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기 페이스로 읽는다
'생각하기 위해서 읽으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
자. 그러면 도대체 '생각하기 위해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질문에 앞서서,
"도대체 읽는다는 것과 '생각한다'는 것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있을까요?" 하
고
당신이 따지고 나온다면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지적한 바는
'읽는 것은 생각하는 것' 이라고 믿었던, 고전시대의 독서관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이렇게 추궁을 당할 필자는 꼼짝 못할 판단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다.
'생각하는 것'과 '읽는 것'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 이 두 가지의 관계에 대해서,
고금의 철학자들이나 대독서가들이 어떤 것을 생각했으며, 어떤 말을
했는가를 한번 훑어봄으로써 교훈을 찾아보자.
"너무 빨리 읽는다는 것은 좋지 않다" 고 말하면서,
"너무 느리게 읽어서는 안된다" 라고 언뜻 듣기에는 모순처럼 보이는 까다로운
주문을 붙인 것은 저 유명한 파스칼이다.
그러나 이 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철학자가 독서 그 자체를 금할 턱은 없는
것이므로 우리들은 여기에서 '정도가 지나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의자에 앉아 있노라면, 나의 생각은 알게 모르게 잠들어 버리고 만다. 하는 수 없
이
나는 생각을 집중하고 싶을 때에는 걷는다" 라고 독서에 대한 마음가짐에 대해서
몽테뉴는 말하였다. 몽테뉴와 같은 위대한 인물조차도 이렇게 조심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생각하면서 읽고 있다' 고는 하면서도, 솔직하게 말한다면 마음은 언제나
공중에 떠 있는 경우가 많다.
너무 빨리 읽어 버리거나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들여서 읽는다는 비난을 듣게 되는
것은 결국 '뭔가 생각하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하
는
씁쓸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씁쓸한 경험을 또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한 가지 비결로 가장 흥미를
끄는 것만을 읽는 방법이 있다.
희극에 흥미가 쏠려 있을 때에 무리하게 대수 문제와 씨름하거나 하지 말 것,
활극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 굳이 애써서 희극의 연구로 돌아올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만 어중간한 열중이어서는 안되겠다. 전심전력으로 열중해야 된다.
열중하는 것이야말로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열중하지 않고는 어떻게 해서
'잘 생각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앞에서 말한 파스칼의 의견에 다소 보충을 해 보자.
"빨리 읽는 것이 즐거우면 빨리 읽는 것 이상으로 좋은 방법은 없다"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상태는 독자의 마음이 가장 '생각하기 쉬운' 상태에 있다
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는 일 자체가 '적당한 독서의 속도'를 정하고 있는 셈이
다.
"열중할 수 잇는 것일수록 읽기 쉽고, 읽기 쉬울수록 그만큼 생각하게 된다"
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더 나아가 생각하는 내용=이해의 효율을 올리는 일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2. '필요'는 생각하기 위한 첫걸음
"당신은 기차 시간표를 어떤 식으로 봅니까?"라는 질문에
"그런 거 뻔하지 않소?"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선 자기가 필요한 데까지 훌쩍 뛰어넘게 된다. 그리고 요점만을 자세히 살펴본다.
극단적으로 기호화된 기차 시간표 중에서 당신이 필요하고도 충분한 사항만을
이해하려고 들 것이다.
기차 시간표를 자주 보아야만 하는 사람은 그런 건 별로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러
나
처음으로 가차 시간표를 보게 된 사람은 별수 없이 그 많은 시간표를 모조리 읽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어디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일까? 물론 '경험의 차이'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경험을 얻기 위한 근원이 된 '필요'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기차 시간표는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 다만 이 사실만이 쉽게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두 가지 극단으로의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여행을 즐기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차 시간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임은 우리
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또 여행하는 것이 취미만이 아닌 사람들, 즉 직업상 여행을 자
주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에게 기차 시간 같은 필요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들은 '기타 시간표 읽기'에는 프로 선수인 셈이다. 어쩌다가 기차 시간표를 이용하
게
되는 사람과 항상 기차 시간표를 보아야 하는 사람 사이에는 읽는 속도라든가 이용하
는
솜씨에 있어야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을 것은 뻔한 일이다.
이와 같이 대충 '생각하면서 읽는다'고는 하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커다란
핸디캡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상기하기 바란다.
몽테뉴와 같은 '책 읽기의 후로 선수'라 할지라도 '앉아 있으면 잠들어 버리는'
위험이 있었다는 점이다.
