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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고전

論語

by Frais Feeling 2020. 6. 26.

공자의 생애와 사상

과거는 알 수가 없다. 바로 어제로 지나가버린 나의 과거도 기실 나의 의식 속의 기억(Memory)이라고 하는 특수한 작용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과거의 총체가 될 수 없다. 기억은 과거의 체험적 사건의 선택이며, 그 선택을 기억해내는 과정에는 이미 상상력이라든가 주관적 판단이라든가 감성적 왜곡이라든가 하는 여러가지 잡스러운 사태들이 개입한다. 기억은 과거의 사실이 아닌, 과거체험의 해석(Interpretation)이다. 기억은 저등동물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기억은 의식작용이 고도화된 동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의 기억은 언어와 결부된 상징작용(symbolism)의 소산이다. 과거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과거는 선택이며, 해석이며, 상징이다. 더구나 과거의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간접체험의 소산일 때 이러한 문제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논어를 읽을 때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인식론적 반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논어에 대한 모든 논어들이 이러한 인식론적 반성을 결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처로운 것이다. 논어를 달통했다 하는 박학지사들의 고론이 이러한 인식론저거 반성을 결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것이다.

 

노자(도덕경)를 읽을 때 우리는 노자라는 한 역사적 인간을 반드시 전제로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추상적 사유의 산물임으로 그 사유의 주체자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없이 추상적 사유의 체계 자체만으로도 적확하고 충분한 이해가 성립할 수가 있는 것이다. 노자 속에는 노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논어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논어는 논이요 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논과 어는 반드시 그 논어의 주체자인 한 인간의 모습의 맥락을 전제로 할 때만이 읽히는 논어인 것이다. 노자 속에는 노자가 없다. 그러나 논어 속에는 어느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시공의 맥락에 따라 논하고 어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는 이러한 사람들간의 논어다. 그 사람들간의 사이라는 것은 반드시 상황성(Situationality)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역사적 상황 상황에서 그려진 그림들의 파편인 것이다. 노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지만 논어는 시공의 구체적 맥락속에서만 일차적으로 의미를 갖는다.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 의미는 반드시 이러한 시공 속의 맥락을 전제로 할 때만이 발현하는 것읻. 논어는 분명히 어느 한 사람이 밥먹고 똥 싸고 울고 웃고 성내고 기뻐하고 있다.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논어는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람을 우리는 공자(콩쯔)라고 부른다. 그러나 공자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어느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우리와 공통의 기반을 가진 생물학적 ''을 소유한 일상적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매우 명백한 사실(crude fact)은 예수의 경우에도, 불타의 경우에도,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전혀 예외일 수가 없다. 이 사실을 초월하는 모든 주장도 반드시 이러한 명백한 사실의 기반 위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에 대한 기술이 우리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공자는 과연 존재했는가? 공자는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상징작용의 착각에 의하여 날조된 픽션의 인물은 아닐까? 사이버 공간의 인조인간이 너무도 유명해져서 역사속에서 실존성을 획득한 것은 아닐까? 맹자가 공자를 직접 만나지 못한 이상(맹자는 공자가 죽은 후, 공자의 이웃 동네에서 100여년 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맹자가 직접경험으로 공자의 실존성을 확인하지 못한 이상, 맹자의 공자에 대한 생각도 이미 이러한 소문에 의한 픽션이었다고 하는 가능성이 배제될 수는 없다. 과연 공자는 실존했는가? 실존했다면 지금의 나 도올과 같이 웃고 울고 고민하고 글쓰고 앉아있는 동시대의 어느 한 인간의 유형이었을까? 공자는 과연 있었는가?

 

이러한 인식론적 질문에 대하여, 이 책의 모두에서 '과거는 알 수 없다'라고 말한 이상, 나는 확답을 제시할 수가 없다. 그 아무도 영원히 확답을 제시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확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공자는 과연 실존했는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떠한 대답을 내려야 할 것인가? 공자는 과연 실존한 어떤 사람이었을까? 실존했다고 한다면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어떻게 생겼으며 어떠한 삶을 영위한 사람이었을까? 그는 어떠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살았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최선의 방도는 단 한 마디로 귀착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정직이라는 한마디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정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적인 정직함(intellectual integrity)이란 논리적 방법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공자는 존재했는가? 살았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나는 올 봄에 중요한 결단을 하나 감행하였다. 공자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활동하고 죽었다는 그의 고향 곡부(취후우)로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청도에서 기차를 타고 황하와 태산앞의 광활한 대지를 달려 새벽의 여명을 깨뜨리고 연주(옌저우) 화차역에 도착한 것이 이천년 유월 삼일 아침의 일이었다. 곡부에 공자가 있었는가? 곡부의 웅대한 대성전의 위용속에 공자가 있었는가? 나의 대답은 간결하다. 곡부의 유적 어느 곳에도 공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곡부의 유적 그 모두가 후대에 건조된 것이다. 그 대부분이 송, 원대 그리고 청대에 크게 개축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찌는 태양 아래 고호의 밀밭보다 더 강렬하게 타오르는 곡부의 산하를 공자의 망령을 쫓아, 하염없이 헤매면서 다음과 같은 명백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여유당전서를 읽고 전남 강진의 다산 초당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정약용이라는 사람의 실존성을 크게 의심하지는 않는다. 퇴계전서를 읽고 안동의 도산서원에 가서 그 숨결을 느껴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황이라는 사람이 나의 몇 대조 할아버지와 같은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크게 회의감을 느끼지 않는다. 곡부에서 내린 나의 결론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다산초당에서 정약용의 웅혼한 울분을 느끼고, 도산서원에서 퇴계의 고매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느낌만큼의 공자의 실존성은 똑같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역사적 실존태라는 것이었다. 공자는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최종적 결론은 매우 독단적이다. 독단이란 검증을 요하지 않는 것이다. 공자는 분명 살아 있었다! 공자는 곡부에서 태어나고 살고 죽었던 어떤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의 기나긴 지적 방황에 이러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나의 이번 여행의 어마어마한 소득이었다. 역사적 판단, 즉 과거에 대한 판단은 사실 궁극적으로 그 모두가 예술적 직관인 것이다. 그러한 직관적 판단을 내리기까지 반세기의 삶의 방황을 거치고, 또 그 사실을 탄생시킨 산하를 두 눈으로 확인해 보아야만 했던 기나긴 여정의 과정이 나에게는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자가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하는 존재의 유무의 확인은 우리가 추구하는 문제의식에 아무런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의 유무에 대한 확신이 신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것과 동일한 맥락인 것이다. 안젤므스의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이 신을 신앙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플라톤의 테아에테투스 이래 제기되어온 서양철학 2천년의 존재의 문제가 럿셀의 기술이론(Theory of Description)에 의해 면박당하는 것과도 동일한 맥락일 것이다. 공자가 존재한다는 나의 확신은 나의 내면에서 기술되는 여러가지 의식의 맥락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공자라는 고유명사가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묻고자 하는 공자라는 의미체와 무관한 헛질문일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공자라는 고유명사가 기술되고 있질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라는 역사적 자기동일적 실체(Substance)에 관한 논의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공자는 존재한다 와 공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결국 다같이 무의미한 명제들이다. 이 명제를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보다 본질적 질문은, 공자는 어떤 사람이었냐? 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최초의 존재론적 근거로서 나는 공자는 살아있었다. 라는 매우 막연한 믿음을 독단적으로, 보다 정확하게는 직관적으로 전제할 수 있기에 이른 것이다. 요번 여행을 통해서.....

 

공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어떤 사람이었다는 명제는, 인식론적으로 공자의 행위로서 기술되고 있는 많은 문헌적 사실들이 시공속에 존재했던 어떤 주체의 실제적 행위에 대한 해석의 체계들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헌적 사실들이 완전한 인간의 상상력의 날조가 아닌, 시공속의 어떤 인격체의 리얼한 행위의 해석체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결국 이 질문은 공자의 삶에 관한 질문이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다? 그런데 삶(Life)이란 행위나 사건, 느낌들의 복합적 연속체인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결국 이러한 역사적 공자의 삶의 행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다.

 

공자의 삶을 전달하는 가장 권위있고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정보의 집약체계로서 우리는 사마천(쓰마 치엔)의 사기 속의 공자세가를 꼽는다. 사실 공자의 삶에 대한 한우충동하는 헤아릴 수 없는 기술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사마천의 공자세가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천언만언의 잡설보다 공자세가 한 편의 문장을 꿰뚫는 것이 공자의 삶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는 첩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들에게 사마천의 공자세가(사기권사십칠, 세가제십칠)의 일독을 권할지언정, 그 내용을 번잡스럽게 여기 부연할 하등의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기는 위대한 책이다. 서구에서는 18세기 말엽에나 기본(Edward Gibbon, 1737~1794)의 로마제국흥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가 달성한 히스토리오그라피의 수준을 사마천은 그보다 무려 18세기를 앞선 기원전 1세기 초엽 정화 연간(BC 92~89)에 달성하였던 것이다. 본기, 세가, , , 열전이라는 다섯개의 다른 기술형식을 빌어 기전체(본기와 열전을 대표적인 형식으로 간주하여 축약한 말)의 전형을 수립한 사마천의 히스토리오그라피는 방대한 사료의 정밀한 편집이 과시하는 놀라운 실증사학의 정신과 함께 그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며 또 자유롭고 비판적인가를 말해준다. 사마천은 역사에 대하여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피력하는데 하등의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주관적 포폄을 가하기까지 얼마나 세심한 객관적 사료의 제시를 선행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찬탄의 혀를 차게 만든다.

 

본기는 제왕의 역사다. 세가는 제왕이라는 축을 둘러싸고 굴러가는 제후라는 바퀴살()들의 전개사다. 세가가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이러한 세계인식의 모델을 가정케 한다. 노자 11장의 삼십복공일축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리고 최근 진시황 무덤에서 나온 동거마가 정확하게 30복의 바퀴모양을 과시하고 있듯이, 사마천의 세가가 정확히 30권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의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노자와 21세기 2~118 참고)

 

그러나 공자는 제후가 아니다. 국군의 위치는 커녕 대부의 지위에도 가본 적이 없는 일개 포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마천은 공자를 제후의 대열인 세가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당대 이미 공자의 위치가. 황고조 유방이 공자 묘소에 참배한 이래 제왕들이 자기들의 도덕정치의 정당성을 주장키 위한 이데올로기적 근거로서 존숭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황무제가 동중서의 건의로 파출백가하고 독존유술하여 유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의 사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마천 자신이 공자를 지성으로 존숭하고 공자가 전개한 역사가 결코 일개 제후가 전개한 역사에 조금도 뒤지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확고한 역사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공자를 열전에 집어넣지 않고 세가에 집어 넣은 그의 과감한 역사인식은 바로 한낱 원한에 사무친 품팔이 농사꾼(용경)에 지나지 않았던 진섭(진승. 섭은 자), 그리고 카리스마적인 권위나 개인적인 재능이나 인물들을 모을 수 있는 덕망이나 가문의 배경이 전무한 그야말로 일개 무지랭이 새끼에 지나지 않았던 진승을 사마천 자신이 그 찬란한 위용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신흥 진제국이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그 붕괴의 기폭제가 된 농민반란을 주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세가에 올려놓은 사실에서 다시 한 번 숙연하게 확인하게 된다. 사마천은 귀천을 막론하고, 역사적 개인(historic person)의 역사적 의미(historical significance)를 물을 줄 알았던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세가라고 하는 공자의 전기를 쓰기 위하여 내가 올 유월에 갔던 곡부의 구석구석을 직접 답사하였다. 내가 가 본 곡부의 모습보다는 보다 원형에 가까운 공자의 체취가 서린 광경들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생생한 구전 자료들을 채록하였을 것이다.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노나라로 직접 가보았었다. 그래서 중니의 사당과 살던 집, 그리고 그가 탔던 수레, 입던 옷, 그리고 예에 썼던 그릇들을 다 보았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유생들이 그 집에 모여 때에 맞추어 예를 배우고 있는 모습도 관람하였다. 나는 공자에게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와 머뭇거리며 그 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적고, 관중니요당차복예기, 제생이시습예기가, 여지형유지불능거원

 

공자세가야말로 권력의 희생양으로 불알발린 사마천이 분세의 그 마음속 깊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권력을 흠모하고 권력을 부정했던 공자라는 인간에 대한 경애감으로 집필한 역작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센티멘탈한 사실의 공감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평심하게 한 번 생각해 보자! 협서 하양의 사람이 400년 전의 산동 곡부의 어느 대한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집필한다고 하자! 어떠한 사료에 어떻게 근거하든지 간에 400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편년체로 세밀하게 기록한다는 것이 어떠한 경우에도 사실 그 자체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불과 몇 십년 전에 저승의 사람이 된 박정희대통령의 전기 문학도 집필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들로 꾸며지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되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마천에게 주어진 사료들은 이미 해석되어진 사료들이다. 그리고 그 해석되어진 사료들을 사마천이 다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마천이 해석한 사료들을 다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실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해석을 요구하는 하나의 자료일 뿐인 것이다. 공자세가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과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최술(1740~1816)의 수사고신록이 낱낱이 밝힌 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베들레헴(Bethlehem)의 어느 말구유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방박사 세사람이 와서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는 사실을 크리스마스 설화의 주요테마로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분명 갈릴리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요셉도 분명 갈릴리의 나자렛(Nazareth)사람이고, 예수도 나자렛에서 성장하여 갈릴리바다의 북단에 있는 가버나움에서 활동을 개시한 사람이다. 그런데 베들레헴이라는 곳은 예루살렘에서도 더 남쪽으로 6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편벽한 곳이다. 저 북방에 위치한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그야말로 험준한 광야의 천리길이다. 그런데 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나야만 했을까? 왜 북방 갈릴리 사람인 예수가 저 남방 유대아 광야의 베들레헹에서 나야만 했을까? 이 사실에 대하여 누가복음의 저자는 매우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메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누가 2:1~5)

 

누가 기자에 의하면 예수가 태어난 해에 바로 모라황제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아구스도)에 의하여 로마제국 전역에 걸친 총호구 조사(general census)가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호구조사를 현주소가 아닌 본적지에서 받기 위해 요셉이 애기를 밴 마리아를 데리고 천리길인 베들레헴으로 가야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매우 정확한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지역사적인 사실을 하나 더 첨가하고 있다. 이 총호구조사는 퀴리니우스(Quirinius, 구레뇨)가 시리아(Syria,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실시한 것이며, 바로 헤롯이 유대아의 왕이었을때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누가의 기자는 이러한 사건이 매우 역사적 배경위에서 진행된 사실인 것처럼, 마치 역사가가 당대의 역사를 기술하듯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로마사는 우리에게 매우 정확하게 알려져 있다.

 

시이저 아우구스투스의 로마제국 전역의 총호구 조사명령이라면 그것은 정확한 연대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우선 로마제국의 총호구조사는 세금의 부과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식민지인인 요셉이 애기밴 마리아를 데리고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 단지 본적지에서 호구등록을 해야한다는 이유때문에 걸어갔다는 것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더욱 명백한 사실은 아우구스투스의 총호구 조사명령은 AD 6년에 한 번 있었으나 예수가 탄생한 시점을 전후로는 그러한 사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와 같은 당대의 사가의 증언에 의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헤롯왕의 치세기간은 BC 37년부터 BC 4년까지에 걸치고 있다. 예수의 탄생이 헤롯왕 치세기간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BC 4년 이전의 사건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헤롯의 치세기간 동안에 퀴리니우스(구레뇨)는 시리아의 총독이 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누가 기자의 이 모든 기술은 날조된 것인가? 물론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말한다면 그것은 날조된 것이다. 그런데도 누가는 그것을 태연하게 마치 당대의 정확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듯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예수는 나자렛에서 태어나도 마리아의 처녀잉태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왜 하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어야만 했을까?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을 잘 서술했다고 여겨지고 있는 제 4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요한복음 7:41~42). 그렇다고 우리는 요한읭 기자가 누가나 마태의 기자보다 더 사실적인 실증적 사료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해서도 아니되는 것이다.

 

여기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을때 중요한 사실은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읽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누가나 마태의 기작들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건을 기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내면적 논리와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내면적 논리와 목적이 바로 케리그마(Kerygma)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단지 역사적 인간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이 땅에 보내여졌고. 천국의 도래를 외쳤으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으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고 하는 신념의 선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선포의 논리로써 기술된 것이 바로 복음서인 것이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이유는 이러한 케리그마적 사건 속에서 명백해진다. 베들레헴은 바로 골리앗을 무너뜨린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왕의 고향인 것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농부의 아들이었으며 양떼를 지키는 목동이었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만 바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혈통의 정통성을 인정받게 된다. 마태는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을 선지자 미카(미가)의 예언의 성취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태 2:6, 미가 5:2)

 

이러한 성서의 케리그마적 기술과 사마천의 공자세가의 기술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다. 공자는 처녀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야 할 아무런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마천의 공자 기술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편년체적 기술처럼 보인다. 공자의 삶에는 케리그마를 매개로 비신화시켜야만 할만큼 신화적 요소가 염색되어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신화를 우리의 상식적 인과적 틀에서 벗어나는 사태로서만 생각하기 쉽다. 처녀잉태(parthenogenesis)라든가 죽은 자의 부활(resurrection)이라든가 하는 것은 분명 우리의 상식적 인과속에서 가능한 사태가 아니다. 전혀 확률적 예외일 가능성조차 없다. 그러나 신화는 불가능한 것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화는 있을 수 있는 것, 즉 현실이 아닌 가능한 사태 속에서 얼마든지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현존재의 행위는 항상 수없이 가능한 사태속의 한 실현이다. 그러나 이 실현이 그 수많은 가능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가능한 사태 속에 무한히 신화적 기술이 가능한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이미 그것이 세가로 편입되었다는 사태가 이미 명백한 어떤 케리그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가 지성이라는 하나의 선포를 위하여 그것을 집필한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료가 된 많은 공자에 관한 기술의 파편들(fragments)이 모두 일정한 목적을 지니고 공자제자의 집단들에 의하여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것도 모두 공자사후의 초기 교단(가르침을 신봉하는 집단)의 케리그마적 성격에서 파생된 것이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에 관한 기술은 신화적이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초자연적 사태를 개입시킨다는 것과 괴력난신을 거부한다는 것이 신화적 기술의 유무의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 매우 평범한, 가능한 사실적 기술이 오히려 신화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공자의 삶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상식의 전도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환경의 문화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삶의 형식(Lebensform)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선진중국인들의 삶의 형식은 격렬한 사막의 유대인들처럼 어떤 초자연적 사태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다. 공자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케리그마처럼 괴력난신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자의 기술도 예수의 기술과 똑같이 비신화되어야 할 신화적 기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명실공히 공자라는 인간에 관하여 최초로 쓰인 가장 포관적인 복음서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 우리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 이전에는 공자 그 인간에 관한 기술을 찾아볼 수 없는가? 선진문헌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나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의 거의 모든 문헌에서 공자라는 인간에 관한 언급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공자세가는 그 이전의 공재에 관한 이야기들을 집대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묵자, 맹자, 장자, 순자, 열자, 예기, 한비자, 여씨춘추, 관자 등 거의 모든 문헌에 공자의 그림자가 비추이고 있다. 이것은 곧 공자는 일가를 이룬 제자백가의 모든 사람들에게 떠날 수 없는 어떤 심상을 제공한 강력한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춘추말에서 진한지제에 이르는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거의 최고의 스타였다. 공자는 결코 은학이 아닌 현학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문헌에 나오고 있는 공자얘기를 다 살펴볼 적에,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모든 문헌에 공자에 관한 기사가 지금 현존하는 논어라는 텍스트를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논어는 서한말 원제(BC 49~33)때 안창후 장우가 노론을 주로 하고 제론을 참조하여 오늘날의 20장 체제로 확정한 장후론 텍스트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안의 집해나 형황의 이류가 모두 이 장후론에 의거한 것이다. 장후론 이전의 전국시대상황을 말하자면 논어 텍스트의 부분적 파편들이 전승되고 있었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오늘 보듯이 볼 수 있는 논어라는 서물은 전국시대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논어라는 텍스트가 없이도 이미 공자와 그의 집단의 행적과 언론은 전국시대때 제자백가에 의하여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사후에 크게 역사의 표면에 등장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역사를 움직여가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의 배면에 자리잡고 있었던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였다. 제자백가의 흥기는 기실 이 공자집단이라는 이 에너지를 분쇄해버리든가 혹은 철저히 옹호하든가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피어난 것이다. 이들 모두가 논어라는 텍스트를 정확히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논어의 많은 주제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제에 따라 제멋대로 평가하고 그들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꾸며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결론은 매우 진솔하다. 묵맹으로부터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이르는 모든 공자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소설이라는 것이다. 소설을 놓고 정밀한 역사적 사실을 논구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우매한 짓이다. 소설이란 본시 작은 이야기다. 삶의 자질구레한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대설 아닌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란 본시 픽션과 넌픽션읭 구분이 없는 것이다. 픽션과 넌픽션이 모두 인간의 의식의 사태이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를 말할 때는 픽션이 넌픽션이 되기도 하고, 넌픽션이 픽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차피 소설이기 때문에 너무도 소해서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는 설인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공자에 관하여 최후로 쓰여진 장편 소설이다. 그 이전의 단편소설을 묶어 장편으로 편집한 것이다. 물론 장편소설을 쓰는 가운데 사마천의 케리그마(선포)가 개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향후의 모든 공자 논의의 조형이 되었다. 그것은 최후의 장편 소설이며 최초의 장편 소설인 것이다.

 

나는 사마천의 공자세가의 내용을 축자적으로 신봉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작품을 대단하게 평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공자에 대해 얘기하려고 할 때 일단 사마천의 공자세가의 논의들을 기준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공자세가라는 소설의 벽을 뚫고 어떠한 공자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는가 하는 것이 결국 세가 이후의 모든 논의의 과제상황인 것이다.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의 가장 정확한 실상에 도달하려는 끊임 없는 노력은 가상한 것이지만, 그 노력은 결국 정론이 있을 수 없다.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의 규명보다는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에 대한 나의 이해의 구조가 궁극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 이전의 문헌으로 우리가 공자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나는 묵자, 맹자, 장자, 예기 이 네개의 책을 들겠다. 이 네개의 서물은 모두 그 나름대로 확고한 공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장자라는 서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유가와 대립하는, 유가와 전혀 무고나한 독자적인 도가적 사상체계로 생각한다. 그러나 장자 속에는 공자에 관한 수없는 알레고리가 있다. 그러한 알레고리를 통하여 반사적으로 자기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장자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마구 희화 한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초라한 모습으로 무대위에 올려진다. 때로는 도둑놈으로, 때로는 창녀로, 때로는 겁쟁이로, 때로는 달변의 유세객으로, 때로는 진지한 구도인으로, 한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둔갑된다. 그러나 나는 장자 속에 그려지고 있는 공자의 소설 속에서 매우 진실한 공자의 상을 본다. 이것은 좀 범인들이 생각키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의 서향속에 좀 머리를 묵힌 자의 독백이다. 공자는 공자는 디펜드하려는 자들 속엔 존재하지 않는다. 공자는 공자의 비판자들 속에서 그 모습을 선명히 드러낸다. 안회 속에는 공자가 보이지 않는다. 공자의 모습은 오히려 자로속에 있다. 자공이나 재후 속에 공자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

 

묵자는 공자를 극렬하게 비판하지만 그 연설을 뒤짚고 보면 묵자야말로 공자의 충실한 후계자임이 분명해진다. 묵자는 공자의 충실한 신도였다. 공자의 집단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흉내내어 일어난 어떤 패시피스트적인 용병집단이었을 것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결코 공자의 세계에서 멀리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다. 묵자가 말하는 겸애나 절용은 그 이데올로기적 외피를 벗기고 보면 이미 공자의 핵심적 사상에 속하는 것이다 묵자는 공자의 핵심사상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독자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공자를 가차없이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이 비판하는 공자는 모두 비판의 대상으로서 희화된 공자의 외피들이다.

 

이러한 묵자의 확고한 안티네제로서, 양묵에 대한 유가의 적통성을 확립하려고 했던 맹자야말로 공자의 최대의 이단일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감언한다. 맹자가 유교의 적통일지는 모르지만, 맹자야말로 공자의 최대 이단이다 라고.

 

맹자에게는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의 공자가 없다. 인의라는 도덕주의적 사상의 주체로서 추상화 되어있고 논리화 되어있고 형해화 되어있다. 공자는 삶의 예지덩어리가 아닌, 맹자 자신의 주장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해주는 이념일 뿐이다. 맹자의 이러한 추상적 공자상은 증자에게서 받은 것이다. 증자는 공자의 14년 유랑장정의 고난길에 참여한 적이 없는 후기의 어린 제자이다. 증자는 공자를 한 인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증자가 공자를 만났을 때는, 공자는 이미 한 면만 쳐다볼 수 밖에 없도록 높이 솟아있는, 너무도 인간적일 수 없는 거목이었다. 증자는 공자의 추상적 한 측면만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아이였다. 맹자는 증자를 이어받아 공자의 대설을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맹자의 대설은 본래의 소설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날의 논어의 틀이 미자편을 만든 사람들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시라카와 시즈카(백천정)선생의 학설을 깊게 공감한다.(공자전, 동경:중공업서. p.273).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자 편은 분명 논의 상층대에 속하는 파편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장자 학파의 사람들에 의하여 날조된 이야기들일 것이다. 공자나 자로가 장자가 구현하는 어떤 은자들의 모습앞에 고개를 숙이는 그림들은 분명 후대의 날조일 것이지만, 그 설화들이 상징하는 것은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삶의 전환, 사상적 대어의 계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는 끊임없이 자기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이었다. 무지의 자각을 외친 소크라테스는 결국 자신의 무지 속으로 함몰되고 말았을지언정, 공자는 죽을때까지 일순간도 자신의 무지를 벗어나려는 여학의 노력을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러한 사상적 비상의 한 차원을 미자는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생생하고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인간적인 공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만약 논어가 적통임을 주장하는 아성 맹자 계열에서 편집되었더라면 훨씬 더 경직되고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서물이 되었을 것이다. 논어 속에는 제자백가의 모든 원형이 숨어있는 것이다. 논어는 결코 유교만의 성전이 아니다.

 

장자가 희화하고 있는 공자의 모습은 공자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바로 맹순 계열에 의하여 도덕주의적으로 고착화되어버린 공자에 대한 모멸감의 분출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장자가 말하는 모든 논리는 노자를 원형으로 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살아있는 공자의 원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장자의 자유분방한 설화문학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는 공자의 살아있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 공자가 젊은 시절에 주나라의 수도 낙양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 하는 이야기도, 그 노자가 오늘날의 도덕경의 저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공자 사상에는 이미 도가적 본질이 함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의 이야기나 장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같은 평면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이해의 한 지평이다. 공구가 말하는 인이나 장주가 말하는 좌망이나 현해를 모두 그 깊은 내면에서 상통하는 가치로서 인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곽점초요죽간의 출현은 노자라는 텍스트에 관한 BC 300년 이전의 원형을 보여주었다는 놀라운 사실 이외로, 14편에 달하는 방대한 유교전적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첨가하고 있다. 14편 중의 한 편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예기의 치의와 거의 일치하는 고본형태라는 사실이 우선 눈에 띈다. 오늘날 이 14편의 성격이 대강 예기의 저본이 된 고문 기 이백사편류에 속하는 문장일 것이라고 비정되고 있다. 즉 곽점초간의 출현으로 예기가 한대에 성립한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깨어버렸다. 예기의 원본들이 이미 BC 4세기에 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그리고 곽점죽간에서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논어의 몇구절들이 있는 그대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논어의 파편의 부분적 존재가 이미 기원전 4세기에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논과 어의 성문화 작업이 이미 기원전 4세기경, 상당히 오래전부터 부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추측케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1973) 발굴된 정주한간 논어 만 해도 명백하게 장후론 의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고본임으로 논어의 원형을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문헌으로 간주된다.

 

이제 다시 한 번 우리의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공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다? 이 질문에 가장 포괄적인 대답을 제공하는 전기문학서로서 우리는 사마천의 공자세가를 논구하였다. 그러나 사마천의 공자세가 속에도 살아있는 공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자의 삶이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나에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삶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세가보다도 더 늦게 편찬된 것이지만, 왕숙의 공자가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공자 19세에 송나라의 병관씨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아들 백어(뿨위)를 낳았다. 공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당대의 국군이었던 노나라 소공이 사신을 보내어 접시에 커다란 잉어(리어) 한마리를 담어 보내왔다. 공자는 아들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문득 소공이 보낸 잉어를 보고 잉어()라고 이름지었다. 백어는 리의 자이다. 그래서 지금도 곡부에 가면 공부가의 연석에는 잉어요리가 올라오지 않는다. 공씨들이 어쩌다 타지에서 잉어를 먹게 되면 그들은 지금도 그것을 잉어라 부르지 않고 홍어라 부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곡부에서 지금도 사실 그대로 신봉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공자 전기의 작가들이 이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청년 공자의 지위가 국군에게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잘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중용의 저자 자사의 아버지의 이름이 현실적으로 리라는 사실에서 추론해 보아도 이런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공자는 20세경에는 계씨의 일개 가신인 양호에게도 문전박대를 당할 정도의 사에도 못미치는 천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 자신이 자신의 과거 시절을 회상하여 나는 젊었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오소야천. 자회 6). 라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고, 사마천도 공자는 어렸을 때 가난했고 또 천한 사람이었다(공자빈차천)라고 말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어떻게 해서 스무살의 천민 공자가 곡부의 판자촌 어느 한 구석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그 나라의 국군인 소공이 경축의 사신을 보내 성대하게 은쟁반에 담긴 잉어 한마리를 선사했겠는가? 생각해보면 터무니 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시골 사람들이 애를 낳으면 산후조리가 어려우니까 잉어를 한마리 구해다가 포고 고아먹는 것은 우리 어릴 적에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습속의 하나였다. 아마도 공자부인이 고생 중에 아이를 낳았기에 건강이 좋질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보다가 딱한 주변의 당골네나 촌장이 잉어나 한마리 고아 먹으라고 주었을 것이다. 천민 공자는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부인에게 잉어 한 마리 고아 멕이고 아들 이름을 잉어라 지었을 것읻.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아들 이름이 잉어()라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사고방식이 즉물적이고 천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 어릴 때 천민들의 자식들 이름을 보면, 개땅쇠, 말똥이 그런 류의 이름이 많았다. 우리 동네 행길가 끝에 살던 오두막집 자식의 이름이 붙뚜리였는데 그 이름의 유래인 즉, 자식을 낳아 놓으면 하두 어디로 돌아다니다가 없어지곤 해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요번에는 집에 좀 꼭 붙어있으라고 붙뚜리라 했다는 것이다. 붙뚜리라는 이름 자체가 그들의 삶이 자식을 돌볼 겨를이 없이 얼마나 곤고로운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공자의 이름이 구(언덕)이다. 그 아비 숙량흘과 어미 안징재가 니구산에서 빌어 낳았다 해서 구라 했다는데, 기실은 그 공자의 머리 생김새가 펑퍼짐한 니구산의 언덕 모양을 닮아 머리 꼭대기 정수리 부분이 좀 움푹 파이고 주변으로 두상이 퍼져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구라 했다는 것이다(생이수상우정, 고인명왈구운. 세가). 사마천의 이와 같은 명료한 기술에 의하여 말하자면 공자의 이름은 언덕대가리, 가장 친근한 우리말로는 짱구(). 아버지의 이름은 공짱구, 아들의 이름은 공잉어 짱구의 아들 잉어의 탄생을 놓고 국군 소공이 경하의 사절을 보냈다는 것, 그래서 가어의 표현을 빌리면 영군지항(임금의 경하를 영예롭게 생각)하여 잉어란 이름을 지었다 운운하는 이런 식의 기술의 천박한 신화적 양식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기술양식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부연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짱구와 잉어라는 부자의 이름이야말로 우리가 그 출신의 비천함을 알 수 있는 너무도 명백한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국군의 공경의 대상으로 기술되는 사태는 후대의 공자인식이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공자가 말년이나 사후에 점한 어떤 위치에 의하여 그 삶의 모든 사건이 유기적으로 일관되게 해석되어야만 했던 어떤 신화적 인식의 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공자가 35세 때, 계평자와 후소백이 닭싸움(투계)을 벌렸는데, 서로 야비한 짓을 하다가 화가 나서 큰 싸움으로 비화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소공은 후소백편을 들어 계평자를 쳤는데, 계평자는 맹손씨, 숙손씨와 연합하여 소공을 쳤다. 소공은 이에 크게 패하여 제나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사마천은 이 사건을 공자가 제나라로 간 사건과 병치시키고 있다. 사실 닭싸움과 공자가 35세라는 사실은 전혀 무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가의 기술방식은 마치 공자 35세 때 어떠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시점의 사실이 공자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소공이 제나라로 패주한 사실과, 공자가 젊었을 때 한 때 제나라로 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두 사실을 교묘하게 병치시켰다. 그래서 마치 공자가 패주한 국군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계씨의 독재로 어지러워진 노나라를 떠나 국군을 보좌하기 위하여 제나라로 간 것처럼 위장시킨다. 그러나 공자는 대부간 닭싸움에의 불필요한 개입으로 패주했어야만 하는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소공을 보좌하러 같이 제나라로 가야만 할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공자가 그 후 제나라에서 한 행위들, 고소자의 가신이 되어 제나라의 경공과 통하려 했다든가, 제나라의 태사에게 소음악을 배웠다든가 하는 일련의 사건은 패주한 노나라 소공을 보좌한다고 하는 명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소공을 따라 제나라로 간 것은 소공이 십오년전에 아들 낳았을때 잉어를 보내 준 그 감격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을까? 소공과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암시로서 잉어의 신화는 만들어진 것일가?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이지만 바로 세가의 공자 기술이 이렇게 정당화될 수 없고 필연적 인과 관계를 갖기 어려운 사태들의 그럴듯한 몽따쥬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기술 속에서 살아있는 리얼한 공자의 모습을 찾아내기는 어려운 것이다.

 

예기 단궁의 기록에 의하면 공짱구는 잉어를 낳은 부인 병관씨와 이혼했다. 그 이혼한 부인(출모, 정확하게 내쫓긴 부인의 뜻)이 죽었을 때 일년이 지나도록 잉어가 넘도 슬피 울었다(기이유곡). 잉어가 그토록 슬피 운다는 소리를 듣고 공짱구는 화가 나서 너무 심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잉어는 곡을 뚝 그치고 말았다. 그뿐인가? 잉어()는 또 그의 부인과 이혼했다. 이혼한 부인은 위나라로 가서 서씨와 다시 결혼했다. 그러다가 위나라에 가서 재가한 그 잉어의부인, 그러니까 중용을 지은 자사의 엄마가 되는 셈인데, 그 부인이 죽었다. 그러자 자사가 그 소식을 듣고 곡부 공씨의 사당에서 슬피 울었다. 그러니까 자사의 문인들이 자사에게 와서 물었다.

 

어찌하여 서씨의 엄마가 죽었는데 공시의 사당에서 곡을 하십니까?(서씨지모사, 하위곡공씨지묘호?) 그러니까 자사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하면서 딴 집으로 가서 몰래 울었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자사도 또 이혼했다. 그 자사의 이혼한 부인이 죽었을 때 그 아들인 자상(이름은 백)이 복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사의 문인들이 와서 선대에는 출모라도 상을 입었는데 왜 선생의 아들인 자상으로 하여금 상을 못입게 하냐고 물으니까, 자사가 골이 나서, 그년은 내 마누라가 아니니까 자상의 엄마도 아니다. 복상할 필요없다고 잘라 말하는 광경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공씨 가문에서 출모에게는 상을 입지 않는 전통이 자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고공씨지불상출모, 자자사시야.)

 

짱구와 잉어, 이따위 이름을 소지한 신분의 사람들인데다가, 잉어의 아들 자사까지 삼대에 걸쳐 모두 이혼한 불행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가정중심의 도덕원리를 표방한 유교의 패라곤들의 실상이 과연 무엇일가? 짱구에 의하여 논어가 나왔고 짱구의 손자 자사에 의하여 의대의 위대한 철학서 중용이 나왔고, 이것들이 모노가미(일부일처제) 가족윤리의 규범을 설정했다고 한다면, 그 규범의 주인공들의 사생활이 이와 같이 개차반이라는 이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공자를 위대한 예악의 완성자로서 기리고자 하는 예기가 왜 이와 같은 사실을 극명하게 기록하고 있는가? 이것은 과연 사실의 투영인가? 상상의 날조인가? 사실이라면 무당동네 판자촌에서 개차반으로 산 천민들의 이그러진 삶의 실상의 고발인가? 날조라면 과연 왜, 어떠한 목적으로 날조한 것일까? 이혼한 부인이지만 행모이기에 구슬피 흐느끼는 자식의 울음마저 그치게 만드는 이 졸렬한 인간상들 앞에 우리는 과연 어떠한 경외감을 느껴야 할 것인가? 이러한 공자의 얘기들을 위대한 경전 속에서 읽고 다 알고 있으면서도 쉬쉬 덮었어야만 했을 과거 조선의 유생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했을까?

 

소크라테스의 부인은 과연 악처였을까?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악처였다는 사실을 통해 반사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철인으로서 위대해졌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공자 삼대에 걸친 가족사의 비극은 공자 삼대를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어떤 반사적 장치였을까? 나는 공자를 둘러싼 이와같은 끝도 없는 이야기들의 실상을 파헤치려는 노력 그 자체의 허구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즉 세가의 기록이든, 단궁의 기록이든, 장자의 기록이든, 이 모든 것이 사실의 르뽀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양식(Form)의 목적론적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즉 이러한 기록의 사실 여부에 대한 추정에 앞서 근원적인 어떤 인식론적 반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단궁의 상기의 기록은 상례를 둘러싼 어떤 양식적 논의 속에서 공패미리의 인물들이 하나의 극단적 구현체로서 설정된 것일 뿐이다. 진위의 논변 그 체가 무의미할 뿐인 것이다.

 

나는 세칭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경우, 반드시 그 정체를 폭로하고 그 가면을 벗겨내리고 그 신화적 의미를 깍아내리는 짓을 통해서만 그들의 실상이 드러나고 실증사학의 정신이 성취된다는 그러한 바보스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비신화화의 목적이 저속화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파헤치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의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공자라는 인가, 그 인간의 삶과의 만남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들은 분개할 것이다. 그 질문 자체가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너무도 인간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 상상속에 날조된 인물일 수 밖에 없다. 가버나움의 시몬 베드로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고, 예루살렘의 타락한 성전을 뒤엎어 버리고, 가롯 유다의 오해 속에 로마 병정에 팔려 넘김을 당하고, 십자가라는 형벌 속에서 죽고, 다시 돌무덤을 열고 부활의 영광을 보인 그 예수, 벤허와 같은 수없는 당대의 인물들이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을 그 예수의 역사적 실존성을 거부하는 사태를 용인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성령스러운 빛의 화현이었던 죽어도 죽지 않고 부활하는 로고스였던지 간에, 그 예수가 역사 속에 실존한 한 역사적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기독교인들은 동시에 분명하게 나의 질문에 대답하여야 한다. 예수는 방귀를 뀌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은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를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아무도 던지지 않는 질문이다. 그러나 지금 인간 공자를 말하려는 나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방귀를 뀌었냐는 이러한 질문처럼 심각한 철학적 질문은 없다. 예수가 사람이라면 분명 똥도 누었을 것이고, 방귀도 뀌었을 것이다. 그가 방귀를 뀌었다면 어떤 냄새가 났을까? 지금 중동 사람들이 올리브 기름을 잔뜩 먹고 뀌는 어떤 퀴퀴한 내음새나는 종류의 방귀를 뀌었을까? 예수는 하루에 몇 끼의 음식을 먹었을까? (포도주)은 많이 먹었을까? 그는 취한 적이 있을까? 그는 막달라 마리아와 동침한 적이 있을까? 그의 일상적 삶의 행위 방식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는 완벽한 금욕주의자였을까?

 

아주 끝없이 하찮은 질문같지만 최소한 내가 말하는 인간은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인간이다. 바로 우리와 같은 동일한 일상성 속에서 모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러한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자의 일상적 삶에 관한 기록을 전달하는 모든 문헌이 그 일상적 현실감각을 결하는 어떤 양식이나 케리그마의 소산이라는데 그 근원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끊임없이 우리의 인식론적 반성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을까? 그 삶의 과정을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문헌인 공자세가가 결코 이러한 문제에 시원한 대답을 제공할 수 없다면 과연 우리의 다음의 접근방식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사기 외에 다른 문헌이 있는가? 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논어라는 문헌인 것이다.

