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이트와 스피박의 문화비평
올림포스 산의 숲속에는 아름다운 요정 에코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제우스 신의
아내 헤라로부터 벌을 받게 된다. 남편이 다른 요정과 바람 피우고 있는 현장을 잡으러온
헤라에게 말을 걸어 시간을 지연시킨 죄이다. 원래 말하기를 좋아하던 에코에게 헤라는 그
녀가 다시는 자신의 말을 할 수 없고 오직 남의 말을 뒤따라, 그것도 끝 부분만을 반복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숲속에는 요정들만큼 아름다운 청년 나르시스가 살고 있었다. 에코는 그
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아무런 구애의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숲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나르시스의 부름에도 오직 그의 말 끝만을 반복했고 그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어했을 때
도 허락의 말을 전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가 내 가슴에 안겨달라 외칠 때 그것을
허락하는 끝말을 하지만 그녀를 본 나르시스는 냉혹히 거절한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으로
여위고 뼈만 남은 에코는 나중에는 목소리만 남아 쓸쓸히 동굴에서 살며 타인의 말을 반복
할 뿐이었다. 오늘날까지도.
한편 나르시스를 사랑하는 숲의 요정들은 에코의 슬픈 모습을 본다. 그리고 자신들도 애
타게 구했으나 거절당한 사랑의 상처를 복수의 여신에게 빌어서 앙갚음하려 한다. 나르시스
를 벌하여 주소서. 그가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여 파멸케 해주소서. 복수의 여신은 나르시스
의 오만함에 벌을 내린다. 깊은 숲속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 고요한 호수가 있었다. 그 물가
에서 나르시스는 물 위에 떠오른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에 반해 애타게 구애한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의 눈물방울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나고 그가 팔을 뻗으면 함께 뻗었다가
도 잡으려면 사라지곤 했다. 자신의 모습만을 사랑한 그는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연인에 의
한 고통으로 아름다운 얼굴은 일그러지고 가슴은 메말라 죽고 만다.
나르시스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여 다시 이야기한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사랑
의 본질, 환상의 본질이 들어 있기에 프로이트가 그것에 반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 위에
비친 내 모습을 타인으로 착각하고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스. 자신을 대상으로 착각하는 환
상 우리는 연인의 얼굴에서도 자신의 모습만을 보고 모든 이념 속에서도 제 얼굴만 보는 것
은 아닐까. 연인이란 내가 세운 이상적 자아이고 그것과 합일을 원하는 것은 내가 그것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대상이란 또 하나의 독립된 인간일 뿐 결코
내가 될 수 없는데 그렇다고 믿는 본능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고통을 겪고 상처를
주고 배반의 쓰라림을 겪는가. 프로이트는 바로 이 고통의 근원을 탐색했다.
그가 가설로 내세운 무의식, 유아기 성, 쾌감원칙은 인간 속에 내재하여 결코 사라지지
않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이다. 오이디푸스 신화가 프로이트 이론의 현실원칙이요, 문명의 시
작이라면 나르시시즘은 에로스의 본질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
으며 제삼자의 존재를 의식하기 이전, 오직 너와 나만 있는 세상, 오직 네 모습에서도 나만
을 보는 유아기 단계가 나르시시즘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지나 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아
버지를 죽이고 싶은 무의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요, 이 무의식을 억압하며 또 하나의 아
버지가 되는 게 오이디푸스 단계이다. 현실원칙에 순응하더라도 억압된 무의식은 틈틈이 현
실의 옷을 입고 위장하여 되돌아오기에 프로이트는 그토록 수많은 글들 속에서 본능의 존
재를 알리려고 애썼다. 교육의 힘으로 다져진 의식 밑에 억압된 무의식이 있음을 잊지 말라
고 말했다. 나르시시즘은 바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이었다. 어머니와 나의 욕망이 완벽하게 일
치한다고 믿는 상상계적 오인은 물 위에 비친 제 모습을 대상으로 착각하고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스의 오인과 다를 게 없다.
아이의 성은 사춘기에 이르러 새로운 대상을 향해 옮아가는데 이때 억압된 원초적 나르시
시즘이 남아대상의 선택에 환상이 개입된다. 그는 자신의 성본능과 에고본능을 충족시켜줄
것이라고 믿는 연인을 향해 다가선다. 연인은 바로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어머니다. 그래
서 그녀의 사랑을 받으면 나의 자존심이 세워지고 그렇지 못하면 나의 자존심이 상하기 때
문에 흠모와 증오가 교차한다. 대상은 결코 근원적 어머니가 될 수 없고 나의 또 다른 얼
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은 원래 자기사정에서 나오기에 사랑 속에는 늘 대상에
대한 소유욕과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일어나는 증오가 도사린다.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프로이트의 주체이론에서 억압된 무의식이요, 쾌감원칙이다. 문학에서는 은유이고 라캉에
오면 상상계가 된다.
이런 식으로 나르시스 신화는 에코의 이야기를 떼어버리고 수많은 인용을 낳는다. 인간이
사회화되기 전의 동물적 본능을 가리키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유아기적 이기심
을 가리키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초기에 이 억압된 유아기 성, 혹은 나르시시즘에 혁명적인
시선을 보내다가 차츰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여성이 더
나르시스적이어서 보상심리로 허영심이 많고 그것을 승화시키지 못해 역사적으로 큰 일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시대에 프로이트는 어떻게 읽혀질까. 최근의 문화비평의 맥락에서 프로이트
를 다시 읽어보자. 제국주의 비판과 페미니즘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여성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의 경우를 살펴본다.
프로이트와 문화비평 : 어떻게 주체적인 읽기가 가능한가
윤리적 주체로서의 에코
스피박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인으로 데리다의 해체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등 서구의
대가들을 정확히 읽고 그들의 이론 뒤에 숨은 제국주의적 혹은 중심주의적 오인을 들추어
전복함으로써 비서구인의 비판적 읽기를 시도한다. 그녀는20세기 인도의 철학자, 마티랄
(B.K.Matilal)을 통해 서구와 동양의 윤리학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모색한다. 인도인들은 논
리에 바탕을 둔 서구철학이 신비주의에 바탕을 둔 인도철학과 다르기에 서구에 저항하는 인
도 고유의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어떤 것이 인도 고유의 것인지 가려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한 가지 대안은 비 유럽문화 속에 갇히지 말고 서구의 것을 정확히 알아
서 그것에 저항하는 전략적인 읽기를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녀는 원래 데리다의
해체에서 자리바꿈(displacement)이라는 전략을 빌어와 남성 중심주의의 허구를 들추어 여
성으로서의 읽기를 제안했다. 그리고 이제 제3세계인으로서 제국주의에도 저항하는 이중비
판을 수행한다.
본질은 이미 반복인데도 인간은 본질을 말하는 중심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데리다의
'차연'은 구조주의의 정반의 차이에 시간이 결합되어 온갖 우열의 차이를 없애는 정치적인
전략이다. 본질은 이미 차이의 철학인 구조주의에서부터 열려 있었다. 스피박은 데리다 이후
의 마르크시즘을 생각한다. 해체 이후의 정치성은 전통 마르크시즘처럼 본질, 혹은 고유가치
로서의 주장이 아니고 오직 전략으로서의 주장이다. 진리는 니체의 말처럼 힘들의 전략에
의해 세워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서구문화가 억압해온 에코, 나르시시즘에 억압되어온 에
코를 어떻게 귀환시키나. 그러나 결코 에코는 나르시시즘이 저지른 남성 우월주의와 제국
우월주의를 되풀이하면 안 된다. 자신이 더 진리라고 보여서는 안 된다. 나르시스만이 전부
가 아니고 둘이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에코의 이야기를 제외시 켜온 서구의 나
르시스 중심주의를 전복해보자.
프로이트는 무의식 중에 에코의 부분을 제외하고 나르시스의 이야기만을 도려내 자신의
이론을 만들었고 이렇게 서사의 틀을 무시한 것은 라캉도 마찬가지다. 에코는 서구신화에서
억울하게 벌을 받은 요정이다. 그녀는 제우스를 위해 일했으나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티리어시스는 제우스와 헤라가 남녀의 성적 결합에서 누구의 희열이 더 크겠느냐고 물었을
때 제우스의 편을 들었다. 분노한 헤라가 그의 눈을 멀게 했을 때 제우스는 대신에 그에게
예언가의 지혜를 주어 보상했다. 그런데 에코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그녀는 억압 받
는 하위계층이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오늘날 인간이 하는 짓과 별로 다르지 않았는데 여
자를 하찮게 여긴 것도 그랬나 보다. 아무튼 스피박은 제우스신 이래 서구인들이 억압해온
에코를 찾아내어 그녀를 윤리적 주체로 부활시킨다. 어떻게 윤리적 주체가 되는가. 에코가
나르시스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그의 말을 오직 늦게 그것도 끝부분만 반복하는 것을
눈여겨보자. 나르시스는 말을 못하여 남의 속만 태우게 하는 에코에게 묻는다.
그대는 왜 내게서 도망가시오?(Why do you fly from me?)
나르시스가 답답하여 소리치면 그녀는 그저 '내게서 도망가시오'(Fly from me)라고 뒷부
분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녀가 자신을 허락할 수 있었던 끝말의 반복을 마쳤
을 때 물론 그는 에코를 거절한다. 매혹은 허락하는 순간, 손에 쥐는 순간 사라지기 때문이
다. 너무도 아름다워 자신만을 사랑할 운명을 타고난 나르시스의 비극은 자신이 보여지는
존재, 요정들의 원한과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데서 시작된다. 라캉이 욕망이론
에서 보여짐을 모르는 상상계를 거울단계라고 한 것은 나르시스의 비극을 잘 암시한다. 그
러나 그가 요정들에 의해 보여 지는 존재였음을 알려주는 라캉의 타자의식에서도 에코는 여
전히 지워진 존재였다.
스피박은 에코의 말 "내게서 도망가시오"에 초점을 맞춘다. 나르시스는 대상을 추구하고
내게서 도망가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물 위에 비친 제 모습만을 사랑하기에 그 대
상을 얻는 순간 그것을 잃고 만다. 에코가 허락하는 순간 그녀를 거부했듯이 물 위에 비치
는 제 모습을 잡는 순간이 곧 죽음이듯이 그는 대상을 소유하려 하지만 영원히 포착하지 못
한다. 대상은 대상일 뿐 자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르시스적 인식론이 겪는 논
리의 아포리아이다. 그러나 에코는 대상을 포착하려 하지 않는다. 그녀의 욕망과 행위는 나
르시스와 달리 고정된 정체성이 없고 우연 속으로 흩어진다. 그저 타인의 욕망에 불완전하
게 호응할 뿐이다. "Why do you fly from me?"라고 물으면 오직 "Fly from me"라고 반복
한다. 그녀의 대답은 다르고 늦게 온다. 차연이요, 흔적이고 산종이다. 앞의 것이 대상과 자
신을 일치시키는 지배의 언어라면 뒤의 것은 대상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해방의 언어다.
스피박은 나르시스 이야기를 의미의 고정, 고집스런 자기 동일성, 라캉의 거울단계로 보
아 계몽주의 이후 남근 중심주의, 식민지 담론, 배타 적 민족주의로 본다. 이에 비해 에코는
앞의 것을 따라하는데 오직 늦게 다르게 하기에 의미의 산종, 흔적 글쓰기, 여성, 흑인 소수
민족, 해체 그리고 탈식민지 담론으로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르시스를 인식주체로 에코
를 윤리적 주체로 보아 그녀의 신비스런 책임성을 암시한다. 인식론의 아포리아를 벗어나
현실에 대한 비판과 책임의식을 갖는 길은 나르시스적 인식주체에서 에코적 윤리의 주체로
넘어서는 것이다.
스피박은 에코에게 보답 없이 벌만을 내린 오비디우스, 에코를 지워버린 프로이트와 라캉,
그리고 인식론적 아포리아에 머문 데리다를 다시 읽어 윤리적 주체로서 에코를 되살려낸다.
에코는 지금까지 서구 중심주의 역사에 서 있으면서도 지워져온 여성이기도 하고 억압되어
온 인도의 신비주의이기도 하다. 이처럼 스피박은 선배들을 끌어들여 그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그들과 다르게 읽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다. 그들보다 늦게 읽으면서 그들이 범한
중심주의를 되풀이하지 않으므로 차연이요 산종이다. 그리고 나르시스의 말을 늦게 다르게
반복하는 에코의 언어이다. 선배와 후배는 동반자이면서 라이벌인 것이다.
동반자이면서 맞수. 프로이트의 남근선망?
무의식을 강조하던 프로이트는 점차 초기의 혁명성을 잃고 후기에는 초자아를 설정하여
문명과 사회현상을 설명하려 애썼다. 그의 성이론이 유아기 성이나 오이디푸스 전단계를 강
조하던 전반부의 글과 성차가 별 의심을 받지 않던 당시의 사회현상을 설명하던 후기의 '
여성성'은 큰 차이를 보인다. 그 악명 높은 '남근선망'이나 '거세 콤플렉스'는 여성의 열등
성을 열심히 설명해낼 때의 프로이트요, 최근의 페미니스트들이 그가 발견한 무의식에서 혁
명성을 끌어낼 때는 자연주의 사상과 에너지 불변의 법칙등 초기의 억압된 것을 들출 때이
다.
남근선망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열을 가리는 시각 중심주의 오류라고 여성이론가들은
말한다. 스피박은 오비디우스의 텍스트를 정밀하게 읽듯이 버지니아울프의 '등대로'(To the
lighthouse)를 정밀히 읽어서 프로이트의 남근선망에 의해 억압된 여성의 생산능력을 밝힌
다.
'등대로'는 아내가 죽고 긴 세월이 지난 후에 등대에 도착하는 램지 씨가족과 램지 부인
을 그리지 못하던 화가 릴리가 그 순간 하나의 긴 획을 그려 그녀의 초상화를 완성시킨다는
이야기다. 3부로 나누어진 이 작품은 1부가 '창문'으로 램지 부인의 결혼생활, 2부는 '시간
이 흘러서'로 전쟁으로 가족이 흩어지고 부인이 죽는 이야기 3부 '등대'는 남은 램지 씨와
아들들이 등대에 도착하여 릴리가 초상화의 한 획을 긋는 이야기다. 스피박은 이 소설에서
램지 부인이라는 텍스트를 철학자인 램지 씨와 예술가인 릴리가 어떻게 다르게 읽어내는가
로 본다. 순수이성과 심미적 이성의 대조요, 인식론적 주체와 윤리적 주체의 대조이다.
1부 '창문'에서 램지 부인은 남성들의 메마름을 다스리며 가정의 화목과 사랑을 확인하지
만 언어를 믿지 않는다. 램지 씨는 Q 다음에 오는 R, 즉 자기 이름의 첫글자인 R에 도달할
것을 꿈꾼다. 그는 부권적 전유와 언어의 절대성을 믿는다. 그러나 결코 아내를 언어로 그
려내지 못하기에 그의 꿈은 좌절된다.
2부 '시간이 흘러서'는 램지 씨의 결혼의 언어와 릴리의 예술의 언어를 이어주는 접목부
분이다. 실제 울프의 삶에서는 램지 부인의 모델이었던 어머니가 죽고(1894) 전쟁(1914-18)
이 끝나고 울프 자신은 정신이상으로 몇 번의 발작을 겪던 시기였다. 그러기에 이 접목부분
은 불안정하고 따라서 램지 부인이 누구인가(기표)에 대한 대답(기의)은불안정하다. 기표와
기의는 일치하지 못하고 진실에의 접근은 쉽지 않다. 식구들이 흩어지고 램지 부인이 죽듯
이 모든 게 흩어지고 인간과 자연을 연결짓는 고리는 상실된다. 재현의 거울이 사라진 지금
램지 부인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이것이 살아남은 램지 씨와 아들이 등대를 향해가는 제3
부에서 릴리가 맡은 임무다.
