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정신적인 치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슬픔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내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주제에 몰두하기 전에는, 수년간
'슬픔의 작업'을 연구했었다. 그러나 그 개념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나는 슬
픔에 관한 보다 분명한 표상을 갖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슬픔의 작업'이라는 단어 설정이 별로 효과적
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상처의 자연스런 치유과정을 '아물기 작업' 이라고 불러야 할까? 내가 보기에 프
로이트는 그의 경향상, 정신이라는 기계의 자아를 마치 작업 중인 학자로 연상했던 것 같다. 감정의 행위는
방해를 받지 않는 한 순환적으로 어떤 모양을 갖춘 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노동화되고 능률화
되고 있다. 이렇게 노동화되고 능률화된 행위는, 통제된 노력을 요구하고 사회적인 가치평가 개념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자연스러운 슬픔은 신체기관의 상처가 아물고 복구되는 과정에 상응한다. 슬픔은 당사자가
조용한 상태에서 주변 상황으로부터 보호되고, 또 사실을 인지하도록 도와준다. 슬픔을 통해 정신적인 상처
가 더 이상 출혈을 멈추고 천천히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슬픔을 통한 치유 과정은 뼈가 부러
지거나 손가락을 다쳤을 때와는 반대로, 일직선적이고 빠른 속도가 아니라, 순환적이고 느린 속도로 진행된
다. 다시 말해 슬퍼하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으며, 눈에 띄지는 않지만 즐거워 보이기
까지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우리의 감정 구조가 그 아래 편입되어 있는 자연스런 삶의
조건하에서는 슬픔의 동기가 흔히 발견되고, 그 슬픔의 동기는 일시적으로 슬픔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살아남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정신적인 상처를 자연스럽게 치유하는 슬픔은 다른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성과에 기준이 맞춰진 사회에서 자주 공격의 대상이 되고, 평가절하된다. 슬픔은 우울증과는 좀 다르다. 우
울증은 내적 대상의 손실과 깊은 연관을 가지지만, 슬픔은 외적인 손실에 대한 고통과 연관된다. 또 우울증
이 흔히 뒤따르는 공포나 분노처럼 새로운 현실을 만들지 못하는 반면, 슬픔은 새로운 현실을 점차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손실을 통해 발생한 위협적인 고통을
감수할 수가 없고, 스스로 처방한 일종의 마취제 속으로 침잠한다. 그것은 그가 '해로운' 손실과 '나쁜' 손실
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하는 덕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자기가 원하던 대로 사랑받지 못하는 것
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자기가 원하던 대로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다. 그는 늘 새로운
방식으로 끊임없이 분투하면서 이 슬픈 상황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에 그는 분노를 느낀다. 그는 또 실패에 대한 염려로 두려움에 떤다. 분노는 스스로를 겨냥하고, 결국
그는 그 안에 갇히고 만다. 그는 자신과 절대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 완벽한 사랑의 대상을 원하지만, 그것
은 분노를 통해 더렵혀져서는 안 되며, 또한 그쪽에서 그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해서도 안 된다. 내가 필요
로 하는 만큼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나의 무능력, 낮은 지적 수준과 작업 능률, 파괴된 어린 시절, 혹은
파트너의 불행한 어린 시절 탓으로 돌리는 한 나는 어떤 것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나는 두렵고(실패할까봐), 화가 나고(고군분투해야 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망연자실해진다(더 이상 쏟을 힘
이 없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상황이 그런 것' 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나
