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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 모음/늙지 않는다

제5부 죽음의 저주 물리치기

by FraisGout 2020. 5. 14.

영혼아, 그대의 재주로써 그대는 죽음의 침노를 물리치노라.-<리그 베다> 인생의 궁극적인 경계는 죽음이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우리는 그경게선을 넘어서 여행해 보려고 노력해 왔다. 죽게 되어 있는 우리 신체의 명백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불사에대한 명확한 인식이 구

름을 뚫듯이 비쳐 오는 순간이 있다. 시인 테니슨AlfredTennyson

어린 시절에 경험한 것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개인적인 자는 "한계 없는 존재 속으로 해체되어 녹아드는 듯했다. " 일상적인경험에서 벗어나는 이 같은 극적인 전이는 "어떤 혼돈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극히 명확하고 극히 확실하여 도무지 말로써 현할 수 없었다. 죽음이란 거의 우스울 정도로 불가능해 보이는 런 순간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이러한 불사의 느낌은 너무나 주관적인 것이어서 과학적인 세계관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느낌에 종교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다차원적인 거대한 풍선처럼 에워고 있는 실재의 모습을 찰나적으로나마 목격하는 특권을 누려 왔다.어떤 사람들은 임사 상태의 체험을 통해서 무시간의 영역에 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 속에서도 접촉할 수가 있다. 물질이라는 가면을 들치고 들여다보면 "말로써 어떻게 현할 수 없는 어떤 느낌, 어떤 기대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몸부림이다... 우리 안에서 뭔가 더 크고 더 높은 것을 구하려

." 철학자 제이콥 니들먼Jacob Needleman은 자신이 "우리의두

번째 세계"라고 부른, 특정한 조건에서는 누구나 접근해 볼 수있는 그것을 이렇게 가리켰다.

니들먼은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첫번째 세계는 우리가 나을 살아가고 있는 세계, 이 일과 활동과 행동의 세계이다. " 그것은 일상의 사고와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영적인 깨달음의 섬광처럼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하며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분명하고 잊을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제2의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들이 있다.니들먼은 그것을 "자신 안에 존재하는 생생한 순간'이라고 불렀다. 두번째 세계는 우리의 내면에 있으며 첫번째 세계 또한 그렇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저 밖이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눈에 보이고 느껴지고 만져지는 모든 사물이 우리 두뇌 속에서 깜박거리는 신경신호로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이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어떤 세계에 몸담고 살고 있는 것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1의 세계는 변화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 불가피한 광경으로서 질병과 노화와 죽음을 담고 있다.오직 순수한 존재bein만이 있는 제2의 세계에는 이런 것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내면에서 이러한 세계를 찾곤그것을 한순간이나마 경험하는 것은 죽음까지는 아니라도 질병과 노화의 과정에 깊숙한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동양에서는 늘 사실로서 받아들여져 왔다. 인도와중국에서는 어떤 영적 스승들은 시간을 초월한 의식timeless aware-ness을 얻은 결과로 수백 년을 산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것은 모크샤Moksha, 즉 해탈을 성취한 영혼이 택할 수 있는 선택 중의 하나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모든 스승들이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는 선택을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서양에서는 그러한 능력을 지극히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은 시간이 용해되어 버는,

혹은 뒤집어 말하자면 시간이 창조되는 자연의 어떤 차원이 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이 차원은 시간과 공간의 창조 이전부터 존재해 왔으므로 자

quantum의 관점에서 보아도 지극히 수수께끼 같은 얘기다. 논적인 마음은 이러한 경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무엇인가가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의 현인들은 시간이 없는 실재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믿었다. 모든 시대에서 그러한 주장이 확인되어 왔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시공간의 경계에서 완전히 방된 체험의 일화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순간에 사람은 자신이작은 행성의 한 지점에 서서, 싸늘 하지만 깊은 감동을 주는 영원의 아름다움, 그 헤아릴 수 없음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삶과 죽음은 하나로 흘러든다. 진화도 영원도 없으며 오직 '존재Being'뿐이다. "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존재야말로 변화와 죽음을 초월하여 실재하며, 변화를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이 반전되는 곳이며, 진정한 실재의 상태임을 보여 주기에 이르기까지는 세 세대가 걸렸다. 죽음이란 궁극적으로 물질과 에너지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넘어가는 또다른 변형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변화라는 경기장의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한 죽음은 종말, 곧 소멸을 의미한다. 죽음의 손아귀에서 궁극적으로 빠져나온다는 것은 죽음에 대해서 폐막과 종말이라는 끔찍 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세계관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뜻한다.

"저는 죽음이 매우 두렵습니다. " 인도의 한 제자가 스승에게 이렇게고백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저를 괴롭혀 왔습니다. 저는 왜 태어난 것일까요? 제가 죽으면 무슨 이 일어날까요?" 스승은 그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는 왜 네가태어났다고 생각하느냐?" "선생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 제자는 머뭇거렸다.

"너는 왜 네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느냐?" 스승은 되물었다. "네가 태어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네 부모님이 말해 준것이 아니냐? 너는 실제로 태어나는 경험, 비존재의 상태에서 존재의 상태로 들어서는 경험을 해 보았는가? 아니면 그저 어릴 적 어느 날 네가 어떻게 났는지를 물어 보았더니 부모님께서 너는 어머니에게서 난 것이라고 말해 준 것이 아니더냐? 네가 그 대답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생각이 너를 두렵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마라.죽지도 않고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동일한 개념의 양극이 다. 아마도 너는 늘 살아 있었고 또 늘 그럴 것이다. 그러나 네 부모님의 신념채계를 받아들이면서 너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로 동의한 것이다. 너는 그것을 종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종말이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거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가능성이다. "

당연히 제자는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우리들과 마찬가지로그는

죽음을 자신이 믿기로 동의한 하나의 신념이라고 생각하지는 았기 때문이다. 스승이 지적한 것은 탄생과 죽음은 시공간적인 사건이지만 존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우리는 늘 있어 왔다는, 희미하지만 확실한 기억을 발견한다. 달리 말하자면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문제가 제기된다는 사실이 인간이 얼마난 독특한 존재인지를 말해 준다. 우리에게는 죽음이란 단지 냉정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신비이며, 노화-죽음으로 이끄는 과정인-의 신비를 풀기 위해서는 그것이 먼저 해명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가장 내밀한 의문은 존재의 본성 속에 감추어져 있다.

죽음의 저주가 깨지면 우리는 죽음에 힘을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의식적인 마음이 기꺼이 시인하려고 하는 것보다 더 깊숙한 곳까지 미쳐 있다. 데이비드 비스콧이 적은 것처럼, "우리가 죽음이 두렵다고 말할 때, 사실 우리는 진

정한 삶을 살지 않았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움이 세상을 조용한 고통의 장막으로 덮어씌우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두려움을 꿰뚫어보면 그것을 오히려 긍정적인 힘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비스콧은 이렇게 우리를 북돋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밝히고 자신의 삶에 대해 꿈을 가지게 하는 원동력으로 만들라. 그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 시간을 가치 있게 하곤 그 바탕 위에서 행동하곤 그 속에서 살도록 돕게 하라." 나는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자신을 시간을 초월한, 죽지 않는 '존재'로서 바라볼 때 우리의 세포 하나 하나가 새로운 실재로 일깨워진다는 사실을 주장하려고 한다. 진정한 불사不死는 지금,여기, 이 살아 있는 몸 속에서 체험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위하는 모든 것 속에 '존재를 불어넣을 때 현실화된다. 이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온 시간을 초월한 마음과 늙지않는 몸의 체험인 것이다.

시간을 소화시켜 버리다

아인슈타인이 현대물리학에 기여한 눈부신 공헌 중의 하나는,그 속

에서 만사가 일어나고 있는 직선적인 시간이란 피상적인 것임을통찰

한 그의 직관이다. 시간은 흐르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시는 째깍거리며 시분초를 가리키고 영겁의 역사는 펼쳐졌다 사라져 간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 광대한 움직임이 궁극적으로는 모두 상대적인 것이라곤 즉 절대적인 값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저명한 물리학자 존 휠러John Wheeler는 이렇게 썼다. "시공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된 개념이다. 이 개념이 잘못됨으로써 ''''라는 개념도잘못되었다. 이 말을 이처럼 간단히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바가 세상에 받아들여지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 그것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한 가지 증거는 사람들아 여전히 직선적인 과정을 따라 마치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성실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옳았다면 노화는 하나의 환상이다. 그것은 ''''라는 거의 1세기 전에부도가 나 버린 개념에 의지하고 있다. 수피 신비주의 시인인 루미 Rumi1세기 전에 이 진리를 이해하고 이렇게 썼다. "그대는 규정속에 갇힌 규정되지 않는 영혼이라. 일식으로 빛을 가린 태양이로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규정이다. 우리가 자신을 그 속에 갇힌 존재로 볼 때 우리는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가 허구 속으로 던져진다.

아인슈타인은 직선적인 시간을 그보다 훨씬 더 유연한 어떤것, 즉 수축하고 확장할 수 있으며, 느리게도 빠르게도 갈 수 있는 시간으로 대치했다. 그는 이것을 종종 주관적인 시간에 비교했다. 그는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는 1분은 마치 한 시간과도 같고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앉아 있는 한 시간은 마치 1분과도 같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그가 이것으로써 뜻하고자 한 것은 시간이란 관찰자의 상황에 따라 변한다는 점이다. 물리학자들에게는 수축하고 확장하는 시간의 개념이 광속도에 가깝게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계산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아인슈인에게는 광속도는 변할 수도 없고 그것을 넘어설수도 없는 우주의 절대적 척도였다. 광속도라는 상수를 위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은 수축하고 확장해야만 했다.

우리는 누구나 시간이 확장하고수축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어떤 때는 지루하고 어떤 때는 화살처럼 지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우리의 절대, 우리의 상수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자아에 대한 우리의 느낌의 핵심인 ''라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의 예를 빌리자면, 두남자가 아름다운 여인과 같이 앉아 있는데 그 여자가 누이동생인 한사람에게는 시간이 질질 끌리듯 느리게 가고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진 다른 남자에게는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간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나 시간의 감각을 개별적으로 조절할 수 있음을 뜻한다. 우리가 시간에 대해서 갖다 붙이는 모든 주관적인 성질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런 걸 할 시간이 없다.

시간이 다 됐다.

너의 시간은 다 갔다.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간다.

시간이 너무 안 간다.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이런 말들은 시계로써 재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시계

'저 밖이 있는 직선적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에 대해서 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이 안이만 있는 그런 주관적인 시간은 문제가 다르다. 위의 말들은 모두 자아의 어떤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지겨움을 느낄 때는 시간이 너무 안 간다. 절망적인 때에는 시간은 다가 버린다. 유쾌할 때에는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간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시간이 멉추어 버린다. 달리 말하면, 시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때마다사실은 자신에 대해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주관적인 의미에서 시간은 하나의 거울이다.

의료인들은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은 십중팔구 건강에 문제가 생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컨대 A형 행동양태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늘 시간이 쫓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심장마비와 관계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A형의 사람에게는 마감시한이란 것은 언제나 하나의 위협이다. 그리고 그의 '시간과의 뚜껑은 불만과 적의가 마음 깊숙이 스며들게 하는 데에 한몫을 한다. 그리하여 적의는 심장에 메시지를 보내어 혈관을 수축시키고 혈압을 높이고 콜레스테롤치를 상승시킨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부정맥, 즉 불규칙한 심장박동을 일으킨다.

이것은 단지 A형의 사람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일난다. 415일이 다가오면 세무회계사들의 혈압과 콜레스테롤치가 일시적으로 올라갔다가 마감일이 지나면 되돌아오는 것이 관찰되었다. 시간에 대한 그들의 주관적인 느낌이 그들의 몸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것은 더 심오한 교훈을 던져 주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오믈렛을 해 달라고 청해 보자. 달된 요리사는 2분쯤이면 끝낸다.하지만 상황을 조금만 이렇게 바꾸어 보자. "오믈렛을 만들어 주시오.하지만 2분밖에는 시간이 없소" 이것은 숙달된 요리사에게조차도 긴장감과 조급감을 느게 만든다. 시간적 압박감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체내에 분비시키고 그것은 다시 심장각동수를 높인다. 그가 이러한 반응에 저항하여 애를 쓰면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될 뿐이다. 이제 그의 심장은 시간의 압박과 욕구불만을 견뎌야 한다. 심장질환자가 마감시한 에 힘드는 일을 해야 되게 되면 심각한 수치의 동요가 일어나 심이 실제로 국소빈혈이 되거나'소리 없는' 심장마비가 일어난다. (이경우의 '소리 없는'이란 어떤 통증의 느낌이 없이 손상이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 시간적 압박은 또한 행동이나 태도, 생리적 반응 등을 변화시킨다.그러므로 주관적 시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질 수가있다. 마감시한deadline이라는 말이 dead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다. 마감시한은 '이 기한을 넘기면 너는 끝장이다'. 하는 위협을 시하고 있다. 그 위협은 미묘한 것일 수도 있고 눈에 확 띄는 것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항상 존재하고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시간의 압박감에 그렇게 초조하게 느끼지 않을것이다. 때로 씨는 경호받고 있는 몸이다I'm under thegun'라든가, '그의 시간은 다 갔다His time is up'는 등의 말(이것이 곧 죽게 될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기 전에는 그저그런 뜻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위협감을 더욱 분명히 노출시킨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시간의 압박감에 대해 민감하다.신경질적인 요리사는 2분의 시한 때문에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달걀을 떨어뜨리고 손을 데는 등,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훌륭하게 해낼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또다른 요리사는 오히려 도전적인 일에 더 강해서 정해진 시한보다 더 빨리 오믈렛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한사람은 시간의 압박을 스트레스로 받아들이고, 다른사람은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 사람은 어쩔 줄 물라 쩔쩔 매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하며 그로써 더 발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중대하고 험한시한, 즉 죽음에 대해서는 압박감을 느긴다. 당신이 자신의 존재 기한을 일정 기간 할당받았다고 믿는다면, 죽음의 시한은 오믈렛을 빨리 만들려다가 일을 망쳐 버리는 신경질적인 요리사가 느긴 것과 같은 종류의 스트레스를 줄 것이다. 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삶을 완전히 꽃피우려면 시간의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수록 좋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는 삶이란 경쟁이 아니라 꽃피우는 것이라고 보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다 가고 있다는 믿음 따위는 가질 수가 없다. 신체 세포에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세포에게 노화하여 죽도록 프로그램을 해 놓는 것과 같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직선적인 시간은 냉혹하게 앞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와는 다른 종류의 시간, 혹은 시간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곤 그것을 내면화할 수 있는 곳을 발견해야만 한다.

