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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어머니

by Frais Feeling 2020. 7. 27.

  여자가 생리적인 사명을 완전히 성취하는 것은 모성에 의해서이다. 여자의 모든 기능은 
종의 존속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자연적인 천직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결코 
자연에게 송두리째 내맡기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특히 약 1세기 전부
터 출산은 단지 생물학적인 우연에 지배되어 있지 않고, 의지에 의해 통제되어 있다. 어
떤 나라들에서는 산아제한의 정밀한 방법을 공공연히 채택하고 있다. 카톨릭의 영향 아래 
있는 나라에서조차 몰래 실시되고 있다. 남자가 사정을 중단하거나 여자가 성행위를 마친 
후에 정자를 몸 밖으로 배출한다.
  이것은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 흔히 다투거나 반감을 갖는 원인이 된다. 남자는 자기
의 쾌락을 자제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여자는 세척의 번거로움을 싫어한다. 남자
는 여자가 자주 임신하는 자궁을 원망하고, 여자는 자기 몸 안에 심는 생명의 싹에 두려
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조심했는데도 여자가 '걸렸을' 때에는 두 사람 다 곤혹스러워
한다. 피임법이 아직 초보적인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래서 반자연은 특
히 중대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낙태가 그것이다. 산아제한을 공인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도 역시 이것을 금하고 있어 그런 일이 일어날 기회는 드물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취하는 방법으로, 그녀들의 연애생활에는 언제나 이런 일이 뒤따
르게 마련이다.
  부르주아 사회가, 이보다 더 위선을 다루는 주제는 적다. 낙태는 혐오스러운 죄악으로 
이것을 암시하는 것조차도 못마땅하다. 작가가 해산한 여자의 기쁨이나 고통을 그리는 것
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낙태를 한 여자의 이야기를 쓰면 사람들은 지저분한 내
용으로 인류를 혐오스럽게 묘사한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출산과 같
은 수의 낙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널리 퍼져 있는 현상이므로, 여자에게 흔히 있
을 수 있는 위험의 하나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민법은 어디까지나 이것을 범죄로 보고 있다. 즉 이와 같은 델리케이트한 수술은 몰래 
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낙태의 합법화에 반대하는 의견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위험한 간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실한 의사들은 마그누스 히르슈

펠트 박사와 함께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병원에서 필요한 예방수단을 정확히 강구
한 후에 진정한 전문의사가 실시하는 낙태수술에는 형법이 주장하는 큰 위험은 없다." 이
와 반대로 현재 하고 있는 것 같은 낙태가 이루어진다면 여자에게 큰 위험이 따른다. 낙
태하는 자의 기술부족과 또 그녀들이 낙태를 하는 조건은, 때로는 치명적이 될 수 있는 
많은 사고를 일으킨다. 무리하게 출산하는 것은 부모가 키울 힘이 없는 약한 아기를 사회
에 내던지는 격이 되어, 그런 어린이는 빈민구제의 희생이 되거나 순교의 어린이가 되기 
쉽다. 그리고 태아의 권리를 그처럼 열심히 보호하는 사회가, 일단 태어난 아기에게는 대
단히 무관심한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빈민구제라고 부르는 빈약한 시설을 개량하지 않고, 낙태한 여자의 책임만 추궁
한다. 고아를 잔인한 옥리에게 맡기는 책임자를 그대로 방치하고, 감화원이나 개인 집에
서 어린이를 학대하는 무서운 압제에 대하여는 눈을 감고 있다. 태아가 잉태한 여자의 것
임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태어난 아기는 어디까지나 양친의 것으로 인정한다. 같은 주에 
이런 두 사건이 일어났다. 즉 한쪽에서는 낙태수술을 한 외과의사가 유죄선고를 받아 자
살하고, 한쪽에서는 자기 자식을 구타하여 빈사상태에 빠뜨린 아버지가 3개월의 금고형을 
받게 되었다. 최근에도 어떤 아버지가 부주의로 자기 아들을 디프테리아로 죽게 했다. 그
리고 어떤 어머니는 생사를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는 구실로 죽어가는 딸아이를 위해 의사
를 부르지 않았다. 묘지에서 아이들이 이 어머니에게 돌을 던졌다. 그런데 신문기자들이 
이 어머니의 태도에 분개하자, 몇몇 신사들은 자식은 부모의 소유이므로 제3자가 간섭하
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오늘날에는 100만의 아이들이 위험에 놓여있다"고 <스 수아르>지는 보도하고 있다. 
<프랑스 수아르>지도 "50만의 어린이가 생리적 혹은 정신적인 위험에 빠져있다"고 게재하
고 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아라비아 부인은 낙태할 가능성이 없다. 아기를 10명 낳으면, 
그 중에서 7,8명은 죽는다. 아무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어머니로서의 임무가 너
무 괴롭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모성적인 감정을 죽여버린 것이다. 이런 것도 도덕적이라고 
한다면, 그런 도덕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태아의 생명을 가장 존중한다는 사람
들이 성인남자를 전쟁터로 몰아 목숨을 잃게 하는 가장 일상적인 사람들이라는 것도 부언
해야겠다.
  합법적인 낙태에 반대하는 실제의 이유는 조금도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도덕적인 이유
는 결국 낡은 카톨릭의 가르침에 귀착된다. 즉 태아에게도 영혼이 있는데 세례를 받지 못
한 채 죽이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회가 경우에 따라서는 성인인간을 죽이
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전쟁이나 사형수의 경우가 그렇다. 교회
는 태아에 한해서만 대단히 인도주의적이다. 태아는 아직 세례에 의해 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지만, 과거 종교전쟁 때 그들은 정화되지 않은 비교도를 학살하는 것은 공공연히 
장려되었다. 종교재판에 희생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
했을 것이다.
  오늘날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범죄자나 전장에서 죽는 병사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경우에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은총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 교회는, 인간은 자기 손 
안에 있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며 영혼의 구원은 교회와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

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이 타인의 영혼을 천국에 인도해 주실 것
을 간구하지 않는가? 교회가 그것을 인정하면 인디언학살로 잔인했던 시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여기서는 도덕과는 관계가 없는 완고하고 낡은 
전통과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전에 말한 남성의 사디즘과 관계가 있다는 것
을 알아야 한다.
  1943년 루아 박사가 페탱에게 바친 저서는 그러한 실례의 하나이다. 그것은 악의의 유
물이다. 박사는 낙태의 위험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에게는 제왕절개수술처럼 위생
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되는 모양이다. 인공유산은 경범죄가 아니라 중범죄로 여겨야 한다
고 주장한다. 그것은 외과수술을 하는 방법도 금해야 하며, 임신으로 모체가 위태로울 경
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한 생명과 다른 생명 중에서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은 부도덕
하다는 주장이다. 박사는 이런 논지에 따라 오히려 모체를 희생시킬 것을 권유한다. 태아
는 어머니의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보수적인 사상을 지
닌 의사들이 모성애를 찬양할 때에는 태아는 모체의 일부이며, 결코 모체의 희생으로 자
라는 기생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몇몇 남자들이 여성을 해방시킬 수 있는 모
든 상황을 거부하는 열성을 보더라도, 아직 반여성적인 사상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그런데 많은 젊은 여성을 죽음과 불임과 병으로 몰고 가는 법률은 인구의 증가로 완전
히 무력하다. 합법적인 유산을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는 한 가
지 점은 그런 행위는 방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돌레리스, 발타자르, 라카시뉴 등 여러 
교수들의 말에 의하면 프랑스에서는 1933년경에 해마다 50만 것의 낙태가 행해졌다고 한
다. 1941년에 보르도시의 오베르탱 박사는 80만 명에서 1백만 명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가장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이 마지막 숫자이다. 1948년 3월의 <전투>지에 
실은 논문에서 테플라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낙태는 사회에 하나의 풍습이 되어 있다... 그것을 억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
다... 샌현에서 1943년에 1,300회의 검거 중에 750건이 고소되고, 그 중에서 여자는 360
명이 체포되었다. 513명은 1년 이하에서 5년 이상의 실형을 받았다. 이것은 현 내에서 추
정되는 15,000건의 낙태와 비교하면 적은 숫자이다. 전국적으로는 10,000건이 재판을 받
았다.
  이른바 범죄적인 낙태는 우리의 위선적인 사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피임 정책과 마찬가
지로 모든 사회계증에서 일상적인 것이 되어 있다. 낙태한 여자의 3분의 2는 기혼여성이
다... 대체로 프랑스에서는 출산과 거의 같은 수의 낙태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낙태수술이 때때로 불완전한 조건하에서 실시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수의 낙태는 임신
부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파리의 법의학연구소에서는 낙태로 죽은 여자의 사체가 매주 두 구 정도 당도한다. 그
리고 치명적인 질환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낙태는 계급의 범죄라고 불린 적이 있는데 이것은 대체로 맞는 말이다. 피임법은 부르
주아 계층에는 널리 퍼져 있다. 화장실 설비는 수도 시설의 편의를 갖추지 못한 노동자나 
농민의 경우보다 그 실행이 한결 쉽다. 중산층 가정의 처녀들은 상당히 조심스럽다. 그리
고 부부생활에서도 자녀의 부담은 가볍다. 가난과 주택난과 여자가 사회에서 일할 필요가 
낙태의 가장 큰 원인이 되어 있다. 부부가 출산을 제한하려고 결심하는 것은 아내가 두번 
어머니가 된 이후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낙태를 한 추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가 한편으로는 금발의 두 천사를 안
고 달래는 숭고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전자와 후자는 같은 여자인 것이다. 1945년 10월호
의 <현대>지에 공동 병실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보고에, 주느비에브 사로 부인은 병원의 
한 방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그 병원에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소파수술을 받
은 많은 여자들이 입원해 있었다. 그녀들은 18명 중에 15명은 유산하고 그 절반은 고의로 
자극을 받았다. 제9호실 환자는 중앙시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아내로 두 번의 결혼에서 
10명의 아기를 출산하고, 그 중에서 3명만 살아 남았다. 7번 유산을 했는데 5번은 고의였
다. 그녀는 흔히 트렝글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즐겨 사용하고 또 정제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이 이름을 동료에게 가르쳐주었다. 16세에 결혼한 제16호실 환자는 여러 가지 
정사를 경험하고 낙태로 인해 수란관염에 걸려 있었다. 35세인 제7호실 환자는 이렇게 말
했다.
  "내가 결혼한 건 20년 전이었어. 나는 남편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어. 20년 동안 나는 
품행이 방정했는데, 바로 석 달 전에 애인이 생겼어. 오직 한 번, 호텔 방에서 말이야. 
그때 난 임신했어... 그러니 할 수 없잖아. 안 그래? 지워버렸어. 아무도 몰래 말이야. 
남편도 몰라... 그 남자도 물론 몰라. 이것으로 끝난거야. 이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로 했어. 혼났거든... 소파수술을 말하는 게 아냐. 그게 아니고 딴 거야. 그러니
까... 그건 자존심의 문제야. 내 말 알아듣겠지?" 제14호실 환자는 5년 동안에 다섯 아기
를 낳았다. 그녀는 40세에 벌서 할머니처럼 보였다. 저마다 절망에서 비롯된 체념을 경험
하고 있었다. "여자는 고생을 하기 위해 태어난 거야." 하고 그녀는 서글픈 듯이 말했다.
  이와 같은 시련의 고통도 생활형편에 따라 큰 변화가 있다. 부르주아식으로 결혼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남편에게 의지하여 돈과 교제가 많은 여자는 유리하다. 이런 여자는 의
술적인 낙태의 허락을 받기가 한결 쉽다. 경우에 따라서는 낙태를 너그럽게 보아주는 스
위스까지 갈 수도 있다. 현재의 산부인과의학의 조건이라면 완벽한 위생시설을 갖추고 있
어 경우에 따라서는 마취제를 사용하여 전문의가 시술하면 간단히 끝낼 수도 있다. 그런 
여성은 공적인 승인을 받지 못해도 비공식으로 안전한 원조를 받을 수 있다. 전문의의 주
소도 알고 있으며, 양심적인 치료의 대가를 지불할 돈도 있다. 임신 초기에 충분히 손을 
쓸 수 있다. 의사도 그런 여자는 소중히 다룬다. 이런 특권을 가진 여성 중에는 이런 생
리적인 변화가 건강에 도움이 되어 혈색도 좋아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와 반대로, 
돈도 없고 외로운 젊은 처녀가 주위사람들이 용서하지 않는 과실을 해소하기 위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몰리는 것처럼 비참한 경우는 없다. 해마다 프랑스에서는 약 3
0만 명의 여점원, 여비서, 여학생, 여공, 농촌여자들이 이런 경우를 당하고 있다. 혼외 

출산은 아직 대단히 나쁜 일로 여기고 있으므로, 미혼모가 되느니 차라리 자살이나 영아
살해 쪽을 택하게 된다. 흔히 볼 수 있는 실례의 하나는 프리만 박사가 수록한 고백 속에 
나와 있다. 이것은 구둣방 직공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인 베를린의 이야기이다.
(<청춘기와 성욕>에서)
  
  나는 10세 연상인 이웃남자와 관계를 맺었어요... 그의 애무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으
므로 상대방이 하는 대로 맡기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러
나 그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고, 여자에 대한 책을 읽어보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드디어 나는 그에게 순결을 주어버렸어요. 두 달이 지나 슈푀츠 유치원의 보모로 취직하
려고 했을 때 나는 이미 임신중이었어요. 그 두 달 전부터 나는 월경이 없었어요. 나를 
유혹한 남자는 편지로 월경을 할 수 있도록 석유를 마시고 검은 비누를 먹으라고 당부했
어요. 그때 내가 받은 고통을 지금 여기서 말할 기력이 없어요... 나는 혼자서 이런 비참
한 생활의 밑바닥에 빠져 있어야 했어요. 아기를 낳는 것이 걱정스러워 나는 무서운 죄를 
저지르게 되었어요. 그 때부터 나는 남자를 증오하게 되었어요.
  
  편지로 이 사실을 알게 된 목사는 긴 설교를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남자와 헤어졌다. 
그후 줄곧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나는 18개월 동안 감화원에 들어간 것처럼 살아야 했어요.
  
  그후 그녀는 어떤 교수의 집에서 착한 여인이 되어 4년 동안 그 곳에서 살았다.
  
  그 무렵에 나는 우연한 기회에 한 공무원을 알게 되었어요. 나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여 행복했어요. 나는 애정과 함께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어요. 24세 
때 건강한 남자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는 지금 10세가 되었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인 그 
남자는 그 이후로 다시 만나지 못했어요... 그것은 내가 500마르크의 돈으로는 아이를 양
육하는 데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그는 아이를 자기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우리들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어요. 지금 나는 어떤 남자에게도 흥미가 없어요.
  
  여자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권하는 것은 흔히 유혹자 자신이다. 여자가 임신했을 경
우, 남자 쪽에서는 여자를 버리거나 여자 쪽에서 요령있게 처리하거나 자기 몸의 이상을 
숨기기를 바란다. 어쨌든 남자로부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거이다. 여자가 아기를 버
리는 것을 애석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곧바로 지워버리는 결심을 하지 못하거나, 유
산시켜줄 의사를 찾지 못하거나, 돈이 없어서 효과가 없는 약을 먹으면서 시간을 허비하
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초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험이 뒤따르고 고통도 심하다. 
여자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불안과 절망 속에서 자기를 구출하려고 한다.
  시골에서는 소식자(체내의 장기나 조직 속에 삽입하여 검사하는 금속의 막대 모양으로 
된 외과용 의료기구)의 사용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실수를 한 시골여자는 곳간 사다

리에서 일부러 떨어지거나, 계단 위에서 뛰어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부상만 입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생울타리 속에서, 무성한 숲 속에서, 거름구덩이 속에서 목이 졸린 조그만 
시체가 발견되기도 한다.
  도시에서는 여자가 서로 돕는다. 의사에게 낙태를 부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필
요한 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임신한 여자는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자기 스스로 처리한다. 이런 임시 외과의는 신뢰할 수 없다. 막대기나 뜨개바늘
로 박박 긁어버린다. 어느 의사의 말에 의하면 어떤 여자 요리사가 자궁에 식초를 부어넣
으려고 하다가 방광에 들어가 심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는 것이다. 난폭한 방법으로 유산
을 하면 정상적인 출산보다 고통이 훨씬 심하고, 신경에 이상을 일으켜 간질 증상을 보이
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위험한 내장질환과 치명적인 출혈을 일으켜 생명을 잃기도 한다.
  콜레트는 <그리비슈>에서 무지한 어머니에 의해 카바레의 댄서가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진한 비눗물을 마시고 15분쯤 뛰어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방법은 어머니를 죽이고 아기도 죽이는 결과가 된다. 내가 들은 이
야기의 하나는, 어떤 여자 타이피스트는 피투성이가 된 채 4일 동안이나 처박혀 식음을 
전폐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부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죽음의 위험이 죄와 치욕의 위협
과 혼동되는 절망감보다 더 무서운 절망감은 없을 것이다. 가난한 아내가 남편과 협의하
여 낙태를 할 경우에는 불필요한 걱정이 없어 한결 마음이 가볍다.
  사회사업을 하는 어떤 부인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하층계급에서는 여자들이 서로 조
언을 하고, 기구를 빌려 주고, 마치 티눈이라도 빼듯이 간단히 처리하지만 그녀들은 생리
적으로 심한 고통을 참는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유산한 여자를 수용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을 겪는 동안이나 또는 소파수술 중에 진통제도 쓰지 않고 도리어 이를 벌
한다. G.사로가 수록한 증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고통에 익숙한 여자는 이런 박해에
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들은 치욕을 느낀다. 그녀들이 받는 수술이 비밀리에 행하는 범죄라는 인식 
때문에 그 위험은 더욱 커지고, 불쾌와 불안을 느끼게 마련이다. 고통, 병, 죽음이 징벌
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고통과 고문, 사고와 징벌 사이에는 물론 큰 차이가 있다. 각오
하고 저지르는 위험을 통하여 여자는 죄의식을 느끼고, 고통과 과실을 이처럼 해석하기 
때문에 더욱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 비극이 도덕적인 양상은 상황에 따라서 강하게 느끼기도 하고 약하게 느끼기도 한
다. 재력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자유로운 환경에 의해 대단히 해방된 여자들, 또는 가난과 
불행 때문에 부르주아 도덕의 경멸을 배운 여자들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
는 다소 불쾌한 시기를 보내야 하지만, 그것이 지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거기에 위배되는 행위를 했지만, 역시 도덕의 위력에 대해서는 겁을 내고 있다. 
그녀들은 자기가 무시한 법률을 마음으로는 존중하고 있기 때문에 죄를 범하면 괴로워한
다. 그녀들은 우선 상대방에게 애걸하는 굴욕을 당한다. 의사나 산파의 도움을 애써 구해
야 한다. 상대방의 냉대도 각오해야 한다. 혹은 불명예스러운 공모에 말려들지도 모른다. 
고의로 다른 사람을 죄에 끌어들이는(대부분의 남자들은 알지 못하는) 그런 혐오스러운 
입장을 여자는 걱정과 치욕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처치를 부탁하기를 원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것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 그녀는 마음이 분열되어 있는 것이
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기분은 아기를 낳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아
도 자기가 감행하려는 행동의 애매성을 불쾌하게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낙태는 결코 살
인은 아니지만 단순한 피임수단과 같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절대적 시작인 
수태가 이루어졌으므로 그 발전을 저지하려는 것이다. 태어나지 못한 아기의 환각에 시달
리는 여자도 있다.
  헬렌 도이치는 심리적으로 극히 정상이지만, 생리적인 문제 때문에 3개월이 되는 태아
를 두 번 지운 한 기혼부인이 두 개의 작은 무덤을 만들고, 아기를 많이 낳은 후에도 경
건하게 보살핀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더구나 유산이 자기에 의해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죄의식을 갖기가 쉽다. 어렸을 때 새로 태어난 동생을 질투하여 죽기를 바랐던 욕망에 이
어 다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여자는 실제로 한 아이를 죽인 것 때문에 죄
책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 죄책감이 병적인 우울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남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의 일부를 살상했다고 생각하는 여자도 많
다. 그래서 이 살상에 동의했거나 혹은 그것을 권유한 남자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H. 도
이치는 이런 사례를 들고 있다. 어떤 젊은 처녀는 애인에게 반했으나, 두 사람의 행복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어린애를 지우자고 자진해서 주장했다. 그런데 막상 병원을 나서자 
사랑하는 애인과 다시 만나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처럼 단호히 헤어지는 경우는 드물지
만, 그 때문에 남자 전체에 대해 혹은 자기에게 임신을 시킨 남성에 대해 불감증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남자는 낙태를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이것을 자연의 장난이 여자에게만 주
는 수많은 사고의 하나로 보고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가치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여자
는 남성의 윤리가 가장 근본적으로 이완될 경우에는, 여성으로서의 가치, 즉 자기 자신의 
가치를 부정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모든 도덕적인 세계는 흔들리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는 아이를 낳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왔다. 모성의 영광을 
찬미하는 노래도 들어왔다. 여자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불편(월경, 질병 등등)이나 
가사의 번거로움은 모두 아기를 낳는다는 놀라운 특권에 의해 변호되어 왔다.
  그러나 남자는 자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 장래를 불리하게 하지 않기 위해 자기작
업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여자에게 여자로서의 승리를 단념할 것을 요구한다. 어
린애는 이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도 아니며 출산은 신성한 일도 아니다. 여자의 
뱃속에 생긴 작은 살덩어리는 우연적인, 귀찮은 존재로 이것 역시 여자이기 때문에 갖는 
결점의 하나이다. 이에 비하면 달마다 있는 월경의 고역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처녀 
때 놀랐던 그 빨간 피가 다시 흐를 때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일이 시작된다. 
그것은 어린애를 낳기 위한 것이라고 해서 전에는 위안이 되었다. 설사 낙태에 동의하여 
그것을 원했다고 하더라도 여자는 자기의 특징을 희생한 것처럼 느낀다. 그녀는 점점 명
확하게 자기의 성 속에서 저주, 일종의 불구, 위험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여자는 유산의 
외상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극에 도달하여 동성연애를 하게 된다. 
  그런데 남자가 남자로서의 삶에 성공하기 위해 여자에게 그 육체적인 가능성을 희생할 
것을 요구할 때 그는 남성의 도덕규범이 위선인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남자들의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낙태를 금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는 그것을 편리한 방법으
로 채택한다. 그들은 파렴치하게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자는 상처를 
입은 자신의 육체 안에서 이와 같은 모순을 체험하게 된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소심하기 
때문에 남자의 위선에 단호히 반항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죄악시하는 불공평
한 처사에 희생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모욕과 굴욕을 느끼게 된다. 남자가 저지른 과실
을 구체적인 형태로 자기 속에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과실을 범하고도 시치미를 
떼고 여자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운다. 그는 애원하듯, 위협하듯, 따지듯, 당당한 어조
로 말만 늘어 놓을 뿐 그것도 곧 잊어버린다. 이런 말을 고통의 핏속에서 표현하는 것은 
그녀이다. 남자는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훌쩍 떠나버린다. 그 침묵이나 도피는 남
자들이 만든 도덕규범이 얼마나 거짓인가를 입증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흔히 여자의 부도덕에 대해서 말한다. 이것은 여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좋
아하는 테마에 불과하므로 놀랄 일이 못된다. 남자들이 공공연히 내세우면서 그것을 몰래 
어기는 그럴 듯한 원칙을 여자들은 마음속으로 믿지 않는다. 그녀들은 남자들이 여자를 
칭찬할 때나 남자를 칭찬할 때에도 믿지 않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피를 쏟는 
뱃속에 붉은 생명의 단편인 태아가 없다는 사실이다. 여자는 처음으로 낙태했을 때 비로
소 이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은 그녀들의 대다수를 이제 전과 같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피임법의 지식이 충분히 보급되어 있지 않은 오늘의 프랑스에서는, 낙태는 궁핍
으로 죽을 운명에 놓여있는 어린애를 낳지 않고 싶은 여자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방도이
다. 슈테켈은 "낙태의 금지는 부도덕한 법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범하게 
되는 법률이기 때문이다" 하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산아제한과 인공유산은 여자에게 그 모성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게 한다. 사실 여자가 임
신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자유의사에 의해 결정되고 또 어느 정도는 우연에 의해 이루어
진다. 인공수정이 일반화되지 않으면, 여자는 어머니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녀가 남자와 접촉하지 않았거나, 남편에게 임신시킬 능력이 없거나, 또는 자기의 
체질이 불완전한 경우가 그렇다.
  이와 반대로 자기의 의사와는 달리 임신하는 경우도 있다. 임신과 모성은 그것이 반항 
속에, 체념 속에, 만족이나 열의 속에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서 각각 크게 다른 체
험을 하게 된다. 젊은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결심이나 감정이 반드시 그 강한 욕
망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미혼으로 어머니가 된 여성은 갑자기 자
기에게 닥친 부담에 물질적으로 시달리는 고충을 하소연하는 경우가 있어도, 어린애에게
서 몰래 간직한 꿈의 실현을 발견하고 만족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는 반대로 임신을 기쁨으로 자랑스럽게 받아들이는 젊은 아내가 침묵 속에 그것을 
두려워하고 강박관념이나 환상이나 이미 회상할 수 없는 유아기의 기억 등을 통하여 몹시 
혐오스럽게 여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여자가 비밀을 간직하기 쉬운 이유의 하
나이다. 그녀들의 침묵은, 여자만의 특유한 경험을 신비로 남겨두고 싶은 심저의 표시이
기도 하다. 그리고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모순이나 투쟁에 당혹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
다. "임신에 대한 걱정은 분만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이져지는 꿈이다" 하고 어떤 

여성은 말했다.(N. 알) 즉 그것은 그때 비로소 드러나는 복합적인 진실이며, 그녀들은 이
것을 망각 속에 다시 가라앉히려고 노력한다.
  나는 전에, 여자는 유년시절과 사춘기 사이에 모성에 관해 몇 가지 단계를 통과하게 된
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고 유희였다. 그녀는 인
형이나 어린애 속에서 소유하고 지배할 대상을 발견했다. 사춘기가 되면 자기의 귀중한 
인격의 완전성을 위협하는 것을 그 모성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혹은 콜레트 오드리의 여
주인 여주인공이 고백하는 것처럼, 그것을 단호히 거부한다(<잃는 노름>에서)
  
  나는 모래 위에서 놀고 있는 꼬마들을 유심히 보고 그들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것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이 아이들을 지배하고, 씻어주고, 엉덩이를 때려 주고, 옷을 입혀
주는 등, 온갖 방법으로 나쁘게 만드는 어른들도 미워했다. 잇따라 아기를 만들고 있는 
물렁물렁 한 육체를 지닌 여자를 그리고 자기 아이의 부드러운 살을 만족스러운 듯이 혹
은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미워했다. 나의 몸은 나 한 사람의 것이다. 나는 햇볕
에 타고, 소금이 끼고, 가시나무에 긁힌 육체만을 사랑했다. 이 몸은 굳게 봉인되어 있어
야 한다.
  