를 정말 슬프게 할지도 모르는 현실을 가능한 한 멀리 하려고 한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왜 그렇게 슬픔을
통한 치유 과정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설명이 될 것이다. 사회는 자연을 억압하고 그 위에 군림할수록
더욱 슬픔을 허용하지 않는다. 수십 년간을 서로 비난하며 같이 사는 부부의 경우 그 원인은 대가 각자 좌
절된 열망에 대해 슬퍼함으로써 다시 새로운 현실을 구축할 수 없는 데 있다. 그리고 그들은 발전소 주변
의 공기가 더 이상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나빠졌을 때, 굴뚝을 더 높일 생각을 가장 먼저 하는 사회적인
관습을 그대로 반복한다. 그 결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숲이 죽어 간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필터
장치를 생각해 낸다. 그러면서도 에너지 소비와 소비재 생산의 성장을 그만 포기하도록 도와 주는 슬픔의
작업을 감내할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
역할 수행에의 요구는 사회 내에서 단지 외적인 성공을 가능케 하는데, 이러한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
는 것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생 투쟁의 전제 조건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고
유한 자기 감정과 감정의 자치권이 불구가 되고 발전이 저지되는 것을 통해 발생한다. 그 대신 방어 메커
니즘이 등장한다. 갑각류의 연한 속살을 단단한 껍데기가 보호하듯이, 역할 수행의 요구는 자기 감정을 끊
임없이 의심함으로써 위험에 처하고 불안한 상태에 빠진 자치권을 보호해야만 한다. 그래서 거리를 두고,
어떤 고정적 관계도 회피하며, 동시에 여러 명의 파트너와 관계하고, 성적인 친밀감과 정신적인 갈등으로
이분화되는 것은 일정의 보호막이다. 그리고 분명한 감정으로 다가오는 파트너는 결국에는 그가 칼과 쇠막
대로 껍데기를 뚫고 들어오도록 만든다. 그러고는 이제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들어
와, 내부의 연한 살을 뜯어먹으려는 것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 식으로 당사자는 안으로부터 방어
태세가 갖춰지고,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재빠르게 인식하며, 그것을 교정하려고 한다.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자기를 과보호하는 사람은 대부분 슬픔이라는 자연스런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그
와 관련해서 그는 우울증에도 강한 두려움을 느끼는데, 우울증이 마치 강철로 괸 옷처럼 그를 가둘 것 같
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자아 복구의 자연스럽고 순환적인 성격을 더 이상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울증
에 대한 두려움을 결코 비켜 갈 수 없다. 그리고 우울증은 영원히 감금되어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 예를
들어 그런 우울증 환자는 이렇게 혼자말을 한다. "절대 울어서는 안 돼. 한번 울기 시작하면, 그럼 더 이상
그칠 수 없을 거야!" 그들은 운다는 것이 순환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모른다. 여기서 눈물은 단순히 슬
픔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들은 슬픔을 아무 이득도 없고 부적응적인 행위로 판단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나에게 도움이 안 되며", "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운다고 잃어버린 파
트너를 되찾는 곳은 아니다. 또 암에 걸렸을 때 운다고 다시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눈물과 슬픔은 뭔가
를 해결한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면, 그럴수록 더욱 울거나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슬픔으로부터의 도피는 다른 많은 길을
제시한다. 그럼으로써 상실의 충격은 억제될 수 있다. 그러면 상실은 더 이상 상실로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
라, 무의식에 머물게 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상실은 부정되고 이득으로 전환된다.