양자역학적 신체

회의론자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순전히 주관적인 이야기로 들릴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직선적인 시간을 무력화시키는 양자적 사건이 우우리외 세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DNA의 지능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 동시에 작용한다. , 과거부터는 생명의 청사진을 가져오고 그 정보 중에서 세포 기능에 필요한 오직 일부분만(아마도 총 데이터 양의 10억분의 1 정도)을 현재에 적용하며 이후로 관련될 정보를 미래를 대비해 저장해 놓는다. 이 이중나선은 우리의 미래를 담고 있는 양자의 저장고이다. 여기에는 시간이 압축되어 필요한 시기가 올 때까지 밀봉되어 있다. 우리가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간 순간부터 유전자는 정확한 순서로 일어날 일평생의 사건을 손아귀에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의 손은 처음에 자궁 속에서 형태도 없는 한 점의 세포로 출현했다. 그리고는 그 조잡한 덩어리가 물고기 같은 지느러미로, 양서류의 발로 포유류의 앞발로 그리고 마침내인

간의 손의 형태로 모습을 바꾼다. 이 점, 덩어리, 지느러미, ,앞발들은 우리의 유아기, 아동기, 성년기, 노년기의 손과 함께 아직도 우리의 유전자 속에 저장된 데이터로서 존재하고 있다. 양자의 차원에서는 우리는 이 모든 시대를 동시에 사는 것이다.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양자적이므로 인간은 다차원적인 삶을산다.이 순간에 우리는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몸이 '외부'에 있는 자연의 모든 힘에 영향받는, 눈에 보이는 감각의 세계이다. 바람은 우리의 살갗을 때리고 첫볕은 살갗을 태우며 겨울철에 는 집이 없으면 얼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세균과 바이러스의 공격은 우리치 세포를 병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양자의 세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거기에서는 이 모든 것이 바뀐다. 욕탕 안에 들어가도 우리의 의식은 물에 젖지 않는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육신의 삶의 한계가 훨씬 덜 중요해지며, 종종 아무 것도 아니다. 겨울의 찬바람이 우리의 기억을 얼게 하지는 못한다. 7월의 무더운 밤이 우리를 꿈 속에서 땀흘리게 하지 않는다.

우리 세포 속의 모든 양자적 사건들을 다 한데 모은 총합이 우리의 양자역학적 신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보이지 않는 생리를 따라 작용한다. 우리의 양자역학적 신체는 움직이는 의식이며 창조의 근원에 있는 의식의 영속적인 장의 일부이다. 우리 내면의 지능은 빛처럼 진동하며 양자세계와 물질세계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리하여 끊임없는 아원자적 대화 속에서 그 둘을 통일시킨다. 육체와 양자역학적 신체는 둘 다 우리의 보금자리라고 부를 수 있다. 이들은 우리가 그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는 가운데 그 사이를 여행하고 는

평행 우주와도 같다.

''는 자신을 이렇게 생각한다.

세포와 조직과 장기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과 공간 속에 한정되어 있다.

생화학적 작용에 의해 기능한다. (먹기, 숨쉬기, 소화하기 등) ''는 자신을 이렇게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능의 신호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과 공간 속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생각, 느낌, 소망, 기억 등에 의해 기능한다.

어느 모로 보나 육체는 몇 십입방센티미터의 공간을 차지하고있다.

그것은 폐기되기 전까지 70, 80년 동안을 하나의 연약한 생명탱 시스템으로서 기능한다. 한편 양자역학적 신체는 어떤 정의된 공간도 차지하지 않으며 결코 마멸되지도 않는다. 지난 밤에 꾼 꿈, 혹은 사랑하고 싶은 욕망을 담는 데에 얼마나 큰 그룻이 필요할까? 한 사람의 유전물질은 찻숟가락 하나 속에 다 담을 수 있지만 유전자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것-그 지능-은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적 신체의 차원에서는 경험의 모든 측면이 3차원 세계 너머에 있는 한 점 속에 간직된다. 신부의 사진은 그 모습에 대한 생긴그대로의 기록을 제공하며 녹음기는 그녀의 목소리를 붙잡아 놓을 수있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의 가장 조잡한 파편일 뿐이다. 신부가 웨딩드레스와 케이크를 기념물로서 남겨 놓지 는 한 드레스의 재질과 케이크의 맛은 영원히 잊혀질 것만 같이 인다.

그러나 양자의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거기에 있다. 그리하여 기억을 떠올리는 단순한 행위로써 신부는 완전한 세계를 다시 되찾을 수 있다. 기적을 좀더 행하면 그녀가 겪는 다른 모든 경험들이 그녀의 기억 위에 새롭게 덧붙여지는 이 기억으로써 물들여질 것이다. 그 순간부터 결혼한 몸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전 생애에 대한 그녀의 두뇌의 관점의 일부가 된다.

양자역학적 신체에 새겨진 이미지는 우리의 모습만큼이나 잡하다.간단히 말해서 그 이미지는 ''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시간대를 요리하면서 우리의 저장된 이미지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시간대에 요구되는 종류의 신체를 프로그램한다. 이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정신분석 사례 연구에 관한 매혹적인 책 <사랑의 집행인Love's Ex-ecutioner>에서 저자인 어빈 얄Irvin Ya10m은 그에게 치료를 받으러 왔던 27세의 미혼 여성 베티의사례를 이야기하고 있다. 베티는 처음부터 매우 어려운 경우였다. 그녀는 냉담하고 닥평이 가득한 태도로 아무도 자기를 좋하지도 받아들여주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장황한 하소연을 임없이 늘어놓았다. 그녀는 큰 백화점의 섭외부서에 근무했다. 객이나 동료, 상사들과의 사소한 시비 하나 하나가 그녀의 불평거리가 되었다.

얄롬은 베티가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 지칠 줄 모르고 늘어놓는 이야기를 듣던 중에 그녀가 분명한 사실 한 가지-그녀의 체중-에 대해서는 결코 입에 올리는 일이 없다는 기이한 사실에 놀랐다. 베티는 키가 155센티미터밖에 안되었지만 체중은 113킬로그램이 나 되었다. 그녀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녀의 모습이 비정상적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전 존재를 이 사실을 감추는 혼신의 게임에 쏟아부었다. 자신의 체중에 대해서 말을 하지않는 것은 그녀가 정면으로 부딪힐 수 없었던 한층 깊은 고통을 덮어 버리는 일종의 침묵의 장막이었다.

얄롬은 베티가 먼저 자신의 심리적인 우을 상태에 길이 들어서 포기한 상태가 되지 않고는 자신의 비만을 면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 우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수월 동안 그녀의 방어벽을 뚫어 보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마침내 것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어느날 극적으로, 베티는 얄롬에게 신이 체중을 줄이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놀라을 정도로 엄격하게 잘 짜여진 체중감량 계획을 잡았다. 그녀는 매우 진지하게 식사조절을 시작했고 봉사 그룹에 가담했으며 먹고 노는 파티라면 그 어떤 유혹에도 종교적인 태도로 극구 뿌리쳤다. 일주일에 한 번씩 스퀘어댄싱square dancing(남녀 네 쌍이 어울려 추는 춤)을 배우러 다녔으며 TV 수상기 앞에다 페달 운동 기구설치했다. 체중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자 얄롬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체중이 줄어들면서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사건들이 생생한 꿈으로 나타나거나 머리 속에 시금 떠오르는 것이었다. 얄롬으로서도 치료하기가 힘들었던 잠된 과거의 상처들이 이제 이와 함께 녹아 가고 있었다. 베티는 기이 변덕스럽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제멋대로인 것럼 보였다. 그러다가 얄롬은 그것이 어떤 일관적인 양상을 지니고있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단계별로 자신의 체중이 각각 얼마였던시기에 생겼던 마음의 상처들을 하나씩 되새기고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열다섯 살 이후로부터 계속 체중이 늘어난 것으로 밝혀다.

예를 들어 그녀가 95킬로그램을 넘어가기 시작했을 때는 뉴으로 가기로 결심했을 때였다. 그녀는 텍사스 주의 작고 가난한 목장에서 과부가 되어 실의에 빠진 어머니 밑에서 무남독녀로 자라났다. 식사조절을 한 덕분에 체중을 95킬로그램으로 되돌려 놓은 어느 날 베티는 가출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다시금 생생하게 기억에 떠올렸다. 문자 그대로 시간이 그녀의 마음 속에 꼭꼭 챙겨진 채로 그녀의 세포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이렇게 그녀의 체중이 113킬로그램에서 떨머져 가면서 그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올라가면서 자신의 생에서 정서적으로 부담스러웠던 사건들을 되씹고 있었다. 텍사스에서 가출하여 뉴욕으로 떠나오고 (75킬로그램일 때), 대학을 졸업하고(86킬로그램), 의예과 공부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따라서 그녀의 아버지를 죽게 했던 암의 치료법을 발견하려던 꿈도 포기하고)(81킬로그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의 외로움, 다른 집안의 딸들이나 아버지들에 대한 부러움, 학교의 댄스 파티에 남학생의 초대를 받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 등에 시달리고(77킬 로그램), 중학교를 졸업했을때 졸업식장에 아버지가 오시지 않아서 서운했고(70킬로그램) 등등이다. " 얄롬은 과거의 기억이 얼마나 생생하고 구체적일 수 있는 것인가를 깨닫고 매우 흥분했다.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이 얼마나 훌륭한 증거인가! 베티의 몸은 그녀의 마음이 오래 전에 잊어버린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한술 더 떠서, 그녀의 몸은 그 자체가 일종의 마음, 곧 지방질 세포라는 물질적 형태를 취한 기억의 저장고라고 말하 겠다. 베티의 경험이그대로 베티가 된 것이다. 단지 햄버거와 피자,

밀크세이크만 소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 한입 한입과 께 얽혀 있던 그 모든 감정들-서글픈 갈구, 만족되지 못한 희망, 쓰디쓴 절망 등-까지도 소화시켜 버린 것이다.

체중을 줄이는 것은 옛날부터 가졌던 그녀의 결심이었다. 그리고그 옛 몸이 사라지자 새로운 베티가 태어난 것이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자신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 그녀는 깊숙히 묻혀 있었던 욕망들을 다시 발견했으며 여러 해 동안 스스로에게 감어 왔던 상처에 대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몸의 윤곽이 드러기 시작했다. 먼저 허리가,그 다음에 가슴이, 그리고는 턱과 광대뼈가 드러났다. 자신의 새로운 모습과 함께 베티는 사회적인 생로의 모험을 행할 용기를 얻었다..

비만은 십대 초반 이래로 그녀를 버림받은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제 그녀는 첫 데이트를 했고 사무실의 동료 남성들도 더이상 그녀가 쳐 놓은 방어벽에부딪히지 않고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러한 변신은 끝내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베티가성년이 되기 직전에 생애 최악의 상처를 가져온 사건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암므로 오랫동안 시달리면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체중이 68킬로그램이었는데 그 이후로 다시는 그처럼 날씬해질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의 몸무게가 70킬로그램까지 내려오자 식사 조절은 하나의 처절한 몸부림이 되었다. 아무리 해도 체중은 몇 그램도 줄어들려고 하지 않았고 되살아나는 기억들은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

"곧 우리는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서 충분히 이야기하는 시을 가졌다. 모든 것을 밝혀 낼 때가 온 것이다. 나는 그녀를 회상 속으로 밀어 넣어 그녀가 기억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도록 용기를 줬다.아버지의 병,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보았을 때의 모습, 장례식의 자세한 광경, 그녀가 입었던 옷, 목사의 말씀, 석한사람들 등등. 그녀는 전에 없었던 상실감에 빠져서 2주일이 도록 거의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 이것은 의사에게나 환자에게나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악몽에 시달린 베티는 자기가 하룻밤에 세 번이나 죽었었다고 말했다. 얄롬은 그녀로 하여금 단지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한 꿈까지도 잃어버렸던 과거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것에 강한 죄책감을 느꼈다.

베티는 묻힌 감정을 더이상 파헤치는 데 실패했다. 그녀의 마음이 너무나도 두려운 그 마지막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너무나 많은 비탄과 실현되지 못한 희망이 그대로 베티가 되었다.그 시점에 이르자 베티는 식사조절도 치료도 다 그만두어 버렸다. 다시는 그녀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아버지와의 사별이 체화된 68킬로그램의 장벽은 움직일 줄을 랐다. 얄롬은 그녀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알았다는 것이 유감스러웠지만 자신도 비로소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는 느낌은 솔직히 시인해야 했다. 그만큼 그 시련은 두 사람 모두를 뿌리 깊이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베티처럼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과거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러한 과정을 되돌려 놓음으로써, 더이상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행복을 가로막는 가두어진 기억과 얼어붙은 시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양자의 차원에서 칸임없이 자신의 몸을 만들고 허물어뜨린다. '허물어뜨린다는 말은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전적으로 창조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태의 연하고 낡은 경험은 새로운 경험이 쌓임과 더불어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 가끔씩 사람은 여러 해 동안 쌓아 놓은 경험들을 몽땅 내던져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갑자기 직장을 바꾸거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이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새롭게 바꾸어 나갈 능력이 없는 데서 충동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직장이 성미에 맞지 않다거나 아내가 사랑스럽지 못다는 등으로 비난의 화살을 바깥으로 돌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견딜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내면화된 경험이다. 그들의 내부에 좋지 못한기억들이 쌓여 가다가 결국은 전혀 무관한 상황-예컨대 커피 자판기 앞에서 상관을 만난다든가 아내가 아침에 칫솔질하는 모습을 본다든가 하는 따위-이 깊이 가라앉아 있던 부정적 감전을 폭발시키기에 이르는 것이다. 도망치는 것은 이한 감정들을 풀어 보려는 시도이지만 그런 전략은 거의 먹혀들지 않는다. 우리가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은 이미 우리 자신의 일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속박된 의식, 시간을 초월한 의식

나는 이 책에서 내내, 우리의 노화는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화시키는가에 달려 있음을 주장해 왔다. 그 마지막 분석으로서,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소화하느냐 하는 것은 이 과정의 가장 중요한 국면이다.왜냐하면 시간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영적 가르침의 핵심적인 교훈은 이것이었다. "시간은 인간의 심리적인 적이다. " 이것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근본을 침식당하고 있으며, 시간은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엇이라는 생각에 의해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빼앗겨 버렸음을 뜻한다. 우리는 자신이 애초에 시간을 적으로 만들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째서인지 망각해 버린다.