  여자는 마음속으로는 임신을 원하면서도 그것을 몹시 두려워하기 때문에 임신망상이나 
여러 가지 불안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모성이 주는 권위를 행사하기를 좋아하지만 그 책
임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처녀가 많다. H.도이치가 인용한 리디아의 경우가 그렇
다. 이 처녀는 16세 때 남의 집에 하녀로 가서, 자기가 맡은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극진히 
돌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아기를 기르기 위해 어머니와 일체화되었던 소아가 몽상의 연장
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자기의 소임을 게을리하기 시작하여, 아이들에 냉담해지고, 멋대
로 외출하여 남자와 어울렸다. 즉 그녀는 유희의 시기가 끝나고 자기의 진정한 생활에 관
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그 생활에서는 모성적인 욕구는 작은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여자들은 한 평생 어린애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 출산의 생물
학적인 작용에는 혐오감을 갖고 있다. 이런 여성은 산파나 간호원이나 여교사가 된다. 그
녀들은 친절한 아주머니이기는 하지만, 어린애를 낳는 것은 싫어한다. 그녀들 중에는 어
머니가 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지는 않지만 연애에 몰두하거나 직업에 전념하여 임
신을 피하는 여자도 있다. 또는 아이가 자기나 남편에게 지울 부담을 걱정하는 경우도 있
다.
  여자는 때때로 성적 교섭을 회피하거나 피임법에 의해 고의로 임신을 피한다. 그러나 
그녀가 아기를 갖는 두려움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경우나, 어떤 심리적인 방어과정이 임
신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여성에게는 의학적인 검증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신경성 
기능 장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튀스 박사는 그 현저한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H부인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여자의 생활에 관해 대단히 나쁜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네가 결혼하여 임신을 하게 되면 대단히 불행하게 될 것이라고 언제나 예고해 

왔었다... H부인은 결혼한 다음달에 임신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곧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3개월 후에 또 임신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것 역시 잘못 안 것이었다. 1년 후
에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러 갔으나, 의사는 그녀와 남편, 모두에게 불임
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3년 후에 다른 의사에게서 진찰을 받았다. "당신이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임신을 하게 될 거예요." 하고 의사는 말했다. 결혼 후 5년이 지나 H
부인과 그녀의 남편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자 6년째 아기가 태어
났다.
  
  수태의 수락 혹은 거부는 임신과 같은 원인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임신기간 중에는 
소아기의 몽상이나 사춘기의 불안이 되살아난다. 이 시기는 그 어머니나 남편 또는 자기 
자신과 갖는 관계에 따라 각각 다른 경험이 된다.
  여자는 어머니가 되면 자기를 낳은 어머니의 입장을 계승하는 셈이다. 그녀의 완전한 
해방은 여기에 있다. 만일 그녀가 아직도 어머니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당분간 그런 상
태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면, 그녀는 어머니가 자기를 돌봐주기를 원한 것이다. 이윽고 태
어난 아기는 자기의 열매라기보다는 남동생이나 여동생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만일 그
녀가 해방되기를 진심으로 원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으면 아기는 자기를 구제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를 속박할 것이라고 걱정하게 될 것이다. 이런 불안이 유산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H.도이치는 이런 경우를 인용하고 있다. 임신한 어떤 젊은 아내가 해산한 후에 남편의 
여행에 동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 동안에 장차 태어날 아기를 어머니에게 맡기지 않
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다. 그러한 고민 때문에 결국 그녀는 사산아를 낳게 되었다. 그녀
는 아이를 몹시 원했으므로 무척 슬퍼할 줄 알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아 이상했다. 그러
나 그녀는 아기를 어머니에게 줄곧 맡겨두면, 어머니가 아기를 통하여 그녀를 지배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어떤 처녀는 어머니에 대해 죄악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감정이 강하게 남아 있으면, 여자는 자기가 낳을 아기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저주가 내릴 것 같은 망상에 사로 잡히게 된다. 이 아기는 태어나도 곧 죽거나, 
아니면 살아서 자기를 죽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런 마음의 가책이 젊은 여자에게 
불안감을 조장하여 임신을 망치게 하는 경우가 있다. H.도이치가 보고하는 다음의 예에
서, 어머니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자식이 많지만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가정의 막내로 태어난 스미스 부인은, 아들이기를 
원했던 어머니가 자신을 별로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언니의 지극한 사
랑으로 별로 마음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그러나 그러던 그녀가 결혼을 해 아이를 가지게 
되자 임신을 무척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에 어머니에게 느끼던 그 증오심으로, 자기 자
신이 어머니가 된다는 점을 증오하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산달보다 한 달 앞서 아이를 
사산하고 말았다. 두번째로 임신했을 때에는 다시 실패하지나 않나 해서 걱정을 했다. 다
행히 친한 여자친구 한 사람이 그녀와 동시에 임신했다. 이 여자친구의 어머니는 대단히 

다정하여, 두 여자의 임신중에 줄곧 잘 돌봐주었다. 그러나 여자친구 쪽이 한 달 먼저 임
신했으므로, 스미스 부인은 혼자서 출산날을 기다려야 했기에 걱정을 했다. 그런데 놀랍
게도 그 여자친구는 출산 예정일에서 한 달이나 늦어져, 결국 두 여자는 같은 달에 해산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친구는 다음 아기도 같은 날에 수태하기로 약속했다. 그리하여 스미스 부인
은 안심하고 다음 임신을 했다. 그러나 이번엔 이 여자친구가 임신 3개월만에 그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이것을 알게 된 날에, 스미스 부인은 유산을 했다. 그녀는 그 후에는 임
신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던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여자와 아이 아버지의 관계이다. 이미 성숙한 독립적인 여
성이 자기만의 아기를 갖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여성은 남성적인 남자
를 보면 눈이 빛났는데, 그것은 관능적인 욕망에서가 아니라, 그 남자의 생식적인 능력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아. 이런 여성들이야말로, 인공수정의 기적을 열망하는 모성적인 여
장부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그녀들과 함께 살 경우에는, 그녀들은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모든 권리를 거부하고 - <아들과 연인>에 나오는 폴의 어머니처럼 - 자기아기와 폐쇄적으
로 결합하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여성이 새로운 책임을 수락하기 위해서는 남
성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한 사람의 남자가 그녀에게 헌신하지 않으면, 그녀는 태어난 
아기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할 수 없다.
  그녀가 유치하고 소심할수록 이런 욕구는 강하다. H.도이치는 이와 같은 한 사례에 대
해 이야기하고 있다. 15세의 어떤 젊은 여자가 16세인 남자와 결혼하여 임신했다. 그녀는 
처녀시절엔 아기를 무척 좋아했으며,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도 잘 돌보아주었다. 그러나 
막상 자리 자신이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자 당황한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남편이 곁에 
있어주기를 원했다. 남편은 가정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면서 일해야만 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걱정 속에 살았다. 아이들의 싸움을 과장하여 말하고, 날마다 일어나는 사소한 일
에 대해서도 몹시 신경을 썼다. 이처럼 많은 젊은 어머니는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 
귀찮은 호소를 지겨워하는 남편을 가정에서 몰아세우는 것이다. H.도이치는 호기심을 끌 
만한 여러 가지 사례를 들고 있는데, 그중에서 한가지만 인용하고자 한다.
  
  젊은 여자는 자신이 임신했다고 생각하여 대단히 행복했다. 그런데 남편이 여행을 떠난 
사이에 그만 바람을 피웠다. 곧 어머니가 될 것이고, 또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
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가, 얼마 후에 자신이 수태날짜를 잘못 
짚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의 여행 기간에 해당되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녀는 남편의 자식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애인의 자식인지 알 수 없어 걱정스러웠
다. 그리하여 원했던 아기에게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고민하던 끝에 정신과 의
사를 찾아가야만 했다. 얼마 후 남편이 그 아이의 아버지인 것을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
소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남편에게 애정을 갖는 여자는, 남편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따라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남편이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느냐, 귀찮게 여기느냐에 따라 그녀는 임신
이나 모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도 하고, 신통치 않게 여기기도 한다. 때로는 두 사람의 
애정이나 결혼을 더 견고하게 하기 위해 아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가 이 아이에
게 느끼는 애정에 따라 그녀의 계획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를 좌우한다. 그녀가 남편에
게 적의를 품고 있을 경우에는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 아버지에게는 아이에 대한 소유권
을 부인하고 자기는 아이에게 증오하는 남자의 씨라고 하여 증오심을 갖고 대하기도 한
다. 앞에서 슈테켈이 인용한 사례로서, 결혼 첫날밤의 이야기를 했던 H.N.부인은 그후 곧 
임신했으나, 그 거친 첫날밤의 공포 속에서 가진 딸을 한평생 미워했다고 한다. 이와 마
찬가지로 톨스토이 부인의 <일기>에 남편에 대한 상반된 감정이 임신 초기에 반영되어 있
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상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참을 수 없다. 나는 무서운 권태, 공허, 
불안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리오바(톨스토이)에게 나는 이미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임신한 나는 그에게 어떤 기쁨도 줄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그녀가 느끼는 유일한 쾌락은 마조히즘적인 것이다. 아마도 사랑의 실패
가 그녀에게 자기 징벌의 소아적인 욕구를 일으키게 했을 것이다.
  
  어제부터 몸이 아프다. 유산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이 뱃속의 통증은 오히려 일종의 
쾌감까지 느끼게 한다. 내가 어려서 어리석은 짓을 했을 때, 어머지는 용서해 주었으나, 
내 스스로는 용서되지 않았던 그런 심정이다. 나는 자신을 꼬집고, 아픔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손을 찔렀다. 그런데 그것을 꾹 참으며 큰 쾌감을 느꼈다... 아기가 태어
나면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날 것이다. 지겹기 짝이 없다. 나는 모든 것이 시시하게 생
각된다. 시계소리가 슬프게 들려온다. 모든 것이 우울하다. 아, 만일 리오바가!...
  
  그런데 임신을 특히 여자에게 있어서는 자기와 자기 사이에 연출되는 하나의 연극이다. 
그녀는 임신을 풍요로워지는 것으로 느끼는 동시에 큰 손상으로 느낀다. 태아는 자기 몸
의 일부이며, 자기 육체를 잠식하는 기생물이다. 그녀는 태아를 소유하면서 또 그 태아에
게 소유된다. 태아는 미래 전체를 요약하고 있으며, 태아를 몸 안에 갖고 있는 그녀는 자
기를 세계처럼 광활하게 느낀다. 그러나 이 풍요 자체가 그녀를 무로 만들어, 그녀는 자
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려고 하며, 자시 
자신의 생명 역시 그로 인해 큰 의미를 가지게 됨으로써 뿌듯한 느낌도 가지게 된다. 그
러나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함에 농락당하고, 우롱당하고, 강요받는 느낌이 든다.
  임신한 여자에게 특이한 것은, 그녀의 육체가 자기를 초월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
이 내재적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육체는 구토와 불안 속에서 자성한다. 그 육체는 자기
를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때 육체는 유례없이 큰 부피를 갖게 된다. 기술자나 
행동가의 초월에는 주체성이 있다. 미래의 어머니에게서는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소멸된
다. 그녀는 자기 몸을 부풀리고 있는 태아와 함께 생명에 휩싸인 애매한 한 쌍을 이루게 

된다. 자연의 올가미에 걸린 그녀는 식물이여 동물이다. 그리고 아교질 저장소이고 부화
기이며 하나의 알이다.
  그녀는 이기주의적인 육체를 가진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존재가 되고, 때론 젊은이들에
게 조소를 받는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고 의식이며 자유이던 그녀가 이제는 생명의 수동
적인 기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생명은 습관적으로는 실존의 한 보전에 불과하다. 그
런데 임신에서는 그것은 창조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과 사실성 속에 이
루어지는 기이한 창조이다.
  임신과 수유의 기쁨이 강하여 이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를 원하는 여자도 있다. 유아
가 젖을 떼면, 물건을 빼앗긴 것처럼 느끼게 된다. 어머니라기보다는 차라리 '아이를 낳
는 여자'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여성은 자기의 자유를 육체를 위하여 소외할 가능성을 열
망하고 있다. 육체의 수동적인 다산성에 의해 자기 생존의 의미가 정당화되는 것처럼 느
끼는 것이다. 만일 육체가, 생명이 전혀 없고 무기력하다면, 타락한 형태에서도 초월을 
구현할 수 없다. 육체는 게으르기 쉽고 권태를 느끼기 쉽다.
  그러나 거기에 새싹이 돋아날 경우, 그것은 나무 포기가 되고, 샘이 되고, 꽃이 되는 
것이다. 즉 자기를 초월한다. 그것은 충실한 현재인 동시에 미래를 향한 움직임이다. 그
리하여 여자가 옛날에 젖을 뗐을 때 괴로워했던 이별을 보상받게 된다. 그녀는 이곳에서 
다시 세대의 흐름 속에 복귀하여, 한없이 이어지는 세대의 한 고리가 되어, 다른 육체를 
위해, 그리고 다른 육체에 의하여 존재하는 육체가 된다. 그리하여 남성의 품속에서 구했
던 융화, 부여되자마자 거부된 그 융화를 어머니는 자기의 무거운 뱃속에서 어린 생명의 
존재를 느끼거나, 또는 그 아이를 자기의 부푼 젖가슴에 껴안음으로써 실현한다.
  그녀는 이미 한 주체에 복종하는 객체가 아니다. 그리고 그 자유로 말미암아 불안을 느
끼는 주체도 아니다. 그녀는 이 애매한 현실, 즉 생명이다. 그녀의 육체는 드디어 자기 
것이 된 것이다. 그녀의 육체는 아이의 것이고, 그 아이는 자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
는 그녀에게 아이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으며, 거기에 신성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일
찍이 에로틱한 대상이었던 유방을, 지금은 밖으로 드러내보일 수 있다. 그것은 생명의 원
천이다. 많은 종교화에서도 가슴을 열어 젖힌 성모가 아들에게 인류를 위해 더 큰 은총을 
내리도록 애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육체와 사회적인 권외에서 소외된 어머니
는 자기를 '즉자'의 존재로, 하나의 기성가치로 느끼는 평화로운 착각을 한다. 그러나 이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정말 아이를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
는 그녀 속에 만들어진다. 그녀의 육체는 단지 육체를 낳은 뿐이다. 즉 스스로 쌓아나가
야 하는 하나의 실존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에서 비롯되는 창조는 대상을 가치로
서 설정하고, 거기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어머니의 태내에 있는 아이는 아직 그 존재가 
정당화되어 있지 않다. 아이는 아직 무상의 분포이며, 가공되지 않은 사실에 불과하다. 
그 우연성은 죽음의 그것과 비슷하다. 어머니는 한 아기를 원하는 자기의 이유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미래에 존재하려고 하는 이 타자에게 그 자신의 존재이유를 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육체의 일반성 속에 아기를 낳는 것이지, 그 실존의 개별성 속에 아
기를 낳는 것이 아니다. 콜레트 오드리의 여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녀는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이 아이가 내 생명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아이의 생명은 내 속에 싹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때문에 죽
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일을 앞당길 수 없어, 끝까지 열매를 맺게해야만 하였다. 그 아이
는 나한테서 생겨난 거기 나타났다. 이리하여 그 아이는 내 생명의 내부에서 만들 수 있
는 작품을 닮았다... 그러나 요컨대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잃은 노름>에서)
  
  어느 의미에서 육체화의 신비는 모든 여자에게 반복되고 있다. 태어나는 아이는 모두 
신이다.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면 의식으로서, 자유로서 자기를 실현할 수 
없다. 어머니는 이 신비를 위해 자기 몸을 빌려준다. 그러나 그 신비를 지배하지는 못한
다. 자기 뱃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이 존재의 최고 진리를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녀는 
이런 애매성을 두개의 모순된 환상으로 나타낸다. 어머니는 누구나 자기 아들은 영웅된다
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하나의 의식과 하나의 자유를 낳는 경이를 표출한다. 그러
나 그녀는 불구자나 기형아를 낳지 않을까 하여 크게 두려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육체의 혐오스러운 우연성을 알고 있으며, 또 자기 속에 있는 이 태아는 단순한 육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환상 중에서 한쪽이 지배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여자는 이 양자 사이에
서 동요하고 있다. 그녀는 또한 이와는 다른 애매성에도 민감하다. 종이라는 큰 순환 속
에 에워싸여 있는 그녀는 시간과 죽음에 대하여 생명을 확인하고 있다. 그로 인해 불멸을 
약속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자신의 육체 속에서 헤겔의 말의 진실성을 절
실히 느끼고 있다. "아기의 탄생은 부모의 죽음이다." 아기는 부모에게 "그들의 사랑의 
대자존재가 그들로부터 밖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거꾸로 아기는 자기의 대자조재를
 "원천과의 분리, 이 원천이 거기서 고갈될 이별 속에" 획득한 것이다. 이 자기 초월은 여
자에게 자기 죽음의 전조 같은 것이 된다. 그녀는 이 분만을 상상할 때 자기가 느끼는 공
포에 의하여 이 진실을 나타낸다. 그때 그녀는 자신 자신의 생명을 잃을까봐 두려워한다.
  임신의 의미는 이처럼 애매하기 때문에, 여자의 태도가 모순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여자의 태도는 태아가 성장하는 각 단계에 따라 변하게 된다. 우선 과정의 시초에
는 아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유의해야 한다. 아이는 아직 상상 속의 존재에 불과하
다. 어머니는 몇 단 후에 태어날 이 작은 존재에 대해 꿈도 주고, 요람이나 배냇저고리 
등의 준비를 서두르기도 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자기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모호한 기관의 현상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생명'과 '출산'을 신비적인 현상으로 보는 사
람들은, 여자는 자기가 느낀 쾌락의 성질에 따라 남자가 자기를 어머니로 만든 것을 안다
고 주장하지만, 이런 신비설은 버려야 한다. 그녀는 자기 태내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분명한 직감은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다만 불확실한 징후로 임신을 단정할 뿐이다. 월경
이 멎고, 몸이 비대해지고, 유방이 무거워지고, 몸이 불편하고 현기증이나 구토를 느낀
다. 때로는 단순히 병이 난 것으로 알고 있다가 의사가 임신이라고 가르쳐주는 경우도 있
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육체가 그것을 초월하는 사명을 갖게된 것을 비로소 알게 된
다. 날이 갈수록 자기 육체에서 생겨나, 그 육체와는 다른 작은 살덩어리가 자기 속에서 

커가는 것이다. 그녀는 신비적인 법칙을 자기에게 억지로 적용하는 종의 먹이이다. 그래
서 일반적으로 이런 소외는 그녀에게 두려움을 준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구토로 표시된
다. 이 구토는 그때 시작된 위 분비물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포유동
물의 암컷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반응이 크게 나타나는 것은 정신적인 원인에 의
해서이다. 인류의 암컷에서 종과 개인 사이에 일어나는 투쟁의 예리한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자가 아기를 몹시 원할 경우에도, 그 아기를 자기가 낳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는 우선 그녀의 육체가 반항한다. 슈테켈은 <신경성 불안상태> 속에서, 임신한 여자의 구
토는 언제나 어린애를 거부하는 표시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아기에 대한 거부
감이 심할 경우에는 (때때로 고백할 수 없는 이유로) 위장의 변화가 심해진다. "정신분석
학자들은 우리에게, 구토증상이 정신적인 원인으로 심해지는 것은 후두로부터의 배설이 
임신이나 태아에 대하여 거부감을 표시할때만 일어난다고 가르쳤다."고 H.도이치는 말하
고 있다. 그녀는 이어서 이렇게 부언한다. "임신기의 구토의 심리적인 의미는, 때때로 임
신망상에서 생기는 젊은 처녀의 히스테리성 구토의 그것과 같다." 두 경우에 있어서, 입
으로부터 임신이라는, 어린이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낡은 관념이 부활되어 있다. 
특히 소아적인 여자에게는 임신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소화기관의 질병처럼 보이기 쉽다.
  H.도이치가 인용한 한 여자환자는 자기의 토사물 속에 혹 태아의 파편이라고 없나하여 
걱정스러운 듯이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여성은 그와 같은 망상이 불합리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여성은 그와 같은 망상이 불합리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허기증, 식욕결핍, 혐오 등은 태아를 보존하고 싶은 욕망과 지워버리고 
싶은 욕망의 중간을 마찬가지로 동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는 젊
은 여성은 심한 구토와 악성 변비로 고생하고 있었다. 하루는 그녀가 내게 말하기를 자기
는 태아를 버리려는 심정과 보존하려는 심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그녀
가 분명히 표명한 욕망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요약한 실례는 아르튀스 
박사가 <결혼>에서 기술한 것이다.
  
  T부인은 임신중에 억제할 수 없는 구토로 시달리고 있었다... 증상이 너무 심하여 임신
중절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녀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간단히 정신분석 실
험을 해본 결과, T부인은 자기의 생활감정에 큰 영향을 미쳤던 한 친구와 무의식적으로 
같은 증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여자친구는 초산후에 죽었다. 이처럼 원인이 밝혀지자 
증상이 차츰 좋아졌다. 2주일 후에도 가끔씩 토하기는 했으나, 더이상 위험한 상태는 아
니었다.
  
  변비, 설사, 구토 등은 언제나 욕망과 불안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결과 때로는 유산이 되기도 한다. 거의 모든 자여유산은 어떤 심리적인 원인을 갖고 있
다. 이런 병적인 증상은 여자가 거기에 신경을 쓰고 '자기가 받아들이는 일'이 많을수록 
심해지는 것이다. 특히 흔히 볼 수 있는 임산부의 입덧은 소아기적인 기원을 갖는 강박관
념이 응석을 부리는 것이다. 음식으로 임신하게 된다는 과거의 상상 탓에 임신은 언제나 
음식과 관계가 있다. 자기 몸에 이상을 느낀여자는 신경쇠약에 걸렸을 때처럼, 이 이상을 

어떤 욕망으로 표현하고, 때로는 이 욕망에 매혹되기도 한다. 전에 히스테리의 개발이 있
었던 것처럼, 전통에 의한 입덧의 개발도 있다. 여자는 이와 같은 입덧이 나기를 기대하
고, 기다리고, 생각해 낸다. 나는 전에 이런 사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임신한 
젊은 미혼여성은 시금치가 하도 먹고 싶어서 시장을 헤매었다. 그녀는 시금치가 냄비에서 
끓는 것을 바라보면서 참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자기의 외로움을 이렇게 표현
했던 것이다. 자기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으므로, 미칠 듯이 초조하여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조바심을 쳤던 것이다. 다브랑테스 공작부인은 <수기>에서 입덧을 할 때
의 편식이 그녀의 주위사람들에 의해 강하게 암시되는 경우를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임신중에 주위사람들의 많은 배려를 즐거워했다.
  
