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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성숙기에서 노년기로

by Frais Feeling 2020. 7. 27.

  여자의 일생은―여자는 아직도 암컷의 직능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남자의 일생에 비
하면 훨씬 더 생기적인 운명에 지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운명의 곡선은 남성의 그것에 비
해 고저가 더욱 심하고 연속되어 있지 않다. 여자의 일생의 각 시기는 평온하고 무사하다. 
그러나 한 시기에서 다음시기로 옮겨갈 때에는 위험이 고조되어, 남자의 경우보다 훨씬 결
정적인 위기를 조성한다. 사춘기와 첫 성적 경험과 월경폐쇄가 그것이다. 남자가 줄곧 일
관되게 나이를 먹어가는 데 비해, 여자는 갑자기 그 여자다움을 빼앗기게 된다. 아직 젊은 
시기에 그녀는 성적 매력과 수태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 두 가지에서는 사회와 자기 자
신에 대해, 존재의 의미와 행복해질수 있는 기회를 끌어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후로 그
녀는 미래를 빼앗긴 채 성인이 된 생애의 절반을 살아가야 한다.
  '위험한 연령(갱년기)'의 특징은, 몇 가지 기관의 고장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고장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지닌 상징적인 가치 때문이다. 자기의 여자다움에 모든 
것을 걸고 있지 않는 여자들에게는, 이 위기는 그다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집 안팎
에서 고된 일을 하는 여자들은, 월경의 굴욕이 사라진 것을 안도감으로 맞이한다. 끊임없
이 임신에 대한 위협을 받고 있는 농부의 아내나 노동자의 아내는 그제서야 이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뻐할 정도이다. 이 경우에도―이밖에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여자의 
병은 육체 자체로부터 비롯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녀가 그것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데서 
온다고 말할 수 있다. 보통, 생리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전에 정신적인 비극이 시작되고 생
리현상이 다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 비극이 끝난다.
  확실한 고장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여자는 늙는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성숙
한 남자에게는 연애보다 더 중요한 사업이 있다. 성욕은 젊었을 때처럼 심하지 않다. 그리
고 남자는 물체로서의 수동적인 가치가 요구되지 않으므로, 얼굴 모습이나 육체가 변해도 
그 매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는 달리 여성은 35세쯤 되어야 겨우 비로소 
모든 억제를 극복하고 색정적 개화에 도달한다. 여자의 정욕이 더욱 심해져서 이것을 악착
같이 채우고 싶어하는 것도 이 나이이다. 그녀는 자기가 지닌 성적 가치에 남자보다 훨씬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 남편을 붙잡아두기 위해서, 그리고 여자가 종사하는 대부분의 
직업에서 좋은 보호자를 얻기 위해서는, 남자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여자는 남성을 통해서만, 세계에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남자를 더 이상 붙잡을 수 없게 
되면 자기는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으로 그녀는 자기와 하나가 되어 있는 이 육체가 무너
져가고 있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면서 괴로운 듯이 자문한다. 그녀는 저항한다. 머리 
염색, 피부 정형, 화장술등은 그녀의 청춘을 얼마간 연장시키는 데 불과하다. 적어도 그녀
는 거울을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과정이 드디어 시작되어, 젊
은 시절에 쌓아올린 누각이 자기 속에서 무터져 가려고 할 때, 그녀는 죽음의 숙명 자체에 
접한 느낌을 가지기 시작한다.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자기의 아름다움과 젊음에 심취되었던 여성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자는 자기 자신의 일을 남달리 걱정하고 있으므
로, 언젠가는 지불기일이 올 것을 예상하여 미리 피난처를 마련한다. 물론 그녀도 자기의 
파괴를 괴로워한다. 그러나 적어도 불의의 기습을 당하지 않고 재빨리 적응해 간다. 자기
를 망각하고, 헌신적으로 희생해온 여자 쪽이 훨씬 갑작스러운 계시에 당황하게 된다. '나
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데 이 지경이 되어버렸어!'
  그때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하는 큰 변화가 그녀에게 일어난다. 그녀는 피난처에서
마저 쫓겨나 어찌할 바를 모른다. 갑자기 외ㅣ톨이가 되어버린 자기 자신과 마주친다. 갑
자기 경계선에서 밀려나버린 그녀는 헛되이 살아남은 것 같은 생각이 들 뿐이다. 이제 육
체에는 희망이 없다. 그녀는 이 새로운 전도 앞에서 과거를 되돌아본다. 한 금을 그어 결
산할 때가 온 것이다. 그녀는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결산한다. 그리고 인생이 자기에게 부
과한 비좁은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이 짧은 생애를 앞두
고, 안타까운 미래 앞에 선 젊은 처녀와 같은 행동을 취한다. 
  그녀는 자기의 유한성을 거부한다. 그녀는 가난한 생활에 비해 자기의 인간성은 매우 풍
부한 것으로 생각한다. 여자로서 수동적으로 숙명에 말없이 따라온 것을, 기회를 빼앗기고 
기만당하여 부지불식간에 청춘 시절을 흘려보내고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라고 생각
하게 된다. 남편이나 환경이나 일과가 자기에게 부적당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남
들이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보통사람 이상으로 뛰어난 여자라는 생
각 때문에 주위로부터 고립된다. 그녀는 마음속에 비밀을 간직한 채 갇혀 있다. 그 비밀이

야말로 그녀의 불행한 심경을 푸는 신비한 열쇠이다. 그녀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가능성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려고 한다. 그녀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해력이 많은 마음의 상대
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자기의 심정을 끝없이 토로하기도 한다. 밤낮 없는 후회와 비탄이 
되풀이된다. 젊은 처녀가 자기 미래의 모습을 가상하는 것처럼 그녀는 자기의 과거를 '그
럴 수 있었을'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자기가 놓친 기회를 상기
하고 아름다운 회상에 잠긴다.
  H.도이치가 인용한 여성의 경우를 보면, 그녀는 젊어서 불행한 결혼을 청산하고, 두번째 
남편과 오랫동안 평온하게 살아왔으나 45세 때 첫남편을 몹시 그리워하여 우울증에 빠졌
다. 그녀는 어렸을 때와 젊었을 때의 흥미가 재현되어 당시의 이야기를 한없이 되풀이했
다. 부모와 자매, 소꼽친구들에 대해 잠자던 그리움이 고개를 치켜들었던 것이다. 때로는 
멍하니 우울한 공상에 잠기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실패한 생활을 과거의 추억을 통해 
단숨에 회복하려고 한다. 가련한 운명과는 대조적으로 자기 속에서 발견한 이 훌륭한 인품
을 자랑하고 과시하고 그 가치를 강조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경험에 의해 성숙해진 그녀는, 드디어 자기가 인정받을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재
기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먼저 비장한 각오로 노력을 하여 시간을 정지시키려고 한다. 모
성적인 여자의 경우는 아직 자기에게 아이를 낳을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생명을 다시 
한번 창조하고 싶어한다. 한편 육체적인 여자의 경우에는 새로운 애인을 정복하려고 한다. 
요염한 여자는 전보다 더욱 남자의 마음에 들려고 한다.
  그녀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이 이처럼 젊었다고 느낀 적이 그 전엔 한 번도 없었다
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는 시간의 흐름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
려고 노력한다. 그녀들은 옷을 젊게 입기 시작하고, 앳된 표정이나 행동을 위한다. 나이든 
여자는 자기가 색정적인 대상이 못 되는 것은 단지 자기 육체가 이제는 남에게 신선감을 
주지 못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의 과거와 인생 경험이 싫든 좋든 자신을 한 인격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자기를 위해 싸우고 사랑하고 원했고 괴
로워하고 즐거워했다. 이러한 자주성은 남자에게 위협이 된다. 그녀는 자기의 자주성을 부
정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유난히 여자다움을 과장하고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향수를 뿌려
서, 자기를 매력 있고 우아한 여자가 되게 하려고 한다. 그녀는 앳된 목소리로 말하고 순
진한 눈빛으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처녀시절의 추억을 회상한다. 그녀는 말하는 대신
에 새처럼 재잘거린다. 손뼉을 치면서 깔깔댄다. 그녀는 진지한 마음으로 이런 연극을 한
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갖게 된 새로운 흥미로 말미암아, 낡은 습성을 벗어버리고 새 
출발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출발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유롭게 효과적으로 투신할 만
한 목적을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조바심은 공허하고 지리멸렬한 형태
를 취하고 있다. 과거의 잘못과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상하는 이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
다. 그녀는 특히, 늦기 전에 어렸을 때나 처녀시절의 소원을 모두 실현하려고 한다. 어떤 
여자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고, 어떤 여자는 오락이나 창작이나 여행을 시작한다. 또 어떤 
여자는 스키나 외국어를 배우기도 한다. 그녀는 지금까지 거부해 왔던 그 어떤 것도―역시 
늙기 전에―받아들이려고 한다. 지금까지 억제했던 남편에 대한 혐오감을 분명히 드러내

고, 그의 품에 안겨도 불감증을 느낀다.
  또는 이와 반대로 지금까지 억제해온 정열에 빠져 격렬한 요구로 남편을 궁지에 몰아넣
는 여자도 있다. 그녀는 어렸을 때 포기했던 마스터베이션(자위행위)을 다시 하기 시작한
다. 그리고 동성애적인 성향―거의 모든 여성에게 유충과 같은 형태로 잠재해 있는―이 분
명히 드러난다. 때로는 그 경향이 자기 딸에게 쏠리기도 한다. 그러나 동성친구를 상대로 
이 감정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롬 랜도는 그의 작품 〈성, 인생, 신앙〉에서 자신이 들
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X부인은 이제 50세를 앞두고 있는 여자였다. 25년 전에 결혼하여 장성한 자식이 셋이난 
되고, 시의 사회자선단체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 런던에
서, 자기보다 10세 연하인 같은 자선사업에 종사하는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고, Y양은 그녀에게 다음 여행 때에는 자기 집에 묵으라고 권했다. X부인은 
이 초대에 응했다. 그리고 머무른 지 이틀째 되는 날 저녁이 그녀는 Y양을 열렬히 포옹하
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거
듭 변명했다. 그녀는 그날 밤을 자기 여자친구와 하얗게 새운 뒤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
다. 그녀는 그때까지 동성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런일'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Y양과의 일을 생각하면서 정열을 불태웠다. 생전 처음으로 
남편의 애무와 키스가 시들하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분명히 결말을 짓기 위해 그 여자 친
구를 다시 한번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열은 더욱 타오를 뿐이었다. 이 관계는 
그녀가 오늘날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쁨으로 그녀늘 채워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죄
책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의사를 찾아가서 자기의 입장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또 도덕적인 이유로 변호할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이 경우에 당사자는 자발적인 충동에 몸을 맡기고, 이 때문에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여
자는 종종 의식적으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경험할 수 없게 될 그
런 소설 같은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가정을 떠난다. 그것은 가정이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여, 차라리 고독을 택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험을 찾는 
마음에서이도 하다. 모험과 마주치면, 그녀는 허겁지겁 그 속에 뛰어든다. 슈테켈이 인용한 
다음과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B.Z.부인은 40세로 아이가 셋이나 있으며, 결혼한 지 20년이 지났다. 그런데 그해에 그
녀는 비로소 주위 사람들이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생을 헛살아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스키를 타러 갔
다가 30세의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곧 B.Z.부인의 딸을 좋
아하게 되었다. 부인은 애인을 자기 곁에 붙잡아두기 위해 두 사람의 결혼에 동의했다. 모
녀 사이에 입 밖에 내지는 못했으나, 대단히 격렬한 동성애가 있었기 때문에 이 어머니의 
결심은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윽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향으로 빠져들었다. 남자가 때때로 밤중에 어머
니의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딸에게 몰래 가는 것이었다. B.Z.부인은 자살을 시도했다. 그녀
는―그때 그녀는 46세였다―슈테켈의 진찰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딸도 결혼할 계획을 단념했다. 그래서 Z.부인은 다시 모범적인 아내로 돌아가 신앙 

생활에 전념하게 되었다.
  단정하고 정숙한 전통에 억압되었던 여성이 언제나 행동으로까지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꿈은 에로틱한 환상으로 가득차고, 그녀는 그 환상을 낮에도 그리게 된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격렬한 관능적인 애정을 표시한다. 아들에게 근친상간적인 강박관념을 
품는다. 그녀는 잇따라 젊은 남자에게 연정을 갖는다. 사춘기의 소녀처럼 언제나 강간을 
당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고, 무의식중에 매음을 꿈꾸기도 한다. 그녀의 경우도 욕망, 공
포의 상반성은 불안을 낳고, 그 불안은 신경증을 일으키기 쉽다. 이렇게 되면 괴상한 행동
으로 이웃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이런 행동은 그녀의 상상 속의 생활을 나타내고 있
을 뿐이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는 사춘기보다 중년의 동요기에 더 모호한 것으로 나타난다. 노경에 
접어든 여성에게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인격붕괴의 감정이다. 이 감정으로 말미
암아 그녀는 모든 객관적인 목표를 잃게 된다.
  건강한 몸인데도, 신변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 중에는 기묘한 이중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자기를 의식으로 활동체로 자유로 느끼고 있다면 숙명에 좌우되는 수동의 객체는 마치 타
인처럼 생각된다. 자동차에 치인 것은 내가 아니다. 거울에 비치 할머니의 '내가'아니다. 
이처럼 자기를 젊다고 느껴본 적이 없고, 동시에 이처럼 자리를 늙었다고 느낀 적이 없는 
여성에게는, 이 두 가지 자기의 모습을 융화시킬 수 없다. 시간이 흘러 추이가 자기를 좀
먹는 것은 꿈속에서의 일이다. 그리하여 현실은 멀어지고 희박해진다. 동시에 그녀는 이미 
환상과 자기를 분명히 구별하지 못한다. 그녀는 시간이 뒷걸음을 쳐서, 자기의 분신이 벌
써 자기를 닮지 않고, 일어나는 사실마다 자기를 배반하는 이 괴상한 세계보다는 차라리 
그녀는 마음속의 명료함을 신용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도취, 계시, 망상에 이끌린다. 이
때 연애는 전보다 더 그녀에게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그러므로 그녀가 자기는 사랑을 받
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색광의 십중팔구는 여자이다. 그리고 그 대
부분이 40세에서 50세 사이의 연령층이다. 그러나 그처럼 대담하게 현실의 벽을 넘는 것
은 누구에게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여자들은 꿈속에서도 인간적인 애정에 절망하
고 신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요부, 색골, 음탕한 여자가 갑자기 신앙에 빠지는 것은 폐경기
에 이르러서이다. 여성이 그 자주성에 눈떠서 품게 되는 운명이니 비밀이니 이해되지 않는 
인격이니 하는 막연한 생각은 종교속에서 합리적인 통일을 발견하게 된다.
  신앙을 갖게 된 여자는 자기의 실패한 인생을 구세주가 내린 시련으로 생각한다. 자기의 
영혼은 불행 속에서 큰 공덕을 얻어 특별히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
는 하늘이 자기에게 계시를 내렸다거나―크뤼드네르 부인(18세기 프랑스의 여류작가)처럼
―신으로부터 종교적인 사명을 받았다고 믿고 싶어한다. 현실감각을 다소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은 이 위기 동안에 여러 가지 암시를 받기 쉽다. 여자의 혼은 정신적 지도자
의 강렬한 영향력이 미치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여자는 미심쩍어 보이는 권위에도 열심히 
매달린다. 종파, 심령술사, 점쟁이, 주술사, 사기꾼들에게 이런 여자는 가장 좋은 먹이이다. 
그것은 단지 현실세계와의 접촉이 두절되어, 모든 비판적인 감각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녀가 절대의 진리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녀는 구원을 받음
으로써, 세계를 구원하는 약, 처방, 열쇠를 얻는 것이다. 자기의 특수한 처지와 분명하게 

