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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연애하는 여자

by Frais Feeling 2020. 7. 27.

  '연애'라는 말은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남녀 사이를 떼
어놓는 중대한 오해의 원천이 되고 있다. 바이런이 지적한 것처럼 연애란 남성의 인생에
는 하나의 일시적 관계에 지나지 않지만, 여성에게는 인생 자체이다. 니체는 이와 동일한 
말을 <즐거운 지혜>에서 이렇고 말하고 있다.
  연애라는 똑같은 말이 남성과 여성에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여성이 
연애에서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명백하다. 그것은 단지 헌신에 그치지 않고 육체와 정신
을 막론하고 무제한으로 완전히 제공하는 것이다. 여성이 연애를 하나의 신앙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이 무조건성이다. 그리고 여성의 신앙은 이것말고는 없다. 남성이 여성을 사랑
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이다. 따라서 남성이 여성과 마찬가지의 감정을 
자기의 경우에도 상정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전적인 포기의 욕구를 동
일하게 느끼는 남성이 있다면, 그는 이미 남성이 아닐 것이다.
남성에게도 열렬한 애인이 되는 시기가 있기는 하지만 '위대한 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남성은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격정에 사로잡힌 경우에도 남성은 결코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설사 애인의 말에 무릎을 끓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 역시 그녀를 소유
하여 자기에게 소속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숨을 쉬는 한 언제나 독립적인 주
체로 남아 있으며, 사랑하는 여성은 많은 가치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런 여성
을 자기들의 실존에 일체화시키려고 하며, 결코 그녀 속에 자기의 실존을 몰입 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여성의 경우 연애는 애인을 위한 완전한 자기포기이
다.
  세실 소바주(20세기 초의 프랑스 여류시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성은 연애를 할 때 자기 인력을 완전히 잊어버려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여성은 애인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인이 없는 여성은 산산히 흩어진 꽃다발과 같
다.
  사실은 여기서 자연법칙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상황의 차이가 남녀의 
사랑에 대한 사고방식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주체이며 자기 자신인 인간이라면, 초
월에의 고귀한 소원을 지닐 때에는 세계에 대한 행동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야
심에 가득차서 행동한다. 그런데 비본질적인 존재는 자기의 주체성 속에서 절대를 발견하
지 못한다. 내재를 운명으로 여기는 존재는 행위에 의해 자기를 실현하지 못한다. 의존의 
영역 안에 처박혀서, 어렸을 때부터 남성의 예속물로 자랐기 때문에, 남성에게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지배자를 발견하는 데 익숙하다.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 욕구가 말살되어 
있지 않은 여성이 원하는것은, 이런 우월한 존재에 대해 자기 존재를 초월하는 것이며, 
지배적인 주체와 결합하여 융합되는 것이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존재라고 가르침을 받아
온 남성 속에 몸과 마음을 몰입하는 것 이외에 그녀가 택할 길은 없다. 어차피 예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폭군 - 부모나 남편이나 보호자와 같은 - 에게 복종하기보다는 신을 섬
기는 편이 낫다. 그녀는 자진하여 예속을 선택했기 때문에 자기의 예속을 자유의 표시처
럼 생각하려고 한다. 그녀는 보잘 것 없는 비본질적인 객체인 자기 입장을 자진해서 받아
들여 그것을 극복하려고 한다. 육체나 감정, 행위를 통하여 그녀는 사랑하는 남성을 최고
의 위치까지 높이고,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최고의 존재로 삼는다. 그녀는 그의 앞에 자

기를 소멸시키려고 한다. 연애는 그녀에게 하나의 종교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도 보아온 
바와 같이, 젊은 여성은 처음에는 자기를 남성과 동일시하려고 한다. 그것을 단념하면 이
번에는 한 남성에게 사랑을 받음으로써 남성다움의 일부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녀는 특정한 남성의 개성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남성을 사랑하고 있
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사랑하게 될 남성들이여, 나는 당신들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고 이렌 르벨리오티는 쓰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남성은 그녀와 같은 계급과 
인종에 속해 있어야 한다. 이성의 특권은 이 범위 안에서만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신과 
같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식민지 관리의 딸에게 있어 토
인은 인간의 범주에 끼지 못한다. 젊은 여성이 '아랫사람'에게 몸을 맡기는 것은, 자기에
게는 연애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굴욕감을 맛보기 위해서 이다. 여성은 보통 
남성의 우월성이 분명히 나타나 있는 남성을 원한다. 이윽고 그녀는 남성의 대다수는 유
감스럽게도 우연적이고 세속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더라도 처음에는 남성에 대
해 좋은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남성은 자기의 존재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노골적
으로 그것을 배반하지만 않으면 된다. 개탄스러운 실패가 그처럼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처녀는 남성이라는 거울에 눈이 멀어버린다. 여성에게 비친 
남성의 가치는 경우에 따라서 체력이나 체격, 재력, 교양, 지성, 권력, 사회적인 지위나 
군복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는 것은 애인에게 남성의 본질이 요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밀해졌기 때문에 애인의 위력이 파손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처음 키스할 
때, 또는 날마다 얼굴을 마주 대하는 동안에, 또는 결혼 첫날 밤에 그것들은 쉽사리 붕괴
된다. 그러나 서로 떨어져 있는 연애는 환각에 불과하며, 현실적인 경험이 따르지 않는
다. 사랑의 욕구는 육체적으로 확인해야 비로소 정열적인 사랑이 된다. 반대로 사랑은 육
체적인 포옹에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성적으로 지배된 여성이 처음에는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남성에게 감격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여성은 자
기가 잘 알고 있는 어떤 남성도 신으로 변화 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연애는 세상사람 들
이 말하는 것처럼, 여성의 생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편이나 
자식, 가정, 오락, 사교, 허영, 성욕, 출세 등이 훨씬 더 중요하다.
  여성은 대개 한 번쯤은 '위대한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대용품을 발견하
여 거기에 덤벼든다. 연애는 미완성의 상처를 받는, 비참하고 불충분한 허위의 모습으로 
그녀를 찾아오지만, 자기의 생명 전체를 거기에 바치는 여성은 대단히 드물다. 열렬한 연
애를 한 여성은 대부분 젊었을 때 풋내기 연애에 애를 태우지 않은 여성이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남편, 가정, 자식과 같은 전통적인 여성의 숙명을 받아들였거나,  심한 고독을 
경험했거나, 혹은 어떤 일을 시작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는 여성이다. 실패한 자기의 인
생을 선택 받은 한 사람에게 바침으로써 그 실패를 한꺼번에 만회할 기회를 발견했을 때, 
그녀들은 이 희망에 전력투구를 하게 된다. 아이세 양이나 쥘리에트 드루에(빅토르 위고
의 애인), 다규(프랑스의 여류작가, 음악가 리스트의 애인) 백작부인은 연애를 시작했을 
때 거의 30세에 가까웠으며, 쥘리 드 레스피나스(18세기의 프랑스 사교계의 여왕)는 40세

에 가까웠다. 그녀들은 그때까지 아무 목적도 발견하지 못하고 보람 있게 생각되는 일은 
하나도 하지 못하여 연애 이외에는 돌파구가 없었던 것이다.
  제대로 자립할 수 있는 경우에도, 역시 이 길은 대다수의 여성에게 가장 매혹적이다. 
자기 삶을 혼자서 감당하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젊은 남성도 마찬가지로 연상의 여성에
게 이끌려, 그녀에게서 지도자, 교육자, 어머니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의 성장과정이나 
풍습, 마음의 소리 등이 그가 자기포기라는 안이한 해결책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연애를 하나의 중간단계로 생각할 뿐이다. 남성의 행운은 - 
유년기나 성년이 되어서도 - 가장 어렵긴 하지만 한편으론 가장 확실하기도 한 길을 가도
록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불행은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편한 고갯길로 내려가도록 유혹한다. 자기를 위해 투쟁할 것을 권유 받는 대신에, 적당히 
순응하면 황홀한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녀가 신기루에 속은 것을 알
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그때쯤 그녀는 기진맥진해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 학자들은 여성은 애인 속에서 자기 아버지의 모습을 추구한다고 주장하고 싶
어한다. 그러나 여성이 어렸을 때 아버지를 좋아했던 것은 그가 남성이기 때문이지 아버
지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남성이 이 마력을 조금씩은 갖고 있다. 여성은 어
떤 인간을 다른 인간 속에 재현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 어른들의 
보호하에서 경험한 것이다. 그녀는 가정 속에 깊숙이 융합되어, 수동적인 평화를 경험했
다. 연애는 그녀에게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돌려준다. 또 유년시절도 돌려준다. 그
녀가 바라고 있는 것은 머리 위의 지붕을, 그리고 세계속에 방치된 자기를 보호해주는 벽
을, 그녀의 자유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법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어린시절의 꿈은 많은 여성의 연애에 수반된다. 여성은 애인이 자기를 '나의 귀여운 
소녀, 나의 귀여운 아기'라고 불러주면 행복감을 느낀다. "당신은 정말 귀여운 아기 같
아" 라는 말이 가장 확실하게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말이라는 걸 남성들은 잘 알고 있
다. 어른이 되는 것을 괴로워하는 여성이 많다는 것은 이미 보아왔다. 많은 여성들은 어
린아이처럼 행동하여, 그 태도나 화장 속에서 어린시절을 무한히 연장하려고 노력한다. 
남성의 품에서 다시 한 번 어린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여성들을 황홀하게 한다. 다음과 같
은 유행가의 주제도 바로 그것이다.
  
  당신의 품에 포근히 안겨
  나는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오 내 사랑...
  