  이처럼 주위사람들이 여러 모로 돌봐주면, 불안과 구토와 신경과민, 그리고 임신 초기
에 으레 따르게 마련인 고통이 더욱 심해진다.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 그것은 먼저, 어
느날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아, 참 그래"하고 어머니는 갑자기 포크
를 놓고 내 얼굴을 당혹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뭘 먹고 싶어하는지 
물어보는 걸 그만 잊어버렸구나."
  "특별히 먹고 싶은 거없어요" 하고 나는 어머니에게 대답했다. "아니 먹고 싶은 게 없
다니! 원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네가 주의력이 부족해
서 그래. 내가 네 시어머니에게 말씀드려야겠다. 내가 네 시어머니에게 말씀드려야겠다." 
그 후에 두 사람의 어머니 사이에 의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쥐노는 자신이 기형아를 낳
을까 걱정하여 아침마다 물어보는 것이었다. "로르, 너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베르사이
유에서 돌아온 시누이가 이 질문에 끼여들었다... 입덧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해 이상해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나도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무엇이 가장 먹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으나, 전혀 알 수 없었다. 드디어 
어느날 파인애풀이 들어 있는 정제를 먹으면서,문득 파인애풀은 틀림없이 맛있을 것이라
고 생각했다... 일단 파인애플이 먹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자, 나는 심한 욕망을 느꼈다. 
그 마음속의 욕망은 코르슬레가 "지금은 계절이 아니야"하고 말했을 때 더욱 강해졌다. 
그때 나는 미친 듯이 그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아니면 죽을 것만 같은 상태에서는 이르러 
몹시 괴로웠다. (쥐노는 무척 애쓴 끝에 보나파르트 부인을 통해 파인애플을 얻을 수 있
었다. 다브랑테스 공작부인은 크게 기뻐하면서 그것을 받아 냄새를 맡고, 매만지면서 하
룻밤을 보냈다. 의사가 아침에 먹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쥐노가 그녀에게 그 
파인애플을 먹으라고 권했을 때에는) 나는 그 접시를 밀었다. "웬일인지 나는 파인애플을 
먹을 수 없어요." 그는 그 저주받은 접시를 내 코에 갖다대었다. 그러자 정말 그 파인애
플을 먹을 수 없다는 확증이 일어났다. 파인애플을 멀찌감치 밀어낼 뿐만 아니라, 창문을 
열고 향수를 뿌려서 그 과일냄새를 몰아내야만 하였다. 그후로 가장 이상한 일은, 억지로
가 아니면 나는 파인애플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주위사람들이 너무 마음을 쓰거나, 또는 스스로 자기 일을 너무 걱정하는 여자는 가장 
병적인 현상을 나타낸다. 임신의 시련을 가장 쉽게 넘기는 여자는, 한편으로는 출산기능

에 헌신하는 모성형의 여성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기 육체에서 일어나는 이변에 현혹되지 
않고, 그것을 가볍게 극복해나가는 남성형의 여성이다. 스탈 부인은 임신을 마치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처럼 슬기롭게 처리했다.
  임신이 계속되는 동안은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도 변하게 된다. 태아는 이제, 어머니의 
뱃속에 정착하여, 두 개의 기관조직이 서로 적용하고, 양자사이에 생물학적인 교환작용이 
이루어져, 이것이 여자에게 안정감을 회복시켜준다. 그녀는 이제 종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뱃속에 생긴 과일을 소유하고 있다. 임신 초기에 그
녀는 평범한 여자였고, 몸 안에 일어난 은밀한 작용으로 말미암아 조금씩 여위어간다. 후
에 그녀는 분명한 한 사람의 어머니가 되며 그 쇠약은 영광의 이면이 된다. 그녀가 괴로
워하는 신체불수는 점점 강화되어 하나의 구실이 된다. 
  많은 여성들은 임신중에 놀라운 평화를 발견하게 된다. 그녀들은 자기들이 정당화된 것
을 실감한다. 그녀들은 자기 몸을 언제나 관찰하고, 또 변화를 알아보고픈 기분을 가진
다. 사회적 이목 때문에 제 몸을 세심하게 돌보는 것이 어쩐지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해도 무방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자기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은 다 아기를 위하
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이제 그녀에게 노동이나 노력 등을 구하지 않는다. 자기 몸 이외
의 일에는 일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녀들은 마음 편히 느긋하게 살아가면 된
다. 그녀들은 휴가중이다. 그녀들의 삶의 의미는 거기, 즉 뱃속에 있으며, 이것이 그녀들
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인상을 준다. "당신만을 위해, 당신의 뜻대로 언제나 불
이 타오르고 있는 겨울날의 작은 난로와 같다. 그것은 도 한여름에 더위를 식혀주는 서늘
한 샤워와 같이 거기 있다. 그것은 도 한여름에 더위를 식혀주는 서늘한 샤워와 같이 거
기 있다" 고 H. 도이치가 인용한 사례 중의 어떤 여자는 말하고 있다. 마음이 흡족한 여
자는 또한 자기를 '가치있는 존재'로 보는 만족감도 느끼고 있다. 이것은 그녀의 소녀시
절 이후로 가장 큰 소원이었다. 그리고 아내로서는 남편에 대한 자신의 의존적 성향을 괴
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성적대상도 아니고, 하녀도 아니다. 그녀는 조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과 영원을 약속받고 있다.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존중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녀 자신의 자의까지도 소중한 것이 된다. 그것이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입덧 때 먹고 싶은 것" 을 생각해 내게 한다. "임신은 여자에게, 다른 경우라면 부당하
게 보일 행위를 합리화시킨다" 고 H. 도이치는 말하고 있다. 그녀의 태내에 다른 생명체
가 있는 것 때문에 그 존재 의의를 인정받게 된 그녀는 이게 겨우 자기 자신을 충분히 즐
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콜레트는 [저녁별] 에서 자기의 임신기의 이와 같은 양상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충족된 여성의 행복감이, 교활하게 유유히 나를 사로잡고 있다. 나는 이제 어떤 불안, 
어떤 불행도 하소연할 처지가 못된다. 병 중의 쾌적이라고 할까, 고양이가 빈둥거리며 목
청을 울리는 상태라고 할까. 조용히 나 자신을 평안히 유지하고 있는 것을 과학적으로, 
아니 속된 말로 뭐라고 부를까? 아무튼 나는 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
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아 그렇다. 저녁마다 나는 내 인생의 좋은 한 때의 하나하나에 
작별을 고하였다. 나는 그 좋은 한때를 보내기가 아쉬웠다. 모든 것을 쾌적하고 안락한 
행복이 지배하고 있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내 체중과 내가 만들어 가고 있는 생명체의 작

은 호흡소리로 말미암아 온몸이 온화한 동물성과 무관심에 휩싸여 있었다.하
  6월, 7월... 첫딸기, 첫장미, 이 임신을 긴 축하연이라고 부르지 않고,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 분만의 고통은 잊어버린다. 그러나 한 번밖에 없는 긴 축하연을 잊을 수는 없다. 
나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특히 마음이 산만한 때에는 졸음이 와서, 어렸을 때처
럼 땅바닥에서 풀밭이나 따스한 흙 위에서 잠들고 싶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이것은 유
일한 욕망, 건전한 욕망이다.
  나는 임신 말기에 이르러 마치 훔친 달걀을 끌고 가는 쥐와 같았다. 몸을 가누기가 어
렵고 옆으로 드러눕는 것도 귀찮았다. 몸이 무겁고 지쳐 있었지만, 아직 축하연은 중단되
지 않았다. 주위사람들은 나를 특권과 친절한 보호의 큰 방패 위로 운반해 주었다.
  이처럼 행복한 임신기를 가리켜, 콜레트는 그녀의 한 여자친구가 "남자의 임신" 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실제로 콜레트는 이런 처지에 완전히 빠져들어가지 않고, 용감히 참아
나가는 타입의 여성이다. 그녀는 임신을 해도 작가로서의 창작활동에 계속했다. "아이는 
자기가 먼저라고 표명했다. 그래서 나는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이렇지 못한 다른 여자들은 더욱 둔하게 된다. 자기의 새로운 중요성을 무한정 되씹고 
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주위에서 격려를 받으면, 남성이 지은 신화의 포로가 된다. 그
녀들은 지성의 명석에 '생명' 의 다산적인 밤을 대립시키고, 분명한 의식에 내면화의 신
비를 대립시키며, 풍부한 자우에 그녀의 배의 무게를 대립시킨다. 미래의 어머니는 자신
을 부식토 경작의 지반. 원천. 뿌리로 느끼고 있다. 그녀가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그 
수면은 세계가 형성될 때의 혼돈 그것이다. 그녀들 중에는 자신을 아예 잊어버리고 자기 
안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의 보배에 황홀감을 느끼는 여자도 있다. 세실 소비주가 그이 시 
[싹튼 영혼] 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은 이 환희이다.
  
  그대의 주위를 나의 생명이 따스한 털실처럼 감싸고
  그 속에서 그대는 움츠러든 사지를 가만히 뻗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오, 솜털 속에서 내가 조심스럽게 애무하는
  내 꽃에 맺힌 조그마한 싹의 영혼이여.
  내 마음의 한 조각으로 그대의 마음을 만들자꾸나.
  오, 솜털처럼 부드러운 나의 과실, 어여쁘고 촉축한 입술.
  
  그리고 그녀의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참으로 신기해요. 내가 조그마한 하나의 유성이 형성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 같
고, 귀엽고 연약한 지구를 내 손으로 빚어만들고 있는 듯한 기분이에요. 나 자신이 식물
이나 수액을 가진 대지의 자매인 것을 이렇게 분명하게 느껴본 적이 없어요. 나는 마치 
짐승처럼 땅 위를 걸어가고 있어요. 나는 피리와 잠에서 깨어난 꿀벌과 이슬로 가득찬 그
날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도 아이는 내 뱃속에서 뛰놀고 있으니까요.
  이와는 달리 대단히 요염한 여자들, 즉 자신을 에로틱한 대상으로만 의식하고 자신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있는 여자들은 몸이 이그러지고, 추해져서 관능을 자극할 
수 없게 된 것을 괴로워한다. 이런 여자에게 임신은 조금도 축복이나 풍요로 느껴지지 않
고, 자기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사도라 덩컨의 [나의 생애] 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어린애가 드디어 나에게 자기의 존재를 분명히 느끼게 한다. 대리석같은 나의 아름다운 
육체는 이완되고 부서지고 흉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바닷가를 거닐면서 때로는 정력을 강
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어린아이는 나의 것, 나만의 소유라고 마음속으로 뇌까리기도 
한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면서 나는 흔히 젊었을 때의 먼 여행과 방랑과 예술적인 미의 
발견 등에 대해 생각했다. 이것들은 이제 옛말이 되어 안개 속에 묻혀 버렸으며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는 일밖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아기는 어떤 여자라도 만들 수 있는 걸작이다. 나는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여자면 
누구나 다 아이를 갖는다면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일이
다. 그러나 나는 두려워했다. 무얼까? 그것은 분명히 죽음이나 고통 때문은 아니다. 그것
은 내가 미처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 육신은 점점 초라해졌고,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놀란다. 물의 요정 같던 나의 아
름다운 젊음은 어디로 갔는가? 나의 야심, 나의 명성은 어디로 갔는가? 본의 아니게 나는 
나 자신이 비참한 패배자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었다. 인생이라는 이 거인과의 격투에서는 
힘이 부친다.
  그러나 그때 문득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내 모든 슬픔이 사라지는 것이다. 어둠 속에
서의 괴롭고 안타까운 기대, 어머니가 된다는 그 영예는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임신 말기에는 어머니와 아기 사이에 분리가 시작된다. 여자는 태아의 최초의 움직임, 
세계의 입구를 두드리는, 갇혀 있는 배의 내벽을 두드리는 그 발길질을 각자 다르게 느낀
다. 어떤 여자는 자주적인 생명의 존재를 알리는 이 신호를 환희로 받아들인다. 다른 여
자는 자기가 다른 인간의 용기가 된 것처럼 생각되어 혐오감을 느낀다. 그리고 여기서 태
아와 모체의 결합이 끊긴다. 자궁이 아래로 처져 임신부는 압박과 긴장을 느끼기 시작하
고 숨이 차게 된다. 그녀는 분명치 않은 종에게 소유된 것이 아니라 금방 태어나려고 하
는 아기에게 소유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하나의 영상, 희망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무겁게 현존하는 것이 되었
다.
  그 현실이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모든 과도기는 불안한 것이다. 분만이 
유난히 무섭게 생각된다. 여자가 출산기에 가까워지면서 소아적인 공포가 다시 고개를 쳐
들기 시작한다. 어떤 죄악감으로 어머니에게서 저주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죽거
나 아기가 죽게 된다고 믿기도 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에서 리즈를 등장시켜 분
만 때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아적인 여성을 묘사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죽는다. 
  분만은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다른 성격을 띠게 된다. 어머니는 자신의 귀중한 이 한 
덩어리인 혈육의 보배를 자기 뱃속에 언제가지나 간수하고 싶다는 욕망과 귀찮은 존재를 

추방하고 싶은 욕망을 동시에 갖게 된다. 오랫동안 키워온 자기 꿈을 손에 갖고 싶어하지
만, 그것이 수반하는 현실적인 새로운 책임이 걱정된다. 이 두가지 욕망 중에서 어느 하나
가 이기는 경우도 있으나, 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때때로 이 불안한 체험에 단호하게 대
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녀는 자기자신이나 주위사람(어머니나 남편)에게 도움을 받
지 않고 혼자서도 훌륭히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자기에게 닥친 고통에 대해 세상이나 인생이나 근친자에게 원한을 품고 있으며, 항
의하는 의미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독립적인(모성형이나 남성적인 여자)는 분만을 앞둔 시기에도, 아니 분만때에도 능동적
이고 과감한 역할을 수행할 용기를 갖는다. 몹시 소아형인 여자는 수동적이 되어 산파나 
어머니의 보살핌에 자기를 내맡긴다. 해산 때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여자도 있고, 모든 수칙을 거부하는 여자도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해산의 위기에서 
그녀들은 사회에 대한, 특히 모성에 대한  본질적인 태도를 나타낸다고 말할수 있다. 
  극기적인가, 체념하고 있는가, 버릇없는가, 과격한가, 반항적인가, 무기력한가, 긴장하고 
있는가... 이런 여러 가지 심리적인 경향이 분만의 시간이나 어려움에 큰 영향을 주게 된
다.(물론 순수하게 생리적인 원인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정상적인 여자는(어떤 가축의 암컷처럼) 자연이 그녀에게 시키
는 이 일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거친 시골여자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미혼녀는 혼자서 분만을 한다. 그러나 혼자 아이를 낳는 경우, 아이를 죽게 한다거나 모체 
역시 위험한 병에 걸리기 쉽다. 여자가 여자로서 운명을 실현할 때 역시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인류에게 자연과 인공이 결코 확연히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것을 입증하
고 있다. 자연에 맡기면 여자의 개체로서의 이해와 종의 그것 사이에 충돌이 심하여 산모
나 아이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쉽다. 외과수술에 의한 인간적인 간섭이 전에 그렇게 
많았던 사고를 크게 감소시켰을 뿐 아니라 이제는 거의 제거했다. 무통분만법은 "네가 수
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시게 3장 16절)라는 성서의 구절을 사문화 시키고 있다. 
이런 방법은 미국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프랑스에도 널리 퍼져 가고 있다. 영국에서 
제정된 1949년 3월의 법령은 이런 방법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런 방법이 제거해 주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엄밀하게 할 수는 없다. 출산은 때로 24
시간 이상도 걸리는가 하면 두세 시간에 끝나는 경우도 있어 일반화할 수 없다. 어떤 여자
는 해산이 하나의 수난이다. 이사도라 덩컨의 경우가 그렇다. 그녀는 임신중에 줄곧 불안
해 했으며, 그런 심리적인 저항이 출산의 고통을 더욱 증대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들은 스페인의 종교재판에 대해 말이 많지만, 아기를 낳아본 여자는  그런것을 두려
워하지 않는다. 그런 것과 비교하는 것은 하나의 유희이다. 끊임없이, 아무 가책도 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잔혹한 악마는 자기 발톱으로 뼈와 신경을 짓이겨 놓는다. 사람들은 
이런 고통은 곧 잊어버린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나와 외침과 
탄식을 다시 듣기 위해서 나의 눈을 감으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어떤 여자들은 이것을 비교적 견디기 쉬운 시련으로 생각하고 있다. 극히 
소수의 여자들은 감각적인 쾌락도 느낀다. "나는 무척 성감적인 여자인가 보다. 출산도 내

게는 하나의 성행위였다. 나의 산파는 대단히 미인이었다. 이 사람이 나를 목욕시키고 닦
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흥분하기에 충분했다."
  분만할 때 창조의 힘 같은 것을 실감했다는 여자도 있다. 그런 사람은 확실히 의지적이
고 생산적인 일을 한 것이다. 많은 여자들은 이와 반대로 자기를 수동적으로 고통을 당하
는 도구처럼 느끼고 있다. 
  산모와 태어난 아기와의 최초의 관계에도 큰 변화가 많다. 자기의 육체에서 느끼는 공허
감 때문에 고민하는 여자도 있다. 갖고 있던 보물을 도둑맞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소리없는 벌집
  벌은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나의 이 피 한 방울을
  다시는 너의 연약한 몸에 주지 못한다. 
  나는 빈집이 되었다. 
  거기서 죽은 사람은 가져가 버렸다. 
  
  세실 소바주는 이렇게 쓰고 있다. 또 다음과 같이도 썼다. 
  
  너는 이제 나의 것이 아니다. 
  그 얼굴에는 이미 다른 하늘이 비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태어났다. 나는 어린 연인을 잃었다. 
  그 아이가 태어나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내 몸에서 피의 공허가 놀란 소란을 피우고 있다. 
  
  그러나 아주 젊은 어머니라면 경이로운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자기 몸에서 만들어졌고, 
또 그 몸에서 나온 생명에 대해 느끼게 되는 것은 신기한 기적이다. 그러나 새 생명을 지
상에 던진 이상한 사건 속에서 어머니는 진정 무엇을 했는가? 그녀는 알 수 없다. 아기는 
그녀가 없이는 존재하지 못했을 테지만, 그녀는 알 수 없다. 아기는 그녀가 자기 몸을 더
나 밖에 있는 것을 보면서 놀라움과 슬픔이 엇갈리는 것이다. 그리고 거의 환멸에 가까운 
느낌을 가지게 된다. 여자는 자기 아기를 자기 손처럼 확신하게 자기 것으로 느끼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아기가 느끼는 것은 이제 모두 그 아기 속에 들어 있다. 더욱이 그 아기는 뚝 
떨어져 있어 그녀에게는 그것이 불투명해졌고, 그러므로 통제도 불가능하다. 그녀는 그를 
모르며 낯설기만 하다. 임신중에 그년 그가 없이 살아왔다. 이 꼬마 이방인과 어떤 과거도 
공통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그와 곧 친숙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것은 신참자이다. 그녀는 그를 맞아들이는 자신의 태도가 담담한 데 놀랄 정도이다. 임

신중의 상상 속에 있던 아이는 하나의 그림이었다. 그것은 무한한 것이며, 그녀는 미래의 
어머니상을 여러 모로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아주 작은 한정된 한 인
간으로 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연적이고 연약하고 방자하다. 아기가 태어나 여기 이렇
게 있다는 현실적인 기쁨에는 단지 그것뿐이라는 후회가 섞여 있다. 
  많은 젊은 어머니들은 아기에게 젖을 먹임으로써 분리 이전에 갖고 있던 아기와의 동물
적인 친밀한 관계를 회복한다. 그것은 임신보다 더 피로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아기
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에게, 임신부가 느끼고 있던 휴식과 평화와 만족의 상태를 계속하
도록 허용한다. 
  콜레트 오드리는 자신이 쓴 여주인공의 삶을 이렇게 말하고있다. "아기가 젖을 빨 때에
는 아무 할 일이 없으며, 그것이 몇 시간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그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 
그녀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녀는 아기가 살찐 꿀벌처럼 자기 가슴에서 떠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없는 여자의 경우, 아기와의 구체적인 유대를 회복할 수
가 없어서 태어났을 당시의 놀라움에 가득찬 그 냉담이 계속되는 여자도 있다. 딸에게 모
유를 먹일 수 없었던 콜레트의 경우도 그 한 예이다. 그녀는 언제나 솔직하게 초기의 모성
감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결과, 집안에 새로 들어온 인물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이 아이에게 
충분한 애정을 쏟고 있을까? 어쩐지 분명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나는 확실히 경탄
했다. 그것은 하나의 습관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아기라는 놀라운 존재에 대해 그런 감
정을 느끼고 있었다. 장밋빛 새우껍질처럼 투명한 그 발톱, 땅을 밟지 않고 우리 곁에 온 
그 발바닥, 지상의 풍경과 푸른 꿈 사이에 놓은 부드러운 속 눈썹, 간신히 째진 쌍각의 음
순이 맞닿아 꽉 닫힌 은행알 같은 그 조그마한 성기, 내가 딸에게 바쳤던 섬세한 찬미, 나
는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광경을 보고도, 나는 거기서 현혹
된 어머니의 조심성이나 경쟁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언제 나에게 더욱 곤란한 침해를 가하려는 제2의 징조가 나타날 것인가. 나는 여러
가지 주의, 은밀히 치솟는 질투의 흥분, 거짓 혹은 참된 노파심, 자기가 채권자인 한 생명
에게 자유를 주고 있다는 자부심, 타인에게 겸손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다소 교활한 의식,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드디어 평범한 어머니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래도 
내가 완전히 마음을 놓게 된 것은 뜻 모를 말이 아기의 귀여운 입술 위에서 꽃처럼 피어 
났을때, 지식이나 장난이나 애정까지도 표준형인 아기를 한 사람의 딸로 만들고 그 딸을 
내 딸로 만들었을 때였다.
  
  그리고 새로운 책임을 두려워 하는 어머니도 적지 않다. 그녀들은 임신중에는 자신을 자
기의 육체에 맡기기만 하면 되었다. 자주적으로 일을 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들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는한 인간을 마주 대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여자들
은 병원에서 평온하고 명랑한 기분으로 지낼 동안은 아기를 귀엽게 애무하지만, 집에 돌아
오자마자 무거운 짐으로 느끼기도 한다. 그리하여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조차 기쁨을 주

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가슴의 형태가 이지러질까봐 걱정한다. 유방이 찌그러지고, 젖꼭지
가 아픈 것을 원통하게 여긴다. 아기가 자기의 기력과 생명과 행복을 빨아먹는 것처럼 생
각된다. 아기는 과중한 노예노동을 강요하는 존재로, 이미 자기의 일부로 생각되지 않는다. 
아기는 폭군이다. 그녀들은 자기의 유체, 자유, 자아 전체를 위협하는 이 꼬마 타인을 적의
를 갖고 바라본다. 이밖에 여러가지 이류가 첨가된다. 여자와 어머니의 관계는 언제나 그 
중요성을 잃지 않는다. H. 도이치는 자기 어머니가 만나러 올 적마다 젖이 나오지 않는 젊
은 아내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그녀는 자주 남의 도음을 구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여
자가 자신의 아기를 돌보는 것을 질투하고, 그 아기에 대해 불쾌한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 어린아이의 관계, 아버지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도 큰 영향을 준다. 경제적, 감
정적 이유의 전체가 아이를 무거운 짐이나 속박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혹은 해방이나 보배
나 안전감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적의가 명백한 증오가 되어, 극단적인 무
관심이나 학대로 표시되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어머니가 자기의 의무를 의식하여, 이런 
나쁜 감정과 싸운다. 거기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생기고, 불안 속에서 임신기의 진
정되지 않은 걱정 같은 것이 지속되는 것이다.
  모든 정신분석학자들은 아기에게 어떤 해를 끼치고 싶은 강박관념이나 무서운 사고를 
상상하는 어머니는 아기에게 적의를 품으면서 이것을 애써 억압하려고 하는 것을 인정하
고 있다. 어쨌든 다른 인간관계와 다른 점은, 처음에는 아기가 거기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아기의 미소, 더듬는 말투 같은 것은, 어머니가 아기
에게 갖는 의미와는 관계가 없다. 귀엽다, 이런 착한 아기는 없다, 혹은 귀찮고, 신통치 않
고, 보기 싫다라는 것 등의 감정은 어머니에 의해서지, 아기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불감증으로 불안스럽고 우울한 여자가 아기에게서 다정한 친구, 하나의 온정, 자극을 얻어 
우울을 잊으려고 하면, 대개는 환멸을 느끼게 마련이다. 사춘기나 성적 입문이나 결혼의 '
과도기'처럼, 모성의 그것도 외적인 사건이 자기들의 생활을 새롭게 하여 정상으로 돌리기
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우울한 환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소피아 톨스토이에게서 
이런 심정을 찾아볼 수 있다. 
  이 9개월 동안이 나의 일생에 가장 무서운 시기였다. 10개월째에 일어난 일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녀의 일기에 판에 박힌 기쁨을 쓰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거기에는 슬픔과 책임의 
두려움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아기를 낳았다. 당연히 겪어야 할 고통을 경험하고 회복되어 조
금씩 원래의 생활로 돌아간다. 그러나 아기와 남편에 대한 걱정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내 
속에는 뭔가 깨져 있다. 뭔가가 나에게 너는 앞으로 언제나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내가 가족에게 자신의 의무를 제대로 다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자식에 미숙한 사랑과 남편에 대한 그 호들갑스러운 사랑을 두
려워하던 나로서는 이제 더 이상 자연스럽지 못했다. 남편과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미덕이
라고들 말한다. 이런 생각이 나를 위로해 주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의 애정은 얼마나 강

한 것인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나에게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된다. 이것은 리오바(톨스
토이)의 아이다. 그래서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한다. 
  
  그러나 톨스토이 부인이 이처럼 남편에 대한 사랑을 과시하는 것은 그가 그녀를 사랑하
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반감이 마지못해 응한 포옹에서 생긴 아이
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K. 맨스필드는 남편을 그리워하면서도 그의 애무를 지겨워하는 젊은 어머니의 망설이는 
심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식에게 애정과 동시에 일종의 공허한 인상을 느끼
고, 이것을 완전한 무관심과 같은 침울성으로 나타내고 있다. 린다는 정원에서 자신의 막
내아이 옆에서 쉬면서 남편 스탠리를 생각하고 있다.
  
  지금 그녀는 그와 결혼한 것이다. 남편을 사랑하기도 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
는 스탠리가 아니다. 즉 평소의 스탠리가 아니다. 소심하고, 감수성이 강하고, 순진하고, 
밤마다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스탠리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녀가 스탠리를 보
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번개처럼 가끔 평온한 순간이 있지만, 그 이외에는 언제나 금방이
라도 불이 날 것 같은 집안에서, 난파하는 배위에서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위험속
에 있는 것은 언제나 스탠리였다. 그녀는 그를 구출하고, 돌보고, 안정시키고, 그의 이야기
에 귀를 기울이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엔 아이 낳는 일을 걱정해
야 했다... 아기를 낳는 것은 여자의 공통된 운명이라는 남편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녀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인다. 임신중에는 지치고, 쇠약해지고, 의기
소침해진다. 그리고 가장 괴로운 것은, 그녀가 자기 어린애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겉으로 사랑하는 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서운 여행을 하나하나 
경험할 때마다 찬바람이 그녀를 얼어붙게 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어린애에게 줄 온정이 남
아있지 않았다. 이 꼬마 사내아이는 자기 어머니의 것이며, 베릴의 것이며, 누구나 원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자기 품안에 안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이가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냉담했다. 그녀는 내려보았다... 아이의 미소에는 참으로 기이
한 뜻밖의 무엇이 있었다. 그래서 린다는 따라 웃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고 냉정하
게 아이에게 말했다.. 
  "난 아기를 좋아하지 않아."
  "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아기는 어머니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엄마가 날 좋아하지 않아요?" 아이는 바보처럼 어머니에게 팔을 내저었다. 린다는 풀 
위에 앉았다. "뭣 때문에 그렇게 웃기만 하니?" 하고 그녀는 나무라는 듯이 말했다.  "엄마
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그렇게 웃지 않을거야..." 린다는 자기에 대한 아이의 
큰 신뢰심에 놀랐다. 아니다. 정직해야겠다. 그녀가 느낀 것은 그것이 아니다. 어떤 새로운 
것...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조용히 아이에게 중얼거렸다. "잘 있었니! 내 야
릇한 아기야..."

