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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제2의 성

독립한 여성

by Frais Feeling 2020. 7. 27.

  프랑스 법전은 이미 복종을 아내가 감당해야 할 의무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지 않으며, 
시민이면 누구나(여성도)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공민으로서의 자유도 경제적인 
자립이 수반되지 않으면 허울 좋은 간판에 지나지 않는다. 정식으로 결혼한 여성이건 창
녀이건 남자의 손에 의해 부양되고 있는 여성이 투표용지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해서 남성
으로부터 자유로운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옛날처럼 풍습이 여성에게 구속을 강요하지

는 않더라도 그것은 소극적인 허용에 불과하여 여성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지 않은 
채 여전히 종속적인 신분에 갇혀 있다.
  여성이 남성과의 거리를 크게 축소시킨 것은 노동이다. 여성이 기생물이 되지 않게 되
면서 여성의 의존성을 토대로 삼았던 체계는 붕괴되어 가고 있다. 그녀와 세계와의 사이
에는 이제 남성의 매개가 필요없게 되었다. 종속자로서의 여성을 억압했던 저주는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르시시즘, 연애, 종
교를 통하여 절망적으로 추구하려고 존재한다.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여성은 초월을 다시 
회복한다. 그녀는 자기 기획 속에서 주체로서 구체적으로 자기를 확립한다. 그녀가 추구
하는 목적이나 자기 손으로 벌어들이는 돈, 권리 등을 생각하면 자기 책임을 느끼게 된
다. 많은 여성들이 이점을 의식하고 있다. 보잘것없는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도 그러하다. 
나는 어느날 날품팔이 여성이 호텔의 바닥을 닦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부터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한 적이 없어요. 혼자 벌어서 살아왔어요." 
이 여성은 록펠러처럼 스스로를 만족스러워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선거권과 직업만 내세워 여성이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이다. 오늘날
에는 일하는 것이 곧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이 일하면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사회주의적인 세계뿐이다. 현재 노동자의 대다수는 착취를 당하고 있다. 그리고 사
회구조가 여성의 신분을 어느 정도 개선하였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수정된 것은 아니다. 
언제나 남성의 것이었던 이 세계는 지금도 여전히 남성이 새긴 상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이런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성의 노동문제가 복잡한 원인은 여기에 있다.
  최근, 사상이 온건한 어떤 유력한 여성이 르노 공장의 여공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적
이 있었다. 그 조사에 의하면 여공들은 공장에서 일하기보다는 가정에 머물러 있는 쪽을 
원하고 있다. 그녀들은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는 계급에 속하여 경제적인 자립을 구
하는 것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 공장에서 일한다고 해서 가사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처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들에게 한 주일에 40시간쯤 일할 경우에 
공장과 가정 중에서 어느쪽을 택하겠느냐고 물어 보라. 아마 전과는 다른 대답을 할 것이
다. 그리고 그녀들이 근로자로서 자기들의 것이 될지도 모르는 세계, 기쁨과 긍지를 갖고 
그 완성에 참가할 수 있는 세계에 분명한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면 가정과 노동을 모두 
감당하는 것도 얼른 승낙할 것이다.
  오늘날 일하는 여성의 대부분은(농촌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여
성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녀들은 사회나 남편에게서도 실질적으로 남성과 
대등하게 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다만 정치적인 신념을 갖고 조합에 
가입하여 싸우며 밝은 미래를 믿고 있는 여성만이 보답이 적은 나날의 피로에 윤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여가를 빼앗긴 채 복종의 전통을 이어받아왔으므로 여성이 정치적, 사회적인 
의식을 겨우 확장하기 시작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노동의 대가로 당연히 기대해도 좋은 
정신적, 사회적인 이득을 받을 수 없다면 여성이 아무 정열도 느끼지 못하고 속박을 감수
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여점원, 여자 종업원, 여비서가 남성에게 의지하여 얻을 수 있는 
이득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 이유도 잘 알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여성이 그 

육체를 아낌없이 주어야만 참여가 허락되는 특권계급의 생활은 젊은 여성에게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급료는 적은데 생활 수준은 높다. 그래서 남성의 유혹에 끌리게 된다. 
자기의 보수에 만족하면 최하층의 생활에 몰리게 된다. 좋은 집에서 살 수 없고 좋은 옷
을 입을 수도 없으며 오락도 즐길 수 없는데다가 연애도 제대로 하기 어렵다. 도덕가는 
금욕을 역설한다. 실제로 이런 부류의 젊은 여성의 식사는 카르멜 수도회의 수녀 못지 않
게 간소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신을 애인으로 삼을 수는 없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잘 꾸려나가
려면, 남성들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그래야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고용주인 남성은 파
렴치하게 미리 계산하고 있어서 여성에게는 굶주림을 면할 정도의 급료밖에 주지 않는다. 
때로는 이런 도움에 의해서도 환경을 개선하여 참된 자립을 획득하는 여성도 있지만 반대
로 자기의 일을 버리고 남성의 시중을 드는 것이 본업이 되기도 한다. 대개의 여성은 양
쪽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일거리가 있기 때문에 애인에게 구속을 받지 않고 애인 덕분에 
일에 매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직업과 남성의 비호라는 이중적인 예속을 체험하기도 
한다. 기혼녀에게 지급되는 급료는 대개 약간의 보탬이 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남의 도움을 받고 있는 여성에게는 남성의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경우
에도 여성의 개성적인 노력에 의해 완전히 자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오늘날에는 직업을 가짐으로써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주성을 얻고 있는 
여성들이 많다. 우리가 여성의 기능성이나 그 장래를 논할때에 문제삼아야 하는 것은 이
런 사람들이다. 지금은 그런 여성의 수가 아주 적더라도 그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여권론자와 반여권론자의 논쟁이 전개되는 것도 이들 여성들 
사이에서이다. 후자의 주장은 현재 해방된 여성은 사회에 나가서도 이렇다 할 중요한 일
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녀 자신도 거의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
자는 그녀들이 획득한 결과를 과대평가하여 혼란에는 시선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여성이 걸어온 길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그녀들이 새
로운 지위에 안정을 찾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녀들은 아직 과정에 있다.
  여성이 남성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했다고 해서 정신적, 사회적, 심리적으로 남성과 동
등한 지위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여성이 자기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헌신하는 방법은 그
녀의 생활 전체의 형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규정된다. 여성이 어른의 생활에 참여할 때
조차 남성과 동일한 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사회는 같은 눈으로 보아주지 않는
다. 그녀에게는, 세계(사회)는 남성과 다른 전망 속에 나타난다. 여성이라는 사실은 오늘
날 지주적인 한 인간에게 특수한 문제를 안겨준다.
  남성에게만 허용되는 특권, 유년시절부터 그가 느껴온 특권은 인간이라는 천직과 남성
이라는 운명이 완전하게 조화되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근과 초월의 일체
화로 말미암아 남성의 사회적, 정신적인 성공은 그에게 남성적인 위력을 분명히 느끼게 
한다. 남성은 분열되어 있지않다. 그러나 여성이 여성다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단지 물
건이 되고 먹이가 되는 것만 허용되어 있다. 주체성이라는 지고한 것을 손에 넣으려는 요
구를 단념하라는 것이다. 이 갈등이야말로 해방된 여성의 위치를 특징짓는 특이한 것이
다.

  해방된 여성은 거세되지 않기 위해 암컷의 역할 속에 안주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자
기의 성을 거부하는 것도 자기를 불구로 만드는 것이다. 남성은 성이 있는 인간이다. 마
찬가지로 여성도 성이 있는 인간이 되지 않으면 완전한 개인, 즉 남성과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여성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자기의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여
성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흔히 "지적인 여성은 몸단장을 소홀히 한다." 고 비난해 왔으나 
한편 "만일 당신들이 우리와 동등한 자가 되고 싶다면, 얼굴에 분을 바르거나 손톱을 빨
갛게 물들이기를 그만두라." 고 설교하기도 한다. 후자의 충고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여
성답다는 관념은 습관이나 유행에 의해 인위적으로 정해진다. 그리고 그 관념은 여성에게 
강제력을 행사한다.
  이런 여성다움도 시대와 함께 진화된다. 그 표준은 남성이 채택하고 있는 표준에 접근
하는 방식으로 진화되고 있다. 바닷가에서는 남성의 바지가 여성의 전용이 되었다. 이런 
것도 문제의 근저에는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 여성이라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만
드는 것은 개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표준형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성은 성적, 사회적
으로 가치를 하락시키게 된다. 사회는 성적인 가치를 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그 
속성을 거부해도 남성의 속성을 얻을 수는 없다. 남성으로 변장한다고 남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변장한 여성이다. 동성애도 그것은 그것대로 분류되어 있다. 중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적인 태도는 반드시 실제적인 반대를 다소 내포하고 있
다. 젊은 처녀들은 다만 습속을 약간 경멸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녀는 그런 
태도로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며 언젠가는 자기가 만든 새로운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결
과를 가져오게 된다. 기성의 법망을 빠져나가면 그 사람은 폭도가 된다. 괴상한 옷차림을 
한 여성이 "이것은 내 마음에 들어 그렇게 할 뿐이에요." 하고 태연한 태도로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녀는 자기의 기호에 따르는 것이 남의 시선을 끄는 괴상한 짓이라
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반대로 색다른 모습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여성은 일반관례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적
극적으로 효과적인 행동이 아닌 한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
은 시간과 힘의 낭비이다. 남에게 거역하고 싶지 않고 사회적으로 가치를 떨어뜨리고 싶
지 않은 여성은 여성이라는 신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성이 직업에서 성공하려면 그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풍습은 자주적이고 활동적인 남성의 요구로 정해지기 때문에 -획일성은 
남성에게 특히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여성은 남성 못지않게 자주성을 지닌 활동가라
도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단정하고 있는 세계에 살짝 끼어들어야 한다. 여성만의 좁은 
영역에 갇혀 그곳에서 필요 이상으로 중요성을 과장하고 있는 만큼 여성이 하는 일은 많
아지게 마련이다. 여성들은 화장이나 가사를 어려운 기술로 만들어버렸다.
  남성은 자기의 옷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활동적인 생활에 어울리도록 
편리하게 되어 있으므로 복잡한 궁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옷차림이 인품의 일부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성이 손수 옷을 손질하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다. 그런 손질은 남성 대신 누군가 친절한 여성이거나 돈으로 고용한 여성이 해준다.
  여성은 반대로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볼 때 자기의 외관도 함께 보고 있다 는 것을 잘 알
고 있다. 그녀는 화장을 통하여 판단되고 존중되며 욕망의 대상이 된다. 원래 여성의 의

상은 무기력하게, 일하는 데 불편하게 되어 있었다.
  지금도 여성의 의상은 비활동적으로 되어 있다. 양말은 금방 찢어지고 구두 뒤축은 쉬 
망가지며 밝은 색깔의 블라우스나 드레스는 더러워지기 쉽다. 주름은 곧 늘어진다. 그러
나 여성은 대개 손수 매만져야 한다. 친구도 친절히 도와줄 수 없다. 자기 스스로 할 수 
있으므로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려고 하지 않는다. 퍼머, 화장품, 새 옷 장만 등으로 지출
이 많다. 여비서나 여학생들은 밤에 자기 집으로 돌아오면 짜깁기를 할 양말이나 빨아야
할 블라우스, 다리미질을 해야 할 스커트 등이 기다리고 있다. 상류사회 부인은 이런 일
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좀더 치밀하게 멋을 부려야 한다. 그녀는 쇼핑이나 옷의 가봉 등
으로 시간을 보낸다. 전통은 여성에게 자기의 집에 대해 남성과 달리 여러 모로 신경을 
쓸 것을 강요하고 있다. 독신여성도 마찬가지이다. 시에 새로 부임한 관리는 간편하게 호
텔에 머무를 수 있으나 여성의 경우는 자기 집에서 살게 된다. 그 주거는 자기가 손질해
야 한다. 남성의 경우에는 소홀히 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성에게는 그런 게으
름이 용납되지 않는다.
  옷치장이나 가사에 주로 시간이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
만이 아니다. 여성은 자기자신의 만족을 위해 어디까지나 여성다운 여성이기를 바라고 있
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자신이 이룬 생활과 어렸을 때의 유희나 처녀시절의 환상 등에 의해 조성된 
여성의 숙명을 아울러 지님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통해 스스로 바람직하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녀는 나르시시즘의 꿈을 갖고 있다. 여성은 남성이 소유하고 있는 남근적인 자존
심에 대항하여 자기의 이미지를 숭배하고 있다.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하며 남자를 매혹시
키고 싶어한다. 그녀는 어머니나 언니에 의해 둥우리 속에 갇혀 사는 취미를 익혀왔다. 
자기의 가정이 그녀의 독립적인 꿈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다. 다른 방법으로 자유를 손
에 넣은 후에도 그녀는 이 옛 꿈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남성 본위의 세계에서 사는 데 
거북함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서 어딘가에 자기의 은신처를 찾으려는 욕구를 갖게 된다. 
이 은신처야말 여성이 자기 내부에서 찾아온 내적인 도피의 상징이다. 여성다운 전통에 
순종하는 그녀는 마루를 닦으며 남성처럼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가지 않고 손수 요리를 
만든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싶은 것이다. 그 결과 일과 피로를 가중시키
고 있다.
  만일 그녀가 완전한 여성이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최대한의 기회를 살려 남성이라는 다
른 성에 접근하려고 생각하는 것과 일맥상통된다.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성
이라는 장소이다. 여성이 완전한 개인으로서 남성과 대등하게 되기 위해서는 마치 남성이 
여성의 세계에 접근하는 것처럼 남성의 세계에 접근해야 한다. 즉, '타자'에 접근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타자의 요구가 쌍방에게 균형이 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부와 명
성을 얻게 되면 그것은 내재적인 가치처럼 보여 여성의 성적 매력은 더욱 증가될 수 있
다. 그러나 자주적인 능동성은 여성의 여성다움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여성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자유로운 여성 -특히, 자기의 상황을 깊이 생생하고 있는 인텔리 여성- 은 여
성으로서의 열등감에 시달린다. 그녀가 오직 남성을 유혹하는 데만 관심을 쏟고 있는 요
염한 여성처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몸단장에 전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방면에 밝은 

사람의 충고를 따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멋을 부리는 일에는 언제나 아마추어의 경
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다운 매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초월이 내재를 타락시키는 미묘
한 육신의 꿈틀거림을 보여야 한다. 즉, 자진하여 바친 먹이가 되어야 한다.
  지적인 여성은 자기가 몸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의식의 주체
라는 것도 알고 있다. 자기의 시선을 마음대로 묵살하거나 구름 사이로 엿보이는 하늘의 
한 조각이나 물웅덩이로 바꿔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여성의 육체가 무기력한 조각에서 
활기찬 인형으로 변모하기 위해 세계로 항해 약동하는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지적인 
여성은 실수를 걱정하여 더욱 열심히 노력한다. 이 의식적인 정열은 역시 능동성이다. 그
래서 실패한다. 그녀는 여기서 폐경기의 현상과 비슷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중년 여성이 
자기 나이를 부정하려고 하는 것처럼 자기의 두뇌작용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중년 
여성은 젊은 처녀와 같은 옷차림을 하고 꽃을 꽂고 요란한 장신구를 달고 울긋불긋한 천
을 몸에 휘감기도 한다. 그리고 일부러 어린애 같은 놀라운 몸짓을 한다. 장난질을 하고 
깡충깡충 뛰고 수다를 떤다. 자연스러운 태도를 ,가장하여 일부러 경솔한 행동을 취하고 
충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실제는 근육을 크게 신장시키는 감동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
에 눈꺼풀을 내려뜨거나 입을 오무려 반동근을 수축시키는 여배우와 비슷한 행동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적인 여성은 자기를 망각하고 상대에게 완전히 맡기는 태도를 흉내
내려고 몸을 떤다. 그녀는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초조해 한다. 얼빠진 듯
한 순진한 얼굴에 갑자기 예리한 지성이 섬광처럼 스쳐간다. 애교 있던 입술이 꽉 다물어
진다. 그녀가 남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고분고분한 여동생들처럼 남의 호감을 
사려는 순수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매혹시키고 싶은 욕구가 아무리 
간절해도 그것이 골수에 스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 방면에 서투르다는 것을 의
식하게 되면 비굴한 자기자신이 얄밉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번엔 보복하기 위해 남성의 
무기를 들고 승부를 결정지으려고 하다. 그녀는 듣는 대신에 지껄이고, 어려운 시상이나 
개성적인 감정을 터뜨린다. 말상대에게 반대하여 그를 억누르려고 한다. 스탈 부인은 전
격적인 승리를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슬기롭게 혼합했다. 그래서 좀처럼 대적하는 남성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미국 여성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이 도전적인 태도는 남성들을 지
배하기보다는 귀찮게 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에게 이런 도전적인 태도를 유발시키는 것은 
남성들이 여성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만일 남성이 노예가 아닌 대등한 사랑을 하려고 하
면 -남자들 중에도 오만한 생각이나 열등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그
렇게 생각하고 있다- 전처럼 여성도 여성다워지려고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녀도 더
욱 자연스러워지고 단순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여성이리는 것을 그다지 괴
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남성들은 여성의 새로운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이제 자기들이 선천
적으로 불운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다. 오늘날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은 일하고 있다고 해서 여성다움을 소홀히 하지도 않고 자기의 성적 
매력을 잃지도 않는다. 이런 성과는 -이것만으로도 이미 안정으로의 첫걸음이지만- 아직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여성이 원하는 관계를 남녀가 각각 이성과의 사이에 맺으려고 
하면 여성의 경우에 아직도 남성보다 훨씬 어렵다. 여성의 성생활이나 감정생활에는 많은 

