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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유년기

by FraisGout 2020. 7. 26.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남성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형태
는 어떤 생리적, 심리적, 경제적인 숙명이 결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명 전체가 수컷과 
거세체와의 중간산물을 만들고, 그것에 여성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타인이 끼
여들어야 비로소 '타자'로서의 개체가 성립될 수 있다. 자기만을 위해 존재하는 동안에는, 
어린이는 자기를 성적으로 차별된 존재로 파악하지 못한다. 여자아이의 경우나 남자아이의 
경우도, 처음 얼마 동안 육체는 주체성의 발현이며 외부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구이다. 
어린이들이 세계를 파악하는 것은 눈이나 남녀가 똑같이 전개된다. 크게 흥미를 느끼는 쾌
감도 양쪽 다 마찬가지이다. 우선 빠는 행위가 그들에게 최대의 쾌감의 원천이다.
  이어 항문기에 접어들어도 남녀에게 공통된 배설작용에서 최대의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성욕의 발달도 비슷하다. 그들은 같은 호기심과 같은 무관심으로 자기 몸을 더듬어, 음핵
과 페니스에서 막연한 쾌감을 끌어낸다. 그 감각은 이미 확실해진 범위에서 어머니에게로 
향해져 있다. 부드럽고 매끄럽고 탄력있는 여성의 육체는 성적인 욕망을 자극하고, 성적인 
욕망은 물건을 잡으려는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도 남자아이와 같이 공격적인 방
법으로 어머니를 껴안고, 그 몸을 만지고 애무한다.
  새로 아기가 태어나면, 그들은 서로 질투하고, 그 질투를 행동으로 표시한다. 화를 내거
나 토라지거나, 배설작용에 이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들은 어른의 사랑을 받기 위해 같
은 교태에 의존한다. 여자아이도 남자형제 못지않게 튼튼하며, 같은 지능을 나타낸다. 그녀
들이 형제들과 경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영역은 하나도 없다. 만일 성인이 되기 전부
터, 때로는 매우 어렸을 때부터 성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불
가해한 본능이 여자아이를 나면서부터 수동성이나 교태나 모성애에 어울리게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아기의 생활에 타인이 개입하여, 강제적으로 아기가 그 인생의 
직분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아기에게 세계는 내재적 감각형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태내의 어둠 속에서 살던 무렵
처럼 전체의 품 안에 잠겨 있다. 모유로 기르건 분유로 기르건, 아직 모체의 온기로 싸여 
있다. 그는 서서히 자기와는 다른 사물을 지각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그리하여 그것들에게 
자기를 구별한다. 동시에 그는 다소 무리하게 수유체에서 떨어져나간다. 이 분리에 대해 
맹렬한 기세로 반항하는 경우도 있다.
  이 발작이 약해질 무렵부터(생후 약 6개월경) 그는 나중에 진짜 시위행위로 바뀌는 표
정 속에서 남의 관심을 끌려는 소원을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이것은 의식적인 행위로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의 상황을 살리기 위해 그것을 생각하고 나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유아는 만물의 근원적인 비극인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불안한 고뇌 속에 자기의 고독을 의식한다. 그는 자기의 자유와 주체성으로부터 
탈출하여 전체의 품 속에 따뜻이 몸을 묻고자 한다. 여기에 인간의 우주적, 범신론적 몽상
의 원인, 즉 망각이나 수면, 무아의 경지나 죽음에 대한 욕구의 원인이 있다. 일단 분리된 
자아를 말소하는 것은 절대로 가망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 즉자존재의 안정에 도달하기를, 사물에 응결해 버리기를 원한다. 인
간이 자신의 눈에 하나의 존재로 비치는 것은, 특히 그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응결되어질 
때이다. 어린이의 행동에 대한 해석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육체적인 형태 안
에서 어린이는 미지의 세계에서의 유한과 고독과 피투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타
인이 그 실재와 가치를 세워주는 하나의 이미지 속에 자기의 존재를 소외시켜 이 비극을 
보상하려고 한다.
  어린이가 자기를 식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알아보는 시기(이
유기와 일치한다)에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어린이는 자아가 형성된다. 거울이 하는 역
할에 차이는 있지만, 어린이는 6개월경부터 부모의 표정을 알아보고 부모의 시선 아래 하
나의 객체로서의 자기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미 세계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하나의 자주적인 주체이다. 그러나 소외된 형태에서만 어린이는 자기 자신과 만
나게 되는 것이다.
  어린이는 성장하면 두 가지 방법으로 선천적인 피투성을 향하여 투쟁한다. 즉, 그는 분
리를 부정하려고 한다. 어린이는 어머니의 품에 몸을 웅크린 채 어머니의 체온과 애무를 
원한다. 그리고 어린이는 타인의 동의에 의해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어린이에게 어른
들은 마치 신처럼 생각된다. 어른은 그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
린이는 자기를 때로는 귀여운 천사로, 때로는 괴물로 바꿔버리는 시선에 대해 마력을 느낀
다.
  이 두 가지 방어수단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 관련되고 교차
된다. 유혹과 교태가 성공을 거두었을 경우에는, 뽀뽀나 애무라는 육체적인 보증으로 정당
행위의 감정을 발견한다. 유아가 어머니의 무릎에서, 그 부드러운 시선에서 느끼는 것도 
그것과 같은 행복의 수동성이다. 처음 3, 4년 동안은 여아와 남아의 태도 사이에 차별을 
찾아볼 수 없다. 모두 이유기 이전의 행복한 상태를 언제까지나 유지하려고 한다. 여아는 
물론이고 남아에게서도 시위와 교태를 찾아보게 된다. 남아도 여아 못지않게 다른 사람들
의 호감, 미소, 칭찬을 원한다.
  분열을 극복하기보다는 그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데 철저하고, 남의 의식에 의해 
응결되기보다는 전체의 품 속에 묻히는 쪽에 보다 적극적이다. 육체적인 융합은 타인의 시
선 아래서 이루어지는 어떤 권리포기도 미칠 수 없는 철저한 자기소외를 가져오기 때문이
다. 시위나 교태는 어머니의 품 안에 단지 몸을 맡기고 있는 것보다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어른의 시선이 보여주는 마술은 변덕스럽다. 어린이는 자기 모습은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부모는 그 어린이의 놀이에 끼여들어 손을 더
듬어 아이를 찾으며 깔깔 웃는다. 그런가 하면 "이제 그만해둬라. 너는 아주 잘 보이는걸." 
어른은 아이의 말이 재미있다는 듯 흉내를 내다가는 어느새 무시하는 듯이 어깨를 움츠린

다. 카프카(독일의 소설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1883 - 1924)의 세계처럼 불안정하
고 예측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는 한 걸음 옮겨놓을 적마다 걸려 넘어지기 일쑤이다. 많은 
어린이들이 성장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부모의 무릎 위에 앉지 못하고 
부모의 침대에서 함께 잘 수도 없게 되면, 실망하고 낙담한다. 육체적인 실망을 통해, 고뇌
가 없이는 의식할 수 없는 고독을 점점 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보다 이들을 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시기이다. 제2의 이유는 
처음처럼 잔인하지도 않고, 또 보다 서서히 어린이의 포옹에서 어머니의 육체를 떼어놓는
다. 키스나 애무를 조금씩 줄여나가는 것은 특히 남자아이 쪽이다. 여자아이는 여전히 응
석을 부리고 어머니의 치마폭에 싸인 생활이 허용되며, 아버지는 그 아이를 무릎 위에 안
아올리고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준다. 또 여자아이에게는 부드러운 옷을 입히고, 눈
물이나 변덕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며 머리 매무새에 신경을 쓰고 그 표정이나 교태도 받
아준다. 육체의 접촉과 친절한 눈길이 그 아이를 고뇌와 고독에서 지켜준다.
  이와는 반대로 남자아이에게는 교태도 금하게 한다. 아양을 떨거나 감상적인 태도를 취
하면 귀찮게 여긴다. "사내녀석이 안아달라고 하다니... 남자는 거울 같은 걸 보는 게 아
냐... 남자가 눈물을 흘려서는 안 돼."를 해방시켜야 어른들의 찬사를 얻게 된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는 것이 남에게 잘 보이는 길이다.
  많은 남자아이들은 가혹한 독립을 선고받는 것이 두려워 여자아이가 되고 싶어한다. 남
자아이에게 여자아이와 같은 옷을 입히던 시기가 지나 바지로 바꿔 입히고 길었던 머리를 
깎을 때, 눈물을 흘리는 남자아이가 있다. 개중에는 여자아이의 모습 그대로 입기를 바라
는 남자아이도 있는데, 이것은 동성애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자아이가 되
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로 태어난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몸을 쭈
그리고 앉아서 오줌을 누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모리스 삭스(현대 프랑스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안식일>에서)
  그러나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에 비해 푸대접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남자아이 
쪽에 더욱 큰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아이에게 여러 가지 요구를 하는 데에는, 
직접적으로 가치존중이 포함되어 있다. <회상기>에서 모라스(현대 프랑스의 문학가, 정치
가)는 그가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응석을 부리는 여동생을 질투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어내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남자야. 계집애
의 일은 내버려둬라." 남자아이에게 여러 가지 요구를 하는 것은, 그 우월성 때문이라고 
한다. 험난한 앞날에 대비하기 위해, 남자아이는 남성으로서의 긍지를 주입받게 마련이다.   
이 추상적인 개념은 어린이에게 하나의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즉, 그것은 페니스
(남근) 속에 나타난다. 남자아이가 아무 감각도 없는 자기의 작은 성기에 대해 자랑스러움
을 느끼는 것은 자발적이 아니라 주위의 태도를 통해서이다. 어머니나 유모들은 남근과 남
성의 개념을 동일시하는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녀들은 사랑의 은총이나 복종 속에 그 
위력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아의 몸에 그것이 초라하고 가엾은 형태를 취하
고 있는 것을 보게 되어 그녀들에게 하나의 복수가 되기 때문인지, 아무튼 유아의 페니스
를 이상한 즐거움을 가지고 다룬다.
  라블레(16세기 프랑스의 소설가)는 가르강튀아의 유모들의 못된 놀이와 이야기를 전하

고 있다. 그리고 역사는 루이 13세의 유모들의 예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다지 대담하
지 못한 여성들은 꼬마 남자아이의 페니스에 하나의 애칭을 붙여, 그 아이에게 그것을 말
할 때 마치 그 아이 자신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이기도 한 하나의 작은 인격인 듯이 여
기고 있다. 그녀들은 그것을, 앞에서 인용한 말을 사용하면 "보통사람보다 교활하고 똑똑
하고 교묘한 제2의 자아"(A. 발랭, '어린이의 사생활'에서)로 만들어버린다. 해부학적으로 
말하면, 페니스는 이 역할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모형의 평가를 올리는 것은, 어린이의 평가를 올리는 것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아버지가 나에게 말하기를, 자기 아들이 세 살이 되도록 쭈그리고 앉아
서 소변을 본다고 한다. 주위에 자매나 사촌 자매들뿐이라 겁쟁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
번은 아버지가 그 아이와 함께 화장실에 가서 말했다. "자, 이제부터는 남자가 오줌을 누
는 방법을 가르쳐줄게." 그 후부터 아이는 서서 소변을 보는 것이 자랑스러워 "구멍으로 
오줌을 누는" 여자아이를 멸시하게 되었다. 그 아이의 이런 멸시는 여자아이에게 하나의 
기관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여자아이는 자기처럼 아버지가 가르쳐
주는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페니스 자체는 남
자아이에게 우월감의 원천이 되는 직접적인 권리라기보다는 제2의 이유 때의 고난에 대한 
하나의 보상(어린들에 의해 고안되어, 남자아이가 잘 받아들이는)처럼 생각된다. 그럼으로
써 남자아이는 이제 유아도 아니고 여자아이도 아니고 될 수 없다는 한탄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성기 속에 자기의 우월과 자랑스러운 주권을 구체화한다.
  여자아이의 운명은 이와는 크게 다르다. 어머니나 유모들은 여자아이의 생식기를 귀중하
게 여기지 않을 뿐더러 애정도 느끼지 않는다. 그녀들은 표면만 본다. 손으로 잡을 수 없
는 이 숨은 기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의미에서는 여자아이에게는 
성기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이 부재를 결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의 육체는 
분명히 그녀에게 하나의 완벽체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남자아이와는 다르게 세상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되었을 경우에 이런 차별이 열등감으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유명한 여성의 '거세 콤플렉스'만큼 정신분석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문
제도 많지 않다. 오늘날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에의하면, 페니스에 대한 실망은 
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나이가 들 때까지 남성의 육체구조를 모르는 여자
아이가 많다. 어린이는 남자와 여자를 달과 태양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하게 받아들
인다. 어린이는 말에 포함된 본질을 믿는데다가 호기심은 본래 분석적이지 못하기 때문이
다. 많은 여자아이들에게 남자아이의 두 다리 사이에 달려 있는 이작은 살덩이는 보잘것없
는 것, 오히려 경멸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머리나 옷의 변종과 같은 일종의 변
종이다. 때때로 갓 태어난 남동생에게서 페니스를 보기도 하지만, "여자아이가 아주 꼬마
일 때에는 남동생의 페니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헬렌 도이치 여사는 말하고 있다. 
여사는 그 예로서 처음으로 페니스를 보았을 때에는 전혀 무관심했으나, 훨씬 나중에 자기
의 관심사와 관련을 갖게 되어, 비로소 페니스의 가치를 인정한 생후 18개월이 되는 여아
의 경우를 들고 있다. 때로는 페니스를 이상한 물건으로, 마치 혹이나 유방이나 사마귀처
럼 군살이 매달린 일종의 애매한 물체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혐오감을 주기

도 한다. 여자아이가 친구나 형제의 페니스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
렇지만 그것에 대해 성적인 질투를 느끼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그녀가 이 기관의 부재로 
큰 타격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뭐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처럼, 페니스
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극히 표면적인 것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배설작용, 특히 배뇨작용이 어린이들에게 큰 흥미를 끄는 것은 사실이다. 자면서 오줌을 
싸는 것은 부모의 편애에 대한 항의의 표시인 경우가 많다. 장소에 따라서는 남자들이 앉
아서 소변을 보는 나라도 있고, 여자가 서서 소변을 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특히 농촌
여성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습관이다. 그러나 현재의 서구사회에서는 보통여자는 몸을 쭈
그리고, 남자는 서서 소변을본다. 이런 차이가 여아에게 가장 두드러진 성적 차별이다. 그
녀가 소변을 보려면 몸을 쭈그리고 엉덩이를 드러내야 하므로 자연 몸을 가려야 한다. 이
것은 불편하고 부끄러운 치욕이다.
  또한 여성은 배를 움켜잡고 웃다가 무의식적으로 오줌이 나와 애를 먹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에는 치욕감이 더욱 커진다. 여자아이의 경우는, 남자아이처럼 컨트롤이 잘 되지 않
는다. 남자아이는 배뇨작용이 자유자재로운 놀이처럼, 자유를 발휘할 수 있는 유희에 으레 
따르게 마련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페니스는 손으로조작할 수 있고, 어린이는 이 조작을 
통해 움직일 수 있다. 이것은 남자아이에게 큰 흥미거리이다.
  어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가 오줌누는 것을 보고 감탄한 듯이 "참 편리하겠구나!"하고 
외쳤다.(A. 발랭의 인용) 오줌줄기는 어떤 방향으로나 마음대로 멀리 날릴 수 있다. 남자
아이는 이 때문에 전능감을 느끼게 된다. 프로이트는 '옛 이뇨제에의 열망'에 대해 말하고, 
슈테켈은 양식있게 이 공식을 논박했다. 그러나 케이런 허니가 지적한 것처럼('부인에게서 
볼 수 있는 거세 콤플렉스의 유래', '국제정신분석', 1923 - 1924) "특히 사디즘적 성격
을 지닌 전능의 환상은 때로 남성의 오줌방출과 결부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다.일부 어
른에게도 있는 이 환상은(몽테를랑의 '모충', '하지' 참조) 아이의 경우에는 매우 중요하다. 
아브라함은 "여성이 살수기로 뜰에 물을 뿌릴 때에 느끼는 큰 쾌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쾌감의 근원이 반드시 살수기와 페니스의 결합게 있지 않다는 점에서(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 결합이 뚜렷할 수도 있다) 나는 사르트르나 바슐라르의 주장에 동의한다.
  오줌줄기를 내뿜는 것은 모든 기적과 마찬가지로, 인력에 대한하나의 도전처럼 생각된
다. 그것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것은, 바로 자연법칙에 대해 작은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어
쨌든 남자아이는 거기에서 그 자매들에게는 금지된 나날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시골에서는 오줌줄기를 내뿜음으로써 여러 가지 사물, 즉 물, 대지, 이기, 구름 등과 많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여자아이 중에는 이런 경험을 하기 위해 반듯이 드러누워 우줌을 위
로 뿜어올리려고 하거나 서서 오줌을 누는 연습을 하는 아이도 있다.
  케이런 허니에 의하면,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에 배해 노출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 데 대
해 부러워하는 것 같다. "병상에 있던 어떤 여자는, 거리 모퉁이에 서서 소변을 보는 한 
남자를 보다가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에게 한 가지 청이 있다면, 죽을 때까지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남자처럼 오줌을 누고 싶어.'" 케이런 허니가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남
자아이는 자기의 페니스를 만질 권리가 있으므로 그것을 장난감으로 삼을 수 있는 반면에, 

여자아이에게는 자기들의 성기가 금제물이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원인이 모여서 많은 여자아이에게 남성 성기의 소유를 원하게 한
다는 것은 심리학자들의 많은 조사나 그들이 입수한 고백이 입증한다. 헤벨로크 엘리스(그
의 '배수증' 참조)는 그가 제니아라고 부르는 환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다. "물
이 솟구치는 소리, 특히 목이 긴 살수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어렸을 때 오빠나 그 밖의 남
자들에게서 바라본 오줌이 쏟아져 나오는 소리를 상기시켜, 언제나 나를 흥분에 빠뜨린
다."
  또 한 사람의 여성인 R.S. 부인은 어렸을 때 친구의 페니스를 양손으로 움켜잡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날 그녀는 살수기를 손에 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치 
페니스를 움켜잡고 있을 때처럼, 그것을 손에 잡고 있는 것이 말로 표한할 수 없는 즐거운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페니스가 자신에게 전혀 성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
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페니스에 대하여는 배뇨의 용도 이외에는 알지 못했다. 특히 흥
미로운 예는 헤벨로크 엘리스(그의 '성심리학 연구' 제13권)가 입수하고 후에 슈테겔이 분
석한 플로리라는 여성의 경우이다. 그 자세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대단히 총명하고 활동적이며, 예술가 타입이고, 생리적으로도 정상이며 성도착자
가 아닌 한 여성의 경우이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배뇨작용이 유년시절에 커다란 역할을 
했었다. 그녀는 자기 형재들과 오줌을 누며, 조금도 더럽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 서로 상대
방의 손을 적셨다.
  "남성우위에 대한 나의 최초의 생각은, 배뇨기관과 관련되어 있었어요. 그토록 편리하고 
근사한 기관을 내게 주지 않은 데 대해, 나는 자연을 원망했어요. 주둥이가 없어진 도자기 
병도 이처럼 비참함을 느끼지는 못했을 테지요. 아무도 내게 남성우위와 우월의 원리를 가
르칠 필요가 없었어요. 언제나 내 눈으로 그 증거를 보았으니까요." 그녀는 밖에서 오줌을 
누면서 콘 쾌감을 느꼈다. 숲의 한구석에서 낙엽 위에 쏟아져내리는 물의 황홀한 소리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느끼면서, 그녀는 그것이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이끈 것은 물 속에 오줌을 누는 것이었다. 이것은 많
은 남자아이가 느끼는 즐거움이다. 꼬마 남자아이가 연못이나 개울에 오줌을 누는 그림을 
그린 순진하고 비속한 판화류가 많다. 플로리는 드로즈(여성용 팬츠)의 형태 때문에 하고
싶은 실험을 할 수 없어 투덜대고 있다. 그녀는 시골길을 산보할 때, 되도록 오랫동안 오
줌이 마려운 것을 참고 있다가 서서 누는 경우가 많았다. "이 즐겁고 신기한 금단의 느낌
과 서 있어요 분수처럼 솟아날 수 있다는 놀라운 느낌을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녀는 어린이옷의 형태가 여성 일반의 심리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먼저 드로즈
를 벗고, 그 앞부분을 더럽히지 않도록 쭈그리고 앉아야 하는 것이 내게는 큰 골칫거리였
어요. 뿐만 아니라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엉덩이를 드러내놓는 것은, 많은 여자들에게 어
째서 수치심이 전방이 아닌 후방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설명도 되었어요. 내가 최초로 알
게 된 성적 구별(큰 차이)은, 남자아이는 서서 오줌을 누고 여자아이는 앉아서 오줌을 누
는 것이었어요. 나의 가장 오랜 수치심이 치골보다 둔부와 결부되어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었을 거예요." 이런 인상은 모두 플로리의 경우에 큰 중요성을 갖게 된다. 왜냐

