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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나르시시즘의 여성

by FraisGout 2020. 7. 27.

  나르시시즘은 흔히 모든 여성의 근본적인 태도인 것처럼 말해 왔다.(헬렌 도이치의 <여
성심리> 참조) 그러나 개념을 함부로 확대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깨어버리는 것이다. 마
치 라 로슈푸크(17세기 프랑스의 사상가로 인간행위의 동기를 에고이즘으로 보았다)가 에
고이즘의 개념을 깨어버린 것처럼 자신을 절대적인 목표로 설정하여, 주체가 그 속에 도
피해 버린 것이다. 여성에게서는 이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태도 -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
이든 - 를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는 이미 고찰했다. 실제로 여성은 환경적으
로 자기를 돌아봐야 하고, 자기에게 사랑을 바치는 경우가 남성보다 많다.
  모든 사랑은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을 요구한다. 여성을 결국 하나로 합쳐지는 두 길을 
지나 나르시시즘으로 인도된다. 주체로서 그녀는 불만을 경험한다. 어린시적, 그녀에게는 
남자아이의 페니스에 해당되는 제2의 자아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 후에도 그녀의 공격적
인 성욕은 충족되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남성적인 활동이 그녀에게 금지되
어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내, 어
머니, 부부의 역할에서도 그 개별성을 인정 받지 못한다.
  남성의 진리는 그가 짓는 집이나 그가 개척하는 삼림이나 그가 치료하는 환자 속에 있

다. 여성은 계획이나 목적을 통하여 자기를 완수할 수 없으므로, 자기 인격의 내재성 속
에서 자기를 파악하려고 한다. 시예스(프랑스의 정치가, 대혁명 당시에 제헌의원, 제3계
급에 관한 논문이 있음. 1748-1836)의 말을 들어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모든 것이 되려고 한다."
(시예스의 말이란 '제3계급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정치적인 질서에서 그것은 현재
까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무엇인가 되기를 
바란다.'이다) 많은 여성들이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국한시켜 그것을 전체와 혼동할 만
큼 과정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나의 여주인공이다."라고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말
하기도 한다. 남성은 행동해야 하므로, 자기와 대립된다. 여성은 힘없이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위치를 정할 수 없고, 자기의 척도를 측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어떤 중요
한 목적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여성이 자기의 욕구에 자기 자신을 추천할 수 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녀
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스스로를 객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교육은 그녀에게 자기를 완전
히 소외할 것을 권장하고 사춘기는 그녀의 육체를 수동적인 욕구의 대상으로 가르쳤다. 
그것은 그녀가 비단이나 비로드에 감격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애인 같은 시
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이 자위의 쾌락을 즐기면서 남성적인 주체와 여성적
인 객체로 나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달비에스가 이렌의 증상을 연구했는데, 이렌
은 이렇게까지 말했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싶다. 더나아가 나는 나를 소유하고 싶다. 
심한 경우에는, 나는 나를 수태시키고 싶다."
  마리 바슈키르체프가 아래와 같은 글을 쓸 때, 그녀 역시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기도 하
다. "아무도 나의 팔과 나의 가슴을 보아주지 않는 것은 따분한 노릇이야. 이렇게 활기차
고 젊음으로 넘쳐 있는데."
  시실, 자기 자신에 대해 적극적으로 타자가 되고, 의식의 빛을 받아 자기를 객체로 파
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분신이란 몽상에 불과하다. 어린이의 경우에 이 꿈을 구체
화하는 것은 인형이다. 여자아이는 인형을 통해 자기 자신의 육체 속에서보다 더욱 구체
적으로 자기를 인식한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와 자기 
사이에서 정다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 둘이 될 필요가 있다. 노아유 부인은 <나의 생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인형을 사랑했다. 생명이 없는 인형에게 내 생명을 나눠 주었다. 인형이 담요나 
새털이불로 푹 싸여 있지 않으면, 나는 따뜻한 이불 밑에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
는 분신의 순수한 고독을 맛보고 싶었다... 언제까지나 순수하게. 나 자신이 되고 싶은 
이 소망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맹렬히 느끼고 있었다... 아, 나의 달콤한 공상. 슬픔으로 
가득찬 심정일 때는 언제나 나의 곁에 또 하나의 나인 안나가 있었다. 나는 그 인형이 내 
목을 양팔로 감싸며 위로하고 나를 이해해 준다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일생을 
통하여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만나,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는 내가 원하는 위로보다는 
용기를 주며 나를 도와주었다.
  사춘기로 접어든 그녀는 이제 인형과 함께 자는 것을 그만둔다. 그런데 여성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에게서 불리되었다가 다시 합체하려고 노력할때, 거울의 마법에서 큰 도움을 

받는다. 오토 랑크는 신화나 꿈 속에 나타난 거울과 분신의 관계를 규명했다. 거울에 비
친 반영이 자아와 동일화되는 것은, 특히 여성의 경우이다. 남성미는 초월성의 표시이며, 
여성미는 내재에 따르는 수동성을 갖는다. 여성미만이 시선을 멈추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거울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자기를 능동성, 주체성의 소유자라고 느끼고, 또 그렇게 되
기를 원하는 남성은 자기의 영상 따위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영사은 그에게 큰 
매력을 주지 못한다. 남성의 육체는 그에게 욕망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여성은 자기가 객체임을 알고, 또 자진하여 그렇게 되므로 거울 속에서 진정한 자
기를 보는 느낌을 갖게 된다. 수동적으로 비쳐지는 거울의 반영은, 그녀 자신처럼 하나의 
물체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성의 육체, 즉 자기의 육체를 갈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울에 보이는 생명이 없는 기질에 찬미와 욕망으로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이런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는 노아유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언제나 내 속에 있는 큰 지적 재능보다 거울에 비친 모습에서 허영심을 느끼곤 했
다... 육체적인 쾌락만이 영혼을 완전하게 만족시켜 준다.
