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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연애는 사랑이 낳은 원한

by FraisGout 2020. 7. 26.

  연애는 원한의 니라요,
  연애는 사랑이 낳은 원한
  
  그는 남자를 노예상태로 몰아넣어 녹여버리는 결혼을 공격한다. 그리고 여자를 매도한
다. 한편 여성 옹호론자들은 이에 대항하여 여자의 우월성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논리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연약한 여성 옹호자들에게 이용되었다. "여자는 
남자를 능가한다. 즉 물질적인 면에서 아담은 흙으로 지음을 받고,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
로 지음을 받았다. 장소의 면에서도 아담은 낙원 밖에서 지음을 받고 이브는 낙원 안에서 
지음을 받았다. 잉태에 있어서도 여자는 신을 잉태하였다. 이것은 남자가 하지 못하는 일
이다. 신탁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는 사후에 한 여성, 막달라 마리아 앞에 니타나셨다.그리고 
승천에 있어서도 지복(至福)을 누린 한 여성, 마리아가 천사의 무리보다 상위에 올랐다...."
  이에 대해 반대론자는 그리스도가 먼저 여자들의 앞에 나타나신 것은 여자들이 말이 많
은 것을 아시고, 자신의 부활을 빨리 알리려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이 논쟁은 15
세기에도 계속되었다.〈결혼의 열다섯 가지 즐거움〉의 저자는, 가엾은 남편의 불운을 재
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외스타슈 데샹은 같은 주제로 끝없이 긴 시를 썼다.〈장미 이야기〉의 논쟁이 시작된 것
은 이 무렵이다. 여기서 비로소 여성이 동성을 옹호하기 위해 펜을 든다. 크리스틴 드 피
장은 '사랑하는 신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성직자를 통렬히 공격한다. 성직자들은 즉시 장 
드 밍을 변호한다.
  그러나 파리대학 총장인 제르송은 크리스틴의 편을 든다. 그는 더욱 광범위한 대중에게 

호소하기 위해 프랑스어로 논문을 발표했다. 마르탱 르 프랑은 200년 후까지도 읽힌 '귀
부인의 머릿수건'이라는 약간 조리없는 책을 써서 논쟁에 가담했다. 여기에 크리스틴이 다
시 뛰어들었다. 그녀는 특히 여자도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여자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이 관례가 되어 아들과 마찬가지로 딸도 학문을 배우게 한다면, 
그녀들도 남자처럼 모든 예술과 학문을 깊이 습득하고 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
쟁은 사실상 여성에게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을 뿐이다. 여자를 위해 아무도 현재의 처지
와 다른 사회적인 역할을 요구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성직자의 생
활과 결혼생활을 대립시키는 데 있었다. 즉 결혼에 대한 교회의 애매한 태도가 일으킨 남
성의 문제였다. 이 분쟁은 루터(독일의 종교개혁자, 1483~1546)가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부정함으써 단번에 해결되었다. 여자의 신분은 이런 문학적인 논쟁으로는 영향을 받지 않
는다. 희극이나 우의시의 풍자는 있는 그대로의 사회를 비웃을 뿐 변혁하려고 하지 않은 
채 여자를 무시하지만 여자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연애시는 여자를 찬양하지만, 이런 
찬양은 남녀평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논쟁' 또한 부차적인 현상으로서, 사회현실을 반영
하기는 하지만 개혁은 하지 못한다.
  여자에 관한 법규는 15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으나, 특권층에서는 여
자의 구체적인 신분이 진보되었다. 이탈리아의 문예부흥기는,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강렬
한 개성의 개화를 기꺼이 받아들인 개인주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잔 다리공이나 잔 드 
나플, 그리고 이사벨 데스트와 같은 강력한 여군주가 등장했다. 그리고 남자처럼 무기를 
들고 싸운 용감한 여자 용병대장도 있었다.
  지랄로모 리아리오의 아내는 포를리 시의 자유를 위해 용감하게 싸웠고, 히폴리타 피오
라멘티는 말라노 공의 군대를 지휘하여 파비아 포위전에서 귀부인의 군대를 이끌고 성벽
으로 진격했다. 시에나의 여자들은 자기들의 시를 몽뤼크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3천 명의 여자로 구성된 3개 부대를 편성하여 여자가 지휘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여자들
은 교양과 재능이 뛰어나 명성을 떨쳤다. 이자라 노가라, 베로니카 감바라, 가스파라 스탐
파라, 미켈란젤로의 여자친구인 빅토리아 콜론나, 그리고 특히 메디치 가문의 로랑과 쥘리
앙의 어머니인 루크레치아 코르나부오니가 있다. 그녀는 특히 많은 찬가와 성 장 밥티스트
와 성모 마리아의 전기를 썼다.
  이들 특출한 여자들 중에는 고급 창녀들이 많았다. 행동의 자유에 정신적인 자유까지 향
유하는데다가 직업이 있어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자들은 이들 고급 창
녀들을 존경하고 감탄했다. 그녀들은 미술을 보호하고 문학과 철학에 흥미를 가졌으며, 글
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사벨라 드 루나, 카타리나 디 상 첼소, 시인이며 음악
가인 임페리아는 아스파지아와 프리네의 전통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급 창녀들
에게 자유는 방종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귀부인이나 고급 창녀의 호화로
운 주연과 죄악은 전설이 되어 있을 정도이다.
  다음 세기에서도 지위나 재산으로 세속적인 도덕에서 벗어난 여자들 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흔한 자유도 대체로 이런 방종이었다. 세속적인 도덕은 여전히 중세와 마찬가지
로 엄격했다. 대담한 행동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할 수 있었다. 여왕은 언제나 특권을 
누리는 입장에 있었다. 카테린느 드 메디치, 엘리자베스 당글레테르, 이사벨 라 카톨리크는 

위대한 여군주들이다. 몇몇 위대한 성녀도 존경을 받았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의 놀라운 
운명도 성 카타리나의 경우와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녀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토
대로, 자기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손에 넣는다. 그녀는 자기 신분에 어울리는 미덕을 최고
도까지 높임으로써, 고백자들을 비롯하여 기독교 세계에서의 지지을 확보했다. 그리하여 
일반적인 수녀의 신분을 초월할 수 있었다. 그녀는 수도원을 설립하고 운영했으며, 남자들
처럼 모험적인 용기를 발휘하여 여행하고 기획하여 끝까지 수행하였다. 사회도 그녀가 하
는 일을 방해하지 않았다. 책을 쓰는 것도 건방지게 보지 않았다. 고백자들이 그녀에게 그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놀라운 행운에 의해 남자와 마찬가지로 기회만 주어지면 
여자도 남자와 같은 수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행운은 대단히 불평등한 가운데 얻어진 것이다. 16세기에는 여성들
이 아직도 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안 드 브레타뉴는 그 무렵까지 남성들만 
출입했던 궁정에 많은 여성을 불러들여 여관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그때 그녀는 그녀들의 
소양보다는 교육을 걱정했다. 재능이나 지적 수준이나 저술에 뛰어난 여자들은 거의가 귀
부인들이었는데 레츠 공작부인, 리뉴롤 부인, 루앙 공작부인과 그 딸 안 등을 들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이들은 왕실의 여자들로서, 여왕 마르고와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를 들 수 있
다. 프레트 뒤 귀예는 평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루이즈 라베(16세기의 프랑스 여류시
인)은 고급 창녀였던 것 같다. 하여튼 그녀는 행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17세기에 이르러 여자는 주로 지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사교생활이 발달
되고, 교양이 보급되었다. 살롱에서 여자들은 눈부신 역할을 했다. 여자는 사회의 건설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교나 미술이나 문학에 전념할 여가를 갖게 되었다. 여자를 위
한 교육제도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나, 대담이나 독서나 가정교사의 지도와 공개강연 등
을 통해, 여자는 남편보다 뛰어난 학식을 얻기도 했다. 구르네 양, 랑부예 부인, 스퀴데리 
양, 라파예트 부인, 세비네 부인 등은 프랑스 문단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프랑스 이외에도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크리스티나 여왕, 그리고 많은 문학자들과 교신한 슈르망 양도 같은 
명성을 얻었다.
  이런 교양에서 얻은 명성으로, 여자는 조금씩 남성의 세계에 참여하는데 성공한다. 야심
있는 여자는 문학이나 연애론을 떠나 정치에 관심을 두었다. 1623년에 교황의 특사는 이
렇게 쓰고 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온갖 큰 사건이나 중대한 음모의 배후에는 대개 여자
가 도사리고 있다." 콩데 공작부인은 '부인의 결속'을 선동한다. 안 도트리시(프랑스 루이 
13세의 왕비)는 여성을 고문으로 앉힌다. 리슐리의 재상은 데귀용 공작부인의 의견에 귀
를 기울였다. 몽바종 부인과 셰브뢰즈 공작부인, 몽팡시예양, 롱그빌 공작부인, 안 드 공자
그, 그밖의 많은 부인이 '프롱드의 난'(17세기 프랑스의 내란으로 마자랭 재상파에 반항하
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남) 동안에 수행한 역할에 대하여는 널리 알려져 있다. 끝으
로 맹트농 부인(루이 14세의 애첩)은 슬기로운 여성 조언자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
마나 큰가를 보여주었다. 여자가 격려자로서, 조언자로서, 모사가로서 가장 효과적인 역할
을 하는 것은 간접적인 방법에 의해서이다. 스페인에서는 오르시니 공의 부인이 가장 권위
있게 지배했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이들 귀부인과 나란히 중류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난 몇 사람의 뛰어난 인물이 나타났다. 

즉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여배우가 나타난 것이다. 여자가 무대에서 처음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1545년이다. 1592년에는 아직 한 사람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17세기 초엽에
는 여배우의 대부분이 배우의 아내였다. 이어서 그녀들은 사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직업에
서도 독립을 획득한다.
  고급 창녀 중에서는 프리네와 임페리아에 이어 니농 드 랑클로(당시 일류문인 및 학자
들과 교류한 가장 지적인 여성으로, 창녀라고 할 수 없다)에게서 그 본보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여자임을 이용하여 여자를 초월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자들 사이에서 살면
서 남성의 자격을 손에 쥐게 된다. 행동의 자유는 그녀로 하여금 정신의 독립을 얻게 했
다. 니농 드 랑클로는 당시의 여자들에게 허용된 최대한의 자유를 누렸다.
  18세기에 들어오면 여자의 자유와 독립은 더욱 향상된다. 풍속은 일반적으로 여전히 엄
격하여 처녀들은 간단한 교육밖에 받지 못했고,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을 하거나 수
도원에 들어갔다. 차츰 기반을 닦은 신흥계급인 부루조아는, 아내에게 엄격한 도덕을 강요
했다. 그러나 귀족계급의 붕괴로, 사교계의 부인들은 자유로운 행동이 허용되어 상류 부르
주아까지 그 여파가 미쳤다. 이제 수도원이나 결혼생활도 여자를 억압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시기에도 대다수의 여성에게 자유는 소극적, 추상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쾌락의 추구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총명하고 야심적인 여성들은 행동의 가능성을 찾아내었다. 살롱의 생활은 크게 
발전했다. 조프랭 부인, 뒤 드팡 부인, 레스피나스 양, 에피네 양, 탕생 부인 등이 살롱에
서 수행한 역할은 널리 알려져 있다. 여성이 후원자로서 혹은 조언자로서 작가의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문학이나 철학, 과학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뒤 샤틀
레 부인(볼테르의 애인)은, 개인적으로 물리연구실과 화학실험실을 소유하고 실험과 분석
을 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생활에 개입하였다. 프리 부인, 
메위 부인, 샤토뇌프 부인, 퐁파두르 부인, 뒤 바리 부인들은 차례로 루이 15세를 조종했
다. 그늘에서 간섭하는 여자를 갖지 않은 대신은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몽테스키외는 프
랑스에서는 모든 일이 여성의 손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에 의하면, 여성은 '
국가 속의 새로운 국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콜레 또한 1789년 전야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녀들은 프랑스인 사이에서 우위를 차지한 채 그들을 조종하고 있어서, 프랑
스인들은 여성의 의해 생각과 느낌이 좌우된다." 사교계 여성들과 함께 명성을 날린 여배
우나 화류계 여성들도 있다. 소피 아르누, 쥘리 탈마, 아드리엔 르쿠브뢰르(모두 18세기 
프랑스의 명배우들) 등의 경우가 그렇다.
  이와 같이 구정체시대 전반에 걸쳐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시도한 여자들이 가장 접근하
기 쉬운 것은 문화 분야였다. 그러나 단테나 셰익스피어처럼 정점에 도달한 여자는 없었
다. 이것은 여자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았다는 데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교양은 
상류층 여자들의 소유물이지, 여성 전체의 소유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남자 천재는 흔히 
집단에서 배출된다. 특권층의 여자들도 높은 정상에 오르는 것을 훼방하는 주변의 장애물
에 봉착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성 테레사나 러시아의 카테리나 여재와 같은 여자의 비약에
는 방해물이 없었으나 여류작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결탁하여 대항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저서에서 만일 셰익스피어에게 여동생이 있었

