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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생물학적 조건

by Frais Feeling 2020. 7. 26.

  "여자란? 아주 단순해." 단순한 공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란 자궁이
고, 난소이다. 여자는 한 마리의 암컷이며, 이 암컷이라는 말로 여자의 정체는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자의 입에서 "암컷" 이라는 형용사는 멸시하는 말투로 뱉어진다. 그런데 
남자는 자기의 동물성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저 녀석은 수컷이야!" 하고 말하면 
우쭐해지기도 한다.
  "암컷" 이라는 말이 멸시하는 뜻이 되는 것은, 그것이 여자를 자연 현상에 있게 놓아두
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를 섹스 속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 죄도 없는 동물
의 경우에도 그 성이 남성의 눈에 중요한 경멸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여성이 남성의 마음속에 불안한 적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성은 이런 감정
이 생기는 까닭을 오히려 생물학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암컷이라는 말은 남자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이미지의 회오리를 일으킨다. 커다란 둥
근 난자가 민첩한 정자를 사로잡아 거세하는 광경이나, 배가 터지게 먹은 괴물 같은 흰 여
왕개미가 노예가 된 수컷에게 군림하는 광경, 사랑을 만끽한 버마재비나 거미의 암컷이 수
컷을 물어 죽이고 먹어 버리는 광경, 발정기의 암캐가 음탕한 냄새를 풍기면서 거리를 뛰
어다니는 광경, 암 원숭이가 노골적으로 음부를 드러내 보이고 상대방의 애간장을 태우면
서 도망치는 광경, 그리고 가장 존대한 동물들인 호랑이, 사자, 표범의 암컷들도 수컷의 위
압적인 포옹 밑에 자빠져 버둥거리는 광경 둥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이다.
  무기력하고, 방자하고, 교활하고, 우매하고, 냉담하고, 음탕하고, 잔인하고, 비굴한 모든 
암컷을 남자는 한꺼번에 여자의 속성 속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사실 여자는 하나의 암컷이
다. 그러나 만일 조금이라도 진부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본다면, 즉시 다음과 같은 두 가
지 문제가 제기된다. 즉 동물계에서 암컷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리고 여성은 

암컷으로서 어떤 특수성을 갖고 있는가?

  수컷과 암컷은 한 종의 내부에서 생식을 위해 개체가 양분된 것이므로 서로 관련시켜 
정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을 두 성으로 나눈다는 그 의미 자체가 명확하지 않는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자연 속에서는 이 자웅의 분리는 보편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동물을 놓고 생각해 보
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적충류, 아메바, 박테리아 등의 단세포족의 번식은 완전
히 성과는 무관하며, 혼자서 분열을 거듭해 나간다. 어떤 후생동물의 경우에는 복분열에 
의해 번식된다. 즉 본래 무성으로 발생한 개체가 토막토막 끊겨 나가는 것이다. 혹은 배종 
발생에 의해, 즉 성적 현상에 의해 형성된 개체가 토막토막 잘려 나간다.민물의 히드라나 
강장동물, 해면류, 연충, 피낭류 등에서 볼 수 있는 발아분열의 현상은 그 예로서 잘 알려
져 있다. 단성생식에서는 무정란은 수컷의 간섭을 받지 않고 유충으로 자라게 된다. 수컷
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거나, 혹은 극히 사소한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예컨대 수정하지 않은 벌의 알도 분열되어 수벌을 낳는다. 진딧물의 경우에는 여러 대에 
걸쳐서 수컷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며, 무정란은 암컷이 된다. 섬게, 불가사리, 개구리는 
인공적으로 단성번식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원생동물의 경우에도 두 개의 세포가 합병하여 
접합자를 형성하는 경우가 있으며, 벌의 알이 암컷이 되거나 진딧물의 알이 수컷이 되기 
위해서는 수정작용이 필요하다.
  일부의 생물학자들은 이런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한쪽만으로 영속
이 가능한 종에서도, 이종의 염색체의 결합에 의한 배자의 갱신은 그 혈통을 젊고 활기차
게 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생명의 가장 복잡한 형태에 있어서는, 성본능은 없어서는 
안 되는 기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시적인 유기체만이 무성으로 번식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해서 점점 그 생명력을 고갈시켜가고 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오늘에 와서는 가장 의심스럽게 생각되고 있다. 관찰에 의하면 무성번
식은 아무리 되풀이해도 전혀 퇴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박테리아의 경우는 이런 현상
이 특히 뚜렷이 나타난다. 단성생식의 실험은 점점 더 빈번하고 대담해져서, 지금은 많은 
종의 수컷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세포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환의 
유용성이 증명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유용성은 근거가 없는 하나의 사실에 불과하다. 생물
학은 양성의 구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생물학이 아무리 종국목적설에 젖어 있다고 하
더라도, 세포의 구조나 세포의 번식법칙, 또는 근본적인 현상에서도 양성의 구분이라는 결
론을 유도해낼 수 있다. 
  이종의 생식세포의 존재만으로는 두 성의 분명한 차이를 정의할 수 없다. 실제로 생식세
포의 분열이 종을 둘로 분리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즉 그 생식세포가 둘 다 한 개체에 
속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식물에서 많이 볼 수 있다.그리고 많은 하등동물, 특히 
환충류와 연체동물에서 볼 수 있는 양성구유의 경우에 그렇다.이 경우에 번식은 자기수정
이나 교배수정에 의해 이루어진다.이 점에 대해서도 어떤 생물학자들은 분명한 진화론적 
의의를 찾아보려고 했다.자웅의 구분을, 즉 다른 생식선이 쌍방의 개체에 속해 있는 조직
을,양성구유가 진화하는 도중에 완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반대로 자웅이체를 원시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 경우에 양성구
유는 그 퇴화일 것이다. 아무튼 진화론적으로 생각하여 하나의 조직이 다른 하나의 조직보
다 우수하다는 이런 사고방식이 얼마나 애매모호한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여기서 분명
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번식방법이 자연계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과, 모두 종의 
영속을 실현하여 생식세포의 이질과 마찬가지로 생식선을 갖는 유기체의 이질이라는 것도 
우연한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물이 수컷과 암컷으로 갈라져 있는 것은 어
쩔 수 없는 우발적인 하나의 사실처럼 생각된다. 대다수의 철학자들은 이 사실을 설명하려
고 하지 않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플라톤의 우화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태고에 남
자와 여자와 그 밖의 양성구유자가 있었다. 각자 두 얼굴과 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발과 밀
착된 두 개의 동체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치 알을 째는 것처럼"두 개로 쪼개
졌다. 그리하여 그 후로 각각의 반신은 다른 쪽 반신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신들
은 그 다른 두 반신을 결합시켜 새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
기가 설명 하려고 하는 것은 단지 사랑의 유래뿐이다. 양성에의 분리는 처음부터 기정사실
로 생각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분리를 의미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에서 
내용과 형식의 협력이 요구된다면, 능동과 수동의 요소가 성이 다른 두 종류의 개체로 분
리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토마스는 여성을 "우발적인" 존재라고 말했다. 이것
은 남성 중심의 입장에서 성의 우연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헤겔은 그 합
리주의원칙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성을 논리적으로 확립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에 의
하면, 성은 주체가 자기를 구체적으로 유로서 확립하기 위한 중개물이다.
  "유는 자기의 개체실현의 불균형에 대한 하나의 신장력으로서 자기 속에 생겨나는 것이
며, 자기와 같은 종의 다른 개체와 결합하여 상대방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여 
자기를 보충함으로써 유를 자기 본성 속에 포괄하여 그것을 존재로 이끌려는 욕구로서 생
긴다.이것이 교접이다." 그리고 그 앞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즉 양자의 자연의 모습, 즉 오직 하나의 유,하나의 동일한 주체적인 생명이라는 것을 양자
는 이렇게 해서 표시한다." 그리고 헤겔은 이어서 양성이 접근하는 과정이 실현되기 위해
서는 먼저 양성이 서로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증명은 납득할 수 없다.거기에는 모든 사물에서 삼단논법의 세 요소를 찾아
내려는 선입견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종을 향한 개체의 초월은, 이로 인하여 개체와 종이 
각각 참된 완성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제3단계가 없이 번식자와 그 자식과의 단순
한 관계 속에서도 실현될 것이다. 즉 번식은 무성인 경우에도 가능한 것이다. 혹은 양성구
유자의 종의 경우처럼, 분화는 동일형의 개체의 특이성 속에 존재할 뿐이며, 번식자와 그 
자식과의 관계는 두 종류의 관계일 수도 있다.
  헤겔의 설명은 성의 중요한 의미를 다루고 있지만, 그의 오류는 언제나 의미와 이유를 
혼동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성행
위에 의해 양성과 그 상호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성관계는 결코 인간의 본성 속에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지각의 현상학" 속에서 메를로풍티는, 인간의 실존
이 필연이나 우연과 같은 관념을 수정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그는 이