3부 '등대'는 예술가가 심미적 비전을 얻는 과정을 그린 것이요, 언어가 아닌 추상으로 이
루어지는 재현이다. 릴리는 43세의 울프 자신이요, 화가인 여동생 바네사를 모델로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여성적 감수성과 남성적 능력을 가진 양성적 존재이다. 램지 씨가 등
대에 발을 딛는 것을 상상하며 릴리는 갑작스런 계시 속에서 직선을 긋는다. 길다랗게 그
은 그 한획은 잠정적인 것이다. 폴 드 만의 시간의 수사성처럼 램지부인에 대한 알레고리적
읽기이다.
그런데 정말 릴리는 양성적이고 자족적인가? 스피박은 '첨가'된 글로 앞의 논리를 뒤엎는
다. 릴리는 남자를 이용하여 심미적 비전을 얻는다.
그녀는 순수 이성주체인 램지 씨를 이용하여 램지 부인이라는 예술을 창조하는 심미적 주체
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버지를 이용하여 어머니를 낳는 생산자가 아닌가. 남근을 부러워하
는 딸이 어머니를 미워하고 아버지를 흠모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진다는 프로이트의
남근선망은 혹시 여성의 생산능력을 억압하고 나온 가설이 아닌가. 릴리는 아버지를 이용해
어머니를 재현하는 창조적 행위를 하고 있다. 그는 여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기에 신경증 환자가 많고 사회적으로 창조적인 활동을 못하고 역사적으로도 인류에 공
헌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릴리는 아버지를 이용해 어머니를 재현하는 창조적 행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릴리의 창조행위는 램지 씨의 시도와 달리 잠정적인 알레고리로 에코의 말처
럼 흔적이요, 얼마든지 다르게 반복될 수 있는 산종이다. 스피박은 릴리를 이용하여 프로이
트를 다르게 반복하고 있다. 프랑스 페미니스트 이리가레이가 프로이트의 남근선망을 공격
하며 왜 여성의 자궁은 인정하지 않는가 물었듯이 스피박은 정밀한 텍스트 분석을 통해 그
녀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화가인 릴리는 철학자인 램지 씨를 이용하여 램지 부인이라는 예술 텍스트를 낳는다. 남
성들이 그토록 내세운 남근숭배를 의심해보자. 혹시 자신들의 생산능력이 없음을 감추기 위
해 여정의 자궁을 결핍으로 규정지은 것은 아닌가. 남근선망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자궁
선망을 그것과 대립시켜보자는 것이다. 푸코가 말했듯이 결코 권력의 형식으로부터 진리를
분리시킬 수는 없지만 현재 헤게모니가 작용하는 곳의 진실성을 의심해볼 수는 있다. 이것
이 릴리와 램지 씨가 "맞수이면서 동반자"인 이유이다. 둘 다 중심이 될 수 없으면서 둘 다
중심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데리다 이후, 푸코 이후의 마르크시스트들이 가질 수
있는 정치성이다. 혁명의 자리에 공존과 타협을 놓는 것이다. 아무런 비전을 얻을 수 없다
하여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남성을 도구로 하여 여성에 대한 여성의 비전을 구
성하려는 시도로 '등대로'를 읽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스피박은 말한다.
남근선망에 대한 대안으로 자궁선망을 암시한 스피박의 제안은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
주의 비판'에서도 나타난다. 스피박은 이 글에서 페미니즘 텍스트의 고전이 되다시피한 샬
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제국주의 비판의 텍스트로 다시 읽는다.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여주인공 제인의 억눌린 분노와 광기를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 버어사로 해석하여
제인이 어떻게 당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신의 의지를 펴나가는가 보여주었다.
이제 스피박은 버어사가 크레올계 유색인종이었음에 초점을 맞추어 버어사를 제인이 당시
대영제국이 요구하는 가정을 꾸미는데 희생되는 식민지인으로 해석한다. 문화는 당대의 이
념을 심는다. 가치중립적인 텍스트란 없다. 19제기 영국소설 속에는 당대 이념을 독자의 무
의식 속에 심어주는 정치적인 욕망이 있다. 가치중립적인 언어란 없다는 푸코나 에드워드
사이드와 같은 입장에서 스피박은 문화비평을 시도한다.
그녀는 억압되어온 유색인 여성작가, 진 리이스(Jean Rhys)의 텍스트 '드넓은 사가소 바
다'(Wide Sargasso Sea, 1965)를 복원하고 19세기 메어리 셀리가 쓴 '프랑켄슈타인'(1818)
도 다시 읽는다. 연구실에서 과학의 힘으로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박사의 욕
망은 인간을 창조해내는 여성의 자궁에 대한 남성의 선망에서 나온 게 아니냐. 또한 박사가
괴물의 씨를 퍼뜨리지 못하게 막는 것은 식민지인에 대한 제국의 야망이 아니냐. 그러기에
셀리는 서사의 틀을 열어놓아 식민지인이 피할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스피박의 정밀한
해석은 서사의 가닥가닥을 더듬으며 선배들의 매끄러운 논리 밑에 억압되어온 무의식을 들
추어 늦게 그러나 다르게 되받아 읽는다.
이런 저항적 인기가 문화연구의 한 갈래요, 문화비평이다. 문화 비평은 왜 프로이트와 연
결되는가.
문화비평과 프로이트
첫째, 일상의 삶이나 대중문화, 혹은 정치 등을 연구하는 데 사용되는 세련된 분석방식.
둘째, 문화적 유물론의 발달 다시 말하면 문화적인 작품들이 생산되거나 수용되는 상황들을
연구하는 것. 셋째, 문학작품들의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한 작품을 기능케 하고 그것과 관련
된 의미들이 어떻게 구조되는가를 보기 위해서 상황과 역사를 읽는 것. 넷째, 이론을 역사화
하는 것,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19세기 유럽인(유대인?) 부르주아지의 관점을 반영
하는가, '해체'는 어떻게 프랑스에서 일어난 1968년 5월의 사건과 관련되는가 등등...
위의 글은 1996년 봄 한국에 다녀간 바바라 존슨이 대담에서 밝힌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에 대한 정의이다("문학비평의 새로운 방향", '현대문학', 통권 498호, 1996)
미국에서의 문화비평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갈래로 줄곧 세속적 비평을 주장해온 에드워
드 사이드와 관계를 맺고 있다. 위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이전, 그 외에서 근원을 찾
을 수도 있지만 사이드가 예일대학 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해체비평이 여전히 텍스트를 벗어
나지 못한다고 불만을 표하며 이제 비평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서 근
거를 찾을 수 있다. 텍스트와 세상을 연결하자. 문학은 그렇게 가치중립적인 텍스트가 아니
다. 그것은 상황의 산물이다. 아니 상황을 반영하는 수동적인 게 아니라 상황을 만들어내는
정치적인 것이다. 문화비평은 신비평의 한계를 극복하려던 해체비평이 더 정밀한 텍스트 인
기에 빠져버린 것에 대한 반론에서 시작된다.
언어는 비유적이어서 저자의 의도가 그대로 작품 속에 반영될 수 없고 따라서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없다는 가정 아래 작품의 유기적 구성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었던 신비평
이 그 사명을 다할 즈음,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해체비평은 데리다의 영향을 받았으
나 대단히 미국적이었다.
신비평이 언어를 텍스트 안에 가두었다고 비난하면서 이제 언어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자
고 말한 폴 드 만('신비평의 막다른 골목')은 언어를 텍스트 밖으로 끌어냈지만 그것이 실
재를 지칭하지 못하는 것을 줄기차게 보여주는 비평의 알레고리를 연출한다. 언어는 객관
실재를 지칭하지 못하고 읽기는 앞선 읽기를 다르게 반복한다. 드 만의 수사비평은 정밀한
텍스트 읽기와 언어가 욕망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읽기는 늘 또다른 읽기를 억압하고 만이 가
능하다는 실천비평으로 많은 공헌을 했으나, 사이드가 보기에는 여전히 텍스트 안에 갇히기
는 마찬가지였다.
푸코가 이미 말했듯이 지식은 권력과 뗄 수 없다. 권력에의 의지와 지식에의 의지를 인간
의 속성으로 본 니체를 다시 끌어들인 푸코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을 쓰게 한다.
가치중립적인 언어는 없다. 동양을 읽는 서구의 지식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제국의 욕망
으로 물들어 있다. 지식이 권력을 창출한다는 가설은 문학을 비롯한 문화현상이 당대의 이
데올로기를 창출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무의식 중에 심어준다는 뜻이다.
19세기 영국 소설인 '폭풍의 언덕'이나 '위대한 유산'을 자세히 보면 식민지인 오스트레
일리아는 죄인들이 속죄하러 가는 곳이거나 갑자기 돈을 벌어오는 곳으로 그려져 있다. 문
학은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무의식 중에 심어준다. 사이드는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19
세기와 20세 기의 영국소설들을 제국과 식민지인의 관계에서 분석했다.
언어와 권력을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보기에 제국은 식민지 문화를 객관적으로 읽을 수
없고 문학은 당대의 지배 이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화비평은 작품을 욕망과 이념에 연결
시키는 작업으로 단순히 작품이 시대를 반영한다는 게 아니라 시대의 이념을 어떻게 심어주
고 구조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가치중립적인 언어가 없다면, 언어가 객관 실재를 지
칭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식민지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그들의 언어 역시
욕망에 물든 정치적 전략이 아닌가. 여기에 인식론적 한계가 있고 데리다와 푸코를 비롯한
해체론자들이 부딪히는 논리의 아포리아가 있다. 사이드는 자신의 '오리엔탈리즘'이 이런 한
계에 부딪히자 푸코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새롭게 지도했고 그것이 '문화와 제국주의'
였다. 그러나 이 책은 텍스트 분석이 단순해서 사실주의 작품들은 거의 당대 제국의 이념을
벗어나지 못했고, 조셉 콘래드와 E.M.포스터 등의 모던 소설들은 제대로 저항을 못했다는
이분법을 낳는다. 작품을 사실주의 시각에서 스토리 위주로 보았을 뿐 복합적인 형식 속에
들어 있는 저항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호미 바바가 그의 책 '문화의 위치
'(1994)에서 똑같은 모던 텍스트를 다르게 분석한 것과 대조된다.
인도인으로서 호미 바바는 프로이트의 '전이', 라캉의 '상상계', 데리다의 '산종', 바흐친
의 '대화'등 선배들의 이론틀을 빌려 '문화와 혼혈성'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만들었고 모더
니즘의 텍스트가 갖는 복합적인 저항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그는 문화란 고유한 것이 아니
라 언제나 하나의 문화 위에 다른 문화가 덧칠해지는 것으로 정신분석의 전이와 같다고 보
았다. 환자와 분석자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지는 치료는 환자의 욕망과 그것을 읽어내는 분
석자의 욕망이 상호 접촉하면서 의미가 계속 덧붙여져 나간다. 그러므로 치료가 완료되는
순간이란 둘 사이의 욕망이 타협을 보는 순간이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무의식을 어딘가에 묻힌 상흔으로 보았으나 후기에 이르러 특히 '전
이의 역동성'이나 '분석에 있어서의 구성'과 같은 글들에서 상흔이 복원될 수 있는 게 아니
라 대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강하게 암시했다. 사실 라캉이 벌떡 일어서서 선배를 재
해석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분석은 대화 속에서 얻어진다. 진리는 이미 표층에 올라
와 있는 것이지 어딘가에 깊숙이 숨어 있는 게 아니다. 정신분석은 둘 사이의 욕망 길들이
기이고 예술 작품도, 사랑도, 삶도 둘 사이의 욕망길들이기 이다. 이것은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과도 흡사하다. 그는 나의 말은 이미 반쪽이 타자의 말이라고 했다. 데리다의 산종은
시간이 흐를수록 의미가 덧칠해져가는 것으로 나의 의식은 고유한 백지가 아니라 앞선 흔적
의 타자 위에 또 다시 쓰여지는 요술 책받침과 같다. 우리의 의식이 초를 먹인 셀로판지
와 같다고 본 프로이트에게서 데리다가 얻어낸 선물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이론은 앞선 이론 위에 또다시 쓰여지는 흔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프로
이트가 현대 이론에 공헌한 것은 나르시시즘 혹은 라캉의 상상계이며 이것은 문화비평에서
도 예외는 아니다.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상상계적 오인이다. 너는 나요, 나는
곧 너라는 동일시가 제국의 논리라는 것이다. 바바는 이 동일시가 부르는 착오로 식민지 정
책이 실패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선배들의 것에서 자신의 이론 을 만들어냈고 스피박은 실천
적인 읽기를 했다. 그녀에게 나르시시즘은 중심주의 사고이다. 모든 중심주의는 타자를 인정
하지 않는 나르시스적 본능이다. 그러나 중심주의는 타자를 억압하고만 설 수 있기에 성공
하지 못한다. 이 얼룩을 끄집어내는 작업이 라캉의 실재계로 가는 길이었고 스피박의 탈식
민주의 여성비평이다. 그녀는 위의 논리를 과거 식민지였던 인도 여성이라는 자신의 입장에
서 다시 읽어낸 것이다. 그녀의 작업은 정밀하다. 올 하나하나를 빠뜨리지 않으면서 앞선 텍
스트를 읽어 그 속에 숨은 얼룩을 짚어낸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 또 하나의 중심이 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남근선망이 억압한 자궁선망이나 나르시스가 억압한 에코는 중심이
아니라 타자와 공존하는 대안이다. 식민지는 제국과 다르지만 열등하지 않고 여성은 남성과
다르지만 열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월의 차이 대신에 공존의 차이(difference)를 들여놓은 현대이론은 공존과 대화, 그리고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고유가치를 상실한, 아니 포착할 수 없는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것은 본질에 대한향수보다 표층 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더 문제라는
것이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스스로를 발전이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두고 가는 것,
잃고가는 것이 너무 많다. 스스로를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실천비평가라고 말하는 스피박의
읽기는 프로이트에게서 영향을 받은 데리다, 라캉의 '해체'를 인도 여성이라는 자신의 입장
에서 다시 읽어냄으로써 선배들의 인기가 억압하고 있는 것을 드러낸다. 정밀한 텍스트 읽
기와 정치적인 전략의 양면을 충족하는 그녀의 읽기에서 프로이트는 그녀 의 선배이면서 동
시에 맞서는 라이벌이 된다. 백인 남성에게서 빌려온 논리로 백인 남성을 전복하는 게 스피
박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2. 호미 바바와 문화의 혼혈성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내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더 많은 여가를 즐기고... 인간은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끊임없이 발견과 창조를 거듭해왔다. 과학기술과 합리적인 이성에 근거
한 개발의 논리는 미신의 어두움과 권력의 혼돈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자는 계몽의 빛이
었다. 그러나 앞으로 향하던 전진의 행군이 비틀거리며 문득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순간이
있었다. 그런 행진의 발굽 아래 짓밟히고 스러져가는 것들의 흔적이 어느 날 전진하는 발끝
을 툭 건드린 것이다. 그 지점은 바로 어느 정도 물자가 보급되고 어느 점도 민주화가 이
루어진 지점, 후기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무엇이 밟히고 억눌려 왔던가. 개발의 논리에 짓밟혀온 환경파괴, 백인이 주도한 민주화에
의해 억압되어온 흑인, 남성이 이끌어온 가부장제가 억압한 여성, 제1세계가 억압한 제3세
계, 이성이 억압한 감성, 서구 합리주의가 억압한 동양의 비합리주의, 말하기가 억압한 글쓰
기 등 20세기 중반부터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붙이며 일어난 온갖 사회, 문화운동은 산업
화와 민주화가 억압해온 것들의 흔적이 쌓이고 쌓여 터져나온 과거에 대한 반성의 결과였
다.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
그러나 이 세 가지 논의들은 20세기 후반부 사회 전반과 문화의 패러다임들로 서로가 관련
을 맺고 있기에 경계를 가늠하기란 그리 간단치가 않다. 그러나 해체 혹은 후기 구조주의는
사상이요 비평이론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술과 문화의 양식이고 탈식민주의는 해체와
마르크시즘이 결합된 문화비평의 한 갈래라고 거칠게 말해볼 수는 있으리라.
