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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유전자

유전자의 긴 팔

by Frais Feeling 2020. 9. 20.

        유전자는 영원하다
  하나의 불안한 긴장이 이기적 유전자의 이론의 핵심을 교란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근
본적 담당자인 생물 개체의 몸과 유전자 사이의  긴장이다. 우리는 독립된 DNA 자기 복제
자라는 마음 설레이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샤모아처럼  펄쩍펄쩍 뛰면서 자유 분
방하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옮겨지고  일시적으로 써버린 생존 기계에 붙어  모였다가 
각각 별개의 영원한 미래를 향해 전진하면서 죽을 생물체를 차례차례로 끝없이 벗어 버리는 
불멸의 코일이다. 또 한편에서는 생물 개체의  봄 그 자체를 보고 있는데 각각의 몸은 분명
히 하나의 긴밀히 연결되고 통합된 아주 다져진 기계이고, 뚜렷한 목적의 일치를  수반한다. 
그것이 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정자나 난자에 실려 거대한  유전적 분산 집단(생물체의 
몸)의 다음 여정으로 떠나는 서로 대항적인 유전적 담당자의 느슨하고  일시적인 연합의 산
물이라고는 별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지와 감각 
기관의 협조를 조정하는 충실한 뇌를  가지고 있다. 생물의 몸은 그  자체로서 매우 훌륭한 
주체인 것처럼 보이며 또 그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 
      유전자의 눈
  이 책의 몇 개 장에서는 실제로 생물 개체를 그의 모든 유전자를 미래의 세대에 최대한의 
성공도로 전하려고 노력하는 하나의 담당자로 생각해 왔다. 우리는  동물 개체가 여러 가지 
행동 방침에 관해 복잡한 경제학적 '의사' 계산을 하는 것처럼 상정해 왔다. 그러나 다른 장
에서는 근본적 이유가 유전자의 관점에서  제공됐다. 우전자의 눈으로 본  생물관과 생물이 
왜 자신의 장생보다 자신과 그 혈연자의 번식 성공도에 '마음을  쓸' 필요가 있는지 특별한 
이유가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생물을 보는 이 두 가지 방법의 패러독스를 어떻게 해소하면 좋을까? 이에 관한 내 자신
의 의도는'연장된 표현형' 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 책은 학자로서 나의 생애에서 달성한 어
떠한 성취보다도 자랑스럽소 기쁜 일이다. 이 장은 그 책의  몇 개 주제의 간단한 정수이지
만 실은 지금 당장 이 내용을 읽지 말고 '연장된 표현형' 으로 바꾸라고 권하고 싶다. 
  어쨌든 현명한 견해로  본다면 다윈주의적  선택이 유전자에  직접 작용하는  일은 없다. 
DNA는 단백질로 말려져 있고, 막으로 싸여 있어서, 바깥 세상으로부터 보호 받고 있으므로 
자연 선택에서는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만일 선택이 DNA분자를 직접 고르려고 시도 해도 
그것을 하기 이한 어떤 기준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든 유전자는 녹음 테이프 같아
서 어느 것이나 다 같은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간의 중요한 차이는 그것이 미치는 '효과'로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보통  배 발생 과정과 그로부터 몸체의  형성 그리고 행동에 
대한 효과를 뜻한다. 성공하는 유전자란 하나의 공통된 배에 속하는 다른 유전자에 의해 영
향을 받는 환경에서 그 배에 유리한 효과를 미치게 하는 유전자를 말한다. 유리하다는 것은 
성공할 것 같은 성인, 즉 잘 번식하여 그것과 똑같은  유전자를 미래의 세대에서 전해줄 수 
있는 성인이 되도록 배를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형(phenotype)'이라는 전문용어는 
하나의 유전자의구체적 나타남, 즉 유전자의 발생을 통하여 그  대립 유전자와 비교해서 신
체에 끼치는 효과에 대해 쓰인다. 몇 개의 특정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는 녹색의 눈을 만들
지도 모른다.실제로 대부분의 유전자는 얘를 들어 녹색의 눈과  고수머리털 같은 둘 이상의 
표현형 효과를 가지고 있다. 자연 선택은  유전자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그 결과- 그의 
표현형의 결과- 때문에 한 유전자를 다른 유전자보다 선호한다.
      다윈주의자적 유전자론
  다윈주의자는 보통 표현형 효과나 생물체 전체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작용하는 유전자에 관해 논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유전자 그  자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
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이론의 핵심에서 패러독스가  왜 통상 자각되지 못하는가
라는 이유의 하나이다. 예컨대 어떤 유전자는 포식자의 주행속도를 개선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포식자의 몸 전체는  그 모든 유전자를 포함하여 더  빨리 달리기 때문에 
보다 성공하기 쉽다. 그의 속도는 그것이 새끼를 가질 나이까지 생존을 도움으로써 빨리 달
리는 유전자까지도 포함하여 그 유전자 모두의 보다 많은 사본이 전해지게 한다. 하나의 유
전자에 대해 좋은 것은 모든 유전자에게  좋기 때문에 여기서 패러독스는 훌륭하게  해소된
다. 
  그러나 만일 하나의 유전자가 그 자신에게는  좋은 것이나 몸 속의 나머지  유전자에게는 
나쁜 표현형 효과를 끼친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결코 단순한 공상 같은 것은 아니다. 그
와 같은 사례는 예컨대 '감수 분열 구동(meiotic drive)' 이라 불리는 흥미있는 현상으로 알
려져 있다. '감수분열' 이란 염색체의 수가 반으로 되어 난세포와 정세포를 생성하는 특별한 
세포 분열이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정상적인 감수분열은 완벽하게 공정한  제비뽑기이다. 
대립유전자의 모든 짝 중에서 운 좋게 정자나 난자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그 중의 한  쪽 
뿐이다. 그러나 하나의 짝 중 어느 것도 들어갈 확률은 같아 만일 다수의 정자(또는 난자)를 
평균하면 그 중의 반이 대립유전자의 한쪽을, 반이 또 한쪽을 포함하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
다. 감수 분열은 동전을 던지는 것과 같이 공정하다. 속담처럼 우리는 동전던지기가  무작위
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이것 까지도 바람이나 엄밀하게는 얼마나 강하게 동전을 튕기
는가 등 여러 사정에 따라  영향을 받는 물리적 과정이다. 감수분열  또한 물리적 과정으로 
유전자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만일 눈 색깔이나 머리카락의 말림 상태 등 눈에 보이
는 것에 대해서가 아닌 감수분열 그 자체에 종종 효과를 미치는 돌연변이 유전자가 생기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가끔 돌연변이 유전자 그 자체가 그것의 대립 유전자의 파트너보다 최
종적으로 난자로 되기 쉬운 경향을 감수분열에게  준다고 가정해 보자. 그와 같은 유전자를 
'분리 왜곡 인자(segregation distorter)'라고 하는데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은 악마적인 단순
함을 가지고 있어서 돌연변이에 의해 분리 왜곡인자가 생기면 대립 유전자를 희생으로 해서 
집단 내에 거침없이 퍼져 나간다. 감수 분열 구동이라고  알려진 것이 이것이다. 몸의 번영, 
체내의 다른 모든 유전자의 번영에 미치는 그 효과가 비참한 경우에도 그것은 일어난다. 
      쥐의 유전자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생물 개체가 미묘한 방법에 의하여 스스로 사회적인 동무를 '속일
' 가능성에 관하여 주의를 환기시켜왔다. 여기서 우리는 단일 유전자에 의해 하나의 생물체
를 공유하는 다른 유전자를 속이는 석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유전학자인 크로
(James crow)는 그것을 '시스템을 때려부수는  유전자' 라고 불렀다. 가장 잘  알려진 분리 
왜곡 인자의 하나는 생쥐의 t유전자이다. 한 마리의 생쥐가 두 개의 t유전자 를 가지고 있으
면 새끼는 죽거나 불임이 되거나 한다. 따라서 t는 동형접합 상태에서는 '치사적'이다. 만일 
수놈의 생쥐가 t유전자를 하나만  가지고 있을 경우,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을 제외하고는 
정상이고 건강한 생쥐이다. 만일 그와 같은 수놈의 정자를 조사해 보면 95%가 t유전자이며 
겨우 5%만이 그것의  대립 유전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분명히  예측치에서 대략 
50%정도 왜곡된 것이다. 야생의 개체군에서 t유전자가 돌연변이에 의해 종종 나타나면 그것
은 즉시 요원의 불처럼 퍼져 나간다. 감수 분열의 추첨에서  그와 같이 심하게 불공평한 유
리함이 있다고 하면 그렇게 되지 말라는 이유가 있을까? 그것은 너무 빨리 퍼져 나가기 때
문에 머지 않아 곧 집단 내의 대다수의 개체는  t유전자를 2배로 계승하게 된다(양친으로부
터 각각). 이와 같은 개체는  죽거나 불임이기 때문에 결국 그  지역 개체군 전체가 절멸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몇몇의  생쥐와 야생  개체군이 과거에 t유전자의 유행을 통하여 
절멸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 증거가 몇 개 존재한다.
  반드시 모든 분리 왜곡 인자가 t와 같은 파괴적인 부차 효과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 대부분은 적어도 어떤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거의 모든 유전적 부차 효
과는 불리한 것이며, 새로운 돌연 변이는 보통 그 유리한  효과가 불리한 효과를 능가할 때
에만 퍼진다. 만일 불리한 효과와 유리한 효과가 같이 생물체 전체에 적용된다고 하면 생물
체에게 있어 그 차등 효과는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불리한 효과는 생물체에, 유리한  효과
는 유전자에게만 적용한다고 하면 생물체의 입장에서 볼 때의 차등 효과는 완전히 불리해진
다). 그 유해한 부차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만일  분리 왜곡인자가 돌연 변이에 의해 생긴다
면 그것은 확실히 집단 내에 퍼지게 될 것이다. 자연 선택(이것은 결국에 가서 유전자 수준
에서 작용한다) 은 가령 그 효과가 생물 개체 수준에서 불리하게 될 것 같더라도 분리 왜곡 
인자를 유리하게 한다.
  단 분리 왜곡 인자는 그다지 흔치는  않다. 왜 흔하게 볼 수 없느냐는  의문을 계속할 수 
있다. 그것은 왜 감수 분열 과정이 보통 균형 잡힌  동전을 전질 때처럼 빈틈없이 공평한가
를 또 다른 형태로 묻는 것이다. 그 해답은 생물체가  왜 존재하는가를 이해하는 순간에 자
연스럽게 나올 것이다. 
      생물 개체 - 로봇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생물 개체의 존재를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
유는 아마도 그 가 부분이  극히 일체화되고 통합된 방법을 서로  협조하고 이씩 때문이다. 
생물에 관한 물음은 보통 생물 개체에 관한 물임이다. 생물학자는 생물개체가 돼 그것을 하
고, 또 왜 저것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종종 생물 개체가 왜 모여서 사회를  이루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왜 - 본래 그렇게 물어야 하는데 - 생물 물질이 무엇 때문에 모여서 
생물체를 구성 하느냐고는 묻지 않는가? 왜 바다는 아직도 자유로이 독립된 자기 복제자들
의 원초적인 투쟁의 장이 아닌가? 왜 태고의 복제자들은 모여서 묵직하게 작동하는 로봇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살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 같은 로봇 - 생물 개체의 몸, 당신과 나 - 은 
이처럼 크고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
  많은 생물학자는 도대체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이해 못하고 있다. 문제를 새물 개
체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이 그들의 제 2의 천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부 생물학자는 
앞질러 가서 생물 개체가 보기 위해서 눈을 사용하는 것처럼 DNA를  마치 생물 개체가 번
식을 위해 쓰는 도구라고 보고 있다. 이 책의 독자는 이 같은  태도가 당치도 않은 큰 오류
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거꾸로 된 진실이다. 독자는 또 그것에  대신하는 
태도, 즉 이기적 유전자라고 하는 생명관이 그 자체로서 심각한 문제를 갖는다는 것도 인정
하게 될 것이다. 그 문제 -  거의 정반대의 - 란 도대체  생물 개체가 왜 존재하느냐, 특히 
생물학자가 진실을 반대로 전도시킬 정도로 크고 긴밀한 목적성을 가진 형태로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잠자코 새울 개체를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
으로 간주하는 낡은 태도를 우리의 정신에서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
면 문제의 요점을 회피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정신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장치는 내가 연장된 표현형이라고 부르는 사고 방식이다. 이 사고 방식에 대해, 그리고 그것
이 의미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하고 싶다. 
