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찾아온 사람들
난감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내가 나를 배반한 이야기이다. 중소기업을
하다 보니 사람 구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자구책 삼아
세웠던 원칙이 하나 있다. '필요한 사람은 내 손으로 키워서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지켜왔던 그 원칙을 스스로 위반해야 했던 사건이 있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한번은 고광일이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모 대기업 연구부서에서
팀장으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좀 의아했지만,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니 일단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피차에 득 되는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 항상 유익하게
마련이다.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지만 일전에 사장님을 한번 뵌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 공장을 한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그때 내가
이야기하던 경영철학과 기술중심주의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어렴풋하게 나도 그를 기억할 수 있었다. 대기업 간부로서가 아니라
최 과장이라는 우리 직원의 소개로 잠깐 공장구경을 왔던 사람이다.
구내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났다.
예의를 차리느라 그랬는지 그날은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듣고 보니
고광일이라는 친구는 자기 회사에서 꽤나 인정받고 있는 간부였다. 젊은
나이에 이미 수석부장의 자리에 있었다. 대기업 수석부장이라면 이사급
대우다. 몇 년 전에는 혁신리더로 선발되어 포상까지 받았다고 한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유능한 기술간부가 갑자기 나를 찾아온 이유가 당연히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즈음, 결국은
본론을 꺼내놓았다. 실로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였다. 자신을 받아 달라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자신이 이끌던 팀 전체를 말이다. 나는
더럭 그에게 의심이 갔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대기업에서는 더 이상 비전이 없습니다. 부디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원래 그가 이끌던 팀은 'SMD마운터' 분야의 연구를 벌써 10년째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SMD마운터는 각종 전자부품의 표면실장을 위한 장비이다. 간단히
말해 전자제품의 회로기판을 자동으로 조립하는 기계다. 옵토메카트로닉스,
제어기술, 컴퓨팅기술, 센싱기술 등 고도의 첨단기술들이 총동원되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SMD마운터의 국산화가 그들의 목표였다
어느 정도 성과가 보인다고 자평하고 있었는데 위로부터 덜컥 불벼락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프로젝트를 중지하고 팀을 해산하라는
명령이었다. 구체적인 성과 없이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 틀림없었다.
"저희를 가장 가치 있게 관리할 수 있는 회사는 미래산업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어쨌든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미래산업은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에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었다. '테스트 핸들러'란 완성된
반도체를 성능별로 분류하는 장비이니 말하자면 반도체 후공정 중에서도 거의
막바지 단계에 필요한 장비였다.
그에 비해 SMD마운터는 훨씬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장비이면서,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모든 공장에서 사용해야만 하는 범용 조립장비라고 할 수
있다. SMD마운터에 손을 대고 있다면 반도체 제조장비 분야에도 원용할 수
있는 온갖 노하우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나와 미래산업의 목표는 반도체 제조장비 전 분야를 석권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필요한 모든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을 마련하던 중이었다.
역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엔지니어로는 핸들러를
지키기에도 벅찰 지경이었다. 반도체 전후공정을 이해하는 다수의 고급인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데 믿기지 않게도 필요한 사람들이 제 발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다른 회사의 사람을 함부로 들어앉힐 수는 없었다. '스카우트'에
항상 따라오는 많은 뒷소리들과 감정대립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에 손해를 입히기도 싫었고, 욕을 먹기도 싫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키워서 쓰자'고 작심했던 것 아닌가.
"고마운 말이네만, 다른 회사 사람들을 함부로 받아들일 수는 없네. 자네
회사에서 우리를 뭘로 보겠나."
반가움은 속으로만 삭일 뿐이었다. 정말로 아쉬웠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어지간히 실망한 눈치였다. 알고 보면 미래산업에 대한
애정보다는 지금 회사에 대한 분노가 더 클 것이 분명했다. 홧김에 무더기로
뛰쳐 나온 사람들을 옳다꾸나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질
않았다. 내 양심과 회사의 원칙을 둘 다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절뿐이었다.
"사장님께서 받아주지 않으시더라도 우리는 회사를 나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자제들을 받아들이고 싶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주기 바라네."
곤혹스럽고도 안타까운 만남이었다. 그는 침울한 얼굴로 돌아갔다.
미안했지만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좋은 기분일 리가 없었다. 마음 한쪽은 내
자신의 알량한 결벽증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가 돌아간 이후 나는 한참
동안이나 자부심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도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자신이 이끌던 팀 전체를 받아 달라고 했다. "저희를
가장 가치 있게 관리할 수 있는 회사는 미래산업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고마운 말이네만, 다른 회사 사람들을 함부로 받아들일 수는 없네, 자네
회사에서 우리를 뭘로 보겠나" "사장님께서 받아주지 않으시더라도 우리는
회사를 나옵니다."
@ff
현명한 협박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광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집
전화번호까지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끈질긴 친구인 것만은
분명했다. 휴일을 기다려 집으로 직접 전화를 했던 것에도 어떤 의도가 숨어
있었으리라.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니까 매일같이 술고문을 시키는 겁니다. 한 사람당 세
사람씩 달라붙었습니다. 감시, 회유, 협박이죠. 진절머리가 나서 아예 안
나가기로 했습니다."
집단퇴사를 결심하고 나서 어디를 가든지 팀원들은 헤어지지 말자는
원칙하에 투표를 했는데 팀장인 그를 제외한 전원이 미래산업을 적어
내더란다. 어떻게 낌새를 눈치챘는지 그날부터 간부들이 그들을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프로젝트를 다시 해보라느니 직급을 올려주겠다느니 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집으로만 끌고 다니는 통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무단퇴사 했다는 이야기였다.
"몇 군데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저희들을 받아주겠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D정밀로 가고 싶었습니다. 거기 잘 아는 선배님이 계시거든요.
S전자에서도 긍정적인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팀원들은 전부
미래산업을 고집합니다. 사장님이 끝까지 받아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결국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협박이었다. 일전에 말한 것처럼 내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들은
어차피 회사를 나올 것이고, 어디로든 흘러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시 대기업의 답답한 환경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자신도 있었고, 그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는 개방적 환경을 마련해줄 자신이 있었다.
고광일의 말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어떻게든 결판을 짓겠다는 단호함이
수화기를 통해서도 느껴졌다. 갈등이었다. 한참 후에야 나는 짤막한 대답을
해줄 수 있었다.
"오시오."
처임이자 마지막 파계라고 생각했다. 나를 위해서나 그들을 위해서나 어떤
독선적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분당에 있는 동서증권빌딩
5, 6, 7층을 얻어 연구소를 마련해주었다. 우리 미래산업의 또 다른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미래 연구소(Mirae Research Center)'는 그렇게 생겨났다.
내부가 대충 정리되고 나서야 나는 그들과 첫 미팅을 가졌다. 그때까지
고광일 말고는 아무도 만나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을 이야기했다.
"첫째. 연구목표는 언제나 여러분들 스스로 정하십시오. 둘째, 연구비용은
제발 절약하지 말아 주십시오. 셋째, 나에게 업무 보고하는 사람은 즉시
해고하겠습니다."
다소 극적인 과장이 섞이긴 했을지라도 사장인 내가 이렇게까지 다짐했건만
대기업에서 일하던 기질은 쉽게 고쳐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고광일 상무는
지금도 틈만 나면 브리핑 자료를 들고 천안까지 찾아온다. 번번이 야단을
치지만 소용이 없다.
"사업설명도 좀 드려야겠고, 인사드린 지도 오래되었는데 오늘 오후쯤
한번..."
"분당에서 천안까지 뭐하러 와. 당신, 시간이 그렇게 많아?"
요즘도 우리의 전화통화는 늘 이런 식이다. 집단퇴사를 결심하고 나서
어디를 가든지 팀원들은 헤어지지 말자는 원칙하에 투표를 했는데 팀장인 그를
제외한 전원이 미래산업을 적어내더란다. "첫째, 연구목표는 언제나 여러분들
스스로 정하십시오. 둘째. 연구비용은 제발 절약하지 말아 주십시오. 셋째,
나에게 업무 보고하는 사람은 즉시 해고하겠습니다."
@ff
먼저 갖다 써!
무슨 일을 할 것인지조차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것이 내
경영방침이다. 말하자면 자율, 방임이다. 물론 무관심은 아니다. 참견을
스스로 자제하고 있을 뿐, 회사의 일에 어찌 사장이라는 사람이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내 방으로 불러서 만나기도 하고,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만나기도 한다. 일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격의
농담도, 개인적인 고민도 주고받는다. 현장 직원도 만나고 연구원도 만나고
경리도 만나고 간부도 만난다.
또한 나는 매일 아침 부사장과 미팅을 한다. 특별한 주제는 없다.
기업운영에 관한 것이라든지 시국이나 경제동향이라든지 업계의 향후전망 등에
관해서 그저 떠오르는 대로 마구잡이 대화를 하다. 부사장은 또 팀장들을 그런
식으로 만나고 팀장들은 팀원들과 그렇게 일상적으로 만나다. 이것이 우리가
회의하는 방식이다.
모두들 놀라지만 미래산업에는 정말 사훈(사훈)이 없다. 나부터도 지키기
힘든 원칙 따위를 만들어서 무엇에 쓸 것인가. 직원이 사장을 믿고 사장이
직원을 믿는다면 그만이다. 거창한 구호는 언제나 쓸데가 없다. 대개는
술자리에서 우스개로 쓰일 뿐이다.
기업의 철학은 구호나 회의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외우는 것과
공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리더의 철학은 자시의
행동과 업무를 통해서 주변에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보고와 사전결재를 싫어한다. 정확한 수치나 세세한 데이터는
해당업무의 담당자들만 알고 있으면 된다. 높은 사람이 너무 자세하게 알게
되면 섣불리 간섭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일하는 사람들의 의욕을 잃는다.
보고는 또 일의 속도를 지연시킨다. 한사람이 생각하고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언제나 빠르고 능률적이다. 결국은 한 사람이 움직일 일에 여러 사람이
생각하고 끼여든다면 그게 바로 문제다. 될 일도 안 되고 보고와 결재가
진행되는 동안 당사자의 의욕은 삭감될 수밖에 없다.
식자우환(식자우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보고받는 사람도 귀찮고 보고하는 사람은 더 귀찮다. 내가 늘상 직원들에게
'제발 보고하지 말라'고 수선을 피우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되든 안 되든
하고 싶은 일은 해봐야 한다. 그 결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만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특히 연구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보고와 결재는 가장
치명적이다. 그 결과가 평소의 연구의욕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나는 연구원들에게 "먼저 갖다 써"라고 말하고, 경리부에는 "달라는 대로
줘"라고 말한다. 경리이사로 있는 신 상무는 다른 기업에서도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입사하고 나서 한동안은 "달라는 대로 주라"는 마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나중에 사석에서 고백한 말이지만 '이 사람
회사 망해 먹을 사람이로군'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무슨 일에 얼마나 쓰겠다는 것인지 자세히 알아보고 지출규모를 조정하는
것을 '지출결의'라고 한다. 당연히 지출결의는 사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이 지출결의라는 게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래산업은 사후결재를 권장한 것이다.
신 상무처럼 큰일 날 소리 한다고 펄쩍 뛰는 분들도 분명 계실 것이다.
모험이라면 모험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제로 사후결재를 도입하더라도
엄청난 낭비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간부가 인색하게 개입하지 않았으므로 돈의
흐름이 좀더 자유로워졌을 따름이다. 돈의 흐름이 자유로워지면 돈을 쓰는
사람도 자유로워진다. 기술개발에 가장 필요한 것은 상상력과 창의성이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자유로움에서 시작된다.
심지어는 운전기사에게까지 지출 권한을 주고 있다. 운전기사도 분명히
회사의 직원이고, 나름대로 재량껏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예컨대 경영자들끼리
만나야 할 자리가 있다면 운전기사들끼리도 자연스럽게 모이게 된다. 그럴 때,
보이지 않게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밥이라도 한 끼 사줄 수 있는 배포가 내
운전기사에게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기업행위의 일부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필요하면 팍팍 써. 나중에 경리과에다 영수증만 갖다 주라구."
사후결재에도 물론 전제는 있다. 철저한 신뢰가 그것이다. 기업이 누구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 누구도 기업의 돈을 헛되이 쓰지 않으리라는
믿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투명하고 정직한 기업을 만들어야 g나다.
감추고 숨길 것이 많은 사장은 직원들도 믿지 못한다. 그런 사장을 당연히
직원들도 믿지 못한다. 서로 믿으면 강해진다. 강한 기업이 돈도 번다.
미래산업에는 사훈(사훈)이 없다. 나부터도 지키기 힘든 원칙 따위를 만들어서
무엇에 쓸 것인가. 직원이 사장을 믿고 사장이 직원을 믿는다면 그만이다.
나는 연구원에게 "먼저 갖다 써"라고 말하고, 경리부에는 "달라는 대로
줘"라고 말한다.
@ff
실패에 투자하는 흑자 경영법
실패는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다. 진정한 경영자라면 실패와 친해져야 하고
실패 앞에서 당당해져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회사는 지출결의에 많은
인력과 시간을 낭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물론 실패의 확률은 줄어들기도
하겠다. 그렇지만 이미 말했듯이 그런 요식행위를 위해 동원해야 하는 인력과
시간은 무엇으로 벌충해야 하는가.
물론 결과론이겠지만 때론 실패조차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다. 한번의
실패는 고통과 함께 많은 가능성을 남겨준다. 고통에만 눈이 멀어 숨어 있는
가능성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미국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총 714회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무려 1,330여 회에 달하는 삼진아웃을 당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삼진
한 번을 당할 때마다 그는 반드시 실패요인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또한 삼진을 당할 때마다 느꼈을 심한 외로움과 열패감은
결과적으로 그를 강인하게 키워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330여 회의
삼진아웃은 714회의 홈런을 가능하게 했던 밑거름이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나는 우리 엔지니어들에게 무엇이건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권하고, 실패하더라도 진심으로 격려한다. 한번
실패한 엔지니어는 오너에게 미안해서라도 실패요인을 분석하고 성과물을
뽑아둔다. 그렇게 축적된 성과물들은 산만하게라도 우리 주변에 남아 있게
마련이다. 언젠가는 그 성과물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성공을 이루어낸다.
나는 우리 엔지니어들에게 '연구개발에 있어서는 경제개념을 갖지 말라'고
말한다. 경제개념을 없애라는 말은 어떠한 실패도 추궁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신입사원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사장이 듣기 좋으라고 격려 한번 하는
것이겠거니 생각하고는 그만이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면, 선배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연구개발에는 언제나 열 번의 실패와 한 번의 성공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열 번의 실패가 무섭다는 이유로 단 한 번의 시도조차 포기한다. 그런
사람들이나 집단에게는 영원토록 발전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제자리
걸음보다야 차라리 잃는 것이 낫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고 부딪쳐보는 편이 더 의미 있다.
우리 공장의 한 구석에는 개발에 실패한 장비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
실패를 잊지 말자는 뜻이기도 하지만, 실패와 익숙해지자는 뜻이기도 하다.
미래산업이 그 동안 개발한 장비들은 대략 30종류 가량 된다. 그중에서 20여
종은 기계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대여섯 종은 그럭저럭 개발비 정도를
건졌다. 나머지 서너 종의 장비들은 결국 지금까지 미래산업을 먹여살리고
있는 셈이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어떤 성공도 없다.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단점들에 쉽게 좌절하면 아무런 발전도 없다. 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하루는 토스카니니의 이야기를 하셨다. 첼로 연주자였던 토스카니니는 눈이
매우 나빴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악보를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그가
속한 오케스트라의 책임 지휘자가 몸이 아파 결근을 했단다. 연주시간은
다가오고 지휘할 사람은 없어 모두가 걱정하던 차에, 악보를 항상 외우고
다녔던 토스카니니가 임시로 지휘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베르디의
'아이다'를 완벽하게 외어서 지휘함으로써 그 특출한 자질을 인정받은
토스카니니는 이후로도 항상 모든 곡을 외워서 지휘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토스카니니가 음악사에 길이 남는 명지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눈이 매우
나빴기 때문이라는 역설이다.
'탈무드'에서 말하는 '가장 유능한 사람'이란 '모든 경우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그 '모든 경우'란 긍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들을 같이
일컫는 말이다. 움직이는 모든 행위에는 흑자가 숨어 있다. 수치상으로 명백한
적자라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미래형 흑자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을 발굴하여 곱게 갈무리할 능력과 안목만 있다면 어떠한 실패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흑자경영법'이다. 미국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총 714회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무려 1,330여 회에
달하는 삼진아웃을 당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연구개발에는 언제나 열 번의 실패와 한 번의 성공이 있다.
토스카니니는 눈이 매우 나빴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악보를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베르디의 '아이디'를 완벽하게 외워서 지휘함으로써 그 특출한 자질을
인정받았다.
@ff
사장실이 어딥니까
1994년에 나는 충남기업인 대상을 수상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당연히
기쁨이 더 컸다. 그런데 기쁨도 잠깐, 곧 회사에 비상이 걸렸다.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것이다. 사업을 시작한 이후로 이런 일은 처음이라 무슨 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관례라는 것도 있을텐데 어디
한 군데 물어볼 만한 곳도 없었다.
간부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내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갑갑한
노릇이었다. 변변한 응접실도 없었고, 사장실이래봐야 책상 하나 덜렁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일단 부딪쳐보자. 닥치면 다 수가 생긴다....'
중요한 인생의 기로에서도, 지금껏 사업을 해 오면서도, 나는 항상 그런
무지막지한 낙관주의로 일관해왔다.
대통령이 별건가. 물으면 아는 대로 대답하고, 칭찬하면 인사하고, 때 되면
구내식당에서 식사대접이나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준비하긴 뭘 준비해. 청소나 한번 깨끗하게 하자구."
직원들은 황당한 표정들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보다 그쪽에서 해야 할 준비가 더 많은 모양이었다. 대통령 방문
이틀 전부터 수상한 사람들이 잔뜩 몰려온 것이다. 비서실과 경호실
사람들이었다. 비서실 사람들은 우리측과 스케줄을 잡는다고 정신없었고,
경호실 사람들은 공장을 온통 들쑤시면서 안전점검을 한답시고 난리였다.
나는 공연히 불안하고 뒤숭숭했다. 내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
마침내는 그들이 내 방에까지 쳐들어왔다. 그들을 안내하던 정미리 과장이
나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 건물이 아주 멋있습니다."
책임자쯤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얼떨결에
인사를 받았다.
"그나저나 사장실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사장실에 불쑥 들어와 놓고 사장실을 다시 찾으니 황당할 뿐이었다. 여기가
사장실이라고 했더니 그 사내는 깜짝 놀랐다.
"원, 참, 이런 사장실이 다 있나 그래."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곧 이해가 되었다. 지금은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 방은 거의 창고나 다름없었다. 마땅히 둘 곳이
없었던 큼직한 기계를 사장실에 가져다 놓았는가 하면, 소파는커녕 제대로 된
의자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경호실 직원들은 큰일 났다는 듯이 갑자기 수선을 떨었다. 소파와 탁자를
빌려올 만한 곳이 없느냐, 이 기계 좀 다른 곳으로 치워야겠다. 화분 몇 개만
가져다 놓으면 어떻겠느냐,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공단 사무실에
사람을 보내서 의자 몇 개를 실어왔지만, 내 방에 있던 기계는 마땅히 치울
만한 곳이 없어 그대로 두기로 했다.
대통령 방문에서는 다행히 별 탈이 없었다. 내 안내에 따라 공장을 한 번
둘러보고는 사장실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은 일본 기업을 이기고 있는 미래산업이 대견스럽다고 크게 칭찬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왔다는 이야기보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경호실 직원광의
에피소드가 더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들의 웃음이 나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쓸데없는 겉치레를 싫어하고 항상
몸으로 말하려는 나의 노력을 직원들도 아랑주고 있는 듯해서 내심 고맙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미래산업 삶들은 언제나 소리 없이 움직인다 요란한 지시도 없고
복잡한 보고도 없다. 저마다의 할 일은 스스로 알고 스스로 하며 스스로
책임진다. 그것이 신뢰다. 내가 직원을 믿는 만큼 직원 또한 나를 믿는다.
'믿고 따르라'고 백번 소리치고 우겨봐야 리더십은 생기지 않는다. 오직
행동뿐이다. 믿고 행동하면 강요하지 않아도 따라온다.
그 이후로 마주치면 '사장실 좀 가꾸셔야겠네요' 하고 인사하는 직원들이
많아졌다. 미소 짓는 그들의 표정에서 나는 분명한 애정과 신뢰를 본다.
미래산업 사람들은 언제나 소리 없이 움직이다. 요란한 지시도 없고 복잡한
보고도 없다. 저마다의 할 일은 스스로 알고 스스로 하며 스스로 책임진다.
그것이 신뢰다.
@ff
내가 수돗물만 먹는 이유
언제나 TV를 보다가 아연해진 적이 있다. 당시는 '수돗물 파동'이 나서 온
나라가 시끄럽던 시절이었다. STM 기자가 당시 서울시장을 인터뷰했는데,
당연히 '수돗물은 아직 믿을 만하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시장님께서는
수돗물을 드십니까?' 하고 기자가 물으니 어처구니없게도 '안 먹는다'는
대답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런 대화를 듣다가 무척 불쾌해졌던 기억이 있다.
그런 모습들 때문에 사람들은 정부를 믿지 않는다. 정부측에서 무슨무슨
지침이나 정책이 발표되면 환영은커녕 국민들의 입꼬리는 당장에 비뚤어진다.
말은 좋지만 얼마나 제대로 되랴 싶은 것이다. 수돗물만 해도 그렇다.
정부관료부터가 정작 수돗물을 먹지 않으니 수돗물을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한들 무슨 설득력이 있겠는가.
정부가 못 미더운 것이야 국민의 한 사람인 나로서도 별 수 없다. 그러나
속는 셈치고서라도 자꾸 믿어야 할 것 같다. 아니, '믿어줘야' 할 것 같다.
불신은 부신을 낳고 그러한 불신의 팽배는 결국 파멸을 낳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양치기 소년의 우화에서처럼 정말 훌륭한 정책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불신하고 있지 않는가. 자구 믿고, 속을 줄 알면서도 또 믿고 해야
조금씩이나마 신뢰가 회복되어 가지 않겠는가.
사실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신뢰'다. 정부에 대한 신뢰,
국민에 대한 신뢰, 기업에 대한 신뢰, 직업에 대한 신뢰들이 필요하다. 서로를
믿지 못하면 허약해진다.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이 많이 무너지는 것도 신뢰의
문제다. '열심히 일해봐야 사장 주머니만 불러주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무너지는 것이다.
나는 수돗물을 먹는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너도나도 생수를 대놓고
먹는 풍토에서는 사실 수돗물 먹는다는 말이 별로 당연하지 않다. 나는 직원들
집에 들를 때가 많다. 18평짜리 조그만 아파트에만 들어가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생수통 아니면 정수기다. 수돗물을 먹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생수'라는 것이 수돗물보다 더 불안하다. 업자가 돈을 벌자는
목적으로 어디서 퍼왔는지도 모를 '생수'라는 것이 나라에서 관리하는
'수돗물' 보다 더 믿음직스럽다니 얼마나 어이 없는 세태인가.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하다니 이 나라가 왜 이 모양인가.
내가 고집스럽게 수돗물을 먹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불신의 세태에 대한
반발이다. 어떠한 정책이 발표되면 국민들은 '저대로만 안 하면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가는 큰일 난다는 태도다. 사실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가 농민들이나 기업들이나 많이 당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정부의 모든 말을 거꾸로 알아듣는다는 것은 정말 문제다.
속는 셈치고라도 자꾸 믿어줘야 정부도 건강해질 텐데 습관적으로 불신만 하니
정부도 자꾸 엉터리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물론 나도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생수를 먹인다. 내가 수돗물을 먹는다고
직원들에게까지 그대로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직원들 중에는 분명히
수돗물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수돗물을 먹인다면
나는 나쁜 기업주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수만 먹는 직원들을 만나면
항상 내 생각을 이야기해준다.
"제발 좀 믿어. 믿으라구. 나는 평생 수돗물만 먹고 살았어도 지끔껏
잔병치레 없이 잘살잖아. 젊은 사람이 뭔 겁이 그리 많아. 무얼 먹어도 죽을
때 되면 죽고, 아직 살 만하면 사는 거야." "제발 좀 믿어. 믿으라고. 나는
평생 수돗물만 먹고 살았어도 지금껏 잔병치레 없이 잘 살잖아 젊은 사람이 뭔
겁이 그리 많아."
@ff
금이빨에 의료보험 되는 것 봤습니까
개인사업 하는 사람들은 월급쟁이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렇지만 사업에
실패했다고 해서 다시 월급쟁이로 돌아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항상
자신의 앞날에 도사라고 위는 위험이 싫긴 하지만, 월급쟁이들의 빤한 일생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봉급을 많이 받건 적게 받건 웬만한 월급쟁이들의 삶이란 대개 한결같다.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도 목돈이 없어서 언제나 막막하다. 저축이 좀되었다
싶으면 어느새 커버린 아이들이 무서운 속도로 그 돈을 먹어치운다. 아이들도
대충 성장하고 작은 평수나마 집 한 채 겨우 마련했다 싶으면 어느새 퇴직할
나이가 된다. 잠시만 방심하다 보면 퇴직금이란 것도 남의 주머니로 들어가
버리게 마련이다. 돌이켜봐야 무엇을 하겠다고 평생을 애달캐달 달려왔는지
허무하기만 하다.
이렇게 불우한 사람들이 바로 이 나라의 월급쟁이들이다. 가능하다면 기업은
이들이 최대한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업행위의 진정한 의미이자 목표이다. 기업이 책임져야 할 것은 직원 한
사람의 목숨만이 아니다. 기업은 직원을 포함해서 그들의 가정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기업의 복지정책에는 한정선이 있을 수 없다. 각 회사마다 물론 사정이
다르겠지만, 사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나누자는 이야기다. 자기
식구들의 위태한 삶들을 모른 체하고 밖으로만 생색 내는 자선사업에도 문제가
있고, 개인적 치부에만 관심 있는 경영자들도 문제가 있다. 자신은 뒷구멍으로
온갖 보험을 마련해 놓고 입으로만 '같이 죽고 같이 살자'고 백날 이야기한들
직원들이 무슨 감동을 느낄 수 있겠는가.
미래산업 역시 창업했을 당시에는 직원복지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저
직원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최대한 나눠주겠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다만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해주려고 노력했다. 안정적인
복지제도를 수립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나는 다른 기업을 벤치마킹하기 좋아한다. 어떤 기업을 방문하더라도 그
회사가 돌아가는 방식이며 기업문화며 근무환경 같은 것들을 유심히 살펴본 후
속으로 평가를 한다. 그러면서 그 기업과 미래산업을 비교해보는 속물적인
버릇을 좀 가지고 있다. 다른 회사 사람이 찾아와서 구내식당에 갈 기회가
있으면 나는 꼭 한번씩 묻는다.
"어떻습니까? 식사는 하실 만합니까? 당신네 회사 밥하고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이런 식이다. 또 사옥에 대한 인상도 묻고, 봉급수준도 묻고, 직원
복지정책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묻는다. 사실 복지정책에도 공부가 필요하다.
합리적인 목적과 규모를 설정하는 것도 매우 복잡한 일이다. 그래서 자꾸 묻고
고안하고 창작한다.
미래산업은 직원들에게 봉급을 많이 준다. 연구원은 대기업의 연구원과
비려하고, 일반직원은 대기업 전자회사 직원과 비교해서 그보다 약간 높게
책정한다 보너스는 연 800%를 지급한다. 800%는 다른 회사의 그것과 다르다.
다른 회사의 보너스란 개념은 보통 '본봉'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나
미래산업의 보너스는 항상 '총수령액'을 기준으로 한다.
연구직의 과장급 이상은 회사에서 승용차를 지급한다. 미혼직원은
기숙사에서 묵을 수 있게 하고 기혼자는 주택자금으로 3천만 원을 무이자로
대출해준다. 대학까지의 자녀교육비는 전액을 회사에서 부담한다. 직계가족과
장인, 장모의 병원비까지 모두 회사 차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경리부 직원이 젊은 친구 하나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무슨 영문인지 두 사람 모두 여간 격앙된 얼굴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이 사람이 금이빨을 하겠다는 겁니다. 글쎄."
"대체 무슨 소린가."
"충치가 있어서 금이빨을 해야 하니까 의료지원금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참으로 알쏭달쏭한 문제였다. 직원들의 직계가족까지 치료비를 전액
지원해준다는 것이 회사의 방침이었다. 그렇지만 금이빨까지 회사에서 해줘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긴 있었다. 직원의 부인이 불임클리닉에 다니는데 그 비용을 회사에
청구했던 것이다.
"이봐요, 금이빨에 의료보험 되는 것 봤습니까?"
"아니, 그럼, 뽑기만 하고 해넣지는 말라는 얘깁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 보니 마침내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의료보험으로 못 해주는 것이니까 회사가 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국가의
복지정책을 보완하기 위해서 기업복지라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냥 해줘, 금이빨 해놓고 번쩍번쩍 일 좀 잘하라구." 자신은 뒷구멍으로
온갖 보험을 마련해놓고 입으로만 '같이 죽고 같이 살자'고 백날 이야기한들
직원들이 무슨 감동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의료보험으로 못 해주는 것이니까
회사가 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국가의 복지정책을 보완하기 위해서
기업복지라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ff
천안 대이동
1995년 12월에는 모 대기업이 실시하는 협력업체 사업실적 평가에서
미래산업이 국산화 부문 금상을 수상하여 상금 1억 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는
첨단측정기를 구입했다. 별도로 회삿돈 2억 2천만 원을 들여 전 직원에게
200%의 특별 보너스를 지급했다. 이런 기분 좋은 '빌미'를 미래산업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중소기업이 대기업 흉내 내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며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흉내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는
것이다. 어느 회사가 더 직원들을 위해 노력하는 회사인지 한번
판가름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선의의 경쟁이라면 충분히 의미도 있지 않은가.
공연한 자존심 때문에 무리를 한다면야 문제가 있다. 기업 본래의 목적을
수행하는 데에는 차질이 없어야 한다. 회사가 발전해야 직원들의 삶의 질도
발전할 수 있다. 직원복지는 회사에 재투자하고 남의 돈에 대한 직원들의
권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직원들에게 분배하고도 남는 돈이 있다면 나는 그 돈을 기꺼이 좀더 쾌적한
근무환경을 위해 사용한다. 사무용 가구, 컴퓨터를 비롯한 업무기기, 사무용
소모품에 이르기까지 직원들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최고급품으로 지원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좀더 능률적으로, 좀더 즐겁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 투자라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회사는 고급스럽고 기능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볼품없고 지저분하면 직원들까지 볼품없어 보인다. 더구나 하루종일 일하고
쉬어야 하는 공간이라면 아름답고 편안한 것이 최고 아닌가.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생기는 직원들의 피로와 볼만은 오히려 일의 능률을 저하시킨다.
나는 '참아주어야'하는 회사보다는 '자꾸만 출근하고 싶은'회사를 만들고
싶다.
나는 넓고 환한 우리의 공장과 '스카이 라운지'로 통하는 구내 식당이 아주
자랑스럽다. 어떤 귀한 손님이 찾아오더라도 나는 반드시 구내식당에서
대접한다. 전망 좋고 음식도 맛있다. 아침값 500원말고는 누가 먹어도
공짜라는 장점도 있다. 물론 아침값 500원은 아침식사를 집에서 하는
기혼자들과의 형평을 고려한 것 일뿐 절대 돈 아끼자는 정책은 아니다.
사옥을 설계할 때 나는 특히 운동시설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직원들이
여가를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야 일하는 시간도 건강하고 즐거울 수 있다고
믿는 편이기 때문이다. 테니스장, 족구장, 농구장, 탁구장 등등 젊은 사람들이
즐길 만한 운동시설이라면 대부분 마련했다. 특히 두 군데의 테니스장은
교본에서 제시한 그대로 땅 깊은 곳에서부터 켜켜이 재료를 깔고 처리를 했다.
직원들은 간혹 '해피한 우리 회사'라는 표현을 쓴다. 이런 말을 듣는 사장의
기분은 최고다. 그래서 더 '해피'하게 해주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해피한
회사'를 만들겠다는 내 노력을 직원들도 알아주어서인지, 14년 동안 우리
회사에서 일하다가 떠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1994년에 미래산업은 부천에서 천안 제2공단으로 이사했다. 당시의 어느
경제 일간지 기자는 우리의 이사를 두고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던'사건에 비유했다. 당시 직원 137명 중에서 단 한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회사를 따라 천안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제외된 한 명은 4대 독자였다.
모친이 하루라도 아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도 우기는 탓에 별 수 없이
이사를 포기했던 것이다.
회사가 지역이동을 할 때 일반적으로 직원의 20__30%가 회사를 떠난다고
한다. 사실 직원들의 개인사정들을 일일이 고려하면서 사옥이전을 할 수는
없다. 미래산업은 보다 넓은 공장이 필요했고, 보다 쾌적한 업무환경이
필요했다. 이사를 얼마 앞두고 나는 직원들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했을 뿐이다.
이주비로 1일당 90만 원씩을 지급해주겠다는 것과 신청하는 전원에게
전세보조금 1천만 원씩을 무이자로 융자해주겠다는 배려말고는 더 할말도
없었다. 집사람은 그때 일을 두고 나에게 독선적이고 엉뚱한 구석이 있다고
말한 적까지 있다.
사실 속으로야 어찌 걱정이 없었겠는가. 사람 구하기 힘들다는 중소기업에서
그 동안 키워왔던 현장직원이며 엔지니어가 단 한사람만 빠져 나가더라도
심각한 문제였다. 결과적으로는 기우였을망정 당시의 내 심정은 노심초사 그
자체였다. 이사는 불가피했고, 그 결정은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얼굴관리를
했을 뿐이다.
'천안 대이동'을 끝내고 나는 감격했다. 우리 직원들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고, 요즘의 젊은이들은 유난히 지방에서 일하기를 싫어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를 따라 행동통일을 해주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미래산업이 망하더라도 나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다.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내 인생의 손익계산은 이것으로 끝났다.'
나는 카이사르에 대해 잘 모른다. 다만 루빈콘 강을 건너고 나서 그가
느꼈을 기분에 대해서라면 이제 약간은 이해할 수가 있다. '참아주어야'하는
회사보다는 '자꾸만 출근하고 싶은' 회사를 만들고 싶다. 직원들은 간혹
'해피한 우리 회사'라는 표현을 쓴다. 이런 말을 듣는 사장의 기분은 최고다.
그래서 더 '해피'하게 해주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천안 대이동'을 끝내고
나는 감격했다. '미래산업이 망하더라도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내 인생의 손익계산은 이것으로 끝났다.'
@ff
미래를 모르면 '초짜'
얼마 전,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고등학교 동창과 저녁을 먹은 일이
있다. 하는 일들이 그렇다 보니 화제가 자연스럽게 요즘의 증시불황으로
이어졌다.
"그나저나 정 사장 유명해졌더라."
무슨 소린가 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재미있었다.
"아, 글세 우리 마누라가 자네를 다 알지 뭔가."
안식구 되는 사람한테 정문술 사장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당신이 정문술
사장을 어떻게 아느냐'며 깜짝 놀라더라는 것이다.
"우리 마누라가 주식투자를 한답시고 좀 돌아다녔거든. 미래산업이랑
정문술이 모르면 그 동네에서는 초짜 소리 듣는다더군."
반도체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미래산업과 정문술을 알고 있다면 십중팔구
주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증권가에서는 미래산업이 꽤 유명한 편이다.
지난 몇 년 간의 불황이 우리한테는 고속성장의 시기였고 그 와중에
미래산업은 주식상장을 결정했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빚 갚자는 돈은 아니다. 기술개발자금을
확보해두려는 의도였다. 군침만 흘리던 고가의 연구장비들을 그때 많이 사들일
수 있었다. 후발주자로 뛰어들어 자리잡느라 고생만 잔뜩 시켰던 직원들에게도
좋은 보답이 되었다. 신문에서 떠들던 대로 약간 과장하자면 '전 사원 억대
부자'의 신화도 이룰 수 있었다.
96년 9월에 우리사주 7만 9천 주를 270명의 직원에게 주당 4만원씩 사게
해주었다. 경력에 따라서 200주에서 1천 주까지 배당해주었다. 당시 주가가
30만 원을 오르내렸으니 그 차액이 엄청났다. 정확히 계산해보면 270명 중에서
200명이 억대 부자가 된 셈이다. 관리과에 근무하는 어느 여직원의 경우
730주를 받았으니 현재 시가로 환산하면 2억 7천만 원이 된다. 구내식당에서
일하는 한 아주머니도 억대 부자가 되었다. 이른바 '황제주', '귀족주'라는
것이다.
일반회사에서 주식회사로 변모한다는 것은, 사장과 직원들만의 기업에서
바야흐로 국민의 기업으로 변화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단 주식회사가 된
이상 기업은 더욱 투명해져야 하고 더욱 도덕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당연히
기업 공개념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미래산업이 주식상장을 준비하던 1996년, 증권가의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증권 공모가 자율화 조치'의 시행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증권감독원에서 상장을 준비하는 기업의 재무구조와 수익성,
안정성, 성장성 등 각종 항목을 심사하여 공모가를 결정해왔다. 그러기 위해서
기업은 '주간사 계획서'를 제출하고 승인받아야 한다. 미래산업은 당시
증시사상 최고가격인 주당 4만 원으로 승인이 났다.
주간사 계획서의 승인을 받고 안도하던 중에 갑자기 '증권 공모가 자율화
조치'의 시행령이 공표되었다. 한 달 후부터는 시장의 원리에 의해 자유롭게
공모가를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래산업의 상장을 준비하던 동원증권은
곧바로 증권감독원에 재심청원을 했다. 이러저러해서 억울한 입장이니
가급적이면 공모가를 다시 책정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증권감독원측에서는 우리의 입장을 십분 이해는 하겠지만 공공기관의
심사결과를 함부로 번복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동원증권이 이번에는 이미 승인된 주간사 계획을 취하하자고
제안했다. 딱 한 달만 기다리면 엄청난 가격으로 팔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비슷한 경우 때문에 두어 군데 기업에서는 벌써 주간사 계획을 취하한 경우가
있었다. 공모가 자율화 조치 이후에 상장하면 최하 200억에서 300억은 더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승인된 공모가 4만 원에 50만 주를 발행할 예정이었으니, 눈
딱 감고 한 달만 버티면 200억 원 규모의 유입자금이 졸지에 400__500억 원
규모로 뻥튀기되는 셈이다.
나라에서 어떤 제도를 변경하고자 할 때에는 장기적으로 무언가의 이득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는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보는 사람도 생겨날
수 있다.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 한번쯤은 감수해야 할 불가피한 아픔이다.
반대로 그 혼잡한 와중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폭리를 취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러한 발상 자체를 부도덕한 것이라 생각했고 국가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얄팍한 장난질은 나의 적성에 맞질 않았다.
나는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는 가격으로 우리의 주식을 나눠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어렵게 주식발행을 결정한 의미도 그래야만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더구나 기업 이미지만큼 주가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없다.
주식을 발행한다는 것은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과는 달랐다. 장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특히 우리로서는 자금유입보다 기업공개의 의미가 더 컸다
이미 사장 한 삶이 차지하고 있기에는 회사가 너무 커져 있었다. 나라고 그럴
욕심이 없었겠냐마는 다만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어렵사리 결심을 굳혔다.
내 결심을 말했더니 동원증권에서는 당연히 펄쩍 뛰며 만류했다. 동원증권의
입장에서도 유입되는 자금이 커질수록 더 많은 커미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이러한 결정에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내 고집이 의외로 강건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못마땅해하면서도 별 수 없이 그대로 따라와 주었다. 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바보 같은 클라이언트였을 것이다.
공모가 자율화 조치를 불과 몇 주일 앞두고 미래산업은 마침내 주식을
시장에 공개했다. 사람들은 모두들 정문술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욕했다.
사업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도 했다. 하지만 나와 우리 직원들은 우리의
결정이 옳다고 믿었다.
다행히 시장은 비교적 정확하게 우리의 도덕성을 평가해주었다. 특히
소액투자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발행 며칠만에 미래산업 주식값은
엄청나게 뛰어올랐고, 매스컴들은 우리의 과감한 결정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장외시장 사상 최단기간 주가상승률을 r기록했다. 순식간에
4만 원이던 주가가 30만 원을 넘어섰다.
얼마 후에 증권사 사장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투자 한번 기막히게 하셨습니다."
미래산업은 200억을 포기하고 더 많은 것을 얻었다. 기억 이미지도
좋아졌고, 주식신뢰도도 매우 높았다. 주가가 항상 높은 수준을 유지해주니
당연히 나를 포함한 우리 직원들은 큰 부자가 되었다. 200억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수천억을 벌어들인 셈이다. 약간 과장하자면 '전 사원 억대 부자'의
신화가 이루어졌다. 주식을 발행한다는 것은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과는
달랐다. 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금유입보다 기업공개의의미가 더 컸다.
매스컴들은 우리의 과감한 결정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4만 원이던 주가가
30만 원을 넘어섰다.
@ff
한 푼도 안 내놓는 미래산업
내가 이해하는 '벤처기업'이란 지극히 상식적이고 고전적인 기업개념이라고
했다. 약삭빠름과 적당한 기회주의를 경영처세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착한 기업이 돈도 벌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착한 기업'이란 말은 언제나 내 화두였다.
물론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기업을 원하는 건 아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기업을 이용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입혀 가며 돈벌이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선사업이나 공익사업에 투자하는 액수의
규모로 기업의 도덕성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런 상식을 좀 우습게
보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런 일에 도맡아 앞장 서는 기업들의 면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주일만 되면 교회에 헌금하는 사람을
훌륭하다고 할 수야 없지 않은가.
기자들이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고 나니 그 다음으로 나를 괴롭힌 것은
자선단체들이었다. 각종 빈민단체, 종교단체, 시민단체, 장애인단체 등에서
쉬지 않고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로 거절한다고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업무에
차질이 있을 정도로 면담 요청이 쇄도했다.
살면서 몇 번인가의 기부금을 내본 적은 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는 모두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자선기금을 내고 있다. 자녀들의
학교에서도 자선기금을 거두고, 종교단체에 내는 헌금 속에도 자선기금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회사이름을 걸고 기부금을 내본 적이 한번도 없다.
많은 자선단체들로부터 인색하다느니 매정하다느니 하는 원망의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사회사업을 열심히 한다는 모 알로에 회사와 한 푼도 안 내기로
유명한 미래산업은 그 동네에서 곧잘 비교되는 모양이다. 기분이 좋을 리야
없지만 그런 것까지 항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선단체가 하고 있는 일들을 특별히 색안경을 끼고 본다거나 하진 않는다.
남들이 하기 어려운 훌륭한 일을 벌이고 있으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하는 것이야 당연하다. 다만 미래산업 사장실에 앉아 있는 한, 나는
공인이다. 공인으로서의 나는 기업의 자선사업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기업이 돈 좀 벌었다고 기부금 조금 내고 생색이나 내는 것보다는,
기업이 번 돈을 기업 안에서 잘 쓰는 것이 진정한 자선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나는 미래산업을 대표해서 '산업포장'을 받았다. 중소기업 중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냈기 때문이다. 기업이 기업행위에 충실하면 그것이 바로
자선사업이고 사회공헌이다. 기업이 내는 세금에는 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세금을 용도별로 배분하고 집행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지만
기업으로서는 어쨌거나 최선을 다한 셈 아닌가.
언젠가 폴 마이어의 '베풂의 기술'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폴 마이어의
인생철학은 그야말로 감동적이다. 그가 사회에 봉사하는 방식은 거의
종교적이다. '언제까지 얼마의 자선기금을 마련해야 하니까 이런 저런 사업을
지금쯤은 시작해야 한다'는 식이다. 자선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사업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기업행위의 한 목적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연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사업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사회봉사는 바로 기술개발이다. 나는 우리의 기업이 좀더
기업다워졌으면 한다. 기업이 정치판을 기웃거리고 기업이 복덕방이나
기웃거리는 모양은 보기 싫다.
씨도 안 먹힐 얄팍한 인본주의를 내세워 이미지 광고랍시고 쳐들이는 돈들도
밉다. IMF 시대라고 봉급 동결하고 인원 감축하면서 연예인과 방송국에만 수억
원씩 갖다 바치는 꼴이 아닌가. 기업이 기업행위를 안하고 정치를 하려고 드니
참으로 문제다. 연예인이 유명해지면 정치를 하려 들고, 학자가 유명해져도
정치를 하려 드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업내에 돈이 많아지면 그만큼 안에서 쓰일 곳도 많아진다.. 어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기간이 5년이라고 치자. 그럼 나머지 3년 동안 번
돈은? 당연히 직원들의 몫이다.
경영자에게 '당신에게 기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천차만별의 대답이
나온다. 각자 그럴 듯한 답변들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원들에게
물으면 그 대답은 한결같다. '행복추구와 자아실현의 장'이다.
그렇지만 직장이 '행복추구와 자아실현의 장'이 도기가 말처럼 어디 쉬운가.
바로 앞에서 말한 '3년 동나 번 돈'의 행방 때문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그
돈은 정치가나 행정관료의 뒷주머니에 들어가 박혔을 수도 있고, 회장의
젖먹이 손주가 빨아먹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그중의 작은 일부는
'인간사랑'을 표방하는 기업광고에 쓰였을 테고, 또 다른 일부는 자선단체의
기부금으로 갈 수도 있다.
기업과 기업인들이 유명해지면 그만큼 쓸데없는 제스처가 많아진다 마이크
잡을 일도 많아지고 생색 내야 할 이벤트도 많아진다. 성공했으니 이제 폼
나는 일이나 하다가 주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신문의 인사 동정란에
온갖 행보를 광고하는 사람들도 참 꼴불견이다. 물론 그거야 개인적인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혼자 폼 나는 일을 하려고 직원들의 생떼 같은 돈들을
남에게 퍼다 주는 행위는 분명한 도둑질이다.
정상적인 기업인이라면 모두 공금의 두려움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장 또는
대표이사라는 직함 때문에 다소 혼란스러울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특히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재무제표를 들여다보며 '이 돈이 내 돈인가
아닌가'를 자꾸만 고민하는 사람은 기업가라기보다는 장사꾼이다. 그런 사람은
'가게'를 해야지 '기업'을 할 만한 그릇은 못 된다.
직원들이 고생하는 만큼 기업에는 돈이 생긴다. 사장은 그 돈의 흐름을
합리적으로 유도하는 교통순경이다. 교통순경이 자꾸 다른 생각을 하면
교통질서가 엉망이 된다. 기업가가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니까 이 나라 경제가
이 모양이다. 하지만 요즘은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이나 전도되었다. 언제는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아서 오늘 IMF인가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회사이름을 걸고 기부금을 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연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사업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사회봉사는 바로 기술개발이다.
직원들이 고생하는 만큼 기업에는 돈이 생긴다. 사장은 그 돈의 흐름을
합리적으로 유도하는 교통순경이다. 교통순경이 자꾸 다른 생각을 하면
교통질서가 엉망이 된다.
@ff
마흔셋의 절망
@ff
나는 잡초류였다
사실 내가 처음 반도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좀 오래된 이야기다.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던 1970년도에 모범공무원 포상휴가차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견학을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도시바에서
개발한 트랜지스터 단파 라디오를 하나 샀다. 그때 라디오에 큰 글자로 써
있는 'IC'란 단어를 처음 접했다. 한국에서는 TV나 냉장고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던 통신분야 전문가가 한 사람 있었는데 업무상
자주 접촉하다 보니 자연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내가 단파 라디오를
자랑했더니 그 사람은 외국 신문이나 자료 등을 보여주면서 집적회로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 사람 말로는 직접회로라는 것이 컴퓨터의
핵심부품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산업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게 웬 달나라 이야긴가'할 정도로 도통 실감을 하지
못했다.
