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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정신분석의 입장

by Frais Feeling 2020. 7. 26.

  정신분석이란 정신생리학의 영역에서 이룬 커다란 진보는, 정신생활에 나타난 모든 현상
에는 인간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 점이다. 실제로 실존하는 것은, 과학자들에 
의해 기록된 객관적인 물체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육체이다. 여자는 자기를 암컷
으로 느끼는 한 암컷이다. 물론 여자는 본질적으로 생물학적인 존재여서 체험과 무관한 조
건도 있다. 예컨대 난자의 구조에는 체험이 반영되지 않는다. 반대로 생물학적으로는 그다
지 중요하지 않은 기관, 예를 들면 음핵 같은 것이 체험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연이 여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그 감성 속에 자연을 받아들여 자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견지에서 하나의 체계가 세워졌다. 나는 여기서 그것을 전면적으로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단지 그것이 여성에 대한 연구에 공헌한 점만을 알아보려고 한다. 정신분석
에 대해 검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종교-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
로, 정신분석은 엄격한 개념의 바탕 위에 서 있지만, 거추장스러울 만큼 융통성이 많다. 정
신분석에서의 용어는 때로 가장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팔루스라는 용어는 분명
히 남성의 생식기를 가리킨다. 그런데 같은 용어가 때로는 크게 확대되어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양물은 남성의 성격이나 상황 전체를 표시하게 된다. 만일 그 학설의 낱말
뜻을 공격하면, 정신분석학자는 그 정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고, 그 정신을 긍정
하면 곧 자기 속에 가둬놓으려고 할 것이다. 학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신
분석학은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성공을 거두면, 이 학설의 신봉자는 점점 신뢰성이 깊어진다. 대개 정
신분석학자말고 어디서 정신분석학의 진실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기독교나 마르
크스주의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학자 중에도 이단자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많은 정
신분석학자는. "정신분석학의 가장 큰 적은 정신분석학자이다." 하고 공언한다. 가끔 현학
적일 정도로 학문적인 복잡성을 띠면서도, 여러 가지 애매한 점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가 지적한 것처럼 '성욕은 실존과 공존한다'는 명제는, 크게 다른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실존의 모든 현상은 성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모든 성적인 현상은 실존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단정 
사이에 타협점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 상호간을 왕래하는 데 그친다. 그리고 '성
적'과 '생식적'이라는 말을 구별하려고 하면, 성욕의 개념이 흐려진다.
  "프로이트에 있어서 성적 요소란, 생식력을 개방하는 내적인 능력이다." 하고 달비에는 
말한다. 그런데 '능력'이라는 관념, 즉 가능의 관념처럼 애매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현실
만이 가능의 확증을 주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자기가 철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기의 
체계를 철학적으로 변호하기를 거절했다. 그의 제자들은, 프로이트는 그럼으로써 모든 형
이상학적인 공격을 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내린 모든 단정의 배후에는 형이상학
적인 가정이 숨어 있다. 자기의 용어를 활용하는 것은 바로 하나의 철학을 채택하는 것이 
된다. 이런 혼란 때문에 비판하기가 어렵지만, 그 때문에 비판이 필요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여자의 숙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남자의 숙명에

서 여자의 숙명을 끄집어내어, 몇 가지 문제점을 수정하는 데 그쳤다. 프로이트 이전의 성
과학자 마라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욕은 분화된 에너지로 보면, 남성적인 힘이다. 우
리는 오르가슴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르
가슴에 도달하는 것은 '남성적'인 여자이다. 성적 충동은 '일방통행'이며 여자는 단지 그 
과정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자
의 성은 남자의 성과 마찬가지로 진화되어 있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자만을 특별히 
연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성욕은 남성과 여성이 어느 쪽에 나
타나건 으레 남성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그는 여성의 성욕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여성의 성욕이 인간의 일반적인 성욕의 복합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
다.