무시간성은 실제로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시간에 속박된 의식으로부터 시간을 초월한 의식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시간에 속박된 의식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외부적인 목표(다른 사람들의 인정, 물질적 소유, 봉급, 출의 계단을 오르는 것 등) .마감시한과 시간에 대한 압박감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구축된 자아상 .과거의 상처와 실패로부터 배운 교훈 .변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과거와 미래에 의한 혼란(근심, 후회, 기대, 공상) .안전에 대한 갈구(결코 영원히 성취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기심, 제한된 시각(전형적인 동기: '그것이 내게 무슨 이득이 되는가?')

시간을 초월한 의식은 이렇게 정의된다.

.내면적인 목표(행복, 자기포용, 창조성,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만족감) .시간의 압박감이 없응. 시간은 충분하고 한정성이 없다는 느낌 .자아의 이미지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음. 현재의 순간에 집중된 행위 .직관과 상상력의 도약에 대한 신뢰 .변화와 혼란에 대해 초연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

.존재에 대한 긍정적 체험 .에고가 없음. 이타주의. 서로 나누는 인류애의 감정(전형적인 동기: '내가 도와 줄 수 있을까?)

.개인적인 영원불멸의 느낌

내가 이들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묘사하기는 했지만, 사실모든종류의 경험이 완전히 시간에 속박된 의식과 완전히 시간을 초월한 의식에 두루 걸쳐 존재한다. 자신이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임을 두려워하며 성공과 마감시한에 쫓기고 오직 외부적인 동기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거의 병적으로 시간에 속박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도 누구나 이러한 속성 중의 일부를 자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존재의 체험이 지속적이고 분명하며, 오직 신만을 위해 사는 성자는 무시간의 지극한 해탈감을 드러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양극의 상태를 보이는 일이 없다. 여러 모로 우리의 내면적인 깊숙한 성향과 태도는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며 그것을 어떻게 소화시키는가에 근거해 있다. 자신이 시간에 속박된 의식과 시간을 초월한 의식 사이의 어느 수준에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다음의 설문에 답해 보라.

당신은 시간을 어떻게 소화하는가?

다음의 문장을 읽고 자신에게 자주 해당되는지, 혹은 그저 대충 동의하는지를 표시하라. 1부의 어떤 문장들은 제2부의 것과 서

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관없다. 서로 반대되는 성질과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문장을 별개의 문제로 보고 답해 보라.

11.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없다.

2. 가끔 너무 지쳐서 밤에 잠이 안 온다.

3. 내가 어렸을 때 세웠던 중요한 목표 몇 가지를 포기해야만했

었다.

4. 나는 옛날보다 덜 이상주의적인 사람이 되었다.

5. 지불하지 않은 청구서가 있으면 신경이 쓰인다.

6.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깊은 관계를 맺는 일에 지금은 더 조심스럽다.

7. 나는 곤경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8. 나는 가족이나 친구들보다는 나의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정열 을 쏟는다.

9. 나의 돈 씀씀이는 지금보다 훨씬 지혜로워질 수 있을 것다.

10. 삶은 득과 실의 균형이다. 나는 실보다는 득을 더 많이 으려고 애쓴다.

11. 사랑하는 관계에서 상대방이 나의 필요에 맞추어 주어야만한다.

12. 내가 저버린 사람들이 기억날 때면 가끔 마음이 아프다.

13. 사랑받는 것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나

이다.

14. 나는 권위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알는다.

15. 나에게는 외로움이 노년의 가장 두려운 측면 중의 하나다.

1부 점수-

2

1.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곡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

2. 인생에서 단지 가족이나 일보다도 더 큰 목표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3. 나는 내가 별나다고 생각한다.

4. 임사 체험들은 매우 그럴 듯하다.

5.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를 자주 까먹는다.

6. 나는 자신을 태평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겠다.

7. 성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곤란해 하더라도 공개된 자리에서 내놓는 것이좋다.

8.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

9. 신문을 못 보거나 저녁 뉴스 시간을 놓쳐도 아무렇지도 다.

10. 나는 자신을 사랑한다.

11. 나는 요법이나 다른 자기개발 수행을 한 적이 있다.

12. 나는 뉴에이지New Age에 관련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흥미는 있다.

13. 나는 신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14. 나는 만사에 보통 사람들보다 좀더 느긋하다.

15. 나는 자신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이 생에서 관심을 쏟고 있는 한 영역이다.

2부 점수-

당신의 점수를 계산하라. 누구나 양쪽의 질문에서 최소한 몇가지는 해당이 되겠지만 아마도 당신은 어느 한쪽에서 더 많은 수를 얻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1부에서 점수를 더 많이 얻었다면 당신은 시간에 속박당하는 경향성이 있다. 당신에게는 시간은직선적이다. 자주 시간에 쫒기고 결국은 시간이 아주 없어진다. 외부로부터의 인정과 동기와 사랑에 기대기 때문에 당신은 자의 내면세계보다는 외면세계에 대해서 더 많은 고민을 했다. 당신은내적인 평화와 무집착보다는 자극적인 일과 긍정적인 감정에 더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다.당신은 사람에게서 사랑받기만을 너무좋아해서 자기포용력을 발견할 기회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2부에서 더 많은 점수를 얻었다면 당신의 의식은 시간을 초월한 경향성이 농후하다. 사랑을 주고 받는 당신의 감각은 자신

과의 안정된 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당신은 소유보다는 무집착에 더 가치를 두며, 당신의 행동동기는 외부적이기보다는 내부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언젠가 자신이 제한된 육체적 자아보다 더 크다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있다. 당신의 인생은 신, 혹은 더 높은 자아에 대한 결정적인 체험에 의해 모양을 바꾸어 왔는지도 모른다. 다른사람들은 외로움을 두려워하나, 당신은고독을 감사히 여긴다. 고독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당신의 능력을 키워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을 시간에 속박된 의식 속에가두어놓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를 거의 모르고 있다.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몸과 마음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느끼는 즉시 방출해 버리려고한다. 아기는 배가 고프면 울고 화가 나면 때리고 힘이 빠지면 잠이든다. 그러나 일단 어른이 되면 이런 자발적인 표현은 안전한 행동,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행동,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계산된 행동, 혹은 단순히 습관적인 행동 등에 밀려 대부분 억눌려 버린다. 이같은 자율성의 상실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현재 속에서 살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나 내가 언급하지 않은 또다른 결과가 있다. 시간을 초월한의식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인체가 부정적인 경험을 효과적으로 방출하고 있으면 마음은 과거나 미래에 대한 관심이 없다. 걱정도 기대도 후회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존재, 즉 가장 단순한 의식의 상태를 향해 열려 있음을 뜻한다. 마음이 이처럼 열려 있는 상태가 되게 하기 위해서 몸은 반드시 이완되고 유연해야 한다. 스트레스가 쌓여 있지 않으면 노화현상은 발을 붙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쉬운 경험이 바로 시간을 초월한 마음과 늙지 않는 몸인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반적인 삶은 이러한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모두 시간에 속박되어 있으며 오직 드문 경우에만-보통은 우리가 전혀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간신히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의식적으로경

험할 수 있다. 영적인 접촉에 목말라하고 그것이 절망적으로 핍되어 있는 세계에서는 시간을 초월한 의식을 한번 맛보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의식 속에 지진을 일으켜 놓는다.

그러한 경험에 의해 인생이 완전히 변화해 버린 한 사람의예를 들고 싶다. 그는 영적인 스승이자 작가인 앨런 왓츠Alan Watts'이다.젊은 시절에 왓츠는 명상의 올바른 방법을 찾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그는 명상이 위대한 영적 전통 속에서 수행되어 왔으며,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일상적 존재의굴레 속에서 벗어나오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명상은 편안하지 않고 지루했으며 자신이 얼마나 제한된 존재인가 하는 것만을 상기시켜 줄 따름이었다.

왓츠는 동양의 많은 명상법들이 서로 로순되고 배타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스승들은 마음이 자신을 주시해야 한다고 가르쳤고,어떤 스승들은 마음이 자신을 주시하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가르쳤다. 어떤 스승들은 마음을 매어 놓은 코끼리처럼 다스려야 한다고 했곤 다른 스승들은 제멋대로 가도록 놔둬야 한다고 했다. 너무나 염(1)-교회를 떠나 신비주의 해설자 겸 작가, 교사가 된 성공회 신부. 동양학자로서 선런을 서양에 소개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했다. 정신의 신성 차원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환각제 연의 출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증을 느낀 나머지 그는 그 모든 것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어느날 그는 아무런 특별한 방법도 취하지 않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처럼 기대를 풀어놓아 버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해방시키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왓츠는 이렇게 적었다. "그것들을 팽개쳐 버리는 힘 속에 나 자신도 함께 던져진 것만 같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내 몸의 무게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내 자아마저 가진 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아무 것도 나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온 세계가 내 마음만 큼이나 투명하고 방해되지 않게 되었다. '인생의 문제는 그냥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열여덟 시간 동안 나와 내 주위의 모든 것은 마치 가을날 들판을 가로질러 낙엽을 날리며 부는 바람처럼 느껴졌다. "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는 홀륭한 묘사이다. 낡은 짐꾸러미를 멀리 집어던지는 해방의 느낌은 자신의 한정된 자아만을 고집하기를 그치면 저절로 일어난다. 우리가 ''라고 하는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기억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기준점이다. 신부가 결혼하던 날을 떠올리기 위해서 불러을 수 있는 어떤 특정한 기준점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 마음의 내용물은 이와 비슷한 기준점-지나간 경험의 홀로그램 꾸러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과 우리는 이것을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데에 사용한다. ''1746년에 태어난 사람이다. 카톨릭 계통의 학교를 다녔고, 이불에 오줌을 싸고는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여덟 살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코끼리 인형을 받았곤 너무 일찍 결혼했고, 대학을 중퇴했으며., 등등 끝이 없다. 기억의 축적은 하나의 단단한 틀을 이룰 때까지 계속 쌓여 간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아상이다.

가장 깊은 심층의 의식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이 자아상을 완전히 초월한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영적 스승들이 '진정한 자아를 경험하는 순간이라고 말하는 때이다. 자아상이 완전히 없어지면 순수한 자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가 평상시에 가지고 있는 ''에 대한 느낌이 지닌 경직성에 비해서, 진정한 자아는 결코 고갈되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살아 흐르는 느낌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갓난아이로서 경험하든, 어린아이, 혹은 청년, 혹은 노인으로 경험하든 상관없이 변화를 초월한 경지이다.

앨런 왓츠는 누구나 경험할 수 없는 진정한 자아의 명료한 험을 겪었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려고 어떤 짓을 할 필요도 다. 모든짓을 그만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상과, 그 배의 기억과 직선적 시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을 그만두어야만 는 것이다. 인도의 한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억을 사용다. 기억이 나를 사용하게 하지는 않는다. " 이것은 아주 핵씸적인지적이다. 기억이란 '한갓 얼어붙은 시간이다. 시간에 뿌리를 박은마음이 시간을 초월한 경지를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영원불멸을 어떤 양으로 쪼개어 놓은 것이기때문이다. 실재는 대양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찻잔에 담아서 가져간다.

왓츠가 실재, 즉 무시간의 대양 속으로 빠져들어갔을 때 그의 인식은 변화되었다. 속박되고 숨막히는 느낌(분명히 표현하기는 힘들지 몰 라도 누구나가 다 느끼고 있는) 대신그는 "대양과도 같은 느낌"을 가졌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온전히 하나로 이어진 전체wholeness 속으 로 융합될 때의 느낌을 리켜서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시간에 뿌리 박고 있는 존재는 체가 아니며, 결코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의 체가 파편들로써 이루어진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5부 직선적 시간의 와해

아인슈타인이 시공간의 환상을 비누거품처럼 터뜨려 놓았을때, 단지 그의 마음 속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어떤 일이 일어났다. 자연의 절대적인 것들 중의 하나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직선적인 시간과 함께 아인슈타인은 3차원 공간도 끌어내려 놓은 것이다. 공중에서 보면 가로등이 3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 공간감각은 관찰자의 위치 변화에 따라서 완전히 바뀐다. 더 높은 곳에서 보면 가로등은 점점 더 서로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외계로 나가서 보면 사라져 버린다.

아인슈타인은, 실재의 한가운데에서는 둑이 무너진 강물처럼직선적인 시간이 완전히 증발해 버린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물리학에서는 관찰자 앞을 지나가는 입자는 화살이나 대포알, 총알이 날아가는 것처럼 직선궤도를 따라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여기에 시간적으로 분리된 두 점이 있다. 화살표는 우주의 장 기본적인 사건, A점에서 B점으로의 시간의 경과를 나타낸다. 우리가 시간 속을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입자와 에너지 파가 움직일 수 있기때문이다. 이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근거를 이룬다. 어떤 입자는 A에 있었는데 지금은 B를 향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결국 거기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다른 위대한 선구적 물리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실재가 마치커져가는 반지 모양의 웅덩이에 더 가

까워 보인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매우 정확하게 증명했다. 시간은확률

파로 바뀌고 공간은 한 개의 입자가 한 번 지나갔거나 나타날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모호하고 불명확한 영역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의 두 점 AB는 이 커져 가는 반지 속의 어딘가에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명확한 과거나 현재나 미래는 없고 다만 위치의 가능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입자는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고 저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위치가 정해지면 그와 함께 시간영역도 드러난다. AB는 중심에 같이 붙어 있을 수도 있고 어딘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직선적인 시간은 1분은 그 전의 1분에 동일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다고 속인다. 하지만 주관적인 시간으로 눈을 돌려 보라.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는 2분은 아름다운 아가씨와 앉아 있는 2분보다 훨씬 더 길다. 아인슈타인은 두 사건 사이의 간격은 완전히 제멋대로 임을 증명했다. 현실적으로는 단지 시간간격의 '가능성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직선적인 시간의 와해가 아인슈타인을 그리 행복하게 해주는 않았다. 고는 개인적으로 3차원의 사물과 사건들이 실재라고 믿고 싶어 했다. 그렁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해방시키는 최상의 적이 성취되었다. 젊은 물리학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의해우리는 이제 '초공간superspace'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차원과 새로운 기하학, 그리고 우리가 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시간으로 폭발하는 영역이다. 초공간 속에서는 별들이 더이상 깜깜한 허공 속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 공간 속에는 무한한 에너진가 그 자체보이지 않는 줄과 원형을 따라 꼬이면서 진동한다. 시간은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제로 공간 속에 무한한 시간을 펼치는 시공간의 압축된 씨앗인 '특이점 Singularities'2 바깥으로 뱉어져 나온다.

