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은유와 환유로서의 정신분석학
정신분석이란 용어가 오늘날만큼 폭넓게 사용되는 경우도 드문 것 같다 19세기 말, 신경
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창시된 프로이트의 치료법은 20세기 후반부에 이르러 단순한 심리
연구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학문의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고, 이제는 모든 문화
현상을 연구하는 기본적인 틀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 요즈음의 웬만한 이론서에서 '상상계'
(the Imaginary)라는 단어는 정신분석의 문맥이 아닌 곳에서도 자연스럽게 쓰여서 보통명사
가 되다시피 했다. 무엇이 한 정신과 의사의 사례연구와 사고를 이렇게 보편적인 사상으로
만들었을까?
첫째는 그것이 인간의 심리, 사회적 부적응 욕망과 좌절 등 인간에 관한 연구였기 때문이
고, 둘째는 그런 연구를 폭넓게 문명사와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명사 속에는 문명
의 기원뿐 아니라, 사회현상과 예술까지도 포함된다. 그의 이론이 인간의 욕망뿐 아니라 여
성이론, 예술이론, 사회이론 등 폭넓게 논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
든 것을 넘어서 프로이트의 위대성은 또 다른 곳에 있다. 평생 동안유대인으로 박해받으면
서도 좌절하지 않고 많은 연구와 글을 남겼으며, 그 글들이 한결같이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고의 일관성이다. 물론 초기와 후기의 강조점이 다르고, 영역마다 다
른 이야기를 하고, 앞선 이야기를 스스로 뒤엎고 수정하기도 하지만, 그의 글들을 자세히 읽
어보면 그 수많은 다른 이야기들 속에 일관된 프로이트만의 주장, 아니 가설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 가설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되풀이되고 문학과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프로이트의
글을 중심으로 이런 것을 알아본다. 특히 그가 직접 쓴 예술가, 혹은 작가에 관한 글과 그의
사상이 어떻게 후세 사람들에 의해 작품분석에 이용되는가를 시대별로 살펴본다. 은유가 강
조되던 19세기의 '저자의 심리비평', 은유와 환유의 엇갈림이 강조되던 20세기구조주의, 환
유가 압도적이 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비평을 알아본다.
1. 프로이트의 가설
신경증을 치료하면서 프로이트는 환자의 심리 속에 억압된 것을 주로 자유연상법으로 밝
혀내려 했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환자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근원적 상흔은 무엇인가.
분명히 사회로부터 금기된 욕망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틈틈이 의식을 뚫고 솟아오른다. 꿈
이나 말 실수는 바로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 의식의 저변에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 밑에 무의식이라는 억압된 본능이 자리잡고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것이 결코 사라지지 않고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여러 영역에서 보여준다. 그러
면 인간의 가장 근원적 상흔, 혹은 억압된 본능은 무엇인가.
프로이트 이론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콤플렉스는 억압된 본능이요, 다른 형태
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근원적 상흔이다. 무의식은 이루지 못한 어머니와 하나됨의 꿈이요,
이 꿈은 한 인간의 무의식일 뿐 아니라 인류 문명의 근원이기도 하다. '토템과 타부'는 인류
의 문명이 바로 이 근친상간에의 욕망을 막기 위한 장치로부터 시작되고 그러면서도 그 꿈
이 포기되지 않기에 인간의 감흥이 양가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어
머니에의 꿈과 양가적 감흥은 그의 전 이론을 지배하는 핵심사상이다. 이제 몇 가지 예를
들어 그것이 그의 글에서 어떻게 다르게 반복되는지 보자.
2세에서 3세 사이, 아이는 어머니와의 합일을 꿈꾸며 유아기 성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런
꿈은 오이디푸스 단계로 들어서며 아버지의 법에 의해 깨어진다. 사회 속에 들어선 아이는
사춘기에 이르러 대상에게 욕망을 느낀다. 그는 충만을 꿈꾸며 이상적 타자를 향해 접근한
다. 그러나 무의식으로 자리잡은 근원적 나르시시즘은 타자에게서 완벽히 충족될 수가 없다.
아무도 잃어버린 고향, 어머니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 속에는 증오가 깃든다. 그리고 대상을 찾는 여행은 계속된다. 전자가 양가적 감
흥이요, 후자가 '페티시즘' 혹은 환유이다. 자꾸만 옆의 것을 짚어서 욕망은 끝없이 지연되
고 그 반복충동이 오히려 삶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라캉의 욕망이론은 바로 이 환유적인
속성을 공식으로 만든 것이었다.
어릴 적에 아이가 맛본 아늑한 어머니에의 꿈은 어머니가 남근을 소유했다는 환상과 일치
한다. 남근이란 욕망에 틈새를 남기지 않고 완벽한 충족을 가능케 하는 상징물로 아이가 잠
깐 누릴 수 있었던 지복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이는 어머니가 거세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남근이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없다는 뜻이기 때
문이다. 그러기에 남근에 대한 대체물을 갈망한다. 이것이 페티시즘이다(Fetishism,1927). 페
티시즘은 알면서 포기하지 못하는 양가적 감흥에서 나온다. 신발이나 발을 연인의 남근으로
대체하는 것은 쉽게 욕망을 충족시키는 길이다. 우리는 현실이 자신의 소망을 해결해주지
못할 때 우회하거나, 옆의 것을 대신 짚어서라도 충족을 맛보는 끈질긴 나르시시스트이다.
아무도 그 내밀한 환상을 제거해 버리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의 가설은 주체의 문제에서는 '근원적 나르시시즘'으로, 성이론과 문명이
론에서는 근친상간, 혹은 '유아기 성'으로, 예술이론에서는 '무의식'으로, 강박적 반복충동을
설명할 때는 현실원칙에 대응하는 '쾌감원칙'으로 용어를 달리하여 반복된다. 인간은 어릴
적에 경험한 안락을 잊지 못하고 현실과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계속 되돌아갈 것을 꿈꾼다.
이 양가적인 감흥을 교육의 힘으로 잘 조절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에서 문학과 예술은 이 양가적 감흥을 보여주고 스스로를 반성케 하
는 '타자 드러내기'였다. 그러므로 신경증이란 정도의 차이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일 뿐 누구
에게나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양가성이 은유와 환유를 만들어내고 프로이트를 문
학과 연결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어머니와의 합일이 은유요, 그것을 상실하고 자꾸만 옆
의 것을 짚는 것이 환유이다. 그럼 우선 프로이트의 글 가운데 예술 혹은 문학이론에 관한
글 몇 개를 예로 들고, 그의 이론이 훗날 어떻게 해석, 재해석되는지 본다.
2. 문학에 관한 프로이트의 글
미학에 대한정의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그 이전부터 여러 견해로 밝혀지지만 넓게
가늠하여 즐거움과 도덕성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도덕적인 설득이 재미와 감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 사적인 욕망이 사회적으로
승화되는 것이 문학이라면 프로이트의 글, '창조적 작가와 백일몽'(Creative Writers and
Day-Dreaming, 1908)역시 이런 견해와 멀지 않다. 그러면서도 그의 독특한 가설에 뿌리내
리고 있어 흥미롭다. 아이는 어린 시절에 유희에의 욕망을 갖는다. 그러나 그 욕망은 성장하
며 사회적으로 용납되지는 않지만 결코 포기되지 않는다. 어른이 갖는 백일몽이 그것이다.
창조적인 작가란 사적인 백일몽을 공적인 문학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예를 들면 아름다운 공주를 얻고 싶은 꿈은 그것을 얻기 위한 많은 시련으로 대치되고 그
시련의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미덕이 암시된다. 작품의 한 구석에 아주 조그맣게
그려진 여인의 얼굴이 사실은 백일몽의 실체요, 위장된 욕망의 핵심인 셈이다. 이것이 환유
다. 그런데 이 위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여인은 바로 잃어버린 어머니, 유아기를 투
사시킨 대상이다. 이 부분이 은유다. 물론 프로이트는 여기까지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성인
은 억압된 유아기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백일몽으로 충족시키며, 예술가는 이것을 작품으
로 위장하여 사회에 내놓는다고 말한다. 그가 살았던 당시에는 은유와 환유라는 상징체계,
기호 학, 소쉬르 언어학이 논의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적인 책, '꿈의 분석'(1900)이 프로이트가 전혀 꿈꾸지 않은 곳에서 문학과 만나
는 것 역시 흥미롭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한 번 소유했던 것은 결코 흔적 없이 잃어버릴 수
는 없다." 꿈은 우리가 내적, 외적으로 경험했던 것을 의식이 잊었을지라도 어딘가 그 밖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짚어주는 증거이다.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대화를 통한 자유연
상법을 쓴 프로이트에게 꿈은 환자의 억압된 기억들을 끌어내는 길이었다. 꿈은 무의식으로
가는 왕도, 혹은 억압된 소망이 충족되는 서사였다. 아주 짧게 압축되고 초현실주의적으로
위장된 그림과, 들리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이야기, 꿈은 의식의 빗장이 느슨해지기에,
억압되지만 틈틈이 위장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아기 소망이 비교적 느긋하게 노출되는 스
크린이다. 어떤 꿈사상이 있다. 그것은 두 단계의 위장을 거친다. 긴 내용을 이미지로 압축
하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옆의 것을 짚는다. 앞의 것이 은유이고 뒤의 것이 환유이다. 그
러므로 분석자는 이런 경로와 반대로 환유를 거쳐 은유로 내려가서 상흔을 찾아내는 것이
다. 물론 프로이트는 이것을 압축과 전치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그러나 은유와 환유라는 문
학의 중요한 상징체계를 암시한 그의 분석은 훗날 소쉬르 언어학이 낳은 구조주의, 기호학,
해체론의 근간이 된다.
이 외에도 프로이트 자신이 예술에 대해 쓴 글로 '미켈란젤로의 모세상'(The Moses of
Michelangelo,1914)과 '도스토예프스키 와 부친살해'(Dostoevsky and Parricide,1928)를 들
수 있다. 앞의 글은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인 모세상을 본 프로이트가 미켈란젤로의 독특함
을 밝혀내어 정신분석자의 작품 인기가 훌륭한 비평이 됨 을 보여주는 글이다. 뒤의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의식을 부친살해와 연결시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작품에 연결시킨 글
이다.
모세상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원래 성경에 나오는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들고
내려와 타락한 민중을 보고 분노하여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던진다. 그리고 많은 비평가들
은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에 대한해석도 분노로 돌판을 막 던지기 전의 모습이라는 데 동의한
다. 수염을 만지는 손과 막 일어서려는 왼발 등, 분노 폭발 직전의 가장 긴장된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아주 조그만 손놀림, 수염의 움직임, 석판의 위치 등을 자세히
읽어 그런 일반론을 뒤엎고 그의 모세상은 성경과 달리 분노의 순간을 극복한 자제된 모세
임을 보여준다고 풀이한다. 수염을 만지는 오른손을 자세히 보면 엄지는 속으로 들어가 안
보이고 검지만 수염에 닿는다. 따라서 오른손 전체가 수염을 만진다는 해석은 옳지 않다. 수
염은 안 보이는 엄지와 보이는 검지 사이에서 쓸어 담긴 형태로 왼쪽을 향한다. 눈과 머리
는 오른 쪽을 향해 있고 수염은 오른 손의 압력 아래서 반대쪽을 향한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재현된 모세상 그 이전의 밑그림을 추정해낸다. 1. 오른손에 십계명을
끼고 앉은 자세, 2. 소동을 듣고 분노하여 수염을 누르고 고개를 돌린 분노한 모세, 이때 거
꾸로 된 십계명이 손안에서 미끄러져 모서리만 기댄 꼴이 된다. 3. 분노를 자제한 모세, 십
계명이 적힌 돌판을 바로 잡으려는 데서 왼쪽수염이 딸려간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것은 3번
의 모세다. 프로이트는 고개와 수염의 방향이 엇갈리는 데서 흥미를 느꼈고 위와 같은 해석
을 추론한다. 그는 전설 속의 모세가 급하고 발작적인 성격이었음에 비해 미켈란젤로는 내
적인 열정과 외적인 자제를 겸비한 더 나은 모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모세상을 만들었다. 그가 더 온화한
모세를 만든 것은 그런 모세를 율리우스 2세에게 바랐고 자신에게도 바랐던 게 아닐까? 모
세, 율리우스2세, 미켈란젤로. 이 세 사람이 다 급하고 단호했기에 예술가는 전설적인 모세
상을 떠나 자신의 바람을 그 속에 담아낸 게 아니냐고 프로이트는 묻는다. 프로이트의 모세
상 읽기는 예술이 창조자의 소망충족의 한 형태라는 데서 다른 글들과 만난다. 그리고 그것
이 정신분석이 비평이 되는 이유다. 창조자의 묻혀진 소망은 무엇이었을까를 밝히는 작업.
바로 당대에 풍미한 작가의 전기적 입장에서 작품을 읽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되는 한 부분이 있다. 유독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이 프로이트를 유혹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바로 엇갈린 두개의 방향, 고개와 시
선은 오른쪽을 향하는데 수염은 그 반대쪽으로 향한 그 엇갈림이 아니었을까? 갈등, 양가성,
의식과 무의식의 교차, 쾌감원칙과 현실원칙의 교차 반복... 이런 요소는 훗날 다른 서사론자
들에 의해 프로이트 해석을 환유로 끌어가는 동기가 된다. 고개와 시선의 방향만을 본 당시
의 비평에 대해 그는 그 반대의 것을 본 것이다. 바로 억압된 부분이요, 무의식이었다.
프로이트는 1927년, 위의 글에 대한 '후기'를 썼는데 여기서 자신이1914년에 추정했던 모
세상의 밑그림이 실제로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즉 분노한 모세상(프로이트가 추정한 2번 밑
그림)이 12세기에 만들어졌다(Statuette of Moses). 자신의 가설이 역사적인 사실로 증명되
었음을 적어놓은 프로이트. 그는 언제나 가설이라는 허구와 역사적 증명 사이를 오가며 가
설이 과학이 되기를 바랐고 그러면서도 매끄러운 단선식 과학에 회의적 시선을 던졌다.
성경의 모세상을 자신의 입장에서 읽어낸 미켈란젤로, 그를 또 자신의 입장에서 읽어낸
프로이트, 그렇다면 읽기란 끝없이 자신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알레고리요, 옆으로 가는
춤, 즉 환유가 아닌가. 그러나 프로이트의 글이 이런 식으로 읽히기 위해서는 좀 더 긴 세월
을 기다려야 된다. 당대에는 전기적 비평이 문화의 흐름이었다. 부친살해라는 원초적 본능에
서 도스토예프스키를 해석한 경우 역시 전기 비평의 한 예가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를 읽어보면, 프로이트는 원죄의 고통을 가장 잘 드러낸 작가
가 도스토예프스키였다고 믿었던 것 같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의 전형으로 풀어내듯이 도스토예프스키는 창조적 작가요, 신경증 환자에 도덕주의자요, 죄
의식에 가득 찬 자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이런 작가의 양가성을 가장 잘 나타낸
작품이다. 도덕성이란 죄에 끌리면서, 죄를 범하면서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이요, 갈등이
기 때문이다. 본능의 충동과 사회의 요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위악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에 그는 스승도, 인간 해방론자도 아니다. 그는 죄를 지켜보는 간수이다. 살인적이고 자
기중심적인 에고이스트를 골라 자신의 성격을 비추어 보이기에 사실문명은 그에게 감사할
것이 별로 없다. 도박에 미친 듯이 빠져들고, 감옥에 가고, 성추행을 저지르는 감정적인 삶,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성향이 농후한 도착적인 성향, 그리고 예술적 재능, 그에게는 이 세 가
지가 하나였다.
프로이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 발작을 히스테리로 보았다. 억압된 것이 무의식중에
격렬한 형태로 방출되는 것. 무엇이 억압되었을까. 그는 어릴 때 죽음을 겪은 적이 있다. 아
버지에 대한 강렬한 증오와 살해욕망이 자신에게 전이된 것이 아닐까. 자신을 아버지와 동
일시하여 죽으면서 거꾸로 아버지에 의해 죽는다고 착각하는 것 인간의 원죄는 아버지를 죽
이고 어머니와 하나가 되고 싶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비롯된다.
프로이트의 후기 사상을 지배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문명사와의 연결이 이 글에서 엿
보인다. 아담이 이브 때문에 하느님을 거역하듯 인간은 사랑 때문에 아버지를 거역한다. 드
미트리가 여자를 놓고 아버지와 라이벌이 되듯이 유아는 어머니를 놓고 아버지와 라이벌이
된다. 그러나 근친상간에의 욕망은 거세 위협에 의해 단념되는데 이때 아버지에 대한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죄의식의 근원이 된다. 아버지를 살해하고픈 욕망이 남아 있어 증오와
흠모의 양가적 감정이 생겨난다. 두려움 때문에 억압된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도스토예프스
키에게 강한 내적 양성성으로 나타난다. 증오와 흠모의 양가성, 그에게 있어 죄와 벌은 부친
살해에 대한 자기처벌이다. 도박, 감옥, 소설, 이 모두가 자신을 벌하는 한방식이었다.
프로이트는 부친살해의 욕망을 다룬 극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예를 든다.
먼저 그리스신화로서 '오이디푸스 왕'이다. 그는 모르고 저지르지만 결과에 책임을 진다.
이 극은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되지만 정신분석적으로는 말이 된다. 그리스 비극은 개인의
무의식적 욕망을 외적인 신탁(운명)으로 대치해 놓은 것이다.
영국의 비극, '햄릿'에서 부친살해는 아들이 아닌 삼촌에 의해 일어난다. 그러기에 성의
대상인 어머니는 위장할 필요가 없다. 아들은 삼촌에게 복수해야 하는데 하지 못한다. 자신
이 할 일을 삼촌이 대신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의식과 삼촌의 것을 동일시하기에 그는 복
수 대신 죄의식에 시달리고, 복수의 행위는 늦춰지고 결국 스스로를 벌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러시아 비극에서 부친살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이지만 형제, 즉 같은 아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반은 드미트리와 같은 아들이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라이벌 의식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알로샤를 제외하고 모든 인물들이 이 죄의식을 공유한다. 조시마 신부는 드미트리
에게 절을 한다. 자신의 죄를 그가 대신 지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발작을
드미트리에게 씌우고 자신의 죄를 이반과 드미트리에게 전가한다. 아니 그의 모든 책에서
죄인은 모두 자신의 분신들이다. 그것이 그가 죄에 그토록 관심과 연민을 보이는 이유다. 그
는 독일에 머물 때 도박에 돈을 몽땅 탕진하고서야 작품에 몰두했었다. 죄와 벌과 창작의
연쇄고리이다.
프로이트는 이 글에서 잠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이라는 단편(슈테판츠바이크 작, 1920)
으로 빗나간다. 이 글은 사춘기에 이른 아들이 어머니가 자연스레 자신을 성으로 인도해주
기 바라지만 이를 이루어주지 못하자 자위행위(도박)에 빠지고 이에 대한 자기처벌로 자살
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한 여인이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데리고 산다. 남성에 대한욕망이
단념된 50세가 넘은 어느 날, 그녀는 도박장에서 젊은 남자의 두손을 본다. 그를 타락에서
구원하고자 그와 함께 밤을 보낸 그녀는 다음날 그와 함께 떠날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그
녀는 방황 속에서 다시 도박장에 이르고 그곳에서 도박에 빠진 젊은이는 자살한다. 어머니
는 쉽게 닿을 수 없는 여인이었고 그러면서도 무의식 속에서 아들에 대한 전이적 사랑을 막
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프로이트가 이렇게 빗나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스토예프스키나, 단편 속
의 젊은이는 모두 인간의 삶에서 유아기 성(오이디푸스콤플렉스)과 사춘기 성이 일생에 영
향을 미치고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처럼 부친살해의 욕망은 억압되지만 사라
지지 않고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 글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과 도박을 억압된 부친살해의 욕망에 대한 죄의식과 처벌
로, 그의 작품을 그것에 대한 증거로 보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의식이 남보다 컸기에 도
덕적이며 죄인이고, 신경증 환자였고 창조적 작가였음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작
가와 작품을 연결시킨 전기적, 혹은 심리 비평에 속한다. 환유를 통해 은유를 캐어낸 다고
할까, 거대한 화산재에 묻힌 폼페이의 도시를 발굴해내는 고고학자 와 유사하다고 할까. 그
리고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정신분석 비평은 대략 이런 방식이었다. 작품을 자세
히 읽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캐내고 그것을 창조자의 억압된 무의식과 연결시키는 방식이다.
