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도와 주는 직업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연관된다. 그 가장
단순한 형태는 우리가 정신적 장애인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치료하는 데 적합한 심리상담가를
찾는다는 것이고, 그 심리상담가는 자신의 재능을 장애를 '없애는' 데 사용한다. 여기서 내가 만일 심리상담
가를 문제 삼으려는(일종의 자아비판) 의도를 갖지 않았다면, 위와 같이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전부터 간과되어 온 이와 관련된 다른 형태는 도와 주는 직업 자체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
현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감정의 세계를 자기의 역할 수행 능력 안으로 편입시킨다. 그리고 다
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환자로부터 분리시키고, 지나친 혼신이나 충족시킬 수 없는 요구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직업적인 구조를 이용한다. 여기서 제삼의 가능성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
는 것과 직업적인 협력자를 요구하는 것이 공동의 뿌리를 역사적 발전 속에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
이다. 이것은 협력자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의 운명에 깊이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직
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어떤 가치중립적인 서술 방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
에 나는 나의 입장을 고수하려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25년간 심리상담가로 일해 왔고, 이 직업을 예나 지
금이나 매력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받은 '교육' 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나는 심리분석가로서의
교육을 마쳤지만, 오늘날 프로이트 학파가 주재하는 국제학술재단의 일원이 아니며, 다만 작은 연구 모임의
일원일 따름이다. 나는 그룹치료와 그룹자아발견의 방식이 상담가를 양성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본
다. 이런 생각은 상담가의 사회심리학이 특별히 나의 관심을 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룹치료 상
담가가 다른 상담가들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생각은 환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족자들은 내가 상담가의
직업적인 상황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여전히 상담가로 일하는 것(그 중에서도 상담가를 양성하는
일)을 모순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비판하는 사람이 스스로 비판의 대상이 될 때 설득력을
잃는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 자신이 매일 몇 시간 동안,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장애가
분명한 사람들과 만나기 때문에, 이 작업을 통해 얻은 현실적인 견해들을 밝히고자 한다. 환자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외적으로는 상당히 차이가 있지만, 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첫 번째 그룹에
서는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 가장 눈에 띄는 장애다. 그들은 관계를 기피하거나, 바
라던 파트너십을 유지하되 적당한 간격이 늘 보장되어야 한다. 환자들 스스로 매우 강조해서 말하는 이런
현상들 이면에는 자기의 고유한 감정에 대한 불신, 대상에 대한 매우 불안정한 표상, 혹은 자기의 감정에
대한 욕구와 감정을 비판적이고 신뢰하지 못하는 태도간에 화해를 이룰 수 없는 나약함이 숨어있다. 내가
이미 기술한 바 있는 양심의 전쟁이 이 환자들 내부에서 일어난다. 그들이 내부의 문제를 바깥으로 돌릴수
록, 심적 부담은 덜어지지만, 문제 상황을 변화시키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여자를 사랑하는 데 두려움을 갖
는 남자는, 여자들을 이상적인 여자와 늘 결부짓거나 아니면 이상적인 여자를 결코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을
마치 운명적인 예시처럼 갖고 있는 남자보다 훨씬 더 간단하게 상담치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후자의