  하나의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는 보통 그것이 속하는 생물체에 미치는 효과의 모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종래의 정의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제 하나의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는 "그
것이 세계에 미치는 모든 효과"로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떤 유전자의 효과가 사
실 문제로서 그 유전자가 대대로  속해 가는 몸에 한정된다는 것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히 사실에 대한 문제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의, 
그 자체의 일부이어야 할 사항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한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라는 것은 그 유전자가 다음 세대에 스스로를 들어올리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을 생각하
기 바란다. 내가 여기서 더 첨가하려고 하는 것은 이 도구가 생물 개체의 체벽 바깥까지 미
칠 수 있다는 것뿐이다. 유전자를 그것이 속하는 생물체  바깥의 세계에까지 미치는 표현형 
효과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음에 떠오르는 실례는 
비버 댐, 새집 그리고 날도래 유충의 집과 겉은 건축물이다.
      날도래의 건축물
  날도래는 단지 특징이 없는 갈색 곤충이며 하천의 수면 위를 서툴게 날기 때문에 대부분
의 사람은 좀처럼 알아채지 못한다. 이것도 성충일때의 이야기이고 서충이 되기까지 그것은 
하천의 밑바닥을 기어다니는 유충으로서 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우리가 그 날도래의 유
충이 특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놀랄만한 동물중의 
하나이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접착 물질로 하천 바닥의  재료를 가지고 관상의 집을 솜
씨있게 만든다. 이 집은 운반하기 쉬운 집으로서 달팽이나  소라게의 껍질처럼 짊어지고 다
닌다. 단 한가지 틀린 것은 그 껍질을 자기가 분비하는 물질이 아닌 외부 세계의 재료로 집
을 짓는다는 점이다. 날도래의 몇몇  종은 건축 재료로서 막대를 사용하고  다른 종은 죽은 
잎의 조각을, 도 다른 종은 소형의 달팽이 껍질을 사용한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주목할  만
한 날도래의 집은 그 지역의 돌로 만드는 것이다. 날도래는  돌을 주의 깊게 선택하여 벽의 
뚫린 공간이 너무 크거나 작은 것은  버리고 심지어는 꼭 들어맞을 때까지 각각의 돌을 돌
리기도 한다.
  아울러 왜 이것이 그처럼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일까? 만일 우리 스스로가 공평한  견해로 
생각한다면 이 날 도래의 집이라고 하는 비교적 적당한 건축물보다도 그의 눈이나 팔꿈치의 
관절 구조에 보다 강한 인상을 받아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  눈과 팔꿈치 관절은 집보다 훨
씬 복잡하게 '설계된' 것이다. 그리고 날도래의 눈과 팔꿈치의 관절은 우리 인간의 눈과 팔
꿈치 관절과 같은 형태로 발생한 것이다. 그 건축 과정에 관해 우리는 아무런 자만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한층 강한 감명을 받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본 줄거리를 떠났기 때문에 조금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겠다. 우리는 날
도래의 집에 감명을 받을지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동물의 그
것에 필적하는 성취에 대해 느낄 정도까지 강한 감명을 받지는 못한다. 만일 해양 생물학작
가 자기 신장의 20배의 직경을 가진 크고 복잡한 어망을 짜는 돌고래 종을 발견했고, 그 기
사의 제목이 신문에 전단 크기로 난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거미의 집을 당연히 경이
로운 것 이라기  보다는 집 구석의  귀찮은 것으로 여긴다.  또 구돌(Jane Goodall)이  곰베
(Gombe)강에서 정성껏 선별한 돌을 짜임새 있게  쌓고 틈새를 잘 막으면서 훌륭한  지붕과 
울타리를 가진 집을 건조 중인 야생 침팬지의 사진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하면 어떤 열광적
인 일이 가다리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 그러나 우리는 날도래 유충이  바로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관심하기 일쑤이다.  거미나 날도래는 때로 이와  같은 차별적인 
기준을 옹호하는 것처럼 그 건축의 위업을 '본능'에 의해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래서 어떻다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본능이 위업을 한층 더 강하고 
인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자! 본론으로 돌아와서 날도래의 집이 다윈주의적인 선택에 의해 진화래  온 하나의 적응
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예컨대 그것은 바다가재의 굳은 껍질이 그랬던 것과 
똑같은 짓이어서 선택에 의해 유리하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몸을 보호하는 덮개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생물개체 및 모든 유전자에게 이익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연 
선책에 관한 한 생물 개체의 이익은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함을 배워 왔다. 현실적으로 
고려할 만한 이익은 껍질에 보호적인  성질을 주는 유전자의 이익이다.  바다가제의 경우에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이야기 이다. 바다가재의 껍질은 분명히 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런
데 날도래의 집에 대해서는 어떨까?
  자연 선택의 소유자들은 효과적인 집을 만들도록 작용하는 날도래 조상의 유전자를  선택
했다. 이들의 유전자는 아마도 신경계의  발생에 영향을 줌으로써 행동에 작용했다.  그러나 
유전학자가 실제로 보는 것은 집의 모양과 그 밖의 성질에 미치는 유전자의 효과이다. 우전
학자는 집의 모양을 '위한' 유전자를  예컨대 다리 모양을 위한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것과 
엄밀히 같은 의미로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욱이 실제로  날도래 집의 유전학을 연구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사육해서 번식시킨 날도래의 세심한 가
계의 기록을 계속해야 하는데 날도래의 번식은 어렵다. 그러나  날도래의 집에 다른 영향을 
주는 유전자가 존재한다. 또는 전에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유전학을 연구해야만 하
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다윈주의적인 적응이다'라고 하는 정당한 이유뿐이다. 이 경우
에는 날도래 집의  변이를 통제하는  유전자가 존재함에 틀림 없다. 왜냐하면  자연 선택은 
선택하는 것들 중에 유전적인 차이가 없는 한 적응을 만들어 냏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전학자는 그것을 기묘한 생각이라고 할지 몰라도 우리가 돌 모양, 돌의 크기, 돌
의 견고함 등을 '위한' 유전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것이다. 이 말에 반대하는 
유전학자가 있다면 그는 눈 색깔을 위한 유전자나 콩의 주름을 위한 유전자 등에 관한 말에 
대해서도 반대해야만 한다. 돌의 경우에 이 사고 방식이 기묘하게 생각되는 이유 중의 하나
는 돌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돌의 성질에  대한 유전자의 영향은 간접적인 것
이라고 생각된다. 유전학자는 유전자의 직접적인 영향이 돌 그  자체가 아니라 돌을 선택하
는 행동을 유도하는 신경계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유
전학자에게 신경계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를 신중히 고찰하도록 바라고 싶다. 유전자가 현실적으로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
는 것은 단백질 합성뿐이다. 신경계에 끼치는 유전자의 영향과 눈 색깔이나 콩의 주름에 미
치는 영향도 항상 간접적인 것이다.  유전자는 하나의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을 결정하고 
그것이 X에 영향을 끼치고 그것이 또 Y에도 영향을  끼치고 그리고 그것이 또 Z에도 영향
을 끼치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종자의 주름이나 신경계 세포의 배선에 까지도 영향을 끼친다
는 것이다. 날도래의 집은 이 같은 인과의 계열을 다시 더 한층 연장해 갔음에 불과하다. 돌
의 견고함은 날도래 유전자의 '연장된' 표현형  효과인 것이다. 만일 콩의 주름이나 동물의 
신경계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에 관해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면(모든 유전학자는 그렇게 생
각하고 있다), 날도래의 집을  만드는 돌의 견고함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에 관해 말하는 
것 또한 정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당치도 않은 생각이 아닐까?  그러나 이와 같은 
추론으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달팽이의 껍질
  이로써 논의의 다음 단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즉, 하나의 생물 개체에 있는  유전자
가 다른 생물 개체의 몸에 연장된  표현형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점이다. 이 단계에 
오기까지는 날도래의 집이 도움이 됐다. 이번에는 달팽이의 껍질이 도와 줄 것이다.  달팽이
에게 있어 껍질은 날도래 유충의 돌집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달팽이 자신의 세
포에 의해 분비되는 것이며, 관습에 충실한 유전학자들도 다행히 두께라든가 껍질의 성질을 
'위한' 유전자에 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한 종의 흡충류가 기생하는 
달팽이가 특별히 두꺼운 껍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두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
까? 만일 기생당한 달팽이가 특별히 엷은 껍질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을 달팽
이의 성질에 대한 명백한 쇠약화 효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꺼운 껍질이란? 
두꺼운 껍질은 아마 달팽이를 보다  잘 보호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기생자가 숙주에 대해 
그 껍질을 개량함으로써 실제로 도움을 주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좀더 조심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두꺼운 껍질이  정말로 달팽이에게 유리하다면 도
대체 그들은 왜 두꺼운 껍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답은 아마도 경제적인 것에 있을 적
이다. 껍질을 만드는 것은 달팽이에게 지출을 요하는 일이다. 그것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용이하게 얻을 수 없는 먹이에서 섭취해야만 하는 칼슘과 다른 화학 물질을 필요로 
한다. 이 모든 자원이 만일 껍질을 만들기 위해 소비되지 않을 경우 더 많은 새끼를 만드는 
등 다른 유익한 것에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여분의 두터운 껍질을 만들기 위해 다량의 자
원을 소비하는 달팽이는 자기의 몸을  위한 안전을 확보한 셈이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지출을 요하는 것일까? 그 달팽이는 장생할지는 모르나 번식에는 그다지 성곡 못하고 그 유
전자를 전하는 데 실패할지도 모른다. 전하는 데 실패하는 유전자 중에는 여분의 두꺼운 껍
질을 만드는 유전자도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껍질이 너무 두껍다는 것은 껍질이  너무 
얇다는 것과 같다고 하는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흡충이  달팽이에게 여분의 껍질을 분비시
키도록 할 깨에 만일 껍질을 두껍게 하는 경제적 비용을 흡충이 부담하지 않는 한 달팽이에
게 친절한 행위를 요구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흡충이 그렇게도 씀씀이가 헤픈 
생물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  확실히 보증할 수 있다. 흡충은  달팽이에게 어떤 숨겨진 
화학적 영형을 끼쳐 달팽이가 스스로 '알맞은' 껍질의  두께를 변화시키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달팽이의 수명을 연장할는지는 모르나 달팽이의 유전자에게 도움을 주지 못
한다. 
  그러면 흡충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는 것일까? 왜  그런 짓을 하는 것일까? 다른 모든 사
정이 같다면 달팽이의 유전자도, 흡충의 유전자도 모두 달팽이의  생존에 의해 이익을 얻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생존은 번식과 갗응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종의 교환 거래가 있을 것 
같다. 달팽이의 유전자는 자신의 번식에 의해 이익을 엊는 입장에 있는데 반해 흡충의 유전
자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흡충도 자신의 유전자가 현재의 숙주의  자손의 몸 속에 
산다는 것에 과해 특별한 기대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살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경
쟁 흡충 유전자에 관해서도 같을 것이다. 달팽이의 수명이 그  번식 성공도 에서 다소의 손
실이라는 지출에 의해 대가를 줘야만 한다고 가정하면  흡충의 유전자는 '기쁘게' 달팽이에
게 비용을 지불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달팽이의 번식 그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달팽이의 유전자는 그 비용의 지불을 꺼린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장래는 스스로의 번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흡충의 유전자가 자기에게는 이
익을 주나 달팽이의 달팽이의 유전자에게는 달팽이의 껍질을 분비하는 세포에게 지출을  강
요하는 듯한 영향을 미치게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이론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지만 가능
성이 크다.
