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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기혼부인

by FraisGout 2020. 7. 27.

  사회가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은 결혼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여성이 결혼해 
있거나, 과거에 결혼했거나, 앞으로 결혼할 준비를 하고 있거나, 혹은 결혼하지 못해 고심
하고 있다. 아무리 독신녀가 이런 결혼제도에 실망했거나, 반항하고 있건, 아니면 냉담하거
나 간에 그 독신녀라는 것에 대한 정의도 결혼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를 위해서는 결혼 자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여성의 생활조건의 경제적인 진화는 결혼제도를 전복해 가고 있다. 결혼은 두 사람의 자
주적인 개인 사이에 동의가 이루어진 결합이다. 배우자의 계약은 개인적이고 상호적이다. 
간통은 상호간의 계약파기가 된다. 양자가 모두 같은 조건에서 이혼이 가능하다. 이제 여
성은 아기를 낳는 직능 속에 갇혀 있지 않다. 아기를 낳는 것은 그 자연적인 노예작업의 
성격을 대부분 상실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직능도 의지적으로 맡은 일처럼 되었다. 그리
고 산아는 생산노동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
  대체로 국가는 고용주는 임신기간중에 요구되는 휴양기간을 산모에게 주어야 하기 때문
이다. 소련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결혼은 단지 부부의 자유에 기초를 둔 개인 상호간의 
계약처럼 생각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국가가 두 사람에게 부과하는 공적이 의무처럼 보인
다. 앞으로 그중 어느경향이 주류를 이루는가는, 전체적인 사회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어쨌든 남성의 감독적인 지위는 소실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여성해방이라는 관점에서 보
면, 현대는 아직 과도기에 불과하다. 여성의 일부만이 겨우 생산에 종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도 옛날의 가치가 아직 남아 있는 사회에 속해 있다. 현대의 결혼은 거기에 영
원히 남아 있는 과거의 빛에 비춰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결혼은 언제나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전혀 다른 형태로 존속되어 왔다. 두 성은 반드시 
서로 상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필요가 양자 사이에 조금도 상호성을 이루지 못했다. 
여성은 한 번도 남성이라는 계급을 상대하여, 교환과 계약의 평등한 위치에서 자기들의 계
급을 형성한 적이 없다. 사회적으로 보면, 남성은 자주적이고 완전한 개체이다. 남성은 특
히 생산자로서 생각되며, 그 생존은 그가 집단에 제공하는 노동에 의해 정당화되어 있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생식적, 가정적인 역할에는 어째서 남성과 동일한 품위가 주어져 있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다.
  확실히 남성은 여성을 필요로 한다. 어떤 원시민족 중에는 독신남은 혼자서 생활필수품
을 얻을 능력이 없으므로 최하층의 천민처럼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농촌에서는 조력자로
서의 여성이 꼭 필요한 존재이다. 또한 대다수의 남성들은 노예적인 일은 아내에게 맡기는 
것이 유리하다. 개인은 안정된 성생활과 자손을 원한다. 사회는 그에게 사회가 영속되도록 
협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에게 직접 도움을 청하지는 않는다. 남성의 사
회는 그 구성원 각각에게 남편으로서, 또는 아버지로서의 소임을 다하게 한다. 여성은 아
버지나 남자형제가 지배하는 가족에게 노예로서, 가신으로서 끼게 되는 여성은 결혼이라는 
명분에 의해 한 남성의 손에서 다른 남성에게로 주어진다.
  원시시대의 씨족, 부계의 일족은 여성을 거의 물건처럼 취급했다. 여성은 두 가족집단이 
서로 합의하여 제공하는 물건의 일부였다. 결혼이 진화되어 계약의 형태를 취하게 된 후에

도, 여성의 신분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결혼지참금을 갖고 있거나 또는 유산 중에서 자
기 몫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여성도 어느정도 한 사람의 시민처럼 보인다.그러나 그 지참
금이나 유산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더 그 가족에 예속되게끔 했다. 오랫동안 계약은 
장인과 사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미망인인 경우에만 경제적인 자주성을 가질 수 있었다. 혼기를 맞은 처녀에게 선택의 자유
는 언제나 제한되어 있었다. 독신생활은, 그것이 신성한 성격을 지닌 예외적인 경우를 제
외하고는 여성을 기생적이고 천민적인 신분으로 떨어뜨린다.
  결혼은 여자의 유일한 호구지책이며, 그 생활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되는 유일한 방법이
다. 결혼은 여자에게 이중의 의미를 갖게 한다. 여자는 공동체에 자식을 제공해야 한다. 그
러나 국가가(스파르타나 나치스 치하에서 다소 그랬던 것처럼) 직접 여자를 보호하고, 단
지 어머니의 역할만 요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버지의 생식적인 역할을 무시하는 사
회에서도 여자는 남편의 보호 아래에 있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의 성욕을 만족시키는 한편, 가사를 맡게 된다.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하고 
있는 부담은, 남편에 대한 봉사이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에게 선물이나 재산의 일부를 
주어야 하고, 또 아내를 부양해야 한다. 사회는 남편을 중개자로 하여 그 봉사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아내가 그 임무를 다하는 대가로 어떤 권리를 갖게 되는 가는, 남편의 의
무에 의해 분명해진다. 남자는 멋대로 부부의 유대를 파기해서는 안 된다. 결혼을 포기하
거나 이혼을 하는 것은 국법의 결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때로는 그 경우에 남편은 경제
적인 것으로 보상해야 한다. 이런 관습은 보코리스의 이집트에서는 남용되는 경우도 있었
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그것이 이혼수당의 형식으로 시행되고 있다.
  일부다처제는 언제나 다소 너그럽게 보아왔다. 남성은 그의 침대에서 노예, 제2부인, 첩, 
애인, 창녀 등과 동침할 수 있다. 그러나 본부인의 모종의 특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만
일 본부인이 학대를 받거나, 크게 모욕을 당했을 경우에 그녀는 다소나마 구체적으로 보증
된 비상수단에 호소한다. 즉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별거나 이혼을 요구한다. 이처럼 두 사
람에게 있어 결혼은 부담이자 이익이다. 그러나 이 양자의 입장은 전혀 동등하지 않다. 젊
은 처녀에게 결혼은 집단 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일 팔리지 않으면 그녀들은 
사회적으로 실격자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들이 그처럼 혈안이 되어 딸을 결혼시키려고 하
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세기 중산층에서는 딸의 의견 따위는 무시해 버렸다. 미리 정해 
놓은 맞선장소에 나타난 구혼자에게 그냥 내주어버린다. 졸라(프랑스의 자연주의 작가, 18
40~1902)는 <세대>에서 이러한 습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조스랑 부인은 "실패야, 실패했다니까." 하고 의자에 푹 파묻히면서 말했다.
  "아!" 하고 조스랑 씨는 말할 뿐이다.
  "당신은 모르시는군요? 또 혼담이 깨졌단 말이에요. 벌써 네 번이나 실패했어요." 조스랑 
부인은 토라진 목소리로 말한다.
  "알아들었니?" 조스랑 부인은 딸에게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넌 왜 또 혼담을 그러쳤느
냔 말이야?"
  베르트는 드디어 자기 차례가 왔다고 생각했다.

  "몰라요, 엄마." 하고 그녀는 중얼거린다.
  "부국장이야, 아직 30도 안 됐다구. 장래가 유망하잖아. 달마다 너에게 월급을 갖다줄 
수 있잖아. 착실한 청년이라구. 그게 제일이지... 네가 또 저번처럼 망쳤어."
  "그렇지 않다니까요. 엄마."
  "춤출 때 둘이서 옆방에 들어가지 않았니!"
  베르트는 쑥스러웠다. "그래요. 엄마... 단둘이라 그 사람이 짓궂게 굴었어요. 날 이렇게 
껴안고 키스하지 뭐예요. 난 무서워서 그 사람을 서랍장 쪽으로 떼밀어버렸어요."
  어머니는 짜증을 내면서 딸의 말을 가로막았다. "뭐, 서랍장 쪽으로 떼밀었다구! 이 바보
야. 남자를 그렇게 떼밀다니!"
  "하지만 엄마, 글쎄 그 사람이 날 놓아주지 않지 뭐예요."
  "그게 어쨌다는 거야? 놓아주지 않았다구... 이 바보야, 기숙사에라도 처넣야겠다! 도대
체 지금까지 뭘 배운 거야! 문 뒤에서 키스 한 번 한 게 뭐가 어떻다는 거야! 그것도 말이
라고 에미에게 하니? 남자를 떼밀고 혼담을 모조리 깨버리다니!"
  어머니는 세상 물정을 제법 아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이제 끝장이야. 이럴 수가... 넌 정
말 바보야... 넌 물려받을 재산이 없으니 딴 방법으로 남자를 붙잡아야 해. 귀업게 굴고 섹
시한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그가 손을 잡아도 모른 체하고 장난쯤은 하게 내버려워야 
해. 남편을 낚는 거야... 내가 화를 안 내게 됐니, 맘이 내킬 땐 곧잘 하면서 왜 그래? 자, 
눈물을 닦고 이 엄마를 널 좋아하는 남자라 생각하고, 이쪽을 좀 바라봐. 알겠어. 자, 부채
를 방바닥에 떨어뜨리고, 남자가 그걸 줍다가 네 손을 살짝 만지게 말이야... 긴장해서는 
안 돼. 몸을 부드럽게 해야 해. 남자들은 뻣뻣한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상대가 좀 짓궂게 
굴어도 내버려두란 말이야. 그래야 남자 쪽이 확 달아오르니까. 알겠어!"
  벽시계는 두시를 쳤다. 어머니는 밤을 꼬박 새우는 흥분과, 당장 딸을 시집보내야 한다
는 욕망으로 딸을 마분지로 만든 인형처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서 정신없이 큰 소리
로 떠든다. 딸은 얼빠진 얼굴로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공포와 수치로 목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이처럼 젊은 처녀는 완전히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녀는 부모에 의해 혼담이 이루어
져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제공된다. 그러나 젊은 남자는 스스로 결혼한다. 자기가 아내를 
택한다. 그들이 결혼에서 얻는 것은 생활의 신장과 확보일 뿐, 결코 생존을 위한 권리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결혼이란 자진하여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부담이다. 그러
므로 그들은 그 이해득실을 그리스나 중세의 풍자작가들처럼 차분하게 따질 수 있다. 그들
에게 결혼은 하나의 생활양식이지 결코 운명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독신생활의 고독을 택
하는 것도 허용되어 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늦게 결혼하고, 또 결혼을 하지 않기도 
한다.
  여자는 결혼함으로써 세계의 작은 일부를 자기의 영지로 받게 된다. 법률의 보증이 남자
의 폭력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준다. 그 대신 그녀는 남자의 가신이 되는 것이다. 경제적으
로 가장은 남자이며, 따라서 사회에서 그녀를 대표하는 것도 남자이다. 그녀는 남자의 성
을 따르게 된다. 남자의 종교에 속하고, 그 계급에 편입되고, 그 환경에 들어간다. 그 가족

의 일원이 되고, 그의 반신이 된다. 그녀는 남자의 직업에 따라 움직여야한다. 부부의 거처
는 남자의 직업에 따라 결정된다. 그녀는 자기의 과거와 단절되어 남편의 세계에 적응한
다. 남편에게 자기의 인격을 맡긴다. 그리하여 그녀는 민법이 독신여성에게 인정하는 권리
의 일부를 상실하게 된다.
  로마의 법률은 여자를 처녀로서 남편의 손에 인도한다. 19세기 초에 보날드는, 여자와 
남편의 관계는 아기와 어머니의 관계와 같다고 말했다. 1942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민
법은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지금도 법률이나 관습은 남자에게 높은 권위
를 인정하고 있다. 그 권위는 남자가 부부의 공동생활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주어진
다. 남자야말로 생산자이며, 가족의 이해를 초월하여 사회의 이익을 위하는 것도 그 남자
이고, 집단의 장래를 확립하는 데 협력하면서 사회를 위해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것도 남
자이다. 초월을 구현하는 것도 남자이다. 여자는 종의 존속과 가사에 몸을 바치고 있다. 즉 
내재에 몸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생활은 초월인 동시에 내재이다. 자기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유지
하는 것이 필요하며, 미래를 향해 비약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합쳐서 타자와 교류하면서 자
기 안에서 자기를 확인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활동에는 이 두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남
자에게 결혼은 바로 그 행복한 종합을 허용하는 것이다. 남자는 그 직업, 그 사회활동을 
통해 변화와 발전을 알게 되고, 시간과 우주를 통해 자기확대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남
자는 이런 활동에 지쳤을 때 가정을 이루어 거처를 정하고 세계의 한 지점에 닻을 내린다. 
그는 밤에 아내가 아이들과 가구를 돌보고 또 그녀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과거
를 지키고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아내는 단지 순수하고 동일한 일반성 속에 생활
을 유지하고 가꾸는 일만 할 뿐이다. 그녀는 부동의 종을 영속시킨다. 날마다 일정한 리듬
과 자기가 문을 닫고 지키는 가정의 항구성을 확보한다. 그녀에게는 미래나 세계에 직접 
도전할 어떤 계기도 주어져 있지 않다. 그녀가 자기를 벗어나 공동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다만 남편의 중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오늘날에 와서도 결혼은 여전히 많은 점에서 이런 전통적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결혼
은 젊은 남자보다도 젊은 여자에게 훨씬 더 강요되고 있다. 아직도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
하고 있는 사회계층에서 여자에게는 결혼 이외엔 장래를 헤쳐나갈 방법이 없다. 농민의 경
우 독신녀는 최하층의 인간이다. 그녀는 아버지나 형제, 혹은 형부의 하녀가 되어야 한다. 
도시로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혼은 그녀를 남자에게 예속시키지만 한 가정의 여주
인이 되게도 하는 것이다.
  어떤 중산층의 환경에서는 젊은 처녀는 여전히 스스로 살아가는 힘을 갖지 못하게 한다. 
집에 얹혀서 살아가건, 남의 집에서 종속적인 지위에 안주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가장 해
방되어 있을 경우에도 경제적인 특권은 남성의 손에 쥐어져 있으므로 직장을 갖기보다는 
결혼 쪽을 택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의 현재 지위보다 더욱 훌륭한 지위를 
갖고 있는 남편을 찾아, 남편이 더욱 빨리, 더욱 높이 출세하기를 기대한다.
  옛날이나 지금까지도, 성행위는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봉사로 간주되어 왔다. 남자는 자
기의 쾌락을 느끼고, 그 대신 상대방에게 보상을 제공해야한다. 여자의 육체는 사고파는 
하나의 물품이다. 여자에게 있어 육체는 자신이 알아서 이용하는 허용된 자본이다. 여자가 

남편에게 지참금을 가져올 때도 있다. 흔히 여자는 가사를 떠맡는다. 집안일을 처리하고 
아기를 기른다. 어쨌든 그녀는 남편에게 양육받을 권리를 갖게 되고 전통적인 도덕은 그것
을 권장하기도 한다.
  여자의 직업이 대개 불리하고 급료도 싸기 때문에 여자가 이런 안이한 전통에 유혹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혼은 다른 경력보다 훨씬 유리하다. 풍습은 여전히 독신여성의 
성적 해방을 어렵게 한다. 프랑스에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법률로도 여자의 자유연
애를 금하지는 않았지만 아내의 간통은 범죄로 규정했다. 여자가 애인을 택하려고 하면 먼
저 결혼할 것이 전제되었다. 엄한 구속을 받고 있는 많은 중산층 처녀들은 오늘날에도 자
유롭기 위해 결혼한다.
  상당히 많은 미국 여성들은 그 성적인 자유를 획득했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체험은 말리
노프스키(영국의 인류학자, 1824~1942)가 쓰고 있는 것처럼 '독신자의 집'에서 하찮은 
쾌락을 맛보고 있는 젊은 원시인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어쨌거나 그녀들은 결혼에 기대를 
걸고 있으며, 결혼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어른 취급을 받게 된다. 독신녀는 프랑스보다 미
국에서, 설사 자기 힘으로 살아가더라도, 사회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다. 개인으로서 어엿
한 품위와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고 있어야 한다. 특히 모성은 
결혼한 여자에게만 경의를 표한다. 미혼모는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그 아기는 
무거운 핸디캡이 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처녀들은 장래에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으면 결혼하고 싶다고 대답한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한편 어떤 청년도 결혼을 장래의 기본적인 희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에게 성년남
자로서의 품위를 주는 것은 경제적인 성공일 것이다. 이 품위에 결혼이 포함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특히 농민에게) 그것은 포함되 있지 않아도 무방하다. 현대생활의 조건은, 
전보다 안정성이 없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젊은 남자에게도 결혼의 부담이 대단히 무거워
졌다. 반면에 결혼이 갖는 이득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그는 자기생활은 혼자서 꾸려나가기가 한결 쉬어졌으며, 일반적으로 성적 만족도 쉽사리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결혼은 물질적으로 편의를 제공하며(음식점에서 사먹는 것보
다 자기 집에서 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에로틱한 편의도 있고(그리하여 자기 집에 
매음녀를 갖게 된다), 개인을 고독에서 구해 주고, 가정과 자녀를 갖게 되어 시간과 공간 
속에 안정을 얻게 된다. 그것은 그의 생존에 결정적인 목적수행이 된다. 그러나 전체적으
로 보아 남성의 요구가 여성의 공급을 능가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딸을 남에게 준다기보다
는 차라리 딸을 치워버린다. 남편을 구하는 젊은 쳐녀는 남자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아니
라 그 부름을 유발한다.
  중매결혼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 온건한 부르주아지는 누구나 이런 결혼의 존속
을 찬성한다. 나폴레옹의 무덤 주변, 오페라 극장, 무도회, 바닷가, 티파티 등에는 미장원
에서 방금 세트한 머리에 새옷을 갈아입고 신랑감을 찾는 처녀들이 수줍은 듯이 아름다운 
용모와 조심스러운 대화를 전시하고 있다. 부모가 옆에서 재촉한다. "그만하면 괜찮은 자
리다.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거야. 다음엔 네 동생 차례다."
  가엾은 후보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구혼자는 결코 많지 않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점에서 그녀는 양의 무리와 교환되는 베두

앙 토인의 딸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콜레트는 다음과 같이 적절한 말을 하고 있다. "재산
도 없고, 직장도 없고, 형제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는 처녀는 묵묵히 자기에게 돌아온 기회
를 받아들여, 신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다."(<클로딘의 딥>)
  사교생활은 이처럼 노골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어머니의 주의 깊은 감시하에 젊은 처녀
에게 교제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좀 더 자유가 허용된 처녀들은 자주 밖에 나가고 대학 
강의를 받고 또 남자를 알 기회를 제공하는 직장을 갖게된다. 1945년부터 1947년 사이
에 클레르 르플래 부인이 벨기에의 중산층을 대상으로 결혼선택에 관해 조사한 것이 있다.
(클레르 르플래의 <약혼> 참조) 이 조사는 인터뷰로 실시되었다. 그 문답을 몇 가지 인
용하려고 한다.
  
  문: 중매결혼은 많은가?
  답: 이제 중매결혼은 없어졌다.(51%)
  중매결혼이 대단히 줄어들었다. 겨우 1%정도이다.(16%)
  결혼한 사람의 3%는 중매에 의해서였다.(28%)
  결혼한 사람의 5~10%는 중매에 의한 것이다.(5%)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1945년 이전에 많았던 중매결혼은 거의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러
나 이해관계, 교제할 기회가 적은 것, 수줍음, 나이 또는 좋은 배우자를 택하고 싶은 욕망 
등이 얼마 되지 않는 중매결혼의 동기이다. 이런 결혼은 때때로 성직자의 주선으로 이루어
진다. 어떤 경우, 젊은 처녀는 펜팔에 의해 결혼하는 수도 있다. 그녀들은 자기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리고 여기에 번호를 붙여 특수한 간행물에 게재한다. 이 간행물은 초상화를 게
재한 사람들에게 모두 발송한다. 예컨대 200명의 구혼여성과 거의 같은 수의 구혼남성이 
거기에 게재된다. 남자쪽에서도 각자 자기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들은 자기가 그 중매자의 
중매로 펜팔을 하려고 생각하는 상대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문: 최근 10년 사이에 젊은이들은 어떤 상황에서 약혼했는가?
  답: 사교적인 모임에서(45%)
  공동연구나 일에서(22%)
  사사로운 모임, 체류에서(30%)
  
  소꼽친구들 사이의 결혼은 매우 드물다. 연애는 예기치 않은 일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모
두 인정하고 있다.
  
  문: 결혼 상대를 택할 때에는 돈이 가장 큰 역할을 하는가?
  답: 결혼의 30%는 오직 돈이 문제가 된다.(48%)
  결혼의 50%는 돈이 문제가 된다.(24%)
  결혼의 70%는 돈이 문제가 된다.(17%)
  문: 부모는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가?

  답: 부모는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58%)
  부모는 딸의 결혼을 바라고 있다.(24%)
  부모는 딸을 자기 곁에 두고 싶어한다.(18%)
  문: 혼기에 접어든 처녀들은 결혼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가?
  답: 처녀는 결혼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36%)
  처녀는 결혼하기를 원하고 있다.(38%)
  처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을 하기보다는 결혼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26%)
  
  젊은 처녀들은 혼기에 접어든 청년을 쫓아다닌다. 처녀들은 자기의 생활을 해결하기 위
해 아무하고나 결혼한다. 그녀들은 저마다 결혼하기를 바라고, 이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남자가 구애하지 않는 것은 처녀에게 치욕이다. 이것을 면하기 위해 그녀는 아무
하고나 결혼한다. 혼기에 찬 처녀들은 결혼을 위해 결혼을 한다. 결혼에 의해 보다 자유를 
누릴 수 있으므로, 결혼을 서두른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든 증언이 일치하고 있다.
  
  문: 결혼을 원하는 태도는 처녀 쪽이 총각보다 더 적극적인가?
  답: 처녀들은 젊은 남자에게 자기의 심정을 분명히 표시하여 구혼한다.(43%)
  처녀들은 구혼에 남자들보다 더 적극적이다.(43%)
  처녀들은 수줍어한다.(14%)
  
  이 점에서도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결혼의 주도권을 잡은 쪽은 처녀
들이다.
  처녀들은 자기가 세상을 잘 살아나갈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생활
수단을 손에 넣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므로 결혼의 길을 택한다. 그래서 처녀 쪽에
서 젊은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한다. 그 기세는 대단하다! 그녀들은 결혼하기 위해 필사적
인 힘을 기울인다... 그녀들은 그야말로 남자의 꽁무니를 쫓아다닌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자료를 구할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도 중산층의 상황은 벨기에와 마
찬가지이므로, 아마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 같다. 중매결혼은 다른 나라들보다 
프랑스에서는 언제나 많은 편이었다. 양성사이의 접근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 개최되는 파
티의 회원이 모이는 녹색 변두리 클럽은 지금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구혼광고는 많은 신
문에 줄을 잇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나 언니, 그리고 여성잡지는 파리약으로 파
리를 잡듯이 남편을 잡는 기술을 처녀들에게 노골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것이 낚시이고 
사냥이므로,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눈이 너무 높아도 안 되고 너무 낮아도 안된다. 
꿈을 버리고 현실주의자가 되라. 교태에 수줍음을 곁들여라. 희망을 너무 크게 갖지 말고, 
지나친 과욕도 금물이다. 젊은 남자들은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자를 경계한다. 벨기에의 한 
청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클레를 르플래의 <약혼> 참조) "남자는 자기가 여자에게 추
격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여자가 자기에게 갈고리를 던진 것을 알아차릴 때처럼 불쾌

한 일은 없다."
  그들은 함정을 슬기롭게 피하려고 애쓴다. 처녀의 선택은 대체로 대단히 한정되어 있다. 
결혼하지 못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다면 자유로울 수 없다. 대개의 경우에 그녀의 
결심 속에는 열의보다는 오히려 계산과 혐오와 체념이 들어 있다. '구혼하는 남자가 대체
로 괜찮게 생각되면(환경, 건강, 직업) 사랑하지 않더라도 결혼을 승낙한다.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머리는 냉정을 잃지 않는다.'
  그런데 젊은 처녀는 결혼을 원하면서도 한편으로 결혼을 두려워하고 있다. 결혼은 남자
에게보다 여자에게 큰 이득이 되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보다 결혼을 강하게 희구한다. 그러
나 결혼은 동시에 여자에게 한층 무거운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남자의 경우보다 한
층 더 무정하게 과거와 절연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불안
을 느끼는 처녀가 많다는 것은 앞에서도 보아왔다. 결혼날짜가 가까워짐에 따라 이 불안은 
더욱 커진다. 신경병이 생기는 것은 이런 시기이다. 젊은 남자 쪽에서도 새로운 책임을 져
야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위
기에서 중대화되는 문제 때문에 생기는 신경병은 남자보다 처녀들이 휠씬 더 많다. 슈테켈
은 신경병적 징후를 보인 많은 처녀들을 진단한 바 있는데 그중에서 실례를 하나 인용하
고자 한다.
  
  슈테켈이 그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구토증에 시달여 밤마다 모르핀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세수하기를 싫어하고, 침대에서 식사를 하고 항상 방에 처박
혀 있었다. 그녀는 약혼했으며, 자기의 약혼자를 열럴히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슈테켈
에게 자기는 이미 그 남자에게 몸을 허락했다고 고백했다... 나중에 밝힌 바에 의하면, 그
때 그녀는 조금도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상대방 남자의 키스가 불쾌했다고 말하기
도 했다. 그녀는 자기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어머니에 대한 반감에서 남자에
게 몸을 맡겼던 것이다. 소녀시절에 부모가 남동생이나 여동생을 낳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
이 되어 밤에 부모의 거동을 엿보기도 했다. 그녀는 어머니를 몹시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결혼해야 한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부모의 침실을 내버려두고 가야 하나? 이건 말
도 안돼.'
  그녀는 뚱뚱해지려고 했고, 손을 일부러 긁어 흉하게 만들었다. 바보행세를 하기도 했고 
병에 걸리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는 등, 약혼자가 자기를 싫어하게 만들려고 애를 썼
다. 병은 의사의 치료를 받아 완전히 나았으나 그녀는 어머니에게 파혼하겠다고 애원했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집에 남아 어린애처럼 있고 싶었다. 어머니는 기어코 결혼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그녀는 침대에서 죽어 있었다. 권총 자살을 한 것이다.
  다른 사례를 보자. 한 처녀가 오랫동안 앓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의 처지 때문에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 수 없게 된 데 대해 절망한다. 사실 그녀는 그와 결혼하지 
않으려고 병을 앓고 있고, 파혼하지 않고서는 그 병을 고칠 수가 없다. 때로 결혼에 대한 
공포증은, 전에 있었던 다른 사람과의 성경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처녀성을 잃은 것을 
상대방이 알게 될까 봐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매들
에의 깊은 애정이, 아버지의 집에 대한 애착이 자신이 다른 남성의 소유가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결혼하기를 결심하는 처녀도 역시 마음 한구
석으로는 은밀하고 집요한 저항감을 느끼고 있다. 이것이 결혼 초의 생활을 어렵게 하여, 
안정된 행복을 끝내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결혼이 결정되는 것은 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다. "남편은 이를테면 자기를 사
랑하는 남자의 대리자이지 그 남자 자신은 아니다."라고 프로이트는 말하고 있다. 이와 같
은 분리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의 성질에 내포되어 있
는 것이다.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의 경제적, 성적인 결합을 집단의 이익을 향하여 초월시
키는 것이지 결코 그들의 개인적인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가부장제도하에
서는 -오늘날에도 회교도는 그렇지만- 부모의 권위로 선택된 약혼자들은 결혼하는 날까
지 서로 상대방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그런 사회에서 생각된 생활기획을 감정이나 사랑
의 느낌 위에 구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분별있는 교제에서는 욕망은 그다지 심하지 않다. 그것은 약하고 둔하다. 사랑의 신
은 인간이 사랑 이외의 것으로 결합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예컨대 결혼과 같은 사랑 
이외의 명목으로 결합하여 계속되는 교제에는 별로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결혼에서는 당
연히 친족관계나 재산 등이 정숙이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존중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자손과 가족을 그와 동등하게, 혹은 그 이
상으로 생각해서 결혼한다."(제3권 제5장)
  
  남자는 자기가 아내를 위한다는 사실에서, 특히 신부감이 많이 공급될 경우에는 선택에 
여유를 갖는다. 그러나 성행위는 여자가 해야 하는 봉사로 생각되고, 그 봉사로서 자기의 
이득을 꾀한다고 생각하는 이상, 여자의 개성적인 선택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결혼은 남
자의 자유에 대하여 여자를 방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개성도 존재할 수 없다. 남자의 일생에 걸친 보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사랑 따
윈 단념해야 한다. 믿음이 강한 어느 어머니가 딸에게 "사랑이란 남자들이나 갖는 야비한 
감정일 뿐이야. 정숙한 여자는 그런 걸 가질 필요가 없어." 하고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들
은 적이 있다. 이것은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하고 있는 이론을 소박한 형태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제2권, p.25)
  
  어머니나 아내의 여러 가지 관계는 한편으로는 쾌락에 속하는 자연스러운 개별성을 갖
고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쾌락에서 자기소멸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개별성을 갖고 
있다. 이 개별성이 언제나 다른 개별성에 의해 대치되는 어떤 우연적인 것을 어느 정도 갖
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성적 본능에서 생기는 사랑이 지배하는 가정생활에서는 '이 남
편'이 아닌 일반적인 '어떤 남편', 일반적인 '어린이'가 문제이다. 여자의 이런 관계는 감수
성 위에 수립 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 위에 수립되는 것이다. 여자의 윤리생활이 남자의 

그것과 다른 것은, 여자의 개별성에 의한 구별 속에서나 그 쾌락 속에서는 직접적으로 보
편적이며, 욕망의 개별성과는 무관하다는 데 있다.
  이와 반대로 남자의 경우에는 이 양면이 따로 떨어져 있다. 그리고 남자는 시민으로서 
자기를 의식하는 능력과 보편성을 갖고 있으므로 그는 욕망의 권리를 이렇게 해서 스스로 
사들이고, 동시에 이 요강에 대해 자기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이 관
계에는 개별성이 섞여 있어도, 그 윤리적인 성격은 순수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 윤리적이 
성격이 이런 성질의 것인 이상, 개별성은 아무래도 무방하며, 여자에게는 자기인식이나 타
자에 있어서의 자기인식도 결여되어 있다.
  
