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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신비주의자인 여성

by FraisGout 2020. 7. 27.

  사랑은 여성에게 최고의 천직이라고 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사랑을 바칠 때 그에게서 

신을 발견하려고 한다. 만일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배반을 당하거나 혹은 소원이 너무 클 
경우, 그녀는 진짜 신에게 그 신성을 숭배하려고 한다. 물론 남성들 중에도 이런 정염을 
불태우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남성은 보기 드물고 또 그들의 신앙은 
대단히 세련되고 지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천국과의 혼례라는 환희에 몸을 
바친 여성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런 여성은 이상하리만큼 감정적인 형태로 그것을 경
험한다.
  여성은 무릎을 꿇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 있다. 여성은 대개 남성이 왕좌에 앉아 있는 
천국에서 자기를 구제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남성도 천국처럼 구름에 싸여 있다. 육체
를 싸고 있는 베일을 통하여 남성의 권위가 나타난다. '사랑하는 남성'이란 언제나 다소 
비현실적인 존재이며, 그는 애매한 증거에 의해 자기를 숭배하는 여성과 교감한다. 그녀
는 일종의 신앙행위를 통해서만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그가 훌륭
하게 보일수록 그의 행위는 그녀에게 점점 불가사의한 것이 된다. 색정광의 경우 이 신앙
이 모든 반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다. 여성은 현존을 체득하기 
위해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필요가 없다. 상대가 의사이건 사제이건 또는 신이건 그
녀는 확실한 증거를 인정하고, 자기 마음속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랑의 물결을 공손히 맞
아들인다. 인간의 사랑은 신의 사랑이 승화된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도 초월
자의 방향, 즉 절대자의 방향을 지향하는 하나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는 여성에
게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우연적인 존재를 구제하기 위해, 자기의 실존을 지고의 인격
으로 구현시킨 전체에 결부시키는 것이 문제이다.
  이 애매성은, 실로 많은 경우에서 - 병리학적인 경우도 있고, 정상적인 경우도 있다 - 
찾아볼 수 있으며, 사랑하는 남성은 신격화되고 신은 인간의 모습을 취한다. 여기에는 페
르디에르가 색정광에 관한 저서에서 보고한 한 사례를 인용하는 데 그치려고 한다. 말하
고 있는 것은 환자 자신이다.
  
  1923년에 나는 <프레스>지의 어느 기자와 서신 교환을 했어요. 나는 날마다 그의 인생 
안내의 기사를 읽고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어요. 나는 그가 나의 질문에 대답하고 충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나는 연애편지를 썼어요. 열심히 써보냈어요... 1924년, 
갑자기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어요. 신이 한 여자를 찾으시다가 내게 이야기하러 오시는 
것으로 생각되었어요. 나는 신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교회를 짓기 위해 택함을 받은 것 같
은 기분이 들었어요. 나는 내가 어떤 중요한 단체의 중심인물이 되어 여자환자를 의사들
에게 치료받게 하는 것처럼 생각되었어요... 바로 그 무렵에 나는 클레르몽의 요양소로 
옮겨졌어요... 그곳에는 세계 개조의 희망에 불타는 젊은 의사들이 있었어요. 나는 독방
에서 손가락으로 그들의 키스를 느끼고 손바닥으로 그들의 성기를 느끼게 되었어요. 한번
은 그들이 말했어요.
  "당신은 민감하지 못하지만 관능적인 여자야. 이쪽을 향해 봐."
  나는 뒤돌아보고 그들을 몸으로 느꼈어요. 매우 기분이 좋았어요... 부장인 D. 박사는 
마치 신과 같은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내 침대 옆에 다가왔어요. 나는 일이 심상치 않
은 것을 알아차렸어요. 그는 마치 내게 홀딱 반했다고 말하려는 듯한 얼굴로 나는 바라보