나르시스 신화가 억압한 에코를 들추어 상상계에 저항하는 '흔적'으로서의 읽기를 선보인
스피박의 탈식민주의 여성비평은 데리다의 해체에서 타자의식을 빌어온다. 그리고 제3세계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선배들을 다시 읽어 중심주의를 드러내고 그들이 억압한 식민지인과
여성의 음성을 복원한다. 입장이란 무엇인가. 나의 나르시시즘으로 너의 나르시시즘을 읽어
무의식이 억압한 타자를 드러내는 것 아닌가. 너의 나르시시즘으로 본 나는 정확한 나가
아니다. 인식에 개입되는 착오를 벗어날 수 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에 착오가 개입된다는 걸
보여줄 수는 있지 않는 가. 스피박의 읽기는 프로이트의 나르시스적 주체, 혹은 데리다의 '
흔적'으로서의 주체에 입장이라는 마르크시즘이 경합된 문화비평이다. 같은 제3세계인이며
남성인 호미 바바는 어떻게 나르시시즘을 이용하는 가. 그의 문화이론은 정신분석과 마르
크시즘을 스피박과 어떻게 달리 결합시키는지 보자.
호미 바바의 문화이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탈식민주의 문화비평 에서 이루어진 작
업들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구적인 작업을 벌 인 프란츠 파농과 잔모하메드,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드를 살펴보는 것은 이들이 정신분석과 나름대로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도 조
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언어는 이미 타인의 입 속에 반이 있다는 바흐친의 대화적 상
상력이 프로이트의 전이와 흡사한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그의 이론은 볼셰비키의
단음조에 반대했을 뿐 제국주의나 식민지 관계로 확장되지는 않는다.
정신분석이 환자와 분석자 사이의 대화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본 프로이트의 전이는 환자
와 분석자의 욕망을 중시하고 양쪽의 나르시스적 주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로의 욕망을
나누고 길들이는 과정에서 진리가 얻어진다고 본 혁명적인 암시였다. 나의 나르시시즘과 너
의 나르시시즘이 부딪쳐 서로를 나누고 길들이는 게 정신분석이라면 치료란 실재 그 자체
의 독단과 권위를 무너뜨리는 과정이 아닐까. 대화인 점은 비슷하지만 바흐친과 달리 프로
이트의 갈림 언어는 우월의 차이를 지닌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무너뜨리는 전략이 암
시된다. 너의 나르시시즘이 지닌 착오와 독단을 나의 나르시스적 주체가 드러내 보이는 정
치성이다.
1. 하얀 마스크를 쓴 검은 피부 :프란츠 파농
해방된 식민지인들은 그날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법적으로 신분이 보장되
고 의식으로도 그렇게 알고 있지만 진실로 자긍심을 가지고 홀로 설 수 있는가. 겉으로는
해방된 흑인이지만 마음 속으로는 열등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사에 백인이 되려 애쓴
다. 자신의 검은 피부를 증오하고 두려워하여 꿈속에서는 늘 흑색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백인이 되고픈 소망을 무의식 속에 가두고 있다. 왜 해방은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없
는가. 해방이 된 지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것은 몸의 해방일 뿐 마음은 여전히 갇혀 사는
식민지인은 아닌가. 식민지란 형패를 달리하여 마음속으로 스며들었고 이런 열등의식은 인
간을 이중적으로 만든다. 하얀 마스크를 쓰는 검은 피부의 인간으로.
알제리와 프랑스의 국경지방에서 정신과 의사로서 흑인들의 꿈을 분석하고 그들의 분열증
을 치료해온 파농은 흑인으로서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가 가늠해보게 된다. 해방된 지 백년
이 가까워오는데도 왜 흑인들은 자신의 피부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가. 50년대와 60년대
초 파농은 이 분열증에 가까운 흑인들의 열등의식을 탐색하고 그것이 식민통치가 끝났어도
여전히 사회의 가치기준이 백인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사회의 가치기준이 백
인에게 있기에 자아는 붕괴되어 타자가 되고픈 꿈을 꾼다. 어릴 적부터 그를 둘러싼 문화
와 교육은 백인이 우월하고 흑인은 열등하다는 무의식을 심어준다. 백인이 사용하는 언어
와 흑인의 언어는 그저 다른 게 아니라 한쪽이 더 우월하게 다르다. 그래서 흑인은 불어를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백인이 된다. 불어를 잘못하는 러시아인이나 독일인들은 자존심이
있기에 그들 식으로 발음하고도 전혀 꺼리지 않는다. 그러나 흑인은 자신만의 문화와 역사
가 없기에 백인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보이려 애쓴다.
흑인 여성은 푸른 눈을 가진 남성과 결혼하여 사회적 신분을 높이려 한다. 그녀는 영혼을
팔아 그의 시종이 된다 흑인 남성은 어떤가. 흑백혼혈의 여성에게 아첨하고 그녀를 얻으려
한다. 자신보다 한 단계 위의 신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피부색에 따라 한 단계
씩 상승한다. 흑에서 혼혈로 혼혈에서 백으로, 소망은 오직 앞으로만 나아갈 뿐 퇴행을 모른
다. 흑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려 안간힘을 쓰다보니 분열적인 행동을 보인다.
흔히 프랑스의 흑인은 미국의 흑인보다 더 자유롭다고 여겨지지만 프란츠 파농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미국의 흑인은 인종차별에 항의하고 스스로 전리를 쟁취하려 행동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런 항의가 필요 없게 차별이 없다. 그러나 무의식 속에 심어진 차별의식은
더 끈질기고 심각하다. 이 문제는 헤겔 식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노예의 피부 위에 주인의 마스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으로는 주인이지만 무의식으로
는 여전히 노예인 것이 식민시대가 끝난 탈식민주의 시대의 식민지인이다. 그래서 포스트
컬로니얼리즘의 '포스트'(post-)에는 후기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파농의 글은 이것을 밝힌
것에서 의미가 있었다.
미국의 1993년도 노벨상 수상작가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 (1970)은 이런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어릴 적부터 흑인 아이가 보아온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셜리 템플이었다. 아
이는 푸른 눈만 가지면 자신도 사랑 받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백인이 미의 기준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 그렇게 교육받아온 아이가 그런 환상을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소설은 자긍심과 사랑이 없는 한 가족의 불행을 그린다. 모리슨은 사회의 잘못된 백인 우
월주의와 그것을 무분별하게 뒤쫓는 흑인의 허영, 그리고 그것에 의해 분열증을 일으키는
한 소녀의 모습을 그려 미국 사회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먼 유럽 땅에서 파
농이 겪은 항의와 반성이 10년 후 미국의 한 여성작가의 작품으로 나타난다.
이로부터 20년이 흐른 1994년, 이런 정체성의 비극은 존 업다이크의소설, '브라질'에서 한
층 더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흑백의 인종차별이 심한 브라질에서 백인 상류층 여자가 흑
인 하류층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갖가지 모험을 거치면서도 두터운 인종차별의 벽을 넘지
못한 여성이 연인을 위해 피부색깔을 바꾼다. 마술의 힘을 빌어 자신의 하얀 피부를 남자에
게 주고 자신은 흑인이 된다. 흑인 여성이 흑인 남성보다 인종차별의 벽을 넘기 쉬웠고 또
그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연 뜻한 대로 행복해 질까.
백인이 된 남자의 속은 여전히 흑인이었다. 그는 검은 피부 위에 하얀 마스크를 썼을 뿐
이다. 그는 옛날 자신이 백인을 상대로 금품을 뜯던 바로 그 해변가에서 살해당한다. 백인
이 된 자신을 잊고 동료를 대하듯 하자 흑인 부랑아는 겁에 질려 면도칼로 그를 찔러 죽인
다. 속과 겉이 다른데서 온 이 비극적 종말은 인종 차별의 벽과 정체성의 문제가 얼마나 복
합적인 것인가 보여준다. 그것은 외적인 법적 자유의 문제라기보다 내적인 자긍심과 사회
의 가치기준과 무의식의 문제여서 긴 시간을 두고 이처럼 이론으로 작품으로 되풀이되고 있
다.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마스크들'(Black Skin, White Masks, 1952)에서 속은 흑인인데
흰 마스크를 쓰려는 흑인들의 성격파탄을 이렇게 예로 든다. 흑인 여성은 같은 동족인 흑인
남성을 거부한다. 흑인 남성 의사는 군의관이 되어 자신이 당한 만큼 백인들을 지배하고 싶
어한다. 그는 자아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기에 자아를 사랑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타자를 사
랑하지도 못한다. 굴욕감이 주는 자기학대는 타인학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문화는 이처럼
제도만큼 중요하다. 아무리 제도적으로 식민지 대가 끝났다 해도 문화 속에 심어진 차별, 무
의식에 내재된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식민주의는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될 것이다.
50년대에 쓰인 파농의 이런 통찰은 이후 탈식민주의 문화비평에 큰 영 향을 미친다. 우선
제도나 이성의 힘보다 문화와 무의식의 힘이 중시된 다. 무의식에 심어진 지배와 종속의 관
계를 살피게 되어 텍스트 분석에 도 정신분석과 마르크시즘이 다 필요하게 된다. 이제 프로
이트의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에로스와 문명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의 에로스와
제3세계인의 에로스가 부딪쳐서 우월의 관계를 의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문화
읽기가 된다.
2, 탈식민주의 문화비평
비록 파농의 글이 60년대에 영어로 번역되었지만 탈식민주의 담론이 활발히 논의되기 시
작한 것은 8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잔모하메드(Abdul R. JanMohamed)는 식민주의 문학을
상상계적 텍스트와 상징계적 텍스트로 나눈다. 유럽은 선이요 원주민은 악이라는 이분법을
고정시키고 타자를 자아와 일치시키려는 상상계적인 것과 타자를 다르다고 보면서 혼성적
인 합일을 꿈꾸지만 결국은 타자를 인정치 못하고 은연중에 지배자의 시각을 드러내는 상징
계적 텍스트이다. 인종적 차이를 느끼는데 경제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한다고 보는 잔모하
메드는 정복과 지배의 야망을 숨기고 한 쪽이 다른 쪽을 교화시켜야 한다고 믿는 상상계적
텍스트보다 타자를 인정하는 상징계적 텍스트를 위에 놓지만 진정한 탈적민주의 소설은 타
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소설이라고 믿는다. 유럽인은 원주민을 사용가치로 보지 않고 교환가
치로 보아 잉여가치를 원하기에 선과 악의 이분법적 이념을 식민지인에게 심어 재투자를
시도하려 한다. 유럽인의 나르시시즘은 의식으로는 식민지인을 교화시켜 자신들과 똑같이
문화인으로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은 지배와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이다. 잔모하메드는 라캉의 상상계를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연결시킨다.
잔모하메드는 제국과 식민지인을 모두 죄인으로 보는 꾸찌에 (J. MCoetzec)와 호미 바바
를 상상계적 환상에 빠져 있다고 보고 나딘 고디머 (Nadine Gordimer)의 소설이나 '인도로
가는 길', '어둠의 속',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상징계적 텍스트로 분류한다. 그의 이런 분
류법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 책의 뒤에서 보이겠지만 꾸찌에는 비록 백인이지 만 남
아프리카의 백인이 상상계적 오류에 빠진 것을 드러내 자기 반성적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리고 곧 논의되는 바바는 백인의 것을 흉내내어 백 인의 것을 전복하는 저항을 담고 있기
에 그가 단순히 상상계적 오류에 빠져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한 편의 글이 그 정
도의 압축된 통찰을 담고 있기도 쉽지는 않다.
잔모하메드만큼 압축된 통찰은 아니지만 같은 마르크시즘 계열의 아메드(Aijaz Ahmad)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대가들을 비판하면서 탈식민주의가 이 둘 밖의 어
느 곳이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는 제1세계와 제3세계를 자본주의 대 반자본주의로 나누는
제임슨의 견해가 피상적이라고 반박한다. 한국은 제3세계지만 가장 빠르게 성장한 자본국가
이다. 제3세계인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매직리얼리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기법이다. 제3세계의 자본주의 민족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과 힘든 관계라는 증거는 없다. 살
만 루시디(Salman Rushdie)는 포스트모던 기법과 제3세계를 합쳐 캐논에 반대되는 작품을
썼다. 그러므로 제임슨 식의 이분법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푸코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미시적 접근도 문제다. 사이드의 책에서는 그가 해체시키려는 바로 그 권력의 음성이 들린
다. 또 아무리 그의 '오리엔탈리즘'이 통찰을 보여도 과거의 모든 기록이나 연구가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고 제국주의의 발흥자나 원주민이 똑같을수는 없지 않느냐.
아메드는 제3세계 민족주의는 제임슨을 통해 비판하고 '해체'는 사이드를 통해 비판한다.
그의 이런 반박은 상당히 정확하고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비판보다 대안이다. 그는
자신의 대안이나 논리를 밝히지 못한다. 이제 바바의 대안으로 넘어가기 전에 사이드의 문
제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그가 부딪친 한계는 무엇이며 바바는 어떻게 프로이트를 끌어
들여 이 한계를 극복하는가.
순수학문이란 이상에 불과하고 동양에 관한 서구의 텍스트는 객관사실이 아닌 담론이라는
전제는 지금까지 무심코 받아들여온 서구문화에 대해 재검토하게 만든다. 지식이 권력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면 동양에 대한 지식이란 서사이다. 그것은 서구인들의 욕망과 동양인
들의 욕망에 의해 형성되는 과정의 산물이지 객관사실이 아니다. 동양에 관한 서구인들의
여행기, 안내서, 학술단체, 세미나, 그리고 주요 시인, 예술가, 학자들에게서 공통되는 일련의
수사적 기교가 밝혀진다. 즉 한 권의 책이 권위를 얻으면 그것이 인용, 재인용되면서 점점
실체에서 멀어지고 하나의 동일하고 획일적인 동양관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의 식
민정책과 긴밀히 연결된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를 나르시스적 주체와 연결시킨 책
이다. 무의식에 잠재한 지배의 욕망을 지식과 연결시킨 그의 작업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와 지식에의 의지를 미국에 사는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제3세계인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글이
며,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연결시킨 글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반문이었다. 어떻게 타인을 억압하거나 조정하지 않고 다른 문화와 민족을 연
구할 수 있는가. 어떤 대안도 지식이 권력이라는 그물망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가 거짓이고 제국과 식민지인의 나르시시즘에는 차이도 없다는 말인가. 이런 반문
에 푸코가 그렇듯이 사이드는 소극적인 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식은 억압이면서 동시
에 각자가 즐거이 참여하는 생산이다. 이 지속적이고 단단한 힘을 단순히 상부구조의 강대
함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문화적 지배의 가공할 구조를 깨닫고 그 구조를 타인에
게 적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등등.