  자! 이제 우리는 날도래의 교훈을 일반화 해야 할 상황에 왔다 만일 흡충이 하고 있는 것
에 관한 나의 가설이 옳다면 그 합리적인 결과로서 우리는 달팽이의 유전자가 달팽이의 몸
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로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유전자가 '자신의'몸의 
바깥까지 도달하여 외계를 조작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날도래의 경우와  같이 이 말도 
유전학자들을 침착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몸의 내부에 한정된 유전자의 효과에
만 익숙해 있다. 그러나 또다시 날도해의 경우와 같이 유전학자가 '효과'를 가진 유전자라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자세히 고찰해 보면, 그와 같은 침착하지 못함이 잘못이라는 것
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달팽이 껍질의 변화가  흡충의 적응에 의해 생긴다는 것
을 인정만 하면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흡충의 다윈주의적 선택에 의해 생겼음이 틀림
없다. 우리는 한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가 돌과  같이 생명이 없는 대상 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체에게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낼 수 있다. 
      유충 호르몬
  달팽이와 흡충의 이야기는 시작에 불과하다. 여러 형태의 기생자가  그 숙주에 대해 놀랄 
정도로 교활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 현미경으로밖에 볼 수 없는 
작은 기생 원생 동물인 Nosema(포자충의 일종)는 fluor beetle(밀가루에 꾀는 벌레) 에 기생
하는데, 이 원생 동물은 이 갑충에게서 극히 특이적인 화학 물질의 제조법을 발견 했다.  다
른 곤충과 마찬가지로 이 갑충도 유충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유충 호르몬이라고 하는 호르몬
을 가지고 있다. 유충에서 성충으로 제대로 변화하려
면 유충이 유충 호르몬의 생산을 정지해야 한다.  기생자인 포자충은 이 호르몬 (아주 유사
한 화합물)을 합성하는데 성공 한 것이다. 수백만의 포자충이 힘을 합하여 이 갑충의 몸 속
에서 유충호르몬을 대량 생산하고, 이에 따라 이것이 성충이 되는 것을 저지하고 있는 것이
다. 갑충은 생장을 계속하여 최후에는  정상적인 성충의 2배 이상이나  체중을 갖는 거대한 
유충으로 된다. 유전자의 증식에 있어서 그것은 갑충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나 기생자인 
포자충에게는 풍요한 입장이다. 갑충의 유충이  커지는 것은 원생 동물의  유전자의 연장된 
표현형 효과의 하나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 피터 팬 같은 갑충보다 더 강한 프로이트적 불안을 일으키는 하나의 사
례가 있다. '기생 거세'가 그것이다. 게에는 Sacculina라고 하는 동물이 기생한다. Sacculina
는 따개비 조개에 가깝지만 식물과 비유한다면 기생 식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은 불
운한 게의 조직에 복잡한 뿌리 체계를  깊이 박고 그 몸에서 영양을 빨아  먹는다. 이 기생 
동물이 최초로 공격하는 기관의 하나가 게의 정소와 나소라는 것은 아마도 우연 만은 아닐 
것이다 .반면에 게의 생존에 필요한 - 번식을 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  기관에는 해를 끼
치지 않는다. 게는 이 기생에 의해  실질적으로 거세된다. 거세된 살찐 소처럼 거세된  게는 
번식에 쓸 에너지와 자원을 자기 자체의 생장에만 사용한다.  기생자로서는 게의 번식의 희
생을 힘입어 풍부한 이득을 취한다. 내가 fluor beetle에 기생하는 Nosema와 달팽이에 기생
하는 흡충에 대해 추축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이다. 이들 세 가지의 모든 예에서 숙주로서
의 변화는 만일 그것이 기생자의 이익이 되는 다원주의적 적응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기생
자의 유전자의 연장된 표현형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유전자는 '자신의' 몸 바깥까
지 손을 뻗쳐서 다른 생물체의 표현형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숙주와 기생자
  기생자의 유전자와 숙주의 유전자 사이의 이해 관계는 매우 큰 정도까지 일치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관점에서 보면 흡충의 유전자와 달팽이의 유전자 모두 달팽이의 
몸에 기생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양자 모두 같은 보호  껍질에 둘러싸여 있음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더 좋은' 껍질의 정확한 두께에 관해서는 서로 이해 관계가 다르다.
이 분기(分岐)는 근본적으로 이 달팽이의  몸 속에서 떠나 다른  개체에 들어가는 기생자의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생긴 것이다. 기생자가 달팽이의 유전자로서 떠나는 방법은 달팽
이의 정자나 알을 통해서 이다. 흡충의 유전자로서 그것은 아주 다르다.  상세히 (기가 막히
게 섬세한)관여하지는 않으나 문제는 그들의 유전자가 달팽이의 정자 또는  알 속에 들어가 
달팽이의 몸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기생자에 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물음은 다음과 같다.  즉, '그 
유전자는 숙주의 유전자와 같은 운반자를  통하여 미래의 세대로 전해지는가?'라는  물음이
다. 만일 '아니오' 라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숙주에게 손해를 끼친다고  예측할 수 있다. 
만일 '예'라면 기생자는 숙주가 단순히 생존뿐만이 아니라 번식도 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
하여 도와줄 것이다. 긴 진화적인 시간이 흐르면 그것은 기생자라는 것을 멈추고 숙주와 협
력하여 최종적으로 숙주의 조직에 합세하여 이미 기생자라고는 인정받을 수 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앞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자칫하면 우리의 세포도  이 진화적인 스펙트럼에서 생겨
난 것인지도 모른다. 즉, 우리 모두는 태고의 기생자들이 합쳐진 역사적 유물이라는 것이다.
  기생자의 유전자와 숙주의 유전자가 공통의 숙주를 공유할 때에 어떤일이 생기는가를  생
각해 보자. 
  나무에 구멍을 뚫는 ambrosia beetle(Xyleborus ferrugineus라는 종의  일종) 에는 박테리
아가 기생하는데, 이 박테리아는 숙주의 몸에서 살 뿐만 아니라 자기를 새로운 숙주에게 운
반해 달라는 수단으로 숙주의 알을 이용한다. 그와 같은  기생자의 유전자는 따라서 숙주의 
유전자와 거의 정확하게 같은 상황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두  세포의 유전자는 하나의 
생물 개체에 있는 모든 유전자가 보통 협조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 협조한다 ' 고 
예측할 수 있다. 그 중의 명 개가 종종 '갑충의 유전자'이며 다른 것이 종종 '박테리아의 유
전자'라고 구별하는 것은 이 경우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양쪽의 유전자 세트는 갑충의 생
존과 그 알의 증식에 '관심'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갑충의 알을 자기들의 장래의 
패스포트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박테리아의 유전자는 숙주의 유전자와 공통
의 운명을 공유하는데, 나의 해석에 따르면 박테리아는 그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갑충과 협
력한다고 예측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협력'이라는 것이 조심성 잇는 표현임을 알게 된다. 그들이 갑충을 위해 행
하는 것은 이 이상 있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친절한 것이다. 갑충류는 종종 벌이나 개미처
럼 단복상체(haplodiploid)이다.(제 10장 참조). 만일 알이 수놈에 의해 수정되면 반드시 암놈
이 발생하고 미수정란에서는 수놈이 발생한다. 바꾸어 말하면 수놈에게는 부친이 없다. 수놈
이 되는 알은 정자에 침입됨이  없이 자발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벌과  개미의 알과 달리 
갑충의 알은 실제로 무엇인가에 의해 침입될 필요가 있다.
  거기에 박테리아가 등장하는 것이다.  박테리아가 미수정란을 자극하여  활동을 개시토록 
해서 수놈의 갑충이 되도록 발생을  유발한다. 이들의 박테리아는 기생적인  것을 지양하고 
호혜적으로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주장하는 그 같은 유의 기생자이다. 왜냐하면  박테리아
는 바로 숙주의 알 속에서 숙주 자신의 유전자와 함께  전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 자신
의 몸은 아마도 소실되어 '숙주'의 몸에 완전히 합체되어 버릴 것이다.
      히드라
  히드라(hydra)의 종 중에서는 오늘날도 계발적인 스펙트럼을 발견할 수가 있다. 히드라는 
육수의 말미잘처럼 촉수를 가진 작은 정착성 동물인데 그 조직에는 조류(algae)가 기생하는 
경향이 있다. Hydra vulgaris와 Hydra attenuata라는 종에서  조류는 히드라에게 진짜 기생
자이며 히드라를 병들게 한다.  이에 대해 Chlorohydra viridissima라는  종에서는 히드라의 
조직으로부터 조류가 없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고, 히드라에게 산소를 공급함으로 해서 히드
라의 번영에 유익한 공헌을 하고 있다. 자! 여기에 흥미로운 점이 있다. Chlorohydra에 있어
서는 바로 우리의 예상대로 이 조류는 히드라의 알을 통하여 자기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
이다.양자 모두 Chlorohydra의 알의 증식을 위해 전력을 쏟는다. 그러나 다른 두 종의 히드
라 유전자는 자기에게 기생하는 조류의 유전자와 '의견의 일치'를 않는다. 어쨌든 같은 정도
로 일치하는 일은 없다. 양쪽의 유전자 세트는 모두 히드라의 유전자만이 번식을 마음에 둔
다. 그래서 조류는 친절한 협력을 향해 진화하는 것보다  오히려 상대를 약화시키는 기생자
의 마음에 매달린다. 중요한 점을  다시 되풀이 하면 자기의 유전자가  그 숙주의 유전자와 
같은 운명을 열망하는 기생자는 모든 이해 관계를 숙주와 공유하고 최종적으로 기생적 작용
을 멈추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박테리아
  이 경우에 운명이란 미래의 세대를 의미한다. Chlorohydra의 유전자와 조류의 유전자, 그
리고 갑충의 유전자와 박테리아의 유전자는 수구의 알을 통해서만  미래에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생활 분야의 최적정책에 관해 기생자가 행하는 모든 '계산'은 숙주의 유전자가 
같은 계산에 의해 빼낸 최적 정책과 같은 또는 거의 같은 것에 수렴할 것이다. 우리는 달팽
이와 그  기생자인 흡충의   경우 각각이 좋아하는   껍질의 두께는 다르다고  결론내렸다. 
Ambrosia beetle과 그의 박테리아의 경우, 숙주와 기생자는 날개의  길이와 그 밖의 갑충의 
모든 몸의 특징에 관해 같은  선호도를 취한다는 것에 일치할 것이다.  이것은 곤충이 그의 
날개 또는 그 밖의 무엇인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의 상세함을 전혀 몰라도 예측할 수 있다. 
우리는 갑충의 유전자와 박테리아의 유전자가 모두 같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 - 갑충의 알
의 증식에 바람직한 사건 -  을 계획하고 나서 그들의 능력  범위내의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는 추론에서 단순히 그렇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논의를 논리적인 결론까지 밀고 나가  정상적인 '우리 자신의'유전자에게 응용
할 수가 있다. 우리 자신의 유전자들이 서로 협력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로의 같은 출구 - 알이나 정자 - 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
과 같은 한 개의 생물체에 들어 있는
어떤 유전자도 만일 정자 또는 난자라고 하는 재래의 경로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을 넓히는 
등의 방법이 발견된다면 협력을 하지 않고 그 방법을 취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몸 속의 
다른 유전자에서 가져온 다른 세트의 장래 결과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감수 분열을 펴게 하는  유전자의 실례를 보았다. 아마도 
정자 내지는 알이라는 '적절한 통로'를 완전히 부수고 옆길을 개척한 유전자가 이미 존재할 
것이다. 
  염색체 속에 편입되지 않고 세포 특히 박테리아 세포의 액체 성분 속에 자유로이 떠다니
며 증식하는 DNA절편이 존재한다. 그들의 절편은  비로이드 라든가 플라스미드 라든가 하
는 여러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플라스미드는 바이러스보다 작고  보통은 극히 소수의 유
전자로 되어 있다. 일부 플라스미드는 이음새도  없이 자신을 염색체에 이어 붙일 수  있다. 
이어 붙임이 너무도 매끄러워서 이음새를 알  수 없다. 즉, 이 같은 플라스미드는  염색체의 
어떤 부분과도 구별이 어렵다. 같은 플라스미드가 또 한번 자신을 자를 수 있다. 신호가  떨
어지자마자 끊어지고 이어지며, 염색체에서  뛰어내리고 뛰어오르는 이  DNA의 능력은 이 
책의 초판이 나온 이후에 확실히 밝혀진 극히 흥미로운 사실 중의 하나이다. 실제로 플라스
미드에 관한 최근의 증거는 이 책의 제10장의 끝에서 기술한 추측(그 당시에는 아직 약간은 
난폭한 추측으로 생각되었다.)을 지지하는 실로 깨끗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몇 개의 관점
에 서 말하면 이들의 단편이 침입한 기생자에 서 유래하든지 아니면 이탈한 반란자에서 유
래 하든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그들의 단편의 행동은 다분히 같아질 것이다. 나는 나의 관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탈한 단편에 관해 말하려 한다.
