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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두려움

이별은 사랑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다

by Frais Feeling 2020. 8. 24.

    내가 이 글의 첫 장을 완성했을 때,  베아테가 상담을 받으러 왔다. 그녀의 기분은  무척 좋아 보였
다. 오랫동안 차갑게 보이고, 자기한테 무관심하던 아버지가 다른 면을 보였던  것이다. 그가(어린아이들
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던  베아테의 아버지가) 베아테와 그녀의 딸을  데리고 여행을 갈 생각을 
한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어떻게 전남편을 만나게 됐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아테는 대학 시
절 한 남자 친구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그만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녀는 죄의식을  느꼈다. 원래 그는 
그녀와 함께 방학을 이용해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반대했기 때문에 그녀는 
거절했다. 그 사고가 있은 후 그녀는 다른 도시로 여행을 떠났고, 나중에 남편이  된 한 남자의 차에 동
승하게 되었다. 차 안에서 그들은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후 어느 파티에 갔는데, 많은 친구들
이 그녀에게 물었다. "네 남자 친구 어딨어?" 그녀는 이 질문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뛰쳐나왔고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질주하여 바로  자신을 태워 주었던 그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첫아이를 출산하고 그녀가 아팠을  때, 그녀의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책만 
읽을 뿐이었다. "내가 아파서 기어 다니지도 못할 때, 그는 밤 1시에 들어와 '뭐 먹을거 있어?'라는 거예
요. '내가 아픈 게 보이지 않아?' 했더니, '그럼  나중에 다시 올게' 라는 거예요. 난 거의 미쳐서  날뛰었
죠. 겨우 진정했지만, 변한 건 없었죠. 전 늘  기다렸어요. 뭔가 변하기를요. 그것도 너무나 오랫동안 말
이죠." 이런 상황에서 베아테는 엄마를 떠올렸다. "늘 그랬어요.  왜 그런지는 몰라요. 아파서 누워 있을 
때면 엄마가 한번은 오리라고 기대하면서 기다렸죠.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와  주지 않았어요. 가끔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던 적도 있어요. 아침식사 쟁반이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인 것을 저녁에
야 발견하고 가정부가 깜짝 놀란 적도 있어요. 그때는  엄마가 날 챙겨주도록 하기 위해선 정말 아파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거죠. 최근에, 엄마가 예전에 선물해 준 동화책을 다시 봤어요. 엄마는 늘 내가 무슨 
병으로 아픈지 꼼꼼하게 기록해 두곤 했어요. 그건  내 전남편하고 비슷해요. 그래선지, 난 그가 언젠가
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어떻게 보면 아빠랑 비슷하기도 해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
든 걸 주어야 해요. 그렇지 않고 그가  나에게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정말 
상상 하기도 싫어요." "당신의 아버지는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습니다. 그분이 당신이 원하
는 모든 걸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분 방식대로 뭔가를 줍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많이 바라면서도, 아무것도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건 왜죠?" 
"내 생각에 당신은 다섯 형제 중의 막내로, 무시당하고 관심  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자랐습니다. 그러면
서 본인이 원하는 좋은 엄마, 이상적인 엄마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당
신을 위해서 늘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 엄마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남편에게도 비
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그렇게 오랫동안 부모님으로부터,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독
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이상적인  엄마의 상을 늘 간직하고 있어서.  현실의 엄마에게서 매번 
실망을 느낄 때마다 이상적인 엄마를 늘 열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나는데요,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난 매일 저녁마다 누군가 내 베개 밑에 사탕을 놓고 갔을 거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내 방에 자러 들
어가면 늘 베개 밑을 뒤져보았죠. 늘 아무것도 없었지만, '내일은...'  하면서 기대했어요. 그런 짓을 오랫
동안 계속했어요. 한번은 숙모 댁에 갔어요. 그 숙모는 가족 내에서 별로 사랑받지 못했어요. 성격이 아
주 극단적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나는 베개 밑에서 사탕이 가득 든 봉지를 발견했어요."
  이런 사건은 어째서 그런 환상이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엄마나 다른 사람들(아버
지와 남편)을 통해 현실에서 느끼는 좌절은 베아테에게 우연한 행운, 이상적인 충족이라는  환상을 심어 
주었다. 현실에서 생겨나는 좌절로부터 환상이 싹튼 것이다.  그건 마치, 그녀가 그토록 베개 밑에서 찾
았지만 실망시키기만 하던 사탕이 마침내 한 봉지의 사탕이  되어 돌아온 것과 같다. 나중에 남편에 대
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위한 모든 헌신과 노력은 마침내  한 봉지의 사탕을 얻게 되는 비밀스런 꿈
을 향한 것이었다. 거꾸로, 남편에 대한 희생적인 봉사는 자기가 갖고 있는 너무도 큰 욕구와 갈망에 대
한 속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도움을 주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의 관계는, 아름다운 미래를 위한 기
대가 영영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을 때 무참히 깨진다. 실제로 현실의  관계는 양극으로 분화된다. 언젠가
는 이상적인 엄마의 모습으로, 사랑이 많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리고 완벽한 애인으로 거듭나야 할 남
편이 점점 더 요구 사항이 많아지는 아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편과 헤어진다는 것
은, 언젠가는 이루어질 욕구의 충족(이상의 현실화)을 포기하는  것이며, 이 탐욕스런 구더기의 한 부분
을 자기 안에 갖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게 될 것이다.
