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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이야기

바이올린의 눈물

by FraisGout 2020. 5. 16.

늦가을 밤이었다. 거리엔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내린 가을비는 밤이 되어도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영등포역 
지하상가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던 맹인 악사 김씨는 '선구자'를 막 끝내고 시계를 
만져 보았다. 일반인 시계와는 달리 시계 바늘이 밖으로 돌출돼 있는 맹인용 시계는 
벌써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씨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싶어 
바이올린을 케이스 속에 집어넣었다. 바구니에 담긴 백원 짜리 동전 몇 개도 호주머니 
속에 챙겨 넣고 낡은 비닐 가방 속에 넣어 둔 휴대용 흰 지팡이를 길게 뽑아 들었다. 
그러자 그때 지팡이 끝에 한 남자의 발이 걸렸다. 뜻밖에 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비가 많이 오는 데 어떻게 가실려구 그러세요?"
  술 취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주 맑은 20 대 청년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만으로도 상당히 신뢰가 가는 사람이었다. 
  "괜찮습니다. 늘 이렇게 다니는 걸요."
  김씨는 그 청년에게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하도 출구를 향하여 발을 옮겼다. 
그러자 그 청년이 얼른 김씨 앞으로 다가왔다. 
  "저는 이 상가 건너편 카메라 점에서 일하는 최철호라고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저씨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지요. 아저씨의 열렬한 팬이라고나 할까요. 전 음악을 
아주 좋아합니다."
  "아, 예에, 그러세요. 고맙습니다."
  김씨는 청년이 자기 팬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집이 어디세요? 버스 타고 다니세요? 제가 차 타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죠."
  "아니, 괜찮습니다. 집은 봉천동이지만 늘 다니던 길이라 잘 갈 수 있어요."
  "그래도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지금도 빗방울이 제법 굵은 걸요."
  어느새 청년은 지하도 계단을 오르는 김씨의 팔을 가볍게 잡아 주고 있었다. 김씨는 
그런 청년의 호의를 굳이 뿌리치지는 않았다. 아무리 세상이 메말랐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 같은 사람이 이 정도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인심이 
그리 나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거리엔 청년의 말대로 정말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청년이 우산을 받쳐 주었으나 얼굴에 와 닿는 빗방울이 
제법 굵고 차가왔다. 김씨는 지팡이를 요령껏 내뻗치면서 걸음을 걸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행인들과 어깨를 부딪쳤는가 하면, 물웅덩이인 줄도 모르고 발을 내디뎠다. 
  "그 바이올린 이리 주시죠. 제가 들어 드릴께요."
  김씨는 그 청년에게 바이올린을 건네주었다. 가끔 그의 연주 솜씨를 칭찬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친절을 받아왔던터라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악기를 넘겨주었다. 
그런데 김씨가 버스 정류장 앞에 채 이르지 않았을 때였다. 
  "아무래도 비가 많이 와서 안 되겠어요. 집에다 전화를 해서 차를 오라고 
해야겠어요. 제가 자가용으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죠. 가만 있자. 공중전화가 어디 
있나? 아, 저기 있군요. 이리 오세요. 저기 공중전화 있는 데로 잠깐 같이 가시죠."
  김씨는 청년을 따라 공중전화가 있는 데로 갔다. 청년이 집으로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박스 속으로 들어가자, 김씨도 비를 피하기 위해 그 옆에 있는 전화 박스 
속으로 들어갔다. 10여 분이 지났다. 그런데 어딘가 전화를 걸던 청년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최 선생! 최 선생!"
  김씨는 전화 박스 칸막이를 손으로 두드리며 청년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청년의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김씨는 '아차!'하는 생각이 들어 얼른 청년이 들어갔던 
전화 박스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청년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김씨는 혹시나 
무슨 급한 일로 청년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전화 
박스 앞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청년은 나타나주지 않았다. 온통 비를 맞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등포역 앞을 몇 차례나 왔다갔다했으나 한번 바이올린 가지고 
가 버린 청년은 끝내 나타나 주지 않았다. 
  그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채 자정이 넘어 봉천동 달동네 셋방으로 돌아온 
김씨는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같은 맹인인 아내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잠에 
곯아떨어진 세 살 박이 아들만이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청년을 믿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스러웠다. 
복받쳐 오르는 설움에 한번 터진 울음이 그치지 않자, 평소 별로 말이 없던 옆방 주인 
남자가 자다가 일어나서 '112신고'를 해주었다. 그러자 새벽 세 시경에 방범대원이 
찾아와서 김씨의 진술을 받아 갔다. 
  세 살 때 백내장을 앓아 시력을 잃어버린 김씨는 서울 맹학교를 졸업한 후, 기타를 
치는 떠돌이 유랑 악사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나이 서른이 넘어 서울에 
정착한 후, 녹음기를 틀어 놓고 곡을 외워 가며 혼자 바이올린을 배웠다. 싸구려 
하숙집에서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면 겨울에도 추운 골목에 나가 연습을 하곤 했다. 
김씨는 꼬박 2 년 동안 바이올린을 연습한 후에야 거리에 나가 손님들을 불러모을 
수가 있었다. 운이 좋은 날이면 1 만 원 이상을 벌 때도 있었다. 4 년 전에는 먹고 
싶은 것도 안 먹어 가며 아끼고 아낀 돈으로 체코제 바이올린을 1백만 원이나 주고 
샀다. 주로 대중이 좋아하는 가곡이나 클래식 소품, 찬송가 등을 연주했으며, 즐겨 
연주하는 곡 중에는 '비목', '아베마리아', 등도 들어 있었다. 
  바이올린을 잃어버린 후 김씨는 마냥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일을 나가고 싶어도 
바이올린이 없어 나갈 수가 없었다. 아내는 지하철을 타고 하모니카를 불며 구걸 
행각이라도 하자고 했으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찾아온 기자를 
붙들고 호소했다. 
  "잃어버린 저의 바이올린에는 거리의 악사가 흘린 눈물과 한숨이 배어 있습니다. 
돈이 필요해서 가져갔다면 돈을 드리겠습니다. 제발 저의 생명인 바이올린만은 
돌려주십시오."
  신문에는 '거리의 맹인 악사, 바이올린 잃고 한숨만. 데려다 주겠다고 친절 
베푼 젊은이, 악기 받아 쥐고는 잠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났다. 
  그러자 기사가 난 다음 날, 악기 제조 회사 사장 한 사람이 산동네까지 그를 찾아와 
바이올린 한 대를 선물로 주고 갔다. 그는 김씨의 손을 꼭 잡고 "이건 제가 젊은 날에 
쓰던 독일제 활입니다. 부디 용기를 잃지 마시고 열심히 사십시오" 하는 격려의 
말까지 하고 돌아갔다. 김씨는 다시 새생명을 얻은 것 같았다. 그는 그 다음 날부터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영등포역 앞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계속해 나갔다. 
  그 뒤 2 년이 지난 어느 늦가을 밤이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던 김씨의 발 
아래에 조용히 바이올린 한 대를 두고 가는 청년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왜 그 
청년이 김씨한테 바이올린을 주고 가는지 몰랐으나 김씨만은 알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돌려 드립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김씨는 바이올린을 켜다가 그 젊은 청년의 맑은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그러나 그는 
바구니에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처럼 잠깐 허리를 굽혔을 뿐 여전히 
바이올린만을 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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