즐거운 것이어야만 할 독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짐스럽고 싫증나는, 한마디로
말해서 귀찮은 것이 되어 버려서야 되겠는가.
읽고 있던 책 위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몽테뉴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도 몽테뉴의 흉내를
내어서는 안된다.
3. 겉치레보다는 저자의 인격
그런데 기차 시간표의 예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기차 시간표
를
보는 방법이 생각하면서 읽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한 하나의 열쇠가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 하는 독서와 인격 형성을 위해서 책을 읽는
것과는 어디까지나 구별되어져야 한다.
지식을 얻기 위한 태도는 자연스러운 욕구의 나타남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키워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식의 책'은 결국 그 자체로서의 의미밖에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기본(1737-1794, 영국의 역사가, "로마제국의 쇠망사"로 이름이 높다)이나
마콜레이(1800-1859, 영국의 역사가, 시사평론가), 몸젠(1817-1903, 독일의 고전학자,
역사가)의 역사책은 과연 존경할 만한 노작이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지식의
책이고, 생각하는 도구의 백화점이지만, 생각하면서 읽기에는 적당치 않은 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지식의 책'이란 어디까지나 '알 필요가 있어서 읽는' 종류의 책이다. 당신의 꼭 알
고
싶은 부분이 20페이지에 있다고 하면, 그 부분만 읽으면 되는 것이다. 전부를 읽지
않으면 양심적이라고 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전부 읽는 것은 도리어 해로울 때도 있다고 하겠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라. 시간을 아낀다는 것은 유효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태도이다. 가능하면 당신의 노트를 활용하라.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사항은 될 수 있는 대로 반드시 노트를 하자. 이렇게 하면 훗날 책을 다
시
읽는 시간을 절약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하면 훗날 책을 다시 읽는 시간을 절약할 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지식의 정리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한두 줄 읽기만 해도 내용을 알 수 있는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
목차를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내용을 알 만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서점에서 책을 선택할 경우 저자와 당신의 의견의 차이를 뚜렷이 알 수가 있는지,
또
책의 장절을 보아서 금방 알 수가 있는지 어떤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저자와 당신의 의견이 대립된다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간단히 잠들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논쟁을 하면서 좋든 싫든 당신은 '생각을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
기
때문이다.
저자나 출판사 쪽에서 보면 책의 주제, 특히 독자에 대한 논점을 명백히 드러내
놓는다는 것은 센세이셔널 하다기보다는 성실한 태도라고 할 수가 있다. 의미를
명석하게 하려고 한 나머지, 인쇄상의 기교를 부렸다고 해서 백안시 당한
샤를르 폐기(1873-1914, 프랑스의 시인, "반월수첩" 창간자)의 일이 생각난다.
그와 같은 '편견'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판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출판사의 스타일도 나날이 새로워져서 새로운 장식을 하게 되는 것은
시대의 추세라고 할 수가 있다. 새로운 시대의 독자의 의도가 거기에 반영되고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급한 주장이나 겉치레가 거창한 것만을 보고 본질적인 논점의 소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더욱 조심하고 싶은 심정이다. 공격적이고 겉보기에 그럴
듯하게 보이는 책일수록 내용이 빈약한 것이 많다는 것이다. 비판에 대해서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에 소홀히 하기 쉬운 일방적인 주장은 대개의 경우 당신의
'인격형성'이나 교양의 향상에 도움이 안될 뿐만 아니라 지식의 씨앗조차도 되지 않는
것이다.
사정은 이렇다.
#1 어떤 책이 여기에 있다.
#2 저자의 논점이 당신을 자극했다.
#3 당신은 저자와 논점의 가부를 따져 보고 싶다.
#4 당신의 기대는 채워졌다. 즉 당신은 읽는 과정을 통해서 생각하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물론 졸지도 않았다.
이렇게만 된다면 이상적이겠지요. 그러나 #1-#3의 전제가 결과인 #4에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없다고는 할 수가 없다.
당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왜 생겼을까? 물론 그것은 당신을 자극한 논점이
'겉치레만 번지르르한' 엉터리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실수를 미리부터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결과를 보고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은 저자가 제시한 논점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들이 정말로 대결할 가치가 있는 것, 그것은 저작의 인격이지 인격에서
독립된 견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변에-즉 주제의 배우에-당신의 존경을 느꼈을 때에 다분히 그 책은
진짜일 것이다. 당신이 읽고 생각하게 되는 책이라 당신이 읽으면서 '존경'을 잃지
않았던 책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당신과 저자 사이에서 침묵 속에 주고받는 '존경의 뜻'이 '창조적 비평'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설명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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