프로이트의 글로 미학의 근본을 암시한 것에는 이외에도 '언캐니'(The Uncanny, 1919)와
'쾌감원칙을 넘어서'(Beyond the Pleasure Principle,1920)가 있고, 해체비평과 관련되는 글
로는 '늑대인간 분석'과 '분석에 있어서의 구성'(Constructions in Analysis,1937) 등이 있다.
이 글들은 환유로서의 정신분석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3. 프로이트와 비평이론 :환유를 통해서 은유로
프로이트가 살았던 당시의 비평은 작품과 작가의 전기를 연결시키는 전기 비평 혹은 심리
비평이 압도적이었다. 그것은 그가 신경증 환자의 억압된 상흔을 추적하는 방식과 흡사했다.
작품 속에 나타난 주제나 상징은 작가의 유년기 욕망이 위장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소망 충
족식의 해석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어릴 적에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증오의 양가성
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과 드미트리의 갈등으로 나타나고 작가 자신의 삶에서는
간질 발작, 도박, 죄의식과 처벌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아들과 아버지가 어머니를 놓고 벌이
는 라이벌 의식이 작품 속에서 실현된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싶은 욕망은 인
간 죄의식의 근원이었다.
이런 전기적 비평은 저자와 인물의 신경증적 이상 심리를 파헤치는 데는 공헌을 하지만
작품이 저자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견을 낳게 되고 신비평이나 구조주
의의 도전을 받게 된다. 이제 프로이트의 재해석을 구조주의 쪽과 연결시켜본다
구조주의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문화이론으로 소쉬르 언어학에 기반을 두었다.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로만 야콥슨이 프랑스 구조주의의 기틀을 다질 때 사용했던 기본 틀은 은
유와 환유의 두 축이었다. 구조주의는 언어가 실재를 지칭하는 발화의 측면에서 구조의 측
면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데서 비롯된다. 언어는 한 언어체계에서 오직 한 대상을 지칭한다
는 약속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언어는 '다름'의 체계이다. 그것은 '차이'에 의해 의미를
낳는 자의적 체계이고 기의와 기표로 이루어진 약속이지 절대적인 게 아니다. 언어를 통하
지 않는 재현이란 없다고 가정할 때 재현된 진리는 얼마나 자의적인가. 차이, 즉 정반의 대
칭이라는 것을 절대의미의 자리에 놓아보자. 세상이 해와 달, 음과 양, 이성과 감성으로 이
루어진 것이듯 작품의 구조도 은유와 환유의 열린 두 축으로 보자. 진리의 절대성을 의심하
며 그것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구조주의는 기호가 자의적인 약속체계라는
기호학과 맞물려 종래는 후기 구조주의에 이른다.
레비-스트로스, 토도로프, 바르트의 구조주의는 진리의 자의성을 암 시하면서 그것을 텍
스트나 문명연구 정치 사회적 문맥에 적용시켜 신선 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프로이트의
환유를 통한 은유에 이르기는 이제 은유와 환유의 열린 두 축으로 재해석되는 것이다. 그러
나 비록 진리의 자의성을 암시했으나 구조주의는 정반의 체계를 정적으로 열어놓았기에 반
복되다보니 한계를 맞는다. 진리를 정반으로 구조화시켰다는 비난이 다. 뭐니뭐니해도 프로
이트를 구조주의 언어학과 연결시켜 후기구조주의 (혹은 해체)로 이끌어간 사람은 프랑스
정신분석자인 라캉이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이제 포스트모던 이론의 핵심이 된다. 프
로이트의 어 떤 측면이 해체론 시대의 중심으로 부상하는가. 데리다의 경우부터 보자.
4. 해체론 시대의 프로이트. 은유에서 환유로
구조주의의 정적인 이분법에서 데리다가 넘어서려고 했던 것은 우월의 이분법이었다. 말
하기보다 글쓰기를 우월하다고 본 서구 형이상학 체계를 '차연'으로 해체시키고 하나의 논
리가 서기 위해서는 반대논리를 억압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 '해체'는 억압된 것이 있음과
그것을 귀환시키는 것에서 프로이트와 닮았고, 매끄럽고 단일한 이성 중심주의의 허구를 드
러내는 것에서 닮았다.
실제로 프로이트가 쓴 요술 책받침의 원리는 데리다에 의해 '흔적' 혹은 '산종'으로 재해
석된다. 특히 프로이트의 '늑대인간분석'이나 '분석에 있어서의 구성', '기억하기, 반복하기,
그리고 작업하기', 그리고 '전이의 역동성'은 근원에 대한 회의에서 해체론과 만난다. 프로
이트는 환자가 기억해낸 과거가 현재의 욕망에 의해 굴절됨을 '전이'에서 암시했고 늑대 인
간의 치료에서 주를 들어 밝힌다. 어릴 적에 꾼 늑대의 꿈을 중시한 분석가는 신경증의 원
인을 찾는다. 유아기에 보았던 부모의 성교장면이 환자의 원초적 상흔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석을 마친 프로이트는 그가 밝힌 근원이 사후의 것이요, 회고적 산물이기에 허구일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전이'는 환자가 상흔의 대상을 분석자에게 옮기는 현상으로 정신분석이 은유를 밝히는
과학이라기보다 환유적 속성을 지닌 대화라는 가설로 넘어가는 중요한 개념이다. 일찍이 프
로이트는 '도라 분석' (1901년에 분석하고, 발표는 1905년)에서 자신이 실패한 원인을 도라
의 전이에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 아버지와 K씨를 분석과정에서
자기에게 투사해 솔직하게 과거를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전이의 역동성'(The Dynamics of Transference, 1912)에서는 부정적
전이와 긍정적 전이를 구별하고 긍정적 전이는 분석에서 필수적임을 인정한다. 환자는 현실
에 의해 사랑이 충족되지 못할 때 그것을 타인에게 전이하는데 이때 이 전이는 환자의 의식
적 기대뿐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서도 똑같이 이루어지기에 분석자에 게 중요하다. 전이는
저항의 한 형태인데 이때 전이가 의사에게 옮겨져 애정과 친근감으로 바뀌면 치료는 쉬워진
다. 프로이트는 도라의 경우에 보였던 불평과 달리 "전이의 현상들은 분석을 힘들게 하지만
결국은 그 것이 치료를 가능케 한다"고 말함으로써 전이를 통한 치료를 암시한다.
프로이트의 이런 변화는 다음 글 '기억하기, 반복하기 그리고 작업하기'(Remembering,
Repeating and Working-Through,1912)에서 한 걸음 더 전이를 인정하는 쪽으로 나간다. 환
자가 의식하지 못 하는 저항을 분석자가 알려주면 환자는 잊었던 것을 기억해낼 수 있다.
그때 그 기억은 어린 시절에는 모르다가 훗날 이해하고 해석된 일이다. 말하자면 기억은 행
위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반복된 것이다. 물론 그는 그것이 반복인지 모른다. 그는 거꾸로
반복충동에 의해 기억한다. 그리고 전이는 이 반복의 한 부분이다. 분석자는 저항의 상태로
이루어지는 반복에서 무엇을 반복하는가 따져야 한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근원이란 이
미 반복된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이다.
환자의 병이란 분석을 시작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그의 병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동력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우리는 분명히 해왔다. 이 병의
상태는 치료의 현장과 범위 안에서 조각조각 끌어내 지고, 환자가 그것을 생생한 현실의 문
제로 경험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으로 과거의 것을 추적하는 분석작업을 해내야 한다.
반복의 형태로 나타나는 기억이란 환자의 현재 욕망이 가미된 것이다. 그렇다면 분석자가
캐내는 환자의 과거란 이미 현재 욕망의 산물이 아닌가. 프로이트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
는 중간지대인 '전이'를 중시하고 이것을 잘 다루는 게 분석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거기에
서 과거를 추적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라캉과 데리다를 비롯한 현대 해체론자들은
프로이트의 글에서 근원이 이미 반복이고 과거는 현재 욕망의 산물이라는 말을 더 중시한
다.
윗글보다 훨씬 뒤에 쓰인 '분석에 있어서의 구성'에서 프로이트는 분석이 비록 고고학자
가 과거의 유물을 발굴하는 작업과 같지만 그것과 다른 점도 많다고 말한다. 우선 그 작업
은 환자가 제시하는 자료들을 조각조각 다시 짜 맞추는 작업이기에 둘 사이의 연결에 의해
결과가 얻어진다. 심리적 대상은 물건과 다르기에 여기저기 자료는 훨씬 많지만 그것들을
모으는 작업은 훨씬 복잡하다. 그 작업은 분석이라기보다 구성, 아니 재구성이고, 그 조합물
은 오직 환자가 마음속으로 수용할 때만 답이 된다. 프로이트는 이 글에서 정신분석이 고고
학과 달리 이미 분석자와 환자사이의 대화 속에 존재하고 둘 사이의 욕망 읽기라는 암시를
하고 있다.
근원이 이미 반복이요, 분석은 오직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중간지대인 '전이'에 의해서
가능할 뿐이라는 프로이트의 암시는 정신분석을 진리를 캐어내는 확고한 과학이라기보다.
환자와 분석자 사이의 대화를 통한 욕망 다스리기로 보는 것이다. 진리는 화산재에 묻혀 고
스란히 복원되기를 기다리는 폼페이 시가 아니라 이미 둘 사이의 대화 속에 존재하는 표층
위의 것이다. 이것이 라캉이 프로이트를 다시 읽어낸 부분이다. 이제 해답은 환유를 통해 은
유에 이르는 것도 아니요, 은유와 환유의 두 축으로 열린 것도 아니요, 단지 환유적인 것이
다. 그것은 영원히 '다르게 반복하기'이다. 자꾸만 옆의 것을 짚는 페티시즘이고 상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끝없이 반복되는 '강박적 반복충동'이다.
프로이트의 유아기 성, 근원적 나르시시즘 등 유아가 어머니와 한 몸이었던 시기를 라캉
은 '상상계'(The Imaginary)라 이름 붙인다. 이 거울단계는 대상의 얼굴에서도 자신만을 보
는 오인의 단계로서 주체의 근원으로 자리잡는다. 이 시기가 지나 아이가 '아버지의 법'이라
는 사회 속으로 진입하는 단계가 '상징계'(The Symbolic)이다.
정신분석에 소쉬르 언어학을 끌어들인 라캉은 언어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뜻에서 프로이트
의 현실원칙을 상징계라고 표현한다. 라캉은 인식주체가 매끄럽게 통합된 이성만의 주체가
아니라 유아기의 환상인 거울단계 위에 이루어진 분열적인 것이라고 본다. 프로이트에게서
억압된 무의식이 되돌아오듯 상상계는 상징계를 뚫고 틈틈이 되돌아온다. 여기에서 욕망이
론이 탄생한다. 욕망은 우리가 대상을 어머니라고 믿고 추구하다가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미끄러지며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그러기에 다시 또 다음 대상에 다가서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자꾸만 가게 만드는 힘이 삶의 동력이요, 욕망의 미끼(a)요, 상징계를 무너뜨리
는 우수리요, 실재계(The Real)이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유아기 성, 혹은 '근원적 나
르시시즘' 이 약 3, 4세에 이르는 시기임을 떠올릴 때 라캉은 프로이트를 다시 읽어내며 명
칭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시기도 유아가 언어를 배우는 시기를 고려해 당겼음을 알 수 있
다.
프로이트가 어렴풋이, 그러면서도 신념을 가지고 줄기차게 되풀이 해온 무의식을 라캉은
소쉬르 언어학과 결합시켜 구체적인 시기와 용어를 만들어내고 욕망의 본질로 축소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해체론과 맥이 닿으면서도 더 나아가 정치적인 문맥으로 읽히게 만들었
다.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정신분석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특히 프로이트의 용어보다
라캉의 용어, '상상계'가 더 보편화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라캉을 읽으면 읽
을수록 이미 프로이트가 암시했던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니 라캉의 입장에서 프로이트를
되돌아보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프로이트의 '언캐니'가 라캉의 '실재계' 혹은 욕망의
미끼, 프티 오브제 아(a)와 거의 같은 맥락에 있음을 밝혀보자.
프로이트의 유명한 글, '쾌감원칙을 넘어서'의 전신이기도 한 '언캐니'는 그가 '강박적 반
복충동'이라는 개념에 골몰해 있을 때 쓴 글이다. 이미 1912년에 쓰인 '기억하기, 반복하기,
그리고 분석하기'에서 반복의 중요성을 암시했지만 프로이트는 인간이 쾌감의 즉각적인 충
족을 지연시키며 현실을 지탱해나가는 데는 어딘가 반복을 강요하는 충동이 본능 속에 있음
을 감지했다.
실제로 어린 손자가 어머니의 부재를 견디는 방법으로 끈이 달린 실패를 집어서 던지고
다시 집어서 던지며 노는 것을 본 그는 "포르트" (저기)"다"(여기) 게임이 바로 인간이 현실
을 견디는 본능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이는 어머니가 없는 것을 견디어야 한다. 그래서 실패
를 던지며 사라지면 '저기'(fort)라고 말하고 다시 나타나면 '여기'(da)라고 말하기를 반복하
며 시간을 보낸다. 이 반복을 향한 충동은 얼마나 강박적인지 쾌감의 충족조차 저지한다. 쾌
감의 충족이란 죽음이기에 반복충동이란 삶본능이요, 자꾸만 옆의 것을 짚어서 충족을 지연
시키는 현실원칙이다. 환유를 통해 죽음을 지연시키는 충동, 이것이 삶과 서사의 동인이라는
암시는 20세기 후반부 프로이트 해석의 핵심이 된다.
라캉의 욕망이론도 상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실재계를 낳으며 반복
되는데 이 끝없는 되풀이도 결국 죽음을 지연시키는 삶 본능이다. 대상을 보고 그것이 남근,
혹은 어머니라고 믿고 다가간다 (상상계). 포착하는 순간 대상은 환상의 껍질을 벗고 본체를
드러낸다 (상징계). 옆의 것을 짚었기에 그는 또 저만큼 물러나서 손짓하는 대상을 향해 간
다(상상계). 이런 되풀이가 우리의 삶이요, 이때 이런 반복을 가능케 하는 욕망의 동인이 '
실재계'라는 미끼, 혹은 우수리다. 그러므로 실재계란 그 자체로는 재현이 되지 않지만 인간
을 반복으로 몰아넣는 동안이다. 상상계와 상징계의 차액이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
는 상징계 속의 구멍이요, 대상과의 완벽한 동일시를 방해하는 얼룩이요, 타자(The other)이
다. 상징계의 매끄러운 동일시를 뒤엎고 낯설게 만드는 어떤 것, 그것은 프로이트의 '언캐니
'이기도 하다.
흔히 미학은 숭고함, 아름다움, 매혹을 자아내는 대상과 그런 상황에 대한 연구로만 알려
져 왔는데 괴기함, 공포, 낯설음도 미학의 요소가 된다. '언캐니'는 바로 반감, 두려움, 놀람
도 미학의 한 요소임을 증명하는 연구다.
서사에서 언캐니를 창조하는 방식은 독자를 불확실함 속에 놓는 것이다. 독자의 주의력을
분산시켜 문제의 해결을 늦추면서도 궁금증을 갖게 만드는 것, 즉시 문제를 풀지 못하게 만
드는 것이다. 언캐니란 억압되어 반복을 일으키는 원초적 장면이다(Whatever reminds us
of this inner 'compulsion to repeat is perceived as uncanny). 억압된 무의식이 있음을 암
시하는 것, 반복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 즉 언캐니는 욕망의 동인이요, 동일시를 전복하는
얼룩이요, 통합된 주체를 무너뜨리는 타자'이다.
반복충동은 프로이트 후기 사상의 핵심이었고 라캉은 이 부분에서 많은 암시를 얻는다.
거울 단계를 주체 형성의 기본으로 삼은 것은 반복충 동으로 가는 동인이었다. 그것 때문에
주체 속에 이물질이 존재하고 욕망은 충족을 모르고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반복'이
야말로 후기 구조주의, 혹은 해체론의 핵심사상이었다. 환유를 거쳐 은유에 이르던 심리 비
평은 은유와 환유의 동등한 입장을 지나 환유로서의 정신분석에 이른다. 삶도 서사도 비평
도 죽는 순간까지 옆으로 가는 춤, '다르게 되풀이하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은유인가 하는
순간, 합일을 가로막는 얼 룩, 우수리, 타자에 의해 그 꿈이 깨어지고 환유가 되는 것이다.
환유로 보는 정신분석은 해체비평에서 힐리스 밀러 (Hillis Miller)의 '옆으로 가는 춤' 혹
은 '반복'적 읽기 그리고 폴 드 만(Paul de Man)의 '독서의 알레고리'와 같은 맥락에 있다.
완벽한 텍스트 읽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읽기는 우수리를 남긴다. 하나의 인기는 반대
적 읽기를 억압하고서만 존재한다. 밀러는 그의 유명한 책, '픽션과 반복'에서 지금까 지의
모든 읽기가 옆의 것을 짚는 반복이었음을 보여준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보
자. 주제를 보는 읽기는 쓰여진 방식이 몇 겹으로 되어 있음을 간과했다. 정신분석적 읽기는
마르크시즘적 읽기를 억압한다... 이런 식으로 책읽기란 우수리를 남기며 끝없이 되풀이된다.
드 만의 독서의 알레고리 역시 환유적 읽기이다. 루소를 읽으면서 데리다는 어떤 부분을
억압했는가. 루소를 읽은 데리다를 다시 읽는 드 만의 인기는 다시 그 다음 사람에 의해 전
복된다. 그도 역시 반대부분을 억압하지 않고는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통찰에는 맹목
이라는 어두운 그늘이 존재하고 이 맹목은 프로이트의 언캐니, 라캉의 얼룩이 아니고 무엇
이랴? 통찰 속에 존재하는 맹목은 주체 속에 존재하는 타자이다. 바바라 존슨의 '포, 라캉,
데리다-비평의 틀짜기' 역시 반복으로써의 읽기이다. 포를 읽은 라캉이 무엇을 억압했는가
를 드러낸 데리다의 읽기를 존슨이 다시 읽어 데리다가 라캉의 어느 부분을 억압했는지 보
여주는 글이다.
환유로서의 비평은 완벽한 읽기가 아닌, 옆의 것 짚기이다. 그리고 이 '다르게 되풀이하기
'는 쾌감원칙 너머에 반복충동이 있다는 프로이트의 '쾌감원칙을 넘어서'를 떠올리게 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서사분석에 적용한 피터 브룩스(Peter Brooks)의 '플롯을 따라 읽기
'(Reading for the Plot, 1984)는 쾌감원칙이 어떻게 충족을 우회하여 현실원칙과 교차 반복
함으로써 삶과 소설을 지연시켜 가는지 보여준다. 상상계와 상징계가 교 차 반복되듯, 삶본
능과 죽음본능이 교차 반복되어 픽션을 이룬다. 욕망 이 즉각적으로 충족되면 곧 죽음이기
에 욕망은 충족을 늦추고 길게 우회하여 자꾸만 옆의 것을 짚는다. 탄생과 죽음 사이의 가
장 긴 거리는 바로 구불구불한 아라베스크, 그래서 서사도 삶도 반복을 통해 거리를 길게
늘인다. 그가 서구의 사실주의와 모더니즘 소설들을 반복과 전이의 구조로 읽어낸 이 책은
정신분석을 서사 읽기에 적용한 정밀하고 신선한 통찰이었다.