  그에 의하면 이 인간 일반의 성욕은 남녀 간에 마찬가지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빠는 구순기를 지나 다음으로 항문기를 거쳐, 마지막으로 생식기에 
도달한다. 양성이 구분되는 것이 이 시기이다. 프로이트는 그의 선배들이 그 중요성을 충
분히 인정하지 않은 하나의 사실을 해명했다. 남성의 색정은 완전히 페니스(음경) 속에 국
한되지만, 여성에게는 분명히 양분된 색정 계통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유아기에 발달하
는 클리토리스(음핵) 계통이고, 또 하나는 성년기에 비로소 성숙되는 질 계통이다. 남아는 
생식기에 도달했을 때, 그 발달이 완성된다. 그는 쾌락이 주체성 속에서 추구되는 자애적
인 태도에서 쾌락을 어떤 개체에, 보통은 여성과 결부시키는 타애적인 태도로 옮아간다.
  이 이행은 사춘기에 자애의 단계를 지나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페니스는 유아기와 마찬
가지로 특권적인 색정기관으로 머물러 있다. 여성도 나르시시즘(자기애)을 통하여 남성에 
대해 그 성욕을 객체화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남성의 경우보다 복잡하다. 왜냐하면 여자
는 클리토리스의 쾌감에서 질의 쾌감으로 옮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남성에게는 하나의 생
식기밖에 없지만, 여성에게는 두 생식기가 있다. 그래서 여성은 그 성적 진화가 최후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유아기에 머물러, 결국 신경증을 일으킬 확률이 더 높다.
  어린이는 자애단계에서 다소 강렬하게 객체에 애착을 느낀다. 남자아이는 어머니에게 긴
밀히 접근하여 아버지와 동일시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 엄청난 요구에 질려, 아버지가 
자기를 벌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사내아이가 아버지에게 반감
을 갖고 어머니를 사모하는 경향)에서 '거세 콤플렉스'가 생긴다. 그리하여 아버지에게 반
항심을 갖는 동시에 자기의 프라이드를 내면화한다. 이리하여 근친상간의 경향을 비난하는
 '초아'가 생긴다. 이런 경향은 억압되어 콤플렉스는 청산되며, 남아는 마음속의 감독자였던 
아버지에게서 해방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경향이 더욱 뚜렷해지고, 그것이 무참히 
짓밟힐수록 초아는 강해진다.
  프로이트는 여아의 성장과정을 처음에는 남아와 동일하게 서술했다. 다음에 유아기 콤플
렉스의 여성형태에 엘렉트라 콤플렉스(여자아이가 아버지를 따르고 어머니에게 반감을 느
끼는 경향)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본질에서 생각하기보다는 남성적인 
측면에서 출발하여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남녀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인정한다. 소
녀는 먼저 어머니에게 고착한다. 그러나 소년은 어느 시기에도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이끌
리는 일이 없다. 그 고착은 구순기의 잔재이다. 그때 소녀는 아버지와 동화하려고 한다. 그

런데 5세경부터 소녀는 해부학상 성기의 차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페니스가 달리지 않은 
데 대해 일종의 거세 콤플렉스를 느끼게 된다. 그녀는 페니스가 잘려나간 것으로 생각하고 
고민한다.
  이렇게 되면 남자가 된다는 희망을 포기해야 하며, 그녀는 어머니와 동화되어 아버지를 
유혹하려고 한다. 거세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서로 협조한다. 소녀가 아버지를 
사랑할 때에는 아버지를 닮고 싶어하므로, 그 실망은 그만큼 더 커진다. 한편 이 실망은 
그녀의 애정을 더욱더 강하게 만든다. 그녀가 자기의 열등감을 메우기 위해서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통하여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녀는 어머니에게는 적대감정을 갖게 된다. 이윽고 그녀 속에서도 초아가 형성되어, 근
친상간적인 경향이 억압된다. 그러나 이 '초아'는 연약하다. 최초의 고착의 대상이 어머니
였으므로,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처럼 분명치 않다. 아버지 자신이 자
기가 비난하는 애정의 대상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금지명령은 경쟁자인 아들의 경우처럼 
강하지 않다. 소녀에게는 성기의 발달과 마찬가지로 성의 드라마는 그 남자형제들보다 복
잡하다. 그녀는 거세 콤플렉스에 대한 반동으로서 여자이기를 거부한 채, 언제까지나 페니
스를 달기를 원하며 아버지와 동화하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녀를 언제
까지나 클리토리스 단계에 머물게 하여, 불감증이나 동성애로 향하게 한다.