물론 사이드는 자신의 방어에 만족하지 못한다. 해체 이후의 마르크시즘은 고유가치를 인
정하지 않기에 그리 쉬운 대안을 제시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오리엔탈리즘만으로는 뭔가 부족
하다. 이때 철저한 텍스트 분석으로 제국의 나르시시즘을 드러내고 자신의 욕망을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스피박의 실천비평이 그에게 하나의 탈출구로 떠오른다. 영국제국
주의 시대의 텍스트를 읽어 그 속에 묻힌 지배이념을 밝히자.
1994년에 나온 '문화와 제국주의'는 바로 이런 맥락의 책이었다.
'로빈슨 크루소' 이래 19세기 위대한 영국 소설들은 지금까지 사랑이야기, 인간적인 성장,
미학적 구성, 그리고 더 나아가야 당시 영국사회의문제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오곤
했다. 그것은 인문학적이고 심미적인 작품으로 영국 사회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
나 제국주의의 영국문화는 그 이념을 바탕에 깔고 있지 않겠는가. 사이드는 문화 읽기에
어찌 그런 이념이 배제될 수 있는가 반문한다. 제국으로서의 영국이었으니 제국주의 문화로
서 영국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러티브(서사)란 소설의 수사성일뿐 아니라 국가의
전략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꾸미고 그 속에서 듣는 이를 설득하려는 욕망은 한 국가의 전략
이며 이것은 문화를 통해 나타난다. 아니 문화가 오히려 제국을 이끌어간다.
로빈슨 크루소는 거구 식민지 개척의 대표적 선구자이다. 그는 무인도 에 표류하여 어떻
게 야만인과 어울리며 재물을 축적해 나가는지 보여준 다.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는 전 부
인 버어사를 다락방에 가둔다. 미친 그녀는 서인도제도인이다. '폭풍의 언덕'에서 캐더린에
게 거부당한 히 스클리프는 먼 곳에 가서 돈을 벌어와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게 복
수한다. '위대한 유산'의 매그위치는 죄수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유배되지만 그곳에서 돈을 벌
어 핍을 신사로 만든다. 매그위치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속죄의 장소를 이탈한 죄수
로서 돌아와서는 안 될 곳에와 있다는 이념을 심어준다. '테스'의 엔젤은 첫날 밤 테스의 고
백을 듣고 충격으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 방랑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돌아오지만 너무 늦
어 그녀를 구원하지 못한다.
19세기 영국소설들에서 식민지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는 인물들의 탈출구다. 그곳은 참
회의 지역이요, 재산을 모아오는 곳이요, 가능성을 지닌 미지의 영역이다... 이 정도면 제
국이 독자에게 식민지에 대한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영국 사회를 다루면서
은밀히 끼워 넣는 식민주의. 문화와 제국은 독자를 은밀히 움직이는 수사요, 내러티브다.
이제 제국주의 문제를 좀 더 드러나게 다룬 20세기 소설들을 보자.
폴란드에서 망명하여 영국 작가가 된 조셉 콘래드의 소설은 영국의 제국주의에 자의식적
인 시선을 던진다. '어둠의 속'(Heart of Darkness,1899)에서 그는 영국의 아프리카 콩고 식
민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다. 식민지 통치자 커츠는 상아 채집과 야만적 행위로
탐욕을 채우기에 급급하다가 비극적 최후를 마친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공포, 공포
"(horror, horror)였다. 사이드는 이 소설이 제국주의의 문제점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커츠의 체험을 말로우가 전달하면서 자의성이 개입되고 다시 그것을 제3의 화자가
전달하는 기법이 주제를 흐려놓았다는 것이다. 말로우는 두 세계 사이에서 감정적으로 어중
간한 거리를 유지할 뿐 식민지인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능동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콘래
드는 제국주의를 비판했으나 그 제국주의를 벗어날 탈출구를 암시하지 못했다. 결국 폴란
드 망명인의 자의식에 머문 그 소설은 자기시대의 산물이었다고 사이드는 아쉬움을 표한다.
'어둠의 속'은 인간의 어두운 심연과 죄의식을 다룬 모더니즘 소설로 알려져왔다. 또한 언
어가 전달자의 욕망에 따라 굴절되는 것을 양파껍질과도 같은 독특한 기법으로 보여준 소설
로 해석되기도 한다. 리얼리즘의 명징함을 선호하는 사이드는 콘래드의 모던 기법이 엉거
주춤하게 느껴진다. 그가 인도의 문제를 다룬 소설 중에서 포스터의 것보다 키플링의 것을
선호하는 것도 전자의 모호성 때문이다. 키플링은 인도를 사랑한다. 그러나 올바로 사랑하
지 못한다.
키플링의 소설 '킴'(Kim, 1901)에서 버려진 아이로 자란 킴은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 스파
이 조직을 와해시키는 데 큰 몫을 하게 되고 결국 영국의 신사로 인정받으며 긴 모험의 종
지부를 찍는다. 키플링은 인도를 이해하고 사랑했지만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는 것에 조금도
회의를 표하지 않는다. 그에게 인도인의 혈통을 받은 킴이 영국의 신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인간 승리였다.
키플링이 제국과 식민지의 합의에 건강한 축복을 보내는 데 비해 포스터는 대단히 회의적
이다. 그리고 포스터의 회의적 태도는 키플링의 축복보다야 낫겠지만 존래드의 망설임만큼
이나 모호하여 사이드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가 보기에는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A
Passage to India, 1924) 역시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포스터의 소설에서 인도는 불가해하고 광대한 지역이다. 무어 부인은인도인과 거부감 없
이 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여인이지만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하
고 죽는다. 인도인 의사 아지즈도 좋게 부각시키지 못했고 가장 공정한 입장에 선 듯한 필
딩도 아지즈와 공감하지 못하며 그의 경험은 개인의 차원으로 끝난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무력감은 회피적인 작가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영국 식민주의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요 옹호
하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이다. 사이드는 콘래드의 회의적인 태도를 비난하듯 포스터
역시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모호성과 아이러니는 리얼리즘의 닫힘을 열어 놓으려던 모더니
즘의 열림이었으니 직설적인 저항을 기다리는 사이드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사이드는 푸코의 미시적 접근이 갖는 소극성에서 벗어나려고 리얼리즘 쪽으로 지나치게
가버렸다. 그는 절대가치로부터 소외되었음을 표현하려는 텍스트에서 절대가치를 찾으려 했
다. 그리고 문화비평이란 고유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해체 이후의 정치적 전략임을 깜빡 잊
는다. 열정은 좋으나 단순해진 탓에 그가 서문에서 밝힌 순수한 단일 문화는 없고 모든문화
는 혼혈이며 다양하고 다층적 이라는 언급을 보여주는 실제 예는 책에서 찾기 어렵다. 제국
은 타문화를 지배해서는 안 되고 제3세계도 타문화를 무조건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던
유보적인 태도는 실제비평에서 작품이 당대의 산물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으로 뒷걸음친 인상
이다.
모던 텍스트의 저항을 억울하지 않게 읽어주고 제3세계인으로 선배들이 만든 '차이'에서
'문화적 차이'를 만들어낸 사람은 인도인 호미 바바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스피박이
그랬듯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연결한다. 그러면서도 스피박과는 조금 다르게 에로스와
권력을 연결시킨다.
3, 호미 바바의 문화적 차이
스피박은 제국의 에로스를 식민지인의 에로스로 전복시켰다. 그녀의표현대로 하위계층
(subaltan)은 상위계층의 상상계에서 우수리를 발견하여 그들의 믿음이 착각임을 짚어주고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제시했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대안으로 에코의 '흔
적'을, 남근선망에 대한 대안으로 자궁전망을 암시한다. 바바 역시 제국의 에로스를 식민지
인의 에로스로 전복한다. 그러나 그는 강력한 실천비평이 아니라 전복적인 이론을 만든다.
프로이트의 전이(transference)와 데리다의 산종(dissemination)에서 문화의 혼혈성
(hybridity)을 만들어내고 차이(difference)에서 문화적 차이(cultural difference)라는 제3세계
인의 저항이론을 만들어낸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든'에서 엘라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하나의 해결책일지라도 바로
네 자신이 또 하나의 문제이니 그런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뜻있는 결
의가 있다 해도 그것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굴절되니 언어는 중립적인 가치체계가 아니고
상황에 의해 굴절되는 수행적인 것이요 인간의 욕망은 시간에 따라 의미를 굴절시키니 주체
자체가 문제인 세상에서 진리란 어떤 것이어야 하나.
프로이트는 '전이의 역동성'에서 치료는 분석자와 환자의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주
관적인 것이라 했고 라캉은 이것을 한층 더 밀고나가 치료란 둘 사이의 욕망 길들이기라고
했다. 분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모되는 둘 사이의 욕망 주고받기이므로 해답이란 어딘
가에 온전히 숨어 있는 게 아니라 표층 위에 이미 올라와 있다. 진리란 과정 속에서 존재하
는 잠정적인 것이고 의미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굴절되는 대화적인 것이다. 프로이트의 전
이와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은 주체도 진리도 닫힘이나 단음조가 아니요 열림이고 갈림적
이라는 데서 서로 만난다. 피터브룩스는 이 원리를 소설 분석에 끌어들여 '플롯을 따라 읽
기'라는 책을 만들었다.
이제 바바는 서사를 국가의 전략으로 확장시켜 문화와 문화 사이의 충돌과 접목과 혼혈성
을 논한다 그의 글 '국가와 서사'(Nation and Narration)는 서사전략이 곧 국가전략이라는
것으로 문화와 제국을 연결시키는 글이다. 국가는 선험적 이념이 아니라 전진과 퇴행의 양
가성으로 구성되는 문화적 충돌과 접목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문화의 경계는 유동적이
고 대화적 이어서 늘 자리바꿈을 겪는다.
왜 제국의 문화가 식민지인의 것을, 선진국의 문화가 후진국의 것을 꿀떡 삼키지 못하는
가. 목에 탁 걸리는 아담의 뼈 때문이다. 그게 무엇일까. 바로 식민지인의 무의식이다. 이 아
담의 뼈는 프로이트의 에로스요, 라캉의 억압되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상상계요, 데리다의
디페랑스이다. 그것은 반복을 가능케 하는 언캐니, 실재계, 욕망의 미끼인 '프티 오브제 아'
(a), 그리고 말하기에서는 들리지 않지만 글쓰기 에서는 분명히나타나는 디페랑스
(differance)의 a이다. 바바는 여기서 자신들의 "사악한 눈"인 알파벳 첫글자, '아'(a)를 만든
다.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전이에 바탕을 둔 데리다의 '디페랑스'와 '산종', 라캉의 상
상계와 욕망이론을 자기 식으로 읽어 나라와 나라 사이의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
고 원주민의 무의식이 갖는 저항 때문에 식민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혹은 이기적이고 사악한 꿈인 원초적 나르시시즘을 제국의 꿈을 뒤엎
는 수단으로 만들어버린 바바. 그래서 그의 문화적 혼혈성 속에는 응어리진 '사악한 눈
'(Evil Eye)이 도사리고있다. 그가 어떻게 에로스와 권력을,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연결시
키는지 그의 책 '문화의 위치'(The Location of Culture, 1994)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배 위에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인다. 그 배는 필리핀인에 의해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자본이 값싼 노동력을 따라 이동하는 다국적 기업시대, 냉전체재가 끝나면서 새롭게 부상되
는 민족주의, 기술과 정보의 발달로 세계가 하나의 커다란 촌락이 되어갈 때 민족주의와 세
계화는 어떻게 조화를 이를 수 있는가. 문화와 문화는 어떻게 충돌하여 변형되고 그 속에서
녹지 않는 "문회적 무의식"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최근의 글, '부호화하기, 해독하기'(Encoding, decoding)에서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다양성(pluralism)과 다의성(polysemy)을 이렇게 구별했다. 기표는 상황에 의해 여러 개의
암시적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들 은 서로 동등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즉 어느 집단 안에
서 더 좋은 해 석이 제도화된다. 우열의 차이를 드러내며 종속되는 것이지 공존이 아니 라
는 것이다. 그저 개인의 사적인 반응에 의해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게 아니라 주체 속의 응
어리에 의해 선택적으로 감지되고 이 응어리가 의사 소통을 가능케 한다.
홀의 이런 견해는 바바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주체 속의 응어리에 의해 여러 개의 의미
들 가운데 하나의 의미가 만들어지기 마련인데 이때 응어리가 무엇을 가리키느냐에서 차이
가 난다. 바바의 응어리는 인간이 지닌 무의식이다. 억압되어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
는 에로스 요나르시시즘으로 '사악한 눈'이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우월한 것을 선택한다는
보장은 없다. 의식의 기준으로는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무의식으로는 이기적
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응어리때문에 타문화는 그대로 흡수되지 않고 그래서
제국의 꿈은 무산된다는 것이다.
제3의 공간과 문화적 차이
파농이 프랑스에서 사는 흑인으로서 느끼던 집 없는 느낌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닌 그
어떤 제3의 인간으로서 느끼던 고향 없는 느낌은 그 자신만의 느낌이 아니었다. 토니 모리
슨의 '빌러비드'에 나오는 124번지는 어떤가. 1873년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자유를 얻은 직후
의 흑인의 삶이 백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 쓰여지고 읽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의 딸을
죽이고 그 딸이 유령으로 나타나서 같이 살며 한 가정을 파괴하는 스토리는 오늘날 무슨 의
미를 지니는가, 모리슨의 여주인공 시드가사는 블루스톤가 124번지는 원한과 저주로 가득
차 있다. 그곳은 가정이 아니고 죽은 유령이 되돌아와 함께 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투쟁의장이다. 제3의 공간이다.
노예시절 너무도 참혹한 학대로 고통받은 시드는 어린 딸을 죽인다. 그 애가 자신과 같은
동물적인 삶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바바는 시드의 이런 행위를 노예로서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고 말한다. 주인의 재산을 파괴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은 딸
이 어느 날 소녀가 되어 시드 앞에 나타나 그녀와 함께 산다. 사랑과 증오와 소유와 탐닉으
로 124번지는 소외되고 피폐된다. 유령은 과거 노예시절의 악몽이다. 시드가 유령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과거의 악몽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파농이 느끼듯 인
종차별은 이제 무의식 속에 자리잡아 악몽처럼 시드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다. 그리고 시드
는 그 속에서 헤메고 탐닉하여 자아를 붕괴시킨다.
빌러비드는 누구인가. 모든 흑인의 얼굴에 달라 불은 노예시절의 악몽이다. 그들은 해방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 열등의식의 마스크를 벗어 던지지 못한다. 124번지는 더 이상 옛날 같
은 집이 아니다. 그곳은 현대인 이 겪는 타자와의 만남, 문화적 충돌을 상징하는 은유이다.
시드와 빌러 비드처럼 검은 피부 위에 흰 마스크를 쓰고 탐닉과 고립 속에 황폐하여 마멸될
것인가. 덴버처럼 다시 이웃과 손잡고 건강한 타협을 찾을 것인가. 모리슨의 질문은 바바의
것이기도 하다.