았어요... 그의 초록빛 눈은 하늘과 같은 파란빛으로 변하고, 무서울 정도로 크게 떴어
요... 그는 다른 환자에게 말을 걸어 효과를 확인하고 나서 미소를 지었어요... 나는 그 
자리에서 그의 포로가 되어 그에게서 떠날 수 없었어요. 새것이 생긴다고 먼저 것을 잊을 
수는 없는 거예요. 나에게는 여러명의 애인이 새로 생겼지만(나의 애인은 15, 6명은 되었
어요.) 그에게서 떠날 수는 없었어요. 그는 정말 죄인이에요... 12년 전부터 이미 나는 
줄곧 그와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내가 그를 잊으려고 하면 그는 다시 나타나곤 해요... 그는 때때로 좀 비웃는 듯이 "어
때, 내가 무서워졌나. 당신은 아무리 많은 남자와 어울려도 언제나 나에게 돌아올거야." 
하고 말해요. 나는 자주 편지를 쓰고 데이트를 약속하고 만나러 갔어요. 작년에 나는 그
를 만났어요. 그는 점잖을 빼었어요. 그는 정열이 식어 있었어요. 나는 머쓱해서 돌아왔
어요...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들리지만, 그는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 
거예요... 그는 내 남편이에요. 그러나 두 사람을 결합시키는 행위는 한 번도 한 적이 없
었어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 올라와, 그리면 당신은 지상의 인간이 안될 테니
까." 하고 그는 때때로 말했어요. 이것으로 알 수 있겠지요. 나는 신을 찾을 적마다 남자
를 찾게 돼요. 지금은 어떤 종교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어요.
  
  이것은 병리학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독실한 믿음을 가진 많은 여성들중에도 인간과 신 
사이에서 오는 혼란을 찾아볼 수 있다. 하늘과 땅의 중간에 분명치 않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고해를 듣는 신부이다. 자기의 영혼을 그대로 드러내보이는 고해하는 여자의 
말을 육신의 귀로 듣지만 그녀를 에워싼 그의 시선 속에 빛나는 것은 초자연의 빛이다. 
그는 신의 인간이며 인간의 외모로 나타난 신이다. 기용 부인(17세기 프랑스의 신비주의
자)은 라콩 신부와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성스러운 은총의 위력이 영혼을 통하여 그에게서 나에게로 왔다가 다시 나에게서 그에
게 돌아가 그도 같은 효과를 맛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가 오랫동안 시달려온 무감각한 기분에서 그녀를 건져내어 그녀의 영혼을 다시 감
격으로 불타게 한 것은 이 신부의 힘이었다. 그녀는 그 위대한 신비주의적인 시기의 전부
를 그의 곁에서 보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일치여서, 
이미 나는 그를 신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녀는 사실상 한 남자를 사랑한 것
일 뿐 신은 사랑하는 시늉만 했다고 말하는 것은 속단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신과 함께 
그 남자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 다른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페르디에르 환
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막연히 추구한 것은 최고가치의 원천이었다. 모든 신비주
의적인 여성의 목적은 이것이다.
  남성의 중개는 그녀가 천국의 무인지경을 향해 날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유희와 현실, 행위와 마술, 실체와 상상물은 분명히 구별할 수 없
기 때문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녀의 육체를 통하여 현존하게 하는 경향이 강하
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생각하면 흔히 말하고 있듯이 신비주의자와 색정광을 동일시한
다. 색정광도 지고의 존재의 사랑에 의해 자기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처럼 느낀다. 지고의 
존재가 연애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여 상대방으로부터 받고 있는 사랑 이상으로 열렬히 사

