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 한국인
@ff
1. 편리함만 추구하는 버릇
김치통조림을 사먹는다는 것은 김치라는 결과만을 얻는 것이요. 풋김치가
시시각각 익어가는 각기 다른 과정의 맛을 생략한 것이 된다.
깡통 속에 흙과 비료와 꽃씨를 섞어 담은 통조림꽃이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서 잘
팔린다는 말을 들었다. 그 통조림 뚜껑을 따 물만 부으면 즉석꽃이 피어난다. 지금
식탁 복판에 그 통조림 인스턴트 팬지가 놓여 있다. 자동 전기밥솥이 지은 즉석밥,
즉석 된장국, 통조림 김치가 차례로 나온다. 이어 슈퍼마켓에서 산 즉석 매운탕이
올라온다. 냉동 포장된 생선 토막, 무, 우거지, 간장, 고추장 등 조미료에 물만 부어
끓인 즉석탕이다.
밥먹으면서 원격 조정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들놈이 번거롭게 숟가락질이나
젓가락질 하지 않고도 밥을 먹을 수 없을까 하고 짜증을 낸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게 됐다. 왜냐하면 머지않아 전자 숟가락이 나와 원격 조정을 하면 먹고
싶은 된장, 매운탕을 떠먹여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갱년기에 들어 눈이 나빠진 한 친구가 한 안경알로 원시, 근시,
난시가 조절되는 이색적인 안경을 무척 자랑하는 것을 보았다.
아마 머지않아 그 안경에 이슬을 닦는 스위퍼가 달리고 예쁜 여인이 비치면
자동으로 윙크를 하게 하는 원격 조절 장치가 달릴 것이며 빚장이를 만나면 검은
안경으로 돌변해 버리는 그런 다목적 안경이 등장하게 될 듯하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편리할수록 선이라는 논리가 너무나 각박하게
지배하고 있음을 본다. 그리하여 뭣인가 새롭고 신기하고 이상한 것이 나오기만
하면 키 위에 콩알 쏠리듯이 뒤질세라 달려 붙는다.
달리지 않는 살빼기 자전거가 나왔다면 몰려가 사놓고 보고, 목욕물이 욕조에
차면 삐이 소리가, 욕조물이 알맞은 온도에 이르면 빼이 소리가 나는 계기가
나왔다면 그에 달려붙는다.
이같은 즉석 반응형 인간이 우리 주변에 날로 늘어가고 있고 이 늘어나는 새
인구층에 부응하여 즉석 상품 개발이 날로 왕성해져 가고 있다.
꽃을 집 안에 피우게 한다 할 때 피어난 결과로서의 꽃만이 아니라 그 꽃을
피우게 하는 과정의 맛을 생략한 것이 된다.
또 물만 넣어 끓이는 즉석 매운탕은 매운탕이라는 결과만을 먹는 것이요, 내 구미
내 개성에 맞게끔 고추장을 더 풀고 덜 풀며, 어떤 양념을 더 넣고 덜 넣는 과정의
묘미를 상실한 것이 된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문화권에서는 통조림이나 인스턴트 식품같이 과정이 무시된
식품은 전혀 인기가 없거나 먹더라도 하급 식품으로 점잖은 사람이 먹을 식품이 못
된 것으로 인식돼 있음은 이 과정주의의 정신 체질 때문일 것이다. 이에 비해
결과만이 선이요, 그 결과를 위한 과정은 짧고 간단하고 없을수록 좋다는 결과주의
사고는 미국, 일본, 한국에서 판친다.
그리하여 모든 인스턴트 식품이나 통조림 식품 등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성
상품, 시계 달린 전등, 라이터 겸용의 만년필이니 하는 복합 상품이 발상되고 또
만들어지고 팔리는 결과주의 시장대를 이루고 있다.
10여 년 전 필자도 그 일원으로 참여했던 한국 히말라야 등반대가 츄렌히말 봉의
첫 등정에 성공했을 때 이탈리아, 일본 등 등반계에서는 속임수 등정이라 하여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 산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체험이 있어 그 코스를 잘
알고 있는 그들인지라, 한국 등반대가 밝힌 그 짧은 일정에 도저히 등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구체적인 코스별 소요 일정을 들어 제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이유는 한국인의 강한 결과주의 의식에서 비롯된 과정,
극소화의 생리를 모른 데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한 크레바스가
나타났을 때 과정을 중요시한 외국 등반대라면 안전을 위해 하루고 사흘이고 시간을
더 잡아 그 크레바스를 우회하여 진행을 한다. 한데 안전이라는 과정 보다 결과에
집념이 강한 한국인은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 크레바스를 뛰어넘는다.
빙벽 위에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설괴가 엉켜 있다면 외국 등반대는 그 지름길
빙벽을 피해 닷새고 엿새고 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안전 코스로 우회하는 것이
상식이다. 나도 직접 곁에서 보았지만 한국 등반대원은 '몇만 년 떨어지지 않고 있던
저 눈덩이가 하필 내가 올라갈 때 떨어질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그 위험한 지름길
빙벽에 도전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같이 우리 한국인은 막중한 위험을 부담하고서라도 과정을 결과 속에
희생시킨다는 결과주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 외국인의 오해였던
것이다.
출세나 돈벌이도 스텝 바이 스텝으로 과정을 밟아 상향하려 않고 세도에
붙는다든지 줄을 탄다든지 또는 한탕 한다든지 벼락부자를 노리는 과정 무시의
상향을 하려 하는 것도 이같은 즉석병의 개연성이랄 것이다.
과외공부에 시달렸던 무렵의 아들 놈이 어느 하루는 아버지를 찾아와 진지하게 또
어렵게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었다.
"아빠는 책도 많이 읽고 해서 아는 것이 많지?"
"그렇다. 뭣이 알고 싶으냐."
"아빠...공부 간단히 하는 방법은 없어?"
한심한 놈이구나고 꿀밤을 주기도 했지만 결과주의 민족의 핏줄을 이어받은
놈으로서 당연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이 선이요, 편리한 것만이 선이라는 즉석병이 기하급수로
우리 사회를 침식해 든다는 것은 정말 세상 살맛나지 않게 하는 무서운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이같은 결과주의를 극단적으로 몰아가면 이 세상 태어나서 결과는 죽을 것이
뻔하므로 그 힘들고 험난하며 이풍진 과정을 거친 필요없이 낳자마자 자살해
버린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한 친구로부터 '상 클로드'라는 상표의 쌈지 담배를
선물받은 일이 있다. 파이프 담배려니 하고 그 비닐 쌈지를 열어 보았더니 담배를
말아 피우게끔 잘라진 얇은 종이 상자가 들어 있었다. 담배를 구할 수 없었던 6.25
사변 직후 잎담배를 썰어서 콘사이스 종이를 찢어 말아 피웠던 바로 그 솜씨를
오랫만에 재연하고 보니 그립기도 하고 청승맞기도 했다.
그 친구의 말로는 프랑스에서는 이 말아 피우는 담배가 유행하고 있으며 특히
젊은 여인들이 루즈 묻은 입술의 침으로 붉게 물들여 만든 담배는 멋이요, 낭만이
되고 있다고 했다.
지금 패션의 발상지인 프랑스 사회의 멋이나 낭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편리하고 간편하고 안이할수록 값어치가 있다는 현대사회의 이 가치 기준에
조그마한 반란을, 그 말아 피우는 담배의 유행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작지만
엄청나게 큰 반란이 아닐 수 없다.
담배를 입에 물고 한모금 빨기만 하면 자동으로 불이 켜지는 그런 신개발 담배를
미국에서 피워 본 일이 있다.
가급적 움직이지 않고 기계나 전자가 대행해 줄수록 값어치가 있다는 가치체계가
지속되어 나간다면 아마 담배 빠는 것까지도 대행해 주는 전자 장치가 마구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고민하다가
자살하는 사람이 병들어 죽는 사람보다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상클로드'의 반란을 새로운 사회 현상으로, 뜻깊은 것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ff
2. 공짜 좋아하는 버릇-덤
구체적으로 내 것이 아니면 그리고 구체적으로 손으로 잡을 수없는 내 것이
아니면 한국인에게는 공것이다. 공공의식이 박약한 한국에서는 공것은 공것이 된다.
요즈음만큼 고학에 혜택받지 못했던 수복 직후의 서울 학생들간에는 손수레에
소금 가마니를 싣고 다니는 소금 고학이 유행했었다. 시민들한테는 '학생
소금장수'로 동정을 받았고, 여대생들한테는 '짠 학생으로'으로 멸시 당했으며, 소금
고학생들끼리는 '소금 인생'으로 자존, 동정과 멸시에서 자구했던 것이다.
나는 그 소금 인생 가운데 하나였다. 그 소금 인생 가운데서도 실패한 소금
인생이었으며, 그 실패한 이유가 나 자신에게 있었기보다 한국인의 한 일상성의
습속이 나의 최초의 빈곤한 인생의 출발을 좌절시킨 것이므로 지금도 뼈저리기만
하다.
손 종을 달랑거리며 소금 수레를 끌고 골목을 누비면 아주머니들이 자루나
바구니를 들고 나온다. '학생 소금장수구먼.'하며 더러는 혀를 차고 동정을 하곤
한다. 한데 이 동정하는 부처님 같은 얼굴은 흥정을 하기 시작하면서 냉혈귀의
얼굴로 돌변해 버린다.
외빼기, 쌍빼기의 부기법
소금맛 좀 본다고 각기 손바닥에 담을 수 있는 최대 분량을 퍼들고 맛을 본 체
한다. 그 맛보기 소금을 모른 새 아는 새에 아주머니들이 들고 온 자루 속에 집어
담는다. 한국인의 '덤' 의식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금 가마니를 도매상에서 떼어 올 때 그 분량은 평승, 곧 깎아서 말로 되어 온
것이다. 한데 아주머니들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고봉으로 얹어서 되어
담는다. 어떤 아주머니는 고봉으로도 성이 차질 않아 손바닥으로 눌러 대기까지
한다.
이렇게 눌러 '덤'이 뒤따른다. 그러고서도 그지없는 이 덤의식은 멎지 않고 '덤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며, 한두어 주먹 더 집어 담는다.
이처럼 맛덤에 눌러덤, 고봉덤, 진짜덤의 4단계 덤을 감당하고 나면 수지가 맞을
턱이 없다.
이 소금 파는 과정의 중첩된 덤은 예부터 관례가 돼 있었던 것같다. 왜냐하면
도매상에서 소금을 떼어 올 때 이덤을 감안, 열 말값에서 한 말 값을 덤빼기라 하여
감해 주는 것이 관례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개성 상인의 전통적 부기법에 '외빼기',
'쌍빼기'라는 한국적인 관습적 부기법이 있었다 한다. 소금, 곡식 같은 됫박으로
되어서 매매하는 물품을 소매상에게 도매할 때는 그 분량의 10분의 1이 덤으로
나갈 것으로 간주, 그 값을 받지 않는 것이 외빼기요, 10분의 2를 덤으로 간주,
계산하는 것이 쌍빼기인 것이다.
외빼기, 쌍빼기라는 상거래 습속이 제도화돼 있었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얼마나 덤
의식이 강하며 그 덤 습속이 보편화돼 있는가의 단적인 증거랄 수가 있겠다.
'소금 인생'으로서의 나도 이 외빼기 혜택을 받았던 것인데도 소매과정에서 너무나
왕성한 '덤'의 범람으로 나의 소금 인생 석달 만에 밑천인 리어카 값마저 날리고
말았던 것이다.
새우젓 장수와 '덤통'의 의미
옛날 시골에 돌아 다니는 새우젓 장수는 지게에다가 양철통 두 개를 엮어 지고
다니게 마련인데, 그 양철통 가운데 하나를 '덤통'으로 불렀던 것이다.
본통에는 양질의 육젓만을 담고 덤통에는 저질의 젓국물만을 담는다. 그리하여
젓을 팔 때 덤통 젓을 덤으로 주어 한국인의 강인하고 끈질긴 덤 의지를 충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곧 상거래에 있어 이 '덤통'을 필연케 한 한국적 상황에 주의하게 된다. 옛말에
사나이가 시원찮고 뼈대가 약하면 '저 놈은 덤통 국물로 만들었나.'하는 외설적인
속담이 있었을 정도로 덤통의 전통은 면면했던 것이다.
건고등어 같은 소금에 절인 염어는 이미 배때기에 새끼 한 마리씩 덤으로 기워
파는데 덤이 하나일 때는 '외동 덤', 두 마리일 때는 '남매 덤', 그리고 그 덤 새끼가
어미만큼 클 때는 '서방 덤'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처럼 공것 좋아하는 한국인의 생리는 덤 말고도 영어나 여느 다른 외국말로
옮길 수 없는 소위 '공짜 명사군'을 이루고 있다. 에누리, 우수리, 떨이, 사구려를
비롯, 이사턱, 승진턱 하는 '턱', 그리고 이름도 아름다운 '인정'도 인정을 빙자하고
요구한 덤명사다. 옛 관료층에서는 '복전'이라는 공짜가 있었는데 결재 서류에 짐 한
짐을 형용하는 '복'자를 써 반려함으로써 요즈음 급행료를 공공연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이 문화적 덤과 공짜 좋아하는 유전 체질이 오늘날 상가의 쇼윈도에 실감 있게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반값 봉사, 폐점 대매출, 몽땅 세일, 얹어 세일, 원단 값만
주세요, 무조건 1천원, 본전이 아깝습니다, 와! 싸다, 그냥 갈 수 없잖아요,
언밸런스'하는 외래어까지 '공짜 명사군'에 도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우리 한국인의 공것 좋아하는 성향은 우리 속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속담에 나타난 '공짜 명사'
'공것이면 어찌 무당 서방뿐이랴' '공것이면 양잿물도 마신다' '공술 한 잔 보고
십리 간다' '공짜라면 당나귀도 잡아먹는다' '공것에 눈도 벌겅 코도 벌겅' 하는 등
적지 않다. 심지어는 '벌도 덤이 있다'는 속담까지 있으니 그지없다.
한 한국인 교포가 미국에서 야구 구경 중 오한이 나기에 때마침 이전에 진료를
받은 일이 있는 미국인 의사가 곁에 있어 상담을 했다. 바로 돌아가 아스피린을
먹고 빨리 자도록 충고를 받았다.
그런 일이 있은지 수일 후 이 의사로부터 상담료로 10달러의 청구서가 왔다.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해서, 역시 지면이 있는 미국인
변호사에게 그 지불 여부를 물었더니 지불하도록 충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
10달러를 보내고 나니 이번에는 바로 그 변호사로부터 10달러의 청구서가 온
것이다. 약간 과장된 이야기이긴 하나 미국에서는 이만한 전문가의 지식이나 정보를
얻는데 공짜라는 것이 없다. 지식과 정보는 공기나 물처럼 공짜로 얻는 것처럼 여긴
한국인과는 원천적으로 다르다.
더러는 구미 사회에 철저한 팁의 생리가 덤이나 공짜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의심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봉사에 대한 정당하고 응분의 보수인 것이다.
영국에서 택시를 타면 대체로 10퍼센트 내외의 팁을 주게끔 돼있다. 관례대로
응분의 10퍼센트를 주면 '댕큐 베리 머치'라고 감사해 하고 응분의 액수보다 좀
적게 주면 '댕큐'만 하고 '베리 머치'를 생략한다고 한다. 액수에 따라 감사도가
짙거나 묽어진다는 사실을 빗대어 현저하게 적게 주면 댕큐의 댕도 생략, 큐라고만
한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있다. 문제는 응분의 액수보다 많이 준다고 감사도가
높아지질 않는다는데 있다.
곧 20퍼센트를 주면 '댕큐 베리 머치'보다 덜 감사한 '머치 어블라이지드(much
obliged)'란 말을 듣게 된다. 이 말에는 그러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질서의
파괴자라는 약간의 경멸의 뜻이 내포된 그런 감사의 말이라는 것이다.
이 팁을 둔 운전사의 감사 농도는 곧 응분 이상의 덤도 거부하고 응분 이하의
에누리도 거부하는 덤과 공짜의 거부 생리를 적절히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구미에선 응분 이상 싫어하고
구미 사람들은 응분보다 비싼 것도 싫어하지만 응분보다 싼 것도 비싼 것 이상
싫어한다. 우리 한국인이 물건을 살 때 가치 기준이 덤과 에누리라면 구미인들의
가치 기준은 그 값의 리즈너블(reason-able) 여부다.
그 물건의 성능, 사용 연한, 외견과 가격이 비싸지도 싸지도 않고 사는 사람
쪽에서 봐 납득이 갈 뿐 아니라 파는 쪽에서도 손해가 가지 않는 값을
리즈너블하다고 한다. 곧 매매 쌍방에서 봐 비용과 효과가 균형을 잡았다고 볼 때
그들은 구매 욕구가 가장 왕성해진다.
국어 사전에 보면 공것, 공짜의 어원을 '공'에 찾고 있다. 응당한 가치나 노력이
결여된 곧 빈 것이라는 뜻일 게다. 한데 '공'에서 비롯된 것일 거라는 이설도 있다.
한자 풀이의 성서랄 "설문"을 보면 '팔'은 배반한다는 뜻이요, '사'는 사의 옛
글씨라 했다. 곧 사를 배반하여 평분한다는 뜻이다. 이를 재산에 투영하면 나의
사유 재산 아닌 공유의 것이 곧 공것이 된다.
구체적으로 내 것이 아니면 그리고 구체적으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내 것이
아니면 한국인에게는 공것이다. 공동의식이 강한 나라에서는 공적인 물도, 공기도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도, 지식도 모두 돈, 곧 가치화하는데 공공의식이
박약한 한국에서는 공것은 공것이 된다.
농경 사회의 정신적 유산
극복해야 할 공것 생리의 뿌리가 아닐 수 없다. 반면에 공것 좋아하게 된
한국인의 문화 생리는 비타산의 인정을 미덕시했던 농경촌락 사회의 정신적
유산이기도 하다. '인정'이란 말이 요즈음 촌지나 금일봉 같은 공짜 명사가 돼
있었다는 사실이 타산적, 경제적 노예가 아니었던 한국적 인간주의의 명쾌한 증명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곧 잘 사는 사람은 못 사는 마을 사람에게, 잘 사는 친척은 못
사는 친척에게 타산하지 않는 재산 유통을 했으며, 따라서 비타산의 가치관이
공것이나 덤을 주고받는 것을 악덕시하지 않았기에 이 같은 문화 생리가 형성
조장됐음직도 하다.
@ff
3. 매사에 서두는 버릇
결과는 과정 끝에 있는 '점'이요, 과정은 그 결과에 이르는 '선'이다. 가급적 선을
생략하거나 단축하거나 비약해서 점을 얻으려는 것이 결과주의다.
우리 한국인은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너무 서두르는 버릇이 있다. 물론 결과를
얻기 위해 일을 한다는 데는 동서양이 다를 것이 없다. 그 결과를 얻는데 거쳐야 할
과정을 성실히 밟는 것을 과정주의라 하고, 그 결과에 너무 집착, 과정을 조금만
밟거나 날리거나 새치기하여 결과를 빨리 얻으려는 것을 결과주의라 한다면 한국
사람은 결과주의편에 속한다.
그래선지 우리 한국인은 무슨 일이든 빨리 할수록 미덕이요, 선이며, 가치를
이룬다. 잠을 빨리 자고, 빨리 일어나며, 심부름을 빨리 하고, 쇠뿔을 단김에 빼는
것은 모르나, 밥도 빨리 먹으라 하고, 공부도 빨리 하라 하며, 일도 빨리 하라고
한다. 빨리 하면 체하고 설치고 날리게 되는 일도 빨리 하라고 한다. 반대로
터키에서는 천천히 할수록 미덕이요, 선이요, 가치를 이룬다. 그래서 그들은
말끝마다 '수하힐리(천천히)! 수하힐리!' 한다. 우리에게 있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이 부덕이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오늘 하지 못하면 내일로 미루는 것이
미덕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우리 한국인의 식사 속도가 가장 빠르게 됐는지도 모른다.
프랑스 사람들의 저녁밥은 2__3시간이 상식이다.
그들은 식사를 한다고 그 과정을 즐기기 위해 그 과정을 최대한으로 연장시키고
연장시킨 그 과정을 농도짙게 즐긴다.
우리 한국 밥상은 아무리 찬이 걸더라도 할아버지, 할머니 아니고는 15분 안에
먹어 치운다. 그토록 빨리 먹지 못하도록 펄펄 끓여 놓은 설렁탕도 후후 불어가며
5분 안에 먹어 치운다. 짜장면이나 라면 따위는 1__2분 안에 먹어버린다.
이렇게 빨리 먹게 된 복합 이유 가운데 하나로서 한국인의 결과의식을 들 수
있다. 밥은 배고픔을 면하거나 배부르기 위해서 먹는다. 밥먹는 행위의 결과가
그것이요, 그 결과를 빨리 얻기 위해서는 가급적 밥먹는 과정을 단축시킬 필요가
있다. 유럽 사람들처럼 밥먹는 과정을 연장시켜 가며 즐기는 프로세스
엔조어(process enjoy) 따위는 의식구조상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밥먹으면서 말한다는 것을 예의에 어긋나고 부덕시했으며, 엄마가 빨리 죽는다는
등의 금기를 붙여 놓기까지 했다. 술마시는 속도가 비상하세 빠른 이유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 한국 사람이 프로세스 엔조이를 하는데 익숙하지 못하고 리설트
엔조이(result enjoy)를 하려는 의식구조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단위 시간 안에 퍼붓는 알코올 농도가 고밀도인 것은 술에 취한다는 결과에
집착하고 또 보다 빨리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과정을 단축하려 할 때 일어나는
필연인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때를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긴 하지만 술마시는 속도는 완만하다.
가급적 술마시는 시간을 연장, 은은히 취해 오르는 그 프로세스를 엔조이하려 한다.
그러기에 술집에 가서 몇 시간 앉아 있더라도 한두 잔이 고작이다. 미국의 대중적인
술집에서 한 잔씩 가져올 때마다 잔당 술값을 계산하는 것은 그렇게 계산하는 것이
그들 프로세스 엔조이 음주 방식에 합리적이고 또 편리하기 때문이다. 리설트
엔조이를 하는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이 미국 술집의 잔당 계산이 불편하고 짜증이
난다. 왜냐하면 홀짝홀짝 빨리 마시고 마시는 쪽쪽 술값을 치러야 하기에 술마시러
술집에 갔는지 술값 계산하러 술집에 갔는지 혼동할 지경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대체로 5달러나 10달러는 아예 테이블에 내놓고 웨이터가 알아서
계산해 가라고 시켜놓고 불러 마시는 것이 한국인의 습관이 돼 있다.
또 외국 사람에 비해 술을 마시고는 술마신 티를 내려는 성향이 강한 것도 이
결과의식의 조치로 풀이해 볼 수가 있다. 바꿔 말하면 후다닥 마시고 젓가락짝을
때리거나, 읊어대거나, 울어버리거나, 통사정을 하거나, 싸우거나, 술상을 엎어
버리거나 하는 주정을 하려 들고 또 아예 주정을 하려고 술을 마시는 성향마저도
없지 않다. 그 때문에 주정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관용한 나라가 됐는지도
모른다.
은은히 취해 오르는 과정을 연장시켜 가며 즐기러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취한다는 결과를 얻기 위해 술을 마시기에 취했다는 그 결과를 자타에게 인정시킬
필요에서 주정을 하게 된다고 볼 수가 있다.
결과는 과정 끝에 있는 '점'이요, 과정은 그 결과에 이르는 '선'이다. 가급적 선을
생략하거나 단축하거나 비약해서 점을 얻으려는 것이 결과주의요, 주정은 바로 이
'점'의 인지인 것이다.
우리 고전소설 가운데 연애 요소가 희박한 것은 연애는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그 '선'을 단축시키거나 소외시켜 '점'으로 직결하려는 의식구조에 부합하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 고전소설 가운데 연애소설하면 "춘향전"을 연상하게 된다.
여타의 소설보다 연애요소가 가장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춘향전"을 굳이
어떤 범주 안에 분류한다면 연애소설의 범주 안에 분류한다면 연애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도령이 남원 광한루에서 산책하다가 그네를 뛰고 있는 춘향이를 보고 연정이
싹튼다. "춘향전"이 연애소설이려면 첫머리에서 싹튼 이연정이 '점'으로써 결실하는
대목은 적어도"춘향전"의 후반부에 있어야 한다. 그러해야만 이 '선', 곧 연애가
개입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한데 "춘향전"은 이 '선'을 가능한 단축하고 가급적
배제하려는 방향으로 꾸려지고 있다.
광한루에서 책방으로 돌아온 이도령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의 그 작은
과정마저도 못 기다려 방자를 데리고 애를 태운다.
해가 어찌 되었느냐. 해 아직 멀었소. 애고 얘 날 죽인다. 채질 급히 해달라고
희화(요임금님 때 천문을 관장했던 벼슬아치들)에게 부탁할까. 해 어찌 되었느냐. 해
아직 멀었소. 애고 얘 날 죽인다. 활로 쏴 달라고 유궁(고대 하의 나라 이름)
예(활을 잘 쏘아 왕위에 오른 사람)에게 찾아갈까. 이제 당신도 염치 없이 해말은
속에 두고 밥재촉하듯 어찌 되었느냐. 아직 멀었소. 어찌 되었느냐. 아직 멀었소.
허허 흉한 일이로다. 그렇게 더디 가면 과부(옛날 해그림자를 쫓았으나 미치지
못하고 죽은 사람)는 고사하고 앉은뱅이도 따라가겠다.
이렇게 해지는 '과정'마저도 못 기다려 초조하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통인, 방자
등불 들려 앞세우고 춘향집으로 직행을 한다. 춘향이 거처하는 별당으로 들어가,
'사랑 사랑이야 무수히 이룬 후에 벗기기'로 든다.
곧 춘향이를 처음 본 그날 밤에 '점'을 얻고 만다. '선'이 개입됐다면 그토록
희화와 예까지 동원하면서까지 초조하게 단축시키려 들었던 한나절에 불과하다.
그렇게 '점'을 초반부에서 얻어버린 "춘향전 "은 어디까지나 수절 소설이지
연애소설이라기에는 구성상 허점이 많다. 이처럼 우리 고전소설에서 연애요소가
증발된 데는 연애가 과정에서 요소로서 결과의식에 배치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한국인은 관광도 결과주의로 한다. 설악산을 목적지로 하여 관광을 할 때
결과, 곧 '점'은 설악산이 된다. 과정주의로 관광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목적지가
같은 설악산일지라도 설악산까지 이르는 과정, 이를테면 관동의 경치라든지 동해의
풍광, 도중에 있는 고적이나 사찰을 열심히 관광을 하면서 간다. 곧 과정관광의
비중을 결과관광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크게 둔다. 이에 비해 설악산이 점으로서
설정된 이상 그에 이르는 선은 짧을수록 없을수록 좋다. 그러기에 그 선을
무화시키기 위해 코를 골고 졸거나 술을 마심으로써 읊거나 뛰거나 하여 선 감각을
둔화시키려 든다. 우리 한국 관광버스를 들여다 보면 십중팔구는 속에서 깡충깡충
뛰고들 있는데 예외가 없다. 과정을 무화시키기 위해 피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셈이다. 그리곤 오로지 설악산이란 결과를 향해 돌진을 한다.
수년 전 미국에서 나오다가 하와이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고 오스트레일리아를
가게 된 적이 있었다. 콴타스란 여객기에 올라타자 기내방송이 나오는데 이 비행기
어디어디가 고장이 나서 다섯 시간 연발을 한다는 것이었다. 보세 지역에서 짜증을
내며 권태로운 다섯 시간을 기다렸다가 올라 탔다.
이 여객기는 남태평양의 풍광 좋은 피지 섬의 난다 국제공항에서 급유를 하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가게 돼 있었다. 예정대로 난다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또 기내
방송이 있었다. 이 비행기의 수압장치에 고장이 생겨 다시 열한 시간이나
연발한다는 것이었다.
하와이에서 다섯 시간 기다렸던 짜증까지 복합되어 홧김에 와이셔츠 자락을 잡아
젖힌 것이 단추 서너 개가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3백여 명 타고 있는 그 여객기 안에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
혼자 뿐이었다. 연발한다는 기내 방송이 끝나기가 바쁘게 그 모든 여객들이 환성을
지르며 기뻐 날뛰는 것이었다.
휘파람을 부는 사람, 만세를 부르는 사람, 지나다니는 스튜어디스를 붙들고 키스를
하는 사람 등등 환희의 수라장이 돼 버린 것이었다.
연발한다는 기내 방송에 나와 나를 제외한 모든 승객간에 정반대의 엇갈린 반응이
순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미쳤거나 나 아닌 다른 승객들이
집단적으로 미쳤거나 어느 한편이 미쳤다고 하지 않고는 이 정반대된 반응이
해석되질 않는다.
그들이 기뻐 날뛴 이유는 간단했다. 일부러라도 거금을 들여 관광하러 왔어야
했던 피지 섬, 열한 시간 연발로 공짜 구경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어찌 아니
기쁘겠는가.
나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누구라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고 또 직업상 꼭 시간
맞추어 갈 일도 없는 나였다. 곧 여행의 '결과'를 제한된 시간에 취득해야 할 아무런
강제적 여건도 없는 터인데 왜 그렇게 '결과'얻는 것이 지연된다 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내야 했던가. 한국인의 결과의식이 무의식 중에 발로된 때문일 것이다.
여행의 결과보다 여행의 과정을 중요시하는 인종과는 순발적인 반응이 이렇게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인이 행락의 결과를 얻으면 그 결과를 배경으로 하여 기념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 관광결과에 너무 집착했기에 발생되는 '결과 사유화'의 소치라고
본다.
@ff
4. 사진찍기 좋아하는 버릇
해수욕장에서 종종 목격하는 일이지만 젊은 아가씨들이 아름다운 해수욕복을
입고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돌아갈 뿐 해수욕을 하지 않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서양 사람들이 나들이하는데 있어 카메라가 있으면 나쁘지는 않지만 필수의
물건은 아니다. 우리 나라의 나들이에 있어 카메라는 필수적인 휴대물이 돼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국의 해외 취업자들이 가장 먼저 사는 것이 자동차라는데,
한국의 해외 취업자들이 가장 먼저 사는 것은 카메라라 한다. 그리하여 해외
취업자들이 고국에 돌아올 때는 어깨에 x자로 가로세로 카메라며 녹음기류를
주렁주렁 매달고 오는 광경은 적이 한국적이다.
라디오에 버금갈 만큼 카메라의 보급률을 가진 나라도 일본과 한국정도라고
들었다.
카메라를 좋아하는 이 공통심리는 명소나 명승지에서의 왕성한 촬영 빈도에서도
완연하다. 구경하러 명소에 간다기보다 사진 찍기 위해 간다 할 만큼 사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관광을 간다는 이 심리에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구미 사람들이 5퍼센트를 차지한다면 한국 사람은 30__50퍼센트 이상 차지할지도
모른다. 명소에 이르면 그 관찰한 대상이나 감상할 풍경을 보다 상세하게 진지하게
보고 느끼려 하기 이전에 우선 도달한 그 목적지를 배경으로 하여 사진부터 찍는다.
사진만 찍으면 목적의 거의를 완성한 것이 되기에 바삐 다른 대상 또 대상으로
이동해 간다. 현장에 이르러서의 관찰이나 감상은 그 현장을 담은 사진 속에 수렴돼
버린 것으로 여기기에 그다지 대단한 요소가 못 된다.
곧 '선'을 버리고 '점'만 취하면 된다.
여름 해수욕장에서 종종 목격하는 일이지만 일단의 젊은 아가씨들이 아름다운
해수욕복을 마련해 입고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돌아갈 뿐 물 속에 들어가
해수욕을 하지 않는 경우를 이따금 볼 수 있다. 바다에 왔다는 결과가 사진을 찍는
것으로 수렴되기에 이같은 이상한 해수욕이 저항없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은 어디를 가든 과정을 즐긴다기보다 사진으로 그 결과를 담아 오기 위한
충동이 선행된다.
내가 그 명소에 갔었다는 결과를 그 아름다운, 또는 유명한 결과를 '사유화'하려는
심리작용의 소치이다.
카메라라는 이기가 없었을 때도 우리 한국인에게는 이 관광 결과의 사유화 심리가
왕성했었다.
이를테면 풍광 좋은 계곡의 암석마다 새겨진 우리 선조들의 이름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왕성하게 암석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
바위에 이름을 새겨 둠으로써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 싶은 이름(명)에의
집착성향도 그 복합요인일 수 있으나 그보다 그 좋은 풍광에 자신의 이름을
명기함으로써 그 관광결과를 '사유화'하려는 한국인의 심성에서 이름의 암각이
보편화됐다고 본다. 더러는 낙서심리로도 이를 풀이해 볼 수 있으나 서양 사람들의
왕성한 낙서심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무슨 글귀를 쓸 뿐 이름을 쓴다는 일은 희귀하다. 서양의
낙서는 사람의 주체를 나타내지 않음으로써 '사'를 무화시킨다. 희랍 수니온 갑의
폐허에 가면 희랍에 반했던 영국 시인 바이런이 남긴 낙서를 관광 안내인이 보여
준다.
그 낙서는 간단한 시구일 뿐 '바이런'이라는 이름이 없다. 누군가가 지적해 주지
않으면 바이런의 낙서인지 여부를 모르는 몰사의 낙서인 것이다.
예루살렘의 최후의 만찬을 베풀었다던 성지의 석벽에도 바이런의 낙서가 있는데
그 역시 글귀일 뿐 이름이 없었다.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에 서 있는 워싱턴 탑을 안에서 오르다 보면 그 탑 내부의
벽에 거기에 오르내린 숱한 사람들의 낙서를 볼 수 있다.
눈여겨 보면 한국 사람들의 낙서도 더러 볼 수 있는데 이름 석 자를 적고 있는데
예외가 없다.
곧 이 명소에 왔었다는 증명 심리뿐만 아니라 이 명소를 사유화하려는 한국인의
통성발로가 구미의 명소까지 뻗어가고 있음을 보았다. 곧 결과주의의 국제화랄
것이다.
우리 옛 시가문화를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도 이 한국인의 사유화 심성이 관건이
되고 있다고 본다.
옛 우리 선조들이 읊은 시가의 대부분이 자연이나 풍광에 야기된 정서를 시에
동화시킴으로써 그것을 사유화한다. 그것이 시가라는 형태로 나의 것이 된다.
그러기에 옛 문인은 들르는 명소 명승마다 시를 남겼다. 현대의 한국인이 들르는
명소 명승마다 사진을 찍어 관광결과를 사유하듯이 시를 지어 관광결과를
사유화했다.
이를테면 전국을 방랑했던 저항시인 김시습은 관서 지방의 명소를 구경하면서
곳곳마다 1백 46수의 시를 남겼고, 관동 지방에 놀면서 1백 35곳에 들러 1백
35수의 시를, 호남에 놀면서 88수의 시를 남기고 있다. 비단 김시습뿐만 아니라
송강 정철의 "관동 별곡", "성산별곡"이며 율곡 이이의 "구산별곡"이며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이며 이 명소마다 자신의 정서를 동화시킴으로써 사유화하고 있으며 이
경관의 사유화는 한국 시가형성의 한 유형을 이루고 있다 할 것이다.
곧 한국인에게는 사유화의 파토스가 유별나게 강하다.
미국 대학교수들의 서재에 들를 때마다 느끼는 공통된 느낌으로 장서가 너무
빈약하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대학에 가 1__2년 있는 한국인 연구 교수들의
책장이 그 본고장에서 10여 년씩 있는 현지 교수들의 책장이 그 본고장에서
10여년씩 있는 현지 교수들의 책장보다는 대체로 풍부한 편이었다. 교수들 뿐만
아니라 여느 지식층 가정에 들러봐도 한국의 지식층 가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장서량이 적다.
그렇다고 미국의 교수들이나 지식층, 학생들이 한국의 교수나 지식층, 학생들보다
책을 덜 읽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장서량은 상대적으로 적다
할지라도 그들의 독서량은 상대적으로 크다. 얼핏 보기에 장서량과 독서량은 비례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주로 도서관이나 연구실의 장서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곧 그들은 한국 사람처럼 장서를 사유화하지 않고 공유화한 것을 왕성히
사용한다는 그런 동적인 생각으로 생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서의 사유화는
사장할 우려가 많지만 장서의 공유화는 지식흡수가 왕성하다. 비단 도서관 장서의
이용이 아니더라도 미국 교수나 학생들은 필요한 서적을 사서 그것으로부터 지식을
흡수하면 다시 팔아 버린다. 그러기에 미국 대학의 게시판이나 대학신문에는
자기에게 필요 없는 서적판매광고나 필요로 하는 서적을 구한다는 광고가 굉장히
많다. 더러는 다 보고난 책을 늘어 놓고 파는 학생도 있다.
사유화의 파토스가 강한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학자들 집은 집이 아니라 도서관이다.' 라고 한 서울에 사는 한 미국인 외교관의
말을 따지고 보면 부러워하고 경탄하는 말이라기보다 사유화의 파토스가 미미한
그들인 것을 감안하면 약간 비꼬는 저의가 담긴 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책에서 내용을 흡수한다는 것은 과정의 '선' 행위요, 일단 책을 갖추고 보는 것은
결과부터 갖추어 놓는 '점' 행위로 이 장서의 차이도 결과주의로 귀착할 수가 있다.
@ff
5. 형식갖추기를 좋아하는 버릇
학교를 나오면 책과 멀어진다는 점을 들고 있는데 그것은 졸업장이 결과요,
결과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결과의식의 소치인 것이다. 과정주의 사회에서는
졸업장이나 학위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내용보다 우선 결과를 얻어 놓고 보려는 심성이 한국인을 형식주의로 만들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곧 형식주의의 어머니가 결과의식인 것이다.
한국인의 고급품 지향이나 외래품 지향도 바로 이 결과의식을 온상으로 한
형식주의의 소산인 것이다. 고급품에는 값이 비싼 만큼 그 고급품에 따라 다니는
스테이터스 이미지가 있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연봉 10만 달러 이상 벌이가 있는
사람들이 로렉스 시계를 찬다든가.... 한데 우리 한국 사람은 그만한 스테이터스
이미지를 얻기 위한 과정은 거두절미하고 그 결과만을 잘라 차지하려 한다. 곧 그
고급품이 지니고 있는 스테이터스 이미지에 자기를 동일화시킨다.
학력주의가 별나게 강세를 부리고 교육열이 과열된 것은 교양을 높이거나 학술의
발전을 위한다는 실질적인 과정의식에서 빚어진 사회 현상이 아니라 보다 높은
졸업장, 보다 좋은 졸업장이란 결과지향에서 빚어진 형식주의 현상이다. 보다 좋은
졸업장, 보다 높은 학위만 얻으면 그 후의 계속적인 연구나 업적 없이도 그
결과만으로도 여생을 우대받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바로 우리 사회인 것이다. 물론
그 같은 좋은 졸업장이나 학위에는 그에 부응하는 질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 질이
효용보다 형식적인 명에 보다 집착을 한다.
그러기에 우리 한국 삶의 통폐로 학교를 나오면 책과 멀어진다는 점을 들고 있는
데 그것은 졸업장이 결과요, 결과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결과의식의 소치인 것이다.
과정주의 사회에서는 졸업장이나 학위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러기에 천하없는
좋은 졸업장이나 학위를 얻었다 해도 적극적인 업적 없이는 의미가 없다.
이 세상에서 부모들의 자식을 위한 교육 투자가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는 것이 우리나라다. 이처럼 인생의 목적을 오로지 자녀들의 교육에 두고
아낌없이 투자하는 우리 한국사람인데도 투자에 비해 그 보상이 가장 형편없는 것이
우리나라다. 왜냐하면 졸업장만 얻으면 끝나 버리는 결과주의이기 때문에 그 터득한
지식을 발전적으로 창조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ff
6. 기다리지 못하는 버릇
거리를 걷는 그들의 걸음새가 안단테의 황새 걸음이라면 한국인의 걸음걸이는
비바체의 뱁새걸음이다.
우리 한국인이 열을 서서 기다리지 못하고 열 서는 것을 포기하거나
새치기하거나, 질서를 문란케 하는 통성은 바로 결과주의가 그 심리적 원흉 가운데
하나랄 수 있다. 줄서서 기다려 질서를 지킨다는 것은 과정이요, 표를 사거나 차를
잡아 탄다는 것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점'을 빨리 얻고자 '선'을 못 기다리기에
공중질서가 엉망이 되곤 한다.
시애틀 국제공항에서 미국 국내항공인 아메리칸 에어라인을 잡아타고 그날 밤까지
워싱턴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었다.
시애틀 공항은 구내가 복잡하기로 소문나 있으며 특히 구내 전동차의
안내표지판이 없어 초행자는 당황하기 마련이다. 시행착오의 실험이라도 당하는
쥐처럼 왔다갔다 하다가 갈아탈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데스크를 찾아간 것은
출발시간 5분 전이었다. 한데 30여 명의 손님들이 탑승 수속을 밟고자 줄지어 서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잡아먹는 시간이 빨라야 1분 남짓인데, 이러다가는 비행기를
놓치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냥 초조해졌다.
줄을 벗어나 데스크 앞에 가서 항공사 여직원에게 시계를 가리키며 초조해진
사연을 말하자 안경너머로 바라보며 태연스레 기다리면 된다고 말할 뿐이었다.
되돌아가 줄을 서 있는데 한결 앞줄에 서 있던, 아무도 일본 사람만 같은 동양
사람이 데스크 앞에 다가가 뭐라고 물었다. 이 여직원, 안경 너머로 나에게 하듯 한
동작을 짓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그 사람도 나만큼 초조하여 나오 똑같은 질문을
했던 것 같다. 초조해 하는 것은 동양 사람뿐인 것 같았다.
같은 항공기 편으로 워싱턴에 가게 돼 있는 바로 앞에 서있는 미국 사람은 발로
장단을 맞추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일부러 '출발 시간이 넘었는데도 불안하지 않는가.'고 물어 봤다. 이 친구는 두
손바닥을 펴보이면서 그것은 우리의 사정이 아니라 저들(항공사)의 사정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중부 오클라호머에서도 일요일 아침 식사를 파는 집이 한 집밖에 없어서 셀프
서비스의 밥상을 들고 30분 기다리다가 어쩐지 거지만 같은 궁상맞은 생각이 들어
이를 포기, 아침을 굶은 적도 있다.
디즈니랜드에 근간에 새로 생긴 서부 시대의 철도여행 코스가 인기를 독점하고
있었다. 30분 기다렸는데도 앞으로 한 시간 남짓 기다려야만 할 것 같아 포기하기도
했다.
휴일의 디즈니랜드 인기 코스는 대체로 한두 시간 기다리는 것이 상식처럼 돼
있다. 그러기에 입구마다 기자를 너댓개 붙여 놓은 것 같은 지루한 철책 길이
마련돼 있다. 디즈니랜드는 미국 생활에 길들지 않은 아이들로 하여금 기다리는
훈련을 시키는데, 훌륭한 교육장이란 한국 친지의 귀띔이 실감이 났다.
오일 쇼크 때, 미국의 서부에서는 평균 10__15시간 열지어 서 있어야만 휘발유 한
초롱 살 수 있는 그런 며칠 동안이 있었다 한다.
이 대열에 한국 사람이 끼어 서 있는 것을 본 일이 없다고 들었다.
한국인 경영의 주유소에서 뒷구멍으로 얻기도 했지만, 차라리 며칠 차를 못
굴리고 말지 하루의 전부를 기다리는 데 쓸 만큼 정신적으로 느긋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유럽도 예외는 아니다. 파리의 지하철도는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을 구경하려면 대단한 인내력이 필요한 것이다. 70명쯤 타는 배로
안내해 주는데, 희망자가 너무 많아 세 시간은 열지어 서서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사실 기다리는데 체질화되지 않고는 미국이나 유럽의 도시 생활은 불가능하다.
스타인 벡의 "미국인론" 가운데 미국의 도시인들은 그들의 일생에 있어 잠자지
않는 시간의 3분의 1을 기다리는데 낭비한다고 지적하고 미국 인생의 허점을
예리하게 파헤쳐 놓기도 했다.
반드시 기다린다는 것과는 달리 구미인들은 대체로 아무일 하지 않고 가만히 안자
있는데도 도사가 다 돼 있다. 뉴욕 5번가의 소공원을 오전 10시쯤 지나갈 일이
있었다. 그 공원의 한 벤치에 코트 빛깔이 원색으로 요란스런 한 중년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가만히 한 자리에 있을 수 있는 내력에 질려 버렸다. 그러기에
구미의 공원들은 대체로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하면 아마 발광을 하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의 공원은 온통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분자들의 브라운 운동으로
법석대기 마련이다.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에 보면 중국의 공원에서도 하루종일 또는 며칠 동안을
어항 속의 고기 노는 것, 조롱 속의 새 노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적혀 있기도 하다.
한국의 술집하면 시끄럽다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미국의 바에 가면 조용하다는
것이 상식이다. 제각기 혼자 와서 술잔 하나 들고 그저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기
때문이다.
비단 아무 일 하지 않고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속성과 연관된 속성으로
구미인들의 걸음걸이가 대체로 느리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거리를 걷는 그들의
걸음새는 안단테의 황새 걸음이라면 한국인의 걸음걸이는 비바체의 뱁새 걸음이다.
구미에서 한국 사람을 식별하는 방법으로 피부색과 키가 작다는 것을 드는데 사실
키가 작다는 것은 중, 북유럽에서나 해당되는 기준일 뿐 그 밖의 나라들에서는 판단
기준이 못 된다. 오히려 키보다는 걸음새의 속도로 식별할 수가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궁인 윈저 성을 들렀을 때, 들어가서는 안 되게끔 된 정원에
히피 스타일의 미국 청년이 들어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를 멀리서 본 경비 순경이 이 범법자에게 접근하는데 마치 산보라도 즐기듯한
태평스런 걸음새로 다가가는 모습은 적이 목가적이었다. 저렇게 걷다가 히피가
도망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오히려 그것을 보는 한국인이 초조해지는 그런
걸음새였다.
인도 캘커타에서 네팔 접경까지 수일 동안의 기차 여행을 한 일이 있다. 기차가
정거장에 멈추면 승객들이 쏟아져 나와 그 인근에 흩어져 차를 끓여 마신다.
더러는 깡통을 들고 증기 기관차 옆에 장사진을 치곤 한다.
그럼 기관사는 증기기관 속에서 덥혀진 물을 호스로 뽑아 이들에게 배급을 한다. 그
물로 느긋하게 차를 타 마신 연후에 기차는 떠난다. 그리하여 목적지에 닿았을 때는
보통 하루나 이틀씩 연착하는 것이 상식이 돼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세상의 눈의 초점이 돼 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정부 관리가 소련의 원조로
지었다는 발전소를 구경시켜 준 일이 있다.
규모는 컸으나 먼지가 자옥하고 거미줄이 쳐 있곤 하여 왜 가동하지 않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발전 터빈의 부속품 하나를 소련이 끼워주질 않아 3년째 그냥
두고 있다 했다. 그까짓 3년쯤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아랍 지방에서는 겨우 교각 서너 개의 짧은 다리 하나 놓는 데도 5개년 계획으로
놓고 그나마도 2차 계획으로 넘어가서 완성시키는 경우가 많다 한다.
중동에 한국건설용역이 대거 진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이 만만디의 시간
감각에서 볼 때 한국인의 동작이나 작업이 제트식 초스피드로 인식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멘에 이주한 유태인은 2천년 가까이 외부의 문명 세계와 격리된 체 살아 왔다.
그런데 어느 날 풍문에 팔레스티나의 땅에 자기네의 조국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2천년 동안 기다렸던 그 약속이 실현됐음을 안 그 순간에 4만 3천
명의 유태인들은 손에 들 수 있는 생활 도구만을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부동산이나 집이 되는 가산은 그 자리에 버려 둔 채.... 약속된 땅, 그들의 조국을
향해 남부여대하고 암벽을 넘고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군용 수송기를 전세내어 이들을 조국까지
운반, 사상 최초의 공수에 의한 민족대이동이 이뤄진 것이었다. 그들은 이 하늘의
민족대이동을 두고 '성서에 쓰여 있는 것처럼 바람의 날개를 타고 약속의 땅에
돌아온 것이다.'고 합리화했다 한다. 정류장에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버스가
당도하니까 타고 가는 식으로 2천 년을 그런 자세로 기다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오한이 날 정도로 오싹한 기다림의 체질이다.
왜 이 세상의 대부분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잘도 기다리고 또 느긋하고
만만디인데 우리 한국 사람만은 못 기다리고 초조하고 각박한 것일까. 결과주의가
이렇게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ff
7. 매사에 표변하는 버릇
설악산에 폭설이 왔다는 뉴스를 듣다가 갑자기 구봉서의 코미디가 나오는가 하면
"함께 춤을 추어요"하는 노래가 나온다.
어느 일요일, 집에 들어박혀 아이들이 노는 것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일부러
보려 했던 것이 아니라 유심히 봐주지 않을 수 없게끔, 노는데 일정한 계속성을
지녔기에 주의를 끌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야구한다고 글러브와 방망이를 갖고 나갔던 놈이 30분도 못 되어 돌아왔다.
친구를 불러내는 시간 또 오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겨우 15분도 못 놀았다는 계산이
된다. 돌아와서는 모형만들기 공작을 한다.
그 역시 15분 남짓하고는 턱을 괴고 엎어져 텔레비전을 본다. 대체로 어느 한
행동을 두고 15분 이상을 지속한다는 법이 없이 잘도 표변했다. 이것을 눈여겨 보고
나니 어느 한 소문난 과외 선생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왜 자기가 인기가 있고 또
과외 공부에 효과를 올리고 있느냐의 비결은 대체로 지속성이 없는 요즈음 아이들의
보편적 개연성을 감안, 공부시키는 내용을 15분 혹은 15분의 배수인 30분 단위로
바꿔 가르친다는 것이다. 15분 단절의 만화경 교육이 요즈음 아이들의 체질에 맞고
권태를 덜어주며 의욕을 돋운다는 것이 된다.
이 15분주의 촉매제로서 60년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 프로가 15분 단위로 편성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 2단위로써
30분, 4단위로써 1시간, 이같은 단위로 모자이크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15분간
뉴스를 시청하고 30분짜리 홈 드라마를 본다.
설악산에 폭설이 왔다는 뉴스를 듣다가 갑자기 구봉서의 코미디가 나오는가 하면
"함께 춤을 추어요" 하는 노래가 나온다.
이같은 15분주의의 구별 감각과 구별 능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텔레비전이라는
맹물과 접할 수가 있게 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15분마다 단절되어 내용이 백팔십도
전환하는 체내 시계가 생리적으로 체질화되었다 할 것이다.
하지만 쿼터리즘(15분주의)이 체질화된 원천적인 이유는 한국인이 과정에
성숙하지 못하고 결과에 집착, 그 결과를 빨리 얻으려는 한국인의 의식구조도
공모하고 있다고 본다.
이같이 15분 간격의 체내 시간을 속에 품고 있는 현대인은 활자를 읽는데도 15분
벽을 넘는 것에는 지루한 감을 갖게 되었다.
요즈음 짤막한 에세이류가 번지고 또 많이 읽히는 이유도 이 15분주의 때문이며
단편소설도 자꾸만 짧아지는 성향이 있다 한다.
"전쟁과 평화"나 "상록수" 같은 대하소설을 읽는 독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이다. 신문의 독자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이 평균적으로 조간신문을
접하는 시간은 15분 전후라 한다.
잡지도 2백자 원고지 1백 메가 넘는 대논문을 게재한다는 것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길어야 15분 안에 독파될 수 있는 20매 안팎인 것으로 메워지고 있음을
본다.
활자뿐 아니라 영화도 그렇다. 영화산업이 사양길을 걷는 이유도 텔레비전의
보급을 들고 있으나 그 밖의 이유로써 현대인이 두 시간 남짓한 길이의 영화를 봐낼
시간적 지속의 감상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짤막하게
하여 동시 두 편 상영인 동시 세 편 이상 상영이 유행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에
있다고 본다.
비단 문화 분야 뿐만 아니라 오락 분야도 이 쿼터리즘 전염이 심하다. 볼링도 한
사람 게임당 15분이며, 게임 이론에서 아무리 흥미 있는 것이라도 15분 넘기지 않는
것이 상식이라 한다. 유원지의 전문가들에 의하면 회전 목마니 비행기니 각종 타는
놀이의 소요 시간은 5분 이상 경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짧게 단절한 것이 아니라 5분 넘으면 권태를 느끼기 때문이라 한다.
화투놀이도 옛날에는 '육백'이라 하여 한 게임 끝나는데 길어지면 30분도 더
걸렸는데, 요즈음은 '뻥'이라 하여 5분도 안 걸린다. 5분도 못참아 '섯다'로 승부를
낸다. 마작도 요즈음은 단판으로 승부를 내는 게 상식이 돼 있다 한다. 비지니스
세계로부터 레저 세계에 이르기까지 현대는 쿼터리즘 일변도다.
이런 시대이기에 시간적인 지속을 지닌 사람이 예의적인 위인으로서 우러름을
받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수년 전 치체스타 경이 혼자서 요트로 세계일 주를
감행했다는 것은 분명히 위대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 오랜 '시간'을
감내했다는 사실에 대한 무언의 감탄이 내포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대 우리
사회는 시간적 지속력이 일반적으로 저하할수록 가치를 부여하는 이상한 세상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촌단된 시간을 각박하게 산다는 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다 사라지는
것들 뿐이요, 결과적으로는 소득도 없고 또 시간의 충실도란 의미의 인생에서
보람도 못 얻고 마는 그런 낭비의 계속인 것이다. 결국 인생은 가급적 잘게 짤라
소비해 버리는 것이다. 인생을 위해 저축하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옛 공장들은
불상 하나 만드는데 10년 공들이고 10년 조각을 한다지 않다던가.
10년 후를 못 바라볼지언정 최소한도 1년이나 2년에 걸치는 지속된 틀이 현대의
우리에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현대를 지혜롭게 살아내는 지성의 노력 가운데
하나로서 이 쿼터리즘의 극복이 그 무엇보다 선행돼야 할 줄 안다.
@ff
8. 신용을 지키지 못하는 버릇
한국 사람은 신기한 것을 보면 맨 먼저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 한다. 만져봐야만이
그 존재가치가 확인되는 이 피부감촉적 사고의 무의식적인 발동 때문이다.
뉴욕의 관광 코스에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인 영국 성공회 사원이 꼭 끼어
있다. 이 사원에 대한 관광안내서를 보면 이 사원이 착공된 것 1775년으로 돼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영조 말년으로 그 몇 년 전에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살해된
해이다.
그런데 그때 착공했다는 그 사원이 아직도 준공하질 않고 지금도 짓고 있다고
안내서에 적혀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은 지가 언제인데 지금까지 준공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감각으로는 도저히 가늠이 가지 않는다.
1979년에 우연히 그 사원 앞을 지나다가 그것이 사실인가 알고 싶어 한 번
들렀던 일이 있다. 2__3백 명의 인부들이 발판을 만들어 놓고 공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 감독이 현장에 있기에 물어 봤다. 이 사원 언제 준공할 작정인가고.... 이
감독은 친절하게 설계도까지 보여주는데, 아직도 지을 공간이 어마어마하게 남아
있었다.
'본 계획대로 보면 아직도 80년이 남았다. 한데 내가 설계 변경을 해서 50년 후면
준공하도록 했다.'면서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해 보이는 것이었다.
구미의 사원이나 공공건물들은 우리나라 건물처럼 다 지어서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어가면서, 쓰면서, 또 쓰면서 지어간다.
곧 '점(결과)'을 '선(과정)' 속에 매몰시켜 버린다. 그리고서 그 과정을 확고하게
하여 날림이나 부실을 배제, 하나의 확고한 자연물처럼 만든다. 유럽의 오랜
사원들이 어느 부분은 고딕형이요, 어느 부분은 코린트형, 어느 부분은
로마네스크형으로 복합돼 있는 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지어졌기에 일어난 필연이다.
따라서 과정주의는 날림이나 부실이 용납되지 않으며 결국 위험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결과를 빨리 얻어 누리려는 결과주의가 부실과 날림을 불러들이고 또
위험을 자초하게 한다.
우리 한국인에게 신용이 결핍된 것은 신용이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이라
함이지 결과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곧 신용을 지키지만 이런 강요된 신용은
자발적인 신용에 비겨 악질일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에 들렀을 때, 나는 여느 서민과 가깝게 접해 보려고 세인트 조지 호텔에
이웃한 유태인 경영의 세탁소에 민박을 했다. 보름 남짓 민박하는 동안 나는
한국인과 다른 유태인의 사고나 행동을 적지 않게 관찰할 수가 있었다.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일로 신용을 둔 한국인과 유태인의 차이였다. 이 세탁소에
단골 손님 아닌 낯선 사람이 오면 유태인 주인은 반드시 다음과 같이 손님에게
물었던 것이다. '혹시 저 앞에 있는 세탁소에 갈 것을 잘못 알고 이리 온 것이
아니냐.'고 그 세탁소의 길 건너 블록에 다른 세탁소 하나가 있었으며 이 유태인은
그 앞집 세탁소 손님인가 아닌가를 반드시 확인한 다음 세탁물을 받았던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비록 앞집에 갈 손님이 잘못 알고 찾아 왔을지라도 맞아서 돈을
벌면 욀 일을 굳이 확인해서 보낼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의 질문은 곧
한국적인 발상을 대변한 것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저 사람도 똑같이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오. 사람이 태어날
때는 그 사람이 평생동안 일할 분량이 정해져 있으며 신으로부터 주어진 일을 너무
빨리 끝내 버리면 그만큼 빨리 죽게 됩니다."
대형 공장에서 드라이 클리닝을 해오는 이 세탁물은 때가 잘 벗겨지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 유태인 주인은 깨끗하게 세탁되지 못했다고 판단되면 손님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 굳이 돈을 주려 하면 반액만을 받곤 했던 것이다.
혹시 이 주인이 출타 중에 이 흠이 있다고 판단된 세탁물을 찾아갔을 경우는
전표에 적힌 주소를 자전거로 찾아 일부러 돈을 되돌려 준다고 했다. 손에
구체적으로 잡힌 눈앞의 돈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신용이 유태인에게는
그만큼 소중했던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이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 일시성의 돈, 곧 결과가 손아귀에
들어와 있지 않지만 영속성의 신용, 곧 과정 중 어느 것이 이 유태인의 장사를
번창하게 할 것인가는 자명한 일이다.
보이지 않는 신용을 기업이나 장사의 우선된 자본으로 삼는 사고방식은 비단
유태인만의 것은 아니다. 수년 전 나는 대만에서 발행되는 "중앙일보"에서 대만에
있는 각종 고문헌에 대한 정보를 해외에 서비스한다는 학생서국이라는 책방 광고를
보았다.
당, 송, 명대에 중국 사람이 한조에 관해 쓴 옛 기록 수십 종의 문헌들이 지금
대만의 각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지 없는지 이 학생서국에 물었던 것이다.
나는 그 문헌의 유무를 확인한 다음 있다면 복사해 올 심산이었다. 한데 약 석 달
후에 꽤 두터운 국제 소포 하나가 나에게 배달된 것이다. 펴보았더니 내가 있나
없나만을 알아봐 달랬던 이 옛 문헌들을 모조리 발굴, 복사해서 보내준 것이었다.
복사 대금이 280달러라는 간략한 편지와 더불어.... 물론 언제까지 어떻게 보내
달라는 내용도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복사대금을 내가 떼어 먹고 보내지 않아도 그쪽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어디까지나 한국에 사는 한 자연인으로서 문의한 것일 뿐 그
학생서국이 인정하는 어떤 기관이나 기구의 보증을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외국에 사는 한 자연인에게 아무런 보증도 없이 문헌발굴이라는 힘든 노력을 무료로
봉사하고 거기에 280달러라는 재력을 아낌없이 쓸 수 있는 이 정신적 자질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생서국이란 대만대학 앞에 있는 겨우 너댓 평의 공간을 가진
조그마한 책방으로 그 소규모의 기업에서 280달러라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나는 이
대담한 신용에 매혹을 느끼고 이 책방과 거래를 계속, 무려 1만 달러 어치의 한국
관계, 중국 관계 옛 문헌을 들여왔는데 수천 달러가 미불인 채 밀리길 여러 번
했으나 지불독촉 한 번 받은 일이 없었다.
한국의 기업이나 장사가 이만큼 신용을 폭넓게 또 자연스레 활용할 수 있을까는
의문이 가고도 남는다.
이것은 신용에 숙달하고 미숙하고 하는 의식구조의 차원이 아닌가 싶다. 곧 외국
사람에 비해 한국인은 신용에 숙달하지 못하며 이것은 한국 기업의 신장과 침체를
좌우시키는 엄청난 인자라고 본다. 왜 한국인은 이처럼 신용에 미숙할까. 결과주의
이외에 또다른 이유를 들라면 결과주의에서 발상된 피부감촉적 사고를 들 수 있다.
피부감촉적 사고란 어떤 뭣이건 구체적으로 손에 만져지는 결과에 보다 가치를 두는
사고다. 바꿔 말하면 만져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일수록 가치를 두려고 하지 않는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람은 신기한 것을 보면 맨 먼저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 한다. 만져봐야만이
그 존재가치가 확인되는 이 피부감촉적 사고의 무의식적인 발동 때문이다.
옷감을 사거나 그릇 하나를 사거나 한국 사람은 예외없이 만져보고 산다.
관광지나 고적지에 가면 문화의 손이 닿는 부문에는 예외없이 사람의 손때가
반지르르한 데 예외가 없다. 눈으로 복 감상해도 될 것을 한국 사람은 손으로
만져봐야만이 성이 풀린다.
플라스틱 인생이란 말도 있듯이 미국 사회는 크레디트 카드만으로 모든 물건도
사고 밥도 먹으며 비행기도 탄다. 곧 현금이 필요없다.
한데, 미국에 이민가 사는 장년, 노년층의 한국인은 대부분이 크레디트 카드의
사용을 거부한다고 들었다. 왜냐하면 생리적으로 맞지 않고, 돈쓰는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작년 가을 미국을 여행하면서 이 한국인의 플라스틱 인생 거부 현상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현상도 구체적으로 돈을 만지고 헤아리고
씀으로써만이 돈쓴 맛이나 가치를 얻는 피부감촉적 사고 때문으로 알고 있다.
한국인에게 강한 피부감촉적 사고에서는 손에 쥐어지지도 않고 또 보이지도 않는
신용이 불안하고 가치를 형성하기 힘들다. 그러기에 신용에 미숙할 수밖에 없다.
흔히들 유럽 사람들은 시각이 발달하고 한국 사람들은 촉각이 발달했다고 한다.
시각의 발달은 추상적 사고를 발달시키고 촉각의 발달은 구상적 사고를
발달시킨다고도 한다. 구상적인 것에 가치를 편중시키는 한국인이기에 항상 눈앞에
있는 것에만 가치를 두고 사리를 먼 눈으로 보지 못한다. 눈앞에 닥친 일은 빨리
현명하게 잘 처리하지만 조금 멀리 있는 것에 대한 사려나 배려가 부족하다. 신용은
추상적인 것이면서 미래의 일이기에 한국인의 가치권이나 관심권이나 사려권 밖에
있는 것이 된다.
@ff
9. 눈앞만 보는 버릇
앞을 못보고 또 말초적인 이같은 한국인의 성향에는 여러가지 복합 이유가
있겠지만 맨 먼저 만성결과주의의 병인으로서 한국의 풍토에 지속성이 없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한치 눈앞을 못 본다는 말도 있듯이 한국인의 결점으로 바로 눈앞의 일만 보고
행동한다든지 무슨 일을 할 때 먼 앞을 보지 않고 우선 편리한 대로 오솔길을 찾는
버릇이 곧잘 지적되고 있다.
런던에서 양말 하나 사고 싶어 조그마한 가게에 들어간 일이 있었다. 진열장 속에
쌓여 있는 양말 가운데 맘에 드는 회색 양말 하나를 손가락질 했다. 나는
한국에서처럼 그 점원 아가씨가 그 지적한 양말을 꺼내 줄 것으로만 알았다. 한데
내 기내와는 달리 이 아가씨 꺼내 줄 생각은 않고, "발 사이즈가 얼마입니까."고
묻는 것이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면 어느 한 사람 예외없이 양말을
위한 자기의 발 사이즈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양말을 위한 발 사이즈
단위 자체도 없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느낀 것이 있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아무리 빛깔이 좋다 해도 발에 맞지 않으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양말을
고를 때는 회색이든 갈색이든 그 빛깔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발크기를 말해야 옳다.
아마 이 아가씨는 물건 사는 순서도 모르고 물건 사려는 사람 처음 보겠다고 속으로
손가락질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한국인은 대체로 무슨 물건을 선택할
때 실용성이나 실용가치보다 색상이나 모양 같은 감각 적인 것이 선택 순서에서
앞서지 않나 싶다. 바꿔 말하면 빛깔이나 모양이나 디자인을 먼저 보고 그것에
합당하면 사이즈라든지 또는 실용가치를 다음에 따진다. 이성보다 감각이 앞서고
실용보다 형식이 앞서며 훗날 생각보다 눈앞의 생각을 앞세운다.
도시계획이나 신흥주택지를 개발하는 데도 바로 눈앞만 보고 몇 년 후를 못 본 것
같다. 서울 간선도로를 넓히는 데 10여 층짜리 고층 건물들을 헐어내는 것을
보았지만 그 건물들이 겨우 4__5년전에 허가를 받고 지어진 건물이 많다. 뿐만
아니라 포장해 놓은 도로 밑을 1년에 몇 번씩 파헤치는 것도 다반사가 돼있다. 좀
앞을 내어다 본다면 한 번 파헤쳤을 때 하수도며, 상수도며, 전선이며, 가스관이며
하는 지하공사를 한꺼번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알프스의 마터호른이 우러러보이는 스위스의 관광지 체르마트란 곳이 있다. 그
도시에서는 어느 한 빈터가 생겼다 해서 그 땅주인이 함부로 남에게 팔지 못할
뿐더러 또 그곳에 땅주인 마음대로 건물을 지을 수도 없다. 시청에서 규제하는 것도
아니다.
그곳에 사는 주민들 스스로가 합당하다고 여기고 합의를 본 건물만을 지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 관광지에는 자동차를 타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기계소리를 거부할
만큼 그 도시를 위한 원대한 계획 아래 많은 제한을 받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한국은 주인 한사람 한사람이 제터라 해서 제각기 제마음대로 집을 짓는다. 길이
어떻게 나든 또 남의 집을 가리든 말든 아랑곳없으며 하물며 그 전체의 미관 따위를
생각한다는 법이 없다. 먼 훗날이라는 시간적인 앞을 못 볼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눈앞만 볼 뿐 먼 곳을 볼 줄 모른다.
6.25사변 후 황폐화된 서울이 부흥된 것은 마치 장마비 끝에 잡초 자라듯 제각기
눈앞만 보고 집을 짓는 그런 복합 형식으로 부흥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어느 단계에
이르면 이전에 부흥했던 것을 부수고 또 그 자리에 새로 짓고 새로 지은 것을 다시
부수고 짓곤 하는 파괴의 연속 위에서 오늘의 서울이 이룩된 것이다.
미래의 서울을 예상하고 파괴없이 단계적으로 부흥된 것이 아니다.
독일의 함부르크도 2차 대전으로 폐허가 됐던 도시다. 옛날 한자동맹(Hansa)의
맹주로서 풍요했던 함부르크는 그 부흥의 제1단계를 항만, 제2단계를 공장,
제3단계를 주택하는 식으로 분명한 계획과 순서 아래 부흥, 오늘의 함부르크를
이룩했던 것이다. 그런 단계 부흥이 무슨 법률이나 시당국의 계획에 의한 견제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진행되었던 것이다. 항만이
건설되고 공장이 재건될 때까지 함부르크 시민들은 폐허에 바람을 가리거나 가옥을
짓고 참아냈던 것이다. 금비를 쓰면 땅이 산성화하여 그 정도가 심하면 수확량이
줄뿐만 아니라 폐토화한다는 사실은 어느 농민 예외없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퇴비를 쓰도록 장려하고 퇴비 생산을 의무화하도록 계몽도 하고 장려하기도
했지만 퇴비를 쓰는 농민은 무시할 정도다. 앞을 보는 농민이라면 계몽이나
의무화를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퇴비를 생산하고 썼을 것이다. 구득하기 쉽고 또
시비하기 쉽고, 또 당장에는 퇴비보다 수확량이 많기 때문에 우선 금비를 쓰고 본다.
독일의 위치는 만주 북부와 같은 위도로 그 농토가 풍요하질 못하다.
그러기에 독일 사람들은 삼포식이라 하여 일정 면적의 땅을 삼분해서 이포를
경작하는 동안 나머지 일포를 유휴시킴으로써 지력 소모를 막는다. 이렇게 일포씩
번갈아가며 쉬게 하는 농사를 삼포식이라 한다.
물론 독일 사람도 금비의 효력을 잘 안다. 또한 양식의 증산을 위해 일포를 쉬지
않게 경작할 수도 있다. 우리 한국 사람 같으면 금비를 써서 노는 땅을 없앴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 농촌에 가면 여전히 삼포식 농사를 지속함으로써 앞날을 위해
지력을 아끼고 있는 것이다.
해방 전에는 겨울 생선으로 보편적이었던 어종이 동태와 대구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구는 희귀한 어종이 되고 말았다. 대구는 회유하는 성질이 있어
주로 진해만에 와서 알을 까고 다시 동해안의 한류를 따라 북상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해방전에는 산란지인 진해만 인근에서는 이 대구잡이를 엄하게
제한함으로써 한국 연안에 대구를 번식시켰던 것이다. 한데 해방 후 이 제한이
해이되면서부터 진해만의 대구가 남획되어 해가 갈수록 대구는 잡히지 않게 될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대구를 잡을 줄만 알지 그것이 앞날의 멸종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행을 못한다.
따지고 보면 욕심나는 물건이 앞에 있으면 바로 달려가 입수한다는 것이 소박한
인정이요, 인지상정이랄 수도 있다.
먼날을 위해 단계를 밟아가며 괴로운 길을 걷는다는 것을 한국인은 참아내질
못한다. 기분이 앞서 사리나 도리를 무시한다. 목적이 눈앞에 이르면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을 뛰어넘어 그저 결과부터 입수하려든다.
농사나 어업뿐 아니라 공업, 상업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외국에서 어떤 발달된 기계나 새로운 아이디어의 상품이 나오면 나오기가 바쁘게
도입해서 그대로 만들어 쓰고 만들어 판다. 그것이 되기까지의 발명이나 발견이라는
어려운 노고나 시행착오는 빙산의 저변 같은 것인데, 그것은 묵살하고 빙산의
일각만 취해 버린다. 백척간두는 백척이라는 받침이 있기 때문에 간두가 형성된
것이다. 그 백척은 잘라 없애고 간두만 갖고 들어온다.
간두만 잘라 들여오니까 간두가 쓸모없어지면 그것으로 끝나 버린다. 백척이
있으면 간두가 쓸모없어지더라도 또 그 밑천에서 다른 간두를 만들 수가 있겠지만
토양이 없이 결실만 거둬오며, 그 결실은 토양이 없기에 그것으로 끝나는 그런
결실이다.
그런 뜻에서 한국문화는 말초문화랄 수가 있다. 우리 한국인의 신경은 근본적인
것보다는 말초적인 것에 섬세하게 작용한다는 것이 되겠다. 그러기에 한국의 학술은
사정을 토대로 체계화하려는 성향이 빈약하다. 외래의 학문을 도입해서 그것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하고 있지만....이를테면 한국의 사정을 토대로 한 사회학 같은 것이
체계화돼 있질 않다.
결과주의의 형성요인
앞을 못 보고 또 말초적인 이같은 한국인의 성향에는 여러 가지 복합 이유가
있겠지만 맨 먼저 만성결과주의의 병인으로서 한국의 풍토에 지속성(constancy)이
없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기후 풍토가 유순한 유럽 대륙에서는 변화가 극히 미미하고 지속적이며
규칙적으로 움직이기에 이 자연을 움직이는 법칙을 사람이 터득하면 사람의 맘대로
지배할 수가 있다는 것이 유럽 사람의 자연을 둔 태도다.
이에 비해 한국의 풍토는 유럽의 그것에 비해 풍요하긴 하지만 혹한, 혹서가
교차되고 집중 폭우에 한재가 교차되며 홍수가 논밭을 쓸어가고 사태가 논밭을
덮으며 태풍이 1년 농사를 망쳐 버린다.
한국은 사시사철이 시시각각이 변하고 몬순 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풍우뿐 아니라
박테리아도 활발하여 물체가 자주 변질한다. 성했던 것도 한나절만 지나면
썩어버리고 썩어서는 사라져 간다. 어젯밤에 없던 잡초가 솟아나오고 버섯이
돋아나오는가 하면 어느 세월이 지나면 쇠도 녹슬어 사라지고 바위도 비바람에 씻겨
바스러진다. 변한다는 것은 영구성이 없다는 것이 되며 미래를 단절시켜 버린다.
썩어 없어질 것을...하고 생각하는 사람의 사고 속에 미래, 곧 앞을 멀리보는 안식이
싹틀 수 없다. 우선 변하기 전에 뭣인가 어떻게 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내일이면
늦으리...다.
그러기에 한국인은 바쁘다. 항상 변화 이전에...변질 이전에...하는 강박에
쫓기기에 바쁘다. 항상 나만이 막차에 못 탈 것 같은 그런 조급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다. 내일 어떻게 되든 오늘 해놓고 본다. 따라서 유럽에서처럼 과정주의나
합리주의가 발달할 수 없고 촌단된 그 지속 시간에서 빨리 결과를 취하려는
결과주의와 그저 횡포를 부리는 수많은 신령들 앞에 무릎꿇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비합리주의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같은 지속성 없는 풍토에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정치나 문화마저도 지속성 없이 무상하여 이 결과주의가 보다 중병화돼
내린 것이 아닌가 싶다.
둘째로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유사시대 이래 자생문화가 열매를 맺기 이전에
주변의 외래문화가 와서 결실을 했다는 점도 들 수 있겠다. 문화는 물 같은
것이어서 우성문화권에서 열성문화권으로 흘러들게 마련이다. 주변에 중국이라는
강대문화권이 자리잡고 있는 데다 정치적인 지배까지도 받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
겹쳐 자생문화가 자랄 터를 닦지 못했던 것이다.
