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과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관해 연구를 하면, 그러한 관계를 규정하는 불가사의한 기대감에
대해 더 예리한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관계의 당사자는 매우 복잡한 의식에 의해 형성된 행동을 한
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그(녀)에게 대우받길 원하는 바와 똑같은 식으로 그(녀)를 대우한
다면, 마침내 그토록 갈망하던 완전한 일치, 완벽한 조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대감은 은밀한
자아 과대평가와 관련된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자신의 강한 힘, 사랑으로 가득
한 배려, 강한 집중력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그도 역시 광범위하게 보살핌을 받는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동시에 그는 사태를 정확히 인식할 필요도 없게 만든다. 그는 다른 사람의 욕구를 알아내고, 그것
을 충족시키고자 노력하며, 공생관계에서 수동적인 역할을 이어받을 권리를 얻기 위하여,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고자 힘을 기울인다.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파트너를 개인적인 욕구를 가진, 다른 사람과는 구분
되는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해서가 아니라, 언젠가는 보상받아야 하는 과업으로 인식하고 그래서 자신의 모
든 노력을 쏟아붓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가사의한 기대감을 관찰하면 조증과 우울증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 여기서 두되 신진대사의 변화에 근거하는 '내인적 정신병'으로 설명하려는 정신병리학적 접근을
나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자 한다. 그러한 질병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상당히 다른 현상으로 나타나고, 그
빈도수가 지역마다 천차만별이라는 점이 그 반증 사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연과학적, 의학적 설명은 환
자를 이해할 수 없는 대상으로, 증상을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제한하려고 한다. 의학적인, 무엇보다도 정
신병리학적인 진단은 제도적인 방어의 표현이다. 정신병리학자들은 환자를 즉물적으로 다루고, 환자와의 관
계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쉽게 관찰하기 위하여 환자와의 대면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감정이 배제된 곳에
서는 늘 '자발적인' 것은 '히스테리적인' 것으로, 또 자발성이나 감수성을 기대하지 않는 전문의사에게는 '민
감한' 것은 '편집증적인' 것으로 진단된다, 그러므로 '내인적' 불균형이 우리의 이해 영역을 벗어남으로써 생
기는 심각한 어려움을 자연과학적으로만 설명해선 안 될 것이다. 조증에 걸린 환자는 매우 열정적이고, 무
제한적인 자기확신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어떤 저항도 이겨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잇고, 자기 자신은 아무 도움도 필요없다. 물론 전철 안에서 오페라 아
리아를 부르거나, 그것을 저지하려는 경찰과 몸싸움을 하거나, 시장에서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말하는
사람 등과 같은 아주 극단적인 조증 환자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사회 전체가 조증적 행동
방식으로 규정된 곳에서 장애가 뚜렷한 극소수의 사람들일 뿐이다.(그러므로 우울증 환자가 조증 환자보다
훨씬 더 많다는 곳 역시 두드러진 현상이다). 조증적 태도는 우리의 일상과 정치권에서도 흔히 체험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경제의 각 분야를 결정 짓는다. 그 결과로 개인은 병적인 조증을
겪는다. 환자는 자신의 능력을 의미 없는 일에 소모한다. 언젠가는 끔찍한 현실을 걱정하는 때가 올 것이
다. 과연 지구를 초토화시키는 산업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위와 같은 과장된 표현은 수많은 공생관계에
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상적이고 기능적이며 통제적인 조증에 대해서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게 함으
로써 나름대로의 목표를 달성했다. 조증적 태도는 관계가 유지되는 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관계가
끝장났을 때 생성되는 우울증은 이전에 존재했던, 즉 자기 힘으로 공생을 '구축' 했던 과대망상증이 남긴
뚜렷한 흔적을 보여 준다.
베티나는 평범한 근로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호령하고
욕을 했으며 때리기도 했다. 술이 깨면 그는 그것을 자책했다. 아내는 그런 그를 무시했고, 아이들은 그를
본 체 만 체했다. 베티나는 나이가 차자 집을 떠났고, 간호원이 되었다. 그때 하랄트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같이 산적은 없지만, 10년 동안 주말과 휴가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다. 베티나는 술을 마시게 되면 남자 친
구를 비난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기에게 너무 거리를 두고, 어떤 결속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아이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단지 "참을 수 없으면, 떠나면 되잖아!"