  다음과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인간DNA의 반란  분자를 생각해 보자 . 그것은 자신이 그 
염색체로부터 끊겨져 나와 세포 내를 자유로이 부유하며 아마도 증식하여 여러 복사물을 낳
아 결국 자신을 다른 염색체에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향한 어떤 비정통적인 대
체 통로가 그와 같은 반란 자기 복제자를 개발할 수 있을까? 우리는 피부에서 끊임없이 세
포를 잃고 있다. 집안 먼지의 대부분은 우리가 벗어 버린 세포에서 비롯됐다. 우리가 서로의 
세포를 항상 마시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입속의  살갗을 손톱을 긁어 보면 수
백 개의 살아 있는 세포가  긁혀져 떨어진다. 연인들의 키스나 애무는  서로 다수의 세포를 
주고 받고 있음에 틀림없다.  반란 DNA분자는 이 같은  세포의 어느것엔가에 편승할 수가 
있을 것이다.만일 유전자가 다른 몸에  통하는 비정통적인 통로의 틈  (정통적인 정자 또는 
알이라는 통로가 아닌)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자연 선택이 그 편의 주의를  선호하여 그것을 
개선한다고 예측할 수가 있다. 그들이 쓰는 정확한 방법에 관해서  그것이 바이러스 책동 - 
연장된 표현형 이론가에게는 완전히 예상이 가능한 이기적  유전자 - 과 어딘가 틀린 곳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의 광견병
감기가 들거나 기침이 나면 보통 우리는  그 증후를 바이러스의 활동에 의한  부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몇 경우에는 한 사람의 숙주에서 다른  숙주로 이동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 바이러스에 의해 의도적으로 공작된 것일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바이러
스는 단순히 공기중으로 호흡을 통해 뿜어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에게 재채기나 기침
을 하도록 해서 힘차게 토해 내도록 한다. 광견병 바이러스는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을 물
었을 때에 타액에 섞여서 감염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개는 흉포하게  무는 개가 되어 
입에서 거품을 내게 된다. 또한 이 개는 불길하게도 - 보통 개의 행동 반경은 1마일이다. - 
행동권 범위를 훨씬 뛰어넘어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바이러스를 광범위하게 퍼뜨리게 된다. 
잘 알고 있듯이 물을 무서워하는 증후도 개가 입에서 거품을 - 이에 동반하여 바이러스 그 
자체마저도 - 뿌리고 다니며 퍼뜨리는 것을 조장하고 있음을 시사하기까지 한다. 나는 성적 
관계를 통해 전염되는 병이 감염자의 성충동을 높인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나 그것은 조사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적어도 미약(媚藥)이라고 하는 가뢰
류(Spanish Fly)가 가려움증 을  일으켜 작용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사람을 가렵게 
하는 것은 마치 바이러스가 뜻을 이루려고 했던 종류의 일이다.
  반역한 사람의 DNA와 침입할 기생적인 바이러스를 비교하는 요점은 양자 사이에 어떠한 
중요한 차이도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바이러스가 단편으로 된 유
전자의 집단에서 생길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만일 어떤 구별을 세우려고 생각한다
면 그것은 정자 내지는 난자라는 정통적인 통로를 따라 몸에서 몸으로 옮기는 유전자와 비
정통적인 '옆길'통로를 거쳐 이동하는 유전자 사이의 구별이 아니면 안 된다. 양쪽 모두 '자
신의 '염색체 유전자로서 생긴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양쪽 모두 
외부에서 침입한 기생자에서 유래하는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다분히 이 
책의 제 10장에서 내가 억측한 대로 우리들 자신의 모든 염색체 유전자는 서로가 기생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양 할지도 모른다. 내가 말하는 두 가지 부류의 유전자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는 그것들이 장래에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정황의 차이 속에 있다. 감기 바
이러스의 유전자와 단편화된 인간의 염색체 유전자는 자신들의 숙주가 재채기하는 것을  발
고 있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정통적인 염색체 유전자와  성교에 의해 전해지는 바이러스
는 자기들의 숙주가 성교하는 것을 열망하는 점에서 서로가 일치한다. 양쪽 모두 숙주가 성
적 매력을 갖기를 바랄 것이다라는 생각은 매우 재미있다.  더욱이 정통적인 염색체 유전자
와 숙주의 알 속에 들어가 전해지는 바이러스는 숙주가 단순히 구애에 성공할 뿐만 아니라 
성실하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와 조부모가 될 때까지 인생의 자세한 모든 측면에서 성공할 
것을 바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할 것이다.
      비버 댐
  날도래는 자기 집 속에서 살고,  지금까지 내가 말한 기생자들은 숙주의  몸 속에서 살아 
왔다. 따라서 이들의 유전자는 유전자나 보통 그 표현형에 가까운 곳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
로 각각의 연장된 표현형 효과와 물리적으로 가까운 데 있다. 그러나 유전자는 거리가 떨어
져 있어도 작용할 수 있다. 즉, 연장된 표현형은 아주  머리까지 연장할 수 있다. 내가 생각
할 수 있는 최장의 범위는 하나의 호수이다. 거미 집이나  날도래 집과 마찬가지로 비버 댐
(beaver dam)은 아주 경이롭다. 그 다윈주의적  목적이 완전히 분명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비버는 댐을 쌓기 위해 매우 많은 시간과 에너
지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들어 내는 호수는 아마도  비버의 집을 포식자로부터 지
키는 역할을 다할 것이다. 호수는 또 이동하거나 통나무를  운반하기에 합당한 좋은 수로까
지도 제공해 준다. 비버는 캐나다 목재 회사가 하천을  이용하고 18세기의 석탄업자가 운하
를 이용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유체의 부력을 이용한다. 그것이 주는 이익이 어떻든 간에 
비버의 호수는 경관 중에서도 눈에 띄는 특징적 풍물이다. 그것은 비버의 이나 꼬리에 못지 
않게 하나의 표현형이며 다윈주의적인 자연 선택이 작용하려면 유전적 변이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선택은 좋은 호수와 그다지 좋지 않은 호수  사이에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선택
은 나무를 운반하기에 적합한 호수를 만드는 비버의 유전자에 작용할 것이다. 그것은 꼭 나
무를 자르기에 적합한 이를 만드는 유전자가 선택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버의 호수는 유
전자의 연장된 표현형 효과이며 이것들은 몇백 야드도 연장할 수 있다. 얼마나 긴 팔 인가!
  기생자가 반드시 숙주의 몸 속에서  살 필요는 없다. 그들의 유전자는  멀리 떨어진 곳의 
숙주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다. 뻐꾸기의 새끼가 울새나 개개비의  몸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뻐꾸기가 직접 울새나 개개비의 피를  빨아먹거나 조직을 뜯어 먹지도 
않는데도 우리는 그들에게 기생자라는 라벨을  붙이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양부모의 
행동 조작을 향한 뻐꾸기의 적응은 뻐꾸기의 유전자에 의한 연장된 표현형의 원격 작용이라
고 간주할 수 있다.
      뻐꾸기의 속임수
  뻐꾸기의 알을 품도록 속은 양부모에게 감정 이입하는 것은 쉽다. 알 채집인도 역시 뻐꾸
기의 알이 논종다리 알이나 개개비 알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많이 속아 왔다(암 뻐꾸기는 
품종마다 각각 다른 숙주 종에 전문화 되어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번식기 후기에 거
의 둥지에서 날아갈 수 있기 직전의 뻐꾸기 새끼에 대해 양부모가 하는 행동이다. 뻐꾸기는 
보통 양부모보다 훨씬 체구가 크다. 나는 지금 바위종다리의 어미새 사진을 보고 있는데, 그 
괴물과 같은 양자에 비하여 양부모가 너무 작기 때문에 먹이를 주기 위해서는 그 놈의 등에 
올라타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숙주에게 별로 동정이 가지  않는다. 그 어리석음, 
속기 잘하는데 아주 놀란다. 틀림없이 아무리 바보 같은  동물일지라도 그러한 새끼를 보고 
어딘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뻐꾸기 새끼는 오히려 그 숙주를 그냥 '속임' 이상의, 단순히 진자 자기가 아닌 어떤 시늉
을 하는 이상의 것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즉, 숙주의 신경계에 상습성의 마약
과 같은 형태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비록  마약을 쓴 경험이 없는 사람
까지도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남자는  여성의 육체 사진에 주의하게 되며 발기까지도  한다. 
그는 결코 인쇄된 잉크의 패턴이 진짜  여성이라고 생각하도록 '속고 있을'리는 없다. 그는 
자기가 종이 위의 잉크를 보고 있음에 불과한 것을 알고 있으나 그의 신경계는 진짜 여성에
게 반응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반응하고 만다. 우리는 비록 그 상대와의 관계가 장기적으로 
보아 누구의 이익에도 도움이 안됨을 바로 판단하게 될 경우에라도 특정 이성의 매력에 견
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물에 대한 참기 어려운 매력도 마친가지이다. 
바위종다리는 다분히 장기적으로 본 자기의 최선의 이익에 대해서 분명한 자각은 가지고 있
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 신경계가 특정한 종류의 자극을  참기 어려운 것으로 보는 것은 
훨씬 간단하기까지 하다.
  뻐꾸기 새끼의 크게 벌린 빨간 입은 너무도 유혹적이어서 조류학자들은 다른 새의 둥지에 
앉아 있는 뻐꾸기 새끼의 입에 먹이를 넣어 주는 다른 종의 어미 새를 쉽게 볼 수 있다. 이 
새는 자기 새끼의 먹이를 물고 집으로  오는 도중이었을 지도 모른다. 돌연히 눈에  뜨이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새 둥지 속에 있는 뻐꾸기 새끼의 특별히 크게 벌린 빨간 입을  발견하게 
된다. 이 새는 그 남의 둥지를 향해 방향을 바꿔 자기 새끼에게 주려고 했던 먹이를 뻐꾸기
의 입 속에다 넣어 준다. '불가항력설'은 양모가 '마약 중독자' 처럼 행동하여 뻐꾸기새끼가 
그들에게 '나쁜 버릇'으로서 행동한다고 말한 초기 독일 조류 학자들의 견해와 일치한다. 최
근 이 견해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뻐꾸기의 벌린 입이 마약과 같은 강력한 초
자극이라고 상정하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쉽다.  괴물 같은 새끼 등에 
올라 탄 자그마한 어미 새의 행동에 줄곧 공감을 갖기 쉽다. 그  어미 새는 결코 바보가 아
니다. '속는다'라는 말은 잘못된 말투이다. 그 신경계는 마치  그것이 무력한 마약 중독환자
이며 마치 그 뻐꾸기가 양모의 뇌에 전극을 꽂는 과학자나 되는 듯한 상황하에서 억제할 수 
없도록 통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조작된 양부모에게 우리가 더한층  개인적 공감을 가지게 됐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뻐꾸기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 자연 선택이 왜  허용되어 왔는가를 물어봐야겠다. 왜 
숙주의 신경계는 빨간 입이라는 마약에 대한 저항성을 진화시키지 않았는가? 자칫하면 그것
이 작용하는 만큼의 시간이 아직 부족한지도 모른다. 어쩌면 뻐꾸기는 겨우 수백 년 전부터 
현재의 양 부모에게 기생을 시작했고, 2,3백 년 사이에는 그것들을 써먹고 다른 종을 희생으
로 바칠지도 모른다. 이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가 멏 가지 존재하는데, 나는 여기에서 그것보
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뻐꾸기와 그 숙주가 되는 어떤 종 사이의 진화적인 '군비  경쟁'에는 실패의 불평등한 지
출에서 기인하는 일종의 타고난 불공정이 존재한다. 개개의 뻐꾸기  새끼는 조상 뻐꾸기 새
끼들이 길게 이어져 온 계열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이 계열에 속하는 모든 개체는 그 양부모
를 조작하는데 성공해 왔음이 틀림없다. 양부모에 대한 지배력을  만일 잠시라도 잃은 뻐꾸
기 새끼는 죽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개의 양부모는  대개가 그의 생애에 한번도 뻐꾸
기와 만난 적이 없는 길게 이어져 온 조상의 계열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둥지 속에 실제로 
뻐꾸기 알을 받은 양부모 새도 그것에게 지고 있으면서도 살아 남아서 다음 번식기에는 다
른 한배의 새끼를 키울 수가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실패에 대한 지출에 비대칭성이 있다는 
점이다. 뻐꾸기의 노예가 되는 것에 저항 하여 손해를  보는 유전자는 울새나 바위종다리의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질 수 없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타고난 불공정'과 '실패에 대한 지출
의 비대칭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점은 다음의 이솝우화에 요약되어 있
다. 즉, "토끼는 여우보다 빠르다. 왜냐하면 토끼는 목숨을 걸고 달리나 여우는 먹이를 위해
서만 달리기 때문이다." 나의 동료인 크렙스와 나는 이것을 '생명/식사 원리'라고 명명했다. 
