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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유전자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 한다

by FraisGout 2020. 9. 20.

        마음씨 좋은 놈, 마음씨 나쁜 놈
  "마음씨 좋은 놈이 꼴찌한다." 비록 일부 전문가는 그보다 먼저,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
다고 주장할지라도 이 문구는 야구의 세계에서 유래된 것 같다. 미국의 생물학자 하딘은 그
것을 '사회 생물학(sociobiology)' 또는 '이기적  유전자학(selfish genery)'을 요약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것이 어떻게 딱 맞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만일 '마음씨 좋은 놈' 이라는 구어
체의 의미를 그것에 대응하는 다원주의적 말로 번역하면 , 마음씨 좋은 놈이란 가기와 같은 
종의 다른 구성원들을 도와서 스스로의 희생으로 그들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게 하는 
개체이다. 따라서 마음씨 좋은 놈의 수는 감소하게 될 운명에 있다고 생각된다. 마음씨가 좋
다는 것은 다윈주의적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마음씨 좋은' 이란 구어적인 단어에는 또 하
나의 전문 용어로서 해석이 있다.  만일 이 정의를 일상회화에서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은 
의미로 해용한다면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이 될 수 있다. 지금부터 보다 낙관주의적인 결론
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딜레마
  제 10장의 '원한파'를 상기하기 바란다.  그들은 분명히 이타적인 방법으로  서로 돕는데, 
이전에 자기를 돕기를 거부한 개체에 대해서는 한을 품고 도와주기를 거절하는 새들이었다. 
원한파는 집단 속에서 우세를 차지하게 됐다. 왜냐하면 '선심파'(무분별하게 남을 도와 자신
은 이용된다)와 '사기꾼'(무분별하고 무자비하게 이용하려고  시도해서 나중에는 서로 손해
를 입는다)의 어느 것 보다도 많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해 줄 수 있기 때문 이다. 원한
파의 이야기는 트라이버스가 '호혜적 이타주의' 라고 한 중요한 일반 원리를 예증하고 있다. 
청소어의 예(제10장)에서 본 바대로 호혜적 이타주의는 단일  종의 구성원에 한정되지 않는
다. 그것은 공생이라고 하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작동하고 있다. 예컨대  개미는 그들의 '가
축' 인 진딧물에서 액을 짠다. 제 10장이 씌어진 후, 미국의  정치학자인 엑셀로드는 호혜적 
이타주의 라는 생각을 자극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들였다 내가 이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조금 비친 전문적인 의미의 'nice'라는 단어를 새롭게 한 것은 엑셀로드였다.
  엑셀로드는 많은 정치학자, 경제학자,  수학자, 심리학자와 같이  죄수의 딜레마라고 하는 
단순한 게임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해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그것을 아
주 오해하고 거기에 무언가가 더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
나 그 단순함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도서관의 몇 개의  선반이 이 현혹시키는 게임에서 파
생된 문제에 해당된다. 많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전략적인  방위계획의 열쇠를 그것이 쥐
고 잇고, 또 제 3차 대전 을 저지하기 위해서 그것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 생물학자로서 나는 많은 야생동식물이 진화적인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그칠 줄  모르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에 빠져 있는 엑셀로드와 해밀턴의 의견에 동의한다. 
      배신과 협력의 게임
  그 본래의 인간이 하는 형식에서 이 게임을 하는 방법을  설명하자. 물주가 아나 있고 두 
사람의 상대에게 판정을 내려 이득을 지불한다. 내가 당신과 내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각
각의 손에는 '협력'과 '베신' 이라 표시된 두 장의 카드 밖에 없다.  내기할 때는 각각의 손
에 있는 카드 한 장을 뽑아 책상 위에 엎어 둔다. 카드를 엎을 때는 어느 쪽도 상대의 움직
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한다. 즉, 실질적으로  쌍방이 동시에 움직인다. 그리고 물주
가 카드를 뒤집기를 조용히 보며 기다린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이유는, 승자는 자기가 어
쩐 카드를 뽑았나 하는 것 뿐만 아니라(그것에 관해서는 나도 당신도 각각 알고 있다) 상대
가 무었을 뽑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이다.(그것에  대해서는 물주가 보여 줄 때까지 
모른다).
  카드는 2.2매 있으므로 조합은 네 가지가 된다. 각각의 경우에서 이득은 아래와 같다.
  결과Ⅰ: 나와 당신이 같이 '협력'을 냈을 때 물주는 양자에게  300달러를 지불한다. 이 금
액은 상호 협
력의 보수라고 한다.
  결과Ⅱ: 나와 당신이 같이 '배신'을 냈을  때 물주는 벌로서 양자로부터 10달러를 징수한
다. 이것은 상호 배신의 벌금이라고 한다.
  결과Ⅲ: 당신이 '협력'을 내고 내가 '배신'을 냈을 때 물주는  나에게 500달러를 지불하고
(배신에 대한 유혹료) 당신(속은 선심파)으로  부터 100달러를 장수한다.
  결과Ⅳ: 당신이 '배신'을 내고 내가  '협력'을 내면 물주는 당신에게  500달러의 유혹료를 
지불하고 패자인 나에게서 100달러를 징수한다.
  결과 Ⅲ과 Ⅳ는 분명히 경상 관계에 있다.  즉, 한쪽은 큰 이득을 얻고 다른 한쪽은  크게 
손해를 본다.
  결과 Ⅰ과 Ⅱ에서는 서로 손득은 같으나 우리 쌍방에게는 Ⅰ쪽이 Ⅱ보다도 보다 바람직하
다. 정확한 금액은 문제가 아니다. 그들 중에서 몇 번이 플러스(지급)이고 몇 번이 마이너스
(징수)인가도 문제는 아니다. 이 게임이 진짜 죄수의 딜레마로서의 자격을 가진 후에 문제인 
것은 그들의 서열인 것이다. 배신에  대한 유혹료는 상호 협력의 보수보다  높지 않으면 안 
되고 상호 협력의 보수는 상호 배신의 벌금보다도, 그리고 상호 배신의 벌금은 선심파의 손
실보다도 조건이 좋지 않으면 안 된다.(엄밀히 말하면  이 게임을 진짜 죄수의 딜레마가 되
게 하는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즉, 유혹료와 선심파의 지불의 평균이 상호 협력의  보수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 이 부가적인 조건의 이유는 후에 또 나온다.)  
  네 가지 경우의 결과가 (그림 A)에서 수지표로 요약되어 있다.
  (그림 A)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나온 여러 가지 결과로부터 내가 얻은 보수와 지불
  당신이 협력을 내고 내가 협력을 낸 경우- 꽤  좋음, 보수(상호 협력에 대한), 예: 300 달

  당신이 배신을 내고 내가 협력을 낸 경우- 매우 나쁨, 선심파의 지불, 예: 100 달러 징수
  당신이 협력을 내고 내가 배신을 낸 경우- 매우 좋음, 유혹료(배신으로), 예 500달러
  당신이 배신을 내고 내가 배신을 낸 경우- 꽤 나쁨, 벌금(상호 배신에  대한), 예 10 달러 
징수
  그럼 왜 딜레마 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수지표를 보고 당신과 게임을  하고 
있을 때에 나의 머리 속을 스치는 사고를 상상해 주기 바란다. 나는  당신이 냏 수 있는 카
드가 '협력'과 '배신'이라는 2장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차례대로 생각해 보자. 만일 
당신이 '배신'을 냈다면 나 또한 최선의 카드로 '배신'을 낼  것이다. 상호 배신으로 형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도 만일 '협력'의 카드를 낸다면 나는 선심파의 지불을 해야만 되
어 그 쪽이 더 나쁠 것이다. 다음에는 당신이 딴 짓을 한 경우 즉, '협력'의 카드를 냈을 때
를 상상해 보자. 이때에도 또한 '배신'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만일 내가 협력하
고 있으면 두 사람 모두는 300달러의 높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배신
하면 더 많은 500달러의 이득을 얻을 수가 있다. 결론은 당신이  어느 카드를 내든 그 것에 
상관없이 나의 최선의 행동은 '항상 배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무랄 데 없는 논리로 당신이 어떻든 나는 배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해답
을 냈다. 그 리고 당신은 그에 못지 않게 나무랄 데 없는  논리로 똑같은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이성적인 경기자가 만나면 모두 배신하여 같이 벌금 또는 약간의 
이득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만일 쌍방이 '협력'만을 낸다면 상호 협력의 이유로 비교적 높은 보수(우리
의 예로는 300달러)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있다. 이 게임이 왜  딜레마이며, 왜 
그것이 미칠 정도로 역설적으로 보이며, 왜 그것에 대항하는  법칙이 마땅이 존재해야 한다
고 제안되어 왔는가의 이유이다.
      죄수의 딜레마
  '죄수'란 하나의 특별한 상징적인 예에서 유래한다.  이 경우의 통화는 돈이 아닌 죄수의 
형기이다. 페터슨(Pwteraon)과 모리아티(Moriarty)는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공범 혐
의로 투옥되어 있다. 
  그 죄수들은 각각 독방 속에서 공범자에 대한 불이익한 증언을 함으로써 동료를 배신하도
록 유혹당했다. 처분은 두 사람의 죄수가  어떻게 하는가에 딸 결정되며, 어느 쪽도  상대가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만일 페터슨이 모리아티에게  완전히 죄를 뒤집어씌우고 모리아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협력했던 옛 친구가 마음을 바꾸어 배반자로서) 그 이야기를 믿
을 수 있게 되어 모리아티는 무거운 형기를 받게 되고 페터슨은 무죄석방이 되어 배신에 대
한 유혹에 굴복한 셈이 된다. 만일 각각이 배신하면 양자  모두 죄가 인정되나 증거를 제공
한 점으로 약간의 신용을 얻어 어느 정도 경감된 형기, 즉 상호 배신의 벌을 받게  된다. 만
일 양자가 협력하여(서로는 협력이지만 당국에 대해서는 반대)  증언을 거부하면 주요한 범
죄에 관해서 두 사람 중 어느 쪽이든 유죄가 될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보다 경미한  죄로 
짧은 형기, 즉 상호 협력의 보수를 받는다. 형기를 '보수'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지도 모르나 양자 택일로 인해 오랫동안  옥중에서 보내게 된다면 그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다. '지불'이 돈이 아니라  형기였지만 이 게임의 기본적 특징이 보존되어 
있는 것을 느낄 것이다(네 가지 경우의 바람직한 순서를 고찰해 보기 바람). 만이 당신 자신
이 각각의 죄수의 입장에서 양쪽모두 합리적인 자기 이익에  정신을 쏟는다고 가정하고, 서
로 협정을 위한 타협이 안 된다는 것을 상기하면, 어느  쪽도 서로 배신하여 그로 말미암아 
쌍방 모두 무거운 형기를 선고 받는 것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딜레마로부터 피하는 방법은 있는가? 쌍방 모두가 상대가 무엇을 하든 간에 자기 자신
은 '배신하는'이상으로 좋은 방책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또 두 사람이 협력하
기만 하면 각각 그것이 보다 이익을 얻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만일 ~만 한다면, 만일  ~만 
하면, 만일 동의에 도달하는 무슨 방법이  있기만 하면, 각각의 선수가 상대가 이기적인  큰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도록 안심시킬 방법만 있다고  하면, 협약을 지킬 수 있
는 무슨 방법이 있다면.
