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의식과 성
사장이 베푸는 파티에 참석한 어느 사원이 축배를 들고 사장의 건강과 회사의 발전을 기
원하면서 "우리 모두 사장님을 위해 트림을 합시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프로이트는
이 트림이란 말이 우연히 튀어나온 게 아니라 사장을 존경하는 사원의 심중에 그를 못마땅
하게 생각하는 뒤틀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트림'이라는 단어가 무엇에서 파생되었는
지를 밝히면서 그는 인간의 말실수는 의식이 믿는 것을 가로막는 무의식이 있기 때문에 일
어난다고 보았다.
19세기 영국작가 찰스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에 이런 장면이 있다. 가난한 고아 핍
이 어느 날 부유한 해비샴의 대저택에서 아름답고 오만한 에스텔라를 만난다. 그녀로부터
모욕을 당했음에도 그는 그날 이후 줄곧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신분의 차
이를 의식하기에 그녀를 무시하려 했지만 그녀에게 매료된 핍의 본능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나타난다. 해비샴 저택을 '해비-텔라'라고 잘못 말해버린 것이다. 우리의 의식 밑에는 사회
에서 금기하지만 본능이 원하는 소망을 묻어둔 거대한 창고가 있어서 의식의 빗장을 뚫고
틈틈이 솟아오르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말실수가 아닐까. 비록 보이지 않지만 그 거대한 본
능의 저장고는 우리를 단순히 사회적 동물로만 만들지 않고 언제나 본능에 침해받는 갈등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의 가설은 이 거대한 창고가 있다는 데서 시작된다.
꿈은 현실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옛부터 꿈의 신비를 푸는 일은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해
왔다. 간밤의 꿈자리가 사나우면 그날의 일이 심난하게 느껴지고 돼지꿈을 꾸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 아기를 갖은 후에 꾸는 신비한 꿈은 태몽이라 하여 한 인간의 미래
를 점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꿈속에서 갈증이 나 물을 마시고 또 마셔도 해소되
지 않을 때 우리는 현실에서 목이 마른 것을 깨닫는다. 또 실제로 소변이 마려울 때 화장실
을 찾는 꿈을 꾼다든지 오줌을 싼 아이가 홍수가 난 꿈을 꾸는 것 등 육체적인 소망이 꿈으
로 나타나기도 한다. 늘 의식 속에서 그리워하는 사람보다는 잊혀진 사람이 엉뚱하게 나타
나기도 한다.
꿈은 현실에서 억압된 무엇인가가 있다는 증거이고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에
둘러 이루는 소망충족의 길일는지 모른다. 프로이트에 게 꿈은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증명
하는 왕도였다.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애의 침상을 지키던 아버지가 잠깐 옆방으로 눈을 붙이러 간
다. 그는 아들의 방에서 불길이 훨훨 치솟는 꿈을 꾼다. 아버지, 아버지, 내가 불에 타는 게
안 보이세요? 아들은 외쳤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아들의 방으로 달려갔다. 정말로 그 방
에서는 불길 이 치솟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이 유명한 일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리 적인
현실이 꿈속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죽은 아들이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소망이 꿈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이라는 프로이트의 작업의 첫획을 그은 책은 '꿈의 분석'이었다. 그의 나이 44세
가 되던 1900년에 출간되어 첫판이 팔리는 데 수년이 걸렸지만 지금은 고전이 되었다. 그에
게 꿈은 말실수와 함께 인간의 의식 저변에 묻힌 무의식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꿈이 재
현되는 방식을 설명했고 그것은 소쉬르 언어학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언어의 속성, 아니 비
유체계의 속성을 설명한 선구적 작업이 된다. 현실에서 금지된 인간의 소망은 그저 사라지
는 게 아니라 의식 밑에 잠재해 있다가 의식의 고리가 헐거워진 틈을 타 수면 위로 떠오른
다. 그러나 그대로 재현되지 못하고 시처럼 압축되고 무대 위의 배우처럼 다른 모습으로 위
장한다. 꿈사상이라는 이야기를 몇 장면으로 압축하고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옆 의 것과
슬쩍 자리를 바꾼다. 압축(condensation)과 전치(displacement) 이다. 이 두 단계를 통해 억
압된 내밀한 욕망은 몇 개의 그림으로 재현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꿈작업은 훗날 야콥슨이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언어 의 속성을 압축(은
유)과 전치(환유)로 푼 것과 같다. 모든 비유체계는 은유와 환유로 되어 있고 문학 역시 마
찬가지라면 프로이트가 꿈을 해석한 방식은 바로 인간의 사상과 재현의 체계를 설명한 셈이
된다. 그러기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과학이었고 동시에 비 과학이었다. 언어 혹은 꿈 작
업은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대체라는 절대가치와 옆의 것을 짚는 허구가 함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과학 속에 개입되는 이 허구 때문에 문학과 예술이 존재하고 프로
이트의 이론 역시 해석되고 재해석되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가 그토록 무의식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신분석자로서 환자의
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또 유대인으로서 박해받는 까닭을 짚어보고 싶어서다. 문명이
발달되는데도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한가, 바로 그 존재의 불안을 해석하기 위해서다. 그는
환자뿐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문명, 존재의 궁지를 분석하는 분석가였다. 우선 최면요법보다
자유연상법을 선호했던 그는 환자의 기억을 되살려 억압된 것이 무엇이고 왜 현실에 적응하
지 못하는지 알아야만 했다. 화산폭발로 무너진 폼페이의 잿더미 속에서 옛 도시의 모습을
재현해 내듯 그는 환자의 기억 속에 묻힌 상흔을 되살려내려 한다. 무너진 잿더미가 곧 무
의식이고 그 속에 여기저기 흩어진 파편들을 되살려내 조각들을 맞추어 이야기 (서사,
narrative)를 만들어내야 한다.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상흔, 사회와 현실이 금지했지만 사라
지지 않고 남아 있는 어떤 것을 캐어내야만 환지치 병이 치료되기 때문이다.
쾌감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은 타인과 어울려 살아야 되는 현실 속에 서 금지되고 억압
된다. 무의식은 바로 이 만족과 충족을 원하는 본능이 다 그러므로 이기적이다. 그런데 이
본능은 사회가 억압해도 소멸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다른 모습으로 실현을 꿈꾼다. 프로이
트는 본능을 중시한 당대의 자연주의 사상에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결합했다. 리비도라 는
에너지는 형태를 달리할 망정 그 총화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꿈은 잠 속에 등장하는 리
비도 충족의 한 형태다. 말실수에도 소망이 튀어나오고 기억을 되살리는 환자의 대화 속에
도 소망이 깃들어 있다. 그러면 인간에게 최초로 억압된 가장 근원적인 상흔은 무엇일까. 가
장 본능적인 리비도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인간은 어머니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세상에 태어난다. 마치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
가듯이 어머니는 대지요, 고향이다. 그의 첫 울음은 고향과의 이별, 대지와 분리되는 고통스
러움의 표현이다. 그리고 한동안어머니의 품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자란다. 자리가 젖으면 갈
아주고 울면 먹여주고 씻겨주고 안아준다. 아무도 아이에게 명령하거나 야단치거나 금지하
지 않는다. 어머니는 나의 모든 것이고 나는 어머니의 모든 것으로 나와 어머니 사이에 틈
새가 없이 완전한 합일을 느낀다(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이 행복한 시기를 프로이트
는 '유아기',혹은 '근원 적 나르시시즘' 이라 이름 붙이고 약 2세에서 4제 사이로 본다. 그
이후부터 금기와 억압이 일어난다. 아이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연인인 것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라는 시기적인 구분은 이후 이론가 들에 의해 재해석되
기도 한다. 라캉은 유아기를 '상상계'라 하여 생후18 개월까지로 보고 크리스테바는 유아기
를 세분하여 여성이론을 만든다. 어쨌든 사회를 의식하고 현실 속에서 압박감을 느끼며 사
는 인간에게 현 실을 모르던 시절은 지복의 시기였고 이 평화와 이기적인 충족에 대한 소
망은 억압될지라도 결코 포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성인이 되어 거꾸
로 추론한 가설의 산물이다.
'꼬마 한스에 관한 분석' '후기'는 이것을 기막히게 잘 표현하고 있다. 한스의 아버지가
기록한 긴 보고서를 그대로 소개한 후 긴 세월이 지나 한스를 만난 프로이트. 한스는 그 속
에 그려진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전 혀 낯설게 느낀다. 내가 아니라고. 억압된 것은 바다
저 밑에 깊숙이 가라앉은 타이타닉의 잔해와 같아 물위에 있는 나의 시선으로는 볼 수가 없
다.
인간의 원초적 행복은 어머니와 한 몸이었을 때이고 원초적 상흔은 어머니와의 헤어짐이
다. 아버지 때문에, 아우 때문에 어머니를 빼앗길 때 그는 그 방해물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
워한다. 물론 그 증오는 억압되지 만. 어머니는 프로이트의 가설에서 쾌감원칙의 대상이요,
영원한 애인이며 삶의 목표요, 죽음으로 완성되는 최후의 목적지이다. 프로이트의 글, '세
바구니의 주제'(The Theme of the Three Caskets, 1913)를 보면 정신 분석에서 어머니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신화와 문학에서 되풀이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세 번째 여신, 탄생 과 죽음의 여신이다.
아름답고 옳고 말이 없는 '리어왕'의 셋째 딸 코딜 리어를 비롯해 많은 작품들이 세 번째
것에 의미를 둔다. 마지막 선택으로 "바로 그것"인 세 번째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욕망을 드러낸다. 그는 아주 어릴 적에는 어머니의 품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란다. 그리고
성장하면 어머니를 닮은 연인의 품에서 사랑 받기를 소망한다. 이제나이가 들면 아무도 그
를 사랑해주지 않기에 대지의 품안에 안길 것을 소망한다. 흙은 세 번째 연인이요, 마지막
선택으로 어머니의 또다른 모습이다.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근원적 대상으로서 어머니는 은
유요, 연인과 대지는 어머니가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환유이다. 은유는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어머니이고 환유는 늘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잃어버린 어머니다.
억압된 것이 있고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된다는 프로이트의 가설은
그의 글 전체에서 다르게 되풀이되는 무의식이요, 타자이다. 이 리비도 불변의 법칙은 오늘
날 푸코의 '성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데리다나 라캉등의 현대 '해체론'의 기원이
되고있다. 이성이 억압해온 감성은 제거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늘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
고 중심이 억압한 주변, 제국이 억압한 야만인은 타자로서 중심 속에, 제국 속에 자리잡고
있다. 포스트모던 철학이나 미학, 그리고 탈 식민주의 이론들은 모두 이 타자가 있음을 보여
주어 중심주의나 객관재현의 독재가 허구임을 드러낸다. 역사의 타자로서 여성들이 프로이
트 이론에서 저항의 근거를 찾을 때 끌어내는 부분이 바로 이 무의식과 타자이다.
프로이트의 글, '가족 로맨스'(Family Romances, 1909)에서 무의식이라는 타자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어릴 적에 아이는 자신의 부모를 절대적이고 완벽한 최고의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
장하면서 현실에 눈을 뜨면 아이는 부모를 타인과 비교하게 되고 그들의 왜소함에 실망을
느낀다. 게다가 동생이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빼앗기게 되면 질투를 느끼고 증오마저 경험
한다. 아버지의 권위를 벗어나 독립하려는 아들의 노력은 현실에 대한 불만을 낳고 아들은
그 불만을 백일몽이나 공상으로 해소하려 한다. 공상 속에서 아들은 왕이나 멋진 기사, 우아
한 황태자를 꿈꾸며 부모에 대한 실망을 위로 받는다.
가족 로맨스의 두 번째 단계에는 성이 개입된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늘 불확실한 존재이
다. 이에 비해 어머니는 확고한 존재로 아이의 환상 속에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다. 아들은
아버지를 라이벌로 느끼고 아버지 에 대한 실망까지 곁들여 어머니를 사랑하며 내밀한 각본
을 꾸민다. 자 신을 제외한 형제 자매를 모두 서자라고 믿고 그러기 때문에 누이들 가운 데
성적으로 끌리는 대상이 있으면 근친상간도 꿈꾼다. 프로이트는 이 글의 말미에서, 이런 각
본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가 나무라겠지만 지극히 자연스럽게 시작된다고 말한다. 부
모에 대한 지극한 애정 밑에 숨은 강한 증오심, 지나간 어린 시절에 대한 비대해진 그리움
은 그런 사 악한 그림을 그려낸다. 인간은 그렇게 명료한 이성의 존재만이 아니요, 억압된
동물적 본성은 틈틈이 의식을 뚫고 솟아오른다.
프로이트는 이 글에서 억압된 무의식이 어떻게 돌아오는지 보여주고 그것이 성과문명의
이해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암시한다. 문명과 문화사란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하며 독립해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배반과 독립의 밑바탕에는 강렬한 애정과 실망에서 오는 증오가
깔려 있다. 가족 로맨스는 아이가 성장한 후에도 늘 그리게 되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로
서 환상 속의 고귀한 남녀는 모두 어릴 적에 흠모했던 부모의 잔상이다. 그러므로 문명이
아무리 성본능을 억압해도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성인이 된 남성은 현
실원칙과 쾌감원칙을 융통성 있게 수용한다. 만약 이때 결벽증과 죄의식으로 쾌감원칙이 돌
아오는 것을 수용하지 못하면 신경증 환자가 되고 지나치게 수용하면 도착증 환자가 된다.
여성에게 신경증 환자가 더 많은 것은 결벽증 때문이다.
무의식과 타자의 귀환을 흔한 일상에서 찾는 프로이트는 성의 대상을 선택하는 흔한 예로
어머니에 대한 어릴 적 사랑이 어떻게 달리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고귀한 신분의 남자가 그
에 걸맞은 여성을 아내로 맞은 뒤 그녀에게 애정을 전혀 못 느끼고 비천한 신분의 여자를
평생 동안 숨겨놓고 사랑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현상은 아주 흔해서 동양에서는 양반이 기
생집에 드나들거나 소실을 맞는 게 당연시되었고 서양에서도 귀족이 비천한 계급의 정부를
두는 일이 흔하다. 아니 더 흔하게는 오늘날에도 결혼 후 곧 불감증에 빠지거나 같은 대상
을 바꾸고픈 욕망은 사랑의 속성에 속할 정도다. 술꾼은 늘 같은 술을 마셔도 싫증이 나지
않는데 왜 사랑은 같은 대상에 싫증을 내는가. 성본능 그 자체 속에는 이미 완벽한 충족의
실현을 싫어하는 무언가가 들어 있지는 않을까.
맨 처음에는 그저 전화로 음성만 들어도 좋았다. 그 다음에는 만나서 바라보기만 해도 좋
았고 그 다음에는 손길만 스쳐도 짜릿했으나 그 다음에는 손목을 잡고 입술을 찾고‥‥‥
이렇게 사랑은 완벽한 충족을 모르는 욕망 그 자체다. 그래서 욕망은 욕망을 욕망 한다.
성본능과 현실이 타협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간의 주체를 욕망 하는 주체로 보았을 때 이
부분은 좀 더 명료해진다. 욕망의 본질은 바로 죽음 외에는 아무 것도 만족시킬 수 없는 '
결핍'(lack)이기 때문이다. 헤겔이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고 동물은 대상을 욕망 한다고 했을
때, 또 라캉이 인간 주체에 상상계라는 거울단계를 상정할 때 이들은 모두 성본능 속에 있
는 결핍을 암시했다.
이제 프로이트의 글에서 이 부분을 짚어보자. 그의 글 전체가 이것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
만 '사랑이 지닌 보편적인 대상천시의 경향'(On the Universal Tendency to Debasement in
the Sphere of Love, 1912) 은 특히 이런 성본능에 대해 잘 설명해준다. 왜 성본능은 장애물
이 있어야만 더 증진되는가. 남성이 여성과 사랑에 빠질 때는 그녀를 과대평가 하다가 소유
하고 난 후에는 과소평가 한다면 여성은 얼마나 불리한 입장에 서는가. 결혼 전까지 순결을
강요한 성이 결혼 후에 불감증에 빠진다면 그런 도덕이란 인간에게 이익만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미 성이론의 고전으로 불리는 '성이론에 대한 세 글'에서 암시된 것들
을 이 글에서 다르게 되풀이하면서 무의식이 얼마나 일상에 끈질기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준다.