  즉, 여자는 그 개별성 속에서 선택한 남편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반성 
속에서 여성적인 기능을 수행하도록 요구된다. 여자는 단지 생물의 종으로서, 개성화되지 
않은 형태로만 쾌락을 느끼는 데 불과하다. 그래서 여자의 에로틱한 운명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우선 여자는 결혼 이외에 어떤 성행위도 허용되지 않는다. 
부부사이의 성행위는 제도화되어 있으므로 욕망과 쾌락은 사회적인 이익을 위해 희생된다.
  그러나 남자는 노동자아며 시민으로서 보편적인 것을 향하여 자기를 초월해 가므로 결
혼하기 전에도, 부부생활 이외에도 우연히 쾌락을 맛볼 수 있다. 어쨌든 남자는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의 정욕을 해소할 수 있다. 한편 여자가 암컷으로서 본질적으로 규정되
어 있는 세계에서는 여자는 어디까지나 암컷으로서 정당화 되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은 생
물학적으로 다르다. 남자는 남편으로서, 또는 생식자로서 종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쾌락을 
느끼고 있다.
  이와 반대로 여자는 생식행위와 성적 쾌락 사이에 흔히 분열이 생긴다. 그래서 결혼은 
여자의 성생활에 도덕적인 품위를 제공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런 윤리적인 품위를 말
살시키고 있다.
  이런 식의 여자의 성생활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손상은 남자에 의해 고의적으로 인정되
고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남자들은 낙천적인 자연주의에 의해 여자의 고통을 보고도 
태연스럽게 체념해 왔다. 남자들은 그것을 여자의 운명이라고 생각해 왔다. 성서가 여자를 
저주하고 있기 때문에 남자들은 더욱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한다. 임신의 고통, 짧고 불확실
한 쾌락의 대가로 여자에게 부과된 이 과중한 벌금도 많은 농담거리가 되었다. '5분 동안
의 쾌락, 9개월의 형벌... 나오기보다 들어가기가 훨씬 쉽다.' 이런 대조가 남자들을 곧잘 
웃긴다. 이 철학에는 사디즘이 포함되어 있다. 많은 남자들은 여자들의 불행을 즐기고, 그 
불행이 경감되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자들은 그 배우자의 성적인 행복을 
부인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남자들은 아내에게 쾌락의 자주성과 함께 욕망의 유혹도 거
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몽테뉴는 이에 대해 재미있는 해학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 존엄하고 신성한 결합에 방종한 연애의 완력과 광포를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근친상간이다. "너무 음탕하게 여자를 즐겁게 하여 쾌락이 이성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해서
는 안 된다... 신중하고 진지하게 아내를 다뤄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나는 

아름다움과 애욕에 의해 성사된 결혼일수록 급속히 파탄에 이르는 것을 목격했다. 결혼에
는 보다 견고한 불변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신중히 결혼에 임하지 않으
면 안 된다. 그 화려한 즐거움은 아무 가치도 없다... 이상적인 결혼은, 만일 그런 결혼이 
있다면, 연애가 전제되어야 하며 조건을 거부한다.(제3권 제5장)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 아내와의 접촉에서 얻은 쾌락에도 절제가 없으면 비난을 받게 된다. 부정한 성행위
와 마찬가지로, 방종하고 음탕에 빠질 우려가 있다 최초의 정열이 이런 성행위에서 우리에
게 요구하기 쉬운 후안무치한 애무는 아내에게 실례일 뿐 아니라 유해하다. 이런 식으로 
아내들에게 후안무치를 가르쳐서는 아니 된다. 그녀들은 우리의 요구에 의해 언제나 충분
히 성에 눈뜨고 있다... 결혼은 신성하고 경건한 결합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얻게 되는 쾌
락은 신중하고 진지하고 다소는 위엄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조심스럽고 양심적
인 쾌락이 되어야 한다.(제1권 제30장)
  
  사실상 남편이 아내의 관능을 일깨워준다면, 그것은 일반성 속에 눈뜨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로 하여금 관능에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곧,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의 품안에서 쾌락을 찾도록 미리 준비를 시켜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아내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은, 몽테뉴의 말대로 '바구니 안에서 똥을 
받아 머리 위에 이는 격'이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남자 쪽의 신중함이 오히려 큰 손해
를 보는 상태로 여자를 유도한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여자들이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생활규범을 거부한다 해도 조금도 잘못이 없다. 그것
은 남자들이 그녀들과 상의하지 않고 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들과 그들 사이에는 자
연히 음모와 싸움이 있다. 우리들은 아내들을 다음과 같은 점에서 무분별하게 취급하고 있
다. 여자 쪽이 남자보다 연애에 있어서는 훨씬 유능하고 열렬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도... 우리네 남자들은 절제를 여자들 특유의 것으로 강요했다. 그것도 극형으로 위협하면
서 말이다... 우리는 여자들이 건장하고 튼튼하고 알맞게 기름지고 또 동시에 순결하기를, 
즉 뜨겁고도 냉랭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결혼은 아내들이 타오르는 것을 억제하는 역할
을 한다고 우리는 말하지만, 우리들의 일상적인 풍습에 의하면 결혼은 그녀들을 별로 시원
하게 해주지 못한다.
  프루동은 이처럼 섬세한 견해는 피력하지 않고 있다. 그는 결혼에서 사랑을 배제하는 것
이 정의에 합당하고 말한다.
  
  사랑은 정의 속에 완전히 묻혀버려야 한다... 약혼한 사람끼리, 부부사이에서도 온갖 성
애적인 접촉은 가정의 존엄과 노동의 애호와 사회적인 의무수행에 적절치 못하며 파괴적
이다. (사랑의 행위를 일단 마치고 나면)... 양치는 목자가 젖을 일단 응결시키고 나면 압
착지를 떼는 것처럼 사랑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자 중산층의 사고방식이 다소 달라지기 시작했다. 즉 그들은 결혼
을 열심히 방어하고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한편 개인주의의 발달은 여자의 정당한 요구를 
함부로 억압하는 경향을 거부했다. 생 시몽, 푸리에, 조르주 상드 등, 그밖의 여러 낭만주
의 작가들이 사랑의 권리를 강럭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완전히 배제되고 있던 
개인적 감정들을 결혼이란 것에 도입시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부부애'라는 애매한 관념
이 고안된 것은 이때의 일이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관습에 의한 결혼에서 만들어낸 기적의 
열매였다. 발자크는 온갖 모순 속에서 부르주아지의 사고방식을 표현하고 있다. 결혼과 사
랑은 윈칙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그는 인정하지만, 존중할 만한 제도와 여
성이 물품처럼 취급되는 거래를 동일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혼의 생리>에
서와 같이 우스꽝스러운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았다. 거기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읽을 수 있
다.
  
  결혼은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으로 하나의 법, 계약, 제도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결혼은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사회는 부부생활을 지배하는 법, 계약, 제도를 우
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의 남자는 결혼을 통해 생식과 자녀, 그리고 재산만을 문제시 했다. 그러나 생식
이나 재산, 자녀도 행복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낳으라, 번식시키라'는 말에는 사랑이 포
함되어 있지 않다. 15일 동안 열네 번 만난 어떤 처녀에게 법률과 왕과 정의의 이름으로 
사랑을 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부조리이다.
  이것은 헤겔의 이론만큼 분명하다. 그러나 발자크는 곧 비약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계속
한다.
  
  사랑은 욕구와 감정의 조화이다. 행복한 결혼은 부부의 영혼이 완전한 조화를 이룸으로
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남자는 명예와 기품과 약간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 욕구를 신성시하는 사회법칙의 이익을 행사한 후에, 그는 감정을 꽃피우는 자연의 
은밀한 법칙에 따라야 한다.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성실하게 사랑해야 한다. 참된 정열을 
거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정열적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욕망을 가져야 한다. 
언제나 자기 아내에게 욕망을 느낄 수 있는가?
  -느낄 수 있다.
  
  발자크는 이어서 '결혼학'을 전개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남편으로서 사랑을 받는다는 점
보다도 어떻게 하면 아내에게 속지 않는가 하는 조심성이 중심문제가 되어 있다. 남편은 
아내에게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게 하거나 지식을 쌓는 일들을 금하기도 하면서, 오로
지 자신의 명예만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아내를 바보로 만드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대체 이것이 사랑일까? 이런 애매하고 불합리한 생각에 하나의 의미를 찾아낸다면, 남성
은 한 사람의 여성을 택하여 일반성(여자의 정절을 보증하는 일반성) 속에 그의 욕구를 
충족시킬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남성은 나름대로의 방법을 동원해 아내

로 하여금 사랑에 눈뜨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산이나 자손을 위해 결혼한다면 그는 
참으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사랑이 없다면, 그러면서도 어떻게 상대
의 정열까지도 끌어낼 만큼 자신의 정열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발자크는 짝사랑
이 상대를 끌어들이기는커녕, 상대에게 귀찮고 혐오스럼움만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
고 있는 것일까?
  발자크의 서한체 주제소설 <두 사람의 젊은 아내의 수기>에는 그의 자기기만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루이즈 드 숄리외는 결혼을 사랑 위에 쌓아 올리려고 한다. 그녀는 정열이 
지나쳐 첫 남편을 죽인다. 그 뒤 둘째남편에 대한 미칠 듯한 질투로 그녀는 죽게된다.
  르네 드 레스토라드는 이성에 순응하기 위해 자기감정을 희생시킨다. 어머니로서의 기쁨
은 그 희생의 충분한 보상이 되어 안정된 행복을 부여한다. 우리는 먼저 정열적인 루이즈
에게 어떤 저주 -작가 자신이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니라면- 가 내렸길래 그녀가 그렇게 
소망하고 있는 모성이 금지되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결코 임신을 방해하
지 않는데 말이다. 그리고 한편 남편의 포옹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해 르네에게는, 스탕
달이 정숙한 부인네들에게서 혐오감을 느꼈던 그 '위선적인 태도'가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발자크는 신혼 첫날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르네는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네가 말한 남편이라는 이름의 동물은 자취를 감춰버
렸다. 언젠지 모르지만 어느 즐거운 저녁 파티에서 한 애인이 나타났다. 그의 말은 내 영
혼 속까지 스며들었다. 나는 황홀한 심정으로 그의 품안에 안겨 있었다... 마음속에서 호기
심이 치솟았다... 그러나 가장 달콤한 사랑에 필요한 것, 이를테면 이런 한때의 예기치 않
은 영예는 완벽했었다. 우리가 상상으로나 그리던 신비로운 황홀감, 거리낌없는 흥분, 억지 
승낙, 오랫동안 상상했던 영혼을 앗아가는 환락, 거기에는 모든 유혹이 매혹적이었다."
  
  이 아름다운 기적은 그후 자주 되풀이되지 않았던 것 같다. 조금 앞에서 쓴 편지에서는 
르네가 눈물로 나날을 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전에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는데, 지
금은 물건이 되어 버렸어." 그리고 그녀는 '부부애'의 밤 대신에 보날드를 읽는 것으로 자
신을 위로하고 있다.
  그것은 어쨌든 간에 여성으로 입문하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남편이 어떤 방법으로 매혹
자가 되었는지, 그것을 우리는 알고 싶다. 발자크가 <결혼의 생리>에서 보여주는 방법은 
대단히 엉성하다. "결혼을 결코 폭행으로 시작하지 말자."든가 혹은 "쾌락의 미묘한 점을 
잘 알아차려 그것을 발전시켜서 새로운 양식이나 독창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남편의 재능
이다."라는 식으로 막연하기 짝이 없다. 그는 다시 이렇게 덧붙인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서는 이 재능은 역겨운 유희가 된다." 사실 르네는 루이를 사랑하지 않는
다. 소설에 그려져 있는 이 사나이는 어디서 그 재능을 얻게 되는가? 발자크는 문제를 비
겁하게 얼버무리고 있다.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중성적인 감정은 있을 수 없으며, 사랑
의 결여, 구속, 권태는 회한과 초조와 적의보다도 오히려 애정을 일으키기 어렵다는 것을 
그는 잘 모르고 있다. 그의 <골짜기의 백합>에서는 한결 더하다. 불행한 모르소프 부인의 
운명은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결혼과 연애를 조화시키는 것은 매우 무리한 억지로, 성공을 위해서는 신의 중개가 필요
하다. 키에르케고르가 이리저리 돌려서 결국 도달하는 해결방법도 그것이다. 그는 줄곧 결
혼의 모순을 지적한다.
  
  결혼이란 얼마나 기이한 착상인가! 결혼을 더욱 왜곡시키는 것은 그것이 자발적인 행동
처럼 생각되는 데서 비롯된다. 결혼처럼 결정적인 행위는 없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결정적인 행위는 자발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술 속에 진실이 있다>에서)
  난점은 여기에 있다. 사랑이나 호의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다. 그러나 결혼은 결정이
다. 그런데 애정은 결혼에 의해, 즉 결정에 의해 자각되어진다. 결혼을 원한다는 것, 그것
은 가장 자발적인 일인 동시에 가장 자유로운 결정이어야 한다. 그 자발성이란 것 때문에 
결혼을 설명하기가 까다로워지는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신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또한 하나의 반성, 즉 거기서 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신중하고 사려 깊은 반
성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위에 하나가 다른 것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결정은 천천히 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두 가지 일이 
마지막의 빠듯한 순간에 하나로 결합되어야 한다.(<결혼에 대하여>에서)
  
  그러니까 사랑하는 것은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랑이 어째서 의무가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역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결혼에 관한 그의 모든 논문은 이 신비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반성은 자발성을 죽여버리는 천사이다... 반성이 도중에 애정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옳다면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은 반성을 통하여 하게 되며, 순전히 이
상적으로 느껴진 새로운 자발성이다. 이 자발성은 바로 애정의 자발성에 대응하는 것이다. 
결정은 윤리적인 기초 위에 세워진 종교적인 인생관이며, 이 인생관이 애정으로 가는 통로
를 열어, 안팎의 모든 위험에 대해 그 통로를 확보해야 한다.' 그리하여 '남편, 즉 훌륭한 
남편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다... 한편으로 인생의 엄숙함이 그와 그의 애인 위에 덮쳐
지고 있는데, 연애의 행복을 언제까지나 보유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것이다.
  
  한편 여성 쪽은 어떤가. 이성은 여성의 것이 아니며, 여성은 '반성'같은 것을 하지 않는
다. 그러므로 '여성은 사랑의 직접성에서 종교적인 것의 직접성으로 옮아간다.' 이 이론을 
알기 쉬운 말로 표현하면, 사랑하는 남성의 경우는 감정과 의무의 조화를 보증하는 신앙이
라는 행위로 결혼을 결심하지만 여성의 경우는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결혼하고 싶다고 생
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카톨릭 신자인 할머니는 매우 단순하게도, 신랑 신
부가 제단 앞에서 "네" 하고 선서할 때 그 신랑 신부의 마음이 불타오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결혼하기 전에 호감을 느끼는 것을 인정하고 있
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한평생 지속되도록 결심한다는 것은 역시 기적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세기말 소설가나 극작가는 신 앞에서의 서약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방

법을 통한 결혼에서의 행복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발자크보다 한결 대담하게, 에
로티시즘을 합법적인 사랑에 포함시키는 가능성을 연구했다.
  포르토 리슈의 <인정이 많은 여자>는 성애와 가정생활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확언
하고 있다. 아내의 지나친 정열에 기진맥진한 남편은 좀더 절도 있는 애인에게서 안정을 
구한다. 그러나 '사랑'이 부부간에 하나의 의무라는 폴 에르비외의 역설은 널리 일반에게 
인정되고 있다. 마르셀 프레보는 젊은 남편에게 아내를 애인처럼 취급해야 한다고 가르치
고 있으며, 은근하게 에로틱한 말로 부부간의 성적인 쾌락을 암시하고 있다.
  베른슈타인은 주로 합법적인 사랑을 주장하는 극작가이다. 부도덕하고 거짓말을 잘하고 
관능적이고 심술궂고 도둑질하는 여자 곁에 현명하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표현되는 남편이 
등장하고 있다. 더구나 이 남편에게서는 정력적이고 유능한 애인으로서의 일면 또한 엿보
인다. 간통소설에 대한 반동으로 결혼을 응호하는소설이 많이 등장했다. 콜레트까지도 이 
도덕적인 파도를 타고 <순진한 탕녀>에서, 어리석게 처녀성을 빼앗긴 젊은 아내의 추잡
한 경험을 묘사하고 나서, 이 여자가 남편의 품안에서 쾌락을 알게 한다. 마찬가지로 마르
탱 모리스의 다소 알려진 소설에서, 젊은 여자를 농락한 애인의 침대에 잠시 여행을 시킨 
다음에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가 남편에게 그 경험을 활용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이와는 다른 이유로 이와는 다른 방법에 의해 결혼제도를 존중하
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개인주의를 신봉하고 있으므로, 성생활과 결혼을 슬기롭게 결합시키
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때문에 부부 사이의 원만한 성생활을 제시해 주는 
책들이 해마다 많이 출판되고 있다. 특히 남성쪽에서 여성을 상대로 행복을 어떻게 가꿔나
갈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정신분석학자나 의사가 '부부생활의 상담역'을 맡고 있다. 여
성도 쾌락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남성은 여성에게 쾌락을 제공할 수 있는 기술을 알고 있
어야 한다는 것이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성적 생활의 성공은 단지 기술문제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알아야 할 일>, <행복한 결혼의 비결>, <두려움 없는 사랑>과 같은 
참고서를 젊은 남자가 20권쯤 암기하고 있어도, 그가 아내에게서 그만큼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아내가 반응하는 것은, 심리적인 상황 전체에 대해서이다. 전통적
인 결혼은 여자의 성감을 일깨우고 꽃피우는 데 가장 좋은 조건을 조성하고 있지 못하다.
  옛날에 여성이 어머니가 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던 사회에서는, 아내의 처녀성은 그
다지 요구되지 않았다. 신비적인 이유로 결혼하기 전에 신부의 처녀성을 빼앗는 풍습도 있
엇다.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의 어느 지방에는 이런 파렴치한 옛풍습을 그대로 지키는 곳도 
있다. 혼기에 이른 처녀에게 결혼 전의 정결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실수한'처녀, 아기
를 낳은 처녀도 그렇지 않은 처녀보다 쉽게 시집가는 경우도 있다. 한편 여성해방을 인정
하고 있는 환경에서는, 처녀들에게 젊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성적 자유를 인정한다.
  그러나 역시 부권주의의 윤리는, 약혼한 딸을 처녀로 남편에게 시집가야 한다고 설명하
고 있다. 딸은 그 태내에 남의 씨를 배어서는 안 된다. 남편은 자기 것으로 여기는 이 육
체를 완전히 독점하고 싶어한다. 처녀성에는 도덕적, 종교적, 신비적인 가치가 씌워져 있으
며, 이 가치는 오늘날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프랑스에는 이런 지방이 몇 군
데 있다. 신부의 친구들이 신혼부부의 침실 밖에서 웃고 노래 부르면서 대기하고 있으면 

이윽고 신랑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피가 묻은 시트를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타난다. 혹
은 부모가 아침에 이것을 이웃에게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노골적인 방법은 아니더
라도 '첫날밤'의 풍습은 아직도 여러곳에 남아 있다. 이런 풍습이 많은 외설문학의 소재로 
이용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사회적인 곳과 동물적인 것의 분열은 반드시 외
성을 낳게 마련이다. 인도주의적인 윤리는, 모든 생활경험이 하나의 인간적인 의미를 갖게 
되며, 그 경험에 자유가 깃들기를 요구한다. 참으로 도덕적인 성생활에는 욕망과 쾌락의 
자유로운 만족이 있다. 혹은 적어도 성행위 속에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감동적인 투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나 정욕 속에 타자의 개성적인 인식이 선행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성본능이 인간 개인에 의해 구제되지 않고 그것을 신이나 사회가 정당화할 때, 두 
당사자의 관계는 단지 동물적인 것이 될뿐이다. 보수적인 사상을 가진 현모양처들이 성행
위에 대해 혐오스러운 얼굴로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들은 그것을 대소변의 배설
작용과 같은 것으로 보고있다. 결혼식 연회에서 그처럼 난잡한 웃음소리를 듣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천한 현실의 동물적인 작용에 화려한 의식을 겹치는데에는 외설스러운 역설
이 있다. 결혼은 그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를 공공연히 표시한다. 즉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여자가 여러 사람들의 눈앞에서 상징직인 의식에 의해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침대에서 은밀히 서로 대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개인이며, 이때만큼은 모
든 시선이 이 두 사람의 포옹을 외면한다. 콜레트는 13세 때 한 농가의 결혼식에 가서 여
자친구들과 함께 신랑 신부의 침실을 몰래 엿보고 크게 당황했다.
  
  신랑 신부의 침실... 분홍빛 싸구려 무명 커튼 아래 좁고 높은 침대가 놓여있다. 날짐승
의 날개와 거위솜털을 다져놓은 베개로 부풀어오른 침대. 땀과 향과 가축의 냄새와 소스의 
열기로 뒤범벅이 되었던 오늘 하루의 마지막에 도달하게 된 침대... 이윽고 신랑 신부는 이
곳에 오게 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나로서는 생각조차 못 해본 일이었다. 그들은 이 깊숙한 
날개 속에 묻힌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 싸움이 어떤 
것인지는 어머니의 노골적인 말이나 동물의 생태가 나에게 너무나 많이 또는 너무나 적게 
가르쳐주었다. 그 다음은? 나는 지금까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이 침실과 침대에 두려움
을 느낀다.(<클로딘의 집>에서)
  
  소녀는 어린애 같은 두려움 속에서 온 가족의 호화로운 축하연과 밀폐된 침대의 동물적
인 신비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느꼈다. 결혼의 냉소적이고 관능적인 측면은 여성을 
개성화하고 있지 않은 문명 속에서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동양, 그리스, 로마에서는 그렇
다. 그곳에서는 동물적인 작용이 사회적인 의식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서양에서는 남녀를 모두 개인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결혼식에 초대된 하객들이 
킬킬대는 것은 그 신랑 신부가 자신들의 개성적인 인생체험을 틀에 박힌 의식이나 연설, 
꽃으로 에워싸인 형태 속에서 치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야단스러운 장례식의 
화려함과 무덤 속의 부패 사이에도 분명히 언짢은 대조가 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지하에 
묻히면 깨어나지 않는다. 한편 신부는 시장이 걸치는 의식용 3색 훈장이나 성당 오르간 소

리에 따라 인도된 현실체험의 특이한 우연성을 발견하게 될 때 두려움과 놀라움에 어리둥
절하게 된다. 젊은 여성이 결혼식날 밤에 울면서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것은 가벼운 희극이
라고만 볼 수 없다. 정신질환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많이 쓰여 있다. 내가 직접 들은 이야
기도 몇 가지 있다. 성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양가의 딸이 갑자기 에로티시즘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19세기의 이야기지만 아담 부인은 자기는 키스한 남자와 결혼하
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최후의 성적 결합이라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최근에 슈테겔은 어떤 젊은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신혼여행에서 남편에게 처녀성을 빼앗긴 그녀는 남편을 미친 사람으로 알고 말을 한마디
도 건네지 못했다."(<불안의 신경증상>에서) 순진한 처녀가 변태성욕자와 결혼하여 오랫
동안 함께 살면서도 상대방이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결혼 첫날밤에 집에 돌아와 당신이 신부를 우물 속에 풍덩 빠뜨린다면 그녀는 얼마나 
놀라겠는가. 설사 그녀가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더라도... '그래, 이것이 결혼이
야. 그래서 결혼이 뭔가를 비밀로 해왔군. 난 그 함정에 빠졌어.' 하고 그녀는 마음속으
로 생각한다.
  이런 변을 당하고도 그녀는 여전히 잠자코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오랫동안 몇 번이고 
우물 속에 그녀를 빠뜨릴 수 있을 것이다. 이웃에 아무 소문도 내지 않고 말이다.
  
  이 <신혼의 밤>이라는 제목의 미쇼의 시 한 토막은 그 사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오
늘날에는 많은 처녀들이 그런 사정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들의 승낙은 여전히 
막연한 것이다. 처녀성을 잃은 행위에는 여전히 폭행의 성격이 남아있다. "혼외보다 결혼
에서의 폭행이 더 많다."고 하벨로크 엘리스는 말하고 있다. 그가 쓴 <출산에 대한 월간
잡지> 9권에서 노이게바우어는 성교를 할 때 남자의 페니스에 의해 여자가 받는 150가지 
이상의 부상 사례를 수집하고 있다. 그 원인은 난폭, 만취, 잘못된 체위, 성기의 불균형 
등이었다.
  하벨로크 엘리스의 보고에 의하면, 영국에서는 어떤 부인이 중류층 지식계급의 기혼여
성 6명에게 첫날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질문했다. 그 여섯 사람에게 있어 성행위는 모두 
돌발적인 충격이었다. 그 중에서 두 사람은 성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나마 알고는 있는 것 같았지만 역시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었다. 아들러도 처
녀성을 잃은 행위의 정신적인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남자가 자기의 모든 권리를 얻게 되는 이 최초의 순간은 때때로 여자의 전 생애를 결정
하게 된다. 경험이 없어 지나치게 흥분한 남편은 그 순간 여자에게 불감증을 안겨주고, 
그 후에도 계속되는 졸렬함이나 난폭함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불감증을 만들어 버리는 경
우도 있다.
  
  여러분들은 아마 이런 서툰 초보에 대한 많은 사례를 보아 왔을 것이다. 여기 슈테켈이 
기록한 사례가 있다.
  

  H. N. 부인은 매우 정숙하게 자라서 첫날밤을 두려워했다. 신랑은 그녀에게 침대에 드
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난폭하게 옷을 벗겼다. 그리고 자기도 옷을 벗어 그녀에게 자기의 
알몸과 페니스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려면 혼자서 살 것이지 뭐하러 시집을 왔어. 이 등신아!" 그는 그녀를 침대
에 쓰러뜨리고 난폭하게 처녀성을 빼앗았다. 그 후로 그녀는 불감증에 걸리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앞에서 처녀가 그 성적인 운명을 감당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여러 가
지 저항에 대하여 보아 왔다. 섹스의 입문은 생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하나의 작업이다. 
이 입문을 단지 하룻밤 사이에 마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야만적인 행위이다. 
최초의 성교는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도 그것을 그럴 듯한 의무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부조
리이다.
  여자는 자기에게 가해지는 이상한 행위가 신성시되어 있고, 사회, 종교, 가족, 친구들
이 모두 자기를 남편의 손에 마치 주인에게 넘겨주듯이 엄숙하게 넘겨주기 때문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것은 결혼이 결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이 성행위도 
자기의 장래를 속박하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절대화
된 것처럼 느끼게 된다. 자기가 일생을 맡기기로 한 이 남자는 그녀에게 모든 남자를 구
체화하고 있다. 그리고 남자도 그녀 앞에 미지의 인간으로 나타난다. 한 생애에 걸쳐서 
반려자가 되므로 이 미지의 형태는 대단히 큰 중요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한편 남자도 자기 자신에게 닥치는 구속 때문에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도 걱정과 
콤플렉스가 있다. 그래서 소심해지고 어색해지며, 반대로 난폭해지기도 한다. 결혼식이 
엄숙하기 때문에 첫날밤에 무능해지는 남자가 많다. 자네는 <강박관념과 신경쇠약>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결혼행위를 완벽하게 성취할 수 없어서 자기들의 운명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이 때문에 
언제나 치욕과 절망에 시달리고 있는 젊은 부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작
년에 대단히 희한한 비극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화가 난 장인이 풀이 죽은 사위를 살페트
리에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장인은 이혼을 청구하기 위해 필요한 의학증명을 얻고 싶
다고 말했다. 사위는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결혼하고 나서 거북하고 부끄러운 느
낌이 들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욕정이 너무 격하면 처녀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지나치게 사양을 하면 굴
욕을 느끼게 된다. 여성은 자기들에게는 고통을 주고 자신은 에고이스틱한 쾌락을 즐기는 
남자를 한평생 미워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자기를 경멸한 것처럼 생각되는 남자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원한을 품게 된다.
  한편 첫날밤에 처녀성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것이 불가능 했던 남자에게 
그런 감정을 품는 경우도 많다. H. 도이치는, 신부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외과수
술로 처녀성을 빼앗아줄 것을 의사에게 부탁하러 온 소심하고 무능한 남편의 사례를 몇 
가지 들고 있다. 그 이유라는 것이 대개 하찮은 것이다. 정상적으로 행위를 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여자는 두고두고 원한을 품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프로이트가 관찰한 하나의 사
례는 남편의 성적 불능이 여자에게 정신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여자 환자는 한 방에서 가운데에 테이블이 놓여 있는 다른 방 사이를 뛰어다니며 왔
다갔다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보를 일정한 방법으로 덮은 뒤, 하녀를 불러 그 
테이블에 가까이 오게 했다간 곧바로 내보내곤 했다... 이 강박관념을 설명하기 위해 H. 
도이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상기했다. 그 테이블보에는 더러운 얼룩이 묻어 있었기 때문
에 이것을 펼 때마다 일부러 그 얼룩을 하녀의 눈에 띄게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남
편이 남성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첫날밤의 일을 다시 해보이고 있는 것이다. 남편은 다시 
해보기 위해 여러 번 자기 방에서 신부 방으로 왕복했었다. 침대를 매만지러 오는 하녀 
보기가 부끄러워 그는 피가 묻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빨간 잉크를 시트에 묻혀놓았다.
  