  죄수의 딜레마라는 단순한 게임에서도 신뢰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선수 중 적어도 한쪽
이 대단한 선심파이지만 진짜 성인과 같은 선심파가 아닌 한 최종적으로 이 게임은 쌍방에
게 역설적으로 빈약한 결과를 동반하는 상호 배신으로 끝나게 될 운명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게임에는 또 하나의 설명이 있다  . 그것은 '반복' 또는 '되풀이'  죄수의 딜레마라고 한
다. 반복 게임은 보다 공이 드는 것이고, 그 복잡함 속에 희망이 있다. 
  이 일반적인 반복 게임은 동일한 경기자에  의해 제한없이 반복되어 행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나와 당신은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물주가 앉아 있다. 또한 서로의 손 안
에는 '협력'과 '배신'이라는 2장의 카드  밖에 없다. 또한 우리는 이들  카드의 어느 한쪽을 
냄으로써 승부를 내고 물주는 먼저 제시한 규칙에 따라 돈을 지불하거나, 벌금을  징수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으로 게임이 끝나는 대신에 우리는 또다시 카드를 집어서 다음의 승부에 
대비한다. 몇 번 승부를 계속하는 사이에 우리에게는 신용 또는 불신을 쌓아 보답하거나 외
유하거나 용서와 복수를 하거나 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제한없이  긴 게임에서 중요한 점은 
서로가 손해를 볼 것 없이 물주에게 손해를 주어 쌍방이 이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10번 승부를 한 후, 이론적으로 나는 최대 5,000달러를 얻을 수 있으나 그것은 당신이  터
무니없이 어리석어서 (또는 성인처럼)내가 항상 배신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번 ' 협
력'의 카드를 계속 내고 있을 경우에 그렇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쌍방이 10번의 승부 모두
에서 '협력'의 카드를 냄으로써 물주의 돈 3,000달러를 손에 넣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간
단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특히 성인적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카드를  내는 
상대의 버릇으로 보아 상대가 신용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서로의 행동을 살필 수가 있다. 또 하나 극히 일어나기 쉬운 가능성이 높은 일은 우리들 누
구도 상대를 신용하지 않는 것이다. 즉, 쌍방이 10번의 승부  모두에 '배신'을 계속 내어 물
주가 우리 각각 으로부터 100달러를 얻는 것이다. 모든 것 중에서 가능성이 높은 것은 우리
가 서로 부분적으로 상대를 신용하고 '협력'과 '배신'을 다소라도 섞은 순서로 내고 최종적
으로 어느 정도 중간 금액을 얻는다는 것이다.
  제 10자에서 말한 서로의 깃털에서 진드기를  제거한 새들은 일종의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럴까? 새에게 있어 자기 몸에 붙은 진드기를 잡아 내는 것은 
중요하나 자기의 머리 꼭대기에는 부리가 못 미치고 자기를 대신하여 그것을 제거해 줄 친
구를 필요로 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후에 그가 갚아 준다는 것은 공평하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새에게 있어 이 서비스는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시간과 에너지 지불이 켰
다. 만일 새가 속이고 - 자기의 진드기를 잡게 한 후에 갚기를 거부하므로 -  도망칠 수 있
다면 그는 비용을 치르지 않고 모든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일어  날 수 있는 결과를 순서대
로 나열하면 거시에는 실제로 진짜  죄수의 딜레마게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자가 
서로 진드기를 잡아 주고 협력 하면 어느 정도 득이 되나 갚아 주는 대가를 지불하기를  거
부하고 보다 득을 얻으려는 유혹도 당연히 존재한다. 쌍방이  진드기 잡기를 거부하고 배신
하면 조금 손해를 보나 다른 새의 진드기를 잡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스스로는 진드기 꾸러
기가 되고 마는 것처럼 심한 손해는 없다. 그 수치 표는 (그림 B)와 같다
  (그림 B) 새의 진드기 잡기 게임의 여러 가지 결과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보수와 지불
  당신이 협력을 내고 내가 협력을 낸 경우 : 꽤 좋음, 보수, 나는 진드기 잡기를 받는다. 그 
대신 나도 당신의 진드기를 잡아 주는 비용을 지불한다.
  당신이 배신을 내고 내가 협력을 낸 경우 : 매우 나쁨,  패자의 지불, 나는 진드기를 내버
려 둔 채로 당신의 진드기를 잡아 주는 비용을 지불한다.
  내가 배신을 내고 당신이 협력을 낸 경우 : 매우 좋음,  유혹료, 나는 진드기 잡기를 받는
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진드기를 잡아 주는 비용을 지불하지는 않는다. 
  내가 배신을 내고 당신이 배신을 낸 경우 : 꽤 나쁨, 벌금, 나는 진드기를 내버려 둔 채로 
당신의 진드기를  잡아 주지는 않는다는 가냘픈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일례에 불과하다. 그것에 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간의 생활 뿐
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의 생활까지도 반복 죄수 딜레마 게임에 말려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
게 된다. 식물의 생활이라니? 그레 왜 이상한가? 우리가 의식적인 전략(더욱이 우리 인간은 
때로 그럴 때도 있으나)에 관해서가 아닌 유전자가 미리 부터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 같은 
전략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후에 식물, 여러 가지 동물 그리고 박테리아 까지도 
모두 반복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지금 여기서 반복에 관한 매
우 중요한 일에 대해 더 자세한 검토를 해 보자.
      반복게임
  '배신'이 유일의 합리적인 전략임을 어느 정도 예측하기 쉬운 단순한 게임과는 달리 반복 
방식의 게임은 다수의 전략적 여지를 제공 한다. 단순한 게임에서 가능한 전략은 두 가지, '
협력'과 '배신' 이다. 그렇지만 반복 방식에서는 여러 가지 전략이 생각되기 때문에 어느 것
이 최선 인가는 결코 분명치가 않다. 예컨데 "대개의 경우는  협력하는데, 승부 중 10%정도
는 배신 카드를 낸다." 하는 전략은 몇 천 중에 겨우 일례에 불과하다. 또는 게임의 과거 역
사에 의한 조건적 전략이 될지도 모른다. 나의  '원한파' 가 그 예이다. 그것은 얼굴 생김새
에 관해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고 기본적으로 협력적인데 앞서 상대 선수가 배신한 적
이 있으면 배신하는 것이다. 이외에 보다 관대하고 보다  단기의 기억력을 가진다는 전략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반복게임에서 취할 수 있는 전략을 제산하는 것은 우리의 창의적 재능 뿐이다. 어
느 것이 최선인가를 해명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것은 엑셀로드가 스스로 맡겨서 한  일이
다. 그는 경쟁을 벌인다는 재미 있는 아이디어를 내서 전략을 제출하도록 게임 이론의 전문
가 에게 광고를 냈다. 이경우의 전략의 의미는 미리 프로그램된 행동의 규칙인 것이고, 따라
서 응모자는 작품을 컴퓨터 언어로 송부하는 것이 적절 했다.  14번째 까지 같은 전략이 제
안 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엑셀로드는 랜덤(random)이라는 15 번째의  전략을 추가 했다. 
이것은 '협력'과 '배신'을 아무렇게나 내는 것만으로 일종의 기준이 되는 '무전략'의 역할을 
했다. 만일 어떤 전략이 랜덤보다 득이 아니면 그것은 상당히 좋지 못함에 틀림없다. 
  엑셀로드는 15번째 전략을 모두 하나의 공통 프로그램 언어로 번역하여 대형 컴퓨터로 서
로 대전 시켰다. 각각의 전력은 다른 모든 전략과 순차적으로 짝지어져서 반복 죄수의 딜레
마 게임을 한다. 15번째의 전략이 있었기 때문에 컴퓨터로 행해지는 게임은 15×15, 즉  125 
가지가 있다. 각각의 대전에서 200 번의 승부가 끝나면 득점을 총계해서 승자를 선언한다.
  우리는 어느 전략이 어느 특정의 상대에게 이기는지, 즉 승부 여하에는 관심이 없다. 문제
는 어느 전략이 15회의 대전 모두를 합계했을 때에 최대의 '돈'을 누적 하느냐는  것이다. '
돈'이라는 것은 단순히 아래에 있는 도식에 따라  주어지는 '득점'을 의미한다. 즉, 상호 협
력은 3점, 배신에 대한 유혹료는 5점, 상호배신의 벌은1점, 패자의 지불은 0점이다. 
  하나의 전략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 득점은 1만 5000점 이다(매  라운드 5점으로 200라운
드, 그것을 매회마다 상대에게 모두 얻으면)이다. 최저 득점은 0 이다.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두 개의 극단 적인 예는 실제로 일어나기 않는다. 하나의  전략이 15회의 대전 동안 평균치
로서 획득할 수 있는 최대치는 600 점을 크게 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두 사람의 경기자
가 계속 협력하여 200라운드의 게임의 각 라운드에 3 점씩 획득해 갔을 때에 각각의 경기자
가 받는 득점이다. 만일 어느 쪽이든 한편이  배신의 유혹에 굴복하면 다른 경기자의 보복( 
제안된 전략의 대부분은 그 속에  어떤 종류의 보복 행동을 짜  넣고 있다. ) 때문에 600점 
보다 적은 득점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600점을 게임의 기준으로 쓰고 모든 
득점을 이 기준의 백분율로 표시할 수 있다. 이 척도로는 이론적으로  최고 166%(1000점)까
지 될 수 있으나 실험적으로 평균 득점이 600점을 넘는 전략은 없다. 
  이 토너먼트 시합에서는 상대방이 인간이 아닌 컴퓨터 프로그램,  즉 미리 프로그램된 전
략이라는 것을 생각하라. 그 프로그램을  작성한 자는 육체를 프로그램하는  유전자와 같은 
역할을 연출한 셈이다. 전략은 그 작성자의 모형 '대리인' 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그 작성자
가 두 개 이상의 전략을 제안 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한 사람의 작성자가 경기에 복수 전
략을 '짜넣고' 그 중의 하나가 다른 전략으로부터 희생적인 협력이라는 이익을 받게끔 하려
면 부정 행위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엑셀로드도 아마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하면 갚는다'와 '소박한 시험꾼'
  몇 개의 교묘한 전략이 제안되었으나 당연히 그 작성자의 교묘함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친
다. 승리를 거둔 전략은 놀랍게도 가장 단순하고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교묘함
이 부족했다. 그것은 '당하면 갚는다(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fit for fat)'로 불렸고 
제안자는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게임  이론가인 토론토 대학의  라포포트 교수였다. '당하면 
갚는다' 게임의 최초의 승부는 협력으로 시작하고 그 이후는 단순히 전번에 상대가 뺀 손을 
흉내내는 것 뿐이다. 
  '당하면 갚는다'전략이 관여하는 게임은 어떻게 진행하는가? 언제든지  무엇이 일어날 후 
있는지는 상대의 경기에 달렸다. 최초의  상대선수도 '당하면 갚는다' 라고 상정해  보자(각 
전략은 다른 14개의 전략 외에 자기 자신의  사본과도 경기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라). 쌍
방 모두 협력부터 시작한다. 다음 번에는 각각 상대가 전번에 뺀 손을 흉내 내는데 그것 은 
'협력' 이었다. 양자 모두 게임의 끝까지 '협력'을 계속하여 600 점이라는 '기준'의  100%의 
득점을 얻게 된다. 