항상 외래문화의 꽃이나 열매만 잘라오는 습성은 바로 자생문화의 빈곤에서
어찌할 수 없는 필연이었다. 중국문화권에서 이탈하자 이제 우성 구미문화의
물줄기가 노도처럼 밀려들어왔으며 우리 한국인은 선조들이 중국문화를 두고 눈앞의
결실만 따왔듯이 이제 서양문화의 결실만 따왔던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주변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어떤 역사 시간이 좀
길었더라면 사정은 좀 달라졌으리라고 본다.
오솔길보다 좀 늦더라도 온건한 우리의 길을 더듬는 지혜를 정립할 시기가 오지
않았나 싶다.
결과의식을 재촉하고 가속시킨 다른 한 요인으로 전쟁을 들 수 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다. 비단 유형의 것뿐만 아니라 무형의 것들도 파괴해 버린다.
파괴되고 없는 잿더미 위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결과주의로밖에 살 수가 없다.
과정을 겪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도 없을 뿐더러 과정을 겪다 보면 낙오되고
소외되고 처져 버린다.
지금 전쟁으로 집이 불타 없어지고 처자식이 거리를 헤매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하자. 가장인 나는 당장 집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졸지의 판국에
백년대계를 세우고 과정을 빈틈없이 하는 과정주의로 집을 마련하기로 했다 하자.
이산 저산 헤매면서 좌청룡이 어떻고 우백호가 어떻다 하며 풍수부터 보고 다니고
또 기초를 탄탄히 한다 하며 서너 달 동안 터를 닦는 등 과정을 착실히 할 겨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 과정 동안에 한데서 얼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에 거적이라도 주워다가 비바람을 막는 것이 상책이다. 그 거적집이 바로
결과주의인 것이다.
또 양식이 없어 처자식이 사나흘이나 굶어 울고 있다 하자.
양식을 구하러 나간 내가 그 식품의 칼로리를 따지고 지방분을 따지며 취사
선택할 그런 과정주의적인 여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당장에 쓰레기통을 뒤져 썩은 감자라도 주워다 먹어야 한다.
그 썩은 감자가 결과주의인 것이다.
이처럼 전쟁의 잿더미에서 살아나려면 결과주의자 아니고는 살아날 수가 없다.
우리는 역사적으로도 엄청난 큰 전쟁을 10년 사이에 두 번이나 겪었다.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이 그것이다. 이 잇따른 전쟁의 폐허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결과주의로 살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주의로 살아오다 보니 결과의식이 체질화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부정적 요인들은 하나 예외없이 이 결과주의에서
탄생되었다 해도 대과가 없다.
정당한 절차...곧 과장을 밟지 않고 지위나 이권이나 학위를 얻기 위해 돈과 빽과
부정이 난무하고 급행료가 상식화된 것도 결과주의의 소치요,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급행료가 상식화된 것도 결과주의의 소치요,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새치기를
함으로써 모든 사회질서가 분란해진 것은 결과주의의 소치며 모든 공사나 제조업이
겉만 반지르르하게 하고 심속은 날림으로 내구성이나 신용을 극도로 타락시킨 것도
결과주의의 소치인 것이다.
눈앞에 있는 돈벌이에만 급급하여 먼 훗날을 염두에 두질 않았던 경영원칙이며
경제정책들에 있어서도 결과주의의 소치며 모든 공사나 제조업이 겉만 반지르르하게
하고 심속은 날림으로 내구성이나 신용을 극도로 타락시킨 것도 결과주의의 소치인
것이다.
눈앞에 있는 돈벌이에만 급급하여 먼 훗날을 염두에 두질 않았던 경영원칙이며
경제정책들에 있어서도 결과주의의 결과는 빨리 얻어진다는 장점은 있으나
일회성으로 끝나는 결과요, 과정주의의 결과는 더디게 얻어진다는 단점은 있으나
일단 얻어 놓으면 영속되는 결과다.
오늘날 한국 기업들이 처해 있는 흥망의 갈림길이 있다면 경영 철학을
결과주의로부터 과정주의로 전환시키느냐 결과주의로 일관해 나가느냐에 있다고
본다.
@ff
10. 본심을 숨기는 버릇
한국인은 대체로 본심을 숨기는 은폐의식이 강하며, 이 적정한 은폐를 해야만이
인간관계를 모나지 않고 원활하게 유지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Yes but no
프랑스 인 부인과 같이 사는 한 교수 친구가 있다. 자주 만나는 친한 친구가
아니고 길가에서 우연히 만나면 한 잔을 하는 정도의 그런 친구였다.
어느 날 우연히 길가에서 그 교수를 만났다. 외국인 부인과 같이 살기에 그에게
묻는 형식적인 안부로서 부인과의 사이는 원만한가 하고 묻게 마련이다. 한데 그
사이가 어긋나 부인은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현재는 별거 중이라는 것이었다.
술이 얼근하게 취하자 그는 부인과 틀어지게 된 몇 가지 심층 이유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었다.
언젠가 부인과 같이 참석한 파티석상에서 학생시절의 주임교수 내외분을 만났다.
이미 정년퇴임을 하고 은거하고 있는 노교수였다. 그 노교수 부부로부터 아무 밤 몇
시에 집에 와 동부인해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초대를 받았다. 제자가 먼저 은사를
초대했어야 하는 것이 도리인데 오히려 은사의 초대를 받고 보니 이 제자는
송구스럽고 가책을 느껴 몸둘 바를 모르고 있는데 곁에 있던 프랑스 인 부인은 그
초대일시를 재확인한 끝에 불쑥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 시간은 안 됩니다. 아들놈 약 먹일 시간이요, 안정시켜야 할 시간입니다."고
매섭게 그 호의를 차단해 버린 것이다.
한국 사람 같으면 비록 그 시간에는 초대에 응하지 못할 보다 큰 일이 있더라도
초대를 백 번 감사하고 또 미리 초대 못한 것을 사죄했을 것이다. 본심은 '노'이지만
일단 '예스' 하는 것이 예의요, 도리며 상례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 논리 가운데 표
논리를 선행시키고 리(이) 논리를 표면화시킴으로써 한국인과의 문화갈등을 곧잘
빚는다.
이 당돌하고 무례한 대꾸에 어이없어진 노교수 부부는 슬그머니 파티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 교수 친구에게는 부인을 둔 심리적 갈등의 심지에 불이 점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 시어머니를 두고도 이 표리부동의 의식구조 때문에 갈등이 있었다 한다.
그 프랑스 부인은 무척 한복 입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어느 해 부인의 생일날에
시어머니가 한복을 한 벌 선물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생일날 시어머니가 보자기를 들고 문 안에 들어서자 부인은 반갑게 달려나가 들고
온 보자기를 빼앗듯 받아들고 시어머니에 앞서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미리 약속한
선물인지라 동양적 예절에 둔감한 그녀로써 그런 행위쯤은 귀엽게 여기는 대범한
시어머니였다.
우리와는 달리 선물한 사람 앞에서 선물을 펴보는 것이 오히려 예의가 돼 있는
구미인인지라 이 부인은 보자기를 펴보았다. 저고리 치마를 들추어 보더니 갑자기
표정이 시무룩해지더니 면전에 앉아 계신 시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빛깔로만 골라서 지어 왔다."
아무리 이해심 많은 시어머니일지라도 이 대꾸에는 크게 맘을 상하고 그 길로
돌아가 일체 발길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어머니 뿐만 아니라
시집 식구 모두와의 사이에 장벽이 쌓이게 되었고 이 교수 친구도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소외감 속에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일련의 이와 같은 갈등이 축적되고 거듭되자 사이가 벌어지고 끝내는 별거하기로
합의 본국에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이 별거는 그 프랑스 인 부인의 인간적 결함이나 잘못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본심을 은폐하지 않는 의식구조와 본심을 은폐하는 의식구조와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처럼 우리 한국인은 대체로 본심을 숨기는 은폐의식이 강하며, 이 적정한
은폐를 해야만이 인간관계를 모나지 않고 원활하게 유지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 사람에게 예스 노가 애매하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며, 예스 노가
애매한 것은 예스 노의 판단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은폐의식이 그 분명한 한계를
저해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떤 한 중역이 말단 사원인 내가 맡고 있는 일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하자. 그 의견을 듣고 보니 실무자가 볼 때 당치도 않은 의견이었다고 하자. 곧
본심은 '노'라고 판단됐지만 겉으로는 맞대놓고 '노'라 할 수는 없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고 일단 긍정을 해놓고 본다. 한데 그로써 말이 다
끝나지가 않았음을 본인이나 중역이 은연중으로 다 알고 있다.
'...만은....' 하고 접속사로 다리를 건 다음 이번에는 지당한 말씀과는 정반대의
말이 나온다. 곧 'yes but no'라는 지극히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등식이 우리
한국인에게는 조금도 이상하질 않고 또 비합리적이지 않게 수용이 된다.
우리 한국인은 은폐돼 있어야 할 자신의 본심을 적나라하게 노출한다는 것은
인간관계 효율상 마이너스이기에 부정을 하더라도 긍정을 선행시킴으로써 본심을
애매하게 흐리는 표현방식이 크게 발달했다.
곧 부정을 위한 긍정 전치사구가 우리나라처럼 발달한 나라가 없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렇긴 합니다만...
,
그렇고말고요..., 그러해야겠지요, 일리가 있습니다만, 이치가 맞는 말입니다만...,
옳은 말씀입니다만.... 끝없이 있다.
서독 뮌헨의 국제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밟고 있는데 나의 여권을 받아든 법무성
관리는 한국 사람임을 확인하고 '독토르 피라이흐트' 하고 조크를 하는 것이었다
피라이흐트란 영어로 퍼헵스, 우리말로 '아마...'라는 부사다. 후에 안 일이지만 '아
마
박사'는 서독에서 한국인의 별칭으로 통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한국 사람이
피라이흐트란 말을 자주 썼기에 별명까지 됐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란 말은 우리 한국인의 은폐의식에 꼭 들어맞는 부사이기에 무의식중에
가장 자주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돼 있는 것이다.
속맘으로는 '노'라고 확신을 하고 있더라도 그 속맘을 겉으로 노출시킬 때는
본심은폐의 심리 메커니즘이 작동, '아마...그렇지 않을 걸'로 변질이 된다. 아마...
는
긍정과 부정이 적정히 배합되어 본심을 적나라하게 노출되지 않게 하는 표현이기에
선호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한국인에게 강한 은폐의식은 예스와 노를 애매하게 하는 것에 그치질 않고 예스를
노로 변절시켜 버리기까지 한다. 특히 싶으냐고 본능적인 욕구를 물었을 때에는
싶어 죽겠다는 것을 싶지 않다고 대답한다.
미국 아가씨 메리는 한국 총각 갑돌이의 프로포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고
가정을 하자. 한데 어느 달 밝은 날 밤 메리는 그토록 기다렸던 갑돌이의
프로포즈를 받았다. 이때 메리의 태도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토록 기다렸고 싶었던 일인지라 프로포즈가 끝나기가 바쁘게 갑돌이 목에
매달려 이리 키스 저리 키스 적극적인 예스를 할 것이다. 이번에는 사람을 달리하여
프로포즈를 하는 것이 미국 총각인 존이요, 프로포즈를 받는 것이 한국 아가씨인
갑순이었다 하자. 상황은 똑같다. 갑순이는 존의 프로포즈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몸져 누울 정도였다 하자. 한데 어느 달 밝은 낭만적인 가을밤에 존이 프로포즈를
해왔다. 이에 갑순이는 어떻게 태도를 취했을까. 하기야 요즈음에는 메리처럼
양성적인 갑순이가 많다고 들었지만 여기에서는 까벌려진 그런 갑순이가 아니라
전통적인 순박한 갑순이를 연상해야만 되겠다.
프로포즈가 떨어지기가 바쁘게 갑순이는 몸을 휙 틀어 존에게 등을 대고 애꿎은
손톱만 뜯고 있을 것이다. 등을 댄다는 것은 분명히 '노!'다. 이렇게 한국인은
강력한 예스를 강력한 노로 나타낸다. 이에 존은 실연했구나 하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가랑잎 차며 돌아가 버렸을 것이다.
미8군에 교체해 오는 미군 장병의 현지 적응교육 가운데 '한국 아가씨의 노는
예스'라고 가르친다던데 일리가 있는 관찰이 아닐 수가 없다.
미국 오스틴에 머물러 있을 때 그 근교에서 크게 농장을 하는 한 독신
노인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한국 전쟁 때 장교로 참전했다는 연고로 농장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농장을 찾아가는데, 길을 잘못 들어 오후 1 시에 도착하겠다는 약속을 못 지키고
오후 3시에야 도착을 했다. 반 사막의 텍사스인지라 도중에서 끼니를 때우기 마땅한
곳이 없어 점심을 거른 바람에 무척 배가 고파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반갑게 손을 잡고 집 안에 안내하더니 커다란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식품들을 낱낱이 외어대더니 나를 보고 배고프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물음에 배고프지 않다고 조건반사적인 대답을 했다. 왜 배고프면서 배고프지
않다는 거짓 대답을 했느냐는 한국인 아니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의
할아버지였다면 나에게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면 굳이 배고프냐, 고프지 않느냐 물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먹고 싶어도 먹고 싶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해서 배고프냐고 물었던 그 물음에 배고프지
않다고 대꾸했다 하더라도 속을 꿰뚫어보고는 '배 안 고프긴....'하며 냉장고 앞에
끌어다 세울 것이다.
한데 이 미국의 할아버지는 배고프지 않다고 하자 무자비하게도 냉장고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었다. 냉장고 닫힐 때 소리가 나게 마련이다. 별나게 요란스러웠던 그
냉장고 닫히는 소리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낳는 것은 그때 상황에 나에게는 너무나
모질게 인상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냉장고가 닫힌 다음에야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구나 하는 정신이 들어 나의
잘못 대답을 정정하려 했으나 이 정정만은 내 나이답지가 않아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정정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배고프지 않다고 말한 것을 정정한다. 지금은 다시 배고프다."
그 길로 그 넓은 농장을 지프차와 헬리콥터에 태워 휘돌려대는 바람에 하늘이
노오라서 구경하나마나 했던 기억이 있다.
은폐의식과 예의
이같은 한국인의 은폐의식과 한국인의 예의 감각의 발달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동방예의지국이니 군자지국이니 하는 호칭을 받았으리만큼 한국인의 예절은
소문나 있었으나 그렇게 되게 한 복합이유 가운데 하나로서 이 은폐의식이 큰 몫을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의란, 본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효율적이고
문화적인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예의를 열심히 지키면 본심은 결코 노출된다는 법이 없다. 따라서 예의를 지키면
은폐의식이 충족되고 또 남에게 좋은 인상도 주고 도덕적으로 평가받는
일석이조이기에 한국인은 열심히 예의를 지키게 되고 그래서 동방예의지국이
됐음직도 하다.
중학생 때부터 객지에 나와 공부했던 나는 편지를 했다면 아버지에게 돈을 부쳐
달라는 편지밖에 써본 기억이 별반 없다. 누구나가 아버지에게 편지할 때 그
글쓰기가 어렵다고 체험을 했겠지만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의바른 그
형식적인 문구를 매번 이어대기가 손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꾀가 나서 이책 저책 뒤져 도덕적이고 예의바른 문구 30여 가지를 골라 수첩에
적고 일련번호를 매겼다. 그리고 이번에 편지 쓸 때는 1, 3, 5, 7, 9 홀수로 뽑아
접속사로만 이어 쓰고, 다음 번에는 2 ,4, 6, 8, 10 짝수로 뽑아 접속사로 이어 썼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좋은 말들로만 이어 써놓은 이 편지야말로 어느 도덕군자도 따를 수 없는
명문장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편지의 첫머리에서부터 끝까지 인사와 안부와
자식의 도리와 효성일변도일 뿐 돈 부쳐 달라는 편지의 내용은 일언반구도 본문
속에 쓰질 않았던 것이다. 아니 쓸 수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몇 월 며칠 돈아 아무개... 하고 편지를 마무리 해놓고 편지 말미에 본문에 썼던
글씨 크기의 약 절반도 안 되는 작은 글씨로 '추신'이라 쓰고 거기에 돈이
떨어졌다는 사연을 짤막하게 써 부치곤 했던 것이다.
지금 편지 쓰는 의도는 예의와 도리로 쓰는 것이지 돈을 부쳐 달라는 본심을
전달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는 그런 편지투요, 때마침 돈이 떨어졌다는 것을
부수적으로 알린다는 주객이 전도된 그런 편지투가 한국에 있어 편지의 정도였던
것이다. 본심은폐의 의식구조가 이렇게 편지에까지도 침투돼 있었던 것이다.
한말 서울에 와 프랑스 대리공사까지 지낸 프랑시라는 외교관이 쓴 그의 짤막한
회고록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대목이 있다.
"한국인의 편지는 끝에서부터 읽어야 효과적이다."
이 말은 진리이며 오늘날의 편지에도 개인 편지인 경우엔 적용되는 프랑시의
법칙이랄 수가 있다.
공적자기층과 사적자기층
반랜드라는 미국의 사회심리학자는 공개하고 있는 마음의 층을 공적자기층(public
self)라 하고 남으로부터 은폐하고 있는 마음의 층을 사적자기층(private self)이라
대분하여 미국 사람과 동양 사람의 그 심층 두께를 비교해 보고 있다. 미국 사람은
공적자기층이 91퍼센트, 사적자기층이 9퍼센트로 9대 1의 비율을 보이는데 비해
미국에 사는 동양 사람 곧 중국 사람, 일본 사람, 한국 사람을 상대로 똑같은
방법으로 조사해본 결과 공적자기층이 15퍼센트, 사적자기층이 85퍼센트로 나왔다
한다. 9대1이 1.5대 8.5호 역전하고 있다.
조사 방법에 따라 이 비율에는 기폭이 있는 것이나 사적자기층이 공적자기층보다
두텁다고 한국인의 개연성만은 뒤집을 수 없을 만큼 현격한 차이를 인지할 수가
있겠다.
이 두터운 사적자기층이 바로 한국인에게 강한 본심을 숨기려는 억센
은폐의식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 은폐의식의 개연성을 인간관계 개선이나
인간관리에 발전적으로 응용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ff
11. 헐뜯기 좋아하는 버릇
모나지 않는 평균인간으로서 공존하고 싶은데 누군가가 그 평균성을 벗어나려
하면 발을 끌어내려 평균층에 있게 하려는 심리 취향이 곧 시기 질투로 발전한다.
옛 남도 농촌의 사투리에 '세덧이 있다'느니 '세덧이 있어야 한다'느니 하여
부녀자의 인덕을 말할 때 '세덧'이란 말을 잘 썼다.
세덧이 있는 마님하면 인덕이며 인성을 갖춘 마님이란 뜻이다. 시집갈 때 가난한
친정 부모가 딸에게 해줄 것이 없으면 세덧밖에 해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세덧은 세덕(삼덕)을 잘못 발음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세덧이란 말 가운데 우리
한국인의 아름다운 의식이 전통적 구조로서 존재해 내린 것이다.
세덧은 셋을 더한다는 뜻이다. 밥을 지을 때 식구 수만큼 쌀을 되어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짓는 것이 상식이다. 이를테면 열 식구면 열 명분의 양식을 퍼내어
짓는다. 한데 '세덧'이란 식구 수보다 세몫을 많게 양식을 퍼내어 밥을 짓는다는
뜻이다. 열 식구면 열세 식구 몫으로 밥을 짓는 행위를 셋을 더한다 하여 세덧이라
한다.
합리적 사고로 따지면 먹지도 않을 잉여분의 밥을 지어 낭비를 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모든 사물이 합리적으로 따지지 않듯이 이 세덧의 낭비도 합리적으로
따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대체로 한국 농촌은 가난했다. 제 논밭 가꿔 먹고 사는 사람보다 논밭이 없어 품을
팔거나 남의 논밭을 얻어 가꾸거나 하여 제벌어 제가 못 먹고 사는 사람의 비율이
많았다. 이런 가난한 집 어버이들은 좀 먹고 사는 집에 가서 청하지도 않은
설거지며, 빨래며, 김매는 일이며, 청소를 자청해서 한다. 이 불청노동을 거절해서는
안 되게끔 전통적 불문률이 돼 있기도 했다. 불청노동이기에 그 보수나 대가를
요구한다는 법은 없다. 다만 끼니에 그 집 식구들이 먹다 남은 밥을 먹고 또 남은
밥을 얻어 갖고 집에 가서 집식구들을 먹였던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
숟가락 하나씩만 들려 그 집에 데려가 먹이기도 했다.
어려운 사람과 공존공생하는 아름다운 전통인 것이다.
만약 어떤 주부가 자기 식구 수대로만 밥을 지었다 하자. 그럼 어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이 불청노동자가 먹을 밥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세덧의 지혜는 이 어려운
사람과 같이 먹고, 산다는 우리 촌락 공동체의 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한국인이 전통적으로 가난했으면서도 굶지 않고 살아왔으며, 또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농촌공동체는 그 자체가 마이크로 코스모스로 그 공동체내의
기능만으로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인간적인 공생공존의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촌락공동체의 생리는 그 속에 같이 사는 사람끼리 서로 동정하고 실패하거나
어렵거나 불행한 삶을 서로 돕는데 시간이나 노력을 아끼지 않게 했다. 따라서
공동체의 삶이 요구하는 융화될 수 있는 평균인간을 지향하고 그 평균인간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한다.
만약 유별나게 재능이 많거나, 유별나게 잘되거나, 유별나게 고생하거나, 유별나게
인색하거나, 유별나게 사치하거나, 유별나게 고매하거나, 유별나게 타산적이거나,
유별나게 이치를 따지거나 하는 비 평균인간을 거부하고, 싫어하고, 배척한다.
평균을 벗어나 남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는 그런 인간을 지향하고 교육도 이
비평균을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베풀어졌던 것이다.
누군가가 잘되거나 누군가가 잘 살게 되면 배리감을 갖고 그것이 질투로, 그
질투가 모략과 헐뜯는 일로 곧잘 진전하는 이유가 바로 한국인의 촌락공동체의
평균인간 체질때문인 것이다.
모나지 않는 평균인간으로서 공존하고 싶은데 누군가가 그 평균성을 벗어나려
하면 발을 끌어내려 평균층에 있게 하려는 심리 취향이 곧 시기 질투로 발전한다.
예부터 한국인을 '독 속의 게 꼴'이라고 비유했다. 오지독 속에 많은 게를 잡아
넣어두면 제각기 독의 벽을 타고 기어오르려 한다. 그러나 다른 게가 기어오르는
게를 붙들고 늘어져 밑으로 떨어진다. 독속에서 제각기 기어오르고 붙들고 떨어지고
하는 반복운동을 계속함으로써 어느 한 마리도 기어나오질 못한다.
한국인의 집단생활에서 '독 속의 게'현상은 너무나 보편적이고 자연스럽다.
어려워지거나 불행해지면 서로를 잘 돕지만 누군가가 출세를 하거나 돈을 잘 벌거나
승진이 빠르거나 하면 숨어서 욕을 하고 흉을 본다. 누군가가 이 비평균 인간을
헐뜯으면 속으로 시원해지는 카타르시스마저도 느낀다.
옆집 아이가 우리 아이보다 공부를 잘해도 시기심이 나고 옆집 부인이 비싼 옷을
입으면 웬지 흠을 잡고 싶어진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심리가 이러한 평균
인간층의 이탈에 저항을 느끼는 촌락 공동체의 체질 때문인 것이다.
외국에 이민한 한국인 사회에서도 이 현상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1900년대 초 하와이와 멕시코에 이민했던 한국인들은 계약기간 동안 노예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는 한국 이민을 비롯 중국인, 일본인, 쿠바 인
등 서로 이웃을 이루고 이민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한국인처럼 상부상조를 잘하는 민족이 없었다 한다. 이를테면 중국이나 쿠바
이민촌의 경우 누군가가 앓아 누우면 그 사람이 일하지 못한 만큼 그 사람 수입은
로스가 커진다고 하는데 한국인과 일본인은 누군가가 동료가 앓아 누우면 서로 와서
대신 일해 주기 때문에 오히려 앓아 눕지 않고 일했던 때보다 작업량이 늘어 수입의
플러스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곤궁에 빠지고 불행할 때는 세덧의식구조의 작동으로 상부상조하고
공생공존을 한다. 그러하던 한국 이민이 계약 노동을 마치고 일가를 이뤄 좀 살게
되면서부터는 서로 헐뜯고 모략하고 고자질하여 서로가 불화할 뿐더러 성공에
지장을 주기 일쑤였다 한다. 한국 이민들의 자립이 일본인들의 자립에 비해
30년이나 늦고 성공률도 15퍼센트에 불과했다는 것은 바로 이 이민국가의 외적인
조건 때문이 아니라 한국 이민끼리의 내적인 조건 때문이었다는 것은 이민 사회에서
상식화돼 있다 한다. 중동의 기업체 진출도 한국 업체끼리 시기, 질투, 모략하는
바람에 일을 적지 않게 놓치거나 불리한 조건으로 맡게 되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ff
12. 불구자를 얕보는 버릇
한국에서 오체구족이 아닌 불구자는 도태요소이지만 미국사회에서는 공존요소가
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다극상 사회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몇 차례 파티에 낙 느낀 것 가운데 하나로 그 파티에 참석한
신체장애자의 태도와 신체장애자를 둔 비장애자 태도가 우리 한국의 그것과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유별나게 발을 저는 절름발이 학생이 다른 학생들과 어울려 왕성하게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서 있을 수가 없기에 그 절름발이 학생과 의논하는
학생은 그 앞에 허리를 굽히거나 의자를 끌어당겨 놓고 삿대질을 하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불구자에게 너무하지 않나 하고 비정적인 느낌이 든 것도 어디까지나
느끼는 자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다. 한쪽 발이 없는 사람은 한쪽 발이 없는
사람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 때문에 파생되는 정서적 플러스 알파가
없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으로 정신적인 노력은 하고 있는지 모르나 곁에서
보기에는 결코 한쪽 발이 없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거나 비뚤어져 있지가
않다. 곧 한국에서처럼 어딘가 어두운 음영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또 이
불구자와 의논하는 사람도 그 불구라는 것 때문에 핸디캡을 주고 대어들 것을
대어들지 않고 할 이야기를 삼간다는 법이 없다.
곧 불구라는 것이 그 사람의 가치에 결부되는 법이 없다. 그 사람의 불구가
정상적인 사람이냐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냐 하는 가치와 결부되지 않는 것이다.
오체구족에 가치를 두고 지극히 남다름의 동조사회인 우리 한국에서는 남과 같지
않은 그 무엇을 지닌 사람은 매우 살기 어려운 일생을 살아야만 한다. 한쪽 발이
없고, 한쪽 손이 없다는 것으로 정상적인 사회 관계에서 탈락되어 예외시당하거나
동정을 받거나 한다.
신체장애자라는 말은 미국에서도 있으나 한국에서 신체장애자란 말이 내포하고
있는 감각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 한국에서는 손이나 발 하나가 없다는 그 사실을
초월한 야릇한 감각이 내포되어 있게 마련이다.
우리 한국에서 신체장애자들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 대체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혹시 그런 장애자가 참석하면 그 파티는 그 사람을 동정하고 위해 주는 파티가 되고
만다. 그 불구라는 것에 항상 마음을 써 주어야 하고 그 마음을 쓴다는 것이 곧
한국에서의 휴머니즘인 것이다. 한데 그 마음을 쓴다는 그 자체가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회관계로부터 탈락했다는 전제에서 형성되기에 장애자 자신도 유쾌하지
못하여 슬퍼질 뿐더러 그를 둘러싼 사람들도 피로하다.
이처럼 마음을 써주고 동정을 해야 하기에 일상생활에서 가급적 신체 장애자를
기피하려는 성향이 자연 발생한다.
따지고 보면 장애자를 위해 주고 마음을 쓰는 것으로써 자신은 친절한 인간이라고
자기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동정으로 충족시키는 이기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불구 때문에 정상적 사회관계에서 소외된 사람을 동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소외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확인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같은 불구자나
약자를 둔 동정은 이따금씩 진정이라기보다 위선일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 이 사회적 약자는 어디까지나 공존자이지 동정받는 소외자가 아니며,
그러기에 전혀 열등감이나 비굴감이나 비뚤어진 마음을 갖질 않게 되고, 따라서
모든 생활 현장에서 여느 사람과 똑같이 자연스럽게 웃고 행동한다.
팔 하나 없는 아이가 야구 게임에서 투수를 하고 목발을 짚은 아이가 유쾌하게
포수 뒤에서 심판을 본다.
생태학에서 생물은 격심한 생존경쟁 끝에 자연도태되어 우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진화론이 있다. 이 진화론을 문화측면에 원용하여 '단극상'이라 한다면
생물이 어느 공간을 서로 나눠 갖고 그 자신의 공간 한계에 적응해 가며 공존한다는
반도태의 생태이론을 '다극상'이라 할 수 있다.
곧 ABCDE...라는 많은 문화인자가 어느 공간에 있게 됐을 때 그 중에서 제일로
강한 C만이 살아남고 ABDE...는 도태되어 사라져가는 문화생태와 ABCDE...가
서로 공존하는 문화생태로 대별해 본다면 한국사회가 단극상 사회요, 영국이나
미국사회가 다극상 사회가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 오체구족이 아닌 불구자는 도태요소이지만 미국사회에서는 공존요소가
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다극상사회이기 때문이다.
신체장애자 뿐만이 아니다. 영국 산매상들의 다극상은 경탄할 만하다. 이를테면
같은 상표의 같은 분량의 위스키일지라도 거리나 장소, 가게에 따라 값이 다르다.
한국 같으면 값싼 가게로 몰려 값비싼 집은 한산하고 장사도 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곧 도태당하는 단극 양상을 보일 것이다. 한데 영국에서는 손님이 값
차이만으로는 옮겨다닌다는 법이 없다. 손님은 자기가 좋아하는 단골 가게를 정해
놓고 있고 그 단골 가게에서는 그 손님의 취향을 잘 알고서 그에 맞게끔 서비스를
하고 있다. 개중에는 3대, 5대, 대대로 그 가게를 단골로 하는 대물림까지 하는 집도
적지 않다.
그러기에 가게는 물건 파는 데만이 아니라 일종의 사교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딴 가게에서 사고 또 줄지어 서 있는데도 가게 주인은 손님하고 한가하게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광경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줄지어 서 있는
손님이 고함을 지른다는 법이 없다. 오히려 줄지어 서서 한담에 자신도 가담하고
있다.
영국 사람들은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기에 단골 담배 집에서는 그 단골 손님의
취향에 맞추어 파이프 담배를 조제해 준다. 스코틀랜드의 술집에서는 몰트라는
위스키 원주 통을 놓아두고 그 손님에게 알맞게끔 즉석에서 술을 조제해서 판다.
그러기에 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단골 가게를 바꿀 수가 없게 돼 있다. 산매상들의
경쟁이나 도태가 있을 수 없으며 아무런 충돌 없이 공존을 하게 된다.
과자집이나 빵집들도 매일 정해진 분량 이상을 굽지 않는다. 그것이 팔리면
가게문을 닫아 버린다. 평판이 좋아 잘 팔린다고 해서 우리 한국처럼 대량 생산을
하고 또 분점이니 뭐니하는 체인스토어로 만든다는 법이 없다.
근년 영국에 마크 앤 스펜서라는 슈퍼마켓이 탄생 유통구조의 근대화가 되고
있으나 팔리는 만큼만 만든다는 전통적인 유통구조는 일조 일석에 변하지도 않을
뿐더러 단골 가게가 그 때문에 망한다는 법도 없다 한다.
이같은 다극상 상법은 곧 주문을 받아 생산하고 파는 수주생산, 수주판매의
비중을 크게 하고 있다.
영국의 책방이 그 좋은 실례이다. 런던에 있는 서너 개의 대형 서점을 제외하면
영국 책방에 진열된 책의 빈약함에 놀라게 된다. 책방에 책이 적다고 영국 사람들이
독서를 잘하지 않는 민족으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지루한 겨울의 영향도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독서를 하는 독서 민족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읽고 싶은
책을 인근 단골 책방에 신청을 하면 책방에서는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에 주문을
해서 늦어도 2__3주 안에 입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같이 주문받아 책을 팔기에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르는 책을 잔뜩 책방에 꽂아둘 필요가 없다.
영국이 자랑하는 수주산업으로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롤스로이스는 재고가 없다. 주문을 해오면 그때 만든다.
돈많은 한 미국인이 롤스로이스를 갖고 싶어 회사에다 그 자동차의 성능을 가르쳐
달라고 편지를 띄웠다 한다. 한데 회사측의 답장은 'As you like'라는 세마디
말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곧 롤스로이스는 일정한 성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문자가 어떤 성능을 원하면 그에 맞추어 만들어준다는 수주성을 풍자하는
이야기랄 것이다.
이같은 수주산업사회는 경쟁이 없기에 소비자 운동이 상륙하질 못한다. 발붙일
틈이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다극상사회와 단극상사회의 형성요인은 그 사회가 내 나름의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냐 남 나름의 동조성이 존중되는 사회냐의 차이가 있다고 본다.
우리 한국사회의 기본취락단위인 농경촌락공동체에서는 농경에 필요한 오체구족의
평균인간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평균인간 이상으로 뛰어나거나, 잘나거나 힘이
세어도 소외요소가 잘 되었고 평균인간 이하도 소외요소가 되었다. 높은 가지는
바람을 잘 타고 뛰어난 말뚝을 두들겨 박음으로서 평균인간 지향을 하였다. 곧 남
나름대로 동조하는 것이 가치를 이루었기로 개성적인 요인은 비가치화될 수밖에
없었다. 재능이 있든 없든 일률적으로 대학에 보내고 개성에 맞든 안맞든
일률적으로 법과 지망을 한다. 풍토적 특색을 무시, 통일벼를 심게 하고 곧 지방색이
있는 음식을 버리고 서울 음식을 지방화해 버린다. 남 나름대로의 동조하는 것이
가치를 이룬다는 이 한국인의 의식체질은 평균문화, 평균인간, 평균가치로
단일화하게 되고, 따라서 단극상 사회를 이룩하게 되며 개성존중 사회는
단일평균지향을 거부하기에 문화나 인간이나 가치가 다양화하고 따라서
다극상사회를 이룩하게 된다.
이 단극과 다극은 비교문화의 척도로서 외국문화와 다른 한국문화의 본질을
풀이해 주는 열쇠가 될 뿐 아니라 우리 한국의 앞날을 원시적으로 개선해 나가는데
중요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ff
13. 새것을 좋아하는 버릇
어느 한 사람이 입었거나 손때가 묻은 것은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물이며 이 정령적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의식을 지녔기 때문이다.
미장원이나 미용실하면 여자들만이 가는 금남의 영역이었다. 한데 근간 보도된
바로는 서울의 번화가에 있는 미장원이나 미용실에 남자들이 많아 드나들어
여자만의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하다. 지금 여기에서 남성의 중성화, 여성의
중성화를 거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도시에서의 미장원이라는 금남 영역에 남자가 드나들어 중성화하기 시작한
것은 1__2년밖에 안 된다.
그리하여 지금은 '유니섹스 뷰티살롱'이라 하여 남자의 이발은 여자의 미장원에
가서 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고, 따라서 미국 주요 도시의 도심지에는 남자
전용의 이발소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홍, 청, 백의 나선형 이발소 표지는 지방에
가지 않고는 찾아 보기 힘들게 돼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일천한 유니섹스 미장원이 한국에 예민한 감염도를 보인 것은 주의를
끈다. 대체로 외래 문화에 예민하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피부로 느껴온 터이지만
이같은 예민한 문화감염에 어떤 한국문화의 특질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발소 가는 것이 두려웠다. 소독약내가 풍기고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수술도구 같은 것을 만지작거리는 이발소가 어딘지 병원만 같곤 해서
시골의 미개 환경에서 자랐던 탓인지 두렵기 그지 없었다. 이 잠재의식 탓인지 자란
후에도 이발소 기피증은 여전하였다.
런던을 여행하던 중, 격식을 갖춘 예방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 이발소를
찾아갔다. 물론 나의 생리에 따라 큰 길가로부터 들어가 있는 허술한 삼류 이발소를
찾아들었던 것이다.
들어서자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발의자였다. 박물관에서나 보듯한 낡고 손때가
번지르르한 나무의자였기 때문이다.
치과병원의 의자만큼 온갖 장치와 장식이 붙어 있는 한국의 최신형 이발의자와
너무나 대조되었기 때문이다. 쿠션도 없는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자마자 두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 팔꿈치가 닿는 부분이 오목하게 패여 있음을 촉감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심히 그 매끄럽게 패인 부분을 살펴보았더니 일부러 판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뭇 사람의 팔꿈치의 마찰에 의해 파여진 성상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그 성상에 압도되어 이 이발의자는 언제 때 것이냐고 물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발사의 대꾸가 1809년에 4대조 할아버지가 이곳에 이발소를 차릴 때 맞춘
것이라 했다.
곧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4대째 자기가 가업을 물려받았으며 곁에 있는 한
청년을 가리키며 저 아들이 가업을 물려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의자를 신형 의자로 바꾸고 싶은 의사는 전혀 없다 하고 2백년 된 의자를
후대에 물릴 뜻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수동장치에서 전동장치로 다시 세면장치로부터 마사지장치로 마냥 모델 체인지를
숨가쁘게 해온 한국의 이발의자에 대해서 이분에게 말해 준다면 어떤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
이같은 소비구조를 둔 영국문화와 비겨 볼 때 한국의 유니섹스 미장원 대두가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대체로 유럽의 소비수요라는 것의 구조는 한국이나 미국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국 가정에 초대받아 가보거나, 또 한국 친구들이 세들어간 집을 가보면 그 집에
설비돼 있는 세탁기나 냉장고, 청소기 등은 대체 20년 이상된 것들인데 예외가
없었다. 가구도 그렇다. 가구 모델이 한국처럼 10년 단위로 바뀐다면 유럽 사람들의
그것은 100년 단위로 바뀐다. 그만큼 낡고 묵었다.
런던에서 전기기구점을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데 물론 최신형 기구도 있지만
한국에서 일제시대에만 보았듯 한 낡은 기구부속들도 적지 아니 진열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50년 전에 샀던 전기기구를 그대로 쓰고 있는 사람이 많기에 그같은
부속이 계속 팔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되고 낡더라도 쓸 수 있는 데까지 쓴다는 것이 유럽에 있어 소비라는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의 소비유형은 곧 쓰느냐 쓰지 못하느냐의 실용원리와는 관계없이
세탁기든, 텔레비전이든, 가구든, 소파든, 자동차든 항상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개발되어 눈부신 신진대사 기능으로 차례차례 버리는 그런 소비문화다. 달리 말하면
한국에 있어 이같은 기계적 내구소비재들은 문화적으로 내구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실용과는 동떨어진 왕성한 새모델 지향의 소비구조 때문에 광고의 범람도 한국과
미국은 유사점이 있다. 영국은 물론, 프랑스나 북구에도 광고란 거의 부재에 가깝다.
물론 런던의 지하철이나 에스컬레이터의 양쪽에 광고가 많이 나붙어 있고 신문에도
광고난이 있으며 TV의 방송에도 커머셜은 있다. 하지만 한국처럼 번잡하지 않고 또
극성스럽지도 않을 뿐더러 별반 어필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 같으면 신문광고 말고도 신문에 끼여 든 10여 종의 광고 쪽지의 홍수,
10분이 멀다 하고 튀어나오는 TV의 커머셜, 우편을 통해 들어오는 할인 쿠폰,
전화를 통해 침투하는 상품권유, 거기에 문을 두들겨대는 각종 세일즈맨....
뭣인가 사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게끔 한다.
유럽의 장사들은 상품을 팔려는 사람들인지 상품을 지키고 있는 사람인지 분간을
못할 만큼 손님에게 무감동하다. 큰 가게든 작은 가게든 물건을 팔기 위한 어떤
작위를 전혀 볼 수가 없다.
성냥 같은 서비스 용품을 손님에게 공짜로 주는 나라는 아마 이 세상에서 한국과
일본과 미국밖에 없을 것이다. 영국에서 성냥이 필요하면 3펜스 내지 5펜스를 내고
사지 않으면 안 된다. 라이터가 영국에서 별나게 발달한 이유는 바로 이 성냥을
산다는 번거로움 때문이라고 들었다.
이와 같은 소비 패턴의 차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시간관의 차이다. 한국인은 대체로 유럽 인에 비해 시한 감각이 짧고 빠르다. 곧
어느 짧은 시한 안에 무엇인지 해내야 하며 그 시한이 지나면 또다른 시한 속에
들어가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시한의식이 강하다. 터키에는 '오늘 일을 못다하면
내일이 있다.'는 격언이 가치를 발하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격언이 가치를 돋보이고 있다.
변화가 심한 한국의 기후풍토 아래서 농사는 어느 시한 안에 무슨 일을 꼭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시한의 연속으로 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지방에서 어느 시기의 닷새 동안에 초벌김을 매지 않으면 잡초가 우거져 농사를
망치거나 감수를 가져온다. 그러기에 그 시한 안에 반드시 초벌김을 매야 한다.
그런지 다시 며칠 후에는 그날부터 닷새 안에 두벌김을 매지 않으면 안 되게끔
시한의 구속을 받는다.
이같은 한반도의 시한성 농사구조가 한국인으로 하여금 소비의 시한성을 짧게
하지 않았나 싶다. 둘째로 행복관의 차이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 있어
'행복'이란 어디까지나 미래의 문제다. 남이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어느 사람에게
행복 여부를 물어도 그 자신이 현재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행복이란
언제나 달성될 것이라고 기대되는 상태이며 현재는 그 상태에 이르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래에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 한국인과 또 미국인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 향유하고 있는 각종 가구나 세탁기,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등 물질문명의 도구들로 만족을 못한다. 보다 좋고 크고 비싼 새것을
욕구하며 살기에 만성적인 욕구 불만에 걸려 있는 것이다. 곧 객관적 판단은
아랑곳없이 주관적으로는 항상 불행하다. 런던교외에서 가난하게 사는 노동자와
농민을 상대로 '소득이 지금보다 갑절로 늘었다면 무얼 하겠는가'하는 설문 조사
결과를 본 일이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설문에 많은 대상자가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고 '지금 수입으로 그다지 큰 불편은 없다', '돈보다
여가가 더 필요하다', '그 돈으로 장미나 가꾸겠다'는 등 현재 자신이 영위하고 있고
생계에 만족을 하고 있음이 완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외국문물이나 새로운 문물에 예민한 한국인의 체질은 이같은 행복관의 차이에서는
이유를 찾아볼 수가 있겠다.
미국의 지방신문을 보면 러미지 세일(rummage sale)이라는 표제의 광고가 자주
눈을 끈다. 우리나라 신문들의 구인, 매매, 구직, 개인교수 등, 3행 안내광고처럼
러미지 세일이라는 항목 아래 시일과 장소를 명시해 놓고 있다.
러미지란 낱말이 생소하여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본래 색출, 검색이라는 말인데
쓸모없는 잡품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곧 러미지 세일은 쓸모없는 생활도구를 파는 수시성의 미니 개인시장이다.
우리 생활주변을 돌아보면 쓸모는 없지만 아직은 쓸 수 있는 생활 도구가 적지
아니 널려 있다. 유행에 뒤늦은 옷가지, 싫증난 넥타이, 성장한 후의 아이들 옷가지,
세트에서 짝을 잃은 가구나 식기 등등 어쩌면 쓰고 있는 생활도구보다 쓰지 않고
있는 생활도구들이 더 많은 주택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이 쓸모없는 생활도구가 어느 만큼 축적이 되면 지방신문에 이
러미지 세일란에 광고를 낸다. 그러고서 주로 주차장 공간에 이 쓸모없는
러미지들을 진열해 놓고, 광고 보고 이 미니시장을 찾아온 고객들에게 판다.
러미지 세일을 개리지 세일로 통칭하는 것은 이 중고품 거래가 주로 주차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클라호마를 여행할 때 나는 일부러 이 개리지 세일을 하는 한 회계사부인의
차고를 구경한 일이 있다.
차고 안에 비닐 끄나풀로 줄을 매고 중고품 옷가지 10여 점을 걸어 놓았으며,
벽돌을 쌓아 판자로 걸쳐 놓고 그 위에 중고 주전자며 아이들 노리개, 그리고
남편이 습득하고 난 회계관계 서적 너댓 권 등 잡품이 놓여 있었다.
30대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중고 브래지어를 들고 자기 젖가슴에 맞춰보고
있었으며 대여섯 살 돼보이는 꼬마 손님이 로켓 노리개의 시동법을 주인에게 물어
보고 있었다. 값은 이 미니시장의 주최자가 임의로 정하긴 하지만 대치로 1달러를
넘는 것이 별반 없었다. 체크무늬의 소녀용 스커트가 50센트요, 노리개들은 10센트
안팎이었다. 이 미니시장에서 나온 모든 상품을 판다고 해야 겨우 30달러 내외 밖에
안되는 돈이다. 따지고 보면 품삯도 안 된다. 개리지 세일이란 이득을 보는
'장사'라기보다 나에게는 쓸모없지만 쓸모 있는 사람에게 양도하는 그런 정신적
배려를 기조로 한 거래습속인 것 같았다.
나는 이 미니시장의 안주인으로부터 커피 대접까지 받았는데, 내가 외국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이렇게 찾아온 손님에게 차대접을 하고 세상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일종의 낙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개리지 세일의 번창뿐만 아니라 중고품에 대한 미국 사람의 감각이 우리 한국
사람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증거를 도처에서 발견할 수가 있었다.
물자가 많은 미국인지라 쓰던 물건이 좀 낡거나 부서지면 곧잘 버리는 문화의
범주에서 미국 사람들을 이해하고들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그들에게
체질화된 중고품에 대한 감각 때문인지 오히려 한국 사람이 미국 사람보다 더 잘
버린다.
뉴욕의 한국인 친지집에 머물고 있었을 때 일이다.
날을 정해서 쓰지 못할 폐품이나 쓰레기를 집 앞에 내놓으면 시에서 트럭을 돌려
거둬가는데, 이날 한국인 친지는 낡아서 삐걱거리는 의자 하나를 버리고자 쓰레기
봉지와 더불어 집 앞에 내놓았던 것이다. 이 친구는 시의 트럭이 오기 전에 그
의자가 먼저 없어질 것이라고 예언을 하면서 나를 창가에 불러대는 것이었다.
창 밖을 내다보았더니 애완용 개를 차의 뒤칸에 싣고 지나가던 한 중년의 백인
부인이 차를 멈추고 이 낡은 의자를 트렁크에 싣고 있는 것이었다. 이 부인이 몰고
있는 차는 나의 친지가 몰고 있는 차보다 세 곱절이나 비싼 고급차였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던 것이다.
갓난아이가 있는 집에 초대받아 갈 때 선물로서 그 아이가 입을 헌 옷을 갖고
간다면 우리 한국에서는 평생 원한을 살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 입던 옷을 선물하는 것이 상식이 돼 있다. 그러기에 웬만한
가정에서 아기들 옷은 남의 집에서 선물받은 헌옷으로 충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한국의 백화점에 가면 어린이 복장 코너가 가장 화려한데 비해 미국
백화점에 가면 가장 초라한 코너가 돼 있는 이유를 알 만하였다.
블루진은 낡아야 좋고 또 꿰맨 것일수록 멋이 나며 해어진 엉덩이나 무릎에
패치를 대는 것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멋이 되고 유행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미 선망의 이병적인 단계에까지 고양되고 있는 한국에서의 사정이지,
미국 사람들은 멋도 유행도 아무것도 아니다. 진스문화란 곧 낡은 것일지라도
아무렇지 않게 입을 수 있는 중고품 문화에서 파생된 필연이지 멋이나 유행과는
인연이 없다.
이 중고 감각과 관련해서 연상되는 것은 카터 대통령 부인이 취임식날 밤의 축하
파티에서 입었던 드레스다. 모든 사람의 예상과는 반대로 6년 전에 만든 중고
드레스였던 것이다. 6년 전이라면 카터가 주지사에 당선됐던 해인 것이다. 그 지사
취임식날 한 번 입고 그 후 백악관에 초대되었을 때 두번째, 그리고 대통령 취임식
날 세 번째 입은 것으로 보도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비난의 소리도 없지 않았다.
일국의 대통령 부인이 일세 일대의 성스러운 날에 중고품 옷을 입는다는 것은
품위에 관한 문제라는 상류사회에서의 비판이 그것이고 또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옷을 입는다는 것은 퍼스트 레이디의 둔한 센스의 표현이라는 패션계의 비판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축하 파티에 동부인하고 나온 카터 대통령은 마이크 앞에서,
"여러분, 이 드레스 훌륭하지 않습니까."고 말하여 크게 갈채를 받았던 것이다.
근검하다는 이미지업을 위한 대통령의 쇼는 아닌 것이다. 바로 중고품 감각을
이뤄 놓은 살아 있는 청교도 정신의 전통을 거기에서 볼 수 있다 하겠다.
이 중고품 감각과 기독교의 상부상조의식이 복합하여 점블세일이라는 다른 한
습관을 이뤄 놓기로 했다. 종교단체든 부인단체든 반드시 단체가 아니더라도 임의로
점블세일을 개장한다. 이 점블세일은 목적이 있다. 베트남 난민을 돕는다든지,
방글라데시의 홍수 난민을 돕는다든지 하는 목적을 내세우고 광고를 하면 뜻 있는
사람들은 중고품 몇 점씩 을 희사를 한다. 그 희사품들을 늘어 놓고 즉매를 하여 그
즉매에서 나온 돈을 목적을 위해 쓴다. 이것이 곧 점블세일이다.
한 달에 한 번쯤 오클라호마의 시민들은 오렌지 빛깔이 나는 엽서 한 통을 받기
마련이다.
구세군에서는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중고물자를 얻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가구, 의류, 서적 등 쓸모없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이 지구에서의
회수일은 몇 월 며칠입니다. '구세군'이란 붉은 글씨를 써서 불요품을 현관 앞에
내놓아 주십시오.
당일이 되면 '구세군'이라고 크게 써 붙인 진흥의 트럭이 나타나 거리를 돈다.
낡은 옷장이며 테이블 등 대형 가구들도 아낌없이 내놓는다.
구세군은 이 중고품들을 본부로 가져가 그 일부는 무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지만 그 일부는 구세군 직영의 중고품매점에서 일반에게 판다. 충분히
입을 수 있는 양복 아래위 한 벌이 2달러이기에 자선적인 장사이며 그 이득금은
자선이나 트럭 경비에 충당한다.
구세군과 유사한 것으로 굿윌(선의)이라는 조직도 있다.
이 역시 비영리 단체로 사회의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중고의 생활 물자를
분배해 주는 것이 그 목적이다.
구세군과 다른 것은 그 회수방법이다. 굿윌에서는 슈퍼마켓이나 주유소의 입구
같은 사람 나들이가 많은 곳에 커다란 쇠상자를 설치해 놓는다. 이 쇠상자에는
우체통처럼 커다란 투입구가 나있어 불요중고품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곳에 투입할
수 있게 돼 있다.
이같은 일련의 중고품 자선은 중고품에 혐오를 느끼지 않는 문화감각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미국과 다른 한국의 문화 감각 가운데 하나로서 이 중고품을 둔 혐오를 들 수가
있다. 한국인은 남이 입었던 것이나 썼던 것에 대체로 혐오감을 느낀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체취가 스민다는 것을 물질적으로 보지 않고 정령적으로 본다. 곧 그
사람의 어떤 정령이 스민 영적인 존재로 본다. 어느 한 사람이 입었거나 손때가
묻은 것은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물이며 이 정령적 영역(teritory)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의식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중고품 감각에 대한 세련과 숙달은 소비절약이나 근검절용생활의 내적인
촉진제로서 중요한, 그리고 개발돼야 할 시급한 과제가 아닌가 싶다.
@ff
14. 남이 하니까 나도 하는 버릇
남이 하니까 하는 의식은 이 유성에서 탈락되거나 소외되지 않기 위한 존재에의
안간힘이기도 한 것이다. 곧 유성의 생활이 철칙이 된 것이다.
어느 날, 국민학교 5학년에 다니는 아들놈이 전자 손목시계를 사달라고 정식으로
요구해 왔다.
평소에 저 하고 싶은 일에 자중하고 먹고 싶은 것 사먹으라고 돈 백 원 주어도 잘
받지 않던 놈이기에 이 요구가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아이들이 제 욕심을
말할 때면 나타나게 마련된 아양이나 응석도 없이 정색을 하고 불쑥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 나이에 시계는 필요없다고 타이름으로써 이 요구를 거절했다.
집에 있을 때는 벽시계가 있고 학교에 가면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 주기 때문에
너는 시계가 없어도 불편이 없다는 것을 설득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아들놈은 전혀 설득당한 기색이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같은 반의 다른 아이들이 전자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는 것이 정당하고 당당한
그 이유였다. 처음에는 나의 주장에 동조했던 아내도 이 아들놈의 이유 제기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남이 하니까... 이것은 한국인에게 어느 무엇보다도 강한 정당성(legitimacy)인
것이다.
어느 물건이나 상황이 갖는 실질적인 가치(value)는 한국인에게 별반 중요하지
않으며 남이 하니까의 의타성이 한결 우선되고 선행된다.
나는 겨우 농토 스무 남은 마지기를 짓는 산촌 소농의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평년작일 때 겨우 양식이 되는 불안한 농토를, 그보다 단 한 뼘도 줄일 수 없는
하한의 땅이었다.
내가 열여덟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집안 어른들과 더불어 장례를 두고
상의를 할 때 상여를 마을의 상계에서 쓰는 낡은 것으로 하느냐, 새로 꽃상여를
만드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집안 어른들은 우리 집 만큼도 못 사는 아무 누구도 꽃상여를 냈는데, 이 가문의
체통으로 미루어 보아 동네 상여를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아마 누구의 장례 때는 만장이 80여 개나 되었으니 적어도 80개는 만들어야
한다고 집안 어른들이 압력을 넣었다. 만장이란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친지들이
보내주는 일종의 부조이다. 많이 보내 오면 많고, 적게 보내 오면 적을 수밖에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도 만장의 다과로 가문의 성쇠를 가늠했던 터라 그런
남의 이목의 노예가 되어 상가에서 돈을 내어 보내 오지도 않은 만장을 대량으로
위조생산을 했던 것이다.
객지에 가서 꽃상여를 만드는 기술자를 비싸게 모아 오고, 또 오색 만장의 매스
프로를 하는 등 하여 우리 집 원래 농토의 4분의 1인 다섯 마지기를 팔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 팔려간 밭두렁에는 내가 태어났을 때 심었던 오동나무 열 그루가 우람하게
자라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나무를 심었으며 그 나무로 시집 장가갈 때 농짝을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내나무 습속이 있었던 것이다. 그 내나무가 농토와 더불어
팔려갔기 때문인지 이 '남이 하니까'의 의타의식에 사로잡혔던 할아버지의 장례가
더욱 잊혀지지가 않는다.
시험 볼 때 커닝을 하다 들킨 학생은 대체로 커닝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을 별반
느낀다는 법은 없다. 왜냐하면 남들도 다하니까 하는 생각이 선점해 있기 때문이다.
커닝의 정당성이 이미 획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커닝하다가 들킨 사람은
재수없다고 하여 불운으로 처리를 해버린다. 곧 나쁜 소행이 아니라 재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부정으로 해고당한 공무원들도 예외없이 부정행위가 나쁘다는
가치기준에서 자신의 해고를 생각한다기보다 불운으로 하니까 하는 정당성이 그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생활 주변에는 이 남이 하니까에 휩쓸리는 소비 패턴이 깊게 뿌리박고 있다.
어느 소비재의 가치보다 남들이 그 소비재를 사 쓰니까 나도 사 쓴다는 동조성이
지배하는 소비성향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전기믹서가 선풍처럼 팔리는 어느 시기가 있었다. 야채나 과일을
갈아주는 전기믹서는 생활의 이기일 수는 있어도, 없다고 해서 못 사는 필수품은
아닌 것이다. 혹시 식이요법을 위해 특수 야채를 갈아먹어야 할 사람 같으면
전기믹서는 그 가정에 가치를 형성한다. 그 가치에 따라 믹서를 사면 된다.
한데 그같은 가치가 없는데도 너나없이 믹서를 사들이는 유행은 바로 남들도
사니까 하는 동조성에서 형성된 것이다.
전기밥솥 붐도 마찬가지다. 밥짓는데 편리해서라기보다 남들이 모두 사니까 나도
산다. 요즈음 바싹 유행되고 있는 수도꼭지에 다는 정수기 붐도 일종의 그런 남들이
하니까의 심리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 의식 형성의 요인은 복합적이랄 수가 있다. 한민족은 같은 피부색의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문화를 누려 온 동일종족으로 이같은 동일종족만이 수천 년
동일문화를 누리며 한 땅덩어리에 살아왔다는 것은 세계적인 분포로 보아 이상에
속한다.
이처럼 서로가 같다는 것은 서로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개인주의나 개성을
모르고 산다는 것이 된다. 곧 유성이 생활의 철칙이 된 것이다.
남이 하니까 하는 의식은 이 유성에서 탈락되거나 소외되지 않기 위한 존재에의
안간힘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농경공동체 사회란 유별나게 뛰어나거나 잘 나거나
별나게 유능하거나, 또 못나거나, 처지거나 하는 특수성을 거부하고 남 나름대로
하는 보편적인 유성을 안전기반으로 하여 구축된 사회이다. 높은 가지는 바람을
많이 타고 튀어나온 말뚝은 두들겨 박음으로써 보편화시키는 가치체계 위에 형성된
사회인 것이다. 이같은 유성이 남 나름대로의 의식을 형성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에 있어 소비절약에 역행하는 가장 큰 의식구조 측면에서의 저항과
반작용은 바로 이같은 남이 하니까 유성에 정당성을 찾는 성향이라고 본다.
곧 '유'로부터 '개'를 찾고 '동조성'으로부터 '가치'를 찾아내는 지성의 노력이
소비절약을 원천적으로 정착시키는 오늘을 사는 지혜가 아닌가 싶다.
@ff
15. 매점매석하는 버릇
역사적으로 우리 한국인이 치부하는 경우란 예외없이 매점매석에 있었다. 연암
박지원에 의해 소개된 거부 허생도 매점매석에 의해 치부했다.
1833년 봄이었다. 경강의 김재순이란 돈 많은 객주가 그 전해에 홍수로 흉년이
들었던 것을 계산하고 곡식을 매점하였다.
워낙 돈 많은 객주라, 마포로 몰려든 곡식은 모조리 이 김재순의 창고로 들어갔다.
그 결과 장안에는 쌀이 들어가지 않아 단번에 쌀값이 폭등했다. 살기 어려워진 장안
사람들이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시중 싸전들이 매점한 줄로 알고 몇몇씩 작당하여
성안 싸전에 불을 놓고 다녔다.
이를 막지 못했다 하여 훈련대장 조만영, 금위대장 이철구, 어영대장 이유수 등은
좌천당하고, 시전의 감독기관인 평시서 제조 박제일이 파면되었으며, 난도의 수괴
7명이 처형당했지만 곡가는 여전히 앙등일로에 있었다.
한 달 후에야 동막 객주 김재순이 매점한 것을 알고 잡아다가 엄벌에 처하여,
겨우 쌀값을 바로 잡았던 것이다.
이것은 객주의 독점매석이 얼마나 큰 힘으로 악용될 수 있는가 하는 실례다.
동태 객주가 셋만 작당하면 동태값 반값을 올릴 수 있고, 다섯이 작당하면 곱으로
올릴 수 있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역사적으로 우리 한국인이 치부하는 경우란 예외없이 매점매석에 있었다. 연암
박지원에 의해 소개된 의로운 거부 허생도 매점에 의해 치부했다.
남산 밑 흑적동 게딱지 같은 오막살이에서 굶주려가며 독서만 하고 있던 허생이
도적질이라도 해오라는 아내의 성화에 자극받아 장안 갑부요, 의리 있기로 소문난
변씨를 찾아가 돈 만 금을 빌려 달라고 한다. 허생을 보고 느낀 바 있었는지 면식도
없는 허생에게 만 금을 건네준다. 허생은 그 길로 과실의 집산지인 안성으로 내려가
싯가보다 갑절을 주고 대추, 밤, 배, 감, 귤감 등속을 모조리 매점을 했다. 이 매점을
우리 고유말로 '통좀한다'고 했으며 매점갑부를 통좀부자라 일컬었던 것이다.
이 허생의 통좀으로 각국 각지에서 제사를 지낼 수가 없게 되었고 과실상들은
허생에게 열 갑절을 주고 과실을 도로 사가게끔까지 되었던 것이다.
통좀부자가 된 허생은 다시 제주도로 건너가 망건의 원료인 말총을 모조리
통좀함으로써 망건값이 당장 열 갑절이나 폭등해 버렸다.
이같이 하여 통좀거부가 된 허생은 은 백만 금 중 90만을 빈궁 고독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10만 금을 돈을 빌려 주었던 변씨에게 갚고 빈털터리로 남산 밑 게딱지
같은 오두막으로 다시 기어들어갔던 것이다. 변씨가 그 돈을 받지 않겠다 하고
돌려주자 '내가 만일 부를 원한다면 백만 금을 버리고 10만 금을 가져가겠소.
이로부터 먹고 입을 약간의 생활비만 대주면 고맙겠소.' 하고 받지 않았던 것이다.
변씨가 허생의 뜻을 들어 매월 양식과 포목을 대어주니 허생은 꼭 먹고 입는 것만
받고 나머지는 일승 일척이라도 돌려 보냈다 한다.
변씨가 이완에게 허생의 이인됨을 말했더니 친히 찾아가 계획을 상의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개화기 때 장안 거부로 손꼽혔던 상쾌도 바로 통좀부자였다. 안동 김씨 세도가인
김병국 집에 종으로 있던 상쾌, 상신 형제는 상전의 신임을 확고하게 하고자 꾀를
내었다. 벙어리 통을 사서 한푼 두푼 돈을 저축, 10냥이란 돈을 모았다.
정경부인이 상쾌를 불러 능금 닷돈 어치를 사오라 시키자 모전에 가서 제 돈 두
돈을 얹어 일곱 돈 하는 주상품을 사다 받쳤다.
이렇게 제 돈을 얹어 비싼 물건을 싸게 사다 바치자 상전은 다른 종들을 의심하게
되는 한편 상쾌에의 신임이 두터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신임으로 창고의 출납뿐
아니라 사동 대감 댁의 재산을 상쾌가 모두 관리하게 되었고, 그 후광을 입어 뚝섬
객주들로 하여금 소금이나 시탄을 매점매석케 하여 값을 급등시켜 팔아먹는 등
통좀을 거듭하여 장안에 소문난 부자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벼락부자가 생겼다면 예외없이 통좀부자였으며 통좀부자가 생겨날
구조적인 어떤 온상이 돼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가장 큰 요인이 바로 각 수요자들이 수요물자를 비축해 놓지 않는 개연성에
있다 할 수 있다.
어느 한 집에서 수요로 하는 물자를 1년치만 비축해 놓았던들 매점에 의해
희귀해진다 하여 등귀현상은 당장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통좀할 생각도
먹지 않게 될 것이다.
비축하질 않거나 비축한다 해도 그 비축량이 적기 때문에 매점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ff
16. 외래품을 좋아하는 버릇
우리 한국 사람이 내가 보는 나, 곧 실제의 나와 남이 보는 나, 곧 남에게
인식시키고 싶은 내가 다르다는 것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외래품 불매운동을 생각하기 전에 왜 우리 한국 사람이 외래품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순리일 것 같다.
거기에는 물리적 이유와 심리적 이유가 있다. 물리적 이유란 외래품이 질이나
색상이나 디자인이나 내구성 등이 좋았기 때문에 외래품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양의 공업기술이 발달하여 질이 좋을 수밖에 없었고, 또 2차대전과
6.25전쟁을 겪는 동안 물자부족과 궁핍 때문에 국산품 질이 외래품을 따라갈 수
없었던 데서 형성된 어찌할 수 없는 외래품 선호랄 수가 있다.
이같은 물리적 이유는 국산품의 질적 향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이유랄 수가 있다.
사실상 분야에 따라서는 외래품에 못지 않거나 외래품을 앞서는 국산품이 나오고
있어 물리적 이유의 극복은 낙관적이랄 수 있다.
한데 비관적인 것은 심리적 이유다. 한국 사람이 외래품을 선호하게 된 것은 질이
좋다는 물리적 이유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사람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외국이 좋고 커서 잘 산다는 막연한
사대사상이 의식구조 속에 체질화돼 내려왔다. 수천 년 계속된 중국에의 사대
때문도 있겠고, 또 삼국시대 이래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어떤 외국으로부터도
쇄국을 해왔기 때문도 있겠다.
한말에 타력에 의해 쇄국에서 풀리면서 접하기 시작한 외국들이 모두 우리보다
문명이나 문화나 경제가 발달된 서양 여러 나라였기에 외국에 대해 열등감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열등감이 외국 선망이라는 또다른 사대사상을 싹트게 했던
것이다.
곧 외국것은 선별없이 무턱대고 좋다는 막연한 생각은 이같은 사대전통과
쇄국전통의 필연적인 선물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우리 한국 사람은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두개의 자아를 갖고
살아왔던 것과 외래 선망이 야합하여 외래품 선호의 심리적 이유를 형성해 놓고 산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이 내가 보는 나, 곧 실제의 나와 남이 보는 나, 곧 남에게
인식시키고 싶은 내가 다르다는 것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외출한 때의 복장과 집에서 있을 때의 복장이 그렇게 표변할 수가 없다.
이브 생 로랑에다가 구치 핸드백이니 최고급품으로 차리고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기가 바쁘게 훨훨 벗어 버리고 인조치마에 속곳가랑이 펄렁이며 산다. 곧 집
밖에 나가 남이 보는 나와 집안에서 내가 보는 내가 이렇게 표변한다.
물론 서양 사람도 파티나 음악회 같은데 나갈 때는 요란스럽게 꾸미고 나가지만
친구를 만나다든가 쇼핑한다는 등의 일상적인 외출을 할 때는 집안에서 입던 옷
그대로 입고 나간다. 곧 집안팎에서 차림새의 표변이 없다.
이처럼 우리 한국 사람은 남들에게는 실제의 나 이상으로 잘 보이려고 하는
의식구조의 노에가 되었다. 경제측면에서나 명예측면, 권력측면, 인격측면에서
실제의 나보다도 돋보이려 하고 이 표리의 이중구조가 남이 보는 외형적인 것에
사치를 유발한다. 남들이 고급으로 여기는 것을 몸에 지니거나 걸치거나 집에 차려
놓으면 남이 보는 나, 곧 환상적인 자아를 충족시키기에 십상이다.
외래품은 고급이라는 등식이 성립돼 있고 우리나라에서 외래품 지니기를 좋아하는
심리적 이유가 이 한국인의 속다르고 겉다른 표리구조에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은 외래품을 선택할 때 그것이 비록 값이 비싸지만 내구성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경제적이라는 판단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고급이라는
인식에 부응하기 위해 선택을 한다. 곧 상표 때문에 산다. 외래상표의 국산품이 이
세상에서 우리나라처럼 판을 치는 나라가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분명히
국산 자재 가지고 국산 기술로 한국 사람이 만든 상품인데도 상표가 외국상표라
해서 값은 곱절 이상으로 받고 또 그것이 팔리는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이 심리적 이유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이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남이 보는 환상적인 나와 내가 보는 실제적인 나 사이에 공백을 짓눌러
버리고 표리가 있는 나가 아니라 단일의 나로서 성숙해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외래품이 고급품이라는 인식의 증발이 따라야 한다. 모든 한국인이 가식 없고
허식이 없는 본연의 나가 되었을 때 발을 붙이려 해도 붙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외래품 불매운동은 외래품을 사면 그만큼 우리 돈이 외국으로 나가
가난하게 된다는 국가적인 대의명분 갖고는 설득력도 없고 또 실효를 거두기가
어렵다. 오히려 외래품을 몸에 지니고 걸치고 또 먹고 집안에 놓아두는 것이 실제의
자기 자신을 외래품이라고 위광을 이용하여 돋보이려는 위선행위요, 위선자라는
인식을 보편화시키고 생활시키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 본다.
곧 외래품을 선호하는 심리적 이유, 그 밑바닥에서 대책을 세워 계몽하는 쪽으로
몰아 갔으면 한다.
@ff
17. 학력에 집착하는 버릇
학력주의 사회와 학력주의 사회를 구분하면서 우리는 학력이 아니라 학력에 의해
인간을 평가하는 학력사회적 요인이 우세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있어 학교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외국에 비해 월등하게 크다.
한데 그 비중은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비중이 아니라 명목상 의미에서의 비중이란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고등 교육을 받았다는 자격은 반드시 고도의 전문적 능력을
지녔음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대학을 졸업했다는 명목적인 효과가
효력을 발휘하고 또 크게 작용하는 사회란 점에서 학교 교육의 비중이 커져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 인생 항로의 출범은 대학을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 나왔으면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의해 이미 장래의 방향이나 목적지가 어림으로나마
결정되는 그런 사회인 것이다.
그래서 학력주의 사회와 학력주의 사회를 구분하게 되었고 우리나라는 학력이
아니라 학력에 의해 인간을 평가하는 학력 사회적 요인이 우세하다 할 것이다.
이것이 여러 외국의 학교와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진 우리 학교의 특징이랄
수가 있다.
이 학력사회에 사는 오늘날 학생들의 의식구조가 외국의 구조와 달라질 것은 뻔한
일이다.
먼저 학력사회의 장단점부터 가려 볼 필요가 있다.
학력 사회는 장단점을 양쪽에 지닌 양날의 칼이랄 수가 있다. 오늘날 과당 경쟁
속에 신음하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불행은 이 단점의 면이 크게 가늠하고 있기
때문이며 장점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도 못하고 있다.
학력 사회의 장점은 누구나 다 학교만 졸업하면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게 인생의
스타트 라인에 설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가문의 귀천이나 직업의 귀천과
재력의 다과 등 아이들의 능력에 관계없는 사회적 조건 때문에 학교의 문호가
제한받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같은 사회에서는 사회적 신분이나 재력에 아랑곳없이
누구나 부상할 수 있을 뿐더러 일단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문호가 개방된
사회인 것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이 비싼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어 재력상의 불평등이 격차를 형성시키고는 있지만 원칙면에서는
재력에 차등을 두진 않고 있는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이 우리나라처럼 교육 기회에 평등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이를테면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일레븐 테스트라 하여 중학교에 들어 갈 나이인
열한 살만 되면 국가 시험을 치른다. 이 시험을 계기로 그 인생이 엘리트 코스를
밟느냐, 비엘리트 코스를 밟느냐 판가름이 된다. 비엘리트로 판정이 난 소년은
일찍부터 직업 학교나 직업 전문 학교로 발길을 돌리고 엘리트로 판정된 소수의
소년들만이 소수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 사회의 지도적 인물이 된다. 근래에 와서
열한 살 된 아이의 능력으로 일생을 판단하는 것이 무자비하다 하여 비판의 소리가
높지만 여전히 이 차별로써 다수를 걸러내고 소수만을 골라 가르친다.
그러기에 유럽 각국마다 우리나라처럼 대학이 많지가 않다. 아니 필요가 없다.
빈부의 계층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구미의 계층 사회에 비기면 우리나라의
학력 사회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 청소년이
크게 혜택을 받고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이 곧 학력 사회의 장점이다.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가 붙게 마련이듯이 평등한 자유 개방의 문호 앞에는
혹심한 학력 경쟁, 수험 경쟁이 따르게 마련이다.
곧 일생의 경쟁이 학교 시대에 집중되는 느낌마저도 든다.
국가나 사회가 1년에 요구하는 인재는 국한되어 있는데 그 국한된'사회'를 위해
1년이면 몇만 대로 배출된다. 이 험난한 경쟁은 대학 입시의 경쟁으로 소급되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이 악순환 속에서 우선 이겨내고 봐야 한다는 의식이 맨 먼저 선행되기에
경쟁에서 이긴다는 최고의 가치관 아래서 많은 청소년의 의식 구조가 개조되고
재구성된다.
첫째, 서두에 지적했듯이 학력을 위해 공부를 하지 않고 경쟁에서 이겨낼 시험
공부를 치중, 공부를 바로 시험 공부로 오인하게 까지 됐다. 어쩌면 한국의
고등학생이 세계 어느 나라의 고등학생 보다, 또 예전 어느 시대의 고등학생보다
공부하는 시간은 많을 것이다. 바람직한 그 많은 시간을 시험 치르기 위한 일종의
수험 공부이다. 바람직한 그 많은 시간을 시험 치르기 위한 일종의 수험 공부로
소비한다는 것은 마치 금그릇에다 오줌 받는 격이다.
더욱이 출제 범위를 교과서에 국한하는 바람에 그 많은 시간을 공부하면서도 얻을
수 있는 지식 범위는 그 좁디좁은 교과서 범위를 못 벗어난다. 어쩌면 그 공부
시간을 유용하게 쓴다면 박사 학위라도 얻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현대 청소년들에게 창의력과 정서력을 불모케 했다. 시험 공부란 수단
공부이기에 창의력을 개발한다든지 정서력을 풍요하게 하는 공부가 못 된다.
스스로의 인생을 풍요하게 하며 국가 사회에 이바지할 능력이 결여되는 그런
드라이하고 무능한 인간 공장이 돼 가고 있다.
셋째, 남을 항상 낙후시켜야만이 내가 선택되는 겹치기 경쟁 사회의 생리 때문에
남을 보다 낙후시키고 못 되고 잘 안 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작용을 하는 악성의
의식이 도사리게 된다.
물에 빠진 자에게 손을 빌려주는 인간이 아니라 물에 빠진 자가 내어 뻗은 구원의
손을 뿌리치는 인간이 돼 가고 있다.
넷째, 비단 수험 공부가 끝난 후에도 공부하는 목적을 항상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취직을 위한 공부, 고시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
승진이나 자격을 따기 위한 공부, 학위를 따기 위한 공부만을 한다. 그로써
상향의식은 충족될지 몰라도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풍요한 자기 계발이나 국가,
사회, 학술, 예술에의 참다운 기여는 하지 못하는 그런 인간이 되고 만다.