  첫날밤의 에로틱한 체험은, 떨어질까 봐 초조해하는 시험을 치르는 것과 비슷하다. 각
자가 자기에게 어려운 문제투성이여서, 상대방을 친절히 대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분위
기는 고압적인 자세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것 때문에 아내가 불감증 환자가 되게 하
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전혀 이상하게 여길 일이 못 된다. 한편 신랑에게 어려운 문제
는, 아내를 너무 난잡하게 자극하면 그녀가 모욕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걱정
들은 특히 미국의 남편을 불능으로 만드는 것 같다. 더구나 대학교육을 받은 부부 사이에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킨제이 보고는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자가 보다 의식적
이므로 그만큼 더욱 억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자제하면 성감을 일으키는 데 실
패하게 된다. 이런 모순은 여자의 태도가 애매한 데서 일어난다. 그녀는 쾌락을 원하면서
도 한편으로는 이를 거절한다. 상대방에게 자제를 요구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고민한다. 
예외적으로 행복한 경우를 제외하고, 남편은 반드시 바람둥이가 아니면 성불능자로 보인
다. 그러므로 부부행위가 여자에게 흔히 불쾌한 노역에 불과한 것도 놀랄 일이 못 된다.
  
  "싫어하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녀에게 큰 형벌이다." 하고 디드로는 말하고 있
다.(<여자에 관하여>에서) 나는 남편이 자기에게 접촉하면 혐오스러워 몸부림치는 한 정
숙한 여성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욕실에 가서 아무리 몸을 씻어도 아내로서의 소임이라
는 그 더러움을 깨끗이 씻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혐오감은, 우리(남성)에
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들의 기관은 한결 관대하다. 다수의 여성들은 그 지극
한 쾌락을 채 맛보지도 못한 채 늙어가고 또 죽게 될 것이다. 내가 '일시적 간질'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 쾌감은 여성들에 있어서는 극히 드물지만 우리 남성들은 그것을 부르기만 
하면 반드시 도달할 수 있다. 가장 사랑하는 남성의 품안에서도, 그 지극한 행복감은 그
녀들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 여성을 상대해서 그것을 느끼게 된다. 
여성들은 우리들보다 감각을 제어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보상을 얼른 받지 못하고, 또 
확실히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들은 수없이 많이 기대에 어긋나게 된다.
  
  사실 많은 여성들은 합 번도 쾌락이나 도취를 알지 못한 채,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된다. 그녀들은 의사의 증명이나 다른 구실을 만들어, 여성의 의무인 더러움에서 벗어나
려고 한다. 킨제이 보고는, 미국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아내들이 "성교횟수가 너무 빈번
하다고 생각하고, 남편들이 자주 접근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도 말한 바와 같이 여성의 에로티시즘의 가능성은 거의 무한하다. 이런 모순은 결혼이 여
성의 에로티시즘을 통제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이것을 죽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리아크
는 <테레즈 데케이루>에서 이성적으로 결혼한 젊은 여성의 결혼, 특히 부부의 의무에 대
한 반응을 기술하고 있다.
  
  테레즈는 결혼에서 지배나 소유를 구하기보다는, 도피처를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테레즈를 결혼으로 몰고간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실제적인 처녀로서, 
가정적인 딸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분명한 지위를 발견하려고 서둔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위험에서 그녀는 자기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테레즈는 약혼시절처럼 얌
전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가족이라는 블록 속에 들어가 박혔다. '그녀는 그 곳에 
정착했다.' 하나의 질서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위험에서 벗어났다.
  생클레르의 비좁은 성당 안에서 치러진 그 숨막힐 듯한 결혼식 날, 부인들의 떠드는 소
리가 목쉰 오르간 소리를 지워버리고, 그녀들의 체취가 제단의 향내를 압도한 그 결혼식 
날, 그날이야말로 테레즈가 이제 자기는 끝장이라고 느낀 날이었다. 그녀는 몽유병자처럼 
우리 속으로 들어갔다. 육중한 문이 요란하게 닫히는 소리에 불행한 처녀는 갑자기 눈을 
떴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테레즈는 이제 앞으로는 자기 마음
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뭇가지 아래를 맴도는 음험한 불처럼 앞으로 그
녀는 가정에 깊숙이 처박혀 잠자코 숨어 있어야 한다...
  농민식과 부르조아식이 각각 절반씩 합쳐졌던 그 결혼식날 밤에 처녀들의 현란한 의상
으로 눈부신 군중들이 신랑 신부의 차를 에워싸는 바람에 속도를 낼 수가 없어 천천히 굴
러가야 할 정도였다. 모두들 갈채를 보냈다... 테레즈는 그 후에 계속된 밤에 일어난 일
들을 상기하면서 중얼거린다. "지겨웠어." 그리고 다음에 상기한다. "아니 그다지 싫지는 
않았어." 이탈리아의 호수지방으로 신혼여행을 하는 동안에 테레즈는 그렇게 괴로웠던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녀는 본심을 보여주지 않는 유희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녀는 자신의 육체를 이렇게 가면 속에 감출 줄 알았던 것이며, 그로 인한 쓰디쓴 쾌락을 
맛보고 있었다. 한 남자가 강제로 밀어 넣어준 이 미지의 감각세계, 아마도 그 세계엔 그
녀를 위한 행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행복인가? 빗속에 가려진 풍경을 보고 앉아, 날이 개고 해가 비치
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고 상상하듯, 테레즈는 관능의 기쁨을 발견하고 있었다. 베르나르, 
이 얼빠진 눈을 가진 젊은 남자... 쉽사리 속일 수 있는 남자! 울타리 너머 죽통 앞에서 
코를 울리고 있는 귀여운 돼지새끼처럼 그는 자기의 쾌락 속에 빠져 있었다. '바로 내가 
죽통이야.' 하고 테레즈는 생각했다... 육체에 관한 모든 것을 정확히 분류하고, 성실한 
남자의 애무와 호색한의 애무를 구분하는 것을 그녀는 어디서 배웠을까? 참으로 분명한 
것이다...
  가엷은 베르나르, 다른 남자보다 특별히 나쁜 사람도 아닌데! 그렇지만 정욕은 우리에

게 접근하는 사람을 괴물로 바꿔버린다. '나는 언제나 죽은 척했다. 저 미치광이, 저 간
질병 환자가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나를 죽여 버리기라도 할 것 같아서...'
  
  여기서 더욱 솔직한 증언이 있다. 슈테켈리 수록한 고백이다. 나는 그중에서 결혼생활
에 관계가 있는 부분만 인용하고자 한다. 그녀는 세련되고 교양 있는 환경에서 자라난 28
세의 여성이다.
  
  나는 약혼하여 행복했었다. 이제 비로소 누구의 보호를 받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인간이 되었다. 나는 귀염을 받았고, 약혼자는 나에게 찬미
를 아끼지 않았다. 이것은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키스(나의 약혼자는 다른 애무
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는 나를 화끈 달아오르게 했고, 결혼날짜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
다... 결혼식을 올리는 날 아침에 나는 몹시 흥분하여 속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토록 고대했던 미지의 일에 대해 알게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남자가 여자의 질 
속에 오줌을 눈다는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침실로 들어가, 남편에게 저쪽으
로 가 있으라고 말했다. 사실 이때 난 가벼운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그
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첫날밤에 옷을 벗는 장면은 그때까지 상상 속에서 중요한 역할
을 하고 있었다.
  침대에 눕자, 그가 대단히 난처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나중에 그가 고백한 바에 의하
면, 내 모습을 보고 몹시 흥분했다고 하였다. 내가 빛나고 기대에 찬 청춘. 그 자체로 그
에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옷을 벗고 곧 불을 껐다. 나에게 키스하자마자 그는 나를 소
유하려고 했다. 나는 겁이 나서 몸을 만지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의 곁을 떠나
고 싶었다. 사전에 아무 애무 없이 대뜸 그렇게 하기 때문에 겁이 났던 것이다. 나는 그
를 난폭하다고 생각했고 그 후에 이것을 자주 비난했다. 하지만 난폭한 것이 아니라 서툴
고 센스가 없는 것이었다. 밤새도록 여러모로 시도해 보았으나 잘되지 않았다. 나는 대단
히 불행했다. 자기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웠다. 나는 애 자신의 어딘가가 잘못 되 있고, 몸
에 결함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나는 그의 키스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10일이 지나서야 그는 드디어 내 처녀성을 빼앗을 수 있었다. 성교는 몇 초밖에 계속되
지 않았고 가벼운 통증 이외에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것은 큰 환멸이었다! 그 후
에 성교에서 약간의 즐거움을 느끼기는 했지만, 성공은 대단히 어려웠다. 남편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직도 애쓰고 있다... 프라하에서 독신인 시동생의 침대에서 내가 잔 사
실을 알고 나면 그가 무엇을 느끼게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내가 처음으로 오르가즘을 
느끼고 행복감을 맛보게 된 것은 이 방에서였다. 남편은 처음 몇 주일 동안은 날마다 나
를 애무했다. 나는 오르가즘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만족은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 
짧았고, 나는 울고 싶도록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출산 후에... 성교는 점점 
불만족스러웠다. 간혹 오르가즘에 도달해도 남편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끝나곤 했었다. 
나는 번번이 불안한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앞으로 그는 얼마 동안이나 계속할 수 
있을까? 그가 나를 어중간하게 건드려놓고 혼자서 만족을 느끼면 나는 그를 미워했다. 나
는 가끔 성교 도중에 시동생과 분만할 때의 의사를 머리에 떠올렸다. 남편은 손가락으로 

나를 자극하려고 시도해 보았다... 나는 몹시 흥분했으나, 그런 방법은 부끄럽고 불건전
하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도 쾌감을 느끼지 못했다... 결혼기간을 통하여 그는 내 몸의 어
느 한군데도 애무한 적이 없다. 어느 날 이제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내게 말했
다... 그는 내 알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잠옷을 벗지 않았고, 성교
는 밤에만 했기 때문이다.
  
  대단히 관능적인 이 여자는 그 후 애인의 품안에서 완전히 행복해졌다.
  약혼은 젊은 처녀에게 점진적으로 성교육을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 기간에 처녀가 미
래의 남편을 알아버리게 될 경우에 그녀의 입장은 신부의 그것과 별로 차이가 없다. 즉 
약혼이 결혼과 같을 정도로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최초의 성교는 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녀가 일단 몸을 허락하면, 임신까지 하게 되면 완전히 매이게 되겠
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그녀 쪽에서 파혼을 통보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첫 경험의 어려움은, 만일 사랑이나 정욕을 두 사람이 완전히 공감하고 있을 경우에는 
쉽사리 극복할 수 있다. 애인들이 그들의 자유를 서로 자각하면서 주고받는 기쁨에서 생
리적인 사랑은 그 힘과 품위를 갖게 된다. 그 경우에 그들의 행위는 하나도 부끄러울 것
이 없다. 왜냐하면 양쪽 다 그런 행위를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바라
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벌족인 의욕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야 할 결혼의 원칙이 권리나 의무로 바
뀌어 버리기 때문에 불쾌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결혼의 원칙은, 그 일반성 속에서 서로
의 육체를 파악하려고 하므로 육체에 도구적인 성격, 따라서 타락한 성격을 부여하게 된
다. 물론 부부생활의 초기에 두 사람의 관계가 개성화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성적 수련이 때로는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첫날밤부터 부부간에 행복한 생리
적인 매력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결혼은 아직도 육체에 수반되는 피의식을 지워버리므
로 여자의 기분을 풀어주는 힘이 있다. 언제나 규칙적으로 동거한다. 육체의 친밀성을 조
성하여 성적 성숙에 유리하다. 결혼 초기에 매우 만족스러워 하는 아내를 흔히 볼 수 있
다. 이런 아내는 이런 만족으로 말미암아 남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므로, 후에 
남편이 여러 가지로 속을 썩여도 용서하게 된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한 일이다.
  "불행한 부부생활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는 아내는 반드시 그 남편에게 만족을 느끼는 
여자들이다." 하고 슈테켈은 말하고 있다. 이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젊은 처녀가 일생
을 오직 한 사람의 남자, 성적으로 불만스러운 만자와 동침하는 것은 역시 큰 모험이 아
닐 수 없다. 그녀의 성적인 운명은 오로지 이 상대방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
다. 이것은 레옹블륌이 <결혼에 대하여>라는 저서에서 올바로 지적한 모순이다.
  습관적인 결합이 결국 사란을 낳을 수 있는 여러 기회를 제공한다는 주장은 위선이다. 
실제적, 사회적, 도덕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결합된 부부에게 일생 동안 서로에게 성적 행
복을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조리의 극치이다. 그러나 이성적 결혼을 주장하는 사람들
이 연애결혼이 반드시 부부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우선 젊은 처녀가 경험하는 이상적인 사랑은 반드시 성적인 사랑에 부
합되는 것은 아니다. 처녀시절의 플라토닉한 존경과 애정, 몽상, 그녀의 어린애 같은 혹

은 처녀다운 정열 등이 나날의 생활에서 닥치는 모든 시련을 견디게 하고 또 언제까지나 
영속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아무리 처녀와 약혼자 사이에서 성실하고 격정적인 매력
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한평생 지속되는 생활설계를 지탱할 만큼 견고한 기반
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콜레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방랑의 여인>에서)
  
  성적 쾌락은 사랑의 무한한 사막 속에서 열렬하지만 대단히 작은 공간밖에 차지하지 못
한다. 이 작은 것이 너무도 불타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안전하지 못한 불꽃의 주위야말로 알 수 없이 막연한 위험이다. 짧은, 아니면 길었던 
그 한밤의 포옹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우리들 각자는 서로의 곁에 누워 있는 상대를 위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결혼 전에 이미 육체적인 사랑이 있었다거나, 혹은 결혼 초기에 벌써 그 것에 눈떠 있
을 경우에도 오래 지속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서로 사랑하는 두 연인의 욕망은 그들의 
개별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성적 사랑에는 확실히 정조가 필요하다. 그들은 이 개성이 
외부의 다른 경험에 의해 침해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두 사람은 서로가 대용될 수 없는 
존재가 되길 원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있어서도 정조라는 것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면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자발적인 경우에는 에로티시즘의 매력이 매우 빨리 사라진다. 
신기하게도 에로티시즘은, 그 순간에 연인 각자에게 육체관계 속에 하나의 무한한 초월로 
실존하는 존재를 부여한다. 아마도 이 존재의 소유는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그것은 특권
적인, 참으로 통렬한 방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서로간에 적
의, 혐오감, 냉담함이 있으면 에로틱한 매력은 사라진다. 그것은 존경심, 우정 등의 경우
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초월성의 움직임에, 세계 혹은 공동과업을 통해 결합된 두 사람의 
존재는 벌써 육체적으로 결합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결합이 의미를 잃
게 된 사실에서 그들은 그것을 혐오스럽게 여기게 되는 경우도 있다. 몽테뉴가 말한 '근
친상간'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에로티시즘은 타자를 향하는 움직임이며, 거기에 에로
티시즘의 본질적인 성격이 있다.
  그러나 부부는 그 결합의 내부에서 서로 '동일체'가 되어 버린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는 어떤 교환도, 또 어떤 증여나 정복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직도 연인과 같
은 기분에 머물러 있다면 마음속으로는 수치를 느끼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은 성행위가 각자 자기를 초월하는 주체적인 경험이 아니라 일종의 공동의 자위행위처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상대를 자기의 욕구충족에 필요한 도구로 생각하는 것을, 
부부간의 예의가 잘 감추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 예의가 제거되면 그것은 분명하게 들
어난다. 예를 들면 라가슈 박사가 그의 저서 <질투의 성질과 그 형태>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를 통해 관찰되는 것들이 그것이다.
  아내는 남자의 성기를 자기에게 소유권이 있는 일종의 쾌락의 도구처럼 생각하여, 찬장 
속에 간수한 통조림처럼 그것에 탐욕을 느낀다. 만일 남편이 그것을 다른 여자에게 주게 
되면 자기 몫이 없어진다. 그녀는 귀중한 정액이 낭비되지 않나 싶어 남편의 팬티를 유심

히 살펴보기도 한다. 주앙도의 <전쟁기록>에는, '남편의 속옷을 살피며, 남편이 잠들어 
있는 동안 외도의 흔적을 발견하려고 탐색'하는 아내의 조사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남
성은 남성대로 아내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마음껏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킨다.
  이 거친 욕구충족이 인간의 정욕을 충분히 채워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외관상 가장 
정상으로 보이는 이 포옹 속에 때때로 씁쓰레한 뒷맛을 느끼는 것이다. 여성이 에로틱한 
환상을 이용하는 경우는 자주 일어난다. 슈테켈은 25세의 여성이 훨씬 연상인 억센 남성
에게 갑자기 겁탈당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남편을 상대로 가벼운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경우를 인용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가 폭행당하고 얻어맞는 것을 마음속에 그리면
서, 남편을 다른 사람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한편 남편도 마찬가지 꿈을 꾼다. 아내의 몸 위에서 그는 카바레에서 흘끗 쳐다본 댄서
의 넓적다리나 사진에서 본 벌거벗은 여인의 젖가슴을, 혹은 그와 유사한 추억이나 이미
지를 가진다. 또는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의 정욕의 대상이 되어 추행당하는 장면을 상상
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타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결혼은 괴상한 도치나 도착을 만들어낸다. 세련된 연기자, 밖으로 모이는 것과 현실 
사이의 모든 한계를 최소화하려는 두 파트너의 희극" 이라고 슈테켈은 말한다. 극단에 이
르면 분명히 병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남편은 엿보는 심리학자가 된다. 아내에게서 매력
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는 그녀가 다른 애인과 동침하는 광경을 목격한다거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때로는 아내가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사디즘적으로 괴롭히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아내의 의식이나 자유가 분명히 노출될 수 있고, 따라서 
남편은 자신이 소유하는 것이 바로 인간적인 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싶은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실제는 온순한 남자를 지배자나 폭군처럼 보려는 여자에게는 마조히즘적인 
요소가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여성은 수도원에서 경건하게 자랐는데, 낮에는 억척스럽고 
지배욕이 강한 편이지만, 밤이면 남편에게 자기를 회초리로 때려 달라고 졸라대는 바람에 
남편은 마지못해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결혼생활에서는 병적인 행위도 규모 있고 냉정
한 모습으로 보이며 또 진지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사실 육체적인 사랑을 절대적인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수단
으로만 여길 수도 없다. 육체적인 사랑은 인간생활을 정당화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다른 
무엇에 의한 어떤 정당화도 받아들일 수 없다. 즉 육체적인 사랑은 모든 인간생활에서 삽
화적인 동시에 자주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즉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은 자유로워야 한다.
  
  부르조아적인 낙천주의는 젊은 아내에게 결코 사랑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녀의 눈에 어
른거리는 이상은 바로 행복이다. 즉 내재와 반복 속에서 조용히 안정을 유지하려는 이상
적인 생활이다. 부르주아지가 한창 번영을 누리던  한 시기에는 이 이상이 부르주아지 전
체, 특히 지주계층 전체의 이상이었다. 그들에게 오직 과거의 평화적인 보존, 현상유지 
따위가 목표였다. 야심도 정열도 방향감각도 없이, 무한히 되풀이되는 날들 속에 도금된 
평범이 있을 뿐이다. 그 이유를 반성하기보다는 죽음을 향해 조용히 미끄러져 가는 그런 
생활이 계속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행복한 소네트>의 작가가 주장하는 것도 그렇다. 에피쿠로스나 제논의 사상
의 흐름을 이어받은 이 사이비 철학은 오늘날에는 이미 신망을 잃고 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여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도 않고 또 가능한 일도 아니
라고 생각된다. 남성의 천직은 행동이다. 생산하고, 싸우고, 창조하고, 발전하여, 세계의 
전체성과 미래의 무한 속에 자기를 초월해야 한다.
  그런데 전통적인 결혼은 여성에게 남성과 함께 자신을 초월하게 하지 않는다. 결혼은 
여성을 안으로 가두어 버린다. 그러므로 여성에게는 안정된 생활의 유지가 유일한 목적이 
된다. 그 안정된 생활이라는 현재는 과거의 연장으로 된 것이며, 내일의 위협을 벗어나는 
것이다. 즉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 없어도 여성은 남편에게 부부애라는 이름의 
존경심과도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녀는 자기가 관리를 맡고 있는 가정의 네 벽 사
이에 세계를 가둬둔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인류의 종을 영속시킬 것이다.
  그러나 실존하는 자는 누구나 그 초월성을 단념할 수 없다. 설사 그것을 부정하려고 고
집을 부려도 어쩔 수 없다. 옛날의 부르주아는 기성질서를 보존하고 번영시킴으로써 그 
미덕을 과시했고, 신을 섬겼고, 또 자신이 속한 나라의 제도에, 문명에 봉사했다. 행복하
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을 뜻했다. 여성에게 있어서의 조화된 가정생활
도 최종목적을 향해 초월되어야 한다. 바로 이런 여성의 개성과 세계 사이를 중개하는 자
가 남성이다.
  남성은 여성의 우연한 사실성에 인간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자신이 아내 곁에서 
일을 도모하고, 행동하고, 싸우는 힘을 얻게 된다는 사실로 그 아내를 정당화한다. 여성
은 오로지 자신의 생활을 남성의 손에 맡길 뿐이며, 바로 그 점을 두고 남성은 많은 의미
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에게는 비굴하게 체념하는 마음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여성은 바로 그 느낌으로 인해 보상을 받고 있다. 남성의 힘에 의해 
인도되고 보호되면서 그녀는 본래의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필요한 
존재가 된다. 둥지 속의 여왕처럼, 자신의 영지 안에서 평화롭게 휴식하면서, 남성을 매
개로 하여 무한한 우주나 시간을 가로질러 이끌려간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주부로서, 
여성은 결혼 속에서 사는 힘의 의미를 찾아내게 된다. 이 이상이 현실에 어떤 형태로 나
타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행복의 이상은 귀족의 저택이든 초막이든, 언제나 그 집 울타리 안에서 나타난다. 집은 
영구불변과 분리를 구체화한다. 가정이 고립된 밀실로서 형성되어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채 그 가정만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곳은 바로 그 네 벽 사이이다. 가구나 조상의 초상화 
사이로 간직된 과거가 안전한 미래란 바로 이런 것이라며 가르치고 있다. 정원에는 4계절 
먹을 야채들이 그 정확한 주기를 보여주고 있다. 해마다 같은 꽃으로 장식된 같은 봄이, 
그 불변의 여름이, 그리고 한결같은 과일을 영글게 하는 가을이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도, 무한을 향해 결코 일탈하지 않는 얌전한 원을 그리면서 회전할 뿐
이다. 소유지 위에 쌓은 모든 문화에는 집의 비중과 미덕을 노래한 풍요로운 문학이 으레 
있기 마련이다. <집>이라는 앙리 보르도의 소설에는 집이 가진 모든 부르주아적인 가치를 
요약하고 있다. 과거에의 충실, 인내, 저축, 선견지명, 가족이나 고향에 대한 사랑 등등. 

집을 노래하는 가수는 여성인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가족집단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
은 그녀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역할은 '로마의 귀부인'이 그 저택에서 수행하던 
시대 그대로 집의 '안주인'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집이 가부장제도적인 빛을 잃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집은 과거의 과
거의 몇 세대의 기억에 의해 압도되는 공간이 아니며, 다가올 시대를 그 곳에 가둬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거처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성은 아직도 가정안에서 옛날에 
집이 갖고 있던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존 스타인벡(미국의 소설가, 1
902~1963)은 <캐너리 로드>에서 늙은 여자 방랑객이 남편과 함께 사는 폐물이 된 철관 속
을 양탄자나 커튼으로 열심히 장식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남편이 창문도 없는데 커
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대해도 그녀는 듣지 않는다.
  이러한 배려는 여자의 고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신이 멀쩡한 남자라면, 자기 주위의 
물건들을 단지 도구로만 볼 뿐이다. 그는 그런 물건들을 각각 그 용도에 따라 처리한다. 
그의 질서-여자는 거시서 무질서밖에 찾아보지 못하지만-는 그의 손이 바로 닿는 곳에 담
배나 종이나 일에 필요한 도구가 있는 것이다. 특히 물질을 통하여 세계를 다시 창조하는 
일을 하는 예술가-조각가나 화가-는 자기가 살고 있는 물질적인 환경에 대해 전혀 무관심
하다. 릴케는 로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처음 로댕의 집에 갔을 때, 그의 집은 단순한 필요 그 이상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저 추위를 피하는 장소였고, 잠을 자기 위한 지붕이었다. 집은 그에게 
아무래도 상관없는 존재로, 그 고독이나 명상위에 조금도 부담을 주고 있지 않았다. 로댕
은 자기 안에 자기 집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늘이며, 은신처이며, 평화였다. 그는 자
신의 하늘, 자신의 숲, 무엇에 의해서도 막을 수 없는 강물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 자기 집을 찾아내려면 먼저 작품이나 행위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야 
한다. 남성이 가정에 대해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는 것은 전체적인 세계와 접촉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기획 속에 자기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성은 결혼생활 속에 갇
혀 있다. 그녀의 소임은 이 감옥을 왕국으로 바꾸는 것이다. 가정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자신의 신분을 쉽게 정의하는 변증법에 의해 정해져 있다. 여자는 스스로 목이가 됨으로
써 그것을 얻게 된다. 즉 원리를 버림으로써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세계를 단념함으
로써 하나의 세계를 정복하려고 한다.
  여성이 스스로 가정의 문을 지킬 때 억울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처녀시절은 
지상 전체를 자기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숲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좁은 공간 속에 갇혀 있다. 자연계는 제라늄 화분 하나만한 크기로 축소되어 버렸다. 벽
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V. 울프의 한 여주인공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이제 들에서 자라는 풀이나 히드(식물의 이름)의 상태로는 겨울과 여름의 차이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단지 유리창에 어리는 김이나 결빙에 의해 그것을 알 수 있을 뿐이
다. 전에는 너도밤나무 숲을 걸어가면서 여치의 푸른 깃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아름
다움에 감탄하고 도중에 부랑자나 양치는 목자를 만나기도 했는데... 지금은 새털 빗자루

를 손에 들고 이 방 저 방을 서성거릴 뿐이다.(<파도>에서)
  
  그러나 여자는 이런 제한을 부정하려고 한다. 벽으로 가로막힌 좁은 장소에 자기 형편
에 맞는 비용을 들여서, 지상의 동물이나 식물, 이국, 지나간 시대 등을 가둬놓는다. 가
정은 세계의 중심이 되고, 유일한 진리가 되기도 한다.
  바슐라르가 적절히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반세계 꼬는 반대의 것의 한 
세계'이다. 도피처, 동굴, 태로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가족을 지켜준다.
  이 어수선한 외면성이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특히 밤에 덧문을 닫으면 여자는 여왕이 
된 듯한 느낌이다. 세계를 두루 비추는 정오의 태양은 그녀를 곤욕스럽게 한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녀는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기가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이 보이지 않
기 때문이다. 전등 갓 아래서 여자는 자기 집만 비추는 자기 빛이 반짝거리는 것을 목격
하게 된다. 이제 그녀에게는 자기 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버지니
아 울프의 다음 문장은 밖의 공간이 어둠에 사라졌을 때 집에 집중된 현실이 어떤 것인가
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 밤은 유리창 밖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유리창은 바깥세계의 정확한 모습을 보
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상하게 왜곡시켜 질서, 안정, 확고한 지반 등이 집 내부에 
마련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와 반대로 바깥엔 유동적인 물체가 늘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하나의 반사와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
  
  자기 몸의 주위를 우단이나 실크나 도자기 등으로 에워쌈으로써 여성은 평소의 성생활
에서 만족되지 않던 관능적인 욕구를 어느 정도 채울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장식으로 자
기 인격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가구나 골동품을 고르고 만들고 발굴한 것은 여성이었으
며, 그것들을 미적으로 배치할 줄 안 것도 여성이다. 그런 심미감에는 좌우대칭적인 조화
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와 같은 도구류는 여자의 생활기준을 사회적으로 표시하면서 
그 개인으로서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하여 가정은 지상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몫
이며, 사회적인 가치가 그녀의 가장 내면적인 진실의 표시이다. 여성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속에서 열심히 자기를 탐구한다.
  여성이 자기 '보금자리'를 독점하는 것은 가상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다른 사
람에게 도움을 청할 때'에도 그녀는 자기도 손수 하고 싶어한다. 적어도 간독하고 비평하
고 점검하면서 하녀들이 일한 결과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여성은 자기 주거를 
관리함으로써 사회적인 정당화를 얻어낸다. 그녀는 일을 의생활, 식생활 등, 일반적으로 
가족적인 사회의 유지에 힘쓰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여성도 자기의 활동성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여성을 안에서부터 해방시키기보다
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하는 행위를 허용하지 않는 활동성이다.
  사람들은 가사에 대한 시를 써가며 높이 찬양한다. 가사는 사실 여성을 물질과 싸우게 
하고, 또 더불어 살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그러한 친밀성을 통해 여성 자신
의 존재를 드러내고 또 학정시켜나가는 것도 사실이다. 마들렌 부르두스는 <마리를 찾아

서>에서 여주인공이 오븐을 닦을 때 느끼는 기쁨에 대해 적고 있다. 잘 닦인 금속이 반짝
이는 이미지를 반사하고 있는 자유와 힘을 그녀는 손가락 끝에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지하실에서 올라올 때, 각 층에 이를 때마다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물이 가득찬 
양동이의 무게를 사랑한다. 그녀는 언제나 그 특유의 냄새와 까슬까슬한 촉감과 입체감을 
지닌 단순한 물건들을 좋아했다. 그녀는 그런 물건들을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마리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물러서지 않고, 불이 꺼진 오븐이나 비눗물 속에 손을 담가 금
속의 녹을 닦아 광택을 내고, 마룻바닥에 초를 칠하고, 테이블 위에 흩어진 찌꺼기를 팔
을 휘둘러 긁어모은다. 그녀의 손바닥과 만지는 물건 사이에는 안전한 양해나 우정 같은 
것이 있다.
  