하면 그녀에게 소변을 보게 하기 위해, 아버지는 자주 그녀를 피나도록 회초리로 때렸고, 
가정부조차 그녀의 엉덩이를 때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조히즘의 꿈이나 환상에 
사로잡혀, 학교에서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여선생에게서 매를 맞고 마지못해 오줌을 누면
서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쾌감을 느끼는 상상'에 잠기기도 했다. 15세 때 급한 나머지 
인적이 없는 거리에 서서 오줌을 눈 적이 있었다.
  "나의 감각을 분석해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서 있다는 수치심과, 나와 지면 사이에 방
사가 이루어지는 거리의 길이였어요. 옷이 가리기는 했지만, 이런 일을 중대하고도 우스꽝
스럽게 한 것은 이 거리였답니다. 보통의 자세 속에는 친밀한 요소가 있었죠. 어린이로서
는 키가 큰 편이라고는 해도, 방사가 이루어지는 거리의 길이는 뻔해요. 그러나 15세인 나
는 그 거리의 길이를 생각하니, 부끄러웠어요. 앞에서 말한 포스마스의 신식 화장실에서 
질겁을 하고 도망친 부인들은 두 다리를 벌리고 선 채 치마를 걷어올리고 하체에서 그런 
긴 방사를 하는 것이 여성으로서 대단히 망측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요."
  그녀는 20세 때에도 한 번 이런 경험을 되풀이하고, 그후에는 자주 하게 되었다. 언제 
남에게 발각될지 모르지만 도중에 중단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녀는 수치와 쾌감이 뒤섞인 
기분을 느꼈다. "물(소변)은 내 몸에서 어쩔 수 없이 분출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여 분출한 것 이상으로 쾌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어요.(특히 플로리가 강조했
다.) 그것이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갔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
에 없었다는 기묘한 감각은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쾌감이고 미묘한 매력이에요. 
자기보다 강한 의지에 의해 물의 흐름이 자기에게서 분출된다는 기분 속에 큰 매력이 깃
들어 있어요." 그 후 플로리는 배뇨편집과 혼합된 마조허즘적 색정증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병적인 사례는 유아기 경험의 여러 가지 요소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그런 것이 이처럼 큰 중요성을 띠게 되는 것은 확실히 특수한 경우일 것이다. 
정상으로 자란 여자아이에게 있어 남자아이가 지닌 배뇨의 특권은, 그것이 곧바로 여자의 
열등감의 원인이 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의 견해에 따라 페니스의 발견이라
는 것만으로도 외상성 증상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정신분석학자들은 유아의 심리를 잘못 
알고 있다. 어린이의 기분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합리적이고 명확한 
범주를 설정하지도 못하며 모순을 개의치 않는다.
  아직 어린 여자아이가 페니스를 보고 "나도 전에 그런 거 갖고 있었어."하고 말하거나 "
내게도 언젠가는 그런 게 생겨." 또는 "나도 그런 게 있어."하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에 없는 단순한 반항심에서 한 말이 아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양립될 수 없다. 어
린이는(그 데생이 증명하는 것처럼) 현재 눈으로 보고 있는 것보다도, 일단 그렇다고 결정
한 심원한 '유형'을 훨씬 신뢰한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실물을 보지 않고 그리는 경우가 많
고, 언제나 자기의 지각 속에 자기 자신이 끌어들인 것만 보려고 한다. 소쉬르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여, 뤼케의 다음과 같은 대단히 중요한 관찰을 인용하고 있다.(정신발생학과 
정신분석, '프랑스 정신분석 잡지', 1933년호)
  "어린이는 한번 선을 잘못 그으면 그 선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대신에 
새로 그은 선에 관심을 집중하여, 전에 그었던 선은 전혀 안중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종

이 위에 계속하여 선이 여러 개 겹쳐져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남성의 강인한 육체구조가 
여자아이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렇게 되면 그녀는 자기의 육체는 안
중에 없게 된다. 소쉬르가 따로 인용하고 있는 4세의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처럼 창살문의 
문살 사이로 오줌을 누려고 하다가 '물(오줌)이 나오는 조그마한 것'을 갖고 싶다고 말한
다. 그 아이는 자기가 페니스를 갖고 있다고도 말하고, 동시에 갖고 있지 않다고도 말했는
데, 이것은 피아제가 어린이의 경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참여'에 대한 사고와 부합되어 
있다. 여자아이는, 어린이는 모두 페니스를 달고 태어나지만, 부모가 그 중에서 몇몇 아이
의 페니스를 잘라내어 여자아이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
은 어린이의 인위주의를 만족시킨다. 어린이는 자기 부모를 신격화하여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의 원인이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한다."고 피아제는 말한다. 어린이가 처음부
터 거세 속에서 징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실망의 성격을 띠기 위해서는, 이미 
그 소녀가 어떤 이유로든 자기의 처지에 불만을 느껴야 한다. 이미 그 소녀가 어떤 이유로
든 자기의 처지에 불만을 느껴야 한다.
  H. 도이치가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처럼, 페니스를 보았다는 외적인 일이 내면적인 
전개를 추진시키지는 못한다. "남자의 성기를 보고 정신적인 외상을 입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데 적합한 일련의 사전경험이 선행되었다
는 조건 하에서만 말할 수 있다." 여자아이가 그 마스터베이션이나 노출의 욕구를 충족시
키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거나, 부모에게서 수음과 관련하여 질책을 받았거나, 남자형제
부터 사랑이나 귀염을 덜 받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되면, 그녀는 자기의 불만을 남자의 성
기에 투사하게 된다. "남자아이와의 육체적인 차이에관해 여자아이가 하게 되는 발견은, 
그녀가 전부터 갖고 있던 하나의 욕구의 확인, 이를테면 그 합리화이다."(H. 도이치의 '여
성심리' 참조. H. 도이치 여사는 R. 아브라함과 J. H. 람 오핑센의 권위 있는 학설을 인용
하고 있다.) 그리고 부모나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존중은 남자아이에게 위신을 높여주는 동
시에 여자아이의 눈에 페니스가 그 위신의 설명과 상징이 된다는 사실은 아들러가 강조하
고 있는 바와 같다. 남자형제는 뛰어나 보이고 그 형제 쪽에서도 자기가 남자인 것을 자랑
스럽게 여긴다. 그래서 여자아이는 형제를 원망하고 비관한다. 때로는 이 때문에 어머니를 
원망하고 간혹 아버지를 원망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페니스가 절단된 데 대해 자기 자
신을 탓하거나 페니스는 자기 몸 안에 숨어 있으므로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자위한다.
  페니스의 부재는, 설사 그 여자아이가 페니스의 소유를 절실히 원치 않을 경우에도, 여
자아이의 운명에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남자 아이가 페니스에서 큰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어 부분적이나마 거기에 자기를 반영할(소
외할)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육체가 갖고 있는 신비나 위협을 남자아이는 자기의 몸 밖
으로 투사함으로써, 그것들을 자기에게서 멀리할 수 있다. 확실히 그는 자기의 페니스에서 
위험을 느끼고, 거세를 두려워해야 한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자기의 '내부'에 대해 느끼는 
종잡을 수 없는 불안, 때때로 여성의 일생을 통해 영속되는 불안에 비하면 그것은 그나마 
극복하기 쉬운 공포이다. 여자아이는 자기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큰 불안을 
느끼고 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자신의 눈에 훨씬 불투명하고, 생명의 불가사의한 불안

에 더욱 깊이 사여 있다.
  남자아이는 자기가 그 속에서 자기를 인식하는 제2의 자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담하
게 자기의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가 방사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지주와 초월적 권
력의 한 상징이 된다. 그래서 그는 자기 페니스의 길이를 재고, 친구들과 오줌의 사정거리
를 경쟁하며, 나중에는 발기와 사정이 만족과 도전의 원천이 된다. 반면 여자아이는 자기
의 어떤 부분에도 자기를 육체화할 수 없다. 그 보상으로서 제2의 자아의 역할을 할 수 있
는 외부의 한 물체가 주어진다. 그것이 곧 인형이다. 유의해야 하는 것은, 상처를 입은 손
가락에 감은 붕대도 '인형'으로 불린다는 점이다. 옷을 입혀 고립된 손가락은 일종의 기쁨
과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는 자기를 거기에 반영하는 과정을 잠깐 실행하여 본다. 
그러나 페니스라는 분신, 다시 말해서 페니스라는 자연적인 장난감의 대용을 가장 만족스
럽게 이행하는 것은 인간의 얼굴을 지닌 작은 형태(그것이 없으면 옥수수이삭이나 나무토
막이라도 무방하다)이다.
  크게 다른 점은, 인형은 완전한 형태로 육체를 대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히 수
동적인 물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아이는 자기를 송두리째 반영하고, 이 반영된 자기
를 무생명의 여건으로 간주하게 된다. 남자아이가 자주적인 주체로서의 페니스 속에 자기
를 추구하는 반면에, 여자아이는 자기도 인형처럼 장식되어 귀여움을 받고 싶다고 공상하
며 인형을 장식하고 귀여워한다. 더 나아가 그녀는 자기 자신을 근사한 인형이라고 생각한
다.
  칭찬과 꾸중을 통하여, 또는 시각과 말을 통하여 그녀는 '아름답다'또는 '밉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이윽고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림처럼 아름답게'되
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한 폭의 그림을 닮으려고 한다. 분장
을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동화 속의 공주나 선녀와 자기를 비교해 본다. 이 유아기의 
교태를 보여주는 실례는 마리 바슈키르체프(19세기 러시아의 여류화가)에 의해 제공되었
다. 늦게 젖을 뗀 그녀가(그때 그녀는 3세 6개월이었다) 4, 5세 때 남에게 칭찬을 받고, 
남을 위해 존재하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젖을 뗀 충
격은 보통 경우보다 성숙한 여자아이에게 더욱 심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어머니의 품
에서 억지로 떨어지게 된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애썼을 것이다. 그녀는 일기에 이
렇게 쓰고 있다. "5세 때 나는 어머니의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꽃을 장식하고, 거실로 춤
추러 갔다. 나는 유명한 무용가 파티파였고 온 집안 식구의 눈이 내게 쏠려 있었다...." 이 
나르시시즘은 여아의 경우에 매우 일찍부터 나타나, 여자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
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여성의 신비로운 본능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성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것이 육체적인 숙명이 아닌 것은 지금까지 고
찰해 온 바와 같다. 여자아이를 남자아이와 구별하는 차이를 여자아이도 여러가지 면으로 
알게 된다. 페니스는 하나의 특권을 표시하고 있지만, 어린이가 배설작용에 흥미를 잃고 
사회화할 때 그 가치는 당연히 감소된다. 만일 8, 9세가 지나도 남자아이의 눈에 여전히 
페니스가 그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페니스가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사
나이다움의 상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교육과 주위의 영향이 대단히 크다. 모
든 어린이는 젖을 떼고 어머니의 품에서 떠나는 허전함을 교태와 시위의 행동으로 메우려

고 한다. 사람들은 남자아이에 대하여는 이 단계를 극복하도록 강요한다. 그를 페니스에 
고정시켜 나르시시즘으로부터 해방시킨다. 한편 여자아이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공통된 자
기의 객체화를 더욱 견고히 한다. 인형이 이 경향을 조장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아이도 곰이나 어릿광대의 인형 속에 자기를 반영하는 경우
가 있다. 페니스나 인형 같은 것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어린이들의 생활의 총
괄적인 형태 속에서이다.
  '여성다운' 여성의 본질적인 특성이라 불리는 수동성도 유년시절부터 줄곧 키워진 것이
다. 이것을 생물학적인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상 그것은 그녀가 교육자
들이나 사회에서 강요받는 숙명이다. 남자아이의 큰 행운은, 타인에 대한 존재방식이 그에
게 자기 자신을 위해 설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세계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자기 생활의 수업을 쌓아나간다. 그는 다른 남자아이들을 상대로 강한 기상과 독립을 겨루
고 여자아이들을 경멸한다. 나무에 기어오르고, 친구와 격투를 하고, 거친 유희로 친구들과 
겨루고, 자기의 육체를 자연을 지배하는 하나의 수단, 투쟁의 도구로 여긴다. 그는 자기의 
성기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근육과 뼈에 자랑을 느낀다. 유희, 운동, 씨름, 도전, 시련 등을 
통하여 자기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힘을 고루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동시에 그는 엄
한 인내의 교훈을 알게 된다. 그는 구타를 견디고 고통에 굴하지 않으며 어렸을 때의 눈물
을 부정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는 기도하고 창조하고 감행한다. 물론 그도 자기를 '남을 
위해'존재한다고 느끼고, 자기의 사나이다움에 의문을 느끼며, 그 결과 어른이나 친구에 대
해서도 많은 의문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자기의 객관적인 형태에 대한 불안과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하
기 위해 자기를 확립하려는 의지 사이에 근본적인 대립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자기 존재
를 형성해 나가는 것은 뭔가를 행한다(만든다)는 유일한 동작을 통해서이다. 이와는 달리 
여성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자주적인 존재와 '타자(존재)'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그녀는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즉 자기를 객체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의 자주성을 단념해야 한다. 그녀는 마치 살아 있는 인형처럼 취급되
어, 자유를 거부당한다. 일종의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그녀가 자기를 에워싼 세계를 이해하
고 파악하고 별견하기 위해, 자기의 자유를 행사하는 일이 적을수록 그녀는 세계 속에서 
수단을 찾는 일이 적어지고, 그만큼 주체로서의 자기를 확립하려는 용기가 없어지기 때문
이다. 만약 남자아이에게서처럼 격려를 받는다면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와 같은 약동력과 탐
구심과 진취의 기상과 대담성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여자아이가 남성적인 가르
침을 받고 자랐을 경우에 가끔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여자아이는 많은 문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버지가 딸의 이처럼 키우고 싶어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남자의 손에서 자란 여자
는 여성의 결점을 많이 모면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아이를 남자아이와 마찬가지로 취급하
는 것은 풍습이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어느 마을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바지를 입는 3, 
4세의 여자아이 몇을 보았는데, 그 아이들은 다른 어린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있었다. "쟤
네들은 여자야, 남자야?"하고 실제로 검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 여자아이들은 자기들
도 여자옷을 입게 해달라고 울면서 떼를 썼다.

  그 여자아이가 대단히 고독하게 살아가지 않는 한, 설사 부모가 남자아이와 같은 생활방
법을 하락하더라도 그 여자아이 주변의 동성 친구들이나 선생들이 분개한다. 아버지의 영
향에 대한 해독제로서 언제나 숙모, 할머니, 사촌들이 대기하고 있다. 보통 딸에 대해 아버
지에게 할당된 역할은 별로 크지 않다. 여성에게 제공된 불운의 하나는 미슐레(19세기 프
랑스의 진보적인 역사가)가 지적한 것처럼 유년기의 여자아이는 여성의 손에서 자란다는 
것이다. 남자아이도 처음에는 어머니의 손에 의해 양육된다. 그러나 남자아이의 남성을 존
중하여, 곧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나게 된다.
  한편 어머니는 딸을 여성의 세계에 완전히 가둬두려고 한다.
  어머니와 그 딸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서는 좀더 나아가서 고찰하려고 한다. 딸은 어머니
에게 있어 자신의 분신인 동시에 타인이기도 하며, 어머니는 딸을 무척 사랑하는 동시에 
적의를 품기도 한다. 어머니가 딸에게 자기 자신의 운명을 강요하는 것은, 자기의 여자다
움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방법이기도 하며, 한편 이에 대해 복수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와 동일한 과정은 남색가, 도박꾼, 마약중독자 등 자기가 어떤 부류에 속해 있는 것을 자
랑스럽게 여기는 동시에 수치스럽게도 느끼는 사람들에게 공통되어 있다. 그들은 열심히 
선전하여 동조자를 얻으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자기에게 딸이 맏겨졌을 때 교만과 원한이 뒤섞인 열성을 가
지고 자기와 비슷한 여자로 만드는 데 몰두한다. 딸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인자한 어
머니도 딸을 '여자다운 여자'로 키우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야 
사회가 쉽사리 받아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딸에게는 동성친구만 주어지고, 여선생에게 맡
기며, 그리스, 로마 시대의 귀부인들처럼 어렸을 때부터 현모양처 속에서 성장하도록 한다. 
여성으로서의 운명을 깨우쳐주는 책이나 놀이를 택하게 되고, 여자다운 여자의 귀감이 주
입되고, 부덕을 심어주고, 요리나 재봉이나 가사와 함께 화장, 매력, 수치심 등을 가르친
다.
  소중히 다뤄야 하는 불편한 고급 옷을 입히고 귀찮은 머리 매무새를 하게 하며 까다로
운 예의범절을 강요한다. "몸을 똑바로 일으켜야 해. 집오리처럼 걸어다녀서는 안 돼." 우
아해지기 위해 그녀는 자연스러운 동작을 억제해야 한다. 말괄량이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되
고 심한 운동도 금지되며 싸움은 금물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녀는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하녀 겸우상이 되라고 강요받는다.
  오늘날에는 여권신장 덕분에 여자가 학문을 하고 스포츠에 전념하도록 장려하는 것을 
점점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여자아이가 그런 전문분야에서 성공을 거두
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남자아이의 경우처럼 야단을 치지 않는다. 세상은 여자에게는 이와 
다른 종류의 완성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런 전문분야에서의 성공을 더 어렵게 한다. 세상
은 적어도 그녀가 여자로서 그 여자다움을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여자아이는 처음엔 별 어려움 없이 이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 아이는 놀이와 공상의 무
대 위에서 활동한다. 인간의 처세방법을 모방하고 인간의 행위를 본받는다. 공상적인 행위
를 하는 동안은 행위와 존재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우월성에 
대한 대상을 자기의 운명속에 포함된, 자기가 이미 유희 속에서 실현하고 있는 약속 가운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아직 자기의 유치한 세계만을 알고 있는 소녀에게는, 처음에 어머니

