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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이상과 같이 여성신화가 집단적으로 나타난 것을 분석해 보았다.

by FraisGout 2020. 7. 26.

이상과 같이 여성신화가 집단적으로 나타난 것을 분석해 보았다. 이제 그덧을 획인하기 
위해 다음 몇 사람의 작가에게 볼 수 있는 개별적 또는 혼합적인 형태를 실펴보고자 한다. 
몽테를랑,D.H.로렌스,클로델,브르통,스탕달 등의 여성관은 그런 의미에서 특히 대표적이라
고 생각된다.
  
  1. 몽테롤랑, 혹은 혐오의 양식
  
  알리 드 몽테롤랑(1896 ~ 1972) :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제 1차 세계대전에 참가
한 체험을 작품으로 썼다. 그의 작품은 인간들의 혼란속에서의 동요와 고민을 적나라하게 
그렸고, 생명을 동적인 양상에서 파악하려고 하여, 행동적인 자아의 확립을 목표로 전쟁 
투우 연애 스포츠가 수단이 되어서 나타난 남성적 정력을 찬미한다. 언제나 남성적 가치를 
찬양하고 여성을 경멸하는 경향이 강하다. 제 2차 세계대전중에 나치스에 협력한 혐의로 
국외에 추방되었다가 다시 문단에 복귀함. <꿈>,<투우사>,<올림픽>,<젊은 처녀들>,
<욕망의샘에서> 등 소설 및 희곡 다수.
  
  몽테롤랑은 피타고라스의 이원론을 남성들의 편리에 이용한 긴 전통ㅇ속에 이름을 남기
고 있다. 그 역시 니체의 '영원한 여성'을 찬양하는 것은 허약한 시대뿡이고, 영웅은 '위대
한 모성'에 반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영웅주의 전문가인 그는 여성을 왕위에
서 밀어내려고 한다. 여자는 밤이고 무질서이며 내재이다. 그는 "이러한 암흑은 순수한 상

태의 여자 그자체이다."(<여성론>에서) 라고 톨스토이 부인에 대해 쓰고 있다.
  몽테롤랑의 말에 의하면, 여성의 담점을 무슨 장점이나 되는 것처럼 떠받드는 것은 현대 
남성들의 어리석음과 저열성을 보여주고 것이라고 한다. 여자는 우매성,완고한 무지,현실파
악 능력의 부족 등을 지적해야 할 텐데 오히려 여자의 본능이나 직관, 통찰력에 대해 운운
하고 있다. 사실 여자는 관찰자도 아니고 심리학자도 아니다. 여자는 사물을 보는 능력이
나 인간을 이해하는 능력도 없다. 여자의 신비성은 하나의 책략이며, 여자가 갖고 있는 무
한한 보물이라고 것도 허무의 깊이를 말할 뿐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해를 끼칠 뿐이다. 
  몽테롤랑에게 큰 적은 우선 어머니이다. 그가 젊었을 때 쓴 희곡<추방>에서는, 아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머니를 등장시키고 있다. <올림픽>에서는 스포츠에 전
념하고 싶어하는 청년이 어머니의 비겁한 에고이즘에 의해 차단된다. <독선자>나 <젊은 
처녀들>에서도 어머니는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머니의 죄는 자기 아들을 
언제까지나 자기 태내의 어둠속에 가둬두려고 하는 것이다. 아들을 독점하여 자가 존재의
무이간 허무를 메우려고 함으로써,어머니는 그를 병신으로 만든다. 어머니처럼 한심한 교
육자는 없다. 아들의 날개를 잘라버리고, 그가 오르고 싶어하는 봉우리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여 아들을 바보로 만든다.
  이런 비난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몽테롤랑이 여성,어머니에게 던지고 
이쓴 표면적인 비난의 이면에서는, 영성에 대한 혐오가 숨어 있으며, 그 이유가 자신의 출
생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신이라고 믿고,또 신이기를 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남자이며,'탁월한 인간'이고, 몽테롤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다. 신의 몸은 만일 신에게 몸이 있다면 강인하고 유연한 근육으로 된 의지
일 수응 있으나, 생명과 죽음이 깃들어 있는 육체는 아니다. 그는 자가가 싫어하는 육체, 
언젠가는 사멸해야 하는 육체,허망하게 상처받기 쉬운 이 육체를 지니게 된 책임을 어머니
에게 돌리고 있다. "아킬레스(호머<일라스>의 주인공, 그리스의 영웅>)의 몸에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유일한 부분은 어머니의 손이 누르고 있던 곳이었다."(<이성론>에서)
  몽테롤랑은 인간의 조건을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자존
심은, 육체를 통해 세께를 참여하는 자유가 갖는 위험을 처음부터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것
이다. 그는 연줄도 뿌리도 제거하고 오직 산속의 장군처럼 자기속에 틀어박히는 주관적인 
태도를 꿈꾸고 있다. 자기의 육체적인 근원이 상기 되어, 이 몽상이 방해를 받을 때마다 
같은 태도를 취한다. 즉 그런 조건을 극복하는 대신에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몽테롤랑의 눈에는 애인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해로운 존재이다. 사랑하는 여자는 남자
가 자기 안에 신을 부활시키는 것을 방해한다. 그는 말한다. '여자의 몫은 생명 속의 자발
적인 부분이다. 죽 여자는 감가으로 살아가고, 여자는 자가초원에 대한 충동을 느끼지 못
하고,위대성에 대한 감각도 없다. 여자는 애인의 약점만 사랑하고 강점을 사랑하지 않으며, 
애인의 고통만 사랑하고 기쁨을 사랑하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가 항복하여 불행하게 되기
를 원하며,남자에게 그의 비참함을 획인시키려고 한다. 남자는 여자를 능가하기 때문에 여
자의 손이 남자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는 여자가 남자를 붙잡기 위해, 남자를 자기와 
같은 수준으로 끌언내리려고 한다. 여자는 자기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기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남자가 필요하다.' 몽테롤랑은 도미니크의 눈을 통해 라늘라그(파리에 있는 산책장
소)를 산책하는 여자들의 모습을,"그녀들은 연체동물과 같은 모습으로 애인의 팔에 매달려 
있다. 그것은 위장된 커다란 될 태충과 같은." (<꿈>에서)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여자 운동선수를 제외한 모든 여자는 예속에 적합한 불완전한 존재이다. 
여자들은 적당한 근육이나 뼈대도 갖추지 못하여 세계에 대해 손을 쓸 기만이 없다. 그래
서 그녀들은 애인이나 남편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몽테롤랑은 버마재비의 비유
는 사용하지 않았으나,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다. 즉 여자에게 사랑이란 상대방을 잡아 
먹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자기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대방을 빼앗는다. 톨스토
이 부인의 "나는 남편에게 의지해 살고, 남편을 위해 살고 있어요. 나는 남이 나를 위해 
그와 똑같이 해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라고 말을 인용하여, 이런 미친 둣한 사랑의 위험
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전도서>의 당신의 불행을 바라는 남자가 당신의 행복을 바라는 여자보다 낫
다."는 말에서 놀라운 진실을 찾고있다. 그는 "결혼한 사람은 반쪽 인간이 된다."는 리요테
(프랑스의 장군)의 경험을 인용한다. 특히 "뛰어난 남자"에게는 결혼이 적합하지 않다고 
그는 단정한다. 결혼은 우스꽝스러운 속인화이다. 아이스킬로스의 부인이라거나, 단테 부부
댁의 만찬에 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이래서는 위대한 사람의 위엄이 말이 아니다. 특
히 결혼은 영웅의 장엄한 고독을 파괴한다. "영웅은 자신에게서 한눔을 팔지 않아야 한다." 
(<여성론>에서)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몽테를랑이 선택한 것은 '대상이 없는 자유'이다. 즉 그는 세
계에 참여하는 진정한 자유보다도 자주성의 착각을 택한 것이다. 그가 여자에 대해 옹호하
려는 것은 이런 소극적인 자유행사이다. 여자는 벅차고 무거운 짐이 된다. "그것은 사랑하
는 여자가 팔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남자가 똑바로 걸어갈 수 없다는 비통한 상징이었다." 
(<젊은 처녀들>에서) "내가 불타면 그녀는 그것을 깨버린다. 내가 파도 위를 걸어가면, 
그녀가 내 팔을 붙잡기 때문에 나는 가라 앉게 된다."(<젊은 처녀들>에서) 야자는 모자라
고 빈약하고 소극적이어서, 그매력은 단지 착각일 뿐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여자에게 그런 
힘이 있을까? 몽테롤랑은 그야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사자가 모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젊은 처녀들>에서)라고 큰소리를 칠뿐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누구에게도 분명하다. 즉 혼자서 자기를 가장 훌륭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거나, 무거
운 짐을 지기를 일체 거절하고 스스로 힘이 장사라고 생각하기는 쉅다는 것이다. 몽테롤랑
은 쉬운 길을 택했다. 그는 얻기 어려운 가치를 예찬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것을 쉬운 
방법으로 손에 넣을 궁리를 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자기에게 주는 왕관만이 쓸만한 가치가 있다." 고 <파시파에>(그리스신화
에서 미노스의 아내)에서 왕은 말한다. 편리한 원칙이다. 몽테롤랑은 자기 이마에 감당하
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관을 쓰고 자줏빛의상을 걸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왕관이 색종이
로 만들어졌고,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임금처럼 알몸이라는 것인 남의 눈에는 잘 보인
다. 꿈속에서 바다 위를 걸어다니는 것은 실제로 육지의 길을 걸어가는 것 보다 훨씬 쉬울
것이다. 그리고 사자인 몽테롤랑이 여성인 모기가 무서워 도망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는 현실의 시련을 두려워하고 있다.

  만일 몽테롤랑이 영원한 여성의 신화를 진정으로 타파했다면 축하해야 할 것이다. 여자
가 인간다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도우려면, '여자'를 부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런데 이미 보아온 것처럼 그는 우상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괴물로 바꿨을 뿐이다, 
그도 이 '여성'이라는 정체불명의 애매한 본질의 존재를 믿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성 
토마스의 뒤를 이어 그도 여자는 부정적으로만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남자다
움이 없기 때문에 여자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여성이 감수해야 하는 불변의 숙명이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여자는 인간의 최하층에 놓이게 된다. 그런 여자는 남자가 될 수
도 없고,여자이기도 포기하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운 풍자만화나 가짜에 불과하다. 여자는 
육체이지만, 의식에 의해 조금도 현실성이 부여 되지 않는다. 자기가 유리할 때에는 플라
톤주의자로 돌변하는 몽테롤랑은 여성과 남성의 '이념'만이 존재를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모양이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인간은 존재의 외모만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를 자주적인 주체로 설정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흡혈귀'를 가차 없이 단죄한
다. 그래서 그는 앙드레 아크보(<젊은 처녀들>의 여자 주인공)의 초상을 그려서, 자기를 
하나의 인격으로 간주하려는 여자는 모두 얼굴이 흉한 꼭두각시가 된다는 것을 입증하려
고 한다, 물론 안드레는 얼굴이 추하고 무뚝뚝하고, 옷은 초라하고 불결하며, 손톱이나 손
목은 때투성이이다. 어설픈 교육을 받은 것이 그녀의 여성다움이 완전히 없애버렸다. 코스
탈(<젊은 처녀들>의 남자 주인공)은 그녀가 총명한 여자라고 보증한다. 그런데 몽테롤랑
은 이 여자를 묘사할 때마다 그녀의 어리석음을 독자에게 믿게 한다, 코스탈은 그녀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몽테롤랑은 독자에게 그녀를 혐오스러운 여자로 생각
하게 한다. 이 교활한 불투명성으로 여성지성이 열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근원적인 결함
때문에 그녀가 얻으려고 하는 모든 남성적인 특질을 일그러뜨리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몽테롤랑은 여자 운동선수에게만 예의를 인정한다, 육체의 자극적인 행위를 통하여 그녀
들은 하나의 정신,혼을 획득할 수 있다. 그래도 그녀들을 그런 높은 경지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간단하다. 몽테롤랑은 여자 1천미터 경기에 우승한 선수에게 열렬한 찬사를 보낸 다
음, 그녀의 곁을 떠난다. 그는 그녀를 간단히 유혹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
런 불명예를 안겨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도미니크는 아르방이 자기를 불렁올린 정상에 잠
자코 머물러 있지 못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완전히 정신과 혼 덩어리였
던 여자가 지금은 향기를 발산하고 숨이 차서 잔기침을 하고 있다."(<꿈>에서) 아르방은 
화가 나서 그녀를 쫓아낸다. 스포츠훈련으로 자기 속의 육체를 죽여버린 여자를 사람들은 
존경할지 모른다. 글러나 여자의 육체 속에 자주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의식이 깃들면 여자의 육체는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여자에게 어울리는 것은 순수한 육체
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몽테롤랑은 동양적인 여자의 다소곳한 태도를 긍정한다, 이세상에서 약한 성(여성)은 향
락의 대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비천하지만 하나의 쓸모있는 위치를 차지한다, 남성이 여
성에게서 얻은 쾌락 속에만 여자의 존재사치를 발견한다. 이상적인 여자는 완전히 어리석
고 절대적으로 순종행야 한다. 그녀는 언제나 기꺼이 남자를 맞어 들이고, 남자에게 절대
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아르방이 자기가 필요할때 소중히 여기는 두스라는 여자가 
바로 그렇다. "두스, 무척 어리석고, 어리석을수록 매력이 있는 여자 ...... 연애할 때 외에

는 쓸모가 없고, 쓸모없게 되면 남자가 단호히 멀리하는 여자."(<꿈>에서) 그리고 쾌락과 
돈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얌전한 애완 동물 같은 아라비아 처녀인 라디자의 경우가 그렇다. 
또한 스페인 열차속에서 만난 '여성동물'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너무나 어리
석어 보여 나는 그녀에게 정욕을 느끼기 시작했다."(<카스티유의 공주>에서) 작자는 다시 
설명하고 있다.
  "여자는 역겹게 보이는 것은 영리한 테할 때이다. 여자가 동물서을 괴시할때에는 초인의 
면노가 있다."(<젊은 처녀들>에서) 이렇게 말해도 몽테롤랑은 중도의 회교국 군주와는 다
르다. 첫째로 그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여자는 "병악하고, 불결하고, 산뜻한 
맛이 전혀 없다." (<젊은 처녀들>에서)코스탈은 젊은 남자의 머리향기가 여자의 머리향기
보다 강렬하다고 털어 놓는다. 그는 솔랑주의 곁에 있으면,"들척지근한 역겨운 냄새와 근
육도 신경도 없는 흰 달팽이 같은 육체"(<젊은 처녀들>에서)에 자주 구역질을 느낀다.그
는 좀더 자기에게 어울리는 포옹, 대등한 자끼리의 포옹을 꿈꾸고 있다. 거기에는 정복된 
힘에서 생기는 감미로움이 있다. 동양남자는 여자를 관능적으로 즐긴다. 그래서 애인 사이
에는 육체적으로 평등한 관계가 형성된다. <아가>의 정열적인 기원이나 <아라비안 나이
트>의 이야기나, 사랑하는 여자를 찬양하는 수많은 아라비아 시에 그것은 나타나 있다.
  물론 개중에는 질이 나쁜 여자도 있지만, 기분좋은 여자도 많다. 관능적인 남자는 그녀
들의 품에 편안히 몸을 내밭기고, 조금도 굴욕을 느끼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몽테롤랑의 
주인공은 언제나 방어자세를 취하고 있다. "상대방에게 빼앗기지 않고 빼앗는 것이, 뛰어
난 남녀간ㅇ에 이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젊은 처녀들>에서) 그는 공격적이고 
남성적인 순간으로 생각되는 정욕의 순간에 대해 즐겨 말하지만,쾌락의 순간은 교묘히 피
해버린다. 아마 몽테롤랑 자신도 그럴때에는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면서 '체취를 발산'하
는 것을 느끼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누가 그의 체취를 맡고, 그땀내를 느낄 수 있겠
는가 ? 무장이 해제된 그의 육체는 누구를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몽테롤랑
의 앞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히 의식뿐인,투명하고 순수한 존재이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의 의식에 쾌락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그는 그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방해가 
뙤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상대방에게 주는 쾌락에 대해서는 즐겨 말하자만, 자기가 상
대방으로부터 받은 쾌락에 대해서는 입밖에 내지 않는다.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의존관계
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여자에게 원하는 것은,그녀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카스티유
의 공주>에서)
  관능적인 쾌락에 뜨거운 만족을 느끼는 것은 공범관계를 나타내는것이다. 그는 그런 관
계를 일체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배자의 고독을 택한다, 그가 여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곤능의 만족이 아니라, 두뇌적인 만족이다. 여자 앞에서는 "사나운 말이나 투우에게 
접근할 때와 같은 느낌이 든다. 말이나 황소 앞에서처럼 여자 앞에서도 자가의 힘을 시험
한다는 불안한 취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카스티유의공주>에서)
  다른 남자들을 상대하여 힘을 겨루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은 시합에서 뜻밖의 점
수를 조작하여 일방적으로 판정을 내리기도 할 것이다. 소나 말을 상대하면 자기가 심판관
일 수 있어 훨씬 안전하다. 여자를 상대할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를 잘 선택하기만 하
면, 자신이 마음대로 할수 있는 독무대가 된다. "나는 대등한 연애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

면 여자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명한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되
지 않는다. 왜 그는 자식은 원하면서 대등한 상대는 원치 않는가 ? 차라리 자기에게 대등
한 상대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면 몽테롤랑은 더욱 정직해 보일 것이다. 자기가 대등한 
상대가 두려운 것이다. <올림픽>을 쓸 무렵 느는 스포츠를 속임수가 끼어 들 수 없는 등
급치와 엄밀한 승부를 찬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몽테롤랑 자신은 이교훈을 이해하지 못했
다. 그후의 작품과 생활태도를 보면,그는 작중인물과 마찬가지로 모든 대결을 회피한다. 단
지 동물이나 경치, 어린이나 어린이와 같은 여자를 상대로 택하고, 자신과 대등한 사람은 
절대로 상대하지 않는다.
  일찍이 스포츠의 엄밀한 정확성에 반했던 몽테롤랑은 자기의 비겁한 자존심이 비판 받
을 우려가 없는 여자만 애인으로 받아들인다. 수동적이고 식물적이고 유아적이고 어리석어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자만을 택한다. 그는 여자가 자의식을 갖는 것을 철저히 피하려고 한
다. 만일 조금이라도 자의식의 흔적을 발견하면, 반사저그올 모을 움츠리고 돌아선다. 여자
를 상대하녀 주체와 주체외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조차 없다. 남자의 왕국
에서 여자는 단지 상아서 움직이는 하나의 물체여야 한다. 여자를 절대로 주체로 보지 않
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자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다.
  몽테롤랑의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위세가 당당해 보이지만, 사실은 적당주의의 도덕
을 갖고 있다. 즉 자기 자신밖에 염두에 없다. 그가 여자에게 이끌린다기보다는 여자를 자
기에게 끌어들이는 것은, 그녀의 향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안전한 상태로 즐기기 위
해서이다. 여자의 실존은 절대로 열등하며, 남자의 실질적이고 본질적인 절대 우원성을 드
러낼 뿐이다. 그래서 아르방은 두스가 우매하기 때문에 "그리스의 전설에 나오는 거위를 
아내로 삼은 반신의 기분을 어느 정도 맛볼 수 있다." (<꿈>에서) 코스탈은 솔랑주의 몸
을 만지자마자 곧 굉장한 사자로 변한다. "다가 앉아 마자 그는 곧 젊은 처녀의 허벅지 위
로(옷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사자가 고깃덩어리를 발로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그 손
을 그녀의 중심부에 댄다."(<젊은 처녀들>에서)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세상남자들이 슬금
슬금하고 있는 이 거동을 코스탈은 "영주의 원시적인 손버릇"(<젊은 처녀들>에서)이라고 
말한다.
  만일 여자의 육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전에 애무하는 남자나 남편이 모만일 여자의 
육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전에 애무하는 남자나 남편이 모두 몽테롤랑과 같은 의식을 
갖고 있다면, 이런 강렬한 변신을 쉽사리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막연히 이 여자
의 얼굴에서 냄새를 맡았다. 마치 사자가 두발사이에 움켜쥔 고깃덩어리를 찢어먹는 동작
을 때때로 중지하고 그것을 핥는 것처럼."(<젊은 처녀들>에서) 남성이 여성에게서 얻는 
쾌락은 이런 살벌한 자존심에서만은 아니다. 이런식으로는 여성이란 남성이 마음대로 안전
하게 자기 마음의 불꽃을 시험해 보는 역할을 할뿐이다.
  코스탈은 어느날 밤에 고통이 지겨워 닭다리를 맛있게 뜯어먹을 정도로 고뇌의 유희에 
빠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놀이는 그렇게 자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밖에도 
강렬하고 묘한 즐거움이 있다. 예컨대 자비심이다. 코스탈은 자비심에서 여자들이 보내온 
어떤 편지에는 답장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친절하게 돌봐주기도 한다. 영감을 받은 시골처
녀에게 보낸 설교조의 유식한 편지 끝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내 글을 이해

