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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유물사관의 입장

by FraisGout 2020. 7. 26.

  유물사관의 이론은 대단히 중요한 여러 가지 진리를 밝히고 있다. 인간은 동물의 일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현실이다. 인간사회는 반자연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수동적으로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자연을 변혁 한다. 이 변혁은 
내적으로, 주관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천 속에서 객관적으로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자도 단지 성을 지닌 유기체로만 볼 수는 없다. 생물학적인 여러 가지 조건 
속에서 중요성을 갖는 것은 행위 속에 구체적인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의식은, 그 성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다. 그 의식은, 인간이 도달한 
기술적인 진화의 단계를 나타내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에 의해 좌우되는 하나의 상황을 반
영하고 있다. 앞에서도 고찰한 것처럼, 생물학에서 여자를 규정하는 두 가지 본질적인 특
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세계에 대한 여자의 파악은 남자보다 좁은 범위로 제한되어 
있고, 여자는 남자보다 종에 엄격히 예속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도 경제적, 사회적 관계에 따라 전혀 다른 가치를 갖게 된다. 인류 역
사에서 세계에의 파악은 결코 벌거벗은 육체에 의해 규정되지는 않는다. 손은 물체를 잡는 
엄지손가락에 의해 그 힘을 배가하는 도구로서 이미 자기를 초월해 있다. 인류 역사가 시
작되기 전의 가장 오랜 문헌에도 인간은 언제나 무기를 갖고 나타난다. 육중한 막대기를 
휘둘러서 야수의 공격을 막아야 했던 시대에는, 여자의 나약한 육체는 분명히 열등해 보였
다. 여자가 행사할 수 있는 힘보다 약간 큰 힘을 도구가 요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
자는 대단히 무능력해 보였다. 그러나 기술이 남자와 여자 사이를 떼어놓는 육체적인 차이
를 없애는 경우도 있다. 강한 힘을 갖고 있어도, 필요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우세한 
것이 못 된다. 많이 갖는 것은 충분히 갖는 것보다 우세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근대적인 기계를 많은 사람들이 다룰 경우에, 남성의 힘은 그 일부만 필요로 
할 뿐이다. 그 필요의 최저한도가 여성의 능력을 능가하지 않을 경우에 여성은 노동에 있
어서 남성과 동등하게 된다. 사실 오늘날에는 단추 하나만 눌러도 거대한 에너지를 작동시
킬 수 있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일은 풍습에 따라 그 중요성이 크게 달라진다. 아기를 
많이 낳도록 강요받거나,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아기를 길러야 할 경우에는 대견해 보인
다. 그러나 만일 여자가 아기를 자기 의사대로 낳을 수 있으며 사회가 임산부를 도와주고 
아기를 돌봐준다면 어머니의 부담은 훨씬 가벼워지고, 그 대신 노동분야에서 쉽사리 그것
을 보상할 수 있게 된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엥겔스는 <가족의 기원>에서 여성의 역사를 쓰고 있다. 이 역사
는 본질적으로 기술의 역사에 좌우된다. 석기시대에 씨족 전원이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했
던 시대에는 원시적인 삽과 괭이의 기능이 저조했으므로 농경의 규모도 제한되어, 농경에 
필요한 노동력은 여성의 체력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노동의 원시적인 분화 속에서 남녀 양
성은 이미 두 계급으로 구분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두 계급 사이에는 평등이 있었다. 
남자는 사냥과 고기잡이에 종사하고 여자는 가정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가정의 임무 중
에는 생산적인 노동, 즉 토기의 제작이나 직조, 원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여자

는 경제생활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후 구리, 주석, 청동, 철 등의 발견으로 쟁기를 만들게 되어 농업의 규모가 커졌다. 삼
림을 개간하고 벌판을 경작하기 위해서는 중노동이 필요했다. 그래서 남자는 다른 남자의 
도움을 구하여 그들을 노예로 부렸다. 여기서 사유재산이 생기게 되었다. 노예와 땅주인인 
사나이는 또한 여자의 소유자가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여성의 역사적인 대패배'이다. 이 
패배는 새로운 도구의 발명에 의한 노동의 구분에서 일어난 혼란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집 
안에서 여자에게 지금까지의 권한을 보강했던 원인, 즉 여자가 집 안 노동에만 종사하고 
있었다는 그 원인이, 이제는 집 안에서 남자의 지배를 보장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여자의 
집 안 노동은 남자의 생산노동 앞에서 퇴색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남자는 전부가 되었고 여
자는 초라한 부속물이 되었다." 이제부터 아버지의 권리가 어머니의 권리에 대치되었다.
  토지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상속되고, 아내에게 상속되지 않았다. 이것이 사유재산을 
기반으로 한 가부장 가족의 출현이다. 이런 가족 속에서는 여성이 압박을 받게 마련이다. 
지배자로 군림하는 남성은 무엇보다도 성을 마음대로 취급하게 된다. 그는 노예나 창녀와 
동침한다. 그리하여 혼자서 많은 아내를 거느리게 된다. 풍습이 평등한 행동을 인정하게 
되면, 여자는 곧 부정으로 보복한다. 그리하여 결혼에는 당연히 간통이 뒤따르게 된다. 이
것이야말로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가정에서의 노예상태에 대해 여자가 취할 수 있는 유
일한 방어수단이다. 여자가 받는 사회적인 압박은 경제적 압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두 
성이 법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갖게 되어야만 비로소 평등이 회복된다. 그 해방을 위해서는 
모든 여성이 공적인 생산이 복귀해야 한다.
  "여성해방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녀가 사회적인 생산에 참여할 수 있고, 집안일이 그녀
에게 아주 적은 부담을 주게 될 때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대규모의 여성노
동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근대의 대규모 산업에 의해서이다."
  이와 같이 여성의 운명과 사회주의의 운명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하여는 
베벨(독일의 사회주의자, <여성론>의 저자, 1840~1913)이 여성을 위해 쓴 방대한 저서
에도 나타나 있다. "여성과 프롤레타리아는 모두 피압박계급이다." 양자를 해방시키는 것은 
기계산업이 가져온 변동에서 비롯되는 경제의 발전이다. 여성문제는 그 노동능력의 문제로 
귀착된다. 기술이 여자의 능력에 적합했던 시대에는 권위를 가졌고, 능력을 행사할 수 없
게 되면서 위신을 잃게 되었던 여성은 근대사회에서 남성과의 평등을 되찾게 된다.
  많은 나라들에서 이런 평등의 구체적인 실현을 방해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낡은 가
부장주의의 저항이다. 이 저항이 타파되는 날부터 평등은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이미 소
련은 그렇게 되어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사회주의적인 사회가 전 세계에 걸쳐서 실현될 
경우에는 남성과 여성은 없어지고, 다만 서로 평등한 근로자만 남게 될 것이다.
  엥겔스에 의해 시도된 종합적인 이론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이론보다 진일보하고 
있으나, 이 이론 또한 우리를 실망시킨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인류역
사의 중추가 되어 있는 것은 공유재산제도에서 사유재산제도에의 이행이지만, 그것이 어떻
게 실현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엥겔스 자신이 "지금은 그것에 대하여
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고 고백하고 있다.(<가족의 기원>, pp. 209~210) 그는 이에 
대해 역사적으로 자세히 알지 못하여, 어떤 해석도 암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유재산제도

가 필연적으로 여성을 예속되게 만들었다는 것도 분명치 않다. 유물사관은 설명이 필요한 
사항을 당연한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충분한 검토 없이 인간을 재산과 결부시키는 '
이해'의 유대를 정의할 뿐이다.
  그러나 이 사회제도의 근원인 이해는 그 자체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엥겔스의 
설명은 표면적인 데 그치고, 그가 발견한 진실은 우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유물
사관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진리를 더 이상 깊이 탐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물사관에서
는 우리가 지적한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는, 전인간과 관계되는 
것이지 추상적인 '경제적 인간'에만 관계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소유라는 관념도 실존자의 근원적인 조건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그
런 관념이 나타나려면 먼저 주체 속에 본질적인 특수성에 뿌리를 내리려는 경향이 있어야 
하며, 도한 자기가 독립된 자유로운 존재라는 주장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의향은 개인
이 객관적으로 그것을 만족시키는 실제적인 수단이 없는 한, 주관적이고 내적인 진실성이 
결여된 상태가 될 뿐이다.
  인간은 충분한 도구가 없었을 때에는, 세계에 대한 자신들이 힘을 의식하지 못했다. 인
간은 자연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집단 속에서 피동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미지의 힘에 농락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씨족 전체에 동화되어 자기를 생각하
려고 했다. 토템이나 마나나 대지는 집단적인 현실이었다. 청동의 발견은 인간에게 격심한 
생산적 노동의 시련 속에서 스스로 창조자임을 발견하도록 허용했다. 자연을 지배하게 되
면 자연은 두렵지 않다. 자연의 저항을 이긴 그는 자기를 자주적인 활동력이라고 생각하
여, 개개의 특이성 속에서 자기를 완성하기 위해 대담해진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완성을 근원적으로 원치 않았더라면, 이 완성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
을 것이다. 수동적인 주체에는 노동의 교훈도 성과를 남기지 않는다. 주체 자신이 도구를 
만들고 대지를 정복함으로써 자기를 단련하고 정복한 것이다.
  한편 주체의 확립만으로는 재산을 설명하는 데 충분치 않다. 도전, 전투, 특수한 투쟁 속
에서 각자 우월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도전이 포틀래치(북미 토인들의 물물교환 파티)의 
형태, 즉 경제적 경쟁의 형태를 취하고, 먼저 족장이, 다음의 씨족 전원이 사유재산권을 요
구하기 위해서는, 인간 속에 또 하나의 근원적인 경향이 있어야만 했다.
  앞장에서 실존자는 자기를 소외시켜야만 자기를 파악하게 된다고 말한적이 있다. 그는 
세계를 통하여 다른 양상 밑에서 자기를 구하고, 그것을 자기 모습으로 만든다. 토템이나 
마나나 그가 소유한 토지는 씨족이 소외된 실존이다. 개인이 공동생활에서 떠나게 되면, 
어떤 특수한 구현을 요구한다. 마나는 먼저 족장 속에서 개성화하고, 다음에는 개개인 속
에서 개성화한다. 동시에 개개인은 땅과 노동의 도구와 수확을 사유화하려고 한다. 그리하
여 자기가 얻은 부에서 인간이 다시 발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인간이 그와 같은 부에 
자기의 생명과 같은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이것으로 알 수 있다. 인간과 그 재
산에 대한 '관심'의 관계는 이렇게 해서 분명히 밝혀진다. 그러나 이 관계를 도구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 관계를 이해하려면 도구를 지닌 인간의 모든 태도를 파악해야 한다. 
이 태도는 존재론적인 하부구조와도 관계를 갖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제도에서 곧 여성 압박을 추론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한 엥겔스의 관점이 불충분한 것이 잇다. 그도 단지 그 청동이나 철제도구와의 
관계에서 여성의 육체적인 취약성이 구체적인 열등감으로 나타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능력의 한계는 어떤 일정한 부분에서만 구체적인 불리함을 수반하지 않
는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인간이 새로운 도구를 통하여 새로운 요구를 갖게 되는 것은, 
인간이 초월이고 야만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청동의 도구를 발견했을 때에는 채소밭을 가꾸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넓은 들을 
개간하여 경작하려고 했다. 이런 의지는 청동 자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여성의 무능
력은, 남성이 부를 늘려 세력을 확장하는 계획에 따라 여자를 다루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다. 여기서 여성의 패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의 내용을 검토하는 것만으로는 여
성이 압박받은 것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성에 의한 노동의 구분도 어쩌면 양성이 
우호적으로 협조하는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만일 인간과 인간의 근원적인 관계가 우호적이라면, 노예적인 유형의 존재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객관적으로 자기의 우월성을 완성시키려는 인간의 제국주의적인 
결과이다. 그 속에 '타자'의 근원적인 범주와 '타자'를 지배하려는 근원적인 의지가 없었던
들, 청동도구의 발견이나 여성 압박은 없었을 것이다. 엥겔스는 또한 이 압박의 특수한 성
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양성의 대립을 하나의 계급투쟁으로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도 별로 확신도 갖지 못한 채 그렇게 했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성에 의한 노동의 구분과 거기서 비롯되는 압박으로 어느 정도 계급적인 구분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양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계급의 구분 속에는 생물적인 
기반이 전혀 없다. 노동에서 노예는 지배자에 대해 자기를 의식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언제
나 반항 속에 자기의 처지를 실감한다. 이리하여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가 자기의 착취자를 
위협한다. 프롤레타리아는 계급의 소실을 원한다.
  나는 서론에서 여성이 남성과 연대책임을 갖게 하는 생활과 관심은 공통적이고 또 남성
이 여성을 협력자로 알기 때문에, 여성의 처지가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 언급했었다. 여자
에게는 혁명을 일으키려는 욕심은 없다. 여자는 성으로서 자기를 말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단지 성적인 특성에서 비롯되는 얼마간의 결과가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성을 단지 노동자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생산능력과 마찬가지로, 생식작용은 개인생활이나 사회, 경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
문이다. 쟁기를 다루는 것보다 아기를 낳는 쪽이 보다 유익한 시대도 있었다.
  그런데 엥겔스는 이 문제를 외면했다. 그는 사회주의적인 공동체는 가족 제도를 소멸시
킬 것이라고 선언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추상적인 해결책이다. 소련이 생산
과 생식의 직접적인 수요의 균형이 여러 모로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가정에 대한 정책을 
자주, 본질적으로 변경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족의 말살이 곧 여성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스파르타나 나치 시대의 예는, 여성이 국가에 직접 결부되어 있어도 여전히 남성에게 압
박을 받고 있었던 것을 잘 입증해 준다. 진정한 사회주의적 윤리관은 자유를 해치지 않고 
정의를 추구하며 개인에게 책임을 지게하지만 개성을 해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은 여자의 
신분에서 생기는 문제로 말미암아 대단히 복잡하다. 임신을 노동이나 군대와 같은 봉사와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자에게 아기를 낳도록 강요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할 일을 
법률로 통제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여성의 사생활을 파괴하는 것이다. 어떤 나라도 여
성에게 강제로 성교를 시키지 않았다. 여성은 성교나 모성 속에 시간과 힘뿐만 아니라, 본
질적인 가치도 바친다. 합리론적 유물주의가 이 성의 극적인 성격을 무시하려고 해도 소용
없다. 성본능은 규칙에 매이지 않는다.
  성본능이 그 속에 만족감을 거부하는 힘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프로이
트도 말했다. 확실한 것은, 색정 속에는 시간에 대한 순간적 반항과 우주에 대한 개인의 
반항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회와 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이용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을 해칠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자연 발생적인 것을 무기물처
럼 다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강요하듯이, 그 이상으로 성적 본능을 강요할 수는 
없다. 여성에게 아기를 낳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능한 일이라면, 어머니가 되
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가 되는 상황으로 여성을 몰아넣는 것이다. 법과 풍습이 여성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피임과 낙태와 그리고 이혼을 금지한다. 소련이 오늘날 부활시킨 것은 
이런 족장제도의 낡은 속박이었다. 결혼의 가부장주의적인 이론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에게 다시 성적 객체가 되기를 요구하는 결과가 되었다. 최근의 어떤 담화는 
소련 여성들에게 화장을 하고 분을 바르고, 남편의 욕정을 자극하기 위해 요염해지기를 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예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여성을 단지 생산적인 힘으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여성은 남성의 성적 배우자이고, 생식하는 자이며, 성적 객체이고, '타자'이다. 
남성은 이 타자를 통하여 자기를 구한다. 전체주의나 독재정치가 아무리 만장일치로 정신
분석학을 금지시켜도 소용없다. 그리고 국가에 충실한 시민들에게 개인적인 드라마가 개입
할 여지가 없다고 선언해도 소용없다. 색정은 그 일반성이 각 개인에게 파악되어 있는 하
나의 경험이다. 그리고 계급은 없어졌지만 개인은 존재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에서는, 개인
의 운명에 관한 문제는 매우 중요시될 것이다. 즉 성적 구분은 중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 
여성을 남성에게 결합시키는 성적 관계는 남성이 여성과 함께 지지하고 있는 관계와 동일
한 것이 아니다. 여성을 아기에게 결합시키는 유대는 다른 어떤 유대와도 비교할 수 없다. 
여성은 청동의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기계도 여성을 말살할 수 없다. 여성을 
위해 모든 권리, 보통인간이 되는 모든 기회를 요구하는 것은, 그녀의 특이한 상황에 눈을 
감아야 하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여성을 알려면, 남성과 여성 속에서 경제적인 단위밖에 
보이지 않는 유물사관 안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같은 이유에서 프로이트의 성적 일원론 및 엥겔스의 경제적 일원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정신분석학자는 여성이 모든 사회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남성적 반
항'의 현상으로 해석한다. 이와는 달리 유물론자는, 성은 다소 복잡한 우여곡절을 거쳐서 
경제적인 조건을 나타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음핵과 질 의 범주는 부르주아나 프롤레타
리아의 범주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여성을 가둬두기에는 무력하다. 인간의 경제사처럼 
개인의 드라마를 기초로 하여, 인생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전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실존적 
하부구조가 있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학성의 가치는 실존자가 육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즉 실존자가 

육체로서 다른 육체와 만나 자기를 느끼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그 실존상황을 나타내는 것
이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적인 이론에서 옳은 것은, 실존자의 존재론적 의향은 실존자에
게 제공되는 물질적인 가능성에 따라서, 특히 기술이 그의 개방하는 가능성에 따라서 구체
적인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향을 전적인 인간적인 현실과 일치시키지 않으
면, 성이나 기술도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에 있
어서 초자아에 의해 일어난 억제와 자아의 충동은 우발적인 사실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가족의 역사에 대한 엥겔스의 이론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항도 갑자기 신기한 우연에서 비
롯되는 것처럼 되어 있다.
  우리는 여성을 발견하기 위해 생물학이나 정신분석학이나 유물사관이 세운 여러 가지 
공헌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육체, 성생활, 기술 등은 인간 존재의 총체적인 전망 속
에서 파악되었을 때에만 구체적으로 존재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완력, 남근, 도구 등의 
가치는, 단지 가치의 세계에서만 정의할 수 있다. 가치는 실존자가 존재를 향해 자기를 초
원시키는 기본적인 투기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1
  이 세계는 언제나 남성이 소유해 왔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어느 하나
도 우리에게는 충분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선사학과 민속학의 성과를 실존주의 철학
의 빛으로 재조명해야만 비로소 남녀 양성의 계급이 이루어진 내막을 이행할 수 있을 것
이다.
  두 종류의 인간이 서로 만날 때에는 피차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
다. 만일 쌍방이 이 요구를 관철할 능력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양자 사이에 대립의 형태
를 취하든 우정의 형태를 취하든, 긴장상태 속에서 대등한 관계가 형성된다. 만일 어느 한
쪽이 특권을 누릴 경우에는 다른 쪽을 이겨 계속해서 압박하려고 한다. 이것으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 이유도 납득이 가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남성은 어떤 
특권 때문에 이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을까?
  인간사회의 원시형태에 대해 민속학자가 제공하는 자료는 크게 모순되어 있다. 그 자료
는 풍부하지만 체계가 서 있지 않아 더욱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농경기 이전의 여성의 
생활상태를 상상하기는 더욱 어렵다. 오늘과는 전혀 다른 생활상태 속에서 여성의 근육구
조나 호흡기가 남성과 같을 정도로 발달되어 있지 않았는지 그 여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여성도 어려운 노동을 했으며, 그중에서도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것은 여성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연유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그런 일을 여성이 말게 된 것은, 짐을 운반할 때 
남성은 언제 덤벼들지 모르는 인간이나 동물의 공격을 막기 위해 빈 손으로 있어야 할 필
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의 역할이 위험하고 더욱 많은 체력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체
로 여성도 전사로서 원정에 참가할 수 있을 만큼 건장했던 것 같다. 헤로도토스(고대 그리
스의 역사가, BC 480?~425?)의 이야기나 또 다호메이 지방의 아마존 여자에 관한 전설
을 비롯하여 고금의 많은 문헌에 의하면, 여성이 피비린내나는 전쟁이나 복수에 참가한 경
우도 있다. 그때 여성은 남성 못지않는 용기와 잔인성을 발휘했다. 적의 간을 이로 깨문 