사랑은 두 가지 성향을 갖는다. 애정성향(the affectionate current)과 관능성향(the
sensual current)이다. 전자는 유아기의 주로 2세에서 4세 사이에 가장 강하게 느끼는 어머
니에 대한 애정이다. 자신을 보살펴주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육체적 접촉과 정신적 평안
이 완전히 일치하는 단계로 이 시기의 리비도를 자아보존 본능, 혹은 에고 본능이라 이름
붙인 다. 4세가 지난 후 아이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금지를 당하거나 부모로부터
꾸지람을 듣는다. 또 형제가 태어나 사랑을 빼앗긴다. 아 이는 이제 어머니로부터 받던 사랑
을 포기하거나 억압한다.
유아기의 무한한 애정본능은 차츰 축소되고 사춘기에 이르면 남녀의 성차가 육체에 나타
나면서 관능성향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타자로 나타난다. 어머니
에 대한 욕망은 원초적인 것이고 그것에 대한 금기는 너무도 강렬하여 이후의 많은 대체물
들은 금기가 있어야 욕망이 가능하거나 증폭된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 지
못하고 고착되거나 어릴 적 부모의 성행위에서 우연히 받은 나쁜 인상 이 남아 있으면 주체
는 막연히 내부에서 사랑의 행위를 억제하거나 막는 성향을 갖는다.
사춘기란 어릴 적의 나르시스적 에고본능이 억압되고 차츰 성본능으로 바뀌며 자기애에서
대상으로 애정이 옮아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남녀는 결혼을 통해 그 동안 억압되
어온 성본능을 해방시키는 게 아니라 다시 한번 현실원칙에 종속시킨다. 자식을 낳아 사회
에 이바지한다는 도덕적인 임무다. 그러기에 성본능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만족을 얻기 어렵
고, 오직 억압된 애정성향과 새롭게 태어난 관능성향을 잘 조화시켜야만 정상적인 성생활이
가능하게 된다.
무의식 속에 억압된 어머니에 대한 소망이 그토록 강한데 사회가 금지령을 내릴 때 성인
이 된 남성은 어머니와 닳지 않은 여성을 찾으려 애를 쓴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여인
은 어머니와 어딘지 닮아 있다. 에고 본능이 가치 있게 평가한 대상, 즉 존경하는 여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제 어머니를 천한 창녀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애정의 대상을 관능의 대
상으로 바꿔치는 것이다. 천한 여성에게만 성적 만족을 느끼는 남성은 어릴 적 어머니에 대
한 애정이 너무 강하고 현실에서 만족을 못하기 때문이다. 금기가 있을 때만 성욕이 강해지
는 것도 남성이 사랑에 빠진 여성 을 과대평가 하다가 소유하고 난 후에 과소평가 하는 것
도, 어릴 적에 경험한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애정이 사라지지 않고 나타나는 데 있다.
프로이트의 성 이론에서 무의식은 이토록 강렬하고 끈질긴 타자이다. 그것은 리비도요, 원
초적 상흔으로 깊이 잠재하면서도, 신경증환자는 물론 정상인의 일상에도 표층에 흔적을 드
러낸다. 그러면 이런 성이론들 은 여성이론가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프로이트 자신이 남
성이었는데 그가 여성에 대해 얼마나 알 것인가. 그러나 프로이트가 분석한 히스테리 환자
들은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증상은 사회가 금기한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되었
다. 그는 환자의 기억을 통해 무의식을 더듬으며 가부장제 사회가 억압한 여성의 원초적 소
망과 경험을 읽게 된다. 그가 남긴 기록들은 인간 심리를 과학적으로 탐색하려 애쓴 흔적이
다. 늘 불확실한 여운을 남기면서...
그러면 이제 프로이트의 성이론을 살펴보고 그것이 어떻게 혁명적이고 어떻게 보수적인지
알아본다. 혁신은 여성이론가들이 끌어내는 부분이고 보수적인 측면은 그들이 비판하는 부
분이다.
프로이트의 성이론 : 혁명성과 보수성
혁명성 '성이론에 대한 세 글'과 '문명화된 성도덕과 현대 신경증'
현대 여성이론가들이 프로이트의 성이론 가운데 교과서처럼 삼는 중요한 글, '성이론에 대
한 세 글'(Three Essays on the Theory of Sexuality)은 1905년에 발표되었다. 이 해는 여
성이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글 '도라 분석' (Fragment of an Analysis of a Case
Hysteria)이 출판된 해이다. 자신의 새로운 발견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를 바랐던 프로이트
는 '꿈의 분석'을 한동안 접어두었다 발표했고 '도라 분석'도 5년이 지난 후에 발표한다. 그
러므로 '성이론에 대한 세 글'은 도라 분석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이 선 후 그것에 새로움
을 보태고 정리한 글이라 볼 수 있다.
두 글은 어느 점이 비슷하고 어느 점이 다른가. 도라는 프로이트의 초기 사상에 큰 영향
을 준 인물이다. 그의 주저인 '꿈의 분석'이 출판되던 때쯤 이루어진 신경증 환자의 치료였
고 무의식의 확인뿐 아니라 여성이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동성애 문제가 암시된다. 또
환자와 분석자사이의 전이, 기억과 대화와 구성 사이에 존재하는 허구성이 암시되어 훗날
그의 글들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주요 사상들이 이미 배태되어있었다. 프로이트는 '도라
분석'을 출판하며 자신의 치료가 실패했고 분석의 기록조차 정확치 못하다고 밝힌다. 실패
이유는 도라가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K씨에 대한 분노를 자신에게 전이시켜 복수하느라 치
료를 중단해 버린 것이고 기록에 허구가 개입되는 것은 도라의 환상, 분석 과 정, 그것의 기
록이 시간의 차이를 두고 이루어져 사후에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서문 아래 밝혀지는 도라 분석이 중요한 것은 맨 마지막, 가장 억압된 신경증의 원
인이 도라의 K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데 있다. 즉 아버지를 사랑한 도라는 K부인과 밀회
를 갖는 아버지에게 증오를 품게 되 고 그 대가로 주어지는 K씨의 구애를 즐기지만 막상
호숫가에서 K씨가 청하는 요구를 격렬히 거부한다. 도라의 가장 깊은 무의식 속에는 오이
디푸스 콤플렉스보다 더 근원적인 욕망, 동성애가 있었다. 그것은 여성 이 같은 여성을 증오
하고 아버지의 아이를 갖기 위해 수동적이고 열등한 존재가 된다는 가부장제 성이론을 반박
하는 근거가 된다. 가부장제 사회 에 의해 남성과 여성이 적극성과 수동성이라는 우월의 관
계로 구조되기 이전, 오이디푸스 상황 이전에는 남녀가 동등했다는 암시가 도라의 의식 깊
이 묻혀 있었고 프로이트는 이것을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다. 아마도 도라가 전이를 일으켜
치료가 중단되었다기보다 프로이트가 더 이상 치료의 끝을 보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
가 서둘러 서술을 마감한 시절이 바로 도라가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K부인을 사랑했다는 동
성애, 아니 도라의 남성성에 이르러서였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사회에서 동성애는 죄악으로
인정되었다.
'도라 분석'에 대한 출판을 미루고 5년이 지난 후 프로이트는 좀 더 확실한 근거를 가지
고 도라 분석을 선보이는데 그 근거가 바로 '성이론에 대한 세 글'이었다. 그리고 이 글에서
핵심이 되는 성도착, 유아기의 성, 양성성, 자기성애 등은 오이디푸스 상황 이전에 남녀 평
등의 단계가 있었다는 중요한 근거들로서 여성이론가들의 성차별이란 가부장제 사회와 문명
의 산물이지 태어날 때부터 지닌 인간의 자연스런 속성이 아니라는 주장에 공헌한다.
성도착이란 문명이 인위적으로 주변화시킨 성본능이다
리비도는 배고픔과 같은 인간의 본능이고 프로이트에게는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흔히
인간의 성은 사춘기 때부터 시작된다고 알려져 있지 만 그 이전에 이미 태어난 후부터 성이
있었고 그것이 억압되어온 것은 아닐까. 흔히 우리가 성도착이라고 제외시키는 성은 신경증
환자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교양인에게도 귀족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으로 은밀히 감추어
져 있을 뿐이다. 성도착은 무엇인가. 남녀가 자식을 낳는 것에 목적을 두고 생식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성합, 즉 이성간의 성(hetero-sexuality) 이외의 성이다. 그런데도 동성애 등 도
착이라고 밀려난 성들이 얼마나 공공연하게 정상인들 사이에서 행해져 왔는가. 그렇다면 이
성간의 성이란 사회가 규정한 성이지 본래의 자연스런 성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춘
기란 남녀간의 성을 위해 남성과 여성이 우월의 관계로 가름지어지는 사회적 성의 출발일
뿐 그 이전에 태어날 때부터 지닌 아주 자연스런 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 억압된 성, '유아
기 성'(Infantile Sexuality)이 프로이트 성 이론에서 무의식이요, 타자이다.
인구 정책으로 문명이 성을 규제하기 이전의 원시 사회나 유아기에 남녀의 구분은 없었
다. 아이는 태어나서 삶 본능에 의해 자기를 보살피는 사람과 애정을 교감한다. 이때 애정은
대상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혼자스스로 충만한 기쁨으로 몸 전체를 성감대로 하는 자발적 혹
은 자기성애(auto- erotism)이다.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과 입맞춤, 젖을 먹여주고 배설을 치
워주는 것 등 모든 게 환희요, 아늑함인 이 시기는 어떤 사회적금기도 존재하지 않는 낙원
이었다. 아담과 이브 사이에 다른 어떤 타자가 존재하지 않고 서로가 완벽하게 서로를 사랑
하고 충만해 하던 에덴동산이었다. 둘의 시선은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누구에 의해서도 보
여지지 않는다. 바라봄(eye)만 있고 보여짐(gaze)이 없는 낙원에서 타자란 없었다. 제 삼의
시선이 없으니 금기도 억압도 없는 것이다. 둘은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회와 문
명이 개입되기 이전, 지식의 열매를 먹고 눈을 뜨고 부끄러움을 알기 이전이다. '자발적 성
애', 혹은 '유아기성'이란 바로 이것이고 이때 어머니와 아이는 한 몸이고 서로가 서로의 완
벽한 남근이다. 물론 이것은 아이의 환상일 뿐, 어머니는 아버지의 연인이고 동생의 연인이
다. 그러나 이 환상과 경험을 단념하지 못하고 실낙원에 사는데, 낙원이 있으리라고 믿는 것
에 존재의 비극이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이 단계를 '원초적 나르시시즘'이라 했고 라캉은
'거울단계'라 한다.
2세에서 4세 사이에 정점을 이루고 그 이후 억압되는 자기성애는 성장하면서 사회적 제약
에 의해 남녀가 자식을 낳는 사회적 임무에 종속된 다. 그러나 그 이후 정상적인 성인들에
게 여전히 도착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사회와 문명에 의해 제약이 가해져 주변으로
물러났을 뿐 원래는 자연스런 성이었다는 추론을 낳게 한다. 성도착이 원래는 자연스런 성
이었다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왜 사랑에 빠진 연인은 대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과대평가 하는가. 그녀를 사랑하는 순간
부터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광휘를 발하며 빛나 보인 다. 젊은 베르테르는 로테가 준 오렌
지를 소중히 간직한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그였지만 그녀가 아이들에게 오렌지 조각을 나누
어줄 때 그는 마 치 아이들이 자신의 살점을 떼어 가는 것처럼 느낀다. 죽을 때 베르테르
는 로테를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연미복을 입는다. 로테가 바라본 옷은 그에게 그녀 자체
이고 그는 그 옷을 입으며 그녀에게 감싸인 듯 느낀다. 그리고는 로테가 만진 권총에 의해
목숨을 끊는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에서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직업이 언제나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그가 극장 매표원이면 연극이 세상에서 최고요, 그 가 목수이면 나무가 수의사면 동물이 최
고의 가치를 지닌다.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는 미다스의 손길처럼 연인과 관계되는
모든 것이 에로틱해진다. 오렌지는 그냥 하나의 과일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주었을 때는
바로 그 연인과 같아진다. 이것이 사랑이 지닌 환유적 속성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페티시즘'으로 표현했다. '자발적 성애'는 대상을 사랑할 때 특히 손
에 닿지 못할 때 그것을 완벽한 어린 시절의 어머니로 믿게 만드는 환상을 창조한다. 온몸
이 성감대였던 시절, 나르시즘적 자기애에 충만해 있던 경험은 억압되었지만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와 대상에 투사된다. 그는 연인의 얼굴에서도 자기 얼굴을 보고 대상을 사랑하지만
사실은 대상에 비친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과대 평가는 지상에서 결
코 지속되지 못한다. 그런 사랑은 대상을 얻음으로써 끝이 나거나 대상을 잃음으로써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사회가 금지하는데도 여전히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남성
끼리 사랑하는 경우에 한쪽은 남성적 성향(mus-culinity)을 띠고 상대방은 여성적 성향
(femininity)을 띤다. 여성끼리 사랑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인간은 원래 양성적
존재가 아닐 까. 해부학은 인간이 원래 암수 한몸이었는데 차츰 단성으로 퇴화되었다 고 말
한다. 프로이트는 심리적으로도 인간은 원래 양성이었는데 사회가 단성이 되도록 억압했다
고 말한다. 인류의 보존과 노동력의 증가를 위해 사회는 남녀가 이성으로 합법적인 결혼을
통해 아이를 낳아 양육하도록 가르쳐 왔다는 것이다. 문명은 그런 이성간의 성만이 옳은 것
이라고 훈련 시켜온 것이다.
자발적 성애의 단계에서 남녀의 구별은 없다. 그때에는 남아와 여아가 모두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남성적 성향을 갖는다. 리비도는 하나였고 그 것은 남성적이었다. 프로이트가 지적
한 이 '리비도는 하나였다'라는 말과 양성성(bisexuality)은 여성 이론가들에게 중요한 의미
를 지닌다. 특히 인간이 사회에 의해 억압되기 이전에 남녀가 평등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가
설은 프로이트 성이론의 혁신적 측면으로 많은 용어들을 낳고 여성이론가들에 의해 재해석
된다. 남근기, 자발적 성애, 동성애, 양성성 등은 소위 '오이디푸스 전 단계'라 하여 20세기
후반부의 지적 흐름에서 도전적인 부분이 된다. 그가 말한 '사회'라는 말 앞에 '가부장제'
라는 형용사를 덧붙이면 그대로 여성이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비도는 공격적이기에 성 본능에는 본질적으로 대상에게 고통을 주려는 욕망이 들어 있
다. 가장 흔하고 중요한 도착 가운데 하나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다. 성이 갖는 잔인성은 동
물적 욕망의 잔재이다. 한 쪽은 고통을 주는 데서 쾌감을 얻고 다른 쪽은 고통을 당하는 데
서 쾌감을 얻는다. 어떻게 고통을 받는 경우에도 쾌감을 느끼는가. 프로이트는 말한다.
사디스트는 늘 동시에 마조히스트라고. 가학자는 피학자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피
학자는 가학자의 얼굴에서 자신을 본다.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충족이란 나르시스적 욕망,
자기성애가 억압되었다가 되돌아오는 것은 아닌가. 사실 이런 충동은 정상인에게도 있으며
오직 극단적인 경우에만 도착증 환자가 되고 그것을 억압할 때 신경증 환자가 된다. 도착증
과 신경증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억압된 성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예이다. 인간은 교
육의 정도와 인성의 차이에 의해 도착증이 더 나타나거나 덜 나타날 뿐이고 지나치게 결백
할 때는 오히려 신경증이 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하나라는 것은 공격성과 수동성, 남성성과 여성성이 하나였다는 것
을 말해준다. 인간은 원래 양성성이었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여성이론에 공헌한 부분이다.
전희(fore-pleasure) 역시 유아기 성이 억압되었지만 되돌아오는 예를 보여준다. 성은 두
가지 성향을 지닌다. 어릴 적 어머니의 보호를 받던 유아기 성인 '애정성향'과 사춘기부터
발달되는 '관능성향'이다. 나르시스적 자발적 성애의 단계가 억압된 후 성감대는 온몸에서
특정 부위로 축소된다. 사춘기가 지나면 남녀의 구분이 명확해지고 성은 대상을 찾는다. 자
기성애에서 대상을 향해 옮아가며 성은 남녀가 결합하여 자식을 낳는 사회적 이익(후에 프
로이트는 이 성본능도 역시 자아보존 본능이라 하여 삶 본능의 범주에 넣고 대신 죽음 본능
을 대치시킨다)에 종속된다. 그런데 애정성향은 관능성향의 밑받침이 되어 애정과 육체가
조화를 이룬다. 정상적인 성생활을 위해서는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이 대상을 향
한 관능과 조화를 미루어야 한다. 전희는 바로 억압된 애정성향이 되돌아온 흔적이다.