적합하지 못한 이론을 전보다 더욱 경멸한다. 그리하여 자기에게만 특별히 마련된 이론을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영감, 신탁, 계시, 기적 같은 것이 그녀의 주위에서 힘을 발휘한다. 
때로는 자기가 생각한 것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충고자나 혹은 자신의 내부 
목소리에 따라 장사, 사업, 모험에 뛰어든다. 또 때로는 진리나 궁극적인 예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도 한다. 그녀의 행동엔 언제나 열광적인 감격이 뒤따르게 된다.
  폐경의 위험은 여성의 일생을 무참하게 둘로 절단시켜버린다. 여성에게 '새로운 인색'의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단절이다. 그녀의 눈앞에는 '다른'시간이 열린 것이다. 그녀
는 개종자와 같은 열의를 가지고 거기에 접근해 간다. 그녀는 연애에, 인생에, 신에, 예술
에, 인류에 새로운 관심을 갖는다. 이런 것에 몰입하여 자기를 숭고하게 여긴다. 그녀는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천국의 비밀을 간파한 눈으로 지상을 바라보고, 아직 아
무도 올라간 적이 없는 정상에 오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지상 자체는 변치 않는다. 정상에도 여전히 손이 미치지 못한다. 신의 계시는 받
았지만―설사 눈부실 정도로 분명한 신의 계시라 하더라도―그 의미는 좀처럼 해독할 수 
없다. 마음의 등불은 꺼진다. 그뒤에는 거울에 비친, 어제보다 더 늙은 한 여인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열광의 시기 대신에 우울한 낙담의 시간이 계속된다. 신체의 컨디션이 이 리듬
을 그대로 반영하여, 호르몬 분비의 감소가 뇌하수체의 이상 활동에 의해 보충된다. 그러
나 이 교대를 강하게 지배하는 것은 특히 심리상태이다. 흥분, 환상, 열광 등은 과거의 여
자의 숙명에 대한 일종의 방어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불안감에 시달
리게 된다. 생명은 이미 쇠진되었지만, 아직 죽음은 오지 않는다. 그녀는 절망에 도전하는 
대신 자주 거기에 도취되는 편을 택한다. 그녀는 푸념과 아쉬움과 하소연을 뇌까리고 있
다. 이웃과 근친에게서 그녀는 음모를 상상한다. 같은 연배의 자매나 여자친구가 있으면 
함께 피해망상을 갖는 경우도 있다. 특히 그녀는 남편에 대하여 병적으로 질투하여, 남편
의 친구들과 자매, 심지어 남편의 직업에까지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불행을
―실제로 있든 없든―연적의 책임으로 돌린다. 질투의 병적 현상이 가장 많은 것은 50세
에서 55세 사이의 연령층이다.
  폐경기의 고민은, 때로는 죽을 때까지 연장된다. 여자는 좀처럼 늙을 결심을 하지 못한
다. 만일 자기의 매력을 개발하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경우에,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여자는 싸워나갈 것이다. 만일 성욕이 여전히 왕성하면 그 싸움은 더욱 치열해진다. 그럴 
경우도 드물지 않다. 메테르니히 공비에게, 대체 여자는 몇살이 되면 육체적으로 고민을 
하지 않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몰라, 나는 아직 65세니까."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몽테뉴에 의하면 여자의 성욕에 '약간의 청량제'만을 제공하는 결혼생활은, 여자가 나이
를 먹어갈수록 점점 불충분한 만족밖에 주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는 때때로 나이가 들면
서, 젊었을 때의 저항과 냉담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녀가 겨우 정욕의 불길을 알게 될 
무렵에, 남편은 그 훨씬 전에 그녀의 냉담함에 체념하고 자기도 냉담해진다. 오래 함께 살
아 매력이 없어진 아내에게는, 부부간의 정열을 불러일으킬 힘이 거의 없다. 그녀는 야속
한 나머지 '나는 나대로 살테야'하고 결심하고, 전과 같이―전에 애인을 가진 적이 있으면
―애인을 갖는 것을 망설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애인이 생기지 않는다면 허사이다. 그래서 쫓아다니게 된다. 수단방법을 총동원
한다. 몸을 맡기는 체하면서 자기 쪽에서 강요한다. 품위있게 행동하고 친절을 베풀며, 고
마움을 표시하는 따위는 모두 함정이다. 그녀가 젊은 남자를 노리는 것은 발랄한 육체를 
좋아해서만이 아니다. 청년이 곧잘 어머니와 같은 애인에 대해 느끼는, 이해관계를 떠난 
애정을 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젊은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도 공격적이고 지배
적이 된다. 레아를 만족시키는 것은 셰리의 미모와 함께 그 순종이었다. 스탈 부인은 사십 
고개를 넘어서는 그녀에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시동들을 주위에 거느리고 있었다. 소심한 
풋내기 남자가 손에 넣기 쉽다. 유혹이나 술책이 효과가 없을 때에도 악착 같은 여성에게
는 아직 마지막 수단이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은 돈으로 남자를 사는 것이다.
  이런 음탕한 여자의 말로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는 중세의 〈사랑의 표시〉라는 민간
설화이다. 어떤 젊은 여자가 몸을 허락한 답례로, 상대방 남자에거서 조그마한 '사랑의 표
시'를 하나씩 요구하여 그것을 장롱 속에 간직한다. 드디어 그것이 어느날 장롱에 가득차
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부터 이번에는 남자 쪽에서 하룻밤을 보낼 적마다 '사랑의 표시'를 
요구하여 이번에는 남자의 장롱이 가득차게 되었다. 그녀가 받은 '사랑의 표시'는 하나도 
남김없이 남자에게 돌려줘 결국 다른 것으로 그 값을 치러야만 했다.
  어떤 여자들은 이런 상황을 아이러니컬하게 생각한다. 그녀들은 에제 쓸모가 없게 된 것
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쪽에서 그 '사랑의 표시'를 돌려 줄 차례가 된 것이다. 돈은 그녀
들에게 창녀의 경우와 반대의 역할을 하게 된다. 정화의 역할을 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 
돈은 남자를 하나의 도구로 바꾸어 일찍이 그녀가 젊은 시절의 오기만으로 거부해 온 정
욕의 자유를 주게 된다. 그러나 이성적이라기보다 로맨틱한 여성 패트런(후원자)은 때때로 
애정과 찬미와 존경의 환영까지 사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녀는 상대방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주고 싶기 때문에 준다고까지 생각한다. 여기서도 젊은 남자는 적합한 
애인이다. 왜냐하면 젊은 남자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아량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리고 젊은이게게는 어딘가 '신비로운'면이 있다. 남자도 자기가 '돕는'여자에게는 이 신비
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신비에 의해 거래의 노골적인 양상이 수수께끼로 위장되기 때문이
다. 그러나 눈속임이 오래 계속될 리가 없다. 남녀의 투쟁은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의 
결투로 변하여, 여성은 배반을 당하고 우롱되고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분별 있는 여
자라면, 망설이지 않고 '무장해제'를 결심한다. 설사 아직 완전히 정열이 식지 않았다고 하
더라도 말이다.
  여자가 드디어 나이 먹는 것을 받아들인 그날부터 그녀의 입장은 달라진다. 그때까지 그
녀는 아직 젊은 여자로 자기를 추하게 변형시키는 불가사의한 재해와 싸우는 데 열중했었
다. 그러나 이제야 그녀는 다른 존재로 성을 잃은 대신에 완성된 존재, 노년기의 여자가 
된다. 이것으로 갱년기의 위기는 청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여자가 살
기 쉬워진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시간의 숙명에 대해 싸우기를 단념하면 다음의 
투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지상에 자기가 있을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해야 한다.
  인생이,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어야 여자는 겨우 자기의 사슬에서 풀려난다. 이때가 되
면 그녀는 나이를 구실로 자기에게 내려진 고역을 면하게 된다. 남편을 너무나 잘 알기 때
문에 이제는 남편도 두렵지 않다. 그녀는 남편의 포옹을 보기 좋게 물리치고 그의 옆에―

우정이나 무관심이나 혹은 적의를 품고―자기 생활을 마련한다. 남편이 먼저 노쇠했을 경
우에는 그녀가 부부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녀는 유행이나 세론을 무시하고, 사교적인 의무
나 섭생이나 미용 등의 손질 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셰리가 복원되어 돌아왔을 때에 
레아처럼, 이제는 양재사에게서도 코르셋 제조자에게서도 미용사에게서도 해방되어, 식도
락 속에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 아이들은 이제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고, 성인이 되어 
결혼하여 집을 나간다. 의무에서 해방된 그녀는 그제서야 겨우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
러나 불행하게도 어느 여자의 경우나 '여자의 역사'속에서 말한 사실이 되풀이 된다. 즉 그
녀는 아무 쓸모없게 되엇을 때, 이 자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반복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가부장제인 사회는 여자가 하는 모든 직능에 예속
의 형태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자는 활동의 가치를 상실하는 순간에 비로소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50세경이 되면 그녀는 완전한 실력을 갖게 되고, 경험에 
의해 풍부해진 것을 느끼게 된다. 남자는 이 나이가 되면, 높은 신분과 가장 중요한 지위
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여자는 이때 은퇴하낟. 헌신하라는 가르침만 받아온 여자에게 이
제 아무도 그 헌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쓸모가 없어져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
게 된 그녀는 희망이 없는 긴 앞날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그래도 그녀는 선뜻 체념하지 않는다. 때로는 비탄에 빠져 남편에게 매달리고, 
전보다도 남편의 시중을 잘 든다. 그러나 결혼생활의 타성은 깊이 뿌리박혀 있다. 자기가 
남편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내는 훨씬 전부터 알고 있거나, 남편은 이제 자
기에게 어울리는 훌륭한 남자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부부의 공동생활을 무사히 계속해 나
가려고 보살피는 것도, 혼자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것도 따분한 노력이다. 그녀는 자식에게 
희망을 갖는다. 자식들만은 아직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세계와 미래가 열려 있
다. 그녀는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려가려고 한다. 나이를 먹고서도 아이를 낳을 기회를 가진 
여자는 자기를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한다. 다른 여자들은 할머니가 될 시기에 그녀는 아직 
젊은 어머니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40세에서 50세 사이에 어머니는 자식이 
어른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식이 자기 곁을 떠날 때가 되어 그녀는 자식을 통해 
살아남으려고 애쓴다.
  그녀가 그 구제를 남자아이에게 기대하느냐, 여자아이에게 기대하느냐에 따라 그녀의 태
도가 달라진다. 보통 큰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은 남자아이쪽이다. 지평선 저쪽에서 나타나
는 것을 꿈에 그리던 훌륭한 남성의 모습이 드디어 과거의 저쪽에서 그녀에게 다가온 것
이다. 갓난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한 보물를 언젠가 
이 아이가 자기에게 채워줄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동안에 그녀는 아이의 뺨도 때리고 
매질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벌써 그런 일들은 잊고 있었다. 자기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
는, 그때부터 벌써 세계와 그리고 여자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반신이었다. 이제야 이 아이
는 모성의 영광이 빛나는 그녀를 인정해 준다. 남편의 횡포로부터 그녀를 지켜주고, 그녀
가 가졌던, 혹은 갖지 못했던 애인에 대한 복수를 해줄 그 아이는 그녀에게 해방자가 되고 
구세주가 될 것이다.
  그녀는 아들을 상대로 다시 한번, '멋진 왕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처녀와 같은, 유혹
과 과시의 거동을 다시 보인다. 아들과 나란히 걸어가면서 자기는 아직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이 있으므로, '누나'로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아들이―미국영화의 등장인물을 
모방하여―어머니를 놀려주고 웃겨주고 까불면서도 존경해 준다면, 그녀는 꿈속에서처럼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자기 뱃속에서 키운 아이의 남성적인 우월성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감정의 어느 정도까지를 근친상간의 이름으로 불러도 무방할까? 그녀가 아들의 
팔에 기대는 자기를 상상하며 즐기고 있을 때 '누나'라는 말이 다소 미심쩍은 환상을 얌전
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잠이 들었을 때, 즉 자기를 감시하고 있지 않
을 때에는 그녀의 공상이 탈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공상이나 환상은 언제나 현실적인 행위의 숨은 욕구를 표
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흔히 그것은 그것만으로 자족한다. 그것은 하나의 
욕구의 완결된 성취이며, 공상의 만족만을 요구하는 어머니가 농담으로 자기 아들을 애인
으로 볼때에는 문자 그대로 농담으로 여겨도 무방하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에로티스즘이 
이러한 관게에서는 별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남녀관계임에는 틀림없다. 그
녀는 여성으로서 마음속으로 아들에게서 지배적인 남성을 동경하고 있다. 그녀는 사랑하는 
여자 못지않은 
정열로 자기를 그의 수중에 맡기고, 이 선물과 교환하여 신이 알지 못하는 곳까지 오르기
를 원하고 있다.
  연애하는 여자가 이런 승천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애인의 자유의지에 호소하고, 자기는 
기꺼이 위험을 각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에 이쪽에서도 여러 가지 요구를 한다. 어머
니는 낳아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기에게 신성한 권리가 있는 듯이 생각된다. 자기가 자
식을 만든 것, 자기 재산으로 간주하기 위해서 자식이 자기를 인정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
는다. 그녀는 사랑하는 여자처럼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를 가장 
신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나의 육체를 창조하여 하나의 존재를 자기 것으로 만든
다. 그녀는 그 존재의 행위, 작품, 가치를 자기 것으로 횡령한다. 자기의 과실을 찬양하고, 
자기 자신을 격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대리에 의해 산다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이다. 뜻대로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
들이 무능하거나 깡패, 낙오자, 열등생,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영웅으로 키우고 싶다는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다. 자기 아
이를 인간으로서 진정으로 존중하고, 설사 아이가 실수를 해도 그 자유를 인정하고, 무슨 
일에나 뒤따르게 마련인 위험을 아이와 함께 책임지는 어머니는 대단히 보기 드물다. 그보
다 훨씬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자기 피를 나눠받은 자식을 쉽게 영광이나 죽음으로 몰아
넣어 사람들에게 지나친 칭찬을 받는 스파르타의 어머니와 비슷한 어머니이다. 아들이 지
상에서 해야 하는 일은, 어머니의 존재를 뜻있게 하기 위해 어머니가 존중하는 가치를 손
에 넣는 것이다.
  어머니는 신인 아들의 기획이 자기 이상과 일치하며 그것을 반드시 성공시키도록 요구
한다. 여자는 저마다 영웅이나 천재를 낳고 싶어한다. 그런데 영웅이나 천재의 어머니는 
모두 자식 때문에 마음고생이 유난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어머니가 탐내어 갖기를 꿈꾸
었던 전리품을 아들은 대개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며 손에 넣는다. 그리하여 그가 그 전리
품을 어머니에게 바칠 때 어머니는 그것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원칙적으로 아들이 하는 일

을 인정하고 있을 경우에도 그녀는 사랑하는 여자를 괴롭히는 모순과 비슷한 모순에 빠져 
고민하게 된다. 아들은 자기 인생―동시에 어머니의 인생―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한 목표를 
향해 그런 운명을 극복해야 한다. 그는 이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모험을 해야 한다.
  그런데 단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어떤 목적을 높이 세우려고 하면, 그는 
어머니가 자기에게 준 선물의 가치에 의심을 품게 된다. 어머니는 이에 대해 분개한다. 그
녀는 자기가 낳은 이 육체가 자기에게 최고의 존재로 생각되지 않으면, 남자에 대해 지배
자로서 군림할 수 없다. 아들에게는 그녀가 고통 속에 완성한 이 작품을 망가뜨릴 권리가 
없다.
  "피곤하겠구나 그러다가 병이라도 나면 큰일이야."하고 그녀는 그의 귀가 따갑도록 타이
른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를 낳는 것도 헛수고가 아닌가. 아이가 게으름뱅이거나 칠칠치 못하면 제일 먼
저 화를 내는 사람은 그녀이다. 그녀는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아들이 출정하면 살아 돌아
오기를 바라지만 훈장도 받아오기를 원하다. 아들이 일을 잘하여 출세하기를 원하지만 과
로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아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그녀는 자기 자식이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언제나 안타까워하면서 보고만 있어야 한다. 자식이 길을 잘못 들지 않을
까 걱정하고 실패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성공하면 병에 걸리지 않을 까 걱정한다. 설사 마
음을 놓는다고 하더라도 나이와 성의 차이는 그녀와 아들 사이에 참된 유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아들은 그녀에게 아무 도움도 청하
지 않는다. 자식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을 때에도 어머니의 불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단지 하나의 육체를 낳았을뿐만 아니라 완전히 필요한 한 존재의 기초를 만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는, 과거로 거슬러올라가서까지 자기의 존재가 정당화되었다
고 느낀다. 그러나 권리가 일이 되지는 못한다. 그녀는 하루하루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
의 행운의 행위를 영구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녀는 자기의 신에게 자기가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런 위선적인 헌신은 무참히 드러난다. 며느리
가 그녀에게서 그 직책을 고스란히 빼앗아 버린다. 자기에게서 아들을 빼앗는 다른 여자에 
대해 그녀가 느끼는 적의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여러 번 언급했었다.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우연한 사실을 신성한 신비에까지 끌어올렸다. 그녀는 인간의 의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가치는 기존의 것이며 모두 자연에서 
과거에서 생긴다. 그녀는 자유로운 행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들은 자기에게서 생
명을 받은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알지도 못했던 이 여자에게서 아들이 무엇을 받았단 
말인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유대가 존재했던 것처럼 생각하게 한 것은 어떤 마법
의 힘이 틀림없다. 그 여자는 위험한 곡예사이다. 어머니는 그 속임수가 들통이 나기를 손
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고약한 여자에게서 받은 상처를 붕대로 감아주는 손길이 부드
러운 어머니를 마음속에 그리며, 아들의 얼굴에 불행의 표시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들이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해도, 그녀는 기어코 그것을 찾아낸다. 그가 아무 불행도 말하
지 않는데도 그녀는 그를 동정한다. 그리고 며느리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며느리의 새로운 
생활방식에 대해 일일이 과거나 습관을 대립시켜 침입자의 존재 자체를 부당하게 보려고 

