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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역사는 언제나 남자가 모든 실권을 장악해 온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by FraisGout 2020. 7. 26.

역사는 언제나 남자가 모든 실권을 장악해 온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가부장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사회의 초기부터 남자는 여자를 종속적인 신분으로 억눌러두는 것이 유리
하다고 생각했었다. 남자들이 만든 법률은 본래 여자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여자는 구체적으로 '타자'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남성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도움이 되었
으며, 동시에 그것은 그들의 존재론적, 윤리적인 욕구에도 합치하는 것이었다.
  주체가 자기를 확립하려고 할 때, 그 주체를 한정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타자'가 필요하
게 된다. 자기 이외의 실재를 통해서만 주체는 자기에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의 
생활이 결코 만족이나 안식이 아니라 불만과 활동과 투쟁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남자는 
눈앞의 '자연'과 부딪치게 된다. 남자는 자연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자연은 그를 
만족시켜 주지 않는다. 자연은 순전히 추상적인 대립물로 나타나, 장애물로서 외부에 머물
러 있거나, 수동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받아들여 남자에게 동화되어버린다.
  남자는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그것을 소유한다. 이런 경우 남자는 역시 혼자이다. 돌을 
던질 때도 혼자이고 과일을 소화할 때도 혼자이다. '타자'가 거기 있다는 것은, 그 '타자'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참된 타성이란, 나의 의식과 별개이면
서 동일한 의식인 것이다. 각자를 그 내재성에서 떼어내어, 그 인간이 그의 참된 존재를 
완성하고, 초월로서, 목적을 행하는 탈출로서, 투기(자유로운 계획)로서 자기완성을 가능하
게 하는 것은 다른 인간의 실존이다.
  그런데 나의 자유를 확립시켜주는 이 타인의 자유는, 또한 나의 자유와도 충돌한다. 이
것이 불행한 의식의 비극이다. 의식은 각각 자기만을 최고의 주체로 인정하기를 원한다. 
각자 타인을 노예로 삼아 자기를 완성하려고 한다. 그러나 노예 쪽에서도 노동과 공포 속
에서 자기를 본질적인 것으로 느낀다. 변증법적으로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주인이 
비본질적인 인간으로 생각된다.
  이런 생각은 서로가 상대의 자유를 인정할 때, 즉 자기와 상대를 객체와 주체로 인정할 
때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자유를 서로 인정하는 우정이나 관용은 상당한 미덕이다. 
확실히 이것은 인간으로서 최고의 완성이며, 인간은 이것을 통하여 자기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진실은 끊임없이 형성되어가면서 부단히 소멸되는 투쟁의 진실
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잠시도 쉬지 않고 자기초월을 계속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바
꿔 말하면, 인간은 '존재'이기를 그치고 자기 실존을 짊어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도
덕적인 태도에 도달하게 된다. 이 회심에 의해 그는 일체의 소유를 단념하게 된다. 왜냐하
면 소유는 존재를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참된 지혜에 도달하
는 회심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아,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긴장이 필
요하다. 그래서 남자는 자기 혼자서는 자기를 이룰 수도 없고 또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도 항상 위험에 놓이게 된다. 그 일생은 절대로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매우 어려운 기회이
다.
  그런데 남자는 어려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위험을 무서워한다. 그는 생명과 휴식, 실
존과 존재와 같은 모순된 것을 갈망하고 있다. '정신의 불안'은 자기발전을 위한 대가이며, 
객체와 자기와의 거리는 자기에 대해 자기가 존재하기 위한 대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남자는 불안 속에서 평온을 꿈꾸고, 의식을 지니면서 불투명한 만족상태를 꿈꾸고 
있다.
  남자의 이 꿈이 구현된 것이 바로 여자이다. 여자는 남자와는 전혀 다른 자연과, 남자와 
너무나 일치하는 동류 사이의 바람직한 중간적인 존재이다. 여자는 남자를 자연의 적의에 
찬 침묵으로도 대하지 않고, 상호존중의 가혹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 여자는 유일한 특권
으로서 하나의 의식이지만, 그래도 여자의 육체를 소유하는 것은 가능한 일로 생각된다. 
여자에 의해 남자는 자유의 상호성 속에서 그 근원을 갖는 지배자와 노예의  엄격한 변증
법에서 벗어날 한 가지 수단이 주어졌다.
  태초에 해방된 자유로운 여성들이 있었는데 남성이 그녀들을 예속시킨 것이 아니며, 성
의 구별 자체가 곧 계급을 구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 여성을 노예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노예 중에도 여자가 있었지만, 그러나 자유로운 여자, 
즉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권위를 지닌 여자도 언제나 있어 왔다. 여자 쪽에서 남자의 
지배권을 받아들여, 남자는 자기를 객체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반항에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여자는 절대로 본질로 돌아가지 않는 비본질적인 존재로, 일방적으로 절
대적인 '타자'로 보여졌다.
  천지창조에 대한 신화는 모두 남자가 소중히 여기는 이런 확신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그리스신화가 그러하며, 이것이 기독교를 통해 서양문명 속에 전해졌다. 이브는 남자와 동
시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른 재료로 지은 것도 아니고, 아담을 지을 때 사용한 흙으로 
지은 것도 아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지었다는 것이다. 여자는 그 출생부터가 자주
적이 아니었다. 신은 처음부터 그녀 자신을 목적으로 하여, 그녀로부터 영광을 받기 위해 
여자를 만들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신은 여자를 남자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신은 아담의 
고독을 구제하기 위해 여자를 만들었으며, 여자의 기원과 목적은 남편 속에 있다. 여자는 
비본질적인 존재로 남자의 보충물이다.
  그래서 여자는 적합한 먹이로 보인다. 여자는 설익고 불투명한 의식을 지닌 자연이며, 
그 의식은 본래 순종하기에 알맞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가 그런 존재이기를 기대했다. 남
자는 여자라는 하나의 존재를 육체적으로 소유하여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한편, 순종의 자

유에 의해 자기 자유를 점점 확보하려고 한다. 여자가 되어도 좋다는 남자는 한 사람도 없
겠지만, 남자는 모두 여자라는 존재가 있기를 바란다.
  "여자는 만든 신에 감사해야 한다.""남자에게 여자를 주었으니, 자연은 선한 것이다." 이
런 글귀나 이와 비슷한 글귀 속에서, 이 세계에서의 남자의 존재는 필연적인 하나의 권리
이며, 여자의 존재는 단지 하나에 우연에 불과하다고 태연스럽게 그리고 순진하게 단정하
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반가운 우연이다. 여자는 '타자'처럼 봉지만, 동시에 남자가 그 허
무를 느끼고 있는 실존과의 대조에서 하나의 충실한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타자'는 주체
의 눈에 객체로 보임으로써 존재로 인식된다. 실존자가 자기 마음속에 품고 있는 욕구와 
불만이 여자 속에 구체화되어 있으므로, 남자는 여자를 통해 자기합일을 이루려고 노력하
여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에게 '타자'의 유일한 구체화를 나타냈던 
것은 아니며, 또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언제나 불면의 지위를 유지했던 것도 아니다. 
다른 우상에 의해 여성의 지위가 달라진 시기도 있었다. 국가가 개인을 희생시킬 때, 남자
는 자기 개인의 일에만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스파르타의 여성은 국가에 헌신했으므
로 그리스 여성보다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자는 남자의 어떤 몽상에 의해
서도 변형되는 일이 없었다. 수령숭배는 나폴레옹이나 무솔리니나 히틀러의 경우에도,  다
른 것의 숭배는 일체 배제한다. 군국주의적 독재국가나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여자는 이미 
특권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물질적으로 풍족한 시민들이 자기들의 생활에 어떤 의미를 부
여해야 좋을지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여자가 신격화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반대로 모든 인간을 동일시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장차 어떤 인간도 
객체나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예언하고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
에서는 '타가'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택한 군인이나 투사라 할지라
도 그 직업에 만족하는 남자는 극히 드물다. 남자가 개인으로 머물러 있는 한, 그들의 눈
에 여자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나는 독일 병사들이 프랑스의 창녀에게 보낸 편지를 
본적이 있는데, 그 속에서는 나치즘에도 불구하고 독일류의 '푸른 꽃'의 전통이 소박하게 
살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프랑스의 아라공이나 이탈리아의 비토니리와 같은 공
산계 작가들은 작품 속에서 애인이나 어머니 같은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여성의 신화는 아마도 언젠가는 소멸될 것이다. 여성이 인간으로서 자기를 확립함에 
따라 '타자'의 신비적인 특질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아직 이 신화는 모
든 남성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모든 신화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희망과 공포를 '초월'(집에 머물어 있는 여성의 
생활이 '내재'라면, 밖에 나와 일하는 남성의 생활은 '초월'이다.주어진 환경에 안주하는 것
이 '내재'이고 현실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타개하는 것이 '초월'이다)의 하늘을 향해 던
지는 '주체'가 필요하다. 여자는 자기를 '주체'로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의 투기(자
유행사)를 반영하는 남성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여자들은 자기 자신의 종교도 시도 갖
지 못하고 있다. 꿈꾸는 것조차도 남자의 꿈을 통해서 본다. 여자들이 숭배하는 것은 남자
들이 만들어 낸 신들이다. 남자들은 자기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위대한 남성의 모습을 만들
어내었다. 헤라클레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 제우스의 아들), 프로메테이스(그리스신

화에 나오는 영웅, 제우스를 속여 불을 훔쳐 인류에게 줌), 파르치발(중세의 유럽 전설에 
나오는 군인, 수많은 고난을 이기고 왕이 됨) 같은 영웅들의 운명 속에서 여자는 단지 제2
의적인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하긴 여자와 관련하여 생각되는 전형적인 남성상도 있기는 
하다. 아버지, 유혹자, 남편, 질투하는 남자, 효자, 불효자 등. 그러나 이런 전형을 정한 것
도 남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화가 갖는 높은 품격에는 이르지 못한 평범한 전형이다.
  이와는 달리 여자는 오직 남자와의 관계에서만 규정된다. 남녀 양성의 불공평한 성의 신
화의 일방적인 구조 속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다만 '성'이란 말만으로도 여자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프랑스어는 단지 '성'이라는 말만으로 여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육체와 
육체적 쾌락과 위험이 여자이다. 그런데 여자에게 섹스와 육체를 대표하는 것은 남자라는 
진실은 한 번도 밝혀진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외칠 수 있는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그려진 세계의 모습도, 세계 자체와 마찬가지로 남자들이 만들어내었다. 그들은 
세계를 자기들의 관점에서 보고, 그 관점을 절대적인 진리와 혼동하고 있다.
  신화를 설명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신화는 좀처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신화는 사람들의 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고정된 대상으로서 의식의 정면에 떠오르
진 않는다. 신화는 변덕스럽고 모순투성이이고, 쉽게 통일성을 파악할 수 없다. 여자는 데
릴라(삼손을 유혹한 여자)이고, 오디트(적장을 죽인 전형적인 열녀)이고, 아스파지아(고대
의 창녀)이기도 하고, 루크레티아(정숙한 여자의 전형)이기도 하고, 판도라(마녀의 상징)
이기도 하고, 아테네(제우스의 딸, 지혜의 여신)이기도 하다. 또 여자는 이브인 동시에 성
모 마리아이기도 하다. 여자는 우상이기도 하고 하녀이기도 하며,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고 
어둠(악마)의 세력이기도 하다. 여자는 진리의 소박한 침묵인가 하면, 재주꾼이기도 하고 
수다쟁이기도 하고 거짓말쟁이기도 하다. 여자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기도 하고 마법사이기
도 하다. 여자는 남자의 먹이이며, 남자를 파멸시키는 원천이다. 남자가 자신에게 없기 때
문에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 즉 남자의 부정적인 측면이고, 또 남자의 존재이유이기도 하
다.
  키에르케고르(덴마크의 사상가, 20세기 실존주의의 선구자, 1813~1855)는 이렇게 말
했다. "여자라는 것은 참으로 기묘하고 불순하고 복잡한 그 무엇이어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다. 여러 가지로 표현하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여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모순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인생행로의 여려 단계>에서)
  그 원인은 여자를 그 자신으로서의 적극적인 모습으로 고찰하지 않는 데있다. 즉 소극적
으로 남자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고찰하기 때문이다. 여자 이외에도 다른 '타자'가 있다
고 하더라도 여자는 여전히 '타자'로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불투명성은, 
바로 '타자'의 관념의 불투명성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여자를 '타자'와 관련시켜 규정하는 
한, 인간적인 조건이 불투명할 수 밖에 없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타자'란 악을 뜻한
다. 그러나 그것이 선에 필요할 경우에는 선이 된다. 여자는 남자를 통하여 '전체'에 도달
한다. 그러나 여자를 '전체'에서 분리시키는 것도 남자이다. 남자는 무한에의 입구이기도 
하고, 유한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자는 어떤 개념도 구체화하지 못한다. 여자를 
통하여 희망에서 실패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선에서 악, 악에서 선으로의 이행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어떤 각도에서 여자를 보아도 이 상반성이 먼저 눈에 띈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자연'으로서, 또한 같은 인간으로서 '타인'을 찾는다. 그러나 자연은 
남자에게 여러 가지 상반된 감정을 갖게 한다. 남자는 자연을 개발하고 이용하지만, 자연
에 의해 파멸되기도 한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서 죽어간다. 자연은 남자의 
생명의 원천이며, 또 그가 자기의 의지에 복종시키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신을 그 
안에 가두고 있는 물질의 덩어리이고, 또한 최고의 현실이다. 자연은 우연이고, 이념이고, 
유한이고, 전체이다. 자연은 정신에 대립하기도 하고, 정신 그 자체이기도 하다. 자연은 둥
지도 되고 적도 되고, 흡사 생명이 솟아나는 혼돈된 암흑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생명 자체
로 생각되기도 하며, 또 생명의 피안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여자는 '어머니','아내', 그리고 
'이념'으로서 이 자연을 요약하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서로 융합되기도 하고 대립되기도 
하면서 각각 이중의 형태를 갖고 있다.
  남자는 자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는 동물이나 식물과 마찬가지로 태어났으며, 
자기가 사는 데까지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가장이 강력한 권한을 행
사하는 사회가 출현한 후로, '생명'은 그의 눈에 이중의 형태로 보였다. 생명은 의식이고 
의지이며 초월, 즉 정신인 동시에 물질이며 수동성이고 내재, 즉 육체이기도 하다. 아이스
킬로스나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는 올림포스 산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도 
참된 창조자는 남성적인 요소라고 언명했다. 형태나 수, 운동도 남성적 요소에서 비롯되었
다. 데메테르(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에 의해 보리이삭은 자라지만, 보리이삭이 
자라는 원리와 이치는 제우스에게 있다.
  여자의 생식력은 수동적인 능력으로 간주된다. 여자는 흙이고 남자는 씨앗, 여자는 물이
고 남자는 불이다. 창조는 흔히 불과 물의 결합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생물
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뜨거운 습기이다. '태양'은 '바다'의 남편이었다. '태양'이나 불은 남
성신이다. 그리고 '바다'는 대개 모성을 상징한다. 생명이 없는 조용한 물은 타오르는 햇빛
을 받아 비옥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농부의 노동으로 파헤쳐진 대지는 잠자코 그 이랑 
속에 씨앗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대지의 역할은 중요하다. 싹을 키우고 지키고, 그 싹이 자라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대지이다. 그래서 '모신'의 지위가 실추된 후에도, 인간은 계속해서 풍요의 여신들을 
숭배한다. 농작물과 가축의 번영은 키벨레(주피터의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 덕분이다. 이 
여신은 인간이 생명의 은인이다. 인간은 물도 불도 마찬가지로 찬미한다.
  "바다에 영광이 있으라! 거룩한 불꽃으로 에워싸인 바다의 파도에 영광이 있으라! 파도
에 영광이 있으라! 불꽃에 영광이 있으라! 불가사의한 모험에 영광이 있으라!"하고 괴테는
<파우스트(제2부)>에 쓰고 있다. 남자는 '대지'를, 브레이크(영국 시인)가 말한 '대지의 
부인'을 숭배한다.
  인도의 어떤 예언자는 제자들에게 땅을 쟁기로 파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공통된 
어머니를 농사일로 상처를 입혀 갈라지게 하는 것은 죄악이야... 어머니의 가슴을 단도로 
찌를 수 있느냐? 어머니의 살을 뼈까지 벨 수 있느냐? 어떻게 감히 어머니의 머리칼을 자
를 수 있느냐?" 인도 중부의 바이어족도 '쟁기로 자기의 어머니인 대지의 가슴을 파헤치는
' 것을 죄악을 생각했다.
  이와 반대로 아이스킬로스는 오이디푸스 왕에게, 그는 "대담하게도 자기를 만들어 준 거

룩한 이랑에 씨를 뿌렸다."고 말했다. 소포클레스(아이스킬로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2대 
비극시인)는 '아버지의 이랑'이라는 말과 '씨를 뿌리는 계절에 한 번 밖에 찾아오지 않는 
먼 밭의 소유자인 농부'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집트의 어떤 노래 속의 애인(여자)은 "나
는 대지예요!"하고 외친다. 이슬람의 문서 속에선 여자를 '밭... 포도를 영글게 하는 밭'이
라고 부르고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한 찬미가에서 '우리들의 자매인 대지, 우리
를 키우고, 각양각색의 꽃과 초목과 여러 가지 과일을 생산하는 우리의 어머니'에 대해 말
하고 있다. 미슐레(프랑스의 19세기 역사가)는 아키에게 흙탕물에 목욕하면서 "친애하는 
어머니여! 우리는 모두 하나이다. 나는 당신에게서 나와 당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정신'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원하는 생명주의적 낭만주의를 주장하는 
시기도 있었다. 그때에는 대지나 여성의 마술적인 중요성이 남성의 협력작용보다 더 뛰어
나 보였다. 남성은 다시 한 번 모성의 암흑과 혼연일체가 되어 거기에서 자기 생명의 참된 
원천을 찾아보려고 했다. 어머니는 우주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거기서 수액을 빨아올리는 
뿌리이고, 젖과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며. 흙과 물로 된 재생력이 풍부한 진흙이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남성의 태도는 자기 육체의 조건에 대한 반발이다. 그는 자기를 
실격한 신으로 생각한다. 그의 불행은 빛나는 하늘에서 추락하여 어머니의 뱃속 깊숙한 혼
돈된 어둠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저 불꽃, 남자가 그 속에서 자기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능동적이고 순수한 입김을 여자는 대지의 진흙 속에 감춰둔다. 남자는 자기가 '하나', '전
체', '절대정신'과 같은 순수이념처럼 필연적인 것이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는 유한한 육체 
속에, 자기가 선택도 하지 않고 초대를 받지도 않은 장소와 시간속에, 무익하고 거추장스
럽고 부조리한 존재가 되어 갇혀 있다. 육체의 우연성은 존재의 우연성이다. 이것을 남자
는 자기의 고독과 부당한 우연 속에 경험한다. 그것은 그를 죽음에 바치고 있다. 자궁(무
덤처럼 닫힌 은밀한 자궁)속에서 형성되어가는 흐늘흐늘한 아교질은 끈적거리는 썩은 고
기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섬뜩하여 얼굴을 돌리게 한다. 생명이 형성되어가는 장소는 모두, 
발아이든 발효이든 붕괴에 의해 형성되므로 혐오를 느끼게 한다. 단백질의 태는 죽음의 부
태 속에서 완결되는 순환의 시작이다. 우연과 죽음을 싫어하기 때문에 남자는 탄생된]사실
에 혐오를 느낀다. 남자는 자기의 동물적인 인연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출산이라는 사
실에 의해, 파괴적인 '자연'이 남자를 지배하고 있다. 미개인 사회에서는 출산에 대한 것이 
크게 터부시되었다. 특히 태반은 공들여 태워버리거나 바다에 던져야 했다. 태반을 손에 
넣은 자는, 누구나 그 아기의 운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태아를 기른 
태반은 태아가 의존한 증거물이다. 태반을 깨뜨리면 아기는 비로소 자주적인 존재로 살 수 
있다. 출산할 때의 불결은 모체에 파급된다. <레위기>(율법을 기록한 구약성서)를 비롯한 
고대의 법률은, 모두 산모의 정화와 의식이 이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산모의 배나 유모의 
부푼 유방 앞에서 아이들이나 젊은 처녀나 남자들이 엉겁결에 당혹감을 느끼고, 그런 심정
을 냉소로 얼버무리는 경우가 있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다.
  뒤피트랑 박물관에서는 구경꾼들이 무덤이라도 파헤치는 듯한 병적인 호기심으로 밀랍
의 태아나 알코올에 담근 태아를 들여다본다. 사회가 그것을 아무리 감싸더라도 잉태작용
은 사람에게 혐오감을 준다. 그래서 남자는 아기 때에는 어머니의 육체에 관능적으로 애착
을 느껴도, 성장하여 사회에 나가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하면 어머니의 육체

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육체를 무시하려고 하며, 어머니에게서 
정신적인 인격만 보려고 한다. 그가 어머니를 순결한 존재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랑
의 질투심에서가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육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려는 심정 때문이다. 청
년은 친구들과 함께 걸어갈 때, 어머니나 자매나 가족 중의 여성을 만나면 당황하여 얼굴
을 붉히기 일쑤이다. 그 이유는, 그녀들의 모습이 그가 뛰쳐나오고 싶어하는 내재의 영역
으로 그를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그 청년이 거기서 뽑아버리고 싶어하는 뿌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포옹해 주거나 뺨을 비비면 소년이 언짢아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
서이다. 그는 가정을, 어머니를, 그리고 어머니의 가슴을 거부한다. 그는 아테네 여신처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무장하고, 불사신으로 어른의 세계에 나타나고 싶은 것이다. 잉태되
었다는 것, 그리고 출산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숙명적인 저주이며, 그의 존재를 더럽히는 
오점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출생숭배는 언제나 사자숭배와 연
결되어왔다. '어머니의 대지'는 뱃속에 그녀의 자식들의 유골을 삼켜버린다. 인간의 운명의 
실을 짜는 것은 여자들-파르카에(로마신화에서 생사를 주관하는 세 여신)나 모이라이(그
리스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이지만, 그 실을 끊어 버리는 것도 그녀들이다. 전설 속
에서 '죽음'은 대개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죽음은 여자들이 일이므로 죽은 자를 슬퍼
하는 것도 여자가 할 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어머니인 여성'은 암흑의 얼굴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이 거기서 발생하고, 모
든 것이 언젠가는 거기로 돌아가는 혼돈이며, 허무이다. 이 암흑 속에, 낮에 분명히 보였던 
세계의 여러 가지 모습이 자취를 감춰버린다. 물질의 일반성과 불투명성 속에 갇혀 있는 
정신의 밤, 수면과 무의 밤이다. 바다 밑은 암흑이다. 여자는 옛날의 뱃사공들이 두려워했
던 '마음의 심연'이다. 대지의 내부도 암흑이다. 남자를 삼켜버리려고 대기하고 있는, 번식
의 이면인 이 밤은, 남자에게 두렵기 짝이 없다. 남자는 하늘이나 햇빛이나, 햇빛이 반짝이
는 산꼭대기와 푸른 하늘의 수정같이 맑은 냉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발 밑에는 습하고 후
덥지근하고 캄캄한 심연이 그를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다. 많은 전설을 영웅이 동굴이나 심
연이나 지옥과 같은 어머니인 암흑 속에 떨어져 영구히 파멸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상반성이 작용한다. 출생이 언제나 죽음과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죽음
은 또한 다산성과 결부되어 있다. 혐오스러운 죽음은 새로운 탄생도 되어, 그때에는 축복
을 받는다. 죽은 영웅은 오시리스(고대 이집트신화에 나오는 사자의 수호신)처럼 봄마다 
부활하여 새로운 출산에 의해 재생된다며 K. 구스타프 융(스위스의 심리학자, 콤플렉스라
는 개념도 그에게서 나왔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리비도의 변신>에서) "남자의 가장 
큰 소원은 죽음의 검은 파도가 생명의 파도가 되는 것, 죽음과 그 싸늘한 포옹이 어머니의 
무릎이 되는 것이다. 마치 바다가 태양을 삼켜 해저에서 그것을 다시 재생하는 것처럼."
  태양신의 바다에의 몰입과 그 빛나는 재현은 많은 신화에 공통된 테마이다. 그래서 남자
는 살기를 원하면서 또한 그와 동시에 휴식이나 수면이나 허무도 갈망한다. 그는 불멸을 
원치 않는다. 죽음을 사랑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무기물질은 어머니의 품속이다. 생명
에서 해방되는 것은 진실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즉 자기완성이다. 이것을 깨달은 인간
은 무감각한 흙덩이로 돌아가는 것을 축제처럼 즐겁게 생각할 것이다."라고 니체는 쓰고 
있다. 초서는 죽을 수 없는 노인의 입을 빌려 이렇게 기도하게 한다.

