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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년이 지고 온 함 전쟁이 끝나 뒤 사람들은 가난했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전쟁에 나가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철모에 압록강물 한번 떠먹어 보지 못하고 중공군들에게 쫓겨 내려올 때는 죽은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랑은 있었다. 그는 한 여대생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결혼을 약속했다. 그는 자신의 가난을 염려했으나 여대생은 그 가난마저도 사랑한다고 말했다. 여대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이태가 지났다. 그는 청혼을 하기 위해 여자의 집을 찾았다. 여자의 부모가 그에게 물었다. "자네 직업은 무엇인가?" "아직 뚜렷하게 직업이라고 할 만한 게 없습니다." "직업도 없이 남의 귀한 딸을 데려가려고 하는가?" "지금 고등고시(오늘날의 사법 고시).. 2020. 5. 16.
땅 위의 직업 강원도 사북에 간 김 기자는 막장 광원 감장순 씨를 따라 수직 갱으로 들어갔다. 먼저 탈의실에 들어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헤드 램프가 달린 헬멧을 쓴 뒤, 작업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7백 미터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갱차를 타고 수평으로 1천 2백 미터까지 가서, 다시 갱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미로와 같은 갱 속은 춥고 어두웠다. 지하 사무실에서 막장으로 가는 지도를 보았으나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갱 양편으로 탄가루가 섞인 검은 지하수가 급히 흘러갔다. 갱 바닥은 탄가루와 뒤범벅이 돼 장화 신은 발이 푹푹 빠졌다. 김 기자는 오직 헬멧에 부착된 희미한 불빛만 의지하고 김장순 씨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한 30여 분쯤 걸었을까. 더 이상 갱도가 없는 곳이 나타나고,.. 2020. 5. 16.
가장 아름다운 꽃 남편이 죽었다. 교통사고로. 결혼한 지 1 년도 채 되지 않아 사랑하는 남편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새벽에 경부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이 남편의 차를 들이받아 버렸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면 남편의 죽음을 기정 사실화했으나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번 여름휴가 때 첫아들을 안고 고향의 바닷가를 찾자고 하던 말만 떠올랐다. 나는 임신 중이었다. 도대체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원망스러웠다. 가난했지만 착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려고 하던 남편이었다. 다니던 성당에도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 해산을 했다. 남편이 바라던 대로 아들이었다. 나는 아들을 안고 남편의 고향을 찾았다. 동해가 보이는 산자락에 남편을 잠들어 있었다... 2020. 5. 16.
발레리나를 꿈꾸던 소녀 소녀는 발레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저 애는 발레에 소질이 있어. 열심히 노력하면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될 거야." 소녀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말을 한 마디씩 하곤 했다. 소녀 또한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권위 있는 발레단의 단원이 되어 '백조의 호수'의 오테트 공주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오로라 공주 같은 배역을 맡아보는 게 최대의 꿈이었다. 소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 살 때부터 발레 학교에 들어가 수업을 받았다. 다른 학생들이 한 시간쯤 연습을 하면 그녀 스스로 두 시간 이상씩 연습을 했다. 소녀에 대한 교사들의 기대는 컸다. 소녀의 천부적 재능도 재능이지만 남다른 노력과 성실성을 높이 샀다. 물론 스스로에 대한 소녀 자신의 기대도 컸다. 그런데 소녀가 열 다.. 2020. 5. 16.
바다로 날아간 까치 내 고향은 바닷가 솔숲이다. 우리들은 대대로 이 솔숲에서 살아왔다. 사람들이 방풍림이라고 부르는 이 솔숲을 나는 참으로 사랑한다. 아마 우리 까치들 중에서 나만큼 이 솔숲을 사랑하는 까치도 드물 것이다. 나는 아침마다 해 뜨는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한 바퀴 솔숲을 휘돌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나의 집은 2백여 년도 넘는 세월 동안 절벽 바위틈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소나무 위에 있다. 파도가 심하게 치면 바닷물이 곧 튀길 듯하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날아갈 염려가 있다고 다들 송림 한가운데가 집을 지었으나, 나만은 고개만 내밀면 곧바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다 집을 지었다. 몇 해 전 여름이던가. 폭풍에 집이 날아가 버리자 부모 형제와 다정한 친구들이 이제는 송림 한가운데에다 집을 지으라고 야단이었으나,.. 2020. 5. 16.
바이올린의 눈물 늦가을 밤이었다. 거리엔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내린 가을비는 밤이 되어도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영등포역 지하상가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던 맹인 악사 김씨는 '선구자'를 막 끝내고 시계를 만져 보았다. 일반인 시계와는 달리 시계 바늘이 밖으로 돌출돼 있는 맹인용 시계는 벌써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씨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싶어 바이올린을 케이스 속에 집어넣었다. 바구니에 담긴 백원 짜리 동전 몇 개도 호주머니 속에 챙겨 넣고 낡은 비닐 가방 속에 넣어 둔 휴대용 흰 지팡이를 길게 뽑아 들었다. 그러자 그때 지팡이 끝에 한 남자의 발이 걸렸다. 뜻밖에 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비가 많이 오는 데 어떻게 가실려구 그러세요?" 술 .. 2020.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