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요정들은 아름다운 청년 나르시스를 흠모했다. 그리고 누구의 사랑도 거부하는 그의
무정함에 상처 입은 요정들은 복수의 여신을 통해 그에게 벌을 내린다. 어느 날 한적한 호
숫가에서 나르시스는 물위에 비친 아름다운 청년에게 반해 그를 잡으려 한다. 그러나 손끝
이 닿으면 물빛은 흐려지고 대상은 사라졌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던 그의 가슴이 슬픔으로
가득 차 올랐으나 물 위로 흩어지는 눈물방울은 물 속의 연인을 도망가게만 할뿐이었다. 빤
히 그를 바라보면서도 잡으려면 도망치는 연인 때문에 나르시스는 마음이 황폐해지고 메말
라 물 속에 빠져 죽고 만다.
요정들의 복수는 끝났다. 그러나 나르시스의 죽음은 올림포스 산 아래 살고 있는 후세 사
람들에게 영원히 그리고 가장 많이 말해지는 위대한 전설을 낳는다. 그토록 보편적인 인간
의 비극을 온몸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이
유를 그는 말해준다. 빤히 보이지만 잡으려고 애를 써도 언제나 원점에 서 있는 삶. 권력도
연인도 삶의 목표도 닿는 순간 저만큼 물러난다. 죽는 순간까지 목표를 세우고 사랑을 얻으
려 하지만 마침내 죽음이 찾아오면 허무 속에서 그는 말한다. 이것이 그 많은 유혹들의 끝
인가? 그래서 이 삶에 긴 이별을 고하면서 또 다른 삶을 믿는다.
어떻게 그 단순한 나르시스 신화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진실을 말해주는가? 철학도 예술
도 대상의 신비를 그려내지만 정신분석은 가장 선명하게 이것을 설명해준다. 나르시스의 비
극은 어디에서 오는가? 물위에 비친 제 모습을 타인인 줄 알고 사랑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바탕으로 삼아 신경증을 치료하고 예술작품을 분석하고 사회와 문명을 비판했다. 흔
히 우리는 프로이트 사상의 근원을 오이디푸스신화에서 찾는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보다 더 근원적인 곳에 나르시시즘이 자리잡고 있다. 나르시시
즘이야말로 그의 리비도요, 에로스요, 어머니요, 쾌감원칙이고 무의식이다.
1. 에로스의 슬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그들의 심리 속에 억압
된 상흔을 밝혀야만 했다. 최면보다 대화를 선호했던 그는 환자의 의식이 억압한 어떤 것을
밝혀내기 위해 꿈을 분석했다. 꿈이란 의식의 빗장이 느슨해진 순간에 억압된 소망이 에둘
러서 충족되는 길이다. 그 소망은 물론 사회에서 금기된 것으로 빗장이 느슨해도 안심이 안
되어 위장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꿈의 내용을 짧게 압축하고 그 옆의 것과 자리를 바꾸고
몇몇 장면으로 나타난다. 분석자는 이 짧은 도해에서 자리바꿈과 압축을 거쳐 긴 이야기를
풀어낸다. 프로이트에게 꿈은 환자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의
식이 억압한 거대한 무의식이 있다는 가설을 세운다. 이것이 그가 환자를 치료하고 세상과
삶을 설명해낸 많은 글들의 원리였다.
무의식이란 무엇일까. 사회가 금기한 어떤 것이라면 가장 원초적인 욕망일 것이다. 그렇다
면 성본능이다. 에로스야말로 현실이 아무리 금지해도 단념치 못하고 평생토록 충족되기를
꿈꾸는 삶의 에너지다. 그렇다면 현실에 눈뜨기 전,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의식하기 이전 어
떤 시기까지 인간은 이 에로스를 충만히 누렸을 것이다. 억압된 것이 있다는 가설은 그것이
억압되기 이전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니까. 아이에게 억압이 일어나는 최초의 상흔은 무엇
이고 언제일까. 아마도 어머니의 몸에서 떨어져나와 한동안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
며 세상에서 오직 나와 어머니만이 있다고 믿는 시기. 젖을 먹여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그
녀의 얼굴이 그가 볼 수 있는 전부였던 시절. 아이는 그녀에게 전부요, 그녀는 아이에게 전
부인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시기가 있었으리라. 어머니의 사랑에 가득 찬 입맞춤과 온몸을
닦아주는 씻김에서 아이가 느끼는 아늑한 지복만큼 더 충만한 에로스가 어디 있을까. 프로
이트는 이 시기를 유아기 성이라 하여 약 3,4세 정도까지로 잡고, 라캉은 조금 좁혀 생후 18
개월까지로 잡는다.