여성의 사례도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어쨌든, 당시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남성 쪽이 육체적인 특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곤봉으로 맹수와 싸운 시기, 즉 자연의 저항이 강하고 도구가 몹시 
유치했던 시대에는 이 육체적인 우월성은 최고의 가치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여성
이 아무리 강건했다고 하더라도, 적의에 찬 세계와 싸울 때 출산의 굴욕은 그녀들에게 큰 
장해였다. 아마존 여성들은 자기의 유방을 잘라냈다고 한다. 이것은 그녀들이 적어도 전사
로서의 생활기간 중에는 여성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 여성의 경우에는 임신, 출산, 월경이 노동능력을 감소시키고 오랫동안 무능한 상태
에 있을 것을 강요했다. 외적을 막고 자기를 비롯하여 자손의 생활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녀들에게는 병사의 보호가 필요했고, 남성들이 사냥이나 어로에서 얻은 먹이가 필요했
다. 물론 산아제한 같은 것도 없고, 또 자연은 여성에게 다른 포유동물처럼 불임기간을 보
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끊임없는 출산으로 그녀들의 체력과 시간을 대부분 충당해야 했
을 것이다. 그년들은 자기가 낳은 아기의 생명을 보장할 능력도 없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
요한 사실이며, 여기서 여러 가지 결과가 생기게 되었다.
  아무튼 인류의 출발은 순탄하지 않았다. 농경과 사냥, 어로에 종사하는 백성들은 엄청난 
노력의 대가로 땅에서 약간의 자원밖에 얻지 못했다. 그 자원에 비해 태어나는 아기의 수
는 너무 많았다. 이런 불합리한 다산은 여성이 자원의 증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것을 방해하는 한편, 새로운 수요를 한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종족의 존속을 위
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녀는 지나친 다산으로 종족을 존속시켜나갔다.
  생산과 출산의 균형을 확보하는 것은 남성이었다. 그래서 여성은 창조자인 남성과 대결
하는 데 있어서, 생명을 유지하는 특권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녀는 정자에 대한 난자의 역
할과, 페니스에 대한 자궁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도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인류의 노력에 한몫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노력이 구체적으로 결실
을 보게 되는 것은 남성의 덕분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영아 살해, 희생, 전쟁 등에 의해 생산과 출산의 균형은 어느 정도 유
지되어, 집단의 존속이라는 관점에서는 남성과 여성은 똑같이 필요했다. 식량이 풍부했던 
시대에는 보호자 겸 양육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이 남성을 어머니인 여성에게 예속시킨 적
이 있다고도 생각된다. 동물의 암컷 중에는 어미가 됨으로써 자주성을 완전히 손에 넣는 
것도 있다.
  그런데 인간인 여성이 자주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손
의 필요가 개발해야 할 원료의 필요보다 더욱 절실해서 인류가 가장 출산을 요구했던 시
기에도, 그리고 모성이 가장 존중되었던 시대에도, 여자는 어머니가 됨으로써 제1위를 확
보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인류는 단지 자연적인 종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것은 종으로서 
자기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정체가 아니다. 그것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다.
  원시적인 유목민은 자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여 별로 
소유한 것이 없고, 또 어떤 고정된 것에 자기를 구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종족의 영
속에 대해 전혀 구체적인 생각을 갖지 못했다. 자기를 후세에까지 남기려고 하지 않았으

며, 자손 속에 자기를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속자
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식은 그들에게 부담이 될지언정 재산은 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유
목민 사이에서도 영아 살해가 언제나 자주 일어났다. 그리고 살해되지 않은 갓난아기도 냉
담한 무관심 속에 위생이 부실하여 죽어갔다. 그러므로 아기를 낳는 여성도 창조의 자부심
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노리개인 듯이 느껴졌으며, 고통스러운 
출산은 무용한 일인 동시에 귀찮은 일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어린아이의 가치를 좀더 인정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임신하거나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것은 생활에 필요한 활동은 되지 
못했다. 그것은 자연적인 기능일 뿐이었다. 어떠한 계획도 거기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여
성이 거기에서 자기의 실존을 강하게 주장할 만한 동기를 찾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생리적인 숙명에 수동적으로 지배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임무와 양립될 수 
있는 일은 가사뿐이라는 이유를 들어 강요하고 그녀를 반복과 내재 속에 가둬두었다. 이런 
일은 여러 세기에 걸쳐서 거의 아무 변화도 없이 계속되고 날마다 반복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은 하나도 생산되지 못했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일벌처럼 단지 생명의 충동에 의해 집단
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동물적인 조건을 초월하는 행위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호모 파베르는 태초부터 한 사람의 발명가이며, 과일을 두들겨 떨어뜨리거나 짐승을 때려
잡기 위해 손에 든 몽둥이나 곤봉은, 벌써 그가 세계에 대한 지배를 확대하는 도구이다. 
그는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집으로 운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먼저 통나무배를 
타고 파도치는 물의 영역을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의 부를 손에 넣기 위해 세계에 병합한다. 이런 행위를 통하여 그는 자기의 힘
을 입증한다. 그는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을 위해 일을 계획한다. 그는 실존자로서 자기
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 자기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 그는 창조한다. 그는 현재에서 뛰쳐
나와 미래를 열어나간다. 어로와 사냥의 원정이 신성한 성격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의 성공은 출세나 개선으로 받아들인다. 남성은 거기서 자기의 인간성을 확인한다. 오늘날
에도 댐이나 마천루를 건설할 때 그는 이런 자존심을 느끼게 된다. 그는 주어진 세계를 유
지하기 위해 일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그의 활동은 이제 하나의 차원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그에게 큰 존엄성을 제공한다. 거
기에는 종종 위험이 뒤따른다. 피가 단지 하나의 식료품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우유 이상
의 가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냥꾼은 도살자는 아니다. 그는 맹수와 싸우면서 위험을 
무릅쓴다. 전사는 집단이나 자기가 속해 있는 씨족의 위광을 빛내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생명은 인간의 최고의 가치가 아니며, 생명은 그 자신보다 더욱 
중요한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하게 된다. 여성에게 던져진 가장 고약한 
저주는 그녀가 이런 빛나는 역할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 위에 서는 것
은 아기를 낳음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위험에 노출시킴으로써이다. 인간에게 있어 
낳는 성에 우위가 주어지지 않고, 죽이는 성에 그것이 주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비밀을 푸는 열쇠를 쥐게 된다. 생물학에서는 종이 자신을 유지하는 
것은, 새로 자기를 창조함으로써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창조는, 단지 다른 행태로 같은 생
명이 되풀이되는 데 불과하다. 남성은 '실존'에 의해 '생명'을 초월함으로써 '생명'이 되풀

이된다. 이 초월에 의해 그는 단순한 되풀이에서의 모든 가치를 빼앗는 가치를 창조하게 
된다. 동물의 경우는, 목적이 없이 멋대로 행하는 수컷의 행동은 아무 계획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무가치하다. 종에 기여하지 못할 때, 그의 행동은 무익하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종에게 봉사하면서 남성 세계의 외면을 개조하고, 새로운 도구를 만들고 발명하여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그는 지배자로서 여성의 속에서 공모자를 찾아낸다. 왜냐하면 여성도 같은 
실존자이며, 초월을 내포하고, 그 목표는 반복이 아니라 다른 미래를 지향하는 초월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 존재 속에서 남성의 주장을 확인하고 발견한다. 남성의 성공이나 
승리를 축하하는 제전의 형태로 그녀는 자기를 남성과 결부시킨다. 그녀의 불행은 바로 이
러한 것에서 비롯된다. 즉 자기는 생물학적으로 생명을 반복하는 운명에 처해 있으면서, 
그녀의 눈에 '생명'은 그 자체에 존재이유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그 존재이유 
쪽이 생명 자체보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변증법의 어느 일면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 쪽에 더욱 잘 들어맞는다. 헤겔에 의하면, 주인의 특권은 그가 자기 생명을 
위험에 드러내 놓음으로써 '생명' 보다는 '정신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정복된 노예도 같은 위험을 경험했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여성은 근원적으로 '생
명'을 주어도 자기의 생명을 위험에 드러내지 않는 실존자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투
쟁은 없었다.
  헤겔의 정의는 특히 여자에게 잘 들어맞는다. "지금 한쪽 의식은 의존한 의식이지, 그 
의식에게 본질적인 현실은 동물적인 생명, 즉 다른 실체에 의해 주어지는 존재이다." 그러
나 이 관계와 압박의 관계가 다른 점은, 여성도 남성이 구체적으로 얻게 되는 가치를 목표
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이 열어나가는 미래를 향해, 그녀도 자기를 초월한다. 실제로 
여성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남성의 가치에 여성의 가치를 대결시킨 적이 없다. 남성의 특권
을 끝까지 유지하기를 원하는 남성들이 이런 구별을 생각해 냈을 뿐이다. 남성들은 여성에
게 고유한 영역 - 생명과 내재의 영역 - 을 만들어 내어, 거기에 여성을 가둬놓으려고 했
다. 그러나 실존자는 모든 성적 구변을 넘어서서 초월의 운동 속에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여성의 복종 자체가 역시 그 증거이기도 하다. 여성들이 오늘날 요구하고 있는 것은 
남성과 동등하게 실존자로 인정받는 것이지, 실존을 생명에 복종시키고, 인간을 그 동물성
에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실존주의적인 견해는 이처럼 원시 유목민의 생물학적 경제적 상황이 남성의 우위를 가
져올 수밖에 없었던 경위를 밝혀주고 있다. 여성은 남성 이상으로 종의 희생물이 된다. 인
류는 끊임없이 그 종으로서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해 왔다. 도구의 발명으로 생
명을 유지하는 행위는 남성에게는 활동이며 계획이 되었다. 그런데 여성은 출산으로 말미
암아 동물로서 자기의 육체에 얽매인 채 헤어나지 못했다. 남성이 여성의 지배자가 된 이
유는, 인간은 자기 존재에 의문을 품고 생명보다 삶의 이유 쪽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인간
의 계획은 시간 속에서 자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지배하고 미래를 형성해 
나가는 데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가치를 창출하여 실존 자체를 가치로 만들어간 것은 남
성적인 활동이다. 그것은 생명의 혼돈된 힘을 이겨내고 '자연'과 '여성'을 굴복시켰다.
  이제부터 이런 상황이 어떻게 지속되어, 여러 세기 동안 발전해 갔는가를 알아보려고 한

다. 자기의 내부에서 타자로서 자기를 정의한 이 인간의 일부분에 인류는 어떤 위치를 부
여했는가? 이에 대해 어떤 권리를 인정했는가? 그것을 남성들은 어떻게 정의했는가?

  2
  위에서 우리는 원시 유목민 속에서 여성의 삶이 대단히 고통스러웠던 것을 보았다. 동물
의 암놈은 출산작용이 자연에 의해 제한되어 출산한 그 개체는 다른 노역에서 거의 완전
히 벗어나 있다. 그런데 가정의 여성만이 때때로 아기를 낳는 도구로서, 또는 개인적으로 
일하는 자로서 요구가 많은 남편에게 지치도록 혹사된다. 적의 집단과 싸우기 위해 공동체
가 소유하고 있는 자원을 총동원해야 했던 시대의 여성의 처지가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규칙한 출산의 피로에 고된 가사의 피로가 겹쳐졌다.
  그런데 일부 역사가는 남성의 우위가 가장 드러나지 않은 것은 이 시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 즉 그 우위는 직접적으로 유지되고, 
아직 이론으로 강조할 시기는 아니었다고 말이다. 남성은 여성에게 장해가 되고 있는 불리
한 점을 보상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후에 가부장제도하에서처럼 여성을 구박하려고도 하
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에 양성의 불평등을 분명히 인정하는 사회제도는 아직 없었다. 도
대체 제도라는 것 자체가 전혀 없었다. 재산도 없으니 상속인도 없고 법률도 없었다. 종교
도 중립적이어서 성별이 없는 토템이 숭배의 대상이었다.
  제도나 법률이 생긴 것은 유목민이 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을 때부터이다. 인간
은 이제 적대세력과 심하게 싸울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세계에서 취하는 태도를 통하여 자
기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그 세계와 자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시기에 와서야 성적 
구별은 사회구조를 반영하여 독특한 성격을 갖기 시작한다.
  농업 공동체에서는 여성이 큰 권위를 갖는 경우가 많다. 이 권위는 토지의 경작에 기반
을 두는 문명 속에서, 어린아이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중요성을 지니게 된 데서 설명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한 지역에 정착함으로써 그 토지의 전유화가 이루어진다. 집단형태 속
에 재산이 형성된다. 그리고 재산은 그 소유자에게 자손을 요구한다. 그래서 모성은 하나
의 신성한 기능이 된다.
  많은 종족들은 공동사회 체제에서 살아갔다. 이것은 여성들이 그 공동사회의 모든 남성
의 소유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에는 잡혼에서 결혼제도가 생겼다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남녀는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집단으로만 존재했다. 
즉 그들의 개별성은 순전히 생물적 사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혼도 일부일부제이
든, 일부다처제이든, 또는 일처다부제이든, 그 형태는 어떠했던 간에 전혀 신비적인 연결을 
갖지 못한 일에 불과했다. 그것은 아내에게 전혀 굴종의 근원이 되지 않았으며, 그녀는 그 
씨족 중에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같은 토템을 숭배하는 씨족 전체는 신비하게도 같은 
하나의 '마나'를 갖고, 물질적으로는 같은 하나의 토지를 공유하고 있었다. 앞에서 설명한 
소외의 과정대로, 종족은 이 토지 속에서 하나의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자기를 파
악한다. 토지의 영속성에 의해 종족은 시종일관하여 하나의 통일체로서 자기를 실현한다.
  이와 같은 실존적인 해석에 의해서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종족, 인간, 가족과 그리고 상
속권 사이에 존속해 온 동화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순간밖에 존재하지 않는 유목민족의 

개념 대신에, 농경공동체는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미래를 병합하는 생명의 개념으로 바뀐
다. 씨족 전원에게 그 이름을 주고 있는 토템적인 조상을 숭배하고, 씨족은 그 자손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씨족은 자손에게 대를 물려주고, 자손이 개간하는 토지를 통하여 
존속하는 것이다. 그 공동체는 현재를 넘어서 미래에서 자기의 통일을 내다보고 자기의 실
존을 원한다. 자식에게서 자기를 찾아 자식들을 자기것으로 하고, 자식들 속에 자기를 완
성하고 자기를 초월한다.
  그러나 많은 원시민족들은 자식의 출산에서 아버지가 연출하는 역할을 알지 못했다. 그
들은 단지 아이는 어떤 특정한 나무와 바위의 주위나 신성한 장소에서 떠돌아다니는 조상
의 영혼이 여자의 체내에 들어가 화신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민족은 이 체내
의 침입이 가능하려면 여자가 처녀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그밖의 민족들은 그 침입
이 콧구멍이나 입을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여기서는 처녀의 상실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고, 신비적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것은 남편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
다.
  어머니는 확실히 아기의 출생에 필요한 존재였다. 그녀는 자기 체내에 정자를 보유하고 
육성한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씨족의 생명은 그녀에 의해 전파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아기는 대개 어머니의 씨족에 속하여 
그 이름을 따게 되고, 그 권리를 행사하며, 특히 그 씨족이 소유한 토지를 자기 것으로 한
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재산은 여성에 의해 전해지게 된다. 토지나 농작물은 여성의 손에 
의해 씨족의 각자에게 배분된다. 다시 말해서 각자는 그 어머니에 의해 토지와 연결된다. 
그래서 신비적인 대지는 여성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여성은 밭과 그 수확에 대해 
종교적, 법적인 권리를 갖게 되었다. 토지와 여성을 연결하는 유대는 단지 소속 이상으로 
긴밀하다. 모권제도의 특징은 여성의 토지를 동화시키는 데 있다. 양쪽이 모두 그 여러 가
지 변신을 통하여 생명의 영속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생명은 본질적으로 생산이다.
  유목민 사이에서는 출산은 거의 우연한 일로 여겼다. 그리고 토지의 자원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농부는 밭이랑이나 어머니의 뱃속에서 개화되는 번식의 신비에 감탄한다. 
그는 자기가 가축이나 농작물과 마찬가지로 태어난 것을 알고 있으며, 자기의 종족이 다른 
인간을 낳고, 그 인간이 밭의 번식을 영속시켜 종족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기를 원한다. 그
에게는 자연 전체가 어머니처럼 생각된다. 대지는 어머니이다.
  그리고 여성에게는 대지와 마찬가지로 신기한 힘이 깃들어 있다. 농사짓는 일을 여성에
게 맡긴 이유의 일부는 여기 있었다. 자기 체내에서 조상의 영혼을 불러들일 수 있다고 생
각했기 때문에, 그녀는 씨를 뿌리는 밭에서 과실이나 이삭이 나게 하는 힘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어느 경우도 창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법적인 주술의 문제였다.
  이 시기에는 인간은 이미 토지의 산물을 주워모으는 데 그치지 않았지만, 아직 자기의 
힘을 인식하지 못하고 기술과 마법의 중간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자기는 수동적이고, 존재
와 죽음을 멋대로 쥐고 흔드는 자연에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물론 성행위나 토
지를 경작하는 기술의 효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아이나 수확물을 여전히 초자연
의 선물로 생각했으며, 여성의 체내에서 나오는 어떤 신비로운 발산물이 생명의 원천에 묻
혀 있는 자원을 세상에 끌어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와 같은 신앙은 오늘날에도 인도인이