사춘기 이전에 유아기 성이 있었고 오이디푸스 상황 이전에 오이디푸스 전 단계가 있었다
는 프로이트의 가정은 상징계의 성차를 의심해보고 가부장제를 무너뜨리려는 여성이론가들
에게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특히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인 엘렌 식수스의 '여성적 글쓰
기'나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기호계의 저항은 바로 남녀의 성차가 없던 유아기 성인 양성성
에 뿌리내린 이론들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이론이 늘 그렇게 여성들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후기에 가서 그
가 초자아와 거세 콤플렉스를 강조할 때 그는 당대 가부장제 질서를 거와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기에 무의식이나 타자를 강조하는 혁명적인 글 속에서도 이런 보수적인
측면은 언뜻 보인다. 사춘기 이후성에서 남아와 여아가 적극성과 수동성으로 갈라지는 분기
점은 아마도 그 악명 높은 '남근선망' (penis-envy)이라는 용어일 것이다. 남근의 유무에 의
해, 눈에 보이는 해부학적 특성에 의해 그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규정지었고 이런 암시는 후
기의 글들에서 본격적으로 발전되며 되풀이된다.
20세기 전반부 존스(Ernest Jones)나 호나이(Karen Horney)와 같은 여성이론가들이 프로
이트의 거세 콤플렉스에 반발하고 프로이트를 반여성주의자로 규정한 것은 특히 그의 후기
의 글들 때문이었다. 1970년에 나온 케이트 밀렛의 '성의 정치학'(Sexual Politics)에서도 프
로이트는 반 여성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비난을 면치 못한다. 그 이후 프랑스 해체론에 영향
을 받은 영국의 마르크시스트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이 20세기후반부의 지적 흐름을
감지하고 프로이트를 제대로 읽어서 여성이론에 보탬이 되게 하자는 글이 나을 때까지 프로
이트는 여성들의 적이었다. 그러면 이제 프로이트의 후기 글들, 그가 모더니즘 시대의 고전
적인 분위기를 초자아에 담고 현실을 충실히 설명하려 애썼던 보수적인 글들 가운데 여성성
을 규명한 몇 편을 살펴보자.
보수성 : 거세 콤플렉스, 남근선망 그리고 초자아
1925년에 쓰인 '성의 해부학적 구분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Some Psychical
Consequences of the Anatomical Distinction between the Sexes)은 눈에 보이는 신체적 특
징이 어떻게 인간의 심리에 영향을 주어 사회적 성차를 낳는가 설명한 글이다.
리비도가 적극성을 띠고 하나였던 남근기, 혹은 유아기 성에서 남녀의 차이는 없었다. 남
성적 성향과 여성적 성향, 적극성과 수동성, 혹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라는 양성을 다 지닌
인간은 오직 애정으로 감싸주는 어머니의 손길을 온몸으로 느끼는 완벽한 자기성애의 시절
을 누린다. 남근기의 남아는 아버지의 연인인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적 성향을 지닌다.
그리고 손가락 빨기, 수음, 침대 적시는 행위 등으로 차츰 성에 눈 떠간다. 이때 부모의 성
행위를 목격한 아이는 훗날 그것이 상흔으로 남아 정상적인 성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경우
도 있다(이 '원초적 환상' (primal phantasies)은 '늑대 인간의 분석'에서 자세히 다루어진
다).
그런데 이때 남아는 여아의 성기가 자신과 다른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거세된
여아를 보며 공포와 승리감을 느낀다. 그리고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증오하던 오이디
푸스 콤플렉스를 벗어나 자신이 또 하나의 아버지가 될 것을 꿈꾼다. 초자아를 길러 사회적
자아가 되려는 것이다. 그러나 남아는 결코 어머니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다른 여성
으로 대치될 뿐이다. 억압된 원초적 욕망은 평생 다른 대체물로 나타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남아는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며 추구하는 대상이 어
머니인 것에서 일관성을 유지한다.
여아는 이와 조금 다르다. 자신이 거세되었음을 알게 된 여아는 그때까지 강렬히 사랑했
던 어머니를 원망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남근을 가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아버지의
연인이 되어 그의 아기를 낳는 길이다. 남아와 반대로 여아는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 오이디
푸스 콤플렉스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의 추구에서 여아는 일관성을 갖지 못 하고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옮아가야 한다.
남아가 초자아에 의해 사회 속으로 편입되는 것에 비해 여아는 이보다 복잡한 심리적 갈
등을 겪는다. 우선 어머니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느낀 다. 유아기의 강렬한 애정과 거세되었
음을 안 후의 강렬한 증오가 교차된다. 훗날 아버지의 이미지를 닮은 남편을 얻었을 때 어
머니에 대해 억압했던 양가적인 감흥을 그대로 전이시키기도 한다. 또한 아버지에 의존 적
이 되고 수치심이 강하며 열등의식에 차 있다. 여아는 남아보다 정의감이 약하고 수동적이
고 모든 일을 감정적으로 판단하고 세상일에 소극적이다. 만약 이때 여아가 수치심을 수용
못하면 남성적인 여성이 되거나(레스비언) 모든 성행위를 경멸하고 거부하는 불감증에 걸린
다.
프로이트는 이런 여성의 경향을 '남근선망' 이라는 단어로 요약하고 그 결과 일생 되풀이
되는 현상으로 몇 가지 예를 든다. 여아는 질투심이 강하다 구타당하는 환상에 쉽게 빠진다.
어머니와 멀어지고 남성과 달리 수음을 억제한다. 초자아를 형성하지 못하고 남성에 의존하
는 여성성을 그려낸 '성의 해부학적 구분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서 프로이트는 상당한 유
보를 붙이기는 했다. '꿈의 분석'이나 '도라 분석'과 달리 검증해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서두와 양성성 때문에 자신의 이론은 확고한 증명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결말이다. "대
부분의 남성들 역시 남성적인 이상에서 멀고 모든 인간은 양성성 때문에 적극성과 수동성을
다 지닌다." 그러나 '남근선망'과 '거세 콤플렉스'는 당대 여성운동가들을 분노케 했다. 이런
내용은 십년 후에 발표된 '여성의 성'(Female Sexuality, 1931)이나 '여성성'(femininity,
1932) 에서 되풀이되고 견고해진다.
'여성의 성'에서 프로이트는 여아가 남아보다 더 양성적이라고 말한다.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 남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은 여전히 어머니이다. 다
만 아버지처럼 초자아를 길러 어머니와 닮은 연인을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 비록 원초적
대상은 포기했지만 남아에게 어머니는 여전히 억압된 무의식이다. 이처럼 남아는 일관된 성
격을 유지하지만 여아는 다르다. 자신이 거세된 것에 수치심과 분노를 느낀 여아는 그토록
강렬했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아버지를 택한다. 대상을 바꾸어야 하기에 그녀의
성격은 일관성을 잃고 분열을 초래하기 쉽다. 또 그녀의 사랑과 집착에는 강렬한 증오가 숨
겨진다. 이 양가적 성향에 의해 여성은 남성보다 더 양성적이고 갈등이 심하며 사회에서 중
요한 일을 수행하기 어렵다. 여아의 오이디푸스 전 단계는 남아보다 길다. 그런데 이 양성성
은 여성이 적극적인 남근기에서 소극적인 여성성으로 변모되는 과정에서 다양하게 나타난
다. 레스비언처럼 한층 더 강렬히 남성성을 밀고 나가는 경우, 성을 혐오하여 불감증이 되는
경우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는 경우이다. 물론 세 번째 단계가 사회에 적응하는 정상
인이다.
위와 같은 프로이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무의식과 유아기 성을 강조하던 혁명기의 프로이
트가 참으로 많이 후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당대 가부장제 현실을 설명하다보니 오이
디푸스 상황을 강조하는 꼴이 되었고 수동적인 여성성을 설명하다보니 혁명적인 가설은 흔
적만 남는다. 다른 모든 면에서는 혁신적인 프로이트도 여성에게만은 보수적인가. '여성의
성'에서 언급되는 양성성은 '성이론에 대한 세 글'에서 언급된 양성성과는 다르다. '유아기
성'에서 양성성은 남아나 여아가 똑같이 적극성과 수동성, 남성적 성향과 여성적 성향을 지
닌다. 이때의 양성성은여성이론가들에게 인간이 원래 하나의 리비도로 이루어졌고 성차는
단순히 가부장제 사회에 의한 것이라는 적극적 해석을 낳는다. 그러나 후기의 프로이트는
양성성을 남아보다 여아가 지닌 열등한 속성으로 보고 그 의미도 초자아를 발전시키지 못한
양가적 감흥으로 해석한다. 여아는 사랑의 대상을 바꾸는 데서 적극성에서 수동성으로 옮아
가며 그 결과 성격의 일관성을 잃는다. 한마디로 '여성성'이란 남근이 없다는 열등의식에서
오는 수동성, 의지의 박약, 보상심리에서 오는 허영심 등으로 풀이된다. 그러기에 여성은 역
사상으로도 인류의 문명에 공헌한 발견이나 발명 같은 적극적인 일을 거의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성은 강하다 라든가 남성도 마조히즘과 같은 수동성을 지니기에 남
녀를 가름짓는 것은 힘든 일이다. 또 여성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다만 여성이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되는지 밝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프로이트의 겸손한 유보가 붙어 있지만 그는
분명히 이 글에서 초기와 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데서 멈춘다. 그는 해부학에 근거를 두고
남성의 남근에 가치의 기준을 둔다. 그것이 없는 것을 결핍으로 보는 거세콤플렉스나 남근
선망은 그 이후 여성이론가들에게 두고두고 원망의 근거가 된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한 우
월주의에 빠져 있다는 해체론자들의 비난, 진정한 거세는 남근의 유무가 아니라 남녀 모두
성본능을 충족할 수 없다는 불안이라는 어니스트 존스나 카렌 호나이의 비판 등 프로이트의
현실에 대한 보수적인 해석은 여성들의 불만을 낳는다.
유아기의 성에 대한 혁신적인 글을 쓸 당시 프로이트는 '문명화된 성도덕과 현대 신경증
'(Civilized Sexual Morality and Modern Nervous Illness, 1906-08)에서 문명이란 우리가
믿는 대로 과연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켜 왔는가라고 반문한다. 20세기 초반부 정신적 황무
지를 절감하며 그는 문명과 성의 관계를 조명한다. 그토록 사회가 규제하지만 암암리에 존
재하는 성도착들, 매춘행위 , 강간... 인간이 더 평등해지고물자가 더 풍부해지는데 왜 불안
은 증가하고 신경증 환자는 늘어나는가.
프로이트는 이 글에서 인간의 자연스런 성이 문명의 요구에 의해 규제되는 측면들을 고찰
하고 다분히 원시적 사회나 유아기에 향수 어린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후기에 쓰인 '여성
성'에서는 초자아가 문명을 창조하는 것에 찬사를 보내고 여성이 역사나 문명의 창조에 공
헌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성 본능이 억제되고 승화된 것이 문명이라는 관점에는 변함
이 없으나 문명을 보는 시각이 보수적으로 바뀐다. 초기에 강조하던 쾌감원칙이 후기에 현
실원칙 쪽으로 기운 것은 아마 당시의 지적 분위기 때문이었으리라. 초기에는 인간은 동물
로부터 진화했다는 다윈의 사상과인간의 심리를 과학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후기에는 추상적 논리보다 구체적 현실에 적응하는 실존주의와 개인의 감흥
을 보편질서 속에 편입시키는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현실원칙과 초자아를 강조했을 것이다.
정신분석이 한 시대의 문화적 흐름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은 프로이트 이후사상가들이
그의 이론을 어떻게 응용하는가에서 잘 드러난다. 프랑스의 자크 라캉은 50년대 구조주의
혹은 후기 구조주의 입장에서 프로이트를 다시 보았다.
해부학적 관점으로 본 성과 거세 콤플렉스를 디딤돌로 삼아 초자아를 강조함으로써 모더
니즘의 자율성과 같은 맥락에서 프로이트를 해석한 모던 정신분석은 자아의 조정능력을 중
시했다. 저자의 심리를 중시하던 초기의 비평에서 자아가 대상을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중시
한 모던 정신분석에 이르면 프로이트의 후기 글들이 사회성과 현실을 더 인정했듯이 그를
해석하는 사람들도 보수적인 경향을 띤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으로 되돌아가 그의 혁명적인 부분을 재조명한다. 그는
해부학적인 결정론 대신 구조주의 언어학을 끌어들여 남녀의 성차를 지운다. "무의식은 언
어처럼 구조되어 있다"라는 그의 명제는 무의식과 소쉬르 언어학의 핵심인 '차이'를 결합시
켜 욕망하는 주체로 가는 팻말이었다. 욕망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인간은 결코 절대 논리(남
근)를 가질 수 없는 차이의 존재라는 것이다. 거세는 이미 상징계 이전에 상상계가 있음으
로써 시작된다. 언어의 세계 이전에 억압된 거울단계가 있었고 그것은 늘 되돌아온다. 그러
므로 '결핍'은 인간 모두의 비극이지 결코 여성만의 것이 아니다. 거세 콤플렉스는 남근의
유무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거울단계로부터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라캉의 이런 혁명적인 프로이트 재해석은 모던 정신분석에 저항한 것으로 20세기 후반부
의 지적 흐름인 '해체' 혹은 후기 구조주의 사상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성이론은 이런 혁명
성에 주목하게 되고, 영어권에서는 줄리엣 미첼이 프로이트를 다시 읽는다. 영국의 마르크시
스트였던 그녀는 프랑스에서 일고 있는 해체론의 정치성을 간파해내고 무의식이 성차를 전
복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라캉의 상상계에 해당되는 무의식은 상징계인 가부
장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1974년에 출판된 그녀의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은 케
이트 밀렛의 '성의 정치 학'에서 절정에 이른 프로이트 비난이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물론 해체론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 정신분석은 다양하게 응용된다. 루스 이리가레이, 엘렌
식수스, 크리스테바등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딛고 비판과 재해석을 하면서 여성이론을 모색
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가설에 불과하지만 성의 문제에서 많은 현상들
을 설명해내고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여지를 남긴다. 남녀의 성이나 심리의 문제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재해석은 앞으로도 새로운 사상이 출현할 때마
다 다르게 되풀이될 것이다. 마치 그 자신이 발견해낸 '반복충동'처럼 사색이 종말에 이르는
순간까지 다르게 되풀이되며 비난과 이해를 반복할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가설은 그토록 많
은 이야기를 이끌어내며 삶의 이곳저곳을 더듬고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2.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여성들의 도전
여성이란 무엇인가와 여성성(Femininity)이란 무엇인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질문이다 우
리는 생물학적 특성으로 여성과 남성을 나눌 수 있다. 인체를 해부하면 분명히 여성과 남성
은 각기 다른 신체적 특성을 지닌다. 도대체 무엇이 다르기에 우리는 두 개의 성을 나누는
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나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문제에 이르면 이런 질문은 더욱 복잡해
진다. 남성 같은 여성과 여성 같은 남성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아니 동성애는 사회관습이
구별지은 성을 넘어 생물학적 차이도 관습에 의한 차이도 지워버리려 한다.
최근의 퀴어(queer) 이론은 성차의 문제를 종래의 관습이 규정한 성(gender)도 생물학적
차이(sex)도 넘어선 곳에서 남녀의 경계를 의심해본 다. 성을 이성간의 문제로만 규정해 온
사회적 관습을 의심해보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동성애 문제를 끌어들여 남성적인 여성과 여
성적인 남성 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남성과 여성을 구별지어 온 성차가 얼마 나
인위적인 것인가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물론 여성끼리의 결속을 다짐하는 부수적인 효
과도 기대하면서.
성의 차이는 이토록 복잡한 문제여서 지금까지도 명쾌한 결론이 나지 않는 논쟁이다.
여자란 무엇인가, 그녀는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질문은 철학자들의 끊임없는 질문이었고
그것은 마치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했다. 그리고 60년대 이후 여성운동이 활발해
지면서 그런 물음은 이제 여성스스로의 것이 되었다. 지금까지 남성들이 규정 지어온 여성
의 정의를 여성의 입장에서 다시 읽으려는 것이다.