랑한다. 그는 자기 감정을 은밀한 신에 의해 명백하게 알게 된다. 그는 자기가 택한 여성
의 정열이 부족한 데 대해 질투하고 초조해하는 나머지 그녀를 처벌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육체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모든 특색은 신비
주의적인 여성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신은 사랑의 불꽃에 의해 불타오르게 한 영
혼에게 영원히 자비를 베풀어 그녀를 위해 피를 흘리고, 그 때문에 눈부신 최후의 영광을 
마련해 주신다. 그 영혼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의 불꽃에 몸을 맡기는 일뿐이다.
  색정광이 플라토닉하거나 혹은 성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을 오늘날에는 인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비주의적인 여성이 신에게 바치는 감정 속에는 육체가 얼마간의 자리를 차
지하고 있다. 그녀의 뜨거운 정열은 지상의 연인들이 경험하는 정열과 유사하다. 앙젤 드 
폴리뇨가 성프란체스코를 껴안은 그리스도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리스도가 그녀에
게 말했다.
  "이처럼 너를 껴안아줄거야. 육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욱 강하게... 네가 나를 사랑한
다면 나는 너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리다." 기용 부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랑은 잠시
도 나를 쉬게 하지 않았다. 나를 사랑에게 말했다. 오, 나의 사랑이여, 이제 족하다. 놓
아다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전율로 영혼을 관통하는 듯한 사랑, 나를 기절하게 하는 
듯한 사랑을 나는 원하고 있다... 오 신이여,... 가장 관능적인 여자에게 내가 느끼고 있
는 것을 느끼게 하신다면 이처럼 진실한 부를 손에 넣기 위해 즉시 거짓 쾌락을 버릴 것
입니다." 성 테레사의 유명한 환상은 널리 알려져 있다.
  천사는 양손에 금빛 나는 긴 창을 들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그 창으로 내 심장을 찔렀
다. 천사가 그 창을 뺄 때에는 마치 창자를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 나는 신에 대한 사랑
에 불타 있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이 몸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것과 내 
의식 속의 남편이 창자를 찌른 화살을 빼낼 때 창자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는 언어의 빈곤으로 말미암아 이런 에로틱한 용어를 빌려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경건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신비가인 여성도 마찬가지로, 단 하나
의 육체를 다루고 지상의 사랑에서 말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태도까지도 빌려온다. 그녀는 
자기를 신에게 바치기 위해 그녀가 인간에게 자기를 바칠 때와 같은 행위를 한다. 물론 
이것은 그녀의 감정의 가치를 조금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앙젤 드 폴리뇨가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서 까칠하고 창백해지거나 기름지고 혈색이 좋을 때 그리고 눈물의 홍수 속
에 울고불고할 때 그리고 갑자기 졸도할 때 이런 현상을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라고 생
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그녀의 '과도한 감수성'으로 설명하
는 것은, 마치 마약의 '최면효과'를 이끌어내는 것과 같다.
  육체는 절대로 주체적인 경험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객체적인 형태를 취한 주
체 자체이며, 주체는 그 통일적 존재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 살기 때문이다. 신비주의자의 
반대자나 찬미자가 성 테레사의 법열에 성적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그녀를 히스테리 환자
로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히스테리 환자의 불명예는 그 육체가 그 고정
관념을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집념에 사로잡히고 그 자유가 
저주를 받아 무로 돌아가는 데 있다. 고행자는 자기 몸에 대해 지배력을 갖고 있으므로 
신체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육체의 찌푸린 얼굴이 자유의 약동 속에 은폐되는 경우도 있