물론 이 시기는 무의식이 언제부터 시작되는가를 거슬러 추정한 가설이다. 그런 충만과
지복은 그리 오래 누릴 수 없다. 어머니와 아이만의 겹쳐진 얼굴 사이로 아버지가 들어오고
새로 태어나는 동생이 들어온다. 자신과 어머니 단 둘뿐이라고 믿었던 세상 속으로 타인이
들어오면서 아이에게 억압이 시작된다. 현실을 의식하면서 아이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것임
을 알게 되고 사랑은 삼각관계로 발전한다. 아이는 어머니를 단념할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
가 없어져주기를 바란다. 이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그러던 아이는 어느 날 어머니와
여자아이에게 남근이 없음 을보고 거세의 공포를 느낀다. 어머니를 단념하지 않으면 자신도
그리된다는 두려움으로 그는 아버지같이 되어 어머니 같은 연인을 얻으리라 마음먹는다.
성장한 아이는 사춘기에 이르고 대상을 향해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이때부터 방황과 좌
절과 동경과 기대와 복잡한 청춘이 시작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
은 문학작품들은 우리가 지상에서 낙원을 되찾는 것만큼 진정한 사랑을 되찾는 게 얼마나
힘든지 보여준다. 눈이 먼 에로스는 금촉 화살과 납촉 화살을 동시에 가지고 다닌다. 눈이
멀었으니 제대로 맞출 리가 없고 사랑의 금빛 환상 속에는 잿빛 증오와 슬픔이 들어 있다.
왜 낙원을 되찾지 못하고 사랑에는 증오가 깃드는가. 왜 결혼 전에는 연인에게 금빛 왕관을
씌우다가도 결혼 후에는 구릿빛 왕관도 아까워하고, 고귀한 아내를 둔 지체 높은 양반은 천
박한 첩에게서 지복을 찾고 고귀한 백작은 천한 정부에게서 성적인 만족을 누리는가. 프로
이트는 이 모든 사회 현상을 설명해낸다. 그는 정상인과 신경증 환자의 차이란 게 억압을
요구하는 현실에 얼마만큼 잘 적응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
에서 있어온 대량학살이나 폭정은 정상보다 더 정상에서 시작한 신경증보다 더 위험한 신경
증이었던 것이다.
2. 나르시시즘에의 향수
어머니의 품안을 떠나야 하는 아이는 아버지의 법인 사회 속으로 들어서지만 달콤한 품안
에서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내가 그녀요 그녀가 나였던 너와 나만의 세상에는 타자가 없었
다. 아이는 어머니를 바라보기 만할 뿐 누군가에 의해 보여지는 것을 모른다. 그녀의 얼굴이
곧 내 얼굴이라고 믿는 이 오인의 단계를 프로이트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렀고 라
캉은 '거울단계' 라고 말했다. 나르시스가 물위에 비친 청년을 사랑할 때 그는 바로 자신을
사랑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는 어머니가 자신만을 보살펴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다. 그런데 이 유아기 성은 억압되지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 다른 모습으로 위장
하여 돌아온다. 억압된 소망이 꿈으로 나타나듯이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주체형성에서 뿌리
이다. 아이는 거세의 위협을 느끼며 사회화되지만 결코 어린 시절에 누린 지복의 순간을 잊
지 못하며 그것이라고 믿는 대상을 향해 다 가서고 그것이라고 믿는 대상을 위해 일한다.