  자, 다음은 '당하면 갚아라'가 '소박한  시험꾼'(naive prober)으로 불리는 전략과  경기할 
때를 생각해 보자. '소박한 시험꾼' 은 실제로는 액셀로드의 경합에는 참가하지 않으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유익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당하면 갚는다'와 같으나 때로는 10회 중에 1
회는 함부로 이유없이 배신하여 유혹료로서  높은 득점을 요구한다. 이  시험에서 ' 소박한 
시험꾼'이 배신을 하기까지 경기자는 '당하면 갚는다'와 같을 것이다. 길게 그리고  상호 이
익이 있는 협력의 연속은 쌍방의 경기자에게 쾌적한 100% 의 기준점을  수반하면서 자연스
럽게 진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돌연히 예고 없이, 예컨데 8회째 승부에서 '소박한 시험꾼'
이 배신한다. '당하면 갚는다'는 물론 이 승부에서는 '협력'을 내고 있었게 때문에 0 점이라
는 패자의 지불을 하게 된다. '소박한 시험꾼'은 그 유혹료 5점을 얻었기 때문에 득이 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음의 승부에서는 '당하면 갚는다' 가 '보복 한다'. 그것은 그저 전번 
상대의 손을 흉내내는 규칙에 따라 '배신'을 내는 것이다. 한편'소박한 시험꾼'은 말려든 스
스로의 모방의 규칙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여 적의 '협력' 이라는 손을 모방하고 있다. 그래서 
패자가 0점을 얻는데 대해 '당하면 갚는다.' 는 5점이라는 높은 득점을 얻는다. 다음 승부에
서는 '소박한 시험꾼'이 -공정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될지  몰라도- '당하면 갚는다'의 배신
에 '보복한다.' 그리고 그 역이 교대로 계속된다. 이 교대의  방법이 진행되는 동안 양 선수
는 한 승부당 평균 2.5점 (5점과 0 점의 평균)을 받는다. 이것은 양선수가 상호 협력을 계속
하여 모을 수 있는 착실한 3점 보다도 낮다(이것이  앞에서 설명한 '부가적인 조건'에의 이
유이다). '소박한 시험꾼'이 '당하면 갚는다'와 경기할 때에는 약자 모두  '당하면 갚는다'끼
리 경기하는 것보다 나쁜 점수가 된다. 그리고 만일 '소박한 시험꾼'끼리 경기하면 양자 모
두 오히려 더 나쁜 결과로 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배신의 상호 보복은 더 일찍부터 시
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후회하는 시험꾼'
  이번에는 '후회하는 시험꾼'(remoreseful prober) 이라는 또 하나의 전략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후회하는 시험꾼'은 ' 소박한 시험꾼'과 닮았으나 그저  교대로 반복되는 보복의 연속
을 타파하는 적극적인 방책을 강구하는 점만이 다르다.  그러기 위해서 이것은 ' 당하면 갚
는다'와 '소박한 시험꾼'의 어느 쪽 보다도 조금 긴 기억을 가질 필요가 있다. '후회하는 시
험꾼'은 자기가 그저 돌발적으로 배신했을 뿐인지  어떤지, 그리고 결과가 즉각적인 보복이
었는지 어떤지를 기억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후회를 염두에 두고' 보복할 것 없
이 '한번만 자유로이 때리는' 것을 적에게 허락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호 보복의 연속이 아
직 새싹일 때 꺾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여기서 '후회하는 시험꾼'과 '당하면 갚는
다' 와의 사이에 진행되는 상상의 게임을 계속해 보면 일어날 수 있었던  상호 보복의 연속
이 빨리 진압되는 것을 볼 것이다. 게임의 대부분은 상호  협력에 소비되고 양쪽 선수 모두 
그 결과와의 대전에서 ' 소박한 시험꾼' 보다도 좋은 점수를 딸 수 있으나 '당하면 갚는다'
가 자기 자신과 대전 했을 때만큼 좋은 점수는 아니다. 
  엑셀로드의 토너먼트에서 취급되는 전략 중에 어떤 것은 '후회하는 시험꾼'과 '소박한 시
험꾼'의 어느 것보다도 세련된 것이었으나, 그것들도 평균하면 단순히  '당하면 갚는다'보다
는 적은 득점으로 그친다. 실제로 모든  전략(랜덤 제외)중에서 가작 성공률이 낮았던 것은 
가장 공들인 것이었다. 그것은 '익명씨'는 누구인가? 펜타곤의 흑막일까?  CIA장관인가? 키
신저인가? 엑셀로드 자신인가? 결코 알 수 없다. 
  제출된 특정의 전략을 상세히 검토하는 것은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컴퓨
터 프로그램 작성자의 교묘함에 관한 책은 아니다. 어떤 범주에  따라 각 전략을 분류한 다
음 각각의 더 넓은 수분마다의 성공도를 검토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엑셀로드가 인정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범주는 '마음씨 좋은' 이다. '마음씨 좋은'  전략은 자기부터 최초로 배신
하는 일이 결코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당하면 갚는다' 는  그 일례이다. 그것은 배신할 수
가 있으나 보복으로 그것을 한다. '소박한 시험꾼'과 '후회하는 시험꾼' 은 얼마나 희소하든 
간에 도발당하지 않을 때 때때로 배신을 하므로 간악한  전략이다. 토너먼트에 참가한 15개
의 전략 중에 8개는 '마음씨 좋은' 이다. 득점이 높은 쪽부터 상위 8위까지 모두  8개의 '마
음씨 좋은' 전략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 깊다. '당하면  갚는다'는 평균 504.5점을 
얻는데 이것은 우리의 기준점인 600점의  84%로 , 비교적 고득점이다.  다른 '마음씨 좋은' 
전략도 이것보다 조금 낮게 83.4%에서 78.6%의 사이의  득점을 한다. 이 득점과 간악한 전
략 중에서 최고로 성공한 그래스캠프(Graaskamp)가 얻은 66.8%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다. 
이 게임에서는 마음씨 좋은놈이 잘된다는 것이 비교적 유력한 것 같다. 
      관용
  엑셀로드의 또 하나의 전문 용어는  '관용(forgiving)'이다. '관용'전략이란 것은 보복하는 
일은 있으나 단기의 기억 밖에 없다.  그것은 오래된 나쁜 일을 바로 잊어  버린다. '당하면 
갚는다'는 하나의 관용 전략이다. 배신자에 대해 즉시  한대 때려서 갚고 그 후에는 과거를 
씻은 듯이 잊는다. 제 10 장에서의 '원한파'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그 기억은 게임의전
기간을 통해 지속된다. 한번이라도 자기에게 배신한 적이 있는 상대에 대한 원한은 결코 잊
지 않는다.   형식상으로 '원한파'와  같은  전략이  엑셀로드의  토너먼트에서는 프리드만
(frideman)이라는 호칭으로 제출되었으나 성적은 별로 좋지 않다. 모든 마음씨 좋은 전략(구
분상 프리드만 전략은 '마음씨 좋은' 전략이면서도 전혀 관용이 없음에  주의)중에 '원한파/
프리드만'은 두번째로 나뿐 성적이다. 관용이 없는 전략이 그렇게 잘 안 되는 이유는 적이 '
후회하는' 전략일 경우에도 상호 보복의 연속을 타개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당하면 갚는다' 보다 더 관대할 수도 있다. '두 발에 안 발 갚는다'는 전략은 최종적으로 
보복할 때까지 적이 연거푸 두 번 배신하는 것을 용납한다. 이것은 지나치게 도량이 넓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셀로드는 누군가가  이 토너먼트에다 '두 발에 한
발 갚기'를 제안했었다면 그것이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상호 보복의 연속을 회피하는 데 능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하는 전략에 두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즉 '마음씨 
좋기'와 '관용함'이다. 거의 유토피아적인 경향의 이 결론- 즉 마음씨 좋기와 관용함이 합당
하다는 결론-은 미묘하게 간악한 전략을 제출함으로  인해 지나치게 교묘히 하려고 시도한 
전문가들을 많이 놀라게 했다. 또 한편 마음씨 좋은 전략을 제출한 사람까지도 '두 발에 한
발 갚기' 라 할 정도로 관용적인 전략을 굳이 제출하는 일은 없었다. 
  엑셀로드는 두 번째 토너먼트를 광고했다. 그는  62명으로부터 응모를 받고 거기에다 '랜
덤'을 부사하여 전부 63명으로 했다. 이번에는 한 게임당 승부의 정확한 회수를 200회로 고
정하지 않ㄱ소 미정으로 했는데 그렇게 해야 할 이유에 관해서는 후에 다시 논하기로 하자. 
이번에도 역시 득점을 '기준점', 즉 '항상 협력적'인 득점의 백분율로 나타낼 수 있다. 다만 
그 기준점은 더 복잡한 계산을 필요로 하여 이미 600점으로 고정될 수 없다. 
  두 번째 토너먼트 프로그램 '당하면  갚는다'와 그 밖의'마음씨 좋은''관용한'  전략이 왜 
모두 그렇게 까지 잘 되느냐에 관한 엑셀로드의 분석을 포함해 첫 번째의 결과를 제공하게 
되었다. 선수가 이 배경의 정보를 어쩐 모양으로든 고려할 것이라는 것은 당연히  예상된다. 
실제로 그들은 두 가지 사고 의 유파로 나뉜다. 한 사고 의 유파는 마음씨 좋기와 관용함이 
확실히 승자로 되는 성질이라고 생각하여 이에  따라 '마음씨 좋은'과 '관용함'전략을 제출
했다. 메이나드-스미스는 초관용의 '두 발에 한발 갚는'전략을 제출하는데 까지 갔다. 또 다
른 사고의 유파는 그들의 많은 동료가 엑셀로드의 논문을 읽고 이번에는 '마음씨 좋은' '관
용한' 전략을 제출할 것으로 생각하고 간악한 전략을 제출하여 예상되는 약자들을 착취하려
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간악함은 갚지 못했다. 또한 라포포트에 의해 제출 된 '당하면 갚는다' 가 
승자가 되고 기준점이 96%라는 훌륭한 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또다시 마음씨 좋은 전략
은 대체로 간악한 전략보다 더 성공했다. 상위 15위중 하나만 제외하면 모두 '마음씨 좋은' 
전략이고 하위 15위중 하나만 제외하면 모두 '간악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두 발에 한발 갚
기'는 만일 첫 번째의 토너먼트에 제출 했으면  이겼을 것이나 두 번째에는 이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번 전쟁터에는 그와 같이 사기치지 않는 약자를 무정하게 용서 없이 포식할 수 
있는 더 미묘하고 간악한 전략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이와 같은 토너먼트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점의 하나를 강조하고 있다. 즉 전략의 
성공은 다른 어떤 전략이 제출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야말로 '두 발에 한발 갚기'가 순위 중 
비교적 하위에 랭크되는 두 번째의 토너먼트와 '두 발에 한발 갚기'가 승자로 되는 첫 번째
의 차이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책은 컴퓨터 프로그램 
작성자의 독창력에 관한 책은 아니다. 보다 일반적이고 보다  자의적이 아니라는 의미로 어
느 것이 참으로 최선의 전략인지를 판단하는 객관적인 방법이 있을까? 여기까지 읽은 독자
는 이미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라는 이론에서 그 답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엑셀로드는 그이 초기의 결과를 여러 사람에게 회람하여 두 번째의 토너먼트에 전략을 제
출하도록 초청했는데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것에 응하지 않고 대신에 하나의 
제안을 했다. 엑셀로드는 이미 ESS의 용어를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경향이 매우 중
요하다고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해밀턴과 접촉하도록 편지로 권했던 것이다. 당시 엑셀
로드는 해밀턴과 접촉하였고, 그 후에 행해진 두 사람의 공동 연구의 성과가 1981년의  <사
이언스>지에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전미 과학 진흥협회의 뉴콤 클리브랜드 상을 획득했다. 
