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야기 모음/두려움

상대방을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잃을까 두려워 마라

by Frais Feeling 2020. 8. 24.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의존성에 대한 두려움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많은 사람들의 바람
은 친밀한 거리를 확보하되, 서로 의존적이지 않은 것이다. 때로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당사자가 자신이 얼마나 의존적인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는 스스로를 자
신의 파트너와 거의 동일시함으로써 마치 그 양이 희박해져야만 겨우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공기처
럼 안전하게 여긴다. 이제까지 지구상에 존재해 온 대부분의 인류는 현대 유럽인의 '의존성에 대한 두려
움'을 말도 안 되는 미친 생각이라고  여길 것이다. 의존성이란 당연한 게 아닌가,  라고 말이다. 어떻게 
자기 외에 모든 타인과 독립적으로 판단을  하고, 가치관을 형성하고, 자신의 삶을 모양지을  수 있겠는
가! 전통 사회에서는 씨족 공동체, 지역 공동체, 혹은 다른 식의 공동체 안에서만 사람이 살았고, 그러한 
공동체로부터 분리될 수도 없었으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어느 한 순간, 너희들이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골 깨달았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
렇게 의존적인 것이 정말 끔찍하다. 내가 이야기를 마저 해야 할지, 아니면  말아야 할지, 그건 내가 '스
스로'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어느 심리치료 모임에서 나온 것으로서, 비의존적을 향한 투
쟁을 단적으로 보여 주며, 또한 공격할 수 없는 자발적인 통로와 그 뒤에 숨어 있는 무력하고 의존적인 
어린아이 사이에서 복잡하게 왔다갔다하는 왜곡된 관계를  드러낸다. 노동이 극단적으로 세분화된 사회
에서는 이성적으로 통제 가능한 의존성이 다양하게 분화된다. 우리의 삶은 늘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결
속되어 있다. 경찰 조서에서 세금 계산서에 이르기까지 거미줄 같은  제도적 장치에 의존적이다. 자동차 
기술자, 비행기 검사관, 교통경찰, 생필품 공장의  근로자, 마취사들은 자기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 그렇
지 않으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이렇게 이성적으로  통제되는 사회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없
다, 단 몇몇 정신이상자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들 정신이상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이  거대한 기계의 
당연한 기능에 대한 믿음을 잃고, 누군가 자신을 독살하려고 한다고 상상하거나, 텔레비전 방송국으로부
터 추적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감정적이고 의존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이와 관련된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갖고 있다.
  티나는 열네 살 때, 부모님이 차례로 돌아가셨다. 그것은 그녀에게 몹시 큰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그
녀는 상담 때마다 늘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어느 날 결혼을 결심한 그녀는 집을 떠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로베르타는 열일곱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녀는 전혀 슬퍼하지 않았고, 어린 여동생들을 
위해 어머니의 역할을 떠맡았다. 그녀는 어떤 남자와도  교제를 하지 않았고, 어느덧 서른 살이 넘었다. 
그런 어느 날 그녀의 휴가 여행 중에 한 스페인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 남자가 그녀에게 뭔가를 요구
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표현할수록, 그가 더욱 매력 없어 보였다. 그는 너무 단순하고, 불결하고, 아직까
지도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시간이 없어서 일주일에  단 하루만 만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녀는 그가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주말까지 함께 지내려고 애를 썼다.