가 아버지보다 더 큰 권한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는 세계를 모권제도의 일종
처럼 상상한다. 그녀는 어머니를 모방하고, 어머니와 동화한다. 때로는 역할을 거꾸로 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커지고, 엄마가 작아지면..."하고 여자아이는 말하고 싶어한다.
  인형은 그녀의 분신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기이기도 하다. 진짜 아기도 그 어머니에
게 하나의 '제2의 자아'라는 시각에서 보면, 이 두 기능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여
자아이가 자기 인형을 꾸짖으며 벌을 주고 이어서 토닥거려줄 때, 그녀는 어머니에 대해 
자기를 지키는 동시에, 어머니의 권위를 지니게 되는 셈이다. 그녀는 모녀의 두 요소를 동
시에 갖고있다. 그녀는 자기의 인형을 신뢰하고 교육하고 자기의 절대권한을 확립하는가 
하면 때로는 인형의 팔을 잡아비틀고 때려주고 학대하는 경우가 있다. 즉 그녀는 인형을 
통하여 주체성의 확립과 소외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어머니가 이 상상의 생활에 가담하는 경우가 있다. 여자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인
형을 상대로 아빠, 엄마놀이를 한다. 이것은 남자를 배제한 부부이다. 여기에 선천적으로 
신비로운 '모성본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소녀는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어머니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또 주위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 들은 이야기나 읽은 책, 그녀의 
작은 경험은 모두 이것을 확인해 준다. 그녀는 그와 같은 미래의 흡족한 행복에 감격하도
록 유도하고, 그것이 앞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 그녀에게 인형이 주어진
다. 그녀의 사명은 명령적으로 주어진다. 아기를 기르는 것이 여자의 숙명인 것처럼 생각
하도록 가르치고 남자아이 이상으로 자기 '가정'에 관심을 갖도록 교육한다. 특히 생식의 
신비에 호기심을 갖게한다.
  여자아이는 아기가 양배추 밑에서 태어난다거나 황새가 데리고 온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좀처럼 믿지 않는다. 특히 어머니에게서 남동생이나 여동생이 태어나면, 여자아이는 곧 아
기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근래의 어머니는 옛날 어머니들처
럼 이것을 비밀로 삼지 않는다. 여자아이는 이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기 보다는 감탄하는 
것이 보통이다. 해산은 그녀에게는 마치 마법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해산의 생리적인 의미를 다 알고 있지는 않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래서 여자가 임신을 하는 것은 어떤 음식을 먹었기 때문
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동화의 주체이다.(동화 속의 여왕이 어떤 과일이나 생선을 먹은 
후에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 이 때문에 일부 여성들은, 임신과 소화기능 사이에 어떤 관
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런 의문이나 발견이 모여서 여자아이의 관심의 대부분을 차
지하여, 그 상상을 키우게 한다. 그 전형적인 것으로서 융(스위스의 심리학자, 정신의학자, 
1875-1961)이 수집한 사례를 들고자 한다.(융의 '어린이 정신의 갈등'에서) 이것은 같
은 시절에 프로이트가 분석한 한스 소년의 예와 여러 면에서 많은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
다.
  안나가 아기의 출처에 대해 부모에게 묻기 시작한 것은 3살쯤 되었을 무렵부터이다. 처
음에 그녀는 아기가 '어린 천사'라는 말을 듣고,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가서 아기의 모습으
로 바뀌어 태어나는 것이라고 상상한 모양이다. 4살 때 그녀에게 동생이 태어났다. 그녀는 
어머니가 임신한 것을 알아차린 것 같지 않았으나, 해산한 이튿날 어머니가 잠든 것을 보
고 그녀는 의아하고 당혹스런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드디어 이렇게 물었다. "엄마

는 죽으려고 한 게 아니었어?"
  그녀가 며칠 할머니 집에 가 있다가 돌아왔더니, 간호사가 어머니의 시중을 들고 있었
다. 그녀는 처음엔 간호사를 싫어했으나 얼마 안 가서 간호사놀이를 하면서 놀게 되었다. 
그녀는 동생을 질투하고 비웃고 혼잣말을 하고 말을 듣지 않고 말썽을 부리며 다시 할머
니에게 돌아가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녀는 바른 대로 알려주지 않는다고 어머니에게 
여러 번 투덜댔다. 그녀는 아기의 출생에 대해 어머니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아기를 갖더라도 간호사로서 갖는 것과 어머니로서 갖는 것은 차이
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낀 그녀를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도 언젠가는 엄
마 같은 여자가 되는 거야?" 그녀는 밤중에 큰 소리로 부모를 부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
고 자기 주위에서 메시나의 대지진이 큰 화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공포의 구실로 삼
아, 이 지진에 대해 자주 물었다. 어느 날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소피는 어째서 
나보다 나이가 적어? 프리츠는 태어나기 전에 어디 있었어? 하늘나라에 있었어?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왜 지금 하늘나라에서 내려왔어?" 어머니는 드디어 그녀에게 동생은 마치 
나무나 풀이 땅에서 생겨나는 것처럼, 자기 뱃속에서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안나는 그것이 
매우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이어서 그녀는 물었다.
  "동생은 혼자 나왔어?"
  "그래."
  "그렇지만 걷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나왔어?"
  "기어서 나왔어."
  "그럼 거기 구멍이 있어?"(그녀는 자기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면 입에서 나
왔어?"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동생을 데리고 온 것이 황새였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갑자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오빠는 여기서 말하는 오빠는 그녀의 놀이에서 큰 역할을 했던 가공의 큰 오빠를 
가리킨다) 이탈리아에 있는데 천과 유리로 된 깨지지 않는 집을 갖고 있어."
  그 후부터 그녀는 지진에 대한 흥미를 잃고, 분화의 사진을 보여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
다. 인형을 상대로 아직도 황새 이야기를 꺼냈으나 자신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곧 그
녀는 새로운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아빠는 왜 자리에 누워 있어? 아빠도 뱃속에 풀이 났어?" 그녀는 어느날 꿈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갖고 있는 노아의 방주(여러 가지 동물을 모은 장난감)의 꿈인데, "아래쪽에 
뚜껑이 열리게 되어 있어서, 작은 동물은 모두 이 뚜껑 때문에 아래로 떨어졌어."
  실제로 그녀의 노아의 방주는 지붕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그 무렵에 그녀는 다시 악몽
을 꾸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버지의 역할을 궁금하게 여긴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임산부가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온 그 이튿날에, 안나는 어머니 앞에서 스커트 밑으로 인형
을 집어넣었다가 그 인형의 머리를 슬슬 끄집어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 아기가 나오고 있어. 벌써 거의 다 나왔어." 얼마가 지나 오렌지를 먹고 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걸 삼켜서 뱃속 아래까지 쑥 내려가게 해야지. 그럼 아기가 생
길 거야." 어느날 아침, 아버지가 화장실에 갔을 때 그녀가 아버지의 침대에 뛰어올라가 

배를 깔고 두 다리를 파닥거리면서 말했다.
  "그렇지, 아빠는 이렇게 하는 거지?"
  다섯 달 동안 그녀는 이에 대한 관심을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의혹을 표시하여 아버지가 자기를 물에 빠뜨리려 했다고 멋대로 지
껄였다.
  어느날 정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땅에 씨를 뿌리면서 놀고 있던 안나가 아버지에게 물
었다. "눈은 머리에 심는 거야? 그리고 머리털도?" 아버지는 그것은 발육하기 전부터 이미 
아기의 몸에 생겼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럼 프리츠는 어떻게 엄마 
속으로 들어갔어? 누가 아기를 엄마 속에 심었어? 아빠도 마찬가지야. 누가 아빠를 아빠의 
엄마 속에 심은 거야? 그리고 프리츠는 어디로 나왔어?"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러자 그녀는 자기의 생식기
를 가리키며 말했다. "동생은 여기서 나왔어?"
  "그래."
  "동생은 어떻게 엄마 속에 들어갔어? 누가 엄마 속에 씨를 뿌렸어?"
  아버지는 씨를 뿌린 것은 자신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아주 만족한 듯이 보였다. 이튿
날 안나는 어머니를 놀려주었다.
  "아빠에게서 들었어. 프리츠는 꼬마천사였는데 황새가 데리고 왔대."
  그녀는 전보다 훨씬 침착해 보였다. 그래도 그녀는 정원사들이 오줌을 누는데 아버지도 
함께 있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정확한 역할에 대해 몹시 알고 싶어했다. 
그녀는 5살 때 거의 모든 걸 알게 되었지만, 마음이 동요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것이다. 소녀가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이처럼 분명한 의문을 갖지 
않거나, 이 점에 관해 부모가 회피하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많다. 많은 여자아이들은 앞
치마 밑에 방석을 집어넣고 임신 흉내를 내거나 치마주름을 이용하여 인형을 요람 속으로 
떨어뜨리거나 인형에게 자기의 젖을 빨리기도 한다. 남자아이도 여자아이와 마찬가지로 모
성의 신비에 감탄한다. 어린이는 모두 사물의 내부에 숨어 있는 부를 예감하는 오묘한 상
상력을 갖고 있다. 어린이는 저마다, 예컨대 보다 작은 인형이 들어 있는 인형이나, 다른 
상자를 포함하고 있는 상자나, 한복판에 작은 복제가 붙은 삽화처럼 '끼워넣는 경이'에 민
감하다. 어린이는 누구나 그들의 눈앞에서 싹을 까보이거나 알 속에 들어 있는 새끼를 보
이거나 화분 속에 '수중화'의 경이가 펼쳐지거나 하면 황홀해한다. 어떤 남자아이는 사탕으
로 만든 작은 알맹이가 가득찬 부활절의 알을 열자마자 "야, 엄마다!"하고 외쳤다.
  자기의 뱃속으로 아기를 낳는 것은, 마치 요술처럼 신기한 일이다. 어머니는 선녀와 같
은 신비로운 힘을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많은 남자아이는 자기들에게 이와 같은 특권
이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을 비관한다. 남자아이들이 나중에 새 둥지에서 알을 훔쳐내거나 
어린 초목을 짓밟는 등 일종의 분노로 자기 주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자기들에게는 
생명을 꽃피울 힘이 없는 데 대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자아이는 언젠가 그것
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에 감격한다.
  인형놀이에 의해 구체화되는 이 희망 이외에, 가정생활이 또한 여자아이에게 자기확립의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가사의 대부분은 아이도 할 수 있다. 남자아이는 보통 가사가 면제
되지만, 여자아이는 쓸거나 털거나 야채 껍질을 벗기거나 아기의 몸을 씻어주거나 불에 올
려놓은 수프냄비를 지켜보아도 무방할 뿐 아니라, 또 그렇게 하도록 지시를 받는다. 특히 
장녀는 어머니가 하는 일을 곧잘 돕는다. 어머니는 편리해서인지 적의나 사디즘에서 많은 
부분을 장녀의 손에 맡긴다. 그래서 장녀는 일찍부터 진실한 세계에 합류된다. 자기가 중
요하다는 의식은 자기가 여성임을 승복하기 쉽게한다.
  그러나 행복한 무상성이나 어린이다운 무관심 등은 그녀에게 거부된다. 나이에 비해 일
찍 여성이 된 그녀는 이 특수화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를 너무 일찍 깨닫게 된다. 
그녀는 벌써 어른이 되어 성년기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에게 하나의 특수성을 
부여한다. 여자아이가 과중한 일을 짊어지게 되면, 일찍부터 노예가 되고 기쁨이 없는 삶
을 강요받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의 힘에 알맞는 노력만 요구될 때에는, 자기가 어른처럼 
유능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어른과 책임을 공동으로 지게 된 데 기뻐한다. 이 연대책
임은 어린이와 주부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의해 가능하다.
  전문직업을 갖고 있는 성인남자는 여러 해 동안의 수업에 의해 유아단계를 벗어나게 된
다. 어버지의 역할은 남자아이에게 깊은 신비에 싸여 있다. 남자아이의 경우, 미래의 자기 
모습인 어른은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다. 이와 반대로 어머니의 역할은 여자아이의 손이 
닿는 데 있다. "아직 어려도 벌써 여자예요."하고 그녀의 부모는 말한다. 그래서 흔히 여자
아이는 남자아이보다 조숙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여자아이 쪽이 어른의 단계에 
더욱 접근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대다수의 여성에게는 전통적으로 이단계가 보다 유아적
인 상태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자아이는 스스로 조숙하다고 생각하고, 아기 옆
에서 '꼬마 엄마'노릇하기를 좋아한다. 어른인 체하여 어른스럽게 말하고 명령하며 어린이
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형제들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어머니와 대등한 입장에서 말한
다.
  이런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
히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성장함에 따라 그녀는 남자아이들에 대해 그들이 남성이라는 점
을 부러워한다. 부모나 조부모가 여자아이보다 남자아이를 더 좋아한다는 말을 입밖에 낼 
때가 있다. 혹은 여자아이보다도 남자아이에게 더 큰 애정을 쏟기도 한다. 남자아이에 대
해서는 더욱 진지하게 존중하는 태도로 말을 걸고, 많은 권리도 인정한다. 남자아이 쪽에
서도 여자아이를 무시한다. 여자아이를 끼워주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놀고 여자아이를 바
보로 취급한다. 특히 여자아이를 '오줌싸개'라고 불러 어렸을 때의 숨겨진 굴욕감을 되살려
놓는다. 프랑스의 남녀공학 학교에서는 남자학급이 여자학급을 억압하고 박해한다. 만일 
여자아이가 지지 않으려고 남자아이와 겨루기라도 하면 곧 심한 꾸중을 받게 된다. 여자아
이는 남자아이가 특별하게 여겨지는 활동을 할 때 이중적인 의미로 그것을 부러워한다. 즉 
그녀들은 자기의 힘을 세계에 확립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소원을 갖는 동시에 자기들에
게 강요된 열등한 위치에 대해 항의한다. 특히 그녀들은 나무, 의자, 지붕 위에 오르는 것
이 금지된 것을 야속하게 생각한다. 아들러는 상하의 개념이 매우 큰 중요성을 갖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많은 영웅신화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처럼 공간적인 상승개념은 정신적인 
우월을 의미한다. 나무나 지붕 위에 오르는 것은, 지상의 주체로서 주어진 세계의 피안에 

떠오르는 것이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도전의 명분이 된다. 이런 용감한 행위가 금지되어, 나무
나 방위 밑에 앉아서 의기양양한 남자아이를 올려다보아야만 하는 여자아이는 몸과 마음 
모두 남자보다 열등한 자로 느낀다. 달리기, 높이뛰기에서 뒤에 처지거나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넘어지거나 밀려나기만 해도 같은 기분이 된다.
  어린이가 성장함에 따라 그 세계는 점점 확대되어 남성의 우위가 더욱 확고해진다. 어머
니에의 동화는 이미 만족스러운 해결책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자아이가 여성으
로서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배하기 위
해서이다. 주부들의 사회가 그녀의 눈에 특권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녀는 주부가 되기를 원
한다. 그러나 교제, 공부, 놀이, 독서가 그녀를 어머니에게서 떼어놓게 되면 세계의 지배자
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가르침이 페니스의 발견 이상으로 자
기 자신에 대한 그녀의 의식을 크게 바꾸어 놓는다.
  여자아이는 가정에서의 경험을 통해 차츰 남녀의 계급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 권력은 
남발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빛나 보인다. 사실상 가정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어머니라고 
하더라도,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의 의사를 존중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어떤 중대한 일에 대해, 어머니가 명령하거나 칭찬하거나 벌하는 것은 으레 아버지의 이
름으로 행해지고 아버지를 통해서이다. 아버지의 생활은 신비로운 위신에 싸여 있다. 아버
지가 집에 있는 시간, 아버지가 일하는 방, 아버지를 에워싼 물건들, 아버지의 일, 아버지
의 습성 등은 모두 일종의 신성함을 띠고 있다. 가족을 부양하는 것도 아버지이며 가정의 
책임자이고 우두머리이다. 아버지는 보통 밖에서 일하므로 가정이 외계와 연결되는 것은 
아버지를 통해서이다. 아버지는 파란만장하고 광대무변하며 힘겹고 희한한 세계의 화신이
다. 아버지는 초월이고 신이다. 여자아이가 자신을 안아올리는 아버지의 억센 팔에서, 몸을 
의탁하고 있는 육체 속에서 육감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옛날에 이시스(이집
트신화에 나오는 다산의 여신)가 라에게, 대지가 태양에게 지위를 빼앗기는 것처럼, 어머
니는 아버지에게 지위를 빼앗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여자아이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녀는 장차 자기도 전능한 
어미니 같은 여자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로 권위있는 아버지처럼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어머니와 연결시키고 있던 것은, 적극적인 경쟁심이었다. 그녀는 아버
지에게서는 소극적인 찬동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자아이 쪽은 일종의 대항의식
을 통하여 아버지의 우월성을 파악한다. 한편 여자아이는 무력한 찬탄으로 그것을 받아들
인다.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성적인 욕망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
서도 말한 바와 같다. 그것은 복종과 찬미 속에 자기를 객체화하는 데 동의하는 주체의 철
저한 포기이다. 아버지가 애정을 표시하면, 그 딸은 자기의 존재가 훌륭히 정당화된다고 
느낀다. 그녀는 타인이 애써 손에 넣어야 하는 가치를 쉽게 차지한다. 그녀는 충족되고 신
격화된다. 그녀가 이 충족감과 평화를 그리워하여 그것을 한평생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이 애정이 거절당하면 그녀는 영구히 자기는 죄를 지어 벌을 받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또는 자기에 대한 칭찬을 다른 데서 찾고, 자기 아버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의를 품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아버지가 세계의 열쇠를 쥐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러
나 대체로 모든 남자는 남성으로서의 위엄을 다소나마 갖고 있다. 그들을 일부러 아버지의 
'대용품'으로 볼 필요는 없다. 할아버지, 오빠, 숙부, 친구의 아버지, 집에 오는 남자들, 선
생님, 목사, 의사 등이 여자아이들을 매료시키는 것은 우선 남성으로서이다. 성인여자가 '
남자'에게 보여주는 감격적인 존경은, 남자를 우상화하기에 충분하다.
  모든 것이 여자아이에게 이 차이를 확신시켜주고 있다. 여자가 받는 역사적, 문학적인 
교양, 여자아이를 달래기 위해 사용되는 노래나 동화 등은 모두가, 남자를 찬양하게 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제국, 프랑스도, 그밖의 모든 국가도 남자가 세웠으며, 지구를 발견하고 
그것을 개발하는 도구를 발명한 것도 남자이고, 지구를 다스리고, 그것을 조각이나 그림, 
서류로 가득 채운 것도 남자이다. 어린이의 문학은 신화도 동화도 이야기도 모두 남자의 
교만과 욕구가 만들어낸 신화를 반영하고 있다. 여자아이가 세계를 개척하고, 거기에서 자
기의 숙명을 알게 되는 것은 남자의 눈을 통해서이다. 남성의 우위는 압도적이다. 여성으
로서 유일한 잔 다르크에 비해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다비데, 아킬레스, 랜스트르, 뒤게
클랭, 바이야르, 나폴레옹 등 얼마나 많은 남성이 있는가. 더욱이 잔 다르크는 배후에 대천
사 미카엘의 남성적인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유명한 여성의 전기만큼 따분한 것은 없다. 위대한 남성의 전기와 비교하면 그것은 빛바
랜 존재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어떤 남자영웅의 혜택을 받고 있다. 이브는 그녀 자신을 위
해 빚어진 것이 아니라 아담의 반려자로서 그의 옆구리에서 끄집어내어 만들어졌다. 성서
에도 눈부신 활약을 하는 여성은 거의 없다. 룻(구약성서에 나오는 정숙한 여자)도 결국 
남편을 발견한 것뿐이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루스 앞에 무릎을 꿇고 유태인의 용서를 받았
다. 그러나 그녀는 모르드개의 수중에서 한낱 순종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유디트는 좀더 
대담했지만 그녀 역시 승려에게 복종했으며, 그녀의 공적 또한 젊은 다비데의 순수하고 빛
나는 승리에는 비교도 안 된다. 신화속의 여신은 경박하여 유피테르 앞에서는 크게 위축된
다. 프로메테우스가 오만하게 천국의 불을 탈취하는 데 비해 판도라는 재앙의 상자를 몰래 
연다.
  물론 동화 속에도 무서운 권력을 휘두르는 마녀나 노파가 있기는 하다. 그 중에서도 안
데르센의 '천국의 뜰'에 나오는 풍모신의 모습은 원시적인 대여신을 방불케 한다. 그녀의 
장승 같은 네 아들은 무서움에 떨면서 그녀에게 복종한다. 그녀는 아들의 행실이 나쁠 때
에는 때려주고 포대 속에 가둔다. 그러나 이들은 호감이 가는 인물은 아니다. 선녀나 인어, 
물의 요정이 한층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존재는 불안정하며, 개성이 뚜렷하지 않다. 
그녀들은 자기 자신의 운명을 갖지 않고 인간세계에 개입한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여
자가 된 날부터 사랑의 멍에를 알게 되며, 이에 따르는 고통이 그녀의 운명이 된다.
  고대의 전설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이야기에서도 남성은 특권적인 영웅이다. 세귀르 부인
(19세기 프랑스의 아동문학가)의 작품만은 신기하게도 하나의 예외이다. 그녀는 일종의 
모권사회를 그려 그 속에 나오는 남편은 우스꽝스러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 아
버지의 모습은 현실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광의 후광에 싸여 있다. '작은 아씨들'(미국의 
여류작가 L.M. 올콧의 가정소설)은 부재에 의해 신성화된 아버지의 비호 아래 전개된다. 
모험소설 속에서 세계일주를 하고, 수부가 되어 항해하며, 밀림속에서 빵나무 열매를 먹고 

목숨을 이어나가는 것은, 으레 남자아이이다. 중대한 사건은 모두 남자가 일으킨다. 현실이 
이런 소설이나 동화를 입증하고 있다. 신문을 읽어도, 어른의 대화를 들어도 옛날이나 지
금이나 여전히 세계를 좌우하고 있는 것은 남자들이다. 그녀가 숭배하는 국가원수, 장군, 
탐험가, 음악가, 화가는 모두 남자이며, 그녀의 가슴을 감동으로 물결치게 하는 것도 역시 
남자이다.
  이 위광은 초자연적인 세백에도 반영된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여성의 생활에 미치는 영
향은 크다. 어머니에게 남자아이 이상으로 지배받는 여자아이는 종교적인 감화도 더욱 크
게 받기 쉽다. 서양의 종교에서는 아버지인 신은 남성이며, 특히 남성적인 특질, 즉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되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체적으로 긴 금발의 수염을 기
른 살과 뼈로 된 남자이다. 신학자의 말에 의하면, 천사에게는 성별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남자의 이름에 미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상에서의 신의 사도는 교황도, 신도들을 그 
반지에 입맞추게 하는 사교도, 미사를 드리고 고해실에서 신도의 무릎을 꿇게 하는 신부도 
모두 남자이다. 믿음이 깊은 소녀에게 영원한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녀가 현세의 아버지와 
유지하고 있는 관계와 비슷하다. 그 관계가 상상의 기반 위에 전개되기 위해 그녀는 더욱 
완벽한 권리포기도 경험한다. 카톨릭은 특히 소녀에게 혼란을 주는 경우가 있다.
  성모는 무릎을 꿇고 천사의 말을 들으며 "나는 주의 종입니다."하고 대답한다. 막달라 마
리아는 그리스도의 발밑에 무릎을 굻고 자신의 긴 머리칼로 그 발을 씻는다. 성녀들은 무
릎을 꿇고, 빛나는 그리스도에게 자기들의 사랑을 맹세한다. 여자아이는 무릎을 굻고 향기
에 싸여서 신과 천사의 시선, 즉 남자의 시선에 몸을 던진다. 에로틱한 언어와 여자가 사
용하는 신비로운 언어의 유사성은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예컨대 어린 그리스도에 대해 성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부드러운 시선을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하는 것도 당신의 입맞
춤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당신의 사랑으로 참아내겠으니, 당신의 사랑으로 이 몸을 불태워
주소서....
  사랑하는 이여, 적어도 당신의 부드러운 첫 미소를 생각하는 것만은 허락해 주소서. 아, 
이 불타는 열광을 안은 채 당신의 품에 이 몸을 숨게 하소서!
  그대의 숭고한 시선에 매혹되었으면... 그대의 사랑의 먹이가 되었으면... 언젠가는 그것
을 바라리라. 그대는 나를 잡고 사랑의 보금자리로 이끌어가겠지요. 끝내는 나를 이 불타
는 심연에 빠뜨려 영원토록 행복한 희생자가 되게 하겠지요.
  