더라면 하고 가정하고, 그 여동생의 운명을 묘사했다. 셰익스피어가 학교에서 라틴어 문법, 
논리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그녀는 부모의 감시하에 걸레조각이나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설사 그녀가 오빠처럼 결단을 내려 출세를 하기 위해 런던으로 뛰쳐나갔더라도, 자유분방
하게 살아가는 여배우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에게 덜미를 잡혀 강제결혼을 하거나,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 버림을 받고 비탄에 빠진 나머지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녀가 다니엘 디포(로빈슨 크루소의 작가)가 묘사한 몰 플랜더스와 같은 창녀가 되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어쨌든 그녀는 극단을 지도하거나 희곡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버지니
아 울프는 영국에서 여류작가들은 언제나 반감을 샀다고 지적하고 있다. 존슨 박사는 여류
작가를 뒷다리로 걸어다니는 개에 비유했다. "그것은 모양새는 좋지 않지만 사람을 놀라게 
한다." 예술가는 누구보다도 남의 의견에 신경을 쓴다. 특히 여자는 여기에 좌우되기 쉽다. 
그러므로 여류예술가는 태연하게 밀고 나가는 것만도 무척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이다. 그녀들은 자주 이 투쟁에서 지쳐버린다. 17세기 말의 귀족으로 자식이 없는 윈힐시 
부인이 글을 쓰는 모험을 했다. 그녀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녀가 감수성이 뛰어난 시적인 
천재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는 증오와 분노와 공포 속에서 정력을 소모했다.
  아, 펜을 잡는 여자는
  크게 교만한 자로 보여
  그 죄를 씻을 길이 없어라.
  그녀의 작품은 거의 모두가 여자의 처지에 대한 분개로 일관되어 있다. 뉴캐슬 후작부인
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귀부인인 그녀는 글을 쓰다가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녀는 "여자
는 바퀴나 올빼미처럼 살다가 구더기같이 죽는다."고 분노에 찬 글을 썼다. 모욕을 당하고 
웃음거리가 된 그녀는 영지에 갇혀 살아야 했다. 대범한 기질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반
미치광이가 되어, 그후에는 괴로움을 달래는 태작 밖에 쓰지 못했다.
  18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평민 출신에다 미망인인 아프라 벤 부인이 남자와 마찬가지로 
펜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를 따르는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19세
기가 되어서도 여류작가는 몸을 숨기고 작품을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들은 '자기
만의 방'이 없었다. 즉 마음의 자유를 갖는 데 필수조건의 하나인 물질적인 독립을 성취하
지 못했다.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프랑스 여성의 처지는 사교계의 발전과 그 지적 생활의 긴밀
한 결합으로 인해 이보다는 다소 유리했지만, 그래도 역시 여성들이 여성의 권익을 위한 
운동을 일으켰고, 이탈리아에서 유입된 플라톤학파의 학설이 연애나 여성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만흥 문인들이 여성을 변호했다. '유덕한 귀부인의 방주'나 '
귀부인 기사' 등이 간행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에라스무스(네덜란드 인문주의자, 1466~1
536)는 '작은 상원의원'에서, 코르넬리아를 통해 여성의 불만을 신랄하게 토로했다. "남자
는 폭군이에요... 남자는 우리를 장난감으로 취급하고... 우리를 세탁부나 부엌데기로만 알
고 있어요." 에라스무스는 여자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줄 것을 요구했다.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15세기의 철학자)는 '여성의 고귀성과 우수성에 대하여'라는 유
명한 저서에서 여성의 뛰어난 자질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논지는 유태 밀교의 낡은 
논법을 다시 사용하고 있다. 즉 이브는 생명을 뜻하고, 아담은 대지를 뜻한다. 여자는 남자

보다 나중에 지음을 받았으므로 남자보다 더 완벽하다. 여자는 낙원에서 태어났으나, 남자
는 낙원 밖에서 태어났다. 여자는 물에 빠져도 떠오르지만, 남자는 가라앉는다. 여자는 사
람의 갈비뼈로 지음을 받았으며, 흙으로 지음을 받지 않았다. 여자의 월경은 만병을 치료
한다. 이브는 모르고 잘못을 저질렀을 뿐 죄를 지은 것은 오히려 아담이다. 그래서 신은 
남자의 모습을 취했다. 그리고 신은 부활한 후에도 여자 앞에 모습을 나타내셨다. 따라서 
아그리파는 여자가 남자보다 덕이 많다고 선언하고 여성이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뛰어
난 부인"의 예를 든다. 이것은 이런 변호에 으레 뒤따르게 마련인 농지이다. 끝으로 그는 
남성의 횡포를 공격한다.
  "모든 권리를 짓밟고, 본래의 평등을 무참히 침해하는 등 남성의 횡포는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자유를 여성으로부터 빼앗았다. 그런데, 여자는 아기를 낳고, 두뇌도 남자에게 뒤떨
어지기는커녕 더욱 영리하다. 여자의 활동을 제한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것은 하느님
의 명령이나, 필연성,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관례나 교육, 노동, 그리고 주로 폭력과 
압박에 의해서이다." 그는 남녀의 평등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여성이 존경받기를 원하고 
있다. 이 저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여성 옹호론인 '난공불락의 요새'
나 플라톤풍의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은 에로에의 '완전한 여자들'도 대성공이었다. 생 시몽
(프랑스의 사회사상가, 사회주의 사상의 선구자, 1760~1825) 학설의 선구를 이룬 흥미
로운 책 속에서 포스텔은 인류 재생의 어머니인 새로운 이브의 도래를 예고하여, 그 여성
을 만났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그 여성은 죽었지만, 자기 마음속에 살아 있다고 말했다.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앙리 2세의 딸)는 자신의 저서 '나의 식견'에서 보다 온건하게 여성 
속에는 신성이 있다고 언명했다.
  그러나 여성의 변호에 가장 주력한 작가는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프랑수아 1세의 여동
생, 문재로 알려졌으며 '엡타메롱'의 저자)로, 그녀는 방자한 행동에 반대하여 감상적 신비
주의와 오만하지 않은 정숙을 이상으로 내걸고 여성의 명예와 행복을 위해 결혼과 연애를 
조화시키려고 애썼다. 이에 대해 물론 여성의 적도 잠자코 있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아그
리파의 주장에 반대하는 '남녀의 논쟁' 속에는 중세의 낡은 논의가 반복된다. 라블레는 '제
3의 서'에서 마티외와 데샹의 전통을 이어가는 결혼에 대해 신랄한 풍자를 즐겼다. 그렇지
만 텔레므의 행복한 수도원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여성이었다.
  반여성론은 1617년에 자크 올리비에의 '여성의 악과 결점의 알파벳'에 의해 다시 기세
를 올린다. 이 책의 표지에는 새의 몸에 여성의 얼굴을 한 괴물(그것은 신화에 나오는 악
랄한 여자의 상징)의 손과 사치스러운 날개, 암탉처럼 집안 살림이 엉망이라는 표시로 암
탉의 다리를 하고 서 있다. 알파벳의 글자 하나하나에 그녀의 결점이 하나씩 쓰여 있다.
  이번에도 낡은 노쟁을 재연시킨 것은 교회의 인사들이었다. 구르네 양은 '남녀평등론'으
로 이를 반박한다. 종교가들이 여성을 악평하기 위해 성 바울과 로마교회의 교부들과 복음 
전도가의 말을 인용하는 동안에, '풍자적 시집과 작은 방' 같은 자유사상가의 문학이 여성
의 품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성은 또한 마튀랭 레니에(17세기 초의 시인)와 그 일파
들의 풍자시에 무한한 주제를 제공했다. 한편 다른 진영에서는 여성 옹호론자들이 아그리
파의 주장을 다투어 받아들여 부연설명을 했다. 뒤 보스크 신부는 '정숙한 부인'에서 여자
에게도 교육을 받도록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아스트레'(오노레 위르페의 연애소설)을 비롯

하여 많은 연애문학이 단시와 14행시, 비가 등의 형식으로 여성의 장점을 찬양했다.
  여성이 거둔 성곡은 오히려 여성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야기시켰다. 재원들(17세기의 
여류문인들)은 세상의 반감을 사게 되고, '우스꽝스러운 재원들'이나 그후에 나온 '여학자
들'(모두 몰리에르의 희극)이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몰리에르는 여자의 적이 아니었다. 그
는 여자의 강제결혼은 맹렬히 공격했고, 처녀들을 위해 감정의 자유를 요구했으며, 아내를 
위해서는 존경과 독립을 요구했다.
  이와 반대로 보쉬에는 그의 설교에서 여자에게 엄격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최초의 여자
(이브)는 아담의 일부에 불과하며, 이를테면, 남자의 축소판이었다. 두뇌도 크기에 비례했
다."고 설교했다. 여자를 공격하는 부알토(고전주의 문예비평가, '시학'의 저자)의 풍자시는 
수사의 연습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에 대해 프라동, 르냐르, 페로 등이 맹렬히 반격했다. 
라 브뤼예르나 생 테브르몽도 여자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 시대에 가장 단호했던 
페미니스트는 1673년에 데카르트(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
며 해석기하학의 창시자, 1596~1650)의 영향을 받아 '남녀평등론'을 저술한 풀랭 드 라 
바르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남성은 강자의 지위를 이용하여 무슨 일에나 동성의 편의를 
도모하고, 여성은 습관적으로 그 종속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은 자유도 없고, 교
육의 기회를 간진 적도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업적으로 여자를 판단할 수 없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해부학상으로 차이는 있지만, 그 어느 것도 남성
에게 유리하지는 않다. 풀랭 드 라 바르는 결론적으로 여자를 위해 교육을 제대로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퐁트넬은 여성을 두둔하여 '세계 복수론'을 썼다. 그리고 페늘롱(종교가, '
텔레마크'의 저자)이 맹트농 부인과 플뢰리 신부를 따라. 자신의 교육 계획안에서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장세니슴파(17세기 프랑스의 얀센이 창시한 교의를 신봉하는 구
교의 일파. '포르 라얄'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남. 파스칼도 이 교파에 속함)의 대학 교수
인 롤랭은 이와 반대로 여자들도 진지하게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에도 양진영으로 갈라져 있었다. 1744년 암스테르담에서 '여성의 영혼에 관한 논
설'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오직 남자를 위해 지음을 받은 여자는 세상이 끝나
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는 그 때문에 지음을 받은 목적에 쓸모가 없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자의 영혼은 불멸하지 않는 결론이 나온다." 이처럼 극
단적인 주장은 하지 않았지만 루소(프랑스의 사상가, 1712~1778)도 이 점에서는 부르주
아의 대변자로서, 여자가 그 남편과 어머니의 의무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 "여성의 교육
은 모두 남성과 관련시켜 실시해야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양보하고, 남자와의 불공평을 
참도록 되어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18세기의 민주적, 개인주의적인 이상은 여성에게 유리했다. 여자는 대다수의 사
상가들 눈에 강한 성(남성)과 동등한 인간적 존재로 비쳤다. 볼테르는 여자의 운명의 불공
평을 고발했다. 디드로는 여자의 열등성은 대부분 사회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여성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동정한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모든 관습 중에서 법률의 가혹성이 여성을 
적대시하며 자연의 가혹성과 결탁하고 있다. 여자는 저능아 취급을 당해 왔다." 몽테스키
외는 역설적으로 여자는 가정생활에서는 남자에게 복종해야겠지만, 모든 면에서 여자는 정
치적 활동에 관심을 갖게 한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가정의 주인이 되는 것은 비합리적이

고, 반자연적이다... 여자들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비합리적이지도 반자연적이지도 않
다." 엘베시우스(프랑스의 철학자, 진보적인 18세기 사상가, 1715~1771)는 여자의 열등
성은 잘못된 교육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달랑베르(프랑스의 철학자, 1717~17
83)도 이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시레 부인과 같은 여성의 경우에도 볼 수 있듯이 경제적
인 여권론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여공의 비참한 생활에 분개하여 부인노동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 사람은 '파리
의 풍경'을 쓴 메르시에이다, 콩도르세(18세기 프랑스의 진보적 철학자, 수학자, 1743~1
793)는 여자가 정치활동을 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그는 여자와 남자를 대등하게 간주하
고, 종래의 비난에서 여자를 옹호했다. "여자는... 원래 공정한 감정을 지니지 못하여 양식
보다 감정에 따른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천성이 아니라 교
육과 사회생활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여자가 법률에 의해 억압받을수록 여자
의 세력은 위험성을 띠게 된다... 만일 여자가 자기 세력을 유지할 필요를 그다지 느끼지 
못하며 또 그것이 여자에게 자기를 지키고 압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닐 때, 그 
세력은 자연히 감소되어갈 것이다."
  
  대혁명(프랑스혁명)에 의해 여성의 처지가 크게 변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
다. 그러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의 제도와 가치를 존
중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혁명의 대부분은 남성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구정체 동안에 
근로계급의 여자가 여성으로서는 가장 독립적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자는 
장사를 할 권리를 갖고 있었으며, 자기 직업을 자주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권리
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재봉사, 세탁부, 접시닦이, 소매상 등으로 생산에 참가하여 가정
이나 소기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물질적인 독립으로 일상적인 행위에 있어서도 
많은 자유가 허용되었다. 서민여성들은 외출을 하거나 술집에도 드나드는 등 거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여자는 남편의 협력자로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 여자가 압박을 받고 있었던 것은 경제적
인 면이지, 성의 분야가 아니었다. 시골에서는 여자가 농사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하녀처럼 취급되어, 경우에 따라서는 남편이나 자녀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
지도 못하고, 남자보다 일을 더 많이 하여 피로한 몸에 어머니로서의 부담까지 맡아야 했
다. 그러나 고대의 농경사회와 마찬가지로, 남자에게 이처럼 일하는 여자가 필요했기 때문
에 소중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남녀가 재산을 공유하고, 이해관계나 관심도 공통되었다. 여자는 가정에서 큰 권한을 가
지고 있었다. 이런 여자들은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인격적인 존재로 자기를 확립하고, 권
한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심과 굴종의 전통이 그녀들을 무겁게 짓눌러, 국회(귀족, 
승려, 시민으로 구성된 삼부회의)의 기록에서 여성이 권리를 요구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여성의 권리요구는 한정되어 있었다. 즉 "여자가 전문으로 하는 직업은 남자가 하지 못하
게 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물론 시위나 소란이 일어났을 때, 남자와 함께 행동한 여자
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베르사유에 '빵장수 부부와 그 사환'(대혁명 때 루이 16세와 
왕비 및 왕자가 빵장수로 가장하여 도망치려고 한 것을 가르킴)의 신병을 인도할 것을 요