  '육체적인 쾌락'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막연하고 애매하다. 영혼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지성은 아직 증명되어 있지 않지만 보여진 얼굴은 현재 거기에 분명히 비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거울의 틀 속에 미래 전체가 집약되어 있다. 이 좁
은 한계 밖에서는 사물은 무질서한 혼돈일 뿐이다. 세계는 '유일자'라는 영상이 빛났던 
이 한 족각의 유리에 환원된다. 그 영상 속에 빠지는 여성은 모두 공간과 시간에 절대자
로서 군림한다. 그녀는 남성이나 재산, 명예, 애욕 등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갖는다.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나머지, 그것을 불멸의 대리석에 새기고 
싶어했다. 자기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나는 옷을 벗고 알몸이 되어,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나의 육체미에 놀
란다. 나의 조상을 만들어야겠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결혼을 하지 않고
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조상은 꼭 만들어야 한다. 나는 차츰 보기 
흉해지고 망가지게 될 것이다... 남편을 얻어야 한다. 나의 조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세실 소렐(19세기의 유명한 여배우)은 데이트를 준비하는 자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거울 앞에 있다. 나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싶다. 나는 나의 긴 머리칼과 싸우고 있
다. 나의 빗 밑에서 불꽃이 튄다. 황금빛 햇살처럼 빛나는 머리칼 한가운데서 나의 얼굴
은 마치 태양과 같다.
  나는 어느날 아침에 카페의 화장실에서 만난 한 젊은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는 장미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술에 조금 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치 자기의 영상을 삼켜버
리려는 듯이 입술을 거울에 가까이 대고,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어머, 예뻐라. 
나는 정말 아름다워!"
  무당과 우상을 한 몸에 겸한 나르시스트는, 영광의 후광에 싸여 영원 속을 날아간다. 
구름의 저쪽에서 무릎을 끓은 인간들이 그녀를 숭배한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는 '신'이다. "나는 나를 사랑해요. 나는 나의 신이에요."하고 메제로프스키 부인은 말
했다. 신이 되는 것, 그것은 즉자와 대자와의 불가능한 통합을 실현하는 것이다. 어떤 사

람이 이 통합에 성공했다고 상상하는 순가, 그는 희열과 찬양과 충만이 넘칠 것이다.
  루셀(프랑스의 작가,1877~1933)은 어느날 다락방에서 자기의 머리 위로 영광의 후광이 
에워싸는 것을 느끼고 한평생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 자신의 모습을 한 - 그녀의 
생각으로는 자기 자신의 의식에 의해 생명이 주어지 - 미,용망,사랑,행복의 모습을 거울
에서 본 그녀는 일생을 통하여 이 놀라운 계시의 약속을 추구하려고 한다. "너야말로 내
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야."하고 어느날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다른 날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나를 무척 사랑하고 있다. 나
는 너무 기뻐서 저녁식사를 하는 내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절세의 미인이 아닌 경우
에도, 여성은 자기 영혼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가 
도취하기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발레리라는 여성의 모습에다 자기를 투영한 소설에
서 크리드네르 부인은 자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내가 아직 어떤 여자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면이 있다. 아무리 우
아한 여자나 아름다운 여자라 해도 그녀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그녀는 미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정신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 그녀를 본 사람은 그녀가 
너무나 섬세하고 날씬하여 마치 삼색오랑캐꽃과 같다고 한다...
  뛰어나게 아름답지 못한 여성들도 때로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황홀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은 잘못이다. 그녀들은 육체로서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
실만으로도 감동한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그녀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는 젊은 여성의 
순수한 풍요로움만으로도 충분하다. 여성들은 자기를 개별적인 주체라고 생각하여 종으로
서의 여성의 특질에 개성적인 매력을 부여한다. 얼굴이나 육체 속에 그녀들은 우아하고 
진귀하며 자극적인 어떤 특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기를 여성이라고 느끼는 것만으로
도 그녀는 아름답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거울은 가장 좋은 도구이기는 하지만, 분신의 유일한 기구는 아니다. 마음속으
로 자기와 대화하면서, 누구나 자기의 쌍둥이 형제를 만들려고 시도할 수 있다. 하루의 
대부분을 혼자서 보내며 가사에 권태를 느끼고 있는 여성은, 자기의 모습을 원하는 대로 
상상할 수 있는 여가를 갖고 있다. 그녀는 처녀시절에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무한한 현
재 속에 갇혀 있는 지금, 그녀는 자기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 속에 하나
의 미적 질서를 끌어들여 자기의 우연적인 생활을 하나의 숙명으로 바꿔버린다.
