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기능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각 개별 부분들을 연결하는 전체 설계도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자기
아래 예속시키는 광범위한 규범을 갖는다. 이 규범은 나아가 주변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자
동차에 적합한 길과 도시를 만드는 상황을 보자. 오늘날 구시가지나 자연환경이 '개발된' 곳을 살펴보면, 어
디서나 기계의 원칙에 따라 맞지 않는 것은 무자비하게 없애 버리는 무분별한 횡포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두 대상의 관계를 보면 이와 비슷한 과정이 관찰된다. 여기서도 공동의 규범을 향한 추
구가 기본적인 틀을 제공한다. 클라우디아와 에버하르트의 관계에서도 분명히 보여지는 것은, 조화롭고 기
독교적인 가정이라는 남편의 관념에 의해 이러한 규범이 매우 강하게 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클라우디아
는 에버하르트가 제시하는 것에 적응을 했다. 물론 나중에 에버하르트는 자신이 만든 규범이 마치 악몽처
럼 그를 힘들게 하고, 자기 자신을 비난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규범 이행이 삶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고, 동시에 사회의 규범이 개인적이고 행복한 사랑의 관계에 선행할 때, 사랑의 감정적인 토대는
위험에 빠진다. 규범이 사적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오면, 개인이 '퇴행'과 휴식과 긴장이완을 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개인의 자유가 허락된 유일한 공간은 흔히 성의 영역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규범의 창조자들이
이미 작업을 진행 중이다. 마치 모피를 얻기 위해 마지막 처녀림으로 침입해 들어가는 밀렵꾼처럼 말이다.
나는 이제 공동의 규범 추구와 관련이 있는 어떤 상황을 묘사하고자한다. 이 상황의 기본 구조는 두 사
람이 함께 살면서 둘 다 지나친 규범의 억압 아래 시달리는 것이다. 그것이 오로지 내면세계에서만 작용하
는 동안에는 그 압박은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고통 감수의 대상이기 때문에(엄격한 초자아와 구원을 갈망
하는 자아 간의 대립 구도로서 여기서 자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드에 의해 제공된 탈출 가능성을 수용
할 수 없다), 압박은 바깥으로 잘못 겨냥된다. 이제 파트너를 규범에 근거해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만드
는 과정 속에 끊임없는 투쟁이 반복된다. 이 투쟁에서는 상대방이 자기의 모든 고통에 책임을 져야 한다.
상대방은 강하고 완전해야 한다. 그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내가 필요로 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래야 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혼자서 달성할 수 없어 보이는 일을 그는 가능케 해야 한다. 내게 부족
한 것은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과 기대의 마술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뭔가를 제대로 하려고 애를 쓰면, 그도 역시 똑같이 애를 써야 당연하다! 외부의 어려운 상황이 그런
대로 잘 극복되는 동안엔 흔히 관계가 별 탈 없이 유지되곤 한다. 그 동안에는 휴식과 퇴행을 바라는 약한
태도가 억제된다. 언젠가 사업이 번창하고, 직장에서의 일이 잘 진행되고, 집이 마련되면, 그때 가서야 좀
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건설' 하는 과정이 지나고, 서로의 친밀감을 실컷 맛
본 뒤에는 투쟁이 시작되곤 한다. 그들은 각자 이렇게 아무런 평화도, 아무런 휴식도 얻지 못한 것이 누구
의 책임인지 단번에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전쟁을 즐겨라. 평화는 끔찍할 것이다" 라는 속담을 떠올린다.
이 상황을 보여 주는 하나의 문학적인 예가 에드워드 알비의 희곡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다.
쾌락에 적대적인 초자아는 휴식이 설계되는 것을 방해한다. 휴식이란 그 동안 조금씩 누적되었던 퇴행에의
욕구를 해소시키는 일종의 위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비난은 주로 "내가 필요로 할 때 넌 늘 없었어" 라
는 점에 모아진다. 그들은 휴식과 자유시간에 대한 의견 조정을 깊이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큰 기대감을
표현하지 않지만 이 점을 염두해 두고 있는 게 사실이다. 당사자들은 각자 과도한 일과 불면의 일을 하고,
아내(남편)보다는 그 밖의 다른 일들에 더 많은 신경을 쓴다고 항의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퇴행에 적대적인
상황의 원인이 자기 자신보다는 늘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울리케와 클라우스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둘은 어떤 체인 소매상의 지점을 운영했다. 울리케는 낮에는
남편의 비서로 일하고, 나머지 시간엔 이와 가사일을 돌보았다. 클라우스는 매우 야망이 큰 사람으로서,
늘 새로운 계획들을 세우고, 다른 시장을 개척하고, 더 큰 지점을 인계받고, 혹은 직업을 바꾸는 등의 생각
들을 통해 때때로 겪는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울리케는 지인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커다란
정원을 가꾸었다. 클라우스는 과묵하고 진중한 성격이었으며, 말하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는 편이었다.