한다.
  인간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해석한다. 아내는 그것을 통하여 자
기가 세계를 컨트롤할 수 있는 남성을 남편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를 
잡아두기 위해 그를 그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오게 하려고 한다. 자기 남편이 부자가 되고 
유력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젊은 아내의 계획에 어머니는 아들의 변치 않는 본질의 철
칙을 대치시키고 있다. 이 아이는 몸이 약하므로 과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임신했을 때에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투쟁이 격화된다. '아이의 출
생은 부모의 죽음을 의미한다.'이 진리가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이때이다. 자기 아들 
속에 살아남기를 원했던 어머니는 아들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은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아들에게 생명을 주었다. 그런데 그 생명은 그녀가 없어도 살아간다. 그녀는 이미 어머니
가 아니다. 그녀는 단지 사슬의 한 고리에 불과하다. 그 증오가 병적이 되어 신경 질환이 
생기고 범죄로 인도하기도 하는 것은 이 시기이다. 르페브르 부인이 오랫동안 미워하던 며
느리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은 며느리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대개 할머니가 된 여자는 이런 적의를 극복한다. 때로는 할머니가 갓난아이를 완고하게 
자기 아들만의 아이로 생각하여 그 아이를 독점적으로 사랑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통 
젊은 어머니, 즉 그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를 되찾아간다. 그래서 질투를 느낀 할머니는 아
이에 대해 불안의 가면 아래 적의를 품은 애매한 애정을 느낀다.
  어머니의 딸에 대한 태도는 대단히 상반적이다. 그녀는 아들에게서는 신을 찾지만, 딸에
게서는 자기 분신을 찾아낸다. '분신'이란 애매한 인격이다. 그것은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살해한다. 포의 단편이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나 마르셀 슈봅이 한 이야기에서 찾
아볼 수 있는 것처럼, 장성한 딸은 어머니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에
게 살아남는 것을 허용하기도 한다. 어머니의 행동은 자기 아이의 성장에서 파멸의 약속을 
발견하느냐 재생의 약속을 발견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많은 어머니들은 적의 속에서 경화된다. 그녀는 자기에게서 생명을 얻은 배은망덕한 딸
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남자에게 익숙해진 여자가 젊고 발랄한 딸에
게 자기의 기교를 빼앗기는데 대해 질투하는 것은 많이 지적되었다. 모든 여자들 중에서 
경쟁자를 미워한 여자는 자기 딸마저 경쟁자로 여겨 질투하게 된다. 그녀는 그 딸을 멀리
하고 격리하여 딸에게서 기회를 빼앗을 궁리를 한다. 정숙하고 훌륭한 '아내' 또는 '어머
니'가 되는 것을 명예로 알던 어머니도 자기의 입장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는 열성은 변치 
않는다. 그녀는 딸이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항상 강조하고 딸이 하는 일을 유치한 유희처
럼 생각한다. 딸은 결혼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 아이를 낳기에는 몸이 너무 약하다. 
그래서 그 딸이 남편이나 가정이나 아기를 갖고 싶어해도 그것은 헛소리에 불과하게 된
다. 어머니는 집요하게 비판하고 비웃고 또한 불행을 예고한다. 그녀는 되도록 자기 딸을 
영원한 어린애로 머무르게 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딸을 
제 것처럼 여기고 딸의 생활을 파괴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어머니의 기도는 대개 성공했
다. 이런 불길한 영향 때문에 많은 젊은 여자들이 아기를 낳지 못하고 유산하거나 자기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도 키울 수도 없고 자기 가정을 꾸려나가지를 못한다. 그녀들의 결
혼생활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딸들은 불행하게 되고 외톨이가 되어 어머니

의 품안에서 최고의 피난처를 찾게 된다. 만일 어머니에게 반항하면 두 사람을 영원히 대
립시켜 싸우게 한다. 어머니는 기대에 어긋난 딸의 불순하고 독집적인 태도에 대한 분노
는 무작정 사위에게 터뜨리게 된다.
  자기 딸과 마음이 잘 맞는 어머니도 이에 못지않게 전제적이다. 그녀는 자기의 성숙한 
경험을 무기로 삼아, 청춘을 다시 살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의 가거에서 벗어남
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구제하려고 한다. 자기가 얻지 못한 몽상 속의 남편과 일치된 사위
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 고르려고 한다. 남자를 좋아하든 딸을 염려하든, 그녀는 마
음 한구석에서 이 사위가 결혼하는 상대는 사실은 자기인 것처럼 상상하고 싶어한다. 그
녀는 자기 딸은 통하여 부와 성공과 명성에 대한 그녀의 오랜 욕구를 충족시키게 된다. 
자기 딸을 일부러 정사로 밀어넣는 여자들에 대해서는 자주 묘사되어 왔다. 딸을 감독한
다는 구실로, 자기가 그 생활을 가로채는 것이다. 나는 자기 딸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을 
자기 침대에 끌어들이기까지 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딸이 어머니의 이런 후견인 역할을 언제까지나 참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남편
이나 진실한 패트런(후견자)을  발견한 그날부터 그녀는 어머니에게 반기를 든다. 처음에
는 사위를 사랑했던 장모가 이제는 그에게 적의를 갖게 된다. 그녀는 인간의 배은망덕을 
개탄하고 희생자로 자처한다. 그리하여 드디어 적으로서의 어머니가 된다. 많은 여성들은 
이와 같은 실망을 예상하고 자기 자식들이 장성하면 일부러 무관심한 체한다. 이때 그녀
는 자식에게서 아무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다. 어머니가 폭군이 되지 않고 또 자식들에게
서 푸대접도 받지 않으며 자식들의 생활에서 진정한 이들을 얻으려면 관용과 무사의 흔치 
않은 조화가 필요하다.
  손자에 대한 할머니의 감정은, 어머니가 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연장이다. 그 속에 
딸에 대한 적의가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 많은 여자들이 타락한 자기 딸에게 낙태와 기아
와 암매장을 강요하는 것은 단지 남의 눈을 의식해서만이 아니다. 그녀들은 딸이 어머니
가 되지 못하게 금하는 것을 달가워한다. 그녀들은 혼자서 특권을 독점하려 애쓴다. 정당
하게 결혼한 딸에게까지도, 어머니는 딸이 아이에게 상관하지 말고 모유를 주지 말고, 멀
리하라고 충고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녀들 자신이 이 작은 존재를 냉담하게 묵살하기도 
한다. 아니면 그녀들은 아이를 야단치고 벌을 주고 구박한다.
  이와 반대로 그 딸과 마음이 맞는 어머니는 때때로 아이를 젊은 어머니 이상으로 끔찍
이 사랑한다. 젊은 어머니는 미지의 작은 꼬마가 태어나 다소 당황하지만, 할머니는 꼬마
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시간을 초월하여 2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젊은 산모가 된다. 
그리하여 오래 전부터 자기 자식에게서 느끼지 못한 소유와 지배의 기쁨을 다시 느끼게 
된다. 따라서 폐경이 이후로 그녀가 단념했던 모성의 모든 욕망이 기적적으로 충족된다. 
자기야말로 어머니라고 실감한다. 그리하여 아기의 시중을 기꺼이 맡아 아이에게 온갖 정
성을 기울여 헌신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젊은 어머니가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 그래서 할머니에게는 겨우 조
력자로서의 역할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그 역할은 전에 그녀의 곁에서 연상의 여자가 맡
았던 것이다. 그녀는 마치 왕좌에서 추방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물론 질투도 느끼게 된
다. 사위의 어머니에 대하여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야속한 생각이 들면 처음에 그

녀가 아이에 대해 느꼈던 자연스러운 애정도 사라진다. 할머니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불
안은, 그녀의 감정의 상반성를 표시하고 있다. 할머니들은 그 아기가 자기가 소유하는 범
위내에서는 무척 귀여워하지만, 한편 자기에게 낯선 꼬마라고 하여 미워한다.
  그녀는 이런 반감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아이를 완전히 소유하는 것을 단념
하고도, 만일 그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강한 애정을 느끼고 있다면, 그녀는 손자의 생활 
속에서 수호신과 같은 특권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권리나 책임을 
느끼지 않고 손자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한다. 그들을 통하여 자기의 나르시시즘적(자
애적)인 꿈을 애무하려고 하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현재 그 우연성과 무상성 속에 있는 살과 뼈를 지닌 작은 존재이다. 그녀는 교육자는 아
니다. 그녀는 추상적인 정의나 법칙의 화신이 아니다. 그래서 때때로 할머니와 손자의 부
모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여자가 후손이 없거나 또는 혈연에 대해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들이
나 손자와의 자연스러운 혈연관계가 없을 경우에는 그녀는 때때로 인위적으로 그와 비슷
한 것을 만들려고 한다. 그녀는 젊은 남자들에게 모성적인 애정을 제공한다. 그녀의 애정
이 플라토닉한 것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녀가 눈여겨 보아온 젊은이를 '아들처럼' 사
랑한다고 말한다고 그것을 모두 위선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거꾸로 어떤 어머니의 감정
도 연애적이다. 바랑 부인(소년 루소를 어머니처럼 돌보아준 여성)과 같은 사랑으로 어떤 
젊은 남성을 어른이 될 때까지 소중히 돌봐주고 도와주기를 즐기는 것을 흔히 볼 수 있
다.
  그녀들은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의 원천이 되고 필요한 존재가 되고 토대가 되기를 원한
다. 그녀들은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그 애인에게서 정부라기보다는 어머니로서의 자기를 
찾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무성적인 여성이 여자아이를 상대로 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경우에도 그녀들의 관계는 다소 성적인 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플라토닉한 것
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그녀가 그 사랑하는 젊은 처녀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기적적
으로 젊어진 그녀의 분신이다. 여배우, 여류 무용가, 여류 성악가 등은 교육자가 되어 학
생을 지도한다. 교양 있는 여성은-콜롱비에(스위스의 지명)의 고독 속에서의 샤리에르 부
인처럼-제자들을 가르친다. 믿음이 독실한 여성은, 주위에 정신적인 양녀를 모아놓고 화
류계 여성은 사창가의 주인이 된다. 그녀들이 후배의 양성에 열의를 보이더라도, 그것은 
결코 순수한 흥미에서가 아니다. 그녀들은 자기가 다시 변신하기를 열정적으로 바라고 있
다. 그녀들의 폭군적인 관용은 혈육으로 이루어진 모녀 사이와 같은 갈등을 일으킨다. 그
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양손자를 맞아들이기도 한다. 대고모들이나 대모들은, 할머니들의 
그것과 같은 역할을 기꺼이 맡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가 그 후계자 속에-자연적이든 혹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든- 자기의 기울어져가는 생명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다.
  그녀가 그런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인생의 지도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해도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투쟁과 사건 속에 휘말
려 실망과 비극 속에 소멸해 버리거나 또는 소극적으로 협력하여 체념해 버리는 것이 보
통이다. 어머니는 늙어가고 할머니는 지배욕을 자제하면서 그녀들은 그 한을 숨기고 있

다. 그리고 자식들이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자식들에게서 많은 도
움을 바라지는 못한다. 미래의 사막을 앞에 두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 고독과 후회와 
권태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서 늙은 여성의 애처로운 비극을 언급하게 된다. 그녀는 자기가 쓸모없게 된 것을 
알고 있다. 중산층의 여자는 일생을 통하여 하찮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가? 그러나 자식이 장성하고 남편이 성공하고 적어도 지위가 안
정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곧 죽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부인의 바느질'은 이 무서운 권
태를 얼버무리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다. 양손은 자수를 놓거나 뜨개질을 하면서 움직이
고 있으나 참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것은 거의 대부분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만든 물건을 처치하기가 어려워 때때로 애를 먹
기도 한다. 그것들은 친구나 자선단체에 주기도 하고 선반이나 테이블에 가득 늘어놓는 
것이 고작이다. 그 무상성 속에서 순수한 기쁨을 발견한 수 있는 놀이도 아니다. 정신이 
비어 있으므로, 기껏해야 알리바이(부재증명)가 될 정도이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참으로 초라한 심심풀이이다. 여성은 바늘로 그날그날의 허무를 
따분하게 짜고 있는 것이다. 수채화, 음악, 독서등도 대동소이한 역할을 하고 있다.할 일
이 없는 여성은 이 세계에 발판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권태
를 달래기 위한 것이다.
  미래를 개척하지 못하는 행동성은 반드시 내재의 허무에 빠지게 마련이다. 한가한 여성
은 책을 읽기 시작하다가 집어던지고,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가 다시 닫고, 자수를 두면서 
하품을 하고, 결국은 수화기를 든다. 실제로 이런 여성이 가장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 것
은 사교생활 속에서이다. 외출하고 방문하고-댈러웨이 부인처럼-손님접대를 중요시하게 
된다. 그녀는 온갖 결혼식과 장례식에 참가한다. 이제 자기의 생활을 갖지 못하고, 남의 
존재에 의해 자기를 살린다. 멋쟁이 여자에서 유한마담으로 된다. 그녀는 관찰하고 비평
한다. 그녀는 자기의 무위를, 주의 사람들에세 비평과 충고를 일삼는 것으로 메운다. 자
기의 경험을, 자기에게 요구도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려고 한다. 만
일 경제사정이 허락하면 그녀는 살롱을 내려고 한다. 이런 방밥으로 남의 기획이나 성공
을 자기 소유로 삼고 싶어한다. 뒤데팡 부인(18세기 프랑스에서 유명한 살롱의 주인)이나 
베르뒤랭 부인(프루스트의 작중인물)이, 자기에게 모여드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루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인기의 중심이 되고 교차로가 되고 인스피레이션을 제공하는 여자
가 되고, 그리고 하나의 '분위기'를 조성하면 그것은 이미 행동의 대용물이 된다.
  세계의 움직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좀더 직접적인 다른 방법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
자선사업'이나 무슨 '협회'같은 것이 있고, 특히 미국에서는 여성들이 클럽에 모여 트럼
프를 하거나 문학상을 분배하거나 또는 사회 개조를 꿈꾸기도 한다. 양대륙에서 이런 조
직의 특색이 되는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 속에 그 존재이유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조
직이 추구하는 목적은 단지 하나의 구실에 그친다. 그것은 카프카(1883-1924, 독일의 작
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의 우화와 마찬가지로 경과한다.
  아무도 바벨탑을 세울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공상적인 터전의 주위에는 어느새 큰 집
단이 생겨, 스스로 다스리고 확정하고 사회의 불화를 시정하는 데 열성을 부린다. 그래서 

자선사업을 하는 여성들은 시간의 대부분을 이런 조직을 결성하는 데 보내게 된다. 그녀
들은 간부를 선정하고 회칙에 대해 의논하고 서로 토론하고 다른 경쟁상대의 협회와 권위
를 겨룬다. 그녀들에게서 자신들의 빈민, 병자, 부상자, 고아를 빼앗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이들을 남의 소에 넘겨주느니, 차라리 병자나 고아가 죽어가는 쪽이 낫
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들은 사회의 부정이나 악정을 제거하여, 그녀들의 헌신을 필
요없게 만드는 정치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자기들을 인도주의적인 선행을 하는 자가 되
게 하는 전쟁이니 굶주림을 오히려 환영한다. 그녀들의 눈에는 오히려 방한모나 짐짝이 
군인이나 배고픈 자를 위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털실이나 소포를 받기 위해 특별
히 생겨난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들 단체의 몇몇은 실제적인 효과를 올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존경받는 '어머
니'의 영향이 상당히 크다. 이것은 여성의 기생적인 생활이 낳은 산물인 여가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의 영향이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의학, 예술, 과학, 
종교, 법률, 건강, 위생 등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므로 그녀들은 그 많은 기관의 회원으
로 있는 동안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단지 '소일
거리'만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하고 필립 윌리(미국작가)는 말하고 있다.
  그녀들의 노력은 일관된 건설적인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어떤 목적을 달
성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녀들은 취미나 편견을 과시하거나 뭔가에 이용하려고 할 뿐
이다. 예컨대 문화적인 영역에서 그녀들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책을 많이 사들이는 것
은 이런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독서는 혼자서 하는 트럼프놀이를 하는 것과 다름없
다.
  문학은 기획에 투신하고 있는 사람에게 말할 때, 독자가 더욱 넓은 미래를 향해 행동하
는 것을 도울 때, 비로소 의미와 품위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녀들도 인간행동의 움직임과 
합치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여성은 책이나 예술작품을 그대로 삼켜서 내재 속에 묻
어버린다. 그림은 장식품이 되고 음악은 상투어가 되고 소설은 벽에 걸어둔 모자처럼 공
허한 몽상이 된다. 베스트셀러의 나쁜 영향에 책임이 있는 것은 미국 여성이다. 그런 책
들은 단지 인기를 얻기 위해 쓰여졌을 뿐 아니라 도피병에 걸린 유한마담들을 기쁘게 하
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녀들의 활동성 전체에 대해서는 필립 윌리가 다음과 같이 분명히 
정의하고 있다.
  그녀들은 정치가들이 엄살을 부리는 비굴한 인간의 될 정도로 그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고 목사들은 위협한다. 은행장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학교 교장을 공격한다. 그녀들은 
조직체를 잇따라 만들지만 실제의 목적은 가까운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들의 이기주의적인 
욕구에 비굴하게 타협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녀들은 가능하면, 도시에서 주에서 젊은 
창녀들을 추방한다... 그녀들은 버스의 노선을 노동자들을 위해서보다 오히려 자기에게 
편리하도록 결정한다... 시장사례로 문지기에게 배상금의 일부를 넘겨준다. 클럽은 부인
에게 남의 문제에 개입하여 수다를 떨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이 신랄한 비난 속에는 많은 진실이 내포되어 있다. 정치나 경제, 그리고 어떤 실제적
인 기능에도 전문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나이먹은 부인들은 사회에 구체적으로 작용할 수 
없다. 그녀들은 행동이 가져다주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리고 어떤 건설적인 