  오후에 이 병원 상담원들 회의에서 한 동료가 베아테를 연상시키는 어떤 환자를 소개했다. 그녀는 얼
마 전에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과 헤어졌으며, 매달 그가 진 빚 수백 마르크를 갚아야 한다. 그녀의 현재 
걱정거리는 이제 막 패션스쿨을 졸업한 친한 여자 친구다. 이 친구가 그녀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 같이 
사는 게 정말 불편하다. 친구는 냉장고를 다 비워 내고, 전화도 함부로 쓰고, 자기 친구들을 초대하는가 
하면, 물건들을 늘 여기저기 늘어놓는다. 그녀가 거기에 대해서 뭔가 말을 하려고  하면 그 친구는 슬그
머니 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환자도 자기 안의 구더기를 떨어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의 아파트 열쇠를 돌려 달라고 해서 그 친구가 자기를 다시는 보지 않으려  한다면 너무도 끔찍할 것이
라고 한 말이다. "자기 친구가 다시는 보려고 하지 않을까 봐 겁내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 상
담원이 말했다. "그러면 자기 스스로 그 친구를 영영 안 보는 것은요? 이해가 안 가요." 그는 상당히 침
체되어 있었다. 그런 분위기는 곧 다른 상담원들이 그녀의 환상들을 설명하면서 다소 완화되었다. "그녀
는 지금은 자기 여자 친구로 표현되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자기 밖으로 배출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
다." 한 여자 상담원이 말했다. "그건 내가 얼마나 모순적으로, 내 딸아이가 꼼꼼하지 못한  것에 반응했
는지를 상기시킵니다. 가끔은 아주 엄하게, 그러고는 다시 아주 관대하게 대했거든요." 다른 상담원이 말
했다. "그녀는 자기의 정체성을, 자기가 선하고 관대하다는 자각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나쁜  것
은 그 여자 친구 탓으로 돌릴지도 모릅니다. 저의 결혼 생활이 떠오르는데, 우리는 이혼하자고 5년 동안
이나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그건 내가 아내가 사용하는  저속하고 비열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
력했기 때문입니다. '난 절대로 그렇게는 못해!' 하고 생각했던  거죠. 어느 날 내 여자 친구가 그러더군
요. 만일 자기 역시 자기한테만 모든 나쁜 일을 전가시킨다면 아주 화가  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와 마찬가지로 비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3개월  뒤 이혼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
도 불구하고 저는 선한 쪽에 서고 싶었습니다." "만일 누가 내 집에 와서, 냉장고에 있는 걸 다 꺼내 먹
는다면, 그것을 못하게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냉장고에 자물쇠를 채우거나, 아니면 내가 그의 
집으로 가서 그의 냉장고를 텅 비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상당히 조심스럽고, 남을 언제나 잘  도와 
주는 한 동료가 날 살피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진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래요. 누군가 빼앗긴 걸 도로 가져온다면, 피장파장이 되
는 거잖아요." "하지만 상대방이 냉장고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다른 사람이 우쭐해서 말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뭔가를 주거나 받고, 기다릴 수 있는 준비 자세지." 내가 말했다. "그녀에게는  다른 사람이 
단지 요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결여되어  있어. 그건 자기 '내부의' 문제
야. 외부의 대상에 좋은 기대를 갖게 하는 내부의 대상이 그것이지. 이 환자는 그걸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어. 이 사람은 그걸 마치 크리스마스의 칠면조처럼 다 벗겨지고 내장이 꺼내지도록 하는 행동으로 대
체하지.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게 다 끝나 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 "기다림! 기다림이 중요해." 다른 
한 동료가 말했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대상을  보면 정말 놀라워. 헤어지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으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가끔은 자신이 얻은 실망감에  대해서 말하기도 해. 그리고 기다려. 고도를 기
다리며." "난 지금 크리스마스 휴가를  기다려. 지금이 크리스마스라면... 난  그걸로 족해." 다른 사람이 
아쉬운 듯 말했다. "기다림에 연관지어서 하인리히 뵐의 이야기 하나가 생각나. 지금 내 딸이 그것에 관
해서 텍스트 분석을 쓰고 있어. 요점이 뭔지는 다들 알거야. 카프리 섬의 해변에서 한 여행객이 배 위에 
게으른 모습으로 누워 있는 어부 한 사람을 본 거야. 그러고는 말을 걸었지. 얘기를 하다 보니, 그 여행
객은 태만해 보이는 어부에게 여러 가지 제안을 하게 됐어. 더 많은 고기를 잡아서, 더 많은 배를 사고, 
레스토랑도 사서 나중엔 통조림 공장을 하나 세운다는 거야. 그래서 결국엔 사람들을 고용해서 대신 일
을 하는 거지. 그러자 어부가 '그러고 나선?' 이라고  물었지. '그러고 나선 그러고 나선 태양 아래 누워
서 편히 쉬는 거지.' 그러자 어부는 '그건 지금도 할 수 있는걸.' 하면서 도로  편히 눕더라는 거야." "음, 