  
  지팡이를 짚고 나는 낮이나 밤이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문인 대지를 두드리며 말한다.
  오 어머니여,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주소서.
  
  남자는 자기의 개별적인 실존을 확립하고, 자기의 '본질적인 차이'에 자랑스럽게 안주하
기를 바라지만, 또한 자아의 경계를 타파하여 물과 대지와 밤에, '허무'에, '전체'에 융합하
고 싶어한다. 여자는 남자를 유한성에 가두고 있지만, 여자에 의해 남자는 자기 본래의 한
계를 초월할 수 있다. 여기서 여자에게 주어진 애매한 마력이 생기게 된다.
  어떤 사회에서나, 오늘날까지도 여자는 남자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다. 이것은 남자가 자
기 육체의 우연성에 대해 갖는 두려움을 여자 속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직 미성숙한 
소녀는 아무 위협을 주지 않아, 전혀 터부의 대상이 되지 않고 신성한 성격도 갖지 않는
다. 많은 원시사회에서는 그런 소녀의 성기도 순결한 것으로 생각하여, 남자아이와 여자아
이가 꼬마 때부터 에로틱한 놀이를 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여자가 부정하게 생각되는 것은 아기를 낳을 수 있을 때부터이다. 원시사회에서는 처음
으로 월경이 시작된 날부터 그 소녀를 감시하는 엄격한 터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자가 특히 존경을 받던 이집트에서도 월경기간중에는 줄곧 갇혀 지냈다. 흔히 여자를 지
붕 위에 올라가게 하거나 마을 외곽에 있는 오두막 속에 감금하여, 그 모습을 보거나 몸에 
닿는 것도 금기되었다. 더욱이 월경중인 여자는 스스로 자기 몸에 손을 대어서도 안 된다. 
날마다 이를 잡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 있는 민족 사이에서는, 여자에게 막대기를 주
어 몸을 긁게 한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음식을 만져서도 안 되고, 또 음식을 입에 대는 것
을 금하는 경우도 있으며, 어머니나 자매가 숟가락으로 그녀에게 음식을 먹여주게 했다. 
또한 월경기간에 그녀의 몸에 닿은 물건은 모두 불태워야 했다. 이 첫번째 시련이 지나면 
월경 터부는 어느 정도 완화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엄격했다.
  특히 <레위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몸 안에서 피가 흐르는 여자는 7일 동안 
부정하다. 그 몸은 만진 자는 그날 하루 동안 부정하다. 여자가 잠자는 침대는 모두 부정
하고, 그녀가 앉은 자리도 부정하다. 그녀의 침대를 만진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어야 하며, 그날 하루 그도 부정하다." 이 문장은 임질에 걸린 남성에게 생기는 부정을 
다룬 내용과 같으며, 또한 정화를 위한 의식도 양자가 동일하다. 월경이 끝나면 7일 후에
제사장에게 두 마리의 비둘기를 갖고 가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야 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모권사회에서는 월경이 두 가지 상반작용을 한다고 생각한 점이다. 
월경은 사회활동을 방해하고 생명력을 파괴하고 꽃을 시들게 하고 과일을 떨어뜨리지만, 
반면에 유익한 효능도 갖고 있다. 경수나 마약이나 약제, 특히 외상이나 피하출열을 치료
하는 데 쓰인다. 지금도 일부 인디언 사회에서는, 개천에 출몰하는 도깨비를 퇴치하러갈 
때 월경의 피를 헝겊에 적신 뭉치를 뱃머리에 놓아둔다. 그 피에서 발생하는 기운이 초자
연적인 적을 퇴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스의 일부 도시에서는, 젊은 처녀들
이 자기들의 첫 월경 때의 피가 묻은 속옷을 아스타르테의 신전에 공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가부장제 사회가 출현한 후에는, 여자의 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그 수상한 액체에 
대하여는 불길한 효능만 생각하게 되었다. 플리니우스(로마의 장군, 23~79)는 <박물지>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월경이 시작된 여자는 농락물을 썩게 하고, 화초를 시들게 하
고, 싹을 죽이고, 과일을 떨어뜨리고, 꿀벌을 죽여버린다. 만일 그 여자가 술에 손을 대면 
술은 식초로 변한다. 우유는 시큼해지고...."
  영구의 어떤 노 시인을 이와 비슷한 정서가 담긴 시를 썼다.
  오, 월경이 시작된 여인이여,
  너의 재앙으로부터 자연을 지켜야겠다.
  이와 같은 신앙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갖고 있다. 1878년 영
국 의학협회의 한 회원은 영국 의학회지에 게재한 보고서에서 "월경중인 여자의 손을 만진 
사이 썩는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언명하고, 그 경우에 햄이 썩는 것을 
두 번이나 목격했다고 쓰고 있다. 금세기 초에 북부의 제당공장에서는 영어로 커스라고 부
는 월경중인 여자는 공장에 들어가지 말라는 규칙을 지키고 있었다. 설탕이 검게 변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이공의 아편공장에서는 여자를 고용하지 않는다. 월경의 작용으로 아
편이 변질되어 시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신앙은 오늘날에도 프랑스의 여러 시골에 남아 있다. 음식을 만드는 여자들은 누구
나 자기가 월경중이거나 월경중인 여자가 옆에 있기만 해도 마요네즈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앙주 지방에서 최근에 어떤 늙은 정원사가 그 해에 수확한 능금주를 
지하실에 보관한 후에 주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보냈다. "댁의 젊은 부인이나 여자
손님 주에 월경이 있는 날에는 술을 보관한 지하실 앞을 지나가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부인들 때문에 사과가 발효되지 않으니까요." 이 편지의 내용을 알게 된 한 
여자 요리사는 어깨를 치켜올리고 말했다. "그것(월경) 때문에 능금주가 발효되지 않다니 
말도 안 돼. 그것이 망쳐놓는 것은 비계뿐이야. 월경중인 여자 앞에서 고기를 소금에 절여
서는 안 되지. 썩어버리니까."
  이런 혐오감과 모든 경우에 출혈이 일으키는 혐오감을 혼동하는 것은 속단일 것이다. 피
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신성한 요소이며, 생명과 죽음을 겸한 신비로은 마나(본래는 멜라네
시아 토민의 말로, 초자연적인 힘을 뜻함)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이 침투되어 있다. 
그러나 월경의 고약한 힘은 더욱 독특한 것으로, 그것은 여자를 위태롭게 한다. 샤고족들
은 딸에게 성교육을 할 때, 월경의 피를 조심스럽게 감추도록 가르친다.
  "엄마에게 그런 걸 보여서는 안 돼, 엄마가 죽어버리니까. 친구에게 보여서도 안 돼. 그 
친구들 중에 나쁜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닦은 헝겊을 가져갈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너는 결혼해도 아기를 낳지 못해. 그리고 그 헝겊을 길가나 숲속에 버려도 안 왜. 고약한 
사람이 그것을 나쁜 일에 사용할지도 모르니까. 그 헝겊은 땅 속에 묻어야 해. 피가 아버
지나 형제자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해야 해. 만일 눈에 띄게 되면 그것은 죄가 된단다."
(레비스토로스의 <혈족관계의 원초적 형태>에서 인용) 알레우트족(북태평양 군도의 주
민)은 아버지가 초경중인 딸의 모습을 보면, 그 딸은 소경이나 귀머거리가 될 위험이 있다
고 생각했다. 이 기간중에 여자는 귀신에 씌어 위태로운 힘을 지니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
이다. 일부 원시민족은 월경은 뱀에게 물려서 일어나는 것이며, 여자는 뱀이나 도마뱀과 

수상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월경에는 파충류의 독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레위기>는 월경과 임질을 비슷한 것으로 본다. 여성의 성기의 출혈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수상한 상처라는 것이다. 그리고 비니(19세기 프랑스 시인)도 더러워진 것과 병에 
걸린 것을 동일시하여 "여자, 열두 번이나 더렵혀지는 병든 아이"라고 썼다. 체내의 불가사
의한 연금술의 산물인 여성의 주기적인 출혈은 달의 주기와 묘하게도 일치한다. 달에도 위
험한 변덕이 있다.
  여자의 몸은 유성이나 태양의 운행을 지배하는 무서운 톱니장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
다는 것이다. 별과 조수의 운명을 결정하고, 인간에게 불안한 작용을 하는 우주적인 힘에 
여자가 농락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돋보이는 것은, 월경의 영향이 크림을 
변질시키고 마요네즈를 손상시키고, 발효나 부패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월경은 
깨지기 쉬운 물건을 파괴하고 바이올린과 하프의 줄을 끊게 한다고도 말한다. 특히 월경은 
물질과 생명의 중간 유기물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피이기 때문이라기보
다도 생식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정확한 기능을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생명의 발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고대인은 난자의 존재를 알지 못했으므로 월경을 정자의 
보조물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사실은 이 피가 여자를 부정하게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피
는 여자가 부정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 피는 여자에게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에 
나오게 되며, 이 피가 사라지면 여자는 다시 불임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태아가 형성되는 
뱃속에서 나오는 이 피 때문에 남자는 여자의 출산력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부정한 여자에 고나한 여러 가지 터부 중에서도, 그 여자와의 성교를 일체금지하는 규정
이 가장 엄격했다. <레위기>는 이 규정을 어긴 남자에게는 1주일간의 부정의 형벌이 언
도되었다. 마누법전(고대 인도의 법전)은 더욱 엄격하다. "월경으로 오염된 여자를 가까이
하는 남자는 지혜와 몸과 기력을 크게 잃게 된다." 고행승회는 월경중인 여자와 성교한 남
자에게 보름 동안 속죄를 명했다. 월경중일 때는 여성적인 원소가 최대의 위력을 발휘한다
고 생각했기 때문에, 친밀한 접촉으로 그것이 남성적인 원소를 정복해 버리는 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분명한 자각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남자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여자에게서 무서운 모성적인 본질을 발견하는 것 두려워하고 있다. 남자는 어떻게 해
서든지 여자의 이 양면을 떼어놓으려고 한다. 그래서 이민족과의 결혼이나, 혹은 더욱 현
대적인 형태로 근친상간을 금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으로 되어 있다. 월경중이거나 임신
중, 혹은 수유기간중과 같이 특히 여자에게 생식의 역할을 하게 되어 있는 시기에는 남자
가 여자를 성적으로 멀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설명에는 어느 정
도의 수정이 필요하지만, 이런 태도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것을 밑받침하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경계하는 것은, 여자가 뭐라고 파악하기 어려운 세계의 애매한 원천 
또는 생명의 불가해한 생명의 일면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주나 신들과 일단 분리된 사회가 그것들과 연결될 수 있는 것도 여성의 이
런 성격에 의해서이다. 오늘날에도 베두인족이나 이로쿼이족에서는 전답을 수확하는 역할
을 여자가 담당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자는 땅속의 소리를 듣고, 바람이나 나무
의 말을 포착했다. 여자는 무당이나 점쟁이나 예언자였다. 죽은 자나 신들은 여자의 입을 
통해 말한다. 오늘날에도 여자는 이런 능력을 갖고 있어서 영매사, 수상가, 카드 점쟁이, 

예언가, 신을 영접한 자가 되기도 한다. 여자는 사물의 소리를 알아듣고, 유령을 본다. 남
자가 식물적 또는 동물적인 생명의 품속에 뛰어들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에는, 예컨대 힘
을 되찾기 위해 대지를 만진 안타이오스(포세이돈과 대지의 아들. 헤라클레스는 그와 싸울 
때, 그를 땅에 집어던져 그의 어머니인 대지와 그가 접촉하게 될 때마다 전보다 더 큰 힘
을 얻게 되는 것을 알고 그를 들어올려서 죽였다고 함)처럼 여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리스나 로마의 합리주의적인 문명시대에도, 지하의 신들에 대한 숭배는 계속되었다. 
평소에는 공적인 종교생활과는 별도로 그것들을 숭배했으며, 엘레우시스(고대 그리스의 신
비극)의 경우처럼, 비의의 형태를 취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것들이 갖는 의미는, 독립과 정
신에의 의지를 강조하는 태양숭배가 갖는 의미와 정반대이지만, 한편으론 그것을 보충하는 
것이다. 남자는 황홀에 의해 자기의 고독에서 탈출을 시도하므로, 거기에 신비극이나 주신
제의 목적이 있다.
  남성들에 의해 정복된 세계에서는 남성적인 신인 디오니소스가 이슈타르나 아스타르테
가 갖고 있던 원시적인 마력을 빼앗아버렸으나, 그래도 그의 주의에는 많은 여성이 날뛰고 
마이나스나 튀나스, 박케(이들은 술의 신 박카스의 제식에 참가했던 여승들이다)는 남자들
을 종교적인 도취로, 성스러운 광기로 몰아넣었다. 신전에서 벌어진 매음행위의 역할도 유
사한 것이다. 생식력을 폭발시켜 소통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오늘날에도 민간축제의 특
징은 색욕의 해방이다. 거기서 여자는 쾌락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각자가 자기를 초월하
여 열광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존재가 자기의 내부에 소유하고 있는 잃
어버린 비극적인 것, '눈부신 기적'은 침대 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고 바타유는 쓰고 
있다.
  색욕의 해방에서, 남자는 애인을 포용하고 육체의 무한한 신비 속에 빠져들려고 한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남자의 정상적인 성욕은 '어머니'를 '아내'
에게서 격리시킨다. 남자는 생명의 불가해한 연금술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그 자
신의 생명은 대지의 향기로운 산물을 달게 먹으면서 살고 있다. 남자는 그런 것들을 자기 
소유로 삼고자한다. 남자는 물속에서 나온 비너스(미와 사랑의 여신)를 탐낸다.
  가부장제도가 시행되는 사회에서는, 최고의 창조주는 남성이므로 여자는 먼저 아내의 모
습으로 나타난다. 인류의 어머니이기 전에 이브는 아담의 배우자이다. 남자에게 여자가 주
어진 목적은, 남자가 땅을 소유하여 경작하는 것처럼, 그녀를 자시 소유로 하여 수태시키
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통하여 자연을 자기 영토로 만든다. 남자가 성행위
에서 요구하는 것은, 오직 주관적인 잠깐의 쾌락만이 아니다. 남자는 정복하고 불잡고 소
유하기를 원한다. 남자에게 여자를 갖는다는 것은 그녀를 정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는 
보습이 밭이랑에 파고드는 것처럼 그녀 속에 파고든다. 그리하여 자기가 경작하는 땅을 자
기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여자를 자기것으로 만든다. 경작하고, 심고, 씨를 뿌리는 비유는 
문자와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있었다. 그 예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무수히 많다. "여자는 밭
이고 남자는 씨앗이다."하고 마누법전은 말하고 있다. 앙드레 마농의 그림 중에, 남자가 삽
을 손에 들고, 여자의 성기인 뜰을 파는 것이 있다.
  남자가 공포와 욕망 사이, 즉 정체불명의 힘에 사로잡힌다는 공포심과 그 힘을 사로잡으
려는 의욕 사이에서 망설이는 모습은, '처녀성'에 관한 여러 가지 신화 속에 분명히 반영되

어 있다. 때로는 남성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때로는 바라고 요구하는 처녀성은, 여성
이 지닌 신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가장 불안하면서도 가장 매혹적
인 것이다. 남자가 자기를 에워싼 힘에 압도되는 느낌을 갖느냐, 혹은 그런 힘을 자랑스럽
게 굴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느냐에 따라서, 아내가 처녀로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
을 싫어하기도 하고 바라기도 한다. 극히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여자의 위력이 크게 생각되
었기 때문에, 두려움 쪽이 우세했다.
  그래서 여자는 결혼 첫날밤 이전에 처녀를 상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마르
코 폴로는, '티베트인은 아무도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처녀배척에 대해서는 흔히 합리주의적인 해석을 해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남자의 성욕
을 자극한 적이 없는 아내는 남자가 원치 않는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아랍의 지리학자인 
엘 베크리가 슬라브인에 대해 보고한 바에 의하면, "남자는 결혼하여 여자가 처녀인 줄 알
게 되면 아내에게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여자로서의 가치가 있었다면, 지금까지 당신을 좋
아하여 처녀성을 빼앗은 남자가 한 사람쯤은 있었을게 아냐'하고 말하며 그 아내를 쫓아낸
다."고 한다. 일부의 미개인은 이미 어머니가 된 경험이 있어서, 이로 말미암아 생식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 여자하고만 결혼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널리 퍼진 처녀회피의 습관이 생기게 된 진정한 동기는 더욱 신비스런 
것이다. 어떤 종족은 여자의 질 속에는 뱀이 한 마리 살고있으며, 처녀막이 찢어질 때 남
편의 성기를 깨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녀막의 출혈은 월경의 피와 마찬가지로 남성의 
정력을 파괴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여, 무서운 위헙을 여기에 결부시키고 있다. 이
런 상상을 통해서 여성적인 요소는 그것이 자연 그대로일수록 더 큰 위력과 피해를 내포
하고 있다는 사고방식이 나타났다. 
  처녀성의 상실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 예를 말리노프스키가 쓴 글에서 찾
아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토민들은 어렸을 때부터 성의 유희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딸
들 중에서 처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때로는 어머니나 언니 또는 나이든 여인이 
일부러 딸의 처녀성을 빼앗아 소녀시절에 질구를 넓히는 경우도 있다. 또는 성숙기에 도달
했을 때 나이든 여자들이 막대기나 뼈나 돌로 질을 넓히는데, 그것을 외과수술쯤으로 생각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다른 종족은 딸이 사춘기가 되면 거친 성교육을 강요한다. 남자들은 그녀를 마을
에서 끌어내어, 도구를 사용하거나 폭력을 사용하여 처녀성을 빼앗는다. 가장 자주 행하는 
의식의 하나는 길을 가는 이방인에게 처녀를 맡기는 방법이다. 이것은 그 부족의 남자에게
만 위험한 마나(초자연적인 힘)에 이방인은 그다지 민감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
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고, 그 마나의 화를 자기들이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음에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승려나 의사, 추장 또는 부락의 우두머리가, 결
혼식 전날밤에 신부의 처녀성을 빼앗는 방법이다. 말라바르 연안에서는 이 역할을 바라문 
승려가 맡는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의무적으로 이를 실행하여 많은 수고비를 요구한다. 
모든 신성한 물건들은 속인에게는 위험하지만, 그 자신이 신성화된 인간은 위험 없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경계해야 하는 해로운 힘을 승려나 족장
이 제압할 수 있는 이유도 납득이 간다.

