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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좋은글

창조적인 사고

by FraisGout 2020. 3. 24.

1.창조력

  '창조적 사고'란 천재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권일까? 물론 천재란 '창조적 사고'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창조하는 마음'은 그 자체는 어느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마음먹기에 따라서 우리들도 천재같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생각한다는 것 자체는 본래 그리 까다롭고 가까이하기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다.
가까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미리 겁부터 먹기 쉽다는 바로 그 점이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사고는 창조라는 최고의 형식에 있어서조차도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자기의 능력(가능성)을 믿을 것, 필자가 이 책에서 여러분에게
권장하고 싶은 요점은 바로 이것 한 가지이다.

  2. 당신도 천재가 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들은 천재와 '자기'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을 대담하게
치워 없애자. 창조적 능력을 천재들의 특권이라는 위치에서 끌어내려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로의 비너스'(고대 희랍의 조각 중의 걸작)와 같은 천재의 '창조물'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감탄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들은 거기에서
신의 특질과의 유사성, 즉 최고의 완전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무랄 데 없는, 신처럼 완전한 예술품에 대하여 우리가 감탄하는 것은
이해 능력을 확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대상의 '완전함'에
홀딱 반한 나머지 자기 자신의 열등성을 지나치게 의식해서는 안된다. 지나친
열등감-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보다 높은 곳을 향하여 발전하려고 하는 '창조적 의식'을
가로막고 불완전하고 수준이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재들은 과연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요컨대 뛰어나 있기
때문에 뛰어난 것이지 결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상식적인 이치를 새삼스러이 내세우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천재들이 마치 어떤 신의 섭리에 의해서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지나친 과장과 신비적인 묘사로 천재를 추켜올림으로써 사실을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디도르(1713-1784 프랑스의 18세기 문학, 철학계의 중심적 존재)와 같은 사람조차도
'재능의 고양'을 강조한 나머지, 천재들의 능력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빅토르 위고(1802-1885, 프랑스 낭만파의 거두, "레미제라블"은 유명하다)나
대뒤마(1803-1887,프랑스의 작가, 극작가 "삼총사"는 유명하다)의 경우도
'시대의 대예언자' 취급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불행한 일이었다.
  '아르키메데스(287-212, 희랍의 철학자)는 에디슨(1847-1931, 미국의 발명가)과 같

발명을 할 수는 없었다'라고 하는 말은 그들의 '재능'을 비교하는 말은 아니다.
아르키메데스와 에디슨의 차이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데이터에 의해서 좌우되어지는
것이라고 누구나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어떠한 천재도 전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뛰어난 시인들은 끊임없이 영감을 받고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들이라
할지라도 태어나면서부터 대시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시인들도 결국 하나의
인간이다. 희망이나 자신의 기억이란 것을 의지해서 암중모색을 하면서
길을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불모의 시기도 반드시 경험하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태는 천재들도 한때 거치지 않을 수 없었던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들이(천재와 비교해서) '뒤떨어진다'고 하는 말은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하

것일까?
  우리들 앞에도 길은 공평하게 열려 있다.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이 길은
자기의 의지로써 선택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바로 범인과 천재의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어떤가? 적어도 우리들은 노력하는 길은 선택함으로써 결국 천재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부질없는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태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게 되느냐?
지금까지 우리들이 연구해 온 방법을 생각해 보면 된다. 요는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라는 평범한 이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3. 창조의 근원은 무엇인가?

  창조란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마치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의 흐름과도 같은
것이다. 풍부한 흐름을 원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맞닿는 곳에는 관념이 기다리고
있다. 사색적인 창조도, 예술적인 창조도 모두 근원은 하나-관념 이외의 것이
아니다.
  관념이 창조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관념은 처음에는
마음의 밭에 떨어진 한 톨의 씨앗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씨앗은 싹이 틀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일단 싹이 트면 마음껏
양분을 흡수해서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발육을 하나의 목적으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이미 확실한 것이다. 드디어 열매가 맺어지는 것, 그것을 우리들은 '창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기 여러 가지 관념의 씨를 품고 있다. 관념이 성장하는 모습이나
속도는 그 사람의 사람됨, 생각하는 능력이라든가 노력에 따라서 당연히 달리질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의 마음에나 헤아릴 수 없는 가지가지의 관념이
잠자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관념이 부풀어서 드디어 창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도 이른바 자연의
도리인 것이다. '창조'가 천재의 특권이 아니라고 하는 까닭도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비슷한 '관념'에서 전혀 비슷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열매가 열리게 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우리들은 그 비밀의 열쇠를 관념을 키워 올리려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 태도 속에서
보려고 하는 것이다.
  떼느에게는 고양이와 연애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고양이에게 매혹된 나머지
고양이에게 매혹된 수없이 많은 기억을 소중하게 키워 갔던 것이다. 그의 만년에
"고양이의 소네트"라는 작품이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늙은 철학자와 고양이, 좀 이상스러운 결합이기는 하지만 떼느에게 있어서는
고양이에 대한 애착은 이른바 '늙은이의 심심파적'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
다.
  그러나 떼느를 흉내내는 일이 우리들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없는 것이다.
고양이를 사랑하고 고양이를 철저히 안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떼느의 일화는 기묘한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길가의 길 잃은 고양이를 지나쳐 버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집에 데리고 와서
기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이 사람의 고양이에 대한 관념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떤
'성장'을 거쳐 왔는가는 우리들에게도 쉽게 관찰될 것이다.