  
  이런 사례는 모성본능이라는 것이 그다지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
하다. 그런 말은 아무래도 인류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어머니의 태도란 그녀의 상황의 전
체에 의해, 그녀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의해 결정된다. 이 방법은 방금 보아온 
것처럼 매우 다양하다.
  만일 사정이 불리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머니는 어린애에게서 자기를 풍부하게 하는 것
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현실의 보증과 같았다... 이 아이에 의해 그녀는 모든 것
에 먼저 그녀 자신에게 유력한 단서가 생기게 된다.
  콜레트 오드리는 어느 젊은 여자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다른 어머
니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 아이는 내 팔과 내 가슴위에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처럼 내 힘의 한계에까지 
실려 있었다. 그 아이는 나를 고요와 어둠 속에서 지하로 처박았다. 그 아이는 단번에 이 
세계의 무게를 내 두 어깨위에 얹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아이를 원했던 것이다. 나 혼
자서는 모든 게 너무 가벼웠다. 
  
  어머니라기보다는 차라리 '출산녀'라고 불러야 적합한 여성은, 아기가 젖을 때자마자, 아
니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다음 임신을 원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많은 여성들
은 아이가 자기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가고 나서야 비로서 자신이 진정으로 아이를 가졌
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아이는 그녀들의 불명확한 조각이 아니라 세계의 작은 한 부분이
다. 아이는 이미 모체에 달라붙어 은밀히 괴롭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게 되었다. 출산에서 비롯된 우울이 지나간 후, 소유하는 어머니
로서의 즐거움을 세실 소바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제 너는 나의 작은 연인
  엄마의 커다란 침대 위에서
  너에게 입을 맞추고 껴안고
  너의 아름다운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
  잘 있었니, 나의 귀여운
  피와 기쁨과 알몸으로 된 조각상이여
  나의 작은 화신, 나의 감동...
  
  여자는 아이에게서 페니스의 대용을 발견한다는 말이 있고 또 그런 말이 거듭되어 왔다. 
이것은 전혀 옳지 않은 말이다. 사실, 다 자란 남자가 자신의 페니스를 근사한 장난감으로 
간주하는 일은 없다. 그의 이 기관이 갖고 있는 가치는 그것이 소유를 보증하는 바람직한 
대상물의 가치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성인여자는 남성에 대하여, 그가 취하는 먹이를 

부러워하는 것이지 취하기 위한 그 기구 자체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남성의 
포옹에 의해 충족되지 않는 공격적인 에로티시즘을 만족시킨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내어주고, 남자에게서는 얻지 못하는 정부에 필적하는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 같은 것은 
아니다. 모든 관계는 각각 특이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에게서 사랑하는 남자가 사랑받
는 여자에게서처럼, 육체적인 충실감을 발견한다. 그것도 항목에서가 아니라, 지배에서 발
견하게 된다. 어머니는 아이에게서 남자가 여자에게서 구하는 것을 분명히 파악한다. 자기
의 먹이, 자기의 분신이 되는 동시에 자연이며 의식인 하나의 타자를 파악한다. C. 오드리
의 여주인공은 자기의 아이에게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있다. 
  
  나의 손가락을 위해 생긴 피부, 그것은 모든 고양이나 모든 꽃의 약속을 지켜주었다...
  
  아이의 육체는, 여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의 육체를 통하여, 후에는 이 세계의 도처에서 
원한 그 부드러움, 그 따뜻한 탄력을 갖고 있다. 그는 식물이며 동물이기도 하다. 그 눈에
는 비와 개울과 하늘과 바다의 푸른빛이 있다. 그 발톱은 산호이며, 머리털은 비단같이 부
드러운 풀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형이며, 작은 새이며, 새끼고양이다.  나의 꽃, 나의 
진주, 나의 병아리이며 나의 어린 양이다. 어머니는 애인처럼 속삭이고, 애인처럼 소유형용
사('나의'라는 말)를 함부로 쓴다. 즉 애무, 키스와 같은 독점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그녀
는 아기를 가슴에 껴안고 자기 팔과, 자기 침대의 온기로 감싼다. 때때로 이와 같은 관계
가 뚜렷한 성적인 특색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앞에서 내가 일부를 인용한 슈테켈이 수록
한 고백에서도 그것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아들에게 젖을 주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 아이는 좀처럼 자라지 못하고, 우리는 둘 
다 체중이 줄어들었으므로, 기쁜 줄을 몰랐어요. 나에게는 그것이 어떤 성적인 것처럼 생
각되어 그에게 가슴을 드러내주면서도 부끄럽게 느껴졌어요. 내 몸에 밀착되는 작은 몸뚱
이를 느끼는 것은 참으로 기분이 좋았어요. 그는 작은 손이 내 몸에 밀착되는 작은 몸뚱이
를 느끼는 것은 참으로 기분이 좋았어요. 그는 작은 손이 내 몸을 만지면 나는 몸이 오싹 
떨렸어요... 내 사랑이 모두 이 아이에게 흘러들어 갔어요... 아이는 자주 나와 함께 있었어
요. 내가 침대에 누워 있으면, 겨우 두 살밖에 안 된 아이는 침대에 다가와서 내 위에 올
라타려고 했어요. 그리고 작은 손으로 내 가슴을 애무하고,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더듬으려
고 했어요. 그것은 내게 무척 쾌감을 주어, 아이를 물리치기가 힘들 정도였어요. 나는 그애
의 페니스를 가지고 놀고 싶은 유혹과 자주 싸워야 했어요.
  
  아이가 성장하면, 모성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처음에 아이는 '표준아기'에 불과하
다. 그리하여 아이는 다만 일반성 속에 존재할 뿐이다. 그후 아이는 조금씩 개성이 나타난
다. 대단히 지배적이거나 관능적인 여자는 이렇게 되면 아이에게 냉담해진다. 이와 반대로 
어떤 여자들은(콜레트처럼) 바로 이때 여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모자의 관
계는 점점 복잡해 진다. 아이는 어머니의 분신이며, 그 어머니는 아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외시키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아이는 하나의 자주적인 주체이므로 반항한다. 그는 이제 대단히 현실적이다. 그
러나 그 미래는 한 사람의 청년과 어른이다. 그것은 하나의 부이며 보물이다. 또한 부담이
고 폭군이다. 어머니가 아이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관용의 기쁨이다. 그녀는 아이에
게 봉상하고 제공하며 행복을 창조하는 데에 만족을 느껴야 한다. 바로 C. 오드리가 묘사
한 어머니처럼.
  
  그래서 그는 마치 책에 쓰여 있는 것 같은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유년시
절은 책에 쓰여 있는 그것에 비하면 진짜 장미를 그림 엽서에 그린 장미와 비교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의 행복은 내가 키운 젖과 마찬가지로 역시 내게서 나온 것이었다.
  
  연애를 하는 여자처럼 어머니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면 대단히 기
뻐한다. 그녀는 자신이 크게 요구될때 비로서 존재의 이유를 가지게 되며, 이 요구에 기꺼
이 응한다. 그러나 모성애의 곤란과 위대성은 그것이 상호성 위에 서 있지 않는 데 있다. 
여자는 자기 앞에 한 사람의 사나이, 영웅, 반신을 상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우연적인 육체속에 잠겨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작은 육체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어
린애는 아무 가치도 갖고 있지 않으며, 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도 없다. 그런 어린애를 
상대라고 있는 여자는 역시 외톨이다. 그녀는 아이에게 자기가 제공하는 반대급부를 기대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자유의사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용에 대하여는 남자들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모성'의 종교가 모든 어
머니는 모범적이라고 선언하게 되면, 거기서 기만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단히 보
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보통, 모성은 나르시시즘, 타애정신, 몽상, 성실, 기만, 헌신, 쾌
락, 멸시 등의 혼합인 것이다.
  우리의 풍습은 아이에게 대단히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 그것은 아이의 손발을 묶다시피
하여 어머니에게 맡기는 것으로, 그 어머니는 언제나 욕구 불만을 느끼게 된다. 이런 여성
은 성적으로는 불감증에 걸려 있거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사
회적으로 남자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세계나 미래에 대해서도 손쓸 여지가 없다. 
그녀는 아기를 통하여 자기 인생의 모든 손실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만일 사람들이 오늘날 
여성이 놓여있는 상황이 얼마나 여자의 능력발휘를 어렵게 하고, 얼마나 많은 욕망과 반항
심과 자부심 그리고 요구를 마음속에 몰래 간직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면 무방비의 아기
가 이런 여자에게 맡겨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녀가 인형을 어르거나 못살게 구는 것처럼 그 행동은 상징적이지만, 이 상징은 아이에
게는 가혹한 현실이 된다. 자기 아이를 때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
면, 아이를 때리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남자에게, 사회에서, 또는 자기 
자신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는 아이가 맞고 있다. 물루지는 (엔리코)에서 
이런 괴로운 오해를 표현했다. 엔리코는 어머니가 이렇게 미친 듯이 때리는 것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착란에게 깨어난 어머니는 후회와 애처로움 때문에 맞
는 아이는 상처를 입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올테트 르뒷의 (가사)에 나오는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 감정을 폭발

시킴으로써 사실은 자기를 버린 유혹자와 자기를 이처럼 비참하게 만든 생애에 대해 복수
를 한다. 모성의 이와 같은 잔혹한 양상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위선적인 수치심
에서 '악한어머니'라는 생각을 살짝 숨기고 계모라는 타입을 생각해 낸 것이다. 두번째 어
머니가, 죽은 '좋은 어머니'의 자식을 학대한다. 사실은 세귀르 부인이 현모인 플뢰르빌 부
인과 대조하여 우리에게 보여준 피쉬니 부인이야말로 그런 어머니이다. 쥘 르나르의 (홍당
무)이래로, 어머니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엔리코), (가사), S. 드 테르바뉴의 
(어머니의 증오), 에르베 바쟁의 (주먹에 올려놓은 독사)등이 그렇다. 이런 소설에 쓰여진 
내용이 다소 예외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대다수의 여자는 도덕관념과 자제심에서 자기의 
자발적인 충동을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억압된 것은 히스테릭한 싸움이나 손찌검, 
분노, 모욕, 처벌 등으로 번개처럼 외부에 표출된다. 
  전적으로 사디즘적인 어머니는 젖혀놓더라도, 유별나게 변덕스러운 어머니는 세상에 얼
마든지 있다. 그녀들이 좋아하는 것은 지배이다. 어린애는 장난감이다. 사내아이라면 그녀
는 아무렇지 않게 페니스를 가지고 논다. 계집이라면 인형으로 삼는다. 후에도 그녀들은 
꼬마노예가 맹복적으로 복종하기를 원한다. 이런 어머니는 허영심이 강하므로 아이를 재주
부리는 동물처럼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질투가 많고 독점적인기 때문에 그 아이를 자기 이
외의 다른 사람과 때어놓는다. 여자는 자기가 아이를 돌본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경우가 적
지 않다. 그녀는 아이를 통해 하나의 상상적인 존재(인간)를 만들어, 이 존재가 자기를 훌
륭한 어머니로서 감사하고, 자기가 그 존재에게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코르넬리가 자기 아이들을 가리키면서 "이애들이 나의 보배예요" 하고 자랑스럽게 말했
을 때, 그녀는 후세에 가장 나쁜 실례를 보여준 것이다.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이와 같은 
자존심에 가득찬 제스처를 취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는 살과 뼈로 된 작
은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도 불사한다. 그러나 이런 우연적이고 불확실한 작은 존재만으로
는, 그녀들은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녀들은 아이에게 아버지를 닮으라고 가르치거나 닮지 
말라고 가르친다. 혹은 아버지나 어머니나 존경받고 있는 조상의 한 사람이 되라고 강요한
다. 그녀들은 인기 있는 모델을 모방한다. H. 도이치의 말에 의하면, 독일의 어느 여성 사
회주의자는 릴리 브라운을 종경하고 있었다. 이 유명한 여자 선동가에게는 천재적인 아들
이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 죽었다. 이 여성을 모방하려던 한 부인은 자기 아들을 어디까지
나 미래의 천재로 취급했는데, 그 결과 그 아이는 자라서 도둑이 되었다. 이처럼, 터무니없
는 압제는 반드시 어머니에게 실망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H. 도이치는 다른 사례로 여러 
해에 걸쳐 그 생활을 관찰한 한 이탈리아 부인의 경우를 들고 있다.
  
  마제티 부인은 많은 자녀들을 두었는데, 그 자녀들과 사이가 나쁜 것을 늘 개탄하고 있
었다. 그녀는 남편이 도와주기를 원했으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누구
보다도 자신이 잘났고, 특히 남편이나 자식들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집 밖에서는 매우 신중히, 그리고 점잖게 행동했으나 집 안에서는 대단히 신경질적이어서 
심한 말다툼이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가난하고 교양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언
제나 '올라서기'를 원했다. 그녀는 야학에도 다녔다. 16세 때 성적으로 매력을 느낀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야심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공부를 

계속하여 자기의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남편은 훌륭한 노동자였으나, 아내의 공격적
이고 우월감에 가득찬 태도에 반감을 갖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아내에게 여러 번 임
신을 하게 한 것도 아마 복수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남편과 별거하여 한동안 자기 시분
을 체념했던 그녀는 남편에게 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자식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녀의 말을 잘 들었다. 공부도 잘하여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장녀 루이즈가 16세가 되자 어머니는 딸이 자기와 같은 경험을 되풀이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루이즈를 엄하게 다루었다. 류이즈는 이에 복수하려는 듯이 사생아
를 낳았다. 아이들은 모두 결속하여 행실에 대해 잔소리가 많은 어머니에게 아버지처럼 대
응하기로 했다. 그러다간 까닭도 없이 번갈아 그 애정을 쏟는 대상을 바꾸기도 했다. 이것
이 아이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질투를 자극했다. 또 다시 한 딸아이기 남자와 놀아나 성병
에 걸리는가 하면 또 다른 사생아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 사내아이는 자라서 도둑이 되었
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 자식들에게 너무 높은 이상을 추구했
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완고한 자녀교육과 앞에서 내가 말한 변덕수러운 사디즘은 곧잘 배합된다. 어머니
는 화가 나면 '사람을 만든다'는 구실로 자식들을 억압한다. 그리하여 자기의 의도가 실패
로 돌아가면 반감이 더욱 심해진다. 
  아이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또 하나의 태도는 자학적인 헌신으로, 이것 역시 흔히 
볼 수 있다. 어떤 어머니들은 마음의 공허를 매우기 위해 그리고 분명히 자각하지 못하는 
적의로 자기를 벌하기 의해 자식의 노예처럼 된다. 그녀들은 병적인 불안을 한없이 조성하
여, 아이가 자기 곁을 더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근들은 모든 쾌락과 개인적인 생활을 단
념한다. 그리하여 희생자다운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자기가 희생을 치름으로
써 아이에게 일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권리를 얻으려고 한다. 
  이런 자기포기는 폭군적인 지배력과 결부되기 쉽다. 슬픈 어머니는 자기의 괴로움을 사
디즘적으로 사용하는 무기로 삼는다. 어머니의 이와 같은 체념의 도전은 아이에게 죄의식
을 느끼게 하여 그것이 그의 생애에 무거운 체념의 도전은 아이에게 죄의식을 느끼게 하
여 그것이 그의 생애에 무거운 짐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공격적인 방법보다 이것이 오히려 
더욱 해롭다. 이때문에 타격을 받게 되면 아이는 마음이 흔들려 아무 방어자세도 취하지 
못한다. 때로는 구타에 의해, 때로는 눈물로 인해 아이는 죄인처럼 되어버린다. 어머니의 
변명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에게 약속된 행복의 완성을 아이가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
었다. 자기가 걸려든 기만의 원한을, 순진하고 명랑한 아이에게서 풀어보려는 것이다. 옛날
에는 인형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자매나 여자친구들을 위해, 아기의 시중을 돌
보았을 때에는 자기에게 책임이 없었으나 지금은 사회와 남편과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자
신의 자존심이 이 이방인 같은 작은 생명에게 마치 자기가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책임을 
지운다. 특히 남편은 아이의 결점을 마치 잘못 만든 요리나 아내의 비행으로 돌려 화를 낸
다. 
  남편의 추상적인 요구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 무거운 짐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독립적인 여자는 가정에서의 고독, 무관심 혹은 권위 때문에 자기가 굴종하고 있는 지배적

인 의지에 아이를 복종시키면서 자기도 따라야 하는 여자들보다 훨씬 명랑하다. 왜냐하면 
짐승의 그것처럼 신비적이고, 자연의 힘과 같이 소란하고 무질서한,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하나의 생명을 예정된 틀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개를 길들이는 것처럼 잠자코 키울 수 없고, 어른처럼 설득할 수도 없다. 아이는 
타이르는 말에 대하여는 울음과 동물성으로 대항하고, 압박에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투덜대면서 그런 애매성을 잘 조작한다. 이렇게 해서 눈앞에 놓인 문제는 확실히 흥미를 
자아낸다. 어머니에게 여가가 있을 때에는 제법 교육자답다. 공원에 조용히 놓아둔 아기는 
그가 그녀의 뱃속에 들어 있었을 때처럼 또 하나의 알리바이이다. 어머니도 종종 어린애 
같은 데가 남아 있으므로 지난날의 유희, 말, 걱정, 기쁨들을 돌이 키우면서 아이를 상대로 
장난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가 빨래를 하거나, 요리를 만들거나, 다른 아이에게 젖을 먹이거나, 장보러가
거나, 손님을 접대하거나, 또는 특히 남편의 시중을 들고 있을 때에는 아이는 귀찮고 성가
신 존재일 따름이다. 이제는 아이를 '예의 바르게' 키울 여가가 없다. 먼저 아이가 나쁜 짓
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아이는 깨고, 찢고, 더럽힌다. 물건이나 아이 자신에게도 
아이는 언제나 위험한 존재이다. 아이는 움직이고, 외치고, 떠들고, 소리를 지른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산다. 이 생명이 부모의 생활을 뒤숭수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친자관계가 
원만하지 못한다. 부모와 자식의 이해관계가 일치되지 않는다. 여기서 비극이 생긴다. 언제
나 아이 때문에 훼방을 받게 되는 부모는 아이에게 끊임없는 영문 모를 희생을 입힌다. 부
모의 안정과 아이의 장래를 위해 아이를 희생시킨다. 
  그러므로 아이가 반항하는 것은 당연한다. 그는 부모가 설명해도 납득하지 못한다. 어머
니는 아이의 의식 속에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그의 꿈, 두려움, 고집, 욕망은 하나의 불투
명한 세계로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은 추상적인 법칙을 부조리한 폭력처럼 느끼고 있는 생
명을, 어머니는 밖에서 암중모색의 방법으로 규제할수 있을 뿐이다. 
  아이는 성장해도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한다. 아이는 어머니가 들어가지 않은 가치나 관
심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래서 아이는 어머니를 경멸하기도 한다. 특히 남자아이는 자기의 
남성적인 특권을 자랑삼아 여자의 명령 같은 것을 비웃는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숙제를 하
라고 말하지만, 그 문제를 풀어주거나 라틴어 문장을 번역해 주지도 못한다. 아이를 따라
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런 보람없는 수고를 눈물이 날 지경으로 따분하게 
여기는 때도 있지만, 남편은 그런 일의 괴로움을 별로 알지 못한다. 자기와 마음이 잘 통
하지 않는 존재, 그렇지만 역시 인간적인 존재를 지도, 감독하며, 주로 거기에 반항함으로
써 자신을 확립해 가는 하나의 자유에 간섭하는 그런 일이다. 
  아이의 성별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전자 쪽이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거기에 
더 만족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인정하고 있는 위력, 그리고 남자들이 구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특권
을 고대하여 많은 여셩들은 아들을 원한다. "아들을 낳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야!"하
고 그녀들은 말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자는 영웅을 낳을 것을 꿈꾼다. 드리고 영
웅은 확실히 남자의 것이다. 아들은 장차 우두머리, 지도자, 장군, 창조자가 될 것이다. 그 
아이는 자기의 의지를 지상에 실현할 것이며, 어머니도 그 영원한 성취에 동참할 것이다. 

그녀가 짖지 못했던 집, 그녀가 탐험하지 못했던 나라들, 그녀는 아들을 통하여 세계를 소
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가 아들을 분명히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여기
서 어머니의 태도에 모순이 생긴다. 
  프로이트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는 모순이 가장 적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상 모
성에서도 결혼이나 연애의 경우처럼, 여자는 남자의 초월성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만일 그 결혼생활이나 연애경험에서 남자에게 적의를 품고 있을 경우에는 어린의 모습으
로 축소된 남성을 지배하는 것은 그녀에게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녀는 아들이 장차 그게 
뽑내게 될 성기를, 빈정거리는 친숙감을 느끼면서 다룰 것이다. 때로는 "얌전히 굴지 않으
면 떼어버릴 테야"하고 아이를 위협하기도 한다.
  가장 겸허하고 얌전한 어머니가 장차 아들을 영웅으로 소중히 키우는 경우에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분명히 하기 위해 아들을 내재적인 현실에 제한하려고 한다. 그녀가 남편을 
아이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들을 갓난아기로 취급한다. 어머니가 아들을 거세시키려
고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또 너무나 단순하다. 그녀의 몽상은 더욱 모
순되어 있다. 아들이 무한히 뻗어 나가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손아귀에 넣고 세계
가 자기 앞에 무릅을 꿇게 하여 이를 지배하고 싶어한다. 그녀는 아들이 우유부단하고, 잘 
먹고, 너그럽고, 소심하고 외출을 싫어하도록 유도한다. 운동이나 친구와의 교제를 금하고 
자신감을 갖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들을 자기 소유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들이 자랑
스러운, 대담한 모험가나 운동선수나 천재가 되지 않으면 환멸을 느낀다. 이런 어머니의 
영향이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을 몽테를랑이 말한 
것과 같고 또 모리아크가 <제니트릭스>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다. 다행히 남자아이
는 이런 압박에서 비교적 쉽사리 벗어날 수 있다. 풍습이나 사회가 그것을 도와준다. 그리
고 어머니 자신도 단념하게 된다. 그녀는 남자와 투쟁하여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슬픈 어머니의 역할을 하거나, 자기를 이기는 승리자를 낳았다는 자존심을 
곱씹으며 자위한다.
  소녀는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맡겨져 있다. 그래서 어머니의 주장도 한결 강하다. 그리고 
모녀의 관계는 더욱 극적인 성격을 갖는다. 어머니는 딸에게서 선택된 계급의 일원임을 인
정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분신을 찾아 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자기 자신과의 
애매성을 모두 딸에게 투영한다. 이 제2의 자아의 타성(타자로서의 성격)이 분명해지면, 
어머니는 자기가 배반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갈등은 모녀간에는 더욱 심해지
게 마련이다.
  개중에는 자신의 생애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어서, 딸을 통해 자기를 다시 한 번 더 구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적어도 그것을 환멸 없이 받아 들이는 여자도 있다. 이런 여자
는 딸에게 자기의 경험, 혹은 자기가 하지 못한 경험을 할 기회를 주고 싶어한다. 그리하
여 자기 딸에게 행복한 청춘을 갖게 하려고 한다. 콜레트는 이처럼 균형이 잡히고 너그러
운 어머니의 한 사람을 묘사했다. 기도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딸을 사랑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기쁨을 찾고 있으므로, 딸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만족
시켜준다. 자기의 모습을 거기서 발견하기도 하고, 또한 자기를 초월하는 이 분신에게 헌

신하여, 어머니가 그 속에 자기를 모두 옮겨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녀는 자아를 포기한다. 유일한 걱정은 자식의 행복이다. 그녀는 다른면에는 이기적이
며 냉혹하기까지 하다. 그녀를 두렵게 하는 위험은 열애하는 딸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다. 
새비네 부인이 딸 그리냥에게 그러했다. 딸은 기분이 나빠 어머니의 억압적인 헌신에서 벗
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한평생 어머니같이 자기의 
책임에 대해 소심한 인간으로 남아 있다. 너무 귀엽게 자랐기 때문이다. 그런 특히 젊은 
딸에게 참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모성의 어떤 자학적인 형태이다. 어떤 여자들
은 자기가 여자인 것을 절대적인 저주처럼 여기고 있다. 그녀들은 딸이 또 하나의 새로운 
희생자라는 사실에서 쓰디쓴 기쁨을 느끼면서, 바라고 혹은 받아들인다. 이와 동시에 그 
딸을 낳은 것을 일종의 죄악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녀들의 회한, 달을 통하여 자기자신에
게 느끼고 있는 연민은 큰 불안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달의 곁을 잠시도 떠나려고 하지 않
는다. 그리하여 15년, 20년이나 딸과 같은 침대에서 잔다. 딸은 이런 불안한 정열의 불꽃
에 의해 소멸해 버린다.
  대부분의 여자는 자기들의 여성적인 조건을 요구하는 동시에 그 조건을 혐오하고 있다. 
그녀들은 반감을 느끼면서 그 조건 속에서 살고 있다. 그녀들이 자기의 성에 대해 느끼고 
있는 혐오는 결과적으로 딸을 남성적으로 키우려고 한다. 그리하여 딸에게 관대한 어머니
는 많지 않다. 딸을 낳았기 때문에 속상한 어머니는 "너도 여자가 되는 거야"라는 그 의미
가 분명치 않은 저주로 딸을 맞아들인다. 그녀는 자기 분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딸을 훌륭
한 인간으로 만들어, 자기의 열등성에 대해 보상 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시달
린 약점도 딸에게 심어 주려고 한다. 때로는 딸에게 자기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물려주려
고 한다. "내게 좋았던 것은 네게도 좋은 거야." "나는 이렇게 자랐으니, 너도 나와 같은 
운명에 놓이는 게 바람직해." 이와 반대로 딸이 자기를 닮는 것을 엄하게 금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딸에게 자기 경험이 좋은 경종이 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일종의 반동이다. 화류
계 여자는 딸을 수도원에 보내고, 무지한 여자는 딸에게 공부를 시킨다. <가사>에는, 딸
에게서 젊었을 때 자기의 실수로 빚어진 언짢은 결과를 발견한 어머니가 딸에게 열심히 
설득한다. 
  
