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어릴 때 언제나 구박과 학대를 받아왔다. 그러나 자신을 자주적인 개체로 알고
있었다. 부모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공부나 유의에서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를 하
나의 초월자로 인식해 왔다. 다만 미래의 수용적인 여자의 생활을 어렴풋이 꿈꾸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 그 미래는 한결 가까이 다가올 뿐아니라 육체 속에 들어와
가장 구체적인 현실이 된다. 그 미래는 여성이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숙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청년이 성년기를 향해 활발히 나아가는 것과는 달리, 젊은 처녀는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는 것을 불안한 마음으로 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어린이였
던 과거에서 이미 이탈한 처녀에게 현재는 과도기로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 분명한
가치가 있는 목적도 찾아내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고 있다. 그 청춘의 외관은 얼마간 가
장된 채 기다림 속에 소비된다. 그녀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청년도 물론 여자를 꿈꾸고 정욕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언제나 여성은 생활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즉 여성이 그의 운명 전체를 좌우하지 않는다. 소녀는 유년시절
이후 여성으로서 자기를 실현하길 원하든, 혹은 여성으로서의 한계에서 탈출하려는 야심을
갖든 간에 그 실현과 탈출을 남성에게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남성은 페르세우스(그리스신
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아들)나 성 그레고리우스의(사람을 황홀하게 하는)얼굴을가진 해방
자이며, 돈과 권력도 갖고 있다. 그는 행복의 열쇠를 갖고 있는 멋진 왕자이다. 처녀는 그
의 애무를 받아, 어머니의 무릎에 안겨 있던 때처럼, '인생'의 큰 흐름에 휩쓸리게 될 자신
을 예감하고 있다. 그의 부드러운 지배에 몸을 맡기면, 아버지의 팔에 안겨 있을 때와 같
은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포옹과 부드러운 시선의 마력은, 그녀를 다시
우상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제나 남성의 우위에 대해 설명을 들어왔다. 이 남성의 위력은 유치한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사회적인 기반을 갖고 있으며, 남자들은 분명 이 세계의 주인이다.
모든 것이 처녀에게, 남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득한다. 부모는 그런 방향으
로 그녀를 유도한다. 아버지는 딸이 거둔 성공을 자랑하며, 어머니는 딸의 미래에 번영이
약속된 것을 내다본다. 그리고 여자친구들은 그녀들 중에서 남자에게 인기가 제일 좋은 친
구를 질투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미국의 대학에세는, 여학생의 평가기준은 그녀
의 데이트 횟수에 있다.
결혼이란 명예로운 경력이며, 다른 여러 가지 일처럼 고되지 않을 뿐더러, 결혼만이 여
성에게 완전한 사회적인 권위를 갖게 하고, 성적으로 애인, 어머니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녀의 주위사람들이 그녀의 미래에 관심을 가져주고, 그녀 자신이 자기 미래를 설
계하게 되는 것은, 이 결혼이라는 형태를 통해서이다. 남편을-어떤 경우에는 보호자를-얻
는 것은,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남성에게 '타자'는 그녀
속에 육체화되어 있는 것처럼, 그녀에게 '타자'는 남성 속에 육체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 '
타자'는 본질적인 형태로 그녀 앞에 나타나며, 그녀는 타자 앞에서 자기를 비본질로 파악
하게 된다. 처녀는 그 부모의 가정에서 어머니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면, 능동적인 정복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주인의 손에서 수동적이고 순종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열어나간다.
사람들은 흔히 처녀가 이처럼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그녀들이 육체적으로나 정
신적으로 청년들보다 열등하여, 그들과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헛된 경쟁을
포기하고, 그녀의 행복에 대한 보상을 한 남성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녀의
자기비하는 선천적인 열등성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자기비하야말로 그녀의 모
든 결점의 근원이다. 이 자기비하는 소녀의 과거 속에, 그녀를 에워싼 사회 속에, 그리고
그녀 앞에 제시되어 잇는 미래 속에 그 원인을 갖고 있다.
사춘기는 확실히 젊은 처녀의 육체를 변화시킨다. 그녀의 육체는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
지고, 성기는 상처받기 쉬우며 그 기능은 미묘해지고, 거추장스러운 유방은 무거운 짐이
되어 심한 운동을 할 때에는 흔들리고 아프기까지도 하여 그 존재를 환기시킨다. 이제부터
여성의 근력, 인내력, 민첩성은 남자의 그것에 비해 뒤떨어지게 된다. 호르몬 분비으 불균
형이 신경과 혈관운동의 불안정으 가져온다. 월경이 시작되면 고통이 따른다. 두통, 피로,
복통은 평소의 행동을 힘들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한다. 이 불쾌에 때때로 심리적인 이변이
가세한다. 그리하여 신경질이 되고 민감해져서 달마다 정신착란에 가까운 증상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신경계통과 교감신경계통의 신경중추에 대한 제동이 불확실하여, 일종
의 자가중독인 순환불순으로 말미암아 육체는 여성과 세계 사이에 놓인 장벽이 되어 그녀
를 짓누르고 질식시키고 떼어놓는, 타는 듯한 안개가 된다.
이 가엾은 수동적인 육체에게 전 세계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억압되어 침몰한 그녀는
세계의 다른 부분에 대해 이방인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방인이 도니다. 종합
이 분해되고, 시간이 연결되지 않으며, 타인을 추상적으로만 인식한다. 우울증에 걸렸을 때
처럼 사고력이나 논리가 분명하더라도, 그것은 기능의 혼란 속에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정
열을 표시하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여성이 이 사실을
중요시하는 것은, 그것을 의식하는 방식에 의해서이다.
소녀들이 실제로 폭력을 모방하여 공격성과 권력욕과 결투심을 표시하는 것은 13세경이
다. 그것은 바로 소녀가 거친 장난을 그만두는 시기이다. 스포츠는 여자도 할 수 있다. 그
러나 인위적인 규칙에 따라야 하는 특수한 스포츠는 자연스럽고 습관적인 체력사용의 대
체물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생활권의 주변에 있으며 주먹질이나 나무오르기처럼 세계난
자기 자신에 대해 내면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스포츠를 하는 여자는, 친구의 양쪽 어
깨를 짓누른(레슬링의 규칙, 양쪽 어개가 지면에 동시에 닿은 쪽이 패함) 소년의 자랑스러
운 승리감은 결코 맛보지 못한다. 그리고 많은 나라의 소녀의 대다수가 스포츠 훈련을 받
지 못하고 있다. 그녀들에게는 싸움이나 나무오르기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그 육체를 따를 뿐이다. 그녀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세계를 초월하여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녀들에게는 가능성의 한계를 개척하거나 감행하거나 후퇴하는 것이 금지되
어 있다. 특히 청년들에게 그처럼 중요한 도저적인 태도는 그녀들에게는 거의 생소한 것이
다. 여성도 물론 서로 비교는 하지만, 도전은 이런 소극적인 대결과는 다르다. 서로 경계선
을 넘으려고 하는 세력을 이 지상에 갖고 있는 한, 두 자유는 서로 싸우게 마련이다. 상대
보다 높이 뛰어오르거나 상대의 팔을 꺾는 것은, 지상에 자기의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정복은 소녀에게는 허용되지 않으며 특히 폭력은 금물이다. 성인의 세계에도 평상
시에는, 폭력이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성인의 세계는 폭력이 떠나지 않고 있다.
남성적인 행동은 가능한 폭력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어느 뒷골목에서나
싸움이벌어질 듯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 싸움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러나 남자에게
그의 주권이 확립되어 있다고 의식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확신을 그 주먹 속에 느끼는 것
으로 충분하다. 남성은 모든 모욕에 대해, 그리고 그를 물건으로 취급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폭력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남에게 초월을 당하지 않고, 자기의
주체성 속에 자기자신을 발견한다.
폭력이란 각자가 자기 자신에, 자기의 정열과 의지에 집착하고 있는 진정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폭력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모든 객관적 진실을 거부하는 것이며, 추상적인
주관성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근육을 관통하지 않는 분노나 반항은 상상에 그
치는 것이다.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지구의 표면에 새길 수 없는 것은 무서운 실망이다.
미국 남부에세는 흑인이 백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신비로운 '검
은 영혼'의 열쇠는 바로 이 금지령이다. 흑인이 백인세계에서 보여주는 태도, 그가 거기서
조화시키려는 행동, 그가 요구하는 보상, 그의 느낌이나 행동 일체는그냐 강요당하고 있는
수동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독일군의 점령기간중에 점령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자고
결의한 프랑스인은(그것이 이기적인 신중성에 의한 것이든 중요한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
든)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들의 위치가 근본적으로 뒤집어진 것을 느꼈다. 그들이 객
체(물품)로 변하는 여부는 타인의 자의에 의해 결정되며, 이에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수단
을 갖지 못한 그들의 주체성은, 제2의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주는 우쭐대며 자기를 나타낼 수 있도록 허용된 청년을 대하는 것과 즉각
적인 효력이 박탈당한 감정을 갖고 있는 소녀에게 대하는 것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
난다. 한쪽은 언제나 세계에 의문을 품고 주어진 조건에 반항할 수 있으므로, 그것을 받아
들일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확인하는 인상을 갖는다. 그런데 다른쪽은 거기에 순종할 뿐이
며, 세계는 여자 없이도 규정되고 부동의 자세를 지니고 있다. 이 육체적인 무력은 대개의
경우 여자의 소심에 의해 표출된다. 그녀는 자기의 육체 속에 경험하지 못한 힘을 믿지 않
으며, 순종하고 포기하여 사외에서 기존의 위치를 받아들이기만 한다. 그녀는 사물의 질서
를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여성이 나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젊었을 때 그녀는 자기의 육체적인 약점을 완강
히 부인하고 있었다.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지적이나 정치적인 영역에서 무엇인가
를 지도할 경우에 계획적으로 일을 추진하려는 의도와 용기를 잃게 한다는 것이었다.
남자아이처럼 자라서 남자와 마찬가지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씩씩한 처녀를 나는 알고
있었다. 대단히 아름다운 처녀로 달마다 괴로운 월경을 하면서도 자기가 여성이라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칠고 활기에 넘쳐 소년과 같은 실천력을 갖고 있으며, 소
년처럼 대담했다. 만일 여자나 어린이가 구박을 받는 것을 보면 거리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두 가지 불행한 경험을 통해 그녀 역시 완력은 남성의 것
임을 알게 되었다.
자기의 연햑함을 알게 되자 그 확신의 대부분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이 그녀를 여자답
게 하여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예속을 받아들이는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자기의 육체에 신
뢰를 갖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에의 신뢰를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 모든 주체가 그의 육
체를 그의 객관적인 표현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청년들이 그들의 육체에
부여하고 있는 중요성을 보면 된다.
젊은 남자의 성적 충동은 그가 자기의 육체에서 갖게 된 자존심을 더욱 확신할 뿐 아니
라. 자기의 초월과 능력의 표시를 발견하게 된다. 젊은 처녀도 성적인 욕망을 가질 수 있
지만, 대개 부끄러운 성질을 갖고 있다. 그녀의 육체는 전적으로 부자연스럽게 생각된다.
어린시절 그녀가 자기의 '내부'에 대해 느낀 의혹은, 월경이 시작되자 혐오스럽고 지겨운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월경이라는 속박이 핸디캡이 되는 것은, 그녀의 심리적인 태도에
기인한다. 일정 기간 젊은 처녀를 짓누르는 그 위협은 몹시 참기 어렵게 생각되므로 그녀
는 자기의 불쾌감을 남에게 알리기를 꺼려하여 여행이나 오락을 그만들 정도이다. 그녀가
느끼는 공포는 육체 전체에 영향을 주어, 병이나 고통으로 발전한다.
여성 생리의 특색 중 하나는 내분비와 신경조절과의 밀접한 관계로, 그것들은 상호작용
을 한다. 여성의, 특히 젊은 처녀의 육체는 정신생활과 그 생리적인 현실 사이에 거리가
없다는 의미에서, '히스테리성'의 육체이다. 소녀가 사춘기의 여러 가지 고민을 발견하여
일어나는 놀라움은, 그 고민을 더욱 심화시킨다. 그녀는 자기 육체가 의심스러워 불안한
심정으로 그것을 탐색하기 때문에 자기 몸이 언제나 병든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병이다. 육체는 확실히 연약하다. 그리고 그녀의 육체에는 기능적인 혼란이 생긴다.
그러나 산부인과 의사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즉 그들의 환자 중 10분의 9는 상상
에 의한 환자로, 그녀들의 병은 생리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거나 기능장해 자체가 심리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성의 육체를 괴롭히는 것은 그 대부분이 여성
으로서의 고뇌이다.
이와 같이 여성의 생물학적인 입장이 그녀에게 핸디캡이 외어 있더라도 그것은 그 속에
여성이 위치한 장래의 전망 때문이다. 신경쇠약이나 혈액순환 중추의 불안정 정도는 그것
이 병리학적인 것이 되지 않을 경우, 여성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지장을 주지 않는다.
남성들 사이에도 여러 가지 성질이 있다. 한 달에 하루이틀쯤 대수롭지 않은 병에 시달리
더라도 이것은 별 장애가 되지 않는다. 사실 많은 여성들이 거기에 순응해 있으며, 특히
달마다의 '저주'가 더욱 지장이 된다고 생각되는 운동선수·여행가·중노동을 하는 여성들
의 경우가 그러하다. 대개의 직업은 여성이 제공할 수 있는 힘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포츠에서 추구하는 목적은, 육체적 능력에서의 독립된 성공이 아니라, 각 육체조
직에 있는 고유한 장점의 완성이다. 페더급 선수는 헤비급 선수와 동일한 가치가 있으며,
여자 스키선수는 보다 빠른 종목의 남자선수에게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각각 서로 다른
두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독특한 완성을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남성에 대해 핸디캡을 느끼는 경우가 적은
것은 바로 여성 운동선수들이다. 육체적인 열세로 인해 여성에게 폭력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지만, 만일 여성이 그 육체에 자신을 갖고 다른 방법으로 세계 속에 진출하는 것이 가능
하다면 그 결점은 간단히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헤엄을 치거나, 등산을 하거나, 비행기를
조종하거나, 원소와 겨루거나, 모험을 무릅쓰거나, 그녀의 세계 앞에서 내가 앞에서 말한
소심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특이성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 어렸을 때부터 싹
튼 열등 콤플렉스를 확고히 하여 의미있는 듯이 보이게 하는 것은, 여성에게 조금도 힘의
배출구를 열어주지 않는 그 상황(여자라는 것) 때문이다.
여성의 지적 완성을 어렵게 하는 것도 이 콤플렉스이다. 소녀는 사춘기 이후 지적·예술
적인 영역에서 퇴보한다는 지적이 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춘기의 소녀는 그 형제들이 주위에서 받는 격려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의욕을 위축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 역시 한 사
람의 여자가 되기를 원한다. 결국 그녀는 직업적인 책임과 그녀가 여성인 데서 오는 책임
을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어느 실업학교의 여교장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소녀는 갑자기 일을 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그녀는 이제 가족과 더이상 만나고 싶
지 않다는 새로운 욕구를 갖는다. 그녀가 비상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녀는 밤에, 몹시 지쳐서 낮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로 복잡한 머리를 식히지도 못하고 집으
로 돌아간다... 그런데 집에서는 그녀를 어떻게 맞이하는가? 어머니는 그녀가 집으로 돌아
오자마자 심부름을 시킨다. 그리고 흩어진 가사를 정리해야 하고 자기 옷가지도 손질해야
한다. 그래서 마음에 걸리는 여러 가지 생각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그녀는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남자형제의 입장과 자기의 입장을 비교하고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반항심을 일으킨다(리프만의 <청년과 성욕>에서)
어머니가 여학생이나 직장에 다니는 딸에게 서슴지 않고 시키는 가사나 잡무는 그녀들
을 피로에 지치게 한다. 나는 전쟁중에 세브르에서 가르친 여학생들이 학업 이외로 맡겨진
가사노동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중의 한 여학생은 결핵성 추골
염에 걸리고, 다른 여학생은 뇌막염에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차차 알겠지만) 자기 딸의
해방에 대하여 은근히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딸을 고의로 구박하려고 했다. 그
러나 남자가 되기 위한 청년의 노력은 존중되어 이미 많은 자유가 허용되어 있었다. 소녀
는 집에 눌러 있기를 바라고, 외출은 감시를 받고, 오락이나 쾌락은 전혀 누릴 수 없다. 긴
여행이나 도보여행, 또는 자전거여행을 혼자 계획하거나 당구나 공글리기에 열중하는 여성
은 보기 힘들다. 여성의 교육에서 보는 자발성의 부족 이외에도 사회의 풍습이 그녀들의
자유를 어렵게 하고 있다. 만일 여자가 거리를 거닐기라도 하면, 남자들이 추파를 던지면
서 접근해 온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처녀들은 내항성 기질이 전혀 아니데 파리 시내를 산책해도 전효
즐겁지 않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남자들이 언제나 귀찮게 굴어 그것을 경계하느라고 즐거
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만일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처럼 즐겁게 떼를 지어 거리를 활보하
면 구경거리가 된다. 성큼성큼 걸어가거나,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지껄이거나, 깔깔
대며 웃거나, 사과를 씹어먹거나 하면, 그것은 일종의 도발로 간주되어 모욕을 당하거나
미행을 받거나 트집을 잡히기도 한다. 조심성이 없는 것은 곧 행실이 나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의 복종과 '양가집 처녀'의 제2의 천성이 된 이 자기제어는 자연스러움을 완전히 말살
해 버린다. 젊은 처녀가 활달하면 언제나 억압을 받게 된다. 여기서 긴장과 권태가 생기고,
이 권태는 감염된다. 그녀들은 곧 권태를 느끼고, 감옥 같은 구속을 싫어한다. 그녀들이 남
자친구를 필요로 하는 이유의 하나가 이것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무능은 조심을 낳고, 그것이 그녀들의 모든 생활에 널리 퍼져 공
부에도 나타난다. 빛나는 승리는 남성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너무 높은
목표에는 감히 도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14세의 소녀들은 자기들을 소년과 비교하여 "사
내아이 쪽이 월등해." 하고 단언하기도 한다. 이런 단정은 의기소침해지는 원인이 되며, 나
태와 평범을 조장한다. 어떤 소녀가 - 그녀는 남성에 대해 별로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다
- 어떤 남자를 비겁하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네가 더 비겁한 여자라고 말했다.
여자는 "어머, 그렇지만 여자가 어디 남자와 같은가요?" 하고 애교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패배주의의 원인은 처녀가 자기의 미래에 대해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행각하지
않는데 있다. 그녀는 자기 미래에 애해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그녀는 자기 운명은 어차피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설사 자기가 어떤 의욕을 갖더라
도 소용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남성에게 헌신하는 것은 남자보다 자신이 못하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는 남자에게 바쳐진 몸이므로 열등감을 받아들여 그것을 조장하
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의 눈으로 볼 때 여성이 가치를 높이는 것은. 그 인간적인 가치를 증대시켜서가 아
니라 남자의 이상에 맞도록 자기를 만들어 나가는 데서 이루어진다. 여자가 경험이 없으면
그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청년들과 같은 공격정신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어설픈 권위로 콧대를 높이고 승리를 거두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대부분 그녀를
실패로 몰아넣는다. 가장 비천한 여자에서 가장 존귀한 여자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은 저마
다 남자의 마음에 들려면 양보가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어머니들은 딸에게 "사내
아이를 절대로 동등한 친구로 대하지 말고, 나서지도 말고, 수동적인 역할을 감수해야 해."
하고 엄명을 내린다. 만일 그녀들이 남자친구와 사귀려고 하거나 남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
면 자기 쪽에서 적극성을 때는 듯이 보이는 것을 피해야 한다. 너무 대담하거나 너무 교양
이 있거나 너무 똑똑하거나 개성이 너무 뚜렸한 여자는 남자들을 두렵게 한다. G. 엘이엇
(영국의 여류작가, 1819~1889)이 지적한 것처럼, 대부분의 소설에서는 별로 똑똑하지
못한 금발의 여주인공이 남성적인 성격을 지닌 갈색머리 여자를 이긴다. <플로스 강의 물
레방앗간>에서 마기는 역할을 뒤집어놓으려고 헛된 노력을 하다가 결국은 죽고 만다. 결
국 스테판과 결혼하는 것은 금발의 루시이다. <모히칸족의 최후>(페니모어 쿠퍼의 탐험
소설)에서도 주인공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용감한 클라라가 아니라, 유순한 앨리스이다.
<작은 아씨들>에서도 로라에 대해서 동정적인 주는 유년시절의 친구에 불과하며, 지저분
하며 멋없는 곱슬머리 에이미에게 사랑을 바친다. 여자라고 하는 것은 무능하고 쓸모없고
수동적이고 유순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처녀는 화장을 하고 몸을 단장할 뿐 아니
라, 자기의 자발성을 억제하는 대신에 우아하고 세련된 매력을 보여야 한다. 일체의 자기
확인은 그녀에게 여자다움과 유혹의 기회를 줄이는 일이다. 청년이 인생에의 출발을 비교
적 쉽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천직과 남성이라는 천직이 상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는 독립과 자유의 주인공으로 완성되면서 사회적인 가치와 함께 남자의 위신을 획
득한다. 그는 라스타냑(발자크의 소설에 나오는 젊은 야심가)처럼 야심을 갖고, 돈과 명예
와 여자를 한꺼번에 얻으려고 한다. 그를 격려하는 평범한 전형의 하나는 여자들이 아양을
부리는 강하고 유명한 남자의 야심이다. 이와는 달리 처녀의 경우는 인간이라는 조건과 여
성이라는 천직 사이에 거리가 있다. 청년기는 여성에게 대단히 어렵고 또 결정적인 시기이
다. 지금까지 그녀는 자주적인 개체였으나, 이제는 주권을 버려야 한다. 그녀는 형제들처
럼, 아니 더욱 심하게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분열될 뿐만 아니라, 주체이고 능동체이며 자
유를 누리려고 하는 그녀의 선천적인 욕구와 그녀에게 수동적인 객체이기를 요구하는 색
정적인 경향 및 사회적인 요망 사이에 알력이 생긴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자기를 본질로서
파악한다. 그런데 어떻게 비본질이 될 결심을 했을까? '타자'로서만 자기를 완성할 수 있다
고 하더라도, 어떻게 나의 '자아'를 버릴 수 있겠는가? 젊은 여성은 이런 괴로운 딜레마에
빠져 몸부림을 친다. 욕정에서 혐오로, 희망에서 공포로 동요하며, 스스로 불러세운 것을
거부하면서 그녀는 어린이로서 독립했을 시기와 여성으로서 복종해야 하는 시기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 불확실성이, 미숙한 나이를 벗어나려는 처녀에게 설익은 과일의 시큼한
맛을 보여준다.
젊은 처녀는 자기의 상황에 대하여 지금까지 취해 온 선택의 방법에 따라 각각 다르게
반응한다. 미숙한 주부인 '작은 아내'는 그 변신을 솔직히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작은 어머니'로서의 조건 중에서 지배욕을 가질 수도 있는데 이것이 남성의 속
박에 대해 용감하게 반향하도록 유도한다. 그녀는 성욕의 대싱어 되는 것과 하녀로 취급되
는 데 만족하지 않고 모권제를 확립하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은 아주 어려서부터 무거운
책임을 젊어진 맏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말괄량이'는 자기가 여자라는 것올 발견하
고, 때로는 심한 환멸을 느낀 나머지 동성애로 빠지기도 한다.그러나 그녀가 독립과 폭력
사이에서 구하고 있었던 것은, 세계의 소유였다.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여성으로서의 능력
이나 모성의 경험이나, 여자로서의 운명의 일부를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젊은 처녀는 어떤 저항을 거쳐서 자기가 여성이리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미
어린애같이 아양을 떨던 시기에 아버지와 마주 대할 때 그리고 색정적인 몽상 속에 그녀
는 여자다운 수동성의 매력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수동성의 위력을 발견하게 된다.
이윽고 자기 육체에서 느끼게 되는 수치에 허영심이 섞이게 된다.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
게 했던 그손, 그녀를 당황하게 했던 그 시선, 그것은 애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육체가 신기한 마력을 갖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보물이고 무기이다. 그녀는 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자주적이었던 유년기 이후로 사라졌던 그녀의 교태가 부활된다.
얼굴에 화장을 하고 치장을 하기 시작한다. 양쪽 유방을 감추는 대신에,그것을 크게 만들
기 위해 주무르는 한편, 거울을 보며 웃는 방법도 연구한다. 당황과 교태의 연결이 너무
밀접하기 때문에, 당사자의 색정적인 감수성이 눈떠 있지 않는 한, 그녀가 남자의 마음에
들려는 간절한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좀처럼 눈치채기 어렵다.
실험을 통해, 갑상선 발육부전으로 무감각하고 우울하여 괴로워하는 병자에게 갑상선 추
출물의 주사를 놓아 증상을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들
은 얼굴에 웃음을 띄고 명랑해져서 교태를 부리게 된다. 유물론적 형이상에 젖어 있는 심
리학자들은 여자의 교태를 갑상선에 의해 분비된 '본능'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막연
한 설명은 유년시절과 마찬가지로 가치가 없다. 임파체질이나 빈혈증과 같은 기능적인 결
함은 언제나, 육체는 과중한 짐처럼 무거워지고 악의를 품게 되어 아무 희망도 약속도 갖
지 않는다. 몸이 일단 안정과 생기를 회복하면, 당사자는 육체를 자기 것으로 확언하고, 그
육체를 통하여 남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젊은 처녀가 색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를 미끼
로 삼는 것이다. 그녀는 하나의 객체가 되고, 객체로서 자각한다. 즉 자기 존재의 새로운
양상을 놀라운 눈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가 이중의 존재가 된 것처럼 생각된
다. 그녀는 자기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고, '외부'에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로저먼드
레이먼(영국의 현대 여류소설가)의〈왈츠에의 초대〉에서 올리비아가 거울에서 미지의 얼
굴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그 얼굴은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나타난 객체화
된 그녀이다. 이때에 받은 그녀의 감동은 곧 사라졌지만, 그것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조금 전부터 자기 모습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라보는 순간에 특이한 감동이
밀려왔다.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의 눈앞에 낯선 여자, 즉 새로운 존재가 나타
났던 것이다.