상상계, 혹은 거울단계는 탈식민주의에 오면 정치적인 맥락에서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식
민주의자들의 환상을 일컫는 용어가 된다. 백인들은 제 3세계인들이나 흑인들을 자신들의
욕망으로 읽어낸다. 그런데 피지배인들 역시 자신들의 욕망으로 대상을 읽기에 대상의 교화
라는 식민주 의자들의 산뜻한 꿈은 깨어진다. 주체 속에는 이물질이 있어 통합된 깔끔한 이
상론을 무너뜨린다. 이 우수리, 상징계를 무너뜨리는 실재계는 "타자"가 되어 식민주의가 왜
실패했는지 보여주고 제도적으로는 끝났을 지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문화적 식민주의, 혹은
무의식 속에 잠재한 식민주의를 들추어낸다.
물론 타자성(otherness)이란 무의식이 되돌아오면서 의식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얼룩으로
제국인의 가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인의 욕망뿐 아니라, 피식민지인의 가슴에도 제
국주의가 있음을 보여주어 항의 와 함께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은 최근 탈식민주의 문학의
특징이다. 누구나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제국, 그것은 타자의 귀환과 함께 무너진다. 미학을
설명하던 프로이트의 언캐니는 이처럼 라캉의 타자가 되어 정치 적인 문맥에서 이용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을 은유와 환유의 관계로 살펴보고, 그 이론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리 재해석되는지 간략히 더듬어 보았다. 그의 글들 가운데에서도 문학에 관련되는
것들을 골라 살펴보았고 그 글들 속에서 되풀이되는 사상을 밝혔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읽고 다시 읽는가 더듬었다. 프로이트의 글들이 끝없이 재해석되는 것을 보면
그 자체가 이미 환유적 읽기가 아닌가 싶다. 많은 이론들을 더듬다보니 충분한 예를 들지
못한 아쉬움과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그 다음 시대는 프로이트를 어떻게 재해석할 것
인가. 환유를 통해 은유를 탐색하더니 은유와 환유가 대칭을 이루고 다시 은유를 거쳐 환유
적 읽기가 된다. 이제 다시 환유를 통한 은유인가? 해체비평이 환유적 읽기였으니 탈식민주
의 비평은 이미 환유를 거친 은유 찾기는 아닐까? 그토록 시대를 따라 재해석되니 '무의식
은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온다'는 이 단순한 명제는 대단한 진리인가 보다. 물론 확률적으로.
2. 해결이 또 하나의 문제인 세상
프로이트와 토니 모리슨의 '언캐니'
1. 프로이트의 '언캐니'
정확히 언제 쓰였는지 확실치 않아도 1919년에 출판된 글 '언캐니'(The Uncanny)는 미학
과 관련이 깊은 프로이트의 글들 가운데 하나이다. 흔히 미학이란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
문, 즉 숭고함과 기쁨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에 관한 연구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프로
이트는 그 반대의 측면, 즉 괴기함, 공포,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역시 연구되어야 한
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캐니'와 '언캐니'의 어원과 낱말의 의미에 대한 추적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친근한", "집 같은"(homely), "낯익은"의 뜻을 가진 '캐니'(canny)와 "낯선", "두려운", "놀라
운"의 뜻을 가진 '언캐니' (uncanny)는 얼핏 반대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집이
란 고향이요, 친숙함이지만 이방인에게는 비밀을 간직한 괴기하고 신비한 것으로 보인다. 결
국 언캐니는 캐니에 종속된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언캐니는 원래 친숙한 것이었는데 억
압되었다가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낯설고 두려운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낯익은 이성과 명료한 의식 밑에 억압된 무의식이 있고 이 억압된 것은 틈틈
이 귀환한다는 프로이트의 핵심사상은 이 글에서 다시 되풀이된다. 사회로부터 금기된 쾌감
에의 욕망은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의식 밑에 억압되어 있다가 틈틈이 귀환한다. 이
무의식의 발견 혹은 주장은 인간의 본능에 내재한 강박적인 반복충동(compulsion torepeat)
과 연결되어 프로이트 미학의 중요한 근간을 이룬다.
이 글은 다음 해 발표된 '쾌감원칙을 넘어서'의 뼈대가 되는데 최근 미국의 서사론자 피
터 브룩스는 '플롯을 따라 읽기'라는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 이론과 '쾌감원칙을 넘
어서'를 접목하여 소설분석의 획기적인 작업을 이루어냈다. 독창성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
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을 오늘에 맞게 새롭게 읽는 것임을 보여준 예이다. 매혹이란 변함없
이 친근한 면과 낯선 면이 합쳐져서 우러나는 것인가 보다.
미학적 매혹의 본질을 설명하기도 하는 '언캐니'에서 프로이트는 유아 가 어릴 적에 품었
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거세 콤플렉스가 억압되었다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예로 호프만
(Hogmann)의 '모래인간(The sand-Man, 1816)을 든다.
나타니엘은 어릴 적에 유모로부터 잠자리에 들 때 모래인간에 대한 무서운 얘기를 듣는
다. 어린아이가 잠을 자지 않으면 모래인간이 나타나 눈을 빼앗아간다는 얘기였다. 그 이야
기는 아이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 을 남긴다. 아이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원인을 잘 모르는
그 죽음의 현장에는 코펠리우스가 함께 있었고 그는 그후 종적을 감춘다. 나타니엘은 아버
지가 코펠리우스와 함께 있다가 죽었다는 환상을 갖게 되고, 그를 모래인간으로 여긴다. 성
장한 나타니엘은 어느 날 코폴라에게서 안경을 산다. 그는 그 안경을 쓰고 맞은 편 집을 훔
쳐보게 되는데 그곳에는 올림피아라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고 나타니엘은 약혼자 클라라를
잊을 정도로 맹렬히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 소녀는 코폴라와 스팔란지니 교수가
함께 만든 자동인형이었다. 둘이 다툼이 벌어지던 날 코폴라는 인형의 눈을 빼서 나타니엘
을 향해 던지고 그는 순간 기절한다. 환몽 속에서 나타니엘은 아버지의 죽음과 올림피아의
죽음을 동일시하게 된다.
클라라와 화해한 나타니엘은 어느 날 클라라와 그녀의 오빠와 함께 시내를 배회하다 첨탑
에 오른다. 순간 아래를 내려다본 그는 경악을 하며 클라라를 개울 속으로 떠미는데 그녀는
마침 아래 서 있던 오빠에 의해 구출된다. 그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군중 속에 서 있는
코펠리우스였다. 나타니엘은 소리를 지르며 난간에 떨어져 죽고 코펠리우스는 유유히 자취
를 감춘다.
프로이트는 이 이야기를 유아기에 경험한 거세 콤플렉스가 억압되었다가 계속 반복되는
것으로 풀어낸다. 나타니엘은 모래인간을 거세 위협하는 아버지로 받아들인다. 눈을 빼앗아
간다는 것은 거세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모래인간은 코펠리우스, 코폴라, 그리고 마지막
다시 나타난 코펠리우스로 다르게 반복되어 그럴 때마다 사랑이 좌절된다. 그는 나타니엘의
사랑을 막는 아버지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반복은 독자의 호기심을 끌어가는 모호함을 낳
고 이 낯설음에 의해 서사가 계속된다. 반복은 독자의 정신을 분산시키고 그를 불확실성 안
에 가두며 이것이 바로 작품 그 자체, 즉 미학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러시아 형식주의자
들의 예술이론인 '낯설게 하기'와 피터 브룩스의 '플롯을 따라 읽기'를 연상시킨다.
그러면 반복은 왜 일어나는가. 이 부분에 대한 프로이트의 설명은 욕망의 원리를 설명하
는 라캉의 것과 흡사하다. 주체는 유아기에 자아와 대상을 일치시킨다. 어머니와 나를 혼동
하는 이 '더블'(double) 혹은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끝없는 자기사랑에서 나온다. 아이는 성
장하면서 이것을 극복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아점검의 단계로 들어선다. 그러나 스
스로를 지켜보는 이 분열된 주체, 즉 자기 반성적 주체는 유아기 나르시시즘에 종속된다. 다
시 말하면 친숙한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사라지지 않고 억압되어 괴기하게 다시 나타난다.
'언캐니'란 '더블'이 극복되었지만 공포로 다시 나타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인간의 본능
속에는 반복충동이 있고 이것은 대단히 강박적 이어서 쾌감원칙을 넘어서 존재한다. 쾌감원
칙도 이 반복을 향한 충동에는 당해내지 못한 다는 것이다.
반복충동이란 무엇일까. '언캐니'를 씨앗 삼아 활짝 꽃피는 그 다음 글, '쾌감원칙을 넘어
서'를 잠깐 보자. 프로이트는 어느 날 어린 손자가 엄마가 집에 없는 동안 혼자 놀이를 하
면서 엄마의 부재를 견디어내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아이는 실패 같은 것을 던지며 안
보이면 "포르트"(fort)라고 소리치고, 다시 잡아당겨서 보이면 "다"(da)라고 소리쳤다. 이 '포
르트다' 게임이 그 유명한 반복충동이라는 이론을 낳는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때로 그것이 힘들고 지겹다고 느끼지만 막
상 죽음이나 위기의 순간에 부딪히면 그 반복이 얼마나 고마운 것이었고 그 반복자체가 곧
삶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프로이트가 그저 스쳐 지나치기 쉬운 아이의 게임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어머
니 부재라는 현실을 견디어내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쾌감원칙보다 더 강렬한 게 삶
의 원칙 아닌가. 살기 위해서 우리는 쾌감의 충족을 미룬다는 프로이트 이론이 여기에서 나
온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리비도는 성본능 뿐 아니라 삶본능도 포함된다.
이 후기 이론은 인간이 어떻게 불만의 현실에 자아를 적응시켜 가는가라는 얘기여서 당대
모던 심리학의 자아조정 이론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 반복충동을 끝없는 반복이라는 "환유"로써 다시 읽는다.
다시 '언캐니'로 돌아가자. 우리에게 이 내적인 반복충동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괴기함'으로 감지된다(whatever reminds us of this inner 'compulsion to repeat' is
perceived as uncanny). 그렇다면 '언캐니'란 무엇일까 혹시 라캉의 '프티 오브제 아'처럼
인간에게 끊임없이 욕망을 갖게 하여 삶을 영위시키는 동인은 아닐까? 프로이트의 '더블'
은 라캉의 상상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원초적 나르시시즘을 극복하고 사회로 들어서는
단계는 상징계가 아닐까. 주체가 사회로 들어서며 억압되는 부분인 '실재계'는 주체를 상징
계에서 다시 상상계로 귀환시키는 동인이다.
말하자면 상상계는 극복되는 듯하지만 틈틈이 상징계를 뚫고 되돌아오기에 없는 것 같지
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뭉크의 외침처럼 들리지 않지 만 엄연히 존재하고 아담의 뼈처럼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있다. 바로 이 상징계만도 아니요, 상상계만도 아니게 만드는 얼룩이
실재계이고 반복 을 가능케 하는 욕망의 동인이다. 그리고 이 반복충동이 죽음본능인 쾌감
원칙을 넘어서 존재하는 삶의 본능이다. 인간의 삶은 욕망이 있는 한 계속되고 상상계와 상
징계의 끝없는 회로 속에서 욕망을 가능케 하는 것이 실재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로
이트의 '언캐니'는 라캉의 실재계 혹은 '프티 오브제 아'에 해당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반복은 또한 픽션을 가능케 하는 동인이다. 그것은 죽음의 본능 너머 삶을 연장시키는 동
인이며 동시에 예술에서는 서사를 끌어가는 동인이다. 브룩스는 사실주의 소설과 모더니즘
소설에서 반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 탄생과 죽음의 사이가 삶이듯 시작과 종말
의 사이가 소설이다. 현실원칙 혹은 삶본능은 앞으로 곧장 내달린다. 그러나 직선은 두 지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다. 가장 긴 거리는 구불거리는 아라베스크 곡선이다. 반복충동은 직
선을 아라베스크 곡선으로 늘리는 것으로 죽음을 늦추려는 강박적인 삶본능이다. 여기서 우
리는 프로이트의 리비도는 단순하게 성 본능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강박적인 삶본능이었다
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삶본능과 대치되는 죽음본능이 소개된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서 어린 핍이 죄수 매그위치와 처음 만나는 장면은 서사를
끌어가는 근원적 상흔이다. 공포의 그 장면은 그가 에스텔라와 해비샴 저택, 그리고 런던에
서 신사수업을 받을 때까지 틈틈이 죄수와 연결되어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다가 안개가 자
욱하게 낀 어느 날 저녁 죄수는 그의 앞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출연은 낯익은 어릴 적 상흔이 억압되었다가 나타나는 것이며 서사를 반전시키고 주
인공을 무지에서 발견으로 인도한다.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어떤가. 월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Absalom, Absalom!,
1936)에서 서사는 양파 껍질처럼 반복된다. 서트펜, 헨리, 본, 주디트를 둘러싼 이야기는 주
변 사람들에 의해 독자에게 전달되고 그것은 다시 서술자인 씩 의해 독자에게 전달되는데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이야기는 거의 퀜틴과 쉬리브에 의해 꾸며진다. 서술의 '전이', 혹은
서술자에 따라 같은 이야기가 '다르게 반복'되는 것이다.
브룩스는 프로이트와 쾌감원칙 너머에 존재하는 반복충동을 소설 읽기에 적용했다. 그리
고 그것은 프로이트의 '모래인간 읽기'와 거의 같다. 그러면 포스트모던 서사에서 괴기함은
어떻게 나타날까.
60년대 실험소설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인물의 내적 독백이 사라지고 다시 저자가 서술자
로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겉보기에 강력한 삼인칭 서사로서 인물들의 입장에서 서술해
주는 서술자는 줄곧 자의식적이다. 자신의 객관서술을 바라보는 욕망의 시선이 있다. 서술은
바라봄만 있는 게 아니라 보여진다. 그는 자신의 서술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반영하지 못하
는 자기 얘기일 뿐이고 독자를 설득하려는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
술의 주체는 입장에서 서술하는 전지적 주체와 그런 주체를 의심스럽게 응시하는 일인칭 주
체로 분열되어 있다. 라캉의 용어를 빌리면 시선과 응시의 교차이다. 시선이 앞으로 나가려
는 현실원칙이라면 응시는 억압되어 틈틈이 돌아오는 쾌감원칙이다. 포스트모던 서사는 삼
인칭 서술을 틈틈이 간섭하는 일인칭 서술의 귀환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매끄러운 시선을
가로막으며 귀환하는 응시가 바로 '언캐니'이다.
객관재현을 할 수 없다는 반사실주의는 60년대에 격렬한 실험으로 나타난다. 언어의 자의
성, 이념의 허구성을 콜라주, 자의식적 서사로 표현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70년대에 이르러
억압된 계층이 자신의 음성을 내는 정치적 성향을 띠게 된다. 그동안 엇갈리며 매끄러운 사
실주의를 의심하던 반사실주의는 대화를 시도한다. 일인칭 제한서술은 이제 더 이상 삼인칭
전지서술을 가로막는 간섭이 아니라 서로 돕는 관계이다. 일인칭이 볼 수 없는 상황을 삼인
칭이 보충해주고 삼인칭 서술이 실패한 내용을 일인칭이 보충해준다. 이 역동적이며 대화적
인 관계는 토니 모리슨의 경우 '가장 푸른 눈'에 잘 나타나며 '빌러비드'는 조금 다르지만
역시 대화적이다.
2. 토니 모리슨의 정치적 수사
백인 문화가 가치의 기준이 되어 있는 사회, 인종적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
나의 문화가 똑같이 적용되는 사회는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획일주의 사회이다. 이
런 사회의 주체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주체와 대상을 일치시키는 프로이트의 '더블' 혹은
라캉의 거울단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상계적 착오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르시
스적 자아는 타자를 자신과 동일시하기에 하나의 문화는 다른 문화와 '차이'를 지닌 독특한
문화로 공존하는 게 아니라 우월의 관계가 되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한다.
모리슨의 첫작품 '가장 푸른 눈'(The Bluest Eyes, 1970)은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런 상상계적 사회가 흑인에게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다. 흑인 소녀 피콜라는 파란 눈
이 미의 기준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 그런 눈만 지니면 부모와 이웃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웠고 광고에도 그렇게 되어 있고 인형도 그런 모
습이었다. 깨끗하고 정돈된 백인의 가정과 그들의 부부관계를 부러워하는 어머니는 딸보다
백인 주인의 딸을 더 소중히 여겼고 아버지는 과거 의 상처로 인해 그런 아내를 사랑할 용
기와 관용이 없었다. 그의 뇌리에 는 근원적 상흔으로써 어릴 적 백인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짙게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거부한 아버지에 의해 가족이나 뿌리 없이 자랐다.
소설은 피콜라를 둘러싼 인물들이 제각기 상처받은 과거의 기억으로 그에게 어떤 대응을
보이며 그것이 어떤 파국을 초래하는지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서 작가는 자신의 어릴 적 분
신이기도 한 클로디어 가족을 개입시킨다. 클로디어 가족은 이 소설의 타자이다. 사회 전체
가 눈 먼 나르시시즘 속에 물들어 있을 때 유일하게 그런 억압을 뚫고 솟아오르는 이질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그녀의 서술은 삼인칭 서술을 뚫고 솟아오르는 일인칭 서술이다. 타자를
인정하는 이런 이질성(hoterogeneity)은 소설을 끌어가는 동인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자아를 긍정하는 정치성을 낳는다. 백인과 다를 뿐 그것에 의해 지워질 수 없는
흑인의 문화, 그리고 남성과 다를 뿐 그것에 의해 지워질 수 없는 여성의 정체성을 클로디
어라는 소녀의 일인칭 음성과 삼인칭 전지적 서술자의 음성이 교직됨으로써 이루어내고 있
기 때문이다. 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피콜라의 가족과 이웃에 관한 전지적 서술이 실패
의 내용을 담고 있다면 클로디어의 서술은 그 실패에 대한 대안으로서 공존한다.
모호성, 혹은 낯섦이라는 미학의 본질을 밝히는 프로이트의 '괴기함'과 반복충동은 모리슨
에게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는 정치적인 문맥으로 자리바꿈 된다. 이제 이런 자리바꿈을 그
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빌러비드'에서 살펴보자.
노예의 삶이건 자유로운 삶이건 매일 매일의 삶은 하나의 시험이요. 시련이다. 네가 하나
의 해결일 때조차도 문제인 그런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할 것인가...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느니라.
노예였던 어머니가 자신의 젖먹이 딸만은 같은 삶을 반복시키지 않겠다고 죽인다. 1855년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근거로 하여 쓰인 소설 '빌러비드'(Beloved, 1987)는 1873년 신시내
티의 블루스톤가 124번지로부터 시작된다. 호미 바바가 그의 책, '문화의 위치'에서 가볍게
언급했듯이 124번지는 서술이 반복하여 되돌아오는 '괴기한' 집이다. 집은 이 소설에서 주인
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집은 베이비 숙스가 마을의 지도자로 활기 찬 삶을 영위할 때는 이
웃이 모여드는 정거장이었고, 시드가 자신의 아이를 죽인 후로는 잿빛 감옥이었다. 유령이
살 때는 괴기함과 흔들림으로 떨었고, 유령이 되살아난 빌러비드가 살 때는 소유와 탐닉으
로 고립되었고, 그녀가 떠난 뒤로는 폐허가 되어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린다. 집은 주체이며
가족이며 이웃을 상징한다. 그것은 친근함과 낯섦이 반복되는 '괴기함' 이다.