  많은 여류작가들은 금방 다린 셔츠나 비눗물의 파르스름한 빛이나 흰 시트, 반짝이는 
구리그릇 등에 대해 애정을 갖고 기술한다. 가정에서 여성이 가구를 청소하거나 닦을 때
에는 "목재에 광택을 내는 손의 상쾌한 참을성을 삼투의 꿈이 받쳐주고 있다."고 바슐라
르는 말한다. 주부는 일을 끝내고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기쁨을 알고 있다. 그러나 
테이블의 광택이나 촛대의 반짝임, 풀을 잘 먹인 속옷의 순백, 이런 귀중한 품질이 분명
히 드러나게 하려면, 우선 소극적인 행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체의 나쁜 원리는 배제되
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주부가 마음을 다 바치는 본질적인 꿈이다."라고 바슐라르는 
쓰고 있다. 활동적인 깨끗한 꿈, 즉 불결을 추방하고 이것을 정복하고 얻는 깨끗한 꿈이
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대지와 휴식의 꿈>에서)
  
  청결을 위한 투쟁의 상상력에는 어떤 강한 자극이 필요한 모양이다. 이 상상력은 심술
궂은 분노에 의해 자극 받는 것이 분명하다. 수도꼭지를 닦으면서 여자는 어떤 심술궂은 
미소를 짓고 있을까. 기름이 묻은 더러운 걸레에 끈적거리는 지저분한 마분을 묻혀 문질
러댄다. 일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적의가 치솟아 오른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런 천한 일
을 해야 하는가? 그런데 걸레가 마르면 즐거운 악의, 억세고 수다스러운 악의가 비로소 
나타난다. '수도꼭지야, 너는 거울이 돼야 해. 냄비야, 너는 태양이 돼야 해!' 이윽고 놋
쇠가 반짝거리고 순진한 소녀처럼 활짝 웃을 때 겨우 평화를 느끼게 된다. 주부는 빛나는 
승리를 만족스러운 듯이 잠자코 바라본다.
  
  퐁주는 세탁통 속에서 불결과 청결의 투쟁상태를 묘사하고 있다.(리아스의 <빨래하는 
여자> 참조)
  
  적어도 한겨울 동안 세탁통과 친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대단히 감동적인 어떤 기분이
나 성질을 모를 것이다.
  먼저-비틀거리면서-더러워진 빨랫감이 가득 들어 있는 세탁통을 땅바닥에서 단숨에 들
어 올려 가마솥 위에 올려놓고 잠시 이리저리 움직여 본 다음에 화로의 둥근 쇠 위에 잘 
고정시켜야 한다. 밑에서 불을 쑤셔 점점 강하게 해야 한다. 자주 미지근한 혹은 화끈거

리는 화로 벽을 만져본다. 다음에 세탁통 안에서 들려오는 물이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
고, 뚜껑을 열고 분출력의 강도나 물이 어느 정도 끓어오르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끝으로 아직 끓는 그릇을 다시 땅에 내려놓는다...
  세탁통은 더러운 빨랫감으로 가득차서,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동, 끓어오르는 분노가 그 
상층부에 밀려 흘러 이윽고 혐오감으로 구역질이 나게 하는 이 산더미 같은 더러운 빨랫
감 위로 비처럼 떨어진다. 끊임없이 이런 혐오감이 계속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정화에 도
달하게 된다...
  확실히 속옷은 세탁통에 처넣으면 벌써 때가 대충 빠진다... 그래도 역시 더러운 느낌
을 갖게 되는 세탁통이 감동적인 노력에 의해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처리하여 더러워진 
천은 찬물에 헹궈져 새하얀 모습으로 나타낸다.
  이렇게 해서 기적이 이루어진다.
  갑자기 무수한 흰 깃발이 펄럭인다. 항복이 아니라 승리의 표시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
지 그 곳에 사는 물질적인 표시만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은 가사일에 대해 유희의 매력을 줄 수 있다. 소녀는 은그릇에 윤을 내거
나 문잡이를 닦으면서 논다. 그러나 여자가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
는 자기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가정에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력의 유일
한 보상, 즉 나중에 바라보는 기쁨을 결코 느끼지 못할 것이다.
  미국의 어느 보도기자는, 합중국 남부의 '가난한 백인'들과 함께 몇 달 동안 생활하고 
나서, 더러운 주거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끝에 기진맥진한 한 
여성의 비참한 운명을 그렸다. 그녀는 남편과 7명의 자녀들과 함께, 벽이 연기로 그을고 
빈대가 우글거리는 판잣집에 살고 있었다. 중요한 방 안의 벽난로는 푸르죽죽한 초벌로 
발라져 있고, 테이블 하나와 벽에 걸린 그림 몇 장은 마치 제단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누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G 부인은 눈물이 글썽해져서 말했다. "아! 나는 아집이 아주 
싫어요! 이 집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어요!"
  수많은 여성들의 운명은 이와 같이, 결코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 투쟁 속에서 끝없이 거
듭되는 피로 밖엔 얻지 못한다. 가장 혜택을 누린다고 하는 경우에도 이 승리는 결코 결
정적인 것이 못 된다. 가정주부의 일만큼 시지프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
으로, 한없이 끌어올리는 작업을 계속함)의 형벌과 비슷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날마다 
접시를 씻고, 가구의 먼지를 털고, 속옷을 기워야 한다. 그러나 내일이면 그것은 또다시 
더러워지고, 먼지투성이가 되고, 터질 것이다. 주부는 한 곳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힘을 
빼고 있다.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를 영구화하고 있을 뿐이다. "닦아
서 뭐합니까. 내일 또 닦아야 할 텐데요."
  아직 모든걸 완전히 단명할 수 없는 많은 젊은 처녀들이 이런 실의에 빠져 있다. 나는 
16살짜리 어느 한 여학생의 작문이 언제나 다음과 같은 발로 시작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
하고 있다. "오늘은 대청소 날이다. 어머니가 응접실을 닦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도망
치고 싶다. 내가 어른이 되면 우리집에는 절대로 대청소날을 정해두지 않을 것이다."
  어린이는 미래를 어떤 산꼭대기를 향해 끝없이 오르는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 아이

는 어머니가 접시를 씻고 있는 부엌에서, 몇 해 전부터 오후 마다 같은 시각에 기름 낀 
물에 양손을 담그고 꺼칠꺼칠한 행주로 그릇을 닦는 것을 벌견하게 된다. 그리고 죽을 때
까지 이 양손은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먹고, 잠자고, 청소를 한다... 세월이 아무리 흘
러도 하늘에는 기어오르지 못한다. 날마다 어제를 모방한다. 그것은 헛되고 희망이 없는 
영원한 현재이다. <먼지>라는 중편소설에서 콜레트 오드리는 시간에 도전하는 슬픈 공허
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튿날 그녀는 소파 밑에 빚자루를 뻗어 무엇인가 꺼내었다. 처음에 그녀는 그것이 헌 
헝겊조각이나 새털뭉치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랫동안 쓸지 않은 높은 장 위나 가
구 위의 벽 사이에 흔히 쌓이는 먼지덩어리였다. 그녀는 이 기이한 물건을 앞에 놓고 생
각에 잠겼다. 이미 8주 내지 10주일이나 그들이 이 집에 살고 있는데, 쥘리에트의 주의에
도 불구하고 이런 먼지덩어리가 생겨 마치 어린시절 항상 공포심을 심어주던 그 잿빛 짐
승처럼 구석에 숨어 있다. 고운 재와 같은 먼지는 그 동안 얼마나 소홀했는가 하는 것과 
이윽고 생기는 포기의 실마리가 된다. 이 먼지는 실내의 공기가 마찰하는 옷, 열린 창문
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통해 만져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게 쌓이고 또 쌓여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 덩어리는 이미 단지 먼지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의기양
양하게 분명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쌓이고 쌓여서 폐물이 되었다. 제법 아름답기까지 하
고, 들장미의 송이보다 더욱 투명하고 가볍지만 관계가 없다... 먼지는 청소하는 모든 능
력에 이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점령했다. 청소기는 불가항력의 불결과 싸우는 인간의 
노력이 모두 실패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실패를 상징하고 
있다.
  
  ...두 사람의 공동생활이 그 모든 원인이다. 찌꺼기를 만들어내는 그들의 식사, 어디서
나 섞이는 두 가지 먼지... 어느 가정에서나 계속해서 이런 작은 오물들을 배출해내고 있
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끄는 깨끗한 셔츠를 입고 외출하기 위해, 당신의 남
편인 기사의 생활이 조금 나아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여자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 마르그리트의 머릿속에는 이런 공식이 들어 있다. '마루를 깨끗이 닦을 것... 놋그릇
을 깨끗이 닦아놓을 것... 그것을 사용하여 두 사람의 생활을 깨끗이 보존하는 것이 그녀
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이다.
  
  빨래를 하고 다름질을 하고 장롱 구석에 숨어 있는 먼지를 청소하는 것은, 삶을 거부하
면서 죽음을 막는 일이다. 왜야하면 시간은 같은 작용으로 창조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주부는 그 부정적인 양상밖에 파악하고 있지 않다. 그녀의 태도는 마니교도의 그것이다. 
마니교의 특징은, 선과 악의 두 원리를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선은 적극적인 활동
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악을 소멸시킴으로써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악마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마니교적이 아니다. 왜야하면 신에게 몸을 
바쳐야 악마와 잘 싸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악마를 무찌르기 위해 악마에게만 몰두하
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초월과 자유의 모든 이론은 악의 패배를 선에의 진보에 종속시킨다. 그런데 여성은 보
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집, 방, 더러워진 속옷, 마루 등은 
응결된 물건이다. 그런 물건에 스며드는 악의 원리를 여성은 한없이 쫓아버리는 일밖에 
할 수 없다. 여성은 먼지, 얼룩, 흙탕물, 때를 공격한다. 여성은 죄와 싸우고, 악마와 싸
운다. 그러나 적극적인 목표롤 향하는 대신에 쉴새없이 적을 쫓아내기만 하는 것은 슬픈 
운명이다. 주부는 흔히 분노 속에서 그 운명을 견디고 있다. 바슐라르는 이에 대해 '심술
궂다'는 말을 사용했다. 같은 의미의 말은 한 정신분석 학자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에 의하면 가정적인 일에 집착하는 것은 사드 마조히즘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이 병
의 특징적인 기벽은 자유가 원치 않는 것을 자유에게 원하게 하는 것이다. 소극성, 불결, 
악을 운명으로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주부는 오히려 그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운명을 요
구하면서 광적으로 그 먼지를 향해 사납게 돌진한다. 그녀는 모든 생명의 약동이 뒤에 남
기는 얼룩이나 쓰레기를 통하여 인생 자체를 공격한다. 누구라도 그녀의 영역에 침범하
면, 그녀는 눈을 심술궂은 불꽃으로 빛난다. "발을 닦아라. 너는 뭐든지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구나. 그걸 만져서는 안돼." 그녀는 주위의 사람이 숨도 못 쉬게 하고 싶어한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소란을 떤다. 모든 일에 수고가 뒤따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아이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곧 잔손이 가야 한다. 그녀는 인생에서 붕괴의 약속, 무한한 
노력의 요구만을 보았기에 살아가는 기쁨을 완전히 잃고 있다. 냉혹한 눈과 걱정스럽고 
긴장한, 그리고 언제나 불안한 얼굴을 학 있다. 신중과 인색으로 자기를 방어한다. 그녀
는 창문을 굳게 닫는다. 왜냐하면 햇빛과 함께 벌레나 홀씨, 혹은 먼지가 날아들기 때문
이다. 게다가 햇빛은 실크벽지를 망쳐놓는다. 낡은 안락의자는 커버 밑에 숨겨져 나프탈
렌 냄새를 마구 풍긴다. 강한 햇살은 의자의 색깔도 바래게 한다. 그녀는 이런 보물을 찾
아온 손님에게 내보이면서도 큰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그녀의 경계심은 점점 심해져서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적의를 품게 된다. 가구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쌓여 있지나 
않나 해서 흰 장갑을 끼고 살펴보는 시골 주부들이 곧잘 화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몇 
해 전에 파팽 자매가 실연한 것은 이런 종류의 여자들이다. 불결에 대한 그녀들의 증오는 
하인이나 세상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침울한 성벽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여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인생을 사랑하는 여자들은 남을 증오하는 일이 없다. 콜레트는 '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녀는 민첩하고 활동적이었으나 열성적인 주부형은 아니었다. 깨끗하고 깔끔하긴 했으
나 냅킨, 각사탕, 술병의 수를 일일이 세거나 하는 병적으로 고독한 정신 상태와는 거리
가 멀었다. 플란넬 천을 손에 들고 이웃과 웃으면서 유리창을 닦는 하녀를 감독하는 그녀
의 입에서 가끔 신경질적인 외침, 참을성 없는 주절거림이 마구 새어 나오기도 한다.
  "오랫동안 공을 들여 도자기 찻잔을 닦고 있노라면 나는 정말 늙어가는 느낌이 들어
요." 그녀는 성실하게 자기 일을 끝낸다. 그리고 집 입구의 두 계단을 넘어서 뜰로 들어
선다. 그러자 금세 그녀의 침울한 흥분과 원한은 사라져버린다.
  

  불감증 또는 불만이 많은 여성, 올드미스, 배반당한 아내, 난폭한 남편 때문에 고독하
고 공허한 생활을 하고 있는 아내 등이 빠지기 쉬운 것이 바로 이러한 신경병이다. 나는 
이런 할머니를 알고 있다. 그녀는 아침마다 다섯시에 일어나 옷장을 살펴보고 다시 정리
한다. 그녀는 20세 때에는 명랑하고 멋쟁이였던 것 같다.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 남편
과의 사이에서 난 외아들을 키우며 쓸쓸한 시골에 갇혀 살면서부터, 술병이나 기울이는 
남들과는 달리 그녀에게는 물품을 정리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남편의 기록>에 나오는 엘
리즈에게는 가사의 취미가 한 세계를 비배하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구나 지나친 생활의욕, 
목표가 없이 겉도는 지배욕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또한 시간과 공간, 인생과 인간들, 
존재하는 모든 것에의 도전이기도 하다.
  
  저녁식사 후 아홉시가 되면 그녀는 몸을 씻는다. 한밤중이다. 나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
다. 그러나 그녀의 용기는 나의 휴식을 마치 게으름으로 여기는 것처럼 모욕하고 있는 것 
같아 불쾌하다.
  엘리즈-'정결하게 하려면 먼저 손을 더럽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해.'
  집안은 이윽고 무척 깨끗해져서 인간이 살아갈 용기가 없어질 것이다. 휴식을 위하기 
위해 침대가 놓여 있다. 그렇지만 푹 쉬기 위해서는 옆 마루 위에 쓰러져 눕는 게 낫다. 
침대의 쿠션이 너무나 새것이라서 머리나 발을 대서 공연히 더러워질까 봐 걱정이다. 내
가 카펫을 밟을 때마다 내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서 기계나 걸레를 가진 손이 나를 따라온
다.
  밤-
  '이제 끝났어.'
  그녀가 잠잘 때까지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하나의 물품이나 가
구를 움직이고 마루나 벽이나 천장을 여기저기 만져보는 일.
  아무튼 지금 그녀가 마음속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주부이다. 다락 안을 깨
끗이 털고 나서 창가의 제라늄의 먼지를 턴다.
  그녀의 어머니-'엘리즈는 언제나 바쁘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
해.'
  
  가사는 확실히 여자에게 자기로부터 멀리 한없이 도피하는 것을 허용한다. 샤르돈은 정
확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한도 끝도 없는 자질구레하고 거추장스러운 일이다. 집 안에서 남편의 마음에 
들 자신이 있는 여자는 곧 하나의 소모점, 방심상태, 자기를 말살시켜버리는 정신적 공허
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투쟁, 여자가 사물과 자기에게 도전하는 사드 마조히즘은 때때로 성적인 특징도 
큰 관련을 가진다. "육체노동을 요구하는 가사는 여자가 들어가야 할 매음굴이다."라고 
비올레트 르뒷은 말한다. 청결의 취미는 불감증에 걸린 여자가 많은 네덜란드나 관능의 

기쁨에 질서나 순결의 이상을 대립시키는 청교도적 문명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지중해 연안의 남쪽 나라가 불결한 속에서도 즐겁게 살아
가고 있는 것은, 단지 그 지방에 물이 귀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육체, 그리고 동물적인 
것에 대한 스스럼없는 애착은 인간다운 냄새나 때, 혹은 벌레인 이까지도 참아나가게 하
는 것이다.
  식사준비는 청소 이상으로 적극적인, 때때로 즐겁기까지 한 노동이다. 먼저 시장에서 
보내는 한때는 주부에게 있어서 하루 중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가정의 고독은 
기계적인 일로 인해 머리를 쓸 일이 없는 것인만큼 여자에게는 무거운 짐이 된다. 남국의 
도시에서처럼, 집 입구에 걸터앉아 지껄이면서 옷을 꿰메거나 빨래를 하거나 야채를 다듬
을 때 여자는 행복하다. 개울로 물을 길러가는 것은 거의 갇혀 사는 회교도 부인들에게는 
큰 모험이다. 나는 전에 카빌리의 작은 마을에서는 관에서 마련해 준 광장의 공동수도를 
여자들이 깨어버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침마다 모두 함께 언덕 아래를 흐르고 있는 
개천까지 내려가는 것이 오히려 그녀들에겐 즐거운, 그리고 유일한 위안이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거리 모퉁이 가게 앞에 줄지어 서서 물건을 사면서 잡담을 하는 동안 '주부로서
의 가치'를 확인하고, 자기의 소중함을 의식하게 된다. 그녀들은 자기도 공동체의 일원인 
것을 순간적으로 느낀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본질적인 것을 비 본질적인 것에 대립시키
는 것처럼 남자의 사회에 자기를 대립시킨다.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 쇼핑은 큰 즐거움
이다. 그것은 하나의 발전이자 또한 발명이다.
  지드는 <일기>에서, 유희를 모르는 회교도는 숨은 보물을 발견하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
한다고 쓰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문명의 시와 모험이다. 주부는 그 유희가 언
젠가 곧 끝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알차고 푸짐한 양배추, 잘 만들어진 치즈는 
보물이며, 상인들이 이것을 엉큼하게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을 상인의 손에
서 교묘히 빼앗아야 한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는 투쟁과 책략의 관계가 형성된
다. 사는 사람은 값싸고 좋은 상품을 손에 넣는 것이 중요하다. 살림이 너무 어려워 예산
에 맞추기 위한 고충 때문에 그런다는 차원은 이미 넘어선 것이다. 승부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상품진열대를 의심쩍게 살펴보고 있는 동안의 주부는 여왕이다. 세계는 그 부와 
올가미를 던져놓고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거기서 그녀가 노획물을 골라내기를 기다
리고 있다. 테이블 위에다 장바구니에 들어 있는 것을 쏟아놓을 때, 그녀는 허황한 승리
감을 맛보게 된다. 먼저 찬장 속에는 통조림, 즉 미래에 대해 그녀를 지켜주는 소멸하지 
않는 물품을 진열한다. 그리고 자기의 권위에 굴복하게 될 야채나 육류를 만족스러운 얼
굴로 바라본다.
  가스등과 전등은 불의 마력을 소멸시켜버렸다. 그러나 아직 시골에서는 많은 여자들이 
생명력 있는 장작에서 생생한 불꽃을 이끌어내는 환희를 알고 있다. 불이 붙으면 여자는 
곧 마녀로 변신한다. 손을 한 번 휘저어서-그녀가 달걀을 깨거나 빵가루를 반죽할 때-또
는 불의 마술에 의해, 재료의 질을 바꿔버린다. 그리하여 물질은 음식이 되다. 콜레트는 
이런 연금술의 마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모든 것이 신비, 마법, 요술이다. 불 위에 냄비나 주전자, 그리고 그 속의 물건을 꺼내 

식탁에 올리는 순간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요리를 식탁 위에서 바라보는 즐거운 불안, 
쾌락적인 희망에 찬 순간 사이에 이루어진 모든 것은 신비, 마법, 요술이다.
  
  또한 콜레트는 뜨거운 재의 비밀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형을 즐겁게 묘사하고 있다.
  
  장작불의 재는 그 위에 올려놓은 것을 맛있게 구워준다. 뜨거운 재 속에 파 묻었던 사
과나 배를 꺼내 보면 이미 주름이 잡힌 채 잘 구워져 그 껍질 속이 마치 두더지의 뱃가죽
처럼 부드러워져 있다. 부엌의 화덕 위에서 사과가 아무리 '마음씨 좋은 할머니'처럼 되
더라도 본래의 껍질을 쓴 채 맛이 든 정도만으로 되어 있다면, 만일 솜씨를 발휘하며 단
지 한 방울 꿀의 눈물을 짜낸 데 불과한 잼에는 아직 아득히 미치지 못한다. 세발 냄비에
는 불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체로 친 재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서로 닿지 않게 가까이 
있는 감자로 가득찬 이 냄비가 숯불 위에 다리를 버티고 서서 거기서 눈같이 새하얗고 따
끈따끈하고 비늘과 같은 구근을 낳아둔다.
  
  여류작가들은 특히 잼의 시를 노래했었다. 구리냄비 속에서 딱딱하고 순수한 사탕과 과
실의 부드러운 살을 잘 결합시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거품이 일고, 끈적끈적하고, 따
끈따끈하게 정제되는 물질은 위태롭다. 주부가 잘 처리하여 자랑스럽게 단지 속에 넣는 
것은 바로 비등하는 용암이다. 그 단지를 종이로 싸고, 거기에 승리한 날짜를 기록할 때, 
그녀는 바로 시간을 정복한 샘이 된다. 그녀는 사탕의 함성 속에 지속을 잡아넣고 생명을 
단지 속에 가둬놓은 것이다. 요리는 여러 가지 재료의 친밀성에 침투하여 작용하는 것 이
상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물질을 새로운 형태로 다시 창조한다. 가루를 다루는 가운데 
그 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손도 눈과 마찬가지로 꿈과 시를 지닌다."고 말했다.(<대지와 의지의 꿈>
에서) 이어서 그는 그 '충실한 순응성, 재료에서 손으로, 손에서 재료로 무한히 반사하
는, 손에 가득차게 하는 그 원활성'에 대해 발하고 있다. 가루를 반죽하는 여자 요리사의 
손은 '행복한 손'이다. 그 손으로 반죽이 구워지면 가루에 가치가 더해진다. '빵이 구워
지는 것은 이와 같이 대단한 물질적 생성이다. 창백한 흰 가루에서 황금색으로, 그리고 
가루에서 빵 껍질로의 생성이다.'(<대지와 의지의 꿈>에서) 여자는 과자나 파이의 성공 
속에서 개성적인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공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성공하려면 재능이 있어야 한다. 미슐레는 "파이를 만드는 기술처럼 복잡
한 것은 없다. 일정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가르치기도 배우기도 어려운 그
것은 타고난 재주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선물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 분야에서도 어린 소녀들이 언니들이 하는 일을 열심히 모방하여 기뻐하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 그녀는 흙덩이나 풀잎으로 대용품을 만들어서 논다. 작은 진짜 솥을 장난감
으로 선물 받거나, 어머니 허락 하에 부엌으로 들어가 과자를 만드는 밀가루를 손바닥으
로 반죽한다든지 따끈따끈한 캐러멜을 자를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가정의 다른 여러 가지 일들처럼 반복됨으로써 곧 그 즐거움을 상실
하게 된다. 옥수수빵을 주식으로 하는 인도인 가정에서는 여자는 하루의 절반을 가루를 

반죽하고 굽고 데우는 데, 또 집집마다 같은 파이 과자를 만드는 일에 보낸다. 그것은 몇 
세기에 걸쳐 똑같다. 그녀들은 이제 조금도 화덕의 마력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다. 매일 
반복되는 장보기를 보물찾기처럼 생각할 줄도 모르고 반짝거리는 수도꼭지에서 황홀감을 
느낄 줄도 모르는 날이 온 것이다. 이런 솜씨를 찬양하는 것은 남녀 작가들 뿐이다. 그들
은 가사를 돌보지 않거나 돌보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이 일이 일상적이 되고 보면, 그 소동은 단조롭고 기계적이다. 언제나 대기상태에 있
다. 물이 끓고, 고기가 알맞게 구워지고, 빨래가 마르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여러 가지 
다른 일을 벌려보아도 공허만이 남게 된다. 거의가 따분한 가운데 하는 일들이다. 현재의 
삶과 내일의 삶 사이의 비 본질적인 중개에 불과하다. 그런 일을 하는 개인이 생산자이고 
창조자라면, 그것은 그 사람의 생활과 생리작용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자연과 일체가 된
다. 이런 하루하루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남자가 할 때에는 그다지 침울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남자에게 그런 일은 소극적이고 일시적인 한 순간에 불과하고, 남자들은 곧 그 
일에서 빠져나간다.
  하녀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분업이 여자의 생활을 그대로 일반적이고 비 본
질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주거나 식사는 생활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주부의 직접적인 목표는 단지 수단에 불과하며 진정
한 목적이 아니다. 거기에는 단지 무명의 기획이 반영되어 있을 뿐이다. 여자가 일에 마
음을 쏟지 위해 거기에 자기의 개별성을 반영시켜 보려는 것도, 또 얻은 결과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는 뜻도 이해가 된다.
  그녀는 고유의 의식과 미신을 갖고 있다. '상 차리는 데, 객실을 정돈하는 데, 요리하
는 데' 남과는 다른 자기만의 방법을 고집한다. 자기가 아니면 고기를 장 구울 수조, 윤
을 잘 낼 수도 없다고 믿고 있다. 만일 남편이나 딸이 도와주려고 하거나, 그녀의 손을 
빌리지 않고 뭔가를 하려고 하면, 곤 그들의 손에서 바늘이나 빗자루를 빼앗아버린다.
  "당신은 단추도 하나 달지 못해요." 하는 식이다. 도로시 파커는, 자기 집을 정돈하는 
데 어떻게 하면 개성적인 특색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 까 당혹해하는 한 젊은 여성을 동
정어린 익살로 묘사하고 있다.
  
