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漢書 卷八十五
東夷列傳 第七十五
<韓>
03〔韓-06/01〕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山海閒, 地合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한韓은 세 종류가 있으니, 첫번째를 마한馬韓이라 하고, 두번째를 진한辰韓이라 하며, 세번째를 변진弁辰이라 한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 있고, 그 북쪽이 낙랑과 접하며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고, 그 북쪽이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는데, 그 남쪽이 역시 왜와 접하고 있다. 무릇 78국이며 백제伯濟가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것은 1만여 호戶이고 작은 것은 수천 가家로서, 각기 산과 바다의 사이에 있으며, 땅을 합하면 사방 4천여 리로서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니 모두가 예전의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가장 크니 모두 함께 그 혈통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고,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모든 삼한三韓의 땅을 왕으로서 다스린다. 그 곳 모든 나라 왕의 선조들은 모두 마한 혈통의 사람들이다.
03〔韓-06/02〕馬韓人知田蠶, 作 布. 出大栗如梨. 有長尾 , 尾長五尺. 邑落雜居, 亦無城郭. 作土室, 形如 , 開戶在上. 不知 拜. 無長幼男女之別. 不貴金寶錦 , 不知騎乘牛馬, 唯重瓔珠, 以綴衣爲飾, 及縣頸垂耳. 大率皆魁頭露 ,[1] 布袍草履. 其人壯勇, 少年有築室作力者, 輒以繩貫脊皮, 以大木, 呼爲健. 常以五月田竟祭鬼神, 晝夜酒會, 聚歌舞, 舞輒數十人相隨 地爲節.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諸國邑各以一人主祭天神, 號爲[天君]. 又立蘇塗,[2] 建大木以縣鈴鼓, 事鬼神. 其南界近倭, 亦有文身者.
마한馬韓 사람들은 밭농사와 누에치는 법과 고치솜과 피륙을 자을 줄 안다. 배만한 크기의 밤이 난다.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가 다섯 자나 된다. 읍락은 서로 섞여 거처하며 역시 성곽은 없다. 흙으로 집을 짓는데 모습이 마치 무덤과 같으며 출입문은 위쪽으로 열어둔다. 무릎 꿇어 절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 어른과 아이 및 남녀의 구별이 없다. 금과 보석 및 비단이나 담 등은 귀하게 여기지 않고 소나 말을 탈 줄을 모르며, 오직 구슬을 귀중하게 여겨 옷에 매어달아 장식으로 삼거나 목이나 귀에 걸어 드리운다. 대부분 모두 맨머리에 드러난 상투를 틀고 베로 만든 도포에 짚신을 신는다. 사람들은 건장하고 용감하여 어린 나이에도 집을 짓는 등 힘을 쓰는 자가 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새끼줄을 등골 가죽에 관통시키고 큰 나무를 매어 달아 힘 있게 외치며 일하는 것을 건장하다 여긴다. 항상 5월이면 밭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 지내며 밤낮으로 술자리를 열고 무리지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데, 춤을 출 때는 번번이 수십 명이 서로 따르며 절도 있게 땅을 밟는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도 다시 이와 같이 한다. 모든 나라의 읍邑에는 각기 한 사람이 주관하여 하늘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한 소도蘇塗를 설치하여 큰 나무를 곧추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아 귀신을 섬긴다. 그 남쪽 경계가 왜倭와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도 있다.
【1】魁頭猶科頭也, 謂以髮 繞成科結也. 音計.
【2】《魏志》曰: [諸國各有別邑, 爲蘇塗,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蘇塗之義, 有似浮屠.]
【1】괴두魁頭는 과두科頭(관冠 등을 쓰지 않은 맨머리)와 같은데 머리칼을 둘러 얽어 묶음을 만든 것을 말한다. 의 음은 '計(계)'이다.
【2】《위지》에 이르기를 [모든 나라에는 별도의 읍이 있어 소도蘇塗를 두고 모든 도망자가 도피하여 그곳에 이르면 누구라도 그를 돌려보내지 않는다. 소도의 의미는 사찰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03〔韓-06/03〕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城柵屋室. 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次有儉側, 次有樊 , 次有殺奚, 次有邑借.[1] 土地肥美, 宜五穀. 知蠶桑, 作 布. 乘駕牛馬. 嫁娶以禮. 行者讓路. 國出鐵, 濊 倭 馬韓 從市之. 凡諸(貨)[貿]易, 皆以鐵爲貨. 俗憙歌舞飮酒鼓瑟.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2]
진한辰韓은 늙은이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도망한 사람들로서, 고된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에 건너가니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들이 이름하는 것에 나라를 일러 방邦이라 하고, 활을 호弧라 하며, 도적을 구寇라 하고,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하며, 서로 일컬을 때는 도徒라고 하는 등 진秦나라의 말과 비슷한 까닭에, 혹은 이름하여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성곽과 목책 및 가옥이 있다.