124번지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을 지닌 다양한 인간들이 그 집을
들락거리며 이야기를 꾸며간다. 그들은 서로가 지닌 과거의 상처에 의해 영향을 주고 받는
다. 124번지는 모임과 축제의 장소에서 주장과 자만으로 가득 찬 잿빛 가옥으로, 소유와 탐
닉으로 물든 배타적인 은둔처로, 그리고 수선을 기다리는 풍상에 찌든 집이 된다. 마치 '가
장 푸른 눈'에서 주변 사람들이 피콜라에게 영향을 주듯 사람들은 집에 영향을 준다.
소설은 유령이 나오는 집에 18년간의 방랑을 거친 폴 디가 도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과
거의 기억과 현재의 행위가 조각이불 잇듯이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이어져 가는 전체 내용
을 시간 순서로 간추려본다.
시드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아들이 치룬 노동의 대가로 자유의 몸
이 된 베이비 숙스가 희망에 찬 연설을 하며 흑인에게 육체를 사랑하라고 꿈과 용기를 불어
넣던 곳이었다. 그러나 베이비 숙스의 꿈은 며느리 시드가 노예생활에서 탈출하여 함께 산
지 28일 만에 산산이 부서진다. 도망친 노예를 잡으러 온 것을 안 시드가 어린 딸을 죽인
것이다. 오렌지 색을 그리워하며 베이비 숙스는 구두 수선공으로서의 삶을 끝마친다. 시드의
남편이었던 홀은 소식이 끊겼고 두 아들은 유령이 나오는 집이 무서워 도망갔다. 어린 딸
덴버와 단 둘이 사는 이 고립된 시드에게 폴 디가 나타난다. 스위트 홈 농장시절 시드를 사
랑했던 폴 디는 그녀의 피폐된 삶에 활기를 불어 넣으려 애쓰며 유령을 내쫓는다. 한동안
잠잠했던 집에 어느 날 낯선 소녀가 나타난다. 그녀가 한 가족이 된 후 폴 디는 한 단계 씩
집안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헛간에서 자던 날 폴 디는 소녀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 스탬
프로부터 시드가 아이를 죽인 사건을 들은 폴 디는 시드를 떠난다. 그녀의 잔인성과 폴 디
의 죄의식이 겹쳐 그들 사이에 커다란 숲이 들어앉게 된 것이다.
폴 디를 쫓아 낸 빌러비드는 시드를 독차지하고 늘 어머니가 무서웠던 덴버는 과거의 기
억 속에 살며 빌러비드를 따르지만 둘은 덴버를 외롭게 소외시킨다. 시드는 자신이 사랑 때
문에 딸을 죽였노라고 끝까지 해명하지만 빌러비드는 그럴수록 광폭하게 그녀를 탐하고 욕
심을 채운다. 이웃과 단절된 채 눈먼 둘만의 탐닉은 시드의 몸과 영혼을 파괴한다. 드디어
덴버는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고 이웃의 힘으로 빌러비드는 집에서 쫓겨나 숲으로 사라진다.
다시 찾아온 폴 디는 시드의 피폐한 영혼을 어루만지며 그녀가 가진 최선은 딸이 아니고 그
녀 자신이라고 일러준다.
육화된 유령을 자연스럽게 일상 속으로 끌어들인 이 환상적 사실주의는 모리슨의 독특한
창조일 뿐 아니라 흑인의 민속에 뿌리내린 것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유령을 몰아내는 마을
사람들의 푸닥거리이다. 유령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법석을 떨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쫓
겨나 발자국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1850년대 신시내티의 작은 마을에 그런 얘기가 소
문처럼 떠돌 수도 있었으리라. '빌러비드'는 노예의 기억으로 가득찬 책이고 124번지는 과거
의 상처로 가득 찬 집이요, 빌러비드는 6천만흑인들의 악령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모리
슨은 이 아픈 과거를 청산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모리슨은 시드와 빌러비드의 관계를 통해 과거 노예시절의 기억과 분노가 흑인의 현재 삶
을 얼마나 갉아먹는가, 그리고 진정한 자아찾기와 이웃의식, 그리고 더 나아가 올바른 사랑
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려 했다. 시드는 어릴 적에 어머니의 사랑이나 젖을 먹지 못하고
자란다. 노예의 삶이란 부모와 자식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삶이었다. 들판에서 일하던 어머
니가 어느 날 그녀에게 보여 준 문신은 시드가 어머니를 기억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그
첫 번째 상흔은 어린아이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고 그후에 일어난 어머니의 교수형, 젖어미
가 들려주던 노예의 참혹한 운명, 그리고 그녀가 스위트 홈 농장에 가서 겪는 일들로 반복
하여 일어난다. 홀의 아내가 될 때 그녀는 흑인 노예에게는 결혼의 예식이 없다는 것을 처
음으로 듣는다. 그리고 그후 '학교 선생'의 아이들은 그녀의 젖을 훔쳤고 동물처럼 두개골의
칫수를 잰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도망쳤고 124번지에 도착하자 자유를 처음으로 만끽한
다. 그리고 28일만에 노예잡이가 그녀 집의 뒷뜰로 들어선 것이다.
28일간의 자유는 그녀에게 그날 무엇을 할 것인가 스스로 결정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맛
보게 했다. 124번지와 공터는 긍지, 자립, 해방된 자아를 주장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녀
가 선택한 것은 무엇인가. 자신과 같은 삶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려고 자식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였다. 백인들은 흑인을 가축처럼 소유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들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았
고 자신의 욕망을 대상과 일치시켰다. 그들의 주체는 프로이트의 '더블', 혹은 원초적 나르
시시즘에 갇힌 상상계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시드는 그것과 똑같은 선택을 내린다. 그
녀는 딸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과 아이의 욕망을 일치시킨다. 그녀가 본 아이
는 바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시드와 빌러비드의 관계가 프로이트의 더블 혹은 라캉의 상상계라는 것은 죽은 딸이 유령
으로 나타나는 것과 육화된 후의 삶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타자를 배제시킨 124번지에서 시
드와 빌러비드는 서로 내것이라며 완벽한 소유를 주장한다. 시드는 자신의 행위가 딸을 너
무 사랑해서나온 것임을 되풀이하여 주장하고 딸은 그럴수록 그녀에게 밀착하여 보상을 요
구한다. "너는 내것이고 나는 너의 것이다." 되풀이되는 이 말은 백인이 하는 말과 방향만
다를 뿐 차이가 없다.
폴 디는 그녀의 사랑이 아무리 지극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다른 아이들을 괴롭힌 것이라면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고 시드에게 말한다. 유령을 견디지 못한 두 아이는 집을 나갔고
덴버는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속에서 아버지만을 기다린다. 또한 탐닉한 두 사람조
차 서로를 황폐화시킨다. 시드는 빌러비드만을 너무 사랑하여 다른 아이들에게 줄 사랑을
남겨놓지 못했고 그 아이조차 탐욕에 눈멀게 만들었으며, 자신은 파멸에 이른다. 사랑이 너
무 지나쳐 대상을 한 치의 우수리도 없이 소유하기를 원하면 자아도 송두리째 내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백인이 흑인을 소유하려던 것, 제국이 식민지인을 교화시키는 것과 상상계
적 착오라는 것에서 닮았다. 둘은 쌍둥이였다.
베이비 숙스가 좌절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한 쪽만이라면 숙스는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주장이 그녀를 패배
시킨다." 즉 백인이 뒷마당으로 들어온 것과 시드가 아이를 죽인 것은 서로 방향만 달랐을
뿐 같은 주장이었던 것이다. 숙스는 백인뿐 아니라 동족의 가금에서도 악을 보았다. 비극이
일어나기 전 날 그녀의 집에서는 성대한 파티가 열린다. 넘치는 음식과 웃음, 베이비 숙스는
너무 많은 것을 누렸고 흑인들은 질투를 느껴 노예잡이가 마을로 들어설 때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희망에 찼던 거대한 가슴은 무너지고 그녀는 오렌지 색을 그리워하며 암울한 삶을
마친다.
반복을 모르는 이 파괴적인 '원초적 나르시시즘', 지상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낙원을
빌러비드와 시드가 꾸미려 한다. 그러나 아담이 사과를 먹다가 목에 걸려 울대뼈가 불쑥 튀
어나온 이래로(밀턴의 '실낙원'),아이가 어머니와 누렸던 아주 짧은 유아기 이래로(프로이트
의 현실), 아이가 언어를 사용하게 된 이래로(라캉의 상징계) 지상에 그런 낙원은 없었다.
둘은 완벽히 고립되고 닫힌 상상계를 꿈꾸지만 이미 상징계에 노출되었기에 타자에 의해 보
이고 보여져서 서로 대상을 바라만 보는 평화를 누릴 수는 없었다. 낙원이 아닌 실낙원에서
소유는 대상을 먹으려 하고 둘이 서로를 먹으려 하기에 124번지는 탐욕으로 배가 부르고 질
투로 황폐해질 뿐이다.
이 상상계를 꿈꾸는 닫힌 세계에서 조그맣게 문이 열린다. 고립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우
수리가 있었다. 124번지라는 상상계의 얼룩이 덴버이다. 다른 식구와 달리 그 아이는 힘든
상황을 견디는 지혜를 갖는다. 그녀는 어머니와 달리 백인인 에이미의 도움을 되풀이하여
떠올린다. 그리고 집을 뛰쳐나간 오빠들과 달리 숲의 공터에 가서 자아를 지키는 법을 배운
다. 그녀에게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상상력이 있었다. 자신이 세상에 나오게 도와준 백인 소
녀 에이미는 그녀가 힘든 삶을 견디는 데 즐거운 추억이 된다. 벨벳을 구하러 보스톤으로
가던 에이미는 시드가 덴버를 낳는 데 도움을 준다. 시드는 딸에게 그런 얘기를 해주었으면
서도 자신은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지니지 못한다. 덴버는 꼭 닫힌 집안의 뒷문을 열고 이
웃을 받아들인다. 타인의 도움을 청하고 자기자신을 돌보고 마침내는 이웃의 힘으로 빌러비
드를 몰아내는 것이다.
타자의식이 없는 시드와 빌러비드가 반복을 모르는 고착이라면 이질성을 받아들이는 덴버
는 현실원칙과 쾌감원칙이 교차 반복되는 주체로서 진정한 '언캐니'이다. 시드는 무의식 중
에 백인이 흑인에게 향한 폭력과 소유욕을 딸에게 옮기는데 이 닮음은 반복이 아닌 쌍둥이
다. 프로이트나 라캉, 혹은 '해체'의 반복은 '다르게 반복하기'이다. 상상계 혹은 상징계에는
아담의 뼈 때문에 얼룩이 생긴다. 이것이 라캉의 실재계요, 프로이트의 언캐니다. 이 얼룩이
너와 나의 완벽한 합일을 무너뜨린다. 상상계와 상징계의 차액인 이 우수리 때문에 인간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앞선 것을 다르게 반복한다.
'꼬마 한스에 대한 분석'은 3, 4세 때 어머니를 사랑하는 한스가 아버지나 어린 동생을 장
애물로 여겨 말(馬)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데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때 아이
는 환상을 창조함으로써 공포증에서 벗어나고 정상적인 아이로 성장한다. 환상은 현실의 불
만을 이겨내는 탈출구로서 즉각적인 소망을 늦추는 우회의 길이다. 그것은 다르게 반복하기
로서 고착을 벗어나며 현실에 적응하는 타협이다.
프로이트는 그의 글 '언캐니'에서 진정한 언캐니(괴기함)는 현실과 갈등을 일으키거나 현
실에 적용되는 믿음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햄릿'의 유령은 언캐니가 아니
다. 그것은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또 피그말리온의 신화처럼 자신이 만든 조각
상에 숨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연인을 얻는 것도 언캐니가 아니다. 소원이 즉각적으로 충족
되는 것은 언캐니가 아니다. 소원을 늦추는 것, 죽음에 이를 때까지 소망충족을 늦추어 삶을
연장시키는 삶본능이 언캐니다. 언캐니란 상상계와 상징계의 잉여물로 대상을 향해 우리를
끝없이 가게 만드는 욕망의 미끼(a)이다. 억압된 무의식은 위장된 모습으로 귀환하기에 늘
잉여물이 남고 그러기에 반복이 일어난다. 반복은 우리를 결핍에 떨게 하면서도 살게 만드
는 동인이다.
언캐니를 정치적인 상황으로 끌어 내보자. 성차별과 제국주의라는 계급의 문제로 옮아 가
보자. 남녀의 사랑에서는 소유의 환상을 무너뜨리는 우수리가 되고, 탈식민주의에서는 제국
의 상상계적 동일시에 저항하는 우수리가 된다.
내가 가진 것 가운데 최고는 빌러비드였다고 말하는 시드에게 당신이 가진 최고는 바로
당신이라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속죄로 피폐된 그녀의 육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폴 디는
덴버와 마찬가지로 반복이 가능한 주체이다. 그는 시드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 부딪쳤고 더
참혹한 탈출을 하지만 "과거의 상처를 마음 속에 있는 담뱃갑 속에 넣고 꼭 닫아둔다." 그
가 겪은 수많은 위기는 그에게 주어지는 순간을 있는 그대로 충만하게 받아들이고 어루만질
수 있게 가르친다. 과거가 튀어나와 현재를 망치지 않게 하며 사랑을 소유가 아닌 경험의
교환으로 믿게 한다. 일찍이 밤하늘을 보며 홀로 누워 흑인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
지 않다는 것을 배웠기에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되 다음 사랑을 위해 무언가를 남긴다.
결코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과 일치시키지 않으며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앞으로 나간다.
그의 쾌감원칙은 현실원칙과 타협을 벌이며 욕망의 충족을 늦춘다. 이 반복이 가능한 분열
된 주체가 프로이트의 진정한 '언캐니'다.
해결이 곧 문제인 세상
폴 디는 소설의 맨 마지막에 시드에게 스스로가 자신이 지닌 최고의 것이라고 얘기해준
다. 소설의 주제로 보아 그것은 작가 자신의 음성이기도하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모리슨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엘라이다. 그녀 역시 폴디처럼 '원초적 나르시시즘'을 극복한 주체이다.
그녀는 베이비 숙스보다 더 강하다. 어릴 때 겪은 "가장 심한 치욕"의 상처는 그녀로 하여
금 그 이후의 어떤 굴욕도 견디게 만든다. 그 상처는 바로 백인이 아닌 같은 동족, 그것도
바로 아버지와 오빠로부터 겪은 일 년간의 감금과 강간이었다. 덴버가 에이미라는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를 돕고 이웃에 도움을 청하듯 엘라는 동족으로부터의 굴욕이라는 타
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더블'의 함정을 벗어난다. 연설을 하고 파티를 연 베이비 숙스와 달리
그녀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흑인을 돕는다.
베이비 숙스가 백인이 뒷마당에 들어선 것과 시드가 아이를 죽인 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한 것과 달리 엘라는 그 다음을 본다. 그녀는 "해결이 또 하나의 문제"가 되는 바로 그
상황을 직시하는 인물이다. 시드는 자신의 행동이 백인의 것과 똑같이 닮았음을 알지 못했
다. 그것을 알았더라면 딸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주체는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가 없는 눈먼 주체였다. 해결이 또 하나의 문제가 된다는 것은 영원히 우수리
가 남는 상황이다. 자아의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대상은 죽음 이외에 없다는 프로이
트의 말과 같다. 시드가 그런 상황을 읽을 수 없던 것에 비해 베이비 숙스는 그런 상황에
경악한다. 그리고 좌절한다. 그녀의 이름이 베이비인 것처럼 그녀는 단순한 이상주의적 안목
으로 사태를 쉽게 보아왔고 이질성과 타자를 수용할 기회가 없었다.
엘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노예의 삶이건 자유로운 삶이건 매일매일은 하나의
시련이요, 시험이다. 네가 하나의 해결일 때조차도 문제인 그런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할 것
인가.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느니라.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것이
현재의 삶을 짓밟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엘라의 단호한 뜻은 바로 모리슨 자신의 의
지이기도 하다. 그녀의 자아는 이질성과 타자를 수용하여 반복을 가능케 하는 분열된 주체
이다.
3. 프로이트와 토니 모리슨의 '언캐니'
해결이 문제인 세상이란 언제나 우수리가 남는 세상이다. 프로이트의 '더블' 이나 라캉의
상상계에는 우수리가 없다. 아이는 주체의 욕망과 대상의 욕망을 일치시킨다. 라캉의 거울단
계나 프로이트의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대상에게서도 자신의 얼굴만을 볼 뿐 타자를 보지 못
한다. 차이가 없는 세계, 아니 차이를 억압한 세계이다. 아이는 사회화되면서 이 단계를 극
복한다. 그러나 상상계는 사라지지 않고 억압되어 상징계 속에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그것이
실재계요, 프로이트의 '언캐니'이다. 그리고 모리슨의 "해결이 문제인 세상"이 아닐까 생각
해본다.
데카르트가 이성의 투명성을 강조한 이래 계몽주의는 자만심에 차 있었다. 그는 전쟁, 식
민지 개척, 나치즘의 유대인 박해 등이 모두 그런 자만심의 부정적 산물이 아닐까 의심했다.
프로이트 사상의 혁신성은 의식에 억압된 거대한 무의식은 늘 반복을 꿈꾸며 표출되고 그것
이 삶의 동력인 이상 인간은 그리 선한 존재가 아니고 사악함을 억압한 양면적 존재라는 데
있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과학과 문학이 합쳐진 어느 곳, 이성과감성이 만나는 어느지점에서
이루어진다.
프로이트의 글 '언캐니' 역시 미학에 관한 글이다. 문학이나 예술에서 더 잘 구현되는 언
캐니는 억압된 무의식이 틈틈이 의식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데서 오는 낯섦이다. 그것은 교
육과 이성의 힘으로 단련된 현실원칙을 뚫고 들어오는 쾌감원칙이기에 갈등을 일으키는 어
깃장이다. 이러한 갈림, 혹은 타자, 이질성이 괴기한 느낌을 갖게 하고 독자를 모호함속에
사로잡아 작품을 지속시킨다. 쾌감의 충족을 지연시키며 반복되는 억압된 것의 귀환은 인간
의 본능이며 미학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리슨에게 언캐니는 단순히 미학이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녀에게 반복이란
타자를 인정하는 이웃의식이요, 앞으로 나가면서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자의식적 혹
은 분열된 주체요, 바흐친의 용어를 빌려 이질성을 받아들이는 갈림(heterogeneity)이요, 바
바의 표현을 빌리면 혼혈성(hybridity)이다. '빌러비드'의 124번지를 둘러싼 여러 이웃들의
혼성 적이고 갈림적인 들락거림에 의해 이루어진 소설의 짜임새 역시 혼혈적이다. 반복을
모르는 주체는 제국주의적 주체이다. 백인과 흑인 노예의 관계나 시드와 빌러비드의 관계는
둘 다 주체와 대상을 일치시키는 '더블'로서 진정한 언캐니가 아니다. 덴버, 엘라, 폴 디는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더블의 함정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모리슨의 반복은 문화적 차이
(cultural difference)를 인정하는 탈식민주의적인 언캐니라고 볼 수 있다.
흑인 여성작가로서 모리슨은 여성인물들을 중심으로 소설을 쓴다. 그러나 그들을 남성인
물에 의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는 입장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성인물을 자기 반
성적 주체로 그리면서 남성적 특성에 억압되어온 여성적 특성을 살려낸다. 이 소설에서 작
가 자신의 음성은 엘라라는 여성인물뿐 아니라 폴 디라는 남성인물을 통해서도 말해진다.
폴 디의 인내와 삶의 직관은 엘라의 것과 거의 비슷하며 게다가 부드러움이라는 여성적 속
성으로 시드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백인과 흑인이 악과 선의 이분법으로 축소되지 않듯이
남성과 여성도 그리되지 않는다. 다만 지금까지 제국주의가 반복을 모르는 프로이트의 원초
적 나르시시즘과 같은 것이었다면 남성 우월주의 역시 그런 것이었음이 유추된다.