  여기서 보이는 '회피의 전략'은 유년기의 충격적인 이별과 아주 깊은 상관관계를 갖는다. 그들은 어린 
시절 이별을 겪고 다시 친밀감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위기를 충분히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더 쉽게 상처
받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핵가족 문화에서는 '의존성'이 예전보다  더 '개인적'이 되어 버렸고, 그래서 
위기 상황이 연출된다. 부모의 죽음이나 질병으로 인한 압박감은 그 개인의 주변에 신뢰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을 때 더욱 심화된다. 그러나 핵가족의 문제를 이별과 같은 상실의 문제에만 국한시키고, 그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잘못이다. 그와 같은 해석은 다시 되돌이키기 어려운 환상에 빠
지게 된다. 다시 말해, 그러한 환상은 자기  혼자 힘으로 일어서고, 적어도 환상 속에서나마 접시닦이에
서 백만장자까지 무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도시 생활이나 산업화의 과정은 
그와 같은 환상을 이전까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방식으로 자극한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두려움
을 일깨운다. 자연, 물류 순환, 인간 자신의 육체, 그리고 나무랄 데  없이 이성적인 기능을 대상으로 어
렵게 얻어 낸 통제력을 잃는다는 것은 극히  위협적인 일이다. 여기서 더 적게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이런 통제력의 손실에 더 적은 불안감을 갖게 될 것이다. 알 수 없는 질병에 의해 인간이 마치 야생 동
물처럼 죽어 가고, 흉작으로 인해  기아에 시달리는 곳에서 외부세계란  더욱 정복될 수 없는 것으로서 
통제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개인 역시 자기 자신을 통제하기가 어렵다.  개인은 자기 자신을 믿을 수밖
에 없는 운명이고, 이런 감정 생태 아래 있는 모든 의존성은 삶이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운다. 
사회적 통제의 위력이 미약해서, 개인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외부세계에 떠맡기는 것과  똑같이, 자기 
내부의 힘에 자신을 맡긴다. 산업화의 과정에서는 외부세계에 대한 통제가 점차 커지고, 감정 표현에 대
한 통제 역시 같은 길을 걷는다. 그래서  급기야 감정이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감정', 무엇보다
도 '두려움'에 의해서 통제될 수밖에 없는 사태에 이르고 말았다. 두려움은  쾌감과는 달리, 사회적 현실
과 얽혀 있다. 여기서 '신경증적  두려움'(그 반대 개념은 '실제적 공포'다)은  그대마다의 사회적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 앞서 말한 '비문명적인 사회의  사람들'은 감정적 의존성에 대한 두려움을 언어도단이라
고 하는 반면, 우리는 그들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가진 나이 든 여자들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을 
보고,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피상적으로 무제한적으로 보이는 개인의 발전 가능성으로 인해 강하게 고무된 환상은, 외부세계에 대
한 통제를 잃을까 봐 두려워함으로써 억제된다. 그런  식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사회에 자신을 억류시키
면서 동시에 무제한적인 배회에 빠진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과도하게 자극되는 환상과, 다른 한편으로는 
통제의 손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성이 동시에 기능하기 때문에 현대사회의 모순은 쉽사리 해결
되지 않는다(예를 들어, 이러한 통제의 손실에 대한 회복은  한 정치가로 하여금 늘 실재하는, 고립적인 
인간의 자아 파괴의 위험에 대한 환상을 스스로  금지시킨다. 동시에 그는 '현실적인 정치를 한다'고 주
장할 것이며, 그의 정치는 뭔가를 변화시키는 게 불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 것이다).
