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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동성애의 여성

by FraisGout 2020. 7. 26.

  동성애의 여성이라고 하면, 남자처럼 펠트 모자를 쓰고 머리를 짧게 깎고 넥타이를 맨 
모습을 상상하기 쉽다. 이런 여성의 남성 같은 모습은 호르몬 분비가 정상적으로 되지 않
아 변태로 나타나 있다고 한다. 성도착자와 남성 같은 여성을 혼동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터키 왕궁의 후궁이나 매춘부처럼 '여성다움'을 파는 여성 중에도 성도착자가 적
지 않다. 이와 반대로 '남성적인' 여성의 대다수는 성적으로는 정상이다. 성과학자나 정신
분석학자들은 일반사회에서 관찰되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고 있다. 즉 '저주받은 여성들'(성
도착증이 있는 여성)의 대부분은 생리적으로는 다른 여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어떤 '해
부학적 숙명'에 의해서도 그녀들의 성욕이 결정되어 있지는 않다.
  생리적인 조건이 특수한 케이스를 조성하는 경우도 있다. 남녀 양성 사이에는 엄밀한 생
물학적 구분은 없다. 동일한 생식조직이 원형적으로 결정된 방향의 호르몬 작용에 의해 각
각 변화되어 간다. 그러나 그 방향은 태아가 성장하는 도중에 빗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래
서 남성과 여성의 중간적인 개체가 나타나게 된다. 어떤 남성은 남성기관의 발달이 더디기 
때문에 여성과 같은 외모를 하고 있다. 처녀가(특히 스포츠를 좋아하는) 도중에 남자로 변
하는 예는 흔히 볼 수 있다. H. 도이치는, 결혼한 부인에게 열렬히 반하여 그 여성을 납치
해서 함께 살려고 했던 어떤 젊은 처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어느날 이 처녀는 자기가 실제로는 남자인 것을 알아차리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여 
아기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 때문에, 동성애의 여성을 모두 거짓외모 밑
에 '숨겨진 남성'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양성 생식기관의 형태를 어렴풋이 갖춘 반음
양은 때때로 여성의 성본능을 갖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런 한 여성은 나치에 의해 빈
에서 추방되었는데, 자기는 남자만을 사랑하지만 정상성욕을 지닌 남자나 남색가 모두에게 
호감을 사지 못한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정말 '남성화한' 여성은 남성 호르몬의 영향을 받
아 부차적인 남성적 성본능의 특징을 나타낸다. 언제까지나 미성숙한 여성은 여성 호르몬

이 결여되어 그 발달이 불완전한 채 정지되어 있다. 이런 특색이 다소라도 직접적으로 동
성애의 성향을 조성하는 동기가 될 수도 있다.
  정력적이고 공격적이며 왕성한 생활력을 갖고 있는 여성은 적극적으로 자기의 정력을 
소비하고 싶어서 완강하게 수동성을 거부한다. 용모를 잘 타고나지 못한 못생긴 여성은 남
성적인 성질을 지님으로써 그 열등성을 커버하려고 한다. 이 경우에 색정감각이 발달되어 
있지 않으면 그녀는 남성의 애무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생리와 호르몬은 단지 하나의 
상황을 설정하는 데 그치므로 그녀가 자기를 예속시킬 대상을 정하지는 않는디. H. 도이치
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자기가 돌본 폴란드의 부상병에 대
한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그 사람은 분명히 남성화의 특징을 지닌 처녀였다. 그녀는 간
호사로 종군했으나, 후에 남자 병사의 군복을 입고 싶은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그녀
는 어떤 병사와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후에 그녀는 이 남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동성애의 
남자로 보이게 되었다. 그녀는 남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색정적으로는 여자였
다. 남색가의 생리기관이 완전히 남성적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여성이 남성적이라는 
것만으로 반드시 동성애를 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생리적으로 정상인 여성의 경우에도 '음핵형'과 '질형'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있었다. 전자는 동성애의 성향으로 기울기 쉽다. 여자 어린이의 성감은 모두 음핵과 관련
이 있다는 것은 이미 말한 적이 있다. 그 성감이 이 단계에 머물러 있느냐 더욱 발달하느
냐 하는 것은, 해부학적 조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유소년기의 자위행위, 후에 음핵감각
계가 후에 특권을 갖는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오늘의 성과
학은 유아의 자위행위 속에 정상적인, 그리고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현상을 인정하고 있
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여성의 에로티시즘의 발달은 생리적인 인자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심리적인 역사이며, 그것은 생존 앞에서 취하는 주체의 총괄적인 태도에 의존
하고 있다. 마라농은, 성욕은 '일방통행'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남성의 경우에는 완전한 형
태에 도달해 있으나, 여성의 경우에는 '중도'에 멈추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동성애의 여성
만이 남자와 마찬가지로 풍부한 성욕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여성은 '탁월한' 여성형
일 것이다. 실제로 여성의 성욕은 개성적인 구조를 갖고 있으므로, 남성과 여성의 성욕에 
등급을 매기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성적인 대상의 선택은 여성이 지닌 정력의 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정신분석학자가 성도착증(변태성욕)에서 기관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현상을 본 것은 큰 
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도착증은 역시 외적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였
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별로 깊이 연구하고 있지 않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여성의 색정이 
성숙되는 것은 음핵의 단계에서 질의 단계로 옮아가는 시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자아이가 처음에 어머니에게서 느끼던 사랑을 아버지에게서 느끼게 되는 추이
와 비슷한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이 발달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은 거세되어 
있는 것을 체념하지 않는다. 그녀는 페니스의 결여를 자기에게 숨긴 채 이를 대신할 만한 
대상을 찾으면서 역시 어머니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 아들러에 의하면 이 정체상태는 
수동적으로 생긴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주체가 권력의지에 의해 자기의 거세된 상태를 분
명히 부인하고, 지배를 받지 않는 남성과 동일화되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유아기