미래산업을 시작하기 전에 풍기기공이라는 조그만 금형공장을 운영한 적이
있다. 나중에 자세히 말하겠지만, 해직 당한 직후에 조급한 심정에서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처참한 실패로 마감해야 했던 아픈 경험이었다. 풍전기공을
그만두고 다시 새로운 창업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나는 그 시절 얻어들었던
반도체에 관한 정보들을 떠올렸다. 여전히 반도체를 잘 이해하고 있지
못했지만 일단 복잡하고 어려운 분야라는 것이 나의 호기심과 승부욕을
자극했던 것 같다. 성공을 해도 크게 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어려운 분야가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사람들은 모두 내 생각을 비웃었다. 18년 동안 책상머리에서 펜대나
구리던 사람이 뜬금 없이 반도체 제조장비 사업을 시작하겠다니 한심스럽게도
여겨졌을 것이다. 만일 반도체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입장이었다면 나는 아마도
다른 사업을 했을 것이다 무슨 재미로 잘 알고 있는 분야에 뛰어든단 말인가.
도전과 모험이란 낯선 곳에서 더욱 신바람이 나는 법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인생행로는 참으로 엉뚱했다. 어느 한 순간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계획에 딸 살았던 저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사업을 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단은 무조건 저질러 놓고 보는 것이다. 그 다음에 실제로
부딪쳐오는 상황 따라 대응방식을 정하고, 정해진 방식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사실 지금껏 나를 키운 것은 호기심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대한 인생의 전환기에는 언제나 못 말릴 호기심이 있었다.
충동과 열정은 스스로 선택한 불치병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이건 얻었다
생각하면 곧바로 다른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내가 선택한
방식을 후회해본 적은 없었다.
바둑계에서는 서봉수가 '잡초류'로 통한다. 정해진 코스 없이 이리저리
거칠게 커왔다는 점에서 나 역시 서봉수와 비슷하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언제나 미래를 낙관하는 힘, 이것이 바로 잡초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다. 잡초
같은 내게, 미래는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전과 모험의
대상이었다.
어릴 적 이야기를 잠시 해야겠다. 나는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시절도
어수선했고 공부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다행히 집안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기부금을 주고 보결입학했다. 어찌어찌해서
원광대 종교철학과에 간신히 진학했지만 2년 동안 재미없이 허송세월만 하다가
결국 군입대를 결심했다.
당시에는 모두들 군대를 '죽으로 가는 곳'쯤으로 여겼다. 우리 어머니도
그랬다. 영장이 떨어지자 어머니는 대번에 눈물바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들떠
있었다. 힘든 것이야 모두들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했지만, 내 앞에 새롭게
펼쳐질 세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나는 밤마다 잠을 설쳐야 했다.
훈련소에 입소하니 동기들은 모두들 죽는 소리였지만 나는 정말 즐겁게
훈련에 임했다. 각개전투, 수류탄 투척, 청검술, 사격훈련 등등 새롭게 배우는
모든 것이 재미있었다. 물론 내용이야 삭막한 전쟁훈련이었지만, 각
교과마다에 축적되어 있는 합리적인 전술교리와 엄청난 노하우들을 발견하는
일이 내겐 흥미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들이라는 점만으로 도 내가 열광하기에는 충분했다.
모두들 군대라는 낯선 환경에 진절머리를 치는 동안에도 나는 그 안에서조차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워낙에 안주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
성미였다. 군대시절 내내 내 별명은 다름 아닌 '꼴통'이었다. 여전히 반도체를
잘 이해하고 있지 못했지만 일단 복잡하고 어려운 분야라는 것이 나의
호기심과 승부욕을 자극했던 것 같다. 도전과 모험이란 낯선 곳에서 더욱
신바람이 나는 법이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언제나 미래를 낙관하는 힘,
이것이 바로 잡초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다. 군대시절 내내 내 별명은 다름
아닌 '꼴통'이었다.
@ff
인생을 뒤바꾼 호기심
신병훈련도 다 끝나가던 어느 날, 일과가 끝난 시간에 설문지 두 장씩이
지급되었다. 저녁식사도 했겠다, 모도 피로하겠다, 모두들 그림 그리듯이 대충
답안을 기입하고는 벌렁벌렁 드러누웠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설문내용이 재미있었다. 딱딱한 시험문제가 아니라 대부분 엉뚱하고 기발한
질문들이었다. 동기들의 비아냥거림까지 참아가며 나는 열심히 답안을
기입했다. 모범생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그것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적성검사와 지능검사였던 모양이다. 신병훈련이 끝나자마자 나는
육군행정학교에 배속되었다. 순간의 호기심 덕분에 모두가 부러워하는 행정병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기획관리, 문서관리 등 서구식
행정실무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고향에서 잠시 농협의 급사노릇을 했던
경력이 있었던지라, 합리적이고 규격화된 새로운 행정제도를 접하자마자 나는
순식간에 거기에 매혹되었다.
재미가 있었으니 자연히 성적이 좋았다. 후반기 교육이 끝나자 나는 '보직
중의 보직'이라는 육군본부에 배속되었다. 육본 부관 감실 통계과에서
일하면서 당시 육군업무 전산화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나는 처음
컴퓨터라는 걸 알게 되었고, 통계나 분석 작업의 기초 등을 습득할 수 있었다.
동기들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억세게 운이 좋은 녀석'이거나 '끝내주는
잔대가리'였다. 신병훈련소에서 육군행정학교로, 그곳에서 다시 육군본부로
향했던 일련의 행보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소위 말하는 '빽'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랬다. 내게는 '호기심'이라는 매우 든든한 '빽'이 있었다.
군복무 중에서 1961년에는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당시 국가
재건최고회의에서는 육군본부 근무자를 대상으로 행정요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지원은 고사하고 강제로 뽑혀 가지나 않을까 모두들 전전긍긍이었다. 쿠데타
진압된다면 졸지에 반역자로 몰려 죽게 된다는 것이다. 워낙에 정치적
식견이나 역사의식 같은 것이 희박했던 나로서는 그런 소리들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새로운 집단에는 항상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경험이
있었다. 그 소문을 듣자마자 나는 다시 한 번 흥분했다. 내가 안 가고 누가
가랴. 나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내 안의 호기심을 짐작할 리 없는 동료들은
다시 한 번 미친놈 취급이었다.
다행히 반역자(?)로 몰려 처단되는 일없이 나는 나머지 군 생활을 그곳에서
보냈다. 남들과 똑같은 3년이란 세월을 나는 정말 변화무쌍하고 파란만장한
경험으로 가득 채웠다. 그곳에서도 나는 물론 열심히 일했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 성실성과 신명을 귀엽게 본 가부들은 제대와 동시에 나를 중앙정보부로
데려갔다. 새로운 환경만을 좇아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사이, 어느새 나는 5급
공무원(현재 9급)이 되어 있었다. 특채였다.
당시의 중앙정보부라면 소위 '끗발' 있는 동네였다. 더구나 특수공무원이기
때문에 일반공무원보다 보수도 훨씬 좋았다 들어가 보니 동료들은 거의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었고, 모두 나보다 직급이 높은 4급이었다. 나는 강한 승부 욕에
사로잡혔다. 할당되는 업무는 항상 남보다 먼저 끝냈고, 수시로 실시되는 각종
정보시험에서 나는 항상 1,2등을 오르내렸다. 결과적으로 나는 동기들
중에서는 물론 중앙정보부 내에서도 가장 빠른 승진기록을 세웠다.1976년 7월
나는 부이사관으로 승진했다. 입사한 지 14년만에 얻게 된 엿서 번째
승진이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대책 없는 호기심이 중년까지의 so 인생을 결정지었던
셈이다. 새로운 환경을 선택하게 했던 것이 호기심이라면, 새로운 환경에서
나를 독려했던 건 승부 욕이었다. 호기심과 승부 욕의 계속되는 자리바꿈,
이것이나를 가르친 유일한 선생님이었다.
나에게는 대단한 학벌이 없다. 명예로운 학위나 커리어 같은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나마 한 기업의 경영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직접 사회와
부딪치면서 얻은 것들이 큰 몫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의
화려함은 짧지만 들녘에서 자란 잡초의 강인함과 다채로움은 길지 않던가.
새로운 집단에는 항상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경험이 있었다. 나는 강한 승부
욕에 사로잡혔다. 할당되는 업무는 항상 남보다 먼저 끝냈고, 수시로 실시되는
각종 정보실험에서 나는 항상 1,2등을 오르내렸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의
화려함은 짧지만 들녘에서 자란 잡초의 강인함과 다채로움은 길지 않던가.
@ff
강제해직
나는 세상을 늦게 배운 셈이다. 사회가 무서운 곳이라는 걸 볼 혹이
넘어서야 깨닫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처녀 불알 따는 것 빼고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중앙정보부에서 젊은 날을 다 보냈으니 말하자면 온실 속에서만
살아왔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한 번 해본 적 없었고,
특별히 고통스러웠던 경험도 없었다.
제대와 동시에 중앙정보부로 특채되어서 18년을 고스란히 그곳에서 일했다.
평소에 호기심이 강했던 나는 그곳의 긴장된 일과들이 재미있었고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했다. 덕분에 승진도 빨랐고 그저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하던
나날이었다. 1979년 12.12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10.26이 일어나기 3개월 전, 중앙정보부는 보안사령부 축소작업을
단행했다. 군 정보부대인 보안사령부가 원래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반인 대상의
정보활동을 벌이다 보니 적폐가 심하다는 이유로 축소지침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직무상 그 작업에 관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10.26과 함께 보안사령부가 득세하면서 이번에는 중앙정보부가
풍전등화 신세였다. 말 그대로 '세상이 바뀐'것이다.
1980년 5월이었다. 평소처럼 출근했더니 그날 따라 회사 분위기가 이상했다.
나를 포함하여 간부급만 수십 명이나 해고통보를 받은 것이다. 보복치고는
너무나 잔인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접한 해고통보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정신이 멍해진 나는 책상정리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서둘러
회사를 나왔다.
길거리를 헤매다 보니 그간 격조했던 친구 녀석 사무실 근처였다. 그 친구를
불러내서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정문술이가 점심을 먹자고 할 때가 다
있다'며 친구가 수선을 피웠지만 나는 따라 웃지 못했다.
그 동안 직장밖에 몰랐던 생활이었다. 대낮에 갑자기 갈 곳이 있을 턱이
없었다. 별 수 없이 집으로 갔다. 마침 아내는 집에 없었다. 나는 옷을 편하게
갈아입고 청계산에 올랐다.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마흔 셋이라는 나이와, 다섯 명의 아이들, 사랑하는 아내,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부담스럽게 여겨졌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아득하기만
했다.
나는 요즘도 청계산엘 자주 오른다. 집의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
청계산인데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추억들이 서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명예퇴직 바람이니 실업률 몇 퍼센트니 하는 말들은 산에 가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나는 보통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3시에 퇴근한다. 등산을 하는 날은
정상에 올라봐야 오후 4시가 조금 못 된다. 요즘은 쓸쓸한 표정으로 묵묵히
산행을 하는 중년남자들을 그 시간에 많이 볼 수 있다. 서글픈 일이다.
간혹은 악수를 떠주면서 간단하게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그럴 때 내 심정은
정말 각별하다. 저들도 그 시절의 나오 똑같은 생각들을 하겠거니 생각하면
금방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뭐라고 격려의 마을 전하고 싶어도 어줍잖게
여길까봐 참는 수밖에 없다 다만 속으로만 중얼거리는 것이다. '용기와 열정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 정문술이도 꼭 마흔 셋에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힘드시겠지만 부디 꾹 참고 이겨내십시오.'
나의 경우에야 구시대의 건전치 못한 정치격변 때문에 떨궈져 나온 셈이고,
다름 아닌 내가 선택한 모험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원망할 구석도 별로 없다.
그렇지만 평생을 한 기업만을 위해 묵묵히 일해왔던 사람들은 뭔가. 그 고통과
분노는 어떻게 다스리란 말인가.
중년의 강제퇴직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엄청난 고통인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가족들 얼굴을 보기도 무섭고, 친구들에게 연락 한 번하기도
망설여진다. 남아도는 시간은 일분 일초가 모두 고문이다. 앞날을 생각라면
깜깜하고 그런 때일수록 잠들기도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자꾸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을 싸들고 나가 뭔가를 해보려고 든다. 성급하게 덤벼드니 자연히
실패도 많고 사기 당하는 일도 많다.
중앙정보부에서 함께 해직 당한 사람들 중에는 나와 잘 지내던 네 명의
동료들이 있다. 그 중에서 두 명은 사업실패로 자살했다. 다른 한 친구는
사업에 실패하고 지금까지 매우 곤궁한 삶을 살고 있다. 나머지 한 친구는
금융 불량거래자에 올라서 자신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다. 가게를 경영하는 아내를 아침마다 바래다주고 외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아내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다. 그래도 그
정도면 해직동료들 중에서는 다행인 케이스다. 중년의 강제퇴직이 만들어낸
비극들이다. 평소처럼 출근했더니 그날 따라 회사 분위기가 이상했다. 나를
포함하여 간부급만 수십 명이나 해고통보를 받은 것이다 보복치고는 너무나
잔인했다. 이 정문술이도 꼭 마흔 셋에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힘드시겠지만
부디 꾹 참고 이겨내십시오. 자꾸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을 싸들고 나가 뭔가를
해보려고 든다. 성급하게 덤벼드니 자연히 실패도 많고 사기 당하는 일도
많다.
@ff
퇴직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
사람은 각각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배워야 할 세상이 따로 있다. 학생과
사회인이 배워야 할 세상이 다르고, 직장인과 기업가가 배워야 할 세상이 각각
다르고, 직장인과 기업가가 배워야 할 세상이 또한 각각 다르다. 18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나는 사회를 알만큼 알고 있다고 자신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무원의 눈으로 포착할 만한, 꼭 그만큼의 세상이었다. 막상 퇴직
당하고 밖에 나와 보니 모르는 것 투성이었고, 그래서 모든 것이 두렵기만
했다. 갑자기 마흔이 넘은 어린애가 되어버린 것이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자괴감이었다. 할 일 없이 노는 것은 죽은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무엇보다
일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동사무소에 가서 처음으로 인감증명이라는 걸 떼어보고, 주민등록등본도
떼어봤다. 예전 같으면 운전기사나 집사람에게 시키던 일이었지만 직접
해보려니 그 또한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무엇을 하든 운전면허는 있어야겠다
싶어 학원에도 나가봤지만 시험만 보면 번번이 떨어졌다. 만만한 건 도대체가
하나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운전면허를 따놓고 기쁜 마음에 소형차 한 대를 구입했다.
차가 집으로 도착한 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아이들은 드라이브를 가자고
졸라댔다. 나도 모처럼 기분이 좋아서 그러마고 나서려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공무원 시절에 나의 운전기사로 일하던 부하직원이 위로 인사차 찾아온
것이었다.
요즘 뭐하며 지내냐길래 그냥 일없이 쉬고 있다고 하니, 그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앞으로 다가앉았다.
"제가 잘 아는 분께서 부천에서 조그만 부품공장을 하시거든 요. 요즘
동업자를 구한다고 하시더라구요."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다. 공장이면 어떻고 식당이면 어떠랴.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동업이라니 해볼만할 것 같았다. 그러나
워낙에 공장일 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공장이라면, 대체 뭘 만드나."
"스위치 클립이라는 걸 만들어서 납품한답니다. 뭐, 전기설비에 쓰이는
부품인가 봅디다. 거래처가 확실해서 경기도 안 타고 전망도 좋다네요."
무슨 소리인지 내가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나 같은 사람도 쓸모가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하니 그런 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은행관리나 관청에 관련된
일들을 봐주면 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그런 일이라면 내
공직경험도 제법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당장 그 친구를 데리고 부천으로 차를 몰았다. 예의상 자기가
모시겠다는 그 친구를 조수석에 강제로 앉혀놓고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워낙에 내 성질이 급하기도 했겠지만, 당시의 내 심정이 그만큼 조급하기도
했다.
일요일이었는데도 공장은 시끄러웠다. 직원은 예닐곱 명밖에 안 되었지만
모두들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 수보다 기계가 많은 편이었는데,
여기저기 쇳밥이 튀고 소음이 요란한 것이 매우 역동적으로 느껴졌다. 벌써 몇
달째 집안에서 일 없이 뒹굴던 내게는 그런 장관이 다시없었다.
상호는 풍전기공이었다. 사장이란 사람을 만나보니 우직하고 성실해 보였다.
그런데 몇 마디 나눠보니 듣던 것하고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아예 대표이사
자리를 넘길 테니까 얼마가 되든 자본을 투자하라는 것이었다. 자기는
영업이사로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좀 불안하기도 했지만 졸지에 사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별생각 없이 2천만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내가 받은 퇴직금의
꼭 절반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석연찮은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참 순진하고도 어리석었던 모양이다.
출근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빚쟁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이만한 공장이 굴러가려면 빚도 좀 있겠거니 생각되었다. 빚이란 것도 사실
몇백만 원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채권자들이 한두 달 사이에만도 셀 수 없이
드나들었다. 전임 사장을 포함해서 인사기록부에 올라 있는 이사라는 사람들은
아예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공장에 있는 기계들까지 남김없이
담보로 걸려 있었다. 퍼뜩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퇴직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그제서야 생각났다. 좀 불안하기도 했지만 졸지에 사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별 생각 없이 2천만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내가 받은
퇴직금의 꼭 절반이었다. 퍼뜩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퇴직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그제서야 생각났다.
@ff
뒤늦은 오기
그때까지 나는 누구를 속여본 적도 없었고, 속아본 적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였다. 중앙정보부에 있던 사람이 누군가를 속여가며 이득
취할 일이 무엇이 있겠으며, 나를 속여서 득 보고자 하는 사람이 어찌 또한
있었겠는가.
순식간에 2천만 원을 날리고, 껍데기뿐인 공장 하나를 인수한 것이 말하자면
내 경영인생의 시작이었다. 흔히 서로 속이고 배신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생리인 것처럼 말한다. 나도 그 당시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고, 나 혼자만 바보라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째야 할지 몰라 허수아비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던 중에 옛 은사의 소개로
백정규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기술력이란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었고,
엔지니어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타고난 성실성으로 풍전기공에 활력을
심어주었다.
그와 나의 만남은 운명적이기도 했다. 사기를 당하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공장 문만 열어놓고 있는 상태였건만, 백정규는 이상할 정도로 풍전기공
입사를 고집했다. 당시 멀쩡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나 역시
그의 우직한 심성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대번에 의기투합하고 폐허나
다름없는 공장에 뛰어들었다.
백정규를 얻고 나니 현장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게 모자란
현장경험은 백정규가 보완하고, 백정규에게 모자란 관리업무는 내가
맡아보았다. 현장이 움직여주니 나도 죽을 각오로 뛰어다녔다. 그러다 보니
사업이라는 것도 점차 알게 되는 것 같았다. 속은 건 속은 것이고,
이제부터라도 풍전기공을 살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오기라면 오기였다.
사업경험이 없다는 것만 문제였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했다. 현장직원들이 부품을 사다 달라면 즉시 청계천으로 달력서 필요한
부품을 사다 주었다. 거래처에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찾아가서 몇 번이고 도와
달라고 애걸을 했다. 그러다 보니 별 치욕스런 꼴을 다 겪었지만, 더 큰
자존심을 위해 참고 또 참았다.
청소도 직접 하고 은행도 내가 다녔다. 나는 직원들에게 '심부름꾼이라고
생각하고 무슨 일이든 시켜 달라'고 공공연히 부탁했다. 허수아비 사장이라고
무시하던 예전 직원들도 차츰 나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뒤늦게 내 사람으로
입사한 백정규도 자연스럽게 현장책임자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풍전기공은 점차 '내 공장'이 되어 갔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금형 사업을 시작했다. 기술력 확보를 위해 고심하던
나는 수소문 끝에 시오이 세이치라는 일본인 퇴역기술자를 초빙해왔다. 월급
150만 원에 체류비 50만 원, 한달에 한 번 씩 일본 여행경비 50만 원, '총
250만 원을 주기로 했으니 80년대 초반의 임금수준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시오이 세이치는 말 그대로 장인(장인)이었다. 육십이 넘은 노인이었지만
기계 앞에만 앉으면 미친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정밀한 금형을 만지면서
장갑을 낄 수 없다며 항상 맨손으로 쇠와 기름을 만졌다. 풍전기공 직원들은
시오이 세이치로부터 고도의 금형 기술을 새로 익혔다. 오래지 않아 '잘 안
되는 게 있으면 풍전기공으로 가라'는 말이 부천공단에 나돌 정도로 우리의
기술력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금형 제작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대신에 사업적인 안정성이
없었다. 항상 새로운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속도가 붙어주질 않았고, 그
때문에 대개는 납품기일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이쪽에서 먼저 문제가 생겼으니
흐지부지 잔금 떼어먹히는 일도 잦았다. 더구나 금형은 납품으로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각 현장상황에 따라 예상치 못한 트러블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A/S에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직원들은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공장 분위기를 일신하고 금형 사업에 새로 적응하는 와중에도 빚쟁이들은
끊임없이 찾아왔다. 전임사장의 빚을 가지고 자꾸 나를 괴롭히니 참을 수가
없었다. 갚아줄 돈도 없거니와 갚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세상물정을
몰랐던 것이다.
무조건 버티고 있으려니 갖가지 말썽이 일어났다. 험한 언사들이 오가는가
하면, 기계를 실어가려는 사람들과 거친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새로운
기분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지만, 어리석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너무나 많은 과거들을 책임져야 했다. 여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은 욕심만
있었을 뿐, 여전히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다.
@ff
한때 공무원이었던 죄
한번은 면도기 제조업체에 금형 하나를 납품한 적이 있었다. 덮개를 열고
면도날을 끼워서 쓰는 구형면도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금형이었다.
납품기일을 맞추기 못했더니 그쪽 사장은 심하게 화를 내었다. 예상대로 납품
후에도 A/S 요청만 쇄도하고 잔금은 치러주질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A/S를 나가 보면, 우리가 납품한 금형은 멀쩡하게 제품을
찍어내고 있었다. 금형에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품생산에는 별
지장이 없는 사소한 것들뿐이었다. 그 때문에 잔금을 치러주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쪽 사장은 우리 기술자 한 사람을 빼가려고 장난질을 치고
있었다. 필요한 금형을 매번 비싼 돈 주고 사느니 아예 직접 만들어 쓰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잔금 문제로 가뜩이나 화가 나 있던 참에 그런 사실까지
알게 되니 나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쪽에 전화를 걸어, 잔금도
필요 없으니 금형이나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자연히 서로 험악한 소리들이
오고 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시로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찍 퇴근하고
집에서 쉬고 있던 어느 날 저녁, 회사로부터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사장님, 큰일났습니다. 경찰들이 사무실을 온통 뒤지고 난리가 났습니다."
황급히 공장으로 달려가 보니 사무실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경기도경 수사과에서 나온 사람들이 회사 서류를 몽땅 압수해갔다는 것이다.
나주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부천 세무서 직원들을 차출해다가 정밀한
세무조사를 실시한 모양이었다. '털면 다 나오게 도어 있다'고들 하지만
풍전기공에는 도무지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빼돌리기는커녕 그 무렵의
풍전기공은 내 개인돈으로 유지되고 있는 셈이었다.
어쨌든 며칠 후에 경기도경으로부터 소환장이 날아왔다. 담당형사들은 매우
친절하고 극진하게 대우해주었다. 고발이 있어서 조사를 좀 해야겠다는 데 그
내용이 또한 기가 막혔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중앙정보부 시절에 같이
근무했다는 것을 내세워 채권자들을 협박하고 채무이행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면도기 제조업체와 처음 거래를 트면서 그쪽 사장과 몇 차례
술자리를 함께 했다. 자리가 무르익어 스스럼없이 서로의 지나온 얘기들을
나누게 되었는데, 나는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던 이야기며, 잠시 전두환
대령과 같은 부서에서 일했던 기억 따위를 재미 삼아 떠들어댔던 적이 있다.
그게 빌미가 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당시 경기도경 국장으로 있던 사람이 바로 그 면도기 사장과 각별한
친구사이였다. 풍전기공 채권자 중 하나를 부추겨 고발장을 내게 하고, 그걸
핑계로 세무조사를 해서 나를 망가뜨릴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이 세무조사로는 '털어봐야 ' 나올 것도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갖다
붙인다는 것이 기껏 '공갈, 협박'이었다.
증거는커녕 혐의도 희박한 사건을 가지고 며칠씩이나 조서를 꾸미는
척하자니 담당형사로서도 답답한 모양이었다.
"어이, 정 사장님. 그만 화해하시지 그래요."
그쪽 사장과 좋게 화해하고 그만 나가 보라는 뜻이었다. 형사도 지저분한
내막을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그렇게 노골적인 말까지 들으니 나는 오히려
더욱 화가 치밀었다.
"더이상 당신들한테 조사 못 받겠소. 이렇게 편파적이고 지저분한 수사가
대체 어딨단 말이오. 설사 내가 잘못한 게 있다고 해도 여기서 조사받을
이유는 없소. 차라리 관할서로 이관해주시오."
내가 그렇게까지 분명하게 따지고 들자 그들로서도 별 수 없었는지 일단
돌려보내 주었다. 며칠 있다가 다시 부천경찰서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
이제야 제대로 수습이 되겠다 싶어 나가 보았더니, 웬걸, 다짜고짜 나를
유치장에 집어넣는 게 아닌가.
경기도경의 경우와 별 다를 바 없는 형식적인 조사가 몇 번 있었지만 역시
허무맹랑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열흘째가 되어서야 담당형사도 더는 잡아둘
수가 없었던지 그만 나가 보라며 풀어주었다. 당연히 무혐의였다. 세무조사로
안 되니 잔뜩 고생이나 시키고 내보자는 심보였다.
초췌한 몰골로 집에 돌아가니 다섯 아이들과 아내가 현관 마루에 나란히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려드는 아이들을 끌어안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내도 옷소매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새삼 기가
막혔다. 늙은 학생이 배워야 했던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황급히 공장으로
달려가 보니 사무실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경기도경 수사과에서
나온 사람들이 회사 서류를 몽땅 압수해갔다는 것이다. 초췌한 몰골로 집에
돌아가니 다섯 아이들과 아내가 현관 마루에 나란히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려드는 아이들을 끌어안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ff
모처럼 찾아온 희망
다행히 한 몸 고생한 것말고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면도기 금형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었다. 잔금이고 뭐고 아예 그쪽을 바라보는
것조차 내키지 않았다. 분하기도 했지만 서글픈 마음도 한량없었다.
금형을 만드는 일이 지긋지긋하게 여겨졌다. 수지 맞추기도 힘든데다가
고생만 죽도록 하면서도 항상 욕먹고 마음 상하는 일이었다. 금형을 필요로
하는 건 대부분 부품생산 공장들이다. 말하자면 다른 기업의 하청업체인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금형을 납품해야 하는 우리는 다시 그들의 하청업체가
hel는 꼴이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알아준다고도 하건만, 이 하청업체들의
질 낮은 행패는 우리로서도 참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금형을 대체할 제품이 갑자기 생겨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풍전기공의 기술력 하나만은 제대로 소문이 나서 금형 주문은 계속해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짜증만 쌓여갔다. 그러던
중, 당시 오산에 공장을 두고 있던 금성전기에서 금형 주문이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리 같은 영세업자가 어떤 식으로든지 대기업과
관계를 맺어서 나쁠 이유가 없으리란 생각이었다.
그 당시의 전화교환기용 단국장치에는 베릴륨카파라는 금속소재를 원료로
하는 커넥터 부품이 반드시 필요했다. 금성전기는 일본의 NEC(일본전기)라는
회사로부터 그 부품을 수입해 다가 조립해서 한국통신에 납품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영전자라는 중소기업에서도 NEC에 선을 대어 그 부품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금성전기는 NEC에 항의했고, 의리를 중시하는 일본기업답게 NEC는
대영전자와의 거래를 끊었다.
갑자기 수입 선을 끊긴 대영전자는 그 부품의 자체개발에 착수했고 놀랍게도
오래지 않아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금성전기가 급해진 것이다.
대기업이라는 자존심도 어지간히 상했으려니와 예상치 못했던 시장경쟁자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금성전기는 부랴부랴 이 부품의 국산화계획을 세웠다.
협력업체를 물색하던 중에 금형 기술이 좋다는 풍전기공으로 연락이 왔던
것이다.
흥미 있는 제안이었다. 개발비는 전액 금성전기에서 지원하겠으니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금형을 제작해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진 금형 기술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중이었다. 언제까지 금형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그쪽에서 원하는 날짜에 정확히 맞춰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금형은 저희가
갖고 있겠습니다. 커넥터 생산을 저희가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생산업체를
따로 구하느니 아예 저희가 한다면 피차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저희가 만든 금형이니 저희가 갖고 있는 것이
유지보수에도 편리할 테니까요. 금형 기술 없는 곳에 괜히 줘보십시오. 고장
한번 나면 A/S다 뭐다 해서 생산 손실이 좀 많겠습니까?"
금형 부장은 대뜸 난감한 표정부터 지었다. 물론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라 짐작했다. 그는 상부와 상의를 해봐야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초조한
시간이었다 우리의 제안대로만 된다면 야 풍전기공이 일어서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금형 부장은 곧 돌아왔다.
"그렇게 합시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금형 부장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 역시 기분이
졸았던지 마주보며 웃어주었다. 그런데 막상 계약서를 받고 보니 그 내용이
빠져 있었다.
"아, 그건 좀 이해를 해주셔야 합니다. 본사까지 올라가야 할 공문식문서
아닙니까. 그런 것까지 구체적으로 계약서에 명시한다는 건 좀... 전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예,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해주시는 걸로 알라고만
있겠습니다."
공장에 돌아가서 경과를 설명하니 직원들은 일시에 환호성을 터뜨렸다. 금형
개발에만 성공한다면 우리의 상황으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고정매출이 생겨나는
일이었다. 풍전기공을 인수하고 처음으로 느껴보는 희망이자 감격이었다.
오산에 공장을 두고 있는 금성전기에서 금형 주문이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리 같은 영세업자가 어떤 식으로든지 대기업과 관계를
맺어서 나쁠 이유가 없으리란 생각이었다.
@ff
하청업체의 눈물
엔지니어들은 당장 그날 저녁부터 작업에 착수했다. 사운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베릴륨카파라는 금속소재를 다루는 일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그 문제 때문에 애를 끓이는 동안 별 성과도 없이
아까운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베릴륨카파는 전량을 일본에서 수입하는
금속이었다. 모두들 시오이 세이치에게 은근히 기대를 거는 눈치였지만, 그
역시 난감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초조해진 나는 베릴륨카파를 다뤄본 경험자를 수배하기 시작했다. 며칠을
고생한 덕분에 퍼시픽 컨트롤스라는 회사에 맞춤한 금형 기사가 한 사람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내가 하도 간곡히 부탁하자 결국 퇴근 이후
시간을 잠깐씩 빌려주기로 허락을 했다. 두둑한 보수를 약속한 건 물론이었다.
그러나 새 친구의 도움은 오래 필요하지 않았다. 워낙에 눈썰미 좋은 시오이
세이치와 백정규는 이 낯선 금속의 요리법을 금세 터득해 버렸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금형 제작에 관한 한 스스로 최고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도중에 금성전기의 책임 엔지니어가 기술지도 방문을 나온 적이 있었다.
진행된 작업을 면밀히 살펴보더니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토록 허름한
공장에서 하고 있는 작업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규격이 정확하고 정밀도가
우수하다는 평가였다. 특히 버(Bur)가 없다는 점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금속
절단면이 매우 매끄럽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우리의 금형 기술 신뢰할
수 있다는 눈치였다.
마침내 금형을 완성하고 금성전기에 연락을 취하니 십여 명의 기술평가단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들은 떨어지는 시제품을 붙잡고 각 부위별로 세밀하게
검사하고 측정하더니 드디어 합격판정을 내렸다. 까다로운 사람들에게 대번에
합격판정을 받고 나니 오히려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쪽 사람들의 태도가 왠지 좀 이상했다.
자기들끼리 뭔가 수군거리는가 싶더니, 또 한 사람은 어딘가에 자꾸 전화를
걸어댔다. 얼마 있으려니, 크레인과 인부 대여섯이 공장으로 불쑥 나타났다.
"기계 좀 잠시 가져갔다가 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금형 부장을 붙잡고 정색을 했다.
"아니, 부장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회삿돈이 많이 들어갔으니 간부들한테 프리젠테이션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기계를 돌려드릴 때 돌려드리더라도 엄연한 금성전기
재산이니 우선 재산등록절차부터 거쳐야 합니다 재산번호만 붙이고 곧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정 사장님께서 이해를 좀 해주세요."
석연치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계를 붙잡고 강짜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들은 실려가는 기계를 그저 물끄러미 전송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퇴근 후에 회식이랍시고 고깃집에 둘러앉았지만 어쩐지
우울하고 허전한 술자리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넘도록 기계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슬그머니
불안해졌다. 기다리다 지쳐 나는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수십 토의
전화를 하고 메모를 남겼지만 담당자인 금형 부장과 자재부장한테는 통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금성전기로 찾아갔다.
수도 없이 드나들어서 이제는 수위와도 인사를 건넬 지경이었지만, 그날
따라 수위는 입구에서부터 나를 막았다. 무슨 용건이냐는 것이다. 기가
막혔지만 금형 부장과 자재부장을 만나러 왔다고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사전약속을 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점입가경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나도 화를 안 낼 수가 없었다. 부장을 만나지 않고는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겠다고 우겼다. 워낙에 안면이 있던 터라 수위도 더는
매정하게 굴지 못하고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는 시늉을 했다.
"금형 부장님께서 지금 자리에 d나 계시답니다. 다음엔 연락을 미리 주시고
오시죠."
"도대체 연락이 돼야 연락을 미리 주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니요!"
나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그대로 정문을 통과했다. 수위는 급하게 내 팔을
자았지만 나는 거칠게 뿌리치며 곧바로 건물로 들어갔다. 금형 부장은
멀쩡하게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씩씩거리는 나를 보더니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보기나 합시다."
내가 다짜고짜 따지고 들자 그는 윗사람들 핑계를 대며 횡설수설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힘없는 회사라고 이렇게 무시하고 등쳐먹어도 되는
겁니까!"
내 목소리가 너무 컸던지 부공장장이라는 사람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나를 보고서야 대충 상황을 짐작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부공장장은
짜증스런 얼굴로 금형 부장에게 소리쳤다.
"뭐가 문제야! 계약서 가져와 봐!"
계약서에 밑줄까지 쳐가며 어쩌구 저쩌구 떠들어대는 부공장장을 무시한 채
나는 그냥 돌아 나왔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일이었구나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그처럼 기대했던 일마저 무너지고 나니, 나는 지독한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의욕상실이었다. 사실은 그 이전에도 금성전기와 비슷한 경우를 겪은 적이
있었다. 동성개발이라는 프레스 업체로부터 한국형 수류탄 제조 금형을 의뢰
받았다가 여러 가지 구실로 잔금을 떼어먹히고 금형을 빼앗기기도 했다.
아무래도 금형 사업에는 비전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뾰족한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오 상관없는 빚 때문에 계속 행패를 당해야 하는 것도 이젠
피곤했고, 만성적인 적자를 버틸 힘도 더 이상은 없었다. 이쯤에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았다.
사기로 시작해서 배신으로 끝났던 나의 첫 사업이었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세상은 예상했던 것보다 한참 더 혹독했다. 세상을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직원들에게 먼저 미안했다. 어리석은 사장 밑에서 그래도 회사
한번 다시 일으켜보겠다고 사력을 다했던 엔지니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나는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들이라고 회사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나는 훗날을 기약하며 풍전기공을 포기했다.
물론 얻은 것도 많았다. 주먹구구로나마 사업과 경영이란 것을 배웠고, 많은
사람들을 겪었다. 게다가 몇 명의 사람을 얻었다.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선택한 모험이었고 내가 선택한 환란이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마침내 금형을 완성하고
금성전기에 연락을 취하니 십여 명의 기술평가단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들은
떨어지는 시제품을 붙잡고 각 부위별로 세밀하게 검사하고 측정하더니 드디어
합격판정을 내렸다. 사기로 시작해서 배신으로 끝났던 나의 첫 상업이었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ff
다시 시작하는 사회적응 훈련
풍전기공에서 손을 뗌과 동시에 나는 또 다른 창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얼떨결에 속아서 입문한 경영의 세계였지만, 실패했다고 해서 그대로 힘없이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공직에서도 쫓겨난 마당에 새롭게 뛰어든 세계에서도
다시 한 번 쫓겨나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이런 모습의 회사는 되지 말아야 한다'는 개념만은 확실하게 서
있었다. 잠시 공백기를 갖기로 했다. 공직생활의 안일함과 순진함을 완전히
벗지 못한 상태로 재 창업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사회적응
훈련'을 해야 했다. '공직은 옷과 같다. 옷은 벗으면 그뿐이다. 현재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는 각오를 해야 했다.
양복을 골라도 짙은 색깔의 옷만 고른다든지, 친구들과 음식점엘 가도 으레
접대 받던 게 몸에 밴 탓에 먼저 계산하는 것에도 익숙지 않았다.
아랫사람에게 시키던 버릇 때문에 지시하고 관리하는 것에만 능한 것도
문제였다. 집에 있는 동안에도 가급적 아내나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고 필요한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하는 훈련을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나는
부지런히 머리를 돌렸다. 새로운 창업을 위해서였다.
풍전기공을 정리하면서 백정규를 포함한 공고출신 엔지니어 네 사람과 공장
수위 아저씨에게 나는 분명히 말했다. 조금만 시간을 주면 반드시 다시 시작할
테니 힘들겠지만 어디서고 버티고만 있어 달라고, 뻔뻔한 부탁이었지만 그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실패는 했을망정 나를 분명한
오너로 인정해주는 그들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아직 내게는 퇴직금 2천만 원이 남아 있었고, 공무원 시절부터 틈틈이 사
모았다. 값나가는 그림도 몇 점 있었다. 집을 담보로 하면 대출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었다. 문제는 사업 아이템이었다. 금형 기술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금형 사업은 기술 자부심 외에는 아무 것도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았다.
풍전기공 시절에 내가 당해야 했던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금형 사업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요즘은 뭐가 된다더라'식의 풍문에는 더욱이 관심이 없었다. 나는
원래 유행이란 것을 믿지 않는 성격이었다. 넥타이고 양복이고 간에 나는
웬만하면 버리지 않고 모두 간수해두는 버릇이 있었다. 유행은 계속 돌고 도는
것이고, 예전에 사용하던 넥타이와 양복을 십년 후면 여보란 듯이 다시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행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돌 정도라면 그 사업은 이미 가망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래지향적이고 경쟁자가 적은 분야를 택해야 했다. 물론
우리가 가진 기술력을 토대로 할 수 있는 사업이어야 했다. 어려운 문제였다.
나를 반기는 사람이 없더라도 발로 뛰면서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공무원 시절에 공식, 비공식적으로 알고 지냈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밥과 술을 내는 대가로 잡다한 정보들을 수집했다. 그 동안에
친구들 사업하는 것도 틈틈이 도와주면서 경험을 쌓았다. 한동안은 증권객장에
출근하다시피 나가면서 증권의 흐름과 원리에 대해서도 배워두었다.
'주(주식)님,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를 외치는 다양한 사람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경험들도 제법 많이 훔쳤다.
자칫 느슨해지기 쉬운 일상이었지만 와신상담(와신상담)의 고사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체질을 바꾸고 새로운 아이템을 고민하는 동안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결론은 반도체였다. 기계기술에서 첨단전자분야로 갑자기
점프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럴 능력도 없었다.
다만 내게는 어떤 회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젊은 시절 내내 나를
사로잡았던 호기심과 열정이 안정된 직장생활을 거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이제 막 세상에 튀어나온 사회초년생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그렇다면 사회 초년생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패기,
열정, 낭만, 모험심, 승부근성, 호기심, 저돌성...역시 이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어차피 신이 아닌 이상 지나치게 재고 추측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정작
험한 세상을 돌파해내기 위해서는 젊은이의 뜨거운 가슴이 필요한 것이다.
풍전기공의 쓰라린 경험은 오히려 묻어두었던 진짜 나를 자극하게
일깨워주었다. 낯선 곳으로 끝도 없이 뛰어들었던 나, 그 덕분에 항상
동료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 나갈 수 있었던 나를 되찾고 싶어졌다. 자칫
느슨해지기 쉬운 일상이었지만 와신상담(와신상담)의 고사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체질을 바꾸고 새로운 아이템을 고민하는 동안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결론은 반도체였다. 사회 초년생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패기, 열정, 낭만, 모험심, 승부근성, 호기심, 저돌성... 역시 이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ff
'미래산업'이라는 고유명사
사회 초년생이나 다름없는 내게 손쉽게 돈을 쥐어줄 수 있는 눈먼 사업은
없다고 판단했다. 남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은 분야에 뛰어들어 내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반도체라면 모두들 어렵고 생소하게만
여겼다. 그러나 그만한 미래지향성을 갖고 있는 분야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반도체 산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반도체 생산업체, 둘째
원부자재 공급업체, 셋째 반도체 제조장비 공급업체다.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고 이에 원부자재를 공급하는 분야는 대기업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러나 제조장비쪽 이라면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매우 다양했다. 그쪽이라면
내가 뛰어들 만한 사업도 있을 것 같다.
관심을 갖고 시장분석을 해본 결과, 굳이 외국기술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몇
가지 제조장비들이 전량 수입되고 있음을 알았다. 꼭 필요한 물건이지만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제품들이 절박한 내 눈에는 걸려들었던
것이다.
공직생활에서도, 소규모 금형 공장에서도 처참하게 실패했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반도체 제조장비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정보부 출신이었으니 뒤를 봐준 누가 있었다거나,
아니면 지독히 운이 좋았다거나 하는 식으로들 생각하는 모양이다.
반도체 제조장비 분야를 선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했는지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사업
아이템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2년이란 시간을 투자했다고 말해준다면, 그들은
그 말도 믿지 못할 게 분명하다.
세상에는 손쉽게 얻어지는 것이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거나, 갑작스런 행운이 찾아왔다고 하면 누구나 신이나
운명을 말하고 믿게 된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나도 신의 존재를
믿고 경외하지만, 신은 그런 식의 장난꾸러기가 아니다. 갑작스럽게 여겨지는
모든 행운의 배후에는 끊임없는 관심의 집중과 고통의 축적이 있다. 신은
그토록 합리적인 분이시다.
정확히 말하자면 2년 내내 내가 고민했던 것은 창업 아이템 말고도 하나가
더 있다. 바로 회사의 이름이다. 처음으로 내 손으로 지어보는 상호였으니
당연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이름을 찾아야
할 텐데 쉽게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전 직원들이 자랑스럽게 A라하고
일반인들도 손쉽게 기억할 수 있는 이름. 그러나 괜찮다 싶은 이름을 어렵사리
생각해 내면 이미 다른 곳에서 사용하고 있게 마련이다.
사업 아이템을 반도체 쪽으로 굳혀갈 시점과 거의 동시에 나는 운명적으로
'미래산업'이란 단어와 마주쳤다. 당시의 유일한 관심분야가 반도체였던 터라
내가 보는 자료나 서적은 거의 그쪽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하루는
경제일간지를 뒤져보다가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장차 각광받을
산업에 관한 기획시사에서 '미래산업'이란 단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래산업'이라는 일반명사를 한참 동안이나 입에 넣고 굴려보았다.
단순하면서도 진취적인 이름이었다. 앞으로 내가 만들어가고 싶은 회사의
이미지하고도 너무 일치했다. 2년 동안 찾아 헤매던 이름을 무심코 신문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것이다. '미래산업'이라는 신조어를 고안해낸 사람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나는 곧바로 이 단어를 고유명사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어느 경제지 기자가 '미래산업'이라는 이름의 탄생설화에 관해 물은 적이
있다.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기자는 저으기 실망한 눈치였다.
"아니 그럼 신문을 보시다가 우연히 찾아내신 이름이로군요."
"그렇지요, 우연히 찾았지요. 2년 동안 마르고 닳도록 준비해 왔던
우연이었지만 요." 갑작스럽게 여겨지는 모든 행운의 배후에는 끊임없는
관심의 집중과 고통의 축척이 있다. 신은 그토록 합리적인 분이시다. 나는
'미래산업'이라는 일반명사를 한참 동안이나 입에 넣고 굴려보았다.
단순하면서도 진취적인 이름이었다. 앞으로 내가 만들어가고 싶은 회사의
이미지하고도 너무 일치했다. "그렇지요. 우연히 찾았지요. 2년 동안 마르고
닳도록 준비해왔던 우연이었지만 요."
@ff
회사를 살려낸 푸념 한마디
'미래산업'이라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을 마치고 나는 이미 약속했던 풍전기공
식구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백정규를 위시한 다른 사람들은 그 동안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내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달려왔다.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십 몇 년 동안을 나와 함께 울고 웃었던, 그야말로 '의리의
돌쇠'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부천에 있는 조그만 공장 하나를 전세로 얻어 조촐한 자축연을 가지는
것으로 미래산업은 시작됐다. 자본금 중에서 공장 전세금으로 3천만 원을
치르고, 나머지 돈으로는 연마기, 프레스, 절단기, 몇 가지 측정기구 등 아주
기본적인 장비들을 구입했다. 총 자본금 8천만 원에, 사장까지 포함해서 전
직원이 여섯 명밖에 안 되는 아주 조그만 회사였다. 1983년 2월이었다.
회사를 오픈 하자마자 곧바로 반도체 제조장비쪽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작정은 이미 섰지만 아직 구체적인 전략제품을 선정하지 못했을 뿐더러,
아무리 간단한 제품일지라도 경험이 없는 우리로서는 상당한 연구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초기의 미래산업은 적은 규모가 되더라도 비교적 안정적인 고정수입원이
필요했다. 풍전기공의 실패로부터 얻은 뼈저린 교훈이었다. 나와 백정규가
열심히 뛰어다닌 보람이 있어 몇 군데로부터 납품을 허락 받았다. 간단하고
단순한 기계부품 하청이었다.
"이걸로 일단 너희들이라도 먹고 살라구. 나한테도 계획이 있으니까 조금만
참고들 있어."
내가 당시에 직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나는 막 가동하기
시작한 공장을 직원들에게 완전히 떠맡기다시피 하였다. 내게는 보다 중요한
할 일들이 있었다.
당시 한국의 반도체 제조회사로는 모토롤라 코리아, 페어차일드 코리아,
대한 마이크로 전자, 시그네틱스 코리아, 아남산업 등이 움직이고 있었다.
풍전기공 시절에 (주)한독의 요청으로 시계 조립 금형을 납품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안면을 익혔던 과장 한사람이 당시에는 시그네틱 코리아로
옮겨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도움으로 당시에 가동 중이던 반도체
조립라인을 차례로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그러면서 나는 차츰 '리드 프레임 매거진'이라는 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반도체 조립공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리드프레임'이라는 반도체
소자에 단자를 부착하기 위해 사용되는 복잡한 형상의 금속상자가 바로 '리드
프레임 매거진'이다. 소모품은 아니었지만 수량이 많이 필요했고, 반도체
산업은 당시 엄청난 속도로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복잡한 장비는 아니지만 고도의 정밀도를 요구하는 고부가가치
상품이라는 접도 나의 관심을 끌었다.
나는 곧바로 '리드 프레임 매거진'의 시장현황을 분석했다. 당시 6개 업체가
매거진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직원이 6__7명에 불과한
영세기업들이었다. 그러므로 국내에서 필요로 하는 매거진은 거의 전량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각 회사 제품들을 살펴보니
제작공정과 제품수준이 대개 비슷비슷했다. 모두 거래처 확보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고 제품 자체에 대한 연구에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이 업체들은 모두 매거진을 제대로 만들어내기에는 기술적으로 역부족인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술력은 단연 월등했다.
한국의 제조업체들은 대개 자기의 기술능력보다 훨씬 높은 단계의 전략목표를
설정하고 턱걸이 성공에 기업의 사활을 걸기 일수였다. 높은 기술을 가지고
낮은 단계의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을 무슨 커다란 수치인 것처럼 여기는
이상한 습성이 있었다.
나는 매거진에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가 가진 금형 기술 그깟
매거진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국내 업체들의 제품과 함께 미국과
일본의 제품을 싸들고 공장에 돌아와 세밀한 기술검토에 들어갔다.