 

공자는 세가 속에도 예기 속에도 여타의 어느 문헌 속에도 없다. 공자는 오직 논어 속에만 살아 있다. 나는 논어 이상의 진실한 공자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세가도 결국 논어의 논과 어를 설명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건들을 배열했을 뿐이다. 논어를 역사적으로 배열하기 위하여 그럴듯한 역사적 사태들을 구성해낸 것이다. 논어 속에는 공자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논어 속에만 공자의 숨결이 생동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세가의 기록대로 노양공이십이년(BC 551)에 탄생했는가? 춘추공양전이나 곡량전의 기록대로 노양공이십일년(BC 552)에 탄생했는가? 이러한 논쟁은 학자들에 따라 끊임 없는 고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논의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공자가 BC551에 태어났든, BC 552에 태어났든, 공자의 이해나 공자를 둘러싼 역사의 이해와 무관한 사태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가능한 사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이 논어의 기록과 무관한 사태라는 것이다. 논어가 말하는 공자의 사실만이 궁극적으로 공자의 사실인 것이다. 우리는 공자를 말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논어 그 하나만은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주장은 또 다시 인식론적으로 중대한 문제를 노정시킨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또 다시 논어라는 문헌 그 자체의 문제로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논어 그 자체가 공자의 삶의 직접적 전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자가 직접 슨 것도 아니고, 공자의 직전 제자들이 편찬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공자 사후에 오랜 세원레 걸쳐 공자문인들의 다양한 류파에 의하여 성립한 단편들이 집적된 것이다. 그렇다면 논어가 세가나 여타 문헌에 비해 그 오리지날리티를 보장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매우 희박해진다. 어찌 논어만이 공자의 진실한 모습을 전달한다고 호언할 수 있단 말인가? 논어도 공자가 죽은 후 삼사백년 후에 날조된 것이라고 한다면?

 

논어는 유교의 최대의 이단서일 수도 있다. 논어야말로 성인공자의 최대의 걸림돌일 수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논어가 유교의 이단이라 함은, 유교를 국가종교(state religion)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 유교를 절대적인 권위체계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논어의 정직하고 비권위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은 이단으로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논어가 성인 공자의 걸림돌이라 함은, 공자를 성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논어 속의 너무도 인간적이고 변화무쌍한 희노애락의 공자상은 성인화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논어에 있어서처럼 인간 공자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펼쳐진 문헌은 그 유례가 없다. 논어는 인류문명사의 한 축복이다.

 

논어는 분명 공자 사후에 제자들의 활약으로 분기되어나간 여러 학파들의 전승, 또 공자를 흉내내는 유사집단들에게 화제가 된 전승등을 통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집적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논어 텍스트는, 공관 복음서의 원마가자료(Ur-Markus, 마태 누가에 공통되는 마가자료)Q자료(Quelle, 마태 누가에 공통되면서 마가에는 없는 자료)와 같이, 어떤 공자의 생상한 모습을 전달하는 초기 자료, 즉 이미 공자의 생전에 기록되었을지도 모르는 원자료들이 상당부분 그 기저에 남아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공자는 천민 출신의 개비적 인간이었지만, 그의 최대의 강점은 문자를 활용하는 능력과 문헌을 다루는 실력에 있었다. 그의 제자집단(교단)이 강력한 유대감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문자적 표현의 학습과정에서 획득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문아한 측면을 가장 잘 계승한 제자는 안회였다. 그러나 안회는 불행히도 장년의 나이에(나는 안회의 죽음의 나이를 30세 전후로 보지 않고 40세 전후로 본다),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만약 안회가 공자 사후에 장시간 살아 남았더라면 오늘 논어의 모습은 보다 전일하고 체계적인 성격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안회의 요절은 공자에게 저주이자 축복이었다. 안회가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논어는 안회의 인식의 울타리에 갇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안회의 요절은 공자를 안회의 인식의 울타리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러나 논어에는 분명 안회의 오리지날한 기록의 파편이 남아있다. 예를 들면 공자와 자로와의 대화는 그 생생한 캐릭터의 모습고 내면적 심성에서 북받쳐 우러나오는 거짓 없는 진실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공자와 자로의 대화의 대부분은 안회에 의하여 기록된 매우 초기의 파편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논어라는 텍스트의 경우 정확하게 공관복음서 문제(Synoptic Problem)와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논어는 공자의 어록일 뿐이다. 복음서 또한 예수의 어록이지만, 논어와는 매우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어록이지만, 논어와는 매우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말을 의미있게 만드는 확고한 삶의 내러티브(narrative)를 전제로 예수의 삶의 일정한 시간적 서열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공관복음서의 원자료라고 생각되는 마가복음은 매우 단순한 서열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1) 세례 요한의 이야기, 2) 예수의 세례와 광야의 시험, 3) 예수의 갈릴리 선교, 4) 유대아로의 여행, 5) 예루살렘에서의 클라이막스, 6) 수난의 내러티브, 7) 빈 무덤의 발견. 마가에는 예수 처녀 탄생 설화나 예수의 부활 이야기가 없다.

 

마태와 누가는 이러한 마가의 틀을 기본적으로 준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가의 자료에다가, 앞을 서로 다른 예수 탄생 설화로 장식하였고, 후미를 또 서로 다른, 부활한 예수의 현혀으로 결론짓고 있다. 그리고 마가에 없는 자기들의 자료를 첨가시켰다. 그러나 논어는 이러한 공자의 삶의 시간 서열적 구조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어록의 상황은 그 상황을 만들고 있는 캐릭터나 사건들에 의하여만 암시되고 있을 뿐이다. 사실 복음서에 가가운 것은 논어가 아니라 세가다. 만약 사마천의 세가와 같은 것이 동시대의 여러 사가들에 의하여 비슷한 시기에 집필되었다면 공자도 예수처럼 공관복음서 문제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논어의 편 사이에 있어서도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춘추 전국시대의 여러 문헌에 동일한 주제가 달리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공관복음서와 유사한 문제의식으로 텍스트를 접근할 수도 있다. 성서의 경우는 아람어나 히브리어 자료를 희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에서 이미 다른 버젼의 문제가 생겨났겠지만, 논어의 경우는 이러한 번역상의 문제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제국간에 말은 달라도 문자는 어느 정도 공통되었을 것이다. 동일한 구문이 여러 텍스트에 나오고 있다는 것은 동일한 초기 파편의 유통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어떤 프로토 텍스트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현존하는 논어의 20편은 그 편제가 이미 매우 일찍 확정된 것이므로, 각 편마다 어떤 주제적 통일성이나 시공적 균일성이나 전승의 독자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편의 각 내용이 이러한 독자적 성격을 말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각 편들의 전승의 편집시기는 각기 한 시점으로 규정할 수 있어도, 한 편의 전승의 내용의 성격은 도저히 균일한 것으로 묶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이미 학이니 술어니 하는 식으로 의미론적 구조와 관계없이 첫 두 글자만을 따서 편명을 삼았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어떤 일관된 주제를 내걸기에는 너무도 그 내용이 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의 모든 편의 편집시기를 세밀하게 재구성한 최근의 브룩스(E. Bruce Broks and A. Taeko Brooks)의 역작, 논어변(The Original Analect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이 있다. 이 책은 매우 광범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치밀한 논리를 제시하고 있는데 퍽으나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키에 이 책은 그 노력의 정교한의 위대성에도 불구하고 논어에 대한 최대의 왜곡일 수도 있는 것이다. 논어 각 편의 편집시기의 구성은 논어의 경우 큰 의미가 없다. 어느 시점에 편집되었든지 간에 그 편집된 내용이 곧 그 편집 시점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각 편을 구성하는 어록의 파편이 공자의 삶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체험을 반영하는가 하는 것이 보다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것도 근원적으로 정확한 논의가 불가능한 것이다. 공자의 삶의 과정 그 자체가 하나의 에니그마에 속하는 것이며, 그 자체가 불가지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학문은 정밀성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지만, 고전 텍스트의 경우, 정밀도가 높으면 높을 수록 왜곡도가 높아질 수도 있다는 파라독스를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의 삶은 정밀한 분석이 불가능하다. 공자의 삶은 어차피 소설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은 마가복음과도 같은 어떤 케리그마의 구조에 갇혀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잡설일 뿐이다.

 

우리의 어뜻 보는 인상으로, 그러니까 아주 인상론적으로 이인 편이나 술이 편과 같은 것은 공자의 어록으로서는 매우 초기 자료일 것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이인 이 두 개의 파편(15,26)을 빼놓고는 모두 간결한 자왈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든가, 술이 편의 내용 또한 이인 보다는 잡하지만 순결한 공자의 원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자왈의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지만, 결국 이러한 논의는 정밀한 과학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거점을 마련하기가 어렵다. 정직하게 말해서 논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육감이다.

 

상론(1~10)과 하론(11~20)의 구분도 결코 엄밀한 구분 근거를 발견할 수가 없다. 상론에도 후대의 파편이 편입되어 있고 하론에도 초기의 파편이 편입되어 있는 사실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론이 그 정편이며 하론이 그 속편이라고 하는 진사이(이등인재)의 항,하론 논의는 그 확실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상론의 마지막 편인 향당 편이 그 내용이 매우 특수한 성격임에 비추어 상론을 마감하는 의도로 말미에 붙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황간소에 의하면 한 시대에 전승되고 있던 고문학파 텍스트 고론의 체제 속에선 향당편이 학이 편 다음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어, 그 편제의 실상을 알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론과 하론의 구분은 방편상 유용한 논의로서 수용될 수도 있다. 상론과 하론에서 대체적으로 각각 일관되는 어떤 분위기를 감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상,하로 구분짓기에는 역시 어려운 문제가 많다. 내 느낌으로 상론 맨 앞에 나오고 있는 학이, 위정, 팔일 편은 오히려 하론적 성격이 강하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논어를 읽을 때, 간결한 자왈의 형태를 취할 것을 고층대에 속하는 파편으로 추정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BC 300년 이전의 문헌이 확실한 관점죽간에 나타난 논어 구절도 그러한 간결한 추상적 내용을 말해주는 것들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기다란 대화형식을 취한 것, 아규먼트의 성격이 강한 것, 그리고 드라마적인 구조를 갖춘 것들은 대체적으로 후대에 성립한 것으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선진 편의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자로, 증석, 염유, 공서화가 공자를 시좌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특기할 사실은 증석의 답변이 제일 나중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의 무우풍영의 답변내용만을 공자가 허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로, 염유, 공서화 3인이 나가고 난 후에 증석 혼자만이 공자 곁에 남아, 공자와 사적인 정담을 나누며, 나간 3인의 답변 내용을 분석 검토하는 공자의 멘트를 듣는다. 이것은 명백히 공자 교단 내의 증석의 위치가, 자로, 염유, 공서화에 비해 한 레벨 높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증석에 대한 허여의 차원이 타 3인과는 질적으로 격상되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자로를 내보내놓고 자로 등뒤에서 공자가 증석과 멘트를 나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불성설의 상황이다. 여기에 모종의 음모가 감지된다. 증석은 증자의 아버니다. 맹자는 바로 증자 계열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이다. 이 드라마의 구성 의도는 명백해진다. 이 파편은 증자-맹자 계열에서 증석-증자의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꾸민 드라마임이 분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증자가 들은 공자의 말로서 기록되고 있는 파편들은 대부분 후대에 조작된 것이다. 증자는 공자 최만년에 입학한 제자였으며 공자와 직접 심오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위치에 있었을 기회가 없었다. 이인 편의 그 유명한 일이관지에 대한 증자의 충노 운운한 따위의 파편도 그 실제상황성이 의심되는 것이다.

 

그라나 이런 식으로 논어를 분석해 들어가는 작업은, 끊임없이 재미있는 텍스트의 비평(textual criticism)의 묘미를 제공할 수도 있고, 텍스트의 원형을 복구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또 텍스트의 무한히 가능한 새로운 배열이나, 텍스트 자체의 교정이나 변형에 의한 새로운 의미의 발굴을 가능케 해 줄 수도 있지만, 최종적인 문제는 이러한 문헌 비평의 궁극적 성과가 과연 논어의 오리지날리티를 변할 수 있으며 더 나은 공자의 이해로 우리를 다가가게 하는가 하는 질문에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질문에 매우 회의적 답변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논어 그 텍스트를 아무리 분석해도 논어를 아무리 재배열해도 논어를 아무리 변형시켜도 우리의 결론은 매우 간결하다: 더 나을 것이 없다! 변형된 텍스트가 있는 그대로의 텍스트에 비해 더 우수하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는 것이다. 황하의 물결과 함께 흘러가는 무수한 고종 석학들의 땀방울이 도도히 흐르기만 하는 논어의 탁류 속에 족적없이 명멸할 뿐인 것이다.

 

우리가 해석해야 할 것은 논어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논어, 이천여년을 묵묵히 흘러내려온 논어라는 의미체계, 이미 역사 속에서 수없는 인간들의 의식의 장속에 실체화되어버린 텍스트 그 자체의 해석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논어라는 텍스트는, 이미 그 오리지날리티의 시비를 떠나,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그 역사적 사실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공자라는 관념을 형성시킨 것이다. Return to the Analects!

 

논어 그 자체로의 회귀라는 나의 외침은 매우 소박한 요구이지만, 이러한 소박한 요구는 결코 소박하지가 않다. 논어라는 텍스트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텍스트의 이해는 공자 그 인간에 대한 선이해(Pre-Understanding)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텍스트의 의미가 맥락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공자라는 인간에 대한 선이해는 또 다시 논어라는 텍스트에서만 발현된다고 하는 파라독스에 우리는 봉착한다. 결국 이러한 파라독스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논어라는 텍스트와 공자라는 인간 사이를 왕래하는 우리 인식의 변증법적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은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는 시험적인 모델들을 요구한다. 논어는 분명 공자라는 인간의 삶의 구조속에 던져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공자의 삶의 구조를 변증법적으로 전제할 것인가?

 

앞서 누누이 말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공자의 삶의 역사적 사건의 나열이나 그 사실성의 여부에 대한 논의는 전혀 무의미하다. 그러한 사관들을 거점으로 해서 펼쳐지는 가능한 인각 공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구조를 밝히는 것만이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나 도올 자신의 이해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다. 나 도올은 과연 공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우선 그 출생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그 이해의 실마리를 추적해보자!

 

세가에 의하면 공자는 숙량흘을 아비로, 안시녀를 어미로 태어났다. 이 두개의 표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아비는 성이 없고 그 어미는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숙량은 자요, 흘은 명이라 한다. 그런데 그 아비를 부를때 공흘이라 아니 부르고, 숙량흘이라 부르는 것은 왠지 어색하다. 중니구니 자로유라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물론 춘추이전에 이렇게 자와 명을 합쳐 부르거나, 관직명과 명을 합쳐 부르는 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컨대 그 숙량흘의 족보를 따져 올라가는 모든 논의가 후대의 날조라는 인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공자의 증조부가 노나라 장손끼의 채읍인 방읍의 읍재를 함으로써, 송나라에서 몰락한 귀족으로 노나라에 망명하여 와서 평민화된 지위를 떨쳐버리고 귀족신분을 회복했고 그래서 그를 사람들이 방숙이라 부르고, 그 앞에 공이라는 애칭을 덧붙였는데, 그 후에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여 공으로써 성을 덧붙였는데 그 후에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여 공으로써 성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공이라는 성은 실제로 공자가 유명해짐으로써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그 아버지대에 까지도 성이 없었던 어떤 평민 족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아버지 이름이 성이 없는 숙량흘이 된 것이다. 이것은 곧 공자가 유명해져서 성이 생겨나기 이전의 어떤 진실을 전하는 이름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 내가 여기서 정확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숙량흘이 추읍의 대부였다는 등등의 논의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이러한 공자의 족보를 귀족화시키기 위한 설화적 이야기를 일체 기록하지 않았다.

 

안씨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전승되어 내려오는 여러 설화에 의하면, 곡부성내 글쓸 줄을 알고 예에 통달한 안양이라는 훌륭한 노인이 있었다. 그에게 세 딸이 있었는데, 그 막내의 이름이 안징재였다. 이 현숙한 세째 딸이 바로 안씨녀다. 숙량흘은 원래 부인 시씨가 있었는데 이 첫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아홉이나 낳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들 모두가 딸이었다. 팔공주가 아닌 구공주였던 것이다. 조상의 제사를 받들려면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은 어김없는 당시의 통념이었다. 그래서 부인을 하나 더 얻었다. 그래서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앗뿔사, 불행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은 맹피라 했는데 선천성 기형의 절름발이(가자, 가어에는 병족이라 표현)였다. 공야장 제 1장에 보면 공자가 자기의 제자 남용에게 형의 딸을 시집 보낸 이야기가 나오는데, 공자에게 형이 있었다는 것은 논어의 문맥상 입증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배다른 형제였던 것이다. 공자의 자가 중니인데 중이란 두째 아들이란 뜻이다. 중니란 곧 니구산에서 빌어 얻은 두째 아들이란 뜻이다. 맹은 맏맹자이고 맏 아들의 뜻이다. (가죽)라는 이름은 간접적으로 병신의 뜻을 시사한다. 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맏가죽(맹피)이란 이름을 붙여주었겠는가?

 

그래서 술량흘은 셋째 부인을 얻으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곡부의 안양 노인에게서 가서 딸 하나를 달라고 간구한다. 그 때 이미 숙량흘은 70세에 가까웠다. 첫째딸은 청혼을 거절한다. 두째 딸도 거절한다. 무엇보다 나이가 많아 골골하게 보이는 숙량흘에게 시집갈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나 세째딸은 육감이 달랐다. 무엇인가 신의 뜻을 감시했다는 것이다. 안징재는 기꺼이 숙량흘에게 시집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버지의 명을 따라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다.(종부명위혼) 그 때 안징재의 나이는 곷다운 16세의 청춘이었다. 복사꽃 만발하는 봄날의 향기가 흐드러지는 니구산에서 70노인과 16세의 새악씨가 아들 낳아 달라고 빌러가는 뒷모습을 연상하는 우리의 가슴속엔 태고의 낭만이 서린다.

 

사마천은 이 두사람의 결합을 이와 같이 표현했다.

 

흘여안씨녀야합이생공자, 도어니구득공자

 

이 표현에서 역대 주석가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야합이라는 한마디였다. 색은은 야합이라 함은 숙량흘이 늙었고 안징재가 어려서 머리얹고 비녀꽂는 예를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야합이라 했다고 했다. 곧 정식의 예의에 합당한 결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는 보다 관념적인 해석을 내렸다. 소문 상고천진론의 의학적 상식을 인용하여 남자는 팔십 육십사세면 양도가 절하는 법인데 숙량흘의 나이 64세를 넘어 정식 혼인이 성립할 수 없음으로 야합(억지 결합)이라 한 것이다 라고 주석을 달았다. 결국 우리는 야합이라는 말이 통례적인 예의에 합당치 않은 결혼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적나라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의 해석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사실을 단순한 사실 그대로, 단순한 표현을 단순한 표현 그대로 읽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전기를 연구하는 사계의 대부분의 석학들이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안씨녀는 무녀였다. 안씨 집안은 무속과 관계된 집안이었다. 안씨녀의 부친도 아마 큰 만신이었을 것이다. 안씨녀가 죽었을 때 그녀를 장한 오부치가라는 곳이 바로 노성내에 상례를 전담하는 당골네 님들의 집성촌락이었다는 것이다.

 

숙량흘에 관해서도 많은 무용담이 전하고 있다. 우리가 공자라는 한 인간을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그의 덩치다. 지금도 산동 사람들이 체구가 크기로 유명하다. 일메타 팔구십되는 대한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산똥따한(산동대한)이라는 말이 있다.

 

사기의 공자기술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공자장구척유육촌, 인개위지장인이이지.

 

공자는 키가 아홉척하고도 여섯촌이나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모두 키다리라고 불렀다. 정말 그를 볼 때마다 기이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96촌을 정확히 주제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주제의 1척은 약 22.5cm이다. 그렇다면 9 척만 해도 공자의 신장은 2m 2cm가 된다. 그러니까 공자의 신장은 정확하게 2m 10cm 가 넘는다.

 

위지장인이이지 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이러한 칫수가 결코 과장되었거나 잘못 표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자를 생각할 때 우리는 농구선수 서장훈과 같은 덩치를 정확히 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염달린 목동, 아담한 예수의 이미지와는 전혀 느낌이 다른 거한을 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러한 사실은 공자라는 인간의 인간됨의 핵심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은 중요한 사실이다. 이 공자의 덩치는 공자의 행적의 모든 사실에 깊게 스미어 있다. 공자의 엄청난 정열과 기나긴 방황과, 세간적 결단과 초세간적 승화의 모든 사실이 바로 이 체구의 체력과 관력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공자의 체구는 바로 그의 부친 숙량흘에서 유전되어 받은 것이다. 노양공 10(BC 563) 봄의 일이다. 진국이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노, , 주 삼국과 연합하여 지금의 산증성 조장시에 자리잡고 있었던 핍양이라는 작은 나라를 침공하였다. 이때 숙량흘은 맹헌자 막하의 진근부(혹은 진동부), 적사미 두 장수와 함께 출전하여 핍양성의 북문을 공타한다. 핍양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핍양군은 술책을 쓴다. 성의 북문이 위로 들어올리는 갑문이었는데, 이 문을 들어올려 적장과 부하들을 성내로 유인시킨 후에 성내에서 몰살시키려는 작전이었다. 갑문이 서서히 들어올려지고 진, 적 휘하의 부대는 성내로 돌격한다. 이들이 성내로 진입했을 때 갑문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이것이 술책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 때였다. 이것이 계책이라는 것을 깨덜은 숙량흘은 성문 아래 정가운데 우뚝 서서 두 손으로 하늘을 쳐받치는 아틀라스처럼 내려오는 갑문을 치켜올리고 두 눈을 부릅뜨고 퇴각을 호령하는 것이다. 이 덕분에 노군은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공자가 태어나기 12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 7년후, 노양공 17(BC 556), 이웃 강대국인 제국은 노나라의 북부변경을 침략한다. 제국의 장수 고후는 막강한 세력으로 노국의 대장인 장흘(장무중)과 숙량흘을 방읍에서 포위한다. 보급이 차단되고 위기에 몰린 노군은 원군을 요청했다. 원군은 양관(진안의 동쪽)으로부터 진공을 시도했지만 제군의 엄중한 포진을 뚫을 수 없었다. 이 때 숙량흘은 대장 장흘의 두 형제인 장주와 장고와 더불어 300여명의 용사를 데리고 제국의 포위망을 뚫는 작업을 감행한다. 숙량흘의 무용 앞에 막강하던 제군의 포위망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러한 얘기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숙량흘이 힘이 막강하고 용맹스러운 거대한 체구의 군인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어떠한 족보와 혈통의 사람이든지 간에 매우 명백한 사실은 숙량흘은 거대한 체구의 무인이었고, 그 체격을 공자가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공자의 탄생에 관하여 아주 단순한 사실을 도출해낼 수 있다.

 

야합이란 아주 단순하게 새길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들판에서 씹한다. 는 뜻이다. 세가의 기술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아주 단순하고 최종적인 사실은 이것이다: 무명의 늙은 무사 한 사람과 무명의 젊은 무녀 한 사람이 들판에서 씹하여 남자아기 하나 얻었다. 그것이 모든 역사의 시작이었다.

 

예수가 왜 하필 그 더러운 말 구유깐에서 태어나야만 했는지, 마리아가 요셉과 동침한 사실이 없었다면, 인간 예수의 탄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AD 178년경 이방인 철학자 켈수스(Celsus)가 예수는 마리아와 식민지 주둔의 로마보병(a Roman legionary)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당시의 초대교회에 퍼져있던 소문을 들추어내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외경 야고보서가 예수의 엄마 마리아를 성전의 창녀로서 기술하고 있는 것... 우리는 이러한 많은 이야기들의 진위나 불경을 논하기 전에 인류 역사에 실존한 많은 위대한 사람들의 탄생에는 이미 그 탄생부터 신의 저주가 숨어 있다는 그 고난의 역사를 간파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탄생이나 공자의 탄생이나 모두 순탄한 시작은 아니었던 것이다.

 

야합이란 표현은 내가 생각키로 요즈음의 인류학 용어를 빌리면, 아마도 비지팅 허스밴드 매리지(visiting husband marriage) 형태를 취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숙량흘은 첫부인, 두째부인과 일가를 이루고 있고, 세째부인인 안징재는 그와는 별도로 이구산 산자락에 일가를 이루고 있어 숙량흘이 안징재가 있었던 그 곳으로 가끔 통근을 했을 것이다(방혼 혹은 통혼). 안징재라는 무녀가 애이구산 산자락에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나라의 무녀들이 삼각산과 같은 성산 밑 바위자락에 촛불키고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어떤 가옥형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안씨녀의 본가는 곡부 성내에 있었다.

 

방혼의 의미는 공자의 탄생이 전혀 숙량흘 본가에서는 인정이 안 된 문자 그대로의 야합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공구와 안씨녀 모자는 완전히 부계에서는 버림 받은 모자였다.

 

이산 산자락 무녀 오두막집에서 쌔큰거리는 아기 공자의 울음은 태산 대원의 정적을 깨트리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희미한 호롱불 밑에 아기 모습을 들여다 보고 있는 늙은 장수 숙량흘, 자손을 잇게 되었다는 안도감과 자부감에 흐뭇한 얼굴을 지엇을 숙량흘, 그 옆의 꽃다운 여인 안징재는 늠름하고 비범한 기상의 짱구 대가기 아기 보고 곱게곱게 자라나라고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이산 자락의 이들 삼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스럽게 화평한 정경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러한 만년의 행복을 산신은 더 받아주지를 않았다. 삼년후에 숙량흘은 이승을 떴다.

 

공자가 17세 때 엄마도 세상을 떴다. 사마천은 공자가 엄마를 아버지 묘에 합장하려 했으나, 아버지의 묘가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해 합장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엄마가 생전에 공자에게 아비의 묘를 아르켜 주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숙량흘의 죽음과 관련된 많은 사연이 있어, 안씨녀가 숙량흘의 묘지를 아르켜주기를 꺼려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 우리는 방혼의 의미와 관련지어 안씨녀는 남편의 상례로부터 완별하게 차단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안징재 자신이 남편의 상례에 참여할 수 없었고 따라서 남편의 묘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자는 엄마를 우선 오부지구에 빈소를 차렸다가, 만부(만보)의 어머니를 만나 아버지의 묘소가 방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합장한다. 만보의 엄마는 아마도 숙량흘의 상례에 직접 참여했던 숙량흘 본가계열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숙량흘과 안씨녀의 사별은 그렇게 비극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곧 어린이 공자의 운명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슬하에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맹모삼천이라는 맹자 어머니의 고사는 후대의 열녀전과 같은 문헌에 나오는 것으로써 실제상황이라기 보다는 후대에 어떤 현녀상의 패턴에 의하여 날조된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공자의 엄마 안씨녀의 보살핌이야말로 극진하고 또 극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공자는 안씨 가통 속에서 사물을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사마천의 사기 세가에 공자가 17세 때, 노나라의 대부인 맹리자(맹희자와 동일인임)가 병으로 죽게 되어, 그의 후계자인 맹의자에게 훈계하는 장면이 실려 있다. 공자 17세 때라면 소공 7년인데 그때는 맹의자(의자)는 태어나 있지도 않았다. 맹이자(리자)가 죽은 것은 소공 24, 공자 34세 때의 일이었다. 이와 같이 세가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이벤트를 이 시공을 초월하여 꼴라쥬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 우리의 주목을 끄는 사실은 그 훈계의 내용이다. 이 훈계의 내용은 내가 죽은 후에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후계자인 맹의자에게17세의 공자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사마천이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누가복음의 기자식으로 어떻게 조립하였든지간에, 이 멧세지의 내용은 17세의 공자의 모습을 전하려는 것이다. 그 첫마디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공구성인지후. 멸이송.

 

구라는 아이는 성인의 후예다.

그 가계는 송나라에서 망하여

노나라로 옮긴 집안이다.

 

구는 애명이다. 따라서 맹이자(희자)가 구라 부른 것은 친근하게 말한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성인지후라는 말은 도무지 우리의 범상한 의미론의 맥락으로는 이해되기가 어려운 표현이다. 우선 성인이라는 표현의 대상이 된 사람은, 공자의 7대조인 정고보라는 인물이다. 그런데 공자는 나이 17, 전혀 알려지지도 않은 평민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공자는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의미에서의 성인(Sage)이라는 의미맥락과는 전혀 무관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공짱구()는 성인이라고 지칭되기에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그런데 그의 7대조를 가리켜 성인이라 표현한 것도 참으로 이상하다. 그것은 분명 어떤 사람의 직업이나 관직이나 특징을 지칭하는 말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자 시대에 성인이라는 말이 과연 우리가 쓰는 의미에서의 도덕적 인격을 완성한 지고의 문화인이라는 말로서 통용되고 있었고 그러함 맥락에서 성인의 자손이라고 말함으로서 공자를 성인과 같은 위치로 높이려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여기서 성인이라는 말은 공구라는 청년의 할아버지의 단순한 직업을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공구, 성인지후라는 표현은 공구 걔말야, 성인 집 자손이야! 라는 친근한 표현 이상의 어떤 의미도 부여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성인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발달된 문자학의 연구는 성이라는 글자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귀이라는 요소에 있는 것임을 말해준다. 재미있게도 최근에 발굴된 노자 백서에 의하면, 보다 고본인 갑본은 성인을 성인으로 표기하고 있고, 을본은 이인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또 성자는 청자와도 통한다. 이 모두 소리()을 귀()로 듣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소리란 곧 신의 소리다. 성이란 곧 신의 소리를 들음이다. 성인이란 곧 신탁의 소리를 듣는 무당이란 뜻인 것이다. 옛날 무당 중에는 장님의 악사가 많았다. 청각이 비상하게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춘추좌씨전 양공 십팔년조에 진과 초가 서로 싸우는데 진나라의 눈먼 악사인 사광이 바람 소리를 듣고 전쟁의 승패를 점치는 장면이 나온다: 남쪽의 바람(노래)은 흥이 나질 않고, 죽은 소리가 많습니다. 초나라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남풍불경, 다사성, 초필무공.) 바람타고 들려오는 소리. 그것은 곧 신의 소리였다. 이 소리를 듣는 자들을 예로부터 성인(성인)이라 불렀던 것이다.

 

공자가 성인의 후예라는 말은 곧 무당집 자손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나의 논증은 사마천이 기록하고 있는 맹이자의 훈계의 자체의 논리에서 명료해진다. 맹이자는 다시 이 성인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문성인지후, 수부당세, 필요달자. 금공구년소호예, 기달자여? 요즉불, 약필사지.

 

내가 듣기고, 성인 집안 자식들은 비록 세상에서 대접은 못 받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사리에 통달한 자들이 있다고 한다. 지금 공구라는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예를 좋아한다. 예를 좋아한다는 것. 그것이 곧 통달한 자의 증표가 아니겠느냐? 내가 죽으면 곧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

 

여기 의미맥락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들은 도출해낼 수 있다.

 

1) 성인의 자식들은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부당세).

2) 성인의 자식들은 통달한 자들이 많다.

3) 호예가 바로 그 통달함의 증표이다.

 

여기서 성인의 의미맥락은 매우 명백해진다. 성인이란 예의 달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란 무엇인가?

 

공자의 부계를 성인으로 간주한다면 무인 숙량흘 계보 속에도 이미 무속의 핏줄을 읽어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맹이자의 언명은 곧 안씨 가풍에 대한 인상을 전이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공자는 안씨녀 당골 슬하에서 컸다. 사마천은 안씨녀 슬하에서 성장하는 소년 공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공자위아희희, 당진조두, 설예용.

 

공자는 어릴 때 소꼽장난하기를 좋아했는데, 항상 도마와 목기 등의 제사그릇을 벌려놓고, 예에 맞는 복장을 입고 놀았다.

 

이것은 우리가 당골네집 자식들의 소꼽장난을 생각하면 쉽게 연상이 간다. 여기서 말하는 예라는 것은 바로 시킴굿과도 같은 굿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즉 공자는 어려서부터 굿(=)의 달인으로 컸다는 것이다. 이구 산자락의 당골네의 아들로서 이런 굿의 환경 속에서 컸던 것이다.

 

우리 국악계에 통용되는 말로서 개비라는 말이 있다. 개비란 그 태생으로부터 국악인의 집안에서 큰 달인들을말한다. 그런데 개비의 백프로가 무속집안이다. 즉 개비는 모두 성인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실상 모두 사마천의 기술대로 빈하고 천한 사람들이다. 이 개비들의 큰 특징으로서 우리는 두 측면을 들 수가 있다. 그 첫째가 그들의 상례(시킴굿)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째가 곧 그들은 가무의 달인이며, 또 탁월한 악사들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시나위의 명인들이다. 시나위란 당골의 무용을 반주하기 위하여 고안된 계면길의 즉흥기악곡이다. 서로 다른 가락들이 동시에 연주되어 이루어가는 앙상블(ensamble)의 개념이 존재하는 유일한 음악이다. 보이지 않는 본청을 따라가는 자유로운 변주음악이다. 시나위는 곧 째즈다. 공자는 곧 째즈의 명인이요 달인이었다. 나의 이런 발언에 눈을 휘둥그레 뜰 많은 학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산동의 고속이 우리나라 백제문화권인 남도음악에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 비근한 사례를 들어 공자와 논어를 이해할 때 오히려 역사적으로 가장 정확한 실상에 접근할 수 있다.

 

남도 당골네를 따라다니는 악사들을 우리가 삼현융각이라고 부르는데, 이 삼현융각이란 세개의 현악기와 여섯개의 뿔관악기(three string and six horns)란 의미와 전혀 관계가 없다. 삼현육각은 실제로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그려져 있듯이, 지금까지도 향피리 두 개, 젓대(대금) 하나, 해금 하나, 장고 하나, 북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육각이란 연주자의 숫자를 말하는 것으로 여섯명의 총각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삼현이란 새면이라는 토속어의 와전으로 시나위와 같은 어원의 말일것이다. 공자는 실제로 새면육각잽이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이 새면육각잽이야말로 시나위의 명수들이며 째즈의 달인이며 상례를 주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음의 예식의 달인이었다. 성인의 일차적 의미는 바로 이러한 죽음의 세계(the World of Death)와의 관련속에서 그 구체적 맥락을 잡아야 할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이 모두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변주되는 것도 바로 공자가 이러한 째즈의 명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자는 탁월한 상황적인 감성의 달인이었다. 그리고 논어가 말하는 예의 핵심이 관혼상제 중에서도 바로 신종추월하는 상례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해서 재언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린 공자는 이구산 자락에서 조두(제기)를 진하고 예용을 설하며 가무와 악기와 굿의 달인으로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속에서 늠름하게 자라났을 것이다. 공자가 자라난 니구산 자락에서 노성까지는 약 22km, 한 육십리 되는 거리다. 소년 공자가 죽으라고 열심히 걸으면 한나절(6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다. 우리는 아버지를 사별하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난 외로운 소년 공자가 가끔 곡부의 벌판을 열심히 횡단하는 모습을 연상해볼 수 있다. 외로운 소년 공자는 곡부 노성내에 있는 외조부의 집을 다녔을 가능성이 높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외조부의 집에 도착했을 때, 호기심이 많은 시골 당골후보생인 소년 공자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것은 성내 지위 높은 자들의 상례를 치루는 장엄한 위용이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본격적인 상례 시킴굿을 보고 공자는 끓어오르는 어떤 예술적 충동, 그리고 무한한 지적 호기심을 느꼈을 것이다. 이 장엄한 예식들이 모두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과연 어떤 근거 위에서 이러한 예식들이 행하여지고 있는가? 제사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소년 공자는 엄마에게 졸랐을 것이다. 더 이상 촌구석 산자락에서 살기 싫다고..... 아들의 강렬한 배움의 욕구를 감지한 엄마 안징재는 소년 공자의 시절 어는 시점에 용단을 내린다. 이렇게 해서 공자는 노성대 한복판 곡부 궐리에서 컸다. 그는 비록 천한 신분으로 컸지만 끊임 없는 물음(다문)의 인간이었고, 박학다능의 귀재였다.

 

나는 이 시점에서 공자에 관한 더 이상의 소설을 써내려 가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논어라는 텍스트가 독자들에게 독백해야만 할 부분이다. 공자의 삶의 이야기를 내가 지금 여기서 다 꾸며내야 할 하등의 필요성을 감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자에 관한 가능한 모든 이야기에서 우리가 근원적으로 전제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개념적인 틀은 비록 나의 좁은 사견이나마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감지한다.

 

우선 공자의 탄생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지배하는 일관된 거시적 축은 바로 공자의 족보에 관련된 송과 노라는 두 문화의 패러다임이다. 송과 노는 곧 중국고문명의 쌍벽인 은과 주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우리는 폭군 신제 주의 이야기나, 주지육림의 탕년 달기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항상 한 왕조의 끝에는 음탕한 폭군이 자리잡게 마련이다. 사마천은 주를 평가하여, 타고난 자질이 사리를 명료히 분변하며 판단력이 매우 빠를뿐 아니라 듣고 보는 것이 매우 민첩했고 힘이 보통사람보다 출중나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제주자변첩질, 문견심민; 촌력과인, 수격맹수.) 사실 주에 대한 실상은 후대의 왜곡된 자료에 의해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왜 백이, 숙제가 그토록 주를 정벌하러가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눈물 흘리며 불인하다 간했어야만 했는지 우리는 그 실상을 다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여하튼 주는 실정을 거듭하여 국민의 원성을 샀을 것이고, 그래서 서백 창의 아들 무왕에 의하여 정벌되었을 것이다. 주는 바로 상왕조(주나라 사람들이 정벌후에 수도 이름을 따서 은나라로 격하시켜 불렀다. 원래의 이름은 상이다.)의 마지막 임금이고, 무왕은 주나라의 첫 임금이다. 오늘날 은허에서 발굴되는 갑골문이나, 여기저기 상조의 넓은 지역에서 발굴되는 정교하고 찬란한, 방대한 수량의 거대한 청동기 제기들은 은나라 문명이 얼마나 높고 섬세한 문화수준을 과시하고 있었는가를 극명하겍 보여준다. 은문명이 비록 시대를 앞서있다고 해서, 후대에 성립한 주문명에 비해 초극되어야만 할 유치하고 난폭한 문명이었다는 식의 선입견을 우리는 배제해야만 한다. 그것들은 모두 다른 양태의 고문명들이었다.

 

상왕조는 서백 창의 아들 무왕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그것은 정치적 좌절이었다. 그러나 상왕조의 문화와 전통은 멸망될 수 없어. 은말의 삼정(세명의 충직한 신하)으로 우리는 미자, 기자, 비간을 꼽는다. 비간이 바른 간언을 많이 하나, 주는성인의 마음에는 일곱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런가 하고, 그 심장을 갈라 죽였다. 미자와 기자는 모두 주 임금들의 서형들이다. 미자의 모친은 상조 30대 국왕인 제을의 첩이었다. 미자와 기자를 낳았을 때는 정비가 아니었다. 정비가 죽고 첩이었던 미자의 모친이 정실이 되어 낳은 아이가 바로 수 즉, 주다. 그래서 정비로서 낳은 아들이 주이었기 때문에 비로소 적자로 간주되었고, 주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그러니까 미자와 기자는 실상 주임금의 친형들이었던 것이다. 기자는 주의 황음과 방종을 간곡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다가 노예가 되었다. 그러다가 감옥에 갇혔다. 미자는 부자간에는 골육의 정이 있어 간해서 안 들어도 계속 따라다니면서 울고불고라도 할 수 있지만, 군신 사이에는 의로서 맺은 것이라 불의하면 떠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떠나 버렸다. 무왕은 주를 벌하고 왕위에 즉하면서 기자를 석방하였다. 무왕은 그에게 천지의 대법을 묻자, 기자는 흥범의 대도를 술하였다. 이에 무왕은 그를 조선의 제후로 봉하였고, 그를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어이무왕내봉기자어조선, 이불신야. 송미자세가). 그리고 무왕이 주를 벌하자, 미자는 종묘안의 제기를 가지고 무왕의 군문에 이르러 상의를 벗고 손을 등뒤로 묶게 한 수, 무릎을 꿇고 앞으로 나아가 무왕에게 고하였다. 무왕은 현인 미자의 작위를 종전과 같이 회복시켜주었다.

 

무와은 그의 동생 단을 또 노나라에 봉하였다. 그러나 단은 무왕의 역성혁명이 아직은 위태로운 상황임으로 그를 보좌하는 일이 시급하다 판단되어 그의 아들 백금을 임지로 보내고 자기는 계속 남아 무왕을 보좌하였다. 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태자송이 대를 이었는데 그가 곧 성왕이다. 무왕의 동생, 단은 실상 우리나라의 세조처럼 조카 성왕의 왕위를 찬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은 그런 짓을 하지 않고 어린 조카 성에게 깎듯한 신하의 예를 다하면서 섭정을 베풀어 주나라 초기의 문물제도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 단이라는 인물이 바로 항상 공자가 꿈에서조차, 오매불망 그리는 주공이다.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한 후, 그 마지막 임금 주의 아들 무경륵부를 후에 책봉하였고, 그에게 은나라의 유민을 종속시켰다. 정복당한 은나라 유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으며, 혁명 초기의 불안정한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두 동생 관숙선과 채숙도으로 하여금 무경의 사부가 되게하여 보좌하게 하였고, 은나라의 역법과 제사를 계승하도록 하였다(이속은사). 그런데 이렇게 후하게 대접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왕이 죽자 무경이 관숙과 채숙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 일어난 주왕조를 배반했다. 그러자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동벌을 감행하고, 무경을 주살하고 친동생인 관숙을 죽였으며, 또 채숙을 멀리 추방시켜 버렸다. 주공은 이에 은나라의 유민을 모아 주의 형인 미자를 따르게 하고 지금의 하남성 상구혀녀 부근인 송에 나라를 세우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미자 계()는 송의 시조가 되었고, 송은 은나라를 이어받은 주나라의 제후국이 된 것이다. 하난의 상구에 자리잡은 송과 산동의 곡부에 자리잡은 노는 지도를 놓고 보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곡부에서 서남쪽으로 약 200km 정도의 거리에 상구가 자리잡고 있다.