  노라는 둘째아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자우어란트의 한 소도시에서 강점을  경영했는데, 어머니가 상
점의 소유자였으며, 경영면에서 아버지보다 더 나았다. 겁이 많고 지나치게  순응적인 어머니는 다른 사
람들이 어떻게 말하든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했고,  노라와는 늘 같이 놀아 주지 않았다. 그래
서 노라는 관심을 아버지에게로 돌렸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실망시켰고, 자신과 다툼이 생길 때에만 관
심을 가져주었다. 그런 식으로 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아버지를 더 이상 자극하지 
않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녀를  때렸다. 열일곱 살 때 그녀는 자살을 기도했
다. 어머니가 요양원으로 가자, 그녀가 상점을 맡았다.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사람들은 그녀의 어머니보
다도 그녀를 더 좋아했다. 그녀는 동시에 가사일도  도맡았는데, 아버지를 위해 요리를 했고, 이에 아버
지는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마침내 어머니가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를 칭찬해 주기는커녕  사소한 일
로, 말하자면 상점 경영을 다른 방식으로 했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았다.  낙담한 그녀는 그때 다량의 수
면제를 복용했다. 노라는 사업적인 면에서 매우 성공했다. 그녀는 일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거의 쉴 
수가 없었고, 편안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현재 눈앞에 당면한 과제를 어떻게 
잘 풀어 볼까 궁리했다. 그녀는 비서로 취직했고, 직장 상사와 은밀한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는 몇 년 뒤 느닷없이 관계를 끝냈고, 다른 젊은 여자에게 접근했다. 다시 '아버지'가 배반한 것이다. 그
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단호하게 자기를 보호했고, 일에만 빠져들었다.  한번은 한 여자 친구가 남자
를 소개시켜 주며 말했다. "이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어때?" 그녀는 그 남자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 둘은 처음부터 '열린 부부 관계'에 합의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정받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을 마
침내 종식시키고자 하는 노라의 강렬한 바람이 깔려 있었다. 결혼 후 그녀는 정신적인 원인의 무감각증
을 앓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성공적으로 이끌어 온 판매 업무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 다 이런 점에는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업을 바꾸었고,  곧 이전보다 더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서로 의존하지 말고,  또 앞으로도 그러자는 게 이들 부부의  공공연한 목표였
고, 그러는 동시에 두 사람 다 여러 차례의  불륜 관계를 가졌다. 그것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그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남편이  점점 더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자, 비로소  즐거움을 찾았
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남편을 무시하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자신의 모욕감을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노라가 하는  말은 자주 바뀌며, 그래서 진지하
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식으로 자기를 방어했다.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으며, 그는 다만 짐이고, 자기
가 돌봐야하는 아기라고 노라가 큰 소리로 떠들 때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상담을 받
으러 왔을 때, 노라는 한 미국인 사업가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는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이었는데, 비
밀 요원으로 일하며, 큰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이를 갖고 싶어했다. 그것은 그녀를 감동시켰
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남편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 미국인은 이미 부인과 헤어졌으며, 두 명의 애
인과도 헤어진 상태였다. 처음 상담할 때 그녀는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고, 한번은 그것과 아
주 비슷한 일이 이미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어떤 나이 많은 남자와  관계를 가졌고 바로 그 날 
남편과 동침한 적이 있는데, 임신이 되었다고 했다. 남편은 자기 아이인지 확신이 안 갔기 때문에, 유산
을 원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그녀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진다면, 그녀와의 결혼생활을 제대로 이
어갈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녀는 별 고민 없는 듯이 말했고, 자기  자신보다는 오히려 남편을 더 걱정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미국인은 노라를 감동시켰으며, 그것은 아주 색다른 감정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떠났고, 아이에게는 남편이 더 좋은 아빠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얼마 후, 이 고상한 부부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어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파악되었다. 그들은 별 걱
정 없이 편하고 윤택하게 사는  듯이 보였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일에서 항상 성공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른 애인이 그 강박관념의  탈출구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사업적인 면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는 늘 실천력 강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노라는 친밀한 관계에 있어서는 
방치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몰두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써, 남편이 그것을 견디지 못해하면 자극이 되었다. 한편 남편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의 그늘로 비춰졌
