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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두려움

인내와 적응에는 한계가 있다

by Frais Feeling 2020. 8. 24.

  인류가 우주 비행선, 유무선 통신망, 제5세대 컴퓨터 시스템의 장비를 갖추고 포스트모던의 시기로 진
입한 지금, 우리의 정신세계에서는 이에 대립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의식세계에
서는 아동기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오래된 체험이 언제나 우리의  의식세계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견함으로써 아동기 연구는  그 첫발을 내디뎠다. 오이디푸스 콤플
렉스는 아동기에 겪는 정서적 손상과 비교해 보면, 우리의 의식 상태에 관한 논의에서 오히려 정신적으
로 건강한 사람의 전형을 보인다. 진보와 퇴행은 그 간격이 점차  더 벌어지고 있다. 스포츠에서는 신기
록이 속출하고 있다. 인간의 작업 능률성도 사회의 총생산량처럼(아주 빠른 속도는 아닐지라도) 점차 높
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여성이 사회적인 지위를 높여 가고  있다. 예전엔 여성이 남성보다 심
장발작증이나 위장병에 걸릴 확률이 적은 것과 경쟁사회에서 열등한 것이, 여성의 삶에서 퇴행이 더 많
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사업 매니저들은 예전보다 더 스마트해지고, 더 유연해졌다. 그들은 작은  서류가방을 들고 세계를 누
빈다. 그리고 그들은 거리에서 머리를 물들이고 찢어진  자켓을 입고 서성이는 게으른 사람들과 마주친
다. 부지런한 사람들의 작업 능률은 오르고, 이에 병행해서 희망 퇴직자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수
가 늘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활력을 찾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한다. 그래서 헬스 클럽이
나 레저 센터가 이런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한편 다른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능한 한 빨리 스스로
를 망가뜨리려고 한다. (구)서독에만 200만의 알코올 중독자와 5000만의 약물 및 헤로인 중독자가 있다. 
나는 이제까지 파트너에 대한 적응을 사랑에 대립시켜 설명했다. 예전에 나는 문헌 연구를 통해, 우리의 
삶을 규정짓는 기술적인 진보가 공생적인 생활 양식을 강화시킨다는 결론을 도출한 바 있다. 기계에 둘
러싸여, 거기에 노예가 된 인간은("단지 내가 모방할 수 있는 것만을 난 이해했다"라고 행동생리학자 에
리히 폰 홀스트가 말했다) 이런 일상의  형태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킨다. 적응의  관계, 즉 공생은 두 
인격체로 하나의 기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역할이 분명히 나뉘어져 있는 아동기에는 의미가 
있다. 엄마는 어린아이의 표현되지 않은(전부는 아니지만) 욕구를 추측하고, 해결해 주는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다. 성인의 삶에는 공생적 체험  형태를 위한 두 가지의 두드러진 상징이  있다. 그것은 기계와 
공공단체이다. 둘 다, 전체의  목적지향적인 운동을 위해서 부분이 서로  교환되거나, 완전히 교체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같다. 기계는 스스로 움직이고, 부분적으로는 자기복구를 할 수가 있다. 공공단체는 각각
의 고유한 인력관리부서가 있고, 자기복구를 유지하도록 책임을 지는 과정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기술적
인 자기복구와 인간의 자기복구 간의 차이는 기계와 사회단체가 퇴행을 모른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비
록 멈춰 있더라도 잠들지 않는다. 그들의 진보적인 기능은 꿈과 도취  속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만일 파
트너가, 자기가 바라는대로 하지 않을 경우, 자신의 목소리가 예리해지고  퉁명스러워 지는 것은 공생적 
일상의 한 전형적인 예다. 뭔가 맞지 않는 상황에서 사랑의 감정은  사라지고 만다. 만일 반복적인 불완
전성을 위한 공간이 전혀 없다면, 마치  기계나 사회단체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구속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을 토대로 왜 공생 갈등으로 엮어진 사람들이 사소한  일로 싸우는지 이해할 수가 있다. 기계나 어
떤 공공단체가 아무 문제없이 기능해야  하는 곳에는 어떤 사소한  잘못도 있어서는 안 된다. 누구라도 
한번쯤 모터를 수리하거나, 컴퓨터를 조작하거나, 혹은 공무원에게 서식을 보내  본 사람이라면 이런 것
을 잘 알 것이다.