초공간 속에서는 시간은 어떤 고정된 방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간은 앞으로나 뒤로나 마음대로 갈 수 있다. A에서 출발하는 A입자는 출발하기도 전에 B점에 나타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의 직선적인시

간 관념의 기대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불가능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밤에 떠나는 제트 비행기를 상상해 보자. 비행기 안에 앉아 있는 승객은 활주로의 가로등이 일렬로 시간적 순서를 따라서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일단 이륙하여 내려다보면 가로등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로등은 움직이는 시간으로서 경험했던 하나의 패턴 속에서 존한다. 직선적 시간은 언제나 움직이 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차원적인 시각을 벗어나면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전체를 조감하고 시간 자체는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가 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지지하는 자연의 표준구조는 우리가 감각이나 과학이론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두 개의 층을 가지고 있다.

물리적 창조물

양자장

(2)-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 따라 끝없이 과거로 거슬러을라갈수 있다면 결국 우주가 시작된 출발점의 하나인 이 특이점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가 바로 우주의 원초에 해당하는 대폭발BigBang이 일어난 지점이다.

물질세계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의 근원인 양자장으로부터 겨났다.하지만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명백한 의문을 야기한다. 그렇다면 양자장은 어디서 생겨났는가 하는 것이다. 양자적 현실은 이미 시간과 공간의 벼랑 끝에 있다. 그 너머에는 언제도, 어디도 없다. 그러므로 양자장의 근원은 아무 곳도 아니고 동시에 모든 곳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이 생겨난 때는 아무 시간도 아니며 동시에 모든 시간이다.

달리 말해서, 이 의문은 우리의 평범한 시공간 개념의 틀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대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 또 아인슈타인은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일부 물리학자들이 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사상적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일반상대성 이론을 완성한 후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자연의 법칙들을 한데 묶어 공통의 기반을 제공해 줄 통일장 이론을 가정했다. 유명한 방식 I=me'은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물리학용어로 말하자면, 아인슈타인은 이 둘을 통합시킨 것이다. ) 그리고 이제 그는 시간과 공간도 통합하려고 나섰다.그는 2층 구조의 우주 모델을 3층 구조로 대치하려고 했다.

물리적 창조물

양자장

통일장

이미 시간과 공간이 환상임을 증명해 놓았으므로 이 통일장라는 새로운 층은 그 환상의 배후에 있는 실재, 모든 차원들 너머에 있는 온전히 하나로 이어진 전체wholeness여야만 했다. 불행히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통일장 이론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식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죽은 지 30년 후에,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극도로회의적인 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존 횔러, 데이비드 봄David Bohm3같은 젊은 동료들이 그 작업을 이어받았다. 진정한 통일장 이론을 발견해 내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물의 이론thenryof every-thing'4이 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그 회의론은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스티븐 호킹 StephenHawking이나 로저 펜로즈Roger Penros언와 같은 저명한 사유가들 은 만물의 이론을 찾는 것이 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장이 앨런 왓츠의 무시간의 체험, 즉 완벽한 질서를 지녔으며 모든 시공간의 사건들을 천의무봉의 그물 속에 담고 있는총체성과 동일한 것임을 이해하기 위해서 만물의 이론이

증명되기를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것I am That'라고 영적 스승들이 선언할 때 그들은 가장 완벽한 소속감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통일장이 자신의 내부에, 주위에, 자신을 관통하여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체험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매우 높은 장애물을 넘어야만한다.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생명이 종말을 고하고 미지가 시작되는 (3)-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양자역학의 표준적인 교과서 중의 하나로 유명한 <양자론 QuantumTheory>(1951)을 썼으며, 1770년대부터는 주로 철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우주는 '분할 불가능한 전체임을 강조하는 점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4)-어느 것에나 다 적용되는 이론이라는 뜻으로, 연구자들이 양자물리학을 가리켜 이렇게 부른다.(5)-스티븐 호킹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물리학자이고 로저 펜로즈는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자이다. 이 두 사람은 우주의 조와 블랙홀의 성질에 관해서 획기적인 연구성과를 발표한 바 다. 그것이 바로 '특이점 정리'이다. 현재 스티븐 호킹은 양자역학과상대성이론을 결합시키는 연구를 하고 있고, 로저 펜로즈는 소립자물리학에서 독특한 영역을 구축하고있다.결산점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이후의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시간과 공간 속의 경계도 없다. 이처럼 훨씬 더 커진 현실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삶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인지를, 혹은 그것이 과연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기나 한 것인지를 다시 정의해 보아야만 한다.

죽음의 저주

죽음의 환상을 극복하기

통일장은 호흡 하나하나, 낱낱의 생각, 모든 행위 속에서 우를 무시간의 세계에 묶어 놓으면서 우리 자신 속에 존재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이러한 관계를 훨씬 더 잘 인식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훨씬 덜 위협적이다. 아인슈타인은 젊은 시절 깊은 병 과 우울 속에 갇혀 있었을 때 절친한 친구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나는 자신이 뭇 생명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절실히 느껴져서, 이 끝없는 흐름 속에서 어떤 한 사람의 구체적인 존재의 탄생이나 종말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가지 않는다네." 사물과의 이러한 일체감은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고 두려움을 없애준다. 마음 속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 노화를 일으킨다면, 우리는 현재 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살 수가 없다. 사실상 죽음은 두려움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처럼 그렇게 막강한 힘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는 죽음이란 탄생과 갱신이라는 더 큰 순환의 일부이다. 올해외 씨앗은 싹터서 자라고 꽃을 피워서 내년의 씨앗을 맺는다. 이 끝없는 갱신의 순환은 죽음을 넘어서 있지 않다. 이들은 죽음을 더 큰 목적을 위해 사용하면서 자신 속에 통합시켜 놓고 있다. 우리 몸 속에서도 같은일 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세포들이 무서운 죽음의 신에 의해 강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으로서 노화와 죽음을 거친다.

죽음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조차도 반쪽의 진실이다. 왜하면 소멸을 모르는 많은 차원의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원자들은 수십억 년의 나이를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수십억 년을 더 살 수있다. 먼 미래에 원자들이 더 작은 입자로 쪼개질 때도, 이들은 죽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또다른 형태로 변환될 뿐이다. 처음부터 원자란 변환된 형태의 에너지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수수 헬륨, 기타 원소들의 질서정연한 패턴 속에 갇히는 것을 이 원시 '에너지 수프'가 죽었다 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신체를 한데 붙잡고 있는 중력, 그리고 그와 유사한 아원자 차원의 힘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폭발 때 이 힘들을 만들었던 더욱 큰 힘의 장 속으로 빨려들 어갈지는 몰라도..... 우리가 이같이 죽지 않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을진대, 우리 자신을 그런 시각으로 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환상의 손아귀 속에서

죽음의 손아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우리가 의식으로 택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 속에 규정되어 버린 매우 선택적인 실재관 위에 근거해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어린 시절로 마음 속을 더듬어 보라. 이 첫번째 대면은 보통 매우 충격적이다. 네 살짜리 아이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집에서 키우던 새나 고양이, 혹은 강아지가 그만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란다. 무슨 일일까? 내 카나리아는 어디로 간 걸까? 이러한 의문에 부모들은 좋은 대답을 거의 해주지 못한다. 그들은 '네 카나리아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려고 하늘나라로 갔단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것이 문제를 마무리해 주지는 않는다. 카나리아가 하늘나라 로 갔다고 말하는 것은 부모가 '희망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속으로 아이들만큼이나 죽음을 두려워하곤 또 그것에 대해서 아이들만큼이나 아는 것이 없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의혹과 얼버무림을 알아채는 훌륭한 안테나를 가지고 있다. 눈물이 그치고 고통이 사라지지만 좀더 깊은 곳에서는 희미한 의심이 생겨난다. 이것은 나에게도 일어날지도 몰라.

아이가 네 살에서 여섯 살사이의 나이가 되면 부모는 그 두운 암시가 사실임을 확인시켜 준다. "할머니는 돌아가셔서 하늘나라로 가셨단다. 그리고 언젠가는 너도 죽고 엄마 아빠도 죽는단다. " 그때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많은 아이들이 차라리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피터 팬, 즉 영원한 아이가 되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든 안 하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일부 심리학자들이 논쟁하기로는, 죽음을 대면한 그 순간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을 장악해 왔던 그 관념의 손아귀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죽음을 소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음이 이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그래 왔듯이 우리의 신체를 쇠퇴하여 늙고 죽도록 운명지었다.

우리를 해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공포이다. 우리는 누구나 고통을 느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소중히 여겼던것이 죽었을 때 가슴 속에는 구멍이 뚫렸다. 두려움으로써 메워야 할구멍이 남겨졌고, 그 이후로 다른 아무 것도 그 구멍을 메워 주지않

았으므로 우리는 아직도 죽음을 대면할 수가 없었다. 상실감이말로 근심의 가장 큰 원인이며, 마주 대면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는, 늙는다는 것은 곧 상실감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그것은 어린 시절에 뚫린 구멍 속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인간을 죽음 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모든 종교의 목표이다. "오 죽음이여, 그대의 독침은 어디 있느뇨? 오 무덤이여, 그대의 승리는 어디 있느뇨?"성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작은 무리의 기독교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리고는 그는 이렇게 그 답을 썼다. "죽음의 독침은 죄이다. " 그것은 실수, 혹은 은총으로부터의 탈락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죽음이란 죽지 않는 신한테서 인간이 떨어져 나온 결과이다. 불사성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생명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릴 적에 죽었던 새와 고양이, 개들은 어떻게 되었나? 그들은 이 같은 신학적 신념이 없이 죽었다. 그러나 동물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창밖의 나무를 보라. 그것은 죽었는가 살았는가? 양쪽 다이다. 오래된 잎은 죽었곡 나무가싹터 나왔던 씨앗도 죽었다. 나무줄기 속의 목질부도 죽었고, 나뭇잎에 영양을 공급꿇 주는 5밀리미터도 안되는 얇은 형성층만이 살아 있다. 잎은 또 대부분이 죽은 셀룰로스의 섬유질로 구성되어있다. 가을이 되면 잎의 시체는 땅에 떨어지지만, 그 전까지는 이들도 살아 있는 나무의 일부이다.

게다가 나무 속에서 순환되고 있는 공기와 물과 영양분은 위와 빗방을 속에 갇혀 있을 때보다도 생명력이 없다. 나무를 받쳐 주고 있는 흙은 한갓 잘게 부서진 돌과 전에 죽은 나무들이 썩은 혼합물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나무라고 부르는 것은 생명과 죽음의 혼합물이며, 이 둘 사이의 구별은 거의가 우리의 머리 속에 있다. 동물이나 식물은 모두 영속적으로 흐르는 원소들의 끊임없는 순환과 재순환 속의 단지 한 국면일 뿐이다. 그 전체의 순환이 곧 생명이며, 순환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순환을 정지상태로 고정시켜 놓고", 이 나무는 살아 있곤 이 나무는 죽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반영해 준다. 우리는 쇠퇴와 해체를 두려워하여, 사실상 단지 변화일 뿐인 그것들에다 죽음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나무와 마찬가지로 카나리아는 단지 생명의 한 국면이다. 초기에 카나리아는 한 개의 알이었다. 그 전에는 수정된 세포였으며, 그 전에는 어미새가 알을 부화시킬 영양분으로 먹은 나무 씨앗이었다. 카나리아가 죽은 후에는 시체가 분해되곤 그 원소들이 식물에 영양분을 주며,식물은 다른 새들이 먹을 씨앗을 맺을 것이다. 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만일 있다면 어느 만큼이 죽음이며 어느 만큼이 단지 우리가 사물(우리 자신을 포함하여)을 보는 관점일까? 사실상 우리 몸의 일부가 매순간마다 죽어가고 있는데도 당신은 죽음이 미래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끔찍한 사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위벽은 음식물을 소화시킬 때마다 부분적으로 죽어서 새로운 조직으로 갱신된다. 피부와 머리카락, 발톱, 혈구, 그리고 다른 모든 조직들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죽음을 당신의 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세포들은 당신을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죽고 있다. 위벽이 죽어서 자꾸만 새롭게 바뀌지 않았다면 몇 시간 후에는 위산이 당신의 위에 구멍을 뚫어서 당신의 몸 전체가 죽어 버릴 것이다. 죽은 것과 산 것 사이의 경계선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더 애매해진다. 우리 몸의 어떤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훨씬 더 생명력있다. 근육은 지방질보다 신진대사율이 빠르다. 두뇌와 심장, 간의 세포는 탄생 이후로 거의 복제되지 않는다. 반면에 위, 피부, 그리고 혈구 세포는 하루, 혹은 일주일이나 한 달 만에 한 번씩 자신을 교체시킨다.