  대화나 연애편지에서도 여전히 되풀이되는 문구는 '베이비 나의 베이비'라는 애인의 속
삭임이다. 그리고 여성은 자기를 '당신의 소녀, 당신의 어린꼬마'라고 말한다. 이렌 르벨
리오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대체 그 사람은 언제, 나를 지배할 그 사람은 언제 찾아올
까?" 그리고 그 남성을 만났을 때에는 "나는 당신을 남성이라고,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
람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쓰고 있다.
  자네가 연구한 어떤 신경쇠약증의 여성은 분명히 이런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강박관

념과 신경쇠약>)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계 안에서는, 내가 행한 어리석은 행동이나 훌륭한 행동은 모두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완전히 줄 수 있고, 나의 존재 전체를 또 
하나의 다른 존재에게 의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항에 대한 동경이다. 상대는 신이라도 
좋고, 남성 혹은 여성이라도 무방하다. 다만 나보다 훨씬 뛰어나 스스로 내 인생을 살아
나가려고 생각하거나 자기를 돌보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어야 한다. 나를 충분히 사랑하
고 나의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전폭적인 신뢰를 갖고 복종하
며, 모든 과실을 피하게 하고 친절한 애정으로 나를 완성으로 인도해 주는, 그런 상대를 
발견하고 싶었다. 막달라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이상적인 사랑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
다. 숭배하는, 그리고 숭배를 받을 만한 열렬한 사도가 되는 것, 자기의 이상을 위해 살
고 죽으며, 일체의 의혹에서 떠나 그것을 믿는 것, 끝으로 야수성에 대한 '천사'의 마지
막 승리를 손에 넣는 것, 그의 품속에 완전히 안기고, 그의 비호 속에 아주 작아져서 송
두리째 파묻혀 완전히 그의 것이 되고, 자기는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되는 일이다.
  
  여러 가지 사례에 의해 이미 알게 된 것처럼, 이 자기소멸의 꿈은 실제로는 존재하려는 
강한 의지이다. 모든 종교에서 신에 대한 숭배는 신자에게 있어 자기 자신의 구원의 염원
과 일치되어 있다. 우상에게 자기를 완전히 맡겨 버림으로써 여성은 자기의 소유와 우상 
속에 요약되어 있는 세계의 소유가 동시에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대개 여성이 먼저 애
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 자아의 정당화와 찬양이다. 많은 여성은 상대방으로부터 사랑
을 받지 못하면 연애에 뛰어들지 않는다. 상대방이 사랑의 표시만 해도 연애에 빠지는 경
우도 자주 있다. 젊은 처녀는 남성의 눈을 통해 자기의 꿈을 그리고 있다. 남성의 시선에
서 여성은 비로소 자기를 발견한다고 생각한다.
  세실 소바주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신의 곁으로 걸어가서 당신이 좋아하는 작은 발을 앞으로 내밀고, 뒤축이 달린 하이
힐 속의 작은 발을 생각하면, 그것을 감싸고 있는 당신의 사랑이 그리워진다. 장갑 속의 
손이나 팔, 얼굴의 가냘픈 움직임에도, 내 목소리의 진동에도 나는 가득찬 행복을 느낀
다.
  
  여성은 분명히 자신은 높은 가치를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그녀는 자기가 애인에
게 갖게 한 사랑을 통하여 자위할 수 있다. 그녀는 애인 속에서 한 사람의 증인을 발견하
고 크게 기뻐한다. 콜레트의 <방랑하는 여인>이 고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지고 말았다. 나는 그 남자에게 이튿날 찾아오도록 허락함으로
써, 그에게 애인도 친구도 아닌 내 생활과 내 모습의 열렬한 관찰자를 남겨두고 싶은 그
런 욕망에 지고 만 것이다... "할머니가 되지 않는 한 어떤 남자의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다는 허영은 좀처럼 포기할 수 없어."라고 언젠가 바로고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미들턴 머리(현대 영국의 평론가, 캐서린 맨스필드의 남편)에게 보낸 한 편지에 캐서린 
맨스필드는 자기가 멋있는 연보랏빛 코르셋을 사왔다는 말을 하고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
다.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참으로 유감이에요!" 자기를,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 
꽃이나 향수나 패물처럼 느끼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다. 자기 자신도 부유하게 만들
지 못하고, 아무도 갖고 싶어하지 않는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연애는 이를테면 
건판과 같이 흐리고 아무것도 없는 음화를 선명하고 명확하게 나타내는 현상액과 같은 것
이다. 연애를 통하여 여성의 얼굴과 육체의 곡선, 어렸을 때의 추억, 옛날의 눈물, 옷, 
그리고 습관과 그녀의 전부와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이 된다. 그녀는 자기가 
섬기는 신의 제단에 바쳐진 훌륭한 제물이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기 전까지는, 그의 시선이 그녀를 만족시키기 전
까지는, 그녀는 퇴색되고 음침한 세계 속에서 별로 아름답지도 못한 한 사람의 여성에 불
과했다. 그가 그녀를 포옹한 순간부터 그녀는 불멸하는 진주의 광채 속에 서 있었다.(메
리 웨브의 <그늘의 무게>에서)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고 여성의 허영심에 잘 영합하는 교묘한 남성이, 설사 육체적인 
매력이 전혀 없더라도 정열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법칙'과 '진리'를 구현하고 있다. 그들의 의식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남성들에게 찬사를 받는 여성은 자기가 마치 값진 보물이
라도 된 것처럼 느낀다. 예컨대 이사도라 덩컨의 말대로 다눈치오(이탈리아의 작가, 1863
-1938)가 성공한 이유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다눈치오가 한 여성을 사랑할 때에는 그 여성의 영혼을 지상에서 끌어올려 베아트리체
가 영광스럽게 살고 있는 나라로 데려간다. 그는 잇따라 모든 여성에게 차례차례 신성을 
부여하고 그녀를 높이높이, 그야말로 베아트리체와 같은 단계에까지 끌어올린다... 그는 
좋아하는 여성에게 잇따라 빛나는 베일을 씌워준다. 그녀는 속인들 위에 우뚝 나타나 신
비로운 빛에 싸여 걸어다닌다. 그런데 시인의 변덕이 끝나고 다른 여성에게 호감을 느낄 
때 그 빛나던 베일은 사라지고 후광도 사라져 그녀는 다시 본래의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
간다... 다눈치오에게 특유의 마법으로 찬사를 받는 것은, 이브가 천국에서 뱀의 목소리
를 들었을 때 느꼈을 것으로 생각되는 기쁨과 견줄 수 있는 것이다. 다눈치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성에게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이사도라 덩컨의 <나의 생애>에서)
  
  성은 연애 속에서만이 에로티시즘과 나르시시즘을 무리없이 조화시킬 수 있다. 이미 앞
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이 둘 사이에는 하나의 대립이 있으며, 그것이 여성이 자기의 성
적 숙명에 적응하기 어렵도록 하고 있다. 자기가 육체적인 대상, 즉 먹이가 되는 것은 그
녀가 자기에게 바치고 있는 숭배와 모순된다. 그녀에게는 남성의 포옹이 자기 몸을 손상

시키고 더럽히며, 자기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어떤 여성들은 불
감증을 선택하여 자아의 완전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여성들은 동물적인 쾌락
과 고귀한 감정을 분명히 분리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슈테켈이 보고하고 있다. 앞에서 
결혼과 관련하여 이미 인용한 D. S. 부인의 경우이다.
  
  존경하는 남편과 함께 살면서 불감증이었던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에 역시 예술가로, 
뛰어난 음악가였던 젊은 남자의 애인이 되었다. 그녀의 애정은 언제나 절대적인 것이어
서, 그 남자의 옆에 있지 않으면 행복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의 생활은 로타르에 
대한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그를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그녀는 그의 품에서도 여
전히 불감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한 남자가 그녀의 길을 돌려놓았다. 그는 
억세고 난폭한 산지기로, 어느날 그녀와 단 둘이 있을 때 그녀를 간단히 자기 것으로 만
들어 버렸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그가 하는 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품에
서 참으로 강렬한 오르가슴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 달 동안 
계속해서 그의 품에 안겼어요. 나는 거친 황홀감을 느꼈으나, 로타르 생각을 하면 형용할 
수 없는 혐오감이 느껴졌어요. 나는 폴을 무척 싫어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로타르예
요. 그렇지만 폴은 나를 만족시켜줘요. 나는 로타르의 모든 것에 마음이 끌려요. 나는 쾌
락이 탐나 일부러 매춘부로 변신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상류사회 부인에게는 쾌락이 
금지되어 있거든요." 그녀는 폴의 청혼을 거절하지만, 그와 계속해서 동침한다. 그때 그
녀는 딴 사람이 되어, 평소에는 할 수 없는 노골적인 말이 튀어 나오는 것이었다.
  