  4. '단순성' 놀라운 결실

  창조적인 견해라고 하면 뭔가 복잡하고도 까다로운 것을 연상하기 쉬우나 그
밑바닥을 파헤쳐 보면 별다른 것이 있는 것 아니다. 매우 단순하고도 순수한 것이다.
요는 '단순성'에 있는 것이 다. 오직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순수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프랑스에서 가장 국민들에게 어필한 작가라고
한다면 아나톨 프랑스와 모리스 바레스(1862-1923, 프랑스의 작가)일 것이다.
  "이 보잘것 없는 인간세계!"
  단지 이런 정도로 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관념'이 아나톨 프랑스에게 있어서는
사물의 시작이고 또 전부였었던 것 같다. 어릴 때 별이 빛나는 창공의 크기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이 세상의 인간의 영위의 허무함이 그의 생애를 통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관조되어졌다. 바레스의 경우에는 실상 매우 대조적이었다.
바레스에게 있어서는 청춘 시절의 어떤 저녁 무렵이 결정적인 의미를 주었다.
  해가 넘어가는 저녁 무렵, 교회묘지에 서서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그는 '조상들이 부르는 소리'를 자기의 영혼의 귀로 들었다. '조국에의
연대감'이라는 관념이 이 때 바레스 청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았던 것을 모리스 바레스는 한없이 큰
힘의 원천으로 본 것이다. 두 가지 극단이라는 표현이 아주 꼭 맞는 것 같다.
이 두 사람에게 공통된 점, 그것은 '단순성'뿐이다.
  이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비전이 같은 시대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5. 때에 맞추어 생각하라

  그러나 저러나 인간의 일생을 결정짓는 '관념'이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과연 '마음대로' 손에 넣을 수가 있을까?
  우리들의 영혼은 넓은 바다와 같이 망막해서 붙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영혼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가능성 이른바 감수성의 탄력성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지만,
정말로 신비로운 것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누구의 마음에나 기회는 무한히 많이 있는 것이다. 잊어버린 줄만
알고 있었던 어떤 사실이 어떤 계기에 문득 머리에 떠오른 경험이 당신에게는 없는가?
  당신은 그럴 때 일종의 '영감'의 작용을 느끼지 않았는가? 음악감상을 하는 도중 또

커피를 마시고 있던 도중 잊어버렸던(잊은 줄로만 알고 있던) 이미지가 선명하게
계속해서 자꾸자꾸 되살아나올 때에 우리들은 자기의 마음속에 한없는 풍부함,
깊이, 신비감을 엿볼 수가 있다.
  이런 '때'를 우리들은 중요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1 뛰어난 이미지를 저장하도록 항시 유의하고
  #2 어쩌다가 이 이미지의 파일이 떠오른 '관념'은 결코 소홀히 하지 말고 비평이라

조명을 비추어 재정리된 상태로 마음속에 다시 저장해 두어야만 한다.
  '나중에 생각해 보고 알게 되었다'
라고 우리들이 말할 때에 그것은 일단 하나의 이미지로서 잡힌 대상이 나중에 또
다른 각도에서 재평가되고 새로운 가치가 부여되었을 때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때에 맞추어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감수성을
언제까지라도 탄력성 있게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거기에서 신선한 이미지를 끄집어
낼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6. 관념을 발전시키려면

  여기서 말하는 '관념'이란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단순하지만
기본적인 '사물을 보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누구나 현실과 자기 사이에 관계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보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과 현실과의 위치 관련을 아는데 필요한 척도가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단지 사람에 따라서는
  #1 이 척도를 사용하는 방법이 적극적인가 소극적인가?
  #2 척도 그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반성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반성을
게을리 하고 있지는 않는가?
  라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정도의 차이가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자기의 관념을 찾아낸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높여 주는 사물을 보는 방법을 찾아내서 그것을 몸에 익히는 것'과 같은 태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에게 
  "당신의 철학이라든가 세계관을 말해 주시오"라고 했을 때,
  "그런 건 별로 없습니다" 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 사람에게도 그런 대로의 '의견'이 있을 것이
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에게나 그 사람 나름의 철학이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기
나름의 '관념'이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반성이 부족하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수동적인 태도와는 아무래도 인연을 끊는 것이 좋겠다.
  가끔 "저 사람은 쓸데없는 관념에 구애받기 때문에 틀렸다"
라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인 이상 자연히 자기의 관념이 쓸데없는
것인지 어떤지를 반성하고 검토할 기회를 언제나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이 경우 당신

의지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바로 '창조적인 사고 방법'인 것이다.
  우선 지금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관념'이 어떤 것인가를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 관념에 발전성, 지속성이 있는가를 검토해 보는 일이다.

