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전집>
작가: 김소월(1902--1934)
소월 김정식은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 <진달래꽃>(1925)을 냈으나, 그의 사후 스승인 김억이 그 유고작을 수습하여 <소월시초>(1939)로
다시 출판한 바 있다. 전통적인 한의 정서를 민요적 가락과 여성적 어조로 표현한 소월의 시들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던 한민족의 무거운
가슴을 카타르시스해주었다. 소월의 시를 민족시, 민중시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고독한 시인
평북 정주군 곽산면에서 김성도와 장경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정식, 개화의 도시 정주는 이광수나 김억 등 한국 신문학의
개척자들을 배출했음은 물론, 안창호나 조만식 선생과 같은 선각자도 그 부근에서 출생했을 정도로, 일찍이 서구사상을 수용한 도시였다.
또한 정주는 하나의 서정시인을 기르는 데 부족함이 없는 수려한 도시였다. 소월이 그의 시에서 즐겨 노래한 산과 바다강 등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의 고향이 그 모태가 되었고, 워즈워스가 그의 고향 컴벌랜드의 자연을 시로 읊었던 것과 같이, 소월 역시 고향의 자연을
통해서 삶의 본질적이고도 근원적인 감성을 노래했다.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소월은 가족들의 사랑 속에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2살 때 그의 부친은
나들이를 가다가, 철도공사를 하던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해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소월문학의 주제가 되는 한은 여기서 시작된다.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숙모인 계희영에게 <심청전> <장화홍련전> 등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특히 계희영은 소월의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인데, 친정에서 읽은 고대소설 설화로서는 더이상 소월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하자, <언문 이야기
책>을 사서 보고 이 꿈 많은 소년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주었다.
할아버지의 배려로 독선생을 모시고 공부하던 수월은 7살 때 그의 고향 뒷산에 남산보통학교가 설립되자, 여기에 입학하여 신식교육을 받게
된다. 1915년에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교장이던 이승훈 선생, 교사이던 조만식 선생이 있던 오산학교에 진학한 것은 그의 생에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그것은 첫째 그가 일생 동안 스승으로 모신 안서 김억을 만난 것이고, 둘째는 폐쇄된 향토생활을 떠나 민족이나
국가차원으로 시야를 넓히게 된 점이다.
1916년에는 할아버지의 강권으로 홍단실과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한다.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숙모 계희영에게 불만을 털어놓긴 했지만
버리지는 않았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되자 졸업 1년을 남기고 배재고등학교에 편입해 1923년
졸업했다. 이때 성적은 44명 중 4위 정도였다고 한다.
곧바로 도일하여 동경상대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그해 10월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조부를 모시고 큰 집을 지키며
농사일을 돌보았다. 원래 비사교적인 성격인 그는 이제 외부와의 대화가 단절된 채 외롭고 적막한 생활을 했다.
정신이상자인 부친, 무식했던 어머니, 유교사상에 철저했던 조부, 애정을 줄 수 없었던 아내, 이미 기울기 시작한 가산, 무능한 자신에게
떠맡겨진 장남으로서의 책임, 무엇보다 자신의 성격적 결함 등은 심성이 연약한 소월로서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의 유일한
말벗이던 숙모가 남편을 따라 평양으로 이사를 가자, 그는 자폐적 생활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고향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구성으로 분가해 갔다. 무겁고 칙칙한 분위기를 떨치고 싶었으리라.
그곳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하기도 하고 고리대금업에도 손을 대기도 했으나, 결과는 빈손뿐이었다. 이즈음에는 일본인들의 감시도
심해졌다. 답답하고 울적한 소월은 그의 스승인 김억에게 자신의 심경을 편지에 담아 토로하기도 했다.
결국 이상과 꿈에 대한 좌절,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한 적응할 수 없는 현실과 세속적인 삶에 대한 절망, 대화의 단절, 문학의 한계성에
대한 자각과 역사의 거대한 횡포 등은 나약하고 소심했던 서정시인을 폐인으로 만들고 말았다. 소월은 이제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술로
위안을 삼으면서 집에서, 시장터에서,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아내와 더불어 그는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 독백하고, 때로는 절규하면서
자신과 세상을 조소했다.
소월이 고향을 떠나 처가로 이사해온 후의 10년간은 그의 정신과 육체가, 그의 문학과 생활이 하나씩 몰락해간 기간이었다. 남은것은 그가
어떤 죽음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였다. 1934년 32세 때 고향의 조상 무덤을 둘러보고, 그날 밤도 아내와 술을 마신 후 홀로 아편을 술에 타서
마시고 자살했다. 이렇게 해서 가장 비극적인 시대를 살았던 민족시인은 그것을 비극으로 초월하기보다는 한으로 남긴 채 꿈꾸듯 이 세상을
떠났다.