결과는 싱거웠다. 그 정도 제품을 만드는 데에는 별다른 기술력도 필요
없었다. 각 부품의 규격만 정확히 나와준다면 조립하는 것은 그야말로
단순작업이었다. 엔지니어들 말로는 당장이라도 생산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크지도 않은 시장에서 이미 여섯 개나 되는 회사가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비슷한 수준의제품을 만들어서 뒤늦게 뛰어들어 봐야 결과는
뻔했다.
우리는 현재 유통되고 있는 제품들의 문제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모두들
원가절감을 통한 가격 경쟁력 확보에 목숨을 걸고 있는 판국이니, 우리는
품질개선으로 맞서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제품들을 면밀히 살펴보니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정밀도와 내구력이었다. 여러 개의 금속판을 조립해서 하나의
매거진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조립과정에서 일단 오차가 생길 확률이
높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멀쩡한 제품도 차츰 오차가 생겨날 수박에 없었다.
욕심만큼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조립과정에 신중을 기하자면
생산속도가 지나치게 느려져서 문제였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내구력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몇 달 동안 그 문제에만 매달렸다. 조립에
사용되는 볼트와 너트도 개선해보고, 몸체를 이루는 금속판의 소재도 다양하게
교체해보았다. 그러나 성과는 별로 없었다.
하도 밤낮없이 일하다 보니 하루는 백정규의 아내가 확인차 공장을 찾아오는
일까지 있었다. 모두가 그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기존에 있던 납품 거래선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말은 안했지만 모두들 풍전기공의 악몽들을
떠올리고 있을 터였다. 나도, 엔지니어들도 차츰 지쳐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반도체 쪽으로의 해외 진출은 무리였던가 싶기도 했다.
그 날도 나는 사무실에서 거래중단을 통보하는 전화를 받고 참담한 기분으로
현장에 나갔다. 엔지니어들은 각자 흩어져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친
기색들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푸념이 흘러나왔다.
"에이, 빌어먹을, 조립하지 않고 통째로 꽝꽝 찍어버렸으면 좋겠구먼."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에 갑자기 백정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그러면 되겠는데요! 금형으로 찍어버리는 겁니다!"
어째서 이 정도의 간단한 생각을 아무도 못했는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다소 복잡하긴 하지만 우리가 가진 금형 기술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오래지 않아 매우 정확하고 내구성도 높은 '리드 프레임 매거진'이 탄생했다.
금형으로 한 번에 찍어내는, 말하자면 이음새 없는 매거진이었다. 우리는 당장
의장등록과 실용시안을 출원해놓고 곧바로 제품생산에 돌입했다.
반도체 업체들마다 우리가 개발한 신제품에 갈채를 보냈다. 실로 기막힌
발상의 전환이었다.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우리의 제품이 시장을 온통
장악했다. 대여섯 명의 직원들로는 터무니없는 주문물량이 몰려들었다. 우리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면서 급하게 사람들을 충원했다. 우리가 개발한 매거진은
세계시장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순식간에 매출액이 억단위로 뛰어올랐고,
미래산업은 일약 반도체 조립장치 업체의 반열에 올랐다.
참으로 살맛 나던 시절이었다. 매일 출근하기 전에 나는 공장에 전화를 걸어
그날 필요한 부품명세와 필요수량을 알아보았다. 엔드밀, 드릴, 텅스텐봉,
우레탄봉, 연마석, 릴레이, 철판, 황동판, 스테인리스판, 볼트, 너트,
심지어는 장갑, 걸레까지 일일이 받아 적었다. 그리고 당시 우리 공장에서
불가능했던 로타리연마, 방전가공, 와이어컷 방전가공, 정밀연마 등과 관계된
위탁가공 주문내역을 가지고 영등포 시장과 구로동 공구상가를 돌았다. 오전
11시가 다되어 경우 공장에 도착했을 즈음이면 내가 모는 소형차는 온갖
공구와 제품들이 가득 들어차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공장에 도착해서 한숨을 돌리고 나면, 잔심부름 거리를 도맡아 처리했다.
예를 들어, 은행 심부름이나 관공서 뒤치다꺼리, 우편물 발송이나 서류복사,
화장실 청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공장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한 기술 하나도 없는 나로서는 이런 일이라도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전혀 힘든 줄을 몰랐다. 퇴근하여 집에서 저녁식사를 끝내면
나는 다시 차를 몰고 강남의 영동시장으로 나갔다. 야근하는 녀석들에게
밤참을 챙겨주기 위해서였다. 통닭, 족발, 순대, 감자튀김 등을 식지 않게
단단히 포장해서 다시 부천공장으로 밤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경인고속도로가 한가해서 영동시장에서 부천공장까지 차를 몰면
채 한시간이 안 걸렸다. 푸짐한 밤참을 뒷좌석에 싣고 경인고속도로를
질주하노라면 구수한 통닭냄새가 어느새 차안에 가득 찼고, 그럴 때 내 마음은
한없이 풍요로웠다. 맛있게 먹고, 웃고 떠들며 서로를 격려하고 칭찬했다.
지금도 그때의 시끌벅적하던 심야의 공장이 눈에 선하다. 잊지 못할, 정말
그리운 시절이다. 한국의 제조업체들은 대개 자기의 기술능력보다 훨씬 높은
단계의 전략목표를 설정하고 턱걸이 성공에 기업의 사활을 걸기 일쑤였다.
높은 기술을 가지고 낮은 단계의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을 무슨 커다란 수치인
것처럼 여기는 이상한 습성이 있었다. 제품들을 면밀히 살펴보니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정밀도와 내구력이었다.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푸념이
흘러나왔다."에이, 빌어먹을, 조립하지 않고 통째로 꽝꽝 찍어버렸으면
좋겠구먼" 반도체 업체들마다 우리가 개발한 신제품에 갈채를 보냈다 시로
기막힌 발상의 전환이었다.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우리의 제품이 시장을 온통
장악했다. 푸짐한 밤참을 뒷좌석에 싣고 경인고속도로를 질주하노라면 구수한
통닭냄새가 어느새 차안에 가득 찼고, 그럴 때 내 마음은 한없이 풍요로웠다.
내가 도착하면 야근하던 직원들은 아이들처럼 좋아했다.
@ff
새로운 도전
안정궤도에 막 올라선 기업이 가장 경계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만'이다. 자만의 늪에 한번 빠지면 그간의 노력들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기업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기업도 겸손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알량한 성공에 취하긴 쉬워도 겸손을 알고 실천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이미 말했듯이 '리드 프레임 매거진'의 개발은 나의 첫 성공이자 미래산업의
첫 성공이었다. 순식간에 매거진 시장 전체를 우리의 제품이 장악했으니
말이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도 우리의 매거진은 인기가 좋았다. 그
전까지 매거진을 국내에 수입 판매하던 델트론 오토메이션 코리아라는
회사에서는 우리 때문에 판로가 끊기자, 반대로 우리 제품의 해외수출을
제안해왔다. 김영환이라는 사람과의 첫 만남이었다.
김영환은 매거진의 해외수출 업무를 대행해주었다. 대행료가 좀 비싼
편이었지만, 당신의 우리는 그 정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로 심리적으로
넉넉했다. 미래산업의 매출액이 5억을 넘어서고 순익만 3억을 갈무리하던 해에
김영환은 내게 필리핀 여행을 제안했다. 필리핀에 현지법인을 열어둔 미국계
회사였던 델트론 오토메이션에 갈 일이 있는데, 함께 가서 매거진 영업도 하고
반도체에 대한 안목도 좀 넓혀보라는 얘기였다. 경험도 쌓을 겸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김영환의 경비까지 내가 책임지기로 하고 따라 나섰다.
생가 해보면 좀이 쑤셨던 것 같다.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하자 나는
또다시 뭔가 획기적이고 새로운 일을 벌여보고 싶었다. 모험과 도전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자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번 멋지게
성공하고 나니 계속해서 큰일을 터뜨려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호기심과
승부 욕을 넘어선 만용이었다.
나는 마닐라에서 아서 테일러와 만났다. 아서 테일러는 미국에서 이미 크게
성공한 바 있던 왕 컴퓨터라는 벤처기업의 창업멤버였다. 그 덕분에
자기자본을 매우 넉넉히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 당시에는 델트론
오토메이션의 경영자이면서 핵심 엔지니어이기도 했다. 공장을 돌아다녀 보니
실로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마침 새로 개발한 반도체 제조장비 몇 종을
시험 가동하는 중이었다 비로소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아서 테일러의 부인은 한국 여자였는데, 한국에서 살고 싶어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서 테일러는 한국에서 같이 사업할 만한 파트너를 찾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김영환은 이미 그것을 알고서 나를 데리고 갔던 것이다.
아서 테일러가 설명하는 새로운 사업이란 바로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매거진은 매우 복잡한 공정을 필요로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기계장치가
아니었다. 매거진은 우리가 가지 금형 기술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던
제품이었다. 그러나 '웨이퍼 검사장비'라면 반도체 제조장비 중에서도
최첨단에 속했다. 웨이퍼(Wafer)란 반도체의 가장 기본이 되는 소자를 말한다.
반도체 제조과정에서 아직 자동화되지 않은 공정 중의 하나가 바로 웨이퍼
검사공정이었다. 이 웨이퍼를 검사하기 위해서는 현미경과 육안을 필요로
했다.
현미경과 육안이 하는 일을 기계로 대체하겠다는 계획이었으니, 당시의 우리
입장으로서는 엄청난 기술도약을 필요로 했다. 그렇지만 나는 별로 어렵게
생가하지 않았다. 나의 투자와 아서 테일러의 기술만 합치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반도체 업계에 종사하는 주변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모두들 놀라워했다.
반도체 제조공정은 이미 대부분 자동화되었지만, 웨이퍼 검사만은 사람이
현미경을 붙들고 직접 해야 했다. 그런 장비가 있다면 야 사업성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서 테일러는 반도체 제조장비 분야에서 이미 많은 경험을
쌓아왔던 엔지니어였으며 스스로 대단한 벤처사업가이기도 했다. 내가 당시에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사업방향과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DS 코리아'라는 합작법인이었다. 당시
미래산업은 매거진 생산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각지방에서 공고 생들을 수련
생으로 끌어왔고 심지어는 동네 아주머니들까지 데려다가 이을 가르쳤다.
개발이 어려웠지 다음 문제는 물량을 뽑아내는 단순작업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백정규는 내게 공장이전을 건의해왔다 매년 전세금을 올려줘야 하는
공장에서 벗어나 넓고 깨끗한 공장을 사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때 '웨이퍼
검사장비'의 개발계획을 백정규에게 꺼내놓았다.
"사장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약간 불안한 눈치였지만 언제나처럼 똑같은 대답이었다.
나는 부천에 있던 S엔지니어들을 모조리 서울 압구정동 뉴서울빌딩에 있는
'DS 코리아'로 불러 올렸다. 역시 백정규가 현장책임자로 임명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개발자금을 구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섰다. 매거진
판매수익으로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비용이 필요했던 것이다. 주변에서
끌어올 수 있는 사채라는 사채는 다 끌어다 대었고, 은행과 신용금고에
들락거리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시작은 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많은 경비가
필요했다. 얼마 되지 않아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났고, 그에 비해 연구진행
속도는 매우 더뎠다. 나는 차츰 지치기 시작했다.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하자 나는 또다시 뭔가 획기적이고 새로운 일을 벌여보고 싶었었다.
모험과 도전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자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의 우리 입장으로서는 엄청난 기술도약을 필요로 했다. 나의
투자와 아서 테일러의 기술만 합치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ff
수첩 속에 감춘 눈물
직원들이 '제멋대로' 뛰어 놀도록 하기 위해서는 물론 말못할 고통도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회사가 성공했을 때에는 직원들 모두에게 그 성과를
돌리고, 회사가 실패했을 때에는 오직 홀로 그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게 바로
사장이다. 그래서 모든 사장은 외롭다고들 하는 모양이다.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해라 온 나라가 시끌벅적했고 모든 이들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옥과 같은 한 해였다. '무인웨이퍼
검사장비'를 개발하겠다는 일념으로 엔지니어들은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직원들이 하는 일에는 일절 참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당시 개발팀장이었던 백정규에게 일임했고,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들이
걱정 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일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가급적이면 밖에서 봐야 할 일들을 주로 내가 맡았다.
엔지니어들은 야전침대까지 갖다 놓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부분적인
성과들은 있었지만 아직 성패는 불투명했다. 조카 곗돈까지 끌어다가 연구비로
쏟아 부었다. 더 이상 끌어다댈 돈도 없었다. 집도 날아갈 판이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그림 몇 점도 모조리 팔아치운 상태였다. 3년째였다.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들었다.
지금껏 사업을 하면서 월급날을 어긴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건 직원과
사장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약속이었다. 직원들과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했다. 불신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하면 회사는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월급을 주지 못한다면 회사 문을 닫는 것이 차라리 옳았다.
당시 내 수첩에는 깨알같은 글씨가 가득 적혀 있었다. 은행 관련, 사채 관련
이자만으로 하루에 대여섯 건씩 돌아왔다. 어음은 또 어음대로 쳐들어왔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나의 신용등급은 땅바닥을 기고 있었다. 매일
아침 화장실 변기에 앉아 수첩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노라며 기가 막히고
눈앞이 깜깜했다.
없는 집안에 제사 자주 돌아온다더니,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월급날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월급날 아침이면 특히 막막했다. 어디서든 돈을 끌어와야
했다. 어느 날엔 가는 아침부터 친구들에게 전화를 도렸더니 모두들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동창이고 친척이고 모두 나를 꺼리는
눈치였다. 이해는 하지만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어찌 해서 겨우 액수를 맞춰놓고 사무실에 도착하니 차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오는 빚독촉도 무서웠지만, 이
기분으로는 도저히 직원들에게 웃는 낯을 보여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직원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어도 회사 사정이 엉망이라는 걸 그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나타나면 항상 직원들은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그게 못
견디게 싫었다. 아무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일에만 최선을 다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었다. 직원들 앞에서 나는 항상 웃으면서 격려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던 것이다. 직원들을 보는 순간 곧바로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공중전화로 경리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바쁜 일이
있어 못 들어갈 것 같으니, 은행에서 봉급 찾아오는 대로 이상 벗이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서 나는 차를 주차장 구석으로 몰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시 쉬고 싶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그대로 사라져버릴 수만 있다면 그러고도
싶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 시였다. 꼬박 여섯 시간을 차안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실컷 우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지갑을 보니 만
원짜리 한 장이 있었다. 슈퍼마켓에 들러 빵과 음료수를 사들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무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입사한 지 아직 한 달이 안된 어린
경리는 책상에 엎드려서 울고 있었다. 직원들은 일손을 놓고 침통하게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당시 개발팀장이었던
백정규를 불러 세웠더니 그제서야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월급을 찾아오다가, 은행 앞에서 날치기를 당했답니다."
머리를 뭔가로 된통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기가 막혔다.
그날 아침 돈을 꿔주겠다면서 전화기에 대로 면박을 주던 고향 친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딱 한 번만 더 속아주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 자식아.'
그러나 나는 경리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대수롭지 않은 척 웃어주었다.
"괜찮아, 임마. 그럴 때도 있는 거지."
경리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안됐지만 월급은 내일들 받아가."
나는 들고 있던 빵봉지를 내려놓고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더 있다가
무슨 실수를 저지르게 될는지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충북 영도에서 경리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못난 제 자식을 믿어주시고 오히려 위로해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변상을 해드려도 죄스러울 판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자식을 키우는 사람인 걸요. 각박한 세상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당시의 심정으로는 사실 경리에게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경리가 아니더라도 아무나 붙잡고 원망하고 통곡하고
싶었다. 그렇게 인사까지 받고 나니 나는 더없이 부끄러워졌다.
바로 며칠 전에 백정규 부사장과 아침 미팅을 하던 중에 잠시 그 시절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사장님은 연극배우가 체질에 맞습니다.
같이 웃고 말았지만, 내게는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다. 회사가
성공했을 때에는 직원들 모두에게 그 성과를 돌리고, 회사가 실패했을 때에는
오직 홀로 그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게 바로 사장이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그대로 사라져버릴 수만 있다면 그러고도 싶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 시였다. 꼬박 여섯 시간을 차안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월급을
찾아오다가, 은행 앞에서 날치기를 당했답니다.?" 머리를 뭔가로 된통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기가 막혔다. 그날 아침 돈을 꿔주겠다며 전화기에 대고
면박을 주던 고향친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ff
제가 사장님 전 재산을 날렸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록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었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포기까지 고려하고 있던 중에 기술개발주식회사(현재의 한국종합기술금융)의
7억 융자가 떨어졌다. 가뭄 끝에 만난 단비였다. 그렇지만 그 돈이라고 오래
쓸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 이미 끌어다 슨 각종 사채며 은행빚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무렵 전주에 살던 동생 내외가 어린 조카들과 함께 우리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파산할 지경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고, 그저 평소처럼
떠들고 놀면서 즐겁게 보냈다. 동생네 식구들이 하룻밤을 묵고 떠날 시간이
되자, 막상 몇만 원 여비도 챙겨줄 돈이 없었다. 아내와 안방에 숨어서 이불
속까지 뒤져보았지만 그렇다고 없는 돈이 갑자기 생겨날 리가 만무했다.
다행히 내 자동차에는 기름이 약간 남아 있었다. 동생네를
고속버스터미널까지 태워주긴 했지만 어린 조카들의 새까만 눈을 바라보면서도
과자값 한푼 집어주지 못하는 내가 한심스럽게만 여겨졌다. 혼자 돌아오는
차안에서 느껴야 했던 참담한 부끄러움이란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월급이란 것을 한 번도 가져다주지 못했으니 아내의 고생은 특히
극심했다.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의 학비마저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도시락
반찬을 마련하는 것이 매일 아침마다의 커다란 근심이었다. 나는 그러한 집안
사정들을 애써 모른 척했다. 같이 걱정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길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집안일 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간 기술개발에도
사업에도 모두 의욕을 잃어버리게 될 것 같았다.
어려운 와중에도 아내는 금송, 고려영산홍, 일본 철쭉, 주목 등의 관상 수를
아이들과 함께 잘 관리해 나갔다. 관상 수를 정원에 들이자는 것은 애초에 내
의견이었지만, 사업에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정원관리를 소홀히 하는 동안
오히려 아내와 아이들이 그놈들에게 잔뜩 정을 붙여 가는 눈치였다.
어느 날엔가 모처럼 환한 시간에 집에 돌아와 보니 정원이 썰렁했다.
이상해서 정원을 가만히 살펴보니 나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듬성듬성 구덩이가
생겨 있었다. 나는 큰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철없이 역정을 내는 내 앞에서
아내는 말없이 흐느꼈다. 하기는 그 동안 애들 학비며 생활비를 무엇으로
충당해왔는지 가장인내가 진작부터 궁금해했어야 정상이었다.
그렇게 암담한 생활 속에서도 큰딸 은경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이화여자대학교 건강교육학과에 합격해준 사실은 우리 내외의 커다란
기쁨이었다. 양장 한 벌 해 입히지 못하는 못난 부모를 추호도 원망하는 기색
없이 은경이는 아내의 구닥다리 옷을 입고 입학식에 나갔다. 딸을 입학식에
보내놓고서 아내와 나는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이나 방바닥에 앉아 있었다.
말하는 것 자체가 상처였던 시절이었다.
파산이 눈앞에 다가온 시점이었지만 직원들에게는 용케 감추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백정규만이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직원들을 격려하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파산을
위한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힘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내게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드디어 장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함께 있던
아내와 나는 부끄러움도 잊고 만세를 불렀다. 이 지긋지긋한 고생도 이젠
끝이구나 생각하니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고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나는 듯이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정말로 기계는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계에는 실로 어이없는 결함이 있었다. 기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웨이퍼를 검사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던 것이다. 숙달된
기수자가 육안으로 검사하는 것보다 대략 4배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사람이
일하는 것보다 4배나 느린 멍청한 기계를 과연 누가 사준단 말인가.
사람의 눈을 대신해야 할 '머신비전'이 문제였다. 머신비전 분야에 최고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는 미국의 'CCC 테크놀로지'에서 개발을 맡았다.
그렇다면 당시의 기술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소리였다. 더 이상
개선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시작부터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던 셈이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백정규가 내게 했던 한마디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제가 사장님 전 재산을 날렸습니다." 어린 조카들의 새까만 눈을
바라보면서 과자값 한 푼 집어주지 못하는 내가 한심스럽게만 여겨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백정규만이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직원들을 격려하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파산을
위한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숙달된 기술자가 육안으로 검사하는 것보다
대략 4배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사람이 일하는 것보다 4배나 느린 멍청한
기계를 과연 누가 사준단 말인가.
@ff
청계산이 가르쳐준 '거꾸로 경영'
눈앞이 깜깜했다. 패기와 만용을 착각한 결과였다. 변명의 여지도 없는
온전한 내 잘못이요, 실수였다. 매거진이 성공했을 때 차분히 내실을 기하며
단계적 기술개발에 힘썼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직원들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직원들뿐만이 아니었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은 나를 믿고 나를 도와줬던 친척들이며 친구들,
끝까지 침묵으로 나의 길을 보살펴 주었던 아내와 아이들에게까지 면목이
없었다.
커다란 벽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순식간에
비관적인 생각들이나를 온통 지배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어둡게만 느껴졌다.
오십이 넘은 나에게 이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그대로 주저앉아
아무 생각 없이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오로지 죽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렇게들 자살을 하는구나 싶었다.
뒤늦게 뛰어든 사업에 실패하고 결국 자살을 택했던 해직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의 선택을 내가 얼마나 비웃었던가.
자금 문제로 내가 한참 힘들어했을 무렵, 한번은 둘째딸이 자기와 함께
교회에 나가자고 했다. 매일같이 한숨만 쉬고 있는 아버지가 아무래도 안돼
보였던 모양이었다. 당시 마음도 심난하고 해서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섰다.
그날 처음 들었던 목사님 설교내용이 바로 '욥의 고난'이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그의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그를
지금보다 더욱 순수하게 단련시키기 위한 은사였다." 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이후로 나는 열심히 교회에 나갔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서 힘을 얻어 힘든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지경까지
도고 나니 더 이상 하나님 말씀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하나님을
저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새벽에도 일어나 식탁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잠결에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던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멍하니 취하고 있자면 어느새 아내도 일어나 내 옆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몇 주일을 밤낮없이 술에만 취해 있었다. 사무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회사일 이라면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어느 날 새벽, 나는 아내와 술을 마시다가 마침내 해서는 안 될 말을
꺼내놓았다.
"여보, 죽읍시다. 아무래도 방법이 없어."
의외로 아내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들어서 안
소리지만, 그 다음날 아내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더 끔직한 일은, 아이들 모두가 그 말에 동의를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때부터 죽을 궁리를 시작했다. 아이들만 남겨둘 수도 없으니
일가족 동반자살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 무렵 TV를 보다가, 강원도 어디쯤에서 승용차를 타고 가던 일가족이
벼랑에서 떨어져 몰살했다는 뉴스보도가 있었다. 나에게는 포니 한 대가
있었다. 식구는 많고 차는 작아서 문제가 좀 있겠지만, 한 가족이 자살을
하기에는 그 방법이 가장 그럴 듯하다고 여겨졌다. 안에서 문을 잠그고 물에
빠지면 틀림없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물 속에서 고통스러워할
아이들을 상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청산가리였다. 아내의 먼 친척되는 양반이 전 재산을
탕진하고 청산가리로 일가족 동반자살을 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산가리를 어떻게 구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방도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죽을 마음까지는 없었던가 보다. 우습게도 죽지 못할
이유가 참 많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수면제를 모아보기로 작정했다. 당시 우리 식구가 잘 가던
서초동 우성아파트 단지 내 우성쇼핑센터에 약국이 하나 있었고 그 주변에도
약국이 두어 군데 있었다. 수면제를 다라고 하면 내주는 것이 고작 서너 알이
채 안 되었다. 근 한달 간을 약국에 들락거리면서 수면제를 겨우 한 병 가득
모았다. 그래봐야 우리 여덟 식구가 모두 죽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다.
별 수 없이 나 혼자라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수주 한 병과 수면제를
챙겨들고 청계산을 올랐다. 정상에 올라와 보니 강남 일대가 시원스레
내려다보였다. 비정한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어째서 나 혼자만
이렇게 비참해져야 하는 건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 갑자기
무너져 내려서 모두가 같이 죽었으면 하는 생가도 들었다. 차라리 전쟁이라도
나서 모든 것이 불타 없어졌으면 하는 못된 생각도 했다. 소주병과 약병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 한쪽에서 설명할 수 없는 희망 같은 것이
피어나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나를 믿고 도와줬던 사람들은 뭐가 되는가. 내
가족들은 또 뭐가 되는가. 무작정 살다보면 항상 어떻게든 길이 생겨나지
않던가. 이런 생각이 갑자기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대로 실패한 인생으로
마감되긴 싫었다. 잃었던 오기도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때 불현듯 머리 속을 스치는 깨달음이 있었다. 무조건 잃어버린 것만은
아니다. 실패는 했지만 아직 기술은 남아 있지 않은가. 기계설계, 전자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제어계측, 진동, 소음제어, 정밀온도제어, 현미경
연동제어, 색채 식별, 정밀위치제어, 특수모터제어, 에어베어링, 정밀기계
분야 등등에 관한 우리의 기술력만큼은 국내 최고라 할 만했다.
자그마치 4년 동안 18억을 쏟아 부어 가며 추적한 기술을 이대로 흩어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이퍼 검사장비'따위는 이제 알 바 아니었다.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제품을 개발해서 팔 수만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산 아래를 향해서 있는 힘껏 약병을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뛰듯이 산을
내려왔다. 늦은 오후였다. 나는 서둘러 차를 몰아 사무실로 달려갔다.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직원들이 지레 짐들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뛰어들어온 나를 보더니 모두가 고래를 떨구었다.
나는 짐짓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망하기라도 했냐! 얼른 짐들 못풀어!"
근 한 달만에 나타난 사장치고는 목소리가 좀 컸던 모양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해보자구. 다른 걸 만들면 될 거 아냐. 기술은 뒀다 어디 쓸 거야.
제기."
나의 갑작스런 말에 직원들은 당황한 눈치였으나, 곧 내 의도를 알아채고는
묶었던 짐들을 다시 풀기 시작했다. 비로소 내 눈에 내가 책임져야 할
일꾼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부담감이 싫지 않았다. 오로지
죽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렇게들 자살을 하는구나 싶었다. 뒤늦게
뛰어든 사업에 실패하고 결국 자살을 택했던 해직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의 선택을 내가 얼마나 비웃었던가. 어느 날 새벽, 나는 아내와 술을
마시다가 마침내 해서는 안 될 말을 꺼내놓았다. "여보, 죽읍시다. 아무래도
방법이 없어." 의외로 아내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한W고에서 설명할 수 없는 희망 같은 것이 피어나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나를
믿고 도와줬던 사람들은 뭐가 되는가. 내 가족들은 또 뭐가 되는가. 무작정
살다보면 항상 어떻게든 길이 생겨나지 않던가! 그때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깨달음이 있었다. 무조건 잃어버린 것만은 아니다. 실패는 했지만 아직 기술은
남아 있지 않은가. 자그마치 4년 동안 18억을 쏟아부어 가며 축적한 기술을
이대로 흩어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이퍼 검사장비'따위는 이제
알 바 아니었다.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제품을 개발해서 팔 수만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도 있지 않겠는가.!
@ff
기술을 찍어오는 사진사
김두철이라는 녀석이 있다. 현재 미래산업의 설계팀장을 맡고 있는
재주꾼이다. 이 녀석의 머릿속에는 온통 기계밖에 들어 있지 않다. 잠자는
시간 말고는 항상 연구하고 실험한다. 어쩌다 그를 마주치면 나는 현재 진행
중인 연구에 대해 슬쩍 물어본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격려의 의미가 더 크다. 그러면 그는 마치 두툼한 보고서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처럼 막무가내로 쏟아낸다. 복도에서고 식당에서고 상관하지 않는다.
대개는 내가 질려 줄행랑을 놓고야 만다.
DS 코리아를 설립하고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를 개발하던 무렵이었다.
개발팀장이었던 백정규가 하루는 내게 와서 조수가 필요하니 고려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잔심부름이라도 할 똘망똘망한 녀석이 하나쯤 있었으면 합니다."
"뭘 물어, 알아서 데려다 쓰면 되지."
나는 그저 입버릇처럼 대답하고 이후로 신경을 안 썼다. 백 부사장은 자신이
다녔던 전주공고에 추천을 의뢰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찾아온 녀석이 좀
괴짜였다.
눈동자는 맨날 허튼 곳에만 가 있고, 주의를 주어도 그냥 히죽거리는 게
일이었다. 정작 '똘망똘망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더구나 특별한
기술이나 재능도 없어 보였다. 공고를 졸업하고 2년 동안을 내리 놀았다는
것이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재학시절에 지역 기능올림픽 제도부문에서 동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는데, 그것도 영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녀석한테 일을 시키면 언제나 늦었고, 결과도 신통찮았다. 더구나 이
녀석은 틈만 생기면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소리만을 잔뜩 늘어놓기
일쑤였다. '이러 S자동차 부품은 저렇게 하면 훨씬 좋아질 텐데 왜들 그
생각을 못하고 있는지 안타깝다'는 식이었다. 백정규는 '꼴통' 하나
들어왔다며 푸념을 했지만, 나는 사실 이 녀석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백정규도 사실 진득한 속정이 많은 인물이라 투덜거리면서도 꾸준히 일을
가르치는 것 같았다. '웨이퍼 검사장비'의 실패 이후 DS 코리아는 다시 부천의
미래산업과 합쳐졌다. 김두철도 당연히 부천으로 따라왔다. 매거진이 있는
부천은 우리의 베이스캠프였다. 다시 시작하더라도 부천에서 시작해야 했다.
비록 다년간의 연구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 동안 축적했던 기술력만은
믿음직했다. 우리가 가진 기술력보다 한 단계 낮은 제품을 선정해서 남들보다
잘 만들자는 것이 우리의 합의사항이었다. 마침 '세미콘 코리아'라는 반도체
전시회가 코엑스에서 열렸다. 참고가 될까 싶어 직원들을 보냈더니 나중에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가 '핸들러'였다.
핸들러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았다. 반도체 제조공정에 꼭 필요한
장비이면서도 당시에는 모두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물론 그만큼 복잡한
장비였지만 우리가 개발하던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로부터 많은 기술을
그대로 뽑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무너질 것도 없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핸들러라는 장비는 복잡하기도 할뿐더러 일단 그 크기부터가 엄청났다.
소프트웨어나 컨트롤러 같은 핵심기술은 둘째치고, 기계구조를 파악하는 것도
문제였다. 설계도면이 있으면 좋겠지만, 엄두도 낼 수 없는 바람이었다.
그러던 중에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두철이라는 녀석이 불쑥
설계도면을 가지고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이 자식, 이거 어디서 났어!"
백정규의 말투에는 반가움과 불안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김두철의
대답이 또 한번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제가 그렸는데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허투루 그린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부분적으로 미비한 구석도 많았지만, 이 정도 골격이라면 차차
보완해도 될 만한 문제였다.
졸지에 김두철은 우리의 스타가 되었다. 그 녀석의 머릿속에는 항상
설계도면이 들어가 있었다. 핸들러에 관한 것이든, 자동차에 관계된 것이든,
어쨌거나 말이다. 한번 유심히 본 장비는 머릿속에서 도면을 그려보고, 또
나름대로 수정까지 해보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타고난 눈썰미에다
뛰어난 상상력과 구성력을 가지고 있는 놈이었다.
김두철이 우리들로부터 얻어 가지게 된 별명은 다름 아닌 '찍사'였다.
정정당당한 산업스파이였고, 걸어다니는 사진기였던 셈이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결국 핸들러 개발에 성공했다. 그런데
우리의 제품이 현장에 풀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말 웃지 못할
사단이 벌어졌다.
일본기업과 합작으로 핸들러를 제조하던 한 업체로부터 거센 항의가
들어왔던 것이다. 하루는 그 회사 개발부장이 당시 압구정동에 있던 우리
연구소로 쳐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거친 말투로 사장부터 찾았다. 내가
나서니 다짜고짜 날더러 도둑놈이라며 소리를 질렀다. 자기네 도면을 우리가
훔쳐갔다는 얘기였다. 그 회사에서 일본 도시바제 핸들러를 모듈별로 나누어
다른 공장에 하청을 준 바 있는데, 그 도면을 우리가 빼내 갔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맞섰다.
"실수로 뚫어놓은 구멍까지 똑같은데 안 훔쳐갔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잘못하다간 법정투쟁까지 갈 뻔했지만, 나중에 그 문제는 원만히
해결되었다. 껍데기만 비슷할 뿐 내부구조는 명백히 다르다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김두철은 못 말릴 녀석이었다. 이 녀석한테 일을 기키면
언제나 늦었고, 결과도 신통찮았다. 더구나 이 녀석은 틈만 생기면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소리만을 잔뜩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러나 나는 이
녀석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너 이 자식, 이거 어디서 났어!" 백정규의
말투에는 반가움과 불안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김두철의 대답이 또 한번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제가 그렸는데요." 졸지에 김두철은 우리의 스타가
되었다. 그 녀석의 머릿속에는 항상 설계도면이 들어가 있었다. 어쨌거나
녀석은 한번 유심히 본 장비는 머릿속에서 도면을 그려보고, 또 나름대로
수정까지 해보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ff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김두철이 그려온 설계도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저기서 입수한 핸들러 관련
자료들을 참고로 해서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1차분 설계도와 개발계획서를
작성했다. 나와 백정규는 이것을 들고 다짜고짜 부천의 S사로 찾아갔다.
S사에서는 이미 핸들러 국한화를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설계도면을 가지고 불쑥 찾아갔으니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시간을 두고 진지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설계도와
개발계획서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들도 매우 놀라워했다. '매거진'이나
만들던 회사의 기술이 이 정도였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다는 투였다.
"믿어보십시오.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헤드만이라도 만들어오시면 어떨까요."
헤드만이라도 만들어온다면 믿어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한 달이라는
기한을 정하고 곧바로 헤드모듈 제작에 들어갔다. 쉽지는 않았지만 회사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우리는 사력을 다해 그 일에 매달렸다.
지금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원시적인 형태였지만 아무튼 우리는 약속한 한
다 안에 헤드를 만들었다.
샘플을 검토해보더니 그들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체
시제품이 만들어진 것을 봐야 거래를 시작할 수 있겠다며 다시 말을 바꿨다.
맥 빠지는 일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다시 시제품 제작에 들어갔다.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입장으로서도 급하긴 마찬가지였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장비가 만들어졌다.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핸들러였다. 물론 아직 완전한 제품은 아니었다. S사에 보여줄 불완전한
시제품일 뿐이었다.
약속한 6개월은 아직 넉넉히 남아 있었지만 우리로서는 당장 하루가 급할
지경이었다. 얼마나 급하게 만들었던지 차에 싣는 도중 다리받침이 건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엔지니어가 차 우에 올라타서 이동 중에 볼트를 조여야 했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프로토타입을 차에 싣고 S사를
찾아갔다.
그 지경이었으니 우리의 걱정이야 오죽했겠는가. 시험가동에 들어가자 나는
긴장으로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감동스럽게도 테스트 결과는 매우
훌륭했다. 당시 S사에서 사용하고 있던 일본 태섹의 "TO-92 핸들러"보다
생산량이 오히려 훨씬 높게 나왔던 것이다 기쁘긴 했지만 나로서도 이해가 잘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늘이 도운 덕분으로 우리는 그 자리에서 3대의 주문을 받을 수 있었다.
기술지원 차원에서 계약조거도 우리측에 매우 유리하게 떨어졌다. R들로서도
우리의 가능성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미래산업은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얼마 안 되는 주문이었지만 제대로 해낸다면 앞으로 얼마든지 시장은 확대될
수 있었다.
우리는 일본 업체들의 핸들러를 개조하거나 복제함으로써 모방 학습을 마친
뒤, 비(비)메모리 DIP타입 테스트 핸들러 개발에 착수했다. 나는 당시 홍릉에
있던 산업연구원과 KAIST를 들락거리면서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특히 미국과
독일, 일본의 데이터베이스들을 검색하면서 에어베어링, 정밀 서보 모터, 정밀
스태핑 모터, 고정밀 베어링 등등에 관한 논문과 제품 목록들을 조사하는
한편으로 기술 관련 문헌정보와 카탈로그, 기술잡지, 특허정보 등 도
검토했다.
핸들러를 개발하는 석 달 동안 나는 일주일에 3일 밤낮을 반드시 그곳에서
보냈다. 쉰이 넘은 사람이 하도 극성을 부려대니 사업연구원의 연구원들도
성심껏 도와주기 시작했다. 꼭 그렇지 않아도 당시의 산업연구원은 중소기업의
기술자원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선진국의 핸들러 제품들을
분석하고, 면밀한 시장파악도 가능해졌다. 특히 산업연구원의 문인혁
책임연구원은 핸들러 국산화계획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 이후로도 몇 년 동안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정리해서 엔지니어들이 즉석에서 참조할 수
있도록 가져다주는 일을 반복했다. 엔지니어들이 핸들러를 개발하는 동안 나는
나름대로 외곽 지원업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그때의 내 심정은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미의 그것이었다. 땀 흘리며 연구에 몰두하는
엔지니어들을 보면 한없이 안타까웠고, 조심스러웠으며, 고마웠다.
안팎으로 고생을 한 보람이 있어 우리는 마침내 핸들러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한번에 IC 하나씩 로딩해서 테스팅하는 원시적인 장비였지만 그마저도
경험 없는 우리로서는 쉽지 않았다. 개발에 성공하고 나서 모델명을 붙일 때는
정말 감개무량했다. '미래'의 이니셜을 따서 'MS-3000' 이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개발한 최초의 고유모델이었다.
우리가 납품한 3대의 '트랜지스터 테스트 핸들러'는 한동안 무리 없이 잘
돌아갔다. 그러나 막상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경험의 문제였다. 기계는 어찌어찌 만들었으나 현장에서 오랫동안 테스트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나와 우리 엔지니어들은 거의 현장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돌아가는 기계를
계속 모니터링 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분석과 수리에
들어갔다. 연구실에서는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들이었고, 우리는
당황스러웠지만 그럭저럭 해결해나가고 있었다. 다행히 S사측에서는 국산화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적응 기려니 여기고 별 추궁을 하지 않았다. 고마운
노릇이었다.
우리의 성공을 목격함으로써 핸들러 국산화의 가능성을 믿게된 S사에서는
곧이어 일본 곡사이 덴키의 IC 테스트 핸들러 모델명 '504'의 기능분석과
복제작업을 우리에게 의뢰했다. 그것마저 성공하자 계속해서 태섹의 장비 몇
가지에 대해서도 복제 내지는 개조작업을 떠맡게 되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덤볐고, S사 역시 우리에게 무슨 일이든 맡기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리라.'는 오기와 투지말고는 내게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헤드만이라도 만들어온다면 믿어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한달이라는
기한을 정하고 곧바로 헤드모듈 제작에 들어갔다. 쉽지는 않았지만 회사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우리는 사력을 다해 그 일에 매달렸다.
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정리해서 엔지니어들이 즉석에서 참조할 수
있도록 가져다주는 일을 반복했다. 엔지니어들이 핸들러를 개발하는 동안 나는
나름대로 외곽 지원업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돌아가는 기계를 계속 모니터링
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분석과 수리에 들어갔다. 다행히
(S사)측에서는 국산화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적용기려니 여기고 별 추궁을
하지 않았다. 고마운 노릇이었다.
@ff
대기업이 살아가는 법
나중에 알아낸 사실이지만, 처음 'MS-3000'의 개발제안서를 내었을 때,
S사에서는 우리가 돌아가자마자 구미에 있는 H사에 동일한 조건의 오더를
내렸다. MS-3000'과 같은 종류의 핸들러를 개발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여러
군데에 동일한 오더를 주고, 빠르고 싼 쪽을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일종의
보험전략이자 대기업의 오래된 습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S사에서는 우리가 일년 동안 연구해서 겨우 마련한, 실로 목숨과도
같은 우리의 개발계획과 세부규격, 설계도면까지 같이 내주었던 것이다.
미래산업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까 더 좋은 쪽으로 그쪽에서 한번
해보라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나는 곧바로 S사 본관 9층에 있는 구매 부로 뛰어갔다.
더 이상 두려울 것도, 당할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핸들러고 뭐고 아무 것도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친 나쁜
사람들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사무실로 쳐들어가서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구매부장 어디 있어!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내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는 처음에 거칠게 저지하던 직원들도 곧
포기해버렸다. 간부들이 달려와서 나를 끌어다 회의실에 앉혔다.
"정 사장님, 진정하십시오! 여기 일이란 게 워낙에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우리한테 목숨이나 다름없는 걸 제멋대로
빼돌려! 여기 일 안 하면 그만이지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그런 장난을 쳐!"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자하고는 별일 아닙니다. 그저 다른
각도에서 도움이라도 좀 될까 싶어서..."
웬일인지 그쪽의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였다. 내막을 알게 된
담당이사가 이미 담당간부들을 단단히 문책했던 것이다. '건전한 양심을 갖춘
사람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로구나' 하고 생각하니 내 마음도 저절로
풀어졌다. 이미 그렇게 된 일은 할 수 없었고, 최대한 미래산업의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선에서 그 민망한 자리는 끝이 났다. 결과적으로 미래산업이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별 피해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일로 인해 나는 대기업의 생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풍전기공 시절에도 금성전기와 거래하면서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 대기업은
늘 이런 식으로 하청업체들을 가볍게 취급했다. 그것은 그 안의 특별한 누가
일부러 의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의 대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자연스런 생리일뿐인 것이다.
나는 지금도 대기업을 자주 들락거린다. '협력업체'의 사장이 해야 할
중요한 업무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기업 사람들 하는 양을 보자면
기가 막힐 때가 많다. 대기업의 과장이나 부장쯤 되는 사람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협력업체 사장들을 아주 내려보는 버릇이 있다. '당신네 회사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이번인 사는 좀 문제 있지 않았어?' 하는 식으로
내정간섭까지 하려든다. 그런 어이없는 충고 앞에서 우리네와 같은 협력업체
사장들은 감지덕지한 표정으로 굽실거리는 수밖에 없다. 협력업체의
생사존망이 오로지 그들의 심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요즘도 대기업의 부장쯤 되는 사람들은 우리 회사로 전화를 한다. 이미
환갑이 넘은 나한테 전화를 해서 온갖 잘난 척을 하며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기
일쑤다. 아저씨뻘 되는 사람을 붙잡아 놓고 실없는 농지거리를 할 수 있는
배포가 도대체 어디서 나올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기업에서 간부노릇 정도 할 사람이면 어려서부터 모범생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또한 '일류대'에서 착실한 엘리트 수업을 받아왔을 것이다. 사회에
나와보면 이미 앞서간 그들의 선배들이 든든히 버티고 있으니 겁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대기업에 들어가서 선배들이 마련해준 길을 또한 착실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사람들이 자기 앞에 와서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무서운 줄을, 사람이 무서운 줄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들의 거드름과 권위주의는 사회에서 키워준 것이다.
그러니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인 것이다. 대기업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어쩌다가 정리해고라도 당할라치면 한강밖에 갈 곳이 없다는 소리도 그래서
일리가 있다. 세상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에만 익숙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험난한 세상에 내팽개쳐져도 도대체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할 수 있겠는가.
웬일인지 그쪽의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였다. 내막을 알게 된
담당이사가 이미 담당간부들을 단단히 문책했던 것이다. '건전한 양심을 갖춘
사람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로구나' 대기업은 늘 이런 식으로 하청업체들을
가볍게 취급했다. 그것은 그 안의 특별한 누가 일부러 의도해서 그건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의 대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자연스런
생리일뿐인 것이다. 미루어 짐작해보며 그들의 거드름과 권위주의는 사회에서
키워준 것이다. 그러니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인 것이다. 대기업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어쩌다가 정리해고라도 당할라치면 한강밖에 갈곳이 없다는 소리도
그래서 일리가 있다.
@ff
요놈을 워떻게 돌려야 쓴당가
어쨌든 처음 납품한 장비들이 대충 돌아갈 만해지자 S사에서는 다시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그 무렵 S사에서 사용하던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는 모두
일보 히다치 사의 제품이었다. 전세계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모양이 바뀌고
있던 시점이라 S사는 현재 사용하고 있던 핸들러들의 개조를 히다치측에
요청했다.
당시의 반도체 규격은 DIP타입에서 SOJ타입으로 변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부착 후에 다시 마무리를 해주어야 하는 뾰족한 다리에서 별다른
마무리가 필요 없는 둥근 다리로 바뀐 것이다. 단지 다리 모양만 바뀌었을
뿐이니 반도체 접속레일과 소켓의 형태 등과 같은 간단한 몇 가지 장치를
손보면 기존의 기계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히다치에서는 S사의 요구를 거절했다. 내용이야 어쨌건 그들로서는
새 물건을 팔아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화가 난 S사에서는
히다치에서 새로 구입한 최신형 'DIP타입 16병렬 테스트 핸들러' 여섯 대를
포장도 듣지 않은 채 비행기에 실어 일본의 본사로 보냈다. 히다치쪽에서도
지지 않았다. 그들 역시 포장을 뜯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반송해버렸던 것이다.
기업간의 자존심 싸움이자 국가간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다. 결국 오기가
생긴 S사에서는 우리를 찾았다. 실력이 아무리 형편없는 신출내기라 하더라도
국내에서 SDNFL가 핸들러 분야의 선두주자였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들은 새
규격의 SOJ 반도체를 핸드링할 수 있도록 기존의 DIP 장비를 개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성공만 한다면 현재 보유하고 있는 모든 DIP 장비의 개조권한을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우리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들은 미국의 핸들러 메이커 심텍에 같은 조건, 같은 내용의
의뢰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히 개발에 착수하는 동안 심텍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한국의 미래산업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회사에서 핸들러
개조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니 당연히 못 해내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우리가
핸들러 개조에 실패하면 S사의 새로운 주문무량은 의당 자기네를 향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S사와 히다치는 이번 일로 해서 사이가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히다치의 핸들러를 처음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가 처음에 주먹구구로 만들었던 핸들러 따위는
실로 장난감에 불과했다. 함부로 개조할 수 있는 장비가 아니었다. 특히
컨트롤러 부분은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논리구조가 일본어에 적합하게
구성되었을 뿐 아니라, 그냥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프로그래밍 소스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본사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우리는 결국 변칙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의 컨트룰러에
우리가 만든 보조 컨트롤러를 하나 더 부착해버린 것이다. 변경된 규격에 따른
제어만을 전담하는 별도의 두뇌를 만들어 붙이고 검사소켓의 기계적인 구조를
뜯어고치니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S사의 핸들러를 모두 개조했다. 우리의 핸들러 기술을
한 차원 높이는 계기가 되었을 뿐더러, 수입도 적지 않았다. 아직 미래산업의
재무구조는 형편없었지만, 매거진도 계속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런
일거리들도 끊이지 않아 그 즈음에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급한 고비를 넘기자 우리는 겁 없이 또 다른 모험을 준비했다. 미래산업의
상표를 붙인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를 개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나는 다시 S사를 찾아가서 우리가 작성한 설계도면을 보여주며 개발계발을
설명했다. 그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성공만 한다면 기본적인 판로는
보장된 셈이었다.
그 대신 우리도 한 가지 부탁을 했다. 6개월 안에 틀림없이 핸들러를 만들어
올 테니, 핸들러를 한 대만 우리한테 빌려 라라고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까지만 해도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의 내부구조를 직접 본 적도 없는
울들이었다. 그들은 순순히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어느 정도 우리를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일본 어드벤테스트의 최신모델인 '16병렬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였다. 잔뜩 호기를 부려 겁 없이 실어오기는 했지만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전라도 출신의 한 엔지니어는 핸들러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당최 요놈을 워떻게 돌려야 쓴당가?"
옆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포복절도했지만, 사실 한심스러운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구조를 파악하는 건 둘째치고 제대로 작동시키는 법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핸들러가 도무지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도 모른 채 무턱대고
뜯어보기부터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S사쪽에다 대고 도움을 요청할
계제를 아니었다. 핸들러를 개발하겠다는 사람들이 그런 부탁을 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어이없게 생각하겠는가 말이다.