  이런 경향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비난은, 프로이트가 남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그는 여성이 자기를 페니스가 잘린 남성이라고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렸다는 생각은 어떤 것과의 비교, 즉 경중을 의미한다. 많은 정신분석
학자는 오늘날에 와서 여아는 페니스가 없는 것에 대해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잘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애석하게 느끼는 심정은 그다지 일반적인 것은 아니
다. 또한 이것은 단지 해부학적인 대조만으로는 생기지 않는다. 많은 소녀들은 훨씬 나중
에야 남자의 신체구조가 자기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 발견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시
각을 통해서이다.
  남아는 페니스에 대해 프라이드를 느낄 수 있는 체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프라이드
도 그의 자매들의 굴욕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자매들은 남자의 성기를 단지 외면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다란 혹, 툭 부러질 것만 같은 막대기에 대해 그녀들은 무관심
하거나 심할 경우에는 혐오감을 느끼는 데 불과하다. 소녀들이 그것을 부러워하게 되는 것
은, 남성의 가치에 대해 예비지식을 갖게 되면서부터이다. 프로이트는 이 선망에 대해 설
명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일로 간주한 것이다.
  한편 여성의 성욕에 대해 독자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개념은 대단히 애매하다. 이미 남아의 경우에도 순전히 생식기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존재는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버지가 딸에게 성적 
자극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여자의 색정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의 하
나는, 클리토리스의 쾌감이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춘기가 되어 질의 색정과 
관련하여 비로소 여성의 체내에는 여러 가지 색정대가 발달하기 때문이다.
  10세 여아의 경우에, 아버지의 키스나 애무가 클리토리스의 쾌감을 일으키는 '내재적 능
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보면 전혀 무의미한 주장이다. 만일 '엘렉트라 콤플렉

스'가 극히 모호한 감성적 성격밖에 띠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감정이라는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는데, 일단 이것을 성욕과 구별하면 프로이트의 학설로는 이것을 정의할 방
법이 없게 된다. 어쨌든 아버지를 신격화하는 것이 여성의 성욕은 아니다.
  어머니도 아들에게 일으키는 욕망에 의해 신격화되지 않는다. 여성의 욕망이 지배적인 
존재에 대해 일어난다는 사실은 여자에게 하나의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 대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인다. 아버지 우월성은 사회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것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역사상 어느 시기에 어떤 권위가, 아버
지가 어머니보다 우월하다고 결정했는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프로이트 자신이 실토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결정은 진보를 의미하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이 경우에 이것은 아버지의 권위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권위가 아버지에게 주어
진 것은 진보의 힘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하고 그는 마지막 저술(모세와 그 백성) 에서 
쓰고 있다.
  아들러(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1870~1937)가 프로이트와 다른 점은, 인간생활의 
발전을 단지 성욕에서 찾으려는 학설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즉 그는 
인간생활을 인격 전체에서 찾으려고 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위는 모두 욕망, 즉 쾌락
의 추구에서 시작된다고 보았으나, 아들러는 인간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고 있
다고 생각한다. 그는 행위 대신 동기, 목적성, 계획을 내세운다. 그는 지성에 큰 비중을 두
기 때문에 성적인 것은 상징적인 가치밖에 없다.
  아들러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활동은 세 시기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인
간에게는 권력에의 의지가 있는데, 거기에는 열등 콤플렉스가 따르게 된다. 이 모순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현실의 시련을 회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속
임수를 쓰게 된다. 그는 자기와 자기가 두려워하는 사회 사이에 간격을 둔다. 여기서 사회
적인 질병인 신경증이 생기게 된다. 여성의 경우, 그 열등 콤플렉스는 자기가 여자인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거부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 콤플렉스는 자기에게 페니스가 달리지 않아
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아가 페니스를 부러워하는 것은, 그것이 오직 남아에게 주어진 특권의 상징이기 때문
이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차지하는 지위, 남성 존중의 풍조, 교육 등 모든 것이 남성의 우
월성을 여성에게 믿도록 유도하고 있다. 나중에 성관계를 가질 때 여성이 남성의 밑에 있
게 되는 성교의 체위까지도 또 하나의 굴욕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여성은 '남성적인 항의'
로 반항하게 된다. 일부러 남성화하려고 노력하거나, 여성에게 고유한 무기를 사용하여 남
성에게 도전하기도 한다. 어머니가 되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어린애의 페니스에서 상당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여자로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자
기의 열등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제가 된다. 여자는 남자보다 더욱 깊이 자기분열을 일으
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러와 프로이트의 학설의 차이점이나 그 견해에 대해 상세히 알아볼 필요는 
없다. 요컨대 전자의 행위에 의한 설명이나 후자의 동기에 의한 설명도 크게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는 동기를 전제로 하지만, 동기는 행위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기 때
문이다. 이렇게 보면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학설을 종합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

실 아들러는, 목적이나 결말의 개념을 개입시키면서도, 심리적 인간관계의 관념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 그와 프로이트의 관계는 정력설과 기계설의 관계와 비슷하다. 충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든, 인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든, 물리학자는 언제나 결정론을 인정하고 있
다.