외국에도 수단을 위해 보다 높은 교육을 받으려는 성향은 있다. 이를테면 국제
청소년의 의식 조사에서 '학교는 취직이나 결혼에 유리한 수단이 돼 있다.'고
생각하는 각국별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독 24.8퍼센트, 프랑스 33.4퍼센트, 스웨덴 35.8퍼센트, 미국 35.9퍼센트, 영국
40.6퍼센트, 스위스 41.7퍼센트, 일본 51.4퍼센트.
한국에서는 조사한 자료가 없어 비길 수가 없으나 아마 50퍼센트 이상은 될
것이다. 어쩌면 80퍼센트가 넘을지도 모른다.
다섯째, 이 경쟁적 학력 사회는 한국인의 의식구조 가운데 비교적 강한 편인 타인
지향성과 야합하여 보다 타인 지향의 성향을 강하게 하고 있다.
공부도 하기 싫을 뿐 아니라 공부해 봤자 별볼 일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청소년일지라도 모두 대학에 가니까, 또는 누구도 가는데 내가 안 갈 수 없다는
타인 지향성 진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진학동기를 물어 본 우리나라의 통계 자료는 더러 있다. 뚜렷한 동기가 없이
모두들 가니까 간다고 답변하는 율이 조사 대상의 18퍼센트에 이르고 있다. 여자
대학생만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는 보다 상승하여 27퍼센트에 이르고 있다.
전기 국제청소년 의식조사에서도 같은 설문조사가 있었는데 각국별 비율은 다음과
같이 거의가 영콤마 이하다.
서독 0.5퍼센트, 영국 1.0퍼센트, 프랑스 0.6퍼센트, 일본 4.7퍼센트.
물론 유럽 사람들은 합리주의적 사고를 하기에 무목적의 행동이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타인 지향의 율이 무시할 만큼 적다.
남에게 뒤지지 않고 '남도 하는데, 내가....' 하는 의식은 근면성을 유발하는 좋은
장점도 있다. 그 타인 지향성 의식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번영에 적지 않은 역활,
작용을 할 것으로 본다.
이 학력 사회는 한국 청소년들로 하여금 이상과 같은 정상적이지 못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후천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청소년의 의식 변화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많은 부작용을 빚고 있기도
하다.
비참한 낙방 수험생의 자살과 좌절은 그만 두고라도 모든 청소년들에게 천금의
억압을 주고 있다는 것이 첫째 부작용이요, 수험 공부에 소비되는 젊은이들의
막대한 에너지 낭비가 그 둘째 부작용이며, 그 때에 많은 다른 가능성의 싹이
잘리거나 시들고 있다는 것이 그 셋째 부작용이다.
그 결과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단절하는 타인 불신의 불행한 국민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해도 대과가 없다.
흔히 요즈음 청소년들 사이에 무기력, 무관심, 무책임, 무감동의 사무주의가
만연되고 있다고들 한다. 그것을 현대 젊은이들의 책임으로 곧잘 돌리고 있으나
이것은 바로 어릴 때부터 그 순진하고 발랄한 정신에 너무 강한 억압을 가한데서
비롯된 일종의 정신 이상 증상이랄 수가 있다.
평등한 개방 사회의 장점도 이 개방 사회의 결점인 학력 사회의 병폐 때문에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ff
18. 합리화하는 버릇
나--자아는 세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곧 하는 나, 보는 나, 보여지는
나가 그것이다.
중학교 입학시험 때 체력시험의 한 종목으로 마라톤이 있었다.
마라톤을 해본 학생이면 어느 누구나 체험했듯이 도중에 걷고 싶은 강력한 유혹을
받게 마련이다. 비록 단축된 마라톤 코스이긴 하만 달려봤다는 것이 겨우 운동회 때
100미터 이상 달려본 체험밖에 없는 당시의 나로서는 걷고 싶은 유혹이 대단했다.
처지면 시험에 떨어진다는 그런 정신적 압력과 이 유혹 틈에서 무척 갈등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정신과 육체가 서로 싸움을 하면서 달리는데 드디어 어느 수험생 하나가
달리기를 포기하고 걷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한 사람이 걷기
시작하지 잇따라 두 사람, 세 사람, 다섯 사람, 열 사람이 걷기 시작했다.
'남들도 다 걸어가는데....' 하고 내 나름의 합리화를 한 다음 나도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약 3분의 1이 걸어서 달리는 이상한 마라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걸어가는 마라톤을 했던 그 많은 수험생들 모두가 나처럼 남들도
걸어가니까 나도...하는 합리화 끝에 걸었을 것은 뻔한 일이다.
뮌헨 올림픽 때 마라톤에서 처녀 출전한 무명의 미국선수 쇼터가 우승을 했었다.
이때 어떻게 해서 우승할 수가 있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쇼터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던 것이다.
"마라톤은 과격한 경기입니다. 남과 겨룬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괴로운
운동이죠. 그래서 나는 남과 겨루지 않고 또 남을 의식하지 않고 철저하게 내
나름대로 뛰었습니다. 물론 몇 등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전혀 배제하였고, 미국의
명예 같은 것도 전혀 생각 밖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그를 압박하는 국가의 명예와 자기 자신의 명예 그리고 승패 같은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뛴 것이 바로 우승하게 한 원인이 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
된다. 바꿔 말하면 대타경쟁은 전혀 염두에 없고 오로지 대자경쟁만을 했다는 것이
된다. 만약 마라톤을 대타경쟁으로 뛴다면 다른 선수가 느리게 뛰니까 나도 느리게
뛰어도 되고 압도적으로 앞서서 승부가 결정적으로 파악되면 곧 가까이 가서
걸어가도 된다. 그러나 대자경쟁은 그럴 수가 없다.
내가 시험 마라톤에서 걸었던 것도 철두철미 남을 의식한 대타경쟁이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비단 마라톤뿐만 아니다. 우리 일상 생활은 온통 이 대타경쟁의 여울에 휘말려
영위되고 있다 해도 대과가 없다. 학생들도 예외가 아니다. 공부를 하지 않는 가장
본격적인 이유가 '남들도 노는데 난들....' 하는 생각이다. 공부를 하는 소수에의
동화보다 공부를 하지 않는 다수에의 동화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버스나 택시
정류장에서 열을 서서 기다리다가도 몇 사람이 그 열을 무시하고 잡아타면 열 서서
기다리던 것이 바보처럼만 여겨져 '남들도...' 의식이 재빨리 작용하여 열은 이탈
혼잡을 이룬다.
따라서 무슨 일이 잘못됐을 때 남의 탓도 잘한다.
무슨 일을 실패하면 남이 그렇게 시켰기 때문에 실패했다 하고 내가 공부 못한
것은 집이 가난했기 때문이요, 내가 가난한 것은 조상탓으로 미룬다.
내가 희망한 대학에 떨어진 것은 선생이 학과 선택을 잘못해준 탓이요, 또 희망
대학에 동급생이 대거 낙방하면 남들도 낙방했는데, 하고 자위한다.
나-자아(ego)는 다음과 같은 세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곧 하는 나, 보는 나, 보여지는 나가 그것이다.
'하는 나'란 주체적으로 무엇인가 행동하는 나다. 행동적인 인간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하는 나'의 요소가 다른 요소보다 강하기 때문에 행동적이다. 바람직한
요소이긴 하지만 이 '하는 나'의 요소가 별나게 발달한 사람은 달리고 나서
생각한다는 식으로 행동만이 앞서서 분별없는 결과를 곧잘 가져오기도 한다. 우선
먼저 때려놓고 먼저 부셔놓고 시비는 나중에 한다. 이를테면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 격이다.
'보는 나'는 관찰자요, 사고자로서의 나다. 사물이나 사리를 용의주도하게
관찰하여 객관화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 그 행동 때문에
앞으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다는 것을 세밀하게 계산을 하고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행동을 수정하기에 소극적일 수도 있지만 빈틈이 없다.
하지만 이 '보는 나'도 너무 심하면 실행이 따르지 않고 비평만 하고 탁상공론으로
지새우는 결점이 있다. 앞서 자동차의 브레이크에 비기면 브레이크가 너무 자주
걸려, 가기보다 가지 않는 것을 장기로 한 자동차가 된다.
'보여지는 나'는 나 이외의 남이 보는 나와 이것은 타인으로부터 '보여지는
나'이며 남들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 바꿔 말하면 내가 남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가
하는 의식이다. 이 역시 남들과 사는 공동 사회에서 내가 적자로서 생존하려면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멋대로 산다 해서 그멋대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요, 또한 남을 의식하고 살다 보면 그 공동체에서 소외당해
버림받은 인생이 된다.
하지만 너무나 남에게 보여지는 나를 의식하고 살다 보면 개성도 없고 창의력도
없는 부족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된다.
자동차에 비기면 그저 남보기에 모양만 좋고 빛깔만 좋을 뿐 달리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자동차 격이다.
가장 이상적인 자동차는 성능 좋게 달리기도 하고 또 브레이크는 잘 들어야 하며
빛깔도 디자인도 좋다는 이 세 가지 요소의 균형이 잘 잡혀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만약 파란색의 얼룩말을 발견한 자에게 백만 달러의
현상금을 준다고 미국의 한 부호가 현상금을 걸었다고 하자. 이에 대한 각국의
반응은 다음과 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독일 사람은 맨 먼저 도서관으로 뛰어 들어가 진화론부터 따져 그 파란 얼룩말의
생태와 그 생존하는 지역을 탐구하려 든다.
이에 비해 영국인은 맨 먼저 아프리카의 지도부터 산다. 그리고 사파리 복을 입고
여행 준비를 시작한다.
프랑스 사람은 어느새 노새 한 마리를 구해 놓고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를 문 채
그 노새 몸에다가 파란 페인트 칠을 한다.
일본 사람은 파란 털을 구해다가 낱낱이 노새의 몸에 심는다.
스페인 사람은 파란 줄말을 생각하기에 앞서 우선 백만 달러라는 돈에 신이 나서
성대하게 전야제를 벌이고 한탕 먹고 본다.
각 민족의 민족성이 완전히 들어나고 있다. 앞서 자아의 세 가지 유형에다 맞추어
보면 '하는 나'의 유형이 강한 것은 아프리카 지도를 먼저 사는 영국인이요, '보는
나'의 유형이 강한 것은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독일 사람이며, '보여지는 나'의
유형이 강한 것도 페인트 칠을 하는 프랑스 인과 그리고 푸른 털을 심는 일본
사람이란 것이다.
만약 이 어느 유형에 한국인이 해당하는가를 따져 보면 한국인은 프랑스 인과
일본인이 속하는 보여지는 나의 유형에 속할 것은 뻔한 일이다.
곧 한국인은 이 세 가지 자아유형 가운데 가장 발달하고 심한 요소가 남을
의식하고 그 남의 눈에 빗나가거나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에 가치를 두는
문화이기에 이처럼 남 하는 대로 하는 민족성이 정착하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곧잘 '알았습니까?' 하고 묻는다. 선생님이
이렇게 물었을 때 자기가 가르친 내용을 못 알아 들은 학생을 가려내어 철저히
주지시키고 넘어가려고 묻는다는 법은 없다. 몰라도 '예'하고 안다고 대답해 줄 것을
기대하고 묻는데 예외가 없다.
또한 학생들도 비록 이해 못 했어도 남들이 이해했을 테니 그에 동조해야 하고,
또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을 학생의 도리로 알고 있기에 몰라도 '예' 한다. 남
나름의 동조가 이토록 철저하다. 미국 아이 같으면 아무리 나 이외의 모든 학생이
알았다 해도 모르면 모른다고 알 때까지 우긴다.
요즈음 학생들의 수험 공부도 너무 남을 의식하는 대타경쟁에 편중되고 있기에
공부한 만큼 효력도 못 얻고 고달프고 피로하다. 마라톤에 처녀출전한 미국의 쇼터
선수처럼 대자경쟁으로 전환 수험공부에 임하는 자만이 승리할 것이다. '남이
하니까...'의 의식개조, 그리고 '보여지는 나'에 대한 대담한 탈피가 바람직하다.
@ff
19. 기어오르려는 버릇
외줄기 실가닥에 수천 마리, 수십만 마리의 개미 떼가 기어오르려는 양상을
상상해 보면 이 단선상향의 문제성이 완연해진다.
"위를 보고 걷자"는 대중가요가 유행한 적이 있다. 같은 이름의 영화도
히트했었다. "출세를 하라"는 노래도 꽤 유행했었다. 위를 보고 걷자나 출세를
하라는 것이 모두 우리 한국인의 마음속에 잠재된 어떤 의식에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공명을 일으킨 의식을 상향의식이라 한다. 이 세상 누구에게나 자신의 처지를
보다 높이려는 상향의식이 있다. 그것이 없다는 편이 오히려 이상하다. 하지만 그
의식이 한국인에게 유별나게 강하다는 것, 그 강한 것 때문에 한국사회의 마이너스
요소인 부조리와 부정부패의 소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먼저 상향의식이 강하다는 개연성을 외국인과의 비교로 부각시켜 볼 필요가 있다.
좀 오래된 조사통계이긴 하지만 1966년에 영국에서 실시된 한 식품기업 노동자의
의식조사에 의하면 남자 노동자의 58퍼센트, 여자 노동자의 83퍼센트가 현장감독
자리에의 승진을 거부하고 있다. 감독이라는 직위는 보다 상향된 직위요,
관리직위로서 육체노동을 면할 수 있는 자리다. 한데도 그 상향을 원치 않는
것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별반 흥미가 없다거나 책임이 무겁다는 것이었다.
어느 한 사람 예외없이 감독 직위에 승진하고 싶은 우리 한국인에게는 이해 못할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필자도 영국 여행 도중 리버풀에서 만나 너댓 명의 노동자에게 만약 봉급이
50퍼센트 더 오른다면 뭣에다 쓰겠느냐고 물어 본 일이 있다. 이때 이들의 대꾸는
봉급의 인상은 원치 않고 일을 덜어주어 여가를 늘여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봉급이 50퍼센트 오른다는 것은 경제적 상향을 의미한다. 한데도 그 상향을 원치
않는다. 심신이 감당할 수 있는 지극히 고된 노동조건이 아닌 바에야 우리
한국인이면 경제적 상향을 원하지, 여가를 원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영국
노동자들은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척도에서의 상향보다는 동정스트라이크, 기업간의
임금 격차, 남녀간의 임금 격차에 별난 관심과 정열이 있었던 것이다. 곧 개인의
종적인 상향보다 동료와의 횡적인 연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니스베트는 흔히 써왔던 계급의식이라는 개념 말고
수준의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쓰고 있다. 곧 유럽 사람들이 횡적인 수준의식이
강하다면, 한국인은 종적인 수준의식이 강하다는 것으로 구조적 특성을 대비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상향의식이 강하다는 단적인 증거로는 유럽 사람들에 비해 하향을
하지 않으려는 하향억제의식이 별나게 강하다는 것을 들 수 있는 것이다. 유럽
사람들은 상황이나 사정 또는 환경이 바뀌면 그에 맞추어 자연스레 하향을 한다.
한데 우리 한국인은 이것과 사정이나 상황이 달라졌다 해도 하향은 끝내 하지
않으려 하며, 어찌할 수 없이 하향을 하게 될 때에는 처참하고 처절한 심경에
빠지고 만다.
영국이나 서독, 프랑스에서 수상을 했던 사람이 자연스레 장관자리에 앉곤 한다.
수상으로서 장관자리에 하향했다 해서 털끝만한 저항감을 갖거나 처절해진다는 법은
없다.
우리 한국에서 국무총리하던 사람으로 후에 장관을 한 사람은 단 한 분도
없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만하다. 정승 판서를 지냈던 사람이 지금은 비록 끼니를
못 이어 처자식을 굶기는 일이 있더라도, 아니 혀를 모래에 박고 죽는 일이
있더라도 그 하위직인 참판이나 정랑 벼슬에 하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강한 한국인의 상향의식이 원인이 되어 너무나 한국적인 상황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첫째, 한국인의 단선상향을 들 수가 있겠다. 유럽 사람들은 사회적인 신분이
상승한다고 할 때 그에 알맞는 인격적인 지위, 교양적인 지위, 경제적인 지위,
심지어는 신체적인 지위까지도 조화되어 균형되어야 상승이 가능하다. 곧
복선상향을 하여 인격이나 교양은 형편없는데, 돈만 많이 얻었다고 해서 상향한
것도 아니요, 또 아무도 상향했다고 인정해 주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상향이 더디고 무딘 반면에 별반 상향의지가 강하지 않고, 오히려
복선요소들의 조화나 균형을 잡는데 보다 강한 의지를 보인다.
한국 사람은 상향의지가 강하기에 상향이 빠르고 예민한 단선상향을 노린다.
이를테면 금권이나 벼슬보다 인격적인 상향을 중요시했던 우리 옛 선비 사회에서는
오로지 도학에 의한 인격상이란 단선에 집착, 그 밖의 복선들인 돈이나 벼슬을 전혀
도외시한다.
그리하여 누더기를 입고 끼니를 거르며 숟가락도 갖추지 못하여 한 숟가락으로
식구가 돌려가며 밥을 먹어가면서도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격적으로 숭앙받는 그런
단선상향을 택했던 것이다.
요즈음 돈버는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인간성이나 도덕성, 상식이나 법률을
조개처럼 짓밟고 오로지 돈에 혈안이 되는 것은 단선상향의 단적인 증거이다. 한국
상인들이 해외시장에서 단칼에 큰 돈을 벌 수 있어도 지속적인 돈벌이는 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 단선상향 때문이다. 눈 앞에 있는 돈을 위해서는 신용이며,
인간성이며, 애국심이며, 모든 복선요소를 저버리기에 계속해서 장사를 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한국 업체끼리 해외경쟁입찰에서 덤핑을 하여 서로 손해를 보는 그 잦았던
행위도 이 단선상향성의 의식구조가 원흉인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고질이었던 과외병도 단선상향성이 가장 큰 원흉인 것이다.
우리 한국사회는 어느 한 사람의 인격이나 교양, 재능, 지식, 발상력, 구상력,
창조력, 조화력 등 많은 복선요소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기보다 단선요소, 곧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단선으로 판단하는 성향이 농후하다. 곧
학력이란 단선으로 그 사람의 모든 신분을 결정짓는다. 일류학교를 나오면 수준급의
배우자를 선택, 일류 취직자리가 보장되고 그것은 장래의 안정된 생활과 연결이
된다.
그러기에 일류대학을 나오기 위해서는 유치원부터 '일류'에 다니게 해야 하고, 그
일류라는 단선을 붙들고 기어오르기 위해서는 본래의 인격 함양의 공부와는 전혀
별도의 기어오르기 공부, 곧 수험공부에만 치중하게 되고 그것이 악성의 과외병을
만연시킨 것이다.
외줄기 실가닥에 수천 마리, 수십만 마리의 개미 떼가 기어오르려는 양상을
상상해 보면 이 단선상향의 문제성이 완연해진다.
그 혹심한 경쟁 속에서 서로를 뛰어넘고, 서로를 밀치고 차고 떠밀어 가며
소수만이 가능한 외줄기 상향선 지향을 한다. 그러기에 상향한 소수의
마이너리티보다 상향선에서 떨어져 나간 다수의 메이저리티로 한국 사회의 기층이
형성되고, 그 메이저리티의 좌절감이 마이너리티에의 불신, 불만, 반동으로 고질적인
단절을 이루기에 이른 것이다.
곧 한국 민중의 심리적 저변에는 이 좌절감 보상의 원한이 항존하고 있으며, 이
항존하는 기층심정은 여러 가지 정치, 사회문제에 잠재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한국인의 강한 상향의식은 자기만이 단독으로 기어오르려는 단독상향의
성향을 농후하게 지닌다. 지금 내가 여러 사람과 더불어 배를 타고 바다 위를
달리다가 그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다고 가정하자. 침몰 중에 있는 배로부터 나
혼자만이 구제되어 인양되었다면 그것은 나 개인의 상승이동이요, 침몰하는 배
전체가 구제되어 인양되었다면 그것은 내가 소속된 집단의 상승이동이 된다.
일반적으로 구미인과 한국인과의 상향의식이 두드러진 차이는 구미인들이 배
전체를 상승시키려는 단독상향 성향이 강하다.
앞서 영국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위 상향보다 같은 직업이나 집단 동료의
차별대우에 보다 관심을 보였듯이 구미인들의 상향 욕망은 자신까지 포함한 직업,
집단, 계급, 크게는 국가의 지위 향상에 관심을 더 보인다.
한국인은 어떤 직업집단에 소속되면 가급적 빨리 그 직업을 빠져나와 보다 높은
상향 직업에 취업하기 위하여 직업생활을 한다. 술장사를 하는 사람은 그 술장사를
면하고 보다 상향된 다른 직업을 할 수 있는 밑천 마련을 위해 술장사를 한다.
그러기에 일생 동안 만족하고 안주하는 직업이나 직급이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직업이나 직급이 보다 상향된 직업이나 직급을 위한 과도기요, 디딤돌의
임시과정으로 일생이 점철되게 마련이다.
한데 집단상향성이 강한 구미인들은 자신이 속하고 종사하는 직업에 집착하여 그
직업인끼리 횡적인 유대를 갖고, 힘을 기르고 그 힘을 이용, 그 집단의 상향을
노린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장의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장의사라는 작업집단의
상향을 위해 조합운동으로 직업 이름인 Undertaker를 Funeral Director로
변경하고 직업조합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으며(1882년), 면허제도를 두어
권위와 자격을 높이는가 하면 (1884년), 드디어는 직업 윤리강령(1894년)까지
선포함으로써 품위를 높이는 집단상향을 꾸준히 해온 것이다.
또한 1914년에는 장의대학이란 전문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의사나 변호사처럼
전문적인 권위직업으로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데 꾸준히 노력해 온 것이다.
초면에 사람을 만났을 때 구미인들은 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만 알면
그만이다. 한국 사람처럼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 것만 알아서는 성이 차질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곧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데, 얼마나 높은 사람이냐, 낮은
사람이냐에 전혀 알려 하지도, 또 관심도, 흥미도 갖지 않는다. 이를테면 저 사람은
우리 회사 제품을 사러온 상사원이라는 것만 알면 그만이지, 상사원인데 평사원이냐,
차장이냐, 부장이냐, 부사장이냐 하는 것은 전혀 알고 싶어하지도, 관심도 없다. 곧
그 사람이 소속된 직업집단이 중요하지, 그 사람의 단독상향치인 직위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다.
사회학자 네이들은 사회의 역할을, 본역할과 의사역할로 나눠 풀이하고 있다.
본역할이란 사회전체적으로 통용되는 역할 명칭이요, 의사역할이란 그 집단
내부에서 분화되어 통용되는 역할 명칭이다. 이를테면 대학교수라는 역할을 두고
실례를 들면, 교수라는 것은 본역할 명칭이요, 정교수, 부교수, 조교수, 전임강사는
의사역할 명칭이다.
구미 사람들은 이 본역할만 알면 족한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의사역할까지
알아야만 성이 찬다.
이것은 곧 한국인의 상향의식이 단독 상향성인데, 구미인의 상향의식은
집단상향성이라는 차이 때문에 형성된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이같은 구조적 특성 때문에 한국인은 같은 동료나 같은 집단사람, 그리고 직위
서열이 같은 사람일수록 무자비하게 짓밟고 모략하고 헐뜯고, 마냥 단독성향만 하려
한다. 종적인 단선을 타고 단독성향을 하기 위해서는 횡적인 복선적 요소를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반복과 갈등과 부조리의 원천적 씨앗이 바로 여기에서 싹트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ff
20. 외집단에 불친절한 버릇
한국사람은 내집단 둘레에 큰 성벽을 쌓고 외집단으로부터 침해나 간섭이나
관여를 거부하려 든다. 서비스는 외집단에서 내집단에 작동하는 최초의 관여란
점에서 한국인에게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흔히들 한국인은 서비스를 할 줄 모른다고 한다. 서비스를 할 줄 모를 분더러
서비스를 받을 줄도 모른다. 할 줄도 모르고 받을 줄도 모른다는 이 두 가지 속성이
상승하여 더욱더 한국인으로 하여금 서비스에 미숙하고 서툴게 해왔다.
어떤 것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서비스에 미숙하게 했을까. 그 이유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 세상에는 나와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과 나와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을 내집단이라고 하고, 내가 알고 있지 않는 남을 외집단이라고
한다.
세상은 나라나 민족에 따라 이 내집단을 대하는 것과 외집단을 대하는 것이
일정치가 않다. 유럽이나 미국 사람 또는 중동 사람들은 예부터 유목이나 상업 같은
낯선 사람과 주로 접하는 이동성 생업을 영위해 온 때문인지 나와 잘 알지 못한 남,
곧 외집단에 속한 사람들도 남이 아니라 예비친지로서 친밀감을 갖는다. 외집단의
친밀감이 한국 사람보다 한결 강하다. 이에 비해 서로 아는 친지들끼리만 한 마을에
폐쇄되어 평생을 정착성 생업을 영위해 온 우리 한국인은 외집단에 속하는 남들은
일단 불신을 하고 적대하며 나를 해칠 사람으로까지 경원시한다.
바꿔 말하면 낯선 사람과 만났을 때 서양 사람들은 친화성이 작용하는데,
한국인은 상반성이 작동한다. 서비스란 낯선 사람 사이에 오가는 친화성의 언동이요,
사인이며 제스처다.
그렇다면 한국인에게 서비스가 서툰 이유가 자명해진다. 낯선 사람에게 퉁명하고
불친절하며 가급적 무관, 무심하려고 하는 정신체질에서 서비스가 성숙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사람은 나의 내집단 둘레에 큰 성벽을 쌓고 가급적 외집단으로부터
침해나 간섭이나 관여를 거부하려 든다.
서비스는 바로 외집단에서 내집단에 작동하는 최초의 관여란 점에서 볼 때
서비스는 한국인에게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버스 속에서 한 여학생으로부터 자리를 양보받고 앉았다 하자. 버스
안에 서 잇기가 괴로울 만큼 늙었거나 건강이 나쁜 경우라면 이 여학생의 서비스
또는 친절이 무척 고맙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고마워야 할 그
서비스나 친절이 차라리 주어지지 않은 편이 보다 맘으로는 편했을 것이라는 불편한
느낌이 수반된 것을 체험했을 것이다.
서비스를 받고도 불편하고 부담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나의 내집단에
남(타인)이라는 외집단의 침투를 억제하려는 자연적인 심리의 반동 때문인 것이다.
외집단에 이토록 미숙한 우리 한국인은 내집단 사람에게는 외국 사람이 흉내도 낼
수 없을 만큼 친밀감을 갖는다. 내집단 사람에게는 이해도 초월하고 타산도 하지
않는다. 내집단에 속한 사람 때문에 내가 약간의 손해나 불편을 당해도 별반 짜증도
나질 않고 배가 아프지가 않다.
곧 서비스나 에티켓이나 예의 같은 별반 친밀도가 약한 사람 사이에 오가는
관계매체를 이 친밀한 내집단 사람 사이에 적용한다는 것을 오히려 불쾌하고
섭섭하게 여긴다. 어느 가게 주인이 나와 잘 알고 있는 사이라 하자. 그 가게에
내가 들어갔을 때 그 가게주인이 나와 잘 알고 있는 사이라 하자. 그 가게에 내가
들어갔을 때 그 가게주인이 어느 낯선 고객 대하듯이 '안녕하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뭣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서비스 용어를 늘어놓았다고 하자. 우리 한국
사람은 한 사람 예외없이 서비스를 받았다고 유쾌하기는커녕 기껏 형성시켜 놓은
친밀감을 저해시키는 소원감과 섭섭한 마음을 갖게 마련일 것이다.
그래 서비스고 뭐고 아무말 말고 그 아는 사람이 가게를 찾아온 어떤 가능성을
눈치로 알아차리고 그것을 알아주는 것에 오히려 친절감과 친근감을 가중시켜 준다.
곧 서비스가 서비스 효과를 내질 못하는 내집단 사회에서 자라온 한국 사람이기에
서비스 감각이 발달할 수 없는 것이다.
서비스 풍토가 성숙하지 않는 다른 이유로서 서비스가 가장 왕성하게 기생할
상업관행이 우리나라에 미약했고 또 사농공상이라는 전통적 직업 관념이 말해주듯
상업은 천대받는 직업이었다는 점에서 서비스가 기를 펼 어떤 역사적 여건이 돼
있지 않았음을 들 수가 있다.
우리 선조들은 주로 필요에 의한 물물교환이었기에 그 사이에 거간꾼만 끼면 됐지
서비스 따위는 개입할 수도 개입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서비스에 대한 계급적인
하위개념이 생겼으며 서비스는 아쉬운 사람이나 계급적으로 아랫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됐으며 지금도 그같은 인식은 예외가 아니다. 구미에서는 서비스를
하는 사람이나 서비스를 받는 사람 사이에 서열적 고하 없이 평등한 수평관계에서
주고받기에 서비스를 받는 사람은 그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할 줄 안다. 비록 그
대가가 고맙다는 말 한 마디요, 웃음띤 표정을 지어주는 단순한 것일지라도 기브 앤
테이크의 평등한 교환 이론에서 응분의 대가를 한다. 이에 대해 우리 한국 사람은
의당히 그래야 하고 또 당연하게 받을 사람으로 자신은 당연시하고 서비스에 대한
반례를 하지 않는다. 반례는커녕 오히려 처음 본 사람인데도 반말을 지껄인다.
이토록 서비스를 받을 줄도 모른다.
또한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내집단 사람끼리 살아왔기 때문인지 말을 통해
자신의 요구나 필요를 전달하려 하기보다 상대방이 눈치나 통찰이나 정보를 통해
자신의 요구나 필요를 알아주길 바란다. 곧 어린애들이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려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듯이 한국의 고객들은 가게에 들어와 '왜 있잖아....'
'그것 몰라?'하는 식으로 가게주인에게 알아주기를 원한다.
한국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뭣인가 알아주면 어린애처럼 친밀감을 갖고 접근한다.
고객의 신분이나 가족상황을 알아서 촉발해 주면 더욱 좋고, 그 사람의 차림새나
용모나 식견을 좋은 관점에서 알아주어도 좋다. 그 사람이 지닌 시계나 넥타이나
옷차림이 유명 메이커의 것이면 그것을 알아주어도 좋아라 하고, 또 그 손님의
의중에 기호나 성향을 알아주어도 좋다. 곧 서비스받기에 서툰 한국인에게 하는
서비스는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언사나 굽실거리는 인사보다는 통찰에 의해 알아주는
그래서 응석을 충족시켜 주었을 때 가장 서비스 효과가 상승한다.
@ff
21. 여가를 악덕시하는 버릇
누가 취미생활을 여가란 말로 번역했는지 자못 한국적이랄 수가 있다. 곧 할 일
없는 여기에나 할 일이지 서양 사람들처럼 권리로서 누리려 한다는 법은 없다.
영국 케임브리지에 들렀을 때 나는 그 유명한 케임브리지 대학보다 그곳에 소문난
달리아 공원을 먼저 들렀었다. 공원 이름이 달리아가 아니라 그 공원의 한쪽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달리아 화원이 잘 가꾸어져 있었기로 그같은 이름으로 통칭되고
있었다. 나는 이 달리아보다 이 달리아를 가꾼 피콕크라는 노인에게 보다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이 노인은 주급 17파운드의 난방공사 인부였다. 집세로 매주 천 파운드씩
지불하고, 13파운드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기에 고달픈 인생이라 할 수 있다. 한데
그에게는 달리아 기르는 취미가 있어 시청이 관리하는 공원의 한쪽 모퉁이를 빌어
그곳에다 달리아를 재배, 취미를 흡족시켜왔던 것이다. 일만 끝나면 이곳에 와
손질을 하길 10여 년 해서 영국 최고뿐 아니라 세계 최고의 달리아 화원으로 가꿔
놓고만 것이다. 화원하면 한국에서처럼 꽃을 가꾸어 파는 영업으로 생각하게
마련이나, 이 피콕크 노인의 하원은 영업화원이 아니라 철두철미 순수한 취미화원인
것이다. 그리하여 8월 하순 달리아꽃이 만개하면 이를 일반에게 공개한다. 유럽
각지에서 달리아 애호가들이 1천여 명 몰려들 이때쯤 푼푼이 모아둔 돈으로 손수
차를 끓여 이 애호가들을 대접하는 것이 이 노인이 삶의 보람을 느끼는 최고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 피콕크 노인의 '취미가 나의 제 1인생이요, 직업은 나의 제2인생이다.'고 한
말이 나의 뇌리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다.
사실 서양 사람들은 직업인으로서의 인격과 취미인으로서의 인격을 같은 비중으로
병행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인과 크게 차이가 난다. 취미인으로서 인격을 갖지
못한 사람은 인간으로서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서양 사람의 상식이라 해도
대과가 없다. 오히려 이 가난한 인부 피콕크 노인처럼 직업은 취미생활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하는 경향마저도 없지 않다.
서양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반드시 당신의 취미가 뭐냐고 묻게 마련이다.
취미인으로서의 인격을 안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편이기도
하려니와 상대방과 친밀해지는 가장 편리한 접착제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의 경우 취미는 없어도 되는 여분의 것이다. 살아가다가 여분이 있으면
뭣인가에 취미가 붙게 되겠지 하는 정도의 것에 불과하다. 아니 그 정도라기보다
취미를 갖는다는 것은 인생을 성실하게 살지 않는 증거로서 부정적인 이미지까지
지니게 한다. 누가 취미생활을 여가란 말로 번역했는지 자못 한국적이랄 수가 있다.
곧 할 일 없는 여가에나 할 일이지 서양 사람들처럼 권리로서 누리려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기에 어떤 한국인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어도 주저하거나 당황하게 마련이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사실 아무것도 없기에 생각해 내기가 힘이 든다. 그래서 약
80퍼센트 이상은 독서, 산보라고 한다. 물론 독서나 산보를 하지 않는 한국 사람이
많기에 굳이 취미랄 수 있겠으나 서양 사람들에게 있어 독서나 산보는 일상생활이지
취미는 아닌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 소수가 등산, 골프, 테니스, 우표수집, 서예, 선, 꽃꽂이 등 취미를
갖고 있긴 하지만 서양 사람들의 취미처럼 본격성을 지니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서양 사람들의 그것은 일생을 지속하는데 비해 한국인의 그것은 수년 수개월로
단속적이고 가변적이다.
우리나라 텔레비전 보급율이 유럽의 보급율을 웃돌고, 또 텔레비전 앞에 붙어
사는 시간이 유별나게 많은 것도 이 전통적 무취미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본다.
텔레비전 채널도 세계적으로 많은 편에 속한다. 일본이 17개, 워싱턴이 6개, 런던이
3개, 파리가 2개인데 비해 한국에는 AFKN까지 합쳐서 4개나 된다. 이처럼
텔레비전 문화가 기승을 부린 것은 무취미한 인간의 여가 메우기는 텔레비전이란
이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유럽에 텔레비전 문화 침투가 더딘 이유를 유럽
보수주의 탓인 줄로만 알았으나 현지에 가서 살펴보면 그들의 취미에 열중하다 보니
텔레비전 볼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앞서 달리아 화원의 피콕크 노인에게, '텔레비전은 하루에 얼마 동안 봅니까.'
물었더니, '텔레비전이요, 한 달 두 번 있는 빅게임 때만 봅니다.'고 대꾸한
것이었다.
한국인의 어떤 전통이 한국을 취미 불모지로 만들었을까. 여러 가지 복합 이유가
있겠으나 한국의 풍토와 생업조건, 그리고 유문문화에서 형성된 가치관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 한반도는 남방계생업인 미작이 가능한 가장 북한계에 속한다.
미작의 본고장인 남방에서는 볍씨만 뿌려 놓고 거둬들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북한계의 미작은 볍씨를 뿌려서 그것을 거둘 때까지 속칭 88차례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시한 속에 어느 일을 해내지 않으면 농사를 망치는 그런 긴박한
시한의 연속 속에서 부지런히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가 있다. 사실 한반도의
주생업인 미작은 사람에게 여가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하지 않고 노는
사람은 생존경쟁에서 도태당하고 말며, 따라서 여가를 누린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악일 수밖에 없다. 근면만이 선이요, 여가는 가치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같은 취미 불모의 풍토이기에 유교문화가 영합됐다는 도리론도 성립된다.
공맹사상을 체계화한 주자학은 완물상지라 하여 취미로 흐르는 인간의 마음을
정도가 아닌 사도로 가르쳤던 것이다. 경제를 모르고, 예도 모르며, 취미가 없는
그런 사람이 규범에 맞는 사람이다. 오로지 주어진 일에만 근면하는 것으로서
인생의 가치가 부여됐던 것이다.
요즈음 학생들에게 오로지 공부만을 강요하는 기풍도 바로 이같은 전통적
가치관의 소생인 것이다. 영국에서처럼 소학교 때부터 취미교육을 시키고 취미
성적을 매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경제학자가 유화전람회를 가지면 그 사람 별난 사람이라 하고 치과
의사들이 보컬 그룹을 만들면 별난 사람이라고 말들 한다. 곧 정상이 아닌 이상으로
본다는데 예외가 없다. 정상적인 본무 이외의 일은 하면 변신한다고 해서 이를
엄하게 금지하는 전통이 있었으며, 이 전통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취미인으로서의
인격 형성을 저해해 온 것이다.
@ff
22. 힘없음을 내세우는 버릇
무력에의 공감이 한국인에게는 어떤 도덕, 질서, 법률, 권력의 가치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 공감을 촉발시킴으로써 한국인은 이같은 가치로부터의 소외에서
구제받았던 것이다.
언젠가 택시 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열지어 서 있다가 차례가 되어 택시를
탔다. 한데 나보다 먼저 앞자리에 올라타는 젊은이가 있었다. 운전사는 아마 일행인
줄 알았는지 이 낯선 두 사람을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앞자리 손님과 뒷자리
손님과는 시비가 붙을 수밖에 없었고 무법자인 앞자리 손님이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빠져 더 이상 시비를 할 수 없게 되자 이 젊은이는 나는 권력도
빽도 없는 노동자니까 맘대로 하시구려 하며 자세를 고쳐 눌러앉는 것이었다.
왜 난데없는 권력도 빽도 없는 무력자를 내세우는지 도시 알 수 없었다. 불법과
무력은 통하는 것인지 또는 무력이 유력보다 강하고 또 질서나 도덕이나 법률보다
강하다는 어떤 개념성이 있지 않고는 이 궁지에 몰린 자가 무력으로써 방패로
삼으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은 말로써 시비할 수 없는 그런 경지에서 곧잘 이 무력을 내세우는
버릇이 있다. 이를테면 시비 끝에 육체적인 싸움이 붙기 직전, 싸우는 두 사람은
서로가 먼저 상대방으로부터의 피해자가 되고자 한다. 예외없이 서로 볼을 내밀며
'때려?...' '때려?...' 한다. 싸움은 이겨야 하고 이기려면 선제공격을 하도록 하는
이
행위는 바로 자신을 무력자로 만들어 육체적으로 피해를 받음으로써 주변 사람으로
하여금 무력이라는 공감 측면에서 응석을 떨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은 무력이란 공감에 응석을 떠는 버릇이 보편화되어 있다.
옛날에 산송이라 하여 무덤자리를 두고 가문끼리 싸움이 잦았다. 왜냐하면 풍수를
믿었기에 무덤자리가 가문의 성쇠와 직결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가문이
번창하거나 세도가 있거나 또는 벼슬아치가 있을 경우 이 약자의 풍수혈을 압력으로
빼앗는 경우도 잦았다. 약자의 가문에서 강자와 대결해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최후 수단으로 그 가문의 약자인 부녀자들로 하여금 그 묘자리에 가서
연좌시키는 일종의 무저항 대결을 하는 습속도 있었다. 개화기 철도 공사 때 이
공사가 지연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이 부녀자들의 잦은 연좌 때문이었다고 한다.
철로가 난다는 것은 풍수혈을 끊는 행위로 인식했던 당시의 백성들은 이에
대항하고자 가장 무력한 부녀자들로 하여금 공사장에 연좌시켜 무력항거를 했던
것이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도 이같은 무저항의 저항을
행동강령으로 삼았던 것은 적이 한국적이랄 것이다. 33인의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고 종로 경찰서에 연락하여 체포해 갈 것을 통고했던 것이다.
무력에의 공감이 한국인에게는 어떤 도덕, 질서, 법률, 권력의 가치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 공감을 촉발시킴으로써 한국인은 이같은 가치로부터의 소외에서
구제받았던 것이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라도 재판관 앞에서, "조실부모하고 사고무친인데 먹을 것도
없고 동생들은 배고파 울며...." 하고 무력과 약자를 강조할 때 눈물을 흘리며
공감하고 또 그에 일단 공감하면 한국의 대중들은 그 흉악범죄를 잊어 버리거나
용서해 준다.
신문에 난 범죄자나 사고로 화를 입는 사람 가운데 3대 독자니, 고학생이니,
고아니, 부모가 병석에 누워 있으니 하는 사적, 이면적인 내용이 보도되고 또 신문
화제의 요령이 되어 있는 것도 한국적이랄 수 있다. 그런 무력성, 약자성의 보도가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시켜 표면적인 보도에서 못 느끼는 인간적 여운을 남겨주기
때문이다. 외국의 신문에서는 그같은 요소는 사적이므로 취재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리지도 않고 또 독자에게도 공감을 준다는 법이 없다.
한국인이 인간관계에서 '사정을 한다'는 요소는 굉장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곧
통사정을 한다는 것은 이치, 도리나 법적으로는 불합리하고 불법이며 되지 않는
일을 이같은 약자성, 무력성을 강조하여 공감시킴으로써 무슨 일을 용서받고 또 안
될 일을 해내는 그런 한국적 함수관계인 것이다. 그같은 불합리하고 불법적인
행위를 미국 사람들에게 통사정했다고 들어먹는다는 법은 없다. 한국인에게 어떤
요소가 이같이 무력에 응석을 떨고, 그것이 힘을 갖게 했을까. 여러 가지 복합요소가
있다고 본다. 첫째, 한국인은 아이가 어머니에 의존하고 응석을 부리는 그런
모성의존적 퍼서낼러티가 강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곧 어머니에의 응석은 사리,
도리나 법률 같은 이성사회를 초월한 행위다. 서양인이 이성적이고 독립적인
부성문화라면 한국인은 정실적, 의존적인 모성문화라 그 응석이 실생활에서 무력
공감에의 응석으로 나타난다. 둘째, 한국인은 가족외적 요소에 침해를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으면 가족 내적요소로 도피하여 구원을 받으려 한다. 셋째, 역사적으로
한국인은 항상 피해자로 살아온 역사시간이 그렇지 않은 역사시간보다 길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외침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정착된 중앙집권제의 정치가
백성으로부터 빼앗아만 갔지 돌려주는 것이 없었다는 기나긴 체험에서 약자의식,
피해자의식이 체질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피해자, 약자끼리 공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그 피해가 피해자의 잘못 때문이라도 피해자끼리의 공감은 이
역사적 상황 아래에서 생존의 조건이었기에 이같은 퍼서낼러티가 체질화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논리는 관존민비, 관민괴리에도 해당된다. 곧 최소한도 조선왕조의 후기에 있어
관은 민의 원망의 표적이 된다. 곧 최소한도 조선왕조의 후기에 있어 관은 민의
원망의 표적이었으며, 곧 최소한도 조선왕조의 후기에 있어 관은 민의 원망의
표적이었으며, 민은 관으로부터의 피해자라는 의식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관에 대한 민의 피해자의식은 곧 민의 피해자 공감력을 강하게 해주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민의 피해자의식에 가장 민감한 악세의 사례를 살펴보자. 종종 2년에
문약으로 해이해진 병역의무를 바로 잡는 방편으로 병역에 응하지 않는 장정에게는
병역 대신 1년에 베 두 필을 바치는 군보포제도로 합법화시켰던 것이다. 이
군보포를 일선의 수령들이 악용, 열여섯 살 이상의 장정으로 국한한 의무 연한을
갓낳은 사내아이들까지 소급해 받아내는가 하면, 이미 병적에 들었던 자로서 사망한
자일지라도 병적에서 제적하지 않고 증세를 했던 것이다.(백골포). 그 밖에
정상적으로 납부한 세미 이외에 수십 가지 부가세가 붙는 것으로 민에 대한 관의
수탈이 얼마큼 제도화되어 있었는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세미를 서울의 창고에
옮기는 동안 축이 난다 하여 그 보충미 명목으로 1섬당 3승색을 부가세로 더
받았다. 이를 가승이라 했으며, 또 덧붙이라 하여 운반 도중 새나 쥐가 소모시키는
분량을 보충한다 하여 역시 섬당 3승색 더 받았던 것이다. 이 세미를 배에서 내려
창고까지 들여놓는데 인부 2명의 품이 든다 해서 그 품삯으로 이가미라는 부가세를
받았고, 또 세금을 거두는 관원의 노고에 인정을 베푼다는 미명으로 인정미라는
부가세가 또 붙었다.
이 밖에도 교묘한 명분을 세워 역가미, 진상가미, 책지가미, 수령의 사용전인
치계미, 치계색락미, 서원고복채미, 신관쇄마가, 구관쇄마가, 심지어는 말질할 때
말잡이들이 속임수를 써 남겨먹는 그 손실까지 부가미니 타석미니 하여 부가세로
공식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제도적 수탈 아래서 민의 관에 대한 피해의식은 고질화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공감의 약자의식이 성숙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ff
23. 완전해야 성이 풀리는 버릇
한국의 완전주의는 그 모든 개성이나 자질을 모두 갖추도록 가르치고 있다.
완전이란 힘들고 어려워 그 '완전'을 성취하기란 역사적으로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남도에서 봄에 피는 진달래꽃을 '참꽃'이라 하고 진달래가 지면서 피어나는
철쭉꽃을 '개꽃'이라 한다. 우리나라 말에서 '개'란 접두어는 개떡, 개살구, 개구장
이,
개차반 등이 말해주듯 진짜가 아닌 가짜 혹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
우선적인 것이 아니라 차선적인 것,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것을 뜻한다.
왜 진달래에 '참'이 붙고 비슷한 생김새에 비슷한 빛깔인 같은 과의 꽃인 철쭉에는
'개'가 붙었을까.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철쭉꽃이 진달래에 비해 훨씬 아름답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것이 생명인 꽃이고 보면 '참'과 '개'가 전도돼야 한다. 한데도
진달래가 '참'이 된 이유는 그 꽃잎을 먹을 수 있고 단 술에 빚거나 떡에 빚거나 그
뿌리가 약재로 쓰이는 등 하여, 비단 꽃으로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사람에게 쓸모도
있는 완전한 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비해 철쭉은 점액질이 있어 벌레를
불러들이고 또 유독하여 사람이 먹을 수 없기에 사람의 공리성 가치판단에서
결격요소가 있는 것이 되며, 따라서 '불완전하기에 개꽃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완전할수록 가치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완전지향의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이보다
아름다운 철쭉에 개꽃이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수년 전 여름 나는 설악산의 설악동 입구 강변에서 야영을 한 일이 있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면서 강변의 풀밭에서 낮에는 보지 못했던 노오란 꽃이 일제히 피어나
몽환적인 무드에 황홀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알아 보았더니 해가 지면서 피고
새벽녘에 다무는 달맞이꽃(월견초)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꽃에 흥미를 갖고
식물도감도 찾아보고 고문헌도 뒤져보고 했더니 '개달맞이꽃'으로 돼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중국에서는 이 꽃이름이 '야리향'으로 돼 있으며, 꽃이 피면서
아주 특수한 방향을 풍기기에 그같은 이름을 얻었다 했다. 그래서 규방이나
기방에서는 이 야리향 화분을 창가에 두어 그 방향으로 로맨스 무드를 돋구는 것이
풍류가 돼 있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후 설악산에서 등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한국의 야리향에서 방향을
맡아 보고자 여러 번 달밤에 방황을 해왔지만 방향은커녕 지린내 같은 악취가 날
뿐이었다. 야리향이란 예쁜 이름이 전달되지 못하고 개달맞이라는 차선적이고
불완전한 이름이 붙어 있는가를 이해할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외국인이 한국이나 한국인에 관해 쓰는 글들을 유심히 찾아 읽는데 그
가운데 그들이 이질적으로 생각하는 한국인의 공통요소로서 이 완전지향을 실감할
때가 많다. 이를테면 어느 한 미국인은 어느 한 미국인은 한국에서 옷을 아주 싸게
사입는 방법으로 바지 저고리를 한꺼번에 맞추어 사지 말고 따로따로 사면 된다고
그의 체험을 구체적인 금액을 제시하면서 쓴 것을 본 일이 있다. 분명히 원세트로
한 벌 사입는 돈과 아이비 룩으로 바지 저고리를 따로따로 사입는 돈과는 큰 차이가
난다. 같은 옷 한 벌인데 원세트의 완전주의적 요소가 내포되면 값이 비싸고
빛깔이나 디자인이 각기 다른 불완전주의적 요소가 내포되면 값이 싸지는 이유는 곧
한국인의 완전성향이 빚어 놓은 경제현상인 것이다. 옷 한 벌 해준다는 그런 공여의
가치형성은 원세트로 완전하게 해야지 가능한 것이고 피공여자의 필요나 기호에
따라 바지만, 또는 저고리만 해준다 할 때 그 공여가치는 반감하게 마련이다.
외국인이 쓴 체험 가운데 한국에서는 가구점에 가 자기 마음에 맞는 의자가
있어도 그 하나만은 살 수 없으며, 또 책방에 가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책이 있어도
그 한 권만을 살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도 있었다. 아마 의자의 경우
테이블 하나에 의자 너댓 개가 일조가 된 세트세일이요, 책의 경우 전집의
세트세일인데 어느 하나만 달라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외국에도 세트세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한국처럼 왕성하지는 않아 아마 부엌세간살이 일습까지도
세트세일하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뿐이 아닌가 싶다. 더욱이 한국의 전집 붐은
외국인에게 적이 이상하게 보이는 문화양상 가운데 하나다. 이같은 세트세일이
한국에서 판치는 것은 완전을 추구하는 의식구조의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교육면에서도 이 완전주의가 판친다. 사람에게는 개성이 있고 자질에도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으며 또 사회에서는 이 천차만별의 개성이나 자질을 골고루
요구하고 있다. 한데 한국의 완전주의는 그 모든 개성이나 자질을 모두 갖추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를테면 각급 학교에서 주는 우등상이란, 모든 과목을 모두 잘한
학생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개성과 자질에 맞는 어떤 과목 하나만 잘했다 해서
우등상이 주어진다는 법은 없다. 이에 비해 프랑스의 학교에서는 수학의 우등상,
라틴 어의 우등상, 미술의 우등상이 따로따로 있고 또 용기의 우등상, 협동의
우등상, 엘레강스의 우등상도 있다. 곧 완전주의가 아니라 개성주의다. 그러기에
프랑스의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개성과 자질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개성과
자질의 개발에 스스로가 역점을 둘 뿐 아니라 학부모나 선생들도 그 개성과 자질
개발에 주력을 한다.
구미에 있어 진학할 때 내신제가 갖는 비중은 꽤 크다. 한데 이 내신제는
한국인이 생각한 것처럼 전체 성적의 순위가 아닌 것이다. 내신제가 갖는 장점은
바로 이 종합성적의 우열이 아니라 그 학생의 개성과 자질이 상세히 전달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 자질이 지적으로 단련되어 그 자질을 요구하는 사회의 수요에
응해 그 역할을 다 한다.
지난 학년말에 우리나라 학교에서도 평균 12종 이상의 각기 다른 상이 있고
최고로 상을 많이 주는 학교는 25종의 상이 있었다는 보도를 보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개성을 중요시하는 시상제가 베풀어지고 있구나 생각했었다. 그런 선입감을 갖고
그 기사를 읽어내리는 도중에 여전히 완전주의를 탈피 못하고 있구나 하는 배신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상의 종류가 많은 것은 개성이나 자질별로 시상을 해서 많아진 것이 아니라
시장상, 교육감상, 교육구청장상, 학교장상, 육성회장상,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상
등 온통 유지상으로 상의 종류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 역시 종합성적순에 의한다지만
사정에 쏠려 시상하고 있음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한국인의 완전주의는 그것이 작동되는 경우나 부문에 따라 효과적인 경우도
있지만 이처럼 병폐로서 작용하는 경우나 부문도 많은 것인 경우도 있지만 이처럼
병폐로서 작용하는 경우나 부문도 많은 것이다. 완전이란 어렵고 힘들어 그 '완전'을
성취하기란 역사적으로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불완전한 것으로 그치느니보다 완전한 인간이 되는 편이 한결 가치를 형성한다 할
것이다.
@ff
24. 높은 사람에 약한 버릇
사장부인은 사장의 부인일 뿐이지 회사의 서열과는 전혀 관계없는 직위에 있다.
한데도 남편의 직위인 사장에다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여 사장이 누린 권위를
사원이나 사회에다 누리려 한다.
체호프의 단편소설에 "관리의 죽음"이라는 게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반 체르
비야코프는 회계검사원이라는 하급관리다.
이 이야기는 이 하급관리 이반이 영화구경을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구경하는
도중 이반은 크게 재채기를 한다. 재채기는 일종의 생리현상으로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는 것이기에 많은 관중들도 이 이반의 재채기에 별반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한데 재채기를 하고 난 이반은 바로 제 앞줄에 앉아 있는 분이, 황제가 직접
임명한 운수성의 칙임관인 고급관리 브리스쟈로프임을 알게 된다. 이반의
재채기에서 튀어나온 침이 이 브리스쟈로프의 대머리까지 튀어나간 사실을 두고 이
하급관리는 고민을 한다.
물론 이 고급관리는 이반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이반이 아무 말도 않고 있었으면
아무렇지도 않다. 한데 어딘지 꺼림칙한 이반은 이 고급관리의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매우 죄송하게 됐다고 사과를 한다.
극장에서 집에 돌아온 이 소심한 이반은 유쾌한 것 같지 않은 칙임관의 표정이
맘에 걸려 우울해진다. 그래서 그의 아내와 상의를 한 끝에 이튿날 이 칙임관의
사무실을 찾아가 어젯밤에 재채기를 한 것은 별다른 악의가 있어서 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한다. 이 집요한 사과에 울화가 치민 칙임관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돌아가 버려!" 하고 호통을 친다.
이반의 눈앞은 캄캄해진다. 집에 돌아가 소파에 앉아 있는 자세로 절망 끝에 죽어
버린다.
이 단편은 관료사회의 지위(status)에 대한 억센 서열의식을 풍자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그같은 재채기 때문에 죽기까지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 억센 지위의
서열에 대한 감각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공통된 감각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본다.
사람과 사람을 서열적으로 견주어 볼 기준은 수백 수천 무한정으로 많다.
이를테면 인물이 잘생기고 못생기고의 기준, 학력이 높고 낮고의 기준, 마누라가
예쁘고 밉고 하는 기준, 자식놈의 재주가 좋고 나쁜 기준 등....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에 비해 어떤 기준에서는 서열이 높고 어떤 기준에서는 서열이
낮기도 하다.
관청이나 기업에서 직위가 높고 낮은 것은 그 많은 서열기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한데 우리 한국인은 직위의 기준을 많은 서열기준 가운데 평등한
하나로 여기지 않고, 그 많은 서열기준에서 가장 우선되고 다른 많은 기준을
압도하는 절대기준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데서 적이 한국적이다.
곧 직위는 한국인에게 있어 one of them이 아니라 all of them인 것이다.
직위가 높은 사람은 학식도 높고, 인격도 높으며 돈도 많고 아이들도 보다
행복하다고 약간씩 착각을 하고 있으며, 직위가 높은 본인도 직위가 낮은 다른
사람에 비해 모든 다른 서열기준에서도 자기가 높다는 약간의 착각들을 지니고
있다.
이같은 직위에 자기 인간의 모든 것을 동일시하는
아이덴티피케이션(identification)이 한국인에게 유별나게 강하다.
이를테면 캐딜락을 모는 운전기사는 그 고급 승용차에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
완행하는 소형차를 추월하면서 캐딜락 운전기사는 차창을 열고 그 소형차를 모는
사람에게 일갈을 하는 광경을 곧잘 보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동일시성향의
발로인 것이다.
이를테면 사장 부인은 사장의 부인일 뿐이지 회사의 서열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런
직위에 있다. 한데도 남편의 직위인 사장에다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여 사장이
누린 권위를 사원이나 사회에다 누리려 한다.
한국 사람이 고급 좋아하는 것도 바로 그 고급품에 자기 자신을 동일화하려는
의식구조의 소치라고 본다. 보다 고급 승용차를 탈수록 그 고급 승용차가
나타내주는 어떤 사회적 직위에 자신을 동일화시킨다. 오메가나 로렉스를 참으로서
그 고급 시계가 제시해 주는 어떤 보다 사위의 직위에 동일화하고, 루이뷔통의
핸드백을 들고 가르댕의 스카프를 둘러씀으로써 그 고급 외제품이 암시하는 어떤
직위에 자신을 동일화시킨다.
일류학교에의 과열지망도 일류학교가 지닌 어떤 사회적 직위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화하려는 성향 때문일 것이다.
한말에 안동 김씨 세도는 유명하다. 심지어 김좌근, 김병국 등 세도가들이 문을
맞대고 살았던 교사동에는 전국 팔도에서 몰려든 뇌물의 짐바리와 수레로 꽉 찼다
한다.
빨리 바치고 돌아가야겠기에 급행료를 물어야 한다. 급행료는 그 세도가의
고직이나 집사 등 하인들이 받는 다. 심지어 이 세도가들이 타고 다니는 말에게까지
향응을 베풂으로써 아부를 해야만 했다.
그러기에 '교사동 고직이 세도'란 속담이 생겼으며 '교사동 나귀와 말은 밀과와
약식도 마다고 한다'는 원한의 노래가 퍼지기까지 했다.
곧 안동 김씨 세도에 그 하인과, 나귀나 말까지 아이덴티파이를 했던 것이다.
한국인이 직위만 높아지면 모든 다른 지위도 아울러 높아진다는 착각은 이같은
한국인의 의식구조 가운데 하나인 동일화성향 때문인 것이다.
한국의 웃사람은 직책상의 웃사람일 뿐 아니라 모든 사사까지 웃사람이기에
상사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상사에게는 모든 서열기준에서 자신이 상사만 못하다고 비하하고 살아야
하며 상사보다 좋은 집, 좋은 차, 고급오락, 고급시계를 차는 불손감을 갖는다.
상사의 집에 아내를 보내어 김장을 해주고 맛있는 음식을 바치는 일종의
아부행위도 상사 직위 아래 자신이 놓여 있는 그런 하위 지위의 확인행위인 것이다.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은 곧 한국에 있어 모든 자기의 스테이터스를 직위의
아래에 사장시키는 그런 죽음의 풍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같은 직위지상주의의
탈피야말로 민주주의의 토착화와 밀접한 함수 관계에 있다고 본다.
사람은 얼굴이 다른 만큼 개성과 재능과 가능성이 다르다. 그 차이만큼 서열을
따질 기준도 많다. 그 무한량의 수많은 기준을 직위 아래서 부활시키고 그런
지성적인 용기가 현대의 한국인에게 한국사가 요구하는 역사적 사명이랄 것이다.
@ff
25. 자조하는 버릇
곧 한국인은 탈한국 운동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러기에 한국은 머지않아
한국이라는 특수성으로 좁아지는 세계에 존립할 가치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한국에 관한 옛 중국 문헌을 읽다가 '고려취'란 낱말을 본 일이 있다. 백인에게
노린내, 호인에게 되내가 나는 한국인의 민족냄새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에 의하면 한국말 고린내의 어원이 바로
'고려취'라는 것이었다.
그는 연행길에 이 '고려취'란 말이 생기게 된 동기를 직접 체험했던 것이다.
사신이 행차할 때는 경우에 따라 수백 명에 이르는 가마꾼과 말몰이꾼 등 종들이
수행하게 마련이다. 무도한 이들은 행패도 심했으려니와 몸의 청결도 말이
아니었다.
몇 달 동안 모랫바람을 안고 걸어야만 하기에 몸을 청결히 할 엄두도 못내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들 몸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풍기게 마련이며 이들에 접근했을
때 나는 냄새를 중국 사람들이 고려취라 부르고 무척 싫어했다는 것이다.
또 이 사신행차의 종들은 연행길가의 행상들의 물건을 소매치기하거나 좀도둑질을
자주 하여, 이 조선 사신의 행차가 멀리 나타나면 철시를 하고 저자들은 문을 닫는
것이 상례가 돼 있었다고 박지원은 그의 견문을 써 남기고도 있다. 그리하여 중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뚱이(동이)란 말을, 중국에서 좀도둑이란
뜻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뚱이란 말은 고린내란 말과 더불어 고스란히
우리나라에 흘러들어와 우리말로 정착했으며, 요즈음 어린이들간에 좀도둑질하는
아이를 빗대어 뚱이라고 놀린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 고린내와 뚱이란 두 외래어를 두고 생각해 보자.
이 두 말은 어원이 중국 말이고 중국에서만 통용되었어야 했을 말들이다. 비록
우리나라 사람의 불결이나 나쁜 버릇에서 비롯된 말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 사람들간에 통용될 중국말이지 한국말은 아닌 것이다.
한데 왜 한국을 천대하고 깔보며 수치스런 이 중국말이 국경을 넘어 거침없이
우리나라에 몰려들었고, 또 그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말을 앞다투어 즐겨 쓰게
되었는가 말이다.
여기에 한국인 특유의 사고방식을 찾아볼 수가 있겠다.
이미 박지원도 이 치욕적인 말을 조선 사람이 즐겨 쓰는 일에 한탄하고 연행길
다녀간 한국 사신 일행들이 이 말을 조선 땅에 옮겨놓았을 것이라고 지적해 놓고
있다.
곧 우리의 것을 깔보고 얕보는 자학적 사고방식이 이 신나는 두 낱말을 얼싸안고
즐겨 씀으로서 마치 자기는 고린내나고 뚱이질 하는 한국인으로부터 소외시킬 수
있는 것으로 안 것이다.
'조선 사람이 그렇지 뭐.' 하는 어른들의 말을 곧잘 듣는다. '엽전이 그렇지 뭐.'
'엽전이 그렇지 뭐.' 하는 요즈음 말과 발상이 같다. 곧 고린내나 뚱이란 말을 쓰는
정신체질과 별 다를 게 없다.
무슨 좋지 않는 일이 벌어졌을 때마다 '조선 사람은...' 혹은 '한국 종자는...' 하
며
그 좋지 못한 일을 민족 또는 국민 전체의 소행으로 확대시킨데 길들어 있다.
'조선 사람은 공중 도덕이 없고....' '한국 종자는 의존심이 강해서....' 예를 들라
면
끝이 없다.
한국인의 결함을 반성하기 위해서 이같은 한국인 저주의 어두로 시작된다면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렇게 한국을 통틀어 얕보는 사람의 저의가, 자기는 마치 그런
한국 사람이 아닌 체하는데 예외가 없다. 이를테면 엽전은 공중도덕심이 없다고
말한 사람은 한국 사람들이 새치기를 잘하고 길가에 침을 뱉고 하는 것을 그 실례로
곧잘 드는데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에는 '단 나만은 예외이지만....' 하는
은연중의 예의 표현이 내포되게 마련이다.
이같은 풍조는 한국인의 사고방식 가운데 분명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자학의
심성 때문인 것이다.
그 같은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의 주변에는 신이나 사람이나 역사나 풍속이나 또
집이나 옷이나, 밥그릇이나 모두가 군더더기 같은 지저분한 것들뿐이다.
그런 것들은 희랍의 신이나 독일의 사상이나, 영국의 역사, 프랑스의 풍속,
이탈리아의 옷, 코르시카의 밥그릇에 비겨 열등하고 천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한국의 전통에 열등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있지만 그만한 열등적
요소는 비단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앵글로 색슨 족에도 게르만 족에도 또 슬라브
족에도 다 있다. 오히려 더 심할 수도 있다.
어느 민족에게나 마이너스적인 가치도 있고 또 플러스적인 가치도 있게 마련이다.
다만 다른 민족들은 자기네 마이너스적 가치를 극소화하고 플러스적 가치를
극대화한데 비해 한민족은 마이너스적 가치를 극대화하고 플러스적 가치를
극소화하는 역조의 차이가 다를 뿐인 것이다.
이 오랜 역조시대의 연장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공간적인 옆의 것 곧 외래의
문물이면 모든 것이 좋고, '시간적인 뒤의 것' 곧 전통의 문물이면 모든 것이
나쁘다는 것이 통념화되어 버린 것이다.
테크놀로지 만능의 구미사조만을 옆으로 보고서 그들의 미래상을 정립하려 할 뿐
전통적 한국의 가치관을 발굴해서 미래상을 정립하려고 뒤를 돌아본다는 법은 없다.
곁눈질만 늘어 한국인의 눈은 옆으로 찢어지는 세상에도 흉한 괴물이 돼가고
있다.
그리하여 교통, 통신, 매스컴 등의 발달로 자꾸만 좁아지는 지구상에서 한국인은
국적을 상실한 고아가 돼 가고 있다.
곧 한국인은 탈한국 운동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은 머지않아
한국이라는 특수성으로 좁아지는 세계에 존립할 가치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두려운 사실이 아니겠는가.
성내어 '뒤'를 돌아봐야 할 때라고 본다. 한국인의 문명작용인 전통의 극소화
진행에서 극대화 진행으로 방향을 돌리고 정신혁명을 역사는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적 요구에 부응하는 맨 첫 정신개조는 우리의 것을 얕보는 고린내
콤플렉스와 뚱이 콤플렉스로부터의 대담한 탈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성내어 뒤돌아보는 젊은 세대를 한국사는 목메어 부르고 있는 것이다.
@ff
26. 지름길을 좋아하는 버릇
순리란 어떤 사물의 일부분과 그 일부분을 포함한 전체와의 관계를 의미한다. 또
세부적인 일을 할 때 그것이 내포된 전체를 머릿속에 그리는 감각이 바로
순서감각인 것이다.
연전 어느 가을철에 미국의 동부를 자동차로 가로지르다가 공업도시인
맨체스터에서 폭설을 만났다. 가벼운 옷차림이었기에 방한복 하나를 사입고자
옷가게에 들렀다.
진열장 속에 갖가지 디자인과 여러 색깔의 방한복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빛깔과 디자인으로 된 것을 골라 아가씨에게 꺼내 달라고 했다.
한데 이 아가씨는 꺼내 줄 생각은 않고, 나의 몸 사이즈를 물었다. 몸이 크다는
것만 막연하게 알고 있을 뿐 내 몸 사이즈가 얼마나 되는지, 더욱이 미국 사이즈에
상식이 없는 나로서는 확답을 할 수가 없었다. 확답을 하지 않은 데는 한국에서처럼
입어 보면 될 것을 까다롭게 군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도 했던 것이다.
"어떤 사이즈를 원합니까? 속에 우모가 든 것을 원합니까? 인조견이 든 것을
원합니까?"
질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겉감이 자연면, 혼방, 나일론으로 세 종류가 있는데 어떤 것을 드릴까요? 폭설이
내리는데 혹시 방수된 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까다롭게 묻는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한국인은 겉으로 나타나는
감각적인 부분, 즉 빛깔이나 모양새만 보고 물건을 사려고 들기에 사이즈라든가
옷감의 질 같은 실용가치 면에서는 등한해지기 쉽다. '색을 보는 자는 형을 보지
않는다'는 공맹의 철리에도 있듯이 어떤 사물의 필요성이라든가 실용도를 우선해서
고려해야 할 경우에 대체로 한국인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먼저
생각하는 폐단이 있는 듯하다.
맨 먼저 몸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그 옷의 내구성과
방수성은 어떤가를 따져 보고 나서 빛깔이나 디자인 같은 감각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순리인데, 선택의 순서가 거꾸로 소급되는 우리들의 이러한 심성을 지름길
의식이라 부르기로 하자.
따지고 보면 물건 하나 사는데에 작용하는 지름길 의식은 별 문제가 없다 해도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한 일을 실행할 경우 지름길 의식 때문에 순서가 뒤바뀌게
되면 그 일은 엉망진창이 된다.
이를테면 마이홈을 갖고자 수십 년 저축 해 온 한 봉급생활자가 교외에 싼 대지가
나왔다 하면 먼저 사놓고 본다. 아직도 그 개발지에는 도로도 나 있지 않고 상,
하수도 시설도 돼 있지 않지만 '사람 사는 곳인데 어떻게 되겠지.' 하고 이리저리
변통하여 집짓는 일을 서둔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무계획적으로 집을 짓고서
도로를 내고 상, 하수도 시설을 설치하느라 길은 구절양장이 되고 월례행사처럼
길바닥을 파헤쳐야만 한다.
물론 신개발지라 해도 도시계획이 선행되어 도로가 먼저 되고 공공 시설이 들어선
연후에 집이 들어서야 하는데, 한국인의 지름길 의식은 그 순서를 거꾸로부터
시작해 소급해 오곤 한다.
2차대전 이후 전쟁으로 폐허화된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에는 단 한 채의
바라크(판잣집)도 들어서지 않았었다고 한다. 낡은 폐허에서 은인자중하길 10년,
15년, 고생스러움을 참으면서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항만, 공장, 주택 순으로
재건하기 위해 '지름길 부흥'을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 인내 끝에 지은 집들은
당연히 앞으로 수백 년 갈 만큼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들이었다고 한다.
절경인 마터호른이 우러러보이는 스위스의 관광지 체르마트에서는 빈 터가
생겼다고 해도 이 마을 사람들의 합의가 없이는 주인이 맘대로 매매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자동차 출입도 통제하는 이 조용한 마을에 요란스런 미국식 고층
호텔이 들어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배려가 도시 조성에 합당한 순리일
것이다. 한데 한국인의 지름길 의식은 마치 황무지나 밀림을 개척하고 집을
짓는듯이 불도저식으로 도시 조성을 해온 것이다.
순리란 어떤 사물의 일부분과 그 일부분을 포함한 전체와의 관계를 의미한다. 또
세부적인 일을 할 때 그것이 내포된 전체를 머릿속에 그리는 감각이 바로
순서감각인 것이다. 우리 한국인에게는 이 '전체 속의 부분 감각', '부분 밖의 전체
감각' 이라는 순서의식에 대체로 미숙하다.
이 순서의식의 미숙이 지름길 의식을 유발하고 있으며 이 지름길 의식은 여태까지
우리 사회에서 저질러져 온 부정부패, 부조리의 온상이 되어 왔던 것이다.
지름길 의식이 빚는 폐단은 공공질서의 문란에서부터 뇌물을 주고 받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국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줄 서서 못 기다리는 행렬기피증은 세계적이다. 영국
사람은 혼자 있어도 줄을 선다. 기차표 사는데 줄 서는 것쯤은 우리나라에서도
상식이 되어 있지만 홈에 들어가 그 수많은 열차 문전에서까지 줄을 서는 국민이
바로 영국 국민이다. 홈에 올라서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영국 노인이 뒤에
와서 서면서, "Af-ter you sir"한다. 'After you sir'란 인사말도 되지만 다음
차례의 권리는 내가 확실히 보유한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하다.
사실 구미의 소문난 관광지에 들어가려면 보통 2__3시간 줄지어 서서 기다리는
것이 상식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그만큼 기다려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돌아설 것이다. 약은 사람은 새치기를 하던가, 권력 있는 사람은 힘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지름길을 모색할 것이다.
공공질서의 행렬은 눈에 보이는 행렬이지만 우리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잡한
행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테면 돈을 버는 것도 순서가 있는 법이다. 스텝 바이 스텝으로 서서히 바탕을
다져가며 벌어나가는 것이 원칙인데도 이 지름길 의식은 그렇게 순서대로 버는 것이
바보같이 뒤쳐진 것처럼 여겨지게 한다. 그리하여 분에 넘게 남의 돈을 빌리고
은행돈을 끌어대어 투기를 하는 등 지름길 성금을 노리는 모험을 한다. 지름길과
부정부패 부조리와는 바로 종잇장의 표리관계로 사촌간임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집단 내에서의 지위향상에도 지름길 의식이 왕성하게
작용한다. 차근차근히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다져가며 사다리 오르듯 한칸 한칸
순서대로 오르려 하지 않고 위선과 시기와 모략과 전시효과 그리고 아부와 뇌물
등등... 모든 악의 요소를 동원하여 사다리를 두 칸 세 칸씩 뛰어오르려 한다.
한국인의 이 지름길 의식을 어떤 방법으로 없애 나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앞날이
희망적이냐 절망적이냐로 결정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줄 안다.
@ff
27. 중원문화에 맹종하는 버릇
한국적이란 개념이 탄생한 것은 일제 침략시기였다. 민족과 민족문화 말살에
저항하여 민족을 민족문화의 유지하고 명맥을 잇기 위한 안간힘의 표현으로
'한국적'이란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문화권을 분류하는 한 방법으로 문화인류학에서는 중원문화(Central culture)와
변경문화(Marginal culture)로 양대별 한다.
중원문화란 어떤 역사 시기에 있어 가장 우세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그런
문화권의 문화를 뜻한다. 이를테면 서양에 있어 기원 전의 희랍문화, 기원 직후의
로마문화가 그렇고 근세에서는 프랑스문화가 중원문화요, 동양에 있어서는
중국문화가 그것이다.
이 중원문화를 중심으로 하여 그 문화의 영향권에 있는 주변의 위성문화권을
변경문화권이라 한다. 이를테면 16세기 전후의 독일, 영국 등 유럽 여러 문화권들은
프랑스를 중원문화로 한 변경문화권이었고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양의 여러
나라들은 중국을 중원문화로 한 변경문화권이었다.
지금도 국제회의에서 회의 용어로 프랑스 어가 통용되는 것은 바로 프랑스 문화가
오랫동안 중원문화로 있어 왔기 때문이요, 한국말, 일본말, 베트남 말이 한문요소가
막대한 것은 그 때문인 것이다.