결국 내가 움직일 차례였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부탁해서 다른 반도체
업체의 핸들러 기사 한 명을 간신히 소개받았다. 풍전기공 시절에도 한 번
해본 적 있는 일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후한 보수를 약속하고 퇴근 후
시간을 빌리기로 했다. 퇴근시간만 되면 나는 부랴부랴 차를 몰고 그쪽
공장으로 가서 그를 태우고 곧장 우리 공장으로 돌아왔다. 밤새 가르침(?)이
끝나면 나는 또 부랴부랴 그를 태우고 출근을 시켜주었다. 나도 힘들었지만 그
사람도 어지간히 고된 일정이었다. 당시 이런 일거리들은 대개 내 차지였다.
기업간의 자존심 싸움이자 국가간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다. 결국 오기가
생긴 S사에서는 우리를 찾았다. 실력이 아무리 형편없는 신출내기가 하더라도
국내에서 우리가 핸들러 분야의 선두주자였던 것만은 분명했다. 급한 고비를
넘기자 우리는 겁 없이 또 다른 모임을 준비했다. 미래산업의 상표를 붙인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를 개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6개월 안에
틀림없이 핸들러를 만들어 올 테니, 핸들러를 한 대 만 우리한테 빌려 달라고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까지만 해도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의
내부구조를 직접 본 적도 없는 우리들이었다.
@ff
일일 현장근무
일주일 동안 그 야단을 피우고 나서야 우리는 겨우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라는 물건을 작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장비였다.
저자기술과 기계기술만 가지고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열역학에서부터
로보틱스, 센서 활용광학, 위치제어, 정밀모터활용, 컴퓨터 프로그래밍까지
온갖 분야의 노하우가 복합적으로 총동원되다시피 한, 그야말로 하나의 완벽한
'작품'이었다. 우리가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넋을 잃고 핸들러의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하느라 우리는 또 며칠을 그냥 보냈다.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저런 괴물을 우리가 무슨 수로 만들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먼저 핸들러의 구조를 철저히 분석해서 특성상 몇 개의
분야로 나누고, 다시 각 분야마다 팀을 구성해서 제각각 연구에 돌입했다. DS
코리아 시절에 익혔던 기술들이 그제서야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뭉쳐놓고
보면 무서웠지만 흩어놓고 보니 역시 '웨이퍼 검사장비'보다는 한 수 아래임이
분명했다.
다만 한 가지만은 우리로서는 너무나 낯선 분야라 별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핸들러는 반도체를 다양한 조건하에서 테스팅하게 되는데, 그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매우 정밀한 온도조절장치가 필요했다. 예컨대, 반도체는
혹한의 추위에서도 사용되어야 하고, 매우 뜨거운 환경에서도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온도에서 그 성능을 실험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정밀한 온도조절이란 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공간의 넓이와 모양에
따라, 또 주변장치의 형태와 소재에 따라 온도는 항상 변하였다. 기본적인
열역학 공식을 이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무수한 실험을
통해서 겨우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시간과 몸으로 때웠던 것이다. 지금은
컴퓨터 시뮬레이팅기법을 이용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무식한(?) 방법이었다.
테스팅 챔버의 온도조절장치 완성을 끝으로 핸들러는 겨우 제 모습을
갖추었다. 기계장치쪽은 거의 모방에 가까웠지만 나머지 것들은 거의 우리
기술로 만든 것이다. 눈으로 보고 따라할 수 있는 것은 기계장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는 당시에 사용되던 핸들러들의 장점들을
모자이크하기로 했다. 예컨대 전체적인 기계설비와 IC를 적재하는 로딩부분은
어드밴테스트의 제품을, 검사를 끝낸 IC를 성능에 따라 분류해주는
소팅(sorting)부분은 히다치의 제품을 모방하는 식이다. 물론 별다른 음모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가 안 풀릴 때마다 김두철을 생산현장에 보내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개발한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 30대를 S사에 납품했다.
미래산업의 주력 모델인 'MS-5000'시리즈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트랜지스터 테스트 핸들러' 때와
마찬가지로 엔지니어들이 죽어라고 뛰어다녔지만, 이번에는 기계의 개수도
너무 많았고 발생하는 에러의 대부분은 처음 접해보는 것이었다 나 역시
현장에 나가 있거나 사무실에 앉아 있거나 초조하고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S사측에서는 연일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우리더러 죽으라는 소립니까! 아시다시피 반도체는 시간이 생명 아니오!
당신네 물건들 때문에 다른 라인까지 다 서 있단 말요. 지금!"
"필요 없으니까 물건들 도로 다 가져가시오. 이러니까 엽전, 엽전, 하는 거
아뇨!'
"이게 그냥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말요! 법정에 가면 당신네들이
손해배상까지 해줘야 한다구!"
이런 경우에는 기회손실비용까지 우리가 변상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자 덜컥
겁이 났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기회손실비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 기계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전체공장의 시간당 손실비용을
우리가 물어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뒤늦게 계약서를 훑어보니 저W고에서
요구만 한다면 꼼짝없이 혀 빼물고 죽어줘야 할 판이었다. 수십억 원에 달하는
변상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당시의 우리에게 있을 턱이 없었다.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하면 또 한 고비가 찾아왔다. 마음은 다 급한데
도무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나는
S사에 일일 현장근무를 제안했다. 내가 공장에서 직접 일을 하면서 문제를
파악해보겠다는 얘기였다.
하루 동안 현장에 있어 보니 그들의 항의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금세
알게 되었다. 돌아가며 말썽을 부리는 우리 기계들 때문에 생산라인은 수시로
정지되었다. 현장감독 말로는 생산량이 말도 못하게 줄었다는 것이다.
현장직원들도 짜증이 날 만큼 나 있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일부러 기계를
걷어차며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일과가 끝나갈 즈음, 나는 공장장을 찾아가서 공장간부들에게 잠시 동안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 공장장은 잔뜩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나는 여러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불편을 끼쳐 들려서 죄송합니다. 오늘 현장에 와서 하루를
보내고 나니 비로소 문제의심각성을 절감했습니다. 어떻게든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지만, 죄송합니다. 저로서도 지금은 뾰족한 방도가 없습니다.
장비 국산화는 저희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일이고, 이런 어려움
들도 한 번쯤은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미래산업과
여러분들은 핸들러 국산화의 주역들입니다. 다만 경험이 짧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한 번에 기계 두 대씩을 저희 공장으로
가져가서 다시 만든다는 기분으로 수리하겠습니다. 그 대신 다른 기계 두 대를
임시로 가져다 놓겠습니다. 물론 이런 방법으로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짜증이 나시더라도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공장이 정상
가동될 수 있을 때까지 사운을 걸고 노력하겠습니다."
그 이후로 현장이 투덜거림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약속대로
기계들을 모두 수리해주었다.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었지만, 그 덕분으로 다음
제품들의 에러 율은 현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고난이 끝나 것은 아니었다. 'MR-5000'을 대충
잡아놓으니 이번에는 'MR-3000'을 비롯해서 일제 복제품, 개조했던 장비 등
비메모리 핸드러들이 한꺼번에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고장이 빈번해지자
다시 비메모리 계열 생산라인이 현저히 느려졌다. 상황은 다시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일일 현장근무'를 신청했다. 현장의 상황을 내가
직접 확인하고, 장비 30여 대를 모두 새것으로 교환해줌으로써 겨우 상황이
수습되었다.
미래산업의 핸들러 사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90년, 미래산업을 창업한
지 꼬박 8년째였다.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저런 괴물을 우리가 무슨
수로 만들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먼저 핸들러의 구조를 철저히
분석해서 특성상 몇 개의 분야로 나누고, 다시 각 분야마다 팀을 구성해서
제각각 연구에 돌입했다. 우리는 우리가 개발한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
30대를 S사에 납품했다. 미래산업의 주력 모델인 'MR-5000' 시리즈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하면 또 한 고비가 찾아왔다. 마음은 다급한데 도무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나는 S사에 일일
현장근무를 제안했다. 장비 국산화는 저희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일이고, 이런 어려움 들도 한 번쯤은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미래산업과 여러분들은 핸들러 국산화의 주역들입니다.
@ff
벤처 중독
어쨌건 '트랜지스터 테스트 핸들러'로부터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까지의 숨
가쁜 성공이 결국 미래산업의 일으켰다. 그 이후로도 핸들러는 꾸준히 성능이
개선되었고, 신 모델도 계속 출시되었다. 아직 핸들러 기술에 있어 세계
최고라고는 어느 회사의 제품보다 월등하다고 자신할 수 잇다.
역시 문제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내 성질이었다. 핸들러로 자리를 잡았다
싶자 또 좀이 쑤셔왔고 위험을 겪고 싶어 안달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실로
'벤처 중독'이었다. 내가 도전할 만한 새로운 아이템이 없을까 고심하던 중에
어떤 사람이 날 찾아왔다. '테스터'에 미쳐 있는 장대훈이란 사람이었다.
반도체 분야는 크게 전공정과 후공정으로 나눌 수 있고, 우리의 주력제품인
테스트 핸들러는 후공정 중에서도 거의 막바지 공정(Final Process)에
사용된다. 핸들러는 항상 '테스터'라는 장비와 연결해서 사용해야만 한다.
'핸들러'가 반도체를 성능에 따라 분류하는 장비라면, '테스터'는 말 그대로
반도체의 기본 기능을 시험하는 장비다. 칩에 순간적으로 전기신호를 보내고
되돌아오는 신호를 정밀하게 분석해서 각종 성능검사를 하는 기계라고 할 수
있다. 후공정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고 어려운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장대훈은 '테스터'를 국산화시키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관심과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돈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평소에
미래산업을 주시해왔고, 정문술이라면 같이 일해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다. 나와 손잡고 테스터 국산화를 추진해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나는 당연히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우리나라에서 테스터를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누가 하랴' 싶은 독선적 생각도 있었다. 어쨌거나 내가 찾고 잇던
맞춤한 일거리가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핸들러의 경우처럼 테스터를 밑바닥부터 시작할 수는 없었다. 이미 말했듯이
테스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매우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현재 테스터 생산업체들도 모두 수천만 달러에서 많게는 수억 달러의 개발비와
몇십 년의 개발기간을 거쳤다는 것이다. 스타트 라인만 균등하게
맞추어놓는다면 이후 업그레이드에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그들의 노하우를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테스터 업체로는 미국의 테라다인, 메가테스트, 슐럼버제, 그리고 일본의
어드밴테스트, 아시아 일렉트로닉, 안도 덴키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
테라다인과 는 우리도 꽤 인연이 있는 편이었다. 우리가 처음 개발한 MR-3000
핸들러는 S사는 우리의 핸들러를 테라다인의 테스터와 붙여서 사용했다.
테라다인 기술자들이 S사를 둘러보고는 한국에 이런 훌륭한 핸들러 업체가
있는 줄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이후에 우리가 MR-5000이라는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까지 개발하자
테라다인에서는 더욱 미래산업에 관심을 가졌다. 장대훈과 나는 테라다인에
선을 대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렇지 않아도 테라다인은 미래산업과 손잡고
싶어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테라다인은 테스터 기술로는 세게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항상 일본의 어드밴테스트에 뒤쳐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드밴테스트는 핸들러와 테스터를 모두 만드는 기술을 가졌고, 그래서
핸들러와 테스터를 모두 만드는 기술을 가졌고, 그래서 핸들러와 테스터를
결합시킨 이른바 '토탈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회사의
제품이다. 보니 테스터와 핸들러 사이의 호환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일괄적인 A/S가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테라다인의 목표는 '타도
어드밴'이었다. 그들이 핸들러 업체인 미래산업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테라다인 사람들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미래산업에 꼭 한 번씩은 들르는
터라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테라다인의
수석 부사장으로 있는 조지 다벨로프가 미래산업을 찾아왔다. 좋은 기회였다.
장대훈과 나는 기술합작과 토탈 솔루션 개발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눈치만 보고 있던 조지 다벨로프는 당연히 환영했다.
X라다인의 테스터와 미래산업의 핸들러가 뭉치면 '타도 어드밴'은
시간문제라며 좋아했다. 우리 역시 그들의 영업망과 시장을 타고 핸드러를
세계적으로 유통시킬 수 있었다. 조지 다벨로프의 표현대로 'Win-Win
Game'이었다. 그러나 핸들러를 많이 팔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긴 하지만,
나와 장대훈의 궁극적 목표는 당연히 테스터 기술을 보유하는 것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테스터를 국산화시키겠다는 욕심 말고는 사실 아무
것도 없었다. 핸들러로 자리를 잡았다. 또 좀이 쑤셔왔고 위험을 겪고 싶어
안달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실로 '벤처 중독'이었다. 내가 도전할 만한
새로운 아이템이 없을까 고심하던 중에 어떤 사람이 날 찾아왔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테스터를 국산화시키겠다는 욕심 말고는 사실 아무 것도
없었다.
@ff
기술 후진국의 비애
나오 장대훈은 곧바로 미국 보스턴에 있는 테라다인 본사를 찾아갔다.
회장인 알렉스 다벨로프는 약간 과시적인 사람이었다. 협상에 앞서 나를
주눅들게 할 심산인지 모라도, 아무튼 회사의 규모와 테라다인의 막강한 힘을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 쓰고 있다는 사실이 금방 느껴졌다. 배짱하나로 지금껏
버텨왔던 나로서도 다소 위축될 만큼 테라다인은 대단한 회사임이 분명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동석한 공인회계사가 한국계라는 점이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알게 모르게 우리편을 들어주었다. 내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는 마음이 끌린 모양이었다. 하도 자리가
묘하게 돌아가다 보니 참다못해 알렉스 다벨로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 돈을 받고 이 자리에 온거요! 당신 본분을 잊고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곤란하오!"
내심 고맙긴 했지만 사실 나로서도 민망한 노릇이었다. 실력 있는
공인회계사를 수배해서 거액의 보수를 약속하고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비행기를
실어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상대편 입장을 자꾸 옹호하니
고용인으로서 부아가 치미는 건 당연했다.
어쨌든 며칠 동안의 마라톤 회의 끝에 협상은 마무리되었다. 미래산업
지분의 3분의 1을 테라다인측에 제공하는 대신, 테스터를 한국에서 만들어
미래산업의 상표를 부착하고 제조기술을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회사 주식 중에서 지불해야 했지만 벼로 아깝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내게 있어 테스터 건은 중요했다.
얼마 후, 보스턴으로부터 실무협상단이 한국으로 날아왔다. 초지 다벨로프와
한국계 통역 한 사람을 포함한 임원진이었다. 그러나 D라 수 없는 이이었다.
실질적인 합작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들은 기술이전 문제만 나오면
말꼬리를 자꾸 돌렸다. 그러나 나 역시 기술이전에만 관심이 있었다. 자연히
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보스턴에서 가졌던 최초 협상의 결과가 법적 강제력을 갖고 있지
않은 '계약전 합의문' 형식이라는 데 있었다. 테라다인은 우리의 핸들러만
탐냈을 뿐, 처음부터 기술이전 따위는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테스터 기술 말고는 아무 것도 필요 없소. 그래서 회사 지분을 주기로 했던
것 아니오."
"당신네 핸들러와 우리의 테스터가 뭉치면 세계제패도 꿈꿀 수 있소. 굳이
기술을 가져갈 필요가 뭐가 있소."
"그건 얘기가 다르잖소. 핸들러를 못 팔아도 좋으니 기술이전은 약속대로
추진해주시오."
"테스터 기술을 개발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갔는지 아시오.
자그마치 1억 달러가 넘게 들어갔소. 함부로 노하우를 제공할 수는 없소."
'회사 합작까지 추진하는 마당에 뭘 그리 아까워하시오."
"미안한 얘기지만 그것만은 정말 곤란하오."
"최신기술이 아니라도 좋소. 정 곤란하다면 오기 기술만이라도 넘겨주시오."
"모르는 소리 마시오. 초기기술이나 최신기술이나 모두 연관성이 있는
것이니 결국은 마찬가지요. 초기기술을 넘겨주면 우리의 노하우를 전부 주는
것이나 같소. 부디 포기해주시오."
"그렇다면 합작 추진 일은 없던 것으로 합시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분명히 당신네들이오."
모처럼 이루어진 협상은 그렇게 결렬되었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미국계
테스터 회사 3개사, 일본의 2개사와 협의하고 제휴를 추진했지만 결과는
테라다인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핵심기술만은 절대로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미래산업을 전부 주더라도 그들은 선진기술을 결코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야 깨달을 수 있었다. '기술이 곧 무기'라는 말이
실감되었다.
장대훈과 나는 크게 낙심했다. 몇 번의 협상 끝에 얻은 것이라고는 기술
후진국의 비애뿐이었다. 정작 중요한 기술은 사올 수도, 훔쳐올 수도 없다는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그렇지만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장대훈과 나는
어렵겠지만 처음부터 우리 힘으로 시작해보자는 것에 합의했다. 테스터
개발업체인 테스텍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실질적인 합작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들은 기술이전 문제만 나오면 말꼬리를 자꾸 돌렸다. 그러나 나
역시 기술이전에만 관심이 있었다. 자연히 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래산업을 전부 주더라도 그들은 선진기술을 결코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을 수 있었다. '기술이 곧 무기'라는 말이 실감되었다.
@ff
안 주면 키우겠다
우리의 반도체 제조장비는 선진국들에 비해 많이 뒤쳐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나와 미래산업은 '핸들러'로부터 장비국산화의 첫걸음을
떼었다. 아직 그들과 동등하게 경쟁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지만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고 또 도전해볼 작정이다. 테스터기술을 얻기
위한 우리의 부질없는 노력들은 다시 나의 승부근성을 자극했다.
'나도 더 이상 구걸하지는 않겠다. 내 손으로 꼭 키워내고 말겠다.'
이후 테스텍은 장비개발의 방향을 약간 수정했다. 미래산업을 사렸던 경구
한마디, '눈높이를 낮추고' 볼일이었다. 기술적 난이도가 한 단계 낮은 '번인
테스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번인 테스터'는 고온, 고전압 등 가혹한
조건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IC를 검사한 후, 취약한 제품을 사전에 가려내는 데
쓰이는 검사장비를 말한다. 우리는 그쪽 방면에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는
미국의 모테이라는 회사와 기술협력계약을 맺었다. 그들은 우리의 소자검사에
관한 기술이 필요했고, 우리는 그들의 번인 테스터에 대한 설계기술이
필요했다.
조급증을 버리니 자존심도 살아났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핵심기술을 전수
받겠다는 허황한 바람은 깨끗이 포기했다. 다만 '우리가 주는 만큼 너희도
달라'는 태도로 당당히 맞섰다. 기술협력계약은 하였지만, 핵심기술을 기술도
입선으로부터 넘겨받을 수는 없었다.
모테이 역시 핵심기술에 관해서는 항상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중요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도 공개해주지 않았다. 더 이상 아쉬운 소리는 하지
않으리라 작정했다. 모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엔지니어들은 늦도록
회로를 분석하고 그 회로에 알맞은 소프트웨어를 작성했다. 구동해보고 그
결과를 분석해서 끊임없이 수정하고 버전업하기를 반복하였다. 모테이에서는
우리의 무서운 집념을 보면서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해했다.
그렇다고 따질 계제도 아니었으니 내심 초조해하는 티가 역력했다.
당시에는 모두가 벤처기업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또한 반도체
산업이 아직도 호황기 끝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 시작하는
중소기업으로서는 유능한 엔지니어를 확보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번인
테스터와 테스터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한 회사였기 때문에, 그 취지와
도전정신에 공감한 인재들이 하나 둘씩 우리를 찾아왔다. 세상에는 아직도
꿈과 낭만에 인생을 거는 용감한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유능한 사람들이 모여들고, 다른 무엇보다 '결코 포기지 않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우리는 결국 '번인 테스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핵심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모테이보다 빠른 성공이었다.
기술 후진국이라는 열패감을 극복했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우리는
모테이측에 거꾸로 훈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감격적인 주객전도의
상황이었다.
테스텍을 창업하고 테스터 개발에 주력한 지 벌써 2년이 흘렀다. 작년에
테스텍은 완전히 미래산업으로부터 독립했다. 코스닥에 등록하려고 주식
플레이도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하나의 벤처기업이 만들어졌다. 개발 쪽에서도
다행히 소정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테스텍이 개발한 '번인 테스터'는 벌써
판매를 시작했다. 수십 가지 테스트 항목 중에서 기본적이 항목만을
제한적으로 검사하는 기계이지만, 이미 걸음마는 시작한 셈이고 결코
늦춰지거나 중단되지 않을 싸움이익에 여전히 미래는 낙관적이다.
아무 것도 없어도 사람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 뒤늦게 사업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미래산업과 함께 하는 동안 몸으로 확인 할 수 있었던
경구가 바로 그것이다. 테스텍에서 키워지고 있는 엔지니어들은 언젠가
테라다인과 어드밴테스트에 버금가는 훌륭한 반도체 테스터를 개발해낼
것이다. 나는 그들을 믿는다. 미래산업을 살렸던 경구 한마디, '눈높이를
낮추고' 볼일이었다. 기술적 난이도가 한 단계 낮은 '번인 테스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아무 것도 없어도 사람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
뒤늦게 사업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미래산업과 함께 하는 동안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경구가 바로 그것이다.
@ff
거꾸로 경영
@ff
백프로 믿고 맡겨라--신뢰 경영
@ff
캠페인 좋아하는 기업문화
창업 초기에 잠시 관련을 맺고 들락거리던 어느 스프링 제조업체가 있었다.
스프링 제조용 금형을 주문 받기 위해 몇 번인가 내가 찾아간 적이 있는
회사였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그 회사에서 실시하고 있는 '초(초)관리'가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특히 IMF 시대를 맞아 매우
귀중한 모범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 기사의 요지였다.
요즘은 불황을 이기자는 취지의 기획 물이 TV에도 자주 등장한다. 성공한
경제인사의 강연도 잦다. 이 회사의 '초관리'가 그런 곳에서도 인기절정이다.
이 회사는 일본에서 시도하던 '5S 운동'부터 시작해서 '초관리운동', '사력
0.01운동'으로 엄청난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내운동을 주도했던
간부는 벌써 4백여 회가 넘는 강연을 다녔단다. 무엇이 그리 대단한지 좀
살펴보자.
'5S운동'이란 정리, 정돈, 청소, 청결, 예절, 이 다섯
가지를 철저히 하자는 운동이다. 이 다섯 단어의 일본식 발음을 따라 '5S'가
되었다. 이 회사의 전 직원은 매주 월요일 오전 7시 20분부터 공장과 사무실
구석구석을 청소한다. 서류함부터 유리창까지 말끔하게 정리한다.
이 회사는 이어서 본격적인 '초관리운동'에 돌입했다. 연간 근무
일수(일수)의 총시간을 초(초)로 환산하고, 다시 이것을 연봉으로 나누어
직원의 1초당 임금을 계산한다. 연봉 1,400만 원을 받는 직원의 연 근무일수가
250일이고 1일 근무시간이 8시간이라 치자.
(250×8시간×3,600초)÷1,400만 원 =2원
이 사람의 초당 임금원가는 2원이다. 이 사람이 스프링 하나 생산할 때
10초가 걸렸다면 20원의 임금이 들었다는 얘기다. 이 사람이 담배를 한 대
태우는 데 350초가 걸렸다면 700원이 낭비되는 셈이다. 화장실에서 동료와
100초 동안 잡담을 하면 200원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출근시간이 오전 8시임에도 불구하고 전 직원들이 7시에 나와 회의를 하고
교육을 받는다. 업무시간에는 '돈 버는 일'만 하자는 것이다. 솔선수범하자는
구호 아래 간부들은 출근시간이 더 빠르다. 과장은 7시, 부장은 6시 30분,
임원은 6시가 출근시간이다.
최근 고안했다는 '0.01운동'이라는 건 이른바 '물가절약운동'인 모양이다.
1%의 물자라도 아끼자는 뜻이다. 직원 1인당 한 달에 15건 이상씩 '낭비
제거안'을 의무적으로 적어내도록 했다. 여기서 채택된 낭비절약 아이디어들은
실로 기가 막힐 정도다.
방문자에게 회사약도를 팩스로 보낼 때 수신자 이름을 연필로 써서
다음에 또 사용한다.
종이컵과 음료수 캔은 꼭 찌그러뜨려 버려서 쓰레기봉투 수를 줄인다.
다 쓴 무선호출기 건전지를 전자계산기에 다시 넣어서 계속 사용한다.
장갑을 작업용과 청소용으로 번갈아 K한 번씩 사용하면 좀더 오래 쓸 수
있다.
다른 업체로부터 받은 대봉투는 사내용으로 다시 사용한다.
화장실 입구에는 자석 게시판을 붙여 마지막 사용자가 불을 꼭 끌 수
있도록 한다.
사무실 각 직원의 책상 위에는 모두 형광등 끈이 하나씩 달려 있다.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 운동의 주역이라는 사람의 의자 뒤쪽에는
이러한 안건들이 적힌 수천 장의 제안서를 모아둔 금고가 있단다. 내가 이렇게
까지 자세히 이야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회사나 그 회사에 열광하는 매스컴까지도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쓸데없는 이벤트를 고안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을 전 직원들의
두뇌가 아깝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낭비되는 시간보다, 시간을
아끼자고 온갖 희한한 방법들을 연구하면서 낭비되는 시간이 더 아깝지
않은가.
물론 전 직원을 그 저도 볶아댔으니 효과가 없지는 않았겠다. 운동을 시작한
이후 연평균 20%대의 매출신장률, 연간 매출 150억 규모, 연간 94일의
유급휴무, 20% 수준의 부채비율, 대기업수준의 직원복지 등등을 달성했단다.
특히 사내 원가절감 캠페인을 통해, 대기업에서 요구하는 가격보다 오히려 더
낮은 납품단가를 자진해서 적용했다는 것이다. 정말 경하할 일이다.
그 회사는 74년 창업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스프링만 만들고 있다. 신제품
개발과 신기술 연구 쪽으로 쓸 머리가 없어서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좁은
테두리 안에서 마른걸레만 있는 힘껏 쥐어짜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물 한
방울 똑 떨어지면 '해냈다!'고 함성을 지르는 꼴이다. 가장 커다란 낭비는
그러한 '운동' 때문에 직원들이 받고 있을 스트레스다. 지켜야 할 원칙이
많으면 많을수록 창조적인 사고는 퇴화되게 마련이다.
요즘 가볼 일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 회사를 머릿속에 떠올리자면
거미줄로 가득한 미로를 연상하게 된다. 조금만 움직여도 위반할 것 투성이다.
잠시만 한눈을 팔면 낙오되거나 길을 잃는다. 귀에는 항상 '2원, 4원...'하고
계량기 도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매스컴을 위해 사진 찍힐 때 말고, 과연
그 회사에 웃음이라는 것이 있기나 할까.
미래산업에는 사훈도 없고 운동도 없다. 일년이 가야 회의란 것도 별로 하지
않는다. 무슨 특별한 철학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편안하게
믿고 맡기니 결국은 다 잘되더라는 식의 대책 없는 낙관이 있을 뿐이다. 나는
오히려 연구원들에게 '제발 절약하지 말고 돈 좀 열심히 쓰라'고 독려한다.
창조적 사고가 먼저 가고, 여건이 뒤따라가야 물건이 생기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의 머리가 여건에 맞춰 제한되면 결국은 죽도 밥도 안 된다.
미래산업의 1992년도 매출액은 30억 원이었고, 3년 후인 1995년도 매출액은
318억 원, 1996년도에는 454억, 1997년에는 615억 2,300만 원이었다. 상장회사
중에서 유일하게 3년 연속 매출액 대비 당기 순이익이 30% 이상선을
기록했다. 그 동안 미래사업에 무슨 별난 운동이 있었던 건 아니다. 운동이나
이벤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기업문화가 오히려 우리의 성장밑천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쓸데없는 이벤트를 고안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을 전 직원들의
두뇌가 아깝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낭비되는 시간보다, 시간을
아끼자고 온갖 희한한 방법들을 연구하면서 낭비되는 시간이 더 아깝지는
않은가. 미래산업에는 일년이 가야 회의란 것도 별로 하지 않는다. 무슨
특별한 철학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편안하게 믿고 맡기니
결국은 다 잘되더라는 식의 대책 없는 낙관이 있을 뿐이다.
@ff
당신의 직장은 어떠십니까
기업이 파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다. 기업문화도 중요한 상품이다. 굳이
경제개념과 연관시켜서 안됐지만, 기업문호는 기업이미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직원들의 업무 효율성에도, 심지어는 주가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만큼 기업문화는 중요하다.
대기업이야 워낙에 거대한 조직이다 보니 어떤 식으로든지 기업문호가
생겨난다. 그런데 중소기업쯤 되면 기업문화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하지 않는다.
기껏 한다는 짓이 어느 회사에서 재미 좀 봤다니까 그 회사에서 했던 운동이나
이벤트를 도입해보자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름대로의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업문화를 보자면 아예
'문화'라기보다는 왜곡된 '종교'같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앞에서 한 회사의 예를 들었다. 매스컴에서는 불황을 이겨낼 무슨 커다란
묘책이라도 발견한 듯이 너도나도 야단이다. 대기업에서는 순번까지 정해가며
간부들을 견학 보낸다. 대기업에 속한 그 많은 직원들을 전부 그 모양으로
만들겠다는 소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멀쩡한 청춘들을 몽땅 바보로
만들자는 소리나 다름없지 않은가. 한심하고 무서운 일이다.
요즘 '벤처기업'이란 용어를 자주들 사용한다. 기술력으로 승부하대서
벤처라는 것이고, 그만큼 위험하대서 또한 벤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벤처기업'이란 시정에서의 개념이다.
좀더 크게 생각해보면, 모든 기업은 벤처기업이다. 모험은 시장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안에서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작은 국가이자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기업도 안으로 끊임없이 개척해야 하고, 시도해야 하고,
투쟁해야 하고, 생존해야 한다. 안에서 실패하는 기업은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런데 우리들은 참 모험하기를 싫어한다. 자기만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모험하는 것도 싫어한다. 내가 하는 모험은 위험해서 싫고, 남이 하는
모험은 위화감을 조성하니 싫은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냥 해먹던 대로
해먹는 것이 제일 속 편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변화도 없고 발전도 없다. 뿐만
아니라 경직되고 퇴화한다. 바로 이게 문제다.
기업문화의 주역은 직원들이다. 위에서 도입하고 교육하고 강요해서
만들어지는 건 바라직한 기업문화가 아니다. 간부들도 괴롭고 직원들도
괴롭다. 기업 본래의 목적과는 별개로 또 하나의 기형적인 '일거리'들이
생겨난다. 그런데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참고
견뎌서 얼마간의 성과를 본다한들 무에 그리 대견스럽겠는가, 참고 견디느라
허비한 엄청난 에너지들로 기술개발에나 힘썼으면 그만한 성과보다 못했겠는가
말이다.
예컨대, 시간을 절약하자고 위로부터 캠페인을 벌이고 이벤트를 조직한다.
시간을 절약하는 묘안들을 짜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런
취지를 교육하고 다짐하고 평가해야 할 테니 이런 저런 집회와 회의를 하느라
또 많은 시간들이 허비된다. 약간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경제개념에도 맞지 않는다. 대개의 사내
운동이란 것이 이토록 어리석기 짝이 없다.
기업문화란 직원들이 가장 즐겁고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무형의 환경을
뜻한다. 리더는 직원들이 스스로 원하는 환경을 모색하고 구축해갈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바로 모험이라는 것이다. 직원들을 자유롭게
풀어두자니 간부들이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다. 이 불안과 초조를 견뎌내지
못한다면 결국 기업문화는 사라지고 기형적인 관료조직만 남는다. 관료조직은
속성상 보다 견고한 관료조직을 모방한다. 악순환이다.
사람들은 미래산업의 기업문화가 독특하다고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 회사의 기업문화는 지금도 건설 중이다. 다만 제대로된
기업문화 건설을 위해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것이다. 그러니 밖에서 보기에 어지럽고 방만해 보일 수밖에.
미래산업은 기술력 하나만 자신 있을 뿐 관리면 에서는 매우 취약하다.
인력이나 자금이 필요 없이 낭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인이 확인되는
대로 꾸준히 고쳐 나가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쓸데없는 푸닥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자율과 방임의 기업문화를 원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자율과 방임 속에서 진정한 창조성이 나올 수 있다는 믿음이고 또 하나는
미래산업이 즐거운 회사가 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인생의 삼분의 일을 직장에서 보내게 마련이다. 더구나
그 시간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Golden Time of Golden Age'인 것이다.
나머지 삼분의 일은 가정과 휴양을 위해 쓰고 마지막 삼분의 일은 잠을 자면서
보낸다. 흔히 직장을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억울한 감이 없지 않다.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쓰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삼분의 일이 불행한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하루 중에서 가장 활동적인 시간대를 우리는 직장에서 보내야
한다. 직장에서의 기분이 거의 하루의 컨디션을 지배한다고 봐야 한다.
직장생활은 그만큼 중요하다.
나는 늘상 직원들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직장에서 즐겁게 보내라. 행복하게 일해라. 일하는 즐거움과 행복을
만끽해라. 회사는 환경만 만들어줄 수 있을 뿐이다. 결국은 너희들 신세
너희가 책임지는 것 아니냐, 후회하지 말고 매 순간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며 보내라. 직장에서 일하는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요, 일하는
행복을 모르고 그저 벌어먹기 위해 고달프게 사는 사람은 실패한 인생임을
명심해라."
아직은 무엇이 진정 올바르고 능률적인지 알 수 없지만, 필요 없는 간섭과
강요가 없기 때문에 모두가 즐겁게 일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의 미래산업을
있게 한 힘이다. 중소기업진흥공단 경영평가단이 우리를 욕하면서도 우리의
주식을 살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직원들이 불행한
기업이라면, 그 기업이 아무리 돈을 잘 본다 하더라도 존재할 가치가 없다.
궁극에는 사람을 위한 기업이어야지, 기업을 위한 사람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 우리들은 참 모험하기를 싫어한다. 자기만 실험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모험하는 것도 싫어한다. 내가 하는 모험은 위험해서 싫고, 남이 하는 모험은
위화감을 조정하니 싫은 것이다. 기업문화란 직원들이 즐겁고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무형의 환경을 뜻한다. 리더는 직원들이 스스로 원하는 환경을
모색하고 구축해갈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바로 모험이라는
것이다. 내가 자율과 방임의 기업문화를 원하는 것은 두 가지 여유 때문이다.
하나는 자유고 방침 속에서 진정한 창조성이 나올 수 있다는 믿음이고 또
하나는 미래사업이 즐거운 회사가 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다. 직원들이
불행한 기업이라면, 그 기업이 아무리 돈을 잘 번다 하더라도 존재할 가치가
없다. 궁극에는 사람을 위한 기업이어야지, 기업을 위한 사람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
@ff
질식하는 인재들
미래산업은 이른바 대기업의 '협력업체'이다 국내의 몇몇 대기업들이 우리의
고객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업의 생리에 대해서 얻어듣는 바도 많고 내가
짐작하는 바도 많다.
연구직은 말 그대로 연구하라고 맡겨진 직책이다. 그러니 연구직이라면 다른
무엇보다 기술개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러나 어떤 대기업에서는
기술개발마저도 단기간의 매출성과와 연관을 짓는다. 심지어는 연구 부서에
구체적인 매출목표를 할당하기도 g나다. 당연히 그 결과에 대해 책임추궁이
뒤따르고 고과도 움직일 거시다. 예를 들어 어떤 연구 부서에서 새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치자. 기안을 올리면 위에서는 예산절감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규모를 축소하고 액수를 깎아 내린단다.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오래된 습관일 뿐이다. 어찌어찌 해서 통과가 되었다 치자. 이번에는 우로부터
언제 날벼락이 떨어져 백지로 돌아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고광일네가
겪은 것처럼 말이다.
대기업의 연구개발부서만큼 인사이동이 많은 곳도 없다고 g나다. 프로젝트가
좀 길어진다 싶으면 그 팀은 이미 풍전등화 신세란다. 하긴 연구소장쯤 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성과 없는 프로젝트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한테 불리할 테니 말이다.
3M이라는 미국 기업은 첨단 기계에서부터 사무용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아이디어 제품을 개발하고 판매한다. 3M의 리처드 카턴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회사는 정말 우연히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왔다. 그러나 무엇인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연히 라도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휴렛팩커드의 빌 휴렛도 거기에 덧붙인다.
"3M은 진정 존경할 만하고 배울 만한 기업이다. 3M조차도 그들이 무엇을
새로 개발하게 도리는지 모른다는 것이 바로 3M의 매력이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발전하리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한다. 병적일 정도의
안전주의에 중독 되어 있다. 괜한 도박을 하느니 가만히 있자는 주의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그렇다. 없는 돈으로 확실한 일에만
쓰기에도 급한데 불확실한 일에 쓸 돈이 어디 있느냐고 들 항변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3M 같은 유능한 기업이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에디슨은 어려서부터 말썽꾸러기였다.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확인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어른들이 보기에 그는 말썽꾸러기일 수밖에 없었다. '있는
것'을 '그냥 있다'고만 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왜'를 물었고 눈으로
확인했다. 에디슨은 줄곧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주변사람들에게 항상 욕을
먹었고, 또한 수없이 파산했다 그 덕분에 에디슨은 오늘날까지 칭송 받는
발명왕이 될 수 있었다.
끈기와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연구작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엉뚱한 착상에서 나온다. 엉뚱한 착상은
모험을 통해 검증된다. 물론 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다. 실패는 사소한 것도
있고 심각한 것도 있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성공도 없다.
요즘의 신세대 엔지니어들이란 다른 무엇보다 연구에 몰두하는 행위 그
자체가 너무 좋아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낮없이 그것에만 열중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그것에서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업풍토는 그들의 취향을 고려할 만큼 너그럽지 못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 그것에만 열중할 수 있다는
점이 신세대들의 장점이다. 반면에 기성사회의 복잡한 절차와 예절, 책임과
의무감 따위에는 진저리를 친다는 것이 또한 그들의 단점이기도 하다.
반짝이는 재치와 열정만 가지고 세상에 막 뛰어든 그들이 대기업의 꽉 짜여진
관료조직 속에서 받아야 할 압박감이야 오죽하겠는가.
요즘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는 더욱 셀프리더(Self Leader)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예스맨이니 복지부동이니 하는 말들은 이미 흘러간
노래가 되었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주어진 일에만 묵묵히 매달리는
사람들을 '로봇형 인간'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기획하고 스스로 행동하며
스스로 책임지는 신세대형 일꾼들을 일컬어 '셀프리더'라고 한단다.
지금까지 한국을 지탱해왔던 '로봇형 인간'들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앞으로는
발랄한 신세대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말이다. 신세대들에게는
복음처럼 들리겠지만 순종과 인내가 전부인 줄 알았던 구세대들에게는
용도폐기를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컴퓨터니 인터넷이니 하는 낯선 질서에
적응하기 위해 애달캐달하는 중늙은이들이 그래서 생겨난다.
이런 위기감은 이 땅의 모든 기업이 피부로 절감하는 있는 문제다. 그래서
체질개선 얘기가 나온다. 젊은 사람들의 창의성과 모험정신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체질개선을 하자는 것이다. 자율복장이니 자율 출퇴근 제니 하는 것들
말이다. 한때는 그러한 체질개선운동이 대기업마다 유행처럼 번졌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과 일부러라도 삐딱해지려는 개성 같은 것이
신세대들의 힘이다. 그러한 태도가 일과 합치되는 공간이야말로 바로 그들의
놀이터이자 일터가 될 수 있다. 그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주지 않고서 기발한 조직개편만 계속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공무원으로 보낸 덕분에 나는 관료제도의 경직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전통'과 '합리'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비능률이다. 그것이 단순한 이벤트나 사내운동 따위로 쉽게 개선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도 잘 알고 있다. 경영주가 직원들을 전적으로 신뢰해주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직원들을 백프로 믿어주고 맡겨주는
기업만이 셀프리더들을 고용할 자격이 있다.
'우리를 가장 가치 있게 관리할 수 있는 회사는 미래산업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는 고광일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우리 미래산업이 '연구원들의 천국'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가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정말 그들을 가치 있게 관리할
자신이 있었다. 놀이터 같은 직장, 그 안에서 마음껏 망가뜨리고 부서뜨리는
에디슨들,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미래산업의 모습이다. "우리 회사는
정말 우연히 새로운 상품을 개발한다. 그러나 무엇인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연히 라도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요즘의
신세대 엔지니어들이란 다른 무엇보다 연구에 몰두하는 행위 그 자체가 너무
좋아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낮없이 그것에만 열중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업풍토는 그들의 취향을 고려할 만큼 너그럽지 못하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주어진 일에만 묵묵히 매달리는 사람들을 '로봇형
인간'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기획하고 스스로 행동하며 스스로 책임지는
신세대형 일꾼들을 일컬어 '셀프리더'라고 한단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과 일부러 라도 삐딱해지려는 개성 같은 것이 신세대들의 힘이다.
그러한 태도가 일고 합치되는 공간이야말로 바로 그들의 놀이터이자 일터가 될
수 있다.
@ff
두 가지 시험
고광일네들과 어렵사리 인연을 맺고 우여곡절 끝에 '미래연구소'를 분당에
열었을 때, 나는 그들이 진행해왔던 'SMD마운터'는 미래산업의 중장기적
계획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미래산업은 핸들러를 주력으로 하는 반도체
제조장비업체이고, SMD마운터라면 저자제품 조립장비 분야이니 기술연관성이야
있을지라도 어떻게 보면 방향이 전혀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누구보다도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내
제안을 극구 사양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입장이다 보니 뭔가 회사측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일거리를 찾고 싶었을 게다. 그들은 핸들러 성능개선부터
시작하자고 덤볐다.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서글픈 제안이기도 했다. 나는
간곡하게 그들을 설득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그들이 전에 일하던 직장에서는 SMD마운터의 개발이 예상보다 늦어지자
일본의 유명한 컨설팅 회사에 검토를 의뢰했다고 한다. '매우 유망하지만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받고서 그들은 결국
프로젝트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유망'에 대한 기대보다는 '필요'에 대한
부담이 컸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는 '유망'에 배팅 했다. 만약 SMD마운터 개발이 성공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SMD마운터가 국산화된다면 기업으로서도 또한 국가적으로도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 될 것임은 틀림이 없다. SMD마운터는 저자제품을 생산하는 거의 모든
공장에서 저자부품 조립공장을 비출 때 항상 보이는 조립기계가 바로
SMD마운터다. 그렇게 흔히 쓰이는 장비이면서도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그것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새로 깨닫고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이 투자'를 견디는 데에는 아주 이골이 난 사람이다. 아니,
그것 말고는 다른 아무런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내가 이해하는 벤처마인드란
그런 것이다.
전혀 다른 각도에서 진행되었던 연구도, 심지어는 참담한 실패로 끝난
연구조차도 많은 것을 남겨주고 간다고 생각한다. 현재 미래산업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가 바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는 한때 나로 하여금 자살까지 결심하게 만들었던 어떤
실패로부터 얻어진 선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처구니없는 실패가 바로
성공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너희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그냥 생각만 해볼
것이 아니라 직접 해보라. 다행히 회사에는 돈이 있다. 이 돈은 너희들이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마음껏 낭비해도 되는 유흥비라고 생각하라. 놀 때 돈
아끼는 놈은 한심함 놈이다. 기술개발에 있어서만 은 절대로 경제개념을 갖지
않길 바란다. 금방 느끼게 되겠지만 지금 너희들이 낭비한 유흥비가 곧 엄청난
흑자로 되돌아올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들은 비로소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곧이곧대로는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연구소를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나를 처음으로 시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스스로가 시험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최고의 워크스테이션으로 빠르고 편리하게 작업하기를 원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컴퓨터는 엔지니어들의 손발 노릇을 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자 친구이다. 그들이 최고성능의 컴퓨터로 작업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언제나 돈이 문제였다. 그들이 원하는 워크스테이션은 당시 최고사양과
최고성능을 자랑하는 고급모델이었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고성능의 네트워킹 시스템도 갖추었다. 수억 원이라는 비용이 들었지만 대신에
그들의 사기와 능률을 얻었다.
내 태도에 용기를 얻었던지 그들은 또 한 차례 나를 시험했다. 무려 30억을
호가하는 미국의 최신형 설계 소프트웨어를 요구한 것이다. 고광일 상무의
설명을 들으니 대단한 프로그램인 줄은 알겠지만, 소프트웨어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계장비라면 모르겠지만 도대체
무슨 소프트웨어이길래 그토록 비싼 것일까.
아무리 탄탄하기로 소문난 기업이라 할지라도 미래산업은 여전히
중소기업이다. 누가 듣더라고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였다. 30억이라면
웬만한 중소기업의 1년 총매출액일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고민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다만 오래 고민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의 능력과 그들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입절차를 밟도록 지시했지만 엉뚱한 곳에서 트러블이 생겼다. 소프트웨어
판매업체 쪽에서 파견 나온 담당자가 문제였다. 사장과 직접 계약하겠다며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거액이 오고 가는 중요한 거래에 일개 팀장과
최종계약을 한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미심쩍고 불안했던 모양이다.
연락을 받자마자 나는 분당으로 곧바로 차를 몰았다. 계약담당자가 원하는
것은 내가 직접 서명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계약서에 직접 서명하는
대신에 '이 계약에 관한 한 나는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모든 것은 팀장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솔직한 말이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왈가왈부하겠는가.
사실 나는 서투르게나마 영어를 할 줄 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서
일부러 고 상무에게 통역을 시켰다. 모택동이 그랬다던가. 그는 통역을 시키는
동안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내가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랬던 건 아니다. 고 상무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고, 그
자리에서 내가 멀리 떨어져 있음을 그 사람에게 가르쳐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계약은 무사히 끝났다. 한국으로의 첫 진출이라는 상징성을
감안해주어서 좋은 할인율을 적용 받을 수 있었다. IMF직전의 일이라 환율도
적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담당자가 돌아가자 고상무는 연신 싱글벙글
이었다. 통쾌했던 모양이다.
"세계의 많은 기업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손쉽고 간단한 계약은
처음이랍니다. 그러면서 '네가 책임질 수 있는 연구비의 바운더리가 도대체
얼마냐'고 묻는 겁니다. '그런 것 없다'고 했죠.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사실 이 소프트웨어는 전에 있던 호사에서도 몇 번이나
구입을 요청했던 겁니다 정말 대단한 프로그램이거든요. 업무효율이 높아지고
어쩌고 아무리 설득을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왜 , 있잖습니까, 내내 검토만
하다가 흐지부지되는 거요." 실패로 끝났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그것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새로 깨닫고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술개발에 있어서만 은 절대로 경제개념을 갖지 않길
바란다. 금방 느끼게 되겠지만 지금 너희들이 낭비한 유흥비가 곧 엄청난
흑자로 되돌아올 것이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고성능의
네트워킹 시스템도 갖추었다. 수억 원이라는 비용이 들었지만 대신에 그들의
사기와 능률을 얻었다. 나는 계약서에 직접 서명하는 대신에 '이 계약에 관한
한 나는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모든 것은 팀장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ff
인재는 키워서 써라--텃밭 경영
@ff
정문술식 영재교육법
중소기업이 '사람'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그래서 항상 인재에
목말랐고 사람 탐을 많이 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사실 미래산업과
산학협동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대학교들은 소위 '일류'가 아니다.
우선은 '일류대학'의 공과대학에는 우리 같은 중소기업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학생들뿐 아니라 공과대학 전체를 몇 개의 대기업들이
입도선매해놓은 것과 같은 형국이다.
'까짓 것, 좋다. 안목만 있다면 사람은 지천이다.'
중소기업 하는 사람한테 이런 오기가 생길 법도 하다. 상황이 그러하기도
하려니와 내 스스로가 '레디 메이드 인생'들을 실험하기도 한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카피 때문에 요즘은 '준비된'이라는 형용어구가 유행인
모양이지만, 그 '준비된 ' 모범생들에게 나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왠지 애늙은이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아무튼 일류대학만을 바라고 죽어라고 교과서를 후벼팠을 그들을 생각하면,
왠지 옆가리개를 씌어놓은 경주마 같다는 생각이 들어 측은하게 느껴진다.