렇게 말했다. "실존은 자체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는 데 유용하지 않은 우연의 속성이나 내
용을 갖고 있지 않다. 실존 속에는 단지 사실 같은 것이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존 자체가 사실에 의미를 제공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
나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어 서,그것이 없이는 실존 자체가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것도 사
실이다.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이 세계의 한 사물이며, 동시에 그 세
계를 보는 하나의 관점이기도한 육체의 입장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육체가 이러저러
한 특수한 구조를 갖는 것은 요구되지 않는다.
  "존재와 무" 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의 현실은 그 유한성 때문에 죽음에 바쳐지고 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명하고 있다. 즉 시간적으로 한정된 유한한 존
재도 생각할 수 있지만, 만일 인간의 생명에 죽음이 따르지 않는다면 인간은 세계 및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가 근본적으로 무너져 "인간은 죽는 것이다" 라는 정의가 경험적인 사실
과는 전혀 다르게 될 것이다. 즉 죽지 않는 존재자는 인간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특색의 하나는, 그 일시적인 생명의 활동이 무한한 과거와 미래를 창조한다
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의 영속은 개체의 생명의 한계와 서로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번식의 현상은 존재론적으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속단해서는 안 된다. 종의 존속이 곧 양성의 분화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
니다. 그 분화가 존재자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존재의 구체적인 양태를 분명히 밝
히는 것은 바람직 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시 육체가 없는 의식이나 죽지 
않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가 단성생식으로 번식하거나 양성을 갖춘 인간으
로 구성되는 경우를 여전히 상상할 수는 있다.
  두 성의 각각의 역할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양하다.그 견해들은 처음에 전혀 과학적인 근
거를 갖지 않고 단지 사회적인 신화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었다.모계제도의 원시적인 사회
에서는 오랫동안 다음과 같이 생각되어 왔으며,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아버지는 
아기의 수태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며, 조상의 정령이 살아 있는 태아의 형태로 어머니
의 체내에 침입한다는 것이다. 이윽고 족장사회가 출현하자 남성은 지식에 대한 권리를 강
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어머니가 출산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어머니는 살아 있는 정액을 뱃속에 품어 살찌게 할 뿐이며, 아버지야말로 유일한 
창조자로 간주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난자는 정액과 월경의 만남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이런 협동작
용에서 여자는 단지 수동적인 재료를 제공할 뿐이며, 남성의 요소야말로 힘이며 능동성이
고 운동이며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히포크라테스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는 정액
에 두 종류가 있다고 보고, 약한 쪽은 암정액이고 강한 쪽은 수정액이라고 칭하였다. 아리
스토텔레스의 학설은 중세기를 통하여 인정받았으며 근대에 이르렀다. 17세기 말에 하베
이는 교접 직후의 암사슴을 죽여 자궁관 속에서 소포를 발견하고, 그것을 난자라고 생각했
으나 사실은 태아였다.
 덴마크인 스테노는 그때까지 "여성의 고환"으로 불렸던 암생식선을 난소라고 부르고, 그 
표면에서 소포를 발견했다. 1677년에 그라프는 이 소포를 난자로 잘못 알고 소포에 자기 
이름을 붙였다. 난소는 줄곧 남성의 선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런데 같은 해에 "

정액 속에서 극히 미세한 생물"이 발견되었고, 그것이 여성의 자궁 속으로 침입해 들어가
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궁 속에서 성장할 뿐이며 개체는 이미 만들어져 있다고 생각되었다. 1
694년에 네덜란드인 하르트 사커는 정충 속에 숨어 있는 난쟁이의 그림을 그렸다. 또한 1
699년에는 다른 학자가, 정자가 털같은 것을 키우고 그 밑에 작은 인간이 나타난 것을 보
았다고 밝히고, 그도 그 그림을 그렸다. 즉 이 모든 가설에 의하면 여자가 하는 일이란 능
동적인 생명을 지닌, 그리고 이미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진 요소를 살찌게 하는 것뿐이었
다. 이 학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9세기까지 논쟁이 계속되었다.
  동물의 난자를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은 현미경의 발명 덕택이었다. 1827년에 베이어가 
포유동물의 난자를 식별하였는데 그것은 그라프의 소포의 내부에 포함된 하나의 요소로 
생각되었다. 얼마 후에 그 분열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1835년에는 사르코드, 즉 원형
질이 발견되었고, 이어서 세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1877년에는 불가사리의 난자 속에 
정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여 주는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 두 생식세포의 핵이 
상칭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것이 합일되는 세부현상은 1883년에 비로소 벨기에의 어느 
동물학자에 의해 분석되었다.
  그러나 낡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완전히 신빙성을 잃게 된 것은 아니었다. 헤겔은 
두 성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쪽은 능동적이고 다른 쪽은 수동적이며, 그 수동
성은 당연히 암컷의 숙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이 분화의 결과로 남성은 능동적인 
요소이며 여성은 수동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발전하지 않는 통일체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자가 능동적인 요소라는 것이 인정된 후에도, 여전히 남성들은 난자의 무기력
성을 지적하여 정자의 활동성과 비교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와 정반대의 경향
이 나타나고 있다. 단성생식의 발견으로 일부학자들은 수컷의 역할을 단지 물리, 화학적인 
한 매개물의 역할로까지 축소하게 되었다. 어떤 종에서는 산의 작용이나 인공적인 자극만
으로 난자에 분열을 일으켜 배자를 기를 수 있는 것이 밝혀졌다. 이 경우에 남성의 생식세
포는 번식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고작해서 그 하나의 유인에 불과하다는 대답한 가설도 
나타나고 있다. 생식에 대한 남성의 협력은 장차 언젠가는 불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리고 이것이 많은 여성들의 소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담한 예상은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에 나타난 생명과정으로 
모든 것을 추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성번식이나 단성생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유
성생식이 선험적으로 우수하지 못하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것이 더욱 
간단한 구조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실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선험적인 학설이나 애매한 학설을 배제하면, 우리는 존재론적인 기초도 
경험적인 증명도 제공하지 못하고,그 가치를 이론적으로 알 수도 없게 된다. 우리가 이런 
사실에서 하나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그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검토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암컷이라는 말의 내용을 좀더 분명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하나의 생명철학을 제창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목적론과 기계론을 대
립시키는 논쟁에서 성급하게 어느 한쪽에 가담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모든 생리학자와 생

물학자가 생명현상에 하나의 의미를 제공한다는 이유만으로 다소나마 목적론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나도 그들의 용어를 빌려 쓰려고 한다. 생명과 의식의 관계
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단언은 할 수 있다. 모든 생명현상은 하나
의 초월을 나타내고 있으며, 모든 기능 속에는 하나의 투기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이다. 내
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대부분의 종에서는 수컷의 생명체와 암컷의 생명체는 생식을 위해 협력한다. 수컷과 암
컷은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생식세포에 의해 근본적으로 구별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종류
의 해초나 세균은 난자를 만들기 위해 결합하는 세포가 양쪽 다 같다. 이와 같은 동형접합
의 경우는,생식세포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전
반적인 경우에 생식세포는 분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유사성은 일목요연하다. 정자
와 난자는 본래 같은 세포가 진화하여 된 것이다.
  여성 원세포가 발전하여 난모세포가 되는 것과 원형질적 현상에 의해 정모세포가 발전
하는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핵현상은 아주 비슷하다. 생물학자 앙셀이 1903년에 발표한 
견해는 지금도 인정받고 있다. 즉 "발생하기 전에는 중성이던 세포는 그것이 출현할 때에 
생식선 속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서 수컷이 되기도 하고 암컷이 되기도 
한다.그 조건이란 몇 개의 상피세포가 특별한 물질을 만드는 영양소로 변형되는 것이다."
  발생할 때의 이러한 유사성은 양쪽 생식세포의 구조에 나타나 있으며,모든 종의 내부에
는 같은 수의 염색체를 갖고 있다.그리고 수정할 때에는 그 두 개의 핵이 그 내용물을 혼
합한다. 그리고 양쪽 염색체가 감소되어 그 수는 최초의 절반에 이른다. 이 감소는 양쪽에
서 통일하게 이루어진다. 난자가 마지막 두 번의 분열에서 극체를 형성하는 것은 정자의 
마지막 분열과 같다.
  오늘날에는 종에 따라서 남성의 생식세포나 혹은 여성의 생식세포가 성별을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예컨대 포유류에서는 수놈이 암놈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질적인 염
색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정자 쪽이다.유전적인 성격의 전달은, 멘델(오스트리아의 목사
·식물학자·유전학의 창시자,1822~1884)의 통계에 의한 법칙으로 보면 아버지에 의해
서나 어머니에 의해서나 똑같이 이루어진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양자가 서로 만날 때 어
느 쪽의 생식세포도 유리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즉 양쪽이 모두 그 개별성을 희생
하고 결국 난자가 그 양쪽 실체의 전체를 흡수하고 만다. 
  그러므로 세상에 통용되고 있는 두 가지 편견은,적어도 이 생물학적 근본단계에서는 과
오를 범하고 있다. 그 첫째 편견은 여성의 수동성이다. 생명의 불꽃은 두 생명세포의 어느 
쪽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고, 양자의 결합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난자의 핵은 정자의 그것
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생명원소이다. 두 번째 편견은 첫번째 편견과 모순되는데도 불구하
고 이 양자는 곧잘 함께 존재하고 있다. 즉 남성의 원소는 폭발적이고 순간적인 생명을 갖
고 있기 때문에 종의 존속은 여성에 의해 확보되어 있다는 견해이다. 실제로 배자는 어머
니의 생식세포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생식세포도 존속시켜, 남성 혹은 여성의 형태로 양
쪽의 생식세포를 자손에게 전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몸 세포의 개개의 변신이 이루어진 후
에도 대대로 존속되는 양성 생식세포이다.
  이 정도로 서두를 마치고, 다음에 난자와 정자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참으로 흥미있