 

공자는 송나라의 후예다. 공자는 분명 송나라 사람이다. 아무리 남한에 오래 살았어도 이북 사람이 이북사람인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공자는 은나라 사람인 셈이다. 송을 통해 내려오는 은나라 문화전통을 계승한 사람인 셈이다. 송을 통해 내려오는 은나라 문화전통을 계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노나라 사람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살았다. 그러니까 공자의 삶의 압각처 자체가 이미 태생부터 매우 미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공자를 생각할 때 우리 주변에서 가장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유태인이 아닌가 한다. 송나라는 이미 은유민들의 다이애스포라다. 그런데 공자의 선조는 송에서 또 다시 실패하여 노나라로 이주하였다. 공자의 선조이자 송나라의 대사마였던 공부가의 부인이 아주 미녀였는데, 송나라의 수상에 해당되는 태재 화독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여 결국 공부가를 독살하고 그 부인을 차지한다. 공부가의 아들인 목금부까지 암살하려고 하니까, 목금부는 송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노나라로 도망온 것이다. 이 목금부의 손자가 바로 공방숙인 것이다.(이상의 이야기도 다분히 설화적 각색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 가계는 이중의 다이애스포라 생활을 거친 사람들이다. 송나라의 다이애스포라에서 또 다시 노나라의 다이애스포라로 이주한 사람들인 것이다.

 

춘추전국의 제자백가서에서 송인들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의 질이 악질적인 것이 아니라, 좀 코믹하다. 코믹하다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것이다. 터무니없다는 것은 순진하지만 상식의 궤를 일탈한다는 것이다. 맹자의 조장 이야기의 주인공도 송인이다. 한비자의 수주대토의 주인공도 송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종류의 아둔함이나 어리석음이란 천재의 특질이다. 영어로 말해서 속이 빈 사람들 성격(Absentmindedness)이야말로 천재들의 속성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화는 주나라 문화권에서 자기들이 멸망시킨 왕조의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자아내기 위하여 지어낸 것이다. 그러나 정언약반이라, 우리는 그 말의 반면을 읽어내어야 한다. 경상도 왕국이 되면, 전라도 사람들을 모멸하는 온갖 설화들이 꾸며지게 마련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거짓말 잘하고, 교활하고, 이중성이 강하여, ..... 그래서 하와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미지를 창출하는 온갖 이야기들이 항담을 차지한다. 그러나 전라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열려있으며 머리가 좋으며, 판소리나 남도민요가 입증하듯이 예술적이다. 아마도 고도의 문화를 자랑하던 은인의 후예 송인들은 이러한 정면과 반면이 교착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서구사회에 있어서 다이애스포라에서 사는 유대인들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도 이와 다름이 없다. 유대인들은 폐쇄적이며 깊게 종교적이며 독선적이며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일반적 이미지가 팽배해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외없이 천재적이며, 예술, 과학, 인문 각 분야에 인류사회를 리드하는 눈부신 업적들을 쏟아내어 놓았다. 왜 그다지도 유대인들은 천재적인가? 예수로부터 지그문트 프로이드, 칼 맑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춈스키나 아인슈타인, 스필버그에 이르기까지 왜 이들 민족에서만 집약적으로 천재들이 쏟아지는가? 나는 그 이유는 실로 간단히 설명된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다이애스포라에서 사는 과정을 통하여 어떤 내면적 갈등을 축적해왔으며, 그것은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면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유대인치고 바이링규알(bilingual, 2개 모국어화자) 아닌 사람이 없다. 유대인치고 박해의식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항상 자신이 지켜야할 내면적 규범과 삶의 외부적 환경이 극심한 콘트라스트와 타협하기 어려운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갈등을 어려서부터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예술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라나게 마련이다. 노나라 라는 다이애스포라에서 살던 송인 공자의 유년시절의 삶 자체가 이러한 갈등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다이애스포라에서 배출되는 유대인 천재들이라 해서 반드시 유대인의 전통과 인습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맑스에게 있어서나 프로이드에 있어서나 유대인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숭배나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맑스나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궁극적으로 해방의 대상이다. 위대한 천재들은 항상 인간을 아토믹한 개인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사유재산이나 이기적 권익에 의하여 꽁꽁 묶여있는 그런 절대적 자유의 개인을 그들의 배움의 전제로 삼을 수 없다. 맑스는 묻는다: 자유(Liberty)란 기껏해야 불간섭(Non-interference)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들이 문제시하는 것은 보편적 콤뮤니티의 한 멤버로서, 즉 공민으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냐에 관한 것이다. 정치적 해방(political emancipation)은 시민사회(burgerliche Gesellschaft, Civil Society)의 원자적 구조를 하나도 근원적으로 개혁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맑스나 프로이드가 말하는 것은 정치적 해방을 넘어서는 인간해방(human emancipation)이다. 유대인 전통이야말로 이러한 인간해방에 부정적인 모든 인습의 덩어리일 뿐인 것이다.

 

맑스나 프로이드가 유대인이면서 종교적인 폐습에 갇혀 있는 유대인을 비판하는 문제의식과 매우 유사한 의식구조를 우리는 공자의 삶 속에서 발견한다. 공자는 송의 후예로서 송의 모든 종교적, 문화적 인습체계를 받아들였지만, 그는 가장 강렬하게 송의 전통을 거부하고, 은의 문화에 반발한다.

 

욱욱호문재! 오종주.

 

찬란하도다! 그 문화여! 나는 주를 따르리로다.

 

오종주! 이 한마디에는 공자의 삶을 지배하는 줄기찬 긴장, 공자의 이데아와 현실 사이의 엄청난 갈등구조가 숨어 있다. 나는 주를 따르리로다! 여기서 말하는 주는 곧 송()의 거부다. 공자가 비록 하를 같이 이야기하지만 그에게 하는 실제로 큰 의미가 없다. 그에게 관념화 되어 있는 것은 송과 노, 은과 주의 긴장감이다.

 

공자는 송인으로서 노나라에 살았다. 노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그것은 바로 은을 정복한 왕조 주나라의 문물을 완성한 주공, 무왕의 정복으로부터 성왕의 치세까지의 주문화 초기정착의 모든 측면을 완성한 이상적인 패라곤, 그 주공이 분봉된 곳이었다. 성왕은 주공을 신하로 취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공의 사후에도 성왕은 주공에게 천자의 모든 예우를 다했다. 그리고 노나라에 있는 주공의 사당, 즉 태묘에는 전자의 예악을 허락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 왕실의 교제를 노나라에서 올렸다. 따라서 노나라에는 오의 종교문화에 대한 주의 인문전통이 가장 정통적으로 보존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송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아이덴티티를 철저히 노인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장성한 이후의 의식구조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의식 속에서 송이 노에 대해 대자적으로 분열을 일으킨 이후의 사건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은 곧 자기가 송인이라는 바로 그 자신의 속성을 거부하는 안티테제에로의 귀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부정(Self-negation)은 성인의 길의 출발이다. 공자는 분명 성인의 후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성인이란 무속집안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인은 곧 개비다. 그가 17세때까지 자모 안씨녀의 슬하에서 자라났다면, 외가의 훈도속에서 성장하였다면, 그것은 곧 그가 송의 적통속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의 삶이란 곧 송의 개비적 성격으로부터 노의 비개비적 성격으로의 근원적 전환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공자의 삶에서 최초로 우리가 의미론적으로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성인이 구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의 삶은 곧 종교적 성인(개비)으로부터 도덕적, 문화적 성인(비개비)에로의 전화(transformation)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샤만적 충동(shamanic impulse)으로부터 도덕적 인격의 구현(moral incarnation)으로의 도약을 의미한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송에서 노로의 전화, 은문화에서 주문화로의 비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의 상징적 구현체는 곧 주공(Duke of Zhou)이었다.

 

심의, 오쇠야. 구의, 오불부몽견주고.

 

심하도다! 나의 노쇠함이여. 오래되었도다! 주공을 꿈에 다시 보지 못함이여.

 

공자가 과연 은나라 역사나 주나라 역사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명료하게 알 길이 없다. 공자는 사가로서 하()나 은()의 역사를 캘려고 할 때 그 문헌이 부족하다는 것을 탄식하고 있느아(팔일 9), 그에게는 이러한 문명의 실제적 정황이 중요했다기 보다는 어떤 관념적 규정성이 더 의미있는 것이었다. 은과 주는 직접적으로 대비된 언명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논어에 기술된 공자의 논과 어 전반에 걸쳐 어떤 관념적 틀로서 깔려있는 것이다.

 

흥어시, 입어예, 성어악.

 

시란 공자에게 있어서는 언어를 의미한다. 공자의 언어는 곧 노래였다. 여기서의 노래는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곧 무당의 가사다. 우리의 문화화되 삶은 곧 노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노래는 흥이요 바람이요. 언어다. 그것은 개비의 신적 중얼거림이다. 예의 핵심은 무당의 상례였다. 그것은 죽음의 제식이었다. 악은 단순한 음악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곡이요 창작이요 창조다. 그것은 삶의 영감의 완성이다. 공자의 삶은 시, , 악 이 세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의 문제의식은 바로 어떻게 은적인 시례악을 주적인 시례악으로 전화시키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공자의 개비적 삶, 안시녀의 슬하의 가풍, 그것은 전통적 성인(무당)의 삶이었다. 부계, 모계를 막록하고 어떤 송문화의 전통 속에 젖어 있었다.

 

무당의 삶은 죽음의 삶이다. 죽음의 사제로서 죽음을 영위하는 삶이다. 은은 죽음의 문화요, 주는 삶의 문화다. 은 문명의 순장묘나 방대한 청동기 문화가 실증하듯이 그것은 술의 문화요, 제식의 문화요, 죽음의 문화인 것이다. 은문화는 바카스 축제와도 같은 취함의 문화다. 그러나 주문화는 깨임의 문화다. 주왕실은 바로 은문화의 취함을 깨우게 함으로서 성립한 것이다. 은나라가 그 얼마나 술에 빠져 국정을 그르쳤는가 하는 것은 주공의 작으로 전하는 서경 주고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공의 문제의식은 무분별한 종교적 광기에 빠져있는 은문화의 상태로부터 탈피하여, 어떻게 합리적 문아의 덕성으로 인간을 살려내느냐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아사노 유우이찌(천야유일)씨가 공자의 삶을 니이체가 말하는 르쌍디망(ressentimant, 영어로는 resentment)으로 가득찬 종교적 신비주의로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공자의 삶의 지극히 초기적 일면만을 추상한 것이며, 또 후대의 효경 류의 국가종교(state religion)로서 도식화된 공자상의 너울을 덮어 씌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발상의 참신함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은 공자에 대한 너무 협애한 규정이다. 오히려 공자의 삶은 소유적인 르쌍띠망(약자의 원망. 우리말의 한에 해당)에서, 진정한 강자인 대유적인 가치에로의 초극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후대의 죄악의 탓을 그 남상에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 공자는 그러한 후대적 드라마로부터 다시 초탈되어야 하는 것이다.

 

() : 죽음의 문화, () : 삶의 문화

() : 종교의 문화, () : 사문의 문화

() : 주의 문화, () : 논의 문화

() : 정의 문화, () : 이의 문화

() : 신기의 문화, () : 인문의 문화

() : 천의 문화, () : 인의 문화

() : 소인의 문화, () : 군자의 문화

() : 소인유의 문화, () : 군자유의 문화

 

공자의 삶의 출발은 죽음이었다. 비천한 삶의 환경속에서 죽음의 제식과 그 제식에 동반된 시례악을 익혔다. 그러나 공자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탈출하느냐에 있었다. 죽음의 가치를 어떻게 삶의 가치로 전환하느냐? 내가 살아 있다고 하는 바로 그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 공자는 철저히 이 현세 속에서의 자기 존재의 가치를 알고 싶어했다. 공자는 그가 어려서부터 익힌 죽음의 세계를 철저히 삶의 세계로 이전시키고 싶어했다. 그것은 곧 자기뿌리와의 결별이었다. 죽음의 가치를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는 그 열쇠는 인간 공자에게 있어서 과연 무엇이었나? 그것이 바로 학(배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논어라는 서물의 첫글자인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학이라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의 열음이다. 끊임 없는 삶을 향한 도전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새로움의 수용이다. 공자는 그의 삶을 자서전적으로 고백함에 그 첫구절은 다음과 같이 발한다.

 

오십유오이지간학.

 

나는 열 다섯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

 

15세 즈음, 그의 어머니가 죽을 즈음, 그가 양호라는 필생의 숙저거 사나이와 첫대면을 할 즈음 비천하게 살아온 자기 삶은 반추하기 시작할 즈음, 그는 학이라는 삶의 행위로 몰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실지읍, 필유충신여구자언, 불여구지호학야.

 

열가호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반드시 나만큼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있을거야.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걸!

 

이처럼 공자의 젊은 삶을 자신있고 정직하고 소박하게 그려낸 명구절은 없을 것이다. 공자가 낙양엘 가서 노자를 만났다든가, 청년 공자가 또 제나라에 가서 장중한 소의 오케스트라 음악에 충격을 받는다든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공자의 삶이 얼마나 강렬한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충격으로 가득찬 것이었나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학의 대상은 물론 예였다. 그러나 공자의 학은 이 죽음의 예를 어떻게 삶의 예로 전환시키느냐 하는 학이었다. 이 학은 곧 요새말로는 정치(politics)와 교육(education)을 의미한다. 공자에게서 정치는 곧 삶의 예의 정치였다. 공자에게서 교육이란 곧 이 삶의 예를 제자들의 삶에 구현시키는 것이었다. 예는 곧 삶의 질서(Order of Life)의 총칭이었다. 그가 바로 주공의 태묘에서 자신을 힐난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묻는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다(시예야)라고 말했을 때의 예가 곧 고착된 의례로서가 아닌 삶의 상황적 질서를 의미했던 것이다. 공자는 이제 개비적인 삶을 탈피하여 철저히 정치적 삶을 추구하게 된다. 정치적 권력만이 그에게 예악의 실현의 기회를 허용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많은 사람들이 사마천의 세가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대로, 공자가 50세 전후로 대사구라는 벼슬을 했다고 해서 아무 의식없이 그를 대부라고 이야기한다. 요시카와 코오지로오(길천행차랑)화 같은 사계의 대가도 별 생각없이 여기저기서 공자를 노나라의 대부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발언은 크게 잘못된 통념의 귀절이다. 공자는 대부가 되어본 적이 없다. 그것이 바로 공자를 공자다웁게 만드는 사실의 핵심이다. 공자 시대의 대부라는 것은 후대 특히 송대에 형성된 사대부라는 막연한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경대부를 의미한다. 공자 시대는 진시황에 의하여 시작된 군현제도 이전의 인류문명사상 서구의 중세와 일본의 강호막부에서나 목격할 수 있는 봉건제도라는 매우 특이한 정치제도의 규율속에 있었다. 그것은 군사, 경제, 정치적으로 독립된 단위들 사이의 계약관계를 의미하는 특이한 분권적 위계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천자() - 제후() - 대부() - - 서민()

 

은대에만 해도 천자를 제라 불렀으나 주대에 내려오면서 무왕을 비롯하여 왕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주대의 왕은 천자를 의미한다. (기후세폄제호, 호위왕. 은본기) 제후는 천자로부터 국을 봉토로 받는다. 그리고 대부는 반드시 제후로부터 식읍을 분봉받는다. 대부는 단순한 관리(officer)의 직위가 아닌 봉토를 가지고 있는 토착세력이다. 그 유명한 맹손, 숙손, 계손 의 삼환이 바로 대부들이다. 다시 말해서 대부는 나라 안의 작은 나라를 방불케 하는 조그만 성읍을 보유하는 군사, 경제, 정치의 독립단위인 것이다. 그러나 사란 그러한 식읍을 보유하지 않는다. 사는 단지 녹(월급이나 연봉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관리직책인 것이다. 그리고 매우 유동적인 직책이다. 요새 말로는 쉽게 임용되고 쉽게 해고되는 직분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정적인 경제적 하부토대가 없는 것이다.

 

공자가 어렸을 때 위리, 직리(승전), 사공 벼슬을 했다는 것은 계씨, 즉 대부의 사적 조직내의 관리직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56(정공 14)때 대사구 노릇을 했다는 것은 제후, 그러니까 국공의 관리를 했다는 것이다. 둘 다 사라는 직분의 한계 속에 있는 것이지만 계씨의 가신 노릇을 한다는 것은, 요새로 치면 사기업의 임원노릇을 하는 것이고, 정공 밑에서 관리가 된다는 것은 중앙청의 국가공무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그룹의 국장이나 중앙청의 국장이나 다 같은 사이지만 격이 다르고, 세력의 범위가 다르다. 공자와 그의 제자집단은 공자와 사가의 관료조직을 들락거린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자는 꾸준히 대부의 직책을 탐내었다. 그가 제나라에서 경공에게 등용된다 함은 곧 제나라의 대부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법가 계열의 재상인 안영이 그를 니계의 땅에 봉하려는 경공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사실 안영은 공자의 은인이다. 공자가 만약 경공에 의하여 대부로 등용되었다면, 공자는 오늘날 정자산이나 제안영 이상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위나라 영공과의 관계도 동일한 것이었다. 공자는 대부의 직책이 그에게 어떤 정치적 음모나 사회적 이상의 꿈을 실현시키는 확고한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양호의 꼬임에도, 공산불뉴의 유혹에도 공자는 항상 쉽게 넘어갔다. 공자는 정치적으로 매우 단순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공자의 설레임은 항상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자로에 의하여 좌절당했던 것이다. 자로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공자는 사로 살고 사로 죽었다. 공자의 삶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결코 이 사라는 성격에서 이탈해본 적이 없다. 그의 제자중에 나중에 대부가 된 자도 적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공자의 교단은 사의 집단이엇다. 그런데 이 말 자체가 사실은 어폐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라는 개념의 모든 속성을 최초로 구현한 자가 바로 공자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삶으로써 사를 규정해야지, 사로써 공자의 삶을 규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공자에게서 최초로 성의 새로운 의미맥락이 생겨났다면 마찬가지로 사도 공자에게 이르러서 새로운 의미맥락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사는 전통적으로 공, , 대부의 계층과 민의 계층사이에 존재하는 관리계층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에 따라 그 의미의 외연과 내연이 다르다. 시경에 흔히 나오는 사여라는 표현에서의 사는 거의 통속적 의미에서 계집()과 짝을 짓는 사내()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즉 어떤 계급적이나 신분적 의미로 한정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의 원초적 의미는 그 자형이 도끼나 도끼를 상징하는 의기로 상정되듯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문사(선비)적 의미보다는 단순한 전사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즉 왕이나 제후의 공민으로서 전투에 참가할 자격을 지니는 사람을 무분별하게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공자 이전의 사의 일차적 의미는 문적인 의미보다는 무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관학교라 할 때의 사관의 총체적 의미를 생각하면 아마도 연상이 쉬울 것이다. 더욱이 춘추와 전국시대를 통틀어, 특히 공자의 시대에는 문, 무의 구분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우 확고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중앙청 고장이 따로 있고, 소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행정업무 인력이 곧 전투수행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공자시대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전차전 중심이며, 보병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전국시대로 내려가면서 전투의 양상은 보병전 중심이 되면서 대규호화되고 장기화되는 양상을 띤다. 공자 시대의 사의 기본기는 육예 중 사, 경 였다. 그것은 전차전의 특성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전차수레에 타서 말을 모는 것을 어라 했고, 그 수레에 타서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을 사라 한 것이다.

 

자한 편에 달항망인이 공자를 비판하여 박학이무소성명 이라 한 대목이 나오는데, 나는 이 구문에서 이를 전, 후로 하여 어떤 문, 무의 대립적 맥락이 감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박학은 공자가 추구한 문적인 세계지만, 그것은 사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무소성명(이름을 이룬 바가 없다)이란 곧 사의 본질인 무인으로서 이름을 날린 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로소 공자의 대답이 구체적으로 이해가 된다.

 

자문지, 위문제자왈: 오하집? 집어호? 집하호? 오집어의.

 

공자가 이러한 비판을 듣고 문하의 제자들에게 일러 말하였다.: 뭘 잡을까? 말고삐를 잡을까? 활을 잡을까? 난 역시 말고삐를 잡아 이름을 내야지

 

여기서 공자는 자신도 전차몰이의 명수라고 하는 자신의 사로서의 재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육예의 커리큐럼이 예, , , , , 수 라고 하는 사실은 곧 공문의 사의 집단이 기본적으로 문, 무 통합적 인격체의 집단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예악은 문적이다. 사어는 무적이다. 서수는 문무에 공통적인 기본 교양이다. 육예는 실제적으로 공문에서 그 구체적 커리큐럼이 완성된 것이다. 요새처럼 젊은이들이 군대에 나가기를 기피하는 그런 가치관 속에서는 육예가 이해되기 힘들다. 전차를 몬다든가() 활을 쏜다든가()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예낙의 인문적 교양과 완전히 동일한 교육적 가치였고, 그러한 교육을 받아 사가 되고, 사가 되어 전투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영예였다. 그리고 군공에 의하여 작위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군인과 학자가 요즈음처럼 직업적으로 분리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사학의 문제의식 속으로 깊게 진입하여 생각해보아도 사실 이 사라는 개념은 도무지 명료한 계급적, 신분적 규정이 불가능하다. 계급(Class)이다, 신분(Status)이다 하는 말들이 모두 서양사학에서 명료히 규정하고 있는 말들이며 그러한 개념이 도무지 공자시대의 사의 정확한 외연이나 내연을 그려내기에 적합하질 않기 때문이다. 계급이란 부르죠아 혁명 이후에나 쓸 수 있는 개념이며, 신분이란 부르조아 혁명 이전의 중세기적 체제안에서 쓸 수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는 계급도 아니요, 신분도 아닌 것이다. 맹자 양혜왕 첫 머리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맹자와 양혜왕의 하필왈리의 대화속에서 왕이 한 계층으로 다루어지고, 그 다음으로 대부가 한 계층으로 다루어지고, 그 다음으로 분명하게 사서인이 하나의 통합된 계층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곧 사와 서인 사이에 뚜렷한 신분적, 계급적 차별이 없는, 상하 이동(upward and downward mobility)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사는 분명히 서인 위에 가장 직접적으로 군림하는 지배계층임이 분명하다.

 

혹자는 사의 존재를 지역적 개념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사는 씨족 중심적인 성읍 국가에 있어서 국성안에 사는 국인이며, 이는 밖의 야에 사는 야인 즉 서인들과 구분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도 절대적인 준거를 찾을 수 없다. 사가 현실적으로 국인 중에서 공경대부를 제외한 말단의 관료층으로 이해하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문제는 사가 정확히 세습적인 신분이 아니라고 한다면, (현실적 관료)가 될수 있는 가능성의 인간의 범위는 어떻게 설정하냐는 것이다. 삼예중 의예라는 책 중에는 사관예 니, 사혼예 니, 사상견예니, 향음주예, 향사예, 사상예, 사우예, 증 사를 규정하는데 매우 까다로운 예식들이 질서정연하게 기술되어 있다. 의예의 정확한 성립시기와 맞물리는 문제이지만, 이러한 예에 의하여 규정되는 사의 신분의 성립은 결코 공자 시대로 올라갈 수는 없다. 공문의 제자들이 모두 이렇게 까다로운 삶의 절차 속에서 규정되는 사의 신분을 획득한 그런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제반 논의와 관련하여 사의 문제와 춘추전국시대의 사회계층의 공간적, 시간적 구조를 퍽 소상하면서도 명료하게 다룬 좋은 논문이 있다. 일독을 권한다. 이성구, 춘추전국시대의 국가와 사회, 강좌중국사 1.. 지식산업사, 1998)

 

사뿐만 아니라 민(서인)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로 애매하고 유동적이다. 우선 논어에서 말하는 민은 절대적인 다수의 대중을 종국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며 그것이 플라톤의 대화편등 희랍철학에서 말하는 폴리스의 시민(상민[the common people], 군인[soldiers], 수호인[the guardians])과도 같이 광범위한 노예계층으르 전제로 한 제한된 소수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희랍의 민주제의 개념은 결코 민의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논어에서 말하는 민이야말로 오히려 21세기 우리 사회에 적응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이고 종국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맥락에 따라서는 경대부까지를 포함해서 군앞에서는 모두 무차별적으로 민의 개념속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춘추전국시대의 문헌에서 사민이나 사졸이니 하는 표현은 결국 장교와 졸병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는 특수한 기술을 보유한 지도적인 전사들이며, (서인)에서 차출된 저력은 대개 보병이나 치중대의 노역을 제공하는 천역의 사람들이었다.

 

세가에 기록되어 있는 공자 청년시절의 일화, 즉 계씨의 문전에서 양호를 최초로 만나는 대화는 지극히 시사적이다.

 

계시향사, 비감향사야.

 

계씨는 사를 대접하려 한 것이다. 감히 너같은 놈을 대접하려는 것이 아니다. 끼웃거리지 말고 썩 꺼져라!

 

이것은 공자가 모상중에 상복을 입고 계씨집 잔치에 나타났을 때 당한 봉변이다. 공자는 아무말 없이 굴욕을 참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공자유시퇴.)

 

이 양호의 말에서 우리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양호는 공자보다 약간 연배의 사람이며, 즉흥적으로 시소을 밟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탁월한 문사의 교양인이었다), 17세 전후의 공자는 도저히 사로서 간주될 수 없는 수준의 천민이었다는 것이다. 계씨는 사를 향응하려 한 것이다. 너같은 놈을 향응하려 한 것이다. 너같은 놈을 향응하려 한 것이 아니다. 라는 표현에 깔려있는 정조는, 곧 공자는 어렸을 때 사라는 신분과는 거리가 먼 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로서 조차 간주될 수 없었던 천민, 송의 후예며 성인(무당)의 후예인 공자는 과연 어떻게 사의 최고지위인 대사구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대부분의 선진 전적에는 사구로만 되어 있다. 대사구란 표현은 세가의 창작일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답을 주는 것이 논어요, 논어 속에 담긴 공자의 삶의 향기 그 자체인 것이다. 즉 공자의 삶에서 비로소 최초의 사의 의미가 구현되어 나가는 것이며, 공자를 통하여 사의 의미가 새로 창출된 것이다. 공자는 사로서 간주될 수 없는 소년이었다. 이 미천한 소년이 사의 지도적 인물로 변화되어간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곧 공자의 호학이다. 공자의 학의 대상은 예였다. 공자가 사를 지향한 배움으로서의 예는 곧 죽음의 예가 아닌 삶의 예였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적 질서의 예였던 것이다. 공자가 예를 배웠다는 것은, 마치 오늘날 내가 멕시코 유카탄반도(Yucatan)의 치첸잇차(Chichen Itaza)등지에 널려있는 석판의 판화를 보고 9세기경의 찬란했던 마야문명의 의례를 완벽하게 재현하려는 노력과도 유사하다. 공자가 재현하려 했던 것은 주공의 주예였다. 그러나 사실 소년 공자는 전혀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매우 로칼한 당골네의 상례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고례의 담지자로서 공자의 자부감은 그의 호학의 행위로부터 얻어진 결과였다. 공자는 일찍 문자를 터득하였고 문헌을 연구하였으며 가능한 모든 사람들의 구전자료들을 모았다. 그는 끊임없이 물었다. 그는 물어서 배웠다(문이학). 그것이 공자의 사문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자부감은 당대의 지배계급에게는 매우 공포스러운 것이엇다. 그것은 외경의 대상이었다. 실상 그것은 공자의 허풍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의 허풍은 진실한 삶의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정치적 권력의 기회를 허용하는 찬스였다. 그는 고례의 회복을 통하여 새로운 도덕적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꿈이 구 한사람의 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집단적 행위였다는 사실이야말로 공자를 위대하게 만든 것이다. 공자는 도덕을 정치화(politicization of morality)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정치를 도덕화(morality)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정치를 도덕화(moralization of politics)하려 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집단적 노력이었다.

 

공자의 집단의 성격은 애초에는 무와 무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무와 무의 성격속에서 새로운 문의 요소를 창출했다. 이 새로운 문의 요소야말로 향후의 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즉 사는 신분적, 계급적 고정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사문의 획득자가 된 것이다. 공자가 새롭게 규정한 사문을 공부에 의하여 획득하는 자는 누그든지 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교단이야말로 중국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사의 전문적 집단이다. 그것은 기존의 어떤 정치세력과도 타협할 수 없는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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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공자의 사의 집단이야말로 구체적으로 제자백가의 효시를 이루는 것이다. 이후의 모든 가들이 사실 공자의 교단을 모방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용병집단인 묵가였다. 묵자 또한 송인이었다는 사실 또한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다. 그리고 묵가집단이야말로 제민지배체제를 위한 변법의 배후주체세력이었다는(구체적 사례로서 진묵을 논증) 이성규의 논의는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다.(중국고대제국성립사연구. [일조각. 1997] 중에서 제3편 제민지배체제형성의 담당집단을 보라.) 법가 사상가들은 사실 어느 기존집단으로부터 이단적인 개인의 성격을 띠는 것이며 그것이 어떤 학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민적 보편주의(universalism)의 사상적 기저는 실제로 묵가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것은 공자집단에게 내재하는 보편주의를 극단화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집단 속에 이미 영토국가적 제국 출현의 맹아적 요소가 내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공자의 사의 집단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에게 의하여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여기에 해답을 주는 한마디가 나는 도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무리는 도였다. 이러한 나의 갑작스러운 결론에 독자들은 의아심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말이 아닌 장자의 말이다. 공자는 공자집단을 도적의 무리로 규정하는데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고전의 언어를 우리의 현재 언어의 맥락속에서 왜곡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면 안된다. 논어에서 말하는 광의 의미를 오늘날의 정신병자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미셸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논구하는 맥락과 동일한 것이다.

 

도의 의미의 본질에 관하여 역시 이성규의 논의가매우 시사적이다.(동상, 1편 제 1장 제 3, 춘추시대의 도와 신취낙) 결론적으로 말하면 도는 성읍 국가의 기반이 흔들려가는 시대에 국과 국 사이에, 즉 봉강의 사이에 어느 국에도 속하지 않는 일종의 공백지대에서 새로운 취락을 형성하여 사는 사람들이라고 규정되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기존의 읍의 지배체제의 가혹한 수탈로부터 이탈된 사람들이며, 따라서 도적질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확고한 존재 이유를 갖는 집단이었다. 성읍 국가의 붕괴과정에서 이러한 군도의 출렿은 적지 않은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도는 균분을 지향하며, 본질적으로 유객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기존의 어떤 체제적 가치와도 타협하지 않는 진보적 사상의 소유자들일 수 있다. 제자백가의 모태가 바로 이 도에 있었다고 해도 망언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도니, 협이니, 유니 하는 말들이 공자시대에는 모두 상통하는 말들이었다. 논어에 계강자가 도를 걱정하여 공자에게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안연 18), 이를 둘러싼 문답의 배경에는 공자 자신이 도로서 규정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체험과 동정이 서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공자는 곡부시내에 영어학원이나 태권도 도장을 차렸던 사람이 아니다. 공자라는 천민 무당의 아들 밑에 와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사로의 출세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개비에서 비개비로의 전환의 길은 참으로 요원한 것이다.

 

공자라는 성인 밑에 모여든 사람들은, 물론 곡부에 사는 안씨 자제들 같은 읍내 똘만이들도 있었겠지만, 뿌리 없이 부랑하는 갈 곳 없는 유사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가치관을 희구하는 성실한 도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 그 구심점에 공자라는 거인이 있었다. 짱구 대가리에, 거구의 몸체, 뛰어난 음악의 장인, 고례의 담지자, 잡기에 능한 달인, 엄청난 정열의 호학지사, , 어의 강력한 무장, 이러한 퍼스낼리티의 구현체로서의 구가 곡부에 살고 있다는 소문은 유협들의 세계에 널리널리 퍼져나갔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자를 가장 유니크하고 위대하게 만든 것을 두가지라고 생각한다. 그 첫째가 그가 섬세한 음악의 명인이라는 사실이고, 그 둘째가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문자의 세계의 달통했다는 사실이었다. 공자는 그를 찾아오는 도들에게 음악을 통해 새로운 감수성(esthetic sensitivity), 문자를 통해 새로운 역사성(historicity)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공자교단의 형성에 결정적인 사회적 계기를 마련한 것은 바로 공자의 평생의 반려가 된 자로라는 인물과의 만남이었다. 자로는 도였다. 문자 그대로의 도였다. 공자는 자로를 만나 더불어 공생애를 시작하였고, 자로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공자는 자로의 시체가 토막이 나서 소금에 절여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공자는 친구를 대하는 예로써 가운데 뜨락(중정)에 내려와서 어쩔 줄 모르며 서성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자는 소리쳤다: 우리집안에 있는 짠지독(절임독)을 몽땅 엎어버려라!(수명부해). 그리고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공자는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태산기퇴호

양목기회호

철인기위호

 

태산이 드디어 무너지도다!

대들보가 마친내 쓰러지도다!

~ 철인이 소리없이 사라지누나!

 

자로와 공자가 처음으로 상면하는 장면과, 자로의 최후를 기록한 두 장면은 공자의 일생의 드라마를 가장 생생한 콘트라스트 속에서 전달해 주는 감동의 씬들이다. 첫 장면은 공자가어에 기록되어 있고, 마지막 장면은 사기의 중니제자열전과 위강숙세가에 자세하다.

 

자로와 공자가 첫대면하는 장면을 중니제자열전은 다음과 같이 그 대강을 스켓치하고 있다.

 

자로성비, 호용력, 지항직, 관웅계, 패가돈, 릉폭공자.

공자설예초유자로, 자로후유복위질, 인문인청위제자.

 

자로는 본성이 야인 기질이 있어 거칠었다. 용감하고 힘쓰는 일을 좋아하였다. 그 심지가 강직하고 직설적으로 뒤받기를 좋아했다. 숫탉의 꼬리를 머리에 꽂고 산돼지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허리에 찼다. 그리곤 공자를 업신여기며 공자를 때릴려고까지 하였다. 공자는 자로를 예로써 대하며 살살 달래어 인도하였다. 후에 자로는 유복을 입고, 폐백을 드려 죽음의 충절을 맹세하고, 문인들을 통해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자로는 변땅의 사람이었다. 변땅은 노와 위 사이에 있는 새로운 개간지였다. 집해에 자로는 변의 야인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야인이란 곧 사의 신분이 아닌, 국밖의 야에서 사는 사람인 것이다. 한마디로 체제에 예속됨이 없는 방외인이었고, 도였고 깡패였다. 그의 외관의 형용이 무척 재미있다. 머리에 숫탉의 깃털을 꼽았고, 허리엔 산돼지 가죽주머니를 찼다.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Now John was clothed with camel's hair, and had a leather girdle around his waist, and ate locusts and wild honey. (마가 1:6)

 

세례요한의 모습이나 변땅의 자로의 모습은 같은 야인으로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만나 물의 세례를 주려했지만 자로는 공자를 만나자마자 주어 팰려고 하였다. 자로는 무지막지한 깡패였다. 이러한 야인 자로를 공자는 같은 무력으로 맞대응하지 않고 예를 설하였다. 그리고 인격으로 감화시켰다. 강직한 자로는 공자의 인격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제자기 되기를 청했다. 자로는 평생, 공자곁을 지켰다. 한 번 굳게 맺은 맹서를 자로는 평생 저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강직한 사람이었다. 사실 공자는 자로 덕분에 그의 정치적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가 대사구가 되어 삼환의 읍성을 무너뜨리고 무장 해제를 시키는 혁명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자로 덕분이었다. 그리고 실각하자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를 첫망명지로 삼은 것도 자로의 처형 안탁추가 위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로는 위나라에 대소가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공자는 평생을 자로의 보호 속에 살았다. 공자는 고백하였다.

 

자오득유, 악언불문어이.

 

내가 자로를 얻게 된 후로부터는 내 귀에 험담이 사라지게 되었다.

 

가어는 두 사람의 만남을 다음과 같은 대화로 시작하고 있다.

 

자로초견공자. 자왈: 여하호약? 대왈: 호장검. 공자왈: 오비차지문야, 종위이자지소능, 이가지이학문, 기가급호? 자로왈: 학기익야재? 공자왈: 부인군이 무간신즉실정, 사이무교유즉실청; 이광마불석책,, 조궁불반경; 목수승즉직, 인수간즉성. 수학중문, 숙불순재? 훼인악사, 필근간형. 군자불가불학. 자로왈: 남산유죽 불유자식; 참이용지, 달간서혁. 이차언지, 하학지유? 공자왈: 괄이우지, 촉이려지, 기입지불역심호? 자로재배왈: 경수교.

 

자로가 처음 공자를 만났다. 공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자로가 대답하였다. 나는 긴 칼을 좋아한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대의 능한 바에다가 학문을 얹히기만 한다면 아무도 그대를 따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자로가 말하였다. 학문이라는 것이 도무지 무슨 도움이 될 것이 있는가? 공자가 말하였다: 임금이 되어서 간해주는 신하가 없으면 실정하게 되고, 선비는 가르쳐주는 친구가 없으면 귀가 멀게 된다. 미친 말을 몰 때는 채찍을 잠시도 놓을 수 없고, 활을 당길 때는 이미 두 번 다시 당길 수가 없다. 나무는 목수의 먹줄이 닿아야 곧아지고, 사람은 비판을 받아야 비로소 성인이 된다. 배움을 얻고 물음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나? 인을 어지럽히고 사를 미워하면 사회와 마찰을 일츠켜 감방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그러니 사나이라면 학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로가 굴복하지 않고 으르렁 거리며 말했다: 남산에 푸른 대나무가 있는데 휘어잡지 않아도 스스로 곧고, 그것을 짤라 화살로 쓰면 가죽과녁을 뚫어버린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뭘 또 배울 것이 있겠는가? 공자가 타이르며 말했다.: 그 대나무 밑둥아리를 잘 다듬어 깃털을 달고, 그 앞머리는 쇠촉을 달아 날카롭게 연마한다면, 그 가죽을 뚫는 것이 더 깊지 않겠는가? 이에 자로가 무릎 꿇고 두 번 절하였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나이다.

 

(장검)에 배움(학문)! 이것이 곧 공자교단의 출발이었다. 자로는 공자보다 아홉살 연하였고 제자 중에서는 가장 연상의 한 사람이었다. 사실 자로는 공자의 막역한 친구였다. 자로의 비장한 최후는 공자 72, 3 세 고령 때의 사건이었다. 14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노로 돌아온 후 자로는 공자 곁을 떠나 위나라에 가서 당시의 재상이자 대부였던 공회의 읍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위나라에는 본시 불민한 임금 영공이 있었다. 영공에게는 총애하는 부인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본시 송나라의 귀족의 딸이었는데, 그녀가 위나라에 시집온 것은 이미 송의 공자인 조(송조)라는 색골의 미남자와 염문을 뿌린 후였다. 남자는 보기 드문 음녀였다. 나중에 희화되고 각색된 이야기이겠지만 공자와도 살랑거리는 침실의 옥구슬 바알에 가린 염문을 뿌린 음녀였다. 이 남자가 영공의 사이에서 난 자식이 괴외였다. 괴외가 과연 영공의 자식인지, 송조의 자식인지도 알 바가 없다는 것이 당시의 소문이었다. 그런데 영공 39, 괴외는 음녀인 엄마 남자의 횡포를 보다 못해 엄마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전에 발각되어 송나라로 도망갔다가 뒤에 진나라로 갔다. 그 후 영공이 죽자 위나라는 도망친 괴외의 아들 첩을 임금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출공이다. 출공이 즉위한 후 12년이 되도록 괴외는 귀국하지 못했다. 출공은 막강한 신하들을 동원하여 괴외의 입국을 막았다. 그러나 괴외는 집요하게 복위를 꾀하였다. 기나긴 부자간의 싸움이었다.

 

괴외는 마침내 출공 막하의 벽을 뚫을 수 있는 인물을 하나 잡았다. 괴외의 누나, 그러니까 위령공의 큰 딸, 백희는 위대부 공어문자에게 시집을 갔다. 그 공문자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자로가 섬기고 있는 대부, 공회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공문자(공회의 아버지)가 죽고 나자 공회의 엄마 백희는 그 공씨 집에 있었던 젊고 잘생긴 노비() 혼양부와 정을 통하였다. 혼양부는 공회의 엄마 백희와 괴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괴외의 복귀를 도왔던 것이다. 괴외는 혼양부에게 성사만 시켜주면 모든 죄를 감면해 주고 대부의 높은 지위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 누이 즉 공회의 엄마와 결혼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부추켰다.

