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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문학에서 여성의 신화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by Frais Feeling 2020. 7. 26.

문학에서 여성의 신화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어떤 중요성
을 갖고 있는가? 그런 신화는 사회의 풍속이나 개인의 행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것이 현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보아야 한
다.
  신화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여성의 신화는, 인류를 양분하는 '구분'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인간적인 조건의 양상을 승화시키는 정적인 신화이다. 그것은 경험 속에서 파악하
거나 개념화된 현실을 플라톤적인 하늘에 투사하는 것이다. 사실에, 가치에, 의의에, 지식
에, 경험적 법칙에 초월적인 '이념'(이데아)이 대치되어 있다. 이 이념은 주어진 현실의 피
안에 있으므로 도저히 실증할 수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진실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성
들 개개의 우연하고 다양한 실존에 대해, 신화적인 사고방식은 유일하고 확고부동한 '영원
한 여성'을 대립시키려고 한다. 여성이라고 정의한 것과 육체를 지닌 현실의 여성들의 행
동이 어긋나면 그건 여성이 나쁜 것이 된다. 이 경우, '여성'을 하나의 본질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여성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체험은 부정해도 신화에 반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화는 어느 의미에서는 여성 자신 속에 기원을 갖고 있다. 여성이 남성과 
다른 존재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은 욕구나 포옹이나 사랑 속에
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양자의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
는 진정한 드라마를 낳는다. 색정, 사랑, 우정, 실망, 증오, 경쟁이라는 상호작용을 통하여 
양자 모두 자기를 본질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는 투쟁이며, 서로를 확인하는 자유와 자유의 
인식작용이고, 적의에서 협력으로 옮아가는 계속적인 과정이다. '여성'이라는 것을 특별히 
내세우는 것은, 경험에 반하여 여성이 주체이며 남성과 동등한 자임을 거부하는 상호성이 
결여된 '절대의 타자'를 내세우는 것이다.
  여성은,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여성에 관해 지어
낸 신화는 모두 여성을 전체적으로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제각기 유일한 것임을 
자처한다. 그 결과 서로 모순되어 양립하기 어려운 신화가 뒤섞여, '여성'에 대한 견해가 
상층되는 바람에 남성들을 어처구니없게 한다. 모두가 각각 유일한 '진리'를 내포한다고 주
장하는 수 많은 원형에 여성은 다소나마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남성들은 배우자에 대해, 
인간이 동시에 금발일 수도 갈색머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애해할 수 없었던 소피스트(궤
변철학자)와 같은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절대화하기 쉬운 경향은 사회적인 표상에도 이미 나타나 있다. 어린이의 정신에서는 모
든 관계가 사물의 형태를 취하는 것처럼, 관계는 분류로, 작용은 전형으로 정착하기 쉽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의 사회는 재산의 보존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재
산을 보유하는 인간의 옆에, 그것을 소유자에게서 빼앗으려는 남녀의 존재가 상정된다. 남
성(건달, 사기꾼, 도둑, 투기꾼 등)은 일반적으로 그 집단에서 부인된다. 여성은 그 색정적
인 매력을 이용하여, 합법성을 어기지 않고 남성을 유혹하여, 그들의 재산을 탕진하게 할 
수도 있다. 그녀들은 그의 재산을 빼앗거나, 상속권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불길한 것으로 생각되어, 그녀들은 '고약한 여성'으로 불린다. 그런데 그런 여
성은 다른 집(그녀들의 아버지나 형제, 남편이나 애인의 집)에서는 수호의 천사처럼 생각
된다. 부유한 재산가에게서 돈을 울궈내는 창녀는, 화가나 작가에게는 예술의 후원자이다. 
아스파지아나 퐁파두르 부인과 같은 애매한 인물도 구체적인 경험속에서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을 버마재비나 마술초, 악마로 규정한다면 여성에게서 '미의 여신', '
어머니의 여신', '베아트리체'를 발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집단적인 표상, 특히 사회적인 전형은 일반적으로 대립되는 낱말의 짝짓기에 의해 만들
어진 것이다.
  상반성은 '영원한 여성'의 근본적인 특질처럼 생각된다. 성스러운 어머니는 잔인한 계모
로, 천사와 같은 딸은 타락한 처녀로 대비된다. 그래서 '삶과 같은 어머니', 혹은 '죽음과 
같은 어머니'라고도 하며, 처녀를 순수한 정신이라고도 하고, 악마에게 바쳐진 육체라고도 
한다.