  파트너십 치료에 온 한 여자는, 남편이  어떤 특정한 블라우스를 입지 못하게  해서 고민이라고 했다. 
그 그룹의 사람들은 처음엔 너무나 사소한 일이라서 놀랐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그녀가 예
전에 늘 남편에게 무엇을 입을지에  대해 말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었다. 당시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망설임을 덜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 블라우스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이 상징된다. "그녀는 
더 이상 나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아." 반면 그 블라우스는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상징된다. "난 내 마
음에 드는 것을 입어.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건 당신 책임이야!"
  공생 투쟁에 있어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상대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공생관계의 사람들은 각자가 전체(공동의 기계)의 한 부분이다. 그
래서 문제가 발생하면 전체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거나, 아예 생각하려고 
들지 않는다. 단지 자기 자신을 제한하고, 독립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만이 어떤 정해진 
상황에서 추론할 수 있고, 거기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공생관계에 빠진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을 행동할 수 있는 전체로 보려 하지 않고, 공생관계라는  전체를 수리하려고 한다. 그것도 자
신이 옳다고 체험한 것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 갈등관계에 빠진 사람
들은 겉에서 보기에 충격적일 만큼 극도로 비이성적이고  분별력 없는 방식으로 서로를 대한다. 그들의 
지성, 설득력, 통찰력은 그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바쳐진다.
  "물론 내가 남편을 바꿀 수 없다는  건 알아요." 4년째 상담을 받고  있는 환자가 말했다. "하지만 왜 
늘 내가 도맡아 해야 하는 거죠? 그 사람도 한 번쯤은 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하지만 그 사람은 늘상 
똑같아요.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정말 화가 나요!"
  이 경우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의 전형적인 반응은, 둘 중 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거나 아니면 "그 사람
들은 어쩔 수 없어"라며 둘 다에게서 멀어지는  경향을 보이면서 답답해하는 것이다. 당사자들도 이  사
실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친구나 심지어 상담가에게조차 숨기려고 한다. "다시 상담을  시작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 소용없어요. 이젠 다시 오지 않겠어요!" 이런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게 거대한 무기력증이라는 심연을 잠에서 깨우고 비열함과 복수심이라는 침전물에 거세게 
몰아치는지 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은 늘 나보고 조급하다고 한다. 공생관계에 빠진 
사람과의 첫 대화 시간이 끝나면, 이  대화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답답한 심정으로, 게다가  이야기에 잘 
적응이 안 된 기분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이런 상황은 빈번히 발생한다.  하지만 다음번 대화 시간이 되
면, 대개 서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런 갈등에서 빠져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저 아는 게 아니라 직접 체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은 첫 대화 시간에 그렇게 심한 압박과 
불신을 느끼고 난 뒤, 대개 두 번째 시간부터는 마음을 열었다.  그건 아마도 느끼고 난 뒤, 대개 두 번
째 시간부터는 마음을 열었다. 그건 아마도 바로 내가 그런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너무 빨리, 너무 조급
하게 해결책을 찾으려고 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반응 역시 나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있는지 보여 주는 한 단면으로 보인다. 종종  이런 극한적인 공생 갈등에 휩싸인 당사자들은 밖
에서 보는 제삼자에게는 사랑이 많은 사람들로 경험되기도 한다.
  길을 잃은 아이 한 명이 울고 있다. 이때 낯선 사람이 다가와 친절하게  그 아이를 도와 주려고 한다. 
