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대부분이 감정적인 삶을 좋은 평가나 점수와 연결짓는 걸 터득해야 하는 이 사회에서, 사랑은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다. 게다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그 단어는 많은 사람들이 차마 입에 올리려
고 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 코카콜라와 페르질(세탁비누 상표명), 아내와 여자 친구를 똑같이 사
랑할 수 있을까? 산업사회는 개인의 정서를 위축시키고, 광고를 비롯한 소비 세계는 우리의 꿈과 희망
을 오용한다. 그 결과, '진실'은 없어서는 안 되면서도 동시에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
다. '모호함'과 '거부'가 침해받기 쉬운 '친밀의 영역'에서 일종의 보호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자신의 감
정을 결코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최소한 매스 미디어로부터 강요받는 '유치함'의 관념에서 자신을 보호
할 수 있다. 하지만 또한 그럼으로써 감정이 불분명해진다. 자기 비판 앞에 우스워지기 싫어서 침묵해야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인가.
'사회'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유가 불분명한 분노에서 해방되기 위해 이를
테면 남의 창문을 깨뜨리고, 공원의 벤치를 부수고, 경찰이나, 노인, 외국인과 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혹은 마약이 내적인 규제와 일상의 좌절을 잊게 할 수도 있다. 적어
도 그런 희망은 줄 수 있다. 마약 중독의 과정은 한 마디로 '퇴행'이라고 할 수 있다. 퇴행은 꿈, 유아적
환상, 환각, 느슨해진 긴장의 세계다. 간단히 말해, 주변 사람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기 혼자만의 흥미
거리에 복종하고, 안일하게 사는 것이다. '퇴행'의 반대 개념은 '진보', 즉 통제된 행위와 적응으로의 진보
이다. 산업사회가 퇴행보다는 진보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디서나 '진
보'는 가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정신적으로, 무엇보다도 물질적으로, 이를테면 좋은 점수, 사회적 지위,
돈 등으로 보상받게 된다. '퇴행'은 개인의 은밀한 영역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가끔 특수한 직업에서 '사
회적인' 가치를 인정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공개적으로 자기의 꿈을 표현하는 예술가 혹은 질병, 잠, 죽
음을 다루는 의사와 다른 상담 분야 전문가들에게는 '퇴행'이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런 특수한 직업
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적인 체험을 대상으로 다루면서, '진보적인' 경향으로의 속박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로이트는 당시 시민사회의 사람들은 '쉴다 사람(바보란 뜻도 있다)의 말' 이야기에 비유한
적이 있다. 한 쉴다 사람에게 말 한 필이 있었는데, 그 말의 유일한 단점은 자꾸 먹으려고 드는 것이었
다. 구두쇠인 주인은 그걸 고치려고, 말이 먹는 귀리를 매일 조금씩 줄여 나갔다. 마침내 말이 거의 먹
지 않고도 일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이 얼마나 큰 성공인가!), 이 말은 죽어 버림으로써 주인에게 보복한
다. 마찬가지로 만일 문화부 장관이 어느 날 마지막으로 남은 퇴행의 틈새(이를테면 음악 수업)를 교과
과정에서 삭제시켜 버린다면, 그는 점점 더 많은 학생이 알코올이나 대마초 흡연에 빠지는 사태를 보게
될 것이고, 이를 앞에서 언급한 말의 '보복'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도리스 레르헤의 만화 중에 퇴행의 보복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말해 주는 것이 있다. 기운 없이 축 늘
어진 소년 둘이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다. 한 소년이 말한다. "한 번만이라도 정말로 사랑받았으면 좋겠
어." 그러자 그 옆의 소년이 말한다. "나도 그래." 사랑이란 올바른 행위를 했을 때 받는 일종의 점수다.
사람들은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어떻게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
은 것이라면, 무엇을 해야 하나? '사랑'을 한다? 속수무책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약은 한 해결책일 수 있
다. 마약은 쉽게 용해되고, 직접 혈관으로 들어가 편안함과 친밀감을 보장한다. 실제로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는 인간에 의존적이거나, 정서와 친밀함에의 갈망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철저히 약이나 술
자체에 의존한다. 그들은 약물을 손에 넣게 되면 자기 자신조차 수중에 있다고 믿는다. 많은 중독자는
자기와는 정반대의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자기처럼 정서적인 관계(형식적인 관계에 대립되는)에 두려움
을 느끼면서도 '진보' 개념에 얽매여 사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 부단한 노력과 되풀이되는
실망은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는 쓰라린 고통 속에서, 중독자로 하여금 변명하고, 거짓말하고, 훔치게 한
다. 하지만 그는 또한 자신의 불확실성과 감정적인 접촉에서 발생되는 상호 의존성을, 통제된 행동이나,
상대방의 무능력, 의존성, 통제력의 결핍에 대한 근심으로 대신하려 한다.