 

드디어 백희는 괴외를 공회의 집으로 끌어들여 공회를 협박한여 외삼촌, 괴외를 도와 출공을 습격하도록 작전을 세운다. 출공은 드디어 노나라로 도망을 갔고 출공의 뒤를 이어 괴외가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장공이다. 여기서 전개되는 스토리들에는 공회와 자로의 관계가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질 않다. 공회는 자기 엄마가 종놈인 혼량부와 밀통하여 외삼촌 괴외를 즉위시키려는 계획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리 없다. 그러나 공회는 엄마의 엄명 때문에 할 수 없이 반란에 휘말려 들었을 것이다.

 

공회가 괴외에 의하여 높은 누각위에 붙잡혀 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우직한 자로는 공회의 집으로 뛰어갔다. 공시집에 들어가려는 참에 같은 동문의 제자로서 공회의 가신을 지내고 있었던 자고(고지의 자)를 만났다. 자고는 공씨집을 나와 피신하려던 참이었다.

 

자고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고 자로에게 충고하였다. 공연히 개입하여 화를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말렸다. 그러나 자로는 개의치 않고 공씨 집의 밥을 먹고 있는 이상 이 집의 재난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가까스로 공씨 문안으로 단신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자로는 괴외가 공회를 붙잡고 있는 누각 밑에 떡 버티고 서서 소리를 지른다. 공회를 풀러 놓아다! 괴외가 말을 들을 리 없다. 그러자 자로는 그 누각에 불을 지르려 한다. 그러나 괴외는 날샌 검객 두명, 석걸과 호염(우염)을 파견한다. 자로는 이미 늙었다. 젊은 검객들의 날쌘 칼을 피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날쌘 장검이 얼굴을 스치며 갓끈이 끊어지고 갓이 땅에 뒹굴었다. 그 순간 자로는 이미 자기의 최후를 감지한다. 얼굴에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가운데 자로는 유유히 손을 들어 외친다.

 

군자사, 관불면!

군자는 죽더라도 갓을 벗을 수 없다!

 

자로는 정좌하고 땅에 떨어진 갓을 다시 쓰고 단정하게 갓끈을 맨다. 순간 두 검객의 시퍼런 칼날들이 엄숙하게 정좌한 자로의 등을 갈랐을 것이다. 자로는 태연하게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스러져 갔다. 서늘한 칼날이 그의 심장을 에는 순간,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마도 이와 같이 중얼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구 형님! 나는 형님의 가르침대로 한치도 어김없이 살았소. 이제 나는 당당한 군자가 되었소. 군자로서 갓끈을 매는 순간에 형님 곁으로 갈 수 있어 나는 행복하오. 나는 형님의 가르침대로 사로서 살고 사로서 작별하오...... 굿바이.

 

자로의 인생의 출발은 숫탉 꽁지깃털과 산돼지 불알이다. 그런데 그의 삶의 마감은 죽음 앞에 태연히 정좌하고 앉아 갓끈을 매는 모습이다. 숫탉꽁지털에서 갓끈으로의 트란스포메이션, 바로 이것이 공자의 삶의 본질이며, 자로의 삶의 도약이며, 향후 모든 사의 의미를 규정하는 인류사의 교양(studia humanitatis)의 전범을 이루는 것이다. 자로의 삶의 도약이 곧 사를 규정하였고 공자의 교단의 성격을 규정하였고, 제자백가의 인문학을 규정하였고, 제민의 통일 제국에로의 새로운 길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곧 내가 말하는 무와 무에서 사문을 창출해낸 공자의 위대성이다. 장자의 도척편에는 도척이 공자를 힐난하면서 자로를 꾀어낸 죄를 크게 꾸짖는 장면이 있다.

 

천하하고불위자도구, 이내위아위도척. 자이감사설자 로이사종지. 사자로거기위관, 해기장검, 이수교어자. 천하개왈, 공구능지폭초비. 기졸지야, 자로욕살위군, 이사불성, 신저어위동문지상. 시자교지불지야.

 

천하사람들이 왜 널 도둑놈 짱구(도구)라 아니 부르고, 하필 날 도둑놈 척(도척)이라 부르는지 알 수가 없다. 너는 달콤한 말로 자로를 설복시켜 너를 따르게 했다. 자로로 하여금 높은 무사의 관을 벗게 하고, 긴 칼을 풀게 하고, 너의 가르침만을 받게 만들었다. 그래서 선하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기를 공구는 폭력을 그치게 하고 비리를 금지시키는 힘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뭐냐? 자로는 위군을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몸은 동간나 소금에 절여져 위나라 동문 꼭대기에 걸리고 말았다. 이것은 곧 너의 가르침이 아직 모자란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자에 대한 힐난의 반면에 깔려있는 역설적인 공자의 힘과, 당대에 무에서 문으로 화한 자로의 모습, 공자의 도를 지키기 위해 억울하고 또 평화롭게 죽어간 자로에 대한 깊은 애정의 통념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도의 문제에 관하여 재미있는 외물편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유와 직접 연결되는지를 한 번 살펴보자!

 

유이시례발총. 대유려전왈: 동방작의, 사지하약. 소유왈: 미해군유, 구중유주. 시고유지왈: 청청지맥, 생어륵피. 생불시시, 사하함주위? 접기발, 엽기훼. 유이금추공기이, 서별기협, 무상구중구.

 

유란 본시 시경을 읊으며 예를 운운하며 도굴을 일삼는 놈들이다. 오야붕인 대유는 밖에서 망을 보면서 무덤 안에 들어간 꼬붕 소유들에 말을 전한다: 이놀들아! 벌써 동이 트는데 뭘 꾸물거리고 있냐? 무덥속의 소유들은 말한다: 아이쿠 아직 시체 속 바지 저고리를 못벗겼다우. ! 아가리 속엔 찬란한 구슬이 보이는구만. 왜 시경에 이런 노래 있지 않수: 푸르고 푸른 보리가 무덤가에 무성쿠나. 살아 베풀지 못한 이들이 어찌하여 죽어 구슬을 머금고 있는고! 그리곤 시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턱밑을 세게 누르자, 무덤 속 유들이 쇠망치로 톡톡 아랫턱을 친다. 서서히 아가리가 벌어지는 것이다. 입속의 구슬에는 흠집 하나 내지 않고 솜씨좋게 훔쳐 달아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장자의 기술을 단순히 꾸며낸 창작 설화로 볼 수가 없다. 엄연한 당시의 유들의 실상을 전하는 역사적 장면을 희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가 어려서 종사하고 목격한 세계는 이러한 세계였다. 즉 낮에는 상례를 주관하는 사제자로서의 좌의 집단이지만, 그들이야말로 묘혈의 내부구조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밤이면 음험한 도굴꾼으로 변하여 왕후장상들의 보물은 훔쳐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의 세계요, 도의 세계요, 협의 세계요, 객의 세계였다. 전통적으로 유란 주유(난장이)를 의미했으며 소지소언의 편협한 인간들이라는 매우 부정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무당계열의 사람들에는 실제로 꼽추가 많았다. 꼽추였기 때문에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고 사색에 깊게 빠지거나 천문이나 수리에 밝거나 보통 사람들이 못가지는 통찰력을 소유하여 결국 영적인 무당의 길로 들어갔고, 이들이 말하는 시례가 기껏해야 도굴을 위한 양념격이라고 하는 유의 타락한 모습에 대한 장자의 통렬한 비판은 비단 유가의 도덕주의에 대한 도가의 준엄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곧 공자라는 인간의 자기 부정과 자기도약의 핵심적 시각이기도 했던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소인과 군자의 준엄한 분별, 그리고 소인유가 되지 말고 군자유가 되라고 하는(성야 11) 간곡한 당부는, 어떤의미에서 자신의 과거 모습의 잔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했던 것이다. 공자는 어떤 경우에도 서인에게 소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소인은 곧 유에 대한 비판이요, 사에 대한 비판이다. 종교적() 질곡에 빠져 보물이나 탐내고 있는 자들. 이러한 집단으로부터 어떠한 새로운 문화의 리더십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의 광기 속에 은총의 강림을 외치며 연보돈과 십일조를 강요하고, 장대한 성전이나 지으려하고, 목사의 직위마저 세습시키려고 하는 오늘의 우리나라 교계의 작태는 바로 공자가 목격한 소인유의 세계였던 것이다. 공자의 사문에 대한 갈망은 바로 이러한 은대적 종교주의로부터 주대적 인문주의로 문명의 축을 바꾸려는 노력이다. 막스 베버가 근대화=탈주술의 도식을 외치기 양천년 전에 이미 공자는 그러한 근대적 문명의 도식을 완성하려 했던 것이다.

 

사기 골계열전에 서문표가 업의 령이 되어 하백에게 처녀를 바치는 풍속을 단절시키기 위하여, 그 신화와 관련된 모든 무당들과 동네의 장로들을 그들의 논리에 의하여 물속에 수장시키는 장쾌한 모습, 그리고 동네사람들을 각성시켜 관개시설을 하게하는 그런 모습이, 모두 공자의 사상적 기저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씨족 공동체의 선조신앙의 신화적 편협성이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한 신화적 세계관이 더 이상 현실적 삶의 질서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부조리의 인식을 공자는 과감하게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축에서 일상적 삶의 질서의 축으로의 전환이었다. 공자에게서 윤리란 곧 민의 삶의 재발견이었다.

 

공자가 계씨의 팔일무를 놓고 통탄하는 모습에서, 많은 학자들이 공자의 입장을 시대착오적 복고주의라고 비판했다. 천자의 예일지라도, 일개 소국의 대부가 사정에서 춤추어 무방하다면, 그런 예를 충분히 해할 수 있는 패권의 시대로 이미 진입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계씨가 시대적 흐름을 타고 가는 진보세력이고, 그것을 한하는 공자야말로 수구세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비판이 비공비림 시대의 일반적 논리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오류에 불과하다. 오늘의 관념을 과거에 덮어씌우는 억지 춘향의 놀리 이상의 그 아무 것도 아니다. 노국의 현실에서 삼환의 세력은 당시 역사의 진행을 봉쇄하는 가장 보수적인 봉건세력이었다. 다시 말해서 성읍국가적 사유방식으로 인민 대중을 착취하는 전형적인 봉건제적 구습의 타락형태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인민에 대한 보편주의적 지향점이 전무했고, 팔일무를 춘다고 하는 것도 타락한 인간들의 쾌락적 행태의 과시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공자는 팔일무가 천자에게만 전유되어야 한다고 하는 좁은 명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젊은 공자는 아사노(천야유일)씨의 통찰대로, 그 자신이 천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동키호테식의 꿈을 꾸고 있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공자의 관심은 그러한 명분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타락한 삼환 세력을 어떻게 근원적으로 분쇄시키고 무기력화 시키느냐에 있었다. 공자는 봉건적 구질서의 옹호자가 아니라, 오히려 봉건적 위계 질서를 넘어서는 어떤 보편적인 횡적 민의 질서를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공자의 정치 제도적 사유의 틀 속에는 오늘날의 의회민주제도나, 선거 제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군권의 강화를 통한 보편적 민의 질서를 구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민의 질서의 담당자는 개방적 외연을 갖는 사일 수 밖에 없었다. 공자 집단의 정치적 성격은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다. 그가 실제로 소정묘를 죽였다고 한다면 도지이정 하고 제지이형하면 민면이부치라고 하는 그의 입장과는 다른 매우 법가적 엄형주의적 행위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공자에게는 이러한 법가적, 변법적 보편성과 과단성이 있었다. 그러한 무단적 측면도 있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삼가 무장해제나 소정묘 주살이나 하는 일련의 조치는 그의 정치적 입장을 단순히 맹자류의 도덕주의적 왕도주의자로 해석하기 어려운 복합적 측면을 내포한다. 공문 그룹은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적인 사람들이었다. 춘추시대의 폐습에 종언을 고하고 제국의 제민지배체제를 향한 새로운 질서의 태동에 근원적인 보조를 맞출 수 있는 매우 유동적인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정치적 입장만으로는 공자를 해석할 수가 없다. 그가 말하는 정치는 제도의 효율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다웁게 만드는 인간성의 회복에 그 궁극적 소이연이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는 곧 인간을 인간다웁게 만드는 인간 해방이요, 그것이 곧 인의 길이었다. 삼년상을 둘러싼 재아와의 논쟁에서도(양화 21) 공리주의적인 재아의 합리론에 끝까지 양보할 수 없었던 공자의 고집이 엿보인다. 공자는 매우 진보적인 정치적 입장을 취했지만, 그러한 진보적 입장을 묶을 수 있는 인간학의 상위질서가 항상 그에게는 예락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아마도 이러한 공자의 고집이 우리 동양사회의 깊이와 보수성 그리고 진보성의 다면적 심층을 대변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공자에 대하여 너무 많은 말을 하였다. 독자들이 나의 편견의 전제가 없이 논어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너무 박탁하는 것 같아 송구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의 편견의 선리해(Pre-Understanding)를 밝혀 놓는 것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편견을 제공하지 않는 첩경이라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다.

 

공자의 생애에 관한 논의는 문자 그대로 한우충동이다. 공자의 거노(노나라를 떠나 유랑의 길을 밟게 됨)에 대한 의견도 한없이 분분하다. 나는 이러한 사견들을 여기 조정하여 다시 나의 사견을 밝힐 마음의 여유가 없다. 단지 확실한 것은 거노를 계기로 이루어진 14년간(이것도 정확한 루트와 연수는 학자들에 따라 분분하다)의 유랑의 길이 그에게 어떤 중요한 삶의 각성을 주었다는 것이다. 14년간의 망명의 길은 모택동의 장정에 비유할 수도 있는 고난의 길이었다. 이 고난의 길을 처음부터 끈까지 동반한 사람은 단지 자로와 안회, 두사람이었다. 자공과 염유도 동반했지만 그들은 들락거렸다. 14년간의 망명의 삶은 인간 공자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도전이었고, 궁극적인 비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인식을 크게 전환시켰다.

 

예수에게 있어서 40일간의 광야의 고난과 굶주림은 돌을 모두 떡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모두 떡덩이로 만들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돌을 떡으로 만든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현실적 욕구를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첩경이었을 것이다.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의 기본적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닐까? 아에 대한 예수의 독백은 모든 신비주의를 거부하는 명쾌한 해답이자, 그것은 긴박한 현실주의를 거부하는 명료한 자기신념의 관철이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다.

 

14년간의 망명의 최종적 의미는 공자에게 있어서 삶의 좌절이었다. 공자는 결코 자기의 이상을 실현해 줄 수 있는 현세적 군주를 만나지 못했다. 논어의 첫머리에 인불지이불온이라는 자부감의 반면에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회한과 통탄이 숨어있다. 14년간의 유랑을 점철하는 기대와 좌절의 숨가쁜 연속은 공자에게 하나의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것은 자기 이상의 긴박한 현실적 실현의 꿈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타협이나 양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상의 환영의 거품, 그 자체의 말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상의 포기가 아닌 이상의 비약이었다. 그 비상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죽음의 체험이었다. 광에서의 구류, 송에서의 박해, , 채에서의 두절과 굶주림......... 이모두가 끊임없는 삶과 죽음의 기로였다.

 

공자의 삶은 죽음의 세계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죽음의 세계를 탈출하여 삶의 세계로 진입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자기존재에 대한 자의식이 생기고 난 후부터 공자는 철저히 삶의 의미를 물었다. 자기가 오늘 여기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그 현실적 의미를 확실히 알고 싶어했다. 그 현실적 의미의 전부를 그는 한때 정치적 실현(political realization)에 두었다. 그러나 14년간의 유랑을 통해 그는 다시 죽음의 세계를 체험한다. 그가 다시 체험한 죽음의 세계는 더 이상 송인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소인유의 세계가 아니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을 죽음을 포괄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새로운 자각이었다. 삶과 죽음이 새로운 하나의 지평으로 융합되는 사문의 세계였다. 그것은 그윽히 넓고 깊은 무한한 생명의 발출이었다. 그는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정치적 실현이 아닌 인간정신의 내면적 고양의 새로운 계기들을 발견한 것이다.

 

14년간의 유랑이란 결국 계씨에 대한 반항에서 계씨에 대한 굴복으로 끝난 매우 평범한 정치적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유랑의 세월을 통해 공자는 진정한 성인으로서 종심소욕불유구의 자유인으로 비상하였던 것이다. 그가 다시 노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제 더 이상 정치적 꿈을 꾸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만인에게 국부 이상의 외경의 대상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이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 것처럼 14년 유랑을 전후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고 나는 생각한다. 논어에 실린 공자의 사상의 틀의 대부분은 망명생활이 끝난후, 대강 68세부터 73세까지 4, 5년에 걸친 말년의 생각이 그 골간을 이루는 것이다. 거기에는 천과 명, 인간의 종교적 심성, 그리고 감관에 잡히지 않는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나 관용이 깃들어 있다. 그 모든 것은 논어 그 자체가 말할 것이다. 공자는 죽을 때, 자신이 은나라 후예의 사람임을 확인하고 죽었다.

 

관을 안치할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은나라 사람들은 양쪽 기둥 사이에 안치한다. 그런데 어젯밤 꿈에 나는 양쪽 기둥에 않아 사람들이 분향을 하고 제삿밥을 올리는 것을 받았다. 나는 역시 은나라 사람이다.(구야은인야) 이제 곧 나는 죽을 것이다.(단궁 상)

 

귀노 후 얼마 안 있어 아들 백어가 죽었다. 그리고 또 가장 총애하던 수제자 안회가 죽었다. 그리고 평생의 반려 자로가 죽었다. 공자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을 먼저 저 현묘한 세계로 떠나보냈다. 안회는 초기제자 안로의 아들이었다. 안로는 자로보다도 나이가 세살이나 위였다. 그런데 자로는 바로 곡부성내 공자 모친이 살았던 동네의 사람이었다. 공자의 집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안회는 어린 시절부터 공자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안회는 공자의 그늘 속에서 태어났고 공자의 훈도 속에서 성장했고, 어린 나이에 공자 슬하에 입문하여 삼천 제자 중에서 학덕으로는 비견할 자가 없는 인물이 되었다. 안회의 아버지 안로는 매우 무능하고 지더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안회는 빈천한 환경속에서 컸다. 안회는 체직적으로빈천에 익숙한 인간이었다. 안회는 평생을 빈천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성장기가 빈천했고, 문하생이 된 후로는 고난의 장정을 줄곧 갚이 했고, 그리고는 곧 죽었기 때문이다. 안회가 요절한 것도(공자의 관념속에서 요절한 것이지 실제로 그다지 요절도 아니다), 14년의 유랑기간 동안에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로가 한 사발을 먹을 때, 안회는 주먹밥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 채에 갇혀 모두 굶주리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진재지액). 매우 구슬픈 정경이 하나 논형 지실 편에 기록되어 있다. 안회가 공자를 위하여 밥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먼지가 한웅큼 폭 떨어졌다. 다시 지을 수도 없는 일, 안회는 안절부절했다. 그렇다고 모처럼 지은 귀한 밥을 내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안회는 생각타 못해 먼지떨어진 부분의 밥을 더서 자신이 먹어버렸다. 이때 공자는 멀리서 바라보고는 내심 안회가 배가 고파서 남몰래 밥은 먼저 훔쳐먹는 것으로 생각했다.(공자망견이위절식) 안연이 밥을 다 지어 공자에게 정성스럽게 들고 왔을 때, 공자는 모르는 체 하면서, 먹는 것은 청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에둘러 말했다. 그러자 안회는 공자가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금방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자기가 먼지떨어진 부분을 먹어치운 사정을 이야기했다. 공자는 오해임을 깨닫고는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 얼마나 인간적인 정경인가? 공자도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사랑하는 제자가 밥을 훔쳐먹는다고 고깔스럽게 생각했을까? 아마도 안회는 영양실조에, 요즈음 말로는 암 같은 것으로 죽었을 것이다. 자로는 공자말을 뒤받기가 일쑤였다. 안회는 단 한번도 공자의 말씀대로 실천 안 한 바가 없고, 공자에게 단 한 번도 거역의 언행을 시도한 적이 없다. 그리고 공자도 안회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다. 그러니 안회는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살았을 것이고 그것이 결국 암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공자는 안회를 편애했다. 공자의 안회에 대한 총애의 도수는 지나치다. 그리고 안회가 죽은 후 공자가 몇 년을 못 살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논어 전편을 통해 죽은 안회에 대한 공자의 회상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논어가 공자의 지극한 말년의 언행의 모음집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공자의 안회에 대한 편애에는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니산의 꽃동산에서 공자를 키웠던 엄마 안씨녀의 진상이 겹쳐있을지도 모른다. 공자 17세때 상여가마를 어께에 매어야만 했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안회의 내성적이고 소극적이고 고요한 인품 속에 잔잔히 비쳐있었을 것이다. 안회는 두말할 나위없이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안회의 죽음은 곧 공자의 인의 사상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의 학문은 안회와 더불어 죽고, 공자라는 인간은 자로와 더불어 죽은것이다. 결국 공자는 현세에 세속적으로 남긴 바가 없다. 공자와 더불어 모든 것이 단절된 것이다. 향후의 모든 출발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었다. 그것이 곧 공자의 축복이었다. 그것이 오늘의 논어를 보다 잡하고 보다 생생하고 보다 여백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는 말한다. 공자의 삶은 미완성 교향곡이었다.

 

나는 논어를 선이라고 생각한다. 유생들은 또 이게 뭔 망발이냐고 다꾸칠지 모르겠으나 선이란 본시 언어가 단절되는 곳에서 피어나는 모든 깨달음의 통칭이다. 인과적 고리가 단절되는 절대적 경지에로의 도약인 것이다. 대승불학이 당초로부터 중국언어의 외투를 빌렸기 때문에 격의불교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격의의 종국이 선이었다고 한다면, 그 선의 원형, 그 조형은 인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중국 문명에 내재하는 것이요, 중국언어에 심재하는 것이요, 중국마음(Chinese Mind)에 고유한 것이다. 그 중국마음의 조형이 곧 논어라는 서물이다. 논어는 맹자와 같이 논쟁을 벌이지 않는다. 논어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경귀일 뿐이다. 그것은 계발의 단서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노년의 공자의 심경이었을 것이다. 남에게 강요함이 없이, 현실에 대한 긴박한 기대감이 없이, 긴박한 파루시아(재림)에 대한 환상이 없이,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타인의 계발(Enlightenment)을 위하여 툭 툭 던졌다. 논어는 논쟁이 아니요, 계발이다. 그것은 무한한 논리의 시작이요, 끝이다. 논어는 선사들의 말장난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더 일상적으로 인간을 대각으로 인도하는 선어인 것이다. 나는 말한다. 논어는 선이다. 정자의 말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금인불회독서. 여독논어, 미독시, 시차등인. 독료후, 우지시차등인, 편시불증독.

 

요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을 모른다. 논어을 읽으매, 읽기 전에 이런 놈이었는데, 읽은 후에는 이런 놈일 뿐이라면, 그 놈은 전혀 논어를 읽은 사람이 아니다.

 

논어는 선이다. 논어는 그냥 읽으면 아니된다. 사도 바울 선생의 말씀대로 항상 마음이 새로와지는(transformed by the renewal of your mind, 로마서 12:2) 깨달음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논어는 트란스포메이션인 것이다. 읽기 전에도 이놈이고 읽은 후에도 이놈이라면 전혀 트란스포메이션이 없는 것이다. 논어는 선적인 대각인 것이다.

 

또 내가 좋아하는 정자의 말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독논어, 유독료전연무사자; 유독료후, 기중득일양구희자; 유독료후, 지호지자; 유독료후, 직유부지수지무지족지도지자.

 

논어를 읽으매, 어떤 자는 읽고 나서도 전혀 아무 일이 없었던 것과도 같다. 어떤 자는 읽고나서 그 중의 한두 구절을 깨닫고 기뻐한다. 또 어떤 자는 읽고 나서 참으로 배움을 즐기는 경지에 오르는 자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읽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기뻐 발을 구르는 자도 있다.

 

수지무지족지도지(출전은 예기 악기) 이것은 선의 엑스타시요, 깨달음의 환희다. 이제 우리는 지적 희열에로의 기나긴 여행을 시작해보자! 손으로 춤을 추고 기뻐 발을 동동 구르자!

 

논어집주서설

 

 

나의 해석학적 입장

 

해석(Interpretation)은 이해(Understandng)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해석의 과정에는 매우 중층적이고 복잡한 이해의 구조가 얽혀있다. 지금 내가 해석하려는 것은 논어라는 텍스트다. 현존하는 나의 논어 텍스트는 이미 선진시대에 성립한 것이다. 최근에 묘혈에서 나오는 간백의 문자들로 미루어 생각해 볼때 거의 상응되는(identical) 문자체계의 고본이 양천여년 지속성(continuity)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해에 얽힌 주체들은 시공에 따라 다르지만 이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텍스트 그 자체는 동일성을 유지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참으로 서양문화권에서는 흔히 있기 어려운 현상이다. 희랍텍스트나 에집트 텍스트는 이미 사어화된 반면 한문 텍스트는 활어로서 역사적 삶속에서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 춘추전국시대의 중국대륙의 사람, : 21세기의 한국인인 나

 

논어의 성립과정 자체가 역사적이고 복잡한 삶의 관계속에 있기 때문에 그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일단 공자라는 역사적 개인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단순화해서 상정해보자! 이때 공자는 발신자(source)가 된다. 공자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공자라는 발신자의 언어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 전의 산동반도의 곡부지역에서 소통되고 있던 언어체계였다(당시의 방언은 지금 정확하게 재구되기 어렵다). 그러데 인간의 언어의 발설은 반드시 타인의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발신체계는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이나 제자들에 의하여 이해되었던 것들이다. 나는 말한다. 인간의 언어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해되기 위한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언어가 아니다.

 

논어는 공자라는 발신자가 그 발설된 상황에 있던 제자들이라는 수신자(receptor)에게 던져진 멧세지(message)인 것이다. 그 멧세지를 어느 기자가 문자(the written form)의 형태로 기록한 것이 바로 논어인 것이다. 이것이 곧 논어(the Analects)1차적 이해의 구조를 형성한다.

 

공자: S1 ----------------- 논어: M1 ---------------------> 제자: R1

:

:

기자: W1 --------------------> 논어: A

 

그런데 내가 지금 논어를 읽는다고 하는 행위는 이러한 1차적 이해의 구조와는 또 다른 차원의 구조를 갖는 것이다. 나는 2500년 전의 수신자(R1)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같은 멧세지를 2500년 후에 수신하는 사람(R)이다.(보다 정확하게는 M1을 직접 수신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W1]의 해석을 거친 A를 수신하는 것이다.)

 

공자: S1 ------------ 논어: M1 ------------ 제자: R1 <---------------------------------------------------> : R <-------:

: 2500년의 시간, 산동과 조선의 공간 :

: :

:----------------------------------------------------------------------------------------------------------:

 

그런데 나의 수신은 나흘로의 이해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신자(R)인 동시에 발신자(S2)가 된다. 나는 나의 이해를 나와 동일한 시공에 사는 사람들, 나의 제자들(R2)에게 전달하는 행위를 통해 나의 이해를 확인한다. 이것이 바로 나를 둘러싼 2차적 이해의 구조이다. 이 두 차원의 이해의 구조를 간단히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S1 ----------------- M1 ---------------------------> R1

:

:

:-------------------------------> R / S2 ------------------- M2 ---------------------> R2

발 신 자 언 어 수 신 자 언 어

 

여기서 S1R1의 사이는 기본적으로 일국어 통용의 체계(monolingual)이다. 그러나 나( R / S2)는 반드시 2개국어화자(bilingual)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또다시 S2R2 사이는 일국어통용의 체계이다. 공자의 언어통용체계는 네모꼴로 나의 언어통용체계는 원형으로 표시되었다.

 

위의 도식에서 M1R1의 관계와 M2R2의 관계는 제각기 상이한 문화권 속에 있다. 언어와 풍습과 제도와 관습을 달리하는 각기 다른 독자적 장에 놓여있다. 이 각기 다른 장을 다른 삶의 양식(Lebensform)으로 이해한다면, 삶의 양식은 보편적 공통성과 상대적 상이성의 양측면을 동시에 보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논어의 이해의 궁극적 의미가 M2R2의 관계에 집중되어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딜타이류의 주관주의(subjectivism)에 빠진다. 내가 말하는 이해는 주관주의로써도 객관주의로써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해석 그 자체가 이상적인 기준(M1 -- R1), 현실적인 기준(M2 -- R2)도 아닌 어떤 새로운 역동적 객관성을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번역(translation)이란 구극적 나의 실존적 이해의 구조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은 M1M2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다.

 

X

공자의 멧세지: M1 ---------------------------------------> 나의 멧세지: M2

번역

 

그런데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2개국어 화자의 번역행위를 지칭한다. 그것은 축어적 일치성(verval consister)이나 양식적 상응성(formal correspondence)을 지향하는 번역행위이다. 나는 이러한 번역과 그 번역에 깔린 이해의 구조를 혐오한다.

 

내가 말하는 번역이란 M1에서 M2로의 일방적 전환이 아니라, M1R1사이에 성립하는 반응의 체계(System of Response), M2R2사이에 성립하는 반응의 체계 사이의 상응성이다. 상응성은 동일성과 구분되는 것이다. 그것은 축어적 일치가 아닌 맥락적 일치(contextual consistency), 양식적 상응이 아닌 역동적 상응(dynamic equivalence)이다. 그리고 이 두 반응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쌍방적일 수 밖에 없다.

 

M1 <----- Respnse, 반응의 체계 -----> R1 M2 <------ Response, 반응의 체계 ----> R2

: :

: O :

:<--------------------------------------------------------------------------------->:

번역

 

이러한 번역의 구조가 곧 나의 이해의 구조며 이것이 곧 나의 해석학적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응의 관계가 쌍방적이라 사실을 좀 부연설명할 필요가 있다. 번역이 M1에서 M2로의 일방통행이라고 한다면 이때 M1은 절대적인 의미체계로서의 그 무엇이다. 그리고 M2M1라는 절대적 기준에 접근하는 도수로서만 그 가치서열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번역과 이해는 전혀 이러한 것이 아니다. 우선 나는 M1M2의 주체인 S1S2의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무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와 나는 다 같이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며, 시간적, 공간적 점이 아니다. 그것은 점이 아닌 면이며, 그 면은 수없는 관계로 착종된 면인 것이다. S1의 발설체계인 M1이나 S2의 발설체계인 M2는 그 자체로 고정적일 수 없으며, 그것은 오직 각기 R1, R2와의 관계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술어적인 것이다. M1, M2는 모두 주어적인 실체가 아니라 술어적인 상태이다. 따라서 역동적 상응이라고 하는 것은 M1-R1의 반응체계라고 하는 이해의 지평과 M2-R2의 반응체계라고 하는 이해의 지평 사이에 융합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두 반응체계는 상응되는 관계를 통해 나의 이해의 지평속에 출현(emergence)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 두 반응체계가 비록 2500년의 시간을 격하고, 황해라는 공간을 격하고 있을지라도, 그 반응체계 자체가 궁극적으로 실체적, 주어적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비실체적으로, 술어적으로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해석의 지평은 열려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지평간의 융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2500년전의 공자(S1)와 제자(R1) 사이의 반응의 체계는 학문적으로 역사적으로 축적된 주소학의 성과를 통하여 그 객관적 실체성을 전제할 수는 있지만, 그 실체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적이며, 따라서 유동적이고 상황적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나는 술어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사실 공자와 제자 사이의 반응의 체계의 실재는 구극적으로 불가지론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 불가지론을 가지론으로 끊임없이 극복하는 과정이 곧 지평의 융합이요, 해석이요, 이해다.

 

나는 언어를 논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는 느낌(Feeling)일 뿐이다. 논리도 느낌의 반복적 정형일 뿐이다. 언어는 논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의 총체성을 전달키 위한 것이다.

 

나의 번역에는 다음의 5가지 우선의 체계가 있다.

 

1. 맥락적 일치성이 축어적 일치성에 우선한다.

2. 역동적 상응성이 양식적 상응성에 우선한다.

3.언어의 청각적 형태가 문어적 형태에 우선한다.

4. 번역이 의도하고 있는 대상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고 쓰여지는 양식이 전통적으로 더 권위있는 양식에 우선한다.

5. 삶의 총체적 느낌이 형식 논리적 의미에 우선한다.

 

이상의 논의는 나이다와 타버의 번역의 이론과 실제를 참고하였다.(Eugene A. Nida and Charles R. Taber, The Theory and Practice of Translation, Published for the United Bible Societies by E. J. Brill, Leiden 1974.) 나의 책, 도올논문집(통나무, 1991)에 본서의 우리말 번역이 실려있다.

 

범례

 

1. 주자집주본의 원문을 기본텍스트로 하고 그 장절의 구분을 따른다. 제임스 레게(James Legge)의 영역본 번호와 동일하다. 집주판본은, 사서대전을 우리나라 조선왕조에서 간행한 정유자(1777) 내각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2. 해석의 지평이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은 나의 소신이다. 나는 논어 텍스트에 대한 어떤 독단도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주와 소, 금주를 막론하고 역사적 주석의 모든 지평들을 수용할 것이다. 나는 동경대학 유학시절에 토가와 요시오(호천방랑)선생 밑에서 소라이(적생조협)의 논어징을 감명깊게 읽었다. 그때 논어징을 같이 읽은 동반동학이 현 동경대 쿠로즈미 마코토(흑주진)교수다. 대체적으로 나는 그의 설을 취하지는 않지만 다산의 논어고금주 보다는 나에게 주는 계발의 공이 컸다. 다산은 주자학과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지만 소라이나 진사이(이등인제)는 그러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진사이의 논어고의나 어맹자의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3. 금주의 약점을 보완하고 보다 고의를 충실히 살려내려고 노력한 청대의 유보남의 논어정의나, 북경대, 청화대에서 교편을 잡으며 일생을 논어 주석의 집대성에 힘쓴 정수덕(1877~1944)의 논어집석, 그리고 백화 번역본으로서는 가장 탁월한 양백춘의 논어역주, 정주한간본의 연구성과를 도입하여 새롭게 논어를 영역한, 에임즈(Roger T. Ames)와 로즈몬트(Henry Rosemont, Jr.)The Analects of Confucious: A Philosophical Translation(Ballantine Book, 1998)를 위시하여 20세가, 중국, 한국, 일본, 영어 문화권에서 배출된 방대한 연구성과를 될 수 있는대로 폭넓게 참작하려고 노력하였다.

 

4. 20세기 논어 고본에 관한 가장 주목할 만한 두개의 위대한 발견이 있다. 그 하나는 사라졌던 정현주(뻬리오가 감숙성 천불동 석실에서 반출해간 돈황문서와, 신강성 위구르지방의 토노번 당묘에서 발견된 복천수사본, 그리고 그 후에 발견된 잔편들)의 발견이다. 또 하나는 1973년 서한 중산회왕 유수의 분묘에서 출토된 정주한묘죽간본 논어이다. 이 두 문헌의 연구성과도 참작하였다.

 

5. 나의 평소 논어 이해는 요시카와 코오시로오(길천행차랑)선생께 사숙한 바 크다. 그리고 시라카와(백천정)선생의 공자전(중공총서, 1972), 브룩스(E. Bruce Brooks and A. Taeko Brooks)의 논어변(The Original Analects, N. Y.: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도 논어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많은 참신한 시각을 제공하였다. 시라카와 선생의 정신세계는 공자라는 한 인간의 내면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

 

학이 제일

 

논어의 편명이 정확히 언제 결정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상당히 일찍, 최소한 한대에 이르기 전에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름을 삼는 방식이 사실 백남준의 예술 못지않게, 아주 콘템포라리한 냄새가 난다. 그냥 무작위로 편의 맨 먼저 두 글자를 떼어낸 것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라는 문장에서 학이를 떼어낸다는 것은 사실 백남준의 플룩수스예술과도 같은 발상이다. 도무지 의미론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기호적 약속 이상의 그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편명이 일찍 정착되었다는 것은 매 편이 그 나름대로 독자적 편집체께를 지니고 있었으며 단행본으로 유통된 성격이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논어는 기본적으로 각편이 증식되어 쌓여 편집된 것이다. 관자의 첫 편의 이름은 목민이요, 장자의 첫 편의 이름은 소묘유다. 이것은 곧 그 편의 내용의 테마를 전체적으로 의미있게 나타낸 것이다. 논어의 편명과는 사뭇 다르다. 논어가 이렇게 편명이 자의적인 기호체계가 된 것은 아마도 그 내용이 단편들(fragments)의 꼴라쥬며, 그 단편들 사이에 아무런 통일적 성격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팔일편과 같이 아주 균일하게 예락이라고 하는 테마를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의도적으로 편집된 경우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된다. 카오스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카오스적인 단편속에서 우리는 코스모스적 질서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이와 같은 식으이 편명작법의 예를 시경과 맹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학이편은 매우 기분나쁜 편이다. 이 편은 사실 논어의 첫머리에 와서는 아니되었을 편이다. 다행스럽게도 맨 처음에 온 제 1장의 공자말을 빼놓으면, 대부분이 진부하고 도식화된 공자의 후기제자들의 말들이다. 유자의 본입이도생이니, 효제가 인지본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은 너무 개념적인 조작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말들이며 생생한 공자의 살아있는 모습을 전혀 전달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학이편이 천하제일지서인 논어의 관을 차지하는 바람에 논어에 대한 인상이 도식화된 가족주의적 규범윤리, 그리고 복종만을 강조하는(범상은 안된다) 권위주의적 노모스로서 왜곡되었다. 우리 조선조 유생들의 통폐가 모두 이렇게 잘못 편집된 논어의 체계에서 유래된 것일 수도 있다. 이 편은 논어 전편 중에서도 매우 후대에 성립한 것으로 보여진다. 브룩스는 이 편을 위령공 제 15와 계씨 제 16 사이에 집어넣고 있다.

 

집주 차, 위서지수편. 고소기다무본지의, 내입도지문, 적덕지기, 학자지선무야. 범십육장.

 

1-1. 자왈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1-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배워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뜻을 같이 하는 자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도주 자왈이라는 표현은 논어에서 모두 예외없이 공자님께서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이때 자라는 것은 제자들이 아마도 선생님을 높여 부른 말이다. 이것 또한 매우 특이한 용법이다. 아마도 공자 이전에는 자라는 것은, 특별한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었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의 자의 첫 글자가 자로 시작하는 예가 많은데, 아마 그것도 그런 과거의 신분적 유습이 보편화된 특수한 상황으로 여겨진다. 논어로부터 자의 의미가, 본격적으로 오늘날의 master, teacher 으 뜻을 갖는 맥락으로 통용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다음 구적의 유자왈 과 같은 표현도, 그것은 유약의 제자들이 그를 선생님으로 모시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표현이다. 자왈(공자왈)과 구분키 위하여 유자왈이라고 한 것이다.

 

논어의 관을 차지하는 이 말은 얼핏 생각하면 매우 진부하게 들린다. 배워서 예습, 복습 잘 하니 기쁘다는 얘기가 뭐 그다지도 위대한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요한의 말이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창세기의 말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하고 비속하고 진부하고, 너무 일상적인 쇄사로 들린다. 여기에 우리는 해석학적 인식의 지평의 문제를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공자 전기작가들이 이 세마디의 함축적인 공자의 말을 공자의 청년시절, 그러니까 왕성하게 공부하려고 하던 시적의 의욕이 넘치는 언급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은 공자의 전생애를 압축시킨 공자말년의 달인적 회상으로 풀이한다. 대철인이 죽기전에 그의 생애에 대해 남긴 매우 함축적인 언사였을 것이다. 이 언급이 바로 유자(36세 혹은 43세 연하)니 증자(46세 연하)니 하는 공자말년의 어린 제자들의 말과 같이 편집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준다.

 

여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공자의 학의 의미는 반드시 일차적으로 공자라는 발신자(S1)와 수신자인 그 제자들(R1) 사이에서 통용된 이해구조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지금 우리말로 공부하고 예습, 복습 잘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발신자(S2)와 오늘날의 수신자(R2) 사이에서 일어난 이해의 구조속에서 해석된 것이다. 단순히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고 하는 현재의 우리말의 멧세지(M2)가 의미하는 바는 모두 우리 현존재의 일상적 체험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밥먹고 학교에 가고 학교에 가서 영어, 수학 공부하고 집에 와서 예습, 복습 잘하다가 언뜻 뭔 뜻인지 깨달음이 올때 즐거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옆의 친구나 엄마에게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를 외친다면 과연 그것이 정당한 논어의 이해가 될 것인가?