장애가 놓여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남성에게 예속되어 있는 여성에게는 결국 아무 권
리도 주어져 있지 않다. 성적, 감정적으로 말하면 기혼 여성이나 창녀도 근본적으로 불만
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독립한 여성에게 보다 많은 어려움이 뚜렷이 니타난다. 그것은 
체념을 택하지 않고 투쟁을 택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적인 문제는 죽음속에서 침묵의 
해결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살려고 노력한 여성은 의지나 욕구를 포기한 여성보다 
더 타격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후자를 본받으라고 해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
가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남성과 비교했을 경우이다.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책임감을 갖고 세상과 치열한 투쟁을 계속해 온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할 뿐 아니라 행복한 성적 모험에서 오는 긴
장의 완화와 기분전환을 원한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에게 이런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환
경이 남아 있다. 만일 그녀가 이 자유를 행사하면 금세 평판이 나빠져서 일생을 망칠 위
험을 무릅쓰게 된다. 적어도 세상은 그녀에게 괴로운 위선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성이 사
회적인 존경을 받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눈을 감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십중
팔구는 엄격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가장 유리한 경우에도 -즉 남의 이목을 두려워할 필
요가 없을 경우에도- 여성의 입장은 남성과 동등하지 못하다. 이 차이는 전통에서 비롯되
기도 하지만 여성의 에로티시즘이 지니고 있는 개성적인 성질에도 그 원인이 있다.
  육체의 흥분을 진정시키고 정신의 긴장을 풀어주는 일시적인 포옹을 남성은 쉽게 경험
할 수 있다. 여성을 위한 사창가를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여성이 소수이기는 하지만 있었
다. (17호)라는 소설에서 여성이 '택시보이'라고 부르는 남성을 상대로 '성적 위안'을 얻
기 위해 가는 집을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최근 샌프란시스코에 이런 시설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창녀들만 출입했다. 창녀들은 언제나 손님에게서 돈을 받았는데 자기가 돈을 내게 
되자 무척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녀들의 기둥서방들은 그 집을 폐쇄시켰다. 이런 해결 방
안은 어리석고 공상적일 뿐만 아니라 동의할 수도 없으며 성공하지도 못할 것이다. 여성
은 남성처럼 기계적으로 위안을 얻지 못한다. 그런 상황은 대다수의 여성들에게는 관능적
인 위안으로 별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될 것이다. 아무튼 이런 방법은 현재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이 하룻밤이나 한 시간의 남성 파트너를 거리에서 주워오는 해결법 -설사 그것이 
모든 자기 억제를 극복할 수 있는 억센 기질을 타고난 여성이 혐오감 없이 남성과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은 남성보다 훨씬 위험한 것이다. 성병에 대해서도 전염
에 주의하는 쪽은 오히려 남성이므로 위험은 여성에게 더 크다. 그리고 아무리 신중을 기
해도 임신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낮선 타인과의 관계 -난폭한 형태로 성립
되기 쉬운 관계- 에 있어서는 남녀의 체력의 차이가 크게 작용한다.
  남성은 자기 집으로 여성을 데리고 와도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조금만 경계하면 된다. 
그런데 여성이 남성을 집으로 데리고 올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인
데 두 사람의 젊은 여성이 파리에 와서 견문을 넓히려고 대형마차를 타고 한 바퀴 돈 후
에 몽마르트르에서 두 사내를 초대했다. 두 여자는 결국 소지품은 물론 폭행과 협박을 당
했다고 한다.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큰 사례는 이혼한 40세 여성의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그녀는 세 아이와 늙은 부모를 양육하기 위해 하루종일 힘든 노동을 했다. 아직 아름답고 

매력도 남아 있었으나 사교생활을 하거나 모양을 내거나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적
당한 상대를 유혹하여 연애할 여가는 전혀 없었다. 하긴 그런 유혹 같은 것은 그녀에게 
지겹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욕구는 대단히 간절했다. 자기도 남성과 같이 정욕을 진정시킬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때때로 밤이 되면 거리를 서성거리면서 남성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어느날 밤, 불로뉴의 무성한 숲속에서 한두 시간 남자와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가려
고 하는데 상대방 남자가 놓아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때 이름과 주소를 묻고 또 만나자고 
하면서 같이 살기를 원했다. 그녀가 이를 거절하자 남자는 화가 나서 그녀를 마구 구타했
다. 그는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고 협박하고는 그녀 혼자 놓아두고 가버렸다.
  여성이 애인에게 애정을 느낄 경우 남성이 정부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처럼 그를 돌봐주
고 생활을 도와주고 싶어도 그것은 돈많은 부인만 가능한 일이다. 남성에게 돈을 주고 그
를 도구로 만들어 한껏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는 그런 거래에 만족하는 여성도 있다. 그러
나 색정과 감정을 분명하게 분리하려면 상당히 나이를 먹어야 할 것이다. 젊은 여성의 경
우에는 이 양자의 결합은 앞에서도 보아온 것처럼 대단히 깊어진다.
  남성의 경우에도 이 육체와 의식의 분리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더구나 
여성의 대다수는 그런 일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일에는 아무래도 기만이 따르므로 여
성은 남성보다 훨씬 민감하다. 돈을 지불하는 손님도 그녀에게는 하나의 도구가 되어 있
는 셈이다. 상대는 손님을 밥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남성의 자존심은 색정극
의 애매성을 잘 보이지 않도록 숨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자진하여 자기를 기만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보다 모욕을 느끼기 쉽고 한층 민감하므로 남성보다 머리가 명석하다. 
그러므로 한결 교묘한 속임수가 아니면 그녀의 눈을 속일 수 없다. 남성을 돈으로 사는 
것은 설사 여성에게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만족스럽게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대다수의 여성에게는 남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지 정욕을 충족시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정욕을 충촉시키면서도 인간의 폼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남성은 
즐기고 있을 때에나 여성으로 하여금 즐기게 할 때에도 유일한 주체로 자처한다. 그리하
여 오만한 정복자가 되거나 관대한 증여자가 되거나 혹은 이 양자를 겸하게 된다. 반대로 
여성에서는 남성을 자기의 쾌락에 봉사하게 하면서 자기가 준 증여로 남성의 정욕을 채우
게 한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여러 가지 호의를 베풀 것을 약속하거나 
남성의 마음을 끌도록 친절을 부리는 등 여러 가지 수단으로 남성의 정욕을 부추긴다. 그
래서 자기의 욕구충족을 남성에게 강요할 때조차 그의 정욕을 만족시켜준다고 생각하기 
쉽다. 여성은 자기에게 유리한 확신을 갖고 진심으로 관대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성을 유혹할 때에도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다. (푸른 보리)에서 '백의 여인'은 
필의 애무를 갈망하면서도 거만하게 그에게 말한다.
  "나는 구걸하는 사람이나 굶주린 사람밖에는 사랑하지 않아요." 사실 그녀는 남성이 자
기에게 애원하도록 교묘히 유도하고 있다. 콜레트는 쓰고 있다. "그녀는 갑갑하고 어두운 
왕국으로 달려갔다. 그 왕국에서 그녀의 자존심은 하소연을 비참한 고백으로 생각하며 그
녀와 같이 졸라대는 여성처럼 자유의 환상을 마시게 된다." 바랑 부인(루소의 후원자이고 
애인이었던 여성)은 이런 여성의 전형이다. 자기의 욕구에 관대한 인상을 주기 위해 연하

의 애인이나 불행한 애인 등 자기보다 한 단계 신분이 낮은 애인을 택한다. 그러나 개중
에는 튼튼한 남성을 상대하는 대담한 여성도 있다. 그녀는 상대방 남성이 예의나 공포에 
의해서만 굴복할 경우에도 그들을 만족시켜주는 것을 좋아한다.
  반대로 남성을 함정에 빠뜨려 붙잡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주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여
성이 있는가 하면 자진하여 몸을 맡기면서도 자기는 빼앗는 쪽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나는 얻는 편이에요." 하고 어떤 젊은 여기자가 언젠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사실상 폭
행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 일에 있어서는 아무도 타자를 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말
을 하는 여성은 이중으로 자기를 기만하고 있다. 남성은 혈기를 앞세워 공세를 취하여 유
혹하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적극적으로 상대방 여성의 동의를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다. 앞
에서 인용한 스탈 부인의 경우는 별도로 치더라도 대부분의 여성은 이렇게 할 수 없다. 
그녀는 자기 몸을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대다수
의 남성이 자기들의 역할에 매우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성에게 개별적으로 정감을 
일깨워주려고 한다. 또 그들은 일반성 속에(동물적으로) 여성의 정욕을 충족시키는 역할
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역할을 맡게 되면 그들은 상대에게 이용당한다고 생각한
다.
  "남자를 무서워하지 않는 여성은 남자를 두렵게 해요." 하고 어떤 젊은 남성이 내게 말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어른들이 자주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여자가 주도권을 
쥐는 것은 질색이야." 여성이 너무 세게 나오면 남성은 꽁무니를 빼게 된다. 남성은 정복
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여성으로서는 단지 남성의 먹이가 되면서 그를 잡는 수밖에 없
다.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며 복종을 약속해야 한다. 만일 여성이 성공하면 그녀는 이런 
마술적인 수단을 스스로 실행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자주성을 재발견했다고 생각할지
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남성의 경멸로 말미암아 자칫하면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녀가 자진하여 보인 호의를 남성에게 거절당하면 큰 굴욕감을 느끼는 것은 그 때
문이다.
  남성도 여성에게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되면 몹시 화를 낸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단지 
자기의 기도가 실패한 것뿐이다. 한편 여성은 홍분, 기대, 약속 가운데서 스스로 육체가 
될 것에 동의한 것이다. 여성은 자기 몸을 잃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여성은 
잃어버린 상태로 있다. 이와 같은 패배에 초연하다면 맹목적이거나 아니면 대단히 총명한 
것이다. 설사 유혹에 성공하더라도 승리는 역시 애매하다. 사실 세론에 의하면 이기는 것
은 남성이며 그는 여성을 소유하게 된다. 여성은 남성처럼 자기의 욕망을 자주적으로 충
족시키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욕망의 먹이이다. 남성은 그 개성에 종으로서
의 힘을 통합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여성은 종의 노예이다. 여성은 때로 순
수한 수동적인 존재로 생각된다.
  "마리, 거기에 누워. 너의 몸뚱이 위에 타보지 않은 것은 버스뿐이야," 이처럼 여성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고 개방되어 있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녀는 성적 흥분이라는 마술
에 호락호락 넘어가며 남성에 의해 매혹되어 마치 나무열매처럼 따먹힌다. 때로 그녀는 
소외된 능동성의 존재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여성의 질 안쪽에는 남성의 정액을 먹으려
는 탐욕스러운 뱀이 잔뜩 도사리고 있다. 아무튼 여성을 단순히 자귀롭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자유로운 여성과 유혹에 약한 여성을 혼동하는 버릇이 있다. 약
하다는 관념 속에는 저항이나 억제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자유부족이나 자유의 부정이
라고 할 수 있다. 여류문학은 이 편견과 싸우려고 했다.
  (그리젤리디스)에서 클라라 말로는 그 여주인공이 유혹에 이끌려가지 않고 자기가 요구
하는 행동을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여성의 성적인 행동에서 자유를 인
정하기 때문에 대단히 활발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남성이 '자고 싶은 여성' 을 경멸
하는 체하면서 그녀들의 호의를 이용하여 많은 여성을 불감증에 빠지게 한다. 그녀들은 
말썽을 일으키거나 남의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질색이다.
  뜬소문 같은 것은 문제삼지 않더라도 상대하는 남자와의 거래 자체에서 실제로 어려움
을 겪게 된다. 여론은 남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기때문이다. 대개 남성은 침대를 
공격적인 우위성의 활동무대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받으려고 하지 않고 가지려고 한다. 
교환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빼앗으려고 한다. 여성이 그에게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여성
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는 여성의 동의가 패배이기를 바라고 여성이 속삭이는 말이 자
기가 그녀에게서 억지로 이끌어낸 고백이기를 바라고 있다. 여성이 남성의 쾌락을 인정하
는 것은 스스로 남성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된다.
  클로딘이 신속하게 르노에게 순종하려고 할 때 르노는 선수를 써서 그녀가 자진하여 몸
을 맡기려고 할 때조차 강제로 그녀를 소유하려고 한다. 그 싸움에서 그녀가 눈을 뜨고 
자기의 승리를 바라보게 하려고 한다. (인간의 조건)에서도 마찬가지로 권위주의자인 페
랄은 발레리가 끄려고 하는 전등을 굳이 켜놓으려고 한다. 자존심이 있고 권리를 요구할 
줄 이는 여성이 남성에게 접근할 때는 적대자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여성의 
무기는 남성보다 훨씬 약하다. 먼저 남성에게는 체력이 있다. 그러므로 자기 의지를 강요
하는 것이 훨씬 쉽다. 그리고 앞에서도 보아왔듯이 남성의 성욕에는 긴장과 능동성이 잘 
조화되지만 여성은 수동성을 거부하면 자기를 관능적인 향락으로 이끌어가는 유혹을 저버
리게 된다. 그 태도나 움직임에 있어서 상대방을 지배하는 시늉을 하면 쾌락에 잘 도달할 
수 없다. 자존심에 구애받는 여성의 대다수는 불감증에 걸리게 된다. 애인에게 지배적이
거나 혹은 자학적인 경향을 만족시켜주는 남성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순종에
서 완전한 성적 만족을 얻는 여성은 더욱 드문 것이다.
  여성에게는 이보다 훨씬 쉬운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마조히즘의 방법이다. 종일 일
하고 싸우고 책임을 지고 모험을 하면 밤에 자극이 강한 흥분상태에 몸을 맡기는 것은 휴
식이 된다. 사실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여성이나 단순하고 소박한 여성이 남성의 강압적
인 의지에 기꺼이 몸을 맡기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는 분명히 자기가 지배를 받고 있다고 
느낄 필요가 있다. 날마다 남성들 속에서 살고 있는 여성은 좀처럼 남성의 무조건적인 지
상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진정한 마조히스트는 아니지만 대단히 '여성다운', 지금까지 남
성의 품에서 자기포기로 기쁨을 맛본 여성의 사례를 들은 적이 있다. 17세 때부터 여러 
차례 남편을 바꾸고 애인을 잇따라 사귀어 크게 만족을 느낀 이 여성은 어떤 어려운 일도 
무난히 해내었다. 그녀는 그 일을 하는 동안에 남성들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불감증에 걸렸다고 투덜댔다. 즉 그녀는 남성들을 휘어잡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되
면서 남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자기를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여성이 남성의 우월성

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 남성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여성이 남성에게서 느끼는 
존경심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침대에서 남성이 거칠게 나올 때 그가 과시하려는 남성다움
도 노련한 여성의 눈에는 유치해 보인다. 그는 단지 그녀에게 오래된 거세 콤플렉스나 그
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나 혹은 그밖에 다른 환상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여성이 애인의 자의에 좌우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자존심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가 상대
하고 싶은 것은 실제로 인생의 한순간을 살고 있는 어른이지 혼자서 지껄이는 어린애가 
아니다. 마조히스트인 여성은 남달리 환멸을 느끼게 된다. 어떤 일도 용서해야 하는 모성
애적인 친절은 그녀가 몽상하고 있던 자기포기가 아니다. 그녀는 남성에게 지배되고 예속
되어 있는 체하면서 어리석은 유희에 만족하거나 혹은 훌륭한 남성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온전히 섬길 수 있는 상대를 찾아내려고 하거나 혹은 불감증이 되거나 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남녀가 서로 대등하다고 인정하게 되면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유
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남녀의 어느쪽에도 다소의 겸손과 약간의 관용만 있으면 승리와 
패배의 관념은 없어진다. 그리하여 사랑의 행위는 자유로운 교환이 된다. 그러나 역설적
으로 말하면 이성인 개인을 자기와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은 남성보다 여성 쪽이 더 
어렵다. 남성쪽이 우월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남성은 많은 여성에게 다정한 존중을 바칠 
수 있다. 그들이 여성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여성은 우선 애인을 전과는 다른 세
계로 유도하여 그가 자기 곁에서 탐색하도록 하는 특권을 갖고 있다. 적어도 그녀는 한동
안 호기심을 일으키거나 즐거워한다.  다음엔 여성의 입장이 한정되고 종속적인 것이므로 
그녀의 모든 장점은 극복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잘못은 모두 용서하게 된다.
  스탕달은 레날 부인과 샤스텔레 부인이 모두 마땅치 않은 편견을 갖고 있었으나 칭찬하
고 있다. 여성은 잘못된 생각을 하거나 별로 지적이지 않다거나 통찰력이 부족하거나 용
감하지 못해도 무방한 것이다. 남성은 그런 여성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남성은 그녀는 
그 상황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대체로 옳다. 남성은 이 여성이 
전에 이러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 하고 상상한다. 그녀는 전혀 한
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그녀에게 외상을 줄 수 있고 많은 돈을 빌려줄 수 있다. 
이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은 곧 여성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지만 이 때문에 남성
을 유혹하여 쉽사리 애정을 느끼게 하는 신비나 매력이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남성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남성은 남에게 의존
하지 않고 존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성을 사랑하려면 그 현존, 그 진실 속에서
이지 애매한 약속이나 가능성 속에서가 아니다. 그는 자기 행동이나 사상에 책임을 갖고 
있다. 그에게는 변명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의 행위, 목적, 견해에 동의할 수 없으면 그
와의 우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쥘리앙은 정통왕조파(사상적으로 그의 반대파)의 여성을 
사랑할 수 있으나 라미엘(스탕달의 소설의 여주인공)은 자기가 경멸하는 사상을 가진 남
성을 좋아할 수 없을 것이다. 적당히 타협해도 좋을 듯이 보이지만 여성은 좀처럼 관대한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 그것은 남성이 유년시절의 초록빛 낙원을 그녀에게 열어보이지 않
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기들 두 사람에겐 공통된 이 현실세계에서 그를 만난다. 남성은 자기자신만을 
내세운다. 그는 이기적이고 완고하여 상대에게 몽상을 즐기게 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면 