  슈테켈은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많은 여성들에게 동물성에의 전락이 오르가슴의 조건
이 되어 있다. 이런 여성들은 육체적인 사랑을 존경이나 애정과 같은 감정과는 조화될 수 
없는 타락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다른 여성들에게는 반대로 이 타락감은 남성의 존경과 
애정과 찬양을 통해 비로소 해소될 수 있다. 그녀들은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남자에게 몸을 맡기지 않는다. 파렴치하고 아둔하고 오만한 여성이 아니면, 육체 
관계를 피차 서로 반반씩 이득을 보는 쾌락의 교환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남성도 마찬가
지로(아니 아마도 여성 이상으로) 자기를 성적으로 이용하려는 상대방에게는 반항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자기를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경우는 대개 여성 
쪽이다. 이 경우에 오직 감격적인 찬탄만이, 그녀가 패배라고 생각하고 있는 행위의 굴욕
을 보상할 수 있다. 앞에서도 보아온 것처럼 성행위는 그녀에게서 깊은 소외를 요구한다. 
그녀는 수동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 속에 빠져 있다. 눈을 감은 채 자기도 잊
어버리고, 무료하게 물결에 따라 흔들리고 폭풍에 휩쓸려 묻혀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 밤은 육체의 방이고 자궁의 밤이며 무덤의 방이다. 무로 돌아감으로써 그녀는 전체와 
합쳐져 자아가 소멸된다.
  그러나 남자가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갈 때, 그녀는 지면에, 침대위에, 빛속에 다시 한번 
던져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하나의 이름, 하나의 얼굴을 회복한다. 그녀는 정복당한 
여자, 하나의 먹이, 하나의 물체이다. 그녀에게 사랑이 필요하게 되는 것은 이때이다. 젖

을 뗀 아이가 부모의 인자한 시선을 찾는 것처럼 자기를 지켜보는 애인의 시선에 의해 여
성은 자기의 육체가 억지로 떨어져나왔던 전체 속에 되돌아가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
녀가 완전한 만족을 느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진정한 쾌락을 경험했을 경우에도 육체
의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지 않다. 그녀의 성적 흥분은 감정이 되어 연장된다. 남
자는 그녀에게 관능적인 쾌락을 주면서 그녀를 자기 쪽에 단단히 결박시킨다. 그러나 남
자는 더이상 그녀에게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 여자는 이 잠시 동안의 무관심이나 남자가 
일시적이 아닌 절대적인 애정을 표시하지 않으면 용서하려들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그 순간의 내재는 초월된다. 타는 듯한 추억은 이제 후회가 아니라 보물이 
된다. 관능적인 쾌락이 사라짐으로써 희망과 약속이 된다. 그리고 쾌락은 정당화된다. 그
리하여 여성은 성생활을 자랑스럽게 즐길 수 있다. 그녀가 그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흥
분,쾌락,정욕은 이제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선물이다. 그녀의 육체는 이제 하나의 물체가 
아니다. 그것은 송가이고 불꽃이다. 그녀는 이제 색정의 마법에 정열적으로 몸을 맡길 수 
있다. 밤은 빛으로 변하고, 사랑하는 여성은 이제 두 눈을 뜨고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
자, 그 시선이 자기를 찬양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볼 수 있다.
  그를 통하여 허무는 존재로 충만해지고, 존재는 가치로 바뀐다. 그는 이미 어둠의 바닷
속에 가라앉지 않고 날개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간다. 자기포기는 신성한 황홀경이 된다. 
사랑하는 남자를 맞이할 때, 여자는 마치 성모가 성령에 의해 또는 신자가 거룩한 빵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처럼, 자기 몸에서 그를 살게 하기 위해 그의 방문을 받아들인다. 경
건한 찬송가와 외설스러운 노래 사이의 추잡한 유사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신비적인 사랑이 언제나 성적인 생각을 갖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연애를 하는 여성
의 성욕은 신비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나의 신, 나의 숭배자, 나의 주인... 무릎을 꿇은 성녀와 침상위에 누운 사랑하는 여자
의 입에서 같은 말이 흘러나온다. 한편 한 여자는 그리스도를 찌른 창에 자기 몸을 던져 
성혼을 맞아들이기 위해 손을 내밀고 신의 사랑에 의해 불타기를 바란다. 다른 여자도 동
일한 것을 기대한다. 창,화살,칼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어느쪽이건간에 그것은 같은 
꿈, 유년시절의 꿈이고 신비로운 꿈이며 사랑의 꿈이다. 즉 여성은 남성의 품에 안겨 자
기를 포기함으로써 당당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 무로 돌아가려는 욕망은 흔히들 마조히즘과 통한다고 말하고 있다(헬렌 도이치의 논
문 <여성의 심리>에서). 그러나 색정에 대한 진술에서 주의를 촉구한 것처럼, 내가 타인
에 의한 나의 객관화로 인하여 매혹되려고(사르트르 <존재와 허무> 참조) 노력할 때가 아
니면, 다시 말해서 주체의식이 자아를 돌아보고 그것을 굴욕적인 상태에서 파악하려고 할 
때가 아니면, 마조히즘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연애를 하는 여성은 다만 자기 속에 소
외된 나르시스트가 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무한한 
실재에 도달하는 타자의 매개가 되는 동시에 자신도 무한이 되려는 강한 욕구를 갖는다. 
그녀는 먼저 자기를 구제하기 위해 연애에 열중한다.
  그러나 우상숭배적인 연애의 아이러니는, 자기를 구제하기 위한 것인데도 결국은 그것
이 완전히 자기를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감정은 신비적인 차원으로 나
타난다. 신에게 자기를 찬미해 주고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녀는 신의 품에서 

용해되어 자기를 잊으려고 한다. "나는 가능하다면 사랑의 성녀가 되고 싶었다. 나는 그
런 감격과 금욕적인 열광의 순간에는 순교자를 부러워했다." 다규 부인의 이 말에 나타나 
있는 것은 그녀를 애인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경계를 제거하여 자기를 송두리째 파괴해 버
리려는 욕구이다. 이것은 마조히즘이 아니다. 황홀한 결합의 꿈이다. 조르제트 르부강에
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한 것도 같은 꿈이다. "그 무렵에 만일 사람들이 나에게 이 세
상에서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을 거예
요. 그의 마음의 양식과 불꽃이 되는 거예요 하고 말예요."
  이와 같은 결합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이 먼저 원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봉사하는 것이
다. 애인의 요구에 응함으로써 그녀는 자기를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그의 
존재에 편입되고 그의 가치에 참여하여 정당화된다. 안젤리우스 실레시우스의 말에 의하
면, 신비주의자마저도 신은 남자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들이 자기 자신을 신에게 바치더라도 헛된 일이라는 것이다. 남성이 주문을 많이 하면 할
수록 여성은 기쁨을 느끼게 된다. 위고가 쥘리에트에게 강요한 칩거는 그녀의 마음을 억
압했지만 그에게 복종하기를 좋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난로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은, 남
편의 행복을 위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적극적
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녀는 그를 위해 맛있는 요리를 만들고 가정을 꾸민다. '우
리들의 단란한 집안'이라고 그녀는 상냥하게 말한다. 그녀는 그의 의복시중을 들어준다.
  
  '나는 당신이 옷을 더럽히고 구겨오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러면 나 혼자서 그것을 빨아
서 꿰매고 싶어요.'라고 그녀는 쓰고 있다.
  
  그녀는 그를 위해 신문을 읽고, 기사를 스크랩하고, 편지나 노트를 분류하고, 원고를 
정서한다. 시인이 그런 일의 일부를 딸에게 맡기면 그녀는 무척 섭섭해 한다. 연애를 하
는 모든 여성에게서 비슷한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필요하다면 그녀는 애인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폭군화한다. 그녀의 인격 전체와 그녀가 갖고 있는 모든 것과 모든 삶의 시
간이 그에게 바쳐짐으로써 자기의 존재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그녀는 무엇이든지 그의 
안에서만 소유하려고 한다. 그녀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그녀에게 아무것도 부탁하
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정이 많은 애인은 일부러 여러가지 부탁을 생각해 낸다. 
그녀는 연애 속에서 지금까지 자기가 그랬던 것, 자기의 과거와 자신의 인간됨을 확인하
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그 연애 속에 자기의 미래까지도 포함시키려고 한다. 즉, 미래를 의미있
게 하기 위해 그녀는 모든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그에게 자신을 맡겨버리려고 한다. 이렇
게 해서 그녀는 자기의 초월에서 해방된다. 그녀는 그 초월을 본질적인 타인의 초월에 종
속시키고 그의 신하나 노예가 된다. 그녀가 처음 애인 속에 자기를 몰입시킨 것은 자기를 
발견하여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실은 그녀는 그 속에서 조금씩 자기를 잃어갔
다. 그리하여 일체의 현실은 타자 속에 있게 되었다. 출발점에서 나르시시즘의 숭고화라
는 형태를 취하고 있던 연애는 헌신의 고달픈 기쁨 속에서 완성되어 때로는 자학으로까지 
인도되는 경우가 있다.

  위대한 정열의 초기에는, 여성은 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더욱 우아해진다. "아델르가 내 
머리를 매만져줄 때 나는 내 이마를 유심히 바라본다. 당신이 사랑하고 있는 이마니까." 
하고 다규 부인은 쓰고 있다. 그녀는 그런 얼굴.육체.방.자아 속에서 자기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자기를 사랑해 주는 애인을 매개로 하여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면 그녀는 모든 교태를 중단해 버린다. 애인이 원한다면, 사랑보다도 
더욱 귀중했던 자신의 얼굴까지도 변형시킨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게 된다. 그녀
는 자기의 인격, 자기의 소유물 전체를 지배자의 영토로 만들어버린다. 그녀는 그가 경멸
하는 것이라면 부정해 버린다. 그녀는 자기의 심장의 고동 하나하나, 피 한 방울, 뼈까지
도 그에게 바치고 싶어한다. 순교의 꿈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를 제공하는 
것을 극도로 확대하는 것, 애인이 밟는 땅이 되는 것, 그의 부름에 대답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애인에게 불필요한 모든 것을 분노에 차서 없애버린다. 그
녀의 자기헌신이 완전히 받아들여질 경우에는, 마조히즘이 나타나지 못한다. 예컨대 쥘리
에트 드루에의 경우에는 그런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을 열애하는 나머지, 그
녀는 때때로 시인의 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가 범했을지도 모르는 실수를 용서해 달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녀는 분노를 느끼면서 자기자신을 돌아보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
나 관대한 정열에서 마조히스트의 열광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일이다.
  부모 앞에서의 어린애와 같은 기분으로 애인 앞에 있는 여성은 옛날 부모 곁에서 경험
한 죄책감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한, 그에게 반항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자신에 대해 반항한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 남성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
을 때, 그를 독점하고 그를 행복하게 하고 그를 만족시키는 데 실패할 때, 그녀의 나르시
시즘은 혐오나 굴욕, 자기에 대한 증오로 급변하여, 그녀로 하여금 자기 형벌로 이끌어간
다. 그것은 잠시 동안일 경우도 있고, 때로는 한평생 희생자로 자처하기도 한다. 그리고 
애인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자기를 학대하는 데 열중한다. 이때 그녀의 태도는 마조히즘
적이다.
  그러나 자기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이런 경우와 그녀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남성의 
자유와 그 힘의 확인일 경우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흔해 빠진 이야기지만 - 그리고 이것
은 사실로 보이지만 - 매춘부는 정부에게 얻어맞는 것을 자랑스럽게 느낀다. 그러나 자기
가 얻어맞고 거칠게 취급된다는 사실이 그녀를 감동시키는 것은 아니다. 의지하고 있는 
남성의 힘과 권리와 지배력에 감탄하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그가 다른 남성을 학대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하여 때때로 그에게 위험한 경쟁을 부추긴다. 그녀는 그가 자기의 환
경 속에서 인정하고 있는 가치를 지닌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남성의 자의에 기꺼이 복종하는 여성은, 또한 자기에게 가해지는 압제속에 최고의 자유
의 증거를 발견하고 경탄한다. 만일 어떤 원인으로 애인의 위엄이 실추되었을 경우, 그 
남성의 완력이나 자의가 갑자기 혐오스러워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애인이 신성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런 완력이나 자의는 전혀 가치가 없다. 타인의 자유의 먹이가 되어 있
는 자기를 실감하는 것은 도취할 만한 일종의 기쁨이다. 타인의 위압적인 의지에 의해 자
기가 확립되어 있다는 것은 실존자에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인간은 언제나 같은 피부 
속에 살고 있으면 따분해진다. 맹목적인 복종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적극적인 변화의 