프로이트의 언캐니는 억압된 것이 귀환할 때 느끼는 기이한 감흥이다.
우리의 본능 속에 있는 반복충동은 쾌감원칙보다 더 강렬해서 억압된 것은 현실의 옷을 입
고 나타나고 그래서 늘 다르게 되풀이된다. 다르게 반복될 때 생겨나는 이질성의 공간이 인
간의 유추를 가능케 하고 이 은유성이 무의식을 통해 의식의 명료성을 의심해보는 프로이트
와 사상이다. 그는 은유적인 것이 환유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원리라고 보
았던 셈이다.
시드는 어머니와 격리되었던 유아기의 상처를 그대로 빌러비드에게 옮겨준다. 그리고 백
인이 그랬듯이 빌러비드를 "너는 내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녀의 상상계적 착오는 덴
버라는 우수리에 의해 와해되고 이웃과 섞인다. 언캐니는 현실과 나란히 가는 게 아니라 엇
갈려 갈 때 일어나는 감흥이다. 그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이질성이다. 프로이트가 미학의 원
리로서 혹은 삶의 원리로서 설명한 '언캐니'는 흑인 여성인 모리슨의 입장에 적용되었을 때
탈식민주의 여성이론이라는 정치적 담론으로 바뀐다.
흑인문화와 백인문화 동양문화와 서구문화 그리고 여성과 남성은 이질적일 뿐 우월의 관
계가 아니다. 한 쪽이 다른 쪽을 완전히 지워 버릴수 있다는 중심주의는 언제나 잉여물 혹
은 우수리에 의해 전복된다. 프로이트의 '언캐니'는 해체론 이후 매끄러운 총체성을 와해시
키는 우수리로서 억압된 계층을 복원시키는 정치적 전략이 된다.
3. 나르시스적 주체의 슬픔
신화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신들의 사랑, 질투, 정욕, 복수, 허영, 의심, 그리고 탐욕은
인간의 것을 그대로 반영한다. 시인들은 그 이야기를 빗대어 자기 얘기를 하고 역사가는 그
얘기를 빗대어 자기 시대를 말한다. 보편성을 얻는 좋은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많은
신화 가운데 유독 몇 가지만 돋보여온 것은 왜 일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
이디푸스의 비극과 제 모습에 반해 죽은 나르시스의 비극만큼 인류문화사에 깊이 참여한 신
화도 없는 듯싶다. 힘든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은 늘 어릴 적 어머니의 품안을 그리워한다.
아버지의 세계인 사회는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야 되는 법과 질서의 세계이다. 그러나 어머
니는 아늑한 평화와 안식을 주는 너그러운 연인이요, 포근한 대지이다. 오이디푸스의 소망은
인간이 살아 있는 한 늘 갈망하지만 죽기 전에는 결코 이루지 못할 꿈이요 환상이다. 그의
비극은 의식의 세계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을 무의식중에 실천했기에 일어난다. 인간
의 운명을 이만큼 명료하게 그린 신화도 흔치 않으리라 그러면 나르시스의 비극은 인간의
어떤 면을 상징하는가.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죽은 이는 추한 노인이 아니라 젊은미남 청년이었다.
환상과 미망의 폭은 젊은 시절에 더 크게 인간을 사로잡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 신화는 그
보다 훨씬 더 인간 모두에게 내재된 미망을 상징한다.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느끼며 살았
고 많은 문학작품들이 주제로 삼아온 자아와 타자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을 설명해 보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나르시시즘은 좋은 근거를 제시한다. 왜 우리는 서로사랑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세상과 삶에 대해 정답을 내놓지 못하는가, 왜 인간
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끝없이 이어지는가. 아마도 이것이 인류의 문명과 문화사가 존
재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혹시 인간의 내부에는 타자와의 완벽한 교감을 가로막는 이물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나와 너의 사랑을 가로막는 나의 내부 속의 타자를 나르시시즘으로 설명해 볼 수는 없을까.
비록 그 설명이 낯선 이물질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해도 낯섦을 낯익게 만들어 더 큰 오해
와 혼란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역사 속에 얼룩진 미움과 폭력의 실체
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새들이 제 이름만 부르며 우는 이유를.
인간의 실존을 '불안'(anxietry)으로 규정한 실존주의는 기댈 곳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
의 심리를 적절히 포착했다. 그리고 산업사회가 한단계 더 나아간 오늘날에도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의 방황은 삶의 본질 마냥 짙게 깔려 있다.
김형경의 소설에서 불안은 "집 없는 세대"로 형상화된다. 그녀의 소설에서 '집'은 쉴 곳,
혹은 기댈 수 있는 거처의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그 곳은 맑고 투명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산실이다. 단편, '민달팽이'에서 집 없는 느낌과 닿을 수 없는 인간사이의 틈새를 살펴보자.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면서 '나'는 어릴 적에 외가에서 자랐다. 어머니와 함께
보낸 외가는 그후 객지를 떠도는 그녀의 마음 속에 낙원으로 자리잡는다. 과묵하지만 초췌
해가는 아버지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결코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 집을 안겨
주지 못하고 내내 방황하게 만들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녀의 기억 속에 아버지와의 교감
은 현미경을 통해 보여준 세상으로 남아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차라리 망원경을 보여 주셨
더라면 아버지를 쉽게 용서할 수 있었으리라고.
현미경과 망원경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물에 대한 미시적인 접근과 거시적인 접근의 차이
가 아닐까. 현미경을 통해 보는 세상은 안식처가 아니다. 수없이 자질구레한 분자들은 잠시
도 쉴 줄을 모르고 움직이며 유동적이다. 현미경을 통해 본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박해일 수도 있으며 이기심을 달콤하게 포장해놓은 당의정일 수도 있다. 현미경으로 본 마
음은 더 이상 순수한 단음조가 아니고 이성은 더 이상 투명하지도 않았다. 잠시도 쉴 곳을
찾지 못하고 흔들리는 세상에서 집 없는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도 역시 민달팽이다. 화자는
자신의 과거를 더듬으며 그를 보낼 때가 왔음을 느낀다. 민달팽이들의 사랑이란 지상에서
맺지 못하는 모든 사랑의 이름이다. 그들에겐 집이 없기에 어디로 신호를 보내야 되는지 늘
헷갈리기 때문이다.
선량함과 순수함이 어리석음으로, 똑똑함과 영민함이 교활함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그 막
막한 관계의 끝에서 가질 수 있는 선택은 상대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주
인공들처럼 이 단편의 화자 역시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사랑의 소음을 듣기 시작한다. 얼마
전에 그녀가 보았던 영화, '레이스 뜨는 여자'에서처럼 사랑은 소유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왜 사람들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고 그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자신의
취향대로 변화시키려는가. 사회적인 계급의 차이속에서 , 남녀라는 성차에서 그리고 사랑 그
자체 속에 사랑은 이미 폭력이라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진다. 그녀는 자아 속에 자신도 어쩌
지 못하 는타자를 느끼며 그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내면 속에서 타자를 느낄 수 있
는 '나'는 집 없는 존재이기에 적어도 상대방을 구속하거나 소유하려는 꿈을 버린다. 집이
없는 내가 어떻게 또 집이 없는 그를 가질 수 있는가. 그의 의지와 자유를 존중하는 것밖에
는.
'민달팽이'는 김형경의 소설 속에서 형태를 달리하여 되풀이되는 나르시스적 주체의 원형
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깊은 심연을 현미경으로 보는 그녀의 서
술방식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다. 이 좁힐 수 없는 영원한 심연은 그녀의 중편, '담배 피우는
여자'에서 베란다와 맞은 편 베란다사이의 깊고 어두운 나락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누군가
에게 보내는 글인 양 서간체의 형식을 지닌 것 같지만 결코 받아보는 상대가 없는 글의 양
식은 독백으로 머무는 단절의 주제와 잘 들어 맞는다.
소설의 화자인 '나'에게는 일을 하면서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다. 남편과 아이
가 있는 가정주부지만 남편은 매일 밤늦게 들어오고 아이는 유치원에 다닌다. 아침 일찍 해
장국을 끓이는 존재 이상은 될 수 없는 아내의 위치가 '나'를 텅 빈 맞은 편 베란다를 지켜
보거나 담배연기를 길게 뱉아내는 여자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맞은 편 베란다에
또 다른 담배 피는 여자가 나타난다. 나의 외로움을 반씩 나누어 가질듯이, 아니 기댈 곳 없
는 삶의 은신처를 담배 피우는 데서라도 찾은 듯이. 어느 날 나의 아파트 거실 깊숙이 뛰어
든 맞은 편 집 여자는 남편이 담배를 피우면 구타를 하기 때문에 베란다를 펄쩍 건너 뛰었
다고 말한다. 자신이 담배를 피우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는 남편과 아내의 흡연을 한사코 막
으려는 옆집 남자. 목숨을 걸고 난간을 뛰어넘으면서도 담배 피우기를 그만둘 수 없는 여자.
삶은 그렇게 겉돌았다. 그녀가 난간을 뛰어 건너려다 미처 발이 닿지 못해 캄캄한 심연 속
으로 기다란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간 후 '나'는 알게 된다. 그녀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남편
은 아내의 건강에 치명적인 담배를 못 피우게 막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사랑은 자신이 살기
위한 필요에서 나왔고 결국은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기에 이른다. 그토록 그녀를 사랑했다면
왜 담배에 의지하게 만드는 그녀의 외로움을 알아주지 못했을까. 사랑은 외로움을 치유하기
는 커녕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그녀를 죽일 수도 있는 잔인한 이기심일는지도 모른다.
지독한 무관심과 단절의 심연을 견딜 수 없어 담배를 피우는 나와 너무 지나친 관심을 견
디어내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는 그녀. 사랑하지 않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란 무엇인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기심 이외에 다른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콩 나물국을 잘 끓이는
것으로만 아내의 존재를 인식하는 남편과 그녀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기에 그녀의 목숨
을 앗아간 그 남자. 사랑이 이기적인 자기애의 다른 이름인 것을 모른 데서 폭력과 비극은
훨씬 더 커진다. 담배 피우는 두 여자는 집이 없는데서 서로 닮았다. 장롱 속에 웅크리고 앉
은 그녀는 '나'의 분신이고 맞은 편 베란다에서 본 그녀는 거울 속의 나이다. 두 여인은 사
랑이 없음과 사랑이 넘침의 피해자다. 그리고 둘은 베란다를 사이에 두고 영원히 서로 닿지
못한 채 헤어진다. 미끄러지는 나락은 자아의 내부에 있는 틈새이다. 나와 또 다른 나는 하
나가 되지 못하고 얼룩으로 남는다. 나는 늘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한다. 이제 조금씩 작가
김형경이 완강히 거부하는 정신분석에 접근해보자. 아니 우리는 이미 그 속에 들어온 지 한
참되었다.
김형경의 화자들은 유난히 자신들의 심리를 정신분석에 갖다 들이대지 말라고 강조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진단하지 마세요. 소외나 단절감, 혹은 무엇무엇으로 부터의 억압... 그런
분석은 사양합니다" ('푸른 나무의 기억', 문학과 지성사, 1995. 9) 그러나 화자의 거부는 읽
는 이를 끌어들이는 유혹이 될 수 있다. 아니 그녀의 소설을 일일이 정신분석에다 갖다 맞
추는 힘든 짓은 하지 않기로 다짐해도, 커다란 맥락이 프로이트의 사유체계에 맞닿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프로이트를 '꿈의 분석'만으로 이해하여 단순한 범성론자로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글가운데 인간의 심리를 나르시시즘으로 풀어본 예지에 잠깐 귀를 기울
여보자.
꿈이란 억압된 무의식이 위장된 이미지들로 나타난다고 본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의 꿈
을 분석하여 환자가 억압하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다. '꿈의 분석'은 그가 분
석한 많은 예들을 모은 초기의 저서이다. 그러나 이 책만으로 프로이트를 이해할 경우 그는
모든 형상들을 남녀의 성기와 연결시키고 자의적으로 꿈을 분석한다는 인상을 얻기 쉽다.
그가 일생에 걸쳐서 쓴 수많은 글들은 그 책보다 훨씬 더 깊은 삶의 혜안을 보여준다. 자아
와 타자의 문제, 여성성에 관한 문제, 그리고 문명사에 관한 이해 등 과학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많은 글들은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는 설득력 있는 근거를 암시한다.
그가 꿰뚫어본 인간의 비극 가운데 가장 압도적인 것은 바로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없나 라는 영원한 물음이었다. 나르시시즘으로 이 딜레마를 풀어보자('나르시시즘에 관하여'
On Narcissism: An Introduction,1914). 물 위에 비친 아름다운 청년에게 매혹되어 물 속에
몸을 던진 나르시스의 비극은 인간의 자아형성과 타자인식의 바탕이 되는 게 아닐까 프로이
트는 여기에서 출발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겪게 되는 외계와의 접촉은 일생동안 중요한 경험으로 남는다.
어머니와 가졌던 충만한 시절은 늘 되돌아 가고픈 낙원으로 새겨진다. 그때는 성차도, 종족
의 차이도, 빈부의 차이도 느낄수 없던 시절이었다. 현실이 고달프고 불만스러울수록 그 시
절은 비대해진 그리움으로 채색이 된다. 아버지의 질서와 법이 우리를 구속한다고 느낄수록
어린시절의 무한한 자유와 아늑한 품은 되돌아가고 싶은 이상향이 된다.
프로이트는 왜 우리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왜 우리는 문명 속에서도 불만을 느끼는지
설명해보려 애쓰다가 그런 가정을 세우게 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어린시절의 행복
했던 경험은 의외로 아주 가까이에 묻혀 있다가 틈틈이 우리의 사유체계를 간섭한다고. 그
러기에 이성의 판단이 그토록 많은 오차를 내고 우리가 의도한 것과 그것의 결과가 그렇게
도 달라지는 게 아니냐. 너 하나만을 사랑하겠다는 맹세는 부질없이 깨어지고 더 잘 살아보
겠다고 고안해낸 기술문명과 제도들은 인간성을 황폐하게 만들고 공해를 낳는다. 너무도 익
숙하지만 아무도 설명해 낼 수 없는 이런 문제들이 프로이트의 화두였다. 그는 현실의 이면
에서 끊임없이 그것을 거슬러 반대방향을 지향하는 또다른 힘을 무의식이라 가정한다. 무의
식은 어린시절에 어머니의 품안에서 누렸던 무한한 기쁨의 순간들로 쾌감원칙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아형성의 과정에서는 '근원적인 나르시시즘' 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나르시시즘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물 속에 빠질 때 제 모습에 반했기 때문으
로 보아 자기애의 극치로 풀이하는 경우와 타인으로 착각하여 물에 빠진 경우로 보는 것이
다. 나르시스가 워낙 자기 자신만을 사랑해서 요정들의 원성을 샀으니 첫 번째의 해석도 가
능하고 착각이 개입되지 않는 나르시시즘이란 별 의미가 없으니 두번째 해석도 가능하다.
프로이트는 '근원적 나르시시즘'을 인간이 태어나서 경험하는 최초의 자기충만으로 보아 대
략 생후 2세부터 4세 사이로 잡는다. 이때 유아가 접하는 외계는 완전하다. 사실은 어머니나
누이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아이는 제 혼자서 느끼는 충만한 지복이라고 믿는다. 지복의 순
간은 짧고 그러기에 그 맛은 영원히 떠나지 않는 이상으로 인간의 뇌리에 남는다. 아이는
커가면서 차츰 외계에 눈뜨기 시작한다. 타인의 존재는 두려움으로 다가오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세계와 접촉해야만 한다. 그는 가족이 아닌 대상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것
이 아버지의 법이다. 그는 불안에 가득 찬 눈으로 새로운 대상에게 접근한다. 언제든지 자아
에게 되돌아 올 준비를 하고서 그것도 아주 재빨리. 그의 마음속에는 지복의 순간이 자리잡
고 있어 그가 추구하는 대상은 바로 그것이지만 잡고 보면 늘 그게 아니었다.
가족 안에서 찾던 대상을 밖에서 찾아야 되는 현실. 성의 대상과 자아가 일치하던 낙원에
서 분리가 일어나는 실낙원으로 옮아가는 데 인간의 비극이 있지만 더 큰 비극은 실낙원에
사는 데도 늘 낙원을 꿈꾸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는 착각에 있다. 그래서 그는 영
원히 "바로 그것"이라고 믿고 붙잡지만 그 순간 쭈르륵 미끄러지고 만다. 그는 늘 마음속에
닿을 수 없는 심연을 지니고 살며 그가 내리는 판단은 투명할 수가 없다. 주체는 나르시시
즘 위에 세워지기에 지을 수 없는 이물질인 타자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김형경이 그녀의 소설 속에서 끈질기게 매달리는 화두인 인간과 인간사이의 단절과 소외
의 문제를 나르시스적 주체의 맥락에서 풀어보면 어떨까 싶다. 민달팽이처럼 집 없는 느낌,
외가도 아버지의 집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집 없는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운 방황이나 사랑이
지닌 잔인함이나 그것이 소유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 그리고 담배 피
우는 두 여자 사이에 가로놓인 깊은 심연 등, 민달팽이의 사랑과 선택에는 늘 미끄러지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제 나르시스적 주체를 사치적 문맥으로 끌어 내보자.
1. 현미경으로 본 어둠의 속
인간의 욕망이 자기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사회적인 정의는 어떻게 마련되어야
할까. 근원적인 나르시시즘이 무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한 너를 위한 희생이나 민
족을 위한 주장이 가능할까. 김형경의 단편 '단종은 키가 작다'와 '헹가래 치기', 그리고 '무
거운 어둠'은 개인의 욕망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재단하는가, 억압받는 민중 혹은 대중의
욕망이 어떻게 이 시대의 영웅을 만들어 내는가, 그리고 모든 탓을 외부로만 돌리려는 대중
은 무엇을 간과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작품들 속에서 작가는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
법적인 적대관계를 허물고 그 자리에서 모든 인간의 의식 속에 내재한 어둠의 속을 꿰뚫어
보려 애쓴다.
강원도 산골짜기 작은 마을은 일 년에 한 번씩 떠들썩한 행사를 치른다. 화자인 '나'는 영
월읍 최대 행사인 단종제를 보러온다. 각 지방에 흩어진 전래 민속놀이를 모아 분류하는 일
에 의미를 두었던 나는 단종제가 지방의 유지나 권력층에 의해 이용되는 것을 본다. 예전에
는 이씨 문중의 유생들에 의해 이루어지던 행사가 지금은 지배층이 화해운운하며 정치적 욕
망으로 굴절시킨다. 겨레와 민족을 앞세우며 자기욕망 채우기에 급급한 것이다. 단종의 키를
자기 욕망에 맞추어 만들어내는 지배층의 이기심과 말없이 한구석에서 단종의 유배를 가슴
아파하며 절을 올리는 농부의 아낙네가 대조되면서 단편 '단종은 키가 작다'는 끝난다.
그러나 단종의 키는 반드시 기득권층에 의해서만 굴절되지는 않는다.
'헹가래 치기'에서 민중은 자기들의 욕망 때문에 영웅을 만들기에 언제든지 받치던 손을 놓
아버릴 수 있다. 이 단편은 떠받쳐진 소영웅이나 받들고 있는 대중 모두를 비판적인 시각에
서 본다 영혼의 자유로움과 삶의 무중력 상태에 대해 얘기하던 한 소박하고 진실했던 무명
가수가 민중가수로 떠오르면서 변질된다. 히트곡을 내고 유명해지면서 그는 노래가 좋은 세
상을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면서 노동자의 편에 서고 시위현장을 따라다닌다. 그는 더 이
상 외적인 환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어 그가 한때 누렸던 진정한 자유를 잃는다. 언
제 그들의 변덕에 의해 땅 위로 추락할지 모르는 그에게 음악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게 아
니라 그의 자아 이상(ego-ideal)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
사회 속에 들어서면서 자아는 타인을 의식하는 자아 이상을 갖게 된다. 이 자아 이상은
사회가 요구하는 '나'이기에 나르시스적 자아와 달리 이타적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자아 이상은 순수한 이성이 될 수 없다. 그 뒤에는 사라지지 않고 틈틈이 귀환하는 근원적
나르시시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수하게 이타적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은 현미경으
로 들여다보았을 때 자기애에서 출발한다. 이런 프로이트의 암시는 이 단편에서 한 무명가
수의 소영웅주의와 변덕스러운 대중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자아 이상이 자아
로부터 너무 멀리 가버릴 때 온갖 출세와 명예에도 불구하고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
에 있다.