  현실은 사회나 개인에게 상반되는 두 가지 원리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라고 말하지 않는
다. 사회나 개인은 시기나 상황 속에서 필요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채택한 신화 
중에, 자기가 인정하는 제도나 가치를 반영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을 가정에 매어두고 싶
어하는 가부장제도는, 여성을 감정, 내면성, 내재로서 정의한다. 실제로 모든 실존자는 내
재인 동시에 초월이다. 실존자에게 목표도 제공하지 않고, 어떤 목적에도 도달하지 못하도
록 방해하여 승리감을 느끼지 못하게 할 경우에 그 초월은 과거 속에, 즉 내재에 묻혀버린
다.
  이것이 가부장제도의 사회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그러나 노예인 것이 노예의 
천직이 아닌 것처럼, 이것은 결코 여자의 천직이 아니다. 이 신화는 오귀스트 콩트의 학설
에서 발전된 것이 분명하다. '의지'를 '애타정신'과 일치시키는 것은, 남성에게 여성의 헌신
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며, 여성에게는 지상명령적인 의무를 부과하는 것
이다.
  신화를 의미의 파악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의미는 대상에 내재적이다. 그것은 체험을 
통하여 의식에 계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화는 의식이 파악하려고 해도 끝까지 도망치는 
초월적인 이데아이다. 미셸 레리스는 <남자의 연령> 속에 여성의 기관의 모습을 그리면
서 우리에게 의미를 명시하고 있지만, 아무 신화도 만들지 않았다. 여성의 육체를 앞에 두
고 느끼는 현혹이나 경혈에 대한 혐오는 구체적인 현실을 두려워하는 공포의 표시이다. 여
성의 육체에서 향락적인 성질을 발견하게 되는 체험 속에는 신비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 성질을 꽃이나 조약돌에 비유하여 표현하려고 해도 신화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 그것은 육체이다. '육체는 밤이며 죽음이다'라든가 '여자는 우주의 빛'이라
고 한다면, 그것은 지상의 진실에서 떠나 공허한 하늘로 올라가버린다. 남성도 여성에게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은 단순히 육체적인 대상이 아니다. 육체는 각자의 경험 
속에서 개성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뿌리를 내린 존재인 
것도 사실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욱 종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 동물성은 훨씬 분명하다. 
그러나 여성에게도 남성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은 실존에 의해 책임
이 부과된다. 여성도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에 속한다. 이것을 '자연'에 동화시키려는 것은 
하나의 편견이다.
  이처럼 지배계급(여기서는 남성을 가리킨다)에게 유리한 신화는 없을 것이다. 그 계급이 
갖고 있는 모든 특권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남용하는 것도 허용하기 때문에 남성들은 여성
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생리적인 고통이나 부담을 덜어주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연이 요구하는' 일이다. 그것을 구실로 삼아 여성의 비참한 처지를 점점 확대하려고 한
다. 여성에게는 성적 쾌락을 누릴 권리를 일체 인정치 않고, 소나 말처럼 부리기 위해 그
렇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신화 중에서 남성의 마음속에 가장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여성적인 '신비'
이다. 여기에는 유리한 점이 많다. 우선 이것으로, 설명하기 어렵게 생각되던 것도 쉽게 설
명된다. 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은 자기의 무능력을 일반적인 저항으로 대치하여 숨
기고 싶어한다. 자기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고 '신비'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것이
야말로 나태와 허영심을 속이는 알리바이이다. 여자에게 반했을 때도 이렇게 해서 환멸에
서 벗어나려고 한다. 사랑하는 여성의 행동에 바람기가 있어 보이거나 말이 어리석게 생각
되면 신비를 구실로 삼는다. 요컨대 신비의 덕택으로, 키에르케고르에게 현실적인 소유보
다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된 소극적인 관계가 언제까지나 계속된다. 살아 있는 수수께끼 앞
에서 남성은 언제까지나 자기의 꿈, 희망, 사랑, 허영심을 지닌 채로 고독하다. 많은 사람
들에게 악덕에서 신비적인 황홀경에까지 이를 수 있게 하는 이런 주관적인 유희는 살아 
있는 인간을 상대하는 진정한 관계보다 더욱 매혹적인 경험이다. 이처럼 편리한 착각은 대
체 어디에 기초한 걸까?