의 고착이든 남성에 대한 항의이든, 동성애는 하나의 미완성으로 나타난다. 사실 동성애의 
여성은 '모자라는 여성'도 아니고, '진보파 여성'도 아니다. 개인의 역사는 숙명적인 발전은 
아니다. 순간 순간에 과거는 새로운 선택에 의해 다시 파악된다. 선택방법의 '통상'이라는 
것에 어떤 특권적인 가치도 부여되어 있지 않다. 선택의 진정함에 의해 판단해야 한다. 여
성에게 동성애는 주어진 입장을 도피하는 하나의 방법, 또는 그 입장을 받아들이는 방법일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의 큰 잘못은, 도덕을 의식한 타협주의에 의해 동성애를 정당하지 
못한 태도로 생각한 데 있다.
  여성은 객체가 되기를 강요당하는 하나의 존재자이다. 주체로서의 그녀는 남성의 육체를 
상대로 해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공격적인 관능을 갖고 있다. 거기서 그녀의 에로티시
즘이 극복해야 할 투쟁이 생기게 된다. 여성을 남성의 먹이로 제공하여, 그녀의 팔에 아기
를 안겨주고 그 주권을 회복시켜주는 제도를 세상에서는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자연주의'는 다소 이해된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이성애도 다른 해
결이 가능하다. 여성의 동성애는 그 자주성과 육체의 수동성을 조화시키려는 하나의 시도
이다. 만일 사람들이 자연을 내세운다면, 모든 여성은 동성애적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동
성애의 여성은 분명히 남성을 거부하고 여성의 육체를 사랑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젊은 처녀는 모두 남성의 돌입이나 지배를 두려워한다. 그녀들은 남성의 육체에 
대해 일종의 혐오를 느낀다. 이와 반대로 여성의 육체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욕망의 대상이
다. 이것은 이미 지적했지만, 주체로 자인하는 남성은, 이에 따라 각자 분리되어 살고 있
다. 다른 남성을 하나의 '물건'으로 생각하는 것은, 타인이나 자기에게도 동시에 남성적인 
이상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이와 반대로 자기를 객체로 인정하고 있는 여성은, 자기와 같은 여성이나 자기에게서도 
일종의 먹이를 본다. 남색가는 남녀 모두에게 반감을 사는데, 이것은 남성이 지배적인 주
체이기를 강력히 요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녀 모두 동성애 여성에게는 자발적으로 관대하게 대한다. 틸리 백작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을 경쟁자로서도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은 상대이다. 오
히려 나는 흥미를 갖는다. 나는 부도덕하게도 그것을 웃어넘기고 만다." 콜레트도, 클로딘
이 레지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보고 르노에게 이와 똑같이, 단지 흥미있는 태도를 보이
고 있다.
  남성은 얌전한 동성애의 여성보다 활동적이고 자주적인 이성애의 여성에게 더욱 괴로움
을 당한다. 남성의 특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이성애의 여성뿐이다. 여성의 동성애는 
성별의 전통적인 형태에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동성애는 여성의 성질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표현이지 그 거부는 아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동성
애의 성향은 사춘기의 젊은 처녀에게, 아직 접촉할 기회나 용기가 없는 이성애의 관계의 
대용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의 과도기이며, 수업이다. 열렬한 동성애에 빠졌던 처녀도 
그후에는 정열적인 아내, 애인,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여성 성도착자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은, 그 선택의 긍정적인 면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면이다. 성도착자의 특징은 여성
이 여성을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성만을 사랑한다는 데 있다.
  흔히 존스와 헤스나드의 주장에 따라, 동성애의 여성을 두 타입으로 나누고 싶어한다. 

하나는 '남성을 모방하고 싶어하는' 남성형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을 두려워하는' 여성형
이다. 도착증에서 대체로 두 가지 성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여성은 수
동성을 거부하지만, 다른 여성은 수동적으로 몸을 맡기는 데 여성의 품을 택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들은 대개 서로 반응하고 있다. 택하는 대상과 거절하는 대상의 관계는 서로에 
의해 설명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위에서 말한 구별이 모호한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고찰
하려고 한다.
  '남성형'의 동성애 여성을 그 '남성을 모방하는' 의지에 의해 정의하는 것은, 그녀를 부
당하게 단정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가 사회에서 정하고 있는 남녀 성별의 구별을 그대
로 받아들임으로써 문제를 애매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사실 남성은 오늘날
에는 적극적인 것과 '중성적인 것', 즉 남성과 인간을 대표하고 있다. 한편 여성은 단지 소
극적인 것, 여성적인 것일 뿐이다. 여성이 인간적인 존재로서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세상
은 여성이 남성화된다고 말한다. 여성의 스포츠적, 정치적, 지적 활동 및 다른 여성에 대한 
욕망은 '남성다운 항의'로 해석된다, 사람들은 여성이 그것에 대해 자기를 초월하려는 가치
를 고려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이 주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변태로 보인다.
  이와 같은 해석의 기반이 되는 중대한 오해는, 암컷인 인간적 존재에 있어서는 자기를 
여성다운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여성다움의 이
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성애자이고 어머니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참다운 여
성'이 전에 거세된 남성이 그랬던 것처럼, 문명이 만들어낸 인공적 산물이다. 여성의 교태
나 순종의 '본능'은 남성에게 남근적 자존심을 불어넣는 것처럼, 여성에게 불어넣어진다. 
남자라고 해서 반드시 남성적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볼 수는 없다. 여성이야말로 자
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무방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열등의
식'이니 '남성 동경의 콤플렉스'니 하는 사고방식은 나에게는, 드니 드 루즈몽이 <악마의 
몫>에서 말하고 있는 그 일화를 상기하게 된다.
  어떤 부인이 시골길을 산책하면서 새떼가 자기를 습격해 온다는 망상에 시달리게 되었
다. 몇 달 동안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으나, 그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부인과 
함께 병원 뜰을 거닐고 있던 의사는, '새가 그녀를 습격하고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여성다워야 한다는 번거로운 규범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자기의 가치가 저하되기 때문에 
자기를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는, 그녀는 세계와 미래가 눈앞에 열린 완
전한 개인, 하나의 주체, 하나의 자유를 선택한다. 이 선택이 남성화와 혼동되는 것은, 오
늘날 여성이 거세를 의미하는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벨로크 엘리스와 슈테
켈이 수집한 도착증자의 고백(첫째의 경우는 플라토닉한 것이고, 둘재의 경우는 좀더 본격
적인 것이지만)을 보면, 이 두 사람의 환자는 여성으로 성별되는 데 대해 분개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리 먼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나는 한 
번도 내 자신을 처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뒤숭
숭한 상태에 있었다. 5, 6세 경에 나는 세상사람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내가 사내아이가 아
니라면, 계집아이도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의 신체구조를 신비적인 우연처