나 오스트레일리아의 토인이나 폴리네시아인들 사이에 남아 있으며, 사회의 실제적인 이해
관계와 일치하여 점점 중요성을 띠고 있다.
  여성은 어머니로서의 임무 때문에 가정에 갇혀 살게 된다. 그리하여 남성이 사냥과 어로
와 전쟁을 하는 동안에 여성은 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원시민족의 경
우에는 마을에 제한된 얼마 되지 않는 채소밭 정도를 경작할 뿐이다. 그 일도 가사의 일부
이다. 석기시대의 도구를 다루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는다. 경제와 신비가 여성에게 농
사일을 맡기는 데 일치한 셈이다. 차츰 생겨난 가내공업도 여성이 하는 일이었다. 그녀들
은 까는 요와 덮는 이불을 짜고, 도자기를 구웠다. 그리고 상품교환도하여, 장사는 그녀들
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즉 그녀들에 의해 민족의 생명이 유지되고 번식되었다. 아기, 가
축, 농작물, 도구, 그녀들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의 번영 일체는 그녀들의 노동과 마술적인 
힘에 달려 있었다. 이런 위력은 남성들에게 두려움이 섞인 존경심을 갖게 했으며, 이것은 
그들의 제사의식에도 반영되었다. 외부의 자연 전체가 여성 속에 요약되기에 이르렀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자기를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타자'를 생각한다. 그는 
세계를 이원적으로 파악한다. 이 이원성은 처음에는 성적인 성격을 띠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를 동일한 자로 생각하는 남성과 자연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여성은 '타자'의 범주에 
분류된다. 그리하여 '타자'는 여성을 포함하게 된다. 여성은 처음에는 타자를 혼자서 대표
할 만큼 중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타자'를 다시 세분할 수 있다. 예컨대 낡은 천지 
창조설에서는 흔히 같은 하나의 원소가 동시에 남성과 여성의 두 화신을 갖고 있다.
  바빌로니아인들 사이에서는 태양(남성)과 바다(여성)는 우주의 혼돈을 나타내는 이중의 
화신이다. 여성의 역할이 높아지면, 그녀는 '타자'의 역할을 거의 모두 병합해 버린다. 그
때에는 풍요의 관념을 숭상하는 데 사용되는 여성의 신이 나타나게 된다. 쉬스에서 발견된
 '대여신'의 가장 오래된 초상인 '대모신'은 긴 겉옷을 걸치고 머리를 높이 땋아올리고 있
다. 다른 초상에서는 머리에 탑을 얹고 있다. 크레타섬의 발굴품 속에서도 이런 초상이 몇 
개 나왔다. 이 여신은 살찐 엉덩이를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경우도 있고, 비교적 날씬한 몸
매로 서 있는 경우도 있으며, 때로는 옷을 입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나체로 부풀어
오른 젖가슴 밑에 두 팔을 끼고 있다.
  그녀는 천국의 여왕이며, 비둘기가 그 상징이다. 그녀는 또한 지옥의 여왕이며, 그 지옥
에서 기어오르는 뱀이 그 상징이다. 그녀는 산이나 바다, 샘에도 나타난다. 그녀는 곳곳에
서 생명을 창조한다. 설사 죽이더라도 부활시킨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변덕스럽고, 음탕하
고, 잔인하다. 인정이 많은 동시에 가혹하기도 하다. 이 여신은 에게해 군도를 비롯하여 프
리지아, 시리아, 아나톨리아 등 서아시아 전체에 군림하고 있다. 그녀는 바빌로니아에서는 
이슈타르, 셈족 사이에서는 아스타르테, 그리고 그리스인 사이에서는 가이아, 레아, 키벨레 
등으로 불린다. 이집트에서도 이시스의 모습으로 발견된다. 남성인 신들은 이 여신에게 굴
복당한다.
  천국과 지옥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들에서 최고의 신인 여성은, 이 땅에서도 모든 신성한 
존재처럼 터부에 의해 에워싸이고, 그녀 자신이 터부가된다.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위력 
때문에 그녀는 마법사나 요술사로 간주된다. 그녀는 기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고대 켈트족의 드루이드 여승처럼 승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부족의 정치에 참여하여 

단독으로 다스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먼 옛날의 일들은 하나도 문헌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가부장주의 시대에는 신
화나 유적이나 전설에 여성이 대단히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시대의 추억을 남기고 있다.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바라문 시대는 리그 베다의 시대에 비해 퇴보했고, 리그 베다 시대
는 그 이전의 원시시대보다 퇴보하고 있다. 이슬람 시대 이전의 베두인족들 사이에서는 코
란이 여성에 대해 규정한 법규보다 더욱 우수한 법규가 시행되고 있었다. 니오베나 메데이
아의 위대한 모습은, 그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자기만의 소유물로 삼아 자랑스럽게 여기던 
시대를 방불케 한다. 그리고 호메로스(그리스의 시인. 2대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의 저자, BC 800년경)의 시에는, 안드로마케와 헤카베가 고전 그리스 시대의 규방 속으로 
숨어버린 여성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 원시시대에 참으로 여성 천하가 있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바하
오펜이 제시한 가정을 엥겔스가 다시 거론했다. 그는 모권 제도에서 가부장제도에의 이행
을 '여성의 역사적인 대패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여성 황금시대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여성이 '타자'였다는 것은 양성 사이에 대등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토지든, 어머니든, 어린이든,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동류가 아니었
다. 여성의 권위가 확립되어 있었던 것은 인간 영역의 피안에서 이고, 그래서 여성은 이 
영토 밖에 있었던 것이다. 사회는 언제나 남성의 것이었으며, 정치권력도 언제나 남성의 
손아귀에 있었다. "공적인 혹은 단순한 사회적인 권위는 언제나 남성들의 것이다."라고 레
비스트로스는 원시 사회에 관한 연구의 결론을 맺고 있다.
  대등한 관계에 선 동류나 그와 동일한 형태를 취한 타자는, 남성에게 있어 언제나 남성
적 개체이다. 집단 내부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보이는 이원성은 남성의 한 집단과 남성의 
다른 한 집단의 대립이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의 일부이며, 남성과 
남성 사이의 하나의 교환 도구이다. 과오는 상대의 성을 엄격히 배제한 타성의 두 모습을 
혼동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여성을 절대적인 '타자'로서, 즉 - 그 마력은 여하튼 간에 - 본
질적인 것을 보는 한에서는 여성을 또 하나의 주체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여
성은 남성의 집단에 대항하여, 자기를 자기로서 내세우는 다른 집단을 만든 일이 일찌기 
없었다. 즉 여성들은 남성과 직접적이고 자주적인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결혼이 기반이 되어야 할 대등한 관계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고, 남성과 
남성 사이에 여성을 수단으로 삼아 이루어지고, 여성은 그 관계의 주요한 계기가 될 뿐이
다."하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 지음 <혈족의 기본구조> 참조) 여
성의 구체적인 상황은 그녀가 속해있는 사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상속제도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 제도가 부계이든 모계이든, 또는 무차별, 즉 양계이든 여성은 언제나 남성의 보
호와 감독하에 놓여 있다. 다만 문제는 그녀가 결혼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녀의 아버지 도
는 큰 오빠의 권위 - 이 권위는 그녀의 자녀들에게까지 미친다 - 에 복종하고 있는가, 아
니면 남편의 권위로 옮겨가고 있는 가를 아는 것이다.
  어쨌거나 "여자는 단지 그 혈통의 상징에 불과하다... 모계 상속제도란 그녀의 아버지나 
오빠의 손길이 형제의 마을에까지 연장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지음 <혈족의 기본구
조> 참조) 여자는 권리의 매개자에 불과하며, 그 보유자는 아니다. 사실은 상속제도에 의

해 정해진 것은 남자의 두 집단 사이의 관계이지, 두 성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그리하여 
사실상 여자의 구체적인 상황은 권리의 형태와 굳게 결부되어 있지 않다.
  모계제도하에서는 여성이 대단히 높은 지위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종족 위에 한 
여성 족장이나 여왕이 있다고 해서 여성이 지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러시아의 
카테리나 여제의 즉위도 러시아 여성들의 지위를 조금도 개선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여성
이 굴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아내가 자기 친정에 머물
러 있고, 남편이 남의 눈을 피해 슬쩍 잠시 다녀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개 여성쪽이 
남편의 지붕 밑으로 가서 산다. 이 사실만으로도 남성의 우위는 분명하다. 이에 대해 레비
스트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상속양식의 여러 가지 변동의 배후에 가장의 주거의 불변은, 
인간사회의 특징인 양성 사이의 근본적인 불균형을 입증하고 있다." 여성은 아기를 자기 
옆에 놓아둔다. 그래서 종족이 차지한 영토의 형태와 그 토템적인 조직은 부합되지 않는
다. 후자는 확고히 기초가 잡혀 있지만, 전자는 일시적이다. 그러나 사실상 중요한 것은 전
자이다. 사람들이 실제로 일하며 살아가는 장소가 그들의 신비적인 소유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과도기에 가장 일반적인 사회제도 속에는 두 가지 종류의 권리가 있다. 하나는 
종교적인 권리이고, 또 하나는 토지의 소유와 경작에 토대를 둔 권리이다. 이 두 권리가 
뒤얽혀 있다.
  결혼은 단지 세상의 제도에 지나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며, 부부의 가족은 
종교적인 의미는 갖고 있지 않으나 인간적인 면에서 긴밀하게 존재한다. 성에 대해 대단히 
자유로운 집단까지도 아기를 낳는 여성은 결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 여성은 
자기 아이와 단둘이 자주적인 집단을 이룰 수는 없다. 그리고 형제의 종교적인 보호만으로
는 부족하다. 그래서 남편의 존재가 요구된다. 남편은 때때로 자녀에 대해 큰 책임을 지게 
된다. 자녀는 남편의 씨족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자녀를 먹여 살리는 것은 남편이다. 남편
과 아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동거와 노동과 공동의 이해관계와 애정의 유대가 생기게 
된다. 이 세속적인 가족과 토템적인 씨족 사이의 관계는 여러 가지 결혼의식에 나타나 있
는 것처럼 대단히 복잡하다. 본래는 남편이 다른 씨족에게서 아내를 사거나, 아니면 씨족
과 씨족 사이에 선물 교환이 이루어져 한쪽이 가족의 한 사람을 양도하면 다른쪽이 가축
이나 과일, 노동력을 양도했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와 아내가 낳은 아이들을 맡는다고 해
서 아내의 형제들로부터 사례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신비적인 현실과 경제적인 현실은 균형이 깨지기 쉽다. 남자는 자기 조카들보다 자기 자
식들에게 훨씬 더 애정을 갖게 마련이다. 이때 그는 아버지로서 자기를 내세우게 된다. 사
회가 발전함에 따라 남성이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모
든 사회가 가부장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남성이 '생명' 이나 '자연'이나 '여성'의 신비에 완전히 지배되어 있던 시대에도, 남성은 결
코 자기의 권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성이 간직하고 있는 위험한 마력이 두려
워, 남성이 여성을 본질적인 존재로 인정할 때에도 그런 위치를 마련해 주는 것은 남성이
다. 그리하여 남성은 자기가 인정하는 이 소외 속에 자기를 본질로 실현하는 것이다. 번식
력은 여성의 몸에 있는 데도 남성은 비옥한 땅의 주인인 것처럼 역시 여성의 주인이다. 여
성에게 그 마법적인 풍요의 화신인 자연도 또한 그런 것처럼 여성은 정복되고 착취되는 

운명에 있다. 여성이 남성에 대해 갖고 있는 위광은 남성에게서 받은 것이다. 남성들은 '타
자' 앞에 무릎을 꿇고 '모성신'을 숭배한다. 그러나 그 여신이 아무리 강력하게 보여도, 그
녀는 남성의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남성이 만든 우상은 모두 아무리 사나운 형상으로 만들어져도, 실제로는 남성에게 종속
되어 있다. 그러므로 남성은 그것을 언제든지 파괴할 수 있다. 원시사회에서는 이 종속이 
아직 인지되지 않았고, 따라서 확립되어 있지 않으나, 그 자체로서는 직접적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남성이 자기를 더욱 분명히 의식하여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대립시키면, 이 종속
은 곧 수단화된다. 사실 남성이 자기를 비바람에 부대끼는 이전의 수동적인 존재로 파악하
고 있을 때에도 역시 그는 초월과 투기로써 자기를 실현하고 있다. 벌써 그의 속에서 정신
과 의지가 생명의 혼란과 우연성에 대해 자기를 주장하고 있다.
  여성 속에 여러 가지 화신으로 머물러 있는 토템적인 조상은 대개 남성인 것을 알 수 
있는 동물이나 나무의 이름을 갖고 있다. 여자는 그 조상의 육체적인 생명을 영속시키기
만, 그 역할은 단지 양육자에 그칠 뿐 창조자가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도 여자는 창조하지 
않는다. 여자는 어린애와 빵을 제공함으로써 종족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그친다. 여자는 
언제나 내재에 몸을 바치고 있다. 그녀는 사회에 대해 다만 폐쇄적이고 정지적인 면을 나
타내고 있을 뿐이다.
  이와는 달리 남자는 자연과 인간집단 전체를 향해 이 사회를 열어나가는 기능을 계속해
서 독점하고 있다. 그에게 어울리는 일은 전쟁, 사냥, 고기잡이이다. 외계의 먹이를 정복하
고, 그것을 종족에 병합시킨다. 전쟁, 사냥, 고기잡이는 생명의 확장과 세계를 향한 초월을 
나타내고 있다. 남성은 여전히 초월의 유일한 화신이다.
  그는 아직 어머니인 대지를 완전히 지배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며, 아직 
대지에 대항하여 궐기할 용기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이미 대지에서 떨어져나가기
를 바라고 있다. 이 의지 속에서 모권제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다른 종족과의 결혼의 동
기를 찾아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설사 남성이 자기가 생식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더라도 결혼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결혼에 의해 그는 성인으
로 인정받고, 세계의 일부를 분배받게 된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씨족이나 조상, 그리고 그
의 몸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것에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노동이나 결혼과 같은 모든 세속
적인 영위 속에서, 그는 그 유대에서 벗어나 내재에 대해 초월을 확립하여, 자기를 위해 
자기의 뿌리가 박혀 있는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열고자 한다.
  각기 다른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소속의 양상에 따라 근친상간의 금지는 여러 가지 형태
로 나타나지만, 원시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남자
는 자기가 아닌 것을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에게 타자로 생각되는 것과 
결합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의 '마나'에 참여해서는 안 되며, 남편에게 외부인
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녀의 씨족에게도 외부인이어야 한다. 원시결혼은 때때로 실제적, 형
식적인 약탈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상대방
의 타성을 더욱 분명히 입증하기 때문이다. 아내를 폭력으로 정복하므로써, 그는 외부의 
부를 병합하여 출생에 의해 주어진 숙명의 한계를 깨뜨리는 힘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게 
된다. 여러 가지 형태의 매매 - 선물이나 봉사의 제공 - 별로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같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남성은 조금씩 경험을 수단으로 하여 실제생활이나 그 상징에서도 남성적인 원리가 승
리를 얻게 되었다. '정신'이 '생명'을 이기고, 초월이 내재를, 기술이 마술을, 이성이 미신을 
이겼다. 여성의 가치저하는 인류역사에서 하나의 필연적인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
면, 여성이 지닌 권위의 원천이 되고 있었던 것은 적극적인 가치가 아니라 남성의 취약성
이었기 때문이다. 그녀 속에 자연적인 불안한 신비가 구체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남성은 
자연에서 해방되었을 때, 여성의 세력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남성이 그 노동에 의해 토지를 정복하고 자기 자신도 정복할 수 있게 된 것은 석기시대
에서 청동기시대로 옮아갈 무렵이었다. 농부는 토지나 씨앗의 발아상태나 계절의 우연성에 
지배되어 수동적으로 하늘에 빌며 그 결과를 기다린다. 토템의 정령이 인간세계에서 살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농부는 자기를 에워싼 자연의 변덕에 복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
인은 이와 반대로 자기의 의도대로 도구를 만든다. 그는 자기 손으로 그 도구에 자기의 투
기된 모습을 반영한다. 그에게 대적하지만 굴복되는 무기력한 자연에 대해 그는 지배적인 
의지로 자기를 주장한다. 그가 모루를 두들기는 속도를 빨리하면, 도구의 완성을 앞당기게 
된다. 한편 아무 것도 벼가 익는 것을 앞당길 수는 없다. 이리하여 그는 완성된 사물에서 
자기 책임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의 솜씨가 익숙하고 익숙하지 못한 데 따라 사물을 잘 
만들 수도 있고 못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만족하게 완성할 수 있도록 신
중하고 유능하게 사물을 제작한다. 그의 성공은 신들의 도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
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는 동료와 경쟁하여 이기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아직 제
사의 의식을 어느 정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기술 쪽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하여 신비적인 가치는 후퇴하고, 실리를 앞세우게 된다.
  그는 신들에게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지는 않지만, 신들로부터 떠나 신들을 자기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그리하여 신들을 올림포스의 하늘 위로 추방하고, 지상의 영토를 자기 것
으로 만든다. 망치의 최초의 일격이 울려 퍼질 때 위대한 목축의 신은 퇴색하고, 인간의 
치세가 열린다. 인간은 자기 힘을 알고 있다. 자기의 창조적인 팔과 만들어진 대상의 관계 
속에서 그는 인과관계를 체험한다. 땅에 뿌린 씨앗은 싹트는 경우도 있고 싹트지 않는 경
우도 있으나, 금속은 불이나 물에 담가도 기계의 작용에서 언제나 똑같이 반응하기 때문이
다. 이 도구의 세계는 분명한 개념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여기서 합리적인 이념이나 논리
나 수학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 세계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여성숭배는 농경시대에 불가항력적인 지속이나 우발성, 우연성, 기대 및 신비의 치세와 
결부되어 있었다. '만드는 사람'(Homo faber)의 종교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정복할 수 있
는 시간의 치세이며, 필연성과 투기(자유로운 계획)와 행동과 이성의 치세이다. 대지와 대
결할 때도 인간은 앞으로는 노동자로서 대결하게 될 것이다. 그는 토지를 비옥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토지를 휴식시키는 것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며, 어떤 씨앗을 어떻게 뿌
려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즉 농작물을 잘 자라게 하는 것은 그 자신이다. 운하를 파고 
땅에 물을 대고 물을 뺀다. 길을 닦고 사원을 짓는다. 그는 새로 세계를 창조한다.
  어머니인 여신의 지배하에 남아 있는 민족이나, 모계상속제도를 계속 유지해 온 민족도 
원시문명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여성이 숭배를 받게 되는 것은 남성이 자기 자신을 공