  그러나 이처럼 격한 감정이 언제나 성적인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여성의 성감은 
오히려 어린시절부터 남자에 대해 느끼고 있던 종교적인 감정이 스며든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 여자아이는 고해승 옆에서, 심지어 쓸쓸한 제단 아래서도 그녀가 후에 애인의 품에
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전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여자의 사랑은, 하나의 의식이 
그 의식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해 객체화하는 경험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깊은 여성
이 교회에서 느끼는 것도 이런 수동적인 쾌감이다.
  꿇어엎드려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녀는 체념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무

릎을 꿇고 승천한다. 신이 팔에 몸을 맡기고 구름과 천사에 에워싸여 승천할 수 있다. 이 
놀라운 경험을 그녀는 지상에서의 미래로 옮기는 것이다. 여자아이는 이밖에 여러 가지 방
법으로 이런 것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은 그녀가 남자의 품에 몽롱하게 몸을 맡겨 영광의 
하늘나라로 옮겨지도록 권유한다. 여자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사랑을 기다려야 한다.
  여자란 잠자는 숲속의 미녀이고 신데렐라(모두 페로의 동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이고 백
설공주이다. 사랑이 오기를 기다리며 참이야 한다. 유행가나 동화에서 젊은이는 여자를 찾
아 모험을 무릅쓴다. 그는 용을 단칼에 때려 눕히고, 거인을 쓰러뜨린다. 여자는 성, 궁전, 
정원, 동굴 속에 갇혀 있거나 사슬에 매여 있거나 잠들어 있다. 여자는 기다리고 있다. "언
젠가는 나의 왕자가 찾아온다... 언젠가는 그 사람이 올 것이다. 내 애인이 될 사람은...." 
유행가의 가사가 그녀에게 인내와 희망의 꿈을 갖게 한다.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
자의 마음을 끄는 것이다. 설사 굳세고 용감한 성격을 갖고 있을지라도 모든 여주인공이 
동경하는 것은 이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녀들에게 미모 이외의 장점은 요구되지 않는
다. 육체적인 외모에 대한 걱정이 여자에게 문자 그대로 강박관념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왕이든, 양치든 처녀든 사랑과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 
참혹하게도 추하다는 것은 근성이 나쁜 것과 결부되어, 추녀에게 불운이 닥칠 때에는 과연 
운명이 그녀의 죄를 벌했는지, 아니면 추함을 벌했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흔히 빛나는 
미래가 약속된 미녀가 회생자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주느비에브 드 바라방(유럽에 널리 
퍼져 있는 전설의 여인. 남편 지그프리드의 의심을 받아 깊은 숲속으로 추방되어 목숨을 
잃는다)이나 그리셀리디스(페로의 동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생각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괴로움이 그 속에 불안을 조성한다.
  여자가 가장 즐거운 승리를 거두는 것은 비참한 심연에 떨어졌을 때이다. 상대가 신이든 
남자이든, 여자아이는 가장 철저한 권리포기에 동의함으로써 마조히즘을 즐긴다. 사자의 
발톱에 찢겨 선혈로 물들인 성녀 블랑딘, 유리관 속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백설공주, 
잠자는 미녀, 실신한 아탈라(샤토브리앙의 소설'아탈라'의 여주인공), 멍들고 상처입고 무
릎을 굻고 치욕을 당한 가엾은 여자주인공들이 그 후배들에게 학대받고 버림받고 체념한 
미녀의 매혹적인 위광이 이런 것이라고 가르친다. 형제가 영웅놀이를 하는 것과는 달리 여
자아이는 순교자놀이를 하고 싶어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못 된다. 이교도들이 그녀를 사자
에게 던지고, 푸른 숲속으로 추방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념하고 고민하고 죽는다. 그리고 
그 이마에는 후광이 비친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데도 나는 언제나 남자들의 애정을 
끌어 그들을 불안하게 하고, 그들에 의해 구제되고, 그들의 팔에 안겨 죽고 싶어 했어요."
하고 노아유 부인은 쓰고 있다.(자전 '나의 생애의 서'에서) 이런 피학성 꿈의 뚜렷한 예는 
마리르 아르두앵(현대 프랑스의 여류작가)의 '검은 돛'에서도 볼 수 있다.
  
  나는 일곱 살 때 어느 늑골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최초의 남성을 만들었다. 그는 훤
칠한 키에 젊었으며 땅바닥까지 닿는 긴 소매가 달린 검은 사탱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금발은 어깨 위에 탐스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그를 에드몽이라고 불렀

다... 이윽고 내가 그에게 두 사람의 아우를 마련해 주는 날이 왔다... 이 삼형제, 즉 에드
몽, 샤를, 세드릭은, 모두 검은 사탱옷을 입고 금발에 키가 크고 몸이 늘씬하여, 나는 묘한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명주신을 신은 그들의 발은 참으로 아름답고, 그 손도 무척 부드
러워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들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가 
되었다. 나는 오빠들의 횡포에 굴종하고 그들의 의사대로 움직인다고 상상하기를 좋아했
다. 나는 큰오빠인 에드몽이 나의 생사여탈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었다. 나
에게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회
초리로 때렸다.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오면 나는 공포와 비탄으로 기가 질려 대꾸도 말도 찾
지 못한 채 빠른 말로 "네, 전하." "아뇨, 전하."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으로, 내 스스로 바보라고 느끼는 기묘한 쾌감을 맛보았다... 그가 나에게 주는 고통을 
참을 수 없을 때에는 나는 속으로 '고마워, 전하.'하고 중얼거렸다. 이윽고 고통으로 기절
할 지경에 이르는 순간이 다가오면, 나는 고함을 지르지 않기 위해 내 입술을 그의 손으로 
내리눌렀다. 그러면 어떤 충동으로 가슴이 메어질 듯하여, 나는 행복의 절정에서 죽어버리
고 싶은 상태에 이르렀다.
  
  아직 그런 시기가 되기 전부터, 여자아이는 자기가 연애할 나이가 되었다고 공상한다. 
아홉 살이나 열 살쯤부터 화장하기를 즐기고, 가슴에 물건을 넣어 부풀리고, 성인여자처럼 
치장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아이를 상대로 에로틱한 경험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여
자아이가 남자아이와 함께 방구석에 숨어 '서로 보여주기'놀이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
은 단지 성적 호기심에서이다. 사실 여자아이가 사랑을 꿈꾸는 상대는 어른이다. 완전히 
공상적인 인물인 경우도 있고, 현실에 살아 있는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 어린이는 그 남자를 멀리서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콜레트 오드리(현대 프랑스
의 여류작가)의 회상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 예는, 이런 유년기 몽상의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다섯 살 때 사랑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유년시절의 유치한 성적 쾌락, 예컨대 식당의 의자 하나에 올라타거나 잠들기 전에 자기 
몸을 애무하면서 느낀 만족과 그것은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 감정과 앞의 쾌락 사이의 
유일한 공통점은, 그 양쪽 모두를 나는 조심스럽게 감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청년에 
대한 나의 사랑은, 잠들기 전에 그를 생각하고 멋진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이었다... 프리바
(파리 근처의 도시 이름)에서 나는 아버지 밑에 있는 과장들을 차례로 모두 사랑하게 되
었다... 나는 그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
은 나의 사랑의 꿈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실을 만드는 데 불과했기 때문이다... 밤에 잠자리
에 들었을 때 나는 내가 너무 어리고 겁이 많은 데 대해 복수를 했다. 그 방법은 상당히 
계획적이었다. 그를, 그 젊은이를 눈앞에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중요한 것은 나를 
변형시켜 내부에서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성숙한 여자
가 될 뿐 더 이상 내 자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18세의 나이에 미인이 된다. 
봉봉상자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장방형의 납작한 봉봉상자에는 비둘기 무리에 에워
싸인 젊은 처녀 두 명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중에 갈색 고수머리에 긴 모슬린 

옷을 입은 처녀였다. 우리는 109년 동안 헤어졌다가 만난 것이다. 그는 거의 옛날 그대로
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 멋진 처녀를 보고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녀 쪽에서는 그에 대한 기
억이 거의 없는 모양이었으나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대한다. 나는 이 첫번째 만남을 위해 
근사한 대화를 생각해 냈다.
  어어서 오해가, 극히 곤란한 구애가, 그에게는 낙담과 질투의 참담한 시간이 되게 한다. 
으윽고 그는 참을 수 없어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는 말없이 듣다가 그가 낭패라고 생각할 
때, 자기는 그를 줄곧 사랑해 왔다고 고백하고, 두 사람은 잠시 포옹한다. 장소는 보통 공
원 벤치 위에서 저녁때 이루어졌다. 나는 서로 바짝 접근한 두 그림자를 바라보고, 속삭이
는 소리를 듣고, 동시에 육체와 육체의 따뜻한 접촉을 느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완전
히 흐리멍덩해져서... 결혼까지 가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이튿날 세수할 때, 나는 잠시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거울 속에 비친 거품투성이가 된 얼굴이 왜 나를 황홀하게 하고(다른 
때엔 내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 마음을 희망으로 가득차게 하는지 나
는 알 수 없다. 미래의 저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좀 얼떨떨하고 흐
리멍덩한 이 얼굴 표정을 나는 몇 시간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한번 씻어버리면 그것으로 끝난다. 어린이의 평범한 얼굴이 다시 나타나 이
제 더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놀이나 몽상은 여자아이를 수동적인 삶으로 방향을 바꿔놓는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미 자기를 여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
고 자기를 손상시키는 것임을 알고 있다. 설사 권리포기에 매력이 있어도, 손상은 불쾌한 
일이다. '남자'나 '연애'는 아직 멀리 미려의 안개 속에 싸여 있다. 지금 여자아이는 그 형
제들과 마찬가지로 능동성과 자주성을 요구하고 있다. 자유의 무거운 짐은 어린이들에게는 
결코 무거운 짐이 되지 않는다. 책임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른의 비호 아래 
안전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자기로부터 도파하려는 유혹을 느끼지 않고 있다. 그 생명에 
대한 자발적인 약동과 놀이와 웃음과 모험을 즐기는 것이다. 그로 인해 자연히 여자아이도 
어머니의 세계를 따분하고 숨막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의 권위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이것은 남자아이가 받고 있는 권위보다도 훨씬, 날마다 신변에서 강하게 발휘되는 
권위이다.
  콜레트가 애정을 다해 쓰고 있는 '시도'(콜레트의 어머니의 별명)의 경우처럼, 이러한 권
위가 포용력이 있고 신중한 형태를 취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머니가 마치 사형집행인
처럼 어린이에 대해 자기의 지배본능과 사디즘을 만족시키는 정신이상에 가까울 경우(V. 
르딕의 '질식', S. 드 테르비뉴의 '어머니의 원한', H. 바쟁의 '독사를 손에 들고' 참조)는 
예외로 하더라도, 딸은 어머니를 상대로 하여 지배적인 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할 것을 주장
하는 특권적인 개체이다. 이런 방법은 어린이를 반항으로 인도한다. C. 오드리는 정상인 
여자아이가 정상적인 어머니에 대해 갖는 반항을 그리고 있다.
  
  나는 설사 그것이 아무리 결백한 것이라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머니 앞
에서는 절대로 결백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없어서는 안 되는 어른이

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아직도 잊지 못할 정도로 밉살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진정되지 않는 잔인한 상처 같은 것이 있어, 그것이 언제 쑤셔댈지 알 수 없었
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어머니가 지니치게 엄격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어머니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아니, 아니,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를 탓하고 싶었던 것은, 그 권위도 아니고 또 독단적인 명령이나 금지도 아
니다. 그것은 단지 나를 정복하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때때로 그런 말을 입밖에 내기도 
했다. 입밖에 내지 않을 때에도 눈과 입모습이 그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간혹 부
인들에게 아이들은 벌을 받고 나면 훨씬 얌전해진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말은 나의 목
에 걸려서 잊혀지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토해버릴 수도 삼켜버릴 수도 없었다. 나는 이 
분노 때문에 어머니 앞에서 죄의식을 느꼈고, 내 자신에게는 굴욕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를 두려워하여, 과격한 말이나 불손한 태도 이외에는 복수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
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것은 또한 나의 영광이기도 했다. 상처가 남아 있는데
다가 단지 억압, 순종, 징계, 굴욕만을 되풀이하게 하는 무언의 광포가 살아 있는 한 나는 
정복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위신을 잃을 때가 많은데, 그럴 경우 이 반항은 더욱 가열된다. 어머니는 기다
리고 참고 불평하고 울부짖고 언쟁하는 여자처럼 보인다. 어머니는 하루하루 이처럼 손해 
보는 역할을 하면서도 그것이 존경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다. 어머니는 희생자로서 멸시를 
받고, 시끄러운 여자로서 미움을 받는다. 어머니의 숙명은 무미건조한 반복의 좋은 예로 
생각된다. 어머니에게 인생은 끝없이 어리석은 반복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 어머니는 주부
의 역할 속에 갇혀 신장하려는 생명을 가로막고 장애가 되고 부정이 된다.
  그녀의 딸은 어머니를 닮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녀는 여자로서의 굴종에서 벗어난 여
성을(여배우나 작가나 선생들을) 존경한다. 또한 스포츠나 공부에 열중하고, 나무에 기어
오르고, 옷을 찢고, 남자아이와 대항하려고 한다. 대개의 경우에 동성인 친구를 찾아가서 
마음속을 털어놓는다. 그것은 연애처럼 배타적인 우정으로서, 성에 관한 비밀도 나눈다. 그 
여자아이들은 자기들이 얻은 지식을 교환하고 비평한다. 그중의 한 아이가 친구의 오빠를 
사랑하여 삼각관계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소냐는 나타샤의 친구이
며, 그 오빠인 니콜라이를 사랑하고 있다.
  어느 경우에나 이런 우정은 비밀에 싸여 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여자아이들은 비밀
을 갖고 싶어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비밀로 한다. 여자아이는 자기의 호기심에 
대립되는 은폐에 대해 반항한다. 이것은 자기에게 중요성을 부여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중요성을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어른들의 생활에 끼여들려고 
하며, 어른을 주제로 자기가 그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엉터리 소설을 창작한다. 여자
친구들과 함께 남자아이들의 경멸에 대해 경멸로 대응하는 척한다. 여자친구들과 함께 남
자아이들의 경멸에 대해 경멸로 대응하는 척한다. 자기네들끼리 무리를 지어 남자아이들을 
놀리고 무시한다. 그러나 남자아이가 자기네들끼리 무리를 지어 남자아이들을 놀리고 무시
한다. 그러나 남자아이가 자기들을 대등하게 대하기만 하면 크게 기뻐하며 그 아이들의 의

견을 존중한다. 자기들도 특권계층에 속하고 싶은 것이다.
  원시 유목민의 경우, 여성을 남성의 우위에 굴복시키는 것과 같은 감정이, 철이 든 소녀
에게는 자기 운명의 거부로 나타난다. 그녀 내부의 초월성이, 철이 든 소녀에게는 자기 운
명의 거부로 나타난다. 그녀 내부의 초월성이 내재성의 사소함과 부조리를 비난한다. 그녀
는 예의범절에 억압되고 옷차림에 구속을 받고 가사에 얽매이고 모든 비약이 금지되어 있
는 데 대해 분개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조사를 하고 있으나, 거의 같은 결과로 나타난
다.
  남자아이는 하나같이-옛날의 플라톤처럼-여자아이가 되는 것은 질색이라고 말한다. 여
자아이는 거의 모두 남자아이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한다. 하벨로크 엘리스의 통계에 
의하면, 여자아이가 되기를 원하는 남자아이는 100명에 한 명 정도였지만 여자아이는 75
퍼센트 이상이 성이 바뀌기를 원하고 있다. 칼 피팔의 조사(샤를 보두앵이 '유년기의 심리'
에 대한 저서에서 보고하고 있다)에 의하며, 12세에서 14세에 이르는 20명의 남자아이들 
중에서 18명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여자아이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22명의 
여자아이 중에 19명은 남자아이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녀들은 남자가 되고 싶은 이유
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자아이가 좋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처럼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여자아이에게 겁을 주어 재미도 맛볼 수 있다. 남자아이라
면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남자아이는 자유롭다... 남자아이의 놀이가 더 재미있다... 남
자아이는 옷차림에 구속을 받지 않아도 된다...."
  이 마지막 불만은 자주 나온다. 여자아이는 거의 모두 옷이 거추장스러워 마음대로 움직
일 수 없는데다가 더러워지기 쉬운 밝은 색깔의 스커트나 옷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불평
한다. 12, 13세경이 되면 대다수의 여자아이는 문자 그대로 '선머슴애(말괄량이)', 즉 남자
아이로 인정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다. 그녀들은 그것을 마치 박탈행위나 부정행위처럼 괴
로워할 뿐 아니라, 그녀들에게 주어진 제도는 불건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으로 생명의 
충일이 저지되고, 쓸모없는 활력은 신경쇠약에 빠지게 한다. 너무 얌전한 일은, 그녀들의 
넘치는 정력을 다 소모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따분하다. 이 때문에 자기가 고민하
는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 침울하고 로맨틱한 공상에 빠진다. 그녀들은 이와 같은 안이한 
도피취미를 몸에 익히고, 현실감각을 상실한다. 또 자기 감정에 분별없이 몸을 내맡긴다. 
그녀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대신 마냥 지껄여대고, 두서없는 이야기 속에 진지한 말을 섞
으려고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이해해 주지도 않아 자기도취의 감정 속에 위로를 구
한다. 그녀들은 자기를 소설의 주인공처럼 생각하여 자기를 찬미하고 동정한다. 소녀가 사
치스럽고 연극을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은 결점은 사춘기 때 특히 강조될 것이다. 번민은 조바심이나 분노의 발작, 눈물
로 표시된다. 그녀들은 눈물에 대한 취미를-그후에도 많은 여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취미-
갖고 있다. 그것은 여자들이 자신을 희생자로 자처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혹
한 운명에 대한 항의인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받게 하는 방법이다. "여자아이
는 울기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알기로는 이중으로 즐기기 위해서인 것 같다. 한 예로 울
려고 거울 앞에 간 아이도 있었다."하고 뒤팡루(프랑스의 교육자, 1802-1878)는 말하고 