  로마에는 이런 풍습이 상징적인 의식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프리아포스신 석상의 
음경 위에 신부를 앉히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신부의 생식력을 높이고, 그녀의 내부
에서 너무 강하게 솟아나 오히려 해로운 액체를 흡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밖에 남편은 
또 다른 방법으로 자기 몸을 지킨다. 자기가 신부의 처녀성을 빼앗되, 이 위험한 순간에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의식을 통해서 행동으로 옮긴다. 예를 들면 마을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막대기나 뼈조각을 사용하여 처녀성을 빼앗는다. 사모아에서는 흰 헝겊을 감
은 손가락을 사용하여, 피로 물든 그 헝겊을 구경꾼들에게 나눠준다. 남편이 제대로 아내
의 처녀성을 빼앗는 것이 허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때에도 정자가 피에 오염되지 않도록 
3일이 지나기 전에는 아내의 체내에 정액을 사정해서는 안 된다.
  신성한 행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역기능 때문에, 좀더 개화된 사회에서는 이런 피가 적
당한 상징의 역할을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결혼식이 끝난 이튿날 아침에, 친족
이나 친구들 앞에 피가 묻은 시트를 내보이는 마을이 있다. 이것은 가부장제도의 사회에서 
남자가 여자의 지배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위협하는 짐승의 거친 성질은, 그것을 길들일 줄 아는 주인에게 소중한 가치가 
된다. 인간은 야생마의 혈기나 번개나 폭포의 맹위를 자기의 번영을 위한 도구로 바꾸었
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자는 여자가 지닌 모든 것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바란다. 
젊은 딸에게 부과하는 순결의 계율은 확실히 합리적인 동기에서였다. 아내에게 정조를 요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약혼녀의 순결도 아버지가 자기 재산을 남의 자식에게 넘겨줄 위
험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아내를 자기의 재산으로 간주할 경우에, 처녀성을 요구하는 것은 더욱 직
접적인 이유에서이다. 첫째로 소유라는 관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은 어느 누구도 결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 그래서 소극적인 방법으로 소
유하려고 한다. 어떤 재산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남에게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에게 있어 아직 어느 누구의 소유도 도지 않은 
것처럼 바람직하게 생각되는 것은 없다. 이 경우에 정복은 유일하게 절대적인 사실로 보이
지 때문이다.
  처녀지는 언제나 탐험가들의 마음을 끈다. 이전에 아무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산악
을 정복하려고 하며, 그 산중턱에 새로 길로 내기 위해 해마다 여러 명의 등산가가 목숨을 
던지기도 한다. 또한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아무도 들어가본 적이 없는 지하동굴로 목숨
을 걸고 들어간다. 남자들이 이미 정복한 물건은 하나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자연과의 연
결이 끊어지면, 그것은 가장 뛰어난 효능을 잃게 된다. 사나운 급류는 거리의 광장에 있는 
분수의 물보다 많은 기대를 갖게 한다. 처녀의 육체에는 지하를 흐르는 샘의 싱싱함이 있
고, 피지 않은 꽃봉오리의 새로움이 있고, 햇빛을 받은 적이 없는 진주의 광택이 있다. 동
굴이나 신전, 비원 등은 아직 어떤 의식도 없이 영혼이 부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두운 
장소이므로, 남자는 아이들처럼 이에 매혹된다. 자기만이 손에 넣고 뛰어들 수 있다는 것
은, 자기가 창조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모든 욕망이 추구하는 목적의 하나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소멸시키려는 것이며, 거
기에는 파괴정신이 포함되어 있다. 남자가 여자의 처녀막을 파괴하면, 그것을 그대로 두고 

침입하는 것보다 더욱 친밀하게 여자의 육체를 소유하게 된다. 이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작
용으로, 그는 상대방을 분명히 수동적인 대상으로 삼고, 확실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 
의미는, 아직 아무도 그 향기를 맡아본 적이 없는 장미꽃을 꺾기 위해 가시덤불 속을 애써 
헤치고 들어간 기사의 전설에 잘 나타나 있다. 기사는 장미꽃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줄기
를 꺾는다. 이렇게 해서 그것을 정복한 것이 된다. 이 비유는 대단히 분명하여 속어로 '꽃
을 꺾는다'고 말하면 여성의 처녀성을 빼앗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표현에서 'defloration'
(처녀성 상실, 또는 낙화라는 의미)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처녀성은 젊음과 결부되지 않으면 이런 색정적인 매력을 갖지 못한다. 그렇지 못
하면 그 신비성은 다시 불안한 것이 되고 만다. 오늘날 많은 남자들은 결혼이 너무 늦은 
처녀에 대해 일종의 성적 반발을 느낀다. '올드 미스'를 까다롭고 심술궂은 아주머니처럼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저주는 그녀들의 육체 자체 속에 
있다. 어떤 주체의 대상도 되지 않고, 어떤 욕망도 탐내지 않았으며, 남자들의 세계에 의해 
끝내 그 위치가 발견되지 않은 채 꽃을 피우고 시들어버린 육체, 목적지에서 벗어난 그 육
체는 미친 사람의 전달 불능의 사고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사람을 불안하게 만
든다. 처녀로 짐작되는 아직 아름다운 사십대의 여자를 두고, 한 남자가 "저 속에는 거미
줄을 잔뜩 치고 있을 테지..." 하고 천한 비평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사람이 
출입하지 않는, 아무것으로도 사용되지 않는 지하실이나 곳간은 불결한 신비에 가득차게 
된다. 유령 따위가 나타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버림을 받으면 집은 폐가가 된다. 
여자의 처녀성은 신에게 바쳐지지 않으면 악마와 결합되어 있다고 보이기 쉽다. 남자의 지
배를 받지 않은 처녀나 남자의 권력에서 벗어난 늙은 여자는, 다른 여자보다 마녀처럼 보
이기 쉽다. 즉 어차피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바쳐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으므로, 만일 그
녀가 남자의 속박을 얌전히 감수하지 않을 경우에는, 악마의 속박을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
이다.
  꽃을 꺾는 <처녀성의 상실의> 의식에서 악마를 쫓아내거나 반대로 처녀성에 의해 정화
되면, 배우자에게 바람직한 먹이로 보일 수도 있다. 이 여자를 품에 안음으로써 사랑하는 
남자는 생명의 모든 보물을 손에 넣기를 원한다. 남자에게 그녀는 지상의 생물의 전부이며 
꽃의 전부가 된다. 그녀는 영양이며, 사슴이며, 백합이며, 장미이며, 솜털이 이는 복숭아이
며, 향기로운 딸기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보석이며, 나전이며, 마노이며, 진주이며, 명주이
며, 푸른 하늘이며, 싱싱한 샘이며, 맑은 공기이며, 불꽃이며, 땅이며, 물이다. 동서양을 불
문하고 시인들은 모두 여체를 꽃이나 과일, 또는 새로 변형시키고 있다.이에 대해서도 고
대.중세.근대에 걸쳐 예를 들려고 하면, 한 권의 두꺼운 시집이 될 것이다. 유명한 <아가>
속에서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렇게 외친다.
  
  그대의 눈은 새끼비둘기와 같고...
  그대의 머리칼은 염소의 무리와 같고...
  그대의 이는 털을 깎은 양의 무리와 같고...
  그대의 뺨은 석류 열매와 같고...
  그대의 두 유방은 두 마리의 어린 사슴과 같고...

  그대의 혀는 벌꿀과 우유 맛이 난다.
  
  <비법 17>에서 앙드레 브르통(프랑스의 시인, 현실주의의 창시자, 1896 ~ 1966)은 
이 영원한 '아가'를 노래하고 있다.
  "두 번째 외쳤을 때의 멜뤼신. 그녀는 가느다란 허리에서 솟아오르는 듯이 일어난다. 그
녀의 아랫배에는 8월의 보리가 풍요롭게 물결치고, 상체는 제비 날개의 곡선 같은 허리의 
선에서 불꽃처럼 튀어오르고, 그녀의 가슴은 자신의 부르짖음에 놀라고, 타는 듯한 입에서 
작열하는 숯불에 비쳐져 눈이 먼 담비와 같다. 그리고 양팔은 노래부르면서 향기를 뿜는 
시냇물의 넋이다..." 남자는 여자 위에서 빛나는 별과 잠긴 달을, 햇빛과 동굴의 어둠을 다
시 발견한다. 그래서 여자는 덤불 속의 찔레나무이기도 하고, 정원의 탐스러운 장미이기도 
하다. 님프와 숲속의 여신, 바다의 마녀, 물의 정령이나 천사는 들과 숲.호수와 바다 등에 
거주한다. 이와 같은 정령신앙은 남자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뱃사람들에게 
바다는 위험하고 배신하며 다루기 어렵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애정을 느끼는 여자와 같
다. 교만하고 반항적이고 순결하고 짓궂은 산악은, 목숨을 걸고 그것을 정복하려는 등산가
에게 여자와 같다.
  이런 비유는 성적 승화의 표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여자와 자연 사이
에는 성욕 자체만큼이나 근원적인 친밀성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남자는 여자를 소
유하는 데서 본능의 만족 이외의 다른 무엇을 기대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가 '자연'을 정복
하는 중간대상으로서의 가장 적합하다. 여자말고 다른 것이 이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남자가 젊은 동성자의 육체에서 해변의 모래나 밤의 포근한 감촉, 인동덩굴의 향기
를 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지의 육체적 소유를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성적 행위에 국
한되어 있지 않다. 슈타인벡은 그의 소설 <미지의 신에게>에서, 자기와 자연 사이의 중개
자로서 이끼낀 바위를 택한 한 남자를 보여준다. 콜레트가 <암코양이>에서 묘사하고 있
는 젊은 남편은 귀여워하는 암코양이에게 애정을 쏟는다. 그 이유는 야생적이고 얌전한 동
물을 통하여 너무나 인간적인 아내의 육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세계에의 실마리를 찾
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는 여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바다나 산에서도 완전하게 구
현될 수 있다. 그것들은 남자에게 한결같이 수동적인 저항을 하여, 남자에게 자기를 성취
하는 기회를 준다. 그것은 결국은 굴복당할 거절이며, 손에 넣을 수 있는 먹이이다. 바다와 
산이 여자라면, 그것은 여자도 또한 상대방 남자에게는 바다나 산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남자와 세계의 매개역할이 어떤 여자에게나 허용되어 있는 것은 아니
다. 남자는 상대에게서 자기의 생식기관의 보조적 기관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상대인 여자가 생명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 불가해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
야 한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무엇보다도 젊음과 건강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생명을 품에 안을 때, 남자는 모든 생명엔 죽음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는 열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욕심꾸러기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자가 미인이기를 원한다. 여성미의 이상은 
변하지만, 몇 가지 요구는 변치 않는다. 특히 여자는 운명적으로 누군가에게 소유되게 마
련이므로, 그 육체는 확고하게 수동적인 특성을 보여줘야 한다. 남성미는 능동적인 작용에 

적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체력.순발력.유연성이다. 그것은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되는 육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초월'의 표현이다. 여성의 이상이 이처럼 되는 것은, 스파르타나 파시스
트의 이탈리아, 나치의 독일에서처럼, 여자를 국가의 목적을 위해 제공할 뿐 개인의 목적
을 위해 제공하지 않으며 여자를 주로 모성으로만 생각하고 에로티시즘을 인정치 않는 사
회에서이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에게 재산이 될 경우에 남자가 요구하는 것은, 여자의 육체가 순수한 
사실성(상황)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자의 육체는 주체성의 구현으로 파악되지 않고, 내
재성 속에 고정된 하나의 물체로 파악된다. 그 육체는 세계의 다른 부분에 작용해서는 안 
되며, 자기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의 기대가 되어도 안 된다. 즉 그 욕구를 억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여자에의 요구가 가장 소박하게 나타난 것이 호텐토트족에서 볼 수 있는 미
인의 이상형이다. 그들은 둔부가 커야 미인으로 여긴다. 둔부는 육체에서 가장 둔감한 부
위, 즉 목적 없이 주어진 육체의 한 부위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동유럽인이 뚱뚱한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무 의도도 없이 단지 거기 있다는 것밖에는 의미를 지니지 
않는데도 지방이 발달된 그 부조리한 사치가 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형태나 조화의 관념이 개입되어 있는 가장 세련된 감각을 지닌 문명사회에서도, 흉부와 
둔부는 그 발달의 무목적성과 우연성 때문에 특별한 대상으로 남아 있다. 때때로 풍습이나 
유행은 여성의 육체를 초월(어떤 범위 안에 머무르는 것이 '내재'이고 그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초월'이다)에서 강제로 떼어놓는 데 주력해 왔다. 전족을 한 중국 부인은 제대로 걸
어다니지 못하고, 할리우드 영화스타의 매니큐어를 한 손톱은 그녀의 손을 자유롭게 움직
일 수 없게 하고, 하이힐이나 코르셋, 패니어(살을 넣어 둥글게 퍼지게 한 스커트)나 퍼싱
케일(고래뼈의 테를 넣어 펼친 스커트)은 여체의 곡선을 강조하기보다는 그 무능력을 높
이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너무 비대하여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거나 또는 반
대로 너무 여위어 힘든 일을 하지 못하거나, 불편한 옷이나 예의범절에 의해 마비상태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 여자는 남자의 눈에 자기 소유처럼 보이는 것이다. 화장이나 보석류
도 육체나 얼굴의 화석화에 일조를 한다. 장식품의 역할은 대단히 복잡하여, 일부 미개인 
사이에서는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역할은 여자를 우상으로 변형
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애매한 우상이다. 남자는 그것이 육체로 되어 있기를 원한다. 그 아
름다움은 꽃이나 과일과 같은 아름다움이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또한 조약돌처럼 매끄럽고 
딱딱하고 오래 가야 한다. 장식품의 역할은 여자를 더욱 자연과 비슷하게 하는 동시에, 여
자를 자연에서 떼어놓는다. 즉 약동하는 생명에 인공으로 굳어버린 필연성을 부여하게 된
다.
  여자는 몸에 꽃이나 모피.보석.패각.깃털을 뒤섞어, 자신을 초목이나 표버.다이아몬드나 
진주층으로 만든다. 장미나 백합과 같은 향기를 발산하기 위해 자기 몸에 향수를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깃털이나 명주.진주.향수는 그녀의 육체와 체취에서 발산시키는 동물적인 생
기를 감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는 입술이나 뺨을 붉게 칠하여 가면의 확고부동성을 
부여한다. 그 눈동자는 짙은 마스카라에 에워싸여 이미 이상하게 반짝이는 장식물에 불과
하다. 엮어지고 지져지고 매어진 머리칼은 그 은밀한 식물적인 신비로움을 잃게 된다.
  장식된 여자 속에 '자연'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미 남자가 원하는 대로 인간의 의지에 

의해 개조된 것이다. 여자에게서 자연이 충분히 개화하고, 그 자연이 엄격히 억압되어 있
을수록 바람직하다. 부자연스러운 인공적인 여자가 언제나 욕정의 이상적인 대상이 되어왔
던 것이다. 구르몽은 여자의 머리칼은 시냇물이나 초원의 풀처럼 자연 그대로 물결치게 하
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시냇물의 물결이나 이삭의 파도처럼 애무할 수 
있는 것은 베로니카 레이크(미국의 영화배우, 긴 금발이 매력적이었다)와 같은 여자의 머
리이지, 실제로 자연 그대로의 더벅머리가 아니다.
  여자가 젊고 건강할수록, 신선하고 윤기있는 육체가 영원히 싱싱하게 보일수록 기교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래도 역시 남자가 포옹하는 이 먹이의 육체적 약점과 그 육체를 노
리고 있는 파괴를 남자의 눈에서 숨길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의 우연적인 숙명
을 두려워하고 변함없는 필연적인 모습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여자의 얼굴이나 몸매에서 
하나의 엄격한 이상을 추구한다.
  미개인 사이에서는 이 이상은 단지 일반적인 형태의 완성에 불과하다. 두터운 입술과 납
작한 코를 가진 민족은 두터운 입술과 납작한 코를 가진 비너스를 만들어낸다. 문화가 발
달되면, 더욱 복잡한 미학의 기준이 여자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어쨌든 여자의 용모나 몸
의 균형이 조화를 이룰수록 그 여자는 자연적 산물의 변화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남자를 기쁘게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묘한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즉 여자에
게서 자연, 그러나 변형된 자연을 파악하길 원하면서도 남자는 오히려 여자를 인공에 맡긴
다. 여자는 자연물일 뿐만 아니라, 또한 반자연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기퍼머나 탈모크림
이나 브래지어의 문명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고지대의 흑인국가나 중국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에서 그렇다. 스위프트(<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1667 ~ 1745)는 셀리아에
게 바친 유명한 시에서 이러한 기만을 고발했다. 그는 바람을 피우는 여자의 화장도구를 
불쾌하게 묘사하여, 그 육체의 동물적인 예측을 신랄하게 혹평하고 있다.
  그러나 스위프트가 분개하고 있는 것은 이중으로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
가 동물이나 식물인 동시에, 인공적인 틀 위에 숨어 있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가 파도 사이에서 올라올 때나 양장점에서 나올 때, 알몸으로 있을 때나 옷을 입고 있
을 때나 모두 좋아한다. 즉 인간세계에서 만나는 그대로, 스커트 밑에 알몸이기를 원한다. 
도시의 인간은 여자에게서 동물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입대한 시골 젊은이에게는 매음굴이 
도시가 지닌 매력의 전부이다. 여자는 들에도 있고 목장에도 있지만, 동시에 바빌론(문화
가 퇴폐한 대도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여자의 최초의 거짓이고 최초의 배신이다. 그것은 생명 자체의 배
신이기도 하다. 생명은 아무리 아름다운 외형을 지녀도, 언제나 노쇠와 죽음의 씨앗을 지
니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부리는 것 자체가 여자의 가장 소중한 장점을 파괴하게 마련이
다. 출산의 무거운 짐으로 여자는 성적 매력을 잃게 된다. 아기를 낳지 않더라도 갱년기가 
어면 매력이 사라진다. 병들거나 못생겼거나 늙은 여자는 배척을 받았다. 그런 여자를 가
리켜 식물처럼 시들었다거나 쭈그러졌다고 말한다.
  물론 남자에게도 노쇠는 기분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남자는 다른 남자를 육체로서 
경험하지 않고, 또 그런 자주적인 다른 육체와는 추상적인 연대성만을 갖는다. 때문에 남
자가 육체의 퇴화를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은, 자기에게 운명이 걸려 있는 여자의 육체에서

이다. 비용(프랑스의 시인, 1431 ~ 1463)의 <투구상인의 아름다운 아내>에선 남성의 
적의에 찬 눈을 통해서 자기 육체의 노쇠를 바라본다. 늙은 여자나 못생긴 여가는 매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섞인 증오감을 준다. 그런 여자에게서는 '모성'의 불안한 모습
이 엿보이고 '아내'의 매력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아내'도 위험한 먹이임에는 틀림이 없다. 탐스런 금발에서 물방울을 튀기면서 파
도 사이에서 나타나는 비너스에게도 데메테르 여신(대지의 여신)은 살아 있다. 남자는 여
자에게서 얻는 쾌락을 통하여 여자를 자기 소유로 삼으면서, 그녀 속의 생식력을 각성시킨
다. 남자가 여자에게 침입하는 곳과 여자가 아기를 낳는 곳은 같은 기관이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도 남성은 참으로 많은 금기에 의해 여성의 성기의 위협에서 보호받고 있다. 그 
반대도 반드시 진실은 것은 아니다. 여성은 남성을 두려워할 아무 이유도 없다. 남성은 속
되고 종교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남근이 신의 위엄으로까지 추앙되는 경
우는 있지만, 남근숭배에는 공포의 요소가 조금도 보이지 않으며, 일상생활에서 여자가 그
것으로부터 신비적으로 보호를 받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여자에게 적합한 것뿐이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것은, 많은 모권사회에서는 대단히 자유로운 성생활을 했으나, 그것
은 단지 여자의 유년시절이나 소녀시절에서처럼, 성교가 생식의 관념과 결과되지 않는 기
간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말리노프스키는 <독신자의 집>에서, 자유롭게 동침하는 
젊은이들이 자기의 정사를 예사로 과시한다고,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이 경우에 
미혼녀는 임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성행위는 태연스럽게 할 수 있는 안전
하고 비종교적인 쾌락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단 결혼하면, 남편은 남이 보는 앞에서 아내
에게 전혀 애정의 표시를 해서는 안 되고, 손으로 만져서도 안 되며, 두 사람의 친밀한 관
계를 암시하는 행동은 일체 모독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여자는 어머니라는 두려
운 존재가 되고, 성교는 하나의 신성한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후로 이 행위는 금단과 
경계로 에워싸이게 된다. 그래서 밭을 갈 때나 씨를 뿌릴 때나 묘목을 심을 때에도 성교는 
금지된다. 그 이유는 풍요로운 수확, 즉 공동체의 복지에 필요한 힘이 개인의 성교로 낭비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풍요와 결부된 힘에 대한 경의에서 그것을 절약하도록 명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절제는 남편의 정력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남자가 사냥을 나
가거나 전쟁준비를 할 때에는 절제가 요구된다. 여자를 가까이하면 남성적인 정력이 약화
되기 때문에, 남자는 자기의 전력을 필요로 할 때에는 언제나 성교를 피해야만 했다. 남자
가 여자에 대해 느끼는 공포심은, 일반적인 성관계의 공포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거나 그 반
대의 경우라고 생각된다. 특히 <레위기>에서 여자와는 무관한데도 몽정을 부정한 것으로 
보고 있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현대사회에서도 소음은 위험시하고 죄악시한다. 그래서 
많은 청소년들이 불안을 느끼면서 그것을 행하고있다. 고독한 쾌락을 악덕으로 간주하는 
것은 사회, 특히 부모의 간섭이다. 그러나 최초의 사정에 대해 스스로 놀라는 젊은이도 적
지 않다. 피든 정액이든 자기의 실질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불안한 것이다. 자기의 생명, 자
기의 마나<초자연적 능력>가 자기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주관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통하지 않고 색욕을 체험 할 수 있더라고, 객관적으로는 남자
의 성욕 속에 여자가 포함되어 있다. 플라톤이 양성구유의 신화에서 말한 것처럼, 남자의 