구하러 간 것도 여자들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기획을 지휘한 것은 서민이 아니고, 또 그 
성과를 차지한 것도 서민이 아니었다.
  시민층의 여성 중에서 자유를 위해 열렬히 협력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롱랑 부인, 
뤼실르 데물랭, 테루아뉴 드 메리쿠르 등이 그들이다. 그중의 한 사람은 사태의 진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즉 마라를 암살했을 대의 샤를로트 코르데의 경우가 그렇다. 여권론자들의 
운동도 더러 있었다. 올랭프 르 구즈는 1789년에 '인권 선언'과 맞먹는 '여권 선언'을 제
출하고, 그중에서 그녀는 남성의 특권을 모두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1790년에는 '가엾은 
자코트의 동의'를 비롯하여 유사한 고발문에서 같은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콩도
르세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올랭프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
졌다. 그녀가 창간한 신문 '성급한 자'와 때를 같이하여 여러 가지 신문이 발간되었으나 오
래 가지는 못했다. 여성의 집회는 거의 모두 남성의 집회와 합병되거나 흡수되었다.
  1793년 무월(프랑스 대혁명 당시 추분 후 30일부터 시작되는 공화력 제2월, 즉 10월 
23일부터 11월 12일까지) 28일에, 공화 혁명파의 부인협회장인 여배우 로즈 라콩브가 여
성 대표단을 이끌고 도의회에 나타났을 때, 쇼메트 의장은 성 바울과 성 토마스에게서 가
르침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발언을 했다. "여자는 언제부터 자기 성을 버리고, 남자가 
되는 것이 허용되었는가? ... '자연'은 여자가 되라고 명령했다. 자식을 돌보고, 자질구레한 
가사, 모성으로서의 여러 가지 마음씀, 이런 것이 당신들의 일이다." 여성은 도의회의 입장
이 금지되고, 정치수업을 하는 집회에 출입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1790년에 장자상속권과 남자의 특권이 폐지됨에 따라 남자와 여자는 상속에 관해서는 
평등해졌다. 1792년에는 이혼을 인정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결혼의 엄한 속박이 완화되었
다. 그러나 이것은 사소한 승리에 불과했다. 부르주아의 여성들은 가정에 얽매여 있었으므
로, 여자들끼리 연대의식을 가질 수 없었다. 이런 여성은 권리에 눈뜬 독립된 계급에 속해 
있지 않았으며 경제적으로는 기생적인 생활이었다. 그리하여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참
여를 할 만한 여자들은 계급 때문에 지장을 받고, 한편 행동적인 계급에 속하는 여자들은 
여자이기 때문에 그늘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경제적인 실권이 노동자의 손에 들어갔을 
때야 비로소 일하는 여성은 지금까지 귀족이나 부르주아처럼 기생적이었던 여성이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었던 능력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대혁명 후의 혼란기에 여성은 무정부주의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나 사회질서가 회
복되자 다시 엄한 억압을 받게 되었다. 근대 프랑스 여성에게 불행한 일은, 여자에 관한 
법률이 군사독재시대에 제정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1세기에 걸쳐서 여성의 운명을 결
정했던 '나폴레옹법전'은 여성해방을 크게 지연시켰다. 군인이 으레 그렇듯이 나폴레옹도 
여자에게 모성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의 후계자인 그는 사회구
조를 파괴하면서까지 아내의 지위보다 어머니의 지위를 존중할 의사가 없어, 사생아의 입
적을 금하고, 사생아의 어머니와 사생아의 신분을 가혹하게 제한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식
으로 결혼한 아내의 신분이 어머니로서의 위엄에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여기에도 
봉건적인 모순이 남아 있었다. 딸과 아내는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박탈되고, 이 때문에 변
호사나 후견인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독신녀는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갖게 되었
다. 이에 비해 결혼에는 옛날부터 유지되어온 부권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여성은 남편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었다. 남편은 아내가 간통했을 때는 징역형
에 처하거나 이혼할 수 있었다. 간통현장에서 살해해도 법이 용서했다. 이와는 달리 남편
은 첩을 자기 집에 끌여들였을 때에만 벌금이 부과되었고, 이런 경우에만 아내는 남편과 
이혼할 수 있었다.
  부부의 거처를 결정하는 것도, 자녀에 대해서도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훨씬 큰 권한을 갖
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어떤 장사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빚을 얻으려면 남편의 허가
를 받아야 했다. 남편은 아내의 신분과 그 재산에 대해서도 부권을 행사했다.
  19세기 전반을 통하여 법률은 이 엄격한 '나폴레옹법전'을 더욱 강화하였고, 여자에게서 
모든 양도권을 박탈했다. 1826년 왕정이 복고되자 이혼을 폐지하고, 1848년의 입법의회
도 그 부활을 거부했다. 이혼의 자유는 1884년에야 겨우 부활되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
기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이 시기처럼 부르주아 계급의 세력이 강화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산업혁명이 가져오는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다. 18세기부터 이어받은 정신의 자유도 가정의 도덕을 파괴할 수 없었으
며, 그것은 19세기 초에 조세프 드 메스트르나 보날드(두 사람 모두 완고한 보수주의자)
와 같은 반동사상가들이 정한 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들은 신의 뜻에 따라 질서의 가치를 
세우고 엄격한 계급사회를 요구했다. 사회에서 가장 작은 세포인 가정은, 사회의 축도라고 
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마치 아내와 자식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왕권과 대신
의 관계는 대신과 백성의 관계와 같다."고 보날드는 말하고 있다. 이혼은 물론 금지되고, 
아내는 가정에 얽매이게 된다. 보날드는 또 "여자는 가정에 속해 있고, 정치적 사회에는 
속해 있지 않다. 자연은 여자를 가정을 돌보기 위해 지었으며, 공무에 종사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19세기 중엽 르 폴레가 가족에 대해 정의했을 때도 이런 계
급제도를 존중하고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오귀스트 콩트(프랑스의 실증주의 철학자. 1798~1857)도 
남녀 사이에 계급을 둘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양성 사이에는 "심신 양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며, 그것이 모든 종류의 동물, 특히 인간의 경우에 양성을 깊이 갈라놓고 있다." 여자
는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있는 것'을 뜻하며, 이 때문에 '인류의 완성형'에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이다. 이 생물학적 소아의 상태는 지적인 취약성으로 나타난다. 이 감정적인 존
재에게 적합한 역할은 아내나 주부이며, 여자는 남자와 경쟁할 수 없다. "지도도 교육도 
여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보날드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여자는 가정에 매여 있고, 이 소규모의 사회(가정)는 
아버지가 통치한다. 여자에게는 가정을 통치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는 다만 관리하
고 조언을 할 뿐이다. 여자에 대한 교육은 제한해야 한다. "여자와 프롤레타리아는, 물론 
그럴 엄두도 내지 않겠지만, 저술가가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콩트는 
사회의 발달에 따라 가정 밖에서의 여자의 노동은 폐지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 저
작의 제2부에서 콩트는 클로틸드 드 보(콩트의 애인)에 대한 사랑의 영향을 받아, 여자를 
거의 신성시하고 위대한 존재로 추어세우고 있다. '인류'의 제전에서 실증주의 종교가 민중
에게 경배하게 하려는 대상은 여성이다.
  그러나 여자가 이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적인 면뿐이다. 남자는 행동하고 여자는 

사랑한다. 이런 점에서, 즉 순수성과 사랑에 있어서 여자는 남자를 능가한다. 여자는 남자
보다 훨씬 더한 타애주의자이다. 그러나 실증주의의 체계에서 보면, 여자는 역시 가정에 
갇혀 있게 된다. 이혼은 금지되고, 과부로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아무 권리를 갖지 못한다. 여자는 주부 겸 교육자에 불과하다.
  발자크(프랑스의 소설가,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 1799~1850)는 이보다 더욱 노골적으
로 이와 동일한 이상을 말했다. "여자의 운명과 그 유일한 명예는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
게 하는 것이다." 하고 그는 '결혼의 생리학'에서 쓰고 있다. "아내는 계약에 의해 손에 넣
는 재산, 즉 동산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소유하면 하나의 자격이 되니까. 요컨대 아내는 엄
밀히 말해서 남편의 부속물에 불과하다." 그는 여기서 부르주아지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
다. 부르주아지는 18세기의 자유와 자기 존재를 위협하는 진보적인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점점 반여성적인 태도를 취한다. 발자크는 '결혼의 생리학'의 첫머리에서, 이 애정을 무시
한 결혼제도가 여성을 당연히 간통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나서, 남
편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피하려면 아내를 완전히 억압할 것을 권하고 있다. "여자에
게는 교육이나 교양이나 개성을 신장시키는 것은 일체 금한 채 강제로 불편한 옷을 입히
고, 영양부족이 될 만큼 절식을 장려해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이 프로그램을 충실히 실행
에 옮겼다. 그리하여 여자는 부엌과 가사에 얽매이고 품행은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독립적
인 일은 제지하는 번거로운 예의범절에 매여 살아야 한다. 그 보수로서 여성은 존경을 받
고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아내란 때로는 왕좌에 앉을 줄도 아는 노예이다." 하고 발자
크는 말했다. 집착하지 않아도 좋은 상황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상석을 양보하거나 굽실거
린다. 남자들은 원시사회처럼 여자에게 무거운 짐을 운반하게 하는 대신 힘든 고역과 걱정
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결국 여자를 모든 책임으로부터 행방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여성은 자기 처지의 안이함에 속아넘어가, 남편이 원하는 어머니나 주부의 역
할을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상 부르주아 여성의 대부분은 항복을 해버린 것이다. 
  여성은 그 교육이나 기생적인 입장 때문에 남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의 권
리를 요구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며, 설사 그런 대담한 여자가 나타나더라도 거의 후원을 
받지 못한다. "사슬에 매여 있는 것보다 사슬에 매어두는 것이 한결 쉬운 일이다." 하고 버
나드 쇼(영국의 극작가. 비평가, 1856~1950)는 말하고 있다. 부르주아 여성은 계급의 
특권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사슬에 집착하게 된다. 그녀는 여성해방이 부르주아 
사회를 약화시킨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서 잘 알고 있다. 남자에게서 해방되면 노동
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부르주아 여성은 사유재산에 대해 남편의 권리에 부수된 권리밖에 
갖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만일 이 재산제도가 폐지되면 그것을 더욱 개
탄할 것이다. 부르주아 여성은 노동계급의 여성과는 연대의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직
물여공보다는 자기 남편에게 더욱 친근감을 갖고 있다. 그녀는 남편의 이해를 자기라는 이
해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완강한 저항도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기계주의의 출현은 토지
라는 부동산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노동계급의 해방과 함께 여성해방을 가져왔다. 모든 사
회주의는 여자를 가정에서 빼앗아버림으로써 그 해방을 쉽게 한다. 예컨대 공유재산제를 

꿈꾸어온 플라톤은, 여자들에게 스파르타에서 향유하는 것과 같은 자유를 약속하고 있다. 
생 시몽이나 푸리에 카베 등의 공상적 사회주의와 더불어 '자유여성'을 공상하게 되었다. 
만인의 협력이라는 생시몽의 사상은, 모든 노예제도, 즉 노동자의 노예제도와 여자의 노예
제도의 폐지를 요구한다. 여자도 남자와 같은 인간이라는 견지에서 생 시몽을 비롯하여 그
후의 르루, 페코, 카르노 등이 여성의 해방을 요구했으나 불행하게도 이 합리적인 이론은 
이 학파 안에서 득세하지 못한 채 전반적으로 여성다움 때문에 여성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여자에도 불리한 방법이다.
  사회의 단위는 남자와 여자라는 구실로, 앙팡탱은 목사 2인조 중의 한 사람을 여자로 하
여, 이 한 쌍을 부부목사라고 부르려고 했다. 그는 여성 구세주에 의해 보다 좋은 세상이 
도래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성친구' 일행은 이 여성 구세주를 찾아 이집트에 가기도 했
다. 그는 여성의 해방과 육체의 복권을 혼동한 푸리에의 영향을 받고 있다. 푸리에는 정열
의 욕구에 따르는 자유를 만인을 위해 요구하여 결혼을 폐지하고 연애를 대치하려고 했다. 
여성을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연애지능체로 보았던 것이다.
  카베도 공상적 공산주의에 의해 남녀의 완전한 평등이 실현될 것을 약속했으나 여자와 
정치활동은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 사실 생 시몽파의 운동에서는 여자가 별로 큰 역할을 
차지하지 못했다. '신여성'이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단기간 간행을 계속한 클레르 바자르만
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정도이다. 그후에 많은 군소 잡지들이 발간되었으나 그 주
장은 모두 소극적인 것이었으며, 여성의 해방보다는 여성의 교육을 요구했다. 카르노와 그
후의 르구베가 강조한 것도 여성교육의 향상에 대해서였다. '협력자로서, 정신을 혁신하는 
자로서의 여성'이라는 관념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일관되어, 빅토르 위고(프랑스의 소설
가, 시인, '레미제라블'의 저자, 1802~1885)의 작품에서도 이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을 남성과 동일시하는 대신에, 남성과 대립시켜 직관이나 감성을 인정하고 
이성은 인정치 않는 이런 가르침은 오히려 여성의 입장을 불리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여자는 지지자들의 졸렬함에 의해서도 품위를 떨어뜨리게 된다. 1848년에는 여
자들이 집회를 열고 신문을 발간했다. 외제니 니부아예는 '여성의 소리'라는 신문을 발간하
고 카베도이에 협력했다. 여성 대표단은 파리시청에 몰려가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기도 했
으나,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다. 1849년에는 잔 드쿠앵이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여 선거운
동을 전개했으나 웃음거리가 되었다. '베쉬비엔' 운동이나, 이상한 복장을 하고 활보하던 
불르메리스트의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대의 가장 지적인 여자들은 이런 운동을 외면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스탈 부인은 동료인 여자의 입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입장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조르주 상드는 자유연애를 위한 권리를 요구했으나, '여성의 
목소리'에 기고하는 것은 거절했다. 그녀의 요구는 특히 감정적인 것이었다. 플로라 트리스
탕은 여성에 의한 민중의 해방을 믿고 있었으나 그녀의 진심은 여성의 해방보다는 오히려 
노동계급의 해방에 있었다. 하지만 다비드 스테론이나 지라르댕 부인은 여권운동에 협력한 
사람들이었다. 
  19세기에 전개된 개혁운동은 전체적으로 보아 평등 속에 정의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여권운동에도 유리했다. 그런데 여기 하나의 특이한 예외가 있다. 프루동(프랑스의 사회주
의자, 1809~1865)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는 농민 출신이기 때문이겠지만 생 시몽파의 