할지 모르겠소. 그러나 그것이 내가 당신과 같은 수준으로 낮아지는 것보다는 낫겠어요."
(<젊은 처녀들>에서) 그는 때로는 상대방 여자를 자기가 좋아하는 이미지대로 상상하고 
즐거워한다. "나는 당신이 내게 훈장처럼 되기를 바라오 ... 당신이 나와는 별개의 것이 되
도록 하기 위해, 나는 당신을 내 수준까지 끌어올리지 않은 것이오."(<젊은 처녀들>에서) 
그는 솔랑주의 아름다운 추억을 즐긴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호탕한 기분을 가장 흐뭇하게 느끼는 것은 여자와 동침할때이다. 기
쁨 휴식 열정 힘 쾌락의 공급자인 그는, 자기가 아낌없이 제공하는 그런 부에 크게 만족한
다. 그는 상대방 애인에게 빚지는 일이 전혀 없다. 그는 때때로 그것을 더욱 획신하기 위
해 여자들에게 돈을 주기도 한다.
  설사 성교가 편등하게 이루어질 경우에도 여자는 일방적인 채무자이다. 여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나, 남자는 빼앗는다. 그러므로 그는 솔랑주의 순결을 빼앗은 날에 그녀를 화장
실로 쫓아버리고도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설사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라도, 남자
가 그녀때문에 신경을 쓴다는것은 말도 안 된다. 그는 신의 섭리에 의해 남성이며, 여자도 
섭리에 의해 세척기로 바쳐지고 있는 것이다. 코스탈의 자존심도 여기에 이르면 참으로 비
열하고 교양없는 외무사원과 다를 바가 없다.
  여자의 첫번째 임무는 남자의 관대한 요구에 얌전히 복종하는 것이다. 솔랑주가 그의 애
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생각될때, 코스탈은 크게 화를 낸다. 그가 라디자를 귀여워하는 
까닭도, 그가 그녀의 몸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금세 기쁨으로 빛나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자기가 맹수라도 된듯 싶고,당당한 군주가 된 것같이 기뻐한다.
  그러나 빼앗기고도 만족을 느끼는 여자가 한나의 가련한 존재의, 의식의 대용품이 고동
치고 있는 생명없는 육체에 불과하다면, 빼앗고 만족을 부는 도취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이상하기만 하다. 코스탈은 어째서 그런 하찮은 것을 상대로 시간을 낭비하려고 하는가? 
이런 모순이 결국 허영심에 불과한 자존심의 정체를 밝혀준다.
  강자의, 관대한 인간의, 주인 된 자의 보다 더 미묘한 즐거움은 가없은 인정에 대한 연
민이다. 코스탈은 때때로 여동생에 대한 오빠와 같은 우애와 천한 자에 대한 동정과 '여성
의 연민'을 느끼고 감동한다. 냉혹하다고 생각했던 인간에게서 뜻밖의 친절을 느꼈을 때 
감동적인 면이 있을까? 그는 여자라는 병든 동물의 베갯머리에 몸을 굽힐때 그런 숭고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여자 운동선수까지도 패하고 다치고 지쳐서 기진
맥진한 모습을 보기를 좋아한다. 코스탈은 여자들이 달마다 겪는 병(월경)을 지겹게 여기
면서 "여자가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아는 날에는 언제나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젊은 
처녀들>에서)고 털어 놓았다. 그도 이 연민의 정에 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약속을 지
키지는 못해도 여러가지 약속을 하는 경우가 있다. 앙드레에게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솔랑주에게 결혼할 것을 약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연민의 정이 사라지는 순
간, 이런 약속은 휴지가 되어버린다. 그는 스스로 유희의 규칙을 정하고, 자기 자신을 상대
로 그 유희를 즐기고 있다.
  몽테롤랑에게 있어 여자는 가엾고 열등한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그는 여자가 경멸
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때로 요건과 경멸의 갈등을 감동적인 비극이라고 
주장한다. "아, 경멸하는 자를 탐내다니, 얼마나 큰 비극인가 ! ...... 같은 동작으로 끌어 

당기고, 물리치고, 성냥개비의 입장,즉 언제나 소홀히 취급되는 자의 입장에서는 손가락을 
델 걱정만 없으면, 이 운동은 분명히 유쾌한 것이다. 만일 경멸하는 자를 탐내는 것이 자
기 멋대로의 쾌락이 아니라면, 그는 자기가 존경하는 자를 탐내는 것을 일부러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아르방은 도미니크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욕정의 대상을 
그렇게 경멸하지 않이도 되었을 것이다. 젊고 아름답고 정열적이고 선량한 스페인의 무희
가 어째서 갑자기 그렇게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녀가 
가난하기 때문인가, 가문이 초라하기 때문인가 , 교양이 없기 때문인가 ?
  몽테롤랑의 눈에는 이것도 결점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그녀가 여
자라는 것만으로 무조건 경멸한다. 그는 여성의 신비가 남성의 공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공상이 여성의 신비를 창조한다고 단정한다. 그런데 그도 자기의 주관성이 
요구하는 것을 대상속에 투영하고 있다. 여자가 경멸할 만하기 때문에 경멸하는 것이 아니
라, 여자를 경멸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에게 여자가 초라해 보이는 것이다. 여자와 몽테롤
랑 사이의 거리가 크게 벌어질수록 그는 점점 높은 봉우리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가 작품의 주인공과 상대를 그처럼 초라한 여성으로 택하는 이유는 이것으로도 알 수 있
다. 그는 위대한 작가 코스탈의 상대역으로 성욕과 권태에 시달리는 시골 올드 미스와 지
혜가 모자라며 이기적이며 극우사상을 가진 주부를 배치하고 있다. 이것은 큰 인물을 일부
러 작은 자로 제는 격이다. 이러한 경솔한 결과로 몽테롤랑 작품의 남자 주인공은 우리 눈
에 몹시 초라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건 아무래도 좋다. 코스탈은 자신이 위대하다고 자부하니까. 여자의 아무것도 
아닌 약점이 그의 자만심을 부풀리기에 충분하다. <젊은 처녀들>의 1절은 특히 의미심장
하다. 코스탈과 동침하기 전에 솔랑주는 밤화장을 한다. "그녀는 화장실에 갔다. 그때 코스
탈은 전에 기르던 암말이 생각났다. 그 암말은 거만하고 신경질적이어서, 그가 올라타고 
있을때에는 대소변을 보지 않았다. "여기에는 육체에 대한 혐오(셀리아가 배변을 본다고 
말한 스위프트가 생각난다), 여자를 가축과 동일시하려는 생각, 오줌을 누는것 하나에도 
여자에게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정이 드러나 있다. 코스탈은 분개하고 있지만, 자
기도 방광과 결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또한 땀과 체취로 더러워진 여자에 대
해 구토를 느낄 때, 그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분비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다. 그는 
자기를 강철 같은 근육과 성기를 지배하는 순수한 정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경멸은 욕망보다 고상하다." 고 몽테롤랑은 <욕망의 샘에서>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알바로눈 "나의 빵은 혐오이다."(<산타아고의 스승>에서)라고 말한다. 마음속으로는 즐기
고 있으면서 경멸이라니 ...... 우리는 남을 깔보고 비판함으로써 자기가 비난하는 타인과 
자신은 전혀 다른 인간인 것처럼 느끼고,자기에게는 흠잡을데가 조금도 없는 것처럼 느껴
져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몽테롤랑은 일종의 도취감에 취해 한평생 인간에 대한 경멸을 계속할 것이다. 자기의 머
리가 좋다고 믿기 위해서는 남의 어리석음을 적발하면 되고, 자가가 용감하다고 믿기 위해
서는 남의 비겁한 태도를 지적하면 된다.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했을때, 그는 패한 동족
에게 유쾌한 경멸을 퍼부었다. 자기 자신은 프랑스인도 아니고,패전국민도 아니다. 그는 공

중을 날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완곡한 표현으로 남을 비판하고 있지만, 미리 패전
을 막기 위해 남보다 더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그는 장교로 종
군하는 것도 거부했다. 그러고도 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남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는 자기의 혐오감을 개탄하는 체하지만, 그것은 그 혐오를 보다 성실하다고 느끼고 그
것을 더욱 즐기기 위해서이다. 사실은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일부러 여
자를 비열속으로 끌어내리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처녀들을 돈과 보석으로 유혹하여 즐긴
다. 여자들이 그의 불순한 선물을 받아들이면 그는 무척 기뻐한다. 앙드레를 괴롭히는 즐
거움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타락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 때문에 그녀를 상대로 사디스트적
인 유희에  빠진다. 그리고 솔랑주에게 영아살해를 부추긴다. 그녀가 그 계획을 승낙하자 
코스탈의 정욕이 갑자기 불타오른다. 그는 경멸의 황홀속에 미래의 조인을 자기 것으로 만
든다.
  이런 태도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모충의교훈이다 숨은 의
도는 어찌되었든, 그것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몽테롤랑은 모충에게 오
줌을 갈기면서 그중에서 어떤 것은 살려두고 어떤 것은 죽여버리며 즐거워한다. 삼아남으
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모충에게는 조롱삼아 연민을 베풀어 기회를 준다. 이놀이는 그를 
도취하게 한다. 모충이 없었더라면, 오줌을 누는 것은 단지 배설행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사를 결정하는 도구가 된다. 기어다니는 벌레에게 오줌을 갈기는 사나이
는 신의 전제적인 고독을 맛보게 된다. 보복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여자는 
동물에게 때로는 잔인히게, 때로는 부드럽게,공평하게,변덕스럽게,주기도 하고 다시 빼앗기
도 하며,만족시키고,동정하고,화를 낸다.
  남자는 이처럼 멋대로 즐기고 잇는 것이다. 그는 지배자이고, 자유의몸이고,유일한 존재
이다. 그러나 동물은 모름지기 동물다워야 한다. 그는 일부러 그런 동물을 골라서 그약점
을 어루만져주고 철저하게 동물로 취급하기에 전념하며, 한편 동물쪽에서도 어느새 자기들
의 처지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루지애나 주나 조지아 주의 백인들은 흑인들의 사소한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대견스럽게 여긴다. 그들은 피부색깔이 자기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우
월성을 거기서 획인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만일 그런 흑인의 한사람이 자기는 
결백하다고 우기기라도 하면, 한층 더 박해를 가한다. 마찬가지로 강제수용소에서는 계획
적으로 인간이 타락하도록 만든다. 군주들은 그런 비열한 행위에서 자기가 초인적인 본질
을 갖고 있는 증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치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몽테롤랑이 나치스 이념의 찬미자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태양의 차륜인 나치스의 만자 십자형이,'태양'의 축제에서 승리한 것을 
보고 그는 크게 기뻐했다. "태양의 '차륜'의 승리는 단지 '태양'의 승리,이교국의 승리만이 
아니다. 그것은 만물이 회전한다는 태양원리의 승이이다. 나는 오늘날 그원리늬 승리를 본
다. 내가 지금까지 찬미했던 그 원리는 내 몸에 스며들어 내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그가 독일군의 점령하에서 어떤 훌륭한 감각을 가졌기에 "힘의 위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독일인을 본받아라고 프랑스인에게 강요했는지를,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안이하
고 비겁한 취미때문에 대등한 자들 앞에서 도망친 그는 같은 동기에서 정복자 앞에 무릎

을 꿇는다. 이렇게함으로써 그는 정복자에게 동화된 기분을 느끼게 된디. 그리하녀 자기도 
정복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언제나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적이 황소이냐,모충
이냐,여자야,혹은 생명 자체이냐,자유이냐의 차이뿐이다.
  그는 이미 승리하기 이전부터 "전체주의의 마술사들"을 예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마
술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지금까지 줄곧 니힐리스트로 인간을 혐오해왔다. "인간은 지도
할 가치가 없다."(이처럼 미움을 받을 만큼 인간이 나쁜 잣을 했을 리가 없는데. <욕망의 
샘에서>에서) 그는 마술사들처럼 어떤 사람들 - 인종이나 국민이나 혹은 몽테롤랑 자신 
- 은 남에게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인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의 윤리관의 전쟁이나 박해를 정장화하여 이를 요구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그의 태도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 윤리관을 자세히 검토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가 어떤 근거에
서 여자들을 비판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나치스 신화에는 역사적인 기반이 있었다. 그 니힐리즘은 독일의 절망의 표시였다. 영웅
숭배는 수백만의 병사가 목숨을 버리는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몽테롤랑의 태도에는 
이렇다 할 특별한 목적이 없고, 단지 자기 자신의 실존적인 선택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의식속에는 주권에 대한 요구구가 있다. 그러나 이주권은 모험을 통해서만 획립된다. 
어떤 우월성도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주관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의 행위나 업적 사이에만 단계가 만들어질 수가 있다. 
가치는 부단히 획득되는 것이다. 몽테롤랑 자신도 이것을 알고 잇다. "모험을 통해 손에 
넣은것 이외에는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몽테롤랑은 남자들 사이에서 자신을 
위험에 드러내놓으려고 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가 인간을 무시하는 것은, 인간과 정면으
로 대결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귀찮은 장애물이다." 라고 <죽은 영왕>에서 왕
이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 허영심이 강한 남자가 자기 주위에 조성하는 흐뭇한 '동화의 
세계'를 현실의 인간이 부인하기 때문이다. 왕의 입장에서는 이런 인간은 인정할수 없다.
  몽테롤랑의 작품 중에 인간과인간의 갈등을 묘사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의 공존이야말로 살아 있는 위대한 드라마인데,그는 이것을 회피하고 있다, 그
가 그린 주인공의 언제나 동물 어린이 여자 풍경을 앞에 두고 혼자 서 있다. 그의 주인공
은 자기의 정욕이나(<파시파에>의 여왕처럼) 자가 욕구의 포로(<산티아고의 스승>처럼)
이며, 그옆에는 아무도 없다. <꿈>에서의 아르방조차도 동료라고는 한 사람도 없다. 프리
네가 살아 있을 때 아르방은 그를 멸시하고, 그가 죽자 그의 시체를 향해 그를 찬양한다. 
몽테롤랑은 실생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작품에서도 오직 한 가지 의식만 인정한다.
  그 때문에 이 세상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진다. 하나의 주체만 있을 경우에는, 주체와 주
체 상호간의 관계는 있을 수 없다. 연애는 경멸하여 마땅하다고 한다. 그럼 우정은 존귀하
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우정에는 내장이 빠져 있다." 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연
대관계를 일방적으로 배격한다. 영웅은 인간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영웅은 공간과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나는 현대의 외부사정에서나,또는 과거 어느 시대의 외부사
정에도 흥미를 느낄 만한 적절한 이유를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몽테롤랑은 타인의 신상
에 일어난 일엔 전혀 관심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외부의 일은 나에게는 한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나를 스쳐지나가면서 내 속에 빛을 비출 때에만 그것을 사랑했

다 ...... 그러므로 그것이 어떤 것이든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행동 따위는 불가능하다. "
정열과 정력과 용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것은 어느 하나도 신뢰할 수 없었기 때
문에, 그것을 누구에게도 사용하지 못했다." 이것은 초월이 일체 금지된 것과 같다. 몽테롤
랑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연애와 우정은 보잘것 없는 것이며, 경멸이 행동을 방해한다.
  몽테롤랑은 예술을 위한 예술도 인정하지 않는다. 신도 믿지 않는다. 다음에는 쾌락의 
내재만 남나 된다. "나의 유일한 야심은 자기의감각을 남보다 더 잘 사용하는 것이었다." 
(<욕망의 샘>에서) 하고 그는 1925년에 쓰고 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 평화와 시에서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욕망의 샘>에서) 그리고 
1941년에는 "그런데 남을 비난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은 지난 20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이 세월은 나에게 쾌락으로 가득찬 하나의 꿈이었다. 내가 인생과 얼마나 밀접한 접촉을 
했던가!"(<하지>에서)
  그것도 좋다고 하자. 그러나 그는 여자의 내재 속에 빠져 있다는 이유로 여자를 그렇게 
경멸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는 어머니나 애인의 독점적인 애정에 대해, 한층 고귀한 어
떤 위대한 목적을 대치시키려고 하는가? 그도 역시 '독점'을 구하고 있다. 그리고 '인생과
의 밀접한 접촉'에 관해서라면, 몽테롤랑보다 월등한 여성이 얼마든지 있다. 하긴 그는 좀 
이상한 쾌락, 동물이나 소년, 미성숙한 소녀에게서 얻는 쾌락을 특히 즐긴다. 그는 자기에
게 반한 애인이, 그녀의 열두살 난 딸과 자기가 동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분개하
고 있다. 이것은 실로 태양답지 않은 치사한 행위이다. 그는 여자의 관능에도 남자의 관능
에 못지 않은 고민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까? 그런 것을 기준으로 하여 남녀의 순위
를 매긴다면 아마도 여자가 남자보다 우세할 것이다. 이 점에서 몽테롤랑의 모순은 참으로 
크다. 그는 '교체'라는 이름의 모든 것이 무가치하므로 모든 가치가 동등하다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승인하고 보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의 이런 관대한 사고방식이 
가정의 어머니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한다. 그런데 독일군이 점령
했을 때 영화나 신문잡지를 검열하는 '종교재판'을 요구한 것은 바로 그이다.
  그는 미국 무희의 허벅지에 구토를 느끼지만, 투우의 번들거리는 성기를 보면 흥분한다. 
취미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동화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
체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하여 이 대 방탕아는 남의 방탕을 보고 역겨워하면서 침을 뱉는
가? 그 방탕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모든 도덕은 몽테롤랑에게서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이 점에 대해 그는 향락을 누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대
답할 것이다. 향락을 누리는 방법이 문제이다. 쾌락은 체념의 반면이 되어야 한다. 그 향락
주의자가 동시에 자기 속에서 영웅이나 성인의 소질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여성들은 
곧잘 자기의 쾌락을 자기 나름대로 높이 평가한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몽테롤랑의 나르시
즘적인 몽상이 그런 여자들의 몽상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몽상이다. 이 몽상에 조금이라도 객관적인 내용을 부여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몽테를랑이 위대하다, 신성하다, 영웅주의 운운하는 말은 아이들의 장난
에 불과하다. 몽테를랑은 남자들 사이에서 자기의 우월성을 시험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는 그 효과적인 술에 취하기 위해 구름 속에 숨어버렸다. '유일자'는 과연 지고하다. 그는 
신기루의 방 안에 틀어박힌다. 거울이 그의 모습을 계속해서 반사하여, 자기 혼자 온 세계