하지만 이 아이는 울면서 도망친다. 그리고 엄마를 보자 그 아이는  기뻐서 달려든다. 비록 엄마가 심하
게 야단 치며 매질을 하더라도 말이다. 잃어버린 공생관계를  복구하고자 하는 바람은 그 어떤 다른 관
계를 향한 욕구에 선행하고 훨씬 더 강력하다. 그것은 배고픔이나 갈증, 가학적인 부모에 대한 공포마저
도 무시한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다는 점을  상담가 자신도 충분히 느낀다. 환자
는 처음 얼마 동안은 덜 민감한 화제에 몰두하면서  힘을 비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는 상담가가 좋
은 대상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제까지  모아둔 힘을 분출하게 되면, 상담가가 순간  비판적이고 나쁜 
사람인 것처럼 여겨지는 듯 보인다. 나중에라도 이와 같은 전개 과정을  납득할 수 있다면, 다시 확실한 
기반 위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때 상담가와 환자는 서로 공감하게 된다. 공생 투쟁을 해결하는 데 있어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말이다.
  가까워지는 곳에 대한 두려움은 공생 투쟁을 더 자세히  연구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 관계에선 두 
사람이 결코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을 통해  왜 사람들이 뜨거운 마그마를 토해 내는 화
산을 연상시키는 이런 정신적 혼란을  기피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정신적 혼돈에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 해결을 위한 열쇠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실망과 좌절을 보여 
준다. 길은 다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펄펄 끓는 분화구 속으로 깊숙이  이어질 뿐이다. 공생 투쟁에 휘
말린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지하는 외부세계의 일부를 바꾸어  자신의 생존을 가능케 하고자 한다. 그들
에게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외부세계의 일부가 이런 식으로 바뀌지 않는 한, 그들은 불완전
하고 무능력하다. 마치 불구자가 된 듯이.
  "그가 없었더라면, 휴가를 더 재밌게 보내고, 잘 쉴 수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소극적이고, 억지나 부
리면서도, 사람들한테는 얼마나 친절한지... 정말 참을 수 없었어요." "왜  그냥 무시하지 않았나요?" "그
럴 수 없었어요. 난 늘 그를 주시해야 했어요. 그에게 관심을 안 두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안 됐어요. 하
지만 내가 봤을 때 그가 정말 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다면, 난 아마도 다른 데로 눈을 돌릴 수도 있었을 
거예요."(어느 30세 여자 환자의 분서 중에서)
  그렇다면 다른 길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이제까지  덜 중시했고, 덜 근본적으로 다루었던 인간 내
부세계의 한 부분에 맡기는 것이다. 각 개인에게 고유한 욕망의 내부세계는 외부세계처럼 통제될 수 없
다. 공생적인 전쟁터를 정리하고, 개인의 체험 중 이제까지 그늘에 가리워져 있던 영역을 파헤치는 것은 
공포를 자극한다. 전쟁이 더 친근하다. 자기 자신과 똑같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상대방과의 끊임없는 싸
움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관계에 능숙하다고 느낀다.  스스로를 상대방보다는 결코 더 나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이 전쟁터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관계를 시도한다면?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공생투쟁은 거기에 어떤 확고한 사랑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선 이런 대상을 만들고,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는 서로 간의 사랑을 증명할 길
은 없다. 갈등과 분쟁은 무엇을  '옳은' 방식의 사랑으로 볼 것인가에 근거한다.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 지나쳐!" 이것이 사랑 대신 주장하는 분쟁의 이유다. "난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당
신이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야." 심리학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은  전장에 부모를 개입시킨다. "너는 꼭 
네 아버지같이 행동하는구나. 하지만 네가 네 아버지하고 똑같다 하더라도 난 상관 않겠어." "우리 서로 
맞지 않아." 이 말은 일종의 체념적인 마침표다. 이 말은 또한  그 관계  속에 얼마나 많은 적응이 감춰
져 있는지를 보여 준다. 공생 투쟁은  보다 더 근원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오이디푸스적인 경쟁을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오이디푸스적인(전형적인 노이로제)'과  '전오이디푸스적인(초기장
애)' 이라는 개념에 대한 몇가지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아이가 대략 세 살이 되면, 자신을  부모와 비
교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이의 발육이 이미 어느 정도 진전됐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아이
는 함께 어울리고, 뛰고, 말할 수 있다. 성취욕과  출세 세 지향적으로 규정된 사회에서 이 상황을 전형
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아이가 어른과(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경쟁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경쟁의 
전제는 그들이 바라는 대상, 즉 사랑, 관심, 식량, 공간 등이 부족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대개  실제와는  
다르게 말이다.