 

오늘 나의 논어 이해는 분명 나의 체헙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체험의 의미체계는 반드시 공자와 공자제자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M1R1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어떤 상황에 맥락적으로 상응되는 방향으로 해석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M2 <------------------ 반응 -----------> R2 M1 <------------------ 반응 ------------>R1

: :

: 상응 :

:------------------------------------------>:

<해석>

 

공자는 분명 나처럼 학교에 다니고 학점을 따고 입시를 걱정하고 박사학위를 딸 생각을 했던 사람은 아닌 것이다. 공자는 기존의 어떤 커리큐럼이 존재하고 그 커리큐럼이 규정하는 제도권내에서 배움을 지향한 사람이 아니다. 공자가 말하는 학이란 바로 학이라는 의미의 창출 그 자체인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의 학이란 무지로부터의 탈출이며 미지의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이다. 그리고 그가 십유오이지우학이라 했을 때의 학은 분명히 구체적인 예라는 미지의 대상을 갖는 것이었다. 과연 예가 무엇이냐? ! 그것을 알아보자!

 

공자의 일생을 통해 추구한 학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학문(wissenschaft)이 아닌 예, , , , 수 로 통칭되는 육예를 말한 것이다. 그것이 문, 무의 구분이 전혀 없는 매우 실용적인 개념이라는 것은 이미 도서에서 상설한 바와 같다. 이러한 육예를 전제로 다음의 구절이 분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학어시습지라 할때, 우선 갈지가가 정확하게 학을 반복하여 목적으로 받은 지시대명사가 아니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구어의 리듬에서 발생한(논어의 문제는 당대의 구어였다) 막연한 조사에 불과한 것이다. 습은 학과 병치되는 독립된 개념이다. (익힌다)이라는 것은 학이 미지의 세계로의 던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실천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천은 반드시 때()를 갖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논어를 피상적으로 읽어, 시습지를 때때로 익힌다.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크게 잘못된 해석이다. 여기서 시란 때때로(occasionally)의 뜻이 아니라 때로 때에 맞추어(timely)의 뜻이다. 율곡이 이를 훈하여 이르기를:

 

자고로샤데 학하야 시로 습하면 또한 열홉디아니랴!

 

율곡이 시로 습하면이라 한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다산은 때에 맞추어로 해석한 황간의 소를 박하여 줄곡 계속하여 익힌다(시시습지)의 뜻으로 새기고 있으나, 내가 생각컨대 다산이 틀린 것이다. 황각의 설이 더 적확하다. 다산의 고금주는 때로 발명하는 바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너무 사소한 문제에 구애되고 있고 대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애석한 일이다. 문무가 통합된 육예를 익히는 과정이란 반드시 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린 아이가 서, 수를 할 수는 있으나 사, 어 를 할 수는 없다. 장년이 되어도 여름의 맑은 날씨에 말달리고 활을 쏠 수는 있으나 추운 겨울날씨에 빙판에서 말달리는 일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황간은 신중시, 년중시, 일중시의 삼시를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배움의 익힘이란 내 몸의 상태, 즉 유, , , , , 기 등의 모든 상태에 따라 그 익힘의 형태가 달라질 것이요(신중시), 또 계절의 형태에 따라(년중시), 또 하루 중에서 아침, 점심, 저녁에 따라(일중시) 익힘이 달라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용의 가르침이요, 역의 가르침이요, 노자가 동선시라 말한 바요, 맹자가 성지시라 한 뜻의 시일 것이다. 때를 잘못 타서 배우고 익히면 그것이 병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평생을 통해 때를 맞추어 끊임 없이 정진하여 삶의 기쁨을 만끽했다는 뜻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 한 뜻이 어찌 요즈음 어린 수험생들의 학습에 비유할 수 있으랴!

 

불역열호라 한 구문에서역의 뜻도, 딴 즐거움도 있는데 이것 또한 즐겁다라는 식으로 새기면 안 된다. 여기서 역이란 자기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남에게 전달하고 남의 동의를 얻고자 하는 강조의 뜻으로 새겨야 한다. 그것은 생대적인 역이 아니라 기쁨의 절대적 경지를 구가하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구문의 불역낙호의 락과 첫 구문의 열은 어떻게 다른가? 반드시 명료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열 = 열 은 나의 실존적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뜻이요, 락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즐거움을 표현한 말로 보아야 한다. 열은 즉자적이요, 락은 대자적이다.

 

유붕자원방래라 할때 유붕의 유는 잘 해석이 되질 않는다. 우붕이라고 한 텍스트도 있음으로 아마도 우붕으로 고쳐 읽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필사과정에서 자형상 유와 우는 쉽게 혼동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달리 생각하면, 시경의 유붕 유주의 용법처럼 별 의미 없는 접두어일 수 도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붕의 해석이다. 이 구문의 뜻 또한 S2-R2 간의 좁은 인식체계에서 해석될 수 없다. S1-R1의 오리지날한 인식체게로 환원시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물론 공자의 삶의 전체의 조망이다. 여기서 공자는 친구가 먼곳에서 찾아오니 즐겁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랫만에 타지에 가 있는 동창생이 찾아와서 그 날 저녁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유붕자원방래면 불역낙호야 하고 고달픈 세파를 안위하는 그런 자위의 탄성이 아닌 것이다.

 

공자는 인생을 통하여 학에 대한 자각의 년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자기 삶의 현세적 의미를 철저히 추구하였다. 공자에게서 그 실존의 추구가 역사속에서 위대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공자 개인의 내면의 차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추구되었다는데 있는 것이다. 바로 공자의 교단은 학을 위한 최초의 자발적 집단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의 전형을 정립했던 것이다. 여기서 발하는 붕이란 우리말의 단순한 친구(friend)가 아니다. 붕이란 고금의 주소가 다 지적하고 있듯이 붕당이요, 동문이요, 동지다. 그것은 개인적 친구가 아니라, 학을 위하여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붕이란 실제로 그의 학단을 구성한 제자들이었다. 공자에게 있어서 붕이라는 의미는 친구와 제자의 명료한 구분이 없었다. 자로는 제자이자 친구였다. 어린 안회도 제자이자, 그에게 무한한 깨달음을 일깨워주는 벗이었다. 이런 동지들이 큰 뜻을 위하여 배움을 위하여, 정치적 개혁을 위하여 사방에서 모여든다! 어찌 즐겁지 아니할 수 있으랴! 그런데 문제는 원방의 해석에 있다. 여기서 원방(먼 곳)이란, 노나라 도성내의 사람들만이 아닌 먼나라 사람들까지 찾아온다는 뜻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공자의 제자들은 위나라, 송나라, 제나라, .....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그러나 원방의 더 중요한 의미는 국과 국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국을 벗어난 비야의세계, 즉 편벽한 서인의 세계까지를 포함해서 말한 것이다. 즉 자로와 같은 변의 야인들도 찾아왔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공자의 유교무류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실현을 위하여 배움을 같이 하는 붕당이 형성되었다는 것, 공자의 인생을 회고할 때, 가장 큰 즐거움이엇을 것이다.

 

인불지이불온에서 인은 남(타인)의 뜻이다. 옛말에서는 인은 기(자기)와 대비되는 말이다. 부지는 단순히 알아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자의 인생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해줄 명군을 만나기 위하여 주유한 삶이었다. 결국 인부지란 뜻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할때, 정치적으로 등용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된 소인으로서 마감한다는 뜻이다. 은이란 단순히 부끄러운의 뜻이 아니라, 하안의 말대로 속에서 치밀어 오느는 분노(, 노야.), 일본말로 우라미, 우리말로 한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여한이 없다! 왜냐? 바로 군자됨을 추구했기 때뭉디라는 것이다.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는 이러한 맥락에서 요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치적 실현과 군자라고 하는 도덕적 이상과의 갈등 사이에서 궁극적으로 공자는 군자라는 도덕적 이상을 선택한 것이다. 이 마지막 구문을 역설적으로 뒤집는다면, 공자의 일생은 분노와 한에 찬 인생이었다. 알아주는 이 없이는 고독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최후의 위안은 바로 자신이 군자요 대인유라고 하는 자부감, 즉 소인으로부터의 탈출의 기쁨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렇게 본다면 이 세 병치되는 탄성처럼 공자의 인생의 토탈리티를 그려내는 명구는 없다. 후속되는 학이 편의 내용이 제자들의 졸한 언급임에도 불구하고 학이편이 논어를 관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세마디 때문일 것이다.

 

집주 설, 열동. 학지위언, 교야. 인성개선, 이각유선후, 후각자필교선각지소위, 내가이명선이복기초야. , 조수비야. 학지불이, 여조수비야. , 희의야. 개학이우시시습지, 즉소학자숙이중심희설, 기심자불능이의. 정자왈: , 중습야. 시복사역, 협흡어중, 즉설야. 우왈: 학자, 장이행지야. 시습지, 즉소학자재아, 고열. 사씨왈: 시습자, 무시이불습. 좌여시, 좌시습야: 입여제, 입시습야.

, 음낙. , 동류야. 자원랑래, 즉근자가지. 정자왈: 이선급인, 이신종자중, 고가락. 우왈: , 재심; , 주발산, 재외. , 우문반. , 함노의. 군자, 성덕지명. 윤씨왈: , 재기; 지부지, 재인. 하온지유? 정자왈: 수락어급인, 불견시이무민, 내소위군자. 우위, 급인이락자, 순이역; 부지이불온자, 역이난. 고유성덕자능지. 연덕지소이성, 역유학지정, 습지숙, 설지심이불이언이. 정자왈: , 유설이후득. 비락, 부족이어군자.

 

1-2. 유자왈: 기위인야효제, 이호범상자, 선의; 불호범상, 이호작란자, 미지유야. 궂자무본, 본립이도생.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1-2. 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 사람됨이 효제스러우면서도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드물다.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있어본 적이 없다. 군자는 근본을 힘쓴다. 근본이 서면 길이 생겨난다. 효제라고 하는 것은 실천하는 근본일 것이다.

 

도주 이것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 유약의 말이다. 유약이라하지 않고 유자(Master You)라고 한 것은 유약을 스승으로 모시는 집단에 의하여 그렇게 기록되었음을 말해준다. 정자를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이 그렇게 기록되엇음을 말해준다. 정자를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이 그 많은 중니의 제자들을 칭함에 유독 증삼과 유약만을 자로 존칭했다는 사실을 들어 논어 자체의 편집이 증자와 유자 계열의 제자들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을 펴지만 그것은 편협한 생각이다. 아마도 증삼과 유약만이 공자 사후에 강력한 교단을 형성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곧 전체 논어 편찬의 주체세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유약은 공자보다, 13세 연하, 33세 연하, 36세 연하(공자가어), 43세 연하(중니제자열전)라는 제설이 분분하나, 나는 36세 연하라는 가어의 설을 취한다. 가어에는 그가 기억력이 뛰어났으며(위인강식), 고도를 숭상하였다(호고도)라고 말했을 뿐, 더 이상의 언급이 없다. 그런데 유약은 원래 노나라 사람이며 무인 출신이었다. 유약은 BC 487(노애공 8) 오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했을 때 노나라의 결사대 3백명 중의 한사람으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유약은 이때만해도 공자를 만나지도 못했고 아직 제자가 아니었다. 유약은 아마도 뒤늦게 자유를 통하여 공자문하에 들어갔을 것이다.

 

공자가 죽었을때 남은 어린 제자들은 어쩔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그래서 자하, 자장, 자유 등 중추를 이루고 있던 제자들이 제안을 했다. 아마도 유약은 공자처럼 키가 컸고 덩치가 좋았고 무장의 기품이 서렸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공자와 비슷하게 생긴 유약을 공자를 대했던 예로써 대하여 공자집단을 유지하자고 제안했다. 유약을 스승대리로 모시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소꼽장난 같은 발상이었다. 공자의 말년제자들의 발상의 유치함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러자 증삼이 버럭 화를 냈다.: 알될 일이다! 우리 공자선생님의 덕성은 저 맑은 한강과도 같고, 저 푸른 가을하늘의 태양과도 같다. 거기에 뭐 구질구질하게 덧붙이겠다는 거냐!

 

이것은 맹자 등문공 상4의 기록이다. 이것은 아마 공자 사후, 공자 교단의 리더십의 계승을 놓고 유약과 증삼이 갈등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재주는 고사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노나라 사람이었던 유약은 공분 집단을 어느 기간동안 리드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사마천의 제자열전에는 유약의 제자가 유약에게 교묘한 질문을 던졌는데, 유약이 대답을 못하고 어물쭈물하는 궁색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자 그 제자가 분연히 일어나 유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시요! 그 자리는 그대가 앉아 있을 자리가 아니요!(유자피지, 차비자지좌야.)라고 성토하는 장면이 매우 소상히 그려져 있다. 이 일화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유약은 내가 생각하기에 역부족의 인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유약의 말이 이 학이 편에만 세번 나온다. 모두 규범적인 예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예의 스페시알리스트였다. 그래서 같은 유파인 증삼과 라이벌 관계에 있었을지 모른다. 이 학이편 두째번 장에 나오는 유악의 생각은 공자의 인의 사상이 매우 규범윤리화된 후대의 타락상의 단초를 보여주는 것이다. 공자의 사상과는 이미 거리가 멀어져 있다.

 

효는 분명 부모와 자식간의 덕목이다. 그것은 종적(vertical)이다. 제는 형제간의 덕목이다. 그것은 횡적(horizontal)이다. 제는 횡적인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공손함(fraternal submission, Legge )을 나타내는 일반적 덕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유가의 생각은 바로 이러한 혈연적 관계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느낌을 모든 인륜의 덕성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까운 인간에 대한 선의를 확충해나가는 것이 모든 도리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입이도생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노자가 말하는 우주론적 근본원리로서의 도가 아니라, 인륜의 길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를 범상이니 작란이니 하는 따위의 논리맥락에 꿰어 맞춘 것은 별로 현명치 못하다. 유약은 머리가 좀 아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선의라고 할 때의 의는 강한 단정을 나타내는 조사이다. 그에 반해 제일 마지막 구절의 기위인지본여의 여는 단정을 주저시키는 조사이다. .......라고나 할까? 정도의 의문을 내포하는 서술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효제야자라고 살 때의 야자의 용법은 주어를 한 번 객관화시키면서 무게를 실리게 하는 조사이다. 우리말의 ...라고 하는 것은 정도에 해당되는 어기를 나타낸다. 그리고 미지유야는 미유지야의 지를 동사앞으로 도치시킨 것이다. 이것은 미라는 부정사를 강화시키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제일 마지막 구문,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에 관한 송유들의 재미있는 논의가 있다. 문제는 이 부분이 딴 판본에 효제지자, 기인지본여라고 되어 있어 발단되는 것인데, 이러한 타본의 논리를 따른다면 효제라는 덕목이 곧 인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즉 효제 그 자체와 인의 뿌리()와 가치상으로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효제라는 것은 구체적인 개별적인 덕목에 불가하다. 그렇다면 인의 핵심적 가치가 효제의 레벨로 격하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가 정자에게 묻는다.

 

효제가 곧 인의 근본이라면, 이것은 곧 효제를 통하여 인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효제위인지본. 차시유효제가이지인불?

 

이에 정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럴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라는 글자이다. 그것은 실천이다. 인을 실천하는 것이 효제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했을 따름이다. 효제는 인의 한 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라고 말하면 되어도, 막바로 인의 근본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대저 인은 성이요 체다. 효제는 용이다. 성중에는 인의예지 사단밖에는 없다. 성중에 효제라는 덕목은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은 사랑()를 주로 하고, 사랑이란 가까운 사람(혈연)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효제라고 하는 것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일 것이다. 라고 유자가 말한 것이다.

 

비야. 위행인자효제시. 효제, 시인지일사, 위지행인지본즉가, 위시인지본즉불가. 개인, 시성야; 효제, 시용야. 성중, 지유개인의예지사안이이. 갈사유효제래? 연인주어애, 애막대어애친. 고왈: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이미 소유들도 유약의 언급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 그자체가 아닌 위인이라는 표현에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인이란 결코 후대의 유자가 말하는 바 구체적 덕목을 고정적으로 실체적으로 지적한 바가 없다. 공자에게 있어서 인이란 정의 불가능한 것(the Undefinable)이며 한정불가능한 것(the Unconditioned)이며, 오직 삶의 유동적 현실속에서만 끊임없이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노모스(nomos)적 울타리에 갇힐 수 없는 것이다.(노모스[vouos]의 원뜻에는 가축을 사육하는 장소라는 뜻이 있다).

 

송유나 기타 주석가들의 문제는 바로 논어의 권위를 절대시한다는데 있다. 우리는 논어의 권위를 인정해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오직 인간의 권위만을 인정해야 한다. 이 유약의 언급은 근본적으로 공자사상을 잘못 이해한 공자의 아류, 어린 제자의 인식구조를 나타내는 저급한 언어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유약류의 인식구조가 논어와 공자를 형해화한 노모서적 세계로 몰고 갔고, 그 궁극점에 있는 것이 곧 예기의 곡예인 것이다. 그것은 장자가 혐기하는 바, 일욕지사의 곡례(세세한 예의 덕목의 나열)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점을 해결하지 못한 송유는 이를 체용론으로 바꾸어 도식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니 어찌 딱한 일이 아니겠는가?

 

() --- , -------- 효제

 

뿐만 아니라 인을 맹자가 말하는 사단의 일단으로 논의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한 논변이 아니리오? 공자가 말하는 인은 맹자가 양묵에 대하여 아폴로제틱하게 설정한 사단 즉 인의예지의 한 덕목으로서의 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단을 초월하는개념이며, 사단을 총괄하는 개념이며, 그것은 인성론적인 개념이자 곧 우주론적 개념인 것이다. 어찌 성속에 인의예지만 있고 효제는 없다 하는 구차스러운 말을 하고 있는가? 아니 인간의 성이라는게 무슨 인터넷 사이트와도 같은 것이래서 그 속을 검색해보니 무엇은 있고 무엇은 없다라는 식으로 논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참으로 유치하고 어리석고 졸열한 것이 송유의 주석이다!

 

다산 또한 이러한 송유의 오류를 근본적으로 벗어나고 있지는 못하나 공자가 말하는 인의 가치가 효제라는 구체적 덕목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느냐에 관하여 비교적 차분하고 일리있는 말을 하고 있다. 한번 다산의 말에 귀를 기우려보자!

 

인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더불어하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스럽다는 것이 곧 인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어버이와 자식간의 두 사람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형을 섬김에 공경스러운 것이 곧 인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형과 아우 사이의 두 사람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임금을 섬김에 충성스러운 것이 곧 인이 되는 것이니, 그것은 임금과 신하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백성을 지도하는데 인자스러운 것이 곧 인이 되는 것이니, 그것은 지도자와 백성 사이의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부부, 붕우의 사이로부터 시작하여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 모두 인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효제가 그 근본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인자, 이인상여야. 사친효위인, 부여자이인야; 사형제위인, 형여제이인야; 사군충위인, 군여신이인야; 목민자위인, 목여민이인야. 이지부부붕우, 범이인지간, 진기도자, 개인야. 연효제위지근.

 

정약용은 구구하게 위 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송유의 해석방식을 취하지는 않으나 그가 말하는 이인상여는 인이라는 자형으르 분해하여 이인으로 푼 매우 상투적인 글자풀이에 기초하고 있다. 인의 고자형인 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두사람이 마주보고 있는 자형으로 풀이될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이 따뜻한 방석위에 앉은 모습이며, 온화롭고 따뜻한 사람의 모습이다. 인의 이 형태에 두 사람의 뜻이 없다. 그것은 임석온난의 뜻이며 그 의미로부터 유교의 최고덕목으로서 확대해석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해의 논의를 떠나 인이 두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다산의 관계론적 사유(Relational Thiking)는 정당하다. 인간을 고립된 존재로 파악하지 않고 간의 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동양적 인간론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러나 다산의 문제점은 그러한 관계론적 사유가 기껏해야 인간중심주의적이고 또 에토스(ethos)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은 분명히 관계론적인 것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 인적 관계, 물적 관계, 우주론적 관계의 총상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성격이 윤리적인데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공자의 인은 윤리적인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윤리적(ethical)이라기 보다는 감성적(Feeling-orientical)인 것이요, 감성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심미적(esthetical)인 것이다. 그것은 이성적 판단에 기초한 도덕적 요구(postulation)가 아니다. 다산의 논어는 너무 지나치게 이성적인 측면에 치우쳐 있다. 그는 조선 유학의 특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도 결국 심의 토탈리티와 관계되는 것이요, 어떤 이나 성적인 측면만을 척출하여 낸 것이 아니다.

 

집주 네, , 개거성. , 상성. 하동. 유자, 공자제자, 명약. 선사부모위효, 선사형장위제. 범상, 위간범재상지인. , 소야. 작란, 즉위패역정투지사의. 차언인능효제, 즉기심지순, 소호범상, 필불호작란야.

, 평성. , 전력야. , 유근야. 인자, 애지라, 심지덕야. 위인, 유왈행인. 여자, 의사, 겸퇴불감질언야. 언군자범사, 전용력어근본. 근본기립, 즉기도자생. 약상문소위효제, 내시위인지본. 학자무차, 즉인도자차이생야. 정자왈: 효제, 순덕야. 고불호범상, 기복유역리난상지사? 덕유본. 본립, 즉기도충대. 효제행어가, 이후인애급어물, 소위친친이인민야. 고위인, 이효제위본. 논성즉이인위효제지본. 혹문: 효제위인지본, 차시유효제가이지인불? : 비야. 위행인자효제시. 효제, 시인지일사, 위지행인지본즉가, 위시인지본즉불가. 개인, 시성야; 효제, 시용야. 성중, 지유개인의예지사자이이. 갈사유효제래? 연인주어애, 애막대어애친. 고왈: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1-3. 자왈: 교언영색, 선의인!

 

1-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말 잘하고 표정을 꾸미는 사람치고 인한 이가 드물다.

 

도주 이것과 완전히 동일한 구문이 양화편에 중출하고 있다(17-17).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공자의 어록중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어떤 조형적 파편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 조형적 파편이 학이 편의 기자에게 또 양화 편의 기자에게 공유된 것이다.

 

공자의 교언영색에 대한 혐오는 단순히 우리가 일상적인 콤멘트로 이해해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공자의 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핵심적인 인식론적 틀을 나타내는 중요한 발언이다. 교언이란 문재 그대로는 교묘한 말이다. 영색이란 문자 그대로 요염한 안색 정도의 의미가 된다. 색은 때때로 여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기미, 분위기, 발출되는 표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너무 공자를 유가, 즉 유교철학이라고 하는 선입적 편견 속에서 해석하는데 익숙해 있다. 공자는 단 한번도 유교를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인간을 말했고 삶을 말했을 뿐이다. 따라서 공자라는 인간의 생각 속에는 유, , 도의 모든 면모가 엿보인다. 그에게는 양묵도 맹순도 한비도 다 들어있는 것이다. 정통과 이단의 터무니 없는 분별심 속에서 공자를 읽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교언영색은 분명 인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의인이란 표현은 본시 인선의를 도치시킨 것으로 선(드물다)이라는 술어를 강화시킨 것이다. 선은 소와 성모를 같이 하고 있다. 통자이다. 인은 교언이나 영색으로는 절대 잡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덕목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데 대한 깊은 불신을 나타낸 것이다. 언어적 표현의 교묘함에 대한 깊은 저주를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노자가 도경의 모두에서 도가도비삼도라 말한 것과 대차가 없다. 도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인 또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노자는 이것을 우주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말한 것이다. 공자는 이것을 일상적 삶의 느낌속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말 잘하는 자치고 인한 자가 드물다!

 

교언영색에 대한 공자의 혐오감은 바로 불립문자를 외치는 대승불학의 선의 정신의 조형적 가치관을 형성한 것이다. 동양인들은 말 잘하는 자를 평가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소피스트를 공자는 기피한다. 이인 편에서 공자는 이와 같이 말한다: 오직 인한 자래야 사람을 미워할 자격이 있다(4-3). 무엇을 미워하는가? 그것이 바로 교언영색인 것이다.

 

공야장에 보면 혹자가 공자의 제자 염옹을 평가하여 그는 인하되 말재주가 없다(불녕)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공자는 얼굴을 붉히며 분노하며 상기된 모습으로 외친다: 그 놈이 인한 지는 내가 알 바 없으되 도대체 말재주라는 것을 어디에다 써먹겠는가(5-4). 영옹이 인하다는 것을 공자는 함부로 허여할 수 없다. 인은 너무도 본직적인 인간의 덕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세속적 평가에 있어서 그가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은 인함()과 말재주 없음(불녕)이 이에 의하여 같이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인한 자가 말재주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인하다고 평가를 하는 동시에 말재주가 없다로 하는데 대한 유감을 표명할 수 있는가?

 

도대체 말재주(=교언)를 어디다 써 처먹겠다는 거냐! 이 바보 머저리 같은 놈들아! 그렇게도 내가 말하는 인의 의미를 못알아 듣느냐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명저 트락타투스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내고 있다.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remain silent.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 지어다.

 

전통적으로 이 말은 매우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즉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말하게 하기 위하여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배제시키고자 하는 반형이상학적(anti-metaphysical) 명제로 비트겐슈타인을 오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나의 궁극적 관심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 써 놓은 것이 아니라 여기에 쓰여질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여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신비롱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우주는 사실의 체계뿐 아니라 가치의 세계를 포괄한다. 상징적 표상의 세계뿐만 아니라 신비적 직관의 세계까지를 포섭하는 것이다. 그는 침묵의 세계를 배제하려 노력한 것이 아니라, 침묵의 세계를 보전하기 위하여 말할 수 있는 세계의 한계를 명료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자는 그의 주장은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묵살하려 함이 아니요,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현묘한 세계를 더욱 현묘하게 인식하려는 것이다. 공자가 교언영색을 혐오한 것은 바로 공자가 말하는 인의 세계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침묵의 세계에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교언영색의 혐오는 공자의 사상의 가장 근원적인 기저를 형성하는 것이다.

 

집주 교, ; , 선야. 호기언, 선기색, 치식어의, 무이열인, 즉인용사이본심지덕, 망의. 성인, 사불박절, 전언선, 즉절무가지, 학자소당심계야. 정자왈: 지교언영색지비인, 즉지인의.

 

1-4. 증자왈: 오일삼성오신, 위인모이불충호? 여붕우교이불신호? 전불습호?

 

1-4. 증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날마다 세가지로 내 몸을 돌이켜 본다. 남을 위해 도모함에 충성스럽지 못하지 않았나? 벗을 사귐에 믿음직스럽지 못하지 않았나? 가르침 받은 것을 익히지 못하지 않았나?

 

도주 증자는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보다 46세 연하의 사람이다. 그러니까 공자의 말년의 제자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아버니 증석(증절)이 공자의 제자였음으로 그러한 연줄로 인해 자연스럽게 제자가 되었을 것이지만. 안연이 그의 부친 안로와의 인연으로 공자와 사제의 정을 맺은 것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 한다. 증자는 결코 공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공자 자신에 의하여 중요하게 언급된 바가 없다. 공자가 말년에 잠깐 가르쳤던 인물인 것 같다. 공자가 선진 편에서 손꼽은 사과십절의 명단에도 끼어있지 않다. 공자는 그가 좀 아둔한 인간이라고 가볍게 평했을 뿐이다.(삼야, . 선진 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자는 논어 속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효경의 저자로서 유교학사에서 매우 중후한 인물로 다루어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파라독시칼한 현상의 배면에는 모종의 역사적 음모나 유전의 획책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태백편 3장에서 7장까지 증자에 대한 기술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을 보아도 여기서 우리가 받는 증자에 대한 성스러운 느낌은 전혀 공자와는 무관한 사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공자가 죽고 난 멀고 먼 훗날에 증자의 제자들이 증자를 추념하여 쓴 것으로 단지 논어에 삽입된 것이다. 증자의 제자들은 증자를 공자 이상으로 중후한 인물로서 다루고 있고 논어를 읽는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증자가 성인인 것처럼 인식을 강요당하게 된다. 태백 3~7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공자의 사후에 어느 일정기간 증자가 노나라의 공자교단을 확고하게 리드했다는 사실이며, 그 공자-증자 교단 속에서 자사가 교육되었고, 또 자사의 문하에서 맹자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맹자는 곡부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추현() 지방의 사람이다. 맹자는 청년시절 한 때,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자사도 죽고 없었다. 맹자는 자사의 문하생에게 배웠던 것이다. 따라서 맹자의 증자에 대한 존경심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권위 때문에 후대에 증자는 효경의 저자로서 추앙되었을 것이다. 증자가 효와 관련된 어떤 덕성의 구현자로서 그 역사적 이미지가 구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효경이라는 문헌의 저자라는 사실을 확보하지는 않는다. 효경은 려씨춘추에 그 구절들이 정확하게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려불위의 시대 이전에 서무로서 확실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효경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그것은 대강 전국말기에 성립한 것으로 간주된다. 전국말기에 증자 계열의 학자의 손에 의하여 집필되었을 것이다. 증자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본격적인 평은 잠깐 뒤로 미루고 우선 본문을 세밀히 검토해보자!

 

우선 오의 용법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일삼성오신에서 오는 주격과 소유격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둘 필요가 있다. 일은 날마다 매일매일 의 뜻이다. 항상(always)의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삼은 세가지로 라는 뜻으로 다음에 이어지고 있는 세개의 주제를 나타낼 수도 있고, 하루에 세번(삼차)의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위인모이불충호? 의 호는 의문스럽게 반추하는 느낌을 나타내기 위하여 구말에 붙인 조사로, 현대 중국어의 마와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끝 구절이다. 전불습호? 의 해석은 다양한 가능성이 생겨난다. 불충호,불신호, 불습호 라는 말구의 패러랄리즘을 존중한다면 일단, 전과 불습 사이에는 이가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전불습호의 해석은 다음의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1. 내가 남에게 전한 것을 내가 익히지 않고 있지는 아니한가?

2. 내가 남에게서 가르침으로서 전하여 받은 것을 익히지 않고 있지는 아니한가?

 

, 전한다는 행위의 주체를 누구로 설정하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본문을 해석하는데 있어 제 2의 뜻을 따랐다. 주자는 전을 수지어사로, 습을 숙지어기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다산도 주자를 따랐다. 1의 해석은 인제가 따르고 있다.

 

그러나 불습호의 윗문장과의 패러랄리즘을 존중치 않고 전과 불습사이를 그냥 접합시킬 경우 또 다른 두가지의 해석이 생겨난다.

 

3. 내가 익히지도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4. (고전)을 익히지 못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3의 경우 전은 동사가 되며 불습은 전의 직접목적이 된다. 그리고 4의 경우는 전이 명사화되어 습이라는 동사의 목적이 된다. 전은 전하여 내려온 것의 뜻으로 공자시데에 존재하던 고전의 의미가 될 수 있다. 상기의 네 해석이 어느 것도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시카와(길천)는 제 3의 해석을 따랐다. 나는 주자의 해석이 가장 부드럽다고 생각되었다.

 

우선 이 절의 증자의 말은 매우 유치하다. 삼성이라는 말이 한자 문화권에서 출판사 등의 로고로 쓰일 만큼 일반에게 잘 알려진 말이지만, 하루에 세번이라든가 하루에 세가지로 라는 등의 표현은 꼭 유치원 생도를 가르치기 위해 짜여진 것과도 같은 정격화된 형식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논어 전체를 통해 숫자의 카테고리에 의하여 표현된 논어들은 거개가 모두 후대에 날조된 것이다. 논어의 파편 중에서 거의 모두가 후대에 성립된 것이다. 일예를 들면 양화 8에 공자가 자로에게 육언육폐를 말하는 따위의 구절들은 참으로 구역질나는 후대의 날조임이 너무도 명백하다. 그 도식적 내용에는 전혀 공자의 생생한 사상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여기 삼성 운운하는 것도 고자의 사상과는 무관한 후대의 형식화도니 첨유의 사고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인간이 하루에 세가지만 반성함으로써 그 인함이 달성될 수 있으리오? 마치 중고생이 책상머리 방학계획표에 몇 가지 도식을 그려놓고 실천한다 하다가 하나도 하지 못하고 마는 차원의 이야기 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진사이(인재)가 이 구절을 평하기를 고인들이 말하는 수신이란 후세의 사람들이 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 홀로 허령한 사유에만 빠지는 것과는 달리, 타인과의 관계에서 모하고 교하고 전하는데서 달성되는 것임으로, 이 구절은 증자 말년의 가언선행의 대표적 표현으로 높게 평가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진사이 역시 고학을 말하면서 논어의 본질에는 접근치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의 사상은 충, , 습의 삼성이라고 하는 도식적 이해로는 도저히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증자 사상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며, 그가 공자사상의 본질에 접근치 못한 아웃사이더에 지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증자가 하루에 세가지로 반성한다는 이야기나, 예수가 베드로에게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마가 14:30) 한 이야기나, 예수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 2:19)한 이야기가 모두 후대의 설화적 양식에 불과한 것이다. 다산이 주자의 말을 빌어 삼성, 고비성인지사(세번 성찰한다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도무지 성인 차원의 일이 될 수가 없다. 논어집주대전)라고 한 것도 무언가 이 구절에서 불안감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인 15에서 공자가 증삼에게 오도는 일이관지라 하니 삼의 이에 긍정을 한 후, 공자가 나간 후에 (자출), 문인이 그 대화의 내용을 증자에게 묻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 증자는 대답한다.: 부자의 도는 충노일 뿐이다. 이 유명한 구절 때문에 공자 사상을 일이관지하고 있는 것은 충노일 뿐이라는 유교의 대논쟁이 두 밀레니엄 이상을 지속되어 왔고, 그 논의의 주체세력으로서의 증자의 권위는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 이인의 구문은 분명한 후대의 날조다. 전혀 공자의 삶에서 이루어진 대화일 수가 없다.

 

우선 공자가 증자를 부르는 말은 삼(애명)으로 되어 있는데 그 전체적 기술은 모두가 증자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증삼을 증자(Master Zeng)로 높여 부르는 증자계열의 교단에서 기록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증자에게 공자와의 대화의 내용을 물은 문인은 공자 당대의 타제자라기 보다는 역시 증자의 제자가 될 수 밖에 없다. 황간은 소에서 이 일이관지의 대화는 공자가 증자집을 방문했을 때 이루어진 것이며, 자출이라 한 것은 공자가 증자의 집의 문을 나섰다는 의미녀, 문인문왈이란 증자의 집에 남아 있던 증자의 제자들이 그 내용을 되물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문인이 증자의 제자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형병의 소도 그 입장이 동일하다.

 

그렇다면 이미 공자가 살아 있을 때 증자가 문인을 거느리는 독립된 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은 도무지 어불성설이다. 증자는 공자의 문하에 들어온지 몇 년 되지도 않았고 당시 20대 초반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증자로 불릴 수 있는 하등의 위치를 확보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공자와 그렇게 중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공자의 사상을 일이관지(일관)하는 것이 곧 충노라 한 것은 후대의 증자학파의 전화된 공자인식을 나타내는 한 전형이다. 공자의 사상은 근원적으로 충노 따위로 논의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인 편에서 말하는 충노의 충과 여기 학이편에서 말하는 위인모이충의 충은 결국 동일한 후대 증자학파의 인식체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서의 충은 아직 군신관계에 있어서의 충성(loyalty)의 의미로 전화되어 있지는 않다. 논어에서 충이 거론되는 대목을 전부 일별해보아도 그 충의 의미는 역시 내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됨(truthfulness) 정도의 개인 내면의 실존적 가치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증자가 지었다고 하는 효경에 오면 사태는 일변한다. 효경은 1장에서 6장까지가 전반을 형성하고 그 나머지 7장에서 18장까지가 후반을 형성한다.(금문경은 18장으로 구성되고 고문경은 2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인 전반부의 장이름만 일별해 보아도 그 구성이 얼마나 정치적인 위계질서속에서 공자의 사상을 틀지우고 있는가 하는 것을 쉽사리 간파할 수 있다.

 

제일 : 개종명의장

제이 : 천자장

제삼 : 제후장

제사 : 경대부장

제오 : 사장

제육 : 서인장

 

1장의 개종명의란 뜻은 효경의 종지를 열고(), 오효의 대의를 밝힌다()는 뜻으로 총론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총론에서 이미 효의 시는 사친이요, 그 중은 사군이요, 그 종은 입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사친의 효를 철저히 사군의 충으로 전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효의 시작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사친)이지만, 그 종국적 존재의의는 입신이다. 입신이란 곧 정치적 출세를 말하는 것이다. 정치적 출세란 곧 그 이름을 후세에 날리어 부모을 영예로운 이름을 역사에 드러내는 것이다.(양명어후세, 이현부모.) 우리나라의 모든 지식인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하거나 정계에 나가 장관 한 자리라도 해먹고 죽을려는 사유의 원형이 모두 효경의 개종명의에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효는 다섯 레벨이 있다. , 천자의 층차, 제후의 층차, 경대부의 층차, 사의 층차, 서인의 층차가 있는 것이다. 이 다섯 층차를 관통하는 일관된 덕성이 곧 효이다. 이미 효는 논어에서 말하는 일개 덕목이 아니라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는 정치적 세계 전체를 일이관지하는 근원적인 이념이다. 그 핵심을 구성하는 사의 효를 보면 이와 같은 말이 있다.

 

고이효사군즉충, 이경사장즉순. 충순부실, 이사기상. 연후능보기작록, 이수기제사. 개사지효야.

 

그러므로 효로써 임금을 섬기면 충하고 경으로써 윗사람을 섬기면 순하다. 충순함을 잃지 않으면서 윗사람을 섬겨야 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사(선비)는 그 작위와 봉록을 보전할 수 있으며, 제사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의 효다.

 

여기서 핵심적인 말은 효가 사군으로 전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곧 충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충에는 중심(표심)이라고 하는 논어의 원래적 의미가 사라져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충은 다시 순(순종함)이라는 말로 재해석되고 있다. 사의 최고 덕성은 효에서 충순으로 전화되고, 이 충순이야말로 작록(직위와 봉급)을 유지하는 최대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집안의 제사를 이어갈 수 있는 전통의 고수자가 된다는 것이다. 공자사상이 우리나라 조선왕조에서 이해된 핵심적 틀은 논어에서 제공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효경인 것이다. 13경 중에서 유독 효경만이 경의 타이틀을 당초로부터(아마도 한대로부터) 보유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하다. 한왕조가 공자사상을 국가종교(state religion)의 이념체계로서 활용하기 위하여 그 효를 절대시하는 과정에서 효경은 태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의 대세를 미리 간파한 증자 계열의 학파에서 이미 전국 말기에 효경의 텍스트를 성립시켰다.

 

증자는 효와 충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증자가 논어에서 비중있는 인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은 맹자가 자사-증자 계열을 존숭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기 보다는 전국말의 유가에서 충효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기 위한 음모로서 철저히 증자의 이미지를 재구축시켰고, 그렇게 구축된 이미지에 따라 증자 설화가 날조되었고, 그 권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날조된 설화들이 논어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논어의 증자관계의 모든 파편은 그러한 후대의 윤색의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증자 설화의 왜곡때문에 공자사상이 충노 따위로 왜곡되는 비극이 초래된 것이다. 공자의 진실 위에 증자의 이데올로기가 덮어 씌워진 것이다. 이로써 유교는 철저히 정치화되어 갔다. 그러나 공자는 정치 자체를 유교화하고 도덕화하려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할 작업은 증자라는 역사적 인물이 과연 어떤 인간이었나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다.

 

사마천의 중니제자열전에는 증자에 관한 기록이 놀라웁게도 간략하게 적혀있다.

 

증삼, 남무성인, 자자여. 소공자사십육세. 공자이위능 통효도, 고수지업. 작효경. 사어노.

 

증삼은 남무성 사람이다. 자는 자여이다. 공자보다 46세 연하이다. 공자는 그가 효의 길에 능통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는 효경을 지었다. 노나라에서 생애를 마치었다.

 

우리가 보통 중니제자에 관해 상고할 때 대표적인 문헌으로서 사기 권육십칠의 중니제자열전과 공자가어 제삼십팔편의 칠십이제자해를 든다. 문헌의 성립연대로 본다면 물론 사기가 공자가어보다 앞선다. 가어는 위 왕숙(AD 195~256)의 위작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가어의 내용이 기존의 서물에 있는 공자관련기사와 그가 공자 22세손인 공맹으로부터 얻은 가전의 서에 기초했다고 보는 만큼 위작의 의미를 날조로 간주할 수는 없다. 위작이지만 전거가 있는 것이므로 위작의 내용이 왕숙시대의 소산은 아니다. 사기의 제자열전과 사기의 제자열전과 가어의 칠십이제자해는 모두 공씨 집안에 내려오던 제자적이라는 어떤 문헌에 기초하고 있다고 사료되는데, 사기와 가어를 비교해볼때, 오히려 후대의 왕숙작품이 그 원사료인 제자적의 모습을 보다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고 있다고 추론된다. 사기 열전은 가어 제자해를 논어의 관련기사와 사마천 자신의 풍부한 역사적 지식에 기초하여 가감한 느낌이 든다. 가어 제자해가 훨씬 더 간결하고 오리지날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증삼의 경우 가어 제자해에는 열전에 생략된 재미있는 고사들이 붙어있다.