다. 성 테레사의 문장을 읽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맹렬한 정욕 속에 기절한 
성녀를 표현한 베르냉의 조각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녀의 감동을 단순한 '성적 승화'로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다. 억압된 성욕이 신에 대한 사랑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연애하는 여성도 처음에는 대상이 없는 정욕에 시달리다가 이어서 그 정욕이 어느 개인
에게 정착되는 것이 아니다. 애인의 현존이야말로 그에게로 향한 그녀에게 불안을 일으키
고 있다. 이리하여 성 테레사는 신과의 결합을 요구하여 그 일치를 대뜸 자기의 육체 속
에 이룬 것이다. 그녀는 신경이나 호르몬의 노예가 아니다. 오히려 육체의 구석구석까지 
스며 있는 그녀의 강렬한 신앙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성 테레사 자신도 이해
하고 있었던 것처럼 신비한 체험의 가치는 그 주체적인 경험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 아니
라 그 객관적인 힘에 의해 측정된다. 법열의 여러 가지현상은 성 테레사의 경우나 마리 
알라코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기의 사명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
다.
  성 테레사는 개인과 초월적인 '존재'와의 관계의 극적인 문제를 지적인 방법으로 설정
한다. 그녀는 일체의 성적 구별을 초월한 의미를 갖는 체험을 했던 것이다. 그녀는 쉬조
나 십자가의 성 요한과 같은 위치에 놓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뚜렷하게 빛나는 하나의 
예외이다. 그녀의 많은 아류가 보여주는 것은 세계와 구원에 대한 여성적인 사고방식이
다. 그녀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초월체가 아니다. 그녀들은 자기가 여성인 데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여성은 신의 사랑 속에서, 먼저 사랑하는 여성이 남성의 사랑에 대해 요구하는 것, 즉 
자기의 나르시시즘(자기애)의 극치를 구하고 있다. 그녀에게 사랑스럽게 쏠리는 지고의 
시선은 그녀에게 기적적인 선물이다. 기용 부인은 처녀시절과 신부시절을 통하여 줄곧 사
랑을 받고 찬미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려왔다. 현대 신교파의 신비주의자인 
베에 양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특별히 정다운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는 것
처럼 슬픈 일은 없다."" 크뤼데네르 부인은 신이 언제나 자기를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했
다. 그 결과 생트 뵈브(19세기의 프랑스 비평가)는 "애인과의 마지막 순간에 신이여, 저
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합니다. 저의 과분한 행복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울부짖을 
정도였다. 하늘전체가 그녀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을 때,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성의 마음
을 충족시키는 도취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신과 합일한 그녀의 이미지는 신과 
마찬가지로 무한하며 영원히 사라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
고 불타오르는 사랑에 빠져 경배하는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속죄되며 사랑을 받
는 자기의 영혼을 실감하는 것이다. 그녀가 포옹하는 것은 그녀의 분신이며 신의 매개로 
말미암아 무한히 신성하게 된 그녀자신이다. 성녀 앙젤 드 폴리뇨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예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귀여운 딸, 나의 딸, 나의 사랑하는 딸, 나의 전당이여, 나의 딸, 나의 귀여운 여
자여, 나를 사랑하여라.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것보다 훨씬 많
이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의 삶 전체, 마시고 먹고 잠드는 삶 전체가 내게 합당하다. 

나는 네 안에서 여러 백성들의 눈에 위대하게 보이는 일을 하려고 한다. 나는 네 안에서 
알려지고, 내 이름이 네 안에서 많은 백성으로부터 찬양을 받을 것이다. 나의 딸, 나의 
귀여운 아내여, 나는 너를 한없이 사랑한다. 
  내가 너에게 기대한 것보다 훨씬 다정한 나의 딸이여, 나의 기쁨이여. 전능하신 신의 
마음은 지금 너의 마음 위에 있다. 전능하신 신은 네 안에 많은 사랑을, 이 거리의 어느 
여자보다 더 많은 사랑을 맡겼다. 신은 너를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나머지 이제 너의 잘못은 마음에 걸리지 않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
다. 나는 네 안에 엄청난 보배를 맡겼다.
  신의 택함을 받은 여성은 이처럼 열렬하고 또 이처럼 높은 데서 내려온 사랑의 고백에 
정열적으로 보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연애하는 여성의 상투적인 수단인 자기소멸에 
의해 애인과 결합하려고 한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사랑하고 자기를 잊고 
자기를 없애는 것이다." 하고 마리 알라코크는 쓰고 있다. 종교적인 황홀은 이 자기포기
의 육체적인 모방이다. 주체는 이미 보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으며 자기의 육체를 망각하
고 육체를 부인한다. 이 포기의 완벽성과 수동성의 열성적인 수락에 의해 빛나는 지고의
 '현존'이 새겨진다. 기용 부인의 정적주의는 이 수동성을 체계화한 것이다. 그녀의 경우
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종의 전신불수 속에서 보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깨어 있을 때에도 
잠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신비주의에 빠진 여성의 대부분은 신에게 수동적으로 자기를 포기하는 것만으로는 만족
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자기의 육신을 파괴하여 자기를 없애는 데 몰두한다.
  금욕주의는 남성인 성직자나 종교가에 의해서도 실행되어 왔다. 그러나 여성이 그 육신
을 모욕할 때 지나치게 심한 것은 특수한 성격을 띠고 있다. 자기 육체에 대한 여성의 태
도가 얼마나 애매한가에 대하여는 이미 보아 온 바와 같다. 그녀는 굴욕과 고통을 통하여 
육체를 영광으로 변화시킨것이다. 쾌락을 위한 육체로서 애인에게 바쳐지는 것으로 그녀
는 일종의 전당이 되고 우상이 된다. 그녀는 분만의 고통으로 갈가리 찢겨져서 영웅을 창
조한다. 신비주의에 빠진 여성은 육신을 자기 것으로 요구할 권리를 갖기 위해 자기의 육
신을 학대하려고 한다. 육신을 모욕함으로써 육신을 자기구제의 도구로 끌어올리는 것이
다. 이것으로 일부 성녀들이 기괴한 행위를 하는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성 앙젤 드 폴
리뇨가 나환자들의 손발을 씻은 물을 달게 마신 사례가 이를 말하고 있다.
  이 음료는 우리들의 목을 기분좋게 적셔주었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맛은 우리에
게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맛좋은 물을 처음 마셨다. 나환자의 상처에서 떨어져나
온 비늘 같은 살갗조각이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토해내는 대신에 삼키는데 
성공했다. 나는 성체를 받아 모셨을 때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때 느낀 무상의 행
복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다.
  마리 알라코크가 병든 여자의 토사물을 혀로 핥아서 깨끗이 치웠다는 이야기는 유명하
다. 그녀는 그 자서전에서 설사를 한 자의 변을 입안에 넣었을 때 느낀 행복감에 대해 쓰
고 있다. 예수는 그녀의 입술을 성심에 세 시간 동안 밀착시켜 그녀에게 보상해 주었다. 
신앙이 육감적인 색채를 띠는 것은, 특히 이탈리아나 스페인과 같이 유난히 관능적인 나
라에서이다. 아브뤼즈(중부 이탈리아의 산악지대)의 어느 마을에서는, 오늘날에도 여성들