포의 노예, 즉 자기의 무능을 공모자로 삼고 있는 동안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
성이 여성을 숭배한 것은 두려움이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남성은 자기를 완성하기 위해 
먼저 여성을 왕좌에서 추방해야만 했다. 이윽고 그는 창조력, 광명, 지성, 질서 등의 남성
적인 원리를 지배자로 인정하게 된다. 어머니인 여신 곁에, 아들이나 혹은 애인인 한 남신
이 나타난다. 그 남신은 아직 여성보다 못하지만, 한 켤레의 신발처럼 닮았다. 이 남신도 
번식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 이것이 황소이며 미노타우로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소머
리에 사람의 몸집을 지닌 괴물)이며, 이집트의 평야를 기름지게 하는 나일강이다.
  그는 가을에 죽지만 봄에 소생한다. 비탄에 잠긴 불사신인 어머니, 곧 아내가 그 시체를 
찾아내어 전력을 다하여 소생시키기 때문이다. 크레타섬에 나타나는 한 쌍의 남녀 신은 지
중해 연안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는 '이시스'와 '호루스'이고 페니키아에서
는 '아스타르테'와 '아도니스'이며, 소아시아에서는 '키벨레'와 '아티스'이고, 고대 그리스에
서는 '레아'와 '제우스'이다. 이윽고 대모신은 실추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예외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여전히 높기 때문에, 하늘의 화신인 '누트'나 비옥한 땅의 화신이며 나일강의 아내
인 '이시스'는 여전히 중요한 여신들이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왕은 태양과 빛과 남성적인 
정력의 신 '라'이다. 바빌로니아에서 '이슈타르'는 이미 미남신인 마르두크의 아내에 지나
지 않는다. 천지를 창조하고 그 조화를 유지하는 것은 이 신이다. 셈족(유태 민족)의 신도 
남신이다. 제우스가 하늘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가이아'와 '레아'와 '키벨레'는 자리에서 물
러나야만 했다. '데메테르'(곡식을 풍요롭게 하는 그리스의 여신)는 아직 세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미 2위의 여신이 되어버렸다. <베다>(고대 인도의 바라문교 경전)의 신들은 아
내를 거느리고 있지만, 그들만큼 존경 받지 못한다. 로마의 '큐피터'의 권력에는 당할 자가 
없다.
  이와 같이 가부장제도의 승리는 우연한 것도 아니고 또한 폭력혁명의 결과도 아니었다. 
인류의 시초부터 남성은 그 생물학적 특권에 의해 자기만을 지배적인 주체로 주장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특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 실존의 일부를 자연이나 여성 속에 
소외시켰으나, 곧 되찾아갔다. 그리하여 '타자'의 역할을 하도록 선고된 여성은 잠시만 권
력을 소유할 운명에 놓여 있었다. 노예의 경우나 우상의 경우에도 자기 운명을 선택하는 
것은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레이저(영국의 인류학자, 1854~1941)는 "남자는 신
을 만들고, 여자는 신을 숭배한다."고 말했다. 자기들의 최고신을 여성으로 하느냐 남성으
로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남자들이다. 사회에서 차지하는 여성의 위치는 언제나 남성이 
할당한다. 어느 시대에도 여자는 자기 자신의 법률을 제정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 생산노동을 여성의 체력으로 감당할 수 있었더라면 여성은 남성과 함께 자
연을 정복하게 되었을 것이다. 인류는 남녀가 함께 신들에게 대항하여 자기를 주장했을 것
이다. 그러나 여자는 도구의 장래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여성이 뒤떨어진 원인에 
대한 엥겔스의 설명은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청동과 철의 발명이 생산력의 안정을 완전히 
뒤엎어 여성의 열등성이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열등성만
으로는 여성이 당한 압박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여성의 불행은 일하는 남성 옆
에서 노동의 동반자가 되지 못해 인간적인 공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여자
가 약하여 생산능력이 떨어진다는 것만으로는 이 제외에 대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남자가 여자를 동류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여자가 남자의 일하는 방법이나 사고하는 방
식에 참여하지 않고, 언제나 생명의 신비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채
용하지 않고 여성이 남성의 눈에 타자의 차원을 머문 순간부터, 남성은 여성의 압박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확대와 정복을 지향하는 남성의 의지는 여성의 무능력을 저
주로 바꿔 놓았다.
  남성은 새로운 기술에 의해 열린 새로운 가능성을 끝까지 추구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노예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자기 동류를 노예로 삼았다. 노예의 노동력은 여성이 제
공할 수 있는 노동력보다 훨씬 유효했기 때문에, 여성은 부족 안에서 갖던 경제적인 역할
을 잃게 되었다.
  한편 주인은 노예와의 관계에서, 그가 여자에게 행사했던 느슨한 권위보다 훨씬 강력한 
지배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성은 그 번식력 때문에 숭배를 받고 두려움을 주었으며, 남
성과는 별개의 존재로서 타자의 무시무시한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남성에게 의존하는 
동시에 어느 의미에서는 남성을 자기에게 의존시켜 왔다. 여자에게는 주인과 노예의 상호
관계가 현실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노예는 어떤 터
부(금기)에 의해서도 보호되어 있지 않고, 한 사람의 굴복한 남자에 불과하며, 차이가 있
다면 열등할 뿐이다.
  주인과 노예관계의 변증법적인 작용이 실현되려면 여러 세기가 지나야 할 것이다. 잘 조
직된 족장제도 사회에서는 노예는 인간의 얼굴을 한 소나 말에 불과하며, 주인은 그에게 
폭군과 같은 권력을 휘두른다. 그리하여 주인의 자존심은 높아진다. 그리고 그는 그 자존
심을 여자에게 돌린다. 그가 획득한 모든 것이 여자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의 권위
가 증대될수록 여자의 격은 낮아 진다. 특히 남자가 토지를 소유했을 경우에는, 그는 여자
의 재산까지 요구한다.(제1편 제3장 참조)
  그는 마나와 대지에게 소유되어 있었으나, 이제 그는 하나의 영혼과 얼마간의 토지를 소
유하고 있다. 그는 여성으로부터 해방되는 동시에 한 여자와 자기 자손을 요구한다. 그는 
자기 밭에서 올릴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가족의 노동이 완전히 자기것이기를 요구한다. 그
리하여 이를 위해 노동자들이 자기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
내나 자식을 예속시킨다.
  그는 자기 재산을 물려줌으로써 무덤의 피안에서 영혼의 휴식에 필요한 명예를 자기에
게 줄 수 있는 상속인을 필요로 하게 된다. 가정에서 신을 숭배하는 것은 사유재산제도와 
연관이 있으며, 이를 위한 상속인의 기능은 경제적인 동시에 신비적이기도 하다. 농업이 
본질적으로 마법을 배제하고 창조적인 일로 변모되는 날부터, 남성은 자기를 생식력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는 자기의 수확과 동시에 자기 자식을 요구한다.
  원시시대에는 모계의 혈통을 부계혈통으로 대치시킨 혁명보다 더 중요한 사상적인 혁명
은 없었다. 그후에 어머니는 유모나 하녀의 지위로 내려가고, 아버지의 지배권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권리를 보유하고 행사하는 것은 아버지이다.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속
에서 아폴로신은 이 새로운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 "아기는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머
니가 낳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자기 몸에 들어온 씨를 키울 뿐이다. 낳는 것은 아버지
이다. 여자는 외부로부터 씨를 받아, 만일 신이 인정하면 그 씨를 보존한다." 이런 확신이 

과학적인 발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며, 이것은 일종의 신앙고백이다.
  하긴 남성은 기술적인 인과관계의 경험에서 자기의 창조능력에 확신을 갖고, 이로 말미
암아 자기는 생식에서 여성 못지않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념이 관찰을 
유도한 셈이다. 그런데 관찰은 단지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역할과 동등한 역할을 인정하게 
할 뿐이다. 그것은 자연현상으로서는, 수태의 조건은 정자와 월경의 만남이라는 가설에 도
달하게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는 사고, 즉 여성은 단지 물질에 불과하며,
 "태어나는 모든 존재 속에서 남성의 운동원리가 보다 월등하고 고상하다."는 사고는 모든 
인식을 초월한 권력의지를 대변하고 있다. 자손을 완전히 독점함으로써 남성은 여성의 지
배력에서 벗어나 여성에게 대항하여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여성은 실제적인 중요성과 
신비적인 권위를 상실하여 단지 생식과 2차적인 일에 헌신하는 하녀에 불과한 존재로 보
인다.
  남성은 이 지배를 치열한 전투 결과로 얻은 것처럼 보아왔다. 우주 창조의 가장 오래된 
신화의 하나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인의 신화는 7세기에 기록된 문헌에서 남성의 승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헌은 훨씬 더 오래된 전설을 재현한 것이다. 대양의 남신과 
바다의 여신인 아토움과 타미아트는 천지를 비롯하여 모든 위대한 신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 신들이 너무 난폭하여 멸망시키려고 결심했다. 그래서 어머니, 즉 여성인 타미아트가 
자기 자식 중에서 가장 억세고 잘생긴 미남 신 마르두크에게 도전하게 되었다. 마르두크는 
그녀와 격전을 벌인 끝에 그녀를 죽여, 그 시체를 두 동강 내였다. 그는 그 절반으로 하늘
을 만들고, 나머지 절반으로 지상세계의 기둥을 만들었다. 그 다음에 그는 우주를 편성하
고 인류를 창조했다.
  모권에 대한 가부장제도의 승리를 구가하는 <에우메니데스>의 희곡에서도, 오레스케스
는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암살한다. 이와 같은 피비린내나는 승리로 남성의 위력, 즉 질서와 
광명인 태양의 위력이 여성의 혼돈을 타파한다. 오레스테스를 무죄로 하기 위해 신들의 법
정은 그가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아들이기에 앞서 아가멤논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선포한다. 
낡은 모권은 죽었다. 그것은 남성의 정복은 말하자면 재정복이었다. 남성은 그가 이미 전
부터 소유하고 있던 것을 다시 손에 넣은 데 불과하다. 그는 권리를 현실과 조화시켰다. 
전투도, 승리도, 패배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 전설에는 깊은 뜻이 있다. 남성은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기를 주장하는 순간
부터 '타자'의 이념을 자기 속에 병합한다. 그날부터 '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드라마가 
된다. '타자'의 존재는 위협이자 위험이다. 낡은 그리스 철학은 - 플라톤도 그 점에 관해
서는 마찬가지지만 - '타성'은 부정과 같으며, 따라서 '악'으로 가르치고 있다. '타자'를 설
정하는 것은, 마니교(인간의 육체는 어둠에서 생기고 그 정신은 빛에서 생기며, 어둠인 악
은 인간을 타락시키려고 하고, 빛인 선은 언제나 인간을 높이려고 한다고 주장하여 세계를 
빛과 어둠의 싸움터로 보는 이원론적인 종교로 3세기 초에 페르시아인 마니가 그 교주이
다)가 하는 일이다. 모든 종교나 법규가 여자를 그처럼 적의를 가지고 다루는 것은 이 때
문이다.
  인류가 자기의 신화나 법률을 문자로 편집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던 시기에는, 가부장제도
는 이미 결정적으로 확립되어 있었다. 법규를 제정하는 것은 남성이다. 그들이 여성에게 

예속적인 지위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성을 어린이나 가축을 
바라보는 것처럼 동정심을 갖고 대한다고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
다. 여성을 압박하도록 법규를 제정하는 입법자들은 여성을 두려워한다. 여성이 간직하고 
있는 상반되는 특질 중에서 특히 불길한 면이 남겨져, 여성은 신성한 존재에서 부정한 존
재로 바뀐다.
  아담의 반려자로 주어진 이브는 인류를 타락시켰다. 이단의 신들은 인간에게 복수하려고 
할 때에는 여자를 지어낸다. 그리고 이런 암컷들 중에서 최초로 태어난 판도라는 인류를 
괴롭히는 모든 재앙을 일으켰다. '타자'란 곧 능동성에 대한 수동성, 통일을 깨뜨리는 잡다
성, 형식에 대립하는 물질, 질서에 대항하는 무질서이다. 여자는 이처럼 운명적으로 악을 
타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질서나 광명이나 남자를 창조한 선의 원리와 혼돈의 암흑과 여
자를 창조한 악의 원리가 있다."고 피타고라스(고대그리스의 철학자.수학자. BC 582?~49
7?)는 법률은 여자에게 아무 권리도 부여하지 않고 있다. 로마법은 여자를 후견인 아래 두
고, 그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교회법은 여자를 '악마의 입구'로 본다. 코란은 여자를 
완전히 멸시하고 있다.
  그러나 '악'은 '선'을 위해 필요하며, 물질은 이념을 위해 필요하고, 어둠은 빛을 위해 필
요하다. 남자는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자기의 생명을 영속시키기 위해서 여자는 자기
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여자를 사회에 
끌어들이려고 한다. 그리하여 여자는 남자가 세운 질서에 순응하는 정도에 따라, 원죄적인 
부정에서 정결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마누법전'에 잘 나타나 있다. "여자는 정식결
혼에 의해 마치 바다에 흘러드는 강물처럼, 그 남편과 같은 장점을 몸에 지니게 된다. 그
리고 그녀는 죽으면 같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서는 '강한 여성'의 모습을 찬사와 함께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는 육
체를 혐오하면서도 헌신적인 처녀와 정결하고 순종하는 아내에게는 경의를 표하고 있다. 
여자는 종교적인 의식과 결부되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인도의 바라문 승려의 
아내나 로마의 사제의 아내는 그 남편 못지않게 신성하다. 부부 사이에서 지배하는 것은 
남편이다. 그러나 남녀의 요소의 결합은 역시 생식구조나 생명이나 사회의 질서를 위해 필
요하다.
  이 '타자'와 '여성'의 상반성은 여성의 그후의 역사에 반영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성
의 의사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의사는 모순되어 있다. 왜냐하면 여성은 완전히 병합
되면 일개 물체의 지위로 하락하지만, 남자는 자기가 정복하여 소유하는 것에 자기의 위엄
을 부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타자"는 그의 눈에 그 원시적인 마술을 아직 어느 정도 간
직하고 있다. 아내를 어떻게 하녀인 동시에 반려자로 삼을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남성이 
해결하려고 부심하는 문제의 하나이다. 남성의 태도는 여러 세기 동안데 진전되어, 여성의 
운명에 진화를 가져올 것이다.
    3
  여성은 사유재산의 출현으로 왕좌를 빼앗기게 되었으나, 여성의 운명은 역시 각 세기를 
통하여 사유재산에 연결되어 있다. 여성의 역사는 상속의 역사와 뒤섞여 있는 부분이 많
다. 이 제도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재산의 소유자는 자기의 실존을 사유재산 속에 쇠외

(물질화)시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재산을 소유한 자는 자기의 생명보다 재산에 더한 
애착을 갖는다. 그것은 이 짧은 생명의 좁은 한계를 넘어서, 불멸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유형의 화신으로 나타난 육체가 붕괴된 후에도 존속된다.
  그러나 이 존속은 사유재산이 소유자의 손에 남아 있어야 실현된다. 즉 그 재산은 소유
자가 그 곳에 존속되어 자기를 인지할 수 있는 그의 자손들에게 속해 있지 않으면, 그것은 
죽음을 초월하여 그의 것일 수 없다. 그리하여 상속자에게는 아버지의 땅을 경작하고, 아
버지의 영혼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유일무이한 임무가 된다. 그는 이 세상과 지하세
계 속에서 조상들의 영속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은 재산과 자식을 아내와 공유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의 이런 주장은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관철되지는 못한다. 그러
나 가부장제도가 강력하게 시행될 때에는 그는 아내에게서 재산의 소유권과 상속권을 모
두 박탈한다. 그리고 이런 권리를 아내에게 주지 않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것처럼 보인다. 
자식은 이미 그녀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며, 동시에 아내가 나온 씨족의 집단과 자식은 
아무 관계도 없게 된다. 결혼은 여자를 한 씨족에서 다른 씨족으로 대여하는 것의 집단에 
부속된다. 그리하여 남편은 그녀를 노예나 가축처럼 사들여, 그녀에게 자기 가문의 신들을 
섬기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자식들은 남편의 가문에 속한다.
  만일 그녀가 상속자라면 당연히 그녀는 아버지의 재산을 몽땅 자기 남편의 집에 넘겨주
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상속자에게 제의하려고 한다. 그러나 반대로 여
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한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을 누리지 못한다. 그려는 남
자의 세습재산의 일부가 되어 먼저 아버지의 다음에는 남편 재산의 일부가 된다. 엄격한 
가부장제도 하에서는 아버지는 남녀를 불문하고 자기 자식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남아
가 태어났을 경우에는 대개 사회가 그의 권한을 제한하여 정상으로 태어난 남자는 모두 
살도록 허용한다.
  한편 여아를 유기하는 풍습은 널리 퍼져 있었다. 아라비안인들 사이에는 갓난 아기의 대
량살육이 자행되어, 여아가 태어나면 곧 구덩이 속에 내던졌다. 여아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로서는 너그럽게 자비를 베푸는 행위였다. 이런 사회에선 동정을 받지 못한 여자는 
끼어들 수 없다. 어쨌든 여아가 태어났을 경우에는, 어머니의 출산은 훨씬 부정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레위기>에 보면 히브리인들 사이에서는 이 경우에 남아를 낳았을 때보다 
갑절이나 긴 정결의식을 요구하고 있을 정도이다. '피의 값'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도 희생자
가 여자인 경우에는 약간의 보상밖에 요구할 수 없어, 그 값을 남성에 비교하면 마치 자유
인과 노예의 관계와 같다.
  딸에 대하여는 아버지가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 그리고 딸이 결혼하면 아버지는 그 권
한을 모두 남편에게 이양한다. 그녀는 노예나 우마나 물품과 마찬가지로 그의 재산이므로, 
남편이 마음대로 많은 아내를 거느리는 것은 당연하다. 일부다처를 제한하는 것은 경제사
정뿐이다. 남편은 기분 내키는 대로 아내를 버릴 수 있고, 사회는 그녀에게 거의 아무 보
장도 해주지 않는다. 한편 여자는 엄격한 정조를 지켜야 한다.
  터부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모권사회는 대단히 자유로운 풍기를 인정하고 있었다. 결혼 
전의 정조는 거의 요구되지 않았으며, 간통은 그다지 남의 눈총을 받지 않는다. 반대로 여
자가 남자의 사유재산이 되면 그는 그녀가 처녀이기를 원하여, 엄한 벌칙을 정해 완전한 