중독자와 파트너십을 이룬다는 것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을 제시해
준다. 중독자는 약물 의존성을 자기 자신과. 가까운 관계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 놓는다. 그리고 그의 파
트너는 다른 방식으로 똑같은 행동을 한다. 그는 상대방이 중독을 극복해 냈을 때 자기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보상되는 낙원과 같은 미래를 보게 된다. 그때까지 그는 중독자의 모든 깊은 곳을 다 아는 유일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서로 간의 조화와 이해에 대한 희망을 깨뜨리는 주범은 마약이나 술이다. 사랑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각자가 느끼는 의무감만이 전부가 된다.
하지만 누군가 그렇게 중독된 상대방을 견뎌 낸다는 것은 분명 그가 사랑할 능력이 있다는 게 아닌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내가 그들보다 더 잘나서, 그들의 희생 정신과 가끔은(아주 드물게) 보상받는 정성
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행위가(중독자의 파트너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
을 가지는) 내 직업보다 더 쉽지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심리 상담가나 부부관계 조언가가 예전에는 없었다. 이런 직업의 출현은 이 사회가 이전에는 간섭하
지 않던 분야에서 전문가를 만들어 냈음을 의미한다. 목사나 의사가 조언을 해 주곤 했지만, 그들은 '관
계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재조립한다거나, 그것을 적당한 기회에 더
반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짧은 수명과 빈번한 죽음을 통한 파트너십의 와해는 사람들
을 더 가깝게 모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욕구의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해소를 오늘날의
불행한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이해'와 '감정이입'보다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 가까운 사람 중 누군
가 죽는 것이 흔한 일상사였을 때에는, 이별이 그렇게까지 나르시스적인 의미를 갖지 않았다. 임신은 운
명이었지, 어떠한 자발적인 선택도 아니었다. 살아남는 아이보다 더 많은 아이가 출생했기 때문에, 개별
적인 아이들의 탄생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자연에 대한 통제를 더 강화함으로써 산업사회에서는 개
인의 안전이 더 강화되었지만, 보다 더 확실한 안전을 향한 욕구 또한 더욱더 커지고 있다. 이 사회는
점점 더 많은 걸 요구하게 만들고, 그럴수록 채워질 수 있는 욕구가 더 적어지는 것이다. 한편 전산화되
고, 컴퓨터화된 세계의 저편에 있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공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우리가 풍요에 길들
여져 더 유약해졌기 때문에, 이 영역에 대한 공포도 더 위협적이 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 것은 더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간의 만남과 헤어짐은 이진법이 발견된
이래로 더 개척되지 않은 영역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 영역에서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남성적'이란
것은, 예를 들자면 돈 주앙 이래로, 성적 관계의 불확실한 질적 측면을 그 양적 측면으로 대체시키는 것
이다. 그래서 관계나 숫자로 세어지고, 측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밀감과 안전함을
향한 욕구는 그대로 남는다. 더 흔한 해결 방법은 자기를 사랑해 주는 여자가 나타나면 결혼하는 것이
다. 하지만 그런 걸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는 그런 걸 알 수 없다. 그는 다른 걸 생각해야
한다. 출세, 취미, 스포츠, 나중엔 자식을 말이다. 어떻게든 그는 이 상황을 잘 넘길 것이다. 아내는 차라
리 고용주다. 고용 계약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랑을 증명하라." 언제든지 그 반대 요구를 할 수 있
고, 또 무엇보다도 가정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어쩌면 이 남자
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아내를 사랑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적
응하게 되고,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제일 편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아내는
이 상황을 잘 활용할 것이다. 그녀는 아이들을 키우고, 언젠가 한번쯤 직장에 다닐 수도 있고, 취미 생
활과 친구들을 갖게 될 것이다. 문제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고, 그만 도중하차하고 싶을 때에야 비로소
발생한다. 그러면 그녀는 우선 남편을 바꾸려고 노력할 것이다. 남편은 좀더 정서가 풍부해져야 하고,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겉으로 드러나게 표현해야 하며, 자기가 단순히 일하는 로봇이나 섹스 파트너가
아니라는 걸 인식하고, 자기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
아내가 집안일이나, 특히 감정에 관계된 부분에서, '이러려는 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 때문에 자신
을 제한하기 시작하면, 부부관계는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감정 표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역할에 기초한 관계가 그 토대를 잃는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남편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른다. 어째서
여태까지 잘 유지되어 오던 관계가 더 이상은 안 되는 걸까? 그는 자기가 직장에서 순전히 일하는 기계
로만 취급받는다면 어떨까에 대해서조차 생각해 보지 않는다. 아마 그렇다 해도, 그는 자신의 아내보다
더 불만을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자기를 더 잘 이해해 달라고, 상사에게 심리학 책을 권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부인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자기가 두려워
하는 부분을 남편에게 불평할 따름이다. 그녀는 마침내 자기가 결혼한 사람은 감동적인 감정의 소유자
가 아니라, 믿을 만하고 성실하며, 그녀가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말수가 다소 적은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이제 그녀는 그의 마음을 열려는 노력이 헛수고이며, 자신의 기다림이 결코 보상받지 못하리
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홀로서기는 경제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불안하다. 그
녀가 남편을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해 왔다면, 더욱 힘들다. 헤어진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노력을 무위
로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더 심한 경우엔 이혼을 하게 되고, 접시 하나 가지고도
소송을 걸며, 예전에 믿고 살던 상대방에게 주느니, 차라리 박살내고 마는 것이다. '좀 나은' 경우는 깊
은 체념의 단계로, 감정적인, 그리고 성적인 침묵 속에, 두 사람 다 진짜 로봇이 되어, 한 집에서 사는
것이다.
