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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이야기

잘려진 바지

by Frais Feeling 2020. 5. 15.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한 늦가을 밤.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는 이씨는 그날 
일을 끝내고 함바집에 들러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한 잔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노점상에서 작업복 바지를 하나 샀다. 낮에 공사장에서 바짓가랑이가 못에 걸려 
길게 찢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내일 일할 생각은 안하고 왜 이렇게 늦었어요?"
  대문을 열어준 이씨의 아내가 피곤해 죽겠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조차 
잊은 채 하품을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울로 파출부 일을 나가는 그녀는 밤 10시만 
넘으면 쏟아지는 잠을 잘 이기지 못했다.  이씨는 그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노모에게 인사를 하고 얼른 바지를 아내에게 내주었다. 
  "여보, 나 오늘 작업복 바지가 찢어져서 새 바지를 하나 사 왔어. 내일 입고 갈 수 
있도록 바짓단 좀 줄여 주지 그래."
  그러자 이씨 아내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바짓단을 줄여 달라고 그래요? 우선 잠이나 좀 자요. 
정말 피곤해 죽겠단 말이에요. 내일 다른 걸 입고 가면 되잖아요."
  "아, 참 그래, 그러지."
  이씨는 아내가 몹시 피곤해 하는 것 같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도 피곤을 이기지 못해 씻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곧 곯아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씨의 아내는 잠을 자지 않고 남편이 사 온 바지를 집어들었다. 솜에 물이 
배듯 온몸에 잠이 쏟아졌으나 아무래도 남편이 내일 새 바지를 입고 가는 게 좋겠다 
싶어 애써 바짓단을 줄여 놓았다. 
  그 뒤 새벽 1시 무렵이었다. 노처녀인 이씨의 동생이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있다가 살짝 마루로 나와 오빠의 바짓단을 줄여 놓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또 새벽 5시, 이씨의 노모가 일어나 살그머니 아들의 바짓단을 줄여 놓고는 
산에 약수를 뜨러 나갔다. 
  그날 아침, 이씨의 아내가 이씨한테 그 작업복 바지를 내놓았다. 
  "오늘 이 바지 입고 가세요. 어젯밤 당신이 곯아떨어지고 난 뒤에 내가 바짓단을 
줄여 놓았단 말이에요."
  "야아! 역시 당신이야."
  이씨는 어머니라도 볼세라 재빨리 아내의 뺨에 살짝 키스를 했다. 그리고 
바짓가랑이 속으로 얼른 다리를 집어넣었다. 그 바지는 이씨의 복숭아뼈 위에까지 
바짓단이 성큼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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