  잘 생각해 봐. 만일 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야.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죄가 어떻고 해도 나는 그 죄라는 걸 잘 몰랐어. 남자가 너를 불러
도 따라가선 안 돼. 너는 자기 길을 똑바로 가야 해. 뒤돌아 보지 말아. 내 말 알았지? 미
리 일러두었으니까. 그런 일이 네게 일어나서는 안 돼.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엄마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꺼야. 밖으로 내쫓을 테야.
  
  마제티 부인이 딸에게 자기가 전에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시키지 않으려고 애쓴 나머지, 
오히려 그런 실수를 앞당기게 된 사례를 앞에서 보아왔다. 슈테켈은 딸에 대한 어머니의 
증오의 복잡한 한 사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어머니는 네번째로 딸을 낳았을 때부터 참을 수 없었다. 그 딸은 

귀엽고 매력 있는 아이였는데... 그녀는 이 딸이 남편의 모든 결점을 물려받았다고 구박하
는 것이었다... 이 아이를 임신할 무렵에 한 남자가 그녀에게 구애를 하고 있었다. 이 남자
는 시인이었다. 그녀는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녀의 괴테의 <친화력>에서처럼, 태어났
을 때부터 남편을 그대로 닮고 있었다. 그 밖에 그녀는 이 아이가 자기 자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중하는 성격, 상냥함, 신앙, 관능성 등이 그러했다. 그녀는 아이
가 억세고, 꿋꿋하고, 끈기 있고, 순결하고, 정력적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서 보이는 남편의 모습보다도 자기 모습을 더욱 증오하고 있었다. 
  진정한 정신적인 갈등이 생기는 것은, 소녀가 좀더 성장한 다음이다. 딸이 어머니에게 
반항하여 자주성을 갖기를 원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혐오스러운 배은망덕이다. 그녀는 자기에게서 벗어나려는 딸의 의지를 묶어두려고 안간힘
을 쓴다. 자기의 분신이 타자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에 대해 맛
보는 쾌감, 즉 자기의 절대적인 우월성에 대한 자의식에서 비롯되는 쾌감을 여자가 맛 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식들, 특히 딸을 통해서이다. 만일 그녀가 이런 특권이나 권위를 버
려야 한다면, 그녀는 자기가 훼손된 것처럼 생각한다. 정열적인 어머니건, 반감을 갖는 어
머니건, 자식의 독립은 그 희망을 좌절시킨다. 그래서 그녀는 이중으로 질투한다. 자기 딸
을 빼았아가는 세계와 세계의 일부를 획득하여 그것을 그녀에게 훔쳐가는 달에 대해서 말
이다.
  이 질투는 먼저 딸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일어난다. 어머니는 때때로 남편을 가정에 
메어두기 위해 자식을 이용한다. 이것이 실패로 끝나면 그녀는 한을 품게 된다. 반면에 성
공하면 그녀는 곳 반대의 형태로 소아콤플렉스를 부활시킨다. 그녀는 딸에게, 전에 자기는 
버림을 받고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딸을 몹시 사랑하는 외국인과 결혼한 한 프랑스 여성이 어느날 화가 나 있었다. "난 이
제 외국사람과 사는 것 질색이야!"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딸이 어머니에게 구박을 받는 경
우가 많다. 어머니는 고된 일로 딸을 괴롭히고, 나이에 비해 무리한 성실성을 요구한다. 그
녀에게는 이 딸이 경쟁자이기 때문에 성인으로 취급한다. 한편 딸도 "인생은 소설이 아니
다. 모든것이 장밋빛일 수 없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세상을 즐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머니는 아이를 단지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마구 때린다. 자기는 어디까지나 주부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녀에게 못마땅한 것은, 열한두 살의 어린 딸에게 보여줄 우월성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딸은 벌서 가시쯤은 훌륭히 해치월 수 있다. 이제는 작은 여자이다. 그 기
민성이나 호기심이나 영리함은 많은 점에서 성인여자보다 오히려 월등하다. 어머니는 여자
로서의 자기 세계에 군림하기를 원한다. 유일자이고, 다른 사람으로 대처될 수 없는 존재
이고자 한다. 그런데 어린 조수의 총명함은 어머니의 직책을 일반화시켜 버린다.
  그녀는 이틀 동안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서는 집안이 난잡하다고 딸을 알고 몹시 저기압
이 된다. 딸이 완전히 자기를 확립하는 것은 더욱 참을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딸이 가
정의 압박에 못이겨 도움을 청하러가는 여자친구들을 몹시 싫어한다. 그애들은 딸을 함부
로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애들을 욕하고, 딸에게 그애들을 자주 만나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나쁜 영향을 구실로 교제를 금한다. 자기가 주지 않는 영향은 모두가 나쁜 

것이다. 그녀는 딸과 친분을 갖고 있는 자기와 같은 또래의 여자들(교사나 딸의 친구의 어
머니)에게 특히 반감을 갖고 있다. 그런 친밀감은 어리석고 불건전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아이의 명료함, 대범함, 유희, 웃음 같은 것도 분통을 터뜨리게 한다.
  그러나 남자아이게게는 관대하다. 그들은 남성의 특권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자연스러워 
보인다. 남자를 상대하여 지는 경쟁은 진작에 단념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아닌 다른 여
자가, 어째서 자기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특권을 즐기려고 한단 말인가?
  함정 속에 포로가 되어 있는 그녀는 딸이 가정에서의 권태를 잊게 할 일과 놀이를 하는 
것을 부러워한다. 딸의 이와 같은 탈출은 그녀가 존중한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딸이 점점 더 자랄수록 원망은 어머니의 마음을 더욱 괴롭힌다. 어머니는 해마다 노쇠해 
간다. 반면에 딸은 해마다 더욱 발랄하고 화사해진다. 어머니는, 딸의 앞날에 전개되는 이 
미래라는 것은 바로  달이 자기에게서부터 빼앗아가는 것이라 느끼게 된다. 달이 처음으로 
월경을 할 때 초조함을 느끼는 어머니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딸이 훌륭한 한 
사람의 여자가 되는데 반감을 각게 된다. 나이 많은 여자들이 운명적으로 겪었던 반복이나 
매너리즘과는 달리 어머니는 이런 기회를 원망하고 혐오한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으므로, 적어도 그것을 축소하거나 말살하려고 한다. 그녀는 딸을 집에 있게 하여, 감시
하고 억압한다. 딸에게 초라한 옷을 입히고,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딸이 화장을 하
거나 외출을 하면 화를 낸다.
  그녀는 자기 인생에 대한 모든 원한을 새로운 미래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는 이 젊은 생
명에게 돌린다. 그리하여 딸에게 수치심을 일으키려 하고, 그 기획을 비웃고, 구박한다. 때
때로 양자 사이에 공공연히 싸움이 시작된다. 흔히 젊은 쪽이 이기게 마련이다. 시간이 젊
은 쪽의 편을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승리는 개운치 않다. 어머니의 태도는 달에게 반
항심을 일으켜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한다. 어머니가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딸을 죄인으
로 만든다. 이와 같은 감정이 딸의 장래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은 이미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결국 어머니는 패배를 시인하게 된다. 딸이 성인이 되었을 때, 모녀 사이에는 다소 
석연치 않은 우정이 성립된다. 그러나 한쪽은 이제 완전히 실망하고 배신당한 심정이고, 
다른 쪽은 저주가 뒤따르는 느낌이 드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서 나이든 여자가 다 자란 아이들과 갖게 되는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아
이가 어머니의 생활에서 가장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생후 20년 사이이다. 지금까
지 서술한 내용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두 가지 편견이 위험한 착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첫째는 언제나 모성애가 여자를 충분히 만족하게 한다는 견해
이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불행하고, 히스테릭하고, 불만스러운 어머니가 많다. 12회이
상이나 출산한 톨스토이 부인의 경우가 그 두드러진 예이다. 그녀는 일기의 여기저기에 세
상에서나 자기 자신 속에서 모든 것이 불필요하고 공허하다는 것을 되풀이하여 쓰고 있다. 
아이는 그녀에게 일종의 자학적인 안정을 가져왔다. "아이들과 같이 있으면, 나는 이제 젊
다는 느낌을 가질수 없다. 나는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하다." 젊음과 아름다움과 사생활의 
체념은 그녀에게 약간의 평온을 가져다준다. 그녀는 나이를 먹은 것으로 삶의 의미가 있다
고 느낀다. "아이들에게 절대로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이 내게는 큰 행복이다. 그녀에게 아
이는 남편의 우월을 거부하기 위한 무기이다. 우리들 사이에 평등을 조성하기 위한 나의 

유일한 수단이며, 유일한 무기는 아이들, 정력, 환희, 건강이다..." 그러나 권태에 사로잡힌 
생활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려면 아이만으로는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 1905년 1월 25
일, 잠시 흥분한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도 모든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 일단 사라지면, 나는 
이미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지 아기를 돌보고, 
먹고, 마시고, 자고,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이것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니 나는 슬퍼서 어제처럼 울고 싶어진다. 
  
  그후 11년이 지나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아이들의 교육에 정력적으로 열띤 의욕에 차서 헌신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성급하고, 화를 잘 내고, 얼마나 소리를 잘 질렀던가!...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이 영원한 
투쟁은 얼마나 서글픈가!
  
  모자관게는 그녀의 일생이라는 전체적인 형태 속에서 결정된다. 그것은 남편과의, 과거
와의, 일과의, 그년 자신과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 자식속에서 보편적인 어머니의 만병통
치약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잘못이다. 
내가 자주 인용한 H.도이치의저서에서 도달한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도이치는 정신분석의 
경험을 통하여 모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그녀는 이 작용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여자가 
자기를 완결하는 것은 모성에 의해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만 그 작용이 자유롭게 
받아들여지고, 성실하게 요구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젊은 여성이 그 무
거운 짐을 제대로 짊어질 수 있는 심리적, 윤리적, 물질적인 상확 속에 있는 것이 중요하
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결과는 비참하게 될 것이다. 특히 우울증이나 신경질환에 결려 있는 
여자에게 임신을 무슨 치료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 권유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것은 여
자에게나 아이에게도 불행을 가져오게 된다. 균형이 잡힌, 건정하고 책임의식이 있는 여자
라야 비로소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결혼을 무겁게 압박하는 불행은 두 사람이 그들의 힘에 의해 결합된 것이 아니라 그들
의 무기력 속에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며, 각자가 상대방에게 주기 싫어하고 달라고만 요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다. 자기가 창조할 수 없었던 완전성이나 열정이
나 가치를 자식을 통해 얻으려고 꿈꾸는 것은 더한 환멸을 초래하기 쉬운 유혹이다. 아이
가 주는 기쁨은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랄 수 있는 여성에게만 있는 것이다. 즉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생명을 초월하려고 하는 여성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확실히 아
이는 어머니가 온 정성을 다 기울여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기획의 하나이다. 그러나 모
든 다른 기획과 마찬가지로, 기정사실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 기획은 가상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바람직해야 한다. 슈테켈은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아이는 사람의 대용이 아니다. 아이가 이루지 못한 인생의 목적을 대신 할 수는 없다. 

아이는 우리 생활의 공허를 채워주는 도구가 아니다. 아이는 하나의 책임이며, 무거운 의
무이다. 아이는 자유로운 사랑의 가장 고귀한 꽃장식이다. 아이는 부모의 장난감이 아니며, 
그들이 살아가려는 욕구의 환성도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충족되지 않은 야심의 대용도 아
니다. 아이는, 행복하게 살게 해야 하는 의무이다.
  
  이와 같은 의무는 자연스러운 것이 못된다. 자연은 도덕적인 선택을 명령할 수 없다. 도
덕적인 선택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포함하고 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사회참여를 의미한
다. 어머니가 그것을 모면하려고 하면 인간적인 실존과 자유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이 된
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부부의 관계처럼 자유
로이 원하는데서 비롯되어야 한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일종의 특권적인 완성이라고 보는 
것도 잘못이다.
  세상에서는 흔히 여자애 대해 '아이가 없어서' 요염하다, 사람이 정열적이다, 동성연애자
다, 야심이 많다 하고 말한다. 그녀의 성생활이나, 추구하는 목적이나 가치는 아이의 대용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분명히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없고, 
일거리가 없고, 동성연애적인 성향을 충족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여자가 아이를 낳기를 
원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거짓과 자연주의 밑에 숨어 있는 하나의 사회적, 인위적인 
도덕이 있다. 아기를 갖는 것이 여자의 최고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광고의 슬로
건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1의 편경에서 직접으로 내포된 제2의 편견은, 아이는 어머니의 품안에서 분명한 행복
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모성애는 자연적인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므로, 부자연스러
운 (비정의) 어머니는 원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나쁜 어
머니가 있다. 정신분석학이 밝힌 중요한 진리의 하나는, 정상적인 부모도 아이에게는 위험
한 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어른이 시달리고 있는 콤플렉스, 강박관념, 정신질환등은 그
들의 가족적인 과거 속에 뿌리를 갖고 있다. 자기 자신의 모순이나 분쟁이나 드라마를 가
진 부모는 가정에서의 생활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있으므로, 여러 가지 콤플렉스나 손상된 
의식을 통하여 그들 자신의 아이들과 접촉하게 된다. 그리고 이 불행의 연쇄는 끝없이 이
어진다. 특히 어머니의 사드-마조히즘은 딸에게 죄의식을 심어 주고 이것이 다시 그 아이
게 사드-마조히즘적 행위로 나타나 끝없이 이어진다.
  세상에서 여자에게 주는 경멸과 어머니에게 주는 존경속에는 심한 아이러니가 있다. 여
자의 공적인 활동을 거부하고 남성이 종사하는 직업의 문을 닫아버린 채, 모든 영역에서 
여자의 무능을 공언하면서 인간 형성이라는 가장 어렵고 중대한 일을 여자에게 맡긴다는 
것은 큰 모순이다. 많은 여성들에게는 지금도 관습이나 전통이란 이름으로, 남자의 특권인 
교육, 문화, 책임, 활동을 금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런 여자의 팔에 태평스럽게 아이를 
안게 한다. 마치 그녀들이 어렸을때, 남자아이와 비교한 열등성을 인형으로 위로한 것처럼, 
여자에게는 사는 것이 혀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 여자에게는 살과 뼈로 된 완구를 주어 각
고 놀라는 것이다. 여자가 완전히 행복하거나 성녀가 아닌 한, 자기 권리를 무심코 남용하
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몽테스티외가,여자에게는 가사를 맡기기보다는 국가의 통치를 맡기는 것이 나을 것이라

고 한 것은 옳은 말 같다. 왜냐하면 기회만 주어지면 여자는 남자와 같은 정도로 이성적일 
수 있어 소기의 성과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추상적인 사상이나 집중적인 행위
에 있어서 한결 쉽사리 자기의 성을 극복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여자로서의 과거에서 자
유로워지고 자기 입장에서 유지하기가 어려운 감정적인 안정을 얻는 것이 그 이상으로 어
려운 일이다.
  남자도 가정에서보다는 일에서 훨씬 안정되어 있고 합리적이다. 그는 수학적으로 정확하
게 계산을 한다. 남자가 여자를 상대하여 멋대로 행동할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그는 비논
리적이고, 거짓말쟁이이고, 변덕스럽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아이를 상대하게 되면 멋
대로 행동한다. 이와 같은 안이한 태도는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보다, 아이가 어머니에 대
해 자기 방어가 어려우므로 더욱 위험하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 어머니가 완전한 
한 인격체이고, 일과 집단의 관련 속에서 자기 완성을 이루는 여자이며, 아이를 통하여 억
지로 그러한 것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여자인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아이 자신이 현재
보다 더욱 부모의 슬하에서 독립되어 있고, 또 그의 학업이나 오락 등이 그 아이와 단지 
비개인적이며 순수한 관계만 갖고 있는 어른의 감독 아래에서, 다른 또래아이들과의 사이
에서 전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행복한, 적어도 안정된 생활 속에 아이가 하나의 부처럼 생각될 경우에도 아이는 미래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를 그대로 실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에 의해 그 내재성
을 깨뜨리지 않는다. 그녀가 아이의 장래에 기대를 걸고 있을 경우에도 그녀는 대리에 대
해 시간과 공간을 통해 자기를 초월하려고 한다. 즉, 여자는 여기서도 다시 의존적인 형태
를 취한다. 그녀는 아들의 배은망덕뿐만 아니라 실패하는 경우에도 그녀의 모든 의망은 빗
나가게 된다. 이것은 여자가 결혼이나 연애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실하고 유일
한 태도이다. 여자의 열등성은, 근본적으로 먼저 생활을 반복하기만 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
  하편 남자는 실존 그대로의 사실성보다 더욱 본질적이라고 그에게 생각되는 삶의 이유
를 창조하고 있다. 여자를 모성 속에 갇히게 하는 것은 여자의 이런 상황을 연속시키는 것
이다. 오늘날은 여자도 자기초월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뜻있게 하려고 시도하는 활동
에 동참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생명이 하나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그녀는 생명을 제공
하는 데 동의 할 수 없다. 그녀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인 생활에서 하나의 역할을 수행
하려고 하지 않고서는 어머니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대포 밥(군대), 노예, 희생자, 또는 자
유로운 인간을 낳는 것은 같지가 않다. 적절히 조직된 사회에서 아이는 대부분 집단에서 
부담하고, 어머니도 시중과 원조를 받는 경우에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 여자가 직장에서 일
하는 것과 양립될 수도 있다. 오히려 직업여성 - 농부, 화학자, 작가 - 은 자기 자신에게 
매혹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임신을 한결 쉽사리 감내할 수 있다. 가장 풍부한 개인적인 활
동을 하고 있는 여자야말로 아기에게 더욱 많은 것을 줄수 있고, 아이에게는 가장 적은 것
을 요구하게 된다. 노력과 투쟁 속에서 참된 인간적인 가치를 획득하는 여자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육자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여자가 가정 밖에서 여러 시간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직업과 아이의 양육을 양
립시켜 나가기 어려운 것은 여자가 하는 일이 아직 노예노동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편 가정 밖에서 아이를 돌보고 교육시키려는 노력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그만큼 
사회가 무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상이나 지하에 기록되어 있는 법도에 따라 어머니와 
아기는 일심동체로 상호간의 속해 있다고 주장하여, 그와 같은 사회적인 결함을 긍정하려
는 것은 궤변에 불과하다. 이런 상호간의 심한 구속은 실제로 이중의 혐오스러운 압박을 
줄 뿐이다. 
  여자가, 어머니가 되는 것으로 사실상 남자와 동등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만이다. 정
신분석학자들은 아이가 여자에게 페니스와 동등한 가치를 주는 것임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런 속성이 아무리 부러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의 인간
생활을 정당화한다거나, 그것이 최고의 목적이라고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머
니의 신성한 권리에 대해서도 귀가 따갑도록 떠들었으나, 부인이 투표권을 획득한것은 어
머니로서가 아니다. 어머니가 된 미혼녀는 아직도 멸시를 받고 있다. 어머니가 찬양을 받
는 것은 결혼했을 때, 즉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을 경우이다. 남편이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
고 있는 한, 어머니가 아이를 잘 돌봐도 아이들은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더 많이 의존하
고 있는 것이다. 모자의 관계는 그녀가 남편과 갖는 관계에 따라 엄격히 규제된다는 것을 
앞에서 지적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리하여 부부관계, 가정생활,모성애는 그 각각의 요소가 서로 규제하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남편과 애정으로 결합되어 있는 여자는 가사를 즐겁게 해나갈 수 있다. 아이
들에게서 행복을 느끼는 여자는 남편에게 관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화는 좀
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자에게 주어지 여러 가지 일이 상호간에 잘 조절되기 어
렵기 때문이다.
  여성잡지는 가정주부에게 부엌일을 하면서도 성적 매력을 잃지 않는 방법이나 임신중에
도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유지하여 교태와 모성과 경제를 조화시키는 비결을 열심히 가
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열심히 실천하려고 하는 여자는 결국 그 걱정으로 얼이 
빠져 오히려 더 추해질 것이다. 손이트고 임신으로 몸매가 망가져 매력을 유지하기 어렵
다. 그래서 사랑을 갈구하던 여자는 결국 매력을 잃어 남편의 애무를 받지 못하고 아이를 
원망하게 된다. 다른 경우, 그녀의 모성이 정말 강하다면 아이는 내것이기도 하다고 남편
을 질투한다.
  그리고 앞에서도 자주 지적한 것처럼, 가정생활의 이상은 생명의 움직임과 모순되고 충
돌한다. 아이는 깨끗이 닦은 마루의 적이다. 가정을 잘 정돈하고 싶은 마음에서 무심코 발
산하는 질책이나 분노속에 모성애가 실종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모순에 늘 시
달리고 있는 여자는 하루하루를 신경질적인 발작이나 히스테릭한 불쾌감속에서 보내게 되
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녀는 언제나 실패하고 있다. 일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한 순간이고 확실한 성공사례로서 기록되는 일도 없다. 여자는 자기활동 자체에 의해
서는 결코 자기를 구제하지 못한다. 그녀는 일에 전념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인생의 의의
를 부여하지 못한다. 그 의의는 타인의 자유에 의존하고 있다. 
  가정에 갇힌 여자는 스스로 실존을 형성해 나갈 수 없다. 그 개체속에 자기를 확인하는 
수단이 없다. 따라서 이 개성은 가정주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아랍인,  인도인, 그리
고 많은 시골사람에게는, 여자는 단지 그녀가 제공하는 노동에 의해 평가되며 없어져도 미