여성은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는 점잔을 뺀다. 재미가 없고 따분한 인간이라 옆에 
있으면 갑갑하다. 다만 아주 젊은 남성이라면 그의 주위에는 거리낌없는 동화 같은 분위
기가 조성된다. 그래서 신비나 미래의 약속을 구할 수 있다. 그들에게서는 구실을 찾아볼 
수도 있다. 또 그들을 가볍게 다룰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성숙한 여성에게 매력적으
로 보인다.
  그런데 대개 젊은 남성은 젊은 처녀를 좋아한다. 여성도 30대가 되면 성년의 남성 쪽으
로 눈길을 돌린다. 그리하여 그녀는 필시 그런 남성들 가운데서 존경이나 우정을 손상시
키지 않을 남성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남성이 거만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그녀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다. 그녀가 몸과 마을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한 편의 이야기, 하
나의 연애극을 연출하고 싶을 때 여성에 대해 우월감을 갖지 않고 여성도 자기와 대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남성을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여성은 그다지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여성은 
문제를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기회를 잡는다. 자존심이나 관능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해결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 그녀는 실망, 굴욕, 회한, 원한 등을 은밀히 마
음속속에 숨기고 있다. 이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남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지만 여성 쪽
이 훨씬 많다. 남성은 다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어도 거기서 쾌락이라는 이득을 찾
아 내지만, 여성은 그 경우에 아무 이득도 얻지 못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설사 그녀가 
남성에게 냉담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예의상 포옹에 공손히 응하게 된다. 그러나 
그 남성이 무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게 되면 여성은 어리석은 일에 애쓴 것을 괴
로워하게 마련이다. 만일 그녀가 쾌감을 느낄 수 없다면 속아서 노리개가 되었다고 느끼
게 된다. 그러나 정욕이 충족되면 언제까지나 애인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한다. 쾌락을 기
대하여 일시적인 연애를 했을 뿐이라고 말할 때에도 그것이 진정한 마음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쾌락은 그녀를 해방시키기커녕 구속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합의에 따라 남성과 
손을 끊었을 때에도 그녀는 상처를 입게 된다. 여성이 옛 애인에 대해 정답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경우는 남성의 경우보다 훨씬 드물다.
  여성은 색정과 자유로운 성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자기들을 일부일처제로 몰아넣는다. 
교제나 결혼은 여성 쪽이 남성보다 직업과 조화되기가 훨씬 어렵다. 애인이나 남편은 그
녀에게 직장을 그만두기를 요구한다. 이때 여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망설이게 된다. 
자기 쪽에서도 남성의 열정을 애절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결혼의 사슬에 매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콜레트의 (방랑하는 여자)와 비슷하다. 남자의 요구에 그대로 따르면, 그녀
는 또 다시 예속자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거절하면 그녀는 따분한 고독에 빠지게 
된다.
  오늘날에는 대개의 남성들이 자기의 배우자가 직장에 계속 나가는 것을 용납한다. 가정
의 평화를 위해 직장을 희생하는 젊은 여성을 다룬 콜레트이베르의 소설은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작품이 되어버렸다. 자유로운 두사람의 공동생활은 각자에게 풍요로움을 준다. 
그리고 각자의 독립을 보장받는다. 자활이 가능한 여성은 남편을 부부생활의 노예상태에
서 해방한다. 남편의 노예상태는 그녀 자신의 노예상태의 대가이다. 만일 남성이 이해심
이 많은 친절한 사람이면 애인끼리나 부부는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고 관용 속에서 완전

한 평등에 도달할 수 있다. 남성 쪽이 오히려 헌신적인 하인의 역할을 떠맡는 경우도 없
지 않다. 조지 엘리엇의 곁에서 루이스는 군주와 같은 남편에게 쾌적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가정의 조화를 위해 수고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여성이다. 여성이 
가정을 관리하며 혼자서 자녀를 돌보고 교육한다. 그리고 남성은 이것을 자연스러우며 당
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다. 또 여성 쪽에서도 결혼하게 되면 그 생활에 뒤따르는 여러 가
지 일거리들을 책임지고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남편이 여성다운 여성과 함께 
살면 얻게 되었을 여러 가지 이득을 잃지 않게 하려고 한다. 아내라는 개념이 전통적으로 
그렇듯이 그녀는 우아하고 좋은 주부가 되고 헌신적인 어머니가 되려고 한다. 띠라서 일
이 고되게 마련이다. 남편을 위해 자기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 이런 일을 떠맡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자기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자신
인 동시에 남편의 그림자이고자 한다. 자기 운명에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그 이상으로 남편의 걱정을 함께 나누고 그의 성공에 협력하려고 한다. 남성의 우월성을 
존중하도록 교육을 받아왔으므로, 제1위를 차지하는 것은 남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때
로는 그 제1위를 빼앗으려고 하면서도 그렇게 하면 가정의 평화가 깨질지도 모른다고 염
려한다. 그녀에게는 자기를 확립하려는 욕구와 자기를 부정하려는 욕구가 양분되어 있다.
  그러나 여성은 그 열등성 자체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하나 있다. 그녀는 출발점에서 
남성만큼 기회가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선험적으로 자기쪽에는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불공평을 보상할 책임은 그녀에게 있지 않다. 그녀에게 그런 책임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선량한 남성이라면 여성에게 친절히 대해야 한다. 여성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은 여성의 아름다운 마음씨나 인정에 이끌리게 마련이다. 남성은 무
방비 상태이므로 남성에게 '달라붙고' 남성을 '삼켜버리는' 여성들의 먹이가 될 위험성도 
있다. 남성과 같은 독립을 획득한 여성은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남성들과 성적으로 교섭을 
갖는 큰 특권이 있다.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남성은 자기의 생활에 기생적인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들의 약점과 정욕의 요구에 따라 상대방 여성을 속박하지도 않을 것이
다. 다만 상대방 남성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성이 흔치 않은 것이다. 남성은 
여성을 속박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데 여자들 스스로 구속의 쇠사슬을 멋대로 마음속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남성에게 연애하는 여성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대와 꿈
과 희망의 20년 동안, 젊은 처녀는 자기를 구원해 줄 영웅의 신화를 마음속으로 키워왔던 
것이다. 직장을 통하여 독립을 획득해도 아직 광휘에 찬 자기포기의 욕구를 버릴 수는 없
다.
  그녀가 처녀시절의 나르시시즘을 쉽사리 극복하려면 정확하게 남아와 마찬가지로 교육
을 받아야 한다. 그녀는 청춘시절에 빠졌던 자아숭배를 어른이 된 후에도 생활 속에 계속
해 나간다. 직업에서 성공하면 자신감이 생겨 자기 모습을 더욱 훌륭히 장식하려고 한다. 
그녀는 하늘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자기의 가치를 분명히 드러내어 인정해 주
기를 바라고있다. 매일같이 그녀는 남성들을 평가하며 그 점수는 상당히 짜지만 그래도 
역시 '남성' 을 경외하고 있다. 때문에 남성과 정면으로 마주치면 그 발치에 엎드리는 시
늉을 한다. 신에 의해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은 자기만의 노력으로 자기를 정당화하기보다 
쉬운 일이다. 세상도 그녀에게 주어진 이 구원의 가능성을 믿도록 장려하고 있다. 그러므

로 그녀는 그것을 믿는다.
  그녀는 자기의 자주성을 완전히 포기할 때도 있다. 그러면 그녀는 연애하는 여자에 불
과하다. 그녀는 때때로 타협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상숭배와 같은 연애, 자기를 포기하는 
연애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 연애는 그녀의 모든 생각과 시간을 악착같이 점령하
여 전제적이 된다. 직장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 그녀는 연애 속에서 열심히 피난처를 구한
다. 그녀의 실패는 히스테릭한 울부짖음이나 무리한 소원으로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며 애
인이 그것을 들어줘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의 상처로 인해 직업에의 열의가 높아지
거나 하지는 않는다. 흔히 그녀는 커다란 연애에의 왕도를 가로막는 그런 생활양식에 대
해 화를 낸다. 여성들이 편집하는 어느 시사잡지에서 10년 동안 일한 여성이 내게 말하기
를, 직장에서 정치가 화제에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언제나 연애 이야기만 했다고 한
다. 어떤 여성은 남성이 여성의 지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육체만 사랑한다고 불평하는
가 하면 어떤 여성은 이와 반대로 남성은 여성의 관능적인 매력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고 
여성의 지성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투덜댄다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남성과 대등하다고 생각해야 하고 또 실제로 대등해야 한다. 그리고 기
획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결의로 참가해야 한다. 이제부터 이에 대해 고찰하려고 하는데 
이런 일은 아직도 그리 흔하지 않다.
  현재로서는 완전히 자유롭게 인수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여성의 직능이 하나 있다. 그것
은 모성이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산하제한'을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어머니의 역
할을 거부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프랑스에서는 고통스럽고 비용이 드는 낙태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여성은 자기가 원하여 낳은 것
도 아닌데 아기를 키우기 위해 직장을 포기해야 한다. 여성에게 아이에 대한 부담이 많다
는 것은 여성이 아이를 낳고 싶을 때 낳는 것을 세상이 인정하지 않기때문이다. 사생아의 
어머니는 스캔들의 표적이 되고 아이에게도 비합법적인 출산은 결함이 된다. 여성이 결혼
의 사슬에 매이지 않고 혹은 육체를 망가뜨리지 않고 어머니가 되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다.
  인공수정이 많은 여성에게 흥미 자아내게 한다면 그것은 그녀들이 남성의 포옹을 싫어
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모성이 이윽고 사회에서 인정받게 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
이다. 시설이 좋은 탁아소나 유치원이 없기 때문에 여성의 능동성을 마비시키기 위해서는 
아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녀는 아이를 부모, 친구, 하녀에게 맡기지 않으면 직장에
서 일을 계속할 수 없다. 불임과 부담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 불임은 대부분의 
경우에 뭔가를 빼앗긴 것 같은 괴로움을 느끼게 하고 부담을 받아들이면 일과 양립하기 
어렵게 된다.
  오늘날 자유로운 여성은 직업에 대한 관심과 성의 사명에 대한 우려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 그 균형을 찾아내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균형을 찾기 위해서는 양보를 하거나 
희생을 치르거나 곡예와 같은 재주를 부려야 하며 또 언제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흔히 
여성에게서 볼 수 있는 신경질이나 연약성의 원인은 생리학적인 조건보다는 방금 언급한 
말 속에 있다. 여성의 신체적인 구조가 여성에게 어느 정도의 핸디캡을 주고 있는가를 결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중에서 월경장해가 문제시되는 경우도 많지만 일이나 행동

에 의해 이름이 알려진 여성의 경우를 보면 그런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녀들이 달마다 겪은 장해가 가벼웠기 때문에 그런 성공을 거둔 것일까? 반대
로 활동적이고 야심적인 생활을 택하였기 때문에 그런 특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이 아
닌가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여성은 이런 생리적인 불쾌감에 몹시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기분이 상하기 마련이다. 운동선수나 활동적인 여성은 그 고통을 그다지 문제시하
지 않기 때문에 다른 여성들처럼 괴로워하지 않는다. 확실히 이 고통은 생리적인 원인에
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례에 이런 것이 있다.
  가장 정력적인 부인이 매월 24시간 동안 침대에 누운 채 심한 고통에 시달렸으나 그 때
문에 그녀가 하는 일에 지장을 받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여성을 괴롭히는 불쾌
감이나 병의 대부분의 원인은 정신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다. 부인과의사의 견해도 마찬가
지이다. 앞에서 말한 정신적인 긴장이나 해야 할 노력 속에서 시달리고 있는 모순 때문에 
여성은 힘을 완전히 소모하여 기진맥진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의 병이 결코 상상
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 병이 나타내는 여성의 상황이 현실적인 것처럼 병도 현실적
인 것이며 괴로운 것이다. 여성의 상황이 그 신체에 의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상
항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직업여성이 사회에서 당연한 지위를 차지하더라도 그것에 신경
을 쓰지않게 되면 신체의 균형이 잘 잡히게 된다.
  여성의 직업에 대해 지금까지 어떤 것이 이루어졌나를 분명히 알고 거기서 장래를 예상
할 때,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 전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성은 괴로운 처지에서도 여
성이라는 것 때문에 전통적으로 여러 가지 부담을 진 채 자기가 하고 싶은 직업에 종사한
다. 객관적인 여건도 여성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 신참자로서 적의를 갖고 있거나 적어
도 호의를 갖고 있지 않은 사회 속에서 하나의 길을 닦으려고 하면 언제나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리처드 라이트는 (블랙 보이) 에서 젊은 아프리카 흑인의 야심이 처음부터 얼
마나 방해를 받았으며, 백인의 경우라면 겨우 출발점에 불과한 수준까지 도달하는 데에도 
얼마나 오랜 투쟁을 해야 했는가에 대해 쓰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에 온 흑인들도 
-자기자신의 내부에서나 외부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비슷한 곤란을 겪고 있
다.
  여성이 열등한 입장에 놓이게 되는 것은 먼저 그 수업시절에서이다. 앞에서 젊은 처녀
에 대해 언급할 때에도 말했지만 좀더 정확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공부하는 동
안, 즉 그녀가 직장에서 일한 처음 몇 해 동안, 이 가장 중요한 몇 해 동안에 조금도 망
설이지 않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많은 여성들은 언제나 출발점에
서부터 핸디캡을 갖게 마련이다. 실제로 18세에서 30세 사이에 앞에서 말한 것 같은 정신
적인 갈등이 극한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바로 여성이 자기 직업의 장래를 결정하는 시기에 
해당된다. 가족과 함께 살거나 결혼하여 따로 나가 살거나 여성의 노력은 남자의 그것처
럼 주위사람들이 존중하는 경우가 드물다. 여러 가지 용무나 힘든 일을 그녀에게 강요하
고 그녀의 자유를 억압한다. 그녀 자신은 아직 교육으로 틀에 박혀 있다. 언니들이 따르
는 가치를 존중하고 유년기나 청춘기의 꿈이 떠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녀는 과거의 유산과 미래의 이득을 원만히 조화시키지 못한다. 때로는 여성
으로서의 자기 운명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리고 순결이라든가 동성애, 남성화된 처녀와 