기획도 세울 만한 능력이 없다. 그녀들의 도덕은 칸트의 지상명령처럼 추상적이고 형식적
이다. 그녀들은 진보의 길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고 금지만을 외친다. 새로운 상황을 적극
적으로 창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 존재하는 것을 공격하여 악을 배제하려고 한
다. 이것이, 그녀들이 언제나 무슨 모임을 만드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녀들은 알
코올에 대해, 매음에 대해, 외설책에 대해 단순하고 소극적인 노력으로는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목한다. 그것은 미국에서는 음주금지의 실패로, 프랑스에서는 마르
트 리샤르가 통과시킨 법안의 실패로 입증되었다. 여성이 기생적인 존재인 한, 그녀는 보
다 나은 세계의 건설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여성 중에는 어떤 기획에 전력을 기울이는 활동적인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 그
녀들은 막연히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녀들은 자주적인 생산
자가 되어 지금까지 고찰해 온 기생적인 입장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환은 극
히 드물다. 사적 또는 공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의 대다수는 도달해야 할 결과를 목
표로 삼지 않고 당장 하고 있는 일에만 열중한다. 그래서 그 일이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
에 불과할 경우에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그녀들 중의 대다수는 이 때문에 괴로워한다. 
과거의 생활이 이미 끝난 여자도 아직 시작하지 않은 미래의 생활을 하려고 하는 젊은이
들과 마찬가지로 불안을 느끼게 된다. 아무것도 그들은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아 주위는 
온통 사막과 같다. 그들은 모든 행동에 앞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 
  그러나 청년은 어쩔 수 없이 남자로서의 생활에 이끌려간다. 그리하여 그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책임과 목적과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세계속에 던져져 결심하고 착수한
다. 나이든 여성은 미래를 향해 새출발을 하도록 권유받아도 "이미 늦었어"하고 비통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장래가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여자는 너
무 일찍 은퇴한다. 그녀에게는 활동력, 신념, 희망, 분노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주위에서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는 언제나 자기의 숙명이었던 생활의 되풀
이 속에 도피한다. 그녀는 반복을 하나의 체계로 삼고 가정행활에 열중하거나 혹은 점점 
신앙에 몰입하거나 샤리에르 부인처럼 극기주의 속에 자랑스럽게 갖혀버린다. 그리하여 
진부해지고 냉담해지며 에고이스트가 된다.
  나이든 여성들이 저마다 평정을 찾는 것은 그 생애가 끝날 무렵, 투쟁을 포기하고 죽음
의 접근이 그녀에게서 미래의 고뇌를 제거했을 때이다. 그녀의 남편은 대개 그녀보다 연
상이므로 그녀는 남자가 노쇠하는 모습을 입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기쁜 마음으로 옆
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복수이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그녀는 그 상심을 즐
겁게 견디어 간다. 상처한 남자가 몹시 괴로워하는 것은 자주 주목되어왔다. 남자는 결혼
에서 여자보다 훨씬 많은 이득을 얻고 있으며, 특히 그 만년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 무
렵에는 세계가 가정의 테두리 안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현재의 나날은 이제 더
이상 미래를 향해 있지 않다. 그날그날 단조로운 리듬을 확보해 주고 그를 지배하는 것은 
아내이다. 공직을 잃게 되면, 남성은 완전히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적어도 가정의 통솔권이라는 것이 있다. 남편에게는 그녀가 필요하
지만 그녀에게는 남편이 귀찮을 뿐이다. 그녀들은 자기들의 독립에서 자부심을 이끌어낸

다. 그리고 그녀들은 세상을 자기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때 일생 동안 속
고 살아온 것을 알아차리에 된다. 그리하여 보다 이성적이 되고 회의적이 되어 때때로 재
미있는 야유를 한다. 특히 진실하에 살아온 여자는 남자에 대해 어떤 남자에게서도 기대
할 수 없는 지식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남자의 공적인 모습이 아니라 동료들이 
없을 때 남자가 무심코 보여주는 우연적인 개인을 옆에서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한 여자들 사이에서만 보여주는 남자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알고 있다. 무대의 
이면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은 기만과 거짓은 폭로해도 진리를 발견하기에는 역부
족이다. 즐겁든 괴롭든간에, 늙은 여성의 지혜는 문자 그대로 소극적이다. 그것의 이의이
고 항의이며 거부이다. 즉 비생산적인 지혜이다. 그 행동이나 사고에 있어서 기생적인 여
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는 금욕적인 도전이 아니면 회의적인 아니러니이다. 여자
는 생애의 어느 연령층에서도 효과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제6장
  여자의 상황과 성격
  그리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에게 가해진 여러가지 비난과 공격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표면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지만, 여자의 근본적
인 신분은 지금도 여전하며 이 신분이 그대로 여자의 성격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자는 '내재 속에 파묻혀 있어서' 반항심을 갖는다. 조심스럽고 인색하다. 진리나 정
확성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고 비열할 정도로 공리적이다. 
거짓말쟁이이고 연극을 잘하며 이기적이다... 이러한 모든 비평에도 정당성이 있기는 하
다. 다만 이렇게 비난 받는 여자의 행실은 결코 호르몬 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
며, 또한 여자의 두뇌구조 속에서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견지에서 
여성이 처해 있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다시 살펴보려고 한다. 반복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여성의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인 조건의 전체속에 이른바 '영원한 여성'을 파악할 수 있
을 것 같다.
  '여성의 세계'를 남성의 세계와 대립시켜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여성이 지
금까지 자기들만의 자주적이고 폐쇄적인 사회를 형성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새
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자는 남자가 지배하는 집단 속에 편입되어 종속적인 지위만 
주어진다. 여자들은 단지 동료로서 상호간에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통일된 공동체
가 형성되는 유기적인 연대성이 없다. 그녀들은-엘레우시스 신비극(고대 그리스에서 대지
의 신을 섬긴 제사의식으로 그리스 연극의 기원이 되어 있다)시대부터 오늘날의 클럽, 살
롱, 직장 등에서도-언제나 독립적인 '반 세계'를 확립하기 위해 결합하려는 노력을 계속
해 왔다.
  그러나 그 역시 남성의 세계 안에서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여성의 입장에 모순
이 생기게 된다. 여성은 남성의 세계 속에 편입된 동시에, 이 세계에 불신을 표시하고 있
는 영역의 양쪽에 걸터앉아 있다. 전자에 의해 분명한 신분이 주어짐과 동시에 후자 속에
서 갇혀지낸다. 그래서 어디서나 침착하게 자리를 잡을 수 없다. 그녀의 순종에는 언제나 
거부가 뒤따르고, 거부에는 그림자처럼 수락이 수반된다. 이런 점에서 여성의 태도는 혼
기를 맞은 처녀의 복잡성과 비슷한 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더욱 지탱하

기 어렵다. 어른이 된 여자로서는, 처녀처럼 인생을 꿈꾸고 있을 수는 없다. 자기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전체적으로 남성의 것이라는 사실을, 여성도 인정하고 있다. 이 세계를 형성하
고 관리하며 지배하는 것은 남성들이다. 여성은 이 새계에 대해 책임의식을 갖고 있지 않
다. 여성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자이고 의논자이다. 따라서 폭력의 교훈도 배우지 못했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 앞에 주체로서 서본 적도 없다. 육체와 집 안에 갇혀서, 인생의 목
적과 가치를 결정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에 대해 자신은 수동적인 존재라고 생각한
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을 '영원한 어린이'가 되게 하는 슬로건에는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노동자, 흑인노예, 식민지 원주민에 대해 그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동안은 "너희들은 큰 
어린애야. "하고 말해 왔다. 그것은 타인이 강요하는 진리나 법률을 송두리째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의 운명도 복종과 존경이다. 여성은 이미 자기의 위치가 주어
져 있는 이 현실세계에서는 마음속으로도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현실은 여자에게 하나의 불투명한 존재이다. 사실상 여자는 물질을 조작할 수 있는 기
술을 습득하지 못했다. 여성은 물질(소재)이 아닌 생명을 상대한다. 이 생명은 도구로는 
지배할 수 없다. 단지 그 비밀의 법칙에 따를 뿐이다. 여성에게는 세계가 하이데거가 정
의한 것처럼, 그녀의 의지와 목적사이에 매개자로 존재하는 '도구의 전체'로 보이지는 않
는다. 세계란 완강하여 제어하기 힘든 저항이다.
  세계는 숙명에 지배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자의에 침투되어 있다. 어머니의 
몸속에서 한 방울의 피가 한 인간으로 변화하는 신비는 어떤 수학으로도 공식화할 수 없
다. 어떤 기계도 그것을 촉진시키거나 지연시킬 수 없다. 여자는 어떤 정교한 장치로도 
조절할 수 없는 시간의 저항을 경험한다. 여자는 달의 리듬에 순응되고 성숙되어지며, 이
윽고 부식되는 자기의 육체속에서 그것을 느끼게 된다. 또 날마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여
자에게 인내와 수동을 가르친다. 이것은 연금술이다. 불과 물에 복종하고 '설탕이 녹는 
것을 기다려야'한다.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오르고 빨래가 마르고 과일이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가정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기술적인 활동과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초보적인 기술이어서 인과율의 법칙을 가르치기에는 너무 단조롭다. 그러나 이런 분야에
도 단순하지만 자의가 있다. 빨면 줄어드는 천이 있고 그렇지 않은 천도 있다. 곧 없어지
는 얼룩도 있고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얼룩도 있다. 저절로 부서지는 물건도 있고, 식물
처럼 싹이 나는 먼지도 있다.
  여자의 정신은 언제나 대지의 신비를 숭배하는 농경사회의 힘을 보유하고 있다. 여자는 
마술을 믿고 있다. 여자의 수동적인 색정은, 욕구를 의지나 공격으로 여기지 않고 점쟁이
(지하의 온천을 알아맞히는 점쟁이)의 추가 흔들리는 인력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
는 데 연유한다. 여자의 육체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자의 성기는 발기한다. 지하에 
숨어 있는 온천수가 마법사의 막대기를 움직이는 경우는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여성
은 파도나 방사, 혹은 전류같은 것에 에워싸여 있는 듯이 느낀다. 영의 감응이나 점성술,  
방사요법, 메스메르(독일의 의학자, 동물의 자력이론의 창설자, 1734-1815)의 축연, 접신
술, 무당, 투시술, 돌팔이의사를 믿는다. 종교에 원시적인 미신을 도입한다. 큰 양초나 

봉납물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고대인처럼 성자에게서 자연의 정령을 그대로 구현한 인간
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 성자는 여행자를 지켜주며, 어떤 성녀는 임산부를 보호해 준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성자는 분실물의 소재를 가르쳐준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신기한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는다. 그녀의 태도는 주술과 기도의 그것이다. 어떤 성과
를 얻기 위해 시험을 거친 의식에 복종한다. 따라서 여성이 관례를 따르기를 좋아하는 까
닭도 쉽사리 알 수 있다.
  여성에게 시간은 새로운 차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창조적인 분출이 아니다. 언
제나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으므로 단지 과거를 반추해 볼 따름이다. 만일 말과 관용어를 
알고 있다면, 시간과 생식력을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식 자체도 달이나 계
절의 리듬에 따른다. 임신이나 개화의 주기는 동일한 반복의 연속이다. 이런 주기적인 움
직임 속에서 시간의 생성은 단지 완만한 퇴보일 뿐이다. 시간은 얼굴을 망가뜨리는 것처
럼 가구나 의류도 손상시킨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생산적인 힘은 조금씩 쇠퇴한다. 그러
므로 여성은 모든 것을 무참히 파괴해 가는 시간이라는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
  여성은 세계의 양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뿐만 아
니라 이 세계의 한가운데, 즉 거대하고 혼돈된 성운 속에 놓인 것처럼 잊혀진 존재가 되
어있다. 여자는 남자의 논리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모른다.
  "여자는 필요하다면 남자 못지않은 훌륭한 논리를 구사한다."고 스탕한은 지적했다. 그
러나 여성에게는 좀처럼 이런 논리를 이용할 기회가 오지 않는다. 삼단논법은 마요네즈를 
잘 만들거나 우는 아기를 달래는 데는 전혀 쓸모가 없다. 남자의 이론은, 여자가 경험하
고 있는 현실에는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남자의 세계에서 여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므
로, 그녀들의 의식은 어떤 기획의 형태도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꿈과 구별되지 않는
다. 실효성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진실한 느낌도 없다. 여자는 다만 이미지와 언어를 상
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크게 모순된 주장도 쉽사리 받아들인다. 자기 능력 밖에 
있는 영역에서의 신비성을 분명히 밝히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막연한 지식으로 
만족하고 있다. 여성은 당, 의견, 장소, 인가, 사건을 혼동하고 있다.
  여성의 머릿속은 기이한 혼란상태에 있다. 요컨대 사물을 분명히 고찰하는 것은 여성의 
일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의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만하면 된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그러므로 스스로 비판, 검토, 판단하기를 단념한다. 그리고 자기보다 우월한 계급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다.
  "남자는 신은 만들고, 여자는 이것을 숭배한다."고 프레이저는 말했다. 남성은 스스로 
만든 우상앞에 전적인 확신으로 무릎을 꿇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성은 길을 가다가 그런 
거대한 조각을 만나게 되면 사람이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공손히 머리를 조아
린다. 특히, 여성은 '질서'나 '법'이 특정한 한 사람의 지도자에세게 구현되는 것을 좋아
한다.
  올림포스에는 최고의 권위를 지닌 단 하나의 신이 있다. 놀라운 남성의 본질이 하나의 
원형 속에 집결되어 있으므로, 아버지, 남편, 애인은 그 희미한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이 이런 위대한 토템(숭배의 대상)에 바치는 숭배는 성적인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
도 유머러스한 이야기이다. 사실 여성은 이런 토템을 항하여 자기의 주체의식을 포기하고 

무릎을 꿇으려고 하는 유아기의 꿈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블랑제, 
페탱, 드골 같은 장군들은 언제나 많은 여성 팬을 갖고 있었다. 최근 <위마니테>지의 여
성기자들이 감격에 넘치는 필치로 그 훌륭한 제복을 묘사한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장군, 독재자-독수리의 눈초리와 의지적인 턱-는 진실한 세계가 요구하는 천상의 아버지
이며, 모든 가치를 장악하고 있는 절대적인 보증자이다.
  남성 세계의 영웅이나 법률에 대한 여성의 존경은, 무기력과 무지에서 비롯된다. 여성
은 정확한 판단에 의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인정한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광신적인 힘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맹목적이고 정열적이며 완강하고 어리
석다. 신앙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적이고 반이성적이며 반역사적이다. 또한 일체의 반증을 
무시해 버린다. 이와 같은 맹목적인 존경은 경우에 따라서 두 가지 형태를 취하게 된다. 
하나는 여성이 법의 내용에 정열적으로 기울어지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법의 공허한 
형식에만 열중하는 경우이다. 여성이 기성사회의 질서에서 이득을 얻고 있는 특권층인 경
우에는 이 질서가 확고부동하기를 원하여 완고한 보수파의 태도를 보인다. 또한 그런 여
성은 다른 제도, 도덕, 법률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성은 자기를 초월하여 세계를 파악하고 있으므로 역사를 하나의 생성으로 생각한다. 
가장 보수적인 남자고 어떤 종류의 진화는 불가피하며 자기 행위나 사상을 거기에 적응시
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면에 여자는 역사에 참가하지 않으므로 그 필연성을 이해
하지 못한다. 미래에 대해 의심을 품고 시간을 정지시키고 싶어한다. 만일 아버지나 형제 
또는 남편에게 가르침을 받은 우상이 깨어지면, 여자는 공허한 하늘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 우상을 끝까지 지키려고 한다. 남북전쟁 때 남부인 
중에서 가장 열렬히 노예제도를 주장한 것은 여자들이었다. 또 보어전쟁 때, 프랑스에서 
코뮌에 대해 가장 열광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여자들이었다.
  여자는 행동의 무기력을 노골적인 감정으로 보상하려고 한다. 승리했을 경우 육식동물
처럼 맹렬히 적에게 덤벼들고, 패배했을 경우에는 일체의 화해에 완강히 저항한다. 여자
의 사상은 단순한 태도에 불과하므로, 낡은 주의, 주장을 지키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 19
14년에는 정통 왕조주의자가 되기도 했고, 1949년에는 황제파가 되기도 했다. 남자는 때
로 미소를 지으면서 일부러 여자를 부추기는 경우도 있다. 자기는 자제하면서 자신이 제
시한 의견이 광신적인 형태로 여자에게 반영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반면에 자기의 생
각이 그와 같이 일방적으로 완고한 양상을 띠는 것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여자가 이처럼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강한 조직을 가진 문명이나 계급속에서이다. 
일반적으로 여자의 신앙은 맹목적이므로 법 또한 그것이 법이기 때문에 존중한다. 법이 
변해도 그 위신은 남는다. 여자의 눈에는 힘이 권리를 창출한다. 여자가 남자에세 인정하
고 있는 권리는 그 힘에서 비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집단이 해체될 때 정복자에세 제
일 먼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여자이다. 여자는 일반적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
인다.
  여성이 지닌 특징의 하나는 체념이다. 한 예로, 폼페이의 폐허를 발굴했을 때, 남자는 
하늘을 향해 도전하거나 도망가려고 애씀으로써 반항의 자세로 굳어 있었다. 반면에 여자
들은 몸을 굽힌 채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화산, 공관, 주인, 남자에 대