  여성이 유년기의 추억에 몹시 집착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여류문학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남성이 쓰는 자서전에선 유년기가 그리 큰 위리를 차지하지 못한
다. 여성은 이와 반대로 유년기의 이야기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유년기는 그녀들의 소
설이나 이야기에서 유전적인 재료가 된다. 친구나 애인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여성은 
대개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나는 어렸을 때..." 그녀들은 이 시기에 향수를 느끼
고 있다. 그 무렵엔 그녀들의 머리 위에 얹어진 자애와 권위에 가득찬 아버지의 손을 의
식 할 수 있었으며, 또한 독립의 기쁨도 만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보호와 지
지 속에 그녀들은 자주적인 개인으로서의 밝은 앞날이 열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결혼
이나 연애에 의해 불충분한 보호를 받으며 현재 속에 갇힌 하녀나 객체가 되어 있다. 어
린시절, 그녀들은 세계에 군림하여 나날이 그것을 정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들은 우주에서 분리되어 내재와 반복에 몸을 바치고 있다. 그녀들은 
권력의 상실을 의식한다. 그러나 그녀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일반성 속에 흡수되어버
리는 것, 즉 아내나 어머니나 주부 등 수많은 평범한 여성 중의 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어린시절, 각자 독자적인 방법으로 살아온 그녀는 자기의 인생수업과 친구들의 
그것 사이에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친구로부터 그녀
는 개별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는 다른 누구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독특한 인
간이며, 독자적인 기회가 약속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린 여동생의 모습을 감동
적인 마음으로 되돌아 본다. 자신은 그 무렵의 자유와 자의와 주권을 포기했다. 또 어느 
정도는 배반한 것이다. 여성이 된 그녀는 어린시절의 자신을 그리워한다. 그녀는 자기 안
에서 죽어버린 그 아이를 다시 찾아보려고 한다. '소녀'라는 말은 그녀를 감동시킨다. 이
런 말은 잃어버린 독창성을 새삼 부활시켜주기 때문이다.
  여성은 이 귀중한 유년기를 멀리서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
을 자기 내부에 재생시키려고 한다. 자신의 취미, 사상, 감정이 대단한 신선함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한다. 그녀는 난처한 모습으로 허공을 쳐다보거나, 목걸이를 만
지작거리고, 반지를 돌리면서 중얼거린다. "이상하다. 나는 언제나 이 모양이야... 정말 
이상해. 나는 물을 보면 흘려버려... 아! 나는 시골이 무척 좋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괴물처럼 보이고, 각자의 의견은 세계에의 도전처럼 생각된다. 도로시 파커 (현대 미국의 
여류작가)는 이처럼 보편화된 특징을 생상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웰튼 부인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녀는 자기를 활짝 핀 꽃으로 애워싸여 있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는 여자처럼 생각
하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 자기가 이처럼 꽃을 사랑하고 있
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그 가냘픈 고백에는 변명에 가까운 어투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듣는 사람에게 그녀의 취미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 같았다. 그녀
의 이야기 상대가 깜짝 놀라, "설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하고 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때로는 사소한 편애에 대해 고백하기도 했다. 마치 
자기 마음을 열어 보이는 것은 섬세한 신경이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언제나 다소 어리둥
절한 모습으로, 자기가 얼마나 색체나 시골, 놀이, 신나는 곳, 아름다운 천, 멋지게 만든 
옷, 그리고 태양 등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자주 고백한 
것은, 꽃에 대한 애정이었다. 이 취미는 다른 어느 취미보다도 보통사람들과 구별되는 것
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여성은 이와 같은 분석을 자진하여 행동으로 확증하려고 한다. 그녀는 색체를 고를 때
도, "초록색, 이것은 내 색깔이에요." 하고 말한다. 그녀는 좋아하는 꽃이나 향수, 음악
가, 미신, 버릇 등을 소중히 여긴다. 그녀가 자기의 개성을 화장이나 마음으로 표현하기 
위해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그녀가 부각시키는 인물은 그녀의 지성, 집착, 소외의 깊이
에 적응하는 일관성과 독창성을 갖고 있다. 어떤 여성은 닥치는 대로 몇몇 특징을 혼합한
다. 그리고 다른 여성은 계통적으로 어떤 형태를 만들어,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
미 말한 것처럼, 여성은 유희와 현실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인
생이 비통하거나 진기한 소설로 구성된다. 때로는 이미 씌어진 소설이 활용되기도 한다. 

나는 몇몇 처녀들로부터 <먼지>의 주디에게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못생긴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골짜기의 백합>을 읽으세요. 
그 소설은 내 이야기를 쓴 거예요."하고 말하곤 했다. 어렸을 때 나는 이시든 백합을 경
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여성들은 더욱 막연하게 중얼거린다. "내 일생은 진짜 
소설 같아요." 그녀들의 이마 위에는 행운이나 불운의 별이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런 일
은 나한테만 일어나요." 하고 그녀들은 말한다. 그녀들에게 액운이 따르든 행운이 미소를 
지어보이든, 그녀들은 저마다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
  세실 소렐은 그의 <추억>을 통하여 변함없이 순진한 필치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사
교계에 데뷔했다. 내가 처음에 사귄 친구는 천재와 미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그리
고 나르시시즘의 특이한 기념비가 된 <나의 생애의 책>에서 노아유 부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느날 여자 가정교사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대신 숙명이 찾아왔다. 숙명은 강하면
서도 약한 여성을 전에 우대해 준 것 만큼이나 학대했다. 숙명은 그녀를 파도 사이에서 
희롱하고, 그녀는 마치 꽃다발을 얻기 위해 목청을 돋우어 노래부르는 오펠리아처럼 보였
다. 숙명은 그녀 쪽에서 최후를 정식해 달라고 원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스인은 죽음
을 이용하지 않았는가.