  어니스트 웰든 부인은 잘 정돈된 방의 여기저기를 조금씩 매만지면서 돌아다니고 있었
다. 그렇게 매만지는 솜씨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결혼 하기 전에는 신
혼살림을 차릴 때 집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여기에는 장미꽃을 꽂아두고 저 쪽에 꽂
힌 꽃을 조금 손질하고 하는 식으로 집을 하나의 스위트홈으로 바꿔놓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 결혼한 지 7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그런 손쉬운 일에 몰두하는 것을 즐기
는 편이었다.
  그러나 날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있어도 밤마다 장밋빛 갓이 달린 전등이 켜지면 
이 집을 다른 집과 구별 짓는 아주 특색 있는 기적을 불러 일으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슬픈 심정으로 반성하는 것이었다. 여성다운 손길을 하는 것은 아내의 역할이
다. 웰든 부인은 책임감이 강한 여자이다. 그녀는 가엾고 불안한 태도로 벽난로 위를 만
져보고, 작은 이리본제 화병을 손에 든 채 방 안을 절망적인 눈으로 둘러보면서 서 있었

다. 이윽고 그녀는 뒤로 물러서서 자기의 참신한 솜씨를 바라보았다. 이 방에 둔 작은 변
화는 놀랄 만했다.(<너무 기쁘다>에서)
  
  여자는 이 독창성 또는 특이한 완성을 탐구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다. 
이것은 샤르돈이 지적한, '끝도 한도 없는 자질구레하고 뒤죽박죽인 일'의 성격을 여자가 
되는 일에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주부의 그런 걱정이나 불안의 원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
지 알기 어렵게 하고 있다. 최근의 앙케트(잡지 <전투>가 C. 에베르의 서명으로 1947년에 
발표한 것)에 의하면, 결혼한 여자는 평일에 약 3시간 45분 동안을 가사에 소비하고, 휴
일에는 8시간을 바치고 있으므로 한 주당 약 30시간 꼴로 계산할 수 있다.
  이것은 여성 노동자나 여성 종업원의 주간 노동시간의 4분의 3에 해당된다. 이 정도의 
일이 만일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가중된다면 그것은 막대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성이 달리 할 일이 없다면 그것은 대단치 않은 일이다.(여성 노동자나 종업원은 장소의 
이동에 시간을 소비하지만 가정주부는 그렇지 않다.) 어린애가 많으면, 여성의 피로는 더
욱 쌓인다. 가난한 가정의 어머니는 하루종일 무질서한 가사에 매여 기력을 소모한다.
  이와 반대로 심부름하는 사람을 두고 있는 부르주아 여성은 매우 한가하다. 그 보상은 
권태이다. 그녀들은 권태에 빠져 대부분이 그 일과를 일부러 아주 복잡하게 즐긴다. 그래
서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이 필요 이상으로 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심한 신경쇠약에 
걸린 친구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건강할 때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가사일
을 빈틈없이 처리하고, 그보다 더 힘든 일도 거뜬히 해낼 여유도 있었다. 그러나 신경쇠
약에 걸린 뒤로는 다른 일을 아예 못하고 날마다 집안일에만 몰두하는데도 그 일을 제대
로 끝마치지 못했다.
  가장 언짢은 것은 이런 노동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지속적인 창조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만큼 자기 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녀는 오븐에서 꺼낸 과자를 바라보고 한숨을 쉰다. 먹어버리기엔 정말 아깝다! 
모처럼 잘 닦아놓은 마루 위를 남편이나 아이들이 흙 묻은 구둣발로 걸어 다니는 것은 질
색이다. 사물은 그것이 유용하게 쓰이자마자 곧 더러워지고 파괴된다. 앞에서도 말한 것
처럼 여자는 그런 물품이 사용되는 것을 아까워한다. 어떤 여자는 곰팡이가 낄 때까지 잽
을 보관한다. 어떤 여자는 객실에 자물쇠를 잠가놓는다. 그러나 시간의 진행을 저지할 수
는 없다. 식료품은 쥐를 불러들이고, 벌레도 달라붙는다. 이불과 커튼과 옷은 좀이 먹는
다. 세계는 돌로 된 꿈이 아니다. 그것은 분해작용(부패)에 위협 받고 있는 너절한 물질
로 되어 있다. 식료품의 재료도 달리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의 고기로 된 시계처럼 
불확실하다. 그것은 죽은 물체처럼, 무기물처럼 보이지만, 결국 숨어 있던 벌레들에 의해 
시체로 바뀌어 버린다. 물체 속에 자기를 투영하는 주부는 물체와 마찬가지로 물질세계에 
의존하고 있다. 속옷은 더러워지고, 고기는 타고, 도자기는 깨진다. 그것은 절대적인 실
패이다. 물건은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물품으로 불변이
나 안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약탈이나 폭탄이 수반되는 전쟁은 찬장이나 집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내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은 곧 소모된다. 어느 것이나 파괴로 끝나는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하는 여성에겐 끊임없는 체념이 따라야 한다. 여성이 그것을 미련없이 승
낙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자질구레한 희생이 어딘가에서 하나의 기쁨, 하나의 즐거움이 
되어 활활 타올라야 한다. 그러나 가사는 주로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여서, 집에 돌아오는 
남편의 눈에 무질서나 태만은 곧 발견되지만, 질서나 청결은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
이다. 그는 맛있게 만든 음식에는 큰 흥미를 갖는다. 음식을 만든 여자가 으쓱해 보일 때
는 그녀가 제법 잘된 요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 순간이다. 남편이나 아이들은 말뿐만 아
니라, 그것을 맛있게 먹으면서 기쁨을 표시한다. 요리의 연금술은 계속되어 음식은 죽이 
되고 피가 된다. 육체의 보존은 마루를 닦는 것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생명적인 의미를 갖
는다. 분명히 요리하는 여자의 노력은 미래를 향해 초월되어 있다. 외적인 자유에 의존하
여 안주하고 있는 것이 그나마 물체 속에 자기를 소외하는 것만큼은 공허하지 않다고 말
하지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요리하는 여자의 일이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은, 
식탁에 둘러앉은 손님의 입 속에서 뿐이다.
  그녀는 그들의 찬성투표를 필요로 한다. 그들에게 자기가 만든 요리를 감상해 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음식을 더 청해 주기를 바란다. 그들이 만일 입맛이 없는 표정을 지으면 
속이 상한다. 감자 프라이가 남편을 위해 있는지, 남편이 감자 프라이를 위해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런 애매성은 가정부인의 태도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집안을 잘 가꾼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수입 전액으로 가구나 냉장고를 사고 싶어 
한다. 그녀는 남편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활동 영역이 그녀가 
만든 행복의 틀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아내의 소망이 대체로 충족되던 시대가 있었다. 행복이 아직 남자의 이상이
고 남자가 무엇보다도 집이나 가족에게 집착하던 시대, 어린이 자신이 부모나 전통이나 
과거에 의 형성되었던 시대로, 그 무렵에는 가정을 지배하고 식탁을 주관하는 여성은 여
왕으로 보였다. 오늘날에도 얼마 되지 않는 지주계급이나 족장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부유
한 농민의 가정에서는 여성이 이런 영광스러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결
혼은 대체로 이미 사멸된 사회풍습의 잔재이며, 아내의 지위는 대단히 하찮아 져 일할 보
람조차 느끼지 못하게 한다. 아내는 과거와 다름없는 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시절
만큼의 권리는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하면서 보수도 명예도 주어져 잇지 
않다.
  오늘날의 남성은 자신을 그 속에 가둬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휴식을 취하기 위해 결혼한
다. 남성은 가정을 갖고 싶어하지만, 언제나 거기서 탈출할 자유가 있다. 그는 가정에서 
안정을 얻지만, 마음속으로는 방랑자이다. 그는 행복을 경멸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목적
으로 삼지도 않는다. 반복은 그를 권태롭게 만든다. 그는 새로운 모험이나 극복해야 할 
저항이나 우의, 즉 두 사람만이 고독에서 자기를 구해주는 우정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
다.
  남편보다는 아이들이 더욱 가정의 울타리를 뛰어넘고 싶어한다. 그들의 생활은 다른 곳
에 있다. 바로 자기 앞에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언제나 타자이기를 원한다. 여성은 불변
과 연속의 세계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남편과 어린이들은 여성이 창조한다. 그러나 그들
은 언제나 주어진 환경에서 초월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여성은 자기가 일생에 걸쳐서 헌

신하는 활동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그로 인해 더욱 자기의 봉사를 억
지로 강요하게 된다. 때문에 그녀는 선량한 어머니나 주부에서 못된 어머니가 되고 성난 
악처가 된다.
  이와 같이 여성이 가정 안에서 하는 일은 그녀에게 조금도 자주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그런 노동은 사회에는 직접 유용하지 않다. 그것은 미래를 지향하고 있지 않으며 아무 것
도 생산하지 못한다. 노동이 그 의미를 갖고 품위를 갖는 것은, 그것이 생산이나 행동으
로 사회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생활방식과 일치될 경우이다. 그런데 가사는 주부를 해
방시키기는커녕 남편이나 자식에게 종속시킨다. 그리하여 주부는 남편이나 자식을 통해 
자기를 정당화한다. 그녀는 그들의 생활 속에서 비 본질적인 매개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민법이 여성의 의무에서 '복종'을 지워버렸다고 해도, 그 입장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
다. 여성의 입장은 부부의 의사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결혼제도를 존중하는 공
동체의 기구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적극적인 일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므
로, 완성된 한 인격으로 인정 받지 못한다. 여성은 집안에서 아무리 존경 받아도 종속되
어 있고, 일인자가 아닌 제이인자이고, 또 다소 기생적이다. 여성을 억누르고 있는 무거
운 저주는 자기 삶의 의의 자체가 자기 수중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생활의 성공과 실패는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훨씬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
다. 남성은 남편이기 전에 시민이며 생산자이다. 여성은 무엇보다도, 그리고 오로지 아내
일 뿐이다. 여성의 노동은 그녀를 그 신분에서 해방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반대로 여성의 
노동은 이 신분에서 그 가치를 이끌어낸다. 여성은 자기 일을 몹시 사랑하고, 진심으로 
헌신하는 기쁨을 느끼면서 수행한다. 그러나 만일 그 일을 원망하면서 하게 되면 불쾌한 
노예의 일이 되고 만다. 그런 일은 여성의 운명으로는 비 본질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하
며, 불행한 결혼생활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침대의 서비스와 가사의 서비
스에 의해 본질적으로 정의되는 신분, 여성이 예속적인 지위를 인정해야만 품위를 발견하
게 된다는 입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젊은 처녀가 유년기에서 사춘기로 접어들 때는 하나의 위기이다. 이 처녀를 성인의 생
활로 밀어 넣는 것은 더욱 큰 위기이다. 다소 당돌한 성적 입문이 여자에게 일으키기 쉬
운 혼란에는, 한 입장에서 다른 입장으로 옮아가는 과도기에 으레 따르게 마련인 불안이 
겹치게 된다.
  "마치 무서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결혼에 의해 현실과 삶 속에 던져지는 석, 사랑
과 수치의 모순에 놀라는 것, 신과 짐승의 예상 밖의 인접에 의해 오직 한 사람의 대상 
속에서 기쁨, 희생, 의무, 동정,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것... 참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신의 착란이 거기에 나타나 있다."고 니체는 말하고 있다.
  
  전통적인 신혼여행은 이 혼란을 어느 정도 숨기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신부는 몇 
주일 동안 일상적인 세계 밖으로 던져져, 사회와 한동안 절연된 상태로 시간과 공간, 현
실 속에 자기를 분명히 놓아두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런 것들 속에 복귀해야 
한다. 그래서 새 가정에 돌아왔을 때는 불안해진다. 사실 친정과의 유대는 상대방 남성과
의 그것보다 훨씬 긴밀했었다. 친정을 떠나는 것은 결정적인 이별인 셈이다. 그래서 그녀

는 고독의 불안과 자유의 현혹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된다. 친정과의 이별은 경우에 따라서
는 얼마간 고통스럽다. 아버지나 형제자매, 특히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던 유대가 벌써부
터 끊어져 있는 것이었다면 그나마 그녀는 슬픔을 느끼지 않고 가족과 헤어질 수 있다. 
만일 육체의 지배력이 아직 강하고, 실제로 그들의 보호 아래 놓여 있다면, 생활의 변화
는 그녀에게 별로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설사 그녀가 부모의 집을 떠나
고 싶어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지금까지 그 일원이었던 가정을 떠나, 그 과거, 확실한 
원칙이나 실증된 가치를 지닌 어린이의 세계와 격리되었을 때 그녀는 당혹감을 느끼게 마
련이다.
  열렬하고 충실한 성생활이라도 있다면 새로운 내재적인 평화 속에 잠길 수도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보통 신혼 초기에는 만족을 느끼기보다는 놀라게 마련이다. 성적인 입문에 어
느 정도 성공하였더라도, 그녀의 혼란은 증대 된다. 신혼 이튿날의 그녀에게는 최초의 월
경 때 보였던 반응이 나타난다. 그녀는 흔히 자기가 암컷이라는 최고의 계시 앞에서 혐오
를 느끼고, 이런 경험이 다시 되풀이될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녀는 이튿날 다
시 첫날밤과 같은 환멸을 느끼게 마련이다. 초경 때 소녀는 자기가 아직 한 사람의 어엿
한 여성이 아니었다는 데 비애를 느꼈던 것이다. 처녀성을 잃은 지금, 그녀는 이미 한 사
람의 아내이다. 최후의 단계를 넘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이 불안한 환멸은 
처녀성의 상실뿐만 아니라, 결혼 자체에도 결부되어 있다. 약혼자와 이미 알 걸 다 알고 
지냈거나 혹은 다른 남자들과도 벌써부터 그런 관계를 가졌었던 여성도 결혼에 의해 한 
남자의 여자로서의 생활에 완전히 접어들게 된다고 생각하면 흔히 이런 반응을 보이기 쉽
다.
  한 사업소의 시초를 경험하는 것은 대단히 보람 있는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단서가 잡
히지 않는 운명을 발견하는 것처럼 정떨어지는 일은 없다. 이런 결정적이고 요지부동한 
바탕 위에 자유가 가장 가차없는 무상성을 띠고 떠오른다. 젊은 처녀는 전에는 부모의 권
위의 보호아래, 반항이나 희망 등으로 그 자유를 행사하고 있었다. 자기가 안전을 누렸던 
환경을 거부하거나 이것을 초월하려는 데 자유를 사용해 왔다. 따뜻한 가족의 품에서 나
와 결혼하기를 동경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제 결혼했다.
  그녀의 앞에는 이제 '다른' 미래가 있을 수 없다. 가정의 문은 그녀를 안으로 밀어 넣
고 닫혀졌다. 이 지상의 모든 운명이 거기에 있다. 그녀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자기를 기다
리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어머니가 했던 일과 같은 일이다. 날마다 같은 습관이 되
풀이될 것이다. 처녀시절에는 양손이 '비어' 있었다. 희망 속에, 꿈 속에 모든 것을 소유
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세계의 작은 일부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걱정하고 있
다. 이것뿐이다. 영원히, 영원히 이 남편, 이 집, 이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이렇다 할 욕망도 있을 수 없다. 그녀는 오직 새로운 책임을 걱정하고 있다. 남편
은 벌써 나이가 지긋하여 권위를 갖고 있어도 이 남자와 성행위를 할 것을 생각하면, 남
편을 존경할 수도 없다. 그는 아버지를 대신할 수도 없고, 어머니가 되어 줄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남편은 그녀를 해발시켜 자유롭게 해줄 수는 없다. 새로운 가정의 고독 속
에 자기에게는 다소나마 타인인 남자와 결합되어, 이제는 소녀가 아닌 아내가 되어, 언젠
가는 어머니가 될 운명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녀는 몸이 오그라드는 신정이다. 어머니의 

품에서 떠나, 어떤 목적도 분명히 갖지 않고 세상의 냉혹한 현실 속에 방치된 것이다. 그
리하여 전적으로 부자연한 것에서 비롯되는 권태와 무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젊은 톨스토이 부인의 일기에 절실히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비탄이다. 그녀는 정열을 
갖고 존경하는 대작가와 약혼했다. 그녀는 야스타야 폴리야나의 나무의 발코니에서 포옹
을 받은 후에 가족과 헤어지고 과거와 절연된 채, 8일 동안 자기보다 17세나 연상인 남자 
곁에서 그 육체적인 사랑에 구역질을 느낀다. 이 남자는 자기와는 전혀 다른 과거와 흥미
를 갖고 있던 사람이다. 모든 것이 공허하고 냉혹하게 느껴진다. 그녀의 생활은 단지 잠
자는 것에 불과하다. 그녀의 결혼 초기에 대한 이야기와, 처음 몇 해 동안의 일기를 인용
하고자 한다.
  1862년 소피아는 결혼하여 그날 밤에 친정을 떠났다.
  
  참을 수 없는 괴로운 느낌이 목을 죄는 긴박감에 나는 사로잡혀 있었다. 가족들과, 내
가 깊이 사랑하여 지금까지 언제나 살아온 모든 사람들과 작별할 때가 다가온 것을 느꼈
다... 작별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괴로웠다... 드디어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일부
러 어머니에게 할 작별인사를 맨 뒤에 남겨두었다... 어머니의 포옹에서 몸을 빼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라타려고 했을 때 어머니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소리를 질렀
다. 나는 그 어머니의 목소리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가을비는 그치지 않았다... 피로
와 고통으로 녹초가 되어 마차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겨우 마냥 울 수 있었다. 레온 니콜
라이예비치는 크게 놀라고 불만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거리로 들어섰을 때 나는 어둠 
속의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어둠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첫 번째 역인 비리울레
프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레온 니콜라이예비치는 다정하게 
여러 모로 나를 돌봐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비리울레프에서는 황제가 쓴다는 방을 우리
에게 내주었다. 빨간 레프스로 장식된 가구가 놓인 커다란 방인데도 조금도 친숙감이 들
지 않았다. 우리에게 물주전자를 갖다 주었다. 나는 소파 끝에 몸을 웅크리고 죄수처럼 
잠자코 있었다. "차 한잔 따라주지 않을래?" 하고 레프는 말했다. 나는 남편에게 다정한 
말을 할 수 없어서, 되도록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고 했다. 오랫동안 나는 그를
 '당신'이라고 불렀다.
  
  24시간 후에 그들은 야스나야 폴리야나에 도착했다. 10월 8일, 소피아는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안을 느끼고 있다. 남편이 어떤 과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를 괴로워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나는 어떤 완전한 존재, 신선하고 순수한 인간을 사랑하고 싶
다고 언제나 꿈꿔 왔다... 나는 이 어린애 같은 꿈을 단념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나를 껴
안을 때, 그가 이처럼 나를 껴안고는 있지만 내가 그의 첫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
다.
  
  이튿날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마음이 죄어드는 느낌이었다. 어젯밤에는 언짢은 꿈을 꾸어, 언제나 그 생각만 한 
것이 아닌데도 마음은 역시 무겁고 답답하다. 어머니가 꿈에 나타났다. 그것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나는 눈을 들 수가 없어서 아침 내내 줄곧 잠만 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인가 나를 억누르고 있다. 나는 곧 죽을 것만 같다. 지금 이렇게 내게 남
편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진다. 남편이 잠들었다. 혼자 있으면 두렵다. 
남편의 깊은 내부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서글프다. 이 모든 육체적인 관계는 참으로 
싫다.
  10월 11일. 무섭다! 참으로 슬프다! 나는 점점 나 자신을 더욱 반성하며 끙끙 앓는다. 
남편은 병이 났다. 기분은 좋지 않아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서운 일인 줄은 알지 못했다. 누가 나의 행복 따위를 걱정해 주나! 그런 행복을 
나로서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만들 힘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슬플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자신에게도 그리고 상대에게도 이렇게 사태가 나쁜데, 무엇 때
문에 살아야 하는가.'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남편은 냉담하다. 한편 나는 그이를 점점 더 사랑하고 있다... 부모님들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 난다. 그 무렵에 인생은 얼마나 경쾌했던가! 그런데 지금, 오 하나님! 제 영혼은 
찢겨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요... 그리운 어머니, 그리운 타니야, 그들
은 나를 정답게 대해 줬는데!
  나는 무엇 때문에 그들과 헤어졌을까? 슬프다, 두렵다! 그렇지만 리오보치카(레프의 애
칭)는 좋은 사람인데... 전에 나는 생활하고 공부하고 가사를 돌보는 데 정열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끝장이다. 날마다 말없이 팔짱을 끼ㅌ 채 지난날을 되풀이하여 상
기하고 있을 뿐이다... 피아노를 치는 것은 즐겁지만 여기서는 불편하다... 리오보치키는 
니콜스코이에에 가는 동안, 나더러 오늘은 집네 조용히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그 사람을 
나에게서 해방시키기 위해 승낙했고 깊어하고, 나에게서 도망칠 구실을 찾아낸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을까?
  1863년 11월 3일. 나는 자기 일을 잘할 줄 모른다는 것을 고백한다. 남편은 행복하다. 
그 사람은 현명하고 유능하다. 나한테는 그 어느 하나도 없다. 무언가 하려고 마음만 먹
으면 할 수 있다. 또 할일이 없는 것도 아니가. 그러나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기를 좋아하
고 그런 것을 아끼도록 자기를 훈려해야 한다. 가축을 돌보고, 피아노를 치고, 시시한 것
만 많고 재비있는 것은 짧은 독서. 오이를 소금에 절인다... 나는 깊이 잠들어, 우리들의 
모스크바 여행에도, 앞으로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대에도 감동이나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내가 눈을 뜨고 되살아나는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은 없는가? 이 고독이 나를 완
전히 녹여버렸다. 나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 친정에선 그처럼 활기에 넘쳤는데, 
이곳에서는 남편이 없으면 우울하다. 그는 고독에 익숙하다. 그는 나처럼 가까운 친구에
게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활동에서 얻고 있다... 그는 가족이 없이 자란 
사람이다.
  11월 23일. 나는 확실히 활발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천성이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무
엇을 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나는 가끔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은 가당찮은 욕망을 

느낄 때가 있다... 무엇 때문에 그의 영향이 내게 무거운 짐이 되는가?... 열심히 노력해 
보지만, 그이처럼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의 개성만 잃어버릴 뿐이다. 이미 나는 
본래의 내가 아니다. 이것이 내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한다.
  4월 1일. 나는 나 자신 속에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큰 결점이다... 남편은 자
신의 일과 영지관리에 몰두하고 있다. 한편 나는 신경쓸 일이 하나도 없다. 내게도 할일
이 있어야겠다. 거리에 나가고 싶다. 예전에는 이런 아름다운 봄날엔 뭔가 하고 싶은 일
이 있었다. 그 무렵에 나는 무엇이 꿈꾸고 있었던가? 지금은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어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항고 어리석은 동경은 이제 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
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견디기 힘든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4월 2일. 남편은 나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그에게는 사랑의 육체적인 면이 대단히 큰 
열할을 하고 있다. 한편 나한테는 점점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가고 있다.
  
  젊은 아내가 최초의 6개월 동안에 가족과의 이별이나 고독, 자기운명이 취한 결정적인 
양상에 시달림을 받고 잇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녀는 남편과의 육체적인 관계를 
혐오하고 우울해진다. 콜레트의 어머니는 형제들의 강요에 못 이겨 결혼한 후에 이와 동
일한 우울을 눈물이 날 정도로 강하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따뜻한 벨기에식 집을 떠났다. 가스냄새가 나는 지하실 부엌, 따끈한 
빵, 커피와 작별하고, 피아노나 바이올린, 아버지의 유품인 살바토르 로자(이탈이아의 화
가. 시인, 1615~1673)의 그림, 담배함, 기다란 고급 도제 파이프... 펼쳐진 책이나 구겨
진 신문과도 작별한 채, 신부로서 삼림지방의 매서운 겨울이 닥쳐오는 돌계단이 딸린 집
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 집 1층에서 뜻밖에도 백새과 황금빛이 나는 객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2층은 초벽도 제대로 바르지 않은 곳간처럼 쓸쓸했고... 썰렁한 침실은 사랑이나 
달콤한 잠자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친구들과 명랑하고 순수한 관계를 맺으며 살던 시드는, 자기 집에서 하인과 의심 많은 
소작인 밖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큰 집을 밝고 명랑하게 장식 하고, 어두운 부
엌을 하얗게 칠하고, 손수 플랑드르식 요리를 감독하고, 포도가 든 과자를 반죽하고, 첫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르 소바즈는 두 차례의 짧은 여행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요리법에 고심하고, 참고 견디고, 밀초를 칠하고 나서 고독으로 
여위고 슬퍼하며 울었다... (<클로딘의 집>에서)
  
  마르셀 프레보는 <결혼한 프랑수아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젊은 
아내의 들뜬 기분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나폴레옹 3세풍의 가구가 놓은 어머니의 집을 생각하다. 방의 거울에 걸어놓은 
벨벳, 검은 오얏나무로 만든 만든 옷장, 모두가 낡아빠져 우습게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이 일제히 기억 속에 현실적인 안식처, 진식처, 진정한 보금자리, 즉 그녀가 헌신적인 
애정에 의해 양육되었고, 모든 위험이나 악천후에서 보호받았던 보금자리가 머리에 떠올

랐다. 새로운 융단냄새나 커튼이 없는 창문이나 아무렇게나 쭉 늘어놓은 의자들이 있는 
지금의 이 집, 어든가 즉흥적이고 안정감이 없는 이 집의 모습은 결코 보금자리가 못 된
다. 단지 보금자리를 만들 장소에 불과하다... 그녀는 갑자기 무서울 정도록 슬퍼졌다. 
마치 사막에 혼자 던져진 것처럼 슬픈 느낌이 들었다.
  
  젊은 여성은 이 진정되지 않은 불안감 때문에 때때로 오랫도안 우울증에 시달리고 정신
질환에 걸리기 쉽다. 특히 그녀는 신경쇠약에서 오는 여러 가지 강박관념의 형태로 지난
날의 자유에 마음이 쏠린다. 예를 들면 그녀는 우리가 이미 '소녀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매춘행위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겅우도 있다. 피에르 자네(<강박관념과 신경쇠약>에서)는 
어떤 신부가 혼자 집 안에 조용히 있지 못하여 창가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추파를 던
지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정신질환의 예를 들고 있다. 이밖에 세계가 진짜로 보이지 않고 
다만 환영만 움직여, 종이에 그린 그림의 배경 같다고 말하는 의지상실의 경우도 있다. 
자기가 어른이 된 것을 부정하려고 하며 한평생 완강하게 그럿을 부정하는 여자도 있다. 
자네가 Qi라는 머릿 글자로 표시하고 있는 다음의 환자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Qi(36세의 여자)는 자기가 10세에서 12세 가량의 소녀라는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혼자 있으면 그녀는 깡출거리거나 웃거나 머리를 풀고 어개를 문지르거나 그 일부를 잘라
버리기도 한다. 그년느 자기가 소려라는 꿈에 완전히 빠져버리고 싶은 것이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까불 수 없는 것은 유감이야... 나는 어줬으면 
해. 쓰다들어주기르 원해. 어린애에게 하는 것처럼 귀엽다는 말을 듣고 싶어... 어린이는 
장난을 치고 귀염을 받고 있어. 그 순진한 마음과 애교 때문에 사랑으 받고 있어. 그 대
신 아이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아! 너를 사랑하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이건 근사한 
일이야. 그러나 나는 이런 말을 남편에게 할 수 없어. 남편이 알아줄 리가 없으니까. 나
는 정말로 꼬마 계집아이가 되고 싶어. 무릎 위에 앉으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필요해... 그렇지만 그럿 안 돼. 나는 아내이고 어머니야. 가정을 잘 지켜야 
해. 오, 얼마나 따분한 생활인가!"
  
  남성에게는 결혼이 때때로 하나의 위기일 수도 있다. 그 증거로 많은 남성 정신질환자
는 약혼기간중에, 혹은 결혼 초기에 생긴다. 누이들만큼 가정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왔던 
청년은 대개 어떤 단체에 속했던 경험이 있다. 전문학교. 대학. 견습직정. 각종 그룹 등
은 그를 고독에서 지켜주었다. 그는 이윽고 한 사람의 성년남자의 생활을 하기 위해 이런 
단체를 떠나게 된다. 그는 장래의 고독이 두려운 나머지, 때로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결
혼한다. 그러나 그는 집단생활의 경험에서 부부를 사회처럼 생각하는 착각에 속게 된다.
  연애할 때 정열이 불타는 잠시 동안을 제외하고, 두 사람이 서로 상대를 사회로부터 보
호해 줄 수 있는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거것은 신혼이 끝나는 직후
부터 두 사람이 느끼게 되는 사실이다. 이윽고 길들여지고 예속되어지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의 자유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아내는 부담일 뿐 부재는 아니다. 그녀는 남편의 책
임을 경감시키기는 커녕 점점 더 무겁게 한다. 남녀의 성별에는 때때로 나이 차나 교육.