를 채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사실은 자기의 포로가 된 은둔자에 불과하다. 그는 자
유를 누리고 있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런데 자기의 자유를 자기의 자아를 위해 소외시키고 
있다. 그는 흔히 볼 수 있는 판화에서 모방한 형에 따라 몽테를랑의 조상을 만든다. 아르
방은 거울에 자기의 우매한 얼굴이 비치는 것을 보고 도미니크를 옆으로 밀어낸다. 이런 
아르방이야말로 노예적인 상태의 좋은 표본이다. 우리는 남의 눈을 통해서만 바보로 보인
다. 교만한 아르방도 평소에 경멸하고 있는 집단 의식에 자기를 복종시키고 있다.
  몽테를랑의 자유는 일종의 태도이지 현실은 아니다. 목적이 없어 행동이 불가능하기 때
문에 그는 제스처로 위안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흉내이다. 여자는 그에게 알맞는 상대
이다. 여자는 그의 상대역을 맡고, 그는 주역을 독점하여 월계관을 쓰고 왕의 옷을 걸친다. 
다만 모든 것은 그의 사유의 무대에서 이루어진다. 햇살이 내리비치는 하늘 아래 공공의 
광장에 나서면, 배우는 눈이 부셔서 서 있을 수가 없어 다리를 비틀거리다가 쓰러진다. 문
득 이것을 알아차리고 코스탈은 외친다. "여자에 대한 이 '승리'는 장난에 불과한 것이 아
닌가!"(<젊은 처녀들>에서)
  그렇다. 몽테블랑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치나 공적은 장난에 불과하다. 그를 열중하게 
하는 용감한 행위도 단지 제스처에 불과하며 결코 기도는 아니다. 그는 페레그리누스의 자
살이나 파시파에의 용기, 결투에서 단칼로 베기 전에 상대에게 자기 우산을 받쳐준 일본 
무사의 아량에 감동한다.
  그러나 그는 "적의 인격이나 사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하지>, P.211)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1941년에 특별한 반응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그 목적 여하
를 불문하고 전쟁은 모두 아름다우며 용도 여하를 막론하고 힘은 언제나 위대하다는 것이
다. "우리가 영웅인 동시에 성자라는, 허용될 수 있는 유일한 인간관을 유지하려고 하면, 
신념없는 투쟁이라는 형식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하지>, P.211) 그런데 모든 
주의, 주장에 대해 고상한 무관심을 표시한 몽테블랑이 레지스탕스가 아니라 국가주의적 
혁명으로 기울어지고, 그의 고귀한 자유가 굴종을 택하고, 영웅적 예지의 비밀을 항독 지
하운동에서 찾지 않고 정복자들에게서 찾은 것은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결
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죽은 여왕>나 <산티아고의 스승>에서 볼 수 있는 위선적인 숭
고는 결국 이런 허황된 것에 도달하게 된다. 작가의 포부로 보아 대단히 중요한 이들 희곡 
속에서, 교만한 두 남자가 단지 인간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 죄도 없는 여자를 자기의 공
허한 자존심 때문에 희생시키는 것은 볼 수 있다. 이 여자들은 애정과 지상의 행복을 원했
다. 그 죄로 한 사람은 목숨을, 한 사람은 영혼을 빼앗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무슨 명목으로 그랬느냐고 묻는다면, 작가는 아무 근거도 없
다고 교만하게 대답할 것이다. 작가는 왕이 기네스를 죽이는 데 뚜렸한 동기를 갖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살인은 평범한 정치적 범행으로 끝난다. "무엇 때문에 나는 그녀를 죽여
야 하는가? 아마도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테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고 그는 
말한다. 그 이유란, 태양의 원리는 당연히 지상의 평범한 습성을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원리는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어떤 목적도 밝히지 않는다. 파괴를 원한다는 
것뿐이다. 몽테를랑은 알바로와 관련하여 어떤 책의 서문에서, 현대의 일부 남성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그들의 강렬한 신념, 외부현실에 대한 경멸, 파괴에의 취미, 무의

미한 것에 대한 광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산티아고의 스승이 자기 딸을 제물로 바치는 
것도 이러한 광포에서 비롯된다. 그는 신비라는 화려한 미명으로 장식된다. 신비보다 행복
을 택하는 것은 평범한 생각이 아닌가? 그러나 실제로 제물과 희생은 인간적인 목적이 있
어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개별적인 애정이나 개인의 행복을 초월하는 목적은 
애정이나 행복의 가치를 인정하는 세계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미디넷(파리의 서민층 처
녀)의 모럴' 쪽이 공허한 선경보다 참된 것이다. 생활과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
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높은 이상도 생기게 된다. 이네스 드 카스트로가 부헨발트에 있는 것
과, 왕이 국사를 빙자하여 독일대사관으로 달려가는 장면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많은 
미디넷들이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동안, 몽테를랑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존중할 만한 
태도를 취했다. 그가 포식하고 있는 헛된 말은 공허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하
다. 초인주의적인 신비설은 현대의 폭력행위를 모두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지금 문제삼고 
있는 두 편의 희곡 중에서, 하나는 육체적인 살인, 또 하나는 도덕적인 살인에 의해 그런 
신비설이 주장되고 있다. 사납고 고독하고 불우한 알바로가 잔혹한 심문관이 될 우려도 충
분히 있다. 외면당한 왕이 히믈러(나치 장군의 한 사람)가 될 우려도 있다. 부녀자를 살해
하고, 유태인을 학살하고, 약한 남자와 유태화된 기독교도를 죽이고, 고매한 이상의 이름을 
내걸고 죽여서 이득이 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모두 죽인다.
  부정적인 신비주의자는 부정하는 것밖에는 자기를 주장할 길이 없는 것이다. 참된 초월
은 미래를 향한 적극적인 전진이다. 가짜영웅은 자기가 멀리 왔다는 것, 하늘 높이 날아다
니고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해, 언제나 후방이나 발 밑을 바라본다. 내려다보고, 비난하고, 
압박하고, 박해하고, 괴롭히고, 죽인다. 그는 이웃에 상처를 입히면 그 사람보다 자기가 뛰
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몽테를랑이 '인생과의 접촉'을 중지하고, 거만하게 우리에게 가리키
는 절정은 바로 이런 것이다.
  "아라비아의 양수차를 끄는 당나귀처럼, 나는 남남이 되어 같은 장소를 끊임없이 빙빙 
돌고 있다. 단지 다른 것은, 나는 새 물을 길어올리지 못한다." 몽테를랑이 1927년에 쓴 
이 고백에 첨가할 말은 별로 없다. 그는 페레그리누스의 화형대에 불을 켜대었더라면 좋았
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논리적인 해결법이었다. 그는 자기숭배 속에 도피하는 길을 택했
다. 그는 세상을 풍부하게 할 수 없어서, 거기에 투신하지 않고 자기 모습을 비추는 것만
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자기 눈에만 보이는 환영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활에 질서를 세웠
다.
  "귀인은 어떤 경우에도 여유가 있다. 패배했을 경우에도 그렇다."(<하지>, P.312)라고 
그는 쓰고 있다. 그리고 그는 패배할 경우도 감수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왕으로 자부한
다. 그는 니체에게서 '여자는 영웅의 노리개'라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영웅이 되기 위해서
는 여자를 노리개로 삼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이 이런 식이다. 코스탈의 
말대로 "결국은 얼마나 장난 같은 짓인가!"  
  
  2. 로렌스, 혹은 남자의 자존심
  

  D.H 로렌스(1885 - 1930):영국의 소설가, 시인. 현대문명에 짓눌린 여러가지 기형, 
특히 남녀관계의 타락을 지적하고, 일종의 신비적인 에로티시즘을 주장함. 그는 옛 스승의 
아내를 사랑하여 함께 독일로 도망했다가 후에 결혼했다. 그는 성의 의의를 중시하여 노골
적이고 대담하게 작품에 취급했다. 그중에서 전쟁으로 불구가 된 남편의 아내와 산지기의 
성행위를 자세히 묘사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작가로 유명하다. <아들과 연인>, <무
지개>, <날개 있는 뱀> 등의 역작을 통해, 인간생활은 정신과 육체의 올바른 균형을 이
루지 못하면 건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로렌스는 몽테를랑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 그에게는 남녀의 특이한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양쪽을 '생명'의 진실에 끌어들인는 것이 문제였다. 그 진실은 표
상(의식 내용)이나 의지 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동물성을 배격
하지 않는다. 로렌스는 성기와 두뇌의 대립을 부정한다. 그에게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우주적 낙천주의가 있다. 남근 속에 표시된 생명의욕은 환희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사상과 행동의 원천을 찾아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공허한 개
념과 무가치한 메커니즘에 빠지고 만다. 단지 성주기(월경주기)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재 속에 떨어져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불완
전한 현실-성과 죽음-도 육체의 옥토에서 떨어져나온 생활보다는 낫다.
  남자는 안티오스(그리스신화의 등장인물, 대지를 활력의 원천으로 삼음)처럼 때때로 대
지와의 접촉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여자를 요구하는 남성다움의 표시가 전부여야 한다. 
따라서 여자는 위안물도 먹이도 아니다. 그녀는 주체에 대한 객체가 아니라, 정반대의 극
의 존재에 없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극이다. 이 진리를 간과한 남자들, 예컨대 나폴레
옹과 같은 사람은 남자로서의 생활에 실패했다. 이런 남자는 실패자이다. 자기의 개별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반성을 최고도로 성취하는 데서 개인은 자기를 구제할 수 있
다. 남녀를 막론하고 성적인 관계 속에서 결코 자존심이나 자아의 고양을 찾아서는 안 된
다. 자기의 성을 의지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자아의 장벽을 부수고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개인적인 지배욕을 단념해야 한다. 해산을 하는 여자를 표현한 저 작
은 조각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강렬한 감각의 중압 밑에서 무의미할 만큼 추상화된, 
무척 공허하고 예리한 얼굴."(<사랑하는 여인들>에서) 이런 황홀은 희생도 아니고 포기도 
아니다. 남녀의 한쪽이 다른쪽에게 얌전히 삼켜지는 것이 아니다. 남녀가 모두 한 쌍에서 
부서진 파편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성은 상처가 아니다. 양쪽이 모두 훌륭한 극을 지닌 하나의 완전한 존재이다. 한쪽이 그 
남성다움에 의해 확립되고, 다른쪽이 여성다움으로 확립될때, "각자 성의 양극 사이에 교
류가 이루어진다."(<사랑하는 여인들>에서) 성행위는 당사자의 어느 한쪽이 정복하거나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를 통하여 이루게 되는 훌륭한 완성이다. 우르술라와 비
르킨이 서로 상대를 발견했을 때, "두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참된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별의 균형을 서로 주고받았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그가 그녀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기억을 초월하는 신비적이고 구체적이고 황홀한 다른 현실이었다."(<사랑하는 여인들>에
서) 뜨거운 애정을 나누는 가운데 서로 상대방에게 도달한다. 즉 연인끼리 함께 '타자'에,
 '전체'에 도달하게 된다. 폴과 클라라라가 서로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이다.(<아들과 연인>

에서) 그녀는 그에게 있어서 "그의 생명과 함께 호흡하는 강렬하고 야생적이고 불가사의한 
생명이었다. 그때 두 사람은 자기들의 힘을 초월한 것을 느끼고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만났다. 그리고 이 만남 속에 무수한 초목이 뻗는 움직임이, 별의 선회가 시
작되었다."
  채털리 부인과 멜러즈도 이와 같은 우주적인 환희에 도달한다. 서로 상대와 몸을 섞음으
로써 두 사람은 나무와 햇살과 비와 섞이게 된다. 로렌스는 이 이론을 '채털리 부인의 변
호'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결혼은 계속적이고 근본적으로 남근과 관계가 없으면, 즉 태양
과 대지와 달과 별과 유성과 결부되어 있지 않으면, 그리고 날과 달과 계절과 해와 세기의 
리듬과 결부되어 있지 않으면,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 피의 교감이 없으면 결혼은 무의미
하다. 피야말로 영혼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남자의 피와 여자의 피는 서로 섞일 수 없는 
영원히 이질적인 두 강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강은 그 굴곡으로 생명 전체를 에워싸고 있
다. "남근은 여자의 피의 계곡을 채우는 혈액의 부피이다. 남성의 피로 이루어진 힘찬 강
은 여성의 피의 강을 그 가장 깊은 곳에서 에워싼다... 그러나 어느 쪽의 흐름도 그 둑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결합이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신비의 하
나이다." 이 결합은 생명을 기적적으로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개성'의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
럼, 개성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서로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면 그런 시도는 실패하게 마
련이다. 그때에는 양쪽의 생명의 흐름을 가로막는 "개인적이고 창백하고 싸늘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시적인"(<사랑하는 여인들>에서) 성욕이 있을 뿐이다. 연인들은 서로 상대방
을 하나의 도구로 보며, 두 사람 사이에 증오가 싹튼다. 예를 들면 채털리 부인과 마이켈
의 경우가 그렇다. 이 두 사람은 자기의 주관 속에 갇혀 있다. 그들은 알코올이나 아편이 
주는 것과 비슷한 흥분을 느끼는 경우는 있어도, 그 흥분에는 대상이 없다. 상대자의 현실
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무엇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로렌스라면 코스탈을 가차없이 비판했을 것이다. 그는 제라드에게서 그런 오만하고 이기
적인 남성을 묘사하고 있다. 제라드가 구드런과 같이 지옥에 떨어지는 책임의 대부분은 그
에게 있다. 지능적이고 방자한 그는 무의미한 자기주장에 만족하여, 인생에 대해 완강히 
저항한다. 사나운 암말을 제어하는 즐거움 때문에, 그는 저쪽에서 기차가 요란하게 달려올 
때 울타리에 그 암말을 매어놓고, 빠져나오려고 날뛰는 옆구리를 피로 물들이며 자기의 억
센 힘에 스스로 도취된다.
  이와 같은 지배욕은 그 대상이 되는 여자를 비천하게 한다. 연약해진 그녀는 노예로 변
하게 된다. 제라드는 미네트 위에 몸을 기댄다. "난폭한 취급을 당하는 데서 그 존재이유
를 갖고 있는 듯한, 폭행을 당하는 노예의 순진한(그녀의) 시선은 제라드의 근육을 떨게 
했다... 그의 의지만이 유일한 의지이며, 그녀는 그의 의지의 수동적인 실체에 불과했다." 
이것은 참으로 비참한 지배이다. 여자가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면, 남자가 지배하는 것
은 하찮은 것이다. 그는 빼앗아서 풍족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제라드는 구드런을 품에 안는다. "그녀는 제라드 자신의 풍요롭고 자랑스러운 실
체였다... 그녀는 제라드 속으로 사라지고, 그는 완성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곁을 떠나면 그는 금세 고독하고 공허해진다. 그리고 이튿날 여자는 약속한 장소에 나오지 

않는다. 여자의 기질이 강할 경우에는, 그녀에게도 남자의 요구와 동일한 요구를 불러일으
킨다. 그녀는 끌리기도 하면서 반발하여, 마조히즘적이 되기도 하고 사디즘적이 되기도 한
다. 구드런은 미친 듯이 날뛰는 암말의 허리를 허벅지 사이로 죄는 것을 보고 흥분한다. 
그리고 제라드의 유모에게서 옛날에 "그녀가 그의 작은 엉덩이를 꼬집었다."는 말을 들었
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흥분했다. 남성의 거만은 여성의 저항을 자극한다. 채털리 부인이 
산지기의, 그리고 우르술라가 비르킨의 성적 순수성에 정복되어 구제되는 반면에, 제라드
는 구드린을 끊임없는 투쟁 속으로 끌어들인다. 부친상을 당하여 상심한 그는 어느날 밤에 
그녀의 품속에 몸을 맡긴다. "그녀는 생명의 대온천이었다. 그에게는 그녀가 근사하게 생
각되었다. 그녀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며 실체였다. 그녀의 여자다운 가슴에서 발산하는 부
드러운 기적적인 영기가 병들어 시든 그의 뇌수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그것은 마치 병을 
낫게 하는 수액 같기도 아고, 생명 자체를 쓰다듬어주는 파도 같기도 하여, 그는 다시 한 
번 어머니의 가슴에 조용히 안겨 있는 듯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날 밤에 그는 여성과의 합일이 어떤 것인가를 예감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
의 행복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구드런은 진정한 의미에서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제라드를 자기 어깨 위에 잠들게 하고, 자신은 깨어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마음은 그에게서 떠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먹이가 된 자가 받는 징벌이다. 그
는 혼자서는 고독을 깰 수 없다. 자기의 장벽을 쌓음으로써 남에게도 장벽이 되었다. 이제
는 타인과 합일할 수 없다. 결구 제라드는 구드런과 자기 자신의 손에 의해 죽는다.
  이와 같이 남녀 양성은 어느 쪽도 본래는 특권을 갖고 있지 않다. 어느 쪽도 주체가 아
니다. 여자는 먹이가 아니고, 단순한 구실도 아니다. 말로(프랑스의 소설가, 정치가)도 지
적한 것처럼, 로렌스에게는 인도인의 경우와는 달리, 여자가 하나의 풍경처럼 무한과 접촉
할 기회의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프랑스어판 서
문에서) 이것도 여자를 하나의 객체로 삼는 한 방법이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현실
적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합일이야말로 그가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그러므로 로렌스가 호
의적으로 묘사한 남성인물은, 애인에게서 육체의 선물을 휠씬 능가하는 것을 요구한다. 예
를 들면 폴은 감상적인 희생정신에서 자기에게 몸을 맡기는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면 폴
은 감상적인 희생정신에서 자기에게 몸을 맡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비르킨은 우르술라
가 자기 품에서 단지 쾌락만을 요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냉정하든 정열적이든, 
자기 속에 파묻혀 사는 여자는 남자를 고독하게 내버려둔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배척한
다. 양쪽이 육체와 정신을 서로에게 모두 주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주고받음이 실현되면 
두 사람은 서로 언제까지나 정절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로렌스는 일부일처제의 찬성자이
다. 존재의 개별성에 마음이 끌리지 않으면 여러 가지 변화를 추구할 수 없다. 그런데 남
근 중심의 결혼은 일반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전류가 제대로 흐르고 
있을 때에는, 어떤 변화에의 욕구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만으로 완전히 닫혀진 
결정적인 유동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선물과 서로의 정절에 의해 진정한 상호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런데 좀처
럼 그렇게 되지 않는다. 로렌스는 남성의 주권을 열렬히 믿고 있다. '남근 중심의 결혼'이
라는 말과, 성적과 남근적이라는 것을 동일시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것은 분명하다. 신비스