  여성은 확실히 어느 의미에서는 신비적이다. 메테를링크의 말에 의하면 '누구나 그렇듯
이 신비적'이다. 누구나 자기에 대해서 주체이며, 자기만을 내재 속에 파악할 수 있다. 이
런 관점에서 보면 타자는 언제나 신비하다. 남성들의 눈에 대한 상대방의 불투명성은 타자
인 여성에게서보다도 명백하다. 그들이 아무리 공감대를 발동해도 여성의 개성적인 체험 
속에 침투하지 못한다. 여성의 에로틱한 쾌락, 월경의 불쾌감, 분만의 고통 등은 도저히 알 
수 없다. 사실 이런 신비는 상호적이다 .모든 남성의 마음속에는 여성이 알 수 없는 무엇
이 있다. 남성의 색정이 무엇인지 여성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찰해 온 일반적
인 원칙에 의하면, 남성이 세계를 생각하는 일정한 방식은 그들의 관점에서 절대적인 것으
로 정해져 있다. 여기서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성은 상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남
성에게 신비인 여성은 그 자체로서 신비하다고 생각된다.
  솔직히 말하면 여성이 살고 있는 상황이 이렇게 보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의 생
리적인 운명은 대단히 복잡하다. 여성 자신도 남의 일처럼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녀의 육

체는 자기의 명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 속에 자기가 소외된 듯한 느낌이 든다. 모든 개인
에게 있어서의 생리적인 삶과 육체적인 생활, 좀더 정확히 말해서 개인의 사실성과 그것을 
떠맡고 있는 자유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인간의 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가장 어려운 수
수께끼이다.
  그러나 흔히 신비라고 불리는 것은, 의식의 주관적인 고독도 아니고 유기적인 생명의 비
밀도 아니다. 그 말이 갖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상호의 전달에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순
수한 침묵이나 밤,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잘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운 무엇을 의미
하고 있다. 여성이 신비스럽다는 것은, 여성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은 분명히 거기에 있다. 그런데 베일에 싸여 있
는 것이다. 불확실한 외관 저편에 실재하고 있다. 여성은 누구인가? 천사인가, 악마인가, 
무녀인가, 배우인가? 이런 물음에 확실한 대답을 하기는 어렵다. 여성에게는 본질적으로 
애매성이 있기 때문에 어떤 대답도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은 자기 마음도 종
잡을 수 없는 스핑크스이다.
  사실 여성도 자기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물음에 반드시 대답
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숨어 있는 진실이 너무나 유동적이어서 파악할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 이 영역에는 진실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실존자는 그가 행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본질이 실존에 선행되어서는 안 된다. 그 순수한 주관성에서 인
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 인간이 측정된다. 농부의 아내에 대하여는 
일솜씨가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 있고 여배우에 대하여는 재능이 있다, 없다 하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을 그 내재에 있는 모습 그대로 본다면, 그 여성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런 여성의 품성은 어떻게 정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 애인이나 부부의 관계
에서는 여성이 종, 즉 제2의적이며 타자의 입장에 있는 모든 관계에서는 언제나 내재적으
로 생각된다. 친구나 동료, 일의 협력자로서 조금도 신비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주목
할 만하다. 남성 쪽이 종속적인 입장에 있을 경우, 예를 들어 자기보다 연상이고 부자인 
남자나 여자 앞에 젊은 청년이 비본질적인 객체가 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역시 신비에 싸
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경제적인 의미에서 여성의 신비로운 하부구조를 보여주고 있
다.
  감정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지드는 이렇게 쓰고 있다. "감정의 영역에서는 현실적인 
것과 상상하는 것이 분명히 구별되지 않는다. 사랑하기위해서는 사랑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얼마쯤 감소시키기에 충분하다... ."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은 오직 
행위를 통해서이다. 이 사회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남성은, 자기의 사랑을 
거침없이 표명할 수 있다. 이 경우, 남성은 여성을 돌보기도 하고 원조하기도 한다. 결혼을 
통해 여성에게 사회적인 지위를 제공한다. 여성에게 선물도 보낸다. 경제적, 사회적인 독립
이 그에게 창의나 착안을 가능하게 한다.