소월의 작품세계와 주요작품
한국 현대시사에서 소월의 시만큼 애송되는 시도 드물다. 소월의 시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던 한민족의 무거움 가슴을
카타르시스해주었다. 수월의 시를 민족시민중시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 소월의 시가 그토록 대중성을 확보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의 정서
소월시에 드러나는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한의 미학이다. 소월시는 그 어느 것을 살펴보아도 그 안에 저 끈질긴, 그러면서도 연약하고
풀 길 없는 맺힘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진달래 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이 시에서 우리는 시인이 지니고 있는 저 <풀 길 없는 맺힌 감정>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시인은 뚜렷한 이유도, 잘못도 없으면서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오직 그만을 위해서 희생하고 사랑한 대가가 임으로부터의 배신인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절망적인
상황이기에 시인은 이러한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 아니 자기를 사랑하는 임은 결코 자신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기합리화에 빠진 시인은 현실적으로는 떠나간 임인데도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떠나가는
임에게 진달래꽃을 뿌려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3연에서는 떠나가는 임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감정을 보이다가 4연에서는 임이 내 곁을 떠나가는 원인이 내 자신에게 있을 수
있다는 자기성찰 내지는 자기반성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 시에는 이렇듯 절망과 미련, 원망과 자책이라는 모순된 감정의 복합구조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소월의 시에서 보편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저 끈질긴 한이란, 바로 이처럼 상대방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긍정하면서도 부정하고,
이별하면서도 그것을 만남이라고 생각하는 모순의 감정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고전문학에 반영된 일반적 정서이기도 하며, 거문고나
판소리의 흐느낌, 동양화의 끊일 듯 끊어지지 않는 선의 감정이기도 하다. 소월은 우리 민족의 심층에 전승되고 있는 이 한을 시화했기에
민족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여성적 어조
소월의 시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여성적 어조에 있다. 물론 소월 시 중에는 남성적 절규를 표현한 <초혼> 같은 시도 있으나 이들
작품은 매우 예외적이다.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이 시를 보면 우리는 시의 주인공이 은연중에 여성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것은 이 시의 내용인 이별과 기다림, 그리고 이룰수 없는
사랑의 한등이 모두 여성 쪽의 입장에서 노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우선 이 시의 주인공이 소극적인 의사표현으로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소월 시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상대방에 의해서 사랑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다. 셋째는 소월시에 표현된 감정은 자기 부정적이거나 자기 희생적이며, 주인공의운명론적
인생관이다. 상황의 변화에 순종할 뿐 현실을 변화시켜나가는 능동적 의지가 결여된,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남성의 그늘 속에서 삶을
영위하던 조선조 여인들의 인생관에 가깝다.
소월은 왜 이토록 여성적 정감에 탐닉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소월이 유년시절부터 영성들 틈에서 자라났기 때문이 아닐까?
민요적 어조
우리는 흔히 소월을 <민요시인>이라고 부른다. 소월의 시가 민요시라는 견해에는 대체로 두 가지 측면의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시의
음률상 소월의 시가 전래민요의 리듬을 차용하거나 계승발전시켰다는 의미와, 둘째는 그외에 민요가 가지는 일반적 속성, 예를 들면
향토적 소재, 설화적 내용, 민중적 정감, 방언의 차용, 전통복귀의식, 반복법 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민요의 기본 음보는 2음보와 3음보이며, 4음보는 2음보의 배수인데, 소월시가 우리민요의 음보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했음을
75조의 <산유화>를 통해 음미해보자.
산유화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어느 비평가의 통계에 따르면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된 시 126편 가운데 93편이 민요적 율격으로 씌어졌다 한다. 소월시에 짙게 깔려 있는
향토적 분위기, 민속적 감정, 설화적 내용 등은 아마도 숙모인 계희영에게서 들은 고대설화나 민담 등이 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민족주의 이념
소월 시를 논함에 있어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그의 민족의식에 관한 것이다. 소월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의
서정시인만은 아니다. 소월이 개별작품에 표현했던 사랑은 그의 문학 전체를 놓고 조망해볼 때 이성에 대한 사랑의 차원을 넘어 그의 민족적
차원을 지향한다.
물론 소월이 직접적으로 현실과 투쟁한 저항시인은 아니다. 또 저항시를 쓰는 것만이 최선의 길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현실도피적이고 식민지인으로서의 패배적 감상주의를 자족적인 슬픔을 통해 노래한 시인이기도 했다.
민족시인 소월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그가 민족시인이라는 뜻이고, 둘째는 민족주의 시인이라는 뜻이다. 전자가 문화적 개념이면,
후자는 정치사회적 개념이다. 소월이 민족시인이라는 말은 그의 시가 한민족의 심층에 전승하는 무형의 가치, 즉 민족적 원형질에 기초를
두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한국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한민족의 집단무의식에서 발원하는 감수성을 느낀다.
한편 소월시는 그가 구체적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식민지인의 불행과 슬픔을 노래함으로써,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는 점에서 민족의 시다. 그가 오산학교에서 얻은 이승훈조만식 선생의 가르침은 그의 민족주의 이념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것이다.
만해와 함께 1920년대 대표적 시인
당시 한국문단을 주도하던 문인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자라 일본유학을 통해 서구의 문학을 배운 후 동인지를 만들며 창작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소월은 서울문단의 흐름과는 일정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시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공유하지 않고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탁월한 시를 만들어 냈다. 이로써 한용운과 함께 한국 현대시의 기점인 1920년대
초중반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간주된다.
그의 시정신은 인생의 깊은 허무와 고독에서 발원하는 연민과 사랑을 노래했고, 사랑의 기본정신인 자기희생의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기 목소리를 지닌 시인, 다시 말해서 자기의 생명과 바꿀 수 있는 진실을 노래하는 시인이었다는 점에서 감동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소월론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 그들도 소월의 공적은 인정하나,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식민지 현실에의 대응방식이
소극적애상적자기유폐적과거지향적이며, 절대에의 탐구를 포기하고 정조속에 숨어 버림으로써, 그의 시는 창조적인 미래
속에서 체험되지 않는다는 한계성을 지적한다.
사실 소월론을 쓰려는 순간, 과연 소월론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소월은 정감으로 다가오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소월론을 읽는
것보다 소월의 시를 읽는 편이 훨씬 진한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독자들이 할 일은 스스로 작품을 읽고 음미해보는 것이다. 그 속에서 독자들께서는 가장 비극적인 시대를 살다가 간 위대한
서정시인의 한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야기 모음/동서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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