입장의 차이가 포함되어 있어,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서로 친
숙해지지만 부부는 타인이다.
  옛날에는 부부 사이에 깊은 강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세상물정을 모르고 자란 무
지한 처녀는 어떤 과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약혼상대는 세상물정을 잘 알
고 있었다. 젊은 처녀에게 실생활에 관한 초보적인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은 남자 쪽에서 
할 일이다. 어떤 남자들은 이런 묘한 역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보다 총명한 남
자는 자기와 미래의 아내를 떼어놓는 거리를 생각하며 불안을 느낀다. 에디스 훠튼은 자
신의 소설 <순진한 시절>에서, 1870년데의 한 미국 청년이 자기 아내가 될 여자를 부담스
러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조심스러운 공포심으로 자기에게 영혼을 맡기려고 하는 젊은 처녀의 맑은 이마, 
성실한 눈동자, 순진하고 명랑한 입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조직이 
낳은 이 산물 -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처녀는 모든 것을 바라고 있다 - 은  지금 자기에
게는 무관한 여자처럼 생각되었다... 교양있는 점잖은 남자로서 자기의 과거를 약혼녀에
게 숨기는 것이야 하난의 의무일 테고, 과거를 갖지 않는 것이 이 처녀의 의무라면 그들
은 대체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이 교묘하게 만들어진 기만적인 조직의 중
심인 처녀는 솔직하고 대담하기 때문에 더욱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보였다.
  그녀는 솔직하다.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녀는 안심하고 있다. 자기를 지
킬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준비도 없이 인생의 현실 속
에 하룻밤 사이에 잠겨버린다. 그는 이 너무나 단순한 영혼을 100번이나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낙심하여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백모와 할머니와 순결주의자인 
먼 조상들의 음모에 의해 이처럼 교묘하게 만들어진 이 부자연스러운 순경은, 그의 사적
인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가 이 순결에 대한 영주권을 행사하여 그것을 눈으로 남든 
조각처럼 부숴버리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말이다.
  
  오늘날에는 젊은 처녀들이 그처럼 부자연스럽게 자라지 않았으므로 그 골이 그다지 깊
지 않다. 그녀는 인생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가기고 있으며 또 준비도 되어 있다. 그
러나 그녀는 남편보다 연하인 경우가 많다. 이 점이 지닌 중요성에 대해서는 별로 유의하
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는 불평등한 성숙의 결과인데도 이를 성의 차별 탓으로 돌
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에 아내는 여성이지 어린애가 아니가. 그녀가 아직 
어린애의 티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애 같은 것이다. 남편이나 남편 친구들의 어
른스러운 태도는 아내에게 압박감을 주게 된다. 소피아 톨스토이는 결혼하고 1년이 지나
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노인이다. 그는 바깥일에 너무 몰두하고 있다. 오늘 나는 나 자신이 참으로 젊게 
느껴져 짓궂게 장난이라도 치고 싶어 견딜 수 없다! 잠을 자지 않고 빙빙 돌며 춤이리도 
추고 싶다. 그런데 대관절 누고와 추지?
  늙은 분위기가 나를 에워싸고 있다. 주위는 모두 늙은 투성이다. 나는 자기의 젊음에 

비롯되는 충동을 하나하나 죽여버리고 있다. 그런 젊음은 분별만 따지는 이 환경에서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남편은 아내에게서 '아기'를 본다. 그녀는 남편이 기대했던 반려자가 아니다. 남
편은 아내에게 그것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아내 쪽에서는 일종의 굴욕감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아마도 친정을 나올 때 인생길을 안내자를 발견한 심정이었을 테지만, 앞으로는 
자기를 '어른'으로 대해 주기를 원했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어린이로 있고 싶지만, 한편
으로는 역시 한 사람의 여자가 되고 깊은 것이다. 연상인 남편은 그녀가 완전히 만족할 
수 있도록 다루어 주지 않는다. 설사 나이차이가 문제되지 않을 때에도, 역시 젊은 남녀
를 일번적으로 성장과정이 전혀 다르다. 여자는 여자답게 얌전한 여성적인 가치를 존중하
도록 가르침을 받고 자란다. 한편 나자는 남성적인 도독의 원리에 젖어 있다. 이런 두 사
람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이들 상호간의 충돌은 얼
마 못 가서 분명히 드러난다.
  결혼이 보통 여성을 남편에게 종곳시킨다는 사실에서, 부부 사이의 문제는 특히 여성에
게서 더욱 두드러진다. 경혼의 모순은 그것이 성애의 작용과 동시에 사회적인 작용의 양
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반성은 젊은 아내의 눈에 비친 남편의 모습에 잘 나타
나 있다. 남편은 남성적인 특권을 갖추고 아버지를 대신하는 반신이다. 그는 보호자. 부
양자.후견인.지도자이다. 아내의 생활은 남편의 비호하에 피어나야 한다. 남편이야말로 
가치의 보호자이고, 진리의 보증인, 부부생활의 윤리적 정당화이다. 그런데 그는 일개 수
컷이므로, 그녀는 수컷을 상대로 종종 부끄럽고 기괴하고 혐오스럽고 혹은 마음을 뒤바꿔
놓은 우연적인 경험을 함게 해야하는 것이다. 그는 아내를 이상으로 향해서 확고한 보조
를 하면 나아가도록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아내를 이끌어 자기와 함게 그 동물송 속으
로 전락시킨다.
  베르나르는 여행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머물렀던 파리에서 어느날 밤, 뮤직홀의 무대를 
보고 분개하여 그것에서 나왔다. "외국인 이런 것 보다니! 참으로 나라의 수치다. 이런 
것으로 우리 프랑스인이 이러쿵저러쿵 비평을 받게 도니단 말이야..." 테레즈는 이 순결
한 남자가 그후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어둠 속에서 끈기있는 자기에게 수작을 강요하는 
남자라는 것에 크게 놀랐다.(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케이루>에서)
  
  지도자와 수신 사이에는 수많은 잡신적인 형태를 생각할 수 있다. 남자는 때로는 아버
지인 동시에 애인이기도 하며, 성행위는 신성한 향연이 되어, 아내는 남편의 품에서 완전
한 자기포기로 얻은 결정적인 구원을 발견하는 애인이 된다. 부부생활에서는 이와 같은 
정열적인 연애는 찾아보기가 매우 드물다. 때로는 아내가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남편을 사
랑하지만 너무나 존경하는 남성을 품에 몸을 맞기는 것을 망설인다. 슈테켈이 보고하고 
있는 부인의 경우가 그렇다. D.S. 부인은 위대한 예술가의 미망인으로 40세이다. 그녀는 
남편을 몹시 사랑하면서도 그와의 접촉에서는 완전히 불감증이었다.
  이와 반대로 남녀간에 존경심을 일게 하는 타락감을 함께 느끼는 형태로 쾌락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성적인 실패는 남편을 완전히 난폭한 인간으로도 만들어버린다. 그

리하여 육체적으로 미움을 받는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멸시를 받게 된다. 경멸이나 반감이
나 원한이 여자에게 불감증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남편은 성적 
경험을 한 후에도 여전히 존경을 받고, 그 동물적인 단점을 너그럽게 보아 용서를 받은 
경우도 적지 않다. 아델 위고(빅토르 위고의 부인)의 경우가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어
떤 경우에는 남편은 그다지 위력은 없지만 유쾌한 상대가 된다. K. 맨스필드는 이런 상반
성이 취하는 하나의 형태를 중편소설<서곡>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르 사모하고 감탄해하고, 대단히 존
견하고 있었다. 오! 이 세상의 누구보다고 그녀는 그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솔직하고 또 기품이 넘쳐흐렀다. 실제생활에서의 다양한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순했고 순진했으며, 또 작은 일에 만족할 술 알고, 사소한 일에 괴로워하기도 했
다. 그가 그처럼 그녀에게 덤벼들지만 않고, 그렇게 큰 소리를 질러대지 않고, 그런 탐욕
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또 그렇게 호색한이지남 않다면!
  그는 그녀에게는 너무 강했다. 소녀시절부터 그녀는 자기에게 덤벼드는 것은 무엇이든
지 질색이었다. 그녀는 그가 참으로 두려워 힘껏 소리를 질러대고 싶을 때도 있었다. "당
신, 날 죽일 셈이야!" 그가 그런 말을 하면 그년 역시 무심코 험악한 망을 해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 그건 사실이다. 그녀는 스탠리를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그가 싫어서 견
딜 수 없었다. 그렇게 분명한 느김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에 대한 그녀의 느낌은 분명하
고, 또 그 하나하나가 사실이었다. 이 낯선 감정, 이 미움 역시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녀
는 자기 감정을 그 수만큰 작은 보자기에 싸서 하나씩 스탠리에게 넘겨줄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중의 마지막 꾸러미를 예기치 않은 선물로 상대방에게 주고, 그가 그 꾸러미를 
펴보았을 때의 얼굴의 상상해 보기도 했다.
  
  젊은 여자가 이처럼 솔직하게 자기 심정을 고백하기는 매우 어렵다. 남편을 사랑함으로
써 행복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의무이다. 그리고 가족이 그녀에게 기대하
는 바이다. 또한 부모가 결혼을 반대한 경우라면 더더욱 그녀는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싶어한다. 보통 그녀는 결혼생활을 우선 소극적인 기분으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남편
에게는 큰 사랑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믿으려고 한다. 이 열의는 아내가 성적으로 만족을 
느끼지 못할수록 병적이고 독점적이고, 질투가 강한 형태를 취한다. 자기가 처음에는 인
정하려고 하지 않은 환멸에서 자기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남편이 곁에 있어 주기를 몹시 
바란다. 이런 병적인 집착에 대해 슈테켈은 많은 예를 들고 있다.
  
  한 여성은 결혼하여 처음 몇 해 동안을 어린애 같은 고집 때문에 불감증에 걸리게 되었
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보통 남편들에게 푸대접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여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장된 애정이 생겨났다. 그녀는 오직 남편을 위해 살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
녀는 자기 의지를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남편은 아침마다 그녀의 쇼핑이라든가 그밖
의 할 일들에 대한 하루의 프로그램에 대해 일러줘야 했다. 그녀는 그것을 양심적으로 실
행한다. 남편이 미리 지시하지 ㅇ낳으면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남편을 그리워

하면서 방에 처박혀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어디르 ㄹ가든지 따라갔다. 혼자 있지 못하
여,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있기를 워했다. 그녀는 불행하여 몇 시간씩 줄곧 울기도 했다. 
남편 걱적을 몹시 하고, 걱정거리가 없으면 굳이 만들어내기도 했다.
  두번째의 예는 혼자서 외출하기가 두려워 방 안에서 감옥처럼 갇혀 있는 여자이다. 나
는 이 부인이 남편의 손을 잡고, 언제나 자기 옆에 있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결혼한 지 7년이 지났으나, 이 남편은 아내와 도저히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소피아 톨스토이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앞에서 인용한 페이지나 그후의 일기를 보면 
그녀는 결혼한 직후에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차린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남편과의 육체적 관계를 몹시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남편의 과거를 비난했고, 또 그가 
나아기 들어서 따분하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사상에 대해서도 반감을 느낄 뿐이다. 아무
튼 그는 침대에서는 정욕에 불타, 그녀에 대한 배려가 전혀없이 거칠고 냉정하게 다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소피아의 절망적인 외침, 권태로운 슬픔이나 냉담한 고백엔 정
열적인 사랑의 항의가 섞여 있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옆에 그리운 남편을 놓아두고 싶
어했다. 남편이 자기에게서 떠나 있으면 곧 질투에 시달리곤 했다.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1863년 1월 11일. 나의 질투는 고칠 수 없는 병이다. 아마도 그를 사랑하고, 오직 그만
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와 더붕어 그리고 그에 의해서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1863년 
1월 15일. 그가 나에 대해서만 꿈꾸고, 생각하고, 나 하나만 사랑했으면 한다. '나는 이
러저러한 것을 좋아해.'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곧 반성하여, 나 자신은 리오보치카가 
아닌 누구도, 아무것도 좋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일을 사랑
하는 것처럼, 나는 반드시 어떤 다른 일을 좋아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가 없느면 나는 참
으로 불안하다. 나는 날마다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느끼
게 된다.
  1863년 10 17일. 니로서는 그를 잘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질투하면서 그
의 돛태를 살피고 있다.
  1868년 7월 31일. 그의 일기르 다시 일어보면 정말로 우습다. 얼마나 모순투성이인가! 
내가 마치 불행한 여자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다니, 우리들보다 사이가 좋은 부부가 있
을까? 나의 사랑은 점점 깊어질 뿐이다. 나는 그를 언제나 한결같이 불안하고 정열적이고 
질투에 찬 시적인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가 냉정하고 자신만만한 것이 가끔 나를 초
조하게 한다.
  1876년 9월 16일. 나는 사랑에 관한 내용이 적힌 그의 일기를 열심히 뒤지고 있다. 그
러곤 막상 그것을 발견하면 심한 질투를 느기게 된다. 나는 남편이 떠나 버린 것을 워망
한다. 나는 잠도 잘 수 없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다. 눈물을 꾹 삼키기도 하고 숨어서 혼
자 울기도 한다. 날마다 미열이 있고, 밤이면 오한이 난다. 내가 그를 너무 사랑했기 때
문에 벌을 받는 것일까?

  
  이런 페이지 전체를 통하여 느끼게 되는 것은, 참된 사랑의 결여를 도독적인 혹은 '시
적인' 흥분에 의해 보충하려는 아내의 헛된 노력이다. 강한 요구나 불안. 질투는 마음의 
공허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많은 병적인 질투는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점점 더해 간
다. 질투는, 여자가 있지 않은 연적을 만들어, 그 불만을 객관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나
타나는 경우도 있다. 남편이 곁에서 완전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남편은 딴 여자를 
가까이하고 있다고 상상하여 자기의 환멸을 합리화한다.
  도독관념. 위선. 자존심. 소심 등에 의해 여자가 거짓말 속에서 완고해지는 경우가 많
다. "남편에 대한 반감이 한평생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우울이나 혹은 다른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고 샤르돈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확실히 고집어 말할 수 는 없어도, 반감은 역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젊은 아내가 
남편의 지배를 거부하려는 다소간의 노력으로 표현되고 있다. 신혼의 밀월과 여기에 이어
지는 불안한 시기가 지나면, 그녀느 ㄴ일단 자주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남편은 흔히 연장자이고, 남성적인 힘을 갖고 
있으며 법률상 가장이므로,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우월성을 갖고 잇다 그리고 적어
도 외관상으로는 지적으로 뛰어난 경우도 있다 남편은 아내보다 교양이나 혹은 적어도 직
업 교육상 우월하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사화의 실무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남자
가 하는 일이다. 법률도 조금은 알고 정치도 안다. 그는 정당이나 조황이나 그밖의 여러 
단체에 속해 있다 근로자나 시민으로서의 사고방식이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는 속일 숭 
없는 현실의 체험자이다. 즉 일반 남자는 추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시실이나 경험을 
존중하고, 다소의 비판렬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많은 여성들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그녀들이 책을 읽고, 강연을 듣
고, 어려 취미강좌를 듣고 익혀도, 두서없이 축적한 그 지식이 하나의 교양이 되기는 어
렵다. 그녀들이 추리를 잘하지 못하는 것은 뇌수의 결함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그런 경험
을 쌓지 못했지 때문이다. 그녀들에게 사상른 유용한 도구이기보다는 오히려 휴희이다. 
총명하고 감수성이 강하고 성실하더라도, 지적인 기술이 결여되어 있지 때문에, 자기의 
의견을 증명하고 거기서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남편은, 그녀보다 훨씬 평범
한 남자라도 쉽사리 그녀를 압도하게 도니다. 그가 잘못했을 경우에도 자기가 옳다고 입
증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남자에게 논리는 때때로 폭력일 수 있다. 샤르돈은 <결혼행진
곡>에서 이런 음험한 형태의 압박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알베르는 베르트보다 연상이
고 교양이 있고 지식도 많은 만큰, 자기와 아내 사이에 견해차가 있을 때에는, 아내의 의
견에 대해 일체의 가치를 거부하는 우월성을 자랑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끈질기
게 입증항다. 아내 쪽에서는 다시 반항하여 남편의 주장에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으려
혹 한다. 남편은 자기 생각을 완강히 고집할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리하여 부부 사
이에 짓눌리는 듯한 오해가 생견난다. 남편은 아내가 변명은 하지 않지만 그녀는 남편의 
현학적인 논리에 어떤 생동감이 숨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남편 쪽에서는 
지금까지 자기도 뻔히 알고 있는 아내의 무지가 자증스러워, 너는 알 텅기 없다는 식으로 
천문학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독서를 지도하기도 하면서, 그녀를 

그의 말이면 뭐든지 얌전히 받아들이는 경청자로 만들고 싶어한다. 자기의 지식부족으로 
언제나 남편에게 지기만 하는 젊은 아내는 침목이나 눈물, 또는 거친 태도로 화풀이를 할 
수 밖에 없다.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한 베르트는, 어런 발작 같은 요란한 목소리를 듣느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알베르는 굴용과 혼란을 느끼고 있는 아내의 당황한 마음에 
그ㅌ까지 상처를 입히려고 오만한 잔소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자기가 잘 알아들을 수 없
는 이론에 굴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드던 그녀는, 이 냉혹한 위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쳤
다. "제발 날 그냥 내버려둬요." 이것만으로는 너무 약했다. 그녀는 경대 위에 놓인 유리
병이 눈에 띄자 갑자기 그것을 알베르에게 집어던졌다.
  
  여성은 때때로 도전한다. 그라나 흔히 어쩔 수 없이 <인형의 집>의 조라처럼 남성이 자
기 대신 생각해 주는 것을 무조건 수용한다. 남편은 부부의 양심이 되는 것이다. 여성은 
소심과 무능과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모든 사항에 대해 공동의견을 
갖도록 남편에게 위임하고 있다. 매우 존경하던 남편을 15년 동안 함게 살다가 사별한, 
총명하고 교양 있고 자주성을 지닌 한 여성이, 자기의 의견이나 행동을 스스로 정해야 하
는 처지에 놓인 불안한 심정을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지금도 남편이 살아 있다면 
이럴 때 이떻게 생각하고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남편은 이
런 지도자 겸 주장의 역할을 하기를 좋아한다. 하루종일 자기와 동등한 인간을 상대로 어
려운 일을 하거나 상사에게 복종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자기의 절대적인 강자로 느끼고 
이론제기를 불허하는 진리를 도도하게 늘어놓고 싶어한다.
  그는 직장에서 하루종일 있었던 일을 이것저것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에 대해 자기가 옳
았다고 주장하고, 아내를 통해 자기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아내에
게 신문이나 새로운 정치정세를 설명하고, 소리내어 읽어주기를 좋아한다. "당신은 교양
에 관해서는 자주성이 없어."하고 말할 듯한 기세이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신장시키기 
위해 여자의 무능을 일부러 과장한다. 아내는 이 종속적인 역할을 다소나마 고분고분 받
아들인다. 남편이 곁에 없는 것을 진심으로 한탄하는 아내도, 혼자 있다가 뜻밖에도 자신
의 능력을 발견하고 놀라며 기뻐하는 아내도 있다. 이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일을 처
리하고, 아이를 교육시키고,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결정하고 관리할 능력이 충분히 있
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편이 집에 돌아와 또다시 자기가 무능한 인간으로 보이게 되는 것
을 괴롭게 여긴다.
  결혼은 남자를 점점 변덕스러운 제국주의로 향하게 한다. 지배욕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것은 매우 유혹적인 것이다. 자식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아내를 남편에게 맡기는 것이 
이 지상에 전제정치를 가능하게 했다. 남편에게는 인정받고 찬양받고 조언하고 지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는 명령한다. 군주 행세를 한다. 소년시절부터 일생을 통하여 
다른 남자들에게 부대끼면서 날마다 상처를 입고 쌓인 한을, 자기 집에서 아내에게 한때
나마 권위를 휘드르는 것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그는 폭력이나 권력이나 완고한 언동을 
사용한다. 무섭게 명령하거나 외치면서 테이블을 두드린다. 이런 희극이 여자에게는 하루

하루의 현실의 하나이다. 남편은 자기의 권리를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아내가 조금이라
도 자주성을 유지하려고하면 무슨 반란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생각한다. 자기가 없이는 
숨도 쉬게 하지 못하려는 기세이다.
  그러나 그녀는 반항한다. 남편의 위력을 인정하더라도 그 현혹은 곧 사라진다. 자녀들
은 언젠가는 아버지도 단지 우연적인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내는 이윽고 자기 앞에 보이는 남편은 영주나 수령이나 군주의 숭고한 얼굴이 아니가, 
한 남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남자에게 이와 같이 예속될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는 다만 일방적이고 부당한 의무를 상징하는 인간으로 보일 뿐이다. 그녀는 
때로는 마조히즘적인 기쁨으로 복종하는 경우도 있다. 아내를 쉽사리 복종시키고 그녀를 
마음대로 교육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참으로 순진하다. "아내는 남편이 만드는 것
이다." 라고 발자크는 말했다. 그러나 몇 페이지 앞에서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다. 
추상이나 논리의 영역에서는, 여자는 단념하고 남자의 권위에 따르기 쉽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맺혀 있는 사고나 관습과 관련될 경우에는 그녀는 상당히 음험하고 집요한 방법으
로 저항한다.
  소녀시절이나 청춘기의 영향은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깊다. 왜냐함ㄴ 여자가 그 개인적
인 역사 속에 많이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몸에 배인 것을 대체로 여자는 한평생 
버리지 않는다. 남편은 아내에게 정치적인 견해를 강요할 수는 있어도, 그녀의 종교적인 
신념은 바꾸게 할 수는 없고, 그 미신을 흔들어놓을 수도 없을 것이다. 어리석은 믿음이 
굳어버린 처녀를 아내로 삼고, 그녀에게 깊은 감화를 줄 수 있다고 믿었던 장 바루아가 
그것을 체험하고 있다. 그는 낙심하여 이렇게 말했다. "지방도시의 그늘에서 찌들어버린 
처녀의 두뇌와 무지한 어리석음에서 빚어진 모든 확신, 이 것만은 손댈 여지가 없다."
  여자는 가르침을 받은 편견이나, 앵무새처럼 모방하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한 
자기의 비전을 갖고 있다. 이런 저항이 자기보다 현명한 남편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경
우도 있다 혹은 반대로 이 저항이 스탕달이나 입센의 여주인공들처럼, 여성을 남성의 진
실성 이상으로 높이 끄러올리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여성이 남성에 대한 반감에서 - 성
적으로 실망했든, 남성의 강한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든 - 자기 것이 아닌 견해를 일부러 
고집한다. 남편을 꺾기 위해 그녀는 부모형제나 혹은 그밖에 자깁다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남성, 고해사 신부나 수녀의 권위에 의지하려고 한다. 또는 분명한 항변을 하지 않고, 무
작정 뭐든지 반대하여 남편에게 상처를 주려고 한다. 그리고 남편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주
려고 한다. 물론 실력이 있으면 남편을 현혹시켜 자기 의견이나 방침을 강요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정신적인 권위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남편의 정신적인 우위를 도
저히 침해할 수 없게 되면, 그녀는 성적인 면에서 보복하려고 한다. 알레비가 말하고 있
는 미슐레 부인처럼 남편의 요구에 응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녀는 어디서나 남편을 지배하겨고 했다. 잠자리에서나, 일하는 테이블에서나, 그녀는 
테이블을 노렸다. 그녀는 침대를 방어하기에 앞서 테이블을 방어했다. 그리하여 몇 달 동
안 부부 사이는 정결했다. 드디어 그녀는 침대를 점령하고 이어서 테이블을 점령했다. 그
녀는 여류작가로 태어났다. 이 테이블이 그녀의 진정한 직장이었다.

  
  남편의 품안에서 뻣뻣하게 굴며, 자기의 불감증을 내세우거나 혹은 변덕스럽고 요염한 
태도로 남편으로 하여금 쩔쩔매며 그녀에게 애원하는 태도를 취하게끔 한다거나, 혹은 교
태를 부리는 등으로 질투를 유발시키고, 그를 소이거나 하면서 남편의 남성다움에 상처를 
입혀 굴욕감을 느끼게 하려고 한다. 신중히 할 필요를 느끼고 너무 철저히 공세를 위하기
를 자제하는 경우에도, 그녀의 마음속은 남편을 멸시하는 냉혹성의 비밀이 품위있게 포장
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비밀을 때로는 일기에 기록하거나, 혹은 가볍게 여자친구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결혼한 여자의 대다수는 자기가 쾌감을 못 느낀다고 가장하기 위해 어떤 속임수를 
쓰는지를 재미있게 서로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자기들에게 속아넘어가는 자부신이 강한 
남편의 어수룩함을 고소하게 비웃고 있다. 이런 고백도 아마 하나의 비극일 것이다. 불감
증과 불감의 경계는 화실치 않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불감증을 내세워, 이것으로 자기들
의 원한을 갚는다. 그중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승리자이기를 원하는 버마재비에 비유할 
만한 여자가 있다. 포옹에서는 무감각하고, 대화에서는 경멸적이고, 행위에서는 폭군적이
다. 프리다가 로렌스에게 취한 태도는, 매벨 도지의 증언에 의하면 이런 것이었다. 그녀
는 남편의 지적 우월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성적인 가치만이 중요성을 지닌다는 자기 자
신의 인생관을 남편에게 강요하려고 했다.
  
  그는 그녀는 어느날 메벨 도지에게 이렇게 분명히 말했다.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나한테서 받아야 해요. 내가 없으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요. 그 사람은 나한테서 자기 책을 받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보란듯이 말을 이었
다. "나는 그 사람을 위해 몇 페이지나 썼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어요."
  
  그러나 그녀는 로랜스가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거듭 자기 자신에게 입증해 
보이고 싶어한다. 그가 자기만을 생각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가 자진하여 그렇게 하지 않
으면 그녀 쪽에서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
  
  프리다는 자기와 로렌스와의 관계가 보통 결혼한 남녀 사이에서 이루어 지는 평범함 속
에서 전개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가 습관적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다고 
생각되면 그녀는 곧 폭탄을 던졌다. 그리하여 그가 자기를 잠시도 잊지 않게 했다. 이처
럼 끊임없이 그의 주의를 끄려는 욕구는, 내가 이 두 사람을 만났을 때 적에게 사용하는 
무기처럼 되어 있었다. 프리다는 그의 가장 예민한 곳을 곧잘 자극한다. 낮에 그가 근에
게 냉담하면, 밤에 그녀가 모욕을 주는 것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결혼생활은 어느 쪽에서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 영원한 싸움터가 되
어 있었다. 그리하여 사소한 싸움에서도 남자 대 여자의 격투가 격렬하게 벌어지는 것이
었다.

  이와는 전혀 다르지만, 주앙도가 묘사한 엘리즈에게서도 남편을 되도록 비하하려는 무
서운 지배욕을 찾아볼 수 있다.
  
  엘리즈 : 나는 우선 주위에 있는 것은 무엇이나 크게 경멸한다. 그러면 나는 마음이 편
하다. 나의 상대는 건달이나 이상한 괴물 같은 것들 뿐이니까.
  그녀는 잠을 깨면 나를 부른다.
  "이 건달아!"
  이것은 술책이다. 그녀는 나를 모욕하고 싶어한다.
  내가 자기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을 하나하나 깨어버리는 것을 그녀는 아주 유쾌하게 
여기고 있다. 어처구니없이하는 나의 친구들이나 하인들 앞에서 내가 이런 '형편없는 놈, 
어리석은 놈'이라고 지적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나도 그녀의 말
을 믿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경멸하기 위해 나의 작품은 거기서 얻는 물질적인 수입만큼
도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끈질기게, 천천히, 그리고 교묘히 나를 낙심시키고, 그럴 듯하게 나를 모욕하
고, 정확하고 냉정하고 집요한 논리로 나의 자존신을 조금씩 잃게 했고, 나의 사상의 원
천을 고갈시켰다.
  "당신은 막노동꾼만큼도 가치가 없어요." 하고 어느날 그녀는 청소부 앞에서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나보다 우수하고, 적어도 동등하게 보이기 위해 나를 깎아 내리고 싶어했
다. 나를 경멸함으로써 자기의 위치를 높이고 싶은 것이다. 나를 자기의 발판, 자기에게 
유용한 물품으로빡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남편의 기록>에서)
  
  프리다와 엘리즈도 남성을 향하여 자신들이야말로 본질적인 주체임을 자처하기 위해, 
남성들에 의해 가끔 개발된 그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 남성들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것이
다. 남성 쪽에서는, 여성들이란 그들의 거세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실제로 셩서의 태도는 더욱 애매하다. 남성의 성을 말살하기보다는 오히려 모욕하고 싶어
한다. 여성은 남성의 기획이나 미래에 손상을 주고 싶어한다는 것이 더욱 정화한 말이다.
  남편이나 자식이 병들고 피로하여 육체적인 것이 되어버릴 때, 여자는 승리감을 느낀
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녀가 군림하는 가정에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물건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때 그녀는 그것을 주부의 권한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깨어진 접시
를 다시 붙이는 것처럼 손질하고, 냄비를 닦는 것처럼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야채의 껍질
을 벗기거나 접시를 씻는 데 익숙한 그녀의 천사와 같은 손을 뿌리치는 것은 하나도 없
다. 로렌스는 프리다의 이야기를 하면서 메벨 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병이 났을 때 자
기 몸에 닿는 이 여자의 손이 어떤 느낌을 주는 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무
겁고 독일적인 손이에요." 여자는 남자에게 그도 육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하기 위
해, 의식적으로 이 손에 무게르 ㄹ주어 남자를 밀어낸다. 주앙도가 말하고 있는 엘리즈처
럼 이런 태도를 철저히 취하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결혼했을 당시의 중국 천진에서의 이가 생각난다. 그 덕분에 나는 비로

소 아내와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날 엘리즈는 나를 양털 깎듯이 발가벗겨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춧불로 내 몸을 구석구석 비췄다. 겨드랑이. 가슴. 배꼽... 그녀의 
손가락은 북처럼 늘어진 고환의 피부까지도 찬찬히 살폈다 넓적다리의 따라 발 사이, 항
문 언저리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숨어 있던 이를 태우고, 노란 체모뭉치들으 휴지통에다 
러리고 난 뒤, 나는 그 벌레와 벌레의 소술에서 동시에 해방되어 새로운 나체와 고독한 
광야가 되어버렸다.
  