생물학적 특성을 고려하면서도 심리적인 것에서 여성성을 찾으려 했던 사람은 프로이트였
다. 그는 원래 해부학을 전공했다가 정신분석의가 되었다. 그래서 여성 히스테리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여성성을 성기 해부학과 심리적인 것이 결합된 영역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의 심리 분석은 당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던 환자들을 대상으로 했기에 사회 속 의 성
문제로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것이 오늘날 많은 여성 이론가들이 프로이트와 그를
재해석한 라캉에게서 여성성의 뿌리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프로이트만큼 여성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낸 사람이 없으면서도 그것이 남성의 입장에서 쓰였고 또 당대 가부장제의 산물
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우선 프로이트가 어떻게 여성성을 풀어내는지 알아보고 프로이트의 사례연구 가
운데 가장 유명한 도라(Dora)의 경우와 그 글에 대한 여성이론가들의 반발, 그리고 라캉의
이론과 여성이론가들의 대응을 살펴본다. 도라에 대한미국 페미니스트들의 대응과 라캉에
대한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대응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 있다. 특히 라캉으로부터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를 보면 독창성이란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앞선 대가의 어떤 부분을 자기 시대에 맞게 조금만 수정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다.
1. 도라 분석과 여성들의 다시 읽기
1900년 어느 날 18세의 소녀 도라가 프로이트를 찾아온다. 부유한 제조업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히스테리 증상을 치료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로부터 약 3개월에 걸친 치료가
있었고 1901년 병상일지가 쓰였다. 그리고 1905년에 이르러서야 발표된 글이 유명한 도라에
관한 이야기, '히스테리 분석의 파편'(Fragment of an Analysis of Case of Hysteria)이다.
프로이트는 이 글의 서문에서 분석이 완벽치 못했음을 밝힌다. 병의 원인을 끝까지 파헤
치지 못했으며 분석과정에서가 아니라 분석이 끝난 후 기록되었고 '전이'의 문제가 치료에
고려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꿈의 분석'을 발표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막 고안해내던
당시의 프로이트이기에 이 글은 훗날 여성성을 밝히는 글들의 근원이 된다. 또한 그가 무의
식을 파헤치면서도 남성이기에 볼 수 없었던 환자의 병인이 훗날여성이론가들에 의해 지적
됨으로써 혁신과 보수, 해방과 억압의 모순된 프로이트를 드러내어 흥미롭다.
도라는 아버지의 병으로 얼마 동안 요양지에서 보낸다. 그녀의 어머니는 철저한 가정주부
로 집안을 쓸고 닦는 것밖에 모른다. 아버지는 K부인의 간호를 받았고 그녀와 밀회를 즐긴
다. 그녀의 남편인 K씨는 도라에게 구애하고 도라는 그것을 거부한다. 도라는 아버지가 자
신의 밀회에 대한대가로 K씨에게 딸을 파는 것이라 생각하여 아버지를 미워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도라의 이런 비난을 "타인에 대한 비난은 똑같은 내용으로 자신을 비난"하는 게
아닌가 의심한다. '꿈의 분석'에서 프로이트가 즐겨 쓰던 자리바꿈(전치)이다. 다시 말하면
도라는 자신이 K씨를 사랑하기 위해 아버지와 K부인의 밀회를 눈감아주면서 그것을 거꾸
로 아버지에게 핑계 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도라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에 만 신경을 쓴 프로이트는 자신이 쓰고 있는 분석
속에 담긴 많은 사실들을 간과해버린다. 도라는 집안의 여자 가정교사가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와 K부인과의 관계를 헐뜯을 때도 K부인의 아이들을 돌보고 여전히 그 부인에게 헌
신적인 숭배를 보낸다. 그리고 K씨를 사랑하는 도라는 어느 날 호숫가에서 그의 성적인 구
애를 단호히 거절했다. 왜 그랬을까?
프로이트는 이 호숫가 장면을 원초적 상흔으로 보고 그것에 집착했다. 도라의 격렬한 거
부 뒤에는 강렬한 성적 흥분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녀의 꿈을 분석해도 그렇고 목이 간질
거리는 증상을 보아도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그녀가 아버지와 K부인의 성유희 장면을 그
려보는 데서 비롯된 것들이다. 프로이트는 도라의 아버지가 발기불능이어서 성도착이었을
테고 그런 도착적인 장면들을 훔쳐본 도라가 흥분을 억압한 데서 히스테리 증상을 일으킨다
고 분석한다.
그러나 환자가 기억해내는 과거와 그녀가 이야기하는 꿈의 내용을 듣고 성적인 유희와 연
결시키는 프로이트는 혹시 자신이 K씨가 되어 분석에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자
신의 욕망을 거절한 도라를 꾸짖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이 든 그가 분석하는 성행위는 중년
남자인 자신의 것이지 어린 18세 소녀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프로이트는 지금 자신이 전이
를 일으키고 있음을 모른다... 등등. 훗날 분노한 페미니스트들은 이 부분을 프로이트의 남근
중심적이고 억압적인 분석의 예로 든다.
프로이트는 파편적이고 미완성이며 중층적인 분석의 끝을 이렇게 내린다. 도라는 아버지
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증오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사랑한 가정교사나 K부인과 자신을 동일
시한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기에 그 사랑에는 증오가 깃든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의 피해자인 K씨를 사랑하게 된 연유이다. 분석은 여기에서 프로이트
가 결코 떠나지 못하고 맴돈 원초적 상흔인 호숫가 장면에 맞추어진다. 왜 도라는 K씨의
구애를 매몰차게 거부했을까. 그 행위를 성적흥분을 감추려는 것으로 본 프로이트는 그런
거절 밑에 숨은 가장 억압된 무의식을 밝힌다. 도라는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K부인을 사랑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갈등 밑에 K씨에 대한 사랑이 억압되어 있고
또 그 밑에는 K부인에 대한 흠모가 억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중층 억압의 맨
위는 딸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고 맨 아래는 K부인에 대한 사랑이라
는 동성애가 억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 프로이트는 유혹이론에서 오이디푸스 이론을 막 고안해 냈고 훗날 여성성의 규정에
서 강조되는 오이디푸스 전 단계, 즉 남근기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때 이미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되풀이될 주요 이론들이 파편화된 서술 속에 암시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펼쳐놓은 글 속에 그런 것들이 숨어 있는 것을 모른 채 분석을 마감해
버린다. 그리고 분석에 덧붙인 후기에서 서로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고 도라가 전이를 일으
킨 것을 몰랐기에 분석이 실패했노라고 덧붙인다. 전이란 분석과정에서 환자가 억압된 감정
의 대상을 분석자에게 투사시켜 제대로 속을 털어놓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과거의 감흥이 현
재 상황으로 옮아오는 것이다. 도라는 K씨에 대한 감정을 분석자인 자신에게 투사시켜 대
화가 지속될 수 없었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훗날 프로이트는 전이는 양쪽에서 일어나고
전이가 결코 분석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석을 도와준다고 말했지만 이 초기의 글
에서는 환자의 전이만을 나무라고 전이가 분석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잠깐 '오이디푸스 전 단계'(Pre-Oedipal Phase)라든가 '남근기'에 대해 언급해보
자. 성 이론에서 이 두 용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여성의 히스테리를 분석하면서 최면요법보다 자유연상법을 선호했다. 그는 환
자의 기억을 되살려 무엇이 인간의 논리적 사고를 가로막는지 알아내려 했다. 어릴 적에 겪
은 아버지 혹은 남성으로부터 겪은 성적인 유혹이 상처로 남아 그후 그것을 연상시키는 상
황에 의해 공포를 느끼거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믿은 그는 환자의 기억과 이야기를
듣고 그 속에서 병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환자의 기억은 사실로 증명될 수가 없었
고 다분히 환상에 기인하는 것 같아 그는 이 유혹이론에 의심을 품게 된다.
그는 기억에 남은 과거의 유혹보다 좀 더 견고하고 보편성을 지닌 기준이 필요했다. 인간
의 의식에는 떠오르지 않지만 억압된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은 아마 가장 원초적인 좌절 혹
은 상흔이 될 것이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상흔과 소망은 무엇일까. 바로 어머니로부터 떨
어져 나온 것, 대지로부터 헤어진 것, 연인과의 이별이다. 이 세 가지를 합한 것이 아주 어
릴 때 자신을 돌봐주는 어머니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다. 유아기는 이 세상에서 자신과 어
머니만 있고 그 둘 사이에 틈새가 없는 어떤 기간이다. 너와 내가 하나인 시기 그 절대적인
감흥은 그후 틈새가 벌어지고 아버지, 형제, 사회가 들어서도 마음의 고향이 되어 늘 돌아가
기를 꿈꾼다. 현실에 의해 억압되지만 사라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을 무
의식이라 부르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바로 인간이 늘 꿈꾸면서도 이루
지 못하는 소망을 충족한 데서 온 비극이 아닌가. 오이디푸스는 그런 결과를 피하려고 애썼
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 일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그는 눈을 찌르고 사치로부터 추방된다.
인간의 무의식을 우회하지 않고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오직 죽음뿐이었기에 오이디푸스의 추방은 현실에서 추방되는 것이요, 장님
이 되는 것은 바라봄만 있고 보여짐을 모르는 것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아마 이런 맥락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만들었을 것이다. 어머
니를 결코 단념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적응이다. 프로이트는 유아가 어머니를 단념하라는
아버지의 법을 모르는 시절을 여러 가지 용어로 언급하는데 남근기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오이디푸스 이전의 단계는 보통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로 세분되기도 하는데 대략 아이가
남녀의 차이를 모르고 어머니와 헤어지기 전이다. 이때 리비도는 하나였고 그것은 남성적이
었다. 이때 남성적이란 남자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리비도는 원래 공격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의미다.
유아는 사회 속으로 들어설 때 남녀가 구분된다. 남아는 여아가 남근이 없는 것을 보고
거세의 위협을 느낀다. 이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 남아는 어머니를 단념하고 또 하나의 아버
지가 되며 여아는 어머니를 미워하고 아버지를 흠모하여 남근을 얻으려 한다. 거세 콤플렉
스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남아에 비해 여아는 오히려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 오
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진다. 이렇듯 프로이트에게 거세 콤플렉스는 인간이 사회화되는 계
기이다. 그리고 생물학적 차이와 사회적 관습이 묘하게 뒤얽혀 성차가 생겨난다. 남근이 있
느냐 없느냐는 생물학적 차이이고 그것이 성차를 낳는 순간은 현실로 들어서는 것, 곧 인간
이 사회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도라의 분석에서 바로 도라에게 오이디푸스 단계 이전의 남근기가 억압되어
있다는 가설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라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가장 표면적인 것이고 사실
은 깊숙이에 같은 여성을 흠모한 동성애가 억압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동
성애는 성이 사 회화되기 이전의 순수한 성이었다.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 순간이나 어
머니가 몸을 씻겨줄 때, 기저귀를 갈아줄 때, 키스해줄 때 느꼈던 성은 평화롭고 아늑한 쾌
감으로 오늘날 남녀 사이의 성기 중심의 성이 아니었다. 이성간의 생식기 중심의 성은사회
가 필요에 의해, 가정을 꾸미기 위 해, 교육을 통해 길들여진 관습일 뿐 본래의 모습이 아니
라는 암시가 여 기에서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동성애에 바탕을 두고 성차를 와해시키는 최
근의 '퀴어 이론'을 프로이트와 연결 지을 수도 있다. 사실 무의식과 성 이론에서 '도라 분
석'은 같은 해에 나온 '꿈의 분석'보다 훨씬 더 혁명적 인 글이었다.
그러나 글이 발표되던 때 프로이트도 독자도 그런 혁명성을 알 리 없었다. 아니 일을 벌
인 프로이트야말로 뭔가 석연치 않게 느낄 뿐 자신이 벌여놓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
다.
'도라 분석'은 곧 이어 여성이론가들에 의해 비난과 재해석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분
석과정에서 프로이트가 보인 남근중심적이고 억압적인 태도, 어머니를 미워하고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한 여성 히스테리 설명, 그리고 더 나아가서 프로이트
는 결국 도라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등의 비난이다. 분석자의 글은 환자의
히스테리 못지 않게 논리가 결여된 파편이다. 그는 도라와의 무의식적 대립에서 도라와 동
일시를 일으키고 있다. 거세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프로이트는 진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으로 도라의 진정한 여성성을 간과해버린다. 도라의 병인은 아버지에 대한 흠모나 남근
선망이 아니었다. 가장 억압된 병의 원인은 도라가 어머니, 바꾸어 말하면 같은 여성인 K부
인을 사랑했던 것에 있다. 어머니에 대한 딸의 사랑을 현실이 수용하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아버지를 사랑하도록 만들었기에 이 강요에 의해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위의 분석에서 본 것처럼 그런 사실을 펼쳐놓고는 보지 못한다. 그는 도
라의 전이 때문에 분석이 실패했다고 믿어 제목에서도 "파편"이란 단어를 썼다. 그의 이런
맹목은 어디에서 오는가.
도라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깊이 잠재한 인물이었다. 그토록 모호하고 실패한 기록이었
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 생애에 걸쳐 이룩한 무의식의 탐색과 오이디푸스 전 단계, 오이디
푸스 콤플렉스가 묻혀 있었고 신기하게도 프로이트 자신이 그걸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역설적으로 그것이 훗날 이론가들 사이에서 논쟁을 일으키고 자신의 분석을 유
명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도라는 아버지와 K씨에 대한 애증 얽힌 복수를 분석자인 자신
에게 옮겨 자기를 버리고 3개월만에 떠나버렸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도라의 전이 때문에
실패했고 그것을 몰랐기에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그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도라의 전이보다 오히려 프로이트 자신의 '역전이'
때문에 분석이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그것을 맨 처음지적한 사람이 라캉이었다. 원래 1951년
에 쓰인 라캉의 글 '전이에 있어서의 간섭' (Intervention on Transference)은 1970년에 이
르러서야 영어로 번역이 되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영미 쪽의 이론가나 페미니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라캉의 '역전이'에 관한 글은70년대 중반부터 논쟁의 쟁점이 된다.
프로이트의 역전이
모던 정신분석은 프로이트가 도라의 사춘기 감흥을 간과했고 도라가 어떻게 자아를 형성
해 가는지 무시했기에 분석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라캉은 자아의 조정능력을 중시한 모던
정신분석이 프로이트의 본래 의도를 잘못 읽었다고 보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으로 다시 돌아
간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시대의 논의인 소쉬르 언어학과 구조주의를 결합시켜 (후 기) 구
조주의 정신분석을 만들어낸다.
주체는 언어를 구사하여 진실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언어에 의해 구조된다. 그 언어는 주
체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 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진 자의적인
약속이다. 그래서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해온 까닭에 오염되었다. 아담과 이브만 살았
던 낙원에서 는 둘 사이가 완전히 일치했지만 사탄이 끼여들어 낙원에서 추방된 후 기 표와
기의도 인간의 타락처럼 추락한다. 오직 상상계에서만 일치하는 기표와 기의의 틈새는 한없
이 넓어져 하나의 기표는 무수한 기의를 지닌 다. 언어가 계속 옆의 것을 짚듯이 주체도 대
상을 바로 짚지 못하고 계속 옆의 것을 짚는다. 언어도 주체도 환유적이다. 투명한 이성이나
투명한 언어란 없다. 그러므로 분석자는 환자를 독자적으로 꿰뚫어볼 수 없다. 언어를 매개
로 하는 정신분석은 상흔을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찾아내는 게 아니라 담론과정에서 얻어낼
뿐이다. 분석은 두 욕망하는 주체 사이 의 대화와 전이에 의해 이루어지는 과정의 산물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도둑맞은 편지'에서 편지가 어딘가에 깊숙이 숨어 있는 게 아니
라 바로 도둑의 코앞에 드러나 있듯이 해답은 표층 위에 떠있다. 라캉이 포의 단편에 반한
것은 바로 편지가 깊은 곳에 숨겨진 게 아니라 벽난로 위에 버젓이 있고 그것이 주체를 훑
고 지나가는 텅빈 기표라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도라가 자신을 K씨나 도라의 아버지로 생각하여 복수했다고 불평하지만 그러
면 프로이트 자신은 담론 밖에서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입장이 될 수 있었는가. 라캉은 '도
라분석'에서 전이가 일련의 변증법적 도치의 형식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를 향
해 전이를 일으킨 도라의 말은 프로이트 쪽에서 역시 자신의 입장으로 도치되어 역전이를
일으킨다. 도라는 프로이트에게 아버지를 기소한다. 그녀는 일체의 조서를 꾸민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것에 속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 누군가에 대한 비난은 자신을 향한 그와 똑같
은 비난을 억압하고 있는 증거다. 도라는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K부인에게 매료된다. 그러면
서 또 한편으로 프로이트와 동일시하듯 K씨와 동일시한다. 프로이트가 가장 억압된 부분으
로 암시했던 도라의 양성성을 라캉은 표층에서 담론의 만남 속에서 보여준다.