있다. 그녀들의 비극의 대부분은 가정과 관련되어 있다. 그녀들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끊으
려고 한다. 때로는 어머니에게 적의를 품고, 때로는 어머니의 보호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
다. 그녀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한다. 질투가 많고 민감하며 까다롭다. 그녀들
은 소설처럼 곧잘 꾸며댄다. 자기는 주워온 아이이며 아버지, 어머니는 친부모가 아니라고 
공상한다. 부모의 숨은 생활을 가상하고, 부모의 관계를 추리한다. 그녀들은 아버지를 아내
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반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난폭하고 야
만적이라고 생각하며 그와의 육체관계를 일체 혐오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공상, 
연극, 유치한 비극, 가짜기쁨, 이상한 행동 등의 원인은 여자의 불가해한 영혼 속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여자아이가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를 주체로, 자주체로, 초월성으로, 절대로 느끼고 있는 개인에게, 자기 속에 기존요
소의 형태로 열등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위해 
자기를 설정하고 있는 인간에게, 하등체로서의 자기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인생수업을 쌓아가는 도중에 스스로 여자로서 자각했을 때, 소녀에게 일어
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녀가 속해 있는 환경은 어디를 바라보나 닫혀 있고 제한되고 
남자의 세계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아무리 높이 날아오르거나 아무리 멀리 나아가도 언제
나 그녀의 머리 위에는 천장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벽이 놓여 있다. 그러나 남자가 
받드는 신들은 하늘 위에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여자아이는 인간
의 얼굴을 지닌 신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여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의 흑인들도 경험하고 있다. 그
들은 부분적으로는 하나의 문명에 용해되어 있지만, 그 문명으로부터 열등계급으로 간주되
고 있다. 빅 토머스(R. 라이트, '토인의 아들' 참조)가 그 인생의 여명기에 대단히 혐오스
러운 심정으로 경험한 것은, 이 결정적인 열등성, 그의 피부색깔 속에 스며 있는 저주스러
운 하등성이다. 그는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자기는 흑인이기 때문에 하늘이 자기
에게 닫혀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녀는 여자이기 때문에, 바다나 남, 북극이 무수한 
모험과 무수한 기쁨을 자기에게 금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불행한 상황으로 태어난 것이다. 큰 차이는, 흑인들은 반항 속에서 자기들의 숙
명을 감수하는, 즉 그 불운의 대가로 어떤 특권도 주어져 있지 않은 반면에 여자는 공범으
로 끌려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주의를 환기시킨 바와 같이, 최상의 자유를 누리기를 바라
는 주체의 진정한 요구와 함께, 자기포기와 도피의 진정치 못한 욕구가 있다. 부모도 교육
자도, 책도, 신화도, 남자도 여자도, 여자아이의 눈에는 수동적인 기쁨으로 비친다. 여자아
이는 어렸을 때부터 그 기쁨을 느끼도록 가르침 받는다. 그 유혹은 점점 교묘해진다. 그리
고 여자아이는 초월하기 위한 비약이 심한 저항을 받기 때문에 점점 숙명적으로 이 권유
를 받아들이게 된다. 자기의 수동성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는 외부로부터 자기에게 주어지
는 숙명을 저항없이 참는 것에 승낙하는 것이 되어 이 숙명에 대해 늘 불안을 느끼게 마
련이다.
  그러나 남자아이는 대담하건 비겁하건 열린 미래를 향해 뛰쳐나간다. 그는 마도로스도 
될 수 있고 기사도 될 수 있다. 농촌에 남을 수도 있고, 도시로 진출할 수도 있다. 그는 넓
은 세계도 볼 수 있고, 부자도 될 수 있다. 뜻하지 않은 기회가 기다리고 있는 미래를 앞

에 두고 그는 자유로운 자기를 느낀다. 한편 여자아이는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할머
니가 될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자기 집을 꾸려나갈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가 자기에
게 한 것과 똑같이 자기 아이들을 돌볼 것이다. 여자는 12세에 자기 일생이 결정된다. 그
녀는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고 날마다 발견해 나간다. 그녀는 호기심이 많지만, 그 
모든 단계는 미리 예견되어 하루하루가 억지로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일생을 상
상하면 소름이 끼칠 것이다.
  여자아이가 남자형제들보다 성의 신비에 대해 훨씬 더 신경을 쓰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확실히 남자아이도 그것에 대해 흥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에 남편이나 아버지로
서의 역할은 그다지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결혼하거나 어머니가 되
는 경우에 그 운명전체를 위태롭게 한다. 그래서 그 비밀을 예감하기 시작하면, 자기의 육
체는 그녀에게 오히려 혐오스러운 위협처럼 생각된다. 어머니가 되는 마술은 사라져버린
다. 어느 정도 일찌감치 계통적으로 지식을 갖게 되었을 경우, 그녀는 아기가 어머니의 뱃
속에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또 아기는 뱃속을 지팡이로 한번 때려서 나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불안한 심정으로 자분자답한다. 언젠가는 기생체가 자
기의 육체 내에 생식하게 된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이미 어렸을 때처럼 근사한 일로 생각
되지 않고 두렵게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이 무서운 종기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런
데 아기는 어떻게 해서 나올까? 출산 때의 비명이나 통증에 대해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는 경우에도 그녀는 지나가는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너희는 고통 속에 자식을 낳으리
라'는 성서의 글귀를 읽기도 한다.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예감한다. 그녀는 
배꼽 근처에서의 기묘한 작용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설사 그녀가 태아는 항문으로부터 떠밀
려나올 것이라고 상상해도, 여전히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출산의 과정을 발견했다고 생
각했을 때, 여자아이가 신경증적 변비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정확한 설명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팽창, 열상, 출혈의 광경이 그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여자아이는 상상
력이 풍부하기 때문에 이런 망상에는 더욱 민감하다. 그러나 그것들을 전율없이 직시한다
는 것은, 여자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콜레트는 졸라(프랑스의 소설가, 1840-190
2)의 작품에서 해산을 묘사한 대목을 읽고 기절하여 어머니에게 발견되었을 때의 일을 말
하고 있다.
  
  작가는 '노골적으로 생생하게, 해부학적으로 자세히 세부묘사를 많이 하여, 색채, 체위, 
외침소리를 즐기면서' 출산하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시골소녀로서 내가 갖고 있던 지식으로
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작은 암컷으로서의 나의 숙명을 믿게 되어 몸서리 
쳐지도록 겁이 났다... 또 다른 대목에서는 내 눈앞에 갈기갈기 찢겨진 육체와 배설물과 더
러워진 피에 대해 묘사해 보였다... 나는 마치 밀렵꾼들이 부엌으로 운반해 오는 죽은 산토
끼처럼 축 늘어져 잔디 위에 쓰러졌다.
  
  어른들이 해주는 위로도 그녀의 불안을 제거하지 못한다. 성장함에 따라 여자아이는 어
른의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들은 생식의 비밀에 관해 어른
들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를 자주 발견한다. 그리고 그녀는 어른들이 대단히 무서운 일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알게 된다. 여자아이가 심한 육체적인 충격-편도선을 잘라
내거나 이를 뽑거나-을 느낀 적이 있을 경우에는, 기억에 남아 있는 그때의 고통을 해산
에 비추어 생각한다.
  임신과 출산의 육체적인 성격이 곧 부부 사이에 '어떤 육체적인 일'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피를 나눈 형제, 순수한 피, 혼혈'이라는 표현 속에서 자주 대하게 되는 '
피'라는 말이 어린이의 상상에 방향을 제시한다. 결혼에는 엄숙한 피의 이입 같은 것이 따
른다는 상상. 그러나 그 '육체적인 일'이 대소변의 조직과 결부되어 있는 듯이 생각되는 경
우가 가장 많다. 특히 어린이는, 남자가 여자 속에 오줌을 누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성적 행위가 더러운 일로 생각되는 것이다. '더러운'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던 어린이에게,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어른들은 어째서 이런 일을 자기의 생활 속에 끌어
오는 것일까? 어린이는 자기가 발견한 부조리 때문에 우선은 혐오감에서 보호된다. 그는 
이야기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또는 자기가 쓴 글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
에게는 모두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카슨 매컬러스(미국의 여류작가)의 재
미있는 작품 '결혼식 하객' 속의 젊은 여주인공은 이웃의 남녀가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있
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의 이상함은 오히려 그녀가 그 일을 중요시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것은 한여름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마를로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방의 한 부분과 세간의 몇 가지와 마를로 부인의 코르셋이 던져져 있는 침대의 다리만 보
였댜. 그런데 조용한 방에서 부인의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턱으로 다가간 그녀는 그
곳에서 일어난 광경에 깜짝 노라, 대뜸 "마를로 아줌마가 돌았어!" 하고 외치면서 부엌으
로 뛰어갔다. 베레니스는 방 쪽으로 급히 달려가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입을 굳게 다물고 문
을 쾅 닫아버렸다... 프랑키는 왜 그러는지 알고 싶어서 베레니스에게 물어보려고 했다. 그
런데 베레니스는 단지 그 사람들에겐 그게 보통 있는 일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
른 사람을 의식해서라도 그런 일을 할 때에는 반문 정도는 닫아야지." 하고 덧붙였다. 프
랑키는 베레니스가 말하는 다른 사람이란 자기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발작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베레니스는 다만 이렇게 대
답할 뿐이었다. "응, 보통 발작이야." 그 목소리의 톤으로 보아, 자기에게는 다 말하지 않
았다는 것을 알아차렷다. 나중에 그녀는 마를로 부부를 보통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
다.
  
  어린이에게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고 이르거나 성적인 일에 대해 설명할때에는, 마치 병
자나 변태자나 광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편리한 설명법
이다. 영화관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몸이 접촉되거나, 길에서 만난 남자가 바지 앞
단추가 열린 채 걸어가는 것을 본 여자아이는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미친 사람
과 마주치는 것은 불쾌한 일이며, 간질이나 히스테리의 발작이나 심한 싸움은 어른의 세계
질서의 허점으로, 그것을 목격한 어린이는 위험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조화된 사회에도 
부랑자나 거지나 상처가 흉한 불구자가 있는 것처럼, 이상한 사람이 몇 있다고 해서 사회
의 밑바닥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참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부모, 친지, 

선생들이 남몰래 비밀을 행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때이다.
  
  나는 처음으로 남녀의 성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단
정했다. 그것은 우리 부모도 그런 짓을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존경하는 부모가 그런 짓
을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추한 짓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
해 왔다. 그런데 나는 얼마 뒤 부모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잘못 안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무서운 순간이었다. 나는 귀를 막고 시트 아래 머리를 처박고, 그
곳에서 몇 천 리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리프만 박사의 <청년과 성욕>에서)
  
  정장을 한 점잖은 사람, 품위와 겸손과 이성을 운운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벌거벗은 두 
마리의 동물이 맞붙은 모습으로 어떻게 돌변할 수 있는가? 어른의 우상대를 뒤흔들고, 폭
풍을 부르는 어른에 대한 의혹이 있다. 어린이는 때때로 이 혐오스러운 계시를 완강히 거
부한다.
  "우리 부모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아." 하고 우긴다. 혹은 성교를 고상하게 생각하려고 한
다. "어린애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을 의사한테 가서 옷을 벗고, 보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눈을 가려. 의사는 아빠와 엄마를 서로 맞붙여서 일이 잘 되게 해." 그녀는 사랑의 행위를 
외과수술로 바꿔놓는다. 이렇게 하면, 별로 유쾌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치과의사에
게서 치료를 받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부정하고 회피하려고 해도, 불안
과 의혹이 어린이의 마음속에 스며든다. 젖을 떼는 것 못지않은 괴로운 징후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어린이를 어머니의 몸에서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보호자의 세계가 무너져나가는 
것이다. 어린이는 머리 위의 지붕이 철거되 캄캄한 미래 앞에 버려진 채, 외톨이가 된 자
기 자신을 발견한다. 여자아이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자기 위에 덮친 정체불명의 
저주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책을 통해 입수한 지식에는 통일성이 없고, 책에 
따라 모순되어 있다. 과학적인 설명을 들어도 그 짙은 어둠을 없애지는 못한다. 그래서 무
수한 문제가 쌓인다. 성행위는 괴로운 것일까, 즐거운 것일까? 시간은 얼마나 걸리까? 5
분, 아니면 밤새도록 걸릴까? 때때로 어떤 여자는 한 번의 포옹으로 어머니가 되었다거나 
몇 시간의 열애 후에도 임신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읽기도 한다. 어른들은 날마다 '그것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간혹 하는 것일까? 어린이는 성서를 읽거나 사전을 찾거나, 친구에
게 물어 지식을 얻으려고 어둠과 혐오 속을 암중모색한다. 이 점에 관한 흥미로운 문헌은 
리프만 박사에 의해 실시된 조사이다. 젊은 처녀들이 자기들의 성적 각성에 관해 박사에게 
제공한 회답을 몇 가지 들어보자.
  
  나는 혼미하고 비뚤어진 생각을 품고 방황을 계속했다. 어머니도 학교선생도 그 밖의 누
구도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룬 책은 하나도 없
었다. 처음에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되었던 행위는 점차 위태롭고 추악한 신비의 막
으로 가려지게 되었다. 12세의 상급생들은 상스러운 농담을 하면서 그녀들과 우리 동급생
들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기가 어디서 생기는가, 결혼식을 
그렇게 야단스럽게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그것을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의 

얄팍한 지식을 문제삼은 대단히 막연하고 불쾌한 농담이었다. 15세 때 처음 겪은 월경은 
나에게 새로운 경이였다. 마침내 이번에는 내가 그 원무속에 뛰어들 차례라고 생각했다...
  
  성교육! 이것은 우리 부모의 집에서는 금물이었다!... 여러 가지 책을 뒤져 보았으나 방
향감각도 잡지 못하여 괴롭고 초조하기만 했다... 나는 남녀공학 학교에 다녔다. 선생님에
게는 그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호를람의 저서인 <남아와 여아>가 드디
어 내게 진리를 전해 주었다. 초조와 참을 수 없는 흥분상태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는 매우 불행해졌고, 색정과 성욕만이 참된 사랑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해하는 데에는 오랜 시일이 필요했다.
  
  내가 성에 눈뜬 과정. (1) 초기의 질문과 몇 가지 막연한 개념. (조금도 만족하지 못한) 
3세 6개월에서 11세까지... 그후의 몇 해 사이에 내가 한 질문에는 회답이 없다. 7세가 되
었을 때 무심코 토끼에게 먹이를 줄 때, 그 밑에서 새빨간 새끼토끼가 기어나오는 것을 우
연히 보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동물의
경우나 인간의 경우에도, 아기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생겨나고 그 옆구리에서 나온다고 말
했다. 이 옆구리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나에게 부조리하게 생각되었다... 어떤 아이 보는 하
녀가 임신과 수태와 월경에 대해 내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끝으로 내가 아버
지에게 그 진실한 역할에 대해 질문했더니, 아버지는 화분과 암술의 애매한 이야기로 대답
을 대신했다. (2) 스스로 터득하기 위한 몇 가지시도.(11세에서 13세에 거쳐서) 나는 백
과사전을 한 권, 의학서적을 한 권 구했다... 이것은 들어보지 못한
 과장된 말로 된 이론적인 지식에 불과했다. (3) 이미 얻은 지식의 정리.(13세에거 20세) 
a. 일상생활 속에서 b. 과학적 저술 속에서.
  
  나는 어덟 살 때 나와 동갑인 한 남자아이와 자주 놀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어머니에게 들어서, 여자의 몸 안에 많은 알이 있
고... 어머니가 아기를 몹시 갖고 싶을 적마다 그 알들 중의 하나에서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린 남자친구들에게 이와 같은 설명을 해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
하는 것이었다.
  "넌 참 바보야! 푸줏간 아저씨와 그 아줌마는 아기를 낳고 싶으면 침대에 누워 더러운 
짓을 하는 거야." 나는 이 말을 듣고 분개했다... 그 무렵(12세 6개월경) 집에 있던 한 하
녀가 우리에게 그 더러운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나는 부끄러워 이 일에 대해 어머니
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남자의 무릎 위에 앉으면 아기가 생기느
냐고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아기가 어디서 태어나는가를 학교에서 배웠는데 무서운 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체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둘이서 그 일에 대해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것이 심해지기 시작한 것은 어느 겨울날 아침 학교로 가는 길의 어둠 
속에서 한 남자를 만났을 때였다. 그 남자는 우리에게 자기의 생식기를 보여주고 다가와서

 "어때, 무척 귀엽지?" 하고 말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구역질
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21세가 될때까지 아기를 배꼽으로 낳는 줄로 알고 있었다.
  
  어떤 여자아이가 내 곁으로 와서 속삭이며 물었다. "너 아기가 어디서 나오는지 아니?" 
결국 그녀는 결심하고 이렇게 말했다. "넌 정말 바보야! 아기는 여자의 뱃속에서 나오는 
거야. 그리고 아기를 낳으려면 여자는 남자와 아주 더러운 짓을 해야해!"
  그후에 그녀는 더욱 자세한 내용을 내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나는 이 설명을 듣고 완
전히 변해 버렸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을 완강히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는 
부모와 같은 방에서 자고 있었다... 어느날 밤에, 나는 설마 하고 생각했던 짓을 하는 소리
를 들었다. 그때 나는 부끄러웠다. 그렇다.  부모를 보기가 부끄러웠다. 이것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무서운 도덕적인 고뇌를 경험했다. 나는 이런 일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내 자신이 몹시 타락한 인간처럼 생각되었다.
  
  합리적인 교육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부모와 선생이 아무리 호의를 갖고 있더
라도 에로틱한 경험을 말이나 개념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인간은 그것을 경험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모든 분석은, 설사  그것이 대단히 진지한 것이라도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일
면을 갖고 있어서, 진실을 전하는 데는 실패할 것이다. 꽃의 시적인 연애나 물고기의 교미
에서 출발하여, 병아리나 고양이, 염소를 거쳐 인류에게까지 올라갔을  때, 이론적으로는 
생식의 신비를 잘 설명할 수 있어도, 정욕과 성애의 신비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 
조용한 피를 지닌 여자아이에게 애무나 키스의 쾌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가족 사
이에서도 서로 키스를 하며, 때로는 입술로도 주고받는다. 그것이 왜, 어떤 경우에 황홀감
을 주는가? 그것은 소경에게 색채를 설명하는 것과 같다. 색정작용에 그 의미와 결합을 제
공하는 정신적인 작용과 육체적인 욕구의 직관력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 여러가지 요소는 
불쾌하고 괴이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여자아이는, 처녀로서 봉인된 상태에서 자기를 여
자로 바꾸기 위해서는 남자의 성기가 자기 몸을 관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심
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노출증이라는 악덕이 세상에 퍼져 있기 때문에 많은 여자아이는 
발기한 페니스를 보아왔다. 어쨌든 여자아이들은 동물의 성기를 보았으며, 유감스럽게도 
말의 그것이 자주 그녀들의 시선을 끈다. 그녀들이 그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출산에 대한 두려움, 결혼한 사람을 위협하는 '발작'에 대한 두려움, 불결한 성행
위에 대한 경멸. 이런 일들이 합쳐져 때때로 여자아이에게 "나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거
야."하고 단언하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고통과 광기와 외설에 대한 가장 확실한 방어책이
다.
  그러나 때가 되면 처녀성의 상실도 아기를 낳는 일도 그다지 두렵지 않게 된다거나, 수
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했는데도 별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설명해도 헛일이다. 아이들이 
외적인 일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면 어른은 그에게, 장차 너도 그런 것을 당연한 일로 받
아들이게 된다고 타이른다. 어린이은 이상하게 변해 광란에 빠진 자기의 미래를 상상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되는 모충의 변신을 보면 징그럽기만 하다.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은 후에도 역시 같은 모충인가? 화려한 날개를 달고 있는 나비가 

예전에 자기 모습을 알고 있을까? 나는 번데기를 보고 깜짝 놀라 깊은 생각에 잠긴 몇 명
의 처녀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신은 이루어진다. 여자아이는 그 의미를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자
기와 세계, 그리고 자기와 자기 자신의 육체와의 관계에서 뭔가 급격히 변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자기가 지금까지 무관심했던 촉각이나 미각, 후각에 대해 예민해지며 
색다른 상상을 하게된다. 거울 속의 자신도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는 자기를 이상하게 
느끼며 사물도 '이상한' 모습으로 보인다. 리처드 휴즈(현대의 영국 소설가)가 <자메이카
의 선풍>에서 묘사한 소녀 에밀리의 모습이 그것이다.
  