  빌르파리지 부인과 별거하고 있는 노르푸아는 하루 걸러 한 번씩 여행을 하는 그녀를 
만나러 간다.(모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 대개 남성 쪽은 
바쁘게 살고 부인은 한가하다. 그가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그가 제공하는 것이므로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기쁨에서인가, 정열에서인가, 아니면 기분전환을 위해

서인가? 그녀는 이런 혜택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가, 이득을 위해서인가?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결혼을 존중하고 있는가? 남성이 그녀에게 제공하는 이유도 모호
하다. 이런 혜택을 사랑으로 제공하고 있는가, 연민으로 제공하는가? 그런데 여성은 흔히 
남성과의 교제에서 많은 이득을 발견하지만, 남성에게 있어서 여성과의 교제는 그가 상대
방 여성을 사랑하고 있는 정도로밖에는 소용이 없다. 그래서 그의 태도 전체에서 그 애정
의 정도를 어는 정도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여성에게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규명할 방법이 
없다. 여성은 기분 여하에 따라서 자기 애정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를 취하게 되지만, 그
런 애정을 수동적으로 느끼고 있는 한, 어떤 해석도 진실성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다. 여
성 쪽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특권을 갖고 있는 특별한 경우에는 신비가 역전된다. 이 
신비는 하나의 성에 부속품처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입장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많은 여성에게 초월의 길은 분명히 막혀 있다. 그녀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므로 아무것도 될 수 없다. 그녀들은 자기가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하고 되풀이
하여 자문한다. 이것은 공허한 물음이다. 남성이 여성의 이 비밀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
는 것도, 결국 그런 본질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은 사회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으므로, 이 사회를 통하여 자기를 객관적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그 비밀의 밑바닥을 부
수면 속은 텅비어 있다.
  그리고 모든 피압박자처럼, 여성은 자기의 객관적인 모습을 일부러 숨기려고 하는 경우
도 있다. 노예, 하인, 원주민 등은 모두 지배자의 자의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므로 
언제나 변함없는 미소나 수수께끼 같은 무감동으로 지배자를 대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그들은 참된 감정이나 행동을 조심스럽게 감춘다. 여성들은 대개 처녀 때부터 남성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책략을 사용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여성은 언제나 가면으로 남성을 대한
다. 여성은 용의주도하고 위선자이며 배우이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여성의 신비'는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 하나
의 현실이다. 사실 그것은 '절대적 타자'의 신화에 직접 포함되어 있다. 비본질적인 의식 
또한 투명한 주체성이다. '코기토'를 작용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상호
성이 불가능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타자'는 자기에게도 타자가 되어야 한다. 그 주체성 자
체가 타성을 띠고 있어야 한다. 의식으로서는 순수한 내재적 현존 속에 소외되어 있는 이 
의식이야말로 분명히 '신비'이다. 즉, 속임수가 만드는 비밀 이외에 흑인종과 황인종의 신
비가 있다. 그들이 절대적으로 비본질의 '타자'로 생각되는 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일반 
유럽인을 크게 당황하게 하는 미국 시민이 조금도 신비적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점이다. 그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이라고 해서 언제나 남성을 이
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성의 신비'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즉 부유한 미국인이나 
남성은 '지배자' 쪽이고, '신비'는 노예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비의 확실한 현실에 대하여는 기만적인 황혼 속에서 꿈꾸는 수밖에 없다. 신비를 
환각처럼 포착하려고 하면 그것은 곧 사라져버린다. 문학은 '신비적인' 여성을 묘사하려고 
하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소설의 시초에는 그런 여성들이 신기한 수수께끼의 인물처럼 나
타나지만, 이야기가 미완성으로 끝나지 않는 한, 그녀들의 비밀은 끝내 드러나 평범한 인
물이 되고만다. 피터 치니의 작품의 주인공은 언제나 여성의 느닷없는 변덕에 놀란다. 그

녀들이 어떻게 처신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녀들은 독자들의 예상을 여지없이 빗나가
게 한다.
  그러나 일단 독자들이 그 행동의 매커니즘을 알게 되면, 그런 여성은 단순한 기계장치처
럼 보인다. 이 여자는 스파이이고, 저 여자는 도둑이다라는 식으로. 이야기의 줄거리가 아
무리 교묘히 짜여져도 거기에는 언제나 열쇠가 있다. 작가가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상
상력이 풍부하더라도 달리 방법이 없다. 신비는 단지 신기루에 불과하며 잡으려고 하면 사
라져버린다.
