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 날 저녁이었다. 발목까지 푹 빠질 정도로 내린 함박눈에 어둠조차 환히
밝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그녀는 퇴근길에 집에서 기다릴 아이들을 생각하고
평소 단골로 다니던 한 과일 가게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가 되었으나
아이들에게 뭐 하나 제대로 사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서 오세요."
늙스그레한 주인 남자가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녀는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사과 3천 원어치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아예 한 상자 들여놓으시지요. 상자로 먹으면 2천 원 정도 싸게 먹힙니다."
그녀는 망설였다. 무작정 사과 한 상자를 들여놓았다가 가난한 가계에 혹시 금이
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20 대 청년 한 사람이 가게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지 청년의 머리에 눈송이가 몇 개 앉아 있었다.
"아저씨, 아까 여기서 사과 몇 세 개를 사 가지고 갔는데, 가다가 미끄러져서 사과가
으깨져 버렸어요. 어떻게, 죄송스럽지만, 좀 바꿔 주셨으면 합니다. 실은 오늘이 어머니
제삿날이라 제상에 놓으려고 사과를 샀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거든요. 다시 천
원어치를 사면 좋겠지만, 제 처지가 그럴 형편이 못 돼서, 아저씨,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청년은 몹시 겸연쩍어 하면서 주인이 꼭 좀 그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평소에 마음이 퍽 좋아 보이던 주인 남자는 의외로 청년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뭐, 집 팔아가면서 장사하는 줄 알아? 그런 사과를 남한테 어떻게 팔란
말이오?"
"저도 잘 압니다. 제상에 놓을 게 아니고 그냥 제가 먹을 거라면 굳이 이런 부탁을
드리지도 않습니다. 좀 힘드시더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허허, 이 사람, 내가 남 좋은 일 시키려고 이 나이에 이 고생하는 줄 아시오?"
청년은 낭패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으깨어진 사과를 든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 그녀가 선뜻 입을 열었다.
"아저씨, 내가 사과 한 상자 살께요. 그 상자에서 가장 좋은 걸로 세 개를 골라 저
청년에게 주세요. 우린 아이들과 먹을 거니까 조금 상처난 부분이 있어도 괜찮아요."
그녀는 처음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가장 때깔 좋은 부사 한 상자를 샀다. 주인
남자가 그녀 말대로 가장 잘 생긴 부사 세 개를 꺼내 청년에게 주고, 청년이 갖고
있던 으깨어진 사과를 상자 속에 넣었다. 그러자 청년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감격한
어조로 말했다.
"아주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은혜는 무슨, 학생도 복 많이 받아요."
"네, 고맙습니다."
청년은 다시 한번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가게문을 나섰다. 그녀는 어두운 골목
끝으로 급히 사라지는 청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그처럼
진실된 축복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기가 그 청년한테
해준 것을 돈으로 따지면 몇백 원도 되지 않지만, 그 청년은 자기에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중요한 것을 주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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