"아닙니다. 모니카가 헤어지자고 한 건 전혀 날 힘들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나도 이미 오래 전부
터 그녀를 떠나려고 했거든요. 드디어 자유입니다! 이제 축하할 일만 남았습니다!" "첼리아가 날 떠난 뒤,
처음엔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것이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목록을 작성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끔찍했던 것에 관해, 그녀의 뚱뚱한 엉덩이와 시끄러운 수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녀를 헐뜯을 때가 좋습니다. 그러면 다른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하
지만 혼자 있을 땐 견디기 힘듭니다. 불안해져서 여기저기 왔다갔다합니다. 그 전엔 언제나 잠을 잘 잤지
만, 지금은 술에 취하지 않으면 밤새도록 한잠도 잘 수가 없습니다. 잠들었다가도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
서 깨면, 무서운 생각에 빠집니다." 첫 번째 인용문은 관계 속에 이미 슬픔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준비가 되
어 있는 사례를 보여 준다. 두 번째 인용문은 일어버린 파트너를 평가절하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하려는 의
지를 보여 준다. 그렇게 매력없는 사람과 헤어졌다고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런 식의
극복은 단지 짧은 시간 동안만 유효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기방어 행위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기 때문이
다. 그래서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는 것이다. 수면은 발작적인 공포 때문에 방해받는다. 그리고 지나친 자
만심("그녀는 아무 가치도 없어. 그러니까 그런 여자는 필요없어!")과 우울증이 서로 교차되면서 나타나는
걸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둘 다 슬픔은 아니다. 상실을 부정하면, 당사자는 자기의 내면에 새로운 현실을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반복적인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일련의 고통스런 사념들 속
에 빙빙 돌면서 고민한다. 그때 헤어진 게 옳은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 슬픔으로부터의 도피로서
나타나는, 이와 비슷한 반복적인 형태가 갑작스런 파트너의 교체다.
지적이고 예민한 성격의 연극비평가, 안나는 수년간 동료 베른트와 관계를 갖고 있었다. 둘 다 이 관계를
힘들어했다. 둘은 서로 공통점이 많았지만, 늘 서로 '충분히 사랑하는지' 분명치 않았다. 그리고 베른트는
아이를 원치 않았던 반면, 안나는 아이를 가졌으면 했다. 베른트는 일년간 다른 도시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들은 서로 아주 드물게만 만날 수 있었다. 그 동안 안나는 슬픔을 느끼기보다는 깊은 고민에 빠
졌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상담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더 이상 잠도 못 자고 베른트와
헤어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녀는 그의 나쁜 점들을 죽 나열해 보고, 그의 좋은 점들과 저울
질을 했다. 그러나 결국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자신이 혐오스럽고 멍청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바로 이
러한 바보스러움과 냉정함을 이유로 그녀는 베른트를 비난했다. 긴 시간 동안의 방황 끝에(안나가 헤어지
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챈 베른트는 그 동안 아이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자기 나름대로 심리상담을 받았
다)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 후 안나는 자기를 존중해 주고, 떠받들어 주는 남자를 만났다. 하지만 그이 열
정에 답할 만큼 큰 감정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자기의 감정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베
른트와는 비슷한 직업을 가진 탓에 서로 정신적으로 잘 통했지만, 이 사람에게서는 정신적인 흥분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관계를 시작하기로 서로 합의했다. 그런데 그가 여행을 떠
났을 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자기 감정 때문에 놀랐다. 그와 함께 있는 건 즐겁고 흐뭇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부재중일 때는 그가 정말 적당한 배우감인지, 혹은 차라리 헤어지는 게 더 나은 건 아닌지, 고
민에 빠졌다. 어느 날 그녀는 베른트와 저녁을 같이했다. 그때 베른트가 자기와 결혼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
다. 그러자 안나는 갑자기 모든 게 분명해졌고, 지금 그와 당장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확
신에 찼다. 그러자 베른트는 그녀가 졸진 자세를 취하는 게 두려워졌다. 사실 그는 안나와 함께 있는 걸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다시 관계에 대한 두려움, 서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충분히 줄 수 있는
지, 하는 물음 속에 고통스럽게 빠졌다.