단편 '무거운 어둠'은 대학의 연극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하여 인간의 영웅심리 속
에 도사린 교활한 이중성과 모든 사태를 외부에서만 찾으려드는 민중의 우매함을 그린다.
사실 이 둘의 관계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카리스마적 지배욕을 그럴싸
한 말로 감쪽같이 위장하고 가장 민주적인 체하는 연출자의 이중성을 꿰뚫어 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런 교활함은 늘 원인을 반대쪽에서만 찾으려드는 인간의 피해의식 위에 뿌리
내리기 때문이다. 폭력의 악순환은 바로 망원경으로만 사태를 보는 데 있지 않을까. 작가는
인간의 내부에 잠재한 이기심을 꿰뚫어볼 현미경이 함께 필요하다고 암시한다.
현미경으로 보는 인간의 세계는 지극히 회의적 이어서 사회의 정의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지 답답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김형경이 현미경을 들이게는 현장은 지금
까지 별 의심을 품지 않고 우리가 정의라고 믿어온 것들에 대한 의심이요, 망원경만으로 문
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단순한 추종에 대한 염려이다. 이제 말과 설득, 이념, 지배와
피지배의 갈등에 대한 탈신비화 작업을 벗어나 후기 산업사회의 여러가지 현상에 대한 풍자
와 비판으로 넘어가 본다.
2. 현대 산업사회와 주체 속의 타자
인간은 더 많은 사람이 더 편리하게 더 잘 살기 위하여 도구를 사용하고 기술문명을 발전
시켜 왔다. 문명은 인간이 동물과 달리 이성의 소유자라는 자랑스러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이룬 기술과 개발은 거꾸로 인간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인성의 황폐화는 어쩔 수 없는 인구증가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성을 너무 믿은 데
서 일어난 시행착오는 아닌가. 인간 중심주의의 허구를 드러내고 자연과 인간을 동등하게
대하자. 이성 중심주의가 낳은 예기치 못했던 여러 징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의도와 결과
가 달라진 이유를 겸손하게 찾으려 했다.
우선 이성의 명령이 실천되는 단계에서 어떤 욕망이 개입되는가 보자.
주체 속에는 투명한 실천을 방해하는 타자가 들어 있는 게 아니냐. 인간의 꿈과 개발이 어
느 정도 이루어졌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해온 일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사불란
한 시도를 가로막는 이물질인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
은 이런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시도 역시 타자를 지니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 욕망
과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그들의 의도는 이성의 투명성을 의심해보고
무조건 앞으로만 치닫는 산업화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었다. 김형경의 최근 소설들은 바
로 인간이 만든 기계와 후기 산업사회의 징후들이 어떻게 주인을 소외시키고 오히려 그들의
노예로 만드는가를 보여준다.
자동차의 핸들 위에 놓인 손, 컴퓨터의 키보드 위에 놓인 손을 바라보며 '손은 몸으로 돌
아가고 싶다'의 화자는 더 이상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손을 본다. 자신의 의지대로 손을 움
직이던 시절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어릴 적에 그토록 싫어했던 국수장막. 그러나 아버지도
기계에 의해 손을 잃었고 라면이 나오면서 손의 쓸모를 잃는다. 활력을 잃고 점점 무력해지
는 현대인의 아내 역시 그런 남편과 조금씩 멀어진다. 그들은 서로의 가슴속에서 '낮은 곳
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단층'을 본다. 이 단편은 아내와 멀어진 남편이 과거를 떠올리면서
손이 도구였던 옛날을 그리워하지만 그것이 인류가 지향해온 발달이라는 과정의 산물임을
의식하는데서 끝난다. 체념, 무력함, 아니 발전에 대한 반성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히 기술의
발달이 부른 아이러니와 함께 이성의 투명성에 대한 회의가 짙게 배어나온다.
무력감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탈출구 없는 현실의 압박감에서 나온다. 단편, '푸른 나무의
기억'은 무력감을 넘어서 아예 현실에 철저히 적응하는 한 도시인의 일상을 코믹하게 다룬
다. 그는 늘 호주머니에는 돈 한푼 없으면서 한 번 멋지게 큰 돈을 벌어보겠다는 소망을 품
고 산다. 아이디어 시대를 풍자하듯이 그의 머리 속은 갖가지 기발한 돈벌이 궁리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거의 다 해버려 늦게 태어난 것이 한스럽다. 무엇에 기대
어 살 것인가, 밀가루 반죽처럼 뒤죽박죽인 세상. 그는 도시의 나무처럼 겉은 멀쩡해도 속은
병들어 있다. 비록 나무처럼 언젠가 푸른 들판에서 자라던 기억이 남아 있지만 그는 아주
건강하다. 이 단편의 묘미는 그가 병든 현실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현실에 부지런히
적응해 가면서 스스로를 아주 건강하다고 믿는 데 있다. 오염이 더 이상 오염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너무 깊숙이 그 속에 빠진 탓이다. 독자가 느끼는 건강과 오염의 차이는 주인공
이 느끼는 차이와 다르다. 미학적인 거리를 주어 허황한 몽상가를 만드는 아이디어의 시대
를 풍자하는 기법이다.
후기 산업사회는 감동이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충격적인 일들이 매일 쏟아져 나오는 현
실에서 사람들은 이미 감각이 무디어 졌거나 힘든 경쟁 사회를 살아내느라 스스로 무감동해
졌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회 속에서 감동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다.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팀은 감동을 만들어내기 위해 거짓 각본을 꾸민다. 드라마도 아닌 실
제 인물에 관한 원고를 꾸며 쓰는 일을 하면서 화자는 묻는다. 대체 우리는 무엇에 의해 휘
둘리고 있느냐고. 이제 어떤 자극과 충격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
단편 '수레 국화가 말하기를'에서는 기만과 자극의 농도가 갈수록 강해져야 하는 고도의
기술경쟁 사회의 단면이 한 극본가의 고뇌를 통해 비추어지고 있다. '별을 분양해드립니다'
역시 각종 광고 문구로 머릿속이 가득 찬 한 광고 회사원의 허위에 가득 찬 삶을 담는다.
시골의 흙에 묻힌 선배의 새 삶을 돌아보고 광고 만들기란 환상과 거짓을 파는 행위임을 알
면서도 그는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자신이 만든 문명의 산물들이 거꾸로 그를 가두는 덫이 된다. 김형경의 최근소설들은 이
런 아이러니를 광고, 다큐멘터리, 아이디어 지상주의 속에 깃든 환상과 허구를 통해 보여준
다. 주인공들은 그런 세계 속에 던져진 채로 잘못되었음을 막연히 느끼지만 어떤 저항도 하
지 못한 채 무기력하다. 초기의 소설들이 저항과 지배 속에 깃든 타자를 보여주었다면 최근
의 단편들은 제도와 흐름의 일부로서 막연히 느끼는 거부감을 보여준다. 잘못이 외부에서만
온다고 믿는 피해의식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주체가 지닌 나르시스적 자기애를 보여주던 서
술에서 더 이상 저항할 외적인 대상이 사라진 시대에 느끼는 불안감으로 옮아간다.
이런 변모는 무엇을 의미할까?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동구권이 무너지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이념의 논쟁이나 저항할 구체적인 대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성큼 무한경쟁이라
는 후기 산업사치의 징후들이 나타난다.
이제 억압의 대상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억압의 실체도 인간스스로가 즐거이 참
여하고 마련해온 산업사회요 기술문명이다. 그러기에 거부감은 인간의 이성이 만든 덫과 인
구의 증가와 자연의 소모에서 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의한 것이어서 저항보다는 반성과
무력감이 흐른다. 의도한 것과 결과가 빗나가는 모순된 역사가 주체 속의 이물질인 타자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김형경이 여러 단편들을 통해 추적해온 주제는 이제 한곳으로
모아져 장편소설로 나타난다. 외적인 저항의 대상이 존재했던 80년대의 학창시절을 돌아보
고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따스한 연민으로 추적한 장편, '거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이다. 지금까지 암시적 배경이던 '달라진 시대'가 확연히 나타난다. 아
니 그 자체가 주제이다. 그리고 역시 암시적이던 '나르시스적 주체'가 주제는 물론 기법으로
승화된다. 젊은 시절의 정의감, 맑고 순수했던 현실개혁에의 의지가 이전 작품들과 달리 회
의적인 시선으로 전달되지 않고 진지한 열정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열정을 알면서도 한
마음이 될 수 없는 저마다의 입장이 무리 없이 서술된다. 마지막으로 서로 사랑하면서도 맺
어지지 못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나르시스의 슬픔으로 작품 전체
를 감싸안는다. 지금까지 써온 글들의 총화랄까, 순수한 열정에 대한 공감과 죄의식이 압도
적인 분위기여서 무력감 대신에 기대와 동정이 앞서고 여전히 인간사이의 심연이 존재하지
만 그것이 사랑의 진실과 서술기법으로 전달된다. 이제 새들이 제 이름만 부르며 울 수밖에
없는 단절과 시대적인 아픔을 글이 쓰여진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다. 이 작품의 품위
는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일까.
3. 새들은 왜 제 이름만 부르며 우는가
민중벽화는 80년대 격렬한 대학생 시위문화의 주요한 부분이었다. 민중의 시와 벽화를 중
심으로 모였던 다섯 명의 대학생들이 세월이 흘러한 여학생의 자살을 계기로 다시 만난다.
맑고 순수한 의지로 투쟁했던 최민화의 죽음이 나머지 친구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반향, 그것
이 서술의 핵심이다. 따라서 핵심인물인 최민화는 서술의 주체가 아니고 대상이다. 그녀의
존재는 네 인물이 번갈아가면서 서술하는 가운데 형상화되며 아무도 그녀의 열정에 대해 비
웃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와 졸업 후까지도 만나고 늘 도우려 애쓰지만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삶을 대하는 시각이 달라 그녀를 구해내지 못한 진은혜, 한때 은혜를 좋아했지만 마
음을 전하지 못하고 고등학교 미술교사의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착 하고 과묵한 구운
형, 운형의 묵묵한 인내를 못마땅해 하고 형조의 개인전을 오해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
기에 결코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김시현, 그리고 사상적으로 민화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고
마지막 죽음의 현장에도 있었지만 결코 그녀를 구해낼 수 없었던 민중화가 민형조. 서술은
이 네 사람이 차례대로 두 번씩 맡아 모두 여덟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서술자는 내포작가 한 사람이지만 부분마다 시점자가 달라지는 입장서술이다. 하나
의 서술자가 운형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다음에는 은혜와 입장에서 서술하기에 문체는 달라
지지 않고 중심인물만이 달라진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개인의 입장에 따라 다르고 그러기
에 인간 사이의 단절과 심연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작품의 주제와 잘 맞아드는 기법이
다.
심한 두통으로 시달려 정신과 의사를 찾는 운형, 잡지사에 근무하는 은혜, 명상원을 운영
하는 시현, 그리고 탄광촌에서 노동하며 그림을 그리는 형조는 어느 날 민화의 죽음으로 한
데 모인다. 그들은 서로가 그녀의 죽음에 깊은 죄의식을 느낀다. 죄의식은 경찰이 자살 방조
자를 찾는 추리극으로 발전되고 형조가 현장에 있었음이 드러난다. 밤이면 서울의 곳곳에
그려지는 벽화사건의 범인 역시 형조였다. 형조의 재판, 운형의 죄의식이 부른 시력상실, 끝
까지 형조를 사랑하고 돕지만 맺어지지 못하는 은혜, 자조 속에서 인도로 고행의 길을 떠나
는 시현, 그리고 운형을 사랑했지만 죽는 순간에 밖에 말할 수 없었던 민화의 이야기가 파
편화된 서술 속에 묻힌 내용이다.
이런 스토리는 네 명의 시점자에 의해 전달되기에 겹치는 부분도 있고 주로 의식을 더듬
기에 행동보다 서술이 더 많아 플롯을 느슨하게 만들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면서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와 개인을 둘러싼 지극한 고독 그것으로
인한 열정과 방황이라는 젊음의 고뇌가 느슨한 플롯에서 오는 지루한 읽기를 밀어낸다. 또
한 비슷비슷하게 착한 인물들 가운데 유독 톡 튀는 인물이 있어 서술의 평면성을 보완해준
다. 사실 이 인물이 없었더라면 소설은 감상성이지나치고 인물들 사이의 변별성이 약해 성
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바로 김시현이다. 작가는 한쪽 눈을 반쯤 감고 인물들을 연민의
눈으로 보다가 이 인물에 오면 정신이 번쩍난다는 듯이 두 눈을 활짝 뜨는 느낌이다.
김시현은 자기학대와 고독이 묘하게 한 자리에 있으며 세상을 뒤틀린 마음으로 보면서도
그 세상에 누구보다 적응을 잘하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작가가 지금까지 그려온 위선적인
인물들의 총화라고 볼 수 있는데 다른 점은 그의 뒤틀린 삶이 기댈 곳 없는 고독 때문이라
는 암시가 있어 풍자지만 냉소보다 연민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그는 왜 사랑을 할 수 없
는가 라는 이 소설의 주제를 살리는 데 단단히 한 몫을 한다. 다른 인물들이 막연히 내부의
타자에 의해 오해하거나 전혀 의식하지 못하거나 (운형의 경우) 용기가 없어 말을 못할 때
(형조의 경우) 오직 이 인물만은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덥썩 차지한다. 그에게 사랑은 성욕
의 해소와 자기과시를 위한 도구이다. 그는 정의를 보면 화가 나고 온당함에는 혐오를 느낀
다. 그에게 사랑은 학대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에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
에 명예와 과시욕에 허덕인다.
운형은 은혜를, 은혜는 형조를, 형조는 은혜를, 민화는 운형을 사랑했고 시현은 아무도 사
랑하지 못한다. 다섯 사람은 각기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 타인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 마치
새들이 제 이름만 부르며 우는 것처럼. 이 소설은 지나간 운동권 시절을 되돌아본 회고의
서술일 뿐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그린 것이기도 하다. 달라
진 시대에 더 이상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한계는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민화의 아픔에 공
감하면서도 아무도 그녀를 구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데 방조한다. 물
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은혜는 약을 구해주고 시현은 죽으라고 소리치고 운형은 그녀
를 외롭게 만들었으며 형조는 그녀가 정말로 암에 걸린 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이런 설정은 그녀의 죽음을 사회적 책임으로 환원시키는 해석을 내리게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주체 속의 타자' 라는 문맥에서 보면 그보다는 좀 더 복합적인 해석을 내
릴 수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 인간이해의 한계를 보여주어 우리에게 과연 사랑이란 어떤 형
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진실이 입장의 산물일 때 우리가 의지해야 할 기준은
어떤 것인지 묻는다. 다원화와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는 시대를 반영하는 기법이면서도 절대
가치를 추구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다. 결코 되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과거, 모르고 흘려보낸 시간들이 아쉽게 작품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김형경의 작품세계를 '나르시스적 주체의 슬픔'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인
간은 어릴 적에 느꼈던 지복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 이상향에 대한 꿈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자아와 타자가 완전히 일치하던 나르시스적 자기애는 주체형성의 기본
이 되어 의식을 간섭하는 타자로 영원히 자리잡는다. 내면에 있는 무의식의 존재가 타인과
의 완벽한 의사소통을 가로막고 말의 투명성을 방해하며 의도와 결과를 빗나가게 만든다.
가장 최근에 쓰여진 중편,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을 보자. 암선고를 받은 아내가 이혼한
남편을 다시 만나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한다. 남편은 정보화사회니 컴퓨터니 빠르게 달라지
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아내에게 마음 쓸 여유가 없다. 삭막한 도시에서 정 붙일 곳을 잃
은 아내는 마음 속에 깊은 골을 키워가고 결국 이혼하기에 이른다. 세월이 흘러 암선고를
받은 어느 날 둘은 다시 만나 그들이 낭비해버린 소중한 시간들을 돌아본다. 왜 좀 더 일찍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가, 말을 해도 알까말까한데 왜 우리는 서로 마음을 열지 못하는가.
그러나 불투명한 이성을 끌어안고 살기에 우리는 늘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고 그런 물음이
지속되기에 소설은 쓰이고 또 쓰이는가 보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심리를 나르시시즘으로 설명한 것은 물론 가설이다. 인간의 자만과 독
선을 경고하기 위해, 우리 삶의 한계를 짚어주기 위해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신화로부
터 그런 가설을 끌어내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그런 가설 위에 쓰여진 또 하나의 가설이 된
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설 아닌 진리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프로이트의 글이 주는 품위
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과 타인에 대한 따스한 이해를 통해 올바르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데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작가의 품위이기도 하다.
4. 에로스와 문명
혼혈성(hybridity)이란 단음조, 혹은 배타성에 반대되는 용어로 최근이론들에서 자주 언급
된다. 하나의 음성과 반대 음성이 공존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논리에서 혼혈성은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이나 탈식민주의 혼성서술, 그리고 호미 바바(Homi Bhabha)의 문화이론 등
이 시대 사상과 서술양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바는 문화적 혼혈성의 근거를 데리다와 라캉, 아니 누구보다 프로이트에게서 찾는다. 의
미의 흘러 넘침, 틈새, 양가성, 어김, 모호성, 우수리는 혼혈성과 거의 같은 맥락의 말이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독자성에 어깃장을 놓는 갈림으로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이다. 또한 분석
자와 환자사이의 '전이'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신분석은 근원이 어딘가에 온전하게 묻혀진
게 아니라 둘 사이의 욕망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눈덩이처럼 덧붙여지는 대
화의 산물이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암시했지만 인정하기를 망설인 전이를 한층 더 밀고 나
가 분석이란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바로 지금 너의 욕망을 묻는 것이라고 말한
다. 의미는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표층 위에, 현재의 욕망속에 떠있는 것이
다. 이런 의미의 산종 혹은 덧칠해짐을 언어철학에 대입시킨 것이 데리다의 산종이다. 근원
의 독자성을 의심하며 의미란 둘 사이의 대화 속에서 덧칠해지며 만들어진다는 것은 의미를
자꾸만 지연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맥으로 확장시켜
보자.
오늘날 우리가 "전통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흔하
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의 유교 문화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불교문화의 흔적이 많았다. 물론
그 이전에는 또 다른 문화의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란 무엇인가. 시간이 흐를
수록 원래의 것에 외래의 것이 덧칠해진 것이다. 어느 시대의 것을 고유 문화라고 가려낼
수 있는가, 유교 문화라고 하지만 중국과 달리 한국적인 것이요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지만 순전한 서구가 아닌 이유는 문화란 그렇게 순수한 것이 아니고 이미 덧칠해진 것에 자
꾸만 덧칠해지는 혼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바바는 이것을 데리다의 산종(dissemination)을 본따 문화의 산종(dissemination)이라고 표
현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의미가 산종된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와 서사'(Nation,
Narration)에서 한 국가의 개념이 서사임을 암시했다. 역사가 서사이듯 국가라는 개념도 독
특하고 고유한 고정불변의 개념이 아니라 엮이고 짜여서 그럴 듯이 꾸며진 서술이다. 그런
데 이런 바바의 문화의 혼혈성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전이, 언
캐니, 모호성, 양가성, 상징계를 전복하는 우수리인 라캉의 실재계 등이다. 한 나라의 문화는
이미 혼혈적이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덧칠해지는 전이의 산물이다.