이제 나는 이런 위기를 해결하는 다른 방법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이 방법은 적지 않은 여자들이
선택하는 방법으로, 남자들은 그런 여자를 '히스테리컬'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의 여자들은 자기
의 '과장된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오늘날 '과장된 감정'이라는 표현이
사람을 이해하는데 더 어렵게 한다고 본다.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격한 감정으로
서의 이 해결 방법은 현대 사랑 관계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다음에서 이야기하려는 사례들은
오토 쾰러의 1937년도 연구를 상기시킨다. 그는 어떤 새에게 가짜 알을 주었다. 그것은 '지나치게 이상
적인' 것으로서, 선명한 얼룩무늬가 그려져 있고, 원래 자기 알보다 네 배는 더 컸다. 새의 암컷은 이 알
을 자기 알보다 더 좋아했다. 그래서 이 알 위에 제대로 올라서지 못하면서도 품으려고 했다. 그러는 동
안 암컷의 원래 알은 그 옆에서 부화되지 못한 채 상하고 말았다.
베라는 어렸을 적부터 자주 맞았다. 그녀는 첫째딸로, 일찍 자기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고, (동생
들을 돌보도록 시킨) 엄마한테는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꼈으며, 그녀의 고집을 꺾으려 드는 아버지와
는 마찰이 심했다. "죽도록 때리라고요!" 한번은 아버지한테 이렇게 외치기도 했다. 그녀는 일찍 결혼했
고, 비록 남편이 돈을 잘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후에는 일을 나갔다. 동시에 자기 아이만은 결코 소홀
히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해 길렀다. 그녀는 다른 형제처럼 교육받지 못한 것을 불행으로
여겼다. 결혼 후 몇 년 뒤, 그녀는 한 유부남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다. 그 애인은 그녀에게 요구했다.
자기한테 성실하고, 늘 모든 것을 숨기지 말고 얘기해 달라고,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그토록 원한다면,
그 사람과 약속한 사랑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베라는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남
편을 멀리함으로써, 부부관계를 위태롭게 몰아갔다. 하지만 애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희
생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를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수년간의 투쟁 끝에 점차 베라는 자신이 그 동안 속
아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한동안 그것을 믿지 못했다. 그는 늘 그녀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확인시켜 주곤 했던 것이다. 그는 질투가 심했고, 독단적이었다. 게다가 베라에게 따를 것을 요구한 명
령 중 어느 것 하나도 자기 자신은 따른 적이 없었다. 마침내 그녀가 이 모든 사실에 눈떴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억제되지 않는 분노를 느끼거나, 그 '지나치게 이상적
이' 애인에게서 그녀가 그토록 벗어날 수 없었던 건, 바로 그가 연기한 감정 때문이었다는, 쓰디 쓴 사
실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거의 늘 울음을 터뜨려야 했다. 그의 감정은 그이 실제 생활보다는 그가 꿈
꾸는 환상과 더 깊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다른 여자 친구들이 있었다. 그의 여자
친구들은 전부, 자기가 처음이자 유일한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베라는 오랫동안, 이런 일에 자신
이 빠져들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늘 모든 일을 올바르게 처리했고, 마음이 열려 있었으며,
감정이 풍부하고 진실했으며, 거짓말을 하거나 속여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알았지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던, 진실에 저항하는 자신을 아주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진실을 외면하려
고 했다. 왜냐하면 진짜 감정보다는 열렬한 맹세가 더 강하게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늘 사랑받
고,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하던 베라는 조금씩 그이 애정 표현을 믿지 못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지조차 의심하게 되었다. 또한 확신에 찬 과장된 애정 표현에 자신이 얼마나 자주 감동받았
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이 사랑에 대한 확신을 일게 되자, 그녀는 자신의 공포와 유약함과 싸워야
했다. 여기서 그녀가 '속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기 감정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아는 사기꾼이라면, 더 과장된 표현을 하려고 애를 쓰게 마련이다. 또한 가능한 한 의심의 여지를 없
애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자기가 사랑받고 잇는지 의심하는 여자에게 더 많은 걸 주고, 자신이
그녀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확신을 주게 된다. 베라가 마치 연극을 하듯이 상황을 묘사하고, 때로는 조용
하게, 때로는 과장된 몸짓으로 흉내를 낼 때, 처음엔 몹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 이면에서 고통
받으면서 자신과 싸우는, 정서가 아주 풍부한 한 여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렇게 보면 볼수록, 그녀의
연극적인 행동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점차 조용해지고, 부드러워졌다. 그녀가 스스로 이렇게
변하긴 했지만, 내가 그녀를 더 많이 이해하고, 그녀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 나눌수록, 그녀는 더욱 자신
의 감정이 극도로 치닫는 걸 억제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진행 과정을 거친 것이
기쁘다. 왜냐하면 그것은 '차가운' 심리 상담가와 '행동하는', 혹은 '진실하지 않은', '히스테리컬한' 환자와
의 관계가, 두 차별적인 사람이 서로의 차이점을 받아들이는 관계로 진보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더 차갑게 굴었다면, 베라는 자신의 처지를 더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 감정이 더 고조되었을 것이고, 아
마도 그럴수록 더 나는 그녀를 믿지 못했을 것이다.
