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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이야기

우물과의 대화

by Frais Feeling 2020. 5. 15.

물동이 하나가 우물에 가서 물을 가득 채운 뒤 우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물을 길으러 오는 일이 미안해서 은근히 물동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을 가져가지만 했을 뿐, 내가 당신에게 해 드린 것은 아무도 
없군요. 내일부터는 매일 오지 않고 하루씩 걸러서 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주저하지 
마시고 찾아오세요. 나는 당신이 내게 오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나는 늘 당신 것을 가져가기만 할뿐인 걸요. 다음부터는 
나를 반쯤만 채워 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매일 나를 찾아 주시는 것이 곧 당신이 
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자주 물길으러 오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하하,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게 오는 수많은 물동이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정말 마음이 좋고 관대하시군요. 당신은 당신을 찾는 다른 모든 
물동이들에게도 이렇게 내게 대하듯이 하시나요?"
  "그렇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합니다. 차별하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마를 때도 그렇게 하나요."
  "나는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항상 차고 넘치고 있어서 내게 오는 모든 물동이들을 
늘 찰랑찰랑 채워 줍니다."
  "하긴 그렇군요. 아직 당신이 마른 걸 본 적이 없군요."
  "나는 나를 찾는 물동이들을 참으로 사랑한답니다. 내가 만일 물동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마르지 않는 건 바로 물동이 
당신들 때문입니다."
  그때 머리에 또아리를 얹은 아주머니 한 분이 머리 위에 물동이를 얹었다. 물동이는 
급히 우물에게 눈인사를 하고 우물가를 떠났다. 
  우물은 멀리 굽은 논두렁길을 가는 물동이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우물 속에 달빛이 비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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