  여성은, 남성이 하나의 주관이 표현되는 개체이기보다는 수동적인 육체이기를 바라고 
있다. 여자는 실존에 반항하여 생명을 만들려고 하며, 정신적인 가치에 반항하여 육체적
인 가치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녀는 남자가 뭔가를 기획하는 것을 보고 파시칼(프랑스의 
사상가. 수학자, 1623~1662) 같은 유머러스한 생각을 한다. 즉 '남자의 불행은 집 안에 
조용ㅎ 처박혀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를 집 안에 
가둬두고 싶어한다. 가정생활에 이익을 주지 못하는 모든 활동은 그녀에게 반감을 갖게 
한다. 페르나르 팔리시(16세기 프랑스의 도예가)의 아내는 남편이 지금까지 세상에 없어
도 무방한 새로운 에나멜을 발명하기 위해 가구를 태워버린다고 분개한다. 라신(프랑스의 
극작가, 1639~16699) 부인은 남편에게 정원의 까치밥나무 열매에만 관신을 갖도록 하고, 
그가 쓴 비극은 읽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주앙도는 <전쟁의 기록>에서, 엘리즈가 그의 문
할 작품을 단지 물질적 수입의 미천으로만 생각하는 데 대때로 격분하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내가 본 이번 단편소설이 오늘 아침에 나올 거야." 그녀는 빈
정대려는 것이 아니다. 거것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이 달에는 
300프랑은 수입이 늘겠군요."
  
  이런 충돌이 심하여 부부가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통 아내는 남편의 지배를 
거부하면서도 남편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는 자기의 자주성을 지
키기 위해 싸우지만, 세계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자기가 의존하고 있는 '상황'을 끝까
지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이중역할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많은 여
성들이 신경질적인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유이다. 슈테켈은 그런 심한 사례를 들고 
있다.
  
  Z.T. 부인은 일찍이 성적 쾌감을 느껴보지 못한 여성이지만 교양있는 남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이 너누 훌륭한 것을 참지 못해 남편의 전공 분야를 자기도 공부하여 남편과 
동등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그년느 약혼시절부터 공
부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유명했고, 제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녀는 자기는 이런 어리
석은 존경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했다. 결혼 초기부터 그녀는 불감증에 걸려 있었다. 남편
이 만족하여 자기 몸에서 떠난 후, 그녀는 수음에 의하자 않고서는 괘감을 느끼지 못했
다. 그래서 그녀는 이 사실을 남편에게 그대로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막상 그녀를 흥분
시키려 하면 이를 거절했다. 이윽고 그녀는 남편의 일을 우습게 여기고 과소평가하기 시

작했다. "남편에게 모여드는 바보들의 심정을 알 수 있다. 나는 훌륭한 사란의 사생활의 
이면을 잘 알고 있다.'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날마다 부부싸움이 계속되어 옥신각신했다.
  "난 당신의 그 하찮은 글에 ㄴㄹ라지 않아요." 혹은 "당신이 글줄이나 쓴다고해서 내가 
당신의 말대로 고분고분 따를 줄 알았어요?"
  남편은 점점 자기 제자들에게로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녀도젊은 남자들을 불러들였
다. 이렇게 몇 해를 보내는 도안에, 남편은 딴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남편의 사소한 바람기는 언제나 간과해 버렸다. 그녀는 버림받은 '어린석은 여자'의 친구
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태도가 일변하여 그녀는 쾌감을 느끼ㅈ 못하면서도 
주위의 청년들에게 닥치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리고 남편에게 이것을 고백했다. 남편은 
모든 것을 용서해 주었다. 그녀는 이때 조용히 이혼할 수도 있었으나, 이혼을 거부했다. 
부부느 ㄴ오랜 상담 끝에 화해했다. 그녀는 울면서 몸을 맡기도, 비고소 쾌감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이처럼 싸우면서도 헤어질 생각은 한 번도 한 작이 없었다. '남편을 붙
잡는' 것은 어려운 기술이지만, '남편을 놓치지 않는' 것은 하나의 직없이다. 이 직업에
는 수련이 필요하다. 신경질적인 신부에게 신중한 시누이가 말했다. "조심해요. 마르셀과 
싸움만 하다가는  '실직'을 하게 돼요."
  남편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히 중요하다. 물질적.정신적인 안정, 자기집, 아내로서의 품
위, 다소나마 연애의 대용으로서의 행복 등등. 여자는 자기의 에로틱한 매력이 자기의 무
기로는 가장 약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그런 매력은 습관에 의해 소멸된다. 그리고 유
감스럽게도 매력있는 여자는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근는 자기를 불감증에 빠뜨리
기 위운 그 자존심과 자기의 관능적인 열정으로 남편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이 
분열되어 고민한다. 그녀는 또한 습과느이 힘이나 쾌적한 주거의 매력에 기대를 건다. 남
편의 요리에 대한 기호나 자녀에 대한 애정에 의지한다. 그리고 손님접대나 옷매무새로 
남편에게 환심을 사려고 한다. 여러 가지 조언이나 감화로 남편에 대해 권위를 가지려고 
한다. ㅓㅈㄴ력으 ㄹ다하여 사교계에서의 남편의 성공이나 일에 자기가 반드시 필요한 존
재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특히 전통은 아내에게 '남자를 손아귀에 넣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남편의 
약점을 발견하여, 이것을 적당히 쓰담듬어줘야 한다. 아첨과 경멸, 순종과 저항, 감시와 
관용을 잘 조절해야 한다. 이 조절은 대단히 어렵다. 남편을 너무 풀어놓아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구속해도안 된다. 아내가 너무 착하염 남편은 도망가버린다. 그가 딴 여자
들을 상대로 소비하는 돈이나 사랑의 정열은 아내에게서 빼앗은 것이다.
  다른 여자가 끼어들어 이혼을 당하거나, 아니면 남편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위험이 있다. 그란 남편에게 발감기를 일체 금하고, 감시와 강짜와 요구로 그를 
지겹게 하면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때로는 일부러 양보할 필요가 있다. 
남편에게 '약속위반'이 있어도 눈을 감아야 한다. 그란 때로는 눈을 번쩍 뜰 필요가 있
다. 특히 결혼한 여자는 자기의 지위를 빼앗으려는 -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 묘령의 
처녀를 경계한다. 이런 걱정스러운 연적에게서 남편을 떼어놓기 위해서는, 여행에 데리고 

가거나 기분전환을 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풍파두르 부인을 본받아, 가장 위
험성이 적은 다른 경쟁자를 사이에 넣기도 한다.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눈물과 신경의 발
작, 자살의 시도 등에 호소한다.
  그란 넘 떠들썩하게 공략하면 남편을 집에서 내몰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
리하여 남편을 가장 매혹시켜야 하는 때에 오히려 가장 성가신 아내로 전락하기도 한다. 
만일 남편과의 승부에서 이기려면,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눈물과 여장부다운 미소, 고집과 
애교를 교묘히 조하시켜야 한다. 본심을 밖으로 드러내보이지 않은 채 계략을 써서 잠자
코 미워하고 또한 두려워하며, 남자의 허영심과 약점을 잘 다루고, 남자의 속셈을 간파하
여 잘 조정하는 것은, 분명히 서글프기끼지 한 기술이다.
  여자의 가장 큰 구실은, 결혼에 자기의 전부를 걸도록 강요받고 있다는데 있다. 직없도 
갖지 않고, 능력도 없고, 교제범위도 좁고, 이름까지도 자기 것이 아니다.(결혼하면 남편
의 성을 따른다.) 여성은 요컨대 남편의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남편에게 버림을 받
게 되면, 여성은 대부분의 경우 안파까으로 득이 될 게 없다. A, 드 몽지나 몽테를랑처럼 
소피아 톨스토이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란 그녀가 스스로 들어선 그 '위
선적인 부부생활'을 거부했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확실히 그녀는 상당히 고약한 여장ㅆ던 것 같다. 그라나 그녀에게 그 폭군을 사
랑하고, 자기의 노예적인 신분을 축복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부부 사이에 성실과 우정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두 삶이 서로 자유롭고 구체적으로 평
등해야 한다. 남자만 경제적인 자주성을 갖고, 법률과 풍습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특권을 
보유하고 있는 한, 그가 폭군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것이 아내를 반항과 책
략으로 내몰게 된다.
  부부생활의 비극가 치사함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란 결혼 옹호론자들은 부부 사이
의 갈등은 개인적인 불성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결혼제도에서 연유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중에서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의 에필로그에서 이상적인 한 쌍의 남녀
를 묘사하고 있다. 피에르와 나타샤의 생활이 그것이다. 나타샤는 멋쟁이고 공상적인 처
녀였다. 그런데 이단 결혼하자 화장도 사교도 그리고 일체의 오락에도 무관심하고, 남편
과 자녀에게 헌신하게 되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녀는 현모 양처의 모델처럼 행
동한다.
  그녀는 전에는 자신의 매력이었던, 타오르는 듯한 생명의 불꽃을 이제는 갖고 있지 않
다.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얼굴과 육체만 보일 뿐,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강인하고 
아름답고, 생식력있는 왕성한 여자만 보일 뿐이다.
  
  그녀는 피에르에게서 자기가 그에게 바치고 있는 것과 같은 독점적인 사랑을 요구한다. 
그녀는 그에게 질투를 느낀다. 그도 일체 외출이나 친구와의 교제를 끊고, 가족에게 몸을 
바치려고 한다.
  
  그는 클럽의 만찬에 참석할 수도 없고 긴 여행을 할 수도 없었다. 다만 사무를 보기 위
해 밖에 나가는 것은 예외였다. 그리고 이 일 중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대단히 중요한 

과학 연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에르는 '아내의 엉덩이에 깔려' 있었으나, 그 대가로...
  
  나타샤는 가정에서 완전히 남편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집 안은 이른바 남편의 명령, 
즉 나타샤가 미리 짐작했던 피에르의 욕망에 의해 좌우되었다.
  
  피에르가 멀리 떠나가게 되면, 나타샤는 그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한다. 남편이 집을 
비운 동안은 괴롭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는 워만한 상호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다. 몇 
마디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아이들과 집과 사랑받고 존경받는 남편 사
이에서 그녀는 거의 티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다.
  이 목가적인 그림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나타샤와 피에르는 영혼과 육체처럼 
결합되어 잇다고 톨스토이는 말한다. 그라나 그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면 그야말로 죽음이 
있을 뿐이다. 피에르가 나타샤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로렌스도 남성
의 변심이라는 가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동 라몽은 언제나 자기에게 마음을 비치는 소녀 
테레사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의 열렬한 지지자의 한 
사람인 앙드레 브르통까지도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이 사랑이 대상을 착각하는 경
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니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착각이든 변심이든 여자는 어느 쪽이나 
버림을 받게 된다.
  억세고 감각적인 피에르는 육체적으로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이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타샤는 질투심이 많다. 이윽고 두 사람 사이는 험악해진다. 남편이 아내와 헤어진다. 
그것은 그녀의 생활을 망치게 한다. 남편은 거짓말을 하고 그녀는 싫어하면서도 참고 견
딘다. 이것은 남편의 새활을 파괴한다. 혹은 그들은 타협과 일시적인 방편으로 결혼생활
을 계속한다. 이것은 양쪽을 다 불행하게 한다.
  나타샤에게는 아이가 잇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라나 아이는 남편
이 그 하나의 정점을 이루는 안정된 형태의 내부에서만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버림
받아 질투하고 있는 아내에게는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된다. 톨스토이는 나타샤가 피에르의 
사상에 맹목적으로따르는 것을 찬탄하고있다. 그란 다른 사람, 역시 여자의 맹목적인 헌
신을 요구하는 로렘스는 피에르나 나타샤를 조롱하고 있다. 한 사람의 남성은, 다른 남성
들이 볼 때엔 흙으로 만든 우상이며 결코 진정한 신이 아니다. 그를 신처럼 숭배하는 것
은 그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잃게 한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남성의 주장에는 대개 서로간의 이론이 있다. 권위가 분명치 않다. 여성은 그것을 판단하
고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여성은 대체로 극히 유순하게 반응할 뿐이다. 여성이 자기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성을 할 수 없는 것을 그녀에게 강요하는 것은 곧 그녀를 무시하
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의 사상의 일부를 공유하는 것은 자주적인 판단에 의해서만 가능
하다. 자기와 관계가 없는 것은 찬성이나 거부를 할 수 없다. 아무리 여성이라도 자기 자
신의 존재이유를 타인에게서 차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피에르 나타샤의 신화에 가장 근본적인 비난은, 그런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 레오와 소

피아(톨스토이 부부)의 결혼생활이었다는 것이다. 소피아는 남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
으며, 톨스토이를 '감당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녀를 속였고, 근처의 시골
여자들을 자주 집적거렸다. 그래서 그녀는 질투를 해야했고, 또 우울해지기고 했다. 그녀
는 임신기간중에 때때로 신경질적인 발작을 일으키기도했다. 자녀들은 그녀의 텅빈 마음
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녀에게 가정이란 메미른 사막이었고, 또 그는 생지옥이라 느꼈다. 
결국, 그는 숲속의 밤이슬이 내리는 한밤중에, 반나체가 되어 누워 있는 히스테리 노파와
의 평생의 '결합'을 부정하며 집을 뚜쳐나가는 처량한 노인이 되고만다.
  확실히 톨스토이의 경우는 예외이다. 세상에는 원만한 가정이 많이 있다. 즉 부부가 하
나의 타협점에 도달하여, 서로를 과롭힌다거나 속이는 일도 없이 함께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점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악연으로 더불어 사는 사말들도 있다. 
그것은 권태이다. 남편은 아내를 자신의 메아리ㄹ 만들어버리고 작자 자기 세계에 처박히
기 시작한다. 그러곤 얼마 지나, 몇 달 혹은 몇해 후에는 두 사람 사이에 할 말이라곤 없
어지는 것이다.
  부부란 결국 그 구성원들이 고독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면서 자주성만을 상실하는 공동체
이다. 서로 다아내믹한 생명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않고 정적으로 양자가 동화되어
버린다, 그래서 정신적인 영역에서나 또는 에로틱한 면에서도, 그들은 이제 무엇 하나 주
는 것도 없고 받는 것도 없다. 도로시 파커는 그의 가장 뛰어난 중편소설의 하나인 <너무 
나쁘다>에서, 많은 결혼생활의 슬픈 이야기를 요약하고 있다. 그것은 저녁때였다. 웰튼이 
집에 돌아온다.
  
  웰튼 부인이 벨 소리를 듣고 문을 연다.
  "벌써 와요!"하고 그녀는 명랑하게 말한다.
  두 사람은 활기에 넘친 미소를 교한한다.
  "여보, 당신 줄곧 집에만 있었어?"
  그들은 가볍게 포옹한다. 남편의 외투와 모자를 벗어서 걸고, 호주머니에서 신문을 꺼
내 그 한 장을 그녀에게 넘겨준다.
  "신문 샀어요?" 그녀는 신문을 받으면서 말한다.
  "그래, 삳신 오늘은 집에서 뭐하고 지냈어?" 하고 묻는다.
  그녀는 그런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오늘 한 일에 대해 이것저
것 이야기하려고 생각을 해두었다... 그러나 막상 그런 이야기르 길게 늘어놓는다는 것은 
별로 흥미롭지도 않을 것 같다.
  "별로 한 게 없는걸요."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오늘 오후는 어땠
어요?"
  "좋았어!" 하고 그는 말을 계속하려고 한다... 그러나 말하기 전에 흥미가 사라졌다. 
그리 아내 역시 방석의 꽃숭에서 실을 한 오라기 뽑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응, 별일 없었어." 하고 그는 말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이야기를 곧잘 하는 편이다... 어니스트도 사람들 사이에서 꽤 
수다스러운 편이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 약혼시절에 둘이서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

다. 그때도 별로 이렇다 할 만한 화제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키스를 했고, 마음속에 여러가지 이야기가 잇따라 떠올랐다. 그란 7년 후의 저
녁에는 키스라거나 그밖의 것들을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
  7년 동안에 서로에게 익숙해졌고, 그저 그렇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그런 게 시들하게 
여겨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란 그렇지 않다. 나중에는 신경이 날커
로워진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가끔씩 생기는, 포근하고친밀한 참묵이 아니다. 당신은 
뭐가 할일이 있는데, 그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마치 손님을 청하
여 개최한 파티가 순조롭게 잘 진행되지 않을 때 여주인이 느끼는 감정 같은 것이다... 
어니스트는 신문을 열심히 읽어나가려고 하지만, 중간쯤부터 하품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 
그를 보며 웰튼 부인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그녀는 델리아에게 할일을 일러
줘야겠다고 주얼거리면서 부엌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냄비를 멍하니 바라보고 빨랫감들을 
살펴보고 나서 그것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돌아왔더니 그는 벌써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
고 있다.
  1년 동안 그들은 300일의 저녁을 이렇게 보낸다. 그러니까 300의 7배 2000일이 넘는다.
  
  이런 부부 사이의 침묵을 쓸데없이 수다보다도 도 깊은 친근감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사
람도 있다. 확실히 부부생활이 어떤 친밀감을 일으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모
든 가족관계가 그렇다. 그러나 역시 미움과 질투와 한을 속에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앙도는 이런 친밀감과 진정한 인간적인 우애의 차이를 리렇게 지적하고 있다.
  
  엘리즈는 나의 아내이다. 아니 나의 친구 중의 누구도, 나의 가족 중의 다른 누구도, 
내 몸의 어느 부위도 그녀보다 더 친말하지 못하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우주에서 그녀
가 나를 위해 마련한 위치와, 내가 그녀를 위해 마련한 위치가 아무리 가까워도, 그리고 
그것이 내 육체나 영혼의 조직 속에 아무리 깊이 뿌리를 내려도(우리들의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결합의 신비와 드라마는 거기에 있다) 지금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이 창문에서 
분명한 모습을 볼 수 없는 미지의 사람이 인간적으로는 그녀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떤 독에 희생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길들어버리는 것을 개닫게 된다. 자
기를 버리자 않고 어떻게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는 또 말한다.
  
  내가 그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부부애라는 걱은 공감이나 감각성, 정열, 우정, 아니 
사랑과도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부부애 자체가 독자적인 것으로 그런 
여러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에도 적용할 수 없다. 부부는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성질, 
특수한 본질이나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부부애의 옹호론자들은 그것은 사랑은 아니지만 거기에 대단히 훌륭한 성질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지는 근년에 하나의 서사시적인 형식을 생각해 내
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매너리즘이 모험에 대치되고, 정숙은 숭고한 광기이며, 권태는 현
명으로 바뀐다. 가족적인 증오는 사랑의 가장 깊은 형태이다. 사실은 두 사람이 서로 싫
어하면서도 헤어지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관계 중에서 결코 진실하고 감동적인 것이 
못 된다. 그것은 가장 가엾은 관계이다. 각자가 스스로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두 사람이 
그들의 사랑의 자유로운 승낙에 의해 결합되어야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잇다.
  톨스토이는 나타샤와 피에르의 결합을 '정의내기리는 어렵지만, 정신과 육체의 그것과 
같은 확고한 결합'이라고 칭찬하고 잇다. 정신과 육체를 나눠서 생각하는 이원존적인 가
정에 따르면, 육체는 정신에게 오직 사실성 뿐이다. 이와 같은 사고 방식에 의하면 부부
의 결합에서는 한족이 상대방에게 우연적으로 부여된 필연적 무게를 갖게 된다. 이것은 
선택된 것이 아닌, 부조리의 존재, 살기 위한 필연적 무게를 갖게 된다. 이것은 선택된 
것이 아닌, 부조리의 존재, 살기 위한 필연적인 조건, 물질 그 자체로서 맞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두 말 사이에 일부러 혼란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있다. 거기서 
속임수가 생기게 된다. 사람은 자기가 맡은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육체
를, 자신의 과거를, 그리고 현재라는 상황을 책임지며 맡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타자에 
대한, 자기와 분리된 생생에 대한, 어떤 한 목적에 대한 혹은 어떤 한 미래에 대한 움직
임이다. 무거운 짐이나 압제를 맡는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반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건적인 관계는 그것이 직접적인 행동으로 옮겨질 경우에는 별 가치가 없다. 예컨대 부
모와 자식의 관계는 그것이 의식에 떠오를 때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된다. 부부의 관계에서
도 역시, 어느 한 배우자가 거기서 자유를 상실해 버리는 것을 찬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부애라고 불리는 집착.원망.증오.구속.체념,나태함.위선 등의 복합적인 것들을 세상
에서 자못 존중하는 체하는 것은, 질실의 대용으로서 유용하기 때문이다. 우정이나 츄ㄱ
체적인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정직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스러워야 한
다. 자유는 변덕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의 감정은 순간을 초월하는 시초이다. 그의 결의
를 유지하거나 혹은 파손하는 것처럼, 그의 일반적인 의지와 개개의 행동을 대립시키는 
것은 개인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외부의 어떤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두려움 없이 성실
하게 살았을 경우에는 감정은 자유롭다.
  이와 반대로 부부애의 구속은 모든 정신적 억압이나 거짓말로 이어지기쉽다. 그리고 무
엇보다도 '부부애'라는 구속은 서로의 진실되게 아는 것을 가로막는다. 일상적인 친밀성
에서는 이해도 공감도 생기지 않는다. 남편이 아내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비밀에 흥미를 
갖기에는 그녀를 너무 존중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내에게 어떤 위험이나 괴로운 
비밀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녀는 침대에서 정말로 쾌감을 느끼고 있을
까? 참으로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가? 남편을 따르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가? 남편은 그런 
질문을 차마 스스로에게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 물음은 실례이기까지 하다. 그는 '정숙
한 여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본질적으로 정숙하고, 헌신적이고, 충실하고, 순수하고, 행
복하다. 그녀가 곁길로 접어든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병상에 누운 남자의 친구
나 친척, 그리고 간호사에게는 감사한다는 인사를 하면서도 6개월 동안 줄곧 병상을 지켜

온 아내에겐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는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당
신의 의무를 다한 거니까."
  그녀의 어떤 재질도 칭찬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모두 사회가 보장한 것이고, 결혼이라
는 제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아내가 보날드(카톨릭 보수 사상가로, 가
정윤리에도 업격하다)의 책에서 나온 사람이 아니며, 살고 뼈를 지닌 한 개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녀가 계율로 지키고 있는 것을 정조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도 싸
워야 할 유혹이 있으며, 아마도 거기에 굴복하는 겨웅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인내와 정
절과 근신은 쉽사리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남편은 일체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더욱 
근본적으로, 아내의 꿈.환상.노스탤지어, 그녀가 날마다 그속에서 보내고 있는 감정적인 
풍토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다. 그리하여 샤르돈은 <이브>에서 몇 해 동안 부부생활의 
일기를 쓰고 있는 남편에 대해 쓰고 있다. 그는 섬세한 뉘앙스로 아내에 대해 말한다. 그
러나 그것은 단지 그의 눈에 비친 아내, 자기에 대한 아내의 모습이며, 그녀 자신의 자유
로운 개인에 대해선 조금도 표현하지 못한다.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집른 나건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벼락을 맞은 기분이
었다. 소박하고 성실한 남편이 아내의 배반을 보고 큰 환멸을 느끼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다. 베른슈타인의 작품에 나오는 남편들은 그 아내가 남편 몰래 돈을 빼돌리고, 심술궂
으며,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혐오스러운 심저으로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그런 타격을 용
감하게 꾹 참지 만, 아무리 작가가 노력해도, 이런 남편들이 너그럽고 강한 성격의 소유
자로 보이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그들은 특히 감수성과 선의가 결여된 거칠고 어리석은 
인간으로 보일 뿐이다. 남편은 아내의 기만을 비난하지만, 남편이 그처럼 언제나 속아넘
어가느 것은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는 것은 아내에게 더덕 자
체가 비인간적인 본질을 구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실한 여성, 경탄할 만한 어머니, 
정숙한 아내 등등이 그것이다. 여성이 생각하고, 꿈꾸고, 잠자고, 욕망을 갖고 속박없이 
호흡하면, 즉시 남성의 이상에 배치된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은 남편이 없을 때 비로소 
자유럽게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자기 남편을 잘 모른다. 날마다 우연성 속에서 남편을 파악하고, 그
것으로 남편의 진정한 모습을 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남성은 우선 사회에서 다른 남
성들과 어울려 일하게 마련이다. 그의 초월적인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본성을 왜
곡하게 된다.
  "시인의 아내가 되어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수세식 변소의 끈을 당기는 것을 자주 잊어
버리는 것이다." 하고 엘리즈는 말하고 있다.(주앙도의 <전쟁의 기록>에서) 그래도 그는 
시인임에 변함이 없으므로 그의 작품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아내는 멀리 있는 독자보다도 
그를 모르고 있다. 이런 공감을 여성이 하지 못하는 것은 여성의 잘못이 아닌 겨웅가 많
다. 그녀는 남편의일에 참견할 수 없다. 경험도 없고 필요한 교양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남편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날마다 단조로운 가사의 되풀이보다는 더욱 본질적인 계
획을 함게 세워가며 그와 호흡을 같이하려고 해도 되지 않느다.
  약간의 특별한 경우에는 아내도 남편에게 참된 동바자가 되기도 한다. 남편의 계획에 
대해 의논하고 조언하고 그 일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그녀가 자기의 개성

적인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역시 남성만이 행동적이고, 책일을 
지는 유일한 자유인이 된다. 그에게 유용한 일에 기쁨을 느끼려면, 그녀가 그를 사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노력의 결과를 빼앗긴 것으로 생각하여 원망하게 될 테니 말이
다. 
  남성들은 여성에게, 당신은 여왕이라고 추어세우면서 노예처럼 다룬다는 발자크의 법칙
을 잘 지켜, 여성의 영향력이 갖는 중요성을 교묘히 과장한다. 그들은 자싱들이 실제로는 
저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조르제트 르 블랑은 메테르링크에게 그들이 같
이 썼다는(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책을 두 사람의 공저로 할 것을 요구했을 때 이 
속임수에 넘어갔다. 여류 성악가의 <추억>에 쓴 머리말에서 그라세는 가차없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남성은 누구나 자기 생애의 반려가 된 여성을 협력자, 즉 영감을 주는 
사람으로 여겨 감사하고 있지만, 그래도 '자기일은 역시 자기 것이다.'라고 말이다.
  모든 행동이나 일에서 가치를 갖는 것은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다. 여자는 일반적으로 
예언자가 들여다보는 유리구슬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다른 여자도 그런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 증거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조언자나 협력자로 삼아도 지장이 없는 경우
가 많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부인은, 남편의 원고를 정서했다. 톨스토이는 후에 그 일
을 딸에게 맡겼다. 그래서 부인은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남편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
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자가 진정한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으려면 자주적인 일을 가져야 한다.
  부부 생활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아내들의 하루는 
거의 동일하게 전개된다. 아침에 남편은 급하게 아내와 헤어진다. 아내는 남편 뒤에서 문
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겨우 자유를 얻어 이제 집 안의 여왕이 된 
것이다. 다음은 아이들이 등교할 차례이다. 그녀는 종일 집에 남아 있다. 요람 속에서 움
지이거나 뜰에서 놀고 있는 아이는 자기 친구가 못 된다. 그녀는 한동안 화장과 자질구레
한 가사를 정리하는 데 보낸다. 가정부가 있으면 지시를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부
엌에서 서성거린다. 아니면 시장에 가서 이웃여자들이나 상인을 상대로 물가 등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 남편과 아이들이 점신시간에 돌아와도 그들과 천천히 즐길 시간의 
여유가 없다. 식사준비를 해야 하고, 산을 차려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릭 그들은 점심을 먹으러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그녀는 길고 공허한 오후의 
시간을 갖게 된다. 어린아이를 공원에 데리고 가, 아이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뜨개질이
나 바느질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집 창가에 만지고 고칠일이 남아 있다. 손을 부지런히 
놀리고 있을 뿐, 머리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녀는 언제나 가정에 대해 막연
히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계획을 세우고 몽상을 한다. 그녀는 권태롭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으 ㄴ하나도 마음을 흡족하게 채워주지 못한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기가 손질한 셔츠를 입게 되거나, 이제부터 마련할 음식
을 먹데 욀 남편과 이이들에 대해서이다. 자기는 다만 그들을 위해 살고 있다. 그들은 조
금이라도 고마워할 까? 그녀의 권태는 조금씩 조바심으로 변하고, 그들이 집ㅇ체 돌아오
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입
을 마추고 이것 저것 물어본다. 그들에게는 해야할 숙제가 있고, 어머니는 아니들과 어울