모든 사랑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완벽한 경험을 되돌리려 하는 것이 기에 사랑에는 근
본적으로 이기심이 깔려 있다. 연인을 사랑하지만 사실은 그녀의 얼굴 속에서도 나만을 보
고 있다. 사춘기에 이른 청년은 연인 을 갈망하는데 이때 그녀는 잃어버린 어머니요,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형이기에 자아 이상(ego-ideal)이다. 그러기에 그녀로부터 사랑을 받으
면 자존심이 서서 살맛이 나고 그녀로부터 거절당하면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그녀를 미워하
게 된다. 사랑이 쉽게 증오로 바뀌는 이유다. 또 상처를 받은 만큼 대상에게 상처를 주러 하
는데 이것이 심해지면 가학증과 피학증이라는 병적인 증세를 나타낸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
하는 사람이 남도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은 이런 병적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쓰이는 말이
다. 사랑이 근본적으로 이기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사랑한다는 사실보다 어
떻게 사랑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실했으나 결코 단념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늘 그리워하는 잃어버린 고향과 같다. 인간은
어릴 적에 누린 어머니의 아늑한 품속을 성인이 되면 연인에게서 찾는다. 그리고 노인이 되
면 안아줄 연인이 없기에 대지의 품을 그리워한다. 프로이트에게 '성' 이란 흔히 생각하는
남녀간의 섹스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 훨씬 넓고 포근한 평화요, 대지의 품과 같은 아늑
한 기쁨이다. 원래의 성은 남녀의 차이도 없었고 부위도 제한을 받지 않아 유아에게는 온몸
이 성감대였다. 그런데 문명은 노동력을 생산해야 하는 필요성에 의해 성을 남녀 사이의 것
으로 또 생식기로 제한하고 그 외의 성을 도착이라고 금기했다. 동성애나 성인들의 전회는
유아기 성이 남아 있는 흔적이다. 문명은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려고 애써왔는데 왜 성도
착이 늘어나고 신경증 환자가 늘어나는가를 곰곰이 생각한 프로이트는 사회가 억압한 무의
식이 있다는 가설을 만들었다. 모든 철학자들처럼 그도 인간이 왜 불행한가 그 원인을 더듬
는 데서 사유를 시작했던 것이다.
문명화된 성이란 이처럼 축소되었고 인간이 사회를 받아들이면서 어쩔 수 없이 감내하는
것이어서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지만 아무도 잃어버린 평화를 온전히 복원할 수
는 없다. 다만 타협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연인을 금으로 보다가 결혼
후에는 구리로 보는 것도 억압된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대상을 향해갈 때는 그것이 잃어버
린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상을 일단 손에 넣고 보면 그런 어머니는, 그런 안락함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에 대한 향수는 끈질기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또 대상을
향해간다. 어머니가 억압되었기에 그는 고귀한 연인을 아내로 맞으려 애쓴다. 그러나 그녀에
게보다 천한 여자에게서 더 성적 만족을 얻는다. 거세에 대한 공포, 어머니를 금지하는 사회
의 법이 어찌나 깊이 뇌리에 박혔는지 그는 아내에게는 자유로운 유아기 성을 열지 못한다.
아내는 자식을 낳고 가정을 꾸미기 위한 문명화된 성만을 실천하는 대상이라고 교육 받아왔
기 때문이다.
원초적 나르시시즘이 억압되었다는 가설로 프로이트는 본능과 현실 사이에서 양가적인 삶
을 살아야 되는 삶의 궁경과 근원적 허무를 설명해낸다. 죽음만이 우리를 완벽하게 충족시
키는 대상이라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삶의 목적을 추구해야 하는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연
인도, 그 어떤 대상도 잃어버린 어머니를 대신할 수 없다면 삶이란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
일 뿐이고 그 과정이 정당해야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것이 우 리가 누릴 수 있는 생
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과학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고 믿었던 19세기 말, 문학에서는 자연주의 사상이 퍼
지던 때 유대인이기에 의대 교수가 되지 못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로 개업하며 인간의 심
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삶과 문명 속에 내재한 불만의 원인을 억압된 무의식이
있다는 가설로 설명해낸 그는 문명이 아무리 금지해도 본능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변형된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변형될지라도 에너지의 총합은 같다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서 리비도 불변의 법칙을 끌어낸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지만 무의식이 분명히 있다는 자신
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초기에는 혁신적인 글을 썼다. 성의 문제에서도 억압된 동성애를
암시하고 문명에 대해서도 불만스런 시선을 던진다. 그러나 후기의 글들에서는 초자아를 설
정하여 자아가 어떻게 본능의 요구를 사치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게 조절해 나가느냐에 초점
을 둔다. 후기의 글에서 제시하는 강박적인 '반복충동'도 자아가 어머니 없는 현실을 어떻게
견디어 내는가에 관심을 둔 발견이었다.