는 2차적인 차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난자의 본질적인 특징은 태아를 기르고 보호하
기 위한 물질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배자가 그 조직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저
장, 즉 생명이 있는 물질의 저장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물질로 되어 있는 저장이다. 그 결
과 그것은 원형이나 타원형의 둔중한 형태를 나타내며, 비교적 부피가 크다. 새알의 크기
가 어느 정도인가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인간의 경우에 여성의 난자의 크기는 지름이 0.13
밀리미터이다. 한편 정자는 1입방 밀리미터마다 6만 마리의 정자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
로 크기가 작다. 정자의 무리는 밀집되어 실 모양의 꼬리와 길쭉하고 작은 머리를 갖고 있
으며, 활동을 둔화시키는 거추장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이 전신이 생명으로 뭉쳐 있다. 이
런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기동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난자는 그 속에 태아의 장래가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고정된 요소이다. 
여성의 조직 속에 간수되거나 혹은 외계에 걸려 있으면서 수동적으로 수정작용을 기다리
고 있다. 그것을 찾아가는 것은 남성의 생식세포이다. 정자는 언제나 노출된 세포지만, 난
자 쪽은 막에 싸여 있기도 하고, 싸여 있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정자는 난
자를 만나자마자 난자를 쓰러뜨리고 뒤흔들어 놓고 그 속으로 침투한다. 이때 남성의 생식
세포는 그 꼬리가 없어지고 머리가 부풀어, 우회운동을 하면서 그 핵에 도달한다. 그 동안 
난자는 곧 하나의 막을 형성하여 다른 정자들을 내쫓는다. 
  수정이 몸 밖에서 이루어지는 섬게의 경우에는 둥둥 떠 있는 난자의 주위에 정자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들어 그 주위를 후광처럼 에워싸는 것을 쉽사리 관찰할 수 있다. 그 중에
서 선두주자가 승리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의 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현상이다. 난
자보다 훨씬 작은 대신에 정자는 일반적으로 훨씬 대량으로 산출되므로 한 개의 난자에 
대해 다수의 구혼자가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난자는 그 본질적인 요소, 즉 핵에 있어서는 능동적이지만, 겉으로는 수동적으
로 보인다. 그 자체만으로 폐쇄되고, 그 자체만으로 부풀어오른 난자에서 칠흑 같은 밤과 
즉자존재의 휴식을 연상케 한다. 고대인들이 닫혀진 세계나 불투명한 원자의 형태를 상상
한 것도 구의 형태로서였다. 난자는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 이와 반대로 개방적이고 자질
구레하며 약삭빠른 정자는 실존의 불안과 초조를 나타내고 있다. 흔히 난자는 내재로, 정
자는 초월로 비유하고 있는데, 언제까지나 이런 비위를 일삼아서는 안 된다. 남성이 여성
의 요소 속에 침입하려면 자기초월과 활동성을 포기해야 한다 즉 정자는 무기력한 물체에 
붙잡혀 그 꼬리가 잘리고 삼켜져서 거세된다. 이것은 모든 수동적인 행위와 마찬가지로 미
술적인 불쾌한 행위이다. 이와는 달리 남성의 생식세포의 활동은 합리적이며, 시간과 공간
의 단위로 측정할 수 있는 운동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생각은 멋대로 상상한 것이다. 남
성과 여성의 생식세포는 난자 속에서 하나로 녹아 버린다. 그것들은 자기를 말살하여 전체 
속에 용해된다. 난자가 정자를 강제로 삼켜 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여성
이 세포의 저장을 멋대로 횡령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합일되
는 행위 속에 서로의 개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아마도 기계론적인 사고에 있어서는 대단히 합리적인 현상으로 생각될 것이
다. 그러나 현대의 물리학에서는 이런 사고는 떨어진 곳에서의 작용이라는 사고와 마찬가
지로 명확하지 못하다. 첫째로 수태적인 결합에 도달하는 물리, 화학적인 작용의 자세한 

내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대비에서 유용한 시사를 받을 수는 있다. 생명 
속에는 서로 결합하는 두 가지 운동이 있다. 생명은 오직 자신을 초월해야만 자기를 유지
할 수 있으며, 또한 자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조건이 없이는 자기를 초월할 수 없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언제나 동시에 실현되며, 이것을 구분하면 결국 추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두 
개의 생식세포는 그 결합 속에서 자기를 초월하는 동시에 자기를 존속시킨다. 그런데 난자
는 그 구조상 가장 먼저 접근한 것을 받아들인다. 난자는 자기 속에서 생긴 생명을 키우도
록 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정자는 자기가 생기게 한 생명체의 성장을 보장할 만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그 대신 난자는 생명을 새로 일으킬 능력은 없다. 한편 정자는 자유롭게 활동
한다. 난자의 대비가 없으면 정자의 활동도 허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정자 없이는 난자는 
자기 생명의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두 생식세포의 역할은 원칙적으로는 동일
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양자는 함께 하나의 생명체를 창조하며, 그 과정에서 양쪽 
다 자기를 멸하고 자기를 초월한다.
  그러나 생명의 조건이 되고 있는 2차적이고 표면적인 현상에 있어서는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게 필요한 상황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남성의 요소에 의해서이며, 그 생명의 출현을 
안정된 몸 안에 정착시키는 것은 여성의 요소의 작용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만으로 여자가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무모
한 사람도 있다. "기질과 성격" 이라는 저서에서 알프레드 푸예(프랑스 철학자,1832~191
2)는 난자를 출발점으로 하여 여성 전체를 정의하고 정자를 출발점으로 하여 남서전체를 
정의하려고 생각했다. 이런 애매한 유추의 유희에서 자못 심원하다고 자칭하는 많은 이론
이 전개되었다. 이런 가짜 사상이 어떤 자연철학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
다. 
  유전법칙을 존중한다면 남녀가 똑같이 정자와 난지에서 생겨난 것이다. 나는 이런 애매
모호한 사상 속에는 중세에서 존중하던 낡은 철학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 의하면 우주는 소우주(인간)를 완전히 반영하고 있으므로 난자는 작은 여성이고, 여
성은 커다란 난자로 생각할 수 있다. 연금술 시대의 잔재인 이런 황당무계한 사고와, 그들
이 서술하는 과학적인 정확성과는 큰 대조를 보이고 있다. 현대의 생물학은 중세식 상징주
의와는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것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다. 
만일 조금만 유념하면, 난자에서 여성에 이르기까지는 긴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난자 속에는 아직 여성의 개념조차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성적 관계는 쌍방의 생식
세포의 관계로 환원될 수 없다는 헤겔의 견해는 정당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성의 조직을 
그 전체 속에서 연구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식물이나 어떤 하등동물, 특히 연체류에서는 생식세포의 분
화는 개체의 분화를 유도하지 못하고, 그 생식세포는 난자와 정자를 함께 생산한다. 양성
이 분리할 경우에도 양자사이에는 조과 종을 구분하는 구분하는 두터운 장벽이 있다. 생식
세포가 본래는 중성의 조직에서 출발하여 구분되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은 공통된 기반 위
에서 출발한 변형처럼 생각된다 .어떤 종류의 동물은(그 대표적인 것은 환형동물의 경우이
다)배자가 처음에 무성이며, 성장하는 도중에 우연히 성이 결정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종에서 성의 결정은 난자의 유전자형의 구조에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꿀벌의 무성란은 단성생식에 의해 번식하는 경우에는 주로 수컷만 낳게 된다. 진딧물의 
알은 같은 조건에서는 암컷만 낳는다. 알이 수정할 경우에 아마도 몇몇 거미의 경우를 제
외하면 태어나는 수컷과 암컷의 수가 같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분화는 양쪽 생식
세포 중에서 한쪽의 이종성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포유동물의 경우에는 정자가 수컷이 될 
가능성과 암컷이 될 가능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리고 정자 또는 난자가 형성되는 과정
에서 이질적인 생식세포의 특수한 성격이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멘델의 통계적 법칙은 그것이 규칙적으로 분배되고 있는 것을 밝히고 있다.
  두 성에 있어서 수태과정과 태아의 성장 초기는 동일하게 이루어진다.후에 생식선으로 
자라는 상피조직은 처음에는 분화되어 있지 않다. 고환이 뚜렷한 형태를 나타내거나 난소
가 생성되는 것은 어느 정도 성숙된 후의 일이다.이것은 양성구유와 자웅이체 사이에 많은 
중간 단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양성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성의 특징인 기관을 지
니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 가장 현저한 예가 두꺼비의 경우이다. 두꺼비의 수
컷에게서는 "비테르 씨 기관" 이라는 위축된 자궁을 찾아볼 수 있고, 인공적으로 거기에 
알을 낳게 할 수도 있다. 포유동물에게도 이 양성적 요소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대표적
인 것으로 고착성 윤충, 남성 자궁, 남성에 있어서의 유선, 여성에 있어서의 "게르트너 씨 
관", 음핵 등이 있다. 성의 분리가 가장 뚜렷한 종 가운데도 수컷인 동시에 암컷인 개체가 
있고, 양성이 혼합된 경우는 동물이나 인간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비나 갑각
류 중에는 수컷과 암컷의 성격이 일종의 모자이크처럼 병치된 자웅양체의 경우도 있다. 그
것은 설사 배자가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더라도, 그 자양을 섭취하는 환경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모두 다 아는 바와 같이 개비, 꿀벌, 흰개미의 경우는, 유충을 암컷으로 완성시키거나 그 
성적 성숙을 저지시켜 일벌로 만드는 것은 영양 여하에 달려 있다. 이 경우에 그 환경적 
영향은 유기체 전체에 미쳐 곤충은 일찍부터 성이 결정되고 생식선에는 좌우되지 않는다. 
척추동물의 경우에 조정역할을 하는 것은 주로 생식선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많은 실
험의 결과, 내분비 환경을 변화시키면 성의 결정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히 밝혀졌
다. 그밖에 접목이나 성장한 동물에게 실시한 거세의 실험에 의해서도 성의 현대적 학설이 
나와 있다. 즉 척추동물의 수컷이나 암컷은 몸체가 동일하여 이것을 중성적 요소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성적인 특질을 부여하는 것은 생식선의 활동이다. 분비되는 호르몬 
중에서 어떤 것은 자극제로 작용하고, 어떤 것은 진정제로 작용한다.
  생식기계 자체도 체세포적 성질을 갖고 있으며 양성적 원형에서 출발하여 호르몬의 영
향에 따라 뚜렷한 형태를 갖춰 나간다는 것이 발생학에서 입증되었다. 호르몬의 균형이 이
루어지지 못하여 두 성적 가능성 중에서 어느 한쪽으로도 명확하게 성이 결정되지 않으면 
양성혼합이 생기게 된다.
  종속에 평등하게 분배되고 같은 근원에서 출발하여 동일하게 진화되어 온 양성의 유기
체는, 형체를 완전히 갖추게 되면 매우 대조적으로 보인다. 양자가 모두 생식세포를 만들
어내는 선의 존재에 의해, 즉 난소와 고환에 의해 특징이 규정되며, 정자의 생성과 난자의 
생성과정도 앞에서 본 것처럼 유사하다.