그것은 두세 번 되풀이하여 일어났다. 그녀는 거울 속의 자기를 바라보고 관찰했다. 그
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오늘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어두우면서
도 밝은 신비로운 얼굴, 약동하며 힘이 넘치는, 마치 전류가 통하는 것 같은 머리칼. 그녀
의 몸은 옷 때문이었는지 알맞게 긴장되어 보였다. 야무지고, 꽃처럼 피어나며, 탄력이 있
으면서도 침착한, 한마디로 생기발랄 했다. 그녀 앞에는 초상화처럼 장미와 같은 처녀가
있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방의 모든 것이 그녀를 감싸고 "이게 너야."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은, 그녀가 그 속에서 자기의 어린애같은 꿈을 인정하
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기도 한 그 모습에서 읽었다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약속이다. 그러
나 젊은 처녀는 마치 다른 소녀의 육체처럼 자기를 감탄시키는 자신의 몸을 육체적인 존
재 속에서 사랑했다. 그녀는 자기를 애무한다. 둥근 어깨와 팔을 어루만진다.그리고 가슴과
다리를 유심히 바라본다. 고독한 쾌락에서 몽상이 생기고, 그녀는 애정을 다하여 자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청년의 경우에는 자기애와 소유하려는 대상 쪽으로 그를 밀어 보내는 색정적인
충동 사이에 하나의 대립이 있다. 즉 그의 나르시시즘은 대개 성적 성숙기에 소멸된다. 한
편 여자는 그 애인에 대해, 자기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수동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처음부
터 불투명한 면이 있다. 여자는 다소 복잡한 감정 속에 자기 육체를 바칠 남성으로부터의
찬사를 통하여 자기 육체가 찬미되기를 바라고 있다. 여자가 남자를 매혹시키기 위해 아름
다워지기를 바란다거나, 자기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기 위해 매혹시키려고 한다는 견해는 너
무 단순하다. 여자는 자기 방에 혼자 있거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자 하는 살롱에 있거나
남성에 대한 욕구와 자기애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런 혼동은 마리 바슈키르
체프의 경우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늦게 젖을 땐 것은 그녀에게 누
구보다도 님에게 칭찬받기를 갈망한 요인이 되었다. 그녀는 5세 때부터 사춘기가 끝날 무
렵까지, 자기 모습에 사랑의 전부를 바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손이나 얼굴의 아름다움
을 미칠 듯이 감탄해 왔다. "나는 나의 여주인공이다..." 하고 그녀는 쓰고 있다. 그녀는 현
혹된 대중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얼굴로 답례하기 위해 가수가 되기
를 원했다. 그러나 이 '자기애'는 비현실적인 꿈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12세 때, 이미 연애를 했다. 그녀는 사랑받기를 원하고 상대방에게 불어넣으려는
열정 속에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사랑의 확증을 얻으려고 했다. 그녀는 한마디 말
도 건네지 않고 사랑하는 H 공작이 자기 발 밑에 엎드려 "그대는 나의 화려함에 이끌려
나를 사랑하게 될 거요...
그대는 진정 내가 바라던 훌륭한 여자요." 하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 이것은<전쟁과 평
화>에 나오는 나타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상반성이다.
엄마도 날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영리할까. "나타샤, 그녀는 정말 귀여
워." 하고 자기를 3인칭으로 부르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훌륭
한 남자가 자기를 찬란하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 하
고 말을 이었다. "영리하고 귀엽고 대단한 미인이야. 또한 수영도 잘 하고 승마솜씨도 훌
륭해. 그리고 또 목소리는 어떤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음정이다." 그날 아침에 그녀
는 다시 자기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나타샤는 얼마나 아름다운 처녀인
가!" 그리고 또다시 남성의 입을 빌려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미인이고, 목소리도
아름답고, 젊고,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니 그 처녀를 조용히 놔주세요."
캐서린 맨스필드(현대 영국의 여류소설가)도 베릴이라는 작중인물을 통하여 나르시시즘
과 여자의 숙명에 대한 로마네스크한 욕망이 밀착되어 있는 경우를 묘사하고 있다.
식당에서는 베릴이 장작 불빛을 받으면서 방석에 앉아 기타를 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를 위해 그 기타를 치며 작은 소리로 노래부르면서 자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로의
불빛은 그녀의 구두와 기타의 빨간 몸통과 그녀의 흰 손가락을 비추고 있었다...
'만일 내가 밖에서 창문을 들여다보고 이런 나를 보게 되면 무척 감동할 테지.' 하고 그
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조용히 기타를 치면서 노래는 부르지 않은 채 기타음만 듣고 있었
다.
"내가 처음으로 그대를 보았을 때, 오! 그대는 혼자 있으려고 했는데, 그대는 그 작은 발
을 방석 위에 올려놓고 앉아서 기타를 치고 있었어. 나는 그런 그대를 있을 수 없어." 베
릴은 고개를 들고 노래부르기 시작한다.
달도 지쳤네...
그런데 누가 요란하게 문올 두드렸다. 하녀의 상기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그녀는 멍
청한 하녀를 쳐다보기도 싫다. 그녀는 어두운 객실에 달려가 서성거렸다. 그녀는 흥분하여
가슴이 설레었다. 벽난로 위에 거울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거울
에 비친 창백한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 아무도 보는 사
람이 없다. 아무도... 베릴은 생긋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그녀는 다시 웃었다.
(서곡〉에서)
젊은 처녀에게 이런 자기숭배가 나타나는 것은, 단지 자기의 육체만을 사랑하기 때문은
아니다.그녀는 그 자아 전체를 소유하고 예찬하기를 원한다. 그녀가 그 속에서 기꺼이 자
기 마음을 털어놓는 일기가 추구하는 목적도 거기에 있다. 유명한 마리 바슈키르체프의 일
기는 그 전형이다. 젊은 처녀는 지금까지 인형에게 말을 건넨 것처럼, 자기 수첩에 말을
건넨다. 그것은 남자친구이고, 고백의 상대이다. 마치 인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러 가지
질문을 한다. 거기에는 부모나 친구나 선생들에게 보여 주지 않는 어떤 진실이 쓰여 있으
며, 혼자서 거기에 도취된다. 어떤 12세의 소녀는 20세까지 일기를 계속 썼는데, 일기장의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나는 작은 일기장
얌전하고 예쁘고 신중한
당신의 비밀은 뭐든지 말해 줘
나는 작은 일기장
(드베스의〈사춘기 특이성의 위기〉에서)
거기에는'내가 죽은 후가 아니면 읽지 말라'또는'내가 죽으면 태워버리라'하고 쓰여 있
다. 사춘기 이전의 소녀에게 발달하는 비밀의식이 점점 중요성을 갖게 된다. 그녀는 남들
과 어울리기가 싫어 고독 속에 파묻혀, 숨겨진 자기를 주위사람들에게 알리기를 거절한다.
그 자기를 그녀는 참된 자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공의 인물이다. 그녀는 톨스토이의
소설에 나오는 나타샤처럼 무용수가, 마리 르네뤼(프랑스의 현대 여류극작가)가 그랬던 것
처럼 성녀(聖女)가, 또는 자기 자신이 특별히 멋진 여자가 된 것으로 자부하기도 한다. 이
여주인공과 그녀의 부모나 친구가 알고 있는 객관적인 용모 사이에는, 언제나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와 그
녀 자신과의 관계는 더욱 정열적이 될 뿐이다. 그녀는 자기의 고독에 도취하여, 자기를 남
들보다 우월한, 예외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래는 평범한 현재의 생활을 보상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녀는 꿈에 의해 이 비좁고 고달프고
초라한 생활에서 벗어난다. 그녀는 언제나 꿈꾸기를 좋아하며 앞으로 더욱 그럴 것이다.
그녀는 평범한 시구(詩句)아래 자기를 위협하는 세계를 감춰 둔다. 달빛이나 장밋빛 구
름이나 비로드 같은 밤으로 남성에게 후광을 두른다. 자기의 육체를 대리석과 벽옥(碧玉)
과 나전(繹細)의 전당으로 만든다. 그리고 어리석은 동화를 자기 자신에게 들려준다. 그녀
가 이런 어리석은 일에 빠지게 되는 것은, 세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
는 행동할 때 사물을 분명히 관찰해야 하는데 안개 속에서 기다리곤 한다.
청년도 꿈을 꾼다. 특히 자기가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모험을 자주 꿈꾼다. 그러나 젊은
처녀는 모험보다는 기적을 꿈꾸며, 사물이나 인간에게 불투명한 마법의 빛을 던진다. 마법
의 관념은 수동적인 힘의 관념이다. 젊은 처녀는 주로 수동적이며 그러면서도 힘을 찾기를
원하기 때문에 마법을 믿게 된다. 남자들을 자기의 지배하에 예속시키는 육체의 마법이나,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녀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운명의 마술을 믿어야 한다. 그
녀는 중요한 현실세계는 잊으려고 한다.
"나는 가끔 학교에서 배운 문제에서 어떻게든지 벗어나 꿈의 나라로 날아간다." 하고 어
떤 소녀는 쓰고 있다. (마르그리트 에바르의〈사춘기의 여성〉에서) '그러면 나는 즐거운
공상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겨 현실감각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된다. 의자에 우두커니 앉
아 있다가 정신이 틀었을 때에는 방 안에 있는 나에게 스스로 깜짝 놀란다."
'나는 시를 쓰기보다는 두서없는 공상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하고 또 한 소녀가 쓰
고 있다. "머릿속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생각하거나, 별빛을 받은 산들
을 바라보면서 전설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훨씬 더 재미있다. 그것은 막연하
여 편안하고 상쾌한 기분을 주기 때문이다."
몽상은 어떤 병적인 형태를 취하여, 다음과 같은 경우처럼 생활 전체에 침투하기도 한
다. (보렐과 로뱅의 공저<병적인 몽상> 참조. 민코프스키의<조발성 치매증>에서)
지적이고 공상적인 소녀 마리 B는 14세 무렵에 맞게 된 사춘기 때, 과대망상과 정신착
란의 발작이 일어났다. 그녀는 갑자기 부모에게 자기는 스페인 여왕이라고 말하고, 위엄있
는 태도를 취하며 장막 안에서 옷을 갈이 입었다. 그녀는 웃고, 노래 부르고, 지휘하고, 명
령을 내렸다. 이런 상태는 2년 동안 월경중에 항상 계속되었다. 그 후 8년 동안은 정상적
인 생활을 했으나, 그녀는 공상을 많이 하고 사치를 좋아하고 종종 야속한 듯이 "나는 고
용인의 딸이에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21세 경에 무감각상태가 되어 주위사람들을 무시하고 여러 가지 야심을 표명했
다.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성 안나병원에 입원하여 8개월을 보냈다. 집에 돌아와 3년 동안
병석에 누워 까다롭고, 짓궃고, 사납고, 변덕스러워 주위사람들이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게
했다. 결국 성 안나병원에 다시 입원하여 병원을 떠나지 못했다.
그녀는 병상에서 아무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월경을 하는 듯한 일정한 기간에는
이불 속에서 옷을 입고, 과장된 태도로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고, 의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거나 야유하는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녀의 말은 일종의 에로티시즘의 표현이
며, 교만한 태도는 과대망상의 표시였다. 그녀는 점점 몽상에 깊이 빠져, 몽상하는 동안은
만족스러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이제 화장은 전혀 하지 않고 침대를 더럽히기도 했
다. '그녀는 기묘한 장신구를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다. 속옷도 입지 않고 종종 시트조차 없
이 알몸을 드러내 보이거나 그러지 않을 때는 이불로 몸을 감쌌다. 머리는 은종이로 장식
하고, 팔·손목·어깨·복사뼈는 끈이나 리본으로 감쌌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반지로 손
가락을 장식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끔 자기의 처지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전에 일어
났던 발작이 생각나요. 마음속으로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나는
인형을 갖고 놀았어요. 그 인형이 살아 있지 않은 것을 잘 알면서도 살아 있다고 믿고 싶
어하는 어린애와 같았어요... 나는 모자를 쓰고, 옷을 입고 차츰 나답지 않게 거기에 매혹
되었어요. 나의 생활은 꿈과 같았어요... 나는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여배우와 같았어요.
나는 가공의 세계에 살고 있었어요. 나는 여러 개의 삶을 살았어요. 그리고 그 어느 삶에
서나 나는 주역 이었어요... 아, 나는 그렇게 많은 삶을 원해요. 한번은 금테 안경을 낀 미
남의 미국인과 결혼했어요... 우리는 저택을 갖고 있었어요. 각자 자기 방을 따로 갖고 있
었어요. 나는 성대한 연회를 자주 베풀었어요... 나는 동굴인 시대를 살아 본 적이 있어
요... 나는 벌써 옛날에 결혼했어요. 나와 동침한 남자들의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어요.
여기서는 사람들의 성장이 뒤졌나 봐요. 내가 넓적다리에 금팔찌를 끼고 알몸으로 있는 것
을 알아보지 못해요. 옛날에 나는 무척 좋아하는 남자친구들을 몇 사람 갖고 있었어요. 우
리 집에서는 자주 연회를 베풀었는데, 꽃과 향수와 담비의 모피도 눈에 띄었어요. 친구들
은 미술품이나 조각이나 자동차를 내게 주었어요... 시트 위에서 알몸이 되면 옛날생활이
생각나요. 나는 거울에 비친 나를 몹시 사랑했어요. 나는 예술가로서 내가 바라는 모든 것
을 소유하고 있었어요. 나는 어리석은 짓도 했어요. 나는 모르핀과 코카인 중독자였어요.
여러 사람의 애인이 있었어요... 그들은 밤에 나한테 찾아왔어요. 그들은 둘이서 왔고, 이
발사를 데리고 왔어요. 그리고 우편엽서를 보고 있었어요."
그녀는 한 의사를 사랑하여, 자기가 그의 애인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것이 사실이라
면 그녀에게는 세 살 된 딸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또 여섯 살 된 딸이 있는데, 아주 행
복하게 여행을 하고 있었다.아버지는 아주 멋쟁이였다. 이 밖에 비슷한 이야기가 두 가지
정도 더 있으나, 모두 그녀가 상상 속에서 지어낸 이야기이다.
이 병적인 몽상은 본질적으로는, 현실생활이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생활
의 실상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는 젊은 처녀의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마
리 B는 많은 처녀들에게 흔히 있는 보상의 과정을 극단적으로 경험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젊은 처녀도 고독한 자기숭배에 빠져 있는 것만으로 충분치는 않다. 자기완성
을 위해서는 타인의 의식 속에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녀는 자주 자기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더욱 젊었을 때에는 마음의 벗이 어머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계를 특
히 성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도와주었다.
이제 그녀는 자아의식의 제한에서 처녀를 박탈하는 객체인 동시에, 자아를 자기에게 돌
려주는 증인이다. 어떤 소녀들은 서로 알몸을 보기도 하고, 가슴 견주어 보기도 한다. 기숙
사에 들어가 있는 여학생의 이런 대담한 유희를 묘사한 <제복의 처녀>의 한 장면을 독자
들은 기억할 것이다. 처녀들은 막연한 혹은 분명한 애무를 교환한다. 콜레트가 <학창시절
의 클로딘>에서, 또 그다지 솔직하지는 않지만 로저먼드 레이먼이 <먼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젊은 처녀에게는 동성애적인 여러 가지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나르시시즘적인 쾌락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어떤 처녀는 자기 살결의 부
드러움이나 자기 몸의 아름다운 곡선을 상대방 처녀에게서 정욕적으로 구한다. 이런 처녀
들이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열애에는, 일반적으로 '여성다움'의 존중도 포함되어 있다. 성
적으로는 남자가 주체이다. 그러므로 남자들은, 보통 자기들을 이성에게로 쏠리게 하는 욕
망 의해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여자는 절대적인 대상이다. 그래서 중학교나 그 밖의 각급
학교·기숙사·여자의 직장 등에는 그처럼 '특수한 우정'이 꽃핀다.그중의 일부는 순전히
정신적이지만, 다른 것은 대단히 육체적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친구들 사이에서 서로 마음
을 털어놓고 서로의 비밀을 주고받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가장 열렬한 신뢰의 증거는 자
기의 일기를 친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성적 포옹 대신에 친구끼리 깊은 애정의 표시를
교환하고, 종종 간접적으로 자기 심정의 육체적 증거를 주고받는다. 예컨대 나타샤는 소냐
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기 위해 빨강게 달궈진 자로 자기 팔에 화상을 입히기도 한다. 특히
그녀들은 서로 무수한 애칭으로 부르고, 열렬한 편지를 교환한다. 여기에 뉴잉글랜드의 청
교도인 에밀리 디킨슨(19세기 미국의 여류시인)이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있
다.
오늘 하루종일 당신을 생각했어요. 간밤에는 줄곧 당신의 꿈들 꾸었어요. 나는 당신과
함께 아름다운 정원을 산책했죠. 당신은 내가 장미를 꺾는 것을 도와주었으나, 내 바구니
는 언제까지나 차지 않았어요.그래서 나는 하루종일 당신과 산책하기를 원하고 있어요. 밤
이 다가오면 나는 즐거워요. 나와 어둠과 꿈과 언제까지나 차지 않는 바구니 사이에 걸쳐
있는 시간을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헤아리고 있답니다...
망두스는〈처녀의 마음〉이라는 저술에서 이와 비슷한 많은 편지를 인용하고 있다.
그리운 수잔... 나는 여기에 <아가>의 몇 구절을 적고 싶었어요. 참으로 아름다운 나의
친구여! 신의 약혼자라도 되는 것처럼, 당신은 샤론(이스라엘의 평원이름)의 장미나 계곡
의 백합을 닮았어요. 그리고 그대는 신의 약혼녀처럼, 내게는 여느 처녀들과는 다른 특별
한 사람이에요. 그대는 상징, 아름답고 고귀한 수많은 것의 상징이었어요... 백옥 같은 수
잔, 나는 그대에게 얼마쯤은 종교적인, 순수하고 무구한 사랑을 바치고 싶어요.
다른 한 사람의 일기는 이처럼 고귀하지는 않지만,자기의 감동적인 심정을 고백하고 있
다.
나는 그 작은 흰팔에 허리를 바싹 안긴 채, 그 사람의 둥근 어깨에 손을 얹고, 팔을 그
사람의 따스한 팔에 대고, 그 부드러운 가슴에 몸을 밀착시켰다. 내 눈앞에는 그 사람의
작은 이가 반쯤 보이는 입술이 다가왔다... .나는 몸이 떨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
꼈다.(망두스의 <처녀의 마음>에서)
에바르 부인도 <사춘기의 여성>이라는 저서에서 이런 애정의 표현을 많이 수록하고 있
다.
나의 사랑하는 요정, 그리운 사람아, 나의 아름다운 요정.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줘요. 나는 언제까지나 당신의 진정한 친구라고 말해 줘요. 나는 슬퍼요, 그토록 당신을 사
랑해요. 나의 L... 나의 이 심정을 말로는 충분히 전할 수없어요. 나의 사랑을 표현할 만한
말이 없어요. 우상 숭배 같은 것은, 내가 느끼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녜요. 때때로 심
장이 터질 것만 같아요.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것은 너무 황홀해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요.
아, 그리운 나의 사람, 앞으로도 줄곧 사랑해 줄 거죠?
이런 흥분한 애정이 청춘기의 죄 많은 사랑으로 빠지는 것은 매우 간단한일이다. 때로는
두 사람의 연인 중에서 한 사람이 상대방을 지배하여 사디즘이 섞인 권력을 휘두르는 경
우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굴욕도 싸움도 없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다. 주고받는 쾌락은
각자가 아직 두 사람으로 갈라지지 않고 홀로 자기를 사랑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순결하다.
그러나 이순수성은 무의미하다. 처녀가 발을 들여놓고, 타자에게 접근하기를 원할 때, 그
녀는 자기를 위해 아버지의 시선의 미술을 소생시키려고 한다. 그녀는 어떤 신성의 감정과
애무를 원한다. 그녀는 남성처럼 낯설지도 않고 또 두렵지도 않은, 그러나 남성적인 매력
을 지닌 여성에게 마음이 이끌린다. 직업을 갖고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
는 여성이 남성만큼 매력적인 것은 당연하다.여학생의 마음에 여교사나 사감에 대해 어떤
정염의 불꽃이 피어오르는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여성 부대>에서 클레망스 단은 불
타는 정열이 순결한 형태를 취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젊은 처녀는 그 마음의 벗에게 뜨
거운 정열을 고백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 정열을 나눠 갖고, 보다 생생
하게 그것을 느끼려고 서로 자극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떤 여학생은 자기가 택한 친
구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나는 감기에 걸려 자리에 누워 있었어요. 나는 X양간 생각하고 있어요. 이처럼 애인(동
성애인)을 사랑해 본 적은 없었어요. 나는 1학년 때부터 당신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에요. 나는 당신보다 정열적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당신을 포
옹하고 있는 것만 같아요. 그래서 제정신이 아녀요. 그리고 당신을 만나러 학교에 가는 것
이 무척 기뻐요. (마르그리트 에바르의〈사춘기의 여성〉에서)
가장 많은 예는 처녀가 자기의 우상에게 자기의 심정을 대담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운 당신, 나는 당신을 마주 대하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돼요... 당신
을 만나지 못할 때에는,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만나고 싶어요. 나는 언제나 당신을 생각
하고 있어요. 당신의 모습을 보면 나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차서 숨어 버리고 싶어요. 당신
곁에서 나는 움츠러들고, 아무 것도 모르게 돼요. 당신이 말을 걸어오면 나는 당황하여 가
슴이 두근거리고, 어떤 요정의 부드러운 목소리나 사랑이 넘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나는 당신의 사소한 동작도 놓치지 않으려고 지켜봐요. 내가 하
는 말은 이제 대화가 아니라, 무엇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릴 뿐이에요. 당신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겠지요. 나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요. 그것은 내가 당신을 진심으
로 사랑하고있다는 거예요.(마르그리트 에바르의〈사춘기의 여성〉에서)
어느 실업학교의 여교장은 말한다.(리프만의〈청년과 성욕〉에서)
나는 청춘시절에, 젊은 선생 중의 한 사람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온 종이를 서로 가지려
고 다투다가 결국 내가 그 종잇조각을 20페니나 주고 샀던 일을 상기해요. 다 쓴 그의 지
하철 승치권도 우리는 수집했어요.
동성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성은 남성의 역할을 해야 하므로, 그녀는 결혼하지 않는 것
이 바람직하다. 결혼이 젊은 애인을 반드시 실망 시킨다고 볼 수는 없으나 장애가 되는 것
은 사실이다.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남편이나 연인의 권력에 복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열은 비밀리에, 적어도 순전히 플라토닉하게 발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경우에 분명한 에로티시즘으로의 이행은, 사랑하는 대상이
남성일 경우보다 훨씬 쉽다. 그녀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는 경우에도 상대가 여성의 육
체일 경우, 젊은 처녀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자매나 어머니를 통해 애정의 육
감이 섬세하게 뒤섞인 친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여자친구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을 때에도, 역시 눈에 뜨이지 않게 애정
은 육감적인 쾌락으로 쉽사리 옮아간다.〈제복의 처녀〉(여학생을 다룬 독일 영화)에서 도
로시 비크가 혜르타 틸의 입술에 키스 했을때, 그 키스는 모성적인 동시에 성적이었다. 여
성과 여성 사이에는 수치심을 깨끗이 제거하는 공범성이 있다. 한 사람이 상대방의 마음에
일으키는 흥분은 대개 거칠지 않다. 동성애의 애무는 처녀를 잃는 일도 없고, 남근의 삽입
도 없다. 그녀들은 유소년기의 음핵 에로티시즘을 불안한 변신 없이 만족시킨다. 젊은 처
녀는 육체를 깊은 혼란에 빠뜨렸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 수동적인 대상으로서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르네 비비앙(프랑스의 현대 여류시인)은 다음과 같이 시로 표
현하고 있다. 거기에는 '저주받은 여자(동성연애를 하는 여자)'와 그녀의 애인들과의 관계
가 묘사되어 있다.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몸은 그들의 몸과 같다.
우리의 반달 같은 입맞춤에는 창백한 부드러움이 있고,
우리의 손가락은 뺨에 돋아난 솜털도 상하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허리띠가 풀릴 때 우리들은 동시에 애인이기도 하고 또 형제기도 하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
우리는 우아하고 섬세함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재 것으로 만들어도 당신의 유방을 해치지 않으니까...
내 입술이 당신의 입술을 모질게 깨물 리도 없으니까(<발자국>에서)
'유방'이니 '입술'이니 하는 부적절한 시어를 통해 그녀가 여자친구에게 분명히 약속하고
있는 것은 폭력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녀가 때때로 연상의 여성에게 첫사랑을 바
치는 것은, 폭력과 폭행을 어느 정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남성적인 여성은 그 처녀에게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된다. 아버지의 권위와 초월성을 갖고, 가치의 원천이며
척도이고, 현실세계를 초월하여 돋보이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디까
지나 여성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애무에서 너무 일찍 떠나거나 반대로 너무 오래 귀염
을 받은 적령기의 처녀는 남자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따스한 유방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리
하여 자기의 육체와 가까운 이 여성의 육체 속에, 젖을 떼었을 때 잃어버린 생명과의 직접
적인 융합을 꾀한다. 그리하여 그녀를 에워싼 타인의 시선에 의해 고독했던 분리를 극복한
다. 물론 모든 인간관계에는 투쟁이 있고 모든 사랑에는 질투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남
성과의 첫사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려움은 배제된다.
동성연애의 경험이 진정한 연애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젊은 처녀에게 대
단히 행복한 안정감을 주어 지속되기를 원하며, 거기에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
다. 그것은 한결 에로틱한 동성연애의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제4장 참조) 그
러나 대개의 경우에 그 것은 처녀시절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
너무 쉬운 것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젊은 처녀는 연상의 여자에게 바치는 사랑 속에
서 자기의 미래를 갈망한다. 그녀는 상대를 우상화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특출하게
뛰어나지 않는 한, 우상화는 불가능하다. 사랑을 바친 연상의 여자가 뽐내기 시작하면, 젊
은 여자는 비판하고 비교한다. 가가이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기 때문에 택한 이 '타자'는
언제까지나 권위를 유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타자'가 아니다. 남성의 신들은 먼 하늘에
있기 때문에 더욱 건재하다. 그리하여 호기심과 정욕이 젊은 처녀로 하여금 더욱 강렬한
포옹을 원하게 한다.
대개의 경우, 처녀는 처음부터 동성애를 과도기적인 성적 입문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가 꿈꾸고는 있지만, 아직 실행에 옮길 용기가 없거나 또는 경험할 기회가 없
었던 연애를 별 위험 없이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다소나마 자인하면서 사랑·질투·분노
·교만·환희·고통 등의 소꿉장난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남자에게 바쳐지게 되어
있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흔히 볼 수 있는 완전한 여자의 운명을 받아들인
다.
남자는 그녀를 현혹시키지만, 역시 두렵다. 남자에 대해 갖고 있는 모순된 두 가지 감정
을 융화시키기 위해, 그녀는 마음속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웅성과, 그녀가 경건하게
숭배하는 우상을 분리한다. 그녀는 남자친구들에게는 쌀쌀맞게 몸을 사리면서, 매력적인
먼 나라의 왕자를 우상화한다. 그녀가 침대머리에 붙여놓는 사진은 영화배우가 아니면 이
세상에 없거나 또는 있지만 접근하기 어려운 영웅, 그리고 우연히 만났으나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낯선 남자이다.
이와 같은 연애에서는 문제가 전혀 생기지 않는다. 이런 연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회
적 또는 시적은 명성이 있지만 그 육체가 불안을 주지 않는 남자, 예컨대 좀 익살스러운
늙은 교수이다. 이런 노인은 처녀가 유폐되어 있는 세계의 피안에 있으므로, 은밀히 사모
하여 신에게 몸을 바치는 것처럼 헌신할 수 있다. 이런 헌신은 조금도 수치스럽지 않다.
육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유롭게 허용된다. 비현실적으로 연애하는 여자는 자기가
택한 남자가 볼품이 없고, 못생기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남자라도 무방하다 .이런 상대라면
더욱 안전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를 그에게서 떼어놓는 여러 가지 장애를 한
탄하는 체하지만, 사실은 그녀와 그 사이에 어떤 현실적인 관계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 남자를 택했던 것이다. 젊은 처녀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기의 순결을 해치지 않는 추
상적인 연애를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상대방 남자가 없을 때에는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는 두려움
·아쉬움·희망·원망·열광 등을 느끼지만 자기 몸은 결백하며, 그녀 자신은 완전히 행동
에서 떠나 있다. 우상이 멀면 멀수록 훌륭한 상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다. 날마다 만나는 피아노 교사는 익살스럽고 못생긴 남자가 바람직하다. 그런데 대단히
먼 곳에서 죽어가는 외국인에게 반할 경우에는, 굉장한 미님이고 남성적인 상대를 택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에도 성의 문제는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뇌적인 연애는 처녀의 내재성 속에 '타자' 의 현실적인 존재가 없이 색정이
일어나는 나르시시즘적인 태도를 연장하여 확인하는 것이다. 때때로 처녀가 비정상적으로
공상적인 생활을 열심히 영위하는 것은, 역으로 실제의 경험을 하지 않는다는 알리바이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환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쪽을 택한다.