      생명/식사 원리
  생명/식사의 원리 때문에 때로 동물은 자기로서 최선은 아닌 듯한  방법으로 생동하여 다
른 어떤 동물에 의해 조작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어쩐 의미에서 자기에게 
최대의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고 있다. 생명/식사 원리의 전체적인 요점은 이론상 조작에 저
항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비용이 너무도 과다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뻐꾸기에 의한 
조작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보다 큰 눈 또는 뇌를 가지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것은 간접적인 
지출을 수반할 것이다.조작에 저항하는 유전적 성향을 갖는 바이러스는 저항에 필요한 경제
적 지출 때문에 현실로는 자손에게 유전자를 전하는 데 그다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생물을 그 유전자보다 생물 개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으로 후
퇴해 버렸다. 흡충과 달팽이에 관해 말했을때 기생자의 유전자는 숙주의 몸에 재해 모든 동
물의 유전자가 그 '자신의'몸에 표현형  효과를 끼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법으로 표현형 
효과를 끼칠 수 있다는 생각에 젖었다고 본다. 우리는 '자신의' 몸이라는 생각 그 자체가 편
견을 갖고 있는 가정이라는 석을 표시 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몸 속에 있는 모든 유전
자는 우리가 그것을 몸 '자신의' 유전자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든 않든 간에 '기생적' 유
전자인 것이다. 뻐꾸기는 숙주의 몸 내부에 살지 않는 기생자의 일례로서 이 논의에 등장했
다. 그러나 뻐꾸기는 내부 기생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숙주를 조작하며, 그 조작은 몸  속의 
약물이나 호르몬처럼 강력하여 저항하기 어렵게 만든다.ㅏ 내부 기생자의 경우와 같이 우리
는 이제 모든 사실을 유전자와 연장된 표현형이라는 관점에서 바꿔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뻐꾸기와 숙주 사이의  진화적 군비 경쟁은 자연 선택에 의해 선택되는 유전적 돌연변이
라는 형태를 취한다. 크게 벌린 뻐꾸기의 입을 보고 숙주의 신경계에 마약과 같이 작용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유전적인 변이로서 생긴 것이 틀림없다.  이 돌연변이는 뻐꾸기 새끼
의 예컨대 크게 벌린 입의 색깔이나 형상 등에 대한  효과를 통해 작용했다. 그러나 이것마
저도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아니다. 그의 가장 직접적 가장 직접적 효과는 아니다. 그의  가
장 직접적 효과는 세포 내부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화학적인 현상에 미치게 됐던 것이
다. 크게 벌린 입의 색깔이나 형상에 대한 유전자의 효과 그 자체는 간접적인 것이다.  그리
고 여기에 문제의 요점이 있다. 그것보다 아주 조금 간접적인 것은 같은 뻐꾸기의 유전자가 
정신을 잃은 숙주의 생동에 미치는 효과이다. 뻐꾸기의 유전자가  크게 벌린 뻐꾸기의 입의 
색깔이나 형상에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엄밀히 같은 의미로 우리는 뻐꾸기의 유전자가 
숙주의 행동에 효과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생자의 유전자는 단순히 기생자가 숙주
의 몸 속에서 직접적인 화학적 수단에  의해 조작될 경우뿐만 아니라 기생자가  숙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원격 조작할 경우에도 숙주의 몸에 효과를 끼칠 수가 있는 것이다. 
  뻐꾸기는 놀랄 만한 가르침을 많이 주는 생물이다. 그러나 척추  동물 사이에서 볼 수 있
는 모든 경이로움까지도 곤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곤충에는 극히 많은 친구가 있다
는 이점이 있다. 나의 동료인 메이는 적절하게 "어림잡아 말하면  모든 종은 곤충이다."라고 
의견을 말했다. 곤충 '뻐꾸기'의 리스트는 거의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실 너무도 많고, 
그들의 습성은 너무도 빈번하게 재발견 되어왔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몇몇의 실례는 낯익
은 '뻐꾸기주의'를 통과하여 '연장된  표현형'이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격렬한 환상을 
충족하고 있다. 
  새 '뻐꾸기'는 알을 낳고 사라진다. 어쩐 '뻐꾸기' 개미의 암놈  중에는 자신의 존재를 더 
극적인 형태로 표현해 주의를 끌게 하는 것이 있다. 나는  라틴어의 학명은 거의 안 쓰는데 
여기서는 Bothriomyrmex regicidues 와 B.  decapitans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된다. 이 두 
종은 모두 다른 종의 개미에 기생한다. 모든 개미에 있어서  새끼는 보통 부모가 아닌 일개
미에 의해 양육되므로 뻐꾸기 개미가 속이거나 조작해야 할  대상은 일개미 이다. 효과적인 
첫 번째 단계는 경합하는 새끼를 낳는 성향을 가진 일개미 자신의 어미를 말살하는 일이다. 
기 두 종에서는 기생자인 단 한  마리의 여왕이 다른 종의 개미 집에  숨어든다. 이 여왕은 
숙주의 여왕을 찾아내면 그 등에 올라타고  끔찍한 짓을 한다. 즉, 희생자의 머리를  천천히 
잘라 버린다. 그 후 이 살해자는 고아가 된 일개미  들에게 인정받고 개미들은 하등의 의심
도 없이 새로운 여왕의 알이나 유충의 시중을 든다. 일부는 양육되어서 일개미 자체가 되고 
그것들이 서서히 본래의 종류로 치환되어간다. 다른 것은 여왕이  되어 새로운 목초지나 아
직 상처 받지 않은 새로운 여왕의 머리를 찾아 밖으로 날아간다. 
      유혹
  그러나 머리를 자르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기생자는 만일 대신할 자를 생각
대로 할 수만 있다면 이 같은 짓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윌슨의 (곤충사회) 중에서  내
가 맘에 드는 특성은 개미의 일종인 Monomorium santschii이다. 이 종은 긴 진화 과정에서 
일개미라는 계급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 숙주의 일개미가 기생자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심
지어 모든 일 중에서 가장  무서운 일까지도 한다. 침입한 여왕의  명령에 따라 일개미들은 
자기 자신의 모친을 살해하는 일을 실제로 행하고 있다. 왕위  강탈자는 자기의 턱을 쓸 필
요가 없다. 여왕은 정신 지배를 사용한다. 어떻게 하느냐는 수수께끼이다. 아마도 여왕은 화
학물질을 사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미의  신경계는 보통 화학 물질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만일에 여왕의 무기가 정말 화학 물질이라면  그것은 과학적으로 알려져 있는 모든  마약과 
같이 교활한 것이다. 그것이 해낼 것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일개미의 뇌를 채우고  근육의 
고삐를 잡아 깊이 새겨진 의무를 방기하도록  강요하여 일개미로 하여금 그 자신의  모친을 
적대하게 한다. 개미에게 있어 모친 살해는 특수한 유전적 광기의 행위이며, 일개미를  그렇
게 하도록 유인하는 마약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다. 연장된  표현형의 세계에서 동물의 행동
이 어떻게 해서 그 유전자에게 이익을 주는가는 불문할 때 그것이 이익을 주는 것은 누구의 
유전자인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개미가 기생자, 그것도 단순히 다름 개미 뿐만이 아니라 마치 동물원과 같이 놀랄 정도로 
다양한 전문가의 수정을 드는 것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다고 해도 거의 놀랄 일이 못 된
다. 일개미들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모은  먹이의 풍요함을 서서히 중앙  저장소로 옮기는데 
그 속은 공짜로 먹으려고 끼여드는  자에게 절호의 표적이 된다. 개미는  또한 훌륭한 보호 
담당자이다. 왜냐하면 잘 무장되어 있고 수도 많기 때문이다. 제 10장에서 말한 진딧물은 직
업적인 경호원을 고용하게 위해 꿀을 지불한다고 볼 수 있다. 몇 종류의 나비는 개미 집 속
에서 유충 시기를 지낸다. 일부는 무분별한 약탈자이다. 다른 것은 보호의 대가로  개미에게 
무엇인가를 준다.  종종 이들  나비에게는 보호자를  조작하기  위한 장비가  많다. Thisbe 
irenea라는 나비의 유충은 머리에 개미를 불러 모으기 위한 발음 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꽁지 끝에는 유혹하는 게 쓸  꿀을 짜내는 , 마음대로 줄였다 늘렸다  하는 한 쌍의 
분출구를 가지고 있다. 어깨에는 또 다른 한 쌍의 분사구가  있는데 이것은 전혀 다르고 보
다 미묘한 마법을 발휘한다. 그 분비물은 먹이가 아니라 개미의 행동에 극적인 영향을 주는 
휘발성의 약물이라고 생각된다. 그 영향 속에 빠진 개미는 확실히 태도가 급변한다. 턱을 크
게 벌리고 공격적으로 되어 어떤 움직이는  대상에 대해서도 보통 이상으로 열심히  덤비고 
물고 찌른다. 흥미로운 것은 약물을 투여하고 있는 나비의 유충만은 예외라는 것이다.  거기
에 더 많은 마약을 뿌리는 유충의 영향하에 있는 개미는  마침내 집착 상태로 된다. 그러다
가 유충은 진딧물처럼 개미를 경호원으로 공용하는데 이 놈들은 한 발 앞선다. 진딧물은 포
식자에 대한 개미의 정상적인 공격성을 일으키는 마약을 투여하고 어떤 중독성ㅇ의 집착 생
태로까지 가는 인상을 준다. 
  나는 극단적인 예를 택했다. 그라나 더 온건한 방법이기는 하나 자연에는 동종 또는 다른 
종의 다른 개체를 조작하는 동물이나 식물이 많이 있다 자연 선택에 의해 조작하는 유전자
가 선택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유전자가  조작하는 생물체(연장된 표현형)에 효과를 
끼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 유전자가 물리적으로 어느 생물의 몸 속에 위치
하는가는 문제가 아니다. 그 조직의 표적은 같은   몸 일지도 모르고, 다른 몸 일지도 모른
다. 자연 선택은 스스로의 증식을 확실히 하도록 세계를 조작하는 유전자를 택한다.  이것이
야말로 내가 '연장된 표현형의 중심 정리' 라고 하는 것에 연결된다. 즉, "동물의 행동은 그
들의 유전자가 그 행동을 하고 있는 동물의 몸 내부에 있거나 없거나 그 행동을 위한  유전
자의 생존을 최대로 하는 경향을  가진다." 나는 동물의 행동이라는  문맥으로 썼는데 물론 
이 정리는 색깔, 크기, 형상, 그리고 그 밖의 무엇에나 응용된다. 
  거기서 겨우 최초로 우리가 내 놓은 문제, 자연 선택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의 후보자로서 경쟁관계에 있는 생물 개체와  유전자 사이의 긴장으로 되돌아올 때가  왔다 
지금까지의 장에서 나는, 개체의 번식은 유전자의 생존과 같아서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문
제도 없다고 가정해 왔다. 여기서 나는 "생물 개체는  모든 유전자를 증식 시키도록 작용한
다."라고 해도 좋고 "유전자는 여러 세대의 생물 개체에 스스로를 증식하도록 작용한다." 라
고 해도 좋다고 가정한 것이다. 이것은 같은 것에 대한 두 가지의 대등한 표현인데 어느 표
현을 취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긴장은 남아 있다. 