유일한 기회이다. 여성은 애인의 덧없는 꿈이나 그의 명령에 의해 노예,여왕,꽃,암사슴,
매춘부,하녀,시신,반려,어머니,자매,어린이로도 변한다. 여성은 복종과 같은 성질을 간직
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릴 때까지 이런 변신에 즐겁게 순응한다. 사랑에 있어서도 
색정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마조히즘은 타인과 자기자신에게 실망하여 불만을 느끼는 
여성이 접어드는 길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자기포기라는 자연스러운 경향은 
아니다. 마조히즘은 무참히 상처를 입고 실패한 모습으로 자의식의 존재를 계속하려고 한
다. 사랑은 본질적인 주체를 위해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인간적인 사랑의 최고의 목적은 종교적인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상대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가치의 척도와 세계의 진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의식 속에 있다. 그
러므로 그에게 봉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성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되어 지기자신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녀는 그가 읽는 책을 읽고, 그가 좋아하는 그
림이나 음악을 좋아하고 그와 함께 보는 경치, 그의 사상에만 흥미를 갖는다. 그녀는 그
의 우정이나 적의, 의견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삼는다. 자기 마음에 묻고, 들으려고 하는 
것은 그의 대답이다. 자기 폐 속에 그가 이미 호흡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어한다. 그녀
가 그에게 받지 않는 과일이나 꽃에는 향기도 맛도 없다. 그녀의 공간감각조차도 바뀌게 
된다. 세계의 중심은 그녀가 서있는 지점이 아니라 애인이 있는 곳이다. 모든 길은 그의 
집에서 나와 그의 집으로 통한다. 그녀는 그의 말을 사용하고 그의 동작을 되풀이하며 그
의 취미와 그의 버릇을 몸에 배게 한다. "나는 히스클리프예요." 하고 <폭풍의 언덕>의 
캐더린은 말한다. 이것은 사랑하는 모든 여성의 외침이다. 그녀는 애인의 또다른 몸이고 
반영이며 그의 분신이다. 그녀는 곧 그 남자이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의 세계는 우연성 속
에 붕괴되는 대로 방치한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은 그의 세계 속이다.
  사랑하는 여성의 최고의 행복은 사랑하는 남성에 의해 그 남성의 일부로 인정되는 것이
다. 그가 '우리들'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녀는 그에게 결합되어 그와 일심동체가 되며 그
의 지위를 나눠갖고, 그와 함께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군림한다. 그녀는 이 즐거운 '우리
들'이라는 말을, 지나치다고 생각될 만큼 자주 되풀이한다. 세계에서 필요한 목적을 향해 
자기를 버리고, 그녀에게 필요한 세계를 회복시켜주는 절대로 필요한 존재에게 필요한 존
재가 됨으로써, 그녀는 자기를 포기하면서 놀라운 소유를 체험한다. 사랑하는 여성에게 
그처럼 큰 기쁨을 주는 것은 그런 확실이다. 그녀는 신의 경지에까지 도달한 듯한 느낌을 
갖는다. 훌륭한 질서를 갖는 세계에서 자기의 위치가 확실히 주어진 이상, 그것이 두번째 
위치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녀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한,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이상,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녀는 안식과 행
복을 느낀다. 위고의 그늘에 있는 쥘리에트 드루에의 운명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예로운 행복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남성은 누구를 막론
하고 신이 아니다. 신비가인 여성과 눈에 보이지 않는 신과의 관계는 그녀의 뜨거운 신앙 
하나에 달려 있다. 그런데 신격화된, 신이 아닌 남성은 바로 눈앞에 있다. 연애하는 여성
에게 고민이 생기는 것은 거기서이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그녀의 숙명은, 쥘리 드 레
스피나스의 유명한 말 속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나의 생애의 단 한 순간에도, 그대여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남성에게도 사랑에는 역시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은 오래가지 않거나 가슴
을 에는 듯이 심하지는 않다. 뱅자맹 콩시탕은 쥘리에트 레카미에 때문에 죽고 싶은 심정
이었다. 그런데 1년쯤 지나자 깨끗이 잊어버린다. 스탕달은 몇 해를 두고 메틸드를 못 잊
어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인생을 파괴한다기보다는 그의 인생에 아름다움을 가미하는 
슬픔이었다. 이와는 달리 여성은 비본질적인 존재로서 남성에게 완전히 의지하여 살고 있
기 때문에, 그럴 때에는 마음속에 지옥을 만들게 된다. 모든 연애하는 여성은 안데르센이 
쓰고 있는 것처럼, 사랑을 위해 물고기의 꼬리를 인간의 다리와 교환하여, 걸을 때마다 
바늘로 된 산이나 타오르는 불 위를 밟는 느낌이었다는 인어의 이야기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여자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남자에게 여자는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숭배하는 남성에게 자신을 바치는 여성을 정당화하
는 것은 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소유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우연성, 즉 상대방의 결점이나 한계, 선천적인 무상성을 그대
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구제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인간 상호간의 관
계이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상대방을 우상화하는 연애는 사랑하는 남성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거짓말인데 이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곧 드러난
다. "그 남자는 당신이 그처럼 끔찍이 사랑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하고 주
위 사람들은 연애하는 여성의 귀에 소근거린다. 연애하는 여성이 기베르백작(레스피나스 
양이 열렬히 사모하던 상대)의 창백한 얼굴을 운운할 때, 후세 사람들은 동정어린 미소를 
금치 못한다. 자기 우상의 결점이나 평범함을 발견하는 것은 여성에게 참으로 괴로운 환
멸이다. 콜레트는 - <방랑의 여인>이나 <나의 수업시대>에서 - 이 쓰라린 고통에 대해 자
주 언급하고 있다.
  그 환멸은 아버지의 위신이 무너지는 것을 본 어린이가 느끼는 실망보다 더욱 비통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기의 존재 전체를 바친 이 남성은 바로 자기자신이 선택한 사
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선택된 남성이 깊이 사랑할 만한 남성인 경우에도, 그는 요
컨대 지상의 인간이다. 지고의 존재 앞에 고개를 속인 여성이 사랑하고 있는 상대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그녀의 가치를 '괄호'속에 넣기를 거부한다. 즉, 가치란 인간적인 존재 
속에 원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심각한 착각에 사로잡혀 있
다. 그런 착각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사랑하는 남성 사이에 장벽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성 앞에 향을 피우고 머리를 숙이지만, 그에게 친구는 아니다. 그녀
는 남성도 이 사회에서 위험에 처해 있으며, 그의 계획이나 목적도 자기자신과 마찬가지
로 손상되기 쉽고 연약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남성을 신앙이나 
진리처럼 간주함으로써, 그녀는 망설이게 되고 불안을 느끼는 그의 자유를 오인하고 있
다. 사랑하는 남성에게 인간의 척도를 적용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으로 여성의 많은 모순
이 설명된다. 여성이 애인에게서 어떤 호의를 요구하고 그가 그것을 들어주었다고 치자. 
그때 그는 너그럽고 부자이고 훌륭하고 당당하고 신격화된다. 만일 거절하면, 그는 곧 인
색하고 잔인한 악마나 짐승 같은 존재로 생각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것 
같다. '좋소'라는 대답이 대단한 것으로 생각되어 여성을 놀라게 한다면 '안 돼요'라는 
거절에 놀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거절이 그처럼 남성의 추악한 이기주의를 표시하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좋소'를 그처럼 찬미하는 것일까? 초인과 비인간 사이에 인간을 위
한 장소는 없는 것인가?
  땅에 굴러떨어진 신은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속임수이다. 사랑받는 남성으로서 실제로 
자기가 사람들이 추앙하는 왕이라는 것을 입증하든지 아니면 자기가 탈취자임을 자수하든
지 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는 숭배를 받지 못하면 걷어챈다. 사랑하는 남성의 
이마에 에워싸인 영광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여성은 그의 모든 약점을 부인한다. 그녀가 
그에게 빌려준 이미지와 그가 일치하지 않으면 그녀는 실망하여 화를 낸다. 만일 그가 피
로를 느끼거나 경솔한 짓을 했을 때, 심한 허기나 갈증을 느낄 때, 그리고 잘못을 저지르
거나 자기모순에 빠졌을 때, 그녀는 그를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단정하고 불만을 느낀
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자기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은 일체 못하게 
한다. 그녀는 자기 재판관을 재판하고, 그가 그녀의 지배자로 어울리게 하기 위해 그의 
자유를 빼앗는다. 그녀가 그에게 바치는 숭배는, 현존보다는 부재에 의해 더욱 만족을 느
끼는 경우가 많다. 살과 뼈로 된 인간과 대결하지 않기 위해 죽었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영웅에게 몸을 바치는 여성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살아 있는 인간은 
숙명적으로 그녀들의 꿈을 깨뜨려버린다. 그래서 염세적인 표현이 나오게 된다. '수려한 
왕자님을 믿어서는 안된다. 인간은 단지 가엾은 존재이다.' 거인이 되기를 소망하지 않는
다면 인간이 난쟁이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정열적인 여성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저주의 하나는 이것이다. 처음에 지녔던 그녀의 
관대한 마음은 곧 강한 요구로 변하기 쉽다. 그녀는 일단 타자 속에 소외되었다가 다시 
자기를 되찾으려고 한다. 그녀에게는 스스로 존재를 보유하고 있는 타자를 자기쪽으로 끌
어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남성에게 자기를 완전히 바친다. 그런데 남성이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을 갖추려면 언제나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자기를 비워둬야 한
다. 그녀는 그에게 모든 순간을 바친다. 그래서 그는 그 순간마다 그녀의 눈앞에 있어야 
한다. 그녀는 그를 통해서만 살려고 한다. 그는 그녀를 살게 하기 위해 몸을 바쳐야 한
다.
  