럽게 결합하는 두 사람의 피의 흐름 중에서 남근적인 흐름 쪽에 특권이 있다. "남근은 두 
하천 사이를 연결하는 밧줄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두 개의 다른 리듬을 유일한 흐름에 결
합기킨다."
  그러므로 남자는 단지 결합된 두 요소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연결의 요인도 
된다. 그것은 남녀를 초월한다. 즉 "미래로 통하는 다리는 남근이다." 로렌스는 '어머니 여
신'의 숭배 대신에 남근숭배를 대치 시키려고 한다. 그가 우주의 성적 성격을 분명히 부각
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비유는 여자의 배가 아니라 남자의 생식력이다. 그는 여자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남자에 대해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다. 그 대신 수컷의 강렬하고 은근한 
부름에 정신을 못 차리는 여자를 등장시킨다. 그가 묘사하는 여성 등장인물들은 아름답고 
건강하지만, 상대방을 도취시키는 매력은 없다. 이와는 달리 남성 주인공들은 상대방의 마
음을 이끄는 야성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생명'이 갖는 불가해한 힘찬 신비를 구현하고 
있는 것은 남성이라는 동물이다. 여자들은 이 마법에 매료된다.
  어떤 여자는 여우에게 홀리기도 하고, 어떤 여자는 종마에게 반하기도 한다. 구드런은 
황소의 무리에게 흥분하여 도전한다. 그녀는 수토끼의 용감한 저항을 보고도 마음이 흔들
린다. 이와 같은 우주적인 특권 위에 사회적인 특권이 생기게 된다. 아마도 남근의 전류가 
격렬하고 공격적이어서, 또한 그것이 미래에 걸쳐 있기 때문이겠지만-로렌스는 이 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생명의 기치를 들고 나아가는'(<무의식의 환상>에
서) 것은 남자가 하는 일이다. 남자는 목적을 향하고 있으며 '초월'을 구현하고 있다. 여자
는 자기의 감정에 마음을 빼앗겨, 완전히 내면성에 머물러 있으며, 운명적으로 '내재'에 안
주한다. 남자는 성생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남자에 의해 성생활은 초월된
다. 남자는 성적 세계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거기서 탈출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 속에 처
박혀 살아간다. 사상과 행동도 남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남근을 차지하지 못한 여자
는 그 어느 쪽에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때로는 여자가 남자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뒤따르지 않는 연기이다. "여자는 아래쪽에 지구의 중심을 향하는 
극을 갖고 있다. 여자의 깊은 극의 성질은 아래로 향하는 조류, 즉 달의 인력이다. 남자는 
그와 반대로 위로 향한다. 태양과 대낮의 활동으로 향하는 극을 갖고 있다."(<무의식의 환
상>에서) 여자에게 "가장 심오한 의식은 배와 허리에 깃들어 있다... 만일 그녀가 위쪽을 
향하면 모든 것이 무너질 때가 언젠가는 닥칠 것이다." (<무의식의 환상>에서) 행동의 영
역에서 적극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남자이다. 여자는 정서면에서 적극적이다. 로
렌스는 보날드(프랑스의 정치사상가, 군주정치와 카톨릭의 옹호자, 1754 - 1840)나 콩
트(프랑스의 실증주의 철학자, 1798 - 1857)나 클레망 보텔(20세기 초의 프랑스의 저
널리스트) 등의 전통적인 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여자는 그 실존을 남자에
게 종속시켜야 한다. "여자는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이 지향하는 심오한 목적을 믿어야 한
다."(<무의식의 환상>에서) 그때 남자는 그녀에게 깊은 애정과 감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아, 아내가 당신을 신뢰하여, 당신에게 그녀가 알지 못하는 깊은 계획이 있다는 것을 인
정할 때,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당신을 사
랑하는 아내에게 헤아릴 수 없는 감사를 느끼게 된다..."(<무의식의 환상>에서) 로렌스는, 
남자는 이와 같은 아내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 큰 기획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만일 그의 기획이 눈가림에 불과할 경우에는, 그 부부는 기만 속에 빠지게 될 것이
다. 오히려 여성주기(월경주기) 속에 갇혀 있는 것이 낫다. 즉, 피에르와 나타샤(톨스토이
의 <전쟁과 평화>의 주요 등장인물)처럼 서로 거짓말로 상대방을 속이느니, 안나 카레니
나와 브론스키(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의 주인공들), 카르멘과 돈 호세(메리메의 
<카르멘>의 주인공들)처럼 사랑과 죽음을 택하는 편이 낫다.
  그러나 이 점을 제외하면, 로렌스가 주장하는 것은 프루동이나 루소식의, 아내가 남편으
로부터 자기 삶의 의의를 찾아내는 일부일처제의 결혼이다. 로렌스는 역할의 교대를 요구
하는 여자들을 몽테를랑 못지않게 증오한다. 여성이 '위대한 모성'의 역할, 생명의 실상을 
보존하는 역할을 거절한다면, 욕심꾸러기인 여자는 남자를 불구로 만들어, 그를 '내재' 속
에 빠뜨리고 궁극적인 목적에서 이탈하게 할 것이다. 로렌스는 모성을 저주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그는 자기가 육체적인 존재임을 기뻐하고 자기의 탄생을 받아들여, 어머니를 깊이 사랑
한다. 그의 작품에는 어머니들이, 참된 여성의 훌륭한 본보기처럼 쓰여 있다. 어머니야말로 
순수한 헌신과 완벽한 관용과 생생한 온정을 남김없이 그 아들에게 바치고 있다. 그녀들은 
아들이 한 사람의 어엿한 사나이가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경계해야 하는 것은 남
자를 어린이의 상태로 되돌리려고 하는 이기주의적인 연인(여자)이다. 그녀는 남성의 비약
을 가로막는다. "여자들의 유성인 달은 우리를 뒤로 끌어당긴다." (<무의식의 환상>에서) 
애인은 언제나 사랑을 얘기한다. 그녀에게 사랑하는 것은 빼앗는 것이며, 그녀가 의식하는 
자신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미움에 가깝다. 자기를 상대방에게 줄 줄 몰라 
무서운 공허감에 시달리는 허미온은 비르킨을 자기의 포로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
는 실패하여 그를 죽이려고 한다. 그녀가 그를 찌르며 느낀 관능적인 황홀감은 쾌락의 에
고이스틱한 경련과 같은 것이다.(<사랑하는 여인들>에서)
  로렌스는 의식을 요구하는 셀룰로이드나 고무인형과 같은 현대여성을 혐오한다. 여자가 
성적으로 자각하면, 곧 "온통 두뇌적으로 행동하고, 자동적인 의지의 명령에 따라 인생을 
살아간다." 로렌스는 여성이 자주적인 관능을 갖는 것을 금한다. 여성은 자기를 주도록 되
어 있지 빼앗도록 되어 있지 않다. 로렌스는 멜러즈의 입을 통해 동성연애를 하는 여성을 
혐오하고 있다. 남자에 대해 초연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여자도 역시 비난한다. 
폴은 미리엄이 그의 허리를 쓰다듬으면서 "당신 멋져요." 하고 말할 때 모욕을 당한 것 같
아 기분이 상한다. 구드런도 자기 애인의 아름다움에 반했을 때, 미리엄과 같은 과오를 범
하게 된다. 이런 관조적인 태도는 오히려 남녀 사이를 떼어놓게 된다는 것이다. 페니스를 
하찮게 여기거나 남자의 몸놀림을 우스꽝스럽게 보는 냉정하고 지적인 여성의 빈정거림과 
마찬가지이다. 집요한 쾌락의 추구도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거기에도 이반을 가져오는 짜
릿하고 고독한 향락이 있으므로, 여자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로렌스는 여성으로서의 사명을 망각한, 독립적이고 지배적인 여성을 많이 묘사했다. 우
르술라와 구드런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우르술라는 독점욕이 강한 여자였다. "남자는 나
에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몸을 맡겨야 한다."(<사랑하는 여인들>에서) 그후에 그녀는 
자기 의지를 극복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구드런은 끝까지 완강하다. 지적이고 예술가 
타입인 그녀는 남자의 독립과 행동의 가능성을 크게 질투한다. 자기의 개성에 대해서는 손

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려고 한다. 빈정대기를 잘하고 
소유욕이 강하여, 언제난 자기 주관 속에 파묻혀 있다. 누구보다도 솔직한 까닭에 가장 심
각한 것은 미리엄의 모습이다.(<아들과 연인>에서) 구드런의 실패는 제라드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미리엄은 폴을 상대로 불행한 자기의 짐을 혼자서 지고 있다. 그녀도 
역시 남자가 되기를 원하며, 남자를 미워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를 자기의 일반성 속에 인
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 때문에 생명의 큰 흐름이 그녀를 꿰
뚫고 있지 않다. 그녀는 마녀나 여승을 닮을 경우는 있어도, 절대로 바카스신의 여제사관
은 닮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자기의 머릿속에서 재창조한 뒤 거기에 어떤 종교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감동하는 일이 없다. 그런 열정이 오히려 그녀를 생명으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녀는 시적이고 신비적이어서 순응성이 없다.
  "그녀의 극단적인 노력은 도리어 무위로 끝났다... 그녀는 무능하지는 않았으나, 적절한 
동작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내면적인 기쁨만 추구한 채 현실을 두려워한다. 
성욕도 두려워한다. 폴과 동침할 때 그녀의 마음은 공포 속에 움츠러든다. 언제나 지성이 
앞서고 생명이 뒷전으로 밀린다. 즉, 그녀는 반려자가 아니다. 애인과 융합되기를 거절한
다. 그녀는 상대방 남자를 자기 속에 흡수하려고 한다. 남자는 그녀의 이런 의지에 기분이 
상한다. 그녀가 꽃을 애무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다. 마치 
그녀가 꽃의 마음을 잡아 뽑으려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매도한다.
  "당신은 사랑을 구걸하는 거지야. 당신은 사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어해.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지만 당신은 뭔가가 결핍되어 그 빈자리를 사랑으로 메우고 싶어해."
  성욕은 공허를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성된 존재의 표현이어야 한다. 여자가 사
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녀들이 남성적인 힘을 손에 넣고 싶어하는 갈망이다. 폴의 어머
니는 미리엄을 꿰뚫어보고 있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를 그에게서 빼내어, 삼켜버리려고 한다." 젊은 처녀는 애인이 병들면 간병을 할 수 있
기 때문에 기뻐한다. 그를 돌봐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에게 자기의 의지를 강요하는 하
나의 방법이다. 그녀는 폴에게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폴에게 '아편이 주는 열병과 같은 정
열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그에게 기쁨과 평화를 줄 수는 없다. 그녀의 사랑의 깊숙한 
곳에서, 그녀 자신의 은밀한 곳에서, "폴이 그녀를 사랑하여 지배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녀
는 폴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폴은 그녀의 곁을 떠난다. 그는 평정을 찾아 클라라에
게로 간다. 아름답고 발랄하며 동물적인 이 여자는 남자에게 자기를 아낌없이 준다. 그리
하여 두 사람은 자신들을 초월하여 황홀한 순간에 도달한다. 그런데 클라라는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 이 환희는 폴의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붙잡아두는 데 실패한다. 다른 여자도 그를 자기 것으로 만
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개별화되면, 그것은 곧 공허한 에고이즘으로 변하여 에로
티시즘의 기적은 소멸된다.
  여자는 개인적인 사랑을 단념해야 한다. 멜러즈도 동 시프리아노도 애인에게 사랑을 속
삭이려고 하지 않는다. 케이트가 모범적인 여성인 테레사에게 동 라몽을 사랑하느냐고 물
었더니 화를 낸다.(<날개 있는 뱀>에서) "그 사람은 내 생명이에요." 하고 그녀는 대답한
다. 그녀가 그에게 허용한 선물은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자존심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생명을 구현하고 있다면, 남자도 여
자에게 생명을 구현하고 있다. 채털리 부인은 이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평안과 기쁨을 느끼
게 된다.
  "그녀는 자신을 피곤하게 하고 경직시키는, 완고하고 언센 힘을 버릴 것이다. 새로운 생
명의 물 속에, 무언의 예찬을 노래하는 심장 속에 깊숙이 빠질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주신 바커스의 제전에 초대되어 도취에 빠진다. 애인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거나 그의 품
에서 자기를 추구하지 않고, 그와 함께 비와 나무와 봄의 꽃과 조화를 이룬다. 이와 마찬
가지로 우르술라는 비르킨의 수중에서 자기의 개성을 포기하고, '별의 균형'에 도달한다. 
로렌스의 이상을 남김없이 반영하고 있는 작품은 <날개 있는 뱀>이다. 동시프리아노는 '
생명의 깃발을 들고 나아가는' 사나이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의 사명에 전력
투구한다. 그 결과 그에게 남성은 초월되고 신성에까지 드높여진다. 그가 신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절대적인 헌신을 받을 만하다. 케이트는 처음에 서구적인 편견
에 사로잡혀, 그런 남자에 대한 의존을 거부하고 자기 개성과 제한된 실존을 고집한다. 그
러나 차츰 생명의 위대한 흐름을 받아들여 시프리아노에게 몸과 마음을 맡긴다. 이것은 노
예의 복종이 아니다. 그와 함께 있기로 결심하기 전에, 그녀는 그가 자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에게 인식시킨다. 그는 이것을 인정한다. 사실 남자에게는 여자가 필요한다.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그의 반려가 되고자 한다. 그녀는 그의 목적, 그의 가치, 그의 세계를 채택
한다. 이런 복종은 에로티시즘 속에 표명된다.
  로렌스는 여자가 몸을 뒤흔드는 경련에 의해 혼자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는 일부러 여자에게 오르가슴을 주지 않는다. 동 시프리아노는 여자에게 이런 쾌락이 다
가오는 것을 느끼면 케이트에게서 몸을 뺀다. 결국 그녀는 이런 자주성까지도 단념하게 된
다. "그녀의 뜨거운 의욕과 정욕은 진정되어 사라져갔다. 그녀는, 대지에서 소리없이 솟아
나 신비로운 효능을 가진 온천처럼, 부드러운 순종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이것으로 로렌스의 소설이 무엇보다도 '여성교육'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우주의 질서를 
따르는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어렵다. 남자는 그런 질서에 자주적으로 순응하는 반면
에, 여자는 남성이라는 매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타자'가 외부의 의식과 의지의 모습
을 취할 때 진정으로 복종이 나타난다. 자주적인 순종은 묘하게도 자주적인 결정과 비슷하
다. 로렌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실패자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예지의 깊은 뜻을 알고 있다. 우주의 질서에 대한 그들의 순종은 오래전부터 완벽한 것이
며,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므로 오만한 개인주의자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교만해 보
이기도 한다. 신이 그들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 신은 로렌스 자신이
다.
  한편 여성은 그들의 신성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남성이 하나의 남근이고 두뇌가 아
니라면, 남성적인 성질이 몸에 밴 인간은 남성의 특권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악한 자가 아닌 선한 자도 될 수 있다. 다만 종속자로서이다. 로렌스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도 역시 '참된 여성'의 이상, 즉 자기를 '타자'로 분명히 인정하는 여성의 이상
이다.  
  

  3. 클로델과 주의 여종
  
  폴 클로델(1868 - 1955):프랑스의 상징과 시인, 극작가, 외교관. 앙드레 지드, 발레리, 
프루스트와 함께 프랑스 20세기의 4대 작가로 알려져 있음. 열렬한 카톨릭 작가로 20세기 
전반의 문학계 및 청년층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6년 브라질 공사, 1919년 덴마크 공사
를 거쳐, 1921 - 1926년 일본 대사, 1927 - 1933년 미국 대사를 역임했다. 작품으로 
<인질>, <잔 다르크>, <피안의 미사>, <마리아에의 알림>, <정오의 분할>, <사탱 신
발> 등이 있음.
  클로델의 카톨릭주의의 특이한 점은, 악도 선으로 변하게 하는 완고한 낙천주의이다. "
악에도 그냥 버려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정오의 분할>에서) 클로텔은 결국, 창조주의 
생각과 같게 귀착되는 관점(창조주는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을 취
하여, 이 세계의 모든 창조물을 동정하고 있다. 지옥과 원죄가 없으면, 자유와 구원도 있을 
수 없다. 신은 무에서 이 세계를 창조할 때, 이미 인간의 과실과 속죄를 예정하고 있었다. 
유대인과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는 이브가 신의 명령(선악과를 먹지 말라는)을 어겼기 때문
에, 그 딸들은 대단히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교회'의 신부들이 여자를 얼마나 냉대했
는가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자가 신의 뜻을 따르면, 여자는 자연스럽게 정당화된다. "여자! 옛날 지상의 낙
원에서 신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신에게 한 봉사, 여자와 신 사이에 이루어진 깊은 공감, 
죄과를 통해 그녀가 속죄를 위해 맡긴 육체!"(<소피의 모험>에서) 여자는 죄의 원천이며, 
인간이 낙원을 잃게 된 것은 그녀의 탓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속죄받아, 이 세계는 다
시 축복을 받고 있다. "우리는 신이 우리를 처음에 살게 한 그 환희의 낙원에서 한 발짝도 
나간 일이 없다."(<세 목소리의 칸타타>에서)
  "이 세상은 모두 '약속의 땅'이다."(<루아르 에 쉐르에서의 대화>에서) 신의 손길에서 
나온 것은 어느 하나도, 주어진 것의 어느 하나도,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은 있을 수 없다. "
우리는 신의 모든 작품과 함께 신에게 기도 한다. 신이 만드신 것에는 어느 하나도 무익한 
것이 없고, 어느 하나도 우리의 구원과 무관한 것이 없다." (<사탱 신발>에서) 또한 세상
에 필연적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신이 창조하신 것은 모두 서로 관련되며, 서로 필요
로 한다."(<마리아에의 알림>에서) 이리하여 여자는 우주의 조화 속에 그 위치를 차지하
게 된다. 그것은 결코 평범한 위치가 아니다. "이 '허무'의 덧없는 꽃에 '영원'을 연결한다. '
악마'에게는 처치하기 곤란한 일종의 불가사의한 정열이 있다."(<소피의 모험>에서)
  물론 여자가 파괴적일 수도 있다. 클로델도 레쉬(<교환>의 여주인공)를 통해 남자를 
파멸로 인도하는 고약한 여자를 보여주고 있다. <정오의 분할>에서 이세는 남자에게 사
랑의 올가미를 씌워 그의 생활을 짓밟는다. 그러나 이 파멸의 위험이 없으면, 구원도 이루
어지지 않는다. 여자는 "신이 그 경탄할 건조물 속에 일부러 가져온 위험의 요소이다."
(<소피의 모험>에서) 남자가 육체의 유혹을 경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들의 
생활에 극적인 요소를 가져다주는 것은, 우리들 속에 숨어 있는 적, 이 강렬한 자극제이다. 
만일 우리들의 영혼이 사나운 적의 침범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잠들어버리겠지만, 그렇
지가 않아서 우리의 영혼은 벌떡 일어난다... 승리를 위해 연마하는 것은 투쟁이다."(<아침

햇살 속의 검은 새>에서) 남자가 영혼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비단 정신의 길을 통해서만
이 아니라 육체의 길도 통한다." 그리고 남자에게 호소할 때 여자의 육체보다 더 강력한 
것이 있을까?"(<사탱 신발>에서) 남자를 잠이나 안일에서 떠나게 하는 것은 그에게 모두 
유익하다.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건, "우리들의 평범한 이성에 의해 정돈된 우리의 
개인적인 작은 세계 속에 하나의 교란적인 요소로" 나타나는 효력을 갖게 된다.(<입장과 
제안>에서) 때때로 여자는 단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기만자일 뿐이다.
  "나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다. 바로 여기에 매력이 있는 것이다." "나는 현재 있는 것의 
즐거움에 현재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가해진 것이다. 나는 오류의 얼굴을 한 진리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도시>에서)
  그런데 착각도 유용한 경우가 있다. 수호천사가 도냐 프루에즈에게 가르치는 것은 이것
이다.
  "'죄까지도! 죄도 쓸모가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 것은 잘한 일이었나요?'
  '네가 그 사람에게 욕망을 가르친 것은 잘한 일이었어.'
  '환영에의 욕망도요? 영원히 잡을 수 없는 환영의 욕망도요?'
  '욕망이란 현실에 있는 것을 바라는 거야. 환영은 현실에 없는 것을 바라는 거지. 환영을 
통한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하여 존재하는 것을 바라는 거야.'"(<사탱 신발>에서)
  신의 뜻에 의하면 프루에즈는 로드리그에게 '그의 심장을 꿰뚫는 검'이었다.(<사탱 신
발>에서)
  그러나 신의 손에 의해 여자는 이런 검이나 환상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현세의 부는 
언제나 거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양식이 되기도 한다. 남자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랑하는 여자는 남자에게 우주의 감각적인 미의 모든 화신이 
되어야 한다. 그녀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예찬의 노래여야 한다. "그대는 얼마나 아름다
운가. 비올렌, 그대가 있는 이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마리아에의 알림>에서)
  "내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대체 누구인가? 산들바람보다도 부드럽고, 신록의 잎사귀에서 
새어 나오는 달빛 같은 그녀... 마치 그녀는 연약한 날개를 펼치고 있는 어린 꿀벌처럼 보
이기도 하고, 큰 암사슴처럼, 혹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녀 비올렌>에서)
  "나에게 그대의 향기를 맡게 해다오. 마치 제단처럼 윤기가 흐르도록 물로 씻은 뒤에 노
랗고 파란 꽃을 피운 대지의 향기 같은...
   또한 밀짚과 초목에서 발산하는 여름의 향기 같기도 하고, 가을의 향기 같기도 하다..."
(<도시>에서)
  사랑하는 여자는 자연 전체를 축도해 놓은 존재이다. 장미, 백합, 별, 과일, 새, 바람, 달, 
태양, 분수이며, "대낮의 햇빛을 받은 거대한 항구의 평화로운 속삭임"(<사탱 신발>에서)
이다. 아니 훨씬 그 이상의 것, 자기와 대등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밤의 생생한 모래 속에서 빛나는 한 점인 하나의 별이, 내게는 하나의 별
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변했다. 나와 같은 인간적인 어떤 사람으로..."(<사탱 신발>에서)
  "너는 앞으로는 외톨이가 아니다. 네 안에는 너와 함께 영원히 헌신적인 여성이 있다. 