  (오이디푸스적인) 궁핍이라는 이러한 기만은 사회가 전투적이고 팽창적인 가치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서 본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번 이 방향으로 발을 디디면, 그 다음의 과정이 저항할 수 없이 진행
된다. 이웃한 문화는 이 과정에 함께  동참하거나 아니면 그 아래로 종속되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단지 
접근이 어렵고 별로 비옥하지 않은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호피 인디언 문화권만이  상당 기간 이런 외부
의 압력을 피해갈 수 있었다. 봉건적이고 계급적인 사회에서 경쟁의 압박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아들
은 대부분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를 답습하고, 딸은 엄마의 신분을 따르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시
민사회로 오면서, 그리고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확연히 달라졌다. '실패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
들은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는 데 실패한다. 딸은 자기의 어머니 상을 앞으로의 자신의 삶에 적용시
키길 거부한다. 이런 와해 현상은 사회 전체적으로 예정된 순서다.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개인의 노력에 
따라 무제한적인 성공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에서, 그들의 자식이  자신들보다 더 잘 되기를 
바란다. 물론 그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하나요?" 아이가 순진한 눈빛
으로 묻는다. "그래, 뛰어내려. 넌 반드시 높이 날게 될 거야." 부모가 말했다. '오이디푸스적' 장애와 '전
오이디푸스적' 장애 사이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오이디푸스적 장애'의 경우, 먼저 기능에 충실한 자아
가 생겨난 뒤에, 그것이 초자아와 이드간의 극복되기 힘든 갈등을 통해  억압되고, 그 결과 증세가 발전
된다. '전오이디푸스적 장애'의 경우, 자아 자체가 손상된다. 자아는 어떤 갈등에 의해 억압되는 것이 아
니라, 결핍에 의해 괴로움을 당한다. 미하엘 발린트는 이것을 '기초 장애'라 불렀다. 반면 자기만의 독창
적인 '자아 심리학'을 발전시킨 하인츠 코후트는 자신의 이 이론으로 이러한 장애를 더 잘 설명할 수 있
다고 믿었다. 두 사람의 공통적인 견해는, 이러한  초기 장애(전오이디푸스적 장애)가 유아기에 애정 결
핍을 통해 생성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에게 어떤 충족적인  공생이 잠재적으로 억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아이는 일생 동안 그것을 만회하고 보충하기  위한 투쟁으로 일관하게 된다. 개
별적인 자아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가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 아이는 자신의 삶을 다하기 위해 공동
의 기계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관계 속에서 어쩔수 없이 파생되는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관
계 자체나, 친밀한(고정적인) 관계를  멀리한다. 부모는 아이의 실존을  확인시켜 주는 반영을 제공하지 
못하고, 아이의 욕구에 공감없이 반응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이는  자율적인 욕구의 실재와 수락에 
대한 충분한 안전을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특히  알리체 밀러가 최근 강조한 바
에 따르면, 부모에 의해 아이가  나르시스적으로 악용된다는 점이다. 부모가 자신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아이더러 부모의 마음이 되어 보라고 하고, 그런 식으로  '심리치료'와 비슷한 효과를 거두는 기
괴한 시도가 이루어지곤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아이는 과대망상증과 우울증 사이에서 헤매게 된다. 한편
으로는 부모보다 우위에 서서 그들을 삶으로 가득 채운다는 거대한 공상으로 아이에게 활력을 주고, 다
른 한편으로는 아이가 적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힘없고, 왜소하고, 공허하게 느끼도록 한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 내가 전에 가졌던  초기 장애에 관한 자연주의적  견해에서 벗어나, 이와 비슷한 견해들의 