프로이트에게 깊은 무의식은 라캉에게 표층으로 떠올라 언어요, 주체가 된다. 왜 그럴까.
혁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원칙에 충실한 프로이트는 동성애를 용납할 수 없
었다. 당대 사회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혁신성은 도라를 앞에 놓
고 지극히 보수적이 된다. 그러기에 그는 거절당한 K씨에게 동정을 느끼고 그 자신이 K씨
가 되어 도라를 꾸짖는다. 게다가 K씨는 도라의 아버지를 프로이트에게 끌고 온 장본인이
다. 고객유치자로 돈을 벌게 해준 사람이다. 이제 프로이트는 계속 K씨의 사랑 문제에서 맴
돈다.
'전이'는 분석자의 편견, 욕망, 불충분한 정보, 넘치는 열정 등이 투명한 분석을 가로막는
것으로 분석이 자신의 입장을 완전히 떠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아무리 혁명적인 프로이트
였지만 성의 문제에서는 남성의 입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전이란 데리다의 '흔적'이나 '산
종'과도 같으며 포스트모던 소설이 즐겨 쓰던 '입장 서술'을 떠올리게 한다. 라캉은 전이를
일으키는 두 주체가 공을 던지듯 자기 입장에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변증법적 도치의 형식
으로 보여준다. '도라 분석'에서 도라의 전이를 나무랐던 프로이트도 훗날 전이가 잘 되어야
만 분석이 잘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라캉은 이 부분을 좀 더 힘주어 말한다.
전이는 피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역전이'조차 피할 수 없다고. 프로이트와 라캉의 차이
다.
라캉의 역전이에 따르면 '도라분석'에서 계속 맴도는 호숫가 장면은 도라의 원초적 상흔
이 아니고 프로이트 자신의 원초적 상흔이 된다. 도라에게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라고 묻
는 것은 프로이트 자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그러면 이제 라캉의 역전이 이후 '도라 분석'에 대한 비판의 글들을 읽어보자.
스티븐 마커스(Steven Marcus)는 1974년에 쓴 글 '프로이트와 도라 :스토리, 역사, 사례연
구'에서 '도라분석'의 글 자체를 모더니스트 픽션으로 읽는다. 절대 진실에의 접근을 시도하
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병력일지는 문학이다. 다중적이고 다성적인 그의 저술은
나보코프나 보르헤스의 픽션을 떠올리게 한다. 모호성으로 가득 찬 '히스테리 분석의 파편'
에서 주인공은 도라가 아니고 프로이트 자신이다. 그리고 그 런 사실을 모르는 프로이트는
"믿을 수 없는 화자"이다. 마커스는 나보코프와 보르헤스처럼 프로이트의 실재에 대한 탐색
이 얼마나 모호하고 자 의적인지 지적한다. 대상에 대한 해석은 자신의 입장을 떠나 객관적
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맥락에서 도라 분석을 읽는 것이다.
닐 허츠(Neil Hertz)는 프로이트와 도라를 헨리 제임스와 그의 여주인 공 메이지('메이지
가 아는 것')에 비교한다. 그리고 실패의 원인은 도라의 전이뿐 아니라 프로이트의 역전이,
즉 자신이 도라와 동일시한 것을 모른 것에 있다고 말한다. 파편적인 서술도 도라의 히스테
리와 닮았고 도라의 틈새로 가득 찬 이야기처럼 분석도 틈새로 가득 차 있다. 둘이 똑같이
근원적 상흔에서 맴돈다. 그는 총체성을 구현하려는 남성적 욕망에도 불구하고 틈새를 드러
낸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신의 여성성에 저항하는 프로이트의 남성적 항의가 아니겠는가.
허츠는 라캉의 역 전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의 입장에서 프로이트의 역전이를 해
석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도라가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K부인을 흠모했다고 동성애를 암시
했다. 도라의 내부에 가장 깊이 억압 된 남성성을 짚어서 인간의 양성성을 암시한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트 역시 전이를 일으켜 K씨의 입장이 되어 도라의 상흔에서 맴돌았다고 말했
다. 이제 허츠는 라캉이 지적한 것처럼 프로이트가 역전이를 일으킴으로써 바로 도라와 닮
은꼴이 되는 측면을 짚어낸다. 남성의 내부에 잠재 한 여성성을 지적한 것이다. 남성중심적
서술이 논리적이고 틈새 없는 닫힘이라면 여성의 글은 모호하고 다층적이고 틈새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도라 분석'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속에 억압된 여성성이 도라에 의해 표출된
글이다.
'도라 분석' 에서 뭐니뭐니해도 프로이트가 가장 질책을 받는 부분은 그가 역전이로 인
해 도라의 동성애, 즉 남근기를 간과했다는 데 있다. 프로이트는 1931년에 이르러서야 어머
니와 딸의 강렬한 사랑인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인정했다. 그러나 1900년에 이미 그것이 드
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역전이로 인해 그 부분을 놓친 것이다. 자신의 여성성 못지 않게 여성
이 무의식 속에 간직한 동성애적 남성성을 그가 간과했음을 지적하는 글들은 여성의 히스테
리를 이렇게 해석한다. 히스테리란 여성이 단순 히 사회에 적응치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병
이라기보다 남성 우월주의가 여성의 억압된 욕망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에 저항하는 병이
다.
토릴 모이(Toril Moi)는 라캉의 역전이에 관한 글을 이념적인 것으로 확장한다. 프로이트
가 실패한 것은 도라의 무의식 속에 깊숙이 잠재한 K부인에 대한 사랑을 간과한 것인데 이
것은 단순한 역전이가 아니라 이념적인 것이다. 19세기 말 억압적인 가부장제 이념에 깊이
침잠된 프로이트는 여성에게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성애
부분을 파헤치지 않는다. 이 점은 라캉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는 현실
에 저항하기 위해 도라는 치료를 거부한다. 그러나 패배의 선언이었던 저항은 프로이트에
의해 기록되어 끝없는 해석을 낳는다. 포라의 승리가 아닌가. 정신분석을 담론 사이의 권력
싸움으로 연장시키는 토릴 모이의 글에서도 핵심은 역시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간과한 프
로이트의 이념적 편견이었다.
그러면 여성들이 그렇게도 중시하는 오이디푸스 전 단계는 무엇일까. 라캉은 바로 이것을
강조함으로써 선배를 다시 일으키고 동시에 선배를 이겨낸다.
2. 라캉의 상상계와 여성들의 도전
남녀가 성차를 의식하지 못하던 시절, 유아가 어머니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지닌 시절이
오이디푸스 전 단계이다. 이 단계는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로 세분되기도 하지만 흔히 성
이론에서는 대략 '남근기'라고 불린다. 이때 남근은 생물학적인 남근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
유아가 어머니와 갖는 관계를 상징한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의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주
는 남근이라 믿고 또 엄마도 자신의 남근이라 믿는다. 그러니까 이때 남근은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키는 대상이요 라캉에게 옮아가면 인간이 평생 추구하는 어머니, 진리 초월기표이다.
그러므로 남근은 상상계에서나 있다고 믿는 오인의 산물이요, 상징계로 들어서며 영원히 포
착할 수 없는 어머니다.
프로이트에게 남근기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단계, 혹은 유아기 성으로 대략 생후 4세까
지를 잡지만 라캉에게 상상계는 이보다 좁은 생후 18개월이 된다. 라캉은 정신분석에 언어
를 끌어들인 (후기)구조주의 정신분석자다. 그러기에 유아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시기를
중시했기 때문에 프로이트보다 시기를 빨리 잡은 것 같다.
프로이트에게 오이디푸스 단계는 유아가 행복한 남근기를 지나 거세위협에 의해 사회 속
으로 들어서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 전단계란 현실원칙에 의해 억압되는 쾌감원
칙이요, 의식에 의해 억압되는 무의식이다. 라캉은 의식과 무의식의 역동성이라는 프로이트
의 발견을 억압하고 현실원칙을 지나치게 강조한 모던 정신분석에 반발하고 소쉬르 언어관
을 끌어들인다. 그래서 무의식을 언어의 세계인 상징질서로 진입하기 전, 대상에서도 자신만
을 보는 시절이라 하여 '거울단계' , 혹은 착각이 개입된다는 뜻에서 상상계라 이름 붙이고
자아형성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는 '이상적 자아'로 상정한다. 유아는 어머니에 의지하지
않고는 혼자 설 수도 없이 흐물흐물한 상태인데 역설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자아로 오인하는
것이다. 이 오인은 자아형성에서 영원히 차지한 틈새다. 그가 인간을 결핍의 존재로 규정하
고 욕망이론을 만든 것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가장 이상적인 총체성으로 착각하고 자아와 타자를 일치시켜 바라
봄만 있는 시기에서 아이는 아버지의 법인 상징질서의 세계로 들어선다. "무의식은 언어처
럼 구조되어 있다"라는 라캉의 말은 주체가 언어를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언어에 의해 구조된다는 뜻이다.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지고 그 틈새는 무한히 열려 있다. 언어는 하늘에서 떨어진
절대적인 게 아니라 한 언어조직 내에서 그것만을 지칭하자는 사회적인 약속 즉 '차이'에
의해 기능하는 자의적 약속의 산물이다. 인간의 주체가 언어에 의해 지배받는 한 인간은 은
유와 환유라는 언어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고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정의한 것
이었다. 프로이트는 꿈작용을 압축과 전치로 설명했다. 그렇다면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되
었다는 말은 주체가 무의식이라는 암시이고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전복이다. 그래서 라캉은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 말한다. 바라봄과 보여짐이 함께 있는 주체이기에 자의식적 이며 분열된 주체이다.
프로이트는 삶본능을 설명하면서 억압된 쾌감원칙이 현실원칙을 위해 완벽한 충족을 끝없
이 미루며 오직 우회하여 충족되기에 반복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강박적인 반복충동
은 그대로 라캉의 삶본능이 된다. 즉 상상계는 즉각적인 충족을 늦추고 우회한다. 대상이나
목표를 향해 다가설 때는 상상계적 오인을 하지만 대상을 쥐는 순간 그것은 남근(어머니)이
아니다. 그래서 라캉은 '햄릿'을 분석하며 남근이란 오직 베일에 가리웠을 때만 작동할 뿐
드러나면 아무 것도 아니(nothing)라고 말한다. 진리는 베일에 가리웠을 때만 진리로 작동할
뿐이라는 말과 같다. 데리다에게서 진리의 현현이 자꾸만 미루어지듯이 라캉에게도 욕망의
완벽한 충족은 죽음에 의해서일 뿐이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주체를 끝없이 순환시키는 실
재계는 욕망의 미끼로 우리를 살게 하는 삶본능이다.
라캉의 욕망하는 주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주체형성에서 최대치로 끌어냈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중시하라는 여성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셈이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남
근선망과 거세 콤플렉스라는 남성우월주의적 용어들을 남녀 모두에게 적용시켜버린다.
일찍이 1920년대에 어니스트 존스는 프로이트의 거세 콤플렉스에 반발하여 거세란 남근의
유무가 아니라 성희를 영원히 상실케 하는 위협이라고 해석했다. 카렌 호나이 역시 남녀 모
두 자신의 내적 본질을 지키기 위한 거세 공포가 있다고 말했다. 여아는 아버지 혹은 남성
이 그녀를 강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근원적 여성 불안을 갖는다. 여아 역시 남근이 있고
그것은 자아보존본능 같은 것이다. 이 둘은 거세공포를 인간이자 신을 지키기 위해 겪는 불
안으로 해석하여 여성 역시 거세에 저항하는 남성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이들에게 거세는
인간이 지닌 실존적인 불안(anxiety)과 흡사한 것이었다.
이제 라캉은 언어와 지배를 받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결핍으로 거세를 받아들인다. 즉
유아가 상징계로 들어서는 순간이 거세이다. 그러므로 만성이든 여성이든 언어의 지배를 받
는 한 아무도 남근을 갖지 못한다. 남근이란 인간 모두가 돌아가기를 꿈꾸는 어머니요, 대지
요, 진리요, 초월기표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확장시킨 라캉에 의해 페미니스트들의 소망은 이루어졌는가. 그렇
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크리스테바처럼 그의 이론을 충실히 계승하여 여성이론을 만드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라캉 역시 남근 중심주의자라는 비난이 특히 프랑스 여성이론가들에
게서 일어난다. 라캉이 남녀를 동등하게 만든 것 같지만 성차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결핍의
존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현실을 그대로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는 게 아니냐는 우려였다.
여성의 반발과 수용
프랑스 페미니스트인 루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는 라캉이 여전히 여성만을 결핍으
로 본다고 주장한다. 비록 남근이란 더 이상 남성만이 가진 남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는
성차를 해결할 수 없는 결핍이라는 보편주체를 물고 늘어진다. 여성이여, 그대는 무엇을 원
하는 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남성의 것이고 그 대답은 들을 수 없다
크리스테바와 달리 이리가레이는 성차를 분명히 하고 여성은 표현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고 말한다. 그녀는 여성과 남성의 육체가 다른 것을 우월로 보지 않고 다름으로 본다. 이
다름은 지금까지 단음조였던 가부장제 사회에 저항하는 여성적 대안이 된다. 여성의 육체를
지식 생산의 근거로 하여 여성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그녀는 해체론을 끌어들이고 정신분석
을 시도하면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양성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남성이 닫힘이요 동질성을
강조한다면, 여성은 열림이요 이질적이다. 타자를 품는 열림과 모순이라는 여체의 특성을 닫
힌 상징질서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남녀가 다르지만 우월의 관계가 아니라 공존의 관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리가레이는
라캉의 보편주체가 여성문제를 흐려놓고 여전히 남성의 기준에서 '희열'이란 단어를 만들뿐
이라고 반박한다. 여성의 '희열'은 오직 남성의 동일시 기준으로는 알 수 없고 들을 수 없
다. 여성은 결코 남성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여성적 글쓰기는 이 다름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문장은 시작과 끝이 없고 상징계의 질서를 거부하듯 논리를 거부한다. 어머니와 딸
의 사랑이 허락되던 상징계 이전인 오이디푸스 전 단계에서 유아는 흉내, 리듬, 옹알이만을
읊었다. 그녀의 문장은 남근기의 문장처럼 경계가 지워지고 합리적인 질서를 전복하고 물
흐르듯 리듬이 충만하다. 데리다의 보환(Supplement : 보충된 것이 주된 것을 전복한다는
중심주의 해체의 용어)처럼 가부장제 상징질서를 위협하는 언어다. 논리적이 아닌, 느끼고
만지는 감성의 언어는 오이디푸스 전단 계의 글쓰기다.
이리가레이는 라캉이 지워버린 생물학적 성차를 되살려낸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정반대로
되살려낸다. 여성을 거세된 존재로 보는 게 아니라 타자를 품을 수 있는 열림으로 보아 양
성성을 강조하는 해체론의 분위기 에 더 적합한 육체로 읽어낸 것이다. 그리고 여성만이 지
닌 생산능력과 비옥한 자양분으로 가부장제 사회에 저항하는 상징질서 이전의 언어를 복원
시키려 한다.
엘렌 식수스(Helene Cixous)는 이리가레이보다 라캉을 수용하는 쪽이 다. 그녀는 생물학
적 특성이나 정신분석보다 데리다와 라캉의 중심주의해체를 여성의 입장에서 끌어들여 글을
쓴다. 지금까지 서구 사회는 이분법적 우월의 체계로 남성과 여성, 말하기와 글쓰기, 이성과
감성, 빛과 어둠을 규정지어 왔다. 남성의 억압된 타자였던 여성은 이제 차이를 가진 타자로
서 공존한다. 어머니와의 완벽한 상상적 일치의 단계에서 성차는 없었다. 성차는 오직 가부
장제 사회로 편입되면서 생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남성 우월주의의 산물인 성차를 지우는
길은 중심주의에 억압된 것을 복원하는 길이다. 말하기 못지 않게 글쓰기를 중지하자는 것
이다. 논리와 총체성을 거부하는 글쓰기를 하여 상징질서에 저항하자.
이리가레이가 라캉에게 반발하여 여성 리비도를 남성과 분리시켜 여성적 재현을 강조한
것에 비해 식수스는 라캉을 데리다와 같은 해체론의 입장에서 본다. 그리고 그것을 여성의
입장에서 읽어 정치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녀의 글쓰기는 데리다의 보환적 글쓰기이고 라캉
의 타자로서의 글쓰기이다.