  이것은 또한 모든 정신분석학자에게 공통된 가설이다. 정신분석학자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는 결정론적 요소의 작용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정신분석학자도 여성
에게 모두 같은 운명을 마련해 주고 있다. 즉 여자의 일생은 그 '남성적'인 경향과 '여성
적'인 경향의 투쟁으로 환원된다. 첫째 경향은 클리토리스 체계 속에, 둘째 경향은 질의 에
로티시즘 속에 나타난다. 여자는 유년기에는 아버지와 동화하려고 하고, 그후 남자에게 열
등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다음의 두 가지 태도 중에서 어느 한쪽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된
다. 즉 자기의 자주성을 유지하여 남성화하거나(이것은 열등감 때문에 긴장감을 일으키는 
신경증의 원인이 되기 쉽다), 아니면 순종적인 사랑 속에 자기 자신의 행복을 성취하는 것
이다. 이 해결방법은 여성이 전에 우월자인 아버지에게 애정을 품은 적이 있기 때문에 한
결 쉽다. 그녀가 애인이나 남편에게서 구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이며, 성적 사랑은 여자에
게 지배를 받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한다. 여자는 어머니가 됨으로써 보상을 받아, 다시 
새로운 자주성을 되찾게 된다. 이 운명은 독자적인 역학에 의해 연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통해 전개되며, 여자는 저마다 이런 운명에 수동적으로 따르
고 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그 학설에 경험적인 확증을 뒷받침하는 데 대단히 유리하다. 널리 알
려진 바와 같이, 프롤레마이오스(그리스의 천문학자)의 학설을 교묘히 복잡하게 만들어, 
유성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태연스럽게 행세해 왔다. 이와 마찬
가지로 오이디푸스에 도착된 오이디푸스를 겹쳐놓고, 모든 고뇌 속에 욕망을 보여줌으로
써, 결국 프로이트의 학설과 모순되는 사실까지도 그 속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형체를 파악하려고 하면 결국 본질에서 출발하게 되고, 그 형체가 파악되는 방법에 따라 
본질은 구체적인 사실로 분해되어 파악된다. 그러므로 만일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개개의 
사례를 서술하려고 하면, 그 사례의 배후에 대하여도 프로이트적인 도식을 발견하게 될 것
이다. 다만 하나의 학설이 세부에 관해 얼마든지 임의의 해석을 허용하거나, 혹은 관찰의 
결과 통칙과 같은 변칙이 발견될 경우에는, 낡은 틀을 깨뜨리는 것이 낫다. 그래서 오늘날
에는 정신분석학자들은 모두 프로이트의 개념을 자기류로 고치려고 노력하여, 절충을 시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현대의 어떤 정신분석학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콤플렉스에는 
그 자의만으로도 몇 개의 구성요소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콤플렉스란, 이런 부조화의 여
러 요소에 있는 것이지, 그중의 한 요소가 다른 여러 요소를 대표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러나 단지 여러 요소의 집합이라는 개념은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생활은 모자
이크 장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시기에 각각 완벽한 것이며, 그 통일성은 반드
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하여 인간
생명(실존)의 근원적인 의도를 발견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 근원에 거슬러올라
가보지 않으면 인간은 마치 방향과 우연성도 없는 충동과 억압의 투쟁을 일삼고 있는 듯
이 보인다. 모든 정신분석학자 중에는 선택의 관념 및 그와 관련된 가치의 관념을 전적으

로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체계의 본질적인 약점이다. 프로이트
는 충동과 억압을 실존적 선택에서 떼어놓았기 때문에 그 기원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그것을 처음부터 주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가치의 개념을 권위의 개념으로 대
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모세와 그 백성> 속에서, 그는 이 권위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예컨대 근친상간이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버지가 그것을 금했기 때
문이라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금했는지는 알 수 없다.