우세한 중원문화권에 들어 있는 동안은 변경국가의 문화란 생명력
이 없기 마련이었다. 그 문화의 질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열세하기에 그 문화는
바이탈리티를 상실하고 침체돼 있어야만 했다. 파워면에서 우세하다는 것과 질적인
면에서 우등하다는 것과는 다르듯이 열세와 열등도 동일개념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랜 중국문화의 중원권에 소속되었던 우리 한국문화도 열등해서가 아니라 열세
때문에 침체돼 있었으며 한국적 요인은 중국적인 요인의 수렁 깊숙이 침체돼 내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옛 선조들은 우리 한국이란 호칭마저도 중원인 중국에 대한 변경의
호칭인 '동방'이란 말로 부름으로써 주체적 국가파악보다 종속적 국가파악을 했던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 같은 나라 이름이 독립된 주체적
차원에서 불려지기보다 변경 차원에서 불려졌을 뿐이며, 그러기에 문화에 있어
'한국적'이란 개념은 항상 열등하고 열세하며 저질의 것을 표현하는 형용사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조수의 근원이 중국으로부터 나오니 우리 서해는 가까운고로 조수가 미치고,
동해는 먼고로 조수가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같은 문헌에, 물고기가 수족이 아닌 것이 없는데 유독 숭어만을 수어라고
부르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중국의 사신 기연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숭어를 먹어 보고 맛이 좋으므로 이 고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통변하는 사람이 '수어라고 합니다.' 했더니, 이
사신이 웃으면서 '비늘 있는 고기가 수만 종이거늘 이 고기만 어찌 수어라 하느냐.
물 속에 있는 고기를 모두 수어라 해야 하지 않느냐.' 하였다. 그 후부터 천사(중국
사신)의 판단을 어길 수 없다 하여 수어가 수어가 돼버린 것이다.
음이 같은 두 다른 글씨의 판별을 하지 못한 일개 중국 사신의 무식에서 비롯된
오판일지라도 중국 사신이 한 일이면 진리도 바꿔 버리는 이 맹렬한 중원지향의
변경사고였다. 이 변경사고의 맹렬시대에 '한국적'이란 개념은 싹틀 수가 없었다.
개화기에 그 중원권인 중국이 영불 연합군에 의해 패배하고 구미와 일본 세력이
우리나라에 밀어닥쳤을 때 이 종래의 변경사고는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랜
의존체질과 약체성 때문에 한말의 한국인들은 그 의존 대상만을 옮겼을 뿐
의존체질을 탈피한다는 법은 없었다. 친청, 친노, 친일파로 세력이 4 분 5 열 되었을
뿐이며 이 혼란기인 한말에 한국적인 주체 세력의 형성이 없었다는 사실은 한국
사상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한국적이란 개념이 탄생한 것은 일제 침략 시기였다. 민족과 민족 문화 말살에
저항하여 민족을 유지하고 민족문화의 명맥을 잊기 위한 안간힘의 표현으로
'한국적'이란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제시대의 '한국적'은 민족
광복에 주안점이 있었기에 2차대전의 끝장으로 그 광복이 얻어진 다음에는 그
'한국적' 개념에 새로운 비전이나 활력을 불어넣어 발전시킬 어떤 토양이 주어지질
못하여 다시 한국문화는 변경성으로 타락하여 미국문화를 중원문화로 지향하고
위성적 위치에 되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왕성한 미국문화 지향 때문에 '한국적'이란 개념은 또다시 열등과 열세 속에서
30여 년 죽어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미국문화 속에 자신을 동일화시켜 미국문화란
색안경을 통해 한국문화를 투시하는 그런 한국관이 지배해왔고 모든 한국적
가치관도 구미화된 가치관의 색안경을 통해 평가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동이 작품에, 한국 각계에 술렁대고 있으며 한국인의 재발견,
한국인의 가치관, 한국인의 의식구조, 한국인의 동일성이 활발하게 대두되고
논의되고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게르마니아나 브리테니커라는 개념이 그들
중원문화인 프랑스 문화권에의 반동이요, 이탈 과정에서 형성되었듯이 '한국적'이란
개념도 미국 문화권에의 반동과 이탈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한국과 한국문화와 한국인에게는 외국과 외국문화와 외국인과는 다른 자질의
동일성(identity)이 있다. 그 동일성은 한국의 기후, 풍토, 의, 식, 주, 생산, 문화,
전통 등 모든 공간적 시간적 조건에 적응해서 형성된 한국 고유의 자질이며 이
자질없이 한국이나 한국문화나 한국인이 형성될 수가 없다. 그것을 무시한 어떤
외래적 요소만으로 한국의 존립이나 발전이나 영화도 기약할 수 없다. 오랜 우리의
역사는 이 동일성을 무시한 전제에서 형성되어 왔다는 점에서 비극이었고, 그런
뜻에서 '한국적'이라는 개념의 대두는 신선하고 희망적인 것이다. 이 발전적 자질인
동일성의 대명사로서 '한국적'일 때 한국적이란 개념의 실이 정립된다.
한데도 이 '한국적'이란 신어는 많은 허를 더불어 내포하고 있다.
첫째, 변경사고의 잔재로서, 한국적이란 개념이 열등개념으로 아직도 통용되고
있다. '엽전' '죠센징(조선인)' 이란 말이 열등개념으로 파악되듯이 코리언 타임,
양견에 대비시킨 통개, 양복에 대비시킨 바지저고리 등 한국적 요소의 열등파악이
아직도 우리의 사고방식을 적지 아니 지배하고 있다.
둘째, 국제적 편견으로 '한국적'이란 개념을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 외국적 요소면
긍정적 가치라도 부정적 가치로 간주하여 거부하고 한국적 요소면 부정적 가치라도
긍정적 가치로 간주하여 수용하는 '한국적' 지상주의인 것이다. 한국적인 요소에서
부정적 면을 들추면 분노와 격분을 함으로써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시점을 무시한다.
셋째,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의 개념으로 파악한다.
협의의 민족주의나 내셔널리즘으로 한국적인 개념의 테두리를 국한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적'의 참뜻은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협조나
발전을 위해 투자할 한국의 개성이라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를테면
구주공동시장(EEC)이 목적한 바는 단지 지역분업도 아니고 또 단순한 유럽의
일체화도 아니며, 강한 민족국가의 개성 발휘와 그에 의한 유럽의 협조적 통일인
것이다.
개인이나 민족의 몰개성화로 세계시민주의나 지역의 통일을 이루려 했던 종래의
주장은 항상 현실을 무시한 몽상에 그쳤으며 인간성이나 사회적 결합이란 것이
본질에 대한 무지에서 탄생한 것이다. '한국적'이란 주장도 편협한 고립주의나
편협한 민족주의에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협조적 국제적 입장에서 한국을 다시
보고 그 위치를 정립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진취적이고 개방된 민족주의요, 실질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내셔널리즘의
주장이어야 할 것이다.
넷째, '한국적'은 복고적이란 편견이다. 옛 우리 한국의 묵고 좋은 것의 복고라는
감상적 의미로도 이 말이 널리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묵고 좋은 것의 재발견이란 차원이 아니라 묵지 않고 좋지 않더라도,
세계적 입장에서 한국 민족이나 한국문화의 특수성을 발견하고 그 특수성 위에다
독자적인 사회질서나 문화를 세우는 일이 오히려 미래지향적이랄 것이다.
다섯째, 우익적 보수적 개념으로 또는 진보적 지성적 발전의 저해요소로서
한국적이란 개념을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한국적이란 실이 한국, 한국인의
원형질인 동일성을 뜻한다 할 때 반진보, 반지성은 해당되질 않는다. 이를테면
한국인의 간 기능과 미국 사람의 간기능에는 20퍼센트 이상의 기능 차이가 있다고
한다. 각기 살고 있는 각종 환경에 적응한 만큼 그렇게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른 한국인의 자질이 한국인의 체질 기능의 동일성이며 만약 미국에서 간의학이
비약적 발전을 한다 해도 이 20퍼센트의 동일성에는 아무런 혜택을 주지 못한다.
한국인의 간 의료에 진보를 가져다 주는 요소는 바로 이 동일성을 둔 의학의 연구에
있는 것이다. '한국적'요소가 무시된 어떤 분야의 진보도 불가능한 것이다. 곧
한국적인 것은 보수로부터 진보에로의 탈피를 뜻한다.
그 밖에 반미적 이미지도 한국적이란 개념 속에 내포된 것 같으나
탈아메리카니레이션과 '반미국적'이란 개념의 혼동에서 비롯된 허 가운데 하나랄
것이다.
@ff
제2부 나도밤나무병
@ff
1. 사치병
인간욕구의 발전에 경제적 뒷받침을 한 것이 에이브러헴 머즈로다. 농업화
사회에서는 생리 욕구가, 공업화 사회에서는 소유욕구가, 탈공업화 사회에선 존재
욕구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열등감 보상위해 소유욕이
아무리 세계적인 블루 진 시대라 하지만 귀밑머리가 흰 나이에 블루진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쯤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데 연전 미국 여행중 별나게
맘에 들었던 진 바지 하나를 샀다. 그것은 바짓가랑이 위아래 부분의 빛깔이 볕에
바랜듯이 좀 다른 짝바지였다. 이 짝바지를 입고 다니고자 산 것만은 분명히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특정의 물건에 대해 편집적인 소유욕이 발동하듯 나에게는 바지
소유에 대한 편집증이 있어 왔으며 그 그지없는 병적 소유욕이 그것을 사게 한
것뿐이다.
오랜 전쟁으로 먹고 입는 기본적 욕구마저도 충족 못 시키고 살았던 광복 직후,
중학교 입학생이었던 나는 여느 다른 아이들처럼 위아래로 깜장 새 제복을 맞추어
입을 수 있을 많나 처지가 못 되었었다. 일제 때 배급받은 국방색 반바지에
광목베로 바지통을 달아내어 깜장물을 들인 것이 내 인생의 첫 제복이었다.
일주일도 못 가서 빛이 바래기 시작, 이을목의 위아래가 완연하게 드러난 짝바지,
그래서 '짝바지'란 별명까지 얻었던 그것이 나의 바지 편집증의 심리적 요인이
아닌가 싶어진다.
더욱이 사춘기인데다 남녀공학을 하는 학교였기로 짝바지 열등감을 감소시키고자
짝바지 이을목에 검은 잉크칠을 했다가 비를 맞아 짝바지에 줄무늬까지 얼룩졌던,
그래도 그 바지를 요 밑에 깔아 주름을 잡았던 일들이 골수에 사무쳤고 그 고농도
열등감의 보상으로 야기된 소유욕이 늙도록 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 생리 욕구를 충족 못 시키는 어떤 상황에 처했던 사람이나 나라일수록
반비례해서 소유욕은 그지없이 커간다고 한다.
1978년도에 13개 선진 국민들의 가치관을 비교 조사한 것을 보면 2차대전에
잿더미가 된 서독과 일본 사람의 소유욕이 13개국 평균치보다 갑절이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다.
직접 비교 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2차대전과 6.25전쟁으로 연거푸 기본적 생리
욕구마저도 무참히 짓밟혔던 피해 민족인 우리 한국인의 소유욕은 병적으로 비대해
있을 것은 예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거기에 우리가 처해 있는 경제구조의 발전 단계가 복합되어 소유 중독증세를
보이기까지 하고 있다.
스스로 선비층에서 소외시켜
연전에 작고한 에리히 프롬은 그의 "산다는 것"에서 사람이란 먹고 살 수 있는
생리 욕구(to love) 단계에서 재산이나 지위, 권위의 소유 욕구(to have) 단계로
발전하고, 다시 소유는 기본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에 그치고 정신적인
흡족과 기쁨을 누리려는 존재(to be) 욕구로 발전한다 하고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의 가치는 소유 인간에서 존재 인간으로의 발돋움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 인간 욕구의 발전에 경제적 뒷받침을 한 것이 에이브러햄 머즈로다. 농업화
사회에서는 생리 욕구가, 공업화 사회에서는 소유 욕구가, 탈공업화 사회에선 존재
욕구가 발생하게 마련이라 했다.
이 논리에 오늘날 한국인의 욕구 단계를 가늠해 보면 농업화 사회에서 공업화
사회로 옮겨가는 도중이기에 소유 욕구가 가장 왕성하게 작동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아파트 평당 단가가 1백80만 원이나 치솟았다 하여 사회적 물의가 일고 있는데
문제는 고단가보다 고단가를 유발하는 주택 사치에 투영된 한국인의 그지없는
소유욕에 있다고 본다.
한국인의 주택 사치는 우리 역사상 분명히 근간의 일이며 경제구조의 변천과
잇따른 전화가 원흉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같다. 막스 베버가 지칭한 한국의
지도층이었던 문인 신분층, 곧 선비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규범을 유지했던 선비
정신이 집 사치를 철저히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집 사치를 한 사람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대체로 예외적 인간이나 계급적
열등감을 보상하려는 소외층 인간들이었다.
기둥 한 자씩 잘라 낮춘 중인의 호화주택
이를테면 사상 가장 호화주택을 지녔던 중종반정의 일등공신 박원종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반정의 공으로 보화를 많이 받아 생활이 지나치게 분수에 넘쳤던
것이다. 정사룡이 예조낭관으로 있을 때 이 호화주택에 갔다가 그 호사함을 적은
것을 보자.
세 대문을 지나서 대청 앞에 이르니 돌을 다듬어 뜰을 만들었는데 반송 두어
그루가 있고 붉은 난간 푸른 창문이 화려해서 눈을 부시게 했다. 다시 한 문을
들어서니 조그마한 누각 하나가 날아갈듯 서 있는데 붉은 발이 땅에 드리웠고
성장의 시녀 하나가 인도하는 대로 다시 문 하나를 들어서니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는 곳에 공이 연못 동쪽 평상 위 수놓은 베개와 비단 자리에 앉아 있는데, 두
여종이 부채를 들고 당상에 서 있고 주렴 안에는 또 다른 시녀가 수없이 있었다.
문제는 이토록 집 사치를 한 박원종이 당시 사회의 지배 이념이요, 지배층이던
선비 정신과 선비층에서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킴으로써 집 사치를 합리화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지식이 없는 일개 촌부로서 종사의 신령을 힘입어 시운을
타고 이런 자리에 외람되게 앉아 있을 따름이다.'고 선비의 사회적 신분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킴으로써 당시 '선비'의 법도나 규범을 오염시키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3.1운동의 진원지인 서울 인사동 태화관은 인조가 등극하기 이전에 살았던
궁가였기에 규모가 사치스러웠다. 구한말에 영의정을 역임한 김흥근이 그 집에
살았는데 그 문하에 드나들던 한성 제일의 갑부 임상현이란 중인이 청계천 수표
다리 근처에 태화관과 똑같은 규모의 호화 주택을 지어서 조정에 말썽이 되었다.
형조에서는 법도에 어긋난 일이라 헐려들자 김 대감이 지각없고 법도 모르는 중인의
짓인지라 집 기둥을 고루 한자씩 잘라 집 높이를 낮추게만 하고 용서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호화 주택은 '납작 태화정'으로 불렸고 분에 넘치게 호화주택을
짓고 살면 '납작 태화정'이라고 빈축을 사는 그런 속담으로까지 정착했던 것이다.
우리 옛 선조들은 중류의 상식적인 방 규모는 대체로 한 식구당 한 칸이었다.
여기 한 칸은 요즈음 한 평보다는 약간 큰 8__9자 평방이긴 하지만 대체로 방만해서
중류 가정이 다섯 칸에서 열 칸 정도였다. 방 면적만 요즈음 평수로 10평 내외를
넘기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보다 크면 '옥'이라 불렀고 이보다 작으면 '사'라
했는데 옥이란 글씨를 풀면 '시지' 곧 송장이 이른다는 뜻이 되고 사란 글씨를 풀면
'인길'이 되니 큰 집에 살면 화를 입고, 작은 집에 살면 복을 받는 다는 것이 일종의
토속 신앙처럼 체질화돼 있었던 것이다.
비를 가리면 집은 족하다.
연산군 때 일이다. 한양 남산에 9만 9천 9백 99칸이란 상상을 초월한 호화주택이
있다는 소문이 팔도에 떠돌았었다. 그래서 서울에 오는 사람은 이 집을 구경코자
남산을 헤매게 마련인데 찾고 보면 크게 실망하곤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판서
홍귀달이 사는 허백당이란 당호가 붙은 단칸 초막을 두고 그런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홍 대감은 비록 그 단칸방 속에서도 9만 9천 9백 99칸의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그의 주거 철학 곧 현상학적 공간이 그를 흠모하는 선비들 입을 통해 구전돼
나간 것이 그렇게 구상적 공간으로 팔도에 와전됐던 것이다. 옛날 선비 가운데도
격이 높은 선비를 '헛가리 선비'라 불렀는데 헛가리란 가벽집, 곧 요즈음 말로
옮기면 판잣집 선비를 일컬었다. 주로 남산에 살았던 선비들은 홍 판서처럼
헛가리에 살았기에 생겨난 말일 것이다.
우리 선조들을 지배했던 주거 철학으로 비우사상을 들 수 있다. 이 비우란 선조
때 판서요, 대학자인 지봉 이수광이 살던 집 당호인 비우당에서 비롯된 사상이다.
근근히 비를 가린다는 뜻인 이 검소한 청빈 사상의 발생지에는 역사가 있다. 지금
동대문 밖 신설동과 보문동 경계쯤 동덕여고가 있는 근처에 조선 왕조 초기에
유관이라는 정승이 살았다. 어찌나 누추했던지 장마철이면 방안에서 일산을 쓰고
살았을 정도였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일산인지라 유 정승은 '일산이
없는 집은 이 장마를 어떻게 지내느냐.'고 걱정까지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바로 그 집이 유관의 외증손인 이희검 판서가 '집은 비를 막는데 족하고, 옷은
몸을 가리는 것으로 족하며, 밥은 속을 채우면 족하다'의 신조로 그 집에서 청빈하게
살다 갔고 임진왜란에 타버린 그 터에 다시 이희검의 아들인 이수광이 두어 칸
초당을 짓고 비우당이라 이름지어 비우사상의 법통을 이어내렸던 것이다.
이 비우사상이 한국인의 정신 체질에 어느 만큼 영향을 미쳤는가는 다음 고사에서
역력히 찾아볼 수가 있다.
장필무가 양산 군수로 있을 때 경상병사와 경상수사가 규정된 법외의 청구를
자주하는 것을 막아 내었다. 이에 화가 난 양사가 모여 '영문의 명령을 거절하고
시행치 않으니 무엇을 믿고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고 힐문하자 '나는 믿는 바가
없고 다만 초가 두어 칸이 있으니 그 맘 속의 비우만이 나의 배경이요.' 했다 한다.
곧 집을 절검하게 갖는 것은 청백의 본이요, 그 이상 큰 빽이 없다고
여겼으리만큼 비우사상은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것 같다. 따라서 집
사치를 서로 경계하는 풍조도 활성을 띠어 왔다. 세조 때 이조판서 이승소는 겨우
삼간되는 초가에서 살았었다. 어느 날 임금이 불러 국사를 의논하는 자리에 당시
병조판서이던 아무개도 자리를 같이 하였다. 병조판서는 이 승소와 아래 이웃집에
사는 친한 사이였다. 한데도 서로 서먹서먹 모르는 체하자, 세조가 '이판은 병판을
모르는가.'고 물었다.
이때의 이승소의 대꾸는 유명하다. '알지만 모릅니다.(지면불화평)' 아무리
말렸지만 끝내 호화주택을 짓고 만 병판을 상종 못할 소인으로 간주, 모르는 체해
온 것이었다. 그로부터 집이 과람하면 뜻있는 친지들은 '지면불화평'로 소외시키는
선비들 습속이 생겨나 그 소외가 두려워 절제하는 풍조가 토착화한 것이다.
이를테면 대제학 벼슬의 김유는 죽동에 마루 한 칸, 방 한 칸의 두 칸 집에서
사는 바람에 여러 아들들이 처마 밑에서 자리를 펴고 거처하기까지 했다. 그가
평양감사로 가 있는 동안 장마에 그 집마저 무너져 중수를 하게 됐는데 아들들이
아버지 눈을 속여 방과 마루를 각각 반 칸씩 늘려 지었던 것이다. 돌아온 김유는
방이 커진 것을 모르고 처마 밑이 좀 좁아진 것을 뒤늦게 알고야 아들들을 불러
애비를 지면부지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고 호통치고 원상대로 복구시키고 있다.
성종 때 대비의 직계 친척 하나가 승지로 있으면서 자단향으로 집을 지은 것을
확인한 임금은 아프다는 핑계로 이궁, 명령을 내려 그 외척을 베어 죽이게 했다.
이궁하는 듯은 대비가 용서 해 주기를 청할까봐 그를 기피하기 위해서였다.
인육까지 먹지 않을 수 없었다던 임진왜란 수복 후 집 사치, 옷 사치, 음식 사치가
대단하여 이를 제동하기 위한 방편으로 도학, 곧 선비의 행동 철학이 크게
부흥됐다는 해석은 일리가 있다고 본다.
곧 전화 후에 왕성해지게 마련인 소유욕에 재동을 가한 것이 곧 선비 정신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집 사치로 나타나고 있는 이 양(quantity)의 시대를 어떻게 질(quality)의
시대로 전환시키는가, 물질적인 하우스(house) 시대를 어떻게 정서적인 홈(home)
시대로 진입하는가, 물질적으로 소유하는(to have) 시대에 어떻게 정신적으로
존재하는(to be) 시대로 발전하는가가 우리가 겪어야 할 가장 큰 정신적 시련이
아닌가 싶다.
@ff
2. 모인병
모인성이란 곧 응석을 다 받아들인 어머니의 과보호성 '사육' 때문에 형성된
의존체질이 어떤 기회에 만족되지 않을 때 생기는 체질적 반발 현상인 것이다.
어릴 때는 왠지 형님 따라가 억세게 놀고 싶은데도 형님은 주먹질 돌팔매질까지
하며 억세게 따라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요즈음 아이들 같으면 어머니에게 가
비죽비죽 울면서 일러바쳤을 것이나, 나는 집에 돌아와 형님의 국어책장을
찢어발겼던 기억이 난다.
형제가 많기도 했지만, 고달픈 소작농으로 들판과 부엌을 오가며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던 어머니인지라 아이들의 응석이나 아양을 받을 심신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응석을 받지도 않을 뿐더러 아이들에게 공부 잘하라든지 뭣이 돼달라고 원한다는
법도 없었으며 모진 환경에 시련받아 성숙한다는 법도, 도 환경의 시련으로
비굴해진다는 법도 없이 묵묵히 하루 종일 일하고 추운 겨울밤이면 등짝을
드러내놓고도 곤히 주무시던 그런 어머니였다. 곧 모자 사이의 응석이 차단된, 그런
심리 공간에서 자랐기에 내 앞에 당한 일은 어머니에게 의존할 수 없이 형님 책장을
찢는다든지 하여 나 스스로가 해결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고뿔을 앓는다든지, 두드러기가 난다든지, 목젖이 부어 오른다든지 할
때도 중증이 아니면 '아양병' 앓는다고 업었다가도 내려 팽개치던 기억이 선하다.
우리 모계로 전승된 슬기 가운데 하나로서 이 모자간의 응석이나 아양 등 과보호가
아이들을 약체화시킨다는 정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신병으로 나타난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같다.
모인병 감기까지 실재
구미 등 선진국에서는 어린이의 감기를 바이러스성 감기와 모인성 감기로 대별해
처방한다고 들었다. 야뇨증, 저혈압, 습진, 기관지 천식이나 알레르기성 피부염에도
모인성이 있다는 학계의 보고가 있다.
문명국에 있어서의 '육아에 대한 정신적 붕괴 과정'이라는 바울비의 WHO 보고에
의하면, 경제성장과 사회보장제도가 충실해지면서 모친주의(matrism)가
부친주의(patrism)를 능가, 어머니들이 육아에 이상 관심과 이상 열성을 부림으로써
모인성 질환이 상승 일로에 있다고 했다.
특히 모친주의가 강한 편인 일본의 한 임상학자는 현대 어린이들 질환의
60퍼센트가 모인성이라 해도 대과가 없다고 체험을 바탕으로 말하고 있다. 하물며
이 세상에서 가장 비대해져 있는 한국의 모친주의임에랴.
모인성이란 곧 응석을 다 받아들인 어머니의 과보호성 '사육' 때문에 형성된
의존체질이 어떤 기회에 만족되지 않을 때 생기는 체질적 반발 현상인 것이다. 우리
옛 어머니들이 업었다가도 내려 팽개치는 '아양병'의 현대적 표현인 것이다. 이
응석받이의 과보호가 육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모인병이라면 정신적, 성격적으로
나타난 것이 자기 본위, 아집, 자폐증, 등교거부 증상으로 발전하고 보다 심해지면
자살과 부모에게 행패를 하는, 가정내 폭력으로 나타난다. 곧 모인병과 가정내
폭력은 그 뿌리가 같은, 각기 다른 나무 가지인 것이다.
부모 구박은 참형 이상의 벌
신문사 사회부장 시절에 다루었던 잊혀지지 않은 일로 청바지 사건을 들 수가
있다.
청바지가 갓 유행할 무렵, 열여덟 살 난 아들이 청바지 입는 것을 거부하는
어머니를 묶어놓고 끼니를 굶기며 폭행한 사건이다.
아버지가 없지만, 유복한 살림에 갖은 응석을 다 받아가며 자란 이 외동아들은
공부도 중상이요, 밖에 나가서는 수줍고 얌전하기 이를데없는 유순한 아이였다 한다.
한데 일부러 옷을 더럽혀 갖고 들어와서 어머니가 그 때문에 노고하는 것을
즐기는가 하면 야뇨를 핑계삼아 번번이 이부자리를 버려놓고 어머니가 그 때문에
근심하고 당황하는 것을 만족한 얼굴로 바라보곤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가치가 청바지만도 못하게 타락된 이 가정내 폭력은 그것이 가학적으로
나타나든 자학적으로 나타나든, 또 직접적으로 나타나든 간접적으로 나타나든, 또는
우회적으로 변질돼 나타나든 가능성으로 잠복돼 있든 오늘날 어른들이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집안 일이라는 금기 때문에 묵살하고 있는, 너무나 흔한 중대
문제가 아닌가 싶다.
현종 5년(1664) 형조의 계목에 보면 조묵석이란 자가 그의 사촌동생 유동이와
서로 싸우다가 몽둥이질을 하려는 참에 이를 말리기 위해 개입한 어머니가 잘못
맞아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비록 과실에 의한 시모이긴 하지만 어머니를 죽였다는
결과는 윤상십악의 대죄이기에 '부대시', 곧 때를 기다리지 않고 당장
능지처참시키고 있다.
시부모나 구부모는 본인의 참형만으로 끝나질 않는다. 파가저택이라 하여 그
윤상사건이 난 집을 파헤쳐 없애 버리고 못을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그 가족들은
전가사변이라 하여 두만강 북변으로 강제 이주 당하고 가문의 족보에서 삭제,
파문을 당한다. 그리고 그 사건이 난 고을을 분할, 이웃에 귀속시키거나 읍호를 부나
군으로 현으로 강등시켰던 것이다.
자학도 모인성서 비롯
이 엄청난 윤상에의 규제가 있던 윤리 풍토였던 것을 감안, 오늘날의 구모, 시모의
개연성을 생각할 때 그렇게 변질시키게 한 인자가 뭣인가가 더욱 심각해지는
것이다.
근간에만 하더라도 아버지의 무비 카메라를 잃어버리고 꾸중들은 18세 된
고등학생이 프로판 가스통을 폭파시켜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 여동생, 조카들에게
집단 중화상을 입히고 있다. 사달라는 것을 잘 사주질 않고 또 그것을 꾸짖는다
하여 어머니의 밥에 독약을 넣어 독살시킨 맹렬 소녀도 있었다. 이것은 가학형
가정내 폭력이다.
돈도 없는 주제에 수학여행은 왜 갔다 왔느냐는 선생님의 그 간단한 말 한 마디에
자살한 여고생, 또 시험볼 때 커닝한 학생들의 이름이 게시판에 나붙자 교실 안에서
자살한 여고생이 있었다. 이 일련의 사건이 있을 때마다 감수성을 배려하지 않은
선생이나 학교측의 잘못으로 여론들은 규탄했었다. 물론 선생이나 학교측의 잘못도
없는 것은 아니나 그만한 감수성의 상처로 그 소중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이
극심한 자학적 바탕은 현대 한국 가정에 있어 이들을 둔 뭣인가 잘못된 문화적
병폐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는 곧 자학형 가정내 폭력으로, 가학형과 방법만 다를 뿐
그 뿌리는 같다.
예전에는 가정내 폭력은 있었다. 밤늦게 돌아다니며 불량배와 짝지어 놀고 이를
주의 주는 부모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부모에 협박, 금품을 요구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근년에 증가하고 있는 가정내 폭력은 이같은 불량성 폭력과는 전혀 이질의
것으로 전혀 문제 행동도 없을 뿐더러 집 밖에서는 대체로 온순하고 공부도 웬만큼
하며 집도 반드시 어렵지 않은 집 아이가 안에서는 주로 어머니나, 어머니의 역할을
하거나 어머니에 편드는 가족에게 폭력을 부린다는 점에서 지극히 현대적인
심리병이랄 수가 있다.
미국에도 가정내 폭력은 있다. 하지만 계약 정신과 개인주의가 왕성한 그
풍토에서는 부모에 대한 직접적인 가학이나 자신에의 자학적 폭력과는 질이 다르게
나타난다.
근간 "매콜즈"지에 의하면 미국의 10대들이 부모를 걸어 법정에 소송하는 일이
악역처럼 만연되고 있다 하고 그 실례를 들고 있다. 열다섯 살 난 딸을 석 달 간에
걸친 세계일주여행에 데리고 가려 했으나 딸은 이를 거부, 재판소에 아버지를 걸어
소송했고 재판소는 그 딸을 친척집에 맡겨두고 떠나라는 선고를 하고 있다.
아버지가 대주기로 구약을 한 대학등록금을 기간 중에 마련하지 못했다 하여 소송,
아버지에게 지불 명령을 내리도록 한 딸의 사례도 적고 있다.
일가족이 물가에서 캠핑을 하는데 10대의 아들이 물이 깊은 줄 알고 다이빙을
했다가 물이 얕아 부상을 입었다. 물이 얕다는 것을 미리 주의시키는 것은 아버지의
의당한 의무인데 이를 소홀히 했다 하여 상해배상 소송을 하고도 있다.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 한심하겠지만 그 병인은 전혀 다른데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그것은 너무 아이들의 응석이나 욕구를 교육적 측면에서, 또 자립 측면에서 제한을
하지 않고 받아줌으로써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가능하다는, 각기 하나의
'소폭군'으로 길러져 왔으며, 사춘기에 이른 소폭군이 가정 밖의 큰 세상에
나아감으로써 당하는 자립과 의존의 갈등과 좌절을 가정내의 의존(응석) 대상에
폭력적으로 발산하는 한국형 가정내 폭력인 것이다.
미국의 폭력(소송) 대상이 주로 아버지인데 비해 한국의 폭력 대상이 주로
어머니인 차이는 퍽이나 주의를 끄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온통 모성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우리 한국인은 감정적인 충격을 받았을 때
예외없이 어머니를 부른다. 육당 최남선이 백두산의 원시림에 발을 딛자 자신도
몰래 맨 먼저 나온 탄성이 '에그머니!'였다 한다. 갑작스런 경악을 당했을 때
한국인은 남녀 없이 '어머니'가 튀어나온다. 가수가 의외의 시상을 했을 때 엄마를
부르며 우는 광경도 자주 봤다.
대중의 심정을 사로잡는 대중가요에서 즐겨 쓰는 낱말 빈도 가운데 최고로 많은
낱말, 곧 1위가 '어머니'요, '아버지'는 1백 8위로 조사된 것을 보았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성악곡에 '죽은 자식을 그리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의
가장 비장한 대목의 가사는 우리의 노래처럼 '어머니의 손을 놓고...'가 아니라
'아버지의 손을 놓고...' 였다.
부성과 모성의 원리 대립
사람 맘 속에는 많은 대립된 원리가 작용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부성과 모성의
원리 대립은 매우 중요하다. 모성의 원리는 좋든 나쁘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감싸는
기능'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모성 원리 앞에서는 절대적인 평등성을 가진다. 내
자식인 이상 좋든 싫든 간에 모든 자질이 평등하게 포용됨으로써 아이들의 개성이나
능력과는 관계가 없다. 반면에 모성 원리는 아이들이 제멋대로 그 포용의 한계, 곧
슬하에서 떠나가는 것을 거부한다. 모자일체의 근본 원리 파괴를 허락치 않기에
응석받이를 과보호한다.
이에 비해 부성 원리는 절단, 곧 '끊는 기능'으로 나타난다. 주체와 객체, 선과 악,
상과 하를 모성 원리와는 달리 분류하고 아이들의 능력이나 개성에 따라 유별을
한다. 이 세상에는 민족이나 문화권에 따라 어떤 원리가 우세하고 잠재되고의
차이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감싸는 모성 원리가 압도적으로 끊는 부성 원리가
잠재돼 있는 전형적인 모성 원리 사회인 것이다.
관음 사상이 그 보살상에서 보여주듯 모성 원리를, 그리고 기독교 사상이
그리스도상에서 보여주듯 부성 원리를 있게 했다고 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
문화권의 문화가 소화할 겨를도 없이 밀려들었지만, 웬일인지 어린이를 둔 부성
원리만은 발을 못 붙이고 있으니 그만큼 한국인의 모성 원리가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일까. 정말 어린이를 위한 길은 옛 우리 모계로 전승된 '아양병'의 슬기를
부활시킴으로써 두 원리간의 역학에 균형을 잡아 주는 일이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
천 길 벼랑 위에서 새기를 떼미는 어미 사자의 지혜를 터득해야만 할 것이다.
@ff
3. 부인병
아버지란 장에 가서 비단구두를 사오게 하는 이기적 필요성과 나팔꽃을 피우기
위해 새끼줄을 치는 노동을 필요로 할 때, 엄마 위해주기 위해 엄마 아빠 좋아하는
마지못할 경우에만 등장한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여덟 살 난 아들놈을 밖으로 몰아내고자 '넌 친구도
없느냐.'고 따졌던 일이 있다. 이따금 옷도 좀 버려갖고 들어오고, 더러는 싸워서
다치기도 하며, 계집아이도 좀 놀려 울리기도 했으면 싶은 그런 요즈음 아이들의
비활성과 자폐 성향을 염려한 아버지로서의 질문이었던 것인데 놈의 엉뚱한 반문에
오히려 말려들고 만 것이다.
"아버지는 나만했을 때 친구가 많았어?"
"그럼, 동네 아이들은 모두 내 친구였지."
"...여자 친구도요?
"그럼 여자 친구도 많았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퇴근길에 집 앞 가게에서 담배를 한 갑 사는데 가겟집
아주머니가 야릇한 웃음을 띠며, '아저씨, 여자 친구 많다면서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아파트에 들어서자 좀처럼 웃는 것을 보지 못했던 수위 아저씨도
일그러진 웃음을 띠며, '선생님, 걸프렌드가 많다면서요?' 하는 것이었다. 내가 마치
바람둥이처럼 동네에 소문이 난 것이다.
아들에게 즉석으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아버지답지가 않아 꾸욱 참고 있다가
어느 날 놈과 더불어 산보를 하면서 가게 아줌마나 수위 아저씨에게 불고 다녔던
여자 친구 사건을 따졌던 것이다.
이에 놈은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로, '아빠가 많다고 했잖아요.' 하면서
발부리에 걸린 돌을 툭 차는 것이었다.
'쓸쓸이'가 된 아버지 상
정말 요즘 아이들은 엉뚱한 데가 있는 것이다. 놈의 어투나 손을 호주머니에 꽂고
돌을 차는 몰골로 미뤄, 아빠가 당한 피해는 미리 조작된 놈의 가해였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회색빛으로 퇴색돼 있는 '아버지'가 놈이 찬 돌멩이에 아프게
얻어맞는 듯한 통증을 절감했던 것이다.
아버지 부재시대의 그 부재 농도는 요즈음 청소년들간의 요즈음 청소년들간의
은어에서도 그 농담이 완연히 드러난다.
근간에 아버지가 '쓸쓸이'로 통하고 있다던데 쓸쓸할 '예'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아비 '부'에서 두 머리 꼭지가 사라진 부친 부재 호칭인 것이다. 더러는 '삐칠이'로도
통한다던데 삐칠 '불' 자에서 비롯된 것으로, 머리 없는 쓸쓸이에서 다리 한쪽마저
증발하고 없는 처절한 부친상이 아닐 수 없다.
옛날 산촌에서는 아이가 너댓 살만 되면 '쪽 숟가락 나이'라 하여 제밥벌이를
시작하는 나이로 쳤다. 반 토막난 쪽 숟가락으로 감자를 긁음으로써 수입 가계에
참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는 옛날 쪽 숟가락 나이가 '아이스크림
에이저'가 되어 이미 그 나이부터 왕성하게 지출 가계에 참여한다. 모든 가족이
왕성하게 수입 가게에 참여했을 때도 그토록 권위가 컸던 아버지였다. 한데 모든
가족이 왕성하게 지출 가계에 참여, 오로지 아버지 혼자 분골쇄신, 그 지출을
감당하느라 허덕허덕하는데도 아버지가 쓸쓸이, 삐칠이로 퇴락하고만 것이다.
그리하여 텔레비전 채널권마저도 아이들에게 빼앗기고, 아이들 어깨 너머로
흘깃흘깃 훔쳐보는 처절해진 아버지의 몰골인 것이다.
옛날 민요나 시조, 잡가 등에는 아버지의 은공을 읊은 대목이 어머니보다 많았다.
어머니의 정을 읊을 필요가 있을 때라도 반드시 아버지를 앞세웠던 것이다. 한데
요즈음 노래에 아버지를 읊은 대목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동요 속에서 가뭄에
콩나듯 아버지가 나오는데, 그 아버지마저도 장에 가서 비단구두를 사오게 하는
이기적 필요가 있을 때나, 나팔꽃을 피우기 위해 새끼줄을 치는 노동을 시킬 필요가
있을 때나, 엄마 위해주기 위해 엄마 아빠 좋아하는 마지못할 경우에만 아버지가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무척 부권에 감정적인 시몬느 드 보봐르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외치게까지 하고 있다.
"크고 뭉실뭉실한 난자가 민첩하게 노는 정자를 날쌔게 낚아채어 그 꼬리를
잘라먹는 광경, 뭉실뭉실 살찐 개미의 여왕이 노예처럼 봉사하는 수캐미 앞에
군림하는 광경. 사랑에 도취한 암당랑이나 암커미가 교미 끝에 숫당랑과 수커미를
잡아먹는 광경. 암원숭이가 음탕한 부분을 노출, 그에 현혹되어 뒤쫓는 수컷들을
실컷 골탕먹이며 즐기는 광경. 그리고 가장 존대한 사자나 표범의 수컷까지도
암컷의 명령적인 포효아래 비굴하게 몸을 가로놓은 광경...."
오늘날 청소년에게 영향력을 많이 주고 있는 마르쿠제로 하여금 '아버지는 죽었다.
이제 아버지는 정액의 공급자라는 것 이외 아무런 존재 이유를 못 갖게 됐다.'고
오이디푸스 시대를 선언하게까지 하고 있다. 니체가 신을 죽였듯이 마르쿠제는
아버지를 죽이고 있다.
사회학자 듀르캥은 그의 "자살론"에서 종전의 엄격했던 부자간의 거리 상실로
요즈음 젊은이들은 자기 욕구를 추구하게 되고 실력이나 재력이 없는 이 욕구
추구는 아버지 권위 시대에 없었던 좌절을 가져오게 한다. 이 거리감각 상실의
아노미 상태가 자살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곧 아노미는 부인병이라 했다.
쇼펜하우어도 '고슴도치의 딜레머'란 개념으로 이 부자거리상실이 청소년의 폭력이나
저하의 원인이라 경고했다.
아버지의 보호막 밖으로 해방된 청소년은 자위 수단으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온몸에 세우게 되고 서로가 추워서 접근하면 서로의 가시로 서로를 찔러 피를 보게
한다는 것이다. 고슴도치의 딜레머도 부인병이다.
"고독한 군중"의 저자 리스만, 그리고 "아버지 없는 사회"의 저자 폴 훼데른,
"뿌리 뽑힌 사람들"의 저자 오스카 헨드린을 비롯하여 많은 지성들이 오늘날
청소년들의 삼무주의이며, 폭력이며, 단절이며, 반체제며 모든 문제를 이 아버지의
권위 상실 곧 부인병에서 찾고 있다.
미국 학생들의 부친 복권 교육
재작년 나는 보스턴 북교, 개화기 때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인 유길준
선생이 유학했던 더머 스쿨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곳 여교장 선생님으로부터 학생들이 반드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필독 서적
가운데 메리메의 "마테오 파르코네"란 소설이 끼여 있으며, 미국의 저명한 사립
고등학교에서는 이 소설이 필독 도서로 돼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설은 부친 부재시대의 부친 복권을 위한 교육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마테오는 산 속 외딴 집에서 아내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사는 농부다. 어느 날
아들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데 총상을 입은 산적 하나가 헌병에 쫓기어 숨겨줄 것을
애원했다. 이 산적이 당시 외국 군주의 지배에 저항하는 애국독립단의 지사임을
알고 짚더미 아래 숨겨준다. 뒤쫓아온 헌병 일행은 이 집 밖에 숨을 곳이 없다고
집요하게 추궁했으나 아들은 막무가내였다.
한데 헌병이 은줄에 매달린 회중시계로 유혹하자 이에 매수되어 산적은 붙잡히고
때마침 돌아온 마테오가 있는 자리에서 산적은 '배신자! '라고 매도하며 끌려간다.
마테오는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라.'고 아들에게 시킨 다음 강변으로
데려간다. 아무리 모자가 울고불고 애원해도 막무가내인 마테오는 한 발 총으로
아들을 쏴죽인다. 그리고 돌아와서 아내에게 '놈을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단 한
마디 말할 뿐이었다. 아버지의 권위 회복을 위해 이 소설을 교육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미국의 고충이 처절하기까지 했다.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부도덕하거나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면 마테오처럼 아버지가 '도모지'란 사형으로
질식사를 시키는 전통이 있었다.
묶어놓고 조선 종이를 몇 겹 발라놓으면 숨막혀 죽는 이 도모지 형이 '도모지 알
수 없다'는 그 도모지의 어원이라고 황현의 "매천야록"에 고증해 놓고 있다.
유계문이 관찰사로 배임받았을 때 관찰사라는 직명 가운데 아버지 이름 유관을
침범하는 글자가 있다 하여 부임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름을 부를 때면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해자를 해서 불렀을 만큼 아버지의 서슬이 퍼렇던 시대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부인병 소멸 위한 방법
일상 생활에서도 일단 아버지가 집안에 계시면 그 집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성'이라 하여 목소리를 죽여 허스키 보이스로 귀엣말을 해야 했을 만큼 문 안에
아버지의 권위가 충만했던 것이다.
아버지 생신날에는 아들은 환갑이 넘어도 때때옷 입고 재롱을 피워야 하며, 또
환갑이 넘어도 아버지 앞에 종아리 걷고 매를 맞았던 것이다. "명륜록"에 기록된
사실을 보면 노부모의 매를 맞고 새삼 우는 장년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전에는 울지 않다가 우는 뜻은 어버이의 매질하는 기운이 이전보다 떨어진 것이
슬퍼 우는 울음인 것이다. 하물며 그런 가정과 사회에 부인병이 탄생할 수 없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아버지의 권위를 되뇌는 뜻은 사라진 권위에의 향수를 달래기 위함도 아니요, 도
낡은 모럴의 복고를 노리려 함도 아니다. 심각해진 부인병에서 자녀들을 구출하기
위해 남녀 평등 등 현대의 조건과 조화시키면서 어떻게 아버지의 권위를 회복시킬
수 있는가의 온고이지신을 위한 것이다.
정신 의학 측면에 있어 가족 연구의 대표적인 학자 리스는 아버지의 기본
역할이란 도구적 역할이라 정의하고 있다. 가정에서 아이들의 버릇을 들일 때
어머니는 부친 이미지를 도구로써 이용하는 것이 부인병 소멸을 위해 크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빠에게 물어 봐서 혹시 좋다고 하시면...', '아빠에게 말씀드려
혼내줄태다', '아빠가 뭐라고 할지...' 해놓고 아버지가 돌아오면 때로는 아이들을
혼내주기 위해 아이들의 악행을 설명하고 때로는 아이들의 대변자가 되어 아빠로
하여금 승낙하게끔 능변을 토한다. 따라서 아버지가 도구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권위 이미지 형성이 필요하다.
아빠가 성내면 끝장난다느니, 비록 술 한잔 걸치고 돌아와 눈총을 쏘는 일이
있더라도 아이들에게는 너희들 학자금을 벌고자 늦게까지 일하는 아빠라고 해주어야
한다. 아빠가 숟가락 들기 이전에 숟가락을 들지 못하게 하고, 맛있는 음식은
아버지가 먼저 손을 댄 후에 손대게 하는 것도 이 도구 이미지를 위한
온고이지신이랄 수가 있겠다.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어느 만큼의 존경, 외포, 그리고
아버지의 노고에 대한 송구스러움을 느끼게 하지 않고는 버릇들이는 도구가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어머니(아내)의 뜻대로의 도구가 되는 아버지(남편)가 있고 없는 가족에
따라 그 가족 프로세스가 순조로이 발전하고 지체하곤 하며 부인병의 병균에
저항력이 생기지 않고 한다고 리스는 말하고 있다.
콩알에서 깨알로 마이크로화하는 부친 이미지의 부활을 위해 어버이가 뭣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성케 하는 어버이날이어야만 하겠다.
@ff
4. 쓰레기병
썩힌다는 것과 태운다는 이 차이는 그의 품으로의 회귀를 포용하는 대지와 회귀를
거부하는 대지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화현상이랄 수가 있다.
짚신 썩어 나무 잘 자라고
연전 한 90대 노인이 라디오의 '장수무대'에 나와, 전라도 남원땅에서 한양을
걸어서 오르내렸던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한양 6백 리 길을 나설
때는 스페어 짚신 열 켤레를 메고 떠나게 마련인데, 약 50리 길에 한 켤레씩 닳아
없어지는 것이 상식이라 했다. 그 짚신 한 켤레 닳아 못 신게 될 만한 곳에 반드시
'신나무'로 불리는 고목이 서 있어, 그 나뭇가지에 해진 짚신을 매달아놓고 떠나곤
하는 나그네 풍속이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한양에서 일을 보고 돌아올 때면, 이미 그 신나무에 걸어 두었던 짚신이
풍우에 썩어 문드러져 그 나무의 거름이 되어 없어지고 신발에 스민 내 기운을 먹고
서 있는 싱싱한 신나무를 보면 고향 사람 만난듯 정을 느끼곤 했다는 그 노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헌 짚신 한 짝일지라도 큰 어머니인 대지에 돌려주는 이
한국인의 모성원리는 한국인의 심성을 이해하는데 한 좋은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유럽의 중세 소설을 보면 양을 모는 목동들은 신발이 떨어지면 반드시 불을
태우고 간다.
십자군 원정 때 병사들의 생활 수칙을 보면 해진 신발은 반드시 불에 태우도록
되어 있으며 태우지 않고 버려두면 악마가 신게 되고 악마가 신게 되면 그 주력이
신상에 불행을 가져오게 된다고 여겼다 한다.
썩힌다는 것과 태운다는 이 차이는 그의 품으로의 회귀를 포용하는 대지와 회귀를
거부하는 대지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화현상이랄 수가 있다.
신발뿐 아니라 만물은 모두 땅으로 돌아간다는 한국인의 발상은 한국의 고온
다습한 기후가 짚신뿐 아니라, 만물을 잘 삭히고 썩혀 끝내는 흙으로 돌아가
기름지게 하는 풍토적 특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국 땅은 곰팡이와 미생물이
왕성하게 물질을 분해하는 힘이 유럽의 죽어 있는 땅에 비해 30배 내지 50배로
왕성하다 한다. 그러기에 신발뿐 아니라 어떤 물건이든 땅에 버려두면 이 미생물의
분해로 땅에 회귀해 버린다.
미생물이 없거나 미약한 유럽의 땅은 박토요, 지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으며, 죽은
땅이기에 같은 단위 면적에서 소출된 곡물의 칼로리량은 한국 땅의 그것에 비해
20분의 1밖에 안 된다. 그나마 한국 땅은 매년 연작을 해도 지력이 지탱하는데,
유럽 땅은 2년 동안 놀리지 않으면 안 되는 삼포식 농사를 불가피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서시대 이래 유럽이나 중동의 대지는 비생산적인 황야였다. 황야에 서
있는 사람은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거부당하고 격리된 존재요, 그 황야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밖에 의지할 길이 없다. 곧 신이라는 부성
원리가 그들의 심성을 지배해 내린 점이 땅이라는 모성 원리가 지배하는 한국과
다르다.
그리하여 만물은 고사하고 사람의 죽음까지도 한국에서는 단절인 perfect out이
아니라 회귀할 return to의 죽음이다. 우리말에 죽는다는 것을 '돌아간다'고 하는
것도 바로 죽음이 이 모성 원리에 의한 회귀이기 때문이다. 우리 옛 선조들이
그토록 집념을 가졌던 묘지 풍수의 형국이 곧 여성의 음부를 그대로 유감시켰음은
이 모성인 대지로의 회귀사상을 실감나게 증명해 준 것이 된다. 물론 유럽 사람들도
죽으면 땅 밑인 지하실에 저장하지만 그것은 땅으로의 회귀라는 모성 원리에서가
아니라, 신에 의한 부활을 대기하는 부성 원리에서다.
쓰레기 곧 오물을 둔 유럽 사람과 한국 사람의 의식도 바로 이 살아 있는 지력과
죽어 있는 지력의 차이에서 달라졌다고 본다. 교활한 인지에 의한 산물인 비닐 같은
화학 합성물이 아니면 어느 뭣을 아무데나 버려도 썩어 문드러져 지력으로
되살아난다. 그러기에 아무데나 버렸고, 버린데 아무런 죄악감이나 오예감을 갖질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닳아 문드러진 짚신짝을 나무에 걸어놓아도 도덕적으로
구제받는 그런 쓰레기 문화가 형성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우리 한국인이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리는 그런 공해 관념이 박약한 문화적 배경이 이에 있는 것이다.
근심 걱정도 강물에 흘려보내
이같은 풍토의 자정 작용은 박테리아 활성의 대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주거지를 가로 세로 흘러내리고 있는 냇물과의 친근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온 국토의 80퍼센트가 산이랄 만큼 딴 나라들에 비해 유별나게 산이 많기로
촌락의 거의가 산비탈이나 산이 끝난 곳에 취락하는데 예외가 없었다. 그러기에
가파르고 복잡한 산비탈의 지형을 타고 '굽이 굽이 휘돌쳐 우르렁 출렁 풍풍 뒤걸러
좌르르 컬컬' 흐르는 냇물은 한국촌락 취락의 기본조건이었다.
몬순 지역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강우량은 세계 평균 강우량의 두 배나 되고
유럽의 세 배나 된다. 이 잦은 비가 모든 쓰레기를 씻고 그 빗물을 쓸어 담아
흐르는 이 냇물이 바로 한국 풍토의 또 다른 자연적인 자정 작용을 했던 것이다.
또 일부러 그 냇물에다 쓰레기를 버림으로써 어느 농토에 흘러들어 거름이 되게끔
했던 것이다. 흐르는지 머물렀는지 모르게 흐르는 유럽의 냇물과는 달리 소리내어
급하게 흘러내리기에 버리면 사라져 버린다.
이 흘려서 또는 흘러서 사라지는 흐름의 사상, 흐름의 정서 역시 한국인의 심성
이해에 중요한 다른 열쇠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장성해서 무슨 근심거리나 갈등이 생겨 우울해져 있으면, 어머니는 무슨
일로 그러는가 알려하거나 물으려든다는 법 없이 조용해진 야밤을 가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박씨를 심었다. 지붕에 박이 커가는데 요강덩이만하던 것이
함지만해지고 장독만해지더니 뒤주만하게, 집덩이만하게 자꾸만 커가는 것이었다.
주인은 그 박의 쓸모를 두고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질 못했다. 근심 끝에 마을에서
가장 어진 노인에게 가서 근심을 말했더니 '허허 이 사람, 강물에다 띄워보내지
그래.' 했다는 것이다.
근심 걱정도 이렇게 흘려보냈으며, 슬픔도, 한도, 후회도, 영화도, 모두 냇물에
흘려보냈던 것이다. 낙화유수에서 종이배 띄워 보내기까지 우린 대중가요에 그토록
잦은 흐름의 정서가 읊어지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닌 것이다.
방랑 도중에 냇물가에 앉아 시를 쓰고는 그 시 쓴 종이로 종이배 만들어
흘려보내곤 했다는 매월당은 너무나 한국적인 흐름의 시인이었다.
우리 옛 선조들이 근심 걱정 등 마음의 요소를 씻어 흘려 버리는 민속으로 유월
유두날 냇물의 상류에 가서 머리를 감았던 것이다. 정다산의 "아언각비"를 보면,
요즈음 잘 깨지고 있는 '계'는 곧 냇물에 가서 마음을 씻어 흘려 버리는 '계'가 그
뿌리라 했다. 비단 유두나 계의 풍습뿐 아니라 아이들이 남의 물건을 훔쳤거나 또
처녀가 마을 총각에게 추파를 받았거나 하면 어머니들은 야밤에 냇물 속에 끌고
들어가 손을 씻기거나 머리를 씻겨 도심이나 정심을 씻어 냇물에 흘렸던 것이다.
마음도 그렇게 흘려보냈는데 쓰레기임에랴. 온통 강변이 쓰레기장이 되고 또
고기가 못 살도록 혹독한 공장 폐수를 냇물에 흘려보내고도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도 바로 이 흐름의 심성이 현대적 조건에 부정적으로 반영된 한 증명이랄
수가 있다.
버리는데 죄책감 안 느껴
한국인의 공해나 쓰레기를 둔 의식구조를 해명하는데 새뮤얼 스토퍼가 제기한
역할 갈등(role conflict)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봄직하다.
가령 이런 경우를 가상해 보자. 나의 다정한 친구 가운데 하나가 직접 운전하는
차의 옆자리에 앉아 고속도로를 달렸다 하자. 제한 스피드 60킬로미터로 표시돼
있는 지점을 80킬로미터로 달리다가 샛길에서 걸어 올라온 농부를 치었다고 하자.
이 친구의 재판에서 유일한 증인으로 내가 법정에 서게 되었고, 나의 증언 여부로
운전자 잘못이냐 농부 잘못이냐가 가려지게 될 판이다.
한데 사실대로 증언을 하면 다정한 친구가 옥살이를 하게 되고 친구를 위해
사실대로 증언하지 않게 되면 시민의 정당한 의무와 양심을 훼손하는 것이 된다. 이
선택의 고민이 역할 갈등인 것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의 집단에 복합 귀속하고 있는
이상 항상 이 역할 갈등에 시달리고 있으며 따지고 보면 사회 생활이란 바로 이
역할 갈등의 연속이랄 수가 있다.
만약 이 교통 사고를 둔 역할 갈등을 두고 한국인에게 어떤 역할을 택일할
것인가고 무기명으로 묻는다면 90퍼센트 이상이 친구로서의 역할을 선택, 위증을
한다고 대꾸할 것이다.
한데 아서 새뮤얼 스토퍼가 미국 대학생들에게 물었더니 90퍼센트가 정당한
시민의 의무나 양심 편을 선택한 것으로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한국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두고 그 안과 밖이라는 안팎 개념으로 파악한데 비해
구미 사람은 집이나 마을이 평등한 이웃 개념으로 파악한다는 데서 이같은 차이가
나는 것이다. 곧 담이나 울을 둔 안과 밖은 전혀 이질의 공간이요, 장승이 서 있는
마을 경계의 그 밖은 구체적인 인촌이 아니라 자신들 세계 그 밖의 존재다. 사실
이웃이라는 관념과 밖이라는 관념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집에
있는 쓰레기를 우리 집의 영역 밖에다 곧잘 버린다. 그 영역 밖에 버리면
구체적으로는 이웃 집이 있게 마련이지만 쓰레기를 버린다 할 때 이웃이란 관념은
없고 그저 밖이라는 관념밖에는 없다.
이웃이라는 관념이 있으면 죄책감이라도 가질 테지만 밖이라는 관념만이라면
죄책감도 느끼질 않는다. 곧 이것이 우리들 문화에 있어 안팎의 기본적 관계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쓰레기 문제뿐 아니라 관할 구역을 둔 강인한 안팎 관념에서
빚어지는 각종 행정이나 수사 문제가 야기된 것도 그 때문이요, 또 구미에는
노동조합이 이웃 관념인 직능별 조합인데 비해 한국의 그것은 안팎 관념인 기업별
조합인 것도 그 때문이다.
기독교에 있어 인인이란 관념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데 비해, 유교에 있어 집이란
관념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가치관의 차이 때문인지 알 수 없어도 나의 영역
이외는 밖이라는 이 한국인의 개연성이 쓰레기를 버리고 또 공해에 무심,
무감각하며 공공 공간에 있어 질서 의식이 박약한 원천적인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ff
5. 청탁병
유럽 인이 껍데기 있는 달걀이라면 한국인은 껍데기 없는 달걀이다. 껍데기가
있으면 달걀 하나하나가 독립할 수 있지만 껍데기 없는 달걀은 유동성 때문에
독립할 수가 없다.
사대부를 예우했던 옛날에는 죄가 있어도 그 죄명을 바로 대질 않고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그 죄를 암시하는 까다롭고 막연한 말을 만들어 썼던 것이다. 이를테면
가문에 음행이 있으면 안방을 가리는 발이 정돈되지 못했다는 뜻으로 '유박불수'라
했고, 청탁을 잘 받고 뇌물을 잘 먹으면 제사 지내는 제기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보궤불칙'이라 했던 것이다.
임진 국난 때 명상인 이원익이 벼슬아치의 기강을 다스리는 사헌부에 있을 때
당시 정승이던 윤두수 대감을 '보궤불칙'했다 해서 탄핵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연후 이원익은 공사로 윤 대감을 찾아가 뵈었으나 조금도 괘씸하게 여기는
빛이 없이 , '어려운 가문 혈족들이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청탁해
오기에 그것을 들어주고 또 그것을 들어주기 위해 응분의 물품을 보내 오면
받아왔다.'고 말하고 그것을 탄핵한 것은 공의 직책으로서 사리에 당연한 것이라고
오히려 칭찬을 했던 것이다.
그런 말을 주고받는 자리에 때마침 시골에 있는 친족이 편지로 혼수를 보태어
달라고 청해온 것이었다. 윤 대감은 그 자리에서 여종을 불러 요전에 여관
아무개로부터 보내 온 비단이 있으니 꺼내 주라고 시킨 것이었다. 여종이 돌아와서
그런 물건이 없다고 아뢰자 윤 대감은 웃으면서, '저 아이들이 공이 자리에 있으니까
숨기려는 것이요.' 하고 굳이 갖고 오라 시켜 봉해 주면서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한다.
--"공사견문"
워낙 대인으로 소문났던 윤두수의 큰그릇을 엿보게 하는 고사이기도 하지만, 우리
옛 관료 사회의 청탁을 둔 어떤 개연성의 한계를 암시해 주는 고사이기도 하다.
또한 이 고사는 청탁이라는 사회악을 제거한다는 데 무엇보다도 그 저해요소가 돼
있는 의식구조상의 고질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유럽 사람이 껍데기 있는 달걀이라면 한국 사람은 껍데기 없는 달걀로 자아
모델의 차이를 들 수가 있다. 껍데기가 있으면 달걀 하나하나가 독립할 수도 있고
또 하나씩 하나씩 운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껍데기 없는 달걀은 그 유독성 때문에 낱낱이 독립할 수도, 또 낱낱이
운반할 수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한 용기 속에 몇 개씩을 담아 그 용기별로
독립하거나 운반할 수박에 없다. 곧 한국 사회는 '용기사회'이며 그 용기 속에 어느
범위의 집단이 몰아의 공존을 한다. 바꿔 말하면 어느 가족, 가문 또는 직장,
촌락이라는 용기 속에 들어가 개인의 이익이나 고집이나 개인의 감정을 가급적
억제하고 그 용기로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게 곧 구조적으로 또 전통적으로
체질화돼 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나와 사회의 중간에 위치한 이 가정이나 직장,
촌락의 중간 집단인 용기사회의 가치관이 개인의 가치관에 항상 우선하였고 이
가치관을 배반하면 생존의 위험까지 받았던 것이다.
윤두수가 껍데기 있는 달걀이라면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말했듯이 동정은
죄악이요, 청탁은 범죄라는 개인의 소신을 관철할 수 있었을 것이나, 껍데기 없는
달걀로서 용기사회에 공존하는 일원인 이상 개인의 가치관보다 가족과 가문의
가치관이 우선되고 그 가치관에 따른 것이 별반 양심에 거리끼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도덕적인 찬양을 받기까지 했던 것이다.
용기사회의 가치나 윤리 지상의 전통의 입증을 몇 가지 사례로 들어본다.
인조 5년에 김홍원이란 자가 모반을 음모한 사실을 그의 아내 말치가 한글 편지로
고변을 한 사건이 있었다.
국가 변란을 미리 알리는 중대한 고변인데도 인조는 음모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도대체 남편을 고발하는 처첩이 생기는 것에 노발대발하고, 아무리 미천한
계집이기로서니 윤상을 무너뜨리는 쪽이 대역보다 중죄라 하고 말치를 잡아 가두게
했던 것이다.
또 인조는 병자호란의 국난을 극복한 일대 공신인 최명길과 완풍부원군 이서를
파면시키는 융단을 부렸는데, 그 이유는 이 두 사람이 형조에 근무했을 때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죄를, 아내를 잡아다가 남편의 죄를 입증시킨 일이 각각 뒤늦게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법보다 가족 윤리 곧 용기 윤리를 우선시킨 사실은 한국 특유의 사상적
배경이 필연이었으며, 한국 사회에 있어 수많은 가치관 가운데 가족 윤리의
가치관이 최우선되었기로 청탁이나 뇌물 같은 부정 요소도 이 가치관의 테두리
안에서 저질러지면 죄악시하지 않는 것이 통념이 돼 있었던 것이다.
당상관이면 20촌 안팎에서 청탁
옛날 고을 원님인 수령에게는 저채라 하여 이같은 가문 사람의 청탁에 사사로이
쓸 수 있는 공금이 보장돼 있었으며, 심한 경우는 고을의 부자에게 수령 명의로
저채를 떼어 금품을 약탈하는 악습마저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다산의
"목민심서"에까지도 궁한 친구나 가난한 고모, 형수, 누이들 중에서 도움을 바라는
자가 있으면 불가불 응해 주되 저채를 많이 져서는 안 된다고 쓰고 있다.
비단 벼슬아치뿐만 아니라 여느 사람도 본종은 8촌까지, 외가나 처가는 3촌까지
부양 의무를 지는 것이 상식이 돼 있었고, 또 본인이 형사나 민사 책임을 지지 못할
경우 이상의 부양 범위에 속한 친족이 연대 책임을 지게끔 돼 있었다. 벼슬이
높을수록 이 부양 친족 범위는 확대되어 정 3품의 관찰사쯤만 되면 내외
20촌까지의 친족이 찾아와서 청탁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돼 있었던 것이다.
근대화와 도시화로 한국 사람들도 껍데기가 생기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껍데기요, 심리적으로는 아직도 용기사회에 머물고 있는 그런
야릇한 형태의 달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있어 청탁 풍조의 뿌리는 이같은 용기사회의 모랄이나
가치관과 오묘한 맥락을 하고 있기에 청탁배격운동을 펼치는데 애로와 또 각자
스스로가 청탁을 배격하고 외면하는데 심적인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갈등은 반드시 현대인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평안도를 침입하자 당시 평안감사 윤훤이 이를 지키지
못하고 도망친 죄가 전란 수습 후에 거론되었으나 인조는 이 주청을 오랫동안
윤허하지 않고 있었다.
사사로운 정과 공무의 갈등을 잘 극복
왜냐하면 윤훤은 바로 인조의 고모인 정혜옹주의 시삼촌이었으며 별나게
용기사회의 윤리, 곧 가족 윤리에 가치를 편중했던 인조였기에 자기 나름의
가치판단에서 비롯된 불허였던 것이다.
한데 이 정을 모르고 정혜옹주가 대궐에 들어와 시삼촌의 구명을 청탁하자 '일단
옹주가 대궐에 든 이상 윤의 죽음을 용서한다면 반드시 청탁에 의한 사정을 위한
것이라 할 테니 나라의 기강을 잡아야 할 나로서 못할 일'이라면서 윤을 잡아
가두게 하고 있다. 곧 용기사회의 윤리와 청탁의 갈등과의 한계를 선명하게 가르고
있음을 본다. 이 갈등의 다른 해소 유형으로 다음과 같은 뼈저린, 하지만 교훈적인
상황도 있었다.
지재 민진후가 형조판서로 있을 때 누이동생의 시집인 참봉 홍우조의 집에
들렀었다. 지재는 원래 술을 즐겼기로 누이가 술을 내왔는데 안주는 다만 김치 한
가지뿐이었다. 술맛이 매우 좋다면서 자꾸 불러 마시면서 안주 없음이 섭섭했는지,
'이른바 유주무효로구나.'를 연발했던 것이다. 실은 그 바로 전날이 시아버지인 홍
참봉의 생신날이라 술을 담갔고 또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았기로 남은 고기가
있었지만 당시는 국법으로 금육을 하고 있던 때라 민공의 법지키는 것이 겁이 나
감히 고기를 내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비녀라도 잡혀서 안주를 마련해 오라는 말에 누이는 이 오빠의 유주무효가
안타까워 이실직고를 한 것이다. 이에 민공은 어서 불고기로 구워들이라 하여 실컷
먹고 일어섰다. 누이는 이 법을 어김을 너무 살피지 마시라고 옷자락을 붙들고
간곡히 청탁을 했지만 문 밖에 나선 민공은 밖에 대기하고 있던 아전들에게, '이
집은 범도를 했으니 이 집 종을 잡아 가두라.'고 시켰던 것이다.
잡아 가둔 다음 민 판서는 자기의 봉록 중에서 28냥의 속전(벌금)을 대납하고 그
종을 풀어주었던 것이다. 이에 홍 참봉은 '공이 법을 엄하게 지키는 것은 가상한
일이나 어찌하여 먹고 나서 금하는가.'고 그 모순을 따지자 민공은 이렇게 말했다.
"지친의 정으로 누이가 권하는데, 어찌 먹지 않을 수 있으며 그 사실이 임 내
귀에 들어온 이상 어찌 사정을 쓸 수 있겠는가."
비록 지친이라도 용서를 하거나 청탁을 받지 않으면서도 반드시 뒷일은 자기가
담당하였기로 용기사회의 모랄에서 책한다는 법이 없었다 한다.
이같은 청탁 처리 유형은 오늘날의 청탁을 둔 갈등 처리에서도 퍽이나 시사한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이 밖에 오늘의 청탁 풍토에 온고이지신의 슬기를 주는
청탁 처리 유형을 몇 가지 더 들어 보기로 한다.
참판인 유의가 홍주목사로 있을 때 금정 찰방이던 다산 정약용이 편지로써 공사를
의논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회답이 오지 않아 화가 나서 들어가
따졌다. 유 목사가 시동으로 하여금 서간을 담은 상자를 갖고 오라 하여 쏟아
보였다. 그 편지들은 모두 조정 귀인들로부터의 사서들이었는데, 하나도 뜯어 보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사서는 뜯어 보지 않은 것으로 청탁에서 고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산도 공사를 공문으로 하지 않고 사서로 한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다.
성종 때 덕천 원이던 양관은 부임하러 갈 때 소학과 이백의 시집, 활, 거문고
그리고 학 한 마리만을 들고 갔었다.
그리고 조정에서나 고관대작 그리고 일가 친척들이 청탁해 오면 방안에서 기르는
학을 어깨에 얹고 나아가 공손히 읍만 할 뿐 묵묵부답만 하니 무색해서 돌아가곤
했다 한다. 이 양학척청은 그 후 선비 사회의 한 법통이 돼 내렸다 한다. 오금이
가렵도록 멋있는 청탁 처리 유형이 아닐 수 없다.
정신적 원천은 선비정신에서
심지어는 청탁을 해오면 그 청탁과 정반대의 조처를 취하는 청탁 처리 유형도
있었다. 이조판서 허성이 그러했다. 어느 한 조관이 지방으로 전근될 차례가 되자
허 판서에게 남도에 보직해 줄 것을 청탁을 했다. 발령이 나고 보니 평안도의
오지인 변방 고을이었다. 어느 문사가 성균관에 보직을 청탁하자 오히려 변방의
교수직을 주는 등 반드시 청탁의 역처리를 한 것이다. 승직도 나라에서 좌우하던
때라 권모술수가 많은 일운이라는 중이 단속사에 옮겨가고자 허 판서에게 거짓
청탁하길 '경치 좋은 서도의 영명사에 옮기고 싶습니다. 만약 단속사에 가게 되면
소승의 일은 그르치게 됩니다.' 했다. 수일 만에 단속사에 옮기라는 비가 내렸던
것이다.
지금도 예외는 아닌 줄 아나 그 고을에 특산품이 있으면 그 특산품에 얽혀
공사간의 청탁이 성행하게 마련이다. 옛 선비 법도에 어느 한 고을의 원이 되면 그
고을의 특산품은 전혀 먹지 않거나 손을 대지 않음으로써 그를 둔 청탁을 아예 할
수 없게 하는 사전 처리도 유형화돼 있었다. 기건이 연안부사로 있던 6년 동안 그곳
명물인 붕어를 한 마리 먹지 않았고 제주목사로 있던 3년 동안 복어 한 점 입에
대지 않음으로써 그에 얽힌 공사 청탁을 사전에 막았던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우리 선조들의 청탁 처리 유형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실천 가능한
처리 유형인 것이다. 다만 그러할 수 있는 용기의 정신적 원천으로 옛날에는 선비
정신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그 정신적 원천이 증발되고 없는데 용기사회의 청탁
풍토만은 여전하다는 점에서 보다 고된 양심적 성숙과 용기의 시련이 요구되고 있다
할 것이다.
@ff
6. 동반자살병
한국인에게는 누명보다 더 큰 죄도 죽으면 동정으로 변질되어 죽음은 미화의
대상이었으며, 굳이 죽음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었다.
식물성 자살과 동물성 자살
병자호란에 남한산성이 포위되었을 때 상신 장유는 판서 이식에게 사사로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성이 만약 불행하게 된다면 선비로서 자살하기는 심히 어려우니 어찌해야 잘
죽을 수 있겠는가."
이에 이식이 말했다.
"칼을 빼어 제 목을 찌르는 것은 장사의 할 일이지 선비로서 할 일은 못 된다.
우리 중신은 군부 옆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가 만약 난병에게 죽지 않고 잡힌 몸이
되면 굴하지 않을 뿐이다. 내가 비록 내 목숨에 손을 대질 않더라도 적이 칼질은 할
터이니 잘 죽는 도리는 이 길밖에 없다."
이 난중의 두 선비들 대화는 우리 한국의 전통적 지식층의 자살관을 단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본다. 선비에게 있어 자살은 죄악이요, 배덕이었던 것이다. 물론
뿌리는 다르지만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에 있어서도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
단테의 "신곡"에도 자살자가 지옥에서 받는 끔찍한 책고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예부터 자살자의 시체는 묘지 매장이 거부되었을 뿐 아니라, 자살자의
시체를 거리로 끌고 다니거나 짐짓 교수대에 늘어 놓기도 했다. 왜냐하면 자살은
타살 이상의 중죄였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여왕 치세의 1860년 런던에서 자살 미수한 한 사나이가 교수형을 받고
있으며 2차대전 후 1955년까지 10년 간 영국에서 자살 미수를 한 5천 8백 명
가운데 3백 명이 금고형을, 5천 1백 40명이 벌금형을 받고 있다. 곧 정신 이상자
이외에는 모두 형이 가해지고 있다.
유럽의 자살 부정은 기독교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한국의 자살 부정은
'신체발부는 수지부모 하니....' 하는 조상관에 뿌리박고 있다. 곧 신체나 생명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조상의 것이기에 해칠 수 없다는 생각이 확고했었다. 본래
천명사상, 숙명사상, 그리고 팔자소관과 그에서 연유된 체념, 사시사철 변하는
자연에서 연유된 인생무상의 체질화로 사람의 생사가 자의로 되지 않는다는
사생관이 복합되어 자살은 우리 한국인에게 비범한 것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이같은 한국인의 자살관은 한국인의 자살 방식에서 완연히 드러나고 있다.
유럽이나 이웃 일본에서는 사체 훼손인 절자 방법으로 자살을 해왔다. 고대
로마에서는 혈관 절자로 죽는 것이 가장 명예로운 자살이었다. 폭군 네로의
가정교사인 세네카는 그의 말을 네로가 듣지 않자, 팔, 발목, 무릎 등 혈관을 절개한
채 열탕 속에 들어가 자살하고 있다. 일본인의 하라끼리며 중국인의 자인, 자자,
자문, 자월이며 동남아의 분신이며, 아프리카의 비신자살이며 모두가 목축적이고
동물적인 신체 훼손의 자살 방법이다. 헤밍웨이가 엽총 자살을 했듯이, 미국인의
자살 수단 가운데 87퍼센트가 총기 자살을 하는 것을 보면 이 자살 수단은 개인적인
성품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족성이나 문화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이에 비해 우리 한국인은 육체를 손상시키지 않은 방법, 물에 몸을 던지는 투신,
목을 매는 자의, 그리고 독약을 마시는 음독, 밥을 굶는 아사 등 너무나 정적이고
피비리지 않는 농경적, 식물적 자살을 하고 있는데 특성을 찾아볼 수가 있다. 유명한
프레이저의 "골든 보"에 보면 조선의 임금님 입에 종기가 나면 그에 칼을 대는 것을
금기시, 광대로 하여금 임금님을 웃기게 하여 종기를 터뜨렸다는 견문이 적혀
있음을 본다. 종기에마저도 철물에 의한 인체 훼손은 안 되었던 것이다. 수염 하나
훼손해도 안 되었기로 머리를 자르라는 단발령이 내렸을 때, 나라가 망하는 것을
저항하여 죽은 자보다 더 많이 죽어가며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한국인의 신체관 때문에 안락사 문제, 암을 환자에게 통고하지 않는 문제,
그리고 죽은 사람의 장기나 안구 이식 문제를 두고 구미 사람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같은 신체관의 정신적 유전질이 우리 현대 한국인의 무의식층에
도사려 있기 때문인 것이다.