백인의 문화와 흑인의 문화가 부딪히고 동양문화와 서양문화가 부딪힌다. 세계가 좁아지
며 우리집은 더 이상 옛날의 고유한 우리집이 아니다. 경계 위의 인간들은 집 없는 느낌 속
에서 이질적인 것과 부딪히고 섞인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의 의미와 상징은 투명성을 잃는
다. 같은 기호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게 읽힘으로써 더 이상 통합적이고 단음조적인 문
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가 산종되듯 문화도 산종된다. 프로이트의 요술 책받침처럼 우리
의 의식 위에 쓰인 글씨는 자꾸만 덧쓰일 뿐 투명한 쓰임이란 없다. 언제나 앞선 것은 흔
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문화도 이런 것이 아닐까 파농의 검은 피부 위에 쓰인 하얀 마스크
처럼, 모리슨의 되살아나는 유령처럼 한번 쓰인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에 저장되어
틈틈이 의식 위로 솟구친다. 이것이 우리에게 집 없는 느낌, 괴기함(프로이트의 언캐니), 산
종(데리다의 'dissemination'은 의미가 시간에 따라 덧칠해지는 것이었는데 바바의
'dissemiNation'은 문화가 시간에 따라 덧칠해지는 것을 말한다), 혼혈적이라는 느낌을 준
다.
헤겔의 정반합과 같은 투명한 의식의 자리에 파농의 덧칠해진 의식이 들어선다. 프로이
트의 무의식과 데리다의 산종을 거친 현대 주체는 더이상 그런 초월주체를 받아들이지 못한
다 기호가 그렇듯이 문화는 늘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고 발화자와 수화
자의 간극으로 제3의 공간(in-between place), 결코 나타나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유령, 아
담의 뼈, 실재계, 응어리, 타자를 지니기에 양가성을 띠고 문화적 차이를 낳는다. 양가성은
프로이트의 양가성과 같은 것으로 다양성이나 이중성과는 다르다. 양가성은 단음조를 가로
막는 타자. 제국의 상상계에 어깃장을 놓는 원주민의 응어리 때문에 생겨나는 문화의 덧칠
해짐이다. 파농의 덧칠해진 주체는 분열증의 원인이지만 바바의 문화적 덧칠해짐은 원주민
의 저항이 된다. 파농의 무의식은 백인이 불어넣은 열등의식이 잠재한 곳이요, 바바의 무의
식은 억압된 원주민 문화의 저장고이기 때문이다.
더프(Duff)가 쓴 '인도와 인도 선교사들'(1839)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선교사가 "인간은
부활해야만 신을 볼 수 있다"고 가르치면 인도인들은 우리도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것은 불
교의 윤회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것과는 다른 의미라고 다시 가르치면 인도인들은 신을
보려면 완벽한 브라만이 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인다. 주인의 언어는 그대로 하인에게 전달되
는 게 아니라 하인의 의식에 잠재해 있는 것에 덧칠해져서 전달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제국주의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척할 뿐이다. 이 '하는척'하게 만드는 나타나지 않는
제3의 공간이 바로 문화적 저항의 영역이다.
이론은 실천보다 선행될 수 없다. 한 시대의 이론과 정치적 실천은 나란히 갈 뿐 마주 볼
수도 없다. 다만 앞선 이론에서 자기 것을 만들어 바로 그것에 저항하는 것, 닮았으나 결코
똑같지 않은 것이 지닌 저항력을 만들어내는 게 이론가의 사치적 책임이라고 바바는 말한
다. 스피박이 제국의 이론에서 얻은 바로 그 방식으로 제국을 인어내 자신의 것을 만들 듯
이 바바는 그들의 것에서 자신들의 이론을 만든다. 프로이트, 데리다, 라캉은 서구의 담론이
고 제국의 것이다. 그는 '하는 척하기'(Mimicry)가 지닌 저항을 그들의 담론에서 끌어낸다.
'하는 척하기'란 무엇인가. 무의식이 의식의 옷으로 위장하고 의식의 세계에 침투하는 것
이 아닌가. 현실의 옷을 입은 쾌감원칙이요 문명의 옷을 입은 에로스다.
오랫동안 식민지인으로서 자신의 무의식 속에 쌓인 제국주의 언어가 해방이 된 후로도 의
식의 세계를 지배하고 온갖 가치의 기준이 여전히 백 인에게 있는 사회에서 흑인은 열등의
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검은 피부 위에 흰 마스크를 쓰고 자아를 부정하고 타인이
되려는 게 흑인의 입장이라고 파농은 말했다. 파농은 물론 부정적인 입장에서 분열된 주체
를 논의했다. 그러나 주체는 단일한 통합체가 아니라 그 밑에 억압 된 무의식이 있다는 프
로이트식 분열을 암시한것에서 그는 데리다, 라 캉, 푸코에 이르는 후기 구조주의적 주체에
접근한 셈이 된다. 바바는 바로 그 분열성 때문에, 무의식 속에 쌓인 원주민의 문화적 유산
때문에, 녹지 않는 아담의 뼈 때문에 제국의 상상계가 무너진다고 본다. 프로이트의 나르시
시즘이 갖는 저항이요, 에로스와 권력의 결합이다.
식민지 담론은 제국이 야만인들을 길들일 수 있다고 믿은 이성적 논리이다. 그것은 모던
시대의 이성이 믿은 합리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그렇게 단음조적 통합체가
아니다. 예를 들어 영국 선교사들이 인도인에게 기독교를 가르치면 인도인들은 하나님의 섭
리로 믿고 그것을 따른다. 특히 만인이 평등하다는 논리는 카스트 제도가 엄한 인도의 하층
민들을 매혹시킨다. 그러나 소를 먹는 서양인들의 성찬식에는 끝까지 참여하지 않으려 하고
그런 성경이 천사가 준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선교사는 영국에 급히 연락
한다. 인도인들이 성경책을 원하니 많이 보내달라고. 그러나 1817년 벵갈의 선교사는 자꾸보
내야 소용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호기심으로, 휴지로 쓰려고, 담배 싸는 종이로 쓰려
고 받았기 때문이다. 식민지인들의 무의식 속에 저장된 그들 고유의 특성은 의식을 뚫고 들
어오는 문명의 교리를 틈틈이 저해한다. 주체 속의 타자는 위장된 모습으로 지배음성에 어
깃장을 놓는다.
사이드와 다르게 해석하기
영국인들은 애초 인도인들을 가르칠 때 서구의 모든 것을 다 가르치지 않고 그들이 노동
력으로 이용하기 쉽게 선택적으로 가르쳤다. 예를 들어 자유와 평등을 가르쳐 자신들과 똑
같이 되면 언젠가 자신들에게 도전해올 것이기 때문에 그저 예절, 삶의 방식, 기술, 지식 등
만 가르칠 뿐 카스트제도 등은 그대로 유지시켰다. 이런 시도는 얼룩덜룩한 "부분적 재현"
이 되어 더욱 주체의 분열을 낳는다. 인도인들은 겉으로는 공손히 지배자의 가르침을 따르
는 척하지만 사실 변화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속은 여전히 인도인이었다. 이 시늉하기,
하는 척하기는 자꾸만 거짓을 낳는다. 그리고 그 거짓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제국이 바라던
교화되고 이 성적인 문명사회가 아니라 모든 게 덧칠해진 깊은 혼돈을 초래한다.
바바는 콘래드나 포스터가 이런 측면을 보여주어 제국주의 담론이 쓸모없음을 보여주었다
고 말한다. '어둠의 속'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투철하고 명료한 사명감을 띠고 아프리카를 문
명화시키기 위해 콩고에 간 커츠는 그곳에서 전혀 의도와 다른 결과를 안고 파멸된다.
문명과 이성은 원주민 사치의 야성 앞에 무력했고 권력은 무한한 탐욕을 가능케 하여 커츠
를 탐욕과 야성의 노예로 만든다. "공포, 공포"라는 커츠의 마지막 말은 이성의 빛에 억압된
인간의 야성적 본능에 대한 표현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상태에 대한 표현이다. 식민지 아프
리카는 커츠라는 제국의 이성을 마비시킨 깊은 혼동이었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깊은 혼동은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에서도 비슷하다. 마라바 동굴
의 알아들을 수 없는 깊은 울림소리 "ouboum"은 식민지의 깊은혼동이요, 제국의 이성으로
는 해석 해낼 수 없는 소리이다. 인도인 아지즈는 못 듣지만 영국인 아델라는 그 소리를 들
으며 깊은 환각에 빠진다. 인도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도를 알려고 했던 아델라는 아지즈
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고 회교인들의 첩제도만 들었기에 그가 자신을 능욕하려
했다는 환각에 빠졌을 것이다. 인간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나라를 지배할 수 있다
는 제국의 단순한 논리를 비웃는 듯한 그 울림은 서구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다. 포스터는 식민지 담론의 무용성을 이렇게 암시한다.
그런 나라를 어떻게 마음이 포착할 수 있을까? 침입자들을 수세대에 걸쳐 노력했지만 그
들은 여전히 쫓겨난 채로 있다. 그들이 세운 중요한 마을들은 오직 피난처일 뿐이고 그들
의 싸움은 고향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병일 뿐이다. 인도는 그들의 고민을
알고 있다. 그녀는 수백 개의 입을 통해 우스꽝스럽고 엄숙한 사물을 통해 "오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엇으로 오라는 것인가? 그녀는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녀는 오직 손짓을 할
뿐 약속을 하지 않는다.
서구의 이성중심 논리가 결코 파악해낼 수 없는 신비한 울림소리,"ouboum"은 식민지 담
론의 투명성을 비웃는다. 그 소리는 혼돈이요, 넌센스요, 문화적 차이로서 헤겔의 투명한 논
리를 비웃는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고 노예가 된 주인과 다스려지지 않는 노예가 있
을 뿐이다.
사이드는 포스터가 영국 편도 아니고 인도 편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이 되어 당시 식민정
책을 수용하는 입장에 섰고 결국 그의 작품은 모던시대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아쉬워했
다. 바바는 마라바 동굴의 울림이 식민지 담론의 단음조를 비웃는 깊은 혼돈으로 저항의 음
성이라고 말한다.
영국은 합리성을 거부하는 그 울림을 다스릴 수 없기에 제국의 시도는 헛된 것이라는 암
시다. 바바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이 저항을 간과했다고 말한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인의 지식과 권력의 산물이지동양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말한 사이드의 지적은 옳다. 그
러나 그는 재현이 굴절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었을 뿐 억압된 것이 귀환하는 것은 보여 주
지 못했다. 일사불란한 근원에의 욕망이 원주민의 나르시시즘에 의해 협박받는다는 것을 사
이드는 간과했던 것이다. 사이드와 바바의 텍스트 분석을 비교해보면 후자가 더 역동적이고
저항적임이 드러난다. 바 바자신이 인도인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배들의 이론에서 끄집
어낸 저항이기에 설득력이 강한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처럼 독창성이란 하늘
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선 것들을 아주 조금만 다르게 읽으면 되는지도 모
른다.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을 조금만 다르게 해석하고, 에로스를 권력과 살짝 연결시키기
만 하면 되었다. 바로 그 "조금만"이라는 게 어려운 것이지만.
'인도로 가는 길'에는 이 두 사람이 논의하지 않은 또 하나의 숨겨진 주제가 있다. 아델라
의 선택이다. 영국 처녀인 그녀는 인도를 배우고 그곳에서 일하는 약혼자 로니를 정말 자신
이 사랑하는지 알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었다. 로니는 영국 식민정책을 철저히 고수하고 신
봉하는 제국주의의 실천자였다. 그러므로 마라바 동굴의 울림은 로니를 거부하는 울림이 기
도 하다. 소설은 사랑의 주제와 식민정책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한번에 유기적으로 연결한
다. 또 다른 차원의 에로스와 권력의 결합이다. 아델라의 선택을 제외시킨 사이드와 바바는
여성의 선택을 배제하는 남성 중심주의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논문의 주제가
되기에 여기 에서는 다만 아델라가 포스터의 눈이기도 하여 바바의 해석이 더 온당하다고
끝맺고 싶다. 아지즈를 더 공감 있게 그리지 못한 포스터가 제국주의에 대해 엉거주춤한 태
도를 취한다는 사이드의 해석은 소박한 느낌을 준다.
사악한 눈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아담의 뼈, 동화되지 않고 그저 '하는척' 하게 만드는 응어리.
바바의 저항하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프로이트의 언캐니나 라캉의 실재계나 데리다의 디페
랑스의 'a'처럼 반복을 가능케 한다. 너와 나의 완전한 합일을 가로막는 '흘러넘침'이 우수
리가 되어 자 꾸만 다르게 반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실원칙 밑에 억압된 쾌감원칙이 반
복충동을 낳는 것처럼, 라캉의 욕망의 미끼, 'a'가 상상계와 상징계의 반복을 낳고 데리다의
차이 속에 숨은타자, 'a'가 '흔적'이나 산종을 낳듯이.
기표의 빠른 순환이 어떻게 정치적인 힘이 되는가. 바바는 세포이 반란을 그 예로 든다.
인도인들이 즐겨 먹는 납작한 밀가루 빵 차파티는 세포이 반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850년대 인도 중북부 원주민 보병대에서 엔필드 총과 악명 높은 탄환대가 소개된 직후 반
란의 기미가 가득한 시골마을에 차파티가 급속히 퍼진다.
케이(Sir John Kaye)가 1864년에 쓴 글에 따르면 누군가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계속
인도인의 주식인 차파티를 돌렸다. 주민들은 무슨 큰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경고로 받아들여
준비를 하고 무조건 복종할 태세를 갖춘다. 빵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불렀고 사람들은 뭉쳤
다. 어떤사람들은 그건 힌두교인의 풍습으로 질병을 몰아내려는 미신이라며 웃어넘겼으나
그런 왈가왈부는 오히려 소문을 부추겨 흥분과 막연한 기대감까지 부른다. 불안은 확산되고
반란을 위한 전초기지가 마련된다. 차파티는 평범한 음식인데 점차 상징적인 기호가 되어
빠르게 순환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포가 확산되어 1857년 세포이 반란의 전초가 된다.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는 것에 두려운 원주민 군대는 전통에 매달리고 정부를 의심했고 드디
어 5월 벵갈 원주민 보병 20사단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공포를 느낀 것은 원주민들만이 아니었다. 당국도 공포를 느끼게 되고 타협을 요
구하게 된다. 사태가 발생하기 몇일 전 한 장교는 당국에 이렇게 쓴다. "불안이 고조되어 무
슨 일이 터질 것만 같다. 그들의 종교와 믿음을 침해할 때 항거할 것이라는 것 외에 아무것
도 모른다." 차파티는 인도인의 주식으로 하나의 상징이 되어 빠른 순환으로 영국인의 공포
를 부른 기호가 된다. 차파티는 영국인의 개화에 굴종되지 않는 인도인의 '사악한 눈'이었
고, 그것이 공포의 힘이 된 것은 순환되어지는 발화의 차원에 의해서였다.
바바의 문화의 혼혈성은 반복충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두 문화 사이의 덧칠해지기이다. 그
리고 이런 문화의 산종을 가능케 하는 것이 원주민의 아담의 뼈인 저항하는 '사악한 눈' 이
다.