신비주의에 맹렬히 반대하여 약간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여성을 가정에 가둬두려고 했
다. '주부냐, 창녀냐'의 양자택일 속에 여성을 몰아넣으려고 했다. 그때까지 여권운동에 대
한 공격은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감행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한결같이 사회주의자들과 싸
우면서 '샤리바리'(1832년에 창간된 풍자파 잡지)에게 야유의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프루동은 여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의 연계를 끊어버렸다. 그는 르루가 주최한 사
회주의 여성대회에 이의를 제기하여 잔 드쿠앵을 공격했다. '정의'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그
는 "여자는 남자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개인으로서 그는 남자밖에 인정
하지 않았다. 부부 사이에도 평등을 전제로 한 협력은 없고, 단지 결합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 그 첫째 이유는, 여자의 육체는 남자의 3분의 2이다. 
또한 여성은 지능과 정서에서 같은 비율로 남성에게 뒤떨어진다. 그러므로 합계하면 여자
의 가치는 3X3X3에 대해 2X2X2의 비율, 즉 27분의 8이 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여성, 즉 아당 부인(여류작가)이 단호하게 대응하고 데리쿠르부인이 소극적으
로 대응한 데 대해 프루동은 '창녀 정치, 근래의 여성'에서 반박했다. 그러나 그도 반여성
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성의 노예이고 거울과 같은 '착실한 여성'에 대해서는 열렬한 찬사
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찬사와 숭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아내조차 자신이 이상
적이라고 찬사한 여자의 생활을 조금도 행복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
다. 포루동 부인이 남긴 편지는 오직 비탄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현실의 상황을 전진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희미하게 반영할 뿐이
었다. 여성은 가정에서 나와 공장에서 생산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사시대 이후로 
잃어왔던 경제력을 되찾게 되었다. 이런 일대 변혁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기계였다. 왜냐하
면 남녀 노동자 사이의 체력 차이는 거의 상실되기 때문이다. 공장의 급속한 약진은 남자 
노동자가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여자의 협력이 필요했
다.
  이것이 19세기 여성의 운명을 변혁하여, 여자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 일대 혁명이
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중대한 의미를 인정하여,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에 의해 필연적
으로 유도되는 해방을 여성들에게 약속했다. "여성과 노동자는 모두 사실상 피압박자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베벨은 말했다. 그리고 양자가 모두 산업기술의 발달을 통하여 그 생산
노동이 갖는 중요성 덕분에 압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엥겔스는 여성의 신분이 사유재산의 역사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모권제
도를 가부장제도로 바꾸어 여성은 세습재산에 예속시킨 불행한 과거가 있었으나, 산업혁명
은 이 실추를 회복시키고 나아가 여성의 해방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
다. "여성이 사회적인 규모로 생산에 참가할 수 있고 가사노동이 극히 미미한 정도를 차지
할 때, 여성의 해방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여성의 노동을 대규모로 허
용할 뿐 아니라, 정식으로 이것을 요구하는 근대의 대공업에 의해서이다." 19세기 초에는, 
여자는 남성 노동자보다 더욱 비참하게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가내공업을 '스
웨팅 시스템'(땀투성의 구조)이라 불렀다. 쉴 사이 없이 일해도, 여공의 임금은 필수품을 
살 수 있는 액수가 되지 못했다. 쥘 시몽은 '여공'에서, 더욱 보수적인 르루아 볼리외는 '1
9세기의 부인 노동'에서, 지독한 혹사의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 후자는 2만 명 이상의 프

랑스 여공이 하루에 50상팀도 못 되는 임금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여공들이 서둘러 공장
을 옮기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공장에서 나오면 바느질과 빨래, 집안청소 등 어느 일이고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싸구려 노예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스나 양품, 잡화의 생산까지도 
공장이 빼앗아가버렸다. 그 대신에 무명이나 양모, 견직공업에서 직공을 대량으로 채용했
다. 여자는 특히 제사와 방직공장에서 많이 채용했다. 공장주는 대개 남자보다 여자 직공
을 선호했다. "여공이 일을 잘하고 임금이 싸다." 이 악랄한 문구는 여성노동의 비극을 말
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자는 노동에 의해 인간으로서 존중되었으나, 그것은 무척 고달프고 
긴 시간의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제사나 방적공장은 열악한 위생조건하에서 운영되었다. 
블랑카는 "리옹의 장식줄 제조공장에서 일부 여공들은 거의 벨트에 매달린 채 양손과 양발
을 동시에 움직이면서 일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1831년에 견직물 여름에는 새벽 3시부터 밤중까지, 겨울에는 5시부터 밤 11시까지, 그
러니까 하루에 17시간씩 일했다. "그녀들은 햇빛이 들지 않는 불결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
다. 이런 처녀들의 절반은 견습기간이 끝나기 전에 폐병에 걸린다. 고통을 호소하면 불평
분자라고 비난을 받는다."하고 노르베르 트뤼캥은 말하고 있다. (트뤼갱의 '어떤 프롤레타
리아의 수기와 모험담', 돌레앙의 '노동운동사' 제1권에서 인용) 게다가 감독은 젊은 여공
들을 욕보이기도 한다. "감독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불쾌한 수단을 사용했
다. 즉 빈곤과 굶주림을 이용했다."고 '리옹 사건의 진상'의 익명의 저자는 쓰고 있다.
  여자는 농사와 공장일을 겸하기도 했다. 악랄한 착취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주에서
 "공장주인 E씨가 내게 알려준 바에 의하면, 그는 이 방적기계에 여자만 채용하며, 특히 결
혼한 여자, 그중에서도 가정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여자를 채용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
런 여성은 독신녀보다 열심이고, 고분고분하며,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힘껏 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여자의 장점이 역으로 이용되어, 여자의 천성인 도덕적인 
부드러운 요소가 그녀를 예속시키고 괴롭히는 수단이 된다."고 쓰고 있다. '자본론'을 요약
하고 베벨을 부연하여 데르빌은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의 여자는 거의가 애완동물이나 
노역동물이다.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남자에 의해 부양을 받고,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
할 때에도 남자에게 부양된다." 여공의 처지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시스몽디와 
블랑키는 여성이 공장에 다니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 원인의 일부는, 여성은 처
음에 자기 권익을 지키기 위해 조합을 조직할 줄 모른 데 있었다. 여성의 조합이 처음 결
성된 것은 1848년으로, 처음에는 생산조합이었다. 이 운동의 발전은 다음의 일람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대단히 느린 속도로 발전하였다.
  1905년 조합원 총수 781,392명에 대하여 여자의 수는 69,405명
  1905년 조합원 총수 957,120명에 대하여 여자의 수는 88,906명
  1912년 조합원 총수 1,064,413명에 대하여 여자의 수는 92,336명
  1920년에는 1,580,967명의 노동자 중에 조합에 참가한 여자 노동자 및 근무자의 수는 
239,016명이고 농사일을 하는 여자 중에서는 1,083,957명 중에 여자 조합원 수는 불과 
36,193명에 불과하다. 즉 조합원 노동자의 총수 3,076,585명 중에 여자 조합원은 292,0
00명이 된다. 여성들에게 새로 열린 가능성을 앞에 두고 그녀들이 이처럼 위축되어 움직

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체념이나 복종의 전통과 연대책임 및 집단의식의 결여 때문이다.
  그 당연한 결과로 여자의 노동은 오랫동안 좀처럼 법규화되지 못했다. 법률이 간섭하기 
위해서는, 1874년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에도 제정시대에 여러 차례 여성운동이 전개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성에 관한 규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미성년 여자의 야
간 작업을 금하고, 일요일과 일반 공휴일에 휴가를 주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하루 노동시
간의 제한을 12시간으로 정한 것과 21세 이상의 여자에 대하여는, 광산이나 채석장에서의 
갱내 작업을 금하는 것이었다. 여자 노동법이 최초로 제정된 것은 1892년 11월 2일로, 
여자의 야간작업을 금하고 공장에서의 하루의 노동시간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의 
모든 위법행위를 통제하지는 못했다.
  1900년에는 하루의 노동시간이 10시간으로 제한되었다. 1905년에 1주일마다 하루의 
휴가를 의무적으로 주게 되었다. 1907년, 여자 노동자는 자기수입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되었다. 1909년에 임산부에게 유급휴가가 보장되고, 1911년에는 1892년의 규정이 
강제적인 효력을 발생한다. 1913년에는 분만 전후에 여자의 휴가에 관한 시행세칙이 마련
되고, 위험하거나 과중한 일이 금지되었다.
  이와 같이 서서히 사회법규가 제정되어, 여자의 노동은 위생상의 보장까지 지켜지게 되
었다. 예컨대 여자 판매원에게는 의자를 제공해야 하고, 점포에 오래 세워두는 것이 금지
되었다. F. I. T(국제 노동사무국)는 출산시의 휴가를 비롯하여 여자 노동의 위생상의 여
러 가지 조건에 관한 국제거인 규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여자 노동자의 체념적인 무기력의 두 번째 결과는, 그녀들이 싼 임금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자의 임금이 이처럼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주장
이 다양하다. 즉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여자의 요구가 남자의 요구보다 약했다
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하며, 그것은 오히려 나중에 첨가한 해석에 불과하다. 여자는 
앞에서도 살펴보았던 것처럼, 착취자에게 저항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들은 
노임을 지불하지 않고 제품을 시장에 내보내는 형무소와 가격경쟁을 해야 했으며, 또 여자
들끼리 일자리를 놓고 경합해야만 했다. 그리고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자는 부부공동체가 
존속되어 있는 사회에서 노동에 의한 자기해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남편의 가정에 매여있는 여성은 대개 집안살림에 용돈을 보태는 정도로 만족한다. 그녀는 
가정 밖에서 일하지만, 가정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 노동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수입이 없어도 되기 때문에, 그녀는 남자가 요구하는 
보수보다 적게 받아도 만족한다. 그리하여 수많은 여성들이 저임금으로 만족하므로, 여자
의 보수는 물론 고용주에게 가장 유리한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프랑스에서 1889년에서 1893년에 걸쳐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남자와 같은 하루의 
취업시간에 대하여, 여자 노동자는 남자 봉급의 절반 밖에 받지 못했다. 1908년의 조사에 
의하면 여자 가내노동자의 최고임금은 1시간에 20상팀을 초과하지 못하고 최하는 5상팀까
지 있었다. 이처럼 착취를 당하는 여자는 얻어먹지 못하고 보호자가 없이는 살아갈수 없었
던 것이다. 미국에서도 1918년에는, 여자는 남자의 절반밖에 보수를 받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는 탄갱 속에서 캐내는 같은 양의 석탄에 대해 여자는 남자의 노임보다 2
5%가 적었다. 1911년에서 1943년에 걸쳐서 프랑스에서 여자의 봉급은 남자에 비해 급

속히 상승되었으나, 여전히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고용주들은 여자가 낮은 임금을 감수한다는 이유로 선호했는데 이 때문에 남성 노동자
측으로부터 항의가 제기되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와 여성의 이해 사이에는, 베벨이나 
엥겔스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직접적인 연대관계는 없었다. 이 문제는 미국에서의 흑인
의 임금문제와 비슷하다. 어떤 사회의 피압박 소수자들은 그들이 소속된 계급 전체에 대한 
무기로 압박자에 의해 이용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피압박 소수자는 적으로 보인다. 흑인과 
백인, 여자 노동자의 남자 노동자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협조하게 하기 위해서는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남자 노동자가 그 값싼 경쟁자에게 위협을 느껴 서로 겨루게 
된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여성이 조합을 결성했을 때, 비로소 여성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는 동시에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성 노동의 진부는 계속되었다. 1900년에 프랑
스에서는 옷이나 피혁제품, 장례용, 가방, 유리제품이나 파리로 보내는 일용품을 만들고 있
는 가내 여공의 수는 90만 명이나 되었으나, 이 수는 그후에 크게 줄어들었다. 1906년에
는 일할 수 있는 나이(18세에서 60세까지)에 있는 여성의 42%가 농업, 공업, 상업, 은행, 
보험회사, 그밖의 자유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런 동향은 1914년에서 18년에 걸친 인
적 자원의 위기와 세계대전의 위기로 말미암아 세계적으로 촉진되었다. 하류 부르주아지나 
중류 부르주아지는 이 움직임을 따르려고 결심하고, 여성들도 자유직업에 진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최신 조사의 하나에 의하면, 18세에서 60세까지의 여성 중에 프랑스에서는 
약 42% 핀란드에서는 37%, 독일에서는 34.2%, 인도에스는 27.7%, 영국에서는 26.9%, 
네덜란드에서는 19.2%, 미국에서는 17.7%가 생산활동을 하는 인구였다. 다만 프랑스와 
인도의 경우에 숫자가 이처럼 올라간 것은 농업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농민을 제외하면 프
랑스에서는 1940년에는 50만 명의 고용주, 1백만 명의 여자 종업원, 2백만 명의 노동자, 
1백50만 명의 여자인부 혹은 실업자로 되어 있다. 여공 중에는 65만 명의 가내 여공이 있
다. 120만 명이 가공공업에서 일하고, 그중에서 44만 명은 섬유공업에서 31만5천명은 의
복공장에서, 38만 명은 재봉공으로 가내에서 일하고 있다. 상업, 자유직업, 공무원의 수는 
프랑스, 영국, 미국이 거의 비슷하다.
  여자에 대한 근본 문제의 하나는,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생식의 역할과 생산업
무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여자가 가사에만 종사하고 
세계의 건설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여자의 고유한 생식기능 때문이었다. 
동물의 암놈에게는 주기적인 발정기가 있어서 암놈의 체력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런데 자연
은 적령기에서 갱년기까지 여성의 수태능력을 제한하지 않고 있다. 문명에 의해 조기의 교
전을 금지하기도 하고, 임신과 임신 사이에 최소한 2년의 휴식을 여자에게 제공하도록 규
정한 인도의 한 부족의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여러 세계를 두고 여성의 임신은 조절
되지 않았다.
  이미 고대부터 주로 여자들이 사용한 정제나 좌약, 질전 등의 피임방법이 있었으나, 이
것은 창녀들이나 의사들의 비밀에 속해 있었다.
  풍자시인들로부터 불임을 비난받은 퇴폐기의 로마의 여성들도 아마 이런 비밀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세에는 피임법이 전혀 알려지지 않아, 18세기까지 그 흔적을 찾