문화가 그렇다면 문명은 어떨까. 문명의 기원은 무엇이고 그것의 발생과정은 어떤 형식의
서사일까. 프로이트의 글 가운데 문명비판에 관한 글들을 더듬어보자. 프로이트의 글가운데
에서 지금까지 가장 주목을 받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분야이다.
그는 초기에 무의식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발적이고 혁명적인 글인 '꿈의 분석'을 비롯하
여 '성이론에 관한 세 글', '히스테리 분석의 파편','창조적 작가와 백일몽', '문명화된 성도
덕과 현대 신경증'등을 썼다. 이런 혁명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양가적 입장을 취하여
그가 강조한 에로스와 리비도는 그것을 억압하는 문명이나 현실원칙과 역동적인 긴장을 이
룬다. 이때 나오는 글들이 주체와 성본능을 밝힌 '나르시시즘에 관하여'와 '본능과 그것의
변모', 그리고 미학에서 중시되는 '언캐니', '쾌감원칙을 넘어서', '미켈란젤로의 모세상'등이
다. '반복충동'이라는 후기의 중요한 개념이 선을 보이는 시기도 이때였다. 성이론의 혁명성
이 '여성성'과 같은 후기 글에서 현실을 설명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내비칠 즈음 프로이트는
사회와 문명에 대한 글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욕망과 현실, 혹은 성과 사회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에 그의 사회 문명론
이 꼭 후기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초기의 글보다 그쪽에 더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은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인종차별과 박해가 심해지던 시기였고 그런 현실에 대해 그는 무엇인
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역사에 대해 더 관심을
보이게 되는지도 모른다. 무의식의 발견과 억압된 무의식이 되돌아 오는 것은 그의 글 전체
를 통해 일관성있게 되풀이된다. 그리고 무의식과 성이론. 그리고 미학이론은 그후 많은 사
람들의 관심을 끌어 반박되고 재창조되어 왔지만 문명론 분야만은 큰 반응을 일으키지 않아
왔다. 특히 이시대에 와서는 여성이론가들이 무의식과 성을, 서사론자들이 미학이론을 논의
하고 부활시켜왔다. 최근에 몇몇 이론가들이 문명분야를 조명하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아직
활발하지는 않다. 왜 그럴까. 혹시 그 분야가 지닌 터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종교의 기원을
파고든다는.
이 글의 목적은 프로이트의 글들속에 일관되게 되풀이되는 '억압된 것의 귀환'이 사회이
론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고 그것이 지닌 한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대
에 어떻게 재해석될 수 있는지 알아보는 데 있다. 다 문화주의, 혹은 탈식민주의에서 멋지게
프로이트를 재해석한 바바의 문화의 혼혈성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문화가 어떻게 자리잡
는지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문명의 기원 혹은 종교의 발생은 어떤 짜임새로 시
작되었을까. 그것은 분명히 동양의 종교관과 큰차이가 있을 것이다. 혁명적이니까. 아니 죄
의식의 문화를 낳는 지극히 보수적인 것일는지도 모른다.
혁명성과 보수성 사이에서 늘 긴장을 유지해온 프로이트의 글들에서 무의식의 귀환이 어
떻게 되풀이되는지 보자.
1. 에로스와 문명의 밀월관계
인간은 왜 늘 행복해지려고 애쓰면서도 완전한 지복을 맛보지 못하는가. 그렇게도 원하는
대상을 얻었지만 행복은 찰나적인 것일 뿐 다시 마음 속에는 뭔가 공허가, 불만이 고인다.
내일, 내일이면 뭔가 끝이 보이겠지. 그러나 가슴 속의 고동이 멈추는 순간에 그는 삶이 참
허무했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데 그렇게 많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
였다는 말이지.
이 결핍과 불만은 어디에서 오는가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밥먹고 노동하고 잠자는 시
간을 빼놓고 문득문득 삶의 참모습을 더듬지 않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철학자와 예술가는 그
것을 파고들어 매개를 통해 표현하려 애써왔다. 누가 더 리얼하게 삶의 실체를 그려 내는가.
물론 프로이트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인간의 불만과 허무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더듬어간다. 가장 불만을 다스리지 못하는 밀려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치료가 과학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분석이란 기억을 통해 마음을 읽는 작업이기에
그는 가설을 세우고 허구가 개입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오히려 이 과학과 허구의 공간에서 그의 위대성을 읽어낸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소망은
무엇일까. 어떤 소외가 가장 치명적인 것일까.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온 일, 거기서부터 숨
쉬기가 시작된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 이것이 삶이라면 탄생도 죽음도 어
머니, 대지, 흙과 연결되고 우리가 뿌리내린 이것으로부터의 분리가 우리를 불안과 결핍에
시달리게 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고 아버지에 의해 간섭받는다. 비록 떨어져 나왔
지만 아직 그녀의 품안에서 잠들던 시절 아이는 평화와 아늑함을 맛본다. 둘 사이를 가로막
는 타자를 모른다. 그녀가 나의 결핍을 완벽히 충족시켜 주듯이 나는 그녀의 완전한 연인이
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둘 사이를 가로막는 최초의 타자를 의식하게 된다. 아버지다. 그
리고 그녀가 이미 아버지의 연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타자의 존재를 알게 되는 순간은 아이
에게도 치명적인 순간이지만 인류에게도 원죄를 짓게 되는 순간이다. 낙원의 상실이다. 보기
만 하던 아이는 이제 자신이 보여지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에 의해 보여짐을
의식하게 되면서 아이는 아늑한 평화와 지복을 잃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애쓴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에 의해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아버지에
대해 두려움과 애정, 증오와 사랑이라는 양가적 감흥을 갖게 된다. 억압이 시작되고 불안이
자리잡는 순간이다. 아버지는 현실원칙이요, 사회의 법이요, 문명이요, 종교이다. 그런데 문
제는 아이가 아무리 현실원칙을 받아들이려 해도 한 번 맛본 지복의 순간을 잊지도 포기하
지도 못한다는 데 있다.
유아기에 경험한 최초의 성은 아이의 일생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늘 그 그늘 속에서 대
상을 찾고 그녀가 아닌 것을 알고는 실망한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그때 그 시절, 그리고
입맞춤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던 그때 그녀를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삶의 허무와 존재의 결핍을 낳는 비극의 근원이고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이다.
낙원으로 돌아가고픈 갈망은 끈질겨서 꿈으로, 성욕으로, 말 실수로, 예술로, 문명으로, 그
리고 종교로 승화되지만 소망은 결코 완벽하게 충족되는 법이 없다. 어머니와 하나가 되는
길은 오직 하나, 대지의 품에 안기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머니는 에로스요, 아
버지는 이 에로스를 가로막는 문명이다. 그리고 이 셋이 이루는 가족 로맨스가 프로이트 이
론의 출발점이다. 그러기에 모르고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눈을 찌르고 참회
하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프로이트에게 인간의 무의식적 소망과 비극을 가장 잘 그려낸 신
화였고 그 소망이 단념되지 않고 귀환을 꿈꾸며 남아 있기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된다.
에로스와 문명은 서로 적이면서도 친구이다. 에로스를 가로막는 게 문명이지만 그 에로스
는 가로막는다고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달리하여 나타나기에 문명 속에 어떤 식으로든 자리
를 잡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질적이면서도 같은 면인 것이다. 적과의 동침이랄까. 그
래서 어머니의 사랑을 제외한 모든 사랑에는 증오가 깃들어 있다. 그리고 문명이 아무리 발
달해도 인간은 결코 마음의 안락을 되찾지 못한다. 아니 반대로 문명이 발달할수록 안락과
평화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그의 글, '문명화된 성도덕과 현대 신경증'에서 찾아보자.
문명이 발달되면 도착적인 성이 줄어들고 가족을 중심으로 안락이 이루어질 것이다. 성이
란 즐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아이를 낳아 잘 길러서 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한것이다. 인간
의 이성은 감성을 누르며 이렇게 속삭여왔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해도 성욕은 형태를 바꾸
어 존재할 뿐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리 비밀스런 성이 자꾸만 늘어
가느냐고. 만화, 영화, 포르노, 창녀, 그 외 곳곳에서 금기된 성은 도처에 숨어 있고 호모, 레
스비언 등 성도착도 줄어들지 않는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성도착은 더 증가했다.
프로이트는 신경증과 불만에 가득 찬 현대인들의 병적인 증세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득한
옛날에 인간은 아무런 금기 없이 자연스럽게 성을 즐겼다. 이때 성이란 아주 넓은 의미의
것으로 아이가 어머니의 입맞춤과 포옹에서 느끼는 기쁨으로부터 동성, 이성간의 온갖 전희
와 어떤 형태의 것까지 제한이 없었다. 그러다가 사회가 형성되면서 성은 재생산의 목적에
만 사용되도록 규제된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는 이성간의 성행위 외의 어떤 것도 배제되는
것이다. 다음단계는 물론 법적인 재생산, 즉 합법적인 부부 사이에서만 성을 허락하고 그외
의 것을 외도, 간통 등으로 배제시키는 단계이다. 배제된 모든 성을 도착이라 불러서 한때
동성애는 위법으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은 규제되고 인간의 만족은 줄어
든다.
그런데 금기된 성은 사라지는 게 아니고 주변으로 물러나 더 강한 쾌감을 준다. 쾌감원칙
은 현실원칙에 의해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주변으로 물러나지만 형태를 달리하여 성도착이라
는 이름으로 여전히 존재한다. '도라 분석'에서 그녀의 무의식에 가장 깊숙이 억압된 성이
동성애였듯이, 그것이 바로 신경증의 원인이었듯이, 금지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지 만족을 추구한다. 예술가는 성본능을 현실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잘 변용시키고
학교와 종교는 이것을 잘 수행하도록 돕는다. 신경증은 이것에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 경우
에 일어난다. 프로이트는 유아가 생식의 목적 없이 온몸으로 느끼는 성을 자발적 성애, 혹은
'자기성애'라 이름 붙인다. 이 온몸으로 느끼는 성감대는 성장하면서 퇴화되고 아이를 낳기
위해 신체의 특정부분으로 축소되면서 이성, 혹은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이처럼 문명의 발달과 성의 변모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겪는 성의 변모와 같다. 온몸이 성
감대였던 시절에서 생식을 위한 특정 부위의 성으로 축소되는 만큼 문명은 인간의 기쁨을
축소시켜온 셈이다. 그러나 리비도의 총량은 같기 때문에 자연스런 성이 문명에 의해 축소
될수록 밀려난 성은 성도착이란 형태로 귀환하여 한층 더 은밀한 쾌감으로 변모한다.
프로이트는 성이 억압되는 현실과 문명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던진다. 솔직한 사람일수
록 억압을 견디지 못하기에 남자보다 여성에게 신경증이 더 많다. 결혼을 위해 억압된 성이
불감증이 되어 행복한 결혼을 가로막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결혼 후 남성은 얼마나 외도
를 즐기려 애쓰는가. 전희를 비롯한 각종 도착이 여전히 비밀스레 남는데 억압이 무슨 의미
가 있는가. 사회 도처에 신경증 환자가 늘어날수록 문명의 목적은 오히려 좌절되는 것은 아
닌가. 과연 문명화된 성도덕이 인간의 쾌감본능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가 등...
프로이트의 이런 반문은 얼핏 반문명론자 같은 인상까지 풍기게 한다. 그러나 비교적 초
기에 속하는 글이기에 이런 혁명성은 그가 문명을 거부해서라기 보다 그것만이 최선이라고
믿는 인간의 단순한 논리에 반론을 제기하는 일종의 대안으로 보여진다.
애정과 증오가 한 자리에 있는 에로스와 문명의 밀월관계는 프로이트의 모든 글에서 다르
게 반복된다. 아버지의 금지와 그것의 상징인 사회의 법을 뚫고 틈틈이 어떤 식으로든 귀환
하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 성장하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삶의 무게를 힘겹게 느낄 때마다 꿈
꾸는 어린시절의 무한한 평화. 사춘기에 이르러 이성에 눈을 뜨지만 사랑한다는 것만큼 고
통스러운 것은 없다는 것만을 깨닫고 물러서는 남녀의 사랑. 삶본능과 죽음본능의 교차 속
에서 삶을 연장시키는 소설의 구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백일몽에서 비롯되는 창조적인
작가, 끝없이 환유의 고리 속을 맴도는 대상에의 추구, 쾌감원칙과 현실원칙이 서로 미워하
며 사랑하며 이루어내는 서사의 플롯. 그리고 우리들의 삶. 에로스만 있으면 곧바로 죽음이
요, 문명만 있으면 지루하고 건조하여 빨리 죽여달라고 애원하던 티토노스(신화 속의 인물
로 새벽의 여신 오로라를 사랑하는 그는 늙은 형태로 영원히 사는 게 형벌임을 깨닫는다)의
삶과 다를 게 없다. 죽되 적당한 길이까지 다르게 반복하다 죽는 것. 이것이 아마 에로스와
문명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힌 밀월관계로 우리를 유혹하고 좌절시키며 끌어가는 삶의 동
력이 아닐까 싶다.
프로이트의 사회, 문명비판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 주체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2. 에로스의 가학성
영화나 소설은 늘 사랑이라는 주제를 즐겨 다룬다. 사랑이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감흥이
면서도 잘못되거나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토록 이야기하고 또 해도 바닥이
마르지 않는 것을 보면 사랑이란 인간의 가장 큰 갈망이면서도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되
는지 모르는 아니, 안다 해도 실천이 어려운 소망인가보다. 그래서 동양사람들은 사랑이란
받는 게 아니고 주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을 제외하고 그렇게 주기만
하는 희생적인 사랑이 가능할까. 아니 어머니와 사랑 속에도 이기적인 자기애가 숨어 있지
는 않은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기애가 자신과 대상을 불행하게 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기적인 자기애를 통해 사
랑의 한계를 짚어준다. 언제나 그렇듯이 인간에 대한 이상적인 시각을 거두고 그 속에 도사
린 사악한 면을 보라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경험과 소망을 어머니와 유아기의 성경험으로 놓고 그 시절에 대한
기쁨이 원초적으로 자리잡아 성장 후에도 포기되지 않는다는 프로이트의 가설은 주체의 문
제에서도 반복된다. 이것이 '원초적 나르시시즘' 이다.
유아는 2세에서 4세 사이 '남근기'라고 불리는 완벽한 자아충만의 시기(auto-eroticism)를
겪는다. 이때 아이의 온몸은 그 자체가 에로스로서 성본능과 에고본능은 완벽히 일치한다. 4
세 이후부터 아이는 세상에 조 금씩 눈을 뜨고 자신과 어머니 사이에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
을 느끼며 억압이 시작된다. 억압에 의해 성본능과 에고본능은 분리된다. 아이는 사춘기에
이르고 적의와 사랑 속에서 대상을 향해 리비도를 옮겨간다. 그러나 그가 찾은 대상은 어머
니가 아니기에, 그의 무의식 속에는 여전히 원초적인 나르시시즘이 억압되어 있기에, 대상은
그를 결코 충족시키지 못한다. 이것이 이차적 나르시시즘이다.
대상을 선택하는 데 나르시시즘이 늘 개입되기에 자아 리비도는 대상 리비도를 방문하고
상처받으며 되돌아온다. 특히 남아는 대상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강하고 여아는 원초적 나르
시시즘이 강하다. 남성이 사랑에 빠질 때 여성을 더 과대평가하고 그 환상이 끝났을 때 그
만큼 평가절하하거나 사랑이 강한 만큼 증오가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은 자아충족
적인 경향이 강하여 이 무심함이 연인을 더 매혹하고 불안케 하거나 불만을 심는다. 그러나
여성도 대상을 선택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대상 리비도가 옮아간다. 그리고 이 여
성의 나르시시즘이 자식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되어 며느리나 사위와 불화를 낳기도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받는 자신을 보기 위한 욕심에서 나온 것은 아닐
까. 자신이 그리 되고 싶은 이상적인 타입과 딱 들어맞는 대상을 어느 날 만난다. 프로이트
는 이것을 '자아이상'이라 불렀고 우리는 그녀를 연인이라 부른다. 나는 그녀가 되고 싶고
그녀를 내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나는 연인과의 완전한 일치에 이를 수
없고 깊은 열등감에서 대상을 증오하게 된다. 사랑에 그토록 증오가 깃드는 것이나 자존심
의 상처가 깊은 것은 너무도 사랑하는 것이 연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
랑받으면 자존심이 서고 사랑받지 못하면 자신을 비하하게 되기에 자살에 이르거나 반대로
연인에게 상처를 주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가학주의자가 된다.
인간은 애초에 두 대상에서 출발했다. 나와 나를 돌봐주는 어머니다. 남성은 사회 속으로
진입해야 하는 압박감 때문에 대상 리비도가 강하고 이것이 여성보다 더 많은 위험을 낳는
다. 여성이 자신에게 의지함에 비해 남성은 늘 대상을 추구하고 상실한 어머니를 찾기에 환
상의 폭이 커지고 사랑과 증오의 폭도 커진다. 자아와 자아 이상형 사이의 틈새가 크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에 그만큼 세상을 끌고 나가려는 야망도 크고 오차도 크
다.
사랑에서나 세상을 끌어가는 야망에서나 리비도는 이기적인 데서 출발한다는 게 프로이트
의 가설이다. 용기도 말도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게 나르시스적 주
체가 갖는 한계이다. 사실은 받으려는 것이 사랑이기에 그 반대로 주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런 프로이트의 원초적 나르시시즘이 갖는 미덕은 무엇인가. 남을 위
한다는 착각이 너무도 많은 폭력을 낳기에 차라리 솔직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어
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이상론을 포기하고 실존적 자각으로 방향을 바꾼다고
할까.
이처럼 1914년에 쓰인 '나르시시즘에 관하여'에 암시된 에로스의 이기심과 가학성은 그
다음 해에 쓰인 '본능과 그것의 변모'에서 좀 더 명확히 되풀이된다. 여기서 본능은 동물적
인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본능적인 충동"(drive)에 가깝다. 유아는 처음으로 외계를
인지할 때 자극을 받고 평화가 깨어지는 불쾌를 맛본다. 그리고 자아 보존본능은 이 자극에
강한 방어를 보이지만 다른 한편 대상을 통해 재생산을 하려는 성본능 때문에 강하게 이끌
린다. 이 사랑과 증오의 양가적인 감정은 자아를 보존하려는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맛보는 쾌감은 고통과 불쾌를 동반한다. 자아는 방어본
능으로 대상에게 고통을 가한다. 그런데 그 고통은 자기를 처벌하는 고통이기도하다. 사디즘
은 곧 마조히즘이다. 그리고 자아는 그 고통이 대상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느낀다. 이렇게 성
본능은 그 밑에 억압된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자아 보존본능이 되고 대상을 갈구하면서도 적
대시하는 이중성을 띤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스적인 자아본능과 대상을 추구하는 성본능이 서로 교차되면서 사랑과
성행위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결국 성본능도 자아를 보존하려는 생산본능에서 나
오므로 '쾌감원칙을 넘어서'에서는 죽음본능을 대치시킨다. 여성보다 남성의 양가적 감성이
더 강하고 유아기 성을 잘 극복하지 못한 경우사랑과 증오의 양가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물
론 이때의 양가성은 성 이론에서 거세 콤플렉스로 인해 여성이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로 사랑
의 대상을 바꿔야 하는 데서 오는 삶의 이중 적 태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 경우는 일관
성 없는 성격으로 수동형이 되는 여성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공격성은 자기애가
강하 여 대상을 과대평가하다가 소유하고 난 후에 과소평가하는 식의 사랑과 증오의 엇갈림
을 낳는다.