경우,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에게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전자의 경우, 상담가는 신경증적 두려움
에 대한 관습적인 처방에 의존할 수 있다. 그는 환자에게서 자기불신의 뿌리를 조사해 볼 수 있다. 그런 식
으로 그는 고유한 감정에 자발적으로 몰두하는 것이 금지되고 방해받는 상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엔 바깥으로 향해진 문제가 먼저 안쪽(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되돌려져야 한다. 이 상황은 무엇
보다도 약물중독 환자를 치료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그들을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약물이 상담치료 과
정에 필수적인 슬픔의 작업보다도 더 편안한 해결책을 짧은 시간 안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물
중독 환자가 재발할 확률은 매우 높다. 그리고 그들과 비슷한 중독증 환자, 즉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
움을 바깥으로 향하게 하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파트너를 바라는 꿈에 거의 수년간 중독되어
있는 환자들 역시 재발할 확률이 높다. 이 두 가지 사례의 환자들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모습으
로 늘 의사를 결코 '제대로 된' 관계를 이끌 수 없는 실패한 파트너 때문에 괴로움을 받도록 상담가가 부당
한 요구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사례의 환자가 말한다. "나는 실질적인 관계에 공포를 느낍니다." 두 번째 사례의 환자가 말한
다. "난 실질적인 관계에는 흥미없어요." 두 번째 그룹의 환자들은 어떤 지속적인, 충족시킬 수 없는 공생의
요구로 인해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감정에 기반을 둔, 사랑스런 친밀감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것은(그들이 생각하기에) 삶을 위태롭게 하는 의존성에의 욕구를 일깨우고, 삶의 투쟁 속에 있
는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중세 영웅 서사시에 나오는 기사가 이미 정복한 여자 곁
에 머물면서 할 일 없이 늘어져서 시간을 죽이는 것과 같다. 그는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나야 마땅하다. 그
러므로 파트너들은 서로 적대적으로 투쟁한다. 사랑과 따뜻함의 부재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늘 상대방이다.
그는 자기의 결점을 없애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이상적 파트너와 현실의 파트너가
어느 정도는 거리를 좁히면서 한 사람의 몸 안에 융합된다. 현실에서 같이 살면서, 거의 매일 화를 돋구는
이 시골 촌놈, 혹은 크산티페(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부인. 악처로 유명)가 언젠가는 마치 동화 속
에서 왕자로 변신하는 개구리처럼 그래도 그렇게 갈구하던 '진짜' 파트너가 되어 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당사자가 동화의 무대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일종의 제의를 어쩔 수 없이 반복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당사자는 개구리를 자꾸만 벽으로 던지면서, 그것이 마침내 왕자가 되어 주기를 희망하는 것이
다. 그런 식으로 그들을 몇 년이고 상처투성이 개구리와 함께 사는 것이다. 여기서도 상담치료 과정은 먼저
파트너를 변화시키고, 그럼으로써 결국 기대하던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려는 환자의 의도를 밝혀 내는 것으
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쉽지는 않다. 여기서는 환자인 당사자가 그렇게도 갈망하는 평화는 산산
이 깨지고, 언제나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는 파트너의 행동에 초점이 맞춰진다. 정말 어려운 것은, 내가 언
제나 방어해야만 하는 상대방의 무기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기가 무엇인지를 알아내
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파트너를 향한 비난의 고리들을 상담이 허용하는 일종의 모델로서 각각의 항목
별로 마치 실타래를 풀 듯 분석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나는 이런 경우 가능한 한 빨리 문제를 인식하
고, 어떤 구체적인 상황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이 상황에선 금지된 감정들, 즉 두려움과 욕망이 발견된다.