그들의 '앞만 보고 달리기'는 일류대학 입학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대개는
대기업이라는 또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죽어라고 학점을 따고 토플을 외워야
하는 것이다. 똑같은 교재로 똑같은 학습을 하면서 누가 더 잘했나를 따지는
것은 별로 재미없는 일이다.
엔지니어는 예술가와도 같다. 방향은 다르지만 어차피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승부 해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같은 지식과 같은 경험과 같은 사고를
지닌 예술가 집단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이 생산해낼 예술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정말 가능성 있는 인재들은 오히려
시키는 대로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시키는 것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컴퓨터이건 만화책이건 간에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노래했다. 21세기를 이끌어갈 인재는 키워진 모범생이 아니라 스스로 큰
방목아가 될 것이다. 다가올 미래에는 모방과 추종보다는 자율과 창의의 힘이
득세할 것이다. 굳이 멀리 볼 것도 없이 현재가 이미 그렇다. '다이아몬드
칼라'니 '셀프리더'니 하는 말들은 모방과 추종의 역사가 벌써 끝나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회사 내에서 내가 자율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아지고 눈치 봐야 할 상사들이 많아지면, 특별히 미운 구석이 없는
모범생은 될 수 있을지언정 아이디어가 번뜩이고 의외의 창의력을 꽃피우는
뛰어난 인재는 될 수 없다.
사실 어느 분야의 사람이든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특이한
개성을 가지고 있기 쉽다. 한쪽에 지나치게 몰두하다보니 보편적인 관습이나
도덕에 신경 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의 관료제도는 특이한
개성을 불편해한다. 그래서 억압되고 마침내 사장되는 천재성이 많다. 알량한
규칙만을 강조하다가 굴러 들어온 복덩이를 차버려서야 되겠는가.
일단 데려온 인재들을 제대로 키우는 데 방임만큼 좋은 선생님은 없다. 거친
들판에서 스스로 큰 방목아들을 데려다가 좀더 풍요로운 목초 밭에 다시 한 번
방목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이 한계에 부딪치면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이
스스로 원할 경우 나는 그들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보다
우수한 인재가 되어서 돌아온다면 다시 방목한다. 이름 붙이자면 '정문술식
영재교육법'이다.
벤처기업의 생명은 기술이다. 벤처기업의 생명을 담보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연구원들이며 엔지니어들이다. 나는 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려고 한다. 그것이 업무와 관계된 것이든 개인적인 유희나 취향에
관계된 것이든 말이다. 연구계획에 있어서도 그렇다. '대충 이런 걸 한번
해보겠습니다.'하고 말하면 검토하고 상의하고 할 것도 없이 무조건 해보라고
한다.
며칠 전 어느 신문의 기자는 인터뷰 도중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벤처기업이라고 말하기에는 이제 덩치가 너무 커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나의 대답은 이랬다.
"미래산업의 지난해 매출액은 615억 원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10%가 넘은
66억 원을 연구개발비로 재투자했습니다. 올해는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비중을 지난해의 10.7%에서 13%로 오히려 높일 계획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아직 벤처기업 자격은 충분히 갖고 있는 것 아닌가요."
올해 우리가 책정한 매출액 대비 13%의 연구비용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갈 것이다. 대부분은 실패라는 이름으로 증발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엄청난 금액을 미래산업의 악동들은 흥청망청 유흥비(?)로 탕진할
것이다. 그러나 미래산업은 그 탕진을 결코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아직 벤처 아닌가. 엔지니어는 예술가와도 같다. 방향은 다르지만 어차피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승부 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대개의
관료제도는 특이한 개성을 불편해한다. 그래서 억압되고 마침내 사장되는
천재성이 없다. 올해 우리가 책정한 매출액 대비 13%의 연구비용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갈 것이다. 대부분은 실패라는 이름으로 증발할
것이라는 뜻이다.
@ff
기술학교 교장선생님
미래연구소 사건 때문에 사실 그들이 전에 일하던 기업으로부터 몇 번인가
신랄한 항의전화를 받기도 했다. 내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일에 미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들과 나의 선택이 결코 비도덕적이거나 그릇된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사람을 부리는 것에도 자격이 필요하다. 우수한 인재들의 꿈과 노력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기업은 결국 사람을 잃게 된다. 내가 그들을 받아들인
것이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비명을 지르고 뛰쳐 나갈 수박에 없을
정도로 몰아갔던 관료적인 기업문화가 바로 부도덕한 것이 아니었을까.
정말 당황스럽고 놀라운 일은 그 이후로도 비슷한 사례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기적인 공채를 제외하고 해당 부서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인력을
모집하는 것은 팀장의 권한이다. 우리 회사의 오래된 관례였고, 나는 한번도
간섭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 책상에 보고서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요즘은
아예 인사과로 곧바로 날아가는 눈치다. 미래연구소라고 예외는 아니다.
고 상무는 가끔 나와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미래를 찾아온 새식구들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좌불안석의 내 심정은 알 바 아니라는 투로 말이다.
"얼마 전에 S기업 설계파트에서 근무하던 친구가 연구소를 찾아왔습니다.
거기서 사표도 수리 안하고 매일같이 전화를 해대는 겁니다. 제가 다
피곤하다니 까요. 그 친구 일 시켜보니까 거기서 그럴 법도 하더라구요."
"거기에 소문이 어떻게 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턱대고 사표부터 던지고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이 꽤 많아요. 저희 팀이 아니었는데도 말이죠. 어디
무턱대고 받을 수야 있습니까. 어쨌든 그쪽 연구팀들 어수선하겠던 데요."
얼마 전에는 K기업 대표로부터 내게 직접 항의서한이 날아들었다. 그쪽에서
일하던 사람을 내가 빼내어 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나라고 그 내막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 거명하는 사람 이름도 생소하기만 했다. 다만 미래연구소에
그런 사람이 또 새로 찾아왔구나 하는 짐작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 편지를 고광일 상무에게 팩스로 보냈다. 내 불편한 심경을 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고광일 상무의
사람자랑은 오늘도 여전하다.
"제어계측 파트가 충원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맞춤한 녀석이
찾아오는 겁니다. 어제 찾아온 녀석은 정말 물건입니다. 꼭 누가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니 까요."
이제는 회사 이름이 많이 알려져서 그런지 사람 구하기도 좀 나아졌다. 지난
공채에는 10명의 신입사원을 뽑는데, 1,100명이 넘는 인원이 몰려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공채가 아니더라도 고상무 말마따나 하나둘씩 찾아오는 사람도
꽤 늘었다. 격세지감이다.
그들은 미래를 찾아오는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그들은 일반명사인 '미래'와
고유명사인 '미래'를 동시에 찾아온 것이다. 내 어깨는 갈수록 무거워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분위기와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그들에게 달렸다.
그들이 불행해지면 나도 불행해진다. 그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 나는
아무래도 사장 체질이 아니다. 기술학교 교장선생이 내 타입이다. 공부 안하고
말만 잘 듣는 모범생이 나는 싫다. 공부 잘하고 놀기 좋아하는 녀석들이 나는
예쁜 것이다. 공부하기 좋은 환경, 놀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교장선생의 역할이다. 사람을 부리는 것에도 자격이 필요하다. 우수한
인재들의 꿈과 노력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기업은 결국 사람을 잃게
된다. 말장난 같지만 그들은 일반명사인 '미래'와 고유명사인 '미래'를 동시에
찾아온 것이다.
@ff
훔쳐보지 않고 키우겠다
미래산업은 사람 욕심이 많은 기업이다. 그래서 앉아서 기다리는 걸 참지
못한다. 다소 먼 길을 돌아가더라도 일찌감치 투자하고 오랫동안 키우려고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년 정도를 미리 내다보고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모습을 알아야 미래에 필요한 인재를 오늘에 미리 구할
수 있다. '리더십의 제1요체는 선견력'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다.
이미 말했지만 미래연구소의 설립과 관계된 일련의 사건들은 전혀 내 타입이
아니었다. 그래서 감히 '파계'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미래산업을 시작할
때부터 나는 이미 나름대로의 인력충원법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필요한 인재를
스스로 양성하겠다는, 말하자면 '자력갱생'의 원칙이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흔히 '3난(난)'이라고들 하다.
자금난, 기술난, 인력난이다. 물론 이 '3난'이 중소기업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땅에서 기업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공통된 어려움이다. 그러나
중고기업에게 특히 난감한 것은 바로 '인력난'이다.
사람은 빌려올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다. 스스로 찾아오길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더구나 중소기업이 고급인력을 확보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어떻게 된 세상인지 요즘 젊은이들은 삼수, 사수를 해서라도 꼭
대기업으로만 몰려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영자들은 뱁새눈이 된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남의
집안에서라도 훔쳐와야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현재의 봉급보다 더 높은 봉급을
제시하여야 할 테고, 직급이나 승진 등에 관한 비전도 함께 제시하여야 한다.
얄미운 짓이지만 무턱대고 욕할 수만도 없지 않은가.
도덕성 시비를 떠나 이런 식의 인력흐름이란 분명 소모적인 것이다.
당사자에게는 지금까지 수행하던 업무를 중단하고 새로운 업무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므로 분명한 인생 낭비라고 할 수 있다. 이전 기업에서는
당연히 해당 업무에 차질이 생긴다. 인력을 훔쳐온 기업에서는 기업수준에
맞지 않는 과잉지출을 감수해야 G나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낭비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중소기업 경영자들의 비애가 여기에 있다. 무슨 일을 하고 싶어도 도무지
사람을 구할 수 없다. 사람을 훔쳐오자니 비난이 두렵고 스스로도 한심하다.
남에게 칭찬 받지는 못할망정 욕을 먹으면서까지 기업을 해야 하다니,
스카우트를 적극적으로 고려할 주변머리도 없는 경영자들은 그저 '요즘 젊은
것'들을 원망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바로 내가 겪어왔던 갈등이다. 어렵사리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고 막상
새로운 일을 시작할라치면 같이 일할 사람이 없다. 이때의 막막함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 역시 사람을 훔쳐올까 고민도 많이 했고,
결국은 지긋지긋한 세태를 원망하기도 했다.
미래산업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풍전기공이라는 조그마한 금형 공장을
운영한 적이 있다. 그 사업은 어이없는 사기와 실패로 마감되었지만 그 쓰라린
경험이 내게는 예방주사나 마찬가지였다. 미래산업을 창업하자마자 나는
인재양성에 매달렸다. 기술력은 사람과 함께 간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스스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훔쳐올 재간도 없는 바에는 차라리
시간과 돈이 좀 들더라도 스스로 키워서 쓰자는 생각이었다.
일류대학의 공대 출신들을 포기하자 당연히 공고 생들에게로 눈이 갔다.
강원도나 전라도 쪽의 공업고등학교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필요한 숫자보다
좀더 많은 인원을 수련 생으로 입사시켰다. 일을 시켜보고 가능성 있는
아이들은 정식으로 채용해서 꾸준히 일을 가르쳤다. 성장하는 만큼
대우해주려고 노력했다. 모험이긴 했지만, 이왕 시작한 이상 성패가 분명해질
때까지 멈추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미래산업이 자랑하는 '공고 4총사'가 있다. 지금까지의 미래산업을 책임지고
이끌어왔던 일등공신들이다. 백정규는 현재 부사장이 되었고, 백영근은 매거진
사업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두철은 현재 설계팀장이고, 선기상은
전자개발부장이다. 물론 '키워서 쓰기'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좀더 규모가
커지고 안정되었다는 점 말고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이미 배운 것보다 앞으로 배울 것들이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바로
젊은이들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당연한 사실을 잊고 산다. 모두들
기성품들만 좋아하다. 최고의 교육코스를 통과한 한결같은 모범생들만
좋아한다. 모범생들 또한 기성품들만 좋아한다. 발전가능성 있는
중소기업보다는 이미 최고로 인정받은 대기업들만 좋아한다. 참으로 재미없는
세태다.
인력난을 호소하는 기업인들을 만나면 나는 서슴없이 '키워서 쓰라'고
말한다. 그러면 으레 '팔자 좋은 소리' 운운하는 비명이 튀어나온다. 하루가
급해 죽을 지경인데 어느 천년에 사람을 키워서 쓰느냐는 것이다. 물론 필요한
사람을 키워서 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장차 필요하게 될 인력이란
어떤 모습일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고, 그러한 생각에 맞춰
미리미리 사람을 알아보고 가르쳐야 하는 미련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
지레 겁먹고 불평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험이 낫지 않은가. 값비싼
기성품들만 짝사랑하는 것보다야, 눈 딱 감고 순백의 가능성에 투자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지식자본이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시대가 점차 다가오고 있다. 지식자본은
우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준비하고 계획하고 실천해야 진정 쓸모
있는 지식자본이 형성된다. 나는 거칠지만 재주 있는 인재들을 일찌감치 골라
키워서 지식인들을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산업은 학교에 가깝다.
미국의 어느 호텔 청소부로 일하는 사람은 다년간의 연구 끝에 호텔 청소를
가장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법칙 화했다. 그는 미국의
능률협회에서 주는 대단한 상을 받았다. 요즘 들어 새롭게 정의되는
'지식인'이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안에서 법칙과 노하우를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무조건 학벌 좋고 책만 많이 읽은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다.
엊그제 사내(사내) 리펙토링 중간성과 보고회가 있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경영평가단의 도움으로 그간 많은 경영합리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리펙토링, 좋다. 문제가 있다면 찾아서 고치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너희들,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둬라. 리펙토링으로 절약하고 합리화되는 것은
아주 작다. 정말 중요한 것은 조직관리가 아니라 행복관리다. 너희들이 어느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는지를 잊으면 안 된다. 미래산업은 학교다. 너희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다 해보고 배워둬라. 그래서 진정한 미래형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솔직히 돈은 회사가 너희한테 줄 것이 아니라, 너희가 회사한테 줘야
한다. 수업료는 내고 학교를 다녀야 할 게 아닌가." 미래산업은 창업하자마자
나는 인재양성에 매달렸다. 기술력은 사람과 함께 간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미래산업이 자랑하는 '공고 4총사'가 있다. 지금까지의
미래산업을 책임지고 이끌어왔던 일등공신들이다. 나는 거칠지만 재주 있는
인재들을 일찌감치 골라 키워서 지식인들을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산업은 학교에 가깝다. 정말 중요한 것은 조직관리가 아니라 행복관리다
너희들이 어느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는지를 잊으면 안 된다. 행복하지 않다면
리펙토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울 수 있어야 한다.
@ff
단순한 조직이 강하다
나는 천안공장에서 일한다. 그러나 각종 연구소나 실험실, 독립을 준비하고
있는 미래산업의 자회사 등은 각 지역에 골고루 퍼져 있다. 이미 말했던
미래연구소도 분당에 있다. 나는 그런 곳에 들락거리기를 원체 싫어한다. 몸도
귀찮고, 참견하기도 귀찮기 때문이다.
내가 미래연구소를 방문한 것은 딱 세 번이다. 오픈 미팅 때 한 번,
소프트웨어 계약 때 또 한번, 그리고 나머지 한 번은 어느 경제지 기자가
연구소 견학을 원해서였다. 그저 구경 삼아 가는 것이니 아무 준비도 하지
말라고 일러두었지만, 아무래도 긴장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기자가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허락했지만, 내키지 않는 걸음일 수밖에 없었다.
막상 도착해보니 몇 층이었는지도 헷갈리는 데다가 보안장치까지 있어서
무진 애를 먹었다. 마침 화장실 가는 직원과 마주쳐서 사장이라고 밝히니 겨우
들여보내 주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고 상무가 달려나왔다. 일하던 직원들도
분주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원이 꽤 늘어 있었다. 고 상무는 큼직하고
깨끗한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게 자네 방인가'하고 물으니 대답이
가관이다.
"사장님 방입니다.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린가.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이곳에 오면 몇
번이나 오겠다고 사장실을 다 만들어두었단 말인가 말문이 막혀 있는 사이에
고 상무는 두꺼운 서류뭉치를 들고 와서는 내 앞에 앉았다. 업무보고를 할
태세다. 정말 못 말릴 사람이었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 이 방 치우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인가. 그리고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겠네만, 내가 부탁하지 않았을 때 또 보고서가은 걸 들이민다면
정말 쫓아내겠네."
동행한 기자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는 건성으로 연구소를 한번
둘러보고 서둘러 나왔다. 평소대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사장대접임을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까.
주변 사람들이 우려할 만큼 나는 불필요한 절차나 인사치레를 싫어한다.
18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절차와 인사치레에 시달릴 만큼 시달렸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업에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 나는 공무원 기질과 결별을 선언했다.
관료주의와 요식행위로 설명되는 소위 '공무원 병'을 버리지 못한다면 사업도
인생도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래산업에는 사장이 참석하는 회의가 없다. 굳이 내가 참석하는
회의가 있다면 1년에 한 번, 시무식 때이다. 회의하기보다는 기본적인
경영철학과 삶의 태도 등에 관해 간략히 이야기하는 정도다. 회의가 필요한
사람들은 현장에서 발로 뛰는 사람들이다. 업무는 팀장에게 맡기고 그 진행에
있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사장은 그저 직원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처리해주는 심부름꾼이다. 사장이 잔소리꾼이 되면 전 직원이 짜증스러워진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회의가 너무나 많다. 설명하고 논의하고 질책하고
평가할 것이 뭐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회의가 많은 조직은 그만큼
관료적인 조직이다. 조직원들에게 두 번 세 번 강조하고 강요할 것이 많은
리더들이나 회의를 소집한다. 회의를 자주 소집하는 리더는 직원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리더다. 동원되는 사람들만 피곤해질 따름이다.
그렇다고 미래산업에 전혀 회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공동으로 논의해야 할
안건이 있다면 물론 모여야 한다. 다만 필요에 따라, 필요한 사람만 참석하는
회의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회의의 간소화, 최소화, 기능화이다. 물론
대부분은 사장이 필요 없는 회의이기 때문에 나는 참석하지 않는다. 나도
편하고 직원들도 편하다.
사토 요시나오(좌등방직)라는 경영학자의 말에 따르면 단순화 능력이야말로
경영자의 제1 자질이라는 것이다. 조직은 가급적 단순해져야 하다. 단순해지지
않으면 불신이 축적될 구석이 그만큼 많아지고 모든 것이 굼뜨게 움직인다.
또한 단순해져야 소통도 빠르다. 미래산업의 서류에는 언제나 도장이 두세
개밖에 찍히지 않는다. 본인, 직속상사, 이렇게 두 사람만 합의한다면
미래산업에서는 무슨 일이든 당장에 착수될 수 있다. 물론 신뢰가 없으면
속도도 없다. 사장은 그저 직원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처리해주는
심부름꾼이다. 사장이 잔소리꾼이 되면 전 직원이 짜증스러워진다. 단순화
능력이야말로 경영자의 제1 자질이라는 것이다. 조직은 가급적 단순해져야
한다. 단순해지지 않으면 불신이 축적될 구석이 그만큼 많아지고 모든 것이
굼뜨게 움직인다.
@ff
사장님 실망했습니다
사내(사내) 리펙토링이 진행된 건 작년부터다. 작년에 우리는
중소기업진흥공단에 경영평가 신청을 냈다. 사실 미래산업의 기업문화에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 무엇이
문제인지를 한번 알아나보자는 심사였다. 그렇다고 삐딱한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다. 이 기회에 차분히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었다. 하도 주변에서 우려의
소리를 듣다 보니 은근히 불안하기도 했던 것 같다.
미래산업에서 경영평가 신청을 냈다고 하니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는 매우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그들로서도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기업이라는 것이다.
접수하고 기다리고 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
분야에서는 최고의 베테랑이라는 지도위원을 필두로 각 방면 전문가들로
구성된 경영평가단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기업과 인연을 맺게 되어서 저희로서도 영광입니다."
"제가 미욱한 탓에 회사가 엉망입니다. 모쪼록 혼 좀 많이 내주십시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나자 그들은 곧바로 분석작업에 들어갔다. 나와
직원들은 잔뜩 긴장했다. 부정적 평가가 나온다고 해서 무슨 불이익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업의 사기에는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분석작업은 경영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인사관리, 재고관리, 기술개발,
업무효율성, 재무구조, 근무태도, 조직구성, 현장생산성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진단이 이루어졌다. 그 번잡한 와중에 하루는 지도위원이라는 사람이 내방으로
찾아왔다. 말하자면 그 사람은 경영평가단의 단장이었다.
최종평가가 이루어지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나는 그의 때
이른 방문이 좀 의아스러웠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 정말 실망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거의 비난에 가까운
말투였다.
"큰일입니다. 이 회사 금방 망하겠습니다. 재원 낭비도 너무 심하고,
직원들도 모두 제멋대로 아닙니까, 이거."
그는 첫 번째로 자금운용이 지나치게 방만하고 무질서함을 지적했다.
계속해서 기구가 너무 사치스럽다. 결재시스템이 왜 이 모양이냐, 별로
사용하지도 않는 비싼 장비가 많다. 경리한테 워크스테이션은 뭐하러
사주었느냐, 사놓고 안 쓰는 비싼 소프트웨어가 너무 많더라 등등 비난은 끝이
없었다. 한마디로 경제개념이 없고 사치스럽다는 이야기였다.
그 다음으로 지적한 것은 직원들의 근무태도였다. 엄숙하고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아무 때나 제멋대로
들락거린다. 일하면서 웬 잡담들은 그리 많으냐, 간부들은 통 권위가 없어
보인다. 위계질서나 명령체계가 너무 느슨하다. 회의 태도가 엉망이다 등등.
그의 표현은 그대로 옮겨보자면 "회사는 돈으로 쳐 발라 놨는데 사원들은
전부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관리직과 생산지의 규모에
비해 연구 부서가 너무 비대하는 점을 들었고, 불용 부품이 많이 발행하니
물류 정비도 시급하다는 것이다. 대개는 수긍이 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또한 대부분은 일부러 방치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아니, 방치라기보다는
권장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어쨌든 진단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석에서 이처럼 신랄한 비판을 듣고 보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모두들 미래산업, 미래산업 하는데, 이거 참 큰일입니다."
경상도 사람이라 그런지 말투도 거칠고 매우 직설적이었다. 아무튼 나는 꾹
참았다.
"아, 그래서 여러분들을 모신 것 아니겠습니까. 구석구석 잘 좀 살펴봐
주십시오."
분석작업은 2주일 정도 계속되었다. 최종평가에서도 역시 기업문화의
방만함과 재원운용의 비효율이 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단장의 악평만큼
지독한 내용은 아니었다. 최종평가내용을 놓고 평가단과 함께 세부 검토에
들어갔다. 고쳐야 할 것과 유지해야 할 것 등에 대해서도 자못 심각한 논쟁이
있었다.
결국 기업구조 개선을 위한 상설기구를 사내에 두기로 했다. 평가단과의
안정적인 교류를 통해 구조개선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기로 했다. 지금도
분주히 가동되고 있는 리펙토링실(실)은 그렇게 태어났다. 아무튼 재미있는
것은 그 이후에 그 사람이 다시 한 번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이외로 그의
얼굴은 매우 밝았다.
"저한테 여유자금이 좀 있었습니다. 어제 그 돈으로 몽땅 미래주식을
샀습니다. 사장님만 믿겠습니다, 허허."
나는 깜짝 놀랐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악평을
쏟아내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그의 설명이 또한 걸작이었다.
첫인상으로는 어디를 보아도 엉망이라 오래가지 못할 회사겠거니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작업을 계속 진행하면 할수록 갸웃거려지는 부분이 있더란다.
각각의 부분들은 방만하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사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미래산업을 굴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는 것이다. 업무와는 상관없는
그저 개인적이고 막연한 느낌이 그랬단다. 그래서 한번 미친 척하고 투자해볼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그 역시 나 만큼이나 바보 같고 낭만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회사는 돈으로 쳐발라놨는데 사원들은 전부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는 것이다. 각각의 부분들은 방만하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사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미래산업을 굴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는 것이다.
@ff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
사실 '고삐 풀린 망아지'라는 표현은 우리 직원들에게 뿐만 아니라 요즘의
젊은이들을 표현하는 데 아주 적합하다. 요즘의 신세대들은 그야말로
'제멋대로'다. 조직의 원리보다 개인의 욕망을 중요시한다. 흔히 하는 말로,
회식하자고 하면 애인 만나러 간다며 두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리는 세대다.
상사한테 눈 똑바로 뜨고 논리 따지는 사람들이다. 기성세대들이 보자면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 참고만 살아왔던 자신의 직장생활을
떠올리며 본전생각에 시달릴 만도 하다.
나 역시 신세대들의 태도를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옷차림이나 머리모양 따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단 옷차림이나 머리모양
따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똑 부러지는 태도는 좋지만 예의 없는 태도는
싫다.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어쩔 땐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건 나이 먹은 한 사람의 노인네로서
느끼는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경영자라면 '사람의 꼴'을 잘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에는 경영자의
취향에 직원들이 맞춰서 스스로를 바꿔 나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이다. 경영자가 직원들의 취향을 인정하고 그것을 배려해주어야만 회사에
탈이 나지 않는다. 그것을 비굴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영자로서 좀
문제가 있다. 사장은 하나지만 직원은 여럿이다. 한 사람에게 여러 사람이
맞추게 되면 여러 사람의 다양한 재능들은 죽게 마련이다.
신세대들이 몰고 오는 새로운 공기는 참으로 신선하다.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과감히 버리자는 솔직함이 있다.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즉시 행동으로 보여준다. 불편한 환경이 끝끝내 바뀌지 않는다면 아예
환경을 무시해버린다. 그러나 환경이 자신의 취향대로 바뀌었을 때 그들은
열광한다. 강요하지 않아도 무섭게 몰두한다.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 환경을 바꾸는 것이 빠르고 현명한 법이다.
기성세대들은 언제나 사람을 바꾸려고 안간힘이다. 혼내고 회유하다가 결국은
사람을 놓치거나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신세대들은 비교적 정확하다. 적당한
조건이 조성되어야만 움직인다. 어떤 면에서는 참 다루기 쉬운 세대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건을 마련해주지 않고 그저 붙잡아두기만 하면 몸만 남기고
머리는 도망간다.
능력 있는 경영자라면 '내 멋대로 하는 신세대'를 참을 수 있어야 한다.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신세대들이 '내 멋대로'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줄
수 있어야 한다. 신세대들은 '내 멋대로' 해야만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신세대인 것이다. 사람의 꼴을 잘못 보는 경영자를 직원들은
따르지 않는다. 잔소리 많고 불만 많은 사장은 피곤한 '어른'일 분 결코
'리더'가 되지 못한다.
경영평가단의 보고서는 내게 어떤 선택을 강요했다. 기업문화의 방만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방만함음 물론 그쪽 표현이고, 내 말투로는 '자율'과
'방임'이다. 어떻게 지지고 볶든지 간에 해보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보라는
것이 평소 내 지론이었다. 그러다 보면 보이지 않는 성과들이 어지럽게나마
쌓여갈 것이고, 그런 것들이 언젠가는 '물건'을 만들어내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상당한 기간을 관찰했으면서도 결국 경영평가단이 보지 못했던 것이 있다.
그들이 퇴근한 후에도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연구소의 불빛이다. 한 사람이
남아 있건 열 사람이 남아 있건 항상 누군가는 밤늦도록 남아서 연구에
몰두한다. 낮에만 우리를 관찰하는 평가단은 직원들의 흐트러진 옷차림과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보며 경악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세대들의 노는 방식이다. 아무도 간섭하고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자기가 고용주인지 고용자인지도 곧잘 잊어버린다. 그저 재미있으니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연구소에는 그들이 좋아하는 온갖 장난감들이 있으니
집에 가기 싫은 것이다. 놀아도 돈을 주니 신나고 흥미로운 것이다.
경영평가단이 진단을 끝내고 우리와 함께 구조개선 방안을 논의하고 있을 때
나는 내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연구팀 쪽은 아무 것도 건드리지 말라고
말이다. 평가단측에서는 물론 강력히 반발했다. 가장 문제가 많은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도 물러설 순 없었다. 가장 문제가 많다는 바로 그 부분이
오늘의 미래산업을 있게 한 에너지 박스였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직원들에게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관리직에 있는 놈들, 괜히 엔지니어들 무시하고 휘두르려 들면 알아서 해.
너희들은 후방지원부대야. 우리한테는 개발팀이 선봉이라구. 걔네들 요구하는
거 아예 트집 잡을 생각 말고 다 들어줘. 우리는 걔네들 심부름이나 해주면
겨우 밥값 하는 거야."
그러면 직원들은 그저 웃는다. 다소 과장되게 이야기했을 뿐, 미래인 이라면
모두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서점에 들렀다가 아주 우연히 책 한 권을 보게 되었다.'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라는 책이었는데 무엇보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제목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내가 직원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내가 '네 멋대로'라는 표현을 즐겨 쓰게 된 경위가 그랬다는
이야기다.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 환경을 바꾸는 것이 빠르고 현명한 법이다.
기성세대들은 언제나 사람을 바꾸려고 안간힘이다. 혼내고 회유하다가 결국은
사람을 놓치거나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상당한 기간을 관찰했으면서도 결국
경영평가단이 보지 못했던 것이 있다. 그들이 퇴근한 후에도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연구소의 불빛이다. "관리직에 있는 놈들, 괜히 엔지니어들 무시하고
휘두르려 들면 알아서 해. 너희들은 후방지원부대야. 우리한테는 개발팀이
선봉이라구. 걔네들 요구하는 거 아예 트집 잡을 생각 말고 다 들어줘. 우리는
걔네들 심부름이나 해주면 겨우 밥값 하는 거야."
@ff
엔지니어는 타고난다
사실 한가락씩 한다는 엔지니어들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특이한 구석이
있다. 이 특이한 구석을 진압하면 그들의 능력도 상실된다. 물로 특이한
구석이라는 것이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꼴을 잘
보아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에 같이 일하던 시오이 세이치라는 일본기술자는 사무라이 같은 침묵의
눈빛이 있고, 백정규 같은 사람은 그토록 무서운 열정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를 정도로 맥없이 순진하기만 하다. 기계설계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김두철이라는 녀석은 처음 보았을 때 어딘지 모르게 덜 자란 것 같고
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엔지니어와 예술가를 곧잘 비교한다. 흔히 한쪽은 두뇌를 상징하고
다른 한쪽은 감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둘 다 '선(선)감성,
후(후)두뇌'라고 말하고 싶다. 기억력이 좋고 계산능력만 탁월한 것은
예술가들뿐 아니라 엔지니어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양쪽 모두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상상력과 창의력, 그리고 열정이다. 이 세 가지는
두뇌라기보다는 감성의 영역이다.
예술가는 타고난다. 베토벤이나 헨델 같은 위대한 음악가는 원래 소질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유명한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모차르트는 베짱이처럼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면서도 일단 오선지만 잡으면 천상의 선율을 막힘 없이
뽑아냈다. 반대로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보다 수십 배의 노력을 하지만 평생
모차르트에 대한 존경과 질투심에 시달려야만 했다.
기술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탁월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는
유명한 선생한테 10년 동안 배운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컴퓨터에 미쳐서 오로지 컴퓨터 앞에 있을 때에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자라서 훌륭한 프로그래머가 된다. 세계의 유명한 컴퓨터 귀재들이
대부분 해커출신이었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의무와 사명감보다는 재미와
흥분이 천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엔지니어는 타고난다'는 말을 한다. 물론 타고난다는 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유전자 속에 모든 것이 점지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의식적으로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닌, 감성적 요인이 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말하자면 제 스스로 재미를 깨닫고 제 스스로 그것에
미칠 수 있어야만 제대로 된 예술가며 엔지니어가 탄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더구나 천재적인 예술가며 엔지니어가 탄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더구나
천재적인 예술가와 엔지니어라면 그러한 열정에 덧붙여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현재 미래산업의 직원 수는 300명이 조금 넘는다. 그중 삼분의 일이
연구원이다. 그중 10여 명 정도가 핵심 엔지니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미래산업은 이 10여 명의 핵심 엔지니어가 이끌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10여 명의 핵심 엔지니어들 중에는 공고출신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들 밑에서 공학박사며 석사들이 일하고 있다. 미래산업에서 학벌은
벼로 의미가 업다. '누가 더 훌륭한 엔지니어인가'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리더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타고난 놈들', '끼 있는 놈들'을 가려내고 제대로
길러내는 것이 바로 리더가 할 일이다.
그렇다고 '평범한 다수'들을 무시하고 도외시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타고난 소수'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모택동은 '물이 탁해야 물고기가
산다'는 말을 했다. 인민과 지도자와의 관계를 빗댄 말이다. 평범한 다수가
든든히 포진하고 있어야 훌륭한 소수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평범한 다수가
쌓아온 어지러운 성과들을 솎아내고 정돈해서 제대로 된 물건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뛰어난 소수라는 이야기다 '물건'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평범한
다수와 뛰어난 소수, 둘 중에 어느 한쪽도 없어서는 안 된다.
미래산업은 창업 초기부터 산간벽지의 공고들과 자매결연을 하고 안정적인
인력흐름을 유도했다. 또한 중앙대, 공주대, 과학기술원 등과 독특한
산학협동 체계를 구축해놓고 있다. 지속적으로 대학에 연구비를 지원하고 그
연구실의 학생을 졸업 전부터 채용하여 정식 직원으로 대우해주고 그에 합당한
정식 월급을 지급해준다. 이렇게 하면 학위논문이 회사의 연구내용이 되어
기술확보는 물론 인력확보에도 도움이 된다.
이러한 인력관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마음을 움직이게 대우하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일을 단순한 계약관계로 치부했다간 결국 큰 코 다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 그리고 찾아낸
사람을 신뢰하며 진심으로 대우하는 자세,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가 있어야
비로소 사람을 키울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특이한 구석이라는 것은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꼴을 잘 보아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가는 타고난다. 베토벤이나 헨델 같은 위대한 음악가는 원래
소질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10여 명의
핵심 엔지니어들 중에는 공고출신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들 밑에서
공학박사며 석사들이 일하고 있다. 미래산업에서 학벌은 별로 의미가 없다.
'누가 더 훌륭한 엔지니어인가'만이 중요하다. '물건'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평범한 다수와 뛰어난 소수, 둘 중에 어느 한쪽도 없어서는 안 된다.
@ff
회사를 위해 일하지 맙시다
흔히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라고 말한다. 그럼 이윤추구의 목적은
무엇인가. 구성원들의 복지와 행복일 것이다. 기업은 직원들의 능력계발과
행복추구를 위해 존재한다. 이윤추구의 궁극적 목적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눈앞의 돈만 벌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긴다. 목적 없는 이윤추구는 결국 사장의
배만 불리는 것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많은 기업들은 직원들에게 자기 계발할 기회와 시간을 주지 않고 무조건
볶아대기만 한다. 앞뒤가 바뀐 것이다. 직원들을 위해 회사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직원들이 혹사당해야 하는 것이다.
매년 기업들의 종무식에는 매출실적이 주제가 되고, 시무식에서는
매출목표가 주제가 된다. 작년 총매출액이 얼마이고, 올해의 내외적 전망이
이러이러하니 올해 총매출은 이 정도까지 나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기준으로 각 부서에 세세한 업무목표들이 할당된다. 나도 경영자 중의 한
사람이지만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세상에는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고 신의능력으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삼국지의 제갈량은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의 일이나 일의
성패를 결정하는 건 하늘의 일(모사는 인사요 성사는 천사라)"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진인사 연후에 대천명(인사대천명)하라는 것이다. 성경의 잠언 16장
9절에도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해도 이루는 건 하나님'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하늘의 일마저 제 손으로 제어하려는 우를 범한다.
그렇게 건방을 떨어서야 될 일도 안 된다. 미래산업의 경우에는 1년
업무계획이란 것이 없다. 업무계획을 작성했다. 하더라도 그대로 진행된 적이
없고, 미리 계획한 것보다 상황에 따라 새로 입안하는 기획이 더 많기
때문이다. 당장 할 일이 있다면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대로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끝없는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 대신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끝없이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신의 소고나이다.
기업도 겸손을 알아야 하고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재작년 시무식 때 나는 전 직원들 앞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지금가지 저는 우리가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강조해왔습니다. 모두가
합심해서 큰 떡을 만들어놓고 골고루 나눠먹자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노선을 전면 수정하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더 이상 회사를 위해
일하지 마십시오."
직원들은 웅성거렸고, 간부들은 눈을 크게 떴다. 사장이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나 싶어 긴장들 하는 눈치였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만 노력하십시오. 자기계발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직원들이 마지못해 일하는 회사는 망한다. 그런 회사의 직원들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지만 사실은 시간을 때우고 있는 중이다. 하루에 단 한
시간이라도 흥겹고 의욕적으로 일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나는 직원들에게 하루 일과를 스스로의 계획과 판단 속에서 시작하기를
권한다. 무엇을 해도 좋으니 재미있는 이을 하라는 것이고, 가급적이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미래산업에서는 총매출액의 1%를
교육비로 지출한다. 물론 앞으로도 직원교육비는 과감하게 지원될 예정이다.
미래산업은 복지회사를 추구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고급한 복지는
교육이다. 미래산업은 직원들을 위한 장학재단이 되고자한다. 영어를 배우고
싶다면 영어학원을 보내고 개인 직무교육을 원한다면 받게 해준다. 보다
고급지식을 원한다면 대학원이나 유학도 보내준다. 현재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은 8명이고, 이미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도 있다.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회사의 철저한 지원아래 암호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연구원도 있다.
95년 하반기에서 96년 전반기까지는 간부직원 73명에게 리더십교육을
시켰다. 한국 LMI(Leadership Management Inc.)에서 실시하는 DPL(Dynamics
Personal Leadership) 즉, 개인리더십 교육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 나의 태도는 어떻고, 능력과 인성은
어떻게 계발할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과정이다. 3개월 코스로 1인당 200만
원이 들었다. 4기로 나누어 1년 동안 3억 2,000만 원을 들여 교육을 받게
했다.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배우자까지 함께 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교육이 기업에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다 준 건 별로 없다. 그러나 각자의
인생설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자신의 능력을 꾸준히 계발하지 않는 직원은 기업의 입장에서도 쓸모가
없다.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직장인들이 우리 주위에는 참 많다. 그런
사원들이 많은 회사는 그들과 함께 늙어간다. 기업의 등급은 바로 그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의 품질수준과 같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자기 계발할 기회와 시간을 주지 않고 무조건 볶아대기만 한다.
직원들을 위해 회사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직원들이
혹사당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해도 좋으니 재미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고,
가급적이면 자신에게 도움이 도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만 노력하십시오. 자기계발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자신의
능력을 꾸준히 계발하지 않는 직원은 기업의 입장에서도 쓸모가 없다.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직장인들이 우리 주위에는 참 많다.
@ff
다르게 끈질기게 파고들어라--시추 경영
@ff
이 친구 정신 나갔군
가장 상식적인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려다 보니 오히려 사람들은 나더라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자주 말한다. 그런 말들에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아져서 결국 생각해낸 말이 '거꾸로 경영'이다. 사실은 거꾸로 된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 방식의 '거꾸로 경영'은 어떤 이론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살면서 체득한 인생철학이었다.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거꾸로 경영'은
상식을 추구하자는 것이고, 상식 속에 진정한 벤처가 있다는 내 믿음에
대해서도 말한 바 있다. 나의 '거꾸로 경영'을 감히 벤처 마인드라고 칭할 수
있다면, 내 인생 역시 벤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 가족은 1979년까지 서울 공릉동에 살다가 서초구 원지동으로 이사했다.
그런 데에는 특별한 동기가 있었다. 70년대 중반, 봉급생활자들의 유일한
재산증식방법은 바로 이사를 다니는 것이었다. 수도와 도로가 채 갖춰지지
않은 미래개발 지역으로 이사하여 한 1__2년을 살다가, 그곳이 개발되어
집값이 오르면 또다시 변두리로 이사가는 식이다. 그렇게 세 번 정도 이사를
다니면 마침내 좋은 집을 갖게 된다.
공릉동으로 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에 직장으로부터 받아 살던, 대지
35평에 건평 18평짜리 집의 가격이 올랐던 덕분이다. 어떤 건축업자가 공릉동
동산의 배 밭을 밀고 60채 정도를 새로 지었는데, 대지 75평에 건평 45평이나
되는 아주 좋은 집이었다. 그곳에서 몇 년을 살다보니 또다시 집값이 올랐다.
그래서 다음에는 어디로 이사하느냐 하는 게 숙제였다.
한편, 나는 70년대에 세 번에 걸쳐 세계여행을 하다시피 했다. 중앙정보부
기획조정실 조정과장을 지냈을 때, 해외공관들을 감사하기 위해 해외출장을
많이 다녔던 것이다. 그런 공무를 수행하러 다니면서도 항상 머릿속에는
'다음에는 어디로 이사를 가야 히트하느냐'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서구지역을 다녀보니, 좋은 집은 예외 없이 산 중턱에 있거나 호수를 끼고
있는 등, 모두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히려 도심지의 집들은 모두
슬럼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은 그 반대였다. 전철역이 가깝거나
교통이 좋은 곳이 인기였다 더구나 멀쩡한 단독주택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이 대유행인 시절이었다.
선진국에서는 환경이 중요시되는 데 비해 한국은 아직 생활의 편의가 더
우선시되는 사회였다. 물론 자가용의 낮은 보급률도 한 이유가 되기도 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1978년 당시에 생각하기에, 우리나라도 한 5년
후부터는 오히려 주거환경쪽으로 관심이 역전될 것 같았다. 경제발전의 속도와
문화적 취향의 변동양상을 유심히 살피다 보니 그런 확신이 생긴 것이다.
자녀교육 문제도 사실은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아직도 대부분의 우리
아이들은 콘크리트 문화에 둘러싸여 각박하게 자라고 있지만, 다가오는
미래사회에는 지금까지처럼 규격화된 엘리트보다는 따뜻한 가슴과 낭만적
열정을 지닌 방목아들이 대접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어도 자녀교육 때문에 도심을 떠날 수 없다는 푸념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과감하게 도심외곽을 선택했다. 아이들은 농사일을 거들면서 자유롭게 자랐고,
장성한 아이들의 모스에도 나는 매우 만족하고 있다.
아무튼, 앞으로는 주거환경이 더 중요시되니 미리 교외에 나가서 살면
재산증식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과, 교육환경 면에서도 아이들을 도심에서
경쟁심리로 키우느니 시골에서 여유롭게 키우면 장성한 후에 더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원래는 신사동 영동시장 언덕에 깔끔하게 지어놓은 꽤 넓은 집으로 이사할
계획이었는데, 해외출장 이후엔 마음이 달라져, 서초구 원지동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당시 원지동은 행정구역상으로만 서울시로 되어 있을 뿐, 사실상은 시골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사방은 온통 논밭이었으며, 내가 처음에 산 500평 정도의
전답은 청계산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공릉동 집을 팔고 원지동 땅을 한
평에 3,200원 정도에 샀으니, 꽤 많은 돈을 남길 수 있었다. 나중에 그 땅에
이어진 임야 1,000평을 더 샀다. 그래도 남은 돈이 있어서 정원수의 왕자라고
하는 금송과 토속적인 한국의 꽃 고려영산홍 등 많은 관상 수를 사다 집
주변에 심었다.
그 무렵 나와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의 관심사는 대개
비슷했다. 만나면 언제나 재산증식이나 노후, 자녀교육문제 등이 화제였고
저마다의 고민이었다. 친구들은 변두리의 쓸모 없어 보이는 땅을 사서
이사한다는 내 말을 듣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친구 정신 나갔군."
군대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들어왔던 소리였다.
물론 내 의견에 동의하는 친구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 친구들 중에는
호젓한 산자락 동네를 나와 함께 답사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실지로
행동으로 옮긴 것은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관심은 있었으나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미래를 내다보고 예측하는 사람은 언제나 많은
법이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본 미래를 믿고, 그에 입각해서 오늘부터 미래를
준비하는 이는 아주 적다.
날씨가 좋은 계절이면 나는 곧잘 친구들 내외를 집에 초대하곤 하는데,
뒷마당에서 불고기를 구우며 여럿이서 수다 떠는 재미가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의 마당은 산자락과 맞닿아 있어 경관이 그럴듯할 뿐 아니라
각종 꽃나무들이 계절마다 다른 빛깔을 내어 보는 맛을 더해준다. 산 속이나
다름없으니 공기 좋은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산자락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이 마당가를 비껴 흘러서 그것을 보고 듣는 운치도 제법이다.
요즘은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는 것을 좀 꺼리는 눈치다. 우리 집에서
놀고 돌아가면 꼭 안식구들한테 '당신은 지금까지 뭐했느냐'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나라고 그들보다 넉넉한 여유자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제적 조건이나 당면 관심사는 비슷했지만 다만 선택이 전혀 달랐을
뿐이다. 당장의 유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항상 제자리걸음일 뿐이다. 지금의
우리 집은 부르는 게 값이 될 지경으로 탐내는 사람이 많다. 가계경영에
있어서도 '거꾸로'의 원칙은 예외가 아니다. '거꾸로 경영'은 상식을
추구하자는 것이고, 상식 속에 진정한 벤처가 있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다가오는 미래사회에는 지금까지처럼 규격화된 엘리트보다는 따뜻한 가슴과
낭만적 열정을 지닌 방목아들이 대접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바라본
미래를 믿고, 그에 입각해서 오늘부터 미래를 준비하는 이는 아주 적다.
@ff
아이들은 잡초처럼 키워라
공장을 천안으로 옮길 때 단 한 사람을 제외한 전 직원이 천안으로 따라
이주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느 신문에 이른바 '천안 대이동'이라고
명명했던 바로 그 사건이다. 이 무렵 직원들이 가장 근심했던 것이 바로
자녀교육 문제였다. 그들도 이 나라의 평범한 학부모들인 바에야, 수도권을
이탈하면서 가장 먼저 교육문제를 염두에 두었다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내가 직원들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바로 '잡초론'이다. 아이들이라면
벌에도 쏘여보고 지렁이도 죽여보면서 커야 제대로 크는 것이라고 말이다.
거칠게 풀어놓고 함부로 길러야 독립심 강하고, 건강하며, 생명력도 강한,
진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세상을 한번 둘러봐. 아니면 애들 주변의 친구들을 한번 보라구.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취향, 똑같은 말투, 똑같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
말야. 선생들이나 부모들이나 하나같이 애들이 엉뚱한 짓 못하도록 들볶기만
하니까 그리 되는 거라구. 그게 바보로 만드는 거지 뭔가. 반대로 생각하면
시골로 도망 오는 것이 애들한테도 다행인 일이야. 순박한 시골 애들과 함께
마음껏 뒤섞여 놀게 하라구. 사랑하고 믿어주기만 한다면 애들은 잘못되지
않는다니까."
그러면서 나는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며,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석연찮은 그들의 얼굴에 대고 내가 가진 증거물을 들이대는 것이다.
우리 집 큰애가 1964년 생이고, 막내가 1970년 생이다. 그러니까 6년 동안
무려 다섯 명의 아이를 낳은 셈이다. 일찌감치 홀로 되신 어머니는 손자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는데 내리 딸 셋을 낳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아내한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어머니를 실망시켜드릴 수는 없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 중에 재수생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 때문에 잡지사에서 몇
번인가 취재요청을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성공적인 자녀교육법의 '비결'을
말해 달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런 인터뷰가 곤혹스럽다. 아이들을 키운
특별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답변을 위해 자녀교육법이라도 연구해야 될
판이었다. 그래서 억지고 생각해낸 말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방목'이다.
80년에 해직 당하고 뒤늦게 사업을 한답시고 뛰어다니느라 나는 집안문제에
벼로 신경을 못 썼다. 그냥 바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항상 죽느냐 사느냐의
긴박감 속에 있었다. 당연히 가계는 물론이려니와 아이들 교육문제도
뒷전이었다. 남들처럼 일류대에 보내겠다고 과외를 시키는 것은 생가조차
못했다. 학비마저 제때 줘서 보내지 못하는 판국에 과외는 너무나 먼
얘기였다.