련없이 교체할 수 있는 일손에 불과하다. 
  현대문명에서는 여자는 남편에 의해 다소나마 개인으로 취급받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나타샤처럼 가정에 정열적으로 헌신하여 완전히 자기를 버리지 않는한 일반성으로 취급받
는 것을 괴로워한다. 그녀는 다만 한사람의 특색없는 주부이고, 아내이고, 어머니이다. 나
타샤는 기꺼이 이런 자기포기를 하여 모든 대립을 물리치고 다른 사람들을 부정한다. 그러
나 현대의 여성은 이와 반대로 타자에 의해 주부, 아내, 어머니, 여자로서 인정받기를 바라
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사회생활에서 만족을 찾는다.
  제3장
  사교생활 
  가족은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경계선을 넘어 다른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 각 가정
은 부부가 들어 앉아 있는 내부에 그치지 않고 또 부부의 생활 수준이나 재산이나 취미의 
표현이기도 한다. 즉 가정은 남의 눈에도 전시되는 그런 것이다. 이런 가정과 가정 사이의 
사교생활을 리드하는 것은 본래 여자의 역할이다. 남자는 분업에 의한 유기적인 연대성의 
유대에 의해 즉 생산자로서, 시민으로서 집단(사회)과 연결되어 있다. 부부는 각각 그들이 
속하는 가족과 환경과 인종에 의해 정해진 하나의 사회적인 인력이며, 사회적으로 위치한 
다른 그룹들과 기계적인 연대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이와같은 사회적인 인격을 가장 순수하게 대표하는 것이 여자이다. 남편이 직업상 어울
리는 교제는 그가 인정받고 있는 사회적인 평가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와는 달리 
여자는 일에 매이지 않으므로 같은 생활수준에 있는 사람들과 언제나 교제할 수 있다. 그
리고 여자는 방문이나 초대에 의해 실제적으로는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강화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인간관계는 사교적인 계급제도상의 부류에서 부부의 지위를 높이거
나 혹은 낮추는 의미밖에 갖지 않는다. 여자는 자기 가정의 내부. 아니 자기의 모습까지도
-남편이나 자식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집을 대표하는 여자의 사교적인 의무는 자기를 남에게 과시하는 기쁨과 혼동되
어 있다.
  우선 그녀는 자기자신의 모습을 보여줘야한다. 집에서는 일에 몰려 아무 옷이나 걸치고 
있다. 그러나 외출하여 손님의 위치가 되면 그녀는 옷을 갈아 입는다. 여자의 화장은 이중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인의 사회적인 품위(생활수준, 재산, 그녀가 속해 있는 
환경)를 나타낸다. 그러나 동시에 여자의 나르시시즘을 나타내기도 한다. 화장은 제복인 
동시에 장신구이다.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과로워하는 여자는 화장에 의해 비로소 그 존재
를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여자가 가사노동으로 가정을 자기것처럼 만드는 것처
럼 자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고 좋은 옷을 입는 것으로 자신의 인격을 자기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동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이렇게 하여 자아를 선택하고 재창조하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의 풍습은 이처럼 여자에게 자기의 이미지에 자기를 몰입하도록 장려하고 있
다. 
  남자의 옷은 그 육체와 마찬가지로 자기초월을 나타내며 남의 시선을 끌지 않는다. 남자
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객체가 되기위한 것이 아니다. 남자의 경우는 그 외관을 인품의 
반영으로 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와 반대로 사회 자체가 여자에게 에로틱한 대상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자가 좇는 유행은 여자를 자주적인 개인으로 표시하는 거의 목
적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를 초월성에서 떼어놓아 남자의 욕망의 먹이로서 여자를 제공하
려고 한다. 세상은 여자의 기획에 힘이 되어주기는 커녕 반대로 그것을 방해하려고 한다. 
스커트는 바지만큼 편리하지 못하고 하이힐은 걷기가 힘들다. 가장 우아한 것은 가장 비실
용적인 의상이나 무도화이고 망가지기 쉬운 모자나 양말이다. 여자의 의상은 몸을 가리건 
그 몸매를 변형시키건, 혹은 몸에 꼭 맞건간에 여자를 남의 시선에 노출시키기 위한 것이
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자기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소녀에게 있어 화장은 참으로 매력있는 
유희이다. 좀더 성장하여 자주성을 갖게 되면 엷은 모슬린이나 에네말화의 거북함에 저항
을 느끼게 된다. 사춘기가 되면 그녀는 자기를 남에게 보이고 싶은 심정과 그러기를 거부
하는 심정으로 분열된다. 성적 대상이라는 여자의 천직을 순순히 받아들이면 그후부터 그
녀는 기꺼이 몸을 장식하기 시작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여자는 인공의 필요성을 자연에 제공함으로써 화장에 의해 자연과 
유사하게 된다. 그녀는 남자에게 꽃도되고 새싹도 된다. 그녀는 자기자신을 위해서도 그렇
게 된다. 남자에게 물결의 부드러운 파동과 모피의 쾌적한 온기를 주기 전에 그녀는 먼저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골동품이나 양탄자나 방석이나 꽃다발의 장식이나 진주, 브
로치나 얇은 비단을 취하여 자기 살에 섞는다.
  여자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성이란 세계의 불쾌감에 대하여 이런 것들의 아름다운 
외관과 그 부드러운 촉감이 보상해 준다. 성에 대한 여자의 감각이 불만일수록, 더욱 이런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동성애의 여자가 흔히 남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흉내를 내거나 사회에 도전하기 위한것만은 아니다. 그녀들은 비로드나 비단의 부드러운 
애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대방 여자의 몸에서 그런 것을 취하고 있기 때문
이다. 남자의 거친 포옹에 몸을 맡기고 있는 여자는- 쾌감을 느끼지 못하고 응하는 경우
는 말할 것도 없고 설사 그것을 즐기고 있더라도- 자기 몸 이외의 어떤 육체적인 먹이도 
기꺼이 포옹하지 못한다. 그녀는 자기 몸을 꽃으로 바꾸려고 향수를 뿌린다. 그녀가 자기 
목에 걸고있는 다이아몬드의 광채는 자기 피부의 광채와 구별되지 않는다. 여자는 세계의 
모든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에 동화된다. 감각적으로 귀중한 것뿐만 아니라 때
로는 그 감상적이고 이상적인 가치를 갈망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보물은 추억이고 다른 
보물은 상징이다. 자기를 꽃다발이나 조롱으로 만드는 여자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박물관, 
상형문자가 되어 있는 여자들도 있다. 조르제트 르블랑은 수기에 자기의 청춘시절을 회상
하여 이렇게 쓰고있다.
  나는 언제나 회화의 옷을 입고 있었다. 반 아이크의 속을, 루벤스의 의화의 속을, 메믈링
의 처녀마리아 속을 산책했던 것이다. 어느날 겨울날에 나는 자수정빛 비로드 옷에서 사제
복 같은 데서 떼어온 낡은 은장식을 단 차림으로 브르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긴 소매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그것을 질질끌어 일부러 보도를 쓸면서 걸어갔던 것이다. 황색모피
의 두건으로 금발을 싸고, 특히 파격적인 것은 내 이마 한가운데 보석관처럼 다이아몬드를 
붙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차림을 했느냐 하면, 단지 그것이 마음에 들었
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세상의 모든 인습을 등지고 사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내 모습을 
오가는 사람들이 보고 웃으면 웃을수록 나는 어리석은 생각을 점점 많이했다. 사람들이 나
를 조소한다고 해서 이제와서 나의 모습을 바꾸는 것은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그것은 불명
예스러운 항복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집에서는 달랐다. 고프리의 천사들, 프라 앙젤리
코의 천사들, 번존스나 와트는 나의 모델이었다. 언제나 나는 하늘색이나 황금색 옷을 입
고 있었다. 나의 주위에는 통넓은 나의 옷이 길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정신병원에 가면 삼라만상을 뭐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이상한 태도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볼 수 있다. 귀중한 물건이나 상징을 무한히 아끼는 여자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얼터당토 않은 옷을 입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아주 어린 소녀는 화장
을 하면 곧 요정이나 여왕이나 꽃으로 변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꽃장식이나 리본을 달
면 금새 아름다워진 느낌이 든다. 자기가 그 근사한 장식과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순진한 
젊은 처녀는 옷의 빛깔에 매혹되면 자기 얼굴빛이 나빠지는 것쯤은 개의치 않는다. 이런 
대담한 악취미는 예술가나 지식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바깥세계에 매혹된 나머지 
자기 얼굴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고대의 직물이나 옛 보석에 반하여 중국이나 중세의 
이미지를 마음속으로 그리는데 열중한다. 그리고 거울을 한 번 힐끗 보고 말거나 독단적으
로 보아넘길 뿐이다.
  중년여인들이 때때로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흐뭇해 하는것을 보고 사람들은 가끔 놀리
기도 한다. 둥근머리 장식, 레이스, 번쩍이는 의상, 이상한 목걸이 등은 가엾게도 그녀들의 
거친 얼굴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할 뿐이다. 그녀들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남자
를 유혹하는 것을 단념하고, 어렸을 때처럼 화장이 다시 무상의 놀이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취미가 고상한 여자는 화장에 순전히 관능적 또는 미적 기쁨
만을 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화장이 자기모습의 조화를 결코 깨어서는 안 
된다. 옷의 빛깔은 얼굴빛에 잘 어울리고, 옷의 재단은 몸의 곡선을 부각시키거나 교정해
야 한다. 그녀가 극진히 다루고 있는 것은 몸단장을 한 자기 자신이지 자기를 장식한 물건
은 아니다.
  화장은 단지 몸을 단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여자의 
사회적인 지위를 표시하는 것이다. 단장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것은 매춘부뿐이며, 이
것은 순전히 성적 대상으로서의 역할만 할 뿐이다. 예전에는 금발머리와 오의 여기저기를 
꽃으로 장식하여 그 직업을 알려주었으나, 오늘날에는 하이힐, 몸에 착 달라붙는 비단옷, 
야단스러운 분장이나 진한 향수등이 그 직업을 알려주고 있다. 다른 여자가 그런 치장을 
하면 매춘부와 같은 옷차림을 했다고 비난을 받았으나 그런 여자의 색정적인 특색은 사회
생활의 일부이므로 그런 야단스러운 차림새를 하지 않으면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한다. 그
러나 극단적으로 검소한 옷차림을 한다고 해서 품행이 단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것
은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너무 노골적으로 남자의 욕정을 자극하는 여자는 저질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의 정욕
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자도 결코 바람직한 여자라고 볼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런 여
자를 가리켜 일부러 남자행세를 하고 싶어하는 동성연애자라고 말하거나, 또는 굳이 괴짜
로 자부하는 여자 혹은 반미치광이로 생각된다. 물건취급을 당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사회

에 대한 도전이며 아나키스트로 간주된다. 그러나 단지 남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기 위해
서라면 여자다운 모습은 지니고 있어야한다. 여자의 노출욕과 수치심이 타협을 이루는 것
은 풍습에 의해서이다. 숙녀가 감춰야 할 신체의 부위는 때로는 앞가슴이고 때로는 발뒤꿈
치이다. 그리고 결혼한 여자는 일체 멋을 부리지 않는데 비해 젊은 처녀만은 구혼자를 유
혹하기 위해 매력을 강조할 권리를 갖는다. 많은 농촌사회에서 이런 관례를 볼 수 있다. 
어느도시에서는 젊은 처녀에게 대단히 얌전하고 빛깔이 은은한 옷을 입히는데 반하여 나
이가 지긋한 여자에게는 도전적일 정도로 몸에 꼭 맞는 무거운 천으로된 화려한 색깔의 
옷이 허용된다. 16세의 소녀가 검정 옷을 입으면 화사해 보인다. 이 나이에는 검정옷을 입
지 않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례는 물론 잘 지켜야 하지만 어떤 경우, 어떤 엄
격한 환경에서도 여자의 성적인 특징은 강조되는 것이 당연하다. 목사의 아내라도 머리를 
퍼머하고 엷은 화장을 하고 조금은 유행을 따라 육체적인 매력에 신경을 써야 그녀가 여
성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에로티시즘을 이렇게 사회생활에 도입하는 것은, 특히 파티복에서 잘 나타난다. 파티가 
개최되는 것을 다시 말해서 사치와 낭비를 알리기 위해 파티복은 비싸고 여리지 않으면 
안 된다. 파티복은 되도록 불편하게 만든다. 스커트는 길고 폭이 지나치게 넓거나 너무 좁
아서 걷기가 불편하다. 보석 치맛단의 장식, 금박, 꽃, 새털깃, 가발에 뒤덮여 여자는 육체
를 가진 인형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 육체 자체가 남의 시선을 받게된다. 꽃이 무심히 피
어나는 것처럼 여자는 어깨, 등, 가슴을 드러낸다. 대연회를 제외하고는 남자는 노골적으로 
그녀를 탐내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남자에게 허용되는 것은 눈으로 보고 춤을 출때 
허리를 껴안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정다운 보배가 깔린 세계에서 왕이 된 기분에 도
취될 수는 있다. 남자에게서 남자에게로, 이렇게 되면 연회는 포틀랜치(북미 토인의 연회
로 참석자에게 선물이 분배된다)처럼 된다. 각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로서 자기의 
재산인 육체를 내보인다. 파티복을 입는 여자는 모든 남성들의 쾌락과 자기 소유자의 자랑
을 위해 여자로 가장한다. 
  화장은 이런 사회적인 의미를 갖게 되므로 여자는 의상을 입는 방법으로 사회에 대한 
태도를 나타낼 수 있다. 기성질서에 따르는 여자는 겸손하고 품위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
다. 많은 뉘앙스가 가능하며, 그 선택방법에 따라, 연약하고, 어리고, 신비적이고, 순진하
고, 엄격하고, 쾌할하고,침하고, 다소 기발하거나 견손한 여자로 자기를 만들수 있다. 혹은 
이와 반대로 개성적인 몸치장으로 세상의 인습에 대한 반항을 나타낼 수도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많은 소설에 묘사되어 있는 해방된 여자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성격, 즉 여자의 
종속성을 강조하는 대담한 화장으로 기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디스 
위튼의 <순진한 시절> 에서 파란 많은 과거와 대담한 용기를 가진 이혼녀는 남편과 헤어
지자마자 가슴을 드러낸 의상을 걸치고 나타난다. 세상의 비난에 대한 반발과 편의주의에 
대한 경멸을 알아보기 쉽게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젊은 처녀는 중년 부인의 복장을 하고, 중년 부인은 젊은 처녀의, 창녀는 상
류부인의, 상류 부인은 천한 여자의 복장을 하고 재미있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자
기 신분에 어울리는 복장을 하더라도 아직 거기에는 유희가 남아 있다. 기교는 예술과 마
찬가지로 상상의 산물이다. 코르셋, 브래지어, 머리염색, 얼굴 성형은 육체나 얼굴 모습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무리 얌전한 처녀라도 일단 성장을 하면, 언뜻 보아 정체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그녀는 회화나 조각, 또는 연극을 하는 여배우와 같다. 그녀는 하나
의 유사한 인간으로서, 이를 통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그녀 자신이 아니라 그녀
가 연기하는 극중 인물이 암시하는 여자가 된다. 소설의 주인공이나 초상화나 흉상처럼, 
비현실저그 필연적, 또는 완벽한 것과 혼돈이 된다. 이것이 그녀를 흡족하게 한다. 그녀는 
이 객체에 자기를 소외시키려 한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을 고정시켜 정당화된 것처럼 생각
하려고 한다.
  마리 바슈키르체프의 <독백> 을 읽어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녀는 페이지마다 
자기의 여러가지 모습을 계속해서 쓰고 있다. 자기 의상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그녀
는 새 옷을 갈아입을 적마다 딴 여자가 된 것처럼 생각하여 새삼스럽게 자기를 열애한다.

  나는 엄마에게 숄을 빼앗았다, 머리를 내놓기 위해 숄에 구멍을 내고 양쪽 끝을 꿰메었
다. 고전적인 주름을 지으면서 늘어진 이 숄은 나에게 동양적인, 성서풍의 괴상한 풍요를 
주었다.
  나는 라페리에르에게 간다. 카롤린리 내게 세 시간 걸려 옷을 한 벌 지어주었다. 이 옷
을 입으면 마치 구름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옷은 모두 영국제 크레이프로 만들어
진 것으로 그녀가 나에게 입혀주었다. 나는 몸매가 날씬하고 우아하고, 키가 커보인다. 주
름이 조화되어, 따스해 보이는 털옷을 걸친, 르페브르가 제작한 초상을 닮았다. 그는 평번
한 천으로 날씬하고 싱싱한 몸매의 선을 잘 나타낸다.

  그녀는 날마다 다음과 같은 후렴을 되풀이한다. "검정색 옷을 입은 나는 아름다웠다... 
회색 옷을 입어도 아름다웠다... 흰 옷을 입어도 역시 아름다웠다. "
  노아우 부인도 모치장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여자지만, 의상에 실패한 비극을 슬픈 
심정으로 <수기> 에 추억하고 있다.

  나는 선명한 색체를, 색체의 대담한 대조를 사랑했다. 한 벌의 옷은 풍경처럼, 운명적인 
유혹의 손길처럼, 모험적인 사랑의 약속처럼 생각되었다. 서툰 솜씨로 지은 옷을 입을 때
에는 모든 결점이 눈에 띄어 참기 어려웠다.

  많은 여자들이 모치장을 이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었 때문인가? 착각일망정 치장
은 세계와 그녀들이 자아를 동시에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인조견 복장을 한 처녀> 라
는 독일 소설에는 가난한 처녀가 리스모피와외투를 열망하는 것을 모사하고 있다. 모피의 
부드러움, 그 따스한 애무에 그녀는 관능적인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값진 모피를 걸친 변
모된 자기를 그리워한다. 그리하여 한번도 차지하지 못한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한번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빛나는 운명을 손에 넣게 된다.

  나는 옷걸이에 걸린 외투 한 벌을 보았다. 참으로 부드러워 보이는 모피, 쾌적하고 포근
하고 정다워 보이는 모피, 나는 키스하고 싶을 정도로 이 외투를 아끼고 있었다. 그것은 

만성절의 평온한 하늘 같은 위안을 주는 인상을 받게 했다. 그것은 진짜 리스 가죽이었다. 
나는 레인코트를 살짝 벗고, 리스 모피의 외투를 몸에 걸쳤다. 이 모피는 내 살결에는 다
이아몬드와 같았다. 그리고 아끼는 물건은 일단 손에 넣기만 하면 결코 다시 돌려줄 수 없
을 것이다. 안감은 본견 모로코 크레이프로 소매에는 자수가 놓여 있었다. 외투는 완전히 
나를 감쌌다. 이것은 내가 휴베르트에게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그에게 말
해 주고 있었다... 나는 이 모피외투를 입으면 금방 돋보였다. 이 모피는 나를 사랑하고 나
를 품위 있는 여자로 만즐어주는 남자와 같다. 이 외투는 나를 차지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나도 이 외투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서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하나의 물체이므로, 어떻게 치장하느냐에 따라서 그 본질적인 가치가 달라진다. 
여자가 실크 양말이나 장갑, 모자등을 그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쉽게 웃어넘길 일이 못 
된다. 자기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화장품이나 의상을 위한 비용이 터무니없이 높다. 프랑스의 경우ㅡ 그 정도
는 아니다. 그러나 여자는 '모양을 내고 있을수록' 존중된다. 여자가 일자리를 구할 필요가 
절실하면, 그만큼 넉넉해 보이는 외모가 필요하다. 즉 맵시는 그녀에거 하나의 무기이며, 
간판이며, 호신용 물건이며, 추천장이다.
  여자가 멋을 부리는 것도 일종의 굴종이다, 모치장을 하려면 돈이 든다. 비용이 너무 많
이 들기 때문에 때로는 백화점 감시인이, 사교계의 부인이나 여배우가 향수나 실크 양말, 
내의 등을 훔치는 현장을 덮쳐야 하는 일도 생긴다. 많은 여자들이 정조를 팔거나 혹은 "
원조' 를 받는 것은, 몸치장 을 하려면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지만 이런 고생은 
때로는 큰 기쁨의 원천이 된다. 이 영역에서는 또한 '숨겨진 보물의 발견' , 즉 흥정. 계략. 
배합. 발견 등이 있다. 슬기로운 여자라면 창조자도 될 수 있다. 바겐세일 기간은 - 특히 
재고판매 기간의 경우는 더욱 - 열광적인 날이다. 새 의상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축제이다.
  화장이나 머리손질은 예술작품의 대용이다. 예전보다는 오늘의 여자는 스포츠. 체조. 입
욕. 마사지. 식이요법에 의해 몸을 가꾸는 기쁨을 느끼고 있다. 체중, 몸의 곡선, 피부 색
깔을 이렇게 해서 결정한다. 근대 미학은 여성미에 활동적인 성질을 가미하는 것을 인정하
고 있다. 여자는 근육을 움직일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지방의 침입을 막으려 애를 쓴다. 
스포츠 방면에서 여자는 훌륭한 하나의 주체로 활약한다. 이것은 우연적인 육체에 관해서
는 여성해방의 일정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해방은 종속에로 쉽사리 되돌아오
기가 쉽다. 할리우드의 스타는 자랑스럽게 자연을 극복하지만, 프류듀서 앞에서는 다시 수
동적이 된다.
  여자가 의기양양하게 열중하는 몸단장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있다. 여자의 몸단장에는 
- 가사도 드렇지만 - 시간에 대한 도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즉, 여자의 육체라는 것
은 시간이 흐를수록 좀먹는 하나의 물체이기 때문이다. 가정주부의 먼지와의 싸움에 필적
하는 이 투쟁을 콜레트오드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제 이것은 청춘의 탄력 있는 육체가 아니다. 그녀의 팔이나 넓적다리의 근육은 약간 

늘어진 피부와 지방층 밑에 유난히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불안하여 다시 한번 일과를 뒤
집어엎었다. 반 시간의 체조로 하루가 시작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15분 동안 마사지를 
한다. 몸매를 날씬하게 유지하기 위해 의학서적과 잡지를 자주 뒤적거린다. 과일 주스를 
준비하고, 가끔 호르몬 약도 사용하고, 설거지를 할 땐 꼭 고무장갑을 꼈다.
  그녀의 두 가지 걱정은 결국 한 가지다. 열심히 몸을 젊게 하고, 열심히 집안을 닦다가, 
어느날인가 일종의 휴식기, 즉 임종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세계는 비로소 노쇠
와 소모를 잊은 듯이 정지된 채 있을 것이다... 지금 그녀는 스타일을 가꾸기 귀해 풀에서 
레슨을 받고 있다. 미용잡지는 끊임없이 새로운 처방으로 그녀에게 숨돌릴 사이도 없게 한
다. 전저 로저스는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나는 아침마다 백 번씩 솔질을 해요. 그러
는 데는 정확히 2분 30초가 걸려요. 그래서 내 머리카락은 명주실처럼 부드러워요.... "
  발꿈치를 예쁘게 하기 위해 날마다 발뒤꿈치를 땅에 대지 않고 발끝으로 서른 번씩 뛰
어오른다. 이 훈련은 1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루 중에 1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발가락을 향유에 담글 때도 있다. 손을 위해서는 레몬과자를, 빰에는 딸기를 짓이겨 바른
다. (잃는 노름 에서)

  얼굴 화장이나 옷 손질도 단조로운 되풀이가 되면 따분한 고역일 수밖에 없다. 모든 생
성에 따르게 마련인 쇠퇴를 두려워한 나머지, 일종의 불감증에 걸린 여자나 실의에 찬 여
자들은 삶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다. 그녀들은 가구나 잼을 보존하듯, 자기 자신을 현상 그
대로 보존하려고 애쓴다. 이렇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그녀들은 자기 자신의 생존의 적
이 되며, 남을 적대시 하게 된다. 맛좋은 식사는 몸매를 망가뜨린다. 포도주는 얼굴 빛을 
해친다. 너무 웃으면 얼굴에 주름이 간다. 태양은 피부를 상하게 한다. 휴식을 취하면 생기
가 없어진다. 일을 하면 피로해진다. 성교는 눈가에 검은 기미를 생기게 한다. 키스는 빰에 
염증을 일으킨다. 애무는 유방을 망가뜨린다. 포옹은 육체를 시들게 한다. 어머니가 되면 
얼굴이나 몸이 추해진다. 젊은 어머니의 발레복을 보고 아이가 눈이 휘둥그레지면 그녀는 
아이를 사납게 몰아세우는데 이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 엄마를 만지면 안돼. 네 
손이 끈적끈적해서 엄마가 더러워지니까. "
  마찬가지로 멋쟁이 여자도 남편이나 애인의 성급한 요구를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녀는 
마치 가구를 커버로 덮어주듯이 되도록이면 남자들의, 세계의, 시간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
어한다. 그러나 아무리 신경을 써도 흰머리나 눈가의 잔주름은 때가 되면 나타나게 마련이
다. 여자는 젊었을 때부터 이 운명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신중해
도 여자에게는 사고가 나게 마련이다. 포도주가 옷에 떨어지기도 하고 담뱃불에 옷을 태우
기도 한다. 이때 얼마 전까지도 사방에 미소를 뿌리면서 자랑스럽게 살롱을 걸어다니던 호
사와 환락의 여성은 사라져버린다. 그녀는 가정주부의 고지식하고 엄한 표정으로 변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로소 알아차린다. 여자의 화장은 잠시 주위를 비추다가 보람도 없이 
사라지는 화려한 불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재산이고, 자본이고, 투자이다. 화장은 대
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그것을 망치는 것은, 보상받을 수 없는 손해이다. 옷이 얼룩지고 
찢어지고 못쓰게 되거나 또는 퍼머를 망쳐놓는 것은, 불고기가 타버리거나 그릇이 깨지는 
것보다 더욱 큰 손실이다. 왜냐하면 멋쟁이 여자는, 사물속에 몰입할 뿐만 아니라, 사물 자

체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직접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재봉사나 양재사와의 거래에서 초조해 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을 보면, 얼마
나 진지하고 또 불안을 느끼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옷의 재봉이 잘 되면 그녀는 몽상 속
의 인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의상이 낡거나 옷을 망치면, 자기 자신이 못쓰게 된 것처럼 
생각한다.

  "내 기분과 태도와 얼굴 표정은 모두 의상에 달려 있었다... " 하고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쓰고 있다. "알몸으로 산책을 하든, 그렇지 않으면 자기 육체, 자기 취미, 성격에 꼭 맞는 
옷차림을 하든, 이 둘 중 어느 하나여야 한다. 이 조건이 제대로 맞지 않으면 어색해지고 
따라서 크게 낙심하게 된다. 기분이나 마음은 어떤가? 누더기를 연상할 정도다. 그래서 몹
시 속상하여 몸둘 바를 모른다. "

  여자들은 대게 너절한 옷차림으로 연희에 가느니, 차라리 단념하는 쪽을 택한다. 사람들
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지 않을 경우에도 그렇다. 하긴 개중에는 " 나는 단지 내 자신을 
위해 옷을 입어요" 하고 단언하는 여자도 있지만, 나르시시즘 속에도 남의 시선이 개입되
어 있는 것은 이미 보아온 바와 같다. 멋쟁이 여자가 보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고집스럽게 
자기 신조를 지킨다는 것은 정신병원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녀가 정상이라면, 반드
시 보아주는 사람을 원하게 된다.

  "나는 남의 호간을 사려고 한다. 나를 아름다운 여자라고 말해 주오. 리오바(톨스토이) 
가 나의 모습을 보아주고 내 말을 들어주기를 바란다... 아름답다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을
까. 나의 귀여운 페치아는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는가. 마치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하는 것
처럼 말이다. 리오보치카는 보기 흉한 얼굴에 익숙해 진 것 같다... 나는 머리를 퍼머하고 
싶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테지만, 한결 아름다워질 것이다. 나는 어째서 남이 보아주
기를 바라고 있을까? 리본이나 타이는 나를 즐겁게 해준다. 나는 새 가죽벨트를 갖고 싶
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다... " 하고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소피아 톨스토이는 쓰고 있다.