정조를 요구한다. 남의 씨에게 상속권이 넘어가는 죄를 짓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었다. 
가정이 잘못을 저지른 아내를 죽일 권리를 갖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유재산이 존속
되는 한, 아내의 부정은 대적죄로 간주되었다. 모든 법률은 간통에 관하여 불평등을 유지
하면서, 아내가 가정에 사생아를 들여놓을 위험이 있는 죄의 중대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남편이 자기 손으로 부정한 아내를 마음대로 처단할 권리는 아우구스투스 대제 이
후로 폐지되었지만, '나폴레옹 법전'은 아직도 아내를 처단한 남편을 배심원이 관대하게 대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여자가 아버지의 씨족과 남편의 가문에 동시에 속해 있던 시기에는, 여자는 서로 뒤섥혀 
대립되는 두 유대 사이에서 상당한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 두 체계의 쌍방이 각각 그녀에
게 유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녀는 흔히 자기 마음에 드는 남편을 택할 수 있었다. 
결혼이 사회구조에 깊은 영항을 주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이 사회구조에 깊은 영
향을 주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부장제도하에서는, 그녀는 아버지의 사유재
산이므로 아버지는 마음대로 그녀를 결혼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계속하여 남편
의 가정에 매여 남편의 물품이며, 그녀가 들어온 씨족의 소유물에 불과하게 된다.
  가족이나 사유재산이 분명한 사회의 기반이 되어 있을 동안은, 여지도 완전히 소외된(인
격성을 상실한 상태)채 살게 마련이다. 이것이 회교사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회교사회의 
구조는 봉건적이다. 즉 여러 부족을 통합화여 복종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국가가 나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의 권력을 억제할 권력이 없었던 것이다. 아랍민족이 전사이자 
정복자였던 시기에 창시된 종교는 여자를 완전히 경멸하고 있다. "남자는 신으로부터 우월
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여자에게 지참금을 주기 때문에 여자보다 우수하다."고 
<코란>은 가르치고 있다. 여자는 현실적인 권력이나 신비적인 권위를 한번도 손에 넣어
본 적이 없다. 베두인족(사막에 사는 아라비아인)의 여자는 힘든 일 에 종사한다. 그녀들
은 쟁기를 다루고 무거운 짐을 운반한다. 이렇게 하여 그녀는 자기 남편과 상호의존 관계
를 갖게 되어 얼굴을 들고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다. 베일을 쓰고 집 안에 처박혀 있는 회
교도 여인은 오늘날까지도 사회계층에서 일종의 노예로 머물러 있다.
  나는 튀니지의 어느 혈거민 부락의 지하동굴 속에서 본 광경이 생각난다. 그곳에는 네 
명의 여자가 몸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애꾸눈에다 이가 빠져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한 늙은 아내가 매운 연기를 마시며 작은 화덕 위에서 가루반죽을 익히고 있었다. 그녀보
다 조금 젊지만 얼굴 모습은 거의 비스한 두 아내가 품속의 어린애를 흔들고 있었다. 그중
의 한 여자는 젖을 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비단과 금은으로 눈부시게 장식한 한 젊은 미인
이 베틀 앞에 앉아서 양털 실오라기를 잇고 있었다. 나는 이 음침한 동굴-내재의 왕국, 자
궁 겸 무덤-을 나오자, 흰 옷을 걸친 눈부시게 깨끗하고 명랑하고 잘생긴 사나이를 만났
다. 그는 시장에서 돌아와 다른 사나이들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넓은 세상에서 자기 
집인 이 은둔처에서 몇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아왔을 분, 그는 세계에 속해 있으며 세계에
서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시들어버린 노파들이나 그처럼 늙어갈 젊은 아내에게는 동굴 밖
의 세계가 없으며, 간혹 나가는 경우가 생겨도 베일을 쓰고 밤을 이용해야 한다.
  성서시대의 유태인들도 아라비아인과 거의 같은 풍습을 갖고 있었다. 가장은 일부다처이
고, 마음대로 아내를 버릴 수 있었다. 가혹한 형벌을 만들어, 남편에게 처녀로 몸을 맡길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간통을 하면 그녀는 버림을 받게 된다. 성서에 쓰여 있는 정숙한 여
인상이 입증하고 있는 것처럼, 여자는 가사에 매여 있다. "여자는 양털과 삼을 매만지
고......아침에는 해 뜨기 전에 일어나고...... 밤에는 등불이 꺼지는 일이 없고...... 게으른 여
자의 빵을 입에 대지 않는다."
  여자는 정숙하고 부지런하더라도 부정하다고 하여 터부시된다. 때문에 여자의 증언은 법
정에서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전도서>는 여자를 대단히 혐오스러운 존재로 말하고 
있다. "여자는 마음이 함정이나 그물과 같고 눈은 사슬과 같아 죽음보다 더 흉하다...... 천 
명의 남자 중에서 한 명의 남자를 발견하기는 쉬운, 여자 중에는 한 사람의 여자도 없다."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은 법률이나 습관에 의해 고인의 형제와 결혼해야만 했다. 이러한 습
관은 동양의 많은 민족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자가 후견인의 보호 아래 있는 결혼
제도인 경우에 반드시 일어나는 문제의 하나는, 미망인에게 주어지는 지위이다. 가장 과격
한 해결책은 그녀들을 남편의 무덤에 생매장하는 것이다. 인도에서도 법률이 이런 대량살
육을 강요한 적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마누법전'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 아내
가 살아 있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남편을 따라 함께 죽는 것은 귀족들 사이의 습관에 불
과했다. 미망인을 상속인들의 처분에 맡기는 경우가 휠씬 많았다. 형수와의 결혼은 때대로 
일처다부의 형태를 취한다. 과부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일가의 형제가 모두 남편으로 제공
된다. 이런 습관을 아들이 없는 경우에 대비하여 씨족을 유지하는 데 유용하다. 시저(로마
의 군인.정치가 BC 102~44)의 글에 보면, 브르타뉴에서는 한 집안의 남자들이 몇 사람
의 아내를 공유했던 것 같다.
  가부장제도는 모든 면에서 이런 극단적인 형태를 취한 것은 아니다. 바빌로니아에서 '함
무라비법전'은 여자에게 몇 가지 권리를 인정하고 있었다. 여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일부 
상속받을 수 있고, 결혼할 때에는 아버지가 지참금을 제공한다. 페르시아에서는 일부다처
가 관계가 되어 있다. 여자는 아버지가 택한 남편에게 절대로 복종한다. 그래도 그녀는 많
은 동양민족의 여성에 비하면 존경을 받는 편이었다. 근친상간은 금지되어 있지 않아 형제
와 자매 사이에 재결혼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여자는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일곱 살이 
되기까지, 여자아이의 경우에는 결혼할 때까지 교육시켰다. 만일 아들이 상속자로 부적합
했을 경우에는, 그녀도 남편 유산의 일부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남편이 성년인 아들을 두
지 않고 죽었을 경우에는, 아내는 미성년인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집안관리를 맡을 권리가 
있었다.
  결혼에 대한 여러 가지 법규에는, 자손의 존재가 가장에게 얼마나 중요시되는가를 분명
히 보여주고 있다. 결혼에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었던 것 같다.
  1. 여성이 부모가 동의하여 결혼했을 경우, 그때에는 '유권처'하고 불리며, 그 자식은 그
녀의 남편에게 속한다.
  2. 아내가 무남독녀일 경우에는 첫 자식은 그녀의 부모에게 양도하여 딸을 대신하게 한
다.
  3. 남자가 독신으로 죽었을 경우에는 그 가족이 외부 여자에게 지참금을 주어 다른 남자
와 결혼시킨다. 그녀는 '양자처'라고 불리며, 그녀가 낳은 자식의 절반은 죽은 남자에게 속
하고, 나머지 절반은 살아 있는 남편에게 속한다.

  4. 미망인으로 자식을 낳지 않고 재혼한 자는 '하녀처'라고 불리며 재혼하여 낳은 자식
들의 절반은 죽은 남편에게 속한다.
  5. 부모의 동의 없이 결혼한 여자는, 그 장남이 성년에 도달하여 그녀가 그 아이 아버지
의 '유권처'가 될 때까지는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없었다. 만일 남편이 그 이전에 
죽으면 그녀는 미성년으로 간주되어 후견인의 관리 아래 놓였다.
  '양자처' 와 '하녀처'의 제도는 반드시 혈연에 의해 연결되지 않는 후에 속에서 어떤 남
성도 존속될 권리를 확립해 주고 있다. 이것은 내가 앞에서 한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이 유대는 남성이 자기의 유한한 생명의 피안에 지상과 지하에서의 불멸성을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남성에 의해 발명된 것이다.
  여성의 신분이 가장 유리했던 것은 이집트였다. 어머니인 여신은 아내가 되어도 그 권위
를 잃지 않았다. 종교적. 사회적인 단위는 부부였다. 아내는 남편의 동맹자요 보조자로 간
주되었다. 여자의 마술성에는 큰 위험이 없었기 때문에 근친상간에 대한 두려움이 극복되
어 아내와 자매를 혼동하는 일도 예사였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권리와 같은 법적 효력을 
갖고 상속을 받아 재산을 소유한다.
  이런 특수한 행운은 결코 우연의 산물은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토지가 왕.승려.군
인 등의 상류계급에 소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토지의 소유는 단지 사용권의 확
보에 불과했다. 토지는 양도할 수 없었으므로, 상속에 의해 물려받은 재산은 별 가치가 없
었으며, 그것을 분배하는 데도 지장이 없었다. 세습적인 사유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엄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들은 자유롭게 결혼하고 미망인이 되어도 
마음대로 재혼할 수 있었다. 남자는 일부다처제도를 따르고 있었다. 그 자식들은 모두 적
자로 인정되었으나 진정한 아내는 한 사람뿐이었다. 즉 제사의식에 참여하고 합법적으로 
남편과 결합한 아내뿐이며, 그 밖의 아내들은 모든 권리를 빼앗긴 노예에 불과했다. 첫째 
부인은 재혼해도 신분이 바뀌지 않았고, 자기 재산을 자유롭게 관리하고 계약도 마음대로 
맺을 수 있었다.
  이집트 왕 보코리스가 사유재산제도를 확립했을 때에는 여자의 신분은 이미 밀려나기에
는 넘나 강력했다. 보코리스가 계약시대를 열자 결혼까지도 계약제가 되었다. 그 계약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 그 하나는 예속적인 결혼과 관련되어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
물이 되었으나, 때로는 남편이 자기 이외의 첩을 두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이기도 했다. 합
법적인 아내는 남편과 동등하게 간주되어, 모든 재산은 부부가 공동으로 소유했다. 이혼할 
경우에는 남편이 일정한 금액을 아내에게 지불해야만 했다. 이윽고 이 습관은 여자에게 유
리한 계약형식으로 발전하여, 남편은 아내에게 관습적인 신용을 인정하게 되었다.
  간통에는 중형을 내렸으나, 이혼은 양쪽 모두에게 거의 자유였다. 계약의 실천으로 일부
다처는 크게 제한되고, 여성은 재산을 독점하여 자식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 때문에 
금권계급이 생겼다.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는 법률로, 아내는 앞으로 남편의 허락 없
이 남에게 자기 재산을 물려 줄 수 없도록 규정하여 그녀들을 영원히 미성년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처럼 고대세계에서 유일한 특권적인 법규를 갖고 있던 시대에도 여자들은 사회
적으로 남자와 평등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들은 제사의식이나 정치와 관련되어 섭정왕후
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왕이 되는 것은 언제나 남성이었다. 승려나 병사도 남성

이었다. 여성은 보조적인 방법으로만 공동생활에 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생활에서는 
그녀들에게 일방적인 정조가 요구되었다.
  그리스인의 풍습은 오늘날에도 동양의 풍습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들은 일부다처제도를 
실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실제로 첩을 두는 것은 큰 부담이 되었다. 
많은 후궁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은 호화로운 솔로몬 왕이나 아라비안나이트의 황제나 임
금, 추장, 부호에 한정되어 있었다. 대개의 남자는 3명에서 4명의 아내로 만족하고 있었다. 
농부는 두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권리가 
없는 이집트를 제외하고, 상속재산을 고스란히 보유하려는 심정에서 부친의 유산에 대한 
개인적인 여러가지 권리를 남자에게 주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여자들 사이에 계급이 생
겨, 상속인의 어머니는 다른 아내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만일 아내가 재산
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나 지참금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에는, 그녀는 남편에게 한 인격체일 
수 있었다. 남편은 종교적, 독점적인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여기서 한 사람의 아
내만 인정하는 풍습이 생겼을 것이다. 사실 그리스의 시민은 거리의 창녀나 부인의 시중을 
드는 하녀를 통해 자기의 욕망을 채울 수 있었으므로 적당히 일부다처가 되었던 것이다. "
우리의 정신적 쾌락을 위해서는 기생이 있고, 감각적 쾌락을 위해서는 창녀가 있으며, 자
식을 두기 위해서는 아내가 있다."고 데모스테네스(고대 그리스의 응변가, BC 384~322)
는 말하고 있다. 창녀는 아내가 병들어서 월경이 있거나 임신했거나 산후 회복기가 있을 
경우에 주인의 침대에서 아내를 대신했다. 그러므로 부인의 방에서 첩이 있는 방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아테네에서는 여자는 자기 방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것은 법률에 의해 엄격
히 규제되고 특별한 관리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여자는 일생을 미성년으로 살아가는 것이
다. 여자는 후견인의 권리 아래 놓여 있다. 그 후견인은 아버지나 남편, 혹은 남편의 상속
자이기도 하고, 아무도 없을 경우에는 관리로 대표되는 국가이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여자의 주인이다. 그들은 물품처럼 여자를 자유롭게 처분한다. 후견인의 권력은 신분
이나 재산에 대해서도 행사하게 된다. 후견인은 그녀의 권리를 마음대로 양도할 수 있다. 
아버지는 자기 딸을 양녀나 결혼상대로 내준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와 이혼하고 그녀를 새 
남편에게 맡길 수 잇다.
  그러나 그리스의 법률은 여자에게 지참금을 보장하고 있어 결혼이 취소되면 그녀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극히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여자에게 이혼을 요구할 권리도 
주어져 있다. 이것은 사회가 그녀에게 제공한 유일한 보상이었다. 물론 모든 유산은 아들
에게 돌아가는 것이므로 지참금은 친자관계에서 얻는 재산이 아니라 후견인에게 부과되는 
일종의 봉사이다. 그러나 지참금을 사용함으로써 미망인은 상속인들 손에 넘어가지 않고 
부모의 후견 아래로 복귀한다.
  부계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하나는, 남자 후계자가 없는 경우의 상속이
다. 그리스인들은 여자 상속제도의 관습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여자 상속인은 아버지의 씨
족 중 가장 연장인 근친과 결혼해야만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긴 
재산은 같은 집단에 속하는 자식에게 전해져, 토지는 씨족의 재산으로 남는다. 상속녀는 
여자 상속인이 아니라, 단지 상속인을 낳는 기계에 불과했다. 이런 관례는 여자를 완전히 
남자의 뜻에 맡기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 집안 남자 중 제일 먼저 태어난 자에

게 자동으로 맡겨지고, 그 남자는 대개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을 압박하는 이유가 가족을 존속시켜 재산을 온전히 보유하려는 의지에 있으므로, 
여성은 가족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따라 이 완전한 의존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만일 사회가 
사유재산을 부정함으로써 가족을 부정하게 되면, 여성의 운명은 그 때문에 훨씬 개선될 것
이다. 공유재산제도가 우세했던 스파르타는 여자가 암자와 거의 평등한 취급을 받은 유일
한 도시였다. 딸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았다. 아내는 남편의 가정에 갇혀 있지 않
았다. 남편은 한밤중에 아내를 은밀히 찾는 것만 허용될 뿐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
게 전적으로 속해 있지 않았으므로, 우생학적인 이유로 다른 남자가 그녀와 결합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상속이 사라짐에 따라 간통의 개념도 소멸되었다. 자식은 시 전체에 공동으로 속해 있었
으므로 여자들도 한 사람의 남편에게 예속되지 않았다. 혹은 그 반대로 개인이 재산이나 
자손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도 아내를 소유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남자들이 
전쟁을 위한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여자들도 모석의 의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
런 시민의 의무수행을 제외하면 어떤 속박도 그녀들의 자유를 제한하지는 않았다.
  그리스에는 방금 말한 자유로운 여자와 씨족 안에서 살아가는 노예들-가장이 절대적인 
소유권을 갖고 있다-외에 창녀가 있었다. 원시민족들 사이에는 길을 가는 여행자에게 아
내를 빌려주는, 신비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매음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생식의 위력을 해방
하기 위한 신성한 매음이 있었다. 이런 습관은 전형적인 고대에 존재했다.
  헤로도토스의 말에 의하면, 기원전 5세기 경에 바빌로니아의 아내들은 모두 일생에 한 
번은 밀리타의 신전에서 한푼의 돈에 외간남자에게 몸을 맡기고, 그 돈을 신전의 재산에 
보태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후 집으로 돌아가 정숙하게 살았다.
  종교적인 매음은 존경받는 음악가나 무용가의 계급을 형성하는 이집트의 '아르메'나 인
도의 무희들 사이게 남아 있다. 그러나 대개 이집트, 인도, 서아시아에서는 신성한 매음이 
일반적인 의미의 매음으로 전락해 버렸다. 승려계급이 이런 거래에서 사욕을 채우는 수단
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인 사이에서도 몸을 파는 매음부가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연안지방이나 섬이나 외
국인들이 모이는 도시에서, 핀다로스(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 BC 518~483)의 표현을 
빌리면 '외국인을 환대하는 젊은 아가씨들'이 모이는 신전이 있었다. 그녀들이 손에 넣는 
돈은 제사의식에 쓰였다. 매음으로 번 돈은 승려들에게 주거나 간접적으로는 그녀들의 생
계에 충당되었다. 현실적으로는 위선적인 형태로-특히 코린토스에서는- 선원이나 여행자
의 성적 욕구를 이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돈을 벌기 위한 매음이었다.
  매음을 제도화한 것은 솔론(그리스 칠현의 한 사람, 아테네의 입법가, BC 640~558)이
다. 그는 아시아인 노예를 사서 아테네의 베누스 신전 옆의, 항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
딕테리온'에 가두어놓고, '포르노트로포스'라는 감독을 두어 그 노예의 재정적인 관리까지
도 책임지게 했다. 창녀에게는 봉급을 주고, 그 이윤은 모두 국고로 들어갔다. 이윽고 사적
인 매음시장인 '카파일레이아'가 열렸다. 붉은 프리아포스(생식의 신, 즉 발기한 남근)가 
간판 구실을 했다.
  이윽고 여자노예 이외에 신분이 낮은 그리스인 여자를 창부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딕테