아이들이 한창 학교에 다닐 무렵, 우리 집 주변은 온통 논밭이었다. 봄이면
모내기하느라 동네가 온통 떠들썩했고 여름, 가을이면 개구리며 풀벌레 소리에
귀청이 떨어져나갈 지경이었다. 말로야 서울이 싫다고들 하지만 자녀교육이며
직장 등을 핑계로 모두들 변두리 생활을 기피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 촌동네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도록 했다. 다른 부모들처럼
극성스럽게 아이들을 볶아댈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원래
원지동은 참외와 수박이 유명했는데 우리 집도 밭에다 직접 심어 먹었다. 여고
2학년부터 중학생, 초등학생까지 골고루였던 아이들이 모두 삽이며 괭이를
들고 밭일을 도왔다. 그러고도 틈이 생기면 밖으로 나가 손발이 새까매지도록
뛰어 놀았다.
사업의 어려움으로 항상 침울해 있던 내게 그런 집안 분위기는 많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아버지와 묵묵히 집안일을 지키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아이들은 철도 일찍 났던 모양이다. 집안 공기는 항상 침울했지만
아이들은 일부러라도 웃고 떠들 줄을 알았다.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집안
여건을 비관하고 비뚤어지기도 했으리라.
시키지 않아도 모두들 힘을 합쳐 집안일 에 한몫씩을 해왔다. 그 민감할
나이에 학비를 제때 주지 못해도 울거나 짜증내는 녀석 하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재수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맏딸은 이화여대 건강교육학과를 졸업했고, 둘째 딸은 세종대학 성악과,
셋째 딸은 덕성여대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했다. 넷째이자 장남은 중앙대
기계공학과와 동대학원을 마쳤고, 막내는 중앙대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실적으로 꼽힌다. 모두 재수 한 번 안하고
소위'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밝고 성실하게 자라주었던 것도 경쟁 없는 시골 분위기에서
따뜻하게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모두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결정한 방향대로 자라주었다. 내가 한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누가 자꾸 물으면 무엇이든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루니 누가 자꾸 물으면 '방목'이라고 대답할 밖에.
딸들은 모두 성실하고 평범한 남편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두 아들은
각각 현대자동차와 삼성신용카드에 근무하고 있다. 큰아들은 수도권 근무를
마다하고 일부러 생산 부서를 지원해서 지금 울산에서 일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를 평생직장으로 삼아 밑바닥에서부터 경험을 쌓겠다는 그 마음이
기특하다. 막내아들은 대학원을 가겠다. 유학을 가겠다고 하는 것을 '학문을
하지 않을 바에야 곧바로 사회에 뛰어드는 게 더 낫다'라고 설득했더니
삼성그룹에 공채로 입사했다. 일류대학 출신자들 속에서도 당당하게
인정받으며 일하는 모습이 또한 대견하다.
나는 아이들을 잡초처럼 키웠다. 내 스스로 잡초처럼 살아왔고, 그래서
잡초의 생명력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자녀를 자기 뜻대로 재단하고
다그치는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아이들을 못 믿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시야 안에 잡아두려고 한다. 그건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피곤하게 만든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만 있다면, 눈 딱 감고
풀어 기르자는 말이다.
아이들에게도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계획표를 짜주고 시간표를 짜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판단과
취향에 따라 세상을 마음껏 모험할 수 있도록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다. 자녀경영에도 벤처 정신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거칠게 풀어놓고
함부로 길러야 독립심 강하고, 건강하며, 생명력도 강한, 진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나는 이 촌동네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도록 했다.
다른 부모들처럼 극성스럽게 아이들을 볶아댈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집안 공기는 항상 침울했지만 아이들은 일부러라도 웃고 떠들 줄을
알았다. 나는 아이들을 잡초처럼 키웠다. 내 스스로 잡초처럼 살아왔고,
그래서 잡초의 생명력과 가능성에대한 믿음이 있었다.
@ff
대기업은 싫습니다
5년 저에 천안공장으로 한 청년이 찾아왔다. 지금도 별다를 게 없지만
그때의 미래산업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규모의 중소기업이었다. 직원공채 같은
건 부담스러워서 시도해본 적도 없었다. 자매결연을 맺은 공업고등학교에서
보내주는 아이들을 키워서 쓰곤 했다. 이렇다 할 학벌을 갖춘 고급인력이란
아예 욕심도 내지 않았다. 노력해봐야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절이라 이 청년의 방문은 더욱 의외였다. 가져온 이력서며 성적증명서를
보니 첫눈에도 매우 우수한 인재라는 판단이 들었다.
"박우열이라고 합니다. 한양대 기계공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고 올해 군대도
마쳤습니다."
"그래 찾아온 용건이 뭔가."
"받아주신다면 미래산업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반가움에 앞서 나는 그 속마음이 궁금했다. 저 정도의 조건이라면
대기업으로 달려가야 정상이었다. 한 번에 실패하면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반드시 대기업에 들어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태가 아닌가.
지금도 미래산업은 주변에 보이느니 허허벌판 아니면 공장뿐인 천안 외곽에
자리잡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조건으로 충분하다. 놀기 힘들고
장가가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이 청년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네 실력을 보니 대기업을 들어가도 충분할 것 같은데 어째서 미래를
찾아올 생각을 했나?"
"대기업은 싫습니다. 저는 비전 있는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에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기회 말인가?"
"제가 공부하고 제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유망한 중소기업에서
일한다면 저한테도 많은 기호가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대기업에는
경쟁자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당돌했지만 밉지 않은 녀석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허락했으면서도 나는
일부로 계속 질문을 던졌다.
"이 촌구석에서 일하기 답답하지 않겠나?"
"방해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느니 금상첨화 아닙니까?"
"자네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에는 회사가 너무 작지 않은가?"
"사실 저는 좀더 작은 회사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여기도 너무
커서 좀 불만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사옥도 멋있고, 사장님도 멋있고, 아무튼
저는 꼭 여기서 일해야 되겠습니다."
얼마 전 그 박우열이 장가를 갔다. 말주변도 없이 직원들 주례에 하도
시달리다 보니 이제는 아예 공식적으로 주례거절을 선언했던 바였다. 그런데도
박우열은 예의 넉살로 나를 구워삶았다. 내가 주례를 서지 않으면 결혼식을 안
하겠다며 협박했던 것이다. 평소의 성정으로 보아 박우열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그러니 울며 겨자 먹기로 주례를 허락할 수밖에.
결혼식 당일. 나는 예식장 구석에 앉아 수첩을 꺼내놓고 복잡한 머릿속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신랑 친구들이 내게 몰려왔다. 강연이다
인터뷰다 해서 한동안 꽤나 번잡을 떨었기 때문인지, 미래산업과 정문술이라는
이름이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는 듯했다. 더구나 신랑친구들도 대부분
비슷한 업계에서 일하는 녀석들인지라 대부분은 나를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마땅한 주례사 내용도 잡히지 않던 차에 그 녀석들과의 대화는 오히려
반가웠다.
"우열이놈, 미래에 가서 무지 출세했습니다. 동기들 중에서 아마 제일 팔자
좋은 녀석일 겁니다."
"자네들은 훌륭한 기업에서 좋은 대우받으며 일하고 있지 않나."
"회사만 크면 뭐합니까. 장래도 불투명하고 매일 그날이 그날입니다."
"미래산업이라고 뭐 다를 게 있겠나."
"에이, 그래도 우열이는 지금 과장 아닙니까. 저희들은 기껏해야 대립니다,
대리. 게다가 우열이는 팀장이니까 저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할 것 아닙니까.
동기들은 우열이를 제일 부러워한다니 까요."
그가 미래산업을 선택했던 것은 그저 단순한 객기가 아니라 나름대로 충분한
분석과 연구의결과일 것이다. 그 많은 중소기업 중에서 굳이 천안까지 내려와
미래산업을 선택한 것도 심상치 않거니와, 소위 말하는 대기업에서 그려질
자신의 인생지도와 미래산업에서 그려질 또 하나의 인생지도를 두고 그가
얼마나 고심했겠는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동기들이 모두 대기업으로만 향할 때 엉뚱하게도 박우열은 스스로 지방의
중소기업을 택했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기호가 더 낳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중소기업에서 성장하면 자기분야 이외의 것들도 접할 기회가 더
많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중소기업에서 성장하면 자기분야 이외의 것들도
접할 기회가 많아진다. 박우열은 기술개발 분야뿐 아니라 조직관리와 리더십
등 경영전반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했다. 박우열의 착상은
적중했다. 시셋말로 동기들 중에서 '가장 출세한 녀석'이 된 것이다.
그 녀석은 여러모로 나와 닮았다. 평범하고 편안한 것을 싫어한다는 점
말고는 욕심이 많은 점이나 저돌적이라는 점등이 특히 그렇다. 그를 보면 나의
젊은 날이 생각나서 흐뭇하다. 그 녀석도 나처럼 타고난 '거꾸로 경영인'이다.
"대기업은 싫습니다. 저는 비전 있는 중소기업에서 잃고 싶습니다." 그가
미래산업을 선택했던 것은 그저 단순한 객기가 아니라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기회가 더 많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동기들이 모두 대기업으로만 향할 때
엉뚱하게도 박우열은 스스로 지방의 중소기업을 택했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기회가 더 많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ff
포도밭의 철학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람을 재능이나 기질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뛰어난 엔지니어들은 잔머리를 굴리지 않기 때문에 아이처럼
순수하고 주어진 일에 모든 것을 걸기 때문에 무척이나 성실하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만 믿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가벼운 삶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나는 싫어한다.
언젠가 백정규 부사장과 나는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자네 처음 봤을 때 좀 실망했네. 사람이 영 히마리가 있어 뵈야지."
"그랬습니까."
"대학교수한테 부탁했으니 당연히 멋진 엘리트를 하나 보내주려나 보다
했지."
"공고출신이라 실망하셨겠군요."
"그래도 나는 자네가 진실 되고 성실한 사람이 어서 좋아하네."
백정규 부사장은 나의 분신과 같은 사람이다. 항상 내 곁에서 나의 부족함을
말없이 보완해주는 이등참모였을 뿐더러,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총괄하고 지도하는 최고의 엔지니어였다. 백정규는 내가 사람을 판단해야 할
때마다 늘상 떠올리는 바로미터다.
타고난 재능과 모험적 기질이 제대로 발휘도기 위해서는 진실과 성실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정의와 끈기가 뒷받침되지 않은 재능이란 반짝
빛났다가 영구히 사라지는 폭죽 같은 것이다. 일시적인 찬란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엉뚱한 창의력을 신뢰하는 만큼이나 우직한 성실성을 믿는다.
일하는 자의 행복을 아는 사람만이 좌절하지 않는다. 결과보다는 과정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구절 중에 '포도밭의 비유'라는 게 있다. 포도밭을 가꾸는 주인이
있었다. 수확철이 되어 일꾼을 모집했다. 그런데 오전부터 일을 시작했던
사람에게나 오후부터 시작했던 사람에게나 모두 똑같은 일당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것도 일을 늦게 시작한 사람부터 지급했으니 당연히 일꾼들 중에는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생겼다. 그러자 포도밭의 주인은 '물질적인 임금은
같지만 노동에서 느끼는 기쁨과 행복은 동등하지 않으니, 나는 매우 공평하게
처리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말하자면 일하는 기쁨과 행복은 조금밖에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어 비로소 공평해졌다는 뜻이다.
임금이라는 '결과'보다는 일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원지동 전원주택은 내 삶의 상징이며 자랑이다.
고즈넉한 청계산 자락을 뒤로하고 자리잡은 이 집은 내 꿈과 아이디어가
총동원된 작품이다. 어느 누가 찾아오더라도 감탄을 이끌어낼 만큼 모든 것이
아름답고 기능적이다. 그 집을 짓는 동안 내가 느꼈던 행복과 기대는
대단했다.
집을 짓는 동안 우리 가족은 별 수 없이 천안에서 잠시 살았다. 그래도
일요일이면 다니던 교회를 가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차를 몰고 서울에
올라왔다. 일단 서울에 도착하면 짓고 있는 집이나마 보고 싶어 몸살이 났다.
그래서 항상 일부러 멀리 돌아 원지동 집터를 꼭 한 번은 바라보고 지나가야
했다.
집이 완성되고 나서 한 일주일쯤은 잠을 못 이룰 만큼 감격스러웠다.
그렇지만 그 감격은 그걸로 끝이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10년을 살아온 집처럼
도로 시들하게 느껴졌다. 이 집과 관련해서 내가 가장 행복을 느꼈을 때는
온갖 아이디어를 쥐어짜던 1년 동안의 건축기간이었던 것이다.
집사람은 나에게 이제 그만 뒤로 물러나서 편안하게 살아보자고 한다.
나라고 그러한 유혹에 항상 의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일거리가 없어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 나는
어느 구두쇠 이야기를 생각한다. 끼니까지 걸러가며 평생 돈을 모은 구두쇠가
있었다. 나이도 먹고 돈도 모일만큼 모였다고 생각하자 그는 이제부터 즐기며
살다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날 밤 그 사람은 죽었다. 그를 살게 했던 것은
내핍과 긴장 그 자체였던 것이다.
미래산업은 이제 내가 없더라도 탄탄하다. 앞으로도 훌륭한 미래인들이 계속
그 탄탄함을 유지하고 키워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새벽 네시에 일어나
여섯시에 출근한다. 회사에는 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직원들을 못 믿어서도 아니다. 나는 단지 나를 위해서 일선을 지킨다.
일하는 즐거움과 과정의 행복을 공연히 포기할 이유는 없다. 나는 죽는 날까지
상상력을 동원하며 모험을 즐길 것이다. 마누라한테는 항상 이렇게 대답해주곤
한다.
"나더러 죽으란 말야? 이 재미있는 걸 왜 그만둬."
그러면 마누라는 말없이 웃으며 혀를 찬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 내 고집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일하는 자의 행복을 아는 사람만이 좌절하지 않는다.
결과보다는 과정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일하는
기쁨과 행복을 조금밖에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어 비로소
공평해졌다는 뜻이다. 나는 단지 나를 위해서 일선을 지킨다. 일하는 즐거움과
과정의 행복을 공연히 포기할 이유는 없다. 나는 죽는 날까지 상상력을
동원하며 모험을 즐길 것이다.
@ff
아이디어도 끈기다
기술개발에 있어서도 포도밭의 철학은 유효하다. 무조건 돈만 쏟아 붓는다고
기술축적이 착착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이 터져주어야
한다. 훌륭한 아이디어는 아주 순간적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아이디어들을 민첩하게 포착해서 실용저인 기술개발로
연결시켜야 한다. 그러나 아이디어란 신의게시처럼 순간적이고 우연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대학시절 종교철학과에 적을 두었던 나는 사실 학교공부에 젬병이었고
관심도 없었다. 졸업하기도 훨씬 전부터 나는 이미 5급 공무원이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시절 어떤 철학책에서
읽었던 철학 이론 하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양질전화(양질전화)의 원리'란 것이다. 예컨대, 물을 가열하면 점차로
뜨거워지지만 물이 끓는 것은 정확히 100도씨가 되어야 한다. 양적인 것들이
충분히 쌓여야 어느 한 순간의 질적인 변화도 생긴다는 논리다.
아이디어란 그런 것이다. 천재는 99프로의 노력과 1프로의 영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특히 기술개발로 먹고사는 우리네 같은
사람들에게 그런 말들은 크나큰 위로가 된다. 힘든 연구일수록 점차 지치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이게 뭣하는 짓인가'하는 회의가 자꾸 고개를 쳐들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낙관이다. '1프로의 영감이 터질 때가 다
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다시 분발하는 것이다.
진정한 창의력이란, 집중적인 관심과 노력을 통해 내부로부터 차츰
성장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떡두꺼비처럼 '응애'하면서 튀어나오는 신생아
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성공담들은 극적으로 미화되게 마련이어서 언제나 그
반대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말이다. 사실,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말처럼 자주 들으면서도 재미없는 이야기가 또 있겠는가. 그러나
"바라는 바를 항상 머릿속에 간절히 그리고 깊이 믿고, 열의를 다해 행동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폴 마이어의 성공철학은 분명한
진리다.
"아이디어도 끈기라고. 조금만 더 고생해."
내가 연구에 몰두하는 엔지니어들을 만날 때마다 등 두드리며 하는 말이다.
나는 군대시절 육군본부 통계과에서 근무했다. 마침 경제기획원 통계국에서
실시하는 인구센서스에 필요한 교육을 받으러 잠시 도안 경제기획원에 파견
나간 적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보았다.
전자식이라기보다는 기계식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 같은 매우 거대하고
시끄러운 컴퓨터였다. 원체 호기심이 강한 나로서는 컴퓨터가 그리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일 수 없었다.
우리는 수집한 각종 자료들을 그 컴퓨터를 이용해 집계하고 분류했다.
하나의 레코드는 하나의 종이카드에 펀칭함로써 기록되고, 컴퓨터는
검색조건에 따라 정밀한 갈고리를 이용해서 카드를 걸러낸다. 각각 한 사람의
인구정보를 담고 있는 수많은 종이카드들이 줄을 맞춰 지나가면 컴퓨터는
해당조건에 맞게 갈고리들을 세팅해서 거기에 걸리는 카드 수를 집계하는
것이다.
나는 컴퓨터의 순차적인 동작과 움직이는 방식은 같다. 매순간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정보와 착상들은 차마 집계하고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갈고리를 준비하는 일이다. 우둔한
끈기와 정확한 방향으로 세팅되어 있는 긴장, 그리고 그 긴장상태를 오랜 시간
유지하는 힘. 하나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수백, 수천
시간의 우직함이다. 아이디어도 끈기인 것이다. 진정한 창의력이란, 집중적인
관심과 노력을 통해 내부로부터 차츰 성장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떡두꺼비처럼
'응애'하면서 튀어나오는 신생아 같은 것이다. 우둔한 끈기가 정확한 방향으로
세팅되어 있는 긴장. 그리고 그 긴장상태를 오랜 시간 유지하는 힘. 하나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수백, 수천 시간의 우직함이다.
아이디어도 끈기인 것이다.
@ff
다르게 생각해야 '물건'이 보인다
꾸준히 생각하고 고민을 집중하는 것에도 물론 노하우가 있다. 무조건
애탈캐달 매달려만 있다고 문득 영감이 떨어져주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유연성도 필요하고 의식적인 환기도 필요하다.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지만
말되, 사면팔방을 우회하면서 발상의 전환을 꾀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정밀도를 요하는 기술분야에서는 오차율이 가장 큰 적이다. 미래산업의
주력제품인 '메모리 테스터 핸들러'라는 장비는 완성된 반도체를 검사해서
불량품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등급별로 분류하는 일을 한다. 이 핸들러를
만드는 데에는 이만여 개의 정밀한 부품이 필요하다. 그만큼 복잡하다는
얘기다. 미래산업은 백지의 상태에서 이 장비를 국산화했다. 난관이 많았음은
물론이다.
어려움을 해결할 때마다 우리는 항상 흡사한 과정을 반복했다. 죽어라고
고민하고 실험한다. 그래도 방법이 안나오면 실망한다. 그러다가 누군가로부터
획기적인 발상이 튀어나온다. 고생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으면 아이디어가
생겨나지 않는다. 물론 그 모든 고생들은 상상력을 가진 소수의 머리를 빌려
결실을 맺는다.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라는 것을 개발하려다 처참히 실패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았을 때, 우리는 축적된 기술을 다시 핸들러 개발에 도전했다. 그런
반도체란 워낙에 작고 예민한 물건이라 다루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여차하면 핸들링은커녕 망가뜨리기 십상이다.
조심하자니 느리고, 서두르자니 위험했다. 엔지니어들이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보아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낫겠다고
모두들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들과 나는 입장이 달랐다. 그것마저 포기하면
내겐 죽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당시의 내 상황이 꼭 그랬다.
내가 아무리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절박성은 누구 못지 않았다. 당연히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내게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탄창이었다. 여러 개의 반도체를 한꺼번에 정돈시켜 검사소켓에 정확하게
접속시킬 수 잇는 보조장치만 있다면 문제는 간단했다. 정밀할뿐더러 빠르지
않겠는가. 직렬에서 병렬과 발상을 전환하니 드디어 길이 보였다. 한국식
16병렬, 32병렬, 64병렬 테스트 핸들러는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PCB드릴링머신을 개발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전자부품용 회로가판에
필요한 수많은 구멍들을 자동으로 뚫어주는 장비였다. 당연히 회로도에 그려진
수많은 구멍들의 좌표를 정확하고 빠르게 기계에 입력시켜줘야 한다. 보통은
회로도 입력을 위해 초정밀카메라를 썼다. 그런데 광각에 따른 공차가 많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였다. 렌즈와 수직에 위치한 구멍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렌즈의 초점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공차가 심해졌다.
엔지니어들은 그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나 역시 잠자고 있을
때말고는 항상 그 문제만 생각했다. 또한 끊임없이 사고의 방향을 바꿔보려고
애를 썼다.
카메라를 여러 대 사용할 수만 있다면 문제는 간단했다. 또한 끊임없이
사고의 방향을 바꿔보려고 애를 썼다.
카메라를 여러 대 사용할 수만 있다면 문제는 간단했다. 그러나 몇천만
원짜리 장비 한 대를 위해 여러 대의 비싼 카메라를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카메라 한 대로 여러 대의 G과를 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했다.
해답은 스캐닝이었다. 기판이 움직이든, 카메라가 움직이든, 아무튼 어느
한쪽이 움직이면서 여러 장의 근접사진을 찍으면 되지 않겠는가.
신의 공평한 것은, 이러한 획기적인 발상도 죽어라고 고민하고 실험하는
과정이 없으면 결코 나와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획기적인 발상이 먼저 있다고
해도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면 항상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튀어나와 실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변수들을 거의 모두 경험하고 제어할 수 있는
상태에서 획기적인 발상이 나와준다면 성공은 시간문제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들이 나를 '기술학교 교장선생'이 되게 했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무엇이든 열심히 찾아 나가면, 언젠가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틀림없이 '물건'이 튀어나와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 놀이인가. 고생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으며 아이디어가
생겨나지 않는다. 물론 그 모든 고생들은 상상력을 가진 소수의 머리를 빌려
결실을 맺는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무엇이든 열심히 찾아 나가면, 언젠가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틀림없이 '물건'이 튀어나오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 놀이인가.
@ff
선한 것이 경쟁력이다--도덕 경영
@ff
선한 기업이 성공한다
이 땅에서 장사를 해먹으려면 사기꾼이 되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남들한테
욕먹지 않고 돈벌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돈 좀 벌었다고 하는 사람들
치고 구린 구석 하나쯤 없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정치'를 잘할 줄 알아야 돈도 버는 것이다. 물론 이미 번 돈을 지키고
불리는 일도 탁월해야 한다. 사실 많은 기업들은 기업 본래의 목적과 상관없이
재테크라는 미명하에 부동산 투기나 돈놀이를 일삼아 왔다. 그래서 큰
기업일수록 더 도둑놈 소리를 듣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거꾸로 경영'에 입각해서 다시 말해본다면, 믿음과 자율, 도덕은
회사의 일용할 양식이다. 듣기 좋은 공자 말씀이라고 비웃을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 공자 말씀을 따르다 보면 돈도 벌린다. 이 세 가지로 묶여 있는 기업은
튼튼하다. 어떤 어려움에도 쓰러지지 않고, 성공을 이루었을 때 더 높은
성공을 꿈꾸며 분발하게 된다.
이 세 가지가 없는 기업은 무너진다. '열심히 일해봐야 나는 맨 날
요꼴'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면, 자기가 다니는 회사가 현재 위험한 상태라고
짐작하면 대충 맞다. 이미 직원과 회사 사이에는 믿음도 자율도 도덕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미래산업에서는 사내 네트워크를 통해서 누구라도 재무구조를 열람할 수
있다. 자기가 벌어들인 돈들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다. 이렇게 서로를 공개하고, 그만큼 서로를 믿으며
일하자는 뜻이다.
기업 내에 믿음이 확보되면 이어서 자율이 생겨난다. 믿기 때문에 알아서들
움직이는 것이다. 잔소리하고 통제하지 않아도, 내가 일하는 만큼 투명하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일에 신명을 바치게 된다.
믿음과 자율이 자리를 잡으면 기업은 정직해지고 선해진다. 숨기고 속이기
때문에 매정해지고 이기적으로 흘러가는 것일 뿐, 사람들의 모임이란
근본적으로 정의롭고 선한 쪽으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착한 기업이 튼튼한 기업이고, 튼튼한 기업이기 때문에
돈도 잘 벌 수 있다는 것이다. 편법이나 부도덕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기업들도 우리 사회에는 많지만, 결국 역사와 국민들이 그들을 심판하고
응징한다.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비근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배신과 부도덕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그것이 상식으로 통하고, 이 사회에서
진정 성공하려면 그러한 상식을 인정하고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단다. 나는
도무지 그러한 태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도 착해보지 않고서 그저
착하면 당한다는 말만 무성하다. 그런 어리석은 말들이 어디 있는가.
나는 정말 착한 기업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악한 것이 상식이라면 그
상식으로부터 다시 한 번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거꾸로 경영의
진정한 목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말 거대한 상식을 거슬러보는 것. 그래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보는 것이다. '열심히 일해봐야 나는 맨 날
요꼴'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면, 자기가 다니는 회사가 현재 위험한 상태라고
짐작하면 대충 맞다. 이미 직원과 회사 사이에는 믿음도 자율도 도덕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착한 기업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악한 것이
상식이라면 그 상식으로부터 다시 한 번 벗어나고 싶었다.
@ff
기술개발주식회사의 횡재
미래산업의 주식 덕분에 부자가 된 사람은 많다.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 주식 때문에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기업들도 있다. '장은창투'는
미래산업 상장 이전의 초기주식에 투자해서 200억 가까운 차액을 남겼다.
기술개발주식회사도 역시 많은 돈을 벌었다. 특히 기술개발주식회사에 얽힌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다.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를 개발하던 시절이었다. 반도체 공정 중에서 몇몇
자동화되지 않은 분야가 바로 웨이퍼(Wafer) 검사공정이었다. 반도체의 가장
기본적 형태라도 할 수 있는 웨이퍼를 검사하는 일만은 반드시 현미경과
육단(육안)을 필요로 했다. 우리는 그 점에 주목했고, 위험한 만큼 기대이익도
크다고 판단했으므로 개발에 착수했다. 미래산업이 반도체 제조장비업체로
성장하기 위한 최초의 발돋움이었다. 결국은 실패로 끝났지만, 처음 우리가
가졌던 의욕은 대단했다. 다만 연구비 조달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기술개발주식회사'라는 곳이었다. 과학기술처에서
출자한 국영기업 성격의 벤처캐피탈 회사였다. 일단은 문전박대였다. 우리가
개발하려고 하는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라는 것을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찾아가 고집을 부리니 겨우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기술이라곤 금형 기술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 방면에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아서 테일러라는 미국인과 의기투합해서 'DS
코리아'라는 합작법인을 만들었다. 기계설계 분야는 백정규를 위시한 미래산업
식구들이 담당하고, 소프트웨어 쪽은 아도니스오 부치라는 필리핀
프로그래머를 데려와서 맡겼다. 육안을 대신해야 할 가장 중요한
머신비전(Machine-Vision)은 미국에 있는 'CCC 테크놀로지'에서 담당하기로
했다. 담당자를 붙들고 이러저러한 조건들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했지만, 내가 사업경험이 없다는 점과 자본규모가 영세하다는 이유를 들어
답변은 역시 거절이었다.
내가 하도 끈질기게 달라붙으니 담당자는 결국 내게 기회를 주었다.
임원회의에 참석해서사업설명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중앙 정보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내 특기는 브리핑이었다. 그때의 경험과 노하우를 십분 발휘해서 나는
아주 입체적인 브리핑 차트를 제작했다. 반도체 관련 업체들을 돌아다니며
설명에 필요한 실제 샘플이며 사진자료들을 구해서 궤도에 직접 붙였다.
공들인 보람이 있었는지 이원들의 반응은 제법 긍정적이었다. 결국 심사에
들어가기로 결정이 났다. 전자부의 안중식, 이한명 부장이 검토에
들어갔다. 그들은 매우 성실하고 치밀한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나를 다른 전문가에게 데려가 그들로부터 자문을 들을 정도였다. 나는
머신비전 전문가들이 근무하는 카이스트(KAIST)로, 서강대로 끌려 다니며 수도
없이 기술 설명을 해야 했다.
그들과 나는 6개월 동안이나 그 문제로 지지고 볶았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결론은 다시 기각이었다. 기운이 빠졌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다. 그만큼 당시의
상황은 절박했다.
기술개발주식회사의 간부라는 간부는 거이 다 만나다시피 했다. 여기서
거절당하면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 설득하고, 거기서도 거절하면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 애원하는 식이었다. 지독한 사람이라며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한 간부가 그런 나를 측은히 여겼던지 어느 날엔 가는 넌즈시 귀뜸을
해주었다.
"사장님이 모친상을 당하셨습니다."
내가 기술개발주식회사의 사장을 본 건 여러 번이었지만 실제로 대화를
나눠본 건 채 몇 번 되지도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무조건 사장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는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그곳에 홀로 앉아서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처음에는 달갑지 않은 눈치 더니 차츰 내 정성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내가 돌아갈 무렵에는 일부러 밖에까지 배웅을 해줄
정도로 마음을 열어주었다.
일주일쯤 지나니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한 번 사업설명을 해보라는
것이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이번에는 아예 그 방면 전문가이자 동업자인
아서 테일러까지 대동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이루어낸 성과들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토록 지독했던 그 사람들도 결국은 내 끈기에 굴복했다.
무담보투자 결정이 떨어진 것이다. 자그마치 2년 만이었다.
조건부 융자가 3억이었고, 일반 융자가 2억 5천, 그리고 투자가 1억
5천이었다. 조건부 융자라는 것은 국가의 기술자원자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쉽게 말하자면 실패했을 경우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이었다. 아무튼 당시
7억이라는 돈은 가뭄 끝에 만난 단비였다.
1980년대 중반의 일이었으니 어쨌거나 기술개발주식공사 쪽에서도 7억이라면
매우 큰 규모였다. 그러나 이미 말했던 것처럼 장비개발은 실패로 돌아가고 DS
코리아라는 합작법인도 폐업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야 말할 것도
없었지만, 기술개발주식회사의 입장에서도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DS 코리아가 성격상으로는 미래산업의 연구센터였지만, 법적으로는 엄연히
독립된 사업체였다. DS 코리아가 파산해버리자 그들로서는 더 이상 책임
추궁할 곳도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투자 결정에 관여했던 담당자들은
아예 나 보기를 불구대천의 원수 보듯 했다. 미안한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때의 내 심정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고, 우여곡절 끝에 미래산업은 다시 일어섰다. 나중에
기술개발주식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시에 나와
접촉하던 한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중에 절연에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만 어쨌든 내게는 고마운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사무실로 찾아온 그를 나는 반갑게 맞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사실은 제 입장이 좀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미래산업과 정문술이 이제 살 만해졌다니, 회사에서 옛날 일들을 다시
추궁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산업과 관계되었던 문제인 건 사실이지만, 그런
식의 일 처리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저히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물론 법적 근거도 없었다. 나는 좀 기가 막혔지만 구체적으로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건지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면목없는 소린 줄은 압니다만, 아무래도 조건부 융자금 3억은
상환해주셨으면 합니다. 법적으로야 어쨌든 내용으로야 DS 코리아는 분명
미래산업 산하 아니었습니까. 사장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위에서 닥달이
이만저만한 게 아닙니다."
다른 건 몰라도 도의적인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소리였다. 나는 십분
인정했다. 그 시절의 고통은 나에게 매우 극심한 것이었지만, 이 회사의
도움이 요긴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방법이 있다면 얼마가 되든지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더구나 당시 그 거래를 담당했던 사람이 인사상 불이익을 면할
수 없다니 어쩌겠는가. 그래서 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융자금 3억을 정 사장님 개인부채로 돌려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좋은 이자율을 적용해드리겠습니다.
이미 사라진 DS 코리아의 빚을 정문술 개인의 빚으로 전환해서 상환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다소 변칙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법과 관례를 떠나서 이거 기본적인 양심과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조건부 융자금 3억은 장기저리상환의 형태로 모두 갚아주었다. 그리고
미래산업을 법인으로 전환하면서 투자금 1억 5천을 산업주식으로 갚아주었다.
그때 주었던 액면가 5천 원짜리 주식이 상장 이후 30만 원을 오르내렸으니 그
차액이 기술개발주식회사에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준 것이다.
한번은 기술개발주식회사의 대표이사가 직접 나를 찾아왔다.
"정 사장님, 이거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회사 창업이래 최고 수입입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수백 억의 수입이 생겼으니 좋아할 만도 했다. 더구나
안 갚아도 되는 조건부 융자와 투자 금을 합한 4억 5천을 제외한 나머지 2억
5천의 부채도 결국은 모두 갚아주었다. 기술개발주식회사는 현재 미래산업 4대
대주주(대주주)중 하나이다. 그 중의 하나는 물론 나이고, 나머지 앞서 말했던
장은창투와 우리사주이니, 그 회사의 입장에서는 정말 대단한 투자를 했던
셈이다. 정문술과 미래산업의 이야기는 지금도 벤체캐피탈가(?)에선 최고의
미담사례로 회자되고 있단다. 흐뭇한 일이다. 내가 하도 끈질기게 달라붙으니
담당자는 결국 내게 기회를 주었다. 임원회의에 참석해서 사업설명을 해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거절당하면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 설득하고, 거기서도
거절하면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 애원하는 식이었다. 지독한 사람이라며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그토록 지독했던 그 사람들도 결국은 내 끈기에
굴복했다. 무담보투자 결정이 떨어진 것이다. 자그마치 2년 만이었다. 이미
사라진 DS 코리아의 빚을 정문술 개인의 빚으로 전환해서 상환해 주었다.
변칙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법과 관례를 떠나서 이건 기본적인 양심과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ff
중소기업 콤플렉스
나는 중앙정보부에서 18년 동안 일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겪으면서 나는
그들이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1980년에 나는 강제해직을
당했다. 그 당시 나는 참으로 외로웠다. 각별하게 지내던 사람들과 술이라도
맘껏 퍼마시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의 직위 앞에서 웃었을 뿐, 인간
정문술 앞에서 웃었던 것이 아님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강제해직 후 내가 겪어야 했던 것은 배신감만이 아니었다. 나의 공직생활은
나름대로 정직하고 성실했다. 그런 거짓웃음을 흘리는 것만큼 권력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나는 이후로도 숱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말 그대로 '도매금'이었다. 미래산업을 시작하면서 나는 결심했다. 정치나
권력의 냄새가 나는 곳을 향해서는 숨도 크게 쉬지 않겠노라고.
권력 앞에서 거짓웃음을 팔고 속으로는 권력을 증오하는, 그런 사람들을
지금도 나는 주변에서 자주 본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끝도 없이 권력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들, 그들이 욕하는 권력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사람들. 기업가들 중에는 특히 그런 사람이 많다.
'어쩔 수 없다'는 표현도 옳긴 옳다. 도장을 가진 사람들이 바라니까 해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풍토에서 기업을 하자면 내심 증오가 생겨나지 않을
도리도 없다. 물론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그 타성만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내가 보기 싫은 것은 바로 그 타성이다.
특히나 중소기업 사장들은 매우 바쁘다. 대기업에도 수시로 들락거려야 하고
관청에도 풍방구리처럼 들락거려야 한다. 언제나 중소기업은 풍전등화
신세이기 때문에 그렇다. 수십 년을 전전긍긍 버티다가도 힘 가지 사람들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져야 한다. 그래서 무슨 날만 되면 중소기업
사장들은 몸살이 난다. 인사 챙겨야 할 곳이 실수 없이 점검하는 것 자체가
일단 큰 일이다.
중소기업 사장들 중에는 골프를 잘 치는 사람이 많다. 나처럼 골프 못 치는
사람을 만나면 아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얼마 전엔가는 정말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정 사장은 그렇게 골프를 못 치면서 어떻게 성공했어 그래."
악순환이라고 생각한다. 중소기업이 권력에 기대어 버티기 때문에 권력이
끊어지면 무너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다면 지금부터라도 바뀌어야 옳다.
기업은 기업행위로 승부 해야 한다. 유통업체는 물류혁신으로, 제조업체는
기술혁신으로 버텨야 한다. 어째서 자기가 가진 것은 도외시하고 남의 것에
기대어 버티려고 하는가.
중소기업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죽는소리다. 국가정책이 어떻고,
시장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마이다. 자기 회사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무슨 탓이 그리 많은가. 어째서 자기 호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이 없는가. 그럴 때마다 나는 반대로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골프를 잘 치니 맨 날 사업이 그 모양이 아닌가.'
사지 않고 못 뱃길 물건을 만들면 국내 시장이 망가져도 외국에서 사준다.
환경에 문제가 있다면 무시하자는 것이 내 경영철학이다. 아스팔트에도
민들레는 피어난다. 나라가 밀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기업이 과연
기업인가. 무슨 놈의 자본주의가 그런가.
기업에 잉여가 있으면 퍼다 주면서 뒤로 욕할 것이 아니라, 기업에
재투자하고 직원들에게 분배하라. 기업은 여러 사람의 살뜰한 꿈들이 모여
굴러가는 유기적 생명체인 것이다. 사장은 그 꿈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제발 이지, 중소기업 사장들이여, 정치하지 말고 경영하라. 기업의
목숨을 담보로 함부로 장난치지 말라.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무슨
탓이 그리 많은가. 어째서 자기 회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이 없는가. 그럴
때마다 나는 반대로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골프를 잘 치나 맨 날
사업이 그 모양인가'
@ff
IMF, 막고 품어라
언젠가 나는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영국의 성 어거스틴 목사에 대해들은 적이
있다. 런던 근교에서 성 어거스틴 목사가 부흥회를 했다고 한다. 설교를
마치자 마자 한 부인이 그에게 질문했다.
"목사님께서 앞으로 72시간, 사흘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면, 지금부터 사흘
동안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질문을 받은 성 어거스틴 목사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수첩 속에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습니다. 몇 시부터
누구를 만나고, 또 몇 시에는 심방을 가고, 몇 시에는 밥을 먹고, 몇 시에는
잠을 자고 하는 평범한 스케줄이지요. 제가 사흘밖에 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저는 이 수첩에 적힌 그대로 할 것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항상 오늘에 충실하고 자기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복음이다.
경제사정이 악화되었다고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몸을 사리는 기업들이 요즘
참 많다. 그저 아끼고, 미루고, 없애고, 참는 소극적 방식들만 횡행하고 있다.
그런 방식으로는 IMF를 극복할 수 없다. 공세적이고 적극적인 대응방식들이
필요하다. 권투에서는 '최대의 공격은 최대의 방어'라는 말을 한다. 어려운
때일수록 성장과 발전을 꿈꿔야 한다. 도약의 불씨를 꺼뜨릴 것이 아니라 더
보살피고 키워내야 한다.
그래서 요즘의 해직바람이 나는 더 못마땅하다. 자르기보다는 오히려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워낙에 말도 안 되는 경제상황이다 보니,
회사마다 각각의 사장과 이유들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수지가 안 맞는다면 머릿수라도 줄여야지 별 수 있겠는가. 다만 너무 과격하고
대책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또 어느 정도는 필연 아닌 유행의 성격마저
띠고 있다는 게 문제다.
요때다 싶어, 사람수 줄이고 업무강도를 높이거나, 명분도 없이 다짜고짜
임금 낮추고, 직원들이 항의하면 무조건 고통분담이니 IMF니 들먹이는
기업가들은 정말 없는지 솔직하게 따져봐야 할 일이다. 조금 힘들다고 평생을
함께 고생했던 사람들을 함부로 내친다면, 남아 있는 어떤 직원이 그 회사와
사장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욕심을 버리고 조금만 긴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들이 요즘 들어 특히 아쉽다.
기업이 '도약의 불씨'를 지키고 키우는 방법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더
열심히 기술개발하고 더 열심히 인재를 키워내는 것뿐이다. 침체를 침체로
맞서는 것은 우울한 미래를 약속하지만, 침체를 열정으로 맞서는 것은
희망적인 미래를 약속한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말은 곧 '오늘을 열정적으로
산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또한 '오늘을 열정적으로 산다'는 말은 '미래를
창조한다'는 말과도 같은 뜻이다.
나는 동물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얼마 전 TV에서 시베리아 호랑이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내가 그것을 보면서 놀란 것은,
사냥개들이 호랑이에게 용맹하게 달려들더라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냥개가 호랑이에게 저토록 공세적일 수 있는 것은 뒤에 총을 든 사냥꾼들이
있음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사냥꾼이 없는 사냥개는 호랑이의 밥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IMF 시대의 기업들이 이 사냥꾼 없는 사냥개 신세라고 생각한다.
기대고 의지할 응원군은 더이상 없다. 오로지 홀로 호랑이와 싸워야 하고
버텨야 한다. 사냥꾼 없이 혼자 싸우는 법을 익혀야 한다. 몸을 사릴 때가
아니다. 부단히 노력해서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오늘에 발을 딛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덤벼야 IMF는 극복될 수 있다.
전라도 사투리로 '막고 품어라'라는 말이 있다.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아예 물길을 막고 바닥이 보이도록 물을 퍼낸다는 뜻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오늘의 IMF도 기회라면 기회다. 이럴 때,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정부의 도움 없이도 기업 자체의 능력과
판단만으로 세계 속에서 올곧게 성장할 수 있는 기업들로 거듭나야 한다.
허리띠를 졸라매자, 원가절감에 사력을 다하자 등등의 소극적인 방식으로 결코
IMF를 극복할 수 없다. 막고 품어라. 요때다 싶어, 사람수 줄이고 업무강도를
높이거나, 명분도 없이 다짜고짜 임금 낮추고, 직원들이 정말 없는지 솔직하게
따져봐야 할 일이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말은 곧 '오늘을 열정적으로
산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또한 '오늘을 열정적으로 산다'는 말은 '미래를
창조한다'는 말과도 같은 뜻이다. 전라도 사투리로 '막고 품어라'라는 말이
있다.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아예 물길을 막고 바닥이 보이도록 물을
퍼낸다는 뜻이다.
@ff
내 인감 좀 빌려주게
미래산업이 97년도 최우량 기업으로 선정되었을 때, 나는 눈시울을 적셨다.
외도하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던 미래산업이 결국은 옳았다는
의미였다. 정치 판에 추파를 던지거나 특혜융자 혹은 부동산투기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잘 나가는 회사를 만들 수 있다는
우리들의 신념이 검증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도덕 경영이란 말을 그리 어렵게 생가하지 않는다. 기업이 기업답지
않은 일을 할 때 부도덕해지는 것이고, 기업이 가장 기업다운 일을 할 대 가장
도덕적이 되는 것이다. 기술 개발해서 제품 생산하고, 제품 판매해서
직원복지와 또 다른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기업다운 기업의 일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불신이다. 직원이 사장을 믿지 못하고,
사장이 직원을 믿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직원은 서로간에 믿지 못하고 국민은
기업을 믿지 못한다. 결국 이러한 불신 때문에 기업들이 무너진다. 기업이
가장 기업다운 일을 할 때 숨길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도덕 경영, 신뢰
경영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자판기 커피를 하도 좋아하다 보니 아침에 출근하면 항상 여직원이
커피를 뽑아다 준다. 항상 그러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 여직원에게 생각날
때마다 만 원이든 이만 원이든 챙겨서 준다. 처음에 그 여직원은 한사코
사양했지만 내 의도를 설명하고부터는 고맙게 받아간다. 커피자판기는
여직원회에서 운영하고 그 수익금은 공동기금으로 활용된다. 200원이든 200억
원이든 공금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나는 단 한 푼도 회사돈을 마음대로 쓰지 않는다. 내가 회사로부터 가져갈
수 있는 돈은 월급뿐이다. 회사돈은 철저하게 기술개발과 직원복지에 쓰인다.
로비를 하지 않으니 비밀장부 같은 것도 없다. 탈세하는 재주도 없다. 너무나
간단해서 쉬쉬할 것도 없다.
그러니 피차간에 의심할 건덕지가 없다. 서로 마음놓고 믿을 수가 있게
된다.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라'고 말해도 기실 그 규모가 대수롭지 않다.
사전결재만 받지 않을 뿐, 적절한 지출규모에 '다라는 대로 주라'는 배짱도
생기는 것이다.
나에게는 인감이 없다. 내 인감은 경리과 대리가 가지고 있다. 내 집문서도
대리가 가지고 있다. 어려웠던 시절에 맡겨두었던 것을 어쩌다 보니 아직도
찾아가지 못했다. 경리과에는 인감대장 같은 것도 없다. 내 인감이 어떻게
쓰이는지 잘 알 수 없지만, 허투루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다.
한번은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인감이 필요했던 적이 있었다.
"별일 없으면 내 인감 좀 하루만 빌려주시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우스웠다.
경리과 직원들과 나는 한참이나 같이 웃었다. 어이없는 실언 때문이기도
했지만, 철저한 믿음에 대한 감격의 웃음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불신이다. 직원이 사장을 믿지 못하고, 사장이 직원을 믿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직원은 서로간에 믿지 못하고 국민은 기업을 믿지
못한다. 결국 이러한 불신 때문에 기업들이 무너진다.
@ff
도대체 신랑이 누굽니까
미래산업에는 소위 '빽'으로 들어온 사람이 없다. 사장이나 간부의 친인척
고용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다. 언젠가 아내는 내게 막내처남의 장래문제를
상의해왔다. 막내처남이 갓 대학을 마쳤는데 아직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새겨듣자면, 내가 좀 데리고 있어 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당연히 펄쩍 뛰었다.
그 다음날에는 큰처남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다시 좀 생각해주면 안
되겠느냐는 얘기였다. 민망했지만 나는 역시 거절했다. 처남은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어려웠던 시절에 내게 돈을 빌려주기도 했던 처남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직원들과 한 약속을 함부로 깨뜨릴 수는 없었다. 처남은
지금까지도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한다. 내 입장을 이해해줄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몇 달 전, 마지막 남은 막내녀석을 장가 보냈다. 마침 그날은 우리 회사
직원의 결혼식 날이기도 했다. 나야 당연히 아들 결혼식을 지켜야겠지만
직원들은 사실 난감한 눈치였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 불필요한
경조사에 불려 다니는 것을 나부터가 싫어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분명히
말했다.
"내가 장가가는 것도 아니니 제발 신경들 쓰지마. 와도 안 반가우니까."
이런 번다한 인사치레들을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웬만한 직원들이라면
모두 안다. 이번 막내의 결혼식에는 특히 아무도 오지 않기를 바랐다. 발 넓은
경영자랍시고 시끄럽게 위세 하는 꼴을 사돈집안에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쪽은 바깥사돈 혼자서 검소하게 꾸려온 집안이었다.
아무튼 아들의결혼식에 참석한 직원들은 얼마 안 되었다. 상사경조사에
빠져도 부하직원 경조사에는 안 빠지려는 회사 분위기 탓도 있었다. 그래도
창업 때부터 나를 도왔던 몇몇 간부들은 늦게나마 나타났다 끝까지 모른
척하기가 아무래도 불편했던 모양이다. 나를 잘 안다는 백정규 부사장은 직원
결혼식에 나를 대신해 참석하느라 안 왔지만, 정 과장과 신 상무가
피로연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아들내외는 이미 친구들과 어울려 자리를 뜨고
없었다.
"사장님, 축하드려요."
"어, 그래 고맙구먼."
"신랑이 참 잘났습니다."
뭔 소린가 싶어 바라보니, 멀끔하게 차려 입은 다른 녀석을 보고 그러는
것이다. 무안해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심 어이가 없었다. 신
상무야 경력으로 들어온 사람이지만 정 과장이라면 십 몇 년 세월을 내 곁에서
동고동락했던 창업멤버가 아닌가.
사실 우리 집에 들어와 가족들을 만나본 사람이라곤 백정규 부사장이
유일했다. 풍전기공에 합류하고 싶다고 처음 나를 찾아왔던 때였으니 가족들
얼굴을 제대로 봤을 리도 없다. 그들이 내 아들놈의 얼굴을 모르는 건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 내 아내와 아이들이 회사를 찾아왔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연초에는 분당에 있는 미래연구센터 직원들이 우리 집에 인사를
오려했던 적이 있었다. 아무리 만류해도 부득불 오겠다고 우기길래 나는
시간에 맞춰 아내와 함께 청계산엘 올라갔다. 문을 잠그고 집을 비운 것이다.