아볼 수 없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많은 여성들이 임신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바람기가 있는 여자들도 방종한 연애의 대가로 자주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시대에 따
라서는 인구를 줄일 필요를 통감하기 했으나 동시에 국가는 국력의 쇠퇴를 두려워했다. 위
기나 빈궁한 시기에는 독신자의 결혼연령이 늦어져 자연히 출산율이 감소되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역시 젊어서 결혼한 여자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만큼 낳은 것이었으며, 유
아의 사망만이 살아 있는 아기의 수를 줄이고 있었다. 이미 17세기의 퓌르 신부(1656년, '
프레스외'에서)는 여자들의 운명인 '사랑의 혹'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그리고 세비네 부인
(17세기의 여류문인)은 자기 딸에게 빈번한 임신을 피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맬더스주의적인 경향이 발달하게 되는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먼저 부유층이, 이어서 국민 전체가 부모의 재력에 따라 아기의 수를 제한하는 것을 합리
적이라고 생각하여, 피임의 수단이 풍속에 도입되었다. 1778년 사회통계학자 모로는 이렇
게 쓰고 있다. "종의 번식을 낡은 시대의 함정으로 보는 것은 상류계급의 여성들만이 아니
다. 인간 이외에는 어떤 동물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이 혐오스러운 비밀은 시골에도 진
출했다. 마을에서도 사람들은 자연을 속이고 있다" '중절성교'의 습관이 먼저 부르주아자에
게, 이어서 시골사람이나 노동자에게 퍼졌다. 옛날부터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쓰여온 콘돔
은 피임기구가 되고, 1840년경에 고무가 발견된 후에 특히 널리 보급되었다. 앵글로색슨
계의 여러 나라에서는 '산아제한'이 공공연히 인정되어, 전에는 불가능했던 두 가지 기능, 
즉, 성적 기능과 번식 기능을 분리시킬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발견되었다. 오스트리아 반
의 의학계의 연구는 수태작과 거기에 합당한 여러 가지 조건을 정확하게 규정함으로써, 동
시에 그것을 피하는 방법을 암시했다. 프랑스에서는 피임의 선전이나 페서리와 질전 등의 
판매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아제한'은 널리 보급되었다.
  낙태는 어느 나라에서도 법률에 의해 공공연히 인정하기는 않았다. 로마법은 태아의 생
명에 대해 특별한 보호를 하지 않았으며, 한 인간으로 보지않고 모체의 일부로 간주했다.
 "아기는 태어나기 전에는 여자의 일부, 즉 내장의 일종이다" 쇠퇴기에는 낙태를 정상적인 
수단으로 간주했으며, 입법자는 출산의 장려를 원할 때에도 낙태를 굳이 금지하려고 하지
는 않았다. 아내가 남편의 의사를 어기고 출산을 거부했을 때에는, 남편은 아내를 벌할 수 
있었으나 그 경우에 죄가 되는 것은 아내의 불복종이었다. 동유럽이나 그리스, 로마시대의 
문명 전반에 걸쳐 낙태는 법률에 의해 허용되었다.
  기독교는 태아에게 혼을 부여함으로써 이 문제에 관한 도덕관념을 뒤집어놓았다. 그후로 
낙태는 태아 자신에 대한 범죄가 되었다. "자기가 낳을 수 있는 수의 아기를 낳지 않는 여
성은 모두 같은 수의 살인을 범하는 것이 된다. 임신한 후에 자기 몸에 위해를 가하는 여
성도 마찬가지다."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고 있다. 비잔틴에서 낙태는 단기간의 금
고형에 처할 뿐이었다. 영아살해를 실천했던 야만족(여기서는 로마인 이외의 민족)사이에
서는, 낙태는 어머니의 의사를 거슬러 폭력으로 무리하게 했을 경우에만 처벌되었다. 그럴 
경우에는 피의 대가를 지불하여 보상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초대 기독교회는 이 '살인죄'에 대하여 태아의 추정나이를 불문하고 가장 엄한 
처벌을 규정했다. 여기서 끝없는 의론의 표적이 된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어느 시
기에 혼이 육체에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성 토마스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그 

시기를 남아의 경우는 40일째경 여자는 80일째경으로 잡고 있다. 그때 혼이 들어간 태아
와 혼이 들어가지 않은 태아 사이에 구별이 생기게 된다. 중세기의 회죄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임산부가 그 태아를 45일 이전에 지웠을 때 그 여자는 1년의 회죄를 받게 된다. 60일
이 되었을 때에는 3년 그리고 그 태아에게 혼이 들어 있을 때에는 살인자로 취급해야 한
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단서를 달고 있다. "기르기 어려워 태아를 지우는 가난한 여자와 
간음죄를 숨기기 위해 지우는 여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1556년 앙리 2세는 임신의 은닉에 관해 유명한 칙령을 공포했다. 이 칙령에는 단순한 
은닉도 사형에 처하는 것을 보면, 낙태에 같은 죄가 적용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
다. 사실 이 칙령은 영아의 살해를 금하려는 것이 취지였으나, 이 칙령을 빙자하여 낙태의 
주범과 방조자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혼이 들어간 태아와 들어가지 않은 태아의 차별
은 18세기경에 없어졌다.
  18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벡카리아는 아기를 갖는 것을 거부하
는 여성을 변호하고 있다. 1791년의 법전은 이런 여성을 용서하고 있으나, 그 공범자는 '
20년의 쇠사슬'로 처벌하고 있다. 낙태가 살인이라는 사고방식은 18세기에 이르자 오히려 
국가에 대한 범죄로 간주되었다. 1810년의 법률은 낙태자와 그 방조자에게 금고와 징역형
에 청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산모의 생명을 구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의
사들은 자주 그것을 실행하고 있었다. 그 법률이 너무 엄격하여 배심원들은 오히려 그 세
기 말에는 이 법률을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범인이 체포된 경우는 극히 드물고, 체포되어
도 8할 가량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1923년에는 다시 새로운 법규가 제정되어, 수술의 방조자 및 시술자에게 징역형을 가했
다. 그러나 그 임산부에게는 금고나 벌금만 부과했다. 1939년에 제정된 새 법령은 특히 
낙태 전문가를 대상으로 하여, 집행유예의 은전은 일체 베풀지 않기로 했다. 1941년에는 
법률에 의해 낙태는 국가치안에 대한 범죄로 규정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낙태를 경범죄로 취급했다. 다만 영국에서는 금고나 징역으로 다스려
지는 중죄였다. 전반적으로 보면 법률이나 법정은 낙태한 여자에 대하여는 그 방조자들보
다 훨씬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의 엄한 태도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
다. 1917년에 공포된 교회법의 조항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낙태를 하려는 자가 
한 번이라도 행동으로 옮길 때에는 산모도 예외 없이 무선고 파문을 받는다." 이유는 일체 
참작하지 않는다. 산모에게 미칠 죽음의 위험도 마찬가지이다. 교황은 다시 최근에도 어머
니의 생명과 아기의 생명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경우에는 전자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선
언하고 있다. 산모는 세례를 받았으므로 하늘나라에 갈수 있지만 - 이상하게도 지옥은 전
혀 안중에 없다 - 태아 쪽은 영원히 해소(세례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아기가 가는 곳)에 
가게 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나치가 집권하기 전에, 소련에서는 1936년 전에 낙태가 공공연히 인정되었
는데 이것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종교와 법률이 금하는 여러 나라에서 낙태의 
사례는 상당한 수에 이르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그 수를 80만에서 100만 - 즉 
출산 수와 같은 수 - 으로 추산하고 낙태하는 여자의 3분의 2는 모두 한두 자녀를 두고 

있는 기혼녀이다. 편견이나 반대나 낡은 도덕의 잔재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개인에 의해 
통제된 출산에의 이행이 자유출산으로 실현된 것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다. 산부인과 의술
의 발달은 출산의 위험을 크게 감소시키고, 분만의 고통을 점점 해소시키고 있다. 최근 - 
1949년 3월 - 에 영국에서는 일종의 마취법을 반드시 실시할 것을 법령으로 정하고 있
다. 이 방법은 미국에서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으며, 프랑스에서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인류는 인공수정에 의해 생식기능도 제어할 수 있는 진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변화는 
특히 여성에게는 큰 의의를 갖고 있다. 여성은 임신의 횟수를 줄여, 그 노예가 되는 대신
에 그것을 자기 생활에 조화시킬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여성이 자연으로부터 해방을 
맞게 된 것이다. 그녀들은 자기 육체를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생식에의 굴종에서 거
의 벗어나 경제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자기의 전인격을 손에 넣게 되었다.
  생산에의 참가와 생식에의 굴종에서 해방된 이 두 인자의 합류에서 여성의 처지가 크게 
진화된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엥겔스가 예언한 것처럼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인 신분은 필
연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했다. 프랑스에서는 콩도르세에 의하여, 영국에서는 매리 울스톤크
라프트의 저서 '여권옹호'에서 발단되어, 19세기 초에 생 시몽파가 이를 계승한 여권운동
은 그 구체적인 기반이 결여되어 있는 동안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오늘날에는 여성
의 권리요구의 중요성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는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공업문명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부동산은 동산에 밀려나 가족집
단 단위의 원칙은 그 힘을 잃게 되었다. 가동자본의 소유자는 전과 같이 재산에 소유되는 
대신에, 일방적으로 그것을 소유하여 처분할 수 있게 되었다. 여자가 실질적으로 남편에게 
결합된 것은 세습재산을 통해서였다.
  그러므로 세습재산이 폐지되면 부부는 이제 1대 1이 되며, 자식도 이해의 견고성에 필
적할 만큼 견고한 유대를 이루지 못한다. 그리하여 집단 대신 개인이 확립된다. 이 진보는 
자본주의의 근대적인 형태가 승리를 거두고 있는 미국에서 특히 현저하다. 미국에서는 이
혼이 성행하고 남편과 아내는 벌써 잠정적인 결합자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농촌 인구가 주축을 이루고, '나폴레옹법전'에 의해 결혼한 여자가 남편의 후견 아래 놓
여 있는 프랑스에서 이 진보는 지지부진하다. 1884년에는 이혼제가 제정되어, 남편이 부
정을 저질렀을 때에는 아내도 이혼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형법에서 남녀의 차
별은 여전히 유지되어, 아내가 범했을 경우에만 부정이 인정되었다. 후견의 권리는 1907
년에도 조건부로 인정되어 1917년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극복되었다. 1912년에 사생아를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게 하는 권리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결혼한 여자의 신분이 개정되기 
위해서는 1938년과 1942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해에 여성에게 복종의 의무가 폐지되었
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일가의 장이며, 그가 주거를 결정한다. 그러나 아내는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에는 남편의 선택에 반대할 수 있을 정도로 아내의 능력은 증대되었다. 
그러나 "결혼한 여성은 충분한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이 권리는 결혼의 계약과 법률에 의
해서만 제한을 받게 된다."는 애매한 문구 속에서, 그 조항의 후반은 전반을 인정하지 않
고 있다. 부부의 평등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정치적인 권리의 획득은 프랑스나 영국.미국에서도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았다. 1867년
에 스튜어트 밀(19세기 영국의 철학자.경제학자)은 영국 의회에 대하여, 그때까지 한 번도 

공개적으로 발언한 적이 없는 부인의 투표권을 요구하는 최초의 변론을 했다. 그는 자기 
저서 속에서 가정과 사회에서의 남녀평등을 강력히 요구했다. "법의 이름으로 여성을 남성
에게 종속시키고 있는 사회관계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이것이 인류의 진보를 가로 막는 
주요한 장해의 하나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것은 완전한 평등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그의 
뒤를 이어 영국의 여성들은 포세트 부인의 지도하에 정치적으로 단합한다. 프랑스의 여성
들은 마리아 데라스므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녀는 1866년에서 1871년에 걸쳐서 여러 차
례의 공개강연을 통하여 여성의 처치를 연구하고, 부정한 아내에게 배반을 당할 남편에게
 "그 여자를 살려두지 말자."고 충고한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춘
희'의 저자, 1824 ~ 1895)와 심한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진정한 여권론자는 레옹 리쉬
에였다. 그는 1869년에 '여자의 권리'를 창간하고, 1878년에 열린 여권국제회의를 주선했
다. 그러나 투표권 문제에는 아직 접근하지 못한 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데 그
쳤다. 30년 동안 프랑스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이 운동은 대단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여성의 손에 의해 투표권을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여성의 이름은 
위베르틴 오클레르였다. 그녀는 '여성투표'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여성시민'이라는 신문을 
창간했다. 그러자 그녀의 영향을 받아 많은 협회가 설립되었으나 그 협회들의 활동은 별다
른 성과가 없었다. 여권운동의 이런 약점은 내분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여자
는 여자로서의 연대성을 갖지 못하고 처음부터 각자의 계급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부
르주아 여성의 이해와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이해가 일치하지 못했다. 혁명파의 여권론은 
생 시몽파나 마르크스파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루이 미셸이라는 한 여성이 여권운
동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녀의 주장은 이 운동이 계급투쟁을 위해 총동원되어
야 하는 힘을 옆길로 빠지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결국 그녀는 
계급투쟁을 통한 자본의 폐지로 여성의 처자는 자연히 개선된다고 주장했다.
  1879년에 사회주의 연맹이 남녀평등을 제창한 후로, 여권운동과 사회주의의 제휴를 부
정하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그 대신에 모든 노동자의 해방과 더불어 자유를 기대하게 되
어, 이 때문에 자기 자신의 이해는 2차적인 것이 되었다. 이와 반대로 부르주아 여성은 현
실 그대로의 사회에서 새로운 권리를 요구했다. 그녀들은 혁명가가 될 의사는 없고 단지 
술, 애로문학, 매음을 금지하는 풍속개혁을 시도하는 데 그쳤다. 1892년에 '여권회의'가 
열려 운동을 전개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897년에는 재판에 여성이 증
인으로 설 수 있는 법률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다만 변호사를 개업하려고 했던 여성 법
학박사들의 요구는 거부되었다. 1898년에는, 여자는 상사재판소에서 선거권을 얻게 되고, 
노동 참의회에서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얻었으며, 빈민구제 참의회 및 미술학교에의 입학
허가를 얻게 되었다. 1900년에는 여권론자들이 새 회의를 소집했으나, 대단한 성과는 얻
지 못했다.
  그런데 1901년에 비비아니가 비로소 여성투표권 문제를 의회에 제안했다. 다만 그는 투
표권을 독신여성과 이혼녀에게만 한정시켰다. 이 무렵부터 여권운동은 힘을 얻게 된다. 19
09년에는 여성투표권을 위한 '프랑스 연맹'이 설립되어 브륀슈위그 부인의 지도하에, 강연, 
집회, 회의, 시위 등의 운동을 일으켰다. 1909년에는 뷔송이 지방의회의 선거권을 여성에