      자기 복제자와 운반자
  문제의 전체를 정리하는 하나의  방법은 '자기 복제자'와  '운반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자연 선택의 근본적인 단위로 생존에 성공 또는 실패하는 기본적인 것, 그리고 때때
로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를 수반하면서 동일한 사본의 계열을 형성하는 것을 자기  복제자라
고 한다. DNA분자는 자기 복제자이다. 자기 복제자는 일반적으로  지금부터 기술하는 이유
에 의해 거대한 공동의 생존 기계, 즉 운반자 속에 모여든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운
반자는 우리 자신과 같은 개체의 몸이다. 그러나 몸은 자기 복제자가 아니다. 그것은 운반자
인 것이다. 이 점은 지금까지 오해되어 왔기 때문에 특히 강조해 둔다. 운반자 그 자신은 복
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운반자는 자기 복제자를 증식하도록 작용한다. 자기 복제자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또한 세계를 지각하지도 못하며 먹이를 잡거나 또는 포식자로부터 도망치지도 
않는다. 자기 복제자는 운반자로 하여금 그와 같은 모든 것을 하도록 작용한다. 여러 목적으
로서 생물학자는 그 관심을 운반자의 수준에 집중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러나 다른 목적으
로서 생물학자는 자기 복제자 수준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편리하다. 유전자와 생물 개체
는 다윈의 드라마에서 같은 주역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는 아니다. 양자는 서로 다른 배역
이고 많은 점에서 똑같이 중요한 서로가 보완하는 역할, 즉 자기 복제자라는 역할과 운반자
라는 역할을 하다. 
  자기 복제자/ 운반자라는 용어법은 여러 면에서 필요하다. 이것은 예컨대 자영 선택이 적
용하는 수준에 대해서 좋지 않은 논쟁을 해결해 준다.  표면적으로는 선택의 수준을 의미하
는 일종의 사닥다리에 있어서 '개체 선택'은 제 3 장에서 주장한 '유전자 선택'과 제 7장에
서 비판한 '그룹선택'의 중간에 놓는 것이 그럴듯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개체 선택'
은 막연히 양극단의 중간에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많은 생물학자와 철학자들이 이 잘
못된 길로 이끌려 그와 같은 것으로 취급해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것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 생물 개체와 개체군이 운반자의 역할을 가지고서 싸우
는 진짜 라이벌이기는 하나 그 어느 것이든 간에 자기  복제자라는 역할의 '후보자' 마저도 
아님을 알고 있다. '개체선택'과 '그룸 선택'사이의 논쟁은  정말로 다른 운반자간의 논쟁이
다. 개체 선택과 유전자 선택 사이의  논쟁은 결국 논쟁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전자와  생물 
개체는 이 이야기에서의 다른 상호 보완 역할, 즉 자기 복제자와 운반자라는 역의 후보자이
기 때문이다. 
  운반자 역으로서의 개체와 개체군의 경쟁이 진짜 다툼이 되게끔  안정시킬 수는 있다. 불
행히도 나의 견해에 의하면 생물 개체의 결정적인 승리로  결론이 내려진다. 개체군은 하나
의 실체로서는 너무도 시시하다. 사슴, 사자 또는 늑대의 무리는 어떤 종의 근본적인 조화와 
목적과 일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 마리의 사자, 늑대 또는 사슴의 몸에서  목적
과 조화와의 일치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이제 널리 인정되고 있
다. 그러나 왜 그것이 사실인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연장된 표현형과 기생자가 도와 준
다.
  기생자의 유전자가 서로 하나가 되어, 그러나 숙주의 유전자(이것도 서로 하나가 되어 일
한다)와는 대립적으로 일할 때 우리는 그 이유를 두 세트의 유전자가 공통의 운반자, 즉 숙
주의 몸에서 떠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달팽이의 유전자는 달팽이의 정자 
또는 알을 통해서 공통의 운반자를 떠난다.  달팽이의 모든 유전자는 어느 정자, 어느  알에 
대해서도 갘은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유전자는 동일한 당파성이 없는 감수 분
열에 참가한다. 그래서 그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같이  일하고 달팽이의 몸을 결속하고 
목적을 가진 운반자로 하는 경향을 갖는다. 흡충이 그 숙주로부터 명료하게 분리할 수 있는 
진정한 이유, 그 목적 및 정체성을 숙주의 그것과 합체시키지 않는 이유는 흡충의 유전자가 
공동의 운반자로부터 이탈하는 방법을 달팽이의 유전자와 공유하지 않고 또 달팽이의  감수 
분열의 추첨에 같이 참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추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런 방식으로 하는 한  두 개의 운반자는 달팽이와 그 몸  속의 분명히 다른 
흡충으로서 분리된 채로 남는다. 만일 흡충의 유전자가 달팽이의  알이나 정자 속에 들어가 
전해진다고 하면 두 개의 몸은 하나의 육체가 되도록 진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두 운반
자가 있었다는 말까지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늑대 집단
  우리 같은 단일 생물 개체는  그와 같은 많은 흡수 합병의  궁극적이 통합체이다. 개체의 
그룹(새떼나 늑대 무리)이 단일 운반자에 합병되는 일은 없다. 그것은  바로 무리 속의 유전
자가 현존하는 운반자를 탈출하는 공통의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늑대 
무리에서 낭군이 떨어져 나가는 수도 잇다 그러나 어미 무리 속에 있던 유전자는 모든 유전
자가 똑같은 분배가 되도록 단일  용기로 낭군에게 전해지는 석은 아니다.  어떤 한 낭군의 
모든 유전자가 장래에 있어서 같은 일련의 사건에서 이득이 약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하
나의 유전자는 자신이 속해 있는 늑대의 개체를 다른 개체의 희생을 통해 유리하게 함으로
써 자신의 장래의 번영을 촉진할 수 있다. 따라서 한 마리의 늑대는 운반자에 해당한다.  그
러나 늑대의 무리는 다르다. 유전적으로 말해 이 이유는 한 마리의 늑대 몸 속의 생식 세포
를 제외한 모든 세포의 유전자가 같고, 한편 생식 세포에  관해서는 모든 유전자들이 그 중
의 하나에 들어갈 기회가 균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늑대의 한 무리에 속하는 세포군은 같
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에서 갈라진 낭군의 세포에 들어갈 기회도 같지 않다. 
그들 모두는 다른 늑대의 몸 속에 있는  라이벌의 세포와 투쟁해서 이겨야만 한다.(늑대 무
리가 어떤 혈연 집단인 것 같다고 하는 사실에 의해 이 투쟁은 완화될 것이다).
  어떤 것이 실질적인 유전자의 운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필수적인 속성이
다. 즉, 그것은 내부의 모든 유전자에게  공평한 미래를 향해서 이탈 통로를 가지지  낳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마리의 늑대에 관해서는 진실이다. 이 경로는 감수 분열에  의
해 만들어지는 정자 또는 알이라는 작은 흐름이다. 이것은 늑대 무리에 대해서는 진실이 아
니다. 유전자는 늑대 무리의 다른 유전자를 희생하여 자기  자신의 개체의 번영을 이기적으
로 촉진함으로써 얻어지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분봉할 때에  꿀벌의 집은 늑대 무리처
럼 다른 개체의 집합된 출아에 의해 번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더 주의 깊게 살펴
보면 유전자에 관한 한 그들의  운 병은 대체로 공통적이라는 것을  안다. 꿀벌의 분봉군의 
유전자의 미래는 적어도 대부분은 한 마리의 여왕의 난소 속에 숨어 있는 그야말로 벌의 군
체가 진짜 통합된 단일 운반자처럼 보여 그같이 행한 이유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장의 에
시지를 표명하는 또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사실 문제로서 우리는 생명이 도처에서 늑대의 개체나 벌집과 같이 분명히 갈라져서 개개
의 목적을 가지는 운반자로 묶여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연장된  표현형의 학설은 그것이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이론이 예상할 수 있는 모
든 것은 유전적인 미래를 가지고, 떠밀고, 속이고, 싸우는 자기 복제자들의 전쟁터라는 것으
로 그치고 만다. 싸움에서 무기는 효과이지만 최종적으로는  날개, 이빨, 나아가 원격효과가
지 포함한다. 이 같은 표현형의  모든 효과가 분명히 분리된 운반자로  묶이게 되는 경우가 
종종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각각의 운반자는 미래로 보내는 정자 또는 알이라는 공통
의 병목을 가진다는 예견에 따라 규제되고 질서 잡힌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넘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의문을 불러 일으키는 경탄할 만
한 사실이다. 왜 유전자는 각각 단일 유전적 탈출 통로를 갖는 커다란 운반자로 모여들었을
까? 왜 유전자는 집단을 이루고 자기들이  살아가는 커다란 몸체를 만드는 선택을 했을까? 
나는 '연장된 표현형'에 있어서 이 곤란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리려고 시도했다 여기서는 
그 답과 같이 일부만 개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때부터  7년이 지난 지금은 다소 전진
할 수 있다.
        유전자는 왜 집단을 형성했는가?
  문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유전자는 왜  세포 속에 집단을 이루고 있
는가? 세포는 왜 집단을 이루고 다세포체를 만들었는가? 그리고  생물체는 왜 내가 '병목을 
가진 형'이라고 하는 생활환(life cycle)을 채용했는가?
  우선 최초로, 유전자는 왜 세포 속에 집단을 이루었을까? 왜  태고의 자기 복제자는 원시 
수프 속의 자유를 버리고 거대한 군체에서 살기로 했는가? 왜 그들은 협력하고 있나? 오늘
날의  DNA 분자가 살아 있는 세포인 화학 공장에서 어떻게 협력하는가를 봄으로써 우리는 
답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 DNA 분자는 단백질을 만든다.  단백질은 효소로 작용하고 특
정한 화학 반응을 촉매한다. 종종 하나의 화학 반응만으로는  유효한 최종 산물을 합성하기
에는 충분치 않다. 하나의 유효한 화학 물질을 합성하는데 있어 인간의 제약 공장에서는 생
산 라인이 필요하다. 출발점이 되는  화학 물질에서 원하는 최종 산물로  직접 변환될 수는 
없다. 일련의 중간 산물이 엄밀한 순서로 합성되어야만 한다. 대부분의 화학 연구자들은 출
발점이 되는 화학 물질에서 유효한  최종 산물의 합성을 달성할 수  없다. 하나는 원료에서 
최초의 중간 산물로의 변환을 촉매하고 또 하나는  최초의 중간 산물에서 제2의 중간 산물
로의 변환을 촉매한다. 결국 이런 방식에 의해 완전한 세트의 효소가 필요하다.
  이들 개개의 효소들은 하나의 유전자로부터 만들어진다. 만일 특정의 합성 경로에서 여섯 
개의 효서 계열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 효소를  만드는 모든 유전자가 존재치 않으면 안 된
다. 그런데 같은 최종 산물에 도달하는데 있어 두 개의  서로 다른 경로가 존재하여 각각이 
여섯 개의 다른 경로와 여섯 개의 다른 효소를 필요로 할 경우 두 경로 사이에는 아무런 선
택할 만한 차이가 없다는 사태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같은 종류의 일은 화학 공장
에 있어서도 일어난다. 어느 경로가 선택되는가는 역사적인 우연이거나 아니면 화학자의 보
다 의도적인 계획의 문제일 것이다. 물론 자연의 화학 과정에 있어서 선택이 의도적일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  선택을 통하여 생길 수 있을  거시다. 그러나 자연 선택은 
두 경로가 혼선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적합한 유전자의 그룹이 출현하도록 계획할 수 있을
까? 그것은 독일인과 영국인 보트  경주 선수의 비유에서 내가 시사한  것과(제5장) 똑같은 
방법에 의해서이다. 중요한 것은, 경로 1의 한 단계를 위한 유전자는 경로 1의 다른 단계를 
위한 유전자군의 존재하에서는 번영할 것이나  경로2의 유전자군의 존재하에서는 번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만일 그 집단이 이미  경로 1을 위한 다른 유전자에 의해  우위를 뺏기고 
있다면 선택은 경로 1을 위한 유전자에게는 유리하게, 경로 2를 위한 유전자에게는  불리하
게 작용할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같다. 경로2의 여섯 개의 효소를 위한  유전자가 '그룹
으로' 선택되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확실히  잘못된 표현이다. 각각은 별개의 이기
적 유전자로서 선택되는데 다른 유전자의 바른 세트의 존재하에서밖에 번영하지 못한다.