영원히 너의 것이 되어 다시는 도망치지 않는 자, 너의 아내가 있다."(<도시>에서)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를 신뢰하는 사람.
  우리를 품에 안고 한 여자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는 나직한 목소리의 반려자."(<굳
은 빵>에서)
  남자는 그녀의 육체와 영혼을 함께 껴안음으로써, 이 지상에서 뿌리를 발견하고, 이 세
상에서 자기를 성취한다.
  "나는 이 여자를 택했다. 그것이 나의 가치척도와 이 지상에서의 몫이 된다."(<도시>에
서) 그녀가 남자에게 가벼운 짐은 아니다. 그러나 남자는 멋대로 행동하도록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윽고 어리석은 남자는 자기가 이 부조리한 인간과 이 무겁고 까다로운 큰 짐과 함께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새삼 놀란다.
  그처럼 많은 옷과 많은 머리칼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일까?
  그는 이제 와서 그것을 버릴 수도 없고, 버릴 엄두도 내지 못한다."(<정오의 분할>에
서)
  이 무거운 짐은 보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굉장한 보물이에요." 하고 비올렌은 말
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을 줌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자기 운명을 달성한다.
  "여자가 되는 것이 꺾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리고 장미가 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하물며 여자로 태어난 이상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힘센 사자의 먹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세 목소리의 칸타타>에서)
  "우리는 어쩌면 좋은가, 남자의 품안에서만 여자가 될 수 있고, 남자의 마음속에서만 술
잔이 될 수 있으니."(<세 목소리의 칸타타>에서)
  "그러나 나의 영혼아, 말해 다오. 나는 헛되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나를 꺾을 사명을 
가진 자가 이 세상에 있다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 마음, 그것을 채우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가."(<세 목
소리의 칸타타>에서)
  물론 이 남녀의 결합은 신 앞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신성하며 영원 속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마음속의 의지가 동의해야 하며, 개인의 의사에 따라 파기할 수 없다. "두 사
람의 자유로운 인격이 주고받는 사랑와 동의를 신은 대견스러운 일로 보시기 때문에, 그것
을 하나의 은총의 의식으로 삼으셨다. 여기서도 이 은총의 의식은 마음의 절실한 소원을 
구체화 하고 있다."(<입장과 제안 2>에서)
  그리고 "결혼은 쾌락이 아니라 쾌락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영원히 자기 
이외의 목적을 위해 서로 상대방에게 만족하도록 두 영혼을 단련하는 것이다."(<사탱 신
발>에서)
  이 결합에 의해 남녀는 서로 상대방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쪽 모두 자
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나의 영혼의 내부에 있는 이 영혼,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
던 것은 그 사람이다!... 내게로 다가와서 손을 내민 것을 그 사람이다... 내 배필로 정해졌

던 상대는 그 사람이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의 근원이었던 것은 그 사람이다! 그러니
까 나는 그 사람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토비와 사라의 글>에서)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겨 이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
으로 생각했던 나 자신의 어느 부분. 아! 하나님, 그것은 존재합니다. 그것은 무서울 정도
로 살아 있습니다."(<모욕받은 아버지>에서)
  그리고 그 존재는 그것이 보충하는 존재에게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 된다. "그에게는 그
대가 필요했다." 하고 프루에즈의 '천사'는 말한다. 그리고 로드리그는 "필요치 않은 것 이
외에, 무엇을 죽음이라고 부르는가? 언제부터 그녀는 내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는
가? 내가 그녀에게, 나의 존재 없이는 그녀가 자기 자신일 수 없는 것은 언제였는가?"
(<사탱 신발>에서)
  "남의 시선이나 남과의 신비로운 관계 밖에서 만들어지는 영혼은 하나도 없다고 사람들
은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 두 사람의 사이는 그 이상의 것이다. 당신의 말에 따라서 나는 존재하게 
된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같은 하나가 서로 메아리치고 있다.
  우리를 이루어나갈 때, 오리온이여, 당신이 사용했던 재료가 조금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이 깎은 재료로 나는 만들어진 것이다."(<모욕받은 아버지>에서)
  이 결합의 기적적인 필연성 속에서 낙원을 되찾고 죽음을 극복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자와 여자로, 일찍이 낙원에 존재했던 인간이 다시 만들어졌다."(<성자의 
노트>에서)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할 수 없다.
  마치 보라색이 오랜지색과 섞여서 빨간색이 되는 것처럼."(<사탱 신발>에서)
  서로가 하나의 타자의 모습을 통하여 완벽한 '타자'에게, 즉 신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상대방에게 주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한 신이다."(<성자의 노트>에
서)
  "만일 당신이 처음에 내 눈동자 속에서 천국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그처럼 천
국을 동경했을까?(<성자의 노트>에서)
  "아! 여자가 되는 것을 그만두고, 당신이 가질 수 없는 '신'을 그 얼굴에서 보게 해다오."
(<사탱 신발>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모든 생물체에게 공통된 감정을 일으킨다. 우리는 자기만으로는 온전
하지 못하고 우리가 자기를 실현하는 최고의 '선'은 우리 외부의 누구라는 느낌을."(<입장
과 제안 1>에서)
  이리하여 남녀 서로가 상대방 속에 현세에서의 자기 생명의 의의와 그 생명의 불안전성
의 분명한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 사람에게 천국을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상에서 떼어놓을 수는 있다. 나만
이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의 불완전한 것을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다."(<사탱 신발>에서)
  "내가 그대에게 요구했던 것, 그대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시간과는 양립되지 않고 영원
과 양립된다."(<모욕받은 아버지>에서)
  그러나 남녀의 역할은 똑같지 않다. 사회할동에서는 분명히 남자에게 우선권이 주어져 

있다. 클로델은 계급제를, 특히 가족의 계급제를 인정한다. 가장은 남편이다. 안느 베르코
르는 그 가정 위에 군림한다. 동 펠라즈는 도나 프루에즈라는 꽃을 돌보는 정원사로 자처
하고 있다. 그는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녀는 그 명령을 거역하려고 하지 않는다. 남성
이라는 것만으로 특권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한 집안의 남자와 자신을 비교하다니, 얼마
나 주제넘은 여자인가!" 하고 시뉴는 자문한다.(<인질>에서) 논밭을 경작하고 대성당을 
짓고 검을 잡고 싸우며 세계를 탐험하고 토지를 정복하고 행동하고 기도하는 것은 남자이
다. 이 지상에서 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남자를 통해서이다. 여자는 어디까지나 여자
일 뿐이다. 그녀는 그 자리에 남아, 기다리고 유지하는 인간이다.
  "나는 뒤에 남아, 언제나 그곳에 있는 사람이에요." 하고 시뉴는 말한다.
  그녀는 그가 먼 곳에 가서 '대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동안, 쿠퐁텐의 재산을 지키며 그
의 가계를 빈틈없이 관리한다. 여자는 전사에게 희망의 원조를 제공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희망을 제공한다."(<도시>에서) 그리고 연민의 원조도. "나는 그 사람이 가엾은 생
각이 든다. 어머니를 찾아서, 신뢰와 수치감 때문에 모욕을 당한 여자에게로 갈 수밖에 없
기 때문이다."(<교환>에서)
  그리고 '황금의 머리'는 죽음을 앞두고 중얼거린다.
  "이것이야말로 부상자에 대한 격려, 불구자에 대한 자주, 죽어가는 자에 대한 반려..."
  이처럼 여자가 남자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 클로델은 여자에게 불평하지 않
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는 몽테를랑과 로렌스가 강조하는 남성의 자부심을 모독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남자가 자기를 육으로 된 비참한 존재로 알고 자기의 기원과 이에 대응하
는 죽음에 대해 잊지 않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어떤 아내든지 마르트의 말을 할 수 있
다.
  "그래요, 당신에게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녜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에게서 그 생명을 
되돌려받기 위해 이 세상에 왔어요." 거기서 남자는 여자를 앞에 놓고 "채권자 앞에 나온 
빚쟁이처럼 자책의 동요를 느낀다."(<교환>에서)
  그러나 이런 연약한 태도는 강한 힘에 굴복되어야 한다. 결혼에 의해 아내는 자기를 맡
아주는 남편에게 '자기를 재공한다.' 랄라는 자기에게 한쪽 다리를 얹어놓은 쾨르브 앞에 
누워 잠든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아버지에 대한 딸의, 오빠에 대한 여동생의 관계는 군신
의 관계이다. 시뉴는 조르주의 수중에서 봉건군주에 대한 기사의 맹세를 한다.
  "당신은 영주이고, 나는 불을 지키는 천한 무녀."(<인질>에서)
  "신참 기사처럼 나로 하여금 맹세하게 하여 주십시오!
  오, 영주님! 오, 나의 오라버니여, 당신 손 안에서 수도를 맹세하는 수녀처럼 맹세를 하
게 하여 주십시오.
  오, 나와 한 집안의 남성이여!"(<인질>에서)
  신하의 가장 큰 미덕은 지조와 충성이다. 여자는 상냥하고 겸손하고 참을성이 많지만, 
가문과 집안의 명성에 대하여는 자랑스럽게 여기며 용감하다. 자존심이 강한 시뉴 드 쿠퐁
텐이라든지, 죽음을 당한 아버지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은자의 고난과 십자가의 고
통을 한몸에 걸머지고, '황금의 머리'의 임종을 지켜본 후에 그 옆에서 죽어가는 '황금의 
머리'의 왕비의 경우가 그렇다. 여성은 흔히 중재자나 조정자로 묘사된다. 여자는 마르도케

의 명령에 순종하는 에스터이며, 승려들에게 복종하는 유디트이다. 여자의 연약함, 소심, 
수치 같은 것은, 남편의 것이기 때문에, 또한 자기 것이기도 한 대의에 충성함으로써 극복
할 수 있다. 여자는 그 헌신 속에서 자기를 세상에서 귀중한 도구로 삼는 힘을 이끌어낸
다.
  여자는 인간적인 면에서는 복종 속에 위대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눈에는, 
그녀는 완전하고 자주적인 한 사람의 인격체이다. 남자의 경우에 존재는 초월되고, 여자의 
경우에는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현세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남녀간의 차이이다. 초월이 완성
되는 것은 현세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이다. 그리고 여자에게 신은, 그녀의 반려자(남편) 
못지않게 직접적인, 아니 더욱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신이 시뉴에게 말을 거
는 것은, 남자(승려)의 입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비올렌은 신의 목소리를 고독한 자기 마
음속에서 듣는다. 그리고 프루에즈는 천사하고만 교류한다. 클로델이 묘사하는 가장 숭고
한 인물은 여자이다. 시뉴, 비올렌, 프루에즈 등등. 그가 말하는 거룩한 상태란 단념(포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는 인간의 투기(자유로운 계획)에 참여하거나 개인적인 
의지를 갖는 경우도 적다. 여자는 주는 것이 본성이다. 얻기 위해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완
전한 헌신에 더욱 가깝다. 지상에서 기쁨이 초극되는 것은 여자를 통해서이다. 이 기쁨은 
정당하고 훌륭한 것이지만, 그것을 희생하는 것은 더욱 훌륭한 일이다. 시뉴는 교황을 구
하려는 확고한 동기에서 희생을 감수한다. 프루에즈는 로드리그와 금욕적인 사랑을 하고 
있으므로, 처음에는 할 수 없이 단념한다.
  "그럼 당신은 내가 당신의 품안에 부정한 여자로 안기기를 바랍니까?... 그러면 나는 당
신의 마음속에서 죽어갈 여자에 불과하고, 당신이 기대하는 영원한 별은 되지 못할 거예
요."(<사탱 신발>에서) 그런데 이 연애가 허용될 가능성이 있는데도 그녀는 현세에서 그 
사랑을 적극적으로 성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사가 그녀에게 이렇게 속삭였기 
때문이다.
  "프루에즈여, 나의 자매여, 빛 속에서 나를 영접하는 신의 딸이여.
  천사들의 눈에 비친 프루에즈, 그가 모르고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너. 프루에즈
이다. 너는 그에게 주기 위해, 그런 너를 만든 것이다."(<사탱 신발>에서)
  그녀도 인간이고 여자이다. 그래서 그녀는 반발없이 단념하지 못한다.
  "저 사람은 이런 내 기분을 모를 거야."(<사탱 신발>에서) 그러나 그녀는 자기와 로드
리그와의 진정한 결혼은 거절에 의해서만 완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더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으로 보였을 때, 그 불가능한 결혼에 그가 영구히 나에
게 묶여 있을 때, 나의 강력한 육체의 기중기에서, 그리고 이 냉혹한 공허에서 도망칠 방
법이 없게 되었을 때, 나의 허무와 함께 그의 허무를 그에게 입증했을 때, 그의 허무 속에
서 나의 허무가 입증할 수 없는 비밀이 하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때야말로 나는 상처를 
입고 도망갈 곳도 없는 그를 신에게 데려가고, 청천벽력을 맞게 하리라. 그때 비로소 나에
게 남편이 생기고 나는 신을 품에 껴안을 수 있게 된다."(<소녀 비올렌>에서)
  비올렌의 결심은 더욱 신비적이고 더욱 부조리하다. 그녀는 합법적인 인연에 의해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결합할 수 있는데도 나병과 맹목을 택했기 때문이다.
  "자크, 아마도 그럴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의 결합이 정당하기에는, 우리 두 사람의 결합이 바람직하기에는, 우리는 
서로 너무나 사랑하고 있어요."(<사탱 신발>에서)
  그런데 여자들이 이처럼 특별히 신성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영웅적인 행위를 감행하
는 주된 이유는, 클로텔처럼 남자의 입장에서 여자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남녀 양
성은 어느 쪽도 보조적 성의 안목으로 보면 '타자'로 나타난다. 그러나 남자인 그의 눈에 '
완전한 타자'로 비치기 쉬운 것은 역시 여자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종의 신비스러운 초월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자가 우리에게 주는 성총과 비슷한 힘이 생긴다."(<사탱 신발>에서) 여기서는 남성만을 
나타낼 뿐 인간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들의 불완전성에 대한 무한의 호소
이다. 어느 의미에서 이것은 종속의 새로운 원리라고 할 수도 있다.
  성자들의 영적 교류에서도 각자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 매개가 된다. 그러나 여자는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남자에 대한 좀더 분명한 구원의 매개체이다. <사탱 신발>은 로드
리그의 구원의 서사시이다. 극은 그의 형제가 그를 위해 신에게 드리는 기도로 시작되어, 
프루에즈에 의해 성인의 경지로 인도된 로드리그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러나 어느 의미에
서는, 여자는 이런 방법으로 최고의 자주성을 획득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녀의 사명은 
그녀 속에 내면화하여, 남자를 구제하거나 남자의 본보기가 됨으로써 고독 속의 자기 자신
을 구제하기 때문이다.
  피에르 드 크라옹은 비올렌에게 그 숙명을 예언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녀의 희생으
로 얻은 신기한 과일을 딴다. 결국 그는 대성당의 돌 속에서 남자들에게 그녀의 덕을 찬양
하게 된다. 하지만 비올렌은 이런 일을 자기 혼자서 해낸 것이다. 클로델 속에는, 베아트리
체에 대한 단테나, 그노시스(기독교의 한 이단)교도나, 여자를 '탄생의 주'라고 부른 생 시
몽파의 전통과 비슷한, 여성에 대한 신비주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남녀가 모두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는 여자에게도 하나의 자주성을 인정했다. 따라서 여자는 자기를 '타
자'로 만듦으로써(나는 신의 하녀) 자기를 주체로 실현한다. 여자가 '타자'가 되는 것은 자
기 존재 안에서이다.
  <소피의 모험>에 나오는 한 구절은 클로델의 견해를 거의 남김없이 요약하고 있다. 신
은 여자에게 "아무리 크게 변했다고 해도 그 얼굴은 신의 완전성의 한 모방이다. 신은 여
자를 바람직하게 지으셨다. 신은 여자에게 시작과 끝을 동시에 부여하셨다. 신은 여자에게 
당신의 목적을 위탁하여, 여자가 그 속에서 만들어진 창조의 수면을 남자에게 제공할 수 
있게 하셨다. 여자는 운명의 지주이다. 여자는 선물이다. 여자는 소유의 가능성이다... 여자
는 창조주를 언제나 그 작품에 연결시키는 애정의 일환이다. 여자는 '그'를 이해한다. 여자
는 보고 행하는 영혼이다. 그녀는 그와 함께 창조의 인내와 능력을 나누어 가진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성을 이보다 더 높이 평가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본에서는 클로델은 다소 근대화된 카톨릭의 전통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지상에서 여성의 사명은, 그 초자연적인 자주성에 아무 장애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거꾸로 여성에게 이 자주성을 인정함으로써, 카톨릭교도는 이 세상에서 남성의 
특권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은 여성을 고귀하게 여기지만, 이 세상에서는 

여성을 하녀로 취급한다. 그리고 여성에게 완전한 복종을 요구할수록 그녀를 구원의 길로 
가게 한다. 어린이, 남편, 가정, 토지, 국가, 교회에 헌신하는 것이 여성의 역할이며, 부르
주아 사회가 끊임없이 할당해 온 역할이다. 남성은 자기의 활동을 제공하고, 여성은 자기
의 인격을 제공한다. 신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이 계급제도를 신성시하는 것은 조금도 개선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영구히 고정 시키려는 것이다.
  