육체구조는 여자의 그것을 예상하고 있다. 설사 여자가 실제로, 혹은 상상중에 주어져 있
지 않은 경우에도, 남자는 자기의 성을 발견함으로써 여자를 발견하게 된다. 거꾸로 말하
면, 남자가 여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성본능의 육체화로서이다.
  현실체험의 내재적인 면과 초월적인 면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다. 내가 두려워하거나 원
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나 지신의 실존의 여러 가지 모습이다. 그런데 무엇이건 내가 아닌 
것을 통해서만 내게 일어난다. 몽정이나 음경의 발기 등에는 분명한 여자의 모습은 아니더
라도, 적어도 '자연'이나 '생명'의 형태로 비자아가 포함되어 있다. 남자는 자기가 아닌 것
에서 마술에 걸려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여자에게 보여주는 상반성은, 자
기의 '성'에 대한 그의 태도-그것을 과시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하고,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는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남자는 자기의 페니스를 친구의 그것과 도전적으로 비
교하기도 한다. 최초의 발기는 그에게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두려움도 느끼게 
한다.
  성인이 된 남자는 성기를 초월과 권력의 상징으로 본다. 그는 그것을 튼튼한 근육처럼 
자랑하는가 하면, 한편 마법의 선물이라도 되는 듯이 자랑한다. 그것은 하늘이 준 특혜가 
지닌 우연한 자유이며, 자유로이 성취된 특혜이다. 남자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이런 
면에서이다.
  그러나 남자는 거기에 숨겨진 술책을 알아차린다. 남자는 성기에 의해 자기를 내세우려
고 하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성기는 충족되지 않은 정욕에 시달리고, 갑자기 발기
하고, 때로는 꿈속에서 자위한다. 그것은 괴상하고 변덕스러운 생명력을 발휘한다. 남자는
 '정신'으로 '생명'을 이기고, 능동성으로 수동성을 이기려고 한다. 그의 의식은 자연을 멀리
하고, 그의 의지는 자연을 마음대로 조형한다. 그러나 그는 성의 양상을 통해 자기속에서 
생명과 자연과 수동성을 재발견한다.
  "생식기는 의지의 참된 중심이며, 그 반대의 극은 두뇌이다."하고 쇼펜하우어는 쓰고 있
다. 여기서 그가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고뇌와 죽음이 따르는 삶에의 집착이다. 그리고 두
뇌란 삶을 관념화함으로써 삶에서 해탈하는 사고력을 가리킨다. 그에 의하면, 성에 대한 
수치심은 인간이 자기들의 어리석은 육체적 집착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그의 학설이 지
닌 독특한 염세주의 사상에는 동의 할 수 없지만, 성과 두뇌의 대립관계 속에서 인간의 이
원성을 발견한 것은 인정할 만하다.
  인간은 주체로서 세계를 설정하고 자기가 설정한 우주 밖에 머물러서, 그 지배자가 된
다. 만일 그가 육체로서 또는 성으로서 자기를 파악한다면, 그는 이미 자율적인 의식이나 
투명한 자유를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세계속에 휘말려서, 멸망해야 할 한정된 대상이 되어
버린다. 생식행위는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지만, 동시에 한계를 만들기도 한다. 페니스는 생
식의 아버지로서 생식의 어머니인 자궁과 대조를 이룬다. 여자의 뱃속에서 새로운 싹으로 
나온 남자는 자기 자신도 그 싹을 지니고 있으며, 생명을 제공하는 종자에 의해 자기 자신
의 생명이 부인되는 것이다. "아기의 탄생은 부모의 죽음이다." 하고 헤겔은 말했다. 사정
은 죽음의 약속이며, 개체를 부정하고 종을 확립하는 것이다. 성기의 존재와 그 활동은 주
체의 자랑스러운 개성을 부정한다.
  이와 같이 생명에 의한 정신의 부정은 성을 파렴치한 대상으로 만든다. 남자는 페니스를 

초월과 활동으로서, '타자'를 지배하는 방법으로서 파악하고, 그 정도에 따라 그것을 찬양
한다. 그러나 페니스를 통해 자기가 '생명'의 불가해한 힘에 농락되는 수동적인 육체에 불
과하다고 생각될 때, 남자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이 수치심은 아이러니컬하게 위장되
기 쉽다. 남의 성기는 흔히 웃음을 자아낸다. (페니스의) 발기는 의지적인 동작을 닮고 있
지만 사실은 수동적이므로, 때때로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그래서 생식기의 형태를 떠올리
기만 해도 우스워진다.
  말리노프스키의 말에 의하면, 그가 함께 생활한 미개인들은 치부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
만으로도 깔깔대며 웃었다고 한다. 외설스럽거나 추잡한 농담도 대개 이런 유치한 말의 유
희와 큰 차이는 없다. 일부 미개인 사이에서는 밭의 잡초를 뽑는 기간중에는, 여자들이 마
을에 온 이국남자를 마음대로 농락해도 무방했다. 여자들이 총출동하여 그 남자에게 덤벼
들어, 가끔 초죽음이 되게 하기도 한다. 이때 부족의 남자들은 여자의 이 용감한 행동을 
웃으면서 구경한다. 이 폭행에 희생된 남자는 수동적.종속적인 육체가 된 것이다. 그는 그
녀들에 의해 그리고 그녀들을 통해, 그 남편들에게 소유된 셈이다. 이와는 달리 정상적인 
성교에서는 남자 쪽이 여자의 소유자로서 자기를 내세우려고 한다.
  그런데 남자가 그 육체적 조건의 불투명성을 가장 분명히 경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이다. 남자가 그 성욕을 자랑스럽게 자기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타자'를 자기 
것으로 삼는 한 방법이 되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 소유의 꿈은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참
된 소유에서는, 타자는 타자로서 소멸된다. 즉 그것은 소비되고 파괴된다. 그러나 <아라비
안나이트>의 터키 황제가 아닌 이상, 새벽에 그의 침대에서 여자가 물러나자마자 그녀의 
목을 자를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품에 안
긴 후에도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남자가 포옹한 후에 양팔을 벌리면, 먹이(여자)는 그와 무관한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여
자는 원상으로 돌아가, 마찬가지로 새 애인에게 일시적이나마 언제든지 소유될 수 있는 것
이다.
  남자의 꿈의 하나는 언제까지나 자기 것이 되게끔 여자에게 '낙인을 찍는' 일이다. 그러
나 아무리 거만한 남자라도 여자에게는 단지 추억을 남길 뿐이며, 아무리 불타는 이미지도 
감각에 비하면 냉담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이 실패를 다룬 문학은 많다. 여자가 자기의 
육체를 한 남자에게만 바치지 않고 여러 남자에게 바친다고 해서 바람둥이니 배신자니 하
고 몰아세우며 남자는 여자에게 이 실패를 객체화시킨다. 여자의 배반은 그 이상으로 부도
덕한 행위이다. 여자 쪽이 그 애인을 먹이로 삼는 것이다. 육체만이 다른 육체에 접촉할 
수 있다. 남자가 갈망하는 육체를 정복하려면 자기 자신이 육체가 되어야 한다. 이브는 아
담이 그녀를 통해 자기의 초월을 완성하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녀는 그를 '내
재'의 암흑 속으로 끌어들인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만들었지만 아들은 거기서 탈출하고 
싶어하는 캄캄한 모암, 정부는 쾌락의 도취 속에서 그 모암의 캄캄한 점토 속으로 다시 한 
번 남자를 가둔다.
  남자는 그녀를 소유하길 원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에게 소유된다. 체취.땀.피로.권태 
등 많은 문학은 육체로 화한 의식의 이 음울한 수난을 그려왔다. 때때로 혐오감을 내포하
고 있는 욕정은 그것이 충족되면 혐오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성교가 끝나면 인간은 슬프

다." "육체는 슬프다." 남자는 애인의 품안에서 확실한 안정을 발견한 적도 없다. 이윽고 
그는 다시 욕구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여자 전반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어느 특정한 여
자에 대한 욕구로 나타난다. 이때 그 여자는 특히 상대방 남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위력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남자의 성적 욕구는 허기나 갈증처럼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적인 
욕구로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자를 개별적인 여자의 육체와 결합시키는 유대
는, '타자'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탄생된 불순하고 풍요로운 복부와 같은 
신비로운 유대, 즉 일종의 수동적인 힘이다. 그것은 마술이다. 남자를 현혹시키는 마녀나 
요술쟁이처럼 여자를 묘사하는 대중소설의 틀에 박힌 문구는, 신화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적인 것을 반영하고 있다. 거기서 여자는 마술에 몸을 바친다. 알랭(프랑스의 철
학자, 1868 ~ 1951)은 이렇게 말했다. "마술이란 사물 속에 흩어져 있는 정신이다." 어
떤 행위가 능동적인 원인에서 비롯되지 않고 수동적인 원인에서 비롯될 경우에는 마술이
다.
  남자들은 여자를 언제나 천부적인 '내재'로만 보아왔다. 여자는 농작물을 생산하고 아기
를 낳지만, 그것은 그녀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다. 여자는 주체가 아니며, 초월하지도 못
하고, 창조력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유동체로 충만한 개체일 뿐이다. 남자가 그러한 신
비를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여자는 그런 특질 때문에 의식에 참가한 여승으로서 존경을 받
는다. 그러나 남자가, 사회가 자연을 이기게 하고, 이성이 생명을, 의기가 무기력한 여건을 
이기게 하기 위해 싸울 때에는, 여자는 마녀로 취급받게 된다. 승려와 마술사는 엄연히 구
별된다. 승려는 신들이나 법률과 협력하여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그 모든 구성원의 이름
으로 통제된 힘을 조종하는 반면에, 마술사는 사회에서 이탈하여 신들이나 법률에 반항하
고, 자기 정념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들의 세계에 완전한 일원이 되어 있지 
않다. '타자'로서 여자는 남자들과 대립된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 능력을 남자들의 사회
를 통하여 미래를 향해 초월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이 분리되고 대치되어 있기 때
문에 남자들을 분리의 고독 속으로, 내재의 어둠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자는 그 노랫소리에 이끌린 뱃사람들을 암초에 부딪치게 하는 인어
이다. 자기를 연모하는 남자들을 짐승으로 변하게 한 키르케(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마녀)이
며, 어부를 늪 속에 끌어들이는 물의 요정이다.
  여자의 포로가 된 남자는 이미 의지도 자유로운 계획도 미래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시
민도 아니며, 욕망의 노예가 된 육체이다. 그는 사회에서 제외되고, 순간 속에 갇혀 있으
며, 고뇌에서 쾌락을 위해 수동적으로 우롱당하고 있다. 사악한 마녀는 의무에 대해 정욕
을, 시간의 통합에 대해 현재의 순간을 내세워, 길손을 그 고향에서 멀리 떠나게 하여 망
각에 도취되게 한다. 남자는 '타자'를 독점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그대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가능한 소유에 실패하면, 그는 그 '타자'가 되려고 하지만 일체가 될 수 없다. 그
래서 그는 자기를 소외하고, 자기를 상실하며, 자기를 자기자신과 무관하게 하는 미약을 
마시고, 흘러가는 죽음의 강물 속에 뛰어든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아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를 죽음에 바치게 된다. 애인은 상대방 남자에게 생명을 포기하도록 하여 마지막 수면 
속에 몸을 맡기게 한다. '연애'를 '죽음'으로 잇는 이 연결은 트리스탄 전설(중세의 전형적
인 연애소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비통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은 깊은 진실을 내

포하고 있다. 육체에서 태어난 남자는 사랑 속에서 육체로서의 자기를 성취하고, 육체는 
무덤으로 향하기로 약속되어 있다. 여기에도 '여자'와 '죽음'의 연결이 분명히 드러난다. 위
대한 수확의 여인(죽음의 신)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풍요성이 역전된 모습이다. 그러나 그
녀는 또한 허망한 부드러운 육체 속에 해골이 들여다보이는 무서운 신부의 모습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남자가 애인으로서의 여자, 또는 어머니로서의 여자에 대해 사랑하고 또 미워
하는 것은, 자기의 동물적인 숙명이 응고된 모습이며, 자기실존에 필요하지만 이 유한성과 
죽음에 운명적으로 결부된 생명이다. 남자는 태어난 날부터 죽기 시작하는데, 이것이야말
로 '어머니'가 구현하고 있는 진리이다. 생식작용에 의해 남자는 자기를 부정하고 종을 주
장한다. 이것을 그는 아내의 포옹 속에서 분명히 알게 된다. 불안과 쾌락 속에 생식행위를 
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자아를 망각한다. 애인과 어머니를 구별하려고 해도, 그는 두 사
람에게서 단지 하나의 분명한 사실, 즉 자기의 육체적 조건을 의식하게 된다. 그는 이 조
건을 수행하고 싶어하여 어머니를 존경하고 애인을 그리워하는가 하면, 한편 혐오와 두려
움으로 말미암아 그녀들에게 반역한다.
  이러한 신화의 대부분을 종합한 뜻깊은 문장이 장 리샤르 블로크(프랑스의 소설가, 188
8 ~ 1943)의 <쿠르드족의 밤> 속에 나온다. 거기에는 어느 거리에서 약탈이 감행되는 
동안에, 사드라는 젊은이가 자기보다 훨씬 연상이지만 아름다운 한 여자와 포옹하는 장면
이 있다.
  "밤은 사물과 감각의 윤곽을 점점 소멸시키고 있었다. 그는 이제 여자를 포옹하고 있지 
않았다. 세계의 개벽 이후로 줄곧 계속해 온 끊임없는 여행의 목적지에 드디어 도달했던 
것이다. 주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끝도 형체도 없는 무한한 공간 속에 그는 점점 용해되어
갔다. 즉 모든 여자가 하나의 거대한 대지, 욕망처럼 음울하고 여름처럼 작열하는 대지에 
용해되어갔다. 그러나 그는 여자에게 감춰진 힘을, 비단을 두른 것처럼 부드럽고 늘씬한 
허벅지나 상아 언덕 같은 무릎을 두려움이 뒤섞인 감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여자의 미끈한 허리에서 어깨까지 척추를 더듬어 올라 갔을 때,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돔
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자의 복부가 그를 간단없이 부르고 있었다. 그
것은 모든 생명이 태어났다가 그곳으로 돌아가는 탄력있는 부드러운 대해, 조수와 수평선
과 무한한 표면을 지닌 은신처 중의 은신처였다."
  "그때 이 감미로운 외피를 뚫고 그 미의 원천에 단숨에 도달하고 싶은 격정이 그를 사로
잡았다. 동시에 충동이 두 사람을 서로 감쌌다. 여자는 이제야 지표처럼 갈라져서 내장을 
열고, 오로지 애인의 정기를 가득 삼키기 위해 존재했다. 살인적인 황홀경에 이르렀다. 서
로 찌르고 찔리는 듯이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그는 고립되고, 분리되고, 떨어져나온 인간, 그는 이제야 자기 자신의 실체에서 벗어
났다. 육체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드디어 영혼과 육체가 합쳐져 우주의 물질 속으로 흘러
들어가려고 했다. 그날까지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최고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지
상의 생존의 한계를 벗어나 주체와 객체, 물음과 대답을 같은 열광 속에 용해시켜버리고, 
모든 비존재를 존재에 통합하여, 최후의 몸부림에 의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하는 
행복."

  "...악궁사가 왔다갔다할 때마다 그가 마음대로 다루는 귀한 악기에서 점점 날카롭게 진
동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갑자기 마지막 몸부림이 사드를 황홀의 절정에서 떼어내어, 대
지와 진흙 속으로 던져버렸다."
  여자의 정욕이 충족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연인을 양다리 사이에 껴안고 놓지 않는다. 
남자는 문득 정욕이 다시 치솟는 것을 느낀다. 그의 눈에는 여자가 자기 정기를 빼앗는 적
대세력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시 여자와 관계하면서, 그녀의 유방을 깊이 깨물어 그녀를 
죽게 한다. 이리하여 어머니에서 애인으로, 애인에서 죽음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순환
의 고리가 닫혀진다.
  이 경우에 육체의 드라마에서 어떤 면에 중점을 두는가에 따라, 남자가 취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만일 그 남자가 생명은 하나뿐이라는 관념을 갖지 않고, 자기의 개채적 운명을 
깨닫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자기의 동물성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회
교도들 사이에서는, 여자는 가장 비천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것은 여자가 가정에서 나와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봉건적인 사회제도다. 전쟁 제일주의의 이상을 반
영하여 남자를 직접 죽음에 바치고, 여자에게서 그 마력을 박탈해 버린 종교 때문이지만, 
마호메트교도가 누리는 천국에서의 즐거운 대향연에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는 사나이라면 
지상에서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러므로 남자는 자기 자신이나 여자를 경계할 필요가 
없으며, 유유히 여자를 향락할 수 있는 것이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는, 여자를 과일이나 잼, 고급 케이크나 향유와 다를 바 없
는 촉감이 좋은 쾌락의 원천처럼 취급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관능 만족주의는 지중해 
연안의 국민들 사이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순간적으로 만족을 느끼고 영생을 갈망하지 
않으며, 하늘과 바다의 빛을 통하여 '자연'의 밝은 면을 파악하는 남방인들은 탐욕스럽게 
여자를 사랑한다. 전통적으로 그들은 여자를 경멸하고 인격으로 대하지 않는다. 여자의 육
체가 주는 즐거움과 모래나 물이 주는 즐거움 사이에 별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자
나 자기에 대하여도 육체에의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다.
  <시칠리아 섬에서의 대화>에 나오는 비토리니는 일곱 살 때 여성의 나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일을 놀라운 심정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나 로마의 합리주의적인 사고는 이 본
능적인 태도를 밑받침하고 있다. 그리스인의 낙천주의 철학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이원론을 
뛰어넘었다. 열등한 자는 우수한 자에게 종속되므로 세상은 우수한 자에게 유리하다. 이런 
조화된 사상은 육체에 대해 전혀 적의를 갖지 않는다. 이데아의 하늘이나 '도시' 또는 '국
가'에 눈길을 돌리고, 자기를 '누스'(그리스어로, 마음이나 이성을 뜻함)나, 혹은 시민으로
서 생각하고 있는 개인은, 자기의 동물적인 조건을 초월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남자가 
향락에 빠지든, 금욕주의를 실천하든 남자의 사회에 완전히 억압된 여자는 이차적인 중요
성밖에 갖지 않는다.
  합리주의는 결코 완전한 승리를 거둔 적이 없고, 그 사회에서도 색욕에 관한 체험은 모
순된 성격을 띄고 있다. 의식이나 신화나 문학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서는 
여자의 매력이나 위험은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자에게 다시 무서운 위력을 안겨
준 것은 기독교이다. 이성에 대한 두려움은, 불행한 인간의식의 고뇌의 한 형태로 나타났
다. 기독교도인 남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육체와 영혼, 생명과 정신이 완전

히 구분된다. 육체를 영혼의 적으로 삼은 것이 원죄이다. 육체적인 애착은 모두 악으로 본
다.
  그리스도에 의해 속죄되어 천국에 인도되었을 때에 한해서만 남자는 구제된다. 그러나 
인간은 근원적으로 부패해 있다. 그 탄생에 의해 남자는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받을 운명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천국의 문이 열릴 가능성은 있지만, 인간의 자
연적인 존재에는 언제나 저주가 뒤따른다. 악은 절대적인 현실이며, 육체는 죄이다. 그리고 
물론 여자는 언제나 '타자'일 따름이므로, 남자와 여자는 같은 육체로 생각되지 않는다.
  기독교도에게 혐오스러운 '타자'인 육체는 여자와 구별되어 있지 않다. 대지와 성욕과 악
마의 유혹은 모두 여자에게서 구체화된다. 로마교회의 장로들은 한결같이 이브가 아담을 
원죄로 인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을 다시 인용해야겠다. "여자여, 너야말로 악마에게 이르는 문이다. 
너는 악마도 정면으로 공격하지 못한 자(아담)를 설득시켰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
도 너 때문이다. 너는 언제라도 상복과 누더기를 걸치고 사라져야 한다." 기독교 문학은 
모두 남자가 여자에 대해 갖고 있는 혐오감을 자극하려고 노력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여
자를 '하수도 위에 세운 전당'이라고 정의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기와 배설기의 혼합
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강조한다. 즉 인간은 오줌과 똥의 중간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여
자의 육체에 대한 기독교의 혐오감은 대단하여, 기독교는 그 신(성자)을 굴욕적인 죽음에 
바치는 것은 동의하지만, 출생의 더러움만은 모면하려고 한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한 것을 가리킴) 동방교회에서는 에페수스의 교의회가, 서방에서는 라테란의 교의회가 
그리스도의 처녀분만을 주장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장로들-오리게네스.테르툴리아누스.히
에로니무스-은 마리아가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피와 불결 속에서 분만했다고 생각했
으나, 결국 성 암브로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가 이겼다. 처녀의 태는 드디어 
닫혀지고 만다. 중세 이후로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여자에게는 치욕으로 간주되었다. 
이 혐오로 인해 과학도 오랫동안 마비되어 왔다. 린네(18세기 스웨덴 생물학자, 1707 ~ 
1778)는 '자연'에 관한 저서에서, 여자의 생식기에 대한 연구를 '더러운 것'으로 여겨 배
척했다. 프랑스의 의사 드로랑은 "이성과 분별력이 있어 남자라고 불리는 신에 가까운 동
물이, 점액으로 더러워진 채 육체의 가장 아랫부분에 부끄럽게 위치하고 있는 치부에 마음
이 쏠리고 있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며 분개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영향 이외에도 다른 많은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으며, 
또 기독교적 사고방식 자체도 단순하지 않은 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특히 청교도의 세계
에서는 육체를 증오하는 관념이 아직도 남아 있다. 예를 들어 포크너(1922년 노벨문학상
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 1897 ~ 1962)의 <8월의 빛>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의 성에 대한 최초의 경험은 그의 마음에 심한 정신적인 상처를 입힌다. 처음으로 
성교를 하고 나서 구토를 느낄 정도로 동요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어느 나
라의 문학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반응은 사실상 매우 드물더라도, 그것이 
이처럼 자주 묘사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특히 청교도주의가 침투한 앵글로색
슨계의 나라에서는, 여자는 대부분의 청년들과 많은 어른들의 마음에 많든 적든 두려움을 
심어주고 있다. 이 두려움은 프랑스에서도 상당히 강하게 존재하고 있다.