해 무기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자는 고생하기 위해 태어났어. 이것이 인생이야...  
할 수 없어."하고 그녀들은 말한다. 이 체념이 때때로 찬양을 받는 인내를 낳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육체적인 고통을 훨씬 잘 참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금욕주의적인 용기도 
갖는다. 남성과 같은 공격적인 대담성을 없지만, 많은 여성은 그 수동적인 저항의 도용한 
강인함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위험, 빈곤, 불행에 대해 남성보다 훨씬 더 강하게 저항한
다. 여성들은 아무리 서둘러도 이길 수 없는 시간을 존중하여 결코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
는다. 어떤 기획을 하여 그 침착함과 완고함을 적용하여 훌륭하게 성공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여자는 일편단심이다."라는 격언도 있지 않은가.
  마음이 너그러운 여성의 경우에는, 이 체념이 관용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녀는 모든 
갓을 용서하고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인간이나 사물도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만 있을 수 
있다고 행각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강한 여자는 이런 태도를 소중한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극기심으로 굳어버린 샤리에르 부인의 경우가 그러한다. 소심한 신중성으로 나타
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은 언제나 물건은 파괴하여 새로 만들기보다는 보존하고 수선하고 
조정하려고 한다. 혁신보다는 타협이나 화해 쪽을 선호한다.
  19세기, 노동해방운동에 가장 큰 장애물의 하나가 여성이었다. 플로라트리스탕이나 루
이드 미셸같은 여자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소심한 주부들이 자기 남편에게 위해를 가하
지 않게 해달라고 탄원했던가. 그녀들은 파업, 실업, 빈곤을 두려워했을 뿐만아니라 반항
을 죄악으로 여겨 걱정했다. 그녀들은 복종을 위해 복종하고 모험보다는 관습을 택한다. 
노상에서보다 집 안에서 사소한 행복을 만들어내는 쪽이 훨신 용이했기 때문이다. 여자들
의 운명은 언젠가는 부서지고 말 물건의 운명과 같아서 사소한 행복을 잃게 되면 모든 것
을 잃은 것처럼 생각한다. 자유로운 주체만이 시간을 초월하여 자기를 확립함으로써, 모
든 파멸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다.
  여자에게는 이런 최고의 수단이 주어져 있지 않다. 여자는 한 번도 자유의 능력을 체험
해 본적이 없으므로 해방을 믿지 않는다. 세계는 알 수 없는 숙명에 지배되어 있으며, 그
것에 반항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한다 해
도 그런 위태로운 길을 스스로 개척해 본 적이 없으므로 열의를 갖고 달려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자에게 미래를 개척해 주면,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있지 않
을 것이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게 한 후 제시된 목표에서 자기가 한 일을 확인하면, 
여성은 남성 못지 않게 용감해지고 대담해질 것이다. 여성이 흔히 비난을 받는 많은 결
점, 용렬, 옹졸, 소심, 인색, 게으름, 경솔, 비굴 등은 단지 여성의 앞날이 막혀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성은 관능적이며 내재 속에 빠져 있다고 말한
다. 그러나 여성은 그 내재 속에 갇힌 것이다. 하렘에 갇혀 있는 여자 노예는 병적으로 
장미향수를 탄 목욕을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심심풀이라도 해야만 견딜 수 있는 것
이다. 침침한 규방-닫혀진 집이거나 혹은 부르주아지의 가정-속에서 숨이 막히는 정도에 
따라 여자는 감각적인 쾌락을 찾아 그곳으로 도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육체적인 쾌락을 심하게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감각적인 만족을 느끼지 않기 때
문이다. 성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남자의 횡포에 시달리며 추잡한 짓을 참아야 하는 
여자는 크림소스로 잘 취하는 술로, 비로드로, 물이나 태양으로, 여자친구들이나 애인의 

애무 등으로 자위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대단히 '육체적'인 인간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여자의 입장이 그 동물성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여자라고 해서 
남자의 경우보다 그 육체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자는 자기육체의 작
은 속삭임을 듣고 이것을 확대한다. 감각적인 쾌락도 예리한 고통도  직접적이고 돌발적
인 승리로 이어진다. 순간적인 난폭함에 의해 미래와 세계가 부정된다. 육체의 정염이외
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화려한 순간동안 그녀는 아무 부족이나 불만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여자가 이와 같은 내재의 승리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내재
가 그녀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경박성은 '추잡한 물질주의'와 같은 원인을 갖고 
있다. 또한 여자는 하루하루를 가득 메우는 자질구레한 일들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생
각한다. 여자가 매력과 기회를 날마다 하는 화장이나 옷치장에서 이끌어낸다. 그러나 여
자가 하는 일은 시간의 흐름처럼 공허한 것이다. 그녀가 수다스럽고 낙서를 좋아하는 것
은 그 무위와 여가를 얼버무리기 위해서이다. 자기에게 불가능한 행위를 말로 대신하려고 
한다. 사실 여자가 인간의 품위에 어울리는 어떤 기획에 참여할 경우에는 남자 못지 않게 
활발하고 효과적으로 또 묵묵히 고통을 참아나간다.
  여성은 비굴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언제나 지배자의 발끝에 엎드려 자기를 때린 손에 
키스하고 싶어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참된 자존심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사실
이다. '신상에 관한 상담'에서 남편에게 배반당한 아내나 버림받은 여자에게 하는 충고에
는 비굴한 복종이 내포되는 경우가 많다. 여자는 기세를 올려 녹초가 되도록 싸움을 하고 
나서도 결국은 남자가 던져주는 빵조각을 주워먹는다.
  그러나 남자가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이고 이유인 여자가 남성의 지지가 없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온갖 굴욕을 참아야 한다. 노예는 '인간의 품위'를 자각할 방법
이 없다. 고작해야 궁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요컨대 여자가 비속하고 가정적이며 인색
하고 타산적이라면, 그것은 음식을 만들고 오물을 청소하는 것으로만 생활을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이런 일에 종사하면서 스스로 거대하다거나 위대하다는 의식을 가질 수
는 없는 것이다. 여자는 자기의 우연성과 사실성 속에 일상생활의 단조로운 반복을 유지
해 나가야 한다. 단조로운 생활을 거듭하고 되풀이할 뿐이므로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며, 시간이 원주처럼 둥글게 회전하여 어디에도 이끌려가지 못하는 것처럼 느
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일에 쫓기고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기가 갖고 있는 것 속에 소외된다. 이 사물에의 의존성은 남자에세 
의지하는 데서 비롯되지만, 여자가 무엇 때문에 저축심이 강하고 인색한가를 알 만하다. 
여자의 생활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수단에 불과한 식량, 옷, 
주거 등은 만들어내거나 보존하는 데 소비된다. 이런 것은 동물적인 생활과 자유인의 삶
(실존) 사이에 놓인 비본질적인 매개물이다. 비본질적인 수단이 갖고 있는 유일한 가치는 
효용이다. 주부는 효용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녀 자신도 가까운 사람에게 유효
한 사람인 것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비본질적인 역할로 만족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곧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다-정치가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 그리고 수단의 가치를 절대적인 가치로 본다.
  그리하여 주부의 세계에서는 효용이 진리, 미, 자유보다 높이 평가되며, 이런 관점으로 

세계 전체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중용, 범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도덕
을 채택한다. 이런 여자에게 대담성, 열의, 무사, 위대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
런 성품은 자유가 모든 예견을 넘어서 전개되는 미래를 통하여 도래할 경우에만 나타난
다. 세상은 여자를 부엌이나 침실에 가둬두고도, 시야가 좁은 데 놀란다. 날개를 잘라놓
고 날지 못한다고 한탄한다. 만일 여자에게 미래를 열어준다면 그녀는 결코 현재 속에 갇
혀 잇지는 않을 것이다.
  여자를 그 자아나 가정의 한계속에 가둬놓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나르시시즘(자기애),
이기주의, 허영, 과민성, 악의 등을 비난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모순을 지적
할 수 있다. 여자는 타인과의 구체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어 있다. 각자 자기 가정에 
몰두하고 있으므로 일상적인 경험을 통하여 연대성의 요구나 이익을 알 기회가 없다. 그
러므로 일반적인 이익을 위해 자기를 초월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자기와 친숙한 영역이
나 사물을 지배할 수 있고 그곳에서 일시적인 주권을 발견할 수 있는 영역에 완강하게 머
물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문을 잠그고 창을 가려도 여자는 자기 가정 안에서조차 절대적인 안전을 
찾아볼 수는 없다. 여자는 감히 남자의 세계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멀리서 바라다보이는 
남자의 세계에 에워싸여 있다. 더욱이 그 남자의 세계를 기술이나 명확한 논리 또는 지식
으로 파악할 수 없으므로 어린이나 원시인처럼 위험한 신비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느끼
고 있다. 여자는 거기에 현실의 마술적인 사고방식을 투사한다. 사물의 진행방향이 그녀
에게는 숙명적인 것처럼 보이고, 한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여성
은 가능과 불가능을 식별하지 못한다. 누구나 믿으려고 한다. 모든 모순을 그대로 받아들
여 그것을 퍼뜨리고, 공황을 일으킨다. 여성은 안전할 때에도 걱정 속에서 살아가고 있
다. 피동이 강요되어 있는 여자에게는 분명히 내다볼 수 없는 미래가 전쟁, 혁명, 기아,
빈곤의 환상으로 가득차 있다.
  여성은 행동할 수 없으므로 불안하다. 남편이나 아들이 어떤 일에 뛰어들거나 사건에 
휘말렸을 경우, 그 위험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다. 여성에게 있어 남성들의 기획이
나 그들이 따르고 있는 규칙은 어둠속에서 하나의 확실한 길을 제시해 준다. 그렇다고 해
도 여성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막연한 어둠 속에서 허둥대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
므로 걱정만 한다. 상상속에서는 가능한 모든 일들이 같은 현실성을 갖게 마련이다. 기차
는 탈선할지 모르고 수술은 실패할지 모르며 사업은 망할지도 모른다. 여성이 오랫동안 
우울한 심정으로 물리치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력한 망령이다.
  근심, 걱정은 기성세계에 대한 불신의 표시이다. 여성에게 이 세계가 위협으로 가득찬 
영문 모를 재앙 속에 멸망할 것처럼 생각된다면, 그것은 여성이 이 세계에서 행복하지 않
기 때문이다. 대체로 여성은 단념하는 것을 단념하지 못하고 있다. 굴종을 받아들이고 있
는 것은, 마지못해 취하는 태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누구와도 의논한 적 없이 
여성이 되었다. 여성에게는 반항할 용기가 없다. 마지못해 복종하는 것이다. 그녀의 태도
는 끊임없는 항의이다. 여성의 고백을 듣는 사람들-의사, 성직자, 인생상담원들-은 그런
고백이 언제나 한탄인 것을 알고 있다.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녀들은 각자 자기의 불
이익을 호소하고 자신의 불운, 사회, 남자들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자유인은 실패를 한

다 해도 그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알고 떳떳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여성에게 일어나는 일
은 모두 타인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그녀의 불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도 타인이다. 
따라서 일체의 치료법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줄기차게 불평을 늘어놓는 여성에게는 여
러가지 해결방법을 권유해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두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이다. 여성은 자기가 알고 있는 환경에서 그대로 살아가려고 한다. 즉 무기력한 분노 속
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변화를 제의하면 그녀는 하늘은 향해 두 
팔을 쳐들고, "결국 그런 말을 할 줄 알았어요! "하고 말한다. 자기의 불쾌는 이런저런 
구실보다 더욱 깊은 곳에 근원이 있으며, 그것을 털어버리기 위해서는 웬만한 고식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세계가 자기와는 상관없이 자기에게 반대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세계 전체를 원망한
다. 여성은 사춘기부터, 아니 유년기부터 자기 신분에 불복해 왔다. 세상은 여성에게 보
상을 약속했다. 자기의 기회를 포기하고 남성의 손에 맡기면 이득이 100배나 되어 돌아온
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지금은 속았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남성의 세계 전체를 고발한다. 
원한은 의존의 이면이다. 모든 것을 맡겨서는 절대로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없다. 그러
나 여성은 남성의 세계도 필요로 하고 있다. 만일 이 세계를 전적으로 의심하고 반항하
면, 여성은 머리 위에 지붕이 없어져 위기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부의 생활에서 
가르침을 받은 마니교도(3세기 초에 파르시아인 마니가 세운 종교로 세계를 선인 빛과 악
인 어둠의 싸움터로 보았음. 채식, 불음, 단식,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악의 배제도 주장
함)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행동하는 자유인은 타인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선이나 악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그는 어떤 이상을 정하고, 이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은 자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행
동 속에서 모든 해결의 애매함을 경험한다. 정의와 부정, 이득과 손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행동 밖에 앉아 
있으며, 마음속으로도 윤리적인 문제를 생각하기는 거부한다. 선은 실현되어야 한다. 만
일 실행되지 않으면 거기에는 잘못이 있는 것이며, 죄가 있는 자는 벌해야 한다. 여성은 
어린이처럼 선과 악을 단지 흔해 빠진 그림처럼 생각하고 있다.
  마니교는 선택의 고민을 없앰으로써 정신적으로 사람들은 안정시킨다. 하나의 불행과 
더 작은 불행, 현재의 이득과 보다 큰 미래의 이득 사이에 서서 결단을 내리는 것과 패배
와 승리를 손수 결정하는 것은 큰 모험이다. 마니교도에게 좋은 곡식과 나쁜 이삭은 분명
히 구별된다. 그들은 단지 나쁜 이삭을 빼버리면 되는 것이다. 먼지는 그 자체가 나쁘다. 
청결하려면 더러운 것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청소하는 것은 낡은 물건과 더러움을 
몰아내는 것이다.
  여성은 이런 사고방식에 따라 유태인은 나쁘다, 프리메이슨 단원(1723년에 런던에서 결
성된 세계주의 운동의 비밀결사로, 국제적 형제애, 성실, 신의를 신조로 한다)은 나쁘다, 
과격파가 나쁘다, 정부가 나쁘다 하고 생각한다. 여성은 언제나 누군가에, 또는 뭔가에 
반대한다. 반 드레퓌스(프랑스의 대위. 독일에 군사 기밀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체포되었
으나 후에 진범이 나타나 무죄가 됨. 1959~1935)운동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격렬했다. 
여성은 악의 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들이 '

좋은정부'에 기대하고 있는 것은, 집에서 먼지를 몰아내는 것처럼 악을 몰아내는 것이다. 
열광적인 드골파 여성에게 드골은 청소부의 왕처럼 보였다. 그가 빗자루나 걸레를 손에 
들고 장애물을 제거하고 닦아내어 청결한 프랑스를 만드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
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언제나 불확실한 미래 속에 머물어 있다. 당장은 악이 선을 침범하
고 있는 것이다. 유태인이나 볼셰비키, 프리메이슨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은 
더욱 구체적으로 자기의 울분을 해소시킬 상대를 찾는다. 남편은 여성에게 알맞은 희생자
이다. 남성의 세계가 바로 남편 속에 육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의 사회는 그를 통하
여 여성을 구박하고 기만할 것이다. 그는 이 세계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만일 일이 잘못
되면 그가 나쁜 것이가. 남편이 저녁에 돌아오면 그녀는 어린 자식, 행상인, 가계, 물가
에 대해 지껄이고, 류머티스나 날씨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에세 책임을 느끼게 하
고 싶은 것이다. 때때로 그녀는 남편에게 특수한 불만을 품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남성이기 때문에 죄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도 병이 있고 근심이 있을지 모른다. '
그것은 여성의 영우와 다르다.'그는 특권을 갖고 있으며, 아내는 언제나 이것을 불공평하
게 생각하고 있다.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에게 갖고 있는 적의가, 그들에게서 멀리하기는
커녕 오히려 결합시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남성은 아내나 애인이 싫어지면 그들에게서 
도망치려고 한다. 그러나 여성은 미워하는 남성에게 보복하기 위해 곁에 두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상대방을 탓하고 비난하는 길을 택하는 것은,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하
는 것이 아니라 그 불행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된다. 최고의 위로는 자기를 비참한 수난
자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여성의 인생은 남성이 정복해 버렸다. 여성은 패배 자체에서 하
나의 승리를 얻어내려고 한다. 마치 어렸을 때처럼 눈물이나 히스테릭한 발작에 빠지게 
된다.
  여성이 그처럼 쉽사리 울 수 있는 것은 생활 자체가 무기력한 반항 위에 서 있기 때문
이다. 물론 여성은 생리적으로 남성보다 교감신경조직을 자제하는 힘이 약하기 때문이기
도 하다. 교육은 여성에게 무저항이 될 것을 가르쳤다. 여기서는 습관적인 규칙이 큰 역
할을 하고 있다. 디드로나 맹자맹, 콩스탕과 같은 남자들도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러나 남성은 풍습이 그런 것을 금한 후로 울기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여성은 언제나 사
회에 대해 실패했다는 태도를 취하려는 버릇이 있다. 남성은 사회에 동의한다. 불행한 일
이 일어나도 그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그는 그 불행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쉽사리 타도
되지 않는다. '
  그런데 여성은 사소한 장해가 생겨도 세계의 적의나 짓궂은 운명을 자각하게 된다. 그
러면 가장 안전한 은신처인 자기 자신 속에 급히 도망쳐버린다. 여성의 두 볼에 흘러내린 
미지근한 눈물의 흔적,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눈빛, 이것은 여성이 괴로워하고 있는 영
혼의 뚜렷한 표시이다. 피부에는 부드럽고 혀에는 약간 짭짤한 맛을 주는 눈물은 동시에 
부드럽고 씁쓸한 애무이다. 얼굴은 인자한 눈물이 흘러내려 빛나고 있다. 눈물은 탄식인 
동시에 위로이기도 한다. 그것은 열인 동시에 마음을 진정시키는 냉각이기도 하다. 그것
은 최고의 도피이다. 천둥비처럼 돌발적으로 갑자기 내리는가 하면 태풍이 되고 파도가 
되고 소나기가 되어, 금세 한탄의 샘으로 변화시키고 검게 찌푸린 하늘로 만들어버린다. 