게 부여하는 뒤소수아의 제안에 대한 보고를 했다. 그리고 1910년에는 토마가 여성투표권
을 위한 제안을 했다. 이 제안은 1918년에 되풀이되고, 이듬해에 하원에서 통과되었으나, 
1922년에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그 경위는 상당히 복잡하다. 혁명적 여권주의와 브륀슈위
그 부인의 이른바 독립 여권주의 이외에도 기독교적 여권주의가 가세하여, 교황 베네딕트 
15세는 1919년에 여성투표권을 위한 성명을 발표했다. 보드리앙르 대주교와 세르티앙주 
신부도 이 노선에 따라 열심히 선전했다.
  사실 카톨릭 신자들은 프랑스 여성이 믿음이 독실한 보수적이며 종교적인 요소를 대표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급진파들이 걱정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그들(급진파)
이 반대한 것은, 여성에게 투표를 허용했을 경우에 표가 그쪽으로 쏠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상원에서도 카톨릭계의 많은 의원들과 공회동맹의 일부 의원, 극좌 정당의 의원
들은 여성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을 찬성했으나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 그리하여 1932년
까지 상원은 지연작전을 써서, 여성투표권에 대한 제안을 토의하기를 거부해 왔다.
  그런데 1932년에 들어와서, 하원이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는 수정안을 
가결하자, 상원은 여러 회기에 걸쳐서 토의한 결과 수정안이 부결되었다. '공보'에 발표된 
의사록은 대단히 흥미롭다. 그 속에는 반여권론자들이 반 세기에 걸쳐서 출판한 많은 저술
에 개진해 온 논의를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첫째로 여성을 위하기 때문에 투표에 참가시키
고 싶지 않다는 식의 동정적인 논의이며, 프루동류에 '창녀냐, 주부냐'의 양자택일에 만족
하는 '진정한 여성'이 찬양을 받는다. "여자가 투표 같은 것을 하게 되면 매력을 잃게 될 
것이다. 여성은 우상화되어 있다. 그 위치에서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것이 좋다. 여성은 투
표자가 됨으로써 모든 것을 잃을 뿐 얻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여자는 투표용지 따위를 필요
로 하지 않아도 남성을 다스리고 있다." 등등.
  한편 더욱 진지하게 가정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반대도 있다. 여성이 있을 곳은 집이
다. 정치논의는 부부 사이에 불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개중에는 극히 온건한 반여권론
도 있다. 여자는 남자와 다르다. 여자는 병역에 복무하지 않는다. 매춘부에게도 투표를 시
킬 심산인가? 그리고 교만하게 자기네 남성의 우월성을 단언하는 자도 있다. 투표는 책임
이지 권리가 아니며 여자에게는 그 자격이 없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지능도 낮고 교육도 
떨어진다. 만일 여자가 투표하게 되면 남자가 여성화되어버릴 것이다. 여자에게는 정치교
육을 할 수 없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지능도 낮고 교육도 떨어진다. 만일 여자가 투표하
게 되면 남자가 여성화되어버릴 것이다. 여자에게는 정치교육을 할 수 없다. 여자는 남편
이 시키는 대로 투표할 것이다. 만일 여자가 자유로워지고 싶으면, 먼저 양장점에서부터 
행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남자보다 여자의 수가 많으므로 곤란하다
는 순진한 주장도 있었다. 이와 같이 모두가 내용이 빈약한 반대의견인데도, 프랑스 여성
이 그 정치적인 능력을 획득하기까지는 1945년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이에 1893년부터 여성에게 완전한 참정권을 부여했으며, 오스트레일리
아도 1908년에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그 승리가 대단히 어려웠다.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영국은 여자를 강압적으로 가정에 묶어두었다. 제인 오스틴은 숨어
서 글을 쓰고, 조지 엘리어트(영국의 여류소설가, 1819~1880)나 에밀리 브론테(영국의 
여류소설가 '폭풍의 언덕'의 작가, 1818~1848)가 되기 위해서는 큰 용기나 특이한 운명

이 필요했다.
  1888년에 영국의 어떤 학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자는 하나의 종족이 아닐 뿐 아니
라, 종족의 절반도 되지 못하고 오직 생식을 위한 하나의 아종에 불과하다." 포세트 부인
이 19세기 말에 여성투표권 운동을 일으켰으나, 그것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운
동이었다. 여성의 권리요구가 독특한 움직임을 보인 것은 1903년경에 팽크허스트 일가가 
런던에서 '여성 사회정치동맹'을 창립하면서부터이다. 이 단체는 노동당과 손을 잡고 대담
하게 전투적인 행동을 개시한다. 여성이 순수하게 여성으로서 분명한 움직임을 보인 것은 
역사상 이것이 처음이며, 이 운동은 영, 미 '여성 참정권 운동자'의 모험에 흥미있는 한 페
이지를 첨가하고 있다.
  그녀들은 15년에 걸쳐서 어떤 면에서는 간디의 태도를 연상케 하는 강압적인 정책을 밀
어붙이고, 폭력을 거부하며, 교묘히 그 대용품을 고안해 냈다. 그녀들은 자유당의 집회 도
중에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고 쓴 깃발을 흔들면서 앨버트 홀에 침입하거나 아스키스 후
작의 대신실로 몰려가기도 하고, 하이드 파크나 트라팔가 광장에서 집회를 여는가 하면 플
랭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연설도 했다. 시위할 때 경관을 모욕하거나 돌을 던져 소
송사태도 일으켰으며, 구치소 안에서는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기금을 모아 수백만 명
의 남녀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여론화함으로써, 드디어 1907년에 200명의 의원이 여
서투표권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후 해마다 이들 중의 몇몇 의원이 여성의 
투표권을 요구하는 법률을 의회에 상정했으나, 빈번히 같은 논의 끝에 기각되었다.
  1907년에 '여성사회정치동맹'은 의회를 목표로 첫번째 난입을 감행했는데, 여기에는 어
깨띠를 두른 여공을 비롯하여 몇 사람의 귀족 여성도 가담하였다. 그들은 경찰에 의해 해
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일부 탄광에서 기혼여성들의 취업을 금한 것이 도화선이 되
어, 랭커셔의 부인 노동자들이 여성사회정치동맹의 지원을 받아 런던에서 궐기대회를 감행
하였다. 1909년에는 또다시 검거사건이 일어났으며, 그때 투옥된 여권론자들은 장기간의 
단식투쟁으로 응수했다. 그녀들은 석방이 되자 새로 대열을 짜고, 그중의 한 사람은 석회
를 칠한 말을 타고 엘리자베스 여왕 행세를 했다. 1910년 7월 18일에 여성의 투표권에 
관한 법안이 상정되었는데, 이날 9킬로미터에 이르는 행렬이 런던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법안이 부결되자 다시 새로운 집회와 새로운 체포작전이 있었다.
  1912년에 그녀들은 전보다 과격한 작전을 감행하여 빈 집을 불태우고, 그림을 찢고, 화
단을 짓밟고,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로이드 조지(제1차 세계대전 당
시의 영국 수상)와 에드먼드 그레이(영국 정치가)경에게 잇따라 대표를 파견했다. 그녀들
은 앨버트 홀에 숨어서 로이드 조지가 연설하는 동안 시끄럽게 방해하였다. 전쟁이 일어나
자 그녀들의 활동은 중지되었다. 이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사태를 진척시켰는지는 알기 어
렵다. 영국 여성에게 투표권은 1918년에 제한된 형태로 주어졌고, 이어서 1928년에는 그 
제한이 철폐되었다. 그녀들에게 이런 성공을 안겨준 것은, 주로 전쟁중에 행한 구가에 대
한 봉사 덕분이었다.
  미국 여성들은 처음부터 유럽 여성들보다 해방되어 있었다. 19세기 초에, 여자들은 남자
들이 수행하는 고된 개척자의 일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
히 하고 싸웠다.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그 수가 훨씬 적었기 때문에 대단히 존중되었다. 

그러나 서서히 그녀들의 처지는 유럽 여성들과 비슷해졌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호의는 여
전히 유지되었고, 여성은 교양에 대한 특권과 가정에서의 지배적인 지위를 잃지 않고 있었
다. 또한 법률은 여성에게 종교적, 도덕적인 역할을 부여했으나, 사회의 요구는 여전히 남
성의 수중에 들어 있었다.
  1830년경부터 일부 여성들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또 흑인들의 권익을 위한 운동도 일으켰다. 1840년 런던에서 열린 노예제도 반대론자 회
의가 그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퀘이커교도인 루크레시아 모트가 여권론
자협회를 창설했다. 1840년 7월 18일, 세네카폴스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그녀들은 앞으로 
미국 여권론의 시범이 되고 퀘이커교의 색채가 농후한 선언문을 작성했다.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게 지음을 받고, 창조주에 의해 빼앗길 수 없는 권리가 주어져 있다. 정부는 이 권
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남성은 결혼한 여성을 죽은 시민으로 만들어버린
다... 남성의 활동범위를 결정하는 것은 여호와뿐인데도 남성들은 그 여호와의 특권을 가로
채버렸다." 이로부터 3년후에 해리엣 비처 스토 부인은 흑인을 위한 여론을 불러일으킨 '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썼다. 에머슨과 링컨은 여권운동을 지지했다.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여성들은 여기에 열렬히 참가했다. 그러나 흑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수정안에 "피부의 
색깔도 성의 구별도... 투표권 장애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써넣으려고 했던 그녀들의 
요구는 무산되었다. 그런데 그 수정안 조항의 하나가 두 가지로 해석되어, 여권운동의 위
대한 지도자 앤터니 양은 이것을 구실삼아 동료 14명과 함께 로체스터에서 투표를 실시했
다. 결국 그녀는 100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1869년에 그녀는 여성의 투표권을 획득
하기 위해 전국적인 규모의 연맹을 결성했고, 같은 해에 와이오밍 주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1893년에야 겨우 콜로라도 주가, 1896년에 아이다호 주와 유타 주가 
그 뒤를 따랐을 뿐 그후의 발전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분야에서는 유럽의 여성들보다는 훨씬 더 성공하고 있었다. 1900년에 
미국에서는 500만 명의 여성 근로자가 있었고, 그중에서 130만 명은 공업에, 50만 명은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상업과 공업, 사무계통과 그밖의 모든 자유직업에 여성의 진출은 
눈부실 정도였다. 여변호사와 여의사가 배출되고, 여자 목사만 해도 3,373명이나 되었다. 
메리 베이커 에디가 '크리스천 사이언스 처치'를 설립했다. 여성들은 클럽에 모이는 습관이 
몸에 배고, 1900년에 클럽은 2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것은 9개 주에 불과했다. 1913년에는 여성의 투표권 
요구운동이 영국의 투쟁적인 운동을 본받아 조직되었다. 두 사람의 여성, 도리스 스티븐스 
양과 젋은 퀘이커교도인 앨리스 폴이 이 운동을 지휘했다. 그녀들은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깃발과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고, 계속해서 강연회나 행진 등 여
러 가지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여성의 투표가 인정되고 있는 9개 주에서는 여성 유권자들이 대거 수도로 몰려가, 전국
적인 여성투표권을 요구했다. 시카고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이 자신들의 성을 해방하기 위해 
하나의 당파를 결집하여, '여성당'으로 발전했다. 1917년 여성투표 찬성론자들은 새로운 
전술을 세웠다. 그녀들은 백악관 정문 앞에서 깃발을 들고, 추방되지 않도록 문살에 몸을 
붙들어 맨채 차례로 농성을 벌였다. 그녀들은 6개월 만에 체포되어 옥스카카의 감옥에 수

감되었으나, 단식투쟁 끝에 드디어 석방되었다. 다시 계속된 시위행렬이 폭동으로 번졌다. 
정부도 드디어 하원에 여성투표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승인했다. 여성당의 집행위원회는 워
싱턴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그 회기 끝에 여성투표권을 위한 수정안을 하원에 제출하여 19
18년 1월 10일에 가결되었다.
  다음은 상원에서 표를 얻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월슨 대통령이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약속하지 않았으므로 여권론자들은 다시 시위에 들어가, 백악관 입구에서 집회를 열
었다. 대통령은 상원에 요청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수정안은 두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1919년 6월에 이 수정안이 가결된 것은 공화당 회의에서였다. 그후 10년 동안은 남녀의 
완전한 평등을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다. 1928년 하바나에서 열린 제 6차 미국 공화당 주
의회에서 여성은 국제여성위원회 창립할 수 있게 되었다. 1933년의 몬테비데오협정은 국
제적 규약에 의해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19명의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여성에게 남
성과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규약에 서명을 했다.
  스웨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여권운동이 일어났다. 스웨덴 여성들은 오랜 전통의 이름으
로 '교육, 노동, 자유'에 대한 권리를 요구했다. 이 투쟁을 감행한 것은 주로 여류문학가들
로서, 처음에는 이 문제의 정신적인 면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강력한 단체로 뭉쳐
서 진보당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으나, 곧 보수당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핀란드의 
여성들은 1906년에, 노르웨이의 여성들은 1907년에 투표권을 획득했으나, 스웨덴의 여성
들은 몇 해를 더 기다려야만 했다.
  라틴 여러 나라들은 동양의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가혹한 법률 못지않는 가혹한 풍
속으로 여성을 압박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여권운동의 발전을 철저히 억압
했다. 파시스트가 집권한 이탈리아는 교회에 협조를 구하고, 가정을 존중하고, 여성의 노예
화의 전통을 연장함으로써 여성을 국가권력과 그 남편에게 이중으로 예속시켰다. 독일에서
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1790년에 학생 히펠이 최초로 독일 여권운동을 선언했다. 19세기 
초에는 조르주 상드의 여권운동과 비슷한 감상적인 여권 운동이 성행하였다. 1848년, 독
일 최초의 여권론자인 루이제 오토는 조국의 변혁에 협력하기 위해 여성에 대한 권리를 
요구했으나, 그 여권론은 근본적으로 국가주의적이었다. 그녀는 1865년에 '독일 여성총동
맹'을 결성했다. 한편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은 베벨과 함께 남녀불평등의 폐지를 요구했다. 
1892년 클라라 제트킨은 당 고문으로 취임했다. 여러 종류의 여성 노동자단체와, 연맹으
로 단결한 사회주의 여성동맹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독일 여성들은 1914년 여성 국민군을 
조직하려다가 실패했으나 전쟁 수행에는 열심히 협력했다.
  독일이 패전한 후에 그녀들은 투표권을 얻어 정치에 참여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파
르타쿠스단에서 립크네히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다가 1919년에 암살되었다. 대다수
의 독일 여성들은 질서유지 편에 섰고 그중의 몇 사람은 국회에 진출했다. 결국 히틀러는 
해방된 여성들에게 다시 한 번 '부엌, 신앙, 자녀'라는 나폴레옹의 이상을 강요했던 것이
다. "여자가 한 사람이라도 섞여 있다는 것은 국회의 불명예이다."라고 히틀러는 선언했다.
  나치즘은 반카톨릭적이며 반부르주아적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특권적인 지위를 제공
했다. 사생아의 어머니와 사생아에게 주어진 보호는, 여성을 결혼의 속박에서 크게 해방시
켰다. 스파르타의 경우처럼 여성은 어떤 개인의 소유이기에 앞서 국가의 소유이며, 그 때