  미셸 레리(프랑스의 시인)는 <장년의 남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에게는 여자의 
성기를 불결한 것으로, 혹은 하나의 상처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매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단지 피가 묻고 축축하고 불결한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 
자체로서 위험한 것으로 생각된다." 성병에 대한 사고방식이 이런 공포를 대변하고 있다. 
병을 옮겨주기 때문에 여자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서 옮겨왔다는 이유로 병이 혐
오스럽게 생각된다. 과도한 성교만으로도 임질에 걸린다고 믿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누군가
가 내게 말해 준 적이 있다. 그리고 성교에 의해 남자는 근육의 힘이나 두뇌의 명석함을 
잃고, 몸에서 인이 소모되어 감수성이 둔해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수음에서도 같은 위험
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사회에선 도덕적인 이유를 들어 이 자위행위
를 정상적인 성행위보다 해롭다고 보고 있다. 합법적인 결혼과 번식의 의지가 색욕의 피해
에 대해 자기방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성행위에는 '타자'
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타자'의 가장 일반적인 것은 여자의 얼굴이다.
  남자는 여자 앞에서 자기 육체의 수동성을 가장 분명히 경험하게 된다. 여자는 흡혈귀이
며, 음탕하고 식충이다. 여자의 성기는 남자의 성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어떤 정신분
석학자는 이런 상상에서 과학적인 근거를 제공하려고 했다. 여자가 성교에서 얻는 쾌락은 
모두 여자가 남자를 상징적으로 거세하여 남자의 성기를 자기 것으로 차지하는 데서 비롯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학설 자체가 정신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리고 이런 학설을 주장한 의사들은 조상으로부터 대를 이어 물려받은 공포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공포의 원천은 '타자'속에 그것을 아무리 병합해도, 타성이 남는다는 데 있다. 가부
장제도의 사회에 이르러서도 여자는 원시사회에서 갖고 있던 불안한 힘의 대부분을 보유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는 결코 '자연'그대로 방치되지 않고, 터부로 포위되고 의식에 의
해 정화되어 승려의 감독하에 놓여졌다. 남자에겐, 절대로 여자에게 본래의 모습 그대로 
접근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의식이나 성례를 거친 후에야 여자를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이 의식이 여자를 대지나 육체에서 분리시켜 인간으로 변신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여자가 갖고 있는 마력을 교묘히 유도할 수 있다. 마치 피뢰침이 발명되고 발전소가 생긴 
후로 뇌전기를 유도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그것을 사회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도 
있다. 여기서 남자의 여자에 대한 관계를 결정하는 진자운동의 다른 일면을 찾아볼 수 있
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 소유이면 사랑하고 남이면 두려워한다. 그리고 여자가 두려운 타
자일수록 남자는 그녀를 자기 소유로 삼기 위해 더욱 애를 쓴다. 남자가 여자의 인격의 존
엄성을 자기와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자의 마력은 가부장적인 가족관계 속에서 완전히 길들어져버렸다. 그리하여 여자는 사
회 속에 우주의 힘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뒤메질(프랑스의 신화학자, 1898 ~ 
1986)은 저서 <미트라 바루나>에서, 인도에서도 로마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권력을 확립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바루나와 로물루스 간다르바와 루페르키에 
있어서, 그것은 공격이고 유괴이고 난폭이고 광란이다. 이때의 여자는 강탈되고 학대를 받
아야 할 준재로 보였다. 강탈당한 시비누스 여자들이 불임녀가 되었다는 걸 알고 로마인들
은 산양의 가죽끈으로 그녀들을 때렸다. 폭력에 다시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그러나 미트

라와 누마와 바라문 여승들과 로마의 여제관들은, 이와는 반대로 도시의 합리적인 질서와 
안정을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그때 여자는 복잡한 의식이 수반되는 결혼에 의해 남편과 
결합되어, 남편과 협력하면서 모든 여성적인 힘을 그의 지배에 맡기게 된다.
  로마에서는 사체의 아내가 죽으면, 그 사제는 사임한다. 이집트에서 이시스(이집트의 여
신, 오시리스의 누이이며 아내가 됨)는 모신으로서의 최고의 권력을 상실한 후에도 여전히 
너그럽고 상냥하고 친절하고 현명한 여자로서, 오시리스(이집트의 신으로 죽은 자의 보호
자)의 훌륭한 아내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여자가 이처럼 남자의 동료나 보좌역, 그 반신이 
될 때 필연적으로 하나의 의식이나 혼이 주어진다. 남자도 인간의 본질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안심하고 의지할 수 없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마누법전'은 본처에게는 그 남편과 같은 천국이 약속되어 있었다. 
남성이 개성화하여 자기의 개성을 요구할수록, 그는 아내의 개성과 자유를 인정하게 된다. 
자기의 운명에 무관심한 동양 남자들은 향락의 대상이 되는 한 아내로 만족한다. 그러나 
서양 남자들이 바라는 것은, 만일 그 남자가 자기 존재의 개성을 자각할 정도에 이르렀다
면 그는 자기 이외의 순종적인 자유의 개체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다. 그리스 남자는 규방의 
포로인 여자에게서 그가 요구하는 동등한 인간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육체와 마
찬가지로 그 육체 속에 의식과 자유가 깃든 남자의 애정을 요구하게 된다. 아니면 그 자주
성과 교양.재치가 남자와 거의 맞먹는 창녀에게 사랑을 바친다.
  그러나 사정만 허락된다면, 남자의 요구를 가장 잘 만족시켜주는 것은 아내이다. 로마의 
시민은 기혼부인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했다. 로마의 시민은 코르넬리아(스키피오의 딸이
며 그라쿠스의 아내, 로마 어머니의 이상적인 타입, BC 189 ~ 110년경)와 아리아 속에 
자기의 분신을 갖고 있다.
  어떤 점에서 남녀의 평들을 선언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기독교였다. 기독교는 여자의 육
체를 혐오한다. 만일 여자가 육체로서의 자기를 부인한다면, 여자는 남자와 같은 자격으로 
구세주에 의해 죄의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하여 여자는 남자와 나란히 
천상의 환희가 약속된 영혼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남녀가 모두 하나님의 종으로서 천사
와 거의 마찬가지로 중성화되어, 성령의 도움으로 함께 지상의 유혹을 물리치게 된다. 여
자가 자신의 동물성을 부인하면 원죄의 육체화에서 벗어나 오히려 원죄를 이긴 선택된 사
람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신 구세주은 남성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끼리 서로 협력해야 한다. 또한 여기서 인간은 가장 비천하고 가장 타락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선의를 표명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신이지만, 전인류를 지배
하는 것은 여자, 즉 '어머니인 처녀'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위대한 여신의 낡은 특권을 부
활시키는 것은, 사회를 초월한 여러 교파뿐이다. 로마교회는 가부장적 사회를 표현하고 거
기에 봉사한다. 거기서는 여자를 역시 남자의 부속품이라고 본다. 여자는 남자의 충실한 
여종이 되어야 축복받은 성녀도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중세의 중반에 와서 남성에게 바람
직한 가장 완전한 여성상이 만들어졌다. 그리스도의 어머니의 얼굴은 영광에 싸여 있다. 
그것은 죄많은 여인 이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그녀는 뱀을 발로 밟아 죽인다. 이브는 
원죄의 중개자였지만, 성모는 구원의 중개자이다.

  여자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어머니'로서였다. 여자를 변형시키고 복종시키려고 
한다면, 그 모성 속에서 행해야 한다. 마리아의 처녀성은 특히 하나의 부정적인 의미를 갖
고 있다. 즉 그 사람을 통하여 죄의 속함을 받은 여자는 육체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
는 남편에게 만져진 일도 없고 소유된 일도 없다. 아시아의 대모신에게도 남편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세계를 낳고, 혼자서 그 위에 구림하고 있었다. 변덕을 부려 음탕한 적도 
있었지만, 그 '어머니'로서의 위대성이 아내의 굴종적인 신분에 의해 감소되지는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성욕에 수반되는 더러움을 모른다. 여류전사 미네르바(로마신화
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의 계보에 속하는 마리아는 상아탑이며, 난공불락의 성채이다. 고
대의 여승들도 기독교의 대부분의 성녀들과 마찬가지로 처녀였다. 선에 바쳐지는 여자는 
순결해야 한다. 그녀는 그 여성적 요소를 누구에게도 정복되지 않은 완벽한 형태로 유지해
야 한다. 마리아에게 아내로서의 성격이 거부된다면, 그것은 마리아 속에 '어머니로서의 여
인'을 더욱 순수히 고양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주어진 종속적인 역할을 받아들여야만 마리아는 찬양받을 수 있다. "나
는 주의 여종이로소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어머니가 그 아들 앞에 무
릎을 꿇는다. 어머니는 스스로 자신의 열등성을 인정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리아 신앙에서 
이룬 남성의 결정적인 승리이다. 즉 마리아 신앙은 완전한 패배에 의한 삶의 갱생이다. 이
슈타르(바빌로니아.아시리아 신화에 나오는 애욕의 여신, 생명의 원천임), 아스타르테(고대 
시리아의 풍요와 다산의 여신), 키벨레(프리기아 지방의 생식력이 풍부한 대지의 여신)와 
같은 고대의 여신들은 잔인하고 방자하고 음탕하며, 세력이 막강했다.
  삶과 죽음의 원천인 그녀들은 남자를 낳아 자기들의 노예로 삼았다. 기독교에서는 삶과 
죽음이 신의 의지에 속해 있으며,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남자는 거기서 영원히 벗어나 
대지는 단지 그 뼈가 묻히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의 영혼의 운명은 어머니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 전개된다. 세례의식은 태반을 소각하거나 강물에 던지는 의식을 웃음거리로 
삼는다. 지상에는 더이상 마술이 활동할 여지가 없고, 신이 유일한 왕이다. 자연은 본래 악
한 힘을 갖고 있으나, 신의 은총 앞에서는 무력하다. 모성도 자연현상으로서 아무 힘도 쓰
지 못한다. 만일 여자가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된 오점을 자기 안에서 극복하려고 한다면, 
이 경우에 남은 유일한 일은 신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뿐이다. 신의 의지는 여자를 남자에
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속에 의해 여자는 남성의 신화 속에서 새로운 역할
을 맡을 수 있다. 여자는 지배자가 되려는 욕망을 가졌을 때, 그리고 그 권리를 분명히 포
기하지 않을 때는 패배하여 짓밟히게 되지만, 가신으로서는 존경을 받는다. 여자는 그 원
시적인 특징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습은 변하여 불길한 것이 길한 것
으로 된다. 악한 마력이 선한 마력으로 변한다. 여자는 여종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숭배
를 받을 권리를 얻게 된다.
  여자가 복종하게 되는 것은 '어머니'로서이므로, 사모와 존경을 받는 것도 어머니로서이
다. 모성의 오랜 두 모습 중에서, 오늘날 남성은 상냥한 모습만을 인정하려고 한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제한을 받으며 육체와 유한한 생명밖에 갖지 못한 남자는 외부의 '자연'과 '역
사'속의 한 개체에 불과하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제한되고 정신이 깃들어 있는 이
상 남자와 비슷하지만, '자연'에 속해 있으며 '생명'의 무한한 흐름에 연결되어 있다. 그래

서 여자는 개체와 우주의 중개자처럼 느껴진다. 어머니의 모습이 안심할 수 있고 신성하게 
보일 때, 남자가 애정을 가지고 그녀 쪽으로 향하는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자연 속에서 
방향감각을 잃게 되면 남자는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자연에서 벗어나면 다시 자연으
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가족이나 사회 안에 완전히 안주하여 법률이나 풍습과 조화를 유지
하고 있으면, 어머니는 '선'의 화신이 된다. 그리하여 그녀가 속해 있는 자연도 선이 된다. 
어머니는 이미 정신의 적이 아니다. 설사 아직 신비에 싸여 있을 경우에도, 그것은 남자는 
여자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속에 모든 것을, 따라서 자기가 아닌 
여자도 거두어들이려고 한다. 어머니를 숭배함으로써 남자는 어머니가 갖는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가 어머니의 아들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자기 속에 어머니를 
인정하는 것이며, 대지와 생명과 과거와의 연결로서 여성을 자기가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비토리니의 <시칠리아 섬에서의 대화>에서, 주인공이 어머니의 곁으로 찾아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가 태어난 땅, 그 향기, 그 열매, 유년 시절, 조상의 추억, 전통, 즉 그
의 개인적인 존재가 그를 떼어놓았던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남자의 마음에 자기초월의 
긍지를 높여주는 것은 뿌리를 갖고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남자는 어머니의 팔을 뿌리치
고 모험과 미래와 전쟁을 향해 출발하는 자를 찬탄의 눈으로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아무도 
만류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 출발은 그다지 감동적인 것이 못 될 것이다. 이 경우에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건이 뿐이며, 애써 손에 넣은 승리가 못 된다. 그러나 남자는 어머니의 양
팔이 언제나 자기를 맞아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웅은 활동의 긴장이 풀리면 어머니의 
곁에서 내재의 휴식을 취하고 싶어한다. 어머니는 피난처이며 수면을 취할 수 있는 곳이
다. 그는 어머니의 손에 애무를 받고, 다시 자연의 태내에 기어들어가, 자궁이나 무덤 속처
럼 조용히 생명의 큰 흐름에 몸을 맡긴다.
  남자가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어가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어머니의 
시선 아래서는 죽음까지도 길들여져, 탄생과 대칭이 되어 모든 육체의 생명과 불가분의 관
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고대 신화의 파르카 여신들(로마신화에서 남자의 생명
을 조종한다는 지옥의 세 여신)처럼, 지금도 역시 죽음과 결부된다. 죽은 자를 매장하고, 
그 죽음을 비통해하는 것은 어머니의 역할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역할을 죽음을 생명에, 
사회에, 선에 합치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용감한 어머니'에 대한 숭배를 권장하고 있다. 
만일 어머니가 그 아들을 죽음에 내주도록 승낙한다면, 사회는 아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아들에 대해 갖고 있는 힘 때문에, 사회는 어머니를 자기에게 예속시
키는 것이 유리하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처럼 존경의 대상이 된다.
  어머니를 온갖 미덕으로 장식하고, 그래서 하나의 종교를 만들고, 이것을 믿지 않는 자
는 불경이니 모독이니 하고 비난한다. 어머니는 도덕의 수호자가 된다. 어머니가 할 일은 
남성의 봉사자, 권력의 봉사자로서 자기 아들을 규정된 길로 조용히 인도하는 것이다. 사
회가 낙천적일수록, 그리고 그것이 애정으로 충만한 권위를 순순히 받아들일수록, 그 집단 
속에서 어머니는 변형된다. 미국의 엄마는 필리 윌리가 <살모사의 시대>에서 묘사한 것 
같은 우상이 되었다. 미국에서 공인된 이데올로기는 가장 철저한 낙천주의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찬미하는 것은 곧 출생과 생명과 죽음을 사회적.동물적인 형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연과 사회의 조화를 선언하는 것이다. 오귀스트 콩트(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의 

창시자, 실증주의의 시조, 1798 ~ 1857)가 여자를 미래 인류의 신으로 받든 것도 이 종
합의 완성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모든 반역자들은 어머니의 상에 저항한
다. 그들은 그것을 조롱함으로써, 풍습과 법률의 여자 수호자를 통하여 자기들에게 사회가 
강요하려는 조건을 거부하는 셈이다.
  '어미니'를 후광으로 장식하는 존경과 '어머니'를 에워싸는 금기는 어머니가 불러일으키
는 육체적인 애정에 자발적으로 섞이는 혐오감을 억압한다. 그래도 잠재적인 형태로 바뀐 
모성에 대한 혐오감은 남아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
다. 그것은 프랑스에서는 중세 이후로 이런 혐오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제2의적인 
신화, 즉 장모의 신화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우화시에서 통속희극에 이르기까지 어떤 
금기로도 보호받지 않는 장모를 통하여 남자는 모성 전체를 조롱한다. 남자는 사랑하는 아
내가 그 어머니의 태내에서 태어난 것을 증오한다. 장모는 노쇠한 모습을 보여주며 자기가 
낳은 딸도 노쇠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한다. 장모의 비만이나 주름살은 젊은 아내
에게 약속된 비만과 주름살을 예고한다. 즉 젊은 아내의 미래는 이처럼 비참하게 예시되어 
있는 것이다. 장모 옆의 젊은 아내는 이미 한 개체가 아니라 종의 한 시기일 뿐이다. 그녀
는 탐나는 먹이나 사랑하는 반려자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개별적인 실존은 보
편적인 생명 속에 용해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특이성은 보편성에 의해 조종을 받게 되고, 
정신의 자율성은 그녀가 과거와 육체에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조롱거리가 된다. 남자가 우
스꽝스러운 등장인물 속에 객관화하는 있는 것은 이런 조롱이다. 그런데 남자의 조소 속에
서 그처럼 원한이 섞여 있는 것은, 아내의 운명이 전인류의 운명, 즉 자기의 운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도 전설이나 이야기는 후처에게서 나타나는 모성
의 잔인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백설공주를 죽여버리려고 한 것은 계모이다. 고약한 계
모-예를 들면 세귀르 부인(프랑스의 여류 동화작가)의 여러 작품에 나오는 소피를 회초리
로 때리는 피쉬니 부인-속에는, 잘라낸 머리를 모아 목걸이로 하는 고대의 칼리가 살아 
있다.
  그런데 신성시되는 '어머니'의 뒤에는, 초목의 즙과 별빛을 남자에게 유용하게 하는 흰 
마녀의 무리가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눈빛이 자애로운 할머니들, 친절한 하녀들, 요양원
의 수녀들, 어떤 시중도 잘 들어주는 놀라운 솜씨를 갖고 있는 간호사들, 베를렌이 꿈꾼 
것 같은 애인 등...
  
  상냥하고 사려깊으며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갈색머리의,
  때로는 아기에게서 하듯이 이마에 키스해 주는 여자.
  
