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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두려움

사랑에도 나침반이 필요하다

by Frais Feeling 2020. 8. 24.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에게 내적 대상은 나침반 역할을 한다. 그는 내적 대상의 도움으로 탁 트인 대해
로 항해할 수 있으며, 안전하게 항구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고독의 시간들을 서로 중재할 수 있
으며,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를 받아줄 누군가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공생
으로 인한 장애를 가진 개인은 외적인 대상에 의존한다.(혹은 그것을 극도로 회피한다) 왜냐하면 내적 대상
은 매우 깨지기 쉬운 것으로, 어린 시절의  불행한 체험에 의해 내적 대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상은 
정신분석학의 관례를 따른 견해였다. 분석자들은 이러한 나침반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도록 작동시키려
면 쉽게 방해받을 수 있는 단계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를 추적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분석자들은 문화
비판적인 시각에서 프로이트와는 달리, 규범의 결과(지구상에 팽배해 있는 식민지화와 산업화)가 환경의 자
연스런 재생 능력에 지나친 요구를 하는  것처럼 규범은 개개인과 그들의 가족에게 지나친  요구를 한다는 
결론에 거의 이르지 못한다.
  루드비히는 큰 기계 제조공장에 근무하는,  성실하고 다소 고집 세게 보이는  엔지니어다. 어느 날, 그가 
상담을 받으러 왔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늘 '실패' 하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그룹 
모임에 참석한 그는 매우 당황해 있었다. 방금 여자 친구가 떠났던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떤 것으로
부터 그렇게 KO패 당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싶어했다. 그는 그 여자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같
이 휴가 여행을 떠났었고, 함께 떠난 스키장 오두막에서 기꺼이 그리고 세심하게  가사일을 돌보았으며, 그
와 같이 자고, 스키를 탔다. 딱 한 번 그녀가 헤어지자는 말을 했지만, 그때 그들은 긴 안락의자에 앉아 서
로 꼭 껴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거기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녀가 한번은 그의 집에 대해 불평한 적이  있었는데, 가구가 없어 너무 썰렁하고, 편안하지  않다는 것이었
다. 그리고 언젠가는 말하기를, 그가 어떤  때는 가깝게 느껴지지만, 어떤 때는 멀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룹의 사람들은 그가 왜 애인이 정말로 떠나 갈 때까지 그런 말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지 파악하려
고 애를 썼다. 한 사람이 그를 어떤 증기 기관차와 비교했는데, 이 기관차는 모든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마
구 달린다. 그래서 결국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탈선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드비히는 왜 기젤라(애인)
가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었는지 반복해서 물었다. 그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늘  그녀의 행동이 모
순적이라는 것만 발견할 따름이었다. 자기 같으면 헤어지려고 하는 사람과는 휴가를 같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그녀에게 불만스러운 게 있는지 함께 토론해 보자고 했다. 그는 그녀가 헤어
지자고 했을 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래 꺼져! 눈 속으로나 도망가 버려!" 
라고 했어야 했다. 물론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게, 그녀가 오두막 안에서 지그리트
(그의 예전 여자 친구)와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지그리트처럼 행동했다면 그도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기젤라는 그렇게 상냥할 수가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갔다. 만일 앞으
로 다른 여자 친구가 또 헤어지자고 한다면, 그땐 그도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했다.  그는 그룹 토
론을 통해 그런 결심이 섰다고 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분명치는 않다고 했다.