죽음을 연출한 응석 자살
내 자랐던 산촌에 '썩은 새끼 서발'이라는 좀 기다란 별명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썩은 새끼 서발이라는 뜻이다. 그분은 노름판에 자리 빌려주는 일, 송장 염하는 일,
돼지 불알까는 일, 마소(마우) 암붙이는 일 등 동네의 궂은 일은 다 맡아서 하는, 밭
한뙈기 없이 가난하지만 착한 분이었다. 가난한 주제에 흥부처럼 슬하에 아들 딸을
죽으로 두어 굶기를 끼니 잇듯 하다가는 목구멍에 곰팡이가 낄 무렵에는 썩은 새끼
서발 거둬다가 사람들이 많이 널려 쉬는 기회를 봐서 정자나무에 목을 곧잘 매곤
했던 것이다. 썩은 새끼에 목이 매어질 리도 없고 또 그 새끼가 썩지 않았다 해도
증인들이 보는 앞인지라 삶의 안보를 완벽하게 한 이상한 자살 기도인 것이다.
이렇게 '썩은 새끼 서발'의 연출을 한 번 하면 동네 사람의 동정을 사서 한 철은
먹고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곧 '썩은 새끼 서발'이란 자살을 연출하는 한국적 자살
유형의 한 표현이랄 수가 있다.
유럽처럼 개인의 억울한 처지, 마이너스 입장 등 의사표시가 활발하지는 못했던
우리 옛 가족, 가문, 촌락공동체 사회에서는 개인의 억울하고 괴롭고 절박한 심정을
직접 토로하는 것은 공동체 논리에 위배되고 부덕시하였기로, 이같은 썩은 새끼
서발로 의사 표시를 곧잘 시도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 심성은 살아 있어 자살
기도는 많이 있는데 그로 인한 사망률이 가장 낮다는 국제 비교 통계에서도 이
'썩은 새끼 서발'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곧 진심으로 죽을 자살을 않고 자살을
연출하는 성향이 한국인에게 강한 이유는 개인 의식이 박약하고 본심 노출을
부덕시하는 한국인의 집단 논리에의 응석으로 따져볼 수가 있을 것 같다.
명분에 목숨을 걸고...
한국인의 자살 가운데 특성으로 도덕 자살을 들 수가 있다. 곧 자신이나 자신이
처한 가문이나 계급의 도덕적 명분 때문에 명을 손쉽게 희생할 수 있었다. 역사적
자살 케이스로 각 문화권별 자살 동기를 비교해 놓은 것을 보면 이같은 도덕 자살이
1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다. 한데 우리나라의 사상
자살케이스의 약 80퍼센트 이상이 도덕 자살의 범주 안에 든다.
우리 옛 부녀자의 자살 케이스로 남녀 내외라는 명분이 약간 오염된 것만으로
숱하게 죽어갔으며, 이는 세계사에서 지극히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지봉유설"에
실린 한 사례를 들어 본다.
한 양가집 처녀가 왜적을 만나 피난하다가 부모 형제를 잃은 체 숲속에 숨어
있었다. 늙은 중이 지나가다가 그 처녀를 보니 굶은 지가 여러 날이 되어 숨이 곧
끊어질 것만 같았다. 중은 이를 부축, 집에 데리고 가려했으나 처녀는 사나이 손이
몸에 닿는 것을 애통해 하고 마냥 버티었다. 중은 하는 수 없이 절로 돌아와 밥을
지어 갖고 가서 권했으나 막무가내기에 밥을 곁에 놓아두고 갔다가 며칠 뒤에
가보니 처녀는 굶어 죽어 있었다 한다. 물론 곁에 놓아둔 밥은 한 숟가락도
건드리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동방의 열은 종이를 태운다'고 중국까지 알려졌듯이, "조선명륜록"에 수록된
자살로서 정표를 받은 그 수천 케이스의 열이 명분 자살이었다. 이를테면 한말 순종
연간에 남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윤씨 집에 갑자기 불이 나 바람을 타고 재빠르게
이웃집으로 연소를 했다. 불이 나면 인명은 소사되는 일이 있더라도 맨 먼저 꺼내야
할 비상지출이 죽고 없는 선조의 신주였기로, 윤씨집 며느리는 신주를 꺼내지
못했었다. 이를 안 윤씨 며느리는 신주를 안고 타고 있는 화심에 뛰어들어 자살을
하고 있다. 이처럼 옛 우리 한국인은 자살은 자살이라기보다 명분 타살이라는 편이
옳았다.
이처럼 '명'을 '명'에 선행시킴으로써 빚어진 한국적인 자살은 명을 모욕당했을 때
그 명을 구제하기 위해서도 손쉽게 자살할 수 있었다. 곧 누명을 쓴다는 것은 '명'에
오욕을 당했다는 뜻이며, 이를 구제하기 위한 그 잦은 누명 자살이야말로 한국적
자살의 다른 한 특성이랄 수가 있다.
심청이의 자살은 명분 자살이겠지만, "숙영 낭자전"의 숙영의 자살은 시비 월매의
음모에 의한 누명 자살이요, "정을선전"에서의 추년의 자살도 계모의 음모로 신랑이
순결을 의심하자 자살로써 그 누명을 씻고 있다. 한국 고소설에 있어 자살의 동기는
이 누명 자살이 압도적이다. 심지어 가문에서 누군가가 누명을 쓰면 그 사실 여부,
음모 여부를 가리기 이전에 그런 소문이 났다는 사실만으로 자살을 위장한 타살
사건이 비일비재였다.
정조 11년에 이언이란 사람은 10대 과부인 며느리 구씨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를
욕심낸 한 사내의 조작적인 유언비어로 행실이 나쁘다는 풍문이 돌았다. 이에
가문에서는 사실 여부를 가리기 이전에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녀 과부의 입을
걸레로 틀어막고 돌을 안겨 치마를 뒤집어씌운 다음 깊은 강물에 떼밀어 넣고는
투신 자살로 소문내어 그 결백을 증명시킴으로써 가문의 명을 구제하기로 했던
것이다.
근간에도 가장 잦은 한국인의 자살이 무슨 혐의를 받았을 때 결백을 증명하고자
일어나는 빈도가 잦음은 이같은 누명 자살의 심성 유전질 때문일 것이다.
이에 비해 유럽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 자살하면 그 누명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결백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으면서 증명해 내지
않으면 안 되며, 그러기에 누명 자살이란 없다.
한국인에게는 누명보다 더 큰 죄도 죽으면 동정으로 변질되어 죽음은 미화의
대상이었으며, 굳이 죽음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살이야말로 모든 오염과
오욕을 씻어 없애는 세제 같은 것이었다.
유교권에 많은 동반자살
다른 한 한국인의 자살의 특성으로 더불어 죽거나 따라 죽는 복수 자살 곧 동반
자살을 들 수 있다. 전기 문화권별, 역사상 자살 비교자료에 의하면 한국, 중국,
일본 등 유교 문화권의 복수 자살들이 전체 자살의 25__3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희랍, 로마, 인도가 10퍼센트 내외, 여타 중근동,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개인 의식이
강한 유럽은 5퍼센트 미만이다.
그러기에 유럽 어 계통에서는 동반 자살이니 정사니 하는 복수 자살 어휘가 없다.
2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에서는 희귀한 동반 자살 사건이 있었다. 80대
할머니가 고독이 지겨워 80대 남편에게 죽여줄 것을 애원을 하자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사랑했기에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할머니를 총기로
사살, 그 할머니의 시체를 끌어안고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쏴 자살을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보도한 당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는 이 동반 자살을 double
suicide(이중자살)라 썼고, 또 다른 신문은 killcide(살해자살)란 신어를 만들어
쓰고도 있었다. 한국에 있어 복수자살로, 패전을 당했을 때의 치욕을 사전에
막으려는 병사나 부녀자들의 집단 자살을 들 수 있다. 대원군 집정 시기인 신미년
미극동 해군 부대에게 점령을 당했던 강화 광성포대의 한국 병사들은 부상당한 병사
이외에는 한 사람 남김없이 강물에 투신, '크림슨 물빛 위에 하얀 꽃잎처럼
떠내려갔다'고 당시 참전한 미국 장교가 글로써 남겨 놓고 있다. 부상당한 병사도
타고 있는 불 속에 기어들어가려다 저지당하기도 하고, 또 미국 병사들에게 총검을
가리키며 찔러 죽여줄 것을 애원했다 하니 처절하기 이를 데 없다.
달레의 "조선교회사서설"에 보면 다음과 같은 예비 복수 자살에 대해 적고 있다
한다.
"미구에 난리가 일어나리라는 막연한 유언비어가 퍼졌을 때 성당에 다니는
부녀자들은 선교사에게 달려와 난적이 들이닥칠 때 자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으며, 이때 어떤 경우라도 자살은 신에 대한 범죄라는 것을 납득시키기에
매우 고생하였다."
다른 한 복수 자살로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죽고, 상전이 죽으면 종이 따라
죽는 미망자살이 있다.
임오사화에 이사명, 이희지 부자가 몰살당하자 시어머니인 조씨와 며느리 정씨는
다음과 같은 임사혈시를 써 남기고 동반 자살을 하고 있다.
타향에 계신 부모형제 이제 다시 못 뵈오니
이 몸 옥같이 귀여워하셨다고 이 마당에 누구라 말해 줄까
젖아기 의지할 곳 없으니 눈감고 황천까지 안고 가랴
유월 초사흘 첫 닭이 울 때 피내어 이 글을 쓰고 강을 향해 가리라.
한국인의 동반 자살은 이같은 의리상의 유대였던 것이 근대화와 더불어 이기적인
유대로 변질, 오늘날의 그 숱한 모자 동반, 부부 동반 자살을 빚게 해놓고 있는
것이다.
@ff
7. 기로병
이것은 내가 한 짓이다. 명망과 노숙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재주와 덕이
노숙하기를 조금 더 기다리게 하는 것이 좋다. 이에 이덕형 혼연히 심복하고 있다.
미국에 있어 1960년대는 인종 차별을 없애는 연대였고, 1970년대는 남녀 차별을
없애는 연대였으며, 1980년대는 연령 차별을 없애는 연대가 될 것이라고 미국의
사회운동가 잭 오소프스키는 말하고 있다.
곧 미국에 있어 차별 철폐의 역사는 레이시즘(racism, 인종 차별)에서
섹시즘(sexism, 남녀 차별)으로 발전하였고, 지금부터는 에이지즘(agism, 연령
차별)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이미 미국의 남 캘리포니아 대학을 비롯, 구미의 대학에서는
제론트로지(연령학)라는 새 학문을 체계화, 연령학과를 신설하고 있어 섹시즘 연대인
1970년대에 여성학과가 생긴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곧 직종이
수십 만 종으로 늘어가는 현대사회의 능력 요구와 날로 팽배해 가는 중, 고
연령층의 팽배라는 사회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젊어서 나오는 능력, 중년에
나오는 능력, 그리고 노년에 나오는 능력을 다각도로 자상하게 가려 그 능력을
이용하려는 현대 사회의 요구에서 태어난 학문이 연령학인 것이다.
노인 인구의 팽배는 우리 한국을 포함한 모든 세계의 공통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기원전 2천 년 고대 희랍의 평균 수명은 18세요, 기원 전 5백 년의 로마 평균
수명은 22세였다. 1840년 유럽의 평균 수명은 54세였고,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에는 62세로 늘었고, 1955년에는 70고개를 넘고 있다. 이런 추세로 가속된다면
2000년에는 1백 세가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지금의 우리나라 55년 정년제가 20년 후 까지 계속된다고 가정해 본다. 대학
나올 때까지 24년과 3년 간 병역 의무를 치르고 고용이 되면 겨우 28년 간 일하고
강제 해고를 당해야만 한다. 그럼 나머지 여생은 45년 동안이나 남아 있는 게 되니
지겨워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
65세 정년제 제정의 허와 실
역사적으로 정년제와 연금제를 처음 만들어 낸 것은 19세기 프러시아의 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서였다 한다. 1889년 비스마르크가 정년을 65세로 하여 연금제를
정한 것이 선례가 되어 영국에서는 1908년에, 미국에서는 1935년에 이 65세
정년제를 도입하고 있다. 한데 이 65세라는 숫자가 어떻게 계산된 것인가를 따져
보면 요즈음 우리들 생각과는 전혀 판이한 판단에서 발상된 것이다.
당시 독일 남자들의 평균 수명은 45세였다. 이 45세에서 20세를 더 살아야
65세인데 당시 65세를 넘게 사는 독일 남자는 극소수요, 그 극소수에게 연금을
준다는 것은 국가 예산으로 봐 새 발의 피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약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15퍼센트를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땅 속의 비스마르크가
들었다면 아마 놀라서 졸도, 두 번 죽었을지 모를 일이다.
만약 평균 수명이 연장된 현재에 비스마르크의 논리를 적용한다면 아마도 정년을
85세 이상으로 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이미 공무원 정년을 70세로 연장하고 있고, 각 주와 기업에 따라
정년제를 폐지하고 있으며 대체로 정년을 연장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55세 청년은 인간의 생리적 능력의 기준에서 발상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문화 인류학자 다베글렌에 의하면 사람의 능력은 30세에 피크에 이르나
판단력은 계속 상승하므로 이 능력 곡선과 판단 곡선의 가장 이상적인 교차점이 몇
세가 되는가는 민족이나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했다. 곧 동양 문화권에서는 그
이상적 교차점이 유럽의 그것보다 높다는 것이다.
J.W 스틸의 연령별 인간능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신적 능력인 기억력은
10세에서 23세까지가 절정이요, 상상력은 20세 전후에서 30세 전후가 절정이며,
창조력은 30세에서 55세까지가 절정이며, 사리를 추상 종합하는 판단력은 45세부터
신장하여 70세를 넘겨서까지 유지된다고 했다.
육체적 능력도 18세에서 28세까지가 신속의 절정이요, 25세에서 35세까지가
스테미나의 절정이며, 33세에서 43세까지가 기량의 절정이고, 38세에서 48세까지가
인내의 절정, 40세에서 70세까지가 불굴의 절정이라 했다.
미국의 아폴로 비행사가 모두 40세 전후였음은 바로 이 스틸의 정신 및 육체능력
조사에 바탕을 두고 가장 우주 여행에 적성의 능력들이 갖추어진 연령대이기
때문이며 로마 교황이나 미국의 최고 재판소 판사 등 판단력을 필요로 한 직위가
고령자인 것은 늙을수록 늘어나는 판단 능력 때문인 것이다.
역시 인간능력을 연구한 테일러 박사의 통계조사에 의하면 창조적인 일로 미국에
공헌한 것은 패기 있는 중약년층보다 중, 고년층이 세 배나 많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단 지적인 영역에 도달하면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은 쇠퇴하지만 사고력, 추상력,
활용력, 판단력 같은 창조적인 정신능력은 중년이 넘은 후에도 계속 신장을 한다.
뇌 세포는 전두엽을 제외하고는 20세에 일단 완성을 한다. 그 이후부터는 하루
10만 개씩의 뇌 세포가 사라져간다. 따라서 30년이면 10억 개의 뇌세포가 사라져
버림으로써 '얼굴은 생각나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현상이 일어난다.
문제는 이 뇌 세포란 일종의 창고 속에 무작정 저축된 자료일 뿐 이 뇌 세포
자체만으로는 창조나 판단이 불가능하다. 그 같은 창조나 판단을 하는 능력은
10세부터 60대까지 끊임없이 발달한다는 전두엽인 것이다. 곧 중, 고령의 존재
가치는 이 전두엽으로 생리적 보장을 받는다 할 것이다.
임어당의 "The Importance of Living"중국에서는 통성명을 한 연후에 반드시
'수령은?' 하고 묻는다 한다. 그리하여 20대라고 대답하면 언젠가는 노인이 될
테니까 섭섭해 할 것이 없다는 노인이 못 된데 대한 위로의 인사말을 하고, 중년
나이면 축하한다 하며, 쉰 몇이라 하면 묻는 사람이 목소리를 낮추어 존경의 태도를
보인다.
중국 속담에도 있듯이 '젊은 사람은 귀는 있어도 입은 없다.' 40대가 30대에게
말을 하면 듣고만 있어야 하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설교하다가도 할머니가 입을
열면 아버지는 입을 닫아 버려야 한다. 아비가 가로질러온 길보다 할머니가 더 많이
가로질렀다는데 대한 존경의 폐구인 것이다.
그러기에 중국에서 최고의 존칭은 노인이나 웃어른이나 아버지를 뜻한 '야'였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해장인 진도독이 이순신 장군의 지략에 감탄하여 연하인데도
반드시 '이야'라 불렀다는 고사는 유명하다.
옛날 중국의 천자가 조선 임금에게 여러 가지 난문을 물어왔는데 그 중 하나로,
일곱 굽으로 구멍난 7곡옥 속에 어떻게 실을 꿰느냐는 것이었다. 이를 온 나라에
공표하여 지혜를 현상공모 했는데 어느 한 사람이 늙어서 고려장 속에 묻어두었던
노부에게 찾아가서 물었다.
옥의 양쪽에 난 구멍 가운데 한 쪽에 꿀칠을 하고 다른 한 쪽 구멍에다 실을 묶은
개미 한 마리를 들어가게 하면 된다고 했다.
이를 임금에게 아뢰자 노인의 지혜는 국사에 큰 도움이 된다 하여 그 후부터
고려장 제도를 폐지했다 한다.
우리 옛날 향약을 보면 나이에 따라 5계의 서열을 정하여 깍듯한 예절과 규범을
정해 놓고 있음을 본다. 20세 연상일 때는 존자라 하여 아버지와 같은 대우를 해야
하며, 10세 연상은 장자라 하여 형님과 같은 대우를 해야 하며, 10세 미만의 연상을
칭장, 10세 미만의 연하를 칭소, 10세 이하를 소자, 20세 연하를 유자라 했다.
그리하여, 유자가 먼 길을 떠날 때는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반드시 마을의
장자와 존자를 두루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떠나야 하는 등 그 연장자에 대한
규율이 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을의 중요한 일이나 향약에 입각한 재판을 할 때는 동네 남자들의 평균
연령으로 계산해서 나온 장자단이 모여 몇 가지 결론을 내고는 존자단이 결정하게끔
돼 있어 중, 고년층의 판단력을 십분 활용했던 것이다.
선조 때 퇴계 이황이 예문관 제학으로 재수되자 그때 상급자인 대제학으로 있던
보다 연하의 박순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던 것이다.
"이황이 제학이 되니 나이 높은 큰 선비는 도리어 낮은 벼슬에 있고, 후진 초학의
선비가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은 인재를 쓰는 것이 거꾸로 된 것이오니, 청컨대 신의
관직을 거꾸로 하여 바로잡아 주시옵소서."
임금은 울면서 이 갸륵한 상소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후세에 성호이익이 이를
두고 이렇게 개탄하고 있다.
"아름답도다. 사암(박순)의 어진 것이 세속에 모범이 될 만한데 어찌하여 지금
세상에는 이를 본받는 이가 없는고, 슬픈 일이로다."
명망이 컸던 이덕형이 나이 31세에 대제학의 망에 올랐는데, 이를 천거하는
정승들 모임에서 무기명 투표로 하는 원점 하나가 부족하여 낙천되자 김귀영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내가 한 짓이다. 명망과 노숙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재주와 덕이
노숙하기를 조금 더 기다리게 하는 것이 좋다."
이에 이덕형 혼연히 심복하고 있다.
로마 멸망의 원인 중 노인 멸시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각도의 군사는 왕을 수호하기 위해 서울로 집중하게 됐는데,
도중에 모두 패하고 오로지 권율 장군이 영도하는 전라군만이 싸움에 이겨 목적을
달성했는데, 이때 전라군에는 노쇠하여 업혀 다니는 지휘관이 많았다는 것과 이
연승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나 싶다. 곧 활동이나 용기나 힘으로는 젊은 사람을
못 당해내지만 작전에는 이 노인들의 지혜나 판단력이 뛰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중, 고년층의 판단력이나 체험에 의한 지혜는 이처럼 하나의 자원이었던 것이다.
기봉의 "로마제국 멸망사"에 보면, 로마의 젊은이들이 그 대로마의 부와 힘에
도취하여 체험과 지혜와 판단력의 축적자인 노인을 거부하고 멸시한 데 큰 원인을
두고 있다. 그 멸시한 실례로서 로마의 젊은이들이 로마의 원로원을 지배한
노인들에게 반기를 들고 '60세 이상의 자들은 다리로부터 떼밀어 버리라.'는 구호를
공공연하게 외치고 다녔던 사실을 들고 있다.
중국 대륙의 대제국이었던 진 나라의 멸망 이유에 대해 목공은 '젊은 전사들보다
분명히 힘은 없지만 경험 많은 노인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았기에 이같은 경국의
죄를 짓고 말았다.'고 했다.
사회학자 D.G 브린톤의 "The Basis of Social Relation"에 보면 체험의
축적자를 배제한 기업체들의 사양을 다각도로 채집, 제시해 놓고도 있다.
그리하여 가장 젊음을 구가하는 미국에서도 근년에 중년 비서, 중년 스튜어디스,
중년 운전기사, 중년 볼런티어 등 젊은이를 대체하여 중, 고령층이 각종 직업에서
부쩍 늘어나고 있음은 결코 에이지즘 시대의 범연한 일이 아니라고 보아지는
것이다.
@ff
8. 파당병
일본 제국주의가 그들 식민 정치의 필요성에서 이 부적정인 당폐 측면만을
과장시킴으로써 사색당쟁에 고질적인 마이너스 이미지가 부각됐다고 본다.
북 이탈리아의 베로나에 들른 분이면 젊든 늙든 간에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에트"의 모델이 됐던 줄리에트의 무덤에 들르게 마련이다.
줄리에트가 태어난 명문 귀족 카퓨레트가의 가족 묘지인지라 원주와 아치로 두른
회랑 안에 성상이 놓인 예배당이 있고, 등나무 덩굴이 자색의 꽃을 드리운 그
중정의 지하층에 줄리에트의 석관이 놓여 있었다.
묘소 입구 '줄리에트에의 우편함'이라 쓰인 대리석의 편지통에는 연중 세계
각지에서 줄리에트에게 부쳐온다는 편지가 수십 통 꽂혀 있었다. 무심코 그 한 통을
뽑아 읽어 보니 '부디 나의 사랑이 나의 연인의 맘을 움직이게 하여 내가 그를
사랑한 만큼 그도 나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하는 사랑의 주력을 기원하는 워싱턴의
한 노처녀로부터의 편지였다. 광한루의 성춘향이나 대동강의 심순애가 이 애주의
편지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던들...하고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외국의 여러 당파 싸움
지금 굳이 줄리에트의 무덤 이야기를 서두에 꺼내는 이유는 그 무덤 입구에 역시
고색창연한 대리석에 새겨진 다음과 같은 문구에 조명을 대고 싶어서인 것이다.
'몬태규 가나 몬태규 가와 붕당을 했던 일당의 후예는 출입을 엄중히 금함' 이라는
금구였다. 몬태규 가는 줄리에트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연인 로미오의 출신
가문이다. 곧 몬태규 가가 속한 당파와 카퓨레트 가가 속한 당파와의 반목과 갈등
때문에 이 사랑이 이뤄지질 못했고 그 파당에 대한 원념이 이 소설적 연인이 죽은
수백 년후 까지도 이 금구에 생동하고 있다는 것은 서양 사람들의 파당에 대한
강인한 집념의 일면을 엿보여 주고 있는 것이 된다.
마키아벨리의 "대공"에 보면 당시 유럽의 각 도시마다 분당 없는 도시가
없었으며, 각 명가들이 이 분당에 속해 반대당끼리는 교제나 결혼은 물론 같은
샘물도 먹지 않았으며, 교회가 하나밖에 없는 소도시에서는 당색별로 앉았을 정도라
했다.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도 이 당색에 있었다고 투기디데스는 쓰고 있고, 로마가
멸망한 원인도 이 당색에 있다고 기봉은 쓰고 있다. 그 거대한 고전 "플루타르크
영웅전"도 당색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고, 세익스피어도 이 당색이라는
배경이 없었으면 그의 작품의 분량은 반감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일리 있는 평가랄
수가 있다.
이 당색에 대한 집착도는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의 정당을 자식이
계승하는 비율로 그 집착도를 가늠해 보면 영국의 경우 보수당이 89퍼센트,
노동당이 92퍼센트가 아버지의 당색을 물려받고 또 물려주고 있다. 사회계층의
이동이 격심한 미국에서도 10여 년 전 조사로 74퍼센트가 아버지의 당색을
물려받고 있다.
이에 비해 이웃 일본은 가장 계승률이 높다는 보수 정당인 자민당의 경우
55퍼센트가 아버지의 당색을 계승할 뿐이며, 그 밖의 사회당이나 공명당 같은 데는
20퍼센트 내외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당색 계승을 살펴볼 만큼 정당의 역사가 깊지 않고 또 당색 변질이
무상하여 살펴볼 수도 없겠지만 자식에게의 계승은커녕 자기 세대에도 몇 번씩
변질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10퍼센트쯤이라도 계승될까 의심스럽다.
유럽보다 강한 우리 당색
옛날 우리 선조들의 당색 농도는 아마 어느 유럽의 다른 나라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관광지가 돼 있는 청주 화양동은 중국 천자를 모시는 만동묘가 있어
예부터 많은 선비들의 순례지가 돼 있었다. 옛날 그 화양동에 환장암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그 절의 한 스님은 그곳에 들르는 사람들의 행태만 보고도 그 사람이
속해 있는 당색을 틀림없이 알아냈다 한다.
이를테면 만동묘 앞을 지날 때 공경하고 근신한 뜻이 안 보이며 잘 떠들고
활달하게 행색을 부리는 사람은 진보적이던 남인이요, 만동묘에 이르러서는 처마만
쳐다보아도 감개 무량이 여기고 몸을 굽혀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보수적인
노론이요, 그저 산수 구경을 간단히 하고 만동묘 구경도 절차를 무시, 산수구경처럼
해버리지만 절에 와서는 중을 곧잘 꾸짖으면 혁신적인 소론이라는 것이다. 곧
자신이 속해 있는 당색이 인격이나 언동에 배어 버린 것이다. 옛 우리 선조들은
이같이 당색과 인간이 절충 융합돼 있었던 것 같다.
남인 가문인 영남의 거유 장여헌의 손녀는 같은 당색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엄한
불문률로 역시 남인 가문인 안씨의 집에 시집을 갔다. 한데 부인의 아들이 벼슬에
급급하여 조상 대대로의 당색을 배반하고 서인에게 붙었던 것이다. 이에 격분한
부인은 자식과 별거했던 바 어느 날 할머니를 찾아 손자가 문안을 왔다. 무엇하러
왔느냐고 꾸짖자, "집에 돌아와 할머니를 뵙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고 대꾸를
했다. "집에 돌아왔다 했으니 이게 바로 네 집이냐."고 반문하자, "그렇습니다."
라는 손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가마를 준비시키며, "선조부터 대대로 남인인
내가 서인의 집에 거처할 수 없다." 하면서 남인의 당색을 지켜내린 딸 유씨 집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죽었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당색에의 강인한 집념은 당색에 따라 옷의 디자인이나 헤어
스타일도 달리해야만 했다. 이를테면 노론 가문의 부녀자는 저고리의 깃과 섶을
모나지 않고 둥글게 접었다. 치마 주름은 굵고 접은 수가 적으며 머리쪽도 느슨하게
늘어서 찌었다. 이에 비해 소론 가문의 부녀자는 깃과 섶을 뾰족하고 모나게
접었다. 이 모난 디자인을 '당코'라 불렀으며 소론 가문을 '당코'로 속칭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치마 주름 수도 많고 잘며 머리쪽도 위쪽으로 바싹 추켜 찌었다. 이같은
옷매무새나 머리 모양은 그들 당의 정신과 너무나 잘 부합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곧 노소론의 분당 원인은 주자학을 둔 보수적 해석과 혁신적 해석 때문이며
곧 보수, 혁신이 그 분당의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당코처럼 날카로운 디자인, 잔주름
많은 치마, 바싹 올려붙인 머리쪽이 혁신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고, 완곡한 옷깃,
굵은 치마 주름, 느슨한 머리쪽은 보수적 이미지를 물씬 나게 한다.
우리 한국인의 당색은 인간만을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이처럼 복색 같은
차림새마저도 변형시켰을 만큼 강인하고 집요했던 것이다.
우리 근세사에 있어 10붕 8당의 당폐가 막대했던 것은 부인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같은 당폐는 비단 우리 역사에만 있었던 일이 아닌데도 일본 제국주의가
그들 식민 정치의 필요성에서 이 부정적인 당폐 측면만을 과장시킴으로써 우리
사색당쟁에 고질적인 마이너스 이미지가 부각됐다고 본다.
긍정적 측면이 많은 당파심
따지고 보면 이 한국인의 강인한 당파심에는 부정적인 측면만큼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1694년(숙종 20)의 환국 이래, 불우한 지위에 놓였던
남인들의 강인한 당파에의 집착이 없었던들 우리 사상사에 획기적인 전기랄
이익이나 안정복 등에 의한 구시의 실학이 형성될 수 없었으며, 또 남인 당색을
혈맥에 섞는 짙은 농도가 없었던들 서로 핏줄이 통한 이가환, 정약용 삼형제, 그리고
이승훈, 이얼, 권일신 형제로 맥락되는 그 많은 순교를 수반한 개화 사상도 그
태동이 적잖이 뒤졌을 것이다.
오히려 근대화 과정에서 이 강인했던 당론에의 집착도가 형편없이 해이된 것을
슬퍼해야 할 일인 줄 안다. 당론에의 집착력이 완전히 이지러진 해방 후의
개연성으로 다음과 같은 현상을 우리는 흔히 보아 왔던 것이다. 어느 한 지역
사회의 유지가 처음엔 좌경의 건국준비위원장을 하다가 그 후에 우경의
독립촉성회장이 된다. 여당인 자유당 위원장이 되었다가 자유당이 망하면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위원장이 된다. 다시 공화당이 여당이 되면 그 위원장이 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물결타듯 당을 타고 식은 죽 먹듯 당을
바꾼다.
또한 표변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민들도 도덕적 불쾌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그 변절에 둔감하다. 앞서 장여헌의 손녀인 장
부인이 보이듯한 변절에 대한 처절한 저항은 꿈만 같은 이야기가 돼버렸다.
소속된 당이 '장(field)'이요, 당을 배경으로 하여 모색하는 유지, 국회의원,
고급관료 같은 감투는 '격(class)'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격의 사고보다 장의
사고가 우선되고 강했는데, 오늘날 우리 한국인은 장의 사고보다 격의 사고가 한결
강해졌다. 그리하여 당은 자신의 개인적인 격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그
수단으로써 당이 무의미해졌을 때는 지지배배 철새가 된다. 격의 사고는 개인을
위한 이기심에 뿌리를 두기에 철새가 되고 장의 사고는 집단을 위한 이타심에
뿌리를 두기에 순교를 수반한다.
당론을 바른 문화 유전질로
정치 해빙을 맞아 많은 당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 있고 공천을 둔 정치
후조들이 이당 저당을 기웃거리고 있다. 문제는 당이 많다는 데 있다기보다 당에의
귀속 농도가 전혀 없이 안남미밥처럼 불면 날리는 버글버글 유리된 채 그릇에 담고
있는 것이 요즈음의 당이다. 그렇게 된 복합 이유로서 당의 찰기랄 이데올로기의
부재를 들고 이데올로기 정립에 부심한다고 들었다. 후조 생리를 막는 법적인
규제도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같은 이데올로기 정립이나 정치 후조의 규제는 지엽적인 방책일 수는 있어도
근원적인 방책일 수는 없을 것이다.
갑자사화 때 자신의 당론에 집착하는 바람에 혹독한 고문을 받고 피투성이가 된
채 옥문 밖에 내어던져진 대제학 홍언충을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동문이면서
반대당인 김안로가 보고 '참혹하도다.'고 동정을 하자, 그는 '홍문관의 물이 묻어
그러내.' 하였다. 홍문관에서 김안로와 더불어 글을 읽던 학문의 물을 몸에 묻은
피로 비긴 것이다.
김안로가, '지혜를 죽이고 학식도 몽매해져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못 가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가.'하고 말하자, 홍언충은 '그렇게 되면 지옥에 가서
외롭지 않겠는가.'고 고개를 흔들었다 한다.
김안로 같이 당색을 악용한 부정적 측면만을 보지 말고 홍언충 같은 당론을 둔
긍정적 측면의 문화 유전질을 우리는 두뇌의 구피질 속에서 아련하게 감지해 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ff
9. 비축병
'해 묵은 쌀밥 먹는 사람하고는 말도 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한 해 두 해를
넘겨가면서 곡식을 축적해 두는 행위. 곧 그런 구두쇠하고는 상종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한말 고종 초기에 정가소라는 벙어리가 서울 남북촌의 양반들 사랑방을
전전하면서 무엇의 팬터마임으로 당시 세태를 풍자하고 다녔다 한다.
한말 독립협회의 회원으로 독립과 개화운동을 선도했던 윤효정이 쓴 "최근
60년의 비록"이란 책을 보면 이 정가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슨 일이든지 손짓 발짓과 이목구비를 형형색색으로 놀려 흉내내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뜻을 혼연히 알게 하는 것이 말함과 다를 것이 없고, 오히려 말로 하는
것보다 재미있고 자상하니 능히 여러 사람을 웃기는 고로 별명이 정가소라, 남북촌
여러 재상의 집을 돌아다니며 당시 세태의 선악과 시비를 익살하는 것을 보면 그
낱낱이 춘추사필의 뜻을 지닌지라. 사동대신 김병국의 집에는 정가소가 제집처럼
드나드니 작은 사랑이나 청지기 방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포복절도케 하니, 그 중
흥인군의 곳간점고하는 흉내는 일품이더라.
흥인군은 흥선대원군의 형 이취응으로 대원군과 사이가 나빠 대원군 집정시절에
푸대접을 받다가 대원군이 실세한 후, 민씨 세도에 업혀 무척 재욕을 충족시켜
소문나 있던 분이다.
그의 집에는 이 재물을 저장하는 곳간이 아홉 개나 즐비하여 재백을 가득 쌓아
놓고 있었으며, 새벽에 일어나면 지팡이를 짚고 이 곳간점고하는 것이 낙이었다.
제1곳간에서 고지기로 하여금 자물쇠를 열게 하여 '두둥실'하고, 제2곳간에 들어가
'지화자' 하며 제9고에 이르기까지 점고춤을 추며 문안을 드렸던 것이다.
제7고에는 생치와 동태 등 생육물이 쌓여 여름철에 썩은내가 진동, 소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권해도 흥인군은, "여는 그 식물됨을 애하는가. 오는 그 적취됨을
애할 뿐이노라." 하며 나누어 주질 않았다 한다. 정가소의 풍자 팬터마임의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초검은 흥인군의 '적취' 취미가 만인의 핀잔을 받을
만한 공감력을 가졌다는 바로 그 점이요, 그 공감력 때문에 정가소의 소재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흥인군의 축재가 권력형 축재였다는 점에서 반감과
핀잔의 공감력을 형성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 공감력은 비록 그의 축재가
권력형 축재가 아니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었다 해도, 그 적취해 두는 그의
습벽에 대해서도 충분히 형성될 수 있는 공감력이다. 곧 권력형 축재와 적취습벽이
복합하여 반감력을 팽배시키고 있다.
대체로 우리 한국인은 정당한 재물일지라도 그것을 활용하질 않고 적취해 두는
행위는 부정적으로 비가치화하는 성향이었다.
구두쇠...하면 옛날 촌락공동체 사회에서는 인격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당했던
것이다.
'해묵은 쌀밥 먹는 사람하고는 말도 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한 해 두 해를 넘겨가면서 곡식을 축적해 두는 행위, 곧 그런 구두쇠하고는
상종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물론 된장, 간장, 고추장 등은 맛을 내고자 묵히는
것이 기에 몇 해를 넘겨도 적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옛 선조들에게는 절용은
미덕이었지만 이 '적취'는 인색과 표리관계에 있는 악덕이었다.
지금도 불황이다, 비상시다 할 때 임박해서 사재기하는 매점 행위가 있을 뿐,
평상시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황이나 비상시를 대비하여 생활필수품을 비축해
두는 집은 극소수일 것이다. 이같은 비축의 전통이 박약하기에 불황이나 비상시에
매점 공황이 일어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가옥구조에 지하실이라는 건 없었다. 구미구조의 개량주택이
들어서면서 지하실이 생겼으나, 전통적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에는 이 지하실의
쓸모나 효율은 보잘것이 없었다.
대체로 반드시 지하실이 아니어도 되는, 연탄이나 쌓아 두는 창고 구실 이상의
기능을 발휘한다는 법은 없다.
미국의 여러 집에 초대되어 집구경을 하고 난 다음, 비로소 지하실의 본 기능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에서 일종의 문화공백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물론 미국
가정의 지하실도 잡다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이기도 하지만, 예외없이 그 일부는
식품저장고의 구실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예부터 중북구에서는 지하실이란 쇠고기나 야채 등 식품을 저장하는
식품저장고였으며, 그 전통이 살아 있어 지금도 포장된 각종 깡통 식품 음료들이
산적돼 있었던 것이다.
식품은 이 지하실에만 비축돼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 가정의 부엌에는 예외없이
거대한 식품저장을 위한 폭 1미터 내지 2미터 남짓한 장이 놓여 있다. 이 장에는
같은 종류의 식품깡통이나 건조음식이 수십 개씩 쌓여 있어 마치 슈퍼마켓의
진열장을 보는 것만 같다.
뿐만 아니다. 대개의 가정에는 이 지하저장고, 부엌저장고 말고 ㄷ프리저라 하여
높이와 깊이 각 1미터, 폭이 2미터 남짓한 거대한 아이스 박스가 비치돼 있다.
뚜껑을 열어 보면 비닐 속에 든 쇠고깃덩이를 비롯, 냉동을 필요로 하는 각종
식품이 가득 들어 있다.
흥인군의 곳간처럼 제9고까지는 없다 해도 대체로 제3고까지는 적취를 해놓고
사는 것이 미국 가정 생활의 상식인 것이다.
미국은 모든 식량을 비롯, 물자가 풍부한 나라다. 또한 바로 5__10분 동안만 차를
몰면 산적된 슈퍼마켓에서 언제든지 식품을 살 수도 있다. 한데 왜 이처럼 대량의
식품을 가정에다 비축해 두어야만 하는가. 오히려 물자가 빈곤하고 입수가 힘든
우리나라에서 이 적취의 문화가 발달했음직한데 오히려 그 반대의 문화 현상이
빚어졌을까. 이 의문을 풀어 보는 것도 한국과 구미의 문화비교의 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식량결핍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유가 못 된다.
만약 식량결핍이 그같은 비축의 문화를 형성시킨다면, 그 잦았던 전란과 흉년을
겪은 우리나라에서 보다 그 비축의 문화가 발달했을 것이다.
오히려 근원적으로는 미국인의 선조인 유럽 인이 그 전통문화의 일부로서 누려온
비축의 관습이 작용한 것일 게다.
고대 사학자요, 지리학자였던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란 책에 보면, 게르만의
생활 양식의 특징으로서 그들은 땅굴을 파고 식량을 그곳에 많이 비축해 덮어
둠으로써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한다고 적고 있다. 곧 식량의 지하실 저장은
이같은 전통적 생활 문화의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식품을
저장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고위도 지방인 중북유럽에 있어 1년이란 풍요한
여름과 결핍의 겨울로 양분된다. 곧 1년의 절반이 양식을 구할 수 없는 겨울이다.
북북 유럽에서 관광버스가 영업하고 있는 것은 겨우 4월에서 9월까지 6개월이요,
나머지 반년은 완전한 휴업 상태로 들어간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그 이치가
들어맞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중북구 지방에서는 뼈저리게 실감나는 우의성이
있는 것이다. 곧 그 지루한 겨울을 위해 비축을 하지 않으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죽는다.
이 중북구의 비축하는 문화가 미국 사회, 특히 고위도에 속하는 중서부의 혹심한
기후대 속에 이민과 더불어 도입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순리가 아닐 수 없다.
미국 개척시대의 역사를 뒤져 보면 비축의 문화 없이는 미국의 서부개척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겨울에 대비하여 땅 속 깊이
감자를 묻어둔 것이 관리 잘못으로 썩어버려 수백 명이 아사했던 이야기, 겨울날
사슴 한 마리를 잡아 그 고기를 땅속에 묻어 보존함으로써 아사를 면했다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 등 서부의 생활사는 어떻게 겨울을 살아내는가의 역사였으며, 이같은
게르만 민족의 비축의 문화가 있었음으로 해서 서부 개척이 가능했다고도 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도 겨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겨울의 길이와 질이 중복구의
그것과는 다르다. 나뭇잎이 지고 넉 달만 지나면 싹이 돋는다. 겨울에 대비하지
않으면 죽음에 직면하는 중북구처럼 그런 심각한 겨울이 아니기에 비축의 농도가
묽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선조 대대로 한마을에서 살아왔기에 한마을의 뉘집 뒤주 속에 들어 있는
양식의 분량까지 서로 알고 산다. '환난상휼'이라는 향약의 가르침이 말해 주듯이
서로 나누어 먹고, 또 언제든지 빌어먹을 수 있는 촌락사회 모랄이 확고하여
엄동설한에 양식이 떨어졌다 해서 걱정하거나 각박해진다는 법이 전혀 없었다.
해동하면 빌어먹은 양식을 품으로 갚을 수 있고 또 빌려준 것을 어떤 형태로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영주성 정착사회의 조건 때문에도 굳이 양식을 비축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독립된 개인의 이산이 자유자재로운 이동성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문화가 비축의 필요를 약화시켜 온 것이기도 했다.
곧 독립적인 개인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상호적인 집단성이 지배하는
사회이기에 가급적 생활필수품은 서로 나눠 쓰도록 하는 모랄이 발달하였으며 이
오랜 모랄의 전통이 나눠 쓰질 않고 적취하는 행위를 악덕시하기에까지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ff
10. 추종병
주체인 나를 일상 대화에서 증발시켜 버린 이유는 나의 의견이나 창의력이나
행동이나 책임을 주변상황에 전가시키고 주변상황 속에 자기 자신을 극소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인들이 별나게 자주 쓰는 말로 '별수 없다, 할 수 없다. 어차피,
차라리...'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말들은 자연이나 세상의 흐름에 내 스스로의 의지나 노력을 포기하거나
체념하고 되는 대로 내어 맡긴다는 말들이다. 곧 어떤 상태나 상황에 접했을 때
개인으로서의 어떤 작용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날이 가물면 내가 가물게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의 조화이기에 그것을
어떻게든지 극복하려 들기보다는 '할 수 없다.'고 체념해 버린 뒤 '어차피 하늘의
뜻대로, 세상 돌아갈 대로 되겠지.' 하며 그것에 거역하고 자신의 의지를 세워
노력하는 것을 포기한다. 의지나 노력보다 '차라리' 남들처럼 행하는 대로 동조하는
편을 택한다.
이렇듯 나의 의지와 나의 노력과 나의 창의력을 남이 하는 대로의 동조 속에
소멸시키려는 성향이 한국인의 의식구조 가운데 강렬한 하나의 자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구미사회에서는 '나'라는 개념이 나를 둘러싼 자연이나 세상이나 '남'들이라는
개념보다 한결 중요하고 또한 선행된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체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상 대화에서 몰아적인 한국인은 '나'란 주어를 잘 쓰지 않는다. 이에
비해 주아적인 구미 사람들은 반드시 주체인 나로부터 말이 시작된다. 나를 꼭
내세우는 뜻은 그 행동에 책임을 지는 중심인물이 나이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나는
그 모든 행동에 최종적인 책임을 지게 된다.
이렇게 우리 한국인이 주체인 나를 일상 대화에서 증발시켜 버린 이유는 나의
의견이나 창의력이나 행동이나 책임을 주변상황에 전가시키고 주변상황 속에 자기
자신을 극소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잘못된 것은 내 탓이 아니라 부모탓, 조상탓, 세상탓 심지어는
무덤탓으로까지 돌리고 있다. 내가 일을 잘못했어도 잘못하게 된 주변 여건에
핑계를 돌리고 내가 무엇인가를 파손했을 때도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 잘
부숴지게 만들어 놓았거나 부숴질 만한 위치에 놓여진 것 때문이라며 외부상황에
책임을 전가하려 든다.
이같은 한국인의 자아증발은 마치 폭풍 속에서 배를 타고 가는 상황과 비유될
수가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배가 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하자. 그 배에 탄
사람들은 그 상황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달리 말하면 이때의 책임은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는 배의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기에 이 상황 변화를
조절할 수 없는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 된다.
이것이 곧 한국인의 책임관이며 '별수 없다'는 사고방식의 원천인 것이다.
이같은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은 세상 살아가는데 뿐만 아니라 어느 한
기업의 부서에 속했을 때도 예외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한국인과
한국의 기업이 이 시점에서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미국 경영학에 '전파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제1종
인간부터 제4종 인간까지로 나누고 있다.
제1종 인간이란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변화를 즐기며 창의적인 유형의
인간이다. 새 상품이 나오면 일단 모험적으로 사고 보는 사람이요, 새 유행이 번지면
누구보다도 먼저 그 유행을 취하고 본다. 그들이 즐기는 말은 모험이요, 창조요,
도전이며, 개성인 것이다. 때문에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하려 하기에 위험이
적잖이 수반되는 그런 인간형이기도 하다.
제2종 인간도 변화나 창조를 좋아하지만 제1종 인간과는 달리 자신의 변화가
남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고 남들이 따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그런
변화와 창조를 추구하는 인간형이다. 새 상품이나 새 유행이 들어왔을 때 일단
취하고 보는 제1종 인간과는 달리 관심을 두고 관망, 이 새것을 많은 사람이 채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설 때 소신을 갖고 그 새것을 채용하는 사람이다. 많은 타인을
의식하는 창조적 인간이기에 이같은 인간층을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세일즈 사회에서는 이러한 제2종 인간층을 특히 중요시한다.
다음으로 제3종 인간은 변화나 새로운 것을 대체로 싫어하는 인간형이다.
그저 앞서 가거나 돋보이거나 빼어나질 않고 무난하게 나름대로 살아가려는
인간층이다. 새 상품 새 유행도 반수 이상이 취한 후에야 남들이 다 하니까 택하는
그런 추종자(fallower)인 것이다.
아이들의 재능이나 소질은 아랑곳없이 남의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니까 우리
아이도 피아노를 가르치고 아이들의 실력이나 소질과는 상관없이 많은 남의
아이들이 법과에 진학하니까 내 아이도 법과에 진학시키는 그런 유형으로 대체로
온건하고 착실하면 실패를 하지 않고 남들에게 신뢰받는, 그래서 사윗감으로서
안전하다는(?) 소리를 듣는 인간형이기도 하다.
끝으로 제4종 인간은 전통주의자로서 제1, 2, 3종 인간에 의해 시대에 뒤진
보수주의자라고 지탄받지만 오히려 1, 2, 3종 인간들을 가볍고 줏대 없고
채신없다고 얕보며 자신의 행동에 자부와 긍지를 갖고 있는 인간형이다.
새로운 상품이나 유행이 거의 시들어갈 무렵에 택하거나 끝내 택하지 않는 것이
제4종 인간의 생리인 것이다.
이 네 가지 인간형 가운데 제1종 제4종 인간은 각기 5퍼센트 미만으로
극소수이며 opinion leader인 제2종 인간이 20퍼센트 그리고 나머지 70퍼센트는
follower인 제3종 인간인 거이다. 물론 나라에 따라 이 인간형별 구성비는 달라져
미국 사람은 제1종 인간의 구성비가 더욱 커진다. 이에 비해 우리 한국인들은 제3종
인간의 구성비가 압도적으로 크다. 왜냐하면 한국인의 평균의식이 이 제3종 인간을
양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제3종 인간층의 우세 때문에 우리 한국의 산업구조도 이 제3종성을 못 면하고
있다. 곧 한국의 오늘날 산업은 온통 3종성뿐이다. 선두적이고 창의적인 기술
개발은 가급적 기피하고 일단 선진국이나 다른 회사가 1종성 내지 2종성의 시행
착오를 거친 기술 혹은 제도나 상품을 선택해 생산한다. 그러기에 노벨상에 빛나는
출중한 학자, 경영자, 창의력 있는 기술이나 경영 기법이 탄생하지 못한다.
요즈음 불어닥치고 있는 불황은 여러 각도에서 그 원인을 해석할 수 있겠지만
우리 산업구조가 아작도 3종성을 못 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언젠가는 닥치고 말
한계점에 우리 산업이 와 있다는 신호로서도 이 불황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불황을 극복하고 또 모든 기업이 발전하고 상향하려면 여태까지의 3종성 기업
경영에서 2종성 기업 경영으로 발돋움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하루가 다르게 국제화되는 지구촌에서 그 존재 가치를 누리고 살려면 제3종
인간성으로부터 제2종 인간성으로의 비약이 필요 불가결한 전제조건인 것이다. 이는
무책임한 인간으로부터 책임 인간으로, 추종적 인간으로부터 창조적 인간으로의
발돋움이어야 한다.
물론 셀러리맨의 모든 일에 제2종성인 창조성만을 필요로 한다고는 보진 않는다.
오히려 창조성 때문에 망치는 일의 분야도 있다. 이를테면 부기 같은 일에 창조성을
발휘하여 제멋대로 장부를 만들어 놓았다가는 큰일이다. 그러나 창조성이 꼭 필요한
기술 분야, 관리 분야, 영업 분야에까지도 우리 산업의 비대한 추종자층 때문에
그것이 용납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게 돼 있다. 곧 창조성은 현 기업의 체제와
대립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창조성이 좌절되지 않고
상달되도록 체제의 체질개선도 연구개발되어야 하겠지만 종업원 각자의 창조적
활동에 대한 고과에 보다 많은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또 종업원들도 자신의
의견이나 창의가 인정되지 않는다 하여 제3종 인간으로 복귀하거나 회사를 뛰쳐
나온다면 이것 역시 모두 비창조적인 행동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리능력이라 하면
자신의 부하관리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웃사람을 어떻게
컨트롤하여 잘 운용하는가의 관리능력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웃사람의 이해가
없다고 창조성을 굽힌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창조성이 결여돼 있는 증거인 것이다.
웃사람에게 자신을 정확히 이해시키고 생각하는 법을 고치고 직장의 분위기를
바꿔가며 자신의 창의력을 살려가는 것이 바로 자신의 창조성인 것이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 하더라도 궁지에 몰릴수록 이에 도전하며 상황을 바꿔가는 것이 곧
책임 인간이요, 제2종 인간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제2종 인간층을 확보하느냐에 따라서 기업성장의 관건이 달려
있으며, 얼마나 많이 제2종 인간성이 성하느냐에 따라서 개인의 성공여부가 달려
있는 것이다.
@ff
11. 동조병
술집에 갔을 때 상석에 앉는 사람이 웃옷을 벗으면 좌중이 모두 따라 벗는다.
상석의 사람이 벗지 않는데 벗는다는 것은 이 동시 동조성의 한국적 생리에
배반되어 결례나 무례감이 수반된다.
한국인의 평균의식은 일상 생활 속에서 동시동조성 행위로 곧잘 나타나기도 한다.
곧 남들과 동조함으로서 평균에서 모나지 않으려 한다.
외국의 식당에 들를 때마다 항상 불안한 느낌을 못 면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못 면하고 말 것이다. 그 불안감은 반드시 메뉴의
내용을 잘 몰라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구미에 맞거나 개성을 내세워 음식을 먹을 수
없게끔 되어 버린 우리 농촌사회에서 심신이 굳어 버린 전통적 자질이 그렇지 않은
자질의 문화와 부딪쳐 생긴 하나의 문화충격 때문인 것이다. 곧 외국 식당에
들른다는 것에 '문화노이로제'가 돼 있다 할 것이다.
보스턴의 하버드대학에 들른 것은 첫눈이 푸짐하게 내리던 날이었다. 그곳 교수
식당인 패컬티 룸에서 한국사 교수의 점심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이 미국인 교수는 메뉴를 들더니 하버드대학에서만 먹을 수 있는 진미라고 자랑을
하면서 말고기 스테이크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물론 메뉴에는 쇠고기도, 닭고기도,
돼지고기도 있었지만 나는 충동적으로 그 교수가 선택한 말고기를 따라 선택했던
것이다. 이전에 말고기를 먹어 본 일도 없고 먹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품고 있는 듯한 혐오감보다 한번 먹어 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한결 웃돌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도 나는 초대자가 선택한 말고기를 선택하고서
먹는 도중이나 먹고 난 후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 미국인 초대자가 말고기 요리를 먹도록 권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말고기가 언짢으며 먹지 말도록 권했는데도 나는 나의 본심을 배신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과 동조해야 한다는 이 동시 동조성(Simultaneous Action) 행위가 필자에게
유별나게 강한지는 몰라도 구미인과 비겨서 한국인에게 보편화돼 있는 하나의
개연성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다. 비단 구미의 낯선 식당이 아닌 한국의
식당에서도 이 개연성은 예외가 아니다. 웃사람이나 어려운 사람들과 어느 식당에
가서 메뉴를 선택한다 하자. 아마 웃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에 앞서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선택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같은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결례요,
무례가 되며 버릇없다는 마이너스 이미지로 보상받게 마련이다. 상대방에게 먼저
메뉴를 선택하게끔 양보를 하고 상대방이 어떤 메뉴를 선택하면 웬만큼 개성이 강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 상대방이 택한 메뉴에 동조, '나도...' 하는 것이 상식이 돼
있다. 곧 자신의 구미를 무시하고 동조성 행위를 한다.
서양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 개성이나 구미에 맞게 세분해서 가려 먹는 그
개별성은 이 동조성의 문화를 지닌 우리를 아연실색케 하고 따라서 문화노이로제에
걸리기에 십상이다. 주스 선택도 오렌지냐, 레몬이냐, 토마토냐..., 수프도 너댓 가
지,
야채에 쳐 먹는 드레싱도 너댓 가지 가운데서 선택해야 한다. 고기도 바싹 굽고
피가 익지 않도록 굽고 중간으로 굽고 하는 기호 표시를 해야 하고 커피도
아메리칸이냐, 프렌치냐, 터키냐, 선택하면 설탕은 넣느냐 안 넣느냐, 넣으면 각설탕
하나냐 둘이냐..., 끝없는 선택이 강요된다.
한국에서는 술집에 가도 누군가 상석에 앉는 사람이 웃옷을 벗으면 좌중이 모두
따라 벗는다. 상석의 사람이 벗지 않는데 벗는다는 것은 이 동시 동조성의 한국적
생리에 배반되어 결례나 무례감이 수반된다.
벗고 싶은 사람도 있고 벗기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며 감기 기운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주머니 속에 거금이 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같은 개별성이 무시되고
동시 동조해서 벗도록 강요를 받거나 또 벗지 말도록 암시적인 압력을 받기도 한다.
미국의 유치원이나 각급 학교에서 아이가 감기가 들면 여름에도 스웨터를 입혀
보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감기 기운이 있다 해도 제복 이외에는 안 된다. 짧은
바지나 감색 이외의 바지는 안 된다. 동조성에 위배되는 일은 안 되기에 학교를
쉬게 할 수밖에 없으며 굳이 보낸다면 감기에 걸렸다는 개별성이 보호받질 못하고
동조의 형식과 논리를 준수해야 한다.
수업에도 이 동조성의 논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선생님이 '알았습니까'고
물으면 교실 안의 모든 어린이는 모르는 아이들까지도 '알았습니다'고 동시에
동조하며 대답하는 것이 선생님에 대한 도리요, 도 선생님도 그 동시 동조성을
예상하고 그렇게 묻는다. 미국 아이들처럼 모르면 끝까지 모른다고 버틴다는 것은
개별성의 논리이기에 착한 아이가 못 된다.
우리나라 음악에 같은 음정, 같은 음계, 같은 음색, 같은 선율로 부르는 제창은
있어도 다른 음정, 음계, 음색, 선율로 화음을 내는 합창이 발달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동시 동조성의 논리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각기 다른 악기가 동시 동조하는 합주는 있어도 화음이 생명인 교향악이 발달되지
않은 것도 음악의 발달이나 후진과 관계없이 이같은 동시 동조성의 논리에 보다
원천적인 이유가 있지 않나 싶다.
따지고 보면 산많고 물많은 우리 한반도는 도처가 관광지일 수 있다. 곧
산수면에서 한국의 관광지는 광역화돼 있는데도 우리 한국인은 유수한 몇몇
관광지에 집중한다. 광역 관광자원을 협역화하는 이 집중현상도 '남들이 가니까
나도' 하는 동조성이 원흉이랄 것이다. 동해안 도처가 한적한 해수욕장 투성인데
굴지의 해수욕장만이 시장처럼 들끓는다.
또한 겨울에 눈덮인 설악산이나 삼복이 지나 쇠별꽃 만발하는 지리산 능선은 다른
철에 못 느끼는 자연감과 낭만을 지니고 있다.
한데 우리 한국인은 삼복철이니 단풍철이니 어느 제한된 시한에만 동시적으로
집중한다.
각 기업체에서 겨울휴가니 춘추휴가는 별반 인기가 없고 여름휴가만을 선택하는
이 집중성도 동시 동조성의 시간논리 때문인 것이다.
각종회의에서도 개별적이고 반대하는 의사를 존중한다기보다 그 개별적이고
반대하는 의사를 동조화시키는데 시간을 낭비한다. 곧 반대의사를 변질시키는
과정이 곧 회의요, 만장일치이어야만이 선으로 여긴다. 투쟁이나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에서 반대의사는 약이 되기에 아무리 그 반대의사가 합리적이고 발전적이라
해도 지탄받고 경우에 따라 폭력으로 제재받기까지 한다. 그러기에 반대의사는 항상
침묵 속에 사장되고 만다.
유태교의 사교 회의에서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전원일치가 되는 안건은 무효가
된다는 회의 원칙이 있다 한다. 곧 반대의사가 없이는 핵심으로의 진실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개별성을 존중하는 세계의 필연인 것이다. 미국 아이들은 서로 낯선
아이들끼리 손쉽게 캐치볼하여 놀 수 있고 그것이 상식이다. 볼만 들고 집을 나가면
또래끼리면 누구나 친구가 된다. 각기 다른 음정과 선율이 화음이 되듯 또
반대의견이 반영되어 전체 의사가 이뤄지듯 개별성이 곧잘 화를 이룬다. 한데
한국의 아이들은 항상 놀던 아이가 아닌 낯선 아이는 캐치볼에 넣어 주질 않는다.
개별성은 배척받고 동조성만이 가치를 이루는 논리는 이같은 어린이들 사회에서도
기승을 부린다.
개별성의 논리는 '미이즘(meism)'을, 동조성의 논리는 '위이즘(weism)'을
탄생시킨다. 위이즘에 있어 미이즘은 배척받고 억압받는다. 모든 것이 자급
자족되는 하나의 완전 사회였던 우리 전통적 농경공동체 사회에 있어 위이즘에
어긋나는 미이즘은 배척받고 소외받는 비가치였다. 동조성의 평균인간보다 잘나도
또 못나도 그 사회에서는 소외당했던 것이다. 유별나게 머리가 좋거나 기발한
발상이나 행동을 하거나 색다른 차림새를 해도 소외당한다. 내의 없이 한복만을
입는 것이 평균인간의 옷차림이었던 예닐곱 살 때의 필자는 메리야스 내복을 속에
입었다는 것만으로 그 또래의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했던 괴로운 기억이 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버지가 서울에 다녀오면서 선물로 사온 노란 스웨터를 한사코 입지
않고 버티었던 기억도 선하다. 겉에서 보이지 않는 내복의 비동조성에만도 따돌림을
당한 판인데 하물며 스웨터임에랴. 한국인의 도시성, 동조성은 한국인이
단일민족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이 역시 어느 시한 안에 어느 농사일을 반드시
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비한계 벼농사구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곧 모를 심는 적기간 안에 모를 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시한성은 동시성을
요구하고 또 혼자만으로써 그 시한성의 일이 불가능하기에 한마을 사람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는 데서 동조성이 요구된다. 곧 혼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은
개별성 곧 미이즘을 불안케 하고 공동체로서만이 가능한 농사구조가 동조성 곧
위이즘을 조장케 한 것이다. 미이즘은 농사를 망치고 따라서 굶게 한다. 북한계의
도작 공동체사회에서의 생존조건은 위이즘이다. 또한 한 수원에서 많은 논에 물을
끌어대야만 한다는 이 수도작의 조건이 동일 시기에 공동의 물을 끌어 공동으로
평균해 나눠 갖는 동시성, 동조성의 논리를 체질화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이 동시성,
동조성이 가치화되고 가치관이 됐으며 한국인의 가장 한국인다운 한 자질을
이뤘다고 본다.
@ff
12. 험담병
다만 이 남의 험담은 그 현장에서 끝나야만 하는 그런 일시성 임장성이어야만
한다는데, 한국적인 험담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미국의 술집에 들어가면 이따금씩 풍선 터뜨리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다.
젊은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이려니 하면 그것이 아니다. 40__50대로 돼 보이는
장년이 더욱이 여러 명이 어울려 흥에 겨워서가 아니라 심각하게 혼자 앉아서
술잔을 앞에 놓고 풍선을 쥐어짜며 터뜨리고 있는 광경을 이따금 볼 수가 있다.
중국 사람들이 폭죽을 터뜨리듯이 축제 무드를 돋우기 위해 풍선을 터뜨리는 것도
분명히 아니다.
샌프란시스코 교외 캘리포니아 포도주 주산지의 한 조그만한 술집에는 카운터에서
풍선을 팔고 있었다. 그 풍선의 표면에는 험상궂은 마귀 할미의 얼굴이며 대머리
얼굴 등 다양한 얼굴들이 그려져 있었다. 풍선을 터뜨리고 싶은 사람은 그 어느
것을 선택해 사들고 와서 술을 마시면서 짓이겨 터뜨린다.
자기 아내 때문에 화가 치밀고 스트레스가 생긴 사나이면 마귀 할멈의 풍선을
선택할 것이요, 또 자기 직장의 상사 때문에 부푼 화를 풀지 못한 사나이는 대머리
풍선을 선택할 것이다.
제각기 자신의 속에 치민 화나 긴장이나 스트레스를 그것을 있게 한 사람의
얼굴을 그린 풍선을 터뜨림으로써 푼다. 곧 풍선에 어느 한 인간을 동일화시켜 직접
화풀이 할 수 없는 사연을 간접으로 푼다. 어떤 술집에는 천장 아래에 권투 연습용
펀치볼이 매달려 있기에 권투 선수들이 많이 드나드는 술집인가 보다고 말했다가
웃음을 산 일도 있다. 그 펀치볼도 스트레스의 간접 해소용인 것이다. 맞대놓고
해댈 수 없는 울화를 펀치볼을 마냥 침으로 푼다. 증오하는 상대자의 머리통으로
동일시되는 이 펀치볼이기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증오받는 처지를 빗대어 '술집의
펀치볼'이란 속담까지 있다 한다.
혼자서 볼링장에 갔다 하면 무슨 화나는 일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그런 풍조도
미국에 있다고 들었다. 핀을 와르르 쓰러뜨리는 그 볼링의 유희구조가 스트레스
해소에 십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미국에 볼링이 성행하는 심층 이유 가운데
하나로써 이 미국 사람들의 울화 해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진행 중인 영국에서 이색적인 흥행이 성업을 이루었다 한다.
글라스 볼 등 유리 제품을 몽둥이로 두들겨 깨는 이 유희는 대체로 유리 공장에
부설되었거나 유리 공장이 가까운 곳에서 개업하게 마련이었다 한다. 입으로 불어
부풀게 했던 당시 수공업적인 유리 제품에는 실패작이 많이 나왔으며 이 실패작을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돌려 돈을 벌고 깨뜨려진 유리 조각을 다시 녹여쓰는
일거양득의 상술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글라스 볼을 깨뜨리는 편이 파열음도 크고
파괴 박력도 강하며 따라서 울화 해소 효력도 더 컸을 것이다.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맥락, 다난해진 사회에 있어서 정말 화나는 대로 처리할 수
없는 인간관계나 인간갈등이 적잖이 생겨난다. 그같은 관계나 갈등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또 서양이나 동양이나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그 관계나 갈등에서 형성된
울화나 스트레스의 긴장을 푸는 그 방법이 서로 다르다. 곧 문화권이나 민족, 나라에
따라 인간관계에서 형성된 갈등 해소의 수법이 달라진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부부싸움을 할 때 파열음이 크고 파괴 박력이 강한 사기그릇 등 살림을 깨는 일이
종종 있고 술집에서 술상을 뒤집거나 유리컵을 던져 깨는 행위를 이따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행위는 우발성이나 관습성일 뿐 미국의 그런 것들처럼
보편성을 지닌다는 법이 없다. 어디까지나 어떤 특수한 개인 사정이지 미국에서
풍선을 팔고 펀치볼을 매어두는 그런 보편적인 사항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에게는 보편성을 지닌 인간 갈등의 자체 해소방법은 무엇일까.
어떤 문화권에 살든 그 갈등 때문에 형성된 정신적 긴장을 끌어가며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나라 나름의 그 해소방법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갈등을 있게 한 상대 인간이 없을 때 그 사람을 헐뜯어 말할 수 있는
험담이 아닌가 싶다. 험담을 실컷 하고 나면 화도 다소 풀리고 긴장도 느긋해진다.
남이 없는 자리에서 남을 헐뜯어서 말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좋지
않다. 남을 헐뜯어서 말한다는 것은 좋지 않지만 남을 헐뜯어서 말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한국인과 외국인을 비교 이해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본다.
한국인의 한국인다운 특징으로써 둘만 모이면 남의 이야기를 곧잘 한다는 것을 들
수가 있다. 사실 많은 대화 가운데 가장 즐겁고 진지한 것이 남의 이야기다.
부녀자들이 모였을 때 정치나 경제 이야기가 진진하고 즐거운지, 서로가 아는
남의 이야기가 진진하고 즐거운지 자문해 보면 자명해 진다. 세상 이야기할 때의
표정과 남의 이야기할 때와는 얼굴의 표정이나 생기가 전혀 달라지게 마련인
것이다.
부녀자뿐만이 아니다. 남자들도 예외가 술을 무척 즐겼던 조선왕조 중엽의 정승
상진이란 분은 여러 가지 술안주가 많지만 남의 험담처럼 맛있고 좋은 안주가
없다고 시에 읊고 있다.
술친구끼리 술마시러 가면서 오늘 술안주는 ooo부장으로 하자고 말하기도 한다.
곧 그 부장을 씹는 것으로 안주를 삼겠다는 이 말을 어떤 미국인이 정면으로
받아들인다면 아마 한국인은 식인종이 아닌가 하고 도망쳐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험담을 함으로써 험담 대상의 그 인간과의 사이에서 형성된 긴장과 울화를
풀기에 굳이 풍선을 터뜨리지 않아도 된다. 따지고 보면 아주 다정하고 맘이 놓이는
친한 사이란 남의 험담을 두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사이라 정의를 내려도 대과가
없을 줄 안다. 험담은 해도 그것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고 또 그 험담에 고개를
끄덕여 주어 공감동조하며 보다 에스컬레이트시켜 주는 그런 사이일수록
다정해진다. 곧 누군가가 험담을 신나게 하면 곁에서 그럼 그렇지 그것말고도 이런
일도 있었다면서 보다 농후한 험담으로 에스컬레이트시켜 주는 그런 사이가 다정한
것이지 신나게 험담을 하고 있는데 '남 없는 데서 남 이야기하는 것은 나쁘다'고
제동을 걸면 전혀 즐겁지도 않으려니와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생기고 친한 관계가
아니게 된다.
다만 이 남의 험담은 그 현장에서 끝나야만 하는 그런 일시성 임장성이어야만
한다는데 한국적인 험담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이 험담이 밖으로
누설되거나 본인에게 들어가도록 이른다는 것은 친한 사이에서 당장에 소외하고
악인으로 비판을 받는다. 곧 험담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험담을 누설시킨
것이 한국에서는 나쁜 것이다.
험담은 미국인의 사고방식과 한국의 그것과는 정반대다. 미국의 어린이 교육에
있어 남 없는 데서 남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악덕시한다. 웃사람이든
선생이든 친구든간에 정정당당하게 정면에서 반성을 추구해야지 이면에서
시시비비하는 것은 악 가운데 최고의 악이 된다. 누군가가 그자는 인색하다고 남의
이야기를 하면 비록 인색하다는 것에 공감하는 일이 있더라도 본인 없는 자리에서
헐뜯는 건 도덕적이 아니라고 정면에서 공감요구를 거절당한다. 그러기에 남
이야기를 해도 재미가 없다. 뿐만 아니라 남의 험담을 하는 것은 악이기에 이를
공악으로 추방하는 뜻에서 그 험담의 당사자에게 '그 사람이 너에 대해 이렇게
험담을 했으니 주의하라'고 충고를 한다. 한국에서는 이같은 행위가 밀고로 악덕시
되지만 미국에서는 통고로서 미덕시 된다.
구미의 근대화를 구축해 온 프로테스탄티즘, 특히 영국인과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사로잡아온 퓨리터니즘의 억센 윤리관은 험담을 용납치 않았던 것이다. 험담의
도덕적 가치 차원을 벗어나서 생각하면 인간관계의 갈등에 형성된 울화를 험담으로
풀 수 있다는 것은 편리한 방편일 수도 있다. 크고 작은 욕구불만이 이 험담에 의해
해소된다는 것은 바로 한국 사람에게 정신 질환이나 정신이상, 노이로제 발생률이
다른 구미 사람들에 비해 낮은 이유 가운데 하나로서 이러한 험담할 수 있는
함수관계의 문화적 특성을 들 수 있을지 모른다.
곧 인간의 결함이나 약점 측면에서 연결되어 서로가 용서하는 그런 인간 관계가
한국적 인간관계의 특성이랄 수도 있다.
어느 좌중에서 험담이 에스컬레이트되어 나가다가도 어느 한계에 이르면 그
상승은 그만두고 인간 신뢰로 U자 회전을 하는 것이 또 한국적인 험담의 인간적인
측면이기도 하다. 험담이 너무 심했다고 서로 공감을 하면 그 사람에게도 이런 좋은
점은 있다느니, 그런 환경이나 여건에서 누군들 그렇게 되지 않겠느냐느니
인간적으로 이해해 주려는데 또다른 에스컬레이트를 한다.
이같은 인간성에로의 회귀 끝에 험담이 멎는 경우도 없지 않다.
마귀할멈이나 대머리 영감의 얼굴을 그린 풍선을 터뜨리며 몸부림치며 술을
마시면서 남의 욕을 하는 이유가 겨우 맞지 않은 일기예보 때문이라는 미국
사람들이기에 도덕적으로는 바람직할지라도 인간적으로는 딱한 면도 없지가 않다.
@ff
13. 성차별병
석화로 불리는 굴은 달팽이처럼 암수 양성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데 영양이
나쁘면 수컷이 되고 영양이 좋으면 암컷이 된다.
아이들의 지각은 무엇이 무엇에게 이기느냐 지느냐의 대결로부터 싹튼다고 한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부모들은 어느 시기의 아들 딸로부터 귀찮을 정도로 이 대결
질문을 받게 마련이다. 호랑이가 이기느냐 사자가 이기느냐, 미국이 이기느냐 소련이
이기느냐, 황금박쥐가 이기느냐 우주 아톰이 이기느냐, 6백만 달러의 사나이가
이기느냐 두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가 이기느냐.... 이런 정도의 질문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대꾸하기 난처한 짝을 지어 묻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언젠가 잡지에 난 슈퍼 스타 박신자 씨의 사진을 보고 있던 아들놈이, "박신자가
이겨, 아빠가 이겨?" 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냉큼 대답하기 난처하여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놈은 헤헤하며 약간 조소 섞인 음조로, "박신자가 이기지?" 하고 제
선입감대로 판결을 해버린다.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부친부재시대인데다
배만 불쑥 튀어나온 별볼일 없는 몰골이라 콩알만큼 작아져 있는 아빠 이미지, 원래
키도 큰 데다가 슈퍼 스타라는 인기로 한결 크게 부풀어져 있는 박신자 이미지와의
대결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 것이다.
나는 이 설욕을 위해 언제고 박신자 씨를 한강 백사장에 불러내어 아들놈이 보는
앞에서 정식으로 결투를 청구할까 한다.
은행은 암나무가 강하고
남과 여의 대결에서 몸집이 크다든지 힘이 세다든지 하는 양적, 물리적, 역학적,
측면에서는 남자가 우세하지만 질적으로나 정신적, 심정적으로는 여성이 우세하다고
본다. 그래서 실은 오랜 남성 상위의 인류사 때문에 빛을 못 보고 있는 이 여성의
질적인 우성을 가려보기 위해 첫 라운드에서 박신자 씨에게 지고 들어간 것이다.
식물에 있어 자성의 질적인 우성을 살펴보자. 인류가 찬미해온 플라토닉 러브란
말에 해당되는 우리 고유의 표현으로 '은행나무 사랑'이란 게 있다. 은행나무에는
수나무와 암나무가 있어, 서로 멀리 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열매를 맺기 때문에
생긴 말일 것이다.
은행의 수나무와 암나무를 가리기란 웬만큼 자랄 때까지는 분간하기가 힘들다
한다. 한데 옛 어른들의 말을 들어 보면 꽃이 필 무렵, 곧 사춘기에 들면 수나무는
암나무보다 키가 더 크는 반면에 암나무는 밑동이 살이 찐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식별하는 방법으로는 사춘기의 은행나무 가지를 꺾어 0.05퍼센트로 희석한 염소산
칼리액에 꽂아두면 한결 빨리 시드는 것이 수나무요, 끈질기게 오래 버티는 것이
암나무라 한다. 양적으로 키만 컸을 뿐 질적인 생명력은 별볼일 없다. 암나무의
어떤 요인이 그렇게 강인하게 버티게 하는지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바로 이것이
암컷을 질적으로 우세하게 하는 우성 인자랄 수가 있겠다. 이를 편의상 '여인소'라고
부르기로 하자.