  "때때로 나는 당신을 어리석게 사랑해요. 그리고 그런 순간마다 나는 당신만을 생각하
고 있는데, 당신이 나만 생각하는 것이 어째서 부당한건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요." 하고 다규 부인은 리스트에게 쓰고 있다.
  
  그녀는 그에게 전부이고자 하는 소원을 꾹 참으려고 한다. 레스피나스양의 한탄에도 이
와 비슷한 호소가 있다.
  
  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즐거움이 없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당신이 알아줬으
면! 당신이 놀든 일을 하든 몸을 움직이고 있기만하면 그것으로 족해요. 나의 행복은 당
신이에요. 오직 당신뿐이에요. 당신을 만날 수 없거나 한평생 당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나는 살고 싶지 않아요.
  

  처음에 사랑을 하는 여성은 애인의 소원을 만족시키기에 열중했었다. 그녀는 - 마치 전
설에, 자기 직업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저기 방황하고 다닌 소방수처럼 - 상대방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것을 일깨우기에 여념이 없다. 만일 그녀가 여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녀는 자기를 쓸모없는 비참한 인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상대방 애인은 실제로 느끼지
도 않는 뜨거운 정열을 가장한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녀는 자기를 노예로 만듦으로써 그를 
사슬로 묶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연애의 또 하나의 거짓말이다.
  많은 남성들 - 로렌스나 몽테를랑 - 이 반감을 갖고 이것을 지적해 왔다. 연애는 폭군
적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주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뱅자맹 콩스탕은 <아돌프>에
서 한 여성의 헌신적인 정열이 오히려 남성을 구속하는 사슬이 되는 경우를 생생하게 묘
사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 희생을 나에게 받아들이게 하는 데 열성적이어서 자기가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지도 일일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고 엘레오노르에 대해 잔인
하게 말하고 있다. 받아들이는 것은 실제로는 애인을 속박하는 것이며, 그는 주는 사람으
로 보이는 이득조차 얻지 못한다. 여성은 자기가 이것저것 억지로 떠맡기는 무거운 짐을 
남성이 고맙게 받아주기를 요구한다. 그녀의 전제는 끝이 없다. 연애하는 남성도 전제적
이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면 만족한다. 그런데 여성의 헌신에는 한이 없다. 
애인을 믿고 있는 남성은, 그녀가 자리를 비우거나 그에게서 떠나 일을 하는 것을 불쾌하
게 여기지 않고 승낙한다. 그녀가 자기 것임을 확신하면 그는 사물보다는 자유를 소유하
는 것을 좋아한다.
  이와 반대로 여성에게 애인의 부재는 언제나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괴롭다. 그는 하나
의 목표이며 재판관이다. 그가 다른 여성에게 한눈을 파는 것은 그녀를 배반하는 것이 된
다. 그가 보는 모든 것은 그녀에게서 훔친 것이다.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녀는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를 빼앗겨버린다. 설사 그가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더라도 그가 자기 
마음대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면 그 역시 그녀를 버리고 그녀를 배반하는 것이 된다. 
그녀는 그가 잠드는 것조차 싫어한다.
  보들레르는 잠자는 여성에게 감동한다. "가엾은 애인이여, 그대의 아름다운 눈은 피로
한가." 프루스트 알베르틴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그 이유는 남성의 질투는 
단지 독점적인 소유의 의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성이 어린이처럼 안심하고 
순진하게 잠들어 있을 때에는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 남성에게는 그 확신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신이나 지배자는 내재의 안식에 빠져서는 안 된다. 초월이 붕괴된 모습
을 여성은 적의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남성의 동물적인 나태를 혐오한다. 벌
써 그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 존재하고 있는 우연성에 몸을 맡긴 육체를 혐
오한다. 비올레트 르뒷은 이런 감정을 다음과 같이 힘있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잠들어 있는 남자를 미워한다. 그들의 항복한 모습을 나는 참을 수 없다. 그들의 
무의식적인 안일이, 그들의 지각 마비가, 그들의 맹목적인 얼굴이, 그들의 당연한 듯한 
포식이, 그들의 무능한 긴장을 미워한다... 나는 잠들어 있는 내 남자의 입에서 뿜어져나
오는 장밋빛 거품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기다렸다. 나는 그에게서 존재의 거품 이상을 
바라지 않았으나 그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밤의 눈시울이 죽음의 눈시울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나이가 사나울 때에는 나는 그의 맑은 눈시울 속에 숨어버렸다. 일
단 수면이 시작되면 그 눈시울은 냉혹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휴식을, 자기를 위해 만들 수 있는 그의 잠든 모습을 나는 미워한다. 나는 그의 꿀 
같은 이마를 미워한다. 그는 자기 안에서 휴식하기에 바쁘다.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뭔
가를 되찾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은 날개를 치면서 날아올랐다. 우리 두 사람의 기질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함께 지상을 떠나 기어오르
고 살피고 기대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도달하고 고민하고 승리하고 또한 패배했다. 그
것은 진실한 감정이었다. 우리는 허무라는 새로운 감정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당
신은 잠들어 있다. 당신의 소멸은 공정하지 못하다.
  잠들어 있는 나의 남자가 몸을 꿈틀거리자 나의 손은 부지중에 정액으로 축축해진다. 
그것은 숨막히게 하는 난폭한 종자가 들어 있는 50개의 주머니를 간수하는 곳간이다. 잠
들어 있는 사나이의 고환이 내 손에 떨어졌다... 나는 종자의 작은 주머니를 손에 쥐고 
있다. 경작된 밭을, 손질한 과수원을, 변화된 수력을 못박힌 4개의 널빤지를 끌어올린 그
물을, 나는 손에 쥐고 있다. 과일,꽃,선택한 짐승을 쥐고 있다. 메스,가위,바늘,권총,핀
셋을 쥐고 있다. 그래도 아직 나의 손은 가득차 있지 않다. 잠들어 있는 세계의 정자는 
영혼의 연장인 밧줄에 불과하다.
  당신이 잠들어 있는 때에는, 나는 당신을 미워한다.
  
  신은 잠들어서는 안 된다. 잠들면 신은 진흙이 되고 육체가 된다. 신은 눈앞에서 사라
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창조물은 무로 돌아가고 만다. 남성의 잠은 여성에
게 탐욕이며 배반이다. 남성도 때로는 잠든 애인을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를 포용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흔들어 깨우는 것은, 다만 그를 잠들지 
않게 하기 위해, 그가 자기에게서 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에게 그녀 이외의 것을 생
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를 그곳에, 그 방 안에, 침대에, 그녀의 품에 - 마치 성궤 속
의 신처럼 - 가둬두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여성의 소원이다. 여성은 일종의 형리이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을 자기의 수인으로 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
로 연애의 처참한 모순의 하나이다. 수인이 되어버리면 신은 그 신격을 빼앗긴다. 여성은 
자기의 초월을 남성에게 위탁하여 그것을 구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남성은 초월을 전세계
로 가져가야 한다. 만일 두 연인이 불타는 정열에 삼키워버리며, 자유는 모두 내재 속에 
타락하여 두 사람에게 죽음 이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게 된다. 이것이 <트리스탄과 이졸
데>의 신화가 갖는 의미의 하나이다.
  오직 상대만을 목표로 삼고 있는 애인끼리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들은 권태로 죽게 된
다. 마르셀 아를랑(현대 프랑스의 작가)은 <타향>속에서 자신을 멸하는 연애의 이 완만한 
괴로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여성은 이 위험을 알고 있다. 질투의 발작을 일으켰을 경
우를 제외하고, 그녀는 남성에게 그가 계획하고 행동하기를 원한다. 만일 그가 눈부신 활
동을 전혀 하지 않으면 그는 이미 영웅이 아니다. 새로운 무용을 발휘하기 위해 출발하는 
기사는 애인을 화나게 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녀의 발 밑에 평안히 앉아 있으면 그녀
는 그를 경멸한다. 이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이다. 여성은 남성을 완전히 