인체 해부학상의 한 가지 기이한 사실은, 어떻게든지 우리 의 모든 세포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나머지 형태는 여전히 인간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골격부는 광물화된 뼈와 인대,힘줄, 결합조직, 그리고 물로 이루어진 홀로 서 있는 산호초와도 비슷하다. 그 속에 모든 세포들이 들어 있다. 산호의 폴립(산호의 개체)이칼슘질의 산호초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산호초가 그 속에 바닷물을 안고 있듯이 우리 몸의 3분의 2 정도는 소금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죽은 부분은 주위의 환경과 자유롭게 원자를 교환한다. 상처가 나면 치유시키고 압력이 가해지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서서히 형태를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신체의 얼마만큼이 살아 있고 얼마만큼이 죽었단 말인가? 나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확실히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구분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 내 폐 속의 공기는 내 몸의 일부인가? 그렇다면 내가 마실 공기, 또는 내가 방금 내쉰 공기는 어떤가? '외부이있는 저 세계는 언젠가 나였던, 혹은 곧 내가 될 수조 개의 원자들로 채워져 있고 우리가 지구라고 부르는 물질과 에너지의 온 덩어리가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데에 꼭 필요하다. 이 큰 몸 속에서 나는 단지 하나의 세포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으며, 또한 나 자신을 지탱시키기 위해서는 온 지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것이 내 몸의 일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것도 죽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썩은 고기, 그것을 먹고 사는 구더기와 곰팡이, 심지어는 우리 조상들의 뼈까지도 나를 그 파도 꼭대기에 싣고 출렁이는 동일한 생명의 조수 속에 속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인하고 뒤로 물러선다. 그들은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두려워 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지는 않거나, 내가 말한 것처럼 그토록 막강한 힘을 휘두르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왜 그처럼 우울한 문제를 그렇게 파고들려고 하는가? 피할 수 없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오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더 건전하지 않은가? 이러한 반론에 대한 대답은, 우리 안에서 무의식적인 힘이 작용하여 두려움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는 죽을 것임은 누구나 시인한다. 그러나 우리가 죽은 사람이나 죽어가고 있는 사람 곁에 있게 되는 때를 제외하고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감추어진 채 간직되어 있다. 이것은 생리적으로 거의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나는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1년에 한두 번 이상 자주 떠오른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상상할 수도 없다. (의사인 나로서는 이보다 훨씬 더 자주 죽음을 목격해야만 한다. 그러나 죽은 암환자의 눈을 감겨 주는 일이 반드시 나의 죽어야만 할 운명을 상기시켜 주는 것만은 아니다. 슬픔을 느낄지는 몰라도 내 눈이 감겨지는 모습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 우리가 누구나 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공포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어두운 구렁텅이 속으로부터 공포는 여전히 우리에게 손아귀를 벌리고 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한다는 것이 참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 자체가 죽음에 엄청난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이 천만 볼트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전기 울타리를 두르고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쓰인 거대한 간판을 붙여 놓은 것인 양 말이다. 죽음이 우리 마음 속에서 울타리를 둘러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 대해서 진정으로 아는 것은 많지 않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무시라는 말로 바뀌어야만 한다.

나는 두려움보다 사람을 빨리 늙게 만드는 것이 없다는 것을 거의 확신한다. 슬픔이 그 뒤를 바싹 따라 온다. 의사라면 누구나 배우자와 사별한 사람에게 닥쳐을 수 있는 무서운 노쇠현상을 목격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움을 당해 낼 수가 없다. , 말기 암을 진단받은 사람은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매우 빠른 속도로 쇠약해 질 수 있다. 언제나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용기, 신에 대한 믿음 등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내적 덕목이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공포스러운 위기에 처했을 때 이러한 덕목을 결집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일단두려움이 환자를 사로잡아 버리면 결과는 너무나 확실하다. 중요한 것은 죽음이 허구라는 사실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존재할 필요도 없는 한계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죽음의 용도

우리가 가정하고 싶어하는 것 중의 하나는 죽음은 아무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묵시적으로는 죄악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에 찬성하지 않는다. 자연은 죽음이 어떻게 이용되는가 혹은 않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너그럽고 융통성이 있다. 그리고 크게 보면 선악의 문제는 다소 임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생명이 유전자 차원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살펴보자. DNA는 과거 세대로 거침없이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아메바, 조류, 박테리아 등의 형태 속에서 이미 오래 전에 늙지 않는 세포의 비밀을 발견해 놓았다. 한 마리의 아메바가 나타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생명은 동일한 유전자로부터 아메바를 계속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자연은 늙지 않는 좀더 복잡한 생물을 계속 만들어내었다. 예컨대 히드라는 원시 수중동물로서, 늙은 세포가 떨어

져 나가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새로운 세포를 키을 수 있다. 한개의 발과 가는 줄기, 꽃처럼 생긴 작은 섬모 다발로 이루어진 히드라는 늘 한쪽에서는 자라고 한쪽에서는 죽는다. 그리하여 2주일마다 몸 전체가 새롭게 바꿔다. 히드라의 세포는 늙은 세포가 죽어가는 자리를 채우기 위해 새로운 세포가 조립 라인을 따라움직이는 완벽한 흐름 속에 존 재한다. 이것은 창조와 파괴의 완벽한 균형으로서 죽음이 발디딜 여지 를 남겨 놓지 않는다. 그므로 세월도 히드라를 어찌하지 못한다. 히 드라는 오직 사고가 어나거나, 영양분이나 물이 없거나, 혹은 다른 외부적인 원인에 해서 죽을 뿐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젊음의 비밀이란 곧 균형잡힌 신진대사, 즉 엔트로피에 한치도 빼앗기지 않고 완벽한 평형상태로 음식과 공기와 물을 처리하는 지속적인 화학반응의 흐름인 것이다. DNA는 이미 수억 년 전에 이러한 균형잡힌 작용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진화의 연쇄 속에서 뒤늦게 발달된 것이다. 그러나 고등생물 속에서도 DNA는 죽음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제어력을 발휘하고 있다. 예를 들면 꿀벌은 마음대로 자신의 나이를 변화시킬 수가 있다.모든 벌집은 집안에 머물면서 새로 부화하는 애벌레를 먹이고 돌보는 일을 맡는 젊은 일벌을 필요로 한다. 3주일이 지나면 이 젊은 일벌들은 자라서 꿀벌이 되어 날아다니며 꽃에서 꿀을 따 모은다.

그러나 어떤 시기에는 젊은 일벌이 너무 많거나 늙은 꿀벌이너무

많아질 수도 있다. 봄에는 너무 맡은 애벌레들이 부화하므로 벌의 수가 모자라서 빠른 시일 내에 더 많은 꿀벌이 요구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평상시에는 꿀벌이 되는 데 3주일이 걸리던 일부 일벌들이 일주일 만에 꿀벌이 되어 꿀을 찾아 날아간다. 이와 반대로 한 무리의 벌이 분봉하기 위해 떨어져 나가면, 꿀벌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 일벌이 모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늙은 꿀벌 중의 일부가 나이를 거꾸로 먹어서 다시 젊어진다. 이들은 젊은 일벌의 호르몬을 다시 만들어 내곤 심지어는 부화하는 애벌레의 먹이를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내분비선이 새로 자라기도 한다.

벌 연구가들은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매우 놀랐다.그들은 꿀벌에게 있어서는 노화가 고정된 시간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일방향의 과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이는 '유연하여서 앞으로나 뒤로나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빨리 먹을 수도 있고 천천히 먹을 수도 있다. 왜 고등 생명체에게는 이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 진짜 수수께끼이다. 나는 나이란 '언제나 유연한 것이라고 주장하겠다. 다만우리가 죽음을 노화라는 고정된 시간표 위의 피할 수 없는

종점이라고 믿는 신념으로써 그것을 고착화시킨 것일 뿐이다. 꿀벌의 집은 개체수의 왔모와 구성비율, 그리고 식량의 비축량, 약탈자, 기후등의 변화에 끊임없이 대처해야만 하는 리드미컬한 통일체이다"라고 벌 언구가인 진 로빈슨Gene Robin,ion은 말했다. 약간만 변형시키면 이 모델을 인체에도 적용시킬 수가 있다. 인체는 50조 개의 세포가 어떤 주어진 순간에 전체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늙거나 혹은 젊은 상태로 남아 있는 거대한 벌집인 것이다.

모든 세포의 물로 가득 찬 내부에는 부패 효소의 밀봉된 알갱이 형태를 가진 자기파괴 메커니즘이 떠다니고 있다. 이 효소가'정상적 노화와 관계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어떤 특정한 목적에 사용된다. 예컨대 식균성 백혈구macrophage는 수많은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을 먹은 후에 이 효소들이 활동하도록 풀어 놓음으로써 그 찌꺼기를 제거한다. 그 과정에서 식균성 백혈구도 죽는다. 이것은 마구잡이 식의 파괴행위가 아니라 고도로 의식화된 판단이다. 신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세포는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처럼 확고한 자기희생이 인체의 가장 큰 조직인 피부에서 하루에 도 수백만 번씩 일어나고 있다. 하나의 물리적 객체로서의 피부세포는 매우 약해서 외부의 영항력에 견디기에는 너무 부드럽다. 그러므로 피부의가장 바깥층안 표피는 완전히 죽은 세포로만 이루어져 있다.

들은 부딪히고 할퀴고 밀리고 맞는 등의 충격에도 충분히 견딜만큼

즐기다.

이 세포들은 공기에 노출되어도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피부층살갗의 내층-에서 젊은 피부세포가 만들어지면 그 밑에서 자라나는 더 새로운 세포들에 떠밀려서 표피 쪽으로 나온다. 이 동안에 세포는 머리카락이나 손톱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딱딱한 물질인 케라틴(각질)이라 불리우는 일종의 단백을 자체 내에 축적시키기 시작한다.케라틴은 세포의 부드러운 부분을 차지하고 들어가서 점점 더 단단하게 만든다. 세포가 표피로 밀려 나가 공기와 직접 맞닿을 때쯤이면 피부세포는 우리의 몸을 바람과 햇빛과 비로부터 보호하기에 충분한 케라틴을 지니게 된다. 그 다음에 세포는 죽어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벗겨져서, 자라나는 세포들의 다음 물결에 자리를 내어 줌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것이다. 죽을 때를 앎으로써 피부세포는 몸 전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일조한다.

이와 반대의 극단에서는 죽어야 할 때를 모르는 암세포가 몸 전체를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암세포는 근본적으로 영원불멸을 믿는 탈주자이다. 암세포는 다른 모든 세포들의 운명은 무시한 채 혼자서만 살아남으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역시 자연의 계획 속에 짜여 있는 하나의 선택이다. 모든 세포의 DNA는 발암 유전자라고 불리는 특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암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이 유전자가 먼저 작동해야만 한다. 최근의 또다른 가설에 의하면 인간의 DNA의 첫번째 염색체 속에는 이것이 작동되면 모든 세포로 하여금 무한히 분열되게 만드는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세포들이 자신의 불멸을 추구하는 이유를 아직 밝혀 내지못했다. 아마도 이 스위치는 과거의 진화 역사로부터 남겨진 유물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뚜껑을 여는 법을 모르고 있는어떤 잠재능력일까?

사람들은 노화와 죽음에 대해서 자신이 얼른 인식할 수 있는것보

다 훨씬 더 많은 선택을 내린다. 비록 우리가 노화와 죽음의 생물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에게 노화와 죽음이야말로 충족되지 않는 삶으로부터 도피하는 유일한 길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내가 믿기로는 그런 도피적 동기가 제1부에서 거론했던 조기은퇴성 사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와 동일선상의 또다른 변형형태의 하나는 덕도성사밍이다. 이것은 사랑하던 배우자나 식이 죽은 날에 죽는 것을 말한다. 연구 결과 중국인과 유태인들의사회에서는 중요한 종교 휴일 직전에 사망률이 급격히 줄어들었다가 그 이후로는 즉시 늘어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숨을 놓기 전에 설날이나 유월절을 한 번만 더 지내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뭔가 애지중지하는 것이 관건이 될 때 목숨에 매달린다는 시실은 새삼스러운 연구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예를 가장 최근에 본 것은 심한 뇌졸중을 몇 번 겪은 노과

그의 손자의 경우에서이다. 노인은 마침내 위중한 지경에 이르서 입원하였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갈 희망은 거의 없었다. 그는 거의 기진해서 의식불명 상태를 오락가락하였는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들 때마다 손자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얘는 어딨지, 얘는 어딨지?" 하고 중얼거렸다.

죽어가는 노인의 자식들이 그 손자를 데리고 보스턴에서부터달려

왔다. 손자가 병원에 도착하자 노인에게 변화가 왔다. 그는 미를 지으며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손자를 포옹했다. 그들은 거의 하루 종일 단 둘이서 손을 잡은 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손자가 떠날 때, 모두들 할아버지가 매우 좋아졌다고 말했다. 두 시간 후에 노인은 잠든 채로 죽었다. 이 경우를 생각해 보면, 바라볼 희망이나 사랑이 있는 한 생명을 지탱시켜 주는 그 힘을 그 어떤 연구가가 측량해 보려는 꿈이나 꿀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밖에서 지켜보는 우리로서는 한 사람의 몸이 무엇에 대해 반응 하는지를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너무나 개인적인 일인 것이다.

수년 전에 <최후의 탈출구Final Exit>라는 제목의 자살 안서가 경이로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그 주된 독자층은 난치병이나 만성적인 육체적 ` 정신적 고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자연 형태의 느린 자살인 노화는 너무 느렸다. 무섭게 들릴지는 몰라도, 해결방법도 없이 고통과 병에 시달리는 삶은 더 무섭다.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노쇠라는 저주를 받았을 것이라고 어떤 인도의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다.

노쇠가 아니라도 삶은 간단히 끝마칠 수 있다. 워싱턴 포트 젤스에 사는 은퇴한 농부인 레든 코치Redden Ce,uch 씨는 "나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소 옛날에 했던 일을 지금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요 죽음은 전혀 두렵지 않소. 지금 당장 죽는다면 아주 그만이겠소 난 언제고 준비되어 있으니까." 하고 말했다. 이 말은 체념을 나타내는 것일까, 아니면 초연? 무관심? 용기? 패배감?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공교롭게도 례든 코치 씨는 이 말을 100세 생일날에 했는데 104세가 되는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그 같은 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더 깊은 자아는 분명 더 살아야 할 일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 모든 예들은 죽음이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단 한 가지의 가치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죽는다는 것은 변화의 한 형 태이다. 그리고 무변화의 더큰 틀 안에서는 또 그렇게 보여야만 한다.

마하리쉬께서 나에게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들은 음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죽음을 종말로 지만 사실은 시작이야." 당신은 이 말을 하나의 신조를 표현한 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것은 사실을 언급하는 실질적인 말이다. 생명의 흐름 속에서는 파괴가 결코 최종 선언이 아니다. 창조는 언제나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난다. 모든 세포는 분열여 두 개의 세포를 이루는 법을 알고 있다. 쪼개진 원자들은 다시새로운 원자로 합쳐질 줄 안다.

모든 생각 뒤에는 새로운 영감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떻게 삶의 완전성인 이 연속성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가 겪는, 혹은 남편을 잃을 때 아내가 겪는 정적 황폐는 어떻게 된 것인가?

물론 이러한 감정은 자연스럽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는고통이있다. 그러나 우리가 잃음도 얻음도 없고 오직 변형만이 존재하는 영원한 흐름으로서의 삶의 현실을 받아들였다면 그 고통은 그처럼 깊고 오래 가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어떤 소네트sonny떼서 이렇게 썼다.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을 가졌음을 나는 슬퍼하노라."이것은 시간에 속박된 의식에 집착한 불가피한 결과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의식이 바로 현실의 근원이며 시간에 속박된 의식과 시간을 초월한 의식으로부터는 전혀 다른 종류의 현실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시간에 속박된 의식의 결말 시간을 초월한 의식의 결말 노화 해방, 자율성

엔트로피 젊음 실재에 대한 지식

무한한 에너지 자유로운 감정

육체와 에고를 넘어 확장됨

억눌림 희생된 느낌

분리에 대한 걱정 다툼

슬픔, 비탄 육체와 에고 속에 갇힘

두려움 凉刻 죽음 .

