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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좋은글

이해했으면 비판하라 사고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IV)

by FraisGout 2020. 3. 24.

1. 생각하는 노력으로부터 시작하자

  어떤 책이라도 일단 읽기로 작정을 했으면
  #1 우선 이해한다.
  #2 이해했다고 생각되면 반드시 비평해 볼 것.
  도대체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독서를 왜 하는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넓은
세상에는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읽는' 방법이 성행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
  이런 일이 있다.
  브라우닝 부인(1806-1861, 남편 로버트와 함께 시인 부부로 알려진 영국의
여류시인)의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독자 여러분의 감상을 물어본 적이 있다.
시인은 여기서 철학을 '신에의 공감'이라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필자는
그 점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작가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
  "알 수가 없는데요"라는 답이었다.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틀려도 좋으니까 부딪쳐
보려는 자세조차도 엿볼 수가 없었던 것은 유감이었다.
  이해할 힘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마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썩히는 짓과 같은 것으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신문을 읽듯이 편하게 앉아서 시를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으로

꾸준한 교양을 계속 쌓아 가는 사람도 있다. 언뜻 보기에는 같은 길을 걸어가는 두
그룹의 사람들 사이에는 넘어 뛸 수 없는 간격이 있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작가가 남겨 놓은 단편들을 발굴했다고 몹시 기뻐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편지 따위라든가 친필 원고 따위를 연구한답시고 몇 년씩
세월을 보내는 태도가 무언가 대단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독서하는 마음'의 자세는 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20행밖에 안되는 세네카(65, 로마 제정 초기 문인)의 문장을 두 시간씩 들여서
연구하는 프랑스의 예비대학교(이것을 리세라고 한다)의 수업 방식은 뛰어난 지적
훈련의 한 방법이다.
외국에서 찾아와서 구경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 하며 나중에는 홀딱 반해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리세의 학생 자신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겪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은 드디어 '올바르게 읽는 습관'이라는 빛나는 결실을 가져오게 된다.
그들도 머지 않아 '그것이 정말 좋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이 외국어를 알고 있다면 한번 번역에 착수를 해 보라. 더구나 매우 지적이고
예술적인 번역이 되도록 해 보라. 하루에 넉줄 정도라도 좋다. 이 작업이 얼마나
'완전히 이해하는 습관'을 붙이는데 도움이 되는지 당신 자신이 스스로 놀라지 않을 

없게 될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거나 너무 어렵다거나 하는 이유로 내동댕이
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생각하는 노력! 이것이 '이해하는' 독서의 시작이고 또 종점이기도 하다.

  2. 우선 의심해 보라

  대체 자기가 쓴 글을 남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한편 그
작가에 대해서 작자의 참다운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남김없이 캐내려고 노력하는
독자가 대기하고 있는 법이다.
  '남김없이 이해하려'고 마음먹고 그런 자세를 취하게 되면 이미 비평이 여기에
포함되고 있는 셈이다. 본래 '비평한다'는 말은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통 비평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직능을 우리가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쉽게 알 수 가 있다. 누구도 남의 흠을 찾아내는 전문가를 가리켜서
비평가라고는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판정자라고 부를 따름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까지는 자기 자신은 자진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맞장구를 쳐 놓고 막상 자기 차례가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상대방 이야기를 그대로 복창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빌어온 의견'에 익숙해져 버리면, 끝내는 다른 사람의 의견의 포로가 되어 버리게
되며, 지배를 당하는 '양'이 되어 버릴 것이다. 부화뇌동의 충동을 누를 수
없는 마음속에는 겁쟁이 심보와 게으름뱅이 근성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다.
  '비판정신'은 될 수 있는 대로 어릴 때부터 몸에 배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빠르다는 법은 없다. 빠를수록 좋다. 우리들은 교사가 해야 할 역할의
중요성을 여기서도 강조화고 싶다.
  뛰어난 문학작품의 분석을 목적으로 하는 세미나는 반드시 우선적으로 했으면 좋을
듯하다.
  학생들은
  #1 되풀이해서 정독을 할 것.
  #2 구조를 조사할 것.
  #3 중심이 되는 관념을 파악할 것.
  #4 관념이 어떻게 전개되며, 지속되었는가를 판단할 것. 이와 같은 순서로
이해 비평의 방법을 몸에 익혀 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훈련이 올바른 지도를 받아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소년 소녀들의 눈이
어른들의 눈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아직 젊은 나이에 매우 놀라운 발전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비밀의 열쇠는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젊은 마음 속에 뚜렷이 뜨여진 눈, 그 눈빛이야말로
'힘찬 어른의 자각'의 증거가 아닐 수가 없다.
  역사를 연구하는 효과도 문학의 경우에 뒤지지 않는다. 방법이 올바르기만 한다면
효과적인 대상은 얼마든지 있다고 하겠다.
  속담이라든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일반적 원리'도 훌륭한 '생각하는 소재'의 자
격을
갖추고 있다. 이해 판단의 공식은 여기서도 당연히 적용되어야 한다.
  좌우지간 학생들에게 의심이 싹트지 않는다고 하면, 그들은 노력이 부족하다고
책망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교사는,
  "이것은 진실입니다"
  "이 그림은 아름답습니다"
와 같이 일정한 관념을 늘어놓고, 학생들로 하여금 외우게 해서는 안된다. 학생 쪽에