  나르시시즘을 소재로 한 문학의 예로서 다음의 1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나는 전에는 자그마하고 동그스름한 손발과 혈색이 좋은 뺨을 가진 튼튼한 소녀였으나, 
지금은 약하고 병에 잘 걸리는 체질로 바뀌어 감성적인 처녀가 되었다. 모세가 바위에서 
물이 샘솟게 한 것처럼 어쩌면 신비로운 생명의 샘이 쏟아져나올것도 같았지만, 나는 떳
떳하게 자기의 용기를 자랑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체력이나 행운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잇다. 사람들이 자기는 푸른 눈을 갖고 있다거나 작지만 튼튼한 손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이 쓰고 잇다.
  나는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영혼과 조화의 힘에 의해 나는 내 목소
리에 맞춰서 살아왔다는 것을.
  여성은 미모와 인기와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경우, 자진하여 희생적인 인간이 되는 
쪽을 택한다. 그녀는 '슬픈 어머니'나 인정받지 못하는 억울한 아내가 되려고 고집을 부
린다. 자기 눈에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슈터켈이 말한 우
울증에 걸린 여인의 경우가 그러하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H. W. 부인은 창백한 얼굴에 검은 옷을 입고 하소연하기 위
해 나를 찾아온다. 그녀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슬프기 짝이 없다. 실패한 일생, 엉망이 된 
가정생활! 그녀가 처음으로 찾아왔을 때,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하마터면 그녀와 함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후 2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그녀는 역시 실패한 인생을 한탄
하면서 희망의 폐허 속에서 살고 있다. 그녀의 얼굴에 초로의 조짐이 나타나자 그것은 또 
다른 푸념의 씨앗이 되었다. "나는 왜 이렇게 변해 버렸을까요? 그렇게 예쁘다는 칭찬을 
듣던 내가!" 그녀의 탄식은 더욱 늘어갔고, 그녀의 절망은 더욱 높아갔다. 그녀의 불행한 
신세가 친구들에게 모두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늘 푸념을 늘어놓아 듣는 사람들은 

우울하게 했다... 이것은, 자기는 불행하고 고독하며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또 하나
의 표시이다. 이 고뇌의 미로에는 출구가 없다... 이 여성은 이 비극적인 역할에서 쾌락
을 찾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라는 생각에 도
취되어 있었다. 그녀로 하여금 활동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려고 한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
아갔다.
  가엾은 웰튼 부인, 교만한 안나 드 노아유 부인, 슈테켈의 불행한 환자를 비롯하여 특
이한 숙명의 낙인이 찍힌 수많은 여성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자기가 남에게 인정받지 못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녀들의 주위는 그녀들의 특이성을 전혀, 혹은 충분히 인정
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이와같은 타인의 무지와 무관심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자기들이 
마음속에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많은 여성들이 자기들에게 
대단한 중요성을 갖고 있는 유년기와 청년기의 여러 가지 삽화를 몰래 간직하고 있다. 그
녀들은 드러난 자기의 과거가 진실한 경력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르시스트가 소중히 여기는 여주인공은 생활 속에서 현실화하는 것이 불가능하
기 때문에 환상에 불과하다. 이 둘의 합일은 구체적인 세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
은 일종의 숨은 원소이며, 고대인이 생각한 연소와 마찬가지로 애매한 일종의 '힘'이나 '
효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성은 그 실재를 믿고 있지만, 그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하면 무형의 죄를 고백하려고 안달하는 신경쇠약 환자와 마찬가지로 당혹감을 느끼게 된
다. 어느 경우에도 '비밀'은,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알아 차리는 열쇠를 자기 안에 갖고 
있다는 허망한 신념에 불과하다. 신경쇠약 환자에게 이런 환상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들
의 의지결핍과 무기력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불가해한 비밀을 지니고 있는 것처
럼 생각하는 것은, 일상적인 행동 속에 자기를 표명할 수 없는 데서 비롯된다. 여성의 신
비라는 유명한 전설이 그녀를 더욱 그런 방향으로 부추기기 때문에 확고 부동한 것이 된
다.
  자기 몸에 묻어둔 보물을 가득 갖고 있는 여성은, 행운의 별을 젊어지든 불운의 별을 
짊어지든 운명에 지배된 비극의 주인공의 조건이 자기에게 갖춰진 것처럼 생각된다. 그녀
의 생활 전체가 하나의 신비극처럼 보인다. 엄숙하게 고른 의복 밑에는 제복 차림의 여사
제와 충실한 손으로 장식되어 숭배하도록 제공된 우상이 양립되어 있다. 그녀가 살고 있
는 집은 전당이 되고, 그곳에서는 그녀의 예배가 전개된다.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옷에 주
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자기 방을 정돈하는 데 신경을 쓴다.