  7. 두 가지 사고 방법

  '자신의 사물을 보는 방법이 옳은 것일까'라는 문제는 한 걸음 그것을 전진시켜 보
면,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기본적 명제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영혼의
전문가'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문제를 다루어 왔을까?
  그들이 어떻게 해서 자기의 관념을 검토했는가, 또는 새로운 관념에 이르렀는가,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은 결코 쓸데없는 일만은 아닐 것 같다.
  #1 형식논리에 의한 검토 방법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동안에 '사색'의 방법, 원칙을 발견하고, 단순한 것에

차츰 복잡한 부분으로 추론을 쌓아 가는 방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384-322, 플라톤의 제자이며 그리스의 철학자) 스콜라학파(중세기
유럽을 주도한 철학의 유파), 데카르트 등 주지주의자들의 방법이
이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과학자들도 같은 방법으로 진리를
해명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논리적'이라 불리는 방법이 이에 해당된
다.
  #2 직관에 의한 관념의 발견법
  종교적 또는 시적인 감흥, 정신의 고양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려는
방법이다. 서정시인이 일단 인스피레이션을 얻으면서 동시에 백과사전 속에서 꼭 맞는
글귀를 찾아내려고 할까? 명상에 잠겨 있는 고승이 신 또는 부처와 한창
대화하면서 세속적인 데이터를 참고할까? 뛰어난 신비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데이터는
이른바 2차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쓴 글을 보면, 그 속에 일종의 정연한 논리의 흐름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 까닭은 명상 속에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계시'가 형식논리의
분석체계와 비슷한 '정신적 과정'의 궤도를 밟는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스웨덴보르그(스웨덴의 신학자, 신비철학자)는 오로지 명상 가운데서 보았던
이미지에 의해서 저 신비로운 대우주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베르그송과 같은
직관을 존중하는 철학자도 마음의 '신비'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데이터니 정보니 하는 것의 가치를 일체 부인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들의 '초월적 논리'라고도 할 수 있는 직관의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로서 데이터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길은 많지만 겨냥하는 목표는 단 한 가지라고 할 수가 있다. 또 뛰어난
사상가들은 그들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한 전제로서 자기를 위한
사고방법이라는 무기를 활용했던 것이다.
  니체나 바레스의 문장은 '그들의 사상을 낳는 방법 그 자체'를 끊임없이
예증해 보였다는 점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방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그들 자신의 훈계의 말이
었다.
  "자기 자신이 되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라"

  8. 자기 자신이 되라

  '독창적인 것을 낳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즉 개성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누구 나가 아는 사실이다. 자기가 어떤 인간인가를 알지 못하고
어떻게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낳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겨우 방해가 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보이기 위한 것'과 '자신의 상실'이다.
  '보이기 위한 것'이나 '외관'은 자신이 아니다. 외간이라는 것은,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을 마치 그런 듯이 연기를 하는 것으로, 그것을 하는 인간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의식하지 않고는 참지 못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의 연극을 하는 것으로 사고를 소모해 버리면, 사고할 활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뭔가를
생산해 낼 가능성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어려운 이론을 잘 이해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사람, 책엔가 어디엔가 씌어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 놓으며 문학이나 미술의 비평을 멋지게 하는 사람, 주네브에서
국제회의가 있었을 때 우연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만으로 외교통인
것처럼 위장하는 사람, 만난 일도 없었으면서 알고 있는 척하는 사람, 한번밖에 만난
일이 없는 유명 인사의 이야기를 '내가 잘 알고 있는 누구누구' 하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 외국인의 강연을 듣고 그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박수를 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말하자면 연기자들이다. 그 중에는 무대 배우 뺨칠 정도로 연기가 능숙