네가 하나의 해결책일지라도 네가 바로 또하나의 문제이니... 아무리 멋진 계획이 있더라
도 그것이 수행되는 과정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 계획은 의미가 없다. 인류는 얼마나 멋진
계획을 세웠던가. 그러나 그것은 한결같이 또다른 문제를 낳고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가곤
했다. 그렇다면 계획보다 실천과정이 중시되고 인식론적 추구보다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의
욕망이 중시되어야 한다. 인간의 주체에 대한 탐색, 언어가 발화되는 과정에서 일으키는 굴
절, 타자와의 대화 의미의 끝없는 산종... 바바는 이런 것들을 강조한다. 논리와 그것을 수행
하는 데서 일어나는 간극은 수행의 주체인 인간의 욕망 때문이고 그것은 또 시간과 공간의
문제 와 결부된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나 욕망이 중시된다.
문화란 인식론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무의식으로부터 따로 떼어낼 수도 없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산뜻한 이론도 발화의 순간 넌센스로 바뀐다.
바바의 문화의 혼혈성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영국 의회에는 "보충질의"라는 게 있는데 실제로 수상의 답변지에 오르는 것은 이 보충질
문들이다. 그렇다면 보충이 더 주인이 아닌가. 데리다의 보환(Supplement)은 중심을 해체하
는 주변이다. 그리고 바바는 쌀의 뉘처럼 푸대접받는 주변인이 주인의 총체성을 와해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보환은 바바의 표현으로 '하나보다 크고 두배보다 적은 것'(less than
one and double)이다. 그것은 너와 나의 하나됨을 막는 라캉의 흘러 넘침(jouissance)이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반복을 멈추지 않는 프로이트의 반복충동이다.
영국인들이 "눈에는 눈"(an eye for an eye)이라고 가르치면 인도인들은"an eye for a I"
라고 따라한다. 소리로는 똑같이 "아이"인데 글로 썼을 때만 "I"라고 다르게 나타난다. 억압
된 원초적 나르시시즘 I가 글쓰기에서만 나타난다.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왜 열등하냐고 묻
던 데리다의 '디페랑스'가 생각난다. 이것이 욕망하는 주체가 수행과정에서 드러내는 저항이
다. 주인의 계획은 실천과정에서 하인의 무의식을 통과하며 eye가 I로 바뀌는 변모를 겪는
다. 이것이 '사악한 눈'이다. 이런 위장과 '하는척하기'로 식민지는 제국이 바라듯이 질서와
문명의 장소가 아니라 혼돈의 장소가 된다.
뒤부아(J. A. Dubois)는 1815년 마드라스(Madras)에 이렇게 썼다. "비록 기독교인이 되어
도 원주민들은 결코 그들의 미신을 버리지 않고 깊이 간직했으며 이런 인도인들 사이에 꾸
미지 않은, 위장하지 않은 기독교인이란 없었다." 그들은 미신을 꾸짖으면 예의 바르게 응대
하며 그걸 버리는 척했다. 식민주의 담론에 위배되는 원주민의 문화는 지식의 저장소에 양
가적으로 새겨진다. 그리고 정신적 불구가 된 그들은 자꾸 거짓을 말하게 되고 제국은 원주
민의 실상을 은폐하기 위해 또 거짓을 말한다. 말로우는 어둠의 심장부에서 벨기에 정원으
로 옮아갔을 때 거짓을 말한다. 그는 커츠의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 제국의 연인
에게 "당신의 이름"이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가 "공포"를 연인의 이름으로 바꾸어 말할 때
의식의 양피지는 얼룩덜룩해진다. 이렇듯 원주민의 에로스와 제국의 에로스는 서로 충돌하
며 식민지는 깊은 혼동에 빠진다.
국가의 서사는 가르쳐서 끌고 가려는 힘과 실제로 인간이 느끼는 본능사이의 긴장을 오가
며 중첩적으로 엮어진다. 전체 속으로 흡수되는 매끄러운 총체성은 욕망하는 주체가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 수행은 끊임없이 교육을 방해하고 간섭한다. 총
체적 서사를 향해 나아가는 현실원칙은 그것을 틈틈이 와해하려는 반대서사인 쾌감원칙에
의해 방해를 받고 서사는 두 가지 힘이 엇갈리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에로스와 문명의 엇갈
림이요, 쾌감원칙 너머에 존재하는 반복충동이다.
사회가 균등하고 단음조여서 개발과 교화의 서사가 아무런 저항없이 펼쳐지리라 믿는 중
심주의 혹은 계몽주의적 이성을 상상계적 사회라 한다면 실제 그런 서사를 개인이 실천할
때 일어나는 역행과 전복은 상징계적 어긋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개인의 무의식이 사회의
의식과 엇갈리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틈틈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식을 전복한다. 정신분석
이 전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분석자는 환자와 대화를 통해 상흔을 밝히는데 그
상흔은 환자의 욕망과 분석자의 욕망이 부딪치며 이루어내는 타협의 산물이다. 그것은 과거
를 방문하면서 앞으로 계속 나아가기에 과거와 현재가 타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프로이트
적 서사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삶본능과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죽음본능이 교차되면
서 이루어내는 다르게 반복하기이다. 그러기에 단음조가 아닌 혼혈적인 것이다. 제3의 공간
이라는 타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전이적 주체를 마르크스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해석
해보자. 분석자와 환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길들임을 제국과 식민지인의 대화로 옮겨
보자. 우열의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는가. 아니었다. 제국만 응어리가 있는 게 아니라 식민지
인에게도 응어리가 있기에 문화는 둘 사이의 욕망길들이기 이지 한쪽이 다른 쪽을 동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문화적 차이를 일으키는 주체는 프로이트의 전이적 주체
에 마르크스의 계급론을 합친 게 된다. 이것이 에로스와 권력의 연합이다.
문화적 차이란 축적되고 발전되는 변증법적 합이 아니라 첨가되고 덧칠해지는 열림이다.
나라와 나라사이의 경계가 엷어지고 자본과 노동력과 두뇌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지
금 문화사이의 충돌은 비록 식민시대가 끝났다 해도 여전히 계속된다. 아니 제도적으로 식
민주의가 끝났기에 더욱 은밀하고 무의식과 의식의 갈림으로 나타난다. 문화적인 식민주의
란 제도적인 것보다 더 끈질기고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때 무조건 외국의
것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것도 착각이고 외국의 것이 더 좋다 해서 그것이 그대로 옮겨지리
라는 것도 착각이다. 착각에서 비롯되는 계획은 혼란을 불러일으킬 뿐 문제의 해결에 도움
이 안된다. 우리 것은 무조건 좋고 남의 것은 막아야 한다는 배타적인 자세는 실제로 그리
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저질 문화만 확산시키는 셈이 된다.
또한 잘못된 모든 현상을 실천하는 주체는 쏙 빼고 남의 문화 탓이라고 쉽게 돌려버리는
구실을 제공한다. 실상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 부르는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에
서 유래된 것이 많다는 것을 고려할 때 문화적 식민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리 단순하지
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문화가 고정불변의 고립체가 아니고 실천하는 주체의 욕망에 의해
덧칠해지는 것이라면 좋은 문화를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들고 이미 우리 것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지켜나가는 일관되고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나 그것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리 해석되는지 알아보는 것도 결
국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너그럽게 직시하고 어떤 선택을 내려야 혼란을 줄이고 우리 문화
를 세계문화 속에서 제대로 지킬 수 있는지 생각해보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문화가 외국
문화와의 타협을 외면한다고 어느 한 쪽이 제대로 지켜진다는 것은 오산임을 프로이트의 정
신분석이나 그 이후의 해석들은 보여주고 있다.
3. 혼성서술 속의 타자
토니 모리슨과 J.M. 꾸찌에 소설 속의 타자 분석
어떤 식으로 써야 독자를 움직이고 감동을 주어 자신의 뜻을 심을 것인가. 미학이란 이
런 개인의 소망에서 출발한다. 그러면서도 예술은 창조자의 유한한 생명을 넘어 시간을 거
슬러 살아남아야 하기에 될수록 많은 사람을 움직여야 한다. 그는 한 시대의 요구가 무엇이
고 그것을 넘어서 인간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보편적 인간의 요구와 한 시대
의 특정한 요구, 그리고 그런 것에 걸맞는 개인의 독창적인 방식, 이런 것들 사이에서 늘 헤
매고 고뇌하는 게 예술가가 아닐까.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시대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통찰하여 기존의 정설을 의심하고, 그것
에 도전하는 새로움을 주장이 아닌 느낌으로 표현한다. 미학은 느끼게 만드는 것. 그래서 소
설은 감동 속에 한 시대의 사상을 담은 서술전략 혹은 기법으로 시대의 압도적인 문화양식
과 함께 변모한다. 19세기 실증주의 시대에는 사실주의 양식이, 20세기 전반부 모던시대에는
모더니즘 예술이, 그리고 20세기 후반부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포스트모던 양식이 존재한다.
소설은 늘 인간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면서도 시대의 문제점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도전
에 의해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난다.
실증주의 시대의 옷은 어떤 색깔과 무늬였던가. 저자가 자신의 서술에 의심을 품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그릴 수 있던 시대의 옷은 실물에 알맞게 지어져서 이질감을 느낄 수 없는
옷이다. 저자는 신처럼 인물들의 마음속을 들락거리고 세상에 대해서도 요약을 서슴지 않는
다. 시작과 중간과 절정과 해결이 산뜻하게 내려진다. 많은 인물들을 원근감 있게 배치한다.
주인공은 선악의 갈등을 표출하는 입체적 인물(round character)로 전면에 확대시키고 주
변인물은 선악의 단편만을 표출하는 평면적 인물(flat character)로 멀리 배치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추정해내던 시대에는 소설가가 객관 현실(혹은 실재)을 그
릴 수 있다 는 믿음이 있었다.
산업혁명은 물자의 혜택을 귀족이 아닌 평민들도 고루 누리게 하자는 선의에서 이루어지
지만 봉건시대 농경사회가 지닌 인간과 사회의 유기적 끈을 파괴시키는 어둠도 낳는다. 민
주화와 함께 산업사회는 가치의 기준이 절대자로부터 개인에게로 옮아가야 했고 이런 과도
기에 사람들은 심한 소외를 겪는다. 절대기준에 대한 회의. 더 이상 그것이 통하지 않는 사
회에서 그것이 있는 것처럼 믿을 때 나타나는 폭력과 괴리.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사상과 예술의 특징은 단 하나의 재현에 대한 의심이었다. 신이 사
라진 시대의 예술은 소설에서 저자의 위치가 감소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제 그는 인물을
위에서 조정하는 게 아니라 인물의 뒤로 사라진다. 인물들이 전면에 나서 자신의 생각을 그
대로 노출시키는 내적 독백이 저자의 서술을 억누른다. 한 사건을 어떻게 인물마다 달리 보
는가 그러므로 여러 인물들의 투명한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단면을 합성하여 둥글게 만드는
것은 독자가 할 일이다. 흩어진 독백과 서술 속에서 이야기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찾아내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러나 뜻은 좋았으나 그것도 언제까지나 권력을 누릴 수는 없었다. 내적
독백과 흩어진 서술은 난해하여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고급 독자에게만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소설은 역시 읽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가 사라졌다지만 인물들을 앞세워서 여전히 뒤에서 그의 음성을 보편음성으로
만든다. 이제 더 이상 숨지 말고 당당히 앞에 나와 자신의 음성으로 현실을 그려보라. 그 현
실은 어떤 것인가.
현실이 유동적이고 단 하나의 기준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의 음성이 신의 음
성이 되는 것을 피하려고 모더니즘은 우주의 질서, 신화, 보편가치를 내세웠다. 그런데 시간
이 흐르자 그것은 절대논리가 되어 중심으로 고착된다. 중심, 기준, 절대논리가 허위임을 드
러내고 지금껏 중심에 의해 밀려났던 주변, 즉 타자를 복원시키자. 포스트모더니즘은 단 하
나의 재현이 중심주의의 허구임을 보여주는 예술양식이다. 객관재현이 숨긴 타자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인물의 내적 독백에서 다시 저자의 서술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전
보다 더 강력한 서술로 돌아가면서 지극히 역설적으로 그것이 현실(혹은 실재)을 객관적으
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개인음성임을 암시한다. 자신의 욕망과 입장에서 나온 자
의적인 서술이라는 것이다. 이런 역설이 '혼성서술'을 낳는다. 삼인칭 전지적 서술이 되돌아
와서 이번에는 인물마다 각각의 입장에 서 서술을 한다. 그런데 그 저자는 옛날과 같은 신
이 아니고 한낱 서술자로서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다. 삼인칭 객관서술과 일인칭 제한서술
이 한곳에 있다. 예전의 어떤 시대에도 그리 흔치 않던 삼인칭과 일인칭의 혼합양식이 포스
트모던시대에 압도적으로 출현한다. 그리고 최근의 탈식민주의 작품에서 이 혼성서술은 좀
더 확장된다. 중심에 의해 억압되어온 타자를 복원시키는 이 시대 혼성서술을 살펴보자.
이 글은 혼성서술 속의 타자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에서 혼
성서술은 각기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탈식민주의 소설인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과
J.M.꾸찌에의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를 통해, 타자를 복원시키는 방식은 쓰는 이의 입장에
따라 어떻게 다른가, 삼인칭과 일인칭의 혼합양상을 살핀다. 모리슨은 미국의 흑인 여성이고
꾸찌에는 남아프리카의 백인 남성작가이다. 전자는 주변인이고 후자는 중심인이다. 프로이트
의 무의식, 데리다의 타자, 라캉의 타자, 그리고 포스트모던 소설과 탈식민주와 소설의 타자
를 살펴보면 한 시대의사상과 예술의 양식이 같은 이념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1. 포스트모던 소설 속의 타자
죽은 형의 전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 나보코프의 '세바스찬 나
잇의 참인생'은 실제 삶(real life)을 아무리 정확히 추적해도 그것이 허구(fiction)가 될 수밖
에 없음을 보여준다. 무덤 속의 인물에서 한 번, 주변의 친구들에서 다시 한 번, 각기 자신
의 입장에서 굴절된 정보를 주고 그것은 다시 기록자에 의해 굴절된다. 적어도 세 번의 굴
절이다. 그래서 죽은 세바스찬의 삶은 그의 자료를 수집하는 동생의 것이고, 그것은 또 누군
가 그들이 모르는 제삼자, 즉 작가 자신의 것일는지도 모른다. 탐정소설 식으로 엮어진 이
소설에서 나보코프는 참모습이란 세 번 굴절되어 아무리 객관적 사실의 기록도 쓰는 이의
얘기가 되고 만다는 암시를 한다.
나는 세바스찬이다. 아니, 세바스찬이 나다. 아니 아마도 우리 둘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다른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서술자의 얘기일 뿐이다. 나보코프의 '롤리타'에서는 어린
연인을 추적하는 예술가 험볼트의 고뇌가 그려진다. 그는 어린시절을 잊지 못하는 망명작가
이고 실체를 파악하지 못해 사실주의를 쓸 수 없는 작가 자신이다. 한편의 장시와 그보다
훨씬 더 긴 비평으로 엮어진 '창백한 불꽃'에서도 객관적인 해석이 얼마나비평가의 주관에
의해 굴절되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비평문 속에는 누군가 제삼자의 망명이 암시된다. 글
의 객관성을 가로막는 제삼자와 색깔, 그 타자는 누구인가, 나보코프 자신이다.