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서 지면에 있는 조약돌을 핥아서 혀를 찢는다. 이 모든 행위에 의
해 그녀들은 점점 자기 육신을 욕되게 함으로써 육신을 구제한다. 구세주를 모방하고 있
는 것이다. 그녀들은 이 위대한 비적에 대해 남성보다 훨씬 구체적인 형태로 감응한다.
  신은 여성에게 남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때로는, 후광에 싸여 순
백으로 찬란히 빛나는 지배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신은 그녀에게 결혼의상
을 입히고 관을 씌운 뒤 손을 잡고 천국에 인도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대개 그는 육적
인 존재이다. 예수가 성 카타리나에게 주어 그녀가 손가락에 낀 눈에 보이지 않는 결혼 
반지는 할례(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로 남성의 양피를 잘라내는 행위로, 오늘날의 포경
수술과 마찬가지이다.) 때, 그에게서 잘라낸 '육의 반지' 였다. 특히 그의 육체는 학대를 
받아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녀는 자기를 이들의 유해를 껴안은 성모마리아나 십자가 아래 
서서 가장 사랑하는 예수의 몸에서 떨어져내리는 피에 몸을 적시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라
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자학적인 환상을 만족시킨다. 신의 굴욕 속에 그녀는 '남성'의 실
추를 찬미한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힌 기진맥진한 예수의 모습은 야수나 단
도나 남성의 제물이 되어 새하얀 피부를 피로 물들인 순교한 여성의 도착된 모습이다. 그
녀는 때때로 자기를 순교자라고 생각해 왔다. 그녀는 '남성'이, 즉 신인 '남성'이 그녀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낀다. 십자가에 매달려 부활의 영광을 약
속받은 사람은 그녀이다. 그녀는 이것을 몸으로 입증한다. 그때 이마는 가시관 밑에서 피
를 흘리고 손, 발, 옆구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칼에 찔려 있다.
  카톨릭 교회가 산출한 321명의 성흔 소지자 중에 남성은 단지 47명뿐이다. 다른 사람들
-헝가리의 엘레나, 십자가의 잔, G. 도스탕, 오잔드 망투, 클레르 드 몽팔콩-은 여성으로
서 대체로 갱년기를 넘긴 여성이 많다. 가장 유명한 카테리나 에메리크는 일찍이 성흔을 
받았다. 24세때 그녀는 가시관의 고통을 받기를 원했더니, 눈부신 젊은 남자가 그녀의 머
리에 가시관을 씌웠다. 이튿날 그녀의 관자놀이와 이마가 부어오르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4년 후에 법열속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상처에
서 예리한 칼날 같은 뾰족한 빛이 새어나와, 성녀의 양손, 양발, 옆구리에서 핏방울이 솟
구쳐나오게 했다. 그녀는 피땀을 흘리며 피를 토했다.
  현재도 성 금요일에는 테레즈 뇌만이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내리는 얼굴을 관람객들에게 
보여 경배하게 하고 있다. 성흔 속에서 육체를 영광으로 바꾸는 신기한 연금술이 이루어
지고 있다. 성흔은 피투성이가 된 고통의 형태에서 신의 사랑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피를 순수한 황금 불꽃으로 변모시키는 데 대단한 집착을 보이는 
이유는 이것으로 잘 알 수 있다. 그녀들은 인간의 왕의 옆구리에서 흘러 내리는 피에 대
한 고착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시에나의 성 카테리나는 거의 모든 편지에서 이에 대해 언
급하고 있다. 앙젤 드 폴리뇨는 예수의 심장과 옆구리에 뚫린 상처를 지켜보는 데 몰두하
고 있다. 카테리나 에메리크는 '피투성이가 된 속옷'과 같은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빨간 
속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보는 것이었다. 마리 알리
코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성심에 세 시간이나 젖어 있었다. 신자의 예배물
로서, 사랑의 빛의 화살을 등에 짊어진 빨간 핏덩이를 신자에게 경배하도록 권한 것은 그