  기젤라와 루드비히의 이별을 보면, 내적 대상의 결핍이 관계에서 파생되는 갈등에 대해 얼마나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없게 하는지 알 수 있다. 루드비히는 공격적인 긴장 상태를 잘 견디지 못해서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인내심이 강한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끊임없이 분노와 
실망을 억제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자연스런 감정을 감시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그룹 안에서 어린
아이처럼 특정 발언들을(주로 공격적 어투) 기억에 담아 두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 절대 그런  생각이 떠
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분노는 그이 내부에서  검은 구름 안으로 모아진다. 그 구름은  나침반 위로 
진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사랑의 내적 대상은 어떤 길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루드비히는 기젤라
나 지그리트를 그렇게 깨지기 쉬운 물건인 양 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장애를 그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
낼 수 없었고, 결코 자연스럽고 생기 있게 행동하지도 못했으며, 그 대신 항상 그들을 잃지 않기 위해 조심
해야만 했다. 하지만 조심스럽고, 정적이며, 냉담하고, 처진 그의  바로 이런 태도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기젤라나 지그리트가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가졌다면, 그 역시 좀더 확신을  가지고 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불안감을 상승시켰고, 결국 이렇게 생겨난 두 협곡 사이를 이어  줄 다리는 없
었다. 그건 마치 서로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어떻게 하면 서로 제대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대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둘 중 누구도 그걸 상대에게 말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진전이 
없다. 그는 그룹에서 자신의 우울한 심정을 토로하고 나서, 어떻게 그런 이별이  닥치게 됐는지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했다.
  "여러분은 아마 믿지 않으시겠지만, 그  전에 기젤라가 아무 문제도 만들지  않고 또 아주 사랑스러웠을 
때, 난 자주 그녀를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녀는 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곁에 있을 때 직장 동료를 
만날까 봐 난 두려웠습니다. 그녀보다 더 예쁜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나의 문제란 걸 압니다. 
지그리트와도 문제가 아주 똑같았습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로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그
녀가 어떤 여자를 가리켰습니다. 그 여자는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러자 당장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여자 친구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그 여자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입니다. 지그리
트는 전혀 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난 그냥 참았고, 그녀와 함께 있으려고 노력했으며, 그러자 점
차 조금씩 맘에 들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7년 동안 같이 살았기 때문에 더 했죠. 하지만  우리가 각자 서
로에게 제대로 된 짝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것을 믿으려고 하고, 그래서 아이를  원했을 때는 그녀
가 싫다고 했고, 그녀가 원했을 땐 내가 싫다고 했습니다."
  그룹에 모인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의 전환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그가 왜 갈등을 회피하려 했
는지 더 분명해졌다. 기젤라에 대한 그의 내적 표상이 너무도 부서지기 쉽고, 또 그것에  그렇게 심한 부담
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늘 자신의 행동을 통제함으로써 그녀가 만족스럽게  느끼도록 해야만 했다. 
그는 그녀에게서 이상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는 실제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다. 어머
니는 평범한 간호원이었고, 늘 의사나 더 좋은 위치의 사람들, 지식인들을 우러러보았다. 그는 고등학교 친
구들을 집으로 데려올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다가 길에서 우연히 어머니를 마주치게  되면, 단 
데로 눈길을 돌렸다. 어머니는 그것을 알았지만, 한 번도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동시에 루드비히
는 어떤 감정적인 공허의 상태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범적인 남성상을 가지지 못했다.  그건 그의 
어머니가 남편을 아무 쓸모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성취한  것이 없었다. 
루드비히는 우울증과 극복하기 힘든 강박관념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제까
지 집에서 써오던 사투리를 더 이상 쓰지 않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이 끝났다. 그는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 동안 그는 어머니를 더 이상 무시라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상담 내용을 녹
음기에 녹음했고, 귀중한 조언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그는 암기했다. "더 자
연스럽게 행동하자", 마치 아이가 학교에서 소수를  암기하듯, 여자가 그를 사랑하고 원할  때는 그 여자를 
불신했다. '왜 나일까, 이토록 불완전한 존재를...?' 한번은 그룹 내의 한 사람이 말했다. "난 말이죠, 날 받아
주는 단체에는 절대 가지 않아요." 분명 어딘가 더 좋은 여자가 있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는 루드비히는 
여자가 자기를 떠나려 할 때, 그 여자를 원하게 된다. 관계가  점점 더 불안하게 흔들릴수록, 그는 더욱 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결국엔 어두운 구름이 파국을  몰고 온다.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 그래  온 것처럼 
또 다시 혼자가 될 것을 매번 알고 있었고, 늘 그런 식으로 반복했다. 왜냐하면  공생관계의 당사자들은 늘 
혼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하는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연장이고, 그는 자기 자신에 
의존적이다. 감정을 믿는 게 아니라, 아무 문제없이 기능하는 곳을 믿는다. 파트너는 자기와는 다른 차별성 
있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랑스런 존재로 인식된다. 파트너는 바로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물론 다른 성별
을 가진 객체로서 말이다. 가끔은 이런 것이 도가 지나쳐서 2차 성징기에서, 그리고  자기의 성적 정체성을 
발견하는 데서, 더 나아가 성 전환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다(이 경우는 물론 호모 섹스적 관계
가 아니라, 호모 섹스적 정체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견해에 해당된다).