  '초아'는 하나의 압제에서 나온 명령과 금지를 내면화한 것이다. 거기에는 본능적인 경향
이 작용하고 있으나,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두 현실은 각각 이질적인 것
이다. 왜냐하면 도덕은 성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통일이 파괴되어 
개인이 사회에 이르는 다리도 없었다. 프로이트는 개인과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기묘한 이
야기(<토템과 터부>)를 만들어내었다. 아들러는 거세 콤플렉스는 그 사회와의 관계를 제
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가치의 문제에 한 걸음 더 접근했다. 그
러나 사회가 인정한 여러 가치의 존재론적 근거까지는 거슬러올라가지 못하고, 성욕 자체 
속에도 가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성의 중요성을 간파했
다.
  성욕은 분명히 인간생활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생활 전반에 
침투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미 생리학의 측면에서 고찰한 것처럼 고환의 생명과 난소의 생
명은 모든 세포의 생명과 융합되어 있다. 살아 있는 것은 성을 지닌 육체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실존자와 역시 성을 가진 육체의 다른 실존자와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성과 관
련이 있게 된다.
  그러나 육체나 성이 실존의 구체적인 표현이라면, 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역시 실
존 자체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런 견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을 기정사실로 처리해 버린다. 예컨대 여아는 엉덩이를 내놓고 쭈그리고 앉아
서 오줌을 누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가? 마찬가지로 남성은 페니스가 있기 때문에 프라이드를 갖는가, 아니면 페니스 속에 그
의 프라이드가 나타나는가 하고 묻기 전에, 프라이드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주체의 
주장이 객체 속에 구현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성을 최소단위의 궁극적인 조건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실존자 중에는 그 이상으로 근원
적인 '존재의 탐구'가 있으며, 성은 그 여러 가지 측면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것을 사르
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바슐라르는 그의 <대지>, <공기>, <
물> 등의 저서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의 첫째 진실은, 자기 
육체와의 관계 및 같은 사회구성원들의 육체와의 관계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에워싼 자연계의 물질에 먼저 관심을 갖고, 그것을 일이나 유희나 모든 '다이내믹한 상상'
의 경험 속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인간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파악한 세계 전체를 통해 구체적으로 존재에 접해 보려고 
한다. 진흙을 만지거나 구멍을 파거나 하는 것은, 포옹이나 성교 못지않는 근원적인 활동
이다. 인간의 이런 활동 속에서 성적 상징만을 인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구멍과 진흙과 벤 
자국, 그리고 견고성이나 완벽성 같은 것은 근본적인 현실이다. 인간이 이런 것들에 대해 

갖는 관심은 성욕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인간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
가에 따라 성욕이 채색되어진다. 완벽성이 남성의 마음을 끄는 것은 그것이 여자의 처녀성
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완벽성에의 애착이 그의 눈에 처녀성을 귀중한 것으로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노동이나 전쟁, 유희, 예술활동 등은 다른 어떤 존재방식에도 환원
될 수 없는 이 사회에서의 존재방식이다. 이런 것들이 성본능과 관계가 있는 특질을 나타
내는 경우도 있다. 개인은 이런 현실과 동시에 이런 색정적인 경험을 통하여 자기를 선택
한다. 그러나 이 선택이 통일성을 회복하려면 존재론적인 관점에 의해서여야 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 선택의 관념을 결정론이나, '집합무의식'이라는 명목으로 배격한다. 