같은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녀는 일부러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변장도 한다. 도전적
인 태도, 연극, 분노, 이러한것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다. 한편 자주 여성다움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녀는 마조히즘과 공세적인 태도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교태를 부리
고 남성을 유혹하고 사랑에 빠진다. 의문에 빠지고 동요하고 힘을 분산하다.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기 일쑤이므로 올바른 기획에 전력투구를 하지못한다. 결국 자기가 히는 일에서 
이득도 별로 취하지 못하며 그 일을 포기하기가 쉽다.
  자립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여성의 정신상태를 크게 악화시키는 것은, 그녀들과 같은 사
회에 속하여 출발점에서는 같은 여건과 기회를 갖고 있으면 기생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다른 여성들의 존재이다. 남성은 특권계급에 속하는 자들을 보면 기분이 상하지만 자기 
계급에는 연대성을 느낀다. 대체로 남성은 출발점에서 기회가 균등하면 거의 같은 생활수
준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여성은 같은 조건이라도 남성의 매개에 의해 많은 차이가 생
긴다. 친구가 결혼하거나 혹은 남의 덕에 편안히 살아가는 것을 보면 자기 힘으로 성공해
야 하는 여성은 유혹을 느낀다. 어쩐지 자기는 일부러 고생이 가장 많은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하나의 장애에 부딪칠 적마다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이 좋지 않았
을까 하고 자문자답한다.
  "하나에서 열까지 자기 머리로만 해결해 나가야 하다니요!" 하고 어느 가난한 여학생이 
불만스럽게 나한테 말한 적이 있다. 남성은 절박한 필요성에 의해 움직인다. 여성은 언제
나 결의를 새롭게 해야 한다. 목표를 향해 똑바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 전진한다. 소심하고 자신이 없는 발길이다. 그녀가 대담하게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녀는 또 다른 기회를 놓치게 된다. 남성은 일반적으로 유식하고 머리가 좋은 여성을 달
가워하지 않는다. 여성이 지나치게 성공하면 남편이나 애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그
래서 그녀는 그만큼 자기를 더 경박한 여성으로 보이려고 할 뿐 아니라 도약하려는 힘을 
무리하게 억제한다. 언젠가는 자기 자신의 일 때문에 일어나는 걱정에서 해방되고 싶은 
희망과 자기 일에 매여 있으면 앞으로 편안히 살아갈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걱정이 합
세하여 연구나 직업에 전념하는 것을 방해한다.
  여성이 여성이기를 원하는 한, 그녀의 자주적인 입장에서 일종의 열등감이 생기게 된
다. 반대로 그녀의 여성다움은 그녀에게 직업에서 성공할 기회를 의심케 한다. 이것이 가
장 중요한 문제점이다. 이런 사례가 있다. 14세의 소녀들에게 앙케이트를 제출했더니, 그
녀들은 저마다 "소년들이 더 유리하다, 그들은 쉽게 공부할 수 있다." 고 대답하는 것이
었다. 그녀들은 자기들의 재능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부모나 선생들이 소
녀의 지적 수준은 소년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여학생들조차 그렇게 생각
한다. 사실 고등학교에서는 수업내용이 같지만 여학생의 교양은 남학생에게 떨어진다. 예
외는 있겠지만 철학 과목의 여학생반은 남학생반보다 성적이 확실히 떨어진다. 여학생의 
대다수는 언제까지나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 없다. 그녀들은 형식적으로만 공부한다. 그래
서 학구열이 있는 여학생들도 경쟁심을 잃게 된다. 시험이 쉽게 출제되면 그녀들의 실력 
부족이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중요한 시험을 치르게 되면 여학생들은 실력부족을 진심으
로 걱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실력 부족의 원인을 공부하는 방법이 서툴렀기 때문으
로 생각지 않고 성이라는 불우한 운명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불

평등을 체념하기 때문에 불평등이 점점 심해진다.
  그녀는 성공의 기회가 인내와 근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력을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려고 결심한다. 이것은 참으로 졸렬한 사고방식이다. 특히 창의나 독창성, 또는 세
밀한 고안을 필요로 하는 연구나 직업에서는 이런 타산적인 태도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
다. 토론이나 과외 독서, 또는 정신이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산책 등은 그리스어의 원
전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따분하게 편찬된 두꺼운 문법책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 양심적
인 여학생은 권위의 존경이나 박식의 무게에 눌리고 눈을 가리고 일정한 방향만 보이게 
하여 비판정신과 지성을 말살시키고 있다. 그 악착스러운 방법은 긴장과 권태를 가져온
다. 세브르(프랑스의 유명한 여자고등학교)의 입시 준비를 하고 있는 반에서는 조금이라
도 발랄한 개성은 질릴 수밖에 없는 숨막히는 분위기에 지배되어 있다. 수험생은 스스로 
도형장을 만들고 있지만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어한다. 일단 책을 덮으면 전혀 다른 생각
을 하게 된다. 그녀는 공부와 오락이 함께 융합되는 풍부한 시간, 정신적인 모험이 열을 
올리는 시간을 알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맥이 풀려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남녀공통의 선발시험에서 교수 자격을 취득
하려고 했던 어떤 여학생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한두 해만 공부하면 합격하겠지만 우리는 아무래도 4년은 걸려요." 언제나 시
험에 잘 출제되는 칸트의 철학책을 읽고 준비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다른 여학생은 "그 책
은 너무 어려워요. 그건 남자들이나 읽을 책이에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여성은 시험
에서 가산점수라도 받아야 합격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처음부터 패배의식
을 갖고 출발하기 때문에 성공할 기회를 송두리째 남성에게 주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패배주의 때문에 여성은 대수롭지 않은 성과로 만족하기 쉽다. 그녀들은 감
히 큰 희망을 갖지 못한다. 표면적인 소양만 몸에 지닌 채 일을 시작하고 큰 야심을 억눌
러버린다. 그럭저럭 자활할 수만 있어도 큰 업적을 올린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많은 여
성들처럼 자기 운명을 남성의 손에 맡길 수도 있다. 자주성을 계속 유지하려면 아직도 많
이 노력해야 한다. 그녀는 그 노력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그 때문에 피로를 자초하게 된
다. 뭔가를 손수 해보려고 선택한 것만 해도 그녀에게는 대견하게 느껴진다. "여성으로서
는 이것만으로도 대단해." 하고 생각한다.
  선례가 없는 색다른 직업을 택한 어떤 부인이 "만일 내가 남성이라면 일류가 되어야 한
다고 느꼈을 테지만,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여성은 프랑스에서 나 하나뿐이므로, 나로서는 
이것으로 만족해요." 하고 말한 기억이 난다. 이런 겸손에는 조심성이 깃들어 있다. 여성
은 더 출세하려다가 좌절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한다. 여성은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겁쟁이가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상류계급은 하류계급의 출세자에게 적의를 갖고 있다. 백인은 흑인 의사의 
진찰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남성은 여의사를 싫어한다. 그리고 하류계급 출신 중에서 그
들의 특유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운명을 극복한 사람에게 강한 반감
을 느끼고 있으며 이들도 권력자 쪽에 가담하려고 한다. 남성에 대한 존경심이 몸에 밴 
여성은, 특히 의사, 변호사, 사장 등의 직업에서 그런 남성을 열심히 찾는다. 남녀를 막
론하고 여성의 지시를 받는 것을 싫어한다. 윗자리에 있는 남성들이 설사 여성을 존중한

다 해도 언제나 여성에게 다소의 동정을 베풀기를 잊지 않는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인간적인 결함이라고까지 말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하나의 특질이
기는 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신뢰를 받지 못한 여성은 그 신뢰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성은 출발점에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여성은 어떤 증거를 보여야 한다. 만일 그녀가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면 그것을 분명히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가치는 주어진 본질이 아니다. 훌륭히 발전하여 좋은 결과에 도달
하는 것이다. 불리한 편견이 자기에게 무거운 부담이 된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그 편견
을 극복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초보적인 열등감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자기
방어의 반동을 일으켜 과장된 오만을 가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여의사는 대다수가 그런 과장이 많거나 또는 너무 적다. 만일 그녀들이 자연
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되면 위험이 없어진다. 여성으로서의 생활 전체로 보아 그녀들은 
명령하기 보다는 오히려 유혹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한 명령을 받기를 좋아하는 환
자는 단순히 조심하라는 말을 들으면 실망한다. 이 사실을 의식한 여의사는 일부러 단호
한 어조로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녀는 자신만만한 남자 의사의 호감을 사는 원만
한 인간성을 잃게 된다. 남성은 권위를 나타내는 데 길들여져 있으므로 환자는 그의 능력
을 믿는다. 그는 마음대로 행동하여 믿음직스러운 인상을 준다. 여의사는 환자에게 그런 
안도감을 주지 못한다. 그녀는 경직되거나 망설이는 등 지나친 반응을 보인다. 사무, 관
리에서 그녀는 사소한일에 구애되고, 걸핏하면 도전적인 태도를 보인다. 연구할 때와 마
찬가지로 그녀들에게는 자연스럽고 원만한 태도나 자유로운 비약이나 용기가 결여되어 있
다. 성공하려고 안달을 한다. 그녀의 행동은 도전과 추상적인 주장만 되풀이한다.
  여기에 확신의 결여에서 비롯된 최대의 결함이 있다. 주체가 자기를 잊지 못하고 너그
러운 마음으로 목표를 항해 전진하지 못한다. 그리고 세상에 요구하는 가치의 증거를 제
시하려고 노력한다. 담대하게 목적달성을 위해 매진하면 후회하게 될지 모르지만 한편 뜻
하지 않은 성과를 얻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조심성은 평범이 되어버린다.
  모험이나 무상의 경험을 하고 싶어하는 취미나 순수한 지적인 호기심 등은 여성에게서
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다른 여성들이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나의 경력을 갖고 
싶어한다. 그녀는 남성의 세계에 지배되고 에워싸여 그 천장을 뚫을 용기가 없다. 정열적
으로 자기의 기획에 몰두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기 삶을 여전히 내재적인 기획처럼 생
각하고 있다.어떤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통하여 주관적인 성공을 거두려고 한다. 이것은 특히 미국 여성들의 특징이다. 그녀들은 
어떤 직업을 갖고 싶어하며 그 직업을 훌륭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 그녀가 하는 일의 내용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다. 여성은 작은 실
패나 평범한 성공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의기가 소침해지는가 하면 오만해지
기도 한다.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경우에는 그 일을 가볍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남들이 
의혹의 눈으로 보는 일에 성공하면 승리감에 도취된다. 여성이 광적으로 거들먹거리거나 
사소한 성공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성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고 지나온 길을 재어보므로 비약이 저해된다. 이런 방법으
로 명예로운 일은 할 수 있겠지만 위대한 일은 하지 못할것이다. 여기서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남성도 대다수가 극히 평범한 운명밖에 개척하지 못한다. 여성이 -극히 보기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우리에게 아직 자기 능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약자로 보이는 것은 
남성들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들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한 여러 가지 이유가 
그것을 설명하고 있지만 장래의 일은 알 수 없다. 어떤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할 경우에 오
늘의 여성에게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은 자기망각이다. 자기를 잊으려고 하면 우선 
정확한 자기발견을 확인해야 한다. 남성의 세계에 막 들어온 신참자로서 남성의 도움을 별
로 받지 않은 여성은 아직도 자기탐구에 전념하고 있다.
  이런 지적이 적용되지 않는 부류에 속하는 여성들도 있다. 그녀들의 직업이 여성다움을 
주장하는 것을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주장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조건을 
예술적인 표현에 의해 초월하려고 하는 여성들, 즉 여배우, 무용가, 성악가 등이다. 그녀들
은 사회 속에서 구체적인 자유를 독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여성이며 지금도 특권적인 지
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에는 여배우라는 직업은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앙왔다. 이런 지나친 
엄격성이 오히려 그녀들에게 커다란 도덕적인 자유를 허용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남성의 
색정적인 유혹에 익숙하여 창녀처럼 하루의 대부분을 남성들에게 에워싸여 보내고 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속박
에서 벗어난 그녀들이 누리고 있는 큰 이득은, 직업상의 성공이 남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적인 가치를 끌어올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인간으로서 자기를 실현
하면서 동시에 여성으로서도 자기를 완성한다. 여러 가지로 상반되는 갈망 사이에서 분열
되기는커녕 나르시시즘을 자기 일을 통해 정당화할 수 있다. 즉, 의상, 화장, 매력 같은 것
이 그 직업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중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자
기를 보여주면서 활동한다는 것은 자기 모습에 매혹되어 있는 여성을 크게 만족시킨다. 이 
전시는 행동의 대용(이것은 조르제트 르블랑의 말이지만)이 될 정도로 상당한 기교와 연
구를 필요로 한다. 유명한 여배우가 되면 더욱 높은 이상을 갖게 된다.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을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그 여건을 초월하여 진정한 예술가가 되고 세계에 
의미를 제공하면서 자기의 삶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손에 넣을 수 없는 이 특권에도 함정이 숨겨져 있다. 여배우가 나르시시
즘의 기쁨이나 허용된 성의 자유를 자기 예술생활의 일부로 삼지 못하고 자기숭배나 색욕
에 빠져버리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이런 가짜 예술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들은 단지 영화, 영극을 통해 남성의 보호를 받으면서 이용할 수 있는 자본으로
서의 명성을 얻을 생각만 하고 있다. 남성의 도움을 받는 것은 편리하므로 직업상의 위험
이나 대부분의 노동에 따르는 엄격성에 비하면 유혹을 느끼기 쉽다. 여성다운 운명, 즉 남
편, 가정, 자녀를 갖고 싶은 욕구와 사랑의 매혹과 출세하려는 의지는 좀처럼 조화되기 어
렵다.
  그런데 특히 그녀가 자기에 대해 느끼는 감탄은 여배우로서의 재능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단지 거기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진실한 
일도 하찮게 본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자기 얼굴을 드러내려고 하여 졸렬한 연기로 자기 
배역을 망쳐버린다. 그녀에게는 자기를 망각하는 고귀한 정신이 없다.그러므로 자기를 초
월할 가능성도 없어진다. 라셸이나 뒤세 같은 여배우는 이런 암초를 뛰어넘은 보기 드문 

여성들이다. 그녀들은 예술을 자아의 하인처럼 여기지 않고 자기의 개성을 예술의 도구로 
삼았다. 그러나 가짜 여배우는 그 사생활에서 나르시시즘의 모든 결함을 드러내보인다. 허
영심이 강하고 민감하고 위선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전세계를 연극 무대처럼 생각한
다.
  
  오늘날의 여성에게 표현 예술만 허용되어 있는것이 아니다. 많은 여성들이 여러 가지 창
조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성은 환경 때문에 문학이나 예술에서 구제를 찾기 쉽다. 남성 
세계의 변두리에서 살고 있는 여성은 그 세계의 보편적인 모습을 파악하지 못한다. 특수한 
하나의 관점을 통해 그것을 보고 있다. 그 세계는 그녀에게는 도구나 개념의 전체가 아니
라 감동이나 정서의 원천이다. 그녀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무상의, 그리고 은밀한 사물의 
성질이다. 현실에 대하여는 부정과 거부의 태도를 취하고 있으므로 현실 속에 몰입하지 못
한다. 그녀는 말로만 현실에 항의한다. 자연을 통하여 자기의 영혼의 모습을 찾는 몽상에 
빠진다. 그녀는 자기의 존재에 '도달'하기를 원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녀는 그 실패를 상
상의 영역에서밖에는 만회하지 못한다. 유인한 목적을 갖지 못한 내면생활의 허무 속에 빠
지지 않기위해 그리고 반항하면서 따르고 있는 주어진 여건에 대해 자기를 주장하기위해 
자기가 도달할 수 없는 세계와는 별도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
를 갖게 된다. 그래서 여성은 수다쟁이와 낙서가로 알려지게 된다. 대화, 편지, 일기에 자
기 생각을 쏟아붓는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약간의 야심만 있느면 그녀는 수기, 자서전, 소
설을 쓰고, 자기 감정을 시로 펴현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이런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많
은 여가가 주어져 있다.
  그러나 여성을 창조활동으로 향하게 하는 환경ㅇ이 오히려 장해가 되어 극복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녀가 매일의 심심풀이를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려고 해도, 그 그림
이나 글은 규수의 작품으로 취급되므로, 더 이상 시간이나 공을 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
러므로 그 작품은 그 정도의 가치밖에 갖지 못한다.
  여성이 자기 실존의 실패를 보상하기 위해 붓과 펜을 들어 작품활동에 전념하는 것은 
갱년기 이후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늦다. 제대로 훈련을 거치지 못했으므로 아마추
어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설사 훨씬 젊었을때부터 시작하더라도 예술을 진지하게 생
각하는 겨우는 매우 드물다. 그녀는 무위에 길들여져 있고 실생활에서 엄격한 수련의 필요
성을 경험한 적이 없으므로 끈기 있는 노력을 계속하지 못할 것이다. 확실한 기술을 습득
하기 위해 고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번번이 망가뜨리고 다
시 시작해도 뜻대로 되지 않아 혼자 암중모색하는 노력을 싫어한다. 어렸을 때부터 남의 
호감을 사려면 속임수를 써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왔으므로 귀찮은 일이 생기면 책략으
로 해결하려고 한다. 마리 바슈키르체프가 고백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 나는 애써 
그림을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오늘 나는 내 자신을 관찰했다. 나는 나를 속이고 있다..."
  그녀는 일하는 연기는 좋아하지만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마술적인 힘을 믿어 마술과 행위, 상징적인 태도와 효과적인 행동을 혼동한다. 미술학교 
학생으로 변장하고 화구를 손에 든다. 이젤 앞에 앉아 눈길은 흰 화폭과 거울 사이를 이리
저리 방황한다. 그러나 꽃다발이나 사과바구니는 제 발로 캔버스 위로 걸어오는 것이 아니