여러 가지 실례 중에서 특히 H.도이치는 뜻깊은 예를 보고하고 있다.(〈여성심리〉에서)
그것은 아름답고 매혹적인 젊은 처녀의 경우이다. 그녀는 쉽사리 남자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젊은 남자와의 교제를 일체 거절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1
3세 때 이미 17세 소년을 사모했다. 그 소년은 못생겼으며, 그녀에게 말 한마디도 건넨 적
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사진을 구하여 손수 헌사를 적어넣고, 3년 동안 날마다 가공의
경험에 대해 일기를 썼다. 두 사람은 키스하고 정열적으로 포옹했다.때로는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싸우기도 한다. 그러면 그녀는 눈알이 붉게 상기되고 눈두덩이 부어 있었으며,
다시 화해하고 꽃다발을 주고받는다. 이사하여 그와 멀어지자 그녀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결코 그에게 보내지는 않았으며 답장도 자기가 썼다. 이것은 분명히 그녀가 두려워하는 실
제 경험에 대한 방어수단이다. 이것은 병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 그것을 확대
하면 극히 일반적으로 쓸 수 있는 예의 해설에 불과하다. 마리 바슈키르체프의 경우도, 공
상적 감정생활의 분명한 실례이다. 그녀가 사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H공작은 그녀가 한
번도 말을 건넨 적이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아찬미이다. 그러나 여자이므로 특히 그
시대나 그녀가 속하는 계급에서는 자립하여 성공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18세 때
그녀는 이렇게 쓰고있다.
"나는 C에게 남자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 나는 자기가 어떤 가치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치마를 걸치고 어디로 나가란 말인가. 결혼은 여성의 유
일한 직업이다. 남자에게는 서른 여섯 번의 기회가 있지만, 여자에게는 오직 한 번 밖에
기회가 없다. 은행(트럼프놀이의 일종)에서의 제로(zero)와 같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남자의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최고의 양심이어야 한다. "나의 위치보다 아래에 있는 남자는 절대로
좋아할 수 없다."고 그녀는 쓰고 있다. "부자이고 독립된 남자에게는 자존심과 더불어 어딘
가 모르게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태도를 취한다. 나는 H 공작의 변
덕스럽고 교만하고 잔인한 태도를 좋아한다. 그에게는 네로 황제와 같은 면이 있다."그리
고 또"사랑하는 남자의 우월성에 여자가 완전히 패하는 것은, 억척스러운 여자가 느낄 수
있는 자기애의 기장 큰 기쁨이다."
이와 같은 나르시시즘은 마조히즘으로 향하게 한다. 이런 관계는 푸른수염의 사나이'(페
로의 동화에 나오는 인물)나〈그리젤리디스〉(페로의 동화)나 순교자를 꿈꾸는 어린이에
게서 찾아볼 수 있다. 자아는 타자를 위해,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타자가 강할수록 그만
큼 자아는 풍부해지고 강해진다. 자아는 그 지배자를 포로로 하여, 지배자가 횡령한 모든
힘을 자기 속에 거둬들인다. 네로의 사랑을 받는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네로가 될 것이다.
타인 앞에서 자기를 무로 돌리는 것은, 자기 속에, 그리고 동시에 자기를 위해 '타자' 를
실현하는 것이다. 참으로 이'무'가 되려는 꿈은 존재하려는 교만한 의지이다. 사실 마 리
바슈키르체프는, 그 남자를 통하여 자기를 매장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뛰어난 남성을
만나지 못했다. 자기가 만든, 멀리 있는 신 앞에 무릎을 꿇는 것과, 현실 속의 남성에게 폼
을 맡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젊은 처녀들은 오랫동안 현실세계에서 자기의 꿈을 추구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녀들
은 그 지위나 자질·지성 동에서 다른 모든 남성을 능가하는 남자를 구한다. 상대방 남자
가 자기들보다 연상이어서 이미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권위와 명성을 고 있기를 바란
다. 산과 명성이 그녀들을 매혹시킨다. 선택된 남자는 그녀들에게 광휘와 필연성을 전해
주는 절대적인 '주체'이다.
그의 우월성은 젊은 처녀가 그에게 쏟는 사랑을 이상화한다. 그녀가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그가 한 남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택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인을 필요로
하는데,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남자뿐"이라고 최근에 어떤 여자친구가 내게 말했다. 이런
고차원의 요구를 구실로 하여 젊은 처녀는 지극히 일상적인 구혼자를 경멸하고, 성본능의
문제를 회피한다. 그녀는 또한 꿈 속에서 아무 위험 없이 매혹적인 이미지의 자기모습을
소중히 이끼고 있다. 그렇다고 자기가 그 모습처럼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마리 르 아
르두앵(〈검은 쫓〉참조)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정말 억세고 고집스러운 처녀였는데, 마음
속으로는 언제나 남자에게 완전히 헌신적인 희생자로서의 자기를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일종의 수치심 때문에, 꿈에서 체험한 천성의 숨은 경향을 현실에서는 도저히 표현
할 수 없었다.내가 나를 알게 된 바로는 사실 방자하고 거칠고 콧대가센 여자였다.
언제나 겸허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때때로 내 자신이 매우 훌륭한 여자라고 생
각하고 있었다. 의무에 의해서만 살아가면서 거의 바보처럼 어떤 남자에게 반하여 그의 비
위를 맞추려고 애를 썼다. 우리는 진저리나는 가난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는 일에
시달려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그의 옷을 깁느라고 저무는 창가에서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연기가 가득 찬 좁은 부엌에서 비참할 정도로 초라한 음식을 만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들의 아이는 병으로 줄곧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내 입가에는 괴
롭지만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르고, 언제나 내 눈에는 현실에서 혐오감 없이는 견딜 수 없
었던 묵묵한 용기의 처절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이 나르시시즘의 만족 이외에 지도자나 선생의 필요를 느끼기도 한다. 부모의 압력에서
벗어날 때 그녀들은 익숙지 못한 자유에 당혹한다. 그녀들은 그런 자유에 대해 부정적인
방법밖에 모르기 때문에 변덕을 부리거나 무절제한 행동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
들은 또다시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고 싶어한다. 변덕스럽고 교만하고 콧대가 높고 뻔뻔스
러운 처녀가 지각있는 남자에게 길들여져 귀엽고 상냥해지는 이야기는 삼류소설이나 영화
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남녀를 동시에 기쁘게 하는 상투적인 스토리이다. 이
것은 특히 세귀르 부인(19세기 프랑스의 아동문학가)이〈참으로 귀여운 아이〉에서 한 이
야기이다.
지젤은 어렸을 때 지나치게 너그러운 아버지에게 실망하여, 엄격한 큰어머니를 좋아하게
된다. 처녀가 되어서는 잔소리가 많은 쥘리앙이라는 청년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는 진실
이라면 사정없이 타이르고 면박을 주어서라도 그녀의 버릇을 고치려고 한다. 그녀는 무골
호인이며 부자인 공작과 결혼하지만 그와의 생활에서 조금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
가 드디어 기쁨과 정숙을 발견한 것은, 미망인이 되어 자기의 인도자의 까다로운 사랑을
받아들였을 때였다.
루이제 올콧의〈선량한 아내들〉에서 독립심이 강한 조는 미래의 남편이 그녀가 저지른
실수를 호되게 책망하자 그에게 마음이 쏠리기 시작한다. 이 남자도 잔소리가 많다 .그러
면 그녀는 열심히 변명하고 그에게 다소곳이 순종한다.
할리우드의 영화는 애인이나 남편의 건전한 폭력에 의해 길들여지는 사나운 처녀를 수
없이 보여주고 있다. 뺨과 엉덩이를 때리는 것이 오히려 유혹의 확실한 수단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관념적인 사랑에서 성적 사랑으로 옮아가는 것이 결코 단순치 않다. 많
은 여성들은 어느 정도 환멸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조심스럽게 자기들의 정열을 피한다. 만
일 영웅이나 거인·반신이 처녀의 마음에 싹튼 사량에 응하여 이 사랑을 현실적인 경험으
로 바꿔 놓으려고 하면, 젊은 처녀는 두려운 나머지 그녀의 우상을 구역질 나는 하나의 수
컷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서 도망친다.
'재미있어 보인다'거나 '매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
동원하는 요염한 처녀도 있다. 그러나 그 남자가 너무 과격한 반응을 보이면 그녀들은 화
를 낸다. 이것은 모순된 태도이다. 남자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접근하기 어렵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애인이 되면 그는 평범해 보인다. 결국 다른 '남자와 같잖아' 하
고 환멸을 느껴 그를 원망한다. 그녀는 처녀의 감수성을 위협하는 육체적인 접촉을 거부하
기 위해 그런 구실을 내세운다.
그녀가 그'이상'에 얌전히 굴복할 때에도, 그녀는 그의 품에서 무감각하다. 슈테젤은 이
렇게 말한다.(〈불감중의 여인〉에서) "흥분한 어떤 젊은 처녀는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자
살하는 경우도 있다. '이상'이 '사나운 동물'의 모습오로 본성을 드러내므로, 상상했던 사랑
의 구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가끔 젊은 처녀는 어떤 남자가 그녀의 친구를 좋아하게 되
면, 그를 사랑하게 되거나 또는 기혼남자를 애인으로 택하는데, 이는 불가능에의 취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진하여 돈 환(바람둥이 남자)을 열렬히 사랑한다. 그리하여 어
떤 여자에게도 매이지 않는 이 유혹자에게 복종과 애착을 꿈꾼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돌
이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자신이 시도해도 실패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것
이야말로 그녀가 그를 선택한 이유의 하나이다. 어떤 젊은 처녀들은 현실적이며 완전한 연
애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녀는 한평생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추구할
것이다.
즉 젊은 처녀의 나르시시즘과 그녀의 성본능이 원하는 경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그
녀는 자기포기 속에서 본질을 발견한다는 조건에서만 자기가 비본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자기가 대상이 되면, 거기서 그녀는 우상이 되어 자랑스러운 자기를 발견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으로 복귀시키는 엄격한 변증법을 거부한다. 여자는 단지 매력적인 보물이
되기를 원하며, 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마술적이고 신비한 숭배물이
되기를 원한다. 보여지고 만져지고 상처받는 육체로 생각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남성은 자기의 먹이가 되는 여자는 사랑하지만 마녀인 데메테르(율리
시즈 전설에 동장하는 여자로 그녀의 지팡이는 남자를 짐승으로 바꾼다)에게서는 도망친
다.
남자의 흥미를 끌고 감탄하게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젊은 여성이 싫어하는 것은
자기가 오히려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다. 사춘기와 함께 그녀는 수치를 배웠다. 그리고 이
수치는 그녀의 교태와 허영심에 섞여 있다. 남성의 눈은 그녀를 기쁘게 하는 동시에 그녀
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녀는 자기가 보이고 싶은 한계 안에서만 남이 보아주기를 원한다.
그녀의 눈은 언제나 지나치게 날카롭다. 남자를 곤란하게 하는 모순이 여기서 생기게 된
다. 그녀는 자기 목덜미나 어깨를 드러내고 다리를 노출시키면서도, 남들에게 보이면 얼굴
을 붉히고 화를 낸다. 남성을 유혹하는 것이 재미있지만, 상대방에게 욕망을 일으키게 한
것을 알아차리면 혐오감으로 몸을 사린다. 자기에 대한 남자의 욕망은 찬사인 동시에 모욕
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매력에 책임을 느끼고 그 매력을 자유롭게 발산한다고 생각
하는 동안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다. 그러나 자기의 용모·태도·육체가 님에게 알려져
인정을 받게 되면, 그녀는 그런 것을 욕정으로 탐내는 타인의 무례한 자유로부터 감추려고
한다. 여기에 선천적인 수치심의 심원한 의미가 있다. 이 수치심은 대담한 교태에도 따르
기 때문에 난처해진다. 젊은 처녀는 자기의 적극성을 수동성 속에서는 나타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놀라운 대담성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대담성을 의
식하게 되면 곧 불쾌하여 화를 낸다.
시선처럼 애매한 것은 없다. 시선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거리 때문에 점잖게 보인다.
그러나 시선은 흘끔 바라본 모습을 음험하게 포착하고 있다. 세상에 익숙하지 못한 젊은
여성은 이 함정에서 몸부림친다. 그녀는 상대방에게 홀딱 빠지지만, 곧 진저리를 내고 자
기 내부의 욕망을 죽여 버린다. 아직도 불확실한 그녀의 육체에서 애무는 때로는 연연한
쾌락으로서, 때로는 달갑지 않은 간지러움으로 느껴진다. 키스도 우선은 그녀에게 강한 감
동을 주지만 나중에는 느닷없이 그녀를 웃긴다. 그녀는 달콤한 만족감에 하나하나 반감을
느낀다. 다소곳이 키스를 받아들이지만, 일부러 입을 닦는다. 생긋 미소를 지어 친밀감을
나타내는가 하면 갑자기 비꼬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여러 가지 약속을 하고 일부러
그 약속을 잊어버린다. 마틸드 드 라 몰르(〈적과 흑〉의 등장인물)가 바로 그런 여자이
다. 그녀는 윌리앙의 미모와 희귀한 자질에 매혹되어, 사랑을 통하여 기이한 운명에 이르
기를 바라지만, 자기 관능의 지배와 남의 마음의 지배를 받는 것을 완강히 거부한다. 그녀
는 순종에서 교만으로, 애원에서 멸시로 변한다.자기가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것이 무엇이
든지 곧 자기에게 갚도록 한다. 마르젤 아를량(현대 프랑스 소설가)이 그 초상을 그린'모
니크'도 또한 그러하다. 그녀는 마음의 동요와 죄를 혼동한다. 그녀에게 사랑은 수치스러운
자기포기이다. 그녀의 피는 끓고 있지만 이 정열을 몹시 싫어하여, 언제나 먼저 반항한 후
에야 굴복한다.
'풋과일'이 남자에 대하여 자기를 방어하는 것은, 유치하고 삐뚤어진 나쁜 성질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젊은 처녀는 흔히 반쯤 거칠고 반쯤 지혜로운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
다. 그 중에서도 콜레트는〈학창시절의 클로딘〉이나〈푸른 보리〉에서, 이런 젊은 처녀를
매혹적인 뱅카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그녀는 자기 눈앞의 세계에 굉장한 흥미를 느끼
고, 거기에 여왕으로서 군림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남성에 대한 호기심과 관능적이고 로
마네스크한 욕망을 갖고 있다. 뱅카는 가시에 찔리고, 새우를 잡고, 나무에 기어오르지만,
남자친구인 필이 손을 만지면 오싹 놀란다. 그녀의 몸뚱이는 비로소 육신이 되며, 또 여자
로서 최초의 자각인 가슴의 설렘을 의식한다. 그녀는 이것을 계기로 마음이 들떠 예뻐지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자주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을 하고, 은은히 비치는 모슬린 옷을 입고,
교태를 부리고, 유혹하는 것을 재미있어 한다.
단지 남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다.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고 싶기 때문에 다른 때에는 지
저분한 헌 옷에 맞지도 않는 바지를 입는다. 교태를 비난하고, 그것을 자기 권리의 포기처
럼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손가락에 잉크를 묻히고, 머리를 풀어 산발
하고, 구질구질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반항심 때문에 어색해지고 매우 못마땅하
게 여긴다. 그래서 초조해 하고, 얼굴을 붉히고, 서투른 짓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이루지
못한 유혹의 시도를 몹시 후회한다. 그녀는 어린이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어른이 되는 것
도 거부한다. 그녀는 자기의 유치한 태도와 여성으로서의 체념을 자기 탓으로 돌린다. 그
녀는 언제나 거부하려고만 한다.
이것은 젊은 여성의 특징이므로, 그 행위의 대부분을 해명하는 열쇠는 여기에 있다.그녀
는 자연과 사회가 강요하는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을 적극적으
로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너무 분열되어 세계와의 투쟁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녀
는 단지 현실을 도피하거나, 상징적으로 현실에 반대하는 데 그친다. 그녀의 욕망의 하나
하나는 고뇌로 밑받침되어 있다. 그녀는 자기 뜻대로 미래를 만들기를 갈망하지만, 과거와
단절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한 남자를 갖고 싶지만, 그의 먹이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녀
의 공포 뒤에는 언제나 욕망이 숨어 있다. 폭행은 그녀를 소름 끼치게 하지만, 수동적이
되는 것은 즐겁다. 그러므로 그녀는 언제나 마지못해 응하는 것처럼 자못 교활하다. .그녀
는 모든 부정적인 집념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욕망과 불안의 이율배반적인 표현이
다.
사춘기 소녀에게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반항형식의 하나는 냉소이다. 여학생이나
여점원들은 감상적이거나 추잡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에로틱한 이야기를 나눌 때, 남자
들과 스쳐 지나가거나 혹은 포옹하고 있는 연인들을 바라보면 폭소를 터뜨린다. 나는 뤽상
부르 공원에서 애인들이 모여드는 오솔길을 일부러 장난삼아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본 적
이 있다. 또 어떤 여학생은 터키탕에 가서 배가 나오고 젖가슴이 늘어진 뚱뚱한 부인들을
놀려 주기도 한다.
그녀들은 여자의 육체를 비웃고, 남자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연애를 비웃는다. 이것은
성본능을 부인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런 웃음 속에는 어른에 대한 도전과 함께 멋쩍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성이 지니고 있는 위험한 마술을 죽이기 위해
이미지나 언어로 희롱하는 것이다. 나는 4학년(여고 1학년)학생이 라틴어 교과서에서 대
퇴골이라는 낱말을 발견하고 폭소를 터뜨린 것을 본 적이 있다. 심지어 소녀는 자기에게
키스를 하거나 자기 몸을 주무르기라도 하면 그 상대방이 친구라도 면전에서 비웃어 보복
하기도 한다.
어느 날 밤에 기차 안에서 두 사람의 젊은 처녀가 절호의 기회를 만난 듯이 기뻐하는
셀러리맨에게 번갈아 달콤한 말로 희롱당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녀들은 이야기를 주
고받으면서 틈틈이 성본능과 수치심이 어울린 가운데 철없던 시절로 돌아가 히스테리컬하
게 웃고 있었다. 그 처녀들은 폭소와 말에서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그 중 한 여자의 입에
서는 남자의 얼굴을 뜨겁게 할 만큼 추잡한 말도 새어 나왔다. 아마도 그녀들이 사용하는
말은 무지로 말미암아 분명한 의미를 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태연하게 사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말을 사용하는 목적은 분명한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을 방해
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 이미지를 약화시키는 데 있다. 그녀들의 음담패설은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성본능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들은 성본능을 기
계적인, 얼마쯤은 외과적인 수술처럼 우스광스러운 것으로만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나 웃음과 마찬가지로 음담을 하는 것은 단순히 항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른에
대한 도전이자 일종의 모독이며, 일부러 타락하려는 행위이다. 젊은 처녀는 자연과 사회를
거부하면서 여러 가지 색다른 방법으로 그것 들을 도발하고 멸시한다. 그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식벽은 자주 지적되었다. 연필심·풀·나무토막·생새우를 먹고, 아스피린
정제를 열 알씩 삼킨다 .심지어 파리나 거미까지도 먹는다. 나는 그런 것을 먹는 똑똑한
처녀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녀는 커피와 백포도주를 혼합하여 억지로 마셨다. 또 어느
때는 식초에 사탕을 찍어 먹기도 했다. 또 다른 처녀는 샐러드에서 구더기를 발견하고도
악착같이 먹어버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린이는 모두 눈이나 손으로, 그리고 나아가서는 입이나 위로 세계를 실험하기를 좋아
한다. 그러나 개구쟁이 시절의 소녀는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이나 징그러운 것으로 세계
를 탐지하고 싶어한다. 흔히 징그러운 것이 그녀의 시선을 끈다. 어느 소녀는 철없던 시기
에 예쁘고 깨끗하고 얌전한 편이었는데, 자기가 '더럽다'고 여기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곤충을 만지작거리고, 더러워진 속옷을 눈여겨보고,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빨아먹
기도 했다. 불결한 것을 가지고 노는 것은 분명히 혐오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
감정은 사춘기 때 큰 중요성을 갖는다. 소녀는 너무나 육체적인 자기 몸에 대하여, 경혈에
대하여, 어른의 성행위에 대하여, 자기가 헌신하고 있는 남성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낀다.
그녀는 혐오스럽게 생각되는 모든 것에 친숙해져서 그 혐오를 해소시키려고 한다.
"나는 다달이 출혈해야 하거든요. 상처의 피를 마셔서,내 몸에서 나오는 피가 두렵지 않
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몸서리치는 경험에 굴복해야 하는데, 어째서 구더기
를 먹어서는 안 돼요?" 이런 태도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이 나이에 많이 볼 수 있는 자
기상해의 경우이다. 젊은 처녀는 면도칼로 자기의 넓적다리를 자르고, 자기 몸을 담뱃불로
지지고, 허물을 벗기기도 한다.
젊었을 때 나의 여자친구는 지루한 야유회에 가고 싶지 않아, 도끼로 자기 발을 찍었다.
그래서 6주 동안 자리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사디즘적인 마조히즘의 행위는 성
적 경험에 선행하는 행위인 동시에, 이에 대한 반역행위이기도 하다. 이런 경험을 견디어
장차 있을 경험에 강하게 대처할 수 있고, 결혼 첫날밤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경험을 대수롭
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젊은 처녀가 자기 가슴에 괄태충을 올려놓을 때나, 아스피린 수십 정을 심킬 때, 그녀는
미래의 애인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내가 내몸에 가한 것보다 더 심한 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것은 성적 모험에 대한 병적이며 자존심에 찬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수동의 먹이로 바쳐질 그녀는 고통과 혐오를 한몸에 지닐 때까지, 자기의 자유를 요
구한다. 그녀가 자기 몸을 칼로 긋고 숯불로 화상을 입힐 때, 그것은 자기의 처녀성을 빼
앗는 돌입에 대하여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런 항의로 처녀성의 박탈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자진하여 고통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마조히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녀는 또한 사
디스트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주적인 주체로서 의존적인 육체, 굴복될 운명에 놓인 이 육
체를 채찍질하고 우롱하고, 괴롭히고, 혐오하면서도 그 육체에서 자기를 구별하려고는 하
지 않는다. 여러 가지 행동을 하면서도 자기의 숙명을 분명히 거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
이다.
사디즘적 마조히즘의 이상한 버릇에는 근본적인 속임수가 포함되어 있다. 나이가 차지
않은 소녀가 거기에 빠진다면,거부를 통하여 여성으로서의 미래를 수력하는 것이다. 처음
에 그녀가 육체로서의 자기를 분명히 알았던들, 자기 몸을 증오하여 상처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폭력의 폭발까지도 체념의 기초 위에서 일어난다. 소년이 자기 아버지와
세계에 대해 반항할 때 그는 벌써 효과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에게 싸움
을 걸어 구타하고 주체로서 주먹을 휘두르며 자기를 주장한다. 그는 세계에 자기 의견을
내세우고, 세계를 초월한다. 그런데 사춘기의 소녀에게는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 의견을 내
세우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그녀의 마음에 그토록 반항심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다.
그녀는 세계를 개조하려고도 하지 않고 ,거기서 상승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가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적어도 그렇게 믿고있다. 아마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가능한 것은 파괴뿐이다. 그녀의 짜증 속에는 절망이 있
고, 그녀가 안절부절 못하는 빔에는 컵을 깨고, 유리창을 부수고, 꽃병을 망가뜨린다. 그러
나 이것은 운명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항의에 불과하다. 젊은 처녀가 미래
의 복종에 반항하는 것은, 현재의 무기력을 통해서이다. 그녀의 헛된 폭발은 그녀를 속박
에서 해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더욱 옥죌 뿐이다. 자기나 자기를 에워싼 세계에
대한 폭력은 언제나 부정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효과적이기보다 전시적인 것에 불과
하다.
바위를 기어오르고, 친구와 싸우는 소년은 육체적인 고통이나 상처, 혹은 적극적인 활동
에서 비롯된 사소한 결과로 생각한다. 그런 것을 자진하여 요구하지도 않고, 또 고통스럽
다고 해서 도망치려고 하지도 않는다.(자기를 여자의 경우와 비슷한 상황에 놓는 병적 열
등감의 경우를 제외하고) 젊은 처녀는 자기가 괴로워하는 것을 스스로 바라본다. 즉 그녀
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폭력이나 반역에의 애호를 구하지만 거기에서 생기는 결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녀의 퇴폐는 어린이의 세계에 닻을 내리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나, 벗어나려
고도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새장 속에서 나오려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
다. 그녀의 태도는 부정적이고 반성적이며 상징적이다. 그 퇴폐는 불온한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있다. 상당히 많은 젊은 처녀에게 절도벽이 있다. 도벽은 매우 애매한 성질의 '성
적 승화' 이다. 법률을 어기고 터부를 범하려는 의지, 금지된 위험한 행위에 눈이 어두워
현혹되는 것 동은 확실히 도벽이 있는 여성에게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양면성이 있다. 아무 권리도 없이 남의 물건을 절취하는 것은 오만하게
자기의 자주성을 주장히는 것이며, 도둑질을 벌하는 사회에 대해 주체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기성질서를 거부하고, 그 질서의 파수꾼에게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 도전은
또한 마조히즘적인 면을 갖는다.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여자는 모험에, 만일 붙잡히면 떨
어지게 될 심연에 매혹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도둑질을 하는 행위에 그처럼 매력을 주는 것은, 붙잡힌다는 위험이다. 붙잡히게 되면
비난을 퍼붓는 눈초리 아래서, 어깨에 얹혀진 손 아래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완전히 객체
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자기를 실현시킬 수있을 것이다. 남자의 먹이가 된다는 고뇌 속에,
붙잡히지 않고 도둑질을 하는 일에는, 사춘기 여성의 성본능의 위태로운 장난이 숨어 있
다. 젊은 여성의 여러 가지 부도덕한 위법행위는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떤 소
녀는 익명의 편지를 보내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 다른 소녀는 자기주위의 사람들에게
질이 나쁜 장난을 하고 재미있어 한다. 어떤 14세의 소녀는 어느 집에 유령이 나온다는
것을 온 마을 사람들에게 믿게 했다. 그녀들은 자기의 능력을 몰래 시험하고 불복종, 사회
에 대한 불신, 그리고 가면이 벗겨질 위험 등을 동시에 즐기는 것이다. 그녀들은 자진하여
가면을 벗고 나쁜 짓을 했다고 자백하는 것도 쾌락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여긴다. 심지
어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과실이나 범죄를 실제로 감행한 것처럼 자책을 느끼기도 한다.
객체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결국 자기를 객체가 되게 한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
이 못 된다. 그것은 모든 부정적인 외고집에 공통된 과정이다. 히스테릭한 마비증에 걸린
병자는 마비를 두려워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바라며 실현한다. 병에 대한 생각을 버리
지 않으면 병은 낫지 않는다. 신경쇠약의 싱습환자도 마찬가지이다. 젊은 처녀를 외고집·
기벽·음모·도덕의 결여 동의 신경성 환자 타입으로 접근시키는 것은, 그 기만의 깊이이
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욕망과 불안의 상반성 때문에 신경병적인
징후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실종'은 흔히 있는 일이다. 무턱대고 집을 나가 멀리
가서 헤매다가 2,3일 후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다. 이 경우,진심으로 가출하거나 가족과
인연을 끊으려는 실제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단지 하나의 탈출극에 불과하다.