럼 보고 있었다... 겨우 걸음마를 할까 말까 할 때 나는 망치나 못에 흥미를 느끼고 또 말
을 타고 싶어했다. 7세 경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든 계집아이들이 싫어하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아 자주 울고 화를 냈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에 
대해 주고받는 말만 들어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요일마다 오빠들이 다니는 학
교의 소년들과 함께 외출했다... 11세 경에... 벌을 받아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15세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남자아이와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여자가 
가엾어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그녀들의 보호자가 되고 원조자가 되었다."
  슈테켈이 수록한 도착증 여자의 경우는 이러하다.
  그녀는 6세까지는 주위 사람이 뭐라고 해도 자기는 사내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
이 여자 옷을 입고 있는 까닭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6세 때 마음속으로 중얼거렸
다. '나는 나중에 중위가 될 거야. 하나님이 오래 살게만 해준다면 원수가 되고.' 그녀는 
말을 타고 군대의 선두에서 거리를 지나가는 꿈을 자주 꾸었다. 대단히 총명한 소녀로, 사
범학교에서 여학교로 옮긴 것을 불행하게 여겼고 여자다워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반항심이 반드시 동성애적 숙명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소녀들은 자기 
몸이 우연히 이렇게 되어 좋아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분개하고 
절망을 느낀다. 콜레트 오드리는 12세 때 자기가 뱃사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몹시 
화가 났다. 미래의 여성이 성에 의해 강요되는 제한에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런 제한을 무엇 때문에 거부하느냐고 묻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문제는 그녀가 무엇 때
문에 그것을 수락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녀의 타협성은 순종과 소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만일 사회가 제공하는 보상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될 경우에 그 체념은 곧 반
항심으로 변하여 반발하기 쉽다. 젊은 처녀가 자기는 여자로서 못생겼다고 생각될 경우에
는 더욱 그렇다.
  해부학적 조건이 특히 중요성을 갖는 것은 이런 우회에 의해서이다. 추하거나 못생겼거
나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자기에게 합당치 않게 생각되는 여자의 운명을 거부한
다. 그러나 여성다움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일부러 남성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
다. 오히려 남성적인 특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주어지는 이득이 너무 적다고 생각되기 때문
이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편리한 옷을 부러워한다. 다만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이
나 거기서 짐작되는 약속이 여성의 옷차림을 조금씩 소중하게 만들 뿐이다. 만일 거울이 
자기의 못난 얼굴을 비추어, 장차 아무 약속도 보장해줄 것 같지 않으면 레이스나 리본은 
거추장스럽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제복에 그치고 말 것이다. 때문에 '말괄량이'는 끝까지 
사내아이로 있고 싶어한다.
  아름다운 여성도 개성적인 기획을 실현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자유를 요구하는 여성인 
경우에는 남성의 이익을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녀는 내재적
인 상태 속에서가 아니라, 자기 행위 속에서 자기를 인식한다. 그녀를 그 육체의 한계 내
에 밀어 넣으려 하는 남성의 욕망이 그녀에게는 불쾌하다. 젊은 남성이 그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불쾌하게 여기듯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여자친
구에 대하여는, 남성적인 남성이 연약한 남색가에게서 느끼는 것과 같은 혐오감을 느낀다.
  그녀가 남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런 고분고분한 여자친구와의 공범을 거절한