라고 할 뿐이었다. 베티나는 그러다 술이 깨면 곧 자기가 너무 심했다고 사과하며 부끄러워했다. 그러면 다
시 우정은 회복되었다. 그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는 그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고, 그는 그녀에
게 기댔다. 한번은 베티나가 다른 남자 친구를 사귀면서 하랄트에게 헤어질 뜻을 비춘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베티나가 자기 곁에 머물러 주길 간절히 원했고, 결국은 그 경쟁자를 물리쳤다. 하지만 몇 년 뒤 그는
다른 여자 때문에 베티나를 떠났다. 베티나는 그의 결정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으나, 그를 마주칠 때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고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새로운 성관계를 통해 위로받고자 했다. 그
러나 임신인 걸 알았을 때는 이미 그 남자가 아무 의미도 없음을 깨달았다. 이 아이는 그녀가 늘 하랄트와
함께 갖고 싶었던 그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를 유산시켰다. 그녀는 우울증으로 시달렸다. 거
기다 육체적 고통도 뒤따랐다. 그녀는 수술을 받았고,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 동안 일년
이 넘도록 하랄트를 피해 왔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가 보고 싶었다. 그 동안 베티나는 사태를 보다 정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남자 친구에 대한 기대감이 더 좋은 아버지에 대한 기대감과 얼마나 결부되어 있었는지
를 말이다. 더 좋은 아버지에 대한 기대감은 실재 아버지를 쓰라리게 거부한 체험 뒤에 숨어 있던 것이었
다. 그녀는 또 인식할 수 있었다. 완전히 포기한 하랄트와의 관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지속될 수 있
었던 것은, 그녀가 인내하고 배려함으로써 그 역시 인내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그녀가 분명
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 역시 비슷한 시각을 갖게 되기를, 속으로 바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과 파트너의 현실을 지속적으로 부정하는 관계는, 원래 가졌던 불가사의한 기대가 바뀌는 것은 견디
면서도 사랑의 감정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헤어지려고 하는 파트너는 선언한다. 더 이상 기대
에 부응하고 싶지 않다고. 그럼으로써 냉혹한 결말이 도출된다. 베티나가 사람들과의 모든 접촉을 끊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아직도 많은 빚을 지고 잇는 하랄트로부터 아주 조금이라도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은 다시 점차 강해져 갔다. 그러나 어느 날 그를 만났을 때, 그
녀는 깜짝 놀랐다. 차갑게, 그리고 거리를 두고 만나면서도 그가 떠나가자 상실로 인한 혹독한 아픔을 느꼈
기 때문이었다. 하랄트와의 현실적 만남은 과대평가되고, 헤어짐은 기대 밖으로 고통스러웠다.("정말 이젠
그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라고 베티나가 말한다) 하랄트에게 꼭 맞는 내적 표상은 자유로운 세계
로 가기 위한 여권과 같은 것이다. 이 여권을 가지지 못한 베티나는 공생관계에 편입된 채, 늘 불안하다.
기대의 마술로 인해 확신에 찬 사랑에 대해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할까 봐서이다. 아주 적극적인 사람은 공
생관계를 새로운 파트너를 통해 늘 새롭게 바꿔 가며 난관을 타개한다. 그것은 마치 급류가 사납게 흐르는
개울을 건너려고 돌다리를 뛰어다니는 사람과 같다.
언제나 우리는 단지 감정의 흐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을 적응의 성취라는 단단한 기반 위에서 찾으려고
시도한다. 동시에 이 단단한 기반을 차지하려고 하는 투쟁은 특별히 더 감정을 위협적으로 만든다. 엄격한
초자아가 혼란스럽고 고집이 센 이드를 제거해야 할까? 어쩌면 엄격한 초자아가 우선권을 가지고 이드를
강요하기 때문에, 이드가 그렇게 혼란스럽고 사악하게 구는 것은 아닐까? 일반적인 사람은 산업사회의 악
순환에 뒤따르는 개인적인 악순환에 쉽게 빠진다. 엄격한 양심은 증오와 혼란에의 열망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것들은 더 강화된 엄격성에 의해 통제되어야만 한다. 자연으로부터의 착취와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생
명의 토대를 위험에 빠뜨리며, 그것을 더 강화되고 새로워진 착취로 대체하려고 한다. 새들은 더 이상 지저
귀지 않는데,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점점 더 완벽해진다. 삶은 황량하지만, 영화는 흥미진진하다.