 

남무성은 당시에 북무성도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무성은 지금 산동 비현 서남 90리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인데 그곳이 바로 공자의 제자인 자유가 성재를 지냈던 곳이다. (옹야12, 양화 4) 그 근처에 있는 비읍도 계씨의 본거지로서 공산불요가 한 때 그 곳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 공자를 부르려 한 적이 있고, 자로가 삼환의 무장을 해제시키려고 했을 때 주요활동 무대이기도 했고, 또 자로가 자고를 비읍의 읍재로 삼었다는 이야기가 선진 24에 나오고 있다. 계씨가 민자건을 비재로 삼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옹야 7에 나온다. 하여튼 이 지역이 공자의 교단과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러한 코넥션으로 증자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부상했다는 추측도 가할 수 있다. 효경에 관하여는 가어 제자해의 언급이 열전과 약간 다르다.

 

지존효도, 고공자인지이작. 효경

 

그 사람됨의 뜻이 효도를 보존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증자 때문에 효경을 짓게 되었다.

 

제자열전에는 증자가 직접 효경을 지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제자해에는 증자에게 촉발받아 공자 자신이 효경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현존하는 효경에도 공자가 어린 증삼을 앞에 앉혀 놓고 훈시하는 것을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마천은 제자해의 기록을 왜곡하여 전한 것이다. 증자가 효경의 저자라고 하는 사마천의 당대의 통념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증자가 노나라에서 태어나 노나라에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노나라에서 줄곧 살면서 공자교단의 적통을 이었다는 스토리가 입증된다. 그는 아마도 맹무백의 아들인 맹경자의 후원을 얻어 공자교단을 이끌어 갔을 것이다.(태백 4) 그리고 증씨는 원래 증이라는 나라의 후손들인데 양공 6년에 거가 증을 멸망시키자 노나라로 이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시외전에는 증자가 한때 월나라에 가서 높은 벼슬(존관)을 하고 구인이나 되는 고당에서 으리떵떵하게 살았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사기 열전 정의) 그런데 가어 제자해에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증자의 삶에 관한 중요한 정설로 실려 있다.

 

첫번째 고사는 제나라가 그를 초빙하여 경(대부와 같은 급이지만 대부보다 더 존귀한 자리, 즉 식읍이 부여된다)으로 삼으려 했던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제나라로 가기를 거절한다. 그 이유인 즉:

 

오부모노, 식인지록, 즉우인지사, 고오불인원친이위인역.

 

내 부모님이 연로하신데 남의 녹을 먹으면 남의 일만을 걱정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차마 부모님을 떠나 남 심부름일 하는 짓은 못하겠다.

 

두번째 고사는 그의 계모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그의 계모가 심지가 고약한 악모였던 모양이다. 그를 항상 박대하였다. 그러나 증자는 계모의 박대에도 불구하고 계모를 극진하게 모시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삼후모우지무은, 이공양불쇠.)

 

그런데 증삼의 실상을 전달해주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는 다음의 세번째 고사인 것이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고급 중국음식점에 가면 배()를 푹 삶어 내어놓는 맛있는 요리가 있다. 담을 삭히는데 좋은 요리라 한다. 그런데 이런 요리의 역사가 꽤 오래된 모양이다. 증자의 시대에도 가정식탁에 오른 요리였던 것 같다. 어느날 증자는 부인에게 배찌는 요리를 부탁했다. 그리고 요리할 때 반드시 푸욱 익히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그 부인이 배를 푸구 익히지 않았다. 그러자 증자는 화가 나서 부인을 내쫓아버렸다.(옛날에는 이혼의 개념이 이렇게 남성일방적인 것이었다. 급기처이이증불숙, 이출지.)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항의를 했다.

 

당신 부인은 칠거지악을 범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사소한 일로 매정하게 내쫓을수 있소?(비칠출야)

 

그러자 증삼은 이런 항의에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배를 찌는 일은 작은 일에 지나지 않소. 나는 그 배를 잘 익혀 달라고 당부했소. 그런데도 그 여자는 내 명령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소. 그렇다면 이렇게 작은 일에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 큰 일에는 어떠하겠소?(이증소물이. 오욕사숙, 이불용어명. 황대사호!)

 

그리고는 주위의 만류도 듣지 않고 결국 부인을 내쫓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죽을때까지 부인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증삼의 아들 증원이 재취를 할 것을 청원했다. 그러자 증삼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은나라의 고종은 후처때문에 효심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주나라 선왕의 대신이었던 윤길보는 후처때문에 자기 두째 아들 백기를 내쫓고 말았다. 나는 위로는 고종에 못미치고, 중간으로는 길보에도 비견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 내가 그와 같은 잘못을 또 안저지르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고종이후처살효이, 윤길보이후처방백기. 오상불급고종, 중불비길보. 용지기득연우비호?)

 

사마천은 이 고사가 증자의 이미지에 손상이 간다고 판단되어 중니제자열전에서 빼버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고사야말로 증자라는 한 인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전달하는 위대한 고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냐 아니냐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문제는 이러한 설화에 나타나고 있는 증삼의 자기인식구조와 당대 사람들의 증삼이라는 인격체를 파악하는 인식구조,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남존여비의 시대라고 하지만 무뢰한 계모에게는 무조건 충성을 다하고, 자기를 떠받들고 애까지 낳은 양처에게는 요리하나 잘못했다고 내쫓아버리는 그 인식구조가 증자라는 인격체가 상징하는 효라고 한다면 그러한 효의 개념의 정합성, 즉 인테그리티(integrity)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백호통 에 이 고사를 비꼬아 말하기를: 그렇게 작은 일로 마누라를 내쫓는데 세상 어느 구석에 증사 마누라 노릇할 여자 있겠나! 그놈의 계모는 그렇게 무은무의하건만 증삼이 그렇게 극진히 섬겼으니 증삼 계모해먹기는 정말 누워 떡먹기로다!

 

이것은 분명 남존여비의 시대정신이나 봉건시대의 관습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증자라는 인격체의 성스러운 모습이 얼마나 조작된 것인가? 아마도 이 고사는 우리의 조작된 관념과 역사적 인격체의 실상과의 괴리감을 잘 나타내주는 명고사 중의 명고사인 것이다. 이러한 인테그리티(integrity)의 결여를 공자가 노둔한 놈(삼야, .)이라 평한 것은 매우 적확한 평가였던 것이다. 이를 후대의 주석가들이 미화시켜, 증삼은 비록 아둔한 사람이었지만 그러한 아둔함 때문에 오히려 효성이 지극할 수 있었고 공자사상의 적통을 이었다고 극찬한 것은 모두 논어라는 텍스트 그 자체의 오독에서 초래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맹자시대에 맹자가 인식한 증자라는 인격체의 문제점을 한번 다시 살펴보자! 맹자 이루 상 18에 사친이 사지본이요, 수신이 수지본이라 역설하면서 증자가 그의 아버지 증석을 모시는 고사를 이례로 들어 설명하는 장면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이루 편의 언어는 나에게는 그렇게 석연하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여튼 그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우리가 어릴 때는 큰방에서 식구가 다 함께 먹는데, 아버지는 진지상을 따로 독상으로 받아 잡수셨다. 물론 아버지 진지상에는 식구가 삥 둘러앉아 먹는 큰상에 오느를 반찬보다는 귀하고 좋은 것들이 올라갔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가 진지를 다 잡수시고 그 상을 물릴때의 상황이었다. 남은 잔반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먹을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와 유사한 상황을 전제로 해서 이 일화를 읽어야 할 것이다.

 

증자는 그 아버지 증석을 봉양하는데 그 진지상에는 반드시 술과 고기가 올라갔다.(증자양증석, 필유주육) 그런데 아버지가 증석이 진지를 다 잡수시고 상을 물릴 때, 증자는 상을 들고 나오면서 꼭 아버지께 여쭈었다: 이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까요? (장철, 필청소여.)

 

그리고 때때로 아버지 증석은 증자에게 묻곤 하였다.: 아직도 더 먹을 여분이 있느냐? 이럴 때, 비록 남은 음식이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증자는 반드시: 네 있습니다.(문유여, 필왈유.)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증석이 죽고 이제는 증자의 아들 증원이 증자를 봉양하는 상황이 되었다. 증원이 증자가 진지상을 올릴 때도 반드시 술과 고기는 있었다. 그런데 증자가 진지상을 물릴 때, 그 아들 증원이는 증자가 하던 것과는 달리, 잔반이 있어도 그것을 누구에게 줄까요 하고 묻는 적이 없었다.(증석사, 증원양증자, 필유주육. 장철, 불청소여.)

 

뿐만 아니라 증자가 증원에게 아직도 남은 음식이 있느냐고 물으면 증원이는 반드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문유여, 왈망의.)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증원이는 음식을 옹고로시 남겨두었다가 증자 진지상에 다시 올릴 생각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원의 태도는 증자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 아구창과 몸뚱이만 모실려고 하는 태도라는 것이다.9장이복진야. 차소위양구체자야.) 이에 비한다면 증자가 증석을 모시는 태도는, 아버지 증석의 기분과 주변상황을 다 고려한 것으로, 그 뜻을 모시는 태도라는 것이다.(약증자, 즉가위양지야.) 증원의 효는 단지 몸뚱이만을 멕이려는 물질적인 효였고, 증자의 효는 아버지의 모든 상황을 고려한 정신적이고도 고차원적인 효였다는 것이다. 논어 위정 7에 자유가 공자에게 효를 묻는 대목이 있다. 이때 공자가 말하기를, 요새 효라는 것은 멕이는 것만 장땡으로 아는데, 개나 말도 멕이기는 마찬가진데, 경함이 없다면 도대체 뭐가 다르겠냐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아마도 맹자가 말하고 있는 증자의 고사는 이러한 논어의 정신을 발현한 어떤 설화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바로 맹자에게 있어서 존경하는 스승 증자의 효성스러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고사가 바로 이 이루 상19의 이야기라고 할때 도대체 증자의 효라는 것이 이렇게 진지상을 둘러싼 프로토콜상의 번쇄하고도 말초적인 형식,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비판을 우리는 안심하고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맹자 시대에 존속된 증자의 효의 일화도 이러한 의례적인 사소한 형식을 반영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소한 의례적 행위에도 물론 깊은 인간의 마음이나 정감이 표현되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우리에게 어떤 은은한 감동이나 드라마틱한 감격을 전달해주는 바가 없다.

 

이루 하 31에는 또 하나의 재미난 고사가 실려있다.

 

증자가 큰 스승이 되어(공자교단의 리더가 되어) 자기의 고향인 무성에 돌아와 잠깐 거할 때의 일이었다. 무성의 사람들은 성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증자를 극진하게 대접하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때마침 월나라로부터 도둑떼가 침략하여 들어왔다. 그때 무성의 시자가 말하였다: 떠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증자는 사양하지도 않고 말했다: 암 떠나구 말구. 그리곤 집은 지키는 사람에게 엄명을 내리는 것이었다. 내가 이 집에 없을 동안 어떠한 사람도 여기 들어와 살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풀 한포기도 나무 한그루라도 다치지 말게 하여라(무우인어아실, 훼상기신목.)

 

그리곤 얼마 있다가 월나라 도둑떼가 물러나려 하자 피난가있던 증자는 무성사람에게 전갈을 보내었다: 우리집 담장과 기와를 잘 수리하여라. 내가 곧 돌아가리라.(수아장옥, 아장반.)

 

그리고 도둑떼가 완전히 물러나자 증자는 유유히 돌아왔다. 그런데 이러한 증자의 모습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매우 얌체짓거리처럼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좌우의 제자들이 증자에게 간언하였다.: 선생님! 여기 무성사람들은 선생님을 극진하게 모시기를 충성스럽게 하고 또 공경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적국의 도둑떼가 몰려오자 선생님께서는 먼저 잽싸게 피해 도망가시었고 백성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도둑떼가 물러나니까 비로소 유유히 돌아오셨습니다. 뭔가 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선생, 여차기충차경야. 구지즉선거, 이위민망. 구퇴즉반, 치어불가.)

 

그러자 그 중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심유행이 증자를 변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네들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닐쎄! 옛날에 선생님께서 우리 심유씨 동네에 머문 적이 계셨네. 그때 우리 동네에 가을 수확을 도둑질해가는 도둑떼가 몰려들었네. 그때 선생님을 모시고 있던 제자들이 70명이나 되었는데 한 사람도 그 재난에 간여하여 싸운 사람이 없었네.(침유행왈: , 비여소지야. , 침유유구퇴지화, 종선생자칠십인, 미유여언.)

 

그런데 자사가 위나라에 거할 때, 제나라로부터 도둑떼가 침략해온 적이 있었다. 이때 주변 사람들이 자사에게 여쭈었다: 도둑떼가 몰려오니 피난을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혹왈: 구지, 합거제?) 그러자 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도망가다니 만약 내가 떠나면 임금께서는 이 땅을 누구와 더불어 지키실 수 있겠는가?(자사왈: 여급거, 군수여수?)

 

물론 증자와 자사의 태도는 동일한 사태에 대하여 매우 대조적이다. 증자는 비겁했고 이기적이었고 고답적이었고 형식적이었다. 그런데 자사는 용감했고, 남의 입장을 생각할 줄 알았고, 긴박한 상황을 대중과 더불어 해결할려고 노력하였다. 증자와 자사의 이러한 대조적 모습에 우리는 과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맹자는 이에 대해 무리하게 증자를 옹호하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외관적으로 이 두 분의 행위는 매우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 같은 원칙 위에 서 있다. 증자께서는 당시 스승이요 부형과 같은 입장에 계셨다. 그런데 자사는 단지 신하였을 뿐이요, 미천한 존재였다. 그러니 행동방식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이 두 분이 서로 입장이 바뀌었다면 두 분 다 동일한 행동을 하셨을 것이다.(증자자사동도. 증자, 사야, 부형야. 자사, 신야, 미야. 증자자사역야, 즉개연.)

 

과연 우리는 이러한 맹자의 판결을 증자의 행동에 대한 정당화로서 받아들이리 수 있을 것인가? 왜구의 침략을 피해 의주로 도망가는 임금 선조의 행차가마에 우리 민중들은 돌을 던졌다. 과연 임금도 아닌 일개 학자가 극진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월구를 피해 도망가는 모습을 무성의 사람들은 과연 경외롭게 바라보았을까? 그러면서 그 피난통에도 내 집엔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도 건들지 못하게 하나 고 엄명을 내리는 증자의 모습을 과연 우리는 효의 휴매니스트적 전범으로서 기릴 수 있을 것인가?

 

여기 우리가 분명히 생각해야 할 것은 이미 맹자 시대에 전달된 증자의 일화들은 맹자가 구구한 변명을 일삼아야 할 정도의 구질구질한 이야기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신화화 되어버린 위대한 인물들의 역사적 실상에 대한 통찰은 비단 그 인물을 깎아내리는 효능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통찰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정보들에 대한 총체적 조감을 새롭게 감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공자말년의 제자들, 공자의 유랑의 장정의 고난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한 적이 없는 어린 세대들은 공자의 인간내면의 핵심적 생각들을 파악할 길이 없었다. 그들에게 공자는 이미 너무도 멀리 있었다. 그들은 이미 신화화 되어버린 공자의 형해만을 쫓고 있었다. 공자의 사상은 안회와 더불어 죽은 것이다. 증자의 효행은 공자의 인의 지극히 협애한 일면만을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증자의 효에 대한 생각은 점점 형식주의적으로 윤색되어갔고 그것은 결국 곡례 스타일의 제식으로 고착화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종교적인 충효의 사상으로 비약의 전기를 맞는다. 아마도 콘스탄티누스대제(280~337)의 기독교 신앙의 공인(the Edict of Milan, 313)이나, 한무제가 유술을 독존한 것이나 우리는 보편사의 문제의식속에서 동일한 성격의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해야 할지도 모른다.

 

집주 성, 실정반. , 거성. , 평성. 증자, 공자제자, 명삼, 자자여. 진기지위충, 이실지위신. , 위수지어사; , 위숙지어기. 증자이차삼자, 일성기신. 유즉개지, 무즉가면. 기자치성절, 여차, 가위득위학지본의. 이삼자지서, 즉우이충신위전습지본야. 윤씨왈: 증자수약, 고동필구제신. 사씨왈: 제자지학, 개출어성인, 기후유원이유실기진. 독증자지학, 전용심어내. 고전지무폐, 관어지사맹자, 가견의. 석호! 기가언선행, 부진전어세야. 기행존이미민자, 학자기가부진심호?

 

1-5. 자왈: 도천승지국, 경사이신,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1-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천수레의 나라를 다스릴 때는 매사를 공경스럽게 하여 믿음이 가게하며, 쓰임을 절도있게 하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백성을 부리는 데는 반드시 때에 맞추어 한다.

 

도주 옛날에는 지식인의 당연한 임무는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정치에 참여한다 하는 것을 요즈음 논어를 읽는 많은 사람들이 장관자리에 앉거나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공자의 시대에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오히려 요새말로 하면 국방의무를 다한다 는 뜻에 더 가까운 의미로 새겨야 할 것이다. 공자의 시대는 기본적으로 전쟁국가시대였다. 작은 성읍간에 잦은 전쟁으로 인민이 시달림을 받던 그런 시대였다. 정치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전쟁이었다. 따라서 공자의 말씀으로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빈번한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 처서 이야기가 학이 편의 다섯번 째 장에 나오고 있는 것이다. 브룩스는 이 장을 양화 편 뒤로 옮겨 놓고 있는데 나는 그 필연성을 찾을 수 없다.

 

공자세가에는 공자가 35세 전후에 제나라에 갔을 때, 제나라 경공을 만나는 장면에서 이 장과의 관련성을 시사하는 이야기가 한 대목 나오고 있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가 한 대답은 군군, 신신, 부부, 자자. (안연 11)였다. 즉 제나라의 정치가 명분에서 이미 어그러져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경공이 공자의 이러한 지적에 크게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자 공자는 물러났다. 며칠 있다가(타일) 경공은 공자를 다시 불러 정치에 관해 또 묻는다. 그 때 공자가 한 유명한 대답이 다음의 한 마디다.

 

정재절재.

정치란 재화의 쓰임새를 절도있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공자가 제나라의 경제구조가 너무 대국의 소비지향적인 낭비에 빠져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경공은 감명을 받아 공자를 이계에 봉하여 대부로 삼으려 한다. 이때 법가 계열의 제나라 재상인 안견이 가만히 좌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안견의 혹독한 비판으로 공자는 출세의 기회를 좌절당한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공자의 정치적 입장, 특히 경제를 바라보는 그의 생각이 정재절재 이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세가의 절재와 이 장의 절용은 같은 뜻이다. 아마도 세가의 논의를 따른다면 이 장은 공자가 제나라에서 한 말로 비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천승지국은 제나라가 될 것이다. 일승은 말이 네마리가 끄는 병차다. 천승이면 말이 4천마리가 된다. 계씨 12에는 제경공이 말 4천마리를 소유하였다는 이야기가 명기되어 있다.(유마천사)

 

그리고 한 수레에 말모는 사람이 한 명, 활 쏘는 사람이 한 명, 그리고 모과등의 장예 병기를 휘두르는 사람이 한 명, 도합 3명이 타게 된다. 그렇다면 천승이면 수레인원만 해도 3천명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보병과 치중대를 어떻게 편성하냐에 따라 그 숫자는 천문학적 숫자로 늘어난다. 공자시대에는 보병의 위치가 전쟁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 전차당 보병이 10명 정도 할당되고, 춘추말기, 전국시대로 내려올 수록 그 숫자는 불어나서 약 70~100 명 정도는 되었다고 본다. 손자 작전편에 보면, 전차 천승이면, 치중차가 천대, 그리고 무장군인 보병이 10만명(대갑십만)이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마어마한 편제인 것이다. 그런데 실상 천승지국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보유의 최대규모를 말한 것이며 실제 전쟁에 천승이 동원되는 상황은 흔치 않았다. 춘추 시기에는 대국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병차 천승을 구비하지는 못했다. 좌전 희승 28년조에 기재되어 있는 성복의 전쟁에도 진문공이 칠백승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도 전쟁이 점점 빈번하게 일어나 병탄의 현상이 생기면서 전차보유대수는 급속히 불어났다. 같은 진국이 평구의 회맹에 이르렀을때 숙향의 말에 의하면 이미 사천승을 보유하고 있었다.(좌전 소공 13) 따라서 공자의 시대에도 이미 천승지국이 꼭 대국만을 의미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선진 25의 그 유명한 증석의 무우영귀의 장에 자로가 천승지국이 대국 사이에 끼어 죽을 못쓰는 형편인데(천승지국, 섭호대국지간.) 운운하는 것을 보아도 천승지국이 이미 대국 사이에서 압박을 받는 약소국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오히려 맹자 양혜왕 첫머리에 만승지국에 임금을 시해하는 반란자는 반드시 천승지가에서 나온다. 운운하는 시대상황을 반영함으로 오히려 역으로 무우영귀의 장이 이미 내가 도서에서 말한 바대로 후대의 조작이라는 것, 즉 맹자 이후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공자 시대에 이미 노나라의 정치규모를 천승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맹자 만장 하7에는 노나라의 무공이 자사와 맞먹을려고 같이 벗하자고 하니까, 자사가 섬긴다(사지)하는 말은 있을 수 있어도 벗한다(우지)하는 말은 있을 수 없다 하며 무공을 엿멕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노나라의 무공은 자신을 천승지국의 군주로 자처하고 있다. 자사의 시대에는 이미 노나라는 선승지국이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여튼 대체적으로 이 공자의 말은 천승지국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공자가 젊은 시대에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때의 발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카지(가지선행)씨는 이 밀을 공자가 대하구가 되었을 때의 그의 정강정책을 나타내는 언급으로 풀이하고있다.(공자 동경:집영사, 1994, p.147). 이것은 그가 노나라를 떠나 유랑의 가시밭길을 걷게 되는 거노의 이유와 맞물리는 언급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공자가 사구가 되어 감행한 정치의 기조는 노나라와 같은 소국의 실정에 적합한 농업공동체적인 에토스에 기초한 절약형 경제정책이었다. 노나라 정공과 계환자가 제나라에서 보내온 80명의 미녀와 문마 30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노나라가 공자의 절약혀 경제정책을 거부하고 제나라의 소비형 경제정책을 받아들임으로써 공자를 실각시키는 정변을 일으킨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성사시킴으로써 급작스럽게 매판자본의 팽창주의적 일로로서 국가운영정책을 일변시킨 사건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태속에 공자는 실각되고 삼가의 공격을 받게 되어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 이 장의 마지막 두 구절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제도사적 사실을 발견한다.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여기 분명 인과 민은 분별되어 사용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은 국의 인을 말하는 것이요, 민은 야의 민을 말하는 것이다. 애인의 인은 국인이요 그들은 노나라의 도성내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강 사의 계층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서 서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본시 절약하는 사람들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살 한톨을 아끼는 사람들이다. 노나라의 경제의 문제는 바로 성내 즉 국중의 문제인 것이다. 국인들이 절약하는 생활을 해야만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공자가 절용의 에토스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국인, 즉 사, 즉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부패는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 애인의 애는 본시 아낀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소구화된 의미에서의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다. 공자가 절용을 강조하는 대상을 곧 사이다. 그 대신 그가 아껴야 할 계층이 바로 사인 것이다. 사민이시의 사민은 주로 전역과 관련된 것이다. 민은 전차를 탈 수 없으며, 보병이나 치중대의 노역에 동원된다. 사민 즉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반드시 농한기를 틈타지 않으면 아니된다. 농번기에 전쟁을 일으키면 그것은 승리했더라도 패배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국고가 텅 비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의 대강의 뜻은 공자라고 하는 고급관리의 입장에서 자기 이외의 세 계층을 대상으로 말한 멧세지나를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경사이신은 공자가 자기의 상관들에 대한 태도를 말한 것이다. 이 때 싸는 공무원으로서 수행하는 공무를 일컫는 것이다. 위령공 37에 사군, 경기사이후기식이라 했을 때의 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사군에서 발생하는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은 반드시 공경되이 처리하여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이라는글자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이라는 의미 때문에 현대어에서 크게 왜곡된 글자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본시 말하는 믿음이란 싱앙이나 신조(Credo)를 말하는 것이 신험의 뜻이다. 즉 경험적으로 증명이 된다는 뜻이다. 즉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 신의 일차적 의미는 증험될 수 있는 것만 말한다. 는 뜻이다. 신은 영어의 Verification에 가깝다. Belief의 뜻으로 왜곡되면 안된다.

 

다음의 절용이애인은 고급관리로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아래의 사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사민이시는 사에 대하여, 밖에 사는 야인들을 함부로 괴롭히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멧세지 : 경사이선,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그 대상 : 제후와 대부, , 서인

 

소라이(조래)는 천승지국의 정치가 이 정도의 소략한 언급에서 끝날 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도를 도()로 해석치 않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아주 색다른 해석을 내렸다. 도는 문자 그대로 길낸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천자가 천승지국인 제후국들을 훈생할 때의 상황에 관한 몇가지 주의사항이라는 것이다. 일견 재미있는 해석이지만 이러한 해석은 곧 그가 본문 그 자체의 중층적 구조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할 뿐인 것이다. 조래는 논어를 도덕적 교과서로 읽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선왕지도(sennonomichi)의 제도사적 측면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왕지도는 문명의 제도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육경에 요약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육경으로써 사서를 읽어야지, 사서로써 육경을 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사서는 송유가 생각하는 도덕의 표방이 아니라. 육경에서 구현된 선진의 제도문물으 표방이라는 것이다. 소라이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 고전세계에 있어서는 참으로 특이한 사회과학적 발상을 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정신을 고학(코가쿠, kogaku)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고학적 발상의 대부분이 지나치게 참신하여 대세를 포착하지 못하고 본의를 그르치고 있다. 지나친 창조성(originality)에의 충동은 때로 망발에 머물고 마는 우를 범한다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집주 도, , 개거성. , 치야. 천승, 제후지국, 기지가출 병차천승자야. 경자, 주일무적지위. 경사이신자, 경기사이신어민야. , 위농극지시. 언치국지요, 재차오자, 역무본지의야. 정자왈: 차언지천, 연당시제후과능차, 역족이치기국의. 성인, 언수지근, 상하개통. 차삼언자, 약추기극, 요순지치, 역불과차. 약상인지언, 근즉천근이이의. 양씨왈: 상불경즉하만, 불신즉하의, 하만이의, 사불입의. 경사이신, 이신선지야. 역왈: 절이제도, 불상재, 불해민. 개치용즉상재, 상재필지어해민. 고애민, 필선어절용. 연사지불이기시, 즉력본자불획자진. 수유애인지심, 이인불피기택의. 연차특론기소존이이, 미금위정야. 구무시심, 즉수유정, 불행언. 호씨왈: 범차수자, 우개이경위주. 우위, 오자반복상인, 각유차제, 독자의세추지.

 

1-6. 자왈 : 제자, 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중이친인,. 행유여력, 즉이학문

 

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젊은이들이여! 들어가서는 효성스럽게 하고, 나와서는 다정하게 하시요. 말은 삼가하되 믿음있는 말만 하시요. 많은 사람을 널리 사랑하되 인한 자를 가까이 하시요. 이 모든 것으르 실천하고 남음이 이씅면 곧 문자를 배우시요.

 

도주 이 장은 비교적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제자는 자기 문하의 학생을 가리킬 적도 있지만, 그냥 일반적으로 손하의 젊은이들을 가리킬 적도 있다. 여기서의 제자는 young fellow 정도의 느낌이 드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나이 먹은 공자가 오로지 당대의 젊은이들을 향하여 외친 말로서 해석되어야 한다(유보남설).

 

여기서의 입과 출은 중국의 가옥구조상 각기 독립된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양백준설). 예기 내측편에 보면 유명사이상, 부자재이군. 이라는 말이 있다. 즉 명사(관직에 있는 선비) 이상이 되면 반드시 아버지와 아들이 집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입은 아버지 처소로 들어간다는 의미고, 출은 자기 집을 나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시대에 모든 사가 이렇게 궁을 달리해서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었을리 만무함으로 나는 별 의미가 없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의 가옥구조는 대부분 부자가 한 집에서 살았음으로 입출이 동일한 집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즉 우리 과거 유생들이 그렇게 해석하였어도 결코 틀린 해석이 아니다.

 

제는 반드시 친 형제간의 관계에만 귀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관본에 따라 제는 제로 되어있기도 하다.) 효를 수직적 관계의 덕목이라고 한다면 제는 수평적 관계의 덕목을 개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출발은 형제간의 우애다.

 

근은 말을 삼가하는 것이다. 신은 평소 말을 삼가하되 말을 일단 하면 반드시 신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친은 근(가까이 한다)의 뜻이다. 인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사람의 뜻이다. 인은 곧 인인이요, 인자다.

 

이 장에서 가장 핵심에 놓인 말은 행유여력, 즉이학문이라는 마지막 구문이다. 이 한마디를 위하여 앞의 모든 교훈이 존재한 것이다. 행유여력, ........ 이라는 구문을 반드시 행하고 나서 요유가 생기면이라는 시간의 단계적 선후를 말하는 것으로 풀면 안된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의 단계적 절차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학문과 일상적 덕목의 실천사이에서, 즉 학과 행 사이에서 행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이디엄적인 표현일 뿐이다. 여기서 문은 막연한 글이나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다. 문의 고 용례의 뜻은 형성자나 회의자가 아닌, 삼형, 지사와 같은 가장 단순한 유니트의 글자(조문)를 의미하는 것이다. 문의 복문, 금문의 자형은 사람의 정면형의 흉부에 문신의 문양을 새겨넣은 모습이다. 그것은 종교적 제식에 있어서의 성스러운 기호였다.

 

공자 당대의 누구든지 사람이라면 말은 할 줄을 알았다. 공자교단의 특징은 문맹의 퇴치인 것이다. 당대의 사람들은 요즈음과는 달리 거개가 문맹이었다. 식자율(literacy rate)이 총인구의 1%도 안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권을 향한 갈망이 공자 당시의 젊은이들에게는 강렬했을 것이다. 이들에게 공자는 야단을 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어투는 상장히 반주지주의적(anti-intellectualistic)이다. 그것은 교언용색에 대한 혐오감과 상통하는 것이다. 나 도올도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싶다: 제자들이여! 공연히 인터넷을 두드리기 전에, 들어가서는 효성스럽고 나와서는 다정한 인간이 되시요.!

 

집주 제자지제, 상성, 즉제지제, 거성. 근자, 행지유상야. 신자, 언지유실야. , 광야. , 위중인. , 근야. , 위인자. 여력, 유언가일. , 용야. , 위시서육예지문, 정자왈: 위제자지식, 역유여즉학문. 불수기직이선문, 비위기지학야. 윤씨왈: 덕행, 본야; 문예, 말야. 궁기불말, 지소선후, 가이입덕의. 홍씨왈: 미유여력이학문, 즉문멸기질; 유여력이불학문, 즉질승이야. 우위, 역행이불학문, 즉무이고성현지성법, 식사리지당연, 이소행혹출어사의, 비단실지어야이이.

 

1-7. 자하왈: 현현역색; 사부모, 능갈기력; 사군, 능치기신; 여붕우고, 언이유신. 수왈미학; 오필위지학의.

 

1-7. 자하가 말하였다: 어진이를 어진이로서 대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조하아하듯 해라. 부모를 섬길때는 있는 힘을 다하여라. 임금을 섬길때는 그 몸을 다 바쳐라. 친구와 사귈때는 믿을 수 있는 말만 하여라. 그리하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일컬을 것이다.

 

도주 나는 올 봄 치박시의 들판을 헤매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 임치고성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서였다. 임치도성은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데 동서, 남북 각각 4km 정도인데, 전장은 약 20km 에 가깝다. 전국책에 유세가 소진이 월나라와의 합종을 제선왕에게 역설한 말 가운데 임치의 인구를 7만호로 묘사하고 있고, 그곳에서 소집할 수 있는 남자장정을 21만으로 잡고 있으니까 아마도 그곳의 당대 인구가 6, 70만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대성읍이었다. 그런데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직문이었다.

 

임치의 도성은 성문이 13개나 있었다. (서울의 도성은 대문과 소문을 합쳐 8) 그런데 그 중 서문의 하나가 직문이었다. 이 직문밖에 즉 직하에 큰 저택이 즐비하게 자리잡아 큰 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대부의 대접을 받았다. 이곳에는 당대의 저명한 학자나 사상가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들을 직하선생이라고 불렀다.(사기 맹자순경열전) 실상 전국시대의 풍토는 바로 이 직하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 유명한 맹자도 직하의 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맹자 자신은 자기를 왕을 가르치는 왕사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욍밑에 소속한 식하학파의 일원으로 간주되는 것에 모멸감을 느낄 것이다. 직하의 초대 총장격의 인물이 순우곤이었고, 그 성쇠의 역사의 마지막 리더로서 우리는 순자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순자 밑에서 한비자와 이사와 같은 전국의 역사를 마감지운 대사상가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제나가 명재상 관중의 명을 탁한 사상서, 관자가 바로 이 직하의 학사들의 선집(the anthology of the Ji Xia School)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유가, 도가, 병가의 사상이 마구 섞여 있는 잡가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방대한 서물이지만 항상 실제적 정치사상을 중시하고 경제문제를 외면치 않으며 구체적인 시책을 언급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어떤 통일성이 엿보인다.

 

나는 이 직하의 거리를 꼭 베스비우스 화산 밑의 폼페이(Pompeii)거리를 걷듯이 한 번 걸어보고 싶었다. 직하의 거리를 나는 서대문밖 인왕산 자락의 느낌 정도로 생각했다. 일설에 의하면, 직문이라는 이름은 인왕산과도 같은 직산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은 완벽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직문의 꿈은 찾아볼 한터럭의 실오라기조차 없었다. 황량한 밀밭에 뿌연 황하의 황사바람만 뒹굴고 있었다.

 

직하는 제나라 위왕때부터 시작하여 선왕때 크게 번창했다. 그런데 제나라 위왕이 직하에 천하의 위대한 학자들을 모을 생각을 하게된 것은 바로 그 이전에 위나라 문후가 출신성분이나 사상경향을 불문하고 실력있는 인재들을 널리 천하에서 구하여 등용하여 국세를 크게 융성하게 만든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자가 하필왈리를 말한 양혜왕은 바로 이 위문후의 손자이다. 위문후가 당시의 인맥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그 핵심에는 바로 이 장의 주인공인 자하가 있었다.

 

자하의 성은 복, 이름은 상이다. 사기에 공자보다 44세 연하로 기록되어 있다. 진나라 온국인(지금의 하남성 온현 서남쪽)이라고도 하고, 위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온국이 원래 위나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다른 이야기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노나라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이 복인 것으로 보아 그도 아마 점과 관련된 무속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공자가 자하에게 특별히 지목하여 소인유가 되지 말고 군자유가 되라고 말씀하였을 수도 있다(옹야 11). 그래서 그는 문학적 상상력에 뛰어났고, 특히 시에 밝았다고 생각된다. 예술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그의 제자 중에 문학으로는 자유와 자하 두 사람을 꼽았다. 자하가 사과십철에 거명돌 뿐만 아니라 공자와의 직접 대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증자나 유자 류에비하면 훨씬 더 공자 생전의 교단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순자 비십이자 편에 보면 천유로서 자장, 자하, 자유 삼인이 함께 거론되고 있는데, 아마도 공자으 최만년 제자로서 교단내에서 헤게모니각축을 벌인 정예들이 바로 이 세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각기 학파를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노나라에 머물지를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세사람이 모두 노나라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자장은 진나라 사람이며, 자유는 오나라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증자와 유자는 둘다 노나라 토백이들로서 곡부에 남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자장, 자하, 자유가 한 그룹으로 떨어지고, 증자, 유자가 또 한 그룹으로 떨어지는데 후자그룹이 아마도 나이도 전자그룹에 비해 약간 더 어렸다고 생각된다.

 

열전의 복상(자하)에 대한 기술은 논어의 대화들을 가지고 각색한 것이다. 그러나 가어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실려있다. 항상 가어의 기술이 열전보다 더 오리지날한 느낌이 든다.

 

고향사람들인 위나라 사람들은 복상이 별볼일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하가 어느날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위나라 조정에서 사지(역사기록)를 읽는 사람이 문헌을 오독하고 있는 것을 당장 지적했다. 그는 진사벌진, 삼시도하(진나라의 군대가 진나라를 칠 때, 세마리의 돼지가 황하를 건넜다.)라고 읽고 있었던 것이다. 자하는 삼시은 기해의 오사임을 지적했다. 그래서 위나라의 사지를 읽는 사람이 그것의 감정을 진나라의 사관에게 의뢰했다. 진의 사관은 조회해본 후 기해가 맞다고 대답했다. 이후로는 위나라 사람들이 자하를 성인 모시듯 했다는 것이다. 이 짤막한 일화는 자하의 학문이 공문하에서 일취월장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자하는 영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활 자세는 매우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공자는 자장()이 과9지나치다)한데 비하여 자하()는 불급9모자란다)하다고 평하였던 것이다(선진 15)

 

공자가 죽은 후 자하는 서하에서 학단을 형성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서하는 위나라 땅으로 황하의 서쪽에 있다는 뜻에서 유래되 지명이다. 분주 지역이다. 그러자 위문후는 그의 문하생이 되어 경학과 육예를 배웠으며, 그에게 국정의 자문을 구하였다(위문후사사지, 이자국정언. 가어) 이런 인연으로 위문후의 주변에 모인 인재는 자하의 제자나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탁월한 경제 정책하였던 이극, 청렴한 고사로 이름 높았던 단간목, 희대으이 봉가 오기, 하백의 미신을 타파한 서문표, 이 모든 사람들이 자하의 문하생이거나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위문후는 위나라의 건립자이다. 그는 창업주 다웁게 위나라를 크게 번성시켰다. 이러한 자하의 지혜로움으로 위문후의 브레인 탱크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전국시대 정신을 리드한 직하학파를 탄생시킨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논어에 자하에 관한 기사가 자장 편에 집중적으로 실려 있다. 3장부터 제 13장까지가 모두 자하와 그의 제자에 관한 이야기다. 또 자하의 이야기는 팔일 8의 그 유명한 회사후소를 비롯하여 여러 군데 나오고 있다. 그런데 나의 느낌으로 자장 편의 자하의 이미지와 자장편 이외의 자하의 이미지는 매우 다르다. 자장편을 제외한 자하의 일반적 이미지는 매우 문학적이고 상황적이고 그리 예에 얽매여 있지 않다. 그러나 자장 편에 드러나는 자하와 그의 제자들의 이미지는 예교주의적 엄숙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아마도 자장편의 자하장들은 후대에 순자계열에서 꾸며진 것으로 사료된다. 순자는 자하를 천유로 비난하고는 있지만, 실상 자하와 순자는 역사적으로 어떤 같은 계보 속에 관계되어 있다. 증자 계열에서 맹자가 나왔고, 자하 계열에서 순자가 나왔다는 것은 중국 철학사의 통설이다. 자장편에는 자하의 이미지가 순자적으로 각색되어간 흔적이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현현역색은 그 문자가 너무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한 해석이 제출되었다. 특히 색이라는 글자의 의미와 관련하여 그것을 여자 혹은 섹쓰와 관련된 추상적 표현으로 보느냐의 가부를 둘러싸고 많은 도덕적 판단이 오갔다. 그러나 어느 전거도 내가 보기에 확고한 타당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1. 현현을 현명한 자를 현명한 자로서 대접한다. 라고 새기고 역을 바꾼다로서 새기면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하는 마음을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과 바꿀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즉 역은 전후 문맥의 등가를 나타내게 된다. 이것이 2, 3 세기 한, 위 사람들의 고주의 해석이다. 다시 말해서 고주는 색에 대한 도덕적 가치판단이 없다. 인간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물로서 색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호색지심으로써 호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언이호색지심호현, 즉선야.)

 

2. 그런데 그 다음의 육조 시대의 사람들은 역색을 안색을 바꾼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다시 말해서 현인을 현인으로서 숭상하는 자세가 평소의 안색을 바꾸어 공경하는 장중한 모습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약속존중차현인, 즉당개역기평상지색, 갱기장엄지용야.) 역색에서 색의 의미를 여자에서 나의 얼굴의 분위기로 바꾸어 해석한 것이다.

 

3. 그런데 송유들은 아예 현현과 역색을 이원화시켜 해석을 내렸다. 현인을 숭상하고, 여색을 가벼이 여겨라는 식으로 새롭게 새겼다. 역에는 바꾼다라는 의미 외로 가볍게 여긴다(경이)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송유의 도덕주의적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송유의 해석은 구역질나는 오독이라고 생각한다.

 

4. 최근의 양백준 같은 이는 송유의 문장패턴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다음의 문장이 부모, 임금, 친구에 대한 것임으로, 이것은 자기의 부인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구문은 부인에 대하여 그 현명한 품덕()을 존중하고 외모()는 중요시하지 말 것이다 라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이택후는 부인에 대한 것으로 보지 않고, 그냥 추상적인 멧세지로서 해석하여 덕행을 중시하고 용모를 중시치 말라(중시덕행체대중시용모)는 뜻이라 하였다.