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자의 옷차림을 하고, 남자의 언행을 가장한다. 여성스러운 
여자친구와 단짝이 되어 남자 행세를 한다. 이런 연극은 확실히 '남성적인 항의'지만, 그것
은 제 2차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자발적인 것, 그것은 자기를 육체적인 먹이로 만든다는 
생각에서, 자주적인 주체가 느끼는 분노이다. 여자 운동선수 중에는 동성애자가 상당히 많
다. 근육, 운동, 팽창, 약동을 위한 이 육체를 그녀들은 하나의 수동적인 근육으로 생각하
지 않는다. 이런 육체는 마술적으로 애무를 불러오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를 잡으려는 파
악력이지 세계의 한 사물이 아니다. 대자적인 육체와 대타적인 육체 사이의 갭은 이 경우
에 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행동적인 여성, 예컨대 육체적인 형태에서도 자기 포기가 불가능한 '건실한 여자'에게서 
이와 같은 저항을 찾아볼 수 있다. 양성의 평등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면, 이런 장애는 대
부분 해소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남성은 여전히 자기의 우월성을 믿고 있으며, 만일 이에 
동의하지 않는 여성의 경우에는 매우 불리해진다. 그러나 의지적이고 지배욕이 강한 여성
은 남성과 정면으로 대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른바 '남성같은' 
여성은 흔히 이성애자이다.
  그녀는 인간의 권리요구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여성적인 성
질을 손상시킬 의도도 없다. 그녀는 남성적인 세계에 접촉하여 그것을 자기에게 합병시키
려고 생각한다. 그녀의 강인한 감각성은 남성의 난폭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남성의 육체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기 위해 그녀는 수줍은 처녀처럼 저항을 극복할 필요도 없다. 신경이 
굵은 동물적인 여성은 성교의 수치 같은 것은 처음부터 느끼지 않는다. 과감한 성향을 지
닌 지적인 여성은 그런 수치감에 저항한다. 투쟁적인 성격으로 자신감을 갖고 있는 여성
은, 자기가 이길 자신이 있는 그 대결에 과감히 나선다.
  조르주 상드는 젊은 남성들, 특히 '여성적'인 남성을 좋아했다. 그러나 스탈 부인이 여인
들 중에서 젊음과 미모를 구한 것은 만년의 일이다. 자기의 지성의 힘으로 남성을 지배하
고, 그들의 찬탄을 오만하게 받아들인 스탈 부인은 남성들의 품안에서도 자기를 그들의 먹
이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는 마조히즘적 도취에 빠지기도 했으
나, 이런 유희에서도 역시 지배자로 머물러 있었다. 이자벨 에베라르트는 남장을 하고 말
을 몰아 사하라 사막을 질주하는 남성적 용감함을 보였지만 어떤 건장한 저격병에게 몸을 
맡겼을 때에도 전혀 굴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남성의 종속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여성이라
고 해서, 반드시 남성에게서 도망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여성은 오히려 남성을 자기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고 한다. 조건이 대단히 좋을 경우에는(그것은 주로 상대방 남
자의 인간됨에 의해 결정되지만) 경쟁의식까지도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이 남
성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여성의 입장을 완전한 형태로 사는 것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여성의 활동적인 인격과 수동적인 암컷으로서의 역할이 이처럼 조화되는 것은, 
아무래도 남성의 경우에 비해 매우 어렵다. 그 때문에 노력하다 중도에서 포기하느니 차라
리 개끗이 단념하는 여성이 많을 것이다. 여성 예술가나 작가들 중에는 동성애자가 많다. 
그녀들의 성적 이상이 작품창조를 위한 에너지의 원천이 되거나, 강한 정력의 존재를 과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지한 창작활동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의 역할을 하거나 
또는 남성들과 겨루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런 여성들은 남성의 우월성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인정하는 체 하지 않고 새삼
스럽게 그것에 대항하여 정력을 소모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육체적 쾌락 속에서 
휴식과 안정과 기분전환을 찾고 있다. 적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상대에 대해서는 경원하는 
것이 더 편하다. 이렇게 해서 여성이기 때문에 강요당하는 구속에서 벗어난다.
  물론 '남성적인' 여성에게 그 성의 역할을 수락하거나 거부하는 동기는 그녀의 이성애적 
체험의 성질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못생긴 여성은 남성의 경멸에 의해 자기의 불
행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남성이 교만하면 자존심이 강한 여성의 마음은 
상처를 입게 된다. 지금까지 검토해 온 불감증의 모든 동기, 즉 원한, 분노, 임신의 걱정, 
낙태가 원인인 장애 등은 이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이 남성에게 경계심을 갖고 접
근할수록 그런 동기는 더욱 더 중요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지배욕이 강한 여성의 경우에는 동성애가 언제나 완전한 만족을 주는 해결방법
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여성은 승부욕이 강하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자기의 능력을 완
전히 발휘하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그녀에게 이성애적 관계는 굴욕적인 동시에 
자기를 윤택하게 하는 것도 된다. 성에 의해 강요되는 제한을 거부하면, 한편으로 자기를 
제한하는 것도 된다. 불감증의 여성이 쾌락을 거부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요구하는 것처
럼, 동성애의 여성은 한편으로 정상인 완전한 여성이 되고 싶어한다. 이런 엉거주춤한 주
저는 슈테켈이 연구한 도착증 여성에서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녀는 남자아이하고만 놀고 싶어하는 '여성이 되는' 것을 싫어했
다. 16세 때 그녀는 젊은 처녀들과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그런 처녀들을 몹시 
경멸하여 이 때문에 그녀의 색정은 사디즘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한 
여자친구만 열렬히 사모했다. 이것은 순전히 정신적인 사랑이었다. 육체적으로 관계한 처
녀들에게는 언제나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그녀는 대단히 어려운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최초의 열렬한 동성애의 환멸을 느낀 
후로, 그녀는 완전히 육감적인 경험에 몰두하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17세 때 어떤 청년
을 알게 되어 그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남성을 자기의 아내로 생각했다. 그녀는 남장을 하
고 술을 마시고 연구를 계속했다. 처음에 그녀는 질경련을 일으켜 성교에서 오르가슴을 느
끼지 못했다. 그녀는 그 체위를 굴욕적으로 생각하고 언제나 자진하여 공세를 취하면서 적
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남편을 '미친 듯이 사랑하면서' 그를 버리고 다시 여성과 관계
를 갖게 되었다. 그후 어떤 남성 예술가를 알게 되어 몸을 맡겼으나, 역시 오르가슴에 도
달하지 못했다.
  그녀의 생활은 몇몇 시기로 분명히 구분되어 있었다. 어느 기간은 글을 쓰면서 창작에 
종사하고, 자기를 완전히 남성으로 느꼈다. 그 기간 동안에 그녀는 사디즘적으로 여성들과 
동침했다. 다음은 여성이 되는 기간이 있다. 그녀는 오르가슴에 도달하고 싶어 정신분석을 
의뢰했다.
  동성애의 여자는 완전히 남성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여성을 상실하는 것에 동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역시 참된 남성적인 자존심을 가질 수 없다. 
그녀는 손으로 여자친구의 처녀성을 빼앗거나, 남성이 여성을 차지하는 동작을 그대로 모
방하기 위해 인공적인 페니스를 사용할 수는 있다. 그래도 그녀는 역시 거세된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여성으로서는 미완성이고, 남성으
로서는 불능인 그녀의 불쾌감은 때로는 정신병적 증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어느 여자 환자
는 달비에즈에게 이렇게 말했다.(<정신분석 방법과 프로이트의 학설>에서) "나에게 돌입
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건강이 좋아질텐데." 그리고 다른 여성은 자기의 유방이 굳어졌
으면 좋겠다고 호소한다. 동성애의 여성이 자기의 열등성을 보충하기 위해 거만한 태도와 
노출증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정신이 안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때때로 다른 여성들을 상대로, '여성적인' 남성이나, 아직 한 남성으로서 미숙한 청년이 여
성을 상대할 때에 하는 것과 비슷한 일종의 관계를 갖는 데 성공한다. 가장 현저한 예는 
크라프트 에빙이 보고하고 있는 '상도르'의 경우이다.
  사롤타는 괴상하기로 이름난 헝가리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녀를 남자아
이처럼 길렀다. 그녀는 말을 타고 사냥도 했다. 이런 일은 13세에 기숙 학교에 들어갈 때
까지 계속되었다. 그녀는 어떤 영국 소녀를 사랑하여 자기는 남자라고 하며 소녀를 유혹했
다. 그녀는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지만, 곧 '상도르'라는 이름으로 남장을 하고 아버지와 함
께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남성적인 스포츠에 열중하고 술을 마시고 매음굴에 출입했다. 
그녀는 특히 여배우나 고독한 부인에게 마음이 끌렸는데, 그것도 나이가 지긋한 여성을 택
하여 정말 '여성적'인 것을 사랑했다.
  "나는 시적인 베일 밑에 감춰진 여성다운 정열을 좋아했다. 여자의 뻔뻔스러움은 나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나는 여자의 옷이나 그 밖에 여성다운 것은 모두 질색이었다. 그러나 
내 속에 있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나는 여성에 대해서는 열정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녀
는 많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졌으며 그 때문에 많은 돈을 썼다. 그동안 그녀는 부다페스
트의 2대 신문에 기사를 쓰고 있었다. 3년 동안 자기보다 10세나 연상인 여성과 남자행세
를 하면서 동거하고, 헤어질 때 상대방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녀에게 열렬한 애정
을 쏟는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젊은 여교사를 사랑하여, 결혼흉내를 내면서 동거생활을 했다. 처녀의 가족
과 약혼자는 그녀를 남자라고 생각했다. 처녀의 아버지는 미래의 사위를, 발기하는 남근을 
가진 훌륭한 남자로 믿었다.(아마도 인조 음경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면도로 수염을 밀기
도 했다. 그러나 어느날 그녀의 속옷에서 월경자국을 발견한 하녀는 열쇠구멍을 통해 상도
르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체가 드러난 그녀는 감옥에 끌려갔다가 석방
되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마리와의 이별을 슬퍼하여 독방에서 열렬한 사랑의 편지를 보내
고 있었다.
  그녀의 체격은 여성으로서 완벽하지는 않았다. 골반은 매우 좁고, 허리도 가늘었다. 유방
은 잘 발달되어 있었으나, 성기는 발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상도르는 17세 때 첫 
월경을 하였는데, 그녀는 월경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남자와의 육체관계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었다. 그녀는 남자보다 여자와 동침하기를 좋아하여, 
여자를 상대하며 수치심도 느끼는 것이었다. 여자로 취급받으면 몹시 당황하고, 여자 옷을 
입어야 할 때에는 몹시 불안해했다. 그녀는 '24세에서 30세까지의 여자에게는 자석처럼 
이끌렸다.' 그녀는 여자친구를 애무할 때에만 성적인 만족을 느끼고 애무를 받을 때에는 
조금도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때로는 발기한 남근 모양의 천 부스러기를 채운 양말을 사