  공생관계는 선진국과 자연의 관계가 거의 똑같다. 산업화된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자연을 이용할까만을 
고려한다. 그들이 이용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는 관심 밖에다. 장애물이 있으면 없애 버린다. 그런 식으로 공
생 파트너는 서로에게서 끊임없이 변화와 발전을 요구하고, 실제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것을 없애 버
린다. 실제적인 발전이란, 상대방이 자신의 차별성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한 일로 간주
된다. 상대방이 자아와의 동일성을 실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대개 실패한다.
  "그가 만일 늦게 오거나, 전화를 하지 않거나, 내 부탁을 거절한다면,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그도 잘 
안다. 하지만 그는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도 않는다. 그러고서는 내가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여기서 "그(녀)도 잘 안다"라는 말이 이들의 관계가 바로 공생관계라는 것을 나타낸다. 상대방도 자기와 같
아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자기가 무슨 나쁜 일을 저지르는지 스스로 알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차별성을 
마치 고의적인 범죄 행위처럼 행사하고, 나를 힘들게 하고, 왜소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내가 맞대응하는 것
은 정당하고 허용되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야만적인 습관이 형성된다. 다시 말해, 무기가 관찰한다, 이제까
지 한번도 질투를 하거나, 접시를 집어 던지거나, 상대를 공적인 자리에서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힘들게 하
지 않던 사람이 이와 같은 행위를 시작한다. 거기에는 그가 똑같이 당했다는 이유 말고는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당신 친구 앞에서 당신을 무시했어야 했는데, 당신이 내  친구들 앞에서 그랬던 것
처럼. 그땐 정말 화가 났어." "그렇게 말 안 하고 있어도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아. 당신은 
또 질투하고 있고, 날 매춘부라고 생각하고  있어. 정말 신물이 나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런데 이렇게 
사소한 모든 것을 가지고도 싸울 수 있는 관계는 루드비히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루드비히
의 경우는 발생 가능한 갈등을 엄격히 회피하고, 관계가 결정적으로 끝날 때까지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갈등의 회피가 지속적인 갈등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아 왔다. 이 두 가지 다 사랑의 감
정이 뒤따르는 확고한 내적 대상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모든 차별성이 고통을 주게 되고, 쓰라
린 종말에 이르기까지 차별성을 거부하거나, 혹은 아무런 결과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장기적인 투쟁 속에서 
늘 새로운 분노와 실망을 겪게 된다. 공생관계는  단지 환상 속에서만 조화를 이룬다. 현실은  환상이 빛을 
거두어 갈 뿐이다. 동시에 환상을 현실화하고자 강제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공포를 야기시킨다. 이
런 과정은 나침반 없이는 방향을 잃고 만다. 현실은 사람의  마음을 끌지만, 동시에 위협적이기도 하다. 오
디세우스가 돛대에 묶여 바다 요정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는 것처럼, 공생관계의 당사자들은 위험한 소
용돌이로부터 자신의 커다란 부분을 지켜줄 관계를 형성시킨다. 관계는 친밀한 안정감과 성적 욕구의 충족
으로 분열되고, 이 두 가지에 각각 맞는 두 명의 전혀 다른 파트너를 분리시킨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거
는 위험을 피하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지 않고자 한다. 그들은 파트너가 멀리 떨어져 살기를 바란다. 그
들은 아이 갖기를 거부하고, 아이를 유산시킨다. 상대가 진정한 파트너인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로나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질투심 때문에 상담을 받으러 왔다. 질투의 대상은 직장 동료로서, 5년 동안 
상당히 가깝게 지내던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몇  년간 외국에 있
는 동안 그를 기다렸다. 그들은 주로 도보 여행을 함께 했으며, 한번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휴가를 가기도 
했다. 일로나는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귀었다. 한번은 등산 길에 그가 그녀에게 존칭 대신 '너'라는 말
을 썼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존칭을 쓰게 되었다. 그녀