  이러한 선은 종의 단계에 따라 그 복잡성이 다른 하나의 관 속에 분비물을 방출한다. 즉 
암컷은 알을 수란관을 통해 즉시 내보내거나 혹은 일단 그것을 배설구나 분화된 자궁 속
에 두었다가 내보낸다. 수컷은 정액을 외부로 보내거나 혹은 하나의 교접기관을 갖추고 있
어서, 그것으로 암컷의 몸 안에 정액을 주입시킨다. 그러므로 정지된 상태에서 보면, 수컷
과 암컷은 서로 보충하는 두 형태처럼 생각된다. 그 특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여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
이다. 여성을 난자의 소유자로 정의하고 남성을 정자의 소유자로 정의하는 것은, 유기체와 
그 생식선의 관계가 매우 변화하기 쉽기 때문에 불충분하다. 난자 쪽이 정자보다 크기가 
크기 때문에 더 많은 생명력을 소비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정자가 무한히 많은 양을 분비하기 때문에, 결국 양성의 소비는 균형을 이루게 
된다. 정자가 생성되는 동안에 소비하는 예를 들어 배란 속에서 절약의 시범을 찾으려고 
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배란현상에도 부조리한 낭비가 있고, 난자의 대다수는 전혀 수정
되지 않는다. 아무튼 생식세포와 생식선에서는 유기체 전체의 소우주를 찾아볼 수 없다.그
러므로 유기체 전체를 직접 연구해야 한다.
  동물에게 있는 종의 여러 단계를 살펴볼 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아래에서 위
로 올라감에 따라 생명이 개체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생명은 종의 유지를 위해
서만 사용되고, 위에서는 독립된 여러 개체를 통하여 생명이 소비된다. 발달되지 않은 종
에서는, 유기체의 기능이 거의 생식기관에 집중되어 있다. 이 경우에는 난자가, 즉 암놈이 
유력하다. 생명의 단순한 반복행위는 특히 난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놈이라고 
해도 몸체의 거의 전부를 복부가 차지하고, 그 생활은 전적으로 배란작업에 소모된다. 암
놈은 수놈에 비해 거대한 몸통을 지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개 사지는 매우 빈약하고 
신체는 볼품없는 자루에 불과하며, 모든 기관은 난자 때문에 퇴화되어 있다. 이 경우에 구
별된 두 유기체를 구성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수컷과 암컷은 거의 개체로 보기 어렵다. 그
것들은 긴밀하게 결합된 여러 가지 요소를 지닌 단일체에 불과하다. 이것은 양성구유와 자
웅일체의 중간의 경우이다.
  예컨대 게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등각류인 엔토닉스의 경우는, 암놈은 수천 개의 알을 싸
는 부화박층에 뒤덮인 희끄무레한 순대와 같다. 그 알들의 한가운데 아주 작은 수놈과 수
놈의 예비에 해당되는 유충이 있다. 에드리올리드수스에서는 작은 수놈의 예속이 더욱 철
저하다. 수놈은 암놈의 입 아래 달라붙어 있으며, 자기의 소화관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 
역할은 단지 생식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암놈도 수놈과 마찬가지로 예속
되어 있다. 즉 암놈은 종에 예속되어 있다. 수놈이 그 배우자에게 매여 있다면, 암놈도 거
기 기생하고 있는 산 유기체나 광물기체에 매여있다. 암놈이 자기 몸을 소모하여 알을 낳
으면, 그것을 작은 수놈이 수정시킨다.
  생명체가 좀더 복잡한 형태를 취하게 되면 개체의 자주성이 두드러지고, 양성을 결합하
는 유대는 느슨해진다. 그러나 곤충류는 수놈과 암놈 모두 알에 예속되어 있다. 하루살이
의 경우처럼 대개 부부는 교접과 산란 직후에 죽어버린다. 때로는 윤충류나 모기류의 경우
처럼, 소화기관을 갖고 있지 않은 수놈은 수정작업을 마친 후에 죽지만, 암놈은 양분을 섭

취하여 살아남는 경우도 있다. 알의 생성과 산란에 어느 정도의 시일이 필요하기 때문이
다. 어미는 다음 세대의 운명이 보장되면 곧 숨을 거둔다.
  대다수의 곤충류에서 암놈이 특권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수정작업은 일반적으로 곧 끝
나는 과정인 반면에, 배란과 산란은 오랜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흰개미의 경우, 여왕
개미는 억지로 양분을 채워넣어 1초마다 하나씩 알을 낳는데 알을 낳지 못하게 되면 무참
히 학살된다. 그러므로 여왕개미의 배에 달라붙어 잇따라 배출되는 알을 수정시키는 수놈
과 마찬가지로 노예인 것이다.
  개미나 꿀벌이 조직하는 모권제 사회에서의 수놈은 귀찮은 존재여서 생식의 계절마다 
학살된다. 혼인비상의 시기가 되면 수놈은 일제히 굴을 빠져나와 암놈에게 날아간다. 수놈
은 암놈을 붙잡아 수태를 시키면 기운이 빠져 곧 죽어버린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일개
미들이 수놈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출구에서 기다렸다가 죽여버리거나 굶어죽게 한
다. 그러나 수태한 암놈도 역시 슬픈 운명을 안고 있다. 그 암놈은 혼자 흙속에 처박혀 첫
알을 낳을 때에 지쳐서 죽기도 한다. 만일 암놈이 개미굴의 재건에 성공하면 그곳에 12년 
동안 갇힌 채 계속하여 알을 낳는다. 성적 기능이 위축된 암놈인 일개미 역시 4년 정도 살
지만, 그 일생은 유충을 키우는데 바치게 된다.
  꿀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혼인비상중의 여왕벌을 만난 수펄은 복부가 찢긴 채 지상
에 추락한다. 다른 수펄은 벌통으로 돌아와 무위의 생활을 보내게 된다. 이들은 초겨울에 
처형된다. 그러나 발육이 불완전한 암놈, 즉 일벌은 부단한 노동으로 살 권리를 얻게 된다. 
여왕벌은 사실상 벌통의 노예이다. 여왕벌은 끊임없이 알을 낳는다. 그래서 늙은 여왕벌이 
죽었을 때를 대비하여 힘으로 상속권을 빼앗도록 몇 마리의 유충을 기르며, 제일 먼저 부
화된 유충이 다른 유충을 죽여버린다.
  어떤 거미의 경우는, 알이 성숙할 때까지 암놈이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 암놈은 수놈
보다 훨씬 크고 튼튼해서 교미가 끝난 뒤 수놈을 물어 죽이는 경우가 있다. 여성공포 신화
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버마재비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습성을 찾아볼 수 있다. 난자가 
정자를 거세하게 되면 버마재비의 암놈은 자기 배우자를 죽여버린다. 이런 사실은 거세에 
대한 여성의 동경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버마재비의 암놈이 그와 같은 잔인성을 보이는 것은 특히 인간에게 잡혔을 
때이고, 자유의 몸으로 먹을 것이 충분히 있을 때에는 수놈을 잡아먹는 경우가 극히 드물
다. 수놈을 잡아먹는 것은 고독한 개미가 곧잘 자기 알 중에서 몇 개를 먹는 경우와 사정
이 같다. 즉 알을 낳아 종을 영속시킬 수 있는 체력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 
개체끼리 편을 갈라 서로 싸우는 '양성의 투쟁'으로 보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개미, 꿀벌, 흰개미, 또는 거미나 버마재비의 경우에도 암놈이 수놈을 노예로 삼아 잡아
먹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암수 양쪽을 다른 방법으로 잡아먹는 종이다. 암놈이 수놈보다 
오래 살고 힘이 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암놈은 아무 자주성도 갖고 있지 않다. 산란, 포
란, 유충을 돌보는 것이 암놈의 할 일이고, 그밖의 기능은 완전히 혹은 일부가 위축되어 
있다. 반대로 수놈에게는 개체의 생존이 어느 정도 보인다. 대개 수놈이 암놈보다 수태에
서도 주도권을 보여준다. 수놈은 암놈을 찾아 습격하고, 애무하고, 붙잡아 교미를 한다. 그
리고 수놈은 때로는 다른 수놈들과 싸워야 한다. 양자를 비교해 보면 운동, 촉각, 파악의 

여러 기관은 대개 수놈 쪽이 발달되어 있다. 나비의 암컷에게는 날개가 없는 경우가 많은
데, 수컷에게는 반드시 날개가 있는데다가 색체, 겉날개, 다리, 앞니가 발달되어 있다. 뿐
만 아니라 화려한 색체와 무늬의 사치스러운 외모가 첨가된다. 수놈의 생활은 잠깐의 교미 
이외에는 쓸모없고 멋대로이다.
  일벌의 근면에 비하면 수펄의 한가로운 생활은 큰 특권이다. 그런데 이런 특권은 언어도
단이다. 그래서 독자적인 징후가 보이는 이런 무위의 생활을 하는 데 대한 형벌로 수컷은 
목숨을 빼앗기게 된다. 암컷을 노예상태로 놓아두는 종은, 종에서 도망가려는 수컷을 반드
시 벌한다. 종이 수컷을 잔인하게 처단하는 것이다.
  생명의 형태가 더욱 진화되면, 생식은 다른 유기체를 생산하게 된다. 이 경우에 생식은 
양면성을 지니게 된다. 즉 종을 유지하는 동시에 새 개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혁신적
인 면은 개체의 특이성이 확립됨에 따라 돋보이게 된다. 이 경우에 생명의 지속과 창조는 
두 시기로 분명히 구분된다. 이 분리는 알의 수정에 대해 언급할 때에 이미 지적했으나, 
생식이라는 현상 전체 속에서 볼 수 있다. 이 분리는 난자의 조직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암컷은 수컷과 동등한 자주성을 갖고, 암컷과 알의 결합에는 밀접하지 않다. 물고
기나 개구리나 새의 암컷은 단지 복부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체와 알의 결합이 긴
밀하지 않을수록 분만에도 열중하지 않게 되며, 어미와 새끼의 관계도 애매해진다. 그리하
여 수컷이 새로 부화된 새끼를 돌보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은 어류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물이라는 물질은 난자와 정자를 운반하여 
만나게 하는 데 적합하며, 물속에서의 수정은 대개 몸 밖에서 이루어진다. 즉 어류는 교미
를 하지 않는다. 고작 상대방을 자극하기 위해 몸을 서로 비벼대는 정도이다. 암컷은 난자
를 배출하고 수컷은 정액을 배출한다. 그 역할은 동일하다. 암컷이 수컷 이상으로 알을 자
기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다. 어떤 종에 있어서는, 알은 그 부모에게서 버림받아 혼자서 
성장한다. 간혹 암컷이 알을 위해 집을 마련하는 경우가 있고, 또 때로는 수정한 후에 암
컷이 알을 돌보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 알을 돌보는 것은 수컷이다. 수컷은 수정된 알을 
먹어버리려는 암컷을 멀리 쫓아버리고, 가까이 접근하는 모든 적으로부터 용감하게 알을 
지킨다. 격리물질로 싸인 기포를 내품어, 안전한 집을 만드는 물고기의 경우도 있다.
  그리고 어류는 때때로 알을 입 속이나 혹은 해마처럼 배의 주름 속에서 부화시킨다. 개
구리에게서도 비슷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개구리들은 진정한 교미를 할 줄 모른다. 수
놈은 암놈을 포옹하고, 포옹에 의해 산란을 촉구한다. 알이 배설구에서 나오면 수놈은 정
액을 배설한다. 종종 염주처럼 생긴 알을 수놈이 다리에 감아서 운반하여 부화를 담당하는 
경우가 있다. '산파두꺼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두꺼비가 그 대표이다.
  새의 경우는 암놈이 몸 안에서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알이 형성되며, 알의 크기도 비교
적 크고, 꽤 고생하면서 낳는다. 알은, 순간적인 교미에 의해 수정시킨 수놈보다는 암놈과 
훨씬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다. 알을 부화하여 새끼를 돌보는 것은 보통 암놈이다. 그러나 
수놈이 집을 지어 암놈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일에 가담하는 경우가 있다. 상당히 드문 일
이지만, 참새의 경우처럼 수놈이 새끼를 까고 기르는 경우도 있다.
  비둘기는 암,수가 모두 모이주머니 속에 일종의 젖을 분비하여 새끼를 기른다. 수놈이 
양육을 담당한 이 모든 경우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수놈이 새끼를 기르기 위해 헌신하는 

