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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손길 장군은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중과부적이라 할지라도 이대로 후퇴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적의 군사가 열 명이라면 아군의 군사는 단 한 명.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은 수효였다. 더구나 아군 병사들은 몇 차례 접전 끝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적은 곧 다시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적의 진지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공격의 북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진퇴양난. 천 근이나 되는 바위가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전멸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먼저 공격을 감행하거나 도망칠 수 있는 데까지 도망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장군은 드디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늠름한 자세로 백마를 타고 병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나를 따르라! 우리가 먼저 공격을 감행한.. 2020. 5. 15.
아버지와 신발 누가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 나는 아버지가 사주시던 신발 생각이 난다. 요즘 아이들이야 소위 '메이커 있는'품질 좋은 운동화를 사 신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검정 고무신이나 질 낮은 운동화가 고작이었다. 어쩌다가 흰 고무신이나 때깔 좋은 운동화라도 얻어걸리면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언제나 내 발보다 한두 치수 큰 신발을 사주셨다. 나는 처음엔 아이들은 키가 쑥쑥 빨리 자라니까 일부러 거기에 맞추어 큰 신발을 사주시는 줄 알았다. 또 가난한 집안 형편에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신발을 신기기 위해서 그러시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무슨 신발을 신든 그리 오래 신지는 못했다. 내 발이 채 크기도 전에 언제나 신발이 먼저 떨어져 버렸다. 그것은 신발의 품질이 너무나 나.. 2020. 5. 15.
가장 위대한 예술 그는 '인생'이라는 말을 참으로 우습게 여기는 예술가였다. 그는 책을 읽다가도 인생이라는 낱말이 나오면 공연히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책의 내용이나 저자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 책을 마냥 진부하고 유치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다. 누구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인생이 어쩌고' 하는 말을 꺼내면 그만 그 말을 꺼낸 사람을 유치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그만큼 그는 인생이라는 말을 뭔가 저속하고 감상적이고 간질간질한 저질 유행가 가사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그 말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굳이 그 말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경우라도 있으면 '삶'이라는 말을 대신 썼다. 인생이나 삶이나 크게 다른 말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삶이라는 말이 보다 더 고상하고 진지하다고 생각했다. 삶이라.. 2020. 5. 15.
시인 이경록 경주 시내에서 불국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불국사 종점 조금 못 미처 '우정의 동산' 앞에 내리면 그 작은 동산 길가엔 젊은 시인의 시비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이 시비는 '77 년 4월, 스물 아홉의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작고한 이경록 시인의 시비다. 경주를 찾고 불국사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그러한 시비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직은 그를 기억하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간간이 그를 찾아올 뿐이다. 이경록 시인이 죽음의 언저리를 헤매던 겨울밤, 그는 의사들로부터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은 흑성동 성모 병원 가까운 어느 소주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또 몇 명의 친구들은 그의 곁에 있었다. 점점 밤이 깊어지고 자정이 넘었을 때 갑자기 그의.. 2020. 5. 15.
적은 누구인가 "잘 가게. 이제 이곳엔 두 번 다시 들어오지 말게." 교도관이 힘껏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았다. "그럽시다. 다시 만나더라도 이제 이곳에서는 만나지 말도록 합시다." 그는 옷 보따리를 들고 10 년만에 청송 보호 감호소의 문을 나왔다. 봄 하늘은 맑았다. 멀리 감호소의 산 아래로 가물가물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는 천천히 청송 읍내로 가는 들길을 걸었다, 어지러웠다. 깊게 심호흡을 하면서 맑은 공기를 들이켰으나 여전히 다리가 휘청거렸다. 갑자기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유를 되찾았다는 기쁨과 해방감을 느낀 것은 잠깐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다. 그는 우선 대구로 나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겨우내 혹한을 견뎌 온 보리밭이 파랗게 펼쳐져 .. 2020. 5. 15.
그녀의 보석 그녀는 아들 셋을 두고도 늘그막에 자녀들과 따로 살게 되었다. 어릴 때는 그토록 착하고 효성스럽기 짝이 없던 아들들이 이제는 며느리한테 꼭 쥐여 분가 할 것을 주장하자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 서로 따로 사는 게 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식들은 처음에는 1주일이 멀다 하고 우르르 손자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녀를 찾는 일이 줄어들었다. 이제는 손자들이 보고 싶어 잠깐 들르라는 전화를 해도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그녀는 노년의 외로움이라도 달래려는 듯 보석이나 장신구 따위의 패물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런 그녀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돈 달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값비싼 보석들을 사 모으는 데에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집안에.. 2020.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