  에밀리는 몸을 식히기 위해 복부까지 물속에 담그고 앉아 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몇백 마리의 작은 물고기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쪼아대는 입술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무의미한 키스와 같았다. 요새 그녀는 사람들과 몸이 닿는 것을 싫어하게 되
었다. 그것은 징그러운 일이다. 그녀는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물에서 나와 
옷을 입었다.
  
  마거릿 케네디(현대 영국의 여류작가)의 침착한 테사(소설 <영원한 처녀>의 주인공)도 
역시 이런 기묘한 동요를 느끼고 있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매우 불행하게 생각되었다. 그녀의 눈은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하여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의해 둘로 갈라진 넓은 거실의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과장된 짧은 외침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 "아!" 하고 
그녀는 외쳤다. "세상이 귀찮아!" 그녀는 이 조용한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이 생각
되는 불길한 예감에 떨며 분노하고, 쫓기는 듯이 산 속에 숨으려고 뛰어나갔다. 산길에서 
비틀거리며 그녀는 또다시 중얼거렸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그녀는 자기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을 생각은 눈꼽만
큼도 없었다. 그러나 격렬한 말이 그녀의 가슴을 진정시키는 듯이 생각되었다.
  앞에서 인용한 카슨 매컬리스의 저서 속에는 이 불안한 시기에 대해 길게 묘사하고 있
다.
  
  그것은 프랑키가 자기 자신에 대해 진절머리와 따분함을 느낀 여름철이었다. 그녀는 자
기가 미웠다. 그녀는 부엌에서 서성거리는 뜨내기, 쓸모없고 더럽고 굶주리고 비참한 여자
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죄를 지은 여자였다. 이번 봄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는 이상한 
계절이였다. 사물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프랑키는 이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4월
의 푸른 잎사귀나 꽃 속에, 그녀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무
엇 때문에 슬픈지 알 수 없었으나, 이 기묘한 슬픔 때문에 자기는 도시에서 떠났어야 했다
고 생각했다.... 그녀는 도시를 떠나 멀리 갔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 해의 늦은 봄이 무료
하고 무척 지루했기 때문이다. 긴 오후는 더디 지나가고, 계절의 푸르른 따사로움이 그녀
의 가슴을 역겹게 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녀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아침 일찍 그

녀는 자주 뜰에 나가 오랫동안 새벽을 바라보며 지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질문 같은 것
이 일어났다. 그러나 하늘은 이에 대해 대답해 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혀 관심 밖이었던 여러 가지 것들이 그녀의 마음을 스치기 시작했다. 저녁에 
산책할 때 바라보는 마을의 등불이나,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지 않은 목소리 등. 그 
등불을 바라보고,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녀는 어떤 기대감으로 경직되는 것이었
다. 그 등불이 꺼지고 목소리가 잠잠해지면, 그녀의 기대와는 아랑곳없이 그것은 그것으로 
끝나버렸다. 그녀는 이런 것들이 무서웠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그녀는 갑자기 자기가 무
엇이고,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되려고 하고, 무엇 때문에 여기서 이렇게 빛을 바라보고 목소
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혼자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녀는 무서워지고, 가슴은 이상하게 죄어들었다. 시내를 산책해도 눈에 보이고 귀에 들
리는 것이 낯설어 보여 언제까지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하여 어떻게든 손을 
써보려고 했으나 헛일이었다.... 그녀는 봄의 긴 저녁 한때를 줄곧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
녀의 신경은 우울한 재즈의 가락처럼 떨고, 심장은 굳어져 금세 고동을 멈출 것 같았다.
  
  이 동요기에 일어나는 것은 유아의 신체가 한 사람의 여자의 몸으로 자라는 것이다. 주
체가 유아단계로 고정되는 선조직 발육부전의 경우를 제외하고 12,13세경부터 사춘기가 
시작된다. 이 위기는 여자아이의 경우, 남자아이보다 훨씬 빨리 시작되어 더욱 커다란 변
화를 가져온다. 여자아이는 불안하고 불쾌한 심정으로 사춘기를 맞게 된다. 유방과 모발조
직이 발달하는 시기에 특수한 감정이 생긴다. 그것은 자존심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으나 원
래는 수치심이다. 즉, 여자아이는 갑자기 수치심을 보이고 자기 자매나 어머니 앞에서도 
알몸이 되기를 싫어한다. 그녀는 두려움과 경이가 뒤섞인 심정으로 자기 몸을 살펴본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배꼽과 마찬가지로 죄가 없던 유방 밑에 나타난, 약간의 통증을 수
반하는 딱딱한 심의 볼룸을 만져보고 고뇌에 빠진다. 그녀는 자기 몸의 상처받기 쉬운한 
부위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이 상처는 화상이나 치통의 아픔에 비하면 경미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부상이든 병이든 아픔은 분명히 이상이었다. 그런데 젊은 여자의 가슴에는 
정체불명의 원한이 숨어 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병이 아니라, 존재의 법
칙 자체에 포함되어있다. 그것은 투쟁이며 고뇌이기도 하다. 여자아이는 분명히 출생에서 
사춘기까지 성장해 왔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날
그날 그녀의 육체는 하나의 훌륭한 완성체로서 그녀의 눈에 비쳐왔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여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말 자체가 그녀에게 두려움을 준다. 생명현상은 그것이 
하나의 안정을 찾아 생생한 꽃이나 털에 윤기가 있는 짐승처럼 분명한 모습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녀는 자기 가슴의 새로운 돌기 속에 '살아 있
다'는 말이 갖는 애매성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금도 다이아몬드도 아니다. 그 내부에서 
어떤 불순한 연금술이 작용하는 신기한, 변동하는, 불확실한 물질이다. 그녀는 명주실타래 
같은 머리를 조용히 내려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겨드랑이나 아랫배의 새로운 발모, 
짐승이나 해초에의 변신, 이런 것은 전부터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급격한 변화 속에
서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에게서 자기를 분리시키는 결정적인 것을 예감한다.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존재시기에서 떠나 한 생명의 고리 속에 던져졌다. 그녀는 자신에
게서 남자나 자식이나 무덤에 바치게 될 의존성을 예감한다. 유방은 그 자체로서는 쓸모없
이 불쑥 솟아난 이상발육처럼 생각된다. 팔도, 다리도, 피부도, 근육도, 둥근 엉덩이도 지
금까지는 모두 분명한 용모가 있었다. 배설기관으로 한정되었던 성기만이 약간 수상했으
나, 그것은 숨어 있으므로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런데 유방은 스웨터나 블라우스 아
래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여자아이는 지금까지 혼동하고 있던 이 육체가 새롭게 그녀의 눈
에 비치게 된다. 이것은 남들이 눈여겨볼 뿐 아니라, 또 신의 눈에 뜨이는 하나의 물체이
다.
  "나는 2년 동안이나 가슴을 숨기기 위해 반코트를 입었어요. 그만큼 내 가슴이 부끄러웠
어요." 하고 어떤 여자가 내게 말했다. 그리고 다른 여자는 "나는 같은 나이에 나보다 먼저 
성숙한 여자친구가 공을 잡으려고 몸을 굽혔을 때, 벌어진 옷깃 사이로 무겁게 늘어진  두 
개의 유방을 보고 느낀 이상한 동요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곧 나도 그애처럼 된다고 
생각되자 얼굴이 붉어지더군요."
  "나는 열세 살 때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드러내놓은 채 돌아다녔어요. 어떤 남자가 
농담삼아 내 장딴지가 굵다고 말했어요. 이튿날부터 어머니는 내게 장화를 신기고 긴 치마
를 입게 했어요. 하지만 내 모습이 들켰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갑자기 느낀 그 충격을 나
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여자아이는 몸이 자기에게서 도망쳐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몸은 이미 그녀의 개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에게 다른 물체가 된다. 동
시에 그녀는 타자로부터 하나의 물체로 파악된다. 외출하면 남들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
고, 그녀의 몸매를 평한다. 그녀는 자기가 남의 눈에 뜨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육체가 변해 가는 것과 자기 육체를 남에게 보이기를 두려워한다.
  이 혐오감은 많은 처녀들에게 여위고 싶은 욕구를 갖게 한다. 그리하여 먹기를 싫어한
다. 억지로 먹게 하면 토해 버린다. 언제나 체중을 경계한다. 어떤 여자들은 병적으로 소심
해진다. 때로는 정신병 증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강박관념과 신경쇠
약>에서 자네가 나디아라는 이름으로 묘사한 환자의 경우이다.
  나디아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매우 영리한 처녀였다. 사치스러운 예술가 타입으로, 특
히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세고 성급한 성격을 
보였다. '그녀는 남달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즉 부
모, 자매, 하녀들의 맹목적인 사랑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애정을 얻게 되면 심한 
억지와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취하므로, 사람들은 곧 그녀 곁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무척 
예민하여 사촌형제들이 그녀의 성격을 고쳐주기 위해 놀려댄 것이 그녀에게 치욕감을 주
게 되어, 그 치욕감이 그녀의 몸에 배게 되었다.'
  한편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는 언제까지나 어린이로 있고 싶게 한다. 남에게 귀염을 받
고, 어떤 무리한 요구도 할 수 있는 꼬마 여자아이를 바라게 한다. 그것은 그녀에게 어른
이 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사춘기가 빨리 온 것은 성장의 공포에 수치의 공포
까지 뒤섞여 사태를 크게 악화시켰다. 남자는 살찐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언제나 말라깽이로 있는 것이다. 음모와 흉부의 발달에 대한 공포가 위에서 말한 공포에 
더해졌다. 11세에 그녀는 벌써 자기가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이 자기를 

주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긴 스커트를 입자, 이번에는 발끝이나 엉덩이를 부끄러워
하게 되었다. 월경의 시작은 그녀를 반 미치광이로 만들었다. 음모가 나기 시작했을 때는 '
이런 기형은 세상에 나뿐이야.' 하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 야만인의 장식을 없애버리기 
위해' 20세까지 탈모에 고심했다. 흉부의 발달은 이 강박관념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했
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뚱뚱해지는 것은 싫지 않았지만, 자기에게는 그것이 결점으로 생
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별로 예뻐지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뚱뚱해지는 것은 큰 치욕으로 생각되었
다. 이것이야말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불행하게도 뚱뚱해지면, 나는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살찌기 않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
하고, 자기의 주위를 경계하고, 자신을 맹세롤 구속했다. "만일 한 곡 속에 피아노의 같은 
건반에 손가락이 네 번 닿으면, 나는 커서 아무한테도 사랑을 받지 않아도 상관없다." 드
디어 그녀는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심 했다. "나는 살이 찌는 것도, 키가 자라는 것도, 어
른이 되는 것도 싫었다. 나는 언제까지나 꼬마 계집아이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드디어 음식을 일체 입에 대지 않기로 엄숙히 맹세했다.
  어머니의 애원에 굴복하여 그녀는 이 맹세를 깨뜨렸으나, 그후에도 그녀는 몇 시간씩 무
릎을 꿇고 서약서를 썼다가는 찢고, 찢었다가는 다시 썼다. 그녀가 18세때 어머니가 돌아
가시자 그녀는 다음과 같은 섭생을 시작했다. 즉 묽은 수프 두 접시, 달걀 노른자 하나, 식
초 큰 숟갈 하나, 9개분의 시트론 주스와 커피 한 잔. 이것이 그녀가 하루에 먹는 음식의 
전부였다. "때로는 몇 시간씩 음식에 대해 생각하면서 지낸 적이 있을 정도록 배가 고팠
다."
  그래도 그녀는 유혹을 참아냈다. 그녀는 미인이었지만, 자기 얼굴이 부어있고 여드름투
성이라고 우겼다. 의사가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단정하면, 그녀는 의사는 모른다, 의
사에게는 피부와 살 사이에 있는 여드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녀
는 가족에게서 떨어져 작은 방에 틀어박혀 간호사와 의사 이외의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좀처럼 외출하지 않았고, 아버지와 대면하는 것도 꺼렸다. 어느날 아버지는 그녀에
게 얼굴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그녀는 살찐 얼
굴이나 윤기가 흐르는 얼굴빛, 튼튼한 체격을 갖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거의 언제나 
어둠 속에서 살았다. 남의 눈에 뜨이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의 태도가, 여자아이에게 자기의 육체적인 외모에 대해 수치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여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슈테켈의 <불감의 여인>에서)
  
  나는 집에서 자주 듣는 비평 때문에 육체적인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극단적인 허영심에서 언제나 나를 남의 눈에 돋보이게 하려고, 나의 결점인 축 처진 어깨
나 탄탄한 허리, 평평한 엉덩이, 튀어나온 가슴 등을 감추기 위해 양장점에 여러 가지 주
문을 잔뜩 하는 것이었다. 나는 몇 해 동안 굵은 목을 옷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나는 사춘기 동안 발이 보기 흉하여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걸음걸
이에 대해 언제나 성가시게 굴었다. 어머니의 이런 간섭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사람

들은 나를 몹시 불행하게 만들었다. 말괄량이였기 때문에 특히 그랬다. 그리고 때로는 겁
에 질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누구를 만날때면, '아, 만일 발만 감출 수 있다
면'하고 먼저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 수치심은 결국 여자아이에게 멍청한 행동을 취하게 하여, 언제나 얼굴을 붉히게 한
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를 더욱 겁쟁이로 만들고, 얼굴을 붉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공포증
의 대상이 된다.(슈테켈의 <불감의 여인>에서) 슈테켈이 말하는 어떤 여자는 '처녀시절에 
얼굴이 붉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병적으로 심하여, 1년 동안 치통을 가장하고 얼
굴 주위에 반창고를 붙인' 여자도 있다.
  가끔 전사춘기라고 불리는 월경 출현 이전의 시기에 여자아이가 자기의 육체에 대한 혐
오를 경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녀는 여자가 되기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흉부의 성숙
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손수건을 옷 속에 넣어 가스을 부풀리고 윗사람 앞에서 뽐낸다. 
그녀는 아직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 첫 월경이 그녀에게 
그 의미를 밝혀주어 수치심을 갖게 된다.
  그 이전에 이미 수치심을 갖고 있었을 경우에는, 이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확인되고 강
해진다. 모든 증언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치되어 있다. 즉 소녀가 월경에 대해 알고 있
는 경우나 모르고 있는 경우에도, 월경 자체는 그녀에게 언제나 불쾌하고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미리 알려주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H. 
도이치가 <여성심리>에서 인용하고 있는 달리와 차드위크의 저서 참조) 어머니들로서는 
딸에게 월경의 비밀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임신이나 출산, 나아가서는 성교의 비밀을 밝
히는 것이 오히려 쉽다. 왜냐하면 어머니들은 자신이 이 여성의 굴욕에 대해 두려움을 갖
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성의 옛 신비로운 공포를 반영하는 것으로, 어머니들이 대대
손손 전하고 있는 공포이다.
  여자아이는 자기의 속옷에서 이상한 오점을 발견했을 때, 자기가 설사나 치명적인 출혈
이나 부끄러운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생각한다. 1896년에 하벨로크 엘리스가 실시한 조사
에 의하면, 미국의 어느
 여학생 125명 중에 36명은 초경 때 월경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39명은 막연한 
지식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즉 반수 이상이 무지였다. 헬렌 도이치에 의하면, 1946년에
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H. 엘리스는 '모르는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기 때
문에 생투앙에서 센 강에 몸을 던진 처녀의 예를 들고 있다. 슈테켈은 <어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월경으로 인한 출혈 속에 자기  영혼을 더럽히고 있는 부정의 증거와 
천벌을 인정하고 자살한 소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녀가 공포를 느낀 것은 당연하다. 그
녀에게는 생명이 자기에게서 떠난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클라인과 영국의 분석학파에 
의하면, 피는 그녀의 눈에 내장기관의 열상을 가리킨다. 신중히 여러 가지 충고를 한 결과 
그다지 심한 고뇌를 느끼지 않는 경우에도, 그녀는 부끄러워 자기를 더럽다고 느낀다. 그
녀는 화장실에 달려가 더러워진 속옷을 빨거나 감추려고 한다. 이 경험에 대한 전형적인 
이야기는 콜레트 오드리의 <추억의 눈동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흥분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잔혹한 극은 막을 내렸다. 어느날 밤에 옷을 벗었을 
때 나는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다지 두렵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이튿날이면 그 병이 
나을 거라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4주일 후에 병은 더욱 심하게 재발했다. 
나는 팬티를 욕실 문 뒤에 있는 세탁물을 넣는 바구니에 던져넣었다. 날씨가 무척 더웠으
므로 복도의 마름모꼴 마루판이 내 맨발 밑에서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돌아와서 침대에 누
으려고 했을 때 어머니가 내 방문을 열었다. 나한테 그 일에 대해 설명하러 왔던 것이다. 
이때 어머니의 이야기가 내게 어떤 효과를 가져다주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어머니가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있을 때 카키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그 둥글고 묘한 얼굴을 보고 발끈하여 그녀에게 나가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깜짝 
놀라 물러갔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녀는 방에 들어오기 전에 노크를 하지 않았으므로 당장 
가서 꾸짖어주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냉정한 태도와 모든것을 다 알고 있는 듯이 만족스
러워하는 모습에서 나는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어머니가 나간 후에 나는 불쾌한 
어둠 속에 빠져 있었다.
  갑자기 두 개의 추억이 머리에 떠올랐다. 2,3개 월 전에 카키를 데리고 산책에서 돌아오
는길에, 어머니와 우리는 백발이 무성하고 벌목꾼처럼 건장한 늙은 의사를 만난 적이 있었
다. "아가씨가 무척 컸군요."하고 의사는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그때 괜히 그를 미
워했다.
  그후 얼마가 지나 어머니가 파리에서 돌아와 서랍장 속에 새하얀 탈지면 한 다발을 넣
어둔 적이 있었다. "그게 뭐야?" 하고 카키가 물었다. 어머니는 사실의 대부분을 감춘 채 
나머지 일부만 밝힐 때 으레 어른들이 취하는 그런 자연스러운 태도로 "곧 콜레트가 쓰게 
될 거야." 하고 말했다. 나는 물어볼 용기도 없어 잠자코 어머니를 미워했다.
  그날 밤에 나는 밤새도록 침대에 누워 엎치락뒤치락했다.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 나는 
알 듯했다. 
 어머니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다.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튿날  나는 이미 변하여 더럽혀진 몸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나는 여동생을 원
망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직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루 
아침에 나보다 훨씬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그 일을 경험한 적이 없으면서 그것을 알고 있는 남자들을 미워했
다. 또한 그  일을 그처럼 얌전히 참아내는 여자들을 미워했다. 만일 여자들이 내게서 일
어나고 있는 일을 알게 되면, 모두 크게 기뻐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드디어 네 차례
가 되었구나.'하고 그녀들은 생각할 것이다. 나는 여자를 보게 되면 으레 저 여자도 그렇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세계가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걷기도 거북하고 달릴 
용기도 없었다. 대지도, 햇살을 듬뿍 받은 녹음도, 음식물도 이상한 냄새를 발산하는 듯이 
생각되었다.... 위기가 사라지자 나는 이제 그것은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몰상식하기 짝
이 없는 희망을 다시 갖기 시작했다. 한 달 후, 나는 증거에 굴복하여, 이번에는 망연자실
한채 그병을 결정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로 나의 기억 속에는 '이전'이 
있게 되었다. 나머지 생애는 벌써 '이후'에 불과했다.
  