그 눈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안개에 싸이게 된다. 그것은 눈동자가 아니라 비가 되
어 녹아내린다. 장님이 된 여성은 자연물의 수동성을 되돌아간다.
  여성은 패배를 강요당하고 있다. 그녀는 그 패배속에 가라앉는다. 수직으로 가라앉아간
다. 그리하여 그 속에 빠진다. 그녀는 폭포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남성에게서 도망가 버린다. 남성은 이런 여성의 태도를 불성실하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여성이 투쟁은 출발에서부터 이미 불성실한다. 여성의 손에는 어떤 효과적
인 무기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은 여기서도 마법적인 주술에 호소한다. 자기
의 흐느낌이 남성을 분노하게 하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점점 그런 방벙을 취하게 된다.
  여성은 눈물만으로 자기의 반항을 잘 표현할 수 없으면, 히스테릭한 언쟁을 벌인다. 그
런 지루하고 거친 태도가 남성을 더욱 당황하게 만든다. 환경에 따라서는 아내를 구타하
기도 한다. 또 다른 환경에서는 남성 쪽이 강하고 그 주먹이 효과적인 도구인 것이 분명
하므로, 오히려 모든 폭력을 자제한다. 그러나 여성은 어린애처럼 여러가지 상징적인 광
란을 연출한다. 남성에게 덤벼들어 할퀴기도 하지만, 그것은 제스처에 불과한다. 여성은 
특히 신경질적인 발작으로, 육체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없는 거부를 몸으로 표현하
는 경우도 많다. 여성이 광적인 동작을 취하기 쉬운 것은 생리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외계에 던져진 에너지가 그 대상물을 파악하는데 실패하여 일어나는 내면화의 하나이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능력의 낭비이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에게는 
좀처런 신경질적인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다. 상대방을 때리거나 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을 댈 수 없는 다 큰 아들이나 남편, 또는 애인을 상대할 때 그녀는 광적인 절망에 빠
진다.
  톨스토이 부인의 광적인 발작은 매우 의미심장한 면을 갖고 있다. 그녀가 남편을 조금
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확실히 잘못이며, 그녀의 일기를 통해 보더라도 그녀
는 결코 관대하거나 상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솔직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여성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잘못이었건 정당했건 상관없이 그
녀가 살고 있던 상황이 혐오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한평생 남편의 포옹이나 모
성, 고독 등 남편으로부터 강요되는 있는 생활방식에 대해 불평하면서 참고 살아왔다. 톨
스토이의 새로운 결심으로 싸움이 격화되면, 그녀는 적과 싸울 무기가 없어 자기의 무력
한 의지로 적의 의지를 거부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거부의 연극만 되풀이된다. 거짓 자
살, 거짓 가출, 꾀병 등이 그것이다. 그 결과, 주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그녀 자
신도 정력이 소비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 스스로 자신을 구제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도 없다. 자기의 반항심을 자제해야만 하는 이유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데다가 또 그런 
심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부의 한계에 도달한 여성에게 열려있는 출구는 확실히 하나 있기는 하다. 그것은 자
살이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보다 자살하는 경우가 적은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통계
가 매우 애매하다(할프 박스의 <자살의 원인>참조). 자살에 성공한 경우는, 여성보다 남
성의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나 자살미수는 여성쪽이 더 많다. 그것은 아마도 거짓으로 
기분을 만족시키는 여성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자살을 많이 연기하지만 
진실로 자살을 원하는 경우은 남성보다 적다. 여성이 잔인한 방법을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들은 자살에서 총기나 칼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필리어(셰익스피어
의 희극 <햄릿>의 등장인물)처럼 투신자살을 선호한다. 이것은 수동적이고 어둠에 찬 물
과 여성의 친근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물 속에서는 생명이 그대로 녹아버릴 것처럼 생
각된다. 대체로 여기서도 앞에서 지적한 애매성을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은 자기가 싫어하
는 일을 진심으로 버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별의 연극을 곧잘 하지만, 결국은 
자기를 괴롭히는 남편의 곁에 머무르게 된다. 그녀를 괴롭히는 인생과 인연을 끊으려는 
시늉은 하지만 실제로 자살하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그녀는 결정적인 해결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자기의 처지를 항의한다. 그러나 거기서 
탈출하지는 않는다.
  항의로 이해되어야 하는 여성의 행위는 참으로 많다.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전하는 
심정으로 남편을 배반하는 여성이 상당히 많다는 것은 이미 보아왔다. 남편이 꼼꼼하고 
검소하면 여성은 일부러 경솔해지고 낭비하기도 한다. 여성을 싫어하는 사람은 "여자는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 "고 비난한다. 여성에게는 '정확성에 대한 관념'이 없다고 생각한
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성이 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성이 지체하는 
것은 일부러 그러는 것이다. 요염한 여성은 그런 방벙으로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런 
모습을 보이면 자신의 값어치가 올라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은 남자를 잠시 
기다리게 하여, 자신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오랜 '기다림'에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여성의 생활 전체가 기다리는 것이다. 내재와 우연성의 혼돈 속에 갇
힌 채 자기 삶의 의미가 언제나 남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들의 경의와 
찬사를 기다리고 있다. 살아가는 이유와 가치, 심지어 존재 자체를 그들에게서 얻기를 기
다리고 있다. 생활비도 수중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설사 자기 손에 수표첩을 갖고 
있더라도. 매주 혹은 매월 남편에게서 돈을 받더라도 그것은 먼저 남편이 그만한 돈을 손
에 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식료품 가게에 물품대를 지불하거나 새 옷을 사려면 그
만큼 남편의 돈을 여분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여성은 남성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남성에게 
좌우된다. 여성은 남성의 생활에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지만 남성은 여성의 생활 전체
이다. 남편은 가정 밖에 일터를 갖고 있지만, 아내는 종일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애인 사이에서도 남성 쪽이-설사 그가 정열적이라고 하더라도-자기의 일에 지장이 없는 
상황에 한해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정한다. 잠자리에서도 여성은 남성의 욕망을 기다리
고 자기 자신의 쾌락을 -때로는 불안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
은 고작 애인이 정한 시간에 늦게 가는 것과 남편이 지시한 시간에 완전한 준비를 마치지 
못하는 정도이다. 이런 방식으로 여성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도 소중하다는 것을 확인시
킨다. 독립을 요구하고 잠시 본질적인 주체가 되어 상대방이 수동적으로 자기의 의지를 
따르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겁한 보복이다. 아무리 남성을 잠시 '멍청하게'만든다고 
하더라도 남성의 자의에 따르면서 보내는 무한한 시간의 보상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남성들의 지상권을 인정하고 그 권위를 받아들이며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지만, 차츰 남성의 지배에 항거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종종 비난을 받는 '반항심'이 생기게 된다. 여성은 일정한 자주적인 영역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진리나 가치를 앞세워 남성들의 그것과 싸우지 못하고, 단지 남성들
의 진리와 가치를 부정할 뿐이다. 여성의 부정은 남성에 대한 존경과 한이 섞여 있는 정
도에 따라 논리가 정연하기도 하고 엉성하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상 여성은 남성이 만들
어놓은 체계의 모든 허점이나 결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적발하려고 열심히 노
력한다. 여성은 논리나 기술을 조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남성의 세계에 대한 
발판을 갖고 있지 않다. 반대로 남성이 사용하는 도구의 위력이 여성의 영역에 접근하면 
힘없이 사라져버린다.
  남성이 일부러 여성을 무시하려고 하는 인간적인 경험의 한 분야가 있다. 그러나 여성
은 이런 경험을 하고 있다. 대단히 정밀한 솜씨를 자랑하는 설계기사도 가정에서는 조회
의 신처럼 행동한다. 식탁 위에 음식이 차려지고 셔츠에는 풀이 잘 먹여있고 떠들썩하던 
아이들은 침묵한다. 출산해 내는 것은 모세가 지팡이를 한 번 휘두르는 것 못지않게 신속
한 행위이다. 남성은 이와 같은 기적을 조금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기적은 마
술과는 조금 다르다. 기적은 합리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세계속에 원인이 없는 사건의 근
본적인 비연속성을 갑자기 나타내는 것으로 이에 대하여는 어떤 사고도 대항하지 못한다. 
한편 마술적인 현상은 은밀한 힘으로 결합되어 있지만, 순종동의 의식은-그것을 이해하지
는 못하지만-그 연속적인 발전을 느낄 수 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조화의 신인 아버지에
게는 기적적이며 그 성장을 뱃속에서 참아온 어머니에게는 마술적이다.
  남성의 경험은 분명하게 이해하기는 쉽지만 여러 곳에 허점이 있다. 반면 여성의 경험
은 애매모호한 것이지만 충실하다. 이 불투명성이 여성을 순중하게 만든다. 여성에게 남
성의 태도는 경솔하게 느껴진다. 남성은 독재자, 장군, 재판관, 관료, 법전, 추상적인 원
칙 등이 갖는 경박성을 지니고 있다. 한 주부가 어깨를 추켜올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 것
은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남자들은 생각이 없어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
남자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인생에 대해 무지해요. "여성들은 버마재비의 신화(버마재비
의 암놈이 수놈을 잡아먹는 것처럼, 여자가 남자를 희생시킨다는 것)를 경박하고 귀찮은 
수필의 상징으로 대항한다.
  이런 견해를 갖고 있는 여성이 남성의 논리를 거절하는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논리는 여성으로서의 자기의 인생체험에 적용되지 않을 뿐더러, 그러한 이론이 남성
의 손에서 폭력의 음험한 형태를 유도하는 것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남성들의 단호한 
긍정은 여성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여성을 딜레마속에 가두어 놓고 동의와 거부의 양자
택일을 강요한다. 이 경우, 여성으로서는 공인되어 있는 체계에 동의해야 한다. 찬성하지 
않으면 체계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여성으로서는 그런 대담한 일을 할 수
가 없다.
  여성은 다른 사회를 만들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사회의 일원인 
것도 아니다. 여성은 반항과 예속의 어중간한 위치에서 남성의 권위에 마지못해 따르고 
있다. 이런 불확실한 복종의 결과를 억지로 여성에게 짊어지게 한다. 남성은 언제나 자유 
의지로 노예가 된 반려자라는 환상을 좇고 있다. 여성이 그처럼 양보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의 추론의 기초가 되는 가정도 남성 스스로가 택한 것임을 알고 있다. 
여성이 이런 근본적인 가정을 의심하려고 하지 않는 한, 남성이 여성의 입을 막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여성도 그것이 전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남성의 이론에 좀
처럼 승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는 고집이 세다, 비논리적이다 하며 화를 내고 비난한
다. 여성은 주사위가 속임수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내기하기를 거절한다.
  그렇다고 진리가 남성들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은 
오히려 진리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생명의 성장과 발전이 그녀에게 동일원리를 의
심하게 하거나, 그녀를 에워싼 마술적인 현상이 인과율의 관념을 상실하게 하는 데 그치
지 않는다. 남성의 세계에 존재하는 여성 자신은 온갖 원리나 가치, 존재하는 모든 것의 
애매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남성의 도덕은 특히 여성에 대해서는 하나의 커다란 기만이라
는 것을 알고 있다. 남성은 여성에게 그가 정한 미덕과 법전을 당당하게 강요한다. 그러
면서 은밀히 그 법전에 따르지 않도록 유인하며 어느 정도 이런 불복종은 기대하기까지 
한다. 만일 그런 기대가 없었더라면, 그가 배후에 몸을 감추고 있는 저 화려한 정면은 붕
괴될 것이다.
  남자는, 시민은 보편적인 적을 향해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품위를 갖게 된다는 헤겔의 
사상을 즐겨 방패로 삼는다. 남자는 한 개인으로서 욕망이나 쾌락을 구할 권리를 갖고 있
다. 그러므로 그와 여자의 관계에는 이미 도덕이 적용되지 않고 자유로운 행동도 보장된
다. 반면 그는 다른 남자들과는 가치가 보장되는 여러 가지 관계를 맺게 된다. 자기도 하
나의 자유이며,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법칙에 따라 다른 자유와 대립된다. 그
러나 여자를 상대할 경우에 그는 실존자답게 살기를 그만두고, 즉자존재의 환영 속에 빠
져 비진정한 계획에 위치하게 된다. 그리하여 폭군이 되고 사디스트가 되고 난폭해지거나  
혹은 유치해지고 마조히스트가 되고 불평분자가 된다. 그리고 자기의 집념이나 고약한 버
릇을 만족시키려고 한다. 공적인 생활에서 얻은 권리를 내세워 긴장을 풀기도 한다. 그의 
아내는-테레즈 테메이루처럼-남편의 공적인 말이나 고상함과 대조를 이루는 개인적인 탐
욕이나 이기심에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는 입으로는 인구증가의 필요성을 주장하지
만 실제로 자기는 필요 이상의 아기를 낳지 않는다. 정결한 아내를 칭찬하면서도 이웃에 
사는 남의 아내를 유혹한다. 낙태는 범죄라고 법으로 규정한 것도 남성이지만 해매다 낙
태해야하는 처지에 몰리고 있는 100만의 프랑스 여자도 남성에 의해 생긴 것이다. 남편이
나 애인이 이런 해결방법을 권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리고 그들은 필요에 따라서는 
이런 방법을 취해야 함을 암암리에 계산하고 있다. 여성이 죄를 범해여 그 책임을 져주기
를 바라고 있다. 여성의 부도덕이 남성에 의해 존중되는 도덕적 사회의 조화를 위해 필요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중성의 가장 명백한 사례는 매음에 대한 남성의 태도이다. 남성이 요구하
기 때문에 매춘부가 생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악적은 비난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악
습에는 대단히 관대한다. 매춘부들이 세상 남자들(특히 신사를 자처하는)을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자기의 육체를 밑천으로 살아가는 매춘부를 패덕의 여인이나 타락한 여인으로 보지만, 
그런 육체를 상대하는 남성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19세기 말, 어떤 사창가에서 열두세 살 먹은 소녀 두 사람을 경관이 발견했다. 이 소녀
들은 상당한 고위층 인사가 단골손님이라고 말했다. 한 소녀가 그 신사의 이름을 대려고 
입을 열자 검사는 당황하여 그것을 막았다. "훌륭한 분의 이름을 더렵혀서는 안 돼! "국
가로부터 명예훈장을 받은 신사는 소녀의 처녀성을 빼앗아도 훌륭한 분이었다. 이 사람에
게도 약점이 있다. 약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보편적인 윤리의 영역에 적을 두
지 않은 소녀-장군도 아니고 위대한 프랑스인도 아니며, 단지 한 소녀에 불과한-는 자기
의 도덕적인 가치를 성본능의 우연한 장소에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타락한 여
자, 탈선한 여자, 감화원에 보내야 하는 불량소녀이다.
  남성은 여성을 상대로 자기의 체면은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여성에게는 불명예가 되
는 공범행위를 할 수 있다. 여성은 이런 미묘한 점을 잘 알지 못한다.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은 남자가 공공연히 여자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성은 
자기도 원한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도 남성에게 
주는 체하지만 실제로는 주지 않는다.
  정결하고 성실한 아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은밀히 자기의 욕망에 몸을 맡
길 것이다. 그녀는 훌륭한 어머니가 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산아제한을 하고 필요하다
면 낙태도 한다. 남성은 공공연히 그런 여성의 행위를 부정한다. 그것은 게임의 규칙이므
로. 그러나 내심으로는 여성의 연약함이나 불임증을 감사하고 있다. 마치 임무를 완수하
면 보상을 듬뿍주지만 붙잡히면 총살당하는 것을 방치하는 간첩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
다. 남성의 부도덕의 결과는 여성이 짊어지게 된다. 훌륭한 신사들이 살고 있는 견고하고 
화려한 궁전을 위해 하수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창녀뿐만 아니라 여성 전체이
다. 이런 처지에서 품위, 명예, 성실 온갖 남성적인 미덕의 찬사를 퍼부어도 여성이 따라
오지 않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도덕가인 남성으로부터 타산적이고 가식적이며 거
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여성은 조용히 냉소하고 있다.
  남성도 돈이나 성공에는 욕심을 부린다. 또 일을 하여 그것들을 획득하는 수단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기생적인 역할이 주어질 뿐이다. 모든 기생자는 필연적으로 착
취자가 되게 마련이다. 여성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향락
을 즐기기 위해 생식하기 위해 남성을 필요로 한다. 성적 서비스에 의해 남성의 혜택을 
확보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녀는 완전히 착취의 도구가 된다. 
거짓말을 한다고 하지만 몸을 파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녀와 보호자 사이에는 공정한 거
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남성은 여성에게 연극하기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그
녀가 타자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실존자는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려고 해도 여전히 
주체이다. 남성은 여성을 객체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를 객체로 만든다. 
그녀가 자진하여 객체가 되려고 하는 순간, 그녀는 자유로운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여기
에 그녀의 근원적인 배신이 있다. 가장 수동적인 여성일지라도 역시 의지적이다. 그래서 
온전히 남성에게 몸을 맡기고 있으면서도 그를 보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속았다고 느끼게 된다.
  여성은 남성에게 바쳐진 존재로서 먹이가 되어야 한다. 특히, 남성은 이 먹이를 여자 