에로스의 본질에 이렇게 강한 적의와 공격성이 있다는 것은 문명이 그렇게 매끄러운 이성
과 교양의 산물이 아니라는 암시를 준다. 인간이 추구하는 온갖 사치적인 행위 역시 지극히
나르시스적인 자아 보존본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의식은 이기적이기에 개인이 모인 단체 역시 이기적인 속성을 지우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익명성으로 인해 양심과 책임감이 지워지고 집단최면에 빠지기 쉽다. 인간은
혼자서는 문화적인 개인이지만 집단 속에서는 야만적이고,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 폭력, 즉
흥성, 충동, 변덕 등 무의식 그 자체가 쉽사리 드러나며 사실과 허위, 진실과 거짓의 구별이
흐려진다. 평화로운 지위대가 자칫 폭도로 바뀌는 경우는 혁명의 시기에 흔히 일어날 수 있
다. 그룹은 말의 위력에 굴복하며 진실 대신 미망을 갈망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상적 자아를
투시시킨 대장을 뽑고 그의 말에 절대 복종하며 그 대가로 그룹내의 모두가 동등하게 대우
받기를 원한다. 남이 더 튀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여한 환상의 옷을 입은
대장은 그들에게 미망을 불어넣어 광신적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기에 그룹은 지적으로
낮은 사람들이 높은 자들을 자기에 맞게 끌어내린다. 그룹을 움직이는 힘은 이성이나 동정
심이 아니고 동일시이며 그것은 넓은 의미의 에로티즘이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집단을 지탱
하는 근본 에너지는 리비도로 개인이 타인과 동일한 감흥을 일으키는 것 은 에로스에 의해
서다.
평등한 사랑이라는 환상에 의해 집단은 뭉친다. 그리고 리비도가 지닌 이기적 속성 때문
에 집단은 뭉칠수록 다른 집단에 대해 잔인하다. 박애를 믿는 신도들이 그들과 다른 집단에
대해 그토록 잔인한 것이나 대장이 죽은 후 단원들이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에로
스가 지닌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에로스의 이기성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곳을 집단으로 보
는 프로이트의 '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Group Psychology and the Analysis of the
Ego)에서 집단은 개인의 무의식이 뭉쳐진 곳이다. 그러므로 이기성과 나르시스적 환상이 더
잘 드러난다. 집단과 대장은 그의 사회문명이론에서 중심이 되는 '원시적 떼'와 '원초적 아
버지'가 귀환한 것이다. 원시시대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살았는데 그때 우두머리는 강한 의지
와 모든 권한을 소유했다. 그는 자신과 라이벌이 되지 않도록 가장 나약한 막내아들을 후계
자로 지목했으며 여자들을 독점했다. 아들들은 이에 반란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죽인다. 그러
나 혼란이 계속되자 강력한 권위를 지닌 새로운 아버지를 세운다. 대장은 단원들의 이상적
자아이다. 그러기에 둘 사이에는 과대평가와 최면을 바탕으로 굴종과 가학이 오간다. 집단
속에 숨은 폭도정신(mob spirit)을 이해하지 못하면 계몽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군대는 폭도
로 변질되기 쉽고 교회는 멤버들뿐 아니라 예수님과도 동일시가 가능하기에 계발이 가능하
다.
인간이 스스로의 음성을 내지 못하고 집단의 음성에 휩쓸려 억압된 폭력을 드러내는 폭도
정신, 그리고 강한 것에 약하고 약한 것을 짓밟는 비겁한 굴종과 폭력은 작가들이 즐겨 다
루어온 주제다. 집단 속에서 인간은 이성의 표피 아래 억압된 무질서와 공격성을 잘 드러낸
다. 익명성과동일시라는 최면에 의해서다. 프로이트는 집단이 이성이 아니라 에로스와 자기
보존본능에 의해 뭉쳐져 있음을 밝힘으로써 많은 작가들이 작품속에서 묘사한 것을 자신의
가설로써 증명하고 있다. 집단이 지닌 이런 마조히즘과 사디즘의 요소를 억제하기 위한 장
치로써 문명이 필요했다. 문명은 어떻게 세워지는가. 그리고 과연 인간은 문명에 의해 뜻하
던 대로 행복해졌는가.
3. 죄의식과 문명의 기원
프로이트의 가설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과 평화는 어린시절에 누렸던 순진무구의 세계
이다. 이때 순진무구는 나를 보살펴주는 대지인 어머니와 나만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절대
적인 너와 나의 세계이다. 제삼자가 끼어들지 못하는 상상계, 나와 나의 이상적 자아
(ideal-ego)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원초적 나르시시즘, 쾌감원칙, 애정의 세계다. 그러나 낙원
에 뱀이 있었듯이 세상에는 타자가 있었다. 의식에 눈을 뜨고 늘어나는 경쟁자를 의식하면
서 아이는 법, 질서, 아버지를 받아들인다. 동생에게 어머니를 완전히 빼앗기기보다는 적어
도 공평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려는 타협이다. 이때부터 개인의 의식 속에서
상상계는 억압된다. 물론 현실에 의해 억압된 쾌감에의 소망은 결코 포기되지 않는다. 한 가
족 안에서 개인의 뇌리에 새겨지는 법과 질서는 이런 과정을 밟는다. 그러면 집단에서는 어
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르고 추방됨으로써 테베시의
재난이 극복되듯이 아이는 거세의 위협을 받고 어머니에의 욕망을 거둔다. 가슴속에 죄의식
을 심어주어 사회를 정화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원죄를 지어 낙원에서 쫓겨
난 후 사회와 문명이 세워지듯이 죄의식은 서구문화의 주춧돌이었다.
프로이트 역시 문명의 기원을 죄의식에 두고 그 죄의식을 부친살해에 둔다. 그러나 그에
게 순진무구했던 어린시절은 이기적이고 충동적이고 자아충족적인 에로스이다. 인간이 떼를
지어 살던 원시시대에 무리를 이 끄는 대장은 집단을 지배하고 여자들을 독점했다. 이 원초
적 아버지는 자신과 라이벌이 되지 못하는 가장 나약한 막내를 후계자로 정해놓고 권력을
독점한다. 여자들이 탐난 아들들은 불만을 느끼게 되고 뭉쳐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흠
모하고 질투하던 아버지를 죽인다.
그러나 형제들끼리 여자와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고, 혼란과 무질서로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들은 이제 아버지를 상징하는 동물을 내세워 그 동물을
숭배함으로써 질서를 세운다. 이것이 토템이다. 원시시대에는 인간이 자연과 가까웠기에 동
물을 아버지로 숭배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아들들은 아버지에 대해 느꼈던 흠모와 적의
감을 토템의식 속에서 승화시키고 아버지의 존재를 강화한다. 일년에 한 번씩 토템동물을
나누어 먹는 잔치를 벌이는데 그것은 절대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증오를 없애고 존경심을 북
돋는 행위였다. 먹고 싶다는 것은 그것과 하나가 되어 그것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다. 실제의
나와 자아 이상 사이의 거리를 없애는 의식이다. 이렇게 하여 다시 세워진 아버지는 원초적
인 아버지보다 훨씬 더 강한 아버지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에서 인류문화의 근원을 추적하기 위해 많은 자료들을 섭렵하며
그것이 부친을 살해한 죄의식에서 출발했고 그 근원에는 흠모와 증오의 양가적 감흥이 숨겨
져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를 죽인 죄의식과 후회로 아들은 아버지 대신 세운 토템을 절대 자로 숭배한다. 허
구적일수록 더 강렬하게 믿는다. 문명은 이처럼 에로스에 의해 뭉쳐진 집단의 죄의식에 의
해 생겨나고 유지된다. 쾌감원칙이 문명을 낳고 현실원칙이 이를 지속시킨다. 오랫동안 토템
의식을 되풀이 해온 인간은 어느 사이 죄의식을 내부에 심게 된다. 이제 자신의 내부에 자
신의 에로스를 감시하는 초자아를 갖게 되는 것이다. 푸코의 원형감옥처럼 감시는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로 잠재해서 자아를 검열한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억압된 욕망
과 감시기관과 이 둘 사이를 조정하는 자아라는 지형도를 갖는다. 어떻게 이 둘을 배분해야
사회도 유지하고 행복도 누릴 것인가. 이것이 행복의 경제학이다. 에로스는 직접적으로 충족
될 때 최고의 만족을 준다. 그러나 초자아는 그 길을 거부한다. 우회하는 수밖에 없다. 삶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우회하는 방법으로 프로이트는 과학과 예술 그리고 술이나 마약 같은
탈출구를 예로 든다. 종교 역시 삶의 고통과 불안을 줄이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에로스의
공격성을 줄이고 억제하거나 우회시키는 것이 문명이다. 그러나 인간의 불만이 고조되면 에
로스가 히스테리로 폭발할 수 있다. '문명 속의 불만'(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을 쓰
면서 프로이트는 인간에 내재한 파괴본능을 감지하고 이를 죽음본능이라 이름붙인다. 삶을
지속시키려는 자아 보존본능이나 성본능과 반대로 에로스가 지닌 가학성은 억압되어 조금씩
분출되는 출구를 찾지 못하면 파괴본능으로 바뀐다. 나치즘의 광기가 유럽을 휩쓸기 시작하
던 1930년에 쓰인 이 글에서 프로이트는 집단 히스테리가 역사의 어떤 시기에 분출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한 공격성을 밝히며 종교가 바다와 같은 체험이라거나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등의 이상론이 현실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문명과 에로스의 애증관계를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 문명의 영역으로
확대시키는 프로이트의 일관성 있는 사고를 보게 된다. 문명은 쾌감원칙에서 태어나 현실원
칙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그의 이론이 이제 종교의 문제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자. 유
대인으로 끊임없이 나치로부터 위협받았고 다가오는 대량학살을 감지하던 1930년대, 그는
개인의 심리 속에만 머물 수 없었다. 민족이란 어떻게 유래되는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
는 무엇이길래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탄압하는가. 유대인의 선민의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그렇게 이질적인 두 갈래일까. 이런 의문은 '토템과 타부' 이후 그
의 뇌리에 선명해진 흠모와 증오의 양가성, '쾌감원칙을 넘어서'이후 그를 사로잡은 '반복충
동'과 연결되어 그에게 도전적인 글, '모세와 일신교'(Moses and Monotheism: Three
Essays)를 낳게 한다.
나치의 위협 속에서 오직 주교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그는 이 글을 1934년부터 썼지만 감
히 출판을 하지 못했다. 1938년 나이 82세가 되어 독일의 침공으로 런던으로 망명한 프로이
트는 이전에 써놓았던 '모세는 이집트인이었다'와 '만일 모세가 이집트인이었다면'에 이어
서 제3부 '모세, 그의 백성, 유일신교'를 쓴다. 러시아가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종교를 아편
으로 금지하고,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원시적 야만성을 보면서 그는 종교란 일종의
억압기제지만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글은 외적인
억압으로 출판을 못한 앞의 부분에 덧붙이고 다시 쓰여서 글 자체가 이미 자신의 반복충동
을 실천하고 있는 듯 보인다.
프로이트의 사유는 너무도 낯익은 사실을 의심해보는 데서 시작된다.
모세가 히브리인이 아니고 이집트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모아진 낯익은
자료들에서 그런 낯선 의문의 근거를 찾는다. 전설이나 영웅담의 낯익은 패턴을 보자. 오이
디푸스, 파리스, 헤라클레스... 그들은 한결같이 왕이나 귀족의 아들로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
난다. 그러나 신탁이나 다른 두려움으로 버림받고 훗날 다시 영웅이 되어 자신의 신분을 되
찾는다. 물론 이런 전설은 후세인들이 자신들의 영웅을 합리화시키고 고귀하게 만들기 위해
신분을 상승시키는 예가 많다.
그러나 어찌됐든 모든 전설의 일반 패턴은 '가족 로맨스'(Family Romances)의 경우를 따
른다. 어린시절의 부모는 아이에게 최고의 존재였지만 성장하면서 타인과 비교되어 왜소해
진다. 아이는 실망으로 아버지를 증오하거나 백일몽 속에서 황제를 꿈꾼다. 모든 신화의 패
턴도 이와 비슷하다. 왕이나 귀족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만 초라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다. 그
런데 왜 모세의 경우는 그 반대인가. 그는 초라한 부모에서 태어나 귀족 부모에서 성장한다.
히브리인에게서 태어나 이집트 황녀가 기른 것이 아니고 파라오의 딸이 경고를 받고 몰래
물에 띄워 평민이 기른 것이 아니냐. 후에 거국적인 목적으로 반대로 수정되었다면 이집트
인이 아니고 유대인이 그리했을 것이다. 이집트인이 모세를 영광스레 만들 이유가 없을 테
니까.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의 영웅이 파라오의 딸인 것을 어찌 받아들일 수 있었겠
는가. 그러니 친숙한 신화의 패턴이 뒤집어진 것이다. 그런데 잠깐, 지금 프로이트가 해석하
는 방식은 어딘지 낯익다. 바로 꿈의 분석이다. 내용물이 상징으로 압축되고 다시 옆의 것으
로 뒤바뀐다. 신화의 낯익은 패턴이 자리바꿈(displacement)하여 거꾸로 된 것을 의심하고
그는 모세가 히브리인이 아니고 그들의 적이었던 이집트인이 아니었나 의심하는 것이다.
모세는 이집트인이었는데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유대인으로 만들었다는 가설을 한 단계
더 밀고 나가 보자. 이집트 종교는 다신교였으나 내세를 믿었고 유대교는 유일신교였으나
내세를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이집트의 종교를 유대인들에게 부여한 게 아닌가. 그가
저절로 다른 민족의 법 제정자요, 정치지도자요, 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는 없었으리라, 그는
이집트의 패망한 아켄나텐 왕국의 아텐교를 유대인에게 전파한다. 아텐교는 내세를 믿는 유
일신교였다. 모세는 이집트만의 관습인 할례를 유대인에게 전파한다. 만약 그가 유대인이라
면 무엇하러 적인 이집트의 관습을 옮겼겠는가, 그는 이집트의 귀족으로 야망이 컸으나 왕
국이 멸망하자 고센지방의 통치자로 그곳의 유대인들을 선택해 자신의 야망을 이룬다. 그러
므로 엑소더스는 평화롭게 이루어진다. 성경 외 유대인들의 문학속에 그려진 모세는 야망,
성급함, 분노 등 이집트귀족의 성향을 많이 드러낸다. 유대교에 나오는 아텐신에 대한고백,
모세라는 이름의 어원, 그리고 "연설이 어눌해서 파라오와 얘기할 때 형 아론의 도움이 필
요했다"는 증거들을 인용하면서 프로이트는 다른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설을 뒷받
침할 자료들을 제시한다. 모세의 어눌함을 그가 이집트인이었기에 유대말에 어눌했다고 거
꾸로 풀이하는 그는 정신분석의 두 가지 방식인 압축과 자리바꿈(전치)을 '서사로서의 역사
'에 적용하고있다.
환자의 상흔을 구성의 산물로 보듯이 역사를 구성으로 보는 프로이트는 이제 부친살해와
반복충동을 유대교의 기원에서 더듬는다. 설린(Sullin)의 가설에 의하면 모세는 폭군으로 유
대인들에게 그의 종교를 강요했고 백성들은 분노하여 그를 살해한다. 부친을 살해한 백성들
은 혼란과 후회의 기간(약 B.C.1350-1215)을 거친 후 아버지를 닮은 한층 더 강력한 유일신
교를 세운다. 원래 보잘것 없는 지역신이었던 여호와신은 점점 옛 모세신을 닮아가더니 죽
은 아텐신이 부활하듯 강력한 유일신이 된다. 성급한 폭군은 아들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다
른 모습으로 더 강력히 되살아 난 것이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이 박해를 견디는 힘이 된다.
정신분석에서 사건이 발생한 후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를 잠복기라고한다. 억압된 것의 귀
환으로 불리는 잠복기는 모세의 종교가 지워진 후 다시 유일신교가 나타날 때까지의 긴 기
간이다. 억압된 아텐 유일신교가 되돌아와 여호와 신과 합쳐져 강력한 여호와 유일신교가
된다. 이것이 증상에의 고착, 혹은 반복충동이다 개인에게 일어나는 신경증과 인류에게 일어
나는 신경증은 다를 게 없다. 프로이트는 나치즘의 광기가 폭발하기직전의 유럽에서 무슨
까닭으로 모세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다원에서 영향받은 '토템과 타부'에 이어서 그가 다시
부친살해와 억압된 것의 귀환, 혹은 다르게 반복하기를 주장하는 이유가 곧 밝혀진다.
"유대교에 유일신교를 불어넣고 그것이 기독교에서 계속되는 것", 이것만큼 종교사에서
분명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탄생은 원죄의식에서 시작된다. 비록 원초적 아버지를 살해 한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나 아들은 죄의식을 느낀다. 예수는 신의 아들로서 인간의 죄를 떠맡고 죽는다. 이제 할
례 대신에 구원이 자리잡는다. 선민의식을 버리는 대신 더 강력한 보편종교가 된다. 아텐신
은 유대교로, 다시 기독교로, 다르게 반복된다.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는 의식은 죽은
아버지의 살을 나누어먹는 토템의식과 다를 게 없다. 모세가 첫 메시아라면 예수는 그의 대
치자요, 승계자다. 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박해하는가. 자리를 먼저 차지했기에, 너무나
닮았기에, 부친살해 위에 선 아들의 종교이기에 흠모하고 증오한다. "유대인 증오는 결국 기
독교인 증오다."
원초적 아버지의 죽음, 모세의 죽음, 예수의 죽음을 반복으로 보고 그 때마다 더 강화되고
보편적인 유일신교가 태어남을 통해 프로이트는 나치즘의 박해를 분석한다. 종교는 억압되
고 무의식 속에 갇혀 있어야만 강력히 되돌아온다. 노래 속에서 영생하기 위해서는 실제 삶
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친살해는 에로스의 공격성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그것에 대
한 금기, 즉 문명은 죄의식에 의해 지속된다.
4. 문명의 혼혈성
에로스와 문명의 밀월관계는 프로이트 이론에서 다르게 되풀이된다. 에로스는 어머니요,
문명은 아버지다. 유아기의 성경험은 성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을 형성하여 다
르게 되풀이되기에 연인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이 생겨나고 창조적인 작가의 백일몽이 되며
삶을 지속시키는 동인이 된다. 문명과 종교 역시 부친살해와 죄의식이라는 양가적 감흥과
억압된 것의 귀환에서 시작되고 지속된다. 에로스는 순수이고 문명은 타자이다. 순수한 자아
에 타자가 끼어드는 것, 이 혼혈성이 바바에게 문화의 위치를 낳게 하고 최근 탈식민주의에
유용하게 쓰인다. 역사가 구성이요, 서사라는 것과 함께. 이제 우리는 모세와 유일신교를 통
해 종교나 인종에서도 혼혈성을 발견한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집트인, 유대인, 기독교인이
라는 다른 민족을 한 동아리로 연결시킨다. 그리고 증오가 어디에서 오는가 보여준다. 혼혈
성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흔히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두 갈래로 설명되는 그리스 문
명과 기독교문명이 프로이트에게서는 하나가 된다. 그는 모세의 전설을 그리스 신화에 빗대
어 풀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파리스, 헤라클레스 등 모든 전설이나 신화와
모세신화는 왜 다른가? 그의 설명은 그리스신화에 기대지 않고는 시작될 수 없었다.
동서문화의 공존, 혹은 모든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시대에 프로이트는 이런 식으로 되읽
힌다. 그의 이론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혼혈적 특성이 강조된다는 뜻이다. 서양이 죄의식에
바탕을 둔 문화라면 동양은 어떤 문화일까? 누군가는 수치심의 문화라고 했다. 전자가 시건
을 안에 둔다면 후자는 시선을 밖에 두는 것이다. 우리 문화는 어떻게 덧칠해져 왔고 지금
어떤 속성이 우세한가. 혹시 에로스가 더 우세한 문화는 아닐까. 우리가 맞고 있는 경제위기
는 단순히 수학적인 계산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풀어가는 데 에로스가 우세해
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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