용하기도 했다.
  그녀는 남자를 몹시 싫어했다. 타인의 정신적 평가에는 민감하고, 문학적인 재능이 있었
다. 그리고 높은 교양과 비범한 기억력도 갖고 있었다.
  상도르는 정신분석은 받지 않았으나, 이런 사실의 보고만 보더라도 몇가지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받은 교육과 체질 때문에 자기를 언제나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자기의 여행과 생활에 그녀를 참여시킨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
다. 그녀의 남성적인 성격은 매우 분명하여, 여자들에 대해서도 전혀 상반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녀는 여자를 남자처럼 사랑하고, 상대방 여자에 의한 타협에 전혀 이상함을 느
끼지 않았다. 그녀는 상호성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 여자를 지배적이고 능동적으로 사랑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남자를 싫어한 것'과 특히 나이가 지긋한 여자를 사랑한 것이 주목을 끈
다. 이것은 상도르가 어머니에 대한 남성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남성이 무의식중에 자기
와 동성인 아버지를 미워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려고 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
을 암시한다. 그녀는 어머니와 짝이 되어 어머니를 보호하다가 언젠가는 지배하려는 희망
을 품고 있던 어렸을 때의 소아적인 태도를 지속해 왔다. 어린이가 어머니의 애정을 충분
히 얻을 수 없을 때, 장성해서까지 이런 애정의 욕구가 뒤따르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의 
손에서 자란 상도르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어머니를 몽상하여, 이것을 다른 여자들을 통해 
찾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로써 연상인 '고독한 여인'에게 바치는 '시적'인 사랑을 다른 남성에 대한 깊은 질투와 
결부시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녀에게 그런 여자들은 신성시된다. 그녀의 태도는 바랑 부
인에 대한 루소의 그것이며, 샤리에르 부인에 대한 젊은 뱅자맹 콩스탕의 그것과 똑같다. 
감상적이고 '여성적'인 청년은 역시 모성애적 애인에게 이끌리기 쉽다. 이런 동성애 여자의 
유형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결코 자기 어머니와 동일화하는 일은 없다. 어머니를 몹
시 존경하거나 반대로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자기는 여자인 것을 거부하면서 여성적인 
부드러움으로 둘러싸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 따스한 어머니의 품에서, 그녀는 남자처럼 대
담하게 세상에 뛰어들 수 있다. 그녀도 남자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남자로서는 약하여 연
상인 애인의 사랑을 구하게 된다. 이런 한 쌍의 연인은 고전적인 이성애의 한 쌍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중년부인과 총각의 커플이 그것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성애형의 여자가 그 어머니와 일찍이 가졌던 관계의 중요성을 지적
했다. 젊은 처녀가 어머니의 영향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두 가지 있다. 하나
는 걱정이 많은 어머니에 의해 애지중지 양육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고약한 어머니에 
의해 구박을 받아 깊은 죄의식을 느끼게 했을 경우이다. 첫째의 경우는 모녀의 관계가 이
성애와 비슷하다. 그녀들은 함께 잠을 자고 서로 애무하고 젖을 빨기도 했다. 딸은 후에 
다른 사람의 품속에서 같은 행복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둘째의 경우는 어머니로부터 자기
를 지키고 자기가 느꼈던 저주를 제거해 주는 '상냥한 어머니'를 몹시 원할 것이다. 하벨로
크 엘리스가 이야기하는 어떤 여성은 그 유년시절에 줄곧 어머니를 싫어했는데, 16세 때 
연상인 여인에게서 느낀 사랑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고아가 갑자기 어머니를 얻은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어른에게 전과 같은 적의를 

품지 않고, 어느 정도 존경하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매우 순결하여, 나는 그
녀를 어머니처럼 생각했다. 그녀의 손이 나를 어루만지면 무척 즐거웠다. 그녀는 때때로 
나를 품에 안기도 하고 무릎 위에 앉히기도 했다... 내가 잠자리에 들면 그녀는 잘 자라면
서 내 입술에 키스해 주곤 했다."
  연상의 여자가 원하면 젊은 처녀는 더욱 함차게 포옹하도록 기꺼이 몸을 맡긴다. 보통 
그녀 쪽이 수동적이 된다. 왜냐하면 상대방에게 지배와 보호를 받기를 원하고 어린애처럼 
귀염과 애무를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가 플라토닉한 것으로 그치든 육체적인 
것이 되든, 진정한 연애의 정열을 수반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것은 사춘기 처녀가 
진화의 도중에 거치는 고전적인 단계이므로, 이것만으로는 동성애의 결정적인 선택을 설명
하기에 충분치 않다.
  젊은 처녀는 이런 방법으로, 그녀가 이윽고 남성의 품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해방과 안
정감을 동시에 구하고 있다. 연애의 정열적인 시기가 지나면 연상인 언니에게, 어머니에 
대해 느끼고 있던 것과 상반되는 감정을 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녀는 그런 감정에서 벗
어나기를 원하면서도 그 힘에 눌려 있다. 상대방이 그녀를 집요하게 붙잡아두려고 하면, 
그녀는 '사로잡힌 여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싸우든 타협하든 언젠가는 이런 환경
에서 벗어난다.
  드디어 성숙기를 마친 그녀는 정상적인 여자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성숙
했다고 느끼게 된다. 동성애자로서의 그녀의 운명이 분명히 결정되려면 그녀는 상도르처럼 
여자다움을 단호히 거부하거나, 아니면 여자다움이 여자의 품에서 가장 행복하게 꽃을 피
우거나, 어느 한쪽이어야 한다. 즉 유아기 어머니와의 관계의 고착만으로 성적 도착을 충
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도착증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 선택되는 경우도 있다. 
여자는 그 완전한, 혹은 미숙한 성적 경험을 통하여,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조금도 쾌락을 
얻을 수 없으며 다른 여성을 상대해야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거나 예감하
는 경우가 있다. 특히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존귀하게 여기고 있는 여자에게는 동성애적인 
포옹이 가장 만족을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과 같은 것은 특히 중요하다. 즉 자기를 객체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반드시 여자
를 동성애로 이끄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동성애 여자의 대다수는 그녀들이 갖고 
있는 귀중한 보물을 자기 것으로 간직하고 싶어한다. 자기를 수동적인 물체로 바꾸는 것에 
동의하는 모든 것은, 주체적인 요구를 개끗이 단념한다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즉자존재의 
형태로 자기발견을 원한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그 타성 속에서 자기를 파악하려 노력한
다.
  고독 속에서 그녀는 현실적으로 자기를 둘로 나룰 수가 없다. 자기 가슴을 스스로 애무
하더라도 그 가슴이 다른 사람의 손에는 그 정체를 어떻게 드러낼 지 알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손 아래서 어떻게 삶을 느끼게 될지 알지 못한다. 한 남자는 그녀 육체의 '대자적'
인 실존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그것이 '타자에 대해' 무엇인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손가락이 한 사람의 여자의 몸을 어루만져 확인하고, 또한 그 여자가 자기 몸을 애
무해 줄 때 비로소 거울의 기적이 완전히 나타난다. 남녀간의 사랑은 하나의 행위이다. 각
자가 자기를 떠나 타자가 된다. 사랑하는 여자를 크게 놀라게 하는 것은, 자신의 수동적인 