두 사람은 거의 매일 그것도 큰 소리로 다투었다. 상담 초기에 울리케는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고, 반면 클
라우스는 그런 그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조용하게 고민하던 그는 나중에 호주로 이민을
가거나 이혼을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크고 잣은 문제들로 다투는 동안에 이 외로운 두 사람은 서로 매우
아끼고 또 칭찬받길 원하면서도, 거의 늘 반대로만 행동했다. 누가 잘못했는지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그들
은 각자 상대방이 모든 분쟁의 책임을 지길 바랐다. 울리케는 클라우스의 스케줄을 관리했고, 클라우스는
그녀의 옷, 아이 교육, 식사에 관련한 것을 챙겼다. 울리케의 말에 의하면, 그는 자기가 원할 때마다 그녀가
척척 도와 주길 바라지만, 그 자신은 늘 일이 너무 많아서 그녀와 이야기 할 시간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그
녀가 주말에 무슨 계획이 있느냐고 물으면 그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무언가를 계획하면 그는 딴소
리를 하는 것이었다.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자 그가 열쇠를 내놓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주중에 미리 열쇠를 복사해 두었다. "난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녀가 그룹 상담 시간에
울면서 호소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가끔 그녀가 과장하는 것이라고 한
마디씩 던질 뿐이었다.
클라우스와 울리케의 공통된 문제점은 각자의 자아 영역이 너무 축소되었다는 데 잇다. 그들의 자아는
엄격한 초자아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억눌린 바람들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 여기서 바람을 지속적
으로 억제함으로써 생겨난 공격적인 욕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관계에서는 엄격한 초자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거리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투쟁은 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밖으로 표출된
다. 그래서 파트너가 좌절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실 이 좌절은 자기 양심의 엄격성에 뿌리를 두고 잇는데
도 말이다. 이 현상은 다가오는 파트너가 공격당하고 거부되는 반면, 떠난 파트너에 대해서는 희망에 대한
집착을 가진다는 점에서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그것은 야누
스의 얼굴을 가진다. 그의 얼굴은 다가올 때와 떠날 때가 다르다. 한쪽 얼굴은 흉측하지만, 다른 쪽 얼굴은
사랑스럽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이미 등을 돌린 뒤에야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 클라우스와 울리케는
둘 다 차갑게 역할 수행을 요구하는 초자아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은 자아를 강화시키면서, 초자아를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는 대신 상대방을 공격한다. 그것을 통해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내적 영역이 확장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의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에 마치 갈레선(11세기, 18세기의 노예선0
에서 노를 젓는 노예처럼 매여 있다. 상대의 불만스런 부분은 늘 요주의 대상이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다가
갈 때 흉측한 얼굴로 찡그리는 것이다.
이것과 연관지어,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보편화된 어떤 현상을 기술하고자 한다. 여
기서는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순환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언어의 형태로 옮겨질 수
있다. "당신이 나랑 말하지 않으니까, 난 당신과 같이 잘 수 없어." "당신이 나랑 같이 자지 않으니까, 당신
과 할 말이 없어." 대부분의 경우, 여자들이 앞의 예와 같이 말하고, 남자들은 뒤의 예와 같이 말한다. 예전
에는 일반적인(가부장적인) 규범이 남자와 여자를 구속했지만, 이제는 특히 중산층 사람들은 이러한 규범에
개인적으로 자신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과도한 요구다. 초자아 투쟁은 개인이 사회의 혼
돈 속에 어떤 공동의 규범을 찾아 헤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사회에선 역할 수행의 욕구와
쾌락의 욕구간에 발생하는 갈등이 화해될 수 없다. 클라우스가 자기 스스로도 역할 수행의 압박에 지치면
서도 이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울리케한테 아이가 옷을 단정하게 입지 않았다거나
집의 대문에 지저분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그가 사회적으로 전형적인 행동 방식의 표본을 아주 조금은 '과
장하는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다지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그렇게 과도한 일에 시달린다면 어느 정도 인내심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
만 울리케 역시 역할 수행 압박에 있어서 클라우스보다 더 편하지는 않다. 만일 그녀가 게으르고 만사를