반복 죄수의 딜레마가 유쾌하고 기발한 생물학적 실례 몇 가지에 관하여 논한 것과 더불어 
엑셀로드와 해밀턴은 내가 그것을 ESS적 접근의 정당한 인식으로 간주하도록 하고 있다.
        순차 순환 대기 방식
  ESS적 접근을 액셀로드의 두 번째 토너먼트에 적용된 '순차 순환 대기 방신(round-robin 
system)'과 비교해 보자. 순차 순환 대기 방식이란 축구의 리그전과 같은 것이다. 각각의 전
략이 다른 전략의 각각과 같은 회수만 대전하다. 한 전략의  최종 득점은 다른 전략 모두와
의 대전에서 획득한 득점의 총계이다. 따라서 리그전의 토너먼트에서 승리하려면 사람은 제
출한 모든 다른 전략에 대해 잘 대항해야만 한다. 폭넓은 다른 전략에 대해, 잘 되는 전략에 
대해 액셀로드가 붙인 이름은 '강건함(robust)'이다. '당하면 갚는다'는 '강건한'  전략인 것으
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제출한 일련의 전략은 자의적인 세트이다. 이것이야말로 전에 
우리를 골탕먹인 점이다. 그리고 종종 액셀로드의 최초의 토너먼트에는 참가자의 거의 절반
이 '마음씨 좋은' 전략이었다. 이와 같은 풍토 속에서 '당하면 갚는다'가 이기고 또한  '두 발
에 한 발 갚기'가 제출된다면 이 풍토 속에서는 이겼을 것이다. 그러나 참가자의 거의  모두
가 '간악한' 전략이었다고 상상해 보자. 이것은 쉽게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결국에는 제출된 
14번의 전략 중 6번은 '간악한' 것이었다. 만일 13번 전부가 '간악한' 것이었다면  '당하면 갚
는다'는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 '풍토'는 '당하면 갚는다'에게는 나빴을 것이다. 획득 상금
뿐만이 아니고 각 전략 사이의 성공도의  순위도 종종 어떤 전략이 제출되었는가에  의존한
다. 바꾸어 발하면 인간의 불안정하고 자의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다. 이 자의성을 어떻게 하
면 덜 수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ESS를 생각'함에 의해서이다.
  여기까지의 장에서 독자는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SS)의 중요한  특징이 만일 여러 가
지의 전략의 집단 중에서 이미 다수를 점하고 있을 때에는 그대로 잘해 나갈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당하면 갚는다'가 ESS라는 것은  '당하면 갚는다'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풍토 속에서는 '당하면 갚는다'가 잘해 나갈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
별한 종류의 '강건함'으로 간주할 수 있다. 진화론자로서  우리는 이것을 그야말로 문제삼아
야 할 유일의 강건함이라고 보고 싶다. 왜 그것이 그렇게도  문제인가?  왜냐하면 다윈주의
의 세계에서 승리는 돈으로 지불되는 것이 아니라 자손의  수로 지불되기 때문이다. 다윈주
의자에게 성공하는 전략은 많은 전략 집단 중에서 다수로 된 것들이다. 어떤 하나의 전략이 
성공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 전략이  다수로 됐을 때에, 즉 자기  자신의 사본들이 우세하게 
됐을 때에 특히 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액셀로드는 사실 문제로서 제3라운드의 토너먼트를 자연 선택이 행하는 식으로  실시하여 
ESS를 구하려고 했다. 실제로 그는 그것을 제3라운드라고 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
것에도 새로운 참가자를 권유하지 않고 제2라운드와 같은 63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제3라운드로 부르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것과  앞의 두 번의 '순차 순환 
대기 방식' 토너먼트와의 차이가 두 번의 순차 순환 대기 방식 토너먼트끼리의 차이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액셀로드는 63번의 전략을 취하여 그것을 또다시 컴퓨터에 입력해서 진화적인 계승의 '제
1세대'를 만들게 했다. 따라서 '제1세대'의 '풍토'는 63번 모두의 전략을  균등히 대표하는 것
으로 되어 있었다. 제1세대의 끝에 각 전략의 승자는 '돈'이나 '득점'이 아닌 그(무성 생식형)
의 부모와 동일한 전략을 취하는 아이의 수로 지불된다. 세대가 진행함에 따라 어떤 전햑은 
수가 적어져서 최종적으로는 절멸한다. 다른 전략은 점점 수가 많아진다. 따라서 그  비율이 
변함에 따른 결과로서 게임의 장래에 대전이 일어나는 '풍토'도 변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대략 1,000세대를 경과한 후에야 비율이 그 이상 변하지 않고 풍토도 그 이상 
변하지 않게 되었다. 안정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까지 여러  가지 전략의 운세는 내가 '사기
꾼', '선심파' 그리고 '원한과'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했을 때와 똑같이 상승하거나 하강하곤 
했다. 몇 개의 전략은 최초부터 절멸로 향하고 대부분은 200세대까지 절멸했다. 간악한 전략 
중 하나 또는 둘은 빈도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출발했는데 나의 시뮬레이션에서 '사기꾼'과 
같이 그 번영은 잠깐이었다. 200세대 이상  산 유일한 '간악한' 전략은 '해링턴(Harrington)'
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해링턴'의 운세는 최초의 150세대쯤 급격하게 상승했다. 그 후  약간 
느리게 하강해서 1,000세대 근처에서 절멸에 접근했다. '해링턴'은 나의 원래의 '사기꾼'과 같
은 이유로 일시적으로 잘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두 발에 한 발 갚기'(너무 관대함)  등의 연
약한 상대가 주위에 있는 한은 그들을 착취했다. 그 후 연약한 패가 절멸당하게 되면  '해링
턴'은 간단하게 이용되는 포획물이  없게 되어 그들의 뒤를  쫓아 절멸하게 됐다.  싸움터는 
'당하면 갚는다'처럼 '마음씨 좋다'가 '분개하는' 전략의 독무대로 됐다.
  실제로 '당하면 갚는다'는 제3라운드의 6회의 실행 중  5회에 있어서 제1, 제2라운드와 같
이 제1위로 됐다. 마음씨 좋으나 분개할 수 있는  5개의 전략도 최종적으로 '당하면 갚는다'
와 거의 같이 성공했다(집단 내의 빈도에 관해). 실은 그 중 하나는 6번째의 실행으로 이겼
다. 모든 '간악한' 전략이 절멸에 임박하게 되면  어떤 '마음씨 좋은' 전략도 '당하면 갚는다'
와 또는 서로 상호간에 구별하는 방법이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마음씨가 
좋기 때문에 서로 협력의 카드를 내놓기 때문이다.
  이 구별 불능성의 귀결은, '당하면 갚는다'는 ESS와 닮았지만 엄밀하게는 진짜 ESS가 아
니라는 것이다. 어떤 전략이 ESS가 되려면 그것이  보편적으로 보일 때에 희소한 돌연변이
의 전략에 침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 주기 바란다. 자! 그렇다면 '당하면 갚는다'
가 어떤 '간악한' 전략의 침입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인데, 또 다른 '마음씨 좋은 '전략
에 대해서는 다른 문제이다. 지금 본 대로 마음씨 좋은  전략의 집단 중에서는 어느 것이든 
모두 상대같이 보여 같은 식으로 행한다. 그래서 완전히 성인과 같은 '항상 협력'과 같은 다
른 어떤 마음씨 좋은 전략도 '당하면 갚는다'에 대해 선택상의 우위성이 명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고없이 집단에 끼여들 수가 있다. 그러므로  전문적으로 말하면 '당하면 갚는다'
는 ESS가 아니다.
  세계가 마치 마음씨 좋은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당하면 갚는다'를 ESS로 간주할 수
가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에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보아주기 바란다. '당하면 갚
는다'와는 달리 '항상 협력'은 '항상 배신'과 같은 간악한 전략의 침입에 대해 안정하지 못하
다. '항상 배신'은 '항상 협력'에 대해  잘 해치울 수가 있다. 매번 '유혹료'의  고득점을 얻기 
때문이다. '항상 배신'과 같은 간악한 전략은 '항상  협력'과 같은 너무 '마음씨 좋은' 전략의 
수를 하락시키게 된다.
  그러나 '당하면 갚는다'는 진짜  ESS가 아니다. 그래서  실천적으로는 기본적으로 마음씨 
좋아서 보복적인 '당하면 갚는다'와 유사한 복수의 전략이 어느 정도의 비유로 혼합하고  있
는 것을 대략 ESS에 대응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게 아마도  공정할 것이다. 그와 같은 혼합 
전략은 소량의 간악한  성분을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 보이드(Robert Boyd)와  로버바움
(Jeffrey Lorberbaum)은 액셀로드가 한 아주 흥미 깊은 추적 연구에 있어서 '두 발에 한 발 
갚는다'와 '외의적인 당하면 갚는다'라고 명명한 전략의  '혼합'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회의
적인 당하면 갚는다'는 구분상으로 간악한 것이나 매우 간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최초의 
대전 이후는 '당하면 갚는다.' 그 자신과 똑같이 행동하나  -이것이야말로 그것을 구분상 간
악한 전략으로 하는 이유인데- 게임의  최초의 대전에서는 꼭 배신한다.  '당하면 갚는다'가 
전면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식의 풍토에 있어서는 '회의적인 당하면 갚는다'는 번영할 수  없
다. 왜냐하면 그 최초의 배신이 이후 길이 끊어지지 않는  상호 역습의 방아쇠를 당기기 때
문이다. 한편 만난 상대가 '두 발에 한 발 갚는다'라면  '두 발에 한 발 갚는다'의 큰 관용성
이 이 역습을 아직 새싹일 때 꺾어 버린다.  양 선수 모두 적어도 '기준점', 즉 모든  협력의 
경우는 득점을 가지고 게임을 마치며 '회의적인 당하면 갚는다'는 최초의 배신분만큼 보너스 
점수를 얻는다. 보이드와 로버바움은 '당하면 갚는다'의 집단이 진화적 표현으로 '두 발에 한 
발 갚는다'와 '회의적인 당하면 갚는다'의 혼합이 침입하여 이 둘이 서로 우호적으로 번영하
는 것임을 보여 주었다. 이 조합이 이와 같은 형태로 침입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은 아니다. 