무기력이 남성 성기의 열광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반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자는 발기한 남성 성기 속에서 막연히 자기의 매력을 느낄 
분이다. 여자들 사이에서 사랑은 관조이다. 애무는 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기
보다,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재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분리란 전혀 없기 때문에 투쟁이나 
승리나 패배도 있을 수 없다. 정확한 상호성 속에 각자가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기도 하며 
군주인 동시에 노예이기도 하다. 이중성은 공모이다. 콜레트는 말하고 있다. "꼭 닮은 것은 
육체적인 쾌락을 보증하기도 한다. 여자치구는 자기의 비밀을 알고, 상대방에게서 애정의 
가르침을 받는 자기 몸을 애무하는 듯한 확실성을 기뻐한다."(<이런 쾌락들>에서) 그리고 
르네 비비앙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들의 마음은 귀여운 여자의 유방처럼 닮았다! 우리들의 육체는 똑같은 형태, 똑같이 
외롭고 육중한 운명이 우리의 영혼에 실려 있다. 나는 그대의 미소와 그림자를 얼굴 위에 
옮긴다. 나의 정다움은 보다 많은 그대의 정다움과 같아, 때때로 우리가 같은 핏줄에서 태
어난 것처럼 생각된다. 그대 속에 있는 나의 아기, 나의 친구, 나의 언니를 사랑한다.
  이와 같은 분열은 모성애와 같은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자기 딸 속에서 자기를 인
정하고 자기를 딸에게 옮기는 어머니는 딸에 대해 성적인 애착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 품안에 귀여운 육체적 대상을 안아 보호하고, 어린아이처럼 애무하고 싶은 심정은 동성
애의 여자와 같다. 콜레트는 <포도덩쿨>에서 다음과 같이 그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다. 당
신은 어머니와 같은 불안하고 근심에 찬 눈빛으로 내 위로 몸을 기울여 내게 쾌락을 줄 
것이다. 정열적인 여자친구를 통하여, 당신이 가져보지 못한 아기를 구하고 있다.
  
  르네 비비앙도 이와 동일한 심정을 말하고 있다.
  
  오라, 나는 병든 소녀처럼, 당신을 데리고 가련다.
  울보에다 겁이 많고 마음 약한 병든 소녀처럼.
  신경이 날카로운 나의 품안에 당신의 날씬한 몸을 껴안는다.
  보라, 나는 병을 고칠수도 있고 보호할 수도 있다.
  이 두 팔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당신이 거기서 안식할 아늑한 요람 같은
  내 품안에 든 연약하고 조용한 당신을 사랑한다.(<합장의 시각>에서)
  
  모든 사랑 속에는(성애이든 모성애이든) 탐욕과 관용, 타자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주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와 동성애의 여자가 완전
히 일치하는 것은 이 양자가 어린이나 애인(여자)속에서 자기의 연장된 형태나 자신의 반
사된 모습을 애무하는 나르시스트인 경우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르시시즘이 언제나 동성애로 인도한다고 볼 수는 없다. 마리 바슈키
르체프의 예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녀가 쓴 것 중에는 여자에 대한 상냥한 마음의 흔
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관능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성적이며, 허영심이 매우 강한 
이 여성은 어렸을 때부터 남성에게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을 꿈꾸었다. 그녀는 명성에 도움

이 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단지 자기만을 우상화하여 추상적인 성공만을 노리고 있는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 애정어린 관계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이 경쟁
자와 적으로만 보인다.
  사실 어떤 요인도 그것 하나가 결정적으로 작용할수는 없다. 언제나 복잡한 전체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자유로운 결정에 근거를 둔 선택이 문제이다. 어떤 성적 숙명도 개인
의 생활을 지배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의 색정작용(에로티시즘)은 실조에 대한 그의 총괄
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이 이 선택방법에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날도 남녀 양성은 많은 경우에 따로 떨어져 살고 있다. 기숙사, 여학교에서는 친구들끼리 
성적관계로 옮아가기 쉽다. 소녀와 소년의 교우관계가 이성애적 체험을 쉽사리 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동성애가 극히 드물다. 직장이나 사무실에서 여자끼리 일하고 남자와 교제할 
기회가 적은 여성은 동성끼리 연인처럼 되기 쉽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그녀들은 
생활을 결합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이성애의 관계의 결여나 실패는 여자들을 도착성욕
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체념과 애호의 한계를 구분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남자에게 실
망하여 여자를 사랑한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원래 남자에게서 여자를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에게 실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이성애의 여자
와 동성애의 여자 사이를 엄밀히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춘기의 불확실한 시기가 지나면, 정상적인 남성은 결코 남색적인 탈선행위를 하지 않
는다. 그런데 정상인 여성이라도(정상적이든, 그렇지 않든) 소녀시절에 즐긴 동성의 사랑
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남자에게 환멸을 느낀 여성은, 동성의 품에서 자기를 
배반한 애인을 구하려고 한다. 콜레트는 <방항하는 여인>에서 여성에게 종종 위로를 주
는 변태적인 쾌락에 대해 쓰고 있다. 여성 중에는 일생을 통하여 이런 위안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남성의 포옹에 의해 만족을 얻고 있는 여성이라도, 보다 조용하고 차분한 쾌
락을 멸시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여자친구들의 애무는 다만 포옹에 몸을 맡기고 만족감을 
느끼면 되기 때문에 수동적이며 관능적인 여성은 그 애무를 거절하지 않는다. 능동적이고 
열렬하면 '남녀 양성 소유자'처럼 생각된다. 호르몬의 신비적인 결합 때문이 아니라, 공격
성, 소유욕을 남성의 성질로 보기 때문이다.
  르노를 사랑하는 클로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지의 매력에 이끌린다. 그녀는 명실공히 
여성이지만, 그래도 상대를 취하여 애무하려는 욕망을 찾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변태적' 
욕망은 '정숙한' 여성에게는 용의주도하게 억압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욕망은 순결하면서
도 정열적인 우정의 형태로 또는 모성애의 형태로 은밀히 나타낸다. 이 욕망은 때때로 정
신병의 발작이나 폐경기간에 격렬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동성애의 여자를 완전히 다른 두 범주로 나누려고 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그 진실
한 관계를 감추고 사회적인 희극이 연출되어 남녀의 한 쌍처럼 꾸미는 경우가 있는 것처
럼, 그녀들도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식으로 구별될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쪽이 남장을 하고 다른쪽이 부드러운 여자옷을 입고 있다고 속아서는 안 된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극단의 경우를 제외하고) 그녀들의 성본능은 애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의 지배가 싫어 동성애자가 된 여자는, 다른 여자에게서 자기와 마찬가지로 자