  이런 여자는 포도넝쿨이나 맑은 물의 청명한 신비를 간직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들은 
붕대를 감아 치료해 준다. 그들의 지혜는 말없는 생명의 지혜이며, 잠자코 이해해 준다. 그
녀들 옆에서 남자들은 모든 교만을 잊어버리고, 몸도 마음도 내맡기는 어린아이로 돌아가
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와 이런 여자들 사이에서는 힘겨루기가 전혀 필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그 비인간적인 힘을 부러워한들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요령을 터득한 지혜로운 여자는, 남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자기를 그의 하녀로 인정

하고 있다.
  남자가 이런 여자의 지혜로운 힘에 잠자코 따르는 것은, 이런 순종을 통해 자기가 그녀
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매나 어린시절의 여자친구, 청순한 소녀들, 
그리고 장차 어머니가 될 여자들은 모두 이 축복된 무리에 참가하고 있다. 그리고 아내까
지도 그 성적 매력이 사라졌을 때에는, 많은 남자들에게는 애인보다는 오히려 아기 어머니
로 보인다. 어머니가 성화되어 굴복한 이래로, 마찬가지로 성화되어 굴복한 아내 속에서 
두려움 없이 어머니의 모습을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를 재인식하는 것은 육체를 
재인식하는 것이며, 결국 육체의 결합이나 아내를 재인식하는 것이다.
  결혼의식에 의해 그 마력의 무기가 박탈되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남편에게 종속된 
선량한 아내는 남자에게 가장 귀중한 보물이다. 아내는 완전히 남편의 소유가 되므로, 남
편과 같은 본질을 소유하게 된다. "그대가 가이우스라면 나는 가이아로다." (로마의 결혼식
에서 사용하는 서약문) 아내는 남편의 이름을 따고, 남편의 신을 믿고, 남편은 아내를 책
임진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의 반신이라고 부른다. 남편은 아내를 그 집이나 토지
나 가축 등 재산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그 이상으로 자랑스럽게 여긴다. 남편은 아내를 통
하여 남들에게 자기 세력을 과시한다. 아내는 남편의 척도가 되며, 이 세상에서 남편이 차
지할 몫이다.
  동양 사람들은 뚱뚱한 아내를 선호한다. 아내에게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어 있는 것이 사
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남편에게 명예로운 일이다. 회교도는 되도록 많은 아내를 거느리
고, 그 아내들이 원기왕성해 보일수록 존경을 받는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여자에 주어진 
역할의 하나는 생활 정도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녀의 미모.매력.지성.맵시는 자가용과 마찬
가지로 남편의 부를 나타내는 외적 표시이다. 돈이 많은 남편은 아내를 모피나 보석으로 
장식한다. 돈이 없는 남편은 아내의 착한 성품과 알뜰한 살림솜씨를 자랑한다. 백수건달이
라도 자기를 섬기는 여자를 손에 넣으면, 이 세상에서 커다란 뭔가를 소유한 느낌을 갖는
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주인공은 이웃을 초대하여 자기가 얼마나 단호한 태도로 아
내를 얌전하게 길들였는가를 이야기한다. 남자에게는 다소나마 칸다울레스 왕(리이아의 
왕)과 비슷한 면이 있다.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아내를 내세운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사회적인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더욱 사사로운 
자랑도 남자에게 맛보게 한다. 남자는 자기가 여자에게 주는 지배력에 만족하며 으스댄다. 
여자가 하나의 인격으로 취급받을 경우에는, 보습이 밭고랑을 간다는 자연현상적인 비유에 
더욱 정신적인 상징이 첨가된다. 단지 색욕적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지적으로 남편은 아내
를 형성한다. 남편은 아내를 교육하고 각인을 찍고, 영향력을 남긴다. 남자가 좋아하는 몽
상의 하나는 자기의 의지를 사물 속에 침투시켜, 그 형체를 만들고 그 실질속으로 돌입하
는 것이다. 이 점에서 여자는 절호의 '부드러운 반죽'이며 얌전히 빚어져 세공하는 대로 이
루어진다. 만들어지는 대로 되면서 또한 저항도 하므로, 남자의 작업은 영속될 수 있다. 너
무 쉽게 마음대로 되는 재료는 오히려 좋지 않다. 여자의 귀중한 점은, 그녀 속에 있는 무
엇인가가 어떠한 포옹에서도 자꾸만 빠져나가는 데 있다. 남자의 손아귀에 좀처럼 들어오
지 않으면 그만큼 더욱 정복할 가치가 있으며, 남자는 이를 정복하여 지배자가 되려고 한
다. 여자에 의해서 남자 속에 하나의 미지의 존재가 눈을 뜨고, 그것이 자기 모습인 것을 

남자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부부간의 은밀한 향락 속에 남자는 자기의 억센 동물성을 자각
한다. 그는 '수컷'이다. 상대적으로 여자는 '암컷'이다. 그런데 이 암컷이라는 말은 때에 따
라서는 즐거운 여운을 남긴다.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고, 핥아주고 지켜주고 목숨을 걸고 
구해 주는 암컷은, 인류의 모범이다.
  남자는 감동을 느끼면서 아내에게서 이런 인내와 헌신을 요구한다. 가장이 가정에 가둬
두고 싶어하는 것은 역시 '자연'이다. 그 자연은 사회나 가족이나 가장에게 유익한 모든 미
덕을 지닌 자연이다. 어린이나 어른을 막론하고 남자에게 공통된 욕망의 하나는, 사물의 
내부에 숨어 있는 비밀을 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물질은 실망을 안겨준다. 인형
의 복부가 찢어져 내부가 밖으로 튀어나오면 그것은 내면성을 갖지 못한다. 살아 있는 생
명체의 내면은 더욱 알기 어렵다. 여자의 복부는 내재의 깊이를 상징한다. 그것은 그 비밀
의 일부를 드러낸다. 특히 여자의 얼굴에 쾌락이 그려져 있을 때에 그렇다. 또한 그것은 
비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남자는 가만히 앉아서 생명의 은밀한 고동과 그 신
비를 망가뜨리지 않고 그대로 손에 넣을 수 있다.
  여자는 인간세계에 동물의 암컷의 기능을 들여온다. 또한 여자는 생명을 유지하고 내재
의 영역을 지배하는 자궁의 온기와 내면성을 가정에 들여온다. 그리하여 과거가 쌓이고 미
래가 예시된 가정을 지키고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낳고, 이미 낳은 아기
를 기른다. 남자는 여자의 덕택으로 세계를 무대로 일하고 행동하며, 그 속에서 소모되는 
실존은 다시 한 번 자기의 내재 속에 가라앉아 회복된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남자는 
지상에 닻을 내린다. 여자에 의해 나날의 연속성이 유지된다. 남자가 외부세계에서 어떤 
우연에 봉착하더라도, 여자는 그에게 식사와 수면을 연속적으로 제공해 준다. 남자의 활동
으로 파괴되고 소모되는 모든 것을 여자가 수습하여 보충해 준다. 피로한 노동자의 식사를 
마련하고, 병들었을 때에는 돌봐주고, 옷도 꿰매고 빨래도 한다. 그리고 자기가 계속해서 
이뤄 나가는 부부의 세계에 넓은 세계 전체를 끌어들인다. 불을 지피고, 집안에 꽃을 기르
고, 태양과 물과 대지에서 발산하는 것을 손질한다. 베벨(유명한 <부인론>의 저자)이 인
용한 어느 부르주아 작가는 이 이상을 다음과 같이 그럴 듯하게 요약하고 있다.
  "남자는 그 심장이 자기를 위해 고동칠 뿐만 아니라, 그 손으로 자기 이마를 닦아주고, 
평화와 질서와 정적을 자기 주위에 무언의 권위를 주는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 그는 가정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는 따스하고 신비로운 향기를 모든 것에 뿌리는 누군가를 원하고 있
다."
  기독교가 출현한 후로, 여성상이 어느 정도 내면화된 것은 분명하다. 남자가 여자를 통
하여 파악하려고 하는 미.따스함.친절은 이미 감각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자는 사물의 
감미로운 외모를 보여주는 대신에 사물의 혼이 된다. 여자의 마음속에는 육체의 신비보다 
더욱 깊게 세계의 진리가 반영하는 은밀하고 순수한 것이 있다. 여자는 집이나 가족이나 
가정의 혼이다. 나아가 큰 집단, 도시나 지방이나 혹은 국가의 혼이다. 융이 지적한 바와 
같이, 도시는 시민을 그 태내에 품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어머니로 비유되어 왔다. 그래서 
키벨레(대지의 신)는 머리에 탑을 이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어머니인 조국'이라는 말도 
한다.
  그런데 여자를 상징하는 것에는 양식을 제공하는 토양뿐만 아니라, 더욱 복잡한 현실도 

있다. 구약성서나 <계시록>에서 예루살렘이나 바빌론은 단지 어머니에 그치지 않는다. 그
것은 아내이기도 하다. 처녀인 도시도 있고, 바벨이나 티르와 같은 창녀적인 도시도 있다. 
그리고 프랑스는 로마교회의 '장녀'라고 불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같은 라틴계의 자매
이다. 프랑스나 로마.게르마니아를 상징하는 조각이나 콩코르드 광장에 있는 스트라스부르
나 리용을 나타내는 여인상에서는, 여자의 역할이 아니라 다만 여자다움이 나타나 있을 뿐
이다. 이런 식의 동화는 다만 비유적으로 쓰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많은 남자들이 이 동
화를 감정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여행가가 방문한 나라의 열쇠(그 나라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뜻함)를 여자에게서 찾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 여자나 스페인 여자를 가슴에 품을 때, 여행자에게는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감미로운 본질을 손에 넣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새 도시에 도착하면, 나
는 언제나 먼저 사창가를 찾아간다."라고 어떤 저널리스트가 말한 적이 있다. 계피가 들어 
있는 초콜릿 한 개가 지드(프랑스의 작가, 1869 ~ 1951)에게 스페인이라는 나라 전체를 
알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국 여자의 키스는 상대방 남자에게 그 나라의 동물.식물.전통.
문화 등 모든 것을 알게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자가 그 나라의 정치제도나 경제적 부
를 대표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자는 그 육체적인 정수와 신비로운 마나를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
  라마르틴(프랑스의 시인.정치가, 1790 ~ 1869)의 <그라지엘라>로부터 로티(프랑스의 
군인.소설가, 1850 ~ 1923)의 장편소설이나 모랑(프랑스의 소설가, 1888 ~ 1976)의 
단편소설에 이르기까지 외국인이 한 지방의 혼을 자기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여자를 
통해서이다. 미뇽.실비(모두 네르발 소설의 주인공)은 각각 이탈리아.발래.프로방스.코르시
카.안달루시아의 가장 심오한 진실을 밝히고 있다.
  괴테가 알자스의 여인 프레데리카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은, 독일인에게는 독일병합을 상
징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반대로 콜레트 보도슈(모리스 바레스의 소설 주인공)가 독일 
사람과 결혼하기를 거절할 때, 바레스(프랑스의 소설가, 1862 ~ 1922)의 생각에는 알자
스가 독일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바레스는 또한 베레니스(바레스 소설의 여자주
인공)라는 한 소녀를 통해 에그 모르트라는 거리와 세련되고 섬세한 문명 전체를 상징하
고 있다. 그녀는 또한 작가 자신의 감수성도 대표한다. 남자는 자연과 도시와 세계의 혼인 
여자 속에서, 신비로운 자기의 분신을 발견한다. 남자의 혼, 그것은 프시케(그리스신화에서 
사랑의 신 에로스에게 사랑을 받은 미소녀로, 영혼의 운명을 상징함)이며, 한 여자이다.
  에드거 포의 <울라륨>속에서 프시케는 여성의 특징을 갖고 있다. "여기서 언젠가 거인 
같은 삼목이 늘어선 길을 나는 나의 혼과 함께 헤멘 적이 있다. 늘어선 삼목을 나의 혼은 
프시케와 함께... 이리하여 나는 프시케를 달래어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나는 말
했다. '그 입구에는 뭐라고 씌어 있나요?'"
  그리고 말라르메는 극장에서 '혼 또는 우리의 관념'(즉 인간의 지성에 나타나는 신)과 
대화할 때, 그것을 "대단히 기품있는 이상한 (원문 그대로)부인"이라고 불렀다.(<극장에서
의 소묘>에서)
  
  꿈과는 다른 조화된 나

  그 침묵에서 이윽고 순수한 행위가 나타난다.
  부드러우면서도 꿋꿋한 여자!
  불가사의한 나...
  
  발레리(프랑스 시인, 1871 ~ 1945)는 혼에게 이렇게 묻는다. 기독교의 세계는 님프와 
요정 대신에 그다지 육체적이 아닌 존재로 대치시켰다. 그러나 가정과 풍경과 도시와 그리
고 인간까지도 여전히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여성적인 것이 따라다니고 있다.
  사물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이 진실은, 하늘에서 빛나는 경우도 있다. 완전한 내재인 '
혼'은 동시에 초월자, 즉 '이념'이다. 도시나 국가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실재나 제도도 여
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로마교회'.'유대교회'.'공화제'.'인간성'은 여성적이고, 또한 '평
화'.'전쟁'.'자유'.'혁명'.'승리'도 그렇다.(이 낱말들은 프랑스어로 여성형이다.) 남자는 이 
이상을 본질적인 '타자'로서 자기 앞에 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여자가 타자성의 감각적인 
형상이라는 이유로 여성화한다. 그래서 언어나 초상화에서의 비유는 대개 여성이다.
  '혼'이기도 하고 '이념'이기도 한 여자는 또한 그 양자의 중개자이기도 하다. 여자는 기
독교도를 신에게 인도하는 성총이며, 단테를 피안으로 인도하는 베아트리체이고, 페트라르
카(이탈리아의 시인, 1304 ~ 1374)를 시의 높은 정상으로 이끄는 라우라(페트라르카의 
시에 의해 전해지는 영원한 여인)이다. '자연'과 '전령'을 동일시하는 모든 교의에서 여자
는 조화.이성.진리로서 나타난다. 그노시스교파는 '예지'를 소피아라는 여자로 하고, 속죄와 
세계의 창조까지도 그녀의 책임으로 돌렸다. 이렇게 되면 여자는 벌써 육체가 아니라 영광
으로 가득찬 실체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소유하기를 원하는 대신 그 위대성을 그대로 존경
한다. 에드거 포의 창백한 여자 망령은 물처럼 바람처럼 떠돌아다닌다. 중세 기사들의 연
애나 17세기의 프레시외(17세기에 멋과 문재에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모든 훌륭
한 전통 속에서는, 여자는 더이상 동물적인 존재가 아니라 에테르와 같은 존재이며, 바람
결이고 햇빛이다. 그리하여 여자의 '밤'의 불투명은 투명으로, 어둠은 청순으로 변하게 된
다. 다음에 인용한 노발리스(독일 시인, 1772 ~ 1801)의 글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밤의 황홀, 하늘의 졸음이여. 너는 내게로 내려왔다. 풍경은 조용히 상승하고, 그 풍경 
위를 해방되고 재생된 나의 정신이 날아갔다. 그 글은 구름으로 변하고, 그 구름 저쪽에서 
나는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변모된 모습을 보았다."
  "캄캄한 밤이여, 그러면 우리는 너의 마음에 드는가?... 귀한 향유가 너의 양손에 떨어져
내리고 있다. 한 줄기의 빛이 너에게서 떨어진다. 너는 영혼이 육중한 날개를 지니고 있다. 
몽롱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기쁨에 떠는 진지한 얼굴이 나
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흐트러진 고수머리 아래로 '어머니'의 그리운 청춘을 알
아본다... '밤'이 우리들의 마음에 열어준 무한한 눈은 반짝이는 별보다 더욱 거룩하게 생
각된다."
  여자가 아래쪽으로 이끄는 유혹은 역전되어, 이제 남자를 대지의 깊숙한 곳으로 끌어내
리지 않고 하늘로 불러올린다.
  
  영원한 여성이

  우리를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다.
  
  괴테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고 있다.
  '처녀 마리아'가 갱생하여 '선'에 몸을 바친 여자 중에서 가장 완성된, 가장 널리 존경받
는 모습으로 문학과 초상화에 나타나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다음은 중세의 열렬한 
기독교도가 마리아에게 바친 기도를 발췌한 것이다.
  "... 지극히 고귀한 마리아님, 그대는 풍요의 이슬이고 환희의 샘이고, 자비의 운하이며, 
우리가 목마름을 축이는 맑은 물이 고인 우물이나이다."
  "그대는 하나님이 고아에게 젖을 주시는 가슴..."
  "그대는 모든 선한 것의 진수이고 알맹이며 핵심이나이다."
  "그대는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는 속임수를 모르는 여자이나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제물을 씻어 맑게 하는 연못이요, 문둥병을 고치는 생명의 약이요, 살
레르노(이탈리아의 도시 이름)나 몽펠리에(프랑스이 도시 이름)에서도 견줄 자가 없는 명
의로소이다."
  "그대는 손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는 성모, 아름다운 흰 손가락으로 코와 입을 고쳐놓고, 
새로운 귀를 만드십니다. 그대는 독에 감염된 환자를 고치시고, 중풍을 회복시키고, 비겁한 
자에게 용기를 주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나이다."
  이런 기도 속에서 이미 지적한 여성적인 특성의 대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마리아는 풍
요.이슬.생명의 원천이다. 많은 비유가 마리아를 우물이나 맑은 물, 또는 샘으로 비유하고 
있다. "생명의 샘"이라는 표현은 가장 널리 알려진 비유 중 하나이다. 마리아는 창조하지는 
않지만, 비옥하게 한다. 땅 속에 감춰진 것을 밖으로 드러나게 한다. 그녀는 사물의 표면 
아래에 갇혀 있는 심오한 현실, 즉 핵이며 진수이다. 그녀에 의해 욕망이 가라앉는다. 그녀
는 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남자에게 주어졌다. 그녀는 생명이 위험에 직면한 장소에 나타
나 그것을 구출하여 회복시키고, 치료하고, 강건하게 만든다. 그리고 생명이 신으로부터 비
롯되는 이상, 인간과 생명의 매개자인 그녀는 또한 인류와 신의 중개자이기도 하다. '악마
의 문'이라고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했다. 그러나 변모한 마리아는 '하늘의 문'이다.
  화가는 마리아가 낙원으로 향한 문과 창을 여는 모습을 즐겨 그리고 있다. 또 대지와 하
늘 사이에 사다리를 놓는 마리아도 그린다. 더욱 분명한 것은, 마리아가 변호사가 되어 아
들(그리스도) 옆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변호하는 모습2이다. 마지막 심판을 그린 많은 
그림에는, 유방을 드러내고 그 영광스러운 모성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에게 애원하는 마리아
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녀는 외투자락 속에 남자아이들을 비호한다. 그 자애에 넘치는 
애정은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나 전쟁터까지 그들을 따라간다. 자비의 이름으로 신의 심판
을 누그러뜨린다. 미소를 지으면서 영혼의 무게를 재는 저울을 '선'쪽으로 기울이는 '저울
질하는 성모'를 많이 볼 수 있다.
  이 자비와 애정의 역할은 여자에게 주어진 모든 역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이
다. 여자는 사회에 합류되어도, '생명'의 슬기로운 관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회의 한계
를 교묘히 벗어난다. 남성이 원하는 건설과 자연의 우연성 사이에 있는 이런 거리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여자가 불안해 보인다.

  그러나 여자가 유순하여 남자의 일을 위협할 만한 힘이 없고, 오히려 그것을 풍부하게 
하여 눈에 거슬리는 선을 부드럽게 하는 데 그칠 경우에는, 이 거리는 합당한 것이 된다. 
남성 신은 엄격한 '숙명'을 대표한다. 반면에 여신 쪽에서는 독단적인 친절과 변덕스러운 
애호를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신은 엄격히 심판한다. 성모는 자비롭고 친절하다. 지상
에서도 남자는 법칙과 이성과 필연성의 옹호자이다. 여자는 남자와 남자가 믿는 필연성과
의 근본적인 우연성을 알고 있다. 여자의 입가에 떠오르는 신비로운 아이러니와 여자의 융
통성있는 관용은 거기서 비롯된다. 여자는 고통 속에서 아기를 낳았고, 남자의 상처를 치
료했다. 여자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죽은 자를 매장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존심을 상
하게 하는 것과 그의 의지를 꺾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여자는 남자 앞에 머리를 숙이고 정신에 육체를 종속시키면서도,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지킨다. 그리고 여자는 딱딱하고 고지식한 남성 건축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 모난 부위를 
부드럽게 완화시킨다. 그리고 그 속에 호화로운 아름다움과 뜻하지 않은 우아함을 도입한
다. 여자가 남자에 대해 갖는 힘은, 남자에게 자신들의 진정한 조건을 겸손하게 깨닫도록 
부드럽게 촉구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은 여자의 환상이 아닌, 통렬하고 아이러니컬한 애
정으로 충만한 지혜의 비밀이다. 경박성이나 변덕.무지까지도 여자에게는 매력있는 미덕이 
된다. 여자는 남자가 살려고 선택하는 세계이면서도 갇혀 있기를 원치 않는 세계의 안팎에
서 편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기존의 의의나 유용한 목적을 위해 도구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신비를 대립시킨
다. 여자는 도시의 도로나 경작된 밭에 시의 입김을 불어넣는다. 시는 일상적인 산문의 피
안에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여자는 훌륭한 하나의 시적인 현실이다. 그것은 
남자가 무엇이 되려고 결의하지 않는 것을 모두 여자 속에 투기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꿈
을 구체화하고 있다. 꿈은 남자에게 가장 친밀하면서도 가장 낯선 것이다. 남자는 그것을 
바라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는다. 동경할 수는 있지만 도달할 수는 없다. 깊은 내재이며 먼 
초월이기도 한 신비로운 '타자'는 그 모습을 꿈에 나타낸다.
  그리하여 아우렐리아는 꿈 속에서 네르발을 찾아가고, 그에게 꿈의 형태로 전세계를 준
다. "그녀는 한 줄기 밝은 빛을 받아 자라기 시작하여, 이윽고 정원이 점점 그녀의 모습으
로 변하고, 꽃밭이나 나무는 그녀의 옷을 장식하는 장미나 레이스가 되어갔다. 한편 그녀
의 얼굴이나 팔은 하늘에 떠도는 붉게 물든 구름에 그 윤곽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변
모함에 따라, 그는 그녀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녀가 그 본래의 크기에서 사라져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도망가지 말아다오!'하고 나는 외쳤다. 자연이 너와 함께 죽어버리니
까."
  여자는 남자의 시적 활동의 실질이므로, 여자가 남자에게 영감의 샘으로 보이는 것은 당
연하다. 시신 뮤즈는 여자이다. 뮤즈는 창조자와 창조자가 길어올리는 자연의 원천 사이의 
중개자이다. 그 정신이 자연 속에 깊이 스며 있는 여자를 통하여 남자는 침묵의 심연과 풍
부한 밤의 심연을 탐지한다. 뮤즈는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녀는 남
자 주인에게 순종하는 여종이 된 얌전한 시발라(고대의 여선지자)이다. 여자의 충고는 구
체적이고 실제적인 영역에서도 유용한 경우가 있다.
  남자는 자기가 세운 목적을 동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달성하고 싶어하며, 다른 남

자의 충고를 귀찮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는 여자가 다른 가치를 내세워, 즉 자
기 것보다 더욱 본능적이고 더욱 현실에 맞는 지혜의 이름으로 자기에게 말을 걸어올 것
이라고 상상한다. 에게리아가 의논하러 온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직관'이다. 남자는 
별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듯이 자존심을 버리고 그녀에게 묻는다. 이런 '직관'은 사업이
나 정치에까지 도입된다. 아스파시아와 맹트농 부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크게 활약하고 
있다.
  남자가 기꺼이 여자에게 맡기는 또 하나의 직능이 있다. 여자는 남자의 활동의 목적이
며, 또한 결단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있어 가치의 척도도 되며 훌륭한 판
단자도 된다. 남자가 '타자'를 꿈꾸는 것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확인되기를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와 동류인 남자들의 확인을 받으려면 언제
나 긴장해야 한다. 그래서 남자는 외부의 시선이 그의 생활이나 사업, 그리고 자기 자신에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해 주기를 원한다. 신의 시선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너무나 
낯설고 불안하다. 신앙의 전성시대에도, 믿음을 위해 화형대에 오른 것은 극소수의 신비가
에 불과했다.
  이런 신과 같은 역할이 가끔 여자에게 주어진다. 남자와 가까이 있고, 남자에게 지배되
어 있는 여자는, 남자에게 관계가 없는 가치를 설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타자'이므
로 남자의 세계에서 떠나 있으며, 따라서 그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언제나 용기와 힘과 미의 유무를 알려주는 동시에, 외부에서 그 보편적인 가치를 보증하는 
것은 여자이다. 남자들은 협력이나 투쟁에 몰두하여 서로에 대해 구경꾼의 입장에 설 수 
없다. 때문에 서로 상대방을 냉정히 바라보는 일이 없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들의 활동에
서 떨어져서, 경쟁이나 투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여자의 입장은 이 관찰의 역할을 하기 쉬
운 것이다.
  기사가 말을 타고 결투를 하는 것은 그 귀부인을 위해서이고, 시인이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녀들의 공감이다. 라스티냐크(발자크의 <고리오 영감>과 <인간 희극>등 여러 작
품에 등장하는 젊은 야심가)가 파리를 점령하려고 했을 때 그는 먼저 여자를 손에 넣으려
고 한다. 그것은 여자의 육체를 소유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자만이 남자에게 줄 
수 있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발자크는 자기 소설의 젊은 주인공들 속에 자기 자신이 
젊었을 때 일어난 이야기를 삽입시켰다. 그는 젊었을 때 연상인 애인 옆에서 자기교육을 
시작했다. 여자가 교육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골짜기의 백합>에서만이 아니다. <감정교
육>(플로베르의 소설)이나 스탕달의 소설에서, 그리고 많은 교육소설에서 여자는 역시 이
런 역할을 맡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여자는 자연인 동시에 반자연이다. 여자는 '자연'과 마찬가
지로 '사회'도 구현한다. 중세의 연애시나 <데카메론>이나 <아스트레>(프랑스의 소설가 
오노레 위르페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자에게는 한 시대의 문명과 문화가 요약
되어 있다. 여자는 유행을 만들고, 살롱에 군림하고, 여론을 이끌고 반영한다. 명성이나 명
예는 여자의 것이다. "군중은 여자이다." 라고 말라르메는 말했다. 청년은 여자의 곁에서 '
세계'니 '인생'이니 하는 목잡한 혀실에 눈을 뜨게 된다. 여자는 영웅이나 탐험가나 개인주
의자가 무엇보다 먼저 목표로 삼는 표적의 하나이다.