리온'은 현실적으로 매우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신성불가침의 위안소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창부들은 불명예스러운 인간으로 낙인찍혀 사회적인 권리를 전혀 인정받지 
못했으며, 그 자식들조차 그녀들을 봉양할 의무를 갖지 않았다. 그녀들은 꽃다발로 장식된 
울긋불긋한 천으로 된 특수한 옷을 걸치고 머리는 사프란으로 염색을 해야만 했다. 딕테리
온 속에 갇혀 있는 여자를 외에 자유로은 창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로 말하면 허가증을 가진 여자에 해당하는 '딕테리아드'와 춤도 추고 피리도 
부는 '아울레트리드'와, 주로 코린토스 출신으로 그리스의 저명인사들과 공공연히 어울리
며, 근대의 사교계 여인들처럼 사회적인 역할을 한 고급창녀 '헤타이라'가 그것이다.
  '딕테리아드'는 해방된 노예나 하류 계층에 속하는 그리스의 노예들 사이에서 볼 수 있
다. 그녀들은 뚜쟁이들에게 착취를 당하며 비참하게 살아갔다. '아울레트리드'는 때때로 그 
음악적인 재능으로 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를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데메트리오스 폴
리오르케테스의 정부가 된 라미아이다. '헤타이라'에 대하여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몇몇 
여자들은 그 애인의 영광과 결부되어 있다. 신분상 행동이 자유롭고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으며, 머리가 좋고 교양이 있는데다가 예술가이기도 한 그녀들은 남자들로부
터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았으며, 남자들은 그녀들과의 교제를 환영했다. 그녀들은 가정
을 떠나 사회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남성의 압력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그리
하여 남성의 눈에 한 동류로서 거의 동등하게 보였다. '아스파시아'나 '프리네', 혹은 '라이
스'에서는 해방된 이런 여자들이 가정의 정숙한 주부보다 뛰어났던 실례를 찾아볼 수 있
다.
  이런 훌륭한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그리스의 여성들은 반 노예상태를 강요당하고 있
었다. 그녀들에게는 이것을 항의할 만한 자유도 없었다. 아스파시나나 그녀보다 더욱 정열
적인 사포가 약간의 항의를 시도할 정도였다. 호메로스에게는 여자들이 어느 정도 권리를 
행사했던 시대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전사들은 그녀들을 준엄하게 안방으로 
돌려보냈다. 헤시오도스의 작품에서도 똑같은 모멸을 찾아볼 수 있다. "여자를 믿는 자는 
도둑을 믿는 것과 같다." 위대한 고전시대에는 여자는 내실에 완전히 갇혀 있었다. "가장 
훌륭한 여자는 남자의 입에 전혀 오르내리지 않는 여자이다."라고 페리클레스는 말했다. 
공화국 행정에 주부위원회를 설치하고 소녀들에게 자유로운 교육을 시키려고 했던 플라톤
의 경우는 예외이다. 그는 아리스토파네스의 비웃음을 샀다. <리시스트라테>에서, 세상일
에 대한 아내의 질문을 받은 남편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니 
잠자코 있어. 그렇지 않으면 때려줄 거야... 너는 베일이나 짜고 있으면 돼."
  아리스토텔레스가, 여자는 일개 미완성품이라는 특질로 인하여 여자이며 가정에 들어앉
아 남자에게 종속되어 살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일반적인 의견을 대변한 것에 불과핬다. "
노예는 의견을 논할 자유가 완전히 박탈당하였다. 여자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으나 희박하
여 효과가 없다."라고 그는 단언하고 있다. 크세노폰(고대 그리스의역사가, 군인, 소크라테
스의 제자, BC 430~354?)에 의하면, 남편과 아내는 어디까지나 남이다. "여자처럼 말상
대가 되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경제학에서 여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상하고 신중하고 알뜰하며 꿀벌처럼 부지런히 일
을 하는 주부에다 모범적인 내조자가 되는 것이다. 여자에게 이런 얌전한 지위를 강요하면

서도, 그리스의 남자들은 마음속으로 여자를 싫어했다. 이미 기원전 7세기에 아르킬로쿠스
는 여성에 대한 신랄한 풍자시를 쓰고 있다. 아모르고스의 시모니데스(고대 그리스의 서정
시인)의 작품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 "여자는 신의 피조물 중 가장 큰 
화근이다. 때로는 유익해 보이기도 하지만, 곧 그 주인에게 애물단지가 된다." 히포낙스의 
작품에서는 "아내가 기쁨을 주는 날은 일생에 이틀뿐이다. 결혼식날과 장례식날이다." 이오
니아 사람들은 밀레토스의 이야기 속에서 마음껏 심술을 부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에페소
스의 여주인공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시대의 여성들이 특히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게으르고 까다롭고 낭비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땅이나 바다에도 괴물은 많지만, 그중
에 가장 큰 괴물은 역시 여자이다." 하고 메난드로스(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 BC 342~2
92?)는 쓰고 있다. "여자는 당신을 일생 동안 풀어주지 않는 두통거리이다."
  지참금제도로 여자가 다소 나은 지위를 얻게 되자, 이번에는 여성의 오만을 개탄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파네스나 메난드로스가 즐겨 사용하던 주제였다. "나는 지참금을 갖고 온 
마녀와 결혼했어. 밭과 집에 눈이 멀어 아내로 맞았으나, 오 아폴로 신이여, 이건 최악의 
제비뽑기예요." "결혼을 최초를 발명한 자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만일 당신이 가난하다
는 이유로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 자네는 동시에 노예와 거지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스의 여자들은 엄격하게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품행에 있어서는 나무랄 데가 없
었다. 그러므로 그 육체에 대해서는 비난을 퍼붓지 않았다. 남자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
는 것은, 결혼을 함으로써 발생하는 부담과 예속이었다. 여기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여
자가 가혹한 처지에 놓여 거의 아무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중요
한 위치를 차지하여 모종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녀들은 복종하면서도 
반항할 수 있었다. 연극으로, 눈물로, 수다로, 욕설로 남편을 압도할 수 있었다. 여성을 종
속시키기 위한 결혼은, 한편으로는 남편에게도 하나의 구속이었다. 크산티페(소크라테스의 
아내이며 악처로 널리 알려져 있음)의 인격 속에 바가지를 긁는 아내와 부부생활의 불행
에 대한 그리스 시민의 불만이 요약되어 있다.

  로마 여성의 역사를 결정하고 있는 것은 가정과 국가와의 투쟁이다. 에트루리아인은 모
계 상속제도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또 왕정시대에도 역시 모권제도와 결부된 이민
족과의 결혼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증거로, 라틴의 왕들은 상속에 의해 왕권을 
계승하지 않았던 점을 들 수 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타르퀴니우스 황제가 죽은 
후 부권이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농지나 사유지, 가정이 사회의 기본이었다. 그후 여자는 사유재산에, 나아가 가족집단에 
엄격히 예속되었다. 법률은 그리스의 여자에게 인정했던 보장을 모두 빼앗아버렸다. 그리
하여 여자는 무능과 굴종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공무에서 제외되어 모든 "남성적인 사
무"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리고 시민생활에서 여자는 영원한 미성년자였다. 여자에게 아
버지의 유산을 분배하는 것을 직접적인 방법을 동원해 거절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마음
대로 처분할 수 없게 했다. "후견제도는 후견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제정된 것이다."라고 
가이우스는 말하고 있다. "후견인들은 그 여자의 추정상속인으로서 그녀의 유언에 의해 자
기들에게서 그녀의 유산을 빼앗아갈 수 없고, 또 양도나 빚에 의해 그 유산을 축낼 수 없

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자의 최초의 후견인은 그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없는 경우, 아버지의 친척이 그 직책
을 맡는다. 결혼을 하게 되면 그녀는 남편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결혼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콘페라티오(밀가루나 보릿가루를 바치는 의식)에서 부부
는 신관 앞에서 유피테르 신에게 보릿자루로 만든 과자를 바친다. '코엠프티오'(매매를 뜻
함)는, 평민계급인 아버지가 딸의 소유권을 그 남편에게 물려주는 제도적인 매매이다. 또 
하나 '우수스'는 1년 동안 동거한 결과 성사되는 결혼이다. 이 세가지 결혼형태에는 모두 "
남편의 권리"가 수반된다. 즉 남편이 아내의 아버지 혹은 후견인을 대신한다. 그후 남편이 
그녀의 신분과 재산에 대해 전권을 갖게 된다. 그런데 12표법(로마 최고의 성문법)의 시
기 이후부터, 로마의 여자는 아버지의 씨족과 남편의 씨족에 동시에 속하게 되어 그 법적 
해방의 원천이 된 투쟁이 생기게 되었다. 사실상 '남편의 권리'가 수반된 결혼은 아버지 쪽
의 후견인의 이익을 말살해 버린다. 그래서 아버지 쪽의 친척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남
편에게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결혼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경우 아내의 재산은 후견인에게 
종속된 채로 있게 되어 남편은 아내의 신분에 대한 권리만 갖게 된다.
  가정재판소의 임무는 아버지와 남편을 대립시킬지도 모르는 충돌을 조정하는 것이다. 이
런 제도로 인해 아내는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가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그리고 이 공식 재판소에소 독립된 재판소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
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듯이 씨족은 극도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 씨족의 장인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 사람의 시민이다. 그의 권위는 무제한이었으며 처자를 절대적으로 지
배한다. 그러나 처자들은 그의 재산은 아니다. 자식을 낳고 가사에 농사까지 겸하고 있는 
아내는 나라를 위해서도 대단히 유익하여 진실로 존경을 받게 된다.
  여기에서 역사의 흐름 전체를 통하여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추
상적인 법률만으로는 여자의 구체적인 상황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자는 대부분 그
녀가 참여하고 있는 경제적인 역할에 좌우된다. 그리고 종종 추상적인 자유와 구체적인 권
력은 반대방향으로 간다. 로마의 여자는 그리스의 여자보다 법률상으로는 더욱 종속되어 
있었으나, 사회에 훨씬 깊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녀는 집안에 깊숙히 갇혀 있는 대신 중심
부인 안뜰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노예가 하는 일을 감독했다. 자녀들을 교
육하고, 자녀들이 성장할 때까지 그 영향력을 미친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일하고, 그의 재
산의 공동소유자로 간주된다. "그대는 가이우스이고 아내는 가이아로다."라는 결혼선서의 
문구는 결코 공허한 격식이 아니다.
  주부는 '여주인'으로 불렸다. 여자는 가정의 여주인이며 제사의식에 관여했다. 노예가 아
닌 남편의 반려자였다. 여자를 남편에게 연결하는 유대는 대단히 신성했으면, 5세기 동안 
단 한 건의 이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자는 자기 방에 갇혀 있지 않고 만찬이나 축제, 
극장에도 간다. 거리에 나가면 남자들은 여자에게 길을 비켜주었는데 집정관이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전설들은 역사 속에서 여자에게 큰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사비누스족
의 여자나 루크레티아, 비르기니아의 전설들은 잘 알려져 있다. 코리올라누스는 자기 어머
니와 아내의 탄원에 지고 만다. 로마 민주제도의 승리를 마련한 루키니우스의 법률은 그의 

아내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라쿠스 일족의 정신을 연마시킨 것은 코르넬
리아(고대 로마의 귀부인)이다. "어디에서나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남자를 통치하는 우리들을 통치하는 것은 여자이다."고 카토(고대 로마의 정치가, BC 234
~149)는 말했다.
  로마 여성의 법적인 지위는 조금씩 현실적인 상황에 적응해 나갔다. 가부장적인 과두정
치 시대에는, 각 가장은 공화국 안에서 독립된 군주였다. 그러나 국가의 권력이 확립되자 
그것은 재산의 축적과 가족의 권위가 부리는 횡포를 억제했다. 가정재판소는 국가의 재판
소 앞에 존재가 흐려지고, 여자는 점차 중요한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여자의 자유를 제한
했던 권력은 본래 네 가지였다. 아버지와 남편이 여자의 신분을 좌우했고, 후견인과 로마
법이 그녀의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국가는 아버지와 남편의 대립을 이용하여 그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국가의 재판소가 간
통과 이혼사건 등을 다루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마누법과 후견제를 대립시켜 상호간의 힘
을 악화시켰다. 후견인의 이익을 위해 이미 남편의 권리를 결혼과 분리시켰다. 남편의 권
리는 여자가 결혼계약을 맺는 데 따라서, 혹은 아버지나 국가에서 친절한 후견인을 얻게 
됨에 따라서, 후견인제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용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제정시대의 법률에는 후견인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동시에 여자는 자기의 독립에 대
한 구체적인 보증을 얻게 된다. 즉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지참금을 제공할 의무를 지
게 된다. 여자는 결혼이 해소되더라도 부계친족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결코 남편의 
것이 아니다. 여자는 언제나 이혼에 의해 지참금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어, 남편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다. "남자가 지참금을 받았을 때 그는 자기의 권리를 팔아넘긴 것이다."라고 
플라우투스(고대 로마의 희극작가, BC 254?~184?)는 말하고 있다.
  공화제 말기부터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등하게 자식들의 존경을 받을 권리를 인정받게 
되고, 후견인이 있는 경우나 남편의 행실이 바르지 못할 경우네는 자식을 감독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에는 원로원인, 자식이 셋이 있고 남편의 다른 친족
이 없을 경우,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유언이 없어도 그의 아내에게 상속할 권리를 주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에서는 로마가족의 발전이 완성되었다. 178
년 이후부터 어머니는 부계친족을 물리치고 자기 자식들을 상속인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
다. 그 이후 가정은 핏줄의 결합에 기토를 두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등하게 간주되었으며 
딸들도 남자형제와 마찬가지로 상속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법의 역사 속에는, 지금까지 기술한 것과 모순되는 하나의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여자를 가족으로부터 독립시키면서 중앙정부의 권력 자체가 그 여자의 후견인
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력이 여자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무력하게 만들었다.
  여자가 부자가 되어 독립을 하게 되면 위험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될 것이라는 견지에서, 
한 손으로 여자에게 허용한 것을 다른 손으로 빼앗으려고 했다. 로마의 여성에게 사치를 
금한 '오피아법'은 때마침 한니발(카르타고의 장군, BC 247~123)이 로마를 위협하고 있
을 때 제정되었다. 카토는 유명한 연설에서 이 법령이 존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광
장에 모인 주부들의 시위가 그를 따돌리고 승리를 거두었다.
  풍속이 문란해지자 점점 더 엄격한 법률이 잇따라 제정되었으나, 모두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탈법행위만을 일으켰을 뿐이다. 다만, 여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 중개하는 것(계약
에 의해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것)을 금하고, 여자에게서 시민권을 거의 빼앗다시피한 벨
레이우스의 원로인 결의만이 승리를 거두었다. 실제로 여자가 가장 해방되어 있던 시기일
수록 여자의 성의 열등성을 크게 부르짖게 되며, 이것은 내가 이미 말한 남성의 자기옹호 
수단의 뚜렷한 실례이다. 즉 딸로서, 아내로서, 자매로서 여자의 권리를, 성을 구실로 삼아 
남자들과 평등하게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녀를 구박하기 위해, '여성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구실로 삼게 된다.
  사실 로마의 주부들은 자기의 새로운 자유를 그다지 유효하게 사용할 줄 몰랐다. 그러나 
한편 그 자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금지된 경우도 있었다. 다음의 두 가지 상반되
는 경향 -가정에서 여성을 해방하는 개인주의적인 경향과 개인으로서의 여자를 박해하는 
국가주의적인 경향-에서 여성의 입장은 불안정하게 되었다. 그녀는 상속인이며, 남편과 동
등하게 자녀들의 존경을 받을 권리를 소유하고, 유언을 한다. 지참금제도 덕분에 결혼의 
속박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이혼을 하고 재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전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방은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소극적인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다. 경제적인 독점이나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므
로 추상적인 것에 그쳤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로마의 여성들은 자주 시위를 했다. 그녀들은 시내를 돌아다니고, 재
판소를 포위하고, 음모를 꾀하고, 항의하고, 내란을 선동하기도 했다. 행렬을 지어 티베르 
강을 따라 '신들의 어머니' 조상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로마에 동방의 신들을 도입
했다. 114년에는 베스타 여인의 축제에서 큰 소동이 일어나 대학이 폐쇄되었다. 공적인 
생활과 미덕은 여전히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었으므로, 가정의 붕괴로 종래의 개인적인 
미덕이 시대에 뒤떨어진 무익한 것이 되자, 여자들에겐 추종할 만한 도덕이 없어져버린다. 
그녀들은 두 가지 해결방안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했다. 자기들의 조상과 같은 가치를 완
고하게 존중하거나, 아니면 어떤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 걸쳐서도 공화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남편의 반려자 및 협력자
가 된 많은 여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플로티나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영광과 중책을 
함께 하고, 사비나는 선행으로 유명해져서 죽기도 전에 사람들이 조상을 만들어 신격화했
다.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는 섹스티아가 아에밀리우스 스카우루스와 생사를 같이하고, 
파스케아는 폼포니우스 라베우스보다 오래 살기를 거부했다. 파울리나는 세네카와 동시에 
자신의 동맥을 끊고, 그 아들 플리니우스는 아리아의 <시인은 슬퍼하지 않는다>를 유명
하게 만들었다. 마르티알리스는 클라우디아 루피나와 비르기니아와 술피키아에게서 완벽한 
아내와 현신적인 어머니를 발견하여 찬미하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가 되기를 거부하고, 이혼을 자주 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법률은 여전히 
간통을 금하고 있었으나, 주부들 중에는 방탕한 생활을 위해 창녀로 등록하는 일까지 있었
다. 이때까지 라틴문학은 여성에 대해 계속 존경심을 품어왔다. 그러나 이 지경이 되자 여
성을 비꼬는 작가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여성 일반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자기 시대의 여성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유베날리우스는 여자들의 사치나 폭음, 폭실을 탓
하고, 남성의 일을 하고 싶어하는 것을 비난했다. 여자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소송서류

에 몰두하고, 문법학자나 수사학자와 의논하고, 사냥이나 전차, 쟁기, 검술, 역기에 열중한
다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와 겨루는 것은, 주로 오락적인 취미와 괴벽에 의한 것이 사실이다. 가장 높
은 목적을 노리기 위해서 필요한 교육이 그녀들에게는 부족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는 아
무 목적도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여자들에게는 행독이 금지되어 있었다. 고대공화국인 로
마의 여성은 지상에 하나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리와 경제적인 독립이 
주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은 사슬에 매여 있었다. 퇴폐기의 로마 여성은, 남성이 
여전히 구체적이고 유일한 지배자인 세계에서 맹목적인 자유밖에 소유하지 못한, 형식적으
로만 해방된 여자의 전형이다. 그녀들은 '무를 위해' 자유로웠다.