스스로 자유의지로 자기에게 제공해 주기를 요구한다. 침대에서 그녀에게 쾌락을 느끼기
를 요구한다. 가정에서는 여성이 남편의 우월성과 재능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
다. 그러므로 그녀는(다른 때에는 수동적인 연극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자주성이 있는 
체해야 한다. 그녀는 자기에게 빵을 제공하는 남편을 위해 싸움과 눈물, 사랑의 황홀, 신
경질적인 발작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받아들이고 있는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거짓말을 한다.
  남성은 자기의 권리와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도 여성에게 연극을 하도록 유도한
다. 여성 쪽에서는 그 거짓 능력을 이용하여 이중으로 즐기는 보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애인이나 여자친구들을 상대로 속아넘어간 남성의 단순한 허영심을 재미있어 한다. "그들
은 우리를 만족시켜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너무 기뻐서 울어주기를 원하고 있어"
하고 반감을 갖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식당 옆에서 주인을 욕하는 하인들과 비슷하다.
  여성도 이와 같은 결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역시 가부장적인 압제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종이 주인을 쳐다보는 것처럼 남성을 올려다보는데 익숙하므로, 하인과 같은 
파렴치한 근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여성의 특색 중에서 어느 하나를 놓고 보더라
도, 그것이 근원적으로 타락한 본성이나 의지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모두
가 하나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적인 제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허위가 
있다. "고 푸리에는 말했다. "상품에 있어서처럼 사랑에 있어서도 급지와 밀수입은 분리
할 수 없다. "여성의 결점이 그 입장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은 남성도 잘 알고 있다. 양성
의 계급차이를 유지하기 위해 남성은 여성을 경멸하는 근거로 삼로 있는 성질을 여성에게 
조장하려고 한다. 물론 함께 살아가는 여자가 나쁜 결함을 갖고 있으면 남편이나 애인은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일반적으로 여성다운 매력에 대해 말할 때에는, 그들은 
그와 같은 여성스러움과 여성의 결함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만일 여성이 불
성실하고 경박하며 비겁하고 게으르지 않다면 그 매력을 잃게 된다.
  <인형의 집>에서 헬머는 남성이 약한 여성의 어린애 같은 과실을 용서해 줄 때, 자기가 
얼마나 정당하고 강하며 분별력 있고 너그러운가를 느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른슈타인(프랑스의 극작가)이 묘사한 남편들은-작가와 공모하여-돈을 훔치
고 심술궂고 부정한 짓을 저지르는 여성들을 측은하게 생각한다. 남편들은 여성 위에 군
림하여 너그럽게 몸을 굽히는 것으로써 남성으로서의 현명함을 자랑하고 있다.
  미국의 인종 불평등론자나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자들 역시, 흑인은 도벽이 있고 게으르
며 거짓말쟁이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으로 흑인 스스로 자신들의 무가치를 입증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압제자에게 정당한 권리를 부여하게 된다. 만일 흑인이 끝까지 정직하고 
성실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그를 고집에 센 놈이라고 욕한다. 여성의 결점도 예외는 아니
어서 여성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장식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부각되는 것이다.
  논리적인 원리나 도덕적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법칙에 대해 회의적인 여성은 
보편적인 감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녀의 눈에 세계는 잡다한 집합체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녀는 과학적인 설명보다는 이웃 여자의 험담 쪽을 쉽사리 믿게 된다. 그겨는 책을 소중
히 여기기는 하지만 쓰여진 글 사이로 시선이 갈 뿐, 내용을 파악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와는 달리 쇼핑 행렬이나 사교장에서 낯선 사람이 말한 일화는 쉽사리 의심할 수 없는 
권위를 갖게 된다.
  여성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는 모든 것이 마술이고, 영역 밖에서는 모든것이 신비스럽
다. 여성은 진실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직접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확신
을 갖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경험도 좋고, 강조된다면 남의 경험도 무방하다. 여성을 
가정에 고립되어 다른 여자들과 활동적으로 대립하지 않으므로, 자연히 자기를 특이하고 
특수한 경우처럼 생각한다. 여성은 언제나 남성의 운명이 자기에게 유리한 예외의 경우를 
만들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이론보다 자기 마음속에서 생기
는 영감을 믿는다. 그리고 그 영감이 신이나 세계의 어떤 신비로운 영으로부터 오는 것으
로 믿기 쉽다. 어떤 불행이나 사고에 대해서는 태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거야'또는 이와 반대로, '나만은 예외가 되겠지'하
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성은 특혜를 좋아한다. 상인은 그녀에게 특별히 할인해 주고 교통
순경은 통행증이 없어도 통과시켜줄 것이다. 여성은 자기 미소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누구나 미소를 짓는다는 것을 그녀에게 가르쳐준 남성은 없다. 여성은 
자기가 이웃집 여자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교를 하지 않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아무리 경험을 쌓아도 생각을 취소하지는 않는다. 여성은 잇따라 실패해도 총계
를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에게 도전할 수 있는 견고한 반세계를 구축하지 못한다. 산발적으
로 남성들을 비난할 뿐이다. 여자끼리 잠자리나 출산, 미래의 예상이나 미용법 등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들의 원망에서 당연히 생길 법한 반감의 세계를 세우기에
는 확신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태도는 너무나 상반되고 감정적이다. 
남자란 어린아이처럼 상처받기 쉬운 육체이며 순진한 존재이다, 귀찮은 수펄이다, 치사한 
폭군이다, 이기적이며 허영심이 강하다. 그러나 영웅이나 신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남성의 욕망은 조잡한 정욕이며 그 포옹은 여성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고역이다. 그러나 
그 거친 정열이나 남성적인 정욕은 조화의 신이 지닌 생산력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과연 
남자야! "하고 황홀감에 빠져 여성이 말할 때, 그것은 남성의 정력과 사회적인 실력에 감
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쌍방에 동일한 창조적인 우월성이 나타나 있다. 여성은 남성이 
대예술가, 대실업가, 장군, 지도자인 것을 상상할 때, 그런 남자가 정열적인 애인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의 사회적인 성공은 언제나 성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
  여성의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켜주는 남성은 천재로 인정받기 쉽다. 결국 여성이 남성적
인 신화를 살리고 있는 셈이다. 남근(양물)의 형태는 로렌스나 그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활기찬 정력과 동시에 인간적인 초월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은 침대의 쾌락 속
에 세계의 정령과의 신비로운 결합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남성을 신비적으로 숭배하는 여
성은 남성의 영예속에 자기를 몰입시키고, 거기서 자기를 재발견하게 된다. 남성의 힘을 
과시하는 것으로 모순은 쉽사리 제거된다. 어떤 남성들은-일상생활에서 남성의 초라함을 
여성에게 보인 남성들은-인산의 비참함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남성의 위대성
이 고양되어 있다. 그리고 이 양자의 모습이 하나로 용해되는 것도 여성은 용납한다.
  "내가 유명해지면 R... 은 반드시 나와 결혼해 줄 것이다. 그 허영심이 채워질 테니까. 

내 팔은 끼고 걸어가면서 그는 가슴을 펼테지. "
  자기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를 사랑한 어떤 처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녀는 
이 남자를 미친 듯이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남자가 그녀의 눈에는 인색하고 교만
하고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고 신일 수도 있다. 신도 약점이 있으니까. 우리는 그 자유속
에서 그 인간성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진정한 존경뿐 아니라 약점도 간과하
지 않을 것이다.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는 남자를 손아귀에 넣을 줄 알고 남자
를 잘 조종하는 것을 자랑할 수 있는데, 사실은 남자의 위력에 굴복하면서 남자의 약점에 
아양을 떠는 것에 불과한다. 이것은 현실적인 행위 속에 완성되는 상대방의 인격에는 조
금도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은 증거이다. 그녀는 단지 우상과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 일반적
인 본질 앞에 맹목적으로 엎드리고 있는 것이다. 남성이라는 것, 그것은 하나의 신성한 
후광과 같은 것으로 응결된 기성의 가치로 되어 있으며, 그것을 지닌 개인은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도 빛나보인다. 당사자는 대단치 않다. 오히려 그 남성이 갖고 있는 특권 자체에 
질투를 느껴 심술궂은 심정으로 그를 눌러버리고 싶어한다.
  여성이 남성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애매함은 그녀 자신과 세계에 대한 태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녀가 갇혀 있는 영역은 남성의 세게에 의해 권한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남자 역시 조종을 받고 있는 어떤 정체불명의 힘이 지배하고 있다. 그런 
마법과 같은 힘에 협력하면 여성도 권력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는 자연을 극복한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역시 사회를 지배한다. 정신은 소멸되어버린다. 여성은 이 
불확실성을 방패로 하여 도시보다 정원에, 사상보다 질병에, 혁명보다 출산에 더 많은 진
실을 인정하려고 한다.
  그녀는 바하오펜(스위스의 문학가로 <모권>의 저자)이 꿈꾼 대지나 어머니의 지배를 회
복하여 자기 안의 비본질적인 것에 대하여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녀도 그 안에 초월성을 갖고 있는 실존자이므로 자기가 갖혀 있는 이 영역을 변형시켜
야만 가치를 높일 수 있다. 그녀는 여기에 초월적인 차원을 부여한다. 남성은 사고가 가
능한 현실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세계에 살고 있다. 반면 여성은 사고가 허락되지 않는 하
나의 마술적인 세계를 상대하고 있다. 그녀는 그 세계에서 현실적인 내용을 갖지 않는 사
고방식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자기의 실존을 올바로 살려고 하지 않고, 하늘에 자기 운명
의 순수한 이념을 바랄 뿐 행동은 하지 않는다. 상상 속에 자기의 모습을 내세운다. 추론
은 하지 않고 꿈을 꾼다. 그래서 여성은 육체적이면서도 공적이고 지상적이면서도 천상벽
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인생은 냄비를 닦는 것으로 보내지만, 그것 또한 훌륭한 소설이
다. 남성의 부하이지만 자기를 남성의 우상처럼 생각한다. 자기의 육체속에서는 굴욕을 
겪으면서도 그녀는 사랑을 찬양한다. 생명의 우연한 사실성밖에 경험하지 못하면서도 이
상에 봉사하는 수녀가 된다.
  이와 같은 상반성은 여성이 그 육체를 파악하는 방법에도 나타나 있다. 그것은 무거운 
짐이다. 종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고 달마다 출혈하고 수동적으로 생식하는 그 육체는 분
명한 쾌락을 확보할 수 없다. 육체에는 자연히 고통이 생기고 고통은 육체를 괴롭힌다. 
여성은 자기 안에 위협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 내부에서 위험을 느끼게 된다. 
근육과 내장을 규제하는 교감신경계통과 내분비계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히스테릭한 육체이다. 그 육체는 여성이 감당하기를 거부하는 반응도 나타난다. 
흐느낌, 경련, 구토 등을 일으켜 육체는 그녀를 거역하고 있다. 육체는 그녀의 가장 친밀
한 진실이지만 그것은 수치스러운 진실이기도 하여, 여성은 이것을 숨기려고 한다. 그러
나 또한 육체는 그녀의 훌륭한 복사이기도 한다. 그녀는 그것을 거울에 비추고 황홀하게 
바라본다. 그것은 행복의 약속이고 예술품이며 살아 있는 조각이다. 그녀는 형태는 만들
고 장식하여 남에게 보여준다. 거울을 향해 미소를 지을 때, 그녀는 자기의 육적인 우연
성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때때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여 자기가 여주인공이며 동시에 육체
라는 데 놀란다.
  자연은 그녀에게 좌우대칭적으로 이중의 얼굴을 갖게 한다. 요리할 때 냄비에 야채를 
제공하는 한편, 신비적은 감동도 느끼게 한다. 여성은 주부가 되고 어머니가 되면서, 들
이나 숲속으로 도망치는 자유를 단념한다. 그것보다는 가정에서 평온하게 채소밭을 일구
는 쪽을 택하고, 꽃을 가꾸어 화병에 꽂는다. 그러나 그녀는 달빛이나 석양을 바라보고 
흥분하기도 한다. 그녀는 지상의 동물이나 식물 속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식량이나 장식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자연의 은총이나 마술인 생명의 진액이 흐르고 있다. 생명은 단지 내
개와 반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빛의 눈부신 면도 갖고 있다. 뱃속에서의 
다산에 의해 자연과 화해하고 있는 여성은 자연의 정령이다.
  여성은 활기를 불어넣는 정력이 입김을 생생히 느끼고 있다. 그리고 여성이 불만의 상
태로 머물러 있고 미완성의 처녀라고 느끼는 정도에 따라 영혼은 무한히 뻗어 있는 길 위
에서 끝없는 지평선 쪽으로 흡수되어간다. 남편, 자식, 가정에 매여 있는 여성은 스스로 
도취된 듯한 심정으로 주체성을 회복한 기분으로 서 있다.
  여성은 이제 아내도 어머니도 주부도 아니다. 한 인간일 뿐이다. 그녀는 수동의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자기도 하나의 의식, 하나의 자유의 주체임을 상기한다. 물의 신비나 
산봉우리의 웅장한 모습 앞에서는 남성의 최고권리 같은 것은 사라져버린다. 그녀가 히스
의 풀밭 사이를 걸어갈 때 손을 개울물에 적실 때 그녀는 타인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
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노예생활을 통하여 그 독립을 유지해온 
여성은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의 자유를 열렬히 사랑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것
에서 그저 약간 산뜻한 도취를 느끼는 구실을 발견하는데 그칠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영혼의 황홀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육의 세계와 시적인 세계에 이중으로 속해 있는 것은, 여성이 다소나마 믿고 있
는 형이상학과 지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여성은 생명과 초월을 혼동하려고 
한다. 즉, 그녀는 데카르트의 철학이나 여기에 친근성을 갖고 있는 모든 사고방식을 기피
한다. 그녀는 스토아 철학자나 16세기의 신플라톤학파의 철학과 유사한 자연주의 철학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여성들이 나바르의 여왕 마르그리트를 선두로 하여, 그런 물질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철학에 심취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회적으로는 마니교
도적인 여성이면서도 존재론적으로는 낙천주의자이고 싶어하는 깊은 욕구를 갖고 있다. 
행동의 모럴은 그녀에게 적합하지 않다. 행동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어진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주어진 것은 선이라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스피노자가 이성에 의해 인정하고 라이프니츠가 계산에 의해 인정한 선에 대해서는 무관

심하다.
  여성은 하나의 살아 있는 조화와 같은 선, 단지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의해 잘 
적응할 수 있는 선을 요구한다. 조화라는 사고는 여성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의 하나이
다. 그 사고방식에는 부동의 완전성과 전체나 개개의 요소도 직접 정당화하는 견해와 여
성이 전체에 수동적으로 참가하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성은 조화의 세계에서 남성
이 행동으로 구하는 것에 도달하게 된다. 여성도 세계와 관계를 갖고 있으며 세계에 요구
되어 있다. 그리하여 선의 승리에 협력하고 있다.
  여성들이 하늘의 계시처럼 생각하는 순간은, 그녀들이 편안히 휴식하고 있는 현실과 자
기들이 조화를 발견하는 때이다. 그것은 버지니아 울프-<댈러웨이 부인>, <등대로의 산
책> 속에서- 그리고 K. 맨스필드가 그 작품 전체에서 여주인공들에게 최고의 보상으로 제
공하는 빛나는 행복의 순간이다. 자유의 도약이라는 기쁨은 남성만의 것이다. 여성이 알
고 있는 것은 평화의 충실감과 같은 인상이다. 여성은 언제나 거부, 비나, 요구와 같은 
긴장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평정이 큰 가치를 갖는 것으로 여긴다. 여성이 아름
다운 오후나 저녁의 고요를 즐기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만 숨은 영
혼의 참된 정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위선이다. '선'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
다. 세계는 조화되어 있지 않다. 어떤 개인도 자신의 필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이 아니다.
  사회가 여성에게 제공하는 최초의 보상은 종교이다. 서민에게 그것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유로 여성에게도 종교가 필요하다. 어는 성과 계급을 내재 속에 가둬두려면, 거기에 초
월의 환상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남성에게는 자기가 정한 법전의 배경을 산에게서 찾는 
것이 매우 유리하다. 여성에게 언제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데다가 그 권위가 지고의 존
재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특히 유태인이나 마호메트교도나 기
독교도에게는 신권에 의해 남성이 주인으로 되어 있다. 신을 공경하면 압박을 받고 있는 
자의 마음에서 모든 반항심을 질식 시켜 버린다. 그리하여 믿기 쉬운 여성의 특성을 이용
할 수 있다. 여성은 남성의 세계 앞에서 존경과 신앙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신은 그녀에게 장관만큼 거리감을 느끼게 하지 않으며, 인간 창조의 신비는 발전소의 신
비와 결부된다.
  그러나 특히 여성이 종교에 열중하기 쉬운 것은 어떤 깊은 욕구에 응하는 것이 있기 때
문이다. 자유에 기여한 근대 문명 - 여자에게도 그러했다 - 에 있어서 종교는 이미 속박
의 도구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반의 도구로 나타난다. 여성에게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열등
감을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대신, 신의 그늘에서 주권자인 남성과 동등해질 수 있다고 말
해 믿을 것을 권고한다. 여성이 신에게 그 내재성을 바침으로써 그 초월성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영혼의 우열이 결정되는 것은 하늘에서이지 지상의 일에 의해서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하면, 이 지상의 생활에는 단지 잡무가 있을 뿐이다. 구두를 닦거
나 다리를 놓는 것은 모두 공허한 일이다. 사회적인 차별을 초월하여 양성의 평등이 회복
된다. 그래서 소녀가 처녀는 남자형제보다 훨씬 열렬히 신앙에 몰입한다. 그의 초월성을 
다시 초월하는 신의 눈동자는 남자에게는 굴욕감을 둔다. 이런 강력한 신의 보호를 받게 
되면, 자기는 언제까지나 어린이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존재로 인해 느끼고 