      유전자의 협력
  오늘날 이 유전자간의 협력은 세포 내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것은 원시 수프(또는 무엇이
든 전에 존재했던 원시적 생활 조건) 속에서의 근본적인 협력에서 출발했음이 확실하다. 세
포벽은 아마도 유효한 화학 물지를 갖추어  온전하게 유지하여 새어 나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생겼을 것이다. 세포 속의 대개의 화학 반응은 실제로는 내부의 막상 구조물 
위에서 진행된다. 막은 컨베이어  벨트에다 시험관의 랙을 조합시킨  것 같은 작용을 한다. 
그러나 유전자간의 협력은 세포 생화학의 범위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세포를 뭉쳐서(또는 
세포 분열 후 분리의 실패로) 다세포의 몸을 만들게 했다.
  이것이 나의 세 가지 의문  중 두 번째로 우리를 유도한다.  왜 세포는 집단을 이루는가, 
왜 쿵쿵거리며 움직이는 로봇이 됐는가?  이것은 협력에 관한 또 하나의  의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영역은 분자의 세계로부터 보다 큰 규모로 이동한다.  다세포 생물의 몸은 현미경으
로 관찰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생장한다. 코끼리나 고래까지도 될 수 있다. 크다는 것이 꼭 
좋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생물은 박테리아이며  코끼리는 극히 조금밖에 없다. 그러나 
작은 생물을 위해 열려 있는 생활의 길이 꽉 차 있을 때,  큰 생물에게 필요한 최적의 생활 
양식은 아직 남아 있다. 예컨대  큰 생물에게 필요한 최적의 생활  양식은 아직 남아 있다. 
예컨대 큰 생물은 작은 생물을 먹을 수 있고 작은 생물은 큰 생물에게 먹히는 것을 피할 수
도 있다.
  세포가 클럽을 만드는 이점은 몸의 크기에 그치지 않는다.  클럽 속의 세포는 특수화되어 
이에 따라 각각의 특이한 임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행할 수  있게 된다. 특수화된 세포는 클
럽 중의 다른 세포의 역할을  하고 동시에 다른 전문가의 능률적인  일에서 이익도 얻는다. 
만일 많은 세포가 있으면 어떤 세포는 먹이를 발견하는  센서로서 특수화하고, 다른 세포는 
메시지를 전하는 신경으로서, 또 다른 세포는 촉수를 써서 먹이를 잡기 위한 근육 세포, 먹
이를 분해하는 분비 세포로, 더 나아가서 그 소화된 액을  흡수하는 세포로 특수화될 수 있
다. 적어도 우리 인류와 같은 현대의  생물체에서는 이들의 세포가 클론(clone)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두 같은  유전자를 품고 있으나 그저 특수화된  각각의 세포마다 다른 
유전자의 스위치가 들어가는 것뿐이다. 각  형태의 세포의 유전자는 번식  때문에 특수화된 
각각의 세포마다 다른 유전자의 스위치가  들어가는 것뿐이다. 각 형태의  세포의 유전자는 
번식 때문에 특수화된 소수파의 세포, 즉 불사의 생식 계열의  세포 내에 있는 그들 자신의 
사본에 직접 이익을 주고 있다.
      병목형
  생물체는 왜 '병목을 가진 형'의 생활환을 참가하는 것일까? 이것이 나의 세 번째 의문이
다. 도대체 병목형이란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코끼리 한  마리의 몸에 얼마나 많은 
세포가 있는가에 상관없이 코끼리는 그 생애를 단일 세포인  수정란에서 시작했다. 이 수정
란이 좁은 병목이고, 이것이 배발생의  과정을 통해서 몇 조의 세포로  불어나서 한 마리의 
코끼리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세포가 얼마나  많은 특수화된 세포와 협력
하여 큰 코끼리가 달릴 수 있게 하는 상상도 못할 상세한 일을 진행하든지 간에 이들  모든 
세포의 노력은 단 한 종류의 단일 세포(정자 또는 알)의 생산이라는 최종 목표로 수렴한다. 
코끼리는 그 시작에 있어서 단일 세포, 즉 수정란이라는 것만은 아니다. 그 목표 또는 최종 
산물을 의미하는 그 목적도 다음 세대의 수정란이라는 단일  세포의 생산에 있다. 코끼리의 
폭넓고 거대한 생활환은 처음과 끝 모두에 좁은 병목이 있다.  이 병목은 모든 다세포 동물
과 거의 모든 식물의 생활환의 특징이다. 왜? 그리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일 그것이 없
었다면 생명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없이 이 의문에 답할 수는 없다.
  Bottle-wrack과 Splurge-weed라고 하는 두 종의 가상적인 해초를 상상해 보면 알기 쉬
울 것이다. Splurge-weed는 바닷속에  헝클러진 부정형의 나뭇가지처럼 무럭무럭  자란다. 
때때로 가지는 끊어져서 표류한다. 이 같은 절단은 실물체의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단편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정원의 삽목처럼 이들  단편은 본래 식물과 똑같이 생장할 
수 있다. 이렇게 몸의 일부가  절단되는 것이 이 식물의 번식법인  것이다. 느낀 바와 같이 
이것은 생장과 현실로는 다른 것이 없고 그저 생장부가 서로서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Bottle-wrack도 겉모양은 닮아서 역시 무럭무럭 자란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하나 있
다. 이것은 단세포의 포자를  방출함으로써 번식한다. 포자는  바닷속을 표류하고 생장하여 
새로운 식물체가  된다. 이들의  포자는  이 식물체  외의 세포와   같은 세포에 불과하다. 
Splurge-weed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은 개재하지 않는다. 딸 식물체는 어미 실물의 세포
의 클론 동료인 세포로 되어 있다. 이 두  종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Splurge-weed가 불특
정 다수의  세포로  이루어진 자신의   조각을 분리 독립시킴으로써   번식하는 데  비하여 
Bottle-wrack은 항상 한 개의 세포로 되는 자신의 조각을 분리 독립시킴으로써 번식한다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식물을 상상함으로써 병목을 가진 생활환과 병목을 갖지 않은 생활환 사이
의 결정적인 차이에 영점 조준을 할 수 있다.  Bottle-wrack은 단일 세포라는 병목을 통해
서 모든 세대를 꿰뚫는다. Splurge-weed는  그저 생장하여 두로 갈라질 뿐이다.  이산적인 
'세대'를  갖든가,  또는   이산적인 '생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Bottle-wrack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이제부터 자세히 설명할 텐데 이미 답을 이해할 수 있
다. Bottle-wrack은 보다 이산적인 '개체다움(organismy)'의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
각되지 않을 것인가?
      진화와 배발생의 관계
  이미 본 대로 Splurge-weed는 생장과 같은 과정에  의해 번식한다. 실제로 그것이 번식
한다고는 거의 말할 수 없다. 다른 ks편 Bottle-wrack에서 생장과 생식은 뚜렷하게 구별된
다. 이 차이에 영점 조준을 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어째서 그것이 문제인가? 나는 이것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왔고,  나로서는 지금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답을 생각하기보다 훨씬  어렵
다). 답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처음 둘은 진화와 배발생의 관계에 상관이  있
다.
  첫째, 단순한 기관에서 복잡한 기관으로의 지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언제까지나 식물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 동물쪽이 분명히 복잡한 기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논의가 이 단계
에 오면 식물에서 동물로 바꾸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시점에서 유성 생식과 무성 생식은 본  문제에서 주의를 벗어나게 하는 미
끼이다. 우리는 무성적인 포자를  방출하면서 번식하는 동물을 상상할  수 있다. 이 포자는 
단일 세포로서 돌연 변이를 제외하면 몸 속의 다른 모든 세포와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인간이나 쥐며느리(woodlouse)와 같이 발달된 동물의 복잡한 기관은 조상들의 단순한 기
관에서 서서히 단계적으로 진화해 왔다. 그러나 조상의 기관은  칼을 두들겨서 보습을 만들 
듯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자손의 기관으로 변화한 것은 아니다. 단순히 그렇지 않다는 것
만은 아니다. 내가 분명히 하고 싶은 점은 대개의 경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칼에서 보
습으로'라는 방식에 의한 직접적 변환에 의해 달성할 수 있는  변화의 양은 극히 한정된 것
뿐이다. 진짜 근본적인 변화는 '제도판으로 돌아와서' 이전의  설계를 버리고 새로이 출발함
으로써만이 달성할 수 있다. 기사가 제도판으로 돌아와서 새로운  설계를 창조할 때 반드시 
헌 설계에서의 발상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헌물체를 문자 그대로 새 것으로 
변형시키려고는 하지 않는다. 헌 물체는 너무도 무거운 역사적 혼란을 짊어지고 있다. 칼은 
두들겨 보습으로 바꿀 수 있을지는 몰라도 프로펠러 엔진을 '두들겨' 제트 엔진으로 바꿀 수
는 없는 것이다. 프로펠러 엔진은 폐기하고 제도판으로 되돌아 와야 한다.
  무론 생물은 결코 제도판 위에서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물은 실제로 새로운 출
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들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새출발하는 것이다. 모든 새 생물체
는 단세포에서 시작되어 새롭게 생장한다. 그것은 조상의 설계 이념을 DNA의 프로그램 형
태로 이어받지만 그 조상의 육체적인 기관을 인수받지는 않는다.  그것은 부모의 심장을 받
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가능하면 개량된) 심장으로 고쳐 만든다. 단일 세포로서 재출발하는 
새로운 개체는 부모의 심장과 동일한 설계 프로그램을 써서 생장하고 더 나아가 거기에 개
선이 가해질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독자는 내가 이끌려고 하는 결론을  알게 될 것이다. '병
목형' 생활환의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제도판으로 돌아오는 것과 동등함을 가능케 했다는 점
이다.
  생활환의 병목화는 두 번째 관련된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발생 과정의 조절에 이용이 
가능한 '달력'을 제공한다. 병목을 가진 생활환에 있어서 새로운 세대는  모두 거의 같은 일
련의 사건을 거쳐간다. 그것은 단세포로 시작하여 세포 분열에 의해 생장한다. 그리고 그것
은 딸세포(daughter cell)를 송출함으로써 번식한다. 아마도 그것은 최종적으로 죽을 것이나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면치 못할 운명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이 논의에 관
한 이 생활환은 현재 생물이 번식하고 새로운 세대의 생활환이 시작됐을 때 끝난다. 이론적
으로 생물은 그 생장기에 언제나 번식하는데 최종적으로는 번식에 최적 시기가 나타날 것으
로 예측된다. 너무 젊어가 노년이 되어 포자를 방출하는 생물은 힘을 저축하여 인생의 전성
기에 많은 수의 포자를 방출하는 경쟁자에 비해 결국은 보다 적은 자손밖에 갖지 못할 것이
다.
  논의는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정형적인 생활환의 문제로 옮겨지고 있다. 각 세대가 단세포
의 병목처럼 시작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일정  기간을 거친 생장기, 즉 아동기를 갖는
다. 생장 기간의 일정성, 정형성은 마치 엄밀히 지켜지는 달력에 따르는 모양으로 배발생의 
특정시기에 특정한 사태가 생기는 것을 가능케 한다. 생물종에 따라 정도는 다르나 발생 중
의 세포 분열은 확정된 규칙 순서대로 진행되며 이 순서는 생활환이 반복될 때마다 재현된
다. 세포 분열시 각 세포는  정해진 위치와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몇 개의 경우에는 
그것이 너무도 엄밀하기 때문에 발생학자는 각 세포마다 이름을 붙일 수가 있어 어떤 개체
의 임의의 세포에 관해 정확히 대응하는 다른 개체의 세포를 알아맞힐 수가 있다.