  4. 브르통, 또는 시
  
  앙드레 브르통(1896 - 1970):프랑스의 시인, 아라공, 스포 등과 함께 다다이즘에 이
어 초현실주의의 주창자이다. 처음에는 일종의 정신혁명과 함께 사회혁명에도 열의를 보였
으나, 1935년에 공산당과 결별한 후로 정치적 입장을 떠났다. 작품으로는 <연통관>, 
<나자>, <비법 17번> 등이 있음.
  클로델의 종교적 세계와 브르통의 시적 우주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지만, 이 두 가지가 
여자에게 부여하는 역할에는 유사점이 있다. 즉, 여자를 교란의 요소로 보는 것이다. 여자
는 남자를 내재의 게으른 잠에서 이끌어 낸다. 입, 열쇠, 문, 다리 등 낱말은 다르지만, 여
자는 모두 단테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베아트리체이다.
  "여자에 대한 남자의 사랑은, 외계를 잠깐만 관찰하면 알 수 있지만, 하늘을 살색의 커
다란 꽃으로 채우려고 애쓰고 있다. 이것은 언제나 안심의 경지를 추구하는 정신에 대해 
가장 두려운 장애물이다." 한 사람의 다른 여자에 대한 사랑은 그를 '타자'에의 사랑으로 
인도한다. "인류에 대한 사랑의 수문이 활짝 열리는 것은 한 인간에 대한 선택적인 사랑이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이다..."
  브르통에게 천국은 이국의 하늘이 아니다. 바로 현세에 있다. 그것은 일상의 평범한 베
일을 벗길 줄 아는 사람 앞에 나타난다. 특히, 정욕은 그릇된 인식의 유혹을 배격한다. "현
대에 와서는 성의 세계가... 내가 알고 있는 한, 우주탐구의 욕구에 대해 언제나 타파하기 
어려운 어둠의 핵을 대립시켜 왔다." 신비와 충돌하는 것은 신비를 발견하는 유일한 수단
이다. 여자는 하나의 수수께끼이며, 언제나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그 복잡한 얼굴이 겹쳐서
 '스핑크스의 궁극의 변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형성한다. 그래서 여자는 계시이다.
 "그대는 비밀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하고 브르통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하고 있다. 그
리고 좀더 나아가서 "그대가 내게 준 계시,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전부터, 나는 그것이 하
나의 계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여자는 시라는 것이다. 제라르 드 네르발(프랑스의 
시인, 1808 - 1855)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실비와 오렐리아(모두 네르발의 작품 속의 여자주인공)의 경우, 여자는 추억이나 
환영과 같은 확실성밖에 없다. 꿈은 현실 이상으로 진실하며, 그것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르통의 경우에 이 일치는 완벽하다. 오직 하나의 세계만 있는 것
이다.
  시는 사물 속에 객관적으로 현존하며, 여자는 분명히 살과 뼈를 지닌 존재이다. 여자를 
만나는 것은 꿈이 아니라 완전히 깨어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날도 달
력의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로(4월 5일이니, 4월 12일이니, 10월 4일이니, 5월 29일이니 

하는 것처럼) 날짜가 카페나 거리 모퉁이의 평범한 액자 속에 꽂혀 있다. 그러나 여자는 
언제나 어떤 색다른 특징에 의해 돋보인다. 나자(브르통의 소설 <나자>의 여자주인공)는 "
다른 모든 통행인들과는 반대로 몸을 뒤로 젖히고 걸어간다... 참으로 기묘하게 화장을 하
고... 나는 전에 그런 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브르통은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그
녀는 생긋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은 의미 심장하여,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
였다."
  <광란>에서는 "막 돌아온 이 젊은 여자는 안개 속에 싸여 있는 것 같았다... 불의 옷을 
걸치고 있을까?... 그리고 1934년 5월 29일, 그녀는 그곳에서 무척 아름다웠다고 분명히 
단언할 수 있다."(브르통이 강조하고 있다.) 즉석에서 시인은 그녀가 자기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줄 상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일시적이고 제2의적인 역할
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연통관>에서 달릴라의 눈에 비친 어린이와 같다. 그런데 그때에
도 그녀의 주위에는 사소한 기적들이 일어난다. 그 달릴라와 데이트한 날에 브르통은 오랫
동안 만나지 못했던 삼손이라는 한 친구에 대한 호의적인 기사를 접하게 된다. 또 때로는 
기적 같은 일들이 잇따라 일어난다. 5월 29일에 본 낯선 여자, 즉 뮤직홀에서 수중쇼의 1
막을 연기해 보인 물의 요정은, 전에 어떤 레스트랑에서 공연한 적이 있는 '물의 요정, 식
사를 하다'라는 쇼프로의 인기에 의해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인과 그녀와의 첫 
나들이는 그보다 11년 전에 쓴 시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런 마법사인 여자 중에 가
장 이상한 여자는 '나자'이다. 그녀는 미래를 예언한다. 그녀의 입에서 그녀의 친구가 그때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말과 이미지가 흘러나온다.
  그녀의 상상과 의지는 신의 계시이다. "나는 방황하는 영혼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순수한 직관에만 의지하고, 언제나 기적과 비슷한 독특한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가
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서는 객관적인 우연이 이상한 일들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외부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무관심하여, 규칙이나 이성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자유로운 정신, 말하자면 어
떤 마법에 의해 일시적으로 불러올 수는 있어도 절대로 예속시킬 수 없는 공중의 정령의 
일종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자로서의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예언자요, 무녀요, 접신자인 그녀는 네르발을 방문했던 비현실적인 존재와 비슷하다.
  그녀는 초현실세계의 문을 연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줄 수가 없다. 여자가 자기를 성취하여 현실 속에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사랑 안에서이다. 개별적으로, 개별적인 숙명을 받아들이면서(세계를 부평초처
럼 떠도는 것이 아니고) 비로소 그녀는 '전체'를 한몸에 표현할 수 있다. 그녀의 미가 최고
조에 도달할 때는, '전에 존재했던 모든 것, 존재하도록 요청된 모든 것이, '지금' 이것이 
존재하려는 것 속에 아름답게 잠겨 비치는 거울에 의해 여자가 되는" 그런 밤의 한때이다.
  브르통에게는 , '그 장소와 표현형식을 발견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 속에 진리를 간직하
는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소유는 주고받는 사랑, 물론 육적인 사랑 속에서만 가능하
다. "사랑하는 여자의 초상은 미소짓는 얼굴을 보이는 그림과 같은 모습이어야 할 뿐만 아
니라, 질문을 던지는 신탁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녀 자체가 이념이나 그림의 모
습 이상의 것이 아니면, 그 초상은 신탁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여자는 '물질세계의 주

춧돌'이 되어야 한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자에게는 이 세계 자체가 '시'이며, 그는 이 세계
에서 실제로 베아트리체를 소유해야 한다. "서로 주고받는 사랑은 아무것도 거기에 간섭할 
수 없는 온전한 자력이 발생하는 유일한 것이며, 육체는 태양이 되고 또 그 육체에 찍혀진 
훌륭한 흔적이 되며, 정신은 힘차게 솟아나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금잔화와 백
리향 사이를 언제까지나 흘러간다."
  이런 불멸의 사랑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브르통의 태도의 모순은 <연통관>에서 <비법 
17>에 이르기까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영원한 사랑을 여러 여자에게 바치려는 데 있다. 
그러나 그의 말에 의하면 사회적인 환경이 그의 자유로운 선택을 방해하여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오를 통하여 그는 실제로 한 사람의 여자를 찾
고 있다고 한다. 설사 지금까지 사랑했던 몇몇 얼굴을 기억하고 있더라도 그는 "모든 여자
의 얼굴 중에서 한 여자의 얼굴밖에 찾아내지 못한다. 즉 마지막으로(브르통이 강조하고 
있다) 사랑한 여자의 얼굴 말이다." "또한 나는 전혀 다른 외모를 지닌 얼굴들에서 서로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광기의 사랑>에서 그는 물의 요정에게 묻
는다. "그대가 그토록 고대했던 그 여자냐, 오늘에서야 그대는 내 앞에 올 수 있었느냐?" 
그런데 <비법 17>에서는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에, 나는 대뜸 당신을 알아차렸다."라고 
말한다. 새로 개조되어 완성된 세계에서는, 남녀 사이에 서로 절대적인 증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헤어질 수 없게 된다. 사랑하는 여자가 전부라면, 어떻게 다른 여자를 받아들일 여
지가 있을 수 있는가. 그런데 그 사랑하는 여자는 다른 여자이기도 한다. 그녀의 개성이 
강할수록 더욱 그렇다. "이례적인 것은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 그녀는 유일한 여자이므로 
내게 언제나 또 다른 여자, 즉 또 하나의 다른 그대 자신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저기 다투
어 피어나는 수많은 꽃을 통하여, 나는 결국 빨간 속옷이나, 잿빛 속옷으로 갈아입는 그대
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 여자와는 다른 사람이지만, 똑같이 유일한 여자에 대해 브르통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상호적인 연애란, 미지의 것이 나를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나의 욕구에 의해 신격화된 더욱 놀랍고 더욱 생기발랄한 나의 사랑하는 
여자의 충실한 모습을 비치는 그런 거울의 장치이다."
  이 유일한 여자, 육체적인 동시에 인공적이고, 자연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여자는 초현실
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정체불명의 물체와 같은 마력을 갖고 있다. 그녀는 시인이 고물시장
에서 발견하거나, 꿈속에서 발명하는 구두 모양의 스푼이나 늑대 모양의 탁자나 대리석 모
양의 각설탕에 해당된다. 그녀는 갑자기 그 진실한 모습을 드러낸 낯익은 물건들의 신비감
을 감추고 있다. 그리고 풀이나 돌의 신비감도, 그녀는 모든 것이다.
  숲의 화재와 같은 머리를 한 나의 여자
  뜨거운 번개와 같은 생각을 지닌
  모래시계와 같은 몸집의
  ...해초와 봉봉과자 같은 성기를 지닌 나의 여자
  ...초원 같은 눈을 가진 나의 여자
  그녀는 미 자체이다. 브르통에게는, 미는 바라보는 개념이 아니라, 정열을 통해서만 발견
할 수 있는(따라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현실이다. 여자를 통해서만 이 세상에 미가 존
재한다. "진정 서로 선택한 두 존재의 융합이 옛 태양시대의 (지금은 없는) 가치를 모든 

것에 회복시키는, 그러나 또한 알래스카의 분화구 주위의 화산재 밑에 눈을 묻는, 자연의 
변덕으로 고독이 맹위를 떨치는 그런 모순된 지대의 인간 도가니의 밑바닥과 같은 그런 
장소에, 이미 몇 해 전에 새로운 미를 찾아가는 것을, 오로지 정열적인 목적에서 미를 찾
아가는 것을 나는 권유했다."
  "몸부림을 칠 듯한 미는 에로틱하고 베일에 싸여 있으며, 폭약이 장치되어 있고, 마법의 
분위기를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여자를 통해서이다. "본질과 존재
의 융합이 최고도로 실현되는 것은 바로 사랑을 통하여, 오직 사랑을 통해서이다." 그것은 
애인들에 의해 실현되고, 그와 동시에 전 세계에 실현된다. "사랑에 의해 성취되는, 유일한 
존재 속에 행하는 세계의 영원한 재창조, 재색칠은 무수한 광명에 의해 지상의 앞날을 비
춘다" 모든(또는 거의 모든) 시인에게 여자는 자연의 화신이다. 그러나 브르통에 의하면 
여자는 자연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을 해방한다. 자연은 명백한 언어로 말하지 
않으므로, 그 진리를 파악하려면 그 비법을 통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연의 진리란 
자연의 미와 같으며, 사는 그 반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열쇠이다. 여자는 여기서 시와 구
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개자이다. 여자가 없으면 천지도 침묵
을 지킨다.
  "그녀, 즉 자연은 빛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나를 섬기기도 하고 나에게 반역하기
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유일한 사랑의 용광로, 하나의 존재에 대한 사랑의 용광로
에서 불꽃이 나를 향해 피어오르는 정도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 사랑이 없을 때 나는 공허
한 하늘을 알게 되었다. 존재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데 있어, 나에게는 커다란 불꽃 
무지개만이 부족하였다. 나는 둘이서 막 점화하여 세차게 타오르는 잔 나뭇가지의 모닥불
을 쬐는 그대의 눈을, 그대의 마법의 손을, 내 생명의 불길 위로 오가는 그대의 투명한 손
을 눈이 부시도록 바라본다."
  브르통에게는 사랑하는 어떤 여자도 모두 자연의 경이이다." "고색창연한 우물의 내벽을 
기어가는 잊지 못할 한 포기의 작은 고사리." "...눈이 부신 참으로 엄숙한 그 무엇... 자연
의 위대한 물리적인 필연을 연상케 하는 한편, 막 피어나기 사작한 늘씬한 꽃의 무기력을 
한결 절실히 느끼게 하는 그 무엇." 그러나 거꾸로 자연의 모든 경이는 사랑하는 여자와 
융화된다. 동굴이나 꽃이나 산에 감격했을 때 그가 찬미하는 것은 사랑하는 여자이다. 테
드의 계단 위에서 손을 말리는 여자와 테드 그 자신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거리는 제
거된다. 오직 한 번의 기도 속에서 시인은 그 양자의 가호를 빈다. "놀라운 테드여, 내 생
명을 붙잡아다오! 천국과 지옥의 입구여, 나는 그런 당신의 수수께끼 같은 모습, 자연의 
미를 찬양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는 모습을 좋아한다." 미는 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인식의 깊은 밤'과 융화된다. 그것은 진리이고 영원이며 절대이다. 여자가 해방하
는 것은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세계의 실상이 아니라 그 필연적인 본질(플라톤이 상상한 
고정된 본질이 아니고), '폭약을 장치한' 본질이다.
  "내가 내 안에서 발견하는 보물은, 그대를 알게 된 후, 제한할 수 없는 저 광야를 여는 
열쇠뿐이다. 그 광야에는 다만 한 포기의 풀이 생명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그 풀은 
끊임없이 자라서, 결국 계속 넓어지는 진폭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시간의 끝

까지, 그대와 나 사이인 여자와 남자는, 자기 차례가 오면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기울
어가는 햇빛 속을 길이 끝날 때까지, 생명과 생명이 망각되는 끝까지 나아갈 터이니 말이
다. 최대의 희망(내가 말하는 희망은 다른 모든 희망을 집약한 희망을 말한다)은 모든 사
람의 것이 되어 만인에게 영속되고, 상호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서로의 절대적인 제
공이 모든 사람의 눈에, 생명 위에 놓인 유일한 자연인 동시에 초자연인 다리가 되는 것이
다."
  이와 같이 여자는 사랑을 품고 또 품게 함으로써, 어떤 남자에게나 유일한 그리고 가능
한 구원이 된다. <비법 17>에서는 여자의 사명이 확대되고 부각된다. 그것은 인류를 구
제하는 것이다. 본래 브르통은 육체의 권리회복을 요구하는 점에서, 정욕의 대상으로서의 
여자를 찬양하는 푸리에(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1772 - 1837)의 전통과도 이어져 있
었다. 그가 개혁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생 시몽의 사상에 귀착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남성은 지배적이다. 그 결과 구르몽(프랑스의 작가, 1858 - 1915)
은 랭보(프랑스의 시인, 그의 시는 반역정신으로 일관하여 시행의 전통을 깨고 자유시의 
창시자가 됨, 1854 - 1891)를 매도할 때 계집애 같은 기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했
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에서 상당히 떠들썩하면서도 파산으로 기울고 있는 남성의 사상
을 배격하고, 여성의 사상을 계발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 같다. 물론 그것은 패배한 여
자, 남자의 상상 속에서 노래하는 여자이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그것은 어느 정도의 시
련을 겪고 나서, 재발견된 여자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자는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여자는 여자에 대해 갖고 있는 남자의 사고방식 때문에 갇혀 있는 지옥에서 빠져
나와 자각할 것을 배워야 한다."
  여자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평화의 역할이다. "평소에 나는 그때그때 여자의 목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데 대해 놀랐다. 그녀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대단히 아름답고 소중한 
두 목소리(하나는 남자에게 말을 걸기 위해, 다른 하나는 어린이와 같은 신뢰를 불러일으
키기 위해)를 가능한 한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데 놀랐다. 여자를 거부하고 경계하는 큰 
외침, 여전히 권위를 갖고 있는 이 외침을 듣지 않게 되려면 어떤 기적, 어떤 미래를 기다
려야 하는가... 장차 전혀 다른 기적을 행하게 될 단순히 여자다운 여자가 격투의 상대인 
남자들에게 손을 내밀며, '당신들은 형제이다'하고 말할 때는 언제일까?" 오늘날 여성이 환
경에 올바로 적응하지 못하여 안정감이 없어 보이는 것은, 여성을 전체적으로 냉대한 결과
이다. 그러나 여자는 남성이 그 비밀을 알지 못하는 생명의 샘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
로,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멜뤼진(토요일마다 발이 뱀으로 변했다는 전설의 선녀), 무서운 생명에 다시 사로잡힐 
것 같은 자갈이나 수초, 밤의 솜털 따위의 하등한 첨가물을 지닌 멜뤼진. 내가 상기하는 
것은 그녀이며, 나로서는 이 야만스러운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자는 그녀밖에 없다고 생
각된다. 그녀는 여성 전체를 대표한다. 그녀는 오늘날 있는 그대로의 여성의 모습이다. 그 
인간적인 기반을 박탈당하고, 흔들리는 뿌리에 묶여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자. 그러나 그 
덕분에 자연의 원시적인 힘과 천우적인 연결을 보유하고 있는 여자이다. 인간으로서의 기
반을 빼앗긴 여자, 전설에서는 남자의 불안과 질투로 인해 여자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편을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생에서 여성의 참된 가치가 회복될 

때까지, '예술에서 남성에게 등을 돌리고 여성의 편을 드는' 시기가 도래했다. "어린아이와 
같은 여자, 예술은 감각적인 모든 세계에 그런 여자가 군림하도록 작용되어야 한다." 어째
서 어린아이와 같은 여자인가? 브르통은 이에 대해 설명한다. "내가 어린아이와 같은 여자
를 택하는 것은, 그녀를 다른 여자와 대립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속에, 오직 그녀 
속에만, 시각이 다른(브르통이 강조하고 있다) 프리즘이 완전히 투명한 상태로 유지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단지 인간적인 존재로만 취급되면 남성의 인간적인 존재와 마찬가지가 되어 몰
락하는 세계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과 시의 진상인 이 '여성적인 요소'만이, 인류
를 구제할 수 있는 다른 요소를 사회에 도입할 수 있다.
  브르통의 견해는 오로지 시적인 것으로, 여성도 시의 세계로 보고 있으며, 따라서 '타자'
로서이다. 그는 여성의 숙명도 상호적인 사랑의 이상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성
은 사랑 이외의 사명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여자가 남자보다 못한 것은 조금도 없
다. 남자의 사명도 역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여성 
자신에게도 사랑이 세계의 열쇠가 되며, 미의 계시인가 하는 점이다. 여자는 상대방 애인 
속에서 그런 미를 발견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 속에서일까? 여자는 하나의 감각적
인 존재를 통하여 시를 실현하는 시적인 활동이 가능할까? 여자는 즉자의, 직접의, 즉 남
자에게 시적인 존재이다.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도 그런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브르통은 주체로서의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고약한 여자에 대해서도 절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 전체에서 볼 때(몇몇 선언이나 팸플릿으로 군중을 매도하고 
있지만) 그는 지상의 장애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은 채, 숨은 진리를 밝히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여성이 그의 흥미를 끄는 이유는 여성이 대단히 훌륭한 '입'을 갖고 있기 때문
이다. 자연 속에 깊숙히 닻을 내리고, 대지에 접근해 있는 여성이 천국의 열쇠로 보이는 
것이다. '소피아(지혜)' 속에 '속죄'를, 나아가서는 창조의 원리까지 깃들어 있다고 본 그노
시스교도나 베아트리체를 길 안내자로 택한 단테나, 라우라의 죽음에 의해 광명이 비쳐진 
페트라르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브르통 속에는 비교적인 자연주주의가 있다. 이런 의미에
서 자연에 가장 깊이 닻을 내리고, 대지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천국의 열쇠도 되는 것이
다. 여성은 진리, 미, 시로의 전체이다. 한 번 더 말하지만 여성은 '타자'의 모습 아래에서
의 전체이며, 자기 자신을 제외한 '전체'이다.
  
  5. 스탕달, 혹은 진실의 로마네스크
  
  스탕달(1783 - 1842):본명은 마리 헨리 베르,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와 함께 리얼리
즘의 선구자이며 근대 심리소설의 개척자로, 위고를 중심으로 한 30년대의 낭만파와 대립
하였다. 정열과 자아예찬에 의한 인생 추구를 그의 본명에 따라 '밸리즘'이라고도 하며, '
살고 쓰고 사랑하다'라는 묘비명으로도 유명함. <적과 흑>, <파르므의 승원>의 작가. 
<연애론>의 여성관은 보부아르의 견해와 일치되는 점이 많다.
  현대를 떠나 내가 다시 스탕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자'가 악녀, 님프, 새벽별(성모 

마리아의 상징), 요부로 잇따라 변장한 가장무도회에서 빠져나와, 현실적인 육체를 지닌 
여자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한 남자를 만나는 것이 마음 든든한 일이기 때문이다.
  스탕달은 소년시절부터 여자를 감각적으로 사랑했다. 그는 여자들 속에 청춘기의 동경을 
투영한 인물이다. 아름다운 미지의 여성을 위험에서 구출하여 그녀의 사랑을 얻는 것을 공
상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가장 열망한 것은 이렇다. "매력있는 여자를 
만나 서로 사랑한다. 그녀는 내 영혼을 알아준다." 그는 만년에 가장 사랑한 여자의 이름 
머릿글자를 땅에 썼다. "나는 무엇보다도 몽상을 좋아했다." 하고 고백했다. 이 몽상의 중
심이 된 것은 언제나 여자의 이미지였다. 그런 여자에 대한 추억은 경치에도 생명을 부여
하여 생기가 넘치게 한다. "돌르에서 큰 길을 지나 아르부아에 도착할 무렵, 도중에서 본 
암석의 선은 , 나에게는 메틸드(스탕달이 가장 사랑했던 이탈리아 여성)의 영혼을 보는 듯
이 명확한 이미지였다."
  그는 음악, 그림, 건축, 그밖에 좋아한 모든 것을 불행한 남자애인의 심정으로 사랑했다. 
로마를 산책한 글을 쓰면 페이지마다 한 여자의 이미지가 머리에 떠올랐다. 여자들이 그에
게 느끼게 했던 아쉬움, 그리움, 슬픔, 기쁨 속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심적 경향을 알게 되
었다. 그는 여자들에게서 비평을 받고 싶어한다. 살롱에 출입하는 그녀들에게 자기의 재기
를 보여주려고 한다.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고통은 모두 여자에게 달려 있으며, 여자들
이 그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그는 남자의 우정보다 여자의 우정을 좋아했다. 여자에게서 
영감을 받아 글을 쓰고, 작품의 착상을 얻었다. 그는 주로 여자들을 위해 글을 썼다. "나는 
1900년에 롤랑 부인이나 멜라니 길베르... 같은, 내가 사랑하는 영혼에게 내 글이 읽히기
를 바란다." 이런 여성은 그의 생활의 실제내용이기도 했다. 대체 그녀들의 이런 특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롤랑 부인은 프랑스 혁명기의 여걸로, 유명한 수기가 있다. 멜라니는 
여배우로 한동안 스탕달과 동거한 여성이다.)
  이 섬세한 마음을 지닌 남자친구(스탕달)는 여성의 진실한 모습을 사랑했기 때문에, 여
성의 신비성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 그는 어떤 본질로도 여자를 규정한 적이 없다. '영원
한 여성'이라는 사상은, 그에게는 현학적이고 우스꽝스럽게 생각된다. "2천 년 이래로 현학
자들은 여자 쪽이 에스프리(정신)가 민감하지만, 남자는 여자보다 정신이 견실하다고 되풀
이하여 주장해 왔다. 여자는 남자보다 생각이 섬세하고, 남자는 여자보다 주의력이 강하다
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찍이 잘 손질한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산책하던 파리의 한 무지
한 사나이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단정하여, 나무는 날 때부터 잘려져 있다고 
말했다."(<연애론>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차이는, 각자가 살고 있는 상
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어째서 여자는 그 애인보다 로맨틱한가? "수틀 앞에 앉아 있
는 여자는 기계적으로 손만 놀리는 일을 하고 있으므로, 애인에 대해 몽상한다. 한편 남자 
쪽은 평원을 질주하는 기병대와 같아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아 한 동작이라도 그르치면 질
책을 받게 된다."
  세상사람들은 여자에게 양식이 없다고 비난한다. "여자는 이성보다 정서를 선호한다. 이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들의 평범한 습관에 의해 여자는 가족에게 아무 책임도 지지 
않기 때문에 이성은 조금도 소용되지 않는다. 당신의 아내에게 소유지 중에서 두 자리쯤 
선택하여 관리를 맡겨보라. 그녀는 틀림없이 장부를 당신보다 더 잘 처리할 것이다."