아마도 조금 간악한 전략과 마음씨 좋은 매우 관용한 전략과의 혼합으로 양자가 함께 침입
할 수가 있도록 된 조합은 많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이것이 인간  생활에 흔한 양상을 
반영하는 거울로 보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액셀로드는 엄밀히 '당하면 갚는다'가 ESS가 아님을 인식하고 있고 따라서 그것을 설명하
기 위해 '집단적으로 안정된 전략'이라는 표현을 만들어 냈다.  진짜 ESS의 경우와 갚이 동
시에 둘 이상의 전략이 진화적으로 안정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어떤 전략이 하나의 집단
으로 우위를 점하는지는 운에 달렸다. '항상 배신'도 '당하면 갚는다'와 같이  안정하다. 이미 
'항상 배신'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 집단에서는 다른 어떤 전략도 잘해 나갈 수 없다. 우리는 
이 시스템을 쌍안정(bistable), 즉 한편에 '항상 배신'이라는 안정점이 있고, 다른  한편에 '당
하면 갚는다'(또는 주로 마음씨 좋아서 보복적인  몇 개의 전략의 혼합)라는 안정점이  있는 
시스템으로 취급할 수 있다. 어느쪽이든 먼저 집단 내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된 저냑
이 그대로 우위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우위'란 정량적인 표현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하면 갚는다'가 '항상 배
신'보다 잘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수가 있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이 특별한 게임
에어 물주가 지불한 금액의 명세에 따라 변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운
명을 좌우하는 임계 빈도가 보통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칼날의 한쪽 면에서는 '당하면  갚는
다'의 임계 빈도를 넘고 선택은 점점 '당하면 갚는다'에 유리하게 되도록 작용한다.  이 칼날
과 동등한 것으로 이미 우리는 제10장의 '원한파'와 '사기꾼'의 이야기를 상기할 것이다.
  그러므로 집단이 칼날의 어느쪽에서 시작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리
고 우리는 어떻게 하여 집단이 칼날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를 알 필요가 있다. 이미 '항상 배신'측에 위치하고  있는 집단에서 우리가 시작했다고 생각
해보자. 소수의 '당하면 갚는다' 개체는 호혜적인 이익을 얻을 만큼의 충분한 빈도로 만나지 
못한다. 따라서 자연 선택은 집단을 다시 극단적인 '항상 배신'측으로 민다. 만일 기회적  부
동에 따라 이 집단이 어떻게 해서 칼날을 건널 수 있는 경우에만 '당하면 갚는다'측으로  사
면을 미끌어 내리게 되어 누군가가 물주의(또는 '자연'의) 지출에 의해  더 잘해 나갈 수 있
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론 집단은  그룹으로서의 의지를 갖지 않으며, 의도나 목적도  갖지 
않는다. 칼날을 기어오르려고 하는 노력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칼날을 기어오르려고  하는 
노력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방향성을 갖지 않는 자연의  힘이 종종 칼날을 건너도록 이끌 
때만 그들은 건넌다.
  그러한 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그 답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은 종종 '우연'에 의
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연'이라는 것은 무지를 말하고 있음에 불과하다. 그것
은 '무엇인가 아직 잘 모를, 또는 특별한 수 없는 이유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우연'보다는 조금은 더 좋게 행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소수파의  '당하면 갚는
다' 개체가 임계값 이상이 될 때까지 수가 불어나는 실제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
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 '당하면 갚는다' 개체가 충분한  수만큼 뭉쳐서 당연히 물주의 지출
에 의해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될 수 있는가, 그 가능한 방법의 탐구로 이어진다.
      유전적인 유연 관계
  이 같은 선상에서 생각하는 것은  가능한 것 같으나 다소 막연하다.  서로 닮은 개체끼리 
도대체 어떻게 뭉치고 궁극적으로 집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  자연계는 유전적인 유연, 
즉 혈연을 통해서 연결이 된다. 대개의 동물은 집단의  무작위적 구성원보다는 자기의 형제 
자매, 조카 등과 가까이서 살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선별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
다. 그것은 집단의 '점성(viscosity)'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한다. 점성이라는 것은 각  개체가 
자기가 출생한 장소 근처에서 살려고 하는 어떤 경향을  의미한다. 예컨대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서 그리고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종종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에서는 다르나) 개개의 
인간이 자기의 출생지에서 몇 마일 이상 멀리까지 방황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 결과 유
전적으로 가까운 것이 국지적 집합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아일랜드의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을 방문했던 일을 경향이 있다. 아일랜드의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을 방문했던 일을 기억
한다. 그때 나는 섬의 거의 모든 사람이 물주전자의 손잡이처럼  생긴 매우 큰 귀를 가지고 
있는 사실에 놀랐다. 큰 귀가 그 곳 기후에 적합하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는 물론 말할 수 
없다(거기서는 바다를 향해 강풍이 분다). 그것은 섬주민의 대부분이 서로서로 밀접한 혈연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유전적 유연 관계는 단순히 용모뿐만이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종류의 사항에 관해서도 닮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당하면 갚는다' 식으로 행하는(또는 행하지 않는) 유전적 경향에 관
해 서로가 잘 닮는 경향을 가질 것이다. 그래서  전체로서의 집단 속에서 '당하면 갚는다'가 
드물 때까지도 국지적으로는 아직 수가 많다고 할 수도 있다. 일정한 지역에서는 '당하면 갚
는다' 개체가 상호 협력 때문에 번영될 정도로  충분히 자주 만날 수 있다. 비론 집단  전체 
속에서의 총체적 빈도만을 고려한 계산이 그들의 빈도가 '칼날의' 임계값 이하라고 제시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만일 그렇다면 살기 좋은 작은 지역 집단을 이루고 서로 협력하는 '당하면 갚는다' 개체는 
매우 크게 번영할 수 있을 것이므로 작은 지역 집단에서  보다 큰 지역 집단으로 성장한다. 
이 같은 지역 집단이 많이 커져서 다른 지역으로까지 퍼지는 일은 있을 수 있다. 이런 지역
은 그때까지 수적으로는 '항상 배신'하는 개체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역 집
단을 생각할 때, 내가 말한 아일랜드의 섬은 물리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고로 오해를 일으키
는 비교하고 할 수 있다. 그보다 오히려 내부 이동이 별로 없으므로 지역 전체에 걸쳐 교잡
이 끊임없이 존재할 경우, 멀리 있는 이웃보다도 옆에 있는 이웃과 닮는 경향을 갖는 큰 개
체군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칼날'까지도 잡아 주면 '당하면  갚는다'는 그 곳을 넘을  수가 있다. 필요한 것은 
작은 지역 집단을 형성하는 것뿐이고, 이것은 자연 개체군으로서 일어나기 쉬운 일이다. '당
하면 갚는다'는 비록 소수인 경우라도 칼날을 넘어서 자기측으로  건너는 타고난 능력을 가
지고 있다. 마치 칼날의 밑을 빠져나가는 비밀 통로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통로는 일방 
통행만 할 수 있는 밸브가 있다. 즉, 비대칭이다. '당하면 갚는다'와 달리 '항상 배신'은 진짜 
ESS인데오 불구하고 지역적인 소집단이 되는 것을 이용하여 칼날을 건널 수 있다. 이에 반
하여 '항상 배신'의 지역 집단은 서로의  존재에 의해 번영하기에는 좀 멀고 서로의  존재에 
의해 특히 '불편'을 받는다. 서로가 평화롭게 도와 물주에게  지출토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서
로가 공격한다. 따라서 '항상 배신'은 '당하면 갚는다'와는 다라서 집단 내에서 혈연 또는 점
성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당하면 갚는다'는 다만 의심스러운 ESS일지 모르나 일종의 고도의 안정성을 가지
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일까? 확실히 안정은  안정인 것이다. 자! 여기서 
우리는 장기적 요인을 중요시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항상 배신'은 비교적 장기간에 걸
쳐 침입에 저항한다. 그러나 만약 충분히 길게, 아마도  수천 년이나 기다리면 '당하면 갚는
다'는 칼날을 저쪽으로 넘기에 필요한 만큼의 개체수를 최종적으로  획득하여 그 집단 전체
는 '당하면 갚는다'로 전환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는 없다. 이미 보았듯이  '항상 배신'은 
집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얻지 못하고 이 고도의 안정성도 누리지 못한다.
  '당하면 갚는다'는 이미 본  대로 '마음씨 좋은'전략이며, 처음부터  배신하는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관용'도 아니다. 그리고 이  비관용은 과거의 나쁜 행동에  대한 단기의 기억밖에 
갖지 못한다. 자! 여기서 액셀로드의 , 또 하나의 환기시키는 전문 용어를 소개하자. '당하면 
갚는다'는 또한 '질투쟁이도 아니다.' 액셀로드의 용어법으로 말하면 질투쟁이라는 것은 절대
적으로 많은 돈을 물주로부터 따먹는 것보다는 상대보다 많은 금액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을 의미한다. 질투쟁이가 아니라는 것은, 가령 상대가 당신과 같게만 돈을 얻었다고 해도 그
로 말미암아 두 사람 모두 보다 많은 금액을 물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한은 완전히  만족한
다는 의미이다. '당하면 갚는다'가 실제로 게임에 '이기는'일은 결코 없다. 잘 생각해 보면 그
것은 보복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배신하지 않으므로 어느 별개의 게임에 있어서도  '적' 
이상의 득점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기껏 잘돼야 상대와 비기게 될 뿐이
다. 그러나 그것은 비김으로써 같이 고득점을 달성하는 경향이 있다. '당하면 갚는다'와 다른 
'마음씨 좋은' 전략을 생각할 때 '적'이라는 말 그 자체는 부적절하다. 그러나 슬프게도 심리
학자들이 현실의 인간 사이에서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실시할 때에는 거의 모든 선수
가 질투의 유혹에 굴복하여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밖에  얻을 수 없다. 많은 사람
들은 아마도 그러한 가능성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상대와 협력하여 물주를 공격하기보다 오
히려 상대를 공격하려고 한다. 액셀로드의 연구는 그것이 어떤 오류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영합 게임과 비영합 게임
  그것은 어떤 종류의 게임에 있어서 하나의 오류에 불과하다. 게임 이론가는 게임을  '영합 
게임(zero sum game)'과 '비영합 게임(nonzero  sum game)'으로 나눈다. 영합  게임이라는 
것은 한쪽 선수의 승리가 다른 쪽 선수의 패배로 된다. 장기는 영합 게임이다. 왜냐하면  각
각의 선수의 목적은 상대에게 이기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쪽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수의 딜레마'는 비영합 게임이다. 돈을  지불하는 물주가 있고, 따라서 두  사람의 
선수는 팔장을 끼고 시종 물주를 봉잡고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이 물주를 봉으로 한다는 표현은 셰익스피어의 즐거운 희곡 한 구절을 상기하게 한다.
  우선 처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모든 법률가를 살해하는 것이다. -(헨리 6세) 제2막-
      민사 분쟁
  민사 '분쟁'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크나큰 협력의 여지가 남아 있는 수가 흔히 있다. 영
합 게임적인 대립처럼 보이는 것을 약간의 선의에 의해 쌍방에서 이익을 주는 비영합 게임
으로 바꿀 수가 있다. 이혼에 관해 생각해 보자. 좋은 결혼은 분명히 비영합 게임이고  상호 
협력으로 넘쳐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했을 때까지도  두 사람이 협력을 계속하여 
이혼까지도 비영합 게임으로서 처리하면 이익을 얻는다는 이유가 얼마든지 있다. 마치 아이
들의 행복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변호사에게 요금을 지불해버리면 가
족의 재정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래서 양식과 교양이 있는 부부는 둘이 같이 한 사람의 변
호사에게 상당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지.
  그러나 실질적인 답은 '아니오'이다. 적어도 영국에서는 또  극히 최근까지 미합중국 50개 
주에서는 법률상 또는 보다 엄밀히는(그리고 의미 깊게) 변호사 자체의 집업상의 규약이 그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변호사는 의뢰인 부부  중 어느편이든 한 사람밖에 수락할 수  없다. 