산업사회는 슬퍼할 줄 아는 능력을 잃어버린 채, 조증의 세계에 살고 있다. 기대감의 마술은 자기의 적응을
통해 상대방과의 경계를 없애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복종시키면서 상대방도 복종시키려고 한
다. 그것은 나 자신의 자학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그것을 관전하는 관객으로 초청된 상대가 그 상황에 책임
이 있으므로 그 역시 스스로를 학대해야 마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화가 남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대한다. 그러므로 너 역시 친절해야 하며, 날 더 이상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 이런 식으로 기대감의 마술이
생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다르다. 마술에 걸린 친절이 자기의 실망을 내비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더
실망하게 된다. 하지만 분노를 포기하는 것이 별로 실효성 없어 보이므로,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감추지 않고 화를 낸다.
클라우디아는 오랫동안 이런 마술의 세계에 살았다. 어렸을 때 그녀는 자신이 다른 여자 형제들에 비해
별로 눈에 띄지도 않고, 둔하고, 너무 평범하다고 느꼈으며, 엄마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녀
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그는 집에 거의 없었고, 그래서 아버지로부터의 실제적인 사랑의 결핍을 중독성의
환상으로 대체했다. 나중에 그녀는 책임감이 강하고 일에 몰두하는 남자와 결혼했다. 그는 큰 변호사 사무
실을 개업했고, 교회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원만한 가정을 지켜 가고자 했다. 그의 가치관에 따
르면, 여자는 아이와 함께 집에 있어야 했다. 그를 사랑한 클라우디아는 그래서 일을 그만두고, 모든 다른
관계를 멀리했다. 하지만 남편은 그것에 완전히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편, 에버하르트가 윤리적인
양심의 가책과 망설임 끝에 자기의 여자 동료와 관계를 갖기 시작하면서 기대감의 마술은 산산조각이 났
다. 클라우디아는 세상이 끝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의 배반 행위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지 못했다. 비
록 남편이 계속 그녀 곁에 머물고 싶다고 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서 어떤 애정도 느낄 수 없었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의 무능력을 비난했다. 그녀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편과의 어떤 연관성도 부정하는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상당히 의존적인 건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남편의 사랑스런 몸짓과 선물들은 그녀에게 더 이상 복구되지 않을 손상의 감정만을 전
달 할 뿐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증오했고, 그런 자신을 또한 증오했다. 그녀는 늘 반복해서 쓰라린 고통에
대해 말했다. 그와 여전히 한집에 살고 있으며, 사실은 그녀가 그걸 바라고 있고, 그 또한 그것을 알고 있
다고. 그리고 그는 그녀가 그렇게도 대화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없고,
예전엔 늘 모든 걸 함께 했는데, 이제는 연극을 보러 가거나 교회 모임에 갈 때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고
말이다. 물론 그녀는 같이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 봤자 아무 의미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클라우디
아는 에버하르트의 '나쁜' 면과는 헤어졌다. 하지만 그라는 사람의 전체에서 떠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남편
을 악인화시켰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남편 때문에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남편을 악인으로 규정
지으면서도 거기에 함께 했던 아름다운 기억들을 결부시켰다. 그렇게 그녀는 남편과 거리를 가지면서도 그
와 헤어질 수 없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사는 집은 그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클라우디아는 그들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침실에서 그를 내쫓았다. 그녀는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었
다. 그는 이것을 이해했고, 그 방에 놓으라고 가구를 선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수년간 그 방을 새
로 구미지 못했다. 그 방은 단지 남편만 없을 뿐, 여전히 공동의 침실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방이 아니었던
것이다.
클라우디아가 가사일에 대한 요구에 지나칠 정도로 잘 적응한 것을 조증이라는 병적 증상과 비교하는 것
이 첫눈에 뭔가 잘못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녀는 마치 우울증 환자처럼 행동했다. 위기에 처한 사랑의
관계를 잃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욕구는 억제하고, 자기 자신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면에서 말이다.
하지만 지주조개 속의 작은 티끌처럼, 과대망상은 모든 우울증적 과대 적응 안에 숨어 있다. 그리고 과대망
상은 대개 상황이 부정적으로 바뀔 때, 그리고 당사자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자기비하에 빠질 때에야 비로
소 인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주 똑똑한 사람이라도 멍청하게 되고, 비록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최악이 되는 것이다. 비록 모든 걸 다 제대로 하기가 아주 어렵다 하더라도, 그들
은 모든 걸 잘못했다. 조증 환자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을 반대로 그것을 성공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며, 부동
의 고통 속에 침잠한다. 둘 다 "부단한 노력과 규범 이행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행운은 만들어지는
곳이다"라는 지킬 수 없는 것을 약속하는 사회의 희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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