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서로 이어 줄 수 있는 감정도 변화한다. 다시 말해, 감정은 사
람들이 그 안에서 찾는 이상적 작용과 모순된다.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흔히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혀 모르겠어요. 그녀를 정말 사랑하는지, 때로는 그녀를 정말 원하기도 하고, 때로
는 그녀가 신경에 거슬리기도 해요. 그런데 지금 그녀는 함께 살자고 합니다. 그렇게는 안 돼요. 그게 옳은
지 정말 모르겠거든요. 일년 뒤엔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질 수도 있잖습니까?" 혹은 "그는 집에 돌아오면, 같
이 자려고 해요. 하지만 난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매일 그와 잘 수는 없어요. 난 저항해야 해요. 한번 양보
하면, 그 다음은 어쩔 수가 없거든요." 감정은 더 강하게 통제되고, 계획적인 성과에 더 깊이 종속될수록,
확실히 그 역할 수행에 실패한다. 예전에는 죄를 범한다는, 그리고 자신을 더럽힌다는 공포가 성적인 행위
를 제약했다면, 오늘날은 충분히 자유롭고 솔직하지 않다는 것이 공포를 야기한다. 사회적인 역할 수행의
본질이 예전엔 감정을 지배하는 데 있었지만, 이제는 억제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역설적으
로 지시한다. 감정을 마침내 자발적인 상태로 놓아두도록, 있는 그대로 허용하도록 말이다. 감정은 자기 안
으로 후퇴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적 충동을 파트너와 함께 있을 때보다 혼자서 충족시킬 때 더 큰 성적 흥
분을 느낀다. 그러면 자기의 고유한 감정은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성적 흥분을 관찰함으로써
무시되고 억제된다. '완전한 오르가슴'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 내적 압박은 나머지를 수행한다. 마지막엔 어
떤 쾌감도 없어지고, 최소한 그렇게 보이기 위해 오르가슴을 연출하는 부담만이 남는다. 이런 연기는 일종
의 내적 상황을 만드는데, 이것은 밖으로의 통로에 저항한다. 이제 그는 장애를 가지고 자유분방한 듯 보이
는 연기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할까, 하고 고민한다. 물론 이런 모순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쉽다. 쾌락의 법칙은 외부로부터 잘못 받아들인 정보의 결과는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초
월하고자 하는 욕구,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을 상처 입히고자 하는 욕구를 표현한다. 그리고 감정의 걷
잡을 수 없는 동요는 당사자가 그것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수록, 점점 더 실현되기 어렵다. 외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의 상황이 비극적인 것은, 그가 조화, 행복, 안정을 추구하면서 그와는 정반대의
것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행운을 지속적인 형태로 만들려는, 믿을 수 없는 감정의 늪에는 절대로 빠지지 않
으려는 노력이 계속해서 불행을 양산한다. 외적 시간의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한 영
속성을 성취하려는 헛된 시도는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좌절 속에서 당사자는 단지
자신의 무능력이나, 상대의 무능력만을 탓할 뿐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사적 영역을 식민지화한 이래로, 이러한 (사랑의) 이상을 기피하는 것은 어렵다. 모든
식민지 정복자와 마찬가지로, 이들 전문가들은 자기가 복종시켜야 할 대상을 단지 그들의 목표에 합당한
만큼만, 즉 대상이 그들의 연구 조건 하에 어떻게 기능하는지 그 정도로만 이해했다. 여기서 그들의 연구
조건은 기술적인 산업사회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식민지화는 적응 능력의 향상에 기여했다. 개인적
인 사랑의 공간에서 휴식하는 것조차 완벽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사람들을 사랑의 전체적인 성격을
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 두 인격체 간의 감정이 문제이지, 두 인격체로부
터 완벽한 사랑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사랑 기계는 적합하지 않은 감정이 표출될
때에만 기능할 뿐이다. 그것은 언제나 짧은 시간 동안만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흥분을 자극하고, 매력적
이며, 많은 기대를 걸게 만드는 파트너, 평생 행운을 약속할 것 같은 그런 파트너는 시간이 지나고 날이 바
뀌면 그 향기를 잃어 간다. 그러면 당사자는 충족되지 않은 욕구는 뒤에 남겨두고, 앞에서 언급한 욕구를
다시 마음 속에 담아둔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실제로 있는 곳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이상적
인 파트너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한 이 사람은 그의 고독 속에서 자기가 지난번 관계에서 뭘 또 잘못
했는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여기서는 따뜻한 정이나 성적 충동에 대한 구체적인 바람을 이루는 것이 중요
한 게 아니다. 대신 미리 해결해야 할 추상적인 과제, 올바른 관계를 위한 적당한 상대를 발견해야 할 뿐이
다. 그는 점차 더 똑똑해지고, 상대의 결합만큼 자신의 실수도 잘 알기 때문에, 파트너에 대한 선택의 폭은
더 좁아진다. 다른 식의 접근이 소모적인 힘을 약화시키고 덜 힘들게 하는 연습을 통해 조성되는 곳과는
달리, 인간관계 안에서 상대방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은 늘 위험한 장애물로 가로막혀 있다. 감정은
용서할 자세가 되어 있는 착한 주인이면서, 잔인하고 계산적인 하인이다. 공생적인 적응이 감정을 지배하는
곳에서는 감정이 목적을 달성하고, 사회적인 역할 수행의 법칙에 부합하려고 집착하며, 자기 자신과 타인을
괴롭힌다. 그리고 충분한 감정 표현을 하기 어렵다. 그것은 통일적으로 흘러가는 체험 양식과 결부되어 있
기 때문에 이로 인해 분노와 증오가 폭발한다. 그러면 엄청난 공포가 자아의 저항력에 경고음을 울린다. 역
할 수행이란 것도 감정 없이는 기능하지 못한다. 만일 최고의 수행 능력을 위해 감정에 의해 조건 지워진
생활 방식이 양보되었다면, 사랑의 관계는 두 배로 보상되어야 마땅하다. 성공적인 남자들은 직업에서의 성
공을 과시하며, 아내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능력있는 로봇으로 기능한다. 그렇지만 이 로봇은 물론 직업적인
적응 때문에 잘 보호해 주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 반면 강인하고 능력있는 여자들은 애교스런 목소리로,
그러다가 금방 불평 섞인 음성으로, 남자들의 세계를 샅샅이 뒤진다. 혹시 거기에 견고한 감정과 결속력이
알맞게 혼합된 이상형이 있는지, 또 자기의 바람대로 따스한 마음과 객관적인 대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있
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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