정신분석에 대한 여성의 거센 반발을 잠재우고 적극적인 수용으로 물꼬를 튼 사람은 줄리
엣 미첼이었고 여성의 입장에서 재창조한 사람은 크리스테바였다. 60년대 말 케이트 밀렛은
'성의 정치학'에서 프로이트를 여성은 수동적, 남성은 능동적이라고 갈라놓고 남성지배를 당
연시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1974년 미첼은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에서 남성에 대한 적의
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한다. 프로이트는 당대의 남성주의 사회를 설명한 것
이지 그것을 추천한 것이 아니다. 여성억압을 이해하고 도전하려면 프로이트를 무시하기보
다 그를 여성 이론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미첼은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강조한 것에 주목하고 그가 성적인 것을 사회적이고 이념적인 것으로 바꾼 것에
주목한다. 미첼이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어떻게 되살려내는지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논의한
다.
곧 이어 미첼은 재클린 로즈와 함께 라캉의 여성이론들을 영어로 번역하고 긴 소개의 글
을 실어 남근 중심주의 해체를 영어권에 소개하는 데 크게 공헌한다(Feminine
Sexuality,1982). 라캉의 분열된 주체는 남근을 허상으로 만들고 남녀의 성차도 허상으로 만
든다. 주체를 결핍으로, 여성을 '희열'(jouissance)로 본 라캉의 이론은 여성적이다. 프로이트
가 결핍으로 규정한 여성성을 라캉은 주체 전체의 문제로 만든다. 라캉에게"여성적인 것"은
프로이트를 다르게 귀환시킨 것이다. 그것은 상징계의 질서, 명령, 단일한 주체에 항거하는
오이디푸스 전 단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첼의 긍정적인 해석에 힘입어 낸시 초도로우(Nancy Chodorow)는 경험주의적 입장에서
프로이트를 풀어낸다. 행동양식과 취향으로 사회 속의 성차별을 설명하면서 여성이든 아니
든 여전히 남성중심 사회에 종속됨을 보여준다. 그녀는 오이디푸스 전 단계에 초점을 맞추
어 아버지와 아들보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강조한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추상적인데 비해
출산과 육아와 가정 돌보기에서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녀의 인격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
친다. 성차를 극복하는 길은 남아에게도 육아나 가정 일에 참여케 하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프로이트를 미국적으로 해석하여 가족관계의 개선이 사회구조 개선으로 나갈 것을 암시한
다. 그녀의 책 '모성의 재생산'(The Reproduction of Mothering, 1978)은 사회적인 평등권
확보에는 성공했으나 개인의 특수한 상황이 간과되는 한계를 지닌다.
프로이트와 라캉을 따르면서도 여성의 입장에서 그들을 다시 읽는 이론가는 크리스테바이
다. 프랑스에서 기호학자로 출발한 그녀는 남녀의 성차별이 있기 전인 오이디푸스 전 단계
를 언어 이전, 상징계로 들어서기 이전으로 '기호계'라 이름 붙인다. 기호계는 모성이요 무
의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한다. 상징계는 부성이요, 사회질서로 너를 위해 말한다.
그리고 주체는 기호계와 상징계가 상호 대화함으로써 구성된다. 모성과 부성이 바흐친의 대
화적 상상력처럼 상호 접촉하여 언어가 생성된다. 언어는 늘 정반의 경계상에 있기에 갈림
이요 다성성(heteroglossia)이고, 주체는 과정으로서만 존재한다.
오이디푸스 상황에서 여성이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입장이 있다. 부권적 질서와 동일시할
수 있고 모계적 질서와 동일시할 수 있고 이 양극의 공존을 취할 수 있다. 여성이론의 발달
단계가 위와 같기도 한데 크리스테바는 이 가운데 세 번째를 택한다. 극단은 또 다른 중심
주의가 되므로 항상 양극의 경계상의 언어, 경계상의 주체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와 라캉이 주목했던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기호 계, 모성, 혹은 코
라(Chora)라고 부른다. 그것은 무의식, 쾌감원칙, 그 리고 라캉의 거울단계이다. 그러기에 그
녀의 모성은 반드시 여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차가 없는 코라는 남근을 가진 어머니와 상
상계적 아버지를 포함한다. 어머니에 대한 유아의 사랑은 나르시스적이어서 숨이 막힌다, 너
는 나이고 나는 너인 사랑은 너무도 강렬하여 죽음과 같다. 이때 중계자가 필요하고 역시
남근을 가진 상상계적 아버지가 제 삼의 공간으로 사랑을 주고받게 만든다. 가부장제 속으
로 들어서기 전의 아버지는 유아에게 이상적인 사랑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나 라캉과 달리 원초적 억압이 코라의 단계 이전에 있었음을 가정
한다. 성차가 없는 상상계에서 어머니와의 나르시스적인 사랑은 에로스요, 아버지의 사랑은
아가페이다. 그러므로 기호계는 프로이트의 양성성이다. 코라는 어머니, 상상계적 아버지, 여
성성, 그리고 기호계이다. 라캉의 주체가 분열적이고 결핍이며 욕망하는 것임에 비해 크리스
테바의 주체는 저항과 수용이 공존하는 대화적인 것이어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문맥으로
확장된다 선배와 달리 원초적 억압을 기호계 이전에 두기에 상상계는 이미 반쯤 상징계로
들어선 '상징적 상상계'이다. 주체 속의 타자를 인정하는 것은 선배와 같으나 그 타자는 결
핍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획일성을 전복하고 갈림적이고 다성적인 것을 낳는 동인이다. 그
녀가 리얼리즘보다 모더니즘과 같은 문학의 실험성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그것이 상징계
의 동일화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단음조에 저항하는 주체가 크리스테바의 주체다.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은 '도라 분석'을 기점으로 많은 여성들의 반발과 재해석을
낳았다. 무의식을 발견한 혁명적인 프로이트가 무의식중에 내보이는 보수적인 여성성을 지
적하고 동시에 그가 암시한 도라의 동성애에서 많은 담론이 생산된다. 동성애는 여성의 남
성성이라는 남근기, 혹은 오이디푸스 전 단계로 가는 길이고 여성들은 이것을 확장시켜 갖
가지 저항담론들을 마련해왔다.
다음 장에서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여성의 입장에서 다시 읽어낸 줄리엣 미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이어서 '도라 분석'에서 암시된 동성애가 어떻게 발전되는지 보기 위해 에
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의 문학세계를 살펴본다. 최근의 쥬디스 버틀러를 중심으로
한 '퀴어 이론'으로 가는 길목에서 리치의 동성애는 중요한 징검다리가 된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 보수적인 사람도 여성끼리의 사랑이 얼른 생각하듯 그렇게 죄악이거나 급진적인 것
만은 아니라고 이해하게 된다. 결국 여성이론도 성차를 해결하려는 정치적인 운동이고 여성
끼리의 결속과 사랑은 그것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주춧돌이기 때문이다.
3. 무의식의 부활과 동성애
정신분석과 마르크시즘의 연합
줄리엣 미첼은 원래 영국의 마르크시스트였다. 그녀는 마르크시즘이 후기 구조주의 시대
에 어떤 모습으로 변형되어야 할 것인지 고심하던 중프랑스 해체론에서 출구를 찾게 된다.
해체론은 온갖 중심주의의 허구를 들추며 역사상에 그 동안 주변으로 물러났거나 지워져온
것들이 자의적인 구조의 문제였지 자연발생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해체론의 전복적인
기능이 그녀에게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문제를 수정할 수 있는 암시를 준다. 마르크시즘은
단순히 자본가와 노동자의 문제뿐 아니라 성차, 인종의 차이, 식민주의 등 다양한 불평등 구
조를 포함한다. 그리고 백인여성이었던 그녀에게는 성차별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였다.
역사상으로 여성은 늘 노동자였다. 남성 중심주의에 의해 주변화된 여성은 분명히 있으면
서도 들리지 않던 타자였다. 가부장제의 매끄러운 논리가 억압한 것이 무엇인가를 들추기
위해 그녀는 프로이트에게 돌아간다. 라캉과 푸코와 데리다가 이성이 억압한 것을 들추는
데 프로이트가 필요했던 것처럼, 미첼도 남성이 억압한 것을 들추기 위해 프로이트가 필요
했다. 그의 성이론을 무조건 비판만 할 게 아니라 그 속에 어떤 정치성이 들어 있는가 보자.
프로이트가 지닌 혁명성을 여성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려는 의도 아래 1974년 미첼은 '정신분
석과 페미니즘'을 펴낸다.
이 책은 프로이트를 재해석한 라캉이 영미 쪽에 익숙히 소개되기 전 여전히 '남근선망'이
라는 단어로 프로이트가 여성들의 비난을 면치 못하던 때 그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미
첼은 프로이트가 당대의 가부장제를 설명했을 뿐 그것을 추천한 것은 아니며 정신분석도 이
념의 산물이므로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고 말한다. 인간의 의식을 다루는 심리학과 달
리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은 현실에 저항할 전복적인 요소를 지닌다. 프로이트의 현실원
칙과 초자아의 측면에서만 보지 말고 그가 얼마나 억압된 쾌감원칙을 강조했는지 보자.
그러나 현실원칙은 결코 쾌감원칙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매끄럽게 총체적으
로 이어질 수도 없다. 어떤 측면은 거의 관여도 못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환상이나 어린이
들의 유희, 어른들의 공상에서 쾌감원칙은 현실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다
고 현실원칙이 성적 욕망에서 강하게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성적욕망은 자발적 성애에서
충족되기에 외적 현실에 우선적으로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위 글에서 자발적 성애란 유아기 성으로 온몸이 성감대였던 시기이다. 그 시절의 쾌감은
오늘날과 달리 남녀 사이의 성기 중심의 쾌락이 아니라 아늑하고 안정된 평화로 아이가 엄
마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 완벽한 충만함이다. 그래서 "쾌락"보다 "쾌감"이란 단어가
더 적절한 것 같다. 현실원칙보다 쾌감원칙을 강조한 미첼이 어떻게 무의식을 마르크시즘과
연결시키는지 보자.
1. 정신분석과 마르크시즘의 연합
미첼이 이 책에서 밝히는 프로이트 재인식은 그의 혁명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라캉과 거의 같은 입장이다. 우선 그녀는 사회와 현실이 인간을 억압하기 이전에 성차는 없
었다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여성이론이 얼마나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성
이론에 관한 세 글'과 '도라 분석'에서 프로이트는 리비도는 원래 하나였고 남성적이라고
말했다. 남성은 적극적이고 여성은 소극적이라는 구별은 사춘기 이후성에서 나타나고 그것
은 사회의 요구 때문이었다. 도라의 무의식에 깊이 새겨진 무의식은 그녀가 아버지와 동일
시하여 K부인을 사랑했던 동성애였고 히스테리는 사회가 이것을 억압했기 때문에 나타난
죄의식과 불만의 징후였다.
다음으로 미첼은 프로이트의 나르시스적 주체를 강조한다. 어릴 적에 아이는 자아와 타자
와 구별을 하지 못한다. 에코에 의해 보여지지 못하고 물 속에 비친 제 모습만 사랑한 나르
시스는 프로이트의 에로스다. 아이는 태어나서 자발적 성애라는 시기를 거친다. 내가 어머니
요 어머니가나인 완벽한 지복의 순간들이다. 이때 성차는 없었다. 미첼은 이 시기가 지난 후
나르시시즘 시기를 두어 대상을 인지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인 줄 모르는 단계로 해석해낸
다. 프로이트는 그의 글 속에서 에코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충분히 타자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첼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르시시즘 단계는 자발적 성애의 단계와 거의 구
별되지 않고 라캉의 경우엔 상상계로 읽힌다. 다만 미첼의 이런 주장은 원초적 억압을 상상
계 이전에 두고 상상계를 성차가 아직 일어나지 않으면서 에로스와 아가페가 조화를 이루는
단계로 상정했던 크리스테바를 떠올리게 된다. 에로스적인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가페적
아버지의 개입이 조화를 이루는 단계이다. 어쨌든 미첼은 타자를 인지하면서도 성차가 없던
나르시시즘이 의식을 뚫고 되돌아오며 가부장제 질서를 위협한다고 믿는다.
미첼은 또 양성성을 강조한다. 사춘기 이전에 유아기 성이 있었고 이때 남녀의 성차는 없
었다. 남녀 모두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했다.
그 증거가 오늘날의 동성애다. 동성애는 남성 속에 억압된 여성성, 여성속에 억압된 남성성
이 귀환하는 예다. 동성끼리 서로 사랑을 느끼는 것이 유아기 성에서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
때는 온몸이 성감대였고 만지고 쓰다듬는 모든 게 아늑한 쾌감이었다. 성이 오늘날처럼 남
녀 사이의 것으로, 생식기라는 특정 부위로, 그리고 성에 있어서 남성은 적극적이고 여성은
소극적으로 규정된 것은 사회의 요구 때문이었다. 남녀가 결합하여 가정을 꾸미고 아이를
낳아 길러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노동력을 늘려가기 위해 그렇게 교육받아온 결과다. 그러
므로 도라의 히스테리는 원래의 성을 억압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 미첼
이 짚은 양성성은 오늘날 사회적인 성(gender)을 의심하며 레스비언의 여성 역할과 남성 역
할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퀴어 이론으로 연결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첼은 동성애에 탐닉하지는 않는다. 거세 콤플렉스 이후의 프로이트에 대해 그때
까지 충분히 비난했으니 이제 그 이전의 무의식, 나르시시즘, 유아기 성을 발견한 프로이트
를 위해 축배를 드는 것이다. 무의식이 갖는 현실에 대한 저항을 간과하지 말자. 사회가 본
래의 성을 어떻게 억압했는가. 어떻게 성차별이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것은 마르크시스트로
서 미칠의 관심사였다. 성차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진리가 아니라 사회적 관습으로 진리처
럼 굳어진 것일 뿐이다. 성차가 이데올로기의 산물임을 프로이트가 짚어줬다는 데서 미첼은
존스와 호나이를 비판한다. 그들은 사회적 성을 말한 프로이트를 생물학적 성을 말한 것으
로만 오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런 오해가 빚어졌을까? 아니 정말 그것은 오해일까?
성차에 저항하는 같은 여성끼리 프로이트를 놓고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프로이트가 지닌 모순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설정하여 스스
로가 자신의 발견을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의식의 존재만이 아니
라 의식이 조정하지 못하는 거대한 무의식의 영역이 있다는 가설은 마치 지구가 우주의 중
심이 아니라 태양의 둘레를 도는 혹성일 뿐이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위험한 가설이었다.
그는 또 자신의 작업을 다윈의 진화론과도 비교했는데 인간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아니라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가설 역시 혁명적이어서 커다란 파문을 몰고 왔다. 무의식 역시 현
실을 거스르는 것으로 사회와 관습에 역행하는 저항이었다. 그의 글에서 에로스는 언제나
문명의 반대편에서 그것을 의심하고 그것을 뚫고 솟구친다.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또 하나의 모순된 꿈이 있었다. 자신의 혁명적인 가설이 현실을 어
떻게든 절실하게 잘 설명해 주기를 바랐다. 현실에 저항하고 현실을 거스르는 가설로 현실
을 절묘하게 설명해내야 하는 것이 프로이트의 숙제였다. 물론 그 자신은 이런 모순을 모르
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막연히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고 느낄 뿐. 예를 들면 그는 여성
에게 억압된 동성애가 히스테리를 일으킨다고 암시하고 리비도는 원래하나였다고 말하면서
도 "여성성"을 설명할 때는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신사가 된다. 여성이 소극적이고 질투와
허영심이 많고 역사상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한 것은 거세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리고 남근선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차를 설명할 때 그는 "더 깊이는 모르지만"이라고
조금 망설이지만 어느 사이 깔끔하게 현실 편에 서고 만다. 프로이트는 분명 당대 가부장제
사치를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아무리 혁명 적인 남성이라도 여성에 대해서만은 보수적
이 되는 것도 무의식 탓이 아닐까. 바로 그가 발견한 무의식 말이다. 무의식은 원래 자아중
심적이고 이기적인 나르시시즘이니까.
게다가 프로이트는 생물학적 성차와 사회적 성차를 혼동하고 있었다. 리비도는 하나였다
는 에로스를 말할 때는 사회적 성차를 암시하고 현실의 여성성을 말할 때는 생물학적 차이
를 가지고 설명했다. 생물학적 성 차, 그것도 남근의 유무라는 우열의 차이를 가지고 성차를
설명하면서 성차란 자연발생적이 아니고 자의적인 현실원칙의 산물이라고 어딘가 미심쩍은
말을 그는 크게 의식하지 않고 언급했던 것 같다. 사실은 그의 이런 미묘한 모순이 그를 해
석하고 재해석하게 만드는 이유지만.