  남편은 이런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남자의 요구는 여기서도 이중적이다. 아내가 너무 
매혹적이면 그는 질투한다. 그러면서도 한편 모든 남편들은 어느 정도 칸돌 왕을 닮아 아
내가 자기를 돋보이게 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즉 아내가 멋있고 귀엽고ㅡ 적어도 '나쁘지 
않은 여자' 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런 소원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는 기분이 
상하여 위뷔영감처럼 아내에게 말할 것이다. "당신 오늘은 정말 보기 흉하구려. 우리가 손
님을 초대하기 때문인가? "
  앞에서도 말했지만, 결혼에서는 에로틱한 가치와 사회적인 가치가 잘 조화되기 어렵다. 
그런 모순이 여기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아내가 성적인 매력을 보이는 것은, 남편이 
보기에는 천박하다. 다른 여자가 요란한 몸차림을 하면 마음이 끌리는데, 자기 아내가 그
렇게 하면 잔소리를 한다. 이 잔소리 때문에 남자의 욕망은 완전히 죽어버린다. 아내가 수

수한 옷차림을 하면 흡족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냉담하다. 아내를 매력 없는 여
자로 생각하고 아내에게 불평을 한다. 그래서 남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좀처럼 아내를 바
라보지 않는다. 그는 "남들이 아내를 뭐라고 할까" 하고 남의 눈을 통하여 아내를 바라본
다. 이처럼 남편으로서의 견해를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빌려오기 때문에, 남편은 잘못된 
선입관을 갖는다. 남편이 다른 여자의 옷이나 태도는 칭찬하면서, 똑같은 것이라도 자기 
아내에 대해서는 나무라는 일처럼 아내를 화나게 하는 일은 없다.
  남편에게는 아내가 언제나 절대로 변치 않는 얼굴을 하고 있다. 아내의 새로운 옷차림이
나, 헤어스타일의 변화도 의식하지 못한다. 애처가인 남편이나 열애하고 있는 애인의 경우
에도 그녀들의 화장에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남자가 여자를 가식없이 열렬히 사랑하고 있
으면, 아무리 어울리는 옷차림을 해도 그것은 가장의 도구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리 초라
한 옷을 입고 까칠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남자는 여자가 더이상 사랑을 받지 못하면, 아무
리 남자의 마음에 드는 옷차림을 하더라도 사랑을 받을 가망은 없는 것이다.
  화장은 정복을 위한 도구는 될 수 있겠지만, 방어를 위한 무기는 되지 못한다. 화장기술
은 여러 가지 신기루를 만들어 내어, 공상적인 대상을 사람들의 눈앞에 제공한다. 날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육체적으로 서로 껴안고 있으면, 어떤 신기루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부부간의 감정은 육체적인 사랑과 마참가지로 현실의 땅 위에 서 있다. 여자가 몸을 가꾸
는 것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가 아니다. 도로시 파커는 한 중편소설에서, 휴가를얻어 
집에 돌아올 남편을 고대하던 젊은 아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몸단장을 하는 장면
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녀는 새 옷을 샀다. 검정색 옷이었다. 남편은 검정색을 좋아했다. 그것은 소박한 옷이
었다. 남편은 소박한 옷을 좋아했다. 값이 굉장히 비쌌지만 그녀는 값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때요. 맘에 들어요. 내 옷? "
  "그래, 맘에 들어.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언제나 당신이 근사해 보여. "
  그녀는 마치 자기가 나무로 만든 마네킹이라도 된 듯싶었다.
  "이 옷 말예요" 하고 그녀는 약간 경멸하는 듯이 분명한 어조로 한 마디 한 마디 야무지
게 말했다.
  "이번에 새로 샀어요. 전에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어요. 당신을 기쁘게 하려고 그때를 
위해 사두었던 거예요. "
  "미안, 미안, 그래? 이제 겨우 알았어. 이 옷은 전의 것과는 다르군. 아무튼 근사해. 당신
은 검정색 옷을 입으면 정말 보기 좋아. "
  "그래서... "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는 전혀 다른 이유로 검정 옷을 입고 싶어져요. "

  여자가 좋은 옷을 입는 것은, 다른 여자의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서라고 흔히 말하고 
있다. 사실 이런 질투는 좋은 옷차림을 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결코 그것만은 
목적이 아니다. 선망과 감탄의 시선을 얼마나 모을 수 있는가에 의해, 여자는 자기의 아름

다움. 우아함. 취미, 요컨데 그녀 자신의 절대적인 확인을 찾으려고 한다. 여자는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 옷을 입는다. 즉 자기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 자기를 나타낸다. 그리하여 그
녀는 괴로운 종속상태에 들어간다. 가정주부의 헌신은, 설사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유익하다. 그러나 멋쟁이 여자의 노력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무익한 것이
다. 그녀는 자기의 가치가 결정적으로 인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절대에의 자부가 그
녀의 추구를 참으로 벅차게 한다. 한 마디만 핀잔을 들어도 벌써 그녀가 쓰고 있는 모자는 
아름답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한 마디의 공치사로 기분이 흐뭇해지지만 한마디의 부정
으로 그녀는 낙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절대라는 것은, 현상이 무한히 계속된 후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녀의 결정적인 승리는 영원히 얻어질 것 같지 않다. 멋쟁이 여자가 
그처럼 손상받기 쉬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는 미인 중에도, 자기는 아름답지 못하고 우아하지도 못하며, 자기
가 모르고 있는 심판자의 절대적인 칭찬을 받지 못했다고 하여 비통하게 자인하는 사람도 
있다. 그녀들은 실현이 불가능한 '즉자' 를 목표로 삼고 있다. 우아의 법칙을 스스로 구현
하여 누가 어디서 보아도 나무랄 데가 없는 최고의 멋쟁이 여자는 극히 드물다. 이런 여성
은 자기가 법령을 만들어 성공과 실패를 판정하는 셈이다. 그녀들의 전성기가 지속되는 한 
그녀들은 자기를 모범적인 성공사례로 볼 수 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이 성공은 무엇
에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화장은 곧 외출이나 손님 초대와 관련된다. 원래는 이것이 화장의 목적이었다. 여자는 
새로 마련한 의상을 걸치고 살롱에서 살롱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 돌아다닌다. 자기가 가
정을 어떻게 꾸려가고 있는가를 다른 여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조대한다. 특히 의식적인 
경우에는 '방문' 에 남편을 동반한다. 그러나 대개는 남편이 일하는 동안에 아내는 '사교의 
임무' 를 수행한다. 이런 사교의 모임에 풍기는 갑갑한 권태에 대하여는 수없이 묘사해 왔
다. 그것은 '사교의 의무감' 에서 모이는 여자들은 서로 이렇다 할 화제를 갖고 있지 못하
기 때문이다. 변호사의 아내와 의사의 아내를 연결할 공통된 흥미는 하나도 없다. 뿐만아
니라, 같은 의사인 뒤풍 박사의 아내와 뒤랑 박사의 아내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세상 이야
기 속에 자기 아이의 장난이나 살림 고생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품위가 없다. 그래서 날
씨가 어떻다느니, 최근에 유행하는 소설에 대한 소문이나, 남편에게서 얻어들은 의견을 몇 
마디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서 '부인의 손님 접대' 의 풍습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그러나 지금도 프랑스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방문' 의 고역이 남아 있다. 미국인은 깨끗이 
대화를 중단하고 대신 트럼프 놀이를 하는데 이것도 이 게임을 즐기는 여자가 아니면 달
갑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교는, 이런 쓸데없는 인사치레보다는 좀더 매력적인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
다. 손님 초대는 단지 자기 집에 타인을 맞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집에 
마술을 걸어 마법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교술의 발휘는 축제인 동시에 포틀래치
이다. 그 집 여주인은 자기 의 모든 보물들, 즉 은그릇. 백포. 유리그릇 등을 전시한다. 집
을 꽃으로 장식한다. 시들기 쉽고 무익한 꽃은 지출과 시치인 파티의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화병속에서 피어나 이찍 시들게 되는 꽃이야 말로 환희의 불꽃, 향기, 몰약, 신주
이며 제물이다. 식탁에는 맛있는 음식과 값비싼 포도주가 놓여 있다. 다음은 손님의 식욕

을 채워주면서도 그들의 욕구를 미리 알아차려서, 그들이 만족할 수 있는 좋은 선물을 마
련하는 것이 문제이다. 식사는 하나의 신비스러운 의식이 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을 묘사한 대목에서 이런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때 문이 열리면 에이프런과 흰  모자를 쓴 써비스걸들이 우아한 자태로 오가기 시작
한다. 그녀들은 욕망의 시녀라기보다는 신비한 수녀들이다. 메이페어(런던의 상류층 주택
지) 의 주부들이 한 시간 반에서 두시간에 걸쳐서 올리는 종교의식이다. 손을 한 번 흔들
면 오가던 발길이 멈춰진다. 그때 눈을 녹이는 환각이 나타난다. 먼저 무료러 제공하는 음
식물이 나온다. 다음에 식탁은 컵. 은그릇. 바구니. 빨간 과일이 담긴 그릇으로 꽉차게 된
다. 갈색 크림의 베일이 넙치를 싼다. 냄비에는 저며진 닭고기가 국물에 잠겨 있고, 불길은 
아름다운 빛깔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이윽고 포도주와 커피가 나오자, 사람들이 꿈꾸
는 즐거운 환상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 눈은 조용히 명상에 잠긴다. 그늘 눈에는 인생이 
마치 음악처럼 신비롭게 떠오른다...

  이런 신비를 주재하는 여성은, 자기야말로 완벽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창조자이며, 행복
과 유쾌함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장본인이란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손님을 서로 결
합시키는 것은 그녀의 주선에 의해서이며, 어떤 사건이 생기는 것도 그녀에 의해서이다. 
그녀는 기쁨과 조화를 마음대로 조성하는 원천이다. 이것이 바로 댈러웨이 부인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피터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하자. "좋아요. 좋구말구요. 그런데 당신이 
이 야희를 여는 의도는 무엇이요? " 그녀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단지 이러하다. (이것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할 수 없다.) "그 야회는 희사예요... " 누구는 남 케닝턴에 
살고 누구는 베이스웨터에, 또 어떤 사람은 메이페어에 살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그
녀는 줄곧 이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정말 안되었다' 
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한데 모을 수 없을까? " 그래서 그들은 한데 모은
다. 이것은 희사이다. 그것은 결합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선물이다. 
그녀가 남에게 줄 것은 그밖에 아무것도 없다...
  가령 누가 그녀를 대신하더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녀는 잘했
다고 자부하고 있다. 어쨌든 자기가 그것을 실현한 것이니까.

  타인에 대한 이런 봉사를 순전히 너그러운 마음에서 하는 것이라면, 연회는 축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의 관례적인 행사가 되면, 연회는 향연이지만 곧 하나의 제도
로 변모되고, 선물은 의무로, 축연은 부자연스러운 의식이 되고 만다. '요릿집에서의 음식' 
을 즐길 때에는, 초대받은 여자는 이것을 갚아야 하는 빚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대접
이 지나쳤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X 씨는 우리를 놀라게 하려는 속셈이었어요" 하고 그녀
는 얄미운 듯이 남편에게 말한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난 세계대전 중에 포르투갈의 어느 작은 읍에서

는 다과회가 연회중에 가장 값진 것이 되었다. 손님이 모일 적마다, 여주인은 지난번보다 
더 많은 여러 가지 과자를 손님에게 내 놓아야만 했다. 이 부담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어느날, 여자들은 앞으로 다과를 내놓지 않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게 되었다. 바로 이
런 경우, 파티는 본래의 정답고 푸짐한 성격을 잃어버리고, 일종의 고역이 된다. 파티의 명
랑한 즐거움을 표시하는 음식까지도 걱정거리가 된다. 유리그릇이나 식탁보에도 주의를 기
울여야 하고, 샴페인이나 비스킷의 양에도 일일이신경을 써야 한다. 찻잔이 하나 깨지거나 
소파의 비단천이 조금만 타도 손해이다. 이튿날에는 청소하고 제대로 정돈해야 한다. 그리
하여 가욋일이 늘어나는 것을 여자는 부담스러워한다.
  그녀는 주부의 운명에 수반되는 여러가지 의존 관계를 실감한다. 풀무, 구운 고기, 푸줏
간, 요리사, 임시 고용인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언짢은 구석이 보이면 곧 
미간을 찌푸리는 남편의 기분에 좌우된다. 그녀는 가구나 포도주를 평가한다. 야회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손님들에게 달려 있다. 다부진 여성이나 자신감이 넘치는 여자가 아
니면, 평온한 마음으로 이 시련을 이겨내기 어려울 것이다. 개가를 올릴 수 있으면 그녀는 
그에 만족한다. 그러나 많은 주부들이 이 점에서는 버지니아 올프가 묘사한 댈러웨이 부인
과 비슷하다.
  "이런 승리...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영광과 흥분을 애호하면서도, 그녀는 동시에 그 
공허와 겉치레의 허식을 느끼고 있었다. " 여자는 이 승리를 별로 중요시하지 않을 때에만 
참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허영심에 시달릴 뿐이
다. 그리고 '사교' 에서 전적으로 자기 인생의 용도를 발견한 만큼 부유한 여자는 매우 드
물다. 사교생활에 힘쓰는 여자는 흔히 그것에 의해 만족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한다.
  진정한 '살롱' 은 문학적 또는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여자는 이것을 수단으로 삼아 
남자들을 좌우하는 힘을 얻고, 자기도 개성적인 역할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들은 결혼한 
여자의 위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결혼한 여자는 일반적으로 일시적인 성취감이나 쾌락으
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한 일시적인 성취감이나 쾌락은 결혼한 여자에게 좀처럼 부
여되지 않고 설사 부여되어도 가벼운 기분전환은 되지만 그만큼 피로를 느끼게 된다. 사교
생활은 '근사한 몸단장' 을 하고,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여자들 사이
의 진정한 유대를 가지도록 하지는 못한다. 사교는 여자를 고독에서 구하지 못한다.

  미슐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생각하면 괴로운 일이지만, 여자는 둘이 함께가 아니면 살
아가지 못하는 상대적인 존재로, 흔히 남자보다 고독하다. 남자는 도처에 사회집단을 발견
하여 새로운 유대관계를 맺는다. 여자는 가족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가족 때문
에 시달리고 있다. 온갖 무거운 짐들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다. "사실상 여자는 격리되어 
갇혀 있으며, 어떤 목적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교유' 의 기쁨을 모르고 산다. 그녀가 하는 
일은 지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성장과정에서 독립에 대한 애착이나 습관을 몸에 
익히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날마다 고독 속에 살아 간다.
  이것은 소피아 톨스토이가 한탄하고 있는 불행의 하나였다. 결혼은 그녀를 친정이나 처
녀시절의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콜레트도 <나의 수업시절> 에서, 젊은 아내가 시

골에서 파리로 이사와서 생활터전을 잃은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와 주고받은 
긴 편지에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편지로는 얼굴을 마주 대할 때와는 다르며, 그녀는 여
러 가지 실망을 시도(어머니) 에게 알리지 않는다. 젊은 여자와 가족 사이에는 진정한 친
밀성이 상실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나 자매도 참된 친구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주
택난 때문에 많은 젊은 부부가 남편 또는 아내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할 수 없이 동거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정한 친교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여자끼리 우정을 맺어 그것을 오래 유지할 수 있게 되면, 이것은 여자에게 귀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자의 우정은 남자들이 알고 있는 여러가지 대인관계와는 매우 다른 양상
을 갖게 된다. 남자들은 사상을 통하여 자기들 사이에 각자의 기획을 개인으로서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여자들은 여자의 운명이라는 공통성 속에 폐쇄되어 있으므로 그녀들의 폐쇄
된 생활에서 일종의 '피차일반' 이라는 심정에 의해 유대관계를 맺게 된다. 그녀들은 의견
을 제시하거나 의논하지 않는다. 여자가 주고받는 것은, 마음속의 비밀이나 살림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들은 일종의 반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동맹을 한다. 그 반세계의 여러가지 
가치는 남자의 세계의 그것을 보다 우월한다.
  그녀들이 이렇게 단결하면, 자기들의 사슬을 떨쳐버릴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된다. 여
자는 서로 자기 남자에 대한 불감증을 고백하고, 남자의 강한 정욕이나 서투른 솜씨를 낸
소하고 성의 세계에서의 남자의 지배를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나 일반 남자들이 도
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여자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우월감을 야유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여자들은 자기의 인생경험을 이야기한다. 임신, 출산, 아이의 질병, 자기 자신의 병, 
살림걱정 등이 인간의 중요한 사건이 된다. 여자가 하는 일은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요리나 살림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전하면서 그녀들은 구전에 근거를 둔 은밀한 기술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여긴다.
  여자들은 때로는 도덕적인 문제를 서로 검토하기도 한다. 여성잡지의 '소식란' 은 이런 
의견교환의 좋은 전형이다.
  남자들만을 위한 '우정 통신' 같은 난의 설치는 상상할 수 없다. 남자는 남자끼리 자기들
의 세계인 사회에서 만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여자는 여자들만의 영역을 먼저 정하여 이
것을 측정하고 탐구해야만 한다. 그녀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몸단장이나 요리나 
편물 등의 방법에 대해서다. 이런 것들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다. 여자들의 수다
나 과시욕 속에 때로는 여자의 참된 고뇌가 들여다 보인다. 여자는 남자가 만든 법전이 자
기들의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여자가 그것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남자가 예상하
고 있다는 것도 여자들은 알고 있다. 즉, 남자는 겉으로는 금하고 있으면서도 낙태, 간통, 
과실, 배반, 거짓말을 여자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여성의 독특한 도덕의 법전' 을 정하려고 한다. 여자가 자기 친구들의 행위를 
낱낱이 비판하고 싶어하는 것은 꼭 악의에서만이 아니다. 여자는 다른 여자의 행위를 심판
하고 자기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남자들보다 훨씬 많은 도덕적인 착상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여자들의 관계에 가치가 주어지는 것은, 거기에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
는 언제나 남자 앞에서 자기를 가장한다. 그녀는 비존질적인 타자인 체하여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표정, 화장, 신중한 말투로 남자 앞에서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거짓말

을 하고 있다. 이런 연극을 하기 위해 여자는 언제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남편이나 애
인의 곁에서 여자는 누구나 어느 정도 '나는 나 자신이 아니다' 하고 생각하고 있다. 남자
의 세계는 준엄하다. 그래서 선이 분명하고, 목소리가 크게 울리고, 빛은 너무 강렬하고, 
감촉은 거칠다. 여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으면, 마치 무대 뒤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
자는 무기를 갈지만 싸우지 않는다. 몸단장을 궁리하고, 얼굴을 새로 단장할 생각을 하고, 
여러 가지 꾀를 마련한다. 무대에 나사기 전에 슬리퍼와 실내옷을 걸치고 분장실을 서성거
리고 있다. 여자는 이런 아늑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콜레트는 여자친구인 마르코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때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짤막한 속내 이야기, 집안에 처박혀 있을 때의 놀이, 여자들의 일터에 있을 때와 같은, 
또는 병중 회복기의 여가와 같은 시간...

  콜레르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에게 조언자 노릇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마르코는 몹시 더운 오후에 발코니의 차일 밑에서 내의를 꿰메고 있었다. 솜씨가 서툴지
만 정성들여 바늘을 놀리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충고를 해줄 수 있는 데 대해 기쁨
을 느끼고 있었다...
  "속치마에는 푸른 리본을 달아서는 안돼요. 속옷은 장미빛이 더 예쁘고, 살색에도 가깝
지요. "
  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파우더나 루주의 빛깔, 눈꺼풀을 아름답게 그리는 딱딱한 선에 
대해 충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정말이예요? " 하고 그녀도 말했다. 나는 연하이
지만 권위를 앓지 않았다. 나는 빗을 집어 그녀의 앞머리에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녀의 눈초리를 불꽃처럼 환히 드러나게 하고, 관자놀이 가까이 광대뼈 위의 엷은 
루주를 살짝 발라 솜씨를 과시했다.

  조금 앞에서는 마르코가, 정복하고 잎은 어떤 청년을 만나기 위해 초조하게 몸치장을 하
는 장면이 있다.
  ...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눈을 씻으려고 앴다. 나는 그것을 말렸다.
  "내게 맡겨요. "
  나는 양손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윗 눈꺼풀을 이마 위에 치켜올리고 속눈썹의 마스카
라가 눈물에 망가지지 않도록, 금방이라도 흩어내릴 듯한 두 눈의 눈물을 잦아들게 했다.
  "잠깐 더 기다려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
  나는 그녀의 화장을 완전히 고쳐주었다. 그녀의 입술이 조금 떨고 있었다. 그녀는 잠자
코 내가 하는 데로 맡겼다. 내가 마치 가축이라도 손질하는 것처럼 느꼈던지, 그녀는 안도
의 숨을 내쉬기도 했다. 나는 끝으로 그녀의 파우더 퍼프에 장미빛이 더 많은 파우더를 채
워두었다.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 무슨 일이 있어도 울어서는 안돼요. 이를 악물고서라도 눈물을 꾹 참아야 해요. "
  ... 그녀는 앞머리와 이마 사이에 손을 가져갔다.

  "지난 토요일에 그 재고판매 때 본 까만 옷을 사두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고급 양말을 
빌려주지 않겠어요? 이제 사러갈 시간이 없어요. "
  "좋아요, 빌려드리지요. "
  "고마워요, 옷에 꽃을 꽂으면 밝아보이지 않을까요? 아니, 코르셋에는 꽃을 꽂을 수 없
지요. 이리스의 향수는 유행이 지났는데 정말이예요? 당신에게는 물어볼 게 아주 많을 것 
같아요... "

  그리고 콜레트는 <투투니에> 라는 다른 책에도 여자의 생활의 이런 이면을 많이 묘사
하고 있다. 사랑 때문에 고민하고 불안해 하는 세 자매가 밤마다 어렸을 때부터 정든 낡은 
소파에 모여든다. 그곳에서 그녀들은 그날에 있었던 걱정거리를 상기하고 내일의 투쟁에 
대하여 충분한 휴식, 포근한  잠, 따뜻한 목욕, 감상적인 눈물, 그런 한때의 기쁨을 맞보면
서 긴장을 푼다. 그녀들은 서로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각자 다른 사람을 
위해 일종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 세 자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진실
이다.
  이 일시적인 따뜻한 친교가 남자와의 허식적인 교제보다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도 
있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자는 처녀시절처럼 상대방 여자에게서 이중의 특권을 발견한
다. 그녀는 상대방의 조심스러운 눈에 비친 자기의 멋있는 의상과 잘 정돈된 집 안을 자랑
스럽게 여긴다. 결혼한 후에도 흉금을 털어놓을 구 있는 여자친구는 누구보다도 그럴 듯한 
구경꾼이다. 그리고 결혼한 후라도 그런 여자친구는 욕망의 대상이며, 바람직한 상대처럼 
보인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젊은 처녀는 누구나 조금은 동성애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남편의 포옹이 서툴 경우에 여자의 이런 성향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 경우에 여자는 동성
과의 교제에서 관능적인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정상적인 남성에게서는 이런 일은 찾아볼 
수 없다. 두 여자의 감각적인 결합은 상승하여 흥분된 감상이 되기도 하고 혹은 막연한 애
무나 정확한 애무로 나타난다. 그녀들의 포옹은 또한 심심풀이를 위한 유희에 불과한 경우
도 있다. 터키 후궁의 여자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녀들은 항상 시간을 보낼 걱정을 라고 
있다. 그러나 이 포옹이 일차적으로 중요성을 갖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여자와 여자의 친밀한 관계가 진정한 우정으로 지향되는 경우는 드물다. 여자
는 본능적으로 남자보다 강한 연대성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이런 연대성 속에서
도 각자 다른 여자에 대해 자기를 초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저마다 남성의 세계
에 눈길을 돌리고, 그 세계의 가치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 여자와 여자의 관계는 
개성에 의거하여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여자라는 일반성 속에서 서로의 관계가 직접 이
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자의 관계에는 곧 적의라는 요소가 개입된다.
  <전쟁과 평화> 의 나타샤는 자기 가족의 여자들에게 호간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
들에게 자기 아기의 침대를 자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타샤도 그녀들에게 질
투를 느끼고 있었다. 피에르의 눈에 그녀들이 저마다 '여자' 로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여자끼리의 화해는 서로 상대를 동일시 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같은 이
유로 여자는 그 친구를 배척한다. 여주인은 자기 하녀와 훨씬 더 친밀한 사이가 된다. 이

런 현상은 남색가라면 모를까 남자와 그 하인이나 운전수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주
부와 하녀는 서로 비밀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공범도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들 사이
에는 냉담한 경쟁심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여주인은 일을 하지 않지만, 그 일의 책임과 공
적은 자기가 갖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남과  바꿀 수 없는 존재, 꼭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내가 없으면 곧 집안이 엉망이 돼" 하고 그녀는 히스테릭한 심정으로 
하녀의 잘못을 발견하려고 한다. 만일 하녀가 일을 너무 잘하면, 그녀는 자기만의 제일이
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돌보는 보모나 가정교사, 유모, 또는 
일을 도와주는 친척이나 친구들에게도 괜히 짜증을 부린다. 그리고 그녀들이 '나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 을 무시한다고 구실을 붙인다. 사실 그녀는 의지도 특별한 
생각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녀를 약오르게 하는 것은 타인이 자기의 직분을 자기처
럼 잘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때때로 가정생활을 어둡게 하는 가족간의 또는 피고용인
과의 모든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다.
  여자는 그 개성적인 재능을 인정받을 수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점점 극성스럽게 
여와노릇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여자가 다른 여자를 적대시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교태와 연애에서 두드러진다. 젊은 처녀의 이런 경쟁심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지만 이것
이 한평생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요조숙녀나 사교계 여성의 이상은 
자기가 누구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이런 여자는 자기 이마에 영광이 빛나지 않
으면 몹시 괴로워한다. 다른 여자의 이마에서 실오라기 같은 영광의 그림자만 보여도 괴로
워한다. 다른 여자가 표를 모으면 그것은 모두 자기에게서 빼앗아간 표이다. 그런데 독자
적인 것이 아닌 절대란 대체 무엇일까? 진실하게 사랑하고 있는 여자라면,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찬미를 받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자기 친구들이 얻는 표면적인 성공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도 사랑 자체에 위험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반
을 당해 애인을 빼앗기는 이야기는 소설에서만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여자가 친하면 친할수록, 두 사람의 공존은 위험하다. 속내 이야기를 듣는 여자는 부지불
식간에 사랑하고 있는 여자의 눈을 통하여 보고, 그 마음, 그 육체로 보게 된다. 그리하여 
친구가 반한 상대방 남자에게 마음이 쏠려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경우에 친구로서의 
신의가 있기 때문에 감정에 지고 싶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자기는 그림자와 같
은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것을 의식하고 초조해 한다. 그러다가 끝내는 유혹에 넘어가 몸
을 내맡기게 된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은 조심스럽게 사랑을 하는 동시에, '친구'를 피한
다. 이 상반성 (사랑과 미움의 공존) 때문에, 여자는 좀처럼 우정에 마음을 놓지 못한다. 
남성의 그림자가 그녀들 위에 언제나 무겁게 덮치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에 대해 말
하지 않을 때에도 남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생존 페르스의 시를 적용할 수 있다.
 
  태양은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여전히 우리들 사이에 엄연히 존자하나니.