다 귀찮게 여긴다면, 그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할 일이
많으며, 그가 얼마나 가족을 돌보지 않는지에 대해 불평한다. 클라우스가 어쩌다 마침내 일을 할 만큼 충분
히 했다고 느끼고 울리케와 함께 가볍게 수다라도 떨려고 하면, 그녀는 일에 지쳐 사랑을 필요로 하는 남
편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신경질적인 불평꾼이 이제 성적 욕구를 해소하려고 달려드는 것으로 보는 곳이
다. 그러면 이제까지 그것도 몇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가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를 생각해 내고 급
기야는 참을 수 없게 된다. 물론 클라우스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그런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클
라우스는 자기의 상처받기 쉬운 면을 솔직히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울리케의 그런 면
역시 인식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는 울리케를 평가절하하며 차갑게 말한다. 그렇게 처신해선 안 되며, 과거
의 일을 다시 끄집어내서는 안 된다고, 그럼으로써 둘 다 그렇게 바라던 애뜻함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상호간의 초자아 투사와 규범 투쟁은 산업사회에서의 적응과 사랑의 대립을 정신분석적인 메타 심리학의
개념으로 규정지으려는 시도다. 나는 이미 이런 개념들의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이 개념들은 단지, 살
아 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상황과 행동을 지칭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클라우스와 울리케 간의 갈등(그들
은 이러한 갈등을 부끄러워서 숨기거나, 혹은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여기고 다시 상대방을 비난한다)에서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것은 이것이 개인적인 질병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에 지나치게 복종한 것이
라는 점이다. 예절, 배려, 상냥한 태도는 사회 어디서나 요구된다. 다만 데모대와 경찰, 집주인과 세입자, 고
용주와 근로자 등의 사이에만 제한적으로 요구될 뿐 그리고 그것은 사적인 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개
인이 점점 더 사회적인 역할 수행의 윤리에 적응하고 이것을 자신의 사생활에도 적용시킬수록, 공공이 요
구하는 대인관계 방식은 더 강하고 파괴적으로 사적 영역에 침투해야 한다. 그러므로 고통스러운 규범 투
쟁은 바로 사적 영역이 갖는 그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직업인, 이를테면 의사, 교사, 사회사업가, 심리학
자, 심리상담가 등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폴커와 유디트는 둘 다 개신교 신학자로서, 부부관계 상담가로서의 직업교육을 받으면서 파트너 상담치
료를 같이 실습했다. 그들은 어쩌다 아주 사소한 문제로 시작해서 고통스럽고도 지루한 투쟁의 관계에 빠
지게 되었다. 폴커가 긴 시간의 대화 끝에 죄의식과 두려움을 가지고 두 사람과 친분이 있는 사람의 아내
와 잤다고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럼 나도 말할 수 있어" 라며 유디트도 말했다. 폴커가 같이 잔 여자의 남
편 친구와 잔 적이 있다고 말이다. 그건 폴커를 만나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폴커에게 이제
까지 숨겨 와KT다. 이런 '사소한' 일로(유디트 생각에) 폴커가 가졌던 신뢰감은 다시 복구되기 힘들 정도로
완전히 손상되었으며, 이 일로 인해 그와 유디트는 서로를 비난하는 끝없이 연쇄적인 투쟁에 말려들게 되
었다. 폴커는 마치 그녀에게 복수하듯, 많은 여자들과 성관계를 갖기 시작했으며, 이를 그녀에게 말하지 않
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밤이면 잠을 못 자고, 질투의 환상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늘 고민했다. 자기
가 질투할 권리가 있는지를, 그러고는 유디트가 솔직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그럴 권리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러나 폴커는 자기가 그런 식으로 자기의 모욕감을 정당화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늘 계속해서 떠오르는 질투로 인해 고통받으면서도,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 자기 자신과 힘겨운 싸움
을 해야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고독에 대한 공포감과 질투라는 감정이 권리나 법을 통해서(이를테면 '눈
에는 눈, 이에는 이, 외도에는 외도'란 식의) 인간의 마음에서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법을
제정하는 행위가 바로 규범 투쟁 관계의 특징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 파트너가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다른 파트너에게 연관짓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술에 취하든, 새 옷을 사든, 다른
여자들과 성관계응 시작하든, 혹은 그녀와 함께 상담 실습을 같이 하든, 그의 생각과 감정 속에선 파트너
(유디트)도 똑같은 행동을 하는지, 혹은 아닌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가 가장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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