히됐

.

조밴

?

우리는 모두가 이 양쪽의 측면들을 다 경험한다. 왜냐하면 리의 의식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탄과 공포의 황폐한 순간을 가져오기도 하며, 평화와 힘에 넘치는 멋진 순간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의식은 한정된 육신과 이기적 에고와 동일시하는 쪽을 택할 수도 있으며 초월과 확장 속으로 해탈하는 쪽을 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유연성이야말로 인간 의식이 지닌 진정한 비상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가능성을 열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한 의식 속에서 영원히 사는 쪽이 분명 훨씬 더 좋다.

인도의 영적 스승들은 인간의 영혼은 무한한 자유와 충족을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다. 멕시코 만류가 보이지 않게 대서양을 가로질러 흘러가듯이 우리 인간의 마음은 더 높은 현실을 향해 사고와 정서를 충동하는 감추어진 흐름을 지니고 있다.인도에서는 이것을 다르마dharma라고 한다. 이것은 고대 산스크리트어로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이다. 이것은 법칙, 질서, 의무, 그리고 올바른 행위를 의미한다. 한 사람의 다르마는 그의 일, 혹은 직업이다. 그것은 또한 그가 가족에 대해 지는 의무이며 그의 삶의더 높은 목표이며 그가 다짐한 영적 이상이다.

'다르마'의 어원은 '떠받치다'라는 뜻의 동사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다르마는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만들어 내는 유인력이다. 그러므로 엔트로피, 노화, 그리고 죽음을피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다르마 속에서 사는 것이다. 우주는 다르마의흐름이 그렇게 인도하기 때문에 진화해 간다. 그것은 생명의 천을 짜는 보이지 않는 지능이다. 인간의 의식은 다르마를 직접 접하고 그것을 파악하여 그 자체의 진화를 인도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것이우

리를 인간답게 하는 것이다. , 우리는 단지 진화해 가는 것이아니

라 우리 자신의 진화를 인도해 간다. 다르마는 종교적인 가르의 체 죽음의 저주 물리치기 425계가 아니라 우리가 발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이다.

다음에 나오는 연습 부분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의식적인 인도에 의해서 우리 내면의 지능은 늙지 않는몸과 시간을 초월한 마음이라는 영속적인 상태를 만들어 낼 수 있다.우리는 누구나 평화와 힘과 사랑이 저절로 우러나왔다가는 금방 사라 져 버리는 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이아니다 재의 이 같은 출몰은 마음이 그것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다르마를 꾸준히 따르면 평화와 랑

과 힘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의의식-시간을 초월한 상태-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내가 이 책을 쓰는 큰 기쁨은, 두려움으로 가득찬 주제-노화를

택해서 그것을 성취의 도구로 만드는 데에 있다. 인간은 시간 에 갇혀 있지 않다. 하나의 몸뚱아리와 한평생이라는 시한 속에 구겨 넣어진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생명이라는 끝없는 강을 떠 가는 항해가이다. 이것이 예수가 "세상 속에 머물라. 그러나 그것에 속하지는 말라" 고 말한 의미이다. 이것이 카를로스 카스타네다Cargos Castaneda"그에게 사랑의 힘을 주었던 무집착의 느낌은 사라졌다. 그러한 무집착이 없어지면 그에게는 오직 일상적 세계의 특징인 세속적인 요구와 자포자기, 그리고 절망밖에는 없었다"고 썼을 때 돈 후앙으로부터 배웠던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집착과 소유와 동일시하지만, 거기에는 은 진실이 있다. 무집착의 힘을 잃는다는 것은 사랑할 능력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무집착은 냉담한 무관심이나 감정의 결핍이 아니다. 무집착이란 경계에 걸리지 않는 자유로운 자아의 감각이다. 우리의 항해는 물질세계에서 시작하거나 끝나지 않는다. 지구는 영원이라는 벽걸이 장식 속에 달린 초록과 파랑의 아름다운 보석이다. 우리가 여기서 맑은 물과 생명을 주는 공기를 마시며 아무리 오래도록 머물더라도 영원이야말로 더욱 진정한 우리의 고향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거품을 떠올려 보내는 바닥 없는 웅덩이에서 났다. 거품 하나는한 순간이며 또다른 거품은 1000년이다. 그러나 웅덩이 그 자체는 순수한 영혼이며 아무리 많은 별들과 은하계들이 거기서 떠올라 비눗방울처럼 물 위에서 터져 가더라도 거기에는 없어진 것도 더해진 것도 없다. '존재는 그윽하고 맑고 영원하며 늘 여여하다. 우리의 일상적 존재가 이 무한히 새로운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생각하면 놀랍다. 그러나 생명은 별도의 기반이 없다. 아인슈타인과 고대의 현인들이 전망했던 통일장 속에는 무한의 지능, 자유, 그리고 힘이 내재해있다. 우리가 이 영원한 흐름 속에 우리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음을 깨달을 때 영원불멸의 동이 터오른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지금 매순간 속에 자신의 영원불멸을 주장할 수 있다. 자연은이 최상의 선물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려고 기다리고 있다. 수백만년 동안 우리를 먹여 온 바다와 대기와 태양은 아직도 우리가 다시 한번 감사해야 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자연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의 원자들 사이 공간에서, 그고 모든 상념들 속에서 하고 있는 말은 무엇일까? 똑같은 그 숨결이, 똑같은 그 말없는 속삭임이 모든 세포 속을 지나간다. 그것은 부드러운 강요로써 우리를 부르는 생명 그 자체의 리듬이다. 나는 고대의 <리그 베다>6에 나오는, 영원의 노래를 부르는 음 시구를 사랑한다.

(6)-고대 인도 브라만교의 근본 성전. 인드라Indra 신 등 많은신들에게 바쳐진 찬가로, 인도사상의 원천이 됨. 모두 열 권으로 되어 있다.

죽음의 저주 물리치기 427

내 영혼이 지구의 네 모퉁이를

방황할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바다를 건너

멀리 나갈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번쩍이는 불빛을 향해 멀리 갈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태양과 새벽을 만나러 멀리 갈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높은 산 위를 헤맬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살아 움직이는 또든 형체들 속으로 멀리 갈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먼 땅으로

멀리 갈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지금 있는 모든 것과 장차 있을 모든 것으로 멀리 갈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죽음의 골짜기를 방황할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이것을 크게 소리내어 두 번 읽으라. 그리고는 5분 동안 조용히 당신의 육체와 함께 있으라. 당신의 의식을 몸의 구석구석로 보내면서그 의식이 바로 영혼임을 알라. 영혼은 모든 세포 속을흐르는 생명과지능의 물결, 치유의 에너지이다. 우리가 신체의 내적 환희와 희열에 다시금 동조될 때 심오한 지혜의 신호가 시 나타나 내부로부터 치유가 일어나게 한다. 고대 중국의 장자는이런 시를 읖는다.

우주를 채우는 것 나는 그것을 내 몸으로 여기노라,

우주를 움직이는 것 나는 그것을 내 자성으로 여기노라.

나는 이 시에서 소리 없는 음악을 듣는다. 그것은 우주의 숨결이 곧 내 다음 숨이며 우주의 춤이 곧 내 심장의 다음 박동을 상기시켜 준다.

연습 시간뜰 초월한 길

우리가 인식하는 가장 깊은 현실은 우리가 힘을 얻어내고 있는 그 현실이다. 오직 물질세계만 의식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은 물질적 힘에만 한정된다. 그러나 좀더 깊은 차원에는 마음과 을 형성시키는 창조력이 있다. 그것은 곧 진화의 힘, 다르마이다. 의 핵심에 접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창조력을 접해야만 한다. 그 은 우리의 개인적 창조성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창조의 장 에 있으면 시간의 자취를 잃어버린다. 오직 흐름만이 존재한다.

모든 생명 속에 넘쳐 있는 세 가지의 힘이 있다. , 창조와 유와 파괴이다. 이 세 가지 힘은 세포 별, 나무, 행성, 은하계 등 모든것의 일생 속에 존재한다. 형체를 지닌 모든 것은 존재를 취하고, 그것을 유지시키다가 언젠가는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각의 일생은 시간속에 순차적으로 펼쳐지지만, 이 세 가지 힘은 시에 존재한다. 모든종의 유전자는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내고 각의 세포를 일정 기간동안 보존시키고 그것을 파괴하여 다음 대의 조직에게 자리를 넘겨 주는 데 필요한 암호를 가지고 있다.이 삼위일체의 지능이, 삶을 의식적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 우리가어떻게든 해 보려고 애쓰는 바로 그것이다. 어느 측면-창조, 유지, 파괴-이 가장 두드러지는가는 각자에게 달렸다. 힘의 균형을이동시키는 능력을 우리가 가졌으므로 우리는 이 힘들보다 한수 위에 서 있다.

창조가 우리의 존재를 지배하는 한 우리는 계속 성장하고 진화해갈 것이다. 진화는 엔트로피와 소멸과 노화를 해한다. 어떤 분야이든 가장 창조적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것을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힘의 근원이 자신임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성장해 간다. 그리고 분야를 불문하고 이들은 일반적로 특정한 성향을 공유하고 있다.

1, 침묵을 접하고 즐길 줄 안다.

2. 자연과 연결되고 자연을 즐긴다.

3. 자신의 느낌을 신뢰한다.

4. 혼돈과 혼란 속에서 동요되지 않고 일할 수 있다.

5.마치 어린아이 같다. 공상과 놀이를 좋아한다.

6. 자신에게 자문을 구한다. 자신의 의식에 가장 높은 신뢰도를 매긴다.

7. 어떤 관점에도 완고하게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의 창조작업에 정열적으로전념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지니고 있다.

이 일곱 가지 점들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창조적으로 나아고 있는지를 측정해 볼 수 있는 실질적인 기준을 제공한다. 다음의연습은 이 각 방면들을 개발하고 힘을 기르는 방법을 보여 준다.

연습 1. 창조적 창동계획

모든 사람이 하루의 고정된 일과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람들은 깨어 있는 시간을 똑같은 활동으로 채운다. 똑같은 가족과친구의 얼굴을 대하고 같은 동료와 일하고 같은 길을 운전해 다러며 심지어는 똑같은 생각을 한다. (측정해 본 결과 우리가 는 생각의 90퍼센트는 그 전날 했던 생각의 반복임이 밝혀졌다. )이 같은 일과는 일부러 여유를 만들지 않는 한 천재적인 창조성을발휘할 만한 여지를 허락하 지않는다. 그러나 양자적 의미에서는 창조성을 위한 무한한 공간이 존재한다. 매순간이 무한한 선택과보이지 않는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단 미지의 새로운 것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시작하면 일상적 존의 공백으로부터 더 깊은 힘이 솟아날 길을 터 주는 것이 된다. 부분의 비범한 역사적 사건들이 평범한 날에 일어났으며 가장 범한 사상들은 많은 평범한 생각들을 가진 마음 속에서 생겨났다.

다음의 연습은 당신의 삶에 성장의 여지를 열어 놓는 길을 제한다. 의식적으로 이를 따를수록 성장에는 더욱 한계가 없어질 이다.

앞서 열거한 창조적인 인물들의 일곱 가지 특성에 근거하여 앞으로6개월간에 할 일의 계획을 적어 보라. 날마다 일곱 가지모두를 집어 넣으려고 애쓸 필요는없다. 다만 당신의 삶에 이러한측면이 더욱 완전히 드러나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하라.

1 침묵을 경험하기

먼저, 침묵을 경험하기 위해 시간을 내라. 이상적인 것은, 아에 일하러 가기 전에 짧은(15분 내지 30) 명상, 그리고 저녁에 으로 돌아온 직후에 한번 더 시간을 내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냥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 단순함이 그 시간을 당신의 삶서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 침묵은 요란하고 잡한 현대사회에서는 특히 값진 일용물이다. 약간 미친 정도를 는 이 세계에서 자신의 한가운데에 있는 침묵을 찾는 일은 마치 상적인 정신과 평화의요새를 재탈환하는 것과도 같다. 마음은 모든행위의 양자적 근원인 침묵 속에서 자신을 재충전시킨다. 당신의 생활이 행위로만 가득채워져 있다면 당신은 얻는 에너지보다 더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리듬-활동과 휴식-이 한 방향으로만 너무 치우치고 있는 것이다.

침묵은 위대한 스승이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는그에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내면의 침묵이라는 자신의 정수를 접는 법을 앎으로써 우러나오는 창조적 영감과 지식과 안정을 대신해줄 만한 것은 없다. 위대한 수피 시인이었던 루미는 "흔들리는 물을 가라앉히기만 해 보라. 그대 존재의 표면에 해와 달이 비리라"고 했다.

2. 자연 속에서 지나기 자연과 접하면서 지내는 시간을 만들어 보라. 억압된 에너지를 방출하는 데에는 이보다 더 좋은 방은 없다. 물질세계의 인위적인 울타리 속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오면 심신 체계는 스스로 불필요한 에너지를 방출해 버린다. 도의 환경에서는 맑은 공기를 한껏 마시며 탁 트인 하늘과 구름을 다볼 수 있는 녹지대 공간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몸을 눕힐수 있고 신발을 벗고 태양을 향해 팔을 뻗을 수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 곳을 활용하라. 이것도 힘들다면, 살고 있는 곳에서 연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찾으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해뜨는것을 보고 저녁에는 발걸음을 멈추고 석양을 감상하거나 밤하늘의 달과 별을 쳐다보라.

우리 몸의 세포들은 해와 달과 별들의 주기에 절묘하게 동조되어있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자연을 이마시면 이 보이지 않는 연결이 굳어진다. 혼잡한 도시 한가운서도 온실을 만들어 씨앗이 싹트는것을 볼 수 있고 옥상에 올라가햇볕을 쬐는 것도 자연과의 연결을 도와 준다. 어떻게 하든 간에 최소한 몇 번쯤은 땅파 하늘과 태양의 풍성한 손길을 느끼는 쾌한 순간을 붙잡으라.