  이와 같이 신화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것을 다루는 방법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의 신화는 하나의 사치이다. 여성의 신화는 하나의 사치이다. 그 신화는 남성이 
그 욕구의 격렬한 파악에서 벗어날 때에 나타나다. 관계가 구체적으로 더 많이 존속할수록 
그 관계의 관념화는 적어진다. 고대 이집트의 농민, 베두인족의 농민, 중세의 직인, 현대의 
노동자는 노동의 필요성과 가난 때문에, 자기의 상대가 되는 여성들과 너무나 분명한 관계
를 맺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을 미화하거나 그 반대로 만들 여유가 없다. 흑과 백의 
여인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꿈꿀 여유가 생긴 시기나 계급에 있어서이다. 그러나 사
치도 효용성을 갖고 있다. 이런 몽상은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신화의 대부분은 남성이 자기의 실존과 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자발적인 태도 속에 뿌
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생활경험을 '초월적 이념'으로 높인 것은 가부장제도를 정당화할 
목적에서 행한 것이었다. 이 사회는 신화를 통하여 개개인에게 그 법칙과 풍습을 알기 쉬
운 형태로 강요했다. 집단의 명령은 신화의 형태로 각자의 의식에 침투했다. 종교, 전통, 
언어, 이야기, 유행가, 영화 등을 매개로 하여 신화는 물질적인 현실에 엄격히 종속되어 있
는 실존자들에게까지 스며들었다. 자기의 검소한 생활경험의 숭고함을 거기서 볼 수 있었
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반에게 배반을 당하면, 그 남자는 여자를 화냥년이라고 욕한다. 
성불능의 강박감에 시달리는 남자는, 여자를 버마재비라고 욕한다. 자기 여자에게 만족하
고 있는 남성에게 그녀는 조화, 휴식, 풍부한 대지이다. 값싸고 영원한 취미, 포켓용 '절대'
를 선호하는 많은 남성들은 신화로 마음을 만족시킨다. 사소한 감동, 반항도 곧 시간을 초
월한 '이념'의 표시로 생각된다. 이런 착각은 쉽게 허영심과 결부된다.
  신화는 상식적이고 사려 깊은 듯이 가장한 정신이 분별없이 뛰어드는 허위적인 객관성
의 함정이다. 체험이나 그것이 요구하는 자유로운 판단을 고정된 우상으로 대치하려는 것
이다. '여성'의 신화는 자주적인 실존자와의 진정한 관계를 신기루로 바꿔놓으려고 한다.
  "환상이여, 환상이여!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므로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것을 안정시켜 가르치고, 보석에 대한 취미를 버리게 하여 우리의 동등한 배우자로, 친한 
친구로, 이 현세의 협력자로 만들어 다른 옷을 입히고, 머리를 짧게 깎도록 하여, 모든 것
을 말해 줘야 한다... ." 하고 라포르그는 외치고 있다. 여성을 상징으로 가장하는 것을 그
만두어도 남성이 잃는 것은 없다. 꿈이 집단적인 명령에 의해 구성되었다면, 그 꿈은 평범
하여 살아 있는 현실에 비하면 참으로 빈약하고 단조롭다. 참된 몽상가와 시인에게는 그 
살아 있는 현실이야말로 낡은 불가사의보다 훨씬 풍부한 원천이다. 여성에 대해 가장 성실
하게 생각한 시대는 우아한 연애문학이 꽃피던 봉건시대도 아니고, 여성의 환심을 사던 1
9세기도 아니다. 그것은(18세기처럼)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생각한 시대이다. 이때 여

성들은 참으로 로마네스크한 것으로 보인다. <위험한 관계>, <적과 흑>, <무기여 잘 있
거라> 등을 읽어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라클로(프랑스의 군인, 작가, 1741 - 180
3), 스탕달, 헤밍웨이의 여주인공들은 신비가 없어도 매력이 있다. 여성 속에서 하나의 인
간적인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남성의 생활경험이 빈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주체
와 주체의 상호관계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중요성이나 강인성을 결코 잃지 않는다. 신화를 
거부하는 것이 남녀간의 모든 극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것도 아니고, 여성이라는 현실을 통
하여 남성이 발견하는 의의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시, 사랑, 모험, 행복, 꿈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다만 행동이나 감정, 정열이 진리 속에 기초를 둘 것을 요구하는 것
이다.