그리고 만일 결정적으로 그녀를 주위사림들로부터 완전히 떼어서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말하면 무척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 욕망도 없으면서 다만 주위사람들로부터 멀어지
고 싶은 것이다. 이 일시적인 실종은 때로는 매음의 환상으로 이어진다. 젊은 처녀는 자기
가 매춘부 노릇을 하는 꿈을 꾼다. 그녀는 그 역할을 하는 것을 다소 겁낸다. 화려한 화장
을 하고, 창가에 기대어 행인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때로는 실제로 집을 나가 연극을 지나
치게 하여 연극과 현실을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녀의 이런 행위도 가끔 성욕에의 혐오,
죄의식의 표시인 경우가 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욕망을 갖고 있으므로, 매춘부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나는 매춘부의 한 사람이다.'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때때로 그녀는 그런 생각을 버리려고 한다. '결말을 내자, 철저하자.'하고 그녀는 생각한
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몸을 맡겨 성욕이란 별것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동시에
이런 태도는 딸이 어머니의 지나치게 엄격한 정조관념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거나 어머니
의 품행이 불량하다고 추측하거나, 아무튼 어머니에게 적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또는
자기에게 너무나 냉담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표시인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이런 강박
관념에는-이미 말한 적이 있고 또 가끔 그것과 관련이 있는, 임신 망상증에서처럼-반항심
과 신경병적 어지러움의 특색인 공범성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여러 가지 행위에서 젊은
처녀가 자연이나 사회의 질서를 깨려고 하지 않고, 가능성의 한계를 확대시키거나 가치의
변혁을 꾀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녀는 그 경계나 법률이 그대로 유
지되고 있는 기성사회 속에서 자기의 반항을 표명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이것이 흔히 '
악마적'이라고 말하는 젊은 여성의 태도이다. 선은 우롱당하기 위해 인정되고, 규칙은 깨기
위해 제정되고, 신성한 일은 모독하기위해 존경된다는 근본적인 기만을 포함한 태도이다.
젊은 처녀의 태도는, 불신의 고뇌에 찬 암흑 속에서 세계와 자기의 숙명을 받아들이면서
거절한다는 사실에 의해 본질적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입장을 소극적으로 거부하는 데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
다. 그녀는 그 불충한 것을 보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미래가 그녀를 위협한다면, 현재 역
시 그녀를 만족시키지 않는다. 여자가 되기를 주저하면서 아직 어린이를 벗어나지 못한 데
대해 애를 태우고 있다.
이미 과거에서 떠났으나 새로운 생활에 참가하고 있지 않다. 발버둥을 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가진 것이 없다. 그녀는 그야말로 무이다.
그녀는 이 공허를 채우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연극과 기만에 의해서이다. 그녀는 음험
한 거짓말쟁이로'이야기를 꾸며서'한다는 비난을 자주 받는다. 이것은 그녀가 비밀과 허위
에 자신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있다. 여성은 16세에 이미 사춘기·월경·성의
자각·최초의 불안·욕망·공포·혐오·음란한 경험 동으로 괴로운 시련을 겪고 있다. 그
녀는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조용히 비밀을 지키는 것도 배웠다. 월경대를 감추
고, 월경을 숨겨야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녀는 허위로 유인되었다.
C.A.포터(현대 미국의 여류작가)가〈인류〉라는 작품에서, 1900년 경의 남부 아메리카
의 처녀들은, 무도회에 갈 때에는 월경을 막기 위해 소금과 시트론으로 만든 물약을 마시
고 병이 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청년들이 퍼렇게 변한 자기들의 눈자위를 보거나 손
을 만져보거나 혹은 냄새로 자기들의 생리를 알아차리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어, 그녀들
을 당황하게한다. 다리 사이에 피가 묻은 천을 느낄 때,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여 육체라는
선천적인 슬픔을 알 때, 그녀들이 우상이나 요정, 먼 나라의 공주 등의 역할을 하기는 어
려운 일이다. 육신으로 인정되는 것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수치심은 기만과 인접해 있다.
그러나 특히 사춘기 처녀가 비난받는 거짓은, 자기가 불안정하고 흐트러진 결함을 가진 존
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객체(대상물), 그것도 사람을 매혹시키는 객체로서 가장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장·퍼머넌트·코르셋, 그리고 '스펀지를 넣은' 브래지어 따위는 모
두 거짓이며, 또 얼굴 자체도 가면이 된다. 기교에 의해 얼굴에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진정으로 감탄하고 있는 것처럼 수동성을 교묘히 드러낸다. 여성적인 기능을 한창 발휘하
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평소의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때처럼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일은 없
다. 그녀의 초월성은 부정되고, 내재성을 모방한다. 눈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반영할 뿐이
다. 육체는 이미 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모든 동작이나 미소는 호소가
된다. 무장을 완전히 해제당하고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는 젊은 처녀는 내맡겨진 꽃이며,
곧 따게 될 과실에 불과하다. 유혹당하기를 갈망하고, 또 여자에게 이런 유혹을 충동하는
것은 남자이다.
얼마가 지나면 남자는 화를 내고, 여자를 탓한다. 책략이 전혀 없는 소녀에게 남자는 더
욱 냉담하고 반감까지 느끼고 있다. 그는 자기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여자에게만 유혹된다.
미끼를 노리는 것은 산 제물로 바쳐진 그녀 쪽이므로, 그녀의 수동적인 자세가 계략에 곧
잘 이용된다. 그녀는 자기의 약점을 힘의 도구로 삼는다. 그녀에게는 정정당당하게 공격하
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부득이 술책과 계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녀로
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공짜로 바쳐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불성실하고
교활하다는 비난을 받게 마련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지배하기를 요구하
므로 그녀로서는 굴복의 신화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 때 가장 본질적
인 요구를 말살시키라고 그녀에게 요구할 수 있을까? 남자에게 환심을 시려는 여자의 마
음은, 처음부터 타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지 계획된 술책에 의해 속이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길이 막혀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단지있는(존재하는)것만이
요구되며 저주가 그녀의 머리 위에 떨어져 있다.그녀는 어렸을 때 무회나 성녀의 흉내를
내면서 놀았다. 그런데 성장해서는 자기 자신의 흉내를 낸다. 진실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녀가 갇혀 있는 영역 안에서 그것은 무의미한 질문이다. 진실, 그것은 베일이 벗겨진 현실
이며, 베일을 벗기는 것은 행동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그녀는 행동하지 않는다. 그녀가 자
기에 대해 자기에게 말하는-때때로 타인에게도 말하지만-가공의 이야기는, 그녀에게는 자
기가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일상생활의 평범한 기록보다 훨씬 잘
표현하는 듯이 생각된다.
그녀는 자기의 값어치를 결정하는 수단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연극을 하여 스스로 위로
한다. 어떤 인물을 자처하여, 거기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보기도 하고 엉뚱한 행동으로
자기를 특이한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현실 속에서는 여자가 개성화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
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성의 세계에서는 자기가 책임을 갖지 않은 무의미한 존재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말을 지어내서 하는' 일 이외에 그녀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없는 것
이다. 지로두(현대 프랑스 소설가 겸 극작가)의 엘렉트라(소포클레
스의 희극에서 테마를 택한 극. 그녀는 오빠인 오레스테스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여자이다. 진짜 칼을 가지고 실제로 살인을 하는 것은 오레스테스의 역
할이기 때문이다.
젊은 처녀는 아이들처럼 싸움이나 분노에 지쳐서 병들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는데, 이
것은 주위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이다. 그녀가 남의 운명에 간섭하는 것도 주위의 관심을
자기에게 돌리기 위해서이다. 그녀는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고, 있지도 않은 비밀을 만들어
내고, 배반하고, 중상한다. 자기의 생활 속에서 구원을 찾지 못하므로, 사는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기 주위에 비극이 필요한 것이다. 그녀가 변덕스러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우리가 마음속에 그리는 여러 가지 환상이나, 그것으로 마음을 달래는 여러 가지 이미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단지 행동이 시간의 다양성을 통일한다.
젊은 처녀는 진실한 의지가 아닌 여러 가지 욕망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두서없
이 한 욕망에서 다른 욕망으로 옮겨간다. 이런 부분별한 행동이 위험에 빠지는 것은, 그녀
가 꿈 속에서만 하고 있는 행동이 현실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를 비타협적이고
대단히 어려운 입장에 놓아두고 싶어하며,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것을 좋아한다. 미래를 마
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단번에 도달하려고 한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거야. 나는 언제나 모든 것을 원해.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 위해,
내 인생을 훌륭하게 선택해야 해." 하고 마리 르네뤼는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말에 호응하
는 듯이 아누이(프랑스 현대 극작가)의 앙티곤은 말한다. "나는 모든 것을 원해. 지금 당
장 말이야." 이런 어린애같은 제국주의는, 자기의 운명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다. 꿈은 시간과 장애물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은 빈약한 현실을 보충하
기 위해 끝까지 강렬해질 필요가 있다.
참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한계를 알고 있다. 그것은 자기에게 실제로 그 정도의 능력
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젊은 처녀는 자기 것이 전혀 없으므로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한
다. 그리하여 어른에게, 특히 남성에게 그녀는 '무서운 아이'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녀는
현실세계에 자기를 투입할 때 개인에게 강요되는 제한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는
제한을 단번에 뛰어넘기 위해 현실세계를 경시한다. 그리하여 힐다 (입센의 건축가 솔네
참조) 는 솔네스가 그녀에게 왕국을 세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왕국을 손아귀에 넣어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기역없이 그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
에게 지금까지 없었던 가장 높은 탑을 세워달라고 요구하고, 또 그에게 '그가 세운 탑의
높이까지 올라가라' 고 요구한다. 남자는 기어오르기를 망설이고, 현기증이 일어날 것을 두
려워한다. 지상에서 쳐다보고 있는 그녀는 사고나 인간의 약점을 부정한다. 그녀의 위대성
에 현실이 어떤 제한을 가하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는 위험을 무릅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에 어떤 위험도 개의치 않은 그녀
에게, 어른은 언제나 째째하고 소심해 보인다. 꿈속에서 매우 이상한 대담성을 발휘할 수
있는 그녀는 현실속에서 어른과 동등한 일을 해보려고 도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시
련을 겪은 적이 없으므로, 실패의 수치를 두려워하지 않고 참으로 경탄할 만한 미덕으로
자기를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통제의 결여에서도 불안이 생기게 된다. 그녀는 자기를 무한한 것으로
꿈꾼다. 그러나 남에게 칭찬받을 만한 인물을 빌려서 그 속에 자기를 거짓으로 옮겨놓고
있는 것이다. 자기와 동일시하고, 수동적으로 그 존재에 종속되어 있는 이 분신 속에서 그
녀는 어떤 위험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불안해지기 쉽고, 허영심이 강하다. 사소한
비판이나 야유에도 흔들린다.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때그때 변덕스러운 타인
의 의견에서 자기의 가치를 찾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개성있는 활동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니라, 평판이라는 세상의 목소리가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그것은 양적으로 측정이 가능
한 듯이 보인다. 너무 흔하면 상품의 가치는 감소되게 마련이다. 젊은 처녀는 다른 어떤
여자가 아닐때에만 진귀하고 예외적이고 주목할 만한고 비범하다. 친구들은 경쟁상대이고
적이다. 그래서 그녀는 친구들을 헐뜯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녀는 샘이 많고 고약
하다.
사춘기의 여성이 비난을 받는 모든 결점은, 그녀가 처해있는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희
망에 부풀고 야심에 찬 시기,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이 시기에 자기는 수동적이고 의존적
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여성이 어떤 정복도 자기에게는 허용되
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미래는 남성의 마음대로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은 정복욕에 가득한 이 시기이다. 성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도
어떤 새로운 갈망이 그녀를 눈뜨게 하면, 그것은 동시에 숙명적으로 불만을 품고 상아야
하는 자기를 발견하는 기회가 될 뿐이다. 생명적이거나 정신적인 모든 약동은 그 즉시 제
지되어버린다. 그녀가 균형을 되찾기가 어렵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들뜬 심
정,눈물,신경질적인 발작등은 생리적으로 허약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사회에서 소외
되어 있는 심각한 부적응의 표시이다.
젊은 처녀는 이런 입장에서 온당치 못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벗어나려고 하지만, 정당하
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그녀는 그 결점 때문에 사람을 성가시게 하지만, 때로는 특이
한 재능으로 사람을 놀라게도 하는데, 그 어느 것도 같은 근원을 갖고 있다. 세계의 거부,
불안한 기대, 허무등을 도약대로 삼아 자기의 고독과 자유 속에서 부상하는 것이다.
젊은 여성은 의로운 투쟁에 부대끼고, 고독에 시달리고 있다. 이와 같은 복잡성은 그녀
를 풍요롭게 한다. 그녀의 내면생활은 소년들보다 더욱 심각하게 발전한다. 뉘앙스가 풍부
해지고 한결 복잡해진 자기 마음의 움직임에 더욱 유의하며 또 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힘쓰는 소년들보다 심리적인 감각이 풍부하다. 그녀는 자기를 세계와 대립시키는 이
런 반항에 무게를 더할 수도 있다. 그녀는 진실성과 타협주의의 함정을 피한다. 주위사람
들의 한결같은 허위도 그녀에게는 아이러니컬하게 간과된다. 그녀는 날마다 자기 입장이
애매한 것을 느끼고 효과없는 항의를 되풀이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낙관
주의, 구태의연한 가치, 위선적인 온건주의의 도덕 등을 의심해 보는 용기를 갖게 된다. '
플로스 강의 물레방앗간'에 나오는 마기의 감동적인 사례가 그러하다. 조지 엘리엇은 이
여성에게 빅토리아 왕조의 영국에 대한 사춘기의 회의와 용감한 반항을 구체화하고 있다.
남성 등장인물들 '특히 마기의 오빠인 톰'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사고방식을 강조하여 도덕
을 형식적인 규칙에 고정화시키지만, 마기는 그것에 생생한 입김을 불어넣기 위해 그것을
부정한다. 그녀는 고독의 끝까지 이르러, 남성들의 경직된 세계의 피안에 순수한 자유인으
로 떠오른다.
이 자유를 사춘기의 처녀는 극히 소극적으로 행사한다. 그러나 그 자유 를 어떻게 사용
하느냐에 따라서 귀중한 감수성을 지닐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헌신적이고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고 애정이 깊은 여성이 되기도 한다. 로저먼드 레이먼이 그린 여주인공들의 특
색은 이런 순종적인 너그러움이다. '왈츠에의 초대'에서 올리비아가 아직 수줍고 어색하고
거의 교태도 부리지 않은 채 강한 호기심으로 내일 들어갈 그 세계를 탐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자기를 찾아오는 댄서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비위에 맞도
록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메아리가 되어 진동하여,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인
다.
'반지'의 여자주인공 쥐디도 같은 매력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어린시절의 기쁨을 버리지
않았다. 밤중에 숲이 우거진 개천에서 알몸으로 목욕하기를 즐기고, 자연과 책과 미와 생
명을 사랑했다. 그녀는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거짓말도 하지 못
하고 이기심도 없는 그녀는 남성을 통한 자기찬미도 원치 않는다. 그녀의 사랑은 오직 주
는 것이다. 그녀는 남자이건 여자이건, 제니퍼든 로디든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존재에게
사랑을 바친다. 그녀는 자기를 망치지 많고 자기를 준다. 그녀는 독립적인 여학생의 생활
을 거쳐 자기의 세계, 자기의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녀를 남자와 구별하는 것은, 그
무엇을 기다리는 태도와 부드러운 순종이다.
그녀는 매우 미묘한 방법으로'타자'에게 자기를 제공한다. 이 경우에'타자'는 그녀에게
대전해 보며, 주위의 모든 청년이나 그들의 집, 자매, 세계를 사랑하게 된다. 제니퍼가 그
녀를 매혹시키는 것은 친구로서가 아니라'타자'로서이다. 그리고 그녀는 로라와 그 사촌들
을 매우 유연하게 상대방의 욕구에 적응시켜 매혹한다. 그녀는 인내요, 온유요, 수락이요,
말없는 고뇌이다. 마거릿 케너디의 '영원한 처녀'의 테사는 그녀와는 다르지마는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마찬가지여서, 대단히 매력적인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장신구, 화장, 변장, 위선, 신중성, 복종 등을 몹시 싫어했
다. 그녀는 타인으로 부터 가면을 쓰지 않은 사랑을 받기를 원하며, 루이스의 비위를 맞춘
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비굴하지 않다. 그녀는 그를 이해하고 그와 함께 감동한다.
이들 두 사람이 언쟁을 할 경우에, 그녀를 승복하게 하는 것이 애무가 아님을 루이스는
알고 있다. 버릇이 없고 허영심이 강한 플로렌스가 키스에 의해 정복되는 반면에 놀랍게도
케사는 사랑 속에 자유를 누리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녀로 하여금 적의나 자존심을
느끼지 않고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그녀의 소박함은 기교가 갖는 모든 매력을 지
니고 있다. 사랑을 받기 위해 그녀는 결코 자기를 꾸미지 낳고 또 비굴해지지도 않고, 객
체가 되어버리지도 않는다. 생활을 음악적인 창조에 바치는 예술가들에게 에워싸여 있어
도, 그녀는 탐욕스러운 악마를 마음속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그들을 힘껏 사랑하고
이해하고 돕는다. 그러나 무리하지 않고 상냥하게 자연스러운 호의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타인에 대한 애정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잊을 때에도, 완전히 자주적
이다. 이런 순수한 진정의 덕택으로 그녀는 사춘기의 까다로운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세상의 비정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분열되지 않으며 태평스러운
소녀, 현명한 부인처럼 조화를 이룬다. 대담하고 너그럽고 다정하고 적극적인 젊은 처녀는
정열적인 애인이 될 수 있다.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시를 만나기도 한다. 그녀는 행동하지 않으므로, 바라보고 느끼
고 기록한다. 어떤 색체, 어떤 미소는 그녀의 마음에 큰 반응을 일으킨다. 그녀의 외부에는
이미 세워진 도시나 인간의 얼굴등에 그녀의 운명이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젊은
남자들처럼 어떤 동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접촉하고 맛본다. 인간사회에 합류
하거나 적응하기 어렵지만, 어린이처럼 그 세계를 바라볼 수는 있다. 사물에 대해 흥미를
갖는 대신에, 그 사물이 갖는 의미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물의 특수한 모습이나
뜻하지 않은 변형을 포착한다.
그녀가 창조적인 충격을 느끼는 일도 드물고 자기 심정을 표현하는 재능이 결여되어 있
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화, 편지, 수필, 소묘에 있어서는 독창적인 감수성을 보이는 경
우가 있다. 그녀는 무슨 일에나 정열적으로 몰두한다. 그녀는 아직 자기의 초월성이 손상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는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했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
각하는 것이 그녀의 활동을 점점 정열적으로 몰고간다. 공허하고 한정되지 않은 그녀가 자
기의 허무 속에서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완전한 성취이다. 그래서 그녀는'자연'에 특수
한 사랑을 쏟거나 청년 이상으로 자연을 숭배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장 명료하게 요
약하는 것은 억압받지 않는, 비인간적인'자연'이다. 사춘기의 소녀는 아직 세계의 어떤 작
은 부문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 무소유 덕분에 세계 전체는 어떤 작은 부문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 무소유 덕분에 세계 전체는 그녀의 왕국이다. 그녀가 세계를 소유할 때, 자
랑스럽게 자기를 소유하게 된다. 콜레트는 이런 청춘의 향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벌써 새벽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것을 나에게 허용해 주셨
다. 어머니에게 3시 반에 깨워주기를 부탁하고, 양팔에 빈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개천이
흐르는 좁은 골짜기에 숨어 있는 채소밭으로 딸기며 까치나무 열매를 따러 갔다.
3시 반에는 만물이 습하고 희미한 푸른빛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길을 내려가면,
그 무게 때문에 낮게 깔린 안개가 먼저 내 자리를, 이어서 잘생긴 내 몸을 적시고, 다음에
입술, 귀, 그리고 내 몸에서 감각이 가장 예민한 코에 이르렀다... 이 시각에, 이 길에서 나
는 나의 가치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을, 그리고 처음 불어오는 미풍을, 처음 날아오
는 새를 의식하고 이지러진 달걀 모양의 태양과 함께 나의 공모를 의식했다... 나는 최초의
미사를 알리는 소리를 듣고 돌아갔다. 그러나 배불리 먹고, 숲속을 혼자 사냥개처럼 한 바
퀴 돌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남들이 모르는, 두 샘의 물을 맛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았
다.
메리 웨브(현대 영국의 여류소설가)도'그늘의 무게'에서 젊은 처녀가 낯익은 풍경에 대
해 친밀감을 느끼는 열렬한 환희를 묘사하고 있다.
집안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앰버의 끊길 듯이 긴장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언덕을 지나
숲으로 갔다. 그녀에게는 도머의 사람들이 법률의 압제를 받아가면서 살고 있는 데 비해,
숲은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연의 미에 눈뜬 그녀는 미의 특수한 지각
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유사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은 자질구레한 것들이 우
연히 쌓여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조화이며, 엄격하고 고귀한 한 편의 시였다. 여기서
는 미가 지배하고 있었다. 꽃의 빛도 아니고 별빛도 아닌 어떤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상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가벼운 진동이 빛처럼 숲속을 달리고 있는 듯이 생각되었다... 앰
버가 이 초록의 세계로 외출한 것은 어떤 종교적인 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
만물이 고요 속에 잠긴 어느날 아침에, 그녀는 새들의 동산으로 올라갔다. 싱겁고 초조
한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그녀는 흔히 그렇게 하곤 했다... 그녀는 새의 세계의 부조리한
모순속에서, 어떤 위로를 느꼈다... 그녀는 드디어'숲의 정상'까지 가서, 금세 그 아름다움
에 도취되었다. 자연과의 대화에는 어떤 싸움과 같은 것, 즉 '네가 나를 축복해 줄 때까지
나는 너를 떠나보내지 않겠다.'고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야생 사과나무에 기대어 있을 때, 갑자기 그녀는 일종의 내면의 청각에 의해 수액이 나
무로 흐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매우 생기에 넘쳐 밀물처럼 그 소리의 현실에, 나뭇
잎의 신기한 목소리를 느꼈다... 꽃잎이나 나뭇잎마다 자기가 생겨난 깊은 땅속을 상기하면
서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언덕 위에서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와 나
뭇가지 사이를 파고 들었다. 일정한 형태를 갖고, 또한 그 형태가 죽을 운명을 알고 있는
것이 그곳을 지나가는, 형태가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을 향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숲은 이제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성좌처럼 빛나는 통일체였다... 그녀는 연
속적인 부동의 존재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연의 정기가 통하는 이 장
소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호기심에 사로잡힌 앰버의 마음을 이끈 것은 이것이었다. 이것이
야말로 그녀를 기묘한 황홀감 속에서 더 이상 꼼짝달싹 못하게 했다.
에밀리 브론테 (19세기 영욱의 여류소설가)와 안나 드 노이유, 이처럼 다른 두여성이
청춘시절에 -이어서 생애를 통하여 그것은 연장되지만-비슷한 정열을 경험하고 있다.
내가 인용한 문장은 적령기의 여성이 들이나 숲에서 어떤 구원을 발견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의 집에는 어머니, 규칙, 습관, 관례가 지배하고 있으며, 그녀는 이
런 과거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녀는 이제 최고의 주체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
회적으로는 아내가 되어야만 어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그녀는 자기의 해방을 기
권으로 지불한다.
한편 그녀는 식물이나 동물이 아닌 인간적인 존재이다. 그녀는 가정과 남성에게서 동시
에 해방되어 주체로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숲의 비밀 속에서 자기 영혼의 고독한 환영을
발견하고, 넓은 평원의 지평선에서는 자기의 초월성에 대한 실감있는 형태를 발견하게 된
다. 그녀 자신이 무한한 광야이며 하늘에 치솟은 높은 산이다. 그녀는 미지의 미래로 향하
는 이런 길을 더듬어 갈 수 있고 또 더듬어 갈 것이다. 그녀는 언덕 위에 앉아서 발아래
펼쳐진 세계의 모든 부를 지배한다. 출렁거리는 물결과 반짝이는 빛을 통하여, 자기가 아
직 알지 못하는 환희, 눈물, 황홀을 예감한다. 연못의 잔물결, 태양의 반점이 그녀에게 막
연히 약속하는 것은, 그녀 자신의 모험이다. 향기나 색깔은 신비로운 말을 속삭이지만 그
중에서 어떤 한마디 말이 분명히 부각된다. 그것은'삶'이라는 말이다. 인생이란 호적에 기
록되는 추상적인 운명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이며, 육체적인 부이다.
육체를 갖는 것은, 이제 수치스러운 약점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춘기의 처녀는 어머니의
시선 아래서 거부하는 저 욕망의 나무 속에서 오르는 수액을 인식한다, 그녀는 이제 저주
받은 존재가 아니며, 자랑스럽게 나뭇잎과 꽃의 관계를 받아들인다. 그녀는 화관을 짓밟아
버린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의 빈손에도 싱싱한 먹이가 쥐어질 것을 알게 된다. 육체는
이제 더러운 것이 아니라 환희이며 미이다. 하늘과 광야와 융합된 젊은 처녀는, 세계에 생
기를 주어 열광케 한다. 그녀는 정체불명의 영기이며, 또한 히스의 새싹 하나하나이다. 흙
에 뿌리를 내린 인간, 무한의 의식인 그녀는 정신이요. 또한 생명이다. 그녀의 존재도 대지
자체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큰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다.
그녀는 때때로 '자연'의 저쪽에서 더욱 먼, 더욱 현혹적인 현실을 찾아 신비적인 황홀감
에 자기를 잊고 싶어한다. 믿음이 두터웠던 시대에는 많은 여성들이 자기들의 공허감을 신
에 의해 충족시키려고 했다. 시에나의 카타리아(14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수녀, 선여) 나
아빌라의 테레사(16세기 스페인의 수녀) 의 천직은 어린 소녀시절에 분명히 드러났다.
(여성의 신비적인 경향의 특이한 성격에 대해서는 후에 서술하겠다.) 잔 다르크는 묘령의
젊은 처녀였다.
그밖의 시대에 최고의 목적이 된 것은 인류이다. 당시에는 신비적인 약동은 구체적인 기
획 속에 합류한다. 그러나 절대에의 생생한 욕구는 롤랑부인(프랑스혁명 때 처형된 여걸)
이나 로자 룩셈부르크 (독일의 급진적인 여성 사회주의자)의 마음속에 생명을 기른 불꽃
을 낳게 한 것이다. 젊은 처녀는 그 굴종이나 가난 속에서, 거부의 밑바닥에서 극단적인
대담성을 끌어낼 수도 있다. 그녀는 시를 만나고, 영웅주의도 만난다. 그녀가 사회에 제대
로 참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방법의 하나는 제한된 지평선을 뛰어넘는 것
이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능력과 행복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몇 사람의 여성들은, 어른이 된 뒤
에도 처녀시절의 정열적인 계획을 계속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이다. 조지
엘리엇이 마기 툴리버를, 마거릿 케네디가 테사를 죽게 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브론테 자
매만 해도 괴로운 숙명을 경험했다. 젊은 처녀는 감동하기 쉽다. 그녀는 연약한 몸으로 외
롭게 세계에 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는 너무나 강력하여 그녀가 이것을 완강
히 거부하면 자멸하고 만다. 신랄한 지성과 독특한 기지로 유럽을 현혹시킨 미녀 주일렌
(샤리에르의 부인)은, 그녀의 모든 구혼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녀는 일체의 양보를
거부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아야 했으며, 이 독신생활은 그녀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그녀는'쳐녀와 희생자'라는 표현은 중복어법이라고까지 공언한 여성이었다. 이런
옹고집은 보기 드물다. 대개의 경우, 젊은 처녀는 싸움이 너무 일방적이라고 생각하여 결
국은 양보하게 된다.