3. 느낌을 경험하고 신뢰하기 자신의 느낌을 기록해 보도록 하라. 이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다. 다만 몇 가지 중요한 감정을열거해 놓고, 일상 속에서 그것이 일어날 때 각각의 감정에 대해서 '한 가지의 예만 적어 보라. 기본적인 긍정적 느낌부터 시하라.

다음에는 창조성과 개인적 성장에 관련되는 좀더 추상적인 낌들을 열거해 보라.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적으라.

분노 두려움

이것을 종이에 적어 아침에 한번 보고, 상기시키는 의미로 니고 다니라. 자신의 감정을 실제로 자세히 적어 보면서 그것을 체화하고 그 감정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다시 느껴보고, 어떤 상이 그것을 유발했는지, 그 감정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지닌 것인지 등을 생각해 보면 가장 효과가 있지만 그저 읽어 기만 해도 아주 좋다., 열거된 사항들을 훑어보면서 각각의 감들을 잠깐씩 상기해 보면 그만이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다음과 다.

1. 자신이 간과하는 많은 것들을 얼마나 자주 느끼는지를 발견한다.

2. 보통 억누르거나 잊어버리려고 애쓰는 감정을 스스로 풀어지게 한다.

3.자신의 감정을 진정으호 안다. 많은 사람들이 예컨대 연민이나 통찰 등이 어떤 느낌인지를 정확하게 설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감정을 의식적으로 지켜보면 그것을 세히 알게 된다.이것인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는 첫 단계이다.

4. 자신의 감정을 즐길 만한 것으로 만든다. 느낌으로 이루어진 생은 원래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감정이 신에게 친숙하지 않으면 그것을 즐길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신은 감정이 별로 없다고 스스로 확신한다. 그러나 그것을 억누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닌 낱낱의 생각는 어떤 느낌이붙어 있다. 이 모든 느낌들을 드러내어 놓으면 당신은 심신이 온전히 연결된 상태를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온전히 하로 이어진 상태야말로 인간이 살 만한 가장 만족스러운 상태이다.

나날의 항목 중에서 어떤 것을 빼 먹거나, 혹은 한 가지 항에 너무 빠지지 말라. (하루에 여러 번 화가 났더라도 한 번만 생하고 다른 것으로 넘어가라.) 또 부정적인 감정에 너무 많은 주를 기울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감정은 누구에게나 가장 험하기 쉬운 것들이고 흔히 가장 이기적인 것들이다. 부정적인 정을 떠올려 보라는 것은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를 통찰는 힘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떤 감정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를 알면, 부정적인 감정을 흩어 버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반드시일어나게 되어 있다. 억눌려 있거나 뿌리깊은 부정적 감정의 경우에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부정적 감정은 문을 닫아 고 세상을 한정시킨다. 반면에 이 연습의 목적은 세상을 넓게 보며창조적인 감정을 일깨우는 데에 있다.

이것들을 진지하게 적어 나가면, 당신은 하루에도 얼마나 다양한감정들이 의식되지도 은 채 지나가는지를 알고 놀라게 될 것다.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는것은 무엇이든 자라게 되어 있다. 그리고 당신 이 '통찰'이나'계시' 따위의 말은 자신에게 극히 드물게 적용된다고 느끼더라도,그저 자신이 작성한 목록을 들여다보고 각각의 감정에 잠깐동안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이 자라날 공간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느낌을 진정으로 접하는 것은 일을 하거나 활동을 하는 중에는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감정은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이 자신의 느낌과 떨어져 있는 경향을 가지고있다면 현대생활의 혼잡성은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억누르고 피하기 쉽게 만든다. 그렇지만 자신의 감정을 경험하는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은 당신의 모습 중에서 가장 꾸없는부분이며, 세상과 관계를 맺는 당신의 의식의 가장 원초적인 표이다. 당신은 자신이 가진 모든 관계들의 총합이며, 그것을 가장정확하게 비쳐 주는 거울이 바로 당 신의 감정이다.

4. 흔돈 속에서 흔들리지 않기 주위의 모든 것이 혼돈 속에 빠져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중심을 찾는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이것을 위해서는 하루 중에서 일이 가장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스트 레스를 주는시간을 두 번 정해 두라. (일이가장 밀릴 때와 퇴근 시간의 러시아워가 명백한 선택이 될 것이다. ) 이제 다음 기법을 이용 해서이 두 시간이 시작되기 직전에 5분 동안 자신의 중심을 잡도록 계획하라.

혼자 있을 수 있는, 가능한 한 가장 조용한 장소를 찾으라. 편안하 게 앉아서 눈을 감으라. 콧구멍을 드나드는 기의 흐름에 의식을 집 중하면서 호흡을 주시하라. 공기를 콧구멍속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부드럽게 흘러 나가는 미약한 소용돌이로 생각하라. 2분 후에 신체를 느 끼기 시작하라. (예컨대 몸 의 느낌, 살갗의 느낌, 사지의 무게 등에 서 일어나는 변동사항들을기록하라.) 1분 후에 가만히 의식을 가슴 한가운데에다 가져다 놓고 거기서 가볍게 쉬라. 떠다니는 생각이나 감 각에 의해 몇초 안으로 주의가 산만해질 것이다. 이것에 저항하지 말 라. 다만 그것을 깨달으면 가만히 주의를 다시 가슴으로 돌려 놓으라.가만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연습을 마치라.

이것은 매우 단순한 기법이지만, 이에 의한 부정적인 에너지의방출은 종종 극적일 정도다. 무거운 짐이 어깨에서 들려지는 듯한 느낌이 오고, 가볍고 평온한 느낌이 온 존재를 적시는 것을느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아무리 요란스러운 상황이라도 모든 상황에서 실제로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방법은 중심을 고 있는 것임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중심 잡기는 자신의 자로 돌아가서 주위의 혼란에 동요되지 않는 하나의 방법이다.

5. 어린아이 같아지기 당신이 내일 할 수 있는 완전히 아이 같은 일 두세 가지를 적어 보라. 어릴 적을 떠오르게 하는 일을생각해 보라. 아이스크림 먹기, 놀이터에서 놀기, 구름 모양을 보면서 놀기 등. 이런 놀이를 현재의 생활제 점점 더 병합되게 라. 목표는 자신 속에서 아직도 아무 근심없는 아이 같은 자리를 아내는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떤 사건도 영원히 사라지지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만 의식의 자각범위 밖으로 물러나서장 속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당신의 어린 시절은 아직도 당신과함께 있다. 불려 나와서 당신의 존재 속에 어우러지기를 기다리서.

당신이 택하는 활동은 장난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인의 장난어서는 안된다. 당신의 몸에 말타기나 줄넘기나 장난감이 맞지 더라도 뭔가 어린아이가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견딜 수 없도록가져다 주는것을 찾아 보라. (애플 파이나 푸딩 같은 맛있는 디트를 만드는 것도 좋은 예이다. ) 아이 같은 행동을 할 때는 '아가 되라.' 놀이터에가서 그네를 타거나 사다리를 오르거나 그저 른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기로 할 수도 있다. 당신의 음을 아이들이 보여 주는것과 같은 순진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에 빠지게 하라. 여기서 당신이 회복하려는 느낌은 어린아이로 돌가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무엇이다. 재기 넘치는 가이자 요법사인 알마아스A. HAlmaas는 이렇게 말한 바 일다.

"어린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충만감과 본성적인 생기발함과 존재 속의 희열이 다른 어떤 것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닫게 된다.그냥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그것은 엇을 한다거나 안 한다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린아이였을 때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 하지만서서히 잊혀져 간다." 시간이 감과 함께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내면의 희열의 자취를잃어버린다는 것이다.우리 외부에도 수많은 즐거움과 성공의 근원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의 느낌과는 상대가 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낮은 수준의 가치와 만족도에 머문다.

극적으로 다시 어려지고 싶어하는 욕망은 새로운 상태로 남아 고자 하는 깊은 욕구의 상징이다. 아기들과 어린아이들에게는 이런것에 관한 한 문제가 없다.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어린아이 같은 마음상태로 자신을 되돌려 놓음으로써 우리는 알마아스가 한 것처럼 "우리는 즐거움이며 환희이며 가장 심오한 의미이고 장 높은 가치'임을 깨닫는 길을 여는 것이다.

6. 자신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되기 우리에게 가능한 가장 높은 의식의 상태는 합일이다. 그것은 관찰자와 관찰대상 간의 분별을 지워 버린다. 일성 속에서는 이전에 '저 밖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 모든 것들이자신의 일부로 보인다. 이러한 경험을 가로막는 것은 과거의 경험의 이미지로부터 구축된 그릇된 자아감각이다. 자아상은 매우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필요하다 우리는 자신의 신분과 직업과 기타 기술적인 문제들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수많은 견해와 신념과 좋아함과 싫어함, 그리고 기타 전혀 무한 케케묵은 생각들로써 자신의 자아상에 무게를 보탠다.이 쓸데는 생각들을 걷어치우고 자유롭고 오롯한 인격체로서의 자신을 시 경하기 위해서는 딱딱하게 굳은 자아상의 칠을 벗겨 내는작업을해야만 한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당신의 행동계획은 여러 가지로다른방향을 취할 수가 있다.

신의 자아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행동을 할 수 있다. 당신이 회색 양복을 입은 점잖은사업가라면 에어로빅 댄스를 시작하라. 당신이 주부라면 역도를 하라. 과거의 습관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데에 도전이 되는 사들이나 상황 앞에 자신을 드러내어 놓으라.

없는 사람이나 불구자와 함께 일하기를 자원하라. 당신과는매우 다른 사람들과 마침으로써 그들에 대한 마음 깊은 두려움과 저항감을 극복하는 을 배우고 마침내 그들 속에서 자신을 보는 것은 당신의 보편적 간성을 발견하는 강력한 방법이다.

자신의 자서전을 쓰라. 자신의 삶을 가능한 한 자발적으로, 정직하게 상세히 적는 일은 당신의뿌리깊은 위선적 태도의 근원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떨쳐 버리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글로 적는 행위는 또한 당신이 보통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구체화시키도록 강요한다. 예컨대 부모나 자신의 직업에 대한 당신의 감정 등을 가능한 한 세하고 구체적으로 적으라. 당신 삶의 매시기마다 느꼈던 감정을주의깊게 생각해 보라.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거나 실제의 자보다 더 낫게 미화시키지 말라.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고 껴지면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봄으로써 말의 흐름을 풀어 놓아보라. 예컨데 "나는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했던 아버지 밑에서 지배받고 살았다"고 하는 대신 "철수는 그가 사랑하면서도 두려했던 아버지 밑에서 지배받고 살있다"는 식이다.

진정한 자신의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행동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날마다 한단계씩 실천해 나가기로 결심하라. 예컨대, 당신은 언제나 사람들이 좋아할 말만 하는 습관적 아첨쟁이일 수도 있다. 다음번에당신이 이런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자신이 정말로 느끼고 있는 것을 말하라. 상황이 반드신 극적이거나 충격적이어야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버스가 항상 늦는단 말이야, 안 그래?" 하든가, 혹은 "여긴 정말 맥 빠지는 곳이야, 안 그래?"하고 말할 때 그들의 불평에 동조하는 대신 실제로 어떻게 느끼지를 말하라. 이와 반대로 당신이 언제나 목소리가 높고 다른 사들이 당신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느끼는 편이라면, 변화를 어서 당신은 말을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라. 이 간단한 연습도 실제로 해 보면 매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당신은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낮추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연습을 할수록 가면을 쓰는 것이 비판력을 더 떨어뜨린다는 것을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을 한정된 의식 밖으로 끄집어내 주는 명상, 요가, 창조적심상화creative visualization, 혹은 다른 정신 수행에 노력을 기울이라.이런 수행법들은 누구에게나 유용하지만 당신이 여기에진정으로 열성을 쏟는다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길로 한층 더빨리 다가가게 될 것이다.

7. 무집착 연습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의 진정한 자아를 가리는 외부의영향력에 방해받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 속에서는 배을수 없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관여하고 흥분하고 열을 리고 깊숙이 참견하는 등의 일에다 높은 가치를 매긴다. 그리고는그런 것이 무집착과 반대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예컨대 인간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그 자신이원하는 모습으로 있도록 놔둘만큼 이해와 사랑을 충분히 지니는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일에 정열을 쏟는다는 것은, 모든 각도에서그 일에 접근하여 새로운 방향과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창조적인 여유를 자신에게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기회들은 오직 당신 내면의 창조의 핵심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다. 의 시시콜콜한 세부사항에 압도되어 파묻혀 버리면 새로운 기회를접할 수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삶에서 가장 큰 정열을 얻으려면 한 걸음 뒤물러서서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어야만 한다. 정열과 관심, 사과 헌신,자기가치와 충족-이 모든 것은 '존재 속에 내재되어 있다.이것은 당신이 비좁은 집착에서 벗어날 때 활짝 피어날 본질적 자아의 속성이다.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우리를 가장 사랑했던 람은 어머니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사랑은 종종 권위와 참을 암시했다. 어릴 때에는 어머니가 시키는 것을 해야지 그렇지 으면 어머니의 사랑은 거두어졌다. "난 네 엄마야, 넌 내 말에 를 기울여야 해가고 하는 것 은,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난 네가네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을 보는것이 가장 행복하단다라고 말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앞의 말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만 그것은 쉽사리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사랑이다.