  책상 옆에는 낡은 긴 의자가 놓여 있어 다른 사람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 긴 의자를 약
간 밀기만 해도 나는 그와 마주앉을 수 있다... 서가를 등지고, 양쪽으로 그림과 화초가 
놓인 학자품의 책상에 가까이 앉으면, 전과 같이 그 검은 나무로 가려지지 않으므로 책상 
다리 끝까지 보인다. 소파 위에는 만돌린과 기타가 걸려 있다. 그 한가운데 창백하고 작
은 손을 가진 금발 처녀를 앉혀 보라.
  여성은 객실 속을 으스대며 걸어갈 때, 애인의 팔에 몸을 기댈 때 자기의 사명을 완수
한다. 그녀는 자기 미모를 세계에 뽐내는 비너스이다. 세실소렐이 자기를 그린 회화를 찢
었을 때, 그녀는 자기 자신을 옹호한 것이 아니다. '미'를 옹호한 것이다. 그녀의 <수기>
를 보면, 그녀는 일생을 통하여 사람들을 예술의 '숭배'로 인도한 것이 분명하다. <나의 

생애>에서 자기를 묘사한 이사도라 덩컨도 마찬가지이다.
  출연이 끝난 후에, 고대 의상을 결치고 머리에 장미관을 장식한 나의 모습은 무척 아름
다웠다. 나는 왜 이 매력을 이용하지 못한단 말인가? 하루 종일 정신노동에 종사한 남자
가 이 호화로운 품에 안겨 노고에 대한 위로와 미와 망각의 몇 시간을 발견하지 못한단 
말인가?
  나르시시즘의 여성도 마음이 너그러운 때가 있다. 거울 속에 비춰보기보다는 다른 사람
의 찬사의 눈동자 속에서 자기 모습이 아름다운 후광에 에워싸이는 것을 바라보고 싶어한
다. 호의적인 관중이 없을 때에는 고해신부나 의사, 정신분석의에게 가서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관상쟁이나 점쟁이를 찾기도 한다. "꼭 믿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예요."라고 어떤 풋내기 여배우는 말했다. 그녀는 여자친구들에게 자기 이야
기를 한다. 특히 애인에게서 열심히 증인을 구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여성은 자신의 자
아를 금세 망각하게 마련이다. 많은 여성들은 진실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그녀들이 절대
로 자기를 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은밀한 침실보다 더욱 광대한 무대를 원한
다. 그래서 현대식 생활이 중요성을 갖게 된다. 자기를 보아주는 눈, 자기 말을 들어주는 
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녀들의 역할에는 가능한 한 많은 관중이 필요하다. 마리 바
슈키르체프는 자기 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들어와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본다. 즉, 나는 무대에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더 앞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훌륭한 무대를 사기로 결심했다. 사라(프랑스의 여배우)의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저택과 더 큰 아틀리에를 짓겠다.
  한편 노아유 부인은 이렇게 쓰고 잇다.
  나는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사람들이 모인 곳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광장에서 참
석자들이 너무 많은 것을 내가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변명하는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
은 솔직한 고백을 하여 안심시켰다. "나는 텅 빈 객석 앞에서 연기를 하는 건 싫어요."하
고.
  화장이나 대화는 흔히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여성의 욕구를 만족시켜준다. 그러나 야심
적인 나르시스트는 더욱 진귀하고 변화가 많은 방법으로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한다. 특
히, 자기 생활을 갈채의 대상으로 하는 한 편의 연극으로 보고 태연스럽게 자기를 연출하
면서 기뻐한다. 스탈 부인은 <코린>에서 자기가 하프를 반주하면서 시를 낭독하여 이탈리
아 군중을 매료했을 때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고 있다. 코페(스위스의 주네브 호반에 있
는 마을)에서 살 때 그녀가 즐긴 놀이의 하나는 비극을 낭송하는 것이었다. 페드로로 분
장한 그녀는 이폴리트로 가장한 젊은 연인들에게 자진하여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었다. 크뤼드네르 부인은 숄춤으로 자기를 과시했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발레리>에 이
렇게 쓰고 있다.
  발레리는 푸른 모슬린 숄을 집어 이마 위에 머리칼을 올리고, 머리로부터 숄을 걸쳤다. 
숄을 관자놀이에서 어깨로 늘어졌다. 이마는 고풍스럽게 윤곽이 잡히고, 머리칼은 숨겨졌
으며, 눈꺼풀은 내리깔려 평소의 미소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머리를 기울이자, 숄은 팔과 

가슴 위로 가볍게 떨어져 푸른 옷과 맑고 부드러운 얼굴은 마치 코레지오(이탈리아의 화
가)가 그린 온화한 체념을 나탸내는 그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올려뜨고 미소
를 지었을 때에는 그야마로 셰익스피어가 그린 기념상 옆에서 '고뇌'에 미소를 짓는 '인
내'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발레리의 모습이야말로 볼 만하다. 수줍고, 고귀하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불안해지
고, 유혹하고, 감동시키고, 눈물을 자아낸다. 위대한 정신에 충족되었을 때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배울 수는 없지만 일부 뛰어난 사람들이 자연에서 은밀히 가르침을 받
는 대단한 매력을 갖고 있다.
  만일 환경만 허용한다면 나르시시즘의 여성에게는 연극계에 뛰어드는 것처럼 깊은 만족
을 느끼게 하는 것은 없다.