문에 여성은 자본주의제도하에서 살고 있는 부르주아 여성 이상의, 또 어느 의미에서는 그 
이하의 자주성이 주어지게 되었다.
  여권운동이 가장 큰 성과를 올린 것은 소련이었다. 이 운동은 19세기 말에 지식층인 여
학생들 사이에서 먼저 일어났으나, 그녀들은 자신들의 입장보다는 혁명운동 전체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녀들은 '민중속에 들어가' 니힐리스트의 방식에 따라 오크라나와 싸
웠다. 베라 자술리치는  1878년에 트레포프 경시청장을 살해하였다. 러일전쟁 때 여자들
은 남자들을 대신하여 많은 직장에서 일했다. 그녀들은 자기의식에 눈뜨기 시작했으며, 러
시아 여권동맹은 남녀의 정치적인 평등을 요구했다. 의회 안에 여권 신장을 여구하는 위원
회가 설치되었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여성 노동자의 해방이 실현된 것은 혁명에 의해서였다. 1905년부터 여성 노동자들은 지
방에서 시작된 대중의 정치적 파업에 많이 참가하여 바리케이드의 선두에 섰다. 1917년의 
혁명이 일어나기 며칠 전인 '국제 여성의 날'(3월 8일)에 그녀들은 빵과 평화와 출전한 남
편들의 귀환을 요구하며 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데모를 했다. 그리고 10월의 봉기에도 참
가했다.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그녀들은 침입자에 대한 소련의 투쟁에서 경제적으
로나 군사적으로도 큰 역할을 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충실히 따라 여성해방
을 노동자의 해방과 연결지었고, 여성에게 정치, 경제적인 평등을 부여했다.
  1936년의 헌법 제 122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소련에서 여성은 경제, 문화, 
공무, 정치의 생활 전반에서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이 원칙은 국제공산주
의동맹에서도 다시 한 번 천명되고 있다. "법률상으로나 공공생활에 있어서 여자와 남자의 
사회적인 평등, 결혼법과 가족법의 근본적인 변혁, 청소년의 보호 및 교육의 국가 부담, 여
성을 예속시키는 이데올르기 및 전통에 대한 조직적인 계몽과 투쟁을 요구했다." 경제적인 
분야에서 여성은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여성 노동자는 남성 노동자와 같은 임금을 받게 
되고, 생산에 의욕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최근에 프랑스 소비에트 협회에서 편찬한 팸플릿에 의하면, 1939년의 보통선거에서 도, 
군, 시, 읍, 면 의회에는 457,000명, 사회주의공화국 최고회의에는 1,480명의 여성 대의
원을 배출했으며, 전소련동맹 최고회의 의원은 227명이나 된다. 또한 1천만 명 가까운 여
성들이 조합에 가입하고 있다. 여성은 소련 노동자 및 근로자의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스
타하노프(소련 노동생산력 증가 운동)에도 많은 여성들이 참가하고 있다. 지난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소련 여성들의 눈부신 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들은 제철, 광산, 뗏목, 
철도 등 지금까지 주로 남자들의 직업으로 간주되어 왔던 생산 부문에도 많은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리고 비행사나 낙하산병으로서 수훈을 세웠고 빨치산 부대도 조직하였다.
  그러나 여성이 공공생활에 참가하자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즉 가정에서의 여성
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느내 하는 것이었다. 여성을 가정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노
력은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다. 예컨대 1924년 11월 16일,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은 공
식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가정의 개념과 가족관계가 존속되는 한 혁명도 
무효이다." 자유결혼의 존중이나 이혼의 편의, 낙태의 법적인 인가에 의해 남성에 대한 여
성의 자유가 확립되고, 출산휴가나 탁아소
유치원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어머니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었다. 감정적이고 모순된 

여러 가지 증언에 의해서는 여성의 구체적인 처지가 어떠한가를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분
명한 것은 오늘날에는 인구 재증가의 필요로 인하여 전과는 다른 가족정책을 실시하고 있
다는 점이다. 가족은 사회의 기본세포로 간주되며, 여성은 노동자인 동시에 주부이다.
  성도덕은 매우 엄격하다. 1936년 6월에 법령이 공포되고 1941년6월 7일에 강화된 법
령에 의해 낙태는 금지되고, 이혼제도도 거의 폐지되었다. 또한 간통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러시아의 여성들은 모든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긴밀히 예속되어, 자기 
가정에 단단히 매여 있으면서도 생산노동에 의해 품위를 얻고 또 정치활동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특이한 것으로서, 이 특이성에 대해 세밀히 연구할 수 있다면 대단히 
유익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여의치 않은 처지에 있다.
  최근 유엔에서 열린 여성문제위원회는 남녀의 평등한 권리를 모든 국가에서 인정할 것
을 요구하는 한편 그 입법을 촉구하기 위해 몇 가지 동의를 가결하였다. 그리고 그런 과정
을 거쳐 성공을 거둔 것으로 생각된다. 미래는 종전에 남성의 차지였던 사회에 여성이 점
점 더 깊이 동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역사를 되돌아보면, 거기서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결론은 
여자의 모든 역사는 남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미국에 흑인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
라 백인문제도 있는 것처럼(뮈르달의<미국의 딜레마>참조) 그리고 '반유태주의는 유태인
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문제'(J.P.사르트르, <유태인 문제에 관한 고찰>참조)인 것처
럼 여성의 문제는 언제나 남성의 문제였다. 남성들이 그 출발점에서 육체적인 힘과 함께 
정신적인 권위를 얻게 된 원인에 대하여는 이미 고찰한 바와 같다. 남성들은 가치를 만들
고, 풍습을 만들고, 종교를 만들었다. 여성은 이런 지배력을 차지하기 위해 남성과 싸운 적
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몇 사람의 여성들-사포, 크리스틴 드 피상, 메리 울스톤크라프
트, 울랭프 드 구즈 등-이 자신들의 가혹한 숙명에 대해 항의했다. 그리고 때로는 집단적
으로 의사를 표시한 적도 있다. 그러나 오피아법에 반대하여 단결한 로마 주부들의 경우
나, 영국과 미국의 여성투표권 운동가들의 경우처럼 압력을 가하는 데 성공한 것은 남성 
쪽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을 때 뿐이었다.
  여성의 운명을 손아귀에 넣고 있었던 것은 언제나 남성들이었다. 그리고 남성들은 여성
의 운명을 여성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끌려고 하지 않았다. 남자가 존중한 것은 언제나 자
기 자신들의 계획이나 걱정, 욕구였다. 남자들이 어머니인 여신을 숭배한 것은 자연이 그
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청동기에 의해 자연에 대항하여 자기를 주장할 
수 있게 되자 곧 가부장제도를 마련했다. 그후부터 여자의 운명은 가족과 국가의 항쟁이 
결정해 나갔다.
  기독교도가 여성에게 지정해 준 조건 속에 반영하고 있는 것은 신 앞에서, 세계 앞에서, 
자기 자신의 육체 앞에서의 기독교도의 태도이다. 중세에 '여성논의'라고 불린 것도 결혼과 
독신에 대한 남자 성직자와 속인 사이의 논쟁이었다. 결혼한 여자에게 후견인제도를 마련
한 것은 사유재산에 의거한 사회제도였고, 오늘의 여성을 해방시킨 것도 남성들이 이룬 기
술혁명이었다. '산아제한'에 의해 자식을 많이 키우는 가정을 줄이고, 여성을 어머니의 비
참한 처지에서 일부 해방시킨 것은 남성의 도덕관념의 진화였다. 여권운동 자체도 결코 여
성의 자주적인 움직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부는 정치가의 손에 쥐어진 도구였고, 일부는 

더욱 깊은 사회동향을 반영한 부대현상이었다.
  여성은 지금까지 독립된 계급을 형성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사실, 역사 속에서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다. 육체나 생명이나 내재로서, 즉 타자로
서의 여성의 군림을 요구한 이론도 결코 여성의 표현이 아닌, 남성의 이데올르기였다. 대
다수의 여성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자기의 운명을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그것을 변
혁하려고 노력한 여성들도 자기들의 개별성에 몰두하여 그것을 관철하는 것이 목적이 아
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소망이었다. 여성들이 세계의 움직임에 참여하게 된 때는, 남
성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남성들의 견해에 따를 때뿐이었다.
  이런 참여는 전체적으로 보면 2차적이며 부가적인 것이다. 여성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자주성을 가지고 생산에 참가했던 계층은 피압박계급이며, 노동자로서의 그녀들은 남자 노
동자 이상으로 노예상태에 놓혀 있었다. 지도층에서의 여성은 기생물이며, 따라서 남성의 
법률에 예속되어 있었다. 즉 어느 경우나 여성의 행동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법률과 
관습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 아니며, 결국 여성은 구체적으로는 전혀 자유를 누리지 못했
다.
  고대 로마공화국에서는 경제적인 조건에 의해 주부에게 구체적인 권한이 부여되었으나 
법적으로는 조금도 독립되어 있지 않았다. 농촌 문화에서나 상업적인 소부르주아 사회에서
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가정에서는 안주인겸 하녀였고, 사회적으로는 미성년자였다. 이와 
반대로 사회가 붕괴되는 시기에는 여성은 해방되었다. 그런데 남성의 가신을 면하게 되자
마자 그녀들은 영토를 잃게 된다. 때문에 여성은 방종이나 낭비와 같은 행동밖에 할 수 없
는 소극적인 자유만 얻게 된다. 로마제국의 퇴폐기와 르네상스 시대, 18세기나 집정관 시
대가 바로 그러했다. 일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을 때는 굴종의 신분이었고, 해방이 되었을 
때는 처신에 서툴렀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결혼한 여성은 사회어서 자기 지위를 차지
했으나 권리를 인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독신여성은, 정숙한 여자든 창녀든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대신 20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생활
에서 배제되었다.
  이 법률과 관습의 대립에서 특히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겼다. 즉 자유연애는 법률에 의
해 금지되지 않았으나 간통은 위법행위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과오를 범한' 처녀는 상처를 
입게 되지만, 아내의 부정은 관용되는 경우가 많다. 17세기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유롭
게 애인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결혼을 한다는 처녀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교묘
한 제도에 의해 여성은 꽁꽁 묶여 있다. 이 추상적이고 구체적인 이중의 구속에서 여성이 
자립을 하려면 예외적인 환경이 필요하다. 남성에 필적할 만한 사업을 이룬 여성은 사회제
도에 힘입어 모든 성적 차별을 초월할 수 있었던 여성들이었다. 이사벨라 여왕이나 엘리자
베스 여왕, 러시아의 카테리나 여제 등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었다. 즉 그녀들은 지
배자였다. 일단 사회적으로 그런 여건이 사라져도, 그녀들이 여성이라는 것이 전혀 열등성
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왕의 비율은 명군의 
비율을 훨씬 능가할 정도이다.
  종교도 이와 같은 변화를 이루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나 성 테레사는 여성의 모든 생리
적인 조건을 초월한 거룩한 영혼이었다. 그녀들의 세속의 생활이나 영적인 삶, 행동, 저술

활동은 소수의 남성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이에 이르고 있다.
  그밖의 여성들이 세계에 큰 발자취를 남길 수 없었던 것은, 그녀들이 여자로서의 조건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들은 소극적이거나 혹은 간접적인 
활동밖에 하지 못했다. 쥐디트(적장 호로페르네스를 잠자리에서 목 벤 유태의 여걸)나 샤
를로트 코르데(공포정치 때 마라를 암살한 소녀)나 베라 자술리치(러시아의 여성혁명가, 
페테르부르크의 경시청장을 저격함)는 암살을 실행했다. 프롱드당의 여성들은 음모를 꾸몄
다. 대혁명때와 코민(파리 혁명정부)에서 여성들은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구질서에 
반항하여 싸웠다. 적극적인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 여성들에게 금지되는 반면, 권리나 능력
이 수반되지 않는 자유에는 완강히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여성들은 고작
해야 먼 발치에서 남성들이 하는 일을 어느 정도 도울 수 있을 뿐이었다. 아스파지아나 맹
트농 부인, 위르생 부인은 남성의 조언자였다. 그나마도 남성이 들어주는 것이 전제가 되
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행동이 구체적으로 표면화될 때부터 여성의 목소리는 침묵을 지킨다. 
그녀들은 전쟁은 일으켜도 작전을 계획하는 데는 참여할 수 없었다. 정치가 음모화한 범위 
안에서만 정치를 좌우했다. 세계의 지배권이 여자의 손에 쥐어진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
다. 여자는 기술이나 경제에도 영향을 준 일이 없고 나라를 세우거나 파괴한 적도 없으며, 
세계를 발견한 적도 없었다. 여자들에 의해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난 적은 있지만, 그녀들은 
행동인이라기보다는 원인의 역할을 더 많이 했다. 루크레티아(BC 6세기의 부인, 타르퀴니
우스 콜라티누스의 처로 정숙했으며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고대 로마의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의 왕자 섹스투스에게 능욕을 당하자 남편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자살함)의 
자살은 상징적인 가치밖에 지니지 못했다. 피압박자에게 남아 있는 길은 죽음뿐이다. 기독
교도를 박해할 때나 사회와 국가가 붕괴한 직후에 여성은 그 증인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
나 아직까지 순교자가 세계를 변화시킨 예는 없다. 여성들이 시위를 하거나 행동을 개시했
을 때도, 남성의 결단에 의해 그것을 유효하게 발전시킨 경우에만 가치를 발휘했다. 비처 
스토 부인의 주위에 모인 미국 여성들은 노예제도에 대해 여론을 일으켰으나, 남북전쟁의 
참된 원인은 감정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1917년 3월 8일의 '부인의 날'은 러시아혁
명을 앞당겼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의 신호에 불과했다.
  여걸의 대다수는 기이한 타입의 인간으로, 그 행동의 중요성보다는 그 운명의 특이성에 
의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모험가나 괴짜였다. 그러므로 잔 다르크나 롤랑 부인, 플로라 
트리스탕 같은 여자들을 리슐리외(프랑스의 정치가, 1585~1642)나 당통(프랑스의 혁명
정치가, 1759~ 1794), 레닌 등과 비교하면 그녀들의 위대성은 지극히 주관적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녀들은 역사적인 행동가라기보다는 모범적인 인물들이다. 위대
한 남성은 대중 속에서 태어나, 환경이 그를 밀어준다. 그런데 여성은 역사의 흐름 밖에 
있으며, 환경은 그녀들에게 장애일 뿐 발판이 되어주지 못한다. 세계의 모습을 바꾸기 위
해서는 먼저 거기에 견고하게 닻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여성들은 사회에 복종하는 여성이다. 신권에 의
해 행동을 일으키도록 지시를 받지 못하면(그리고 이 경우에 여자들은 남자와 동등한 능
력을 발휘했으나)야심을 품고 영웅심이 강한 여자에 불과하다. 로자 룩셈부르크(독일의 여