  상황은 대다수의 소녀에게 마찬가지였다. 그중의 대부분은 자기의 비밀을 주위사람들에
게 털어놓기를 싫어한다. 어떤 여자친구가 내게 말한 바에 의하면, 그녀는 어머니 없이 아
버지와 여자 가정교사 사이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러워진 속옷을 계속 숨겨놓고, 월경을 한
다는 것이 발각되기까지 3개월간을 두려움과 굴욕 속에 보냈다. 자기네들의 동물 같은 생
활 속에서 가장 초라한 모습에 익숙해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농촌여자들도, 월경이 아직도 
터부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귀찮은 것에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나는 남에게 말
할 수 없는 이 비밀을 감추기 위해 겨울 동안 얼어붙은 개울에서 몰래 속옷을 빨아, 젖은 
채 입고 있는 한 젊은 농촌여성을 알고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이 놀라운 불행을 고백해도 구제될 수는 없다. "바보,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이?" 하고 사납게 딸의 따귀를 때렸다는 어머니는 예외겠지만,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어머니도 적지 않다. 대개는 아이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아, 
아이는 최초의 월경의 위기가 시작되는 새로운 처지를 앞에 두고 불안에 싸여 있다. 그녀
는 미래가 자기를 위해 이밖에도 여러 가지 뜻하지 않은 고통을 준비하고 있지 않나 하고 
염려한다. 혹은 앞으로는 남자 앞에 나서거나 남자와 몸이 닿기만 해도 임신하는 것이 아
닌가 하여 남자를 두려워하게 된다. 설사 납득이 가는 설명을 듣고 이런 불안에서 벗어났
을 경우에도, 마음의 평화는 좀처럼 느끼지 못한다.
  사춘기 이전의 여자아이는 다소 억지로 아직 자기를 무성체로 생각할 수 이었다. 자기를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어머니나 숙모가 자랑스러운 듯이 "이 
애가 이제 다 자랐군요." 하고 속삭였다. 어머니들의 승리였다. 여자아이는 이것으로 그녀
들의 것이 되었다. 이제 그녀는 영구히 여자 편에 서게 되었다. 여자아이가 그것을 자랑스
럽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녀는 드디어 자기도 어른이 되어, 자기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한다. 티드 모니에(프랑스의 여류소설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들 중에서 몇 사람은 여름휴가중에 '성숙한 처녀'가 되어 있었다. 그밖에 학교에서그
런 경우도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마치 여왕을 접견하는 신하처럼 그녀가 앉아 있던 화장
실에 차례로 '피를 보러'몰려갔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곧 환멸을 느낀다. 그녀는 자기가 어떤 특권도 갖지 않으며, 인생은 
여전히 변하고 있지 않은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새로운점은, 날마다 되
풀이되는 불결한 사건이다. 자기가 이런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몇 
시간씩 우는 여자아이도 있다. 그녀들의 혐오감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은, 이 부끄러운 결
점이 남자들에게까지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녀들은 여성의 굴욕적인 조건이 남
자들에게는 신비에 싸여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아버지와 형제들과 사촌형제들, 이밖에 다
른 남자들도 알고 있어, 때로는 우스갯소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여자아이들이 자기 육
체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거나 그것이 증대되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
  그리고 최초의 놀라움이 사라져도 날마다 생기는 불쾌감은 줄어들지 않는다. 처녀들은 
자기 몸에서 솟아나는 김빠진 썩은 냄새(늪이나 시든 제비꽃 냄새)와, 어린시절에 피부가 
벗겨져 흐르는 피처럼  빨갛지도 않은 기분 나쁜 피를 앞에 두고, 번번이 같은 혐오를 느

끼게 된다. 그녀는 밤낮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나 하고, 내의와 침대 시트에 신경을 쓰고 
여러 가지 사소한, 실제적이고 불쾌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절약하는 가정에서는 
위생 탈지면을 빨아서 손수건 묶음 사이의 본래 자리에 챙겨둬야 한다. 그래서 빨래하는 
사람, 즉 세탁부, 가정부, 어머니, 언니의 손에 자기 몸에서 나온 배설물을 맡겨야 한다. '
동백'이나 '에델바이스'와 같은 꽃이름이 붙은 상자 속에 넣어 약국에서 팔고 있는 붕대의 
종류는 사용한 후에 버리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여행지나 별장생활이나 소풍의 경우에는 
그것을 간수하기가 쉽지 않다. 화장실의 세면기에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
신분석 일기>의 소녀 주인공은, 위생탈지면에 대한 공포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월경이 
있을 때 그녀는 자기 자매 앞에서도 어둠 속이 아니면 옷을 벗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 거
북하고 거추장스러운 물건은 심한 운동을 할 때 벗겨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거리의 한
복판에서 팬티를 벗기는 것보다 더욱 심한 굴욕이다. 이 두려운 대상은 때때로 신경쇠약증
을 일으키기도 한다.
  자연의 악의에 의해서인지 처음에는 불안이나 고통을 못 느끼다가 나중에 나타나는 경
우가 많다. 그리고 처녀에게는 월경불순이 많다. 그녀들은 산책하는 도중, 거리나 친구의 
집에서 그것이 갑자기 나올 우려가 있다. 그녀들은 셰브뢰즈 부인처럼 옷이나 좌석을 더럽
힐 우려가 있다.
  이런 가능성 때문에 언제나 불안한 가운데 살아가는 여성도 있다. 소녀는 이런 여성의 
결함에 대해 혐오를 느낄수록, 우연히 또는 남모르게 무서운 굴욕을 당하지 않도록 경계하
면서 거기에 신경을 쓰게 마련이다.
 청년의 성생활에 관한 조사중에서 리프만 박사(W. 리프만의 <청년과 성욕> 참조)가 이 
문제에 대해 얻은  일련의 회답을 다음에 열거한다.
  
  나는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불쾌감을 느꼈다. 나는 어느날 아침 그것을 알고 몹시 두려
워했다. 사실 나는 이런 일이 언젠가는 내 몸에서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큰 치욕으로 느껴져서 반나절이나 자리에 누워 무슨말을 들어도 일어날 수 없
다고만 대답했다.
  
  아직 열두 살도 채 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나는 크게 놀란 나
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나에게 어머니는 간단히 이것은 달마다 
있는 일이라고만 가르쳐주었는데도 나는 그것이 대단히 더러운 일로 생각되고, 또 그것이 
남자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있게 되자 아머니는 비로소 나에게 가르쳐주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월경에 대해 말했다. 나는 처음으로 불쾌한 느낌을 갖게 되었을 때, 기쁜 얼굴을 하고 아
직 자고 있는 어머니에게 뛰어가서  "엄마, 그게 나왔어!" 하고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어머니는 "그 때문에 일부러 나를 깨웠니?"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때 나는 두번째로 실
망했다. 아무튼 나는 이 일을 일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첫 월경에서 몇 분이 지나도 출혈이 멎지 않았을 때, 나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
럼에세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일에 관해 누구에게도, 심지어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열다섯 
살이었다. 통증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다만 한 차례 심한 통증을 느끼고 실신하여, 세 시
간 가까이 내 방 침대에 쓰러져 이
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이런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나는 열세 살이었다. 나는 전부터 친구들과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으므로, 도리어 내 차례가 되어 어른들 축에 끼게 
된 것을 무척 대견하게 여겼다. 나는 으스대듯 체조선생에게 오늘은 기분이 언짢아 수업을 
받을 수 없다고 알렸다.
  
  어머니는 내게 이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열아홉 살 때 처음으로 월경이 있었
는데, 속옷을 더럽혔기 때문에 야단을 맞을까봐 두려워 속옷을 밭에 묻으러 갔다고만 말했
다.
  
  열여덟 살때 처음으로 월경이 있었다.
  나는 전혀 알지 못 했다... 그날 밤에 나는 심한 복통과 함께 많은 출혈을 하여, 잠시도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날이 밝아오자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어머니에게 달려가 흐
느껴 울면서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내가 받은 것은 다음과 같은 꾸짖음이었다. "좀더 일
찍 알아차려서 이렇게 이불과 침대를 더럽히지 말아야잖아." 어머니는 설명 대신에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생각하며 무서운 고뇌를 느끼게 되었
다.
  
  나는 이미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렇게 되면 어머니는 아기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무척 기뻐했다.
 "이제 너도 아기를 낳을 수 있어. 너도 한 사람의 어엿한 여자야."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
다.
  
  이런 위험은 여자가 아직 어렸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남자아이는 15,16세가 되어야 겨
우 청춘기에 이른다. 그런데 여자아이가 여자가 되는 것은 13세에서 14세 사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의 근본적인 차이는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차이는 소녀의 경
우에 무서운 빛을 내는 생리적인 현상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사춘기가 양성에게 상반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그녀들에게 동일한 미래를 예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도 사춘기에는 자기의 육체를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유년시절부
터 자기의 남성을 자랑해 왔기 때문에, 그들은 남성다워지기 위해 자랑스럽게 자기형성의 
시기를 넘긴다. 그들은 자기의 다리에 난털을 자랑스럽게 서로 보여준다. 그들의 성기는 

전보다 더 비교와 도전의 대상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남자에게 걱정스러운 변신이
다. 책임이 많은 자유를 알게 되었을 때, 많은 젊은이들은 불안한 고뇌 빠진다. 그러나 결
국은 남성의 위신을 갖게 되는 데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와 반대로 소녀는 어른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한계에 묶
여 있어야 한다. 소년은 돋아나기 시작한 털에서 무한한 약속이 주어진 것을 찬양한다. 소
녀는 자기의 운명을 가로막는 '잔인하고 닫혀진 비극'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페니스가 사회
적인 관계에서 그 특권의 가치를 끌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월경을 일종의 불운으로 만드
는 것도 총괄적인 사회적 관계이다. 전자는 남성을, 후자는 여성를 상징한다. 월경을 혐오
하는 것은 여자의 타락성과 열등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녀의 생활은 그녀에게 이런 알 
수 없는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페니스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이 본질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붉을 피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바로 그 본질이다.
  만일 그녀가 자기의 조건을 이미 인정하고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제 너는 어엿한 여자가 됐어." 만일 그녀가 그것을 계속 거부해 왔다면 피어린 선고는 
그녀를 크게 실망시킨다. 가장 많이 볼수 있는 것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이다. 그
리하여 다달의 오염은 그녀의 마음을 혐오와 공포 쪽으로 몰아간다. "여자가 된다는 말의 
의미는 이것이었구나!" 지금까지 막연히 외부로부터 그녀에게 짐이 되어온 숙명은, 그녀의 
뱃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도망칠 길은 하나도 없다. 그녀는 쫓기고 있는 느낌이다. 만
일 성적으로 평등한 사회라면 그녀는 월경을 성인의 생활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 
정도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남녀를 막론하고 이보다 더 불쾌한 수치감을 많이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
은 그런 것에는 훨씬 태연한 태도를 취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누구나 갖고 있어 결점으
로 생가되지 않기 때문이다. 월경이 소녀에게 걱정이 되는 것은, 그것이 그녀를 열등한 불
구자의 범주로 던져넣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는다면, 피를 흘리
는 자기의 육체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만일(인간으로서)자
부심을 갖게 되면, 자기 육체에 대해 굴욕을 느끼는 것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스포츠, 사회, 학문, 종교 등의 분야에서 초월의 길을 열어나가는 젊은 여성은 여자라는 
자기의 종별화 속에 결함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쉽사리 극복한다. 이런 시기에 젊은 여
성이 정신병의 증상을 나타내기 쉬운 것은, 상상을 초월한 시련을 강요하는 위험한 숙명 
앞에 자기가 무방비 상태에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기가 여자라는 것은 그녀에게 병이
나 고통이나 죽음을 의미하고, 그녀는 이 숙명에 마침내 현기증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고
뇌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는 H. 도이치가 몰리라는 이름으로 묘사하고 있는 환자의 경우이
다.
  
  몰리가 정신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열네 살 때였다. 그녀는 5남매 중 네째아이였
다. 아버지는 대단히 엄격하여 식사 때마다 딸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어미는 불행하여 부
모가 서로 말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형제 중 하나가 가출했다. 몰리는 재능이 
뛰어나고 탭댄스를 잘 추었으나, 소심하여 가정 분위기에 곤민하고 있었다. 남자아이를 두

려워했다. 그녀의 언니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결혼을 했다.
  그 언니가 임신을 하자 몰리는 큰 호기심을 느꼇다. 난산이라 분만용 집게를 사용해야만 
했다. 몰리는 그 장면을 자세히 알고, 산고로 죽는 경우도 있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
았다. 그녀는 두 달 동안 아기를 돌봐주었다.
  언니가 집을 나갔을 때에는 큰 언쟁이 벌어져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몰리도 
함께 실신했다. 그녀는 같은 반 친구가 교실에서 기절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죽음과 기
절의 관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초경 때 그녀는 어머니에게 쑥스러운 듯이 "나 그게 
나왔어." 하고, 언니를 따라 취생탈지면을 사러 갔었다. 도중에 남자를 만나면 그녀는 고개
를 숙였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혐오를 표시했다.
  월경을 할 때 그녀는 통증을 느끼지 않았으나, 언제나 그것을 어머니에게 숨기려고 했
다. 한번은 이불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어머니가 그녀에게 몸이 깨끗지 못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사실인데도 아니라고 부정했다. 어느날 그녀는 언니에게 "이제 나는 뭐든지 할 수 
있게 됐어. 나는 아기도 낳을 수 있어." 하고 말했다. 그러자 언니는 "그러면 남자와 같이 
살아야 해."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나는 두 사람의 남자와 같이 살고 있잖아. 아빠하고 형
부 말이야." 아버지는 딸들이 밤에 혼자서 외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괴한에게 폭행
을 당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리에게 남자는 무섭다는 생각을 더욱 부추기게 
되었다. 임신하여 사고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월경을 하는 순간부터 더욱 크게 느
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가 점점 늘어가고, 나중에는 하루종일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억지로 외출을 시키려고 하면 큰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집을 떠나야 할 경우에는 발작이 일어나 기절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동차, 택시
를 무서워하고, 밤에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밤중에 강도가 집에 몰려들어올 것처럼 
생각되어 울부짖기도 했다. 그녀는 때로는 기절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닥치는 대
로 포식했다. 또 자기가 감시를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녀는 학
교에 가지도 못하고 정상적인 생활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월경의 위기와는 관계없으나, 소녀가 자기의 체내에 대해 느끼는 불안이 표명된 점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낭시에게서도 볼 수 있다.(H. 도이치의 <여성심리>에서)
  
  그소녀는 얼세 살 때 언니와 유난히 다정한 사이가 되어, 언니가 몰래 약혼을 하고 드디
어 결혼했을 때 언니에게서 그 내막을 듣고 마음이 흡족했다. 어른의 비밀을 안다는 것은, 
어른의 세계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그 언니의 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언니
가 곧 아기 하나를 '사야'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낭시는 형부와 앞으로 태어날 아기에 대해 
질투를 느꼈다. 또다시 자기를 어린애 취급하여 대수롭지 않은 일을 자기에게 숨긴 채 둘
러대는 것을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내장에 이상을 느껴 맹장수술을 하고 싶어했
다. 수술을 잘 되었으나,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낭시는 무서운 흥분 속에서 지냈다. 
그녀는 몹시 싫어하는 간호사와 언쟁을 벌였다. 의사를 유혹하기 위해 단둘이 만나기를 원
하여, 도발적인 태도를 취하고 신경발작을 일으켜 의사가 자기를 여자로 대해 주기를 요구
했다. 그녀는 몇 해 전에 동생이 죽은 것이 자기의 책임인 것처럼 말하여 자책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의사가 자기 맹장을 잘라내지 않았을 뿐더러 위 속에 메스를 넣어둔 
채 잊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동전 한 개를 삼켰다는 구실로 엑스레이 촬영을 부탁했
다.
  
  이 수술에의 욕구(특히 맹장절개의 욕구)는 이 나이에 가끔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처
녀들은 폭행, 임신, 출산 등의 공포를 표명한다. 뱃속에 뭔가 숨어 있다고 생각해 위협을 
느끼고, 자기들을 노리고 있는 이 미지의 위험에서 외과의사가 자기들을 구해 주기를 원하
는 것이다.
  소녀에게 여자로서의 숙명을 알려주는 것은 월경의 시작만이 아니다. 그밖에도 여러 가
지 괴상한 현상들이 그녀에게 일어난다. 지금까지 그녀의 색정감각은 음경에 있었다. 자위
행위(수음)가 소녀의 경우에 소년처럼 널리 퍼져 있는지 그 여부를 알기는 어렵다. 여자아
이는 최초의 2년 동안에, 아마도 태어난 지 아직 몇 달이 되지 않은 무렵부터 그 행위를 
하고 두 살경에 일단 포기했다가 훨씬 나중까지도 그것을 다시 시작하지 않는 것으로 생
각된다. 해부학적인 구조로 보더라도, 남성의 육체에 심어진 줄기가 숨어있는 점막보다 더
욱 접촉을 원한다.
  그러나 여자아이가 밧줄타기, 나무오르기, 자전거타기 등의 마찰, 옷에 스치거나 놀이에
서의 신체접촉, 혹은 친구나 연장자나 어른들의 가르침으로 이런 감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재현하려고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어쨌든 쾌감은 그것이 느껴졌을 때에는 자주적인 감각
이다. 그것은 어린의 모든 놀이에 수반되는 대범함과 순진함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이 은밀한 즐거움과 여자로서의 자기 숙명 사이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설사 지금까지 남자아이와 성적 관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호기
심에서였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전에 경험하지 못한, 기분을 뒤흔드는 흥분에 온몸이 휩
싸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성감대의 감수성이 발달된다. 이 성감대는 여성의 경우에 참으
로 많다. 그 육체 전부를 성감대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이다. 가족의 애무가, 순진한 키스
가, 양장점, 의사, 미용사의 무심한 접촉이, 머리나 목에 얹은 부드러운 손이 그녀에게 이
것을 가르친다. 그녀는 친구들과 장난을 하는 동안에 더욱 깊은 동요를 경험하고, 때때로 
자진하여 그것을 추구한다. 질베르트가샹젤리제에서 프루스트와 다툰 것은 그런 예의 하나
이다. 춤추는 상대의 춤에서, 어머니의 순박한 시선에서 그녀는 이상하게 나른함을 느끼게 
된다. 집에 가둬서 기른 처녀는 이보다 더욱 명료한 경험에 직면하게 된다.  상류사회에서
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런 한심스러운 일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
의 애무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아는 남자나 숙부나 사촌오빠들의 애무 속에는, 어
머니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해로운 것이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선생이나 목사
나 의사가 파렴치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험담은 비올레트 르딧(현대 프랑스의 여류소설
가)의 <질식>이나 S. 드테르바뉴(현대 프랑스의 소설가)의 <어머니의 원한>이나, 야쉬 
고클레르의 <파란 오렌지>에 찾아볼 수 있다. 슈테겔로 특히 할아버지가 대단히 위험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
  
  내가 열다섯 살 때였다. 장례식 전날, 할아버지가 집에 자러 왔다. 이튿날 어머니가 일어

난 후에, 할아버지는 나의 침대 속에서 함께 놀아도 좋으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곧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남자가 무서워졌다. (<불감증의 여인>에서)
  
  또 한 여자는 8, 9세 때에 친척 할아버지인 70세 노인이 생식기를 만져 큰 충격을 받은 
것을 기억하도 있다. 그는 그 여자아이를 무릎위에 앉히고, 그녀의 질속에 슬며시 손가락
을 밀어넣었던 것이다. 그 여자아이는 심한 아픔을 느꼈으나, 누구에게도 이 말을 말하지 
않았다. 그후로 그녀는 성적인 것은 모두 무척 두려워하게 되었다.(<불감증의 여인>에서)
  이런 일은 여자아이가 부끄러워하여 잠자코 지나는 것이 보통이다. 만일 그녀가 이런 일
을 부모에게 알린다면, 부모의 반응은 그녀를 책망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하는 게 아냐... 너는 생각부터가 나빠." 그녀는 낯선 남자들의 괴상한 행동에 
관해 입을 다물고 있다. 어떤 처녀가 리프만 박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리프만, <청년과 
성욕>에서)
  