다. 하지만 남편은 파트너십 안에서 욕구를 해소하는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노라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에 다른 남자에  대한 환상이 점차 사라졌다.  노라가 자신의 내면적인 욕구를 더 
많이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남편과의 관계가 더 견고해졌다. 그녀의  꿈속에서 그 미국인은 그녀의 고
향에 있는 풀밭과 빨랫줄 사이에 나타났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그는 다름아닌 그녀가 어린 시
절부터 늘 꿈꿔 온 사랑스런 아버지였다. 다른 꿈속에서 그녀는 어느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옆에 서 있
었다. 그리고 컨베이어 벨트 위에는 다른 물건이  아니라, 그녀가 입에 올렸던 남자들이 있었다. 모호하
고 괴상한 이 꿈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라는 겉으로는 남자들과 즐기는 것처럼 보인
다. 그녀는 한 사람은 아버지로, 한 사람은 어머니로 만들고자 한다. 그 이면에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
려고 하지 않는 절망적인 노력이 있었다. 만일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면, 남편
을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두 사람을 공처
럼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그것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녀는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행동을 하기보
다는,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요구했다. 그녀는 그 미국인 정부와  함께 아이를 갖기로 한 것을 
남편에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양심상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양심은 타자와의 
통일 내지 합일을 향한 열망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투쟁지향적인 삶에 의해 늘 희망을 잃
곤 했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희망이 안 보이기  때문에, 그런 관계에 대한 기대를 저버려야 했다. 이때
는 안전 장치가 필수적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확보한 무기들의 희생자
다. 매번 새롭게 등장하는 무기는 불안감에 대한 허구적인 통제를 증가시키는  한편("내가 무장해제되면 
다른 사람들이 날 맘대로 공격할 거야!"), 실제적인 불안을 더  가중시킨다.(상대방은 위협적으로 받아들
이게 되고, 자기의 무기를 더 강화시킨다. 기술상의 허점은 비참한 연쇄반응을 이끈다). 이때  무장 상태
를 유지하려는 의무감이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힘을 엉뚱한 곳에서 소모시킨다. 이것
은 감정의 관계를 통제와 성과물로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불안감에서 벗어나려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관계는 너무 많은 정열을 소모시키고, 그렇기 때문에 직업에서의 성공과 잘 조화를 이룬다. 사생활을 유
지하기 위해 소모되는 노고와 정열이 실망과 분노를 낳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다른 영역에서의 성
공은 큰 위로가 되고, 그래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노라의 이야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험난한 극복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녀는 지나치게 순응적
인 어머니와 동일시할 수 없었고, 이상적인 아버지상에 얽매여  있다. 이러한 '전형적인'정신분석적 견해
는 '기초장애'와 '공생 결여'의 관점으로 더 보강될  수 있겠다. 과로로 시달리던 엄마의 잘못된 애정 표
현은 그녀에게 어떤 훌륭한 대상의 요소들을 충분히  내면화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희생은 단지 위험
한 의존성으로 경험되었다. 이러한 두 해석이 나에겐 의미 있게 받아들여진다. 인간의 체험이 여러 번에 
걸쳐 결정된다는 가설이 위의 견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른 본질적인 상징은 아이다. 노라와 남편은 처음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합의대로 그들의 
관계에서 의존성의 냄새가 풍기는 것, 뭔가 서로를 결속시킬 수 있는  것은 기피했다. 각자 매일 자신의 
일을 끝마쳐야 했고, 통장관리, 직장 생활 등 가능한 모든 일에서 독립성이 요구되었다. 내가 아는 다른 
부부의 경우, 그들은 20년 이상 함께 살았는데 한 번도 휴가 계획을 짤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늘 다음 
여름 휴가에는 정말로 각자 따로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왜 노라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원했던 것일까? 누가 아이의  아빠인지 불분명해서, 유산을 한 경험도 있는데 말이
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어쩌면 그녀가 '아버지'의 아이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어머니'를 잃고 싶
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유산은 자기 스스로를 벌주기 위한 것이
었을까? 그리고 남편에게 권리보다는 관대한 사랑을 표현해 달라고 호소한  것이었을까? 나중에 그녀는 
자신의 환상을 더 발전시켜 나갔다. 즉  처음에는 정부의 아이를, 그 다음에는 남편의  아이를 갖겠다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그녀와 남편은 최선을  다했지만, 임신이 되지 않았다. 그제서야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구가 커지기 시작했고, 그 전의  유산에 대해 자기 비난을 퍼부었다. 그녀는  아이와 이제까지 
기피했던 퇴행적인 욕구를 연결지었다. 이 욕구는 아이가 생겼을 경우에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지 않
으면, 그녀는 다시 중심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고,  모든 걸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정부와 마
찬가지로 아이는 친밀감으로 결속된 관계를 막연하게나마  기대한다는 분명한 표식이다. 노라는 이러한 
내면적 욕구를 잃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외부세계에서 그와 같은 상징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정신분석 작업의 경우, 조부모 이전 세대의 연구를 포기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대부분 이미 부모 세대에서 포기해 버린다.  핵가족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등장했다. 