우리 역시 때때로 더 좋은 미래를 기다리곤 하지. 그러고 보면 우리나 환자들이나 다 똑같지, 뭐." 내가 
언제나 전철역까지 바래다주는 몇 명 가운데 한 사람인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리스를 알게 
된 이래로 늘 그 사람은 일을 조금만 했으면, 하고 말하지만 그는 주말에도 항상 상담을 하고 있어." '힘
겨운 현재와 안락한 미래', 현대 능률 사회에서는  이것이 당연시 되고 있다. 이승에서의 노력과 고통을 
저승의 천국으로 보상해 준다는 생각, 혹은 다음 생에서는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생각은 대부분
의 문명 사회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그들 사회에서 '사회의 불안'이 너무 큰 짐이 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산업사회의 능률 지향성과 경쟁의 압박이, 저 세상에 대한 희망이 여전히 큰 역할
을 하는 기독교 문화로부터 나왔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종교가 설득력을 잃고,  대가족적인 삶이 그 가 
치를 상실한 이래로, 개인적 삶의 영역이 감정에 관한 한 거의 모든 희망을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보인
다. 그 결과, 부모 자식 관계의 요소들이 다름 아닌 성적 관계로 점점 더 강하게 유입된다. 고정적인 부
모의 표상을 통한 감정이입과 보살핌이 너무 적었을 때는, 일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베아테나 위에 서술한 동료의 환자, 혹은 우리 상담원 자신 역시 마찬가지로 감정이입을 
하고,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모, 애인을 통해서 보상받고자 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사회
적인 안락함의 결여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서로 동등하게 주고받는 경험이 
결여되어 있다. 자연과의 어떤 교감이나, 지역사회, 혹은 대가족적 공동체도 성장 초기의 상처를 치유하
거나 약화시킬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린 시절의 결핍이 이상적인  기대치에 대한 요구와 심리치
료를 통한 보상이 더 강화시키는 것이다.
  큰 실험실을 관리하는 출세한, 나이 지긋한 의사가 상담을 받고자 전화를 걸어왔다. 자기 부인이 최근 
여성인권 모임에 참석하고, 페미니즘 서적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부
인은 그에게 가부장적이며, 요구 사항은 많으면서 아무것도 자기에게 주는  것이 없다고 비난했다. 그는 
자신의 상처받기 쉬운 감정을 은밀하게 숨기며 나의 조언을 구했다. 그는 다만, 통제할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히스테리 증세를 어떻게 다루어야만 할지 알고  싶어했다. 그는 그런 비난에 아예 반응을 보
이지 않는 데 익숙해졌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싸움이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아이들 때문에 그녀와 같이 산다고 한다. 그녀는 감사할 줄도 모른다. 그는 자유롭고 편한 독신 생활 끝
에 그녀와 결혼했는데, 그건 순전히 동정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
문이란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매일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잠자리에서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물론 그는 그것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여기서 그가 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는 데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다만, 자기가 얼마나  많이 부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지,  그리고 부인이 그것에 대해 전혀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만을 본다. 내가 보기에 그는, 독신 생활 동안에 불안정하고 편한 여자 관계를 통
해 멀리했던, 친밀감과 따스함을 향한 욕구를 단지 도움을 주는 삶,  의사로서 우위에 선 역할 속에서만 
허용했던 것이다.
  상처받고 몹시 힘들어하는 이 사람과의 30분  동안의 대화는 어떤 전형적인 사례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위기 속에서의 공생', '친밀감 없는 결합' 혹은 '적응 관계의 끝' 같은 표현이 어떤 심리학적인 
진단(여기서는 '나르시스적인 결합 상태')보다도 이와 같은 상태를 더 의미있게 전달한다고 본다. 정신분
석학 혹은 정신병리학에서는 어떤 특수한 상황을 이를테면 '신경증적인'  혹은 '나르시스적인' 장애로 정
의하고 구분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사례는 전형적이고 또  상당히 보편적이어서, '성숙한 애인관계'라는 
일종의 허구적인 개념이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의 이상적인 상태를 토대로 증세들
이 측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파탄이 난 관계에서 두 사람 다 사회적인 이상형에 잘 복종한다고 생
각하는 것 말고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꾸로 대인관계가 불가능한 경우, 아예 처음부터, 아니면 베아
테처럼 끔찍한 경험을 한 이후에 관계를 기피하는 것 말고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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