이 무의식이 인간에게 기성의 이미지나 보편적인 상징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꿈이나 설익
은 행위, 착란, 비유, 인간운명의 유사성 등은 이것(무의식)에 의해 설명된다. 자유를 들먹
이는 것은, 불안의 일치를 설명하는 방법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사실 자유
의 관념은 항구성의 존재와 합치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정신분석학적 방법이 그 학설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성과를 거두는 것은, 모든 개
개의 사례 중에는 아무도 그 보편성을 부정할 수 없는 여건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
황과 행위는 반복된다. 결정의 순간은 보편성과 반복 속에서 생기게 된다. "신체적 구조는 
운명이다." 라고 프로이트는 말하고 있다. 이 말에서 상기되는 것은, 메를로퐁티의 "육체는 
일반성이다." 라는 말이다. 실존은 실존자의 분리를 통하여 하나가 된다. 그것은 유사한 유
기체 속에서 구현된다. 그러므로 존재론적인 것과 성적인 것의 관계 속에는 불변수가 있
다. 어떤 일정한 시기에 어느 집단의 기술이나 경제적, 사회적 기구는, 그 모든 구성원에게 
같은 세계를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과 사회적 양상 사이에도 불변관계가 있다. 유
사한 조건 속에 놓인 유사한 인간은, 그 조건 속에서 유사한 의미를 파악한다. 이 유사는 
엄격한 보편성을 확립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개개의 사례 속에 일반적인 전형을 찾아볼 수
는 있다. 우리는 상징이 신비로운 무의식이 만든 비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각
각의 의미를 지닌 유사를 통하여 하나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다. 모든 실존자에게 실존의 
상황은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실존이 직면하게 되는 사실성이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여러 가지 의미가 많은 개인에게 동일하게 밝혀진다.
  상징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분리인 동시에 공존이기도 한 인간의 현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개개인의 
창의도 거기서 생겨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방법은 학설이 인정하든 말
든 실제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페니스에 주어진 가치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
의 '소외'에 대한 실존적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다. 자기의 자유에서 오는 
불안으로 말미암아 주체는 사물 속에서 자기를 모색하게 된다. 이것은 도피의 한 방법이
며, 대단히 근본적인 성향이다. 어린이는 젖을 떼어 '전체'에서 떨어져 나오게 괴면, 곧 거
울 속이나 부모의 시선 속에서 자기의 소외된 실존을 파악하려고 한다. 미개인은 마나(초
자연적인 힘)나 토템 속에 자기를 소외시킨다. 그리고 문명인은 개인적인 마음속이나 자
아, 생명, 재산, 일 속에 자기를 소외시킨다. 이것은 진실하지 못한 삶의 최초의 유혹이다.
  페니스는 남아에게 이 '분신'의 역할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 그것은 그에게 자기 것인 

동시에 별개의 객체이다. 하나의 완구이고, 이행이고, 또한 자기 자신의 육체이다. 부모나 
유모는 그것을 마치 작은 인격체처럼 취급한다. 그것이 어린이에게 "인간보다 보통 더 교
활하고 약고 요령있는 제2의 자아"(알리스 발랭, <어린이의 내적 생활>)가 되는 까닭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비뇨작용이나 그후의 발기가 의지적인 행위와 자발적인 작용의 중간
에 있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그것이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쾌락의 원천이라는 사실에서 페
니스는 주체에 의해 자기 자신으로서 또는 자기 이외의 것으로 생각된다.
  종으로서의 초월이 그 속에 쉽사리 손에 잡히는 형태로 구현되어 있으며, 그것은 자랑의 
원천이 된다. 음경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은 자기에게 넘치는 생명력을 자기 개성
에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페니스의 크기나 오줌의 분출력, 발기력과 사정력이 
남성에게 자기 자신의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음경
은 언제나 초월을 육체의 형태로 상징한다.