성에 관한 이론도 초기의 '도라 분석'과 같은 혁명적인 글에서, 후기에는 성차가 존재하던
당시 상황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다보니 남근선망이니 거세 콤플렉스를 조금도 의심치 않고
사용하게 된다. 생물학적인 현상으로 여성성을 설명하여 성차를 고착시켰다고 여성들이 비
난한 것은 이런 연유였다. 그의 이론이 무(nothing)라는 실존적인 삶의 본질을 설명할 때는
그리도 타당해 보이지만 성이 사회화될 때 남녀가 갈라서야 되는 부분은 시대에 따라 많은
논란을 야기하게 된다. 삶에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부분과 변치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변치 않지만 권력의 문제는 이동한다. 또한 나르시시즘에의 향수는 우리의 삶을
양가적이 되게 하여 실재에 관한 논의를 끊임없이 야기하는 철학의 문제와 연결된다. 정신
분석이 성, 문화, 예술, 그리고 사회이론으로 계속 논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에로스의 저항
어릴 적에 경험했던 유희를 성인은 공상 속에서 되풀이하지만 창조적인 작가는 이 꿈을
사회가 용납하는 내용으로 설득력있게 바꾸어낸다. 그렇다면 예술은 에로스를 현실에 맞게
변용시켜 관객의 에로스를 승화시키는 고안이다. 프로이트가 살았던 당시 그의 이론은 작품
을 저자의무의식이 순조롭게 해방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에드거 앨런 포의 '
검은 고양이'는 저자가 어릴 적에 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압축하고(은유) 슬쩍 다르
게 해서 (환유) 표현한 것이라고 읽는다. 마치 프로이트가 꿈을 분석하듯이 작품을 읽는다.
그러다가 모더니즘시대에 이르자 자의식적 이고 자율성을 강조하게 되어 자아가 어떻게 자
신을 내려다보는 초자아를 내부에 의식하며 이드를 조정해 가는가에 관심을 둔다. 무의식이
초자아에 밀려 이드로 압축된 느낌이다. 그러다가 50년대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르러 라캉은
무의식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프로이트를 재해석한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꿈 해석이 소쉬르 언어학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은유와 환유였던 것에
관심을 두고,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와 관련시켜 종래는 후기 구조주의에 이른다. 모던 심리학
이 축소시킨 나르시시즘이 얼마나 압도적인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선배가 인정하면
서도 망설였던 부분을 과감히 끌어낸다. 무의식을 표층 위로 끌어내 정신분석을 근원을 캐
어내는 것이라기보다 대화 속에서 서로의 욕망을 길들이는 과정으로 전환시킨다. 선배가 언
급한 '전이'현상을 확대한다. 거울단계를 내세운 그의 이론은 선배의 나르시시즘을 달리 표
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선배에게서 새 시대를 암시하는 새로운 사유를 끌어낸다. 여성들이 그토록
비난하던 남근선망이니 거세 콤플렉스니 하는 용어들을 없앰으로써 성차를 지우는 효과를
얻어낸다. 남녀 모두 언어의 세계(상징계)에서 풀려날 수 없기에 남근은 여성만이 갖지 못한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포착할 수 없는 실재요, 억압된 초월 기표, 즉 어머니가 되
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쾌감원칙과 현실원칙을 상상계와 상징계로 바꾸어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사회화를 피할 수 없는 언어의 세계로 대치한 그는 데리다보다도 앞서 새로운 사유체
계를 암시한 것이다.
그러나 해체는 또다른 도전을 받는다. 축소된 나르시시즘을 복원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러다 보니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성차나 인종간의 억압을 개선할 길이 모호해 보인 것이
다. 억압된 나르시시즘을 좀더 복원하라. 이제 억압된 계층들의 나르시시즘이 자신들의 것이
그 동안 지배계급의 나르시시즘에 의해 지워져왔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남성 혹은 제국에
의해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 혹은 식민지인들은 지배계급의 나르시시즘, 혹은 상상계를 비판
하기 시작한다. 식민주의는 비록 제도적으로는 해결되었으나 무의식 속에 잠재한 문화적 식
민주의는 지속되며 그것은 의식, 혹은 이성만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는 욕망의 문제이
기에 탈 현대의 해결방법은 그리 단순한 것이 될 수 없었다.
피지배계급의 나르시시즘은 어떤 식으로 저항할 것인가? 우선 역사적으로 피지배 계급이
었던 사람들이 말을 한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했던 짓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의 상
상계가 또다른 계급의 상상계를 지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그들은 조심스럽다. 해체
이후에 세워지는 정치성은 본질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기에 전략이 되고 타협이 될 수밖에
없다. 지배계급의 상상계가 무엇을 착각했는가. 그들의 나르시시즘이 간과한 것을 짚어주자.