다. 책상 앞에 앉아서 줄거리가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자기는 작가라고 상상하
는 것으로 평온한 알리바이(부재증명)를 확보한다. 그러나 사실은 백지 위에 글자를 써야 
하며 그 글자가 남의 눈에 어떤 의미를 갖게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속임수는 정체를 드
러낸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터무니없는 환상으로 충분하지만 예술작품은 환
상이 아니다. 그것은 확고한 객제이차. 이것을 만들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 콜레트가 위
대한 작가가 된 것은 단지 타고난 재능이나 기질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의 펜은 생활의 도
구였다. 솜씨가 좋은 장인이 그 도구로 공들여 일을 마치려고 하는 것처럼 그녀는 공들여 
작품을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클로딘>에서 <하루의 탄생>까지 아마추어에서 전문가가 
되어 갔다. 그 과정을 동아보면 엄한 수련의 결실이 선명히 나타나 있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전달이라는 욕구에 어떤 문제가 숨어 있는가를 잘 
알지 못한다. 이것은 그녀들의 나태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녀들은 자기를 주어진 일정
한 존재로 생각해 왔다. 지금도 재능은 은총처럼 그 사람의 내부에 담기는 것으로 믿고 있
다. 그녀들은 재능을 노력하여 얻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을 매혹시킬 때에도 있
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밖에는 모르고 있다. 타고난 매력이 작용하느냐 못하는냐
의 문제일뿐이다. 성공하는냐 실패하느냐에 대해 행동의 발판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마
찬가지로 흔히 자기를 표현하려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반성하면
서 공들여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발성에 의존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글을 
쓰는 것과 미소를 짓는 것이 동일하다. 그녀들은 자기의 운수를 시험해 본다. 성공하면 다
행이고 실패해도 그만이다. 자기자신에게 확신을 갖거나 노력하지 않은 채 문학작품이나 
그림에 성공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소심하므로 조금이라도 언짢은 비평을 받으면 의기소침
해진다. 실수가 발전의 길을 열어주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한 번 실수를 하면 불구와 마찬
가지로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들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민감성을 보
여주기가 일쑤이다. 실수에세 많은 교훈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것에 흥분하거나 낙심할 뿐
이다.
  불행하게도 자발적이라는 것은 겉으로 보는 것처럼 단수한 행위가 아니다. 평범한 역설
은- <타르브의 꽃>에서 폴랑이 설명하는 것처럼- 흔히 주관적인 인상의 직접적인 표현
과 혼동된다는 것이다. 여성이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단지 자기에게 형성된 이
미지를 가장 특이한 개성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겨우에도 그녀는 단지 평범한 틀에 박
힌 문구를 사용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것을 지적하면 그녀는 크게 놀라 야
속한 마음으로 펜을 내던진다. 그녀에게는 일반 독자는 자기 나름의 안목과 생각으로 읽으
며 대단히 신선한 표현이라도 독자들의 낡은 회상을 상기시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물론 자기의 내면에 파고들어 거기서 강렬한 인상을 포착하여 글로 표현할 수 있
는 것은 귀중한 재능이다. 콜레트의 작품에서 독자들은 남성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발성에 감탄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비록 이 두 말이 모순되는 것 같
지만- 잘 반성된 자발성이다. 클레르는 어떤 인상은 거부하고 충분히 의식하는 것만을 받
아들일 뿐이다. 아마추어는 말을 개인 상호간의 관계나 타자에의 호소로 파악하지 않고 자
기 감수성의 직접적인 표현으로만 사용한다. 그런 사람은 말을 선택하거나 삭제하면 자아
의 일부를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는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즐기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자기의 어느 부분도 희생시키기를 원치 않는다. 자기
를 쌓아올리려고 생각하지 않고 너무 아끼기만 하기 때문에 비생산적인 허영심이 생기게 
된다.
  
  장난삼아 문학이나 예술을 하려고 하는 많은 여성들 중에 오래 계속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 첫번째 장애를 뛰어넘은 여성들도 대개는 나르시시즘과 열등감 사이에서 머뭇
거리는 경우가 많다. 자기를 망각하지 못하는 결함은 다른 어떤 직업에서보다 귀찮고 무거
운 짐이 될 것이다. 그녀들의 주요한 목표가 자아를 추상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며 성공이라
는 형태에서만 만족을 느낄 수 있다면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
녀들은 예술 속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려고 결심했다. 명예욕이라는 고정
관념이 그녀와 현실 사이에 개재한다. 사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
는다. 예술은 그녀에게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야심적이고 공허한 꿈만으로는 색채와 얼
굴의 의미를 알 수 없다. 고귀한 심정으로 창작에 주력하지 않고 그림을 단지 생활의 장식
으로 생각하는 여성이 많다. 문학작품이나 회화는 그녀가 본질적인 현실(그녀 자신)을 전
시하게 하는 비본질적인 매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흥미로운- 때로는 유일한- 
주제는 그녀의 인경이다. 비제 르블렁 부인은 지칠 줄 모르고 화폭에 그녀의 정다운 모성
애를 그린다. 여루작가는 일반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역시 자기에 대해 말
하고 싶어한다. 연극평에서도 필자의 키나 체격, 또는 머리색깔이나 성격의 특징 등을 추
측할 수 있다. 물론 자아라고 해서 언제나 혐오스러운 것은 아니다. 고백 이상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은 없다. 다만 그 고백은 어디까지나 성실해야 하며 그 작가는 고백할 만한 내용
을 갖고 있어야 한다.
  여성의 나르시시즘은 그녀 자신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고 빈약하게 한다. 자기만을 응시
하고 있기 때문에 무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 자체가 틀에 박히게 된
다. 작품에서 자신의 진정한 체험을 발견하는것이 아니라 평범한 문구로 쌓아올린 공상적
인 우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들이 그 소설에서 뱅자맹 콩스탕이나 스탕달처럼 자아를 반
영했다고 해서 비난 할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를 어리석은 선녀의 이야기처럼 생각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젊은 처녀는 생생한 현실에 두려움을 느껴 많은 불가사의를 이용하여 도피하고 있다. 유
감스럽게도 어른이 되어도 역시 세계나 그녀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나 그녀 자신을 
시적인 안개 속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이런 가장 밑에서 진실이 드러나 매력 있는 성과
를 얻는 경우도 없지 않다. <먼지>니 <충실한 요정>이 있는 반면에 싱겁고 도피적인 소
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세상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을 안 여성이 그런 세상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여성이 제라르 드네르발이나 
에드거 앨런 포처럼 대담한 비사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은 이런 소심함에 대해 여
러 가지 변명을 한다. 남에게 호감을 사고 싶은 것이 최대의 관심사이다. 그녀는 자기가 
작품을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성으로서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나닌가 하여 

두려워한다. '규수작가'라는 말은 이제 좀 낡은 표현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불쾌한 반응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작가로서 남의 기분에 거역할 용기가 없다. 독창적인 작가는 
살아 있는 동안 으레 어떤 반감을 사게 마련이다 새로움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불쾌하
게 한다. 여성은 남성이 다루는 영역인 사상과 예술의 세계에서 인정을 받게 되면 깜짝 놀
라면서 기뻐한다. 그리고 매사에 조심한다. 감히 휘젓거나 깊이 파고 들거나 폭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겸손하고 고상하고 울륭한 취미를 보여서 문학을 하려고 한 뻔뻔 스러움을 
용서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녀는 자기가 여성이라는 것을, 선택된 우아함, 감미
로움, 자부심 등을 통해 알리려고 한다. 이 모든것은 그녀가 '베스트셀러'를 쓰는 데 도움
을 준다. 그러나 그녀가 미지의 길로 접어들어 모험을 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
다고 여성이 행동이나 감정에 있어서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가둬두지 않
으면 안될 정도로 특이한 여성도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훨씬 
괴상하고 특이하다. 그러나 그녀들이 기묘한 특성을 발휘하는 것은 일상생활, 대화, 편지에
서이다. 만일 그녀들이 새삼스럽게 글을 쓰려고 할 때면 그녀들은 문화라는 세계에 의해 
짓눌리는 것처럼 느낀다. 그것은 남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분명한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남성이 구사하는 기술 자체를 사용하여 의논하거나 의사를 표시하는 여성
은 자신이 없는 자기개성을 질식시키게 될 것이다. 그녀는 여학생처럼 쉽사리 공부에 열중
하여 현학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남성의 엄격함과 남성다운 태도를 그대로 본받게 될 것
이다. 뛰어난 이론가가 될지도 모르고 또 확고한 재능을 습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여성은 자기 내부에 깃들어 있던 특성을 배제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는 미치광이 같
은 여성도 있고 유능한 여성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그 재능속에 이와 같
이 특이한 광기를 갖고 있는 여성은 한 사람도 없다.
  지금까지 여성의 재능에 제한을 가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 겸손한 태도이다. 많은 여성들
은 나르시시즘이나 허황된 불가사의라는 덫에 걸리지 않으려고 하며 그것을 폭로해 왔다. 
이제 이런 여성들이 점점 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 세계를 뛰어넘어서 고개를 치켜들려
고 신중함을 완전히 버리는 여성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성이 많다. 그녀들은 위협받고 있는 계급 속에서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시민계급의 시인인 것이다. 선택된 형용사를 구사하여 이른바 '질'
의 문명의 세련을 노래한다. 그녀들은 행복이라는 중산층의 이상을 높이 들고 자기들 계급
의 관심을 시의 빛깔로 위장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에게 언제나 여성이기를 설득하는 기만
적인 교향악을 작곡한다. 옛 집, 정원과 채소밭, 정다운 할머니, 고집 센 아이들, 빨래, 잼, 
의상, 객실, 무도회, 고생이 많은 정숙한 아내, 헌신과 희생이 따르는 부부의 여러 가지 애
환, 청춘의 꿈, 분별에서 오는 체념은 이제 바닥이 날 정도로 영국, 프랑스, 미국, 캐나다, 
스칸디나비앙의 여류작가들의 테마로 많이 사용했다. 그녀들은 이런 테마에 의해 명예와 
돈을 손에 넣었으나 우리들의 세계관을 풍족하게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드녀들보다 이 불
공정한 사회를 규탄해 마지않는 반항심이 강한 여성 쪽이 훨씬 흥미를 끈다.
  권리회복을 요구하는 문학은 강력하고 성실한 작품을 낳을 수 있다. 조지엘리엇은 반항 
속에 빅토리아 왕조 치세하에 있는 영국의 세밀하고 극적인 이미지를 남김없이 그렸다. 그

러나 버지니아 울프가 주의를 촉구하고 있는것처럼,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조지 엘리
엇 등은 외적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정력을 소극적으로 소모해야 했으므로 역량 
있는 남성작가들이 출발점으로 삼는 그 단계에 도달하려면 숨이 가쁠 것이다. 그녀들에게
는 승리를 발판으로 하여 자기들을 속박하고 있는 밧줄을 한꺼번에 끊을 만한 여력이 남
아 있지 않다. 그녀들에게서는 스탕달의 아이러니나 자연스러운 태도, 그리고 침착한 솔직
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와 같은 풍부한 경험도 없다. 그
리하여 <미들마치>는 훌륭한 작품이지만 <전쟁과 평화>에 미치지 못하고, <퐁풍의 언
덕>도 위대한 작품이지만 <카라마조프의 형제>가 갖고 있는 스케일은 따르지 못한다.
  오늘날에는 여성이 자기를 확립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직도 여성을 여성으로 가
둬두려는 천 년 이래의 성적 제한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총명한 자각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하나의 승리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만족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전
통적인 여성은 미망에 속은 의식이며 속임수를 위한 도구이다. 그런 여성은 자기의 의존성
을 숨기려고 하지만 이것은 그 의존성에 동의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와 같은 의존성을 
드러내어 고발하는 것은 하나의 해방이다. 철저한 해명은 굴욕이나 수치에 대한 저항이다. 
이것은 최후의 승리에 대한 예비 스케치이다. 끝까지 사물을 정확하게 보고 속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여류작가들은 여성을 위해 가장 큰 봉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여성의 문제에 지나치게 저항해서 세계에 
대해 공평한 태도를 취하지 못할 우려도 있다. 그런 태도야말로 가장 광대한 전망을 열어
주는 것이다. 그녀들은 착각이나 허위의 베일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일단 자기들의 일이 끝
났다고 생각했다. 이런 소극적인 용기로는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된다. 진리 자체는 애매한 것이고 심연이며 신비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존재를 지적한 다
음에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재창조해야 한다. 속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여성은 신기루를 제거하는 데 용기를 탕
진하고 현실의 입궤 떨며 멈춰 있다. 여성의 자서전에는 성실하여 감동을 주는 것이 있지
만 <고백>(루소의저서)이나 <에고티즘의 회상>(스탕달의 작품)과 견줄 만한 것은 하나
도 없다. 우리들 여성은 아직 현실을 명확히 바라보는 데만 열중하고 그 밝은 저편에 있는 
다른어둠을 탐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성은 결코 변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하고 어떤 남성작가가 내게 말한 적이 있
는데 옳은 말로 생각된다. 여성은 이 세계를 검토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것만으로 크게 
놀라 눈을 크게 뜨지 못하고 이 세계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단지 사실의 
목록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녀들이 때때로 그 우수성을 발휘하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
한 관찰에 있어서이다. 그녀들은 뛰어난 보도기자가 된다. 앙드레 비올리스가 인도차이나, 
인도에서 행한 현지답사를 능가한 기자는 아무도 없다. 그녀들은 분위기나 인물묘사에 능
하여 그 미묘한 상호관계를 지적하고 그 인물들의 내면에 깊숙이 숨어 있는 영혼의 은밀
한 움직임을 독자에게 느끼게 하는데 능하다. 윌러, 캐더, 에디스 훠튼, 도로시 파커, 캐서
린 맨스필드 등은 날카로운 특이한 수법으로 개인, 풍토, 문명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었다. 
히스클리프와 같은 현실감각이 뛰어난 남성을 훌륭히 묘사할 수 있는 여성은 극히 드물다. 
그녀들은 남성의 속성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고 있지만 그밖의 것은 거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내면과 경험, 여자의 세계에 대하여는 교묘히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
녀들은 목적물에 숨어 있는 은밀한 내용에 마음이 이끌려 자기자신이 느끼는 감각의 특이
성에 매혹을 느끼고 있으므로 생생한 체험을 뉘앙스가 풍부한 형용사나 감각적인 이미지
로 곧잘 표현한다. 그녀들은 사물과 사물의 관계보다는 사물 자체에 더 흥미를 느끼므로 
흔히 문장보다 어휘쪽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그녀들이 가장 깊은 애정을 갖고 탐구한 
영역의 하나는 '자연'이었다. 젊은 처녀나 아직 완전히 권리를 포기하지 않은 여성에게 자
연은 바로 남성에 대한 여성과 같은 관계에 있다. 즉, 자아 자체와 그 부정, 왕국과 유형지
의 관계도 그것이다. 자연은 타자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마음대로 변한다. 여류작가가 
그 체험과 꿈을 가장 친절하게 우리에게 밝혀주는 것은, 황야나 채소밭을 이야기할 경우이
다. 생기라든가 계절의 기적을 물뿌리개나 화병, 화단 속에 가둬두는 여성이 많다. 식물이
나 동물을 가둬두지 않는 대신 그런 것들에 기울이는 세심한 애정으로 그것들을 자기 것
으로 만들려고 하는 여성도 있다. 콜레트나 캐서린 맨스필드가 바로 그런 여성이다. 그리
고 자연이 갖고 있는 비인간적인 자유를 통하여 자연을 이해하고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며 타자인 이 존재에 합일하기 위해 자기를 잃어버리는 여성도 있다.
  이 방법은 루소가 창시했으나 에밀리 브론데,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마리웨브 등이 이 
방법을 취했다. 주어진 것을 초월하여 자연의 은밀한 영역까지 탐구하려고 한 여성은 더욱 
적어 다섯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에밀리 브론테는 죽음을 문제삼았고, 버지니아 울프는 
생명을, 그리고 캐서린 맨스필드는 일상적인 우연성과 고뇌를 다루었다. 그러나 여성은 아
무도 <심판>, <백경>, <율리시스>, <예지의 일곱기둥>을 쓰지 못했다. 그녀들은 인간
다운 삶을 겨우 살기 시작했으므로, 인간의 조건에 대하여는 논쟁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녀들의 작품에 전체적으로 형이상학적인 색채나 또는 어두운 유머가 없는 이유를 설명
해 주고 있다. 그녀들은 세계를 괄호 속에 넣어서 보류하거나 세계에 대해 질문하거나 하
지 않는다. 그리고 모순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남
성도 대다수가 이와 똑같은 한계 안에서 살고 있다. 여성이 평범하게 생각되는 것은 '위대
하다'고 부르기에 합당한 능력을 가진 소수의 예술가와 비교했을 경우이다. 여성의 한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그 운명이 아니다. 어째서 여성에게는 가장 높은 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왜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런 조건이 여성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인가- 를 쉽사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 문학, 철학은 인간이 자유롭게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시도이다. 즉, 그것은 
창조자의 시도이다. 그런 포부를 마음속에서 키우려면 먼저 자기를 하나의 자유로운 존재
로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여성은 교육이나 풍습에 의해 제약을 받아 세계에 도전할 힘이 
제한되어 있다. 이 세계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너무 치열하다고 해서 몸을 뺄 
수는 없다. 만일 이 세계를 다시 파악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가장 심한 고독에서 고개를 쳐
들어야 한다. 여성에게 특히 결여된 것은 고뇌와 자존심 속에서 고독과 초월의 수업을 쌓
는 것이다.
  