수컷 망신시킨 세 동물
동물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지중해 연안의 속담에 '수컷 망신은 사자와 아귀와
그리고 굴이 시킨다.'는 것이 있다. 석화로 불리는 굴은 달팽이처럼 암수 양성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데 영양이 나쁘면 수컷이 되고 영양이 좋으면 암컷이 된다. 수온이
낮아져 먹이가 변변찮은 가을 굴은 수컷이 많아 질이 나쁘고 수온이 높아지는
봄굴은 암컷이라 질이 좋아진다고 한다. 곧 수컷은 열성이요, 암컷은 우성이다.
은행의 암나무에 내포되는 듯한 신비의 우성 인자가 굴의 암컷에도 어떻게든지
작용하고 있음을 알겠다.
남성 망신의 2번 타자는 바다 메기로 불리는 아귀란 놈이다. 심해에 사는 입이
별나게 크고 넓은 바다 고기로 암컷에는 알이 없고 오히려 수컷이 아랫배에
알주머니를 무겁게 늘어뜨리고 다니는 대단한 공처가인 것이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이 알주머니에 그 알을 받아 부화시키는데, 이것은 마치 미국 남자들이 아기를
안고 부인의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모습과 다를 것이 없는 몰골이다.
3번 타자인 수사자는 몰골만 요란스러울 뿐 암컷에 얹혀 사는 형편없는
무위도식자다. 사자 가족의 먹이는 주로 암컷이 잡아 새끼들로부터 먼저 먹인다.
배고픈 수컷이 다가오면 암컷이 일갈해서 기둥서방 몰아내듯 쫓아 버린다. 새끼들이
다 먹고 나면, 지켜보고 있다가 암놈 눈치를 힐끗힐끗 봐가며 그 찌꺼기를 먹는다.
용맹한 인상을 주는 수사자의 목털은 공갈용이 아니라 교미를 할 때 암놈의 바이팅,
곧 목을 물지 못하도록 하는 보신용이라고 동물학자 데스먼도 모리스는 밝히고
있다. 암컷의 우성 인자에는 백수의 왕도 못 당한다는 입증이다.
인내력 여자가 15시간 더 길고
사람에게 있어 이 여성의 우성 인자, 곧 여인소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외계 현상으로부터 감각을 완전 차단시켰을 때 얼마나 오랫동안 참아내느냐의
남녀별 감각 차단 내력 실험을 하면,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 15시간을 더 버틴다
한다.
온 세계의 여성사를 살펴볼 때 인간의 감각적 욕구와 본능적 욕구 및 사회적인
욕구를 가장 완벽하게 차단받고 살아온 것이 조선시대의 한국 여성이었다. 그래서
한국 여성사는 목석화의 역사라 해도 대과가 없다. 모랄에 의해 철저하게 차단받은
그 무중력공간에 한국 남성들을 그 오랜 역사 동안 넣어두었다면 아마 사망률이
배가했거나 미친 사람이 배가했을 것이 분명하다. 한국 여성의 여인소랄 이
상황이나 환경에의 내성이 목석화의 역사에 단련받아 유전질로 체질화, 아마 그
내성도를 비교 측정한다면 세계 최고로 질긴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네덜란드 학술원 회원인 보이텐디크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이미 태어나기 이전의
태중 사망률이 여자보다 남자가 무려 25퍼센트나 높다 한다. 그렇게 죽고도 남녀
출생률은 105대 100으로 남자가 많은 것을 보면, 남자가 양만 많고 질이 낮다는
단적인 증거가 되겠다. 태어날 때 죽는 율은 남아가 여아보다 54퍼센트나 많고 도
유아기의 사망률은 남아가 27퍼센트나 높다.
지난번 경제기획원이 면밀하게 조사 작성한 한국인의 생명표를 보면 모든
연령층에서 사망률이 남자가 높으며, 특히 40대 이후부터 갑절이나 남자가 많이
죽고 있다. 태중에서의 골격 형성이 여자가 남자보다 한 달이 빠르다는 것부터
어딘가 우성 인자가 작용하고 있음은 부인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한국인의 평균 수명도 여자가 69.1세로 남자의 62.7세보다 무려 6.4세를
더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를
하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를 하게 되는 것은
남녀 수명의 6.4년이란 차이가 5년__5년 반 벌어진 여려 선진국과 비겨 보다 많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한국 여성의 우성 인자가 딴 나라에 비해 보다 양질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벌어진 나라가 미국의 7.6년인데
미국은 잡동사니 민족이기에 민족 인자로서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미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 태평양 연안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 많이 벌어지고
있고 그 중에서 한국은 최고인 것이다.
구박으로 억압된 우성
이 수명 차이는 남녀 결혼 적령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세조실록 13년 3월조에
보면 종친의 결혼에 있어 남녀의 나이가 6년 이상이나 또 그 이하로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불문률을 적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 남녀의 수명 차이와 꼭 들어맞는
연한이다. 곧 누가 먼저 죽고 늦게 죽고 함으로써 생기는 홀아비, 홀어미의 불행을
극소화시키는 그런 동년해로를 우리 선조들은 체험적으로 터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웨스터마크의 "인류혼인사"에 보면 유럽 여러 나라들의 남녀 결혼 연령 차이는
프랑스가 4, 3년으로 제일 많이 벌어지고 있고 나머지는 2, 3년 차이다.
한국 여성의 별나게 양질인 여인소 때문인지 옛날부터 여자 인구 과잉은 종종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모든 사리를 음양오행설에 합리화시키지 않고는 성이 풀리질 않았던 우리
조상들의 합리주의는 이 여다 남소를 여러 모로 합리화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역의
뿌리라는 하도에 천수(양)는 25이고 지수(음)는 26이기에 양수보다 음수가 많아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다는 것이다--"급가주서 직방해". 고려 때의 재상 박유라는
분은 우리 고려 땅은 동방에 속하고 동방은 오행으로 '목'에 속하며, 목을 수로
따지면 3이 성수고 8이 실수가 된다(삼팔동방목) 하고 3이라는 홀수(양, 남)보다
8이라는 짝수(음, 여)가 많으니, 우리 한국에 여자가 많다고 궁색하게 합리화하고
있다--"고려사".
박유의 이 여다 합리론이 이것으로 그쳤으면 다행인데, 이 양반 대단한 배짱을
지녔던지 이 이론을 근거로 하여 일부이처다첩주의를 공식으로 제도화 할 것을
상소했고 이에 성난 여염의 여인들은 박유의 가마를 보면 몰려들어 '저 늙은 거지'라
욕을 퍼부었는가 하면, 그 문제의 결정권을 가진 재상 부인들은 동침 거부로 저항을
했던 것이다. 희랍에서도 소설 속에서나 있었던 섹스 스트라이크를 고려 때 한국
여인은 실제로 실천했으니 대단한 우먼 파워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세상에서 뛰어난 한국 여성의 우성 인자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여성을
제도적으로 구박함으로써 남녀간의 질적인 균형을 잡으려 했다는 역설적이고
반동적인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배비장전"의 정랑, "가루지기 타령"의 옹녀, "옥단춘전"의 옥단춘, "옥낭자전"의
옥낭자, "김씨열행록"의 김씨, "신유복전"의 일일이, "이진사전"의 경패,
"정수경전"의 소저 등 우리 고소설의 여주인공들은 놀랄 만하게 활달하고
능동적이고 실존적으로 나타나, 남주인공을 납작하게 만들고 있다. 이같은 여성
우위의 소설이 이토록 많이 쓰여지고 널리 읽혀졌다는 것은 그것을 수용하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제도적으로 숨 못 쉬게 억압 받은 여인소가
소설 속에 투영되어 근근히 명백을 이어왔다고 볼 수가 있겠다.
농구며 배구며 탁구 등 한국의 여성팀은 세계 제패를 하는데, 같은 종목의
남성팀은 상위권에도 못 들었다는 것도 바로 이 여인소의 단적인 나타남이 아닌가
싶다. 모든 분야에서 정상이 가능한 그런 개연성을 지닌 한국 여인소가 스포츠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ff
14. 서열병
우리 한국 사람에게 이토록 강한 서열의식이 체질화된 데는 우리 한국인이
고대부터 영위해 내린 생업이 강한 정착성을 요구했던 데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가 있다.
사물사리의 서열파악
한국인은 모든 사물이나 사리를 서열적으로 파악해야만이 사고나 행동이 안정되는
성향이 있다. 서열의식이 비교적 강한 편이다.
평등한 남남끼리 만나더라도 한국 사람이 가장 먼저 상대방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은 신분과 나이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와 동시에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알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나의 신분과 그 사람의 신분과를 서열적으로 파악해야만이
'관계'가 안정되기 때문이다. 동창이면 선배인가 후배인가, 종씨이면 항렬이 위인가
아래인가를 알지 않고는 관계가 안정되질 않고 불안하다.
서열을 잡을 기준이 잡히질 않으면 대뜸 형님뻘인지 아버지뻘이니 하여 '뻘'이라는
매체를 이용, 의사 혈연관계로라도 서열을 잡고 본다.
초면에 만나면 별나게 명함 주고받기를 좋아하는 것도 명함에 기재된 상대방의
신문이나 직위를 알므로서 자신의 그것들과의 서열을 설정하기 위한 서열의식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양자 결연에 있어서도 한국인의 서열의식은 대단하다. 한국인에게 가계를
상속시킬 사자가 없으면 같은 형제의 아들 가운데 누군가로 양자를 삼거나
차선적으로 보다 가까운 혈연의 누군가를 선택하겠지만 항렬의 서열인
세대원리(generationalprinciple)를 파괴한다는 법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곧
나보다 하서열인 조카뻘이어야만이 양자로서 조건을 갖춘다는 엄연한 서열의식이
제도화되고 있다. 같은 동양 문화권에 속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일본에서는 나이 차이가 많은 아무라도 양자를 삼는다. 항렬을 무시한 이같은
양자는 서열의식이 강한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친족체계의 기초원리의 침해요,
도덕적으로 용서 못할 패륜행위가 된다.
또한 일본에서는 아버지 형제간의 미망인과의 결혼도 자연스럽게 자행하는데,
항렬을 거역하는 이같은 결혼은 한국인에게 있어 근친상간이 된다.
곧 서열의식의 농도가 이같은 양자제도나 결혼제도에도 여실히 투영됐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초기 신교 선교사 가운데 한 분인 언더우드 1세는 후배 선교사들에게
한국인을 접하는 예의를 가르치면서 다음과 같은 공간 서열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한다.
한국인이 거처하는 방에는 부분마다 서열이 정해져 있으며 선교를 할 때 그
최하위의 자리에 앉아야만 선교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잘못 최상석에
앉으면 선교하나마나다 라고....
그럼 한국인의 방에는 1등석, 2등석, 3등석 하고 푯말이 붙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 푯말도 없는 평등한 공간이기에 고층이 있다면서 상석 말석을 판단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부엌이 붙은 쪽, 곧 아랫목이 최상석이나 부엌을 확인하고자 부인의 독점 공간인
부엌을 기웃거렸다가는 내외가 심한 한국 사람에게는 예비 파렴치범으로 오인되어
몽둥이질을 당하게 될 것이므로 부엌 찾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하고 '방에
들어가 먼저 벽을 둘러보면 모자가 걸려 있는 벽면이 있는데, 그 벽면의 가장 복판
직하가 상석이요, 그 상석의 반대편이 말석이다.'라고 가르쳤다 한다.
방이라는 같은 공간도 부위에 따라 서열적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국인의
강한 서열의식인 것이다.
같은 피가 통하고 신경이 통한 인체도 부위에 따라 서열적으로 파악했다.
이를테면 목 윗부분을 배꼽 아랫부분보다 몇 곱절 서열이 높았고, 또 오른손은
왼손보다 몇 곱절 서열이 높았다. 그러했기로 옛날 양반들 서열 높은 머리나 얼굴
부분에 손댈 필요가 있을 때, 이를테면 갓을 쓴다든지, 머리를 긁적거린다든지
콧등을 매만진다 할 때 반드시 서열 높은 오른손으로만 작업했던 것이다. 만약
초면에 만난 어떤 사람이 왼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었거나 갓을 바로 쓰거나 했으면
당장에 상놈으로 판단케 하는 관습적인 고식적인 기준이 돼 있기까지 했다. 깐깐한
양반이나 고식적인 선비 가운데는 얼굴 씻는 데까지 왼손을 쓰지 않는 분도 있었다
한다.
한국인의 왼손은 역사적으로 무척 학대받아 온 피압박 신체부위였던 것이다.
이제 서열이 낮은 하체부위에 작업할 필요가 있을 때는 서열 낮은 왼손
담당이었다.
옛날 양반들이 발을 씻을 때는 왼손으로 씻었고 소변 볼 때도 반드시 왼손으로
보았다. 양반 집안에서는 오줌가리기 시작할 때부터 어머니가 왼손으로 보도록
버릇을 들였던 것이다.
돈이나 재산문서를 천대했던 양반들은 아예 위임장을 써주어 종에게 거래행위를
대행시키거나 부득이 자신이 돈이나 재산문서를 거래할 때는 왼손으로 주고받았던
것이다.
오늘에 사는 한국인에게 오른손 왼손을 차별하느냐 여부를 묻는다면 아마도
노장층을 제외하고는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층에서의
무차별이요, 무의식층에는 차별할 수 있는 어떤 외부의 자극만 받으면 차별을 하게
할 소인이 잠재돼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선조들이 수백 년 동안 누려왔던
의식구조는 그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희석돼 왔다 해도 소인만은 유전질서로
애오라지 잠재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결핵이란 병 자체는 유전되지
않지만 결핵에 쉽게 걸릴 수 있는 소인은 유전되는 것과 같은 이치랄 수가 있다.
지금 오른손 왼손 차별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는 세대의 두 사람이 초면에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고 하자. 나이도 비슷하고 신분도 재산도 학벌도 비슷한 동등한
서열의 이 두 사람은 보다 친밀해지고 싶어 술집에 들어갔다 하자. 갑은 초면인
을을 존중해 주는 뜻에서 두 손으로 공손히 술잔을 권했다. 한데 을은 갑의 정중한
태도와는 정반대로 양반앉음으로 퍼지게 앉아 왼손으로 살짝 술잔을 받았다고 하자.
또 을은 갑과는 달리 왼손 한 손으로 갑에게 술잔을 권하고 왼손 한 손으로 술을
따랐다 하자. 갑은 두 손으로 공손히 술잔을 받고 있는데....
갑이 미국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면 반드시 심적인 충격을 받을 것이다.
저자가 자신을 나의 상전으로 여기거나 나를 저의 종으로 여기고 있다는, 그런
얕보고 깔보고 있다는 심리적 반발이 생겨날 것이다. 노장년층이 그런 꼴을
당했다면 멱사리를 쥐어틀고 한판 싸움이 벌어졌을 것이다. 노장년층이 아니더라도
이같은 꼴을 당하면 싸움까지는 번지지 않더라도 불쾌한 느낌이 들어 그 사람과의
관계효율은 제로 이하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왼손 반발에 어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한국인에게 강하게 잔존돼 있는 서열의식이 그렇게 살아 있다는 증거랄 수가 있다.
따라서 한국인끼리의 관계 덕목으로 왼손을 써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부각된다.
돈을 주고받든, 전표나 서류나, 볼펜이나 공구 하나를 주고받더라도 왼손을 쓰면
상대편에게 나에 대한 플러스 이미지를 준다.
이같은 한국인의 서열의식은 일상 속에서도 적잖이 정착되고 생활화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지금 말단 사원인 내가 맡고 있는 어떤 업무 때문에 나의 직계상관인 계장, 과장,
부장, 상무, 전무, 부사장, 사장과 함께 술집에 갔다 하자. 미국 같으면 이만한
사람이 가면 술자리마다 푯말을 적어 각자가 앉을 좌석을 명시해 놓는다. 명시해
놓지 않으면 웨이터가 낱낱이 좌석을 안내하여 앉혀 준다.
한데 한국의 술자리는 술상에 백지를 깔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늘어 놓았을 뿐
푯말도 없고 그렇다고 누가 자리를 안내해 주지도 않는다. 술상 자체는 만인에게
평등하게 펼쳐져 있다. 누가 어디에 어떻게 앉으라고 표시도 또 안내도 하지 않는
것일까.
실은 표시나 안내를 할 필요가 없기에 하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에 태어나 사회화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대뇌피질에 서열을
기가 막히게 잘 따지는 서열 컴퓨터 하나씩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임장에서
그 서열 컴퓨터가 민감하게 작동하여 자신의 서열에 맞게끔 앉을 자리를 지정해
준다.
곧 술상이 차려진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서열 컴퓨터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
컴퓨터에는 누구누구가 이 술자리에 온다는 정보가 이미 들어가 있기에 제일로
서열이 높은 사장은 가장 아랫목 한복판 두번째로 높은 부사장은 그 상석의
반대편...하는 식으로 서열을 따져내리면 말단 사원인 내가 앉아야 할 말석이
지정된다. 각자가 각자의 컴퓨터로 자신의 자리를 서열적으로 파악 제자리에 찾아가
앉는다. 무슨 놈의 푯말이며 번거로운 안내가 필요할 까닭이 있겠는가.
대체로 서열에 맞게 제자리를 찾아가 앉는데 이따금 한자리를 두고 두 사람이
서로 양보하며 자리 다툼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서열을 따질 기준이
하나밖에 없다면 이같은 서열 차질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서열을 따질
기준이 수백, 수천, 무수하게 있기에 두 사람의 선택한 서열 기준이 동일하지 않고
이원화된 데서 일어난 차질인 것이다.
이를테면 과장인 A와 사원인 B가 술자리에서 서로 자리 양보를 하고 있다 하자.
직장 직위로는 상위인 A이지만 학교 선후배로 기준을 잡으면 B의 후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했을 경우 A는 직장 같으면 상석에 앉겠지만 술자리에서는 의당히
선배를 상석에 앉혀야 한다고 선후배의 기준으로 서열을 잡고 보다 낮은 자리에
앉으려 든다. 한데 B는 동창회 모임 같으면 상석에 앉겠지만 아무리 직장을 떠난
술자리라 해도 직장 사람들과 같이 있는 이상 과장은 과장대접을 해야 한다 하고
직위 기준으로 서열을 잡고 보다 낮은 자리에 앉으려 든다. 한 자리에 두 사람이
서로 앉으려 드니까 물리적인 충돌이 불가피하게 된다.
이것은 한국인의 억센 서열의식이 어떤 시공에서든 민감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랄 수도 있다.
사무실 공간에 놓인 책상의 구조에도 엄연한 서열이 매겨져 있다. 계원이 일하는
책상의 서랍 수나 면적보다는 계장이 일하는 책상의 서랍 수가 보다 많고 면적도
보다 넓다. 직위가 오를수록 비례해서 서랍 수와 면적이 넓어진다. 따라서 한국의
사무실 공간에 있어 서랍 수와 면적은 실용에 부응해서 많아지고 커가는 것이
아니라 스테이터스 심벌인 것이다. 실용적인 측면에서나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많은 서류를 보관하거나 늘어놓고 일해야 하는 하위직일수록 서랍 수가 많고
면적도 넓어야 하는데도 역현상을 이루고 있는 것 또한 강한 서열의식의 소치다.
미국의 사무실에 가보면 대체로 결정권을 가진 스탭은 책상 면적도 하위직 사람의
것보다 좁고 서랍도 사물만을 넣어두는 한두 개에 불과하다.
앉아 일하는 의자의 구조도 서열적으로 돼 있다. 가장 말단인 계원이 앉아 일하는
의자는 아무런 부착물도 없이 직각으로 고정된 단구조 의자인데 예외가 없다. 이제
계장쯤 되면 의자 양편에서 팔꿈치 괴는 받침대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나오려면
양편에서 고루 다 나오든지 말려면 양편에서 고루 나오지 말든지 할 일이지 오른쪽
한 편만 나온 의자가 있다. 정말 희한한 구조의 의자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의자에 구조적인 차이를 두어야 할 서열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차이를
두느냐 하는 고심 끝에 발상된 서열의식 충족용 의자인 것이다.
과장쯤 되면 왼편에서도 마저 나오고 부장쯤 되면 뒤로 젖히게 되어 있고 중역쯤
되면 빙빙 돌아가게끔 구조적인 차이를 두고 있다.
엉덩이 들어가는 의자의 깊이도 서열에 따라 비례하고 있다. 서열의 고하에 따라
의자에 구조적인 차이가 별반 없는 미국의 사무실과는 대조적이다.
이같은 서열 시스템에 별반 저항이나 불평없이 용납하고 있는 것도 서열의식의
소치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파는 동일 상품이나 동일 식품에 약간의 질적인 차이를 두어 특제를
만드는 것도 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서열의식의 소치다.
이를테면 설렁탕집에는 같은 설렁탕에도 맛빼기, 곱빼기며 보탕(보통탕),
특탕(특제탕), 특특탕으로 서열화한다.
대포집에 가면 제값에 대포만 팔면 되는 것을 왕대포를 두어 서열화하지 않고는
성이 풀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종횡으로 이 서열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 복잡한 서열구조 위에
우리 사회가 영위되어 있다 해도 대과가 없을 것이다.
서열의식이 강해진 이유
우리 한국 사람에게 이토록 강한 서열의식이 체질화된 데는 우리 한국인이
고대부터 영위해 내린 생업이 강한 정착성을 요구했던 데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가 있다.
한반도의 기후대에서 벼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촌락 단위의 소우주에 강하게
정착해 살지 않을 수 없게끔 했다. 그 마을에 태어나 한 발자국도 마을 밖에 나가지
않고 그 마을에서 죽어갈 수 있는, 모든 것이 자급자족 되는 그 소우주에서 10대,
15대 조상대대로 살아온 정착사회의 안정은 종적인 서열없이 영위될 수가 없다. 곧
대인관계가 서열로서 고정됨으로써만이 안정이 된다.
수렵을 하고 유목을 하며 상업을 하면서 떠도는 이동성 민족은 서로 만나는
사람이 평등한 횡적 관계이기에 서로의 이해가 상충되지 않게끔 대등한 입장에서의
계약이나 대화나 의론이 발달한다.
유교 모랄은 중국에서 공맹이 창설한 모랄이라기보다 정착성 사회에서 자생하게
마련인 모랄이며 그 정착성 모랄을 공맹이 체계화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곧
우리나라에는 중국으로부터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기 이전부터 유교가 지향하는
인이나 예 같은 서열 인간구조의 덕목이 보편화 돼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외래의 유교 사상이 그토록 저항없이 쉽게, 깊게 우리 사회에 체질화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러할 수 있는 바탕이 돼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유교의 가르침은 바로 서열구조로 된 인간관계의 덕목을 강조한 것임을 그
보편적인 기조 덕목인 삼강오륜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억세게 체질화된 서열의식이 근대화 과정의 괄목할 만한 변혁이랄 도시화
과정에서 희석돼 왔다고 볼 수 있으나 의식구조란 그것을 형성시킨 여건이 달라진
그 순간부터 달라진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도시화는 정착성 서열사회로부터 이동성 평등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하고 있으나
이같은 여건 변화가 심화된다 해도 현재 생존 세대는 물론 다음 세대까지도 이
서열의식은 잠재돼 있어 세력을 부릴 것은 예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ff
15. 하향거부병
우리나라에서는 병신이 육갑을 한다면 욕이 되지만 구미 사회에서는 육갑을 짚을
줄 아는 병신이 육갑을 짚을 줄 모르는 성한 사람보다 높이 평가를 받는다.
하향 잘하는 구미인
서열이 사다리처럼 선명하게 정해져 있는 종구조 사회에서는 그 사다리를 꾸준히
기어오르려는 상향의식이 강해지는 반면에 그 상향역학의 반동으로 하향을 하지
않으려는 하향억제 역학이 또한 강하게 작동한다. 이 심리적 메커니즘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하향억제 의식을 남달리 강하게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우리 옛날 벼슬사회에서 일품 벼슬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하던 사람이 이품
벼슬인 판서를 한 사람은 거의 없다. 또 이품 벼슬인 판서가 삼품 벼슬인 관찰사로
낙향한 경우도 거의 이례적이었다.
벼슬은 그만두고 헐벗는 일이 있더라도 또 모래에 혀를 박고 죽는 일이 있더라도
하향은 거부했던 것이다. 이 하향억제 의식이 지금이라고 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정부 수립 후에 국무총리 하던 사람이 장관으로 하향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장관하던 사람이 도지사로 하향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비단 벼슬 사회뿐만 아니다. 일반 단체나 기업체에서도 직위를 하향시킨다는 것은
대어놓고 그만두라고 할 수 없기에 취해진 사직권고이지 정상적인 인사라고 볼 수는
없다.
20여 년 전 모 대학의 한 중견 교수가 교수직을 버리고 택시 운전사로 직업을
바꾼 일이 있었다. 이때 도하 각 신문들은 사회면 톱기사로 이 하향직업 선택을
이색 화제로 다루었었다. 수년 전 장관을 역임했던 분이 시골 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을 때도 신문들은 화젯거리로 크게 다루었었다. 곧 한국에서 하향을 한다는
것은 이처럼 신문에 날 정도의 이색적인 것으로 정상적인 것은 못 된다. 이에 비해
직위보다 직능 위주로 영위되는 구미의 횡구조 사회에서는 상향의식이나 그
반동으로 야기되는 하향억제의식이 별반 강하지 않기에 높은 직위의 사람이 아무런
심리적 갈등이나 저항없이 보다 낮은 직위로 곧잘 옮겨가곤 한다.
프랑스의 훠오르 수상은 후에 문교부장관으로 일하고 있고 프리므랑 수상은
시장을 하고 있다. 영국의 흄 수상도 10년 후에 외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일본에서도 하향억제는 우리보다 덜 심한 것같다. 내각총리대신이었던 가쓰라
다로가 외무대신으로 하향하고 있고 역시 총리대신이던 이토히로부미가
조선총독으로 하향하고 있다.
10여 년 전 나는 미 텍사스 주 오스턴 대학의 한 세미나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동양학 연구로 전통이 있는 이 대학에서 교양 과목의 텍스트로 채택했던 졸저
"Modern Transfomation of Korea"대한 학생들의 질의 응답을 위해서였다.
소정의 일을 마치고 작별인사를 하고자 동대학 학장을 찾아갔다.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칠십 가까운 이 학장은 미국 굴지의 동양학자로 오스틴 시민들이
자랑으로 삼고 있는 명사였다. 방학이 시작된 지 일 주일 후의 일이라 학장은
부재였다. 여비서는 몇 번가에 있는 무슨무슨 빌딩의 서비스 센터에 가면 학장을
만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빌딩 서비스 센터라면 그 건물의 청소, 유리닦기,
페인트칠, 수선 등 구질구질한 일을 도맡아 하는 용역 센터인 것이다. 그 고명한
학자가 그런 곳에...하는 의아심을 품고 찾아갔다. 서비스 센터에서 심부름을 한다는
한 노인인 앞장서면서 학장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따라오라고 했다.
빌딩 밖으로 나가더니 그 건물2__3층 즈음에서 밧줄에 매달려 유리를 닦고 있는
한 백발의 노인을 가리키며 저분이 그분이라는 것이었다. 노교수임을 확인하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나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 노 교수가 방학 중에 연구할 과제의 예상 용역비에 3백 달러
남짓이 부족할 것 같아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위험수당이 높게 붙는 이 빌딩
유리닦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잘사는 사람이든 못사는 사람이든 연중 응분의 돈을 사회에 환원을
한다. 어디에 환원하는가는 본인의 자유이지만 당시에는 주로 종합병원
운영기금이나 학자들의 연구기금으로 희사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기에 저명한 학자에게는 필요이상의 연구비가 몰려왔으며 이를 합리화시키는
방편으로 학자에 따라 자신이 받는 연구비의 회사상한액을 정해 그 이상의 돈은
받지 않는 풍조가 생기기까지 했던 것이다. 명분은 영세 기부자를 보호하고 또 영세
기부자의 돈으로 연구한다는 것에 보람을 찾는다는 데 있었지만 실속은 달랐다.
당시 학자들의 유명도를 가늠하는데, 그 학자가 받은 기부 상한액을 기준으로 삼는
풍조가 있었다. 곧 상한액이 낮을수록 유명도가 높아지고 높을수록 유명도가
낮아진다. 그러기에 상한액을 낮게 잡는 학자들은 10달러나 5달러 하는 푼돈만을
받다 보니까 예정했던 연구비용에 다소 모자라는 일도 종종 생기게 된다.
오스틴 대학장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도 바로 이에 있었던
것이다.
내용이야 어떻든 그 고명한 노 학자가 위태로운 빌딩 유리닦이를 아무런 저항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는 그 개연성이 하향억제의식이 남달리 강한 우리에게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 노 교수는 나를 알아보고 입에 두 손을 모아 큰 소리로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다. 동경대학에 들러 동양문고에 소장된 무슨무슨 고문서며 서울 규장각에
소장된 무슨무슨 고문서를 복사해 보내 달라는 등 이야기할 것 다 하고는 손을 들어
굿바이 하고 유리닦기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빌딩 아래로 지나가는 행인이 노 교수를 알아보고 아는 체하면 낱낱이 '하이!'
하며 응답했고 이따금 흥얼흥얼 읊조리면서 즐겁게 일하고 있는 것을 한동안
나혼자서 말뚝처럼 박혀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노교수 한 분이
빌딩에 매달려 유리를 닦고 있다고 가상을 하자. 삽시간에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올려보느라 교통이 두절될 것이다.
신문기자들이 달려와서 망원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댈 것이요, 방송 기자들은
장대에 마이크를 매어 일하고 있는 노교수의 입에다 밀어대며 말 한 마디 할 것을
강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튿날 신문 사회면에 사진과 더불어 대문짝만하게 그에 대한 기사가
실릴 것이요, 그 기사를 접한 한국 사람들은 한사람 예외없이 혀를 차며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노쇠하더니 돌았구먼!' 하고....
미국의 노 교수는 돌지 않고도 유리를 잘 닦는데 돼 한국의 노 교수는 돌지
않고서는 유리를 닦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하향억제의식이 약하고 강하고의 차이에서 빚어진 자연스런 사회 현상이랄
것이다.
흥부의 불향억제
흥부가 하도 굶다 못해 혈육인 놀부집에 양식 얻으러 갔다가 양식은커녕 걷지도
못하게 얻어맞고 기어들어오는 장면은 널리 알려져 있다.
흥부 마누라는 여러 자식놈들의 '어매 밥' 소리에 정신 못 차려서 벗은 발에 두
손을 붙들고 이문 밖에 나가 기다리다가 빈손으로 기어오는 흥부를 본다. 쑥 들어간
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간신히 살을 가리운 그의 뒤쪽이 찢어져나가 빳빳이
마른 볼기짝에 몽둥이 맞은 자리가 구렁이가 감기듯 하였다. 흥부 마누라가 울며
말한다.
"몹쓸래라 몹쓸래라 시아주비도 몹쓸래라. 오늘같이 추운 아침 형보자고 간 동생
저리 몹시 때렸으니 사람이 할 일인가, 남의 원망 쓸데없네. 모두 다 내 죄로세. 내
설마 악을 쓰면 불쌍한 우리 가장 못 먹이고 못 입힐까, 가장은 처복 없어 나
까닭에 굶거니와 철모르는 자식 정경 더구나 못 보겠네. 짐승은 미물이라도 입으로
밥을 물어 자식을 먹여 주며 추우면 날개 벌려 자식을 덮는 것을 나는 어찌
사람으로 수다한 자식들을 굶기고 벗기는고. 벗어졌기고 탁문군의 본을 받아
술장수라도 해야겠소."
흥부 조용히 듣고 있다가 술판다는 대목에 깜짝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아 땅을 다섯 번 치며 자네 그게 웬 소린가를 다섯 번이나 외친다.
흥부전을 통틀어 가장 큰 쇼크를 받는 연출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죽었으면 그저 죽지 자네시켜 술 팔겠나. 가사는 가장인 내가 나서서 품을 팔
터이니 자네는 두 번 다시 그 말 입에 내지 마소." 한다.
한국 소설사상 가장 가난한 흥부마저도 술 판다는 스테이터스에 하향을 하지
않겠다는 한국인의 억센 하향억제의식이 이 장면에서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다.
우리 옛 선조들에게 있어 술판다는 직업은 죽지 못해 하는 마지막 천하 생업으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이 직업에의 하향을 억제함으로서 역사상 가장 가난했던 흥부도
그 나름의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도살을 생업으로 삼는 백정은 전통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사실
백정보다 스테이터스가 낮은 생업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했기로 백정들은 여느
사람과 한 마을에서도 살 수 없게 하여 강 밖이나 외딴 곳에 격리돼 살아야 했으며
옷차림새나 머리쪽도 여느 사람과 같이 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백정은 생업의 서열 랭킹에서 최하위에 속했으며 그보다 하향할 어떤
다른 스테이터스도 없었던 것이다. 한데 하향할 보다 낮은 스테이터스가 없는데도
하향억제를 했던 것이다.
옛날 백정들 각자가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을 가졌던 데 예외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 돼지는 잡는다. 하지만 개는 안 잡는다.'
곧 개를 잡지 않는다는 어떤 한 스테이터스를 설정하고 그 스테이터스에 하향하지
않음으로써 한국인에게 집요한 하향억제의식을 충족하며 살았던 것이다. 곧 하향할
스테이터스가 없으면 일부러라도 만들어서 하향을 억제한 것이다.
개 백정이 소나 돼지 백정보다 천하다는 어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이유는 없는
것이다. 미신이나 주술적인 이유도 없다. 개가 되든 염소가 되든 토끼가 되든
아랑곳없다. 어떤 뭣이건 어느 하나만을 선택, 그것을 잡지 않음으로써
하향억제의식을 충족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한국인의 의식 메커니즘에 개가
재수없게 선택했을 따름인 것이다.
이처럼 하향억제의식 충족용 스테이터스를 만들어 충족시키는 풍습은 사회적
통념으로 천하다고 여기는 생업에 보편화돼 있다.
창녀들은 비록 몸을 쉽게 팔지만 입술(키스)은 완강하게 지키는 것이 전통적
통념이 돼 있었다. 기방에서 '입이 헤픈년'이라면 남의 말을 잘하거나 지켜야 할
비밀을 못 지키는 기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나 입술을 잘 파는 기녀를
뜻하였다. 입이 헤프면 보다 천한 창녀로 창기 사회에서도 지탄을 받았던 것이다.
곧 모든 것을 팔면서도 입술만은 나의 의지로 고수해 내겠다는 비원이며 그
하향억제의식의 충족으로 보람을 찾으며 살았던 것이다.
송장 염하는 사람이 처녀 총각의 염을 기피하는 것도 바로 이 하향 억제의식을
충족시키려는 데서 형성된 한국적 터부인 것이다.
한국형 인질사건
이처럼 한국인에게는 하향억제의식이 강하며 따라서 한국적 인간관계에 있어 하지
말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금기로서 이 하향억제의식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들 수가 있다. 바꿔 말하면 가장 간단한 수법으로 살인까지도 불사할만큼 인간관계
악화를 험악하게 할 수 있는 의식구조가 바로 하향 억제의식이랄 수가 있다.
대체로 우리 한국인은 일상생활이나 조직생활에서 남들의 외형으로 나타난
열등요소나 내면에 간직된 열등요소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예외요, 또 관습이 돼
있긴 하지만 이따금 화가 났을 때나 무슨 일이 잘못됐을 때, 관계가 악화되려 할
때는 곧잘 남의 열등요소를 자극함으로써 하향억제의식에 손상을 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를테면 절름발이 보고 맞대어 놓고 절름발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호칭하지 않는 것이 예의가 돼 있다. 한데 그 친구와의 사이가 악화되거나 그 친구
때문에 화가 났거나 그 친구가 무슨 일을 잘못해서 나에게 피해가 미쳤을 경우는
서슴없이 절름발이 새끼라고 말하게 된다.
브라질 여행 때 한 후배를 만나 그곳 중국집에서 술을 나누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곱게 늙은 한 브라질 중년 신사가 유별나게 발을 절며 그 술집에 들어섰다.
그 브라질 신사는 함께 앉아 있는 후배와 잘 아는 사이였던 것 같다.
"야. 절름발이야(Hey! Cripple guy!)" 하고 후배가 불러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아찔해졌다. 혹시 그 브라질 신사가 화를 내어 칼이라도 뽑아들고 대어들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마저도 들었던 것이다.
한데 나의 조바심은 배신받고 만 것이다. 이 중년 신사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다가와서 합석을 하는 것이었다. 소개를 받았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그분의 신분이 브라질 국회의원이요, 국회의원 가운데에서도 외교분과위원장이었기
때문이다.
술 한잔 나누고 그 발을 저는 신사가 떠나간 뒤에 나는 후배를 나무랐다. 그분이
국회의원이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절름발이더러 맞대어 놓고 절름발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보아하니 나이도 많은 연장자인데다 한국 처지로 보아 말을 놓을 만한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상소리를 한다는 것은 한국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하는
반국가적 행위일 수도 있다고 나무랐던 것이다.
한데 이 후배는 싱글싱글 웃으며 나의 무지를 겨냥, 역습해 왔다.
물론 한국에서 병신더러 병신이라고 했다면 칼부림이 날 것이지만 이곳은 한국이
아니라고 전재하고 중남미의 라틴 아메리카 사회에서는 불구자, 곧 절름발이를
절름발이라 부르고 째보를 째보로, 앉은뱅이를 앉은뱅이라 부르는 것이 결코 그
불구자의 열등감을 자극한다는 법이 없으며, 오히려 그렇게 불러주는 편이 애칭처럼
친밀감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이 좁다지만 이토록 하향억제를 둔 의식구조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에 세
번째 놀랐던 것이다.
절름발이를 절름발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육체적 개성을 객관적으로
적시하는 합리적 호칭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불구도 마치
눈빛깔이 다르고 살색이나 머리빛깔이 다른 것에서 느끼듯한 그런 상이감을 성한
사람에 비해서 느낄 따름이다. 대체로 구미 사람들도 라틴 아메리카 사람 정도는
아닐지라도 이 육체적 결함을 지닌 사람 자신도 한국에서처럼 심한 열등감을
갖는다는 법이 없다.
한국에서처럼 성한 사람의 사회로부터 소외당한다는 법이 없으며 그저 불행한
육체적 특성 정도로 여기는 것이 고작이다. 오히려 개성이나 재능이나 그 사람
특유의 어떤 자질이 없는 성한 사람보다 개성이나 재능이 뚜렷한 불구자가 존경받는
그런 사회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병신이 육갑을 한다면 욕이 되지만 구미 사회에서는 육갑을 짚을 줄
아는 병신이 육갑을 짚을 줄 모르는 성한 사람보다 높이 평가를 받는다.
이 모두가 한국인에게 억세게 강한 하향억제의식에서 형성된 외국과의 차이점인
것이다.
불구라는 외적인 열등요소를 두고 동서를 비교해 봤으나 내적인 열등요소도
매한가지다.
한동안 우리나라의 다방이나 술집 같은데서 일부 특정의 손님들을 인질로 잡고
횡포를 부리는 인질사건이 자주 일어났었다.
언젠가 미국인 친구 하나가 이 한국의 인질사건을 두고 너무나 한국적인
법죄라면서 우리 한국인이 느끼지 못한 점을 지적해 준 일이 있다.
구미에서도 인질사건은 자주 일어난다. 하지만 구미에서의 인질사건은 인질
목적이 선명하고 뚜렷하다. 인질값으로 돈을 몇백 만 달러 지불하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지를 석방하라든지 목적을 내걸고 흥정을 한다.
한데 한국의 인질사건은 예외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인질의 대가로서 무엇을
요구한다는 법도 없고 또 요구한다 해도 선명치 못할 뿐 아니라 해결할 수 없는
추상적인 것들이라는 지적이었다. 예리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한국의 인질사건에 있어 인질범들이 돈을 요구했거나 누구를 석방하라는
구체적인 요구를 했던 기억은 전혀 없다. 그저 막연히 총을 들고 나와 이렇다 할
요구없이 버티다가 지쳐서 잡히거나 자수하거나 죽거나 하는 데 예외가 없었다.
경찰은 인질범을 달래기 위해 가장 정에 무른 범인의 어머니를 불러다가 스피커나
전화를 통해 요구가 무엇이냐고 캐어 묻게 했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하고 있느냐.
말을 해라. 내가 죽는 일이 있더라도 요구를 들어 줄 테니 말을 해라.'하고 울며불며
물어대도 대꾸를 하지 못한다.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목적을 두고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요구나 목적이 아예 없는데 자꾸
물어대니 인질범도 답답했을 것이다.
이런 적도 있었다.
너무나 애절하게 물어대는 어머니에게 궁지에 몰린 인질범은....
"미스 김좀 데려다 주시오." 하고 의중에도 없던 요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자신의 생명을 건 엄청난 모험을 할 수 있게 한
원흉이 무엇일까.
어느 조직 사회에서 하향억제의식을 자극받은 것이 누적이 되었다가 어느 날
폭발함으로써 이루어진 심정적인 우발 범죄이지 계산된 목적 범죄가 아닌 것이다.
각기 다양한 서열기준을 지닌 사람끼리 어울려 단체 생활을 하다 보면 서열
충돌이 잦으며 이 서열 충돌은 하향억제의식의 자극을 누적시킨다. 그 누적이
극한에 이르면 이성을 잃고 흉폭해져 인질사건을 벌인다.
당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제일동포 김희노의 인질사건에서 범인 김은 인질의
대가로 무엇을 달라거나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요구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곧
한국형 인질사건의 테두리를 못 벗어났었다.
어릴 때부터 주변의 일본 사람들로부터 조센징이라는 편견과 차별을 받은 것이
누적되었다가 어느 날 본인에게 더욱 이성으로 참을 수 없는 하향억제의식을
자극받고 그 극한 풍선을 터뜨린 것에 불과했다.
곧 한국의 범죄도 한국인의 의식구조상의 함수관계에서 발생되고 있으며 따라서
범죄 대책도 한국인의 의식구조 위에서 재정립돼야 한다.
이같이 흉악 범죄로까지 악화시킬 수 있는 한국적 인간관계의 작동인자를 아예
제거한다는 것이 한국적 인간관과 한국적 리더십의 기본 원칙이랄 수가 있다.
특히 조직이나 단체의 결속력이 인간적인 측면보다 규칙적인 측면이 강하거나,
상하 서열이나 규율 측면에서 강제성을 띤 조직이나 단체일수록 하향억제의식을
자극할 빈도가 높다.
@ff
16. 면형사고병
공시간, 공공간에서는 공무만을 집행하는 외국인에 비해 한국인의 공시간,
공공간에는 사무가 대거 침투하여 일 보아 가면서 커피를 마시고 기안하다 말고
다방에 가며...면형인 '하면서 주의'로 업무를 한다.
1. 선형사고와 면형사고
같은 생각에도 사고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사고가 독일말로
덴켄(denken)이라면 사색은 데젠(desen)이다.
덴켄은 논리의 선을 따라 차곡차곡 축적하여 결과에 이르는 선형(Lineal) 사고다.
흔히들 독일 사람들이 덴켄을 한다고들 한다. 독일의 가정 주부들 마저도 마치
생산 공장의 공정처럼 순서있게 선형으로 가사를 처리한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독일 주부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덴켄식 가사운행을 한다는 데 예외가 없다 한다.
그 아침부터 밤까지의 차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아이들의 식사 준비
2. 아이들이 식사하는 동안 아이들 침실의 침구정리
3. 남편의 아침밥
4. 부부침실 정리
5. 아침밥 설거지
6. 청소
7. 마당의 잔디 손질(일요일 제외)
8. 점심 마련
9. 1시 반에 귀가하는 아이들과 점심
10. 아이들 공부 점검
11. 5시까지 자습을 시키고 그동안에 다리미질 등 소리나지 않는 일
12. 5시부터 공부에서 아이들을 풀어준다.
13. 6시 저녁 준비, 가족과 함께 식사
14. 설거지
15. 남편과 아이들 구두닦이
16. 뜨개질이나 바느질
17. 취침
독일의 주부들이 이처럼 논리적으로 정해진 선을 타고 가사를 운행한다면 우리
한국의 주부들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면형가사 운영을 한다. 밥을 얹어놓고는
빨래를 하고 빨래를 하면서 아이를 꾸짖는다. 콩나물 다듬으면서 이웃 아주머니와
잡담을 하고 뽕따면서 임도 본다.
이렇게 면형사고가 가사라는 행동에 있어 '하면서 주의'로 나타난다.
직장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한 업무를 둔 열중도가 외국인에 비해 약하다. 공시간,
공공간에서는 공무만을 집행하는 외국인에 비해 한국인의 공시간, 공공간에는
사무가 대거 침투하여 일보아가면서 커피를 마시고 기안하다 말고 다방에 가며
계산하다 말고 결혼식에 잠깐 다녀온다. 면형인 '하면서 주의'로 업무를 본다.
미국 동부 맨체스터의 메이시 백화점에 들렀을 때 점원으로 고용되어 있는 두
명의 한국 아가씨부터 '미국 사람은 죽어서 모두가 지옥에 갈 사람들'이라는 불평을
들은 일이 있다.
손님이 없을 때 다리가 아파 좀 앉아 있다가 적발당하면 일당의 50퍼센트를
벌금으로 삭감당하고, 역시 손님 없을 때 기둥에 기대어 있기만 해도 30퍼센트를
삭감당한다고 말하고, 일할 때 일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일하지 않을 때 잠시
쉬었기로서니 너무 모질게 군다는 것이 공통된 그들의 불평불만이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인의 면형사고에서 유발된 하면서 주의가 그들이 인간적으로 모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손님이 없어도 손님이 있는 것처럼 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단 공사의 혼동뿐 아니라 하면서 주의로 일을 시키고도 있다. 지금 정상적인
사무를 보고 있는데 바삐 결재낼 일이라면서 정상업무를 중단시키고 다른 일을
다반사로 시킨다. 지금 어떤 문서의 타이핑을 하고 있는데 빨리 보고할 문서라면서
종전의 타이핑을 중단시키고 다른 문서의 타이핑을 시킨다. 어떤 일이 밀리면 그
일을 위해 담당자도 아니면서 동원되기 일쑤이며 일보다가 손님 접대며 사장님의
공황출영이며 온통 하면서 주의로 일을 하는 것이 생리에 체질화돼 있다.
칸트철학이 빈틈없는 논리체계로 구성되어 미학, 천문학, 심지어는 색채학에
이르기까지 '선'을 뻗고 있음도 바로 '덴켄'의 소치요, 비스마르크가 사상 최초로
법치국가를 완성하여 정밀한 법체계에 의한 행정을 베풀었던 것도 독일 사람에게
체질화된 덴켄의 산물인 것이다.
프러시아 이래 나치에 이르기까지 독일 군대가 그렇게 강했던 것도 바로 군대
조직이나 작전이 덴켄 위에 논리적으로 체계화된 사상 최초의 군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프러시아 군이 최초로 창설한 '참모본부'도 덴켄의 소산이요, 당시 세계
최대의 오스트리아 제국을 구축했던 가장 큰 요인으로 손꼽히고 있는 모르토케의
'논리작전'도 바로 덴켄의 산물인 것이다.
모든 작전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데 가다가 불칙의 상태나 예상치 않았던
상태까지 최대한으로 예상하여 그 대책을 논리적으로 지엽화시켰던 것이다.
보불전쟁 때 독일군은 뒤늦게 진격을 시작했지만 논리작전이 서 있었기에 파리를
비롯 주요 도시의 함락이 차질없이 논리적으로 이루어져 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고급 장교들은 전술이나 전략 또는 지모나 통솔력보다 논리적 소양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던 것이다. 베를린의 육군대학에서 철학이 가장 중요한 필수
과목이 돼 있었던 것도 바로 논리작전의 소양을 가꾸기 위해서였다.
논리는 선으로 나가기에 점에서 점으로 옮겨가고 계획치와 실제치와 괴리가
생기고 차질이 생기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여 논리의 잘못되었음을 꾸준히
교정해 나간다. 그리하여 논리의 계획치와 실제치와의 차질을 반감시키고 반감된
것을 다시 반감시켜 극소화해 나간다.
서양 사람들이 대체로 덴켄체질인데 비해 동양 사람들은 데젠체질이다.
인도 수상이었던 네루는 명상하는 포즈로 곧잘 사진을 찍었다. 인도와는
견원지간인 이웃 파키스탄 대통령이 어느 한 서독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했을 때
기자가,
"네루는 덴켄을 잘한다."고 하자 파키스탄 대통령은, "아니야, 그 자는 데젠을
하고 있다."고 응수했다 한다.
곧 데젠은 논리적 사고가 아니라 초점이 잡혀지질 않고 불분명하게 확대되어 있는
면형사고랄 수가 있다.
우리 말에 멍하다느니 멍하게 하고 있다는 '멍'이 바로 데젠이다. '멍'을 "시경"에
나오는 망망에서 비롯되었다 하고 또 마음을 잊어버렸다는 회의문자 망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나 그 뿌리는 어떻든 점--선--점으로 이어지는 논리적
선형사고가 아니라 면으로 확대된 비논리적 면형사고의 표시가 '멍'이랄 수가 있다.
선형사고와 면형사고는 시간개념에서도 완연히 나타난다. 서양 사람들은 시간을
점과 점으로 이어져 가는 선의 흐름으로 이해하는데 우리 한국인은 '시간'이란 말이
단적으로 말해 주듯 '간', 곧 평면성의 펼쳐짐으로 이해한다. 곧 전자를
시각개념이라 한다면 후자는 시간개념이랄 수가 있다.
서양 사람들이 전쟁에서 작전하는 것을 보면 점과 점을 이어가는 선형작전을
한다. 그 전형적인 것이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을 들 수가 있다. 아무리 적지
깊숙이라도 점으로 거점을 만들어 나간다.
임진강 방어가 무너지자 한강 방어선까지 포기하고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금강
방어선까지 후퇴하며 다시 그것이 무너졌을 때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했던 면형
전쟁과는 발상이 전혀 다르다.
'철의 삼각지'라 하여 세 개의 거점을 두고도 그것을 세 개의 점으로 여기질 않고
삼각지라 하여 그 세 개의 점이 만드는 면으로 파악했던 것도 적이 한국적이랄 수가
있다.
한국인에게 미터감각이 둔한 것도 바로 면형사고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은
길이(장)라는 선의 척도인 미터를 기준으로 하여 면적을 가늠한다. 곧 길이의
자승으로 면적인 평방을 미터화한다.
요즈음 아파트 분양 광고에 면적 표시를 평방 미터로 하고 있는데 그로서 넓이를
직감적으로 이해하는 한국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미터법에 익숙하지 않기에
일어나는 과도적 현상이랄 수도 있으나 이 선으로 면을 측정하는 데젠사고 체질과는
의식구조상 배리되기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한국인에게 몇 간 집, 몇 평 집 하는 식으로 면 측정 단위가 친근한 것은
비단 그 단위를 오래 써와서 뿐만이 아니라 의식구조상의 필연이랄 수가 있다.
비단 자승의 평방 면적뿐만 아니라 삼승의 입방체적까지도 우리 한국인은
면적으로 파악하려 든다.
체적이 있는 입방체인 나무나 돌을 측정할 때 몇 '사이'라는 간, 곧 면적 단위로
측정한다. 이 나무는 몇 사이가 나온다느니 한다. 입방감각을 평방감각으로
처리하는 것도 바로 우리 한국인의 변형사고 때문인 것이다.
@ff
17. 방울샘병
정치는 all of nothing이 아니라 alternative라고 말한 것은 처칠이다. 최선책
하나만을 들고 그것이 아니면 끝장이라는 것은 방울샘병이다. 항상 차선, 차차선책을
들고 꾸준한 횡적모색을 해야 한다.
옛날 시골에서는 올망졸망한 방울샘들을 흔히 볼 수가 있었다. 논물을 대기 위한
방죽이 오래 되면 흘러든 유사로 담수능력이 없어져 쓸모없게 된다. 그럼 몽리
농민들은 각자가 그 못 쓰게 된 방죽에다 올망졸망 샘을 파 사유화한다. 그 사유
샘들을 방울샘이라 한다. 몽리 농민끼리 서로 횡적으로 타협하여 준설을 하면
몽리수량도 많아지고 서로 좋을 텐데 몽리면적, 몽리거리 등 약간의 이해 때문에
타협 못하고 방울샘이 생겨나고 만다.
이 방울샘이 우리나라 도처에 있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 한국 사람의 횡적인
유대력이 결여돼 있다는 단적인 증거로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서로 횡적으로
타협 못하고 손해보는 것을 '방울샘 판다'고 빚댔던 것이다.
집중 TV안테나가 없는 아파트나 집합 주택을 보면 예외없이 안테나 숲이
난립하고 있음도 방울샘병의 소치다. 더불어 사는 이웃끼리 횡적 유대력이나 횡적
타협력만 작용했던들 각자가 돈들여 안테나를 세우느니 단일 안테나를 세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그 많은 약광고들을 보면 비타민제만 해도 10여 종이요,
간장약만 해도 10여 종에 이른다.
물론 메이커들은 서로 다르지만 약효는 대동소이하다. 그 약들을 수요로 하는
시장은 한정돼 있는데 서로의 시장을 빼앗고 빼앗기며 돈을 처대고 있는 것이다.
만약 메이커끼리 횡적으로 타협을 하여 약종을 달리하고 서로의 약종을 침범하지
않기로 한다면 이익은 배가, 삼배가 될 것이다. 잘 알려진 일이지만 스위스에는 세
개의 세계적인 제약회사 있다. 가이기 치바, 로슈가 그것이다.
이 세 회사마다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연구소와 연구원을 거느리고 그 많은 약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세 회사 사이에 서로 중복된 약을 낸다는 법은 없다 한다. 서로
횡적으로 손을 잡고 타협해 가면서 자기네 제품의 질을 높여 세계적 메이커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갈비가 잘 팔린다면 너나없이 그 인근에 갈비집이, 주물럭이 잘 팔린다면 그
인근에 주물럭집이 난립, 서로가 원조를 내세우고 피를 보는 것도 방울샘병이
얼마큼 저변화돼 있는가의 본보기다.
일전 재벌 그룹들이 문어발 기업을 감량한다는 보도 기사를 보니 한 그룹당 3,
40개의 문어발들이 동일 업종을 두고 서로 엉켜 서로의 문어발을 뜯어먹고 있는
양상이 처절하기까지 했다. 주물럭이 잘 되면 너나없이 주물럭집을 내듯이, 세탁기가
잘 된다면 너나없이, 전기밥솥이 잘 된다면 너나없이, 그리고 자동차가 잘 된다니까
너나없이 자동차에 손을 대어 공존공생 아닌 공도공사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의 세계적 대기업 제너럴 모터스가 자동차 이외에, 제너럴 일렉트릭이 전기기기
이외의 어떤 업종에 손댔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횡적인 유대가 있고 없고가 그렇게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적에게
이겨내는 방법은 관료층이나 특권층에 결탁하는 것이 가장 수월하다. 이 정상의
역사는 횡적 타협이 어려운 우리 사회인지라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종로의 육의전 상인들이 각기 왕실에 어용물을 대는 조건으로 업종을 독점한
것이며 한양 사강의 객주들이 귀족과 결탁하고, 한말의 보부상이 보수세도의
앞잡이로 파워를 행세해 주고 상권을 독점한 것 등이 그것이다.
학문 연구에서 학제간 연구가 미진한 것이며, 노동 운동에서 단위조합별 운동으로
그칠 뿐 외국처럼 직종별 운동으로 연계돼 나가지 못한 것도 횡적유대에 미숙한
때문이다.
노래해도 제창은 있고 합창이 없었음이며, 춤을 추어도 독무는 있고 군무가
발달하지 않음이며, 창극을 해도 오페라와는 달리 혼자서 다역으로 완창한 것도
미숙한 횡적 유대력의 예술적 나타남이랄 것이다.
그 뭣보다 정치에서 방울샘병이 심각하다. 정책이나 정견 이해가 상반된
정파끼리의 횡적 타협이 바로 민주주의의 기조인데, 정파끼리 방울샘만 파고 있으니
정국이 이렇게 답답하고 앞날이 암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는 all of nothing이 아니라 alternative라고 말한 것은 처칠이다. 최선책
하나만을 들고 그것이 아니면 끝장이라는 것은 방울샘병 정치다. 항상 차선,
차차선책을 들고 꾸준한 횡적 모색을 해야 한다. '노!'로 상대방을 잘라 버리지 말고
'노, 벗...' '예스, 벗...'을 되풀이하면서 가능한 한 자기편의 정견이나 정책을 보다
질적으로 가미시켜 나가는 것이다. 카터 대통령의 이란 인질 구출작전이 실패한
것은 그 '블루라이트작전'이 실패했을 때 어떤 작전으로 전환한다는 차선책, 곧
올터너티브의 작전이 없었기 때문으로 평가, 지탄받은 것은 시사적이다. 절체절명의
확고부동한, 그러면서 퍼스트 카드인 동시에 라스트 카드란 정치적으로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또 다수결의 원리는 민주주의의 의사 결정을 하는 만국 공통의 보편적 원리이긴
하다. 한데 횡적 유대력이 강한 나라들에 있어 다수결 원리란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수렴하는 원리로 받아들이는데, 횡적 유대력이 약한 우리나라에서는 다수가 소수에
이기고 소수가 다수에 패배하는 승부의 원리로 생각한다. "장자"에 회라는 입이
둘이 있는 짐승 이야기가 나온다. 먹이가 생기면 두 입이 서로 먹으려고 싸우는
바람에 서로 먹지 못해 굶주리고 또 서로 물어뜯는 바람에 상처입어 죽곤 한다는
짐승이다. 두 입이 서로 횡적인 유대를 갖지 못하고 너 먹을 것, 나 먹을 것, 그리고
네 차례, 내 차례를 타협하지 못한 데서 오는 자멸인 것이다. "장자"의 회는 바로
한국의 방울샘병인 것이다. 왜 우리 한국인에게 방울샘병균이 기생했을까. 우리
한국 사람은 수천 년 동안 한마을에 태어나 그 마을에서 한 발짝 떠나지 않고
죽어갈 수 있었을 만큼 정착,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며 살아왔다. 곧 남들이나 딴
마을, 딴 고을, 딴 나라 사람과의 대화나 설득이나 교류나 교제나 타협 없이도 살 수
있는 생업체계 속에 살아왔기에 의식구조상 횡적인 유대에 익숙지 않은 독불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사회'란 말은 개화기 이후 도입된 서구의 개념으로 사람과
사람과의 교제나 교유 같은 횡적인 유대를 의미하였다. 한데 우리나라에 그같은
'사회'란 개념은 없었고, 그에 대체되는 '세상'이란 말이 있었을 뿐이다. 사회는 서로
협조해 가며 살아야 하는 객관적 공간이지만, 세상은 이 풍진세상... 하는 식으로
혼자서 살아가는 주관적 공간이다.
'사회'에서 살아보지 못하고 '세상'에서만 살아왔기에 횡적 유대에 미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ff
18. 나도밤나무병
회의나 세미나에서 반대 의견이 많이 나오지 않는 이유도 나도밤나무병의 소치다.
나는 아닌 밤나무로 이의를 제거하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며, 자칫 그것이 심하면
이단시되고 소외당한다.
'나도밤나무'라는 색다른 이름의 나무가 있다. 키가 훤칠하며 10미터쯤 자라는
데다 노란 꽃이며 붉은 열매가 고와 관상수로 심어지는 큰키나무다. 한데 잎이
밤나무잎과 비슷하다는 것만으로 나도밤나무가 된 것이다. 그 나무가 밤나무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 사람이 그 나무로 하여금 밤나무이게 하고 싶었기에
주어진 이름이다.
나도밤나무뿐 아니라 우리 한국의 초목 이름에는 '나도...'하는 동조성 이름이 한
유형을 이루고 있다. 나도냉이, 나도바람꽃, 나도생강, 나도송이풀, 나도박달,
나도미꾸리... 나도... 그것에 동조하여 그 후광 속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심성이 초목
이름에 투영된 것일 게다. 왜 '나는 아닌 밤나무'라고 우겨대어 밤나무보다 키도
크고 제목도 좋고 꽃도 곱고 열매도 아름답다고 개성을 내세우지 못한 것일까. 남과
다른 내나름의 이질성을 배척하고 남과 같은 남나름의 동질성에 가치를 부여해 온
오랜 농경정착 생활의 유산이기도 할 것이다.
또 오랜 사대주의도 나도밤나무병의 명인이랄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초에 명나라 사신이 와서 수어를 먹어 보고 맛이 좋았던지 이 고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통사가 '수어'라고 말하자 수어로 오인하고 물 속에 사는
고기가 모두 수어인데 하필 이 고기만을 수어라고 하느냐고 반문했다. 이것이
연유가 되어 아무리 무식할망정 천사(명나라 사신)가 수어라고 한 바에야 그 고기는
수어가 돼야 한다는 사대논리로 수어가 '나도수어'가 돼버린 것이다.
소학교 다니는 아들놈이 손목시계를 사달라고 조른다. 어머니는 중학교에
들어가면 사준다고 달랜다. 하지만 딴 아이들도 다 차고 다닌다면 시계를 찰 수
있는 정당성이 생기고 따라서 동조해 버린다.
선생님이 '알았습니까.' 하고 물으면 알지 못하면서도 '알았습니다.'라고 남들에
동조하는 것이 선생님에 대한 의리가 돼 있고, 식당에 가서 웃사람이 설렁탕을
선택하면 나도, 나도... 설렁탕에 동조하고, 술자리에 가서 웃사람이 웃옷을 벗으면
나도, 나도... 동조하여 벗는다.
회의나 세미나에서 반대 의견이 많이 나오지 않는 이유도 나도밤나무병의 소치다.
나는 아닌 밤나무로 이의를 제기하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며, 자칫 그것이 심하면
이단시되고 소외당한다. 그래서 한국에 있어 회의는 반대 의견이나 소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아니라 동조하게끔 변질시키는 과정이라 해도 대과가 없다. 그래서
회의장 안에서 하는 회의는 형식적이고 회의장 밖에서 변질시키는 공작이 진짜
회의다. 그렇게 동조시켜 놓고서 만장일치! 짝짝 하고 끝난다.
유태인들의 모임에서는 그것이 국회든 종교 회의든 반상회든간에 '회원 전원
일치의 결의는 무효'라는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 재판정에서도 배심관들의 유죄표가
무죄표보다 1표가 많았을 경우 그 판결은 무효가 되어 무죄가 된다. 2표 차가 나야
비로소 유죄 판결이 난다. 소수 의견을 이토록 존중한다. 이스라엘 국회에서도 전원
일치의 결의는 무효다.
이런 일이 있었다. 카터 미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 국회에서 연설을 했을 때
짓궂기로 소문난 코헨 여사가 말끝마다 물고 늘어져 국빈을 당황하게 했던 것 같다.
이에 의장 직권으로 코헨 의원의 퇴장을 만장일치로 가결, 퇴장을 명했다. 이에
그녀는 '만장일치의 결의는 무효'라고 버티고 앉아 있었다 한다. 정말 코헨 의원을
퇴장시키고 싶었으면 누군가 사꾸라 표를 던져 퇴장 의안에 반대했어야 했던
것이다. 소수의견과 반대의견을 존중하는 문화적 배경 없이는 이 같은 제도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발명왕 에디슨의 발명 제1호는 전기투표기록기였다. 일일이 투표함까지
걸어나아가 투표하는 번거로움을 덜고 의석에서 버튼만 누르면 찬반의 수가
나타나는 그런 편리한 기계다. 이걸 쓰면 소수 의견이 박탈당하고 다수 의견이
횡포를 부리기 때문이다.'라고. 이것은 '나는 아닌 밤나무'의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수렴하려는 민주주의 정신의 구현이다. 표결만이 전부라면 다수파의 승리는
자명하고 토론은 의식에 불과하며 졸고 있어도 된다. 민주적인 의논이란 다수파가
소수파의 비판에 시련받는 과정이요, 그 소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협상 테이블에 여야나 노사가 나도밤나무가 되어 일률적이고 강경일변도로
나간다면 하나마나의 협상이 되고 말 것이다. 양편에서 각기 '나는 아닌 밤나무'의
의견에 비판받고 또 수렴하여 협상 테이블에 퍼스트 카드, 세컨드 카드, 서드
카드...를 들고 나와야만이 협상은 숨통이 트일 것이다.
@ff
19. 원심병
결합항을 극소화시키고 대립항만 비대시켜 나가면 개인이나 가정이나 정치사회가
양극화하여 서로 증오하고 헐뜯고 끝내 얻는 것은 파멸밖에 없다.
어느 한 일선 부대에서 장병들의 정서 함양을 위해 공작 한 쌍을 길렀던 같다.
워낙 금실좋기로 소문난 새인지라 낮에는 볕받이에서 거닐다가 비가 내리거나
이슬이 내리는 밤이면 단 두 마리만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진 침실에 정답게 들어가
있곤 했다.
그 후 또 한 쌍의 공작이 늘어났다. 늘어나면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이다. 금실이
좋은 탓인지 공작은 투정 또한 대단하다. 동물의 공격습성을 연구하여 노벨상을 탄
로렌츠에 의하여 수공작은 그의 날개를 보다 크게, 도 날개의 무늬를 보다 영롱하게
과시하는 것으로 암공작을 유혹한다던데 이것이 남의 각시에 대한 추파라 하여
암공작을 유혹한다던데 이것이 남의 각시에 대한 추파라 하여 수놈끼리 필사적으로
싸운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 새망 속에서 쌍쌍간의 적의가 팽배한 가운데 서로 싸우다가도 비가
내리거나 밤이슬이 내리기 시작하면 단 두 마리밖에 들어갈 수 없는 침실에는
예외없이 쌍방의 암컷 두 마리가 차지하게 하고 두 라이벌 투사들은 초라하게 비를
맞으며 밤을 새운다는 것이다. 싸울 때는 깃이 다 빠지도록 싸우면서도 합의와
예의가 필요할 때에는 이토록 의젓한 양보와 아량을 베푸는 공작은 기사요, 신사인
것이다. 당간, 파간에 긴장이 팽팽한 요즈음 정국에 시사한 바 큰 공작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비단 정치사회뿐 아니라 세상 더불어 사는데는 서로 상극하는 대립 측면과 서로
상화하는 결합측면이 있게 마련이다.
대립측면에서는 아름답고 영롱한 그 깃이 다 빠지도록 싸워도 좋지만
그러하다가도 결합측면을 당하면 비내리는 밤의 공작새처럼 관용과 아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역학이 대립측면에 작용하면 원심력이 되어 양극, 양분화로 치닫고,
결합측면에 작용하면 구심력이 되어 화합, 동일화로 아물어 든다. 이 양극화 현상을
원심병이라 해두자.
우리 한국인은 예부터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리를 평가할 때 대립측면만을
부각시켜 그 일부로써 전체를 성격지우는 원심병에 양성이었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이 콩(대두) 꽃은 노랗고 팥(소두)꽃은 붉다고 여기고 있다. 콩이 노랗고 팥이
붉기 때문에 열매 빛깔로 꽃빛깔까지 연장시켜 생각한다. 실은 콩꽃이 붉고 팥꽃이
노란데 말이다. 율곡 이이 선생은 젊었을 때 신변의 번뇌를 가눌 길 없어 머리 깎고
절에 좀 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불교를 이단시했던 유교지상사회인지라 이 유교의
대학자는 이 잠시 동안의 이단행 때문에 평생동안 갖은 수모와 소외를 당하며 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립측면에 이렇게 무자비한 우리 한국인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이같은 원심논리는 비일비재했으며, 그 때문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뒷걸음질한 일 또한 비일비재했다.
이견이나 이설을 존중하는, 존중하지 않더라도 인정한다는 것은 구미사회에서
생존 조건이며 그 때문에 우리보다 잘 살게 됐다고 해도 대과는 없을 줄 안다.
한국의 중류층... 하면 자기 집이 있고 TV와 냉장고가 있으며 자식들을 높은 학교에
가르치는... 식의 물질적 조건으로 판단하려 들지만 영국의 중류층은 물질적
조건과는 아랑곳없다. 영국 중류층의 3대조건은 1) 자타가 더불어 자랑할 수 있는
자기 집 독자의 요리솜씨 하나 이상 지녀야 하고 2) 서툴망정 자기나름의 도락적인
학문, 예술, 악기, 스포츠 하나씩을 즐길 줄 알아야 하며 3) 자신의 독자적인 의견을
분명히 갖되 자신의 의견과 다른 남들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세
가지다. 3)항이 바로 우리에게 중증인 원심병을 면역시킨 요인이랄 수 있다.
결합항을 극소화시키고 대립항만 비대시켜 나가면 개인이나 가정이나 기업이나
정치사회가 양극화하여 서로 증오하고 헐뜯고 끝내 얻는 것은 파멸밖에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결합항은 진보와 반동, 체제와 반체제, 여와 야, 노와 사, 이편과
저편의 대립에서 기회주의가 아니고 O X 사고에서 세모꼴이 아니며 흑백논리에서
회색이 아니다.
바로 공자가 말한 화이부동이다. 화합은 하지만 뇌동하지 않고 서로의 뜻은 같지
않지만 조화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정국을 바로잡은 명상 유성룡은 그의 정치철학을 이렇게 말했다. '동은
물에 물탄 것 같고 화는 국에 맛을 조화하는 것과 같다. 정사를 하는 사람은 무릇
화하는 것이어야지 동해서는 안된다.' 정견은 부동해야 하지만 그 부동을 양극화하지
말고 국맛을 맞추듯 화해야 하는 것이 정치요, 바로 정치의 묘가 그에 있다 했다.
정국의 여야나 기업의 노사는 단적으로 원심병이 악화 일로로 치닫는 단계로
성격지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정치는 증발하고 없는데 원색적인 발언만이 오가고,
말에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양상이야말로 이 원심병이 중태에 들어갔다는 단적인
증상이다. 국회는 대립논리만이 난무했고, 오로지 단 하나 자신들 호주머니를 늘리는
세비 인상하는 데만 결합 논리를 작용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팽팽한 대립의
중간에서 와지직 찢어지는 소리가 나고 있는데 말이다.
성명이 번지고 단식이 늘고 각목이 춤추고 방화로 검은 연기가 충천하고 있는데,
그것을 수렴하는 구심력은 행방불명이다.
임어당이 영국 의회의 의원 끽연실을 '화이부동당'이라 호칭한 것은 퍽 시사한
바가 있다. 의회당에서 신발을 벗어던지며 격론을 벌였던 정적끼리도 일단 이 방에
들어오면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스카치를 나누며 유머와 환담을 한다.
그 우정과 환담에서 새로운 창조가 잉태한다. 서로가 정견을 달리하면서도 더불어
어려운 일에 부딪쳐 인간사회의 개선에 협력하고 또 서로가 상대방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겸허한 마음가짐을 갖기 때문이다. 의회당에서 여야끼리 녹초가 되도록
싸운 날이면 여야에서 대표를 내어 체스 경기를 벌이기까지 한다니 화이부동당이
아닐 수 없다.
팽팽한 원심의 가운데 목에 화이부동당의 집을 짓고 그 속에 들어와 고함을
지르고 우격다짐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 속에서 화이부동하는 정치와 기업의
부활을 보고 싶은 것이다.
@ff
20. 응어리병
그래서 우리 옛 목민의 첫째 조건이 백성의 한과 원을 몰아오는 응어리가
무엇인가를 통찰하여 그 응어리를 풀어주고 또 응어리를 생기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선조 때 정승 백사 이항복이 조정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여염 부인인 길
앞을 가로질러 갔다. 정승에 대한 무례요,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이에 전도하는
하인들이 이 여인을 꾸짖고 밀치어 땅에 엎어지게 했다. 집에 돌아와 백사는
하인들을 불러놓고, "길가는 백성을 밀치어 땅에 엎어지게 한 것은 백성의 원을
사는 일로 심히 부당한 짓이다."라고 엄하게 꾸짖었다. 조금 있으니 그 여인이
뒤쫓아와 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서서 다음과 같이 발악을 하는 것이었다.
"머리 허연 저 늙은이가 종들을 놓아 행패를 부려 나를 길바닥에 엎어지게 했으니
네가 정승이 되어 나라에 유익한 일 한 것이 무엇이길래 이 따위 위세를 부리느냐.
너의 죄로 말할 테면 마땅히 귀양을 가고도 남을 것이다."
이것으로 그치질 않고 혹심한 욕설을 마냥 퍼부어댔다. 당시 신분 사회에서
정승에 대해 이같이 해댄 것을 보면 이 여인도 대단한 맹렬 여성이었던 것 같다.
마침 그 자리에는 손님 한 분이 있었는데, 이 발악과 욕소리를 듣고 "어느
누구에게 하는 욕설입니까?" 하고 물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백사는 웃으면서
"머리 허연 늙은이가 내 말고 누가 있소."했다. 이에 손님은 안색을 바꾸며, "왜 저
여인을 잡아들이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백사의 대꾸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먼저 잘못했으니 그 백성이 성내어 욕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마음대로
욕설을 퍼부어 분을 풀고 가야 백성의 마음 속에 응어리가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그 수가 많든 적든 간에 백성에게 마음의 응어리를 생기지 않게 하고 응어리가
생길 양이면 풀어 주어야 한다는 백사의 정치철학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응어리가 뭘까. 사람의 몸은 기와 피와 살이 맥락 조화되어 이루어 졌다고 우리
선조들은 생각했다. 한데 그것이 조화돼 흐르지 않고 맺히면 기체, 혈체, 육체로
병이 생긴다. 이 흐르지 않고 맺히는 체를 응어리라고 했다. 기가 충만해서
탈출구를 못 찾을 때 '기가 차다'고 하고, 기의 유통이 단절됐을 때 '기가 막히다'고
하듯이, 무형의 기가 외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맺혀 있을 때 응어리라고 한다. 불평,
불만, 원망, 탄식 등을 발산 못 하고 속에 맺혀두는 것을 '옹이지다'고 하고, 겨우
입속말로 투덜대는 것을 '응얼거리다', '옹잘거리다'고 하는 것과 응어리는 같은 의미
계열의 말이다.
우리 한국은 역사적으로 민권 위에 관권이, 여권 위에 남권이, 인권 위에 권세가,
인간 위에 삼강오륜이, 상민 위에 양반이, 살아 있는 자손 위에 돌아가신 조상이
타고 눌러내린 바람에 놀부에게 오장육부 말고 심술보 하나가 더 있듯이
'응어리부'하나가 더 있어 내렸다.