베라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엄마에게서 실망한 소녀가 아버지에게 애정을 표현하지만, 그와 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 주는데, 이 상황은 '파트너 사이의 불화'와 매우 공통점이 많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을 매질로 다스리는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의 실제 모습은 이게 아니라 더 좋은 것인데, 라고 고집
스럽게 우긴다. 그리고 엄마가 주지 못한 것을 아버지로부터 받으려는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엄마의 사
랑을 의심한다는 걸 보여서는 안 된다! 또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걸 드러내서도 안 된다! 아버지의
매질은 아버지와 접촉하고, 벌을 받는다는 곳을 의미한다. 그 이면에는 이상적인 파트너에 대한 갈망이
잠재해 있고, 매질하는 폭군 뒤에는 인자하고 애정이 넘치는 아버지가 숨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숨어
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좌절감은 신뢰에 대한 내적 표상을 손상시킨다. 다시 말해, 감정이 서로 통하는
상대에게서도 그 사람을 신뢰할 내적 기반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이런 내적 감정 구조의 손상을 상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스스로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함으로써, 신뢰성보다는
믿을 만하게 보이는 몇 가지 요소들만으로도 사랑받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외적인 고통을 발전시키고,
상대방이 자신을 걱정하고 관심을 가지고 돌봐 주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육체적인 질병이나
신경성 증세를 통해서 말이다. 혹은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수치와 계산으로 표현하고, 감정에 대한 욕구
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일종의 통제된 세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인류'
혹은 '대중'이라는 거대하고도 불명료한 대상을 향해 예술가적인, 학문적인, 정치적인 노력을 경주하기도
한다.
베라는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며, 늘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대했다. 그럼으로써
내적으로 깊이 결여된 신뢰에 대한 기대감을 보상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수동적일 때는 타인으로
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음으로써 보상받았다. 어린 시절의 정서적 충격은 '너무 이상적인' 애인과의 관계
에서 반복되었다. 이상적인 아버지를 향한 투쟁 속에서 그녀의 유약하고 수동적인 욕구는 소멸되었다.
하지만 베라를 힘들게 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좌절만은 아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인간의 감정
에 적대적인 이 사회 역시 책임이 잇다. 만일 가끔은 연극적으로 과장하는 그녀의 투쟁 이면에 숨어 있
는 그녀의 고유한 감정들을 아무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녀가 투쟁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또 그녀 주변의 남자들이 그녀의 도움을 받고 나서 각자 자신의 길을 가 버렸을 때 그녀가 발작적으로
울거나 큰 소리로 웃는다면, 누가 그녀에게 경멸적인 시선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자신의 표현
능력과 감정 발산을 마치 엄청난 위력을 가진 무기처럼 사용하거나, 혹은 자신의 나약함, 섬세함, 상처
받기 쉬운 감정과 마찬가지로 외부의 비난과 벌에 무감해지는 것말고 어떤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간단히 말해, 베라의 '히스테리'는 병적이고,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정상'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일일
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이것은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사
회가 인정하는 전문가들이 감히, 개인의 '마음의 병'을 자기들의 전문 분야라고 규정짓는다. 한편 한 사
회의 구조에 그와 같은 진단을 강요할 수 있는지 역시 의심스럽다. 여기서 더 의미 있는 진단은, 베라와
그녀를 둘러싼 주변 환경과의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리치료 모임에서 점차 그
녀와 다른 '강박증적인', 혹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 사이에 따뜻한 교감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들은 베라처럼,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자기 내면의 통제력과 감정간의 의사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
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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