  고대에서는 페르세우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아들. 메두사의 목을 베고 안드
로메다를 구출하여 결혼함)가 안드로메다(이디오피아의 왕녀. 바다의 괴물에게 희생되어 
바위에 매달려 있다가 구출되어 괴물을 죽인 페르세우스의 아내가 됨)를 해방시키고, 오르
페우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음악의 명인. 아내 에우리다케롸 결혼한 첫날밤에 그녀가 뱀
에게 물려 죽음)가 에우리다케를 찾아 지옥까지 가도, 트로이가 미녀 헬레나를 지키기 위
해 싸운 것을 볼수 있다. 기사 이야기중에는 잡혀간 공주를 구출하는 것보다 용감한 행위
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멋진 왕자"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깨우지 않거나, '나귀
의 가죽부대'에 선물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면,그밖에 무슨일을 했겠는가? 왕이 양치는 처
녀를 아내로 삼는 신화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남자도 기쁘게 한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재믈을 나눠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쓸모없는 부는 추상적인 것에 그치고 만다. <신
데렐라>의 신화는 필립 윌리(현대 미국의 소설가)의 <살모사의 세대>에서도 달콤하게 
묘사되어 있듯이, 번영한 나라에서 많이 잃히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환영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미국에서 남자들은 자신의 부를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1년동안 번 돈이지
만, 사랑하는 한 여인에게 주지 않으면 무엇에 쓸 것인가. 오슨웰스(미국의 영화배우 감
독)는 특히 <시민 케인>에서, 이 극단적인 거짓선심을 드러내고 있다. 케인이 한 무명가
수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여 그녀를 유명가수로 내세울 결심을 하는 것은, 자기 능력을 확
인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에도 소규모의 '시민 케인'의 예는 얼마든지 있다.

  또하나의 영화 <면도날>에서는, 주인공이 대단한 지혜를 얻고 인도에서 돌아왔을 때, 
그가 발견한 그 지혜의 유일한 용도는 한 사람의 창녀가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구출하
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남자는, 기증자 해방자 속죄자로서의 자기를 꿈꿀 때에도 여자의 
예속을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깨우기 위해서는 악마나 거대
한 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가 어려운 일에 호기심을 갖고 있으면, 여자에게 
어느 정도 독립을 부여하기를 좋아한다. 정복하는 것은 해방시키거나 부여하는 것보다 더
욱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일반남성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은, 남자의 지배에 자유의지로 복종하는 남
자, 토론 없이는 남자의 사상을 받아들지 않지만 결국은 남자의 이론에 굴복하는, 즉 지성
으로 남자에게 저항 하지만 끝내는 설복당하는 그런 여자이다. 남자는 자부심이 강할수록 
위험한 모험을 즐긴다. 얌전히 승낙하는 신데렐라를 아내로 삼기보다는 펜데실레이아(아마
존의 여왕 여장부)를 정복하는 것이 더 근사하다고 니체는 말했다. "전사는 위험과 도박을 
사랑하는 남자는, 정복할 가망이 있는 한 여자가 아마존(남성화한 여자)으로 변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남자가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는 것은 그 투쟁이 그에게는 하나의 도박에 그치는 반면, 
여자는 거기에 자기의 모든 운명을 거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해방자로서, 정복자로서 남
자의 참된 승리이다. 왜냐하면 여자가 자유의지에 의해 남자를 자기 숙명으로 인정하기 때
문이다.

  그래서 '여지를 차지한다.'는 표현은 이중의 포함하게 된다. 대상으로서의기능과 심판자
로서의 기능은 분리할 수 없다. 여자가 인격으로 보였을때부터, 남자는 여자의 동의가 없
이는 여자를 정복할수 없다. 그러므로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사야한다, 멋진 왕자를 만족
시키는 것은 숲속의 잠든 미녀의 미소였다. 기사의 용감한 행위에 진실성을 부여하는 것은 
행복과 감사로 가득찬 공주의 눈물이다. 바꿔 말하면, 여자의 시선은 남자의 시선에서 풍
기는 추상적인 냉혹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쉽사리 유혹에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웅주의와 시는 유혹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여자는 유혹을 받으면서 영웅주
의와 시를 찬양한다. 개인주의자의 안목으로 보면, 여자는 더욱 본질적인 특질을 갖고 있
다. 그의 눈에는 여자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가치척도로서가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재능
과 그라는 존재 자체의 계시로 비쳐진다. 남성은 동성인 도료에게는 자기의 행위에 의해, 
객관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인 척도에 의해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능력의 일부, 특히 생식
능력은 여자에게만 흥미의 대상이 된다. 그가 남성적이고, 매혹적이고, 유혹적이고, 친절하
고, 잔혹하다는 것 등은 모두 여자의 눈에서 보았을 경우이다. 그러므로 이런 은밀한 능력
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고 싶으면, 그는 여자가 절대로 필요하다. 그는 여자에 의해 타자로
서, 가장 깊은 자아이기도 한 타자로서 자기 눈에 비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다
음은 개인주의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잘 표현한 말로의 문장이다.
  키요는 다른사람의 목소리는 귀로 듣고, 자기 목소리는 목구멍으로 듣는다. 그리고 자기 
생명도 목구멍으로 듣는다. 그러나 남의 생명은 ? ... ... 타인에 있어, 나라는 존재는 내가 
행한 것만이 전부이다 ... ... 그러나 메이에게만은, 그라는 존재는 그가 행해 온 행위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메이는 그녀의 전기이외의 존재였다. 포옹, 인간에게 고독을 잊
게 하는 그런 포옹도 결코 인간에게 도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
이 본연의 마음속으로부터 집착하고 있는 저 광인에게, 유례없는 괴물에게나 도움을 부는 
것이었다. 키요의 어머니가 죽은 후에는 메이만이 그를 키요 지조르로 보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녀는 그를 가장 긴말한 반려자로 삼아왔다. .... 세상남자들은 내동지가 아니
다. 그들은 나를 주시하고 나를 비판하는 사람이다. 내 동지는 나를사랑하는 사람이다. 내 
동지는 나를 보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실패해도, 아무리 비천한 것을 해도, 
또 살사 배반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 이에 개의치 않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한 
행위나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행위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
는 한 나를 사랑하는 인간이다. 함께 죽을 정도로.

  키요의 태도가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것은, 그것이 상호성을 갖고 있어 그가 메이에게 있
는 그대로의 진정한 모습으로 자기의 사랑해 주기를 요구하고, 또한 그녀에게도 그가 좋아
할 듯한 달콤한 모습을 반사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데 있다. 이런 요구는 많은 남자의 품
위를 떨어뜨린다.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정확한 모습이 아니라, 찬미와 감사의 후광으로 
장식된 신격화된 자기의 이미지를 상대방 여자의 두 눈동자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흔히 물로 비유되어온 이유는 여자는 남자의 나르시스가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기 때문이다. 그는 선의 또는 악의를 가지고 여자를 대한다. 그러나 어느경우에도 그가 여
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가 자기 밖에 있어서 자기 내부에서 파악할 수 없는 모든 것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존자의 내면은 무이며, 자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상 중
에 자기를 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가 육체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타인의 모
습을 빌린 자기의 신격이기 때문에, 남자에게 있어서는 바람직한 보상이다. 그에게 세계의 
요약인, 자기 가치나 법칙을 강요한 존재를 자기품에 껴안았을때, 그가 포옹하고 있는 것
은 유례없는 괴물, 즉 자기 자신이다.
  
  이리하여 남자는 자기 것으로 만든 이 타자와 합일함으로써 자기자신에게 도달하기를 
원한다. 보물 약탈물 도박이나 위험 뮤즈 안내자 심판자 중개자 거울 등 여자는 그속에서 
주체가 재한을 받지 않고 자기초월을 하는 , 주체에 대항하지만 부인은 하지 않은 타자이
다. 여자는 끊임 없이 타자이면서 종속물이 되는 타자이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의 기쁨이
나 승리감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만일 여자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남자들은 
여자를 일부러 만들어내었을 것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사실 남자는 여자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조작없이도 존재한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몽상의 수현인 동시
에 그 실패이기도 하다. 여성상중에서 그 반대의 모습을 즉시 탄생시키지 않은 것은 하나
도 없다. 여자는 삶과 죽음, 자연과 인공, 낮과 밤이다. 어느 면에서 여자를 보려고 해도 
비본질은 필연적으로 본질로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같은 진자운동을 발견하게 
된다. 성모 마리아나 베아트리체 속에는 이므나 키르케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마녀) 역시 
존재한다.
  키에르케르고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자에 의해 인생속에 관념성이 들어온다. 여자가 없
었더라면 남자가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남자들이 젊은 소녀의 덕택에 천재가 되었다 ... 
그러나 처녀와 결혼한 덕택에 천재가 된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여자가 남자를 관념성 속에서 생산적이 되게 하는 것은 소극적인 관계일 경우이다 ... 여
자와의 소극적인 관계는 우리를 무한하게 만든다 ... 여자와의 적극적인 관계는 남자를 대
단히 유한하게 만든다. 즉 여자는 남자가 자기의 초원을 투기하는 관념에 머무르는 한 필
요하지만, 자기를 위해 존재하고 자기에게 한정된 객관적인 현실일 경우에는 해로운 것이
다. 키에르케고르는 약혼자와 결혼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여자완 유일한 가치 있는 관계를 
확립한 것으로 생각한다. 무한의 타자로 만들어진 여자의 신화는 곧 그 반대를 야기시킨다
는 의미에서 그의 생각이 옳다.
  여자는 허무의 무한 , 실질이 없는 이상이므로, 유한과 범용 그리고 동시에 허위로서 모
습을 나타낸다. 라포르그(프랑스의 시인,1860 ~ 1887)는 여자를 그런 모습으로 다루고 
있다. 그의 전 작품을 통해 그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남자에게도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잘
못에 증오심을 표시하고 있다.
  오필아나 살로메는 사실 하찮은 여자에 불과하다. 햄릿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오필
리아는 나를 자기의 소유물로서, 그리고 내가 그녀의 친구들의 소유물보다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우수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등불을 켤 시간이 되
면 나에게 쾌락과 안락에 관해 알마나 많은 말을 속삭였는지 모른다 !
  여자는 남자를 꿈꾸게 한다. 그런데 여자는 안락이나 국냄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여

자의 정신을 운운하지만, 여자는 육체에 불과하다. 연애를 하는 남자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와 같은 것이다. 여자는 사실 삶의 일상성을 대표한다. 
여자는 어리석고, 소심하고, 인색하고 따분하다. <우리들의 작은 반려자> 라는 시에 이것
이 표현되어 있다.
  
  나는 어떤 격식도 몸에 익히고
  무구의 취미에도 맞은 혼을 갖고 있어요.
  나의 다양한 얼굴의 꽃을 꺾어요.
  내 입술을 빨아요. 그렇지만 소리가 나지 않게 해요.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해서는 안돼요.
  아무도, 나 자신도 앞날을 분명히 꿰뚫어본 적은 없으니까요.
  당신에게 손을 내밀 만큼
  우리의 사랑은 평등하지 않아요.
  당신은 단지 순진한 수컷에 불과하지만,
  나는 영원한 여성이에요.
  나의 목적은 멀리 별 속으로 사라졌어요!
  위대한 여신 이시스는 바로 나예요!
  나의 베일을 벗긴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의 오아시스만을 꿈꾸세요.
  
  남자는 여자를 종속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지금까지 여자의 소유를 바람
직하게 했던 동기를 여자에게서 빼앗아버렸다. 여자의 매력은 가정이나 사회에 합류하면 
변모한다기보다는 소멸된다. 하녀의 신분으로 전락한 여자는 벌써 자연의 풍부한 보물이 
깃든 자유분방한 벅이가 아니다. 기사 연애가 생긴 후호는 결혼이 사랑을 죽인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아내는 지나치게 멸시를 받거나 혹은 과분하게 존경을 받거나, 또는 너무 
평범하여 이미 색정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본래 결혼의식은 남자를 여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 된다. 결혼은 남자에게도 일종의 종속이다. 결혼했
을 때 남자는 자연이 쳐놓은 올가미에 걸린 것이다. 생기발랄한 젊은 처녀를 탐낸 나머지, 
남자는 뚱뚱한 중년부인과 깡마른 노파를 한평생 먹여살려야 한다. 그의 샐활을 미화해야 
할 우아한 보석이 짜증스럽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다.
  크산티페(소크라테스의 아내, 전형적인 악처)는 남자들이 언제나 최대의 혐오감을 갖고 
이야기한 여성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설사 아내가 젊을 때라도 결혼에도 어떤 기만이 숨겨
져 있다. 결혼은 색욕을 사회화하려는 것이지만, 결국은 그것을 말살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색정은 원래 시간에 대한 순간의 요구와 집단에 대한 개체의 주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한다. 그것은 모든 통제에 반
역한다. 그것은 반사회적인 원리를 포함한다. 풍속이 제도나 법률의 엄중성에 굴복한 적은 
한번도 없다. 연애는 어느 시대에나 이런 것에 대항하여 자기를 주장해 왔다.
  그리스나 로마에서의 연애는 관능적인 양상으로 청년이나 혹은 창녀에게 호소했다. 중세

의 기사연애는 육체적인 동시에 플라토닉하여, 언제나 남의 아내가 대상이었다. 트리스탄
(중세의 전설, 그 비련의 주인공)은 간통의 서사시이다.
  1900년경 여자의 신화를 새로 지은 시대는 간통이 모든 문학의 주제가 되었다. 일부 작
가들, 예를 들면 베른스탱(프랑스의 극작가, 1876 ~ 1953)은 부르주아 제도를 옹호하려
는 비장한 심정으로, 색용과 연애를 결혼속에 다시 한 번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서로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포르토 리슈(프랑스의 극작가, 1849 ~ 
1940)의 <사랑하는 여자>쪽에 훨씬 더 많은 진실이 있다.
  간통은 결혼 자체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결혼의 목적은 남자에게 자
기 아내만 상대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여자들은 그에게 눈부신 매력을 갖
고 있다. 그러므로 드는 당연히 그런 여자들에게 눈길을 돌릴 것이다. 이 경우에 여자들도 
공범자가 된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자기들에게서 모든 무기를 빼앗으려는 질서에 반항하기 
때문이다. 여자를 자연에서 떠어 놓기 위해, 의식이나 계약에 의해 남자에게 종속시키기 
위해, 여자는 인격의 존엄성을 인정 받을 정도로 지위가 높아지고, 자유가 주어졌다. 자유
란 모든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흉악한 세력에 사로 잡혀 있는 자에게 자
유가 주어지면 위태로운 인간이 된다. 남자가 혼미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그만큼 더 위
험하다. 남자는 여자를 하년를 삼고 그 초월성을 박탈해 버린다는 조건하에서 비로소 여자
를 자가들의 세계에 받아들인다. 여자에게 주어진 자유는 소극적인 용도로 밖에 쓰이지 못
한다. 그것은 자기를 거부하는데 사용된다. 여자가 사로잡힌 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유
롭게 된다. 여자는 자연이 준 힘을 되찾으려면, 이 인간적인 특권을 단념해야 한다. 여자는 
낮에는 충실한 하녀의 역할을 하지만, 밤이면 암코양이이나 암사슴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인어의 가죽을 뒤집어쓰거나, 혹은 빗자루를 타고 악마의 무도회를 향해 날아간
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남편에게 이 밤의 마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 주인에게는 자기의 변신을 숨기는 것인 안전하다. 연자가 먹이로 택하는 것
은 외간남지들이다. 그들은 그녀에 대해 아무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들에게 여전히 식물이나 샘 별 마법사 그대로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부정에 빠진다. 이것
은 그녀의 자유가 취할수 있는 유일하게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녀는 자기의 요구 사상 의
식을 초원하여 부정을 저지른다. 그녀는 객체시되어 자기를 소유하려는 모든 주체에게 바
쳐지게 된다. 규방에 들어 앉아 있건, 면사포에 가려져 있건, 그녀가 누구의 욕정도 불러일
으키지 못한다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는 것은 이미 남편이나 
사회에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자진하여 이 운명의 공범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여자는 거짓말과 간통에 의하지 않고는 자기가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남자에게 일
방적으로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실증하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의 질투
심이 그렇게 재빨리 머리를 쳐드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여자는 언제나 까닭없이 의심을 받고, 사소한 혐의로 단죄되기 쉅다. 제
네비에브 드 브라방(전설에 나오는 비극의 주인공) 이나 데스데모나(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남편에게 부당하게 의심을 받아 살해당함)의 경우가 그
렇다. 아무 혐의도 없는데, 그리셀다(11세기 부도덕한 여인의 전형)는 가장 가혹한 시련을 
받게 되었다. 여자가 숙명적으로 시기와 의혹의 대상이 되어 있지 않다면, 이런 이야기는 

부당하기 짝이 없다. 여자의 죄를 입증할 필요는 없다. 그녀 쪽에서 자기의 결백을 입증하
면 된다. 질투가 자취를 감추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소유는 결
코 적극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남에게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할 수는 있어도, 자기가 그 샘
을 소유할 수는 없다. 질투하는 남자믐 이것을 잘 알고 있다. 마치 물의 본질이 유동적인 
것처럼 여자도 본능적으로 불안정하다. 그리고 인간은 어떤 힘으로도 자연의 진실을 거역
할 수 없다.
  모든 문학을 통하여, <아리비안 나이트>,(데카메론>에서도 여자의 교활한 지혜가 남자
의 경계심을 이기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자가 옥리처럼 되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의지때문만이 아니다. 사회가 여자의 행실에 대한 책임을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남편으로
서의 남자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각 시민은 자기가 실제로 아버지의 아들로서 공인될 필요
가 있으며, 그와 같은 경제적 종교적인 이유로 여자에게 순결이 강요된다. 한편 사회가 여
자에게 부과한 역할에 충실한 것을 여자에게 강요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남자의 이중의 요구는 여자를 이중인격자로 만든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 소유가 
되는 동시에 타인이기를 요구한다. 하녀인 동시에 마녀인 여자를 몽상한다. 그런데 남자가 
공공연히 인정하는 것은, 이 욕망 중에서 전자뿐이다. 후자는 남자가 마음과 육체 깊숙이 
몰래 숨겨둔 음험한 요구이다. 그것은 도덕과 사회에 위배된다. 그것은 타자처럼ㅡ 혹은 
반항하는 자연처럼, 악녀처럼 고약하다. 남자는 자기 세운 사회에 강요하려고 하는 '선'을 
자기 자신은 완전히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악' 과 부끄러운 내통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악이 불쑥 표면에 나타나면, 그는 곧 이것을 토벌하려고 한다. 그는 밤에는 어
둠속에서 여자를 원죄로 유혹하면서, 낮에는 원죄와 원죄를 여자를 배척한다. 한편 여자쪽
에서도 그녀들 자신이 은밀한 침실에서 죄를 비었으므로, 사람들 앞에서는 점점 열렬하게 
정숙을 존중하게 된다.
  원시인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성기는 세속적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여자의 성기
는 종교적 마력적인 힘을 갖고 있다. 가장 근대화된 사회에서도 남자의 성적 과실은 죄가 
없는 장난에 불과하다. 그것은 대개 너그럽게 봐준다. 남자는 사회의 법규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도 여전히 사회의 일원이다. 남자는 집단적인 질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지 않은 개
구쟁이 아이에 불구하다. 그러나 여자는 사회에서 탈선하면, '자연'과 악령에게 돌아가 억
제할 수 없는 마력을 집단에 일으키게 된다. 그녀들이 저지른 방탕한 행위에 대한 비난에
는 언제나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남편이 그 아내를 정숙하게 단속하지 못하면 자가도 아내의 괴실에 책임의 일부를 지게 
된다. 남편의 불행은 사회에 하나의 불명예가 된다. 그중에는 아내의 죄에 대한 연대책임
을 모면하기 위해 님편이 아내를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엄격한 사회도 있다. 그리고 다
른 사회에서는 아내가 간통했을 경우에 그 남편을 벌하여 소란을 부리거나, 그를 알몸으로 
당나귀에 태워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가 남편을 대신하여 죄를 범한 아내에게 징
벌을 내린다. 그녀가 모욕한 것은 그 남편뿐만 아니라 집단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풍습은 미신적이고 신비적이고 관능적이며, 육체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스페
인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컬데롱(스페인의 극작가 시인 1600 ~ 1681)이나 로르카(스페
인 극작가), 발레 인클란(스페인의 소설가, 1870~ 1936)은 이런 주제로 많은 희곡을 썼