    4
  여성의 지위향상은 그후에도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민족의 대이동과 함께 문명 전체가 
흔들리게 되었다. 로마법도 기독교라는 새로운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그후 몇 세기 동안
은 야만인(로마인은 다른 민족을 이렇게 불렀다)의 법률이 판을 친다. 경제, 사회, 정치가 
일변한다. 물론 여성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기독교의 이념은 여성의 압박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물론 복음서에는 문둥병자나 여
자에게도 자비를 베풀고 있다. 새로운 계율에 가장 열심히 따르는 것은 서민·노예·여자
들이었다. 그리고 기독교 초창기에 여성이 로마교회의 멍에를 얌전히 감당하고 있을 무렵
에는, 그녀들도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여자도 남자와 함께 순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
의식에서도 여자는 부차적인 역할만 맡게 되었다. 여집사는 병자를 돌보거나 빈민을 구제
하는 세속적인 임무에만 종사했다.
  그리고 결혼은 제도상으로 남녀가 서로 정절을 요구하였으나, 사실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성 바울은 극단적으로 반여성적인 유태의 전통을 주장
하고 있다. 바울은 여자에게 표면에 나서지말고 물러나 있기를 요구한다.그는 신·구약성
서에 의거하여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
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생겼으며, 여자를 위해 남자를 지은 것이 아니라 남자를 위
해 여자를 지었다."(〈창세기〉에 있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든 것을 가리킨다.) 
또 "로마교회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무슨 일에서나 아내는 남편을 띠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육체가 저주를 받는 종교에서는, 여자는 악마의 가장 두려운 유혹으로 보
게 된다. (〈창세기〉에서 이브를 유혹한 것은 마귀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여, 그대는 악마의 문이로다. 그대는 악마도 
감히 정면으로 공략하지 못한 자도 설복시킨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했던 것은 너 때
문이다. 너는 상복과 누더기를 걸치고 언제나 물러가 있어야 한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말
했다. "아담이 이브를 죄로 유인한 것이 아니고, 이브가 아담을 죄로 유인했다. 여자가 죄
로 유인한 자를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말했
다. "모든 야수 중에서 여자보다 더 해로운 짐승은 없다."
  교회법이 제정되었던 4세기경에는, 결혼은 인간의 약점에 굴복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기독교의 완전무결한 덕에 배치되는 행위였다."도끼를 손에 들고,혼인의 무익한 나무를 뿌

리째 베어 쓰러뜨려야 한다."고 성 히에로니무스는 쓰고 있다. 그레고리우스 6세 이후로 
성직자에게 독신생활을 요구하게 되면서 여자의 위험한 성격이 점점 강조되어, 로마교회의 
교부들은 저마다 여자의 미천함을 말하고 있다. 성 토마스가 여자는 '우연의' 불안전한 존
재요, 남자가 되려다가 만 인간에 불과하다고 단언하고있는 것은, 이 전통에 충실한 조치
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스도가 남자의 머리인 것처럼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다." 하고 그
는 쓰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지배 속에서 살도록 되어 있으며, 그 주인에 대해 아무 권한
도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교회법은 여자를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지참금제도 이외의 어떤 결혼제도도 인정하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의 직무에 종사하는 것
을 금할 뿐 아니라 법전에서 증언하는 것도 금지하여, 그 증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 황제들은 그다지 극단적인 태도는 취하지 않았으나, 교회 교부들의 영향을 받고 있
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율법은 여자를 아내와 어머니로서 존중하는 대신 아내와 어머니의 
임무에 예속시켰다. 여자의 무능력은 여자라는 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
의 상황에서 온 것이다. 이혼은 금지되고, 결혼은 공적인 일로 간주되었다. 어머니도 자식
에 대해 아버지와 동등한 권한을 갖고, 지식의 상속에 대해서도 같은 권리가 있다. 남편이 
죽었을 경우 어머니는 자식의 법적인 후견인이 된다. 벨레이우스의원로원 결의안은 수정되
어, 앞으로 여자는 제3자를 위하여 중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 대신 계약을 맺을 
수는 없었으며 지참금을 양도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것은 자식들의 세습재산으로, 여자가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을 금지했다.
  야만족(로마인 이외의 민족을 가리킴)인 게르만족에게 점령된 지방에서는, 이 법률과 게
르만족의 풍습이 병행하여 지켜졌다. 게르만인의 풍습은 독특한 것이었다. 그들은 전쟁 때
만 우두머리를 인정했다. 평화시에는 가족이 하나의 자치사회였다. 그것은 모계상속에 근
거를 둔 씨족과 가부장제도하의 씨족의 중간체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머니의 형제는 
아버지와 같은 권한을 가져 질녀에 대해 자매의 남편과 동등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폭력이 모든 능력의 원천인 사회에서는 여자는 사실상 완전히 무기력했다.그러나 여자가 
의존하고 있는 가정에서의 권한의 이원성에 의해 보장되는 권한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
는 예속되어 있었으나 존중되기는 했다. 남편은 돈으로 아내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매입금은 아내의 재산, 즉 그녀만의 재산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딸에게 지참금을 주
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유산을 분배받을 수 있고, 부모가 살해당했을 경우에는 살해자가 
지불하는 보상금의 일부를 받을 수 있었다. 가정은 일부일처제였으며, 간통은 엄하게 처벌
하고, 결혼은 존중되었다. 아내는 여전히 후견하에 있었으나, 남편과는 긴밀히 결합되어 있
었다. "평화시나 전시를 막론하고 아내는 남편과 운명을 함께 하며, 남편과 함께 살고, 남
편과 함께 죽는다." 라고 티커투스는 쓰고 있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여 군
량을 운반하고 옆에서 격려했다. 과부가 되면 죽은 남편의 신분의 일부가 그녀에게 양도되
었다. 여자의 무능력은 육체적인 열세에 의한 것이지 정신적인 열세 때문이라고는 생각하
지 않았다. 승려나 예언자들은 여자였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보다 유식했던 것으로 추정
된다. 유산을 상속할 때 당연히 여자의 몫으로 돌아갈 물품 중에 보석이나 서적도 볼 수 
있었다. 이런 전통은 중세기 동안 변함이 없었다. 여자는 아버지와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
존하고있었다. 클로비스 시대에는 멍디엄(프랑크족의 법률. 남편이나 아버지가 아내나 자

식을 후견하는 권리)이 여자의 일생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프랑크족은 게르만의 순결을 포기하였다. 메로빙 왕조와 카를링 왕조 치하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성행하였다. 여자는 자기 의사와는 관계없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생사여탈의 
권한을 쥐고 있는 남편의 의사에 따라 이혼을 당했다. 여자는 노예와 마찬가지로 취급되었
다. 법률에 의해 보호를 받기는 했으나, 단지 남자의 소유물로서, 자녀의 어머니로서였다. 
아무 증거도 없이 여자를 '창녀'라고 부르면, 모욕죄로 간주되어 남자에 대한 모든 모욕보
다 15배가 되는 배상을 해야만 했다. 기혼여성의 유괴는 노예가 아닌 인간 한 사람을 살
해했을 때와 같은 죄로 간주했다. 기혼여성의 손이나 팔을 잡는 것은 15수 내지 30수(프
랑스의 화폐단위)의 벌금을 내야만 했다. 그리고 낙태는 100수의 벌금형에 처하여 금지했
다. 결혼한 여자의 살해는 노예가 아닌 남자를 살해한 것보다 네 갑절의 죄에 해당되었다. 
임신할 수있는 여자는 노예가 아닌 남자보다 3배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
을 수 없게 되면 그 여자는 모든 가치를 잃게 된다. 만일 노예와 결혼하면 그녀는 법률의 
혜택을 받지 못하며, 부모는 그 딸을 죽여도 무방했다. 여자는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서는 
아무 권리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국가가 강력해지면서 로마에서 완성되었던 진화의 기미
가 나타나, 무능한 어린이나 여자를 보호하는 일은 가족법이 아니라 공동사회의 부담이 되
었다. 샤를마뉴 대제(8세기 프랑크 황제)이후로 여자를 압박하는 멍디엄은 왕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이내가 본래의 후견인을 잃었을 경우에만 개입했다. 그
러나 점차 가족의 권리를 빼앗아갔다. 그러나 이 변화가 프랑크족 여성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멍디엄은 후견인에게 하나의 책무가 되어, 그는 그 피후견인을 보호할 의
무를 갖게 되었다. 이 보호는 피후견인을 이전과 같은 노예상태에 머물게 했다.
  중세 초기의 난세를 지나 봉건제도가 정착되자, 여자의 지위는 오히려 더 불안정하게 되
었다. 봉건적인 법률의 특징은 지배권과 재산권, 공민권과 개인권 사이에 혼동이 일어난다
는 점이다. 이것은 이 제도에 의해 여성의 지위가 낮아지기도 하고 높아지기도 했던 경위
를 설명하고 있다. 여자는 정치적인 능력이 없으므로 처음에는 모든 개인권을 인정받지 못
했다.
  사실 11세기까지는 질서는 주로 폭력의 기반 위에서 유지되고, 소유권은 무력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봉토는 법률학자들의 말처럼 '군대의 지배하에 둔 땅'을 가리킨다. 여자
는 봉토를 지킬 수 없으므로, 소유할 수도 없었다. 봉토가 상속되어 세습재산이 되면서 여
자의 지위가 달라졌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게르만족의 법에는 모권의 잔재가 남아 
있어, 남자 상속인이 없을 경우에는 딸이 상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11세기경에는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하에 대하여는 언제나 군무에 종사할 것을 요
구했다.
  여자가 상속자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신분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 후견
인을 필요로 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아내가 가진 권한을 받아 영
지를 장악하고, 재산의 용역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스 시대의 여자 싱속인처럼, 아내는 
영지를 전달하는 자이지 영지를 보유하는 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도 해방되어 있지 않
았으며, 오히려 영지에 흡수되어 부동산의 일부가 되었다. 영지는 이미 로마 씨족시대처럼 
가족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영주의 소유물이며, 따라서 여자도 영주의 것이었다. 여자

에게 남편을 골라주는 역할도 영주가 하였다.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는 남편보다
도 영주에게 바쳤다. 아기는 영주의 재산을 지키는 가신이 되고, 여자는 영지에 속하는 노
예이며, 주어진 남편의 '보호'를 통한 이 영지의 주인인 영주의 노예이다.
  여자의 처지가 이처럼 비참한 시대도 드물었다. 여자 상속인이란, 곧 토지이며 성이었다. 
그리하여 구혼자들은 이 먹이를 자기 손에 넣으려고 다투었다. 결혼을 자주 하는 것은 남
자에게는 영지를 늘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혼하는 경우도 증가되었다. 교회는 그것을 위
선적으로 허용했다. 혈족결혼은 7촌까지 금지되고, 친족관계는 혈연관계와 마찬가지로 대
부나 대모와 같은 정신적인 관계에 의해서도 정해지므로, 결혼의 해소에는 언제나 어떤 구
실을 찾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11세기에는 네 번 혹은 다섯 번이나 이혼을 당한 여자가 있다. 또 여자가 만일 과부가 
되면 곧 새 남편을 맞아들여야 했다. 무훈을 찬양하는 시에서 샤를마뉴가 스페인에서 전사
한 제후의 과부들을 모아 한꺼번에 재혼을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지라르 드 비엔'에서는, 
부르고뉴 후작부인이 자진하여 왕에게 새 남편을 청원한다. "제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렇
다고 비탄에 잠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에게 강건한 남편을 물색해주십시
오. 저의 영지를 지켜야 하니까요."
  많은 서사시는 왕이나 영주가 처녀와 과부를 강제로 농락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
고 남편이 선물로 받은 아내를 푸대접하는 것도 찾아볼 수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학대
하여 얼굴을 때리고 머리채를 움켜잡고 발길로 찼다. 보부아지의 관습법 속에서 보마누아
르(프랑스의 법학자,〈보부아지 관습법〉을 편찬, 1246~l296)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남
편이 아내를 '적당히 처벌하는'것이었다. 이와 같은 군국문화는 여자에게 오직 경멸감만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기사는 여자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그에게는 자기의 말이 훨씬 
값진 보물로 생각되는 것이다. 무훈을 찬양한 시에서는 언제나 젊은 처녀 쪽에서 남자에게 
접근해 간다. 그리하여 결혼하게 되면 여자쪽에 일방적인 정절이 요구된다.그리고 남자는 
자기 생활에 여자를 관련시키지 않는다.
  "기마시합을 할 때 여자에게 조언을 구하러 가는 기사에게는 저주가 내릴지어다." 그리
고〈르노 드 몽토방〉(7세기 기사 이야기) 속에는 다음과 같은 지독한 구절이 있다. '깨끗
이 단장된 방에 들어가 어두컴컴한 곳에 앉아서 먹고 마시고 수를 놓고 명주에 염색이나 
하는 것이 좋아. 그렇지만 우리가 하는 일에는 참견하지 마. 우리가 하는 일은 검으로 싸
우는 거야. 잠자코 있어!" 때로는 여자도 남자처럼 거친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여
자는 처녀시절부터 모든 육체적인 단련에 익숙하여 말도 잘 타고 매사냥도 한다. 그녀들은 
별로 교육을 받지 않아 수치심도 모르고 자랐으며, 성의 귀한 손님을 접대하고, 식사나 목
욕의 시중도 들고, 잘 자도록 안마를 해주는 것도 그녀들의 몫이다. 그녀들은 결혼 후에도 
야수를 뒤쫓고, 길고 어려운 순례도 떠난다. 남편이 멀리 가 있을 때는 그녀가 대신 영지
를 지킨다.
  이런 여자 성주는 완전히 남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므로 '남자 못지않은 여자'(virago)라
고 불리며 감탄의 대상어 된다. 이런 여자는 욕심 많고 간사하고 잔인하며 부하를 구박한
다. 역사나 전설은 이런 여자들 중에서 몇 사람에 대한 추억을 지금까지도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자 성주 오비는 천주각보다 더 높은 탑을 짓게 한 뒤 비밀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즉시 건축가의 목을 베었다. 그녀는 또 남편을 영지에서 추방했다. 그래서 그 남편이 
몰래 돌아와 그녀를 살해했다. 로제 드 몽고메리의 아내 마비유는 자기영지의 귀족들을 거
지로 만들고 기뻐했다. 결국 귀족들은 그녀의 목을 베어 복수했다. 영국의 헨리 1세의 딸
인 사생아 줄리안은 브레튀유의 성에 틀어박혀 헨리 1세에게 반항하고 불의의 습격을 가
했는데, 이 때문에 심한 보복을 당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어디까지나 예외이다. 보통 여
자 성주는 얌전히 실을 잣고, 기도하고, 남편을 기다리면서 권태로운 나날을 보냈다.
  12세기에 지중해 연안의 남부 프랑스에서 있었던 '우아한 사랑'(amour courtois:중세 
시인들이 노래한 기사와 귀부인 사이의 우아한 사랑)이 여자의 처지를 개선했다고 말한다. 
그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우아한 사랑은 여자 영주와 그 
젊은 부하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카타리파의 사교적 정신
이나 성모숭배와 결부시키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시랑에서 출발한 세속
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랑의 궁정(cours d'amour)이 과연 존재했는지는 확
실히 알 수 없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지은 여인 이브에 대항하여 로마교회가 '
구세주의 어머니'를 찬양하기로 한 것이다. 성모숭배는 대단히 중요시되어 13세기에는 신
이 여자로 분장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여성 신비설이 종교적으로 널리 유포되
었다.
  한편 귀부인들은 성내 생활의 여가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주위에 환담과 예절과 시가(詩
歌)의 영화를 꽃피우게 할 수 있었다. 베아트리스 드 발랑티누아, 알리에노르 다키텐, 그리
고 그녀의 딸인 마리 드 프랑스, 블랑슈드 나바르를 비롯하여 교양있는 부인들은 연금을 
지불하여 시인을 초대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프랑스의 남부에, 다음에는 북부의 문화의 꽃
이 피어, 그것이 여자를 새로운 매력으로 장식했다.
  궁정연애는 때때로 플라토닉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크레티앵 드 트루아(중세의 연애시를 
많이 쓴 궁정시인)는 아마도 자기의 보호자인 여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겠지만 자기
의 소설에서 간통을 추방하여 랑슬로와 게니에브르 왕비의 연애 이외에는 죄가 되는 연애
를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봉건제도하의 남편은 후견인이자 폭군이기도 했으므로, 
아내는 결혼생활 밖에서 애인을 구했다. 궁정연애는 형식적인 도덕의 야만성에 대한 보상
이었던 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연애는, 고대에서는 공적 사회 밖에서만 이루어졌다. 고대의 관능적 
사랑이 멈춰진 지점에서 중세가 재출발한다. 즉 중세는 간통에서 출발한다"고 앵겔스는 지
적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결혼제도가 지속되는 한 연애는 이런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
다.
  사실 예절(궁중의 예절, 여자에 대한 중세 기사의 부드러운 태도)은 여자의 처지를 완화
해도 그것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지는 못한다. 여성을 해방으로 이끄는 것은 종교나 시가
와 같은 관념의 형태가 아니다. 봉건시대 말기에 여자가 어느 정도 사회에 진출하게 된 것
은 전혀 다른 원인에 의해서였다. 왕의 최고권력이 봉건제후에게 미치게 되자, 영주는 그 
권리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특히 여자의 결혼을 결정하던 그의 권리는 서서히 박탈되었
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피후견인의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하는 권리가 후견인의 손에서 
박탈되어 후견에 따르는 이익이 소멸되었다. 그리고 제후가 군무 대신에 금품을 상납하게 