 

앞으로 또 어떤 해석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하의 원래의 문학적 상상력과 관련하여 제 1의 고주의 해석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구한말의 대유 동무 이제마(1837~1900)는 인간의 질병의 원인과 구조를 밝힌 희대의 의서 동의수세보원을 집필하면서 그 총결론에 해당되는 과제설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장식하고 있다!

 

천하지악모다어투현질능, 천하지선모대어호현락선.

 

천하의 악이 현인을 미워하고 능력있는 자를 질시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없고, 천하의 선이 현인을 좋아하고 선량한 자를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할 줄 모르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대병이라는 것이다. 동무의 이 말은 정말 뼈저리게 와 닿는 우리의 현실이다. 구한말 우리나라 조선의 풍토가 얼마나 현능한 자들을 투질하였을까, 그리곤 식민지 패망의 길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역사의 비극을 생각하면, 일개 의원에 지나지 않았던 이 동무의 외침은 조선동포들 모두에게 외치는 대각의 포효이자 20세기 조선의 미래를 향한 예언자의 분노였다.

 

현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자에게 있어서는 아주 단순한 의미였다. 현인이란 나보다 먼저 깨달은 자이요, 나보다 먼저 배운 자이다. 그러한 현인을 현인으로서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이 곧 호학의 출발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러한 단순한 시인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마는 인간의 질병이 모두 희노애락의 부중에서 나오는 것이요, 이 흐노애락의 부중은 궁극적으로투현질능에서 초래되는 것이라고 갈파한 것이다.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할 줄 알면 내 마음이 편할 것이요, 그리하면 병에 걸릴 일이 없을 것이다. 현대인의 질병의 대부분의 원인이 스트레스가 동무가 말하는 투현질능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이 하라! 그렇게 자연스러운 감정의 유출처럼 현인을 현인으로 대잡하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권고인가! 여기에 뭔 다른 구구한 해석이 필요할까?

 

4세기말, 동진의 환현이 은중감(은형주)을 방문했을때의 일이었다. 이때 은중감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애첩의 침실에서 좌우를 돌보지 않고 사랑에 폭 빠져 있었다. 결국 환현은 면회를 거절당하고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환현이 은증감을 만났을 때 은근히 비꼬면서 놀려대자, 은중감은 당황하는 기생으로 다음과 같이 둘러치는 것이다: 뭔 그런 일이 다시 있을 수 있겠나. 그대가 왔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현현역색했을 걸....

 

이것은 세설신어의 언어편(2-103)에 실려있는 이야기지만, 이들의 현현역색의 이해가 분명히 현인을 현인으로서 대접하는 마음이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고주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열거한 1~4까지의 해석을 비교하면 1에서 4까지 꾸준히 원의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학문의 정교함이나 창조력의 발동이 명백한 것의 부정이나 진실의 왜곡을 초래한다는 사례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논어를 애써 달리 해석하려 발버둥 칠 필요 없다. 있는 해석의 의미를 천착하여도 그 무궁한 새 맛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치기신의 치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 희생한다는 뜻으로 새긴다. 사군은 곧 국가사직으 안보에 관한 문제였음으로 그런 뜻이 자연스럽게 들어간 것이다.

 

수왈미학, 오필위지학의는 앞 장에서 행유여력, 즉이학문 이라 한 것과 똑같은 반주지주의적 강조의 맥락을 가지고 있으나,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학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어떤 전문적 학단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미학이라는 것은 구태여 어떤 학단에 들어와 공부하지 않았어도, 즉 어떤 학의 커리큐럼을 이수하지 않았어도 그를 배운 자라 말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예나 오늘이나 우리는 너무 제도권 내에서 익히는 학문만을 학문으로 생각하는데 너무 익숙해 있다. 학문의 근본적 소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깊게 통찰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배움의 궁극적 목적은 배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는 것이다. 배움은 삶이다. 삶이란 곧 현현, 사부모, 사군, 여붕우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관계속에서 있는 힘을 다할 수 있는 자야말로 곧 배운자 인 것이다. 학문과 삶이 점점 유리되어 가고 있는 요즈음의 세태에 대한 자하의 경종의 멧세지인 것이다.

 

집주 자하, 공자제자, 성복, 명상. 현인지현이역기호색지심, 호선유성야. , 유위야. 위치기신, 위불유기신야. 사자, 개인륜지대자, 이행지필개기성, 학구여시이이. 고자하언, 유능여시지인, 구비생질기미, 필기무학지지, 수혹이위미상위학, 아필위지이학야. 유씨왈: 삼대지학, 개소이명인륜야. 능시사자, 즉어인륜후의. 학지위도, 하이가차? 자하이문학명이기언여차, 즉고인지소위학자, 가지의. 고학이일편, 대저개재어무본. 오씨왈: 자하지언, 기의선의. 연사기지간, 억양대태과. 기류지폐, 장혹지어폐학. 필약상장부자지언, 연후위무폐야.

 

1-8. 자왈: 군자부중즉불위. 학즉불고. 주충신, 무우불여기자, 과즉물탄개

 

1-8.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무게있게 행동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학문을 해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 우러나오는 마음과 믿음 있는 말을 주로 하며, 자기보다 못한 자를 벗삼지 아니하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거리지 않는다.

 

도주 주충신 이하의 문장은 자한 24에 그대로 나오고 있음으로 생각컨대, 군자부중즉불위, 학즉불고 와 그 이하의 문장은 본래 별도의 파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뜻에 맥락적 연관성이 있을 필요가 없다.

 

군자부중즉불위를 독립된 하나의 유니트로 보고 학즉불고를 그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학즉불고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불고를 부정적인 맥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맥락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하면 학즉불고는 사람이 배우면 완고하게 되지 않는다. 는 뜻이 된다. 그리고 소라이는 군자부중즉불위를 역시 제도사적 관점에서 독특하게 해석하였다: 군자는 중대한 사안이 아니면 위의를 설하지 않는다(범비중사, 불설위엄)

 

그러나 나는 이 구문에서는 그냥 평이한 주자의 해석을 따랐다. 학즉불고도 앞서 말한 주왈미학, 오필위지학의와 같은 학에 대한 본의를 묻는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혹자는 마지막의 과즉물탄개를 과실에 대한 일반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의 구문을 이어받은 맥락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자기보다 못한 친구를 사귀지 말 것이나, 그러한 서낵에 오류가 있을 경우는 주저없이 그 선택을 바꿔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다.(일운, 약결우과오, 부득선인, 즉개역지모난지야.) 그러나 이것은 매우 협애한 오석이다. 무우불여기자는 그 뜻이 이미 그 자체로서 완료되는 풍부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다시 풀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 장의 대의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액센트는 역시 과즉물탄개에 놓여있다. 인간은 허물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일,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신의 일)이라는 시인 알렉산더 포우프(Alexander Pope, 1688~1744)의 유명한 말대로 인간은 허물을 향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신의 사업이 아니다. 용서 그 자체가 나의 실존적 사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교는 인간을 신에 떠맡기지 않는다. 잘못은 결국 내가 아는 것이다. 내가 안다면 바로 고쳐야 하는 것이다. 그 고침()에 거리낌()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허물을 고치기를 거리끼는 인간, 그것이 바로 소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변의 군상이요, 나의 모습인 것이다. 나의 행위가 나의 존재에 허물됨을 자각하는 순간, 그 허물됨을 고치기를 꺼려한다면 그는 영원히 배움의 길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종언인 것이다. 허물이란 고치면 끝나버리는 것이어늘...........

 

집주 중, 후중; , 위엄; , 견고야. 경호외자, 필불능견호내. 고불후중, 즉무위엄, 이소학역불견고야. 인불충신, 즉사개무실. 위악즉역, 위선즉난. 고학자필이시위주언. 정자왈: 인도유재충신, 불성즉무물. 차출입무시, 모지기향자, 인심야. 약무충신, 기복유물호? , 무통, 금지사야. , 소이보인. 불여기, 즉무익이유손. , 역금기지사. , 외난야. 자치불용, 즉악일장. 고유과즉당속개, 불가의난이구안야. 정자왈: 학문지도, 무타야. 지기불선, 즉속개이종선이이. 정자왈: 군자자수지도, 당여시야. 유씨왈: 군자지도, 이위중위질, 이학이성지. 학지도, 필이충신위주, 이이승기자보지. 연혹린어개과, 즉종무이입덕, 이현자미필 락고이선도. 고이과물탄개, 종언

 

1-9. 증자왈: 신종추원, 인덕귀후의

 

1-9. 증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삶의 마감을 신중히 하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

 

도주 신종추원! 이것은 증자의 말로 기록되어 있지만, 아마도 논어 전체를 통해 가장 많이 인용되고 또 가장 심오한 의미를 함장하는 구절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신종추원이라는 한마디처럼 오늘날까지 우리의 삶의 모든 양식과 직결된, 그리고 유교의 문화적 가치(Confucian Paradigm)를 대변해주는 논어의 구문도 없을 것이다. 이것을 증자가 말했는지, 공자 자신의 생전의 발설이 증자의 문하생들에 의하여 증자의 말로서 전이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아. 증자 계열이 효의 전문가들이라 할때, 이 구절은 아마도 효의 제식적 가치에 대한 최고의 논평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신종추원 이 한마디가 증자 자신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증자는 이 한마디로써 충노로 지은 대죄를 속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나 도올은 말한다: 증자는 신종추원으로써 충노를 대속하였다.

 

신종의 종은 인간의 생명의 종언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 삶의 마감이다. 종은 곧 죽음이다. 신종이란 죽음을 신중하게 한다는 뜻이다. 일본말로 쯔쯔시무라고 하는 이 신의 글자는 우리말로 삼간다는 뜻이다. 신중하게 한다 삼간다. 는 동사의 주체는 죽는 당사자에게 물론 해당될 수도 있다. 내가 죽을 때 나의 죽음을 신중하게 선택한다. 값있는 죽음을 죽는다. 죽는 환경을 아름다웁게 조성한다는 뜻도 물론 내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신의 주체는 주로 그 후손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종은 우리 삶의 대표적 사례, 즉 관, , , 제 중의 흉례인 상례에 해당되는 것이다. , 혼은 삶의 제식이요, , 제는 죽음의 제식이다. , 혼은 가례요, , 제는 흉례요 길례다.(상은 흉례로, 제는 길례로 분류된다.) 신종이란 곧 상례를 말하는 것이요, 추원이란 곧 제례를 말하는 것이다. 공안국은 말한다.

 

신종자, 상진기애야; 추원자, 제진기경야.

 

신종이란 상례에 있어서 그 슬픔을 다하는 것이고, 추원이란 제례에 있어서 그 공경스러움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을 공씨의 애기처럼 도식적으로 단순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상이란 한 인간의 죽음과 함께 성립하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죽음의 잔재인 시체를 묻든지 어떠한 뒷마무리를 반드시 해야한다. 그것은 죽은 자의 없이 아니라 산 자의 없이다. 상에는 반드시 복상의 기간이 따른다. 삼이라는 도식적 숫자의 문제도 물론 그 오리지날리티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지만, 공자 자신이 분명히 삼년상 이라는 학단의 룰을 고집한 것 같다. 본편의 11장에 나오는 삼년무개라든가, 양화 21에 나오는 그 유명한 재아와의 삼년지상 논쟁은 분명히 오리지날한 공자의 입장을 강력히 대변하는 초기파편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의 사후에도 공문 제자들은 3년상의 룰을 엄격히 실천하였다. 3년상이 동양문화권에서 하나의 준수의 정칙으로서 확고한 관습의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은 바로 공자 자신의 고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3년상의 실제적 창립지였다.

 

추원에서 원은 나에게 멀리 있는 조상, 그러니까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혹은 그 이상의 선조를 의미할 수 도 있겠지만 일단 한 인간이 죽은 시접에서 3년까지의 복상기간을 상의 기간으로 본다면, 3년이 지나게 되면, 이미 그 인간은 나에게서 멀리 있게 된다. 이미 정감적으로 가까이 잇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모두 원의 개념으로 편입되게 되며, 그러면 그때는 신의 대상이 아니라 추, 즉 추모나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추원이란 죽은 지 3년이 지나면 그 인간은 상의 대상이 아니라 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제는 흉례가 아니라 길례다. 제는 상실의 슬픔을 넘어서서 이제는 삶의 기쁨으로 화하게 되는 것이다.

 

진종추원, 민덕귀후의.

 

과연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되씹고 또 되씹어 보아도 참으로 다시 없는 명언이요, 인류역사의 한 진보의 장을 수립한 명구요, 인문주의의 승리를 구가한 명론이다. 이 문제를 천착해 들어가기 전에 우선 조건절과 주절에 얽힌 편협한 한 문제를 언급해보자. 신종추원이라는 조건절에 대하여, 주절인 민덕귀후의 주어가 민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역대의 모든 주석가들이 조건절의 신종추원을 천자로부터 제후, 대부, 사에 이르는 상제로 해석하였다. 즉 지배자들이 상례와 제례를 후덕하게 하면, 민심이 후덕하게 돌아간다(귀후)라고 풀이한 것이다. 즉 민의 계급성을 인식한 것이다. 공안국은 인군능행차이자, 민화기덕, 이개귀어후야. (통치자가 신종과 추원을 잘 행하면, 백성들이 그 덕에 감화를 입어 모두 후덕한데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고 황간은 상지화하, 여풍미초.(지배자가 피지배자를 감화시키는 것은 바람이 풀위를 스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모두 상지화하의 맥락에서 조건절과 주절의 관계를 분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생각키에 분명한 오독이다. 논어의 민의 용법은 분명히 서인의 뜻으로 한정되어 쓸 때도 있지만, 막연하게 보편적 인간, 다시 말해서 제후나 대부, , 민의 구분을 초월하는 보편적 개념으로 쓸 때도 많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공자 사상의 계급성과 보편성의 양면을 전관해야만 하는 당위성이다. 공자는 분명 그 시대적 한계 속에 갇혀 있다. 그러나 그가 그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있다면 분명 이미 그 속에 우리가 말하는 보편적 인간이 들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가 유대인의 종족적 신앙과 제식을 타파하고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받고 굶주린 자 모두에게 복음의 멧세지를 전했다면, 분명 공자에게도 그러한 보편주의의 복음이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한 주으 패러다임은 바로 이러한 인문주의적 보편성의 축이었다.

 

어떻게 상제가 천자, 제후, 대부, 사에게만 있고 민에게는 없단 말인가? 민은 죽지도 않고 제사도 안 올린단 말인가? 다산이 대부분의 주석에 있어서 편협한 고증에 구애되어 있고 논어를 바라보는 전체적인 새로운 프레임웍이 결여되어 있다고 나는 비판하지만, 이 부분에 관하여 기존의 주석을 타파해버린 것은 참으로 통쾌하다 아니 말할 수 없다.

 

민자, 인야. 민선능구, 민장불곡, 기필하천자위민호? 상제지례, 통어상하, 불필이관감언야.

 

여기서 말하는 민이란 보편적 인간이다. 민선능구니 민모불곡이니 하는 용례에 있어서, 어찌 단순히 하천한 사람들만을 민으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상례와 제례는 상하에 모두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보아 감화를 입는다는 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죽는다. 예수는 죽었다 살아났는지 모르지만 결국 또 하늘로 올라갔다(승천). 예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은 이 땅에서 일정 기간 살다가 그 삶을 마감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요즈음 과학적 생각으로 이 종언을 해석한다면, 곧 죽으면 끝이다. 죽은 자는 죽음을 모른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신종이라는 것에 그렇게 신경을 써야 하는가? 삼년상은 뭐 말라빠진거냐?

 

옛사람들은 그러니까 동, 서를 막론하고, , 북을 막론하고, 죽음을 죽음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죽음은 새로운 삶, 다른 양식의 삶의 시작이었다. 죽은 자의 삶, 그것이야말로 모든 인류 고대문명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테마였다. 이집트의 피라밋이나 진시황의 거대한 지하궁전이 모두 이 죽은 자의 삶에 관한 문제였다. 이 죽은 자의 삶을 위하여 산 자의 삶이 희생되는 고대 문명에 비일비재하다. 이것은 단순히 지배자의 폭력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기 신종추원이라는 문제는 바로 이러한 죽은 자의 삶에 관한 인식의 전환을 이룩한 위대한 인문주의적 비약을 상징하는 증자의 명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조상숭배(ancestor worship)라고 하는 인류사의 보편현상과 관련되는 주제인 것이다. 우리는 종교를 생각할 때 너무 신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또 신의 개념이 고등 종교라는 타이틀을 소유하는 한 반드시 유링신관, 즉 모노테이즘(monotheism)의 것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신은 알고보면 그 궁극적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모두 죽은 자의 삶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BC 300년 전후에 활약한 희랍의 신화작가(mythographer) 유에메로스(Euhemerus)는 모든 신화적 존재나 사건이 실제적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가설위에서 신화를 연구하는 전통을 확립하였다. 그는 기원전 301년부터 297년까지 마케도니아의 왕 카산다(Cassander)의 궁정에서 일하였으며, 민중의 신화를 해석하기 위하여 희랍의 방대한 지역을 구석구석 답사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의 계보가 역사적 영웅이나 지배자 혹은 종족의 추장이나 전사의 전화형태임을 밝히고 모든 고대 신화가 이러한 인간의 발명에 의한 우화의 축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신화의 해석방식을 우리는 유에메리즘(Euhemerism)이라고 부른다. 이 유에메리스틱한 종교해석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이 장에서 말하고 있는 신종추원 즉 상제라고 하는 조상숭배와 관련된 것이다. 제를 전제로 하지 않는 상은 단순한 장례(funeral)이며 그것은 조상숭배(ancestor worship)로 간주되지 않는다. 미국사람들의 장례식을 우리는 조상숭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19세기의 탁월한 인문주의자이며 사회과학자이며 철학자인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는 그의 주저 사회학원리(Principles of Sociology, 1877)에서 모든 종교의 뿌리는 조상숭배이다(Ancestor worship is the root of every religion)라는 보편가설을 정립하였다. 결국 모든 신은 귀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귀신은 조상신이다. 모든 신은 그 궁극적 분석에 있어서 한 특정한 역사적 개인의 귀신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Every god is, and must be, in ultimate analysis, the ghost of a particular human being) 유대인들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 곧 야훼도 알고 보면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다윗의 하나님이다. 결국 그 계보를 따져 올라가면 야훼도 궁극적으로 어떤 조상신의 전화형태일 것이다. 야훼는 결국 유대인들의 조상신일 뿐이다. 개별적 조상의 숭배(individual cult)이든, 민족전체의 조상의 숭배(national cult)이든 그것은 사실 조상숭배라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그것은 결코 일신이다 다신의 이원법에 의하여 갈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구약의 구서구석을 뒤져보면, 개별적 조상숭배의 제식이 무수히 찾아진다. 죽은 조상, 그리고 죽은 왕이나 영웅에 대한 제사가 곳곳에 그려져 있다. 테라핌(Teraphim, 가신상), 죽은 자에게 음식을 바치는 것, 조상의 무덤에 대한 존중, (mourning)의 습관, 레비레이트율법(Levirate Law), 네크로만시(Necromancy,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말하게 함, 강령술에 의한 점) 등등의 무수한 사례들이 지적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조상 숭배의 습관들이 카발라(the Kabbalah)나 탈무드, 미드라쉬 문헌(Talmudic and Midrashic literature), 그리고 그들의 일상적 시나고그의 리터지(Litergy) 속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돼 신약성서의 첫구절이 바로 예수의 족보(the genealogy of Jesus Christ)로부터 시작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임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왜 그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이 증명되어야 하는가? 예수 또한 조상신의 확고한 대열에 끼어야만 그 신위의 권위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가 가장 처음에 부닥친 사건은 바로 이 땅의 조상숭배와으 마찰이었다. 조상숭배, 즉 제사의 불인이 기독교 신앙의 마크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이야기다. 제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들추어내는 우행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고(=기독교)는 결국 예수에 대한 제사요 예배이다. 우리 제례는 예수가 아닌 자기 조상에 대한 제사요 예배이다. 영어로 안세스터 워싶(ancestor worship)이라 할때 워싶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라. 조상의 제사는 곧 조상의 예배다. 기독교는 개별화되 조상들의 예배를 예수 한 사람의 예배로 대치시키라는 명령이다. 예수도 물론 역사적으로 갈릴리에 존재했던 한 사람의 죽은 영혼이다. 그는 죽어 승천했고 신화되었다. 기독교는 예수에 대한 신종추원인 것이다. 예수의 신종은 십자가이며, 그에 대한 추원은 하늘나라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신종추원과 조상에 대한 신종추원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첫째 조상에 대한 신종추원은 그 신종추원의 단위가 교회라는 단위로 확대된다. 둘째로, 조상에 대한 신종추원은 제사장(priest) 그룹이 분화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가족의 성원이 목사가 되고 신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식의 과정도 가정적 삶에서 자연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식의 과정도 가정적 삶에서 자연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다. 제사에 있어서는 가정적 삶과 종교적 삶이 유리되지 않는다. 가정이 곧 종교이다.

 

우리는 첫번째의 차이에서 기독교의 보편주의적 성향에 대한, 조상숭배의 가족주의적 편협성의 위험을 도출해낼 수 있다. 그리고 두번 째의 차이에서 우리는 기독교가 인간을 일상적 삶에서 유리시키고, 인간을 종교적 질곡속으로 빠뜨리게 되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지적을 할 수가 있다. 물론 제사에 있어서도 삶과 종교의 과도한 밀착이 인간을 목조르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득실의 문제를 떠나 모든 종교가 알고보면 조상숭배에 불과할 뿐이라는 대명제의 근본적 의미를 물을 필요가 있다.

 

인간의 죽음이란 인간의 유한성의 상징이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시인하기를 두려워한다. 유한성을 무한성으로 바꾸려는 노력에서 모든 종교는 태어나기 마련이다. 고대인들은 인간이 죽으면 그 영혼은 어떤 모종의 아이덴티티 체계를 유지한다고 믿었다. 물론 그 아이덴티이 체계의 지속성의 영우너성이나 한시성의 설정은 문화적 양태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면 인도인들은 그 영혼의 동일성의 지속을 무한대에 가까운 기 시간으로 보았고(윤회사상), 중국인들은 그 영혼의 동일성의 지속을 한 백여년 밖에는 잡지 않았다(사대봉사)

 

그런데 고대 문명에 있어서 더 중요한 테마는 사후 영혼의 산자와의 관계였다. 그 영혼이 산 자에게 우호적인 관계에 놓이느냐, 대적적인 관계에 놓이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대적적인 관계의 영혼을 우리는 악귀라고 부르고, 우호적인 관계의 영혼을 선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기실 모든 조상숭배의 출발은 바로 이 악귀를 선귀로 전화시키거나, 악귀의 발생을 애초로부터 봉쇄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에 대해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재산권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내가 죽으면서 살아 생전에 이룩한 업(재산)을 후손에게 증계시켰을 때, 그 재산권은 죽은 내가 계속 보유하게 된다. 이것은 모든 고대인들의 사유였다. 따라서 그 재산을 승계한 자손은 당연히 그 죽은 자에게 제사를 지내야 하는 빚을 지게 된다. 그 빚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을 때 그 귀신은 질병과 재앙 등으로 그 자손을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의 저자이며 영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프레이저경(Sir James George Frazer, 1854~ 1941)의 종교의 정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명쾌하게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다.

 

By religion, then, I understand a propitiation or conciliation of powers superior to man which are believed to direcr and control the course of nature and of human life(Ch. IV. Magic and Religion, GB)

 

종교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그것은 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인간의 삶과 대자연의 진로를 지배하고 방향짓고 있다고 믿어지는 힘과의 화해며 달램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종교의 원초적 출발은 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인간에게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어떤 힘과의 화해인 것이다. 즉 한 인간이 신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으로부터 행위하게 되면 우리는 그를 종교적이라 부르고,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으로부터 행위하게 되면 우리는 그를 도덕적(moral).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두려움의 관계는 수직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Transmigration)나 환생(Reincarnation), 그리고 고대사회의 토테미즘(Totemosm), 우상숭배(Idolatry), 배뱅이굿에서 보여지는 샤마니즘의 강령술 등이 모두 조상숭배라고 하고 인류의 보편적 종교현상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 이 증자의 신종추원은 바로 이러한 전통적 조상숭배의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대치시키는 발언인 것이다. 즉 상제의 궁극적 의미가 귀신의 달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성 속에 내재하는 하나의 축제(feast)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죽음은 나의 유한성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손)의 유한성과의 연속의 계기라는 것이다. 즉 나의 죽음이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손에 의하여 추모됨으로서 어떤 연결의 고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존재의 유한성의 단절이 다시 단절될 타의 유한성과 접합됨으로써 무한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한한 시간의 연접은 무한핟. 그 연접의 고리가 바로 상, 제의 제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귀신에 대한 수직적 공포가 아니라, 나의 존재의 유한성의 두려움에 대한 수평적 유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수평적 유대가 곧 인간의 역사이다. 모든 사람이 양명어후세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기억된다고 하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유한성의 공포를 느끼지 않고 편안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나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분간 그들과 더불어 살 것이다. 나는 죽는 순간 매정하게 단절되거나 내가 사랑했던 그들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나의 삶을 편하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제사의 궁극적 의미는 죽음에 잇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다. 죽는 자의 삶에 있고 살아남는 자의 삶에 있다. 그것이 바로 민덕귀후의 궁극적 의미다. 상제의 의미를 민덕의 귀후에 돌렸다는 것은 곧 인성(humanity)의 종교적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수직적 관계를 역사의 수평적 관계로 환치시킨 것이다. 종교적 공포로부터의 해방이 다신을 일신으로 초월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신을 역사로, 상식으로, 귀속시킴으로서 새로운 인문주의의 가능성을 연 것이다. 무술적 세계를 초월선의 매개 없이 직접 인문화 시킨 것이다. 양수명의 말대로 중국문명은 이런 방식으로 조숙하여 갔던 것이다.

 

집주 신종자, 상진기례; 추원자, 제진기성. 민덕귀후, 위하민하지, 기덕역귀어후. 개종자, 인지소역홀야, 이능근지; 원자, 인지소역망야, 이능추지. 후지도야. 고이차자위, 즉기지덕후. 하민화지, 즉기덕역귀어후야.

 

1-10. 자금문어자공왈: 부자지어시방야, 필문기정, 구지여? 억여지여? 자공왈: 부자온, , , , 양이득지. 부자지구지야, 기저이호인지구지여!

 

1-10. 자금이 자공에게 물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한나라에 이르시면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를 들으시었다. 그것은 선생님 스스로 구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기회가 상대방으로부터 주어진 것인가? 자공이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따뜻하고 솔직하고 위엄있고 검소하고 사양하심으로써 그런 기회를 얻으셨다. 선생님께서 구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주 이 장에는 두명의 중요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있다. 그 하나는 자금이요, 그 하나는 자공이다. 자금은 열전에 공자의 제자로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추론은 오직 논어의 자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혹자는 자금이 자공의 제자였기 때문에 열전에 안 올랐다고 하지만, 자금이 자공에게 묻는 장면이 논어에 두 번 등장했다고 해서 자금을 곧 자공의 제자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자공과 같이 스마트한 사람이 자금과 같은 삐딱한 인물을 제자로 두었을리 만무하다. 자금은 분명 공자의 제자로서 매우 나이가 어린 그룹에 속해 있었다. 공자의 사후에도 공자 교단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자금은 성이 진이요 명이 강이다. 자금은 그의 자이다. 내가 생각키에 자금은 노나라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공자의 문하에 입문하였으면서도 센터에 들어오지 않고 주위를 맴맴 돌면서 공자를 삐딱하게 보는 매우 부정적 인간이었을 것이다. 본장에서도 자금이 공자를 보는 시각은 매우 씨니칼(cynical)하다: 공자는 치사하게 이나라 저나라 정가에 끼웃거린 사람이 아니겠구?

 

지금도 곡부의 공자고택에 가면 시례당이라는 널찍한 건물과 정원이 있다. 물론 옛모습은 아니겠지만, 그곳이 바로 공자가 그의 아들 백어에게 시와 례를 가르쳤다는 곳이다. 그런데 이 당에 얽힌 고사는 계씨 13에 나온다. 자금이 백어와 홀로 있을 때 슬그머니 묻는 말이 이런 것이었다.: , 자네 말야! 아버지한테 뭐 좀 특별하게 배우는 것이 없나? 이에 대한 백어의 대답은 특별하게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시와 례를 모르면 사람구실 못한다고 평소에 들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 고사에서 자금의 태도 또한 무엇인가를 염탐하는 낌새가 있다. 하여튼 좀 치사한 자식이다.

 

이 치사한 자금의 캐릭터는 공자 사후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자금은 자공을 부추기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자장 25: 당신이 그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필요가 있겠소. 천하으 제후를 휘어잡는 당신이야말로 공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아니겠고? 하여튼 자금과 같은 기분나쁜 자식은 당분간 잊어버리는게 좋겠다. 자금과 재여는 모두 공자에게 있어서는 가롯유다 와 같은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었다. 물론 위대한 자의 인격은 이런 부정적 인물들 때문에 더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자공은 위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31세 연하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니까 열전의 기록으로 보면 안회보다 한 살 어리다. 사기열전의 나이기록이 정확하다고만 볼 수 없지만, 하여튼 자공과 안회는 같은 또래의 제자로 공자의 초기제자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공야장 8에는 공자가 자공 보고 너와 안회중에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있겠냐? 라고 물었던 것이다. 자공과 안회는 같이 생활하면서 같이 비견되었던 인물들이었음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대화의 초기 파편이다.

 

자공에 관하여 가어는 놀라웁게도 단목사, 자자공, 위인. 유구재저명. 이라는 짤막한 한 마디만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는 자공에 관한 기록이 72 재자 중에서 최장의 드라마로서 스릴있게 전개되고 있다. 가어와 열전을 비교하면서 느끼는 것은 사마천의 열전의 기술이야말로 곧 사마천의 이매지네이션을 옮겨놓은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그 유명한 와신상담의 주인공 월왕 구천이 기나긴 인고의 세월 끝에 오왕 부차를 깨뜨리고 그의 가슴에 자결의 비수를 꽂게 만드는 그 슬픈 이야기으 역사적 환경이 모두 제나라의 전상이 노나라를 칠려고 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자공의 외교적 수완으로 비롯되어 형성된 대하드라마로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오월동주의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의 배후에 자공이라는 탁월한 유세가의 활약이 그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그 진상을 과연 누가 밝힐 수 있을까?

 

사마천이라는 탁월한 문장가의 기술을 잘 뜯어보면 그것은 공자가 자공과 재아 두 사람을 언어에 능한 제자로 꼽은 공자가 신의 언급(선진 2)의 테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어떤 소설적 각색같다는 느낌을 배제하기 힘들다. 자공의 당대 제후들과의 언변은 모두 역사적 상황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리고 그 복잡하게 얽힌 국제 정세의 가닥을 교묘하게 풀어가면서 매우 유창한 구라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공이라는 인물이 구재에 능하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가 단지 자공이라는 역사적 개인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공자교안 전체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마천은 누구보다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사실 사마천만큼 자공이라는 인물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자공은 탁월한 웅변가며 지략가며 외교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국제적 물류를 잘 파악하여 막대한 재부를 축적하는 호상이었다. 그는 진시황을 탄생시킨 여불위의 전신이었다. 요즈음의 감각으로 정확하게 국제적인 비지니스맨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항상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있었다.

 

자공은 논어의 실제적 주인공이다. 안회는 너무 완벽하게 이상화되어 있고, 자로는 최다출연자이기는 하지만 항상 조연의 역할에 머물고 있다. 자공은 자로를 제외하면 논어의 최다출연자이다. 그리고 그는 항상 스승 공자와 맞대결하면서 깨달음을 축적해가는 주인공적 캐릭터로서 등장한다. 자공이 없으면 논어는 무너진다.

 

공자의 삶이 자로와의 만남과 더불어 시작했고 자로의 죽음과 더불어 죽었다면 공자의 자공과의 만남은 공자의 삶의 크나큰 행운이었다. 공자는 자로와 더불어 죽었지만, 자공과 더불어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대하다! 자공이여!

 

자공의 성이 단목이라는 사실은 아마도 그의 집안이 목재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라는 명과 공(정주간본에는 공으로 되어 있고, 한석경에는 공으로 되어있다.)이라는 자의 연관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원래 위나라의 조정에 물자를 납품하는 어용상인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자공을 가리켜 재화를 늘리는데 있어서는 도사! 억측을 해도 번번히 들어맞는다(선진 18)라고 매우정확하게 세속적인 기술을 하고 있다. 자공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증권가의 큰 손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교단은 실제적으로 자공에 의해서 그 재정이 확보되었던 것이다. 자공이 없었더라면 공자교단의 형성은 어려웠을 것이다. 자공이라는 젊고 영민하며 항상 배움에 게으름이 없는 물주의 사심없는 헌신 때문에 공자교단이 유지된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자공에 대한 평가에 매우 인색하였다. 그러면서도 결코 자공을 천대하지는 않았다. 군자불기의 원칙에 비교하면 공자가 자공을 평가하여 너는 한 그릇에 불과하다.(, 기야. 공야장 3)라고 한 것은 매우 인색한 평가다. 그러나 어떤 그릇이냐고 묻자, 호련이라는 찬란한 옥그릇에 비유한 것은 자공의 역할을 충분히 인정한 것이었다.

 

공자는 죽을 때도 자공의 품을 애타게 기다렸다. 공자의 죽음의 침상에는 이미 사랑하는 아들 백어도, 항상 그리워했던 제자 안회도, 뻥끗하면 나무랬던 친구 자로도 이미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공자는 죽어가는 희미한 의식속에서 오직 자공만을 기억했던 것이다. 공자는 자공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공의 눈물 속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공은 공자가 눈을 감는 순간 안회처럼, 자로처럼 항상 공자를 곁에서 못 모식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이 3년상을 치르고 떠났는데 자공만은 홀로 3년을 더 복상하고야 떠났다. 스스의 무덤 옆에서 6년을 산다는 것 자체가 결코 간단한 고행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가 당대의 거부였다는 생각을 해본다면.....

 

자공이 6년의 수묘(로묘)를 감내해냈다는 사실은 그의 개인적 심리의 보상기재(compensation), 즉 살았을 때 공자 곁은 충분히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대한 보상심리로서 일어난 행위라고만 분석할 수는 없다. 자공의 육년수묘는 그 나름대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공자말년의 제자들이 모두 공자의 유랑장정에 참여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공자의 장정세대는 자공 한 사람이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공의 나이는 비교적 어리다. 공자가 죽었을 때 그는 40세를 갓 넘었다. 그렇지만 그는 공자의 초기제자그룹의 주요멤버였다. 따라서 그는 공자학단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장정세대로서 특별한 본을 보여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만년제자들을 정신적으로 묶을 수 있는 어떤 구심점으로서의 행위 양식이어야만 했다. 공자는 생전부터 삼년상을 고집했다. 자공의 육년상은 스승 공자에 대한 충정의 본보기로서 더 이상없는 과시였다. 자공은 그런 방식으로 공자학단 내의 공자에 대한 절대적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초기교단이 세차게 뻗어나갈 수 있었던 밑거름이요 저력이었다.

 

논어 내의 자공과 공자의 대화는 대체적으로 오리지날한 파편으로 간주된다. 자공이 6년 수며기간 동안에 정리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말한 증자의 충노 운운도 사실 알고 보면 공자가 자공에게 나는 결코 박식한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하나로 꿰뚫는 사람이라고 말한 위령공 2의 일이관지 명제와 자공이 공자에게 종신토록 기억할만한 이야기 한마디만 해달라고 조르니까 노일 것이다. 자기가 원치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라고 한 위령공 23의 노의 명제를 합성하여 윤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공의 파편이 훨씬 더 생생한 그대로의 공자 모습을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오늘날의 공자가 된 것은 실상 자공 덕분이라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자공은 공자 사후에도 공자에 대한 철저한 로얄티를 지켰다. 공자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추호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차에 돈을 싸들고 제후를 찾아다니면서 공자의 위대함을 선양하였던 것이다. 사마천은 화식열전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공결사련기, 속백지폐이빙향제후, 소지, 국군무불분,, 정여지항례. 부사공자명시양어천하자, 자공선후지야. 차소위득예이익창자호?

 

자공은 사두마차를 타고 비단뭉치의 선물을 들고 제후들을 방문하였으므로 그가 가는 곳마다 뜰의 양쪽으로 내려서서 자공과 대등한 예를 행하지 않는 왕이 없었다. 무릇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골고루 알려지게 된 것은 자공이 그를 앞뒤로 모시고 도왔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이른바 세력을 얻으면 그 이름이 세상에 더욱 드러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정범진 외 역본 참고)

 

자공이 위나라 사람이라는 사실도 매우 논어를 읽는데 중요한 함수로 작용한다. 공자의 유랑이 기나긴 장정이기는 했지만 그 루트를 잘 뜯어보면 항상 위나라를 거점으로 해서 움직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장정의 비용을 댄 것이 바로 자공이었다. 자공의 위나라 재정기반이 없었더라면 공자의 장정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공자와 자공의 대화가 상당부분 위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공자의 고난의 시절에 위나라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자공은 부자의 문장은 들을 수 있지만, 성과 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어볼 수가 없다(공야장 12)라고 말했다. 이 장을 들어 많은 학자들이 공자의 사상 자체가 성과 천도를 배제하고 있다고 구구한 논변을 펴지만, 그것은 자공과 공자와의 관계의 구체적 맥락을 떠나서는 무의미한 말임을 일차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즉 공자는 자공과 같은 현실적 인간에게는 성과 천도와 같은 심오한 이야기를 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얘기가 상호간에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공자는 아마도 성과 천도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야기는 안회와 실컷 나누었을 것이다. 안회의 내면성의 깊이를 자공은 가지고 있지를 못했다. 그러나 자공은 자신의 분수를 명확히 깨닫는 훌륭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식의 한계내에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의 질문은 오히려 예리하고 우리로 하여금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게 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준다. 그는 끊임없이 물음으로써 배워간 인간이었다. 그는 학문의 인간이 아니라 문학의 인간이었다. 학문이란 본시 문학인 것이다. 물음으로써 배우는 것이다. 자공의 사회과학적이고 정치학적인 접근에서 출발하여 공자의 인문과학적 인의 사상의 핵심으로 나아가는 진로야말로 논어라는 서물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배움의 과정이다. 자공은 우리와 같은 매우 상식적이고 어찌 보면 답답한 인간이기에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자공과 더불어 깨달음의 과정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먼저 자금의 질문을 살펴보자. 부자라는 표현은 고증가들이 말하기를 대부를 지낸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경칭이라고 하지만(양백준) 부자는 그런 구체적 맥락에서 쓰여진 말은 아니다. 제자들이 스승으로 존중하여 부르는 말이었을 것이며 그것은 공자 고단 내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닌 말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영어로 Confucius라고 쓰는 것은 공부자(콩후우쯔)라는 중국말을 서양선교사들이 라틴어화(Latinization)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에서는 공부자라는 식으로 쓰인 예는 별로 없고 Confucius는 서양선교사들의 발명이라는 것이 최근의 정설이다.

 

지어시방의 시는 어떤 하나의 뜻으로 비특정의 지시 대명사로서 구어적인 어기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필문기정의 문은 그냥 듣는다의 뜻이라기 보다는 정사에 관여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구지여? 억여기여? 에서 억은 영어의 if not(그렇지 않다면)의 뜻이다. 구지는 내가 자발적으로 구한다는 뜻이고, 여지는 정치를 하고 있는 저편에서(치자들이) 구한다는 뜻이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저절로 주어진다는 뜻이다. .........? .............? 의 구문에서 여는 단순한 의문을 나타낸다.

 

이러한 자금의 야비한 비꼼에 대하여 자공은 강력하게 공자를 옹호한다. 그러나 자금의 비꼼의 내용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공자는 기회 닿는대로 여기저기의 나라에서 정치에 끼웃거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실을 자공은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케이! 좋다! 우리 선생은 정치 참여의 기회를 자기 자신이 스스로 구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은, , , , 양의 다섯가지 덕성을 갖추어서 구한 것이다. 범인들이 정치에 끼웃거리는 것과는 본질이 다르다! 사실 자공의 변호는 좀 궁색했다. 그래서 다산은 이 구절을 좀 다르게 해석하였다. 부자온랑공검에서 일단 문장을 끊고 양을 아랫구에 붙여 읽는다. 그리하면 양이득지가 된다. 그러면 우리 선생은 온양공검하셔서 사양하셨는데도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따름이다라고 자금의 비판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새로운 의미맥락이 생겨난다. 그러나 명백하게 다음의 구전, 즉 부자지구지야, 기제이호인지구지여!의 시인과 약간 괴리가 생겨난다. 그래도 억지로 새길 수는 있겠지만 나는 그냥 평범한 해석을 따랐다.