디드로는'당신들은 모두 열다섯 살에 죽어요.'하고 소피볼랑에게 편지를 썼다.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싸움이 상징적인 반항에 불과했을 때 패배는 확실하다. 몽상에서는 요구가
강하고 큰 희망에 가득차 있더라도, 본래 수동적인 젊은 처녀는 어른에게 단념하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헤어졌을 때에는 반항심이 강하고 심술궂은 처녀라 하더라도 2년쯤 지나면
얌전해져서 여자의 생활에 동의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이것은 콜레트가 벵카에게 예언한 운
명이다. 모리악의 초기소설의 여자의 생활에 동의 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이것은 콜레트가
뱅카에게 예언한 운명이다. 모리악의 초기소설의 여자주인공도 이런 식으로 쓰여 있다. 처
녀시절의 위기는 의사 라가슈가'상사'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일종의'일'이다. 잚은 처녀
는 조금씩 그녀의 어린 시절을 매장한다. 자주적이고 당당했던 그때의 자기를 버리고 이제
는 얌전히 어른의 생활로 들어간다.
물론 나이만으로 분명한 구분을 짓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한평생 어린이 같은 여성도
있고, 이미 언급한 여러 가지 행위는 꽤 나이를 먹도록 연장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전
반적으로, 15세의 풋내기와 노처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후자는 현실에 적응하고 있
다. 그녀는 이제 상상만으로는 움직이지 않으며 전과 같이 자기분열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18세경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청춘의 만년에 가까울수록 그만큼 거기에 무관심하게 된다. 지금 나를 초조하게 하
는 것은 거의없다. 옛날에는 모든 것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지만.
이렌 르웰리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여자가 남자의 마음에 들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
면 남자는 당신을 배제하여, 고독이 당신의 운명이 된다, 그리고 나는 이제 고독은 질색이
다. 나는 군중이 나의 주위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현재에 살 것, 그리고
앞으로는 기대하고, 꿈꾸고, 입을 다물고, 몸을 움직이지 않고, 일체를 자기 마음속에서 말
하는 짓은 하지 말 것.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너무 귀여움을 받아서 야심이 대단했다. 그것은 15세때의 감동으로 떨던 그런 행
복이 아니다. 인생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은 차고 매서운
일종의 도취이다. 나는 교태를 부리고 사랑하는 체한다. 그러나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
다... 나는 지성이나 냉정 혹은 평소의 분별에 있어서는 진보한다. 그러나 마음은 잃어가고
있다. 금이 간 것이다... 두 달 동안에 나는 소녀시절과 작별했다.
19세 된 젊은 쳐녀의 고백도 거의 같은 어조이다. (드레스의 사춘기 특이성의 위기에
서)
옛날에는, 아! 이 시대에 적응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정신상태와 이 시대의 호소 사
이의 치열한 투쟁! 지금에 와서야 나의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다. 새롭고 중요한 사상의
하나하나는, 내 속에 들어올 적마다 괴로운 분열과 파괴와 끊임없는 재건을 되풀이하는 대
신에. 이미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에 적합하다... 지금 나는 무의식중에 이론적인 사상에
서 일상생활로 중단없이 옮아가고 있다.
젊은 처녀는 특별히 못생기지 않은 한 결국은'여성다움'을 받아들이게된다. 그리고 여성
의 숙명 속에 본격적으로 접어들기 전에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쾌락과 승리를 부담없이 즐
기며 행복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무도 강요받지 않고 책임도 없이 조용히 기다리
고 있는 그녀에게는 현재가 하나의 중간단계에 불과하므로, 공허나 환멸로 보이지 않는다.
그 무렵의 처녀의 화장이나 교태에는 아직 유희의 순진성이 있고,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꿈은 그 공허함을 그녀에게 숨기고 있다. 이에 대해 버지니아 울프(영궁의 현대 여류 소설
가)가, 어느 파티에 참석한 젊고 사치스러운 처녀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전신이 빛나는 것을 느낀다. 비단 같은 나의 두 다리를 살짝 마주 비
볐다. 목걸이의 싸늘한 보석은 가슴 위에 자리잡고 있다. 나는 아름답게 차려입어 준비가
되어 있다... 머리칼은 보기좋게 늘어뜨려졌고 입술은 알맞게 붉다. 나는 계단을 올라오는
남자들이나 저 여자들과 어울릴 준비를 마쳤다. 저들이 나의 동료이다. 나는 그들의 앞을
지나간다. 그들이 나의 시선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들의 시선을 받고 있다.. 이
향기와 빛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오그라든 잎사귀를 펼치는 고사리처럼 활짝 피어
난다. 마음속에 무수한 가능성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나는 차례로 말괄량이였다가 쾌활해
졌다가 축 늘어졌다가 우울해진다. 깊은 뿌리 위에서 나는 흔들리고 있다. 오른쪽으로 몸
을 기울이고 온몸에 빛을 발하면서 그 청년에세 말한다. '어서 와요...'
그가 내게 다가온다. 그것은 가장 흥분된 순간이다. 나는 몸이 떨리고 흔들린다... 우리
두 사람이 나란히 앉으면 얼마나 매혹적일까. 나는 사탱을 입고 나는 검정과 흰색으로 조
화된 옷차림이다. 나의 동료들은 이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아도 좋다. 나는 남자든 여자
든 거기 참석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의 시선을 받을 것이다. 나
는 당신들의 시선에 보답하려고 한다. 나는 당신들의 것이다. 나는 이곳 나의 세계에 있
다... 문이 열린다.'오, 어서 와요.'하고 내가 말하면 그는 내 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젊은 처녀가 성숙하면 할수록, 어머니의 권위가 그녀를 더욱 억압한다. 그녀는
집에서도 집안일을 거드는 정도에 불과한 것에 불만을 느낀다. 그려는 자기 일, 자기 가정,
자기 자식에게 자기를 마치고 싶어한다. 여기서 엄마와의 경쟁이 심해진다. 특히 큰딸은
남동생이나 여동생이 태어나면 화를 낸다. 그녀는, 어머니는 이제 역할을 마쳤으므로 이제
는 자기가 아기를 낳고 지배할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가 집 밖에서 일을 하더라도
집에 돌아왔을 때 자기가 단지 가족의 일원으로만 취급되고, 자주적인 개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옛날처럼 로맨틱하지 못한 그녀는 연애보다도 결혼에 대해 훨씬 많이 생각하기 시작한
다. 그녀는 이제 미래의 남편을 마법과 같은 후광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그녀의 소원은, 이
세상에서 안정된 지위를 얻어 아내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시골의 부
잣집 처녀들의 상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곧 꿀벌들이 인동덩굴 주위에서 붕붕거리는 뜨거운 한낮이 되면 나의 애인이 돌아올 것
이다. 그는 한마디 말 밖에 하지 않고, 나도 한마디 답만 할 뿐이다. 내 속에서 성장한 모
든 것을 그 사람에게 주리라. 아기를 낳고, 앞치마를 두른 하녀나 행주를 손에 든 하녀를
고용하리라. 나의 부엌에는, 양고기를 다시 데우기 위에 바구니 속에 넣어두고, 햄은 들보
에 걸려 있고, 양파가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나는 어머니를 그대로 닮아 조용히 푸른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는 찬장열쇠를 쥐고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상은 가엾은 프루 사안에게서도 떠나지 않는다.
나는 한평생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무서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처녀들은
누구나 결혼을 한다. 그녀는 가정을 이루고, 아마도 저녁때 남편이 집에 돌아올 시각에 등
불을 밝힐 것이다. 촛불만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것을 창가에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편은 생각한다.'아내는 저기 있어. 촛불을 켰군.'그리고 어느날 베
길디 부인은 그녀에게 갈대의 요람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느날 그 요람에서 예
쁘고 귀여운 아기를 볼 수 있을 것이고, 세례식 초대장을 보낼 것이다. 이웃사람들은 꿀벌
이 여왕벌의 주위에 모여들듯, 어머니 주위에 모여들 것이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괜찮아. 프루 사안!'언젠가 너는 자기 밀방 속에서 여왕이 될 거야.'
나이가 찬 대부분의 처녀들은 부지런히 살든, 경박하게 살든, 혹은 아버지의 집에서 살
든, 아니면 거기서 탈출을 하든, 어쨌거나 남편(엄밀히 말하면 성실한 애인)을 손에 넣는
것이 급선무가 된다. 이에 대한 걱정은 여성간의 우정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마음
의 벗'은 그 특권적인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젊은 처녀는 자기 친구를 공범자라기보다 오
히려 경쟁자로 본다.
이런 처녀 중에 총명하고 재능있는, 그러나 자기를'먼 나라의 공주'라고 생각하는 처녀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 처녀는 시나 수필 속에 자기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는데, 자기는 어린
시절의 친구들에게 아무 흥미도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추하고 어리석은 친구는 달
갑지 않고, 예쁜 친구는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책략과 술책과 굴욕적인 기분이 흔히 따
르게 마련이지만, 남자를 기다리는 초조감은 젊은 처녀의 앞날에 장애가 된다. 그녀는 이
기적이고 냉혹하다. 그리고'매력있는 왕자'의 출현이 늦어지면, 혐오와 불케감이 생기게 된
다.
젊은 처녀의 성격과 행위를 보면 그 상황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만일 상황이 변하면, 그
녀의 모습도 변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처녀도 자기의 운명을 고스란히 남성에게
맡기는 대신에, 자기 손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 학문, 스포츠, 직업적 훈련, 사
회정치적인 활동 등에 전념하면, 그녀는 남성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감정적, 성적
분규에 시달리는 경우가 훨씬 줄어든다. 그러나 자주적 개체로서 완성하기는 아직 청년보
다 훨씬 어렵다. 뿐만 아니라 설사 그녀가 독립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그녀의 인생
에서 남자와 사랑이 차지하는 자리는 비워둔다. 만일 그녀가 여성으로서의 자기 운명을 버
리는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몰두하면, 가끔 걱정이 된다. 이런 감정은 별로 드러나지 않
았지만, 엄연히 존재하여 집중된 의지를 헝클어뜨리며,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어쨌든 근
로여성은 그녀의 직업적인 성공을 순수한 여성으로서의 성공과 화해시키려고 한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많은 시간을 여자답게 하는 몸치장이나 미용에 사용할 수 있게 할애
되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방법으로는 생명에 대한 그녀의 관심이 양분되
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시간 사이에 학생은 자유로운 사색의 유희를 즐기며
거기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성의 몽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그녀는 자기의 육체적인 용모나 남성,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는 학문이나 직업
에는 필요 이상의 노력을 아낀다. 그런데 이 영역에서는 과잉이란 없다. 여성의 지능적인
허약이나 주의집중의 부족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잘 타협되지 않는 여러 가지 관심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것이 문제이다. 악순환 논법이 여기서 생기게 된다. 여자가 남편을
얻게 되면, 곧 음악, 학문, 직장 등을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여성이 자기의 계획(일)에 자기 일부만 참가시켜, 오나성에 큰 이득을 보지 못하
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앞을 다투어 그녀의 개인적인 야심을 억누르려고 한다. 한편 거대
한 사회적인 압박은, 결혼에 의해 하나의 사회적인 지위를 발견하여 자기를 정당화하도록
유인한다. 이 사회에서 자기의 지위를 스스로 쌍아올리려고 노력하지 않거나, 설사 노력한
다고 하더라도 소극적인 것은 당연하다. 남녀의 완전한 경제적 평등이 실현되어, 아내나
애인인 여성에게 일부 남성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특권을 이용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한, 여
성은 수동적인 형태로 성공할 꿈만 계속 꾸게 되고, 그녀의 자기완성은 억제될 것이다.
적령기의 처녀가 어떤 방식으로 어른의 생활에 접근하든 그 연습기간은 아직 끝나지 않
았다. 그녀는 점진적이든 급진적이든 성적 입문을 거쳐야한다. 그것을 싫어하는 젊은 여성
도 더러 있다. 소녀시절에 불쾌한 성적 경험을 했거나, 서투른 성교육이 성본능에 공포심
을 심어주었을 경우에, 그녀들은 남성에 대한 사춘기 소녀시절의 혐오를 잃지 않고 있다.
그밖에 여러 가지 사정이 일부 여성들에게, 그 의지와는 반대로 처녀을 끝까지 보유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젊은 처녀는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그 성적 운명을 성
취한다. 그 방법은 분명히 그녀의 과거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전쳐 예기치
않은 상황 속에 나타나는 새로운 경험이 있는데, 이에 대해 그녀는 자유로운 반응을 보인
다. 앞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새로운 단계이다.
성의 입문
어는 의미에서 여성이 성에 눈 뜨는 것은, 남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매우 어렸을 때부
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입술,항문,성기의 여러 단계에서 성년기에 이르기까지, 이론
적이고 실제적인 수련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러나 적령기의 젊은 처녀의 색정적인 경험
은 종래의 성적 활동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다.
색정적 경험은 때때로 예기치 않은 난폭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언제나 과거와의 결별을
초래하는 새로운 사건이 된다. 이런 색정적인 경험을 거치는 시기에, 젊은 처녀가 당면하
는 모든 문제는 절박하고 날카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그 위기는 간단히 해결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자살이나 광기를 수반해야 비로서 해결되는 비극적인 경우도 있다. 어쨌든 색
정적 경험에 반응하는 방법에 따라 운명의 대부분이 좌우된다. 색정적 경험의 첫걸음이 젊
은 처녀에게 대단히 큰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정신과 의사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것은 전 생애에 영향을 주게 된다.
생물학적, 사회적,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동시에서 살펴볼 때, 이 문제에서 남성과 여성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남성은 유년기의 성적 본능에서 성숙기로 옮아가는 과정이 비
교적 간단하다. 거기에는 색정적 쾌락의 객관화가 있으며 그것은 그 내재적 존재 속에 실
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초월적 존재 위에 의지화된다. 발기는 이 욕구의 표현이다. 남
성은 성기, 양손, 입 등 육체 전체로 상대방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그는 이 활동에서도 여
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자각하고 있는 객체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도구에 대해 주체
로서 머물고 있다. 그는 이 자주성을 잃지 않고 타자에게 몸을 던진다.
이 경우에 여성의 육체는 그에게 하나의 먹이이며, 그는 자기의 육감이 모든 것에 대해
요구하는 특질을 여성에게서 포착한다. 그는 물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
러나 적어도 그는 그것을 포옹한다. 애무와 키스는 반쯤 실패한다. 그러나 이 실패 자체도
하나의 자극이고 희열이다. 사랑의 행위는 그 자연스러운 결말, 즉 오르가슴(성적 황홀)
속에 통일을 발견하게 된다. 성교는 분명한 생리적인 목적을 갖고 있으며, 남성은 사정에
의해, 그를 억압하고 있던 분비물을 방출한다. 그는 발정한 다음에는 완전한 해방의 소원
을 이루며 여기에는 분명한 쾌락이 뒤따른다. 이 경우에 물론 쾌락만이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후에는 흔히 환멸이 온다. 욕구가 충족되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의 분명한 행위가 성취되면 남성은 다시 완전한 육체로 돌아간다. 그가 여성에게 한
봉사는 자기 자신의 쾌락과 융합되어 있었다.
여성의 색정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며, 그것은 여성의 입장의 복잡성을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여성은 자기의 능력을 자기의 생활과 잘 조화시키지 못하고 그녀들
의 목적과 상반된 이해관계를 갖는 종에게 희생된다. 이 모순은 여성에게 있어서 그 절정
에 도달해 있다.
그것은 특히 음핵과 질이라는 두 기관의 대치에 의해 표현된다. 유아기에는 전자가 에로
티시즘의 중심이다. 일부 정신과 의사들은 어떤 여성들에게는 질의 감각이 존재한다고 주
장하지만, 그것은 거의 날조된 견해이며 제2차적인 중요성밖에 갖지 못한다. 성년기에도
음핵의 조직은 변화하지 않고, 여성은 한 평생 이 색정적 자주성을 보유한다. 음핵의 경련
은 남성의 오르가슴처럼 반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일종의 발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
인 성교에는 간접적으로만 연결되어 있으며 생식에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여성이 수
태하게 되는 것은 질에 의해서이다. 그것은 남성의 개입으로 비로서 색정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개입은 언제나 일종의 폭행의 형태를 취한다.
옛날에 여성은 사실상의, 혹은 위장된 형태의 약탈에 의해 어린이의 세계에서 떼어내어
아내로서의 생활에 투입되었다. 그녀를 처녀에서 여성으로 바꾸는 것은 폭력이다. 그래서
처녀성을 빼앗는다거나, 처녀의 꽃을 꺽는다고 말한다. 이런 처녀성의 상실은 연속적인 발
전의 원활한 결말이 아니라,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이며 새로운 과정의 시작이다. 그때 쾌
락은 질의 내부 표면의 수축에 의해 얻게 된다. 이 수축은 명확한 오르가슴으로 이루어지
는 것일까? 이것은 아직도 논의되고 있는 점이다. 해부학의 결과도 매우 애매모호하다.
'해부 및 임상은 질 내벽의 대부분에 신경이 분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
고 있다.' 고 킨제이 보고서는 말하고 있다. '질내의 많은 외과 수술은 마취약의 도움을 받
지 않고서도 할 수 있다. 질내의 신경은 음경의 바닥에 가까운 내벽 속에 있는 부분에 국
한되어 있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신경이 있는 부분의 자극 이외에 '암컷은 질내에
물체가 삽입된것을, 특히 질근육의 수축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느끼는 쾌감
은 아마도 신경의 색정적 자극보다도 근육의 탄력성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질의 쾌감이 존재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질의 마스터베이
션이라는 것도 (성숙한 여성에게 있어서는) 킨제이 보고서 이상으로 성행되고 있는 것으
로 생각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질의 반응은 대단히 복잡하여 심리적,생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반응은 신경계통 전반에 관계 될 뿐 아니라, 그 사람이 경험하는 모
든 면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뿌리 밑바닥으로부터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최초의 교접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색정 감각권이 분명히 확립되려면, 신경계통에
일종의'몽타주'를 이루는 것과, 아직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윽고 음핵 감각계통을 덮게 될
하나의 형태를 완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실현에는 오랜 기간이 필요하여, 때로는 전혀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이 두 감각권에서 어느 한쪽을 택한다는 것은 대단히
신기한 일이다. 둘 중의 하나는 어린시절의 독립을 연장시키고, 다른 하나는 남성과 아이
에게 그녀를 바치는 것이다. 정상인 성행위는 사실 여성을 남성과 종에 예속시킨다. 공격
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거의 모든 동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성 쪽이며, 그녀는 그의 포
옹에 따를 뿐이다. 보통 여성은 언제나 남성에게 정복될 수 있으나, 남성은 페니스가 발기
상태에 있지 않으면 그녀를 정복할 수 없다.
처녀막 이상으로 확실하게 봉하는 질경련과 같은 강한 반항의 경우를 제외하면, 여성의
거부는 극복될 수 있다. 질경련의 경우에도, 남성에게는 그의 완력이 뜻대로 할 수 있는
육체를 상대로 하여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법이 남아 있다.
여성은 개체인 이상, 그녀의 무기력도 그 본래의 역할과 별로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
래서 많은 남성은 그들과 동침하는 여성이 성교를 원하는지 아니면 단지 따르고 있을 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죽은 여성과도 동침할 수 있다. 성교는 남성의 동의가 없이는 하지
못하며, 그 자연스러운 결말은 남성의 만족이다. 여성은 전혀 쾌감을 느끼지 못해도 임신
이 된다. 그리고 임신은 그녀에게 성적과정의 완성이기는 커녕 오히려 바로 그 순간부터
종이 그녀에게 요구하는 봉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임신,분만,포유의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괴롭게 실현되어 간다.
남성과 여성의'해부학적 숙명'은 이처럼 크게 다르다. 그 도덕적,사회적인 입장도 마찬가
지로 다르다. 족장제 문화는 여성을 정결에 바쳤다. 남성이 그 성욕을 만족시키는 권리는
공공연히 인정되는 반면에, 여성은 결혼 속에 갇히게 마련이다. 그녀들에게 성행위는 그것
이 법률이나 의식에 의해 신성시되지 않는 한, 과실이며 타락이고 패배이며 약점이다. 그
녀는 그 정조와 명예를 지켜야 한다. 만일 몸을 함부로 허락하거나 타락하면 그녀는 경멸
의 대상이 된다. 한편 그녀를 정복한 남성에게는 퍼붓는 비난 속에는 찬탄의 뜻도 담겨 있
다.
원시문명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시대에도 침대는 여성에게'봉사'의 현장으로 인식
되고 남성은 선물로 혹은 그녀를 부양함으로써 그 봉사에 대한 감사를 표시해 왔다. 결혼
의 구조 자체가 매춘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불평등의 증거이다. 여성이 몸을 주면 남성은
그 대사를 주고 소유한다, 남성이 약자를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녀와의 정사는 언제나 관대하게 봐왔으나, 운전수나 정원사에게 몸을 맡긴 부인은
사회적으로 명예를 잃게 된다.
인종적 편견이 강한 남부 미국인은 오늘날에도 남북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흑인여성과
동침하는 것을 하나의 풍습으로 허용하고 있다. 그들이 권리를 영주의 교만으로 행사해 왔
으나, 백인여성이 흑인과 동침했을 경우에는 노예시대라면 죽음을 당했을 것이고, 오늘날
에는 린치를 당할 것이다. 남성은 어떤 여성과 동침했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녀를 '소유했
다'거나'가졌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여성이 남성을'가졌다'고 말하고 싶을 경우에는 속된
말로 그 남자와'잤다'고 말한다. 그리스인은 남성을 모르는 여성을'정복되지 않은 처녀'라
고 불렀다. 로마인을 메살리나에게'굴하지 않는'이라는 호칭을 부여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애인 중에 단 한사람도 그녀에게 쾌락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남성에게 성행위는 정복이고 승리이다.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페니스의 발기가
의욕적인 행위의 시시한 모방처럼 보이는 것이 보통이지만, 막상 자기의 경우가 되면 남성
은 누구나 자기 페니스의 발기를 자랑스럽게 바라본다. 남성의 섹스용어는 군대용어에서
그 발상을 얻고 있다. 애인은 병사처럼 혈기가 왕성하고 그의 성기는 활처럼 팽팽하여 사
정할 때에는'발사한다.'그것은 기관총이고 대포이다. 남성은 공격이나 습격이나 승리니 하
는 말을 함부로 한다. 그의 성적 흥분 속에는 어떤 영웅취미가 있다.'어떤 존재의 또 하나
의 존재에 대한 지배로 성립되는 생식행위는 한쪽은 정복자의 느낌을, 다른쪽에는 정복된
자의 느낌을 강요한다. 그리고 가장 문명화된 연애관계를 취급할 때에도 전쟁의 개념에 연
애의 개념을 투영하여, 정복.공격.습격.공방전.패배.항복등의 말을 사용한다. 한 존재가 다
른 존재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을 필요로 하는 행위는 더럽히는 쪽에 일종의 자랑스러움을
안겨주고, 더럽혀지는 쪽에는 동의했을 경우라고 다소의 굴욕감을 주게 된다.'라고 뱅다는
쓰고 있다.(유리엘의 보고에서)
이 마지막 구절은 새로운 신화를 소개하고 있다. 즉 남성은 여성을 더럽힌다는 신화이
다. 사실 정액은 배설물이 아니다.밤의 오염(몽정)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자
연스러운 목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피가 깨끗한 옷을 더럽히는 경우가 있
다고 해서, 그것이 오물이며 위를 더럽힌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어떤 남성들은 반대로
여성이 불결하다고 주장한다.'습기로 더러워져 있는'것은 그녀 쪽이며 그녀가 남성을 더럽
힌다고 한다.
어쨌든 더럽히는 쪽이 된다는 것은 막연한 우월성을 나타낼 뿐이다. 실제로 남성의 특권
적인 입장은 그의 생물학적.공격적인 역할이 가장으로서 또는 주인으로서 갖고 있는 사회
적 역할에 잘 결합되어 있는 데서 비롯된다. 생리학적인 차이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사회
적인 역할을 통해서이다. 이 사회에서의 남성은 주권자이므로, 그는 그 절대성의 표시로서
욕망의 난폭성을 주장한다. 선천적으로 호색한 남자를 가리켜'강하다', '왕성하다'고 한다.
이것은 남성을 행동인, 초월자로 표시하는 형용사이다. 이와 반대로 여성은 물체에 불과하
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서는 '뜨겁다'또는'차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녀가 수동적인 성질만
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젊은 여성이 성욕에 눈뜨는 풍토는 청년이 그 주변에서 찾아내는 풍토와는 전
혀 다르다. 그리고 여성이 처음으로 남성과 부딪칠 때의 색정적인 태도는 대단히 복잡하
다. 흔히 처녀는 욕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남성이 그 관능을 눈뜨게 해준다고 말해 왔
지만, 그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이 전설도 남성의 지배욕을 폭로하고 있다. 남성은 그 생활
의 반려인 여성에 대해, 그녀가 그에게 갖는 정욕까지도 자주적이 아니기를 바란다. 실제
로 남성도 여성과 접촉해야 비로서 정욕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으며, 반대로 대다수의 젊은
처녀는 남성이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을 때에도 열렬히 그 애무를 고대하고 있다.
이사도라 덩컨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전날까지만 해도 남자아이와 같았던 나의 허리가 갑자기 둥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몸으로 한없는 기대의 충동을 느낀다. 하나의 호소가 온몸에서 치밀어올랐다. 그 호소의
의미는 너무나 명백했다. 나는 이제 밤잠을 설치면서 몸이 달아 올라 이리저리 뒤척이고
열병을 앓듯이 괴로워하고 있다.
슈테겔에게 자기 생애의 긴 고백을 한 어느 젊은 여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열심히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나한테는'신경의 간지러움' 이 필요했다. 나는 춤
에 열중하여 그 즐거움에 흠뻑 빠지기 위해 춤을 추면서 눈을 감았다... 춤을 추면서 나는
일종의 노출광 같은 짓을 했다. 관능이 수치심을 이겼기 때문이다. 처음 1년 동안 나는 열
심히 춤을 추었다. 나는 잠자기를 좋아하여 많이 잤다. 그리고 날마다 마스터베이션을 즐
겼는데, 대개 한 시간 동안이나 게속되었다... 나는 땀을 흘릴 때까지 마스터베이션을 하
고,피로하여 더는 계속할 수 없게 되면 잠을 자곤 했다... 나는 전신이 활활 달아올라 있었
으므로, 이런 나를 진정시켜주는 남성이 있었다면 싫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특정한 상대
가 아니라, 남성을 구하고 있었다.
오히려 처녀의 고민은 명확한 요구로 나타나지 않는 데 있다. 처녀는 자기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그녀에게는 유년시절의 공격적인 에로티시즘이 살아
남아 있다. 그녀의 최초의 충동은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지금도 포옹이나 소유의 욕
구를 갖고 있다. 자기가 갈망하는 먹이가 미각이나 후각이나 촉각을 통하여 그녀에게 가치
로 나타났을 때의 성질을 갖고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성욕은 고립된 영역이 아닌, 관능
과 꿈과 기쁨의 연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나 청년은 남녀를 불문하고 매끈거리는
것. 크림 같은 것. 번들거리는 것. 부드러운 것. 그리고 탄력있는 것을 좋아한다. 즉 부서
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압력에 휘며,시선이나 손가락 밑을 미끄러져가는 것을 좋아한다. 남
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흔히 유방으로 비유하는 모래언덕의 기분 좋은 온기나 명주의 감
촉, 깃털이불의 솜털 같은 부드러움이나, 꽃과 과일의 우단 같은 살결에 매혹된다. 그리고
젊은 처녀는 파스텔의 창백한 색깔이나 베일의 망사직물, 엷은 모슬린의 향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거친 천이나 자갈.조약돌.쓴맛이나 코를 찌르는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들도
처음에는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육체를 애무했다. 그 나르시스즘 속에서,막연한
혹은 명료한 동성애적 경험 속에 그녀는 자기를 주체로 설정하고 다른 여성의 육체를 소
유하기를 원했다. 남성에게 부딪칠 때, 그녀는 자기 주먹과 입술로 먹이를 능동적으로 애
무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 단단한 근육과 꺼칠꺼칠한 털이 많은 피부, 독한 냄새와 거친
모습을 지닌 남성은 그녀에게 달갑게 생각되기는 커녕 혐오감까지 일으킨다. 르네 비비앙
은 다음과 같이 그런 기분을 표시했다.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을 취할 자격이 없다.