  그리고 남아는 자기가 초월된 것, 즉 아버지에 의해 자기의 초월을 빼앗겼다고 느끼는 
것도 현실이므로, 여기서 '거세 콤플렉스'라는 프로이트의 사고와 다시 만나게 된다. 소녀
는 이 제2의 자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루기 쉬운 사물 속에 자기를 소외시키지 못
하고, 자기의 완전성을 회복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를 완전한 개체로 하여 '타
자'로서 자기를 설정하게 된다. 여아가 자기를 남아와 견주어보았는가의 여부를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설사 페니스가 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여아
는 성기로는 자기 존재를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결과가 일어난다. 내가 
지적하는 이런 사실로 하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페니스가 그런 가치를 갖는 
것은, 그것이 다른 영역에서 실현되는 우월성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여성이 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는 데 성공하면, 그녀는 음경과 대등한 것을 만들어
낼 것이다. 여아의 미래를 구현하는 인형도 페니스보다 귀중한 소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일부 모계사회에서는, 집단이 그 속에 자기를 소외하는 가면을 여자가 쥐고 있다. 이 경우
에는 페니스의 위광은 크게 소실된다. 육체적인 특권은 언제나 전체 속에 파악한 상황 속
에서 비로소 인간으로서 특권의 기초를 만들에 된다. 정신분석학은 역사적인 관계를 무시
하고는 그 진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를 한 마리의 암컷이라고 말해서는 충분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됨에 대하
여 갖고 있는 의식 자체에 의해서는 여자를 정의할 수 없다. 여자는 자기가 그 일원인 사
회 속에서 그 의식을 얻고 있다. 무의식을 비롯하여 정신생활 전체를 내면화하는 정신분석
학의 용어까지도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그 개인의 내부에서 전개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콤플렉스니, 경향이니 하는 용어는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생활
은 세계와의 관계이며, 세계를 통하여 자기를 선택함으로써 개인이 만들어져나가는 것이
다. 당면한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 쪽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특히 정신분
석학은 어째서 여성은 '타자'인가를 밝혀주지 못한다. 프로이트 자신이 페니스의 권위는 아
버지의 우월성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남성의 우위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성과 중에는 대단히 유익한 면도 있으므로, 그것을 모두 버릴 수는 없지
만, 우리는 그 방법은 일단 거부한다. 첫째로, 성욕을 하나의 주어진 사실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여성의 성욕에 관한 설명이 빈약한 데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정신분석학자들은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려고 하지 않고, 단지 남성의 성욕에
서 출발하여 생각할 뿐이다.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갖는 매력의 근본적인 상반성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프로이트학파나 아들러학파는 여자가 남자의 성기 앞에서 느끼는 불
안과 괴로움을 좌절된 욕망이 도착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슈테켈은 이 두 학파보다 좀
더 깊이 들어가 거기에 근원적인 반응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피상적으로 
해석하여, 여자는 처녀성의 상실이나 삽입, 임신, 고통을 두려워하며, 이 두려움이 여성의 
욕구를 억압한다고 주장했다. 이 설명은 지나치게 합리적이다. 욕구가 고뇌로 변하거나 공
포에 지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에, 여자의 욕구라는 심각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에서 비롯
되는 요소를 근원적인 조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자의 욕구의 특징은 매력과 반발이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동물의 암
컷들은 교미를 원하면서도 그것을 피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교태
나 위선으로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원시적인 행동을 복잡한 행동과 동일시하여 설명하는 
것은 부당하다. 반대로 여자의 교태나 위선과 같은 태도의 근원에 원시적인 행동이 있는 
것이다. '수동적인 성욕'이라는 관념은 어색하다. 왜냐하면, 먼저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
욕을 충동이나 에너지로 규정한 뒤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빛이 동시에 황색도 되고 청색도 
될 수 있다고 선천적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니며, 당연히 녹색을 직관해야 한다. 현실에 더
욱 접근하기 위해서는 성욕을 에너지라는 막연한 말로 규정하지 말고, 성의 의미를 인간의 
다른 태도 - 취한다, 붙잡는다, 먹는다, 행한다, 따른다 등 - 의 의미와 비교해 보아야 한
다. 성본능은 대상을 붙잡으려는 방법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색정의 여러 가지 
특징을, 색정이 성행위로 나타나는 모습뿐만 아니라, 지각 전체 속에 나타나는 모습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시도는 색정을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여자의 숙명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고찰한다. 여자를 가치의 세계에 놓
고, 그 행위에 자유의 광대한 영역을 제공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여자는, 자기초월의 확립
과 객체에의 자기소외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여자는 모순된 충동에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윤리적 해결을 해 나가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가치를 권위로, 선택
을 충동으로 대치함으로써 도덕의 대용품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정상이라는 것을 뜻하
는 관념이다. 이 관념은 임상의에게는 확실히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그것은 정신분석학 
전반 속에서 위험할 만큼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도식이 원칙처럼 되어버렸다. 유물론적 심
리학이 윤리적 창조의 관념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마이
너스'는 설명할 수 있어도 '플러스'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 실패는 인정하지만, 창조는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주체가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진화를 완전히 이루지 못한다면 진화는 도중에 정지
될 것이며, 이 정지를 실패와 소극성으로 해석할지언정 절대로 적극적인 결정이라고는 해
석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특히 위인들의 정신분석을 이상하게 만든다. 이러저러한 전이, 
이러저러한 승화가 그들 가운데서 실현되는 데 실패했다는 말은 해도, 혹시 그들 쪽에서 
그것을 거부한 것이 아닌가, 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지

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행동이 자유롭게 세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
는다. 어떤 개인에 대해 설명할 경우에 과거와의 관계만 볼 뿐 그가 자기를 투기하는 미래
와의 관계에서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들은 우리에게 올바르지 못한 
모습만 제공한다. 그리고 올바르지 못한 곳에서는 정상 이외의 다른 표준은 찾아볼 수 없
게 된다. 여자의 숙명에 대한 설명은 이런 점에서 가장 일목요연하다.