서로 상대적인 관점들을 고찰함으로써 내 견해를 보강했다.  근래의 연구는 모든 고뇌의 원천으로 평가
되는 기준점을 점점 어린 나이로, 더 깊은 어두운 기억으로 소급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 과정을 통해 연
구자들은 가능한 한 긴 시간을 환자와  함께 보내면서 그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 틈새에  동참하고자 하
며,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결핍을 보상하고, 그럼으로써 이제까지 멈춰졌던 성장이 드디어 시작하는 곳
을 환자와 함께 체험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비록 이런 방식이 사회적인 결핍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
사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지만). 특히 알리체  밀러는 실제 보모와(그리고 다른 의견을  가진 정신분석가
와) 경쟁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태초에 교육이 있었다" 라는 식의 흡사  성서를 연상시키는 발언에서는 
사회의 구조가 그늘 속에 가려져 있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좋은 그리고 나쁜 부모와 정신분석가만 있
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따라서 엄마나 여치료사와의 공생관계가 성공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질문은 아마도 보류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엄마는 흔히 다른이로 대체된다고 
한다. 그러면 어째서 공생관계가 그토록 중요하고  필연적이며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 
전문가들은 갓난아기나 어린아이의 '교육'에 관여한다. 사람들은 이를 좋게 만들 수도 있고,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자신이 없는 엄마들은 쉬폭 박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는  훌륭한 조언가들로 가득 찬 두꺼
운 책을 저술한다. 어머니들은 그 책 안에서 거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 즉 정서적 접촉, 선입견 없는  자연스러움, 그리고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드는 모든 전문가들을 
무시할 수 있는 여유는 얻지 못한다. 이러한 공생관계를 발견한다는 것은 종종 공생을 파괴하고, 미묘하
고 개인적인 상호 교환 과정을 미리 공장에서 찍어 낸 규칙으로 대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어
떤 엄마는 4시간 간격에 맞추지 않고, 아이가 요구할  때마다 젖을 주는 것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준
다고 믿고, 다른 엄마는 반대로 아이의 요구를 무시하고 4시간 간격으로 젖을 먹이는 것이 아이를 망친
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학자들이 그들의 연구 대상을 점점 더 어린 나이로 소급시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다. 학자들이 
그들의 학문 영역을 확장시키려는 경향과 상담가의 나르시스적인  욕구가 바로 그 이유들에 속한다. 부
모들은 확신을 잃었다. 왜냐하면 개인의 발전 가능성이 상상할 수 없을  만치 높아졌고, 경쟁이 삶의 거
의 모든 영역을 잠식하기 때문이다. 취학 아동을  교육학적인 환경에 예속시키는 시기가 지나자 갓난아
기를 반교육학적인 환경에 맞추는 시기가 왔다. 성인이 된  후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겪게 되는 공생 투
쟁은 사랑이 결핍된 교육을 전제 조건으로 삼는다.  사랑은 체벌이나 귀엽다고 어루만져 주는 행위보다 
더 강하게 아이들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준다. 아이는 이 '흑색교육학'을 통해서 자신이 좋은 부분과 나
쁜 부분으로 분리될 수 있는 존재라고 경험한다.  새로운 교육으로 새인간을 창조한다는 희망은 환상이
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헛된 꿈이다. 흑색교육학자들은  아이들이 그들에게 복종하도록 엄격
하게 다스렸고, 그것은 아이들에게 확고한 지지대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던 시대는 우리의 현재
보다 더 뚜렷하고 분명했으니까, 반교육학적인 부모들은 확고한 지지대를 아이에게서 찾는다. 마치 서로
에게 들러붙어 의존하는 공생 파트너처럼 말이다. 이 상황에선 이와 같은 의존 상태를 이상적인 모습으
로 꾸미는 것이 뒤따른다.