  역사상 여성 중에 천재가 적은 것은, 사회가 여성에게 자기표현의 수단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로 태어나는 천재는 만인의 행복을 위하는 것은 애초부터 진출이 막혀 있
다고 볼 수 있다. 그녀들에게 자기 실력을 말휘할 수단이 우연히 주어졌을 경우, 그녀들은 
가장 얻기 어려운 재능을 소유하게 된다." 여성에게 최악의 핸디캡은 교육의 기회가 막혀 
있다는 것이다. 압박자는 언제나 피압박자를 하찮은 존재로 머물게 하려고 노력한다. 남자
는 고의적으로 여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여자가 갖고 있는 가장 훌륭
한 소질은 헛되이 잠재워두고 있다. 그런 소질이 그녀들은 물론, 우리 모두의 행복에 크게 
유용한데도 말이다." 10세 때의 소녀는 형제보다 더 활발하고 더 영리하다. 20세가 되면 
개구쟁이 남자아이가 기지의 사나이가 되고, 여자아이는 요령없고 소심하고 거미를 무서워
하는 큰 바보가 되어버린다. 그것은 그녀가 받은 교육 때문이다. 여성에게도 남자아이와 
같은 정도의 교육을 시켜야 한다. 반여성론자들은 교육을 받은 현명한 여성을 '여자답지 
못한 여자'라고 주장한다. 이런 비난은 교육을 받은 여자는 아직 예외적인 존재라는 인식
에서 비롯된다.
  만일 여성에게 남성같이 교양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자도 자연스럽게 교
양을 갖게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자를 불구로 만들어놓고, 자연에 위배된 법도로 구
속하려고 한다. 여성의 의사를 무시하고, 결혼을 시키고, 정결을 강요하고, 이혼이 비행이
라도 되는 것처럼 책망한다. 노동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는데도, 여성의 대부분을 무위 
속에 방치한다. 이와 같은 여성의 생활조건이 스탕달에게 분노를 느끼게 하였다. 그는 여
기서 여성을 비난하는 모든 원인을 간파한다. 여성은 천사도, 악마도, 스핑크스도 아니다. 
여성은 우매한 사회풍습이 반쯤 노예로 만든 인간이다.
  그녀들 중에 가장 뛰어난 여성들이 그들의 압박자들을 추하게 하는 결함을 스스로 피하
려고 하는 것은, 자기들이 피압박자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남자보다 열등하지 않고 우수
하지도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역작용에 의해 불행한 그 입장이 오히려 그녀들에게 유익하
게 된다. 스탕달이 얼마나 '근엄한 정신'을 배격했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돈, 명예, 지
위, 권력 이런 것은 그에게 가장 시시한 우상처럼 보였다. 참으로 많은 남자들이 그런 우
상 때문에 자기를 잃어버리고 있다. 현학자, 권력자, 부자, 남편 등은 그런 자기 안에서 모
든 생명과 진실한 불꽃을 질식시켜버린다. 고정관념이나 빌려온 감정을 주입하고, 사회의 
관습에 복종하는 속이 비어 있는 인물, 이런 얼빠진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세계는 권태의 
사막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음산한 늪지대에서 잠자코 살아가는 여성이 많다. '편협한 파리
적인 사고'를 가진 인형들이거나 위선적인 독신자들이다.
  스탕달은 '정숙한 체하는 여자나 그 특징인 위선에 대해 큰 혐오'를 느꼈다. 그런 여자는 
자기들의 하찮은 일에서 남편이 과시하는 것과 같은 근엄성을 보인다. 교양이 없어서 어리
석고, 시기심이 많고, 허영심이 강하고, 수다스럽다. 무위한 생활을 하는 탓으로 심술궂고, 
냉혹하고, 인정미가 없고, 교만하다. 남에게 해로운 여자가 파리나 지방에도 많다. 레날 부
인(<적과 흑>에 나오는 여성)이나 샤스텔레 부인(<뤼시앙 뢰방>에 나오는 여성)의 고귀
한 모습의 배후에 그런 것이 우글거리고 있다.
  스탕달이 가장 증오하면서 공들여 묘사한 것은 롤랑 부인이나 메틸드 부인과 정반대인 
그랑데 부인(<뤼시앙 뢰방>에 나오는 여성)일 것이다. 미인이지만 표정이 빈약하고 남을 

얕보는 매력없는 여자. 그녀는 그 '유명한 부덕'으로 상대방을 두렵게 하지만, 영혼으로부
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수치심을 모르고 있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역할을 의식하는 데 
급급하며, 다만 외면적으로 위대성을 모방할 뿐이다. "그녀는 개성이 없다. 그래서 나를 따
분하게 한다." 하고 뢰방(뤼시앙의 아버지)은 생각한다. "아주 합리적이고 자기 계획의 성
곡에만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녀의 야심은 오직 남편을 장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녀의 
정신은 무미건조하다." 신중하고 타협적인 그녀는 언제나 연애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녀에
게 고귀한 마음의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메마른 영혼 속에 정열이 생겨도, 
그것은 빛을 내지 못하고 타버리도록 방치했다.
  스탕달이 여자에게 바라고 있는 것을 알아보려면, 위와 같은 여성상의 반대를 생각하면 
된다. 먼저 근엄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여자들은 세상에서 말하는 중요한 일들에 
손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일 때문에 제정신을 잃지 않는다. 스탕달이 무엇
보다도 높게 평가하는 자연성, 순진성, 관용성을 간직하고 있는 여성이 많다. 스탕달이 사
랑한, 그리고 애정을 갖고 작품에 묘사한 모든 여성에게 공통된 특성이 거기에 있다.
  여성도 자유롭고 진실한 존재이다. 그녀들의 자유는 어떤 여자에게는 참으로 화려하게 
드러나보인다. '이탈리아풍의, 루크레티아 보르지아풍의 고급창녀'였던 앙젤나 피에트라그
루아(스탕달이 젊었을 때 사랑했던 이탈리아 여자), 또는 '뒤 바리 부인풍의 창녀인 아쥐
르 부인(그녀도 스탕달이 사랑했던 여자)은 내가 만난 여자들 중에서 가장 인형적이 아닌 
프랑스 여자'로, 공공연히 사회풍습에 도전한다. 라미엘(<라미엘>의 여자주인공)은 습관
이나 풍속이나 법규를 조소한다. 상세베리나 부인은 열정적으로 음모에 가당하여 범죄 앞
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다른 여자들은 지성이 뛰어나 대중 위에 초연하다. 망타(스탕달의 애인)나, 사회를 경멸
하고 그런 사회에서 자기를 구별하려고 하는 마틸드 드 라몰르도 그런 타입의 여자이다. 
다른 여성들에게는 자유가 소극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 샤스텔레 부인에게 두드
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제2의 적인 모든 일에 일체 무관심한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의
사나 의견에 얌전히 따르면서도 부르주아적인 가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무관심을 사
람들은 유치하다고 비난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순진한 쾌활성의 원천이 된다. 클레리아 콩
티(<파르므의 승원>에 나오는 여자)는 신중성이 돋보인다. 그녀는 무도회나 세상의 젊은 
처녀들에게 습관이 되어 있는 오락에 대해서는 언제나 냉담하다. '주위에 대한 경멸이나 
어떤 막연한 공상에 대한 아쉬움에서' 그녀는 언제나 방심한 상태에 있었다. 그녀는 세상
을 판단하고, 그 저열함에 분개하고 있다.
  영혼의 독립성이 가장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은 레날 부인(<적과 흑>에 나오는 여자)이
다. 그녀는 자기의 운명을 체념하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도 모르고 있다. 그녀의 섬세한 마
음과 예리한 감수성은 저속한 자기 주위에 대한 혐오감을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그녀에게
서는 전혀 위선을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고귀한 심성을 갖고 있
었다. 그녀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 속에 숨어 있는 이 불꽃의 열기는 
밖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전신을 완전히 불태우기 위해서는 한 번 입
김을 훅 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런 여자들은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자기의 참된 가치의 원천은 외부에 

있지 않고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그녀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세력이 된
다. 그녀들은 그런 세계에서 꿈, 욕구, 쾌락, 감동, 창의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으로 권태를 
추방해 버린다. 저 '활동적인 영혼' 자체인 상세베리나는 권태를 죽음보다도 두려워하고 있
다. "권태 속에 정체되어 있는 것은 죽지 않는 체하는 것이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 뭔가에 열정을 갖고 행동하여 언제나 쾌활하다." 모든 
여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유치하든 생각이 깊든 간에, 경솔하든 신중하든 
간에, 대담하든 은밀하든 간에, 모두 인간이 빠지는 깊은 잠을 거부하고 있다. 자기의 자유
를 순수하게 보유하고 있는 이런 여자들은 일단 자기에게 적합한 대상을 만나게 되면, 정
열을 쏟아 곧 히로이즘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기력이나 에너지는 전적으로 앙가주망의 강
렬한 순수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유만으로는 그녀들에게 그토록 엄청난 매력을 주기에는 충분치않다. 순순한 자
유뿐이라면, 그것을 존중하지만 감동을 느끼지는 못한다. 마음을 강하게 움직이는 것은 자
유가 장애를 헤쳐나가 자기를 완성하려는 노력이다. 여자의 경우, 투쟁이 심한 만큼 이런 
노력이 더욱 감동적이다. 외부의 구속에서 벗어난 승리는 그것만으로도 스탕달을 기쁘게 
한다. 그는 <이탈리아 기록>(이탈리아의 옛날 기록을 소재로 하여 쓴 단편소설집)에서 
여자주인공들을 수도원에 깊숙이 가두거나, 그녀들을 시기하는 남편의 집에 가둬놓고 있
다. 그런 여자가 애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책략을 써야 한다. 비밀의 문, 줄사다리, 피
묻은 상자, 유괴, 감금, 살인, 정열과 반항의 광분, 이런 것들이 갖가지 수단에 의해 행동
으로 옮겨진다. 죽음이나 가혹한 고문이 그가 그려보이는 격앙된 영혼의 대담성을 더욱 두
드러지게 드러낸다.
  더욱 원숙한 후기작품에서도 스탕달은 여전히 이렇게 현저한 로마네스크를 사랑하고 있
는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속에서 우러난 로마네스크의 분명한 표시이다. 입과 미소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양자도 구분할 수 없다. 클레리아는 파브리스와 통신하기 위해 
알파벳을 고안하여 연애를 새로 창출했다. 상세베리나는 결코 신중하게 행동해 본 적이 없
는 언제나 경솔한 혼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가 음모를 꾸며 대공을 독살하고, 파르므의 
승원을 침수시킬 때, 그녀의 혼은 전모를 드러낸다. 그녀가 감행하기로 결심한 숭고하고도 
광적인 폭거야말로 그녀의 혼이다. 마틸드 드 라 몰르가 창에 기대놓은 사다리는 연극의 
소도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자존심에 찬 무모함, 이상취미, 도발적 
용기의 구현이다. 이런 혼을 지닌 자의 품성은 적에게 에워싸였을 때 비로소 분명히 드러
난다. 감옥의 벽, 군주의 의지, 가족의 엄격성 등.
  그런데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구속은, 자기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경우에 자유의 갈
등은 가장 불안정하고 통렬하다. 그가 그리는 여자주인공들이 가혹한 포로일수록 스탕달의 
공감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는 인습을 완전히 타파하는 창녀(숭고하든 숭고하지 않든 간
에)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러나 그는 신중함이나 수치심으로 억제하는 메틸드에게 더욱 깊
은 애정을 보내고 있다. 뤼시앙 뢰방은 해방된 여성 타입인 오캥쿠르 부인의 곁에서 즐기
고 있지만,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순결하고 얌전하고 곧잘 주저하는 샤스텔레 부
인이었다. 그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상세베리나의 전적인 혼을 찬양하다. 그러나 
클레리아를 더 좋아한다. 파브리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녀이다. 그리고 자존심과 편

견과 무지에 얽매여 있는 레날 부인은 아마도 스탕달이 창조한 모든 여성 중에서 가장 그
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는 즐겨 여성인물을 시골의 비좁은 환경 속에서 어리석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감시를 
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 여자가 교양도 없고, 허망한 사상에 얽매여 있는 것을 
선호한다. 레날 부인과 샤스텔레 부인은 모두 완고한 정통 왕조주의자이다. 전자는 소심한 
성격에 아무 경험도 없는 여자이고, 후자는 뛰어난 지성을 갖고 있으나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두 여자 모두 자기의 과오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나 사회
풍습의 희생자이다.
  시가 좌절에서 생기는 것처럼, 로마네스크는 과오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사리를 잘 판단
하여 행동하는 명쾌한 태도를 냉정하게 인정하거나 비난한다. 한편 암흑 속에서 자기 길을 
탐구하는 고결한 용기나 책략을, 우리는 걱정과 동정과 빈정대는 심정으로 찬탄한다. 그녀
들은 기만당하고 있으므로, 수치심, 자존심, 미묘함과 마찬가지로 무익하고 매혹적인 미덕
이 아름답게 꽃을 피운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결점이다. 그것은 거짓말, 
노여움, 과민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여자가 사소한 일이나
 '감정적으로만 중요성을 갖는 일'에 자존심을 느끼는 것은, '이른바 중요한' 모든 사물은 
그녀의 손에 닿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수치심은 자기가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의존관계에서 비롯된다. 행동으로 자기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여
자는 그 존재 전체를 걸려고 한다. 타인의 의식, 특히 애인의 의식에 의해 자기의 진실이 
밝혀지는 듯한 생각이 든다. 그녀들은 이것이 걱정스러워 거기서 벗어나려고 한다. 도피, 
저주, 반항, 기만 속에서도 가치를 발견하려는 마음이 나타나 있다.
  여자들의 이런 태도는 존경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심경이 어색하고 기만적인 형태
로까지 표현되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들 자신이 감동되어 다소 우습게 보이기도 한다. 자
유가 자기함정에 빠져 자기 자신을 기만하려는 듯이 보일 때 그것은 가장 인간적이다. 그
래서 스탕달에게도 가장 매혹적으로 보인다. 스탕달이 작품에서 다루는 여성은 그 마음에 
예기치 않은 무제가 떠올랐을 때 감동적이다. 그때에는 어떤 법이나 수단 또는 분별등, 밖
에서 주어진 어떤 전례도 지도력이 되지 못한다. 그녀들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고독은 자유의 극단적인 순간이다. 클레리아는 자유주의사상으로 성장한 총명하고 분별있
는 여자이다. 그러나 남에게서 배운 의견은 옳든 그르든, 정신적인 갈등에 아무 도움도 주
지 못한다. 레날 부인은 자기가 존중하던 도덕을 어기고 쥘리앙을 사랑항다. 클레이아는 
그녀의 이성을 거역하고 파브리스를 구제한다.
  이 두 경우에, 모든 가치에 대한 동일한 초월을 볼 수 있다. 이 대담성이 스탕달을 감격
하게 한다. 그리고 이 대담성은 대부분 분명하게 고백하지 않으므로 더욱 감동적이다. 레
날 부인에게는 과감성이 순진성에 가려져있다. 그녀는 아직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므로 그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지고 만다. 마치 지금까지 어둠 속에서만 살
았기 때문에 정열의 찬란한 불꽃 앞에서 무방비상태가 되는 느낌이다. 신과 지옥을 망각하
고 사랑을 받아들여 현혹된다.
  이 불꽃이 꺼지면 그녀는 다시 남편이나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간

다. 그녀는 자기의 판단에만 의지하지만 명백한 증거에는 꼼짝도 못 한다. 그녀는 쥘리앙
을 다시 만나자 자기를 그에게 맡긴다. 그녀의 후회와 고해신부가 그녀에게 억지로 쓰게 
한 편지 등은, 이 열렬하고 성실한 그녀가 사회에 의해 갇혀 있던 감옥에서 탈출하여 행복
한 천상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먼 길이 가로놓여 있는지를 알려준다.
  클레리아에게는 마음의 갈등이 더욱 뚜렷하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성실과 애인에 대
한 동정 사이에서 망설이게 된다. 그리하여 마음속에서 좀 더 그럴싸한 명분을 찾아내려고 
한다. 스탕달이 인정하는 가치의 승리는 위선적인 문명의 희생자들에게는 패배로 생각되므
로, 그에게 더욱 빛나 보인다. 그는 그런 자들이 믿고 있는 허위에 대하여 정열과 행복의 
진리가 승리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 책략을 동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클레리아가 성모
에게 파브리스를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도, 눈을 감는 조건으로 그의 키스와 포
옹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스탕달은 샤스텔레 부인의 망설임과 마틸드 드 라 몰르의 모순된 행동도 모두 애정어리 
아이러니로 보고 있다. 단순하고 당연한 목적에 도달하기위해 이처럼 많은 우여곡절과 숨
은 승리와 패배가 있다는 것은 그에게는 대단히 재미있는 희극이다. 이런 드라마에는 우스
운 데가 있다. 등장하는 여배우가 비판자인 동시에 당사자이며,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속
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을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법령만 있으면 충분한
데, 복잡한 여러 갈래의 길을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복잡성은 고결한 마음을 
괴롭힐 수 있는 가장 존중해야 할 배려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자
기 스스로 존경받을 만한 인간이기를 원한다. 타인의 평가보다 자기평가를 높이 사고, 자
기를 하나의 절대적인 존재로 실현한다. 이 메아리 없는 독한 마음의 갈등은, 내각의 위기
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 샤스텔레 부인이 뤼시앙 뢰방의 사랑에 응할까 말까 망설이
고 있을 때, 그녀는 자기와 세계에 대해 결단을 내린다. 남을 신뢰해도 괜챦을까? 자기 자
신의 마음을 믿어도 좋을까? 사랑이나 맹세의 가치는 무엇인가? 믿고 사랑하는 것은 무분
별한 행위인가, 고귀한 형식인가? 이런 의문은 인생의, 개개인 또는 모두의 인생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분별이 있다는 인간은, 자기 인생에 대한 기존의 의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경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열적이고 사려깊은 여성은 기존의 가치를 순간순간 음미하고 검토한다. 그녀는 
의지할 것이 없는 자유의 부단한 긴장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녀는 순식간에 전부를 얻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다. 스탕달이 
여성의 이야기에 영웅적인 모험의 색조를 가미하는 것은, 그녀들이 불안 속에서 이런 모험
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생에 건 것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다. 각자의 몫이며, 그
녀의 유일한 몫인 실존의 의미 자체인 것이다. 미나 드 방겔(같은 이름의 소설에 나오는 
여자주인공)의 과감한 생활방식은 어처구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모든 모럴을 거기에 걸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생애는 오산이었을까? 그녀의 행복은 8개
월 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은 이 세상의 현실에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열렬한 혼백이었다."
  마틸드 드 라 몰르는 클레리아나 샤스텔레 부인만큼 솔직하지 않다. 그녀는 자기의 행동
을 사랑이나 행복의 명백한 증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으로 규제하고 있
다.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자기를 낮추기보다는 높이는 것이, 굴복하는 것보다 저항하는 