는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 친절한 걸 목격하게 되면 심하게 마음이 아팠다. 일로나는 항상 성실했고, 자기의 
일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며, 편두통이나 천식이  있을 때만 일을 잠깐씩 쉬었다.  그녀는 수줍어하는 
성격에 겸손했다. 그녀의 욕구는 세심하게 통제되었고, 결코 직접적이거나 공격적인  방식으로 노출되지 않
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룹 상담에서 다른  사람이 먼저 발언하도록 양보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겸손한 
태도가 칭찬받기를, 그리고 자기가 양보한 만큼 동일한 양의 시간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렸다. 조금씩 
그녀는 행동을 바꾸기 시작했다. 친구라고 생각한 그 사람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고, 그것은 그녀가 바라
는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결국 그 직장 동료에게 속마음을 말했고 헤어졌다. 그리고 상담 그룹 내의 한 사
람을 이전과 비슷한 식으로(침묵하는 식의) 사랑하게 되었고, 반년이 지나서야 그 마음을 그에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룹 내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용기를 지적하면서도 그녀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일로나는 
이사를 했고, 대도시에 가까운 곳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
게 되길 희망했다. 그녀는 거의 마흔이 다 되어 처음으로 성관계를 가졌다. 그 남자  친구는 그녀가 예전에 
살던 곳에 살았다. 그녀는 이사 가고자 마음을 먹던 날, 그와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는 주말이면 
가금씩 찾아왔는데, 그녀와 함께 미래를 설계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부인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전부인과 늘 너무도 극렬한 싸움을 했던 까닭에 결코 다시는 그런 관계를 갖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일로나는 그것을 다 듣고 나서도 그것을 현실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겉으로는 늘 우호적이었으며, 
싸우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적으로는(가금은 그룹 상담 때도) 그가  얼마나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며, 얼
마나 아무 이유 없이 거리를 두고, 얼마나 경솔하게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오랫동안 비난을 했다.
  그 남자는 일로나로부터 많은 걸 바라는 것  같지 않다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면, 그녀는  당황스러운 듯, 
"하지만 그래도 좋은 때가 많았어요" 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는 그 남자의 스케치만으로도 어느 정도 만족
을 얻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위에  자기가 바라는 식으로 색깔과 형태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유르겐(그 남자 친구)이 너무 뜸하게 전화를 걸거나, 자기의 아이들이나 친구들을 왜 자신에게 소개시
켜 주지 않을까를 생각할 때는 혼돈에 빠져 자문을 구하곤 했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어째서 
그렇게 나약하고 소심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는 그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한편으로는 
그 의도를 실천하기 주저하는 강박적인 태도가 너무도 측은하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녀는 유
르겐이 좋은 남자 친구라는 꿈을 꾸었고, 현실의 그와 어떤 갈등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갈등 상
태를 견뎌 내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전혀 관계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자, 그에게 좀더 드러내놓고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거짓말'이 비난의 원인이 되었다. 유르겐
은 그녀의 망상에서 주인공 역할을 한다. 그는 주말에 시간이 나지 않으면 늘 일을  해야 한다거나, 전부인
과의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 그가 다른 여자들과 만나고 있다
는 걸 알아냈다. 그때 그녀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이 그  복수의 대상은 아니었
다! 하지만 유르겐은 그렇게 비열해선 안되고, 이런 거짓말을 해서도 안된다. 유르겐이 이후 더 소극적으로 
변하고, 몇 달간 얼굴을 내밀지 않자, 그녀는 몹시 상처를 받았다.  그러다 그녀가 자기도 한 번쯤 다른 남
자들과 어울려 보는 게 어떨까, 하고 고민할 때, 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금  여행 중이며, 그녀를 만나
고 싶다는 거였다.