성격이 별난 탓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사장의 장성한
아들이 회사에 자주 들락거리면 직원들은 수군대게 마련이다. 우리의
기업풍토에서라면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다. 누구라도 열심히 일하면 사장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지원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다. 우리 직원 중 누군가는
틀림없이 나의 뒤를 이어 곧 대표이사가 될 것이고, 또 다른 이가 그의 뒤를
이을 것이다. 직원들을 공연히 헛갈리게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약간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내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능력과 개성을 고려하지 않고, 기업이랍시고
무조건 회사를 물려주려는 기업가들이 주변에는 너무나 많다. 그것은
아이들에게도 불행이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부모가 박탈하는 셈이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유산은 독약이다'라고 말해주곤 한다. 사내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애비가 물려준 돈으로 살겠느냐는 얘기다. 스스로 겪어가며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다. 많은 것이 준비된 상황에서 시작하는 인생은
지레 늙어버린 인생이다. 내 아이들이 일찍 늙어버리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내가 장가가는 것도 아니니 제발 신경들 쓰지마. 와도 안
반가우니까" 우리 직원 중 누군가는 틀림없이 나의 뒤를 이어 곧 대표이사가
될 것이고, 또 다른 이가 그의 뒤를 이을 것이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유산은
독약이다'라고 말해주곤 한다. 사내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애비가 물려준
돈으로 살겠느냐는 얘기다.
@ff
이제 '본전생각' 좀 버립시다
요즘 증권가에서는 미래산업이 또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 증시 사상
최초로 주식 액면분할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액면가 5,000원이던 주식이
액면분할을 통해서 100원으로 낮아졌다. 1/50이라는 과격이라는 파격적
분할비율이다. 이 액면 100원짜리 미래산업 주식 한 장의 가격은 1998년 3월
12일 현재 4,220원이다.
액면분할이란, 현재의 5,000원짜리 1장의 증권을 분할비율에 따라 여러 개의
소액증권으로 나누는 것이다. 해당기업의 자본금은 증감하지 않고 오로지
주식수를 늘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20만 원으로 미래산업 주식 1장을 사던
주식투자자가 같은 돈으로 50주를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200, 300만
원을 쥔 소액투자자들도 이제는 미래산업의 주식을 여러 주 보유할 수 있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의 액면분할은 구체적으로 국가경제에 도움이 도리 수도
있다. 주식유동성이 늘어나고 개인투자자의매수세가 유입되면 전체적인 시가
총액이 증가하기 때문에 그만큼 M&A 비용은 커진다 IMF를 맞아 국내기업들이
허약진 틈을 노려 최근에는 외국 펀드들의 적대적인 인수, 합병 노력이
거세졌다. 액면분할은 외국자본의 불순한 침략을 저지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미래산업이 액면분할을 시도한 것은 물론 주가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액면분할을 하면 주식거래량이 대폭 늘고 주가도 다시 올라가
기업가치를 더욱 높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기업
공개념의 확대에 있다. 주식의 집중을 막고 보다 민주적인 주식거래를 유도할
수 있다. 주식의 소수 집중을 막고 미래산업의 동업자를 더욱 늘릴 수 있게
된다.
주식이 어느 정도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가급적이면 좀더 미래지향적인 동업자들을 원한다. 미래산업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가족들이 자꾸 늘어났으면 좋겠다. 우리는 주식배당률을 높이는 것으로
그들의 애정과 관심에 보답할 작정이다. 올해 미래산업은 국내 상장사 중 최고
수준인 액면 기준 65%의 배당을 단행했다. 직원복지 다음으로 내가 생각하는
자선사업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기업은 기업행위만을 통해서 충분히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사실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의 나라에서 절대적인 기업 공개념을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기업가가 자기 회사를 키우기 위해 그 동안 쏟아 부었던
노력을 생각하면 사실 기업 공개념은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린다. 시셋말로
'본전생각'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이 성장하는 데 있어 사장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사장 하나의 노력보다는 직원전체의 노력이 훨씬 컸을 것이고, 직원 전체의
노력보다는 국가와 국민들의 보이지 않는 배려가 더욱 컸을 것이다. 기업이
성장하면 당연히 사장과 직원들에게 응분의 피드백이 생긴다 국가와 국민들도
그 피드백을 배당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회사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장의
손아귀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기업이 직원 전체의 공동소유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기업 공개념은
시작된다. 또한 기업은 국민 전체의 공동소유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기업
공개념은 완성된다. 미래산업은 아직 기업 공개념의 완성 단계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제부터 시작일 뿐이다. IMF를 맞아 국내기업들이 허약진 틈을 노려
최근에는 외국 펀드들의 적대적인 인수, 합병 노력이 거세졌다.
액면분할은 외국자본의 불순한 침략을 저지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기업이
직원 전체의 공동소유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기업 공개념은 시작된다.
또한 기업은 국민 전체의 공동소유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기업 공개념은
완성된다.
@ff
사업은 외로운 예술창작이다--창조 경영
@ff
자네 복싱 좋아하나?
나는 권투를 좋아한다. 프로권투 신인왕전에 매번 참가한다는 어느 중년의
의사처럼 내가 직접 권투를 즐긴다는 뜻은 아니다. 이렇다할 경기라면 그저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정도의 권투팬 이라는 이야기이다. 요즘이야 농구다
야구다 해서 복싱팬들이 많이 줄었지만 몇 년 전가지만 해도 문성길, 유명우
같은 유망주들의 경기가 제법 인기를 끌었다.
대기업에서 멀쩡하게 직장생활 잘하던 후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와서는 창업을 하겠다며 조언을 구했다. 반도체에 재활용 사업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름대로 시장조사도 자세하게 해보고 여기저기 견학도 꽤
다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엉뚱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자네 복싱 좋아하나?"
내가 조언을 해줘야 한다면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영자라면 권투에 임하는 복서들의 마음가짐을 배워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복싱은 특히 기업경영과 닮아 있는 스포츠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가지게 되는 기대감이나 의욕은 모두가 똑같다. 다만 절망과 고독을
함께 준비하고 잇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늦깎이 사업가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틈새를
개척하는 '거꾸로 경영'이란 말 그대로 동지가 없는 외로운 실험이다. 모든
것은 나의 판단과 결정에 달려 있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완전히 내 몫이다.
복서의 고독한 투혼을 배워야 버틸 수 있다. 거꾸로 경영이란 그런 것이다.
성공한 선배에게 그럴 듯한 경영 노하우라도 얻어들을까 싶어 찾아왔을 그
친구가 의아스런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권투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른 스포츠라면 하는 것도 보는 것도 별룬데, 권투 하나는 무지
좋아하네."
"...."
사각링은 복서들에게 천국이며 지옥이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승리하며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패배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권투이다. 물론 무승부라는 것도
있긴 하지만, 여전히 선수들은 아무런 도움도 없이 오로지 혼자 힘으로
상대방과 싸우고 자신과 싸워야 함에는 변함이 없다.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항상 승리와 패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중간한 생존에 만족하는
경영자라면 그는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기술개발을 생명처럼
여겨야 하는 벤처기업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기술개발에 차선은 없다.
벤처기업은 항상 남들보다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투에 임한 복서들처럼 오직 승리 아니면 패배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시작부터 실패를 염두에 두는 경영자는
적다.
"코너에서 매니저가 아무리 약을 써보게. 매니저는 결국 아무 것도 몰라.
당장 나는 피 튀기며 싸우고 있는데 제까짓 것들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 그런 소리나 듣고 있다간 한 순간에 쓰러져. 언제나
혼자라는 걸 명심하게. 외롭고 고통스럽지. 더구나 자넨 늙은 복서 아닌가.
쓰러트릴 확률보다는 스러질 확률이 더 많겠지. 자네도 사업을 하려면 권투를
자주 보게."
내가 권투경기를 통해 지켜보고 있는 것은 복서들의 주먹질이 아니다.
복서들은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며 주먹을 날리지만, 결국 그들은 스스로의
고독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승세를 타고 있을지라도 복서들의 얼굴은
항상 절망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1라운드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그들은 각각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행복한 혼자가
아니라 아주 고통스러운 혼자인 것이다. '거꾸로 경영'이란 말 그대로 동지가
없는 외로운 실험이다. 모든 것은 나의 판단과 결정에 달려 있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완전히 내 몫이다. 복서의 고독과 투혼을 배워야 버틸 수 있다.
복서들은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며 주먹을 날리지만, 결국 그들은 스스로의
고독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ff
벤처는 고독한 것
나는 평소에 과묵한 편이다. 특히 집에 있을 적에는 거의 말이 없는 편이다
그런데 아내와 아이들이 신기해하면서도 재미있어 하는 나의 모습이 있다.
권투경기를 시청할 대의 내 모습이다. 유독 권투경기를 볼 때만은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헛손질을 하거나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게 된다. 경기가 끝나면 나는
제일 먼저 화장실을 찾는다. 가족들 얼굴 보기가 무안하기 때문이다.
내가 프로권투를 보면서 쉽게 흥분하는 것은 나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한 판의 권투시합은 내가 걸어온 길고 걸어가야 할 길은 요약 판이다.
경영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외로움이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을
때나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 때, 경영자들은 세상에 오직 나 혼자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어떠한 조언과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독을 참는 능력이라는 것은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찾아내는 능력과도 같은
말이다. 쓸모 없는 고난은 없는 법이다 .어떠한 고난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고 배우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도 참고 견뎌낸 다음의
이야기이다. 나에게 경영자의 제1덕목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고독을 참는
능력을 말하겠다.
창업과 관련해서 내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벤처라는 것을 오해하고
있다. 벤처사업이라는 것을 아이디어와 순발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떼돈을 벌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런 조급한 생각으로 벤처사업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모험심만 가지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적다.
정작 필요한 것은 진득한 지구력과 인내심이다. 앞으로 닥쳐올 엄청난 양의
환난과 고독을 참고 견디면서도 언제나 난간과 희망을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벤처리더인 것이다.
권투는 또한 우리들에게 인내가 최선이라는 점을 가르쳐준다. 조급한
생각으로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면 헛손질이 많아 힘이 빠지게 되고, 결국은
케이오(K.O.)는커녕 오히려 상대방의 기습에 당하기 십상이다. 다소
지루하더라도 정석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잽을 무시하고 큰 손짓만 좋아하는
권투선수들은 케이오 당할 확률이 높다. 욕심 때문에 허점이 생기는 것이다.
벤처사업을 한다는 친구들은 '대박 한번 터져야 할 텐데...'라는 말을 자주
한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만으로 '대박'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꾸준한
기술축적과 인재양성에 진자 대박이 나온다. 조급하고 욕심이 많을수록 제
스스로 쓰러질 확률이 높다.
"왜 돈 좀 벌었다고 외제차 굴리면서 룸살롱이나 다니는 젊은 친구들
있잖나. 소위 벤처사업 한다는 친구들이 재수 좋게 돈 좀 벌고 나면 다 그리
되는 거지. 언제 카운터 펀치가 날아올지 모르는 건데 말야. 사업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안도하면 안 되네. 권투나 사업이나 안정은 없는 거라고 생각하게."
그 친구는 나로부터 구체적인 창업정보라고는 눈꼽만치도 얻어 가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다 준 셈이었다. 그는 그로부터 얼마 후
실제로 회사를 차렸고 한동안은 제법 잘 나간다는 소문도 들렸다. 얼마 후
어느 강연장에 연사로 참가했다가 그를 우연히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고 나자 그는 습관처럼 IMF타령을 쏟아내었다.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때 권투 얘기만 하시길래 좀 시큰둥했습니다. 이제야 사장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장님께서 해주신 권투 얘기가 이런
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사업에 안정이란 없다. 긴장을 풀고 방심하는 순간 카운터 펀치는 예외 없이
날아든다. 끝없는 도전과 승부 욕만이 기업을 살게 한다. 상대를
케이오시키거나 마지막 공이 울릴 때까지 권투선수들은 안심할 수 없다.
케이오승이나 마지막 공은 기업인들에게 죽는 순간을 의미한다. 죽는 순간까지
기업인은 항상 위험하다. 눈앞의 알량한 성공을 부정하고 기꺼이 고난을
기다려라. 벤처란 늘 고독한 것이다. 정작 필요한 것은 진득한 지구력과
인내심이다. 앞으로 닥쳐올 엄청난 양의 환난과 고독을 참고 견디면서도
언제나 낙관과 희망을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벤처리더인 것이다.
사업에 안정이란 없다. 긴장을 풀고 방심하는 순간 카운터 펀치는 예외 없이
날아든다. 끝없는 도전과 승부 욕만이 기업을 살게 한다. 벤처란 늘 고독한
것이다.
@ff
경영하지 않는 경영자들
2년 전, 인간개발연구원에 있다는 한 지인(지인)이 날 찾아왔다.
인간개발연구원에서 매주 한번씩 경제인 조찬모임을 하는데 다음 회에 나더러
강사로 와달라는 것이다. 얼핏 들으니 그럴 듯 했지만 사실 배운 것도 짧고
말도 못하는 내가 그런 곳에 갔다가 무슨 망신을 당하랴 싶어서 처음에는
정중히 거절했다.
"잘 모르시나 본데, 다른 분들은 이 자리에 초청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미래산업 정 사장님께서 나와주신다면 모두들 아주 좋아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런 분들 앞에서 감히 무슨 말을 하겠소."
"사장님께서 겪어오신 이야기나 경영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점 같은
것들을 그냥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는지라 별 수 없이 승낙은 했지만 사실 남들 앞에서
강사연하며 서본 적이 없는 인생이라 저으기 걱정이 되었다. 더구나
인간개발연구원 회원으로 있는 내 친구가 소문을 듣자마자 나를 들볶아대기
시작했다. 강연도 처음이고 그런 자리도 처음이다 보니 혹시나 실수해서
무안이나 당하지 않을까 싶어 자기가 지레 안달이 났던 것이다. 나름대로
충고를 한답시고 하도 법석을 떠는 통에 도움은커녕 나는 더 초조해졌다.
막상 당일 아침에 가보니 사회를 봐야 할 연구원장은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나를 무시하는 태도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를 섭외 했던
사람이 원장한테 잔소리를 좀 들었던 모양이다. 돈 좀 벌었다고 아무나 강사로
초빙하면 이 모임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이다. 사실 그곳 강사로 초빙되는
사람들은 내로라 하는 정계, 재게 거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원장이 하도 오지 않으니 급하게 다른 사람이 나와서 허둥지둥
사회를 보았다.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지만 이왕 허락한 것이니 최선을
다하리라 작정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유식한 소리라곤 애초에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들이라고는 그 동안 기업을 하면서 겪었던
일들과 그로부터 얻었던 대단치 않은 깨달음 들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체계적으로 이야기할 줄 모르는 나는, 육두문자까지 마구 섞어가며 되는대로
떠들 수밖에 없었다.
강연 도중에 자꾸만 사람들이 웃길래 나는 속으로 '비웃는구나' 하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강연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놀라운
일이었다. 강연 도중에 도착한 연구원장은 나중에 나를 찾아와서 진심으로
자신의 무례함에 대해 사과했다.
"강연 정말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재미도 있었구요. 이래봬도 벌써 9백
회가 넘은 조찬강연입니다. 그런데 오늘처럼 기립박수가 터져나온 건 정문술
사장님이 꼭 세 번째랍니다."
그때 내게 쏟아지던 기립박수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가진 현장성 내지는 진실성에 대한 환호였다. 나주에 알고 보니
이 모임에서 하는 강연이란 것이 그저 그런 점잖은 소리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이 바뀌어도 강연의 주제나 성격 역시 반복되는 것이 많았다.
정치인이나 행정관료가 나오면 보통 정책설명이 강연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마저도 해당관청의 자료를 보거나 신문만 신경 써서 읽어도 금세 알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경영인들이 강사로 나와도 사실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살아 있는 소리라기보다는 대개 비서실에서 작성해준 원고를
읽게 마련이었다. 그런 점잖은 자리에서 내가 앞뒤 없이 마구 떠들어대었으니
사람들이 재미있어 할 수밖에.
요즘도 나는 한 달에 몇 번씩이나 각종 모임과 회합에 초청을 받는다.
그렇지만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절하거나 은근슬쩍 무시해버리고 만다.
관청에서 소집하는 기업정책 세미나에도 가급적이면 불참한다. 정 들어두어야
할 내용이라면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구해서 듣는다.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재미가 없고 지루하기 때문이다.
물론 경영일선에서 일하다 보니 여러 가지 사정상 울며 겨자 먹기로
참석해야 할 때가 없지는 않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항상 봐야하는
단골손님들이 있다. 무슨 무슨 유명 짜한 모임이라며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수선스럽게 악수하기 바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거의 노골적이다.
강사에게 질문하는 것을 빌미로 강사를 어떻게든 자신의 비즈니스에
엮어보려고 하는가 하면, 강연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명함 도리기에
정신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참 보기가 싫다.
정치계도 마찬가지겠지만 경제계에도 수많은 조찬모임이니 연합회니 하는
것들이 있다. 나도 그런 모임에는 몇 번 연사로도, 방청객으로도 참여한 바
있다. 실지로 유용하게 활용될 귀중한 정보를 그런 모임을 통해 얻는 경우도
많다. 다마 s서로 얼굴이나 익혀두었다가 필요할 때 득이나 보자는, 일종의
사교모임 같은 자리들이 불만이라는 것이고, 멀쩡한 정보 세미나를 그런
식으로 변질시키는 얄팍한 비즈니스맨들이 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런 경영자들을 보면 어쩌며 그토록 한가할 수 있는지 신기하게만
여겨진다. 물론 그들에게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이게 다 비즈니스고
사업이다'라고 말이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무슨 비즈니스가 경제현장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이런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말이다.
간혹 얼굴과 손목으로만 장사하려는 경영자들이 있다. 그 집안이야
들여다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들에게 관심 있는 것이라면 기껏해야
정부지원금이나 정책정보 나부랭이들일 것이다. 덩치만 크고 속으로는 잔뜩
곯아버린 껍데기 기업들의 일용할 양식이 보통 그런 것들 아니었던가.
나는 정책과 특혜 좋아하다간 기업 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1980년대
중반에 '수입선 다변화 정책'이란 것이 시행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외국제품을
목록별로 분류해서수입을 규제하고, 결과적으로 국내 기업들의 내수경쟁력을
키워주겠다는 내용이다. 신청만 하면 눈엣가시 같던 외국경쟁사 장비들을 이
땅에서 몰아 낼 수 있는 모처럼의 호기였다.
나는 '수입선 다변화 정책'을 거부했다. 가장 먼저 고객이 불편해질 것이
뻔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장비가 훨씬 뛰어나다면 당연히 외국의
장비를 써야지, 애국한답시고 엉터리 국산 장비를 울며 겨자 먹기로 쓰다간
생산성도 떨어지고 국가경쟁력도 떨어질 것 아닌가. 내가 돈을 벌 수는
있겠지만, 고객들에게 욕을 먹는 것 또한 나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국산 장비만을 보호하다 보면 점차로 신기술의
공급선을 끊어지게 마련이다. 외국의 좋은 장비들이 적당히 들어와야 그들의
기술도 배우고, 새로운 기술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당장 코앞의
이익 때문에 그들을 모두 몰아낸다면 그대로
'우물안 개구리'가 되는 수밖에 없다.
경쟁하지 않는 기업은 낙오될 수밖에 없다. 외국장비들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면 기업은 당연히 안일한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경쟁이 없는데 무슨
기술개발을 하며 경쟁력을 키우겠는가. 정책은 영원하지 않다. '수입선 다변화
정책'이 무너지면 기업도 무너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나는 나의 선택 덕을 보고 있다고 자부한다. 미래산업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정도의 기술력과 자금력을 가질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때의 '거부'가 한몫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호받지 않고 정면으로
덤비는 용기가 경영자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래야 보호가 끝나더라도 기업이
죽지 않는다. 내게 쏟아지던 기립박수의 의미는 내가 가진 현장성 내지는
진실성에 대한 환호였다. 간혹 얼굴과 손목으로만 장사하려는 경영자들이
있다. 그 집안이야 들여다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들에게 관심 있는 것이라면
기껏해야 정부지원금이나 정책정보 나부랭이들일 것이다. 보호받지 않고
정면으로 덤비는 용기가 경영자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래야 보호가 끝나더라도
기업이 죽지 않는다.
@ff
경영은 창작이다
나는 미술품 애호가다. 미술품을 보며 생각 없이 즐기기도 하는 편이지만,
예술 창작행위들과 나의 경영을 비교해보는 버릇도 가지고 있다. 나는 언제나
사업을 예술행위처럼 이해했다. 계산과 원칙보다는 낭만과 열정을 보다
중시했다. 에둘러 돌아가거나 머뭇거리기보다는 맞바로 부딪치고 실험하는
것을 보다 좋아했다.
기업행위는 실로 예술적 창작의 연속이다. 실패의 고통과 성취의
가타르시스에 있어서도 기업행위와 예술은 일맥상통한다. 기업경영은 매우
고독하고 피 마르는 작업이다. 단 한순간을 방심해도 감각을 잃고 둔해진다.
기업가는 예술가처럼 부단히 노력하고 고민해야 하며,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처세로서의 경영이 아닌, 창조로서의 경영이 필요하다. 수입선 다변화
정책을 거부함으로써 단기적인 이익을 포기하고 장기적인 발전가능성을 선택한
것이야말로 '창조적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기업가는 끊임없이
발상을 전환하고 새로운 것을 꿈꿔야 한다. 상상력은 예술가에게 뿐만 아니라
기업가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사업상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나는 간혹 미술잡지를 뒤적이거나
화랑을 둘러본다. 괜한 소리가 아니라 나는 실지로 그림을 보다가 가끔 사업적
영감을 얻는 편이다. 새로운 기법, 새로운 구성, 새로운 색채 등에서
개척자들의 투지와 모험심을 본다. 그를 통해 새로운 용기와 기발한 착상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술창작에서나 기업경영에서 핵심은 창의력이다. 남들과는 다른 무엇을
항상 찾아내고 끊임없이 그것을 추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이다.
창의력을 잃어버린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창의력을 잃어버린 경영자는 종내
도태되게 마련이다. 훌륭한 경영자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예술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는 항상 자신만의 예술적 감각에 따라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예술창작과 기업행위의 또 다른 공통점은 '항상 최초만이 의미 있다'는
것이다. 모방과 추종, 혹은 2위나 차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최초가 가져다
주는 성과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다. 미래산업은 얼마 전 액면분할을
시도했다. 우리가 최초로 시도한 액면분할은 전체 주식시장과 미래산업에
엄청난 긍정적 파장을 몰고 왔다. 이후에 액면분할을 시도한 업체들은 모두
미래산업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최초와 차석의 차이 때문이다.
내가 기술개발에 과도할 정도로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기술개발에서 2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술개발에서 '최초'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실패다. '벤처 마인드'란 '최초'에 대한 집착과 열정을
뜻한다. 따라서 나는 지금껏 '거꾸로 경영'을 주장해왔다. 모두가 가는 길에
언제나 '최초'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술창작오 경영자의 마지막 공통점은 '돈맛을 알면 퇴보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수집해도 가난한 화가의 초기작들을 수집했다. 그런 그림들에서
나는 고독한 예술혼과 넘치는 상상력을 발견한다. 그러나 미술계에서 자리를
잡고 돈도 벌만큼 번 사람들의 그림은 재미없다. 색채부터 화려해지고
반복되는 매너리즘이 생기는 것이다.
경영에 있어서도 그렇다. 장사하는 사람이 '돈맛'을 모르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경영자들에게는 항상 '헝그리 정신'이 필요하다. 어려운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소위 '성공했다'는 기업가들은
개척하기보다는 '지키기'에 고심한다. 그런 경영자가 운영하는 기업에는 더
이상 발전과 모험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경영은 창작행위다. 창작하는 자가
알량한 돈맛에 취하면 창작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기업행위에 안정은
없다. 기업행위에 성공은 없다. 과정의 아름다움을 아는 자가 진정한
경영자다. 예술창작과 기업행위의 또 다른 공통점은 '항상 최초만이 의미
있다'는 것이다. 모방과 추종, 혹은 2위나 차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최초가
가져다주는 성과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다. 경영은 창작행위다. 창작하는
자가 알량한 돈맛에 취하면 창작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기업행위에
안정은 없다. 기업행위에 성공은 없다. 과정의 아름다움을 아는 자가 진정한
경영자다.
@ff
명퇴자여, 고독을 배워라
'공무원은 철밥통'이라는 말이 있다. 해고당할 걱정 없고 가장 속편한
직업이라는 뜻이다. 그대신 공무원에서 밀려나면 다른 일을 새로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래도 속편한 직업인만큼 투지라든가 창의성 같은 소위'인간
경쟁력'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무원은 옷 벗으면 곧바로
얼어죽는다'는 말도 있다.
공무원시절에는 우스개로나 통하던 말들이 실제로 퇴직을 겪어본 비로소
실감되었다. 이후 사업이라는 걸 시작했지만 안일한 공무원 기질을 극복하지
못해 많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배운 것도 많았다.
상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소중한 인생경험들이었다.
갑자기 중년퇴직자가 늘어나는 상황이다 보니 내게 인터뷰를 청하는
기자들이 꽤 있다. '중년 퇴직을 극복하고 벤처사업가로 성공한 정문술 사장이
명퇴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류의 기자를 적겠다는 것이다 건방지다고
욕하지만 않는다면 사실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지는 않다.
사실 중년 퇴직자들이 가장 먼저 겪어야 하는 것은 비참함이다 내 경우도
그랬다. 막상 퇴직당하고 나니, 공무원 시절에 알고 지냈던 사람 중 많은
사람들이 금세 얼굴을 바꿨다. 공직이든 대기업이든 간에 높은 직책에 있던
중년퇴직자일수록 그 비참함의 강도는 더욱 커질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홀로 남게 된다. 몇 달 정도는 외롭게나마 조용히 휴식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눈높이를 낮춰야
하는 것이다. 잘 나가는 안정된 직장에서 바라보던 만만한 세상은 이미
사라졌다. 혹독하고 사나운 세상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부터 내
생활은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위에서 지시하면 거기에 맞춰 다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삶이었을
것이다. 앞으로는 모든 것을 자신의 선택과 판단으로만 헤쳐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고독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어야 한다. 집에 홀로 남겨져 있는
동안, 괴롭겠지만 고독을 참아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눈높이를 낮추고 고독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중년의 창업이란 한낱 꿈이다.
퇴직자들이 조심해야 하는 것은 초조함과 조급증이다. 놀다 보면 일이 그립고,
일거리가 있다면 구가 번쩍 뜨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퇴직자들은 항상
사기 당하기가 쉽다. 나 역시 사기 당하고 좌절하는 법부터 배웠다.
일이 잘못되고 나면 수습한답시고 일 뛰고 저리 뛰어다니다가 결국 한강이나
찾게 된다. 그럴 땐 과감하게 털어 버리는 편이 낫다. 분풀이한다고 사업이
되는 건 결코 아니다. 한 번 사업에 실패했다고 인생 자체를 실패로 몰로
가서는 안 된다. 살아 있는 한, 결국 웃을 날은 오게 마련이다. 버리는 것이
현명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낙관해야 버릴 수도 있다.
창업을 하고 싶다면 마음을 편히 먹고 2단계 정도로 계획을 잡는 것이 좋다.
구가 번쩍 뜨이는 기발한 제안은 무조건 경계해야 한다. 남의 말만 듣고 덜컥
생소한 일에 손을 대면 십중팔구 실패한다. 자신이 다니던 직장이나 자신이
일해온 분야에서 할 일을 찾은 게 좋다. 겸손하게 경영을 마저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실패 가능성은 어디에나 있다. 겁 많은 중년일수록 실패 가능성은 더
많다. 그러니 보다 의미 있고 의로운 분야에 뛰어드는 것이 좋겠다.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에서의 경험과 자부심은 남을 것이다. 돈을 버리고
의로운 경험과 철학을 얻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인 셈이다.
조심스럽게 워밍업을 끝냈다면 그 다음에 정작 하고 싶은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는 사업 아이템 선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경기 좋다는 사업이
당장 눈에 보인다면 그것을 피해 가는 것이 좋다. 뒤늦게 뛰어들어 봐야
사양길 동지가 될 뿐이다. 창의력과 모험심도 필요한 시점이다. 충분한 분석과
연구만 있다면 주눅들 필요가 없다. 남들이 생각해내지 못한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말하는 '틈새공략'이다.
창업 초기의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나서 조금 숨통이 트였다고 하면 곧바로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자만이다. 그만 안주하려고 하거나, 반대로 겁없이
점프하려고 한다. 이러다 망하는 것이다.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고 겸손하게
사업을 끌고 가야 한다.
사업은 바로 인간관계라는 점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인간관계가
삐걱거리면 백전백패다. 몇 안 되는 종업원이나 동업자들일지라도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 서로 신뢰하는 마음 없이는 어떤 사업도 힘들다. 신뢰는 그냥
생기지 않는다. 행동이 중요하다. 절대 회사돈 안 쓰고, 사심 버리고, 과실을
종업원과 항상 나누고, 솔선 수범해야 한다. 한 배 탄 공동운명체라는 신뢰가
생겨야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 눈높이를 낮추고 고독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중년의 창업이란 한날 꿈이다. 귀가 번쩍 뜨이는 기발한 제안은 무조건
경계해야 한다. 남의 말만 듣고 덜컥 생소한 일에 손을 대면 십중팔구
실패한다. 창의력과 모험시도 필요한 시점이다. 충분한 분석과 연구만 있다면
주눅들 필요가 없다. 남들이 생각해내지 못한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말하는 '틈새공략'이다.
@ff
리더십은 빠르고 솔직한 것
한 달 전, 미국으로 출장 가야 할 일이 생겼다. 비행장에서 출국수속을 밟던
도중 내 비자의 유효기간이 만료되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별 수 없이
나는 출장을 포기했다. 같은 일 때문에 먼저 미국에 도착해 있던 동료
경영자들은 아니나 다를까 '정문술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며 전화로
놀려대었다. 비서가 없다 보니 간혹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어야 할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비서가 싫다. 작년까지는 운전도 내가 직접 했다. 나는 전화도
직접 받고, 직접 한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다 보면 별 해괴한 일이 다 있다.
"여기는 OO기업 비서실입니다. 정문술 사장님께 전화연결 좀 부탁드립니다."
"제가 정문술입니다만."
"아, 예,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OOO 전무님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있자면 당사자와 통화를 시작하기 전에 벌써 기분부터
나빠진다. 불쾌할 뿐 아니라 참으로 한심하게 여겨진다. 전화번호부 찾아서
번호 몇 번 찍으면 될 일을 이리 번거롭게 대행시켜야 하는 이유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절차는 필요하라고 있는 것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사회에는 필요 없는
절차가 너무 많다.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또한 관례라는 이름으로 해괴하게
반복되는 이런 절차들을 나는 혐오한다. 빤한 일들을 공연히 수고롭게 만드는
것이 자시의 위신을 세워준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분명한 사장이다. 사실은 '사장'이라는 직함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두렵고 송구하다. 그런데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보통 나를 '회장'이라고
부른다. '회장'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신이 번뜩 난다. 이건
예우가 아니라 숫제 테러에 가깝다.
"저는 사장입니다. 회장은 아닙니다."
이렇게 정중히 정정을 해주면 무척 민망해 한다. 미안한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그 끔찍한 '회장' 소리를 계속 듣는 것보다야 백번 낫다. 멀쩡한
사장더러 왜 회장이라고 하는가. 그것을 예절이 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가.
거추장스러운 절차와 예절을 좋아하기는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매한가지다. 종업원 수가 기껏해야 일이백 명에 불과한 회사에 비서실이
필요한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중소기업이 대기업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바로
융통성과 스피드가 아닌가. 그러나 아무 쓸데없는 허위의식 때문에 모처럼의
장점들은 온데간데가 없다.
기업구조 자체가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로 똘똘 뭉쳐 있으면서도 탈권위적인
체하는 사장들은 더욱 꼴불견이다. 구내식당에서 끝까지 차례를 기다렸다가
밥을 탄다는 모 기업체 사장이나, 우스꽝스럽긴 마찬가지다. 등뒤에 사장을
세워놓고 식사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직원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사장과
함께 목욕을 해야 하는 직원들의 심정은 또한 오죽하겠는가. 그런 쇼는 사진
찍기만 좋을 뿐 직원들에게는 고역일 것이 분명하다.
전화를 걸고 받는 것, 자기 스케줄을 관리하는 것 등은 직급과 상관없이
인간이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다. 회사에서는 검소한 척하고 매일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사장이 작업복 세탁은 항상 비서를 시킨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손님만 있으면 비서를 불러 꼭 자기 스케줄을 묻는다. 다 늙어서
갑자기 유모(유모)가 필요해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권위주의와 진정한 권위는 다르듯이 리더행세와 리더십은 다른 것이다.
직원들은 권위주의적인 사장을 두려워하는 할지언정 진심으로 믿고 따르지는
않는다. 헛폼만 좋아하다간 회사 망한다. 리더십은 빠르고 솔직한 태도에서
생긴다. 자꾸 움직이고 부딪쳐야 서로 믿음이 생긴다. 복잡하고 거추장스럽게
굴지 말고, 직접 겪고 부대껴라. 이것이 내가 말하는 리더십의 시작이다.
절차는 필요하라고 있는 것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사회에는 필요 없는
절차가 너무 많다.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또한 관례라는 이름으로 해괴하게
반복되는 이런 절차들을 나는 혐오한다. 직원들은 권위주의저인 사장을
두려워는 할지언정 진심으로 믿고 따르지는 않는다. 헛폼만 좋아하다간 회사
망한다. 리더십은 빠르고 솔직한 태도에서 생긴다.
@ff
내일을 향해 모험하라--벤처 경영
@ff
세계로 향하는 기술신앙
나는 기술개발에 몰두하는 재미로 사업을 했다. 그래서 사람욕심도 유별난
편이고, 기술교육에도 유난히 신경을 쓰는 편이다. 그런 사람을 구했다고 끝은
아니다. 그들이 자신의 재능을 더욱 계발하고 꽃피울 수 있도록 풍요호운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리더에게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제대로 키워낼 배포도 필요한 것이다.
스위스 다보스에는 세계경제포럼(WEF)이라는 기구가 있다. 여기서 1996년에
펴낸 〈초고속 성장기업에 대한 보고서〉라는 걸 읽어본 적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이들 기업의 공통된 특징은 매출액 증가를 절대절명의 과제로
선정한다는 것이다. 그럴 듯한 말이다.
초고속 성장이라면 미래산업도 결코 빠지지 않는다. 우리의 고속성장을 두고
어느 경제지는 '한국 벤처기업의 유일한 희망'이라고까지 극찬한 일도 있다.
그런데 미래산업은 단 한 번도 '매출액 신장'을 기업목표로 내세운 적이 없다.
목표가 있다면 '매출액 신장'보단 '기술력 신장'쪽이 맞다. 미래산업은
기술개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술개발에
몰두하다 보니 돈은 훗날 저절로 굴러 들어온 셈이다 미래산업에 있어 기술은
차라리 신앙이다.
많은 기업들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기술도입 등으로 손쉽게 돈을 벌고,
안정궤도에 오르고 나서야 기술개발에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러한 노선에는 치명적인 함정도 도사리고 있다. 기술개발은 창의력과
지구력의 싸움이다. 금세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을 수 없는 분야다. 기술도입
등으로 쉽게 돈을 벌었던 기업은 언젠가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짧게 보면서 기술을 도입하는 편이 속편하고 수익률이 좋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미래산업은 늦더라도 우직한 방법을 택했다. 처음부터 기술개발에 적극
투자했던 것이다 1983년에 창업했지만 매출이 나기 시작한 건 1990년부터였고,
흑자는 1991년부터였다. 장사가 뒷전이었으니 초기의 어려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술축적이 차츰 진행되자 어느 순간부터 마치 마술에
걸린 것처럼 매출이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기술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고 하니, 영업사원 대신에 엔지니어들을
쥐어짰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다. 미래산업의 경우는 오히려 그
반대다. 엔지니어들이 마음대로 연구할 수 있도록 관리직들을 침묵시켰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장비라면 무슨 수를 내서라도
구해다 주었고, 그들이 원하는 연구라면 그것이 어디를 향해 있건 얼마만큼의
성공 가능성이 있건 무조건 수락해주었다.
"너희들 입 다물어. 후방지원이나 잘 해."
내가 관리직 직원들에게 늘 하는 말이다.
물론 이런 방식은 돈이 많이 든다. 절약보다는 낭비를 조장한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 돈을 추호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 이 정도
배포도 없이 기술이 크기를 바란다면 그게 바로 도둑놈 심보다.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에 관한 한, 미래산업의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요즘이야 세계의 다양한 업체들과 기술거래도 하고 있지만 초기에는
기술도입을 고려할 여력도 없었다.
지난해, 미래산업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MR-5400' 테스트 핸들러'를 개발했다. 장비를 구성하고 있는 2만여 개의
부품에 대한 의존도가 5%미만이다. 당연히 가격경쟁력이나 수입대체효과가
뛰어나다. 어떤 회사의 반도체 장비에도 쉽게 접속할 수 있고 시간당
처리능력도 우수하다. 더구나 차세대 반도체까지 다룰 수 있는 미래지향성도
갖추고 있다.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즉시 고장원인과 상태를 디스플레이하고
소프트웨어가 스스로 고장을 해결해주는 인공지능 LCD 인터페이스를 장착했다.
장비선정에 가장 까다롭다는 미국 IBM에서도 이 제품을 주문했다.
대만에서도 국내 업체들에서도 다량 주문해왔다. 부품 국산화율이 높기
때문에 수출할 경우에는 국내 가격보다 오히려 훨씬 높이 가격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MR-5400'이야말로 미래산업의 기술력이
최대로 집대성된, 말 그대로 '회심작'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겪었던 숱한
실패와 성공의 노하우들이 이 장비 하나에 모두 용해되어 있다. 이것은
미래사업의 새로운 도약을 의미한다. '기술'이란 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이제 세계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많은 기업들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기술도입
등으로 손쉽게 돈을 벌고, 안정궤도에 오르고 나서야 기술개발에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러한 노선에는 치명적인 함정도 도사리고
있다. 기술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고 하니, 영업사원 대신에 엔지니어들을
쥐어짰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다. 미래산업의 경우는 오히려 그
반대다.
@ff
미래를 창조하는 미래
시장은 언제나 불안하다. 더구나 국경이 의미 없다면 '글로벌 마켓'의
시대에는 지구상의 어떤 변수가 지금 이곳의 물정을 뒤흔들어 놓을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하여 미래산업은 현재 몇 가지 실험을 하는 중이다. 당장은
쓸모 없어 보이지만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필요해질 미래형 산업들을 조용히
준비하는 중이다.
예를 들자면 네트워킹 보안 시스템이다. 온라인 뱅킹이나 네트워크 결재
등은 앞으로 경제사회의 핏줄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네트워킹 보안이다. 더구나 이 영역의 국가적 독립은
매우 시급하다. 미래경제의 근간이 될 분야를 외국기술에만 의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팀의 명칭은 '소프트 포럼 그룹'이다. 현재 8명의
엔지니어가 참여하고 있다. 이곳의 팀장은 학창시절에 '수학계의 풀리지 않는
6가지문제'중 하나를 호주의 어느 수학자와 동시에 해결해서 주목을 받았던
사람이다. 현재는 암호학의 메칼 알려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회사의
지원 아래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다. 그곳에서도 별 무리 없이 분당의
연구팀을 주도하고 있다. 역시 네크워킹의 놀라운 힘이다.
올해 초에는 드디어 시험제품을 내놓아 판매에 들어갔다. '원스 아이디 카드
시스템(Once ID Card System)'이라는 것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매번 사용할
때마다 1회용 암호를 발생하는 보안장치다. 네트워크 뱅킹 서비스를 보완하는
데 필요한 제품이다. 관공서와 은행들에서 현재 도입을 검토 중인데 꽤
긍정적인 반응들을 보이고 있다.
초기부터 128비트 암호 솔루션을 개발해서 업계와 학계의 주목을 받았는가
하면, 1996년에는 국내 최초의 인증기관인 'SFCA'를 운영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문서보관 시스템, 전자지갑 등 미래형 금융에 필요한 보안패키지를
계속 개발 중에 있다.
그 외에도 디스플레이 장치인 LCD 검사장비를 개발하는 팀과 반도체 장비 중
테스터 분야만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팀도 운영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기업다각화는 일종의 실험이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려는 헛된 욕심이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를 능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해 오늘 조심스레 뻗어보는
더듬이 같은 것이다.
작년에 어느 부서 과장이 개인면담을 신청한 일이 있다. 당연히
업무상담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앉아 들어보니 재미있는 사연이었다.
"저, 사장님, 난감한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무슨 일?"
"제 아들 놈 학교에서 숙제를 내줬는데 글쎄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의 사훈을
적어 오라고 했다네요."
"음, 그거 문제로군."
그때부터 두 사람은 학교숙제용 사훈 만들기에 들어갔다. 워낙에 사훈이란
것이 없었던 회사인지라 얼른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생각해낸
것이 '우리는 미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창조하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그 문장을 대외용 카피로 곧잘
쓴다.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로 두려운 것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미심쩍어 하면서도
점집을 다니고 미래서(미래서)도 뒤적이고 하는 것이리라. 나 역시 하루 앞을
모르기에 언제나 전전긍긍하는 가엾은 중생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내다보려
하고 준비하려 한다. 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저 넋놓고 안일하게 앉아 잇는 것은 내게 죄악이다.
나는 그 카피를 좋아한다. 미래산업은 언제나 미래를 기다리지 않고
창조해왔다. 물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윈스 아이디 카드 시스템(Once ID
Card System)'이라는 것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매번 사용할 때마다 1회용
암호를 발생하는 보안장치다. '우리는 미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ff
벤처기업 증후군
풍수가 좋다고들 하지만, 정말 우리나라에는 인재가 많이 난다. 해외의
유수한 기업체나 연구소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보면 절로 어깨가
으쓱해지고 목에 힘이 들어간다. 환경만 조성된다면 어디에 가도 한가락씩
하게끔 되어 있다. 우리 민족이 워낙에 낭만적이면서도 저돌적인 데가 있다.
끈기가 승부근성은 우리를 따라갈 민족이 없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모처럼 생겨난 인재들이 덧없이 시들고 만다. 환경이
그렇게 되어먹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보면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현실로 전환시키고
유지하는 데에는 안타까울 만큼 허약하다. 물론 끈기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무형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고 환경을 조성해주는 사회적 안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인큐베이터가 필요한 것이다. 해외선진국들은 인재 인큐베이터
시스템이 훌륭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끝까지 제대로 자라나는 인재들이
생겨나지만, 그런 점에서 우리 실정은 매우 비관적이다. 앞에서 마한
벤처육성책만 해도 그렇다. 재기 발랄한 인재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추진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너무 숫자를 좋아하고 그래프를
좋아한다. 하나라도 제대로 밀어주는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그러나 일방적으로 환경 욕만 할 수 없는 것은 요즘의 허황한 '벤처붐'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기업만화라는 것을 너무 많이 본 탓일까. 아니면
남의 밑에서 일하기 싫어하는 자유주의적 세태 때문일까. 어쨌든지 간에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라면 너무나도 벤처창업을 한답시고 난리다. 대량실업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서점엘 가도 소호(SOHO)니 아이피(IP)니 하는 소자본
창업 매뉴얼과 각 벤처경영서들이 지천이다. 각 대학 이 공부에는 벤처포럼도
결성되어 대학생 창업 붐에 일조하고 있다. 이러다가 정말 국민 전체가
'사장님'이 될 판이다.
무엇이든 해본다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 적인 필요의
충만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허영심과 유행의 열병에 의해서라면 문제다.
하나의 회사를 만들어서 멀쩡하게 굴러가도록 만드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통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할 텐데 말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괜찮은 소프트웨어 하나 개발했다 싶으면 곧바로 창업부터
하려고 한다. 얼핏 보면 뜻있고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도와줄 호의적인
손길들이 많은 것 같지만, 막상 세상에 뛰쳐나와 보면 그것이 얼마나
껍데기뿐인 호의인 줄을 금세 알게 된다. 창업하자마자 '눈먼 돈'부터 찾느라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니 망한 다음에 환경 탓이나 하지 말고 스스로 버틸 수 있는 자신과
여건이 마련된 자들만 창업하라는 것이 내 조언이다. 철없는 정책바람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신중하게 냉정해지라는 것이다. 인내와 노력 없이는 모험도
없다. 벤처기업이란 허황하고 철없는 기업이란 뜻이 아니다. 창업에 앞서
진정한 '내 것'을 과연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망한 다음에 환경탓이나 하지 말고 스스로 버틸 수 있는 자신과 여건이
마련된 자들만 창업하라는 것이 재 조언이다. 철없는 정책바람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신중하고 냉정해지라는 것이다.
@ff
훼방만 말아 달라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부쩍 '벤처육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제환경에서는 저 투자, 고급인력 중의 벤처기업이
경제활성화의 한 방 편이 될 수 있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요즘은 정부에서도
벤처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각종 벤처자원책들이 하루가 다르게 공표 되고
있다. 정책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우리나라는 벤처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의
천국이다.
물론 뼈 있는 소리다. 개발되는 정책의 개수만큼 현실은 낙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실을 충분히 고려해주지 않고 발표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지원책 아닌 지원책이 참 많다. 그래서 특히 중소기업
하는 사람들은 대개 정부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IBRD 차관 7,000억 원으로 1998년 안에 3,000개의 벤처기업을 만들겠다고
한다. 벤처의 메카라는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도 벤처 성공률은 10% 미만에
불과하다. 정부 정책자금을 배당할 때 담당관리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수해대사의 숫자'란다. 시장검증도 되지 않은 아이디어성 창업을
중심으로 무조건 숫자만 늘린다고 실업자 문제가 해결되고 경제가 살아나지는
않을 텐데, 참 안타까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국내에 벤처기업으로 분류되는 기업의 수는 대략 2,000여 개가 된다.
이중에서 '기업'이라는 이름이나마 제대로 붙일 수 있는 것은 채 수백 개도 안
된다. 이런 상태에서 자본금 2__3억 규모의 벤처기업들을 또다시 줄줄이
양산한다는 생각은 다소 위험해 보인다. 잘못하다간 실업자 문제의 해결은커녕
고학력 실업자만 더 늘어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씨뿌리는 것 자체를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씨뿌리는
것보다 키우고 보살피는 일이 더욱 중요함은 누구나 안다. 씨부리는 것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가능성 있는 벤처기업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정책이 먼저 필요하다. 기술 중심적인 벤처기업은 힘을 실어주는
정책이 먼저 필요하다. 기술 중심적인 벤처기업은 그 속성상 끊임없이
파생산업을 양산할 수 있다. 이미 존재하는 벤처들이 힘있게 자라나면 그
안에서 또 다른 벤처의 맹아들이 자라난다. 올망졸망한 벤처기업들을 도장
찍듯 무더기로 양산하기보다는 벤처기업 자체가 새로운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벤처육성책이다.
벤처기업의 행정적 정의는 매출액 대비 연구비 규모가 몇 퍼센트니 어쩌니
매우 복잡하다. 다만 내가 아는 벤처기업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위험하기
때문에 공격적이고 과감해질 필요가 생기는 것이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후방지원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벤처기업을 지원하고 육성하겠다는
정책들은 오히려 벤처기업들로 하여금 모험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들기
일쑤다. '바라지도 않으니 훼방만 놓지 AF아 달라'는 볼멘 소리가 그래서
나온다.
1만여 개가 넘는 각종 저질 규제는 여전히 그대로인 채로 거창한
벤처육성책만 한 달에도 두세 건씩 터져 나오는 판이니 기업 하는 사람
입장으로선 사실 부아가 날 수밖에 없다. 얼마 되지도 않는 정부 지원금 한번
얻어 쓰려면 관청에서 요구하는 온갖 종류의 서류를 마련해야 한다. 그것만도
엄청난 일이니, 그런 쓸데없는 일에 투여될 인원이 도무지 없어야 제대로된
벤처기업이 아닌가.
이런 역설이 비일비재하다. 어렵사리 지원금을 따내었다고 생각해보자.