  알렉산더 미첼리히는 '아버지 부재의 사회'를 거론하고, 크리스토퍼라쉬는 '나르시시즘의 시대'를  말한
다. '오이디푸스적인' 아버지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이들에게 훈계했다(사회 전체가 그의  권리를 
인정했다). 현대사회의 아버지들은 아마도 선량한 노동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이들 곁에 아예 없거
나, 어쩌면 술에 취한 얼굴로 아이들 곁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그와 아이들을 구분시키는가? 
아이들은 점점 커다란 욕구를 발전시키지만, 실패를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은  덜 발달된다. 그들은 이 세
계를 혼자 개척해 나가야만 한다. 그리고 확실히 이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텔레
비전 화면을 통해서 말이다.
  사람들은 하다가 어렵다 싶으면, 다른 계획으로  바꾼다. 이렇게 소비사회에 적응된 행동양식은, 리모
트 콘트롤로 오디오를 조작하듯  상대방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는 없기  때문에, '진짜' 사랑을 갈구하는 
경우에는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흔들리는 독신'은  현재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인구층
으로,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한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더 깊은 관계를 통해 공생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을 
회피한다. 파트너십과 아이들은 의존적으로  만들고, 원하는 많은 것을 소비할  기회를 줄인다. 만일 그 
모든 심리학자와 교육학자, 부모와 부부관계 상담가를 만족시키려고 한다면 어떻게 배우자 그리고 아이
들의 일에 관여할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청렴하고, 성실하며, 경쟁력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스런 
애인이자, 신뢰할 수 잇는 아버지인 자율적인 시민 개개인은 한꺼풀 벗겨 보면 기생생물학적 신화를 드
러낸다. 그들은 단지 오래된 비이성적인 책략을 유지함으로써 일정 기간 동안 힘을 좀더 얻는다. 하지만 
강이 거꾸로 흐를 수 없듯이, 이러한 책략은 점차 깨지기 쉬워진다. 그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거부함으로
써 자기 자신의 뿌리를 드러내, 시들어 죽게 한다. 또한 이 과정은 다양한 상황에서 아주 천천히 진행된
다. 이런 신화를 성공적으로 증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학자들은 초기 장애를 강조하면서, 살아가면서 공생관계를 재구축하려는 사람들의 갈망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 관계는 성적으로 성숙한 개인간의 열정적인 사랑보다는 우리의 삶의 조건에 더 잘 들어맞는다. 
이러한 공생관계에서는 기능과 다른 사람을 위한 역할 수행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이 관계는 또한 상
대의 욕구를 짐작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으며, 적응의 안전  제대를 떠나서도 안 되고 감정 표현의 불안
전 지대에 발을 들여놓아서도 안  된다. 이러한 초기 장애와  관계 속의 나르시스적인 행동이 증가하는 
것을 인식한 학자들도 간접적으로 그러한 현상에 기여했다. 성, 부부, 교육 상담가들이 매개하는 인간관
계는 공생적 메커니즘으로 각인되어 있다. 역할 수행과 적응이 감정  표현의 자리를 대신한다. 부가적으
로 사회가 점점 더 개인의 사생활 깊숙이 지배된다. '오이디푸스적' 가정은 외부로부터 보호되는 공간이
었다. 그 안에서는 부모가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탁아소, 유치원 등이  그것을 변화시켰다. 매스 
미디어는 교육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전에는 가족간의 일로 치부하던 것을 거의 사회 전체의 일
로 만든다. 독립적이고 통제된 시민은 동시에 의존적이고, 상품의 자극에  순순히 따라가는 소비자가 되
어야만 한다. 상품 광고의 끔찍한 언어사용, 이를테면 '활력이  넘치는 게으른 사람', 혹은 '집중하면서도 
긴장이 완화된 화주 애호가' 등은 신문지상이나,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실생활에
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렇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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