  우리는 구둣방 지하에 방 하나를 세들어 살고 있었다. 집 주인은 내가 혼자 있을 때 찾
아와서 나를 안고 몸을 앞뒤로 움직이면서 오랫동안 키스하는 것이었다. 그 키스는 형식적
인 것이 아니라 혀를 내 입속에 밀어넣었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를 무척 싫어했다. 그러
나 너무 무서워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대담하거나 얌전치 못한 여자친구들말고도, 영화관에서 여자아이의 무릎을 짓누르는 무
릎이나, 야간열차에서 그녀의 다리를 만지는 손이나, 그녀가 지나갈 때 야우하는 젊은 남
자들이나, 거리에서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남자들, 그리고 은밀한 포옹이나 접촉이 있다. 
여자아이는 이런 일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15세경의 머릿속에서는 때때로 이상한 
혼란이 일어난다. 이론적인 지식과 구체적인 경험이 융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소녀는 열띤 동요와 욕망을 이미 경험한 후에도 여전히-프랑시스 잠(프랑스 시인)
이 창조한 클라라 데레버즈(중편집 <토끼의 이야기> 속에 수록됨)처럼-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남자의 키스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소녀는 생식의 생리
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춤추는 상대의 품에 안겼을 때 자기가 느낀 감동
을 편두통으로 착각한다.
  확실히 오늘날의 처녀들은 성에 대해 옛날보다 많은 지식를 갖고 있다. 그러나 몇몇 정
신과 의사들의 주장에 의하여, 아직 생식기에 배뇨 이외의 용도가 있는 것을 모르는 소녀
도 적지 않다.(H. 도이치의 <여성심리> 참조)그녀들은 자기의 성적 충동과 생식기의 존
재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남성 생식기의 발기처럼 명확한 표시
가 없어 이 관련을 그녀들에게 가르쳐주는 일이 없기 떄문이다. 남성이나 연애에 대한 그
녀들의 낭만적인 꿈과 그녀들에게 밝혀진 몇 가지 생생한 사실 사이에 깊은 갭이 가로놓
여, 그녀들은 그 사이에 어떤 결합도 생각해 내지 못한다. 티드모니에(<자아> 참조)는 그
녀가 몇 사람의 여자친구들을 상대로, 남자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보고 와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기로 약속 했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일부러 노크를 하지 않고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이렇게 설명했다. "그것은 소매 속
의 굴대 닮았어요. 즉 두루마리 같은데 그 끝에 둥근 것이 하나 달려있어요." 그녀는 입으
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같은 그림을 석 장이나 그렸다. 그리고 가자 
그 그림을 품속에 감춰두고 가끔 꺼내보며 웃을을 터뜨렸다. 그후엔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연애가 존경, 소심, 한숨, 손에의 키스로 되어 있어, 거세되기까지 숭고화되어 있는 감상
적인 노래나 아름답고 낭만적인 이야기, 이 물체와 나 사이의 관련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비범한 것들을 우리와 같은 순진한 처녀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 대화, 목격, 얼핏 엿들은 말 등을 통하여, 소녀는 자기의 육체
적 동요에 한나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녀는 자기가 하소연이고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열정, 
전율, 습기, 영문 모를 불쾌 속에 그녀의 육체는 하난의 새로운, 불안한 세계가 된다. 젊은 
남자가 정욕의 불길을 내세우는 것은 자기가 남자임을 기꺼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성적 욕망은 일종의 공격이며, 파악적이다. 그는 거기서 자기의 주체성과 초월성이 확립되
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친구에게 그 정욕을 자랑한다. 그의 성기는 그에게 여전히 자랑거
리이다. 그것을 여성에게 던지는 충동은, 그것을 세계로 향해 내던지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속에 자기를 분명히 인정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소녀의 성적 생활을 언제나 비밀리에 이루어져 왔다. 소녀의 색정이 변형되
어 육체 전체를 침범할 때, 그 비밀은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녀는 그 동요를 마
치 부끄러운 병처럼 느껴 괴로움에 시달린다. 그 동요는 능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
나의 상태로, 상상 속에서도 그녀는 어떤 자주적인 결단으로도 거기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그녀는 붙잡고, 억지를 부리고, 유린하는 공상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기다리고 부름
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를 의존물로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자기의 자주
성이 없는 육체 속에 위험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막연한 희망과 행복한 수동적 꿈은, 그
녀의 육체가 다른 사람에 의해 운명지어진 물체라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녀는 성적 경험을 그 내재성 속에서만 알고 싶어한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손, 입술, 또 하나의 츅체의 접촉이지 자기의 것과 다른 손, 입술, 
육체는 아니다. 그녀는 상대의 이미지를 그늘 속에 놓아두거나 또는 그것을 이상의 안개 
속에 가둬둔다. 그러나 그녀는 상대의 존재가 자기를 따라다녀도 그것을 막지 못한다. 남
자에 대한 그녀의 어린애 같은 공포나 반발은 전보다 훨씬 애매하고 또 그 때문에 한결 
괴로운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들은 전에는 유아의 구조와 성인의 미래 사이의 뚜렷한 차
이에서 생겼다. 그러나 지금은 소녀가 그 육체 속에 경험하는 복잡성 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그녀는 자기가 소유에 바쳐지고 있는 것은, 자기가 그겻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욕망에 대해 반항한다. 그녀는 동의하에 먹이가 되
는 수치스러운 피동의 자세를 스스로 희망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두려워한다. 남자 앞에
서 알몸이 될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미칠 지경이지만, 한편 그렇게 되면 영구히 남자
의 시선에 맡겨진다는 것도 느낀다. 붙잡거나 만지는 손은 눈보다 웧씬 위압적인 존재가 
된다. 결국, 손이 더 큰 위협이 된다.

  
  그러나 육체적 소유의 가장 분명하고 혐오스러운 상징은 자기 몸이 남성의 성기가 관통
하는 것이다. 그녀가 자기와 혼동하고 있는 이육체를 남자가 마치 가죽에 구멍일도 뚫는 
듯이 관통하고, 옷감이라도 찢는 듯이 찢어버릴 수 있는 것을 증오한다. 그러나 여기에 따
르는 상처나 고통보다도 더 싫어나는 것은, 그 상처나 고통이 자기에게 가해진다는 사실이
다. "내몸이 남자에게 관통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두렵기만 해요". 하고 언제가 한 여자
가 내게 말했다. 남근에 대한 두려움이 남성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것은 그 확증이며 상징이다.
  소녀의 불안은 악몽이 되어 그녀를 괴롭히고, 환각이 되어 나타나는 그녀에게서 떨어지
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강간의 관념이 강박관념이 되는 것은 소녀가 잠재적인 쾌감을 느
끼기 때문이다. 그 관념은 명백한 상징을 통하여 꿈이나 행위 속에 나타난다. 소녀는 잠자
리에 들기 전에 추잡한 생각을 품은 까까중이 숨어 있지 않나 하여, 자기 방을 살펴본다. 
그녀는 집 안에 도둑이 든 것처럼 생각한다. 침입자가 창문을 통해 들어와서, 손에 든 단
도로 그녀를 찌른다고 생각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녀는 남자가 두렵다. 그녀는 자
기 아버지에게 일종의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담배냄새도 참을  수 
없게 된다. 아버지가 방금 나온 욕실에 들어 가기도 싫어한다. 그녀가 비록 아버지를 계속 
따른다고 하더라도 이 육체적인 혐오감은 자주 일어나 과장된 형태를 취한다. 마치 막내딸
의 경우에 흔히 볼 수있는 것처럼, 아버지에게 이미 적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가 젊은 여자환자에게 흔히 듣게 되는 꿈이야기가 있다. 그녀들은 나이 많은 
한 여자 앞에서 그녀의 동의하에, 자기가 어떤 남자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꿈을 꾼다. 그녀
들이 자기 어머니에게 상징적으로 자기의 욕망에 몸을 맡긴다는 승낙을 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녀들에게 가장 혐오스럽게 덮치고 있는 속박 중에 위선의 속박이 있
기 때문이다. 소녀는 자기 속에서, 그리고 자기 주위에서 생명과 성의 신비로운 동요를 발
견한 순간에, 순결과 청정에 바쳐지고 만다. 사람들은 그녀가 담비의 털가죽처럼 순백하고 
수정처럼 투명하기를 요구하며, 비칠 정도로 엷고 가벼운 모슬린 옷을 입히고, 그 방은 순
백으 벽지로 장식한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면 목소리를 낮추고 외설스러운 책을 읽지 못
하게 한다.
  그런데 혐오스러운 이미지나 욕망을 마음속에 품지 않은 마리아의 딸은 한 삶도 없다. 
그녀는 그런 이미지와 욕망을 자기 친구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감추려고 노력한다. 그
녀는 이제 억제만을 목표로 살아간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은 그녀에게 음험하고 불행하
고 병적인 상태를 가져다준다. 이러한 억압을 극복하는 그것이 그녀에게 대단히 어려운 일
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처럼 억압하고 있어도,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과오의 중압감만 느
끼게 된다. 그녀는 여자에의 변신을 치욕스러운 심정으로 참을 뿐만 아니라, 후회하는 마
음으로 받아들인다.
  이 불쾌한 연령이 소녀에게 괴로운 혼란기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녀는 그냥 여자아
이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른의 세계는 그녀에게 두렵고 따분한 것으
로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는 생각했으나, 어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싶다고 진지하
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콜레드 오드리는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내 마음속에는 
어른으로서의 조건(부모, 주부, 가정부인, 가장 등의 책임)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어른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자라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으 멍에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의 보호 속에 안주하
고자 하는 욕구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양심 위에 얹혀 있는 과실이나 고독한 행
위, 언짢은 교제, 나쁜 독서 등이 그녀에게 이 피난처를 필요로 하게 한 것이다. 15세의 
소녀가 여자친구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H.도이치가 인용한 것)가 그 전형적인 사례
이다.
  
  엄마는   가의 대무도회에 갈 때면 내게 긴 옷을 입히려고 해. 나로서는 긴 옷을 입는 
것이 생전처음이야. 내가 입고 싶어하지 않자 엄마는 놀라는 거야. 나는 엄마에게 이게 마
지막이라고 말하며 앞으로는 핑그색 옷을 입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나는 무척 두려워. 만
일 내가 긴 옷을 입으면 엄마는 멀리 여행을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참  바보지? 엄마는 때때로 마치 내가 어린애인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거야. 아, 만일 엄
마가 안다면 엄마는 내 양손 침대에 묶어놓고 나를 멸시할 거야!
  
  슈테켈의 저서 <불감증의 여인> 속에서 여성의 유년기에 대한 하나의 주목할 만한 자
료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21세 무렵의 고백을 상세히 기록한 비엔나의 어느 깜찍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그 고백은 내가 개별적으로 고찰해 온 모든 시기를 구첵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나는 다섯 살 때 처음으로 남자친구 하나를 골랐다. 리하르트라는 6,7세가 된 남자아이
였다. 나는 전부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귓볼이나 
코로 구분한 했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뭔가 감추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그 설명으로 만족
하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갑자기 오줌을 누고 싶어했다... 나는 내 변기를 빌려주었다. 그
의 페니스를 보는 순간(그것은 나에게 참으로 놀라운 무엇이었다) 나는 감격하여 외쳤다.
 "어머, 너 그게 뭐니? 예쁘구나! 아, 나도 갖고 싶어!" 나는 동시에 대담하게도 손으로 그
것을 만져보았다.
  두 아이는 그 현장을 숙모에게 들켜 그후부터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된다.
  아홉 살 때 나는 여덟 살과 열 살 난 다른 두 소년과 결혼놀이나 의사놀이를 했는데 그
애들은 나의 성기를 만졌다. 그리고 어느날 한 소년이 자기의 성기를 나에게 갖다대며 그
녀의 부모도 결혼했을 때 이런 행동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몹시 화를 냈다. "오, 그런 추
잡한 짓을 했을 리가 없어." 나는 이런 놀이를 오랫동안 계속하여 이 두 남자아이와 연애
적인 성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어느날 숙모가 알고 크게 야단을 치면서 나를 감화원에 넣
겠다고 위협했다. 나는 무척 좋아하는 아르투르를 만날 수 없게 되어 몹시 고민했다. 공부
를 게을리했고 글씨가 비뚤어졌으며 눈까지 사팔뜨기가 되었다.

  나는 발테르와 프랑크라는 남자아이를 새로 사귀게 되었다.
  "발테르는 나의 생각과 관능의 모두를 점령했어요. 나는 그의 앞에 서거나 앉아서 쓰기
연습을 하면서 그에게 스커트 밑으로 내 몸을 만지는 것을 허락했어요... 어머니가 문을 열
자 그는 재빨리 손을 빼고, 나는 쓰기에 몰두했어요. 나중에 우리는 남녀간의 정상적인 관
계를 갖게 되었으나,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허용하지는 않았어요. 그가 내 질 속으로 들
어왔다고 생각되면, 나는 누가 왔다고 말하여 몸을 뺐어요..... 나는 그것이 나쁜 짓이라고
는 생각지 않았어요."
  남자아이와의 교제는 끝나고 다음은 여자아이들과의 우정만 남았다. 나는 집안이 좋고 
교양이 있는 에미라는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열두 살 되던 크리스마스날에 우리는 
작은 하트 모양의 메달 안쪽에 두 살람의 이름을 새겨 교환했다. 우리는 이것을 약혼으로 
알고, '영원한 정절'을 맹세했다. 나는 에미 덕분에 여러가지 것을 배웠다. 그녀는 성에 대
하여도 내게 가르쳐주었다. 2학년 때 나는 황새가 아기를 운반해 준다는 이야기를 의심하
가기 시작했다. 아기는 사람의 배에서 나오므로, 아기가 나오려면 배를 갈라야 한다고 믿
고 있었다. 에미는 특히 마스테베이션에 대해 말하여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복음서의 몇 
구절이 성문제에 관해 우리의 눈을 뜨게 했다. 예컨대 성모 마리아가 성녀 에리자베스를 
만나러 왔을 때, '뱃속의 아기가 기뻐서 뛰놀았다'는 구절을 비롯하여 성서의 신기한 대목
이 그러했다. 우리는 그런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가 그것이 발각되어 생활기록부의 점수가 
나빠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녀는 또 실러가 <군도>에 쓰고 있는 '9개월의 기억'이라는 
문구를 내게 가르쳐 주었다.
  에미의 아버지가 전근하게 되어,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고안해 낸 
암호문구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쓸쓸하여 애들이라는 유태인 소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한번은 애들과 함께 학교에서 나오는 것을 에미가 발견했다. 에미는 질투하여 내게 덤벼들
었다. 나는 상업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애들과 무척 친해져서 언젠가는 시누이, 올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의 오빠인 대학생을 몹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오면 나는 당황하여 엉뚱한 대답빢에 하지 못했다. 저녁때 
애를과 나는 작은 소파에 붙어 앚아, 오빠가 치는 피아노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나는 웬일
인지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애들과 친해지기 전에 나는 몇 주일 동안 엘라라는 가난한 집 딸과 자주 어울렸다. 그녀
는 침대에서 나는 소리에 잠이 깨어 부모가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녀
가 내게 와서 하는 말이 아빠가 엄마의 위에서 자면 엄마는 심하게 소리를 지르는데, 그러
면 아빠는 '빨리 깨끗이 씻고 와.' 하고 말했다고 했다. 나는 그녀 아빠의 행위가 마음에 
걸려서 거리에서 그와 마주치는 것도 피했고 그녀의 엄마에게 깊은 동정을 느겼다. (그렇
게 소리를 지른 것은 굉장히 괴로웠기 때문일 거야.)
  나는 한 여자친구와 페니스의 길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나는 12센티에서 15
센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가사시간에 우리는 자를 대고, 문제의 그곳에서 스커트 위
로 복부를 따라 재어보았다. 적어도 배꼽까지는 닿았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하면 문자 그
대로 말뚝이 박힌다는 생가에 위협을 느꼈다. 나는 수캐와 암캐가 교미를 하는 것을 주의
깊게 보았다. 거리에서 말이 오줌을 누는 것을 보면, 나는 거기서 눈을 땔 수 없었다. 페니

스의 길이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다. 나는 파리도 관찰하고 시골에서는 짐승들을 
눈여겨보았다.
  "12세 때 나는 심한 인후염에 걸려 아는 의사에게 보였어요. 그는 내 침대 옆에 앉아서 
갑자기 손을 담요 밑에 집어넣고 거기를 만졌어요. 나는 '망측한 사람!' 하고 외치면서 벌
떡 일어났어요. 엄마가 달려오자 의사는 몹시 난처한 얼굴을 했어요. 그는 나를 무례하다
고 하며 자기는 단지 나의 장딴지를 만져보려고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어요. 나는 억지로 
그에게 사과해야 했어요. 드디어 나는 월경이 시작되어, 아버지가 피묻은 월경대를 발견했
을 때에는 야단이 났어요. '왜 깨끗한 남자인 아버지가 부정한 여자들 틈에서 살아야 하나
?" 마치 몸의 커디션이 나쁜 것도 내책임인 것만 같았어요."
  15세 때 나는 또 다른 여자친구가 생겨, 서로의 가족들이 그 편지내용을 읽지 못하도록 
속기법으로 교신했다.
  "우리는 서로의 발견에 대해 쓸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어요. 그녀는 화장실 벽에서 발견
한 많은 노래를 내게 써보냈어요. 나는 그중의 하나를 기억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대단히 고상한 것으로 생각했던 연애를 더러운 것으로 보이게 했기 때문이에요. '사
랑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막대기로 이어지는 두 개의 엉덩이.' 나는 절대로 거기까
지 이르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젊은 처녀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상대방에게 이런 일을 요구
할 리가 없어요. 내가 15세 6개월이 되었을 때 남동생이 태어났어요. 나는 몹시 질투가 났
어요. 왜냐하면 나는 줄곧 외동 딸이었거든요. 내 여자친구들은 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달라고 졸라댔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녀들이 바라고 있는 정보를 줄 수 없었어요. 이 
시기에 다른 여자친구가 내게 결혼식날 방의 일을 설명해 주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자 나
는 호기심에서 결혼하고 싶었어요. 다만 그녀의 이야기 가운데 '말처럼 헐떡이는 입김'만은 
나의 미적 감각을 해쳤어요... 사랑하는 남편에게 옷을 벗기게 하고 그에게 이끌려 침대로 
간다면, 누구나 결혼을 원하지 않을 리가 없어요. 그건 무척 근사한 일이니까요..."
  
  이마도 사람들은(여기서는 정상적이며 병적인 경우가 아니지만)이 야자는 특이한 '변태
자'라고 말할것이다. 사실은 단지 그녀에 대한 감독이 다른소녀들보다 부족했던 것이다. 상
류사회 소녀들의 호기심이나 욕망이 비록 행동으로 나타지 않더라도 환상이나 유희의 형
태로 존재한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전에 신앙심이 깊고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한 처녀를 알고 있었다. 이 처녀는 결혼
한 후에 훌륭한 현모가 되고 미망인이 되었으나, 어느날 밤 그녀는 몹시 흥분하여 연상의 
여자에게 고백했다. "남자의 눈앞에서 옷을 벗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당신을 남편
이라고 가정하고 말이야...." 하고 감동으로 몸을 떨면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어떤 교육을 
하더라도 처녀가 자기의 육체를 의식하고, 자기의 운명을 꿈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고
작해야 그녀에게 엄격한 억제를 가할 수 있을 정도이며. 그 억제는 그후에 그녀의 모든 성
생활에 무거운 짐이 될것이다. 그보다 바람직한 것은, 그녀에게 자기도취가 되거나 수치스
럽게 생각지 말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처녀가 어떤 비극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대략 알 수 있으리라
고 생각한다. 그녀는 전부터 잘기의 성에 의해 불완전한, 무력한 생활을 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그것을 깨끗지 못한 병과 감춰진 피로 알고 
있다. 그녀의 열등성은 처음에는 있어야 할 것이 부족하다는 의식에 불과했다. 페니스의 
결여는 이제 오염과 결점으로 바뀌어졌다. 그녀는 상처를 입고 치욕을 느끼며 불안과 죄의
식을 간직한 채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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