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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이야기

그 청년이 지고 온 함

by FraisGout 2020. 5. 16.

전쟁이 끝나 뒤 사람들은 가난했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전쟁에 나가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철모에 압록강물 한번 떠먹어 보지 못하고 중공군들에게 쫓겨 내려올 때는 
죽은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랑은 있었다. 그는 한 여대생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결혼을 약속했다. 그는 자신의 가난을 염려했으나 여대생은 그 가난마저도 사랑한다고 
말했다. 
  여대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이태가 지났다. 그는 청혼을 하기 위해 여자의 집을 
찾았다. 여자의 부모가 그에게 물었다. 
  "자네 직업은 무엇인가?"
  "아직 뚜렷하게 직업이라고 할 만한 게 없습니다."
  "직업도 없이 남의 귀한 딸을 데려가려고 하는가?"
  "지금 고등고시(오늘날의 사법 고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 번 응시했는가?"
  "세 번 응시해서 세 번 떨어졌습니다."
  "그럼 언제 합격할 수 있겠는가?"
  "그건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저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다시 한번 말해 보게. 언제 합격할 수 있겠는가?"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여자의 부모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얼굴에 마뜩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 자네 부모님은 뭘하시나?"
  "전쟁통에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허허, 그것 참 안된 일이군. 그렇지만 난 자네한테 우리 딸을 줄 수 없네."
  여자의 아버지는 더 이상 물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게나."
  여자의 어머니가 그것 참 잘된 일이라는 듯 상냥하게 덧붙여서 말했다. 
  그는 낙망이 되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여자의 부모를 찾아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드디어 허락한다는 말이 떨어지고 곧 결혼 날짜가 잡혔다. 
  그러나 신부집에 함을 보내야 할 날짜가 다가오자 그는 다시 고민이 되었다. 어렵게 
승낙을 얻어 결혼을 하게 되었으나 정작 함 속에 넣을 채단 살 돈이 없었다. 최소한 
청색, 홍색 치마저고리 감이라도 한 벌 끊어 넣어야 했으나 그럴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고민을 하는 동안 함을 지고 가야 할 날은 다가왔다. 그는 커다란 여행용 가방 
하나를 이웃집에서 빌려 달랑 그 가방만 들고 혼자 신부집으로 갔다. 
  "함 사시오! 함!"
  그는 신부 집 대문을 흔들며 커다란 목소리로 당당하게 소리쳤다. 신부집에서는 
신랑 친구들이 여러 명 올 줄 알았으나 신랑이 직접 함을 지고 오자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는 함을 마루에 내려놓았다. 신부의 부모와 인척들이 그 함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이 사람아. 이게 무슨 일인가? 이건 빈 함이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자네, 우릴 무시하는 건가? 도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장인 어른. 비록 이 함이 텅 비어 있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신부를 사랑하는 제 마음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허허, 이 사람, 말하는 거 좀 보게."
  "저는 언제까지나 이 함 속에 사랑을 가득가득 채워 둘 것입니다"
  "허허, 이 사람, 내 그 말을 평생 잊지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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