  그래서 정형적 생장 주기는 발생학적인 사건의  방아쇠를 당기기 위한 시계 또는  달력을 
제공한다. 지구의 자전 주기와 공전 주기를 생활의 구축과 질서화를 위해 우리 자신이 얼마
나 용이하게 이용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같은 식으로  병목을 가진 생활환에 
의해 강요된 끝없이 되풀이되는 생장 리듬은 -그것은 거의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발
생을 구축하고 질서를 잡는 데  이용될 것이다. 특정 유전자의 병목을  특정 시기에 넣거나 
자르거나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병목/생장 주기의 달력이  특정 시기라고 하는 재료의 존재 
그 자체를 보증하기 때문이다. 그처럼 잘 가감된 유전자 활성의 조절은 복잡한 조직이나 기
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발생 과정의 진화에서 불가결한 전제이다.  독수리의 눈이나 제비 
날개의 정확함과 복잡함은 언제 무엇을 만드는가를 정하는 시계 장치의 규칙이 없이는 출현
할 수 없다.
  병목을  가진  생활사에서  제3의  결과는  유전적인  것이다.  여기서  Bottle-Wrack과 
Splurge-weed의 예가 다시 필요하다. 또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기 위해 두 종 모두 무성
으로 증식한다고 가정하고 어떻게 진화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진화는 유전적인 변화, 즉 돌
연변이를 필요로 한다. 돌연변이는  어느 세포 분열  기간 중에도 우연히  일어날 수 있다. 
Splurge-weed에서 세포 계열의 선단은 폭이  넓고 병목과는 정반대이다. 절단되어 돌아다
니는 각 가지는 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딸 개체 중  두 세포의 친족 관계의 간
격이 각 세포와 어미 식물 중의 세포군과의 친족 관계보다 더 멀다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친족'이라는 말은 문자대로 사촌, 손자  기타 등등을 의미한다. 세포는 뚜렷한  유래의 
계열을 가지고 있고 이 계열은 갈라져 간다. 그래서 몸  속의 세포에 관해서 별로 변명없이 
육촌 등의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점에서 Bottle-wack은 Splurge-weed와 뚜렷이  다르
다. 딸 식물 중의 모든 세포는  단일 포자 세포에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개체 중의 
모든 세포는 단일 포자 세포에서 유래하는 것이 때문에 한 개체 중의 모든 세포는 서로  다
른 개체의 어느 세포보다 밀접한 사촌(또는 무엇이든) 관계에 있다.
  이런 두 종 사이의 차이는  중대한 유전적 결과를 초래한다. 새로운  돌연 변이 유전자의 
운명을 우선  Splurge-weed에  관해, 그   다음에는 Bottle-wrack에 관해   생각해 보자. 
Splurge-weed의 새로운 돌연 변이는 식물체의 어느 세포, 어느 가지에도 생길 수 있다. 딸 
식물은 다세포의 출아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돌연변이 세포의 직계 자손들은 비교적 먼 
친척에 해당하는 비돌연변이 세포와 딸 식물체나 손자 식물체를 공유할 수 있다. 다른 한편 
Bottle-wrack에 있어서 한 식물체의 모든 세포의 가장 최근의 공통 조상은 그 식물체에 병
목의 발단을 제공한 포자보다 오래 될 수는 없다. 만일  그 포자가 돌연변이 유전자를 포함
하게 될 것이다. 만일 포자가 그것을 포함하지  않으면 모든 세포가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식물체 내에서 Bottle-wrack의 세포는  Splurge-weed의 세포보다 유전적으로  더 균일할 
것이다(때때로 역돌연변이가 있다고 해도). Bottle-wrack에서 식물 개체는 유전적인 동일성
을 가지는 단위로 개체의 이름에 걸맞게 될  것이다. Splurge-weed의 식물체는 보다 작은 
유전적 동일성밖에 없고 Bottle-wrack의 식물체보다 '개체' 이름에 걸맞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용어법의 문제가 아니다.  돌연변이가 생기기 때문에 Splurge-weed 식물
체 내의 모든 세포가  근본적으로 결코 같은 유전적  이해 관계를 갖는 일은  없을 것이다. 
Splurge-weed 세포 내 유전자는  그 세포의 번식을 촉진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 
그것은 반드시 그 식물 '개체'의 번식을 촉진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돌연변이는 한 식물체 내의 세포와 유전적으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기관이나 새로운 식물
체의 제조에 있어서 서로가 성심 성의로 협력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 선택은 식물체
보다 오히려 세포 사이에서 선택을  할 것이다. 한편 Bottle-wrack에서는  한 식물체 내의 
모든 세포가 아마도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극히 최근의 돌연변이만
이 차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효율적인 생존  기계의 제조에 기꺼이 
협력할 것이다. 다른 식물체 내의 세포는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무엇
보다도 다른 병목을 통과한 세포군은 가장 최근에 생긴 돌연변이를 제거하는 다른 모든 세
포, 즉 대다수의 세포로 달라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Splurge-weed의 경
우와 같이 경쟁자의 세포간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벌 식물체 사이에서 판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식물체 전체에 필요한 기관이나 장치의 진화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엄밀히 전문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만 그룹 선택을 둘러싼  논의와 
유사성이 있다. 우리는 생물 개체를 세포의 그룹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룹 내 변이에 대
해 그룹간 변이의 비율을  증가시키는 방도가 있으면  일종의 그룹 선택이  작용하게 된다. 
Bottle-wrack의 번식  습성은  정확히 비율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Splurge-weed 습성은 정확히 그 정반대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  외에도 '병목을 가지는 
것'과 이 장을 특징짓는 다른 두 가지의 사고 방법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는데 그것들은 계
발적일지는 몰라도 여기서는 찾아내지 않는다. 첫째로 기생자는 그 유전자가 숙주의 유전자
와 같은 생식 세포에 들어가(병목을  통과하여) 다음 세대로 전해질  때에는 숙주와 협력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두 번째는 유성적으로  번식하는 생물체의 세포는 감수  분열이 공정할 
때만 서로 협력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요약하면 병목형의 생활사가 왜 분명히 구별된 단일 운반자로서 생물 개체의 진화를 촉진
하는가라는 세 가지의 이유를 봐 온 것이다. 이 셋에는 각각 '제도판으로 돌아옴', '규칙적인 
시간 주기' 그리고 '세포의 균일성'이라는 라벨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병목이 있는 생활환
과 분명히 구별되는 생물 개체는 어느쪽이 먼저 왔을까? 나로서는 양자가 함께 진화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사실 나는 생물 개체를 본질적으로 정의해 온 특징은 처음과 마지막에 단세
포의 병목을 가진 단위라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생활환이 병목의 어떤 형이 된다면 
생명 물질은 분명하게 구별된 단일 생물 개체에 들어가게 될 운명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
고 생명 물질이 분명히 구별되는 생존 기계에 점점 묻혀 버릴수록 그 생존 기계의 세포들은 
그들과 공통의 유전자가 병목을 통과하여 다음 세대로 옮겨지도록 운명지어진 특별한  부류
의 세포를 위해 점점 큰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병목을  가진 생활환과 분명히 구별되는 생
물 개체라는 두 현상은 서로  손잡고 보조를 맞추어 나간다. 한쪽이  진화하면 그것이 다른 
쪽을 더욱 강화시킨다. 양자는 마치 진행 중의 연애 과정에  있는 남녀 사이에서 감정이 나
선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처럼 서로가 격려하고 있다.
  (연장된 표현형)은 방대한 책이라서 그 논의를 한  장에 간단히 묶어 놓을 수는 없다. 여
기서 나는 압축한 좀 직관적인 인상파적이라고까지 불려질 스타일을 어쩔 수 없이 채용했음
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향미를 전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믿고 싶다.
        불멸의 자기 복제자
  끝으로 간결한 선언을 가지고 매듭짓기로 하자. 그것은 이기적 유전자/연장된 표현형이라
는 생명관의 전체에 대한 요약이다. 나는 그것이 우주의 어떤 장소에 있는 생물에게도 적용
되는 생명관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모든 생명의 근본적인 단위  및 원동력은 자기 복제자이
다. 자기 복제자는 그 사본이 만들어지는 우주에 있는 어떤 것이다. 최초로 우연히 작은 입
자들이 마구 부딪침으로 해서 자기 복제자가 출현한다. 자기  복제자가 일단 존재하게 되면 
그것은 스스로 복제를 한없이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복제 과정도 완전하지는 
않고 자기 복제자들의 집단은 서로가 다른 몇 개의 변이를 품게 된다. 이 같은 변이의 어떤 
것은 자기 복제의 능력을 잃어서 그들 자신이 소멸할 때  그 동족도 아울러 소멸하고 만다. 
다른 변이는 아직 복제를 할 수 있으나 효율이 나쁘다. 아직도 다른 변이는 점점 새로운 방
법을 획득하여 자기의 조상이나 동시대의 것보다 훨씬 효율이 좋게 자기 복제된다. 집단 중
에서 우세하게 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자손이다. 이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계는 가장 강
하고 교묘한 자기 복제자에 의해 채워져 나가게 될 것이다.
  좋은 자기 복제자가 되기 위한 더욱 세련된 방법은 서서히  발견되어 갈 것이다. 자기 목
제자는 자기 고유의 성질 때문만이 아니라 세계에 대하여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 덕분에 살
아 남는다. 이 같은 결과는 극히 간접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필요한 것은 그저 얼마나 간접
적인 것이든간에 최종적으로 자기 복제자가 자기를 복제할 때의 성공률에 피드백하여  영향
을 준다는 결과일 뿐이다.
  어떤 자기 복제자가 이 세상에서 성공할 것인가의  여부는 그것이 어떤 세계 -기존의 조
건- 인가에 달려 있다. 이런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자기 복제자와  그것이 가져
오는 결과일 것이다. 영국인과 독일인 조정 선수의 예와  마찬가지로 서로가 이익을 주고받
는 자기 복제자끼리는 서로의 존재하에서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다. 우리 지구상의 생물 진
화의 어떤 시점에서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자기 복제자끼리의 그와 같은 집결이 분명히 구별
되는 운반자 -세포와 후에는 다세포 생물체-의  창조라는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병목이 
있는 생활환을 가진 운반자가 번영하여 보다 더 확실하게 구별되는 운반자 다운 것이 됐다.
  생물 물질을 분리된 운반자로 포함시키는 것은 그런 두드러짐과 우세함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생물학자가 이 세상에 등장하여 생물에 관한 물음을 시작했을 때 그들의 물음은 전
적으로 운반자, 즉 생물 개체에 관한 것이었다.  생물학자의 의식에 의하면 생물 개체가 먼
저 들장하였고, 자기 복제자(현재로는 유전자로 알려짐)는 생물 개체가 쓰는 장치의 일부로 
인정됐다. 생물학을 다시 정도로 돌려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중요성에 있어서도 자기 복제자
가 최초로 왔다는 것을 신중하게 명심시키기 위해서도 의식적인 정신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명심시키는 하나의 방법은 오늘에 있어서까지도 한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가  반드시 
모두 그것이 위치하는 개체의 몸 속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원
칙적으로 말해 확실히 그리고 사실상 유전자는  개체의 체벽을 통과하여 바깥 세계에  있는 
대상을 조작한다. 대상의 일부는 생명이 없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은 다른 생물이며, 어떤 것
은 매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아주 작은 상상력만  있다면 방사상으로 뻗은 연장된 표현
형의 힘의 그물 눈 중심에 위치하는 유전자를 볼 수 있다. 세계 속에 있는 하나의 대상물은 
여러 생물 개체 속에 위치하는 여러  유전자로부터 오는 영향력의 그물이 집중하는  초점인 
것이다. 유전자의 긴 팔에는 분명히 경계가 없다.  모든 세계에는 멀리 또는 가깝게 유전자
와 표현형 효과를 연계하는 인과의 화살이 종횡으로 난입하고 있다.
  부수적이라기에는 너무 실천적으로 중요하지만, 필연이라 하기에는 이론상 또한 불충분하
다는 사실을 하나 추가해 두자. 그것은 이들 인과의 화살이 뭉쳐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자기 복제자는 바닷 속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거대한 군체(개체의 몸)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표현형 효과의 결과는 세계 전체에 균일하게 분포하고 있
는 것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그 같은 개체에 응결해왔다.  그러나 이 지구에서 낯익은 개체
의 몸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이론은 아니었다. 우주의 어떤 장소이든 생명이 생기기 위해 존
재해야만 했던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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