실질적으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슬픔이 필수적으로 뒤따른다. 파트너간의 투쟁은 그들이 갖는 기대
를 포기하는 대신 그 주변만을 고통스럽게 맴돌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들은 포기를 하면 결과가 결코 치료
불가능한 상처가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치료 불가능한 것은 오히려 끝없는 투쟁 속에 그들이
매일 서로에게 입히는 상처다. 더욱이 투쟁은 승리나 패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것, 이제까지 몰
랐던 것, 혹은 무시했던 것이 등장함으로써 끝나게 된다. 위와 같은 경우, 다른 상황에서 이미 해결책으로
제시된 보장받은 무기를 포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상담치료에 있어서도 딜레마로부터의 탈출은 기대
밖의 어떤 것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것은 바로 일종의 패러독스다. 예를 들어, 환자는 관계의 어려움을 겪
으면서 자주 혼자 있는 법을 알게 되고, 다른 어떤 낯선 사람들의 모임보다는 자기가 아는 세계 안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는 고독 속에서야 비로소 자율성에 대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두려움을 깨닫게 된
다. 그것은 파트너를 자주 바꾸는 동안에, 혹은 규범 투쟁 속에서, 혹은 동화 속 왕자나 공주를 꿈꾸는 동
안에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공생관계의 해체는 욕망, 두려움, 유약함을 '자기의 고유한' 체험으로 받아들이
게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슬픔의 작업을 '수행'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
들일 줄 알게 된다. 공생 관계의 파트너는 자기가 갈망하는 이상적 상태, 즉 희망 없는 행복에 접근하기 위
하여 상대를 바꾸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끊임없는 좌절을 맛봄으로써 결국 상담을 받으러
오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자기의 목표를 수정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상대방이 다른 식으
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상대방이 상담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혹은
그가 이미 그런 치료를 받고 그 결과. 괴로움을 덜었으므로, 자기도 따라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들이 상
담을 받으면서 파트너와 싸울 새로운 무기를 연마하는 동안, 상담가들은 이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작업
을 한다. 여러 명의 상담가들 스스로가 경쟁적으로 투쟁하는(예를 들어, 그들은 '좋은' 그리고 '나쁜' 치료
방법이 있다고 확신하므로) 동안에는 어떤 평화도 구할 수 없다. 비록 한 사람의 상담가가 그런 환자를 담
당한다 하더라도, 그는 자기가 도와 준다고 제공하는 것이 새로운 투쟁의 도구로 변질되거나, 아니면 이런
것을 두려워하여 아예 덜 적극적이고, 덜 효과적인 방식으로 환자와 거리를 유지하는 이 두 가지 위험을
피하기에 급급할 따름이다.
'분석적인 절제'라는 흔히 오해되는 이론과는 반대로, 상담가는 자신을 환자와, 게다가 자기의 감정과도
상당히 깊이 연관시킨다. 냉정하게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 중립성도 결코 원래 의도된 바대로 그렇게 절
제된 자세를 취하기가 어렵다. 그런 중립성은 환자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환자의 부모마저도 도외시되는)을
반복시킴으로써 큰 부담을 준다. 물론 다른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상담가가 환자의 감정을 이해
하지 못하는 대신, 자기의 감정을 투사하는 경우다. 상담가가 취할 수 있는 정말 의미 있는 절제란, 환자를
자기의 문제로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가지는 관계의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파트너
간의 욕구들을 실제로 교환시키는 작업을,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욕구를 대상으로 하는 슬픔의 작업을
수행하는 데에 있다. 상담가가 양쪽 파트너를 함께 다룬다면, 각각의 파트너에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더 많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상담가가 자신의 말과 충고를 지나치게 절제하고, 또 결과에 대한 두려
움을 가지고 회피하는 것(그것을 환자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면서)을 바꾸면 뭔가를 이루어 낼 수 있
다. 회피와 후퇴는 투쟁관계의 파트너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무기인 것이다. 양쪽 파트너와 함께 작업을
하는 것은 그들간의 생각의 차이를 쉽게 찾아내게 해 주고, 상담가 스스로 자신이 무기 거래상이 아니란
걸 깨닫게 해 준다. 상담가가 환자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고 완전히 자신과는 별개의 문제로 취
급하는 태도는, 산업사회에서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삶과 친밀감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한다. 그것은 다
음과 같은 표현들과 유사하다. '실제적으로 완결된' 슬픔의 작업, '충분히 소화된' 이별, 관계 문제의 '해결'
등 실제적인 사랑과 접근은 불완전한 것이며, 위협당하는 것이고, 혁명적인 것이다. 우리가 갈망하는 감정
의 완성은 이상적으로 꿈꾸어 온 그것과 비교함으로써가 아니라, 우리가 고집 부리며 비교해 온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도달할 수 있다.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고, 또 어디에선가 새로운 침식작용이 이루어지듯이,
상담치료도 점차 예전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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