미첼은 그때까지, 특히 케이트 밀렛의 '성의 정치학'(1970)까지 영어권에서 프로이트를 계
속 남근 중심주의자로 몰아붙인 것에 대한 대안으로 프로이트를 다시 읽고자 했다. 프랑스
해체론의 영향을 받고 그것을 마르크시즘과 연결시키려 했기에 "억압된 것의 귀환"이 그녀
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관심사는 생물학적 성차가 아니라 사회적
이고 문화적인 성차였다. 무의식을 억압한 현실이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구조된 것이라는 가설은 프로이트에게서 받아들이고 성차별이 어떻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에 의해 구조되어왔는가를 보는 것은 마르크스의 입김이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보면 성의 법칙도 교환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의 법칙을 따른다. 특
히 산업화 과정에서 어머니는 노동력을 생산하는 모체이다. 재생산을 위해 일부일처제와 가
족이 중시되고 어머니는 가정에서 육아와 가사를 돌보는 소극적 역할을 맡는다. 프로이트는
문명의 기원을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죄의식 속에서 세워놓은 토템으로 본다. 가부장제
역사는 양성성을 억압하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남성적 투쟁의 연속물이다. 남
성이 여성성을 잘 억압한 것에 비해 여성은 남성성을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미첼은
가정도 여자만큼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가 그렇게 꾸며놓은 것이다.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는 가족관계의 인위성을 들추는 면에서 미첼의 주장은 구조주의 마
르크스주의자인 레비-스트로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녀가 라캉의 정신분석에 매료
된 것도 바로 구조주의가 갖는 '실재의 자의성'이라는 데 있었다. 라캉의 성이론을 영미권에
최초로 소개 한 책, '여성적 성'(Feminine Sexuality: Jacques Lacan and the ecole
freudienne, 1982)은 미첼이 로즈(Jacqueline Rose)와 함께 펴낸 책이다. '남근의 의미', '신
과 그 여성의 희열', '연애 편지'등 라캉의 글을 모아 다섯 편을 로즈가 번역해낸 이 책에는
두 사람이 쓴 긴 서문이 붙어 있는데 라캉의 여성이론을 알 수 있는 긴 소개문이 된다.
"나는 호나이, 존스, 그리고 라도 등에 반대한다. 그들은 심리적인 것과 생물학적인 것을
같게 보았다. 우리는 정신분석을 생물학, 해부학, 생리학과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말문을 열며 미첼은 라캉의 작업을 소개한다. 성은 어떻게 구조되고 사회화되는가.
무의식 속에 억압된 소망은 무엇인가. 가장 근원적인 소망은 어머니와 하나가 되고 싶은 욕
망이고 그것은 압축과 전치에 의해 왜곡된 상으로 되돌아온다. 이어서 미첼은 이미 밝힌 것
처럼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으로 돌아가 구조주의 언어학을 대입해 성차를 지웠다고 말
한다. 언어의 지배를 받는 한 남녀는 모두 남근을 가질 수 없는 결핍이다. 남근은 오직 상상
계에서만 존재할 뿐 상징계로 들어서면 억압되기에 그 차액으로 주체는 대상을 온전히 포착
할 수 없다. 그는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보여진다. 물위에서 반짝 빛나는 빈깡통도 우
리를 바라본다. 우리가 보는 깡통의 모습은 실체가 아니라 나의 바라봄과 깡통의 바라봄이
만나는 어느 지점에서 이루어진 상일 뿐이다.
프로이트의 거세 위협은 사회적인 것으로 외적인 요인이지만 라캉에게 거세는 이미 주체
에게 일어난 내적인 결핍이다. 미첼은 여기서 물론 프로이트의 사성적 갈등을 인정한다. 그
는 1920년까지는 성이론과 도라분석에서 주장한 양성성과 무의식을 사회적 금기에 저항하는
힘으로 역설하지만 1924년부터 거세 콤플렉스를 강조하고 초자아와 현실의 질서를 설명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미첼의 프로이트 다시 읽기는 그 이전까지 여성 이론가들이 프로이트를 비판하고 정신분
석을 보수적인 틀로만 해석해낸 것에서 벗어나는 전환의 계기가 된다. 그녀의 재인식은 마
치 라캉의 재인식만큼 여성이론에서 주목받을 만했다. 케이트 밀렛이 '성의 정치학'에서 프
로이트를 남성우월주의의 대가라고 비난한 후 4년만에 미첼이 그 흐름을 바꾸어 놓았으니
공헌한 것은 틀림없었으나 그 만큼의 문제점도 있었다. 무엇보다 프로이트 자신이 혁명과
보수의 경계 위에 있었기 때문이고 라캉의 남근 지우기로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은 미첼에게
도 별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로스와 문명의 불행한 밀월관계를 유지한 프로이트는 바로 그 긴장 때문에 끊임없이 재
해석되지만 바로 그 긴장 때문에 또 비난과 구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가장 바쁘게
무덤을 들락날락 거려야 하는 지성인이 된 것은 그의 전 작업이 혁명적인 방식으로 당대를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현상에 대한 불만과 상징계에 대한 단순한 맹신을 경고했지만 그는 왜 사회적 관계가 그
런 입장을 취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논하지는 못한다. 그의 글은 그보다
자칫 여성을 허영에 찬 수동적 존재로 보편화시킬 위험을 다분히 안고 있었다. 남성이고 유
대인이었던 그는 사실 인종차별과 나치즘의 독선을 경고하고 싶었던 것이지 같은 억압받는
입장인데도 여성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신경증 치료는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그
결과는 여성보다 인간과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로 추상화시켰다. 위돈(Chris Weedon)등 몇
몇 여성이론가들이 주장하듯 그는 여성 억압의 구체적인 역사와 상황의 문맥을 간과했던 것
이다.
미첼은 중요한 방향 전환은 이루었지만 프로이트를 수정하고 발전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
한다. 또한 프로이트는 당대 가부장제를 반영했을 뿐 성차를 추천한 것은 아니라는 그녀의
옹호 역시 최근에는 비난을 받는다.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구조되어 정치성을 낳는지에 관심
을 기울이는 최근 이론들은 담론이란 단순한 사회의 반영이라기보다 그 사회를 구성하는 절
치적 전략이라는 쪽으로 가고 있다. 미첼은 물꼬를 터놓았고 논쟁은 또 그 다음 사람들의
몫이었다. 프랑스의 이리가레이나 크리스테바가 찬반의 입장에서 그런 역할을 떠맡는다. 미
첼과 같은 맥락에서 일하면서도 조금 다른 재클린 로즈는 어떻게 정신분석과 마르크시즘을
결합시키는가 보자.
쾌감원칙과 현실원칙의 긴장관계
라캉의 이론을 영어권에 소개하고 미첼과 함께 긴 소개문을 쓴 로즈는 그 이후 정신분석
을 수정하면서 실제 정치적 문맥으로 끌어낸 페미니스트들 가운데 한사람이다. 정신분석의
역사를 여성성의 역사라고 보는 그녀는 라캉을 해설하면서 욕망의 실체와 성을 같은 차원에
놓는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은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남녀의 성합은 완벽한 충
족을 미루고 또 미루며 늘 우수리를 남긴다. 성욕이 사라지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에서는 충족이 문제가 아니라 우수리, 즉 타자가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남근을
지운 라캉은 남근 중심주의자가 아니라 타자를 인식하게 만든 중심주의의 해체자다. 정신분
석의 목적은 남근이 존재한다는 신비화 뒤에 숨은 허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로즈는 말한
다.
누가 더 실체처럼 그릴 수 있는가 내기를 했던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이 포도나무를
그렸는데 어찌나 진짜 같은지 새가 날아와 그 포도를 쪼아먹으려 했다. 그는 의기양양해서
상대방을 보며 묻는다. 자, 이제 커튼을 걷고 당신의 그림을 볼까요? 그러나 상대방이 그린
그림은 바로 그 커튼이었다. 라캉이 자신의 글에 인용한 이 고사는 바로 진리란 현현될 수
없는 것, 영원히 베일 뒤에 가리워진 것이라는 해석을 낳는다. 우리는 결코 일류전(illusion)
인 그 커튼을 걷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실체처럼 보일 뿐 실체 그 자체는 아니
었다.
'도라 분석'을 놓고 보여주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차이는 두 사상 간의 차이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도라가 전이를 일으켜 솔직하지 못했기에 분석이 미완이라고 말한다. 동성애라
는 해답을 은폐하고픈 무의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라캉은 도라와 프로이트 사이의 담론
주고받기에 초점을 맞춘다. 프로이트가 이제 커튼을 걷고 당신의 그림을 볼까요? 하고 물었
을 때 라캉은 바로 그 커튼이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아무
리 자신의 여성성이 가부장제였던 당대를 반영했을 뿐이라고 해봐야 진실은 담론 이전 어딘
가에 묻힌 게 아니라 그 담론 속에서 얻어진다는 라캉 이후에 오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
제 그가 기댈 곳은 타자이다. 매끄러운 현실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우수리, 언캐니(Uncanny),
되돌아오는 억압된 무의식이다. 로즈는 미첼과 달리 바로 이 타자에 초점을 맞춘다.
로즈는 1993년에 펴낸 책 '왜 싸우는가'(Why War?)에서 욕망의 문제를 현실의 정치적인
상황과 만화, 영화 등 문화영역에 적용하여 정신분석이 현실비판에 응용되는 예를 보여준다.
어린이 만화의 주인공 피터팬이 순진무구한 것은 어린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성인의 욕망으
로 보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대처 수장은 보수당 당수로서 3년 연속 당선되었다. 그녀의 연
설 속에 숨은 폭력을 들추어보자. 여성의 내부에 숨은 공격성을 들추어보면 남성은 공격적
이고 여성은 수동적이라는 이분법이 와해된다.
로즈는 페미니즘의 세 단계를 남녀가 동동함을 주장하는 단계,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며
공존을 꾀하는 단계, 그리고 성차 그 자체가 환상이고 해체해야 할 이념임을 보여주는 단계
로 나눈다. 여성의 내부에는 폭력이나 이중성이 없는가. 미국의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
(Silvia Plath)의 모순은 시 속에서는 가부장제의 모순을 드러내지만 그녀 자신은 바로 그
제도 속에 즐겁게 복종하는 데 있었다. 정치적인 항의와 동시에 그 제도와 동일시하는 심리
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까지는 성적이고 심리적인 것의 정치성을 많이 밝혔으니
이제부터는 정치적인 것의 성적이고 심리적인 것을 밝혀 보자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라캉의 욕망이론, 그리고 데리다의 해체론적 입장에서 그녀는 성차의 문제를 논의한다. 해체
론이 자주곤경에 처하는 논리의 아포리아를 로즈는 어떻게 뛰어넘는가.
라캉의 욕망은 남근이 허상이라고 말함으로써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이리가레
이는 불평했다. 엄연히 존재하는 성차를 해결할 구체적인 접근을 막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즈는 무의식의 전복하는 힘을 확장시킨 사람이 라캉이라고 보기에 현실원칙과 쾌감원칙의
긴장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현실원칙을 정체성이라고 하자. 정체성과 그 정체성에
대한 저항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있다. 매끄러운 가부장제 정체성을 뚫고 그것에 저항하는
정체성 거부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대로 돌아오지 않고 상징계의 옷을 입고 위장하여 돌
아온다. 그러므로 상징계의 질서를 비판하되 그 상징계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정체성 없
는 정치성도 없고 정체성 그 자체에 머무는 정체성도 없다." 억압된 정체성이 되돌아오는데
억압하는 정체성의 옷을 입고 온다. 로즈의 긴장은 정체성의 억압을 거부하면서 혼동과 신
경증을 피하는 수단으로서의 정체성을 수락하는 것이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긴장이요 쾌
감원칙과 현실원칙 사이의 긴장이다. 가부장제의 언어로 가부장제의 허구를 들추자. 프로이
트의 쾌감원칙과 현실원칙 사이의 긴장관계를 그대로 성이론에 대입하는 로즈의 전략은 가
부장제와 자본주의 문화의 신비를 벗기는 행위가 동시에 억압된 것이 되돌아오는 것이 되는
데 있다.
지금까지 프로이트의 타자성 혹은 무의식을 라캉이 어떻게 부활시키고 그것이 영어권에서
어떻게 마르크시즘과 연합되는지 미첼과 로즈의 경우로 살펴보았다. 이제 무의식이 어떻게
동성애로 발전되는지 에이드리언 리치의 경우를 보자.
3. 에이드리언 리치의 타자 구해내기
원래 모더니즘 계열의 시로 출발했던 리치는 차츰 개성적이고 열정에 넘치는 정치적 시로
옮아간다. 그리고 시뿐만 아니라 산문으로도 유명해진다. 그녀의 초기 시들은 고요하고 절제
된 감흥으로 부조리한 세계를 암시하는 형식시 였다. 그러나 60년대 사회상황은 그녀를 기
법에의 탐닉으로부터 정치적인 현장으로 끌어낸다. 1973년도 전미도서상을 수상한'잔해 속
으로 헤엄치기'(Diving into the Wreck)는 모더니즘에서 완전히 벗어나 여성의 정체성 탐색
이 미학과 잘 조화된 시였다. 그후 미학성이 약해진다는 비판을 감수하면서 그녀는 '일상언
어의 꿈' (The Dream of a Common Language, 1978)을 비롯한 많은 시집들을 통해 과거
와 현재 여성들의 삶을 조명한다.
개인적인 서정시로 공적인 음성을 담아내기에 "에머슨과 휘트먼의 딸"이라고 불리기도 하
는 그녀는 절제의 미덕이나 부정적 수용력보다는 여성끼리의 결속과 여성의 긍지를 평범한
언어로 다듬어낸다. 쉽고 즉흥적인 표현, 끓어 넘치는 분노, 그리고 일상언어로 사적인 영역
과 공적인 것을 하나로 연결시킨 것이 그녀의 작품세계이다. 그녀에게 예술의 영감은 여성
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부터 나온다. "휘트먼은 우리가 순진하고 위대하기를 요구하고 보들
레르는 우리의 죄와 지친 혐오를 노래하고, 리치는 우리 자신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생
각한다"라고 오스트리커(Alicia Ostriker)는 언젠가 말했다.
리치의 대표적인 시 '잔해 속으로 헤엄치기'를 잠깐 보자.
여기가 그곳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다. 여자 인어의 검은 머리칼은
뒤로 물결치고. 남자 인어는 갑옷을 입었다.
우리는 조용히
잔해의 주변을 맴돌다가
배의 밑바닥으로 헤엄쳐 들어갔지.
나는 그녀요, 나는 그 남자라네.
그의 물에 잠긴 얼굴은 눈을 뜬 채 잠들었고
그녀의 젖가슴은 아직도 압박감을 견디는데
..... (필자의 줄임)
우리는 반쯤 파괴된 도구들
한때는 물먹은 돛대와
헝클어진 나침반으로
항로에 꼭 달라붙었지.
나이면서 너인 우리는
비겁해서든 용감해서든
칼 하나, 사진기 하나, 우리 이름은 빠져 있는
신화 책 한 권을 들고서 이곳까지 함께
다시 찾아왔다.
('잔해 속으로 헤엄치기'의 일부)
나는 사진기, 칼, 그리고 신화 책을 들고 바다 밑으로 내려간다. 그 신화 책 속에 우리들
의 이름은 빠져 있다. 탐색의 끝에서 나는 발견한다. 부서진 잔해 속에 들어 있는 정수는 나
의 내부에 있는 정수로서 남녀가 공존하는 양성성이었다. 갑옷으로 무장한 남성과 머리칼을
나부끼는 여성, 물먹은 돛대와 헝클어진 나침반은 하나로 묶여 있었다. 나는 발견을 통해 새
롭게 태어난다. 나라는 사적인 개인은 신화 책에 오르지 않은 여성이다. 잔해는 역사에 의해
왜곡되고 부서진 여성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탐색을 통해 얻은 새로운 비전은 "나는 그녀요,
나는 그 남자"라는 양성성이다.
바다 속 깊이 가라앉은 파손된 배의 잔해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행위와 잊혀지고 파손
된 자아 속으로의 탐색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헤엄치는 행위와 자아탐색이 일치하면서
남녀가 한 몸인 인어를 통해 자아의 양성성을 발견하는 이 시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의 탐
험과 흡사하다. 물밑에 잡긴 폐선은 의식의 밑에 억압된 문의식이고 그 속에서 다시 찾은
것은 유아기 성, 혹은 양성성이었다. 인어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반인반수로 암수한몸을 상
징하는 데 적절하고, 돛대와 나침반도 양성을 비유하는 데 적절하다.
양성성은 무엇인가. 프로이트가 도라 분석의 맨 마지막에 얻은 비전이 아닌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겉구조를 헤치고 그 밑으로 헤엄쳐 들어간 곳에 암수한몸인 동성애가 있었다.