그것은 분석적 작업의 임상 실험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다만 직접적인 당사자로부터 
매우 조심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을 뿐이다. 정신분석학자가 자기 환자의 가족(부모, 형제)에 대해 지나
친 자만심을 가지고 논하는 것을 자주  보면서 나는 놀라곤 한다. 우리는  그 부분에 있어서 아주 적게 
알 뿐이고, 작은 부분조차도 왜곡된 형상이기  쉽기 때문이다. 어떤 장애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선, 현재의 상황을 넘어서 어느 정도 그 개인의 역사를 정신분석적으로  더듬어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종종 체험하는 일인데, 임상 실험에서 조부모의 연구,  그들의 사회적 관계, 경제적 상황이 환자와 정신
분석학자 둘 다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는 게 사실이다. 내가 아는  한 젊은 의사는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학생운동을 하면서 자기의 진정한 가족을 발견했다. 한번은 우리가, 늘 중산층적 강요라는 
악몽을 재현하는 그의 어머니가 결코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한 게 아니라  시골 가정에서 태어났음이 분
명하다고 결론을 내리자,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중산층 가정
에서 물려받은 교육이 아니라, 대학생과 결혼한 한 시골 소녀가 상상해서 만들어 낸 것이었어." 그가 그
때 느낀 불안감과 두려움은 환자를 다른  시야에서 보게 해 주었다. 나는  나 자신과 환자를 나 개인의 
호기심 혹은 지적 놀음에 희생시킨다는  비난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좀더 고민하고자  한다. 가족이라는 
틀이 역사적으로 변형되면서 어떻게 가족  교유의 기능들을 상실하는지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토마스 만은 부덴부르크가의 사람들에서 이런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한 가족의 쇠
퇴'라는 작가의 말은 가족사의 다양한 많은  변화들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한 마디로 정의  내린 것이다. 
마치 정신분석가들이 그러듯이 말이다. 나아가 이 말은  가족의 운명과 사회의 변화 과정간의 연관성을 
끌어내도록 허용한다. 끔찍한 산업사회에서 가족이 파괴되고, 예술 그리고 결국 삶과 자연에 대한 '진지
함'을 상실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주요 테마가 되고 있다.