나보코프의 작품에서 타자는 글 속에 묻혀 암시되는 제삼자로 나타난다. 참인생을 추적하
는 전기, 연인의 참모습을 잡으려는 사랑 이야기, 그리고 과학적 분석인 비평 속에서 그런
글들의 순수성을 무너뜨리는 제3의 음성이 있다. 저자가 쓴 글을 곁눈질해보는 또 하나의
응시가 있고 시선과 응시의 교차에 의해 참모습은 슬그머니 무너진다. 삼인칭 서술은 바라
보는 나요, 이 객관성을 의심하는 타자는 보여지는 나다. 나보코프의 글에서 일인칭은 글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은밀히 묻혀서 삼인칭 서술을 무너뜨린다. 지금까지 쓴 이야기는 현
실의 반영이 아니라 내 얘기라고. 존 파울스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타자는 이보다 조
금 더 불거져 나온다. 영국 빅토리아시대의 남녀 이야기와 그 시대상이 삼인칭전지시점으로
서술되다가 갑자기 제 13장에서 작가자신이 튀어 나온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모두가 상상에 불과하다. 내가 창조한 인물은 내 마음
속에서만 존재할 뿐 결코 그 밖에서 존재한 적이 없다. 누보로망 시대의 작가가 어떻게 신
처럼 쓰겠는가. '찰스는 변장한 나 자신' 일지도 모르고 나는 수필이거나 '시대를 바꾼 자서
전'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보로망 시대에 살고 있는 내가 어떻게 빅토리아 시대 이야기를 그릴 수 있는가. 결국
주인공 찰스는 나의 분신이고 이 소설은 위장된 나의 자서전이다. 이 소설에는 간간이 일인
칭이 튀어나오고 뒷부분에 가서는 작가 자신이 위장된 모습으로 찰스와 대면하는 장면도 나
오지만 서술은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관성 있게 삼인칭 전지서술이다. 그러나 전통적
인 서술과 다른 점은 그보다 훨씬 더 '전지한' 척하는 것이다. 서술자가 인물들 편에 서서
그들의 속마음과 상황을 설명하는 입장서술인데 전통 서술에서 볼 수 있는 극화된 장면은
아주 드물다. 강력한 전지적 서술이지만 결국은 나의 서술일 뿐이니 역설의 폭과 전복의 힘
이 그만큼 커진다. 슬며시 몇 가닥 끼어든 일인칭이 압도적인 삼인칭 전지시점을 뒤엎는 효
과랄까. 소설은 객관사실을 반영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주관과 욕망 에 걸러진 세계일 뿐이
라는 암시다. 빅토리아시대 봉건귀족과 신흥자본 계급의 대립, 마지막 봉건지주의 후예인 찰
스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놓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 당대의 위선과 계급의 문제가 남
녀의 사랑 이야기 속에 묻혀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작가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이야기로
유추된다.
나보코프의 위장과 존 파울스의 위장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전자의 경우에는 작가자신
혹은 일인칭이 서술의 표면 위로 튀어 오르지 않고 내용 속에 녹아 있다. 그리고 후자의 경
우에는 서술의 표면 위로 간간이 솟구친다. 그러나 종잡을 수 없이 변모하는 연인을 작가가
추구하는 리얼리티로 보는 면에서 '롤리타'와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닮았다. 또 위장한 작
가가 인물과 나란히 앉아 문제를 상의하는 '세바스찬 나잇의 참인생'의 열차 속의 장면은 '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작가가 인물을 제대로 조종하지 못하고 아니 오히려 인물에 의해
끌려다니는 기법들을 연상시킨다. 소설의 결말을 몇 개로 열어놓아 독자가 선택하게 한 파
울스는 저자, 인물, 독자를 동등한 수준으로 놓는다. 셋 모두가 참여해서 하나의 작품이 완
성되는 것이다.
파울스가 나보코프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드러나게 실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실험
이 배태되어 성숙되려면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보코프가 50년대였다면
파울스가 60년대였고 훗날 쿤데라는 80년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역시 흡사한
혼성서술을 사용한다. 의사 토마스는 많은 여성과의 성관계를 통해 우주의 미세한 차이를
느껴보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에게 생은 그렇게 가벼웠다. 그러던 어느 날 테레사가 나
타난다. 그녀는 토마스에게 정절을 요구하고 그가 욕망을 단념하지 못하자 질투 때문에 그
를 떠난다. 공산군이 들어 온 땅으로 되돌아오는 토마스에게 테레사는 더 이상 가벼움이 아
니었다. 우연히 쓴 글이 문제가 되어 궁지에 몰린 토마스는 유리창 닦이로 전락하지만 테레
사와의 사랑은 단념하지 못한다. 이와 대조되는 사비나와 프란츠. 끝없이 배반하는 사비나에
비해 프란츠는 단 하나의 대상에 집착한다. 그러나 먼 훗날 사비나는 토마스의 사랑과 죽음
앞에서 깃털처럼 가벼웠던 자신의 삶을 공허하게 되돌아본다. 언어와 이념의 허구성 사랑과
질투, 의도와 결과의 빗나감, 인간 욕망의 허상을 그린 쿤데라의 소설은 얼핏보면 수필을 연
상시킬 정도로 설명이 강하다. 삼인칭 전지작가가네 인물의 입장에서 서술을 하는 가운데
꼭 한군데에서 일인칭 작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토마스를 바라보며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네 인물들은 각기 자신의 네 가지 다른 측면이라고 말한다.
흔히 서술의 파편화로 정의하는 포스트모던 서술은 시간적 흐름을 따라가는 일목요연한
서술양식의 와해일 뿐 아니라 시점의 와해이기도 하다. 신처럼 전지적이면서 동시에 이 전
지성을 뒤엎은 자의식적 시선이 통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선과 응시의 교차라고 할까.
타자의 응시라고 할까. 얼핏 내비치는 타자의 응시는 자신만만한 주체의 순수시선을 뒤엎고
얼룩덜룩하게 만든다. 그것은 순수현실의 객관적 반영이 아니라 작가의 자의성에 의해 물들
여진 혼성이다.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가 교차되듯 객관적 시선과 주관적 응시가 교
차된다. 소설에 관한 소설, 혹은 자기반성적 소설에서 타자는 재현의 독재를 무너뜨리는 이
물질이다. 순수이성 혹은 절대주체를 무너뜨리는 라캉의 타자처럼 삼인칭 전지시점에 끼어
든 일인칭은 순수재현을 전복하는 우수리다.
2. 전복에서 대조로: 탈식민주의 서사
대략 70년대부터 쓰여진 탈식민주의 소설들은 혼성이라는 데서는 자의식적 서사와 공통이
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소설들이 재현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전복하는 응시로서 타자를 은밀
히 숨긴다면 탈식민주의 소설은 타자를 서술의 한 부분으로써 당당히 드러낸다.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과 꾸찌에의 '마이클 K의 삶과 시대'에서 타자는 어떤 모습을 취
하는지 보자. 두 작품이 모두 삼인칭과 일인칭을 섞어 쓴 혼성서술이면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흥미롭다. 성과 인종과 문화적인 우월의 차이를 의심하고 그것을 동등한 차이로 바꾸
는 탈식민주의는 차이를 지우고 동질화시키려는 제국주의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려는
다문화적 입장을 취한다. 순수이성, 절대이성을 주장했던 식민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엄연히
존재하는 주체 속의 이물질, 순수한 재현속에 끼어든 응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
자를 지우고 동질화시키려는 제국의 나르시스적 시선 속에는 소유라는 응시가 숨어 있었고
스스로의 타자성을 지우는 척하던 식민지인의 시선 속에도 응시가 숨어 있었다.
식민지 논리는 주체 속의 타자, 아담의 뼈를 인정치 않은 데서 나온 빗나간 꿈이다. 70년
대와 80년대의 소설가로서 모리슨과 꾸찌에는 이런 식민주의가 낳은 파국을 자신들의 입장
에서 소설 속에 담는다. 미국의 흑인이요 여성인 모리슨과 흑백 인종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
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지식인 꾸찌에는 서로 입장이 다르다. 전자는 그 사회의 타자
요. 후자는 지배계급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혼성서술 속의 타자는 어떻게 다를까.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
백인의 문화 속에 사는 흑인은 백색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아니 그것이 추종해
야 되는 절대가치라고 믿는다. 어릴 적부터 크리스마스면 부모는 여자아이에게 인형을 선물
했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인형이다. 늘 보는 낯익은 광고에는 셜리 템플의 웃는 모습이
찍혀 있다. 그녀는 사랑받는 아이의 기준으로 아이들에게 새겨진다. 깨끗하고 아름답게 단장
된 집, 정갈하게 정리된 집안, 절제된 매너 이런 백인의 관습과 문화는 그 사회의 미의 기준
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에 상관없이 그 기준을 따르려 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다른 기
준, 다른 가치를 깨끗이 지우고 동질화시킬 수 있는가.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백인 중심 사
회에서 흑인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은 한 사회가 가치의 기준을 다양하게 두지 않고 단 하나의 백인
문화에 둘 때 일어나는 비극을 그린다. 타자를 인정치 않는 백색 중심주의가 부르는 불행을
여러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우선 쓰인 방식이 독특하다. 맨 앞 서문에는 교과서
에 나오는 낯익은 문구를 인용하고 그것과 같은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두번 인용한다. 표준
맞춤법에 알맞게 띄어 쓴 깨끗한 인용과 달리 불여 쓴 두 개의 다른 인용문은 가치의 기준
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소설은 가을, 겨울, 봄, 여름이라는 네 장으로 나뉜다. 각 장은 일인칭으로 시작하여 십대
의 소녀 클라우디아가 화자이다. 그녀는 친구 피콜라와 이웃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클라우
디아의 서술이 짧게 끝난 후 삼인칭 전지서술이 시작된다. 그녀의 부모와 이웃의 과거와 현
재가 소개되면서 각각의 파편적인 서술들은 소설의 정점을 향해 모아진다. 조각들이 모여
이불 한 채를 꾸미듯이 '나'의 서술과 삼인칭 서술들이 이어진다. 일인칭 서술은 소녀의 시
점으로 쓰이기에 제한적이고 순진하다. 삼인칭서술은 전지적으로 피콜라를 둘러 싼 인물들
의 과거와 현재를 비추어 아버지에게 강간당하고 죽은 아이를 낳는 피콜라의 비극의 원인을
설명한다. 일관성 있는 플롯이 아니라 파편화된 서술들이 조각조각 이어져서 플롯이 생겨난
다. 한집이 있고 그 집을 둘러싼 이웃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
다. 그리고 그 이웃 속에는 그 집을 지켜보는 또 다른 집, 클라우디아의 집이 있다.
'가을'에서는 피콜라의 아버지가 집에 불을 지른 사건, 그 애의 첫 월경이 클라우디아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셜리 템플이 그려진 잔으로 많은 양의 우유를 마셔버린 피콜라에게서
독자는 푸른 눈을 갈망하는 그 애의 미래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독자는 피콜라
의 가정과 다른 클라우디아의 가정을 보게 된다 어머니는 야단도 치고 소리를 지르지만 아
이들의 감기를 보살피고 피콜라를 따뜻이 도와준다. 특히 피콜라의 첫월경과 사랑 받아야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찾지 못한 그 애가 푸른 눈을 갖는 환상으
로 미쳐버리는 결말을 연상시킨다. 삼인칭 전지저술에서는 피콜라의 가정이 소개된다. 아버
지 촐리와 어머니 폴린은 증오에 가득 차 싸우고 그럴 때마다 어린 딸은 눈을 가리고 자신
이 그 집에서 사라져 버리기를 기도한다. 그 애는 부모, 친구, 어디에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
자 이웃 창녀들과 친해지지만 부모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겨울'에서 일인칭 서술은 클라우디아가 겪는 작은 경험과 그 애의 결심에 관한 것이다.
클라우디아의 언니 프리다는 남자애들한테 놀림받는 피콜라를 그 애들과 용감히 싸워 구해
낸다. 프리다는 엄마를 닮았다. 부유한 백인 모우린은 피콜라의 아버지를 모욕한다. 피콜라
는 굴욕을 참는다. 그러나 '나'는 굴욕을 참지 않는다. 흑인에게 무엇이 부족한가. 우리는 피
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허영도 위선도 없이 우리가 가진 것을 사랑한다. 욕망과 질투는
괜찮지만 시샘은 없다. 이 부분은 어린 '나'의 시선을 넘어 작가 자신의 음성이 새어나오는
부분으로 소설의 주제를 형성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사랑하고 주장하는 것. 무조건 남의 것
을 따르지 않는 것. 이 자긍심이 클라우디아 가정의 특징이다.
삼인칭 서술은 그렇지 못한 흑인 상류집안을 보여준다. 제랄딘의 집안은 깨끗하고 잘 정
돈되고 예의 바르다. 그들은 백인의 문화를 그대로 흉내내다보니 부부간에도 사랑을 나누기
보다 더러움에 더 신경을 쓴다. 그녀는 자신의 공허함을 고양이를 사랑함으로써 메우고 아
들 주니어는 사랑을 받지 못하자 피콜라를 괴롭히고 고양이를 죽인다. 기독교를 믿지만 사
랑을 모르고 흑인이면서도 더럽고 추한 흑인을 멸시하는 그들은 백인의 삶을 흉내내는 잘못
된 삶을 산다.
'봄'. 클라우디아의 서술은 두 집안을 대조한다. 헨리가 프리다를 건드리자 그를 당장 내
쫓고 아이들을 창녀의 집에 드나들지 못하게 막는 '나'의 엄마와 백인 딸을 위하고 자신의
딸을 천대하는 피콜라의 엄마가 대조적이다. 특히 피콜라는 엄마를 "브리드러브 여사"라고
부르고 백인 주인의 딸은 그녀를 폴리라고 부른다든지 딸이 더럽힌 주인집 마루를 "나의 마
루"라고 말하는 폴린에게 '나'는 분노를 느낀다.
삼인칭 서술은 왜 폴린이 그렇게 되었고 그것이 피콜라에게 어떤 환상을 품게 하는지 보
여준다. 한 쪽 다리를 약간 저는 폴린은 열등의식 때문에 남들로부터 고립된다. 그러던 어느
날 촐리가 발을 쓰다듬어 주는 데서 사랑이 싹튼다. 그러나 일자리 때문에 북쪽으로 이사가
면서 그녀는 백인들 사이에서 적응을 못하고 흑인들조차 고향사람들 같지 않아 외로워진다.
그녀는 외모에 돈을 낭비하고 술에 탐닉하는 남편과 불화를 빚기 시작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치장하는 폴리는 영화관에 드나들며 화면 속의 화려한 여 주인공을 흉내내고 그들의
사랑을 현실에 적용하여 불만을 느낀다. 불만은 증오를 낳아 자신의 가정을 증오하게 되고
그녀의 허영은 백인 상류집안의 하녀가 됨으로써 충족된다. 그들의 삶과 집안을 자신의 것
으로 착각하고 충실히 돌보는 그녀는 정작 자신의 것을 혐오하여 식구들을 불안하게 만든
다. 허영으로 가득 찬 그녀의 텅빈 자아는 피콜라에게 감염되어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하게
만든다.
촐리는 어떤가.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고모 손에 자란 그는 고모마저 죽자 기댈
곳이 없게 된다. 어느 날 숲속에서 흑인 소녀와 사랑을 나누던 그는 백인에게 모욕을 당한
다. 손전등을 그의 엉덩이에 들이대며 행위를 계속하도록 협박하는 백인 앞에서 그는 자신
의 수치와 무력함을 상대방에게 쏟고 그 애를 증오한다. 그가 대적해야 하는 백인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아버지는 게임에 빠져 그를 거부한다.