현실에 의해 거세되었기에 나 의 이름은 신화 책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억압된
현장을 탐색 해 긴 머리칼에 갑옷을 입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리치의 또 다른 시 '위력'(Power, 1974)을 보자 프로이트의 잠재된 무의식으로 인해 생기
는 사랑과 증오의 양가적 감정을 "위력이 주는 상처" 에서 느낄 수 있다. '나' 는 퀴리 부인
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녀의 발견과 그것에 따른 고통을 본다. 방사선의 발견은 위대했지만
그에 따른 피부병과 눈병은 죽는 날까지 고통의 원인이 된다. 이 시에 나타난 창조에 따른
온갖 고통은 여성의 역사요 여성의 위력과 고통을 암시한다. 출산과 육아 등 여성만이 지닌
위대한 힘 속에 숨은 고통을 찬양하여 지금까지 여성은 별로 중요한 일을 하지 못했다는 통
념을 깬다. 성스러운 창조 속 에 숨은 폭력이라는 양가성에서 프로이트의 타자를 읽을 수
있고 출산과 육아를 역사적인 일로 승화시켜 프로이트의 여성성에 반론이 된다.
의미가 쉽게 전달되는 일상의 언어는 리치에게 중요하다. 그녀에게 일상 언어는 지금까
지 무시되어 왔지만 가장 소중한 여성들의 언어이다. 남성들의 역사 창조에 비해 여성의 출
산과 육아는 흔하고 평범한 것으로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리치는 평범함이 참 진리인
것처럼 여성이 스스로의 역할에 긍지를 느끼고 여성끼리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일상언어의
꿈'에서). 이름을 잃고 살아온 여성들은 신화의 창조자였으면서도 신화 속에서 지워진 삶을
살았다. 모성신화의 신비화를 의심해보자. 모녀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리치는 산문을
통해 모성의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어왔는지 역사적인 자료들을 더듬어 밝힌다.
'여성으로 태어나기' (Of Woman Born: Motherhood as Experience and Institution,1976)
는 여성이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고 출산과 모성의 힘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돕기 위해 쓰여
진 책이다. 리치는 구체적인 역사적 예들을 들추어 남성 중심주의 사회가 여성의 역할과 지
위를 어떻게 훼손시켜 왔는지 논한다. 가부장제에서 모성은 희생과 같은 단어가 된다.
남성들은 법과 제도를 소유하고 피임, 낙태를 조정했으며 출산학을 통 해 여성들의 심리를
통제하고 훈련시켰다. 여성은 생리라는 배출과 출혈의 더러운 몸을 지녔고 그러면서도 모성
은 성스럽고 은혜로운 것이 라는 모순된 심리이다. 리치는 이런 이념이 여성의 출산능력을
질투한 남성들과 자본주의 제도에서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목적에 의해 여성을 성스럽게 하
여 희생을 당연시한 데 기인한다고 말한다. 남성 사회가 어떻게 제도화된 이성간의 사랑만
을 인정했는가에 관해 리치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제도화된 이성애는 수세기 동안 여성들에게 말해왔다. 우리는 위험하고 음란하고, 짐승 같
은 정욕의 화신이라고. 그리고 나서는 또 우리는 "열정이 없고" 무감각하고 성적으로 수동
적... 등등이란다. 제도화된 모성은 여성들이 지성보다 모성적"본능"을 갖추기를 요구한다... "
여성은 가정의 구현이고 그 가정은 모든 제도의 기본이고 사회의 버팀목이라"면서
리치의 모성제도는 프로이트의 사회적 성과 비슷하다. 프로이트는 문명이 사회적인 성을
억압해온 과정을 이렇게 밝힌다. 유아기의 리비도는 적극성으로 동성애와 이성애가 모두 포
함된다. 그후 동성애를 이탈로 보고 제도적으로 금기시하고 남녀간의 이성애
(heterosexuality)만 인정한다. 그후 다시 일부일처제만을 고착시킨다. 물론 프로이트의 "문
명화된 성"은 에로스와 문명의 불행한 밀월관계 속에서 인간의 불행과 그에 따른 신경증의
원인을 밝히는 게 목적이고, 리치의 제도화된 성은남성이 어떻게 모성신화로 여성의 힘을
약화시켜 왔는가 밝히려는 게 목적이다. 그러나 두 이론은 모두 사회가 인간의 본성을 억압
해온 점에서 공통된다. 프로이트에게는 문명의 정체를 벗기려는 의도였고 리치에게는 여성
의 입장에서 지워진 부분을 복원하려는 의도였다.
리치는 가정이 아버지의 성과 재산을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들이 중시되고 딸이 경시되었으며 어머니란 희생이 당연한 성스러운 이미지로 이를 뒷받
침해왔다. 남성은 지식의 추구자요 소유자였고 여성은 자연과 같은 차원인 탐색의 허상이었
다.
리치는 프로이트의 쾌감원칙을 이기적인 닫힌 에고로 해석하여 여성의 육체는 그것에 저
항하는 양성성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리치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남성 중심주의자들
이었다고 반박한다. 프로이트는 마조히즘과 사디즘이 같은 욕망의 다른 표현임을 지적하여
('본능과 그것의 변모'(Instincts and their Vicissitudes) 피해자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불리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미첼이 밝힌 것처럼 쾌감원칙이 현실원칙을 전복하
는 저항으로 쓰일 수도 있음을 리치는 간과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양가성은 주체의 형
성에서 쾌감원칙이 원초적 나르시시즘으로 자리잡고 있기에 타자에 대한 감정이 증오와 애
정의 양가성을 떤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지 그것이 마조히즘이나 사디즘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리 순수한 타자인식이 아니
라 상당히 이기적인 것이므로 남을 사랑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리치가 보는 어머니는 어떠한가. 고대 아르카디아 모계중심제 역사를 보면 여성의 힘은
남에게 행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지닌 천부적인 능력이었다. 그녀는 인간을 낳고 치유
하는 힘이다. 여사제 주술사, 약제사는 여성에 속한 능력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권력이 아닌
가.
가부장제 이전의 시기에 여성은 자연 속에 내재한 힘의 근원이었다. 어머니는 대지요 하
늘이요 어둠이요 빛이었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그녀를 흙, 어둠, 무의식, 잠으로 축소시킨다.
리치의 기원으로 거슬러 오르기, 혹은 물밑으로의 탐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혹은 오이디푸
스 전 단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리치에게 전 단계는 양성적인 여성이었고 프로이트에게는
성의 구분이 없는 양성성이다. 리치에게 전 단계는 단절되지만 프로이트에게 그것은 위장하
여 돌아옴으로써 현실을 교란하는 힘이다.
여성의 힘을 두려워한 남성들은 모성을 길들인다. 페르시아의 천지창조 신화에서는 모성
을 두려워하여 어머니를 죽인다. 엥겔스의 논리가 뒷받침하듯 부권과 사유재산 제도를 내세
워 모계사회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중세의 마녀사냥, 여아 집단 학살, 자학적인 포르노
등 모성 길들이기는 가부장제 신화 그 자체였다. 이런 리치의 지적은 남성이 문화의 발전에
끼친 공로가 큰 것은 그들이 여성의 창조적 모성신화에 맞서고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프로이트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후기 심리학에서 프로이트는 문명이 억압한 모성이
남성의 부러움(envy)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한다.
가부장제 과학기술은 어떻게 출산 능력을 남성의 소유물로 만들었는가. 남성들은 기술과
도구로 여성 조산원들의 손길을 막아버린다. 똑똑 한 여성들은 마녀로 몰린다. 능력 있는 여
성들을 두려워하여 사회에서 몰아낸 는 남성 중심주의, 진통을 여성들에게 내려진 벌로 믿
게 만드는 이념들 희생을 요구하는 모성과 개인의 재능사이에서 고통받던 여성 들... 이런
잘못된 모성신화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자신의 분노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여성의 출산은 성스럽고 그 고통은 승화의 기쁨을 낳는 원천이다. 그것은 벌이 아니라 계몽
과 발전을 위한 경험이요 나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힘이다. 우리는 어머니가 되기 이전에 살
아 있는 정신을 소유한 여성이다. 스스로 행동하고 살아가며 독립된 자아를 위해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본다.
여성의 남아선호 사상이 프로이트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히는 부분을 보면 리치는 미첼이
그를 재해석하기 이전의 보수적 프로이트만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리치는 말한다. 프로이트
는 많은 개혁과 공헌을 했지만 초자아를 강조하고 남근선망으로 여성이 남아를 선호하게 만
들었다. 모녀관계를 소외시키고 부자관계를 중심에 놓은 그에게는 개혁의 의지와 시적 과학
적 진실이 없었다는 것이다. 리치는 무엇보다 프로이트가 거세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콤플
렉스로 딸이 어머니를 멀리하게 만든 것에 화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것처럼 프
로이트의 무의식이 지닌 혁신성과 현실원칙을 강조한 초자아는 그 자신도 어쩌지 못한 모순
이었기에 어느 쪽을 더 보느냐에 의한 비판과 오해가 필연적이다. 리치는 물론 프로이트의
보수성만을 보고 있는데 사실 그녀의 '가부장제 이전'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단계 이전
'과 흡사하다.
모녀관계의 회복과 여성끼리의 도움과 사랑, 그리고 여성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는
것은 리치의 글이 지닌 핵심이다. 어머니는 딸의 내 면에 강한 자기애를 심어주고 여성인
것에 긍지를 느끼게 기른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분노를 창조적으로 사용하
는 삶을 딸에 게 물려준다. 위대한 여성작가, 여성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여성은 영양실조에
걸렸을 것이다. 수세기 동안 여성을 강하게 길러준 것은 이런 양어머니들이었다. 1979년에
펴낸 산문집 속의 글 '제인 에어. 어머니 없는 여인의 유혹들'에서 리치는 '제인 에어'를 양
어머니들의 관계로 읽어낸다.
'제인 에어'에서 무엇보다 우리는 정형화된 여성들끼리의 적대관계에 대한 대안을 발견한
다. 여성들은 그저 삼각형의 꼭지점 정도가 아니고 남성들을 일 대치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
로 진실하고 서로 힘이 되어주는 관계를 보여준다.
살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여성이론가들이 선호하는 작품인데 이론가들마다 자기 입장
에서 달리 읽어 흥미롭다. 길버트(Sandra Gilbert)와 구바(Susan Gubar)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1979)에서 로체스터의 전 부인 버어사를 제인의 억압된 분노로 읽는다. 버어사는 여주
인공이 19세기가부장제 사회에 자신을 적응시켜 나가기 위해 억압해야만 하는 분노로 어느
순간 폭발하면서 제인이 독립적으로 자기 길을 찾게 만든다. 그녀는 제인이 긴 시련을 통해
로체스터와 동등한 결혼 생활에 이르게 만드는 동인이다.
한편 스피박은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1985)에서 버어사를 19세기 영국제국
주의 이념에 의해 억압된 유색인종으로 읽는다. 그녀는 제 음성을 갖지 못한다. 제인이 영국
제국주의의 가부장제를 뒷받침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기 위하여 희생시키고 억압해야
하는 제3세계인이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그녀에게는 분노의 고함뿐 언어가 주어지지 않는
다. 그러면 리치의 인기는 이들과 어떻게 다른가.
버어사는 거울 속에 비친 제인의 또 다른 자아로서 19세기 가부장제에서 제인이 미친 여
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준다. 제인은 고아였다. 그녀가 당당하게 혼자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양어머니들은 누구인가. 어릴 적에는 숙모, 기숙학교에서는 어머니처럼 보살펴주는 템플 선
생과 언니처럼 도와주는 헬렌이 있다. 버어사는 제인이 더 큰 자기 발전을 이루는 데 힘이
되는 자아 속의 또다른 자아, 즉 프로이트의 자아 이상(ego-ideal)을 돕는 자아이다. 버어사
는 힘이 세고 거친 여자이다.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왜곡된 제인의 자아상이고 그녀의 광
기는 제인이 한 남자에게 종속된 아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만드
는 계기가 된 다. '제인 에어'는 어머니 없는 세상의 딸이 어떻게 어머니 역할을 하는 여성
들을 만나 도움을 얻고 자아를 긍정해 가는가 보여주는 소설이다.
버어사를 제인의 억압된 자아로 본 리치의 읽기는 프로이트의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연
상시킨다. 본능적인 자아와 사회가 요구하는 자아의 관계는 버어사와 제인의 관계와 흡사하
다. 거친 본능은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기 전의 고함이고 그것은 억압되어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시 나타나 사회적 자아가 현실의 잘못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준다. 리치는 여
성의 정직성을 주장하는 글에서 '무의식은 진실을 원한다'고 말한다. 여성은 남성 중심사회
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감추고 침묵을 지켜왔다. 그녀
는 속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면서도 겉으로는 "예"라고 말함으로써 보답을 받아왔다. 남성에
게 정절을 지키는 한 여성의 진실은 중요치 않아 옛날에는 정숙을 가장하고 오늘날에는 오
르가즘을 가장한다. 힘없는 자가 살아남는 길은 거짓말을 하는 길이었다.
이처럼 설득력 있는 어조로 여성끼리의 도움과 자각을 주장하는 리치의 여성주의 문학에
는 단순히 급진적인 레스비어니즘으로 돌려버릴 수만은 없는 미덕이 있다. 그러나 그녀의
모성의 신화 벗기기 작업은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또 하나의 우월주의를 낳을 수도 있다.
남녀를 차별화 하여서 우월주의를 심을 수도 있다는 게 리치를 비판하는 해체론적 페미니즘
의 입장이다. 그리고 그녀의 여성주의를 페미니즘의 두 번째 발전단계에 놓는 이유이다.
첫 단계는 남성과 동등한 지위와 직업을 얻기 위해 여성들이 투쟁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가부장제 속에서 남성과 똑같은 지위를 얻기 위한 것이었기에 사회개혁에 한계를
지닌다. 두 번째 단계는 여성이남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강조한다. 양성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시간이 흐르면 남성보다 여성이 우월하다는 또 하나의 우월주의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이론이 현실과 유리되어 존재할 경우 현실개혁에 별 도움이 안 될 것이기 때
문이다. 세 번째 단계는 여성과 남성 모두가 주체 속의 타자를 인정하는 해체론적 입장이다.
이 경우는 앞선 이론가들로부터 정치성이 약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크리스테바는 그녀의 글, '여성의 시간'에서 위와 같은 세 단계의 여성운동들을 설명하고
그들이 공존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남성의 시간'이 시작과 끝이 있는 닫힌 체계라면 '여성
의 시간'은 다양한 이론들이 공존하는 열린 체계이다. 이런 구별은 얼핏 양성성으로 여성의
우월성을 암시한 리치와 무엇이 다르냐는 반문을 낳게 한다. 그러나 크리스테바에게 여성의
시간에서 "여성"은 실존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낱말이 아니다. 모성이 상징하는 '코라'가 반
드시 여성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같다.
크리스테바는 리치를 제2세대 페미니즘으로 보고 급진적 레스비언의 반사회성을 우려의
시선으로 본다. 모성의 힘이 지나치게 신성화될 경우 상징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폭력적 형
태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염려이다. 그보다는 이 세 단계가 공존하거나 심지어는 서로 뒤
얽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제하지 말자 이것이 바로 그녀가 제시하는 '여성의 시간' 이
다. 단음조가 아니라 다성적인 것, 경계 위에 있는 유동적인 것, 상호 텍스트적인 것이다. 그
러므로 여성의 시간은 리얼리즘이 아니라 조이스의 모더니즘이나 그 외 다른 실험 작품들도
해당된다.
크리스테바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만일 여성운동이 시간 순서로 일어난다면 여전히 위와
같은 순서로 일어나야 할 것이고 그것들이 공존하면서 지속되어야 할 것 같다. 성차별은 너
무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기에 어머니가 딸을 차별하지 않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차별하
지 않고 여성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여성끼리 도울 수 있는 자각이야말로 페미니즘이
빠뜨려서는 안 되는 우선적 덕목이며 여기에 리치의 여성문학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프로이트의 타자성, 혹은 무의식과 연결 지어 미첼, 로즈, 리치의 여성이론과 여
성문학을 살펴보았다. 프로이트의 보수적 측면만을 본 리치의 주장도 자세히 보면 프로이트
의 혁신적 측면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에로스와 문명, 양성성과 단음조, 그리
고 무의식과 의식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이처럼 여성이론에서도
많은 논쟁을 낳으며 지속되어 왔다. 그리고 남녀가 평등하다고 느낄 때까지 앞으로도 논쟁
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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