...나는 추한 남성들의 것이다. 당신의 머리칼이나 눈동자는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의 머리칼이 길고 향기롭기 때문이다.
기질이 강한 여성에게 구체적인 소유의 경향이 남아 있을 경우에는 르네비비앙처럼 동
성애 쪽으로 기울어진다. 아니면 여성처럼 취급할 수 있는 남성에게서만 애정을 느끼게 된
다. 라실드(20세기 초 프랑스의 여류소설가)의 베누스씨의 여주인공은 한 젊은 애인을 사
들여 그 남성을 열렬히 애무하고 즐기지만, 자기의 처녀성은 잃지 않는다. 그 중에는 13,1
4세의 소년이나 유아만 애무하기를 즐기며, 성인남성에게는 몸을 허락하지 않는 여성도 있
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대다수의 여성들은 유년시절부터 일종의 수동적
인 성욕이 발달되어, 포옹이나 애무받기를 좋아하며, 사춘기 이후에는 특히 남성의 팔에
안겨 스스로 육신이 되기를 원한다. '남자는 잘 생기지 않아도 돼'하는 말을 그녀는 자주
들어왔다, 여성은 남성에게서 객체가 갖는 무기력한 특징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남성적인 정
력과 완력을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 속에서도 둘로 나뉘게 된다. 그녀는 자기를 가련한 물체로 변형시
키는 거친 포옹을 원한다. 그러나 난폭과 완력은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는 불쾌한 방해물이
도 하다. 그녀의 정욕은 그녀의 피부와 손에 동시에 국부화된다. 그리고 한쪽의 요구는 다
른쪽의 요구와 부분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거기서 그녀는 가급적 타협을 선택한다. 설사
그녀가 남성적이라고 해도, 바람직한 젊고 매력있는 남성에게 몸을 맡긴다. 미남청년에게
서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가속에서 신부의 희열과 신랑의 희
열 사이에 존재하는 정연한 조화를 찾아볼 수 있다.
그녀가 상대방 남성에게서 얻는 것은, 그가 그녀에게서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
상의 짐승과 꽃,보석이며 실개천이며 별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보물을 자기 손으로 잡
을 수 없다. 여성의 신체적인 구조 때문에 그녀는 거세된 내시처럼 어색하고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어야 한다. 소유욕은 이를 구체화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에 좌절된다. 게다가 남
성은 수동적인 역할을 거부한다. 때때로 젊은 처녀는 그 환경 때문에 상대방이 애무하면
동요한다. 하지만 얼굴을 쳐다볼 마음도 없고 애무에 보답할 생각도 없는 남성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 여성의 욕망에 섞여 있는 혐오감 중에는, 단지 남성의 공격성에 대한 두려움
뿐만 아니라 깊은 실망감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강조할 만하다. 여성의 육체적인 기쁨
은 오히려 성욕의 자발적인 약동을 억제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남성은 손
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는 기쁨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성적 쾌락과 하나로 혼합되어 있다.
그리고 수동적인 색정 자체의 여러 가지 요소가 애매모호하다. 접촉처럼 기분 나쁜 것은
없다. 손아귀에 들어 있는 어떤 물건이라도 혐오감 없이 으깨어버리는 남성들 중에도, 풀
포기나 짐승이 자기 몸에 닿는 것을 싫어 하는 사람이 많다. 여성의 육체는 명주나 비로드
에 약간 스치면, 때로는 기분 좋게 떨기도 하고 때로는 오싹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나의
어린시절 친구 중에 복숭아 열매를 보기만 해도 몸에 소름이 돋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동
요에서 쾌감으로,초조에서 쾌락으로의 이행은 쉽게 이루어진다. 육체에 감기는 양팔은 피
난처나 보호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한편 감금하여 숨이 막히게 하기도 한다. 쳐녀의 경
우는 그 입장의 양면성 때문에 이 애매성이 영속된다. 그녀의 변신이 성취되어야 할 기관
은 아직 봉인되어있다. 그녀의 육체의 희미하게 불타는 듯한 호소는 전신에 퍼져 있으나,
성교가 이루어지는 곳만은 제외되어 있다. 처녀가 능동적인 색정을 만족시키는 것을 허용
하는 기관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를 수동성으로 단정하는 기관의 실제 경험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수동성도 아주 무기력한 것은 아니다. 여성이 흥분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기관
에 여러가지 적극적인 현상이 생겨야 한다. 성감대의 신경감동, 몇 가지 발기조직의 팽창,
분비작용,체온상승, 맥박과 호흡의 항진 등이 그것이다. 정욕과 육감의 쾌락은 남성의 경우
와 마찬가지 여성에게서도 생명력의 소비를 요구한다. 여성의 욕구는 수동적이기는 하지만
어는 의미에서는 능동적이며, 그것은 신경과 근육의 탄력에 의해 표명된다. 무감동하고 무
기력한 여성에게는 언제나 불감증이 따르게 된다. 체질적인 불감증이 있는지는 의문이지
만, 확실히 심리적인 인자가 여성의 색정능력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생리적인
결함이나 생활력의 감퇴가 성적 무관심으로 나타나는 것은 확실하다.
이와는 반대로 생명력이 스포츠처럼 의지적인 활동에 소모되는 경우라도 그것이 성적
욕구를 저하시키는 일은 없다. 스칸디나비아의 여성들은 건강하고 튼튼하고 냉정하다.'정열
적인 기질'의 여성이란,이탈리아나 스페인 여성들처럼 나태와 욕정을 융합시키는, 즉 그 활
기를 모조리 육체에 쏟아 붓는 여성들이다. 자기를 객체가 되게 하는 것, 자기를 수동적이
되게 하는 것은, 수동적 객체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사랑에 정열적인 여성이란, 잠들어 있
거나 죽어 있는 여성이 아니다. 그녀 속에는 끊임없이 꺼졌다가 다시 발생하는 약동이 있
다. 이 약동이 사라졌을 때 마술적인 황홀이 생기고, 그 속에서 욕망이 영속된다.
그러나 격렬한 열정과, 몸을 맡기고 황홀해지는 상태의 균형은 깨지기 쉽다. 남성의 욕
망은 긴장이다. 그 욕망은 신경과 근육이 긴장해 있는 육체속에 들어갈 수 있다. 기관에
의지적인 협력을 요구하는 자세나 동작은 남성의 욕망을 저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욕망을 조장한다. 이와 반대로 모든 의지적인 노력은 여성의 육체가 '자기를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된다. 여성이 노력과 긴장을 요구하는 성교의 형태를 자연히 거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체위를 너무 급격히 자주 바꾸거나 행위에 너무 의식적인 조작을 요구하는 것은
황홀한 상태를 깨뜨리는 것이다. 급하고 거친 방법은 경련이나 수축, 또는 긴장을 일으키
는 경우가 있다. 여성들은 할퀴고 깨물고, 놀랄 만한 힘으로 그 몸을 활처럼 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클라이맥스에 도달했을 때이며, 이런 클라이맥스는
우선 모든 억제가 없어지고, 몸의 모든 에너지가 성적으로 집중되어야 도달할 수 있다. 즉,
젊은 처녀가 상대방 남성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만 있어서는 자기 할일을 충분히 수행
한다고 볼 수 없다. 유순하고 무기력하고 멍청하게 있어서는 상대방이나 자기자신을 만족
시키지 못한다. 그녀의 젊은 육체도, 터부나 금기, 편견, 요구로 가득차 있는 그녀의 의식
도,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은 하나의 모험 속에서 능동적인 협력이 요구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이런 조건에서는 여성의 색정의 출발이 결코 순탄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년시절이나 소녀시절에 있었던 사건이 뿌리 깊은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
저항은 물리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대개 젊은 처녀는 보고도 못 본 체한다. 그럴 때에는
그녀에게 내면적으로 심한 갈등이 일어난다. 엄격한 교육, 죄책감, 어머니에 대한 떳떳치
못한 심정이 강한 장벽이 된다. 처녀성은 어서나 흔히 높이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정당한
결혼에 의하지 않고 처녀성을 잃는 것은 엄청난 재난처럼 생각된다. 유혹이나 습격에 의해
몸을 빼앗긴 처녀는 명예가 실추된 것으로 생각한다. 평소 같으면 택하지 않았을 남성에게
처녀를 제공하여, 몇 시간 사이에 성적입문의 일체를 정리해 버리려는'첫날밤'도 결코 감당
키 어려운 경험이다.
일반적으로'상황변화'는 모두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성격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여성
이 된다는 것은 과거와 영구히 절연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변화는 다른 어는 것보다
도 극적이다. 그것은 어제와 내일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처녀를 그녀의 생활
에서 주요한 부분이 전개되고 있던 상상의 세계에서 끌어내어, 현실세계에 투입시킨다. 미
셸 레리스는 신혼의 잠자리를 투우와 비교하여'진리의 싸움터'라고 부른다. 이 표현이 가장
충실하게 가장 가공할 의미를 갖는 것은 처녀에 대해서이다. 약혼이나 연애, 구애기간동안,
설사 그녀가 아무리 어린애 같았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예절과 공상에 익숙한 세계에서 살
아왔다.구애자들은 로맨틱한, 혹은 적어도 아부하는 말을 지껄였다. 또 속이는 것도 가능했
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진짜 눈에 보이고 진짜 손에 잡히게 된다. 이런 시선과 포옹의
엄연한 현실이 그녀를 겁에 질리게 한다.
해부학적 선천성과 사회풍습이 남성에게 지도자의 역할을 하게 한다. 하긴 동정인 젊은
남성에게는 첫 애인이 역시 지도자였다. 그러나 남성은 페니스의 발기가 명백히 표시하는
색정적인 자주성을 갖고 있다. 그의 애인은 그가 이미 갈망했던 대상을 실제로 그의 손에
넘겨준 것뿐이다. 그 대상이란 여성의 육체이다. 그녀는 자기의 육체가 어떤 것인가에 대
한 가르침을 받기 위해 남성을 필요로 한다. 그녀의 의존성은 훨씬 뿌리가 깊다. 그 최초
의 경험에서 볼 때 남성에게는 능동성과 결단이 있다. 그것은 그가 상대방 여성을 돈으로
사는 경우나, 또는 그녀에게 구애하여 유혹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와는 반대로 대개의 젊은 처녀는 구애를 받고 유혹을 당한다. 그녀 쪽에서 남성에게
프로포즈했을 경우에도 남성은 그들의 관계를 주도한다. 남성이 연상이고 경험도 풍부한
경우가 많다. 이 새로운 모험에 책임을 지는 것은 으례 남성 쪽이다. 남성의 욕망은 보다
공격적이고 절대적이다. 애인이든 남편이든, 남성 쪽이 그녀를 침대로 이끌어가며, 그녀는
몸을 맡기고 복종하는 수 밖에 없다. 그녀가 남성의 이런 권위를 인정하고 있을 때에도 실
제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되면, 다소 걱정이 앞선다. 우선 그녀는 자기를 삼켜
버릴 것만 같은 남성의 시선이 두렵다. 그녀가 느끼는 수치심의 일부는 교육의 결과지만,
보다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원래 남녀 모두 자기의 육체에 대해 수치심을 갖고 있다.
육체는 그 순수한 부동의 존재, 부당한 인내성 때문에 남의 눈으로 보면 인위적이고 부
조리한 우연으로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것은'자기자신'이다. 우리는 그것이 남을 위한 존재
가 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한다. 또한 육체를 부정하려고 한다. 남성들 중에는 페니스가 발
기하지 않으면 여성 앞에서 알몸이 되기를 꺼리는 사람이 있다. 사실 육체는 이 발기에 의
해 활동이 되고 힘이 되므로 성기는 이미 무기력한 객체가 아니라, 손이나 얼굴과 마찬가
지로 구체성의 자랑스러운 표출이다. 총각이 처녀보다 수치심을 크게 느끼지 않은 이유의
하나가 이 때문이다. 그 공격정긴 역할 때문에 그들은 남에게 보여지는 입장에 서는 경우
가 적다. 설사 남에게 보여져도 비판을 받을 우려는 별로 없다. 그들의 애인은 결코 무기
력한 특징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의 의식은 박력과 쾌락을 주는 성관계의 기
교 쪽으로 쏠리게 된다. 적어도 그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고, 승부에서 이기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자기의 육체를 의지로 바꾸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여성은 자기의
육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면 그 육체를 무방비 상태로 내맡긴다. 여성은 마음속으로
애무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자기 육체가 남에게 보여지고 만져진다는 사실에 저항감을
느낀다. 유방이나 엉덩이가 유난히 발달된 육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많은 성
인여성들은 옷을 입고 있을 때에도, 남이 등뒤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언짢게 여긴다.
풋내기 여성이 연인에게 자기 몸을 보여주는 데 동의하기까지는 많은 저항을 이겨내야 한
다. 아마 프리네(그리스의 창녀)와 같은 여성은 남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녀는 서슴지 않고 알몸이 된다. 그녀의 육체미가 그대로 옷이다. 그러나 설사 프리네와 같
은 미녀라 하더라도, 젊은 처녀라면 그대로 옷이다. 그러나 설사 프리네와 같은 미녀라 하
더라도, 젊은 처녀라면 그 육체미를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남성들이 입을 모아 찬미하여
그녀의 젊은 허영심을 확인시켜 줄 때, 비로서 그녀는 자기의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그녀에게 하나의 걱정거리로 다가온다.
남성애인의 시선보다 두려운 것은 없다. 그것은 심판관이다. 그 애인이야말로 그녀의 모
습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기의 용모에 한껏 도취되어 있을 때에
도, 남성이 판결을 내리게 될 순간에는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 그녀가 어둠을 요구하고 이
불 속에 몸을 감추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
라보고 있을 때는 공상에 빠져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녀는 남성의 눈을 통해 자기를 상상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눈은 바로 앞에 있다. 속일 수가 없다. 반항할 수도 없다. 신
비로운 자유가 판결을 내리고, 그 판결은 재심이 불가능하다. 색정적 경험의 현실적인 시
련 속에서 유년시절과 소녀시절의 강박관념은 드디어 발산되거나 혹은 영구히 확립된다.
많은 처녀들은 너무 굵은 장딴지, 너무 빈약하거나 혹은 너무 부풀어오른 가슴, 지나치게
가늘거나 굵은 허리, 너무 빈약하거나 튀어나온 엉덩이 때문에 몹시 괴로워한다. 혹은 남
에게 말할 수 없는 기형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하기도 한다.
슈테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감증의 여인에서)
젊은 처녀들은 저마다 스스로 인정하기를 꺼리는 우스꽝스러운 걱정거리를 많이 안고
있다.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육체적으로 이상이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지, 정상적인
육체라는 확신을 갖고 못하기 때문에 남몰래 괴로워하는지, 그 수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다. 예를 들면 어떤 처녀는 그녀의'아래 입구'가 제자리에 달려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배꼽으로 성교를 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처녀는 자기를 남성과 여
성이 혼합된 존재라고 믿고 있었다. 또 한 처녀는 자기는 불구이므로 성교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강박관념을 갖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녀들은 지금까지 자기에게 있어서의 타
인에게 있어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즉,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자기들의 신체의 어느 부분
을 갑자기 드러내게 된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처녀가 자기의 것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이 미지의 자기 모습은 혐오감을 일으키는가, 무관심을 초래하는가, 아이러니
를 여기시키는가? 그녀는 남성의 판결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도박은 시작되었다. 남성
의 태도가 나중까지 그처럼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정열과 애정은 여성에
게 자신감을 주게 되며, 그 자신감은 모든 부정을 초월한다. 80세가 되어도 그녀는 남성의
하룻밤 욕망에 의해 피어난 먼 나라의 꽃이며, 작은 새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대로 애인이
나 남편이 서투른 남성이었을 경우에는, 그녀에게 열등 콤플렉스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 콤플렉스를 토대로 하여 연속적인 신경증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녀는 그것이 한이 되고
그 한은 심한 불감증으로 나타난다. 슈테켈은 이 문제에 관하여 충격적인 실례를 보고하고
있다.
30세가 되는 어떤 부인은 14년 전부터 심항 요통 때문에 몇 주일씩 자리에 누워 있어야
만 했다... 그녀가 그 통증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결혼한 첫날밤이었다. 통증이 심했으
나 성교를 하는 중에 남편은 이렇게 외쳤다. '감쪽같이 속았군. 당신은 처녀가 아니야...'
그녀가 느낀 허리의 통증은 그 괴로운 성교의 산물이었다. 그녀의 이 병은 남편에 대한
징벌이 되어, 그는 그 후 자주 치료비를 지불해야만 했다.. 이 부인은 보냈다... 결혼 첫날
밤은 그녀에게 미래 전체를 결정하는 슬픈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어떤 젊은 여성은 몇 가지 신경증, 특히 완전한 불감증 때문에 나의 진찰을 받았다...결
혼 첫 날밤에 남편은 그녀의 이불을 젖히고 '아니, 당신, 무다리잖아!'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로... 그녀는 완전한 불감증으로 통증만 느낄 뿐이었다... 그녀는 그 첫 날밤의 모욕이
자기의 불감증의 원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 다른 불감증 여성의 말에 의하면, 결혼 첫 날밤에 남편이 그녀를 크게 모욕했다고 한
다. 그는 그녀가 옷을 벗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척 말랐군!'그리고 그는 애무하
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순간이 잊을 수 없는 지겨운 시간이었다. 이 얼마나 난폭한 짓인
가!
Z. W. 부인도 완전한 불감증이었다. 결혼 첫날밤의 큰 상처는 남편이 처 성교 후 그녀
에게 '당신, 구멍이 너무 크군. 날 속인 거야?'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눈은 위험하다. 손은 또 다른 위협이다. 여성은 일반적으로 폭력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
다. 그녀는 젊은 남성이 유년시절이나 소년시절에 격투를 통해 극복해 온 시련을, 즉 육체
가 타인에게 잡혀 물체처럼 되는 시련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타인에게
잡혀 남성 쪽이 강하게 마련인 격투장에 끌려 온 것이다. 그녀는 공상하거나, 후회하거나,
움직이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는 남성에게 맡겨지고 그는 그녀를 마음대로 다룬다.
한 번도 격투를 해본 일이 없는 그녀로서는, 격투와 비슷한 이 포옹은 두려움을 안겨준다.
그녀는 약혼자나 남자친구, 남성동료, 또는 교양있고 예의바른 남성의 애무에 몸을 맡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낯설고 이기주의적이며 완강한 사나이로 변해 있다. 그
녀는 이 미지의 남성에게서 도망칠 수가 없다. 젊은 처녀의 최초의 경험은 문자 그대로 폭
행이며, 남성이 추악하고 난폭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풍습이 거친 시골에서
는 처녀들이 반동의,반강제로 어느 후미진 구석에서 치욕과 공포 속에 처녀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아무튼 모든 환경, 모든 계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쾌락을
악착같이 추구하는 이기주의적인 애인에 의해, 또는 결혼의 권리를 방패삼아 신부의 저항
을 모욕처럼 불쾌하게 여기며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분개까지 하는 남편에 의
해, 처녀성을 난폭하게 빼앗기는 일이다.
남성이 예의바르게 점잖을 경우에도, 최초의 접촉은 다소 거칠게 마련이다. 남성은 여성
이 자기 입술과 유방을 애무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에,또는 넓적다리 사이에서 예상되는 쾌
락을 탐내기 때문에, 불청객으로서 처녀를 찢고 국부로 들어간다. 남편이나 애인의 품에서
넋을 잃고 이것이 꿈꾸어 온 쾌락의 성취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뜻하지 않는 고통을 느끼
는 처녀의 괴로운 놀라움에 대하여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꿈은 사라지고 심신의 흥분
은 가시고, 사랑은 외과수술과 같은 형태를 취한다. 리프만 박사가 수집한(청년과 성욕이
란 제목으로 프랑스어로 발표) 고백 중에서 다음의 대표적인 이야기를 게재하려고 한다.
교양있는 가정에서 자랐으나 성적으로 무지한 처녀의 경우이다.
'나는 한 번만 키스를 주고받아도 아이가 생긴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18세때 어떤 남
자를 알게 되어 흔히 세상에서 말하듯이 반해 버렸어요.' 그녀는 자주 이 남자와 함께 외
출하고 남자는 그녀에게 쳐녀가 남자를 사랑한다면 몸을 맡겨야 한다. 남자는 성관계 없이
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결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까지는 처녀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먼 곳으로 여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그에게 '
그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약속한 날 아침에 그
녀는 그 편지를 그에게 건네주었으나, 그는 읽어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쑤셔넣고, 그녀를
호텔로 데리고 갔다. 남성은 그녀를 정신적으로 억압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따라갔다.
'나는 마치 최면술에라도 걸린 것 같았어요. 도중에 나는 그에게 난폭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간청했어요... 어떻게 해서 호텔에 도착했는지 나는 통 알 수 없었어요. 다만 한 가
지 남아 있는 기억은 내 몸 전체가 심하게 떨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는 나를 열심히 달랬
지만 오랜 저항이 있은 후에야 겨우 목적을 이뤘어요. 나는 의지의 자유를 잃고 마지못해
그가 하자는 대로 따랐어요. 나중에 거리로 나왔을 때, 나는 모든 것이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고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한 기분이었어요.'그녀는 이 경험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
아 9년 동안이나 남자를 거부하고 살아왔다. 그녀가 한 남성의 구혼을 받아들인 것은 9년
후의 일이었다.
이 경우,처녀성의 상실은 일종의 폭행이다. 그러나 동의하고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괴로
운 경우가 있다. 젊은 이사도라 던컨을 어떤 정염이 괴롭혀 왔는지는 잘 아는 사실이다.
그녀는 어떤 미남배우를 만나 첫눈에 반하고, 그 쪽에서도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다.
나도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그를 꽉 껴안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
다. 드디어 어느날 저녁 그는 완전히 자제력을 잃고, 미친 듯이 나를 소파위로 옮겨 놓았
다. 나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황홀감에 도취되었으나, 이어 고통을 못 이겨 외쳤다. 그때
나는 사랑의 동작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의 최초의 인상은 심한 공포
감과 한꺼번에 여러 개의 이가 뽑혀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도 느끼고 있는 듯
한 고통의 모습이 가엾어서,나는 처음에 나만이 그처럼 고통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이튿날) 나에게는 오직 괴로움에 불과했던 그 경험을 신음소리와 비명속
에서 다시 되풀이 하게 되었다. 나는 마치 불구자가 된 느낌이었다. (나의 생애에서)
이런 경험을 한 그녀가, 처음에는 이 애인과 나중에는 다른 많은 애인들과 더불어 대단
히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낙원을 알게 된다.
그러나 현실의 경험에서 지금까지 처녀시절의 상상에서처럼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관통이라는 사실이 훨씬 큰 문제이다. 남성은 성교를 할 때 외부기관
만 관여한다. 그러나 여성은 자기의 내부까지 침범당한다. 물론 남성 쪽에서도 여성의 은
밀한 암흑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을 기분 나쁘게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은 동굴
이나 묘헐 입구에서 어린이가 느끼는 두려움, 즉 톱니바퀴나 낫이나 늑대의 덫 앞에서 느
끼는 두려움을 갖는다. 자기들의 발기된 페니스가 점막의 칼집 속에 박힌다고 상상한다.
여성은 한 번 관통되고 나면 다시는 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녀는 자
기가 드디어 육체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지주는 자기 토지에 대해, 주부는
자기 집에 대해'출입금지'의 팻말을 세우고 각각 자기의 권리를 주장한다. 특히 여성은 자
기의 초월성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자기의 신변을 굳게 지키려고 한다. 그녀들의 방,옷장,보
석함은 신성한 것이다. 콜레크는 늙은 창녀에게서 들은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부인, 내 방에는 남성은 한 사람도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어요. 내가 남성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파리라는 넓은 도시만 있으면 충분하니까요.' 자기의 육체가 못쓰게 되었다고 하
더라도 이 여성은 적어도 남에게 출입을 금지한 한 조작의 땅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처녀는 자기 것이라고는 자기의 몸뚱이 하나뿐이라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그녀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그 속에 남성이 쳐들어와서 그녀로부터 보물을 빼앗아간다. 빼앗아
간다는 말이야말로 산 경험으로 입증된다. 그녀는 예감했던 굴욕을 생생하게 체험한다. 그
녀는 지배를 받고 굴종을 당하고 내맡기게 된다. 암컷이 대개 그렇듯이, 그녀는 성교하는
동안에 남성의 밑에 있다.
아들러는 여기서 생기는 열등감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유년시절부터 상위,하위의 관념
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나무에 기어오른다는 것은 대단히 근사한 행동이다. 천국은 땅
보다 위에 있고, 지옥은 아래에 있다. 떨어지거나 내려가는 것은 실수하는 것이고, 올라가
는 것은 자기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레슬링에서의 승리는 상대방의 어깨를 바닥에 닿게 하
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여성은 침대에 패배의 자세로 드러눕는다. 남성이 마치 고삐나 재
갈에 매여 있는 짐승을 올라타듯 할 때에는 더욱 언짢다.
아무튼 그녀는 자기를 수동으로 간주한다. 애무를 받고 관통하면서 남성이 능동적으로
자기를 소비하는 동안에, 여성은 참게 마련이다. 물론 남성의 것은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울퉁불퉁한 근육이 아니다. 그것은 쟁기도 아니고 검도 아닌 근육에 불과하다. 그러나 남
성은 그것을 마음대로 움직인다. 남성은 가고 오고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인다. 한편 여성
그 움직임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사랑의 자세를 택하고 성교의 길이와 횟수를 정하는 쪽은
(특히 여성이 미경험인 경우는) 남성이다. 그녀는 자기를 기구처럼 느낀다. 자유는 모두
남성에게 있다. 여성은 바이올린에 비유되고, 남성은 그 바이올린을 켜는 활대로 비유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 정신은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은 거문고와 같은 것으로, 그것
을 켜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남성을 만나야 비로서 자기의 비밀을 털어 놓는다.'라고 발
자크는 말했다. 이 말 자체가 불평등을 내포하고 있다. 남성의 발정에는 어떤 빛나는 성격
을 부여하고, 여성의 성적 흥분은 불명예스러운 자기포기로 간주하는 집단적 심상으로 여
성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여성의 내적인 경험이 이 불균형을 확증하고 있다. 젊은
남성과 여성은 육체에 대한 느낌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남성은 이것을 태연하게 인정하고 그 욕망의 충족을 자랑스럽게 요구한다. 여성은 나르
시스즘(자기애)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은 정체불명의 불안하고 무거운 짐이다. 남성의 성
기는 손가락처럼 청결하고 간단하다. 남자아이는 그것을 순진하게 드러내놓고 도전하는 심
정으로 자랑스럽게 친구에게 보여줬다. 여성의 성기는 숨겨져 있고 불안하고 끈적거리고
축축하여, 여성 자신에게도 신비스럽다. 달마다 출혈이 있고 때로는 냉으로 더럽혀지며, 신
비롭고 위험한 생명을 갖고 있다. 여성이 그 욕망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
은 그 성기 속에서 자기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 큰 이유가 되어 있다. 그 욕망은 부끄러운
형태로 표명된다. 남성은 '팽팽한'데 반하여 여성은 '적셔진다.' 이 말 자체에 젖은 침대나
오줌을 잘못 누어 야단을 맞던 유년시절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 남성도 무의식적인 몽정에
대해 이와 동일한 혐오감을 느낀다. 액체를 발사하는 것은 그것이 오줌이든 정액이든 굴욕
감은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능동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만일 액체가 수동적으로 새어 나
오는 경우에는 굴욕감을 느낀다. 그 경우 육체는 벌써 근육이나 괄약근, 뇌신경의 지배를
받아 의식적인 주체를 실현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하나의 그릇, 즉 무기력한 물체로 만들어
져 기계적인 기분에 좌우되는 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육체에서 물이 새어 나올(마치
낡은 벽이나 시체에서처럼) 경우에는, 그것이 액체를 힘차게 발산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
고 액화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붕괴작용이 불쾌한 것이다.