  20세기 중산층 가운데 성공적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큰 골칫거리들을 안고 살았다. 자수성가한 아
버지는 자기를 단련시킨 것 중 아주 적은 부분만을  자식들에게 이어줄 수 있었다. 그 후손들은 자식들
에게 성공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받은 임금을 다 술로 없애고, 아들에게 언젠가는 출세해야 한다는 기대
를 거는 아버지였다. 이 이야기는 소설의 한 표본같이 보인다. 실제로  소설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
족간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역사와 심리간의 중간 지점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 그것을 인식하고, 자기만
의 개념 세계에 빠져들지 않는 정신분석가는 올바르고 이상적인 교육 형태를 잘 안다고 여기던 것을 의
심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면 그는 더 현명해진다.  이런 관점에는 확실히 이점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의 교육이 어떤 결과를 낳는다고 예견하는 것은 어떤가? 이는 전망이 밝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경
우와 유사하다. 마르크스의 예견대로,  그의 이론이 러시아와  중국에서 실천되고 있으니까. 시민사회의 
의사들은 그 문제를 신체의 문제로 규정지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생활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생겨나는 
일종의 '유전인자 낭비(개방적인  성관계)'를 '퇴폐(데카당스)'라고 규정지었다(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된 
족보를 가지고 잇는 귀족들은 수천년 동안 이 문제를 걱정하지 않았다). '신선한 피'가 필요했다. 벼락부
자와 그들의 자식 세대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들의 자식 세대는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뭔가 
이뤄 낼 수 있을 것이라도 믿었다. 하지만  손자 세대는 달랐다. 그들은 너무 많은  불행을 견뎌 내야만 
했다. 너무 많은 퇴행이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너무 많은 요구들이 던져졌다. 사회에 적응하고 성
과를 올리는 것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얻게 되는 사회적인 성공과 퇴행적인 해방
감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군가 일하는 것만 배우고, 사랑
하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가 자신의 사생활에서 자식을 기르면서 좌절감을 맛보지 않기 위해서는 큰 행운이  필요하다(예를 들어, 
그의 배우자만은 그와 이런 면에서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이 문제는 보다 더 상세히 논의되
어야 한다. 일종의 비교가 과연 무엇이 문제인지, 더 분명히 해 줄 것이다. 다른 역사적 전개 과정을 살
펴보면, 인간 자신이 이미 획득한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평가할 수  있는 사고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
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에만 몰두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노력을 기울인
다. 그래서 현재라는 시간이 짊어져야 할 짐은 항상 무겁기만 하다. 덜 가치있는 것이 더 매력적인 빛을 
발한다. 그런 식으로 동화 속의 '행복한 한스'는 말 한 필을 위해 금덩어리를 주고, 젖소를 위해 말을 주
고, 거위를 위해 젖소를 주고, 그 거위를 숫돌과 바꾼 뒤, 마침내 아무것도  안 받고 그 숫돌을 준다. 하
지만 그가 집에 돌아오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놀라 자빠진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미 장바구니를  비닐 봉지나 플라스틱 가방과  맞바꾸었고, 그림이 그려진 사기 
냄비를 빈 통조림 깡통과 맞바꾸었으며, 전원적인 평화를 대도시의 스모그와 맞바꾸었다. 그들은 자신이 
무얼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일어버렸다는 걸 자각했을  땐 너무 늦었다. 지구 어
디서나 산업화가 세력을 확장하는 곳에서는, 비록 지역에 따라 변형된 행태지만 식민지 거래를 통해 상
품들을 옮기고, 천연자원과 땅은 술과 총기와 맞바꾸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도  이와 비슷한 변화를 겪
었다. 오랫동안 익숙한 표현의 가치(감정에 기반을 둔 관계, 그리고 이것과 연관된 기대치들)가 점차 의
미 없어지고, 필요 없게 여겨지며, 단지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만이 가치있게 평가된다(이를테면 성
과, 능률, 통제, 외부세계의 요구에 순응하기 등). 이런 상태가 어느 정도는 무리 없이 진행되고(이건 정
말 바람직하지 않다), 그 동안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감정 표현이라는 가치는 사회의 틈새로, 그
림자 영역으로 숨어든다. 그리고 흔히 이 가치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여성에 의해 지배된다.
  어느 주말에 이루어진 자아발견 치료 모임에서 게오르크가  특히 눈에 띄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친절했고, 뭐든 틀리지 않으려고  매우 노력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내내 나를 주시했다. 오랫동안 그는 말이 없었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가끔 
이런저런 논점에 대해 조언을 하기만 했다. 마침내 모임의 한 참석자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더 이상 그
렇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말하지  말라고. 그는 그런 태도를  취했을까? "나는 내가 그런 식으로 
말했다고 생각지 않는데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굳이 그렇게 말한다면, 내  말투에 뭔가 그런 
요소가 있었겠네요. 내 아내가 그랬습니다. 난 감정이 아예 없거나, 그것을  전혀 표현할 줄 모른다고요. 