  "여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여성은 어디로 갔는가? 오늘의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이런 
신비적인 슬로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이미 알아보았다. 남성의 눈에(그리고 남성의 눈
을 통해 사물을 보는 일단의 여성들의 눈에) '진정한 여성'으로 비치기 위해서는 여자의 
몸을 갖고, 애인이나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주체는 성
본능이나 모성을 통하여 자기의 자율성을 요구할 수 있다. '진정한 여성'은 '타자'로서 자
기를 받아들이는 여성이다.
  오늘날 남성의 태도에는 이중성이 있는데, 이것이 여성에게 괴로운 모순을 안겨주고 있
다. 남성들은 상당히 폭넓게 여성이 동등한 인간, 평등한 자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들은 여전히 여성을 본질적인 존재라고 우긴다. 여성에게 이 두 가지 운명은 양립되기 어
렵다. 그 어느쪽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결국 여성의 불안정한 
상태가 생기게 된다. 남성의 경우는 공생활과 사생활 사이에 별로 충돌이 없다. 행동이나 
일에서 사회에 대한 역할을 확인할수록 그는 점점 더 남성적으로 보인다. 그의 인간적인 
가치와 생명적인 가치는 하나로 융합된다.
  한편 여성의 자주적인 성공은 그 여성다움과 모순된다. 세상은 '참된 여성'에게 객체가 
될 것을, 즉 '타자'가 되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 남성들의 감수성이나 성감
까지 변해 버릴 가능성이 많다. 이미 새로운 미학이 생겼다. 평평한 가슴과 가는 허리의 
유행(20세 안팎의 여자 스타일)은 일시적인 것이었으나, 그래도 과거 풍만형의 이상으로
는 돌아가지 않았다. 여성의 몸이 어느 정도 풍만하길 요구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것
은 소극적이다. 여성의 몸은 날씬해야 한다. 근육이 발달하고 유연하며 건강해 보이는, 초
월성의 표시가 요구된다. 온실 속의 식물처럼 창백한 것이 아니라,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
고 일하는 사람처럼 햇볕에 검게 타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성복이 실용적이 되었다고 해서 성의 특징을 잃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짧은 스커트는 
전보다 다리나 허벅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게 되었다. 일하는 것이 여성의 에로틱한 매력
을 잃게 한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 없다. 여성을 사회적 인간인 동시에 육체적인 먹이처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극적일 수 있다. 최근에 출간된(1948년 10월 출간) 페네의 소묘 
시리즈에는 젊은 남성이 결혼식에 입회하려는 아름다운 여성 시장에게 매혹되어 상대인 
신부를 외면하는 그림이 있었다. 여성이 '남성의 일'을 하면서도 매혹적이라는 것은 오랫동
안 다소 외설스러운 농담의 주제이기도 했었다. 세상사람들의 반감이나 야유가 둔화되어, 
에로티시즘의 새로운 형식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아마 거기서 새로운 신화가 생기게 

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오늘날 여성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조건과 여성적인 숙명을 동시에 
짊어지고 살아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성의 상실'이라고 말하는 부자연스러움과 불
편의 원인도 여기에 있다. 자기를 해방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예속적인 생활을 조용히 받
아들이는 쪽이 훨씬 편할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대지에 한결 적합하다. 어
쨌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또 불가능한 일이다. 바라고 싶은 것은 남
성들도 새로 창조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
래야만 여성도 모순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라포르그의 소원이 성
취될 것이다.
  "오, 젊은 처녀들이여, 당신들은 언제 우리들의 형제, 편견이나 저의가 없는 친한 형제가 
될 수 있는가? 언제 우리는 참으로 악수할 수 있는가?" 그때에는 "남자들이 그녀에게 강요
한 운명의 무게에 더이상 시달리지 않는 멜뤼진, 해방된 멜뤼진..."은 인간으로서의 바탕을
(브르통 <비법 17>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녀는 완전한 인간이 될 것이다. "
여성의 무한한 속박이 풀리고 자기를 위해, 자기에 의해 살게 될 때 남성(지금까지 혐오스
러운 존재였던 남성)이 여성을 해방시켜서." (랭보 <드므니에의 편지>, 1872.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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