다. 로르카의 베르나다 알바의 집에서는 마을의 주부들이 유혹을 받은 딸을 벌하기 위해 
그녀가 죄를 지은 곳을 빨갛게 핀 숯불로 지진다. 발레 인클란의 <신의 말씀>에서는 간
통한 여자를 악마와 춤추는 마녀처럼 보고 있다. 여자의 감음이 드러나면 마을사람들이 모
여 그녀의 옷을 벗기고 강물에 빠뜨린다.
  많은 전설에서 전하는 것을 보더라도 간음한 여자는 이처럼 옷을 벗가고 , 복음서에 쓰
여 있는 것처럼 돌로 쳐죽이거나 생매장을 하거나,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불태워 죽였다. 
이런 처벌이 갖은 의미는, 이렇게 해서 사회적인 신분을 박탈하고 여자를 자연의 손에 돌
려준다는 것이다. 여자는 음란죄로 자연의 나쁜 해독을 사회에 가져다주었다. 그러므로 그
죄의 보상은 일종의 신성한 북새통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가은데서 다른 여작들은 죄를 
지은 여자의 옷을 벗기고 구타하고 학살한여, 이번에는 자가들의 신비로운 그러나 그것은 
그녀들이 사회와 협조하여 행동하기 때문에 유익한 영기를 발산시킨다.
  이 야만적인 잔인성은 미신들이 줄어들고 공포가 소멸함에 따라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
나 지금도 시골에서는, 신도 가정도 갖지 못한 집시 여자를 사람들은 의혹의 눈초리로 대
한다. 자유분방하게 그 매력을 발휘하는 여자, 즉 탕녀 독부 요부 등은 여전히 백안시된다. 
미국 영화에 나오는 요부들중에는 키르케의 모습이 살아남아 있다,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
만으로 마녀로 취급되어 화형울 당하는 여자도 있다. 그리고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에 대
한 시골 도덕의 위선적인 분노 속에는 낡은 공포심의 잔재가 남아 있다.
  이런 위험이, 모험심이 강한 남자에게는 오히려 여자를 대단히 매혹적인 유희의 소재로 
삼는 계기가 된다. 그는 남편의 특권을 버리고 , 사회의 권위에 의지하기를 거부하고 대뜸 
여자를 정복하려는 한다. 그는 여자가 저항하더라도 자가 것으로 만들려고 하며, 여자가 
남자가 거역하녀 자유로워진다. '숲속의 짐든 미녀'도 불쾌하게 잠에서 깨어날 때가 있다. 
자가를 깨우는 남자가 '멋진 왕자'임을 알아보지 못할 경우도 있고, 미소를 짓지 않을 경우
도 생각할 수 있다. <시민 케인>의 경우가 그렇다. 남자가 보호하는 여자는 피압박자이
며, 그의 관용은 권력과 전제에의 의지인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영웅의 아내는 남편이 들려주는 무용담을 냉담하게 한쪽 귀로 흘려버리고, 시인이 동경
하는 뮤즈는 그의 시를 들어면서 하품을 한다. 여장부라도 투쟁이 싫어 거절하는 경우가 
있고, 한편 그 투쟁에 참가하여 끝까지 싸워 이기는 경우도 있다. 퇴폐기의 로마의 여자나 
오늘날의 많은 니국 여성들은 자의와 자기 중심의 규정을 남자에게 강요하고 있다. 신데렐
라는 어디로 갔는가? 남자는 주려고 했는데, 이제는 여자가 남자로부터 빼앗으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남자는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여자는 자유로워진 순간부터 
자신이 자유로이 창조하는 것 이외의 숙명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녀 사이에 투
쟁관계가 조성된다. 남자와 동등해진 여자는, 여자가 남자에게 이질적인 '자연'이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두려운 존재가 된다. 아기를 키우는 헌신적으고 인내심이 강한 암컷이 탐욕스
럽고 사나운 짐승으로 역전한다. 질이 나쁜 여자도 '대지' 나 '생명'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 대지는 무덤이고 생명은 무자비한 투쟁이다. 근면한 꿀벌이나 어미닭의 
신화 대신에, 깨물어죽이는 버마재비나 거미의신화가 등장한다. 여자는 이제 아기에게 젖
을 먹이는 암컷이 아니라 수컷을 잡아 먹은 암컷이다. 난소는 이제 무진장의 창고가 아니
라, 정자가 거세되어 물에 빠져죽는 생명 없는 물질로 된 함정이다. 자궁, 이 태평스럽게 

들어 앉은 동굴은 액체를 빨아들이는 과육 육식동물 경련하는 암투의 심연이 된다. 그 속
에는 한 마리의 뱀이 살고 있어서 남자의 정력을 모조리 삼켜버린다. 같은 논리는 욕정의 
대상을 혐오스러운 마녀로 만들고, 하녀를 배신자로, 신데렐라를 식인귀로 만들며, 모든 여
자를 남자의 적으로 바꿔버린다. 이것은 기만적인 태도를 자기만의 유일한 본질로 설정하
고 싶어했던 남자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   그러나 이런 적대적인 면도 여자의 결정적
인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여자라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원론이 깃들어 있다. 피타고라스
는 선의 원리를 남자로 비유하고, 악의 원리를 여자로 비유했다. 남자는 여자를 자기에게 
종속시킴으로써 악을 초원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속
죄와 구원의사상을 내세워 지옥의 영벌이라는 용어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기독교
인 것과 마찬가지로, 악한 여자가 분명히 드러난 것은 신성화된 여자와의 대립에 있어서였
다.
  중세에서 현대까지 계속되고 있는 여성에 대한 논의에서 어떤 남자들은 자기들이 몽상
에 어긋나는 저주받은 여자만 인정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실은, 만일 남자가 여자속에서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지가 그런 양면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
자는 생명이 의미를 갖는 가치와 반가치를 모두 육체적으로 생생하게 구현하고 있다. 다음
에 든 예에서는, 헌신적인 '어머니와 불성실한 '애인'의 형태를 취한 선과 악이 분명히 대
립되어 있다. 영국의 오랜 민요인 <나의 아들 랜달>에서는 애인에게 속아 독을 마신 젊
은 기사가 어머니의 품에서 죽으러 돌아온다. 리슈팽(프랑스의 소설가,1849 ~ 1926)의 
<새 잡는 끈끈이>는 이보다 더한 비장감과 악취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천사 같은 
미카엘라는 요부인 카르멘과 대조된다. 어머니와 정숙한 약혼자, 인내심이 강한 아내가 요
부나 마녀가 남자들의 마음에 입힌 상처를 헌신적으로 치료해 준다.
  분명한 이 양극단의 타입 중간에도 여러가지 애매한 타입이 있다. 가엾은 녀자, 냘미운 
여자, 죄지은 여자, 남에게 희생된 여자, 교태를 부리는 여자, 연약한 여자, 천사 같은 여
자, 악마 같은 여자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여러가지 행동과 감정이 남자를 자극하여 풍족
하게 해주는 셈이다.
  여자의 복잡성이 또한 남자를 매혹시킨다. 남자에게 쉽사리 현혹되는 것은 하녀이다. 여
자는 천사인가, 악마인가? 그 불확실성이 여자를 스핑크스로 만든다. 파리의 가장 유명한 
창가의 하나가 이 '스핑크스'라는 이름을 간판으로 내걸고 있다. '여성다움'이 강조되던 무
렵,코르셋이 유행하던 시대,폴 부르제(프랑스의 소설가,1852 ~ 1935)나 앙리 바타유(프
랑스의 극작가,1872 ~ 1992)나 프렌치 캉캉 시대에는 이 스핑크스의 주제를 연극 시 가
요 등에서 많이 다루었다. "너는 누구냐, 어디서 왔느냐, 신기한 스핑크스여!" 와 같은 가
사가 그 한 예이다.
  여성의 신비에 대해 몽상하거나 의존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남자들
이 여자에게 자락이 긴 옷이나 스커트 제비꽃 긴장갑 하이힐 등을 버리지 말도록 오랫동
안 권장해 온 것도 이 신비를 옹호하기 위해서 였다. '타자'속에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
은 무엇보다도 그 타자에의 욕구를 부추기게 된다. 왜냐하면 남자가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은, '타자'이기 때문이다. 알랭 푸르니에(프랑스의 소설가, 1886 ~ 1914)는 
그의 편지에서 영국 여자가 남자처럼 악수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지만, 이는 프랑스 여자의 

수줍어하는 듯한 조심성에 더욱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여자가 먼 나라의 공주로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비밀에 싸인 채 미지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푸르니에는 실생활에선 여자에게 남달리 정중했던 것으로 보이진 않지만, 그 
소년시절과 청춘시절의 꿈, 잃어버린 낙원에의 향수 등 모든 것을 한 여자, 접근하기 어렵
게 보이는 것이 제일의 금빛어린 초상을 그렸다. 남자는 여자의 결점이 신비스러움을 조성
한다면 그 결점까지도 사랑한다. "여자는 변덕스러워야 해." 하고 어떤 남자가 알아들을 만
한 여자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변덕이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여자에게 물결 같
은 인상을 준다. 거짓말은 매혹적으로 반영되어 여자를 장식한다. 교태나 간사스러움까지
도 남자를 취하게 하는 향기를 여자에게 준다. 거짓말쟁이이고, 종잡을 수 없고, 정체불명
이고, 속다르고 겉 다른 여자가 남자의 모순된 정욕에 가장 잘 작응한다.
  여자는 한 없는 변신을 하는 '마야'이다. 스핑크스는 대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처
녀성은 남자에게 가장 불안한 비밀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난봉꾼일수록 점점 거기에 매력
을 느낀다. 처녀의 순결은 그것이 장차 어떤 방종으로 흐르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생각되
며, 또 어떤 악덕이 그런 순진한 처녀에게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동물이나 식물에 
가깝지만, 이미 사회의 과습에 잘 순응하고 있는 처녀는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다. 
그녀의 수줍은 여성스러움은 두려움이 아니라 다소의 불안감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런 처
녀가 여성적 신비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처녀'가 점점 드물어졌기 때문에, 
처녀숭배는 오늘에 와서는 다소 시대에 뒤진 것이 되고 말았다. 그 대신에 강티용(프랑스
의 현대 희곡작가,<마야>는 그의 대표작)이 크게 성공한 희곡에서 마야에게 부여한 창녀
의 얼굴은 그위광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구체적인 여성형
의 하나로 악덕과 미덕의 교차를 가장 잘 발휘하는 타입이다. 이런 여자는 소심한 청교도
에게는 악 치욕 질병 징벌의 화신이다. 그녀는 공포와 혐오를 일으킨다. 그녀는 어떤 남자
의 소유도 되지 않고, 어떤 남자에게도 몸을 맡기면서 그런 거래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년은 원시의 음탕한 모신의 두려운 독립성을 재발견하고, 남자의 사회에서 합리화
되지 못하며, 여전히 불길한 힘을 갖는 '여성'을 대표하고 있다. 육체를 다소 저주받은 것
으로 생각하고 있는 앵글로색슨인은 특히 그렇게 느낀다.
  이와 반대로 육체를 겁내지 않는 남자는 창녀의 육체가 지닌 관대한 긍정을 사랑하게 
된다. 어떤 도덕에 의해서는도 진가를 잃지 않는 여성다움을 이런 여자에게서 발견하게 된
다. 일찍이 별이난 바다와 단짝이 되었던 여자의 마력을 남자는 그녀의 육체에서 다시 찾
게 되는 것이다. 헨리밀러 같은 사람은 창녀와 동침할 때 삶과 죽은과 우주의 심연 자체의 
깊이를 헤아리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자기를 혼쾌히 맞아주는 질의 축축한 암흑속에서 그
는 신과 합일한다. '타락한 여자'는 위선적인 도덕의 세께에서 추방된 일종의 비인간이므
로, 그런 여자는 공인된 모든 미덕에의 반역자로 간주해도 부방하다. 그 더러운 행위가 그
녀를 진정한 성녀족에 속하게 한다. 비하된 것이야말로 언젠가는 고양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애의 눈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보았다. 위선적인 미덕보다 죄는 쉽사리 천
국문을 여는 것이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도스토예프스키의 <조와 벌>의 남자 주인
공)는 자기를 범죄로 인도한 남성적인 오만 자존심을 소냐의 발 밑에 바친다. 그는 모든 
남자에게 숨어 있는 분리에의 의지를 살인에 의해 격화시켰다. 그래서 사란들의 눈밖에 난 

천한 창녀는 긍의 자포자기한 고백을 누구보다도 잘 받아들인다. '타락한 여자'라는 말은 
큰 파문을 일으킨다. 많은 남자들도 타락하기를 꿈꾸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적극
성을 띠고 악에 도달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악마적인 사나이도 극악한 범죄 앞에
서는 벌벌 떤다. 어떤 여자는 슬며시 사탄을 불러들이는 검은 미사를 대수롭지 않게 행할 
수 있다. 여자는 남성세계의 변두리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여자와 관계된 행위는 대단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도 인간이므로 여자를 통해서 인간의 법도에 대항해 
음험한 반역을 행할 수도 있다. 뮈세(프랑스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18010 ~ 1857)에서 
조루주 바팅유(프랑스 소설가 사상가,1887 ~ 1962))에 이르기 까지 추하고 매혹적인 방
탕은 언제나 창녀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사드 후작(프랑스 작가,사디즘이라는 용어는 그에
게서 비롯됨, 1740 ~ 1814)이나 자허 마조흐(오스트리아의 작가,마조히즘은 그의 이름
에서 비롯된, 1836 ~ 1895)가 집요한 욕정을 충족시키는 것은 여자의 육체에서 였다. 
그들늬 추종자들이나 '변태성욕'을 만족시키고 싶은 남자는 우선 창녀를 찾아가는 것이 보
통이다. 창녀는 여자중에서 가장 남자에게 고분고분하지만, 그러면서도 남자에게서 가장 
멀리 도망치는 여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창녀에게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하지만 처녀 어머니 아내 자매 하녀 애인 열녀 상냥한 후궁 등 여기에 열거한 여성상 
중에서 남자의 유동적인 갈망을 한몸에 지닌 여자는 하나도 없다.
  남자가 여러가지 양상을 띤 '신화'의 이러저러한 면에 집착하는 이유와, 그가 그것을 어
떤 특정한 여자에게서 찾아내려고 하는 이유를 캐는 것은 심리학, 특히 정신분석학의 과제
이다. 그러나 모든 콤플렉스 강박관념 정신병에는 이 신화가 관련되어 있다. 특히 많은 노
이로제의 원인은 이 금기가 갖은 현혹적인 매력속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터부가 미리 정
해져 있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외적인 사회적 억압만으로는 이 터부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사회적 금기는 실제로 단순한 규약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곳은 여러가지 의미
를 갖고 있으며, 각 개인이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하나의 존재론적인 의미도 갖고 있다.
  그 한 예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검토해 보는 것은 흥미로있는 일이다. 이것은 흔히 
본능적인 경향과 사회적인 규제와의 투쟁에서 오는 산물이라고 보기 쉅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 주체 자신의 내면적인 갈등이다. 어머니의 유방에 대한 아기의 집착은 먼저 보편
성과 내재성에서 볼때, 직접적인 형태에서의 '생명'에의 집착이다. 이유의 거부는, 개체가 
전체에서 분리되면 곧 옹게 마련인 고독의 거부이다. 그후에 개체가 점점 개체화되고 분리
됨에 따라,비로소 그의 육체에서 떠난 어머니의 육체에 대한 그가 갖은 애착에 성적이라는 
이름을 붙일수 있게 된다. 그때에는 그의 관능성은 간접화되어, 이질적인 대상을 향한 초
원이 된다. 그러나 어린이가 자기를 주체로 하여 살아가는 시기가 빠를수록 자기의 자주성
에 반발하는 육체적인 유대가 귀찮게 여겨진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애무에서 벗어나려
고 하며,어머니의 낡은 권위나 자기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 즉 때로는 어머니의 존재에 대
해서까지도 일종의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특히 어머니의 육체로 보는 것은 망측한 일이며 언짢은 일로 생각되어, 애써 어머니의 
육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는 한다. 어린이가 자가 아버지나 계부나 어머니의 애인에 대
해 느끼는 혐오증 중에는 질투심보다는 오히려 분노가 있다. 자가 어머니가 육체적인 존재
임을 상기시키는 것은, 그가 애써 잊느려는 하는 자기자신의 탄생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적어도 어머니에게는 위대한 우주적인 현상의 위엄을 부여하고 싶은 감정이 있다. 어머니
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모든 개체를 감싸는 '자연'을 구현하고 있어야 한다.
  그는 어머니가 남자의 먹이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그가 어
머니를 소유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모든 소융의 피안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내와 애인과 같은 초라한 존재여서는 안된다. 물론 사춘기가 되어 그의 성감이 
남성화되면, 어머니의 육체에서 자극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를 통하여 
그가 일반적인 여성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허벅지나 유방을 보고 싹튼 이 
육체가 어머니의 것임을 의식하면 대개 사라진다. 불륜도 종종 일어난다. 혼란한 연령층인 
청년시절은 혐오가 신성모독을 유발하여,금제에서 유혹이 파생되는 비뚫어진 연령이기 때
문이다. 그렇다고 아들이 먼저 어머니와 자기를 원한다고 다음에 외적 저항이 개입되어 그
를  압박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와 반대로 자기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난 저항에서 오
히려 정욕이 생기게 된다. 이런 금제는 가장 정상적인 것으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적인 정욕을 억제하는 사회적인 규범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존경심은 근원적인 혐오의 승화이다.
  젊은 남자가 어머니를 육체로 보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어머니를 변형시켜, 사회가 제
시하는 성화된 여자의 순결한 이미지에 동화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 세대에도 유용한
 '어머니'의 이상상을 강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개인의 사고방식에 의해 추앙될 경우에만 어
머니는 그런 힘을 갖는다. 그리고 여자는 누구나 '여자'의 , 따라서 '어머니'의 보편적인 본
질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태도가 아내나 애인과의 관계에도 반영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관능적으로 어머니에게 정욕을 느낀 청년을, 어머니를 통하여 여자 일반에 대한 정욕
을 느낀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정욕은 어떤 여자에 의해서도 
진정되게 마련이다. 그는 근친상간의 향수에 빠지는 일도 없다. 반대로 자기 어머니에게 
플라토닉한 애정과 존경울 갖고 있는 젊은이는 언제나 여자가 어머니의 순결을 나눠가지
고 있기를 원한다고 말할수 있다.
  병적인, 또는 정상적인 행위에 있어서의 성본능의 중요성, 따라서 일반적으로 여자의 중
요성은 잘 알려져 있다. 때로는 여자이외의 대상이 여성화되는 경우가 있다. 여자는 대부
분 남자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남자의 육체를 통해서도 여자를 창조 할 
수 있다. 남색의 경우에도 양성의 구별은 유지된다. 그러나 보통 남자가 '여자'를 찾는 것
을 물론 여성적인 존재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에 의해 여자에게 있는 최상의 것과 최악의 
것을 통하여 행복과 고뇌, 악덕과 미덕, 욕망과 체념, 헌신과 전제와 같은 인생 수업, 즉 
자기 수업을 하는 것이다.
  여자가 도박이고 모험이지만, 동시에 시련이기도 하다. 여자의 승리의 개가이지만, 고통
과 실패를 극복한 개가이기도 하다. 여자의 파멸의 소용돌이요, 지옥과 죽음의 미혹이다. 
여자를 통하여 의의가 비로소 존재한다. 여자는 남자의 행동과 감정의 실질적인 내용, 남
자의 자유를 자극하는 모든 가치의 화산이다. 남자는 아무리 큰 환멸을 느낄 우려가 있더
라도, 그의 모든 꿈이 포함되어 있는 나의 꿈만은 결코 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까닭을 잘 
알고 있다.

  그런 까닭에 여자는 기만적이고 이중적인 얼굴을 갖고 있다. 여자는 남자가 호소하는 전
부이며, 남자가 도달하지 못하는 전부이다. 여자는 '자연'과 남자 사이의 지혜로운 중개자
이며,또한 모든 지혜에 반항하는 분방한 '자연'의 유혹이다. 여자는 선에서 악에 이르는 모
든 도덕적인 가치와 그 반대되는 가치를 육체적으로 나타낸다. 여자는 행동의 실질이며, 
행동의 훼방꾼이고, 세계에 대한 남의발판이며,그 실패이자. 이런 존재로서의 여자는, 남자
가 자기 실존에 대해 성찰하거나 표현할 경우에 언제나 그 근원에 존재한다. 그런데 여자
는 남자를 그 자신으로부터 따돌리고, 침묵과 죽음속에 가라앉히려고 한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의 하녀이며 반려자일 뿐만 아니라, 자기의 구경꾼과 자기 심판자도 되어 자기를 그 
존재에서 인정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는 무관심과 모멸과 조소로 그를 거역한다. 남자는 자가가 원하는 것과 두려
워하는 것, 사랑하는 과 미워하는 것을 여자 속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추구하고, 또한 여
자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자는 비본질의 모습에서 점부이다. 여자는 완전히 '타자'
이다. 그리고 타자인한 자기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며,여자에게 기대되는 것과 별개의 것이
다. 여자는 전부이므로 정확하게 여자는 이랭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자는 영원한 
어긋남이다. 자기에게 도달하는데도, 존재자 전부와 화해하는 데도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
하는 실존의 어긋남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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