그래서 이 자리에 있게 된 겁니다. 어쩌면 내 아내가 옳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난 내가 감정이 없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감정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는 건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게다가 난 엔지니어입니다. 
하지만 아내가 갑자기 그렇게 불만을 나타내는 걸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내가 부부심리상담 같은 걸 
어디서 배우면서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걸 배우는  모임에 참가하거든요. 나보고 자기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정말 말도  안 됩니다. 하지만 어쩌면 아내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닐지도 몰라요... 아무튼 그래서 물었죠. 내가 어떻게 해야 믿겠냐고요. 그랬더니 아내는 더 화를 냈습
니다. 난 여러분에게 어떤 조언도 구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
습니다... 그렇지만 혹시 작은 충고라도 해 주시겠습니까?"
  게오르크는 한편으로는 가능한 모든 비난을 미리 계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적인 교류에 능
숙하게 적응하고, 잘 대처할 수 있는 사람들의 범주에 속한다. 그의  이런 성격은 거대한 기업에서 사원
들을 이끄는 리더의 위치에 있는 그에게 확실히  여러 면에서 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부부관계에서는 
물론 그렇지가 않았다. 이 주말 모임이 있은  후 일년 뒤 그가 날 다시 찾아왔다. 그  동안 그는 신경과 
의사를 찾아갔었다. 의사는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나서, 그의  성격이 어떤 치료로도 고쳐지지 않을 
만큼 이미 확고부동하게 굳어져 있으며, 매우 위험한 상태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 충고를 받아들
여 그룹치료를 받기로 했다. 그는  아내와 헤어졌고,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데 신중을 기했다. 한편 다 
큰 자식들과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이전에는 부부 간의 불화를 그들에게 숨겼었다.  왜냐
하면 만일 알렸다가 아이들이 그를 멀리하고 엄마 편에 설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
들이 그의 감정을 읽어 내고, 한편 억지로 자기 감정 표현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자, 훨씬 부드러워졌
다. 그는 더 이상 "어쩌면", "모르겠습니다" 같은 말들을 하지 않았으며, 더 확신에 차고 인내심 있게 대
처했다. 그 결과 얼마 후 그룹 내에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일년 반 뒤, 이제 더 이상 헤
어져 있을 필요가 없어진 그이 아내가 다시 결합하자고 함으로써 치료는 끝났다.
  게오르크 부부의 위기는 서로 간의 적응에 기초한 관계가 얼마나 오래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가
를 잘 보여 준다. 그 관계는 '잘 기능했다'는 식의 시각으로는 감정 표현의 결여가 눈에 띠지 않고, 지각
되지도 않는 법이다. 아내는 자신의 역할이 뭔지 제대로 알려고 하면서(그 동기가 부부심리상담  수업을 
받은 것이라는 게 기묘하다) 그때야 비로소  자신의 요구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이 
둘 간의 관계에 그보다 더 적응하려 노력함으로써 '더 투자했음'을 계산해 낸 뒤, 이제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감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남자의 역할에 적응해  주길 게오르크에게 요구했을 것이다. 그 결과 게
오르크는 위에 설명한 딜레마에 빠졌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감정 표현'을 해 달라는 요구에 '성공적'으
로 적응할 수 있을까?" 하긴 게오르크의  아내도 급작스럽게 비난을 하고, 불만을 표시함으로써 자신이 
뭘 망가뜨리는지 주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남편과 헤어지고, 그를 영영  잃을 수 있는 위험에 빠지
고 나서야 겨우 그녀는 생각을 바꾸어 양보하려 들었다. 그 둘은 지금 이전보다 더 가까워졌을까? 혹시 
서로에 대해 더 겁을 먹고 있는 건 아닐까? 몇 년간 혹은 몇십 년간 잘  적응해서 살아 온 부부생활 끝
에 어느 순간 그와 같은 나락에 빠졌음을  깨닫게 되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당신은  날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어!" 여기서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외
부세계 적응력'의 어두운 면을 간과할 수 없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