하자, 후견인제도 자체도 소멸된다. 여자는 군무를 수행할 수는 없지만, 화폐로 채무를 갚
는 것은 남자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자 영지는 이제 단순한 세습재산에 불과하였고 남녀가 평등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없어진다. 실제로 독일이나 스위스·이탈리아에서는 여자들에게 아직 종신후
견제가 실시되고 있었으나, 프랑스는 보마누아르의 말에 의하면, "여자와 남자는 그 가치
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풍습은 여자에게 후견인으로서 보
호자를 주었다 여자가 더이상 보호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후견인도 필요없게 된다. 여자
라는 이유만으로 무능하다는 낙인이 찍히지 않게 된다. 독신녀나 과부는 남성이 갖고 있는 
모든 권리를 소유한다. 재산이 있으면 지배권은 그녀의 것이다. 영지가 있으면 그녀는 그
것을 통치할 수 있다. 이것은 그녀가 재판을 하고 계약에 서명하고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군사적인 활동을 하여, 군대를 지휘하고 전투에 참가하는 여성도 있다. 잔 다르
크크(프랑스의 애국소너, 백년전생 때 16세의 나이로 프량스군을 진두지휘하여 오를레앙 
성을 탈환함, 1412~1431)이전에도 여군은 있었다. 그러므로 오를레앙의 소녀(잔 다르
크)는 놀랍긴 하지만 비웃음을 사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자의 독립을 훼방하는 원인은 참으로 다양하여, 그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질 수
는 없는 일이었다. 육체적인 열세는 이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여자가 결혼했
을 경우에는 역시 얌전히 종속되어 있는 편이 사회에도 유익하다. 그러므로 남편의 권리는 
봉건제도가 소멸된 후에도 남게 된다. 여기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속되는 모순이 나타난
다. 즉 사회에 가장 완전하게 합류된 여자가 권리를 가장 적게 소유하는 여자라는 모순 말
이다. 시민적인 봉건제도에서도 결혼은 군사적인 봉건제도 시대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남편은 여전히 아내의 후견인이다.
  부르주아지 사회가 형성되었을 때에도 이전의 법률을 준수한다. 관습법(관습 중에서 법
적 효력을 갖는 것)에 있어서도 봉건법과 마찬가지로, 결혼이외에서만 여성의 해방이 있
다. 독신녀나 과부는 남자와 같은 자격을 갖지만, 결혼을 하면 여자는 남편의 후견하에 있
게 된다. 그리하여 남편은 아내를 구타할 수도 있고, 아내의 행위·교제·편지를 감시하고, 
계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사실 그 자체에 의해 아내의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한다.
  "결혼이 성립되면 즉시 두 사람의 재산은 결혼의 효력에 의해 공동소유가 되어, 남자의 
권리 아래 놓인다." 하고 보마누아르는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세습재산의 이익을 위해서
는 귀족과 시민계급의 경우에, 단 한 사람의 주인이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를 남편
에게 종속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녀를 무능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것
도 거리끼지 않을 경우에는 큰 폭으로 여러 가지 자격이 여자에게 인정된다.
  봉건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결혼한 여자는 고의로 사유재산에 희생되어 왔다. 남
편의 재산이 많을수록 이 예속상태가 심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자의 종속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 것은 부유층에서이다. 오늘날에도 가부장제도의 가족형태가 남아 있는 것은 
부유한 지주계급이다. 남자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권력을 장악할수록 권위를 갖고 가
장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공통된 빈곤은 부부관계를 평등하게 만든다. 여성을 해방한 것은 봉건제도

도 아니고 로마교회도 아니다. 가부장제도의 기족형태에서 공정한 부부제도의 가족형태로 
옮아간 것은 오히려 농노제도에서였다. 농노와 그 아내는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가옥과 가구와 도구를 공유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무 재산도 갖고 
있지 않은 아내의 지배자가 되려고 노력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두 사람을 
결합하고 있던 노동과 이해의 유대가 아내를 동료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농노제도가 폐지
되어도 빈곤은 그대로 남았다. 부부가 평등한 모습은 농경의 작은 공동체에서나 직인사회
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여자는 물건도 아니고 고용인도 아니다. 그런 것은 부유한 남편이 
갖는 사치품이다.
  가난한 남자는 자기를 그 배우자와 결합시키는 평등성을 통감하게 된다. 여자는 자유로
운 노동 속에서 경제적·사회적인 역할을 발견하고, 구체적인 자치성을 획득한다. 중세의 
희극이나 우화시에서 반영하고 있는 직인·소상인·농부의 사회에서는, 남편은 아내를 구
타할 수 있는 특권 이외에는 아내에 대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아내 쪽에서도 
책략을 갖고 남편에게 대항하여, 부부는 결국 피장파장이 된다. 이와는 달리 부유한 여자
는 예속되는 대신에 한가하게 놀고 먹는다.
  중세의 여자는 아직 약간의 권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여자는 마을의 주민회의
에 참가하고, 삼부회의(귀족·승려·평민의 세 계급이 모인 국회)의 대의원을 뽑기 위한 
예비집회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남편이 자기권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동산뿐이고, 
부동산을 처분하려면 아내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 구정체(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정체)동
안에 실시된 여러 법규가 제정된 것은 l6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 시대에는 봉건시대의 풍
습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여자를 가정에 묶어두려는 남자의 의도에서 여자를 보호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여자에게 대단히 모멸적이었던 로마법의 영향을 엿볼 수 있었
다.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이성의 우매함과 취약성에 대한 가혹한 비난은 법률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구실로 쓰이고 있다. 남자는 자기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기 위한 이유를 나
중에 찾아낸다.〈과수원의 몽상〉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자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고
약한 소질 중에서 법적인 면에서 아홉 가지 고약한 소질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첫
째, 여자는 나면서부터 화근이고... 둘째, 여자는 그 본성이 욕심쟁이이고... 셋째, 그녀들이 
바라는 것은 매우 변덕스럽고... 넷째, 여자는 생각부터가 저질이고.. 다섯째, 여자는 사람
을 기만하고... 게다가 여자는 거짓말쟁이로 정평이 나 있으므로, 민법에서 유언의 증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여자는 언제나 명령받은 것과는 싱반되는 일을 하며... 
여자는 주제넘게 나서기를 잘하고, 자기의 수치를 태연스럽게 드러낸다. 또 교활하고 심술
궂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자는 견실하지 못한 동물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남편도 
당황하리만큼 증오심에 불타 있고 사악의 온상이며 모든 말썽의 출처이자 모든 부정에의 
길이다." 이와 비슷한 문장을 이 시대에서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문장의 재미는, 하나
하나의 비난이 여성에 대한 법률의 부당한 조치를 잇따라 변호하여, 여성의 낮은 지위를 
정당화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물론 '남자의 일'은 모두 여자에게 금하고 있다. 여자에게서 
모든 시민권을 박탈하는 벨레이우스의 원로원 결의가 부활된다. 장자상속권과 남성의 특권 
때문에, 여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때에는 하위에 놓이게 된다. 독신일 때는 딸은 언제

나 아버지의 후견 하에 있다. 아버지는 딸을 결혼시키지 않을 경우에는 수도원에 가둬둔
다. 사생아의 어머니에게는 자식의 아버지의 승인을 청구할 권리는 인정하지만, 그것도 분
만비용과 양육비를 받을 권리밖에 없다. 결혼하면 그녀는 남편의 권위 아래 속한다. 남편
은 주거를 정하고, 가정생활을 지시하고, 아내가 간통했을 경우에는 이혼을 한 뒤 수도원
에 가두거나, 심지어는 바스티유 감옥으로 보낼 위임장을 손에 넣게 된다. 남편의 서명이 
없이는 어떤 증서도 무효이다.
  여자가 사회에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로마법적인 의미에서 지참금 정도로 국한
된다. 그런데 결혼은 해소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재산에 대한 처분권이 아내의 손에 돌
아오려면 남편이 죽어야 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격언이 생기게 된다. "아내는 원래 친
구가 아니다. 다만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아내는 자기 자본을 관리하지 않기 때문에 설사 그 자본에 대한 여러 가지 권리를 소유
하고 있을 경우에도 이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자본은 여자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내
용도 제공하지 않는다. 즉 여자는 세계에 대해 구체적인 인연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자
식들까지도 에우메니데스 시대처럼,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어머
니는 자기보다 권한이 월등하고 자손의 참된 지배자인  아버지에게 자식을 '낳아주는'사람
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폴레옹이 배나무는 배의 임자에게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
는 자기 자식을 제공하는 남편의 소유물이라고 선언할 때에 이용하는 논리의 근거이기도 
하다.
  구정체 때에 프랑스 여성예 대한 법률은 이런 것이었다. '벨레이우스법'은 판례에 의해 
조금씩 폐기되어갔지만, 그것이 완전히 소멸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법전'의 제정을 기다려
야만 했다. 아내의 품행이나 부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남편이며, 아내는 남편에 대해
서는 절대적으로 의리를 지켜야 한다. 즉 아내는 공공기관에 직접 관여하는 일이 거의 없
고, 가족 이외의 개인과 자주적으로 교제하는 경우도 없다. 아내는 남편의 동료라기보다 
노동과 어머니의 임무로 보아 하녀와 같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물건의가치와 존재 역시 그
녀의 재산이 아니고 가족의 재산이며, 따라서 가장인 남편의 재산이다.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도, 여자의 처지는 이 이상 자유로웠다고는 말할수 없다. 오히려 
이와 반대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아직도 후견인제도가 남아있다. 또 어떤 나라에는 결혼한 
여자의 권리는 거의 없고 지켜야 할 도덕은 더욱 엄하다. 유럽의 법전은 모두 여자에게 불
리한 교회법이나 로마법 그리고 게르만법을 토대로 하여 제정된 것이다. 그래서 나라마다 
사유재산과 가족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런 제도의 요구에 따르고 있다.
  이 모든 나라에서 '정숙한 여자'를 가정에 예속시킨 결과의 하나가 매음이다. 창녀는 외
관상으로는 사회의 버림을 받고 있지만, 사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의 하나를 수행하고 있
다. 기독교는 그녀들에게 모욕을 주고 있지만 필요악으로 인정하고 있다. "창녀를 제거하
면 방종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질 것이다." 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훨씬 후에 성 
토마스는-혹은 적어도〈제도론〉제4권에 같은 이름으로 서명한 신학자-이렇게 말하고 있
다. "사회의 내부에서 창녀를 제거해 보라. 방탕이 온갖 무질서로 사회를 교란시킬 것이다. 
도시에 창녀가 있는 것은, 마치 궁전에 하수도가 있는 것과 같다. 하수도를 제거하면, 궁전
은 악취가 코를 찌르는 오물처리장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중세의 전기(前期)에는 남녀간

의 풍속이 자유로워 창녀가 필요없었다. 그런데 시민적인 가족제가 확립되어 일부일처제도
가 엄격해지면서 남자는 가정 밖으로 쾌락을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샤를미뉴의 법집회가 그것을 엄격히 금했으나 허사였다. 성 루이도 1254년 창녀를 추방
할 것을 명하고, 1269년에는 매음지역을 파괴할 것을 명했으나 이행되지 않았다. 주앵빌
의 말에 의하면, 다미에트에서는 창녀의 막사가 왕의 막사에 인접해 있었다고 한다. 훨씬 
후에 와서 프랑스에서의 샤를 9세의 노력, 18세기 오스트리아에서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노력도 모두 실패로 끝났다. 사회구조가 매춘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l788~1866)는 이렇게 호언했다. '창녀는 일부일처제도의제단에 바친 
제물이다." 유럽의 도덕사를 쓴 레키도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있다. "악덕의 전형인 창녀는 
미덕의 가장 적극적인 호위자이다."
  창녀의 지위가 유태인의 지위와 비교되고, 그녀들이 자주 유태인과 동일시되는 것은 당
연하다. 고리대금업과 사금융업은, 로마교회에서 혼외의 성행위와 마찬가지로 금지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사회는 고리대금업자나 사랑의 자유가 없으면 유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직업은 혐오스러운 계급의 전유물이 되어, 유태인 거류지나 적선구역에 국
한되었다. 파리에서는, 이런 여자들은 아침에 매음굴에 와서 밤에 소등 종이 울리면 돌아
가곤 했다. 그녀들은 특정한 거리에 살아야 했으며, 그곳을 떠날 권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다른 도시에서는 매음굴이 성밖에 있었다. 유태인과 마찬가지로 그녀들은 옷에 신분을 나
타내는 표시를 해야만 했다. 프랑스에서 흔히 사용된 것은 한쪽 어깨에 달아맨 화려한 색
깔의 장식끈이었다. 정숙한 부인이 몸에 걸치는 견직물이나 모피·목걸이를 그녀들에게는 
금한 적도 있었다. 그녀들은 법률상 악인으로 취급되어 경찰이나 법관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으며, 그녀들을 그 주거에서 추방하기 위해서는 이웃의 한 남자가 청구하는 것으로
도 충분했다.
  그녀들의 대다수는 생활이 어렵고 비참했다. 매음굴에 갇혀 있는 창녀도 있었다. 프랑스
의 여행가 앙투안 드 랄랭은 15세기 말 발렌시아의 스페인 매음굴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곳은 "작은 도시만한 크기로, 주위는 담이 에워싸고, 문은 하나뿐이다. 그리고 문 앞에는 
안에서 나쁜 짓을 한 자를 처단하기 위해 교수대가 마련되어 있다. 입구에 한 사나이가 버
티고 서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자의 무기를 빼앗고, '돈을 갖고 있으면 맡겨요. 돌아갈 
때 틀림없이 돌려줄 테니까.' 하고 말한다. 돈을 맡기지 않아 밤중에 도둑에l게 털려도 문
지기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곳에는 매음굴이 밀집된 거리가 서너 개 있는데 집집마다 
비로드와 비단으로 요란하게 단장한 여자를 대기시키고 있다. 모두 2,3백 명쯤 될까. 저마
다 자기 방을 아름다운 천으로 둘러치고 있다. 공정가격은 스페인 화폐로 4드니에인데, 이
것은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상당한 금액이다. 술집과 카바레도 있다. 낮에는 더위 때
문에 이곳을 자세히 돌아볼 수 없고, 오히려 밤이 되면 창녀들이 입구의 아름다운 동불 옆
에 앉아 있기 때문에 더 잘 볼 수 있다. 시(市)에는 두 사람의 의사가 고용되어, 매주 창
녀들을 검진하여 건강에 이상은 없는지, 성병에 걸려 있지는 않는지 조사하여, 만일 병자
가 있으면 시의 유지들이 비용을 걷어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보낸다." 그리고 그는 참으
로 잘 정비된 감독조직에 놀라고 있다. 많은 창녀들이 자유를 누리며, 개중에는 풍족하게 
사는 여자들도 있다. 그리스의 창녀시대와 마찬가지로, 고급 매음부들은 '정숙한 여자들'의 

생활 이상으로 독립된 길을 열어가고 있다.
  프랑스에서 특이한 것은 독신녀의 입장이다. 독신녀에게 주어진 법률상의 독립은 아내의 
예속과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독신녀는 이례적인 인간이다. 그래서 사회의 풍습은 법률
이 그녀에게 제공한 모든 것을 박탈하려고 한다. 그녀는 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고 있
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뿐인 추상적인 권리이다. 그녀는 경제적인 자주성도 없고, 사회적인 
위신도 없다. 노처녀들은 대개 아버지의 집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거나, 혹은 수도원에
서 동료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곳에는 불복종과 죄과(罪科)밖에는 다른 형태의 자유가 없
다. 그래서 쇠퇴기의 로마 여자들은 오직 악덕에 의해서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여자들의 
해방이 소극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 소극성은 여전히 여자의 운명이 된다.
  이런 여건 하에서는 여자가 행동하거나, 혹은 단순히 자기의 의사를 표명할 가능성을 갖
는 것조차 흔치 않다. 노동계급의 경우에는 경제적인 압박이 남녀의 불평등을 없앤다. 그 
대신 그것은 개인에게서 모든 기회를 빼앗아 버린다. 귀족이나 부르주아 계급에서는, 여자
는 여자이기 때문에 구박을 받게 된다. 즉 기생적인 생활밖에 하지 못한다. 교육도 거의 
받지 못한다. 여자가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실현하려면 예외적인 환경이 필요하다. 
여왕이나 여섭정은 이런 희귀한 행복을 갖게 된다. 그녀들의 주권이 그녀들을 보통 여자의 
신분 이상으로 높여주는 것이다. 프랑에서는'살리카법'이 여자에게 왕위계승을 금하고 있
다. 그러나 그녀들은 남편을 도와, 혹은 남편이 죽은 후에 큰일을 하기도 한다. 성 클로틸
드·성 라드공드·블링슈드 카스티유 등이 그런 예이다.
  수도원의 생활은 여자를 남자에게서 독립시킨다. 여수도원 원장 중에는 큰 권한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엘로이즈는 연애뿐만 아니라 수녀로도 유명했다. 여자를 신과 결부시키는 
신비로운, 그리고 자주적인 관계에서 여자의 영혼은 남자의 영혼에서 영감과 힘을 얻게 된
다. 그녀들은 사회가 지불하는 존경에 의해 어려운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잔 다르크의 모
험은 기적에 속한다. 게다가 이것은 물불을 가리지 않은 엉뚱한 짓으로밖에 볼 수없다.
  그러나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의 전기는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활발
한 자선활동과 깊은 내면생활을 표시하는 신탁에 의해 위대한 명성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
녀는 성공에 필요한, 일반 여성들에게는 결여된 권위를 얻게 되었다. 사람들은 사형수에게 
설교할 때, 방황하는 사람들을 선도할 때, 가정과 도시 사이의 분쟁을 진정시킬 때 그녀의 
영향력에 호소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를 인정해 주는 집단의 지지를 받아 거리에서 거리
로 교황에의 순종을 설득하고, 주교와 군주들과 널리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드디어는 피렌
체에서 아비뇽으로 교황을 알현하러 가는 사절로 뽑혀 평화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다. 여
왕은 신권에 의해, 성녀는 빛나는 미덕에 의해 사회에서 남자와 동등한 지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다른 여자들에게는 겸손이 요구된다. 크리스틴 드 피장(1363년경 베
니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생활한 여성작가. 그의 작품들은 15세기 사회의 귀중한 문헌
이다)의 성공도 놀라운 행운이었다. 과부인 그녀는 여러 아이들을 부양해야 했으므로 펜으
로 생계를 유지해 나갈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로 중세기 남성들의 견해는 여성에게 별로 유리하지 못했다. 하긴 연애시인들은 연
애를 소리 높이 찬양했다. '연애수법'을 소재로 수많은 시가 발표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앙드레 르 샤플랭의 시와 유명한〈장미이야기〉가 있으며, 여기서 작가 기용 드 로리스는 

젊은이들에게 귀부인들을 헌신적으로 섬길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음유시인들의 문학에 
영향을 받은 이런 문학 이외에 한편으로는 여자를 몹시 공격하는 부르주아적인 감흥에서 
쓰여진 작품이 있다. 풍자시나 희극, 단시 등은 여자의 태만과 교태·음란 등을 비난하고 
있다.
  여자의 최악의 적은 성직자들이다. 그들은 결혼을 적대시한다. 로마교회는 결혼을 성스
런 일로 취급하면서도, 기독교도의 엘리트들에게는 그것을 금했다. 여기에 '여성논쟁'의 근
원적인 모순이 있다. 이 모순은〈마테올루스의 탄식〉에서 대단히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
다. 이것은〈장미 이야기〉의 제1부가 나온 지 15년 후에 출판되었고, 100년 후에 불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마티외는 아내를 얻음으로써 성직(聖職)을 잃게 되자 자기의 결혼
을 저주하고 나아가서는 여성과 결혼 전체를 저주한다. 결혼과 성직이 서로 용납되지 않는
다면 무엇 때문에 하느님은 여자를 지으셨는가? 결혼 속에 평화는 없다. 이것은 악마가 만
들어낸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은 자기가 한 일을 알지 못한 것이 된다. 마
티외는 여자가 심판의 날에 부활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하느님은, 결혼은 천국에 이
르기 위한 연옥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꿈에 천국에 가게 된 마티외는 수많은 님편들이 "
잘 왔소, 잘 왔소. 당신은 참된 순교자요!" 하고 외치면서 자기를 맞으러 오는 것을 본다. 
같은 성직자였던 장 드 밍이 쓴 책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젊은이에게 
여자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을 권한다. 그는 먼저 연애를 공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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