상대편은 문전에서 거절당한다. 법률적인 감정을  전혀 받을 수 없거나  다른 변호사에게로 
갈 것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일이 시작된다. 두 사람의  변호사는 분리된 방에서, 
그러나 같은 목소리로 즉시 '우리들'과 '그들'에  관해 상의하기 시작한다. '우리들'이란 나와 
내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와 변호사에 대립되는 나와 내 변호사를 의미한다. 이 소송이 
법정에 나오게 되면 현실로 '스미스 대 스미스'라는 식으로 기재된다. 그 부부가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있든 아니든 주의깊게 우호적인 것으로 노력하려고 특별히 동의하고 있든  아니든 
적대하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다. 이혼을 '내가 이기고  너는 진다' 싸움으로 다룸으로써 누
가 이익을 얻는가? 기회는 변호사들에게만 있다.
  불행한 부부는 영합 게임으로 이끌리고 만다. 그러나 변호사들에게  있어 스미스 대 스미
스의 소송은 수지가 잘 맞는 비영합 게임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미스 부처에게 지불하도록 
하여 짜임새 있는 규정에 따른 협력으로 두 의뢰인의 구좌에서  짜낼 수 있다. 그들이 협력
하는 하나의 방법은 쌍방이 상대측이 수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이것
도 역시 쌍방이 수락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 대안을 상대측으로부터 부추긴다. 그리고 일이 
진행된다. 협력하고 있는 '적대자' 사이에서 왕래되는 모든 편지와 전화 요금은 청구서에 빠
짐없이 적힌다. 운 좋게 이 과정을 몇 개월 아니 몇 년까지  연장시킬 수 있다면 이에 평행
하여 요금도 가산된다. 쌍방의 변호사는 이 모든 것을 함에 있어서 결탁은 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얄궂게도 의뢰인의 지출을 가지고 행해지는 그들의 협력을 실현나는 주된 수단은 그
들이 양심적으로 연결을 끊는 것이다. 변호사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한 순간에 만나게 되는 흡혈 박쥐같이 그들은  매우 잘 의식화된 규칙에 따
라 경기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어떤  의식적인 감독이나 관리 없이 작동한다. 그것은  모두 
톱니바퀴 장치에 의하여 우리를 영합 게임으로 향하게 한다. 의뢰인에게는 영합 게임일지라
도 변호사로서는 매우 강한 비영합 게임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셰익스피어의 선택은 혼란을 낳을 뿐이다. 법률을 바꾸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회 의원들은 법률에 관계하는 직업인으로서 영합 게임적인 심성
을 가지고 있다. 영국하원 이상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다(법정은 적어도 
아직 논쟁의 예의 범절을 보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법률가끼리는  시종 물주를 봉잡을 만한 
매우 기분좋은 협력을 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선의의 입법부 의원이나 회한의 정
을 가진 변호사는 게임 이론을 조금이라도 교육받아야만 할 것이다. 공정을 위해 조금만 부
가하면 일부의 변호사는 이와 아주 정반대의  역할을 하여 영합적인 싸움을 하려고  애쓰는 
의뢰인에게 법정 외에서 비영합적인 해결로 착수하는 편이 좋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에서 다른 게임은 어떨까? 무엇이 영합적이고 무엇이 비영합적인 것인가? 한
편(사실과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인생의 어떤 측면을  우리들은 영합적 또는 비영합적으로 
느끼는 것일까? 인간 생활의 어느 측면이 '질투'를 조장하고 어느 측면이 '물주'에 대한 협력
을 조장하는 것일까? 예컨대 임금 계약 교섭과 '차별 임금'에  관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우
리가 임금 인상 교섭을 할 때 '질투'에 의해 동기를 얻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실질적인  수
입을 최대로 하기 위해 협력하는 것일까? 우리는 심리학적인 실험에서와 같이 실생활에서도 
그렇지 않은 경우에 자기가 영합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상정하는 것일까? 여기서는 그저  이 
같은 곤란한 의문을 단순히 제출하는 것으로 그치자. 이에 답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넘
는 것이 될 것이다.
      축구 경기
  축구는 일종의 영합 게임이다. 적어도 통상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때로는 비영합 게임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종종 1977년의  영국 축구리그전에서 일어난(축구는 정식으로는 아식 
축구(association football)라고 한다. 럭비 풋볼,  오스트레일리언 풋볼, 미식 축구, 아일랜드 
풋볼 등, 풋볼로 총칭되는 다른 게임도 보통 영합  게임이다) 영국의 축구 리그 팀은 4부로 
나뉘어 있다. 각 클럽 팀은 자기의 부 내에서 다른 팀과 시합을  하여 시즌을 통해 승리 또
는 비김의 득점을 누계해 간다. 1부에 드는 것은 대단한 명예며 그것은 많은 관중을 보증해 
주기 때문에 클럽으로서도 이익이 된다. 매년 시즌이 끝나면 1부의  하위 3개 팀은 다음 시
즌에서는 2부로 격하하게 된다. 격하는 극히 비참한 운명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
기 위해서는 큰 노력을 해야 한다.
  1977년 5월 18일은 이 해의 축구 시즌의 마지막 날이었다. 1부에서 격하되는 3개 팀 중 2
팀은 이 토요일에 모든 것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선더랜드는 제4위 팀(이팀의 1
부 잔류는 확실했다)과 시합을 하고 있었다. 브리스톨과 코번트리는 서로 시합을 하고 있었
다. 만일 선더랜드가 질 경우 브리스톨과 코번트리는서로 비기기만 하면 1부에 머무르게 된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선더랜드가 이긴다면  브리스톨과 코번트리의 시합 결
과, 어느편이 이기느냐에 따라 한편이 탈락하게  된다. 이 두 중대한 시합은 동시에  행해졌
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브리스톨과 코번트리 전이 5분 늦게 시작됐다. 그 때문에  선더
랜드 전의 결과를 브리스톨-코번트리 전의 종료 전에 알게 됐다.  거기에는 이 복잡한 이야
기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당시 신문 기사를 인용하면 브리스톨 대 코번트리 전의 대부분은 '빠르고 종종 격하고' 일
종의 흥분시키는(만일 당신이 그러한 것을 좋아한다면) 불꽃튀는 격전이었다. 쌍방은 굉장한 
득점력을 보여 시합 개시 80분 후의 득점은 2:2였다. 드디어 시합 종료 2분 전에 다른 경기
장에서 선더랜드 팀이 패했다고 하는 뉴스가 전해졌다. 즉시  코번트리 팀의 매니저가 경기
장의 끝 있는 거대한 전광  게시판에 속보를 내보냈다. 22명 선수  모두는 이미 어느측이든 
성의껏 경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탈락을 면하기 위해서 양  팀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슨 부였다. 실제로 득점을 오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제는 전적으로 나쁜 방책이었
다. 왜냐하면 어느쪽인지 모를 상대팀을 탈락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양 팀 모두 무승부를 확
보하는 데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때 신문 기사를 인용하면  "80분 경과 후 돈  질리스(Don 
Gillies)가 브리스톨을 위해 동점골을 얻을 바로 수초전까지만  해도 심한 경쟁 관계였던 팬
들이 돌연 하나가 되어 축제 분위기에 휩쓸렸다. 심판은 선수들이 공을 가지고 전혀 공격하
지 않고 가볍게 차면서 돌리고  있는 것을 어찌할 도리 없이  보고만 있었다." 그 전까지는 
영합 게임이었는데 외부 세계로부터 온 한편의 뉴스로 돌연 비영합 게임으로 변해 버린 것
이다. 앞에 언급한 우리의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마치 외부의  '물주'가 마법처럼 나타나서 
브리스톨과 코번트리 양 팀이 무승부라는 같은 결과에서 이익을 얻는 것을 가능케 한 것과 
같다.
  축구처럼 관객에게 보이는 스포츠가 보통 영합 게임인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관
중들은 선수들이 우호적으로 공모하는 것을 보기보다는 서로가 힘껏 싸우는 것을 보는 것이 
훨씬 흥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 있는 인간과 동.식물은 관중의 즐거움을  위한 
노리개가 아니다. 사실 문제로서 실생활의 많은 측면은 비영합 게임에 대응하는 것이다.  자
연이 종종 '물주'의 역할을 하고 따라서 개개인은 서로의  성공에서 이익을 얻을 수가 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경쟁자를 칠 필요는 없다. 이기적 유전자의 기본 법칙에서 이탈
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세계에 있어서까지 협력이나 상호 부조가 어떻게  번창하는
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액셀로드가 말하는 의미로 왜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들이 되는가'
를 이해할 수가 있다.
      라운드 게임
  그러나 게임이 되풀이되지 않는 한 이러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선수들은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이 최종회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액셀로드의 말처럼 '미래의 영상'은 
길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어느 정도  길어야만 하는가? 무한히 길 수는 없다. 이론적인 
관점에서는 게임이 얼마나 길든지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쪽 경지자도 게임이 언
제 끝나는지를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와 당신이 대전하고  게임의 회수가 꼭 
100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우리 두  사람 모두 100회째가 최종 라
운드이며 단순한 1라운드의 '죄수의  딜레마' 게임의 동등함을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두 사람의 어느편에게도 제 100라운드에 있어서 유일한 합리적인 전략은 '배신'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각각 상대 경기자가 그 일을 계산하여 최종 라운드에서 배신한다는 결정 
을 확실히 내릴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최종 라운드는  예상 가능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99라운드도 1라운드의 게임과 동등하게 되어 각각의 선수
에게 이 최후에서 두 번째 게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리적인 선택은 역시 '배신'으로 될  것
이다. 98회째도 같은 논리를 따르게 되고  점점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의 엄밀한  이성적 
선수가 각각의 상대도 엄밀히 이성적이라고 상정할 경우, 만일  게임이 몇 번째에서 끝나도
록 정해져 있는지를 쌍방이 알고 있다면 배신하는 것 이외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 이유
에 의해 게임 이론가가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항상 게임의 
마지막은 예상 불가능이거나 또는 물주밖에 모른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게임의 정확한 라운드 수가 확실치 않더라도 현실 생활에 있어서는 그 게임이 어느 정도 
지속될지를 통계적으로 추측하는 것은 종종 가능하다. 이 평가는  전략의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다. 만일 물주가 조급히 시계를 보면 나는 게임이 결말에 가까웠따고 충분히 추측되어, 
배신의 유혹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도 종말에 왔는지 주의하지 않나 의심하면 
당신도 또한 배신할 계획을 하고 있지 않나 하여 불안하게  될 것이다. 틀림없이 나는 먼저 
배신하려고 할 것이다. 특별히 나는 당신이 나의 배신을 겁먹고 있지나 않은가 하고 걱정할
지도 모른다.
  1라운드 '죄수의 딜레마' 게임과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 사이에 수학자가  만든 구별은 
너무 단순하다. 각 경쟁자가 게임이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에  관한 끊임없이 갱신되는 추측
치가 길면 길수록 그는 진짜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관한 수학자의 예측에 보다 잘 따
르는 자세로 경기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보다 마음씨 좋게, 보다 관용으로, 보다  질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게임의 미래에 대한 추측치가 짧으면  짧을수록 그는 1라운드의 게임에 관
한 수학자의 예측에 보다 잘 따르는 자세로 경기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보
다 불쾌하고 보다 질투가 심하게 될 것이다.