류역명가, 1870~1919)나 퀴리 부인과 같은 여성이 나타나게 된 것은, 여성이 이 세계를 
자기 무대로 여기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이런 여성들은 여성의 역사적인 무가치를 결정한 
것이 그녀들의 열등성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입증했다. 그녀들의 역사적인 무가치야말로 
여성들을 열등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여성들이 자기를 주장하는 데 가장 성공한 문화적인 영역에서 명백히 드러
난다. 그녀들의 운명은 문학과 예술의 운명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게르만인들 사이에서 
예언이나 승려직은 여성들의 차지였다. 그녀들은 세계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남자들이 계
발에 의해 자기 우주의 한계를 넘어 다른 우주에 도달하려고 노력할 때에는 여자들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 문예부흥기에 꽃피운 우아한 신비주의나 휴머니즘에 대한 
호기심, 미에의 취향, 또 17세기의 궁정문학이나 18세기의 진보주의적인 이상은 여러 모
로 여성을 찬양했다.
  그 당시에는 여성들이 시의 주제가 되고,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여성들은 한가한 
시간을 활용하여 정신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데 전념했고, 작가의 조언자이며 비판자, 또는 
독자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경쟁자가 되었다. 여성이 남성의 마음을 개발하는 감성이나 도
의심을 북돋아, 자기 자신의 숙명에 간섭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여성교육은 대부분 
여성의 힘으로 쟁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적인 여성들이 연출한 집단적인 역할은 
크지만, 그녀들의 개인적인 업적은 전체적으로 보아 그다지 높이 평가할 수 없었다. 여성
이 사상이나 예술분야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행동에 참가하지 않기 때
문이다. 그런데 예술이나 사상도 행동 속에 생동적인 원천을 갖고 있다. 
  현실세계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세계를 재창조하기를 원하는 자에게 유리한 
입장이 아니다. 이 경우에도 조건을 뛰어넘어 부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기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집단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는 인간에게는 개성의 완성이란 거의 불
가능한 것이다.
  "스커트를 입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하고 마리 바슈키르체프(19세기 러시아의 
여류화가)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탕달도 "여자로 태어난 천재는 인류의 행
복을 위해 도움을 주지 못하고 사라진다."고 말했다. 사실 인간은 천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라면서 천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처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재가 
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반여권론자들은 역사의 예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모순된 논법을 이끌어냈다. 첫째로 
여자는 지금까지 위대한 것을 한 가지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이고, 둘째로 여성의 환경
은 위대한 여성의 출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주장 속에는 기만
이 있다. 몇 사람의 특권여성들이 성공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여성들의 사회적인 위치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메울 수도 변명할 수도 없다. 여성의 성공이 이처럼 낮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환경이 여성에게 불리하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크리스틴 드 피상이
나 풀랭 드 라 바르, 콩도르세, 스튜어트 밀, 스탕달 등이 주장한 것처럼 어떤 분야에서도 
여성에게는 기회가 별로 주어져 있지 않았다. 오늘날 여성들 중의 대다수가 새로운 신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녀들의 이런 요구는 여성다운 성품으로 찬양을 받자는 것이 아니다. 그녀들은 인류 전

체에 있어서처럼 자기들도 초월이 내재를 능가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녀들은 추상적인 권
리와 구체적인 가능성이 합치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 양자가 합치되지 않으면 자유도 기만
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원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바로 그 과도기에 해당된다. 언제나 남성에
게 속해 온 이 세계는 지금도 그들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 가부장제의 여러 제도와 가치
는 거의 옛날 수준 그대로이다. 추상적인 권리도 곳곳에서 여성에게 완전히 인정되어 있다
고 말할 수 없다. 스위스에서는 아직도 여자가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고, 프랑스에
서는 1942년에 제정된 법률이 완화된 형태로 여전히 남편의 특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
나 방금 말한 대로 추상적인 권리만으로는 여자가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을 하기는 
어렵다. 남녀 사이에는 오늘날까지도 진정한 평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첫째로 결혼생활이 주는 부담은 여전히 남자보다 여자에게 훨씬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모성의 과중한 부담은 '산아제한'의 공공연한 혹은 은밀한 실시에 
의해 경감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엄격
히 실시되는 것도 아니다. 낙태가 널리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불법적인 낙
태수술로 몸을 해치고 있으며, 여러 차례의 출산으로 쇠약해지기 쉽다. 가사에서 아기의 
시중까지 거의 모든 것을 여자 혼자 맡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특히 반여권론의 전통이 뿌
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여자가 맡아온 일을 거드는 것을 남자의 수치로 생각
한다. 그 결과 여자는 가정생활과 노동자로서의 생활을 조화시키기가 남자보다 어렵다. 사
회가 여자에게 이런 노력을 요구할 경우에는, 아내의 생활은 남편의 생활보다 훨씬 더 힘
들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농촌여성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자. 프랑스에서 농촌여성들은 거의가 생산
노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다수가 결혼을 하고 있다. 독신녀는 아버지의 집이나 오빠, 언
니의 집에서 하녀나 마찬가지로 일을 하며, 한 가정의 주부가 되기 위해서는 남편의 지배
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농촌여성들은 풍습과 전통의 차이에 따라 맡고 있는 역할이 다
양하다. 예를 들어 노르망디의 농촌여성은 식탁에서 상석에 앉지만, 코르시카의 여성들은 
남자들과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없다. 그러나 어디서든 농촌여성들은 가정경제에 대단히 중
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남자와 책임을 분담하고, 남자와 이해를 같이하며, 남자와 재산
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존중되고, 또 여자 쪽에서 실제로 가정을 지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농촌여성의 위치는 고대의 농업공동체에서 여성이 차지했던 위치를 연상케 한다. 
아내는 남편과 동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정신적인 힘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녀
들의 구체적인 생활은 남자들보다 훨씬 괴로웠다. 채소밭을 가구고 닭이나 양, 돼지를 키
우는 일은 주로 여자가 맡았
다. 그 밖의 힘든 일도 거들어야만 했다. 즉 마구간을 치우고 비료를 주고 씨를 뿌리고 빨
래를 하고 김을 매고 풀을 베고 삽질을 하고 제초를 하고 곡식을 거둬들이고 포도를 따고, 
때로는 짐수레에 밀집, 건초, 재목, 장작, 거적 등을 싣고 내리는 것도 거들어야 한다. 게
다가 식사준비에서 빨래나 바느질 등의 가사도 해야 한다. 그리고 아기를 낳아서 키우는 
어려운 일도 여자만의 몫이다. 아침에는 새벽에 일어나 닭이나 가축에게 먹이를 주고, 남

자들의 아침식사를 마련하고, 아기를 돌보고, 들로 숲으로 밭으로 일하러 간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점심 준비를 하고, 설거지를 마치면 다시 저녁때까지 들일을 하러 간다. 저녁식
사가 끝나면 바느질을 하고 집 안을 치우고 옥수수를 터는 등의 밤일이 기다리고 있다. 또
한 임신기간 동안에도 건강을 돌볼 여가가 없기 때문에 몸이 곧 망가져서 나이보다 일찍 
늙고 병에 시달리게 된다.
  남성이 사회생활에서 찾아내는 얼마간의 보상도 그녀들에게는 돌아오지 않는다. 남자는 
일요일이나 축제 때는 시내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주점에서 술도 마시고 트럼프도 하고, 
사냥이나 낚시를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집에 남아 잠시도 쉴 새가 없다. 다만 
하녀를 부리는 유복한 농촌여성들은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고, 노동에 지치는 일 없이 가정
에서 큰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나 대개의 시골노동은 여성을 우마와 같은 처지로 전락시키
고 있다.
  장사를 하거나 작은 기업을 운영하는 여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비교적 큰 특혜를 누렸다. 
중세 이후로 법률에 의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이런 여자들이었다. 잡화상이나 밀
크상, 여관이나 담배가게의 여주인은 남자와 같은 지위에 있었다. 독신녀이건 과부이건 그
녀들은 사회에서 훌륭히 자립할 수 있었다. 결혼을 해도 그녀들은 남편과 똑같은 자주성을 
지니게 된다. 그녀들은 가정과 같은 장소에서 일할 수 있으며, 그 일도 대체적으로 힘들지 
않은 행운을 누렸다.
  가정 밖에서 일하는 여공이나 여사무원, 비서나 판매원 등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그녀
들은 자기의 직업과 가사를 조화시키는 것이 훨씬 어렵다. (장보기, 식사분비, 청소, 바느
질 등은 날마다 적어도 3시간 반, 일요일에는 6시간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 공장이나 사무
실에서 하는 노동시간에 이를 가산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간이 된다.)
  자유직업에 대해 말하면, 여변호사나 여의사, 여교사의 경우에 설사 가사에서 남의 도움
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가정과 아이는 역시 그녀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 걱정거리이자 핸디
캡이 된다. 미국에서의 가사노동은 편리한 기계 덕분에 한결 간편하게 치르고 있다. 그러
나 직업여성에게 요구되는 몸치장과 맵시 때문에 거기에 따르는 부담이 있게 마련이다. 그
리고 가정과 자녀들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도 여전히 남아 있다.
  한편, 노동으로 자립을 하려는 여성들은 남자 경쟁자보다 훨씬 불리한 여건에 놓여 있
다. 대부분의 직업에서 여성의 봉급은 남성보다 적다. 대부분의 여성에게는 전문직종을 맡
기지 않아, 특수한 기능을 가지고 있느 남성 공원보다 급료가 싸다. 그리고 같은 일을 해
도 여성들의 보수가 더 낮다. 여성은 남성들의 세계에 있어서 신참자이기 때문에 성공할 
가능서도 적다.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도
같은 여자의 명령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 남녀가 모두 언제나 남성 쪽을 신뢰한다. 여성인 
것이 무슨 결함일 수는 없어도, 적어도 특이한 존재이다. 여자가 '출세하기' 위해서는 남자 
후원자가 있는 것이 효과적이다. 가장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고 가장 중요한 부서를 장악하
고 있는 것은 바로 남성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경제적으로 두 세습적인 계급을 구
성하고 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여성의 현재의 신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야흐로 형성되어가고 있는 새로운 문명 속
에 완강히 살아남아 있는 오랜 전통이다. 근시안적인 관찰자들은 이것을 간과하고, 오늘날 

여성에게 열려 있는 새로운 기회를 여성들이 능력이 없어 이용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사
실 여성의 처지는 균형이 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여건에 적응하기가 대단히 어렵
다.
  여성에게도 공장이나 사무실, 대학 등이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결혼이 여성에게 가장 
명예로운 일 중의 하나이며, 결혼만 하면 다른 모든 사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사랑의 행위는 미개한 사회에서처럼 여성에게 직접, 간접으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는 서비스로 간주되어 있다. 소련 이외에는 어느 나라에서도 현대여
성은 자기 육체를 자본으로 간주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 매음은 묵인되고 교태는 장려되
고 있다.
  그리고 결혼한 여자가 남편에게 부양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 알고 있다. 또한 결혼한 
여자가 독신녀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더 큰 위엄을 지니게 된다. 풍습은 아직 독신녀에게 
남자 독신자와 같은 성적 자유를 인정하는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특히 독신녀가 어머
니가 되는 것은 거의 금지 되어 있으며, 사생아의 어머니는 스캔들의 대상이 된다. 신데렐
라의 신화가 언제까지나 인기가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처녀에게, 행운과 행복을 
혼자서 손에 넣으려는 어렵고도 막연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수려한 왕자에게' 그것을 기
대하는 편이 낫다고 격려하고 있다. 특히 처녀는 왕자에 의해 자신의 신분보다 훨씬 높은 
계급에 이르기를 바랄 수도 있다. 이것은 그녀가 한평생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기적이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그녀의 노력과 이익을 갈라놓기 때문에 불길하다. 여성에게 가장 큰 
핸디캡은 아마도 이런 양분을 것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제2부에서 상세히 설명하겠다.) 
부모는 지금도 자기 딸을, 그 개성을 신장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결혼에 잘 적응하도록 키
우고 있다. 그리고 딸 역시 그 편이 더 실속이 있다고 간파하여 자진해서 그것을 바랄 정
도이다. 그래서 대체로 여자들은 자기 형제들만큼 전문능력을 익히지 못하고, 신체도 튼튼
하게 단련하지 못해 자기 직업에 열중하지 않는다. 결국 직장에서 언제나 밑돌게 되고, 여
기서 악순환이 발생하여 이번에는 이 열등의식이 좋은 남편을 구하려는 욕구를 강화하게 
된다. 이익에는 으레 부담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만일 부담이 너무 무거우면, 그 이익
도 고역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노동자의 대다수에게 노동은 불쾌한 고역이며, 특히 여성의 경우 고역은 구체적
으로 사회적인 존경이나 행동의 자유, 또는 경제적인 자립 같은 구체적인 획득으로 보상되
지 않는다. 여공이나 여사무원의 대다수가 일할 권리 속에 의무만을 느끼기 때문에, 결혼
에 의해 노동에서 해방되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성은 자기를 의식했
고, 또 노동에 의해 언제나 결혼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결혼에 얌전히 예속
되려고 하지 않는다.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가정생활과 직업의 양립이 자신에게 벅차고 고
된 곡예가 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일에 대한 유혹이 있는 한(일부의 인간을 살찌우는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하고, 
이런 특권층의 남성들에게 몸을 파는 권리를 여성에게 인정하고 있는 한) 여성들이 자립
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남성들보다 훨씬 큰 정신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유혹은 
장애이며, 그것도 가장 위험한 장애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유혹 속에
는 하나의 기만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런 근사한 결혼의 복권에 당첨되는 여성

은 1천 명에 한 명꼴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여성들을 일터로 유인하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눈에 한가하고 즐거운 낙원을 비춰준다. 이 지상에 튼튼하게 
매여 있는 여성들보다 선택된 특권층의 여성들이 찬양을 받는다. 
  남성들이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경제적인 특권, 그들의 사회적인 가치, 결혼의 영예, 남성
에게 의존할 때의 효과, 이 모든 것이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에게 잘 보이려고 열심히 노력
하게 하는 요인들이다.  여성은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 부하의 신분이다. 그 결과 여성은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자를 어떻다고 평가하는 대로 자기를 인
식하고 자기를 규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남성이 꿈에 그리는 여성의 모습을 중요시
하며 살아가야 한다. '남성을 위한 존재'가 여성의 현실 여건에서 중요한 기본요인의 하나
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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