보면
  "이것은 정말로 진리라고 할 수가 있는가?"
  "이 그림은 과연 아름다운가?"
와 같은 관점에서 스타트할 일이다. 무수한 '견해'가 여기서부터 갈라질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요는 '판단하는 마음'이 일관해서 작동하고 있는지, 어떤지

중요한 것이다.

  3. 사물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데카르트나 쇼펜하우어(1788-1860, 고뇌와 허무의 예언자라 불린 독일의 철학자)에
의하면 판단=비판에서 걸리지 않은 '기정의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체스터턴(1874-1936, 영국의 소설가, 평론가)은
  "흔해빠진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다른 것으로 보여질 때까지 계속
노려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실제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내용을 갖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이다.
  이것은 체스터턴의 이야기인데 대체로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 넘어선 어떤
종류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명언을 말할 수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것으로 보인' 놀라움은 누구 나가 경험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교교하

달빛 아래 경치에 도취해 있으면서 차를 타고 흔들리면서 가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꿈을 꾸는 듯한 경지에서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여기는 어딘가?..."
하면서 놀라서 밖을 내다보고는 안도의 숨을 쉬는 순간이 있다. 멀리서 보아서는 마치
낯선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어느덧 낯이 익은 장소에까지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언덕도 나무도 집도 꿈같이 먼 곳에서 한순간에 현실
세계에로 되돌아와서는 움츠려 들고 또 퇴색해 버리는 일도 있다.
  '유령의 정체가 드러났네. 마른 억새풀'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들의 이미지에는
두 가지 면이 있으며 따라서 인상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른바 기성개념이란 것은, 생활, 사상을 뭉뚱그려서, 이런 식으로
왜곡시키지 않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다시 되풀이하지만, 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진실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교훈이 여기에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모양'의 뒤에 숨은 '진짜 모습, 모양'을 찾아내서 분간하려면
말로만 해치울 수 있는 만큼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나 수고를 아끼고
있다가는 우리들의 실체의 표면을 언제까지나 그냥 지나쳐 버리기가 쉬운 것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할 때 다름 아닌 우리들의 판단하는 능력이 그만큼 유능하냐
어떠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4. 비판 없이 이해 없다

  당신이 아직 읽은 일이 없는 외국작가의 이름을 친구가 들먹였다고 하자. 가령 그
이름이 고리키(1861-1936, 러시아의 소설가)였다고 하자. 당신은 당연히 흥미가 생길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들춰본 잡지에 이 작가의 일기가 실려 있었다. 당신의 눈은 그
부분에 쏠렸다. 여기서 감동과 흥미를 느낀 당신의 욕구는 한층 부풀어올라서 그
후로는 고리키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게 된다.
  이윽고 당신은 고리키를 읽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하여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다.
  "고리키를 이런 식으로 파악한 것은 나 혼자야"라고.
  비평이란 것을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하라. 왜냐하면 우리들의 심미안은
한쪽에서는 머리를 숙이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을 하고 든다. 이 두 가지의
충동의 균형을 잡는 것이 비평의 의의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평의 원리로 일류 작가나 철학자의 노작을 당신 자신이 직접 심사를
해보라.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명예가 결코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정말 훌륭한' 그림을 그린 화가가 화랑에서 친구의 걸작을 정신없이 보고 있는
광경을 본 일은 없는가?
  그들의 눈은 그 그림을 여기저기 샅샅이 살펴보면서 차츰 열을 띠게 된다.
화가만이 지닐 수 있는 예리한 눈의 표정이 극점에 도달했는가 생각되는 순간,
그는 갑자기 눈을 감아 버린다.
  뛰어난 작품 앞에서 자기를 대상 속에 투입하려고 시도하는 예술가의 모습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행위는 비평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비평도 판단도 결국은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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