자신의 자유를 찾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러려면 기대나 결과에 한 선입견, 이기적인 시각을 놓아 버려야 한다, 수퍼마켓의 복도에서서 목청껏 울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아이를 달래려고 애쓰는 두 엄마를 생각해 보자. 한 엄마는 당황하고 화가 나 있다.그녀의 첫떤째 목표는 구경거리가 되지 않도록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물론 어린아이에게 이것이 먹혀들리가 멈다. 아이들은 화가 나면 화를 낸다. 그들의 느낌은 곧 그의 세계이다. 그리고 시장 한복판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것도 그들게는 문제가 안되는 일이다. 그래서 엄마가 "그만 해, 울음 그쳐.제발 당장 그치렴." 하고 명령할 때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엄가 진정으로 받아주지 않으며, 고로 자신이 진정으로 존재하고 있을 용납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엄마는 단지 결과만을 원다. 엄마는 일이 어떤 특정한 쪽으로 되어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두번째 엄마는 반대로, 아이가 정말 화가 나 있음을 알아채고 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에는 관심을 두지않는다. 그녀는 상황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입장을 느끼고 아이가 다시 행복한 기분이되기를 원한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왜 그래? 뭐 때문에 그렇게 놀랐어?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그녀가 사용하는 들은 비판적이지 않다. 혹은 그냥 아이를 들어올려 한동안 안아줄수도 있다. 아이의 양자역학 적 신체는 자신의 감정이 이해받았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러므로 이제두려움은 없다. 왜냐하면 마의 마음은 단지 참을 수 없는 상황의 막을 내리는 데 있는 것이아니라 쓰다듬어 낫게 해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양자역학적 신체는 어린아이의 모든 감수성을 지니고있으며, 우리는 그 감수성을 삶의 복잡다단한 환경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진정한 자아로 돌아가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여에도 자아상의 문제가 다시 개입된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아이 아닌 진정한 자아를 향한다는 것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기본적인 치유적 태도이다. 자아를 향해서 눈을 돌리게 되면 느과 요구와 가치가 이미 충족되어 있는 자신의 존재의 차원을 발하기 위한 도약점으로서 자신의 느낌, 자신의 요구, 자신의 가치를사용하게 된다. 이 자아는 행위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행위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그저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고, 인식하기 위해 행위로부터 물러서 있는 말없는 주시자로서 나타날 것이다. 싸움터의 군인과 위험을무릅쓰는 모험가는 자신이 주위의 광란적인 광경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와 평온하고 태연한 관찰자가 되어 있는 것을 종종느낀다. 나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무집착의 순간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나는 내 몸과 함께 있다.

호흡이 매우 미세해져서 거의 잠잠해진다.

정신활동이 고요해진다.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어디엔가 속해 일다는 확신든다.

나의 내면세계가 경계 없는 열린 공간으로 인식된다. 의식이 어떤 특정한 생각에 집중되기보다는 사방으로 확장된다.

자기포용력이 주위환경 속으로 흘러나간다. '저 밖이 있는 사물이 나와 친밀한 것으로서, 나 자신이 확장된 것처럼 보인다.

이 합일의 경험은 또한 사랑에 대한 나의 실질적인 정의이다. 우리들대부분에게는 사랑이란 왔다가 갔다가 하는 그런 감정이다. 어떤 때는 그것을 강하게 느끼고 또 어떤 때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그러나 사랑의 본질은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어떤 상태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존저와 접해 있는 상태다. 진정으로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은 그저 사랑의 충족감 속에 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이 자신이 진정살아 있다고 느낀다.사랑의 가장 큰 행위는 그저 있는 것, 즉 아무런 행위도 없는 것이다.

사랑이 무집착의 최고의 경지이자 가장 만족스러운 경지인 것은 바로이 때문이다.

당신의 행동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사랑이 빠져나갈 출구, 사랑을 유롭게 줄 수 있는 곳을 찾을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든간에 더 이 터놓고 사랑을 경험할수록 사랑의 본질을 찾는 일에 더 가까이다가갈 것이다. 흐르지 않는 사랑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갈망과 기대일 뿐이다. 저명한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Joseph Cambell은 다음과 같은 말로써 사랑의 표현법을 지적했다."그대의 희열을 따라가라." 희열은 활동하는 사랑이 전율적로 밀려 드는 것이다. 존재가 그 자신을 만나 접하매 희열로 움츠는, 존재의 흐름이다. 사랑은 그 자신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순환이 완성 되면 희열이 흐른다. "나는 어디서 희열을 찾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 보라. 그리고 당신의 삶에서 이러한 경험을 중가시킬 수 있는 실천 단계를 적으라.

즐거움을 희열로 혼동하지 말라. 사랑은 거의 담겨 있지 않은 TV프로그램처럼,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것은 많이 있다. 사랑은 분명히 즐거움을 져다 주지만 그것은 훨씬 더 심오한 의미의 즐거움이다.예컨대 워 있는 환자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것은 텔레비전을 보는것보다훨씬 더 즐거운 사랑의 행위이다. 그리고 그런 행위에는 나눔과 연민과 이해라는 측면에서 배울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러니 피상적인 즐거움에 현혹되지 말라. 삶의 한가운데에 있는 깊은 쁨과 희열을 부지런히 파헤쳐야만 한다. 목록을 작성할 때 당신이가장 아끼던 순간들은 대부분 영원히 사라졌음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결혼한 그 여인과 처음 사랑에 빠졌던 그 신한 느낌을 다시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의 깊이는 끝이 없다.목록을 작성하는 동안 당신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느긴 감정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 기억 속에 단서가 있다. 당신의 그들과의관계를 더욱 깊이 파고들기로 결심한다면 당신의 아이들은 지금도여전히 희열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당신의 희열과 다시 연결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어떤 것도 그보다 성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 현실적이지 않다.

연습 2. 사랑이 되는 것과 사랑에 빠지는 것

사랑의 경지를 좀더 논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존로 돌아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현인들은 궁극으로 모든 것은 의식으로써 만들어져 있으며, 의식을 잡다한 이지나 가정없이 순수하게 체험할 때 그것이 곧 사랑이라고 선언다. 인도의 위대한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사랑은 한갓 충동이 아니다. 사랑은 진리, 곧 법을 담고 있어만 한다"고 말했다.사랑과 진리와 실재의 응화는 합일의식의 위데한현현이다. 그것은 한사람이 진정으로 "나는 전체이다" 그리고 "나는 사랑이다"라고 동시에 말할 수 있는 순간이다. 이런 견지애서 볼 때 사랑이란 진화의 흐름,곧 다르마와 완벽히 동조되었을 때 언제나 존재하는 느낌의 상태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이와 동일한 상태가 아니다. 사랑에 빠지면 억제되었던 감정이 빠져나가서 다른사람에게 집착되도록 출구가 생기는 것이다. 사랑이 매우 깊으면 그 다른 사람은 이상적이고 완벽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의 실제 상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오히려 매우 불완전하며 파괴적이기조차 할 수도 있다. ) 그러나 사랑의 힘이 인식자를 변화시킴으로써 현실을 바꾸어 놓는다. 이런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생리학자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뇌에 세로토닌과 같은 특정한 주요 신경전달물질이 증가하는 것을 측정해 내었다. 그러나 화학물질은 어디까지나 조잡한 지표에 지나지 않는다. 세로토닌이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그것은 단지 사랑에 빠짐으로써 유발되는 즐거운 느낌의 생화학적 근거일 뿐이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매클런드David McClelland는 일련의 새로운 실험을 통해 사랑의 생리학을 증명해 내었다. 그는 실험 대상자들에게 테레사 수녀가 캘커타의 버려진 아이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일상생활을 담은 짧은 영화를 보여 주었다. 그 영화는 사랑이 가슴 깊이 우러나오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시청자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매클런드는 그들의 면역체계 지표가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SlgA, 즉 타액 면역글로블린 항원salivary immunoglobulinantigen이었다. 사람들의 타액에서 측정된 높은 수치의 SlgA는 고양된 면역반응을 가리킨다. 공교롭게도 고양된 면역반응은 또한 최근에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특성이다.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거든 사랑에 빠지라'는 흔한 속담도 감정과 생리의 이러한 연관성을 확인시켜 준다. )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끝나고 시청자에게 테레사 수녀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물어 보았더니 모든 사람이 그녀의 일이 찬양할 만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 관련된 이런 저런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일부는 굶주림과 나병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의 모습에 거북한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청자들이 SlgA치의 증가를 경험했다. 사랑에 대한 그들의 육체적 반응이 정신적 태도보다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매클런드로 하여금 현대심리학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사랑의 정의 중 하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하였다. 그것은 사랑이란 두 사람이 각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만날 때 일어나는 반사성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사랑은 그 관계 속에서 얻는 이득에대한 그 사람의 의식적인 평가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의 신체가 휠씬 더 깊은, 즐거움보다도 더 깊은 차원에서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매클런드는 또 시청자들의 면역반응에 나타난 긍정적 효과가이 영화를 본 후 한두 시간이 지나자 떨어져서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그 효과는 자신의 삶에서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고 가족이나 친구와의 강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사람들에게 가장 높게 남아 있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은 이미 사랑에 빠지기 쉬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지나가는 상태로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성향으로서 흡수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기는 사랑이다'라고 하는 깨달은 성자의 말씀이 비록 그 정도의차이는 있으나마 이들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지나가는 일종의 국면이 아닌 하나의 성향으로서의 사랑이란 어떤것인가? 아무리 열정적인 사랑의 경험도 결국에는 식어 버리고 지속적인 의미의 진정한 사랑은 남아 있지 않아 낙담만 남겨 놓는다. 이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매클런드는 사랑에 관한 시들 속에 묘사된 경험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져 보았다. 이 경험들은 사랑의 이기적인 이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타적이고 사라지지 않는 헌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세익스피어가 "변화 앞에서 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요, 제거자 앞에서 목을 내미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푸 아니데 그것은 유혹을 바라보고도 한사코 흔들림 없는 영원히 고정된 지표이다"라고 외쳤을 때 그것은 단지 잘못 나온 말이었단 말인가? 매클런드는 또한사람들이 어떤 객관적인 이득을 얻는다는 의미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경우들이 심리학 문헌에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느낄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사랑과 헌신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매클런드에게 시사해 준 것은, 사랑이란 이유를초월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단지 더 큰 공유된 현실을 경험하도록허락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에게서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만 사랑했다면 그들의 상호의존성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행위의 토대를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그러한 유대를 갈라 놓음으로써 크나큰 고통을 일으킬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관계에서도 분명히 관찰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매클런드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이와는 매우 다른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연인의 죽음은 매우 심한 고통과 슬픔을 자

아내어야 한다. 그러나 몇 년 전에 내 아내가 암으로 죽었을 때

나는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매우 사랑했고 42년 동

안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떠 다섯 자녀들을 잘 키웠다.. 그러나

아내가 죽었을 때 나는 이 이론이 나에게 요구하는 만큼의 고통

을 느끼지 못했다.. 그 경험이 준 느낌은 사랑에 대한 시인의 시

각과 매우 비슷했다. 우리는 우러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

의 일부라는 느낌을 가졌었다. 함께 한 오랜 일생 동안 그것이

우리를 풍성하게 하고 지탱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내가

죽은 후에도 계속 나를 지탱시켜 주었다.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 사랑의 영역 속으로 한 걸음 다가선 묘사이다. 두 사람이 그들의 사랑을 이 영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서 이용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그 문을 닫아걸거나 상대에게서 그 사랑의 흐름을 앗아가 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상대방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상대는 우리가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핑계일 뿐이다. 우리의 가슴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우리를 풍성하게 하고 지탱해 주는 사랑의 힘은 '이 안에' 있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헌신에 달려 있다.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그것을 발견해 내고, 그리고 그것에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것을 연습의 형 태로 만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실천하기로 자신에게 약속하라.

 

1.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부모님과 나누었던 사랑, 연인이나 친구에게 사랑을 표현했던 순간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지라. 지금 당신의 삶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무엇이 가장 사랑스러운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라. 세익스피어의 소네트나 신약 성서와 같은 사랑의 경전들, 혹은 리그 베다의 헌신적인 찬송 등에 나오는 사랑의 시구들을 깊이 음미해 보라.

2.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느낌을 직접 표현하라. 말로 할 수 없다면 편지를 쓰거나 시를 쓰라. 반드시 보낼 필요는 없다. 이 연습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모든 세포 속에 사랑의 경지를 자극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것을 보내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당신은 응답으로 돌아오는 사랑의 표현을 듣기를 원하므로. 당신의 사랑이 당연한 어떤 것이 되게 하지 말라. 연인에게 보내는 쪽지를 그의 호주머니나 식탁 위에서 발견하도록 놓아 두라.

3. 사랑을 발견해 낸다. 이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가능하다. 우리사회에서 친분은 성적 접촉과 거의 동일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집없는 사람, 병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진심의 경의를 표하거나 감사와 칭찬을 표하는 쪽지를 써 보내는 사랑의 행위이다. 사람들은 사랑받고 인정받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당신이 그들의 이러한 필요를 채워 줄 기회를 찾는다면 그들의 감사는 당신의 몸 속에 사랑받는 희열로서 반영되어 돌아 올 것이다.

4. 사랑의 용기를 북돋운다. 우리는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애정이 나 사랑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갓난아이나 아동들에게나 걸맞지 그 이상의 사람에게는 부적당하다고 가르친다. 예의와 존경심을 가르치면서 우리는 종종 사랑은 건네기가 너무 민감하고 부끄럽다는, 건널 수 없는 틈을 만들어 놓는다. 우리 자신이 그러한 괴리감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이들에게도 이러한 괴리감을 가지게 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는 사랑에 유혹되기를 기다리는, 말없이 기다려야 하는 애정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위의 사람들에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을 당신의 의무로 삼으라. 대가로 무엇을 얻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관없이, 당신이 몸소 애정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애정에 용기를 북돋아 주라. 진정한 사랑은 그저 사랑하는 대상에로 흘러나가는 것만으로 도 완전히 만족한다. 사랑이 돌아오면 그것은 여분의 기쁨이다. 그러 나 그것은 필요하거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숨은 동기가 없는 사랑은 드물다. 이기적인 사랑에 근거한 모든 심리학 이론들은 우리가 주위에서 온통 목격하는 사실로써 확인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요구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조차도 사랑의 한 형태이다. 그것은 대양에서 떠 올린 한 방울의 바닷물이다. 그 한 방울에 용기를 북돋아 주면 커져서 태양이 될 수 있다.

사랑의 교육은 순간에서 시작되어 영원으로 끝난다. 그것은 기쁨의 느낌으로 불이 붙어 '존재 그 자체에 속하는 평화 속으로 녹아든다.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사람의 뇌리를 떠날 줄 모르는 다음 시구 속에다 이 진리를 표현해 놓았다.

 

허나 그대 안의 무시간은 삶의 무시간성을 알고 있다.

또한 어제는 한갓 오늘의 기억이며

내일은 오늘의 꿈임을 안다.

또한, 그대 안에서 노래하고 명상하는 그것은

별들을 공간 속으로 흩어 놓은 그 순간의 경계 안에

여전히 깃들여 있다.

 

사랑을 당신의 무시간성을 비쳐 주는 거울로 사용하라. 그것으로 하여금 당신이 변화를 초월해 있으며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꿈을 초월해 있다는 확신을 키우게 하라. 당신의 진정한'존재를 발견하는 길은 무 한하다. 그러나 사랑은 가장 밝은 횃불을 밝혀 들고 있다. 그것을 따 라가면 당신은 노화와 죽음의 경계 너머로 안내될 것이다. 시간의 고 리 속에서 빠져나와 사랑의 고리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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