녀였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에 의해 피에서 영광으로 가는 여성의 큰 꿈인 것이다. 어떤 
여성은 황홀, 환각, 신과의 대화등 내적인 체험만으로 만족한다. 그밖에 행동을 통하여 
이 경험을 세계에 전할 필요를 느끼는 여성도 있다. 행동을 정관에 연결시키는 데에는 전
혀 다른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성 카테리나나 성 테레사, 잔 다르크와 같은 행동적인 여
성이 있다. 그녀들은 자기가 세운 목적을 잘 알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을 냉정하게 
생각한다. 그녀들의 계시는 그 확신에 객관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데 불과하다. 그 확신은 
그녀들에게 자기가 설정한 길을 의혹없이 가도록 용기를 준다.
  한편 기용 부인이나 크뤼데네르 부인처럼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성도 있다. 그녀들은 정
열적인 신앙을 꾹 참아온 끝에 갑자기 자기가 '사도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녀들은 자기의 임무에 대하여는 그다지 분명하게 의식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언제나 
움직이고 있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부지런한 여자처럼 -자기가 하는 것이 무엇이
건 별로 문제시하지 않고 다만 뭔가 일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크뤼데네르 부인
은 대사의 아내로서, 여류작가로서 자기를 세상에 드러낸 다음에는 자기의 가치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을 내면화한다. 그녀가 알렉산더 1세의 운명을 손에 넣은 것은 분명한 계
획을 성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과 교류하는 여성으로서의 역할로 자기를 확인하기 위
해서였다. 여성은 조금만 재능이 있으면 자기가 신성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줄로 생각하
기 쉽다. 더구나 자기가 신에게 선택된 여성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큰 사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애매한 교리를 설교하고 자진하여 교파를 세운
다. 그리하여 여성은 스스로 감탄하는 단체의 사람들을 통하여 자기의 인격을 증대시키는 
흥미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신비주의적인 정열은 연애나 나르시시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행동적이고 독립된 생활 
속에서 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이런 개인적인 구제의 노력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여성이 자기의 분신이나 신등의 비현실과 관계를 맺건 현실적인 존재와 비
현실적인 관계를 조성하건 어느 경우에도 그녀는 세계에 대해 발붙일 기반을 갖지 못한
다. 자기의 주관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의 자유는 신비화된 채로 남아있
다. 자유를 올바로 실현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능동적인 행동에 의해 그것을 
인간사회 속에 투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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