여성의 발정은 마치 조개가 부드럽게 숨을 쉬는 것과 같다. 남성은 격렬성을 지니고 있
는 반면에 여성은 대기성밖에 갖고 있지 않다. 여성의 기대가 열렬한 경우도 있지만, 역시
수동적이다. 남성은 솔개나 수리처럼 먹이를 향해 덤벼든다. 그러나 여성은 마치 육식식물
이나 곤충,어린이가 미끄러져 빠지는 늪처럼 대기하고 있다. 그녀는 빨아먹고 짜먹고 들이
마신다. 그녀는 송진이며, 끈끈이다. 부동의, 침투하는, 점착성의 유혹이다, 적어도 그녀는
은근히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녀에게 자기를 굴복시키려는 남성에 대한 저항뿐만 아니라,
내부의 투쟁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녀가 받은 교육이나 사회가 명한 타부(금기)나
억압위에, 색정경험 자체에서 비롯되는 혐오나 거부감이 겹쳐 있다. 이 양자가 서로 강화
되는 결과가 되어, 최초의 성교 후에 여성은 자기의 숙명에 대해 전보다 더 강한 반항심을
갖기 쉽다.
마지막으로 종종 남성을 적대시하고 성행위를 큰 위험으로 변형시키는 또 하나의 원인
이 있다. 그것은 아이를 낳는 두려움이다. 흔히 문명사회에서나 사생아는 결혼하지 낳은
여성에게 사회적,경제적으로 큰 핸디캡이 되므로,젊은 처녀는 임신하게 되면 자살을 하거
나,미혼녀가 갓난아기를 목졸라 죽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위험이 강력한 성적 브레이크
(제동기)의 역할을 하여, 많은 젊은 처녀들이 풍습이 요구하는 순결을 지키고 있다. 그 브
레이크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할 때 그녀들은 애인에게 몸을 맡기면서,남성이 자기
뱃속에 투입하는 무서운 위험에 두려움을 느낀다. 슈테켈이 인용하고 있는 말 중의 하나는
'괜찮겠지요! 괜찮겠지요!'라는 젊은 처녀의 예가 있다. 결혼을 하고서도 아기를 원치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건강이 좋이 않다거나, 아기가 너무 큰 부담이 되는 경우이다. 애인이든
남편이든 만일 그녀가 그 남성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을 때, 그녀의 색정은 경계심으로 말
미암아 마비된다. 그리하여 남성의 동작을 걱정하면서 감시하거나, 성교가 끝난 후에 본의
아니게 자기 뱃속에 들어간 생명의 싹을 배에서 몰아내기 위해 화장실로 달려가게 된다.
이런 위생적인 작용은 애무의 관능적인 마력을 무자비하게 지워버리고, 하나의 환희로 융
합했던 두 사람의 육체는 완전히 분리된다. 남성의 정액이 해로운 싹처럼 오염으로 생각되
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 침대 위에서 남성은 태평스럽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녀는 마
치 더러워진 꽃병을 씻는 것처럼 자기 몸을 닦는다. 어떤 이혼한 젊은 여성은 불확실한 기
쁨을 간직한 결혼 첫 날밤을 치른 다음, 그녀의 신랑이 태평한 얼굴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동안에 욕실에 들어박혀 있어야 했을 때의 불쾌한 심정을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부터 이 부부의 파탄은 결정된 것 같았다. 스포이트나 세척기에 대한 불쾌감은 불감
증이 생기는 원인의 하나이다. 좀더 확실하고 편리한 피임법의 존재는 여성의 성적 해방을
위해 크게 유용하다. 미국처럼 피임법이 널리 보급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처녀로 결혼하는
여성의 수는 프랑스에서보다 훨씬 적다. 이 피임법의 보급은 성행위에서 안도감을 증대시
킨다. 그래도 젊은 처녀는 자기의 육체를 물품으로 취급하기 전에 극복해야 하는 혐오가
있다. 남성에 의해 관통될 때 전율 없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처럼, 남성의 정욕을 만족
시키기 위해 일부러 '마개'를 하는 것 역시 유쾌한 일이 못 된다. 자궁이 봉인되고,정충에
게 치명적인 어떤 마개를 자기 몸속에 넣어야 하는 냉철한 예방행위를 생각할 때, 육체와
성기의 애매성을 의식하고 있는 여성이라면 성교에 흥미를 잃을 것이다.
피임도구의 사용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남성도 많다. 성적인 매 순간을 정당화하는 것
은 그 전체의 태도이다. 하나하나 분석하면 혐오스럽게 생각되는 행위도 육체가 본래 갖고
있는 색정적인 위력에 의해 변모될 때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반대로 육
체와 행위를 무의미한 요소로 분해하면 곧 그 요소는 불결하고 외설스러운 것이 되고 만
다. 사랑하는 여성이 사랑하는 남성과 결합되고 융합되어 즐거운 가운데 경험하는 성행위
는 만일 그것이 흥분과 욕망,쾌락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경우에는,그것은 어린이의 눈에 비
친 것처럼 혐오스러운 성격을 띄게 된다. 피임도구의 의식적인 사용에서 생기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예방은 어떤 여성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젊은 처
녀들은 임신의 위협에 대해 아무런 방어책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몸을 맡
긴 남성의 선심 하나에 매달린 채 불안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수많은 저항을 통하여 경험하는, 게다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젊은 처녀의 체
험이 때때로 가공할 만한 증상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잠재적인 조발
성 정신병이 첫경험의 충격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슈테겔은 그 몇가지 예를
들고 있다.
19세가 되는 M. G. 양은 갑자기 심한 착란증이 나타났다. 나는 그녀가 자기방에서 '난
싫어요! 싫어요,싫어요!' 하고 계속하여 고함을 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자기 옷을
찢고 알몸으로 복도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 결과 착란증은
가시고, 일종의 긴장상태로 변했다. 그녀는 속기 타이피스트로 근무하는 회사의 지배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한번은 한 명의 여자친구와 두 명의 남자동료와 함께 시골에 놀러갔다.
한 남자동료가 그녀에게 '그건 단지 장난에 지나지 않아요.'하고 굳게 약속하며 자기 방에
서 그 날 밤을 지내기를 요구했다. 그는 사흘 밤을 계속해서 그녀의 처녀성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녀를 애무했던 것 같다... 그녀는 '마치 개의 콧등과 같은 싸늘한 '태도를 견지하며,
그것은 더러운 짓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잠시 동안 그녀는 감동적으로 '알프레드,알프레
드(지배인의 이름)!'하고 외쳤다. 그녀는 후회했다. (어머니가 알면 뭐라고 할까) 그녀는
집에 돌아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L.X. 양은 완전히 기력을 잃고 자주 울음을 터뜨리며,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밤에 잠도 제
대로 자지 못했다. 그녀는 환각에 사로잡혀 주위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창틀에 올라서
서 거리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이 23세의 젊은 처녀가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내가 들어
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녀의 표정에는 불안과 공포가 나타나 있었다. 양손은 마
치 자기 몸을 방어하려는 듯이 앞으로 내밀었다. 꼬고 앉은 두다리가 경련을 일으키는 듯
이 움지기이고 있었다. 그녀는 '안 돼! 안 돼! 안 돼! 짐승 같으니, 이런 남성은 꽁꽁 묶
어놓아야 해, 아이 아파! 아!'하고 외쳤다. 그리고 영문 모를 말을 찌껄였다... 이 발작은
눈물로 조용히 끝났다... 병자는 마치 그것이 의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속옷으로 몸을 감싸
며 '안 돼! 를 연발해왔다. 알고 보니 이미 결혼한 직장동료 한 사람이 그녀가 몸이 불편
할 때 자주 찾아왔다. 그녀는 무척 기뻐했다. 그러는 곧 그녀는 자살의 유혹이 따르는 환
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병은 나았지만, 그 후에는 어떤 남성도 자기에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진지한 결혼신청도 거절했다.
같은 동기에서 생긴 병도 그처럼 중대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다음은 잃어버린 처녀성에
대한 후회가 최초의 성교에서 생긴 정신착란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이다.
어떤 23세의 처녀는 여러 가지 공포증에 걸려 있다. 그녀의 병은 키스나 화장실에서의
접촉으로도 임신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남성이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나서 물속에 정액을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녀는 자기가 보는 앞에서 욕조
를 세 번 씻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정상적인 자세로 배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처녀막 파상에 대한 공포증이 생겨 춤을 추거나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도 일체 하
지 않고, 성큼성큼 걸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길가에서 말뚝만 눈에 띄어도 난폭하게 처녀
성을 빼앗기지 않을까 두려워 몸을 떨면서 멀리 돌아갔다.
그녀의 공포증의 다른 하나는 기차 안이나 군중 속에서 주위에 있는 남성으로부터 고약
한 일을 당하여 처녀성을 잃고 임신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병의 말기에는 침대나 속
옷에 바늘이 꽂혀 있어, 그것이 자기 성기 속에 들어가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병자는
밤마다 알몸으로 방 한가운데 서 있고, 한편 그녀의 불행한 어머니는 힘든 속옷 검사를 하
도록 강요당했다... 그녀는 언제나 약혼자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다짐하고 있었다. 검시 결
과에 의하면, 그녀는 이미 처녀가 아니어서 만일 약혼자가 그 사실을 알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결혼을 연기해 나갔다. 결국 약혼자에게 자기가 어떤 테너가수에게 유혹을 받은 사실
을 고백하고, 그와 결혼하여 병이 나았다.(슈테켈의 <불감증의 여인>에서)
다른 한 예에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것은 후회(감각적인 만족에 의해 보상받지 못한)
이다.
20세인 H. S. 양은 어떤 여자친구와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다 온 후로 몸이 몹시 쇠약해
졌다. 그녀는 방에서 나오려고도 하지 않았고, 말도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요
양원으로 데려갔으나, 상태는 점점 악화될 뿐이었다. 그녀는 누가 자기를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웃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
왔으나 방 한구석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의사에게 물었다. "어째서 나는
죄를 짓기 전에 오지 못했을까요?"
'나는 이미 죽은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해체되어버렸다. 나는 더럽혀졌
다. 목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고, 세계와의 다리는 끊겨 있다.'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녀는 로마에서 약혼자를 만나, 그곳에서 오랜 저항 끝에 그에게 몸을 맡겼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곤 하였다... 그녀는 그 약혼자와 전혀 쾌락을 느끼지 못했다
고 고백했다. 그녀는 새 애인을 만나자 병이 나았고, 그에게서 만족을 얻어 그와 결혼했다.
내가 전에 유년시절의 고백을 실은 <빈의 귀여운 소녀>는 그녀가 장성하여 겪은 최초
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상세하고 심각한 것이다. 그녀의 소녀시절의 모험은 대
단히 조숙한 성경험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입문'은 완전히 새로운 것임을 알 수 있을 것
이다.
"나는 열여섯 살에 관청에 취직했어요. 열일곱 살 때 처음으로 휴가를 얻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참으로 근사한 기회였어요. 사방에서 내게 구혼을 해왔어요... 나는 관청의 한 동료
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와 함께 공원에 갔어요. 1909년 4월 15일에 있었던 일이에요.
그는 벤치에 앉아 나를 자기 곁에 앉혔어요. 그는 나를 포옹하며 입술을 벌리라고 부탁했
으나,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어요. 그는 내 윗도리 단추를 풀기 시작했어요. 기꺼이
응하고 싶었지만, 아직 내 유방이 작은 것을 상기하고 그가 건드리기만 해도 느꼈을 쾌감
을 단념했어요... 4월 7일, 어떤 기혼자인 동료가 함께 박람회 구경을 가자고 했어요. 우리
는 저녁에 술을 마셨어요. 나는 다소 방심하여 애매한 농담도 지껄이기 시작했어요. 간청
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차를 불러 그 속에 나를 밀어넣고,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내게 키스
를 했어요. 그는 점점 대담해져서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어요. 나는 힘껏 저항했으나, 그
가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생각나지 않아요. 이튿날 나는 상당히 찜찜한 기분으로 출근했어
요. 그는 내게 양손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손은 내게 할퀴어 상처투성이였어요... 그는 나
에게 자기 집에 자주 놀러오라고 말했어요... 나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호기심이 생겨 승낙했어요... 그가 내 몸을 더듬을 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피
했어요. 그런데 나보다 날렵한 그는 갑자기 나를 붙잡고 그의 손가락을 나의 질 속에 넣는
것이었어요. 나는 고통스러워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것은 1909년 6월 어느날에 있었던 일
이에요.
그후 나는 여자친구들과 여행을 떠났어요. 두 명의 관광객이 우리를 따라왔어요. 그들은
우리 일행과 어울리기를 원했어요. 내 파트너가 된 남성은 내 친구에게 키스하려고 했으므
로 그녀는 주먹으로 그를 한대 갈겼어요. 그러자 그는 등뒤에서 나를 붙잡고 강제로 키스
했어요. 나는 거역하지 않았어요. 그는 따라오라고 나를 유혹했어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숲속으로 들어갔어요. 그는 내게 키스했어요. 그가 내 성기에 키스했기 때문에 나는 몹시
화가 나서 말했어요. 어떻게 그런 더러운 짓을 할 수 있어요? 그는 내 손에 자기의 성기를
쥐어 주었어요... 나는 그것을 애무했어요... 갑자기 그는 내 손에서 그것을 빼고, 거기서
생기는 일을 나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손수건을 갖다 대었어요...
... 이틀 후에 우리는 함께 리징으로 갔어요. 어느 쓸쓸한 들판에서 그는 갑자기 외투를
벗어서 풀 위에 깔았어요... 그는 자기의 한쪽 다리를 내 양쪽 다리 사이에 넣고 나를 쓰러
뜨렸어요. 그래도 나는 아직 내 입장의 중대성을 깨닫지 못했어요. 나는 '나의 가장 아끼는
패물'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애원했어요. 그는 매우 거칠어져서 야비한
말을 내뱉으면서 경찰에 알리겠다고 나를 위협했어요. 그는 손으로 내 입을 막고, 자기 페
니스를 내 몸에 집어넣었어요. 나는 죽는 줄만 알았어요. 뱃속이 온통 뒤틀리는 느낌이 들
었어요. 일이 끝났을 때 나는 그가 그다지 싫지 않았어요. 나는 옆으로 누워 있었으므로,
그는 나를 일으켜야 했어요. 그는 두 눈과 얼굴에 키스를 했어요.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만일 그가 나를 부축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장
님처럼 차 위에 넘어졌을 거예요... 우리는 2등 객실에서 단둘이 있었어요. 그는 다시 이상
한 몸짓으로 내게 다가왔어요. 나는 소리를 지르며 기차의 맨 뒷계단까지 도망쳤어요... 드
디어 그는 천한 웃음소리를 내고 뒤쫓는 것을 포기했어요. 나는 그 웃음소리를 잊을 수 없
어요. 나더러 좋은 게 뭔지 모르는 바보 계집애라는 것이었어요. 그는 나를 빈에 혼자 돌
려보내 주었어요.
나는 빈에 도착하자 허겁지겁 화장실로 달려갔어요. 뭔가 뜨거운 것이 흘러 내리는 느낌
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핏자국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집에서 그것을 어떻게 감춰야
할지 알 수 없었어요.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가 몇 시간을 줄곧 울었어요. 나는 계속해
서 배에 압박감을 느꼈어요. 어머니는 나의 이상한 태도와 식용부진을 보고 무슨 언짢은
일이 있지 않았나 하고 걱정했어요. 그래서 나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지요. 어머니는 겁
내지 말라고 말했어요... 나의 동료는 나를 위로하려고 여러모로 노력했어요. 그는 컴컴한
저녁때 나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나의 스커트 아래를 애무했어요. 나는 그것을 허락했으
나, 이상한 기분이 들 때에는 너무도 부끄러워 몸을 도사렸어요."
그녀는 여러 번 그와 호텔에 갔으나 동침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부유한 청년을 알
게 되어 그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그와 잠자리를 같이했으나 아무 느낌도 없이 다
만 혐오스럽기만 했다. 그녀는 관청 동료와의 관계를 회복했으나, 그에게 싫증이 났다. 그
녀는 사팔뜨기가 되어 여위기 시작했다. 요양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한 젊은
러시아인과 동침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나, 최후의 순간에 그를 침대에서 쫓아냈다. 그
후에 그녀는 어떤 의사와 사귀고, 또 어떤 군인과도 사귀었으나, 성관계를 갖는 것은 거절
했다. 그 무렵부터 그녀는 정신적으로 병들어 요양을 하려고 생각했다. 그녀는 요양을 마
치고, 자기를 사랑하는 어떤 남성에게 몸을 맡겨 그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부터 그녀의
불감증은 없어졌다.
유사한 많은 사례 중에서 택한 이와 같은 일들은, 상대방의 난폭한 언행이, 적어도 돌발
성이 언제나 이런 증상이나 혐오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성의 입문에서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폭력이나 불의에 놀라움 없이, 그리고 까다로운 계율이나 장애도 없이 젊은 처녀가
서서히 그 수치심을 극복하여 상대방 남성과 친밀해져서 그의 애무를 즐기게 될 때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젊은 처녀들이 누리고 있고, 오늘날 프랑스 처녀들이 손에 넣으려고
하는 자유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처녀들은, '네킹(포옹)'도 '페팅(애무)'도 알
지 못한 채 성교에 들어간다. 젊은 처녀가 터부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을수록, 상대방에게
많은 자유를 느낄수록, 그리고 남성의 지배적인 성격이 사라질수록 그 입문은 쉬워진다.
만일 상대방 애인도 젊고 순진하고 소심하여 그녀와 비슷하면 처녀의 저항은 적어진다. 그
러나 그녀의 여성에의 변신은 그만큼 철저하지 못할 것이다.
<푸른 보리>에서 클레트의 뱅카는 난폭하게 처녀성을 빼앗긴 이튿날 친구인 필이 놀랄
만큼 평온한 태도를 보인다. 그것은 그녀가 상대방에게 '소유되었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
이다. 오히려 자기가 처녀성에서 벗어난 데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큰 정신적인 혼란을 느
끼지 않았다. 필이 놀라는 것은 잘못이다. 그의 여자친구는 남성과의 성적 경험이 없었다.
르노의 팔에 안겨 한바탕 춤을 추고 나서 클로딘은 더욱 충격을 받게 된다. 아직 풋과일
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프랑스의 한 여학생의 말에 의하며, 그녀는 어떤 남자친구와 하룻
밤을 같이 보내고, 이튿날 아침에 어떤 여자 친구에게 달려가서 "나 C와 같이 잤다. 재미
있었어." 하고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어떤 미국의 고등학교 선생은 나에게 그 학교 학생들
은 여성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처녀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들의 상대는 예의를 지
켜서 그녀들의 수치심을 함부로 해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들의 마음속에 마성을 불러일
으키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젊고 또 그들 자신이 너무 부끄러움을 탄다.
젊은 처녀들 중에는 자진하여 색정적 경험 속에 몸을 던져 성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
해 그런 짓을 되풀이하는 여성도 있다. 이렇게 해서 호기심과 강박관념에서 자기를 해방시
키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그녀들의 행위는 이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므
로 그 행위는 다른 처녀들이 미래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다. 도
전이나 걱정, 청교도적인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상대방에게 몸을 맡기는 것은 진정한 색정
적인 행위가 되지 못한다. 그 경우에는 위험도 없고 별 쾌감도 없이 하나의 대용품이 될
뿐이다. 성행위에는 불안도 수치도 따르지 않는다. 감동은 단지 표현일 뿐 쾌락이 전 육체
를 덮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처녀성을 잃은 여성은 여전히 젊은 처녀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육감
적이고 격렬한 힘을 지닌 남성을 상대할 경우에는, 그녀들 또한 처녀와 같은 저항을 한다
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그동안 그녀들은 아직 미숙한 연령기에 머물러 있다. 애무를 받
으면 간지럼을 타고 키스는 대때로 그녀들에게 웃음을 자아낸다. 육체적인 사랑을 하나의
유희처럼 생각하고, 만일 자기들이 그것을 즐기고 싶지 않다면 애인의 강한 요구는 그녀들
에게 곧 귀찮고 천해 보인다. 여러 가지 혐오나 공포감, 젊은 처녀 특유의 수치심을 간직
하고 있다. 만일 한평생 이 단계를 뛰어넘지 못하면(미국 남성들의 말에 의하면 이런 여성
이 미국 여성들 중에 많다고 한다) 그녀들은 반 불감증 상태로 일생을 보내게 된다. 흥분
과 쾌락 중에 자기를 육체화하는 데 동의하는 여성에게서만 참된 성적 원숙성을 찾아보게
된다.
그렇다고 타오르기 쉬운 체질을 가진 여성의 경우에는 무엇이든지 원만하게 진행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여성의 증상이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의 성적 흥분은
남성이 모르는 강도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다. 남성의 욕망은 강하지만 국부적이고, 남성은
욕망 때문에 경직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자의식을 잃는 경우가 없다.
여성은 이와 반대로 완전히 자기를 떠나 육체화된다. 많은 여성들에게 이 변화는 사랑의
가장 관능적이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마법처럼 두려운 성질을 갖
고 있다. 남성이 자기 품에 안고 있는 여성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만큼 여
성은 그 때 자기를 망각하고 환각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가 느끼는 흥분은 남성
의 공격적인 열광보다 훨씬 근본적인 변질이다. 이 열기가 그녀를 수치심에서 해방시킨다.
그러나 그 열기가 식어지면 더욱 수치스럽고 불쾌하기도 하다. 그녀가 그것을 행복으로(혹
은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관능의 기쁨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
녀가 그 욕망을 충족시키게 되면, 분명히 자기 것으로 인정하여 주장할 것이다. 아니면 그
녀는 그것을 분노로써 배격한다.
이제 여성의 에로티시즘의 근본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그 색정적 생활의 출발점에서 여
성의 권리포기는 확실한 쾌락으로 보상을 받지 못한다. 만일 그렇게 해서 천국의 입구가
열린다면 그녀는 수치심이나 자존심을 좀더 손쉽게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고찰한 바와 같이, 처녀성을 잃는다는 것은 소녀시절 에로티시즘의 행복하고 자연스러운
성취라는 형태를 띠지 못한다. 오히려 이것은 매우 이상한 현상이다. 질의 쾌감은 곧바로
생기지 않는다. 슈테켈의 통계(이것은 많은 성과학자 및 정신분석 의사들이 확증하고 있
다)에 의하면 최초의 성교에서 쾌감을 느끼는 여성은 불과 4%이고 50%는 몇 주일, 몇
달, 또는 몇 년 후가 아니면 질의 쾌감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서는 심리적인 이유가 중
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성에게는 때대로 의식적인 사실과 그 성기의 표현 사이에 아무
거리도 없다는 의미에서 여성의 육체는 매우 히스테릭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적인 억압
은 쾌락의 표출을 방해한다.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때때로 영속되며,
점점 강력한 장애가 된다. 많은 경우에 그 장애는 하나의 악순환을 만든다.
애인의 최초의 서투른 태도, 서투른 한마디 말이나 동작, 교만한 미소 따위가 밀월기간
중에, 혹은 결혼생활을 통하여 영향을 미친다. 여성은 곧 쾌감을 경험하지 못한 데 대해
실망하고 원한을 품어, 행복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 정상적인 쾌감
을 느끼지 못할 경우에도 남성은 음핵을 자극함으로써 그녀에게 성교의 쾌감을 줄 수 있
다. 이 쾌감은 도덕적인 교훈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이완과 진정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은 그것을 거절한다. 질의 쾌감 이상으로 그것은 무리하게 몸에 가해
진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만일 여성이 자기자신의 만족만 생각하는 남성의 이기주의
에 시달린다면, 그녀는 쾌락을 제공하려는 너무나 노골적인 상대방의 의지에 기분이 상하
게 된다.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을 슈테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상대방을 지배하
는 것을 의미한다. 남에게 몸을 맡긴다는 것은 자기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다." 만일 성
공한 정상적인 성교의 경우처럼, 쾌락이 남성 자신이 얻는 쾌락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
는 것처럼 생각될 때 여성은 그것을 좀더 즐겁게 받아들일 것이다. "여성들은 상대방 남성
이 자기들을 지배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꺼이 지배를 받는다."고 슈테켈
은 말하고 있다.
만일 그녀들이 이 의사를 분명히 알아차렸을 때에는 반항한다. 많은 여성들은 손으로 애
무를 받는 데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손은 그것이 주는 쾌감과는 관계가 없는 하나의 도구
이며, 성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기도 만일 욕망에 의해 침투된 하나의 육신이 아니라, 교
묘히 조작된 하나의 도구처럼 생각될 경우에는, 여성은 마찬가지로 반감을 느낀다. 그리고
어떠한 대체물도 자기는 정상적인 여성의 감각을 모른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뿐이라고 여
길 것이다. 슈테켈은 많은 관찰을 한 후에 이른바 불감증 여성의 욕망은 모두 결국 다음과
같은 기준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그녀들은 정상인 여성처럼 오르가슴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다. 그밖의 모든 처치는 그녀들을 정신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성이 취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만일 남성의 욕망이 강하여 야수적일 경
우에, 상대방 여성은 남성의 품안에서 물건이 되어버린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지나치게 자제하여 너무 이성적일 경우 역시 그는 육신이 될 수 없다. 그는 여성에게
객체화될 것을 요구한 채 자기 자신은 그녀에게 잡힐 틈을 주지 않는다. 그 어느 경우에도
여성의 자존심은 반항한다. 그녀가 자기의 육체적 객체에의 변형과 주체로서의 요구를 조
화시킬 수 있으려면, 자기를 남성의 먹이로 주는 한편 남성도 자기의 먹이로 삼아야 한다.
여성이 불감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만일 애인에게 매력이 부족하거나 냉정하거나 서투른 경우에, 그는 그녀의 성욕을 환기
시키는 데 실패하거나, 그녀를 불만족 상태로 방치해 둔다. 그러나 그가 남성적이고 노련
하더라도 상대방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여성은 지배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들은 남성이 소심하고 재능이 없고 절반쯤 무력하기까지 하더라도, 자
기들을 위협하지 않는 남성에게서만 쾌락을 얻을 수 있다.