기업은 일선 대출기관을 상대하느라 다시 한 번 생몸살이다. 벤처기업은
뭐니뭐니해도 기동성과 돌파력이 핵심이다. 묵직한 담보물을 마련해놓았을
정도라면 이미 그 기업은 경직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사업확장에
재투자되지 못하고 돈이 그렇게 정체하는 기업 역시 진정한 벤처기업은
아니다. 확실한 담보를 찾을 바에야 '벤처기업 지원자금'이란 이름은 영
어울리지 않는다.
답답한 것은 정책만이 아니다. 국내 벤처캐피탈은 대략 60여 개가 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벤처캐피탈이란 유망한 기업에 투자해서 그 성패에 따른
결과를 기업고 함께 나누는 '돈장사'다. 기대이익이 높은 만큼 그 기대손실도
크기 때문에 벤처캐피탈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대부분의
벤처캐피탈은 기술전문성이나 경영지도력이 부족하다. 그러니 스스로의 안목을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구 모처럼 조성된 자금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영화산업쪽에 손을 대는 것은 일견 이해가 간다. 그러나 요식업까지 손을
대면서도 기술 집약적인 벤처기업에게만 유독 까다롭게 구는 것은 아무래도
불만이다. 대출심사만 1년씩 끄는 동안 기업은 끌어올 수 있는 돈은 모두 끌어
쓰게 되고, 정작 어렵사리 대출이 결정되더라도 그 돈은 그 동안의 빚을
갚느라고 대부분은 사라지게 된다.
그마저도 한꺼번에 주는 것이 아니다. 대개는 온갖 이유와 구실을 붙여
조금씩 조금씩 흘려주게 마련이다. 기업은 졸지에 젖 보채는 응석꾸러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많은 기업들은 융자나 지원금이 보일 때마다 필요가
없어도 받아둔다. 만성적인 위기의식이 불필요한 부채를 양산하고 있다. 실로
악순환이라 할 만하다.
전문성이 부족하다 보니 저 위험, 저소득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정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영악하게 주식 투자나 하면서
모기업의 현금창고 노릇을 하는 '벤처캐피탈'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다.
한 벤처기업이 악천후 속에도 작동하는 군작전용 노트북을 개발하기로 했다.
어느 창업투자금융사에서는 개발계획을 듣자마자 매우 반가워했다. 개발에만
성공하면 이후 자금지원은 염려 말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래서 그 기업사람들은
노트북 개발에 모든 것을 걸었다. 개발자금이 떨어지면 직원들 사재까지
털어가며 결국 개발에 성공했다. 시제품을 들고 창투사를 찾아가 보니 태도가
달라졌다. IMF가 시작되면서 지금껏 투자는 단 한 건도 안했다는 것이다.
경제상황이 좋아지기 전까지는 어떠한 투자도 하지 않을 계획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하고 암담한 이야기다.
나는 창업 초기부터 사채를 자주 썼다. 정부지원자금이나 창투사들의
융자금, 심지어는 은행대출마저도 나의 성미에는 잘 맞지 않는다. 그
복잡함이나 까다로움, 그리고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소위 '꺾기'와
'커미션'들까지 감안하다 보면 사채쪽이 훨씬 간편하고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그렇다는 얘기다.
벤처육성은 풍토개선이 첫째다. 총체적인 벤처창업 인프라가 마련되어야
한다. 노력들이 있으니 성과를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기업하는 사람들도
스스로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지나치게 외부 의존적이고
허약하다. 기술만으로 정면승부 해보려는 배짱이 없다. 그저 규제를 풀어
달라, 자금을 풀어 달라, 떼쓰고 푸념하는 것에 중독 되어 있다. 환경이
열악하면 스스로라도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라 덕으로 기업을 해보려는
태도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벤처육성책이란 올망졸망한
벤처기업들을 도장 찍듯 무더기로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벤처기업 자체가
새로운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다. 벤처기업은
뭐니뭐니해도 기동성과 돌파력이 핵심이다. 만성적인 위기의식이 불필요한
부채를 양산하고 있다. 실로 악순환이라 할 만이다. 나는 창업 초기부터
사채를 자주 썼다. 정부지원자금이나 창투사들의 융자금, 심지어는
은행대출마저도 나의 성미에는 잘 맞지 않는다. 환경이 열악하면 스스로라도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라 덕으로 기업을 해보려는 태도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ff
벤처대부는 나의 소망
미래산업의 장기적 목표는 당연히 반도체 제조 장비의 완전 국산화이다.
사실 한국이 최대의 반도체 수출국가라고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다. 반도체에 들어가는 부품이나 소재, 반도체 제작에 필요한
온갖 제조장비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이다. 정작 비싼 것은
그쪽이다. 그러니 총매출액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비해 실질적인 부가가치는
그리 크지 못하다. 진정한 반도체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제조장비 국산화가
가장 시급하다.
반도체 제조과정은 크게 전공정과 후공정으로 나뉜다. 미래산업의 주력인
'핸들러'는 검사장비 이니 당연히 후공정에 필요한 장비다. 미래산업은 이제
전공정 분야로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핸들러보다 훨씬 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해진다.
직원의 삼분의 일이 연구직이지만 아직도 미래산업의 연구인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전공정 분야로 뛰어들기 위해서 외국의 다른 업체와 기술제휴를
고려하는 중이다. 미래산업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천안공단 부지에 현재 새
공장을 짓고 있다. 반도체 전공정 분야를 담당할 미래산업의 자매회사 'Prosys
주식회사'는 이제 출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나는 뒤늦게 반도체 분야에 뛰어들어 이제야 대충 자리를 잡은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으로 고맙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는 반대로 반도체
산업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는 중이다. 한국의 반도체
제조장비기술을 한 단계 더 높여놓고, 쓸만한 기술인재를 몇 명이라도
키워놓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키워놓은 녀석이 미래산업을 떠나 다른 어디로 도망가든 그것은 상관이
업다. 한국의 반도체를 위해 일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 일하고 있건 간에 '내가 키운 놈'이라는 자부심과 성취감만은
언제라도 내 몫이다.
내가 생각하는 또 하나의 답례는 벤처육성이다. 나는 참으로 가당찮은 꿈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한국 벤처 계의 대부가 되는 것이다. 나는 가능성 있는
벤처기업을 힘닿는 대로 키워볼 생각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모델로 하는 벤처정책이나 벤처창업은 백전백패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인력에서부터 각종 정보통신 인프라, 세제,
벤처캐피탈에 이르기까지 벤처기업은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자원을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은 실리콘밸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토양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척박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며 풍부한 물적,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는 기성 기업들이
벤처육성의 중책을 떠맡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성 업체 안에서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기술을 가진 사람을 발굴해서 경영훈련을 기키고,
벤처창업에 필요한 각종 자원을 지원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들을
분리, 독립시켜 주는 방법이 가장 한국적인 벤처육성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작년부터 이러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미래산업의 전체사업을
이른바 5개의 독립적 벤처그룹으로 분할하는 다소 실험적인 조직편성이다.
기존의 '핸들러 사업 그룹'을 비롯해서, 차세대 디스플레이 장치를 개발하는
'LCD장비 그룹', 네트워크 보안분야인 '소프트포럼 그룹', 반도체 제조장비
소모품을 담당하는 '매거진 그룹', 반도체 장비의 테스터 분야를 집중적으로
전담하는 '테스텍' 등이다.
각 그룹은 중앙의 결재나 지침 없이 독립적인 연구개발 및 마케팅 활동을
벌이면서 벤처 속의 또 다른 벤처기업을 지향하고 있다. 대기업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사내 벤처' 제도와는 다르다. 향후 얼마 동안은 중앙의 보호와 지원을
받게 되지만, 최소한의 자기 재생산 구조를 갖추게되면 곧바로 독립적인
사업체로 분리해 나간다. 대기업의 '계열사' 개념과도 다르다. 소위 말하는
'문어발식' 계열확장이 아니라 완전한 분리, 독립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거대한 것만이 의미가 있었다. 통합하고 확장하는 것은 곧 발전을
의미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미국엣 1987년 과 1992년 사이에
중소기업들이 창출한 일자리의수는 580만 개에 육박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직원 500명 이상의 대기업에서는 230만 개의 일자리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이것은 중소기업의 현실적응력과 대기업의 동맥경화를 잘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수치다.
로저 마틴이란 사람이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위기에 처한 대기업들을 보면서 가장 분통 터지는 일은, 한때 자신들을
성장시켰던 일들을 지금까지도 계속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행을 정직하게 고스란히 안고 다녔던
것이다."
특히 과거 우리의 기업들은 몸 풀리기에만 급급했다. 그것이 유일한
살길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바로 기업 거대화 때문에 해당
기업은 몰론 국가경제까지도 침몰직전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구조조정을 하고
합리화를 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로저 마틴이 말한 것처럼 이 '기업
거대화'는 이제는 지양하려 해도 쉽사리 수습될 수 없는 고질적인 타성이 되어
버렸다. 그런 고질적인 타성이 되어 버렸다. 그런 고질적인 타성이 생길
여지를 처음부터 없애자는 것이 내 발상이다.
미래산업의 소액주주들은 물론 이러한 사업방식에 대해 부만을 가지고 있다.
지배주주이자 기업의 대표이사로서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경직되고 비대하기만 한 '대기업'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콧대만 높은 권위주의를 키우기는 싫다. 끊임없는 세포분열을 통해 항상 변화,
발전하고 살아 움직이는 '젊은 기업'이 되고 싶은 것이다. 기업의 비만이나
동맥경화를 원천봉쇄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 벤처업계에 새
활력을 불어넣고 싶은 것이다.
결국은 우리의 소액주주들도 우리의 이러한 노력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고
공감해줄 것이라 나는 믿는다.
미래산업에도 60여 개의 협력업체들이 있다. 하도 내가 싫어하다 보니
이제는 신년이 되어도 선물은커녕 연하장조차 한 장 날아오지 않는다.
인사치레도 중독이 된다. 인사치레를 자꾸 겪다 보면 내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과 나도 비슷해질 것이라는 위기 의식이 있다. 방법은 있다. 권위의식이
싹틀 만한 여지를 주지 않고 지레 이런 식으로 원천봉쇄 하는 것이다.
나의 이런 구상을 듣더니 어느 기자는 내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럼 미래산업은 뭐가 남습니까?"
"핸들러야 모기업이니까 그건 계속 남겨둬야죠."
"아니 그게 아니구요. 미래산업 쪽에는 무슨 이득이 되는 겁니까?"
"그야 자부심이죠."
그 기자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나는 마흔셋이 되어서야 경영에 입문했다. 세상은 내게 비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등을 치고 목을 졸랐다. 상처투성이가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세상이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창업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세상에 대한 복수를
기획했다.
'이 땅에서 장사를 하려면 사기꾼이 도어야 한다', '어차피 시장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한다', '배신과 공격만이 살길이다'등등 이 사회에
횡행하는 온갖 종류의 악한 깨달음들을 쳐부수는 것이 내가 생각한 내 식의
복수였다.
기술개발에 목숨을 걸어보겠다는 일념으로 미래산업을 시작했고, 내가
받아왔던 상처들도 이제는 어지간히 치료가 된 셈이다. 하지만 나의 복수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오로지 '돈'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배신하는 세상은 여전하다. 난 기업과 기업가가 그놈의 '돈'을 극복하는
모습을 반드시 보여주고 싶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복수의 진정한 끝이다.
나는 참으로 가당찮은 꿈은 한 가지 가지고 있다. 한국 벤처계의 대부가 되는
것이다. 나는 가능성 있는 벤처기업을 힘닿는 대로 키워볼 생각이다. 애써
키워놓은 녀석이 미래산업을 떠나 다른 어디로 도망가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한국의 반도체를 위해 일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미국에서 1987년과
1992년 사이에 중소기업들이 창출한 일자리의 수는 580만 개에 육박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직원 500명 이상의 대기업에서는 230만 개의 일자리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이 땅에서 장사를 하려면 사기꾼이 되어야 한다',
'어차피 시장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한다', '배신과 공격만이
살길이다'등등 이 사회에 횡행하는 온갖 종류의 악한 깨달음 들을 쳐부수는
것이 내가 생각한 내 식의 복수였다.
@ff
부록
정문술 사장님께 묻습니다
*사장님은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무지막지한 낙관주의잡니다. 저는 미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미래를
창조하여 미리 경험하고자 하는 바람이 큽니다. 한마디로 미래
신봉주의자라고나 할까요.
*기업하기에는 나이가 많다는 소리는 안 들으셨는지요?
늦깎이로 벤처기업을 창업해서 파경을 헤매다가 재기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주목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스포츠나 취미가 무엇입니까?
저는 TV프로 중에서 유독 동물프로를 좋아합니다. 동물의 세계나, 왕국을
틈만 나고 볼 수 있으면 봅니다. 거기서 가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목장 지대에, 목장주들이 아침에 모여 회의를 합니다. 아마 그 전날 밤에
맹수가 와서 목축들에게 손상을 입혔나 보요. 그래서 맹수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고, 사냥개를 모으고 사냥총을 들고 몰이를 나가는 거죠. 나가다 보면
사냥개가 냄새를 맡고 그 표범을 찾아내서 몰고 몰아서, 결국 표범은 나무
우에 올라가더군요. 그러면 목장주들이 총으로 쏴서 잡아 내리는 장면, 또
최근에는 사냥개를 가지고 시베리아 호랑이를 생포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저는 거기서 느끼기를 개와 호랑이의 관계, 이것은 천적입니다. 개의천적은
사람 말고는 호랑이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천적을 몰아가지고
잡았습니다. 그것은 그 개가 호랑이보다 용감해서도 아니고 호랑이보다 더
사나워서도 아닙니다. 뒤에서 엽총을 들고 떡 버티고 서서 배경이 되어 주는
자기의 그 주인, 주인의 힘을 믿고서 자기의 천적을 몰아가지고 잡았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제가 18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해고를 당했습니다. 정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때 심정은 바로 이 사냥꾼이
없는 개가 호랑이와 일 대 일로 부닥쳤을 때라고 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공직생활을 사냥꾼을 뒤에 두고 열심히 뛰었던 포인터라고 한다면 사회에
나와서는 사냥꾼이 없이 내 힘으로 천적과 싸워서 극복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회고가 됩니다. 이런 일을 당한 사람으로서 근래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남다르게,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첫 사업을 할 때 마음가짐은 어떠했습니까?
첫 사업을 할 때 제 마음 이랬습니다. 이미 18년이란 공직경험이 있는
사람이지만 지금 진출하려는 사회에 있어서는 처음이니까 초년생이다. 나 같은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눈먼 사업은 없다. 그러니까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
미처 남들의 눈길이 가지 않는 것, 이것 중에서 내 것을 스스로 찾아 나가야
한다는 겸손한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성공을 하다 보니까 다시
마음속에 자만이 싹텄습니다. 사회라는 것도 별거 아니구나, 공직에서처럼
치밀하게 사업계획 세우고 성실하게 하면 결과가 나오는구나, 이런 착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미 나이도 많고 사업도 별 것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막바로
정상을 도전했지만 죽음에까지 이르는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때 많은 걸
생각했습니다.
*자는 시간에도 사업에 대해 구상을 합니까/
꿈에도 나타나느냐, 이 말씀인 것 같습니다. 가끔 있는 일입니다. 꿈에서
자주 숙제로 생각했던 문제들이 나타나지만 꿈에서 계시를 받거나 해결책을
찾은 일은 없었습니다.
*정 사장님은 IMF를 예상했습니까? 또 IMF 극복안은?
여러 모임에서 그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십여 년 전에 목사님 설교 중에
들은 얘기가 있는데, 비유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영국의 성 어거스틴 목사라는
분이 어느 날 부흥회를 했다고 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아주 감동
어린 설교를 했는데 설교가 끝나자 단상 앞에 있던 한 부인이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만약에 목사님이 앞으로 사흘 후에 돌아가신다고 한다면, 즉
72시간밖에 못산다고 한다면 앞으로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수첩을 딱 꺼내더니, "지금부터 한 시간 이후에는 아무개
집에 심방을 가고 또 그 이후에는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하고...." 그렇게 사흘
동안 스케줄을 읽어주고 "여기에 쓰여 있는 이대로 할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이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지금 경제난국을 맞아가지고
모두 당황을 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만, 여기 교훈처럼 기본에
충실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봅니다.
기업 하는 사람이 모름지기 자세를 바르게 하고 성실히 해왔다면 IMF가
왔다고 부산을 떨 필요도 없는 것 아니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실제로
미래산업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체질적으로 빚지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 하다 보니까 우연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지 예측하거나 대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업 다각화를 한답시고
이것저것 백화점 식으로 사업을 벌이는 유행에도 한눈 팔지 않았습니다.
흔히 IMF를 극복하자면 미국에서, 특히 실리콘밸리에서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벤처기업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실리콘밸리와 우리의 현실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도 단지, 실리콘밸리나
흉내낸다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오히려 가장 한국적인 것, 말하자면 김치가
명성을 떨쳤듯이, 우리의 고유한 정서를 특화 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백남준은
비디오라는 첨단 매체를 썼지만, 나름대로 한국인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래야 글로벌 시대에 눈에 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제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말은 싫어합니다.
무작정 줄이고, 하지 말고, 움츠리자는 자세는 곤란합니다. 이렇게 해서
살아남은들 그때 경쟁력 있는 상품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다 팔
게 없지 않습니까? 우리 부모들은 6.25동란의 폐허 위에서도 소를
팔아서 아들을 대학에 보냈습니다. 성장의 씨앗을 준비하기 위해 오히려
공격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사업을 하면서 가장 크게 부딪친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우선은 사업자금을 구하는 문제였고, 두
번째는 사람이었지요. 저는 사업을 할 만한 여건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술자도 아니고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돈이 많은 사라도 아니고, 그런데
눈은 높았습니다. 저도 좋은 사람이 필요했어요. 모범생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제힘으로는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중소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인재란 무엇이냐,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헛점을 봤습니다. 그래서 강원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오지의 공고를 찾아다니면서 교장 선생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공고 생 몇 명을
가까스로 구해왔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퇴역 기술자를 모셔다 우선 기술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확보한 기술수준에 맞는 사업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낮춰서 쉬운 것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렇게 반도체를 조립하는
기구(리드 프레임 매거진)에 진출해서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첫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때 느낀 것은 기술자도 타고나는 겁니다. 원하는 분야에 타고난
사람을 찾는 게 첫째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진행하고 게신 산학 협동체제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어찌 보면 좀 독특한 방법으로 인재를 모으고 길러서 쓰고 있습니다.
매년 지방 공고에 가서 미래산업에서 필요한 인원의 3배수를 모아옵니다. 다음
1년 동안 일을 시켜보면서 그 사람의 소질, 사람의 됨됨이를 관찰합니다.
그리고 1년에 3명 정도를 병역특례로 회사에 남기고, 이런 순환과정을 한 10년
동안 해서 기간 요원을 확보하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지금 저희 인원이 310명 되는데 그 중에 지금 박사가 5명, 박사과정이 10명,
석사가 18명, 이렇게 고급인력이 3명이 됩니다. 그 상위 서열 4번째까지
공고출신들이 간부로 있고 박사라든지 공부를 많이 한 모범생들이 뒷받침하고
있는 체계입니다. 아마 저희 회사의 강점은 바로 이런 면에서 인재를 제대로
보고 인재를 잘 육성한 결과가 아니었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교육제도에 대한 경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기술 수준에 이르자 공고출신들로는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반도체 검사장비는 대개 6개월마다 성능이 향상됩니다. 초기에 선진국 제품을
모방, 개량을 주로 할 때까지는 공고출신으로 가능했으나 점차 기초적인
기술장벽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기초기술은 공고출신들 불러다가 가르친다고
단시간에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큰 벼에 부딪쳤습니다. 그래서 명문대생을
구하려고 했지만 단 한 명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여러 루트로
고급인력을 구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과감히 채용해, 학업에 열중하면서 틈틈히 회사일 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지도교수와 협의를 해서 연구용역을 주고, 이 학생의 연구제목을
우리 회사가 필요로 하는 연구과제와 일치시켜서 고급인력을 충원하고
있습니다.
기초기술의 예로써 소프트웨어의 경우, 전산학과 출신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대학의 전산학과와 컴퓨터 공학과의 실태를
관찰하다가 하나의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대학의 전산학과와 컴퓨터 공학과의
실태를 관찰하다가 하나의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대학에 전산학과가 설치된
순서로 실력이 있는 학생을 배출하고 있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숭실대학에 최초로 설치되고 중앙대, KAIST 등 순으로 설치되었고 서울대는
그 뒤에 설치되었습니다. 초기 설치된 대학 출신들이 각 연구소 등 요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설치된 대학에서 박사과정
학생들을 뽑아 미래산업 사원으로 채용하고 학비까지 지급하고 있습니다.
현재 박사과정은 KAIST에 3명, 중앙대 5명, 캠브리지 대학에서도 본사의
연구지원을 받아 프로젝트를 연구중입니다. 프로젝트를 완성했을 때 학위를
주게 돼 있습니다.
*창의력은 무엇이며 어떻게 기를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창의력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창의력은 자기가 소질을 타고난 그
분야에서 집중을 하는, 집중력이다. 이렇게 경험을 했습니다.
그 동안 여러 가지 장비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기술적으로 많은 벽에
부딪쳤습니다. 개발초기에는 어떤 문제를 가령 일주일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주문받은거 다 무산되고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하는 아슬아슬한 경우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장인 저는 아주 속이 탔습니다. 그걸 담당하고
있는 엔지니어가 물론 전문가입니다. 그 사람도 아주 사력을 다해서 연구에
집중하고있었지만 하도 촉박하고 어려워서 사장인 W도 그 문제가 무엇인가
파악하게 됩니다. 물론 연구원 앞에서는 의연하게 지냈습니다만 그 문제를
알고 나서는 비전문가인 저도 늘 숙제로 담고 다녔습니다. 잠자는 시간말고는
그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 중에서 2가지를 놀랍게도
비전문가인 제가 힌트를 내가지고 타개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창의력이란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면 어떠한 성과가 있다. 또는
어떠한 위험이 있다는 걸 알고 그 문제를 숙제로 담아두고 이 긴장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거죠. 물론 이게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 연구원도 집중했겠지만
사장인 저보다는 덜 절실했을 것입니다. 해서 어떤 문제 의식을 가지고 오래
긴장하다 보면 어느 순간 탁 걸리는 게 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가운데서 이것이 창의력이다.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사실 전 공상이 많은 편입니다. 사람을 기다릴 때 한 시간 정도는 지루하지
않게 기다립니다. 그때 많은 상상을 합니다. 바로 이런 상상력이 제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군사병으로 있을 때 경제기획원 통계국에 교육을
갔었는데, 거기서 IBM의 초기 컴퓨터, 대형 기계식 컴퓨터를 견학한 적이
있습니다. 인구조사를 해서 통계를 내는데 우선 딱딱한 카드에 통계내용을
인쇄했습니다. 그리고 연령별, 직업별, 이런 식으로 나누어, 아가씨들이
펀칭을 해서 구멍을 뚫습니다. 이것을 기계에다가 고속을 통과시킵니다.
그러면서 필요한 통계, 가령 열살에서 스무살 자료라면, 그 사이에 갈고리를
걸어놓습니다. 여기로 카드를 통과시키면 통과하면서 구멍에 걸리고, 약간
충격을 주면 그 횟수를 집계하고 하는 것이 컴퓨터입니다. 저는 무척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그후로 그 기계는 날로 발전합니다. 그것을 따라가면서
저는 무척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그후로 그 기계는 날로 발전합니다. 그것을
따라가면서 저는 무척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호기심과 집중력 그리고 미래에
유망한 사업이라는 희망 같은 것이 생소한 부냐를 극복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반도체가 전혀 생소한 분야인데 모자란 부분은 어떻게 해결 했습니까?
저에게 있어 반도체 산업에 관한 공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활의
문제였습니다. 미래산업의 젊은 엔지니어들과 함께 열심히 공부하며
파고들었습니다.
선진국의 반도체장비 전시회와 관계회사들을 부지런히 찾아 다녔습니다.
반도체 분야 전문가, 엔지니어들도 틈만 나면 만났습니다. 또 당시 홍릉에
있던 산업연구원과 KAIST를 들락거리면서 자료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미국,
독일, 일본의 데이터 베이스들을 검색하고 한편으로는 문헌과 카탈로그,
기술잡지, 특허정보 등도 검토했습니다. 기술개발에 열중하고 있는
엔지니어들과 동고동락하며 산고를 같이 했습니다. 좀더 세밀히 파악하기
위해서 기술자료를 수소문하고 몰아오고 부품을 사 나르는 등 심부름도
자원했습니다.
*국산을 보호하고 중소기업을 돕는 데 보약과 같은 수입선다변화 정책을
반대한 이유가 뭡니까?
92년도에 메모리 테스터 핸들러를 생산했는데 많은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일본의 어드벤테스트, 히다치, 이 두 회사가 국내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그래 이제 정부에 수입선다변화
품목으로 묶어줄 것을 신청만 하면 독점 할 수 있었는데, 그때 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왜냐, 거기에는 서너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일본 수입을 막아버리면 국내 시장을 독점하고 사업상 대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핸들러란 게 복잡한 시스템입니다. 약 2만 3천 개의
부품이 들어가고 여러 가지 복합기술이 동원되며 많은 기술적인 애로가 있고
해서 이런 제품을 상용화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능이나
아이디어가 선진국 제품보다 앞선 면도 있지만 시간이 필요한 노하우들, 예를
들면 조립기술이라든지 기타 생각지 못한 문제들, 이런 것을 사람으로 때우고
있었는데 반도체 산업은 타이밍 산업입니다. 갑자기 많은 물량을 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산공장들이 미래산업만 믿고 있다가 차질이 생긴다면
큰일일 것입니다. 또한 사오 개월 단위로 업그레이드 해줘야 합니다. 그때
저는 고객 입장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아 되면 일본 제품이 처리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연히 욕심 부리다 고객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는 선진 기술을 견학해야 우리가 발전할 수 있는데, 고객이 물건을
들여와 새 기술을 접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개발 엔지니어들에게 계속적인
긴장감을 주고 경쟁의식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짱짱한 경쟁상대와 경쟁을
해야 엔지니어들도 발전할 수 있다. 그래야 우리가 무너지지 않는다. 이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또 대기업은 제품단가에 인색합니다. 만약 외국의 고가
장비를 들여오지 않는다면, 그 외국장비 가격을 기준으로 가격을 정하지 않고
혹독한 원가계산을 통해 값을 정하게 도고, 따라서 우리 제품이 제 값을
받기가 힘들어집니다.
수입선다변화는 중소기업에게는 보약이었지만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합니다. 만약 그때 수입을 막았다며 그 정도에서
미래산업은 넘어졌을 것입니다.
수많은 중소기업 지원 새책들이 모든 기업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약은 안 먹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약은 필요할 때만 먹는
것이지 아무 때나 먹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공하기까지 정부의 간섭이나 규제는 없었는가? 혹시 불이익 사례가
있었다면 들려주세요.
제가 부천 지역에서 남의 전세공장을 10년간 전전했습니다. 참 집 없는
설움, 아주 괴로웠습니다. 매년 한 번씩 공장주인이 불러다가 세를
올리는데요, 처음에는 돈이 없으니까 필요한 넓이를 다 얻을 수 없으니까 세
군데다가 조각조각 얻어서 아스팔트 길을 건너다니면서 일을 했는데요, 어떻게
하면 내 집 마련하느냐가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벤처기업가 열 분이 모여 농공단지를 하자고 결의했습니다. 당시
서산 농공단지를 추진했는데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어요.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시작을 하더군요. 다음에는 상공부, 농수산부,
중소기업진흥공단, 농협, 은행... 안 걸리는 데가 없었어요. 2년을 걸려 10개
업체가 5천만 원씩 비용을 내서 서산 농공단지 조성을 했는데 처음 시작할 때
서울에서 2시간 반이 걸렸는데 농공단지 승인 나고 나서 4시간이 걸려요.
그런데 정보도 부품도, 좋은 인원도 다 수도권에 있잖아요. 그래서 5천만 원
포기했습니다. 그렇게 정부의 규제를 절감한 사람입니다. 그후에 꿩 대신
닭이라고 천안에 오게 되는데 거기에도 말 못할 규제가 많았어요.
그때까지 들어간 비용과 노력이 아까워서 그곳을 고수한 업체들은 그후
부도가 나거나 매우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신정부의 벤처기업 육성책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얼마 전 제 직원 한 사람의 결혼식 주례를 섰습니다. 식장에서 신랑
친구들에게 우연히 들은 말이지만 신랑은 친구들 사이에서 스타로 통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거의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이었는데,
회사에서 개발프로젝트 팀장을 맡고 있는 신랑이 무척 부러웠던 모양입니다.
이 친구는 제 회사에서 연구개발과제도 스스로 정하고 필요한 예산도
독자적으로 결정해 집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비록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니고 있지만, 자기 자신들의 처지와는 근본적으로 달라 보였나 봅니다.
바로 이 친구는 현재 제 회사에서 조마간 분가해 소사장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입버릇처럼 발리 나가라고 독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래산업에서 독립사업부 체제를 갖추고 있는 6명의 연구개발팀이 2__3년 내에
독자사업을 꾸려나갈 것입니다. 이들은 각각 LCD 제조장비, 통신 네트워크
암호보안시스템, 반도체 제조장비 분야 등에서 각각 경쟁력 있는 독립회사를
탄생시켜 새로운 사장이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내 벤처인 셈입니다.
사실 요즘 벤처붐이 일고 있습니다. KAIST나 각 유명대학에선 어지간하면
벤처창업한다고 야단입니다. 눈이 조금 반짝이는 젊은이들은 모두 창업구상을
한다고 봐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벤처육성정책도 무수히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벤처육성은 말뿐입니다.
벤처육성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씨 뿌리고 잘 기르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실제를 봅시다. 한국에선 그저 씨 뿌리는
쪽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지, 씨 뿌린 뒤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벤처창업하면 모두가 정책금융을 얻어 창업만 하면 성공하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창업대열에 나서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마도 모두 미국 창업의 산실인 실리콘밸리의 막연한 환상만 좇는
것 같습니다만, 정말 우리의 벤처환경이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디이어만 있으면 사무공간이나 책상 등에서부터 자본주, 인력, 법률가,
회계전문가까지 2__3일 내에 구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와는 전혀 딴판인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벤처회사들의 실정도 그렇습니다.
IMF 사태 이전입니다만,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한 벤처캐피탈 사장은 제게
하소연조로 이런 말을 털어놓았습니다. 벤처지망생들이 자기에게 액면가
5,000원짜리 주식에 그 20__30배를 내고 투자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벤처란
뼈를 깎고 노력해야 결실을 볼까말까하는 모험산업인데도 모두 일확천금만
노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벤처창업 열풍의 엄연한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코스닥에 상장시켜 자금동원하고 단칼에 돈만 벌면 그만이란 생각만
있는 것 아닌가, 그저 잿밥에만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일확천금을 노려 창업열풍에만 들뜬 벤처지망생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벤처창업이란 게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엘리트 실패자를 양산할 것입니다. 대기업의 우수
인력과 연구인력이 그저 창업열풍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최근 반도체
기술을 대만에 넘겨주려다가 발각된 산업스파이 사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모두
대기업의 우수 엘리트들 아닙니까? 모두 벤처창업 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들이 결국은 산업스파이로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의
예입니다만 결국은 창업엘리트 유랑자를 대양 양산할 수밖에 없는, 그저 씨만
뿌리는 한국의 벤처환경 탓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방법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한국적 현실에서 씨만 뿌리고 그 뒤는 나
몰라라 하는 우리 벤처환경에서 최선의 길은 벤처컨설턴트나 벤처캐피탈에만
벤처창업, 육성을 맡겨서는 곤란합니다. 그보다는 현역 기업인이 나서야
합니다. 현역 기업인들이 창업의 열기를 열매로 맺게 하는 실질적인
인큐베이터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하는 현역 기업인들이 사내 벤처를
통해 새끼치기를 해가야 합니다. 모기업은 새끼 창업회사가 잘 자라서 혼자 설
수 있도록 젖을 주고 길러야 합니다. 기업주는 산모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업주는 뭐냐, 남 좋은 일만 시키느냐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현역 기업인들을 유망 벤처를 창업시키고 육성시키고
배출시킴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소명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 사업에서도
모기업과 새끼치기 한 벤처기업은 서로 도울 수 있는 관계입니다. 모기업도
새로운 도약을 이한 돌파구가 될 것입니다. 모두가 득이 되는, 그야말로
윈윈(Win-Win) 전략입니다.
벤처캐피탈도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현재의 벤처캐피탈은 어떻습니까? 한 예를 들어봅시다. 한 진취적인
벤처캐피탈 사장으로부터 받은 인사장에 지난해 60% 이상을 창업 2년 이내의
회사에 투자했다는 것을 가장 큰 실적으로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있었습니다. 국내 벤처 투자를 잘 한다는 벤처캐피탈 회사의 실적이
이럴진대 다른 벤처캐피탈은 창업 2년 이내의 회사에는 잘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대부분의 한국
벤처캐피탈은 초기 창업자들을 외면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가만 놔두어도
혼자서 클 수 있는 벤처기업만 골라 투자했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벤처캐피탈 두 군데에서 창업 문의를 했다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얘기로는 투자를 결정하기 위해 제품이 있는지, 그리고
특허가 있는지를 가장 먼저 묻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막 시작하려는 회사에
제품이 있는 턱이 없고 더구나 등록에 2년 이상 소요되는 특허는 더욱 힘든
요건이 아닙니까? 그중 하나는 친구가 근무하고 있던 회사였는데 그
친구말로는 다른 벤처캐피탈도 모두 마찬가지니까 괜히 헛수고하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벤처캐피탈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씨 뿌리는 데
시경을 쓰지 않고 다 된 나무에 비료 한 포대 쏟아 주자는 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도나도 그런 식이니 투자하는 데만 투자되는 겹투자, 실적 있는
사람에게만 지원하는 중복지원만 매일 되풀이되는 실정입니다.
정부에서 아무리 많은 벤처자금을 풀어도 씨앗 뿌리는 데까지는 돈이 잘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벤처캐피탈은 씨를 더 많이 뿌리는 데
투자해야만 합니다. 많은 씨를 뿌려야만 그만큼 거둘 수 있다고 봅니다. 좀더
과감한 초기 투자가 필요합니다.
정책도 걸림돌입니다. 창업지원법이란 게 있습니다만 문턱이 높습니다. 법
이름은 창업지원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한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죠. 법인설립하는 데 최하 5천만 원이 필요합니다. 다른
제조업이라면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컴퓨터와 개인 노트북 하나면
창업이 가능한 벤처 경우엔 그 돈이 너무 많습니다. 대학생, 젊은이들이
도대체 어떻게, 어디서 그 돈을 구합니까? 하는 수 없이 창업 자본금 구하느라
사채시장에서 하루 50만 원 주고 법인설립용 예금잔고증명을 사서 쓴다고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창업하고 나면 실제 돈 한푼 없는 법인만 수두룩한 게
현실입니다.
돈을 지원받은 창업지원기업이 선정잣대도 달라져야 합니다. 현재 요건은
무척 까다롭습니다. 말로는 기술을 평가해서 돈을 준다고 하지만 실제론 모두
담보를 요구하는 실정입니다. 제대로 기술평가를 해서 돈을 지원하는
시스템으로 가야 합니다.
벤처창업엔 인재확보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중
병역특례 문제를 말하고 싶습니다. 현행 병역특례의 경우 1년에 한 번
11월에서 12월에 기업별로 병역특례자 TO를 배정하고 있습니다만 이게 너무
경직되었고 규제 일변도입니다. 그 중간에 창업하는 사람들은 그때까지 대략
1년 반까지도 기다려야 하는 실정입니다. 군대 안 가면 벤처사장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할 수 없이 편법으로 서류상 자신의 부인을 사장으로 앉히고
자신은 직원으로 꾸며 특례를 받는 실정입니다. 병역특례 배정을 그때 그때
수시 배정으로 바꾸었으면 합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20세 이상이면 창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학
학부졸업생은 병역을 마치면 28__29세가 되고 대학원 졸업 후 병역특례를
마치고 나면 31세 이상이 됩니다. 창업할 수 있는 나이도 너무 높은
현실입니다.
창업 후 관련 여러 분야의 기술자원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총체적인
협조지원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요즘 기술은 복합기술입니다. 대학과
연구소 전문가들이 필요하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가용 인력을 총동원할 수 있는 체제, 예컨대
교수도 필요하면 창업회사에 지분 참여해 1년이고 2년이고 현장에서 지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수도 겸업할 수 있고 국책연구기관 연구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물론 벤처 특별조치법에 휴직허용제도가
있습니다만 실제 신청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창업 업종선택에서도 교통정리가 필요합니다. 물론 업종선택이야
본인의자유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한두 군데만 몰리는 벤처창업은 문제가
있습니다. 절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닙니다. 유행을 타지 말고 자신의 소질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차별화된 벤처창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벤처창업은 정말 말대로 모험적이고 위험합니다. 의욕이 아무리 많더라도
실패할 확률이 큽니다. 기성 기업인들이 각자 벤처기업을 하나둘씩 담당해서
잘 돌보고 가르치는 게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사내벤처를 활성화해서
유망사업가를 적극 배출하고 벤처회사들을 한두 개씩 책임관리하는 방식은
한번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내에 실패한 퇴역기업인들을 창업기업 지도사업에 동원하는 방안도 검토해
봄직합니다.
보다 많은 씨를 뿌리고 잘 기르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 기존 현역 기업가들이
적극 나설 때입니다. 그래야만 벤처의 효율적인 창업과 고용창출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를 막고 열매를 거두도록 현역기업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이 심어야 많이 거두고 좋은 품종을 심어야 좋은
것을 거둘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음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업인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이란 무엇인지요?
저는 기업도 선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느꼈습니다. 그 한 가지 경험을
소개하면, 1996년도에 저희미래산업이 상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상장 직전에
구제도의마지막 차를 타게 됐습니다. 바로 다음달부터 공모가격을
자율화한다는 겁니다. 증권감독원에서 4만 원에 승인을 얻어놨는데 막상
상장을 하려니까 자율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관사를 맞았던
증권회사에서 큰일 났다. 한 달만 기다렸다가 상장시키면 10만 원 받을지도
모르는데 하면서 공개계획을 취하하고 한 달 후에 하자며 제안을 해왔습니다.
사실 쉽게 뿌리치기 힘들 만큼 솔깃하고 달콤했습니다. 그러나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정 사장 바보 아니냐, 사업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이익을 좇아야 되는 거다, 그래도 전 의연히 4만 원에 공개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기업을 공개한다는 거, 이것은 앞으로 기업을 공개념으로
운영한다는 선언입니다. 즉 한둘이서 운영하던 걸 수많은 투자자와 함께 한다.
그들의 대표로서 내가 열심히 뛰어서 이익을 그분들에게 돌려준다는 개념인데,
같이 사업을 할 투자자들에게 싸게 서비스해서 나눠주면 되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때 저는 무엇보다도 기업의 공신력 문제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공기업으로 운영하겠다는 사람이 다소 이해관계가 있다고 해서 말을
바꾼다, 저는 이런 걸 체질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래서 주변의 비난을 무릅쓰고
강행한 결과 회사의 새로운 이미지를 세웠고 참신성을 갖게 돼 300억보다 몇
배나 많은 유무형의 이익을 봤습니다. 물론 이걸 의식하고 그런 건 아닙니다.
정도를 걸으면 그에 따른 보상이 있다는 저나름의 체험이었습니다.
삶에 있어서나 사업에 있어서나 신과 인간의 소관사항이 다르다고 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신명을 바쳤다면 그 과정으로서의
만족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결과에 집착하면 도덕성은 희박해집니다.
이 시대 중소기업인의 덕목으로 저는 두 가지를 꼽습니다. 첫째 욕심은 콘트롤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는 것과, 둘째 사람 꼴을 얼마나 잘 보아 주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돈 벌어서 뭐 할 겁니까?
네, 한마디로 이 나이가 되었으니 밥값을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몇 가지 원칙을 사업한 이래 지키고 있습니다. 첫째는 회사에 친인척을
한 명도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가 5남매를 두었습니다만 아직까지
자식들에게 회사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에 대해 매우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평범한 것 같지만 매우 어렵습니다. 제가 아주
시달리고 있습니다. 특히 사채를 얻어주고 보증을 서준 아들과 같은
막내처남이 마산에 있는 영남대 경영학과를 나왔는데, 아마 자형이 취직시켜
줄 거다 하는 기대 속에 대학을 보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마저도 받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 문제로 처남하고 아직도 관계가
서먹하고 제 안사람도 기회만 있으면 공격하는 것 중의 하납니다. 아들 둘 다
대기업에서 열심히 제 갈 길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큰아들은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연구소에 근무하고있고, 둘째 아들은 삼성카드에 근무합니다. 사위
세 명도 자기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많은 효과가 있습니다. 우선 회사의 300여 직원에게
실력주의를 심어줍니다. 사장에게 더 이쁘고 미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어디
출신이냐가 아니라 누가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서열이 매겨져 집니다.
공고생이 부사장이고 그밖에도 자타가 공인하도록 서열이 매겨져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회사가 융성하고 잘되면 그 돈이 회사에 있지 누가 허투로
빼먹는 사람이 없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열심히 벌고 쌓아올리기만 하면 우리
것이고, 또 이 회사의 후계자는 우리 중에서 나올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늦게 사업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남들처럼 크게 회사를 만들 수도 없는
사람이라 소박한 목표를 세웠습니다. 반도체에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을 이
분야에서 받아들여 이만큼 길러줬으니 내가 밥값을 하고 가야겠다고, 방법은
한국 반도체산업 분야에서 기여할 사람 몇 명을 길러놓고 가는 것입니다. 또
미래산업이란 회사를 좋은 회사로, 튼튼한 회사로 영생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닦아주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가 제 목표입니다.
그래서 크게 회사내의 사업을 다섯 가지로 분류해서 그 책임자들을
앉혔습니다. 빨리 열심히 준비해서 독립해 나가라고 채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전부 반대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 머물러서 좀더 확실하게
배워가지고 나가거나 아니면 나갈 생각이 없는 사람들과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내가 조사하고 있는 이 분야에서 똑똑한 사람 몇 명
길러내는 게 목표입니다.
제 주식이 몇 주이고,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고 이런 거 모릅니다. 주가에도
관심 없습니다. 그랬더니 주주들한테 서비스하기 위해서 주가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압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농사짓는 농군이 문전옥답 값이 오른다고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농사 안 짓고 팔아서 쓴다면 몰라도. 그런 생각이라
제 마음은 초연합니다. 한국 중소기업인의 실력이란 욕심을 얼마나 컨트롤할
수 있느냐가 서열이다. 이렇게 생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어서 중소기업이란?
저는 공무원 시절에 취미로 모은 그림 30점을 1982년에 팔아서 3,500만
원이라는 돈을 창업 자금의 일부로 조달한 일이 있습니다.
사업 경력 15년째인 저는 한국에서 있어서는 중소기업이란 예술창작행위와
매우 유사하다. 이것을 느꼈습니다. 한 세 가지 면에서 유사합니다. 첫째는
창의력이 승패의 관건이 됩니다. 두 번째는 최초, 1회성입니다. 세 번째는
좌우간 양쪽, 예술이나 사업이나 다 돈맛을 너무 알고 돈맛을 깊이 알면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분야라는 것입니다.
특히 창의력 문제에 있어서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음악이 회화 이런 분야의
성현들, 대게 보면 가령 베토벤이 원래 음악이 소질이 없는 사람인데 좋은
선생을 잘 만나고 열심히 공부해서 불후의 명작을 남겼느냐,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야에 음악적인 소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타고난 사람이 그
분야에 정진했기 때문에 그러한 성과를 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산업 사회에 있어서, 기업에 있어서의 창의력을 가진 사람도
타고나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창의력이 다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분야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전부 다. 어떤 음악 분야에 타고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 있고. 또 구체적으로 기술분야
들어가서도, 기계분야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학분야에 소질이
있는 사람도 있고 모두 다르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R업 하는 분, 특히나 중소기업을 하시는 분들은 자신이 관심을
느끼고 파고들 수 있는 분야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 분야에
필요한 인재, 창의력을 가지 인재들을 알아보고 키워 쓸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느꼈습니다.
저와 오랫동안 교류를 해온 권영우 화백은 70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돈과는 아무 상관 없이 예술창작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예술가가
타성에 젖게 되면 그것은 창작이 아니고 생산이다." 그분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업가도 마차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는 창작만이 진정한
예술인으로 기업가로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직을 했을 때는?
실직을 하게 되면 노는 게 괴롭습니다. 참 괴롭습니다. 직장 다닐 때는 미처
못 느꼈으나 할 일 없이 논다는 것은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일의 귀중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정말 할 일이 없다는 게 이런거구나, 느끼게 됩니다.
이걸 사람들이 못참으니까 성급하게 뛰어드는데, 여기서 실패합니다. 저도 첫
번째 사업에서 사기 당하고 재기했습니다만, 제와 절친한 친구들을 보면 참
비참합니다. 저와 같은 길, 다시말해 사업을 하던 두 명은 자살 했고 두 명은
파산해 노후를 쓸쓸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18년간 공무원 생활을 해오다가 강제해직돼 어느 날 갑자기 거리로
나온 사람입니다. 실직의 아픔을 뼈저리게 안다고 할 수 있지요. 옷을
벗으니까 정말 사회는 싸늘하더라구요. 퇴직하니까 대하는 태도가 싹
달라져요. 정말 공직이나 대기업의 직책은 옷 같다고 생각합니다. 의복은
벗어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요즘 퇴직자들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할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겨내야 합니다.
우선 집에서 쉬는 게 중요해요. 그 사이에 자신의 눈높이를 낮춰야 합니다.
그간 잘 나가는 안정된 직장에서 대부분이 세상의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자신의 시점을 바꿔야 합니다. 안정된 생활을 해오던 의식을 지워야
합니다. 어렵겠지만 이것을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내 생활은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간의 생활은
한마디로 위에서 지시하면 그냥 따르는 것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였다고 봅니다. 앞으로는 모든 것을 자신의 선택과 판단
아래 움직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혼자만의 고독과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것은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응을 위한 마음의 준비 없인
곤란합니다.
그 다음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조직생활 하다가 나온
다음에 혼자서 어떤 분야를 할 것인가를 잘 결정하지 않으면 홀로서기는
힘듭니다. 제 경험으로는 2단계 전략을 짜는 게 좋다고 봅니다. 대기업에
근무했다면 당장 생소한 것에 손대지 말고 자신이 다니던 직장이나 자신이
일해온 분야에서 할 일을 찾는 게 좋습니다. 하청도 좋고 회사측에서도 기왕에
잘 모르는 남에게 일을 시키는 것보다는 연관 있던 퇴직자를 시키는 게 좋을
것이고, 이렇게 한 1__2년 보내는 게 안정적입니다. 사회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 워밍업 기간이 필요하지요. 1창 적응기간이라고 할까. 그것이 또
다른 중년의 실패를 막는 방안입니다.
혹 이미 퇴직금의 일부를 사기 당했다면 저의 경우는 깨끗이 잊어버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저의 경험담이기도 합니다. 화가 나서 끝가지
분풀이한 경우 시간 잃고 돈 잃고 한 경우를 봤습니다. 자기 본업으로
돌아와야지요.
창업을 할 경우 동업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업이면 영업, 기술이면
기술 다 따로 잘 하는 분야가 있는 법이지요. 모두들 동업을 두려워 하지만
스스로의 욕심을 콘트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창업을 하면 반드시 갈등과
분쟁이 기다립니다. 분쟁이나 갈등도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비롯되기
십상입니다. 이런 정도는 이겨내야 사업을 해내갈 수 있다고 봅니다.
사업은 바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어요. 몇 안되는
종업원들이나 동업자들을 정말 믿어야 합니다. 서로 신뢰감 없이는 어떤
사업도 힘들어요. 신뢰는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적어도 몇 가지를
지켜야지요. 절대 회삿돈 안 쓰고, 사심 버리고 과실을 종업원과 반드시
나누고 이것만 잘 지켜도 사업하는 사람끼리 한 배 탄 공동운명체라는
신뢰감이 생긴다면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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