서양의 역사는 이같은 외압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역사라 해도 대과가 없는데,
우리 한국의 역사는 이같은 외압에의 순종이 강요된 역사라 해도 대과가 없다.
그래서 응어리는 우리 한민족의 고질이 돼버린 것이다. '아리랑'이 우리 민족 정서에
품이 꼭 들어맞는 것도 '날 버리고 가시는 님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라.'는
응어리풀이가 주제가 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응어리가 오래 풀리지 않으면 한이 되고 이 한이 사무치고 공감대를 형성하면
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 원이 하늘에 사무치면 날이 가물고 벼락이 치고 홍수가 나며 일기 불순을
일으켜 흉년을 몰아온다고 알았다.
그래서 우리 옛 목민의 첫째 조건이 백성의 한과 원을 몰아오는 응어리가
무엇인가를 통찰하여 그 응어리를 풀어 주고 또 응어리를 생기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무속의 푸닥거리가 본풀이니, 살풀이니 하는 '풀이'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 응어리를 푸는 굿이기 때문이요, 우리나라 무속신이 최영장군이며, 공민왕이며,
남이장군, 임경업장군 등 원한을 풀지 못하고 죽은 사람인데 예외가 없음도 바로 그
못 풀고 죽은 응어리에 대한 민중의 공감력이 별나게 강하고 예민하다는 단적인
증거인 것이다.
@ff
21. 어른아병
한데 요즈음 자녀들은 아버지의 단절원리는 전혀 작용받지 못하고 어머니의
포용원리에만 무한대로 감싸이면서 자라기에 서른 살이 가깝도록 자립 못하는
의존적 인간이 어른아가 되고만 것이다.
어른아...란 말은 국어사전에 없다. '어른+아이'를 합성해서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어른과 아이, 곧 성년과 미성년이 공존해 있는 사람으로 어른이기도 하고
아이이기도 하며 반면에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어중간 한 인간이 어른아다.
아이 속에 어른이 들어앉아 있고 또 어른 속에 아이가 들어앉아 있기도 한 어른과
아이 사이에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연결 인간이다.
이 어른아는 순박한 아이어야 할 때 걸맞지 않게 어른 행세를 하고 숙성한
어른이어야 할 때 응석부리는 아이 행세를 한다. 요즈음은 온통 매듭상실의 어른아
세대가 판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먼저 가정에서 증발되고 없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매듭을 보자. 아버지가 먹는
밥상과 아이들이 먹는 밥상은 그 질이 같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 밥상의 질이
더 좋은 경우도 없지 않다. 옛날에는 아버지 밥에는 보리쌀이 더 들어가거나 같은
고깃국일지라도 고깃덩이가 더 들어가고 아이들 상에 오르지 않은 별식이 더러
있었다. 밥그릇이나 숟가락부터도 달랐다. 겸상을 하더라도 아이들은 아예 젓가락을
대어서는 안 되게끔 사전에 지시받은 별식이 있게 마련이었다. 차등을 두는 것이
반드시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어른과 아이는 식탁부터 매듭이 확연하게
지어져 있어 어른의 영역, 아이의 영역을 확연하게 인지하고 자라나갔다.
또 잘살든 못살든 일곱 살만 되면 어머니의 슬하를 떠나 아사랑이라는 동년배
집단 속에 끼여듦으로써 응석을 단절한다. 유럽에서도 '어른아'를 매듭짓는 나이가
일곱 살이다. 14세기에 유아세례를 할 때 사제는 '이 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만
물이나 불이나 말로부터 보호돼야 한다.'고 엄연하게 하느님에게 선서를 한다.
지금도 미국 동부의 WASP(앵글로색슨 계의 신교도) 가문에서는 일곱 살만 되면
목장에 데리고 나가 승마를 시킨다. 낙상해서 다치거나, 죽거나하면 그것은 제
팔자로 미루어 버린다고 한다.
메리메의 소설 "마테오 팔코네"에는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섬에 사는 농부 부부와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등장한다. 부상을 당한 이탈리아 독립군이 헌병에게 쫓겨 이
외딴 마테오의 집에 숨어든다. 뒤쫓아온 헌병 상사는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아들에게 회중시계로 유혹, 숨어든 곳을 알아낸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 마테오는
그의 아들이 시계에 팔려 밀고한 비인간적이고 부도덕적인 사실을 알자 아들로
하여금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시킨다.
용서해 주라고 울며 붙드는 어머니를 땅에 쓰러뜨리고 이 아이를 강변으로 끌고
나간다. 조금 있다가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퍼졌다. 혼자 돌아온 아버지
마테오는 울부짖는 어머니에게 '가엾은 놈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한다.
소설 속의 일이지만 부자간의 사이가 이토록 잔인하게 매듭지어지는 것이 유럽의
역사적 상식이었다.
개척시대의 미국에서만도 아버지가 아들을 법정에 데리고 가 증언만 하면 사형을
선고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이처럼 자라나는 자녀에게는 옳고 그르고 또 잘하고 못하고를 선명하게 매듭짓고
단절하는 부성원리와 옳고 그르고 밉고 곱고 잘하고 못하고 간에 무한히 포용하는
모성원리가 더불어 작용하게 마련이다.
한데 요즈음 자녀들은 아버지의 단절원리는 전혀 작용받지 못하고 어머니의
포용원리에만 무한대로 감싸이면서 자라기에 서른 살이 가깝도록 자립 못하는
의존적 인간인 어른아가 되고 만 것이다.
가정에서뿐만 아니다. 사회에서도 어른아를 매듭짓는 단절 원리는 증발되고 없고,
온통 포용 원리만이 판치고 있다. 버스나 전철 속에서 아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어른들이 서 있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뿐이 아닐까 싶다. 원칙적으로 구미
각국에서는 걷지 못하는 대여섯 살난 아이가 아닌 이상, 소학교 1학년일지라도
단거리의 공공승용차 속에서 앉는다는 법은 있을 수가 없다. 자리가 비어도 그
자리는 어른이 앉을 자리라는 확연한 매듭 때문에 앉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매듭이 확연하기에 유럽의 소학생들은 이미 중학생만 되면 자신의 장래에 대해
뚜렷한 목표를 나름대로 지니고 있으며, 그 목표대로 직업을 선택하는 비율이 무려
78퍼센트나 된다는 통계를 접한 일이 있다. 그래서 서양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려느냐고 물으면 우리 아이들처럼 대통령이나 육군 대장이 된다는 아이는 없고
선생이나, 운전사나, 간호사나 우편배달원 등 뚜렷하게 그 목표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졸업을 앞둔 대학생마저도 자신의 장래를 모르고 그저 급료가 좋고
정년이 길며, 복리시설이 잘 갖추어진 회사면 아무데나 좋다는 막연한 생각들을
갖게 마련이다. 진학할 때도 이 학교 저학교, 이 학과 저 학과... 부모가 정해
주었기에 취직도 누군가가 정해주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된다.
또한 밥을 안 먹어줄 테야... 공부를 안 해줄 테야... 나가서 안 놀아줄 테야...
학교에 안 가줄 테야...하는 부성원리를 거부하고 모성원리에 응석만 부리든
아이들이 모성원리가 통하지 않는 집 밖의 사회에 나가면 별스럽지 않은 일에
좌절을 하고 자해자살을 시도하는가 하면 단세포적인 폭행 가해를 스스럼없이 한다.
학교에서도 사제간의 매듭이 없기로는 유사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런
우스개이야기가 있다. 어느 한 서당 선생이 죽어 가고 있었다. 제자들이 울며불며
미음이라도 드십사고 권하자 이런 병세에 미음을 먹으라는 말이 책에 적혀 있지
않다고 막무가내다. 그럼 꿀물이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시라고 하자 서책을 갖고
오게 해서 뒤져내게 하는 동안 숨을 거두고 있다. 스승의 고식성을 빗대는
우스개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제간의 매듭을 끝까지 유지하는 교육적 의미도 있는
것이다. 스승의 그늘은 세 발 물러서 밟지 말아야 하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그늘을
갖고 논다. 사제간에 매듭이 없다는 것은 권위를 상실하는 것이 되고 권위를 상실한
스승은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그 매듭없이 배운 제자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안하무인의 무법적 어른아가 된다.
1964년 일본 동경대학을 과격파 학생들이 점거, 동대학의 문학부장인 H교수를
불법 감금했었다. 보름이 지나도록 풀어 주질 않자 전국에서 여론이 들끓고 구출해
내지 않은 경찰에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한데 알고 보니 경찰의 실력행사에
의한 구출을 H교수가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지금 갇혀서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으니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불법감금이라는 비상수단도 상대가 두려워하거나 겁을 먹거나 할 때 효과가 나는
법이지 감금당한 본인이 피해자 의식을 갖지 않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황하기
시작한 학생들은 빠져나갈 기회를 주었으나 전혀 도망칠 기색을 찾아볼 수 없자
끝내는 손을 들고 말았다.
학생들은 'H교수의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는 글러먹었다. 하지만 조금도 흔들림없이
일관해서 글러먹은 점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석방 이유이며 학생의
적의가 존경으로 돌아가고 일본 백성들은 일본에도 진정한 교육자가 살아남아
있었다고 흠모했던 것이다.
한국의 고질병인 어른아병은 어른아를 구별하지 않고 방영되고 또 시청되는
텔레비전에 의해 가속되고 있지만 그 뭣보다 부모가 단절원리를 포기하고 스승이
단절원리를 포기한 데 가장 큰 병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ff
22. 중앙병
벼슬을 하거나 학문을 하거나 예술을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취직을
하더라도 중앙, 곧 서울이 아니면 안된다는 이상한 중앙 집약적 논리가 우리
한국인의 현대병 가운데 고질인 '중앙병'을 앓게 하고 있다.
우리 한국 사람은 가운데를 무척 좋아한다.
빈 자리가 드문드문 있는 지정석 없는 기차를 탔다 하자. 어느 손님이든 문간
가까운 빈 자리에 일단 앉고 본다. 한숨 돌리고서 보다 가운데에 빈 자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반드시 그 가운데 자리로 옮기는데 예외가 없다. 한국인의
중앙지향이 그렇게 이동시킨다. 아파트의 층별선호에서 그 중앙지향이 완연하게
드러난다. 서양 사람들은 맨 위층이나 맨 가줄에 있는 변경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한데 우리 한국 사람은 가운뎃줄 가운데층을 보다 선호한다. 상하층의 값과
중간층의 값에 몇 백만, 몇 천만 원의 차이가 나는 나라는 아마도 이 세상에서
우리나라뿐이 아닐까 싶다. 옛날 인구가 많이 집산하는 큰 도시에는 전주, 충주,
상주처럼 '주' 자가 붙어 있다. 이 주 자가 붙어 있다. 이 주 자 돌림의 큰 도시는
대체로 변경인 바닷가에서 내륙으로 파고들어 가운데인 바닷가에 발달한 것과
비겨봄직하다.
한국인을 상대로 한 많은 의식조사에서 자신이 중간층이나 중류층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연구에 따라 80__90퍼센트에 이르고 있고 이 마을은 상승추세에
있다.
물론 자신이 중간층에 속해 있다는 것과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같지
않지만 이토록 중간층 의식이 부풀어 있다는 것도 한국인의 중간지향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한국인의 중간층 의식에는 환상중간층의 퍼센티지가 가산 돼
있다고 보아야 한다.
벼슬을 하거나 학문을 하거나 예술을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취직을
하더라도 중앙, 곧 서울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이상한 중앙정치 집약적이요, 중앙경제
집약적이며, 중앙문화 집약적인 논리가 지배, 우리 한국인의 현대병 가운데 고질인
'중앙병'을 앓게 하고 있다.
연전에 지방 도시의 각종 간판 상호를 조사한 것을 본 일이 있는데, 가장
선호하는 상호가 '중앙'이요, 버금이 '서울'이었다. 총 조사대상의 1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니 중앙에 대한 향수가 얼마만한가 알게 해준다. 중앙식당. 중앙시장,
중앙상사, 중앙상회, 중앙치과, 중앙기원, 중앙유치원 등등.... 중앙이란 이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중앙'하면 뭣인가 권위가 더 있고 가치도 있으며, 보다 고급 같고
보다 질도 좋으며, 진짜 같다는 막연한 한국인의 중앙병의 바이러스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모든 생활 문화가 중앙문화를 모방하는 의사중앙문화요,
아류중앙문화로 변질되어 그 개성 있던 전통성은 상실해 왔고 상실하고 있으며,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서울에서 먹듯한 불고기를 전국 각지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편리해졌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비통해야 할 일인 줄 안다. 모든 음식문화가
전통적 특색을 상실하고 일률화한다는 것은 음식문화의 멸망을 뜻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국도처의 관광지에서 파는 기념품이 그 관광지에서만이 살 수 있는 개성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비롯, 전국 각지 아무데에서나 살 수 있게 된 것도 그렇다.
중앙문화의 왕성한 식욕이 개성있는 지방문화를 모조리 잡아먹고 획일화시킨
것이다. 중앙은 그지없이 탐욕하다. 서울의 부동자금이 몇 조원씩 떠도는 반면, 우리
농가 빚이 몇 조원으로 누적된 것도 중앙이 살찌고 지방이 피폐해지는 중앙병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몇 조원이란 수치가 바로 중앙편중치라 해도 대과가 없다.
서울 인구가 1천 만을 넘게 된 이유도 바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중앙병의
증상이다.
한국인의 중앙병은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를 정복하지 못했던 데 원인을
찾아볼 수가 있다.
해외로 뻗어 나가는 프런티어십이 신라시대 이후 건포도처럼 쭈그려들어 밖으로
뻗어 나가려는 원심력이 약화되고 가운데로 파고들려는 구심력이 반비례해서 커
왔다.
거기에 왜구들의 약탈이 유사 이래 삼면의 바다를 위협했을 뿐 아니라, 해안
지역을 간단없이 약탈하였기로 가운데로 파고드는 중앙병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했음직하다.
둘째로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가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다스려졌다는 것이 모든
정치, 경제, 문화를 중앙에 집중시키는 전통일 있게 했다.
유럽이나 일본처럼 지방에 권력이나 경제나 문화가 분산되는 봉건제도를 실시해본
역사적 체험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심은 빈약하지만 화심 둘레의 꽃잎들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국화형
문화'는 정착하지 못하고 화심만 멋없이 비대하고 둘레의 꽃잎들이 빈약한
'해바라기형 문화'로 타락해 버린 것이다.
내 자식이 데모에 참가하여 다치는 걸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데모에
참가하더라도 다칠 확률이 높은 맨 앞이나 맨 뒤 같은 가장자리에 서지 말고
가운데에 끼도록 타이르곤 한다. 그 부모의 충고대로 가운데 끼여 데모했다던
아들놈이 밤늦게 붕대를 싸매고 돌아왔다. 그날따라 진압 경찰관이 데모대열을
양분해서 분산시키고자 한가운데로 돌진했던 것 같다. 유비유환이 된 셈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가운데 끼여 있으면 안전하다고 자위하는 부모들의
심성이다. 그 가운데 지향의 심성은 이 부모들뿐 아니라 우리 한국인의 공통된
심성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사람은 감정이나 용기나 지혜마저도 인체의 중심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뱃심이 좋다느니, 배짱이 좋다느니,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느니, 배를 가르고
이야기하자느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담이 크다느니, 대담하다느니, 담략이
뛰어나다느니 하는 것도 그것이다. 선량한 사람을 부처님 가운데 토막같다고 하는
것을 보면 도덕심도 가운데 있다고 본다. 그래선지 옛날에는 고문을 하더라도 등,
배, 옆구리 등 집중적으로 가운데에다 태질을 했던 것같다. 세종대왕을 비롯, 정조,
숙종이 오장과 오정이 맥락된 배나 등이나 옆구리치는 폐단을 통금하는 어명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옛 우리 선조들은 벼슬하는 동안만 서울에 머물다가 벼슬이 끝나면 주저없이
낙향하는 것이 법도였다.
이퇴계 선생은 열한 번 벼슬을 계속했는데, 벼슬을 그만두기가 바쁘게 열한
번이나 고향인 토계로 물러갔었다. 그래서 아호도 토계에 물러가 살았다 하여
퇴계인 것이다. "목민심서"에 보면 벼슬살이할 때 가급적 가족을 데려가지 말되,
굳이 혈육의 정이 그리우면 아들 하나만 데리고 가는 것이 벼슬아치의 덕목이라
했다.
장보고의 동남지나해의 정복은 활달했던 신라프런티어십의 단적인 증거다. 신라
청년들은 풍운을 품고 낚배 하나 띄워 원양으로 모험을 곧잘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비일비재하다. 진평왕 때 설계두라는 신라 청년은
'도대체 골품이나 논하고 문벌만 따지는 신라땅에서 답답해서 못 살겠다. 나는 멀리
서유를 해 비상한 공을 세워 천자 옆에 서서 호령을 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일엽편주를 타고 항해를 떠나고 있다.
먼 인도의 오천축국을 순례한 스님으로 기록에 남은 고승만도 해초스님 등
10여명에 이른다. 대단했던 이 신라의 원심력만 계승되었던들 안으로 쪼그라드는
중앙병은 기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지방에 뿌리박은 대가족제도나 동족부락, 그리고 서원이 나름대로 그나마도
귀거래할 거점을 상실하고만 것이 중앙병을 가속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ff
23. 망년병
경건하게 지난해의 허물이나 실패나 결점을 되돌아 보는 세모의 일주일은 바로
개인이나 기업하는 이나 정치하는 이에게 있어 마이너스감각의 풍속적 보장이랄 수
있다.
망년병은 우리나라에 없었던 외래병이다. 물론 가는 해를 잊는다는 뜻으로의
망년이란 말도 우리나라에는 없었다. 한적에서 망년은 나이를 잊어 버린다. 곧 나이
차이를 초월한다는 뜻으로 쓰였을 뿐이다. 나이가 어릴지라도 재주나 인품을
존중하여 사귀는 친구를 망년지우라 하고 그런 사귐을 망년지교라 했을 뿐 망년회란
말을 쓴 문헌은 없다.
망년회란 말이나 풍습은 일본 말이요, 일본 풍습이다. 그 나라에는 1천4백 여 년
전부터 망년 또는 연망이라 하여 섣달 그믐께 친지들이 서로 어울려 주식과 가무로
흥청대는 세모풍속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도 세모에 어울리기는 하지만 그를 별세
또는 발산이라 했지 망년회라고는 하지 않았다.
망년병이라는 외래 병균이 현해탄을 건너오면서부터 오히려 원생지보다 더 조건이
좋은 기생지를 만난 것이다. 이 세상에서 혈연, 지연, 학연 같은 연줄을 가장 즐겨
찾고 그 연줄에다 자신을 얽매어두기를 좋아하며 그러해야만이 안도를 하고 그
연줄따라 가치체계가 형성되는 나라가 우리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연줄에서 떠나
살더라도 언젠가는 희귀하다는 전제와 가능성 아래 살고 있는 연줄 이산민족이다.
망년회는 이 연줄 이산민에게 회귀의 원점을 던져주는 것이기에 외래 병균이 걷잡을
수 없이 기생하여 불치의 고질이 돼버린 것이다.
"고암가훈"에 보면 우리 선조들은 3연 12친이라 하여 연중 안부를 묻고 살아야
할 연줄을 제시하고 있다. 3연이란 혈연, 지연, 학연이요, 12친이란 혈연으로는
내팔촌, 외육촌, 처사촌, 내외사돈, 그리고 지연으로는 동, 방, 현, 목에 같이 사는
친지를, 그리고 학연으로는 서당, 오학, 사관, 대과에서 더불어 공부한 동문과
배웠던 스승을 뜻한다.
이 20번이 기본망년회요, 준망년회도 무궁무진하다.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끼리
동성동명망년회, 파리에서 같이 살았던 사람끼리 파리망년회, 어느 대학의
공과출신으로 비공과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끼리의 서자망년회, 병실에 함께 입원했던
사람끼리 동상망년회.... 심지어 동기동창망년회로도 만족 못하여 몇 학년 몇 반 때
같이 다녔던 반창회까지 유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고수망년회라하여 산천의 풍류를
즐기는 모임인 줄 알았더니 고스톱 친구들끼리의 망년회라하여 실색한 일도 있고....
'소셔빌러티(사교학)'라는 미국의 새 학문에서 성인 한 사람당 평균 50개 연줄로
8백 명 꼴로 사귀고 있다 했다. 이 사교학의 이론을 믿는다면 우리 한국 사람은
갖기로 들면 최대한 50번의 망년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된다.
2천만 명의 성인이 한 사람당 1만 원 회비의 망년회를 열 번씩 갖는다 하면
2조원이라는 돈이 먹고 마시며 흥청거리는데 날려 버리는 것이 된다.
우리나라 예산의 8분의 1이 넘는 거액이다. 그 돈이 극빈자에게 분배되었다면...
하고 가정해 본다면 그 흥청거림이 미치는 정신적 황폐나 그러하지 못하는 계층간의
위화감 같은 불가시의 손실은 2조원을 한결 웃돌 것이다.
우리 전통적 세밑습속을 되뇌어 보면 더욱 이 망년병이 새삼스러워진다. 지금도
시골집 부엌에 가면 정화수를 담은 백자 보시기를 흔히 볼 수 있다. 부엌신인
조왕신을 연중 그렇게 독실하게 모셔왔던 것이다. 이 조왕신은 한 해 동안 그 집
식구의 행실을 낱낱이 보아 두었다가 섣날 스무나흗날 밤에 승천하여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옥황상제에게 낱낱이 보고하는 것으로 알았다. 선행이 많으면 많은 만큼
이듬해에 복을 내리고 악행이 많으면 많은 만큼 이듬해에 화를 내린 것으로 알았다.
이렇게 조왕신이 새로운 운명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굴뚝을 통해 돌아 오는 날이
섣달 그믐날이다.
섣달 그믐날 밤 조허모라 하여 집안팎, 심지어 외양간, 칙간, 굴뚝의 개자리에까지
기름불을 켜놓고 밤을 새우는 뜻은 이 조왕신의 하강을 경건히 맞기 위함이다.
이렇게 승천에서 하강까지의 이렛동안 우리 선조들은 목욕재계하고 근신을 했던
것이다. 지금 상천에서 자신이 심판대에 올라서 있는데 어떻게 먹고 마시고
흥청거릴 수 있겠는가. 신과 나와 직결되어 형성된 원초적인 양심을 프로이트는
초자아(슈퍼 에고)라 했다. 우리 한국인이 연중 초자아로 돌아갈 수 있었던 단
한번의 시공이 바로 이 세모의 1주일 동안이었다. 이 동안에 식구끼리 친구끼리 또
부인네들끼리, 궁중에서는 궁녀들끼리 모여 한해 동안 자신이 한 일 가운데 양심에
걸리는 일을 돌아가며 고백하는 '속뵈기'라는 습속도 있었다. 특히 궁녀들의 세모
속뵈기는 엄숙했다 한다.
물론 이 속뵈기에서 한 말은 면책이 되기에 그 때문에 한 해 동안 남몰래 받아온
스트레스로부터 해방이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결함을 반성함으로써 훌륭한
발전의 계기가 되었음직도 하다. 또한 이 경건한 세밑풍속으로 우리 한국인이
얼마나 선량해졌을까 생각하면 뭉클해지기까지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에 세모에 친지들끼리 모여 러시아 판
속뵈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약간의 불편으로 행상하는 한 노파에게 욕지거리를 하고 손찌검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 노파는 병든 과부였으며, 훗날 마음에 걸려 다시 찾아 갔을 때는 죽고
없었다고 고백한다. 다른 한 사람은 남의 집 가정 음악회에 초대되어 가 빈 방에
떨어져 있는 3루블짜리 지폐를 주워 슬쩍했다고 고백한다. 그 때문에 그 집 여급인
고아소녀가 의심받고 쫓겨난다. 눈만 감으면 그 소녀가 원망하는 눈매로 노려보아
괴롭다고 말한다. 얼마나 경건하고 생산적인 세모 습속인가.
사람이 한 일에는 보기에 따라 잘 되었다고도, 또 잘못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자기가 한 일을 되돌아보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 가짐을 '마이너스
감각'이라고 개념화한 것은 미국의 경영하자 훼스팅거다.
그는 개인이나 기업하는 사람이나 정치하는 사람에게 마이너스감각이 왕성하면
성장을 하고 결여되면 파멸한다는 법칙을 계수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결혼을 앞둔
연인들은 상대방의 장점만 보려는 플러스 감각이 왕성하게 작동한다. 만약 장점만
보고 결혼을 하면 결혼 후에 드러나게 마련인 단점들 때문에 그 결혼은
불행해지거나 파멸로 치닫는데 예외가 없다. 그래서 훼스팅거는 마이너스 감각으로
단점을 애써 보다 많이 찾아들고 시집 장가가기를 원한다.
경건하게 지난해의 허물이나 실패나 결점을 되돌아보는 세모의 일주일은 바로
개인이나 기업하는 이나 정치하는 이에게 있어 마이너스 감각의 풍속적 보장이랄 수
있다.
해가 다 저물었다. 외래성의 망년병을 주체화, 경건하게 마이너스 감각으로 자신을
뒤돌아보는 생산적 세모풍습을 되찾는 반환점이었으면 한다.
@ff
24. 흑백병
'내가 주장하는 정론정략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내가 주장하는 정론정략대로
하면 당리당략에 해가 될 수 있다.'는 겸허한 생각으로 임하면 긴장된 정국도
느슨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통감이란 우리말이 있다. 역사란 뜻이지만 역사보다 뜻이 심오하다. 역사란
지나온 사실에 그치지만 통감은 과거의 사실에 그치지 않고 그 사실을 거울(감)로
반사(통)시켜 오늘의 지혜로 삼는다는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듯이 더해 있다. 큰일을
할 때나 또 난국을 타개해 나갈 때 비록 시대의 배경은 다를망정 옛 사람의
시행착오를 참작한다는 것은 실패를 줄이고 실마리를 푸는 좋은 단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 다스리는 사람은 위로는 정승부터 아래로는 수령에
이르기까지 궤상에는 각종 통감이 반드시 놓여 있게 하고 통감 행위를 동사화해
자주 거론했던 것이다. 오늘날에 되살려 정치하는 사람들의 상용어가 됐으면 싶은
동사다.
우리 전통 정치사회에서 정치를 다음 세 개의 유형으로 가려 볼 수 있다.
정암(조광조)형, 퇴계(이황)형, 방촌(황희)형이 그것이다.
정암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굽히지 않고 관철해 내는 직정적인 정치
스타일이다. 임금에게 간할 때 허락한다는 말을 듣지 않고는 밤새워서라도
버티어내는 강경파다. 따라서 악의든 선의든 간에 적이 많았다.
이를 경계하여 그의 삼촌인 판서 조원기는 다음과 같은 훈계 편지를 띄우고 있다.
"대게 사람이란 천지 가운데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인데 기를 곧게 세우다가 새처럼
높이 떠서 살거나 짐승처럼 멀리 달아나 살 수 없는 법이니 조금은 세속과 같이
하여야 남의 미움을 면하는 것이다. 옛날 두기공은 문인들을 경계하여 모난 것을
헐어 둥글게 하여 두드러진 옥이 되지 말고 흔한 기왓장이 되라. 지금 때가
두기공의 시절보다 험하기가 만 배나 더하니 남의 경계가 어찌 조금도
쓸모없겠느냐." 하였다.
하지만 정암은 "곧은 도리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다행히 살면 살고 혹 불행하여
죽으면 죽는 것이다. 화와 복은 하늘에 있는 것이니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 하고
끝내 직선적 정치 스타일을 굽히질 않았다.
이에 비해 퇴계의 정치 스타일은 자신의 정론을 절대시하질 않았다. 그는 열한 번
조정에 나아갔다가 열한 번 은퇴를 한 분이다. 선조가 퇴계를 대접하는 예우가
극진하고 융숭하였는데도 조정에 들어오는 일이 드물고 또 들어왔더라도 곧
돌아가곤 하므로 한 친지가 물었다.
"임금께서 공을 대우하는 것이 옛날에 소열황제가 제갈량 모시듯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도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에 대한 퇴계의 대꾸에서 퇴계의 정치 스타일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요순시절에는 임금과 신하가 서로 화합함이 천고에 비할 데가 없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정사가 옳았으니 글렀느니 하는 하는 말이 있는데 지금 주상께서는 노신의
말에 가부를 묻지 않고 마냥 이를 좇으시니 나는 이 때문에 나랏일 이 걱정되어
감히 머물지 못한다."
곧 정치가는 곧잘 내 주장만이 최고라는 독선에 빠져 극한화하고, 당쟁이 생기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정치적으로 구제해 내는데 퇴계형 정치 스타일의
묘미가 있다.
반대 의견이나 이론을 아낌없이 수렴하여 조화시키는 것이 방촌형 정치
스타일이다.
방촌의 알려진 고사로 노비 싸움의 재판 이야기가 있다. 싸우는 두 노비에게
이편도 일리가 있고, 저편도 일리가 있다 하자, 곁에서 듣고 있던 조카가 옳고
그름이 완연해야지 어찌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고 하시느냐고 반문하자 너도 일리가
있다고 한 이야기다.
곧잘 우유부단으로 이 고사를 왜곡 해석하고 있으나 흑심을 먹고 하는 일이 아닌
이상 세상의 사리는 흑백으로 나 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어딘가에 있는 일리를
가려내어 대리에 비춰 그 일리를 수렴 조화시키거나 취사 선택하거나 하는 것이
방촌형 정치 스타일이다.
성균관 유생들이 방촌의 행차를 길에서 막아서서 '네가 소위 정승이 되어 임금의
그릇됨을 바로 잡지 못한단 말이냐.'고 면박을 한 일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체제측에 서서 반체제 학생들의 집단공박을 당한 셈이다. 정승의 행차인지라 가마
앞에만 얼씬해도 중벌을 받는 세상이지만 방촌은 이 면박에 조금도 노여워하질 않고
너희들의 그같은 기개가 없으면 나라는 썩은 물이 괸 못과 다를 것 없다고
기뻐하였던 것이다.
정승으로 있을 때 북진을 정벌하고 수복한 김종서가 병조, 이조판서를 하고
있었다. 직정적으로 일을 곧잘 처리하였기로 방촌은 박절할 정도로 김종서에게
면박을 주었고, 그의 종을 잡아다 대신 매질을 하곤 했다. 정승 맹사성이 당대의
명경인데 어찌 그렇게 허물을 잡으시오 하고 탓하자, 방촌은 "우리 뒷자리에 앉을
사람인데 저만 옳다 하고 기만 세워 상황을 돌아보지 않으면 국사가 어떻게 되겠소.
반대의 뜻으로 내 뜻을 고르게끔 버릇들이려 함이요." 방촌이 정승을 물러날 때
김종서를 추천하여 앉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세 정치 유형은 각기 시대와 상황에 따라 꼭 들어맞을 수도 있고 또 어긋날
수도 있다.
다만 극한으로 치닫는 이 정국에서 어떤 유형을 본받거나 통감해야 하는가는
자명하다. 곧잘 경직화되게 마련인 당내외 민주주의의 연육제로는 퇴계형 정치를
통감하는 것이 좋을 성싶다. '내가 주장하는 정론정략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내가 주장하는 정론정략대로 한다면 당리당략에 해가 될 수 있다'는 겸허한
생각으로 임하면 찢어질듯 긴장된 정국도 느슨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거기에 방촌형 정치를 통감하면 정국의 차렬형은 유예될 것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대전제라면 반대당의 일리에 인색할 수가 없다.
서로가 정치적 교류뿐만이 아닌 인간적 교류까지 끊고 양극화한다는 것은
양당간의 평면적 단절만이 아니다. 멀어진 만큼 비례해서 백성으로부터도
멀어져가는 입체적 단절임을 알아야 한다.
@ff
25. 최고병
실제의 자기보다 상위에 자기가 처해 있다고 착각하는 의식을 환상상향이라고
하며, 이 환상상향 때문에 생긴 공백이 바로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각박하게 하는 인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연전 파리로부터의 외신보도에서 세계 일류품이요, 귀족의 애용품이라는 루이
뷔통의 핸드백 본점 고객 가운데 한국인의 비율이 두드러진다는 뉴스를 본 일이
있다.
흥미 있는 것은 그 본점이 있는 파리에서 루이 뷔통의 고급 핸드백을 가진 여인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루이 뷔통뿐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세계적 최고급 시계인 로렉스나 오메가쯤 차고 있는 것은 별스럽지도 않다.
던 힐이나 뒤퐁의 라이터도 흔해 빠졌다. 여성들에게도 피에르가르댕의 스카프나
구치의 핸드백쯤 그다지 희귀한 것이 못 된다. 세계적으로 값비싼 술인 나폴레옹
코냑이나 시바스리갈쯤 마신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한국인은 없다.
외국에서는 상류층에 있는 사람도 그만한 술을 마셨다면 자랑할 이야기거리가
충분히 된다던데 말이다.
이 한국인의 외제병은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옛 우리 선조의 마음
속에서 그 병균이 양성화돼 있었던 풍토병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중종실록"에 당대 사대부들이 최고급 의상인 초구, 사라로 몸치장을 하고 옥개
없는 가마는 창피하다 하여 타지 않으려는 성향마저 있다고 사치풍토를 개탄하고
있다.
부녀자들의 두식 사치도 심하여 요란스런 가발을 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렸더니
이제 당물인 주취로 장식한 호화화관이 유행하여 가발을 막느니만 못하다
했고--"정종실록", 손에 들고 다니는 부채가 베 8, 9필 값과 맞먹는 명나라 것이
유행했다고도 했다.--"효종실록".
인조 때는 사치가 어찌나 심했던지 가마꾼마저도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금단을
입는다고 상소하고 있다.
역대에 혼기를 놓친 사녀가 항상 큰 사회문제가 돼 왔고 또 지방의 목민관이 해야
할 일로서 이 혼기 놓친 처녀 총각을 여의어주는 것이 큰 일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혼기를 놓친 가장 큰 이유로서 각종 문헌이 혼인 사치를 빈번히 들고 있다.
'근래에 혼인 사치가 심하여 상하 없이 당물을 쓰는 것이 관례가 되어 어려운
사람은 거의가 혼기를 놓치고 있으니 금령을 내려 주옵소서.' 하고 중종 17년에
예조가 계언을 올리고 있다. 이미 세종 때부터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외래
사치품으로써 시집살이 장만을 하는 풍조가 지배적이어서 혼기를 놓친 사람이
많다는 실록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연산조 때는 사헌부에서 부잣집의 결혼을
신고토록 하여 의녀로 하여금 납채, 혼장, 혼물, 연찬 등을 검찰시킬 것을
상소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 선조들 모두가 이 외제병 환자는 아니었다. 선비사상은 청빈을
가르쳤고, 지족을 가르쳤으며, 수분을 가르쳐 검소하게 사는 것에 가치를 두었고
그렇게 살아낸 선조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치병에 감염될 소지는 우리 일부 한국인의 정신적 원형질에 항상
도사려 왔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소지의 형성 이유가 무엇일까?
사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가난'의 체질화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랫동안 전화 등 이변으로 최저한의 생이 보장되지 않았기에, 곧 하한선을
유지시켜 줄만한 안정시기의 지속시대가 없었기에 불안의 역작용이 상향심을
가속시켜 최고병으로까지 치솟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으로
족하지 못하고 손아귀 밖에 있는 것만을 헤아리면 항상 기근감에 허덕이며 사치를
하면서도 가난하다는 느낌에서 해방되질 못한다.
곧 지족하는 사람들은 가구나 옷, 그림, 식기 등 모든 것을 값이 비싸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맘에 들기에 산다. 곧 물건은 자기의 연장인 것이다. 이에 비해
지족하지 못한 사람은 그가 지닌 물건이 고급품인가 여부로 자기를 나타내는 척도로
삼는다. 즉 자기가 물건의 연장이 돼 버린다.
국산 술이든, 자동차, 전축, 냉장고든 내구소비재의 이름 붙이는 것을 봐도
한국인이 최고병에 어느 만큼 영합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가 있다. 최고를 나타내는
외래어는 빠짐없이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로열, 골드, 슈퍼, 디럭스,
프레지던트....
둘째로 분수 이상으로 자기를 과시하려는 한국인의 환상상향을 들 수 있다.
사람을 곧잘 최고한난계로 비유한다. 여느 보통 한난계는 기온이 오르면 수은주가
오르고 기온이 내리면 따라 내리는데 비해 최고한난계는 수은주가 오르면 최고
표지의 푯말을 떠받쳐 오르지만 수은주가 내리면 푯말은 그 최고 지점에 남아 있을
뿐 따라내리지 않는다. 곧 최고 온도계가 표시하는 눈금과 수은주가 표시하는
눈금과의 사이에는 항상 공백이 있다.
이것을 사람에 비기면 자기 자신이 처해 있다고 생각되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직위와 자기 자신이 실제로 처해 있는 직위와는 어느 만큼씩의 공백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꿔 말하면 내가 보는 주관적 자기와 남이 보는 객관적 자기는 일치하지 않으며
이 공백이 크고 작고의 차이는 있지만 일부의 우리 한국인에게 공통된 심성의
하나로 적시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실제의 자기보다 상위에 자기가 처해 있다고 착각하는 이같은 의식을
환상상향이라고도 하며, 이 환상상향 때문에 생긴 공백이 바로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각박하게 하고 초조하게 하는 인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인자는 우리들의 많은 버릇을 탄생시킨 온상이 되고도 있다. 이를테면 값비싼
것을 분에 넘게 지니려고 하는 최고병도 이 환상상향의 환상 스테이터스를
충족시키려는 데서 파생된 정신병폐다.
우리 한국인에게 있어 최고병은 외제병과 종이 한 장 사이이기에 최고병은
무분별한 외제선호로 나타났다. 곧 한국인은 외제의 질을 따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외제라는 상표 곧 남들이 외제로 보아주니까 산다 해도 대과가 없다. 왜냐하면
남에게 과시하고 싶어 환상적으로 상향시킨 스테이터스만 충족하면 되기 때문이다.
@ff
제3부 임도 보고 뽕도 따고
@ff
1. 한미관계의 반성
미국의 인간관계에서도 겉만이 있다. 곧 사회적 조건으로 밖에 나타낸 것의 그런
관계다. 이에 비해 한국인의 인간관계는 표리의 이중구조로 돼 있다.
맥아더는 어느 사석에서 '일본은 열두 살 어린이요, 한국은 여섯 살 어린이'라고
말했다 한다.
일본을 미국에 비겨 열두 살이라 했음은 다만 미국 사람 측에서 보아 자기에의
모방이 아직 불충분하다는 것에 불과하다. 곧 표준을 자기네들에게 두고 봐서
한국은 여섯 살 어린이인 것이다. 물론 한국의 국민성에는 많은 결함이 있다.
그럼에 있어서는 미국도 같다. 반면에 우리가 그들에게 어린이일 수 있듯이 그들도
우리에 비해 어린이인 측면 또한 많다. 우리들의 문화는 미국의 그것에 비기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고 그만큼 세독돼 있다. 과밀지대에서 몇천 년
살아왔기 때문에 인간관계 처리는 고도로 성숙돼 있을 것이다. 곧 그 측면에서도
미국 사람이 여섯 살인 것이다.
오늘의 혼란은 우리 한국적인 동일성을 부정하고 얼핏 보아 정밀하고 합리적인 것
같지만 실속은 거칠고 기계적이며, 인간 본질의 이해로부터 떨어진 미국의 인간관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취한 것은 좋지만, 인간관계로부터 교육에 이르는 모든 것을 이
미국의 이론 위에 구축하려 했던 데서 혼란을 몰아온 것이다.
미국의 모든 신조는 앵글로 색슨 퓨리터니즘 위에서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토양은 그것이 아닌데 그들의 신조가 이상적으로 뿌리내린다는 것이 오히려
넌센스가 되고 만다.
우월문화는 마치 윗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열등 문화 쪽으로 흘러간다. 해방 후
세대에 공통된 의식구조 가운데 가장 보편성을 지닌 것으로 미국문화는 우월문화요,
한국문화는 열등문화라는 이분사고를 들 수 있다. 그래서 미국 것이면 비상도
좋다고 여긴다. 따라서 선별없는 수용을 해왔고 지금은 모든 사물의 판단을 미국적
가치관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 젊은이들에게 끼친 의식구조면에서의 선은 곧 사물판단 기준의
미국화를 맨 먼저 들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양식을 별반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먹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대개의 경우 양식집에서는 빵으로 하겠는가
밥으로 하겠는가 택일하게 돼 있는데 필자는 밥을 택하는 것이 관례가 돼 있다.
거기에 몸이 비대한 편이어서 양식집에서 나오는 접시 밥으론 양이 안 차 한 그릇
더 불러 먹게 마련이다. 여급더러 밥 한 그릇 더 갖다 달라면 예외없이 이 여급들은
'라이스 말예요?' 하고 되묻는데 예외가 없다. '밥 달라는데 라이스는?' 하고
반문하면 이 여급들은 라이스도 모르는 자가 양식집에 다 왔다는 그런 측은하고
가엾다는 눈매로 필자를 깔아보는 것이었다.
한번은 '얘, 밥하고 라이스하고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 본 일이 있다. 이 아가씨의
대꾸는 명답이었다. '공기에 담아 온 것이 밥이고요, 접시에 담아 나온 것이
라이스'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별반 미국문화에 젖어들 기회도 갖지 못했을 이 여급에게까지 라이스는
밥보다 우월하고 보다 가치가 있어 보이며 영양가도 많은 것 같은 그런 막연한
인식을 주게 한 그 분위기다. 그 분위기는 곧 사물판단 기준의 미국화에 오염된
그런 분위기가 이처럼 괴변확대를 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인 것이다.
한국 사람이 영어를 서툴게 하거나 틀리게 하면 수치로 알고 미국 사람이
우리말을 서툴게 하거나 틀리게 하면 애교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 가치 전도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한국 사람은 영어를 잘 못해야 하는 당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으며 얼마든지
잘못해도 되는데도 열등감을 갖는 소치는 바로 이 전도된 의식구조 탓인 것이다.
둘째, 미국문화가 끼친 한국인의 의식구조면에서 실은 양자택일이라는 O
X사고다.
배와 사과는 어느 쪽이 고급 과실이냐. 여론조사를 한다. 배쪽이 고급이라는
사람이 다섯 명, 사과 쪽이 네 명이다. 그럼 배를 고급으로 정한다. 그것이 진리이며
선이 된다. 이같은 O X사고를 객관적 평가법이라 하여 대학 입학시험 취직시험까지
확대 적용함으로써 이 사고를 젊은이들에게 체질화시켜 놓은 것이다.
반동이냐 진보냐, 체제냐 반체제냐, 내편이냐 남의 편이냐 하는 이분법으로
인간관계를 단순 처리한다. 부패 급식빵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 그럼 급식빵이
나쁘니까 X다. X는 나쁘다. 나쁘니까 없애 버린다. 이렇게 급식제도가 나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급식 관리가 나빠서 일어난 일인데도 O X사고는 급식제도가 나쁜
것으로 극단사고를 한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이같은 이분법은 적어도 인간에게 적용한다는 법은 없었다.
유자광은 유명한 간신이었다. 그러나 중종반정 때 공훈을 받고 있음을 O
X사고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앙받았던 학자 김안국은 간신
김안로와 절친한 사이였다. 친하면서도 김안로를 규탄하고 규탄하고서도 친분을
유지했다.
인간관계에는 어떤 상황에도 대립측면과 결합측면이 있다. 정면충돌은
대립측면만이 가능했을 경우에 일어난다는 조건부요, 유한적인 것에 불과하다. 결합
또한 그렇다. 이 결합과 대립에는 깊고 얕고 넓고 좁고 다양하다. 그같은 본질적
이해가 있으므로서만이 인간다운 인간관계가 성립된다. 옛 우리 인간관계도 이처럼
이분법으로 따져지질 않는데 묘미가 있었다. 거기에만이 참다운 의미의 대화가
존재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노사, 사제, 부자, 부부 등 모든 관계가 기계적이고 형식적 관계로
타락한 것도 이같은 인간관계의 변질 때문인 것이다.
미국의 인간관계에도 겉만이 있다. 곧 사회적 조건으로 밖에 나타낸 것의 그런
관계다. 이에 비해 한국인의 인간관계는 표리의 이중구조로 돼 있다.
스승은 지식을 전승해 주는 그런 사회적 조건의 표관계 이외 일생동안 은혜로
맺어진 인간적 이관계와 평행해서 유지된다. 옛날의 직장에서 과장과 과원은 직책,
직능상의 표관계 이외의 친부모다운 인생의 선배로서 배려하고 추종하는 그런
인간적 표리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한데 미국문화의 영향으로 스승은 네가 내는 등록금을 받고 그 대가로서 지식을
전달하는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만으로 타락해 버리고 과장은 직책상의 관계만으로
고갈해 버린 것이다.
한데 미국문화의 영향으로 스승은 네가 내는 등록금을 받고 그 대가로서 지식을
전달하는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만으로 타락해 버리고 과장은 직책상의 관계만으로
고갈해 버린 것이다.
셋째, 미국 문화가 변질시킨 한국인의 의식 가운데 '수줍음'의 상실을 들 수 있다.
수줍음은 곧 함수로 치에 가까운 부끄러움과는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누가 보고
있지 않을 때도 항상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의식 시선이 없는 시선의 자의식이 곧
수줍음이다.
부끄러움이란 항상 타자를 의식함으로써 우러난다. 그러기에 부끄럽다는 것은
타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수줍음은 아무도 없다. 혼자 있는 방에서도
수줍고 나도 몰래 얼굴 붉히는 그런 의식, 그런 감각이다. 이 의식, 이 감각이 그
사람의 행위, 말, 몸짓 속에서 아련히 스며나오는 그런 것이다. 그것이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하는 아름다움이요 덕이며, 인간미며, 사람 사는데 윤택하게 하는 정신적
습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한데 미국문화는 이 습기를 말려 버리고 한국의 젊은이들을 드라이하게 했다.
그들 정신피부는 소녀같이 윤택하지 않고 마치 70대 노인처럼 메말라 까슬까슬하다.
뻔뻔스럼고, 닿기만 하면 '칵!' 하고 즉시 반응형이다.
여대생 딸을 가진 한 친구는 어느 날 한 낯선 젊은 청년의 방문을 받았다. 그
청년은 당돌하게도 선생님 따님을 사랑하는 남자라고 자기 소개를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결혼할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사나이의
사윗감 여부로서가 아니라 그렇게 드라이하게 나올 수 있는 젊은이들의 개연성에
실망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수줍고 망설이는 것보다 시원시원하게 처리하는 것이
가치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기계나 물질끼리의 관계 같으면 가치를 형성하지만 인간관계는
반드시 그같은 합리적이고 타산된 요소보다 비합리적이고 정적인 요소가 몇 곱절
크게 그 관계를 향상시킨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우리나라는 인간관계의 실천면에서는 미국보다 한결 선진국이며 나이로 따지면
미국은 여섯 살이다. 한국 재발견의 필요성은 바로 이같은 미국적 인간관계에 묻힌
한국적 인간관계의 동일성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의 전진 가능성은 이같은 우리의 세련되고 원숙한 지혜를 밑바닥부터
발굴하여 이것을 현대화하는데 있다고 본다.
우리는 미국문화의 포유시대에 머물러 젖을 빨고 있기에는 남보기 부끄러울 만큼
늙어 있는 것이다.
@ff
2. 모든 일에 바쁜 한국인
곧 빨리 가야 자리를 차지하고 빨리 가야 물건을 차지한다는 어떤 전통적 정신
체질이 한국인을 정신적으로 꾸준히 채찍질 하고 있는 것이다.
밤기차를 타본 승객들에게 대전역 구내의 국수맛은 별미다. 도착에서 발차까지의
짧은 시간에 쫓긴 승객들은 앞다투어 뛰어내리려 흡사 국수소동을 벌인다.
이 국수의 별미를 알고 있는 한 미국인 친구는 언젠가 이 국수소동 속에서
현명하게 별미를 즐기는 비결을 나에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이 무모한 소동의 와중에 끼어들지 않고 소동이 끝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유유히 내려가 한가로이 한 그릇을 비우고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곧
여유있게 먹을 것 다 먹는다.
서로 앞다투어 내려간 다중이 각박하게 먹고 난 시간과 이 미국 친구가 여유있게
먹고 난 시간과는 근소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외국인이 한국에 사는 가장 필요한 지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우쭐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비단 쫓기는 시간 안에 국수를 먹는 일뿐만이 아니라 한국인은 항상 쫓기듯
바쁘다.
이를테면 지하철은 그다지 붐비지도 않는데 항상 붐빈다. 타고 내릴 때마다 빨리
타고 빨리 내리려는 한국인의 개연성이 집중되어 이 가속심리가 붐비게 한다.
차문이 열려서 닫힐 때까지의 시간이 30초로 알려져 있는데, 이 30초란
시간개념이 없기도 하지만 항상 어디서든 재촉하고 쫓기는 한국인에게 별나게 강한
'빨리 빨리'의 의식구조 탓이 아닌가 싶다.
한국의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 구내, 선착장은 달리는 사람으로 인상지어진다
해도 대과는 없다. 탈토처럼, 더러는 큰 짐을 이고 끼고 절뚝절뚝하며 남녀노소없이
달려간다.
그 와중에 끼면 달리지 않을 수 없는 나를 이따금 발견한다. 달려가 보지만 결국
그 달림이 아무런 실용적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리곤 한다.
시간이나 공간에 여유가 있는 줄 알면서도 발이 빨라진다. 차에 올라타서
권태로운 몇십 분을 지나면서도 일단 빨리 올라 타놓고 본다. 곧 시간과 공간에
완전한 보증이 돼 있는 경우에도 한국인은 달린다.
혹시 물리적으로는 달리지 않는다 해도 마음은 초조하여 항상 달리고 있는 것이
한국인의 정상적인 상태다.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항공기 납치사건이 있던 직후의 베이루트에서 필자는
탑승자의 대열에 서 있었다.
지갑 속까지 뒤져보는 철저한 수하물 검사바람에 시간이 굉장히 늦어져 있었다.
비행기의 이륙시간이 5분 전으로 다가왔는데도 검사를 기다리는 탑승자의 대열은
1백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 끼인 나는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초조함을 참지 못하여 짐을 앞사람에게 맡기고 여행사를 찾아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여행사 직원은 "모두 태우고 갈 테니 안심하십시오." 하며 초조한 나를
조소라도 하듯 야릇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돌아와 서 있던 나는 이륙 시간을 한 시간 정도 넘겼을 무렵 다시 초조함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나와 더불어 열을 짓고 있는 백 여 명의 백인들도 나와 똑같이 초조했을까.
초조했다면 저토록 태연하게 서 있을 수 있을까.
나는 북구계 미국인이라는 뒷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비행기가 이토록 늦어진데
불안을 느끼지 않는가고.
그의 대꾸는 "늦어진 이유를 알고 있는데 왜 불안합니까." 라는 것이었다.
왜 한국인만이 이런 경우에 그토록 초조한가. 물리적으로는 비록 열 속에 서
있지만 마음 속에서는 바쁘게 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길에서는 빨리 가자 하고
일할 때는 빨리 하라 한다. 대화에서는 빨리 말하라 하고 밥상에서는 빨리 먹으라
한다.
양계장에서는 빨리 알을 낳으라고 전등으로 밤을 없애고 과수원에서는 빨리
익으라고 과실에 주사를 놓는다. 그러기에 텔레비전 유머에 '바쁘다 바빠'하는
평범한 말이 그토록 유행어로 정착하리만큼 어필했을 것이다.
이 항상 쫓기듯한 의식구조 때문에 빨리, 재빨리, 날쌔게, 얼른, 금세, 당장, 냉큼,
선뜻, 후딱, 싸게, 잽싸게, 속히, 즉각 등등... 가속부사가 어느 다른 나라보다
발달했다.
마작도 단판승부요, 범죄도 한탕에 천금을 얻으려 한다. 이제 연인들간에
플라토닉한 요소는 거추장스럽다. 임금도 즉각 인상하라 하고 배척도 즉각 물러가라
한다. 정치도 경제도 물가도 성급하고 행정에서도 급행료가 생기지 않았는가.
왜 이렇게 바쁠까.
두 가지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하나는 수요공급의 차질이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수요에 비겨 공급이
흡족했던 시대가 없었다. 그러기에 남보다 빨리 앞서지 않으면 그 공급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러기에 남보다 빨리 앞서지 않으면 생존과 관계가 있기에 바쁘다.
미국 사회에서 한국교포가 야채상을 시작하면 여타의 백인들 야채상이 골탕을
먹는다는 것이 상식이 돼 있다 한다. 왜냐하면 남달리 일찍 일어나 신선하고 보다
양질의 야채를 가져다 점두에 늘어놓기에 손님이 몰릴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백인
야채상들이 연서명하여 한국 상인의 이 재빠른 행동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 관례가
돼 있다 한다.
곧 빨리 가야 자리를 차지하고 빨리 가야 물건을 차지한다는 어떤 전통적 정신
체질이 한국인을 정신적으로 꾸준히 채찍질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로서 한국이 지정학적으로 쌀농사의 북한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는 것 같다.
유럽의 보리나 밀농사는 씨뿌리고 수확할 때까지 굳은 흙을 깨주는 중경이라는 단
한번의 손질만 해주면 된다. 이에 비해 한국의 벼농사는 못자리에서 벼베기까지
20__30번씩 일손을 들여야 한다. 같은 쌀농사이지만 남방에서는 씨를 뿌리고 베기만
하면 되는데 북한이라는 여건 때문에 어느 단시일 동안에 무슨 일을 꼭 해내지
않으면 안 되게끔 기후에 의한 연속된 시한의 노예가 되고 있다. 만약 물을 못
얻는다든지 그 어느 시한을 놓치면 태풍에 벼가 쓰러진다. 그 어느 시한을 어기면
서리를 맞고 그 어느 시한을 놓치면 벼가 썩는다. 이처럼 주어진 시한 안에 재빨리
그 일을 해내지 않으면 벼농사는 망치고 말고 망치면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
그러기에 한국인은 바쁘다. 바쁘지 않으면 살 수 없게끔 농경적 조건이 돼 있기에
바쁘다는 의식이 체질화돼 버린 것이다.
이 바쁘고 빨리 해야 한다는 의식구조는 이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근면이라는
황금을 한국인에게 안겨 준 것이다. 어느 제한된 시간 안에 가장 그 일을
능률적으로 잘해 내는 능력의 소유 민족으로 한국인과 일본인을 손꼽는 것이
통념화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같은 조건이면 일본 사람보다 한국
사람이 보다 근면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은 일본보다 더
북한지대에 속하고 따라서 보다 시한적인 부지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천부적인 부지런을 어떻게 촉발하느냐가 앞으로 연구돼야 할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싶다.
@ff
3. 내 나름대로 사는 지혜
타인지향의 남 나름주의에서 내 나름주의를 구제해야만 할 것이다. 남이 한다고
'나도...' 하지 말고, 또 남이 불안해 하고 들뜬다해서 '나도...' 하지 말고 내
책임아래 내 나름대로 사는 지혜를 터득해야 할 것이다.
한 나그네가 등짐을 지고 길을 가고 있었다. 도중에 빈 길마를 맨 소 한 마리를
만나 같이 가게 된다. 나그네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왕 빈 길마로 갈 양이면 등에
멘 짐을 싣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나그네는 등짐을 벗어 옮겨 소 길마에 싣고
한결 편하게 걸어간다. 다시, 기왕 가는 길이면 소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그네는 등짐을 벗어 옮겨 소 길마에 싣고 한결 편하게 걸어간다. 다시,
기왕 가는 길이면 소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가다 보니 기왕이면 보다 빨리
하자 이제 보다 빨리 달리고 싶어졌다.
마냥 채찍을 휘둘러 달려간다. 점점 채찍이 강해지자 이에 격앙된 소가 마냥
미친듯 날뛰는 바람에 나그네는 소 등에서 사정없이 나가 떨어져 팔다리가 부러지고
길마에 실었던 짐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나는 이 전승된 우리 우화를 현대를 사는 소중한 지혜로써 항상 되뇌이면서
생활을 안락하게 해주는 근대화의 흐름에 적당히 저항을 하며 살아왔다.
도시화, 기계화, 전화 등으로 산업화 사회는 숨가쁘게 생활을 안락하고 또
편리하게 해왔다. 그것은 마치 나그네가 소를 두고 차츰차츰 자신을 안락하고
편리하게 하려 했던 과정과 똑같은 것이다. 사람은 소 길마에 짐만 싣고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타려고 든다. 타면 빨리 가고 싶고, 빨리 가면
달리고 싶다. 달리던 소가 천천히 가면 나그네는 불만이요, 또 불행하게 여기며 타고
가던 소에서 내려 걷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나그네는 불만을 느낀다.
산업화 사회는 안락과 편리를 위한 상향을 지향하지만 그 상향은 불안정한 주변
여건 때문에 하향할 가능성을 항상 동반한 그런 성향이다. 곧 상향과 하향의 복합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러기에 상향만 타다 보면 소 길마로부터 내동댕이쳐져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마는 하향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자동차도 없었고 냉장고도 없었고 나일론 스타킹도 없었던 옛날 사람들이
오늘날의 현대인보다 모두 불행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그런
이기가 없었던 옛 사람보다 한결 행복하다고 여기는 현대인도 아마 없을 것이다.
곧 행복은 편리나 안락과는 별개의 차원인 것이다. 상향만 타면 오히려 불행해질
확률이 크고 상향과 하향을 적절히 절충, 조절하여 분을 찾아 누리면 불행을
극소화시킬 수가 있는 법이다.
소 길마에 짐만 지우고 걸어가는, 혹은 소에게 채찍질만 하지 않는 분을 지켰던들
이 나그네는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짐바리를 분실하는 불행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산업의 발달이나 물질문명의 발달은 상향성이 강한 시기와 하향성이 강한 시기가
끝바꿈하면서 진행된다. 지금 우리 경제사회는 하향성의 시기인 것이다.
지난 상향시기에 보다 강하게 상향만 탄 사람일수록 당황하고 불안해 하고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아예 소를 타지 않은 사람은 소가 미쳐 날뛰어도 대안의
불이요, 아랑곳없다.
대체로 우리 한국인은 내 나름대로 한다는 내 나름의식보다 남처럼 나도 한다는
남 나름의식이 강한 편이다. 곧 타인 지향성이 강하다.
그러기에 남이 메추리를 기르면 나도...하여 메추리 공황이 일고, 남들이 휴지를
사재면 나도...하여 사재기 공황이 일며 남들이 과외를 시키면 나도...하여
과외공황을 일으킨다.
곧 '상향'하면 이 타인지향으로 과열상향을 하고 '하향'하면 그 하향이 전혀
피부에 느껴지기도 이전에 불황공황이 들뜬다.
나는 이같은 한국인의 남 나름주의를 한국인 고유의 자질이 아니라 개화기 이래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극히 새로운 정신자질로 보고 있다.
농경문명은 대체로 안정사고를 하고 현상유지를 하는 보수적 성향이 강하며
자신의 분에 맞는 수분 의식이 강한 편이다.
한데 우세한 구미문명이 추종하는 것이 바로 근대화요, 현대화라는 잘못된 개념이
형성된 이래 이 외래문명의 요소에 동조해야만이 현대에 살아 남을 수 있고 적자가
된다는 그런 의식체질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시시각각 물밀듯이 밀려드는 외래물질문명에 동조하는 습성이
체질화되었고 이 동조 현상이 남 나름주의 곧 타인지향의 새로운 정신체질을
파생시킨 것으로 보인다.
우세한 구미문명은 그것을 형성시킨 어엿한 정신적 척추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속'인 이 정신적 척추는 마치 소갈비 추리듯 빼어놓고 '겉'인
물질문명만을 도입해서 추종해 온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곧 한국적인 정신에
접목이 되지 않았기에 남 나름주의의 추종현상이 더욱 성할 수밖에 없다. 무턱댄
상향은 불행과 직결될 확률이 크기에 분의 지혜를 이번 기회에 터득해야 할 것이다.
아마 소를 타고 채찍질하다 팔다리를 부러뜨려 본 나그네는 두 번 다시 그같은
상향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타인지향의 남 나름주의에서 내 나름주의를 구제해야만 할 것이다.
남이 한다고 '나도...' 하지 말고 또 남이 불안해 하고 들뜬다해서 '나도...' 하지 말
고
내 책임 아래 내 나름대로 사는 지혜를 터득해야 할 것이다.
분을 지키고 내 나름대로 살면 아무리 불황의 폭풍이 불어도 불경기의 역풍이
불어도 의연해질 수가 있는 법이다.
@ff
4. 만족을 모르는 속성
자기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상향을 모색하되 그 상향은 자신의 노력과 근면의
대가로 얻어진 일단계 위쪽의 상향이어야 한다.
만약에 1백만 원이 생긴다면 많은 한국인은 그 1백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호사를 발상한다.
흥부전에서 흥부가 박을 타자 수십 섬의 쌀이 나왔다. 물론 가난에 쪼들렸던
감정적 반작용도 작용했겠지만 흥부는 그 수십 섬으로 단번 아이들을 불러낸다.
10여 명 되는 흥부의 아들들은 철환처럼 이 밥산에 틀어박혀 밥을 먹는데 밥 속에
묻혀 보이지는 않고 그저 꿈틀거리기만 했다 한다.
수십 섬의 쌀은 아껴 둔 분량으로 분을 지킬 줄을 모른다. 만약에 1백만 원이
생긴다면 그것을 자신의 분에 맞게 또 장래를 위하여 살아가는데 뜻을 부여할 수
있도록 쓴다는 법없이 남들이 선망하는 표피적이고 단세포적인 허영의 가치에다
자신을 매몰하는데 소비한다.
한국인의 소비성향은 대체로 이같은 화살표의 연장 위에 놓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생각해 보자. 이를테면 흥부가 박을 타서 나온
쌀이기에 수십 섬씩 대량으로 밥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하다.
노동이나 노력의 대가가 아닌 횡재이기에 그같은 무턱댄 소비가 가능한 것이다.
만약 흥부가 관가에서 태를 대신 맞고 얻어온 쌀말이라면 그것을 한꺼번에 밥을
짓는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땀을 흘려 노력한 대가라면 그것이 아무리 큰
재산이라 해도 낭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데 낭비를 한다는 것은 그 낭비하는
돈이 노력의 대가로 생긴 돈이 아니라는 결과가 된다.
평당 50만원 짜리 대지 4백 평에 건평 2백 평의 3층 석조 양옥, 시가 3억 원짜리
집이 있다. 옥외 풀장이 있고 자가용 2대, 독일제 피아노 2대, TV가 4대, 가정부는
3명이다.
사실 더 사치할 여분이 없다. 그러기에 이제 해외도피로 그 상향성의 사치는
비약을 한다.
벽면에 비밀금고를 만들었다. 그 속에는 세 개의 특수 허리띠가 들어 있었다. 그
허리띠에는 4만5천 달러의 외화가 숨겨져 있었다. 그 밖에도 그 금고에는 1천만 원
어치의 금붙이가 들어 있었다.
또 자물쇠도 잠그지 않은 경대 서랍에 4백만 원 돈이, 옷장 속에 또 다른
1천4백만 원의 돈이 각기 굴러 있었다 한다. 그리고 그 집 주인이 외유 끝에
들어오면서 1천만 원쯤은 항상 집에 있었다고 태연스럽게 말했다 한다.
지금 나는 아라비아 토후나 미국에 망명한 아프리카의 추장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지불보증을 하고 3백 50만 달러의 차관을 들여와 철강업을
시작했던 한국 사람 얘기다.
그 기업은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혀 관리가 산업은행으로 넘어갔고 그는 파산
지경에 살 집마저도 빚으로 넘어갔다 해서 동정까지 샀던 분이다.
한데 웬일인가, 3억짜리 호화주택에 살면서 집에 굴러다닌 돈만도 그의 기업을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히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금액인 10여 억을 훨씬 웃돌았던
것이다.
또한 다른 예를 들어보자. 3년 동안 26만 달러를 해외에 빼돌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3만 달러짜리 벤츠를 몰며 하루 1천 달러씩 뿌린다. 국내에서는
1천 5백만 원짜리 오스틴을 몰며 배우, 탤런트 등 백여 명을 엽색해 왔다. 넥타이만
3백 89개요, 구두가 26켤레, 허리띠만도 56개나 되었다. 또 엽색용 미끼로 핸드백이
73개, 목걸이가 40개, 팔찌가 20개....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겠다.
이 두 케이스는 작금에 들통난 호화 풍조의 극히 일부분이다. 호화를 극한 끝에
외화를 도피시켜 해외이주로 그 호화성향을 연장시키는 한국적 사치의 정해진
루트를 이 두 사람은 걸었을 뿐이다. 이미 그 길을 걸어가 산 사람도 허다하고
지금도 그 루트를 걷고 있는 사람도 허다하다. 그리고 그 루트를 선망하고 있는
사람 또한 허다하다.
이같은 사회 풍조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정상적인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벌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곧 정치와 경제 및 사회의 구조적 결함을 이용해서
횡재를 했으며, 그 횡재에서 번 돈은 노동의 대가로 주어진 돈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흥부가 대신 매를 맞고 얻은 엽전과 박을 타서 나온 천만금과 질이
다르듯이....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또는 문화적 위치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의 분량은
그 위치의 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하다는 사실은 비단 성현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진실이다. 곧 손꼽는 재벌이나 구멍가게 주인이나 또 장관이나 5급 공무원이나 그
위치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의 양은 같다. 높을수록 잘 살수록 행복이 많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한데 한국인은 지위가 높을수록 재산이 많을수록 비례해서 행복의
분량이 많은 줄로 안다. 서구처럼 횡적이 아니라 종적인 상향구조 사회의 특성이긴
하나 한국인의 인생 목표는 항상 비현실적인 상향의 지위요, 상향의 부다. 그리고
일생 상향만 하다가 만족을 못하고 죽는다. 곧 자기의 현실적 위치에 만족을 하지
못한다.
이같은 상향구조의 한국적 의식구조에 횡재가 야합하면 앞서 지적한 부조리가
기생한다.
이미 부패해 버린 일부의 반사회적 사치풍조를 탓한다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격이다. 다만 이같은 개연성이 지금 우리 국민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횡재할 기회가 있으면 위험을 무릅쓰고 그에
뛰어들고, 흥부의 박씨를 얻으면 나도 벤츠를 타고 로스엔젤레스를 누비며 배우,
탤런트를 엽색하겠다는 그런 개연성이 두려운 것이다. 자기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상향을 모색하되 그 상향은 자신의 노력과 근면의 대가로 얻어진 바로 일단계
위쪽의 상향이어야 한다. 2단계, 5단계, 10단계의 점핑 상향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불행으로 보상을 받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었다.
만약의 1백만 원은 생기질 말아야 한다. 1백만 원이 생기질 말고 1백만 원을
벌어야 한다.
@ff
5. 임도 보고 뽕도 따고
논다는 것은 악덕이 돼 있으며 노는 사람은 패가망신할 사람으로 소외당했다.
논다는 가치가 우리나라처럼 비가치화한 사회도 없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여가관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정립돼 있었다. 소대 그리스
사람들은 어떤 그럴사한 이유가 있더라도 여가가 없는 생활을 최저의 생활로
여겼다. 바꿔 말하면 놀거나 쉬지 않고 생업에 열중, 부자가 되느니보다는 가난한
대로 여가 있는 생활을 보다 가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이상으로 삼았던 생활이란 어느 정도의 토지와 노예와 가축을
갖고 오전 중에 목장이나 밭을 둘러보고 시장에 가서 가축이나 농산물을 팔아 생활
필수품을 구입하고는, 오후에는 저하고 싶은 대로 각박하지 않게 놀고서 밤에는
향연에 참석한다. 곧 오전만 일하고 오후와 밤을 즐긴다. 그 여가의 오후에는
도처에 만들어져 있는 경기장에 가서 경기 연습을 한다. 그 경기장은 비단 경기
연습만 하는 곳이 아니라 사교장이요, 정보 교환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서로
얼려 정치나 학문, 문학, 연극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는 공개 진행하는 재판소,
민회에 들렀다가 이발소에 가서 시정배들과 잡담을 하고 집에 돌아온다. 밤에는
친구들을 번갈아 초대, 향연을 베푼다.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에 보면 그 향연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고 있다. 저녁밥을 마치고 신들에게 포도주를 바치고 신들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 다음 손님들에게 화관을 나누어 주고서 술자리에 앉는다.
자정을 넘게 지속되게 마련인 이 향연에서 지성적인 의논이 오가기도 하고, 피리
부는 직업 여인이나 무희를 불러다가 여흥을 즐기기도 한다. 향연에 나갈 때는
정장을 하도록 돼 있으며 항상 맨발로 돌아다녔다. 또 소크라테스도 향연에 나갈
때만은 가죽으로 만든 샌들을 신었다 할 만큼 예의가 강하게 요구되었던 것 같다.
이처럼 그리스 사람들은 여가를 최대로 벌어 그 여가를 농도짙게 즐기는 데에
갖은 지혜를 짜냈던 것이며, 이 여가 향유에서 후세 유럽 문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그리스의 독특한 문화가 꽃 피어나고 있다.
전시에는 용감한 전사가 되고, 민회에서는 능변의 대변자가 되며, 경기에서는
챔피언이 되고, 가무에 빼어나며 학문과 시작에도 일가견을 갖게 된다. 이같은 여유
있는 생활 아니고는 직접 민주제에 의한 도시국가 사회를 유지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같은 여가를 얻어낼 수 있었을까. 사가들은 생업을 대행해 주는
노예제도가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주된 생업인 목축업이 사람의
일손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던 데에도 큰 이유가 잇다.
결국 여가관을 달리하게 하는 큰 요인은 생업에 있다. 이 일손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 목축업이나 상업을 주된 생업으로 영위해 온 유럽 사회의 여가관이
그리스의 여가관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생업 때문이었다. 11세기부터
유럽에서 주로 짓기 시작했다던 농사도 우리 한국의 농사에 비기면 농사도 아니다.
초겨울에 밭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이듬해 봄에 응어리진 흙을 깨어주고는 수확만
하면 되는 그런 유럽 농사에서는 얼마든지 여가를 얻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이 세상에서 가장 급격하게 자주 기후가 변하는 몬순 지대에서 가장
일손을 많이 요구하는 벼농사를 주로 지어온 우리 한국 사람은 그 생업 구조가
여가를 낼 겨를을 주지 않았다. 가령 호남 지방에서는 중복에서 이레 안으로
세벌김(세 번째 제초)을 매지 않으면 논에 잡초가 자라나서 수확이 떨어지든지 하는
어느 시한 안에 정해진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각박한 시한 구조로 연속돼 있다.
여가가 끼어들 틈이 없는 곳이다. 거기에 24시간 노동을 해야 했다. 유럽에서는 7,
8시간만 집중적으로 일하고 나머지 16시간은 바캉스다. 이에 비해 우리 한국에서는
유럽처럼 집중 노동은 할 필요가 없지만, 잠을 자면서도 물꼬 걱정을 해야 하고,
비가 쏟아지면 넘칠 걱정을 해야 한다. 걱정은 바로 정신 노동이며 걱정하고 있는
도안은 여가가 아니다.
그러기에 몬순 지역의 농사는 언제 끝나고 언제 시작하는 노동과 여가의 경계가
흐리다. 그래서 일하면서 놀고, 놀면서 일하는 이상한 노동관과 이상한 여가관에
체질화될 수밖에 없다. 곧 노동 속에 여가가 매몰 혼합돼 버려 어느 만큼이
노동이고 어느 만큼이 여가인가 분간해 내기가 어렵다.
미국 공장에는 프린지 워크라는 게 있다. 과외의 부가작업이랄 수 있다. 작업의
교대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면 노동자들은 두부를 칼로라도 자르듯 작업을
멎고 미완의 작업 현장을 그대로 두고 퇴근해 버린다. 물론 작업에 쓰던 공구도
그대로 놓아둔 채다. 그같은 중도반단의 미정리 작업 현장에 교대된 노동자가
들어서면, 그것을 정리하고 또 자신의 작업에 맞게끔 조정하는 데에만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 비능률을 제거하고자 교대하는 중간에 현장을 정리하는 전담 작업을
따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국에서는 하지 않아도 될 그런 부가작업을 프린지
워크라 한다. 이것은 노동과 여가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유럽 사회의 여가관이
필연케 한 작업인 것이다.
이토록 한계가 분명하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뽕 따면서 임도 보고, 나물
다듬으면서 시누이 흉도 본다.
이처럼 여가를 가려낼 수 없기에 여가를 이용할 줄 모른다. 그리스처럼 여가를
현명하게 이용하는 전통도 없고 따라서 여가를 가치로 인정하는 어떤 도덕도 형성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논다는 것은 악덕이 돼 있으며 노는 사람은 패가망신할 사람으로
소외당했다. 논다는 가치가 우리나라처럼 비가치화한 사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구미 사회에서 일한다는 것은 여가를 얻기 위한 수단인데 우리나라에서 일한다는
것은 단지 살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바로 인생의 목적이 돼 왔던 것이다.
논다는 것은 인간에게 공통된 본능적 욕구이기에 최소한도로 보장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곧 극소화 상태에서 보장했던 것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있는 세시명절이다.
더도 말도 덜도 말게 이 세시명절을 안배해서 한 달에 한 번씩은 놀게 했던 것이다.
홀수 달에는 홀수가 겹친 날-곧 1월 1일(설), 3월 3일(삼짇), 5월 5일(단오), 7월
7일(칠석), 9월 9일(중양)을 명절로 삼고, 짝수 달에는 2월 15일(연등), 4월
8일(석탄), 6월 15일(유두), 8월 15일(추석), 10월 15일 하원(하원), 그리고 11월에
동지와 12월에 그믐으로 안배시키고 있다. 이 제도화된 여가 외에 동제나 개인제 등
제삿날에 제사를 핑계한 여가, 곧 놀지 않는 것처럼 노는 '하면서 주의'의 여가를
소극적으로 절도한 것이 한국 전통 사회에 있던 여가의 전부였다.