앞의 예는 슬픔으로부터의 도피가 이상적이고 공생적인 관계에 대한 열망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분명
히 보여준다. 안나는 자기 자신과 똑같으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사람을 원한다. 베른트도 그녀와 비슷하
다. 그래서 그녀의 두 번째 남자 친구가 갖는 감정적인 확신이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안나는 결
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열망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를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되었을 때 수반되는
슬픔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적응과 사랑간의 모순은 해결될 수가 없다. 지적이고 흥미
로운 이 어려운 남자는 감정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감정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반면, 감정에 확신을 갖는
남자는 흥미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그러나 슬픔을 수용하는 자세가 결핍되어 있는 건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개인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안나는 어릴 적에 집안의 태양이었다. 늘 쾌활하고, 성격
이 원만하고, 분별력이 있었으며, 늘 아픈 여동생에 비해 문제가 없고, 모범적인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저녁
에 부모님과 식사를 하면서 자기가 마치 기적의 촛불처럼 즐거운 분위기와 정신적인 교감의 불을 밝혔을
때면 지금도 내적으로 공허하고, 마비되는 걸 자주 느낀다. 고통받는 당사자는 슬픔 속에서 조금씩, 이제까
지 다른 사람에게 의탁하고 스스로를 의존적으로 만든 정신적인 영역들을 자기의 고유한 감정과 바람을 수
단으로 적극적으로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까지
나 늘 의존적으로 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전혀 의존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강렬한 감정관계는 감정
의 지속에 대한 열망과 의존성의 지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므로, 더 강렬한 감정은 회피하거나 정밀하
게 감시되어야 한다. 슬픔으로부터의 도피는 관계를 접착제처럼 끈적이게 만든다. 마치 벗으려고 하면 몸의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네소스의 옷(반인반수의 케타우로스의 옷. 죽어가는 켄타우로스가 자기 피에는 약효
가 있다고 한 말을 디아네이라가 믿고 남편 헤라클레스의 옷에 켄타우로스의 피를 묻히자, 헤라클레스가
죽었다는 데서 '죽음의 선물'을 뜻한다)'처럼, 당사자는 상대방에게 실망할 경우, 영원히 자기 안으로 숨어들
고, 마치 그물에 걸린 짐승이 자기 앞발을 물어뜯듯이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끊으려는 욕구를 자기 안에서
발견한다. 그렇게 당사자는 자기를 불구로 만들면서, 자기에게 많은 의미를 주는 바람들을, 단지 슬픔 앞에
무력하게 내맡겨지지 않기 위해서 포기한다. 하지만 고통받는 당사자가 자기를 보호하고, 사랑으로 자기를
다스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상처를 돌보게 하고,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일 기회를 줄 때 슬픔은 아직
견딜 만한 것이다. 그것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세계와는 다른 것이다. 여기서는 슬픔이
거부된다. 누구도 그것을 눈치채서는 안 된다. 꼭 필요한 위로와 보호가 이런 식으로 배제되기 때문에, 슬
픔이 주기적으로 순환하기 시작할 때 더 강한 심신의 고통이 뒤따를 위험이 크다. 기관지 천식, 위장병, 암
의 발병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
이제 당사자는 스스로 약하고 슬프게 '느껴서'가 아니라 정말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타인의 보호
를 비로소 허락한다. 많은 경우에 심신의 질병이 슬픔을 대신한다. 환자는 그의 정신적 상처가 너무 깊지
않은 경우, 얼마 후 다시 건강해질 수 있으며, 자기의 몸과 존재의 한계에 관해 깊이 사색하면서 자신의 삶
을 의미있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상처가 깊은 경우는 고통이 지속적으로 따라다니게 된다.
사람들이 가장 쉽게 그리고 흔히 발견하는 출구는 자아마취다. 마치 상처를 입은 범죄자가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진통제를 삼키듯, 스스로 억제하기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슬픔은 술, 마
약 혹은 화학적 환각제를 수단으로 제거된다. 그러나 슬픔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하는 이러한 행운
의 도구들은 결국에는 계속 비참한 상황에 빠지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쾌감과 불쾌감, 고통과 편안함,
슬픔과 기쁨이라는 감정들의 자연적인 순환을 균등한 감정의 직선적 움직임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것은 원시림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과 같다. 다양한 형태의 삶이 자갈과 시멘트로 가득 채워진다면, 사
람들은 더 빨리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쉴 수가 없다. 그리고 마침내 도처에 고속도로뿐이
고, 내면 세계가 전부 '개발' 되어 있다면, 이제 머물러 쉴 만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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