  조르제트 르블랑(벨기에의 극작가, 메테를링크의 애인으로, 그의 전기를 썼다)은 말하
기를, 연극은 내가 거기서 구하고 있던 것, 즉 감격의 동기를 내게 주었다. 지금에 와서 
그것은 '행동의 유희'처럼 기질이 과격한 사람들에게는 불가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표현은 적절하다. 여성은 행동할 수 없으므로, 자기를 위해 행동의 대용품을 생각해 
낸다. 연극은 일부여성에게 매우 적합한 대용품이다. 물론 여배우라 하더라고 그 추구하
는 목적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연극이 생계를 위한 하나의 수단, 즉 단지 작업에 
불과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정사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명성에 접근하는 수단이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녀들의 나르시시즘의 개가이다. 유명한 여배우인 라셀(19세기 프랑스
의 희극배우)이나 두제(19세기 이탈리아의 여배우)는 자기가 창조하는 역할 속에서 자기
를 초월한 진정한 예술가이다. 서투른 여배우는 이와 반대로 자기가 하는 연극을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다만 거기서 오는 명예에 관심을 갖는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가치를 내세우려고 한다. 완고한 나르시스트는 상대방에게 자기를 줄 줄을 모르므로 연애
나 예술에도 한계가 있다.
  이런 결점은 여성의 모든 활동분야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녀는 명성을 약속하는 여러 
가지 길에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대담하게 그 길에 뛰어드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회화
나 조각, 문학 등은 훈련을 거쳐야 한다. 즉, 엄한 수업을 요구하며, 고독한 노력을 필요
로 한다. 많은 여성들은 이 분야에 손을 대지만, 적극적인 창조욕구가 없는 한, 곧 단념
하고 만다. 끈질기게 밀로 나가는 여성도, 대개 일을 하는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명예를 갈망하여, 이를 위해서 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즐기기에는 너무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불만스
러운 세월을 보내고 나서 이것을 고백하고 있다.
  "나는 그림을 그리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늘 나는 내 자신을 분명히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속이고 있다..."
  스탈 부인이나 노아유 부인처럼, 여성이 작품을 창작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자기숭배에 
빠져 있지 않을 때이다. 그러나 많은 여류작가들을 억누르고 있는 결함의 하나는 자기 자
신에 대한 만족이다. 그것이 그녀들의 성실성을 손상시켜 한계를 제공하고 가치를 떨어뜨
리고 있다.
  우월감을 갖고 있는 여성의 대다수는 그것을 세상에 분명히 보여줄 실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그녀들의 야심은 남성을 중개자로 이용하여 그 남자에게 여성의 가치를 
설복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녀들은 자유로운 의도에 의해 개성적인 가치창출을 목표를 삼
지 않고, 기존의 가치를 자기들의 자아에 병합하려고 한다. 그래서 세력이나 명성을 보유
하고 있는 남성 - 자기가 시상이나 영감을 제공하여 - 과 일체화되려고 한다. 그 두드러
진 예는, D. H. 로렌스와 메벨 도지(로렌스의 애인)의 관계이다.
  나는 그의 정신을 유혹하여, 그에게서 억지로 무엇을 탄생시키고 싶었다... 나한테는 
그의 정신과 그의 의지와 창조력, 빛나는 환상이 필요했다. 필요한 이런 도구를 자유로이 
사용하기 위해 나는 그의 피를 지배해야만 했다... 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남에게 여러 가지 일을 시키려고 노력했다. 나는 대리인을 통해 일종의 활
동력과 생산의 기쁨을 얻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할일이 없다는 적막감에 대한 일종
의 보상'이었다.
  그리고 더 앞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로렌스가 '나'를 통하여 승리를 얻고, 나의 경험과 나의 관찰과 나의 도를 이용하
여 훌륭한 예술적인 창작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르제트 르블랑은 메테를링트에게 있어서 '양식과 불꽃'이 되기를 원
했다. 그녀는 시인이 지은 책에 자기 이름이 씌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 이 경우, 유
르신(17세기 스페인의 궁전에서 활약한 여성)이나 스탕달 부인처럼 자기의 목적을 분명히 
설정하여,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남성들을 이용하는 야심가인 여성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목표를 세우지 않고 단지 자기를 과시하려는 주관적인 욕망에 따라 남
의 일에 편승하고 싶어하는 여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반드시 그것에 성
공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실패를 자신에게 숨기고, 자기가 굉장한 매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스럽고 바람직하며 뛰어나다는 자신감을 갖고, 
사랑을 받고 기대를 갖게 하고, 찬양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르시스트는 모두가 
벨리즈(몰리에르의 희곡 <여류학자>의 등잔인물로, 오만한 여성의 전형)이다. 로렌스에게 
헌신한 순진한 브레트(D. H. 로렌스의 애인 베르사의 애칭)도 자신이 대단히 매력적이며 
귀여운 여자라고 자부하고 있다.