      영국군과 독일군
  액셀로드는 미래 영상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감동적인 실례를 제1차세계 대전 중에 일어났
던 소위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방식이라는 주목할  만한 현상에서 인용했다. 그가 기본
으로 한 자료는 역사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애시워스(Tony Ashworth)의 연구이다.  크리스마
스에 영국과 독일 부대가 중간 지대에서 일시적으로  친하게 놀고 같이 술을 마신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비공식으로 암암리의 불가침 협정을 맺어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가 전선 모든 곳에서 1914년에 시작하여 적어도 2년간 착실히 지켜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별
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나에게는 이쪽이 더 흥미롭다. 참호에  순시를 나왔을 때 자군의 전
선 배후의 소총사격장 안을 독일병이 걸어다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한 상급 장교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우리편 군인은 전혀 관심도 안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군이 우세하
게 됐을 때 이와 같은 일을 폐지하려고 결심했다. 이와 같은 일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
들은 분명히 전쟁 중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양 진영 모두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의 
원칙을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액셀로드는 선명한 분석을 통해 이 시대에는 아직 게임 이론과 죄수의 디레마는 발명되어 
있지 않았으나, 때늦은 지혜를 가지고 분별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매우 명료하
게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당시의 참호전에 있어서 개개의 소대로서의 미래의 영상은 
길었다. 말하자면 각각의 참호에 틀어박힌 영국 병사는 같은  독일병의 참호대와 몇 달이고 
대치한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반 병사는 가령 부대의 이동이 있을 때에
도 그것이 언제인지 결코 알려지지 않았다. 군의 명령은  주지하는 대로 독단적이고 변덕스
러우며 명을 받은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영상은 '당하면  갚는
다' 형태의 협력을 촉진하기에 아주 충분히 길고 막연했다. 이제부터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
에 대응하는 조건이 있기만 하면 된다.
  진짜 죄수의 딜레마로서의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지불이 특정한 우열의 순위에  따라야만 
함을 다시 한 번 기억하라. 양  진영 모두 상호협력(CC)이 상호 배신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상대의 진영이 협력하고 있을 때의 배신 (DC)은 그것으로 벌을 받는  일
이 없다면 한층 더 좋다. 상대의 진영이 배신(CD)하고 있을 때의 협력은 최악이다. 상호 배
신(DD0은 참모들이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군대가 기회가 있으면 언
제든지 독일변(또는 영국병)을 체포하기를 윈한다.
  상호 협력은 장군의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승에 도움이 되
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 진영의  병사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그들은 
전사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가 인정하듯이 (그리고 또한 이일이 진짜 죄수
의 딜레마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다른 지불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  된다) 병사들이 
전재에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점은  장군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것
은 일개의 병사가 받아들일 선택이 아니다. 전쟁 전체의 귀결이 그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하
느냐에 따라 실질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한편 무인 지대를 끼고 저쪽편
에서 당신과 대치하는 특정의 적병과의 상호 협력은 당신 자신의 운명에 극히 분명한 영향
을 주며 상호 협력은 상호 배신보다 훨씬 바람직하다. 비록 당신이 만일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면 애국적 또는 규율상의 이유에서 종국에 가서  배신(DC)을 좋아하는 수가 있다고 해
도 말이다. 이 상황은 진짜 죄수의 딜레마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당하면 갚는다'와 같은 
것이 생겨날 것이 예상되는데 그것은 실제로 그렇게 됐다.
  참호 전선의 어떤 임의의 지점에서  국지적으로 안정된 전략은 반드시 '당하면  갚는다'에 
한하지 않는다. '당하면 갚는다'는 마음씨 좋고 보복은 하나  관용이라는 한 그룹의 전략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들 전략은 모두 전문적으로 말하면 안정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번 생
겨버리면 그것에 침입하기는 곤란하다. 예컨대 당시의 기사에 의하면 이것은 '한 발에 세 발 
갚기'가 있는 지역에 국지적으로 생겼다.
   우리들은 밤에 참호 앞에 나왔다...독일군의 작업반도 밖에 나와 있었으므로 발포는 예의
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불쾌한 것은 소총 유탄이라는 것이다...참호 속에  떨어지면 
8~9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다...그러나  우리 편은 독일군이 상당히 심한  공격을 하지 않는 
한 결코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보복법으로는 이쪽이  한 발 쏘면 그 편
에서는 세 발 쏘아 오기 때문이다.
  '당하면 갚는다'그 그룹의 어느 전략도 경기자가 배신에 의해 벌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하
하다. 보복의 위협은 항상 존재한다. 보복 능력의 과시는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방식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양 진영에서의 총격은 적병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적병의 바로 가까
이에 있는 부동의 표적을 향한 것으로 그들은 놀랄 만한  사격 솜씨를 과시한다. 이 기교는 
서부 활극 영화에서도 쓰인다(촛불을 쏘아 끄듯이). 왜 최초의 2개의 실전용 원자 폭탄이 이
렇게 솜씨있게 촛불을 끄는 것처럼 사용되지 않고 두 도시를 파괴하는데 사용되었는가에 대
해 아직까지는 만족스러운 해답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그 개발에 책임을  진 지도적인 물
리학자들이 강하게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당하면 갚는다'와 같은 전략의 중요한 특징은 관용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본 바대로 
그렇지 않으면 상처를 서로 주는 상호  역습의 반복에 견디기 어려운 사태를  진정시키기에 
한몫을 한다. 보복의 진정한 중요성은 다음의 한 영국인  장교의 회상록에 극적으로 표현되
어 있다.
   내가 한 사람의 아군과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매우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조사하러  나갔
다. 우리는 아군 병사와 독일병들이 각각의 낮은 방어벽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일
제 사격이 시작됐으나 손상은 없었다. 양 진영 모두 당연하게 몸을 구부렸고 아군 병사들은 
독일병에게 욕설을 시작했다. 그때 돌연히 한 사람의 용감한 독일병이 낮은 방어벽 위에 올
라서 "대단히 미안하다. 부상자가 없어야  하는데...그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고 터무니  없는 
츠로이센 포병대 때문이다."라고 외쳤다.
  이 변명에 대해 액셀로드는 "보복을 막기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서의 노력을 훨씬 넘는 것
이다. 그것은 신뢰의 상황이 깨진 것에 대한 도덕적인 후회의 느낌을 반영하고 있고, 또  누
군가가 부상하지나 않았나 하는 배려를 나타내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확실히 칭찬할 
만한 매우 용감한 독일병이다.
  액셀로드는 또 상호 신뢰의 안정된 패턴을 유지함에 있어서 예측 가능성과 의식의 중요성
까지도 강조한다. 이에 대한 좋은 실례는 영국군 포변대가 전선의 특정 부분에 시계처럼 정
확하게 정기적으로 행하는 '저녁  포격'이다. 독일병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7시에 있었다. 너무도 정기적이어서 그때에 시계를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그것
은 언제나 같은 목표를 겨누었으며 조준은 정확하여 표적에서 벗어나거나 너무 멀거나 모자
라는 일이 결코 없었다...군인 중에는 탐구심이 강한 자도 있어...7시 조금 전에 그 포격을 보
기 위해 나가기까지도 했다.
  독일군의 포병대도 꼭 같은 행동을 했다. 영국군 측에서 본  다음의 기술이 보여 주는 대
로이다.
   그들(독일군)의 표적으로 선택, 총격의 횟수, 발사하는 포탄의 수, 그 밖에도 너무 규칙적
이었으므로...존스 대령은...다음의 포탄이 낙하할  상세한 장소를 알고  있었다. 그의 계산은 
매우 정확해서 그의 주의를 받지 않은 풋내기 참모 장교는 큰 위험을 당할 수가 있다. 존스 
대령은 표적으로 되어 있는 장소에 가해지는  포격이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그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액셀로드는 그와 같은 "형식적이고 정기적인 발포의 의식은  이중의 메시지를 보낸다. 수
뇌진에 대해서는 공격을, 적에게는 평화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논평한다.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방식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방식은 대화에 의한 교섭에 의해 또는 테이블을 둘러싸고 흥정
하는 의식적인 전략에 의해서도 실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것은 사람들이 서로의 '행동'에 반응하는 것을 통해 일련의 국지적인 협정으로서 출현한  것
이다. 개개의 병사는 아마도 그와 같은 협정이 생기고 있는  것에는 거의 느낌이 없었을 것
이다.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액셀로드의 컴퓨터에 입력된 전략은 명확히 무의식적인  것
이었다. 그것들을 정의하는 것은, 마음씨가 좋은가, 간악한가, 관용한가,  비관용인가, 질투가 
심한가 어떤가 등등의 행동이었다. 그것을 설계한 프로그래머는 그  같은 조건의 어디에 해
당됐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관계가 없다. 매우 간악한 인간은  마음씨 좋고 관용하고 질투가 
없는 전략을 간단하게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도 가능하다. 전략의 좋은 마음씨
는 행동에 따라 식별되는 것이지 그 동기(가지고 있지 않은고로)도 아니고, 그 작자(그 프로
그램이 컴퓨터로 해치울 때 배경 속에 모습을  숨기고 있다)의 성격도 아니다. 컴퓨터의 프
로그램은 그 전략에 주의할 것 없이, 아니 실은 어떠한  일에 일체 주의를 않더라도 전략적
인 방법으로 행동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무의식의 전략 또는 적어도 의식이 어찌되든 관계하지 않는 전략이라는 사고 
방식에는 매우 숙달되어 있다. 이 책의 여러 페이지에는 무의식의 전략이 끊임없이  나온다. 
액셀로드의 프로그램은 우리가 이 책을 통하여 동물, 식물 그리고 실은 유전자에 대해 생각
해온 방법으로서 하나의 훌륭한 모델이다. 그래서  그의 낙관적인 결론(질투심 없고 광용하
며 마음씨 좋은 전략의 승리)이 자연계에도 적용되는지 어떤지를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이다. 답은 '예'이며 당연히 그렇다. 유일한 조건은 자연이 때때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설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미래의 영상이  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게임이 
비영합 게임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은 생물계의 도처에서 확실히 충족
시키게 된다.
  박테리아가 의식적인 전략가라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겠지만 기생성의 박테리아는 아마도 
그의 숙주와 끝없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전략에 액셀로드식의 
형용사 -관용, 질투심이 없는 등등-를 귀착시켜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액
셀로드와 해밀턴은 보통 무해하거나 이익을 주고 있는 박테리아가 상처 입은 인간에게는 간
악하게 변하여 치명적인 패혈증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의사는 그 사람의 
'자연적 저항력'이 부상에 의해 저하됐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진짜 이유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박테리아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
통은 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과 박테리아 사이에서 행해지는 게임에 있어 '미래의 
영상'은 보통 길다. 왜냐하면 게임을 어려서부터 시작하는 정상적 인간이라면 수년간은 산다
고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편 심한  상처를 입은 인간은 기생하는  박테리아에게 잠재적으로 
훨씬 짧은 미래의 영상을 줄지 모른다. '배신으로의 유혹'이 '상호 협력에 의한 복수'보다 매
력적인 선택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말한 나위 없이 박테리아가 이 같은 것을 그들의 간악
한 작은 머리로 유도해 내는 것 같지는 않다. 몇 세대에 걸친 선택이 아마도 순수히 생화학
적인 수단에 의해 작용하는 무의식의 실제 경험으로 얻은 법칙을 박테리아의 유전자에게 틀
어넣었을 것이다.