기간 중에는 정자의 생성이 중지된다는 사실이다. 자연히 수놈은 생명을 유지하는 일에 몰
두하면서 새 생명을 낳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
  생명이 더욱 복잡한 형태를 취하여 가장 구체적으로 개체화되어 있는 것은 포유동물이
다. 이들은 생명의 유지와 창조라는 두 시기의 구분이 양성의 분리라는 형태로 분명하게 
이루어진다. 암놈과 새끼의 관계도 가장 밀접해지고, 수놈의 새끼에 대한 관심이 점점 적
어지는 것은-척추동물의 경우만을 생각하면-이 분리에 의해서이다. 암놈의 몸 전체는 모
성의 노동에 적응되어 있고, 모성에 의해 움직여지는 한편 성의 주도권은 수놈이 갖게 된
다. 암놈은 종의 먹이인 셈이다. 한 계절이나 두 계절 동안 암놈의 생명은 성적 주기, 즉 
성적 충동의 주기에 의해 규정된다. 이 주기의 지속기간은 그 간격의 주기와 마찬가지로 
종에 따라 다르다.
  이 성적 주기는 두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 동안에 난자(그 수는 종에 따라 다르다)가 
성숙되고, 자궁 속에서 보금자리를 만든다. 제2기 동안에는 지방질이 뭉그러져서 희끄무레
한 액체가 되어 흘러나온다. 성적 충동은 발정기간과 일치한다. 그러나 암놈의 발정은 수
동적인 성격을 띤다. 암놈은 수놈을 맞아들일 태세를 취하고 기다린다. 포유동물의 경우에
도-어떤 조류처럼-암놈 쪽에서 수놈을 유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울음소리나 교태나 
노출에 의해 수놈을 부르는 데 그친다. 암놈이 교미를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주도권은 수놈에게 돌아간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종에 대한 전적인 희생을 받아들임으로써 수컷이 오히려 큰 특
권을 갖게 된 곤충류에 있어서도, 수태행위를 촉구하는 것은 보통 수컷 쪽이다. 어류의 경
우에는 흔히 수컷의 출현과 접촉에 의해 암컷의 산란을 자극한다. 개구리에 있어서는 수놈
이 상대방을 흥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수놈이 암놈을 크게 지배하는 것은, 특히 조
류와 포유동물이다. 암놈이 수놈을 냉담하게 맞아들이거나 저항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암놈이 도발적이고 동의적으로 나오는 경우에도, 결국 수놈이 암놈을 사로잡는 것이다. 즉 
암놈은 사로잡히게 된다.
  이 말은 때때로 대단히 정확한 의미를 갖는다. 수놈이 거기에 적응하는 기관을 갖고 있
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놈이 강하기 때문인지, 수놈은 암놈을 붙잡아 꼼짝 못하게 한다. 교
미할 때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암놈이다. 많은 곤충이나 조류, 포유동물들은 수놈이 
암놈에게 성기를 삽입한다. 그래서 암놈은 침범되는 것처럼 보인다. 수놈은 종에 대하여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종은 자기 갱신에 의해서만 영속되고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지 않으면 멸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을 보호할 임무를 갖고 있는 암놈은 알을 
체내에 가둬두며, 알의 피난처 구실을 하는 암놈의 몸은 알을 수놈의 수정행위에서 떼어놓
는다. 그러므로 암놈의 몸은 타파해야 하는 저항체이다. 한편 수놈은 암놈의 체내에 쳐들
어가 능동적인 자기를 실현한다.
  수놈의 지배는 교미의 체위에 나타나 있다. 대부분의 동물은 수놈이 암놈 위에서 교미를 
한다. 그리고 수놈이 사용하는 성기는 물질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생명을 지닌 모습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하나의 도구이다. 그런데 이 교미에서 암놈의 성기는 생명력이 없는 수용
기에 지나지 않는다. 수놈이 그곳에 정액을 배설하면, 암놈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암놈은 생식에서 근본적으로 능동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성기삽입과 체내수태

로 말미암아 수동적인 교미를 강요당한다. 발정했을 때에는 자진하여 수컷을 구하는 경우
가 있을 정도이므로, 암놈은 성적인 요구를 개체적인 요구로 느끼기는 하지만 성적 경험을 
내적인 일로 체험하는 것이지, 세계 및 타자와의 관계로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
유동물의 수놈과 암놈의 근본적인 차이는, 같은 성적 체험을 하는 짧은 시간에 정자가 수
놈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그의 몸에서 떠나, 그의 생명이 정자를 통하여 자기를 초월해서 
타자가 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수놈은 자기의 개체성을 초월하는 순간에 다시 자기를 그 속에 가둬둔다. 이
와는 달리 난자는 성숙되어 여포에서 분리되어 수란관 속에 떨어졌을 때 이미 수놈에게서 
분리하기 시작한 것이 되지만, 밖에서 온 생식세포에게 침입을 당하면 자궁 속에 자리를 
잡고 만다. 그러니까 암놈은 먼저 침범된 다음에 소외되는 것이다. 암놈은 각자 성숙단계
에 도달할 때까지 태아를 뱃속에 넣어둔다. 모르모트는 거의 성숙한 상태로 태어나고, 개
는 거의 태아와 분간되지 않는 상태에서 태어난다.
  자기 몸을 양분으로 하여 키우는 타자를 밴 암놈은, 임신기간 동안 줄곧 자기이기도 하
면서 동시에 자기 이외의 것이기도 하다. 출산이 지나도 암놈은 자기 유방에서 나오는 젖
으로 새끼를 기른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에서 새끼를 자주적인 생명체로 보아야 할지 잘 
모른다. 수정했을 때인가, 출산했을 때인가, 아니면 젖을 뗐을 때인가? 암놈이 분리된 개체
의 모습을 취할수록, 모든 분리를 초월하여 생명의 연속이 확립된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
이다. 무정란이나 수정란을 배출하는 어류나 조류는, 포유동물의 암놈만큼 새끼의 먹이가 
되지는 않는다. 포유동물의 암놈은 새끼가 태어난 후에는 자주성을 회복한다. 암놈과 새끼 
사이에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끼에 대한 암놈의 헌신은 분리될 때부터 시작된
다. 암놈은 자진해 싸우기도 하며, 공격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개의 암놈은 자기 개성을 
발휘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수놈이나 다른 암놈에게도 강하게 대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의 투쟁본능을 갖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의심스러운 다윈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암놈은 접근하는 수놈을 별로 선택하
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것은 암놈이 개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이
다. 어미로서의 노역에서 벗어나 있는 동안은, 암놈은 때로는 수놈과 대등할 수 있다. 말도 
암말은 종마에 못지않게 빨리 달리고, 사냥개도 암캐가 때로는 수캐 못지않게 냄새를 잘 
맡으며, 원숭이도 테스트해 보면 암놈이 수놈 못지않은 지능을 갖고 있다. 다만 이런 개성
이 강하게 요구되지 않을 뿐이다. 암놈은 권리의 포기를 요구하는 종의 성질 때문에 자기
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놈의 운명은 암놈과 전혀 다르다. 앞에서 관찰한 것처럼, 수놈은 자기초월 속에 자기
를 분리하면서, 자기 속에서 자기를 확립한다. 이 특징은 곤충에서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다. 집단 속에 섞여 무리를 지어 살고 있는 어류나 고래들도, 발정기에는 집단에
서 빠져나와 고립되어 다른 수놈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암놈에게는 직접적인 성본
능이, 수놈에게는 간접적이 된다. 즉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만족 사이에 있는 거리를, 수
놈은 능동적으로 단축시킨다.
  수놈은 암놈과 교미하기에 앞서 암놈을 찾고, 암놈에게 접근하여 애무하고, 꼼짝 못하게 
한다. 교미, 운동, 포섭의 기능에 필요한 기관은 대개 수놈 쪽이 더 발달되어 있다. 수놈의 