  당신이 마치 짐승처럼 호시탐탐 노리는 눈빛으로 탐욕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나는 눈을 올려뜨고 바라봅니다. 당신을 도발적인 섬광이 눈동자에게 빛나는 목양신입니
다. 당신의 얼굴에서 그 섬광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엄숙한 얼굴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런 착각은 진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클레랑보(프랑스의 작곡가, 1676~
1747)가 색정광증을 일종의 '직업적인 착란'으로 간주한 것도 일리가 있다. 자기를 여성
으로서 느끼는 것은 자기를 타인의 정욕의 대상으로 느끼는 것이며, 사라을 받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연애망상증에 걸린 10명의 환
자 중에서 9명 정도가 여성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녀들이 가공의 애인에게 
바라는 것이 그녀들의 나르시시즘의 반영인 것은 분명하다. 그녀들은 그 애인이 무조건적
인 가치를 지닌, 말하자면 성직자, 의사, 변호사와 같은 뛰어난 인간이기를 원한다. 그녀
들의 행동에 의해 밝혀진 사실은 그녀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은 어떤 여성보다도 우수하고 
훌륭한 인격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색정관증은 여러 가지 정신병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내용은 언제나 마찬가지
이다. 환자는 대단히 훌륭한 남성의 사랑에 의해 장식되고 찬양된다. 그 남성은 갑자기 
그녀의 매력에 이끌려서 - 그녀에게는 전혀 그런 의사가 없는데도 - 우회적이기는 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 관계의 본질적인 특색은, 강하고 화
려한 반신이 짝사랑을 하여, 기묘하고 애매한 행동으로 정열을 표명한다는 것이다. 정신
과 의사들이 보고하고 있는 많은 예증 속에서 전형적인 예를 소개하겠다. 페르디에르의 
기사(<색정광증>에서)를 요약한 것이다. 그녀는 마리이본이라는 48세의 여성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전 국회의원이며, 국무차관, 변호사협회 회원, 교단 이사인 아쉘 선생을, 나는 1920년 
5월 12일부터 알고 있었다. 그 전날 나는 그를 만나고 싶어서 법원에 갔었다. 멀리서 그 
사람의 건장한 몸집이 시야에 들어왔으나,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등골이 오싹했
다...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떤 감정의 교류가 있었다. 눈과 눈이, 시선과 시선이 마주친 
것이다. 나는 첫눈에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그가 먼
저 사랑을 고백했다. 그것은 1922년 초의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따로 객실로 맞아들이곤 했다. 어느날 그는 아들도 밖에 쫓아 냈
다... 어느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를 하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곧 그
의 감정이 격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는 여러 가지 
친절을 베풀며 서로 이미 감정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다음에도 나는 그의 방에
서 그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당신이오. 오직 당신뿐이요. 당신 이외
에는 아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인, 내 마음을 알아주시겠지요."
  나는 깜짝 놀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선생님, 고마워요."하
고 말했을 뿐이다.
  어느날 그는 자기 방에서 나와 나를 배웅해 주었다. 그는 자기를 수행하는 남자를 쫓아
버리기까지 했다. 그는 그 남자에게 돈을 주고 말했다. "이봐, 나를 그냥 내버려둬. 지금 
부인과 같이 있잖은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나와 단둘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나의 양손을 꽉 잡았다. 제1회 변론 때, 그는 자기가 독신이라는 것을 일부러 알
리려고 했다.
  그는 내게 애정을 표시하기 위해 앞뜰로 가수를 보냈다... 그리고 자기는 내 방 창 밑
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랑의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 그는 문 앞에서 코뮌느
의 곡을 부르게 했다. 나는 바보였다. 나는 그의 구애에 응해야했다. 그런데 나는 아쉴 
선생의 정열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때 그는 내가 거절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
했다. 좀더 분명히 고백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는 복수를 했다. 아쉴 선생은 내
가 B에게 호감을 갖고 있은 줄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질투하고 있었다... 그는 내 
사진을 이용하여 나를 저주했다. 책이나 사전을 통해 알아본 결과 올해에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사진을 이용했다. 내 병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실제로 이런 착란은 쉽사리 피해망상으로 변한다. 극히 정산인 경우에도 이런 과정을 
찾아볼 수 있다. 나르시스트는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정열적인 흥미를 갖지 못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자기가 상대방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파악하게 되면, 그녀는 곧 상대방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타인의 비판을 모두 질투나 원망 탓으로 돌린다. 자기의 실패를 음흉한 음모의 결과
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실패는 오히려 그녀에게 자신이 중요하다는 관념을 점점 굳게 갖
도록 한다. 그녀는 쉽사리 과대망상 또는 그 반대의 양상인 피해망상에 빠진다. 자기 세
계의 중심에 서서 그 외의 다른 세계는 알지 못하는 그녀는 이제 자신의 세계의 절대적인 
중심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나르시시즘의 희극은 현실생활을 희생하여 전개한다. 가공의 인물이 
가공된 대중의 찬탄을 요구한다. 완전히 자아의 먹이가 된 여성은 구체적인 세계에의 모
든 발판을 상실하고, 다른 사람과 어떤 현실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치 않는다. 스탈 부인
은, 만일 그녀의 '찬미자'들이 그날 밤 일기에 쓴 조소를 예감했더라면 그처럼 즐겁게 사
람들 앞에서 페르드를 낭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르시스트는 자신이 스스로 보
여주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의 눈에 비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
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그녀가 이토록 자기응시에 몰두해있으면서도, 자신을 잘못 판단
하여 쉽사리 오류를 범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녀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멋대로 지껄여댄다. 그녀가 지껄일 때에는 자기가 맡은 배역, 대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
다.