존심이 강한 남성적인 여성을 발견하고 기쁨을 느낀다.
  전에 남자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공동생활을 영위한 세브르의 여학생 사이에는 변태성 
연애가 많이 생겨났다. 그녀들은 자기가 여성 엘리트임을 자랑스럽게 느끼며 언제까지나 
자주적이고 주체로 있고 싶어했다. 특권적인 계급에 반항하여 그녀들을 결합시키는 이 공
모의식이 그녀들로 하여금 매력적인 존재를 여자친구에게서 발견하고 감탄하게 했다. 이 
매력적인 존재는 그녀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로 포옹할 때 각자는 
남자인 동시에 여자가 되어 암수 앙성의 효과를 즐길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여자의 품속에서 여자다움을 즐기고 싶어하는 여성도, 어떤 지배자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자존심을 갖고 있다. 르네 비비앙은 여성미를 열렬히 사랑하여 자기도 
아름다워지기를 원했다. 그녀는 몸을 단장하고 긴 머리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자유
를 누리고 싶었으며 깨끗한채로 있고 싶어했다. 그녀는 결혼에 의해 남성의 노예가 되는 
여성을 경멸하는 시를 썼다. 그녀가 독한 술을 좋아하고 가끔 추잡한 말을 지껄이는 것은 
남성화의 욕구를 표시하고 있다. 사실상 이런 종류의 수많은 결합에서 애무는 상호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역할은 피차 매우 불확실하게 할당된다. 어린애 같은 여자가 모성타입의 여
자에게 청년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고 남자 품에 안기는 애인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
다.
  그녀들은 서로 평등한 입장에서 사랑할 수 있다. 상대가 동성인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결합, 치환, 교환, 희극이 가능하다. 여자친구들 각자의 심리적인 경향에 따라 분위기 전체
에 따라 각각 관계가 안정된다. 상대방을 돕고 생활에 보탬을 주는 여성이라면, 그녀는 남
성의 역할(폭군적인 보호자, 이용만 당하는 무골호인, 존경받는 군주와 같은)을 한다. 정신
적, 사회적, 지적 우월에 의해 지도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여
자가 가장 많이 사랑하는 상대방의 정열적인 애정의 특권을 받게 마련이다. 남녀간의 동거
생활도 마찬가지로, 두 여자의 공동생활도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것들은 감정
과 이해와 습관 위에 구축된다. 그리하여 실제로 부부생활처럼 보이기도 하고, 낭만적인 
경우도 있다. 거기에는 사디즘, 마조히즘, 관용, 정결, 헌신, 변덕, 이기주의, 배반 등이 포
함된다. 동성애 여자 사이에도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여자도 있고, 매춘부도 있다.
  그러나 이런 관계가 어떤 사정 때문에 특이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동성애는 제도나 
풍속에 의해 정당화되어 있지 않고, 습관에 의해서도 규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동성애
는 보다 솔직하게 존속되고 있다. 남녀는 부부라도 마주 대할 때에는 다소 체면을 차린다. 
특히 여자는 남자로부터 언제나 어떤 요구를 강요받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모범적
인 정조, 매력, 교태, 미숙함, 혹은 엄숙한 태도를 취하도록 요구되고 있다. 여자는 남편이
나 애인 앞에서 완전한 자기 자신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친구들을 상대할 때에는 
체면을 차리지 않아도 되고 가식이 필요없으며 서로 똑같기 때문에 바닥까지 드러내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유사성이 완전한 친밀감을 가져온다. 감각적인 쾌락은 남녀간의 사랑처럼 
격렬하거나 현혹적이 아니며, 놀랄 만한 변모도 일으키지 않는다. 남녀의 애인들은 육체에
서 서로 떨어지면 다시 남남이 된다. 그리고 남성의 몸이 여성에게 진저리나게 여겨질 때
도 있다. 남자는 때때로 상대방 여자의 육체 앞에서 흥미를 잃고 불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와 여자 사이에서는 육체적인 애정은 좀더 평탄하고 한층 지속적이다. 미칠 듯

한 황홀감으로 무아지경에 이르지도 않지만, 결코 반감어린 냉담에 다시 빠지는 일도 없
다.
  상대를 마주보고 접촉하는 것은 침대의 쾌락을 조용히 연장하는 은밀한 기쁨이다. 사라 
포송비와 그 여자 애인과의 결합은 아무 장애 없이 5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두 사람은 현세의 주변에 평화로운 낙원을 건설할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성에도 약점이 있다. 서로 숨기거나 조심할 필요가 없이 자기들의 모습을 드
러낼 수 있기 때문에, 여자들끼리는 격렬하고 난폭한 상황으로 서로를 몰고가는 경우도 있
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자제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연민과 불안을 
느낀다. 여자를 상냥하고 너그럽고 신중하게 다루려고 노력하고, 여자는 남자를 존경하고 
조금은 두려워하며 자제하려고도 한다. 남녀는 그 감정이나 반응을 잘 파악할 수 없는 신
비로운 타인을 매정하게 대하지 않으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자와 여자 사이에는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상대의 계락을 서로 간파하고 도발하고 추구하고 대적하고 비열의 밑바닥
까지 상대방을 끌어넣는다. 남성의 침착한 태도는(그것이 냉담이든 자제이든) 여성의 성화
에 부닥쳐 부서지는 방파제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여자친구들 사이에서는 눈물과 발작의 
경매가 있다. 잔소리와 변명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그녀들의 끈기는 한이 없다. 제멋대로의 
요구, 매도, 질투, 압제, 부부생활에 으레 따르는 이 모든 재해가 사나운 형태로 미친 듯이 
날뛴다. 이와 같은 동성애가 때때로 평온하게 지닐 수 있는 것은, 이성애보다 주위의 위협
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지탄을 받아 사회에 잘 어울리
지 못한다. 남성적인 태도를 취하는 여성측에서는(그 성격이나 입장이나 정열의 힘에 의
해) 자기의 애인인 또 한 사람의 여성에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을, 즉 결혼을 
하지 못하고 이상한 길을 함께 가게 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래드클리프 홀이 
<고독한 우물>에서 그 여자 주인공에게 주고 있는 것이 이런 애정이다. 이런 마음의 고
뇌는 병적인 불안이나, 특히 괴로운 질투가 되어 나타난다.
  한편 좀더 수동적이고 매혹되는 일이 적은 여자 쪽에서는 사회의 비난을 괴로워할 것이
다. 그녀는 자기를 타락하고 변태적이며 비정상인 여자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자기에게 이
런 운명을 강요하는 상대방 여자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여자 중에서 한쪽이 아
기를 갖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녀는 자기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것을 비관
하면서 체념하거나 혹은 두 사람이 양자를 키우거나 혹은 어머니가 되고 싶어하는 여자 
쪽이 어떤 남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기는 때로는 두 여자 사이의 유대를 굳게 하는 경우
도 있지만, 때로는 마찰과 충돌의 새로운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동성애에 묻혀 있는 여자에게 남자와 같은 성격을 주는 것은 그 색정생활이 아니다. 색
정생활은 오히려 여성적인 세계에 그녀들을 가둬두는 것이다. 남자와 같은 성격을 주는 것
은, 그녀들이 남자가 없이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부담해야 하는 모
든 책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들의 입장은, 언제나 남자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
기 때문에 남성적인 정신을 갖기도 하는 고급 창녀형(예컨대 니논 드 랑클로와 같은)과는 
정반대이다. 이런 여성의 생활은 역시 남자에게 의존하고 있다.
  동성애 여자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특수한 분위기는, 여자의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규
방적인 풍토와 공적 생활의 남성과 같은 독립성 사이의 대조에서 조성된다. 그녀들은 남자