려 놀고 싶어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결국 어머니에게서 도망쳐간다. 아이들도 기분전환의 
역할을 해 주지 못한다. 게다가 나쁜 성적을 받아오거나 머플러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
다. 그들은 떠들어대고 뒹굴고 싸우기도 한다. 그래서 때론 야단을 쳐야 한다. 아이들은 
집에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 주기는 커녕 피로하게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 사람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어째서? 빨리 돌아오지 않을까? 
일을 하고 있겠지. 손님을 만나고 있을지도 몰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거야. 
그러나 그는 그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런 남자에게 자시 청춘을 바친 어리
석음을 억울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남편은 아내를 하루종일 가둬둔 자기 집을 
향해, 조금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발길을 돌린다. 결혼 초기에는 꽃다발이나 작은 선
물 같은 것도 사가지고 들어오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습관도 무의미하게 되었다.
  지금은 빈손으로 돌아온다. 아내의 영접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는 발길을 재촉하지 않
는다. 사실 아내는 권태나 낮 동아늬 기다림을 싸움으로 복수하는 경우가 많다. 그도 직
장에서 결코 재미있게 보낸 것은 아니다. 그는 피로하다. 자극과 휴식을 동시에 원하는 
모순된 심정이다. 아내의 낯익은 얼굴은 그에게 지가를 잊게 하지 ㅇ낳는다. 아내가 집 
안에서의 수고를 자기와 나눠 갖기를 원하고, 그녀 쪽에서도 기분전환과 휴식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남편은 잘 알고 있다. 아내는 자기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된다. 그녀는 자기에게 진정한 휴식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도 위로나 평화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식사할 때와 초저녁 시간은 우울하게 보낸다. 신문을 읽고, 라디오를 듣고, 
활기가 없는 잡담을 하고, 친밀감은 감돌고 있지만 각자는 고독하다. 아내는 불안한 마음
으로 주엉ㄹ거린다. - 어쩌면 오늘 밤 ...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녀는 환멸
을 느기고, 초조하게 혹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든다. 이튿날 아침, 문을 여는 소리를 들
을 때야 비로소 그녀는 기쁨을 느낄 것이다.
  여성들의 운명은 가난하고 일이 많을 때에는 더욱 가혹하며, 한가롭거나 심심할 때에는 
다소 밝아진다. 그러나 권태.기대.낙심, 이 공식은 대체로 같다.
  몇 가지 도피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시골에서는 
결혼의 사슬이 상당히 무겁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이라면, 여자는 어떻게 해서든
지 감당해 나가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앞에서도 보아온 것처럼, 권위를 내세워 위압적
인 마나님이나 고약한 여자가 되는 겅우도 있다. 또 어떤 여자들은 불행한 희생자의 역할
을 감수하여, 남편이나 자녀의 슬픈 노예가 되어, 마조히즘적(자학적)인 기쁨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또 어떤 여자들은 혼기에 접어든 처녀에 대해 지적한 바와 같은 나르시
시즘적(자애적)인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그녀들도 어떤 계획에서도 자기를 실현할 수 없
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될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녀들은 
분명히 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무제한의 존재로 느끼고, 자기를 인정받지 못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리 그녀들은 자기에 대한 우울한 자기애를 느끼며, 꿈.희
극.병.괴벽.히스테릭한 싸움 속으로 도피한다. 그녀들은 자기 주변에다 비극적인 것들을 
조성하거나 혹은 가공적인 세게에 갇혀 있다.
  아니엘이 묘사한 '상냥한 뵈데 부인'은 이런 여자이다. 단조로운 시골 생활에 갇힌 그
녀는 거치고 무지한 남편 곁에서 아무것도 할 기되가 없었다. 사랑할 기회조차 없는 그녀

는 자기 인생의 허무감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보상을 소설적인 공상이나 자가 주위에
서 피어난 화초, 혹은 화장이나 자기가 연출하고 있는 인물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남편
은 그러나 그녀의 이런 위로까지도 방해한다. 급기야 그녀는 드디어 남편을 죽이려고까지 
한다. 그녀가 자기를 도피시키는 상징적인 행위는 패륜을 이끌 수도 있다. 집념이 범죄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해관계보다 단지 증오에서 비롯되는 부부간의 범죄도 있다. 그래
서 모리아크는 일찍이 라파르즈 부인이 한 것처럼 남편을 독살한 테레즈 데케이루를 우리
에게 보여준다. 밉살스러워 견딜 수 없는 남편을 20년 동안이나 참아왔으나, 어느날 장남
의 도움으로 이 남편을 냉혹하게 교살한 40세의 여자를 석방한 사례가 최근에도 있었다. 
그녀로서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명석한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진실한 태도로 자기의 처지를 극복하려는 여자에게는 극기
에서 비롯되는 자존심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남에게 의존하고 있으므로 
극히 내면적인, 따라서 추상적인 자유밖에 알 수 없다. 그녀는 모든 기성원치과 가치를 
거부한다.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여 경혼생활의 예속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그녀의 고결한 신중성, '참으라.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은 소극적인 태도이다. 체념 속에 굳어버려, 자기 능력을 발휘할 적극적인 돌파구가 없
다. 그녀는 정열이 넘치고 힘이 솟아나는 한 자기 늘력을 어떻게 해서든지 활용하려고 생
각한다. 그녀는 남을 돕고, 위로하고, 보호하고, 제공하면서 여러 가지 일거리를 늘여나
간다.
  그러나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여, 그 활동을 진정한 목표의 달성에 바
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다. 그녀는 때때로 고독감을 느끼고, 헛된 수로 때문에 괴로워하
며 자기를 부정하고 파괴한다. 그런 여자의 운명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는 샤리에르 부인
(<아돌프>의 작가인 뱅자맹 콩스탕의 애인)의 경우이다. 조프레 스코트는 이 여성을 위해 
쓴 매혹적인 작품(<젤리드의 초상화>)에서 이 부인을 '불의 이목구비, 얼음처럼 싸늘한 
이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에르망수가 '북극인의 마음도 뜨겁게 했을 것'이라고 말
한 그 생명의 불꽃을  이 여성에게서 꺼버린 것은 이성이 아니었다. 쥘렌의 정열적인 미
녀를 조금씩 죽여버린 것은 결혼이었다. 그녀는 그 체념 속에서 살려고 했다. 다른 해결
방법을 생각해 내려면 히로이즘(영웅주의)와 천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 여성의 보기 드
문 성격도 자신을 구제하기에는 부족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결혼제도가 안고 있는 겨함
을 분명히 말해 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튈르 양은 재질이 뛰어나고 교양있고 총명한, 정열적인 여자로서 전 유럽을 놀라게 했
다. 그녀는 12명 이상의 구혼은 거절하여 구혼자들은 두렵게 했다. 그란 가장 마음에 드
는 상대는 그쪽에서 사양했다. 그녀는 자기의 관심을 끈 유일한 남자인 에르망슈도 남편
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와 12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러나 이 우정이
나 그녀의 연구과제도 끝내 그녀에게 만족암을 주지 못했다. '처녀와 순교자'는 같은 뜻
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이썽ㅆ다. 쥘렌의 생할이 주는 속박을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그
녀는 여자가 되고 싶었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30세 때 그녀는 샤리에르와 결혼했다. 그
녀는 남편에게 발견한 '마음의 성실성'과 공정한 정신'을 존중했다. 처음에 그녀는 이 남
자를 '세상에서 가장 진정한 사랑을 받고 있는 남편'으로 만들 결심을 했다.

  후에 뱅자맹 콘스탕은 '그녀는 남편에게 자기와 같은 활기찬 적극성을 갖게 하려고, 그
를 무척 괴롭혔다.'고 말했다. 그녀는 침착하고 냉정한 남편의 성격을 바꾸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성실하지만 침울한 남편과 노쇠한 시아버지, 애교라곤 없는 두 시누이와 함께 
콜롱비에에 갇혀 있는 샤리에르 부인은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뇌사텔의 시골생활은 너
무나 편협하고 평범하여 싫증이 났다. 그녀는 집에서 빨래를 하거나 저녁에는 카드놀이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한 젊은 남자가 그녀의 생활에 한동안 스쳐갔으나 그
후에는 전보다 더욱 고독했다. 그녀는 권태를 뮤즈라고 생각하고 뇌샤텔의 풍속을 소재로 
한 소설을 네 권이나 썼다. 교제 범위는 점점 좁아졌다. 한 작품 속에서는 감수성이 예민
하고 생기 발랄한 여자와 선량하지만 냉철하고 둔중한 남자와의 결혼에서 오랫동안 지속
되는 불행을 다루로 있다.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있어 오해나 환멸, 그리 하찮은 워망의 
연속처럼 생각되었다. 그녀가 불행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병들었으나 회복한 후에
는 다시 긴 고독속으로 돌아갔다. 그 고독은 그녀와 그녀의 인생의 합작품이었다.
  "콜롱비에에서의 단조로운 생활의 반복과 남편의 소극적이고 참을성있는 온화한 성격이 
어떤 활동으로도 메울 수 없는 영원한 공허를 느끼게 한 것은 사실이다." 하고 그녀의 전
기작가는 쓰고 있다. 이때 뱅자맹 콩스탕이 나타나 그후 8년 동안 그녀의 마음을 정열적
으로 사로잡았다. 그녀는 스탈부인과 이 남자를 두고 다투기에는 너무나 자존심이 강해, 
그를 단념했다. 그때 그녀의 자존심은 굳어버렸다. 그녀는 어느날 그에게 이렇게 써 보냈
다. "전에는 콜롱비에에서의 생활이 몹시 지겨웠어요. 그래서 밖에서 이곳에 돌아오면 절
망에 사로잡히곤 했죠. 그러나 이제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이것에서 참고 견
디면서 살아가려고 해요." 그녀는 이곳에 갇혀 살면서 15년 동안 자기 집 뜰에서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운명을 바구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마음을 
이기느 스토아 철학자의 가르침을 실천했던 것이다. 포로가 된 그녀는 오직 자기의 감옥
을 선택함으로써 자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알프스 산맥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샤
리에르의 존재를 지기 곁에 받아들였다."고 스코트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두뇌가 명석한 
그녀는 이런 체념은 일종의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남에게 점점 
진심을 털어놓지 않아 점점 더 완고해졌고, 외부에서 보아도 그녀의 마음속의 절망이 느
껴졌기 때문에 모두들 그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녀는 뇌샤텔에 몰려온 망명궈족들에
게 집을 내어주고, 그들을 보호하고 원조하고 지도했다. 그녀는 인생에 환멸을 느낀 여자
답게 우수한 작품을 쓰고, 가난했던 독일 철학자 휴벨이 이것을 번역했다. 그리고 젊은 
여성들에게 조언을 하거나 특히 사랑하는 앙리에트에게 로크의 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이웃농민들에게는 기꺼이 수호신의 역할을 했다. 그녀는 점점 뇌샤텔의 사교계를 조
심스럽게 피하며 자기 생활의 범위를 조금씩 좁혀갔다.
  그녀는 오로지 "습관적인 생활을 되풀이하고 이를 견디어 나가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한결같은 친절에도 어쩐지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만큼 그녀의 냉정한 태도는 얼음처럼 싸
늘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녀는 빈 방속을 스쳐가는 그림자처럼 생각되었다." 때때로 
드물게, 손님이 찾아왔을 경우에는 생명의 불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은 무미건조하게 흘러갔다. 샤리에르 부부는 마음이 서로 멀어져 있었으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늙어갔다. 방문객은 그녀의 집을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무덤 속에서 도망쳐나온 듯한 인상을 받았다... 시계가 똑딱거리고, 샤리
에르 씨는 아래층에서 수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헛간 쪽에서는 탈곡기의 리드미컬한 소리
가 들려왔다... 탈곡기가 인생의 열매를 모조리 떨어뜨렸는데도 생활은 아직도 계속되었
다... 하루의 작은 균열을 절망적으로 메우는 것밖에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작은 소
일거리들로 채워진 생활이 계속된다. 사소한 것이 질색이던 젤리드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
이다."
  샤리에르 씨의 생활도 아내의 생활 이상으로 유쾌하지는 못했다고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스스로 이런 생활을 택했으며, 그것이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어울렸던 것 같기도 하다. '튈르의 미녀'와 같은 보기 드문 개성을 타고난 남자라면 그는 
콜롱비에의 메미른 고독 속에 일생을 묻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남자라면 사회에 
나가 자기의 기반을 닦고 기획하고, 싸우며, 행동하는 인간으로 살았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결혼생활 속에 매몰되어 스탕달의 말대로 "인류에게 소실되었는
가." 세상사람들은 결혼이 남성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인 경우가 많
다. 그러나 결혼은 거의 언제나 여성을 허무하게 만든다. 결혼 옹호론자인 마르셀 프레보
도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나는 미혼의 처녀시절에 대해 알고 있던 젊은 여성과 몇 달 혹은 몇 년 뒤에 만났을 때 
변해 버린 그녀의 평범한 성격과 무의미한 생활에 놀란 적이 수없이 많다.
  
  결혼한 후 6개월이 지난 소피아 톨스토이가 쓴 글의 내용도 이와 거의 비슷하다.
  
  나의 생활은 참으로 평범했다. 그것은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충실한 
생활, 내면의 생활, 재능, 불후의 명성이 있다.(1863년 12월 23일)
  
  이보다 조금 전에는 다른 탄식을 하고 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도 않고, 영원한 노예로 만들어버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하루종일 바늘을 손에 들고 있을 수 있고, 피아노를 치면서 혼자... 고독 속에서 만족을 
누릴 수 있겠는가?(1863년 5월 9일)
  
  그녀는 11년 후에 오늘날에도 많은 여성들이 이 공감할 듯한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
고 있다.
  
  오늘, 내일, 달마다, 해마다 그것은 언제나 한결같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지만 침대에
서 얼른 일어날 용기가 없다. 내가 기운을 내도록 누가 도와주지 않겠는가?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그렇다. 나는 알고 있다. 먼저 요리사가 온다. 다음은 냐니아의 차례
다. 그리고 나는 말없이 앉아 영국 자수를 집어든다. 그 다음엔 아이들에게 문법과 음계
의 연습을 시킨다. 밤에 나는 영국 자수를 두고, 그 사이에 숙모와 피에르는 여전히 트럼

프를 한다... .(1875년 10월 22일)
  
  프르동 부인의 탄식도 이와 똑같은 어조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사상이 있어요. 그런데 나는 어떻죠? 당신이 일을 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에 나는 할 일이 하나도 없어요."

  결혼한 후 얼마 동안은 아내가 환상에 의해 위로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남편을 
무조건 존경하려고 노력한다. 조금도 거리낌없이 남편을 사랑하고 그와 아이들에게 자기
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처럼 느끼려고 한다. 이윽고 남편의 숨김없는 진정한 기분이 드
러난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를 반드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며, 아이들도 언
젠가는 자기에게서 떠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들은 언제나 어느 정도는 배은망덕한 자들이다. 가정은 그녀의 공허한 자유를 더 이
상 보호해 주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 자기를 고독하고 버림을 받은 존재, 즉 하나의 주체
로서 발견하게 된다. 자기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애정이나 습관이 아직 크게 도
움이 되지만, 구제의 수단은 되지 못한다. 성실한 여류작가는 누구나 '30세의 여인'의 마
음에 일어나는 우울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캐서린 맨스필드나 도로시파커나 버지니아 
울프의 여주인공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생애의 초기에는 그토록 활발하게 결혼과 모성을 노래했던 세실 소바즈도 나중에는 잔
잔한 슬픔을 묘사하고 있다. 독신녀와 기혼녀가 자살하는 수를 비교해 보면, 기혼녀는 20
세에서 30세(특히 25세에서 30세까지)사이에는 삶의 혐오로부터 견실하게 보호되어 있으
나, 그 이후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할브바크스는 이렇게 썼다. "
결혼은 지방에서나 파리에서도 마찬가지로 30세까지는(자살에 대해) 보호하지만 그 이후
에는 점점 효력이 없어진다. 결혼의 비극은 그것이 약속하는 행복을 확실하게 여자에게 
제공하지 않는- 행복에 관해서는 보증이 있을 수 없다- 데 있다. 오히려 그것은 여성을 
불구로 만들고, 그녀를 반복과 매너리즘에 빠지게 한다. 여성의 일생의 처음 20년은 참으
로 풍요롭다. 여성은 월경, 성감, 결혼, 모성 등의 경험을 통과하게 한다. 그리고 세계와 
자기의 운명을 발견한다. 20세에 가정주부가 되고, 그 후로 한평생 한 남자에게 연결되어 
아기를 팔에 안게 된다. 이것으로 그녀의 생활은 이제 끝장이다. 참된 행위, 참된 일은 
남성의 특권이다. 여성에게는 그날그날의 살림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기운을 쑥 빼놓는 
노동이 되기도 하지만, 결코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여성에게 체념과 헌신의 미덕을 가르쳤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어떤 두 사람의 
생활을 그 생애의 마지막까지 돌보는 데 몸을 바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경
우가 많다. 자기를 망각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그
래야 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가장 언짢은 것은 이런 그녀의 헌신 자체가 귀찮
은 일처럼 생각된다는 점이다. 남편의 눈에 아내의 헌신이 억압처럼 보여, 남편은 어떻게 
해서든지 거기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최고로 유일한 정당성으로서 그런 태도
를 억지로 아내에게 강요하는 것은 바로 남편이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여 그녀의 모든 것
을 자기에게 제공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이 증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상호적인 의무를 

인정하지 않는다. 소피아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에 의해 그를 위해 살
고 있다. 같은 것을 나는 그에게 요구한다." 이 말은 톨스토이에게는 거북하게 들릴지 모
른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아내가 자기를 위해 그리고 자기에 의해 살아줄 것을 요구했었
다. 이것은 부부가 서로 그렇게 해야만 긍정할 수 있는 태도이다. 아내가 불행하게 되도
록 해놓고는 아내의 불행으로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불행이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남편의 이중성이다. 침대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남성은 여성이 뜨겁고도 차갑기를 요구
한다. 즉 여성이 전적으로 자기를 제공하되 그 무게로 자기를 누르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
이다. 남편을 지상에 안정시키면서 자유롭게 놓아둘 것, 날마다 단조로운 반복을 거듭하
면서 권태롭지 않게 할 것, 언제나 옆에 있으면서 귀찮은 존재가 되지 않을 것을 요구하
고 있다. 그는 아내를 전부 소유하고, 자기는 아내의 것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는 
공동생활을 하면서도 혼자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남성은 결혼했을 때부터 아내를 속인다. 
그리고 여성은 남편의 이런 배반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살아 있는 셈이다.
  D.H.로렌스가 성애에 대해 한 말은 대체로 옳다. " 두 사람의 결합은, 만일 그것이 서
로를 보완하려는 노력이라면 실패로 끝난다. 그것은 원래가 '불구자'끼리의 결합인 것을 
예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자주적인 두 생활을 공동으로 영위해야 하며, 은둔이
나, 방황, 도피나 일시적인 구제여서는 안 된다. 아내나 어머니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격
자가 되어야 한다고 결심한 노라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부는 자기들을 공
동체 즉 닫혀진 밀실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인으로서의 각자는 사회에 연결되어 있
으며, 그 속에서 혼자의 힘으로 꽃을 피워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에 연결되어 있는 다른 
개인과 함께 너그러운 마음으로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 자유의 인식 위
에 이루어진 유대이다.
  이와 같은 안정된 한 쌍의 남녀는 결코 유토피아에 사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결혼행태 
속에도 다음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육
체적 사랑에 의해 결합되고, 우정과 일에 있어서는 자유롭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정으로 
결합되어, 각자의 성적 자유에 속박을 가하지 않는다. 더욱 보기 드문 경우지만, 애인이
며 동시에 친구로서 서로 상대방에게 배타적인 존재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남녀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가능하다. 우정, 쾌락, 신뢰, 애정, 공동의식, 사랑 등에서, 
남녀는 서로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희열, 풍요, 힘의 가장 비옥한 원천이 될 수 있다. 
결혼의 실패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은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보날드, 콩트, 톨스토이의 
주장과는 달리 제도 자체가 근본적으로 타락한 것이다. 서로 선택되지 않은 남녀가 일생
을 통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상대를 만족시킨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며, 이 부자연
스러움이 위선, 거짓말, 적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다.
  결혼의 전통적인 형식은 오늘날 변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결혼은 아직도 압박감을 
주고 있으므로 두 사람의 배우자는 여러 모로 그것을 느낀다. 부부가 갖고 있는 추상적인 
권리만 생각하면, 오늘날에는 거의 평등하다. 그들은 전보다는 한결 자유롭게 상대방을 
택하고, 헤어지는 것도 쉽다. 특히 미국에서는 이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부부의 연
령이나 교양의 차이도 옛날처럼 심하지 않다. 남편은 아내가 요구하는 자주성을 인정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부부가 평등하게 가사를 분담하는 경우도 있다. 오락도 공통적이
다. 캠핑, 자전거, 수영 등등. 아내는 이제 날마다 남편의 귀가를 고대하면서 하루를 보
내지는 않는다. 그녀는 스포츠를 즐긴다. 협회나 클럽에 가입하고, 밖에 나가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때로는 얼마간 수입이 있는 가벼운 노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이 부
부생활의 경제적인 책임을 계속 맡고 있는 한, 이 자유는 한, 이 자유는 하나의 착각에 
불과하다. 남편이 하고 있는 일의 요구에 따라 부부의 거주지가 결정된다. 아내는 지방에
서 파리로, 파리에서 지방으로, 식민지로, 외국으로 남편을 따라간다. 생활수준은 남편의 
수입에 따라 결정된다. 그 날의, 그 주의 그리고 그 해의 리듬이 남편의 일에 의해 결정
되고, 교제나 우정도 대체로 남편의 직업에 따라 그 범위가 결정된다.
  남편은 아내보다 사회적으로 더욱 확실한 지위에 있으므로, 지적, 정치적, 도덕적인 영
역에서 부부생활을 리드해 나가고 있다.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생활수단을 마련하지 못하
는 한, 이혼은 여자에게 추상적인 가능성에 불과하다. 미국에서는 위자료가 남성에게 큰 
부담의 되고 있지만, 프랑스에서는 우스울 정도의 적은 위자료로 버림을 받기 때문에 그
만큼 여성이나 어머니의 운명이 비참한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본질적인 불평등은, 남편은 노동 또는 행동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자기완
성이 가능하지만, 아내는 아내인 한, 그 자유가 단지 소극적인 형태에 불과하다는 데서 
비롯된다. 젊은 미국 여성의 처지는 퇴폐기의 해방된 로마 부인을 연상케 한다. 당시의 
로마 부인은 두 가지의 생활방식 중 어느 한쪽을 택하고 있었다. 어떤 여성은 할머니의 
생활태도나 미덕을 그대로 이어받아 살아갔고, 또 다른 어떤 여성은 공허한 동요 속에서 
함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많은 미국 여성들은 전통적인 전형에 따라 '가
정적인 여성'에 머물러 있다. 한편 정력이나 시간을 오로지 낭비하는 데 보내는 여성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아무리 호의적이라도, 젊은 여성이 일단 어머니가 되면 가정의 부담
이 그녀에게 엄청나게 불어난다.
  현대의 가정생활, 특히 미국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노예처럼 만들었다는 말이 흔히 유행
되고 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리스시대부터 남자는 크샨티페(소
크라테스의 아내로 전형적인 악처이다)의 압제를 하소연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예를 알
고 있다. 대학생과 결혼한 여성이 남편을 성공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남편의 하루일과
나 먹고 자는 법까지도 자기가 결정하고, 공부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일체의 오
락을 빼앗아버린 것, 그야말로 남편의 자유를 자물쇠로 잠가두려는 것이다. 이런 압제에 
대해 남성 쪽이 전보다 누그러진 것도 사실이다. 그는 여성의 추상적인 권리를 인정한다. 
그리고 여성이 남성인 자기를 통해서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남
성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여성이 강요 받고 있는 무기력과 무생산을 보상하고 있는 것
이다. 남성 쪽이 더욱 많이 소유하고 있으므로, 두 사람의 협력에 표면상의 평등을 실현
하려면 남성 쪽에서 더 많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여성이 더 받고 요구한다는 것은 그만
큼 여성 쪽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여기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다.
  인간은 압박함으로써 압박받는 자가 된다. 남편이 속박을 받는 것은 그들의 절대적인 
주권 자체에 의해서이다. 그들만이 돈을 벌기 때문에 아내는 수표를 달라고 말하는 것이

고, 그들만이 직업에 도전하고 있음으로 아내는 남편을 성공시키려고 그에게 압력을 가하
게 된다. 그들만이 초월성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아내는 그들의 기획이나 성공을 자기 
것으로 하여 그 초월성을 훔치고 싶어한다. 거꾸로 말하면 아내가 남편에게 가하는 압제
는 여성의 예속성을 한층 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부부생활의 성공, 그 장래, 그 행복, 그 정당화는 남편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가 열심히 남편에게 자기 뜻을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은, 그녀가 남편과 
일심동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의 약점을 무기로 삼는다. 부부생활의 구속
은 남편에게 더욱 일상적인 것이 되어 귀찮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에게는 더욱 
심각한 것이다. 여성이 무료하여 몇 시간씩 남편을 자기 곁에 붙들어두면, 남편은 귀찮아
진다. 요컨대 남편 쪽에서는 아내가 그를 필요로 하는 만큼 그녀가 필요치 않은데, 그렇
다고 그냥 아내를 방치해 두면 그녀의 생활은 금방 파멸되어버리는 것이다. 양자의 큰 차
이는 여성에게는 의존이 내면화되어 있는 데서 비롯된다. 그녀는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사실은 노예이다.
  한편 남성은 본질적으로 자주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구속받는 것은 외부에서이다. 남
성이 자기 쪽의 희생이 많다는 인상을 갖는 것은, 그가 참고 있는 속박이 더욱 명백하여 
눈에 잘 뜨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기생동물처럼 그에게 얹혀 살아간다. 기생동물이 승리
하여 주체가 된 적은 없다. 실제로 생물학적으로도 수컷과 암컷은 서로가 상대에게 희생
물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가 모두 종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
찬가지로 부부 사이도 자기들이 만들어내지 않은 제도의 압박을 받고 있다. 남편이 아내
를 압박한다고 말하면 남편은 분개한다. 압박을 받고 있는 쪽은 자기라고 느끼고 있는 것
이다. 사실 그는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남성적인 민법, 즉 남성의 이
익을 위해 발달되어 온 사회가, 오늘날에는 여성의 신분을 남녀 양성을 위하여 고통의 원
천이 되는 그런 형태로 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결혼이 '직업'이 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남녀 양쪽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여성은 지금도 이미 난처한 존재이다'라는 구실로 반페미니스트를 주
장하는 남성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결혼은 여성을 '버마재비'로 만들고 '거머리'로 만
들고. '독'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따라서 여성
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성의 자립을 금하는 한 여성은 남성에
게 무섭게 매달린다. 여성을 해방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여성에게 사회가 일거리를 제공
함으로써 남성은 자기를 해방시킬 수 있다.
  벌써 이와 같은 적극적인 자유를 얻고 있는 젊은 여성들이 많다. 그러나 연구나 직업을 
끝까지 참고 계속하는 여성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
이 어차피 남편의 생활을 위한 희생이라고 알고 있다. 그녀들은 가정에 다소의 보탬이 되
는 정도의 급료밖에 받지 못한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소심하고 불안정한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부부 생활의 예속에서 그녀들을 해방시켜주지 않는다. 버젓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
성들도 거기서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변호사의 아
내는 남편이 죽은 후에 연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여자 변호사의 경우에는 그녀가 
사망했을 때, 남편에게 연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직업여성은 남성과 평등하게 

부부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인정되어 있지 않다. 자기의 직업에서 진정한 독립성을 찾아내
고 있는 여성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바깥일을 하는 것이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는 오로지 
피로를 더할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많다. 첫째로 대부분의 경우에 아기가 태어나
면 어머니의 역할에 매어있어야 한다. 직업과 모성을 조화시키는 것은 현재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전통에 의하면 여성에게 구체적으로 자주성을 부여하거나, 그 밖의 어떤 목적 달성에 
몰두하는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아이이다. 아내로 머물러 있는 것만으
로는 여성은 아직 완전한 개인이 못 된다면, 어머니가 되어야 비로소 그녀는 그것이 되는 
것이다. 자식은 여성의 기쁨인 동시에 정당화이다. 자식에 의해 여성은 성적으로나 사회
적으로 자기를 실현한다. 졀혼이라는 제도 역시 자식에 의해 그 의미를 갖게 되며, 목적
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성 발전의 이 최고 단계에 대해 다음에 검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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