  마리 바수키르체프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하고 있다.' 점잖은 관중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여기고, 어린애 같은 멋대로의 대사나 멋있는 자세로 연기의 효과를 발휘하
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응시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녀는 타인에 대해서도 자기가 인정하는 것밖에는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의 처지나 신상에 
동화되지 않는 것은 그녀와 상관이 없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인생체험을 하고 싶어한다. 
사랑하는 여자의 도취와 고뇌, 모성애의 순수한 기쁨, 우정, 고독, 눈물, 웃음 등을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절대로 자기를 줄 수 없기 때문에 감정이나 감동은 조직된 것이다. 분
명히 이사도라 덩컨은 아이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여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과장된 제스처로 아이들의 재를 바다에 뿌렸을 때에는 여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생애>에서 그녀가 슬픔을 회상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은 불쾌감을 느끼지 않
고서는 읽을 수 없다.
  나는 내 육체의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나는 눈을 통하여, 쭉 뻗어 드러내놓은 두 다리
나 부드러운 가슴, 그리고 잠시도 정지되지 않은 채 조용히 파도치는 두팔을 바라본다. 1
2년 전부터 나는 지쳐 있었다. 가슴에는 끊임없는 고뇌와 슬픔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이 두 눈은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젊은 여성은 자아숭배 속에서 불안한 장래에 대처할 용기를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젠가는 뛰어넘어야 하는 첫단계이다. 그렇지 않으면 장래가 막혀버린다. 자신의 
내재성 속에 애인을 가둬두려고 하는 여성은 자기와 함께 애인을 죽음으로 몰고간다. 나
르시스트는 가공의 분신 속에 자기를 소외시켜 자기를 무로 돌아가게 한다. 그녀의 추억
은 얼어붙고, 판에 박힌 행동과 말을 반복하고, 내용이 완전히 비어버린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 한다. 여성의 많은 '일기'나 '자서전'이 그처럼 빈곤한 인상을 주는 것은 이 때문
이다. 자기예찬에 몰두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성은 자기를 아무것으로도 만들지 못
하여 결국 무를 예찬하게 된다.
  그녀의 불행은 아무리 시치미를 떼어도 이 무를 자각한다는 것이다. 개인과 그 분신 사
이에는 현실적인 관계가 전혀 없다. 이 분신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르시
스트는 완전히 실패하게 마련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충실한 존재로 파악할 수 
없다. 그녀는 즉자가 그대로 대자라는 환상을 언제까지나 보유할 수 없다. 그녀의 고독은 
모든 인간의 고독처럼, 우연성과 피투성으로 경험된다. 그래서 여성은 - 신앙이라도 갖지 
않는 한 - 언제나 군중이나 소란, 또는 타인을 찾아 자기에게서 도망쳐야 한다.
  자기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으면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은 큰 잘못이다. 
외려 더욱 답답한 노예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자기의 자유에 의존하지 않고, 세계와 
타인의 의식 속에서 위험에 노출된 한 객체로 자기를 만든다.
  그녀의 육체와 용모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손상되기 쉬운 몸뚱이이다. 그리고 우상을 
장식하고 그 우상을 위해 대를 만들고 성당을 세우는 것은 돈이 드는 일이다. 마리 바슈
키르체프가 자기 모습을 불멸의 대리석에 새기기 위해서 금전결혼도 불사한 것은 이미 보
았다. 이사도라 덩컨이나 세실 소렐이 그녀들의 옥좌 옆에 높이 쌓아올린 황금이나 향, 
몰약은 남성의 부로 지불된 것이다. 여성에게 운명을 제공하는 것은 남성이므로, 여성은 
자기 힘으로 복종시킨 남성의 양과 질에 의해 자기의 성공의 정도가 측정된다. 그러나 여
기서도 상호관계가 작용한다. 버마재미(교미가 끝나면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다)의 암놈
을 수놈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놈에게서 해방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수놈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게 아양을 떨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여성은 자기를 우상화하기 위해 그녀의 숭배자들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녀의 옷
을 입거나 숨을 쉬는 데도 남성의 의식하여 그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한다. 사실 나르시시
즘의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하가 있는 것은 창녀와 마찬가지이다. 어느 특정한 남성의 지
배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론의 독재는 받아들이고 있다. 그녀를 타인과 연결시키는 
유대는 상호교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그녀가 타인의 자유의사에 의해 인정받으려고 
노력한다면, 또한 활동성을 통한 목표로서 자유를 인정한다면, 그녀는 나르시스트가 되지
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태도가 보여주는 모순을 자기가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있는 세계
(그녀의 눈에는 오직 자기만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에서 인정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타인의 찬동은 비인간적이며 신비롭고 변덕스러운 권위이다. 그녀는 이것을 
마법에 의해서라도 손에 넣으려고 한다. 외면적인 오만에도 불구하고 나르시시즘의 여성
은 자기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의 허영심은 절대로 충족되지 않는
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녀는 점점 찬사나 성공을 갈망하고 자기 주위의 음모를 의심하게 
된다. 그녀는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위협을 느끼며 분신의 어둠 속에 빠져 끝내는 대개 자
기 주위에 편집광의 망상을 쌓아올린다. 그녀에게야말로 성서의 다음과 같은 계율이 특별
히 적용된다.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그 생명을 던져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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