것이 과연 자존심을 살리는 것인가?
  그녀도 여러 가지 의문에 사로잡혀 생명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그 자존심을 걸려고 한다. 
이것은 무지와 편견과 기만의 어둠을 통하여 정열이 출렁대는 강렬한 빛 속에 진실하게 
사는 이유를 열렬히 탐구하는 것이다. 여자의 이와 같은 생활방식에 로마네스크한 영광을 
부여하는 것은, 거기에 행복이냐, 죽음이냐, 위대한 승리냐, 굴욕이냐 하는 무한한 모험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물론 자기가 발산하는 매혹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자기를 응시한 채 어떤 역
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태도이다.자기를 롤랑 부인과 비교하는 그랑데 부인
은 이것만으로도 그녀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마틸드 드 라 몰르에게 매력
이 있는 것은, 그녀가 하고 있는 코미디 속에서 혼란을 일으켜 자기 마음을 잘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오히려 자기 마음의 포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의지에서 벗어
나는 정도에 따라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러나 순수한 여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
는다. 레날 부인은 자기 매력을 모르고 있으며, 샤스텔레 부인은 자기의 총명을 알지 못한
다. 이 점이 이들 여성의 애인이 되는 남성의 가장 큰 기쁨의 하나이므로, 그 연인에게 작
가나 독자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연인이란 이런 은밀한 부를 드러내주는 증인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
져 있을 때, 레날 부인이 보여주는 그 생기발랄한 태도, 주위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샤
스텔레 부인의 '섬세하고 변화무쌍하고 깊이있는 정신', 이런 것은 연인만이 찬양할 수 있
다. 상세베리나 부인의 기상은 다른 사람들도 잘 알고 있지만, 연인만이 그 혼백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할 수 있다.
  여성을 상대로 남성은 관조의 기쁨을 맛본다. 그는 좋은 경치나 그림을 보았을 때처럼 
도취된다. 여성은 그의 마음속에서 노래하고, 하늘에 색조를 더한다. 이런 계시에 의해 남
성들은 자각한다. 여성의 섬세함과 감수성과 열정을 이해하려면, 자기도 섬세하고 민감하
고 정열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여성의 감정은 여러 가지 뉘앙스와 마음의 한 세계를 이
루고 있으며, 이 세계의 발견은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살찌게 한다. 레날 부인의 곁에 
있는 쥘리앙은, 자기가 되려고 결심했던 그 야심가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 그는 자기
를 새로이 선택한 것이다. 남성이 여성에 대해 단지 표면적인 욕구만을 갖고 있다면 여성
을 유혹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연애는 그의 삶에 큰 변화를 준다.
  "베르테르식의 사랑은 영혼을... 미의 감각이나 즐거움에 개방하다. 설사 초라한 옷을 걸
치고 나타나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부라는 것이 행복을 발견하게 한다..."
  "그것은 모든 것과 관계되는 인생의 새로운 목표이며, 그것에 의해 모든 양상이 변한다. 
정열적인 연애는 남성의 눈에 자연 전체를 마치 어제 창조된 새로운 것처럼 그 숭고한 경
관과 더불어 비춰준다."
  사랑의 나날의 매너리즘을 깨뜨리고, 권태를 추방한다. 스탕달은 권태를 큰 악으로 본다. 
거기에는 살기 위한, 혹은 죽기 위한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연인은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으며, 이것만으로 하루하루가 하나의 모험이 되기에 충분하다. 스탕달에게 망타의 
집 지하실에 숨어 지내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었던가. 줄사다리나 피묻은 상자는 그의 
소설에서 이런 이상기호를 표현하고 있다.

  사랑, 곧 여자는 실존의 참된 목적을 분명히 알려준다. 미, 행복, 감각과 세계의 신선미 
등을. 그것은 남성에게서 혼을 빼앗아갔다가 다시 소유하게 한다. 사랑하는 남성은 애인과 
동일한 긴장과 모험을 알고 있다. 그리고 더욱 진지하게 자기를 경험하게 된다. 쥘리앙이 
마틸드가 세워놓은 사다리 밑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그는 앞으로의 전생애를 여기에 걸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순간에 그의 진가가 분명해진다. 여성을 통하여, 여성의 영향하에, 
여성의 반동에 의해, 쥘리앙과 파브리스와 귀시앙은 인생수업을 하게 된다. 스탕달에 의하
면 여성은 시련, 보상, 심판자이자 친구로서, 헤겔이 한때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던 것이 되
어 있다. 그것은 상호간의 인식중에 같은 진리를 부여하는 다른 의식으로, 그 진리는 여성
이 다른 주체에게서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랑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행복한 한 쌍의 
남녀는 세계도 시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기 둘만으로도 만족해하고 절대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여성은 단순한 '타자'여서는 안 된다. 여성 자신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스탕달은 결코 여자주인공을 남성 등장인물과의 관계로만 다루지 않았다. 그는 
여성 등장인물에게 그 자신의 운명을 부여하고 있다. 한 걸음 나아가서 그는 일찍이 어떤 
소설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더욱 희귀한 기도를 시도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한 여성 등장
인물 속에 던져버렸던 것이다. 그는 마리보가 마리안느라는 인물에게, 리처드슨이 클라리
스 할로라는 인물에게 한 것처럼 약간 몸을 굽혀 들여다보는 정도가 아니다. 그는 쥘리앙
의 운명에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이 여자 주인공의 운명과 하나가 된다. 그 때문에 라미
엘의 모습은 좀 이론적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스탕달은 처녀의 주위에 온갖 
장애를 늘어놓았다. 그녀는 가난한 시골처녀로 무지하고 온갖 편견으로 뭉쳐진 사람들에 
의해 거칠게 성장한다. 그러나 그녀가 '이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짤막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날부터 자기가 갈 길의 모든 도덕적인 장벽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녀의 자유로운 
정신은 호기심이나 야심, 희열의 여러가지 충동을 스스로 책임지게 한다. 이런 마음에는 
물질적인 장애가 조금도 방해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그녀 자신이 평범한 사회에
서 자기 능력에 상응한 생애를 개척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쥘리앙의 운명이다. 있는 그대
로의 사회에는 위대한 혼이 있을 곳이 없다. 남녀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
  스탕달이 그토록 로마네스크이며 동시에 페미니스트였던 것은 주목해야한다. 흔히 페미
니스트는 모든 일에 보편적인 입장을 취하는 합리적인 정신의 소유자이다. 스탕달이 여성
의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자유때문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이다. 그
는 여성을 해방한다고 해서 연애가 그 때문에 손해를 볼 것은 조금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
히려 여성이 남성과 대등해지기 때문에 남성을 더욱 잘 이해할 것이므로 사랑이 보다 진
실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의 어떤 특징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특징의 
가치도 거기에 나타나 있는 자유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로마네스크는 결코 세계에서 사라
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상황에 놓인 별개의 두 존재가 자유 속에 대립되어 서로 상대방을 
통하여 실존의 의의를 찾으면서 언제나 위험과 약속으로 충만한 모험을 하면서 살아갈 것
이다.
  스탕달은 진리를 신뢰하고 있다. 인간이 진리를 회피하면, 살아 있으면서 죽어가게 된다. 
진리가 빛나는 곳에 미와 행복과 사랑과 환희(그 자체속에서 의의를 갖는)가 빛나는 것이

다. 그래서 스탕달은 진실을 가장한 기만을 배격하는 동시에 거짓된 신화의 시도 거부한
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현실만으로 충분하다. 그에 의하면 여성은 오직 인간적인 존재일 
뿐이다. 몽상으로도 그 이상 매혹적인 것을 만들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예에서, 개개의 작가에게 집합적으로 커다란 신화가 반영된 것을 알 수 있
을 것이다. 여성은 우리에게 육체로 나타난다. 남성의 육체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고 애인
의 포옹 속에서 재창조된다. 여성은 자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자연을 육체화하고 있다. 
짐승, 피의 골짜기, 피어난 장미, 요부, 언덕의 곡선, 이런 것으로서 여성은 남성에게 부식
토, 수액, 세계의 감각미와 영혼을 제공한다. 여성은 신의 비밀을 보유하고 있을 수 있다. 
여성은 현세와 내세와의 매개자일 수 있다. 미의 신 또는 무녀로서 초자연적, 초현실의 문
을 열 수 있다. 그녀는 내재에 바쳐져 있다. 그 수동성에 의해 평화와 조화를 풍기고 있다. 
여성이 이 역할을 거부하면 금세 버마재비나 식인귀가 된다. 어쨌든 여성은 주체가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를 완성하는 특수한 '타자'이다. 즉 남성이 갖는 수단(척도)의 하나, 그 균
형, 구제, 모험, 행복이다.
  그러나 이런 신화는 각자에게 다르게 윤색된다. '타자'는 각각 '개인'이 자기를 확립하는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남성은 자기를 자유 또는 초월로서 주장하지만, 이것에 모두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몽테를랑의 경우, 초월은 하나의 상태이다. 그는 초월자로서 영웅의 창공을 날아다니고 
있다. 여성은 지상에, 그의 발 아래서 굴러다니고 있다. 그는 여성과 자기 사이에 떨어져 
있는 거리를 재는 것을 좋아하여, 때때로 여성을 자기 쪽으로 끌어올리고는 다시 던진다. 
그는 결코 끈적거리는 암흑의 장소까지 내려오지 않는다.
  로렌스는 초월을 남근 속에 둔다. 남근은 여성을 통해서만 생명과 힘이 된다. 그러므로 
내재도 선이고 필요이다. 땅에 닿지 않으려는 가짜영웅은 반신이기는커녕 한 사람의 인간
도 되지 못한다. 여성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부이며 뜨거운 샘이다. 그러나 여성은 개인
적인 초월은 일체 단념한 채 남성의 초월을 키우고 돕는 것에 그쳐야 한다.
  클로델도 이와 동일한 헌신을 여자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 의하면 여성 역시 
생명을 유지하는 존재이며, 남성은 행위에 의해 생명의 약동을 연장해 나간다. 카톨릭신자
에게는 이 지상에서 하는 일들은 모두가 공허한 내재 속에 잠겨 있다. 유일한 초월자는 신
이다. 신의 눈에는 행동하는 남성이나, 남성에게 봉사하는 여성 모두 동등하다. 자기의 지
상적인 조건을 초월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 있다. 어쨌든 구원은 자주적인 기도이다.
  브르통의 경우는 성의 계급질서가 거꾸로 되어 있다. 남성이 그 초월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의식적인 사고는 어리석은 기만이며, 전쟁과 만행, 관료주의, 인간성의 부정 등은 여
기서 비롯된다. 진리는 오히려 내재, 현실의 불투명한 모습 자체이다. 진정한 초월은 내재
를 뒤집을 때 성취된다. 브르통의 태도는 몽테를랑과 정반대이다. 몽테를랑은 여성에게서 
해방되기 때문에 전쟁을 사랑하낟. 브르통은 여성이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여성을 존경
한다. 전자는 지성과 주관성을 혼동하고 주어진 세계를 거부한다. 후자는 지성은 세계의 
중심에 객관적으로 현존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그의 고독을 채워주기 때문에 몽테를랑에
게는 해를 끼친다. 브르통에게는, 여성이 그를 주관성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에 계시가 
된다.

  스탕달의 경우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여성은 거의 신화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 않
다. 여성도 하나의 초월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휴머니스트에게 있어서는 자유와 자유가 
상호적인 관계를 이루는 데서 자기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인생이 '짜릿한 소금맛'을 갖기 
위해서는, '타자'가 또 하나의 타자인 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별과 같은 안정'을 원하지 않
고, 혐오의 양식을 먹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기적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우주나 시
를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기적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우주나 시를 상대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자유만을 상대하려 한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투명한 자유로 경
험한다. 다른 사람들(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의 하나이지만)은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로 생
각하지만, 자기 안의 불투명한 어떤 것의 포로라고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여자 속에 이 '
어둠의 깨어지지 않는 핵'을 투사한다.
  몽테를랑에게는 거기서 불투명한 기만이 생기는 아들러적 콤플렉스가 있다. 자부와 공포
가 섞인 것을 그는 여성 속에 구체화하여 생각한다. 그가 여자에 대해 갖는 혐오는, 자기 
자신에게서 느껴지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는 기분이다. 여성 속에 자기의 불만스러운 결
점이 나타날 가능성을 짓밟아버리려는 것이다. 여성은 그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모든 괴물
을 던져 버리려는 구멍이다.
  로렌스의 일생은, 이와 비슷한 콤플렉스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콤플렉스는 순전히 성적인 것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여성은 보상의 신화적 가치를 지
니고 있다. 작가가 충분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은 남성의 능력이 여성에 의해 높이 평가된
다. 그가 동 시프리아노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있는 케이트를 묘사했을 때, 그는 남성이 
프리다(로렌스의 애인)를 이겼다고 생각한다. 그도 여성에 의해 자기 능력이 의심받는 것
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여성이 자기의 목적을 트집이라도 잡는다면, 그 목적을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이 그에게 자신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한다. 몽테를랑이 여성에게서 자
기의 우월성을 구하는 것처럼, 그는 여성에게서 평화와 휴식과 신념을 구한다. 두 사람 모
두 자기에게 없는 것을 여성에게서 구하는 것이다.
  클로델에게는 자신감이 부족하지는 않다. 그가 소심하다고 해도 그것은 신의 비밀 안에
서였다. 그러므로 그의 경우, 성의 투쟁은 조금도 없다. 남성은 여성의 무게를 용감하게 짊
어진다. 여성은 유혹과 구제의 기회이다.
  브르통에게 있어서 남성은 그의 내부에 깃든 신비에 의해서만 진실한 것으로 생각된다. 
남성은 그가 향해 나아가는 별, '마음이 없는 꽃의 마음'과 같은 그 별을 본다고 말하는 것
이 호감이 갔다. 남성의 꿈, 예감, 내연의 언어에서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그가 인
정하고 있는 자기의 의지나 이성의 통제를 깨고 흘러나온다. 여성은 남성의 의식적인 인격
보다는 훨씬 본질적인, 숨겨진 무엇의 감각적인 모습이다.
  스탕달은 자기 자신과 평온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그는, 여성이 그를 필요로 하는 것처
럼 여성을 필요로 한다. 뿔뿔이 흩어진 실존이 어떤 한 사람의 모습이나 한 운명의 통일 
속에 분명히 정리되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존재에 이르는 것은, 다른 인간에게 도달하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다른 인간이 그에게 그 의식을 빌려줘야 한다. 타인은 같은 동료인 
인간에게 너무 냉담하다. 사랑하는 여성만이 애인에게 자기의 마음을 열어 그를 거침없이 
들어가게 한다.

  신에게서 이상적인 증인을 발견한 클로델을 제외하고는 앞에서 고찰해본 모든 작가들은 
말로의 말에 의하면, 그들만 알고 있는 자기 틀 속의 '무비의 괴물'을 여성이 사랑해 줄 것
을 기대하고 있다.  협력하든 투쟁하든, 남성들은 일반적으로 대립상태에 있다. 몽테를랑은 
다른 남성들에게는 작가이고, 로렌스는 이론가이며, 브르통은 어떤 예술 유파의 지도자이
다. 또한 스탕달은 외교관이자 문사이다. 여성은 어떤 남자에게서 호탕하고 잔인한 왕자를 
발견하는가 하면 방심할 수 없는 동물적인 인간을, 또 다른 남성에게서는 신이나 태양, 또
는 '스핑크스의 발치에 쓰러진 차갑고 음울한 (<나자>에서)' 존재를, 혹은 호색한, 유혹
자, 연인 등 숨은 정체를 드러내준다.
  각자에게 이상적인 여성은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보이는 '타자'를 정확히 구현하고 있는 
여성이다. 고독한 정신을 지닌 몽테를랑은 여자에게서 순수한 동물성을 구한다. 남근숭배
자인 로렌스는 여성의 성을 그 일반성 속에서 요약하려고 한다. 클로델은 여성을 여동생과 
같은 영혼으로 정의한다. 브르통은 자연 속에 뿌리를 내린 멜뤼진을 사랑하고, 자기의 희
망을 어린이와 같은 여성에게 건다. 스탕달은 자기 애인이 총명하고 교양있고, 정신이나 
행동이 자유롭기를 바란다. 즉 자기와 대등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대등한 자에게, 어린
이와 같은 여성에게 건다. 스탕달은 자기 애인이 총명하고 교양있고, 정신이나 행동이 자
유롭기를 바란다. 즉 자기와 대등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대등한 자에게, 어린이아 같은 
여성에게, 자매인 여성에게, 성인 여성에게, 짐승인 여성에게 준비되어 있는 유일한 지상의 
운명은 언제나 남성이다. 여성을 통하여 자기를 구하는 에고(자아)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여성이 자기에게 용광로(시련)로서 유용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도착할 수 
없다. 어느 경우에도 여성에게는 자기망각과 사랑을 강하게 요구한다.
  몽테를랑은 자기에게서 남성의 권위를 구하는 여성에게 동정을 보낸다. 로렌스는 자기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여성에게 열렬한 찬사를 보낸다. 클로델은 남성에게 복종함으로써 신
에게 복종하는 추종자, 하녀, 헌신하는 여자를 찬양한다. 브르통은 여성이 자식이나 애인에
게 전적으로 사랑을 바칠 수 있으므로 여성에게 인류의구제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스탕
달의 경우에도 여성 작중인물이 남성보다 감동적인 것은 여성들이 남성보다 뜨거운 정열
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프루에즈가 로드리그의 구제에 공헌하는 것처럼, 운명을 개
척하는 남성을 돕고 있다.
  스탕달의 소설에서는 여성이 애인을 파멸이나 감옥, 죽음에서 구출하는 경우가 많다. 몽
테를랑이나 로렌스는 여성의 헌신을 하나의 의무로 요구한다. 클로델, 브르통, 스탕달은 이
처럼 여성의 헌신을 고귀한 선택으로 찬양한다. 그들은 자기가 거기에 합당하다고 자부하
지는 않지만 바라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작품은(놀라운 라미엘은 제외하고) 그들
이 여성에게 애타주의를 기대하고 있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콩트가 여성에게 의무로 
부과한 애타주의이다. 콩트의 견해에 의하면 그 애타주의는 명백한 열등성인 동시에 애매
한 우월성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더 들 수 있지만, 언제나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여성을 정의
함으로써 작가는 각자 자기의 일반적인 윤리와 개성적인 사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그리
고 여성에 대한 생각으로, 세계에 대한 자기의 관점과 에고이스틱한 꿈과의 모순을 드러내
고 있다. 그 작품 전체에 여성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거나 보잘것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이를 분명히 입증하는 것이다.
  로렌스의 경우처럼, 이 요소가 '타자'의 양상으로 요약되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
성을 단지 타자로서 파악하고 있지만, 작가가 그 여성 개개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있을 때
에도(이것은 스탕달의 경우지만) 중요성을 갖게 된다. 오늘날과 같이 각 개인의 문제가 제
2의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는, 그런 중요성은 상실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이 자기초월을 위해서라도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을 때에는, 여성은 여전히 
타자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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