  여자들은 힘을 합해 남자에게 복수하고, 모욕하고, 저주하고, 남자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들은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여자가 규방 속에 가만히 처박혀 움직이지 

않는 이상, 우연성과 따분함과 권태 속에 잠겨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유명계는 모태의 아
늑함을 얼마간 간직하고 있지만 역시 유명계이다. 곧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가 
없다면 여자는 잠자코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녀가 곧 들어가게 될 화려한 객실에 대
한 상상 없이는 축축한 욕실에서의 유유자적한 목욕은 없다. 여자와 여자는 감옥의 친구이
다. 서로 힘을 합쳐서 이 감옥생활을 조금이라도 견디기 쉽게 하고 탈출할 준비도 함께 한
다. 그러나 해방자는 남성의 세셰에서 올 것이다.
  이 남성의 세계는 대다수의 여자에게 결혼한 후에도 그 화려한 빛을 잃지 않고 있다. 광
휘를 잃은 것은 남편일 뿐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자의 순수한 본질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다. 그래도 여전히 남자는 우주의 진리요. 지상의 권위, 경이, 모험, 주인, 여자를 눈여겨 
보는 시선, 먹이, 쾌락 그리고 구원이다. 남자는 역시 초월성의 화신이며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이다. 그래서 아무리 정숙한 나내라도 이런 '남자' 를 완전히 담념하고 속된 한 인간과 
침울하게 마주 바라보면서 일생을 보내는 것은 용납하기 여려운 일이다. 여자는 어린시절
의 습관에 따라 지도자를 갖고 싶어한다. 남편이 이 역할에 실패하면, 다른 남자에게 의지
하게 된다. 때로는 아버지, 형제, 숙부, 친척 중의 어떤 남자, 소꿉동무가 옛날 그대로의 
위신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여자는 이런 남성에게 의지하려고 한다.
  직업상, 여자의 상담역이나 지도자가 되기에 합당한 사람이 있다. 신부와 의사가 이들이
다. 전자와는 무료로 상담할 수 있다는 큰 이점이 있다. 그는 고해실에서 여신도의 말을 
순순히 들어줘야 한다. 신부들은 '성구실의 빈대' 나 '성수반의 개구리' 에게서는 될 수 있
는 대로 도망치려고 한다. 그러나 교구의 신도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자기들의 임무
이며 그런 여신도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 교회는 그런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므로 그녀는 지도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마음의 지도자' 는 그 
여신도에게 자기의 정치적인 견해를 주입하여 투표를 좌우한다.
  때로는 신부가 자기들의 부부생활까지 간섭을 한다고 화를 내는 남편도 적지 않다. 신부
는 규방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규제하려고 한다. 아이들의 교육에도 개입한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행동 전체에 대한 충고도 한다. 남자에게서 신을 발견했던 여자는,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인 한 남성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는다. 한편 의사는 상담에 사례를 요구하기 때문
에 이렇지는 않다. 그리고 의사는 무례한 환자에게는 불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보다 
정확하고 집요하게 추구한다. 색광인 여자들이 찾아가는 남자의 4분의 3은 의사이다. 한 
남자 앞에 알몸이 되는 것은 많은 여자들에게 노출증적인 쾌락을 제공한다.

  "나는 좋아하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을 때에만 만족을 느낀다는 여자를 몇 사람 알고 
있다" 고 슈테켈은 말했다. 특히 노처녀 중에는 몸에 별로 이상이 없는데도 잘 보아달라고 
하면서 의사를 찾아오는 여자환자가 많다. 그리고 암이나 유독감염 (유산에 의한) 공포에 
떨며, 그것을 그실로 진찰을 받으러 온다.

  그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예를 들고 있다.

  노처녀인 B. V. 는 43세, 부유한 여자이다. 달마다 한 번 월경을 마친 후에 반드시 검진

을 받으러 온다. 어딘지 모르게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진찰해 달라고 한다. 그녀는 달마다 
의사를 바꾸고 빈번히 같은 연극을 한다. 의사는 그녀에게 옷을 벗고 테이블이나 소파 위
에 누우라고 말한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면서 거절한다. 의사가 여러 모로 설득하면 겨우 
옷을 벋는다. 나는 처녀이므로 점잖게 다뤄 달라고 의사에게 말한다. 의사는 그녀에게 항
문을 살펴보는 것뿐이라고 말하여 암심시킨다. 검진이 시작되면 대개 성적 쾌감을 느꼈다. 
항문을 살펴보는 중에 그것이 반복되어 강렬해진다. 그녀는 언제나 가명으로 나타나 진칠
이 끝나면 곧 비용을 지불하고 병원을 떠난다... 그녀는 의사에게 강간을 당하고 싶어서 장
난삼아 그렇게 했다고 고백한다.

  L. M. 부인은 38세의 기혼녀이다. 남편과는 완전히 불감증이라고 내게 말했다. 그녀는 
정신분석을 받으러 온 것이다. 3회 받고 나서 애인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 애인도 
그녀에게 오르가슴에 도달하게 하지 못했다.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의 진찰을 받을 때 비로
소 성적 쾌감을 느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 두세 번 진찰을 받고 나
서 다른 의사에게 상담하러 가고 싶었다. 그녀는 가끔 치료를 받았다. 그것은 가장 행복한 
한때였다. 끝으로 어떤 산부인과 의사가 자궁의 위치를 교정한다는 구실로 오랫동안 마사
지를 했다. 마사지를 할 적마다 몇 차례의 성적 쾌감을 느꼈다. 그녀는 의사가 자기 몸에 
손을 대었을 때 처음으로 성적 쾌감을 느꼈고, 그 이후부터 이런 검진을 받는 것을 좋아하
게 되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여자는 자신의 몸을 본 남자는 자기 육체의 매력이나 마음의 아름다움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고 상상하기 쉽다. 병적인 경우에는 상대방 신부나 의사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착
각까지 하는 것이다. 그녀가 정상인 경우에도 상대방 남자와 자기 사이에 미묘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복종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거기
서 자기 생활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안정감 같은 것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의 생활을 도덕적인 권위로 지탱하는 데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도 있다. 
그녀는 좀더 로맨틱한 흥분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이 남편을 속이거나 헤어지고 싶
지 않다면, 그녀들은 젊은 처녀가 남성들을 두려워하는 것과 동일한 수단에 호소하기도 한
다. 즉 그녀들은 공상적인 정열에 도취하는 것이다. 슈테켈은 그와 같은 사례를 많이 인용
하고 있다.

  그녀는 기혼 여성으로 정숙한 상류층에 속해 있는데 신경쇠약 증상이 있었다. 어느날 
밤, 그녀는 오페라 극장에서 자기가 테너 가수에게 반한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그의 
노래를 듣고 흥분에 싸여 있었다. 그래서 열렬한 펜이 되어, 그의 노래를 들으러 가고, 사
진을 사고, 그 남자를 꿈꾸고, '숭배하는 미지의 여성으로부터' 라는 헌시와 함께 꽃다발을 
보냈다. 그녀는 드디어 러브레터를 쓰기로 결심했다. (서명은 역시 미지의 여성이라고 앴
다. ) 그러나 실제로는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열적으로 그를 짝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론 정숙한 아내로 있는 것이 행복했다.


  어떤 부인은 빈의 유명한 배우인 카인츠를 ㅕㄹ렬히 숭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집에 
이 대예술가의 수많은 초상화를 수집하여 카인츠실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모퉁이에
는 카인츠 문고도 있었다. 수집할 수 있는 모든 것, 이 사람에 대해 쓴 책, 팜플릿, 신문 
등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위에는 예술가의 서명이 들어 있는 사진
을 붙여놓았다. 그 우상이 죽었을 때 그녀는 1년 동안 상복을 입고 카인츠에 관한 강연을 
들으러 돌아다니기 위해 긴 여행을 했다. 카인츠 숭배가 이 여성의 색정과 관능을 면역시
켰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루돌프 발렌티노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눈눌을 흘리게 했는지 기억하고 
있다. 기혼 부인도 젊은 처녀도 영화의 영웅을 숭배한다. 그녀들이 수음을 할 때 머릿속에 
떠올리거나 부부간에 포옹할 때 떠올리는 환상은 이 영웅의 모습인 경우가 적지 않다. 때
때로 또 이런 영웅들은 조부. 형제. 선생의 옛 모습이 되어, 소아기의 어떤 기억을 부활시
키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의 주위에는 살과 뼈를 지닌 남자들도 있다. 그녀가 성적으로 만족하고 있
건, 불감증이건, 남편에게 실망하고 있건 완전한. 절대적인. 배타적인 사랑의,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그녀는 이런 현실의 남자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날마다 만나는 남편의 시선은 이제 그녀의 모습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
기엔 부족하다. 아직 신비에 찬 눈이 그녀 자신을 신비스러운 존재로 발견해 주기를 바라
고 있다. 자기의 고백을 친절히 들어주고, 퇴색한 사진을 신선하게 소생시키고, 입가에 보
조개와 깜박거리는 속눈썹을 보존하기 위해, 그녀에게는 자신이 최고라는 의식이 필요하
다. 사람들이 자신을 더 이상 탐내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아름답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못한 것이다. 결혼생활은 그럭저럭 화합을 이루고는 있지
만, 다른 남자들의 곁에서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싶어한다.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바치고 
있는 숭배에, 남자들도 가담하도록 유인한다. 그녀는 유혹하고 즐겁게 해주며 금단의 사랑
을 꿈꾸고 흐뭇해 한다. 즉 내가 원하기만 하면... 그녀는 한 사람과 깊은 정을 맺는 것보
다는 많은 숭배자를 매혹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녀는 젊은 처녀들보다 더욱 열렬하고 세련
되어 있으므로, 그녀의 교태는 남자들에게 그 가치와 위력을 분명히 느끼게 한다. 가정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도 한 남자를 소유하는 데 성공한 만큼, 더욱 대담해질 수 있다. 그리
하여 그녀는 큰 희망도 위험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여자는 한동안 정숙한 기간을 유지한 다음에 반드시 이런 유희적인 교태에만 머물러 있
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남편에 대한 원한 때문에 남편에 대한 일종의 복수라고 아들러는 주
장하고 있다. 이것은 좀 지나친 말 같다. 그러나 실제로 아내는 애인의 유혹에 넘어가기보
다는, 남편에게 도전하고 싶다는 욕구에 이끌리는 경우가 많다. "그이는 이 세상에 하나밖
에 없는 남자가 아니야 내 마음에 드는 남자는 얼마든지 있어 나는 남편의 노예가 아니야. 
그이는 자신만만해하지만, 한 번 속아보라지. " 남편을 우롱하는 것이 여자에게 중요한 의
미를 갖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사춘기의 처녀가 어머니에 대한 반항심이나 부모에 대한 
불만 때문에 자신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애인을 갖는 것처럼, 원한에 의해 남편
에게 매여 있는 아내는 애인에게서 고백의 상대를 구하고, 희생자가 된 자기 모습을 보아

줄 사람과 남편의 가치를 깍아내리는 일에 공모자를 구한다. 그녀는 남편을 사람과 남편이 
가치를 깍아내리는 일에 공모자를 구한다. 그녀는 남편을 경멸할 자료를 제공한다는 구실
로 애인에게 끊임없이 남편의 이야기를 한다. 만일 애인이 그런 상대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녀는 기분이 상하여 애인에게서 등을 돌리고 남편의 곁으로 돌아가거나, 
위안을 줄 수 있는 다른 상대를 찾아나선다. 그러나 가장 많은 것은, 원한보다는 오히려 
있는 다른 상대를 찾아나선다. 그러나 가장 많은 것은, 원한보다는 오히려 실망 때문에 애
인의 품에 안기는 경우이다. 그런 여자는 결혼에서 사랑을 찾지 못한다. 젊었을 때 기대했
던 감각적인 쾌락이나 희열을 느끼지 못한 채 체념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
이다. 결혼은 여자에게서 모든 애로틱한 만족을 빼앗아가고, 그 감정의 자유와 개성을 부
정하므로, 필연적이고 아이러니컬한 논리에 의해 여자를 간통으로 이끌어간다. 몽테뉴는 
말한다.

  우리는 여자를 어렸을 때부터 사랑에 익숙하도록 가르친다. 그 모습. 화장. 지혜. 말씨 
등 모든 교육은 주로 여기에 치중한다. 가정교사는 여자아이에게 주로 사랑의 얼굴을 마음
에 새겨준다.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여자가 그것을 오히려 역겹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는 이보다 조금 앞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자에게 이처럼 간절하고 자연스러운 욕망을 억제하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엘겔스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일부일처제도와 함께 두 가지 사회적인 인간형이 항구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아내의 
정부와 간부의 남편이 그것이다... 일부일처제도와 창녀제도가 존재하는 한편 간통이 불가
피한, 금지되어 있는, 엄중히 처벌되는, 그러면서도 이것을 근절하기는 불가능한 하나의 사
회제도가 있다.

  부부의 포옹이 여자의 성감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호기심만 자극하게 되면 콜레트의 <순
진한 탕녀>에서 처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침대 속에서 성교육을 완성하려고 한다. 만일 
남편이 그녀의 성감을 잘 일깨우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아내는 남편에게 개인적인 애정
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그녀는 다른 남자와 함께 남편이 가르쳐준 쾌락을 맛보고 싶어한
다.
  모럴리스트들은 아내가 애인에게 정을 쏟는 것에 분개한다. 부르주아 문학이 남편의 모
습을 훌륭하게 그리려고 노력한 것을 앞에서 지적한 바가 있다. 그러나 사회의 눈에 즉 다
른 남자들의 눈에 연적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보이게 함으로써 남편을 옹호하려고 하
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편이 그 아내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혐오스럽게 보이는 두 가지 특색이 있다. 먼저 아내에게 서을 눈뜨게 
하는 대단히 거북한 역할을 하는 것이 남편이라는 것이다. 폭행을 당하고 싶은 욕망과 얌
전히 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동시에 갖고 있는 처녀의 모순된 요구는 대개 남편을 실
패로 끝나게 한다. 그 결과 여자는 영구히 남편의 품안에서 불감증이 되고 만다.
  그러나 애인을 상대할 때에는 양상이 달라진다. 그녀는 처녀를 빼앗길때의 고통이나 수
치스러운 굴욕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갑자기 당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인 충격도 없다. 대
강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 첫날밤 때보다 더욱 솔직하고 그다지 민
감하지 않고 별로 무지하지도 않으며 이상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욕망, 감정과 흥분을 혼돈
하지 않는다. 애인을 택했다는 것은 그 사나이를 분명히 원했기 때문이다. 이 명석함이야
말로 선택의 자유의 표시이다. 그것이 남편에게 부담이 되는 또 다른 결함이다.
  보통, 남편은 주어진 생태이지 선택된 상대는 아니다. 체념하고 받아들였거나 가족에 의
해 맺어진 것이다. 설사 사랑으로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남편은 이미 주권자가 되어버렸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의무의 형태를 취하고 남편은 흔히 폭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물론 애
인의 선택도 주위의 상황에 따라 제한된다. 그러나 이런 관계에는 비교적 자유가 많이 주
어진다. 결혼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지만, 애인을 갖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다. 여자는 남자
에게 마음이 이끌려 따르게 된다. 그녀는 자기의 사랑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자기의 욕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애인은 일상생활의 관습적인 접촉으로 유혹
되지 않는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그는 떨어져 있는 타인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애인과의 
접촉에서 자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부와 접촉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녀는 
자기가 딴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애인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여자가 무엇보
다도 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타인에 의해 점유디어 경이를 느끼고 자기 자신의 속
박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녀들은 애인과 헤어지면 절망적인 허무감을 느낀다. 자네는 
이런 우울증상의 많은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이 우울증은 여자가 애인에게서 구하여 찾아
낸 것이 공허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39세의 여자로 5년 동안 어떤 문학가의 일을 도와준 후에 버림을 받은 것을 비
관하여 자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대단히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굉장히 폭군적이
었으므로 나는 오직 그의 일을 도와줄 수 있을 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어요."

  다른 여성은 31세로, 사랑하던 애인과 해어져 병에 걸렸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
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그의 책상에 놓인 잉크병이 되고 싶어요" 하고 쓰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을 덧붙인다. "나는 혼자만 있으면 곧 권태로워져요. 남편은 내 머리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아요.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내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나를 놀라게 하
지 못해요... 단지 상식만 갖고 있을 뿐. 나는 지겹기만 해요." 이와 반대로 그녀의 애인에 
대하여 그녀는 놀라운 사람이에요. 동요하거나 함부로 감동하거나 환희하거나 방종하지 않
아요. 언제나 자제력을 잃지 않고, 상대를 슬퍼서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할 만큼 냉정해요. 
그러면서도 대담하고 침착하고 지성적이고, 마음이 섬세하여 나를 얼떨떨하게 했어요...


  이와 같은 충만감과 즐거운 자극을, 관계를 가지는 초기 단계에만 느끼는 여성도 있다. 
애인이 곧 쾌락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처음에는 조심스러워 잘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흔
히 있다 그녀들은 남자를 원망하고 혐오한다. 이런 메살린형은 몇 번이고 경험을 쌓으면서 
애인을 차례로 바꾼다. 그러나 결혼생활의 실패로 현명해진 여자가 이번에는 자기와 잘 어
울리는 남자에게 이끌려, 두 사람 사이에 영속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때때
로 그 남자가 남편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수가 있다. 아델 (빅토르 위고의 
부인) 을 유혹한 이유도 아마 생트 뵈브가 빅토르 위고와 대조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이었
을 것이다. 슈테켈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P. H. 부인은 8년 전에 어떤 체육클럽의 한 회원과 결혼했다. 그녀는 가벼운 난관염으
로 산부인과 의사의 진찰을 받으러 갔다. 그녀는 의사에게 남편이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그녀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남편은 난폭한 사람이었는데 결국 다른 여자를 
가까이 했다. 그것으로 그녀는 행복했다. 이혼하려고 변호사 사무실을 다니다가 마침 남편
과 성격이 정반대인 비서와 알게 되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정다운 편
지를 보내어, 여러 모로 부인을 위로했다. 두 사람은 피차에 정신적으로 공명하게 되었
다... 최초의 키스는 그녀의 불감증을 소멸시켰다... 이 남자는 정력은 비교적 약한 편이었
으나 여자쪽에서는 처음으로 강한 성적 흥분을 느꼈다. 이혼한 두 사람은 결혼하여 매우 
행복하게 살았다... 키스나 애무만으로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력이 넘치던 
전 남편은 이 여자를 불감증이라 비난하지 않았던가.

  모든 연애관계가 이와 같이 동화처럼 원망한다고 할 수는 없다. 젊은 처녀가 부모의 집
에서 자기를 해방시켜줄 사람을 꿈꾸는 것처럼, 결혼생활의 멍에에서 자신을 구제해 줄 애
인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애인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지금까지 열렬했던 남자가 갑자
기 냉정하여 도망치는 이야기는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의 테마이다. 남자가 소극적이어서 
여자쪽이 상처를 입게 되고, 원망이나 반감이 싹뜨면서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
다. 연애관계가 안정되면 가정과 같은, 부부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하여 이 경우에
도 권태. 질투. 신중. 책략 등 결혼에 뒤따르기 쉬운 모든 결함이 발견된다. 그리고 여자는 
이런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게 하는 다른 남자를 우ㅏㄴ하게 된다. 아무튼 간통은 풍습이나 
상황에 따라 크게 다른 형태를 취한다. 가부장제도적인 전통이 남아있는 우리 문명에서는 
부부생활의 부정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도덕한 일에 대해 잘못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
서가 아니라 이기심에서 악덕이 생기게 하며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다른 형태를 취하게 된다. 우리가 만든 법규가 너무 엄하기 때문에, 여자로 하여금 그녀들
에게 무리하지 않은 부도덕에 오히려 더욱 열중하게 하여, 원인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
온다. "


  이런 엄격성이 생기는 이유는 이미 앞에서 보아왔다. 아내의 간통은 가족 속에 다른 남
자의 아들을 불러들여 정당한 상속자에게서 재산을 빼앗을 위험이 있다. 남편은 주인이고 
아내는 그 소유물이다. 사회의 변화, 산아제한의 실천은 이런 이유를 많이 소멸시켰다. 그
러나 여자를 독립시키지 않고 의존상태에 머무르게 하려는 의지는 지금도 여자에게서 기
존의 금지령을 해제하지 않고 있다. 여자는 흔히 그것에 익숙해 있다. 그녀는 부부간의 사
랑이 가져다주는 기쁨 같은 것에는 눈을 감는다. 종교나 도덕심이나 정숙성을 남자와 마찬
가지로 지닐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위의 속박은 특히 신대륙과 구대륙의 작은 
도시에서는 남편에게 가해지는 속박보다 훨씬 크다. 남편이 자주 외출하고, 여행하고 탈선
행위를 해도 세상은 관대한다. 그러나 나내가 탈선하면 부인으로서의 평판과 지위를 잃게
된다. 여자가 이런 세상의 눈을 교묘히 기만하는 모습을 작품에 묘사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포르투갈의 한 작은 도시는 여자에 대한 감시를 엄격하게 하여 
젊은 아내가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시어머니나 시누이가 따라나선다. 그러한 한 이발사가 
그 가계의 위층에 세들어 있는데 그가 퍼머와 빗질을 하는 사이에 연인들이 서둘러 포옹
을 한다. 큰 도시에서는 여자들이 한결 자유롭다. 그러나 흔히 이용되는 5시에서 7시 사이
의 데이트도 이런 부도덕한 감정을 행복하게 살리지는 못한다. 몰래 숨어서 다급하게 해야 
하는 간통은 인간적인 자유로운 관계가 되지 못한다. 여기에 따르게 마련인 거짓말은 부부
관계에서의 모든 품의를 말살해 버린다.
  오늘날에는 여자가 부분적으로 성적인 자유를 얻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그러나 부부생
활과 성적 만족을 조화시키는 것은 그런 여성에게도 아직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결혼
은 일반적으로 반드시 육체적인 사랑을 수반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이 양자를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생각된다. 남자가 훌륭한 남편이 될 수 있는 것은 인정되지만 
바람기를 갖고 있다. 사실상 남자가 성적으로 방자한 것이 아내와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정의는 그것이 구속을 나타내지 않는 한 그만큼 더 순박하
고 덜 상반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에게도 같은 것을 인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생활을 함께 하고 자식들을 위해 그와 함께 가정을 이뤄나가기를 원하지만, 한편 
다른 남자와의 포옹도 경험하고 싶어한다.
  간통을 타락으로 보는 것은, 신중과 위선의 타협이다. 자유와 성실의 계약은 결혼이 지
닌 결함의 하나를 없앨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뒤마프스의 '프랑시옹' 의 머리에 떠오
른 신통치 않은 문구인 "여자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 가 아직 다소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 이 차이는 전혀 자연적이 아니다. 여자는 남자만큼 성적 활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 주장하는데 이처럼 불확실한 것이 없다. 정욕이 억압된 여자는 신경질적인 아내가 되
고, 변태성욕적인 어머니가 되고, 괴팍한 주부가 되고, 불행하고 위험한 인간이 된다. 어쨌
든 설사 그녀들의 정욕이 남자보다 약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을 불필요한 
일로 여길 이유는 조금도 없다. 차이는 전통과 현대사회가 결정하고 있는 남녀의 성적 상
황의 총체에서 생기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아직 여자의 사랑의 행위를 남자에 대한 일종의 
봉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남자를 마치 여자의 주인처럼 생각한다. 그리하여 남자는 
언제나 여자를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여자가 대등하지 않은 남자에게 자기를 맡기면 그녀는 자신의 품위를 잃게 된다. 

그 승낙은 항복과 타락의 성질을 띠게 된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을 용인하
는 여자도 있다. 그녀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한다. 아델 위고는 정력적인 남편
이 다른 침대로 옮기는 것을 미련없이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이와 반대로 사랑의 포옹에서 여자는 객체가 되고 먹이가 된다. 남편은 그녀가 외부세력
에 빠져 있는 것처럼 생각되며 자기 아내로 보이지 않고 남에게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든다. 
사실 여자는 침대에서 지배를 받고 있다고 느끼고 이를 원하며, 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다. 그리고 남성의 위력을 실감하고, 자기를 이처럼 소유하여남자 전체를 나타내보이는 남
성을 시인하며, 그것을 모방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남편이 아내의 입을 통하여 다른 남자
에 대한 그리움의 메아리를 듣고 화를 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는 자기가 소유당하고 
능욕을 당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샤리에르 부인이 젊은 뱅자맹 콩스탕과 헤어진 것
은 콩스탕은 두 사람의 남성적인 부인 사이에서 여성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남자에게 
스탈 부인의 혐오스러운 감화의 흔적이 보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몸을 맡기
는 남자의 노예가 되고 반영이 되는 한 그녀의 부정은 상호간의 부정보다 남편에게서 더 
많이 초래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자가 자주성을 분명히 유지하고 있더라도 남편이 애인에 의해 나쁜 영향을 받을까봐 
두려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여자는 남자와 자게 되면 비록 단 한번, 서둘러 소파 
위에서라도 본처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물며 애인을 소유한 것으로 자부하는 
남자가, 그녀의 남편보다 자기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바타유의 
<애정> 이나 케셀의 <밤의 미인> 에서는 여자가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애인을 택하게 
하고 있다. 그녀는 그런 애인을 상대하여 감각적인 만족을 얻지만, 그녀는 존경하는 남편
보다 그가 우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로는 <인간의 조건>에서 남녀가 서로 자유계약을 맺은 한 쌍에 대해 쓰고 있다. 그
러나 메이가 키요에게 자기가 어떤 남자친구와 잤다고 말하자, 키요는 그 남자가 그녀를 
자기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괴로워한다. 그는 메이의 자유를 존중
하는 길을 택했다. 아무도 누구를 자기 소유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다른 남자가 달콤한 생각을 했다고 상상하자, 그것이 메이의 입을 통해 그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 굴욕을 느끼게 된다.
  사회는 자유로운 여자와 유혹에 약한 여자를 혼동하고 있다. 연애를 하는 남자도 자기가 
이용하는 상대방의 자유를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남자는 애인이 자기의 유혹에 넘
어갔다, 자기에게 이끌렸다, 자기가 정복했다, 유혹했다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자존심이 
강한 여자라면 자기도 개인으로서 상대방 남자의 허영심을 이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
나 그녀로서도 존경할 만한 남편에게까지는 자기의 오만을 강요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못될 것이다. 여자로서는 남녀평등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으면 
남자와 평등하게 행동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간통. 우정. 사교생활은 모두 결혼생활
에서는 기분전환에 불과하다. 그런 것은 속박을 견디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속박에
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요컨데 그것은 모두가 거짓 도피범에 불과하며 그것이 여자
에게 인생을 올바로 개척할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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