  일로나는 매일 '그와 완전히 갈라서야  될지'를 고민했다. 그러면서 늘 유르겐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여기서도 환상의 힘이 지배한다. 이 환상의 나라에는 이상적인 파트너가 왕이다. 공생으로 혼연
일체가 된 이상적인 파트너. 이런  관계에서는 당연히 그와 헤어지느냐  마느냐는 그녀의 결단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그것이 자기에게 달린 듯이 생각한다. 가끔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그녀는 늘 그를 기다렸고, 그를 위해 존재했으며, 다른 남자나 아이도 그를  위해 포기했다. 그런데 
이게 고맙다는 표시란 말인가? 그녀는 그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악담으로 가득 찬 편지를 그
에게 부치려고 했다. 그러자 그때 마치 황량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함께 즐겁게 보낸 주말의 시간들과 도
보여행의 추억이 떠올랐다.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이 떠오르자, 어쩌면 다 끝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었다. 이처럼 불안정한 내적 대상은 마치 신기루와 같다.  사람들은 쉽사리 신기루로 다가설 수도, 또 
그것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없다. 그것은 사라졌다가, 희망적으로  나타나고, 속이고, 행복하게 하고, 영원불
멸하며, 억센 손으로 잡아쥐거나, 햇빛이 비치면 안개나 연기처럼 사라진다. 어떤 마술적인 끈으로 묶인 것
처럼, 일로나와 유르겐은 그러한 속임수를 유지하려고 하는 동시에  그것을 그만 끝내려고 하는 것처럼 행
동한다. 3개월 뒤 그녀는 그녀의 집에 남아  있던 그의 물건들을 그에게 돌려보냈다. 더 이상  그를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그녀는 거의 동시에 유르겐으로부터 크리스마
스 선물과 따뜻한 마음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그가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고, 그녀와 좋은 친구관
계를 우지하고 싶다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전화를  했고,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그가 왔
고, 앞으로는 더 좋아지리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또 어긋났다. 그가 다시  떠난 것이다. 이제 
그녀는 거의 미치기 직전이었다. 잠도 안 왔다. 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편지와 함께 그가 보낸 선물을 다시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는 그 선물을 도로 보내면서, 정말 미안하고,  앞으로는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이라
고 했다. 일로나와 유르겐은 이 관계를 끝내는 데 결코 합의할 수 없다.
  관계는 '서로 이어 주는 끈(나침반으로서의 내적 대상)'이 결핍됨으로써 공생관계에  빠진다. 그런 까닭에 
표피적인 결합이 어떻게든 만들어져야 한다. 대화는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가 되어 버린다. 사실상  공허 속
에서 결코 해독될 수 없는 문자가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모순은 해결되지 않은 채  연속된다. 마치 
뱀이 되었다가, 곧 사자가 되고, 또 다시 염소로 변하는 괴물처럼, 파트너의 모습은  수시로 변한다. 한번은 
사랑스럽고, 한번은 밉게 보이고, 한번은 너무 멀리 있고, 한번은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급작
스럽게 혼란스럽고, 다시 또 조화롭기도 하다가,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이 행복한 시기가  지나면 바로 관계
가 끝장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징표들은 투시가 안 되는 걸죽한 죽의 표면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아 
버린다. 샘물 주변에선 아이들이 뛰어놀지만, 그 안에는 악어와 물귀신, 두꺼비와 금붕어가 숨겨져 있는 것
과 같다. 공생관계의 파트너는 함께 있어야만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비록 서로 잔인하게 싸우지
만,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선 공동의 결단이 요구되지만,  그것이 결속관계의 종말을 뜻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는 동안 감정은 기능에 비해 더 예민해지고, 더 쉽게 상처를 입
는다. 개중에는 서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면서 몇 년을 같이 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대신 상
대방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일을 하고, 함께 아이를 키운다. 특히 심각한 경우는, 두 사람 중 한 명이 정말
로 떠나가고(거의 대개 새로운 파트너 때문에) 남은 사람이 상처를  안고, 고독 속에 머물 때다. 그는 혼자
가 되었다는 것에 분노하며 이혼담당 변호사와 자정법원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혼자 남은 파트너는 슬퍼
할 수도 없고, 새로운 파트너십을 만들지도 못한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자기처럼  분노에 사로잡히고 겁에 
질리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으며, 헤어진 파트너와 여전히 접촉하려고 하는 아이들도 이해할 수 없다.