체내에서 정자를 증식시키는 생명의 충동은 빛나는 날개와 화려한 비늘이나 뿔, 갈기, 울
음소리나 왕성한 체력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수놈이 발정기에 몸에 
걸치는 '결혼예복'이나 유혹적인 장식에 도태의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때의 생명력이 수놈 속에서 피우는 대단히 화려한 수꽃이다.
  이 생명력의 충만, 교비를 위해 발휘되는 활동력, 그리고 교미할 때 볼 수 있는 암놈에 
대한 지배욕, 이것들은 모두 생명적인 초월의 순간에 개체가 개체로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이 암놈은 종 속에 갇혀있는데 수놈에게는 주체적 요소가 있다고 본 것
은 정당하다. 주체성과 분리는 곧 투쟁을 의미한다. 공격성은 발정기 수놈의 특징 중 하나
이다. 이것은 경쟁이라는 관점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암놈의 수가 수놈의 수와 
거의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투쟁의욕이라는 측면에서 경쟁을 설명할 수 있다. 수놈은 
생식에 접어들기 전에 종을 영속시키는 행위를 자기것으로 만들기 위해, 동류와의 투쟁속
에 자기개성의 진실성을 확인하려한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종은 암놈에게 붙어 살면
서 그 개체로서의 생명의 대부분을 빼앗아간다. 이와는 반대로 수놈은 종의 생명력을 자기
의 개별적인 생명에 일치시킨다. 물론 수놈도 자기 힘을 초월한 여러가지 법칙에 제약을 
받으므로, 수놈에게도 정자의 생성과 정기적인 발정이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유기체 전체에 영향을 주는 정도는, 성충동의 주기보다 훨씬 적다. 
정자의 생산이 힘들지 않은 것은 난자의 생산이 힘들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것이 암놈에게 
정력을 소모하는 일이 되는 것은, 성장한 동물의 체내에서 알이 발달하는 경우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미는 잠깐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수놈의 생명력을 감퇴시키지는 
않는다. 수놈은 부정본능을 거의 나타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수놈은 일단 교미가 끝나면 
암놈을 버린다.
  수놈이 가족집단-일부일처제이건, 첩들을 거느리건, 가축의 무리건 간에-의 주인으로서 
암놈의 곁에 있을 때, 보호나 양육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공동생활체 전체에 대해서이
며, 직접 새끼에게 관심을 갖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개체로서의 생명을 꽃피우는 데 적합
한 종에 있어서는, 자주성을 위한 수놈의 노력은-하등동물은 죽음을 초래하지만-크게 성
공한다. 일반적으로 수놈은 암놈보다 몸집이 크고, 억세고 대담하다. 수놈은 암놈보다 독립
된 생활을 하며 그 활동 또한 보다 자유분방하고 정복적이며 위압적이다. 동물사회에서 명
령하는 것은 언제나 수놈이다.
  자연 속에는 명확한 것은 하나도 없고, 암, 수라는 두 형태도 명백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암, 수 사이에 완전히 우연이라고 생각되는 동종이형-털이나 반점의 배치
나 여러 가지 색깔 등에서-도 있다. 이와 반대로 어류에서 보아온 것처럼, 양자의 구별을 
하기 어렵고 그 기능이 거의 분화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특히 고등동물에서는 양성은 종의 생명의 다른 두 측면을 보여
주고 있다. 양자의 대립은 흔히 말하는 것과 같은 능동성과 수동성이 아니다. 난핵이 능동
적일 뿐만 아니라, 배자의 발달도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고 살아 있는 과정이다. 양자의 대
립을 변화와 영속의 대립으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정자는 난
자 속에 그 활동력이 유지되기 때문에 창조가 이루어지고, 난자는 자기를 초월할 때에만 
자기를 유지하며, 그렇지 않으면 퇴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지와 창조라는 능동적인 두 작용에서 생성이라는 종합작용은 같은 방법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유지란 각 순간의 분산을 거부하고, 순간의 돌발적인 작용에 연속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란 일시적인 통일 속에서 분리된 현재를 돌출시키는 것이다. 
또한 암놈은 분열하려고 하는 생명을 연속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편 
개체화된 힘으로서의 새로운 분열은 수놈이 앞장서서 일으킨다. 그러므로 수놈은 자주성 
속에서 자기를 확립할 수 있다. 수놈은 종의 에너지도 자기 생명에 곧잘 도입한다. 반대로 
암놈의 개성은 종의 이해관계에 의해 눌리고 만다. 암놈은 외부의 힘에 지배를 받는 것, 
즉 소외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유기체의 개성이 확립되어도 양성의 대립은 완화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이
다. 수놈은 힘을 쓰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내어 그 힘의 지배자가 되고, 암놈은 점
점 자기의 예속을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암놈은 자기 자신의 이해와 자기 속에 
깃들어 있는 생식력의 이해 사이에서 투쟁이 격화된다. 암소나 암말의 출산은 생쥐나 토끼
의 그것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위험하다. 암컷 중에서 가장 개체화되어 있는 인간인 여자도 
가장 연약한 암컷, 즉 가장 극적으로 자기 숙명을 살고, 가장 근본적으로 수컷(남성)과 구
별되는 암컷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인류도 대부분의 생물과 마찬가지로, 남녀가 거의 같은 수로 태어난다. (남자 104명에 
대해 여자 100명 꼴이다.) 그리고 태아가 발달하는 방법도 같다. 그러나 원상피조직은 여
자인 태아 쪽이 더 오래 중성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그 발달이 
도중에 역전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반음양은, 본래 여성적이었던 주체가 후에 남성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남성
적인 유기체는 처음부터 곧장 남성으로 결정되지만, 여성적인 유기체는 여성이 되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태아의 이 최초의 망설임은 아직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만큼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양성의 생식기관은 대칭적인 것으로 완성된
다. 그 어느 쪽의 호르몬도 같은 화학족, 즉 스테롤족에 속하고 모두 콜레스테롤에서 생긴
다. 생식세포의 2차적인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이 스테롤족이다.
  그러나 호르몬의 화학방정식이나 해부학적 특성도 여성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을 남성과 구별하는 것은 그 기능의 발달이다. 여성에 비하면 남성의 발달은 단순하
다. 출생에서 사춘기까지 남성은 대체로 순조롭게 성장한다. 15, 16세경에 정자의 생성이 
시작되며, 노년에 니르기까지 지속된다. 그리하여 생식세포의 남성적인 구성을 결정하는 
호르몬이 생긴다. 그후 남성은 성생활을 하게 된다. 성욕이 일어날 때나 성교를 할 때에도, 
종에 대한 자기초월은 자기초월의 주체적 동기와 하나가 된다. 그는 그의 육체이기 때문이
다.
  그런데 여자의 경우에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태아 때부터 이미 난자세포가 저장되어 
있고, 난소에는 약 5만 개의 난자가 여포에 쌓여 있으며, 그중에서 약 400개가 성숙하게 
된다. 그것이 태어나면 곧 종이 여성을 소유하여 그 권리를 주장하려고 한다. 여자는 태어
나자마자 일종의 제1차 사춘기를 통과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난모세포는 급속히 성장한다. 그리고 난소는 약 5분의 1 가량 축소된다. 어린
아이 때에는 휴식이 주어진 셈이다. 그때 유기체는 발달하지만, 생식계통은 거의 정지된 

상태이다. 여포 중에는 팽창하는 것도 있지만, 성숙단계에는 이르지 못한다. 어린 소녀의 
성장은 소년의 경우와 비슷하다. 오히려 같은 나이의 남자보다 키가 크고, 체중이 무거운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 종이 다시 그 권리를 주장한다. 난소 분비물의 영향으
로 성장중인 여포의 수가 증가한다. 난소는 충혈되고 팽창하며, 난자 중의 하나가 성숙하
여 월경주기가 시작된다. 생식계통은 그 최종적인 크기와 형태를 취하여, 생식세포는 여성
화되고 내분비의 평형이 확립된다.
  이런 현상이 '위기'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성의 육체가 아무 저항
도 하지 않고 종을 자기 체내에 자리잡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투쟁은 여성을 쇠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위기에 빠뜨린다. 사춘기 이전에는 남아와 여아의 사망률이 거의 같지만, 
14세에서 18세까지는 남자 100명에 대하여 여자 128명, 18세에서 21세까지는 남자 100
명에 대해 여자 105명이 죽게 된다. 위황병, 결핵, 척추염, 골수염 등이 자주 발생하는 것
은 이 시기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춘기가 빨리 오지만, 45세경에 오는 사람도 있다. 그
런가 하면 사춘기가 전혀 시작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 그 사람은 소아성으로, 
무월경 또는 월경곤란으로 고생하게 된다.
  어떤 여성은 남성화의 징후가 보인다. 부신에서 만들어진 분비물 과잉이 그녀에게 남성
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이상은 결코 종의 폭압에 대한 개체의 승리를 의미하
는 것은 아니다. 종에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나올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종은 개체의 생활
을 예속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키우기 때문이다. 이 이원성은 난소의 기능에 나타난다. 남
성의 활력이 고환 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여성의 활력은 난소 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어느 경우에도 거세된 개체는 단지 불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고 퇴
화한다. 유기체는 형성되지 않거나 잘못 형성되면 전체가 빈약해지고 균형을 잃게 된다. 
유기체는 생식계통의 성숙에 의해 비로소 성숙해진다.
  그러나 생식현상의 대부분은 주체인 개개의 생명을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위험에 노출
시키기도 한다. 사춘기에 발달하는 유선은 여성의 몸의 조화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생애의 어느 시기에 그것을 절제해도 무방하다. 난소의 분비물은 대부분이 난자
의 성숙과 자궁이 난자의 요구에 적응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그
것은 몸 전체에 조정보다 부조화의 원인이 된다. 여성은 자기 자신보다 오히려 난자의 요
구에 적응하도록 되어 있다.
  여자는 사춘기에서 폐경기까지 자기 속에 전개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녀에게 관계
가 없는 사건이 전개되는 무대이다. 앵글로색슨족은 월경을 저주라고 부르고 있다. 사실 
월경주기에는 개인적인 의도가 배제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월경이 수태했을 경우
에 태아의 피와 살을 만드는 데 충당된다고 믿고 있었다. 이 낡은 학설의 정당성은, 여자
는 언제나 임신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포유동물의 경우에는 이 발정주기는 
한 철밖에 계속되지 않으며, 출혈도 뒤따르지 않는다. 그것을 달마다 고통과 출혈이 따르
는 가운데 치러야 하는 것은, 고등원류와 여자뿐이다. 약 14일 동안 난자를 싸고 있는 '그
라프 씨의 여포'중의 하나가 양을 늘려 성숙해 간다. 그동안에 난소가 폴리쿨린이라는 호
르몬을 분비한다. 14일 만에 배란이 이루어진다. 여포의 안쪽 벽이 찢어지고(이 경우에 가
끔 피가 나기도 한다) 그 반흔이 발전하여 황체를 형성해 가는 동안에 난자가 수란관 속

