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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두려움

개별상담 혹은 그룹상담

by FraisGout 2020. 8. 24.

  몇 년 전에 나는,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음하는 이 세계에서, 심리상담이 욕구 해소의 대용
품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지적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필수적인 고통과 지나친  고통을 구분했다. 
누군가 만일 심리상담을 욕구해소의 대용품이라고 시장의 장사꾼처럼 큰 소리로 떠들며 팔려고 한다면, 일
반적으로 이런 사람은 그런 구분을 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는 마치 필수적인 고통과 피할 수 없는 슬
픔을 버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좀더 절제된 요구로  과도한 고통을 줄
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상담의 대리 욕구  해소의 기능을 최소화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으로 
그룹상담이 개별상담보다 더 적합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그룹의 책임자가 환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대신, 카리스마적으로 그룹을 이끌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룹상담은 개별상담보다 더 현실적
인 관계 상황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개별상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상담가가 자신을 관계의 문제에 
능숙한, 이상적인 상담가와 동일시하고, 그와 동시에 빠른 시간 안에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치료
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또한 그룹상담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는 관계 장애를 개별상담가와 오히려 
불분명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비교적 가볍게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환자들은 수년간에 걸친 
그룹상담(일주일에 한 번)으로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환자가 이 상담치료를  통해 삶 
자체가 큰 도움이 되며, 상담치료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환자가 어떤 경우에든, 필연적인 고독을 견
뎌 낼 때, 그리고 파괴적인 샛길로(알콜, 약물  남용, 우울증, 공포증) 빠지지 않을 때, 그런  장애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비교적 가벼운 공생 갈등의 형태는 환자와 그 파트너가  함께 동참하는 수
년간의 상담치료를 통해 호전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치료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부가적인 개별상담이 도
움을 줄 수 잇다. 특히,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외부의  대상과 관련된 것
일 때, 이런 치료의 병행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환자 당사자는 자신의 증상을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제대
로 된 파트너'를 찾는 데 실패한 것으로, 혹은 '잘못된  파트너'와 헤어지는 데 실패한 것으로 설명한다. 한
편, 특별히 큰 장애를 가진 환자는 더 많은 횟수의 더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는 추론은, 실제 임상 
과정에서 보면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게 밝혀진다. 그보다는 심리치료가 대체로 건강한 사람들에게 더 효과
적이라는 것이 옳다. 사회적으로 '건강하게' 보이는 것, 즉 적응과 역할 수행의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발달하
고, 반면 감정의 자율성 부분에서는 덜 발달한 경우, 이는 흔히 상담치료를 중요하고 이로운 것으로 체험할 
수 있는 전제가 된다.
  카를 크라우스는 예전에 정신분석학에 대해 언급한 적  있다. 사람들은 정신분석학을 치료라고 간주하지
만, 실은 일종의 질병이라고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정신분석학이 다른 분야를 경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아차릴수록, 더 잘 이해가 간다. 프로이트의  발견은 최초의 학문적인 진보였지만 동시에  퇴보이기도 했다
(혹은 거기에 적어도 제한적인 가능성만이 덧붙여질 수 있겠다). 그 전에는 환자의 장애, 부적응 등이 서로 
의미 전달이 안 되는 대립 구도에 의해 환자를 치료하는 수단과 분리되었던 것에 반해, 정신분석학자는 이
러한 한계를 없애려는 데 주력한다. 심리상담가는 상담 실습 동안에 자기의 노이로제를  깨달아야 하고, 그
것과 투쟁해야 한다. 그러므로 많은 심리상담가가 환경보호나 평화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들은 기술과 관료주의의 일상 침투 과정을 안전한 거리에서 관찰하며 비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여기서 과대평가는  삼가해야 한다. 정신분석은 환상의 종이를  오려 내면서도 
현실이라는 돌에 부딪혀서는 갑자기 둔하게  변하는 가위인 것이다. 그것은  또 고대 중국의 주사위놀이에 
비유될 수 있겠다. 이 놀이에서는 삼각형의 판 위에서 왕이 닭을  먹고, 닭은 벌레를 먹고, 벌레는 왕을 먹
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은 노이로제를  먹고, 노이로제는 직업을 먹으며,  직업은 다시 정신분석을 
먹는다. 정신분석을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정신분석가의 직업적인 관심을  억압하는 곳에서는, 
정신분석이 변하게 마련이다. 정신분석은 정신과학과 문화정책을 움직이는 힘을 가짐으로써 의학의 사회학
적 분야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트의 반박은 점차 사그러들었다. 나는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
을 느끼는 환자들의 경우,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되는  심리치료 자체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을 나타내는 한 증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본다. 기술의 인과율에 따른  과정을 신중하게 분석한 것을 
사고로 따라간다면 이 말은 좀 모순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번 거듭해서 규정되어 온 심리학의 
세계에서 위의 견해는 이미 예상되었었다.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심리치료의 구조 행위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정신분석과 임상심리학이  총동원되었다. 자기의 감정과 약점을 드러
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능력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세계에도 필요한 뿐만 아니라, 그리
고 심리상담가라는 직업의 세계에도 필요하다. 나는  그곳을 협력자 신드롬에 관한 한  분석에서 '대립성의 
회피' 라고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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