여자 애인을 화나게 하거나 원망하게 하는 것은 남성으로서는 서툰 짓이다. 원망은 여성
의 불감증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다. 그녀는 침대에서 자기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욕에
대하여 우롱받는 듯한 냉담한 태도로 남성에게 보복한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나에게는 결점이 있으므로,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어차피 나는 무시당한 여자이므
로, 나도 사랑이나 욕망이나 쾌락에 빠져 당신에게 몸을 맡기지 않을 거예요. 남성이 그녀
를 냉담하게 대하여 굴욕을 주거나, 그녀에게 질투심을 야기시키거나, 사랑의 고백을 머뭇
거리거나, 그녀 쪽에서 결혼을 바라고 있는데 정부로만 취급할 때, 그녀는 이렇게 그와 자
기자신에 대해 보복한다. 불만의 표시는 갑작스럽게 표출되어, 처음에는 매우 순조롭던 관
계 도중에 이런 반동이 시작되는 경우가 있다. 여성에게 이런 반감을 일으킨 남성은 자기
힘으로 이를 잘 극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상대방에게 믿음을 주어 사태를 완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애인의 품속에서 외고집만 부리던 여성이 손가락에 약혼 반지를 끼는 순간, 태도가 일변하
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행복해지고 사랑을 받고 마음이 평화로워지면, 그녀들의 저항은
말끔히 사라진다. 그러나 원한을 품고 있는 여성을 행복한 연인이나 아내로 쉽게 일변시키
는 것은 공손하고 정답고 인자한 남성의 태도이다. 만일 그가 그녀를 그 열등의식에서 해
방시켜주면 그녀는 그에게 기꺼이 몸을 맡긴다.
슈테켈의 <불감증의 여인>의 근본적인 의도는, 여성의 불감증에 대한 심리적인 원인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다음의 여러 가지 사례는, 불감증이 남편이나 연인에 대한 원망의 표
출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G. S. 양은 결혼하기 전부터 어떤 남성에게 몸을 맡겼는데, 자기는 속박받는 것이 싫어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유로운 여성으로 자부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도덕의 노예였다. 그러나 그녀의 애인은 그녀의 말만 믿고, 조
금도 결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외고집은 점점 굳어져 불감증이 될 정도였다.
드디어 애인이 그녀에게 구혼했을 때, 그녀는 자기가 신경쇠약에 걸려 있는 것을 고백하
고, 이제 결혼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여 보복했다. 행복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
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애인의 구혼을 기다리기에 지쳐 있었다... 그녀는 질투에 시달리
며 교만하게 구혼을 거절하기 위해 그가 구혼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후 그녀는 오직
그 애인을 멋있게 벌하기 위해 자살하려고 했다.
그때까지 남편과 쾌락을 즐기면서도 질투가 심한 어떤 여성은, 자기가 병들어 있는 동안
에 남편이 자기를 배반했다고 상상했다. 집에 돌아가면, 남편을 냉대하려고 결심했다. 앞으
로는 남편에 대해 흥분을 느껴서는 안된다. 그는 자기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필요한 때에
만 그녀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후에 그녀는 불감증이 생겼다. 처음에 그녀는
흥분하지 않기 위해 책략을 썼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 여자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곧 고통은 오르가슴으로 바뀌었다.
17세의 처녀가 어떤 남성과 관계를 가져 강렬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19세에 임신하
자, 그녀는 애인에게 결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결심이 서지 않아 그녀에게 낙태를 권
했다.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3주일 후에 남성은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3주일 동안 괴로워했던 그 일로, 그
를 용서하지 않아 불감증에 걸리고 말았다. 훨씬 나중에 남편과 마음을 터놓고 진정한 대
화를 나누고 나서야 그녀는 불감증에서 벗어났다.
N. M. 부인은 남편이 자기와 결혼한 지 이틀 만에 옛 정부를 만나러 간 것을 알게 되었
다. 그때까지 그녀가 느끼고 있던 오르가슴은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자기는 이제 남편
의 눈 밖에 났다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에게 실망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불감증의 원인이 되었다.
여성이 자기저항을 극복한 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질의 쾌감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이것으로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성의 성욕의 리듬은 남성의 성욕의
리듬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성보다도 훨씬 뒤늦게 즐긴다.
성교가 시작되어 2분이 지나면, 대다수 남성의 4분의 3은 오르가슴을 경험한다고 킨제
이의 보고는 말하고 있다. 그 생활환경이 성적 상황에 불리하여 오르가슴에 도달하려면 1
0분에서 15분 동안 활발한 자극을 필요로 하는 많은 인텔리 여성과 일생을 통하여 오르가
슴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여성들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남성은 상대방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사정하지 않고 성행위를 연장시키는 특수한 능력이 필요하다.
인도에서는 남편이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성행위 도중에 담배를 피운다고 한
다. 서양에서는 카사노바 같은 남성이 자랑하는 것은 오히려 그 횟수이며, 최고의 자부심
은 상대방 여성을 항복시키는 것이다. 색정적 전통에 따르면, 이런 일은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남성들은 흔히 자기 아내의 무서운 요구를 개탄한다. 그것은 광
적인 자궁, 식인 마녀, 굶주린 여성이다. 그녀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몽테뉴는 이런 견
해를 <수상록> 제3권 5장에서 피력하고 있다.
여성 쪽이 남성보다 사랑의 행위에서는 훨씬 유능하고 열렬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
다. 때로는 남성이었다가 때로는 여성이었던 고대의 신관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
고 그녀들 자신의 입에서도 이 방면에 정통한 로마의 유명한 어느 황제와 황후가 각각 다
른 시대에 그것에 대해 증거를 보여주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그는 하룻밤에 포로로
잡혀온 사르마티아 처녀를 10명이나 유린했다. 그런데 황후는 하룻밤에 그 욕망과 취향에
따라 상대를 바꾸어가면서 25차례나 하였다.)
육욕에 불타 그녀는 지쳐버렸지만
아직도 싫증은 느끼지 않는다.(<유베날리스>에서)
카타롤니아에는 이런 재판도 있었다.
어떤 부인이 와서 남편이 너무 치근거린다고 하소연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녀가 그것
을 싫어한 것 같지는 않았다.(나는 신앙 이외에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이에 대해 아라
공 여왕이 유명한 판결을 내렸다. 이 친애하는 여왕은 신중히 생각한 끝에... 정당하고 필
연적인 한계로서, 하루에 여섯 번으로 한정했다. 여왕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여성의 요구
와 욕망을 크게 억제하며 실행하기 쉬운, 따라서 영원불변의 규칙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사실 여성에게 관능적인 쾌락은, 남성과 양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질의 쾌감이 그
대로 결정적인 오르가슴에 도달하는지의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
했다. 이 점에 관한 여성의 고백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그녀들이 정확하게 말하려고 해도
애매성을 피할 수 없다. 반응은 사람에 따라 크게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남성에게는 성교에 분명한 생리학적인 결말인 사정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
결말에 도달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많은 의도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결말에 이
르게 되면 그것은 도달점이 되어, 욕망을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소멸이
된다.
이와 반대로 여성의 경우는, 처음부터 목적이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본래 여성
의 경우에 성교는 생리학적이라기보다는 심리학적인 것이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관능적인
쾌감을 바라지만, 그녀의 육체는 사랑의 행위의 어떤 분명한 종결도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
다. 그녀에게 성교가 완료되는 일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며, 그것은 어떤 결말도 갖지 않
는다.
남성의 쾌감은 활처럼 상승하고, 어느 일정한 문턱에 도달하면 완성되어 오르가슴의 절
정에서 갑자기 까부라진다. 그 성행위의 구조는 한정되어 있고 단절되어 있다. 이에 비해
여성의 쾌락은 전신에 퍼져 있고, 생식기관에만 집중되어 있지 않다. 오르가슴 자체보다는
오히려 질의 수축이 하나의 파동을 형성하고, 그 파동은 리드미컬하게 생겨났다가 사라지
고 다시 나타나 때때로 극점에 도달한 다음에 헝클어지지만 완전히 죽지 않고 재기한다.
즉 어떤 일정한 기한도 정해져 있지 않고 무한을 지향하기 때문에 여성의 색정 능력의 한
계가 되는 것은 분명한 만족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경 또는 심장의 피로나 심리적인 포
만감인 경우가 많다. 여성은 만족을 느끼든 피로하든 결코 완전히 해방되는 일이 없다. 유
베날리스의 말에 의하면 "피로하지만 아직 싫증은 느끼지 않는다."이다.
남성이 상대방에게 자기 자신의 리듬을 옮기려고 생각하거나 그녀에게 오르가슴을 일으
키려고 하면 크게 실패하기 마련이다. 대개의 경우에 그것은 여성이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즐기려고 하는 쾌락의 형태를 도중에 깨뜨려버리는 결과가 된다.
이 특유한 형태는 상당히 자유롭게 자기 자신에게 시한을 줄 수도 있다. 질 내에 또는
전 생식계통에 극한되어 있는 일종의 경련이나, 전신에서 발산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
다. 어떤 여성에게는 이런 경련이 오르가슴과 동일시될 만큼 매우 세차게 규칙적으로 일어
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성은 남성의 오르가슴 속에 자기의 기분을 진정시키고 만족스러
운 종결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매우 원활하면서도 조용히 해소될 수도
있다. 성교를 효과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소심하고 단순하며 우직한 많은 남성들이 생각
하는 것처럼 쾌락의 수학적인 동시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색정의 복잡한 형태가 안정되
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여성을 '즐겁게'하는 것은 시간과 기교, 즉 원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남성
들은 여성의 성욕이 그 분위기 전체에 의해 얼마나 좌우되는가를 모르고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여성의 경우에 성욕이란 일종의 마술적인 효과를 지닌 것으로, 그것은 자기를
송두리째 내던지기를 요구한다. 만일 말이나 동작이 애무의 마술에 거슬릴 때는 그 신통력
은 즉시 사라진다. 애무할 때 여성이 자주 눈을 감는 이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생리학적으로는 동공의 확대를 보상하는 의미를 갖는 반사작용이다.
그러나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눈을 감는다. 그녀는 모든 무대배경을 없애버리고 싶은 것
이다. 그 순간의 특이성이나 자기 자신의 특이성도, 그리고 애인의 개성도 없애버리고 싶
어한다. 어머니의 품속처럼 불명료한 육신의 어둠 속에서, 자기를 없애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특히 그녀는 남성을 자기에게 정면으로 대립시키는 분리의 소멸을 원하며 융합되
고 싶어한다. 이것도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여성은 자기를 객체로 하면서 주체로 머물기
를 원한다. 여성은 그 전신이 욕망이고 착란이기 때문에, 남성보다 깊이 자기를 버린다. 그
러므로 상대와의 결합에 의해서만 주체일 수 있다. 받는 것과 주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
다. 만일 남성이 주지 않고 취하기만 하거나, 또는 자기는 즐기지 않고 여성에게 쾌락을
주기만 한다면, 그녀는 교묘히 조종당했다고 느낀다. 그녀가 타자로서 자기를 실현하자마
자, 그녀는 비본질적인 타자가 된다. 그녀는 타성을 부정해야 한다. 그래서 여성에게는 육
체가 떨어지는 순간이 언제나 가장 괴롭다.
남성은 성교를 마친 후에 외로움을 느끼든 즐거움을 느끼든, 혹은 자연에 우롱당했다는
기분이 들든 아니면 여성을 정복했다고 느끼든 간에, 어쨌든 육체를 부정한다. 그는 다시
완전무결한 육체로 돌아가 잠을 자고 목욕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
가고 싶어한다. 반면에 여성은 그녀를 육체화한 마술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육체의 접
촉을 연장하기를 원한다. 남성의 몸에서 떨어지는 것은 새로운 이유와 마찬가지로 괴로운
것이다. 자기에게서 너무나 매정하게 떨어져나가는 애인에게 그녀는 반감을 느낀다. 그러
나 그 이상으로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녀가 한순간 믿었던 두 사람의 빈틈없
는 융합을 의심하게 하는 말이다.
마들렌 부르둑스의 말처럼 질르의 아내는 남편이 "좋았어?" 하고 묻자 반발하여 남편의
입을 손으로 막는다. 이 말은 많은 여성들에게 불쾌감을 준다. 쾌락을 자기 폐쇄적인 분리
된 감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충분해? 더 할까? 좋았어?" 하고 질문하는 것 자체가 분리
를 표명하여, 사랑의 행위를 남성이 마음대로 그 방향을 정하는 기계적인 작업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분명히 그럴 심산으로 그런 질문을 한다. 그는 두 사람의 융합이나 상호성
보다는 지배를 요구한다.
그는 결합이 풀리면 다시 자기만이 주체가 된다. 남성이 이와 같은 특권을 포기하기 위
해서는 많은 사랑과 관용을 필요로 한다. 그는 여성이 본의 아니게 수치를 당하고 소유되
었다고 느끼기를 바라고 있다. 언제나 그는 여성이 자진하여 몸을 제공하는 것보다 좀더
많이 그녀를 취하려고 한다. 사랑의 행위를 하나의 투쟁으로 생각하는 콤플렉스를 가진 남
성들이 많지 않다면, 여성은 많은 어려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성은 침
대를 투기장처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젊은 처녀에게는 나르시시즘이나 자존심 등과 동시에 지배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어느 정신분석학자에 의하면, 마조히즘(이성에게 얻어 맞거나 하여 성적 쾌락을 느
끼는 변태성욕)은 본래 여성의 특색 중 하나라고 하며, 이런 경향 때문에 여성은 그 색정
적 숙명에 잘 적응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마조히즘의 개념은 매우 애매하여, 우리는
그것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프로이트의 견해에 따라 마조히즘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그 하
나는 고통과 성적 쾌락의 결합에 의해 성립되고, 다음은 여성이 색정적으로 남성에게 의존
하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성립되며, 또 하나는 자기징벌의 메커니즘 위에 성립된다. 처녀
성의 상실이나 분만 등에 쾌락과 고통이 결합되어 있으며, 자기의 수동적인 역할에 동의하
고 있으므로, 마조히즘적이라고 한다.
먼저 유의해야 하는 것은, 고통이라는 것에 일종의 색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해서, 그
것이 곧 수동적인 순종이라는 생활태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때로 고통은 그것
을 겪고 있는 개인의 강인성을 높이거나, 흥분, 쾌락이 심하여 마비된 감각을 신선하게 하
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육체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예리한 빛이다. 그 빛은, 거기 실신해
있는 사랑하는 남성을 다시 그곳에 뛰어들게 하기 위해 저승에서 구출한다. 고통이란 정상
적인 의미에서 색정적 흥분의 일부가 되어 있다. 서로의 환희를 위한 육체임을 서로 기뻐
하는 두 육체는, 갖은 방법으로 만나고 결합하고 또한 대결하고 싶어한다. 색정 속에는 자
기망각과 격정과 황홀이 있다. 그리고 고통은 자기의 한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그것은 일
종의 초월이며 극도이다. 고통은 언제나 감각의 영역에서 큰 역할을 한다. 누구나 미묘함
과 괴로움은 종이 한 장의 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애무는 고문이 될 수도 있고, 형벌이
나 쾌락을 줄 수도 있다. 포옹은 깨물거나 꼬집거나 할퀴는 것과 쉽사리 이어진다.
이런 행동이 모두 사디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파괴작용이 아니라 합일에의 욕구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주체는 서로 상처를 입히거나 모욕하는 일 없이 결합하
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런 행동이 남성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실상
고통이 예속의 표명으로서 이해되고 요구되는 경우에만, 마조히즘적인 양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처녀를 상실한 고통에는 분명한 쾌락이 수반되지 않는다. 분만의 고통은 모든 여
성들이 두려워하고 있지만, 다행히 현대적인 의술이 그것을 없애준다. 그러므로 고통은 여
성의 성욕에서 남성의 성욕과 똑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여성의 순종이라는 것도 매우
애매한 관념이다.
지금까지 고찰해 온 바에 의하면, 대개의 경우에 젊은 처녀는 '상상적'인 것으로서 반신
이나 영웅이나 남성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것은 아직 나르시시즘적인 유희에 지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현실세계에서 이런 권위의 육체적인 표현에 얌전히 따
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이와 반대로 젊은 처녀는 종종 자기가 찬탄하고 존경하는
남성을 거부하고 오히려 보잘것없는 남성에게 몸을 맡긴다. 구체적인 행동의 열쇠를 환상
속에서 찾는 것은 잘못이다. 환상이 환상인 한, 자신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애무할 수 있
기 때문이다. 공포와 기쁨이 혼합된 심정에서 폭행을 꿈꾸는 소녀는 폭행당하기를 원치 않
는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야말로 혐오스러운 파멸이다. 우리는 이미 마리 르
아르두앵의 경우에서 이 모순의 대표적인 예를 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폐기 도중에 있는 영역이 아직 남아 있어서, 나는 거기 들어갈 때면 코를 막고
가슴을 두근거렸다. 그것은 사랑의 관능성을 초월하여, 단지 관능 자체에만 인도하는 영역
이다... 꿈 속에서 내가 범하지 않은 교활한 추행은 하나도 없다.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기를 확인하려고 애썼다.(<검은 돛>에서)
여기서 다시 한 번 마리 바슈키르체프의 경우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생애를 통하여 어떤 '착각의 지배'하에서 자기를 '의지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
다. 그러나 내가 시험해 본 모든 사람들은, 나에 비해 너무 평범하여 나는 그들에게 혐오
감을 느낄 뿐이었다.
여성의 성적 역할이 대부분 수동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동적인 입
장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남성의 정상적인 공격성이 사디즘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
지로 마조히즘적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은 자기의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애무, 흥분, 돌입
을 자기 자신의 쾌락으로 끌어갈 수 있다. 애인과 굳은 결합을 구할 수도 있고 자기를 상
대방에게 바칠 수도 있다. 이것은 기권이 아니라 초월을 의미한다. 마조히즘은 개인이 타
인의 의지에 의해 순수한 물체가 되려고 생각하는 데서, 즉 자기를 물체로 생각하고 물체
인 것처럼 행동하려고 하는 데서 나타나게 된다.
"마조히즘은 자기의 객체성에 의해 타인을 매혹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자기의 객관성에 의해 자기 자신을 매료하기 위한 시도이다.(사르트르 <존재와 허무>에
서) 사드의 쥘리에트나 <규방철학>의 젊은 처녀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남성에게 몸을
맡기지만 그것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이므로, 두 사람은 결코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채털
리 부인이나 케이트(로렌스의 <사랑하는 여인>의 주인공)도 자기를 전적으로 상대방에게
맡기는 데 동의하고 있으므로 마조히스트는 아니다. 마조히즘을 운운하기 위하여는 자기가
밖에 놓여 있어야 하며, 이 옮겨진 이중성(제2의 자기)이 타인의 자유 위에 기반을 두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여성에게는 진짜 마조히즘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처녀에게
는 그런 경향이 있다. 그녀는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쉬우며, 또 나르시시즘은 그녀의 자아
속에 자기를 옮기는 데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에로티시즘에 입문하는 첫머리에서
심한 흥분이나 욕망을 느낀다면, 그녀는 자기의 경험을 현실적으로 살려, 그녀가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관념적인 극점을 향하여 그 경험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감증
속에서 자아는 자기를 계속 주장한다. 자기를 어떤 남성을 위한 물체로 여기는 것은 실패
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마조히즘은 사디즘(상대에게서 학대를 받는 데서 성적 쾌락을 느끼
는 마조히즘과는 달리, 상대를 학대하여 성적 쾌락을 느끼는 변태성욕)과 마찬가지로 죄의
식을 조성한다. 자기에게는 죄가 있다. 확실히 자기가 객체라는 것만으로도 죄이다. 이런
사르트르의 견해는 '자기징벌'이라는 프로이트의 관념과 일치한다. 젊은 처녀는 그 자아를
타인에게 맡겨버리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고 고의로 치욕과 복종을 가중시켜 자기 자신을
벌한다.
그녀들이 미래의 애인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을 여러 모로 벌하여, 미래에 대한 복종을
스스로 벌하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애인이 나타났을 때에도 역시 이런 태도를 바꾸
지 않는다. 불감증 자체도 여성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상대방에게 내
리는 징벌이라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자존심이 강한 여성은 상대방과 자기 자신
을 원망하여 일부러 쾌락을 체험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조히즘이 되면 이런 여성은 남성의
노예가 되어 그를 존경하는 언사를 늘어놓고, 수치와 구타를 당할 것을 자진하여 원한다.
그녀는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에 자극을 받아 자기 포기를 가속화한다.
이것은 마틸드 드 라 몰르(<적과 흑>에 나오는 여성)의 행동에 나타나 있다. 그녀는
쥘리앙에게 몸을 맡긴 것을 후회하고 있다. 때때로 그녀가 쥘리앙의 발 아래 엎드리거나
그의 자의에 따르려고 하거나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 자
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반항한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있어도 얼음덩이처
럼 싸늘할 것이다. 마조히즘적인 여성이 거짓으로 몸을 맡기는 것은 오히려 새로운 장애를
만들어 그녀에게서 점점 쾌락을 차단해 버린다. 동시에 그녀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모욕하
는 것은, 쾌락을 아는 데 있어서의 무능력이 원인이 되어 있다. 불감증에서 마조히즘에 이
르는 악순환은 그 보상으로서 사디즘적인 행동을 수반하면서 영구히 반복된다.
색정적으로 어른이 된 여성이 그 불감증에서, 그리고 나르시시즘에서 해방되어 성적 수
동성을 받아들이면서, 그 수동성을 좀더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마조
히즘의 역설적인 의미는, 주체가 자기를 포기하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자기를
재확인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주체가 자기를 잊을 수 있는 것은 타자에게 함부로 자기를
주고, 타자를 향한 자발적인 행동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여성이 남성보다 마조히즘
의 유혹에 끌리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성욕에 있어서 수동적 객체로서 여성의 입장은 그
녀에게 수동적인 역할을 하게 한다. 그 역할은 그녀의 나르시시즘적인 반항과 그 결과인
불감증에 의해 초래되는 자기징벌이다. 많은 여성들, 특히 젊은 처녀들이 마조히스트가 된
다는 것은 사실이다. 콜레트는 자기의 첫사랑의 경험을 말하면서 <나의 수업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젊음과 무지의 탓도 있었지만, 먼저 도취로부터 시작했다. 그것은 죄 많은 도취로,
보기 흉하고 불순한 사춘기의 무분별이었다. 겨우 적령이 될까말까 한 처녀가 중년 남성의
구경거리가 되고 장난감이 되고 음탕한 걸작이 되기를 꿈꾸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녀들은
더러운 욕망을 만족시키면서 속죄한다. 그것은 사춘기에 흔히 있는 신경병, 즉 분필이나
숯을 깨물고, 양칫물을 마시고, 음란한 책을 읽고, 손바닥에 핀을 꽂는 등의 습관과 병행하
는 욕망이다.
마조히즘은 젊은이의 변태행위의 일부이며, 그것은 여성의 성적 숙명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일어나는 분규나 충동을 올바르게 이끌어가는 해결책이 되지 못하며, 단지 그 속에
서 헤매거나 도피하려고 하는 태도의 하나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것은 절
대로 여성의 색정의 정상적이고 행복한 형태로 볼 수 없다.
사랑의 행복한 형태는, 연애, 애정, 관능 속에서 여성이 자기의 수동성을 잘 극복하여 상
대방 남성과 대등한 관계를 이루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남녀간에 투쟁이 있는 한, 양
자의 에로티시즘의 불균형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욕망과 존경을 동시에 느낄 때에는 이런 어려운 문제도 쉽사리 해결된다. 남성 쪽에서 그
녀의 자유를 충분히 인정하고 그녀의 육체를 원한다면, 그녀는 객체가 되는 순간에 자기를
본질로서 재발견하여 자진하여 따르는 복종 속에서 자유로이 머물 수 있다.
그때야말로 연인들은 각자 고유한 방법으로 공통된 쾌락을 느낄 수 있다. 쾌락은 그 상
대방 속에 원천을 가지면서 쌍방의 당사자에 의해 분명히 자기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받
는다는 말과 준다는 말은 서로 그 의미를 교환한다. 만족은 감사이고 쾌락은 애정이다. 자
기와 타자와의 상호인식은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형태를 취하여 타자와 자기와의 가장 예
리한 의식 속에서 성취된다. 어떤 여성들은 남성의 성기를 마치 자기 자신의 몸의 일부로
느낀다고 하고, 어떤 남성들은 여성을 자기가 침입하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불확실하다. 타자의 차원은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 타성이 적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성행위에 감동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이 분리 속에서의 육체적 결합 의식이다. 상대
와 함께 자기의 한계를 부정하고 또 긍정하는 두 존재는 같으면서도 다르기 때문에 놀라
게 된다. 이 다른 점이 양자를 멀리 떼어놓아 고립시키는 경우가 많지만, 다시 결합했을
때는 오히려 그들에게 감격의 원천이 된다. 여성을 불태우는 부동의 정염, 여성은 남성의
거친 격정 속에 이 정염의 전도된 모습을 보게 된다. 생명으로 부풀어오른 남성의 상징(성
기)은, 마치 여성의 미소가 그녀에게 쾌락을 주는 남성의 것인 것처럼 그녀의 것이다. 남
녀가 갖고 있는 부는 모두 서로에게 반영되고 상대방을 통하여 재인식되며 동적이고 황홀
한 결합을 이루게 한다. 이와 같은 조화에 필요한 것은 기교적인 세련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이고 색정적인 매력을 토대로 한 육체와 정신의 상호적인 관용이다.
이 관용은 남성의 경우에는 흔히 허영심에 의해 저지되고, 여성의 경우에는 소심에 의해
저지된다. 여성은 그 억압을 극복하지 않는 한, 이 관용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 여성의
완전한 성적 성숙이 크게 더딘 것은 이 때문이다. 35세쯤 되어야 그녀는 색정적으로 그
정점에 도달한다. 만일 그녀가 결혼했을 경우, 그녀의 남편은 그 무렵이면 아내의 불감증
에 익숙해진다. 그녀가 새로운 애인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도 점점 시들어가기
시작한다. 앞날이 길지 않다. 매력이 없어질 무렵에 이르러, 많은 여성들은 겨우 자기욕망
을 인정하게 된다.
여성의 성생활이 전개되는 여러 가지 조건은 이런 사정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의 사회적, 경제적 입장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 이 총체적인 관련을 무시하고, 그 이상으로
여성의 성생활을 연구하는 것은 추상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온 검토에서 몇 가지 보편적인 가치가 있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색
정적인 경험은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형태로 그들이 살아 있는 입장의 애매성을 발견하
게 하는 인생체험의 하나이다. 그들은 그 속에서 육체로서, 또는 정신으로서, 타자로서, 주
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이 충돌이 특히 극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여성의 경우이다. 그
이유는, 여성은 자기를 객체로 파악하고, 쾌락 속에 확실한 자주성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
문이다. 그녀는 육체로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자유로운 초월자인 주체로서의 품위를 회복
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위험이 많이 따르므로 종종 좌절한다. 그러나
여성의 입장 자체의 괴로움과 어려움은 남성이 고지식하게 속고 있는 그 '속임수'에서 그
녀를 지켜준다. 남성은 공격적인 역할과 오르가슴의 독선적인 고독에 내포된 허위의 특권
에 쉽사리 속고 있다. 여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진정한 체험을 갖게 된다.
여성은 수동적인 역할에는 다소 정확하게 적응해도, 능동적인 개인으로서는 언제나 손해
를 보고 있다. 여성이 남성을 부러워하는 것은 그 소유를 위한 기관이 아니라, 그 먹이이
다. 남성이 상냥하고 애정에 충만한 부드러운 감각세계, 즉 여성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반
면에 여성은 거칠고 살벌한 남성적인 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상한 아이러니이다.
여성의 손은 아직도 매끄러운 살갗이나 녹을 듯이 부드러운 육체를 껴안고 싶은 욕망을
잃지 않고 있다. 즉 새파란 소년, 여성, 꽃, 모피, 어린이 같은. 그녀 자신의 일부가 그런
역할을 하고 싶은 만큼, 그녀는 자기가 남성에게 주는 것과 똑같은 보물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많은 여성들에게 다소 미완성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동성애의 성향이 남아 있는 것은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복잡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이 성향이 특수한 세력을 갖고 나타
나는 여성도 있다. 모든 여성들이 안고 있는 성적 문제에 대해 사회가 공인하는 고전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인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또한 반도덕적인 길을 택하는 여성들에 대해
서도 고찰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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