      무화과나무와 벌레
  액셀로드와 해밀턴에 의하면 이것 또한 분명히 무의식적인 형태인데, 식물이 복수를 하는 
수까지도 있다고 한다. 무화과나무와 무화과벌레는 밀접한 협력적 관계를 공유하고 있다. 당
신이 먹고 있는 무화과는 진짜 열매가 아니다. 끝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만일 당신이 그 구
멍 속으로 들어가면(들어가기 위해서는 무화과 벌레만큼  몸이 작아야만 한다. 무화과 벌레
는 너무도 작아서 무화과를 먹을 때 벌레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이다) 둘레의  벽에 수백 개
의 작은 꽃이 정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화과는 꽃에게는 캄캄한 옥내 온실이며 옥
내 수분실이다. 그리고 수분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자는 무화과 벌레이다. 그러면 이  벌
레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을 것인가? 그들은 작은 꽃에다 알을 낳고 유충은 그 꽃을 먹는다. 
그들은 같은 무화과 열매 속의 꽃들을 수분시킨다. 무화과 벌레에게 있어 '배신'이란 하나의 
무화과 속의 꽃에만 너무나 많은 알을 낳음으로써 너무 적게 수분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때 
무화과나무는 어떻게 '보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액셀로드와 해밀턴에 의하면  "많은 경우에, 
만일 젊은 무화과 속에 들어간 벌레가 종자를  결실케 할 충분한 꽃을 수분시키지 않고 그 
대신에 거의 모든 꽃에 알만 낳으면 무화과나무는 그 나무의 열매 발육을 얼마 안 가서  정
지시킨다. 그렇게 되면 벌레의 모든 유충은 사멸해 버리고 만다."
      농어의 협력과 배신
  자연계에서 '당하면 갚는다' 협정과  같이 보이는 유별난 예가  피셔(Eric fischer)에 의해 
암수한몸의 농어에서 발견됐다. 우리와는 달리 이물고기의 성은 수정 시점에서 염색체에 의
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어느 개체나 암수 양쪽의 기능을 발현할 수가 있다.  한번의 
방출에 의해 알과 정자가 불규칙하게 나온다. 일부일처적인 한 쌍을 형성하고, 한 쌍은 암수
의 역할을 교대로 한다. 이럴 경우 별다른 벌을 받지  않는다면 개체는 항상 수놈의 역할을 
하기를 '좋아'할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수놈의  역할 쪽이 지출이 적기 때문이
다. 바꿔 말하면 상대방에게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암놈의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기에 성공한 
수놈 역할을 하는 개체는 경제적 투자 이익의  모두를 얻기만 하고 다른 놈과 교미하는 등 
다른 일에 소비할 수 있는 자원의 여유를 가지게 된다.
  사실 피셔가 관찰한 것은 이 고기들이 어느 정도 엄밀한 교체 시스템을 작동시키고 있다
는 것이다. 그것은 만일 그들이  '당하면 갚는다' 전략을 취하고  있다면 예측되는 바대로인 
것이다. 이 게임은 다소 복잡하긴 하나 실제로 진짜  죄수의 딜레마처럼 보이므로 물고기가 
그렇게 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나. '협력'의 카드를  내는 것은 자기의 차례가 돌아
올 때에 암놈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암놈의  역할을 차지할 순번이 됐을 때 
수놈으로 행동하려는 유혹은 '배신'의  카드를 내는 것에 상당한다.  '배신'은 보복의 대상이 
된다. 상대방은 다음에 상대가 그렇게 해야 할 순번이 왔을  때 암놈의 역할을 인수받는 것
을 거부할 수 있다. 또는 단순히 모든 관계를 끝장내는 수도 있다. 피셔는 실제로  불평등한 
성 역할의 분담을 하고 있는 짝이 붕괴되는 경향을 보임을 관찰했다.
      박쥐의 헌혈
  사회학자와 심리학자가 때때로 묻는 질문은, 왜 헌혈자는 무료로 피를 제공하는 것일까라
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나는 그 답이 호혜성  또는 가장된 이기성에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는 것에 유의했다. 정기적인 헌혈자가 수혈의 필요가 생겼을 때에 우선적으로 취급받
는다는 관례는 없다. 헌혈증을 받는 것마저  문제가 안 된다. 너무 순진한 생각인지  몰라도 
나는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이해에 관계하지 않는 이타 행위라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 
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흡혈 박쥐에서 혈액의 분배는 액셀로드의 모델에 매우 잘 맞는다
고 생각된다. 이것은 윌킨스(G.S. Wilkinson)의 연구에서 알 수 있다.
  잘 알려진 바대로 흡혈 박쥐는  밤에 피를 먹고산다. 그들에게 있어  식사를 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단 먹이가 생기면 아마도 잔뜩 먹에 된다. 밤이 새면 불운하게도  굶
주린 채 돌아오는 놈도 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희생물을 발견한 개체는 여분의 피까지 잔
뜩 빨아먹고 올 것이다. 다음날 밤에는 반대의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것은 약간의 
호혜적 이타 행동의 존재가 약속되어 있는 사례같이 생각된다. 윌킨슨은 그 밤에 행운을 만
난 개체가 때때로 실제 그 밤에 별로 운이 좋지 않았던 동무에게 토해 내는 식으로  헌혈하
는 것을 발견했다. 윌킨슨이 목격한 110회의 경우에서 77회는 어미가 새끼에게 먹였다는 사
실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 이외의 혈액 분배의  많은 사례는 다른 유전적 유연성
이 관여했다. 아직 혈연이 없는 박쥐들 사이에서의 혈액 분배의 예도 몇 개쯤 있다.  이들의 
경우에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설명은 사실과 걸맞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관
여한 개체들이 때때로 같은 잠자리 친구라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반복 죄수의 딜레마에 요
구되는 것처럼 서로가 되풀이하여 상호 작용하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죄수의 딜
레마를 위한 다른 요건은 충족됐을까? (그림D)에  제시한 지불표는 만일 그들이 그럴 경우
에 예상되는 내용이다.
  (그림D) 흡혈 박쥐의 헌혈 도식에서 여러 가지 결과로부터 내가 받은 보수와 지불
꽤 좋은, 보수: 나는 불운한 밤에 당신의 헌혈에 의해 죽음에서  구조됐다. 운 좋은 밤에 나
는 당신에게 헌혈하나 이것은 다소의 지불에 불과하다. 매우 나쁨, 패자의 지불: 나는 운 좋
은 밤에 당신을 구하기 위해 헌혈했는데, 내가 불운했을 때  당신은 나에게 피 한방울도 주
지 않아서 나는 죽음 직전에 놓였다. 매우 좋음, 유혹료: 당신은  내가 불운할 때 헌혈해 줘
서 나의 생명을 구했다. 그러나  나는 운 좋은 밤에 당신에게  헌혈한다는 작은 지불까지도 
하지 않았다. 꽤 나쁨, 벌금: 나는 운 좋은 밤에 당신에게  헌혈을 하지 않았으며 당신도 운 
좋은 밤에 나에게 헌혈을 하지 않아 나는 죽음에 직면하기 쉽다.
  흡혈 박쥐의 경제학은 참으로 이 표에 따르는 것일까? 윌킨스는 굶은 박쥐가 체중을 감소
시키는 비율을 조사했다. 이제부터 그는 배부른 박쥐가 아사하기까지에 요하는 시간, 공복의 
박쥐가 아사하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모든 중간 단계의 시간을 계산했다. 그것에 의해  그는 
연장되는 수명 시간의 통화로서 혈액을  이용할 수가 있게 됐다. 실제로서  놀랄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 통화의 교환율이 박쥐가 얼마나 굶어 있었는가에 따라 변하는 것을 발견
했다. 일정량의 혈액은 별로 굶지  않은 박쥐보다 극도로 굶은 박쥐에게  더 장시간의 목숨 
연명 효과를 준다. 헌혈 행위는 헌혈자가 죽는 확률을 증가시킴에도 불구하고 그 증가는 수
혈자가 생존하는 확률의 증가에 비하면 극소이다. 경제학적 용어로  하면 흡혈 박쥐의 경제
학은 죄수의 딜레마의 법칙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같이 생각된다. 암놈(흡혈 
박쥐의 사회 집단은 암놈의 집단이다)에게 헌혈자가 주는 피는 수혈자로서의  같은 양의 피
만큼 귀중한 것은 아니다. 암놈은 불운한 밤에 헌혈한 자신의 피의 선물로 이해 말할 수 없
는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운 좋은 밤에는 만일  그것 때문에 벌을 받지 않는다
고 하면 배신(헌혈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조금의 이익밖에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벌을 안 받는다'라는 것은 물론 박쥐들이 어떤 종류의 '당하면 갚는다' 전략을  채용하고 있
을 때에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당하면 갚는다'적인 응수가 진화하기 위한 
다른 조건은 충족되어 있는가?
  특별히 이들 박쥐는 서로를 개체로서 식별할 수 있는가? 윌킨슨은 사육한 박쥐를 실험하
여 그들이 식별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다른 개체에게는 피를  잔뜩 먹이고 한 마리만 하룻
밤 동안 굶겨 두는 것이 이 실험의 기본적 발상이다. 다음날, 윌킨슨은 굶겼던 박쥐를  다시 
잠자리로 옮겨 놓고 누가 그 개체에게 먹이를 주었는지를 관찰했다. 실험은 각 개체를 순서
대로 굶기면서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 중요한 점은 이 실험  대상 박쥐들이 몇 마일 떨어져 
있는 다른 동굴에서 데려온 두 개의 다른 그룹의 혼합이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박쥐가 자기
의 시구를 식별할 능력이 있다면 실험적으로 굶겨진 박쥐는 자기 그룹의 박쥐로부터만 먹이
를 받는다고 판명한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과 잘 맞는다. 헌혈은 13번 관찰됐다. 그 중 12번이 굶은  희생자
와 같은 동굴에서 온 경우였다. 13번의 경우 중 단한  번만이 다른 동굴에서 데려온 것이었
다. '새 친구'에게 먹이를 주었다. 물론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 수는 있으나 그 확률은  매우 
적다고 산정된다. 그것은 1/500이하이다. 박쥐가 실제로 다른 동굴에서  온 모르는 개체보다
도 오랜 친구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좋아하는 차별성을 가진다고 결론을 내려도 조금은 안
전하다고 본다.
  흡혈 박쥐는 여러 신화를 낳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고딕 양식의 열렬한 애호가에게 흡
혈 박쥐는 밤에 공포를 주며 생명체액을 빨고 그저 목을 추기기 위해서 죄 없는 생명을  희
생시키는 사악한 힘이었다. 이것에게 '이빨과 발톱이 피범벅이 된 자연'이라는 또 하나의 빅
토리아 시대의 신화가 결부되어 흡혈 박쥐야말로  이기적 유전자의 세계에 관한 가장  심한 
공포를 구현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모든 신화에 회의적이다.  만일 특정 사례에서 
어디에 진실이 있는가를 알고 싶으면 자세히 보아야 한다.  다윈주의의 체계가 우리에게 주
는 것은 특정 생물에 관한 섬세한  예측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미묘하여 더 귀중한 
무언가를 주고 있다. 그것은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화를 가져야  한다면 
흡혈 박쥐에 관한 진정한 현실은 또 다른 우화 소설을 말해 줄 것이다. 박쥐 자신에게 피는 
단순하 물보다 진하다는 것뿐만은 아니다. 들은 혈연의 쇠사슬을  넘어서 피를 나눈 성실한 
형제의 연분으로서 영속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흡혈 박쥐는 마음 편한 새로운 신화,  분배하
고 상호 협력한다는 신화의 선봉이 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에 지배되면서까지 마음씨 좋
은 놈이 일등이 될 수가 있다는 자비심 깊은 생각을 예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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