모든 작은 별도의 읍邑에는 각기 우두머리가 있는데, 가장 큰 자를 신지臣智라 이름하고, 그 다음으로 검측儉側이 있고 그 다음으로 번지樊 가 있으며, 그 다음으로 살해殺奚가 있고 그 다음으로 읍차邑借가 있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을 기르기에 알맞다. 누에치고 뽕나무 심는 것을 알고 목화와 무명을 짠다. 소나 말을 타고 부린다.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은 예절로서 한다. 행인은 길을 양보한다. 나라에서 쇠가 나는데, 예濊와 왜倭 및 마한馬韓 등이 모두 와서 사간다. 무릇 모든 교역은 모두 쇠를 통화로 삼는다. 풍속에 가무음주 및 북을 치고 거문고 타기를 좋아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머리를 평평하게 하고자 모두들 돌로 눌러 놓는다.
【1】皆其官名.
【2】扁音補典反.
【1】모두 관직 이름이다.
【2】扁의 음은 補典反이다.
03〔韓-06/04〕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其人形皆長大, 美髮, 衣服 淸. 而刑法嚴峻. 其國近倭, 故頗有文身者.
변진弁辰은 진한과 섞여 거처하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으나 언어와 풍속에 차이가 있다. 그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키와 몸집이 크고 아름다운 머리칼에 의복은 정결하며 깨끗하다. 죄인을 다스리는 법은 준엄하다. 그 나라는 왜倭와 가까운 까닭에 문신을 한 자가 제법 된다.
03〔韓-06/05〕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 等詣樂浪貢獻.[1] 光武封蘇馬 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謁. 靈帝末, 韓 濊 盛, 郡縣不能制, 百姓苦亂, 多流亡入韓者.
애초에 조선왕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격파되자, 그 나머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즉위하여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準 뒤로 멸망하여 단절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스스로 즉위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
건무建武(25∼56) 20년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 소마시蘇馬 등이 낙랑에 찾아들어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가 소마시를 책봉하여 한漢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고 낙랑군에 예속되게 하니, 철철이 예방하고 배알하였다. 영제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더불어 번성하니 군현郡縣으로는 능히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생활이 괴롭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많이 한韓으로 도망하여 흘러 들어갔다.
【1】廉斯, 邑名也. 音是.
【1】염사廉斯는 읍邑의 이름이다. 의 음은 '是(시)'이다.
03〔韓-06/06〕馬韓之西, 海 上有州胡國. 其人短小, 頭, 衣韋衣, 有上無下. 好養牛豕. 乘船往來貨市韓中.
마한의 서쪽 바다섬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그 사람들은 키와 몸집이 작고 머리는 깎은 채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는데, 위의 것은 있으나 아래의 것은 없다.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재물을 한韓에 내다팔고 산다.
晉書 卷九十七
列傳 第六十七
馬 韓
05〔馬-03/01〕韓種有三: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在帶方南, 東西以海爲限.
한韓의 종류로는 셋이 있으니, 그 첫번째를 마한이라 하고, 두번째를 변한이라 하며, 세번째를 진한이라 한다. 진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정되어 있다.
05〔馬-03/02〕馬韓居山海之間, 無城郭, 凡有小國五十六所, 大者萬戶, 小者數千家, 各有渠帥. 俗少綱紀, 無 拜之禮. 居處作土室, 形如 , 其戶向上, 擧家共在其中, 無長幼男女之別. 不知乘牛馬, 畜者但以送葬. 俗不重金銀錦 , 而貴瓔珠, 用以綴衣或飾髮垂耳. 其男子科頭露 , 衣布袍, 履草 , 性勇悍. 國中有所調役, 及起築城隍, 年少勇健者皆鑿其背皮, 貫以大繩, 以杖搖繩, 終日 呼力作, 不以爲痛. 善用弓楯矛櫓, 雖有鬪爭攻戰, 而貴相屈服. 俗信鬼神, 常以五月耕種畢, 聚歌舞以祭神; 至十月農事畢, 亦如之.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謂爲天君. 又置別邑, 名曰蘇塗, 立大木, 懸鈴鼓. 其蘇塗之義, 有似西域浮屠也, 而所行善惡有異.
마한馬韓은 산과 바다 사이에 거처하며 성곽이 없고, 무릇 작은 나라가 56개가 있으니 큰 것은 1만 호이며 작은 것은 수천 가로서 각기 우두머리(渠帥)가 있다.