가 없는 세계에서 남자처럼 행동한다. 여자만의 세계는 언제나 조금은 이상한 인상을 주게 
마련이다. 남자가 여자를 존중한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남자들은 그들의 여자(아내나 
애인이나 정부)를 통하여 남자들끼리 서로 존중하고 있다. 여자에게 남자의 보호가 미치지 
못할 때, 여자는 자기에 대해 공격적이고 조소적이고 적의를 나타내는 우세한 계급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도착성욕'으로서의 여자의 동성애 자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동성애가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나타나면 경멸이나 분노를 일으킨다. 동성연애를 하는 
여자의 태도에 많은 도전과 허세가 보이는 것은, 이런 입장에서 좀더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에는 자기반성을 별로 하지 않다는 것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타인의 행동은 동성애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자기를 
의식하게 한다. 다만 그녀가 나이를 먹었거나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아 자신감을 갖고 있을 
경우에만 냉정하고 무관심하게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의 여자가 흔히 남장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 취미인지 아니면 방어적인 반응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대개의 경우에 이것은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그녀들에게는 
여자의 옷을 입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물론 남장을 하는 것도 인공적이지만, 
이 편이 훨씬 간편하다. 행동을 방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편리하게 한다. 조르주 상드나 이
자벨 에베라르트는 남장을 하고 다녔다. 티드 모니에는 그의 최근 저서에서 남자 바지를 
즐겨 입고 있다고 말했다. 활동적인 여성은 누구나 굽이 낮은 구두와 천이 질긴 옷을 선호
한다. 여자가 화장을 하는 의미는 명백하다. 그것은 몸을 장식하는 것이며 몸을 장식하는 
것은 자기를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전에는 페미니스트도 동성애의 여자와 마찬가지
로 이 문제에 준엄했다. 그녀들은 자기를 상점에 진열하는 상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남자 복장을 하고 장식이 없는 펠트 모자를 썼다. 가슴과 어깨를 드러낸 장식이 
많은 부인복은, 그녀들에게는 자기들이 항거하여 싸우고 있는 사회질서의 상징처럼 생각되
었다.
  오늘날에는 현실을 어느 정도 정복하게 되었으므로, 이 상징은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보
이지 않게 되었다. 동성애의 여자에게도 그녀가 현실과 싸우고 있는 의식의 강도에 따라 
상징은 중요성을 갖는다. 그리고 그 육체적인 특징이 그런 생활태도를 취하게 했다면 그녀
에게는 간편한 복장이 잘 어울릴 수도 있다. 또한 복장의 역할에는 여자의 파악적 관능성
을 만족시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부언하고자 한다. 그리고 동성애의 여자는 비로드나 비
단의 위안을 경멸한다. 그녀는 상도르처럼 그런 것이 자기의 여자 친구에게 입혀지는 것을 
좋아하고, 여자친구의 육체가 자기 육체를 대신하기를 바란다. 동성애의 여자가 독한 술을 
마시고, 독한 담배를 좋아하며, 거친 말을 하고 자진해서 난폭한 운동을 하는 것도 이 때
문이다. 그녀는 색정적으로는 여성적인 부드러움을 갖고 태어난다. 그녀는 대조에 의해 힘
찬 풍토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와의 교제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새로
운 요인이 개입된다. 그것은 그녀가 남자들과 유지하고 있는, 다소 애매한 관계이다. 자기
의 남성적인 성격에 자신이 있는 여자는 친구나 동료로서 주로 남자들과 사귀려고 할 것
이다. 이러한 자신감은, 남자들과 공통된 관심을 갖고 있는 여자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여자는 일, 행동, 예술에서 남자동료의 한 사람으로서 일하여 성공한다. 거트루드 
슈타인은 친구를 초대했을 때 남자들하고만 얘기하고, 여자친구의 접대는 알리스 토클라에

게 맡겼다고 한다. 지극히 남성화된 동성애의 여자는 여자에 대해 상반적인 태도를 취한
다. 그녀는 여자를 경멸한다. 그러나 여자 앞에서는 여자로서나 남자로서도 열등 콤플렉스
를 느낀다. 다른 여자들에게 미숙한 여자나 불완전한 남자로 보이지 않을까 하여 걱정한
다. 그 결과 매우 교만한 태도를 보이거나 동성의 여자들에게(슈테켈이 말한 위장하는 여
자처럼) 사디즘적인 공격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앞에서도 말
한 바와 같이 대다수의 동성애 여자는 표면으로는 말없이 남자를 거부한다. 그녀들에게는 
불감증이 있는 여자처럼 혐오, 원한, 소심, 자존심이 있다. 자기를 정말 남자와 같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여자로서의 원한에 남성적인 열등감이 가미되어 있다.
  남자는 자기들이 손에 넣으려고 하는 먹이를 더욱 교묘히 유혹하여 소유하고 보존하는 
경쟁자이다. 그녀들은 여자를 지배하기 위해 갖고 있는 남자의 권력을 증오한다. 그녀들은 
남자가 여자에 대해 갖는 힘을 미워하고 여자에게 가하는 오욕을 미워한다. 남자가 사회적
인 특권을 독점하고, 자지들보다 강자라고 느끼는 데 대해 분노한다. 그녀들이 경쟁자(남
성)와 당당히 싸울 수 없고, 상대가 자기를 주먹 한방으로 쓰러뜨린다고 생각 하는 것은 
괴로운 굴욕이다.
  그녀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린다. 클럽 같은 것을 만들어 사회적으로나 성적으로 남자가 
필요없다고 시위한다. 그래서 불필요한 허세나 진정한 생활태도라고 볼 수 없는 많은 희극
을 연출하게 된다. 동성애의 여자는 우선 남자인 체한다. 다음에 동성애의 여자라는 그 자
체가 하나의 유희가 된다. 가장과 위장이 제복으로 바뀐다. 그리고 남성의 억압에서 벗어
난다는 구실로, 자기가 연기하는 역할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그녀는 여자라는 입장에 자기
를 가두고 싶지 않았으나, 동성애의 여자의 입장은 자기를 감금해 버린다.
  해방된 여자의 작은 그룹처럼 정신의 편협성이나 불구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없다. 그리
고 많은 여자들은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자기를 동성애의 여자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들은 의식적으로 애매한 태도를 취하여 '악습에 물든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를 유혹하려고 한다. 쉽게 눈에 띄는 이런 여자들 때문에 사회는 그녀들을 
한결같이 악덕처럼, 부자연스러운 겉치레처럼 여기게 하는 악평을 조장하고 있다.
  사실 동성애는 숙명적인 저주도 아니고, 의식적인 배덕도 아니다. 이것은 '상황에 있어서 
선택되는' 하나의 태도, 즉 동기를 갖는 동시에 자유롭게 채택된 하나의 태도이다. 주체가 
이 선택에 의해 수락하는 어떤 요인(생리적인 조건, 심리적인 역사, 사회적인 상황)들이 
그것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결정적이 아니다. 그것은 여자에게 
있어 그 일반적인 조건, 특히 색정적인 입장에 의해 설정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나. 모든 인간의 행위처럼 동성애도 그것이 허위와 나태의 비진
실 속에 사느냐, 아니면 명철과 관용과 자유속에 사느냐에 따라 희극과 불균형과 실패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풍부한 체험의 원천이 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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