에 떨어진다. 이때 자궁에 작용하는 프로게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의 분비에 의해 특징적인 
제2단계, 일명 루테인(난황 색소)이라는 단계가 시작된다. 그리하여 자궁이 변화된다. 내
벽의 모세관 조직은 충혈되고, 내벽이 위축되어 생긴 주름으로 레이스가 늘어진 것처럼 보
인다. 이 세포변화는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므로, 수정하지 않은 경우에도 이 조직은 소
실되지 않는다. 다른 포유동물이라면 그것은 임파관을 통해 제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에는 자궁 내벽의 주름이 뭉그러질 때에는 점막이 박탈되고 모세관
이 열려 핏덩이가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리고 황체가 퇴화하는 한편 다시 점막이 만들어져 
새로운 여포단계가 시작된다. 이런 복잡한 과정은 아직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유기
체 전체를 동요시킨다. 왜냐하면 갑상선과 뇌하수체, 중추신경 계통과 소화기 계통 등 모
든 내장에 영향을 주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여성(85퍼센트 이상)은, 이 기간에 장애를 나타낸다. 출혈이 시작되기 전에는 
혈압이 오르고 다음에는 내린다. 맥박이 빨라지고 때로는 체온도 상승하여 열이 나는 경우
도 많고, 복부에 통증도 느끼게 된다. 변비에 이어 설사를 하기도 한다. 또한 간장비대, 요
폐색, 단백뇨 증상이 일어난다. 많은 여성은 후점막의 충혈(후두통)을 일으키고, 모든 여성
이 시청각장애를 호소한다. 땀이 많이 나고 월경 초에는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심하면 월
경기간 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신진대사는 증대되고, 적혈구의 수가 감소한다. 그러나 혈액
은 보통 조직 속에 비축된 여러물질, 특히 칼슘염을 운반한다. 이 염분이 난소와 갑상선에 
작용하여 비대하게 되며, 뇌하수체를 자극하여 자궁점막에 변화를 일으켜 뇌하수체의 활동
력을 증대시킨다. 선이 이와 같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신경이 몹시 쇠약해진다. 
중추신경 계통이 침해되어 만성적인 두통이 일어나고, 소화기 계통은 과도한 반응을 보인
다. 중추신경 계통에 의한 자동조정력이 감퇴되었기 때문에 반사운동이나 경련성 콤플렉스
가 일어나 기분이 가라앉지 않게 된다. 여자는 평소보다 신경이 예민하고 불안하고 신경질
적이고, 심한 정신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여자가 자기 육신을 광적인 이물질처럼 느끼고, 
크게 상심하는 것은 이 시기이다. 그녀의 육체는 달마다 자기 속에 요람을 만들고 부수는 
집요하고 무심한 생명의 희생물이다. 달마다 아기를 낳을 준비를 하고 빨간 주름의 붕괴로 
유산한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 육체는 자기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육체는 그녀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다.
  수정란이 자궁 속에 내려가 그곳에서 발달할 때에는, 여성은 더욱 심각한 소외감을 느끼
게 된다. 건강하고 영양이 정상일 때에 임신하면, 모체에 해를 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 사회적인 공리주의가 분명히 드러나보이는 낙천적인 학설과는 반대
로, 임신은 여성에게 개인적인 이득이 되기는커녕 반대로 큰 희생을 요구하는 힘든 일이
다. 최초의 몇 달 동안은 흔히 식욕부진과 구토가 따른다. 이것은 다른 어떤 가축의 암컷
에게서도 볼 수 없는 것이며, 유기체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종에 대한 유기체의 반항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기체에서 인, 칼슘, 철분이 결핍되며, 철분의 결핍은 나중에 보충하기도 어렵다. 신진
대사의 과잉이 내분비 계통을 흥분시켜, 소화와 신경계통을 흥분시킨다. 혈액은 그 비중이 
감소되어 빈혈증을 일으키고, 단식이나 결식한 사람 또는 계속해서 출혈한 사람이나 회복
기 환자의 피와 흡사하게 된다. 건강하고 영양상태가 좋은 여성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은, 

분만 후에 크게 고생을 하지 않고 태아가 소비한 양을 회수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임신중에는 중대한 고장이나 위험한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 몸
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위생상태가 나쁘면 여자는 출산 때문에 일찍 늙어 추하게 된다. 이
런 증상이 시골에는 얼마나 많은가, 분만자체도 고통스럽고 위험하다. 육체가 종과 개체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이 위기이다. 분만할 때 아기가 
죽거나 어머니가 죽거나 어머니에게 만성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
도 어머니에게 고역이다. 여러 가지 인자-그 주요한 것은 포르게스테론이라는 황체호르몬
인데-가 밀집하여 유선 속에 모유를 분비하게 한다. 젖이 불 때에는 고통이 따르고, 때때
로 발열현상이 일어나며,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에는 자기 자신의 정력을 쏟는 
것이다.
  분만할 때 극적인 양상을 나타내는 종과 개체의 투쟁은 여자의 몸을 불안하고 연약하게 
만든다. 여자는 흔히 뱃속에 병을 안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들이 체내에 적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종이 그녀들을 좀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걸리는 병의 대부분
은 외부로부터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체내의 이상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의사자궁염은 난
소의 이상자극에 대한 자궁점막의 반작용에 의해 일어나게 된다. 만일 황체가 월경후에도 
흡수되지 않은 채 계속 남아 있으면, 나팔관염이나 자궁내막염의 원인이 된다.
  여자가 종의 세력에서 벗어나려면 역시 괴로운 위기를 거쳐야 한다. 40세에서 50세 사
이에 적령기의 역현상인 폐경기가 나타나게 된다. 난소기능은 감퇴하거나 아예 소멸되기도 
한다. 이 소멸은 여성의 활력을 약화시킨다. 갑상선이나 뇌하수체 등의 분해작용의 선이 
난소의 결함을 보충하려고 노력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폐경기 때는 침체된 기분뿐만 
아니라, 발열, 고혈압, 신경과민 등의 상승현상이 나타나며, 때로는 성본능이 재발되기도 
한다. 어떤 여성은 그 시기에 지방이 증가되거나 때로는 남성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
분의 여성들은 내분비의 균형이 회복된다.
  이때 여성은 비로소 암컷의 굴욕에서 해방된다. 그 활력은 손상을 입지 않았으므로, 거
세된 남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자는 자기를 억누르고 있는 힘의 희생물은 
되지 않는다. 그녀는 이때 비로소 자기 자신과 일치한다. 때때로 나이를 먹은 여자를 '제3
의 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사실 그녀들은 수컷은 아니지만 암컷도 아니다. 그리고 이 
생리적인 자율성은 그녀들이 이전에는 소유하지 못했던 건강, 균형, 정력으로 나타나는 경
우도 많다.
  여성의 경우에는 순전히 성적인 차이 이외에, 다소나마 그 차이와 관련하여 생기는 2차
적인 성적 특이성이 있다. 그것은 생식세포를 결정하는 호르몬의 활동이다. 여성은 일반적
으로 남성보다 키가 작고, 체중도 가볍고, 골격이 약하고, 골반은 임신과 분만작용에 적응
하여 넓다. 몸에 지방이 오르고, 전체적인 모습이 남성보다 둥그스름하다. 전체적인 형태, 
피부, 모발계통은 남녀가 뚜렷하게 다르다. 근육의 힘은 여성이 훨씬 약하여 남성의 약 3
분의 2 가량 된다. 호흡능력도 떨어진다. 폐, 기관지, 후두가 여성 쪽이 작기 때문이다. 후
두의 차이는 또한 성량의 차이를 가져온다. 혈액의 비중은 여성 쪽이 작다. 적혈구의 함량
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성처럼 몸이 튼튼치 못하고 빈혈을 일으키기 쉽다. 맥박도 
빠르고, 혈관계통도 불안정하다. 그래서 금방 빨개진다. 불안정은 여성의 큰 특징의 하나이

다. 남성은 칼슘의 신진대사가 안정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여성은 석회염을 훨씬 적게 갖
고 있는데다가 월경과 임신 때에 그것을 배설하기까지 한다. 난소는 칼슘에 접하면 붕괴작
용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불안정성은 특히 난소에, 그리고 남성보다 여성 쪽이 훨씬 발달되어 있는 갑상선에 
이상을 가져오기 쉽다. 그리고 내분비의 불규칙은 자율신경계통에 영향을 주어, 신경이나 
근육의 통제가 완전히 보장되지 않는다. 이 안정과 통제의 결여는 혈관의 변화에 직접 결
부된 신경이나 근육에 과민성으로 나타난다. 심장이 뛰고, 얼굴이 잘 묽어지는 증상이 그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눈물이나 요란한 웃음, 신경발작과 같은 경련적인 감정표현을 하기
가 쉽다.
  이상과 같은 특징의 대부분은 여성이 종에 종속되어 있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이 검토에서 내리게 된 명백한 결론이다. 여자는 모든 포유동물의 암컷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소외되어 있고, 또한 가장 심하게 이 소외를 거부하고 있다. 다른 생물의 어
떤 암컷을 보아도 유기체의 생식기능에의 종속이 이처럼 절대적이고 또 이 이상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없다. 발정기와 폐경기의 위기, 달마다 겪는 '저주'(월경), 오랫동
안 그리고 자주 큰 고통이 뒤따르는 임신, 위험한 출산, 질병, 재앙 등이 여자의 특징이다. 
여자가 개체로서 자기를 주장하여 자기 숙명에 반역할수록 그 운명은 점점 무겁게 억누른
다고 할 수 있다.
  남성은 여성에 비하면 훨씬 유리하게 생각된다. 남성의 성생활은 그의 개인생활과 모순
되지 않는다. 그의 생활은 위기도 초래하지 않고, 또 일반적으로 큰 변화도 없이 순조롭게 
전개된다. 여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오래 산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병에 걸리
기 쉽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기간도 길다.
  위에서 말한 생물학적인 조건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여성이 처한 생애에 가장 중요
한 역할을 하며, 여성의 환경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이후의 서술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 점
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는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도구이며, 세계는 그 파
악방법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길게 생물학적인 조
건을 연구했다. 그것은 여성을 이해하는 열쇠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조건이 여성에게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이 되어 있다는 사고이다. 이것만으로 남
녀의 계급성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여자가 타자인 이유도 설명할 
수 없다. 그것만으로는 결코 여자에게 영구히 종속적인 역할을 하는 운명을 안겨줄 수는 
없는 것이다.