그는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그것은 무엇이든지 느낄 수 있는 위험한 자
유였다. 그는 폴리에게 영원히 갇히는 게 싫었고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되는지도 배운 적
이 없었다. 그가 외로움 속에서 술에 취해 딸을 범할 때도 가득 차오르는 사랑의 본능을 쏟
아부었을 뿐이다. 아무도 그를 규제하거나 윤리를 심어주거나 진정한 사랑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피클라는 아버지의 아이를 갖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자신이 파란 눈을
가졌다고 믿게 되는가. 삼인칭 서술은 이웃사람 소프헤드 처치에로 옮아간다. 조상에게 백인
귀족의 피가 섞였다는 데서오는 우월감과 유머를 모르는 우울한 성격으로 떠나간 애인에게
집착하는 엘리휴는 병적인 광인이다. 그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이며 신과도 대결하겠다는 빗
나간 우월감으로 애인이 어떻게 감히 지신을 버릴 수 있나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꿈
을 분석해주고 상담자 노릇을 하던 중 피콜라가 푸른 눈을 갖게 해달라고 하자 그렇게 믿게
만든다.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자 악마가 되어 자신이 미친 것처럼 피콜라도
미치게 만든 것이다.
'여름'. 클라우디아는 세상이 무너져도 강하고 느긋하게 미소를 짓는 어머니가 자랑스럽
다. 또 피콜라의 아이를 위해 가진 것을 희생시키는 언니를 따른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이를
낳게 될 피콜라의 불행보다 그 아이를 미워하게 될 이웃들이 더 가슴 아프다. 삼인칭 서술
은 이제 피콜 라의 분열증과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을 상징하듯 자문자답의 대화형식을 취한
다. 가장 푸른 눈을 가진 나는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피한다. 질투하기 때문
에, 아무 곳에서도 사랑받지 못하던 흑인 아이는 유일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것
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모리슨은 흑인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백인 문화를 모방
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비극을 그린다. 피콜라의 비극은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 모두가 자
신이 가진 것을 발견하거나 사랑하지 못하고 갖지 않은 것을 소망한 데서 일어난다. 타자를
인정치 않고 백인 문화를 기준으로 삼아 동질화를 꾀할 때 사회 전체가 허영과 폭력으로 감
염된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처럼 타자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것으로 제국주의적 동질
화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가을에서 시작되어 여름으로 끝나는 이 소설에서 일인칭 제한서술과 삼인칭 전지서술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일인칭 화자인 클라우디아의 가족은 삼인칭 전지시점으로 서술되는 인
물들과 대조된다. 그들은 가치의 기준을 자아에 두지 않고 백인의 삶에 두기에 허영과 자학
으로 누구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제랄딘 가족, 피콜라 가족, 소프헤드. 그 가
운데서도 물론 피콜라 가족이 서술의 핵이다. 이에 비하여 클라우디아 가족은 자신의 정체
성을 지키면서 자아를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피콜라 가족의 파멸에 대한 대안
으로 모리슨은 클라우디아 가정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일인칭은 삼인칭과 대조의 관계이며
대안이다. 그것은 타자의 음성으로 파멸하지 않는 길이요, 작가 자신의 음성이다. 모리슨은
흑인 여성으로 타자이기 때문이다.
J.M. 꾸찌에의 '마이클 K의 삶과 시대'
흑백인종간의 싸움이 끊임없던 시기에 쓰인 이 소설은 전선이나 결투장면이 조금도 나오
지 않는 전쟁소설이다. 한 주변인의 경험을 통해 전쟁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측면만을 끈질
기게 추적하기에 언뜻 읽으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한 사회에서 밀려난 주변인이 관료
주의적 제약에 의해 끊임없이 거부당하다 인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과정이랄까. 마치
카프카의 '성'의 주인공처럼 K는 보이지 않는 힘,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감시당하고 밀려
나고 자신의 삶을 좌우하는 정보로부터 소외된다. 아니 그는 오히려 자신을 거부하는 인간
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자연 속의 일부로 살아가려고 한다.
꾸찌에의 소설이 늘 그렇듯이 여기서도 작가는 사건의 앞뒤를 친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무뚝뚝하고 무감동한 필치로 작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설명보다 일어나는 상황에 초점
을 맞춘다. 더구나 시점이 K에게 맞추어져 있어 삼인칭 객관서술이지만 모리슨과 달리 전
지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질문들. 언제 허가증이 나오는가. 집주인은
어디로 끌려갔을까. 저 군용차량은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전선은 어디에 있
는가. 어머니의 고향은 이곳이 맞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끌려가는가. 이 수용소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에 관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확실한 정보로부터 차단되어 소설 전체에는
질문과 끝없는 기다림만이 있다. K는 소외되기도 하고 스스로를 고집스럽게 소외시키도 한
다. 마치 멜빌의 '바틀비'(Bartleby)를 연상시킬 정도로 그의 거부는 집요하다. 그리고 '바틀
비'의 화자를 연상시키는 군의관이 등장한다. 군의관이 화자가 되어 K를 설득하는 2부는 일
인칭 서술이다. 그러나 소설의 형식, 결말, 주제는 '바틀비'와 다르다.
소설은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삼인칭 제한시점으로 K가 보는 것만 서술하여 K가 모르는
것은 독자도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정보를 차단시키는 기법이다. 2부는 군의관의 시점으로
일인칭 서술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소설 속의 타자가 된다. 군의관은 물론 순진한 주변인
K보다 전쟁에 관해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 부분에서도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
고 독자를 정보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일인칭 시점을 사용한다. 3부는 다시 삼인칭 제한서술
로 K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의 중간 부분인 일인칭 서술을 타자로 보는 것은
전체의 압도적 분량이 삼인칭 서술이고 소설은 제목에 암시된 것처럼 K의 삶과 시대에 관
한 것이기 때문이다.
K는 언청이로 태어난다. 그는 머리가 둔하여 늘 남에게 뒤떨어진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의 손에 길러지다가 지진아들이 다니는 기관에 넘겨져 읽기, 쓰기, 셈하기, 청소, 일 등을
배운 그는 열다섯 살에 그곳을 나와 케이프 타운시의 청소부가 된다. 외모 때문에 여자친
구도 없고 늘 혼자 있는 게 좋다. 그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집단이나 기관에 갇히는
것이다. 서른한 살이 되던 어느 날 병든 어머니가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여 함께 가
려 하지만 당국은 여행허가증을 내주지 않는다. 그는 원인 모르게 난장판이 된 주인집에서
춥고 비오는 몇 밤을 지내다 드디어 짐수레에 어머니를 싣고 길을 떠난다. 그러나 허가증
없이는 중심도로로 갈 수가 없다. 군대는 어디론가 이동했고 검문은 수시로 있었다. 어머니
는 영양실조로 힘든 여정을 견디지 못해 죽고 K는 화장한 유해상자를 가슴에 안고 간다.
그는 이제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가슴에 있고 그
녀의 코트는 그를 감싸주기에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꿈꾸지 않는다.
경찰과 군대의 눈을 피해 덤불 숲에서 먹고 하수구에서 자던 K는 붙잡혀 집단 노동 수용
소로 보내지지만 탈출하여 다시 들판으로 나온다. 골분, 옥수수 속대를 먹으며 고향을 향해
가는 그는 땅에 붙어 사는 게 좋다. 그에게 식사 한 끼와 잠자리를 베풀던 어느 가정이 있
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잔인하고 야박했다. 그는 고향 마을에 도착하여 막연히 그 농가
를 찾는데 그 집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유골을 묻고 폐허 속에서 씨를 뿌
린다. 그가 도시와 전쟁을 잊어가려는 때 농가의 손주가 탈영병이 되어 나타난다. K는 그의
하인이 될 것을 거절하여 그곳을 떠나 댐가에 굴을 판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곤충, 벌레, 도
마뱀을 먹고 사는 그는 작고 여위고 메말라간다. 아무것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그는
붙잡혀 다시 집단수용소에 갇힌다. 먹을 것과 잠잘 곳이 있었지만 그는 인간 속에 갇힌 삶
을 혐오한다. 다시 수용소를 탈출한 그는 옛날의 농가 근처 댐가에 굴을 파고 산다. 어머니
의 유골이 묻힌 곳이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 사는 방식은 숨어 동물처럼 사는 것이었다. 벌
레처럼 살아도 전쟁은 싫고 군인은 싫다. 어느 날 그곳에 산사람들이 나타난다. 철도를 폭파
하고 도둑질, 약탈, 방화하는 그들 반란군에게 K는 남몰래 동정을 느낀다. 그들이 떠난 며칠
뒤 군대가 나타나 K의 토굴과 쌓아놓은 호박을 보고 그곳을 반란군의 전초기지로 오해하고
K를 체포한다.
언청이요 두뇌가 좀 느린 것 때문에 K는 사랑 대신 이상한 눈총 속에 살았다. 그는 스스
로 고집해서만 자유를 맛본다. 그러나 그 자유는 잇몸에서 피가 나고 정상적인 음식을 먹지
못하는 동물의 삶을 요구한다. 전쟁은 호박조차 마음놓고 기를 수 없게 그를 통제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거부당하고 스스로 아버지의 법을 거부한다. 상징계는 그를 소외시키고 구속
하고 그리고 이제 다시 그를 감금하여 자백을 강요한다. 그는 어머니의 세계, 흙과 자연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한다. 어머니는 유일한 안식처요, 땅은 그에게 자유를 준다. 그
에게 상상계는 잇몸의 피를 홀리게 하기에 이상적인 도피처는 아니지만 그래도 잔인한 상징
계보다는 낫다. 오직 그곳에서만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2부는 반란군의 끄나풀로 오해받은 K가 극도의 쇠약과 음식물 거부로 병원에 이송되어
군의관의 치료를 받는 데서 시작된다. 일인칭 화자인 군의관은 치료되기를 거부하는 환자
K에게 호기심과 동정심을 느낀다. 그는 다른 군인들보다 K를 더 잘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듯 보인다. 어떻게 해서든지 음식을 섭취케 하여 원기를 회복시키려는가 하면 K를 순진한
바보라고 믿어 무죄로 석방시켜줄 것을 탄원한다. 그가 입을 잘 열지 않는 K로부터 얻은
정보는 이렇다. 그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미워했다. 그리고 흙에 적응하지 못해 일상음식
을 거부하는 바보다. 그러니 적당히 조서를 꾸며 내보내자. 그는 K에게 집요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고 요구한다.
꾸찌에는 2부에서 일인칭 서술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해석의 공간을 제공한다. 1
부의 객관적 서술을 읽어 K에 대해 알고 있는 독자는 군의관이 어떤 오판을 내리는지 보게
된다. 그는 마이클의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못한다(이름 끝에 S자를 붙임). 그리고 가
장 중요한 부분인 어머니와 땅을 잘못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K에게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K의 모습에서 자신만을 본다. 전쟁이 잘못된 정보에 의해 끝도 없이 계속
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 그는 사회로부터 도피하고픈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K가 사회와 인간에 대해 어떤 야망도 기대도 없는 것을 보며 그는
매료된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을 K는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으로 그는 K의 무의지적 저항에 상처받는다. 논리화하고 이론화하며 지적 추구에 사로잡힌
그의 야망에 K는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군대가 강제로 K를 구속하려 한다면 그는 치료
를 통해 부드러운 방식으로 그를 조정하고 재편성하여 자신의 목적에 맞게 주조하려 한다.
K를 자의적으로 읽어내고 K의 얼굴에서 자신의 욕망만을 보는 그는 또다른 상상계에 빠
져 있다. K가 상징계를 거부하고 상상계(어머니, 대지)로 돌아가고픈 것은 주변인으로서 의
도적으로 취하는 자유의 선택이다. 그러나 군의관은 지배계급으로 거울 단계에 빠져 있다.
그는 상징계에 있는 줄 알지만 사실은 상상계적 착오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상을
먹이고 보살피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믿으며 전쟁과 역사의 우연성과 관료주의의 허위를 잘
알고 싫어한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Whyme?)라든가, 나는 너를 이해하고 있는가?(Have l
understand you?)와 같은 마지막 질문은 지성인으로서 그의 고뇌를 잘 표현한다. 그러면서
도 그는 대상의 철저한 굴복과 복종을 요구한다(Yield!). 이 제국주의적 응시를 독자가 분별
해낼 수 있도록 작가는 혼성서술을 쓰고 있다.
이 소설에서 일인칭으로 쓰인 부분은 삼인칭으로 쓰인 부분에 스스로를 비추어서 왜곡된
면을 드러낸다. 독자는 삼인칭 서술에서 이미 얻은정 보를 가지고 '나'의 서술을 대하기에
두 부분 사이의 틈새를 짚어낼 수 있다. 그리고 군의관이 무의식 중에 저지르는 상상계적
착오를 발견한다. 그릴다면 '나'의 서술은 삼인칭 서술의 타자로서 스스로의 자의적 오류를
드러낸다. '나'는 누구인가 K가 사회의 주변인이라면 '나'는 군인이요 지배계급이다. 삼인칭
시점에 스스로를 비추어 보이는 욕망의 시선, 시선과 응시의 교차이다. '나'는 자신의 상상
계적 응시를 상징계적 시선에 비추어 보이는 작가자신은 아닐까. 남아프리카의 백인 지배
계급으로서 꾸찌에가 쓸 수 있는 탈식민지 소설은 스스로의 욕망과 자의성을 비추어 보이는
자기반성적 서술이 될 수밖에 없다.
모리슨의 일인칭 서술이 자신의 긍지를 주장하는 '나'라면 꾸찌에의 일인칭 서술은 자신
의 상상계적 착오를 비추어 보여주는 반성적인 '나'이다. 전자는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주변인이고 후자는 지배계급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나타나는 혼성서술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언어와 소설이 객관실재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어 언어, 이념, 실재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자의적인 서술에서 혼성은 삼인칭 입장서술이 압도적이고 일인칭 화자는 슬며시
끼어들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삼인칭 서술의 객관재현을 뒤엎는 전복적인 타자로서
저자 자신의 응시이다. 순수한 재현처럼 서술한 후 타자, 혹은 에로스가 끼어들어 순수를 전
복하는 것이다.
탈식민주의 서술에서 타자는 포스트모던 소설에서처럼 전복적이거나 암시적이거나 아주
조금 끼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삼인칭과 자리를 나누어 갖고 삼인칭 서술
과 대조의 관계를 이룬다. 그런데 이때 타자는 작가의 입장에 따라 스스로를 주장하기도 하
고 반성하기도 한다. 모리슨처럼 주변인인 경우 일인칭 화자는 자신의 긍지와 정체성을 주
장하는 쪽이 되고 꾸찌에처럼 지배계급인 경우 일인칭 화자는 스스로의 욕망과 자의성을
반성하는 쪽이 된다. 모리슨의 타자는 가장 긍정적인 인물이고 꾸찌에의 타자는 가장 부정
적인 인물이다. 군의관은 나르시스적 응시로 타자를 본다. 상상계적 착오에 빠진 제국주의적
시선이다. 그 다음으로 부정적인 인물은 모리슨의 삼인칭 서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타자
를 인정하지 않는 제국에서 타자 스스로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허영에 빠진 인물들이다.
그 다음이 K이다. 그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제국에서 상징계를 거부하고 상상계로 귀환
하려는 소망을 집요하게 실천한다. 그 다음이 클라우디아 가족이다. 그들은 제국에서 스스로
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인물이다.
'가장 푸른 눈'과 '마이클 K의 삶과 시대'의 혼성서술은 서술형식과 똑같이 타자를 인정
하는 주제를 담는다. 그것은 삼인칭을 일인칭과 대조시켜 위와 같은 네 가지 인물형을 창조
하고 타자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에 일어나는 비극을 보여주어 제국을 반성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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