소유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소유가 가능한 모든 조건 또한 뛰어넘기를 요
구한다. 자유는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피안의 인간'인 실
존자를 여기에 가둬두기를 원한다. 그녀는 그런 시도가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
는 당신을 사랑의 이상대로, 즉 앞뒤를 재지않고 반 미치광이가 되어 정신없이 절망적으
로 사랑하고 있어요." 하고 쥘리 레스피나스 양은 쓰고 있다. 우상을 숭배하는 듯한 연애
는 분명한 이성을 지닐 때 정말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애인에게 영웅,거인,반신이 되기
를 요구하는 여성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 바치지 않도록 남성에게 요구하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그를 완전히 휩싸지 않으면 행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정열, 즉 자기의 모든 권리의 완전한 포기는 바로 이와 동일한 감정이 또 하나
의 성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왜냐하면 만일 두 사람이 연애로 인하
여 자기 자신을 포기하면, 그야말로 공허의 공포를 느끼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소
유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를 붙들어 주는 인간, 자기 자신을 내던지지 않
고, 연애중에 자기의 자아를 풍부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을 요구한다... 여성은 자기
를 내던지고, 남성은 그것으로 자기를 풍요롭게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적어도 사랑하는 남성을 풍요롭게 하는 데서 기쁨을 찾을 수 있다. 그녀는 그에
게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를 그에게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려고 한다. 필요
성에는 단계가 없다. 만일 그가 '그녀 없이는 못 산다'면, 그녀는 자기를 그의 귀중한 존
재의 기반처럼 생각하고 여기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이끌어낸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를 
섬기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그도 그녀의 봉사를 고맙게 여겨야 한다. 헌신의 일반논리에 
따라 증여는 요구로 바뀐다(<피뤼스와 시네아스>에서 이것을 지적했다). 소심한 여성은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그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이 정말로 나인가? 남성은 그녀를 소중히 
여기고, 특별한 애정과 욕망으로 인해 더욱 그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여자
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여성은 대부분이 맹목적이다. 그녀는 단수속에 일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인
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남성은 그녀들에게 쉽사리 이 환상을 갖게 한다. 처음에는 그도 
그 환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남성의 정욕 속에는 때때로 시간에 도전하는 듯한 열광적
인 면이 있다. 그가 그 여성을 원하는 순간에는 그도 그녀를 정열적으로 대하고, 그녀 이
외에는 안중에 없다. 그 순간은 확실히 하나의 절대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의 절대이
다. 속아넘어간 여성은 영원을 지향한다. 그녀는 남편의 포옹으로 신성화되어 자기가 지
금까지 줄곧 신성하여 신에게 바쳐졌던 것처럼 생각한다. 그것도 그녀 혼자서 말이다.
  그러나 남성의 정욕은 격렬하지만 일시적이다. 일만 충족되면 곧 사라진다. 한편 여성
이 그의 포로가 되는 것은 대개 연애 이후이다. 모든 삼류소설이나 유행가의 주제는 이것
이다. "젊은 사나이가 지나가고, 처녀는 즐겁게 노래부르고 있었다... 젊은 사나이는 즐
겁게 노래부르고 있었다. 처녀는 울고 있었다." 남성이 지속적으로 그 여성과 결합되어 
있을 경우에도 그녀가 반드시 그에게 필요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녀가 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필요이다. 그녀의 자기포기는, 그 권위를 회

복한다는 조건에서만 비로소 그녀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상호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녀는 고민하거나 자기를 속여야 한다. 대개 그녀는 쉽게 거짓말에 
집착하게 된다. 그녀는 남성의 사랑을 그녀가 그에게 갖고 있는 사랑의 정확한 반영인 것
처럼 사랑한다. 그래서 정욕을 사랑으로, 발기를 정욕으로, 연애를 신앙으로 생각한다. 
남성에게 그녀에 대해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한다. 나를 사랑해? 어제와 다름없어? 언제까
지나 사랑해 줄 거야?
  그녀는 그가 진지한 대답을 할 여유가 없을 때나 그런 대답이 불가능한 장소를 택하여 
교묘히 질문한다. 포옹하고 있을 때나 병의 회복기, 흐느껴울 때나 역의 플랫폼 등에서 
그녀는 당돌하게 질문한다. 답변을 이끌어내면 그녀는 도깨비의 목이라도 자른 것처럼 의
기양양하지만 답변을 얻지 못하면 그녀는 침묵으로 말을 대신한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
성은 대개 어느 정도 편집증적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여자 친구는 멀리 있는 애인에
게서 오랫동안 소식이 끊기자 이렇게 말했다.
  "헤어질 생각이라면 편지를 보냈을 거예요. 헤어지자는 말을 하기위해." 이윽고 그에게
서 편지를 받았을 때에는, "정말로 헤어질 생각이라면 편지 같은 건 보내지 않을 거예
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수기를 읽어도 어디서부터 병적인 착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공포에 떠는 여성의 펜에 의해 쓰여진 남성의 행위는 언제나 정상이 아니
다. 남성은 변절자,사디스트,억압심리자,마조히스트,악마,바람둥이,겁쟁이나 혹은 그 전
부를 합친 것이 되어, 미묘한 심리적인 설명도 미치지 못하는 행동을 한다.
  "X는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는 샘이 많아 내가 외출할 때에는 베일을 쓰라고 해요. 
그러나 그는 매우 변덕스러워 사랑을 무척 경시하기 때문에, 내가 벨을 누르면 출입구에
서 맞아줄 뿐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해요." 혹은 "Z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러
나 그는 자존심이 강해 자기가 살고 있는 리용에 와서 같이 살자는 말도 내게 하지 않았
어요. 그래도 나는 리용에 가서 그의 집에서 묵었어요. 일주일 후에, 싸우지도 않았는데 
그는 나를 쫓아냈어요. 그후에 나는 두 번 그를 만났어요. 세번째 내가 전화를 걸었는데, 
그는 이야기 도중에 끊어버렸어요. 이상한 사람이에요."
  이 불가해한 이야기는 남성의 이야기를 들어야 분명해진다. "나는 그녀를 전혀 사랑하
지 않았어요." 라거나 "나는 그녀에게 우정은 갖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녀와 함께 한 달
을 사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요." 너무 집착이 강하면 정신병으로 발전하기 쉽다. 
색정광의 공통된 특징의 하나는 애인의 행동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것
이나. 이렇게 해서, 미치광이의 착란은 언제나 현실의 저항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 정
상인 여성은 나중에는 진실에 복종하여 자기가 상대방 남성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
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알게 되기까지는 그녀도 역시 조금은 속인다. 
서로 사랑하는 경우에도 그녀는 감추려는 것이 있다. 여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남자
는 그녀가 없어도 자기를 정당화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녀가 그에 의해 정당화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영웅 혹은 단지 남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유
를 손에 넣게 되면 그에게는 아무것도 필요없게 된다. 여성이 의존을 감수하는 것은 약하
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가 어떻게 강한 남성에게서 상호의존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강한 기상을 가진 여성은 연애에서 침착성을 찾지 못할 것이다. 모순된 목표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찢기고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남성에게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될 수 없는 그녀는 귀찮고 밉살스러운 존재가 된다. 이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비극이다. 사랑하는 여성이 현명하고 그다지 완고하지 않을 경우에
는 쉽사리 체념한다. 그녀는 전부도 아니고 필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도움이 된다는 것만
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다른 여성이 그녀를 대신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
가. 그러나 현재 있는 여자는 자기라는 사실만으로 만족한다.
  그녀는 평등한 거래를 요구하지 않고 예속을 인정한다. 그때 그녀는 사소한 행복을 느
낄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계 속에서도 그 행복에는 그림자가 없지 않다. 연애를 
하는 여성은 아내보다 훨씬 괴로운 마음으로 기다린다. 아내라 할지라도 정열적으로 사랑
하는 여성은 살림살이도, 어머니로서의 용무도, 평소의 일거리도, 즐거운 놀이도 아무 가
치가 없게 된다. 그녀를 권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남편의 존재분이다. "당신이 옆에 
있지 않으면, 나는 햇볕을 보는 것도 귀찮아요. 모든 것이 생기가 없어지고, 나는 벌써 
의자 위에 벗어던진 옷가지와 마찬가지예요." 하고 세실 소바주는 결혼 초에 쓰고 있다.
  정열적인 연애가 결혼 밖에서 생겨 꽃을 피우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앞에서도 보아왔다. 
연애에 완전히 일생을 바친 사례는 쥘리에트 두루에의 경우이다. 그녀는 오직 무한정 기
다릴 뿐이다. "언제나 동일한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즉 당신을 한없이 기다리지 
않으면 안 돼요. 그리하여 나는 마치 쳇바퀴 속에 갇힌 다람쥐와 같은 모습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아, 나와 같은 기질을 타고난 여자에게 일생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얼마나 따분한 날인가! 나에게는 하루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어요. 그처럼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하루가 너무나 빨
리 지나가버린 것 같아요. 당신이 드디어 내 앞에 나타났으니까... 나는 또다시 하루가 
영원처럼 생각돼요. 나는 역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당신을 기다리는 쪽이 나으니까요."
  위고는 쥘리에트에게 부유한 보호자인 데미도프 공작과 손을 끊게 한 후에 그녀가 옛남
자친구와 어울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녀를 작은 셋방에 가둬두고 12년 동안이나 혼자서 
외출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갇혀 있는 가엾은 희생자'라고 생각하
지 않고 여전히 그의 애인인것에 만족하여 가끔 이루어지는 그와의 만남을 즐기는 데 그
쳤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나의 그리운 빅토르. 그러나 내 마음은 슬프고 고
뇌로 가득차 있어요. 당신을 만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고, 간혹 만나도 당신은 거의 내 
사람이 아녜요. 결국 이 모두가 드문 일이기 때문에 내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차게 돼요." 
하고 1841년에 그녀는 쓰고 있다.
  그녀는 독립과 사랑을 융화시키려고 꿈꾼다. "나는 독립과 노예를 동시에 원하고 있다.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으로 독립하고, 오직 연애에 대해서만 노예이고자 한다." 그
러나 여배우로서 완전히 실패한 후 그녀는 '한평생' 단지 애인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자
기의 우상을 섬기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너무나 공허했다. 위고에게 해마다 3, 4
00통 정도 써보낸 1만7천 통의 편지가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위고가 찾아오기까지 그녀
는 기다림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후궁의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하루하루가 권태
의 사막이라는 것이다. 남성이 그녀를 자기 것으로 사용하지 않을 때, 그녀는 이미 존재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연애를 하는 여성의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 그녀는 사랑
받는 여성 이외의 어떤 무엇이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 이외의 무엇도 그녀의 눈에는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그녀가 존재하기 위하여는 애인이 그녀의 곁에서 그녀만을 대해야만 한다. 그
녀는 그의 방문과 그의 욕구와 그의 각성을 기다린다. 그가 그녀의 곁을 떠나면 그녀는 
곧 다시 그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패니 허스트의 <뒷골목>이나 레이먼의 <비바람>의 여주
인공처럼 순수한 사랑의 사도나 희생자를 짓누르는 저주는 이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운명
을 자기 손으로 헤쳐나가려고 하지 않았던 인간에게 내린 가혹한 형벌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기쁨일 수 있다. 사랑하는 남성이 자기에게 뛰어올 것과 자기를 사랑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지켜보고 있는 여성에게 기다림이란 눈부신 약속이다. 그
러나 부재를 실재로 바꾸는 사랑의 오만한 도취가 지나가면 부재의 공허 속에 불안이라는 
고뇌가 혼재하게 된다. 남성은 이제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여성은 애인을 만날 때마다 놀라워하면서 그를 맞아들였다. "이제 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하고 만일 그가 이유를 물으면, "당신은 돌아오지 않아도 되니까요.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는 언제나 이제 더이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앞섰거든
요."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성이 "그는 나를 미친 
듯이 사랑해요. 그는 나만 사랑해요." 하고 말하면서 아무리 엄청난 환상을 품어도 질투
의 고뇌는 생기게 마련이다. 정열적이고 모순된 단정을 태연스럽게 하게 하는 것은 기만
의 특징이므로 자기를 나폴레옹이라고 끈질기게 생각하는 미치광이는 자기가 이발소의 사
환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혹스러워하지 않는다.
  때로는 여성이 "그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하고 자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
나 그녀는 그보다는 훨씬 많이 의심한다. 그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녀는 남자의 정열이 차츰 식어간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자기만큼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녀는 연적이 나타났다고 상
상한다. 그녀는 사랑을 자유로운 감정으로 보는 동시에 마법적인 저주로 보고 있다. 그러
므로 그녀는 자기 남자가 자유 의사에 의해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는 음모를 꾸민 여성에게 발목을 잡히고,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남자가 
지금도 자유롭게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여성이 자기에게 동화되지 않
는 한에서, 즉 그 내재성 속에서 파악한다. 그가 부부로슈(조르주 쿠르도린의 중편소설의 
주인공. 대단한 호인으로 친구나 애인에게 이용만 당한다.)를 쉽사리 농락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이 여자도 자기에게서 쉽사리 떠나갈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무척 괴롭
다. 그에게 질투는 연애와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발작에 불과하다. 질투가 심하여 살상하
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불안이 그에게서 사라지는 경우는 드물다. 질투는 그에게는 
하나의 파생물로 나타난다. 즉, 그의 일이 잘 진행되지 않거나 생활에 시달릴 때 그는 아
내에게 우롱당했다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남성을 그 타성에서, 그 초월에서 사랑하고 있는 여성은 자기가 언제나 위
험에 놓여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부재라는 배신 행위와 부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녀는 자기가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지 않다고 느끼면 질투하기 시작한다. 무리한 요구