  정신분석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동화한다'는 것은, 하나의 모범 속
에 자기를 소외시키는 것이며, 자기존재의 자연스러운 행동보다도 하나의 다른 모습을 택
하는 것, 즉 존재하는 체하는 것이다. 여자는 두 가지 소외 사이에 서서 헤매게 된다. 남자
인 체하는 것은 여자에게 분명한 실패의 근원이다. 그렇다고 여자인 체하는 것 또한 거짓
이다. 여자라고 자처하는 것은 객체, 즉 '타자'임을 뜻한다. 그런데 그 '타자'는 자기를 포
기해도 여전히 주체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진정한 문제는 이런 도피를 거부하고 자기를 초원하여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
므로 남성적인 태도나 여성적인 태도가 여자에게 어떤 가능성을 열어 주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이가 부모의 지시대로 움직일 때에도, 그것은 그 아이가 부모의 계획을 자
유롭게 자기 것으로 삼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즉 그 아이의 행위는 목적에 의한 선택의 결
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들러의 학설에서 주장하는 권력에의 의지란, 일종의 터무니없
는 정력에 불과하다. 그는 초월이 구현되어 있는 모든 계획을 '남성적 항의'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여자아이가 나무에 기어오르는 것은 남자아이와 같게 되기 위해서이다. 나무
에 기어오르는 것이 여자아이의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다. 어머니는 아이
를 '페니스의 대등물'로 보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정치에 손을 대는 것
은, 그 행위 자체에 목적이 있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현상을 곡해하는 
것이다. 나의 견해와 정신분석학자의 견해 사이에는 어떤 병행관계가 있다는 것을 독자들
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남성의 관점 - 정신분석학자는 남자와 여자를 이 관점에
서 보고 있다 -에서 보면, 소외의 행위는 여성적으로 보이고 주체가 자기의 초월을 설정
하는 행위는 남성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여자의 역사>를 쓴 도널드슨은, '남자는 인간의 수컷이고, 여자는 인간의 암컷이다'라
는 정의는 균형을 잃어 파손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자만 인간이고 여자는 암컷으로 정의
한 경우를, 특히 정신분석학자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여자가 인간으로서 행동할 
때마다 남자의 흉내를 낸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는 유아와 소녀가 아버지나 어머니와 
동화하고 싶어하는 것을 지적하여 '남성적' 경향과 '여성적' 경향으로 양분된다고 한다.
  한편 나는 여성은 '객체'의 역할, 즉 그녀에게 제시된 '타자'의 역할과 자기의 자유요구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몇 가지 사실에서 견해가 일치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특히 여성에게 제시된 올바르지 못한 도피의 길에 대해 생각할 경우
에 그렇다. 그러나 그것에 프로이트학파나 아들러학파와 같은 의미는 결코 부여하지 않는
다. 우리에게는, 여자는 가치있는 세계 속에서 가치를 찾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경제적, 사회적인 구조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실존의 견지에서 이런 세계 전체의 상황을 
통하여 연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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