있는 거세보다 더욱 근본적인 거세이다.
  한편 영원한 어린이(여성을 가리킴)는 자기를 천사의 자매로 변형시켜주는 이 시선 속
에서 구원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남자아이가 갖고 있는 페니스(남성)의 특권을 부인한다. 
성실한 신앙은 소녀에게 모든 열등의식을 제거하는 데 매우 우용하다. 그녀는 이제 남성
도 여성도 아닌 신의 피조물이다. 많은 위대한 성녀가 지닌 남성적인 확고한 정신도 그것
에 연유한다. 성녀 브리지트나 시에나의 성녀 에카테리나 등은 자존심을 갖고 세계를 지
도하려는 의욕을 보였다. 그녀들은 남성의 권위 같은 것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에카
테리나는 남성인 고해신부들을 가혹하게 다루기도 했다. 잔다르크나 성녀 테레사도 남성
이 할 수 없는 대담한 행동을 했다. 로마교회는, 신이 결코 여성에게 남성의 보호에서 벗
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유념하고 있다. 죄악소멸 선언의 거부나 파문과 같은 무
서운 무기는 남성의 손에 맡기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끝까지 자기의 환각을 믿고 고집
을 부린 잔 다르크는 화형을 당했다. 그러나 신의 의지 자체에 의해 남성의 계율에 복종
하는 여성이지만 신의 은총 안에서 남성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확실한 수단을 찾아낸다.
  남성의 논리는 신비에 의해 빛을 잃게 된다. 남성의 자존심은 죄악이 된다. 남성들이 
애써 활동하는 것은 비단 어리석은 짓일 뿐만 아니라, 악한일이기도 하다. 신이 지은 세
계를 무엇 때문에 새로 개조하려고 하는가? 여성의 수동적인 자세가 오히려 신성화된다. 
노변에서 묵상에 잠긴 그녀는 자기가 정치적인 집회 등에 뛰어다니는 남편보다 신에 가깝
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녀는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
다. 반항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생명과 정신의 종합이 정확히 성취된다. 
어머니는 하나의 육체를 낳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영혼을 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이것이 
원자의 비밀 따위를 연구하는 것보다 고상한 일이다. 여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협력
하는 것으로 남성에게 그 여성적인 특질(여성스러움)의 영광을 분명히 요구할 수 있다.
  신은 이렇게 여성 일반에게 품위를 제공할 뿐 아니라 여성 개개인을 높은 하늘로 도피
시키면서 마음의 기둥을 발견하게 한다. 인간적인 인격으로서는 별로 가치를 갖지 못하지
만, 일단 신의 영감의 이름으로 행동하면 그 의지는 신성불가침한 것이 된다. 기용 부인
은 어떤 수녀의 병에 관해 "신의 말씀으로 명령하고, 그 같은 말씀에 따라 복종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신앙이 독실한 여성은 자기의 권위를 겸손한 
복종으로 위장한다. 그녀는 아기를 기르고 수도원을 관리하고 자선사업을 하면서 초자연
적인 힘 안에서 순종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여기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신을 소홀
히 하는 것과 같다.
  남성도 이런 구원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성은 어차피 같은 필요를 갖는 동
료들과 경쟁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러한 것은 기대할 수 없다. 남성의 갈등은 모두
가 인간관계에서 일어난다. 여성은 이제, 자기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신
의 의지를 내세운다. 여성에게 이런 도움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특히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런 관계가 타인과 관련될 경우에도, 숭고한 침묵
이 법의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내면적인 갈등에 있어서이다. 사실상 여성은 자기의 욕
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종교를 구실로 삼는다. 불감증에다 마조히스트인 동시에 사디스트
인 그녀는 육체를 단념하고 희생자를 가장한다. 자기 주위의 모든 생명적인 약동을 말살

해 버리고 자기를 성화한다. 자기를 무로 만들고 손상을 입게 함으로써 선택된 계급에 속
하려고 한다.
  그녀가 남편이나 자식에게서 모든 지상의 행복을 빼앗고 학대하면 그들에게 천국의 좋
은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된다. 코르토나의 마르그리트는 "죄를 범한 자기를 처벌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의 과실을 보상하기 위해"자식을 학대했다고, 그녀의 전기를 쓴 사람은 
말했다. 그녀는 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거지들을 배불리 먹인 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식에
게 먹을것을 주었다고 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원하지도 않는데 생긴 자식을 미워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도덕적인 분노라는 구실로 울분을 터뜨릴수 있는 것은 뜻하지 
않은 행운일 것이다.
  한편, 행실이 그다지 도덕적이지 못한 여자도 신과 잘 어울리는 경우가 있다. 언젠가는 
죄가 소멸되어 정화될 수 있다는 확신은 흔히 믿음이 깊은 여성에게 대담한 행동을 하게 
한다. 금욕주의나 감각적인 즐거움을 택하든 오만이나 겸손을 택하든 간에 그녀가 자기의 
구원에 대해 갖는 걱정은 그녀가 무엇보다도 선호하는 기쁨, 즉 자기 성찰에 몰두하게 한
다. 그리하여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헤아리고, 자기 육체의 전율을 엿보고 있다. 그녀의 
내부에는(임신하면 아기를 갖는 것처럼) 신의 은총이 담겨 있으므로 그렇게 해도 무방하
다. 스스로 자기를 조심스럽게 검토할 뿐만 아니라 지도자(고해신부)에게 마음을 고백한
다. 옛날에는 군중 앞에서 고백하는 도취에 빠지기도 했다. 코르토나의 마르그리트는 자
기의 허영심을 벌하기 위해 자기집 발코니에 올라가서 해산을 하는 여자처럼 큰 소리로 
외쳐댔다고 한다. "코르토나의 주민들이여, 일어나시오. 촛불을 들고 죄 많은 여자의 고
백을 들으러 밖으로 나오시오!" 하고 말이다. 그녀는 자기 죄를 낱낱이 고백한뒤 하늘을 
향해 그 비참함을 한탄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요란스럽게 자기의 수치를 드러내보이는 
나르시시즘의 여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출증적 욕구를 만족시켰던 것이다.
  종교는 여성에게 자기 만족을 허용해 준다. 노스탤지어(향수)의 욕구를 갖고 있는 지도
자, 아버지, 애인, 후견인의 역할을 하는 신을 마련해 준다. 몽상을 조장하고 공허한 시
간을 매워준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세계의 질서를 확인한다. 성이 없는 하늘나라에 가장 
바람직한 미래가 있다는 희망을 가짐으로써 체념을 정당화한다. 오늘날 여성이 교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교회가 여성의 해방을 쉽게 하는 조치에 대
하여 그처럼 반감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종교가 필요하다. 종교를 
영속 시키려면 여성, 즉 '진정한 여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으로 여성의 성격 전반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확신, 가치, 지혜, 도덕, 취미, 행
동 등 이 모든 것은 그녀가 놓인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여성에게 초월이 거부되어 있
다는 사실은 대개 영웅주의, 무사, 반항, 초연, 고안, 창조와 같은 가장 고귀한 인간적인 
태도를 여성에게는 금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남성에게서도 흔한 
것은 아니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비본질적인 중간자적인 영역에 갇혀 있는 남성도 많다.
  노동자는 혁명적인 의지를 나타내는 정치활동을 통하여 그런 영역에서 벗어난다. 그러
나 중류층에 속하는 남성들은 그런 처지에 안주하고 있다. 그들은 여성처럼 일과를 되풀
이하고 기성가치에 만족하며 여론을 존중하며, 지상에서 단지 막연한 쾌락만을 추구한다. 
대부분이 샐러리맨, 상인, 관료들로서 아내에게 조금도 내세울 것이 없다. 요리와 빨래를 

하면서 살림을 꾸려가고 아기를 키우는 안 쪽이, 규칙에 예속되어 있는 남편보다 더 많은 
창의성이나 독립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남성은 하루종일 윗사람에게 복종하고 갑갑한 옷차림으로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해야 한
다. 그러나 여성은 편안한 차림으로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이웃
여자와 담소할 수도 있다. 그녀는 마음대로 행도할 수가 있다. 작은 모험을 하거나 어떤 
결과를 효과적으로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남편처럼 습관이나 체면 속에서 살지는 
않는다. 카프카가 선별하여 묘사한 관료의 세계(그 격식과 어리석은 행동과 목적을 잃은 
행동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남성의 것이다. 여성은 현실에 더욱 밀착되어 있다. 남성이 
숫자를 나열하거나 또는 정어리의 통조림을 현찰로 바꿀 때 그는 단지 추상적인 것만을 
파악하고 있다. 요람 속에서 자라는 유아, 흰 내의, 구운 고기 등은 가장 감촉하기 쉬운 
소유물이다. 그러나 여성은 바로 이런 목적들을 추구하는 동안에 그 우연성 - 상관적으로 
자기 자신의 우연성 - 느끼기 때문에, 그 속에 자기를 소외하지 못하는 일도 일어난다. 
여성은 자유에 머물러 있다. 남성의 사업은 기획인 동시에 도피이다. 그는 자기의 경력이
나 자기가 연출하는 인물에 의해 자기를 소모시킨다. 그는 의젓하고 진실한 체한다. 여성
은 남성의 논리와 도덕을 의심하고 있으므로 그런 함정에는 빠지지 않는다. 스탕달의 여
성을 존중한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여성은 자기 입장의 애매성을 자존심 속으로 도망쳐서 얼버무리지 않는다. 여성은 인간
적인 품위의 가면 뒤에 숨지 않는다. 여성은 자기의 자유로운 생각이나 감동, 자발적인 
반응 등을 있는 그대로 발견한다.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쪽이 그녀의 남편과 대화하는 
것보다 훨씬 덜 지루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여성이 자기가 섬기는 남편의 충실한 아내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서 말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남성은 흔히 일반적인 사
고를 말한다. 즉, 그가 읽은 신문이나 전문적인 책 속에 있는 말과 표현을 지껄이는 것이
다. 그러나 여성은 한정되지만 구체적인 경험을 전달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여성다운 감수성'은 얼마간 신화나 연극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여
성이 남성보다 자기가 세계에 대해 조심스럽다. 그녀는 성적으로 남성적인, 즉 거친 분위
기 속에서 살고 있다. 그 보상으로서 그녀는 예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그래
서 여성의 연약한 애교가 생겨나지만 섬세한 느낌도 준다. 또 활동영역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손이 닿는 대상물을 귀중하게 생각한다. 그것을 개념이나 기획 속에 가둬두지 않
기 때문에 여성은 그 풍요함을 발견하다. 여성의 도피욕망은 축제를 좋아하는 기분에도 
나타나 있다. 꽃다발과 과자, 푸짐하게 차린 식탁을 남에게 베풀기를 무척 좋아하고, 또 
여가의 공허를 타인에 대한 아낌없는 봉사로 변화 시키기를 좋아한다. 또 웃음, 노래, 장
신구, 골동품 등을 좋아하고, 자기의 주위에서 파닥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을 붙잡
으려는 자세를 취한다. 거리의 풍경, 하늘의 모습이나 그 밖의 무엇이라도 말이다. 초대
나 외출은 그녀의 시야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준다.
  남성은 대개 이런 기쁨에는 동참하려고 하지 않는다. 남자가 집에 돌아오면 명랑했던 
목소리는 침묵을 지킨다. 따라서 가정에 있는 아내는 남편이 자기에게 기대하는 따분하고 
점잖은 태도를 취한다. 여성은 고독이나 이별 중에서 자기 생활의 특성을 이끌어낸다. 과
거나 죽음,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는 남성보다 훨씬 깊은 내면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 이

처럼 여성이 자기 마음, 육체, 정신, 모험에 흥미를 갖는 것은, 자신이 지상에서 그런 운
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동적이기 때문에 야심이나 직업에 
몰두하고 있는 남성보다 현실을 보다 정열적이고 파토스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여성에게는 감동에 깊이 빠지거나 자기의 감각을 연구하고 그 의미를 생각할 여가와 취
미가 있다. 그런 상상력이 몽상으로 그치지 않을 때 그것은 공감을 준다. 여성은 타인을 
각자의 입장이 되어 이해하려고 하며, 자기 안에 그를 재창조하려고 한다. 남편이나 애인
에 대해서도 완전한 동일화가 가능하여 상대방의 기획이나 걱정을 송두리째 자기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남성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장점이다. 여성은 세계 전체에 섬세한 주
의를 기울이고 있다. 세계가 하나의 수수께끼로 생각되는 것이다. 개개인과 각각의 사물
은 그녀에게 대답이 될 수 있다. 여성은 끈질기게 질문을 던진다.
  이윽고 노년에 이르면 그녀를 배반한 기대는 아이러니로 변하고, 때로는 구미를 돋우는 
시니시즘으로 변하기도 한다. 남성의 기만은 이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의 눈에는 남
성이 세운 장엄한 건축물에도 우연적이고 어리석으며 무의미한 이면이 분명하게 보인다. 
여성의 의존성은 거기서 몸을 떼는 것을 용납하기 않는다. 또한 여성은 자기에게 부과된 
헌신 속에 고귀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남편을 위해 애인을 위해 자식을 위해, 그
녀는 이제 자기를 조금도 돌보지 않게 된다. 때때로 여성은 스스로 자기의 처세방법을 생
각해 내어야 한다. 그러나 기성의 판에 박힌 듯한 수단이나 평범한 방법으로는 남성들처
럼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만일 그녀가 선의로 충만할 경우에 그녀에게는 남편의 
오만한 확신보다는 진정한 생활태도에 더 가까운 불안은 느낀다.
  그러나 여성이 이런 훌륭한 장점을 지니려면, 남성에 비해 자기에게 강요된 허황된 것
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상류계층에서는 여성이 남편들의 열렬한 동조자가 된다. 그들
이 제공하는 이득에 매이기 때문이다. 상층 부르주아의 부인이나 귀족의 부인들은 앞에서
도 말한 것처럼 언제나 그 계급의 이득을 확보하기 위해 남편보다 더 완고했다. 인간으로
서의 자주성을 완전히 희생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자기 자신의 모든 사
고력과 비판정신 심지어 자발적인 생명의 약동까지 말살시켜버린다. 세상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견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남성의 법전이 강요하는 이상에 영합한다. 그 결과 
어디에서도 성실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가정에서 일하는 주부는 가사나 자녀의 시중에서 하나의 독립을 발견한다. 거기
서 빈약한 대로 구체적인 경험을 이끌어낸다. 이와는 달리 남의 봉사를 받고 있는 여성은 
세계에 대해 아무런 실마리도 갖고 있지 않다. 꿈, 추상, 공허 속에 살고 있다. 그녀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사고의 실제효용을 모르고 있다. 그녀들의 말은 입 속에서 이미 의미를 
잃고 있다. 금융가, 실업가, 때로는 장군들까지도 자진하여 수고를 감당하고 걱정하며 모
험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그 특권을 불공정한 거래에서 얻고 있지만 아무튼 자기 
몸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아내들은 손에 얻는 모든 것의 보상으로 아무것도 
주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그만큼 더 맹목적인 신념으로 시효
에 걸리지 않는 자기의 권리를 믿고 있다. 이런 여성의 공허한 오만과 그 절대적인 무능
과 완고한 무지는 그녀들을 인류가 탄생시킨 가장 불필요하고 가장 무능한 존재로 만들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여성'을 말하는 것은 영원한 '남성'에 대해 말하는 것과 마찬가
지로 무의미하다. 여성이 남성보다 우수하거나 열등하거나, 혹은 동등하다는 것을 결정하
려고 하는 비교론이 무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성과 여성이 처한 상황은 크게 다르
다. 만일 이 상황 자체를 대조해보면 남성 쪽이 크게 유리한 것이 분명하다. 즉, 남성은 
세계 속에 그의 자유를 투기하는 구체적인 가능성을 훨씬 많이 갖고 있다. 필연적인 결과
로 남성의 의욕을 실현하는 쪽이 여성의 그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나타난다. 여성에게는 
뭔가를 하는 것이 거의 금지되어 있다.
  남성과 여성이 그 한계 안에서 그들의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대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들은 각자 자유롭게 그것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기만적인 함정이나 성실을 가
장한 속임수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남성이나 여성을 노리고 있다. 자유는 완전히 각자에게 
있다. 다만 그 자유가 여성에게는 추상적이고 허망한 것이므로, 반항의 형태로 밖에 올바
로 행사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싶다.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게 열린 길이다. 여성의 유일한 자유는 상황의 제한을 
거부하고 미래의 길을 개척하도록 힘쓰는 것이다. 체념은 책임에 대한 포기이며 도피이
다. 여성에게는 자기를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밖에는 달리 출구가 없는 것이다.
  이 해방은 반드시 집단적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여성의 입장에서 경
제적인 진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각자 외롭게 개인적인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여
성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있다. 그녀들은 자기의 실존(삶)을 그 내재성 속에서 정
당화하려고 한다. 즉, 내재 속에 초월을 실현하려고 한다. 이런 절박한 노력 - 때로는 우
스꽝스럽기도 하지만 한편 감동적이기도 한 - 은 감옥에 갇혀 있는 여성이 그 감옥을 영
광의 하늘로, 즉 자신의 예속적인 처지를 숭고한 자유로 바꾸려는 것이다. 나르시스트인 
여성이나 정열적인 사랑을 하는 신비적인 여성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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