  남녀는 인간으로서 균등한 기회가 주어져 있는가? 종에 대해 남녀의 어느 쪽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흔히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생리학뿐이라고 말한
다. 그러나 앞의 물음은, 여자와 다른 생물의 암컷에게 같은 식으로 할 수는 없다. 왜냐하
면 동물은 안정된 형태로 서술할 수 있는 기성의 종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암말이 수
말만큼 빨리 뛰는가, 침팬지의 수놈이 암놈보다 지능테스트의 성적이 좋은가를 알아보려
면, 관찰을 종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형성과정에 있다. 순수하
게 정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다루려는 유물론자도 있었다. 심리와 생리의 평행설에 젖어 

있는 그들은, 암, 수의 유기체 사이를 수학적으로 비교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이런 척도가 
즉시 암, 수의 기능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방법이 불러온 무익한 논의의 한 예를 
들어보려고 한다.
  뇌가 어떤 신기한 방법으로 사상을 분비하는 것처럼 생각했으므로, 여자의 대뇌의 평균
무게가 남자보다 가벼운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로 생각되었다. 여자의 대뇌의 무
게는 1,000그램에서 1,500그램이고, 남자는 1,150그램에서 1,700그램이므로, 평균하면 
여자는 1,220그램이고, 남자는 1,360그램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절대중량은 
의미가 없으므로, 상대중량을 고려하기로 했다. 이것을 보면 여성 쪽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다시 수정해야 한다. 이런 비교에서는 작은 유기체 쪽이 
언제나 이득을 보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 개체를 비교할 경우에 체중을 제외하기 위해서
는, 그것이 동종에 속할 때에는 대뇌의 무게를 체중의 0.56배로 나눠야 한다. 남자와 여자
를 두 변형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남자 체중의 0.56=498승 1360/498=2.73
  여자 체중의 0.56=446승 1220/446=2.74
  
  즉 같은 값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밀한 논쟁을 해도 별로 흥미를 느낄 수 
없는 것은, 대뇌의 무게와 지능의 발달 사이에는 분명한 관계가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이
다. 남녀의 호르몬을 결정하는 화학방정식을 심리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심리와 생리의 평행설 같은 사고를 거부한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결정적으로 무너진 
학설이다. 우리가 특히 이 학설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는 무너
졌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도 알 수 있는 것처
럼 어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낡은 유물이 아직도 행세하고 있다.
  나는 또한 여러 가치의 자연적인 단계, 예를 들면 진화의 단계의 존재를 내포하는 고증
학설도 일체 배격한다. 여성의 육체가 남성의 육체보다 소아적이냐 아니냐, 그것이 유인원
의 육체에 가까우냐 아니냐 하는 질문은 전혀 무의미하다. 막연한 자연주의를 막연한 도덕
론이나 심미론과 혼동하고 있는 이런 논의는 단지 말장난에 불과하다. 인류의 경우에 남녀
의 비교는 인간적인 전망에서나 가능하다. 인간의 정의는, 그것이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현재의 자기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메를로퐁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연의 종이 아니라 역사적인 관념이다. 여자는 굳어버린 현실이 아니라 생성이다. 그러므
로 여자를 남자와 비교할 경우에도 이 생성의 측면에서 해야 한다. 즉 여자의 가능성을 명
확히 알아봐야 한다. 그처럼 많은 논쟁이 오류를 범한 것은 여자의 능력을 문제삼으면서, 
여자를 과거나 현재의 상태로 환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능력이란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에야 비로소 분명히 입증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결코 도중에 계산을 멈춰서는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취한 견해, 즉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의 견해로 볼 때, 만일 육체
가 물건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의 상황이다. 그것은 세계를 파악하는 우리의 도구이며, 
투기의 시도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약하고, 근육의 힘도 적고, 적혈구가 적고, 폐활량도 적

다. 달리는 속도가 느리고,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지도 못한다. 여성이 남성과 대항할 수 
있는 스포츠는 거의 없다. 여성은 격투로 남성에게 도전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말한 불안정성, 통제의 결여, 허약성이 첨가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여성의 파악력은 남성보다 제한되어 있다. 여성은 투기에 있어서 남성보다 결단과 끈기가 
적고, 그것을 실행할 능력 또한 적다. 즉 여성의 개인적인 생명력은 남성만큼 풍부하지 못
하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
다. 우리가 인간사회의 관점에 서서 육체를 실존에서 출발하여 규정하게 되면, 생물학은 
추상적인 학문이 되어버린다. 생물학적 조건(근육의 열등성)이 의미를 갖게 되면 그 의미
는 반드시 전체의 의미와 관련되는 것처럼 보인다. '연약함'은 남성이 지향하는 목표나 남
성이 다루는 기구나, 남성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법칙에 비추어볼 때 그렇게 생각되는 것
이다.
  만일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사물에 대한 파악이라는 개념도 무의미
해질 것이다. 이 파악을 위해 체력의 사용이 요구되지 않을 경우나 실용적인 한계 내에서
는, 체력의 차이는 없어진다. 풍습이 폭력을 금하는 곳에서는 근육 에너지는 지배력을 발
휘할 수 없을 것이다. 연약함의 관념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려면, 생존적, 경제적, 윤리적 관
념이 필요하다. 인류는 반자연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이것은 결코 적절한 표현이 못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조건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조건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현상을 만들
어나가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행동에 의해 파악할 경우에만 인간에게 현실성을 지니게 된다. 그 인간 
자신의 자연(본성)도 예외일 수 없다. 세계에 대한 파악과 마찬가지로, 생식기능이 여자에
게 떠맡기는 부담도 추상속에서는 헤아릴 수 없다. 모성과 개개의 생명의 관계는, 동물의 
경우에는 발정주기와 계절에 따라 자연히 규정되어 있지만, 여자는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
문이다. 사회만이 그것을 결정할 수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출산횟수의 다소에 의해, 또는 
임신과 분만에 대한 위생조건에 따라, 종에 대한 여성의 종속의 긴밀도가 다르다. 그러므
로 고등동물의 경우는 개성적인 존재는 암놈보다 수놈이 우세하지만, 인간의 경우는 개인
적인 가능성은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의해 죄우된다.
  어떤 경우든, 수놈의 개체적인 특권이 종 속에서 수놈에게 우월성을 부여한다고 볼 수는 
없다. 암놈은 어미가 되어 다른 종루의 자치성을 획득한다. 때로는 수놈이 그 지배권을 행
사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추케르만이 연구한 원숭이의 경우다. 그러나 대개의 암, 수는 따
로따로 떨어져 산다. 또한 사자의 경우처럼 암수가 평등하게 가정을 돌보기도 한다. 인간
의 경우는 이 점에 있어서도 다른 동물과 동일시할 수 없다. 인간이 처음부터 명확히 개체
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 남녀가 1대 1로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부부는 본래 함께 사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자체가 또한 언제나 보다 큰 집단의 고정적 또는 과도적인 한 단위로 
나타난다.
  그런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어느 쪽이 종에게 더 필요할까? 생식세포의 단계나 성교
와 임신의 생물학적 기능의 단계에서는, 남성원소는 유지하기 위해 창조하고, 여성원소는 
창조하기 위해 유지한다. 이 구별은 사회생활 속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다른 유기체나 기

체에 기생하고 있는 종에게는, 즉 자연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먹이를 제공할 수 있는 종
에게는, 수놈의 역할은 생식작용에 국한된다. 새끼에게 필요한 먹이를 얻기 위해 사냥감을 
찾아 투쟁해야 할 때에는 수놈은 새끼의 부양을 위해 힘쓴다.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
지 않게 된 후 오랫동안 새끼가 자기의 요구를 스스로 충족시킬 수 없는 종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노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때 수놈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수놈이 탄
생시킨 생명은 수놈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
  해마다 많은 암놈에게 수태를 시키기 위해서는 수놈 한 마리만 있으면 되지만, 새끼를 
적으로부터 지키고 자연의 손에서 새끼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는 몇 마리
의 수놈을 필요로 한다. 생산력과 생식력의 균형은 인류역사의 경제적인 환경에 따라 다르
게 실현된다. 이 경제적인 환경은 새끼에 대한 수놈과 암놈의 관계 내지 암, 수의 상호관
계를 규정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는 생물학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생물학의 지식만으로는 양성이 종을 영속시키기 위해 연출하는 역할에 대해 그 어느 한쪽
이 우월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요컨대 사회는 종이 아니다. 종은 사회 속에서 실존으로서 자기를 실현해 간다. 종은 세
계와 미래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의 윤리는 생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개
체는 결코 자연에 순응하지 않고, 개체의 존재론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욕망과 위험을 반영
하는 습성, 즉 제2의 자연에 따른다. 주체가 자기를 의식하여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것은, 
육체로서가 아니라 터부(금기)나 법률에 예속된 육체로서이다. 그리고 주체가 자기를 가치
있게 하는 것은, 각각의 가치의 이름에 있어서이다. 이 경우에도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결코 생리가 아니다. 오히려 생물학적인 조건은 실존자가 부여하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만일 여성에 대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금한다면, 여성들이 남성에 대해 갖는 존경과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남성의 육체적인 우월성도 권력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 
만일 어떤 인디언 부족처럼, 처녀가 자기 마음대로 남편을 고르는 풍습이 존중된다면, 남
성의 성적 공세는 어떤 주도권도 또 어떤 특권도 제공하지 못한다. 어머니와 자녀의 긴밀
한 관계는, 자녀에게 주는 여러 가지 가치에 따라서 존엄의 원천도 되고, 경멸의 원천도 
될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모자관계 자체가 사회적인 편견에 따라 인정받기
도 못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조건은 존재론적,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인 전체의 관계에 잘 비춰보
아야 한다. 종에 대한 여성의 종속, 그 개인적인 능력의 한계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여
자의 육체는, 여자가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상황의 본질적 요소의 하나이다. 그러나 여자
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를 내리려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 사회 안에서 육체는 의식
이 행위를 통해 살아나가야만 비로소 진정한 현실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생물학은 '어찌
하여 여자는 타자인가?'라는 우리의 물음에 대해 답변할 수 없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
성에게 자연이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가를 알아야 한다. 또 인류가 여성을 어떤 존재로 만
들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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