소위 탈 식민주의 문화비평이라는 범주로 등장하는 이론들은 주로 과거 영국의 식민지인 이
었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가운데에서도 실천비평에 강한 스피박(Gayatri Spivak)은 인도 출신의 여성으로 프로
이트를 비롯한 서구의 선배들이 인간의 고통을 덜어보려고 혁신적으로 사유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무의식중에 지배계급의 사 유가 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프로이트가 현실이 억압하고
있는 무의식을 드러내 인간의 독선과(나치즘과 같은) 정치적 폭력을 경고했지만 그 역 시
여성이나 당시의 빈민층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즘 신화 속에 엄연히 등장하는 에코를 지워버린 서구의 상징 질서에서 프로이트
역시 벗어나지 못한다. 스피박은 나르시시즘을 지배층의 상상계로 보고 그것에 억압되어온
에코를 흔적, 혹은 의미의 산종 (dissemination)으로 복원해낸다. 자신의 음성을 갖지 못하고
오직 타인 의 말을 끝부분만 반복하는 에코의 미덕을 대상 속에서도 자기 얼굴만을 보는 나
르시시즘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스피박은 서구의 텍스트를 분석해온 남성 비평가들이
어떻게 제국의 에로스를 간과했는가 드러낼 뿐 아니라 백인 여성 비평가들조차 남성에 억압
되어온 여성은 고려했지 만 백인 여성에게 억압되어온 제3세계 여성은 간과했음을 들춘다.
제3 세계 여성이라는 자신의 에로스로 지배계급의 에로스를 해체하고 그들 이 제시해온 남
근선망 대신에 자궁선망과 같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대안은 앞의 것을 지우
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공존하는 타협이다. 지금까지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어온 것들은 다
르지만 결코 못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바(Homi Bhabha)의 '문화적 차이'가 등
장한다.
영국의 식민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식민지인의 나르시시즘으로 증명하는 호
미 바바는 프로이트의 전이와 에로스에서 문화이론과 저항이론을 만든다. 제국은 원주민을
교화시켜 문명인을 만든다는 명목 아래 원주민의 땅에 들어선다. 그러나 그들의 이성 속에
는 타자가 있었다. 물자와 노동력을 얻어내려는 이기적 욕망이 숨어 있었다. 원주민은 어떤
가. 그들 역시 제국의 교화를 따르는 척하지만 자신들의 문화와 충돌하는 부분은 결코 변화
되지 않는다. 이 녹지 않는 알맹이가 바로 원주민이 지닌 나르시스적 주체다. 교화는 둘 사
이의 나르시시즘이 충돌하면서 이성에서 멀어지고 혼동만 깊어진다. 그리고 얼룩덜룩한 닮
음은 저항이 되어 완벽한 닮음이라는 환상을 무너뜨린다.
바바는 원주민의 녹지 않는 알맹이를 '사악한 눈'이라고 표현한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이기적인 자아보존 본능으로 보았다면 바바는 그 자아보존 본능이 제국의 문화에 저항하여
자국의 문화를 보존하려는 본능으로 본다. 이 본능이 제국에 의해 억압되어도 결코 제거되
지 않고 다른 형태로 되돌아오기에 식민주의는 거대한 혼동을 낳고 실패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둘 사이의 전이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한 프로이트에게서 바바는 문화적 차이
혹은 문화적 혼혈성이라는 저항이론을 만든다. 문화는 늘 타협이다. 그것은 두 문화가 지닌
자아보존 본능에 의해 시간에 따라 덧칠해지는 혼혈적인 것일 뿐,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순수하게 동화되는 일은 없다. 국경이 엷어지는 다문화시대에 무조건 외국문화를 수용하는
일도, 그렇다고 자국의 문화만 순수하게 보존하는 일도 환상임을 바바는 보여준다. 문화는
녹지 않는 알맹이를 갖고 있으면서도 두 개가 충돌하는 현실원칙에 의해 서로의 욕망을 나
누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우리 삶과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나가는지 살펴보았다. 의
식이 감지하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의식은 삶이 지닌 고난과 궁경을 일깨워 주면
서 낙원이 아닌 세상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일깨워준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조
금씩 다르게 해석됨으로써 새로운 사상의 바탕이 되곤 한다. 저자의 무의식 자아의 조정능
력 , 읽기는 반복일 뿐이라는 해체비평 , 그리고 최근의 문화비평에 이르기까지 나르시시즘
은 현실에서 다르게 귀환한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후배들은 바로 그가 발견한 반복충동을
실천하고 있는 셈은 아닌가. 억압된 것은 늘 다르게 되돌아온다는 가설을 증명하고 있는 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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