를 하는 것은 여성의 본성이므로 이것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있는 것이다. 그녀
의 비난이나 불평은 그 구실이 어떻든간에 질투를 통해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녀는 기다
림의 초조함과 권태, 의존의 괴로움과 불완전한 존재밖에 되지 못하는 불만을 표현하게 
된다.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 때마다 그녀의 운명 전체가 위험에 처하
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자기의 존재 전체를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만일 애인의 눈길이 잠시라도 다른 여자에게 쏠리면 안절부절 못한다. 
만일 그가, 그녀도 얼마 전에 다른 남자를 오랫동안 바라본것을 채근하면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달라요." 그녀의 말이 맞다. 여성의 시선이 쏠린 남성은 그녀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증여는 여성의 육체가 침범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남성
이 탐내는 여성은 곧 바람직한, 그리고 부러워하는 객체로 변한다. 그리하여 소외된 그녀
는 '단순한 육신으로 추락한다.' 따라서 그녀는 언제나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 사
람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엇을 보고 있을까?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일시적
인 정욕이 준 것을 다른 여자의 웃는 얼굴이 빼앗아 갈 수 있다. 그녀를 '오색찬란한 불
멸의 빛'에서 현실의 어둠 속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그녀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그 사랑을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
른다. 애매한 것이든 명확한 것이든 근거가 없는 것이든 정당한 것이든, 질투는 여성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이기 때문이다. 배반이 확실하
다면 사랑을 신앙으로 삼기를 단념하거나 그 사랑을 단념해야 한다. 그것은 대단히 중대
한 일이며, 연애를 하는 여성이 결정적인 진리를 발견할 욕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머뭇
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깜짝깜짝 놀라기를 잘하는 여성은 자주 질투하여 상대방을 오해하
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쥘리에트 드루에는 위고가 가까이하는 모든 여성을 의심하는 
괴로움을 느꼈으나 위고가 8년 동안 사랑했던 레오니 비아르를 경계하는 것을 잊고 있었
다. 불만 속에서는 모든 여성이 연적이요 위험한 존재로 보인다. 여성은 사랑하는 남성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은 우애를 죽여버린다. 질투는 그녀의 고독을 심화시키
고 그녀의 의존을 더욱 거북하게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속에서 권태를 방지하는 하나의 
수단을 발견한다. 남편을 지키는 것은 하나의 과제이다. 애인을 지키는 것을 일종의 성직
이다. 행복한 사랑에 빠져 차림새를 게을리한 여성은 위협을 느끼면 다시 옷차림에 신경
을 쓴다. 화장,살림,사교술이 투쟁의 시간이 된다. 투쟁은 강장제와 같은 것이다. 승리할 
자신이 있는 동안, 여성 투사는 그 속에서 일종의 강렬한 쾌락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패
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지금까지 기꺼이 승낙한 증여를 비굴한 예속으로 변모시켜버
린다. 남성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공격한다. 여성은, 설사 오만한 여성이라도 상냥하게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 수단,신중함,간계,미소,매력,순종 등이 그녀의 최대
의 무기이다.
  나는 어느날 밤 초인종을 누른 그 집의 젊은 여자를 생각한다. 두 시간 전에 그녀와 헤
어졌을 때, 그녀는 별로 화장도 하지 않고 옷차림에도 무심한 채 어두운 눈빛을 하고 있
었다. 지금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녀는 평소의 얼굴을 회복하고 있
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두려움과 위선으로 위축되어, 밝은 미소의 

배후에서 모든 고통을 각오하고 있는 것을 간파했다. 그녀는 머리를 단정히 빗고 뺨과 입
술을 붉게 칠하고 눈이 부신 흰 레이스의 블라우스를 입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화려안 
옷은 전투의 무기이다. 안마사나 미용사는 무익하게 생각되는 손질을 손님들이 얼마나 비
장하고 진지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다. 애인을 위해 새로운 유혹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소유하고 싶어하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노력은 헛된 
일이다. 처음에 그를 유인한 또는 다른 여자가 그를 유인할지도 모르는 타자의 모습을 자
기 속에 부활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애인에게도 남편의 경우와 같은 이중의 불가능한 
요구가 있다. 즉, 그는 자기 애인이 완전히 자기 것인 동시에 타인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완전히 그의 꿈에 합치하는 동시에 그의 상상이 만들어낸 모든 것과 다르기
를, 즉 자기의 기대와 맞기를 원하면서도 예상 밖의 경이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 모순이 여성을 크게 괴롭히고 그녀에게 실패를 안겨준다. 그녀는 애인이 원하는 대
로 되려고 노력한다. 그녀들의 나르시시즘(자기애)을 확립시켜주는 연애의 초기에 참으로 
화려했던 많은 여성들이 전과 같이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느끼게 되면 일방적인 
굴욕감으로 몸서리친다. 여성은 남성에게 맹목적으로 몸을 바침으로써 처음에 그에게 매
력을 주었던 큰 자유를 잃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서 자기의 반영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충실하게 반영되면 그는 권태를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여성에게 닥치는 불
행의 하나는, 그 연애 자체가 그녀를 일그러뜨려서 그녀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이
미 이와 같은 노예,하녀,거울,메아리에 불과하다.
  그녀가 스스로 이것을 알아차릴 때 비탄은 그녀의 가치를 더욱 떨어뜨린다. 그녀는 눈
물,요구,말다툼 속에서 완전히 매력을 잃게 된다. 존재자는 행동하는 그 자체이다. 그녀
는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의식의 주체에 몸을 맡겨 자기가 하는 일은 일체 단념했다. "나
는 사랑하는 것밖에는 하지 못해요." 하고 쥘리 레스피나스 양은 쓰고 있다. <사랑뿐인 
나>라는 소설의 표제(도미니크 롤랭의 작품)는 사랑하는 여성의 표어이다. 그녀는 사랑자
체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대상을 빼앗기게 되면 그녀는 이미 아무것도 아니다.
  때때로 그녀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다. 그때 그녀는 자기의 자유를 다시 확립하고 자
기의 타성을 다시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교태를 부리기 시작한다. 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탐내게 되면, 그녀는 무뎌진 애인의 흥미를 다시 끌 수도 있다. 이것은 많은 통속
소설이 오래 전부터 써먹은 테마이다. 멀어진 애인과의 사이가 오히려 그녀에게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경우가 있다. 알베르틴은 남성의 눈앞에서 얌전히 앉아 있으며, 진부한 여
성으로 보인다. 남성에게서 떠나 있으면 그녀는 신비로운 여성으로 돌아가, 질투하는 프
루스트는 다시 그녀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조작은 미묘하다. 만일 남성이 그녀들의 의도를 간파하면 결국 그녀들은 비
굴한 노예근성을 남성의 눈에 드러내보인 것이 될 뿐이다.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남성이 그 애인을 경시하는 것은 그녀가 자기 소유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가 그녀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도 그녀가 그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부정에 의해 이 경
시,애착 중 어느 한쪽이 파괴되는 것일까? 남성이 냉담한 여성에게 화를 내어 등을 돌리
는 경우도 있다. 그녀가 자유로운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역시 그녀가 자기 
것이 되기를 원한다. 그녀는 이 위험을 알고 있다. 그녀의 교태는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