  공생적으로 얽혀 들어간 사람들의 혼란스런 행동은, 그들 각자가 하나의 인격체라기보다는 최소한 두 개
의 인격체라는 점을 주시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성숙하고, 삶에 긍정적이며, 성실하고,  일이나 친구들 사이
에서 분명한 행동을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  안에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공생적인 
통일체를 자기 감정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모양으로 다듬으려고 하는 또 다른 사람이 성장하고 있다. 그래
서 그는 변덕스런 아이처럼, 혹은 중독자처럼 행동한다. 친절함이나 예의 따위는 잊는다. 그는 겨우 목숨이
나 부지하고자 투쟁을 벌인다. 이 경우, 제삼자에게는 싸움의 동기가 무엇인지 모호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다. 공생관계의 당사자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전선망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 그들은 어디에 부딪치게 되
면 불꽃이 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 제삼자는 놀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을 보이는 사
람의 파트너가 전혀 그런 것을 목표로 다른 행동을, 혹은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
이다. 이 전선망은 "그(녀)는 잘 알아..."란 문장으로, 그리고 전혀 충족될 수 없고 다만 악의와 배신으로 끝
이 날 가능성이 있는 공생적 기대감으로 짜여 있다. 공생관계에선 모두(성장 초기 어머니와 아버지와의 관
계에서처럼) 다른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타인의 관심이라는 안전 장치가 없는 한 스스로를 주변
인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는 극단적이어서, 늘 실망만을 겪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자
기가 그토록 사랑과 관심을  기대했던 바로 그 동일  인물을 길거리의 거지보다도  못하게 대우하게 된다. 
"난 다른 모든 사람하고는 잘 어울려. 하지만 당신만 예외야!"
  나는 이제까지 공생적 장애가 무엇인지 명백히 하고자 했다.  주변적인 영향력이 자주 이러한 혼돈과 폐
쇄성의 극단화를 약화시킨다. 그래서 공생적인 파트너들도 언젠가는 헤어질 수 있고, 그 전에 왜 그렇게 나
쁘게 행동했는지 영문을 모른 채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이제 개인사적인  뿌리를 찾는 것보다는, 
여기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의 일정한 형태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사회의 형태는 수천년 동안 자연
환경을 그 활용 가능성에 따라 이용하는 관계  속에서 변화되었다. 인간은 필요한 것을 얻어  내고, 저항에 
부딪히면 그제서야 포기한다. 인간은 자신과 자연과의 관계를 감정에 의존하기보다는,  합리적인 목표에 종
속시킨다. 그리고 신화적인 체험의 총체적 형태로서 자연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의식을 가지고 기술
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런 비교는 인간 상호의 공생관계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
인다. 그렇다면 공생관계가 모든 합목적성, 모든 성공지향적 추구의 희화화된 모습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
가 파괴된 자연환경, 산업폐수, 오염된 공기 속에 살고 있다는 걸 지각한다면, 성장은 이율배반적인 결과를 
낳지 않는다는, 기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의 약속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기술적인 수단은 그것
이 인간의 감정적 욕구를 구조적으로 지배하게 될 때, 파괴적인 양상을 보인다. 여기서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인 감정적 욕구(오래 전에 신화 속에서 통합된)가 자연을  제한한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한 개인에
게는 코스타 델 속에서 살고 싶다는 욕구가 물론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건축업자들이 그와 같은 
욕구를 자기 이익을 위해서 충족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해
변이 보기 흉한 콘크리트 구조물들 때문에 파괴되고, 맑은 물은 수십만 명의 배설물로 인해 오염될 것이다. 