사람들도 있지만, 이 사람들은 한 조각의 사상도 갖지 않은 그저 하나의 녹음기에
불과한 것이다.
  쓰고 싶은 충동도 없는데 쓰지 않으면 안되는 직업작가에게는 이런 위험이 많다.
  신문, 잡지에 넘쳐 있는 내용이 없는 유창하기만한 문장, 무책임한 흥밋거리 기사,
억지로 자아내게 하는 유머, 이와 같은 방식은 현대인의 정신을 잠들게 하는 자장가가
되고 있다. 다시 작가들에 대해서 말한다면 문학적인 유행도 그들의 개성을
망쳐 버리게 된다.
  빅토르 위고의 리얼리즘을 본뜨려고 프랑스의 낭만파 작가들이 얼마나 열중했는지
모른다. 그 결과 얼마나 많은 프랑스식 위트가 이 때문에 파묻혀 버렸는지 모른다.
1890년에서 1920년에 걸쳐서는 이것 도한 많은 작가나 아나톨 프랑스의 문장의
리듬을 흉내내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표현력이나 감각은 물론 결점에 있어서조차도
그들에게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인간의 생활이나 마음을 관찰하는 데는 단순히 남의 흉내내는 것이 얼마나 방해가
되는가 하는 점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즉 겉으로만의 모방은 참된 창조에
있어서는 커다란 장해이고 드디어는 본질까지도 손상시키는 것이다.
  자기 이외의 다른 것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참된 자기와는 멀어지고 본래의
것을 지켰다면 뭔가가 되었을지 모를 기회는 점점 적어지게 되는 것이다.

  9. 자신 상실은 의지력으로 고칠 수 있다.

  '자신의 상실'은 우리들이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할 때 방해가 되는 또 하나의
약점이기도 하다. '보이기 위한 것' 보다도 더욱 주의를 기울여서 반성해 볼 점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의 개성을 자각하는 데
충분하리만큼 강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일 때에는 이와 같은 취약성은
약이라든가 훈련을 통해서 고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노력한다는 것은 설령 어떤
일이든 개성의 원형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적당한 경쟁이나 욕심도
개인의 가능성을 키워 주는 데 도움이 된다.
  '자기의 상실'은 결국 제멋대로의 이해, 즉 자기가 이러이러하게 되고 싶다고 생각

것보다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신 속에 파묻혀 버리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의 한 가지 형태일 것이다.
  또, 현재의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의 성향이나 재능, 교육, 또는 환경에
의해서 왜곡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또 어떤 경우에는 우리들이
당연히 해야 될 노력을 안했을 때에, 양심의 가책이 '자신의 상실'이 되어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성실한 사람, 특히 아름다운 것을 언젠가는 생산해 내려는 포부를 안고 있는 사람은
한번 실패하면, 또 다음에도 또 실패하지나 않을까 하고 매우 신경을 쓰게 된다.
  이와 같이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환영의 희생물이 되기
쉬우며 예술가가 세속인들에게서 균형이 안 잡혀 있다고 말을 듣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과거의 작품에 상당히 큰 만족을 느끼고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을 쓰고
있던 동안은 지금의 만족 이상으로 큰 고민에 차 있었을 것이다. 그 까닭은 예술가는
언제나 '불가능한 완전성'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일을 하는 중이라든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들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매력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법이다. 이들 이미지를 정착시키려고 하면 그 순간 그것들은 사라져 버리고 말며
단편만이 남게 된다. 이 남아 있는 단편만이라도 걸작을 만드는 데 충분하지만,
그 전에 나타났던 신비적인 환영에 비하면 마치 찌꺼기처럼 보일 뿐이다.
  '이것에는 좀더 좋은 표현 방법이 있다'라든가, '누군가가 더 훌륭하게 이것을
표현해 낼 것이 틀림없다'라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상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는 존경하는 경쟁 상대를 가정해 놓고, 이 사람 같으면 같은 작품을 놀랄
만큼 술술 훨씬 뛰어난 문체로 써낼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된다. 자기의
주제에 대해서도 의심을 가지며, 그것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도 뒤떨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도덕적 불안으로 떠는 사람도 있다. 즉, 과장해서 그려낸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현실적인 영향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지가지의 관념은 마침내 지성을 흐리게 하며 예술적인 작업에 필요한
의지력을 약화시키는 것들이다. 습관이 될 만큼 오랫동안 이들 환영에게서 위협을
받게 되면,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기도 하고, 아니면 아주 낮은 곳에서 정착해 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프로만땅(1820-1876, 프랑스의 화가,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도미니끄라는 인물은
아주 체념해 버리고 자기 자신을 서푼짜리 시인이라고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시골
신사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절망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발작도 여덟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도미니끄와 똑같은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한낱 인쇄업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실제로 발작은 당시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다-만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두 해 사이에
인스피레이션에 사로잡히게 되어, 그것이 그를 예술가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인쇄업자로서 기울였던 그의 노력이 가져다 준 의지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어떤 사업에 참여하는 일, 현실적인 아이디어를 위한 투쟁을 수행하는 일은
누구에게 있어서도 반드시 플러스가 될 것이다. 우리들 속에 있는 강력한 이상이나
관념은 '자신의 상실'을 고쳐 주고, 우리들을 강력하게 할뿐만 아니라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낳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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