이렇게 놀 줄도 모르고 논다는 것을 저주해 온 한국인에게 현대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여가를 안겨주었다. 논다는 것에 대한 가치체계도 예전대로이고, 또 논다는
것에 대한 윤리체계도 예전대로이며, 또 어떻게 노는 것인지에 대한 체험체계도
전혀 돼 있지 않은데, 밀어닥친 여가는 오늘날의 한국인에게 커다란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한국적 피서의 특징
그래서 오늘날 우리 한국인이 누리는 여가는 정상이 아닌 이상으로 일관되고
있다. 그 이상 증후를 하나씩 진단해 보고자 한다.
첫째 집중성을 들 수 있다. 한국적 바캉스의 집중 현상은 시간과 공간, 양
측면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즐기고 싶은 여가는 반드시 연중 어느 계절에 제한받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나의 개성이나 나의 선호에 따라 연중 어느 계절, 어느 때에 선택할 수 있다. 한데
한국인이 택하는 바캉스 시기는 거의가 한여름 한더위가 지속되는 복중에 집중되는
집중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외적인 구속 조건도 없지
않다.
첫째, 몸담고 있는 대부분의 직장이 이 시기에 휴가를 주는 것이 거의 관습적으로
제도화돼 있기에 그 시간적 구속을 자의로 헤어나갈 수 없다.
둘째, 같이 누려야 할 자녀들의 방학이 이 시기에 집중되었기에 그 시기를 택할
수밖에 없다.
셋째, 더위를 피한다는 이득이 겹친다는 등의 이유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그같은 외적 조건 말고도 내적 조건이 이 시간 집중 현상을 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직장은 동시에 많은 사람이 직장을 떠나가는 것은 업무 지속이나
생산 지속에 커다란 타격을 받는다. 그러기에 휴가를 연중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경영상 유리하다. 그래서 많은 회사에서 이 휴가의 확산을 시도했으나 모두가
실패하고 말았다. 이 복중 이외의 바캉스 시기를 선택한 사람은 회사에 따라서 5__8
퍼센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곧 직장에서 제도적으로 휴가를 복중에 집중시키기에
바캉스의 시간 집중 현상이 일어난다기보다 이 시간을 집중적으로 원하고
선택하기에 집중 현상이 벌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방학은 시간 집중 현상의 비중 큰 부분적 이유일 수는 있으나 이 역시
그 전적인 이유는 못 된다. 왜냐하면 자녀가 없거나 있어도 모두 장성하여
개별적으로 바캉스를 떠나 버리고 없는 사람들도 예외없이 이 여름 시기를 택한
것으로 미뤄 알 수 있다.
피서 이유도 그렇다. 서양 사람들처럼 기후가 차가운 고원이나 원거리에 장거리
이동을 하여 별장 같은 데서 한 달 남짓의 장기간을 체류하는 그런 바캉스가 아닌
이상, 3, 4일 길어야 일주일 남짓 동안 더위가 차이 없는 근거리에, 또 집중
현상으로 붐비는 인파의 열기 속에 오가며 몇 시간 동안 바닷물에 잠기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었다 해서 피서를 했다고 볼 수도 없고, 또한 자신도 더위를 모르고
지났다고 자족한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시간대뿐만 아니라 장소대에도 동시동조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 한국적 바캉스의
특성이다. 곧 사람이 몰리는 곳에 몰리고, 집중적으로 몰리긴 하지만 그것은
태양열에 굶주린 유럽 풍토에서 햇볕을 쬐기 위한 생리적 욕구가 강하게 발동한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모든 곳이 가서 쉴 수 있고 놀 수 있는 관광지요, 피서지일
수도 있는데 굴지의 몇 곳에만 집중적으로 몰린다. 집중 현상이 일어나기에 조용히
쉬고 시원하게 지내며 교통편이나 먹고 자는데 편리해야 할 바캉스의 3대 조건은
완전히 유린당하고 만다. 그래서 대체로 바캉스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곳에는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맘먹고 돌아오면서도 이듬해에 또 그곳을 찾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다중이 몰리는 곳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중이 몰리기에 그곳이 좋을 것이라는 그런
객관적 기준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역시 시간 집중 현상을 유발했던
한국인의 동시동조성의 의식구조가 크게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수천 년간 한 마을에 태어나 그곳에 죽어가길 대대로 해온 정착민은 같이 사는
사람끼리 서로 모나지 않게 개성이나 의견을 완강하게 내세우지 않고 서로 동조
조화하는 것을 요구받아왔다. 곧 동시동조성의 의식구조가 체질화돼 있기에 동시의
바캉스, 그리고 같은 곳에 가는 동조의 바캉스를 지향하게 된다. 또한 정착해 사는
공간 그 내부에서 모든 것이 자급자족되었기로 그 한계 밖에 나가는 일이 없고, 또
나갈 필요가 없이 살아왔기에 그 밖에 나갈 때는 불안하고 서먹서먹해 한다. 외지,
곧 객지에 미숙한 의식 체질은 불안을 극소화시키기 위해 동류를 추구한다. 곧 나와
같은 불안해 하는 사람끼리 얼리고 싶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고
싶어한다.
시간 공간에만 동시동조의 집중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캉스에 가서
즐기고 놀고 구경하고 하는 것도 동시동조로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을 즐기고 놀고
구경하려 든다. 곧 개성을 다중 속에 매몰시킨다는 것도 한국적 바캉스의 특징이랄
수가 있다. 많은 사람이 설악산에 갔다 해도 설악산에서 선택해 쉬고 놀고 구경할
곳은 무한대로 있는데도, 개성대로 찾아가 개성있게 쉬고 구경하질 못하고 다중이
가는 굴지의 몇 곳에 몰림으로써 마치 남대문 시장의 잡담 속에 젖는다.
둘째로, 한국 바캉스의 특징으로 단기성을 들 수 있다.
이 역시 유럽처럼 한 달이나 20일 또는 보름 동안 휴가를 주질 않는다는 외적
조건도 전혀 무관하지 않지만, 우리 한국 사람은 그렇게 긴 휴가를 주어도 그것을
알차게 누리고 감내할 만한 의식 체질이 돼 있지가 못하다. 일주일 휴가도 지루하다
하여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뿐만 아니라 휴가지에 가 있어도, 일해
왔던 리듬이나 사이클을 단절하지 못하고 조석으로 사무실이나 가게나 집에 전화를
걸어 노동 사이클을 휴가지에까지 연장 지속시킨다.
이같은 행위는 밤에도 눈물 걱정을 해야 하는 우리 전통적 생업의 '24시간
노동성'이 의식 속 깊이 체질화돼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을 많이 소요하는 이동성
여가의 전통이 전무했고 그저 하루에 나갔다 돌아오는 정착성 휴가에만 체질화돼
있는 데는 이 단기성 바캉스 체질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또 다른 한국적 바캉스의 특성으로 한국인은 여가를 과정으로 파악하지 않고
결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바캉스에 설악산이나 해운대에 갔다는 그
결과만 얻으면 된다. 가고 오고 또 그곳에 가서 어느 만큼 바캉스라는 그 시간적
과정을 안락하게 도 유익하게 누렸는가의 과정 농도에 대해 미숙하고 등한하다.
이를테면 휴가지를 설악산으로 선택했을 때 서양 사람들은 설악산 그곳만을
휴가지로 생각하질 않는다. 그곳까지 가는 과정, 치악산이며 대관령이며 오대산이며
또 그 과정에 있는 사찰이며 풍경이며 그 모두를 엔조이한다. 설악산은 그 과정,
관광의 종점이요, 과정에서 즐기는 많은 곳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곧 결과를
점이라 하고 그 점까지 이르는 과정을 선이라 한다면 서양 사람들은 선을 즐기는
바캉스 체질이다. 한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점을 즐기는 바캉스 체질이다. 그래서
설악산을 점으로 설정한 이상 그곳까지 이르는 선은 짧을수록 좋다. 그러기에 그
선이 길수록 지루하고 그 지루함을 잊기 위해 코를 골고 졸거나 속세를 벗어나고
있으면서 속세의 이야기를 담은 주간지를 읽거나 술을 마시거나 껑충껑충 뜀으로써
과정을 무화시키고자 피나는 노동을 한다.
설악산에 가서도 설악산에 왔다는 그 결과를 충족시켜주는 명소 몇 군데만
집중적으로 몰린다. 그 넓은 광역의 설악산 도처에 멧부리요, 도처에 계곡인데도
비선대나 금강굴, 울산암, 권금성 등 몇 군데에 집중되고, 그것만 봄으로써 바캉스가
충족됐다고 생각한다. 곧 집중현상은 한국인의 이같은 결과주의에도 원인이 있다.
여가를 과정으로 파악하면 붐비고 피로하고 고달픈 그런 인파에 끼어 '여가노동'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인적이 없는 맑은 계곡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할 것이다.
관광을 해도 결과주의이기에 보다 많은 점을 단시간 안에 보다 많이 얻고자
하기에 시간을 두고, 보고 알고 느끼고 그 무드에 젖는 질적인 관광을 하지 못하고
주마간산식으로 피로하기만 하고, 고달프다는 것 이외에 남는 것이 없다.
우리 한국 사람이 관광지에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 결과주의
때문이다.
땀 흘려 불상이 있는 한 '점'에 이르면 대뜸 그 불상을 배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놓고 본다. 사진만 찍으면 그 점이 사유화되고, 그렇게 점만 얻으면 관광은
끝난다. 그저 "석굴암 부처보다 크구만." 하는 정도의 외형적인 관찰로 끝내고 다음
'결과'를 향해 또 발을 서둔다. 그 불상이 언제 어느 때 것이고, 그 불상이
아미타불인지 관음상인지 여래상인지, 또 조형이 다른 불상과 어떻게 다른지, 왜
자비로운 표정이 더한지 등등 알고 느끼고 할 것이 엄청나게 많지만 그것은 '과정'의
요소이기에 별반 흥미가 없다.
이같은 결과주의 바캉스는 여름 해수욕장에서 종종 목격할 수가 있다. 일단의
아가씨들이 아름다운 수영복 차림으로 해변에 나와 물 속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데
서서 찍고 앉아서 찍고 누워서 찍고 어깨동무하고 찍고, 찍고 싶은 대로 다
찍었다고 생각하면 아무런 후회나 불만도 없이 해수욕장을 떠나가 버린다. 곧
해수욕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해수욕장에 왔다는 결과만 얻고, 또 그것만 증명하면
바캉스 욕구가 충족되는 그런 이상한 바캉스 생리를 우리는 아무런 저항없이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소비성을 들 수 있겠다. 달리 말하면 여가를 소비 기회로 파악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우리 한국 사람은 집 안에서 사는 실제 수준보다 집 밖에서 사는 남이
보는 나의 수준을 한결 높여서 산다. 그러기에 항상 경제적으로 무리를 하며 살게
되고 바캉스도 '남이 보는 나'를 과시하는 소비의 기회로 삼아, 그 소비를 통해
자신과 그의 가족의 사회적 위신 내지는 지위를 남들에 대해 승인시키고자 노력을
한다. 곧 여가 소비가 지위 심벌로써 이용되고 또 그로써 전시 효과를 누리려 든다.
그래서 온 가족이 바캉스를 떠날 때는 옷가지를 새로 사고 레저 도구를 장만하며,
값 비싼 매식을 하고 남들처럼 값 비싼 숙박소에 투숙을 한다. 그 이면에는 일 년에
한 번인데 낭비 좀 한들...하는 심리도 크게 작용한다.
이같은 소비성 바캉스 생리 때문에 바캉스는 저소득층뿐 아니라 중산층까지도
커다란 부담이 되고 그 때문에 가계에 구멍이 생기며 짧은 바캉스를 위해 몇
곱절이나 긴 시간을 덤으로 노동을 해야 한다.
이같은 한국인의 바캉스 생리 때문에 우리 한국인은 바캉스 차일드랄 수 있으며
성장해야 할 너무도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할 것이다.
@ff
6. 한국형 개인주의
남 나름 이상의 개성이나 능력, 정신적 가치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이를 발휘하면
오히려 인심을 잃고 결속을 깨뜨린다 하여 소외당했던 것이다.
분단 40여 년 동안의 의식구조 변천을 가늠해 보려면 변천 이전의 의식 원형을
설정하고 그 변천을 있게 한 의식 인자를 설정함으로써 비교해 보지 않으면 그
변천상이 부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그 한국인의 의식 원형과 그 원형을
변천시킨 구미인의 의식 원형을 가려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유목, 상업 등 이동성 직업을 주된 생업으로 영위해 온 유럽 사람들의 밑뿌리에는
사람이란 제각기 서로 다른 이해, 의견,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잠재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인간관이 가로놓여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각자가 책임지는
개와의 평등한 대립사상인 것이다.
인간끼리 잠재적으로 대립하고 있기에 말과 이성으로 상호의 이해를 조정하고
대립의 노골화를 예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미의 사회생활이 상호 교환되는 계약을 지킨다는 전제 아래 영위되는
것이라든가, 각종 종교나 사상이 계약사상에서 싹트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구미형 의식구조는 인간 상호의 이질성과 대립을 전제하고 그 전제 위에서
언어를 매개체로 하여 공동지향을 한다는 데 있다 해도 대과가 없겠다. 이를
도식화하면 '대립 -> 언어 -> 공동'이 된다. 이같은 도식 방향으로 공동을
지향하는 정신태도를 '상인형 의식구조'라고 부르기로 하자.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
팔 때 이미 이해의 대립이 전제되어 있고, 이해를 조정하기 위해 교섭, 흥정, 의논
등 언어를 거쳐 계약에 이르고 일치를 추구한다. 이 과정이야말로 바로 구미형
민주주의에 있어 의사 결정의 과정,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한국형 의식구조의 특징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한국 특유의
의사 결정방법으로써 곧잘 지적되는 것이 전원 일치의 집단의사 결정방식이다. 각
관청이나 조직체, 단체, 기업체에서 쓰고 있는 품의제가 바로 그것이요, 정식 회의
이전에 비공식적인 형태로 관계자끼리 의견을 교환하는 담합제 등이 그것이다. 비록
이견이 있고 이해관계가 있더라도 웬만하면 그 전원 일치의 집단의사에 거역이나
대립을 하지 않고 만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알았습니까?' 하고 물으면 모르더라도 전원 일치하여 '예....
'
하고 대답하는 그런 대립 회피의 심리가 지배하고 있다. 이 대립을 회피하는 성향은
한 마을에 정착해서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여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온 농경공동체
사회의 필연인 것이다.
이 농경공동체 사회에서는 대립과 이견과 비범이나 개성 같은 것은 공동체 영위의
저해요소가 된다. 유럽에서는 언어로써 인위적으로 형성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공동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적으로 존재되어 내려왔으며 그같은 상태에서 언어는
오히려 그 공동을 파괴하고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자기
주장이나 자신의 이익의 명백한 표현은 삼가해야 된다. 그러기에 한국형 의식구조를
도식화하면 '공동 -> 언어 -> 대립'이라는 발전 방향이 된다. 이 대립을
두려워하는 정신구조를 이른바 '농민형 의식구조'라 하자.
정착성 농경공동체 사회에서는 논물을 대고 모를 심고 김을 매며 수확을 하는
시한성 작업에 있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촌락 내부에 있어
대립은 이같은 협력을 불가능하게 한다. 극단적인 경우 대립요소는 그 공동체
사회에서 소외시켜 버린다. 일단 쇠외당하면 정신적 고통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생활 그 자체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한국인의 의식구조 가운데 전원일치에
의한 의사결정이 배후에 도사리고 있음은 바로 이 공동체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하나의 공포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요, 말을 하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중의
정의는 말, 곧 언론 없이 정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이것이 곧
구미형 의식구조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한데 '공동 -> 언어 -> 대립'의 방정식 위에 형성된 한국형 의식구조에 있어서는
당연히 언어의 기능이 저해될 수밖에 없다. 언어 대신 뱃심이나 이심전심, 통찰 같은
한국적인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중요시된다. 그리하여 집단 내부에 대립이
생겼을 때 조정자의 역할은 "자,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하면서 대립자 쌍방의
입을 막는 일이 가장 급선무가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40여 년 전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바로 이같은 농민형 퍼스낼러티였었다. 이
원형에 40여 년 동안 변수 인자로 작용한 것이 바로 상인형 퍼스낼러티이며, 이
변수의 작동으로 원형이 얼마나 변질되었는가로 40여 년 간의 의식구조의 변천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농민형 의식구조의 기본은 개를 전체 속에 매몰시킴으로써 전체의 화를
유지하려는 것인데, 상인형 의식구조의 기본은 개를 전체 속에서 독립시켜 그
개끼리 화를 유지한다는 데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하겠다.
곧 개인의식이 지난 40여 년 동안 가장 크게 변화, 변절을 한 것이다. 개인의식,
자기의식이 지난 40여 년에 비해 분명히 강해지고 발달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40여 년 전의 개인은 어떤 가문의 나, 어떤 가족의 나 하는 식으로 어떤 공동체에
예속된 개인으로, 개인의 식은 항상 그가 소속된 공동체의식보다 차선적이요, 가치가
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윤리는 바로 그 개의 공동체로의 희생 과정에서
선이었다.
한데 40여 년 간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 매몰되고 예속될 대상체인 공동체가
차례로 붕괴해 내렸던 것이다.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어 무너지고 도 도시화의
진행으로 촌락 공동체가 무너졌다.
그리하여 농민형 의식구조를 지탱할 지주와 투사체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
거기에 상인형 의식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민주주의 사상의 개인의식
부양에 가속되어 한국인의 개인의식은 어떤 교정이나 틀이 없이 자유분방하게
커나갔다.
구미에 있어 개인주의는 희랍시대 이래 오랜 시행착오 끝에 고된 책임을 수반한
자기가 하는 일에 전적인 책임을 지는 그런 개인주의요, 또 그 개인이 소속된
집단에 의해 조정되고 조화되는 그런 개인주의였다.
한데 40여 년 동안에 속성된 한국인의 개인주의는 책임이 수반되거나 남의 이해에
조정되고 조화되는 그런 개인주의가 아닌, 너무나 이기적이고 아집적인 개인주의가
되고 만 것이다.
의식구조가 개조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수백 년 동안에 이루어진 의식구조가
개조되려면 여건의 변화만으로는 손쉽게 개조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농민형
의식구조인 전체에 매몰, 그 속에서 무책임하려는 집단적 무책임 성향은 엄연히
살아 있으면서 자기 개인의 이해나 주장만을 내세우는 그런 파행성 개인주의가
판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독일 사람은 길가로 난 창이 더러워져 있거나 길가로 난 창이 더러워져
있거나 길가로 난 베란다의 꽃이 시들어가고 있으면 아무 상관없는 행인일지라도 그
집 초인종을 누르고 주인을 불러내어 유리창을 닦으라고 시키고 꽃에 물을 주라고
이르고 간다. 왜냐하면 그 길가로 난 창이 더럽고 꽃이 시든다는 것은 그 집 사람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그 공동체의 공공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한국 사람이 이같은 남의 집 일을 시키고 또 이르고 간다면 머리가 돈
사람으로 웃고 말거나 언쟁이 붙어 일대 소란을 빚고 말 것이다.
곧 공동체 속의 개인의 책임이 정립되고 되지 않고의 차이가 이런 점에서 완연히
드러난다.
구미적인 개인주의는 공공간에 있어서 그 공공에 모두 책임을 지는 그런
개인주의이다. 한국의 파행성 개인주의처럼 공공 속에 무책임하고 공공질서를
지키지 못하는 개인주의는 진정한 개인주의가 아닌 것이다.
둘째로 대등했을 때 평등한 것이 생명인 상인형 의식구조의 평등의식이 변수로
작용한 농민형 의식구조의 변동을 들 수 있다.
구미에 있어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지 차이가 심한 개성이나 능력이나 노력 같은
비기회성의 것까지의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데 지난 40여 년 간 한국에
도입된 평등의식은 비기회성의 모든 것에까지 평등의 가치를 부여하려 하는 이 역시
파행성 평등의식이 체질화되고 말았다.
곧 40여 년 동안 형성된 한국인의 평등의식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평등의식이다. 희랍의 대도인 프로크루스테스 사람을 잡아오면 자신의 침대에 묶어
놓고 그 침대보다 크면 다리를 잘라 버리고 그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잡아늘려 그
침대 크기에 맞추었다. 곧 모든 사람이 자기 침대 크기로 평등해야만 했던 것이다.
키가 1미터 남짓한 난쟁이와 2미터 남짓한 키다리를 보고 당신들의 키는 남
나름의 보통키라고 말한다면 사람 놀린다고 분노를 할 것이다. 곧 사람은
천차만별로 난쟁이도 있고 키다리도 있으며 뚱보도 있고 홀쭉이도 있다. 수학은 잘
하지만 그림은 형편 없기도 하고, 음악은 '수'인데 산수는 '가', 재치는 있는데
게으른 자, 창조성은 결여되어 있는데 노력형, 신뢰성은 있는데 판단력이 결여된 자
등 천차만별인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차등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여 성적을 모두 평균해서 '우'로 주려는
그런 이상한 평등의식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학교에 우열반을 두려고 했을 때 벌떼처럼 반발이 일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정한 의미의 평등의식은 그 장점과 단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평가함으로써 그
인간을 인간으로 존중하는 의식이다.
모든 사람을 남 나름으로 취급, 그 능력이나 개성, 성차를 적극적으로 평가
식별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얼른 보아 인간적인 태도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만원전차 속에서 노인을, 도 횡단보도에서 맹인을 여느 사람
나름으로 취급하는 가혹함과 같은 것이다. 미국에서는 지금 직종이 20여만 종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철강업만도 무려 3만 8천 종에 이른다고 한다.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직종의 분화나 새로운 직종이 생겨날수록 인간에게
새로운 능력을 요구하고 이제까지 숨겨져 있던 또는 쓸모가 없다 하여 무시되어 온
능력에 각광이 비치곤 한다.
실로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그 천차만별성에 있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또
추구받는 개성의 그지없는 개화가 곧 현대의 가장 현대다운 요소인 것이다.
그것을 그릇된 평등의식으로 획일화하여 개성이나 재능이나 취미를 무시하고
남들처럼 너도 나도 법과에 보내는 식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곧 40여 년 동안에 변천된 한국인의 평등의식은 농민형 의식구조인 획일적인 남
나름주의가 적지 아니 배합되어 있는 그런 평등의식이랄 수 있다.
농경공동체 사회에 있어 인간의 개성화란 악덕이었다.
왜냐하면 대자연이라는 강적을 상대로 사람끼리 일치단결하여 노동력을 마을
단위, 가족 단위로 조직적으로 대지에 투입한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은 이목구비와 수족에 제대로 박힌 오체구족의
육체 노동력의 소유자, 곧 남 나름이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었던
것이다.
남 나름 이상의 개성이나 능력, 정신적 가치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이를 발휘하면
오히려 인심을 잃고 결속을 깨뜨린다 하여 소외당했던 것이다.
이 남 나름의 획일주의가 서양의 개성적 평등의식과 야합하여 '남 나름
평등'이라는 변태의 의식구조를 형성해 놓고 만 것이다.
프랑스의 성적표를 보면 과학의 우등생, 미술의 우등생, 봉사의 우등생, 친절의
우등생, 리더십의 우등생, 엘레강스의 우등생 등 그 아이의 개성과 능력을 발견,
그것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성적을 평가한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그 모두를
평균해 낸 성적이 우수해야 우등상을 준다. 곧 무개성의 획일주의이다.
밥상도 그랬다. 서양 음식은 일품 요리로 시간 전개형으로 나오는데 한국 음식은
먹든 안 먹든 이것저것 여관 밥상식으로 고루 갖추어 공간 전개형으로 획일화하여
갖다 안긴다.
개성무시의 획일주의가 이 평등의식을 잠식, 이상한 평등의식을 형성해 놓고
말았다.
구미 선진국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개인간의 철저한 차등으로써 평등한 입장에서의
가혹한 경쟁을 통해 인간공존의 논리와 새로운 가치를 탄생해 냈던 것이다.
지난 40여 년 간에 변천된 의식구조 가운데 개인의식과 평등의식의 변천을 더듬어
봤는데 이같은 의식구조의 외인적인 변용은 그 장단점을 가려 발전적으로 교정하는
시기가 빠를수록 좋은 것이며 바로 오늘날이 그것에 손대야 할 바로 그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ff
7. 외적변화보다 느린 한국인
더디게 변하는 의식구조가 급속히 변하는 사회조건에 걸맞지 않아 병패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사회조건에 걸맞게 빨리 변하여 잔존해 있는 기성의 의식구조와
갈등을 빚기도 한다.
해방하던 해를 분계점으로 하여 단군이래 해방되기까지의 변천과 해방에서
현재까지의 변천을 비겨본다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거의 맞먹을 만큼 엄청난
변화를 보고 있다.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문물의 변화는 가치관이나 의식구조의
변화를 유발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다. 그렇다면 그 엄청난 변화를
소화시킬 틈도 없이 쏟아부친 지난 45년의 의식구조 변화는 다양하기 그지없으며 한
권의 책으로는 그 대강만도 쓰지 못할 것이다.
다만 물질문화만큼은 정신문화가 따라서 변하지는 않으며 변천 속도도 느리고
더디기는 하다.
그래서 더디게 변하는 의식구조가 급속히 변하는 사회조건에 걸맞지 않아 병폐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사회조건에 걸맞게 빨리 변하여 잔존해 있는 기성의 의식구조와
갈등을 빚기도 한다.
지난 45년 동안 사회조건이 크게 변했는데 그에 따라가지 못한 의식구조로서
공공의식을 들 수 있다.
해방 전까지는 한국 사람의 88퍼센트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촌락에서 살았었다.
한데 지금은 촌락에서 사는 인구는 30퍼센트를 밑돌고 있으니 거의 역전이 되고
있는 셈이다.
촌락에 정착해 살던 시대에는 그 촌락 안에서 모든 의식주가 자급자족되었다.
이따금 가다가 소금장수만 드나들면 되는 소우주였다. 그래서 바깥나들이를 할
필요가 없이 평생 그 마을에서 태어나 그 마을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 소집단 밖은 나가지 않으니 그 소집단 밖에 사는 많은 낯선 사람과 접촉 기회도
없고 또 그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교섭하고 조화를 이루기 위한 질서며 공중도덕이며
낯선 사람끼리 공유하는 공공 공간에서 필요불가결한 공공의식이 발달한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이 사는 집--내가 사는 마을 밖은 나와 아랑곳없는 남의
영역이기에 아무런 애정이나 애착이 생기질 않았다.
이 촌락사회에서 미숙한 공공의식으로--공공의식 없이 살 수 없는 도시화 사회에
살게 되면서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고속버스를 타면 자기 앉을 자리는
입으로 먼지를 불고 털고 손수건으로 닦고 앉으면서, 먹고 난 과자 봉지 나부랑이는
차창 밖으로 죄책감 없이 버린다. 차례를 기다리는데 줄하나 제대로 서지 못한다.
공공공간에서는 순경만 보지 않으면 못된 짓을 해도 된다. 한국인은 남들과
공존하는데 내가 나의 이해로 얼마만큼 양보하고 겸양한가에 전혀 체질화되지 않고
마치 어린애처럼 자기중심적으로 행동을 한다.
이것이 45년 동안 여건은 크게 변했는데도 그에 따르지 못하고 있는 의식구조의
한 본보기랄 수 있다.
이와는 달리, 45년 동안 많이 변한 의식구조 가운데 하나로서 개인의식을 들 수
있다. 45년 전까지는 '개인'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소멸돼 있었고 또 의당히
그러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도리요, 가치였다. 풀어 말하면 각자 '개인'은 사람인
이상 자신의 생각도 있고 감정도 있으며 주장도 있으며 욕망도 있고 취향이며
소질이 있게 마련이다. 이같은 개인의 속성들이 부모를 정점으로 한 가족의 속성과
대결했는데 의당히 가족의 속성이 우선되고 개인의 속성은 그에 수렴되거나
희생되거나 해야 했다. 곧 가족의식이 개인의식보다 월등하게 강했던 것이다.
한국인의 가족의식은 첫째 조상을 깍듯이 섬기는 강한 조상 숭배와, 둘째
혈연끼리는 모든 이해타산을 초월하는 대가족 제도와 남녀의 성차에서 남편을
극진히 존중하고 우대하는 부권지상주의가 그 온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족인의
강한 가족의식을 지탱해 온 이 세 개의 뿌리가 해방을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첫째 조상과 나를 잇는 강한 고리에서 서서히 해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4, 5대조까지는 기일에 가제를 지냈으며 그 이상의 조상에게는 춘추로
시제를 지냈던 것이 요즈음은 2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풍조가 일고 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만에 탈상--2년 동안은 집안에 상청을 차려놓고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며 심상에 준한 모든 행동을 규제받았는데 지금은 49탈상이 상식이 되고 있다.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 있어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가서 고하고,
색다른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마다 먼저 가서 바치고, 멀리 출타할 때마다 가서
고했던 그 사당을 모시는 집은 없다. 이렇게 45년 동안에 한국인은 조상으로부터
해방돼 있고 가족의식의 기둥뿌리인 조상의식이 희석해질 대로 희석돼 버린 것이다.
또 가족의식을 강하게 해온 대가족 제도가 붕괴--핵가족화한 것은 단군 이래의
한족 역사상 가장 크고 획기적인 변화랄 수가 잇다.
45년 전에는 5등친, 곧 고조 할아버지로부터 번져나간 혈손은 형제처럼
살아왔는데 45년 동안에 그 혈연이 무참하게 단절되어 지금은 사촌정도로 그
친밀감이 단축되고 말았다. 곧 한국의 '개인'은 혈연의 구속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
물론 종적으로 조상으로부터 해방되고 횡적으로 혈연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보호나 배려나 상호부조로부터의 소외랄 수도 있다. 그래서 45년 전의
'개인'보다는 지금의 개인이 한결 고독하고 세상사는 데 불안을 느끼고 살게 된
것이다.
핵가족화는 또한 단위 가정에 있어 부권을 약화시키고 모권을 강화시키게
마련이다. 현대 가정에서 '아버지'가 증발되어 없다는 것이 요즈음 적지 않은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음도 이 때문이다.
자녀에게 있어 어머니는 잘잘못이나 잘나고 못나거나 예쁘고 밉거나 그 모두를
감싸는 감정적 포용 원리를, 아버지는 잘잘못을 가지고 잘하면 추기고 못하면
꾸짖는 이성적 절단 원리를 대행한다. 부권 약화로 이같은 절단 원리 없이 모권
강화로 포용 원리만을 받고 자란 요즈음 세대들은 개인중시적인 사고와 행동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45년만에 형성된 한국인의 개인주의, 곧 개인의식은 서양의 다른 아주
이상한 개인주의가 되고 말았다.
"개인주의는 모든 주변의 구속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현대인이 오랫동안
쟁취해 온 영광스런 전리품이라는 책임 또한 고되고 막중하다. 그 책임을 지고
개인주의로 살려느냐, 그 책임을 지지 않고 개인주의로 살지 않으려느냐고
택일하라면 명분상으로는 전자를 택하겠지만 본심으로는 후자를 택할 것이다."
이것은 독일의 사상가 니체가 한 말이다.
그토록 서구 개인주의가 형성되기까지는 고된 책임이 수반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한데 45년 동안에 형성된 한국의 개인주의는 책임은 수반되지 않고
내멋대로 나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이상한 개인주의가 되고만 것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렇게 얻어낸 경망스런 '개인'의 자유의 책임을 찾아 추를
드리워 묵중한 개인의 자유로 전환시키는 일인 줄 안다.
@ff
8. 공공적 미성년
집안에서는 그토록 인간적으로 성숙하고 원숙했던 이 한국인들이 공공성 속에
노출되자마자 길잃은 고아처럼 불안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공지대는 이방이며
낯이 설었다.
인간이란 낱말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일이 있다. 곧 주체인 사람은 어떤
객체와의 사이로 인간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란 사람은 이성과의 사이, 가족과의
사이, 씨족과의 사이, 공동체와의 사이, 나라와의 사이 등 많은 객체와의 사이로
파악되고 존립할 수가 있다.
사람이나 민족에 따라서 어떤 객체와의 사이가 다른 객체와의 사이보다 한결
소중하고 덜하고 한다. 가령 아버지와의 사이를 나라와의 사이보다 수백 배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여자와의 사이, 아버지와의 사이보다 공동체와의 사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그렇듯이 어떤 민족의 풍토적, 체질적, 문화적
여건 때문에 가족과의 사이가 나라와의 사이보다 더 소중한 민족이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속하고 있는 한민족이 가장 소중한 사이의 객체가 무엇이며
그 소중함의 비중이 어느 만큼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야말로 한국인을 알고
그 가치관을 알며 그 문화를 알고 역사를 아는 가장 핵심적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서양 문화의 원천인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폴리스(도시국가)가 가장 소중했다.
항상 해적이나 외침 앞에 노출되어 있었기로 그들의 존망이 그들 '폴리스'의 존망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가족보다도 부족이 한결 소중했다.
유목생활은 가족 단위로 옮겨다니는 것이 아니라 부족 단위로 옮겨다니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규모로는 가혹한 사막적 자연이나 침략자를 당해 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유태인이라는 부족에 집착을 하고 집념을 갖는 것도
그들이 사막에 살아온 유목민이기 때문이다.
한말 강화의 광성포대에서 의적을 막던 한국의 병사들은 미군 해병대의 공격에
전사했거나 죽지 못한 자는 흐르는 한강물에 하나 빠짐없이 투신하러 갈 만한
기력이 없는 부상자였다고 당시 미국측이 보고서에 지적되고 있다.
또한 이 보고서는 포로들을 한국군 측에 조건없이 송환할 테니 데려가라고
통고했으나 한국측에서는 "이미 그 포로들은 당신의 손아귀에 있으니 죽이든 말든
당신네들이 할 일이지 우리는 알 바가 아니다."
양이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 인간 자체에 죽음보다 강한 치욕을 주거나
국가의 일원으로써 국가에 치욕을 주었거나 그 사실이 가족이나 가문의 명예에
치욕적 요소가 되거나 하는 세 요인 가운데 하나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자명해진다. 그의 가족이나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이 확고한 전통적 가치관은 집을 경계로 한 그 안과 밖의 구분을 엄연하게
하였다. 곧 집 밖의 어느 세상은 '밖'이고 '남'이며, 대신 집 안에 있어서의 개인은
소멸된다.
처는 '안사람'이요, '아내'이며, '댁'이다. 아버지는 개인이 소멸된 우리 아버지요,
집은 '우리 집'이다. 나의 아버지, 나의 집이라고 부르는 서양의 개념과 판이하다.
곧 서양에서는 가족 개념보다 개인 개념이 강한데 비해 한국에서는 개인 개념은
가족 개념 속에 소멸돼 버린다.
한국인의 우리 것이라는 소유 관념은 집 안에 있는 것에 국한되는데, 서양의 우리
것은 사회에 있는 모든 것이 된다.
한국인에게 있어 집 밖에 있는 것도 내 것도 아닌 남의 것이며 남의 것인 이상
파손돼도 없어져도 아랑곳없다. 서양인에게 있어서 공원에 핀 한 송이 꽃은 집안에
핀 꽃과 같은 뜻을 갖는데, 한국인에게 있어서 공원에 핀 꽃은 남의 꽃이다.
그러기에 그것이 꺾어져도 우리 집 울 안에 핀 꽃이 꺾어진 것처럼 애석해 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양옥을 짓고서 양식 구조의 집에 살긴 하지만 담과 대문만은 한국인의
의식구조의 표현대로 높게 쌓고 또 빗장을 질러 놓는다.
비록 침대에서 자고 서양식 식사를 한다 해도 그들의 의식구조는 한국적이다.
이를테면 자기 자식이 부정한 일을 저지르면 온갖 정성을 다해 관심을 쏟고 처치를
하는데 공공의 일인 정치가의 부정이나 경제적 부정에 대해서는 그 백분의 일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은 모두가 집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는 그토록 인간적으로 성숙하고 원숙했던 이 한국인들이 공공성 속에
노출되자마자 길잃은 고아처럼 불안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공지대는 이방이며
낯이 설었다. 곧 집단에 허약하기 그지없으며 집단 생활에 훈련이 덜 되어 마치
어린이 다루듯 해야 한다.
공원의 잔디밭에는 아무런 팻말이 없어도 들어가지 않게 되어 있는데도 한국의
공원에는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꽂혀 있다. '나무를 꺾지 마시오', '소변을
보지 마시오',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좌측통행이오', '우물을 깨끗이 씁시다'
등등 현기가 날 지경으로 과보호를 받고 있다. 시내버스를 타면 '운전사와 얘기하지
맙시다', '금연', '화기지입금지', '거스름 돈을 준비해 주시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합시다', '개문발차 엄금' 등등 모든 승객을 백치에 가까운 어린이 취급을 하고
있다.
구미의 버스에는 이와 같은 극히 당연한 표어가 붙어 있는 법은 없다.
한국인은 공공적 미성년인 것이다.
한국 사람을 일본 사람과 비겨 말할 때 개인 개인으로 보면 한결 훌륭한데 몇
사람씩을 모아 놓고 보면 한편 못하다고 한다. 이 견해는 진실이며 곧 한국인의
집단 공공성에의 취약점을 직시하고 있다. 단결이 안 되고 분열이 심한 한민족의
결점도 이 집단 공공성에의 훈련이 부족한 탓이다.
@ff
9. 강한 주제의식
주제는 한국인을 도덕적으로 성숙시켜 법없이도 살아올 수 있게끔 한 좋은 면도
있지만 이처럼 창의력 있는 개체의 균등화 때문에 진보적인 면을 무디게 해온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여자인 주제에....' 하며 주제넘거나 주제없는
행위로 단정한다. 사내가 별나게 장발인 경우에도 '사내인 주제에....' 한다. 여자는
여자로서 지켜야 할 어떤 사회적 분이 있으며, 남자는 남자로서 지켜야 할 어떤
사회적 분이 있다. 비단 남자의 분, 여자의 분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간이며 그
사회에 처한 신분역할, 곧 분이 있다. 선생이면 선생으로서의 분, 공무원이면
공무원으로서의 분이 있다. 곧 그 사람이 처한 사회적 역할에서 생성된 그 당위의
행동거지를 '주제'라고 한다. 그 주제에 맞는 행동거지가 아닐 때 주제꼴이
사납다느니, 주제넘는다고 한다.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이 '주제'가 차지하는 자기 주제는 유럽 사람의 그것에
비해 유별나게 강하여 이 주제에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을 때 그가 소속된 어떤
규모의 집단에서도 소외당하기에 이 주제는 한국인의 한 존재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G.H 미드가 내세운 사회 심리학의 한 개념으로 '역할'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처해 있는 사회적 지위에 알맞게 행동하게끔 기대되고 또 요구받는데
이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여 행하는 일정의 행동방식을 '역할'이라 했다. 바로 그
역할의 한국적 표현이 '주제'란 것이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동시 가림없이 이같은 역할 기대가 있으나 그 역할의 규제력이
강하고 약하고의 차이가 있다. 한국 사람의 규제력이 메가톤 급이라면 서양 사람의
그것은 킬로톤 급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기에 서양 사람과 만났을 때 그 사람들의
언행이 적지 아니 주제넘게 보이는 이유가 이에 있는 것이다.
한말 우리나라 문물제도의 개화를 위해 조정에서는 조영하를 청나라에 보내어
총대신 이홍장에게 제도개혁을 맡을 인물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의뢰했었다. 이때
추천된 인물이 당시 천진에 와 살고 있던 독일사람 묄렌도르프였다.
묄렌도르프가 한국으로 떠날 때 이홍장은 송별연을 베풀어 주고 그 자리에서 한국
사람은 주제에 대해 대단한 분별이 있으며 그 분별을 지키지 않으면 한국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뿐더러 살아갈 수도 없다고 유별나게 심한 한국인의
주제의식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그리고서 조선 왕 앞에 가면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묄렌도르프는 총독에게도 아직 그런 공경례를 하지 않았으니 왕 앞에서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이홍장은 그와 같은 유럽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하지 않겠다고 하자
이홍장은 그와 같은 유럽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조선에 가서 맡은 일을 해내기
어렵다고 주제를 지킬 것을 강조하였고, 묄렌도르프도 그가 처한 어떤 위치가
그에게 요구하는 모든 주제를 지킬 맘을 단단히 하고 한국 땅에 건너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처음 고종을 배알할 때 극도의 근시안인데도 안경을 벗고 들어간다.
왜냐하면 신하로서 임금 앞에 안경을 쓰는 것은 주제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통례대로 세 번 허리를 굽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하고 라틴 어로 발음을 적어 익힌 한국말로 다음과 같이 아뢰었던 것이다.
"신이 귀국에 와 불러보시니 감축하와 갈력 전심하올 것이니 군주께서 항신을
신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역시 한말에 이하영이 미국 대리공사로 가 있을 때 워싱턴 사교계의 무도회에
자주 초청을 받았다고 한다. 활달하고 적응성이 강했던 이하영은 한복에 갓쓰고
미투리를 신은 채 이 무도회에 가서 춤을 곧잘 추곤 했던 것이다. 이 말이 조정에
들어왔을 때 각료회의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한 나라의 사신은 국왕을
대리하는 것인데 어찌 주제넘게 그런 야한 행동을 할 수 있느냐고.... 그가 본국에
송환된 이유 가운데는 이 주제를 지키지 못한 것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한다.
지금도 학교 선생이 술집에서 유행가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면 그 선생은 그
사회에서 배겨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미국이나 유럽 같으면 전혀 그것이 주제에
걸리지 않는데도 한국에서는 민감한 이유는 바로 한국인의 주제의식이 별나게 강한
때문이다.
부인네들이 사회 일선에 나와 소비자 보호운동을 하고 교통질서 캠페인을 하면 그
운동 자체에는 십분 공감을 하면서도 어딘지 아련한 저항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부녀자들에 대한 전통적 역할 기대는 현모양처로서 집 안에 있는 것이기에
집 밖에 나와 남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주제에 넘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에 아련히 저항감을 갖는 것도 주제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사회학 분야에 침범해 들면 사회학 분야의 학자들은
주제넘는다고 반감을 갖는다. 따지고 보면 요즈음 학문은 학문의 경계를 넘어
횡적인 연구를 필요로 하고 있다. 한데 이같은 주제의식이 강한 한국의 학계에서는
횡적인 연구를 가급적 기피하게 되고, 따라서 진취적이질 못하게 된다.
이같은 주제의식이 한국인에게 강하게 체질화된 이유로서 우리 선조들이 대대로
한마을에서 정착해 살았던 정착 촌락공동체였음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정착사회는
그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마치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고 돌 하나하나처럼 분과
역할을 정해 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분과 기대하는 역할을 넘어서면 바로 그 피라미드 공동체가 흔들리게 된다.
그러하기에 그 분의 한계를 엄하게 규제하고 다스릴 필요가 생긴다.
분에 넘게 잘나도 안 되고, 희망이 별나게 커도 안 되며, 분에 넘게 모험을 해도,
창의력을 부려도 거부당한다. 높이 솟은 말뚝은 쳐서 고르게 하고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발을 끌어 그 분의 틀 안에 고정시킨다.
이같이 하여 모든 사람은 분의 틀 안에 넣어 등가치화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한국에 있어서 인간됨의 가치는 대가족이나 촌락이나 계급사회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역할수행의 인격을 형성하는 일이며 그 같은 인격형성을 위해 그 많은 주제를
정하여 그 주제를 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유럽처럼 스스로 독립해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격 형성과는
대조적이랄 것이다. 그래서 자율, 독립, 개인사회인 유럽에서는 남이나 집단과의
함수관계랄 주제가 별반 발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주제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그 주제를 넘는 개인적인 창의나 모험이 악덕시되어
좌절되었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낙후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고 본다. 지금도 많은
한국인이 이 주제의식의 압박으로 무슨 일을 하려하다가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제는 한국인을 도덕적으로 성숙시켜 법 없이도 살아올 수 있게끔 한 좋은 면도
있지만 이처럼 창의력 있는 개체의 균등화 때문에 진보적인 면을 무디게 해온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ff
10. 변명
변명이란 말의 원뜻은 플러스 이미지의 말이지만 이 말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연후에는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화학작용을 일으켜 마이너스 이미지를 지니게 된
것이다.
어느 한 회사의 입사 시험에 '변명'을 한문으로 표기하라는 문제가 출제됐던 일이
있다. 그 결과 '변명'으로 옳게 쓴 수험자보다'변명'으로 쓴 수험자가 많았다 한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한글 세대의 한문에 대한 무식을 탓하려고 이 사례를 머리에
인용한 것은 아니다. 변명이라는 행위자체를 둔 한국인의 공통된 의식구조가 그
답안을 쓴 한국인으로 하여금 공통된 오답을 쓰게 한 것일 게다.
변명이란 말은 글이나 말로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는 뜻이다. 이 말뜻에 조금도
마이너스 이미지가 곁들여 있지 않다. "주역"에 보면 '아무리 조그만 일일지라도
변명이 있어야 한다.' 했고, "관자"에 보면 '사물이나 사리를 정하는 데 있어 변명은
예외다.'라고까지 했다.
이처럼 변명의 본뜻은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말에는 그 어원은 좋은 뜻이라도
그 말이 쓰인 문화적 배경 또는 그 말이 쓰인 나라의 의식구조적 배경에 따라 좋지
않은 마이너스 이미지가 붙을 수도 있는 법이다. 곧 말뜻과 말이 풍기는 이미지는
반드시 일정치가 않다.
이를테면 Gift는 영어권에서 '선물'이란 뜻으로 플러스 이미지를 지니고 있지만
독일어권에서는 선물이라는 말뜻 이외에 독이나 원념의 뜻도 있어 마이너스
이미지를 풍겨주고 있듯이....
변명이란 말의 원뜻은 플러스 이미지의 말이지만 이 말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연후에는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화학작용을 일으켜 마이너스 이미지를 지니게 된
것이다.
곧 우리 한국 사람들 틈에서 변명한다는 것은 불리한 자기 입장을 구제하거나 또
자기 입장을 유리하게 전개시키기 위해 또는 자기의 과실이나 실책이나 죄과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교묘하게 말을 만들어 한다는 그런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그러기에 변명은 사실이나 진실의 표명이 아니라 사실이나 진실을 왜곡하여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게끔 조작적으로 표명한다는 개운찮은 여운을 끄는 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첫째 한국인은 인간관계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고 선명하게
천명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는 의식구조상의 개연성이 있다.
구미에서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각자의 입장이나 의견이나 주장이
왕성하게 제출되고 그것의 타협과 통합으로써 해결해 나간다. 곧 자기 자신의
왕성한 변명이 선행되게끔 구조적으로 돼 있다.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이나 입장의
분명한 천명 없이는 자아의 소멸이나 패배를 의미한다. 곧 변명없이 못 사는
사회다.
한국인의 의지결정도 구미인과는 전혀 다른 코스를 밟는다. 결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이나 의사를 분명히 표명하는 것을 피하고 신중하고 애매하게
상대방의 생각하고 있는 바를 통찰해 가며 또 언제라도 수정하고 철회할 수 있는
그런 단정적이 아닌 표현으로 자기 의견을 피력한다. 곧 구름잡듯 한다. 그리하여
그 의사의 결정은 구미인들처럼 대립적인 의견의 충돌결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사의 침투작용으로 달성된다. 즉 우리 한국인은 변명에 의한 서로의 대립이나
대결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고 기피하는 점에서 가장 민감하고 또 노력을 아끼지
않는 민족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변명이라는 행위는
한국의 집단이나 한국적 인간관계에 있어 부덕이요, 악이며 가치를 형성하지 못한다.
이처럼 '변명'없이 무슨 일이 이루어지고 의사가 결정된 후에 그 일이나 그 결정에
결함이 생겼을 때 비로소 한국인은 자신의 입장을 변명한다. 곧 서양 사람은 사전에
변명을 하고 그 결정의 결과에 대해서도 전적인 책임을 지는데 우리 한국인은
사전에 변명을 하지 않고서 그 사후의 결과에 대해 잘됐으면 자기 때문이었다고
변명을 하고 잘못됐으면 발뺌을 하기 위한 변명을 한다.
우리 한국 사람들 핑계 잘 대는 성미가 곧 이 사후변명의 의식구조 때문인
것이다. 핑계는 사후변명의 한국적 표현이며 핑계없는 무덤 없다듯이 한국인은 모든
사물이나 사리의 결과에 대해 반드시 핑계를 대려 한다. 그것은 사전에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밝히는 그런 사전변명이 없기에 그 반작용으로 핑계가 발달한
것이며 변명이라는 본뜻의 플러스 이미지가 한국 사람에게 변명이라는 마이너스
이미지로 보편화된 이유가 이에 있는 것이다.
소도둑을 잡아 관가에서 족쳤더니 이 소도둑은 완강히 그 도둑질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다만 길가에 새끼 한 토막이 떨어져 있기에 그 새끼를 주워들고 집에
돌아왔더니 그 새끼 끝에 소가 따라들어온 것뿐이지 소를 도둑질 한 것은
아니었다고 우겼다는 우스개 이야기는 곧 한국인의 변명이 변명으로 이미지 다운된
개연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한국인은 이처럼 자기 입장이나 의견을 분명히
밝히는 사전 변명이 의식구조상 용납되지 않기에 사후의 결과 특히 실수나 과실,
죄악, 무례, 부실, 나태, 소홀, 같은 마이너스 결과를 무화시키는 수단으로써 변명을
악용해 왔으며 따라서 '변명'에 악이라는 의식이 따라붙게 된 것이다.
@ff
11. 속과 겉이 다른 한국인
그것을 자제하지 못할 만큼 격양되면 싸울 생각을 뒤로 미루고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든지, 잠시 휴전을 하든지 하여 내부의 일을 철저히 외부로부터 안전보장을
한다.
1890년 상해에서 간행된 아서. H. 스미스의 "중국인성구조"에 중국 사람들의
부부싸움에 대해 흥미 있는 관찰을 하고 있음을 본다.
언성을 높여 싸우면서 서로가 집 밖에 오가는 행인이 있나 없나를 열심히 넘나
본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판정을 해줄 만한 어떤 아는 사람이 지나가고
있으면 달려나가 이 행인을 끌어들여 자기 입장을 구구히 설명하고서 누가 옳고
그르고를 판단해 줄 것을 요구한다. 비단 전혀 지면이 없는 행인일지라도 이 집안
싸움에 개입을 강요받으며, 또 개입해서 판단해 주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다고 했다.
만약 아내에게 불리하고 억울한 판단이 내려지면 아내는 아내 나름으로 다른
행인을 끌어들여 자기의 입장을 설명한다. 이렇게 외부 사람들을 끌어들여 편싸움이
되고 이 편싸움을 판단하는 제삼자를 다시 끌어들이는 경우도 있게 된다.
이같은 중국 패턴의 부부싸움은 집을 둔 내부의 일을 외부에 공개하는 것이요, 또
내부의 일에 외부를 끌어들이는 그런 내외의 소통이 어떤 장해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된다.
인도에도 이 집을 둔 내부와 외부의 차단이 별로 심하지가 않다.
불교성지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인도 비하르지방을 보름에 걸쳐 여행하는 동안
필자는 온 마을의 부녀자들이 한 집에 모여 집단싸움을 하는 것을 두 번이나
목격했었다. 보름 동안에 두 번이나 목격했다는 것은 인도 사회에서는 이같은
부녀자의 집단싸움이 자주 있다는 것을 뜻한다.
호기심이 나서 들어가 왜들 이렇게 싸우냐고 물어 봤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고부싸움이라는 것이었다. 고부싸움이면 단둘이 싸울 일이지
왜 온 동네 부녀자가 난투를 벌이는 건가 하고 물었다.
인도 농촌에 있어 시어머니와 며느리싸움은 거의 집단싸움이게 마련이며
집단싸움이 안 되는 고부싸움이란 오히려 이례적인 것이라 했다.
맨 처음 어느 한 집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움이 붙는다. 그럼 고함소리가
난다. 그 고함소리는 이웃집들에 전파된다. 이 고부싸움소리를 들으면 인도
부녀자들은 본능적인 조건반사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고 있든간에
일손을 멈추고 이 싸움을 하고 있는 전장으로 달려 간다는 것이다. 가서 그 시비를
듣기 전에 옆집 시어머니들은 쌈한 집 시어머니 편을 들고 옆집 며느리들은 쌈한 집
며느리 편을 든다. 이렇게 제일단계의 집안싸움으로 에스컬레이션을 하면 그
고함소리가 더 커진다. 그 커진 고함소리가 온 동네에 미친다. 온 동네의
부녀자들이 그 고함소리에 조건반사 현상을 일으킨다.
이같이 해서 삽시간에 온 동네의 시어머니 대 며느리의 고부전쟁이 되어 버린다.
이처럼 집을 둔 내부의 종적인 구조보다 집 밖으로 유대되는 외부와의 횡적구조가
중국 사람이나 인도 사람에게는 강한 편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부부싸움이나 고부싸움을 견주어 보자.
문을 걸어 잠그고 들창을 내리며 심지어는 홑이불로 문이나 창을 가린 다음 쌈을
한다. 외부 공간과 차단시켜 놓고서 다툰다. 가급적 언성도 죽임으로써 목소리가
밖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면서....
그러기에 허스키, 소프라노는 아주 별난 음성으로 싸운다. 격앙되어 목소리가
커지면 서로 "쉿!" 하며 주의를 주면서 싸우거나, 그것을 자제하지 못할 만큼
격앙되면 싸울 생각을 뒤로 미루고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든지, 잠시 휴전을 하든지
하여 내부의 일을 철저히 외부로부터 안전보장을 한다.
싸움하는 도중 손님이 찾아 오면 칼로 자르듯이 싸움을 멈추고 언제 싸웠냐는
듯이 생글생글 평소처럼 손님을 맞고 용무를 마친다. 인사를 다 차려 보내놓고
나서는 문을 잠그고 삿대질을 하며 다시 재개를 한다. 이처럼 한국인은 집 밖의
외부를 내부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한다.
이처럼 외부와 내부의 완벽한 차단은 외부=표. 내부=이의 외중구조를 뜻하며, 이
표리의 이중구조는 한국인의 사색구조의 기본 패턴이랄 수가 있다. 중국 사람이나
인도 사람이 집안싸움을 손쉽게 집 밖에 공개시키는 것은 표리가 단일구조로 되어
있다는 증좌랄 수가 있다.
한국인의 마음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이 표리의 이중구조는 중요한 기본 공식이랄
수가 있다.
집의 구조 자체도 이 표리성이 완연하다. 구미의 집들은 집의 내부와 외부를
차단하는 담이 큰 구실을 못하고 있다. 차단 구실보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땅이라는
일종의 영역 표시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사람이나 개가 넘어다닐 수 있을 만큼
나지막하게 나무토막을 박아 놓은 것이 고작이다.
곧 집 안과 집 밖이 차단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담은 외부와
내부의 완벽한 물리적 차단이다. 돌담을 쌓거나 벽돌담을 쌓거나 하여 표리표시를
선명하게 한다. 대문도 크게 단단하게 하여 안에서 고리를 걸고 빗장으로 완벽하게
폐쇄한다.
한국인은 일단 문안에 들어오면 표인간에서 이인간으로 표변을 한다. 표인간의
차림인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으며 표복장을 벗고 이복장으로 갈아 입는다.
구미인은 집에 돌아와도 신발을 벗지 않고 옷도 침대에 들어갈 때까지는 집
박에서 입었던 그대로다. 곧 표인간이 이인간으로 돌변한다는 법 없이 단일
차림으로 집 밖이나 집 안에서 산다.
지금 한국의 대부분의 주택이 양옥구조로 개조되고 있다. 어쩌면 도시인구의 약
70퍼센트 이상이 양옥에서 산다 해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옥이 갖는 표리없는 단일구조는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용납치 않아
표리구조로 변형시켜 놓고 있다. 이를테면 영역표시에 그치는 양옥의 담을 그대로
도입한 한국의 양옥은 없다. 모두가 물리적 차단이란 전통적 담을 쌓고 산다. 또
양옥의 기본구조인 신을 싣고 집 안에서 사는 그런 한국의 양옥은 거의 없다.
잠자고 밥먹고 옷입고 사는 이 의식주는 한국인에게 있어 '이'의 공간에서
영위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표로부터 차단되어야 하고 표의 공간에서의 영위는
본능적인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가족끼리 밥먹고 있을 때, 손님이 오면 밥을 먹다 말고 마치 밥먹는 것이 무슨 큰
과실이나 죄짓는 일처럼 반사적으로 밥상을 치운다. 반찬이 없어 남보기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표' 범주가 손님에게 노출된 데 대한 충격 때문에 그같은
조건반사가 일어난 것이다.
동남아의 길거리를 걸어 보면 사람의 왕래가 심한 길거리에서 온가족이 밥을 먹고
있는 광경을 흔히 볼 수가 있다. 프랑스를 비롯 남부 유럽 지방의 길거리에는
카프레리아가 준비되고 있다. 그 길에 앉아 식사들을 한다. 해방 수 미국의
지아이(GI)들이 상륙했을 때, 우리 한국민에게 이질감을 주었던 요소 가운데 하나로
길 가면서 빵을 먹고 콜라를 마시며 껌을 씹는 행위였다.
한국 사람은 길거리는커녕 남이 보는 앞에서 뭣을 먹고 하는 것은 부덕이었다.
비단 음식뿐만이 아니다. 구미 사람들이 잠자고 난 자리를 그대로 두어 두는데
비해 한국인은 이부자리를 반드시 개어 벽장에 넣어 둠으로써 잠잔다는 '이' 범주의
흔적을 말소해 버린다. 이불잇이나 베갯잇 등 이부자리의 빨래는 반드시 '이' 요소가
철저히 보장된 공간인 뒤란에다 말려야 했던 고로 이 '이' 물건의 '표' 공간에의
방기는 그 방기 공간에 따라 뜻이 달랐다.
'이' 공간인 뜰에 베개를 버렸을 경우는 아내를 친정에 내쫓는다는 남편의
의사표시요, 담 밖인 '표' 공간에 버렸을 경우는 아내와 이혼한다는 남편의 단호한
의사표시인 것이다. 곧 돌이킬 수 없는 부부사이의 절연을 그들이 은밀히 베고
잠자던 이중이 요소인 베개를 표 공간에 노출시키는 것으로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같은 한국인의 표리구조와 미국인의 단일구조는 인간관계의 밀도에도 차이를
있게 한다.
한국 사람은 이 공간에 사는 폐쇄된 사람끼리 종적인 인간유대가 강한 반면에
미국 사람은 표 공간에 사는 공개된 사람끼리의 횡적인 인간유대가 강하다.
미국의 경우 부부본위, 어른들 세계, 어린이들 세계, 젊은이들의 세계가 각기
독립적인 것으로서 분절되어 있다. 곧 이 가족구성의 종적인 유대가 약한 반면에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파티를 통해,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끼리 데이트를 통해,
어린이들은 코리구라는 구겨 집단을 통해 횡적으로 사회에 연결되고 있다.
한국인은 조상--조부모--부모--나--형제--자매--아들의 종적 유대가 강한
반면에 미국인은 집 밖의 평등한 동료들과 횡적인 유대가 강하다. 그러기에
도덕이나 윤리도 한국인은 이 종구조의 가족 윤리가 발달하고 어떤 다른 윤리보다
선행된 데 비해, 미국인은 횡구조의 공공윤리가 발달하고 어떤 다른 윤리보다
선행된다.
미국에서는 자기 부모를 상대로 한 소송사건이 해마다 늘고 있다 한다. 이를테면
연전 "타임"지가 열거한 사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할머니가 조실부모한 손녀를 애지중지 기르면서 이 아이의 장래를 위해 착실히
예금한 3만 달러의 통장을 물려주고 죽었다. 그 통장을 보관하고 있던 할아버지가
긴요한 일이 있어 그 중 3천 달러를 찾아 썼다. 이것을 안 손녀는 할아버지를
상대로 3천 달러의 청구소송을 내고 있다.
또 다른 케이스.
한 18세 된 청년이 부모들과 더불어 유원지에 놀러갔다. 그곳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마침 그 다이빙한 자리의 수심이 얕아 팔에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을 입은
청년은 부모들이 이같이 위험한 곳이면 다이빙을 하지 못하게 주의를 주든지
위험표시를 해놓든지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과실죄'로 부모를 형사소송하는 한편
5백만 달러의 배상 민사소송을 아울러 제기했던 것이다.
흔하지 않은 이례적인 일일 것이나 이같은 소송이 가능하다는 모랄풍토만은
인정해야 할 줄 안다. 이만큼 가족간의 종구조의 유대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이에 비해 한국인의 종적 윤리가 횡적 정의보다 얼마나 소중하고 선행되었던가는
우리 역사상 빈번히 있었던 불고존장론에서도 역력히 찾아볼 수 있다.
불고존장론이란 자기 부모나 상전 등 존장이 지은 죄는 알고 있어도 관에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며 또 존장이 지은 죄를 관에서 강요하는 것이 오히려 죄가
된다는 일종의 한국적 법이론이다. 죄는 색출 박멸해야 할 사회(표)의 적이다.
그러나 가족(이)의 유대가 중요한 한국에서는 이 가족의 윤리적 유대를 파괴하는
것이 큰 사건이요, 사회의 적이 번지는 것을 작은 일로 여겼기에 이같은 한국적
법이론이 형성된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왕조 숙종 11년 6월에 당시 좌의정 남구만의 상소문을 들 수 있다.
당시 대흥산성의 병참용 은을 대량으로 도둑맞은 사건이 있었다. 용의자가
잡혔으나 그 증거를 잡을 수가 없어 포도청에서는 그 용의자의 열두 살 난 아들을
인치하여 공갈하며 그의 아버지가 은을 훔친 절차를 심문했던 것이다. 어린
자식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고발케 하여 참륙의 처형을 했던 것이다. 이 문제를 두고
남구만은 '벽에 구멍을 뚫고 은을 훔치는 일은 극소사요,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적으로 만들게 한 패륜은 극대사'라 하고 이같은 처리를 한 포도청의 행위를 그려
군수가 중한 줄만 알았을 뿐 천리강상이 중한지는 몰랐다 하여 포도대장과
형조판서의 파면을 상주하고 있다.
한국 법률의 본이 된 "대명률"을 보면 자손 처첩이 조부모, 부모, 남편을 관에
고할 경우는 장 1백에 도 3년의 중형으로 다스리고 있다. 예외규정이 있는데 이
고발도 대역이나 모반 등 국가 대사에 관한 일,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했을 경우는 이 중률에 해당되지 않는다.
가정뿐만 아니라 회사, 학교, 노동조합 등 한국의 모든 조직사회는 종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 사회의 특징이 늘어난다.
이를테면 어느 한 회사의 과장은 다른 같은 과장 상호간보다는 자기 부하인
계장이나 계원들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 곧 과장끼리라는 횡적 유대보다
과장--계장--계원하는 종적유대가 보다 강하다. 이 친밀도나 유대력은 과장과 계장
또는 계원이 지닌 직무나 직책 관계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떠난 인간적 관계에 의해 결집력이 생긴다.
흔히들 젊은 사원들이 술집에서 술이 거나하면 '우리 과장은 나를 몰라준다.'고
곧잘 불만을 토로한다. 몰라준다는 불만이 현대 한국 샐러리맨들에게 공통된 요소라
해도 대과가 없다. 이 몰라준다. 곧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사항은 자기가 맡은
직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자기라는 인간 그 자체를 이해해 주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인 것이다.
직장의 인간관계도 이처럼 의사가족적 관계로 맺어져 있다. 여기에서 직책이나
직무상의 관계는 표관계요, 인간적 관계는 이관계다. 미국의 직장에서는 철두철미
표관계 이외에는 어떤 다른 관계도 용납되지 않는다. 곧 표관계 일변도의
단층구조를 하고 있는데 한국의 직장은 이처럼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의 직장이나 단체 등 조직집단에 있어 이 직무 직책 등의 표관계보다
그것과는 아랑곳없는 인간적 이관계가 보다 큰 힘을 갖고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중요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직책에 성실하고 직능에 유능하다 하더라도 인간관계가 소홀하거나 이
종적구조에서 소외되면 그 사람은 그 집단에서 생존하지도 못하고 또 발전도 못하며
끝내는 소외당해 버린다. 이관계와 표관계가 싸우면 꼭 이관계가 이기게끔 돼 있다.
그래서 한국에 있어 유능한 관리자, 곧 윗사람은 유능한 스페셜리스트나
엑스퍼트만으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표관계에서만이 유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유능에다 플러스 알파가 더 붙어야 유능한 윗사람일 수가 있다. 그
알파는 마치 아버지나 형님처럼 인간적 인정적인 배려를 하는 인격의
엑스퍼트이어야 한다.
흔히들 개인과 친지와 타인과의 관계를 세 개의 동심원으로 곧잘 표현한다. 가장
안에 있는 중심원을 '나'라 하고 중간층을 '친지', 바깥 원을 '타인'이라 한다면
한국인과 미국인과의 차이는 다음의 도표와 같다.
타인층은 나와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사회관습에 따라 형식적이고 예의바르기를
요구하는 그런 인간층이다.
친지층은 가족이나 친척 또는 친구 등 친한 사이로 형식적이거나 예의로 접하는
것이 좀 뭣한 인간적 인간층이다. 영국이나 미국 사람 같으면 미스터니 미세스 등
호칭을 하지 않고 텍크, 보브, 앨리스, 낸시 등 애칭이나 별명이나 퍼스트 네임으로
부를 수 있는 그런 사이다.
이 나를 둔 두 개의 인간층과 나와의 사이가 실선과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실선은 그 사이에 굳건한 성이 가로놓여 있다는 강한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고,
점선은 그다지 경계가 강하지 않고 서로 소통이 가능한 그런 소홀한 경계를
나타낸다. 한국인은 친지와는 터놓고 살지만 타인과는 담을 쌓고 산다. 모르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모르는 사람이다. 만리 외국에 가서 한국인들끼리 만났을 때도
한국 사람들은 웬만하면 서로 모른 체하고 지낸다. 이 장벽을 뚫으려면 어떤
이니세이션 같은 것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가운데서 소개를 하는 절차를
거치거나 그것을 거치고도 술 한 잔 나눠야만이 타인층에서 친지층으로 수용시킨다.
곧 그 경계로 하여 밖이냐 안이냐가 확연하고 선명하다.
교환교수로 미국에 가 일 년 있었던 한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 친구가 일하고 있는 연구소 건물의 개축 계획을 대학본부에 제출할 단계에 그
책임자가 청사진을 들고와 이 친구에게 묻더라는 것이었다.
이 친구는 겨우 일 년 남짓 있다 갈 사람에게 의견을 묻는다 해서 책임있는
회답을 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했더니 '일 년이 아니라 반년을 체재하는 일이
있더라도 현재는 이 연구소의 멤버임에는 틀림이 없다. 멤버로 있는 이상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고 말했던 것이다.
한국의 대학이 일 년 계약으로 체재하고 있는 외국인 교환교수에게 대학의 장래
계획에 대한 의견을 상의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한국에 있어서는 타인도
남인데 하물며 외국인은 철두철미 외국인인 것이다. 그러기에 외국인은 항상 경계
밖에 놓아두고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법은 없다. 곧 나와 타인의 경계를 외국인은
뚫지 못하게끔 안보를 한다. 외국인이 경계 내의 우리의 것, 이를테면 김치를 잘
먹고 판소리를 하며 한복을 즐겨 입곤 하면 그것은 이상한 외국인으로 순수한
외국인보다 오히려 더 별나게 본다. 이에 비해 미국인은 외국인일지라도 나와의
경계가 허술하기에 교류가 수월하다.
자기와 외부층과의 경계에 있어서는 거꾸로 한국인이 점선이고 미국인이
실선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인의 자기는 친지에게 의존이 가능하기도 하고 또 자기
안에 친지의 침입이 가능하다는 것이 되고, 미국인의 자기는 이것만은 양도할 수
없는 영역으로 친지든 누구이든 타인에 대해 굳게 문을 닫고 있다는 것이 된다.
한국 사람은 일단 친해지면 자타의 구분이 흐려지고 네것 내것에 구차하게 구분을
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의 의사나 의견이나 결정이라는 것이 별반 큰 힘을 갖지
못하고 그 친지들이나 공동체의 의견, 결정에 조화하려 든다. 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곧잘 일어나는 오해는 이 차이에서 적잖이 비롯되고 있다.
외국인과 친해진 한국인이 마치 한국인에게 하듯 외국인의 자기층에 침입하려
했을 때 무자비하게 문을 닫고 밀어내 버린다. 그런 꼴을 당하고 나면 정이 뚝
떨어지고 더 사귈 맛이 안 난다.
필자의 아프리카 여행 때 CBS방송의 한 프로듀서인 미국인 부부와 같은
차편으로 일주일 남짓 관광한 일이 있다. 그 부인은 고국에 두고 온 다섯 살 난
아들놈 생각을 자주 하였고 필자도 다섯 살 난 아들놈이 있어 곧잘 그 동갑 또래를
두고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던 것이다. 이 공감인자 때문인지 부인과 나는 퍽
친해졌으며 농담도 하고 또 서로 짐도 들어주는 다정한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한 호텔의 선물가게에서 필자는 눈이 부리부리한 목각흑인 어린이인형을
다서 살난 아들 놈을 위해 사면서 그 프로듀서 부인더러 이 선물을 아들놈에게
사다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했더니 이 부인, 갑작스레 표정을 굳히더니
"그런 일까지 걱정해 주지 않아도 됩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부인과는 말도 건네지 않았던 거이다. 한국 사람이면 그만한 권고쯤은
친절로서 고맙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 사람에게는 자기가 판단해서 해야
할 자기층의 침해로 받아들이고 그토록 무자비하게 팽개쳐 버린다.
사람을 가로의 시선으로 보고 평등하게 파악하는 경향이 있는 미국인은
개인주의의 '개' 의식이 확고하여, 인격이 중심에 있는 자기의 프라이버시를 굳게
지키며 상대가 누구일지라도 그 개체의 심층에 드는 것을 거부한다.
양옥에 있어 개체의 방은 완벽하게 프라이버시를 보장해 준다. 그리고 문만 열면
바로 사회와 직결된다. 가족이 모이는 식당이나 거실에 나가더라도 그곳은 사회의
일부이며 반드시 사회에 나간 것처럼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나간다. 한국인처럼
거실이나 식당에 나간다는 법은 없다.
곧 개체는 표문화에 직결된 데 비해 한국인의 개체는 이문화와 중화되어 표문화를
단절시킨다.
이같은 한국인의 표리구조는 퍼서낼러티 자체에도 표리층을 형성시키고 있다.
'명실'이란 것이 그것이다. 명실이 상부한다느니 명실이 다르다니 하는 이 명실은
바로 '표리'와 같은 개념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곧 명은 명분이나 체면 같은
형식적인 요소요, 실은 본심 같은 실질적 요소이다.
명은 '표'요, 실은 '이'다. 그러기에 명과 실은 한국인에게 있어 상부하는 경우보다
상이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이 있는 '표' 공간에 있어서의 논리와 혼자 있을 때의 '이' 공간에
있어서의 논리는 상반된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교실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알았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선생은
모르는 것이 있더라도'예'하고 대답해 주기를 기대하고 묻고 있으며, 또 어린이들은
모르더라도 알았다고 대답하는 것이 선생에 대한 '표' 논리의 예외로 알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모르면서도 '예!' 하고 대답한다. 표 논리에의 이 논리의
희생이다. 미국의 어린이면 결코 그 표논리의 명분에 휩쓸린다는 법 없이 모르면
모른다고 우겨대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처럼 '명'에서 '실'을 희생하는 한국인은 회의나 공개토론에서 대체로 명분의
노예가 되는 바람에 실을 상실하기 일쑤이고 그러기에 회의의 결과가 효과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다.
이같은 명실의 이중 퍼서낼러티를 다음과 같은 역시 삼중의 동심형으로 도시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여기 내향성의 한 실업가가 있다고 하자. 그는 항상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조용한 독서를 즐기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주간에 회사에서 일할 때는
실업가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외향성의 어떤 다른 남자와 다름없이 사교적이고
활동적으로 일을 한다. 곧 주간의 그만을 보아 온 사람은 그가 내향성이라는 것을
전혀 모를 지경이다. 이런 경우 이 실업가는 그의 역할(role)에 순응하기 위해 그의
본성질과는 전혀 다른 가면의 행동을 한다. 이같은 외부공간과 접하는 퍼서낼러티의
표층을 A층(role action)이라 한다.
한 사회조사에 의하면 창녀들 가운데는 낮에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얌전하고
수줍어하는 여자가 예상과는 달리 비교적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짙은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 입고서 거리에 서면 그 성질이 표변, 외향적인 난폭한 언행을 하고
표독해진다는 것이다. 마치 배우가 역할이 주어졌을 때 그에 상부한 연기를 하듯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역할행동이 퍼서낼러티의 가장 겉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같은 역할행동이 되풀이됨으로써 몸에 익숙해졌다고 하자. 창녀의 경우를
실례로 들면 역할행동인 난폭한 언행을 하는 것은 특수한 장(situation)에서만 하는
일이요, 본연히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것 때문에 마음의 가책을 받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곧 표리의 이중행동층을 B층(Core peripheral
personality)이라 본다.
다시 이 역할행동이 보다 깊숙이 내면화하여 이제 역할이 본여의 영역까지
지배했을 경우를 A층(Core nucleus personality)이라 한다. 다시 창녀의 경우를
들면 이제 난폭한 언행을 특수한 장이 아닌 일반적인 장. 곧 본연의 장에서도
서슴없이 하게 된다. 역할행동을 두고 가책이나 십자가로 느낀다는 법 없이
일상화해 버린다. 곧 B층은 표리의 이중구조인데 비해 A층은 표가 리를 압도하여
표--표의 단일구조화한다.
민족이나 문화권에 이 역할행동을 둔 퍼서낼러티 형성이 달라진다.
구미인은 역할행동이 A층으로 단일화한데 한국인은 역할행동이 B층으로
이중화한다. 바꿔 말하면 표리화한다. 그러기에 한국인은 공적활동, 집단활동,
사회활동, 외부활동 등 역할행동 때와 사적활동, 개인활동, 가정활동, 내부활동
때와는 의사나 의견이나 주장이나 언행이 일관되지 않고 다를 경우가 많다. 곧
표리가 다르다.
한국인을 이해하는데 있어 이 표리구조는 주요한 관건이 되며 이 관건을
구조면에서 조명해 본 것이다.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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