  마리 비슈키르체프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만 혼자 산보하거나 마음대로 거닐면서 튈러리 공원벤치에 걸터 앉

는 자유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데 절대로 필요한 자유이다. 누군가 동행
이 있을 때나 혹은 루브르에 가기 위해 마차를 기다리거나 함께 갈 처녀가 가족을 기다려
야 할때, 당신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유가 없다. 그리고 이 자유가 없으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은 전혀 할 수 없다. "의식
은 이런 하찮고 끊임없는 훼방의 사슬에 매여 있는 것이다... 이래서는 날개가 떨어질 뿐이
다. 이것이야말로 좀처럼 여성 예술가를 볼 수 없는 커다란 원인의 하나이다."
  
  실제로 창조자가 되려면 자기를 소중히 키우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즉 여러 가지 광
경이나 지식을 자기 생활 속에 도입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초월이라는 자유로운 운동을 
통하여 손에 언ㅎ어야 한다. 정신이 그 모든 부를 지닌 채 공허한 하늘로 비약해야 한다. 
그래서 그 하늘을 정신으로 채워야 한다. 그런데 만일 무수한 맛줄이 끈질기게 정신을 지
상에 결박하고 있으면 비약은 좌절된다.
  오늘날에는 젊은 여성도 혼자 외출하여 튈러리 공원을 산책하는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
나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거리는 이런 여성에게 깊은 적의를 푸고 있다. 곳곳에서 눈과 
손이 대기하고 있다. 만일 멍하게 정처없이 거닐고 있다면 카페의 테라스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면 혹은 혼자 영화관으로 간다면 금세 어떤 불쾌한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그녀는 
의상이나 태도로 위엄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염려는 그녀를 이 지상에, 자기자신
에게 못박아놓는다. 결국 그녀의 날개는 땅에 떨어진다.
  로렌스는 18세때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 여행을 했다. 절므ㅇㄴ 여성이 이런 무
모한 짓을 한다면 아무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렌스가 1년 후에 반쯤 사막으
로 된 위태로운 나라를 도보로 행한 탐험을 여성이 한다는 것은 더욱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인생 체험에는 헤아릴 수 없는 중요한 장래성이 있는 것이다. 이때 
개인은 자유와 발견에 도취하여 지상 전부를 자기 영토처럼 생각하는 것을 ㅐ우게 된다. 
그러나 여성은 완력의 훈련에서 제외된다. 여성은 육체가 약하기 때문에 그 수동성에 큰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이에 대하여도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사내아이가 주먹으로 싸움
을 할 때에는 자기 힘을 신뢰하고 망설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여자아이에게는 적어도 스
포츠나 모험을 솔선하여 하거나 장애물을 극복했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허용해야 할 것이
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세계의 한가운데서도 고독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
다. 그러나 유일자, 지고자로서의 세계와 대립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여성에게는 모든 것
이 외적인 여러 가지 존재에 의해 지배되고 의존하도록 되어 있다. 연애를 할 경우에도 자
기를 강하게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포기한다.
  이런 의미에서 불행이나 불운은 때때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시련이 된다. 에밀리 브론
테가 힘찬 야성적인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거슨 고독의 덕택이었다. 그녀는 자연, 죽음, 운
명과 대결하여 자기의 힘 이외에는 아무 도움도 요구하지 않았다. 로자 룩셈루브그는 못생
긴 여자였다. 그녀는 자기모습의 숭배에 빠지거나 자주성이 없는 물체가 되거나 남의 먹이
가 되거나 남에게 올가미를 걸거나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완벽하게 정신
과 자유의 주체였다. 그런데 여성이 현실세계와의 괴로운 대결을 감당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여성을 결박하고 억누르고 있는 전통은 그녀로 하여금 사회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게 한다. 여서이 평범한 길을 가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위대하게 보는 남성은 어떤 형태로나 그 양 어째에 세계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
들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처리해 왔다. 세계를 재창조하는데 성공하기도 하
고 혹은 실패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들은 처음에 이 엄청난 짐을 한 몸으로 떠맡았던 것이
다. 여성은 아무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세계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
거나 세계의 죄를 자기 죄로 느끼고 그 영광을 자기 명예로 생각하려면 특권계급에 속해
야 한다. 세계를 수정하거나 깊이 고찰하여 그 비밀을 파헤쳐 정당화하는 것은 세계에 대
해 명령할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 계층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다. 그들만이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알아차리고 세계에 대해 자기의 공적을 나기려고 노력하게 된다. 지금까지 '인간'으
로서 자기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남성이지 여성이 아니다. 우리에게 모범적인 인간으로 
생각되고 천재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인간은 그 개개의 실존에서 인류 전체의 운명을 
타개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이런 일에 대해 여성으로서 자신있게 대처한 사람은 없었다.
  반 고흐와 같은 사람이 여성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여성이라면 보리나즈(벨기에의 탄
광지대)에 파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인간의 비참한 광경을 자기자신의 죄로 느끼고 
속죄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 고흐는 해바라기를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화가의 생활방식- 아를르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거나 카페나 창녀촌에 드나들면서 감수성
을 키우는 동시에 그 예술도 성장하게 하는것-은, 여성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여성은 결코 카프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회의와 불안으로 두려워하면서도 그녀는 결
코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의 고뇌를 알아차리지 못행ㅆ을 것이다. 겨우 성 테레사만이 완
전한 고독 속에서 인간의 조건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살아갈 정도이다. 그녀는 지
상의 게급제도가 미치지 못하는 경지에 있었으므로 성자인 장 드 라 크루아처럼 머리 위
의 천장 아래 안도 할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에게는 똑같은 어둠과 똑같은 빛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에게는 똑같은 허무가 신에게는 똑같은 충족이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인
간이 성의 구별을 초월하여 자유로운 실존의 고난에 가득찬 영광 속에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을때 , 비로소 여성은 자기의 역사, 문제, 회의, 희망을 인류의 그것과 하나로 결부하
여 생각할 수 있다. 생활과 작품 속에서 자기의 개인적인 비밀뿐만 아니라 현실 전체의 비
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 그녀가 아직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고 싸원야 하
는 이상 창조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성의 한계를 설명하여면, 그 신비적인 본질이 아니라 그 
상황을 문제 삼아야 한다. 미래는 여전히 활짝 열린 체이다. 여성에게는 '창조적인 천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유명했던 여권반대론자였던 마르트 보렐리 부인이 주
장한 테마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 저술에서 여성의 비논리성과 우매함의 사례를 밝히려고 
했으나 그 저술 자체가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창조적인 '천성'은 타고난다는 견해는, 
실재파의 낡은 간판 속에 있는 '영원한 여성'이라는 관념과 함께 버려야 하는 성질의 것이
다. 여성은 신경이 허약하므로 가치 있는 일은 전혀 창조할 수 없다고 반여성파는 구체적
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천재는 신경쇠약환자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사람들이다. 아무튼 
프루스트의 예는 심리적, 생리적인 불균형이 무능력이나 평범을 의미하지 않는 것을 충분

히 입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성질을 규정하는 노거에 대하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
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켜 영원한 진리를 확립하는 것으
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황은 언제나 변하고 있으므로 역사적인 사실은 단지 역사적으로 
나타난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불과하다. 천재적인 작품- 단지 작품이라고 말해도 무방
하지만- 을 완성할 가능성이 여성에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성이 천재일 
수 있겠는가? 
  유서 깊은 유럽에서는 이렇다할 만한 예술가나 작가를 한 사람도 갖고 있지 않는 야만
적인 미국인을 경멸해 왔다. 이에 대해 "우리에게 이러저러하게 살라고 요구하기 전에 우
리를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제퍼슨은 핵심을 찌르는 답변을 했다. 흑인에게서는 한 사람
의 휘트먼(미국의 시인, 1819~1891)도 탄생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인종주의자에 대해 
흑인도 같은 답변을 한다.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도 라신(프랑스의 시인, 1639~1699)이
나 말라르메(프랑스의 시인, 1842~1898)와 견줄 수 있는 어떤 이름도 갖고 있지 않다. 
자유로운여성은 지금 겨우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여성이 득세할 때에는 아마도 랭보
(프랑스의 시인, 1854~1891)의 예언이 적중될 것이다.
  "시인들이 생겨날 것이다! 한없이 지속되었던 여성의 노예상태가 깨어지고, 여성이 자기
를 위해 자기 힘으로 사는 때가 돌아오면, 지금까지 증오의 대상이었던 남성이 여성을 놓
아줄 터이므로 여성도 시인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은 미지의 세계를 발견할 것이다. 
그녀들의 사상의 세계는 우리 남성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그녀는 기이한 것, 불가해한 
것, 혐오스러운것, 그리고 참으로 감미로운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파악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성의 '사상의세계'가 남성의 사상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확실치 
않다. 여성은 남성의 사상의 세계에 동화함으로써 해방되려고 한다. 여성이 어느 정도까지 
개별적이며 그 개성이 어느 정도로 중요성을 간직할지 알기 위해서는 매우 대담한 예상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는 여성의 가능성이 억압되고 인류를 위해 
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여성 자신을 위해서도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여성
이 모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결론
  
  "아니, 여성은 우리의 형제가 아니다. 우리는 권태와 부패로 말미암아 여성을 색다른 존
재, 미지의 존재, 성이라는 무기 이외에는 아무 무기도 갖지 못한 존재로 규정해 버렸다. 
이것은 영구히 싸움이 계속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정정당당한 무기가 아니라는 것도 의미
하고 있다. 즉 열애하는가 하면 곧 증오하는 상대이지 우리의 솔직한 동료가 아니다. 집단
정신으로 무리를 지어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존재, 영원한 작은 노예가 갖는 시기심이다."
  쥘 라포르그의 이같은 말에 동의하는 남성이 많을 것이다. 남녀 양성 사이에는 언제나 '
음모와 싸움'이 그치지 않고 우애 같은 것은 절대로 있을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
다. 사실 오늘날 남성이나 여성은 서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양자의 사이가 나쁜 것이 선천적인 저주인지 혹은 남녀가 대립되어 싸우는 것이 인류 
역사의 일시적인 과도기의 현상일 따름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설이야 어떻든 생리적인 숙명이 '수컷'과 '암컷'을 그와 같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존재로 적대시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 유명한 버마재
비의 암컷도 먹이가 없거나 종족번식을 위해서가 아니면 수컷을 잡아먹지 않느다. 고등동
몰에서 하등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체는 종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인류는 종과는 다
른것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생성된 것이다.
  인류는 자연의 사실성을 어떤 방법으로 두르느냐에 따라서 규정된다. 사실 아무리 극도
의 불신을 갖는다 해도 남녀 양성 사이에 순전히 생리적인 의미에서의 적대관계를 발견하
는 것은 불간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런 적의를 생리학과 심리학의 중간지대라는 정신분석
학상으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여성이 남성의 페니스에 대해 부러움을 느끼고 그것을 거세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니스에 대한 소아기적인 욕망은 어른이 된 여성의 생활에
서 그녀가 여성인 것을 불구라고 생각할 때에만 중요성을 가즌다. 그녀가 남성의 성기를 
갖고 싶어하는 것은 페니스가 남성의 특권을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때뿐이다. 남성을 
거세시키고 싶다는 여성의 몽상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충분히 인정된다. 사람들은 
여성이 남성에게서 초월을 제거해 버리기를 원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미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이 원하는 것은 훨씬 더 애매하다. 여성은 모순된 방법으로 이 
초월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여성이 그 초월을 존경하면서 부정하고 초월 속으로 뛰
어들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초월을 억류해 두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드라마는 
순수하게 성적인 문제만 전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성적 본능이 인간
의 운명을 규정하거나 인간의 행동에 포함된 문제점을 푸는 열쇠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
인 적이 없다. 성적 본능은 상황 전체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 상황을 규정하는데 공헌하고 
있다. 
  성의 싸움은 남녀의 해부학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실제로 성의 싸움이라고 말하면 으
레 '관념'의 상공에서 불확실한 본질과 본질, '영원한 여성'과 '영원한 남성'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그리고 이 양자의 장렬한 싸움이 지상에서는 전혀 다른 두 
가지 형태로- 역사적으로 다른 시기에 따라- 전개되고 있는 점에 대하여는 유의하지 않
고 있다.
  내재 속에 갇혀 있는 여성은 남성도 이 감옥에 감금하려고 한다. 이렇게되면 감옥도 세
계와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며 여성은 그곳에 갇혀 있는 것을 더 이상 고생으로 여기지 않
을 것이다. 어머니, 아내, 애인(여성)은 여간수가 되는 것이다. 남성의 손에 의해 법제화된 
사회에서 여성의 열등성을 없애려면 남성의 우위를 깨버리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
녀는 남성을 불구로 만들어 지배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녀는 남성에게 대적한다. 남성
이 말하는 진리나 가치를 부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자기를 방어하고 있을 뿐이다. 그
녀가 내재나 열등성을 짊어지고 있는 것은 항구적인 본질이나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졸렬
한 선택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내재와 열등성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압박은 전
쟁상태를 야기시킨다. 이런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실존자는 비본질적인 존재로 취급되면 
반드시 자기의 존엄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오늘날에는 남녀간에 전개되는 싸움의 양상이 변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을 감옥에 가두
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그곳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남성을 내재의 영역으로 끌어오려고 하

지 않는 대신 자진하여 초월의 및 가우데 떠오르려고 한다. 이때에도 남성의 태도에 따라 
새로운 분쟁이 생기게 된다. 남성은 좀처럼 여성을 '놓아주려고'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자기는 지고한 존재이고 절대적으로 우월한 자이며 본질적인 존재로 머무르고 싶은것이다. 
그는 상대방 여서을 자기와 대등한 자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남성의 
이런 불신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로 나오게 된다. 이것은 이제 각자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 아니다. 권리의 회복을 요구하는 계급에 대적하고 특권계급은 
이를 저지한다. 두 초월이 대결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두 자유는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려
고 하지 않고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의 차이는 정신적인 면이나 성적인 면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여성다운'여성은 
스스로 수동적인 먹이가 되면서 남성도 육적인 수동성으로 만들려고 한다. 여성은 스스로 
순종적인 물체가 되어 남성의 욕망을 불러일으켜 그를 함정에 빠뜨리고 사슬로 묶으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이른바 '해방된 여성'은 능동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강요하려고 하는 
수동을 거부한다. 엘리즈와 그녀의 친구들은 남성의 활동성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인한다. 
그녀들은 정신보다 육체를 자유보다 우연성을 창조적인 용기ㅗ다 평범한 상식을 상위에 
둔다. 그러나 '근대적인'여성은 남성적인 가치를 받아들인다. 그녀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생
각하고 행동하고 일하고 창조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남성을 무시하지 않고 자기도 
그들과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한 이 실권회복의 요구는 정당하다. 그리고 
그때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남성의 교만이다. 그러나 남성을 위해 변호해 둘 필요가 있
는 것은 여성은 일부러 트럼프의 카드를 뒤섞어버리기 쉽다는 것이다. 메벨 도지와 같은 
여성은 우선 여성다운 매력으로 로렌스를 정복한 다음에 그를 정신적으로 지배하려는 저
의를 갖고 있다. 많은 여성들은 자기가 남성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구체적인 성과를 통
하여 보여주기 위해 먼저 성적인 매력으로 남성의 지지를 확보하려고 한다. 그녀는 고풍스
러운 존경과 새로운 평가를 동시에 구하고 그것을 낡은 마술과 새로운 권리라는 양쪽에 
승부를 내걸고 두 경기장에서 겨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조한 남성이 방어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남성이 시기심이나 반감에서 여성에게 반드시 필요한 
티켓을 나눠주지 않고 당당히 승부하라고 요구할 때에는 남성에게도 이중성이 있는 것이
다. 사실상 여성의 존재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이 투쟁이 남녀 사이에서 분명한 형태를 드
러난 적은 없다.
  여성은 주체로서가 아니라 주체성이 주어진 객체로서 남성 앞에 서게 된다. 그녀는 자기
를 자기로서 살아가는 동시에 타자로서도 살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모순이며 대단히 부조
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녀가 자기의 연약함과 자기의 힘 쌍방을 무기로 삼고 있는 
것은 깊이 자성한 행위가 아니다. 단지 자발적으로 강요된 수단, 즉 수동이라는 수단에 의
해 구제를 원하며 한편으로는 능독적으로 주체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확실히 이런 방법은 
'정정당당한 싸움'은 아닐 테지만 여자가 살고 있는 애매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다. 그런데 남성이 여성을 자유로운 존재로 대하려고할 경우 여성은 남성에게 하나의 함정
이 된다고 분개한다. 남성이 여성의 비위를 맞춰주고 남성의 먹이로서 만족시켜줄 경우 여
성이 자립하려는 소원을 귀찮게 생각한다. 남성은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고 여성 쪽에서는 