그 고장의 원주민들은 수공업자나 농부로서의 직업을 보리고, 관광객을 위한 서비스업에 종사하게 될 것이
다. 이 상황은, 기술이라는 이름의 전제주의가 합리적, 개인적인 편익의 우세와 결부되어 어떠한 결과를 낳
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미학적인 관점은 환경의 균형을  고려하는 사랑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옆으로 밀려
나고 만다. 결과적으로 수십만 명이 만족해야 하는 곳에서 한 사람도 만족감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동생 
투쟁을 이와 비슷하게 설명해도 될까? 말하자면, 공생관계의 한  파트너는 자신을 기술적인 수단을 이용하
여 확장시키면서, 상대방을(그에 대한 내적 표상이 신뢰가 가지 않는)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식민지로서 기
능하게 한다고 말이다. 이러한 비유는 의미 있고, 또 우리의 생활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자연 파괴적인 사회 내에서 사랑의 관계가 부분적으로는 파괴적이고 혁명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보
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향에 있어서는 자아의, 혹은 상대방의 어려움에 대해 더 많은 인내심이 
생겨날 수 있다. 하지만 공생 투쟁에 있어서, 사적 영역으로 침투하는 기술적인  정복의 형태만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더 나아가, 공생 파트너가 고통과 실망에 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보
인다. 마치 자연을 파괴하고 감정을 억지로 요구하는 사회가 그 짐을 개인에게 전가하듯이, 그렇게 사회 안
에서 발생한 익명의 사악한 힘은 공생 파트너 안에서  개인적인 형태를 취하며 나타난다. 구세주를 기대했
지만, 이제 적어도 사탄은 찾은 셈이다.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는 각각의 개별적 부품이 대체될 수 있는 한, 
부품 몇 개가 고장나더라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를 이해하는 상담가는 개별자들을 
이러한 사회라는 기계의 관리자, 즉 이 기계가  계속 굴러가도록 하는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사회와 개인 
모두 일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심신의학적으로 병이 나지 않기 위해서는, 점점 더 과도한 요구에 힘들
어하는 개인 영역에 균형을 잡아 주어야 한다. 상담 직업 종사자의 엄청난 증가는,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가 
고장난 부품을 수리하는 작은 기계들을 만들고 발전시켜야 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하천이나 숲의 재생 능
력이 기술의 과다한 요구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사랑의 관계의 작은 보호 구역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장에는 해독이 되지 않는 독성 물질이 유입된다. 정확하게 그것은 어떤 모습인가?  소비 세
계에서의 충족(통제된 성과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며,  돈으로 얻고, 상품으로 지불된다)이 쉽게 이루
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사랑의 관계가 요구하게 마련인 실패를 견뎌낼 능력이 점점 더 약해진다.
  루드비히는 그이 여자 친구 지그리트가 어떤 아름다운 여자를 가리키자 당장 지그리트에 대한 내적 표상
을 잃어버렸고, 그 이후부터는 뭐든  그녀에게 위임했다. 이를테면 차를 사거나,  휴가 여행을 예약하는 일 
따위조차도 말이다. 성숙한 고객이라면 언제나 좋은 것과 교환하여 더 좋은 것을 얻을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행동 방식과 그것을 일반화하려는 경향은  자주 과소평가 된다. 이런 행위 원인을  비교적 덜 
심각한 신경증 환자의 손상된 어린 시절로 소급하는 것은 그나마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신화가  되어 버렸
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지금은 심리치료의 한 틈새가, 어린 시절을 고장난 모터처럼 교체할 수 있는 
수리 센터가 되어 버렸고, 그런 광고가 선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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