 

여기 우리가 꼭 주목해야 할 것은 문체다. 부이지구지야, 기제이호인지구지여!에서 지가 네번이나 들어가 있고, ..........., .........여와 같은 조사가 끝에 붙어 있는가 하면 별의미 없는 기자가 중간에 끼어있다. 이것은 얼마나 논어의 문체가 일상적 말(구어체) 그대로에 충실하려고 애썼는가를 나타내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논어의 문장은 이런데서 어떤 생동감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의 여는 앞의 단순한 의문을 나타내는 여와는 달리, 단정을 보류하면서 상대방의 강한 긍정을 유도해내는 어기를 담고 있다. 기제 그냥 리듬을 나타내는 조사일 수도 있고 양백준의 고증대로 노나라의방언이나 습벽일 수 도 있다. 그냥 부자구지, 이인구지 라 해도 될 말이 이렇게 깅어진 것이다.

 

집주 지여지여, 평성. .하동. 자금, 성진, 명항. 자공, 성단목, 명사. 개공자제자. 혹왈, , 자공제자, 미지숙시. , 반어사. , 화후야. , 역직야. , 장경야. , 절제야. , 겸손야. 오자, 부자지성덕광휘점어인자야. 기제, 어사야. , 타인야. 언부자미당구지, 단지덕용지서. 고시군경신, 자이기정취이문지이, 비약타인필구지이후득야. 성인과화존신지묘, 미역규측. 연즉차이관, 즉기덕성례공어불원호의, 역가견의. 학자소당잠심이면학야. 사씨왈: 학자관어성인위의지간, 역가이진덕의. 약자공, 역가위선관성인의, 역가위선언덕행의. 금거성인, 천오백년. 이차오자, 상견기형용, 상능사인여기, 이황어친자지자호! 장경부왈: 부자지시방, 필문기정, 이미유능계국이수지이정자. 개견성인지의형이락고지자, 병이호덕지랑심야. 이사욕해지, 시이종불능용이.

 

1-11. 자왈: 부재, 관기지; 부몰, 관기행. 삼년무개어부지도, 가위효의

 

1-1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는 그 뜻을 살피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그 하신 일을 살핀다. 삼년동안 아버지의 도를 고침이 없으면 효라 이를만 한 것이다.

 

도주 삼년무개어부지도, 가위효의. 는 이인 20에 한 글자도 틀림이 없이 그대로 다시 나오고 있다. 아마도 삼년상의 문제와 더불어 공자의 오리지날한 입장을 대변하는 구절일 것이다.

 

우선 부재관기지, 부몰관기행. 의 해석은 역사적으로 고주나 신주나 기의 지시체를 아버지()로 보지 않고 모두 자식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모든 전통적 해석은 한 인간을 평가할 때 그 인간의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음으로 그의 행동을 보지 않고 그 심지를 살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때부터는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자기 행동을 할 수 있음으로 그 사람의 행동을 보아 그 인품의 됨됨이를 판단한다는 것이다(공안국왈: 부재, 자부득자전, 고관기지이이. 부몰, 내관기행야.)

 

그러나 매우 소박하게 이 구절을 읽을 때, 이 구절의 의미는 삼년무개와 연접되어 있음으로 기지, 기행이 부지도와 관련되는 어떤 사태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한 인간의 인격판단기준을 부재, 부몰에 따라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작위적인 냄새가 난다.

 

지는 요새말로 지향성(intentionality)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생동하는 마음의 지향성이다. 지는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역동적 의지의 세계다. 따라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그 아버지의 살아 움직이는 뜻을 즉각 즉각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러한 지는 포착될 수 없음으로,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그의 행업, 그러니까 이루어 놓은 업적 등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효심의 기본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삶의 길()을 최소한 삼년 동안은 고침이 없어야 한다. 삼년의 설정은 꼭 그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삼년상이라는 공자교단의 규율을 생각할 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아버지가 해오던 일들, 주변에 형성된 삶의 방식을 너무 매정하게 하루아침에 바꾸어 버린다면 앞서 신종추원에서 말한대로역사의 단절이 초래되는 것이다. 삼년무개란 요새말로 하면 스무쓰한 트랜지션(smooth transition)을 말하는 것이요, 심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거리감의 시간설정(the psychological distancing process)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위효의에서 가위는 강한 가치판단을 나타내고 있다. 그냥 가볍게 효라 이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래야 비로소 효라 할 만하다는 강한 어조가 숨어 있다.

 

전통적으로 삼년무개어부지도를 놓고 아버지의도가 악한 것일 경우는 어떠하냐? 그래도 3년은 무조건 고수해야 하느냐? 는 등등의 문제를 놓고 시시콜콜한 많은 예송이 오갔다. 그러나 이 말을 한 사람은 결코 그런 특수 맥락을 전제로 해서 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상황적으로 자연적으로 해결될 문제이지 어떤 절대적 규범으로 접근하면 아니된다. 대체적으로 아버지의 도를 말할 때는 대강 그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이요, 삼년을 설정해놓고 생각하면 그 나쁜 면은 점차 잊혀져 갈것이다. 뭘 그 따위 말을 놓고 시시콜콜한 논쟁을 일삼을까보냐?

 

북한의 김정일씨가 그 아버지 김일성주석이 돌아가신 후에 삼년동안 유훈통치를 하고 그 도를 고침이 없었다는 사례는 아마도 이 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아직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며, 우리사회에 얼마나 논어의 가치관이 뿌리 깊은가를 잘 나타내주는 일화일 것이다.

 

집주 행, 거성. 부재, 자부득자전, 이지즉가치. 부몰, 연후기행가견. 고관차, 족이지기인지선악. 연우필능삼년무개어부지도, 내견기효. 불연, 즉소행수선, 역부득위효의. 윤씨왈: 여기도, 수종신무개, 가야. 여기비도, 하대삼년? 연즉삼년무개자, 효자지심, 유소불인고야. 유씨왈: 삼년무개, 역위재소당개, 이가이미개자이.

 

1-12. 유자왈: 예지용, 화위귀. 선왕지도, 사위미; 소대유지. 유소불행, 자화이화, 불이예절지, 역불가행야.

 

1-12. 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예의 쓰임은 조화로움을 귀하게 여긴다. 선왕의 도가 이 조화를 아름답게 여겼다. 작고 큰 일이 모두 이 조화로움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행하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오직 조화만을 알고 조화를 도모하고 예로써 절제하지 않는다면 또한 행하여 질 수 없는 것이다.

 

도주 이 장은 논어에서 예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구절인데 그 논의가 매우 이론적이고 개념적이다. 따라서 이것은 후대에 유자()에 의탁하여 지어낸 파편임이 분명하다. 브룩스는 이 파편을 자장편 뒤로 옮겨놓고 있는데 매우 타당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자장 편이 성립한 즈음에, 대강 BC 3세기 중반에나 형성된 파편일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후대의 개념적 인식에 의하여 료해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사실 이 편은 완벽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고전이란 그 문자가 불완전하여 온전한 해독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문장과 문장의 틈새에 인과적 고리가 숭숭 빠져 있어 유기적 통일이 어렵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이 장을 완벽하게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대의 문헌 특히 예기 락기의 언어와 상조해보면 그 뜻이 대강 추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악기의 후반부에 위문후가 락에 관하여 자하에게 묻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도 아마 그러한 맥락에서 비슷한 시절에 유약을 가탁하여 지어낸 설화 중의 한 파편일 것이다.

 

우선 예지용, 화위귀. 라는 첫 말부터가 심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이다. 여기 용에 관하여 송유들은 제용론을 들먹이며 해설을 가하고 있으나, 본시 체와 용의 이원적 이해방식은 불교에서 유래된 것이다. 중국인의 원래적 사고방식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원효대사가 소한 대승기신론은 철저히 제용론에 의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나 이런 이해를 논어 이해에 적용할 수는 없다. 예의 체와 예의 용이 개념적으로 분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송유의 이해방식을 비판하는 자들이 쓸용을 단순한 써이로 보아, 예지이화위귀로 풀이하기도 하지만, 다산의 말대로 그냥 있는 그대로 놓고 풀이하여도 별 상관이 없다. 예지용이란 예의 쓰임의 뜻이다. 이것은 아마도 예가 지향하는 바, 즉 예라는 것의 사회적 기능이 의도하는 바는 화를 귀하게 여긴다. 화를 으뜸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장전체를 잘 씹어보면 예의 쓰임의 궁극적 소이연아화(Harmony)에 있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무엇인가 예는 화를 지향하고 있지만 예와 화 사이에는 어떤 텐션, 스트레인이 느껴지는 구조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황간소는 이 문장 전체의 대의가 인군이 행화할 때에 반드시 예악이 상수해야함을 밝힌 것이라 하고 악으로써는 민심을 조화롭게 하고, 예로써는 민적을 검속한다.(용악화민심, 이예검민적.)하였는데 황간은 여기서 암암리 화=악의 도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형병은 화, 위락야. 라고 명백하게 못박았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동양인들은 예를 예로서만 고립시켜 생각한 적이 없다. 예는 반드시 락과 상수되는 개념인 것이다. 예없는 악이 없고, 악 없는 예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자의 관계를 밝힌 천하의 명언이 악기에 실려있다.

 

악자돈화, 율신이종천; 예자별의, 거귀이종지.

 

악이란 조화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을 거느리고 하늘을 따른다. 예란 그 마땅함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것으느 귀와 더불어 살며 땅을 따른다.

 

악은 하늘의 세계요 신의 세계다. 예는 땅의 세계요 귀의 세계다. 그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인가? 예술이란 본시 하늘을 향한 인간의 동경이다. 예의란 본시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의 질서이다.

 

악자위동, 예자위이. 동즉상친, 이즉상경.

 

악이란 같아짐을 위한 것이요, 예란 달라짐을 위한 것이다. 같아지면 친해지고, 달라지면 공경하게 된다.

 

선생과 제자,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이 모든 관계에 존하는 예란 이들 사이의 마땅한 바를 분별키 위함이요, 이들의 다름을 확실케 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름과 공경으로만 살 수가 없다. 그러면 인간은 소원해지고 고독해지고 엄숙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바로 음악, 예술이란 이러한 이화의 방향을 동화의 방향으로 전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곧 화요 동이다. 악속에선, 우리가 같이 노래부르고 춤추는 가운데선 수지무지족지도지하는 광열 속에선, 우리는 하나가 됨을 체험한다. 악이란 위동(같아짐을 위함)인 것이다. 예자는 천지지별이요, 악자는 천지지화인 것이다. 악이란 정의 불가변자요, 예란 이의 불가역자인 것이다. 악이란 내에서 동하는 것이요, 예란 외에서 동하는 것이다.(고락야자, 동어내자야; 예야자, 동어외자야.)

 

여기 예지용, 화위귀. 라 한 말은 예는 분별을 위한 것이지만 예는 악과 이원적으로 분립되는 것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악이 지향하는 화를 성취하는데 그 쓰임()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선왕지도는 이 화를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선왕지도는 곧 예의 총칭이다. 그것은 예의 다른 말인 것이다. 그래서 작고 큰 일들이 모두 이러한 화를 지향하면서 인간세의 문명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화 즉 악으로써만 아니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오직 조화를 위한 조화, 같아짐을 위한 같아짐만을 생각하는 것은 위태롭다는 것이다. 조화는 부조화의 계기를 아니 가질 수 없고, 화동은 별리의 계기를 아니 가질 수 없다. 즉 화()는 반드시 예로써 절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로써 절제된 때만이 락()은 악으로서의 기능()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예가 없는 악은 광란일 뿐이다. 악이 없는 예는 구속일 뿐이다. 바로 논어의 예에 대한 첫구절은 악기에서 말하는 악통동, 예변이 의 오묘한 진리르 예와 화의 친화와 텐션의 관계로써 설파한 것이다.

 

집주 예자, 천리지절문, 인사지의주야. 화자, 종용불후지의. 거예지위체수엄, 연개출어자연지리, 고기위용, 필종용이불추, 내위가귀. 선왕지도차기소이위미, 이소사대사무불유지야. 승상문이언, 여자이복유소불행자, 이기종지화지위귀, 이일어화, 불복이례절지, 즉역비복례지본연의. 소이류탕망반, 이역불가행야. 정자와: 예승줄리, 고례지용, 화위귀. 선왕지도, 이사위미, 이소대유지. 악승즉류, 고유소불행자. 지화이화, 불이예절지, 역불가행. 범씨왈: 범례지체, 주어경. 이기용, 즉이화위귀. 경자, 예지소이입야. 화자, 악지소유생야. 약유자, 거위달례악지본의. 우위, 엄이태, 화이절, 차리지자연, 예지절체야. 호리유차, 즉실기중정, 이각의어일텬. 기불가행, 군의.

 

1-13. 유자왈: 신근어의, 언가복야. 공근어예, 원치욕야. 인불실기친, 역가종야

 

1-13. 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약속이 의로움에 가까워야 그 말이 실천될 수 있다. 공손함이 예에 가까워야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까운 사람들을 잃지 아니 하면 또한 섬길 만 하다.

 

도주 노자 17장에 신부족언, 유불신언. 이라는 말이 있다.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신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왔다. 현은 이러한 평범한 해석을 뒤집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다. 모두 신부족, 안유불신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뜻은 믿음이 부족하다. 어찌 불신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 된다. 도무지 그 뜻이 정반대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해석이 곤란해지게 되는 것이다.

 

선진문헌에서 신의 의미는 곧 인간의 말이다. 신은 곧 언인 것이다. 신은 인간의 말의 신험성(verifiability)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유불신의 불신은 불언이며, 그것은 곧 노자가 말하는 불언지교가 된다. 신부족, 안유불신? 은 이렇게 해석된다: 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믿음이 결여되어 있는데 어찌 불언지교가 가능하겠는가?(자세한 것은 나의 노자와 21세기 제 2220~225쪽을 보라)

 

이 장의 신근어의, 언가복야. 의 신과 언은 결국 같은 단어의 배리에이션일 뿐이다. 인간의 믿음은 모두 말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약속도 결국 말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해석은 이와 같아. 약속이라구 다 약속이냐? 그 약속이 의에 가까운 것이래야 즉 의로운 것이래야 지킬만 한 것이 아닌가? 약속을 그냥 말로 새겨도 상관없다. 인간의 말이란 의로운 것이래야 그 말이 되풀이 되어 실천될 수 있는 것이다.

 

(공손함)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공손한 사람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손한 자일 수록 위선자가 많고 향원(양화13)과 같은 또라이 새끼들이 많을 수도 있다. 공손함도 예에 가까워야만 비로소 치욕을 멀리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문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이 곧 의는 아니지만 그것은 의에 가까운 것이다. 어째서 신이 의에 가까운 것인가? 그 말이 반복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근어의, 언가복야. 를 신이 의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은 그 말이 반복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새기는 것이다. 공근어례, 원치욕야. 도 마찬가지다: 공손함이 예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치욕을 멀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두번째의 해석에서는 신과 공의 부정적 함의의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다.

 

그런데 해석이 어려운 것은 다음의 인불실기친, 역가 종야. 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인을 친인척()으로 보고, 친인척 사람들이 그 부모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즉 부모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 종주로 삼을 만 하다는 식으로 해석하였다. 부모에게 잘하는 친인척은 받들어 줄 만 하다는 뜻으로 새긴 것이다. 그리고 인을 자기 부인으로 보아 다음과 같은 편협한 해석을 내렸다.: 결혼한 여자가 시부모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비로소 종씨로 간주할 만하다. 나는 이 모든 해석이 개똥같은 주석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추상적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마누라에 시부모에 종갓집을 들먹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후대의 편견을 공자시대의 가족관계에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인은 앞 문장의 내용을 받은 전치사에 불과하다. 인신공이 불실기친의 맥락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친도 꼭 부모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부모로 시작해서 친척, 그리고 가까운 친지, 친구들... 나에게서 가까운 연줄의 사람들에 대한 일반명사로 보면 될 것이다. 주자는 친을 가친지인으로 더욱 일반화시켰다. 혈연관계라기 보다는 그냥 교제상에서 친할 수 있는 사람 정도로 새겼다. 종은 동사로서 종주로 모신다. 섬긴다, 받든다의 뜻이다. 평범하게 말하면 존경하다의 뜻이다.

 

예수는 그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Aprophet is not without honor except in his own country and in his own house.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태 13:57, 마가 6:4, 누가 4:24)

 

예수는 왜 자기 고향 나자렛에서, 그리고 친지의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지 못했는가? 우리는 과연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이러한 예수의 말을 만고의 진리처럼 되씹어야만할 것인가?

 

예수가 고향에서 대접(환영)받지 못한 것은 그 이유가 너무도 간단하다. 너무도 엉뚱한 짓만 하고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를 보아왔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엉뚱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의 언행은 일상적 존경(daily esteem)의 대상이 아니라 충격이요, 외경이요, 이단이요, 기적적 권능이었다.

 

예수가 그의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 것은 그 이유가 간단하다. 결국 예수는 소인유의 세계에서 벗어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결코 부정적 맥락에서만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자가 소인유의 세계를 벗어날려고 발버둥쳤다면, 예수는 소인유의 괴력란신의 권능의 세계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오히려 그러한 무속적 세계속에서, 그러한 판타지 속에서 진정하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예수는 소인유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 그가 살았던 중동문명권의 언어였고 삶의 양식(Forms of Life)이었고 가치였고, 힘이었다. 그가 아무리 공자와 같이 대인유의 인문주의적 호학의 스승으로 머물고 싶었다 해도, 그것은 그 문화적 맥락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진부한 범용(banality)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경우, 그가 추구한 대인유의 세계는 상식과의 괴리가 없다. 자연적 질서의 파괴를 초래하는 초자연적 계기가 없다. 그래서 그는 가까운 사람에게서부터 존경을 받는 인간이 될 것을 권유한다. 예수의 기적도 좋다. 예수의 소피아(지혜)도 예수의 뒤나미스(권능), 그 궁극적 의미는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는데 있다(불실기친)고 권유한다.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 자는 진정한 선지자가 될 수 없다고 유교는 가르친다. 나만 해도 그렇다. 어려서부터 나와 같이 큰 또래 아이들은, 지금의 나의 학식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명구를 푸념처럼 뇌까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진정으로 나의 학식을 인정하는 마음이 우러 나오도록, 겸손하고 인내하며 더욱 더 큰 실력을 축적하여 그 가까운 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진리를, 아내로부터 자식으로부터 부모로부터 형제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이야말로 지난의 일이라고 하는 이 평범한 진리를 이 장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유교는 항상 이렇게 우리의 범용의 허를 치고 들어온다. 그리고 고향에서 대접받는 선지자는 없다는 식의 모든 가치명제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통념을 하루속히 타파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그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속에서만 의미 있었던 맥락적 언어였던 것이다. 재검토될 수 없는 진리는 진리라 아니다.

 

집주 근, , 개거성, , 약신야. 의자, 사지의야. , 천언야. , 치경야. , 절문야. , 유의야. , 유주야. 언약신이합기의, 즉언필가천의. 치공이중기절, 즉능원치욕의, 소의자불실기가친지인, 즉역가이종이주지의. 차언, 인지언행교제, 개당근지어시이로기소종. 불연, 즉인잉구차지간, 장유불승기자실지회자의.

 

1-14. 자왈: 군자식무구포, 거무구안, 민어사이신어언, 취유도이정언, 가위호학아이.

 

1-1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삼가할 줄 알며 항상 도가 있는 자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 이만하면 배움을 좋아한다 이를만 하다.

 

도주 국민학교 아동시절부터 입술에 붙었던 이런 말들, 나는 어린시절부터 엄마에게서 성경구절을 배웠고 또 이런 고전의 향기를 배웠다. 이 장의 말은 내 또래의 사람들만이래도 교양있는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실 논어는 논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명 속에 지속되어온 우리 삶의 가치의 전부였다. 식무구포하며 거무구안하며 민어사이신어언이요 취유도이정언이면 가위호학야이니라! 그 얼마나 정감있는 우리의 언어였던가?

 

자가라샤애 군자 식애포호말 구티말며 거호매 안호말 구티말며 사애 민하고 언애 신하고 유도애 취하야 졍하면 가히 혹을 호한다 니랄디니라(율곡언해)

 

이 장은 인간 공자의 매우 소박한 원래의 모습을 담고 있는 오리지날한 파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 언어가 질박하고 개념적 비꼬임이 없다. 예지용, 화위귀. 따위의 난해한 개념적 절구가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소박한 일상적 언어가 공자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군자는 공자의 이상이요, 공문 커리큐럼이 지향하는 인간상이었다. 천자라 할 지라도 군자의 모습을 위배할 수 없다.

 

식후구포하고 거무구안하라는 명령은 반드시 빈핍한 식사와 궁핍한 주거환경에 만족하라는 뜻은 아니다. 논자 80장에 감기식, 미기복, 안기거, 락기속. 이라 했듯이 먹는 것을 달콤하게 하고, 사는 것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우리 문명적 삶의 기본이다. 그러나 여기 공자는 어디까지나 전체의 문맥을 호학이라는 한 줄기에 잡고 있는 것이다. 호학의 조건으로서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배움을 좋아하는 자들은 먹되 배부른 것을 구할 시간이나 관심이 있을 수 없고, 살되 편안한 것을 구할 시간이나 관심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배부르게 먹기 위해 사는 인간, 편안하게 살기 위해 사는 인간, 이런 인간들처럼 굴욕적이고 자기기만적이며, 이기저이며 몰가치적인 인간이 없다. 일상생활에서 먹되 배부르지 않게 먹는다는 명제는 참으로 실천키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조금만 입맛이 당겨도 과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식은 단순히 나의 위장의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영혼의 타락을 초래하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바로 그러한 탐식의 마음이 공무원()의 독직과 연결되는 타락의 바탕인 것이다. 집도 편안하게 꾸밀려면 한이 없다. 돈을 쳐들이기 시작하면 무한정 들어가는 것이 집이다. 조촐한 방 한칸, 깨끗한 온돌장판에 창호지 발라 놓고 조그만 책상에 앉아 나의 세계를 꾸며놓아도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것이다. 빗자락 하나, 걸레 하나면 족할 것이지 뭔 인테리어 디자인이냐?

 

민어사이신어언 이라는 말은 교언영색부터 일관되어 내려오는 공자의 인의 사상의 주제이다. 똑같은 말이 조금 표현을 달리하여 이인 24에서 군자욕눌어언이민어행(말에는 어눌하고 행동에는 민첩하다)로 나오고 있다. 모두가 공자의 일관된 입장, 언어적 표현에 대한 거부감, 언어적 표현보다는 행동의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강력하게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는 말빠른 인간처럼 경멸스러운 인간은 없었다. 요즈음같이 말(verbalism)을 중시하는 가치관 속에서는 공자의 이런 태도는 시대착오적인 가치로 보일 수도 있으나, 진실을 추구하는 모든 현대인이 이러한 공자의 말에 심복하지 않을 자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공자가 증오하는 것은 웅변이나 달변 그 자체가 아니다. 실천이 앞서지 않는 공허한 웅변이나 달변이나 능변이 가증스러운 것이다.

 

취유도이정언은 많은 사람들이 애써 번역을 어렵게 하고 있는데, 그냥 액면 그대로 쉽게 해석하면 된다. 유도는 유도자이다. 고전한문에서는 추상적 속성만으로 그 속성을 구현한 사람이나 물건의 뜻이 된다. 취는 나아간다. 즉 그리로 간다. 그것에 달라붙는다. 는 뜻이다. 정언도 내가 내 자신을 바르게 한다이다. 정은 곧 광정의 정이다. 정을 유도자에 의하여 바르게 된다는 식으로 대부분 해석하는데 이것은 오석이다. 어떻게 유도자가 나를 바르게 할 수가 있겠는가? 바르게 함은 오직 나의 실존적 책임이다. ..............and so is corrected by them.(Brooks) .............and find improvements in their company(Ames) 등은 모두 에둘른, 좋지 않은 번역이다.

 

문장 전체를 복 적에 호학의 내용이 식, , , 도의 이런 일상적 사태에 그치는 것인가? 학문의 내용은 문자를 익히고 독서하는 일이 따로 있는데 앞서 자하의 말대로 미학, 오필위지학의 와 같은 식으로 이러한 일상적 덕목의 중요성만을 강조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이 이 장에 대하여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는데 나는 이런 질문은 퍽으나 가소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공자학단에 있어서 문자를 익히고 독서를 하며, 예악을 배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식무구포하고 거무구안 하는 것과 분리되어 이해된 적은 없다. 특히 마지막의 취유도이정언 이라는 말 속에는 스승을 만나 나의 무지를 끊임없이 깨우친다는 함의가 들어가 있다. 즉 정의 내용에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독서의 함의가 배제될래야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먹되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고, 살되 편안키를 구하지 않고, 일에 민첩하고 말을 삼가하며, 훌륭한 스승밑에 나아가 공부하는 것, 4가지 사태는 단 하나의 학(배움)의 사태인 것이다. 끊임 없는 삶의 과정인 것이다. 공자의 사상을 압축하면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단 두마디이다. 하나는 호학이요, 하나는 인디아. 그리고 그의 솔직 담백한 인품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간은 호학의 인간이다. 호모 스투덴스(homo studens)인 것이다.

 

가위호학야이는 텍스트에 따라 가위호학이의(한석경), 하위호학야이의(황간)의 변화가 있다. 그리고 취유도이정언의 언은 의가 확실한 단정을 나타나는 조사임에 비하면 단정은 단정이되 그 단정의 느낌을 부드럽게 하는 조사이다.

 

집주 호, 거성. 불구안포자, 지유재이불가급야. 민어사자, 면기소부족. 근어언자, 불감진기소유여야. 연유불감자시, 이필취유도지인, 이정기시비, 즉가위호학의. 범언도자, 개위사물당연지리, 인지소공유자야. 윤씨왈: 군자지학, 능시사자, 가위독지력행자의. 연불취정어유도, 이면유차, 여양묵학인의이차자야. 기류지어무부무군, 위지호학, 가호?

 

1-15. 자공왈: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자왈: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자공왈: 시운: 여절여차, 여탁여마, 기사지위여? 자왈: 사야, 시가여언시이의. 고저왕이지래자.

 

1-15. 자공이 말하였다.: 가난하면서도 아첨치 아니하고 부하면서도 교만치 아니하면 어떠하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괜찮지.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는 못해. 자공이 말하였다: 시경에 자른 듯, 다듬은 듯, 쪼은 듯, 간 듯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겠군요?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야! 이제 비로소 너와 시를 말할 수 있겠구나! 지난 것을 알려주니 올 것을 알아차리는구나.

 

도주 앞서 말했듯이 자공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여기 자공의 질문은 학문하는 자로서 이재에 밝은 자신의 파라독시칼한 상황에 대한 깊은 반성의 톤으로 시작하고 있다. 자공의 질문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이 반성할 수 있는 맥시멈의 진리치를드러낸 것이다.

 

선생님! 빈궁하면서도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하면서도 교만치 아니한다면 그래도 훌륭한 삶의 자세라 할만 하지 않겠습니까?

 

이 한 질문은 자공에 있어서는 뼈저린 반성의 외침이었다. 내가 지금 비록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말자! 또 세상이 바뀌어 내가 돈을 다 잃어버리고 가난하게 되었을지라도 아첨하지 말자! 이렇게만 살면 우리 훌륭한 공자님의 제자라 할만하지 않겠는가? 자공은 공자님의 입에서 넘 참으로 훌륭하다 는 긍정의 말씀을 잔뜩 기대했을 것이다. 그 긴장의 순간! 공자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한 마디는 무엇이든가?

 

가야

 

이 순간 자공의 가슴이 저미어졌을 것이다. 철컹! 결코 긍정의 대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야는 부정의 온화한 표현일 뿐이다. 중국사람이 좋아하는 차불다료란 표현과 별 차이가 없는 표현이다. 그것은 호극료가 아닌 것이다. 그 다음엔 가시(but)로 연결되기 마련인 것이다. 공자가 자공의 질문에 대한 부정끝에 제시한 새로운 차원의 긍정적 진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이.

 

빈궁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호례하는 자만 같지 못하다.

 

빈에 대한 무첨이나, 부에 대한 무교는 모든 무라는 부정사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부정적 가치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부정적 가치에 의한 소극적 대처로서는 군자다운 삶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공자는 빈에 대한 락을, 부에 대한 호례를 새롭게 제시한 것이다. 많은 판본이 빈이락을 부이호례와 대구로 만들기 위해 빈이락도로 만들고 있는데, 요번에 나온 정주한간에 그냥 빈이락으로 되어 있어 현존하는 판본이 고판본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나라의 부자들은 세금내기가 무서워 재단을 만든다. 참으로 그 돈으로 진정하게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러한 문화사업에 조직적으로 투신하는 실례가 별로 없다. 빈궁해도 비굴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빈궁함 속에서도 무언가 진정한 삶의 기쁨(Joy of Life)을 발견할 줄 아는 자가 너무도 적은 것이다.

 

이 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공에게는 어떤 영감이 스쳤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모자랐다는 어떤 깨달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 때 그 순간 그의 영감을 스치는 것은 그의 고국, 위나라의 먼 옛날 노래였다.

 

첨피기오

녹죽의의

유비군자

여절여차

여탁여마

 

저기 저 기수의 물구비를 보라! 푸른 대나무 숲이 하늘하늘 우거졌구나 아 문체나는 군자여! 자른 듯 다듬은 듯 쪼은 듯 간 듯.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이 싯귀는 위나라 무공의 덕성을 찬양한 노래라는 것이다. 그는 문장이 빛났으며 간언을 잘 들어 예로써 자신을 잘 방비한 명군이었다는 것이다. 여기 여절여차여탁여마 는 옥석을 자르고 갈아서 서서히 완벽한 예술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인간의 덕성의 함양의 과정에 비유한 말이라는 것이다. 절은 골에 대하여, 차는 상에 대하여, 탁은 옥에 대하여, 마는 석에 대하여 쓰는 가공기술의 언어라는 것이다.

 

자공이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자공의 의도는 곧 자신의 깨달음을 이 시에 은유하여 자신의 수덕의 결심을 나타낸 것이다. 삶에 대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시각을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꾸는 작업이 곧 못생긴 옥석을 갈고 닦아 세련된 작품을 만들듯이 자신의 인격을 다듬어 나가는 작업이 될 것이라는 결의를 구가했던 것이다.

 

이 때, 공자는 자공의 이름을 부른다: 사여! 사는 자공의 명이다. 즉 애명이다. 아이적부터의 이름이요,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중국 고대 습관으로 명을 부른다는 것은 아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의 친근감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다. 명은 보통의 관계에서는 함부로 부를 수 없다. 후대에서는 제자에게조차 명으로 부르는 것은 실례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사랑하는 제자를 부를 때는 항상 명으로 불렀다.

 

이제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이 말은 공자의 극찬이다. 제자의 깨달음을 상찬하는 찬미의 말이다. 공자는 이와 똑같은 말을 다시 한 번 자하에게도 던지고 있다.(팔일 8)

 

고제왕이지래자 는 사실 문자 그대로는 해석이 어렵다. 지난 것을 말해주니까 올 것을 안다는 것의 단순히 과거-미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여기서 과거는 직접적으로 미약빈이락, 무이호례자야라는 공자의 교훈을 가리킨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한 귀퉁이를 튕겨주니까 깨달음이 줄줄이 따라온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레게의 영역이 아름답다: I told him one point, and he knew its proper sequence. 주희가 왕자는 말로 표현한 것이요, 래자는 말로 표현하지 않은 것이라 주한 것도 매우 좋은 해설이다.

 

사야의 야는 사라는 실체를 한 번 거리를 두어 확인시키는 의미를 가지는 조사이다. 기사지위호는 기위사호(그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하는 말이겠군요)의 평상적 어순에서 사를 도치시켜 그사이에 갈지를 삽입시킨 용법이다. 사를 강조하는 어세가 들어가 있다. 고제왕의 제는 우리말로 저로 발음한다. 지호, 지어의 축약형이다. 부이무교는 헌문 11에 빈이무원난, 부이무교역 라는 구절에 한 번 더 나오고 있다. 좌전 정공 십삼년에 위나라의 사유의 말로서 부이불교자선(부유하면서 교만치 않은 자는 드물다)이라는 비슷한 표현이 또 나오고 있다.

 

20세기는 고대중국의 문화, 역사 각 방면에 있어서 놀라운 새로운 발견이 속출한 세기였다. 갑골문의 발견을 비롯하여 지하로부터 고대중국의 엄청난 일차자료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에 따라 중국 고대 문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들이 축적되어갔다. 그것은 단지 새롭다는 차원을 떠나 우리의 인식의 패러다임을 근원적으로 혁명시키는 그러한 발견이었다. 따라서 기존의 경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시각이 요구되었다. 가장 크게 난도질을 당해야만 했던 경전이 바로 시경이었다.

 

시경의 시는 written poem 이라기 보다는 그것은 일차적으로 노래였다. 즉 노래의 곡조가 사라지고 가사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시를 말했을 때는 그것은 반드시 노래(Songs)를 말하는 것이었다. 시경에서는 노래를 풍이라 부르는데 풍은 민요다. 국풍이란 각 나라()의 민요(). 즉 국풍은 민요집이다. 민요는 민중의 삶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정감의 발출이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어떠한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조작되 체계적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정감의 발출이다. 그래서 악기에서는 감어물이도, 고형어성. 이라 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사물에 촉발되어 저절로 움직인 것이 소리로 구체화 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을감이동 즉 감동이라 표현한 것이다. 시는 감동의 세계다. 그것은 이지적 조작이 아니다. 그래서 악이란 정의 불가변자요, 예란 이의 불가역자라 한 것이다.

 

기오의 노래 한 소절은 발랄한 민중의 감동을 표현한 것이다. 무공의 덕이라든가, 인간의 내면적 덕성의 수양과는 완전히 무고나한 그들의 일상적 풍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다.

 

기수의 얼음이 풀리고 화창한 봄날씨가 되면 강변에 푸른 대나무 숲이 무성하게 우거지기 시작하고 남녀의 가슴이 봄바람에 설레이기 시작할때, 청춘 남녀가 모두 강변으로 짝짔기를 하러 나온다. 그 때 멋있는 사내가 수레를 몰고 아름다운 새악씨들이 있는 곳을 지나간다. 소남의 표유매나 위풍의 목과라는 노래가 애기해 주듯이 아릿다운 새악씨는 마음에 끌리는 남자가 지나가면 과실을 따서 던진다. 그리하면 남자는 답례로서 패옥을 선사하여 서로의 사랑을 확약하는 증표로 삼는 풍습이 있었다.

 

훨씬 후대 서진때의 이야기지만, 세설신어 용지 편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고사가 실려있다. 당대의 시부에 능했던 특히 애뢰에 능했던 명인 반악(247~300)은 어려서부터 미모가 출중났고, 기동이라 불릴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그가 비파를 들고 낙양시가를 거닐면 그의 수레에는 사방에서 부녀들의 하느적거리는 손길에서 날라온 과일들이 가득 찼다. 그런데 당대의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고 한 그 유명한 삼도부의 저자 좌사(250~305)는 추남이었다. 그가 낙양의 거리를 거닐면, 그의 수레에는 개왓장(와석)이 가득찼다.(진서 권오십오, 번악전 에는 좌사가 강재로 되어있다.)

 

여기 위풍의 제 1수인 기오의 노래도 분명 이런 관습과 관련되어 있는 민요다. 유비군자는 아 저 아름다운 사내의 뜻이다. 논어가 말하는 도덕적 의미의 군자가 아니다.

 

첨피기오

녹죽의의

유비군자

여절여차

여탁여마

슬혜한혜

혁혜훤혜

유비군자

종불가훤혜

 

저기 저 기수의 물구비를 보라! 푸른 대나무 숲이 야들야들 우거지고, 아 저 아름다운 님. 자른 듯 다듬은 듯. 쪼은 듯. 간 듯. 무게있고 위엄이 넘치는 저 사내. 빛나고 훤출 아름다운 님이여. 종내 잊을 수 없어라!

 

이 노래에서 여절여차, 여탁여마는 한 사내의 쎅시한 외관을 형용하는 아주 최상급의 표현들이다. 포마드를 짝 바르고 족제비 양복을 샥 늘어뜨린 기생홀아비같은 청년을 형용할 때 깎은 듯이, 쏙 빠진 듯이, 쪼아낸 듯이, 빤질빤질 갈아낸 듯이 그렇게 단장한 모습을 형용하는 최상급의 표현이 여절여자, 여탁여마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절차탁마라 하면 옥을 갈아 빛나는 작품을 만들듯이 모나는 성격을 갈아 훌륭한 덕성을 함양한다고 하는 수덕의 의미로 풀이하고 사용하고 있다. 그것이 유행가의 그 때 그 사람의 쎅시한 외모를 형용하는 표현이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치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당대의 유행가 위풍민요의 일차적 의미는 공자-자공 사이에서 이해된 세만틱스는 아니었다.

 

공자는 시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이미 시를 도덕적 의미로 왜곡시켰다. 시경의 왜곡은 이미 공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처녀탄생을 70인역 이사야 7:14를 인용하여 정당화시키려 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마태 1:23)

 

그러나 여기의 처녀의 원어는 파르테노스인데 이것은 처녀가 아닌 그냥 젊은 여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용의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공자는 시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시류의 구역질나는 도덕적 왜곡의 전형이라고 보기는 어려워도 이미 자기사상의 시각에서 보는 어떤 해석의 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공자의 시의 해석은 생기발랄하고, 민요의 원뜻을 꿰뚫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공자를 뛰어넘어 시의 해석에 있어서 공자와 대결하고 공자의 해석을 광정하는 지혜의 눈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집주 락, 음낙. , 거성. , 비굴야. , 긍사야. 상인, 익어빈부지중, 이부지소이자수, 고필유이자이병. 무첨무교, 즉지자수의, 이미능초호빈부지의야. 범왈가자, 근가이유소미진지사야. 락즉심광체반, 이망기빈; 호례즉안처선, 악순리, 역불자지기부의, 자공재식, 개선빈후부, 이당용력어자수자. 고이차위문, 이부자답지여차. 저허기소이능, 이면기소미지야. , 칠다반. , 평서. , 위풍기오지편. 언치골각자, 기절지이복차지; 치옥석자, 기탁지이복마지, 치지이정이익구기정야. 자공자이무첨무교위지의, 문부자지언, 우지의리지무궁. 수유득언, 이미가거자족야, 고인시시이명지. 왕자, 기소이언자; 래자, 기소미언자. 우안, 차장문답, 기천심고하, 고부대변설이명의. 연부절즉차무소시, 불탁즉마무소조. 고학자, 수불가안어소성이불구조도지극치, 역불가무어허원이불찰절기지실병야.

 

1-16. 자왈: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1-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라.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할지니.

 

도주 이것은 학이편의 첫 장에서 이미 논파한 인부지이불온을 생각하면 그 문제의 맥락은 쉽게 풀린다. 공자의 일생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데 대한 한맺힌 생애였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한을 새로운 보편적 인의 간의 지평으로 확산시켰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한이 있다면 우리는 그 한을 역으로 내가 이 순간 남의 휼륭한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자각의 내성으로 회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이 타 텍스트에 보면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야. 로 되어 제일 끝의 인이 빠져버린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도 좋은 해석이 가능하다. 이때 부지는 단순히 내가 타인을 몰라본다는 협애한 의미를 떠나, 내가 진정으로 알려지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참으로 남에게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것에 대한 냉정한 자기 반성의 뜻이 되는 것이다. 남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내면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가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인 14에 불환모기지, 구위가지야. (남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참으로 알려질 수 있기를 구하라)라고 한 뜻과 내면적으로 상통하게 된다. 나의 내면적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이 나를 모른다는 것을 탓하기에 앞서 내가 참으로 알려질 수 있는 내면적 실력을 함양하는데 더 주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구하지 말라! 나에게 알려질 만한 그 무엇이 참으로 내재하고 있는가를 반성하자!

 

헌문 32에 공자는 말한다: 불환인지불기지, 환기불능야.(남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치 말라. 자신의 능하지 못함만을 걱정할지니). 위령공 18에 공자는 말한다: 군자병무능언, 불병인지불기지야.(군자는 자신의 무능함만을 병으로 여겨야 한다. 남이 자기를 알지 못함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

 

공자의 사상에 있어서 남과 나의 관계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일차적인 것은 아니다. 남이 단절된 나의 절대적 반성이 방편적으로 선행되어야만 남과의 관계가 항상 보편적 지평에 놓이게 된다. 남과 나가 어떤 공리주의적 수수의 관계에 놓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공이 공자에 끊임없이 미칠 수 없었던 바의 요체였던 것이다.

 

브룩스는 이 장을 양화편 뒤로 옮겼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치 않는다. 학이 편은 이 편 나름대로 일관된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부지이불온에서 시작하여 불환인지불기지로 끝나는 어떤 기승전결을 이 학이 편의 편자는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판단은 독자의 상상력에 맡긴다.

 

집주 윤씨왈: 군자, 구재아자, 고불환인지불기지. 부지인, 즉시비사정, 혹불능변, 고이위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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