손해를 본 것처럼 생각된다. 
  남녀가 서로 상대방을 대등하다고 인정하지 않는한, 즉 여성인 것이 지금과 같은 상태로 
지속되는 한 갈등은 그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여성다움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남녀간에 어
느 쪽이 더 열심일까? 자기를 해방시킨 여성도 그 여성다운 특권만은 남겨놓기를 원한다. 
남성 쪽에서는 그렇게되면 여성은 거기에 당연히 제한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남녀의 
어느 한쪽을 비난하는 것이 다른 쪽을 변호하기보다 쉽다."고 몽테뉴는 말하고 있다. 비난
이나 칭찬을 늘어놓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사실 순환논법을 깨뜨리는 것이 어렵다면 그
것은 남녀 모두 상대방의 희생이 되며 자기희생도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 순수한 자유 
속에서 대결하고 있는 두 적수사이라면 화해하기 쉬울 것이다. 즉 이 싸움은 쌍방에게 모
두 무익한 것이다. 이런 문제의 복잡성은 각자의 진영이 적의 공범자이기도 하다는 데서 
비롯된다. 여성에게는 자주 포기의 꿈이 있고 남성에게는 소외의 꿈이 있다. 진실하지 못
한 생활태도에서는 얻는 것이 없다. 각자가 안일에 유혹되어 스스로 불러들인 불행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남녀가 서로 상대방을 증오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며 자기자신의 무
기력에서 오는 실패이다.
  처음에 남성이 여성을 종속시킨 이유에 대하여는 이미 앞에서 보아왔다. 여성을 과소평
가하는 것은 인류의 발전에 필요한 한 단계였다. 거기서 양성의 협력이 생겼을지도 모른
다. 압박이란 그러한 목적으로 압박하는 타자속에 자기를 소외함으로써 도피하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오늘날 남성에게서 이런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대다수의 남성들이 
거기에 따르고 있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연인은 애인에게서 석상의 모습을 한 자기를 찾고 
았다. 그는 상대방 여성에게서 자기의 사나이다움과 그 절내권과 그 직접적인 현실성의 신
화를 추구한다. "남편은 영화관 같은 데는 절대로 가지 않아요."하고 아내가 말한다. 그리
하여 남성의 불확실한 의견은 영원한 대리석 속에 깊이 새겨지게 된다. 그러나 남성 자신
은 스스로 자기 분신의 노에가 되어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애쓰
는가! 더구나 그 이미지 속에 안주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런 이미지는 뭐니뭐니해도 
여성들의 변덕스러운 자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언젠가 유리한 것이 
되어야 한다.
  남성은 남성적이고 위엄 있는 우월자의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남성인 자신도 연극하
지만 상대방에게도 연극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도 공세적이고 불안한 처지에 있다. 여성
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여성에게 적으를 품고 자기의 콤플렉스를 청산하고 승화시키고 전
환시키 위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고 그녀들을 유혹하고 두려워하는 데 얼마나 말은 시간
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가! 여성에게 자유를 주면 남성도 자유로워진다. 그런데 남성은 
이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여성을 사슬로 묶어두기 위해 여전히 속임수를 쓰
고 있다. 여성이 속고 있다는 것을 많은 남성들은 잘 알고 있다. "여성이라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러나 여성의 진정한 불행은 자기가 여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하
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남성들은 오랫동안 여성들의 이 불행을 위장하려고 노력해 왔다. 후견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여성에게 '보호자'를 두었다. 그 보호자가 종전의 후견인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해
도 그것은 여성에게 이득이 된다. 여성에게 밖에 나가 일하는 것을 금하고 가정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여성을 지키는 것이며 그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여성이 해야 하는 
단조로운 소임, 즉 가사나 육아를 시적인 베일에 숨겨온 것은 이미 앞에서 보아왔다. 그리
하여 여성은 자유 대신에 '여성다움'이라는 가짜 보석을 받게 된다. 발자크는 여성에게 여
왕이라는 것을 납득시키면서 실제는 노예로 취급하면 된다고 남성들에게 권고했는데 이것
은 그간의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많은 남성들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대신 여성
은 참으로 복받은 존재인 것처럼 설득하려고 한다.
  오늘날 미국의 사회과학자들 중에는 진심으로 '하층 계급의 이득(Low-Class Gain)'이
라는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에도- 이처럼 과학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노동
자는 '체면을 지켜야'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만큼 이득이라고 말해 왔다. 그리고 룸펜들은 
누더기를 걸치고 길바닥에서도 잘 수 있지만 보몽 백작이나 방델(프랑스의 실업가) 같은 
가엾은 신사들에게는 이런 즐거움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몸에서 이를 잡는 태평스러운 
거지들이나 채찍으로 얻어맞으면서도 싱글싱글 웃고 있는 쾌활한 흑인들이나 또는 굶어죽
은 자식을 입가에 웃음을 띠고 매장하는 수스의 쾌활한 아랍인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은 '책
임을 지지 않는'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고통도 책임도 걱정도 없는 그녀는 확실히 '팔
자가 좋은'편에 속한다.
  곤란한 것은, 여러 세기에 걸쳐서 모든 나라들에서 이 '팔자가 좋은'쪽의 인간이 완고한 
철부지로- 이것은 아마도 원죄와 관련이 있을 테지만- 자기 은인(남성)에게 줄곧 불평을 
하고 있는 점이다. 즉 "이건 분에 넘치는군요. 나는 당신이 주는 것으로 만족하니까요."하
고 말이다. 그러나 훌륭한 자본가나 관대한 식민지 경영자나 자존심이 강한 남성들은 한치
도 양보하지 않는다. "복을 놓쳐서는 안 돼. 잘 간직하여라!"
  남성은 여성에게서 평소에 압박자가 피압박자에게서 발견하는것 이상의 공범성을 발견
하게 된다. 남성들은 그 점을 이용하여 교묘히 속여서 여성의 운명을 여성에게 강요하면서
도 여성이 그런 운명을 원했다고 시치미를 뗀다. 여성이 받는 교육은 모두가 반항이나 모
험의 길을 막아버린다. 사회전체는- 존경하는 부모를 비롯하여- 사랑이나 헌신, 자기희생
의 미덕을 찬양하면서도 애인이나 남편이나 자식들은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 싶어하지 않
는다는 것을 숨기고 거짓말을 가르침다. 여성은 안이한 길을 가도록 훈련되어 있으므로 이
런 거짓말을 곧이 듣는다. 이런 것이 여성에게 범하는 최악의 범죄이다. 어렸을 때부터 일
생을 통하여 여성에게 이런 자기 포기야말로 여성의 천직인 것으로 가르쳐 여성을 타락과 
부패로 몰아넣는다. 
  자기의 자유 자체에 불안한 고뇌를 느끼는 모든 실존자는 이런 자기포기의 유혹을 느끼
게 마련이나 어린이를 하루 종일 놀게 하여 게으른 버릇을 기르고 공부할 기회를 주지 않
고 유용한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어른으로 장성했을때 무느하고 무
지한 길을 택했다고 탓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여성에게 자진하여 
자기의 실존을 받아들여야 하는 필요성을 가프쳐주지 않고 키운다. 그래서 그녀는 태연스
럽게 남의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고 도움을 받고 지도를 받는다. 그녀는 자기의 존재를 실
현시키는 노력은 전혀하지 않고 뭔가 할 수 있으리라는 꿈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가 유혹
에 넘어가는 대상은 물론 나쁘다. 그러나 그녀를 유혹한 것은 바로 남성이다. 그러므로 그
녀를 탓하는 것은 부당하다. 남녀 사이에 어떤 분규가 일어나면 서로 그런 상황이 일어나

게 한 책임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은 남성이 그런 상황을 일
으켰다고 남성을 탓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치를 따지거나,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
어요..." 하고 말이다. 그러나 남성 쪽에서는 여성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비난한다. " 넌 
아무것도 몰라. 넌 무능한 여자야..." 하고 말이다. 피차에 상대방을 공격하면 자기를 정당
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쪽의 잘못은 또한 다른 쪽의 잘못이기도 하다.
  남녀간에 일어나는 많은 갈등은 한쪽이 제안하고 다른 쪽이 그것에 따르는 상황에서 비
롯된 모든 결과를 두 사람 중에서 어느 한쪽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
불평등에 있어서의 평등' 같은 애매한 개념을 사용하여 한쪽이 그 전제주의를 감추고 다른 
쪽이 자기의 무기력을 그 개념 아래 감추고 있지만 이런 개념은 검토해 보면 곧 정체가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남성이 보장해 준 추상적인 평등을 요구하고 남성은 구체
적으로 눈에 보이는 불평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준다'와 '받는다'는 말의 애매한 의미에 대한 막연한 논쟁ㅇ이 모든 남녀관계에 언제까
지나 계속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성은 모든 것을 준다고 한탄하고 남성은 여성이 모
든 것을 받는다고 불평한다. 주고 받는 교환은- 이것은 경제학의 기본 원칙이다- 제공되
는 상품이 팔 사람이 아니라 살 사람이 갖고 있는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여성은 
이해하여야 한다. 남성은 여성이 무한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여성에게 가르쳐서 여성
을 속였다. 사실 그녀는 남성에게 하나의 위로이고 쾌락이고 반려이며 비본질적인 재물일 
뿐이다.
  그런데 남성은 여성에게 그녀의 실존의 의미이며 이유이다. 그러므로 주고받는 교환은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속에 불평등이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남성
이 애인과 한께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에 그는 자기 직업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거나 친구
들을 만나 유익한 교제를 하거나 기분전환을 할 수 있다. 사회의 일원이 되어 있는 남성에
게 시간은 실질적인 부이다. 그것은 돈이고 명성이고 쾌락이다. 이와 반대로 할일이 없어
서 권태로운 여성에게 시간은 무거운 짐이어서 그녀는 단지 어떻게 하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다면 그녀에게 
이득이 된다. 즉 남성이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순수한 이득이다.
  대체로 남녀관계에서 남성의 흥미를 가장 크게 끄는 것은 거기서 비롯되는 성적인 이득
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남성은 사랑의 행위를 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꼬박 여자와 함께 
지내면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 쪽은- 예외의 경우는 별도로 치고- 남아도는 사간을 
모조리 애인과 함께 보내고 싶어한다. 순무를 사주지 않으면 감자를 팔지 않겠다는 상인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애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거나 같이 외출하는 시간을 덤으로 주지 않
으면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남성 쪽이 이에 대한 비용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균
형을 잘 잡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남성의 정욕의 강도와 그가 희생시키는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만일 여성이 너무 많은 시간을 요구하거나 지장
을 주면 남성에게는 대단히 귀찮은 존재가 된다. 마치 강물이 그 물줄기에서 벗어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남성은 너무 많은 시간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전혀 갖지 않는 쪽을 택하게 된다. 

이 때문에 그녀는 남자의 요구를 조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균형을 
유지하려면 이중의 긴장이 필요하다. 즉 여성은 남성이 자기를 싼값으로 '갖는다'고 생각하
고 남성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설명은 다소 우습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
나 남성이 샘이 많고 독점욕을 갖고 여성 전체를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애정이나 정욕, 
그리고 연애 자체 속에도 이런 갈등을 지적할 수 있다. 남성은 언제나 자기 시간으로 '다
른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쪽에서는 자기 시간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남성 쪽에서 보면 여성이 그에게 바치는 시간은 증여로 생각하지 않고 무거운 짐으로 여
긴다. 보통 남성은 자기가 여성보다 나은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므로 
참으려고 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어느 정도의 호의를 갖고 있으면 입장의 불평등을 너그
럽게 보상해 주려고도 한다. 그러나 동정하는 것을 무슨 큰 공로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
여 사소한 충돌이라도 일어나면 곧 여성을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여 화를 낸다.
  "나는 너무 호인인가 보다."하고 말이다. 여성 쪽에서는 값진 선물을 한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어쩐지 자기를 거지처럼 취급하고 있는것 같아 굴욕감을 느끼게 된다. 여성이 종종 
잔인성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여성은 불우한 
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특권층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다. 그녀는 다만 자기를 돌볼 생각만 하고 있다. 만일 자기를 만족시켜주지 못한 애인을 
원망할 기회를 갖게 되면 대단히 다행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별로 주는 
것이 없으면 그녀는 야성적인 기쁨을 나타내면서 남성에게서 전부를 되찾으려고 한다. 이
때 남성은 자존심이 상하여 평소에 결멸한 교제 자체의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비로소 알
게 된다. 그는 저자세를 취하여 여성에게 어떤 약속이라도 하려고 한다. 막상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할 때에는 여성에게 당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협
박했다고 비난한다. 한편 여성은 그의 인색함을 비난한다. 그리하여 쌍방이 모두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된다.
  이 경우에도 한쪽을 옹호하고 다른 쪽을 비난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불공평 속에서는 
공평이 이루어질 수 없다. 식민지 행정관은 토착민에게 그리고 장군은 병사에게 선심을 쓸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식민지 행정관이나 장군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
러나 남성은 남성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성은 본의 아니게 죄인도 되고 자기가 저지르
지 않은 과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기도 한다. 여성의 경우에도 본의 아니게 희생자가되어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남성에게 반항하고 잔인해진다. 이렇게 되면 남성은 
불공평의 공범자가 된다. 그리고 과실을 자초한다. 때로는 요구가 많은 희생자(여성)에게 
압도되거나 잡아먹힘다. 이때에는 자기를 얼빠진 인간으로 생각한다. 자기의 위엄이 땅에 
떨어지면 달갑지 않은 타협도 한다. 선의의 남성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여성보다 마음이 
더욱 분열된다. 즉 어느 의미에서는 패자 쪽에 서는 것이 언제나 마음 편하다. 그러나 만
일 여성도 역시 선의의 인간이고 자립할 수 없으며 운명의 무게로 남성을 괴롭히는 것도 
싫어할 경우에는 그야말로 꼼짝없이 혼란 속에서 몸부림치게 된다. 만족스러운 해결을 할 
수 없는 이러한 경우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일어난다. 만족스러운 해결을 할 수 없는 것은 
그 처지를 규정하고 있는 조건이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녀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

하는 남성은 자기가 희생자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생활 전체를 그에게 의
논하던 여성을 빈 손으로 내쫓으면 여성쪽에서도 마찬가지로 불공평한 방법에 의해 희생
자가 될 것이다. 불행은 개인의 부도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기만은 상대방에게 서
로 죄를 전가하려는 데서 생기게 된다- 개개인의 행동이 무기력한 상황에서 생긴다. 여성
은 '찰거머리'이다. 무거운 짐이다. 그녀도 이 때문에 괴로원하고있다. 그것은 그녀가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빨아먹는 기생충의 운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자립적인 생
명 조직을 제공해야 한다. 그녀가 세계와 싸우고 거기서 자기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취하
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의존성은 없어질 것이다. 남성의 의존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
면 틀림없이 남녀 모두 현재의 상황보다 나아질 것이다.
  남녀가 평등한 세계는 쉽사리 상상할 수 있다. 소련의 볼셰비키혁명이 약속한 것도 바로 
그런 세계였다.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을 받은 여성이 남성과 같은 조건에서 남성과 같은 
급료를 받고 일하게 된다. 성적 자유는 숲속에서 인정된다. 성행위는 이제 보수를 받는 '서
비스'로 생각되지 않을것이다. 여성은 그것과는 별도로 살아갈 수단을 가져야 한다. 결혼은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언제든지 해약할 수 있는 자유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어머니의 의
무도 자유로워진다. 즉 산아제한이나 인공유산이 인정되고 어머니와 아이들에게 똑같은 권
리가 주어진다. 그녀들은 결혼해도 좋고 하지않아도 무방하다. 출산 휴가 때에는 사회에서 
급료를 지급하고 사회가 아기도 돌봐준다. 이것은 아기를 어머니에게서 '빼앗는'것이 아니
라 부모에게만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률, 제도, 풍속, 여론 그밖에 모든 사회적인 여건을 바꾸기만하면 남녀가 참으
로 동등하게 될까? "여성은 언제나 여성이야." 하고 회의론자들은 말한다. 여성에게서 여성
적인 것을 제거해 버리면 결국 남성이 되지도 못하고 괴물이 되어버릴 것을 예언하는 사
람도 있다. 이런 생각은 오늘의 여성이 자연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다
시 말하거니와 인간사회에는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나도 없으며 측히 여성은 문명
이 점차로 만들어낸 것이다. 여성의 운명에는 본래 타인이 간섭했다. 이런 간섭의 방법이 
달랐더라면 여성도 달라졌을 것이다. 여성은 호르몬이나 신비적인 본능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밖에 있는 의식을 통하여 그녀가 자기의 육제나 세계와의 관계를 파악
하는 방법에 의해 규정된다. 청년과 처녀를 떼어놓는 심연은 어렸을 때부터 용의주도하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만들어진'존재인 것을 도저히 부인할수 없다. 그래서 
그녀의 배후에 언제까지나 이런 과거를 끌고 다니게 된다. 
  만일 이 과거가 지닌 무게를 잘 검토해 본다면 여성의 운명이 영원 속에서 확고부동하
게 고정되어 있지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성이 그 처지를 바꾸기 위해서는 경제적
인 조건만 시정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것은 확실히 잘못이다. 이 요소는 여성이 진화하
는 데 첫째 요인이었으며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이 요인이 예고하고 요규하는 정
신적, 사회적, 문화적인 결과가 분명히 뒤따르지 않는 한 새로운 여성상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그런 여성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프랑스나 미국이나 소련, 어디서나 그
렇다. 그러므로 오늘의 여성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 그런 신여성은 대개 '
진정한 여성'이 남장을 한 형태로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신여성은 자기의 복장이나 자기
의 육체 속에서도 어쩐지 침착하지 못하다. 그녀는 새로운 피부를 만들어야 하고 참된 자