풍습은 기강이 느슨하여 무릎을 꿇고 절하는 예법이 없다. 흙집을 지어 거처하는데 형태는 마치 무덤 같으며, 출입구는 위로 향하여 두고 온 집안이 그 가운데서 같이 지내니 어른과 어린이 및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 소나 말은 타는 법을 알지 못하니 길러서 단지 장례를 치르는 데 쓰인다.
풍속에 금 은이나 비단과 모직 등은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나 옥돌이나 구슬을 귀하게 여기니, 그것을 옷에 꿰거나 혹은 머리에 장식하고 귀에 걸어 늘어뜨린다. 남자들은 맨머리에 밖으로 드러난 상투를 틀고, 무명옷과 솜옷에 짚신을 신으며 성격은 용감하고도 굳세다. 나라에 조세로서 부역할 일이나 성곽, 또는 황참隍塹을 건축할 일이 있으면 나이 어린 건장한 자들이 모두 등줄기의 가죽을 뚫어 큰 줄로 관통시키고, 몽둥이를 그 줄에 매달아 온종일 소리를 지르며 힘을 쓰고도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다.
활과 방패 및 창과 큰 방패 등을 익숙하게 사용하며, 비록 전쟁이 있어 공격하여 싸우더라도 굴복한 자를 돌보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 풍속에 귀신을 믿으니 항상 5월에 밭갈고 씨뿌리기를 마치면 무리지어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것으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10월에 이르러 농사를 마치고도 역시 그와 같이 한다. 나라의 읍락마다 각기 한 사람을 세워 하늘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는데, 일컬어 '천군天君'이라 한다. 또 별도의 읍을 설치하여 소도蘇塗라 이름하고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아 둔다. 소도의 의미는 서역西域의 부도浮屠와 유사하나 선악을 행하는데 있어서 차이가 있다.
05〔馬-03/03〕武帝.太康元年 二年, 其主頻遣使入貢方物, 七年 八年 十年, 又頻至. 太熙元年, 詣東夷校尉何龕上獻. 咸寧三年復來,[3] 明年又請內附.
무제 태강太康 원년과 2년에 그들의 군주가 빈번히 사신을 들여보내 토산물을 바쳤으며, 7년과 8년 및 10년에도 또한 빈번히 들어왔다. 태희太熙 원년에 동위교위 하감何龕에게 찾아들어 물품을 바쳤다. 함녕咸寧 3년에 다시 들어왔으며, 그 다음해에는 또 내지內地로 붙좇기를 청하였다.
辰 韓
05〔辰-02/01〕辰韓在馬韓之東, 自言秦之亡人避役入韓, 韓割東界以居之, 立城柵, 言語有類秦人, 由是或謂之爲秦韓. 初有六國, 後稍分爲十二, 又有弁辰, 亦十二國, 合四五萬戶, 各有渠帥, 皆屬於辰韓. 辰韓常用馬韓人作主, 雖世世相承, 而不得自立, 明其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也. 地宜五穀, 俗饒蠶桑, 善作 布, 服牛乘馬. 其風俗可類馬韓, 兵器亦與之同. 初生子, 便以石押其頭使扁. 喜舞, 善彈瑟, 瑟形似筑.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으며,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의 망명인들로서 노역을 피해 한韓에 들어오니, 한이 동쪽 경계를 나눠주며 거처하게 하기에 성벽과 목책을 세우게 되었다고 하며, 언어가 진秦나라 사람들과 서로 비슷한 점이 있기에 혹은 그들을 일컬어 진한秦韓이라 한다.
처음에는 여섯 나라가 있었는데 그 후로 점차 나뉘어져 열두 나라가 되었으며, 또한 변진弁辰이 있어 역시 열두 나라이니 합하여 4,5만 호이며, 각각에 우두머리가 있고 모두 진한辰韓에 예속되어 있다. 진한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군주를 삼는데, 비록 대대로 그 보위를 이어간다 하더라도 스스로 자리에 오르지를 못하니, 그 무리들이 다른 곳으로부터 옮겨 온 사람들이 분명한 까닭에 마한에 의해 통제를 받는 것이다.
땅은 오곡에 알맞으며 풍속에 누에치고 뽕나무 심기를 많이하여 비단과 베를 잘 자으며, 소를 부릴 줄 알고 말은 타는 것으로 이용한다. 그 풍속은 얼추 마한과 비슷하며 병장기 역시 그들과 같다. 처음에 자식을 낳으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두어 평평하게 만든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며 가야금을 잘 타는데 가야금의 모습은 마치 축筑과 같다.
05〔辰-02/02〕武帝.太康元年, 其王遣使獻方物. 二年復來朝貢, 七年又來.
무제 태강太康 원년에 그 임금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2년에 다시 들어와 조공하였으며 7년에 또 들어왔다.
이야기 모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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