렵게 된다. 이 유희를 교묘히 연기하기란, 연애하는 여성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녀는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그 애인을 
존경하는 범위내에서 그를 속이기를 싫어한다. 속인다면 그가 어떻게 그녀의 눈에 신으로 
머무를 수 있겠는가? 설사 그녀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자기의 우상을 파괴한다. 또 
만일 지면 그녀는 파멸된다. 어디에도 제재할 길이 없는 것이다.
  신중히 연애하는 여성 - 이 두 낱말은 상반되지만 - 은 애인의 정열을 애정이나 우정, 
습관으로 바꾸려고 한다. 혹은 그녀는 견고한 유대에 의해, 즉 자식이나 결혼에 의해 자
기에게 단단히 붙잡아매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연애에 결혼의 소원이 뛰따르게 된다.
  이것은 완전한 욕망이다. 교묘한 그녀는 연애의 초기에 관용을 이용하여 빨리 장래를 
보장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계획을 열심히 추진할 경우, 그녀는 이미 애인이라고 부
를 만한 가치가 없게 된다. 사랑하는 여성은 애인의 자유를 영원히 사로잡으려고 열망하
지만 그것을 파멸하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생을 두고 자유로운 거래가 
지속되는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연애와 신앙은 파탄을 일으키기 쉽다. 레스피나스
양은 모라와의 관계에서 다행히 초기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가 싫증을 느낀 이유
는 기베르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기베르를 싫어할 차례가 되었다. 다규 부인과 
리스트의 사랑이 파탄을 가져온 것은 다음과 같은 가혹한 변증 논리 때문이었다. 즉, 리
스트를 그토록 멋있게 보이도록 했던 혈기,생명,야망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랑으로 돌아
서게 했던 것이다. 포르투갈의 수녀(유명한 사랑의 서한집 <포르투갈의 글>의 필자)는 버
림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다눈치오에게 그토록 매력을 느끼게 한 정열은 그의 바람기를 
대가로 받았다.
  애인끼리의 불화가 남성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는 남성으로서의 생활을 따로 갖고 있다. 버림을 받은 여성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
며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사람들이 전에는 어떻게 살았나요? 하고 물어도 그녀는 그
것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녀는 자기 것이었던 세계를 재로 만들어버리고 새로운 나
라를 택했으나 이제 그 나라에서 추방된 것이다. 그녀는 믿고 있던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우정을 끊어버렸다. 이제는 머리 위를 덮고 있던 지붕을 다시 잃어 그녀의 주위는 어디나 
사막이다. 그녀에게 사랑하는 남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어떻게 새로운 생활을 다
시 시작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전에 수도원으로 도피했던 것처럼 착란 속으로 도피하고 있다. 그런데 여성이 
지나치게 이성적일 경우 죽음 외에는 길이 없다. 레스피나스 양처럼 곧 죽어버리거나 아
니면 불에 태워지거나 한다. 고뇌는 오래 계속되기도 한다. 10년 혹은 20년 동안 여성이 
한 남성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오고 그녀가 마련한 제단 위에 그 남자가 계속 앉아 있을 
경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무서운 파멸이다.
  40세의 한 여자가 물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자크가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말예요." 그녀는 옷차림과 머리 모양과 화장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으나 까칠하
게 지쳐버린 얼굴로 새로운 사랑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무리였다. 한 남자의 그늘에서 20
년을 지내온 다음에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이 40이면 아직 여생이 많이 남아 
있는데.

  또 한 사람의 여성을 생각해 본다. 그녀는 고통으로 얼굴이 부어올랐는데도 아름다운 
눈과 품위 있는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양 볼에 눈물의 흔적을 남긴 채 사람들 앞에
서 잘 보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금 신은 그녀를 위해 지어낸 말을 다른 
여자에게 하고 있다. 왕좌에서 쫓겨난 여왕에게는 자기가 정말로 한 번이라도 왕국에 군
림하고 있었는지조차도 기억에서 멀어진다. 아직 젊다면 회복될 기회가 있다. 새로운 사
랑이 그녀를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때로 그녀는 유일하지 않은 것은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보다 더욱 겸손하게 거기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대개는 과거의 실패를 한
꺼번에 만회하기 위해 전보다 더욱 맹렬하게 거기에 대처해 간다. 절대적인 사랑의 실패
가 유익한 시련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여성이 자기를 되찾을 힘을 갖고 있을 경우이다.
  아벨라르(프랑스의 신학자이며 스콜라 철학자, 1079~1142)와 헤어진 엘로이즈는 표류하
지 않았다. 그녀는 수도원을 지도하며 자기를 위해 자주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
다. 콜레트의 여주인공들은 사랑의 실패로 좌절되기에는 자존심과 생활력이 너무 강했다. 
르네 메레(콜레트의 소설 <방랑하는 여자>에 등장하는 여주인공)가 일을 통하여 자기를 
구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시도(콜레트 어머니의 애칭)는 딸에게 그녀의 감정적인 
숙명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콜레트가 단지 사랑에 빠진 여자만
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타인의 손에 자기를 완전히 념겨주는 이 
관대한 실수보다 더 무서운 형벌을 초래하는 죄는 별로 없다.
  진정한 사랑은 두 자유가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때에는 
연인이 서로 상대방을 자기 자신처럼 또는 타자처럼 느끼고, 어느 쪽에서도 우월을 포기
하지 않고 또 서로를 불구로 만들지 않으며 함께 세계 속에 가치와 목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서로에게 사랑은 자기를 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조르주 귀스도르프는 <자기 인식>이라는 저서에서 남성이 사랑에서 요
구하는 것을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연애는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우리를 자기의 눈에 나타나게 한다. 
자기 이외에, 자기에게 보완이 되는 것과 접촉함으로써 자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인식의 
형태로서의 연애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광경 속에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대지를 보여
준다. 여기에 큰 비밀이 있다. 세계는 타자이고 나도 타자이다. 나만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맙게도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
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의식속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청년에게 연애가 갖는 중요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스탕달이나 말로가 "나도 타자이다." 
라고 말하게 한 기적에 얼마나 놀라고 있는가는 앞에서 이미 보아왔다. 그러나 귀스도르
프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남성은 여성에게, 그녀 자신으로부터, 그녀 자신에게 불가결한 
중개자가 되고 있다." 고 쓰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여성의 상황은 남성
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은 타자로 나타나지만 그는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 있고, 그
의 새로운 양상은 그 인격의 전체에 통합되어버린다. 여성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녀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대자존재로서 존재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목적을 향해 자기를 투기하며 매개물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집단을 향
해 자기를 초월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말로가 쓰고 있는 기요와 메이(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관계처럼 대등한 연애가 가능하게 된다.
  루소에 대한 바랑 부인이나 셸리에 대한 레아(콜레트의 소설 <세스>의 등장인물)처럼, 
여성이 남성적이고 지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여성
은 자기를 타자로만 인정하고 있다. 그녀의 대타자는 자신의 존재 자체와 혼동되어 있다. 
사랑은 그녀에게 자기로부터 자기로의 중개수단이 아니다. 주체적인 실존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성이 창조한 여자애인 속에 잠겨 있다. 그녀의 구제
는 그녀를 창조해냈고 또한 한순간에 소멸시킬 수도 있는 이 전체적인 자유에 완전히 의
존해 있다. 그녀는 분명히 알지 못하고 또 확실한 의지도 갖지 못한 채 자기의 운명을 손
아귀에 쥔 인간 앞에서 벌벌 떨면서 일생을 보낸다. 자기 자신의 운명을 불안한 듯이 무
기력하게 지켜보는 타자에게 맡겨져서 위험에 처해 있다. 본의 아니게 폭군이 되고 잔인
한 인간이 된 그 타자는 그녀와 그의 소원에 어긋나 적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
랑하는 여성은 바라고 있던 결합 대신에 가장 쓰라린 고독을 느끼고 합의 대신 흔히 증오
를 경험하게 된다. 연애는 여성에게 운명적으로 의존적인 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려
는 절박한 시도이다. 그러나 설사 동의한다고 하더라고 의존하는 삶은 오직 두려움과 굴
욕 속에서만 영위되는 것이다.
  연애는 여성에게 최고의 목적 달성이라고 남성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해왔다. "여성답게 
사랑함으로써 여성은 점점 깊게 여성이 된다"고 니체는 말했다. 그리고 발자크는 "높은 
차원에서 남성의 생활은 명예이고, 여성의 생활은 연애이다. 마치 남성의 생활이 끊임없
는 행동인 것처럼 여성의 생활은 끊임없는 헌신이어야만 남성과 대등할 수 있다"고 말했
는데, 이것도 하나의 잔인한 속임수이다. 그녀의 헌신을 남성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
문이다. 남성은 그가 요구하는 무조건의 헌신도 그를 오만하게 하는 우상숭배와 같은 연
애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자기에게 주어지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상관없
는 조건하에서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남성은 여성에게 달라고 한다. 그런데도 그녀가 주
면 귀찮게 여긴다. 그녀는 자기의 헛된 증여에 당혹감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자기가 무
익한 존재임을 알고 난처해 한다.
  여성이 연약한 처지에서가 아닌 강건한 입장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를 발견
하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를 확립하기 위해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오
면, 그때 비로소 연애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샘이 되어 치명적인 위험이 사라질 것
이다. 그때까지는, 연애는 여성적인 세계에 갇혀 있는 여자, 상처를 받아 자립할 수 없는 
여자에게 부담이 되는 저주를 가장 감동적인 형태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에게 바
람직한 것은 하나도 생산하지 못하는 감옥과 같은 사랑을 남성은 오히려 최고의 구제책으
로서 권고한다. 이런 운명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랑의 순교자들이 증언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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