기 옷을 만들어야 ㅏㄴ다. 그러나 집단적인 발전의 힘에 의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
을 것이다.
  오늘날 어떤 교육자도 고립되어서는 '남성이라는 인간'과 동일한 '여성이라는 인간'을 개
조할 수 없다. 소녀가 소년으로 양육되면 자기가 예외라고 생각하므로 거기서 또 새로운 
종류의 성의 유행이 생기게 된다. 스탕달은 이 사실을 잘 알고 " 숲속의 나무 전체를 한꺼
번에 바꿔심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우리가 남녀 양성의 평등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사회를 상정한다면 그런 평등은 새로운 출발점으로부터 개개인에게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여자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남자형제들과 같은 요구 같은 우대 같은 엄격성 같은 
자유로 교육을 받고, 그들과 같은 공부 같은 유희를 하고 같은 장래가 약속되어, 그녀가 
볼 때 분명히 대등하다고 생각되는 남녀에 에워싸여 있었더라면 '거세 콤플렉스(여자가 페
니스의 결여에서 느끼는 열등감)'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사내아이가 아버지에게 반감을 
갖고 어머니를 사모하는 경향)'의 의미는 크게 수정될 것이다. 어머니가 부부생활의 물질
적, 정신적인 책임을 아버지와 동일하게 담당한다면 그녀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녀에게 
영속적으로 위신을 갖게 될 것이다. 자식은 어머니의 주위에서 남성적인 세계가 아니다. 
남녀 양성적인 세계를 느끼게 될 것이다. 설사 딸이 아버지에게 훨씬 강한 애정을 느끼더
라도- 이것도 확실한지 알수 없지만- 그 아버지에 대한 애정에는 무력감이 아니라 아버
지와 겨루어보고 싶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수동성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공부나 스포츠로 자기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고 남자아이와 능동적으로 대항하므로 페니
스의 결여는 '열등감'을 갖게 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남자아이는 '열등콤플렉스'가 심어져 있지 않고 여성을 남자와 동등시하는 
습관을 붙이게 되면 우월감 같은 것은 갖지 않을 것이다.
  여자아이는 나르시시즘이나 몽상 속에서 헛된 보상을 요구하지도 않을것이다. 그리고 자
기를 주어진 운명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가 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기가 세운 계획을 적극적으로 완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젊
은 처녀가 남자아이와 마찬가지로 청춘시절에 자유롭게 미래를 향해 초월해 간다면 그 시
기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월경이 그녀를 갑자기 여성의 운명에 
처박는다고 해서 혐오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기 운명에 대해 두려움
이 섞인 혐오감을 느끼지 않게 되면 그 미숙한 처녀시절의 색정을 좀더 평온한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일관된 성교육이 그녀에게 이런 위기를 잘 넘기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남녀공학에 의해 '남성'의 엄숙하고도 두려운 신비는 생겨날 여지가 없
어질 것이다. 날마다 즐거운 교제와 자유로운 경쟁으로 말미암아 그런 신비감은 사라질 것
이다.
  이와 같은 일관된 방법에 대한 반대론은 언제나 성의 터부에서 비롯되는데 아이들에게 
호기심이나 쾌락을 억제하려고 해도 소용없다. 그런 방법으로는 단지 억압이나 강박관념이
나 신경병을 초래할 뿐이다. 젊은 처녀의 극단적인 감상주의나 동성애적인 열광이나 플라
토닉한 정열등에는 무지한 어리석음이나 헛된 정신소모가 따르게 되며 어린애 같은 유희
나 정확한 경험보다 더욱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젊은 여성에게 가장 유익하게 생각

되는 것은 남성속에 반신을 찾지 말고 학우, 친구, 동료를 찾기 때문에- 그녀 자신의 실존
을 분명히 감당해 나가고 여기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이나 연애는 자유로운 
초월의 성격을 띠고 자기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1대1의 대등한 관계로 체
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린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모든 어려움을 붓 한 
번 움직여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가장 총명하고 관대한 
교육을 할 경우도 어린이가 자기 힘으로 스스로 경험하는 것을 생략해 줄 수는 없다. 바람
직한 것은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어린이의 앞길에 여러 가지 장애물을 놓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불량소녀'로 낙인을 찍어 배척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벌써 하나의 진보이다. 정신분
석학은 어린이의 생활을 중시하여 부모에게도 어느정도 게몽이 되었다. 그러나 여성이 성
에 대해 그 초보적인 지식을 얻고 교육을 받는 현재의 여건은 참으로 한심하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견해에 반대하는 사고방식에는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 인간으
로서 누구나 갖고 있는 조건의 우연성이나 비참함을 여성에게서 모두 제거하라고 요구하
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여성에게 주라는 것이다.
  여성은 어떤 신비적인 운명에 놀아나는 희생자가 아니다. 여성의 이러저러한 특성은 모
두 선입견에서 그 중요성을 이끌어내고 있다. 새로운 시각으로 여성의 개별성을 이해하면 
그것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성이 그 성적 경험을 통하여 남성의 지배를 절실
히 느끼고 흔히 그것을 혐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난소 
때문에 언제까지나 남성에게 무릎을 꿇고 살아야 한다고 결론을 지어서는 안 된다. 남성의 
공세적인 성질이 영주와 같은 특권처럼 보이는 것은 오직 전력을 다하여 남성의 절대권을 
내세우려는 사회제도 안에서이다. 그리고 여성이 성행위에서 자기를 수동적으로 느끼는 것
을 미리 수동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근대적인 여성들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면서 성생활에 대해서
는 아직 옛날 그대로 예속된 전통에 따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남자 밑에 드러누워 남자
에 의해 관통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불감증으로 짜증을 부린다. 그러나 만일 현실이 
지금과 다르다면 사랑의 몸짓과 자세가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의미도 지금과는 다를 것이
다. 예를 들어 애인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그를 지배하고 있는 여성은 그 우월적인 무위를 
즐기는데 대해 자랑스러움을 느끼거나 활기차고 악착같이 자기의 정력을 소모하고 있는 
남성을 복종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미 성적으로 균형이 잡혀 승리나 패배의 
관념이 교환이라는 생각으로 변한 많은 남녀의 짝들이 존재한다. 사실 남성도 여성과 마찬
가지로 하나의 육체이다. 따라서 수동적이고 호르몬과 종의 노리개이며 자기의 정욕이 노
리고 있는 불안한 먹이이다. 그리고 남녀는 동일하게 육신의 열광 속에 빠져 있으며 이러
한 성행위는 자주적인 동의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피차에 의지적인 증여이며 능동성의 발
휘이다.
  남녀는 각자 자기 나름으로 육체와된 실존의 기이한 애매성에서 살고 있다. 남성과 여성
은 서로 대립하여 싸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양자가 모두 자기에 대해 싸우
고 있는 것이다. 즉 자기가 싫어하는 부분을 상대방에게 투사시켜 그것과 싸우고 있다. 애
매한 자기의 여건에서 살지않고 타자에게 투사한 그 싫어하는 것을 찾게 하여 자기를 위
해 명예를 남겨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양자가 진정한 자존심에서 비롯된 겸손한 

마음으로 그 입장을 살려나간다면 그들은 서로 동등한 자로 인정하고 우애를 느끼면서 성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적인 존재를 여러 모로 구별하는 모든 특이성ㅂ다 대단
히 중요한 것이다. 우위성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주어진 조건이 아니다. 예전 사람이 '덕'
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에게 의존하고 있는것'의 기준에 의해 규정된다. 남녀 양성에 의
해 육체가 정신, 유한성, 초월과 같은 드라마가 연출된다. 양성은 함께 시간에 침식되고 죽
음의 위협을 받으며 타지에 대해 동일한 본질적인 욕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자유
에서 같은 영광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 영광을 누릴 수 있다면 거짓특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양자 사이에 우애도 생갈 것이다.
  '여자를 개조하기' 위해서는 이미 사회가 남성과 대등한 여성을 만들어내었을 터이므로, 
위에서 본 모든 고찰은 유토피아적인 공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이
런 문제에 대하여는 언제나 악순환이라고 지적해 왔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원을 그리지 
않는다. 어떤 계급을 열등한 상태로 유지하면 그 계급은 열등한 채 진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순환을 타파할 수 있다. 흑인에게 투표를 시키면 그들도 백인과 마찬가지로 
투표할 수 있게 된다. 여성에게 책임을 지우면 여성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억
압자가 자발적으로 관대한 마음을 갖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때로는 피압박자의 반항이 때
로는 피압박자의 반항이 때로는 특권계급의 진화 자체가 새로운 여건을 조성한다. 그리하
여 남성들은 자기 이득을 위해 부분적으로 해성을 해방시켰다. 여성으로서는 오직 지위의 
상승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며 나타난 성과에 의해 고무된다. 지금부터 얼마나 시
간이 걸릴지 알 수 없으나 장차 여성이 완전한 경제적, 사회적인 평등을 누리게 될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 결과는 내면적인 변모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어쨌든 몇몇 사람들은 "설사 그런 세계의 도래가 가능하더라도 그것은 바람직한 세계가 
아니다." 하고 항의할 것 같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해지면 인생에서 '맛을 내는 소금'이 없
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도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현상유지를 지속시키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밝은 미래에 미소를 지어보이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사라져가는 과
거에 눈물을 뿌린다. 노예매매를 폐지했기 때문에 진달래와 동백꽃으로 장식한 대농원이 
황폐화되고 남부(미국)의 정교한 문명을 모두 멸망시킨 것은 사실이다. 아름다운 고대의 
레이스는 시간이 다락방 속에서시스티나 사원의 거세된 가수들(15세기경의 시스티나 사원
의 성가대)의 맑은 목소리와 함께 멸망되었다. 일종의 '여성다운 매력'은 언젠가는 먼지가 
되어 날아가버리려고 한다. 진귀한 꽃, 레이스, 거세된 가수의 맑은 목소리, 여성다운 매
력, 이 모든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야만저인 태도라고 비난하는데 대하여는 나도 동감이
다. '매력 있는 여성'이 그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면 랭보를 환희에 몰아넣었던 '백치의 그
림, 문 위의 장식, 무대 배경, 곡마단의 광고, 야한 간판, 저속한 삽화'보다도 더욱 열광시
킨다. 그것은 가장 근대적인 기교로 장식되고, 가장 새로운 기술로 만들어져 먼 옛날부터 
테베, 크레타, 치첸 잇사(고대 멕시코의 도시) 등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는 
가시덤불 한가운데 세워진 토템(동물신)이기도 하다. 그것은 헬리콥터이고 새이다. 그리고 
가장 신기한 기적이다. 그녀의 장식된 머리칼에서는 나무 잎사귀 소리가 하나의 사상이 되
고 그녀의 젖가슴에서는 말이 샘처럼 쏟아져나온다. 남성들은 이 경이를 향햐 탐욕스럽게 

손을 내민다. 그러나 그가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 경이는 사라져버린다. 아내나 
애인은 담담하게 지껄이고 있다. 그 말은 그녀의 가치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젖가슴도 마
찬가지이다. 이처럼 순간적이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기적 때문에 남녀 양성에게 혐오스
러운 상황을 영속시켜도 무방할까. 꽃의 아름다움이나 여성의 매력을 감상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런 보물이 한편으로는 피나 불행에 의해 보상된다면 그런 보물은 아낌없이 버리
는 것이 좋다. 
  사실 이런 희생은 남성에게는 무척 괴롭게 생각되는 것 같다. 여성이 자기완성을 하는 
것을 진심으로 바라는 남성은 별로 없다. 여성을 경멸하는 남성들은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이득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을 소중히 여기는 남성들도 그 경우에 자기가 잃어
야 하는 것을 너무 과대하게 생각한다. 현재의 진화의 정도는 단지 여성의 매력을 위협하
는데 그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이 자기를 위해 살기 시작하면 남성의 그림자나 매
개물로서의 기능을 버리는 것이 된다. 이 기능 덕분에 그녀는 남성의 세계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자연의 침묵과 다른 자유를 요구하는 조재 사이에서 방황하는 남
성에게 자기와 똑같은 형태를 하고 동시에 수동적인 물체인 그 존재는 대단한 보물로 보
인다.
  그가 상대방 여성을 바라보는 그 모습은 신화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를 원인이나 
구실로 삼고 꺽는 경험은 역시 현실적인 것이다. 이 이상이 귀중하고 친밀하고 정열적인 
경험은 없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여성의 종속, 열등성, 불행이 그녀에게 특이한 성격을 제
공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만일 여성의 자립으로 남성이 많은 수고를 덜게 되어도 남성
이 많은 편의를 잃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는 할 수 있어도 다가올 미래의 세
계에서는 없어지는 성적 모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연애, 행복, 시, 몽상 등이 완전히 추
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빈약한 상상력은 언제나 미래를 쓸쓸한 것으로 내다보게 된
다. 이것은 경계하자. 미래는 아직 추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저마다 지금까지 자기였던 것
이 미래의 세계에는 없어진다고 해서 한탄하기 쉽다. 그러나 미래의 인류는 자기 육체 속
에서 자유 속에서 미래를 살아갈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것이 그의 현재가 되어 그것을 더
욱 사랑하게 된다. 남녀 양성 사이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육체적 애정관계가 
생기게 될 것이다. 현재 이미 남녀 사이에는 지난 몇 세기에서는 볼 수 없던 정신적, 혹은 
성적인 우정, 적대감, 공범관계, 우의를 볼 수 있다. 새로운 세계를 획일주의, 즉 권태로 
몰아넣는다고 단정하는 선전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나는 미래의 세계에 권태가 완전히 없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자유가 획일을 조성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첫째로 남녀 사이에는 역시 약간의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성의 색정, 즉 그 성적인 세계는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특유의 감각과 감성
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육체와 남성의 육체 및 아이와의 사이에 갖는 
관계가 남성이 자신의 육체와 여성의 육체 및 아이와의 사이에 갖는 관계와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차이 속의 평등'이라는 주장을 강력히 내세우는 사람들은 평등 속에도 자유
가 존재할 수 있다는 나의 주장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단조로움을 가져오
는 것은 제도이다. 젊고 아름다워도 터키 후궁의 여자들은 술탄(황제)의 품에 안기면 모두 
동일하다. 기독교는 여성에게 혼을 부여함으로써 색정에 죄와 전설의 의미를 알게 했다. 

여성 최고의 개성을 회복시켜줘도 사랑의 포옹에는 황홀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남녀가 실제로 대등해지면 향락적인 연회, 방탕, 황홀, 정열은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육욕과 정신, 순간과 시간, 내재의 현혹
과 초월의 호소, 쾌락의 절대와 망각의 허무 등을 대립시키는 모순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
다. 실존의 긴장, 격동, 희열, 실패, 승리 등은 역시 성본능 속에 구체화될 것이다.
  여성을 자유롭게 해방시킨다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관계 속에 여성을 가둬두지 않는다
는 것이지만 이런 관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여성이 대자적으로 살아가더라도 역
시 남성과 대립하여 살게 될 것이다. 서로 주체로 인정하면서 상대방에게는 어디까지나 타
자이다. 남녀관계의 상호성은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는 데서 생기는 기적, 즉 욕구, 소유, 
사랑, 꿈, 모험 등을 없애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를 감동시키는 말- 준다. 정복한다. 
결합한다는 말- 은 여전히 그 의미를 잃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인류의 절반인 노예상태
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위선적인 사회구조가 폐지될 때 비로소 인류를 둘로 나눈 '
분활'의 그 참된 의미가 밝혀져 한쌍의 남녀가 그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필연적인 관게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이다." 
하고 마르크스는 말하고 있다.(<철학적 저작> 제6권에서) "이 관계의 성격에 따라 남성
이 종으로서의 존재, 즉 남성으로서의 자기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가를 드러내게 된
다. 남녀의 관계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남성의 자연적인 태도가 
어느 정도까지 인간적인 것이 되었는가, 혹은 인간적인 존재가 어느 정도까지 자연적인 존
재로 되어 있는가, 그의 인간성이 어느 정도까지 자연이 되어 있는가 등을 보여준다."
  이 이상 의사표시를 잘 할 수는 없다. 이 주어진 현실세계에 자유의 지배를 도래시키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이 숭고한 승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녀가 그 자연의 
구별을 초월하여 분명한 우애를 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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